우후죽순마냥 궐기하는 반일무장단체들
무장투쟁 료원의 불길로 타올라
무장한 적들과는 무장을 들고 싸워야 한다는 것이‘3.13'운동의 경험교훈이였다. 민족의 해방을 쟁취하는 데 있어서‘외교독립론'이거나 부패정부의 힘을 빈다는 것은 당치도 않은 일이라는 것을 피의 교훈으로 느꼈다. 여러 분야 반일단체들은 더욱 조직적이고 더욱 강력한 무장투쟁을 벌리기 위하여 무장단체의 결성과 무기 구입, 군자금 모집 및 반일기지건설의 방침을 제정하고 힘차게 밀고 나가는 것만이 생로라는 것을 깨달고 즉각 대오를 무장시키는 것을 급선무로 내세우게 되였다.
간도국민회
간도국민회는‘3.13’반일운동 후 연변에서 그 영향력이 가장 크고 세력범위가 가장 넓은 반일무장단체였다.
‘3.13’반일운동이 일어난 이틀 후인 1919년 3월 15일부터 21일까지 연변의 반일의사들은 연길현 지인향 솔완자(지금의 연길시 장백향 인평촌)에 모여‘3.13’학살사건의 경험교훈을 총화한 뒤‘한족독립기성총회'(회장 구춘선)를 건립하였다. 이 단체에서는 각지 반일운동을 지지 지도하고 민중을 조직, 동원하면서 반일운동을 추진하였다. 이들은 악질 친일분자들을 체포, 처단했으며 운동자금을 모으기도 했다.
3월 21일, 로씨야에 파견되였던 김약연, 정재면이 돌아온 후 이들은 민족독립은 남에게 의거할 수 없다는 것을 절실히 깨달으면서 반일무장단체를 결성하기로 결정하였다. 하여‘한족독립기성총회'를‘간도국민회'(회장 구춘선)로 개편하였다. 소재지는 하마탕(후에는 의란구 구룡평에 옮겼음)에 두었다.‘간도국민회'는 중앙총회 아래에 다섯개 지방총회를 두었으며 소재지와 탄탄한 간부진영을 갖고 있었다. 촌지회도 100여개가 있었다.
1920년 봄부터‘간도국민회'에서는 경호대와 국민회군 등 군사조직을 내왔다. 경호대 총사령은 리용(李镛), 국민회군 사령은 안무(安武)가 맡았다. 이들은 반일무장투쟁을 준비하기 위하여 각 지회에 교관을 파견, 청장년들을 군대에 편입시키고 군사훈련을 진행하였다. 1920년 8월의 총병력수는 450명, 보총 400자루, 권총 160자루, 수류탄 다수였다. 이들은 또 군사인재를 양성하기 위하여 연길현 숭례향 이청배 심산 속에 사관훈련소를 세우기도 했다. 1920년 5월, 국민회군은 홍범도의 독립군, 최명록의 도독부, 훈춘한민회 군사부, 신민단의 부대 등과 련합하여 북로독군부를 결성했다.
‘간도국민회'는 전 동북에서 규모가 가장 큰 반일단체였는데 회원이 8000여명이나 되였다. ‘간도국민회'는 반일단체들의 통합에 모를 박고 반일무장투쟁에서 련합을 주장했다. 이들의 이러한 주장은 금후 봉오동, 청산리 전투에서의 승리를 취득할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하게 되였다. 1920년‘경신년대토벌’후 국민회군은 기타 반일부대들과 함께 북만의 밀산에 집결하여 서일을 총재로 하고 홍범도를 사령으로 하는 대한독립군단을 조직, 로씨야로 이동하였다. 주요 간부들은 국민회의 회복건설에 힘썼고 1921년말에는 리동휘가 지도하는 고려공산당(상해파)에 참가하여 돈화에 고려공산당 만주중앙총회를 건립하고 민족해방투쟁을 견지하였다.
북로군정서
북로군정서(北路军政署)는 대종교동도 본사의 주관 서일이 지난날의 반일의병들을 규합하여 조직한 ‘중광단'이 발전되여 세워진 반일무장단체이다. 1919년 5월‘중광단'을‘정의단'으로 개편하고 10월에는‘정의단'을 반일무장조직인‘대한군정서'로 개편하였다. 그 해 12월에는 대한군정서를‘북로군정서'로 개편하고 병사모집과 군사훈련, 무기구입 등에 진력하면서 반일무장조직을 확대했다.
‘북로군정서'는 정치행정사무, 군자금모연, 군인모집, 지방통신련락, 교제, 경비 등 사무를 담당하는 총재부와 군사훈련을 위한 무력강화사업을 담당하는 군사령부 두 조직체가 있었다. 북로군정서의 총재부는 왕청현 덕원리에 있었는데 서일이 총재를 담당하고 수하에 부총재, 비서장, 비서, 서무부장, 재무부장, 인사국장, 경리국장, 계사국장, 탁지국장, 모연국장, 징모국장, 경신국장 등을 두고 있었다. 군사령부의 소재지는 왕청현 서대파 십리평에 두고 있었다. 사령관에 김좌진, 참모장에 리장녕이였다. 수하에 참모부장, 려단장, 련대장, 참모, 련성대장, 군기국장, 군범국장, 군계보관, 정탐대장, 참모, 군의정, 부관 등을 두었다.
총재부산하에는 지방경신국과 경비대가 있었는데 35개 경신분국, 200여명 경비대원이 있었다. 군사령부산하에는400여명 학생을 수용한 사관훈련소가 있었는데 김좌진이 소장을 맡았다.
1920년 9월 북로군정서의 총 병력은 1600명, 동년 화룡현 청산리로 진출한 병력은 600명이였다. 무기장비는 보총 1300자루, 기관총 7정, 권총 150자루였다.
1920년 10월, 청산리전투를 끝내고 북만의 밀산으로 철퇴한‘북로군정서'는 연변으로부터 철퇴한 각 반일부대들과 련합하여 서일을 총재로 하는‘대한독립군단'을 편성하였다. 그후 그들은 로씨야로 철퇴하였는데 그 때 서일은 밀산현 담벽진에 남아서 군정서군대들을 규합하여 재기하려고 했다. 그러나 1921년 6월, 로씨야에 철퇴한 부대들은‘자유시(즉 스보보드니시)참변'으로 인해 좌절되였고 같은 해 8월 17일에는 친일토비 고산의 습격으로 하여 하루밤 사이에 담벽진의 기지는 파괴되고 무장을 탈취당하였으며 수십명의 장병들이 살해되였다. 크게 타격을 받은 서일은 8월 27일에 담벽진 뒤산에 올라가서 돌을 베고 누워 조식법(调息法)으로 자결하였는데 그 때 그의 나이는 41세였다.
대한독립군
대한독립군은 이름 난 의병장 홍범도가 1919년‘3.1’운동 후 원래의 옛 부하들을 토대로 세운 순수한 반일무장단체였다.
홍범도는 106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1919년 9월에 연변에 왔다. 그 후 인차 다른 부대와 합쳐 400명의 병력으로 늘었다. 홍범도의 리상은 조선 국내진입 작전이였다. 《연변항일사적지 연구》(김철수)에 따르면 “당시 중국관방의 자료에도 일단 빠리강화회의에서의 교섭이 실패하면 전대(결사대)는 백산의병대장 홍범도대장의 인솔 밑에 의기를 들고 혈전하려는 계획이라고 기록하고 일제의 1919년 10월 9일의 첩보자료에도‘홍범도는 결사대 2500명을 인솔하고 조선내지에 침입하려고 기도하고 있다'고 기록되고 있는 정황과 1919년 12월 13일의 조선함경남도 지사의 보고요지의‘최근의 정보에 따르면 불령선인들의 수령 홍범도 수하에 약 2천여명의 부하들이 있는데 독립운동의 준비로 부하들을 날마다 훈련시키고 있으며… 그 근거지를 내두산에 설치하고 음력 11월 기간에 조선 내지로 침입하여 일본관현과 교전할 계획을 하고 있다'는 등 자료들로 놓고 볼 때 홍범도는 확실히 일제와의 싸움을 첫자리에 놓은 주목 인물임이 틀림없었다.”
대한독립군은 후에 국민회와 합하여 국민회 산하에 귀속, 국민회의 근거지를 자신의 기지로 삼고 전문 전투에 뛰여들었다. 홍범도부대는 다른 무장단체들과는 달리‘3.1’운동 후에 무장투쟁을 준비한 것이 아니라 이미 기성된 부대로써 일제와 무장투쟁을 벌려나갔다는 특점이 있다.
홍범도는 특히 반일무장단체들의 련합을 선도해나섰다. 국민회와의 련합을 실현한 후 이어 각 반일단체들의 련석회의를 열어 통일과 련합문제를 토의하였다. 잠시 통일은 가져오지 못했지만 련합전선을 결성할 데 대한 협의를 맺기도 했다. 1920년 6월 7일, 홍범도는 정일(征日)제1군사령원의 신분으로 봉오동전투를 지휘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봉오동전투 후 각 무장단체들에서는 련합전선의 필요성을 깊이 느끼면서 통합을 찬성하는 서명운동을 진행, 동도독군부로 통합(북로군정서를 제외)되였다. 홍범도가 사령관을 맡고 근거지는 연길현 의란구 구단구 산속에 두었으며 사령부 산하에 4개 대대를 두었다.
1920년 8월 중순 홍범도부대는 일제침략군을 련속 타격하기 위하여 근거지를 떠나 이도구 일대로 이동, 반일기지를 세우고 유격전을 벌리였다. 국민회군, 의민단, 북로군정서 등 반일부대들도 이도구와 삼도구일대로 이동하여 홍범도부대와 함께 이름 난 청산리전역을 벌려 일본침략군을 호되게 족쳤다.
기타 반일무장단체들
리명순을 회장으로 하는 훈춘한민회는 로씨야에서 성립된‘대한국민의회'의 지부로서 1919년 4월 14일경에 성립되였다. 훈춘한민회군사부 부장은 황병길(후에 김정)이였다. 1919년 7월, 황병길은 결사대를 모집하여‘급진단'을 건립한 후 연통라자 서골에 땅 40헥타르를 사서 귀틀집 7채를 짓고 대오를 4개 중대로 편성한 후 군사훈련을 시켰다. 후에‘의사단',‘포수단'과 합쳐 ‘훈춘한민회 군사부'로 정식 편성되였다.
1920년에 새롭게 군사부를 편성하고 최경천이 군무부장을 맡았다. 새로 구성된 군사부는 군내에 엄격한 군사규률을 세우고 간부선거 등은 민주적으로 진행했다. 군사부에서는 조선진입전투를 벌리면서 일제침략군을 타격했다.
방우룡을 단장으로 하는 의민단무장력은 200여명, 1920년 5월에 국민회군 등과 련합하여 북로독군부에 편입되였다.
최명록을 총재로 하는 도독부는 ‘3.13’운동 후 봉오동에서 자위대형식의 반일무장조직을 건립한 기초 우에서 결성한 단체이다. 병력은 200명 밖에 되지 않지만 지반이 든든하고 식량공급이 충족했다.
1920년 3월과 5월, 도독부는 각 반일단체들의 련석회의 결정에 의해 국민회, 훈춘한민회, 홍범도군 및 기타 반일단체들과 함께 북로독군부를 편성, 홍범도를 정일(征日)제1군 사령으로 6월에 봉오동전투를 벌리였다. 그 후 령도권문제로 홍범도와 모순이 발생하여 7월에 홍범도군은 명월구를 거쳐 화룡현으로 이동하고 최명록군은 라자구를 거쳐 동녕으로 이동했다.
최명록을 부장으로 하는 북로독군부는 1920년 5월 27일, 봉오동에서 국민회군, 훈춘한민회군, 도독부군, 홍범도군의 련합으로 결성된 것이였는데 후에 의군부, 의민다과 신민단도 련합해 들어왔다.
병력은 600여명, 기관총 2정, 5련발보총 355자루, 38식보총 13자루, 30식보총 28자루, 구식보총 4자루 합계 보총 400자루가 있었고 이 밖에 각종 권총 18자루, 수류탄 다수가 있었으며 식량이 충족했다.
리범윤을 명예단장으로, 김성극을 단장으로 하는 광복단은 의병장 리범윤이 로씨야에 갔다가 ‘3.13’운동 후에 돌아와서 반일의병을 규합하여 결성한 단체인데 반일단체이면서도 또한 리조왕권의 광복을 꾀하는 조직이였다. 병력은 150명이고 본부는 왕청현 대감자 이북의 곰골에 있었다. 1920년 10월 22일, 어랑촌에 갔다가 동녕으로 철퇴, 다른 부대들과 함께 대한총군부를 건립하고 리범윤을 사령으로 추대했다.
리범윤을 총재로 하는 의군부는‘3.13’운동 후 공교파들이 조직한 반일무장단체이다. 병력은 200여명, 10월초에 홍범도군과 함께 와룡동에 갔다가 다시 라자구를 거쳐 동년현 쪽으로 이동하였다.
김종식을 의사부장으로 하는 라자구의사부는 ‘3.13’운동 후 라자구에서 조직되였다. 처음엔 대장에 리춘범, 최정국이였다. 10월경에는 개선을 거쳐 김리근이 의사부장으로 활약했다. 병력은 200여명이였다.
그외에도 림창세를 총재로 하는 야단, 김중건을 단장으로 하는 대진단, 리백성 등이 조직한 의형제단, 리춘정이 세운 구제단 등 반일단체들이 우후죽순마냥 궐기해나섰다.
길림신문/연변일보 김철호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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