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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군 6사 재봉대 책임일군 박수환 1
조글로미디어(ZOGLO) 2020년7월20일 09시18분    조회: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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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환 등 항일렬사의 발자취를 찾아. 지난 90년대 초반 연변력사연구소와 중국조선족사학회에서 조직한 어랑촌항일유격근거지 현지답사 사진. (1991년 5월 29일 현지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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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조선사람들로 구성된 항일련군 2군 6사의 녀전사들 가운데는 박수환(朴寿环,1909ㅡ1938)이라고 부르는 한 재봉대원이 있었다. 박수환 녀전사 전기는 이미 정리되고 필자가 펴낸 《겨레 항일지사들》 제6책(민족출판사, 2017년 10월 출판)에 오르기도 하였으나 녀전사의 가족관계와 래력을 알지 못해 당년 처창즈항일유격근거지 이전 발자취를 밝힐 수가 없었다.

요즘 <우리 민족의 무명영웅들> 련재 91과 92를 재정리하면서 1982년 대학졸업 후 화룡현당위 당사연구실 시절 우복동 관련 항일투쟁사 자료를 다시 전면 검토할 기회를 가지였다.

‘삼도구 우복동 항일렬사들’을 빠짐없이 떠올리는 데 박윤옥이란 이름이 어쩐지 무척 눈에 익다. 전에 흘려보낸 우복동 관련 자료에 시선을 모으니 박윤옥은 일명 박수환으로 나타난다. 박수환이면 항일련군 제2군 6사 재봉대 책임일군 박수환이 아니던가.

박수환 렬사 전기에서 밝히지 못한 처창즈항일유격근거지 이전 발자취가 드디여 원형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박수환 렬사 발자취는 처창즈항일유격근거지 이전으로 거스르며 당년 화룡현 삼도구 우복동으로, 그 시절 화룡현내 개산툰구로 이어진다. 알고보면 박윤옥 즉 박수환은 1909년생이고, 화룡현 월청사 기신촌 곡구미 사람이다.

월청 기신촌 곡구미는 두만강변의 한 마을로서 오늘의 도문시 원 월청향 기신 6대를 말한다. 곡구미를 창신동이라고도 하는데, 박수환은 가난한 조선이주민 농가에서 태여났기에 학교공부도 변변히 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진다. 그런 속에서도 소녀는 세월과 더불어 자라면서 한 마을의 가난한 총각 김덕춘과 백년가약을 맺게 되였다. 그 시절 20세기 20년대 후반과 30년대 초반은 월청 기신촌에서도 맹활약하던 조선공산당 당원들이 중국공산당 당원으로 거듭나던 시절이였다.

1931년초, 기신 곡구미에는 중공창신동지부가 조직되였다. 이 지부는 지부서기 오덕수를 비롯하여 박수환의 남편 김덕춘 그리고 주석봉, 오철성, 전영철, 최영덕, 김승국, 정창환, 오덕윤, 강송만 등 10명의 당원으로 구성되였는데 김덕춘은 지부 조직위원을 맡은 것으로 추정된다. 최초의 중공당원 10명 가운데는 박수환이 보이지 않지만 그해 1931년 9.18사변을 전후하여 박수환은 중공당원으로 활약하기 시작하였다.

박수환의 본격적인 혁명활동은 1931년 가을 천지를 진감한 개산툰일대 추수투쟁에서 잘 드러난다.

이해 가을 온 연변을 휩쓴 추수투쟁의 불길은 개산툰 월청일대에서도 거세차게 타올랐다. 가을의 어느 날, 개산툰구 사광사의 수천명 군중들이 렬을 지어 중천평, 삼동포를 거쳐 두만강 따라 곡구미ㅡ창신방향으로 내려왔다. 월청사의 군중들까지 합치니 대오는 신속히 근 만 명으로 늘어났다. 박수환은 남편 그리고 한 마을의 리동순 등과 함께 기신촌의 투쟁골간으로 시위대렬에 뛰여들었다.

화룡시 서성진 어랑촌에 세워진 어랑촌13용사기념비. (2019년 1월 9일 현지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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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천명 시위대렬은 호호탕탕 석건평 아래 바위굽이에 이르렀다. 그때 두만강대안의 조선 종성 일본수비대와 남양평, 걸만동경찰서의 100여 명 놈들이 마차 30여 대를 가지고 길을 막아나섰다. 박수환 등 시위대렬은 즉각 따발진을 치고 놈들에게 틈탈 기회를 주지 않았다. 각 마을의 적위대와 소선대원들은 서로 어깨를 겯고 바깥에 서서 간부와 군중들을 보호하였다.

놈들은 해산하라고 고함치면서 바위에 대고 총질을 해댔다. 아츠러운 총소리가 메아리로 귀청을 때렸으나 시위대렬은 한발자국도 물러서지 않았다. 놈들은 10여명 기병을 시위대렬 속에 몰아넣었다. 적들 기병과 군중들 사이에는 일장 박투가 벌어졌다. 약 두시간쯤 지나자 따발진이 흐트러지기 시작하였다. 적들은 그 틈을 타서 우리 사람들을 하나하나 붙들어서 결박해 놓았다.

어느덧 체포된 사람들은 32명에 달했다. 놈들이 그들을 마차에 싣고 조선으로 건너가려 할 때 시위군중들은 결사적으로 막아나서며 동지탈환투쟁을 벌리였다. 32명 동지들 속에는 기신촌 여러 마을의 사람도 6명 있었다. 박수환은 한마을의 리동순 등 녀성들과 함께 주저없이 마차에 올라 말고삐를 낚아채며 “내 동생을 내놓아라!”고 소리쳤다. 잇달아 녀성들이 아우성을 쳤다.

“내 남편을 내놓아라!”

“내 오빠를 내놓아라!”

“내 아들을 내놓아라!”

수천명이 함께 웨쳐대니 천지가 진동한다. 놀란 적들은 어리벙벙하여 일순 어쩔바를 몰랐다. 동지탈환 투쟁은 해질녘까지 계속되였다. 군중들은 끝내 결박당한 30여명의 동지들을 몽땅 풀어냈다. 나중에 리동순의 시동생 최영림과 황금송, 황운룡, 백원춘 등 10여명의 투쟁골간들이 적들에게 끌려갔다가 선후하여 놓여나왔다.

하루해가 서산에 기울어지니 놈들은 석건평 아래 바위굽이에서 물러섰다. 시위대렬은 계속 기풍현으로 몰려갔다. 당지 지주들은 반항할 념도 못하였다. 시위군중들은 지주들의 승낙을 일일이 받은 후 이튿날 새벽에 흩어져 각자의 마을로 돌아갔다. 사광사와 월청사의 추수투쟁은 무려 4~5일간이나 지속되였다.

그해 가을 기세드높은 추수투쟁에서 박수환은 중공당조직과 단결된 군중의 거대한 위력을 보아냈다. 그는 리동순과 더불어 창신동지부의 부녀회 골간으로 뛰면서 집안살림도 등한시하지 않았다. 지금에 와서 연구자료의 부족으로 박수환의 가족관계를 자상히 밝힐 수는 없지만 남편 김덕춘의 혁명활동을 물심량면으로 받들어 나선 박수환은 기신촌 출신 황운룡 항일투사에 의하여 편단적으로나마 알려져 다행이다.

지난 80년대 초반 이전까지만도 우리는 박수환 남편의 이름을 알지 못하였다. 별명이 ‘제국주의’로 통하니 제국주의로 부를 뿐이였다. 그러던 80년대 초반 화룡현당위 당사연구실 시절 당년 공청단삼도구구위 공청단간부로 활동했던 황운룡의 구술자료를 찾아내고 룡정에서 황운룡 항일투사를 방문하면서 제국주의 본명이 김덕춘이고 1901년생이며 월청사 기신촌 곡구미사람임을 비로소 알게 되였다. 지난 80년대 초반까지 그 시절 화룡현 관련 자료들에는 모두 ‘제국주의’로만 적혀있고, 본명이 김덕춘임을 찾아볼 수가 없다.

지난 90년대 초반, 항일로간부 려영준 전임 부주장을 모시고 처창즈항일유격근거지를 현지답사. (1991년 11월 현지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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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덕춘이란 이름 세글자가 인쇄물에 오른 자료로는 연변인민출판사에서 1984년 2월에 출판한 《연변문사자료》(2)에 나타난다. 《연변문사자료》(2)에는 그 시절 항일로간부 유영효 로인이 정리한 <30년대 중공개산툰구위에 관한 일부 자료>중 창신동지부 10명 당원 가운데서 김덕춘이 두번째로 등장한다. 김덕춘이 월청사 기신촌 사람이라는 것을 잘 알려주는 력사자료였다.

김덕춘은 중공개산툰구위 산하 창신동지부 조직위원, 당지부 서기로 활동하다가 선후하여 구위 농민협회 책임자, 중공달라자구위 서기로 활동한 항일혁명가였다. 남편이 먼저 중공달라자구위 서기로 활동하면서 달라자로 갔을 때 박수환은 지방에 남아 어린 딸애를 키우면서 당지 부녀회 활동에 살손을 대였다. 1932년 6월경에 남편 김덕춘이 중공삼도구구위 제4임 서기로 전근되여 삼도구 우복동으로 가면서 박수환은 어린 딸애를 부모님들께 맡기고 우복동행에 나섰다.

때는 1932년 여름이다. 그때 박수환은 임신중이여서 우복동 어느 마을에선가 해산하게 되였다. 월청사 곡구미에 두고 온 어린 딸애나 새로 태여난 어린 것의 행방은 알려지지 않는다. 그 시절 박윤옥으로 불리운 박수환의 책임은 중공삼도구구위 부녀구책이였다. 우복동에서의 박수환의 혁명활동도 알려지는 자료가 보이지 않지만 전설처럼 전해지는 하나의 이야기는 실로 심금을 울려주는 이야기라 하겠다.

지난 80년대 초반 그 시절, 당년 화룡현 출신 항일투사들 속에서는 “화룡현의 강가에서 빨래방치로 경찰놈을 까부시고 무기를 탈취”하였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었다. 여러모로 되는 방문과 연구자료에 따르면 이는 실제있은 사실로서 그 전설 같은 이야기의 주인공은 다름아닌 박수환이였다.

1932년 여름 중공동만특위에서는 투쟁의 수요에 따라 화룡현 개산툰유격대를 중심으로 연화유격대를 조직하였다. 연화유격대는 개산툰유격대외에도 현안의 평강구유격대와 삼도구유격대의 일부 대원들이 망라되였다. 어느 날 박수환은 구위 조직부장으로 활동하다가 연화유격대 정치지도원으로 전근된 최병조를 통하여 신생한 연화유격대는 무기가 따르지 못한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였다.

박수환은 무기에 관한 일을 맘에 두었다. 그는 우복동 지방 부녀회 책임자와 상의하고 우복동 2중촌과 4중촌으로 드나드는 지방공안국 놈들의 무장을 지혜로 빼앗기로 하였다. 과연 어느 날 박수환과 몇몇 부녀회원들은 우복동 어구 골안물가에서 빨래를 하는 척 하다가 보총을 메고 지나는 공안국놈 두놈을 강가로 유인해 들이곤 놈이 주의하지 않는 틈을 타서 빨래방망이(빨래방치)로 까부시고 앗아낸 보총 두자루를 연화유격대에 넘기였다. 박수환은 바로 이런 녀성이였다.

1933년 3월에 박수환의 남편 김덕춘은 중공화룡현위 선전부장으로 전근되여 산구에 위치한 어랑촌항일유격근거지로 들어갔다. 박윤옥도 남편을 따라 또 어랑촌근거지에 발을 들여놓았다. 어랑촌근거지는 1932년 겨울에 정식으로 수립된 항일유격근거지로서 근거지에는 중공화룡현위와 산하 여러 현위기관들, 평강구위, 화룡현유격대와 유격대 후방기관들이 활동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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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환이 어랑촌항일유격근거지로 들어서니 당현위와 현위 기관들인 교통처와 비서처 그리고 유격대의 후근기관들인 재봉대, 병기공장, 병원, 장공장 등은 버섯골과 천수동 산속에 자리하고 있었다. 이런 기관들은 모두 산속 비밀장소에 설치되였기에 아무사람이나 마음대로 드나들지 못한다. 박수환은 여기 비밀장소의 재봉대원으로 활약하였다. 다시 말하면 화룡현유격대의 재봉대원이고 공산당원이였다.

그런데 어찌 알았으랴, 1933년 봄에 어랑촌항일유격근거지에서는 얼토당토않은 이른바 대내 반 ‘민생단’ 투쟁이 시작될 줄을. 이 선풍 속에서 ‘제국주의’로 불리우는 박수환의 남편 김덕춘도 억울하게 끌려들더니 그해 1933년 9월 근거지의 천수동 버섯골에서 ‘민생단’에 몰려 처단되고 말았다. 박윤옥은 졸지에 남편을 잃었으나 어디에 가서 하소연할 수조차 없었다.

1934년 가을 이후 화룡현 어랑촌근거지의 항일 군민들은 모두 새로 개척된 안도현 처창즈근거지로 전이하였다. 처창즈는 오늘의 화룡시 서성진 화안촌과 그 일대를 가리킨다. 처창즈의 동남차 수림 속에는 금곡 연길작탄의 제작자인 박영순이 책임진 화룡현 병기공장과 박수환이 책임자로 있는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독립사 화룡퇀 재봉대가 자리잡고 있었다.

그때 연길현 상의사 태평구 출신인 김확실 등이 작식대원으로 병기공장과 재봉대 20여명 후근동지들의 식사를 도맡았다. 그러던 어느 날 무기수리소ㅡ병기공장에서 뜻밖의 폭발사고가 일어나고 개산툰출신의 강위룡 청년이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강위룡을 사선에서 구해내고 극진히 간호하여 완치시킨 사람이 김확실 처녀였다.

처녀총각은 서로 사랑하게 되였다. 그러나 강위룡이 본의 아닌 ‘민생단’ 혐의로 몰리는 바람에 둘은 비밀약속만 하였을 뿐 정식결혼은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사랑하는 둘이 좋으면 되는거지, 주저할 것이 무엇이냐”며 처녀총각의 뒤를 밀어준 것이 재봉대 책임자 박수환과 병기공장 책임자 박영순(남자)이였다. 드디여 힘을 얻은 김확실과 강위룡은 처창즈인민혁명정부에 가서 정식 결혼등록을 하게 되였다.

  1991년 11월 4일, 처창즈반일자위대 대장출신인 항일로간부 려영준을 모시고 유서 깊은 처창즈근거지를 답사할 기회를 가지였다. 원 화룡현 와룡향소재지에서 북으로 화집령과 오도양차를 지나고 묘령이라 불리우는 목도고개를 넘어 구비구비 산고개를 따라 북으로 내리면 산골벌방인 처창즈 화안촌에 이르게 된다. 화안촌은 1959년 구역획분 시기까지만 해도 안도현 만보구에 속한 마을이였는데 화룡현 와룡향으로 귀속된 것은 1974년이였다. 후에는 또 와룡향이 취소되고 화룡시 서성진 화안촌으로 되였다. 연변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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