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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만특위 부녀위원 김영신과 남편 한별 (1~2)
조글로미디어(ZOGLO) 2021년4월6일 08시43분    조회: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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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만특위 부녀위원 김영신과 남편 한별 (1)

화룡시로혁명근거지건설추진회에서 장인촌 남쪽 옛 도대구 마을에 꾸린 ‘홍색장인강주체화랑’. (사진 양성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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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 6월 2일자 《연변일보》 3면에는 <공산당원 김영신의 빛나는 최후>라는 1400자 정도의 짤막한 전기 한편이 실리였다. 필자가 정리하는 ‘청사에 길이 빛날 조선족혁명선렬들’항일렬사 전문란이였다. 필자가 연변대학 조문학부 재학시절의 일이다. 그 후 연변항일렬사전ㅡ《장백의 투사들》 제3집(1987년 출판, 연변인민출판사)에 김영신 렬사 전기가 수록되고 후에 중문으로 번역되면서 중공동만특위 부녀위원 김영신은 점차 연변을 대표하는 항일의 녀성영웅으로 떠오르게 되였다. 그러나 연구자료의 결핍으로 김영신 렬사의 고향이나 가족관계 등에 대해 알지 못하여 늘 마음에 걸리였다.

30여년 세월이 흘러간 후 김영신에 대한 연구는 새로운 진전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2019년 1월 7일 오후 지인 김광현씨의 도움하에 연길에서 또 한분의 항일의 녀성영웅 문두찬 렬사의 후손들인 문해복씨(1942년생), 문명호씨(1953년생)를 만났다. 이틀 후인 1월 9일에는 김광현씨의 자가용으로 이분들을 모시고 문두찬 렬사의 고향인 화룡시 투도구진 장인촌을 현지답사하면서 력사 속에 잊혀진 문두찬 렬사의 묘소를 찾을 것을 신신당부하였다.

그뒤 문두찬 렬사의 후손들로부터 렬사의 묘소를 찾았다는 기쁜 소식이 전해졌고 필자는 2019년 5월 1일, 렬사의 후손들과 연변텔레비죤방송국 기자, 화룡시로혁명근거지건설추진회 일군들과 함께 화룡시 투도구진 장인촌 남쪽 가까이, 그제날 장인강 도대구 마을 옛터를 찾았고, 문두찬 렬사의 묘소를 찾았다. 문두찬 렬사는 1932년 음력 11월 5일(양력 12월 2일) 장인강 도대구(倒大沟) 마을가에서 일제와 그 주구 놈들에 의해 희생되였었다. 중공동만특위 부녀위원 김영신도 같은 날 장인강 도대구 마을가에서 희생되였다고 하니 김영신 렬사의 희생지를 처음으로 찾은 셈이기도 하다.

정말이지 김영신 렬사를 알게 되여 40년 만에 비로소 처음 찾은 렬사의 희생지였다. 김영신 렬사 연구는 다시 급물살을 타기 시작하였다. 한국의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를 검색하면서 여태 알지 못하던 렬사의 남동생 김이천(金二千, 연변에서는 金伊千으로 알려졌다)의 행적도 어느 정도 밝혀졌다. 김이천은 누나 김영신을 따라 일찍부터 일제놈들과 싸우는 항일전에 나서다가 적들에게 체포되여 연변  룡정의 간도일본총령사관을 거쳐 서울 서대문형무소로 압송되였고, 서대문형무소에서 6년 형을 언도받았다. 1932년 12월 28일자 《조선일보》 3면의 관련 기사에 따르면 고향은 함경남도 단천군 류도면(端川郡流道面)으로 알려진다.

 

2

김영신 렬사의 진실한 고향이 륜곽을 드러냈다. 두만강 이북으로의 이주 후 삶의 터전도 처음부터 연길현 의란구 남동촌이 아니라 연길현 상의향 팔도구 신흥동(尚义乡八道沟信兴洞)이였다.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를 통해, 김이천을 통해 알려지는 김영신의 고향과 연변으로 이주한 후의 삶의 거주지이다.

김영신의 남편이자 중공연화중심현위 제1임 선전부장인 한별(본명 김인묵)의 서울 서대문형무소 행적도 알려졌다. 1930년 연변 5.30폭동과 그해 가을 추수폭동, 주구청산 등 투쟁을 거치면서 연변에서는 수백명에 달하는 조선족 공산당원과 혁명자들이 서울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였다. 1932년 12월 28일자 《조선일보》 3면 관련 기사에는 수백명 연변출신 혁명자들중 이른바 390명 ‘피고’의 진실한 주소와 년령 등이 밝혀진다.

이에 앞서 기사는 서대문형무소에서 신병으로 신음하거나 보석으로 출옥한 후, 또는 옥중에서 심판과정도 거치지 못하고 병사한 사람 12명의 이름을 렬거하였다. 이들 12명 가운데 한별도 들어있었다. 김영신의 남편 한별이 1932년에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적들 심판과 판결에 앞서 병사하였음이 그 시절 《조선일보》를 통해 잘 알려진다.

김영신의 진실한 고향과 남동생 김이천, 남편 한별에 관한 정보는 김영신 연구에서의 새로운 발견이였다.

김영신(金永信)은 1905년 함경남도 단천군 류도면(端川郡流道面)의 한 가난한 농가에서 태여났다. 본명은 김영숙으로 알려진다. 조선이 일제침략자의 발굽에 짓밟히고 있을 때 김영신은 부모를 따라 살길을 찾아 두만강 이북 연길현 상의향 팔도구 신흥동((尚义乡八道沟信兴洞)으로 이주하게 되였다. 이들 일가는 언제인지는 몰라도 그닥 멀지 않은 연길현 의란구 남동촌으로 옮겨 앉았다. 김영신은 이곳에서 어린시절을 보냈고 젊은이로 자라면서 혁명의 길에 들어섰다.

1928년에 김영신은 1912년생인 남동생 김이천과 함께 부녀회와 소선대에 참가한 후 마을 녀성들을 각성시키기에 힘을 기울이였다. 어느 날 저녁 김영신의 집에서 마을녀성들의 모임이 있었다. 모임에서 영신은 이렇게 말하였다.

“이 자리에 오신 분들중에 글을 아는 분이 있는가요? 한분도 없군요. 녀자들은 어째서 글을 모르는가요? 봉건적 남존녀비 사상이 우리를 까막눈으로 만들었어요. 우리는 눈을 떠야겠어요. 눈을 뜨지 않고 어떻게 우리를 못살게 구는 이 사회를 뒤엎을 수 있겠어요?! 여러분, 아는 것이 힘이라는 말이 있어요. 우리 모두 마음먹고 글을 배웁시다.”

 

‘홍색장인강주체화랑’ 가운데의 한별에 대한 소개 부분. (사진 양성지 제공)

 

3

김영신의 마디마디 말은 녀성들의 심금을 울렸다. 영신의 노력 밑에 마을의 처녀들은 물론 아낙네들까지도 야학에 자원하여 나섰다. 남동촌의 녀성들은 봉건사상의 속박에서 벗어나기 시작하였다. 매일 밤 야학실에서 울려나오는 글소리는 산촌의 고요한 정적을 깨뜨렸다.

삐라를 찍고 삐라를 살포하는 일에서도 김영신은 남달리 열성적이였다. 그는 늘 위험한 곳에가 삐라를 뿌렸고 긴급임무가 있으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앞장에 서서 헌신적으로 수행하였다. 간고한 투쟁의 나날에 김영신은 혁명가인 한별(김인묵, 렬사)을 알게 되고 1929년에 그와 결혼하기에 이르렀다.

남편 한별(韩别, 1895ㅡ1932)의 원명은 김인묵이고 평안남도 태생이다. 그는 1919년 조선 3.1운동 이후 로씨야 연해주로 갔다가 초기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이 꾸린 고려공산당(이르꾸쯔크파)에 참가하여 혁명의 생애를 시작하였다. 1926년에 연해주 땅을 떠나 중국 왕청현으로 왔다. 이 시기의 한별에 대해서 잘 알 수 없으나 신생한 쏘련땅에서 보고 듣고 겪은 들끓는 사회주의 현실은 그를 크게 고무하였다. 그는 연해주에서 맑스주의를 접수하고 초기 조선인 공산주의자로 왕청현에 나타났다.

1927년 10월에 한별은 조선공산당 동만도(화요파) 선전부장 중책을 짊어졌다. 투쟁의 수요로 그는 활동지대를 연길현, 화룡현 일대로 옮기였다. 연길현 의란구 남동에서 활동할 때 한별은 남동촌의 녀성혁명가 김영신을 알게 되고 사랑을 속삭이다가 1929년에 남동에서 결혼하고 부부로 되였다. 이듬해 그들 사이에는 사랑하는 딸애가 있게 되였다. 했으나 한별은 가정의 안일한 생활에 얽매일 수 없었다. 그는 동지들과 함께 동만도 각지로 다니며 조직을 늘이면서 혁명투쟁을 지도하여야 했다.

화룡, 연길 땅에서의 한별의 주요 활동무대는 장인강, 래풍동(来丰洞), 삼도구 등지였다. 1927년에 한별은 화룡현 장인강으로 가서 당지의 청년골간들에게 당규약을 학습시키고 조공당 조직을 건립하도록 이끌었다. 그의 주요 노력으로 하여 화룡현 평강벌일대와 삼도구의 원화동, 청산, 단포동(丹浦洞), 연강(渊江) 등지에 조공당 기층세포가 우후죽순마냥 조직되고 한패 또 한패의 동지들이 혁명의 장도에 오르게 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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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별 등이 지도하는 조선공산당 동만도(화요파)의 혁명투쟁은 선참 1929년 11월부터 시작된 조선 광주학생성원 반일시위투쟁에서 거대한 위력을 과시하였다. 온 조선의 학생들이 부글부글 끓었다. 연변에서도 조선공산당 동만도(화요파)에 의해 거센 격랑을 일으켰다. 거센 격랑의 중심은 룡정의 중소학교들이였다. 그 시절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관련 뉴스 몇개만을 보기로 하자.

 

1930년 2월 6일자 《동아일보》  2면 기사:

<간도 백여명 학생 등교중 재차 만세>ㅡ

오일오전 간도 룡정촌에서 등교하는 학교 학생 백삼십명이 시중에 모이여 만세를 고창하며 시위운동을 하얏는데 룡정령사관 경찰에서는 즉시 경관대가 출동하야 해산식히는 동시에 세명의 학생을 현장에서 검속하얏다.

 

1930년 2월 7일자 《조선일보》 2면 기사:

<동흥, 대성 중학 삼백명 시위만세> ㅡ

간도에서는 오일 오전에 동흥중학교와 대성중학교 학생 삼백여명이 수기를 손에 들고 만세를 부르며 “광주학생에게 동정하자” 등의 문구를 쓴 삐라를 뿌리며 시위운동을 하고 포위하는 경관대에게 칠십여명이 체포되엇스며 각 학교는 다수한 경관이 경계하더라

 

1930년 2월 15일자 《조선일보》 2면 기사:

<룡정촌 남녀학생 이백명 시위만세> ㅡ

11일에 간도 대성중학교 동흥중학교 광명고등녀학교 생도 이백여명이 광주학생사건에 대하야 동정만세를 부르고 수기를 두두며 격문 다수를 베포하엿는데 현장에서 한명이 검속되엇더라

 

1930년 2월 15일자 《조선일보》 2면 기사:

<영신중학도> ㅡ

십이일에는 영신중학생 칠십명이 역시 광주학생사건에 대한 만세를 부르고 시위운동을 하다가 한명이 검속되엇더라

 

1930년 2월 22일자 《동아일보》 7면 기사:

<간도 양교생(两校生) 만세로 시위>ㅡ

지난 십칠일 오후 한시경에 룡정시 영신소학생 약 팔십여명이 각기 만세를 불르자 이 소리를 들은 해성학생 칠십여명이 손에는 붉은 잉크로 쓴 “조선학생만세”라는 수기를 각각 들고 만세를 불르며 시위운동을 하자 미리 경계하고 잇든 총령사관 경찰서 기마대가 총동하야 구명의 학생을 검속하얏다 하다

 

룡정 광주학생성원 반일시위투쟁 관련 여러 뉴스들이다. 원문 그대로 옮겨 적은 이런 기사(띄여쓰기는 지금 표준을 따랐음.)들은 한별 등 조선공산당 동만도(화요파)가 지도한 중소학교 학생들의 반일시위의 당시 상황을 잘 알려준다. 룡정만 해도 연인수 수백수천명이 동원된 중소학교 학생들 반일시위투쟁이였다.

 

화룡시로혁명근거지건설추진회에서 2020년 6월에 수선한 김영신 렬사 묘소. 투도진 장인촌 남쪽 옛 도대구(봉의동) ‘집단부락’가에 위치. (사진 양성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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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년말부터 앙양된 연변에서의 조선 광주학생성원 반일시위투쟁은 중공만주성위의 중시를 불러 일으켰다. 날로 높아가는 동북 조선족인민들의 반일기운에 고무된 만주성위에서는 조선의 3.1운동 11돐을 계기로 집회 또는 시위투쟁을 단행하여 조선족군중들의 반일의식을 보다 제고시키기로 하였다. 이에 조선공산당 만주총국 동만도 화요파는 3.1운동 11돐을 계기로 대규모적인 대중 시위 투쟁을 벌리기로 하고 동만과 북만에 각기 ‘3.1운동 11돐 기념준비위원회’를 조직하기로 결정하였다.

1930년 1월, 조공만주총국 선전부장 장시우(张时雨)가 연길현 수신향 래풍동 (현 화룡시 동성진 명풍촌) 혁명가 류태순((刘泰顺,조공당 평강구역국 책임비서, 항일렬사)의 집에 나타났다. 그는 류태순의 집에서 조공당 동만도지도자들인 김창일 (金昌一,일명 윤복송, 동만도 책임비서), 강석준 (姜锡俊,동만도 조직부장), 한별(동만도 선전부장), 리동선(李东鲜, 연변학생련합회 간부) 등과 함께 자리를 하고 조공당 만주총국의 지시를 전달한 뒤 ‘3.1운동 11돐 기념준비위원회’를 결성하기로 하였다. 그해 2월 20일경 리동선을 총지휘로 하는 ‘3.1운동 11돐 기념준비위원회’가 정식 조직되고 조공당 동만도의 지도를 받게 되였다. ‘준비위원회’는 사실 조선공산당 동만도(화요파)의 지도를 받는 조직이였다.

‘준비위원회’가 조직된 후 한별은 장시우, 강석준, 김창일과 함께 래풍동의 류태순과 강만흥(공청회 만주총국의 간부)의 두 집에 기숙하면서 밤마다 선전삐라 원고를 쓰고 등사했다. 약 30만장의 선전삐라와 격문, 몇천폭의 수기(手旗)는 그렇게 짧은 시간에 만들어졌다. 그들은 이 삐라와 수기를 각지의 당, 단 기층세포를 통해 즉각 연변 각지에 배포하였다.

2월 28일 장인강, 이도구, 소오두구, 개척리, 래풍동, 대동구 등지의 수천수백명 시위자들이 투도구로 진격하였다. 이튿날 3월 1일에는 보다 많은 사람들이 시위에 떨쳐나섰다. 투도구, 룡정, 나아가 전 간도가 들끓었다. 투도구 일본령사분관과 룡정총령사관의 놈들이 시위대오를 해산, 탄압하려고 미쳐 날뛰였지만 타오르는 투쟁의 불길을 꺼버릴 수가 없었다.









동만특위 부녀위원 김영신과 남편 한별 (2)

3월 5일, 한별은 장시우, 김창일, 강석준, 류태순, 리동선과 더불어 래풍동에서 다시 자리를 같이하고 이번 시위투쟁을 총화하였다. 또 ‘준비위원회’를 ‘동만폭동위원회’로 이름을 바꾸고 폭동위원회가 나서서 혁명단체와 혁명군중들을 불러일으켜 무기와 자금을 마련하고 5월 1일에 일제히 폭동을 단행하기로 결의하였다. 헌데 이 폭동준비가 3월 하순에 일본간도총령사관에 알려져 검거선풍이 터지면서 5월 중순까지 100여명이 검거, 체포되고 그중 49명이 서울 서대문형무소로 압송되였다. 한별은 암암리에 지도했기에 적들에게 체포되지 않았다.

▲한별이 투옥되였던, 1932년 룡정에 도사린 간도룡정총령사관. 1932년 12월 28일자 《조선일보》 1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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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 1월, 조선족공산당원 왕경(王耿)이 중공만주성위의 파견을 받고 연변에 와 연변 당조직 재건 사업에 착수하였다. 조공당 동만도 소재지 내풍동에서 왕경을 맞이한 한별은 혈육을 만나기라도 하듯 반갑기 그지없었다. 일찍부터 중공당조직을 찾던 한별이였고 한별을 견실한 공산주의자로 믿은 왕경이였다.

이해 3월에 한별은 왕경의 소개로 선참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으며 왕경의 조수로 되여 중공동만특별지부에서 건당사업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한별이 왕경과 함께 선참으로 착수한 곳은 래풍동이였다. 이 고장은 조공당 화요파 동만도 소재지다 보니 각지 화요계의 투쟁골간들이 늘 드나드는 곳이였다. 이해 4월에 한별과 왕경은 래풍동 류태순의 집에서 원 공청동만도 선전책이며 삼도구지부 책임 리철한을 만났다. 이날 리철한은 한별의 소개로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고 왕경이 수속절차를 밟아주었다. 같은 시기 류태순이 또 한별의 소개로 중공당에 가입하였다.

1930년 4월, 중공동만특별지부에서 ‘붉은 5월투쟁’을 발동하여 투쟁 가운데서 원 조공당 당원들을 검열하고 당조직에 받아들이기로 한 뒤 또 상해의 5.30폭동 5돐을 계기로 대중적 5.30폭동을 발기하기로 결정하였다. 조공당 동만도 엠엘계통에서도 그해 4월 중공만주성위 특파원의 신분으로 연변에 온 박윤서의 지도 밑에 ‘5.1투쟁행동위원회’를 내오고 투쟁방안, 폭동계획을 토의하자 조공당 동만도 화요계통에서 적극 호응하여나섰다.

조선공산당 동만도 화요파들은 ‘제3차 간도 공산당사건’에서 비록 큰 손실을 입기는 하였으나 중공동만특별지부에 김창일, 한별이 있은 것이 다행이였다. 그들은 한별과 김창일의 주선으로 화요파의 당원과 소속군중들로 룡정과 삼도구의 폭동에 참가하기로 하고 리동선을 수신향 래풍동에 파견하여  폭동계획을 토의하게 하였다. 그들은 소오도구, 래풍동, 비암 등지의 동지들은 룡정폭동에 참가하고 장인강, 청지하(青芝河) 등지의 동지들은 투도구폭동에 참가하기로 하였다. 시간이 긴박했기에 한별은 직접 삼도구 원화동에 있는 안학선을 찾아 같이 삼도구폭동계획을 세웠다.

비가 지겹게 내렸던 5월 29일 밤 10시경, 명신사 박달평의 단포동 뒤산에 삼도구(오늘의 화룡시 소재지)일대 혁명군중 수십명이 모이였다. 조공당 삼도구 현임 지부책 안학선이 회의를 사회하면서 동만특별지부에서 파견된 동지의 보고가 있게 된다고 소개하였다. 이 동지가 다름아닌 한별이였다.

한별은 보고에서 국제, 국내 정세를 분석하고 일국일당제에 대하여 말하였다. 그는 주요하게 한 나라에는 하나의 당이 있어야 하고 여러개 당이 존재할 수 없다, 국제공산당의 지시에 좇아 조공(朝共)을 해산하고 중공을 건립한다, 중국공산당의 통일지도하에 혁명을 하여야 한다고 지적하면서 5.30폭동을 단행하는 원인과 의의에 대하여 자상히 설명하였다.

▲한별이 간도룡정총령사관에 이어 투옥되였던 서울 서대문형무소. 1932년 12월 28일자 《조선일보》 1면에서.

7

회의에서는 안학선, 최룡화의 지도하에 각 부서와 담당구역을 분공한 뒤 30일 0시가 되자 각기 행동하였다. 잇달아 충신장(忠信场, 오늘의 화룡시 소재지)의 친일지주와 주구들의 집에 불길이 치솟고 선전삐라들이 도처에 흩날렸다. 청파호에 파견된 조는 부근의 전선줄을 끊어버리고 도끼로 전보대를 찍어넘겼다. 한별의 지시와 지도 밑에 삼도구의 혁명군중들이 맨먼저 행동하여 연변 5.30폭동의 서막을 열어놓았다.

1930년, 연변 각지에서는 ‘붉은 5월투쟁’의 불길이 거세차게 타올랐다. 붉은 5월투쟁의 고조는 5.30폭동이였다. 김영신도 이 투쟁에 합류하면서 광범한 로고대중들과 함께 일제놈들과 그 주구를 반대하는 투쟁에 선참 나섰다고 하지만 어디에서 어떻게 나섰는지 알려지는 자료가 아직 보이지 않는다.

5.30폭동 이후 한별은 왕경을 안내하여 장인강으로 가 투쟁의 시련을 겪은 한패의 동지들을 중공당에 받아들이게 되였다. 장인강은 조선공산당(화요파)조직이 일찌기 뿌리박은 고장이였다. 국제공산당의 ‘일국일당’ 원칙이 제기된 후 조선공산당 동만도 화요파계통에서는 이 원칙을 접수하기 시작하였다. 그 시기인 1930년 3월 조공당 엠엘파계통의 박윤서 등이 장인강에 가 오늘부터 원 조공당 당원들이 중공당원으로 넘는다고 선포하면서 ‘연변당부 장인강지부’를 조직하였다.

이해 6월, 한별과 왕경과 함께 장인강에 가 원 조공당 화요파 당원회의를 소집하고 상급의 지시정신에 따라 원 조공당의 동만도 일체 조직을 해산시킨다고 선포하였다. 동시에 3월에 건립한 ‘연변당부 장인강지부’는 동만특별지부가 아닌 이른바 ‘연변당부’에서 비준한 것이기에 여기서 해산시킨다고 선포하였다. 그 리유는 만주성위에서 비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어 그들은 당원은 집체로 흡수할 수가 없고 반드시 당의 조직원칙에 따라 개별적으로 수속을 거쳐 입당해야 한다고 설명한 뒤 개별심사를 거쳐 리동선, 조군필, 주현갑, 김병수 등 한패의 투쟁골간들을 중공당원으로 받아들였다. 그해 7월초, 장인강 첫패의 당원들은 장인강 봉의동에서 당원대회를 열고 리동선을 서기로 하는 중공장인강지부를 정식으로 건립하였다. 당원은 18명이였는데 지부 아래에 봉의동(凤仪洞)소조, 신풍동소조, 부흥평소조 등 3개 소조를 두었다.

동년 6월 한별은 또 왕경을 안내하여 삼도구로 갔다. 그들이 원화동 상촌의 안학선 집에 들어서자 안학선이 반가이 맞아주었다.

“몹시 고대했습니다.”

“그럴 줄 알았습니다.”

한별은 안학선의 두 손을 굳게 잡아주었다. 안학선의 집은 련일 우리 동지들로 분주하였다.

1930년 6월 하순의 어느 날, 안학선의 집 뒤고방에 우리 동지들이 빼곡이 들어앉았다. 이날 안학선, 최룡화 등 한패의 동지들이 하나하나의 수속을 거쳐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으며 이 동지들로 중공삼도구구위를 설립하였다. 안학선이 구위 서기로, 최룡화가 조직부장으로, 윤동호가 선전부장으로, 장수가 군사부장으로, 황정옥이 부녀위원으로 선출되였다.

김영신의 동생 김이천 사진. 1933년 9월 25일자 《조선일보》 4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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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변 5.30폭동 이후 조선족들 가운데서의 중공당원 발전 사업이 본격적으로 시달됨에 따라 당원수가 급격히 늘어났다. 이해 6월 한달 사이만 해도 당원수는 원래의 10여명으로부터 200여명으로 장대해졌다. 왕경, 한별, 김창일 등의 지도와 노력으로 중공 삼도구구위, 개산툰구위, 평강구위가 륙속 건립되였다. 새 시기에 적응될 당의 통일지도기구를 조직할 문제가 급선무로 나섰다. 이로부터 보면 한별은 지난 30년대 초기 연변의 건당사업에서 마멸할 수 없는 업적을 쌓은 견실한 혁명가였다.

1930년 6월, 5.30폭동의 시련을 겪은 김영신은 영광스럽게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1930년 7월 하순, 연길현 의란구 남동의 남쪽골짜기 빈집에서 중공연화중심현위를 내오기 위한 당원대표대회가 열리였다. 중공만주성위 순시원 료여원은 회의에서 국내외 정세와 당의 령도를 강화할 문제에 대해 연설하면서 적당한 때 화룡현과 연길현을 망라한 중공연화중심현위를 건립하기로 하였다. 회의에는 료여원, 왕경, 마준, 박윤서 등 15명이 참가하였는데 한별과 김영신도 그번 회의의 주요참가자였다. 그들 부부는 의미 있는 눈길을 주고받으며 회의정신을 드팀없이 집행하자는 결의를 다졌다.

그해 8월 13일, 화룡현 평강구 약수동에서 왕경 등 19명(그중 출석대표 9명, 참가자 7명, 방청 3명)이 참가한 제1차 연화당원대표대회가 소집되였다. 대회는 4일간 계속되였는데 7명 위원과 2명 후보위원을 선거하고 연화중심현위를 정식으로 건립하였다. 한별은 현위 제1임 선전부장으로 되고 김영신은 현위 제1임 부녀부장으로 되였다.

중공연화중심현위의 건립은 연변혁명투쟁의 새로운 발전을 표징한다. 연화중심현위는 건립된 후 중공만주성위의 지시에 따라 연변 지방폭동을 조직할 문제를 중심과업으로 내세우고 현위의 주요성원들은 현내 각지에 가 이 폭동을 지도할 당의 기층조직 확대 사업을 활발히 벌리였다. 중공 연길구위, 로투구구위, 룡정구위, 하마탕구위, 옹성라자구위, 훈춘구위가 우후죽순마냥 일어섰다. 연화중심현위는 현위 소재지를 룡정에 두고 산하 9개 구위를 지도하게 되였다. 한별은 낮과 밤이 따로 없이 당면 투쟁에 관한 현위의 해당 문건을 기초, 등사하기에 바빴다.

1930년 9월 25일, 중공만주총행동위원회는 중공연화중심현위 건립과정에 대한 료여원의 보고를 청취한 후 연변에 중공동만특별위원회를 건립하고 연화중심현위를 연화현위로 고치며 왕청현위와 훈춘현위를 건립하며 료여원을 동만특위 서기로 임명하기로 결정하였다. 김영신은 신생한 중공왕청현위 부녀위원으로 파견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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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 10월  료여원은 조선족 양림과 함께 연길현 무산촌에 가 회의를 가지고 중공동만특별위원회를 정식으로 조직하였다. 따라서 연화중심현위가 연화현위로 개칭되고 한별은 의연히 연화현위 제1임 선전부장으로 뛰였다. 낮과 밤이 따로 없었다. 그 바쁜 가운데서도 한별은 10월에 왕청현위 제1임 부녀위원으로 부임되여간 안해를 그리며 부부일심으로 당의 사업의 승리를 위해 끝까지 싸울 결의로 가슴을 불태웠다.

1930년 10월, 중공연화현위는 당내 ‘좌’경로선의 영향으로 연화현 총행동위원회로 탈바꿈하고 현위 산하의 기층구위와 지부도 모두 행동위원회로 되였다. 연화총행동위원회는 10월혁명 13돐 기념일을 계기로 도시와 농촌들에서 대규모적인 지방군중폭동을 단행하기로 하고 그 준비사업을 다그쳤다. 선전삐라와 격문 등이 선행되여야 했다. 한별의 사업량은 배로 늘어났지만 그는 동지들과 함께 몸을 내던지며 일했다. 때론 너무도 지쳐 동지들이 쉬면서 하라 해도 그는 미소로 답례하며 일손을 멈추지 않았다.

1930년 년말에 연화현총행동위원회는 취소되고 연화현위가 회복되였지만 폭동의 제반 과업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그때 현위 련락소는 룡정의 복흥가에 설치되였는데 한별은 동지들과 함께 여기에 숙박하면서 사업을 밀고나갔다.

그러던 1930년 11월 6일, 일본간도총령사관의 순경들이 낌새를 채고 룡정 복흥가의 현위 련락소를 불의에 습격하였다. 미처 어쩔 사이도 없이 한별은 현위 서기 배동건, 현위 부녀부장 리정숙 등 현의 주요간부들과 함께 불행히 적들의 마수에 걸리였다. 이날 룡정구위의 간부들까지 도합 40여명이 체포되였다. 이어 10여명의  동지들이 또 체포되였다. 연화현위가 재차 큰 파괴를 당한 것은 1931년 봄, 연화현위가 소재지를 룡정으로부터 모아산너머 조양천 부근의 무산촌으로 옮긴 것은 1931년 2월의 일이다.

한별과 그의 동지들은 적들에게 체포된 후 인차 룡정의 총령사관 류치장에 갇히였다. 한별은 류치장에서 갖은 취조를 당하였지만 한 공산당원의 고귀한 절개를 조금도 흐트러뜨리지 않았다. 적들은 한별 등을 한동안 들볶다가 서울 서대문형무소로 압송하였다.

1930년 11월에 남편 한별이 룡정에서 체포되여 서울 서대문형무소에 넘어가자 김영신은 더욱 몸을 내걸고 싸웠다. 그는 왕청에 가 사업을 지도하는 연화현위 조직부장 마준 그리고 중공왕청현위 제1임 서기 김훈의 지도를 받으며 적들이 수시로 덮쳐들 위험도 마다하고 늘 왕청현내의 대흥구, 신선동, 하마탕 등지에 내려가 반일 선전고동 사업을 벌렸다.

연변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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