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랜 용사들 적들의 수송대 엄습
변절자에 의해 거사 물거품으로
원쑤를 갚자면 손에 무장을
연분홍진달래가 곱게 핀 나즈막한 언덕 아래에 15만원 탈취 거사 석비가 세워져있었다. 룡정에서 10리 쯤 떨어진 동량리어구이다. 석비정면에 한자로 ‘夺取十五万元事件遗址’ 라고 새겨져있었다. 륙도하가 눈앞에서 흐르는데 강물소리가 귀맛 좋게 들려온다. 미츨한 백양나무에 돋은 파릇파릇한 잎사귀들은 봄바람에 귀엽게 한들거린다. 연변의 여느 고장과 별다른 데가 없는 곳이지만 바로 여기에서 세상을 놀래운 15만원 탈취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지금은 이렇게 백양나무가 서있지만 옛날에는 버들방천이였지요. 바로 저기에 동량마을이 있었고 마을에는 제법 주막집까지 있었습니다. 마을은 후에 저기 보이는 승지촌에 소속되였습니다.”
룡정 ‘3.13’기념사업회 회장이며 룡정항일력사연구회 회장인 최근갑선생은 마을이 있던 곳을 가리켰다. 페촌이 되여버린 마을자리에는 나무와 잡초가 무성할 뿐 그 옛날 사람이 살았던 흔적은 온데 간데 없었다.
기자에게 ‘15만탈취사건’상황을 설명해주고 있는 고 최근갑선생(2004년)
“‘3.13’운동에서 희생된 동지들의 원쑤를 갚고 민족독립을 쟁취하자면 무기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낀 철혈광복단 성원들은 자나 깨나 무기를 갖춰야 하겠다는 생각이였지요.”
철혈광복단 단원인 최이봉(최봉설), 한상호는 무기를 갖추기 위해 쏘련(지금의 로씨야)에 건너가려고 작심했다. 이에 그들의 부친들은 키우던 송아지를 팔아 려비를 마련해주면서 어떻게 하나 총을 구해가지고 오라고 고무해주기도 했다.
쏘련에 건너간 두 사람은 막로동판에 뛰여들어 돈을 벌었다. 돈이 되는 일이면 무슨 일이나 마다하지 않았다. 무기를 사기 위해 아글타글 돈을 모으면서 죽을 고생을 했다. 돈이 모아지자 그들은 권총 4자루, 보총 2자루, 수류탄 몇개를 사가지고 귀향했다.
‘3.13’ 운동 이후 연변 각지에서는 반일무장단체가 우후죽순마냥 건립되였다. 그들은 무장근거지를 건립하고 군사훈련소, 사관양성소를 대량 설립하여 군사인재들을 양성하는 한편 민간에 있는 렵총과 재래식총을 거두어들여 재빨리 자신을 무장하기 시작했다. 어떤 반일단체들에서는 일본경찰서를 습격하거나 일제주구들의 집을 들이쳐 무기를 탈취하기도 했다. 그러나 단순히 이러한 방법으로는 급속히 발전 장대해지는 반일대원들의 무기수요를 만족시킬 수가 없었다. 대량의 무기를 구입해 반일무장대원들을 무장시키자면 돈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모금활동만으로는 대량의 무기를 구입하기엔 턱부족이였다.
이 때 씨비리에서 쏘련사회주의혁명을 무력으로 간섭하려고 쳐들어왔던 체코군단이 패배하고 본국으로 돌아가게 되였다. 그들은 보총 한자루와 탄약 100발을 일본돈 30원에 마구 팔아버리고 있었다. 이것은 군자금만 손에 쥐면 마음대로 무기를 구입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아닐 수 없었다.
1919년 여름, 연변지역의 유지인사들은 군자금을 모아 국민의회 군사부장 김하석에게 주어 무기를 구입해줄 것을 부탁했다. 하여 2000여자루의 총과 수십만발의 탄알을 구입하게 되였다. 그런데 운수도중 무기를 실은 배가 태풍을 만나 침몰되는 바람에 아까운 무기를 몽땅 바다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이러한 후과를 책임져야 했던 김하석은 연길현 와룡동에 있는 철혈광복단 단원 최봉설에게 빠른 시일내에 군자금을 마련할 방법을 강구하라고 지시했다.
철혈광복단 단원들인 최봉설, 윤준희, 림국정 등은 빠른 기일내에 군자금을 얻으려면 일본은행을 습격하는 방법 밖에 없다고 입을 모았다. 그러자면 금융기관에 있는 조선인들과 줄을 달아야 했다. 그들은 일제 금융기관의 활동을 면밀히 조사하는 가운데서 국민회 회원인 전홍섭(全洪燮)이 조선은행룡정출장소 서기로 일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였다. 윤준희는 전홍섭에게 만나자는 편지를 띄웠다. 약속한 시간에 윤준희는 림국정과 함께 전홍섭을 만나 상급의 지시와 금자금 모금정황을 소개한 후 “일본놈들이 회령에서 룡정은행으로 보내는 은행권수송금액과 그 구체적 시간만 알수 있다면 군자금 모집은 아주 손쉽게 해결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에 전홍섭은 자기도 놈들의 은행권수송에 몇번 참가한 적 있다면서 정보를 수집하는 즉시로 련락을 취하겠다고 했다. 윤준희 등 기타 대원들은 그 동안 은행권탈취준비사업을 하기로 하고 헤여졌다.
그러던 1919년 12월 그믐날, 전홍섭은 끝내 중요한 비밀을 알게 되였다. 우연한 기회에 룡정출장소 소장 시부다 고로우가 다게다 지로우와 이야기하는 것을 엿듣게 되였는데 새해 1월 4일 아니면 5일 쯤에 회령으로부터 약 15만원의 현금을 수송해오게 된다는 것이였다. 전홍섭은 즉각 최이봉의 장인인 김하규를 통해 최이봉에게 비밀통지를 전달했다.
1920년 1월 1일, 전홍섭의 비밀통지를 받은 최이봉은 즉시 윤준희를 찾아갔다. “먼저번 귀 형으로부터 부탁받은 일이 1월 4—5일에 있게 될 것이요. 수송대에 내가 편입될 수도 있으니 가차없이 나의 다리를 총으로 쏘아달라.”는 내용의 글이 씌여져있는 쪽지는 너무도 돌발적이고 격동적이였다. 윤준희와 최이봉은 단숨에 와룡동에 있는 김하석네 집으로 뛰여갔다. 전홍섭의 쪽지를 받은 김하석은 윤준희와 최이봉더러 인차 명동에 있는 김계하의 집에 찾아가서 거기에 대기하고 있는 박웅세와 김준을 만나 행동계획을 면밀히 짜라고 지시했다. 1월 3일, 윤준희, 김준, 박웅세, 최이봉, 한상호, 림국정 등 6명은 교동에 있는 김계하네 집에 집결하여 습격계획을 짰다. 습격지점을 동량어구로 정하고 행동편리를 위하여 여섯사람을 두개 조로 나누었다. 윤준희, 김준, 박웅세가 한조가 되고 나머지 셋이 한조가 되였다. 두개 조는 동량리어구에 매복해있다가 은행권수송대가 오면 행인으로 가장하고 먼저 호송대를 처단한 후 은행권을 탈취하기로 했다.
비장한 격전
1920년 1월 4일, 집집의 굴뚝마다에서 늦은 아침의 연기가 모락모락 피여오르고 이따금 개 짖는 소리가 평화롭게 들려오는 동량마을은 그 날 따라 느닷없이 한가로와보였다. 눈 덮인 사자산은 흰 사자가 허리를 꼬며 휘우듬히 돌아앉아있는듯 사뭇 웅위로왔다. 하늘을 향해 머리를 건뜻 쳐든 선바위는 위풍도 당당했다.
권총, 포승, 철봉을 휴대하고 명동촌을 떠나면서 여섯은 사자산과 선바위를 바라보면서 오늘의 거사가 성공되리라로 굳게 믿었다. 일행은 유익하의 집에 들려 점심을 먹은 후 숨도 돌릴새 없이 길을 다그쳤다. 다른 사람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 삼림 속으로 목적지까지 가야 했는데 많이 내린 눈으로 하여 발이 눈 속에 푹푹 빠지기도 했지만 반달음으로 급행군하여 저녁무렵에야 동량리어구에 도착하게 되였다. 이들은 한족 류충괴, 리수옥이 경영하는 주막에 들러 식하한 후 두개 조로 나뉘여 큰길 옆 버들방천에 숨어 송금차가 나타나기만을 기다렸다. 사정없이 휘몰아치는 겨울바람이 용사들의 얼굴을 핥아놓았다. 혹한에 꼼짝하지 않고 숨어있자니 여간만 힘들지 않았지만 그들은 입을 꼭 다물고 가까스로 참았다. 1시간이 지났는 데도 은행권수송대는 나타나지 않았다. 대지에 어둠이 깃들기 시작했다.
4일 아니면 5일이라 했으니 혹시 래일 오는 걸가. 래일 다시 와서 기다려야 하는 걸가. 대원들은 추위 속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서성거렸다. 윤준희는 최이봉더러 한개 소조를 데리고 계속 버들방천에서 기다리게 하고 박웅세, 김준과 함께 회령방향으로 정찰을 떠났다. 반시간 후에 윤준희 일행은 짐을 실은 말을 앞세운 적들의 수송대를 발견했다.
“수송대가 틀림없소! 김준형, 어서 최이봉 소조에 소식을 알리오!”
윤준희는 간단히 명령하고 박웅세와 함께 길 옆에 매복했다. 김준에게서 소식을 받은 최이봉 일행은 인차 전투태세를 갖추고 적들이 오는 방향을 향해 줄달음쳤다.
아무 것도 모르는 적들의 수송대는 거들먹거리면서 동량리어구에 들어섰다. 100메터, 50메터, 30메터… 수송대가 점점 눈앞에 다가오고 있었다. 은행권을 실은 말이 앞서서 오고 그 뒤로 우편물을 실은 마차가 따르고 있었다. 일행은 도합 6명, 룡정에서 파견한 은행원 하루구찌, 회령은행출장소 서기 김용억, 일본순사 나가도모, 박연흡, 상인 진길풍 그외에 우편원 하라가시였다. 우편물을 실은 마바리와 은행권을 실은 마바리를 앞세우고 그 뒤로 진길풍과 나가도모순사가 말을 타고 따르고 있었고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하루구찌은행원과 박순사, 맨뒤로 하라가시가 따라오고 있었다.
“땅! 땅!”
겨울밤의 정적을 깨뜨리면서 맵짠 총소리가 되알지게 울렸다. 윤준희의 사격신호였던 것이다. 대원들은 일제히 일본놈 호송대를 향해 집중사격을 퍼부었다. 맨앞에서 말을 타고 오던 일본순사와 상인 진길풍이 총에 맞아 말 우에서 굴러떨어졌다. 습격대원들은 맹호같이 버들방천에서 뛰쳐나와 혼비백산해 어쩔 줄 모르는 적들을 몰아세웠다. 말에서 떨어진 일본순사 나가도모가 최후의 발악을 했지만 박웅세와 김준의 철봉에 맞아 당장에서 숨을 거두었다. 기타 수송대원들은 겁에 질려 사시나무떨듯 와들와들 떨기만 했다. 그런데 총소리에 놀란 말이 내처 앞으로 내달렸다.
“빨리 말을 잡아타오!”
윤준희는 소리치면서 은행권을 실은 말을 잡아탔다. 최이봉도 달려와 우편물을 실은 말을 잡아탔다. 윤준희와 최이봉은15리 떨어진 팔포강 산중턱에서 말을 멈춰세웠다. 조금 후 한상호가 달려왔다. 마바리에 실은 흑색주머니를 헤치는 순간 셋은 환성을 터치였다. 10원짜리 지페 5만원, 5원짜리 지페 10만원 도합 15만원, 전부 새 돈으로 꽉 차있었던 것이다.
셋은 돈을 나누어가지고 오도구를 거쳐 해란강을 건넌 후 삼봉동, 조양천을 경유하여 부르하통하를 건너 회합지점인 와룡동에 도착할 작정이였다. 한편 박웅세와 김준은 습격지점에서 자기들의 종적을 감추기 위하여 우편물을 실은 말을 몰고 윤준희 일행이 떠난 반대방향으로 달려갔다.
“밤새 지치고 아침까지 굶다나니 맥이 없어 쓰러지군 했답니다. 윤준희가 급한 김에 권총을 빼들고 ‘빨리 걸어라! 안 걸으면 죽여버리겠다. 이러다간 붙잡히고 만다’ 라고 하자 최이봉이 권총을 맞대며 ‘왜 동지를 죽이려 하느냐, 네가 쏘면 나도 쏜다. 그것도 말이라고 하느냐. 어떻게 하나 같이 가야지’ 라고 맞대들었답니다. 그러자 쓰러졌던 사람들이 벌떡 일어나 또다시 간고한 급행군을 했답니다. 동성에서 해란강을 건널 때 신을 벗고 맨발 바람으로 성에장이 뜨는 물을 건너 강기슭에 올라 땅을 디디니 자갈돌이 발에 척척 붙어나더랍니다. 부르하통하를 건널 때도 마찬가지였답니다.”(서봉학 리광수 대형다큐멘터리 《연변아리랑》)최봉설의 아들 최동현씨의 진술이다.
일행은 간고한 급행군을 하여 새벽 3시경에야 와룡동에 다달았다. 그들은 최이봉네 집에서 저녁 8시까지 늘어지게 잔 후 소달구지에 돈을 싣고 김하석이 있는 의란구 류채구로 출발했다. 의란구에서 모든 준비를 갖춘 윤준희, 최이봉, 한상호, 림국정 등 4명은 김하석과 함께 1월 10일, 돈을 휴대한 후 무기를 구입하기 위하여 울라지보스또크를 향해 떠났다. 그들은 15일에 로씨야 모구위에 도착, 거기에서 약 일주일간 기다렸다가 22일에 배를 타고 23일 울라지보스또크의 신한촌에 도착하여 당지의 반일지사인 채성하의 집에 류숙하였다.
최후의 순간
사건이 발생한 후 일제놈들은 혈안이 되여 날뛰였다. 1월 5일, 룡정 주재 일본령사관에서는 도난사건을 사출해내려고 수백명의 중일경찰들을 평강일대에 파견하여 조선인들은 검거체포했다. 1월 6일, 일제는 일본경찰36명과 지방순경 57명을 동원하여 와룡동을 수색하면서 도난사건의 실머리를 잡게 되였다. 하여 최이봉의 종적을 찾아 사처에 수색망을 펼쳤지만 최이봉 일행은 이미 적들의 추격에서 벗어난 후였다.
일제가 윤준희 일행을 체포하기 위해 악에 받쳐 발광하고 있을 때 이들은 신한촌에 머물러 있으면서 최의수란 소개자를 앞세워 일본돈으로 루블을 바꾸는 한편 무기상들과 련계를 맺기 시작했다. 일이 순조롭게 진척되기만 하면 갖고 온 돈으로 3만여자루의 총을 살 수 있는데 연변에 있는 반일단체는 물론 울라지보스또크의 500여명 조선족반일투사들까지도 완전히 무장시킬 수 있었다.
무기구입을 책임진 림국정이 친분이 있는 엄인섭을 찾아가 무기구입을 두고 상론한 것이 끝내 화근으로 되고 말았다. 엄인섭은 벌써 변절하여 울라지보스또크의 반일투쟁대오에 숨어들어 일제의 졸개 노릇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엄인섭은 겉으로는 무기를 사는 일을 근심말라고 호언장담하면서 감쪽같이 울라지보스또크에 있는 일본헌병대에 상황을 밀고해버렸다.
일본정부는 헌병대의 정보를 제공받은 후 즉각 조선 라진항구로부터 일본해군 군함을 울라지보스또크에 파견하였다. 조선인반일투사들을 일망타진할 주밀한 계획을 세운 일제는 1월 31일 밤에 신한촌을 대검거하기 시작했다.
윤준희 등이 무기교섭을 위해 연회를 베풀어 즐겁게 술을 마셨는지라 눕자 마자 꿈나라에 떨어지고 말았다. 한밤중 개들이 자지러지게 짖어대는 통에 잠을 털고 일어난 일행은 왁작대는 바깥동정에 정신을 차리고 서둘렀으나 때는 이미 늦었다. 전신무장을 한 일제군경들이 이미 그들이 투숙하고 있던 집을 물 샐틈없이 포위하고 있었던 것이다. 윤준희, 한상호, 림국정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뒤문으로 빠져나가려 했다. 갑자기 앞뒤문이 벌컥벌컥 열리면서 시커면 총아구리들이 이들을 향해 들이닥쳤다. 셋은 어쩔 새 없이 체포되고 말았다.
뒤방문곁에서 자고있던 최이봉이 사태의 엄중성을 파악하고 문을 박차고 나가면서 앞에 서있는 일본군을 발길로 걷어찬 후 나는듯이 달려가면서 키넘는 담장을 훌쩍 뛰여넘었다. 일본군헌병들이 최이봉을 향해 집중사격을 퍼부었다. 오른쪽 어깨에 총탄을 맞은 최이봉은 상처에서 흘러나오는 붉은 피를 한손으로 감싸면서 맨발로 계속 앞으로 내처 뛰였다. 얼마 안가 이번엔 왼쪽 발에 또 상처를 입었다. 몇번이나 눈앞이 캄캄해나는 것을 참으면서 뛰고 또 뛰였다. 최이봉은 반일비밀공작원인 채성하의 집으로 찾아갔다.
이번 사건으로 하여 현장에 있던 일본돈 12만 8천여원을 압수당했으며 울라지보스또크에 주둔하고 있던 500명의 조선족반일투사들도 몽땅 체포되고말았다.
울라지보스또크의 일본헌병대는 윤준희 일행을 체포한 후 조선인반일무장단체의 비밀을 알아내려고 갖은 고문을 다 들이댔지만 ‘15만원 탈취사건’외에는 아무런 정보도 얻어내지 못했다. 1920년 2월초, 일본놈들은 윤준희 일행 3명을 청진감옥에 압송하였다. 얼마 후에는 또 서울 서대문감옥에 압송하여 갔다. 거기에서 이른바 ‘15만원도난사건’ 관련 공개 재판이 있었다. 재판석에서 윤준희를 비롯한 반일투사들은 한결같이 자기들의 행동은 정의적인 거사로서 무죄라고 절규하면서 일제의 조선침략이야말로 죄악적이라고 규탄했다.
1921년 8월 25일, 일제는 서울감옥에서 윤준희, 한상호, 림국정을 사형에 언도하고 잔혹하게 살해했다. 이 때 윤준희는 30세, 한상호는 23세, 림국정은 27세였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최이봉은 그 후 ‘적기단’을 결성한 후 단장직무를 맡고 쏘련과 연변에서 무장투쟁을 벌린 한편 지하공작을 계속하였다.
길림신문/연변일보 김철호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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