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진 (43)
1970년 요녕성 요양시 출생
1992년 남개(南开)대학 경제학과 가격전공 졸업
1992년 7월~1993년 7월 ,요양시상업국 방직품회사 근무
1994년~1996년 칭다오한국완구회사 근무
1997년 인성원무역회사 설립, 사장
2002년 칭다오브래스(축복)방직유한회사 설립, 이사장
2005년 교주시로 확장 이전
2005년 신 칭다오브래스방직유한회사 설립 , 이사장
2013년 6월 칭다오신해네트워크미디어유한회사 설립, 사장
2013년 10월 칭다오루신환경보호과학기술유한회사 설립, 사장
2013년 11월 칭다오샤비에르화장품유한회사 설립, 사장
칭다오조선족기업협회 부회장
칭다오조선족기업협회 교주지회 지회장
교주시소수민족연합회 회장
교주시정협 제11,12기 상무위원
(흑룡강신문=하얼빈) 이수봉 박영만기자=칭다오브래스방직유한회사의 박성진 이사장은 27살의 젊은 나이에 열정과 패기를 가지고 빈주먹으로 무역분야에 뛰여들어 일본, 한국에 의류를 수출하며 숨 고를새도 없이 급성장해 왔다. 처음에는 "좀 더 잘 살아보자"는 단순한 욕망으로 한국인으로부터 의류 오더를 받아 의류업계에 발을 들여놓아 지금까지 확장, 이전 단계를 거치며 오늘날 의류 수출액 8000만위안을 달성했다. 박 사장은 단지 여기에 만족해 하지 않고 베이징대학 NBA 강습반에 많은 학비를 내고 다니며 재충전하고 있다. 공부를 하면서 진로가 넓어졌다고 박사장은 말한다. 박사장의 꿈은 그룹을 형성해 상장하는 것이다. 현재 박 사장은 교주시 정협상무위원으로 활약하며 지역의 조선족사회를 단결, 응집시켜 리드해가고 있다.
박 사장은 대학 졸업후 고향에 돌아가 조용하게 직장생활을 하던중에서 늘 무엇인가 자신을 충동하는 느낌을 받았다. 안일한 직장생활을 몇년하다 보면 그런 환경에 자신도 모르게 빠져버리게 되고, 그곳을 떠나기가 싫어지고 결국은 한곳에 물러앉게 된다. '분투'정신이 강한 박 사장은 젊은 나이에 이렇게 주저앉는것이 싫었다. 그래서 고향을 떠나 낯선 칭다오 땅에 발을 들여놓았다.
박 사장은 남개대학이라는 중국의 명문대를 졸업했지만 눈높이를 낮추어 한국완구회사에서 2년 넘게 열심히 근무하며, 창업에 대한 꿈을 키워나갔다. 그러다가 우연하게 기회가 왔다. 한국인 지인이 의류 오더를 주었다. 그래서 의류업계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남들 보기에는 의류무역이 간단해 보이는데 바로 남들이 다 쉽다고 여기기 때문에 뛰여드는 사람도 많아 그만큼 경쟁도 심하다. 박 사장은 의류무역이 사람도 많이 필요하기 때문에 복잡하다고 말한다. 게다가 자체 공장이 없다보니 납기와 가격을 맞추기 어려웠다. 그러나 박 사장은 '생명이 다 하는 날까지 분투한다'는 좌우명에 따라 움직였다. 박 사장은 필기책을 바꿀때마다 이 좌우명을 첫 페이지에 적어놓고 필기책을 펼칠때마다 읽어보며 자신을 채찍질했다.
신용을 목숨처럼 여기다
열심히 뛴 보람으로 무역액은 점차 눈덩이처럼 늘어났다. 박 사장은 장기성과 안정성을 고려해 2002년 칭다오 노산구에 의류공장을 지었다. 자체 가공공장이 있어 납기와 가격을 맞추는데 많이 유리했다. 그래서 그해 의류 수출액이 2500만위안에 달했다. 그 이듬해에는 5000만위안으로 배로 늘어났고 몇년간 안정세를 유지했다.
2006년에도 수출액은 6000만위안으로 꾸준한 성장세를 이어갔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때도 별로 큰 영향이 없었다.이렇게 또 몇년간 안정세를 유지했다. 2011년 수출액이 7000만위안으로 늘어 년 성장 1000만위안 달성을 거듭했다. 2012년에도 8000만위안 성장을 거두었다. 사무실과 현장직원이 도합 250명에 달하며 장기적으로 가공 오더를 주는 하청업체가 10곳, 많을 때는 30곳이 된다.
이렇듯 박 사장은 의류무역에서 급성장을 지속했다. 이런 급성장의 성공신화의 힘은 신용과 성실이라는 경영이념에서 왔다고 박 사장은 말한다. 박 사장은 신용을 목숨처럼 소중히 여겼다. 바로 그 힘이 오늘의 박 사장이 있게 했다. 어느 한번은 하청업체에 티셔츠 오더를 주었는데 완성품 티셔츠가 오염된 것이 많았다. "그런것까지 다 빼면 우리 못하지"라며 하청업체 공장장이 나누었다. 모든 책임이 가공공장에 있었지만 박 사장은 두말없이 오염처리에 나섰다. 1차 처리를 거쳐 불량품이 70%에서 30%로 줄었다. 재처리를 거쳤지만 결국은 10% 분량이 완전 불량으로 처리됐다. 그래서 클레임(退货) 받았다. 박 사장이 한국 바이어한테 10만달러를 배상하는것으로 일을 봉합했다.
사실관계를 손금보듯 잘 알고 있는 한국 바이어는 박 사장에 대한 믿음이 한결 돈독해 졌다. 그후부터 한국 바이어는 박 사장한테 더 많은 오더를 주었다. 두 사람은 2010년까지 지속적으로 거래했었다. 박 사장도 그 덕분으로 수출액이 큰 폭으로 늘어났고, 급성장할수 있었다.
불경기에 역으로 가다
현재 제조업체들이 인건비 상승, 노동력 부족, 인민폐 평가절상, 대내외 경제환경 악화 등 각종 애로를 겪고 있다. 또한 동남아 국가들의 제조업 경쟁력이 향상되면서 중국내의 노동밀집형 제조업체들이 충격을 받고 있다. 특히 동아시아연맹 국가가 일본으로 수출하는 방직품에 한해서는 면세 헤택을 받는다. 그러나 중국에서 수출하는 방직품은 14% 관세가 부여된다. 국내 기업들이 아직 기술, 신용, 납기준수 등 우세가 있어 당분간은 비교우위에 있지만 앞으로 더욱 어려워질것으로 전망된다.
박 사장은 이런 현실을 감안하고 불경기 때에 역으로 설비투자를 늘이였다. 100만위안을 투자해 완전자동재단기 1대를 구매했다. 방직 원자재는 잡아당기면 늘어났다 수축이 안된다. 그래서 인력으로 잡아당길 경우 2-3센티미터 오차가 난다. 자동재단기의 경우 잡아당기는 힘이 고르기 때문에 사이즈 오차를 줄인다. 결국은 품질 보증이 가능하다는 말이다.
특히 경제가 어려울 때 설비투자를 늘인다는것은 '성의'를 보인것으로 바이어들이 안심하고 오더를 주게 된다. 박 사장은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자동화를 실현하여 인건비를 줄이는 한편 권한을 풀어주어 적극성을 동원하였다. 그 일례로 회사 또한 주식을 관리자들한테 양도하는데 올해 30~40% 양도하고, 매년 10%씩 양도할 계획이다. 5년후에 자신이 대주주 지위를 보존하더라도 30% 주식만 소유한다는 방침이다. 이를 통해 '내 회사를 우리의 회사'로 만드는 효과를 거둔다는 전략이다. 어느 한번은 하청업체에 티셔츠 오더를 주었는데 완성품 티셔츠가 오염된 것이 많았다. "그런것까지 다 빼면 우리 못하지"라며 하청업체 공장장이 나누었다. 모든 책임이 가공공장에 있었지만 박 사장은 두말없이 오염처리에 나섰다. 1차 처리를 거쳐 불량품이 70%에서 30%로 줄었다. 재처리를 거쳤지만 결국은 10% 분량이 완전 불량으로 처리됐다. 그래서 클레임(退货) 받았다. 박 사장이 한국 바이어한테 10만달러를 배상하는것으로 일을 봉합했다.
사실관계를 손금보듯 잘 알고 있는 한국 바이어는 박 사장에 대한 믿음이 한결 돈독해 졌다. 그후부터 한국 바이어는 박 사장한테 더 많은 오더를 주었다. 두 사람은 2010년까지 지속적으로 거래했었다. 박 사장도 그 덕분으로 수출액이 큰 폭으로 늘어났고, 급성장할수 있었다.
2차 창업에 팔을 걷다
박 사장은 의류업을 선도산업으로 기반을 다져가는 동시에 2차 창업에 팔을 걷었다. 박 사장은 올해 10월 26일 재생타이어공장을 정식 오픈했다. 수출형 업체들이 한 바이어 혹은 한 품목에 지나치게 의존하면 항상 리스크(위험)가 존재한다. 경영 다양화를 지향하는것으로 리스크를 줄인다는것이 박 사장의 경영전략이다. 방직공장에 비워두었던 건물을 수건하고 500만위안을 출자해 루신(如新)환경보호과학기술회사를 설립했다. 칭다오의 유명한 브랜드인 아이커룬타이어관리회사와 합작으로 설립, 창업의 리스크를 최대한 줄였다.
박 사장은 "나무 한대가 수림을 이루지 못하지만 여러대는 수림을 이룰수 있다"며 재생타이어기업을 묶어 상장하려는 꿈도 키우고 있다. 현재 12개 기업이 가맹했다.
박 사장은 초창기때 의류 무역으로 번돈 2000만위안을 투자해 복장공장을 세웠고 , 또 복장공장에서 나오는 이윤으로 재생타이어공장을 세우고 , 화장품, 미디어회사 등을 설립했다. 박 사장은 의류와 화장품을 묶어 전국 대학교보급네트워크를 통해 판매할 예상이다.
한편 박 사장은 각종 사회활동을 조직하여 사회적 책임도 다 하고 있다. 2008년부터 매년 30만위안을 사회에 기부하고 있다. 그래서 교주시 자선선진집체의 명예도 받았다. 교주시 제1, 2회 조선족운동회를 조직해 교주시의 조선족단체들을 똘똘 뭉치게 해 구심점을 만들었다. 올해 국경절에는 칭다오조선족민속축제를 교주지회에서 주관했는데 지회장인 박 사장이 선두지휘했다. 교주시 사상 처음으로 전체 청도시 차원의 민속축제를 훌륭하게 치루어냈다는 성취감에 박성진회장은 총화행사때 회원들과 함께 어깨겯고 밥새도록 노래하고 춤을 추었다.
참말로 박성진 사장은 "생명이 다 하는 날까지 분투한다"는 자신의 좌우명을 실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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