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동충화초 인공재배 성공, 무한한 개발가능성 발굴
북동충하초를 보여주고있는 현영남씨.
“장백산에 동충하초가 자란다니? 말도 안되는거지. 저 량반 귀신에 홀렸나보네”
지난 2012년 현영남(49살)박사가 장백산을 수십번 오르내리며 야생 북동충하초를 채취하려 했을 때 다들 그랬다.
모두들 현영남박사가 자신의 연구실에 신주단지 모시듯 고이 모셔놓은 야생 북동충하초를 직접 두눈으로 보면서도 반신반의하며 도리머리를 저었다.
그도 그럴것이 “백약의 왕”이란 미명을 자랑하는 동충하초는 우리 나라 청해, 사천, 호남 등지에서 천연적으로 성장하고있지만 그 채취량은 굉장히 적어 수요를 만족시키기에는 역부족인 귀한 약재였기때문이다.
현영남박사는 연변대학 농학원에서 본과, 석사과정을 마쳤다. 그리고 바로 훈춘시 “만무과원”에서 근무하다 2002년에 연변림업국으로 근무지를 옮겼고 지난 2006년부터 지금까지 줄곧 장백산삼림공업집단 림업과학연구원 원장직을 맡아왔다.
현영남박사가 북동충하초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건 지난 2009년, 한국에서 열린 국제생명과학세미나에 참가하면서부터다.
“여러 나라 전문가들이 발표한 연구과제중에 동충하초에 관한 론문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일부 전문가들은 장백산에도 북동충하초가 난다는데 아직 발견은 못했다고 하더군요.”
순간 아무도 하지 않았던 도전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번쩍 들더란다.
귀국후 그는 곧바로 동충하초 관련서적 정리, 연구에 달라붙었다.
“산속에서 동충하초에 미쳐 살았습니다. 다들 불가능하다고 랭담한 반응이였고 실성한 사람 취급을 받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무조건 찾고야 말겠다”는 무서운 집념이 무색하리만치 아무리 생태학을 전공한 현영남박사라지만 장백산에서 동충하초를 채취한다는건 하늘의 별따기였다.
장백산은 자연환경이 복잡, 다양하고 식물종류가 많은데다가 동충하초가 워낙 작고 눈에 잘 뜨이지 않아 지척에 두고도 그냥 지나칠수 있었다.
맨손으로 흙을 파헤치며 산과 흙에 묻혀 지낸지도 3년을 훌쩍 넘겼지만 동충화초는 숨박꼭질하듯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다.
되려 미친짓이라며 당장 포기하라는 주위사람들의 만류가 하루가 다르게 늘어났다.
그러나 그럴수록 그의 마음은 더 굳어져 갔고 동충하초에 대한 애착도 더 깊어갔다.
그는 “한번 마음 먹은것은 누구라도 꺾을수 없는 고집불통입니다”면서 “다들 수군댈 때도 창피함보다 오히려 의욕이 생겨나는걸 보면 내가 봐도 한마디로 참 미친놈입니다”라고 말한다.
2012년 7월의 어느날, 현영남박사는 예나 다름없이 또다시 희망을 품고 장백산을 찾았다. 그는 동충하초를 채집하려는 결심을 내린후로부터 단 하루도 마음 편히 쉬여본적도 없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날, 6시간 내내 쉬지 않고 산을 헤매고 다니다 밀려오는 실망감과 피로에 풀숲에 드러누웠다가 몸을 일으키려는 찰나, 불과 2메터 떨어진 곳에서 그는 금빛색을 머금은 동충하초와 마주했다.
그 순간 숨이 멎을번했다.일망무제한 사막에서 황홀한 신기루를 발견한 기분이였다. 환성이 저절로 나왔다.금새 눈물이 흘러 내렸다.
“그 기쁨을 이루다 말로 표현 못합니다.”
그때 희열이 아직도 가슴 한켠에 고스란히 남아있다는 그다.
워낙 귀한 약재다보니 그는 많은 사람들이 쉽게 구해먹을수 있도록 북동충하초 인공재배에 달라붙었다. 그리고 7번의 실패를 거듭한 끝에 얼마전 인공재배에 성공하고 현재 생산에 들어갔다.
“북동충하초는 인공재배로 무한한 개발가능성이 있습니다. 아무래도 난 동충하초에 미쳤나 봅니다”
오늘도 연구실에서 나올념을 하지 않는 현영남박사이다.
글 ·사지 신연희 기자
연변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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