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양=연합뉴스) 조계창 특파원 = 1963년 2월24일 일본 나가노(長野)현 가루이자와(輕井澤)에서 열린 제56회 세계빙속선수권대회에서는 이변이 일어났다. 1천500m 종목에서 소련과 스웨덴, 노르웨이 등 쟁쟁한 유럽 선수들을 제치고 동양인이 우승을 차지하는 일대 사건이 벌어졌던 것.
동양인으로는 처음으로 '세계빙속의 벽'을 무너뜨린 주인공은 바로 중국 대표선수로 출전했던 재중동포 라치환(羅致煥.67)씨였다.
한민족으로서 세계무대를 첫 제패한 라씨의 존재는 우리에게는 낯선 역사일뿐이다. 배기태 선수가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1987년 네덜란드 세계빙속선수권대회 500m종목 우승을 차지했을 때도 24년이나 먼저 세계 정상에 오른 라씨를 기억하는 사람은 없었다.
지금은 하얼빈(哈爾賓)체육학원 구내의 낡은 아파트에서 여생을 보내고 있는 라씨에게서 과거의 화려함을 찾아보기는 어려웠다. 100㎡ 남짓한 그리 넓지 않은 아파트, 소박하게 장식된 응접실 벽면을 채운 상장과 상패, 사진만이 화려했던 그의 과거를 말해주는 물증들이었다.
헤이룽장(黑龍江)성 하이룬(海倫)에서 태어난 라씨는 중학교에 입학하면서 빙상에 입문했다. 1학년 학생이었지만 3학년 학생도 넘보지 못할 만큼 금방 천부적 소질을 나타냈다.
1957년 치치하얼(齊齊哈爾)체육학원에 입학, 빙상 선수로서 본격 훈련에 돌입한 그는 1959년 하얼빈에서 열린 제1회 전국대회 빙속 1천500m에서 2위를 차지, 이듬해 2월 오성홍기를 달고 스위스 다보스에서 열린 세계빙상선수권대회에 참가하게 된다.
당시 19세였던 라씨에게 세계의 벽은 높기만 했다. 500m 15위, 1천500m 29위, 5천m 22위라는 초라한 성적으로 혹독한 세계무대 신고식을 치러야 했다. 하지만 절치부심한 그는 62년 2월 모스크바 세계선수권대회에서 500m 5위와 1천500m 4위 등을 기록, 48명 참가 선수 가운데 개인종합 6위를 차지하는 기염을 토하면서 세계 수준과 격차를 좁혔다.
63년은 빙상선수로서 화려한 전성기를 맞은 해였다. 그해 2월 일본 나가노현 가루이자와에서 개최된 세계대회에서 노르웨이 선수를 따돌리고 1천500m에서 마침내 1위에 오르는 감격을 맛봤다. 같은 대회에서 500m와 5천m에서도 각각 2위로 결승 테이프를 끊어 일약 세계 빙상계의 기린아로 떠올랐다.
유럽 선수들의 독무대였던 세계대회에서 동양인으로서는 최초로, 게다가 조선인 출신의 라씨가 우승했다는 사실은 일본인에게도 커다란 놀라움을 안겨줬다. 지금도 가루이자와에 가면 당시 우승자들의 이름을 새긴 기념비에서 그의 이름을 찾아볼 수 있다.
라씨는 자신이 우승을 차지한 직후 축하선물로 사과상자를 들고 숙소까지 찾아왔던 재일동포들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라씨는 16일 연합뉴스와 인터뷰에서 "당시 신문에서 제 기사를 보고 찾아온 분들이 '왜 조선사람이 중국을 대표해서 나왔느냐'고 물었지만 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고 털어놓았다.
그의 회고에 따르면 중국 빙상계는 한때 재중동포들이 주도했다. 정홍도, 임세준, 박달화 등이 50년대 중국 빙상계를 주름잡았던 인물들이었고, 60년대 들어서도 60년 대회에 자신과 함께 출전한 이태권씨(현재 작고), 61년 대회(노르웨이 오슬로)에 참가한 김미옥과 최순자 선수와 이창섭 코치 등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하지만 동양인 첫 세계빙상대회 우승이라는 타이틀도 문화대혁명의 광풍에서 그를 보호해주지 못했다. 핀란드 세계대회에서 한때 같은 빙상팀에서 활동하다 북한으로 건너간 뒤 북한 대표로 출전한 과거의 동료선수를 접촉했다는 사실이 뒤늦게 트집을 잡혀 고초를 겪기도 했다.
그는 중국이 개혁개방으로 들어선 후에야 제대로 평가를 받기 시작했다. 1984년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35주년을 맞아 '가장 걸출한 운동원'으로 선정됐고 1988년에는 '신중국체육개척자'라는 칭호를 받았다. 그리고 1994년에는 건국 45주년을 맞아 '45명의 영웅'으로 뽑히기도 했다.
하지만 라씨는 1997년에는 심근경색으로 목숨을 잃을 뻔한 고비를 겪기도 했다. 막대한 치료비 때문에 금으로 된 세계대회 우승메달까지 팔려고 생각했지만 안타까운 사연을 전해들은 과거 동료와 체육계 인사 등의 도움으로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 건강을 회복한 그는 1998년 35년 만에 다시 나가노를 방문, 동계올림픽 성화주자로 참가했다.
그는 1985년부터 1996년까지 중국 국가대표팀 코치로 활동하던 기간 한국의 빙상코치 및 선수들과도 인연을 쌓았다. 국제대회에서 만난 한국 대표팀 코치 및 선수와 찍은 기념사진을 아직도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었다.
라씨는 비록 빙상선수 출신이었지만 이번 베이징(北京)올림픽 한국 대 쿠바의 야구 결승전 장면을 지켜보면서 깊은 감동을 받았다고 했다.
그는 "한국이 이겨야 된다는 생각에 내내 긴장 속에서 경기를 지켜봤는 데 마지막에 가서 이기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며 "너무나 반가워서 박수를 치고 그랬던 것은 내 몸에 흐르고 있는 피가 조선 사람의 피라서 그런 게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phillife@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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