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중국 경계서 찾아온 ‘거장’ 장률 감독
재중동포 감독인 장률(46)의 영화 ‘중경’과 ‘이리’는 난다 긴다하는 수십억, 수백억짜리 상업영화의 틈바구니에서 결국 1만명의 관객도 얻지 못했다. 올해 한국영화산업의 각종 지표에는 어떠한 자취도 남기지 못하고 사라질 운명이다. 하지만 과연 훗날 어떤 작품이 당대와 삶의 기록으로서, 그것에 대한 반성과 성찰로서 평가를 받을까 하는 질문을 던진다면, 박스오피스를 장식한 쟁쟁한 이름들이 그 대답이 되리라고는 누구도 장담하지 못할 것이다.
영화사 속 많은 거장의 이름들이 그랬듯이 장률 감독의 영화는 이렇듯 현재 시제로는 상업적으로 불우한 작품임이 틀림없다. 그의 영화는 미래시제의 어떤 가치를 기준으로 봤을 때 재미와 의미가 재발견되는 예술영화의 ‘저주받은’ 운명을 타고났는지도 모른다. 그가 언제 500만, 1000만 관객의 영화를 들고 나올지는 아무도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지금까지는 말이다.
이렇듯 장률은 여전히 한국영화계 주류에서 낯선 이름이고 이방인의 이름이며 타자의 이름이다. 중국 태생의 한국인으로 그는 한국영화 뿐 아니라 중국영화에도 속하지 않은 경계인이기도 하다. 일찌감치 중국으로 건너간 조부의 대를 이은 재중동포 3세로 조부는 일본인에게 맞아 돌아가시고, 아버지는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그의 영화는 기존 상업영화와는 전혀 다른 길을 걸으며 독창적인 시선과 삶의 궤적을 보여준다. 국내에서 그의 영화를 본 관객이 채 1만명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고려할 때 영화제 경력은 그의 영화가 담은 미학적 가치를 증명하는 유일한 객관적 지표가 될 것이다. 서른 아홉살에 늦깎이로 영화를 시작한 그는 생애 첫 영화인 ‘11살’로 베니스영화제 단편 경쟁 부문에 초청되면서 화려한 영화제 순례를 시작했다.
장편데뷔작 ‘당시’(2003)는 로카르노, 밴쿠버, 런던, 홍콩, 그리고 전주영화제에서 상영되었으며 2004년 부산국제영화제 PPP 프로젝트였던 ‘망종’(2005)은 칸영화제 감독주간에서 상영됐다. 3번째 영화 ‘경계’로는 드디어 세계 3대 영화제인 베를린영화제 경쟁부문 레드카펫을 밟았다. 이 작품은 이탈리아 페사로영화제 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중경’과 ‘이리’는 일종의 연작이자 장 감독의 4, 5번째 작품. 윤진서와 엄태웅이 주연한 ‘이리’는 최근 열린 로마국제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돼 상영됐다.
“영화제 큰 놈들은 비슷비슷해요. 큰 백화점 같죠. 작은 영화제는 작은 가게처럼 개성있고 재미있죠. ‘돈 냄새’도 안 나고. 로마영화제에서는 ‘이리’ 상영일에 로마 역사상 가장 큰 비가 내렸어요. 교통이 중단되고 전기가 끊겨서 저도 극장에 못 갈 뻔했어요. 할리우드 스타들도 와서는 레드카펫 행사도 못했어요. 내 영화가 슬픈 영화니까 그렇게 큰 눈물이 내렸나, 하하”
최근 한국을 찾았던 장률 감독은 이창동 감독과 내기한 일화를 털어놓기도 했다. 이창동 감독이 장 감독에게 “당신은 절대로 대중영화를 못 만든다”고 하자 장 감독이 “만약 내가 500만 드는 작품을 만들면 형이라고 불러라”고 했다는 것이다. 소설가 출신으로 같은 길을 걷고 있는 이창동 감독과는 10년 이상 우정을 나눠오고 있는 사이. 한국에 올 때 가끔 이창동 감독의 집에서 묵기도 할 정도로 막역한 사이다.
장 감독은 말끝에 “내기도 젊었을 때 얘기지, 나이 들고 나면 다 부질없는 일”이라고 덧붙였다. 사실 장 감독이 영화에 발을 들여 놓은 것도 30대 호기로운 선언과 내기가 발단이었다. 소설가이자 중문학 교수(옌벤대학)였던 장 감독은 친구인 TV 드라마 감독으로부터 시나리오를 부탁받았다. 그런데 장 감독이 쓴 시나리오가 중국 당국의 검열에서 문제가 됐고, 친구는 "검열용 대본을 따로 만들고, 영화는 원안대로 촬영하자"며 설득했다. 그런데 친구는 약속과 다르게 장 감독이 다시 써 준 검열용 대본으로 영화를 찍었다. 장 감독은 크게 화를 냈고 술자리에서 홧김에 "내가 찍겠다"고 호언장담을 했다. 그 이튿날 쓰린 속을 달래면서도 취중 한 마디가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고, 내친김에 촬영한 작품이 단편 데뷔작 ‘11살’이었던 것이다.
장 감독은 실제로 만나면 여간 유쾌하고 유머러스한 사람이 아니다. 한국어가 완전히 입에 익지도 않았는데도 선문답같은 농담과 능청으로 좌중을 웃기면서도 무릎을 탁 치게 한다. 하지만 그의 영화는 그의 말대로 “슬프다”. 비극이 전염병처럼 감염된 일상과 늘 뭔가를 해야 하고 찾아야 하는 가난한 인물들을 보여주면서 과연 삶을 지탱하도록 하는 것은 무엇인지 집요하게 물어본다. 언뜻 보면 우울하고 어두우며 무거운 영화다. 과연 희망은 어디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사람들은 외롭고 단절돼 있으며 결국은 소통에 실패한다. 힘겹게 이어지는 관계조차 지속될수록 타락하고 더럽혀진다.
“내 눈에는 세상이 우울하고 비극적인 일들로 꽉 차 있어요. 숨겨진 것들의 뚜껑을 열어보면 영화보다 더 심하죠. 감추면 결국 곪기 마련이에요. 드러내고 익숙해져야 삶을 견딜 수 있습니다. 그래도 내가 사람들 앞에서 웃는 건 어머니 말씀때문이에요. 아무리 기분이 나쁘고 우울해도 사람들을 대할 때는 웃는 얼굴로 기분좋게 대하라고 어렸을 때부터 그러셨거든요.”
‘중경’은 외국인들에게 북경어 강습을 하며 살아가고 있는 젊은 여인 쑤이(궈커위)를 중심으로 연로한 그녀의 아버지, 그녀와 부정한 관계를 맺는 경찰(허궈펑), 중국 체류 중인 중년의 한국인 남성 등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다. 급속하게 현대화된 중국의 대도시를 배경으로 육체적인 욕망과 물질적인 이해가 충돌하는 다양한 인물들을 통해 파괴되고 해체돼가는 삶을 그렸다.
‘중경’과 쌍을 이루는 연작 ‘이리’는 1977년 일어나 한국사회를 흔들었던 이리역 폭발사건 30년 후의 이야기다. 사고 당시 어머니의 뱃 속에서 폭발의 진동을 받고 태어난 젊은 여인 진서(윤진서 분)와 택시기사를 하면서 그를 보살피면서 사는 친오빠 태웅(엄태웅 분)의 이야기를 그렸다. 두 남녀는 가난하고 외로운 삶들이 비극적인 일상을 영위해가는 익산의 한 아파트 주변 경로당과 중국어학원 등을 전전하면서 살아간다. 여기에는 30년전으로부터 비롯된 비극의 파장이 여전히 계속되고 있고, 사람들은 숙명처럼 죽음의 냄새를 맡으면서 살아간다.
“‘중경’은 격정적인 중국을 상징하는 도시이자 터지기 직전의 공간이라면 ‘이리’는 폭발 이후의 폐허죠. 중경이나 이리는 뉴욕도 될 수 있고 서울도 될 수 있고, 세계 어느 곳이나 될 수 있어요. 사람들은 여전히 아파하고 상처하고 어느 시대든 아름다움은 찾아 볼 길 없습니다.”
장 감독의 영화는 절망적이고 비극적인 세계관을 담고 있지만 그 속에서 지탱되는 삶을 그려내는 예술은 존재 자체로 위안과 희망이기도 하다. “규정짓고 단언하고 가두고 잘라내는 것은 정치고 폭력이지만 잘려진 것들을 이어붙이면서 위안을 주고 희망을 주는 것이 예술”이라고 장 감독은 말한다.
‘중경’과 ‘이리’에서는 파격적이고 노골적인 ‘성’(性)적 묘사와 행위가 반복적으로 등장하는데, 이는 도시 속에서 황폐화된 삶과 단절된 관계, 육체적이고 물질적인 욕망을 상징한다.
“사람 사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이 밥먹고 옷입고 섹스하는 것 아닙니까. 이를 피하거나 왜곡하면 안되고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담아야 합니다. 섹스는 사랑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폭력과 권력이 지배하는 관계가 되기도 하죠. 사실 인간사회의 어두운 요소들은 성에 다 담겨 있기도 합니다. 이번 작품들에서와는 다르게 전작인 ‘경계’에는 원초적이어서 아름다운 결합으로서의 성이 그려집니다.”
장률 감독은 이른바 전문배우들의 인위적인 연기를 별로 선호하지 않는다. “영화 취향은 다 다르지만 연기는 지금 당장은 관객의 눈을 속일 수 있지만 시대가 지나가면 가짜가 다 탄로나게 돼 있다”며 “브레송 감독은 배우들로 하여금 절대로 인위적인 표현을 하지 못하게 했다”고 말했다. ‘이리’에서는 스타배우인 엄태웅과 윤진서가 주연을 맡았는데, 윤진서는 영화잡지에서 사진을 보고 캐스팅을 하게 됐다. “돈은 거의 못 준다”고 했지만 두 배우 모두 출연에 적극적이었다.
마지막으로 “당신의 영화에는 왜 희망이 없느냐”는 질문에 장 감독은 “희망을 삶에서 찾아야지 왜 영화에서 찾느냐”고 대꾸했다. 그의 영화가 담은 깊은 절망이, 깊은 절망의 응시가 희망의 근거라는 사실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우문현답이다. ‘중경’과 ‘이리’는 장률이라는 경계인이자 이방인이 길어올린, 희망보다 더 희망적인 절망의 성찰이다.
헤럴드경제 이형석 기자(suk@herald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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