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의 말]: 중국조선족문단의 원로소설가 류원무선생이 현재 병환으로 중태에 빠져 병원에 입원중이다.현재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는 상황이며 친인척들이 다 모여 병구환을 하고 있다. 본사이트는 연변라디오TV 채선애기자의 글을 올려 선생의 문학인생을 조명해본다.-조글로미디어
《장백의 소년》,《숲속의 우등불》,《다시 찾은 고향》,《봄물》,《아리랑 열두고개》 등 많은 장,중,단편소설들을 발표하여 전국소수민족문학상을 비롯한 묵직한 영예들을 무더기로 따낸 류원무선생은 중국조선족문단의 저명한 원로소설가의 한분이다. 일전에 제2회 《김학철문학상》시상식에 취재를 다녀오면서 류원무선생이 중병으로 치료를 받고있는 상황이지만 멀리 호북성에서 사업하고있는 아들 류청이 고향의 문화사업을 위해 좋은 일을 하도록 다리를 놓아주었다는 소식을 듣고 기자는 선생을 한번 꼭 만나뵙고싶어 댁으로 찾아갔다.
병상에서 기자를 반겨주면서 《나 간암에 걸렸다우.》라고 하시는 선생은 상상밖으로 얼굴색이 창백하고 몸이 수척해있었으며 오래 앉아계시기도 지어 말씀을 많이 하시기도 힘들어하셨지만 기꺼이 취재를 접수하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들려주셨다.아래에 그 이야기들을 적어본다.
책과 맺은 인연
류원무선생은 1935년 1월 22일(음력 1934년 12월 18일) 조선 함경남도 신흥군 동고촌면 인흥리에서 부친 류문언,모친 신한순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여났고 1941년 2월 부모님들이 두만강을 건너 흑룡강성 녕안현 산골의 한족마을 진가툰으로 이주해온후 5리 상거한 무성촌소학교에 다녔다.
소학교 4학년때에 광복을 맞으면서 실학당했던 선생은 1년 반이 지난 1947년 2월에 가서야 로동촌(진가툰)민반소학교 5학년에 들어가 공부를 계속할수 있었다.
1949년 3월 녕안현조선족중학교에 입학한 선생은 그해 초겨울의 어느날 점심시간에 서점에 들렸다가 우연하게 조선의 이름난 시인 조기천의 시집 《백두산》을 발견하였다.그런데 호기심으로 책가위를 번지고보니 첫머리부터 호방한 시구들이 련해련방 눈에 안겨올줄이야?! 책을 사지 않고서는 견딜수가 없게 된 선생은 어머니가 학용품을 사라고 준 돈 50전으로 그 책을 사고야말았다.
그날 하학한후 20리 산길을 걸어 집에 도착하고보니 벌써 캄캄칠야였지만 선생은 늦은 저녁식사를 마치기 바쁘게 희미한 등잔불아래에서 난생 처음으로 산 책을 읽어내려갔다.
두툼한 장편서사시를 단숨에 다 읽고나서 《세상에 어쩌면 이렇게 좋은 책이 있을수 있을가?조기천이란 도대체 어떤 사람일가?》라는 생각으로 잠을 이루지 못하던 선생은 앞으로 조기천과 같은 시인이 되여볼것을 다짐했다.
《백두산》을 읽으면서 책에 재미를 붙인 선생은 좋은 책을 찾아 서점에 자주 드나들었지만 그때만 해도 해방전쟁시기여서 볼만한 책이 별로 없었다. 그리하여 선생은 《동북조선인민보》(지금의 《연변일보》)에 번역련재되는 공궐,원정 공저의 장편소설 《신아녀영웅전》을 읽기 시작했는데 점차 소설속에 깊이 빠져들어가 한 학급에 한부밖에 배달되지 않는 신문을 매일마다 눈이 빠지게 기다렸고 첫사람으로 잡아채여 읽고나서야 시름을 놓았다.처음으로 장편소설을 접촉하면서 거기에 매료된 선생은 또 장차 그런 장편을 써보고싶어지는 마음을 달랠수 없었다.
1951년에 한족고중인 녕안현중학교에 진학, 1954년에 할빈외국어학원에 입학하여 로어공부를 하게 된 선생은 소원대로 작가가 되려면 그래도 조선어공부를 체계적으로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연변행을 결심했다.
그런데 연변대학 조선어학부에 전학하자고보니 당시 학제가 단과여서 본과공부를 제대로 할수 없는것이 문제였다.력사학부가 본과라는 말에 귀가 솔깃해진 선생은 력사를 배워두면 이후의 작가생활에 도움이 되겠다싶어 우선은 력사학과를 선택하였고 조선어학부가 본과로 된후에는 거기로 이적하였다.
연변대학에서 공부하면서 선생이 제일 흥취를 가진것은 책읽기였다. 연변대학도서관에서 처음으로 그렇게 많은 조선말책을 보게 된 선생은 고리끼의 《어머니》로부터 《뿌쉬낀선집》,《고향》,《황혼》… 닥치는대로 다 읽었다.어느새 책과 떨어질래야 떨어질수 없는 인연을 맺은 선생은 가정현편때문에 학업을 포기하고 연변대학 비서실에 취직한후 사업시간에도 짬만 있으면 소설책에 묻혀있었고 밤이면 11시,12시까지 시간가는줄 모르고 책을 읽었다.
그것이 계기가 되여 당시 교장으로 사업하시던 림민호동지가 하루종일 책과 씨름할수 있는 연변인민출판사에 보내주고…
책을 만드는 사람의 희로애락
책에 미쳐있다가 생각밖으로 책을 만드는 사람으로 되여 한어말문학작품번역사업에 종사하게 된 류원무선생은 번역을 잘하기 위해 책을 읽었고 또 번역을 하면서 글쓰기를 배웠다.
그러나 《류원무 역》으로 된 책자가 륙속 출판되여 가슴벅차오르는 기쁨을 만끽하면서도 선생은 《역》자가 《저》자로 찍혀있지 않는것이 못내 서운했다.번역이란 세계 각 민족간의 문화교류에 다리를 놓아주는 뜻있는 사업이지만 자기로서의 창조는 아니여서 어쩐지 남이 씹어놓은 떡을 받아씹는 느낌이 들었기때문이였다.
《백두산》을 읽을 때의 그 정열이 시도때도 없이 몸을 달구어 세상에 없는것을 창조하면서 자아가치를 실현하고싶었던 선생은 1957년 여름에 첫 작품으로 동요 《다음에 놀자》를 써서 《소년아동》잡지에 투고하였다.비록 편집부에 의해 제목이 고쳐졌지만 처녀작을 발표했다는 기쁨이 커서 이듬해에는 서정시 《념원》을 써서 종합시집 《청춘의 노래》에 투고하였다. 그런데 17련으로 쓴 시가 편집의 손에서 달랑 2련만 남은것을 보고는 실망과 창피와 분노를 금할길 없었다.
시적천부가 없다는것을 인정하게 된 선생은 상실감으로 인한 눈물을 씻고 《시가 안되면 소설을 쓰자. 그까짓 손바닥만한 시를 쓸거면 두툼한 장편소설을 써서 세상을 놀래우자!》라고 마음을 다잡았다.
이때로부터 선생은 번역사업을 열심히 하는 한편 장편소설집필에 착수, 제목을 《도도히 흐르는 목단강》이라고 달아놓고 밤을 패가며 장장 2년동안에 무려 30여만자나 썼다. 그런데 초고를 쓸 때까지만도 세상에 그렇게 멋진 소설이 없을것 같더니 정작 완성하고보니 너무도 한심했다. 해방전쟁이나 토지개혁에 참가하지도 못하고 그런 소재의 장편을 시작했으니 그럴법도 했다.
사회생활을 몰라 첫 대작이 실패했다고 한탄하던중 1961년 초봄에 농촌하방(下放)단련기회를 잡게 된 선생은 안도현 복흥향 도흥촌에 내려가 한해농사를 지으면서 생활체험을 하는 한편 새로운 장편대작을 구상했다.
그리하여 출판사에 돌아온후 지식인들의 사상개조를 주선으로 《시련속에서》라는 장편소설을 쓰기 시작했는데 꼬박 1년동안 40여만자를 내리쓰고보니 도무지 마무리를 지을수 없었다.행여나 해서 《림꺽정》,《창업사》,《개간된 처녀지》,《석개울의 새봄》 등을 거듭 읽으며 2년동안이나 고쳐써보아도 여전히 매듭을 풀지 못한 선생은 아쉬운대로 원고뭉테기를 궤속에 처넣는수밖에 없었다.
(과연 이 세상에 태여나서 이름 한번 날리지 못하고 남이 씹어놓은 떡을 받아씹는 번역일군으로 한생을 보내야 하는건가?)
어느 정도 회의를 느낀 선생은 허무감을 달래보려고 모지름을 썼고 마침내는 한번 먹은 마음 꺾지 말고 글을 써서 꼭 성공을 안아올 결심을 확고히 하게 되였다.
이렇게 필을 댄것이 어린 시절의 생활을 바탕으로 해방전쟁의 폭풍우속에서 자라난 소년영웅의 형상을 부각한 소설 《붉은 별》이였다. 거의 10년간 아동독물편집실에서 아동소설번역을 해온 보람인지 글이 생각대로 잘 내려가서 별로 힘들이지 않고 10여만자의 원고를 마무리했지만 가석하게도 문화대혁명이 터지는바람에 선생의 작가꿈은 재차 무산되고말았다.
문학창작의 아리랑고개
4인무리가 꺼꾸러진후에야 다시 필을 들기 시작한 류원무선생이 진정 창작의 단맛을 체험하게 된것은 1980년에 장편소설 《장백의 소년》과 탐정소설 《숲속의 우등불》을 내놓으면서부터였다.
한해사이에 책 두권을 펴내고 그중 《장백의 소년》이 제1차 전국소수민족문학상을 따낸 덕분에 중국작가협회 문학강습소에 연수를 다녀오고 연변작가협회 창작실에 전직작가로 전근된 선생은 더욱 불타는 정열로 창작에 투신하였다.따라서 선생이 근 30년간 루적해온 소재들과 주위에서 발생된 사소한 이야기들이 정채로운 문학작품으로 탈바꿈되여 독자들과 대면하게 되였다.
1982년 10월 연변조선족자치주 창립 30돐 헌례작품평의에서 우수상을 따낸 단편소설 《비단이불》은 아들을 항미원조전쟁에서 잃은 할아버지 한분이 아들의 무휼금으로 비단이불을 해놓고 간부들이 하향을 내려오면 그 이불을 덮어준다는 1950년대초의 신문기사를 소재로 한 문학작품이다.어느때부터 그 내용으로 소설을 만들어볼 구상을 했지만 맞갖지 않아 손을 대지 못하고있던 선생은 30년이 지난 1982년에 와서 이 소재를 반복적으로 음미하던중 그 할아버지가 인민공사시대에는 어떻게 처사했을가,또 개혁개방시대에 와서는 어떤 변화를 가져왔을가 하는 상상을 해보았고 그 곡선에 따라 1인칭 단편소설 《비단이불》을 창작하였다.
《비단이불》이 30년전에 읽은 짤막한 신문기사를 소재로 발굴해낸 작품이라면 제2차전국소수민족문학상을 수상한 중편소설 《우리 선생님》은 사모님과의 교류를 통해 얻은 소재를 전개시킨것이라고 한다.
선생의 회억에 따르면 연길시태평소학교에서 교편을 잡고있는 사모님이 어느날 저녁 집에 돌아와서 낮에 참 재미있는 일이 있었다고 말했다.알고보니 그날 사모님이 담임을 맡은 학급에서 주제반회를 열고 리상에 대해 담론하게 되였는데 여느 애들은 장차 과학자가 되겠다,작가가 되겠다고 하는데 애꾸러기남학생 하나만은 《나는 사람이 되겠습니다.》라고 발언하여 폭소를 자아냈다는것이였다. 말썽을 자주 일으키는 그 학생이 어머니로부터 《언제 사람구실을 하겠는가?》하는 푸념을 귀에 못이 박일 정도로 들어왔다는 사모님의 이야기를 들으며 선생은 부지중 이 소재를 주선으로 애꾸러기학생을 참된 인간으로 키우기 위해 아글타글하는 인민교원의 형상을 그린 작품을 만들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이리하여 소년아동들은 물론 교원들과 학부모들까지 즐겨 읽는 중편소설 《우리 선생님》이 세상에 나오게 되였다.
전국우수소선대보도원으로 이름을 날린 화룡시의 오원호를 취재하면서 선생은 인민공사시기 서성진 명암촌의 한 청년이 빚이 많다는 리유로 식량분배시 잡곡만 타게 되자 병환으로 누워계시는 아버지를 위해 탈곡장의 벼마대를 집으로 메여갔고 그때문에 감옥살이를 했었다는 말을 들었다.이것이 훌륭한 소설감이 되겠다고 생각한 선생은 당사자를 직접 찾아가 대화를 나누면서 창작에 도움이 될만한 에피소드를 주어모았다.이리하여 감옥에서 공을 세워 기한전에 석방되고 마을에 돌아온후에는 용감하게 인민공사에서 퇴출한후 자기의 힘으로 황무지를 개간하고 묵여두고있는 약진논을 다루어 풍작을 안아오며 개혁개방에서 앞장을 서는 주인공 리억석의 형상을 창조한 장편소설 《봄물》을 펴내게 되였는데 이 작품은 제1차 연변작가협회 장중편소설문학상을 탔다.
근 10년간 거의 한해에 한책꼴로 창작품을 내놓으면서 문학작품창작의 전성기를 화려하게 장식해가던 선생은 1989년말에 장편소설 《아리랑 열두고개》를 탈고하고나서 재차 암초에 부딪치게 되였다.
그때따라 가정에까지 변고가 생겨 선생은 꼬박 615일간 악전고투하면서 완성한 《아리랑 열두고개》가 출판되면 면목도 서게 되고 원고료가 생겨 바쁜목이라도 열수 있겠다고 기대를 많이 했다.그러나 상상외로 처음에는 계획에 든 다른 장편때문에,나중에는 출판사의 재정난과 체제개혁때문에 소원성취하지 못하고 원고가 집으로 되돌아오고말았다.
한동안 절망과 허탈속에서 몸부림치던 선생은 모든 고통을 잊어볼 속셈으로 손에서 필을 놓지 않았다. 행운이라 할가 단편소설 《강건너 바다 건너》가 한국에서 상을 받으면서 한국땅을 밟을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고 조금씩이나마 가정경제난에서 해탈될수 있었으며 21세기초에는 《아리랑 열두고개》도 탈고한지 12년만에 해볕을 보게 되였다.
영원한 청춘
소년시절부터 작가의 꿈을 키워온 류원무선생은 연변인민출판사에서 번역,편집사업에 종사하면서 26년간 《쇼헤마의 이야기》,《오색찬란한 길》 등 20여부의 단행본을 출판,무려 300만여자의 문학작품을 번역해냈고 1957년에 동요 《다음에 놀자》를 발표하면서부터 근 반세기동안 장편실화소설 《나도 사람》, 중편소설 《부중대장과 그의 벗들》,단편소설 《로할아버지와 장죽》,장편동화 《코대황제와 울보황후》,《신동 꾀돌이전기》, 중국조선족시리즈 《우리는 누구》를 비롯해서 무려 500여만자의 글을 써냈다.
이런 성과로 선생은 전국소수민족문학상, 진달래문학상을 비롯한 많은 영예를 따내고 국가신문출판서와 중국출판사업일군협회로부터 영예증서를 수여받았으며 길림성정협위원,주정협 상무위원으로 추대되고 제5차 전국작가대회에 참석하였으며 자치주창립 40돐경축활동에서는 우수작가로 표창을 받고 연변작가협회 성립 40돐을 경축하는 활동에서는 공로자상패를 수여받았다.
퇴직휴양한후에도 식을줄 모르는 창작열정으로 여러가지 형식의 문학작품을 줄기차게 내놓고 책자를 부지런히 펴내던 선생은 금년 4월에 연변작가협회에서 조직한 신체검사에서 페암으로 진단받고 연변병원에서 수술치료를 받았으며 얼마전에는 종양세포가 간으로 전이되여 또다시 몸져누우셨다.
그럼에도 정신력만은 잃지 않은 선생은 많은 시간을 침대에 누워계시는 형편이지만 완강한 의력으로 병마와 싸우는 한편 이따금 떠오르는 령감들을 적어두면서 창작생명을 최대한 연장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있다.
안해사랑 자식사랑
류원무선생은 1957년에 흑룡강성 녕안현 강서촌에서 계부,계모밑에서 자란 최금순과 결혼하여 딸 둘과 아들 하나를 낳아키우며 50년을 금슬좋게 살아왔다.
젊은 시절에 선생은 선후로 2년이나 농촌에 내려가있고 반년간 사상개조로 5.7간부학교에 내려가있은외 쩍하면 생활체험이나 취재때문에 출장을 떠나고 집에 있어도 밤을 패며 글을 쓰느라 교원으로 일하는 사모님을 많이 고생시켰다.
이를 가슴아프게 생각한 선생은 60고개를 넘은후에도 한국땅을 넘나들며 가정생활난을 풀어가기 위해 로심초사하였고 사모님이 위암으로 진단받고 치료를 받은 1년기간에는 2006년에 세상뜨기전까지 환자간호를 도맡고 안팎으로 분주히 보냈다.병이 위중한 사모님이 식욕이 떨어져 식사를 제대로 못하게 되자 선생은 또 랭면을 좋아하는 사모님을 위해 거의 매일마다 식당에 가서 시원한 랭면을 사다가 대접했다고 한다.
자식교양에서 선생은 언제나 높은 요구를 제기하면서 다른 사람을 배려할줄 알고 좋은 일을 많이 하도록 인도해주는 한편 생활면에서는 묵은밥 한끼 먹일세라 자상하게 보살펴주셨다.
쾌활한 성격때문일가 아니면 장기간 소년아동들을 위한 문학작품을 다루어서일가 선생은 자식들을 많이 사랑해주고 시간만 있으면 함께 놀아주기도 하면서 친구처럼 지내왔다.아버지의 특수한 사랑에 습관된 자식들 또한 아버지를 무척 따르면서 연변농기공사에 근무하는 맏딸 류서향이나 연길시실험중학교 조선어문교원으로 사업하는 둘째딸 류서연이나를 막론하고 아버지와 속심을 터놓고 조언을 듣기를 좋아하며 막내인 아들 류청은 때론 아버지를 형이라 부르며 롱담을 건네기도 한다.
연변대학 중문학부를 졸업하고 한국에 가서 경제관리학을 전공한 아들 류청은 현재 호북성석화술업(石花酒 )공사의 집행총경리직을 맡고 활약을 펼쳐가고있다. 고향과 멀리 떨어져있지만 시시각각 고향의 발전에 관심을 돌리고있는 그는 기업의 명의로 문화사업에 투자를 하면서 고향을 위해 저그마한 기여라도 하지 못하는것을 안타까와하던중 구체대상선택을 아버지에게 부탁했다.
1956년에 연변인민출판사에 입사하여서부터 지금까지 50여년간 줄곧 문학작품번역창작사업을 해온 류원무선생은 살아생전에 연변의 문화사업을 위해 기념적의의가 있는 일을 하나라도 해놓는것이 소원이였던지라 아들에게 연변작가협회에서 문학상을 설치할수 있게끔 경제적으로 도움을 주는것이 좋겠다고 조언을 주었다.
결과 류청의 노력으로 호북성석화술업공사에서는 앞으로 6년간 해마다 연변작가협회에 10만원을 협찬할 계획을 내왔고 연변작가협회의 허룡석주석과 류원무선생이 지난 10월에 호북성에 가서 2년간의 계약을 체결하였다.
두번이나 사형선고를 받았음에도 태연자약하게 현실을 받아들이고 병상에 누워서도 의연히 문학을 위한 사업에 모든것을 다 바칠 각오가 되여있는 원로작가 류원무선생이 병세가 호전되고 차세대에게 보다 많은 정신유산을 물려주기를 기대해본다.
연변라디오TV 채선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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