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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중땅크》리영태- 전 중국공군 부사령
조글로미디어(ZOGLO) 2009년8월18일 09시27분    조회:78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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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중땅크》가 중국공군 부사령원이 되기까지
중국인민해방군 전임 공군부사령 리영태중장 만나본다

리영태 (李永泰) 프로필:
1928년 11월4일 출생,  길림성 통화현사람.
1945년 10월에 참군, 1946년 중국공산당 가입.
1949년 10월 공군 입대, 1950년 항공학교 졸업.
1951년에 항미원조전쟁에 참가,  공군 제4사 1대대 대대장 임직.
1951년 조선 철산전역에서 영용히 작전하여 《공중땅크》라는 별호 가짐.
항미원조전쟁중 미군 F-86형 비행기 4대 추락.
선후로 1, 2, 3 등공 세움,  조선정부에서 발급한 2급 해방독립훈장, 3급 국기훈장을 수여받음.
1955년 중남군구영웅모범대회에 참가, 《2급사업모범》으로 당선.
중국인민해방군 공군항공병 퇀장,  부사장,   사장,  부군장직 력임.
1975년 무한군구 공군사령원,1982년 중국인민해방군 공군 부사령원, 1988년 공군중장 칭호 수여받음.
1993년 12월 퇴직.
중국공산당 제10차, 12차 인민대표대회 대표, 제5, 7, 8, 9차 전국인대 대표, 제8, 9차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 전국인대 민족위원회 위원, 전국인대대표 자격심사위원회 위원.

81세의 장군할아버지 댁에서 취재

공화국 설립 60주년 , 중국인민해방군 건군 82주년의 특수한 시기를 즈음하여 기자일행은 북경에서 우리 민족의 자랑, 《공중땅크》라는 별호를 가지고있는 리영태장군을 만나볼 기회를 가졌다.

8.1절을 앞두고 여러 가지 행사, 모임이 빽빽이 배정된 가운데 리영태장군은 천리밖 고향에서 예약없이 찾아온 필자일행의 취재를 빠른 시간내에 배정해주어 우리는 더없이 감동되였다.

7월30일, 경계가 삼엄한 공군대원(空軍大院)을 가로지나 긴장되고 부푼 마음으로 장군댁에 도착하였을 때 리영태부부는 이미 옷을 단정히 받쳐입고 사탕,과일을 준비해놓고 에어콘까지 시원하게 켜놓고 우리를 기다리고있었다. 리영태장군은 군정계통에서 높은 자리에 계셨던 분이고 덕망이 높으신 분이지만 우리에게 주는 첫 인상은 분명 자상한 할아버지와 같았다.

81세고령이지만 일거일동에는 여전히 군인다운 정기가 흐르고 있었고 표정은 온화하면서 안정적이였다. 과거의 영웅사적을 얘기하노라니 81세 로인답지 않게 활력으로 충만되였고 사유 또한 명확하여 어제 발생한 일처럼 또렷이 이야기해주었다.

우리의 예상과는 달리 그가 1945년 10월, 17세에  참군하여 종사한 첫 일터가 공군이 아닌 통화현병원이였다. 한어, 일본어, 조선어에 능통하고 선천적으로 총명령리한 리영태는 병원에 온지 얼마 안되여 료동군구 후근부 위생부의 상사로 전근되였고 의약재과 담당회계사업을 떠맡게 되였다.

1946년―1947년의 《삼하강남, 사보림강》(三下江南,四保臨江) 전역중 약품수요가 급증하고 형세가 아주 긴급하였다. 당시 주요교통선이 국민당군에 의해 엄밀히 봉쇄되고 내지에 가서 의약구입을 할수 없는 정황하에 료동군구 후근부는 사람을 조선에 파견하여 약품을 구입하기로 했다. 3국어에 능통하고 세심한 리영태가 최적인선으로 선정되였다. 리영태는 상급의 중임을 떠맡고 여러차례 신의주, 평양, 원산 등지에서 약품구입을 하여 전선의 약품긴장상황을 대대적으로 완화하였고 상급 지도자들의 표창을 받았다. 탄피와 탄알이 쏟아지는 전장은 아니였지만 의약재가 초긴장한 그 시기 리영태는 전선 못지 않은 혁혁전공을 세웠다. 오늘도 그 시기를 회고하노라면 리영태는 여전히 감개무량해한다.

중국공군의 위용을 떨친 《공중땅크》의 기적

1951년 9월25일, 미군 전투기와 전투폭격기 도합 112대가 혼합공격진을 이루며 조선 신의주 상공으로 달려들었다. 리영태가 소속된 공4사가 이번 전투임무를 접수하였는데 선후로 아군의 114대의 비행기가 반격에 들어갔다.

리영태가 책임진 1대대는 6대의 비행기로 이번 전역의 제3제대로 편성되여 전선으로 날아갔다. 그러나 전투과정에 리영태는 점차 기타 편대와 련계를 잃게 되였고 고군작전의 경지에 빠졌다. 4대의 미군 F-86형 전투기는 리영태의 뒤를  쫓으며 공격을 들이댔고 포탄과 탄알이 우박처럼 쏟아졌다. 리영태의 비행기는 포탄과 탄알에 맞아 볼품없이 중상을 입었고 기능까지 상실하여 반공격을 할수가 없었다.

어떻게 하나 비행기를 보유하자는 생각으로 철거조치를 취하였는데 이때 뒤면에서 또 4대의F-86형 적기가 날아들어 공격을 들이댔다. 리영태의 비행기 미추부위(尾部)가 또다시 적탄에 맞고 검은 연기를 토했다. 《꼭 비행기를 몰고 돌아가야 한다.》리영태의 마음속에는 오직 한가지 신념뿐이였다. 리영태는 침착랭정하게 비행기를 조종하면서 적기와 반복적으로 선회하여 끝내 적기를 뿌리치고 기지로 돌아왔다. 리영태의 비행기는 30여발의 적군포탄에 맞아 기체,  기익,  오일 탱크,  발동기 등 도합 56곳에 중상을 입었다.

기지에 돌아온 후 쏘련우군은 상처투성이인 리영태의 비행기를 보면서 《이것이 어디 비행기인가, 분명 땅크다》고  하면서 감탄을 금치 못하였다. 《공중땅크》라는 명성은 바로 이렇게 얻어진것이다.

전투결속후 공군 지도자는 공4사에 전보를 보내 이번 전역을 높이 평가하면서 《리영태동지가 30여발의 적탄에 명중된 비행기를 안전하게 기지로 몰고온것에 대하여 특별히 표창한다》는 특별지시를 내렸다.

1951년 10월2일, 이번 전역이 결속된지 한달도 못되였을 때 모주석은 공4군의 전투정황회보를 듣고 매우 기뻐하시면서 이렇게 지시를 내렸다. 《공4사는 영용작전을 매우 잘했고 매우 기쁘다.  고무하는것은 정확한 선택이다. 장렬하게 희생된 유가족을 위안해주어야 한다.

항미원조전쟁―선후로 미군비행기 4대 격추

1952년 2월5일 , 이는 리영태의 일생에서 또 하나의 뜻깊은 하루였다.   이날 공4사 12단은 총 18대 비행기를 출동하여 10단 24대의 비행기를 호위하여 철산지구의 적기를 타격하였다. 리영태가 인솔한 1대대는 12단의 좌익대로 편성되여 참전하였다. 편대가 귀성 상공에서 적기와 맞부딪쳤을 때 우리군은 엄밀한 대형(隊型)과 적시적인 방비조치로 적기의 두차례 기습을 파탄시켰다.

리영태가 좌회전을 취했을 때 4대의 미군 F-86형 전투기가 우리 군퇀 인솔장 비행기뒤를 추격하고 있음을 발견하였다. 이때 리영태는 대오를 인솔하여 그중한 한 적기를 덥석 물었다. 적기는 련속 2차례의 하락회전을 취하며 기회를 봐 달아나려고 하였다. 리영태는 바로 이때다 하고 마력을 가해 적기를 뒤좇았다. 적기와의 거리가 약 400메터되는 위치에서 리영태는 단연히 사격하여 적기를 추락시켰다. 이는 리영태가 참전한 이래 처음으로 적기를 추락시킨것이였다.

1953년 7월7일, 조선정전협정이 판문점에서 정식 체결되고 중국인민지원군은 항미원조전쟁에서 대승리를 거두었다. 항미원조전쟁에서 리영태는 선후로 미군비행기 4대나 격추하여 이름을 날렸다. 전투중 리영태는 1등공 두차례, 2등공 1차례,  3등공 두차례를 세웠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정부에서 발급한 2급독립훈장, 3급국기훈장을 수여받았다.

평화년대에도 큰 공훈―중국공군 부사령이 되다


1990년 강택민주석을 배동해 서장으로 시찰가는 특별기안에서.

항미원조전쟁후 리영태는 점차 공군의 중급, 고급 지도자로 사업하면서 새 중국 공군건설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가 선후로 비행 퇀장, 부사장, 사장을 담임한 16년간 당시 공중장비인 각종 전투기, 격투기를 숙련하게 장악할수 있었고 4가지 기상을 비행할수 있는 전천후(全天候) 비행원이였다.

숙련된 비행기술과 뛰여난 지휘예술로 부대를 인솔하여 남정북전하고 조국의 령공을 보위하기 위해 주야로 순지하며 피땀을 뿌렸다. 전쟁에 참가한 경력이 있는 리영태는 시종 전투기술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부대의 군사훈련을 중요한 의사일정에 올려놓았다. 그는 공4사 12단의 단장으로 있는 기간 야간과 복잡한 기상중에서의 운전기술훈련을 틀어쥐고 공전 , 사격, 폭격 등 중점적인 전투기술훈련을 강화하였다.

1982년 11월, 54세의 리영태는 공군 부사령원으로 승임하고 주요하게 공군 작전, 후근과 특별기 보장사업을 책임지였다.

리영태는 미래 고기술조건하에서의 국부전쟁수요에 근거하여 작전사상, 작전방향, 작전지휘, 작전방식, 작전운용, 전쟁준비 등 면의 연구를 강화하였다.

1993년 65세의 리영태는 퇴직하고 48년의 군려생활에 종지부를 찍었다. 퇴직후 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 전국인민대표대회 민족위원회 위원,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대표심사위원으로 활약하면서 민의반영을 자기 직책으로 하였고 경상적으로 사업을 시찰하고 민정을 고찰하였다. 그는 선후로 20여개 의안을 인민대표대회에 제기하였는데 일부 의견과 건의는 이미 해당 부문에서 채납하였다. 또 중화민족단결진보협회 부회장, 중국―체스꼬슬로벤스꼬 우호소조 주석, 중국―말레이시아우호소조 부주석, 중국―한국우호소조 위원도 담임했다.

공화국 60년의 장군의 가장 깊은 체험, 《안정과 단결이 있어야 발전할수 있습니다》


리영태부부와 취재기자 합영(왼쪽 첫번째 인민넷 김홍화기자, 오른쪽 본사기자).

1945년 10월에 참군하여 오늘까지 리영태장군은 필생의 정력을 공화국의 공군사업에 바치셨다. 취재를 마감해서 리영태장군은 이렇게 의미심장하게 말씀하신다.

오늘의 행복은 무수한 렬사들의 생명으로 바꾸어온것이다. 내가 《공중땅크》라고 불리우고 오늘의 성과가 있기까지는 함께 분투하였던 전우들의 노력과 갈라놓을수 없다.

1927년 8.1남창봉기부터 오늘 공화국 창립 60주년에 이르기까지 정말 쉽지 않다는것을 알아야 한다.

56개 민족이 단결하여 조국을 더욱 잘 건설하고 4개 현대화와 경제건설을 위하여 힘을 이바지하여야 한다. 경제건설은 반드시 안정단결의 환경이 있어야 한다. 우리의 60년동안의 가장 깊은 체험이 바로 안정, 단결이 있어야 발전할수 있다는것이다.

《내 공로의 절반은 그대의것》, 장군이 말하는 행복한 가정의 중요성

취재중 리영태장군은 정원에서 일하고계시는 부인 김창신녀사를 특별히 소개해주시면서 《나의 공로 절반은  이분의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금년 결혼 60주년을 맞이하는 리영태부부는 천상배필이라고 할수 있으리만큼 지금도 다정다감하다. 김창신녀사는 상냥하고 친절한 분이였다. 그녀의 몸에서는 조선족녀성의 부드러움과 섬세함, 그리고 어딘가 감출수없는 강인함이 흐르고 있었다.

군인의 안해로, 특히 공군지도자의 안해로 김창신녀사는 당과 국가의 수요에 따라 남편을 따라 대중국을 남정북전하며 리영태의 사업을 묵묵히 지지해왔다. 김창신녀사는 군인에게 있어서 가정이 안정해야 뒤심이 든든하고 열심히 사업할수 있다고 하면서 가는 곳마다 군인 가족들의 안치사업에 힘을 이바지 하였다. 군인가족의 일자리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김창신은 석면기와공장을 세워 그들의 취직문제를 해결하였고 경상적으로 군인가족의 사상공작을 하면서 그들을 안정시키기에 노력하였다.

탁자우에 놓인 가족사진, 리영태부부는 사진속의 아들, 딸들, 손자, 손녀를 바라보며 행복감에 사로잡힌다. 2남2녀를 혼자서 키우다싶이 한 김창신녀사에게 리영태는 지금도 감격해한다.

취재후 기자일행은 김창신녀사의 안내를 받으며 정원구경을 하였다. 정원에 있는 복숭아, 배, 대추나무마다 주렁주렁 열매를 맺었고 남새밭은 풀 한포기 없이 깨끗이 정리되여있었다. 김창신녀사는 기자의 손을 잡으며 여기저기 상세히 설명해주었고 돌아올 때 복숭아며 밭에 달린 남새를 듬뿍 담아주었다.   리영태장군은 멀리서 이 정경을 흐뭇하게 지켜고있었다. 취재중에서도 희생된 전우에 대한 그리움, 오늘의 행복을 누리지 못한 렬사들에 대한 추모로 가슴아파하고 눈시울을 붉히던 장군님, 81세 고령이지만 아직도  인민을 위하여 뭔가 더 기여하고싶어하고 조국의 창공을 시종 마음에 담아둔 장군님, 그 모습이 무한대로 확대되여 더욱 거룩해 보인다.

길림신문 장춘영  김홍화(인민넷)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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