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길신 오기활기자 03-05 ] 3월 5일은 연변조선족자치주 창립의 산파, 초대주장, 200만 조선족을 대표한 연변의 얼굴 ㅡ 주덕해동지 탄생 100주년이다.
주덕해동지는 중화민족의 훌륭한 민족간부였다.
1984년 5월 12일 호요방총서기는 <<주덕해동지는 우리 당의 아주 훌륭한 동지이며 조선족의 수령>>이라며 <<모택동주석과 주은래총리께는 여러번 주덕해동지를 훌륭한 동지라고 말씀하셨다>>고 덧붙혔다.
<<주덕해기념비>>제막식에서 중앙정부를 대표한 황광학의 추도사는 <<주덕해동지는 연변 여러 민족 인민들의 걸출한 대표이며 중국 조선족 인민들이 공인하고 경모하는 지도자이며 우리 나라 소수민족가운데서도 가장 탁월한 인물입니다>>고 했다.
연변대학 김병민총장은 <<훌륭한 민족간부는 우선 자기 민족을 사랑해야 하고 자기 민족의 리익을 대변해야 한다. 자기 민족을 위할줄 모르는 간부는 비단 자기 민족의 환영을 받지 못할뿐만 아니라 타민족의 존경도 받을수 없다. 이는 무수한 사례들이 증명한다>>고 했다.
1949년 2월 주덕해가 연변의 제1책임자로 부임되여 올 때 그는 연변에 기필코 조선민족이 자치권리를 행사할수 있는 자치구를 세우겠다고 결심하고 자치구창립의 구체적인 방안을 중앙과 성당위에 제기, 중앙정부의 관심, 배려로 1952년 9월 3일 연변대지에 주덕해동지가 오매불망 꿈꿔온 자치구가 마침내 힘차게 발돋음을 하였다.
연변이 문화와 교육의 고향으로 부상된것은 주덕해동지의 공로다.
1950년대에 주덕해동지는 선후하여 연변사범학원, 연변농학원, 연변의학원, 연변예술학교를 세운 뒤를 이어 김시룡(김시룡합작사 사장)을 부추켜 1955년 5월 1일 중국의 첫 농민대학인 연길현동성새벽농업대학교를 창립하였다. (1982년 여름 유엔교육과학문화기구의 사찰단이 동성새벽대학을 방문하고 상당한 자금까지 지원해주었다.)
1956년 주덕해동지는 북경회의에 갔다가 중앙민족학원을 찾아보고 돌아와서 우란후(몽골족)교장에게 <<중앙민족학원에는 왜 한족과 몽골족뿐이고 조선족은 한명도 없는가?>> 며 조선언어학부를 세우도록 편지를 썼다. 그래서 조선언어학부가 세웠다고 한다.
주덕해동지는 실사구시사업작풍의 전범이였다.
1962년 6월 22일 주은래총리가 연변을 방문할 때 그는 실사구시적으로 연변의 사업성과를 회보한 후 연변에 존재한 20여가지 난제를 제기하여 상급정부로부터 관개시설, 농업기계, 화학비료등 생산설비개설의 지원을 쟁취하고 입쌀, 해산물, 술, 비단, 고무, 석탄 등 생필품특수공급을 쟁취했으며 문화, 교육, 신문, 출판 등 분야에 직면한 난제들을 풀었다.
주덕해동지는 백성들이 제기하는 사소한 문제도 소홀치 않았다.
<<50년대 명포수>> 김영덕(88세, 도문)은 <<언젠가 사냥길에서 주서기라는 분을 만났는데 그분이 무슨 곤난이 없는가고 묻기에 량식난으로 사냥개를 키우기가 힘들다고 무심하게 말했다. 그런데 며칠후에 시량식국에서 사냥개의 <공량증>을 발급하며 그때만난 분이 주덕해라고 알려주더라>>며 지금도 주덕해동지를 종종 외운다.
필자는 주덕해탄신 100주년을 맞으며 <<민족을 생각하지 않는 민족간부는 자격이 없다. 주덕해처럼 민족을 위해 헌신할줄 아는 간부야말로 진정한 민족의 지도자라고 할수 있다>>는 최채(제1임부주장)동지의 말씀과 <<최채동지의 이말씀은 그의 유언이고 민족의 리더로서의 그의 좌우명이며>> <<우리 민족간부들이 나아갈 앞길을 밝히는 등대다>>라는 김병민총장의 말씀을 전체 우리 민족간부들에게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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