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고속철로 친정나들이 길 30여년 고역에서 벗어나
조글로미디어(ZOGLO) 2016년1월17일 00시07분    조회:2821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대형계렬보도 “두만강은 말한다”(5)

—기자의 고속철탑승 체험생활 1, 2, 3

연변에 고속렬차가 개통된지 한달만에 나는 훈춘—대련행 G8126번 고속렬차에 몸을 실었다. 몇년만에 떠나는 친정나들이길이라서 마음이 들뜬것도 있었지만 연변에 온지 31년만에 고속렬차를 타고 친정으로 가는길이라 실로 만감이 교차된다.

“외딴섬”도 이제는 지척에

내가 1984년에 연변대학에 입학해 졸업하고 연변남편을 만나 “연변사람”으로 살아온 세월이 어언 31년이 지나가고있다. 나의 친정은 연길과 철도로 703킬로메터 상거해있는 료녕성 심양시의 한 작은 진에 있었다. 친정과 멀고 교통이 불편한 연변에 떨어져서 살고있는 나를 친정에서는 “외딴 섬”이라며 애석해할 때가 많았다.

고속렬차의 아늑한 자리에 앉고보니 연변대학에 입학해 심양으로부터 연길까지 올 때의 정경이 눈앞에 삼삼히 떠오른다. 나보다 7살 더 많은 오빠가 나를 연길까지 바래다주었다. 그때 우리가 타고온 렬차는 1981년도에 개통한 심양철도국 관할구역내 렬차(管内旅客列车)인 심양-길림행 렬차였는데 심양방향에서 연변으로 오는 유일한 직행렬차였다. 그 렬차는 개혁개방하면서 1980년부터 관할구역내 도문-통화행 렬차운행선을 연장, 개변한것이라고 한다.

밤 11시반경에 기차에 올랐는데 차안은 이미 숨막힐 정도로 승객이 많아 앉을 자리는 고사하고 설자리조차 없었다. 난생처음으로 그 먼 로정에, 그런 승차환경에서 오빠와 나는 식은땀을 흘리며 이튿날 13시 50분까지, 14시간반만에 연길에 도착했는데 7시간을 꼬박 서서 왔다. 차에서 내릴 때 종아리며 발이 통통 부어올라 새신을 꺾어신을수 밖에 없었던 나를 보고 오빠는 아무런 내색도 없이 “연변이 멀기는 멀구나”고 한마디를 던졌다. 방학이 되여 집으로 갈 때는 겨우 좌석표를 구하기는 했지만 역시 그 고역 차마 견디기 어려웠다.

1989년 6월, 나는 다성(跨省)결혼식을 연길에서 올렸는데 어머니를 비롯한 친정식구( 8명)들이 그 기막힌 기차를 타고 시달릴대로 시달렸다. 어머니는 늘 “보고싶다” 는 말씀대신 내가 한번씩 집으로 다녀올 때면 “그 고생을 어찌하면서 다니겠니”하며 늘 가슴아파하셨다.

지난세기 90년대까지 전국적으로 렬차운행속도를 5, 6차 련속 빨렸지만 나의 친정나들이 길은 30년 근근히 14시간권에서 12시간권으로밖에 안줄었다.

내가 타던 도문-심양행 쾌속렬차를 1985년 1월부터는 도문—천진직행려객렬차로 다시 운행선을 연장했는데 이는 심양철도국 도문철도분국에서 유사이래 처음으로 관내로 진입한 렬차였다.

1988년에 이르러 도문-심양선 북선(장춘시를 경유, 다른 한선은 길림시를 경유)렬차도 개통되였는데 이 렬차가 운행됨에 따라 연변의 시장은 전에 비해 더욱 활성화되였다.

도문철도분국(현재는 연길차무단)의 려객수송량은 연인원으로 1978년에는 677만 8000명이였던데로부터 10년후인 1988년에 이르러서는 1118만 8000명으로 65.1%나 증가해 사상 최고기록을 남겼다.

고속렬차안은 그때의 혼잡했던 기차안과는 완연히 다르게 물뿌린듯 조용했다. 이따금 안내원의 방송소리가 들리고 업무를 체크하는 승무원이 조용히 움직이고있을뿐이였다.

발차하여 17분만에 안도에 도착, 그뒤로 돈화, 교하, 길림... 산과 밭과 텐널이 창밖으로“쑝”,“쑝” 스쳐지나간다.

1993년 3월, 나의 남편이 우리 딸애 돐잔치에 왔다가 가시는 어머니를 배웅하러 큼직한 짐짝을 들고 렬차안에까지 들고 올랐다가 그만 내리지 못했던 기억이 아직도 머리속에 생생하다. 승객이 너무 많고 혼잡해 차가 떠나도록 차문까지 빠져나오지 못했던것이다. 남편은 할수없이 다음역인 조양천에서 내리는수밖에 없었다. 역에서 검문을 받고 차표값을 치르고도 벌칙금까지 안고 1시간이 지나서야 집에 돌아왔는데 고정전화도 없던 때라 나는 나대로 애만 태웠다.

2008년 3월의 그날, 새벽 다섯시, 어머니가 심근경색으로 갑자기 돌아가셨다는 비보전화를 받았지만 그때 그 시간대에는 친정집으로 가는 기차도 없고 뻐스도 없었다. 오후 다섯시까지 기다려야 심양행 기차를 탈수 있는데 심양에 도착하면 24시간후가 된다. 마음이 급한대로 길림으로 가는 뻐스를 잡아탔는데 그날 밤 10시에야 친정에 도착할수 있었다…

철령역에 토착한다는 안내방송목소리에 나는 회억에서 깨여났다. 게시판에는 구간 309킬로메터/시속을 알리고있었다. 그뒤로 24분 달려 20시 34분에 렬차가 심양에 도착했다.

4시간 6분만에 연길에서 심양에 도착하다니! 심양역에 내린 나는 너무도 신기해 고속렬차를 보고 또 보고 역을 둘러보면서 한참동안 묵묵히 서있었다. 30년간 친정나들이 길에서의 애환이 저도모르게 눈물로 맺혀 떨어졌다.

“어머니, 이젠 4시간이면 이렇게 오는걸요...” 나는 하늘을 보며 이미 저세상으로 간 어머니에게 되뇌이였다. 순간 나의 머리속에 착각이 떠올랐다. 마치 어머니께서 “정말 좋은 세월이 왔구나”하며 대답하는것만같았다.

장춘—훈춘고속철도 도시간선이 개통됨에 따라 중국의 고속철도선이 중, 조, 로 변경도시인 훈춘시에까지 연장돼 훈춘에 려객렬차가 없던 력사에 종지부를 찍게 되였고 장훈도시간선이 할빈-대련고속철도, 반금-영구고속철도, 심양-단동고속철도 및 바야흐로 개통하게 될 단동-대련쾌속철도와 동북철도쾌속려객운수망을 형성해 연변지구의 단일했던 교통결구를 보완할수있게 되였다.

연변은 드디여 고속렬차시대에 들어섰다. 지금은 훈춘 혹은 연길에서 발차하는 고속렬차만 하루에 23차, 아침 5시 시간대부터 밤 22시 시간대까지 장춘, 단동, 대련, 북경, 할빈 등 방향으로 매우 편리하게 다닐수 있게 되였다.

62세 언니가 찍어준 사진한장- “추억에 울고웃는 오빠와 나”

심양역에서 내려 40분만에 언니집에 들어서니 “퇴근하고 온다는 말 정말이였던거야?!”하며 언니가 놀라움과 반가움에 어리둥절해한다. 언니집에서 내가 오기를 기다리고있던 오빠도 내손을 잡고서 “니가 돌아갈 때 이번에도 이 오빠가 바래다 주마... ”해 우리는 서로 눈굽을 찍으며 웃었다. 그날밤 우리는 연변의 고속철화제로 밤이 새는줄 몰랐다.

“연길랭면집에서 혹은 대련 바다가에서 자주 만나자”

친정에서 주말을 보내고 나는 연길로 돌아오는 기차표를 끊으려다가 마음을 바꾸어먹고 31년이 넘도록 만나보지 못한 대련에서 살고있는 딱친구도 만나볼겸 심양에서 훈춘—대련행 G8128번 렬차표를 끊었다. 차안은 여전히 만석이였다. 증휘(曾辉)렬차장은 한달간 훈춘—대련을 빈석없이 달리고있다며 “탑승률은 100%, 예상밖이다. 대련이란 해안도시와 훈춘이란 변경도시, 그리고 연변의 조선족민속문화관광이 이어지는 덕이 큰것 같다.”고 말한다.

차에서 내리니 심양에서 느낄수 없었던 해변의 온습도가 물씬 느껴진다. 그리고 플래트홈의 전자계시판에서 “’훈춘’으로부터 왔음(來自珲春)”이란 글씨가 정겹게 안겨온다. 대련에 많이 와봤지만 “훈춘”으로부터 온다는 렬차를 타보기는 처음이다. 그래서 과연 변경도시 훈춘에, “외딴섬” 인 연변에 고속렬차가 통한다는걸 다시한번 실감한다.

서늘해진 때였지만 친구와 나는 해변가로 달려가 “만났다!”고 웨쳤다.

나는 2시간 5분만에 대련에 도착, G8128번 렬차는 훈춘으로부터 7시간 6분만에 대련에 도착한셈이다.

나는 드디여 31년만에 만난 그 친구와 포옹하였다. 우리는 “ 이젠 주말에라도 연길랭면집에서 혹은 대련 바다가에서 자주 만나자”고 약속했다.

고속철에 실은 장길도의 꿈, 동북아의 꿈

2008년 10월 9일 길림성정부와 국가 철도부가 《길림철도건설 유관 문제를 다그쳐 추진할데 관한 회의기요》를 형성하여 길-도-(훈)(기요에는 길림에서 도문까지였었다)쾌속철도건설이 가시화되여서부터 7년만에 장춘-길림-도문-훈춘 쾌속철도가 개통되여 장길도의 만백성이 환호하고있다.

심양철도국 연길차무단에 따르면 연변의 려객수송철도력사는 1924년 11월 1일에 개통한 천(연길현 천보산)-도(도문)철도로부터 시작된다. 침략 의 목적하에 일제가 청나라정부와 체결한《합영천도경전철(天图轻便铁路)공사계약서》에 따라 그 철도가 부설되였다.

1933년후 지방관할구역내 돈도(敦图), 조개(朝开), 도녕( 图宁), 흥녕(兴宁), 청룡(龙青)철도가 선후로 개통되였고 1940년 경-도(京图), 도-가(图佳) 두갈래 철도간선에서 달리는 렬차가운데서 7조의 려객렬차가 신경(新京, 지금의 장춘), 가목사, 목단강으로부터 조선 경성(지금의 서울), 청진, 라진으로 통행했다.

우리는 일제가 그 철도선을 리용해 중국의 많은 자원을 략탈해간 력사를 잊지 않는다.

오늘날 중화민족부흥의 길에서 우리는 새로운 100년, 고속철도의 꿈을 실현하였다.

그 쾌속례루로 장길도가 2시간권으로 시공간거리를 줄여 지난 국경절 황금주 련휴기간 훈춘이 지난 동기보다 111% 증가된 관광객을 맞아들였다. 훈춘, 연길의 려관, 음식점이 초만원, 전연변적으로 지난 동기보다 36.3% 증가된 관광객73만 3000명을 접대해 유사이래의 기록을 남겼다. 국내외 매체는 다시 장길도에 초점을 맞추어 “장훈고속철은 장차 끊임없이 국내외 관광객을 실어오게 되며 연변에 무한한 상업기회를 실어오게 된다”고 전망한다.

2011년 장길(장춘, 길림구간) 고속철도가 통차를 시작할 때에는 30여조(对)의 렬차조가 달리였는데 장도훈고속철이 개통되여서는 구간을 달리는 렬차조가 60조도 더 되게 증가되였다.

길림성관광국 림천국장은 매체에 “장길도를 주선으로, 료녕, 흑룡강을 량익으로 , 동북아6국을 연장지역으로 장도훈고속철도연선관광은 신속히 승온해 동북의 가장 흡인력있는 정품관광대를 형성하게 될것이다 ”고 했다. 동북에 “황금관광대(黄金旅游带)”가 형성된다는 꿈도 결코 머지않아 실현되리라 믿어마지 않는다.

훈춘은 동쪽으로 로씨야 자르비노항, 조선 라진항, 한국 부산항과 배길이 이어졌고 이웃 나라 조선, 로씨야와 륙로를 개통하고있으며 고속철의 개통으로 서쪽으로는 장길고속도로, 장백고속도로와 이어져 비단띠처럼 동북아 6국을 잇고있는 매력도시로 부상하고있다.

당면의 길림성의 고속철도판도에 대해 길림대학 정일병교수는 “고속철도는 동북진흥의 ‘선행군’으로 되여 보다 많은 인구류동과 물류가 장길도 및 훈춘지역에로 밀려오게할것이며 동북지역의 경제우세에 대한 세계의 인식을 깊히 해줄것이다.”고 한다.

훈춘시당위 서기 고옥룡은 “장래에 훈춘은 로씨야 등 나라를 향한 교통시설건설을 통하여 륙해통도련운, 륙해공통도련운, 철길과 배길의 련운을 실현함으로써 진정 동북아를 향한 대통도를 형성할것이다.”고 전망했다.

장훈고속철도, 정녕 너는 민생의 길, 관광의 길이며 동북아통도를 잇는 비단길이다. 

길림신문 김영자 기자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1209
  • —양로사업을 영원한 직책으로 여기는 ‘이쁜 아가씨’ 박진화의 이야기 “로인을 돌보고 어린 애들을 보살필수 있는 양로원, 고아원을 차리는것이 어릴적 저의 꿈이였습니다.” 아니운서라는 화려한 후광을 벗어둔채 2011년 2월, 호리원으로 탈바꿈하면서 지금 사회복리원 특수호리구역에서 주임...
  • 2018-01-03
  • 뻐스정류소에서 길다랗게 줄지어서서 순서를 기다리는 일본인들/리홍매특파원 일본인들의 줄서기를 그들의 문화라고 하기에는 너무 단순하고 조금은 망설임이 앞서는 일이다. 하지만 줄을 서서 기다리는 것에 거부감이 전혀 없는 듯한 일본인들에 대해 처음에는 생소함을 느끼다가 점차 거기에 적응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
  • 2017-12-26
  • ‘아름다운 추억’ 수기 응모작품 (65) ◇서정숙(중경)     언니가 보낸 다시 돌아오지 않는 〈2016년의 렬차〉란 글을 읽으며 감개가 무량하다.   무정한 세월은 드팀없이 꾸준히도 흘러 장장 45년이 지나 그제날의 갓 사업에 참가했던 짧은 량태머리 언니도, 늦은 공부라도 하려고 학교 다니던...
  • 2017-12-25
  • ‘아름다운 추억’ 수기 응모작품 (64) ◇주청룡(룡정) 1973년, 내가 생산대대의 과학실험소조에서 일할 때였다. 그 때 우리 대대에도 주에서 공작대들이 내려와있었는데 당시 주당위 선전부 리휘 부장이 우리 공사에 온 공작대의 총 책임자로 우리 대대에 와 주둔해있었다. 그 해 여름의 어느 날 리휘 부장은 대...
  • 2017-12-25
  • ‘아름다운 추억’ 수기 응모작품 (63) ◇남걸(목단강) 1976년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목단강시전염병병원에 배치받아 의사사업을 한 지도 어언 40여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매번 백설같이 흰 의사복을 떨쳐입고 병원 각 과실(科室)을 순시할 때마다 나에게 진정한 의사자격을 가져다준 감명 깊었던 40년 전 그 날의...
  • 2017-12-19
  • ‘아름다운 추억’ 수기 응모작품 (62) ◇황혜영 (길림) 50년 전 추억의 색바랜 사진(왼쪽이 어린 시절 필자) 어제밤 비가 억수로 쏟아지더니 아침에 나가보니 아직 익지 못한 시퍼런 복숭아 열매가 나무 밑에 쭉 깔렸다. 복숭아를 볼 때마다 복숭아의 맛보다 그 씨가 어떨가 하는 생각을 먼저 해보는 나다...
  • 2017-12-19
  •   남편류학시절의 경제담보인이였던 노토 아키히로(能登昭博)씨는 대학교 졸업론문을 이라는 테마로 썼을 정도로 중국에 관심이 많은 분이다. 《아사히신문》(朝日新聞) 치바(千葉)동부지역의 판촉업무를 총괄하는 회사경영인이였던 그는 내가 일본에 온 이듬해에 새로운 사업으로 지역신문인 《호오지로》(ほお...
  • 2017-12-18
  • 일본의 선물보따리(자료사진) 어린 시절 엄마 뒤꽁무니를 따라 다니면서 눈으로 얻은 깨달음이라고 할가,“받은 그릇은 절대 빈채로 돌려 보내지 않는다”였다. 이웃사이에 주고 받고 빌리고 빌려 주고 하면서 살았던 그 시절, 동네집 잔치가 온 마을의 기쁨이였고 어느집에 상사가 나면 온 동네가 슬퍼했다. 그...
  • 2017-12-18
  • 〔한국서 홀로서기∼나는 이렇게 살았다〕 9년을 하루와 같이 문화봉사를 해온 석복순녀사의 감동 스토리 석복순(맨 앞)강사가 춤을 가르치고 있다 돌이켜보니 내가 2007년 둘째딸을 따라 한국에 올 때 나이가 예순이였으니 10년이 지난 오늘 어언 일흔이라는 고희의 나이로 되였다. 그간 줄곧 소외된 사람들에게 춤을 ...
  • 2017-12-12
  • (흑룡강신문=하얼빈)채복숙 기자 = "저희 기금회는 2012년에 랴오닝성민정청의 2급 법인으로 설립되어 대략 2년 여 동안 운영하다가, 2014년에 독립법인을 신청해, 2015년 1월에 정식 허가증이 내려왔습니다. 기금회가 설립되어서부터 지금까지 조선족사회의 많은 지원을 받아 왔습니다. 우리는 더 많은 사람들에게 기부문...
  • 2017-12-12
  • 〔한국서 홀로서기∼나는 이렇게 살았다〕 9년을 하루와 같이 문화봉사를 해온 석복순녀사의 감동 스토리 석복순(맨 앞)강사가 춤을 가르치고 있다 돌이켜보니 내가 2007년 둘째딸을 따라 한국에 올 때 나이가 예순이였으니 10년이 지난 오늘 어언 일흔이라는 고희의 나이로 되였다. 그간 줄곧 소외된 사람들에게 춤을 ...
  • 2017-12-12
  • 우리 집 가까이에 살고 있는 량씨는 일본에 온지 10년째 되는 한족 료리사이다. 어느 날 그가 찾아와서 답답한 마음을 털어놓았다.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을 장가 보내고 나니 빈털터리가 됐어요” 18살 때부터 료리를 배웠다는 량씨는 일본어를 전혀 접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였다. 갓 마흔살에 접어들면서 일본...
  • 2017-12-11
  • ‘아름다운 추억’ 수기 응모작품 (61) ◇김동화(연길) 30수년전 그 때 그 학생들과 함께 남긴 기념사진 세월은 류수와 같다더니만 정말 만질 수도 걷잡을 수도 없는 것이 바로 시간의 흐름인가 본다. 어언 70을 코앞에 두고 보니 가끔씩 따르는 크고 작은 추억들로 머리를 메운다. 올해 제33회 교사절을 즐...
  • 2017-12-11
  • ‘아름다운 추억’ 수기 응모작품 (60) ◇김규칠 구술 김숙자 대필 행복한 만년을 보내고 있는 김규칠 로인 부부 내 나이 금년에 80이다. 긴 세월 수많은 일들을 겪다 보니 잊혀지지 않는 사연도 많다. 그런데 요즘 인정세태가 삭막해서 그런지 그 때 그 일이 어쩐지 더 자주 떠오르군 한다. 온 나라가 문화대혁...
  • 2017-12-11
  • 〔한국서 홀로서기∼나는 이렇게 살았다〕 “나는 스승을 잘 만나 성공했다” 가수, ‘아리랑 난타’ 단장 아이수의 성공담에서 내가 한국 온 년도가 2004년이니 올해로 벌써 10년 하고도 3년이 된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했는데 그간 나의 한국생활에도 적지 않는 변화가 있어 자부를 느낀다...
  • 2017-12-11
  • 며칠전 묵직한 편지봉투 하나가 우리집에 날아왔다. ‘항상 감사합니다. 더 받은 송금료 164엔을 돌려 드립니다. 또 기회가 되면 잘 부탁합니다’ 짤막한 메모용지와 함께 동전 164엔이 들어 있는 봉투였다. 나는 적혀 있는 번호로 전화를 걸어서 영문을 물었다. 사실은 지인의 부탁으로 인터넷경매에서 옛...
  • 2017-12-10
  • ‘아름다운 추억’ 수기 응모작품 (59) ◇리희숙(안도) 애청자협회 열성자로 뛰고 있는 필자 리희숙 격정과 활력에 끓어넘치며 정열에 불타던 그 청춘시절, 걸탐스레 지식을 배워가며 희망과 기대에 부풀었던 학창시절을 마치고 ‘광활한 천지에는 할일이 많다’는 모주석의 지시에 따라 우리는 1965년...
  • 2017-12-05
  • 아름다운 추억 수기 응모작품 (58) ◇전영실(연길) 등산길에서의 필자 전영실 지금으로부터 40년 전, 취업통지서를 받고 우전국 인사과로 등록하러 갔던 때의 일이 어제런듯 눈앞에 삼삼하다. 한 나이 지긋한 책임일군이 반가이 맞아주며 “동무는 무슨 특장이 있소?” “어떤 일을 하고 싶소?” 하며...
  • 2017-12-05
  • 내가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는 일본에 온지 일년후였다. 그때 야마모토 타마에(山本 多摩江)씨는 우리가 사는 지역의 국제교류협회 책임자였다. 영어에 능한 그녀는 외국인들과 접촉할 기회가 많았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내성적이고 소극적인 대부분의 일본인들에 비해 적극적이고 활달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일본...
  • 2017-12-05
  • 각 지역 촌마다 빈곤해탈 난관 공략전이 치렬하게 펼쳐지고 있는 요즘, 누구보다 마음 한켠이 조급해나는 한 젊은이가 있다. 연거퍼 몇달동안 집에 내려가지 못한 채 농촌사업터에서 빈곤해탈사업을 위해 뛰여다니느라 낮과 밤을 잊은 그는 바로 룡정시 백금향 빈곤부축판공실 주임 홍광철(33살)씨다. 룡정시 백금향 빈곤부...
  • 2017-12-01
‹처음  이전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다음  맨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