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샘작업을 한탓일가? 인터뷰 도중 피곤한듯 눈을 질끈 감고 의자에 몸을 푹 기대면서도 기자 질문에 하나라다도 더 일러주고 싶은 마음에 자료를 들추고 책장을 넘겼다.
“평생을 우리 말 바로잡기와 책 만드는 일에 종사한 사람으로서 좋은 책에 얽힌 이야기가 후배들에게 도움이 될가 싶어 털어놓습니다.”
스스로를 “책이 삶이 되여버린 사람”이라고 소개하는 한영준옹의 말에는 일말의 흐트러짐도, 망설임도 없다.
화룡이 고향인 한영준옹은 지난 1961년에 연변대학 조문학부를 졸업하고 연변1중 어문교원으로 지내다 나이 50에 연변교육출판사 조선어문교과서편집실로 둥지를 틀면서 선생의 “우리 말 우리 글”사랑은 더욱 깊어졌고 어느덧 자타가 공인하는 “사전통”으로 됐다.
재직기간 그가 수집했던 자료를 정리해 집필한 《틀린말 고치기》 책은 발행부수 2만을 훌쩍 넘기며 많은 사랑을 받았다. 이어 《륙용우리말사전》을 펴냈는데 사전은 흑룡강민족출판사에서 1만부 가까이 출판하면서 전국소수민족 우수도서 대상후보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저에게는 신문, 잡지를 보는 목적이 다른 사람보다 하나 더 있는 셈입니다. 틀린 우리 말을 고쳐보는거지요.”
그리고는 신문 기고문 몇장과 두툼한 우리말대사전 등이 놓인 책상에 앉아 돋보기 안경을 쓴 채로 빨간 펜으로 차근차근 무언가를 써내려간다. 50여년을 변함없이 이어왔다.
“그때 그 시절에 어렵사리 창간한 우리 말 신문, 잡지들을 읽어보니 내용도 좋고 너무 즐거웠지요. 그런데 보면 볼수록 틀린 표현이 눈에 들어오는거예요. 그래서 직접 빨간 펜으로 고쳐서 신문사에 보내주기 시작했죠.”
그가 지난 세월동안 신문사와 잡지사 기자, 편집들에게 편지를 보내기 시작한 계기였다.
80년대 초반부터는 신문에 정기적으로 투고하는 대학교수들의 글에 “빨간 펜”을 댔다. 교수 한사람이 바뀌면 그가 가르치는 많은 제자에게 영향을 미칠수 있겠다 싶었다.
“잘 알고 지내는 한 대학교수가 이런 말을 하더라고. 내가 우리말의 소금이라고, 소금은 역시 짜야 제맛이라나.”
껄껄 웃는 모습에서 수고로움을 인정받는 기쁨과 변화를 이끈 보람이 함께 담겨있는듯했다.
그의 열정은 퇴직후인 지금, 조금은 버거워보이는 80고령까지 이어졌다. 품은 많이 들고 빛은 안나는 일로 사전편찬만한것을 찾기 어렵다고들 한다. 그것은 지극한 언어사랑 없이는 불가능한 일, 한영준 선생은 20년째 홀로 옥편 《한자우리말자전》 집필에 모든 심혈을 쏟아붓고있다.
“우리에게도 출판된 옥편이 여러권 있지만 약간의 오류가 있고 전면적이지 못하다는게 너무 안타까웠죠. 그럴듯한 옥편 하나를 남기는게 내 평생 소원입니다.”
20년을 하루와 같이 한영준옹은 매일 도시락을 싸들고 서점과 도서관을 오간다. 그는 그곳에서 하루종일 자료를 뒤적인다. 사전편찬은 말을 캐고 풀이하는 일이다보니 어휘 자료에 대한 검토와 바른 해석에 노력을 기울어야 한다. 무언가 밝힐수 있을때까지 또 한번 터득한것도 다시 생각해 제대로 밝힐때까지의 과정들을 수없이 반복하면서 한영준옹은 모든 자료를 낱낱이 캐는 작업을 손에서 놓질 않는다. 그의 작업실에 놓여진 책상에는 두꺼운 사전과 육필 원고가 놓여있었다. 두터운 사전은 매쪽마다 닳아서 볼품이 없다. 하나의 단어를 정의하기까지에는 오랜 고민과 숙의를 거친다.
옥편은 막바지단계에 다달았고 래년 초 출판을 앞두고있다. 도합 7만개가 넘는 한자를 우리말로 뜻풀이 하는, 방대란 량을 자랑한다. “말을 제대로 못하면 사고방식도 제대로 서지 않는다.”가 그의 신념이다. 우리 말보다 영어를 더 잘해야 한다는 강박증에 시달리는 요즘 세태도 한심하긴 마찬가지라고 안타까움을 감추지 않는다.
혼자서는 더이상 버겁다고 판단한 한영준옹은 마음맞는 지인들의 도움으로 얼마전에는 민족문화전통연구회를 만들었고 연구원들과 함께 우리말 지킴이로 나설 타산이다.
스마트폰 시대가 열리고 인터넷 사전의 리용이 늘어나면서 종이사전이 점차 빛을 잃는 요즘, 그래서 한영준옹의 우리말 지킴이 행보가 더 값진건지도 모른다.
연변일보 글·사진 신연희 기자
파일 [ 1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