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전에 3년 넘어 ‘잠복’했다던 리종환씨를 만났다.‘군중문화연구원’리종환은 60대 중반으로서 연변군중문화무대에서 손꼽히는 연구원이며 노래지휘가이다.
왜 ‘잠복’했는가를 캤더니 난치병으로 한국 나들이를 하면서 치료에만 수십만원의 거금을 팔았다고 한다.
그런데 오늘 마주한 리종환씨가 심신이 그렇게도 밝고도 씩씩할 줄이야!
“이번 앓음으로 인생이란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라는 것을 절감했습니다. 나에게는 하늘나라로 가지고 갈 아무것도 없더군요. 그래서 모든 재간을 살아계시는 사람들에게 기쁨과 행복을 남기는데 쓰려고 작심했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종환씨는 이 세상에 남길 ‘유산’으로 두가지를 선정했다 한다.
하나는 도문시부련회와 손잡고 부인(박미옥)이 창립한 ‘도문녀성문화중심’(무도학원)에 노래공부를 증설해 많은 녀성들의 질적 삶에 도움을 주고 녀성들의 자부심, 자긍심, 응집력을 키우기 위해 ‘도문녀성문화중심회가’를 창작하여 선물하는 것이다.
다음은 집단력과 선동력이 막강한 대합창의 붐을 일으켜 군중문화무대에 ‘다섯가지’ 종자를 파종하는 것이다.
이 다섯가지는 첫째 흘러간 노래 <고향의 봄>으로 우리 민족의 뿌리 깊은 정신을 심어주고 둘째는 연변의 <고향산 기슭에 올라서니>노래로 조선족들의 고향애와 고향정을 키우며 셋째는 항일가곡 <유격대행진곡>으로 우리 민족의 항일혁명정신을 기리며 넷째는 노래 <강산>으로 국민들이 조국 강산을 노래하고 조국을 지키는 애국정신을 고양하고 다섯째는 <국제가>로 무산대중의 공산주의신념을 굳게 하려는 것이다.
이렇게 설명하는 리종환씨는 왕청에서 대합창 <국제가>를 지휘할 때 파격적으로 몸을 돌려 관중을 마중하고 <국제가>의 탄생지인 프랑스어로 높이 불러 전 회장을 우뢰와 같은 박수로 절정에 이르게 했다고 부언했다.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이면 어디나 달려간다.”는 리종환씨의 하루의 일과는 예전보다도 더 바쁘고 더 즐겁다 한다. 그는 지금의 활동반경이 장춘까지 넓혀졌다고 한다.
이글거리는 일출도 좋지만 노을진 석양도 가관이다.
‘무심’으로 살기에 죽음이 두렵지 않고 죽지 않으려니 분투하게 되고 모든 것을 남기려니 인생에 여한이 없다는 리종환씨가 엮어가는 인생마무리가 아름답고 멋지다.
길림신문/오기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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