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추억’ 수기 응모작품 33
◇윤희남(룡정)
필자 윤희남 |
“누구를 찾으세요?”
“음, 엄마 친구인데 너는 아마 모를 거야.”
“울 엄마는 지금 병원에 입원하셨는데요.”
“그래, 알고 있어. 방금 아빠한테서 들었거든.”
“무슨 일이라도 있으신가요?”
“일은 아니구, 아빠랑 함께 집까지 왔다가 아빠는 엄마 데리러 병원에 가셨구 나더러 집에 올라가서 기다리라고 해서 왔는데, 나 집에 들어가서 기다려도 될가?”
의아한 눈빛이면서도 소년은 “들어가도 되냐” 하는 나의 물음을 거절하기가 안스러웠던지 머리만 까딱이면서 비켜주었다.
일하던 작업복 그대로인데다 올망졸망 담은 세수대야까지 옆구리에 끼고 서있는 내 행색이 얼마나 초라했으면 소년은 이윽토록 눈길를 떼지 못하고 있었다. 아마 이런 추한 꼴을 처음 보는 듯 싶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온종일 몸과 마음이 지칠 대로 지친 나는 무너질 것 같은 느낌에 들어가자 마자 벽에 기대 쭈크리고 앉았다.
이는 내가 6년 전 한국에서 양력설를 하루 앞두고 겪은 일이다.
F4 비자가 시행되면서 출국 열풍이 더욱 거세게 일던 그 때, 나는 돈의 유혹을 이길 수 없어 남편과 함께 근 10년간 하던 자영업을 접고 한국으로 가게 되였다. 때는 겨울이 각일각 다가서는 11월말일이였고 도착지는 대구 경산이였다.
마침 시누이 부부가 그 곳에 있었기에 우리는 당분간 그들과 한집에서 지내게 되였고 그간 시누이네와 이웃으로 가깝게 지내는 호용이라는 한국인 부부도 알게 되였다. 그 젊은 내외간은 시누이네와 잘 지내는 사이여서인지 우리를 극진히 대해주었고 필수적인 수속까지 함께 다니면서 끝내주었다. 그러다 보니 생각 밖으로 취직도 힘들지 않았다.
그런데 원래 요추간판 탈출로 허리가 변변치 않은 남편은 회사일을 한달간 하고는 더는 할 수 없게 되였다. 그렇지 않아도 비좁은 시누이네 집에 얹혀있는 것이 송구스러웠던 나는 아예 부부가 함께 일할 수 있고 류숙도 마련해주는 일자리를 찾기로 작심했다. 매일 신문에서 광고를 뒤지던 우리는 마침내 부부팀을 요구하며 류숙도 마련해준다는 고추건조장을 선택하게 되였다.
나와 남편은 그 즉시로 전화 련계를 가진 후 이튿날로 행장을 수습해 가지고 택시에 몸을 싣고 고추건조장으로 향했다. 택시는 약 한시간 반을 달려 편벽한 산골입구에 위치한 큰 건물 앞에 멈추어서더니 이곳이 고추건조장이라고 했다. 이어 작달막한 키에 몸집이 빵빵한 분이 다가오시더니 “혹시 전화로 약속한 분들이신지.” 하면서 맞아주었는데 사장이셨다. 사장은 곁에 있던 젊은 직원을 보면서 우리를 도와 짐부터 기숙사로 옮기게 하였다.
우리는 그 직원을 따라갔다. 건물 벽에 붙여지은 창고를 방불케 하는 낮다란 집들 앞에 이르러 그 직원은 우리를 보면서 이것이 기숙사이니 마음에 드는 칸을 잡으라는 것이였다. 창문도 없는 이런 집이 숙소라니, 불안하였다. 문을 열어보니 9평방도 안되는 작은 방엔 탁구공만한 전등알 하나가 천정에 대롱 매달려있었고 12촌짜리 구식 텔레비죤 한대가 방 한구석에 처박혀있는 외엔 아무 시설도 없었다. 더욱 한심한 것은 출입구 문에서 한메터 정도 사이두고 깊은 논도랑과 논밭이 있었고 주위엔 로천 화장실마저도 보이지 않았다. 어이가 없었다.
나는 물이며 화장실이 어디에 있냐 물었다. 그러자 그 직원은 난처한 기색으로 화장실은 건물 동쪽 맨 끝에 있고 물를 쓰려면 자기를 따라 오란다. 우리는 짐을 되는 대로 방에 처넣고 그 직원을 따라섰는데 그 직원은 오던 길를 되돌아 건물 안으로 되들어가 왼쪽으로 굽어 구석진 곳으로 가더니 이 곳이 회사 식당이란다. 그러면서 래일부터 식사는 자기 손으로 이 곳에서 끓여먹어야 되고 물도 저기에 있는 수도물을 사용해야 된다는 것이였다.
하느님 맙시사, 이곳이 작업장 한구석이지 어찌 식당이라고 한단 말인가. 살펴보니 랭장고 한대에 전기밥솥 하나, 길다란 상과 걸상 몇개 그리고 수도물이 전부인, 칸도 막지 않은 음침한 곳이였다. 동지섣달 추운 겨울 바깥이나 다름없는 어둑스레한 작업장 한모퉁이에서 홀로 밥을 지어야 한다고 생각하니 등골이 섬뜩해났다. 렬악한 환경이였다.
그러나 점차 화식조건을 개선해주겠다는 사장님의 말씀을 거역할 수도 없어 우선 해보기로 작심하고 점심을 먹고는 오후부터 일를 시작하였다. 오후 일를 마치고 숙소에 오니 이건 또 뭐야, 오전에 짐을 둘 때까지만도 조용하던 숙소는 거센 전동기 소음으로 하여 출입문 유리마저 부르르 떨고 있었다. 초풍할 지경이였다. 알고 보니 고추건조실이 바로 숙소와 벽 하나 사이두고 있었고 육중한 전동기는 벽 쪽에 안치되여있었다. 워낙 수면장애를 겪는 우리로선 천금을 준다고 해도 받아들일 수 없는 현실이였다.
가자, 이곳은 아니다. 나와 남편은 일하던 손도 씻지 못한 채 짐짝들을 둘러메고 도로에 나섰다. 짧은 겨울해는 벌써 서산으로 꼴깍 넘어갔고 사위엔 어둠이 깔렸다. 시간을 보니 7시가 되여왔다.
막상 나오고 보니 어디를 어떻게 가야 할지 막연하였다. 시내와 떨어진 외진 곳이라 도로에는 차량도 택시도 없었다. 시누이 신랑도 출장 나가고 집에 없었다. 그 날 따라 날씨도 엄청 추웠다. 고향이라면 친구들의 도움이라도 받으련만 생명부지인 이국땅에서 우리는 누구에게도 청들 수 없었다. 인제는 영낙없이 ‘뚱배’(언배)가 되였다고 생각하니 저도 모르게 얼굴에는 뜨거운 것이 주르르 흘러내렸고 아침부터 설친 배에서는 꼬르륵 꼬르륵 소리가 났다. 서러운 생각에 머리 들어 차거운 하늘을 바라보니 별들마저도 우리를 조롱하는 듯 깜박거렸다. 1분 1분 시간은 어느덧 9시가 되였다.
어디라도 등지고 앉아야 밤을 날 것 같아 서성거리고 있을 때 남편이 폰을 꺼내더니 어디론가 전화하는 것이였다. 행여나 하였지만 금시 도리질이 나가 다시 짐을 옮기려고 할 때 남편이 희색이 만면하여 “옮기지 마, 호영이가 오겠대.”라는 것이였다. 나는 나의 귀를 의심하였다. 이국땅에서 이제 겨우 풋면목 밖에 익히지 못한 그가 온다니 믿어지지 않았지만 기뻤다.
그런데 두시간이 지났지만 가마 하던 사람은 오지 않았다. 이제나 저제나 초조하게 기다리던 마음이 점차 실망으로 번져가고 있을 때 저 멀리에서 불빛이 반짝이였다. 그러나 그 불빛은 우리를 스쳐 휙 지나가버렸다. 인제는 더 이상 기다리고 싶지도 않았다.
나와 남편이 지친 마음으로 다시 짐을 옮기려고 할 때 갑자기 남편의 폰이 울렸다. 안해가 병원에 입원하여 병원에 갔다 오느라 늦었으니 20분만 더 기다리라는 소식이 날아왔다. 기뻤다. 미칠듯이 기뻤다. 얼어붙기 시작했던 가슴에 난류가 굽이쳤다. 이윽고 진짜 그가 차를 운전해 왔다. 우리를 보던 그는 도리여 늦어서 미안하다며 우리를 도와 짐들을 차에 실었다. 그 순간 나와 남편은 무슨 말로도 고마운 마음을 표달할 수 없었고 그냥 미안하다는 말 밖에 할 수 없었다.
이렇게 경산으로 돌아온 우리가 시누이네 집으로 가려고 하자 그는 “이 밤중에 그리로 가지 말고 아예 우리 집으로 가자”면서 차를 집 쪽으로 운전하였다. 집에 이르러 그는 나를 내려놓고는 병원에 가서 안해를 데려왔고 식당에 들려 밥까지 시켜가지고 왔다. 따뜻한 온수에 샤워를 하고 밥상에 마주앉은 나는 “친형제면 이보다 더할가” 하는 생각에 가슴 속에서 뜨거운것이 울컥 솟아 올랐다. 새해 첫날 아침도 우리는 그들과 함께 보냈다.
혹한의 밤길를 달려오고 앓는 안해까지 동원하였지만 그 어떤 생색도 내지 않고 도리여 우리가 부담스러워할가봐 별일 아닌 것처럼 소탈하게 웃으며 배려하는 그들의 치사랑에서 나와 남편은 배려와 사랑에는 국경이 없음을 절실히 느꼈다. 지금도 설명절이 다가오면 나는 그들 부부가 떠오른다. 잔병치례로 가끔씩 병원 신세를 지며 살던 그녀는 괜찮은지? 그때 10대 소년은 인젠 20대 끌끌한 젊은이로 성장했겠는데… 항상 형제처럼 “히야”라고 불러주던 호영이는 지금도 아마 주위에 사랑의 씨앗을 뿌리면서 살겠지? 나는 그들의 생활에 행운이 깃들기를 진심으로 바라면서 그들처럼 남은 여생을 사랑과 배려를 전하면서 살고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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