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추억’ 수기 응모작품 (46)
○ 김설연(길림)
백리향은 높은 산 해볕 잘 드는 바위에서 자라 진한 향기를 백리까지 뿜는다. 사람도 백리향처럼 주위사람들에게 그윽한 향기를 선물하는 사람이 있다.
이미 20여년 전 일이다. 내가 시집온 몇해 사이에 두 시동생이 줄줄이 장가가다 보니 우리는 삼동서가 한울안에서 살게 되는 ‘행운’을 지니게 되였다. 둘째동서와 나는 한주방을 쓰면서 살았고 셋째동서는 앞채에서 살았다.
삼동서가 한울안에서 모순 없이 산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아름찬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게다가 붙임성이 없고 성격 또한 활달하지 못한 나에게 있어서는 더구나 부담스러운 일이였다. 하지만 따로 살 형편이 못되다 보니 울며 겨자 먹기로 한울안에서 사는 수 밖에 없었다.
그나마 매일 직장일에 바쁘다 보니 낮에는 크게 부딪칠 일이 없었고 저녁이면 삼동서가 한집에 모여 낮에 있었던 일들을 주고받으며 그런대로 무난하게 지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내가 퇴근하고 집에 돌아와보니 둘째동서가 어린 딸애를 둘쳐업고 땀벌창이 되여 저녁밥을 지으면서 우리 집 부엌의 불까지 때느라 여념이 없었다. 내가 들어서는 걸 보자 그제야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며 우리 집 저녁밥까지 다 지었으니 함께 먹으면 된다고 하였다.
순간 나는 얼떨결에 뭐라고 할지 말을 찾지 못했다. 워낙부터 남한테 페를 끼치는 것을 꺼려하고 그만큼 남한테 베풀 줄도 모르는 나인지라 이러는 동서의 소행이 고맙기도 하고 충격적이기도 했다. 누구보다 출근이 일찍한 나는 동서보다 먼저 일어나면서도 동서네 아침밥을 함께 지어줄 생각은 종래로 해보지도 못했는데 문득 동서의 넘치는 관심을 받고 보니 어딘가 모르게 송구스러웠다. 뜨끈뜨끈한 방구들을 보니 기쁘기도 하지만 게면쩍은 생각이 더 들었다. 그래서 애를 데리고 한집 불만 때면서 밥하기도 쉽지 않으니 우리 저녁밥은 내가 퇴근해서 해도 되니 다시는 그러지 말라고 당부했다.
하지만 그 후에도 동서는 종종 우리 집 불을 지펴주고 저녁밥까지도 담당하면서 불처럼 훈훈한 인정을 베풀었다.
그러다가 외국붐이 불기 시작하면서 셋째동서는 한국으로 떠나고 둘째동서는 일본으로 돈벌이를 떠났다. 엄마가 되여서 서너살 되는 애들을 떼여놓고 떠나는 그 심정이야 오죽하랴만 잘살아보려는 욕망 하나로 뿔뿔이 외국으로 가는 바람에 삼동서의 한울안 생활도 력사에 종지부를 찍게 되였다.
둘째동서는 일본에 가서 악착스레 일한 보람으로 1년 벌어서 새집을 사고 딸애 생각에 못 견뎌 2년 만에 귀국하였다.
어느 하루, 둘째동서가 숨을 헐떡이며 우리 집에 와서 온종일 집 보러 다니느라 발바닥에 불이 날 지경이라고 푸념했다. 내가 집이 있는데 또 무슨 집을 보러 다니냐고 물었더니 우리한테 사줄 집을 보러 다녔다고 하면서 나보고 같이 집 보러 가자고 했다. 우리 집이란 말에 나는 그만 눈이 휘둥그래졌다. 동서는 의아해하는 나를 보면서 제가 돈을 선대해줄 테니 이젠 세방살이 그만하고 마땅한 집 한채 사라고 하였다.
비록 설음 많은 세방살이긴 하지만 부모도 아닌 동서의 돈으로 집을 사다니? 그것도 어린 딸애를 떼여놓고 외국에 가서 별별 수모를 당하면서 피땀으로 번 동서의 돈으로 집을 사다니? 어불성설이였다. 나는 동서의 마음은 고맙지만 성의만 받고 집은 사지 못한다고 한사코 나눕자 동서는 “이젠 애도 커서 학교에 들어가면 애 방도 하나 있어야 될 텐데 형님 생각만 하지 말고 애 생각도 해야 하지 않겠소?” 하며 진지하게 나섰다.
종래로 누구한테서 이처럼 큰 은혜를 받아보지 못한 나는 당황스러움과 감격을 감추지 못했다. 돈이 있는 사람들은 누가 돈을 꿔달라 할가봐 겁낸다는데 둘째동서는 꿔달라고도 하지 않는데 주동적으로 나서서 선뜻이 돈을 대주다니. 나는 세상에 어쩌면 이처럼 좋은 사람이 다 있을가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하고 천사 같은 동서를 만난 행복감에 목이 메였다. 동서가 생각해주는 마음은 눈물 나게 고맙지만 아무런 대가도 없이 동서의 신세를 지기가 민망스러웠고 언제 갚을지도 모르는 큰돈을 덜컥 받았다가 갚지 못하기라도 하면 괜히 형제간에 금이 갈 것 같아서 나는 극구 사양했다.
한편 동서한테 미안한 생각도 들었다. 나는 김씨 가문에서 맏며느리란 명색 뿐이지 가문의 크고 작은 일에는 항상 둘째동서가 도맡아 나서주었다. 음식솜씨가 좋은 둘째동서는 가족들이 모인 자리에서 언제나 뛰여난 료리재간으로 한몫을 톡톡히 담당하였고 애들을 고와하다보니 번마다 애들 먹거리들까지 알뜰히 챙기면서 잘 거두어주기에 친척들도 내놓고 말은 하지 않아도 은근히 둘째동서가 맏이 역할을 감당한다고 인정하고 있는 터였다. 나는 맏동서로서 해준 것이 없이 그저 받기만 하는데도 둘째동서는 나를 싫어하거나 미워하는 기미가 전혀 없이 여러모로 부족한 나를 극진히도 보살펴주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동서의 돈으로 집까지 산다면 너무 파렴치한 것 같았다.
나는 동서의 강권에 못이겨 동서와 함께 집 보러 나서긴 했으나 건성으로 돌아다녔다. 그 날 마땅한 집을 알아보지 못하자 동서는 이튿날에 또 돌자고 했다. 내가 돌아다니기도 힘드니 후에 보자고 핑게를 댔더니 소뿔은 단김에 뽑아야 한다며 이튿날 또 일찌감치 우리 집에 출근했다. 보아하니 집을 사지 않고는 그냥 넘어가지 않을 태세였다. 동서가 그렇게 성심껏 도와주려는데 그 호의를 지나치게 거절하는 것도 례의가 아닌 것 같기도 하고 확실히 애를 봐서도 집이 있어야 할 것 같아서 나는 죄송스러운 대로 동서의 성의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제야 동서는 잘 생각했다며 당장 집 살 돈을 내놓았다. 동서는 내가 동서네 빚을 부담스럽게 생각할가봐 “형님, 이 돈은 아무때나 돈 있으면 갚고 없으면 갚지 않아도 되니 갚으려고 너무 애쓰지 마오.”라고 한마디 더 얹었다.
동서의 애틋한 관심과 사랑으로 나는 난생처음 나에게 속하는 집을 사게 되였다. 13살에 아버지를 잃어서부터 둥지 없이 떠돌던 나에게 동서는 부모로서도 해주기 힘든 둥지를 마련해주었고 달처럼 차디찬 내 마음에 해살 같은 따사로움을 안겨주었다. 처음으로 갖게 된 내 집에서 나는 동서의 살뜰한 사랑을 가슴으로 느끼면서 비로소 안정된 생활을 하기 시작했다.
돈이 있을수록 인심이 삭막해지고 인정이 날로 메말라간다지만 둘째동서만은 자기보다 남을 더 배려하는 따스한 정으로 인간애의 꽃을 활짝 피우고 있었다. 그만큼 사랑을 베풀었으면 적당히 생색을 낼 만도 한데 둘째동서는 베풀기만 할 뿐 종래로 바라는 것이 없이 오히려 더 베풀지 못해 아쉬워하였다.
사람은 누구를 어떻게 만나느냐에 따라 그 인생이 달라진다.
동서를 만나면서 암담하던 나의 생활에도 찬란한 빛이 새여들었고 동서를 알면서 나는 봉페된 자신의 탈을 벗어버리기 시작했으며 동서를 리해하면서 해살처럼 구김 없는 사랑의 향기를 페부로 깊이깊이 느끼게 되였다.
동서라기보다는 내 삶의 양지바른 언덕이 되여 나에게 무한한 힘과 용기를 안겨주고 내 인생의 등대가 되여 내가 걸어갈 앞길을 환히 비춰주는 동서는 내가 평생 두고두고 감사해야 할 고마운 존재이다.
동서는 하얗게 핀 백리향마냥 오늘도 나의 가슴에 머물러 티없이 깨끗하고 아름다운 향기를 그윽히 피워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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