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인 아키코씨의 연변추억4
“연변,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음식이 무엇이죠?”
“랭면, 랭면이 제일 그리운 연변음식이예요. 그리고 조선명태가 너무 맛있었어요”
아키코씨와의 이번 이야기는 이렇게 먹는 음식으로부터 시작되였다.
갓 연변에 갔을때 어느 개인집에 초대받은 적이 있었는데 차려놓은 밥상을 보고 깜짝 놀랐다는 아키코씨이다. 사실 연변에 가기전까지 연변사람들의 밥상이 그 정도로 풍요로울줄 몰랐던것이다. 후에 안 일이지만 특별한 날이 아니여도 서시장에 나가면 여러가지 식자재를 손쉽게 살수 있었고 연변에서 수확할수 없는 과일류외에는 비교적 저렴한 가격대였다.
아키코씨가 찍은 당시의 푸짐한 음식상
랭장고가 없었던 까닭에 거의 매일 서시장에 갔었다. 서시장을 자유시장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야말로 자유로운 공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다. 사람도 많고 먹거리도 많았다는것이다.
연변대학에서 서시장으로 가는 도중에는 볼거리들도 많았다. 공원다리부근에 정자가 있었는데 그 정자 그늘아래에 돛자리를 깔고 하루종일 조선식장기와 트럼프, 마작에 열중하는 로인들이 있었다. 때로는 나무로 만든것 같은 이름모를 께임기구도 들어 있었다. 그리고 북장단에 맞추어 퉁소를 부는 흥에 겨운 로인들도 있었다. 너무 자유롭게 삶을 즐기고 있는 연길사람들의 모습들이였다고 아키코씨는 말했다.
“그당시 서시장의 가격대를 기억하고 계시나요?”
“대체로 최상급쌀이 한근에 42전씩이였고 콩기름이 한근에 1원 65전이였다고 우리 남편이 그 당시 일본에서 발표한 <연변수기>에 밝혔었습니다. 소고기, 돼지고기보다 닭고기가 엄청 비쌌는데 일본보다 조금 싼 정도였어요. 4,5층 집단주택의 집세가 한달에 8원쯤이였는데 락타털 카디건이 16원이라는것에 조금 놀랐었습니다.” 85년도에는 고급랭면 한그릇에 90전이였는데 때로는 30분정도 기다려서 먹었던 기억이 난다고 한다.
주부인 아키코씨가 매일 시장에 가다보니 여러 가게의 주인들과 친숙해 지게 되였다. 콩나물을 파는 할머니외에는 거의 다 한족들이였다. 어떤 가게의 주인들은 오오무라교수와 아키코부인을 ‘평양’이라고 불렀다. 복장을 보고 홍콩사람이라고 생각했다가 조선말을 하니 평양사람이라고 여겼던 모양이다. 그냥 편하게 그렇게 부르게 내버려 뒀다고 한다. 한어를 모르는 아키코씨가 한족가게 주인들과 수화로 대화하는것을 보고 “벙어리 아줌마가 또 왔네~”라고 말하는 주인들도 있었다. 한어를 잘 알고 계신 교수님은 늘 곁에서 그것을 즐기군 했었다고 한다.
연변대학부근에서는 빵(面包) 하나에 11전, 그리고 비닐봉지값을 따로 받았으나 서시장에 가면 빵하나 10전에 비닐봉지값도 받지 않는 조선족아가씨가 있었다. 장춘에 있는 대학에 진학하려는 남동생의 뒤바라지를 하고 있었다는 그녀가 한겨울에도 하루종일 서서 빵을 팔았다고 한다. 지금도 그 ‘맨뽀우아가씨’의 얼굴을 떠올리면 아키코씨의 가슴에는 파문이 일군 한다.
아키코씨의 추억속 ‘맨뽀우 아가씨’(왼쪽 첫번째)
남편 오오무라교수가 연길의 빙탕후루에 반해 버렸다고 아키코씨가 말했다. 처음 북경에서 맛보았던것보다 더 맛있다는 호평을 받은 연길의 탕후루, 중국에 오면 중산복입기를 즐기는 오오무라교가 중산복차람을 하고 빙탕후루를 먹는 모습을 보면서 한족아주머니가 환하게 웃어주군 했었다.
중산복차림으로 빙탕후루를 맛보고있는 오오무라교수(왼쪽 첫사람)
85년 12월에는 밖에서 옷을 팔던 의류전문점들이 새로 건설된 큰 빌딩안으로 옮겨가기 시작했다. 1년간의 연변생활을 마친 후에도 해마다 한달정도씩 연길에 머물군 했던 아키코부부에게 있어서 서시장은 자석같이 끌어 당기는 정다운 곳이였고 연변사람들속에 깊이 빠져 들어 가게 만든 곳이였다.
‘서시장’하면 한사람한사람 얼굴이 떠오르고 이야기가 튕겨 나온다는 아키코씨. 연변에 갈때마다 감지하는 서시장의 생기와 그곳 사람들의 향기는 시들줄을 몰랐었다고 한다.
/길림신문 일본특파원 리홍매
아키코씨의 당시 추억을 담은 연길의 사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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