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백성이야기80]더 큰 기업을 꾸리기 위하여
조글로미디어(ZOGLO) 2018년9월16일 00시00분    조회:1189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장춘시에서 조선족들이 결혼식과 회갑연을 올리거나 큰 행사를 치를 때면 장춘시명계식품유한회사에서는 빠짐없이 순대, 찰떡 등 조선족 전통음식을 제공한다. 음식에서 인정이 오간다고 여기서 조선족과 조선족사회를 위해 자기의 저그마한 성의를 보여주려는 명계식품회사 계영철 사장의 모습이 돋보인다.

행사뿐만이 아니다. 로인협회나 학교측에 감사하다는 의미로 무작정 음식을 들고 가는 계영철이다. 요즘 심심풀이로 사양하고 있는 토종닭들도 계영철의 착한 마음을 담고 이웃에 무료로 전해지고 있다.

올해로 15년째 식품제조업계에서 분투하면서 자리를 잡은 명계식품이지만 기타 자수성가했던 기업인들과 다를 바가 없이 계영철도 처음에는 역시 단돈 몇푼으로 창업을 시작했다.

두살에 가정의 기둥이던 아버지가 돌아가고 19살 나던 해에는 어머니까지 반신불수로 들어눕다나니 젊은 계영철의 어깨에 놓인 짐은 산처럼 무거웠다.

게다가 기업을 해본 경험도 없고 손에 쥔 것이 아무 것도 없는 계영철에게 남은 것이란 오직 젊은 나이뿐이였다. 사실 그에게는 젊은 나이가 엄청 큰 자산이였다.

남들이 식당을 해서 돈을 버는데 나라고 못할가? 하면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1989년, 28살의 총각 계영철은 여기저기서 500원, 1000원씩 꾸어 겨우 오천원을 장만해가지고 대련에 가서 음식점을 꾸렸다.

그런데 음식점 운영은 생각과는 판판 달랐다. 반년 남짓이 운영하고 보니 수익이 별로 없었다. 더 이상 운영하다간 본전마저 까먹을 형편이였다. 아쉬운 대로 음식점을 그만 접고 집으로 돌아왔다.

“리자를 계산해주기로 하고 돈을 꿨는데 본전도 겨우 갚는 신세가 되였습니다. 그래도 다들 저의 처지를 동정해주면서 리해해주니 고마웠습니다.”

그후 계영철은 심양에서 보이라공으로 있으면서 배연기를 만들어 팔기도 했고 막로동도 하면서 최하층 인간수업을 체험했다.

”그때 저희 앞집에 살던 아주머니가 떡을 만들어 팔더군요. 잘하면 돈을 많이 벌 것 같았습니다.”

그 때로부터 계영철은 떡에 대해 애착을 가지게 되였고 떡으로 창업해보려고 작심했다. 심양에서 1년 가까이 갖은 고생을 겪고나서 고향인 장춘에 돌아와서는 가슴속에 품었던 떡 창업을 시도해보았다.

집에서 7-8키로메터 떨어진 장춘백화점 부근을 삼륜차로 액화가스며 쌀이며 날라서는 현장에서 직접 떡을 쳐서 팔았다.

“거기서 정말 잘 팔렸지요.”라고 계영철은 웃으며 말했지만 그 웃음 뒤에 어쩔 수 없었던 그 때의 아쉬움이 그대로 묻어나왔다. 비가 오면 못 나가, 바람이 불면 못 나가, 추우면 못 나가 그러다 보니 진작 떡을 팔 수 있는 날은 손꼽을 수 있었고 못 나가는 날이면 그 동안 모았던 돈을 까먹게 된다. 그래서 계영철은 떡장사를 접고 말았다.

계영철은 그렇게 또 몇년을 장춘의 여기저기서 막로동을 하면서 생계를 근근히 유지했다. 그러다가 2003년에 계영철은 자신의 전부 재산인 몇백원을 들고 아계식품가공부를 꾸렸다. 자금이 딸리는터라 떡국을 만드는 기계마저도 지인을 통해 외상으로 매입했다. 그렇게 자그만한 가정집에다 떡국 기계를 앉히고 떡국을 가공해 자전거에 싣고 장춘시내의 조선족들이 산다는 골목과 조선족음식점을 일일히 찾아다닌면서 팔았다.

처음에는 하루에 십원어치도 못 팔 때가 있었다. 심지어 그냥 맛을 보라고 무료로 주면서 홍보까지 했다. 배를 굶어가면서, 악렬한 날씨를 이겨내면서 애쓴 보람으로 두달만에 오토바이를 사게 되였고 또 그뒤로 10개월이 지나 5,000원을 주고 중고차를 갖추게 되였다.

계영철은 명계식품이 성공하기까지는 자기의 부지런한 노력을 빼놓을 수 없지만 또 다른 한면으로는 좋은 분들을 만났기에 가능했다고 말한다.

처음에 전통음식으로 창업을 시작하기로 했지만 기술도 없었고 주변에 도와줄 수 있는 사람도 없었다. 그래서 조선족이 많은 연길에 가면 기술을 배울 수 있겠다고 생각하고 무작정 순대와 떡을 만드는 기술을 배우려고 직원들을 거느리고 연길 서시장을 찾아갔다.

운도 좋았는지 서시장에서 떡을 파는 한 할머니를 만나게 되였다. 무턱대고 떡을 만드는 기술을 가르쳐 달라는 귀찮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씨 착한 그 할머니도 그냥 며칠간 떡 가공 기술을 배워주었다.

기술을 다 배웠다고 생각한 계영철은 돌아와서 그대로 해보았지만 도무지 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날, 그 서시장 떡집 할머니가 갑자기 장춘에 나타났다. 그 할머니는 일주일 동안이나 계영철이네 집에 머물면서 계영철에게 차근차근 기술을 가르쳐 끝내 자기절로 합격된 제품을 만들어 낼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

계영철은 너무도 고마워 그 할머니에게 사례비로 2,000원을 드렸지만 할머니는 극구 사양했다. 그는 돈 때문이라면 아예 오지도 않았을거라고 말하면서 오히려 계영철더러 열심히 일해 큰 식품기업을 일떠세우라고 당부했다.

기자가 명계식품이 성공하게 된 비결에 대해 묻자 계영철은 부지런한 노력, 힘들 때 도움을 주는 지인외에 음식의 품질 안전이라고 대답했다.

“품질을 보장하는 것이 모든 장사군들이 가져야 할 기본이라고 생각합니다.”

계영철은 이렇게 말하면서 자신의 경영리념에 대해 풀이했다.

현재 명계식품에 들어가는 매 한가지 원자재는 모두 엄선된 재료들이다. 훌륭한 원자재에 갖은 정성을 다해 소비자들이 만족해하는 전통음식을 만드는 것이 명계식품의 경영리념이란다.

“올해에 200만원을 투입했습니다.”

계영철은 올해로 15년 째 경영하면서 벌어들인 돈 200만원을 전부 공장의 확대생산에 투입했다. 기계도 전부 한국에서 수입했다. 가공 공예는 더는 말할 나위가 없이 좋으며 품질이나 맛도 조선족들의 구미에 맞는다.

현재 회사는 1,100평방메터의 공장건물에서 10명의 숙련공을 거느리고 규모생산을 하고 있다.

회사에서 생산한 민속음식은 동북3성은 물론 북경이나 연태 등 조선족 산재지역에서도 주문이 뒤따르고 있다.

명계식품은 연길시 미스터닭갈비와 오래동안 거래를 하고 있다. 계영철의 소개에 따르면 미스터닭갈비에서 자신의 요구에 부합되는 떡국을 찾고저 많은 지역을 다녀봤지만 명계식품의 떡꾹을 초월하는 제품을 보지 못했다. 그렇게 시작한 거래가 몇년을 이어 왔고 매번의 거래도 톤단위이다.

“아직도 많이 부족합니다. 더 많은 아이디어가 있기는 하지만 재력이 제한되여 감히 벌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의향이 있는 분들은 언제든지 련락하세요. 같이 꿈을 키워갑시다.”

계영철은 이렇게 말하면서 함께 손잡고 더 큰 미래를 펼쳐나갈 사람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던져주었다.

/길림신문 유경봉, 정현관 기자

파일 [ 1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1209
  • —양로사업을 영원한 직책으로 여기는 ‘이쁜 아가씨’ 박진화의 이야기 “로인을 돌보고 어린 애들을 보살필수 있는 양로원, 고아원을 차리는것이 어릴적 저의 꿈이였습니다.” 아니운서라는 화려한 후광을 벗어둔채 2011년 2월, 호리원으로 탈바꿈하면서 지금 사회복리원 특수호리구역에서 주임...
  • 2018-01-03
  • 뻐스정류소에서 길다랗게 줄지어서서 순서를 기다리는 일본인들/리홍매특파원 일본인들의 줄서기를 그들의 문화라고 하기에는 너무 단순하고 조금은 망설임이 앞서는 일이다. 하지만 줄을 서서 기다리는 것에 거부감이 전혀 없는 듯한 일본인들에 대해 처음에는 생소함을 느끼다가 점차 거기에 적응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
  • 2017-12-26
  • ‘아름다운 추억’ 수기 응모작품 (65) ◇서정숙(중경)     언니가 보낸 다시 돌아오지 않는 〈2016년의 렬차〉란 글을 읽으며 감개가 무량하다.   무정한 세월은 드팀없이 꾸준히도 흘러 장장 45년이 지나 그제날의 갓 사업에 참가했던 짧은 량태머리 언니도, 늦은 공부라도 하려고 학교 다니던...
  • 2017-12-25
  • ‘아름다운 추억’ 수기 응모작품 (64) ◇주청룡(룡정) 1973년, 내가 생산대대의 과학실험소조에서 일할 때였다. 그 때 우리 대대에도 주에서 공작대들이 내려와있었는데 당시 주당위 선전부 리휘 부장이 우리 공사에 온 공작대의 총 책임자로 우리 대대에 와 주둔해있었다. 그 해 여름의 어느 날 리휘 부장은 대...
  • 2017-12-25
  • ‘아름다운 추억’ 수기 응모작품 (63) ◇남걸(목단강) 1976년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목단강시전염병병원에 배치받아 의사사업을 한 지도 어언 40여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매번 백설같이 흰 의사복을 떨쳐입고 병원 각 과실(科室)을 순시할 때마다 나에게 진정한 의사자격을 가져다준 감명 깊었던 40년 전 그 날의...
  • 2017-12-19
  • ‘아름다운 추억’ 수기 응모작품 (62) ◇황혜영 (길림) 50년 전 추억의 색바랜 사진(왼쪽이 어린 시절 필자) 어제밤 비가 억수로 쏟아지더니 아침에 나가보니 아직 익지 못한 시퍼런 복숭아 열매가 나무 밑에 쭉 깔렸다. 복숭아를 볼 때마다 복숭아의 맛보다 그 씨가 어떨가 하는 생각을 먼저 해보는 나다...
  • 2017-12-19
  •   남편류학시절의 경제담보인이였던 노토 아키히로(能登昭博)씨는 대학교 졸업론문을 이라는 테마로 썼을 정도로 중국에 관심이 많은 분이다. 《아사히신문》(朝日新聞) 치바(千葉)동부지역의 판촉업무를 총괄하는 회사경영인이였던 그는 내가 일본에 온 이듬해에 새로운 사업으로 지역신문인 《호오지로》(ほお...
  • 2017-12-18
  • 일본의 선물보따리(자료사진) 어린 시절 엄마 뒤꽁무니를 따라 다니면서 눈으로 얻은 깨달음이라고 할가,“받은 그릇은 절대 빈채로 돌려 보내지 않는다”였다. 이웃사이에 주고 받고 빌리고 빌려 주고 하면서 살았던 그 시절, 동네집 잔치가 온 마을의 기쁨이였고 어느집에 상사가 나면 온 동네가 슬퍼했다. 그...
  • 2017-12-18
  • 〔한국서 홀로서기∼나는 이렇게 살았다〕 9년을 하루와 같이 문화봉사를 해온 석복순녀사의 감동 스토리 석복순(맨 앞)강사가 춤을 가르치고 있다 돌이켜보니 내가 2007년 둘째딸을 따라 한국에 올 때 나이가 예순이였으니 10년이 지난 오늘 어언 일흔이라는 고희의 나이로 되였다. 그간 줄곧 소외된 사람들에게 춤을 ...
  • 2017-12-12
  • (흑룡강신문=하얼빈)채복숙 기자 = "저희 기금회는 2012년에 랴오닝성민정청의 2급 법인으로 설립되어 대략 2년 여 동안 운영하다가, 2014년에 독립법인을 신청해, 2015년 1월에 정식 허가증이 내려왔습니다. 기금회가 설립되어서부터 지금까지 조선족사회의 많은 지원을 받아 왔습니다. 우리는 더 많은 사람들에게 기부문...
  • 2017-12-12
  • 〔한국서 홀로서기∼나는 이렇게 살았다〕 9년을 하루와 같이 문화봉사를 해온 석복순녀사의 감동 스토리 석복순(맨 앞)강사가 춤을 가르치고 있다 돌이켜보니 내가 2007년 둘째딸을 따라 한국에 올 때 나이가 예순이였으니 10년이 지난 오늘 어언 일흔이라는 고희의 나이로 되였다. 그간 줄곧 소외된 사람들에게 춤을 ...
  • 2017-12-12
  • 우리 집 가까이에 살고 있는 량씨는 일본에 온지 10년째 되는 한족 료리사이다. 어느 날 그가 찾아와서 답답한 마음을 털어놓았다.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을 장가 보내고 나니 빈털터리가 됐어요” 18살 때부터 료리를 배웠다는 량씨는 일본어를 전혀 접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였다. 갓 마흔살에 접어들면서 일본...
  • 2017-12-11
  • ‘아름다운 추억’ 수기 응모작품 (61) ◇김동화(연길) 30수년전 그 때 그 학생들과 함께 남긴 기념사진 세월은 류수와 같다더니만 정말 만질 수도 걷잡을 수도 없는 것이 바로 시간의 흐름인가 본다. 어언 70을 코앞에 두고 보니 가끔씩 따르는 크고 작은 추억들로 머리를 메운다. 올해 제33회 교사절을 즐...
  • 2017-12-11
  • ‘아름다운 추억’ 수기 응모작품 (60) ◇김규칠 구술 김숙자 대필 행복한 만년을 보내고 있는 김규칠 로인 부부 내 나이 금년에 80이다. 긴 세월 수많은 일들을 겪다 보니 잊혀지지 않는 사연도 많다. 그런데 요즘 인정세태가 삭막해서 그런지 그 때 그 일이 어쩐지 더 자주 떠오르군 한다. 온 나라가 문화대혁...
  • 2017-12-11
  • 〔한국서 홀로서기∼나는 이렇게 살았다〕 “나는 스승을 잘 만나 성공했다” 가수, ‘아리랑 난타’ 단장 아이수의 성공담에서 내가 한국 온 년도가 2004년이니 올해로 벌써 10년 하고도 3년이 된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했는데 그간 나의 한국생활에도 적지 않는 변화가 있어 자부를 느낀다...
  • 2017-12-11
  • 며칠전 묵직한 편지봉투 하나가 우리집에 날아왔다. ‘항상 감사합니다. 더 받은 송금료 164엔을 돌려 드립니다. 또 기회가 되면 잘 부탁합니다’ 짤막한 메모용지와 함께 동전 164엔이 들어 있는 봉투였다. 나는 적혀 있는 번호로 전화를 걸어서 영문을 물었다. 사실은 지인의 부탁으로 인터넷경매에서 옛...
  • 2017-12-10
  • ‘아름다운 추억’ 수기 응모작품 (59) ◇리희숙(안도) 애청자협회 열성자로 뛰고 있는 필자 리희숙 격정과 활력에 끓어넘치며 정열에 불타던 그 청춘시절, 걸탐스레 지식을 배워가며 희망과 기대에 부풀었던 학창시절을 마치고 ‘광활한 천지에는 할일이 많다’는 모주석의 지시에 따라 우리는 1965년...
  • 2017-12-05
  • 아름다운 추억 수기 응모작품 (58) ◇전영실(연길) 등산길에서의 필자 전영실 지금으로부터 40년 전, 취업통지서를 받고 우전국 인사과로 등록하러 갔던 때의 일이 어제런듯 눈앞에 삼삼하다. 한 나이 지긋한 책임일군이 반가이 맞아주며 “동무는 무슨 특장이 있소?” “어떤 일을 하고 싶소?” 하며...
  • 2017-12-05
  • 내가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는 일본에 온지 일년후였다. 그때 야마모토 타마에(山本 多摩江)씨는 우리가 사는 지역의 국제교류협회 책임자였다. 영어에 능한 그녀는 외국인들과 접촉할 기회가 많았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내성적이고 소극적인 대부분의 일본인들에 비해 적극적이고 활달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일본...
  • 2017-12-05
  • 각 지역 촌마다 빈곤해탈 난관 공략전이 치렬하게 펼쳐지고 있는 요즘, 누구보다 마음 한켠이 조급해나는 한 젊은이가 있다. 연거퍼 몇달동안 집에 내려가지 못한 채 농촌사업터에서 빈곤해탈사업을 위해 뛰여다니느라 낮과 밤을 잊은 그는 바로 룡정시 백금향 빈곤부축판공실 주임 홍광철(33살)씨다. 룡정시 백금향 빈곤부...
  • 2017-12-01
‹처음  이전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다음  맨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