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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추억 112] 인민대회당 건설에 땀 흘리던 나날
조글로미디어(ZOGLO) 2018년11월23일 00시00분    조회:1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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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회 ‘아름다운 추억’ 수기 응모작품 (40)

▩최금란(대련)

 

 
텔레비죤 화면을 통하여 당대표와 인민대표, 정치협상회 위원들이 북경에 모여와 인민대회당에서 국사를 의논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나는 솟구치는 감회를 금할 수 없다. 인민대회당을 건설하던 의무로동의 잊지 못할 나날들이 어제런듯 나의 눈앞에 펼쳐진다.

 

그것은 1958년도의 늦가을이였다. 그 때 북경에서는 국경 10주년을 앞두고 만인대강당(후에 ‘인민대회당’이라고 하였음), 중국인민혁명군사박물관, 민족문화궁, 전국농업전람관, 중국력사박물관, 중국혁명박물관, 북경로동자체육장, 조어대국빈호텔, 북경역전, 화교호텔 등10대 건물들을 짓느라고 열의충천할 때였다.

중앙국가기관들에서는 모두 이 건설장에 의무로동대군을 파견하였다. 우리 중앙인민방송국 대외부(지금의 국제방송국) 편집부문에서도 번마다 반달씩 약 30명 좌우의 편집, 방송일군들을 인민대회당 건설공사장에 파견하였다. 나도 그들중의 한사람으로 인민대회당 건설현장에 두번 나가 의무로동에 참가한 적이 있었다.

우리는 아침마다 방송국에서 파견하는 전용차에 앉아 천안문광장의 서남쪽에 있는 넓은 공사장으로 갔다. 시공 현장은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곳곳마다에 각종 건축용기재들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었다.

첫날에 관리부문에서는 우리 매개인에게 안전모와 어깨바대를 하나씩 나누어주었다. 우리는 저마다 버들로 엮은 큼직한 안전모를 눌러쓰고 웃옷 우에 어깨바대를 올려놓고 끈을 매였다. 의용을 바꾸니 대번에 우리는 막로동자로 변해버렸다. 사무실에 앉아 붓대를 끄적거릴 때는 저마다 한다는 재간둥이였지만 공사장에 나오니 그저 잡공이나 심부름군 노릇 밖에 할 수 없었다.

처음에 우리는 푸른색 오지기와를 날랐다. 처음 몇번은 그래도 괜찮았는데 해종일 기와장을 나르려니 어깨와 팔다리가 쑤셔났고 허리도 펴기 힘들어졌다. 나 같은 사람은 그래도 농촌에서 거칠게 자랐으나 우리 대외부의 방송, 편집 일군들 속에는 화교나 도시에서 자란 ‘아씨’ ‘도련님’ 출신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도 가냘픈 몸을 아끼거나 잔꾀를 부리지 않고 열심히 일하였다. 그러다가 휴식시간만 되면 너나없이 땅바닥에 벌렁 드러누워 아픈 팔다리를 쉬웠다. 휴식이 끝나면 또다시 기여일어나 땀을 철철 흘려가며 안깐힘을 다해서 일을 많이 잘하려고 애썼다.

이 건설장에서 하루에 일하는 사람이 무려 만명이나 된다고 하였다. 그런데 희한한 것은 그저 노는 사람은 한사람도 없이 어느 사람에게나 할 일들이 빠듯하게 배치되여있다는 점이였다. 그 빈틈없는 로동력 조직과 배치에 실로 감탄이 갔다.

후에 우리는 또 회가루 포대를 날랐다. 뽀얗게 회가루를 뒤집어쓴 데다 땀까지 흘려서 얼굴들은 너나없이 알락고양이로 되였지만 누구도 어지럽다거나 바쁘다고 두덜거리지 않았다. 점심때가 되면 똑같이 차례지는 찐빵이나 옥수수떡 서너개에 짠지쪼각을 타서 들고는 달게 먹어대였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국경 10주년을 맞으며 북경에서 10대 건물을 짓는데 그중에서도 으뜸으로 치는 것이 인민대회당이라고 했다. 건물 수명은 적어도 350년 이상을 담보해야 한다는 주총리의 지시가 있었단다. 그러니 설계로부터 재료와 시공에 이르기까지 최선을 다해야 하였다.

저녁에 집으로 돌아갈 때면 기진맥진하여도 이튿날이면 또 어김없이 일터로 나갔다. 비록 보잘 것 없는 막로동을 하였지만 주총리께서 직접 지휘하시는 위대한 공정에 힘을 보태고 있다는 긍지로 하여 우리의 젊은 가슴들은 부풀어올랐다.

1959년 초여름에 두번째로 의무로동을 갔을 때는 주체공정이 일어나서 모양새가 좀 알리였다. 벽채 옆에는 숱한 선반들이 거미줄처럼 세워졌고 건물 안팎도 사람들로 법석이였다. 한 넓은 칸에선 목수들이 줄줄이 늘어서서 대패질을 하였는데 잠간 사이에 그들의 발밑에는 대패밥이 수북이 쌓였다. 나는 그 대패밥을 부지런히 쓸어내는 일을 맡아하였다.

목수든 미장공이든 전공이든 용접공이든 철공이든, 이 건축공사장의 모든 기공들은 죄다 솜씨가 출중한 공장들이였는데 전국 각지에서 뽑아왔다고 하였다. 각종 건축용 기재들도 전국각지로부터 가장 좋은 것들을 추려서 가져왔단다. 우리 장백산의 홍송도 인민대회당 건설에 한몫을 담당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만인강당의 중심에 달, 오각별 전등을 책임지고 제작 생산한 상해의 한 전구공장에서는 다 만들어놓은 그 큰 오각별 전등을 손상없이 북경에 운송하기 위해 로동자들이 자기들의 이불 32채나 가져다 싸서 보내왔다는 감동적인 사연도 전해졌다.

우리는 유리를 나르든 벽돌을 나르든 참대를 묶어 세워놓든 현장을 청소하든 자기들이 하는 모든 일을 성스럽게 여겼다. 벽돌 한장이라도 깨여질세라 조심했고 못 한대라도 땅에서 굴러다니면 주어 못통에 넣었다.

의무로동이 끝나는 날 오후였다. 우리들이 짓는 집이 도대체 얼마나 큰가 한번 돌아보고싶었다. 우리 몇몇이 울퉁불퉁하고 거치장스러운 건축현장을 다 돌기엔 기운이 역부족인데다 보았대야 아직은 무엇인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그저 특이한 것은 1, 2층도 채 되지 않았는데 그 웃층들, 지어 지붕까지도 동시에 일어서면서 층층마다에서 사람들이 분망히 일하고 있는 것이였다. 이것을 ‘복합식 시공방식’이라고나 할는지? 곳곳에서 목공청년돌격대, 벽돌공, 콩크리트공, 미장공 등 여러가지 공종의 청년돌격대 기발들이 펄펄 나붓기고 있었다. 아마도 이런 청년돌격대 대원들이 중책을 떠메고 앞장에 서서 온갖 난관을 물리치며 열의충천하게 일한 데서 시공진도를 크게 단축시키지 않았는가 생각되였다.

그 후의 보도에 따르면 인민대회당은 1959년 9월 10일에 완공되였다. 이렇게 방대한 인민대회당 건설공정을 10개월에 완수하였다니 실로 건축사상의 기적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은 2만여명 로동대군이 밤낮없이 분전한 결과이며 전국 각지의 대폭적인 지원과도 갈라놓을 수 없습니다.” 모주석을 배석한 만리동지의 말씀이였다. 모주석께서는 “명예도 리득도 따지지 않고 일심전력으로 일한 그들에게 워낙 기념비를 세워주어야겠는데 사람이 너무 많아 이름조차 비석에 다 써넣을 수 없으니 만인강당을 ‘인민대회당’이라고 합시다.”라고 하시였단다.

국경절이 지난 10월 8일에 인민대회당에서는 수도 10대 공정의 승리적인 준공을 경축하는 대회가 있었다. 주총리께서는 전체 건설자들에게 뜨거운 감사와 위문을 표시하였고 북경시 팽진 시장께서는 나라의 주인으로 된 건설자들의 위대한 창조력과 적극성을 높이 찬양하셨다.

인민대회당의 남북 길이는 336메터, 너비 206메터, 제일 높은 곳은 46.5메터여서 뫼산(山)자를 이루었다. 인민대회당은 크게 3개 부분으로 구성되였는데 북쪽에는 5000개 좌석이 놓여있는 연회청이고 중간은 만인대강당, 남쪽에는 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의 사무청사가 있다.

만인강당은 이름 그대로 만개의 좌석이 있어 만인을 용납할 수 있는 큰 강당이다. 그 곳에는 16가지 언어를 동시에 통역, 전달할 수 있는 이어폰 설비와 도착 신고(접수), 즉석발언, 표결 등 세가지 기능을 일체화한 설비가 갖추어져 있다. 강당의 천정은 큰 오각별 등을 중심으로 주위에 500개의 등으로 만천성을 이루었는바 해바라기가 태양을 따르는 주제와 ‘수천일색, 혼연일체’의 미감을 체현하였다.

천안문의 서남쪽에 자리잡고 있는 인민대회당은 전국 여러 민족 인민들의 지성에 받들려 가장 출중한 장인들이 가장 좋은 건축재료와 가장 빠른 속도로 국사연구의 중심청사를 일떠세웠던 것이다. 우리들의 깨끗한 정성과 청춘의 땀방울도 그 곳에 스며있다고 생각하니 더욱 감개무량하다.

인민대회당은 새 중국이 걸어온 빛나는 려정을 력력히 기록해가면서 수도의 하늘을 떠이고 억만 인민들의 마음속에 거연히 솟아있으리라!

길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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