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일본응모글짓기] 내가 걷는 이쁜 길
조글로미디어(ZOGLO) 2019년7월31일 13시26분    조회:1768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오늘은 토요일이라 애들이 작문배우러 오는 날이여서 여느때보다 일찍이 일어나서 아침 먹고 이쁘게 화장을 하고는 반시간 앞두고 림시로 빌려쓰고 있는 로인대학2층교실로 향했다.

  그런데 몇몇 애들이 벌써 날 기다리고 있었다. 날 본 애들은 쫑그르 달려와서 저마다 나한테 인사를 했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내가 인사를 받자 손태홍이 내 가방을 받아드는 것이였다. 애들에게 둘러싸인 나는 2층으로 향해 올라갔다. 걸음마다 가벼웠고 가슴은 저 바다처럼 설레이기만 했다.

  내가 어느새 이렇게 애들이 찾아와주고 또 존경을 받는 선생님이 되였단 말인가!

  나의 가슴에는 저도몰래 문학이란 이 울퉁불퉁하지만 그래도 신비함과 즐거움이 동반된 길을 선택해왔던 추억들이 봄풀처럼 새파랗게 돋아나면서 나를 감미로운 추억속에 빠지게 했다.

  네살에 다리가 장애로 된 그날부터 나의 동년은 향기잃었고 가슴에는 검은 그림자가 자리틀고 앉아있었다.

  소학교와 중학교까지 공부했지만 그러나 다리가 불편한 탓으로 쩍하면 결석했고 또 다리치료를 하느라고 공부를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 그시절 나에게 있어서 유일한 마음의 달래임이란 아버지께서 사주신 책들을 읽는 것이였다. 책을 읽고 또 읽고하는 사이에 어느새 작문쓰는 수준이 늘어났다. 그러면서 성인이 된후에는 생활속에서 아름다운 색갈을 골라 황홀한 인생을 만들고 싶어졌다. 그래서 선택한것이 바로 글쓰기였다.

  글쓰기는 어떤 때에는 경이로움 그 자체였으며, 어떤 때에는 감동이었으며, 어떤 때에는 무지개같은 아름다움이었으며, 또 어떤 때에는 무거운 부담이였고, 또 어떤 때에는 밑지는 일 같기도 했다. 그러나 이 세상 취미중에서 아마도 글쓰기 취미가 제일 아름다운것 같았다. 중학교 수준밖에 안되는 나에게 있어서 문학의 길은 정말 어렵기가 말이 아니였다. 다른 문우들은 작가양성반에서 많이 배웠지만 나는 그럴 상황도 못 되여 단지 책을 많이 읽은 기초상에서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말 그대로 무거워나는 삶이였다. 고됨의 시작, 실패의 아픔속에서 해가 뜨고 질때마다 가슴에 새겨넣는 한마디-힘을 내여 다시한번 성공을 위해! 바로 이런 야무진 결심이 날 그냥 이 길을 걷게 했던것이 아닐가!

  난 그 어느때면 어찌보면 좀 이악스런 여자가 아닌가 싶다. 30대에 함께 문학의 길을 선택한 여자친구 넷이 있었는데 후에 모두 포기했지만 나만은 그냥 고집을 꺾지않았다. 끝없는 동경, 무수한 기다림속에서 글들이 한편 또 한편 실리는 그때의 그 기분은 무엇으로 형용할수 없었다.

  인간만사 새옹지마라고 때론 화가 복으로 전환되고 잃음이 얻음으로 바뀔때가 있나부다. 글쓰기를 통해서 나는 나의 심령을 세척시킬줄 알았고 아무리 세찬 파도도 이겨내고 오직 웃을수 있는 여인으로 될수 있었다. 그 수확이 너무나도 컸다. 이것이 바로 내가 오늘까지 애들에게 작문을 가르칠수 있는 기초로 된것이기도했다.나는 나의 삶을 살아오면서 글만 쓸것이 아니라 차세대들에게 우리문화와 전통을 알게하는것을 사명감으로 느끼고 2002년도에 소학교학생들에게 작문지도를 시작하기로 결심했다.

  처음에 내가 소학교교원인 황순자선생을 찾아 나의 생각을 털어놓았더니 대번에 찬성이였다.

  “참 좋은 생각이예요. 그러잖아도 지금 각 반의 담임교원들이 학생들의 작문수준이 너무 차해 골치 아파하거든요. 지금 애들은 이상할만치 조선어작문보다 한어작문을 더 좋아하고 있어요. 학교에 작문양성반이 따로 없어 애들이 과외로 지도받으면 좋지요.” (우리민족의 아름다운 글을 쓸 사람 많이 배양하는것이 인제부터의 나의 삶이구나.)나는 이렇게 마음을 굳혔다. 나는 학생들이 공부하지 않는 날인 토요일와 일요일을 리용하여 작문을 배워주기로하고 그해 3월 16일에 첫 시간을 시작했다. 그날 안도현 제일 실험소학교 4학년의 열명의 학생들이 담임선생님인 이현자씨의 인솔하에 우리 집에 왔다. 귀엽게 생긴 애들을 보는 나는 책임감과 민족의 사명감을 느꼈다.

  그날 작문을 씌여보니 들은바와 같이 습작능력이 차한 애들이 대부분이였다. 틀린 글자가 수두룩했고 사투리도 많았다. <<친구>>를 <<동미>>, <<고추>>를 <<고치>>, <<무우>>를 <<무끼>>, 거기에다 전기밥가마, 텔레비전, 냉장고, 아파트, 빵과 같은 명사는 조선말로 어떻게 하는지 몰랐다. 또 어떤 단어는 한어말 발음대로 쓰기도했다.

  “우린 무슨 민족입니까?”내가 묻자 애들이 일제히 “조선족입니다.”하고 소리높이 대답했다.

  “그런데 왜서 표준적인 조선말을 몰라요?”

  “아버지 엄마도 그렇게 말해서 배웠지요.뭐”

  “이제부터 작문에다 한어말을 쓰면 안돼요. 부드럽고 아름다운 우리말을 쓰자요”나의 말이 떨어지자 몇몇 아이들이 조선어작문보다 한어작문을 쓰기가 더 쉽다고했다. 천진하고 거짓없는 애들을 나는 리해할수 있었다. 한족이 80%비률을 차지하는 이곳에서 한어말과 접촉하는 기회가 많은것은 사실이다. 특히 학생들은 학교에 가면 한어시간을 보고 집에 가면 즐겨보는 동화이야기도 한어말로 시청하다보니 한어능력이 강해지기 마련이다. 그렇다고 이 주어진 환경만 탓할때가 아니다. 최대한으로 우리글을 중시하는것을 기반으로하여 하나의 운행의 축을 이루어야한다.

  나는 애들에게 미래와 결부시켜 표현이 풍부한 아름다운 우리 언어와글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례의, 도덕 문제도 홀시하지않았다. 훌륭한 사람으로 되자면 수선 도덕수양을 갖추어야한다. 지금의 아이들은 남을 양보하고 리해하고 사랑함이 너무차하다. 생명을 주신 부모님께 감사할줄도 모른다. 나는 애들에게 부모님께 감사를 표시하기, 문안드리기, 공공장소에서 지켜야할 도덕, 불우이웃돕기 등 아름다운 마음을 심어주기도 했다. 그리고 매번 작문시간마다 애들에게 인성교육을 시키는것을 홀시하지 않았다. 그것이 처음에는 싹이 트고 꽃이피더니 날로 열매 맺어갔다.

  “선생님, 요즘 우리 애가 종래로 하지않던 아침인사를 엄마아빠한테 하고 있어요.” “제 밖에 모르던 우리애가 마음이 후해졌어요 선생님이 가르쳤다 했어요”

  "우리애는워낙내가만든음식이면늘맛없다고투정질했는데작문반에다닌후부터그습관이고쳐졌습니다."

  학부형들이 무척 좋아했다. 나는 우리의 미래인 아이들한테 도덕 품질 교육 또한 중요한 과제란 것을 깊이 느꼈다.

  정성이 지극하면 돌우에도 꽃이 핀다고 처음에는 한참 모지름써야 작문을 쓰던 애들이 시간이 흐르자 눈에띄우게 진보했다. 박소옥이라는 애는 처음에 작문한편을 쓰면 틀린글자가 수없이 많았는데 일년이되자 제법 잘 써 학교에서 진행하는 어느 활동에서글을 잘 쓴다고 반급을 대표하여 발언고까지 썼다.

  2003년 3월 16일 우리집에 온 애들이 나를 밖으로 나가란다. 무슨 감투끈인지도 모르고 나는 <<쫓기워>>나갔다. 한참후 애들이 일제히 소리쳤다.

  "선생님 들어오십시요"조심스레 문을 연 나는 그만눈앞의 정경에 멍해졌다. 천정에는 여러가지 고무풍선들이 드리워있었고 벽은 색종이로 만든 꽃들로 장식되였다.

  “선생님 오늘은 우리가 작문을 배운지 꼭 일년이 되는 날입니다. 원래는 모레 축하파티 열자고 하다가 그날 우리는 작문을 써야 하기때문에 시간이 없어서 오늘 미리 엽니다. 그간 선생님 수고 많았습니다. 선생님 사랑해요.”조직자인 공련희가 이렇게 말하며 색종이로 만든 모자를 나의 머리에 씌워주자 와그르 박수소리가 터졌다. 그다음 애들은 자기가 가져온 음료와 과자를 나의 품에 안겨주었다. 순간 나는 눈시을이 젖어듬을 어쩔 수 없었다. 분명 우리 애들은 우리글을 사랑하고 있었다. 그러길래 나를 좋아하는 것이 아닐가! (좀 더 힘을 내야겠다 )그날 애들의 소행은 한줄기의 감로수로 되여 나의 가슴속에 찰랑대며 흘러들었다. 2013년 11월 나는 의외의 사고로 다리가 골절되였다. 석달동안 일어설 수 없는 형편이여서 작문반을 잠시 더 할 수 없는 상황이였다. 그런데 학부모들이 너도나도 전화가 왔다.

  "우리애가 한창 작문에 취미를 두고 있는데 안하면 애가 취미를 잃을가봐 걱정이 되여서 어쩌죠?"

  "이거 정말 큰 일 났군요. 우리집 애가 그냥 중국말만 하다가 작문반에 다닌 후부터 우리하고 조선말하고 있는데 작문반에 안 가면  또 그 버릇이 도질 것 같아요"

  나는 정말 딱한 처지였다. 이런 기회에 정말 한동안 푹 쉬고 싶었다. 그러나 학부형들의 안타까운 목소리를 듣는 순간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래서 나는 작문반을 그냥 하기로 마음먹고는 애들한테 다리에 한 깁스를 안 보이기 위해 포대기를 다리에 덮고 애들을 맞이했다. 처음에 오는 애는 남편이 문 열어준다. 그 다음 남편이 출근한다. 그 다음부터 먼저 온 애가 후에 온 애들한테 문을 열어주기를 하면서 석달동안 쉬지 않고 가르쳤다. 어떤 애들은 내가 일어서지 못한다고 장난을 쓰기도 했지만 그러나 대부분 애들이 내 아픈 마을을 헤아려 주었다. 작문 쓰다가도 일어서지 못하는 날 보고 물 마시겠는가고 묻는 애도 있었도 집에서 맛나는 간식도 가져 와서는 내입에 넣어주는 애도 있었다. 이렇게 하루하루를 지내면서 나는 끝내 일어설 수 있는 석달동안을 포기하지 않았다. 내가 힘들었지만 그러나 애들한테는 수확이 컸으리라.

  애들의 적극성과 신심을 불러일으키기위해 나는 애들의 좋은 글들을 여러간 행믈에 추천해서 발표되였고 여러 응모작에 추천했는데 큰 상으로는 대상, 다음은 금상, 은상, 동상 등에 선정된 작문들이 많다. 제일 가슴 뿌듯한 것은  kbs방송에 많은 애들의 글이 방송된 것이다. 아나운서의 이쁜 목소리로 자기가 쓴 글을 방송 듣는 애들의 얼굴마다 꽃물결이 출렁댔다.

  특히 2016년도 6월 16일에 방송된 노건우 학생이 쓴 작문 "고모님의 사랑"은 적지 않은 사람들의 감동을 자아냈다.

  그 글을 녹음한 걸 노건우 고모한테 보내주었는데 노건우 고모는 물론 그와 절친하게 지내는 열두 명 친구들도 모두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고 했다. 이런 사연을 들었을 때 나도 저도모르게 눈시울이 젖어 들었다. 우리 글을 쓰기 싫어하던 노건우가 작문반에 와서 우리글을 사랑하면서부터 쓴 작문이 이렇게까지 큰 감동을 일으켰기때문이다.

  매번 작문 배우러 와서는 들어서기 바쁘게 우리말로 된 책을 펼치는 애들의 모습에서, 그리고 서로간에 표준적인 우리말로 대화하는 걸 볼 때면 내가 애써 온 결실이 보인다.

  2005년 여름에 안도현텔레비에 내가 애들을 가르치는 사적이 방송되자 안도현 교육국 새일대 관심협회의 유관책임자가 날 부르더니 여름방학에 진행되는 <안도현의 감동인물> 대면하기 활동에 참여해 달라고 청들엇다. 그래서 나는 그해 방학간 안도현 제일실험소학교와 제3소학교 그리고 5중 등 학교를 다니면서 학생들앞에 나서서 자신이 걸어온 작가길을 소개하게 되였다. 매번마다 백 여 명되는 학생들의 박수갈채를 받은 나는 그때 얼마나 행복스러웠는지 모른다. 끊임없이 애들과 만나고 헤여지고 또 만나고 이렇게 반복되는 삶속에서 애들같은 순진하고 천진한 마음으로 하늘을 보고 별을 보고 세상을 바라보면서 느낀 감성을 시로 써보기도했는데 2016년도에는 동시집<<꿈나무 사랑나무>>도 출간했다. 그 책을 출판할 때 박민정이란 학생이 자기가 모아 둔 세배돈 8천6백원을 보태 주겠다고 했을 때 나는 진짜 눈물 흘리고야 말았다. 애들에게 자그만한 사랑을 베풀었을뿐인데 이같이 큰 사랑을 베풀려고하는 그 학생, 내가 하는 글 쓰는 일과 애들을 가르치는 일은 진정 보람이 컸다.내가 선택한 길은꽃무지개 활짝 펼쳐진 이쁜길이다. 그래서 내일도 더 먼 훗날에도 이 길을 걸을 것이다. 드팀없이 변함없이...

흑룡강신문

파일 [ 1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1209
  • 흰눈이 포근히 덮인 시골집 굴뚝에서 보기좋게 연기가 솟아오른다. 12월21일, 연길시 춘흥촌 신광5대 김종학대장의 집에서는 웃음소리, 노래소리가 넘쳐났다. 전통명절 동지를 맞으며 팥죽잔치가 펼쳐졌다. 마을 지키는 노인들에 인근부락의 노인들도 청해와 신광의 입쌀, 찹쌀과 팥으로 동지 팥죽을 두가마 가득 지었다. ...
  • 2015-12-22
  • 지난12월 20일, 개원호텔에서 후사모(후대사랑협회) 송년회가 있었다.   송년회는 리경호 회장의 축사와 함께 시작되였다. 후사모는 올 한해 정말 많은 좋은 일들을 하였다. 120여명의 회원들로 이루어진 후사모는 매주 자원봉사를 하고 있으며 장학생들을 선정하여 지원하고있다.   후사모는 올 한해 총10회의 ...
  • 2015-12-21
  • (흑룡강신문=하얼빈) 리헌 특약기자 = 일전 중앙문명판공실과 중국문명넷에서 공포한 '중국의 좋은 사람(中国好人)'추천,평의결과에 한 조선족가정이 '중국의 좋은 사람'에 들어 화제를 모으고 있다 이 화제의 조선족가정이 바로 목단강시 서안구 목단조선족가도 서장안사구의 주민 리봉구(李峰九,51세), ...
  • 2015-12-21
  • 17岁的叶石云是云和县崇头镇梅竹村人。   2009年秋,母亲石明秀和父亲叶明松在49天内先后因病去世,留下11岁的他和81岁的爷爷相依为命。   母亲去世前已生病多年,父亲为此欠下了总计3万元的债务——这些债务没有一张借条,但11岁的叶石云决定替父还债。   捡废品、干零活,6年来,叶石云共计挣到22800元。...
  • 2015-12-20
  • 민간기부단체인 '고사모(회장 한설화)'에서는 19일, 연길 천년웨딩홀에서 총화모임을 갖고 한해를 뒤돌아보고 새해를 기약하는 소중한 자리를 마련했다. 우리 주위에는 사랑을 실천하는 사회단체가 참 많다 고사모도 그중의 한개 한체이다. 비록 설립된지 1년도 채 안되지만 그들이 불우이웃에 대한 사랑은 그 여느...
  • 2015-12-19
  • 어릴때부터 선생님이 되고싶다는 꿈을 가진 연길시 의란진 금성촌의 주설매(23살)는 연변대학사범분원을 졸업하고 연변대학유치원의 선생님이 되여 행복한 나날을 보냈다. 그러나 그 행복도 잠시, 주설매의 가정에는 잇달아 불운이 닥쳤다. 지난해 9월, 몸이 불편해 병원을 찾은 주설매의 어머니는 자궁내막암이라는 확진을...
  • 2015-12-17
  • 사진기를  메고  산과 들을  넘나들며          리해숙할머니. “인생에 너무 늦은 시작이란 없다.” 이는 76세부터 회화에 전념하여 80세에 개인전을 열면서 세상에 이름을 떨친 미국 녀류화가 모지스 할머니가 사람들에게 일깨워준 도리이다. 대기만성한 모지스 할머니...
  • 2015-12-15
  • 고향을 다시 찾은 박금숙 김창복 로인 내외분. 옛 인터뷰를 회고하면   《중국민족》잡지 2013년 2기에는 필자의 “하면 된다는 말을 팔순이 돼서야 실감하고 있어요” 란 제목으로 박금숙, 김창복 부부를 취재해 쓴 기사를 실은적이 있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1993년 정년퇴직을 맞은 박금숙, 김창복 부부...
  • 2015-12-08
  • 李相富事迹简介       李相富,男,朝鲜族,1948年8月生,中共党员,延吉市灵通按摩院院长。       李相富是河南街道白玉社区居民,30年来,他独自撑起家庭重担,不离不弃、悉心照顾患病妻子,善行义举感动街坊四邻,成为一段佳话广为传颂。     &...
  • 2015-12-08
  • 영국아기 '호프 리'의 모습 세상의 빛을 본지 1시간밖에 안된 아기가 최년소로 장기기증을 하고 하늘나라로 떠났다. 1일(현지시간) 가디언 등 영국언론에 따르면 아기엄마인 에마 리와 아빠인 드루 리는 지난주 태여나 74분만에 숨을 거둔 딸아이 '호프'(Hope)의 신장과 간세포를 성인환자에게 기증했다. ...
  • 2015-12-03
  •                  (흑룡강신문=하얼빈)리강춘 특약기자=길림성 왕청현 신화사회구역 남산소구역에 살고있는 올해 102세에 나는 손춘영로인은 이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고있다.   손춘영과 남편 서위희는 3남 2녀를 두었는데 자식들은 모두 효성스러웠다. 딸들이 시집가고 아...
  • 2015-12-01
  • 이주민의 경험이 우리 사회에 준 선물 이해응 (서울시 외국인명예부시장.조선족) “고향이 어디에요?” 정체성 고민이 시작되다 ‘내가 누구인가’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한 것은 대학생 시절에 한 한국인 유학생이 나한테 던진 질문 한마디 때문이었던것 같다. “고향이 어디에요? 중국 고향 말고...
  • 2015-12-01
  •   길림대학 연변항공승무학교(교장 최옥금)에서는 학교 설립 10주년을 맞으며 11월 26일 ‘사랑으로 가는 길’프로에 1만5천여원 쾌척하는 등 뜻깊은 행사를 개최했다.   이 학교의 학생들은 '비상애심봉사단'을 내오고 사랑의 모금행사를 펼쳐 5천여원을 모금했다. 학생들의 사랑의 마음이 담...
  • 2015-11-26
  • 길림성 연길시 건공가두 장신사회구역에서는 20명의 사회구역공작인원들과 주민지원자들을 조직하여 중국 중앙방송국 CCTV-13프로그램 촬영에 참여하였다. 이른 아침, 20명의 지원자들은  홍보영상 촬영을 위해 조선...
  • 2015-11-26
  • 애심천사원에 대한 연변무역인협회의 사랑은 오늘도 이어지고있다. 11월 26일 오전,  연변무역인협회(회장 허재룡)에서는 연길 발전에 위치해있는 '애심천사원'에 따뜻한 사랑을 전하기 위해 '사랑의 모금행사'를 펼쳤다.  무역협회에서는 2틀전부터 모금행사를 진행, 짧은 시간내에 양말, 피자...
  • 2015-11-26
  •         11월 19일 이른 아침, 연길시 건공가두 청산소구역의 한 할아버지는 살을 에워싸는 추위에도 꿋꿋이 홀로 눈을 치우신다.    올해 74세의 로당원이신 유영식 할아버지는 매번 눈이 내리는 날이면 주동적으로 눈을 치우시곤 한다. 오늘도 어김없이 소구역내의 쌓인눈을 보시고는...
  • 2015-11-25
  •  11월19일 연길시에는 큰 눈이 내렸다.찬바람과 급강한 기온은 사람들로 하여금 추운겨울이 왔음을느끼게 해주었다.연길시 구조관리잠 사업일꾼들은 거리를 순찰하면서 구조활동을 펼치였다.  당일 8시쯤 시구조관리잠 사업일꾼들은 수상시장,서시장등 류랑구걸인이 비교적 집중된곳에 도착해 그들을 찾아나섰다...
  • 2015-11-24
  • 남돕는 즐거움을 보약으로 매일마다 짬만나면 지역사회를 돌아보며 이웃의 환자나 독거로인들을 살펴보는 백발로인이 있다.그가 바로 연길시 건공가두 장림지역사회의 72세 최복주이다. 일찍 연길시연남소학교에서 당지부서기로 사업하다 퇴직한 최선생은 퇴직하자 바람으로 자기를 지역사회에 맡기였다. 처음에는 선생님의...
  • 2015-11-23
  • 11월18일 30여명의 독거로인들의 즐거운 모임이 연길시 공원가도 원월사회구역(园月社区) 양로활동실에서 열렸다.민족불문,나이를 불문하고 그들의 얼굴에는 웃음이 넘쳐흘렀으며 관심과 보살핌을 받고있음을 느낄수 있었다.   “情暖夕阳红”을 주제로 한 이번 모임은 한 시간 정도 진행하였으며 사회구역...
  • 2015-11-23
  • 연길시 건공가두 장신사회구역 봉사자들은 2011년“三帮扶”활동을 전개한 이래 줄곧 로인들을 보살핌의 대상으로 여기고 정기적으로 문전방문하여 각종봉사를 진행하고 있다. 지난 11월18일 오전,길림성 연길시 건공가두 장신사회구역 "칠색무지개봉사센터" 봉사자들은 거동이 불편한 70세 고령의 독거로인 리숙...
  • 2015-11-20
‹처음  이전 31 32 33 34 35 36 37 38 39 40 41 다음  맨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