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랑만(최화)
조글로미디어(ZOGLO) 2020년1월19일 08시20분    조회:2011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청춘노트]

문학임을 알고 시작했던 건 아니었다. 적어도 그 시절의 나는 그랬다. 갓 상해에 도착했을 때의 나의 모습은 문학과는 거리가 아주 멀었다. 찌는듯 한 8월의 오후, 나는 40여시간의 여정을 마치고 상해역에 내렸다. 출구를 빠져나오면서 나의 시야에 들어온 건 사면이 빼곡히 들어 앉은 고층건물과 그 아래에 꼬리에 꼬리를 물고 달리는 끝이 보이지 않는 차량들이었다. 뭐라고 하는지 알아들을 수 없는 상해의 방언들이 사방에서 쏟아져 내렸고 머리 바로 위에서 내리 꽂히는 듯한 더위와 주체할 수 없이 흘러내리는 땀이 나를 착잡하게 했다. 이 도시에 유일하게 믿고 온 친구가 하나 있었는데 그날 따라 하숙집의 전화선으로 인터넷을 했던 그의 룸메이트 때문에 계속 연락이 되지 않아 나는 기차역 출구에서 네 시간을 기다렸다.

20대의 햇내기에게 삶의 고민은 한꺼번에 몰려왔다. 가장 절박했던 건 생존본능이였다. 대도시는 화려하나 그만큼 또한 현실적이고 냉정하다. 집에서 가지고 왔던 밑천은 금방 바닥이 났고, 나는 월세마저 지급할 수 없을 정도의 궁지에 몰렸다. 취업이 안되던 날들, 머리속에서 한끼의 단가를 계산하며 먹었던 날이 있었고 교통비가 없어서 먼 거리를 걸어 다녔던 시간도 있었다. 폭우가 쏟아지던 날, 면접 시간을 맞추기 위해서 빗속을 뛰였고 결국 속옷까지 다 젖은 상태로 면접실에 들어가 면접관을 당황스럽게 만들었던 적이 있었고 길에서 애 셋 데리고 길을 묻는 아줌마에게 친절하게 지도까지 그리며 가르쳐 줬다가 그날 받은 한달급여를 탈탈 다 털린 적도 있었다. 터널을 지나는 같은 막막했던 순간이 있었고 그걸 극복을 하게 해준 따뜻했던 순간도 분명 있었다.

머리가 복잡해서 찾았던 와이탄, 검푸른 강 너머로 맞은편 꺼질 줄 모르는 빌딩들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강에 뛰여 들어 죽겠노라고 하던 한 여자를 만난적도 있다. 몸의 반쯤 나가 있었고 정작 뛰여 들 용기는 없었던 건지 란간을 잡은 채로 그녀는 엉엉 울면서 후회하게 해줄 거라며 욕 비스무레한 걸 내뱉고 있었다. 주변의 몇몇 사람들이 끌어당겨 겨우 내려오게 했더니 스무살 쯤 되는 여자가 바닥에 퍼더리고 앉은 채 통곡을 했다. 대개 회사에서 억울함을 당했고 세상이 두렵고 고향에는 가지 못하겠고 그런 넉두리였던 거로 기억한다. 다들 그녀의 청승에 웃고 있었지만 어쩌면 씁쓸한 이방인의 입장은 똑같이 경험하고 있었던건지도 모른다.

나는 가장 평범한 80후의 모습이다. 각자의 사정에 따라 서로 차이가 있겠지만 대체적으로 80후는 급속도로 발전하는 시장경제하에 자기만의 불안감과 무게를 짊어지고 있다. 우리는 부모님의 시대에는 상상도 못할 정도의 풍요로운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빠른 절주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압력은 결코 줄어들지 않는다. 나는 이 도시에서 16년을 살았다. 화려한 도시의 외관에 혹했던 콩깍지가 벗겨지는 데는 불과 반년이 걸리지 않는다. 그리고 남은 시간은 현실의 벽과 거기에 부딪쳤을 때의 아픔. 그로부터 오는 좌절감, 그리고 그걸 극복해가는 긴 시간의 성장통이었다. 의지했던 사람들이 하나 둘씩 떠나가고 긴 밤을 잠 못 이룰 때, 나는 글을 쓰기 시작했다.

내가 만났던 좋은 사람, 나쁜 사람, 이상한 사람들을 적었고 인상깊었던 순간들을 기록하였으며 내가 희망하는 상황과 세상들을 글에 담았다. 내세울 만한 실력이 되지 않았다. 즉흥적이고 충동적이었으며 상당히 개인주의였고 거침이 없었다. 나는 누군가의 응원이 필요했고 또 소통을 하고 싶었다. 그 때쯤 나는 날것 그대로의 내 생각을 온라인에 적어 내려갔다. 지금도 내 글에 달린 첫번째 리플을 기억한다. 딱 한구절이었다. “이것도 글이라고..” 피드백이 왔다는 것에 감사했다. 그 사람부터 붙잡고 설득해보고 싶었다.

운 좋게도 나는 나랑 비슷한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잡지사의 프리랜서로 기사를 써주는 친구가 있었고 아이 둘을 키우며 무역을 하는 친구도 있었다. 연구생 공부를 하는 학생도 있었고 알바를 하던 유학생도 있었다. 회사직원도 있었고  병원에서 치료를 받는 환자도 있었다. 온라인 창작의 활성화가 인터넷 문학을 형성하고 있었고 우리는 본명을 숨긴 채 아이디로 글을 올리기 시작했다. 각자 현실에서는 자신의 본업에 충실하고 밤이면 글을 썼다. 누군가가 글을 올리면 밑에는 독자들의 리플이 수두룩하게 달린다. 잘 읽었다는 감사의 메세지일 때도 있고 가끔 따끔한 혹평일 때도 있었으며 간혹 가다가 제대로 된 수준급 글평이 달리는 경우도 있었다. 상상이 안될 정도의 교감이 이루어졌다. 원고료 한푼 안나오는 일에 다들 열정을 불사르며 글을 썼고 짧게는 몇천자 길게는 20만자 이상의 글을 적어내려갔다. 그리고 어느 순간 우리는 인터넷 저 켠의 사람이 익숙해지고 위로가 되였다.

인터넷 문학의 형식은 자유롭고 특별한 구애를 받지 않는다. 다양한 시도를 할 수 있다는 게 가장 큰 매력이었다. 가끔은 서로 끌리는 글쟁이들끼리 듀엣으로 작업을 할 때도 있었다. “냉정과 열정사이” 처럼 주인공의 다른 시선으로 같은 이야기를 풀어가기도 했고 한사람의 글에 각자 다른 캐릭터로 답글을 쓰기도 했으며 그게 밑거름이 되여 나중에는 열몇명이 모여서 하나의 릴레이를 완성하기도 했다. 앞사람이 글을 쓰다가 어느 쯔음에서 끊어주면 뒷사람이 그걸 이어서 쓰는 고난이도의 팀웍을 필요로 하는 작업이였다.

우리는 그렇게 20대를 보냈고 30대를 함께 하고 있다. 내가 생각하는 문학은 지극히 개인적이고 이기적인 욕심일지도 모른다. 살아가면서 해야 하는 일, 할수밖에 없는 일 가운데 하고싶은 일, 좋아하는 일이 하나 정도는 갖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이왕이면 즐겁게 했으면 좋겠다는 바램이다. 문학은 내게 그런거였다. 좋아서 하는 일.

우리는 여전히 글을 쓴다. 인터넷 위챗의 발전과 더불어 뜻이 같은 친구들이 모여 새로운 방식으로 글 동아리를 만들어 창작을 이어가고 있다. 인터넷 문학의 단점을 보완하고 선배들의 노하우와 장점을 살려서 좀 더 나은 글을 쓰기 위해 다들 여전히 갈고닦고 있다. 꾸준히 글을 쓰고 발표를 하며 삶의 희노애락을 나누고 있다. 누군가 내게 글을 왜 쓰냐고 했다. 나는 여전히 문학의 참뜻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한다. 다만 글을 쓰는 순간이 즐거워 꽤 오래동안 계속 써내려 갈것 같다. 그러다보면 언젠가는 또 다른 세상이 펼쳐질거라 생각한다.

글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가장 근사한 랑만이다. 그리고 그 랑만속에서 나는 또 다른 나와 생활과 삶을 마주한다.

최화(崔花),필명: 작도   1981.5월 조양천 출생. 현재 상해 거주. 연변 작가협회 회원. 자유 기고인. 창작노트: 삶의 모든 순간을 격하게 공감하고 싶다. 그리고 기록해 간다.

《도라지》 ‘80후’시선 2019년 제3호 발표

파일 [ 1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1209
  • —양로사업을 영원한 직책으로 여기는 ‘이쁜 아가씨’ 박진화의 이야기 “로인을 돌보고 어린 애들을 보살필수 있는 양로원, 고아원을 차리는것이 어릴적 저의 꿈이였습니다.” 아니운서라는 화려한 후광을 벗어둔채 2011년 2월, 호리원으로 탈바꿈하면서 지금 사회복리원 특수호리구역에서 주임...
  • 2018-01-03
  • 뻐스정류소에서 길다랗게 줄지어서서 순서를 기다리는 일본인들/리홍매특파원 일본인들의 줄서기를 그들의 문화라고 하기에는 너무 단순하고 조금은 망설임이 앞서는 일이다. 하지만 줄을 서서 기다리는 것에 거부감이 전혀 없는 듯한 일본인들에 대해 처음에는 생소함을 느끼다가 점차 거기에 적응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
  • 2017-12-26
  • ‘아름다운 추억’ 수기 응모작품 (65) ◇서정숙(중경)     언니가 보낸 다시 돌아오지 않는 〈2016년의 렬차〉란 글을 읽으며 감개가 무량하다.   무정한 세월은 드팀없이 꾸준히도 흘러 장장 45년이 지나 그제날의 갓 사업에 참가했던 짧은 량태머리 언니도, 늦은 공부라도 하려고 학교 다니던...
  • 2017-12-25
  • ‘아름다운 추억’ 수기 응모작품 (64) ◇주청룡(룡정) 1973년, 내가 생산대대의 과학실험소조에서 일할 때였다. 그 때 우리 대대에도 주에서 공작대들이 내려와있었는데 당시 주당위 선전부 리휘 부장이 우리 공사에 온 공작대의 총 책임자로 우리 대대에 와 주둔해있었다. 그 해 여름의 어느 날 리휘 부장은 대...
  • 2017-12-25
  • ‘아름다운 추억’ 수기 응모작품 (63) ◇남걸(목단강) 1976년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목단강시전염병병원에 배치받아 의사사업을 한 지도 어언 40여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매번 백설같이 흰 의사복을 떨쳐입고 병원 각 과실(科室)을 순시할 때마다 나에게 진정한 의사자격을 가져다준 감명 깊었던 40년 전 그 날의...
  • 2017-12-19
  • ‘아름다운 추억’ 수기 응모작품 (62) ◇황혜영 (길림) 50년 전 추억의 색바랜 사진(왼쪽이 어린 시절 필자) 어제밤 비가 억수로 쏟아지더니 아침에 나가보니 아직 익지 못한 시퍼런 복숭아 열매가 나무 밑에 쭉 깔렸다. 복숭아를 볼 때마다 복숭아의 맛보다 그 씨가 어떨가 하는 생각을 먼저 해보는 나다...
  • 2017-12-19
  •   남편류학시절의 경제담보인이였던 노토 아키히로(能登昭博)씨는 대학교 졸업론문을 이라는 테마로 썼을 정도로 중국에 관심이 많은 분이다. 《아사히신문》(朝日新聞) 치바(千葉)동부지역의 판촉업무를 총괄하는 회사경영인이였던 그는 내가 일본에 온 이듬해에 새로운 사업으로 지역신문인 《호오지로》(ほお...
  • 2017-12-18
  • 일본의 선물보따리(자료사진) 어린 시절 엄마 뒤꽁무니를 따라 다니면서 눈으로 얻은 깨달음이라고 할가,“받은 그릇은 절대 빈채로 돌려 보내지 않는다”였다. 이웃사이에 주고 받고 빌리고 빌려 주고 하면서 살았던 그 시절, 동네집 잔치가 온 마을의 기쁨이였고 어느집에 상사가 나면 온 동네가 슬퍼했다. 그...
  • 2017-12-18
  • 〔한국서 홀로서기∼나는 이렇게 살았다〕 9년을 하루와 같이 문화봉사를 해온 석복순녀사의 감동 스토리 석복순(맨 앞)강사가 춤을 가르치고 있다 돌이켜보니 내가 2007년 둘째딸을 따라 한국에 올 때 나이가 예순이였으니 10년이 지난 오늘 어언 일흔이라는 고희의 나이로 되였다. 그간 줄곧 소외된 사람들에게 춤을 ...
  • 2017-12-12
  • (흑룡강신문=하얼빈)채복숙 기자 = "저희 기금회는 2012년에 랴오닝성민정청의 2급 법인으로 설립되어 대략 2년 여 동안 운영하다가, 2014년에 독립법인을 신청해, 2015년 1월에 정식 허가증이 내려왔습니다. 기금회가 설립되어서부터 지금까지 조선족사회의 많은 지원을 받아 왔습니다. 우리는 더 많은 사람들에게 기부문...
  • 2017-12-12
  • 〔한국서 홀로서기∼나는 이렇게 살았다〕 9년을 하루와 같이 문화봉사를 해온 석복순녀사의 감동 스토리 석복순(맨 앞)강사가 춤을 가르치고 있다 돌이켜보니 내가 2007년 둘째딸을 따라 한국에 올 때 나이가 예순이였으니 10년이 지난 오늘 어언 일흔이라는 고희의 나이로 되였다. 그간 줄곧 소외된 사람들에게 춤을 ...
  • 2017-12-12
  • 우리 집 가까이에 살고 있는 량씨는 일본에 온지 10년째 되는 한족 료리사이다. 어느 날 그가 찾아와서 답답한 마음을 털어놓았다.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을 장가 보내고 나니 빈털터리가 됐어요” 18살 때부터 료리를 배웠다는 량씨는 일본어를 전혀 접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였다. 갓 마흔살에 접어들면서 일본...
  • 2017-12-11
  • ‘아름다운 추억’ 수기 응모작품 (61) ◇김동화(연길) 30수년전 그 때 그 학생들과 함께 남긴 기념사진 세월은 류수와 같다더니만 정말 만질 수도 걷잡을 수도 없는 것이 바로 시간의 흐름인가 본다. 어언 70을 코앞에 두고 보니 가끔씩 따르는 크고 작은 추억들로 머리를 메운다. 올해 제33회 교사절을 즐...
  • 2017-12-11
  • ‘아름다운 추억’ 수기 응모작품 (60) ◇김규칠 구술 김숙자 대필 행복한 만년을 보내고 있는 김규칠 로인 부부 내 나이 금년에 80이다. 긴 세월 수많은 일들을 겪다 보니 잊혀지지 않는 사연도 많다. 그런데 요즘 인정세태가 삭막해서 그런지 그 때 그 일이 어쩐지 더 자주 떠오르군 한다. 온 나라가 문화대혁...
  • 2017-12-11
  • 〔한국서 홀로서기∼나는 이렇게 살았다〕 “나는 스승을 잘 만나 성공했다” 가수, ‘아리랑 난타’ 단장 아이수의 성공담에서 내가 한국 온 년도가 2004년이니 올해로 벌써 10년 하고도 3년이 된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했는데 그간 나의 한국생활에도 적지 않는 변화가 있어 자부를 느낀다...
  • 2017-12-11
  • 며칠전 묵직한 편지봉투 하나가 우리집에 날아왔다. ‘항상 감사합니다. 더 받은 송금료 164엔을 돌려 드립니다. 또 기회가 되면 잘 부탁합니다’ 짤막한 메모용지와 함께 동전 164엔이 들어 있는 봉투였다. 나는 적혀 있는 번호로 전화를 걸어서 영문을 물었다. 사실은 지인의 부탁으로 인터넷경매에서 옛...
  • 2017-12-10
  • ‘아름다운 추억’ 수기 응모작품 (59) ◇리희숙(안도) 애청자협회 열성자로 뛰고 있는 필자 리희숙 격정과 활력에 끓어넘치며 정열에 불타던 그 청춘시절, 걸탐스레 지식을 배워가며 희망과 기대에 부풀었던 학창시절을 마치고 ‘광활한 천지에는 할일이 많다’는 모주석의 지시에 따라 우리는 1965년...
  • 2017-12-05
  • 아름다운 추억 수기 응모작품 (58) ◇전영실(연길) 등산길에서의 필자 전영실 지금으로부터 40년 전, 취업통지서를 받고 우전국 인사과로 등록하러 갔던 때의 일이 어제런듯 눈앞에 삼삼하다. 한 나이 지긋한 책임일군이 반가이 맞아주며 “동무는 무슨 특장이 있소?” “어떤 일을 하고 싶소?” 하며...
  • 2017-12-05
  • 내가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는 일본에 온지 일년후였다. 그때 야마모토 타마에(山本 多摩江)씨는 우리가 사는 지역의 국제교류협회 책임자였다. 영어에 능한 그녀는 외국인들과 접촉할 기회가 많았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내성적이고 소극적인 대부분의 일본인들에 비해 적극적이고 활달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일본...
  • 2017-12-05
  • 각 지역 촌마다 빈곤해탈 난관 공략전이 치렬하게 펼쳐지고 있는 요즘, 누구보다 마음 한켠이 조급해나는 한 젊은이가 있다. 연거퍼 몇달동안 집에 내려가지 못한 채 농촌사업터에서 빈곤해탈사업을 위해 뛰여다니느라 낮과 밤을 잊은 그는 바로 룡정시 백금향 빈곤부축판공실 주임 홍광철(33살)씨다. 룡정시 백금향 빈곤부...
  • 2017-12-01
‹처음  이전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다음  맨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