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나이 14세 떄 일본으로 끌려가 매일 아침부터 저녁 늦게까지 일본군 20여명을 상대해 몸이 망가졌다", "일본군을 피해 도망치다가 일본군과 마주쳤는데, 갓난아기가 총소리에 놀라 울자 총검으로 입을 찌르고 공중에 들어올렸다"
일본을 상대로 댜오위다오(钓鱼岛, 일본명 센카쿠열도) 수호, 전쟁피해 배상 등을 요구한 시민운동가 퉁쩡(童增) 씨가 최근 중국 언론에 공개한 일제 침략 당시 피해를 입은 중국인들의 사연이 담긴 편지 내용 중 일부이다.
반관영 통신 중국뉴스넷(中国新闻网)은 "지난달 26일 아베 신조 총리가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해 전세계적으로 논란을 일으키고 있는 가운데 올해 초 일본을 상대로 20여년 동안 전쟁배상 요구를 하고 있는 퉁쩡이 자신이 보관해 온 종군위안부, 강제노역, 민간인 학살, 세균전 피해자와 유족의 편지 1만여 통을 공개했다"고 10일 전했다.
이 편지들은 퉁쩡이 지난 1990년 일본을 상대로 배상을 요구하는 첫 글을 게재한 뒤, 1991년부터 1993년까지 중국 각지와 해외에 거주하는 일제 침략 피해자들이 보내온 것이다. 편지에는 피해자, 유족의 구체적인 증언은 비롯해 일제의 다양한 만행 현장을 표시한 지도와 사진도 포함돼 있다.
편지에는 일제의 상상도 못할 만행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14세 때 위안부로 끌려간 허우차오롄(侯巧莲) 할머니는 편지에서 "한밤중에 검은 얼굴의 일본군관이 나를 방으로 끌고가 발로 차고 때린 다음에 온돌 위로 던져 옷을 모두 벗기고 성폭행했다"며 "매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20여차례 일본 병사들에게 시달리는 바람에 내 몸은 정상이 아니었다"고 당시의 참상을 전했다.
이어 "70여일 동안 일본군의 성노예가 됐다"며 "가족이 양 20마리, 나귀 한 마리, 밀 250kg, 은화 200여개를 가져와서야 나와 아버지가 풀려났다"고 덧붙였다. 관련 통계에 따르면 2차대전 기간 중국에서는 최소 20만명의 여성이 일본군에 위안부로 끌려간 것으로 추정된다.
안후이성(安徽省)에서 벌어진 학살사건의 한 생존자는 "1938년 음력 4월, 일본군이 마을에 쳐들어오자 나와 큰아버지는 가족과 친척 100여명을 데리고 피난을 떠났다가 일본군과 마주쳤다"며 "그들은 우리에게 기관총을 난사해 그 자리에서 40여명이 죽었으며 일행 중 우는 갓난아기를 입으로 찌른 뒤 공중으로 들어올렸다"고 적었다.
일제 강제노역 피해자인 산시성(山西省) 타이위안시(太原市)의 리(李)모 씨는 편지에서 "1942년 1월부터 1945년 말까지 일본에 끌려가 강제노역을 했는데, 당시 생활은 지옥 그 자체"라며 "중국 노무자들은 매일 산속의 동굴에서 중노동을 했으며 돼지사료로 만든 덩어리로 식사를 해야 했다"고 당시 강제노역의 참상을 전했다.
이어 "그마저도 배불리 먹지 못했고 사계절 똑같은 옷을 입어 극심한 더위와 추위에 시달렸으며 많은 중국인이 일본 작업관리자에게 맞아 죽었는데도 이를 제지하는 사람이 없었다"며 "어떤 이는 도망치다가 산에서 뛰어내려 자살하기도 하는 등 1945년까지 끌려온 노무자 400여명 중 살아남은 이는 130여명 뿐이었다"고 덧붙였다.
퉁쩡은 이같은 생생한 기록이 후대까지 전해질 수 있도록 현재 자신이 보관 중인 1만통의 편지를 분류하고 일일이 스캐닝해 컴퓨터에 저장하고 있다.
퉁쩡은 "편지를 보면 70~80년 전 중국에서 일제가 저지른 만행의 참상이 교과서에서 전하는 수준과는 거리가 멀고 영화나 드라마보다도 훨씬 비참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며 "이 1만통의 편지는 아베를 향한 1만발의 총알과 같은 것"이라고 강조했다.
또한 "한 국가와 민족은 오직 역사를 바로 보고 이를 거울로 삼아야 정확하게 나아갈 방향을 찾을 수 있으며 그렇지 않으면 재난을 맞게 될 것"이라며 "아베의 침략 미화와 국민 기만은 일본을 더 위험하게 만드는 것이고 그가 사익을 위해 전체 국익을 볼모로 삼고 있다"고 지적했다.
한편 퉁쩡은 지난 1990년부터 일본을 상대로 전쟁배상 요구, 댜오위다오 수호 등을 요구해 중국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킨 시민운동가이다.
온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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