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영양 광산문학연구소 全燒
화재로 폐허가 된 광산문학연구소 건물이 있던 자리에 선 이문열 작가는“지금도 내 삶에 이런 일이 왜 일어났나 생각 중”이라며 바닥을 한참 동안 바라봤다.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40년 넘게 마음에 그렸던 집이, 20년 만에 이런 황폐한 잿더미로 돌아가다니…”
지난 4일 오후 경북 영양군 두들마을에서 만난 이문열(74) 작가는 잿더미가 된 광산문학연구소를 보며 참담한 심정을 밝혔다. 지난달 30일 화재로 전소된 이 연구소는 평생 타향살이를 하던 그가 21년 전 고향에 지은 집이다. 전통 목조 한옥 양식 건물 2개 동(418m²)이었다. 불이 지나간 자리엔 깨진 기와, 그릇 등과 잿더미가 남았다.
사라진 고향에 대한 상실(喪失)을 노래한 자신의 소설 ‘그대 다시는 고향에 가지 못하리’(1980년)에서처럼 그에게 이 집은 고향이었다. 마당 한 편으로 나온 작가는 연기와 함께 사라져버린, 집이 있던 자리를 망연자실 바라보고 있었다. 소설 속 고향이 회한과 그리움, 고통과 향수가 공존하는 공간이었던 것처럼, 이제는 그의 집터가 회한과 그리움, 원망이 교차하는 장소가 되어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진정으로 사랑했던 고향으로의 통로는 오직 기억으로만 존재할 뿐”이라고 소설에서 썼던 것처럼, 옛집도 이제는 기억 속에 남을 것이었다. 작가는 “다시는 이런 집 짓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4일 경북 영양군 광산문학연구소에 제 모습을 갖춘 건 물을 담는 큰 둑인 청동 '두멍' 뿐이었다. / 이영관 기자
제 모습이 남은 건 물을 담는 큰 둑인 청동 ‘두멍’뿐이었다. 그는 “쟁반을 만들어서 하늘에 비나니 / 물의 덕으로 (불을) 절제해달라”고 한자로 적힌 글귀의 내용을 읽어줬다. 바람은 하늘에 가 닿지 않았다. 작가는 “여기에 ‘방화수(防火水)’를 담아 마당에 뒀다. 한 조각가가 집에 불이 날까 봐 걱정하는 내게 ‘화마를 제압해달라’는 글귀를 새겨 선물한 것”이라고 했다. “화마는 제압 못하고, 지만 살아남았어. 다 소용없다.”
이 연구소는 작가가 평생 꿈꿔왔던 공간이다. 그는 세 살이던 1951년, 서울을 떠나 가족과 함께 재령 이씨 집성촌인 두들마을에 왔다. 당시 집은 연구소와 70여m 떨어진 곳에 있었다. 2년 뒤 집안 형편이 힘들어져 친척에게 집을 팔고 떠나야만 했다. 이후 안동·부산·대구 등 타지를 떠돌았다. 어린 시절 소년은 “지금 한 푼 없이 셋방을 떠돌고 있지만, 내 고향에 가면 ‘나의 성(城)’이 있다. 언젠가 돌아가겠다”고 다짐하곤 했다.
그가 고향으로 돌아온 건 2001년. 그해 두들마을에 ‘광산문학연구소’를 지었다. 예전 집과 조금 떨어진 곳이었지만, 자비만 20억원을 들였다. 영양군 등의 지원은 4억원가량. 공사비를 마련하느라 서울 양재동 집을 팔고, 1980~1990년대 ‘작가 이문열’ 이름으로 얻은 수익의 대부분을 여기 쏟았다고 했다. 그는 “내가 완전히 들어가 산다고 마음먹고 지은 집”이라며 “이천에서 지내면서도 가족들과 여름마다 내려왔고, 혼자서는 거의 매주 왔다”고 했다. 그는 “20년 넘게 드나들면서 소중한 물건들을 옮겨놨고, 강당 등에서 다른 사람들과 쌓은 추억들도 많다”고 했다.
작가는 한숨을 쉬며 참담함을 감추지 못했다. 지난달 30일 밤 화재 소식을 듣자마자 2시간을 넘게 달려 연구소에 도착했지만, 10분 만에 자리를 떴다. “텅 빈 그 자리가 참혹해 들여다볼 수 없었다. 다음 날 대낮에도 그 참상을 지켜볼 수 없었다.” 영양경찰서 관계자는 “CCTV, 주변 탐문 조사 등을 종합하면 식당 쪽에서 밤 10시 46분쯤 불이 났고, 화재 2시간 전부터 집을 드나든 사람은 없다”고 했다.
피해는 무척 크다. 고(故) 김지하 시인이 그려준 난초와 시화 등 문인들의 선물과 도자기 등 개인적으로 아껴왔던 물건들 대부분이 불에 타고 말았다. “그나마 소장 가치가 높은 중요한 책은 개관 예정인 문학관 등에 옮겨 둬 피해를 줄인 것이 불행 중 다행”이라고 했다.
화재를 대비하지 않은 건 아니다. 그는 목조 건물을 지으면서, 화재를 항상 염려했다. 전선을 목재 내부가 아니라 바깥에 고정시키고, 관리인을 따로 둬 건물을 수시로 검사하게 했다. 2010년 이번 화재가 발생한 식당을 새로 지을 때는, 목재 등에 ‘방화 페인트’도 일일이 칠했다. 화재 보험에는 가입하지 않았다. 그는 “목조 건물이라 보험 비용이 월 수백만원 이상 든다는 소식에 엄두를 내지 못했다”고 말했다.
작가는 “어쩌면 이 큰 집이 나의 ‘오기’였을지도 모르겠다”고 했다. 예전의 집을 되찾겠다는 욕심. 그래서 과거 집보다 2배 조금 안 되는 큰 규모로 지었다. “집을 짓고 난 다음에 ‘아차’ 싶었어요. 아이들도 방학 때밖에는 못 오고, 직계가족도 생각보다 많아지지 않았어요. 나는 옛날의 우리 집을 꿈꿨던 거죠. 이제 세월이 흘렀는데….같은 규모의 집을 다시 짓지는 않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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