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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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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바람처럼 떠나가버린 친구 댓글:  조회:129  추천:0  2024-04-30
바람처럼 떠나가버린 친구 □ 주금파   인연 나는 1993년 12월 10일에 흑룡강성 목릉현 시골에서 혈혈단신으로 연변에 와서 30여년간 살면서 적잖은 인생고초를 다 겪었다. 그동안 나를 이끌어주고 아껴준 선배들도 많았지만 김문혁과는 고운 정 미운 정이 다 든 절친한 사이였다. 하기에 김문혁의 부고는 그야말로 청천벽력 같은 비보였다. 흑룡강성의 시골에 살 때 흑백텔레비죤으로 〈요청무대〉프로를 시청하면서 연변 배우들의 작품을 처음 접하게 되였다. 그 때는 신기하고 놀랍기만 했다. 그러다가 1995년부터 소품극본을 써가지고 연변TV 〈주말극장〉제작팀에 드나들기 시작했고 결국 그 다음해에 소품담당 편집으로 출근하게 되였다. 2년 쯤 출근하다가 〈주말극장〉이 〈토요무대〉로 타이틀을 바꾸면서 계약직인 나는 일자리를 잃고 말았다. 그 때 김문혁이 나에게 구원의 손길을 보내왔다. 당시 김문혁은 연길시구연단의 소속배우였는데 잠시 적을 남겨둔 채 하해(下海)하여 새별예술단을 운영하고 있었다. 평소 별로 가깝게 지낸 사이도 아니였는데 이렇게 도와주니 그 고마움은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그는 나를 극본작가로 초빙하고 싶다고 하면서 월급은 500원씩 주겠다고 했다. 1998년 당시에 500원이면 세집을 맡고 혼자 살아갈 수 있는 금액이였다. 이렇게 7, 8개월 동안 그의 예술단에서 직업작가로 있으면서 나는 그가 수년간 예술단을 운영하면서 수십만원의 빚을 지게 되였다는 걸 알게 되였다. 그러던 차 1999년 봄에 연변TV 청소년부에서 편집을 초빙한다는 소식을 접한 나는 편집부에 찾아갔고 행운스럽게 다시 연변텔레비죤방송국에 출근하게 되였다. 이 사실을 문혁에게 알리자 그는 당장 청소년부 주임에게 전화하여 청소년부의 직원들을 전부 데리고 나오라더니 어느 근사한 음식점에서 크게 한턱 냈다. 자기가 나를 예술단에 데리고 있으면서 제대로 잘해주지 못해 미안하던 차에 청소년부에서 나에게 일자리를 줘서 감사하다면서 말이다. 1년후, 〈스타의 밤〉이란 프로가 새로 창설되여 나는 거기로 자리를 옮겼다. 〈스타의 밤〉은 소품을 위주로 하는 프로이다보니 자연히 김문혁을 비롯한 배우들과 자주 만나게 되였다. 당시 내가 창작한 소품 〈고사리〉를 김문혁이 연출하고 송경철, 김문혁이 출연했는데 지금까지 관객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작품으로 남아있다. 그리고 뛰여난 베테랑 배우인지라 애드리브를 치며 아주 훌륭한 명작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한번은 열흘 넘게 련습한 어느 한 소품에서 갑자기 호칭을 바꿔야 하는 상황이 생겼다. 다른 사람 같으면 무조건 실수가 생겼으련만 김문혁은 용케도 대사 한마디 비끗하지 않고 완벽하게 마무리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 나는 베테랑 배우다운 그의 뛰여난 실력에 또 한번 감탄했다. 수십년간 연변TV에서 소품을 책임진 편집과 연출로 있으면서 느꼈던 바를 총화해보면 조선족중에 배우이면서 직접 극본을 쓰고 연출까지 할 수 있는 사람은 몇명 안된다. 그중 한사람으로 나는 김문혁을 꼽는다. 김문혁의 작품은 대사가 생활적이고 마디마디 폭소를 자아내는 언어로 엮어졌다. 그의 연기 좌우명이랄가, 언젠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채플린이 아닌 이상 어떤 희한한 육체언어(동작)여야 관객을 웃길 수 있겠소? 그렇기 때문에 대사, 바로 유모아적인 생활언어로 관객을 웃기는 게 중요하다고 보오.” 참으로 맞는 말이다. 김문혁이 창작한 〈술장사〉, 〈민들레무역공사〉 등 작품들을 보면 대사들이 맛갈스럽고 재미 있다. 그런데 유감도 없지 않아 있었다. 그의 작품들을 편집하다 보면 어떤 작품은 결말이 뱀에게 발을 붙여놓는 것처럼 그대로 두면 군더더기가 되고 그렇다고 잘라버리면 뭔가 완정하지 못한 감이 들군 했다.   텔레비죤드라마 《샘》의 한 장면(방미선 제공)   인간 김문혁 김문혁은 개성이 강한 친구였다. 두 사람이 모인 자리든 다섯 사람이 모인 자리든 대화하는 법이라고는 없이 줄창 혼자서만 말을 했다. 그래서 롱담 삼아 “김단장, 당신은 왜 대화할 줄 모르오? 대방이 말할 때는 들어주기도 해야지…”라고 하니까 그의 대답이 가관이다. “형님, 중창, 합창 해두 그중에 ‘쏠로’를 하고 싶지 누가 존재감 없이 군중배우를 하겠소? ” 한번은 한 후배가 진지하게 그와 이런 대화를 나누었다고 한다. “형님처럼 말주변이 좋으려면 어떻게 하면 되오?” “책을 많이 읽어보오.” “얼매나 보면 되오?” “한 서너마대 읽어보면 되오.” 확실히 김문혁은 독서광이였다. 고전소설 《삼국연의》를 몇번이나 읽었는지 책 속에 등장하는 수백명의 인물들의 이름, 기호, 사건의 발생년대 등을 줄줄 외웠다. 그가 좋은 작품을 써내고 좋은 연기자로 관객들의 호평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독서를 통해 축적한 풍부한 지식과 갈라놓을 수 없었다. 김문혁의 친구 접대는 지나치다 못해 랑비에 가까웠다. 외지에서 친구들이 오면 돌아갈 때까지 한주든 한달이든 접대하였다. 그러니 만천하에 친구들이 넘쳐났다. 외지 친구들을 접대하다 보면 자신의 월급에다 결혼사회를 해서 번 만원이 넘는 돈도 모자라서 나에게서 돈을 빌릴 때가 여러번 있었다. 그래서 “친구들 접대하는 데 쓰는 게 나쁜 거는 아닌데 자기 형편에서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하는 건 좀 삼가는 게 좋잖니? 접대비에 들어간 돈을 합하면 집 한채 값은 되겠다.”라고 나무라면 “형님, 이것두 다 투자요. 이제 내 결혼만 하게 되면 투자했던 돈이 다 들어오오.”라고 대꾸하군 했다. 나하고 자주 식사자리를 가졌지만 내가 살 때보다 그가 사는 경우가 많았다. 김문혁은 연길 우시장거리(牛市街)에 세집을 맡고 몇년간 살았다. 그가 외지로 회의를 가거나 전국소수민족문예종합공연에 참가하러 갈 때면 적게는 삼사일, 많게는 보름씩 집을 비울 때가 있었다. 그 때면 나 보고 자기 집을 봐달라고 부탁하군 했다. 세집인데 그냥 비워두면 되지 뭐 봐줄 필요가 있느냐고 했더니 새들을 키우는데 먹이와 물을 매일 줘야 한다는 것이였다. 그래서 가보았더니 비좁은 화장실과 주방이 딸린 단칸방이였는데 집안 배치가 이상하고 놀라웠다. 방 중간에 2인용 넓은 침대가 놓여져있었고 침대 주변에는 1m 높이가 넘는 푸른 화초화분이 빙 둘려있었다. 망자를 눕힌 주변에 빙 둘러놓은 화분 같은 느낌이 들어서 오싹하기까지 했다. 새조롱 안에는 앵무새를 포함한 20여마리의 새들이 뛰놀며 재잘거렸다. 새들이 쪼아먹는 좁쌀이 바닥에 가득 널렸고 새똥과 깃털이 날려서 방안의 공기가 혼탁하기가 말이 아니였다. 이러한 안 좋은 느낌을 그한테 곧바로 말하면 자존심이 무척 세고 고집이 강한 그가 받아들일 리 만무해서 빙빙 에둘러서 화분을 침대에 둘러놓지 말고 채광이 좋은 창 곁에 놓고 새조롱도 친구들한테 나눠주고 하나만 두면 좋지 않겠냐고 의논조로 말을 꺼내니 아니나다를가 “내 형님이 무슨 뜻으로 말하는지 알 만하오. 보토리 혼자 사는 집안에 공기 좋으라고 놓은 화초들인데…”라고 하며 내 말을 잘랐다. 17, 18년전 김문혁은 한달에 월급과 결혼식 사회수입을 합하여 15,000원이 넘는 적잖은 돈을 벌었다. 그중 일부는 빚 갚는 데 쓴다고 하지만 집을 사지 않는 것이 리해되지 않았다. 그 리유를 물으니 아빠트 한채를 사려면 수십만원이 드는데 어떻게 사겠냐고 했다. 그래서 선불금(首付款)으로 집값의 30% 정도만 내고 나머지는 대출받아서 다달이 지불하면 된다고 하니 그제야 그런 방법도 있느냐며 놀라는 것이였다. 똑똑한 사람이 왜 이런 데는 신경을 안 쓰는지 리해되지 않았다. 마침 그에게는 부동산 개발을 하는 친구가 있어 그의 도움으로 적합한 가격에 새집을 마련하게 되였다. 반년이 지난 어느 날, 그한테서 전화가 왔다. 퇴근하면 자기 새집에 와서 같이 식사를 하자고 했다. 그리하여 집들이 선물로 휴지와 비누가루를 사가지고 그의 집으로 찾아갔다. 집에 들어서니 TV를 걸어놓은 객실 벽 량옆에 예(艺)자를 쓴 서예작품이 한눈에 보였다. 글자크기는 우로부터 아래로 내려오며 커졌고 똑같은 글자들이 서로 다른 글씨체로 씌여졌으며 한쪽은 한어로, 다른 한쪽은 조선어로 되여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검은색 바탕에 흰색으로 글을 써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기분이 상할 가봐 이리저리 빙빙 에둘러서 이 장식이 좀 이상한 느낌이 든다고 말했다. 그러자 대뜸 “형님 말뜻이 뭔지 알았소! 그런데 형님은 무슨 미신을 그렇게 믿소?”라고 대답하는 것이였다. 본인이 틀렸다는 걸 번연히 알면서도 내 앞에서 곧바로 승인하고 고칠 김문혁이 아니였다. 그래서 한족 연출가 친구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며칠후 문혁의 새집에 간 그 친구는 집에 들어서자마자 초상집 분위기 같은 장식품들을 와락와락 뜯어버리며 다짜고짜 욕설을 퍼부었다. 낯색이 굳어진 문혁은 아무 대꾸도 못하고 고개를 숙인 채 핸드폰만 내려다보는 체하는 것이였다. 그로부터 일년후인 2011년 3월, 나는 뜻밖에도 김문혁이 풍을 맞았다는 소식을 접했다. 병실에 찾아가보니 병문안 왔던 사람들을 배웅하며 병상에서 내려선 그가 왼쪽다리를 절름거렸다. 사실 김문혁은 애주가이고 애연가였다. 한번 앉으면 반근짜리 구기자술 한병을 다 마시고 또 맥주 대여섯병을 마신다. 그리고 담배는 하루에 세갑씩 피운다. 그래서 만날 때마다 잔소리를 하였다. “사람이 절대 술을 못이기네라. 끊으란 말은 안할게. 제발 량을 줄이고 차수를 줄여라. 담배두 적게 피우고… 술담배를 너무 과하게 하니까 녀자들이 싫어하지.” 그러면 그는 이렇게 대답하군 했다. “형님, 내 장가 가서 아이가 있으면 담배는 끊을 수 있소. 그런데 지금은 아니요.” 김문혁의 불행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중풍 맞고 얼마후 한쪽 콩팥을 떼내는 수술을 했다. 원인을 물으니 신장결핵이란다. 그 말을 들으니 옛일이 떠올랐다. 2004년 쯤인가 김문혁이 사는 세집에 불리워가 밥을 먹은 적이 있다. 그 때 그가 하는 말이 세집에서 3년을 살면서 겨울에 석탄불 한번 때본 적이 없다고 했다. 추운 날이면 전기요를 켜고 잤고 겉바람이 셀 때에는 두꺼운 이불을 덮고 자면서 추위를 견뎠다고 한다. 그리고 대부분 밖에서 늦게까지 술 마시다 들어왔기에 추운 줄도 몰랐단다. 아무리 젊은 나이지만 자기 몸을 너무 아끼지 않고 구박한 게 아닌가 싶었다. 3년간 겨울에 불 때지 않은 랭방에서 잤으니 건강이 나빠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김문혁은 풍 맞은 후에도 나하고 위챗으로 계속 련락을 했다. 2015년 여름, 방송국에 사표를 내고 영화제작사를 경영하던 나는 2022년에 코로나로 큰 어려움에 봉착했다. 화는 홀로 오지 않는다고 어느날 저녁부터 아래턱이 뻣뻣해나며 감각이 이상했다. 그러더니 다음날부터 입과 얼굴이 오른쪽으로 비뚤어져갔다. 나는 ‘나도 풍을 맞는구나.’ 하고 한탄했다. 수십편의 작품을 준비해놨는데 코로나가 터져서 3년간 꼼짝없이 움직이지 못한 데다 또 풍까지 맞으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눈앞이 캄캄해났다. 이틀 밤낮을 자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내가 중풍으로 페인이 되면 금방 대학에 붙은 아들 뒤바라지는 어떻게 하며 또 평생 준비해둔 작품들이 제대로 빛도 보지 못했는데 이대로 인생을 마감해야 하나 하는 서러움과 절망에 울고 또 울었다. 그러다가 김문혁에게 전화를 걸어 간단히 내 증상을 말해주고 대처방법을 물었다. “형님, 발음이 똑똑한 거 보니 중풍이 아니고 ‘맨탄(面瘫)’인 거 같소. 왼쪽 팔다리는 잘 움직여지오?”  “응, 입만 비뚤었지 팔다리는 괜찮다. 그런데 ‘맨탄’이란 게 뭐야?” “그게 면풍이요.” 그 말에 내가 깜짝 놀라서 소리 질렀다. “면풍도 풍인데 그게 왜 중풍하고 상관 없니?” “놀라지 마오. 면풍은 중풍하구 아무 상관 없소. 잘 때 얼굴에 찬바람 맞아서 그런 게요.” 그제야 알고지내는 의사들에게 전화를 걸어서 상황을 말해주니 확실히 중풍이 아니라고 했다. 침구치료를 하면 한달내로 정상이 된다는 것이였다. 면풍을 맞은 지 7일째에 연길시 전체의 격리가 풀리면서 병원들이 문을 열었다. 회사와 가까운 병원에 다니며 열흘 정도 침 맞고 물리치료를 받으니 비뚤었던 안면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그 때 나는 김문혁에게 진짜 너무 감사했다.   텔레비죤드라마 《샘》의 한 장면(방미선 제공)   종영자막 2009년 쯤의 어느 저녁 무렵, 청년호 음료매장의 의자에 앉은 우리 두 사람은 이 말 저 말 하다가 김문혁이 나에게 섭섭한 소리를 했다. “드라마를 찍으면서 내게두 부연출 이름을 달아주면 형님께두 도움이 되지, 방해가 되겠소?”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를 내가 아니였다. 드라마작가가 되고 싶어 흑룡강성에서 원고 한주머니를 메고 연길에 온 나는 어렵사리 방송국에 입사하여 10년 넘게 근무하였지만 꿈을 실현하지 못해 광고부에서 촬영사로 근무하는 방호범과 함께 련습용으로 60분짜리 단편작품을 만들었다. 그 작품을 만들 때 찾지 않았다는 섭섭함에서 나온 말이였다. 그래서 그 때 내가 결심 발표하듯 얘기했다. “아직까지 난 작품 같은 작품을 만들지 못했다. 내가 련습용 작품에 아무리 친하다 해도 너 같은 명배우를 어찌 부르겠냐? 이제 다음 작품을 준비 잘해서 꼭 너에게 부탁할게.” 그리고 몇년후인 2011년 9월, 내가 처음으로 직접 극본을 쓰고 연출을 맡은 장편영화 《부모》가 제작되였다. 그런데 그 때는 김문혁이 중풍으로 앓고 있던 시기였다. 이렇게 우리는 영상작품으로 합작을 못한 유감을 영원히 남기게 되였다. 영화나 드라마가 끝날 때 올라가는 종영자막에는 작품에 출연했던 배우와 제작팀의 직종에 따라 이름이 새겨진다. 절대 대부분 사람들은 죽으면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점차 지워진다. 극히 드문 일부분의 명인들을 제외하고는 인류의 력사라는 거대한 세월의 종영자막에 자기의 이름을 남기지 못하고 사라진다. 흔적없이 바람처럼 사라져가는 우리들의 인생은 너무 허무하다. 술담배를 모르는 나에게는 친구가 많지 않다. 몇명 되지 않는 절친중에 김문혁이라는 스타가 있었다는 건 그가 내 인생 한 부분에 굵은 흔적으로 남아있는 친구임을 의미한다. 《샘》, 《백설화》에 주역으로 또 수많은 경전적인 소품무대에서 이름을 날린, 조선족 사회에 널리 알려진 김문혁은 우리 기억의 ‘종영자막’인에 영원한 배우로 이름을 새겨놓고 갔다. 45세에 예술인생을 마감하고 58세에 결국 바람처럼 이 세상을 영영 떠나가버린 친구여, 고통 없는 곳에서 편히 보내기를 바라면서 그의 유덕을 기리는 마음으로 이 글을 마감한다.             주금파 | 연출가 《예술세계》 2024년 제2호  
1    내가 아는 배우 김문혁 댓글:  조회:99  추천:0  2024-04-30
내가 아는 배우 김문혁 □ 방미선     2024년 3월 8일, 내가 아끼고 사랑하던 김문혁배우가 영영 돌아오지 못할 먼길을 떠났다는 애달픈 소식을 접했다. 연기력이 한창 물오른 40대 중반에 갑자기 중풍으로 쓰러졌던 김문혁이 14년간의 힘든 투병생활에 종지부를 찍고 그토록 사랑했던 무대와 관객들의 곁을 떠났다. 이젠 모든 아픔과 힘들었던 세월을 훌훌 털어버렸으니 먼길을 떠나는 걸음이 가벼우리라 생각되면서도 가슴이 먹먹하고 눈앞이 흐릿해졌다. 고 김문혁배우  1. 김문혁배우와 나 1992년에 김문혁배우를 알게 되였다. 당시 최인호 연출가와 함께 신진배우 모집차 길림예술학원 연변분원 연기전공 졸업생들을 만나러 갔는데 그중 퍽 나이 들어보이는 학생이 바로 김문혁이였다. 선생님을 통해 그가 네번이나 시험을 보고서야 음악학부에 입학했고 후에 전공을 연기로 바꾸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은근히 그한테 관심히 쏠렸다. 그후 연길시조선족구연단 공연에서 그가 펼치는 소품연기를 보면서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배우라는 생각이 들었다. 연기 과정에 순간순간 보여주는 톡톡 튀는 생동감과 그 생동감이 끊기지 않고 자연스럽게 지속되는 특징이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연기자에게 있어서 너무나 보귀한 재부이고 쟝르의 구분 없이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고 풍성한 열매를 수확할 수 있는 우수한 ‘종자’임에 틀림없었다. 그 때 나는 그런 보귀한 ‘종자’를 품은 그가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면 꼭 훌륭한 배우로 성장할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연출가는 흔히 중요한 드라마나 연극 혹은 소품을 만들 때면 자연히 극중 주인공이거나 주요 배역 적임자로 먼저 생각나는 배우가 있다. 내가 텔레비죤드라마 《백설화》와 《샘》의 연출을 맡았을 때 주인공 역으로 제일 먼저 떠올린 배우가 바로 김문혁이였다. 1994년에 촬영한 드라마 《백설화》에 출연하기 전에 그는 주로 희극소품연기로 관객들의 인정을 받았을 뿐 드라마 연기를 펼친 적 없었지만 나는 고민 없이 정극 드라마의 주인공으로 그를 선정하였고 1996년에 촬영한 드라마 《샘》의 주인공으로도 역시 그를 택했다. 이 두편의 드라마에서 그는 주인공 형상을 기대 이상으로 출중하게 창조했다. 이렇게 우리는 직장 동료로 지낸 적도 없고 사적으로 막역지우도 아니지만 각자 자신의 예술생애에서 각별히 중요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는 텔레비죤드라마 《백설화》와 《샘》에서 연출가와 주인공 역으로 만난 소중한 인연으로 오랜 시간 특별한 우정을 이어왔다.    텔레비죤드라마 《샘》의 주인공 일가족(오른쪽 두번째 김문혁)   2. 김문혁배우가 들려준 이야기 드라마를 함께 만들면서 나는 그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많이는 내가 의도적으로 화두를 던지군 했는데 그것은 연출가로서 효률적인 연출 진행을 위해 배우를 잘 알아야 할 필요성 때문이였다. 유전 때문인지 그는 어려서부터 책 읽기와 예술에 관심이 많았다. 그의 아버지는 작곡가이지만 책 읽기를 무척 좋아해서 집에 여러가지 책들이 많았다. 그리하여 그는 언제든지 마음껏 책을 읽을 수 있었고 예술학교 근처에 집이 있다보니 매일 보고 듣는 게 노래와 악기 소리였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책 읽기는 물론 음악에도 마음이 쏠려 한때 예술학원의 기량 높은 선생님들의 지도하에 클라리네트와 색소폰을 배우고 손풍금도 쳤고 또 미술공부도 좀 했는데 크면서 흥취가 점차 독서에만 집중되였다. 책을 읽으면서 그는 책 속의 많고많은 이야기와 각양각색의 주인공들의 형상에 깊이 감동하고 감탄하면서 멋진 글을 써내는 작가에 대해 존경과 숭경의 마음을 가지게 되였다. ‘나도 좋은 글을 쓸 수 있을가? 좋은 책을 써내는 훌륭한 작가로 될 수 있을가?’ 작가의 꿈이 서서히 가슴 속 깊은 곳에 싹이 트면서부터 고중생이였던 그는 리과공부를 뒤전으로 하고 작가의 꿈을 이루기 위해 문학서적 읽기에만 전념했다. 청춘의 혈액은 마술사란 말이 틀림이 없는 것 같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당찬 꿈이 마술처럼 순식간에 변해버렸다. 책 속 인물들의 운명에 관심이 쏠리던 데로부터 이야기를 보여주고 들려주는 연극이나 드라마에 관심이 생겼던 것이다. 그렇게 그의 꿈은 신명나게 연기를 펼치는 배우로 바뀌였다. 배우로 되고픈 욕망은 돌연 쓰나미의 기세로 김문혁을 덮쳤다. 강렬한 욕망의 충동하에 문과에만 열중하고 그외 모든 학업을 포기했다. 자리에 누워도 배우꿈, 수업시간에도 배우꿈에 빠지다보니 리과 성적이 바닥을 쳤고 나중엔 아예 고중을 중퇴해버렸다. 그리고 배우꿈을 향한 첫걸음으로 예술학교 응시를 준비했다. 아버지 혼자 월급으로 온 집식구가 살아가는 형편이라 시험을 준비하는 기간에 아무 것도 안하면서 공밥을 먹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는 밥값이라도 벌어보려고 벽돌공장에서 운반공으로도 뛰였고 석탄을 차에 싣고 부리우는 막일도 했고 삼륜차로 작은 식당이나 편리점에 물건을 날라다 주기도 했다. 아무튼 돈이 되는 일은 닥치는 대로 다 했다. 아무리 어지럽고 힘들어도 꿈을 이루는 길이라고 생각하니 모든 걸 극복할 수 있었고 아무리 괴롭고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라도 웃음으로 넘길 수 있었다. 그런데 아무리 애써도 넘기 힘든 언덕이 딱 하나 있었으니 그게 바로 고중시기에 놓쳐버린 수리화(数理化)과목이였다. 그는 련속 3년 예술학원에 응시했다. 전공시험에는 쉽게 합격되였는데 수학, 물리, 화학 시험에 통과되지 못해 세번 다 미역국을 먹었다. 세번째 불합격 통지를 받았을 때는 시험을 보느라 훌쩍 지나버린 3년이 너무 아깝고 여기저기 고된 막일에 부대낀 3년 세월이 너무 억울해서 미칠 지경이여서 아무데라도 화풀이를 해야 속이 시원할 것 같았다. 이리저리 궁리하던 중 어느 날, 날이 어두워지기를 기다려 예술학원 청사를 빙빙 돌다가 음악학부 주임 사무실의 유리창을 묘준해 힘껏 돌팔매를 날렸다. 와장창 소리와 함께 유리창이 박살났다. 그러고도 성차지 않아 캄캄한 예술학원 마당의 한복판에 두 다리를 떡 뻗치고 서서 “예술학원인데 전공이 합격되면 입학시킬 게지, 수리화는 무슨 수리화!” 하고 목이 터져라 소리 질렀다. 그제야 숨통이 좀 열리는 듯했지만 한편으로는 더럭 겁이 났다. 물론 곧 사실이 탄로 나서 예술학원 보위과(保卫科)에 불리워갔다. 이미 엎지른 물이라 다시 퍼 담지도 못하고 퍼담을 생각도 없는지라 어떤 처분이 떨어질지 운명을 그냥 하늘에 맡겨버리기로 했다. 그런데 천만뜻밖에 한바탕 호된 꾸지람만 듣고 무사히 풀려났다. 알고보니 예술학원 지도부에서 그가 저지른 사건이 중대하고 영향이 안 좋지만 얼마나 예술을 사랑했으면 세번이나 시험을 봤겠는가, 얼마나 예술학교에 붙고 싶었으면 이런 일까지 저질렀겠는가고 하면서 선처했던 것이다. 눈물이 찔끔 났다. 물론 교수 아버지의 덕을 많이 입은 건 두말할 것 없지만. 그런데 그 뒤 예술학원에 김교수가 ‘괴물’아들을 두었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고 그는 ‘뿔난’ 아버지를 꽤 오래동안 슬슬 피해다녀야 하는 곤혹을 치렀다. 이듬해 그는 또다시 시험장에 들어섰다. 배짱이 두둑하다고 해야 할지, 얼굴이 두껍다고 해야 할지. 네번째 시험은 그에게 있어서 리상이나 꿈을 떠나서 사활을 건 전투였을지도 모른다. 그번에는 요행 문화과 시험을 통과하여 끝내 음악교육학부에 입학했고 한달후 운 좋게 그 해 마침 새로 설립된 연극학부로 적을 옮겼다. 배우로 가는 길이 마침내 열렸다. 그 길을 걸으면서 그는 속으로 몇십번, 몇백번을 윽벼르며 천번 만번 자기와 굳게 약속했다고 한다. 시험으로 흘려보낸 4년을 꼭 되찾고 앞으로 맞이하는 세월을 더 의미 있고 알차게 살겠다고… 그는 해냈다. 자기와의 약속을 굳건히 지켰다. 다년간 70여부의 소품을 무대와 텔레비죤 화면에 선보였는데 그중 자체로 창작, 연출, 출연한 소품이 40여부나 되고 3부의 텔레비죤드라마에서 주인공 형상을 멋지게 창조했다. 그는 부지런하고 열정적인 연기창조로 조선족의 ‘웃음의 별’ 영예와 함께 수많은 팬을 가진 진정한 배우로 성장했다. 사실 ‘아깝고 억울하게’ 흘려보낸 그 4년은 되려 그가 훌륭한 배우로 성장하는 데 자양분이 된 시간들이였다고 할 수 있다. 그가 읽은 수많은 책들이 그의 기억 창고에 빼곡이, 두텁게 축적되여 예술창조의 자양분으로 발효되였고 그가 비지땀을 휘뿌렸던 벽돌공장 운반공일, 석탄 부리우는 막일 그리고 삼륜차로 물건 나르는 일은 그야말로 그를 ‘웃음의 별’로 탄생시킨 기름진 밑거름이였다. 책에 매달려 책과 씨름했던 세월이 있었기에 극본을 마주하면 곧바로 기억 창고에서 생생한 인물형상을 찾아낼 수 있었고 훌륭한 작품을 창작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눈물로 적셔진 젊은 시절의 다양한 생활체험은 인물형상창조에 단비로 되여 그로 하여금 소품세계의 ‘웃음의 꽃’으로 활짝 필 수 있게 했던 것이다. 텔레비죤드라마 《샘》을 찍을 때 내가 “주인공이 삼륜차를 몰 줄 알아야 하니 촬영에 들어가기 전에 삼륜차 모는 걸 잘 배워야겠소.”라고 했더니 그는 대뜸 “삼륜차 말입니까? 삼륜차 몰기라면 내가 선수지요.”라고 하면서 허허 웃던 모습이 지금도 눈앞에 선하다.   텔레비죤드라마 《샘》의 한 장면   3. 소품 〈딱꿍〉과 두꺼운 혀 나는 김문혁과 단 한번 소품을 함께 만들었는데 그게 바로 2002년에 공연된 〈딱꿍〉이다. 원래는 예술학원 연기전공 학생들의 련습용이였는데 배우를 잘 선택하면 뭔가 좀 될 것 같아서 김문혁을 불렀다. 전화를 받고 곧 달려온 그는 당시 예술학원 학생이였던 애 엄마 역을 맡은 배우와 대사를 맞췄다. 그런데 어쩐지 그의 발음이 좀 이상했다. 소품 제목이 〈딱꿍〉이고 대사 전반에 ‘딱꿍’이란 대사가 쫙 깔려서 처음부터 ‘딱꿍’ 소리를 챙챙하게 내야 되는데 그의 발음에서 ‘딱꿍’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귀를 강구어 자세히 들어도 잘 들리지 않자 대사맞춤을 중지하고 그더러 ‘딱꿍’ 소리를 크게 내보라고 했다. 그랬더니 챙챙한 ‘딱꿍’ 소리는커녕 목소리가 점점 더 흐려지더니 나중에는 헛기침 같은 소리밖에 나오지 않았다. “안되겠어요. 딱꿍 소리가 전혀 안 들리네. 웬 일이지?” 그가 허구픈 웃음을 웃으며 말했다. “방연출, 내 원래 혀가 이렇게 두껍습니다. 보세요.” 그러면서 나를 향해 혀를 쑥 내밀어보였다. “어이구, 쓸데없이 무슨 혀타령이지?” 내가 덩달아 허구픈 웃음을 짓자 그가 정색해서 말했다. “사실 내 혀가 정말 기뚝차게 두껍습니다. 혀가 두꺼운 바람에 발음이 똑똑하지 않아 여태껏 얼마나 고생했는지 압니까? 예술학교 때 연기공부를 하면서 내절로 터득한 건데요, 혀를 구부려야 하는 대사는 내절로 다른 대사로 살짝 수정하군 했습니다. 이건 정말 비밀인데 오늘 요놈 ‘딱꿍’ 탓에 그만 탄로났네.” 그 말에 그의 혀를 다시 자세히 보니 확실히 좀 두꺼워보였다. 그래서 그더러 혀를 입천장에 대보라고 했더니 혀가 너무 두꺼운 탓에 혀가 입천장에 닿지 않고 겨우 앞이 안쪽에 닿았다. 나는 하도 어이 없어 박장대소하며 이렇게 말했다. “소품대왕의 혀가 이 모양일 줄은 몰랐네. 비밀은 꼭 지키겠으니 문혁이 이번 소품은 그만둡시다. 다른 배우를 찾겠어요.” 그랬더니 그가 생억지를 부렸다. “안됩니다. 비밀도 지켜야 되고 소품도 내가 해야 됩니다.” 〈딱꿍〉이 별로 대단한 작품이 아닌지라 나는 그런대로 연기하라고 했다. 하지만 그는 아무리 수수한 작품일지라도 배우 이름에 걸맞게 성의를 다해야 하고 관객들에게 책임을 져야 한다면서 ‘딱꿍’ 소리가 들리지 않는 〈딱꿍〉을 정성 다해 열심히 련습했다. 요즘 위챗계정에 올라온 〈김문혁선생님이 출연한 재미 있는 소품 10편 모음〉에 있는 〈딱꿍〉을 다시 보았더니 그 때 그 일이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머리속에 떠올랐다. 그리고 “‘딱꿍’ 소리를 방연출의 요구 대로 챙챙하게 내지 못하지만 맡은 역할을 잘 소화해서 절대 실망시키지 않겠습니다.”라고 정색해서 말하던 그의 모습도 눈앞에 삼삼하다.   4. 택시 료금에 깃든 우정 2019년 겨울의 어느 하루, 식당에서 친구들과 함께 점심을 먹고 택시를 타려고 길에 나섰는데 그 날 따라 택시가 잘 잡히지 않았다. 배우들과 련습약속을 한 터라 속이 바질바질 탔다. 문득 택시 한대가 속력을 줄이며 내 쪽으로 다가왔다. 찬찬히 보니 조수석에 손님이 앉아있기에 나는 또 락심하고 큰길로 눈길을 돌렸다. 그런데 그 택시 안에서 “방연출! 방연출!” 하는 어눌한 소리가 들려왔다. 급히 머리를 돌려 보니 김문혁이였다. 그가 나 보고 빨리 뒤쪽에 앉으라고 손시늉을 하자 나는 오랜만에 만나 반갑기도 하고 또 시간 때문에 안달이 났던 터라 제꺽 뒤자리에 앉으면서 어디로 가는가고 물었다. 그도 반가운 표정을 지으며 침 맞으러 간다고 하면서 나 보고 어디로 가는가고 물었다. 음력설야회프로 련습하러 텔레비죤방송국에 간다는 말에 그는 옅은 한숨을 내뱉었다. 애처로운 마음에 내가 얼른 “문혁이가 많이 나아져서 참 보기 좋네. 택시를 잡지 못해 애 탔는데 이렇게 만나서 너무 반갑고 고마워.”라고 위로해줬다. 그사이 택시가 연변병원 동문 부근에 다달았다. 택시가 멈춰서자 그는 꼬깃꼬깃 접은 돈 20원을 운전수에게 건넸다. 내가 급히 허리를 굽혀 운전수 손에 놓인 돈을 받아서 그의 손에 쥐여주었더니 돈을 받고 한발 뒤로 물러서면서 운전수에게 빨리 떠나라고 손짓하는 한편 그 돈을 다시 택시 안에 던졌다. 순간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나는 터져나오려는 흐느낌을 애써 참으면서 차창 밖으로 머리를 한껏 내밀어 휘우뚱거리며 저만치 걸어가는 그의 뒤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오래오래 바라보았다…   “배우는 인기를 먹고 산다.”는 말이 있다. 하늘나라에서도 김문혁은 가만히 있지 않을 것 같다. 또다시 작품도 만들고 무대에도 서고 드라마에도 얼굴을 내비치고… 그리고 그의 곁에 또다시 열정적인 팬들이 모일 것 같다. 이게 바로 내가 아는 배우 김문혁이다.     방미선 │ 연출가 《예술세계》 2024년 제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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