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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리장삼, 로전사들의 소중한 기억을 렌즈에 담아 댓글:  조회:95  추천:0  2025-12-24
    리장삼, 로전사들의 소중한 기억을 렌즈에 담아      □ 김향자           시야가 닿는 곳마다 하얀 눈이 뒤덮인 날이였지만 리장삼은 만나고 싶었던 로전사의 주소를 알게 되자 주저없이 길을 나섰다. 차량으로는 진입이 어려운 곳에 이르러 그는 도보로 목적지를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무거운 촬영장비가방을 메고 얼마나 걸었을가. 쌓인 눈 속에서 반 쯤 드러난 무언가가 그의 시선을 끌었다. 잡아당겨 꺼내보니 헐망하고 색 바랜 옛날식 군복이였다. 력사나 전쟁 주제의 드라마 촬영에나 쓸 법한 복장이였지만 어쩐지 소중하게 느껴졌다. 그는 쭈그리고 앉아 군복에 묻은 눈을 깨끗이 털어냈다. 어떻게 되여 이 옷이 여기에 있을가를 생각하며 걷다보니 어느덧 목적지에 이르렀다.     로전사는 따뜻이 웃으면서 그를 반겨맞았다. 인터뷰시간이 길어질수록, 로전사의 피로 얼룩진 기억 깊이 따라갈수록 그는 감동과 경의에 찬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가렬처절했던 전투를 떠올리며 눈물을 글썽이는 로전사를 바라보며 그 역시 눈물에 목이 메이고 가슴이 울컥했다.     잠시 후 그는 오는 길에 주은 낡은 군복을 꺼내 보였다. 로전사는 군복을 받아들고 이리저리 유심히 살펴보더니 “이건 내 옷이야.”라며 격동을 금치 못했다. 안해가 옆에서 “우리 집에 언제 이런 옷이 있었다구 그래요. 주책이네 정말!”라고 하며 핀잔했지만 그는 “젊었을 때 내가 이런 옷을 입었었어!”라며 울먹였다. 리장삼은 카메라 렌즈 속에 안겨들어오는 로전사의 흥분된 얼굴을 바라보며 렌즈에 홍색 기억을 담기로 마음 먹었다.     여기서 잠간 리장삼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자.   두루마리 화폭을 제작하여 순회 강연을 하고 있는 리장삼        리장삼(李长森), 한족.     1955년 4월 12일, 산동성 제성현에서 출생.     1976년, 참군.     1980년, 중국공산당에 가입.     1981년, 룡정현사탕술공사 단서기 겸 보위간사.     1982년, 화룡현상업직공학교 교원.     1984년, 화룡현위 선전부 간사 겸 과장.     1989년, 화룡현위 판공실 부주임 겸 현위상무위원회 비서.     1993년, 연변국제경제기술합작공사 부경리.     2008년, 룡정시경제투자국 국장.     2015년, 연길시 새일대관심사업위원회 상무부주임.       리장삼은 2014년에 촬영에 입문하였고 2017년부터 카메라 렌즈를 풍경에서 로전사들에게로 돌렸다. 그 때로부터 무려 8년 동안 그는 심양, 장춘, 통화, 농안, 구태 및 연변의 각 현, 시, 림업지구, 광산 일대를 누비며 항일전쟁, 해방전쟁, 항미원조 등에 참전했고 지금까지 생존해있는 로전사들을 찾아다녔다. 그는 300여명의 로전사들을 만나 시급히 기록되고 보존되여야 할 사진과 자료들을 수집해나갔다. 발품을 팔아가며 숱한 고생을 한 끝에 그는 8,300점의 진귀한 순간을 사진에 담았고 12,000자에 달하는 상세하고 정확한 자료를 수집하여 정리했다. 로전사들에 대한 깊은 애정과 홍색 기억이 남긴 력사에 대한 경외심을 품지 않았더라면 결코 완성될 수 없는 작업이였다.     날이 갈수록 리장삼은 시간이 얼마나 긴박한지를 절감했다. 로전사들 중에 최고령자는 102세에 이른 분이였다. 그들을 만날 때마다 하루하루 년로해가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그는 마치 시간과 달리기를 하는 듯한 심정이였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저 산의 진달래는 꽃이 피였다 져도 래년에 다시 피여날 테고 장백산의 설경은 녹았다가도 다음해면 다시 하얗게 덮이겠지만 로전사들이 세상을 떠나면 그 소중한 력사와 기억들은 영원히 시간 속에 묻히고 말 것입니다. 그걸 생각하면 너무나 안타깝습니다.”     리장삼의 마음은 얼마나 조마조마하고 다급했을가! 그는 추운 겨울이든 무더운 여름이든 가리지 않았다. 로전사에 대한 소식을 접하는 즉시 그는 곧바로 달려갔다.     2018년 한겨울, 리장삼은 통화시 이도강 구역에 사는, 항일전쟁에 참가했던 진동안 로전사의 주소를 알게 되자 폭설을 무릅쓰고 7시간을 차로 달려 그의 집에 도착했다. 진동안 로전사는 북경에서 열린 열병식에 두차례나 참가한 경력을 가진 분이다. 첫번째는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개국대전 열병식에서 륙군 열병대 전사로 모택동 주석의 검열을 받았고 두번째는 66년이 지난 2015년, 중국인민항일전쟁 승리 70주년 열병식에 항일전쟁 참전 로전사 대표로 참가했다. 진동안 로전사를 취재하는 과정에서 리장삼은 그와 함께 로전사 대표로 참가했던 분이 5명 더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였다. 리장삼은 이들을 찾는 걸음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마침내 빠른 시일내에 나머지 5명의 로전사들을 모두 찾아내여 그들의 모습을 렌즈에 담았고 그들의 영웅이야기도 기록으로 남길 수 있게 되였다.     조국을 위해 목숨도 아끼지 않고 싸워온 로전사들을 취재하는 과정은 눈물겨운 이야기로 가득했다. 95세의 로전사 왕가흥과의 첫번째 만남은 그분의 집에서 이루어졌다. 당시 그분은 건강상태가 안 좋음에도 아주 락관적인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두번째 만남은 병원 중환자실에서 이루어졌다. 리장삼이 모든 정성과 심혈을 기울여 만든, 로전사들의 모습을 담은 화첩을 보면서 왕가흥은 눈물을 흘렸다. “수많은 전우들이 오늘날의 세상을 만들기 위해 목숨을 바쳤소. 나는 부강해진 이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단 한순간도 그들을 잊은 적이 없소.” 전우들과 함께 했던 세월을 추억하는 그의 마음을 헤아리며 리장삼도 눈물을 흘렸다.   로전사들의 모습을 담은 화첩을 보여주고 있는 리장삼     2017년 12월, 남경대학살 희생자 추모의 날에 리장삼은 94세의 로전투영웅 왕총문을 방문하였다. 로전사는 마침 인터넷으로 추모행사 생방송을 시청하고 있던 중이였다. 리장삼은 미리 준비해간 군복을 로전사에게 입혀드리고 그분이 오래도록 소중히 보관해온 훈장들을 달아드린 후 숙연한 마음으로 샤타를 눌렀다.     촬영이 끝난 후 로전사는 어린아이처럼 군복을 꼭 잡은채 벗으려 하지 않았다. 그로부터 일주일후 그가 세상을 떴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 날 찍은 사진을 유상으로 만들고 싶어하는 유가족의 뜻에 따라 리장삼은 필요한 크기로 두장의 사진을 만들어 직접 전해주었다. 이 일은 리장삼의 마음을 아프게 자극하였다. 그는 군복을 많이 준비해 앞으로 인터뷰할 때 모든 로전사에게 선물하기로 마음 먹었다. 이 소식을 들은 하문의 한 기업가가 감동하여 군복 80벌과 솜옷 40벌을 후원했다. 그후 리장삼은 매번 취재와 촬영을 마친 후 로전사에게 한벌씩 선물로 드렸다.     2023년초,  리장삼은 자신이 비용을 부담하는 건 물론이고 자기와 뜻을 함께 한 전우들의 지원금도 모아 기념 티셔츠 120벌을 구매했다. 리장삼은 이 티셔츠를 취재현장에서 만난 로전사들에게 선물하고 무료로 기념사진을 찍어주었다.   옛 군복을 어루만지며 눈시울을 붉히는 로전사 장명순     홍색자원을 가치 있게 활용하고 홍색유전자를 의미 있게 계승하기 위하여 리장삼은 큰 결심을 했다. 2019년 9월, 그는 연변조선족자치주인민정부 대청에서 중화인민공화국 창건 70주년을 기념하여 ‘로전사들의 정신을 기리고 홍색유전자를 계승하자’는 주제의 사진전람회를 열었다. 그는 관객들이 영상 자료를 통해 함께 공감하고 감동받기를 바랐다.     리장삼은 더 많은 사람들에게 로전사들의 홍색정신을 알리기 위해 2019년말 《영원히 퇴색하지 않는 홍색기억》 화첩을 편집, 출판하였으며 이를 홍색교재로 학교와 가두, 향촌에 보급했다. 그뿐만 아니라 2020년에는 항일전쟁, 해방전쟁, 항미원조를 주제로 한 3부작 대형 화폭을 제작, 인쇄하였다. 여기에는 백여명의 로전사가 담겼으며 각 두루마리의 크기는 너비가 1.2m, 길이가 15m에 달했다. 그는 이 작품들을 소중히 들고 학교와 향촌을 다니며 순회전람을 열었다.     2023년 8월, 그는 연길에서 항미원조 승리 70주년을 기념하여 로전사 주제 개인 사진전람을 열어 80여점의 촬영작품과 진귀한 유물들을 전시하였다. 전람회의 참관 인수는 4,600명을 넘었다.   로전사 한룡철과 그의 부인     리장삼의 헌신과 공헌은 광범한 대중들의 찬사와 주목을 받았다. 그는 ‘연길 좋은 사람’으로 선정되였고 길림성 새일대관심사업 특수공헌상과 새일대관심사업선봉(关工先锋) 등 영예를 받았다. 그의 사연은 《인민일보》, 《해방군보》, 《대공보》, 《문회보》 등 여러 매체에 소개되였고 그의 부분 작품들은 길림성 제대군인사무청, 연변조선족자치주 서류관, 연변미술관에 영구 소장되였다. 작품 〈가장 아름다운 길림의 로전사〉는 제23회 길림성촬영예술전에서 길림이야기 부문  금상을, 〈백명 로전사 군상〉은 길림성 ‘로전사의 자취를 찾고 영웅들의 이야기를 통해 홍색정신을 전승하자’ 주제예술작품전에서 1등상을, 〈불타는 기억〉은 중국홰불잡지사에서 주최한 ‘성세의 빛과 어둠, 홰불의 본보기’ 촬영콩쿠르에서 2등상을 받았다. 리장삼의 이런 사적은 CCTV-4 채널의 ‘대동북(大东北)’에 올랐다.     올해는 중국인민항일전쟁 승리 80주년을 맞이하는 해이다. 이에 리장삼은 연변인물연구위원회와 연길시로구역건설촉진위원회(延吉市老区建设促进会)의 지지하에 특별한 기념활동을 기획했다. 실내 전시의 한계에서 벗어나 30명 로전사들의 초상화를 두개의 실외 기둥광고판(室外擎天柱广告牌)에 선전영상자료로 올렸고 연길백화청사 광고전광판(广告显示屏)과 12개 BRT정류장 광고판에 스크롤형식으로 한달 동안 방영하였다. 또한 백명 로전사들의 모습을 담은 두루마리 화폭을 제작하여 화룡, 훈춘, 돈화, 도문 등지와 연변대학에서 순회전시를 하였다.     로전사들을 촬영하는 려정을 이어가는 과정에서 잊지 못할 장면들이 늘 그의 머리속에서 맴돌았다.     해빛이 정수리를 뜨겁게 비추던 어느 무더운 날, 두 눈을 실명한 로전사를 찾아갔을 때의 일이다. 취재를 마치고 나와 로전사의 안해에게 작별인사를 하는데 로전사의 안해가 자기 집 창문 쪽을 가리켰다. 앞을 보지 못하는 그 로전사가 선물로 받은 군복을 입고 서서 창밖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두 눈으로 무엇을 찾으려는 것일가? 앞을 향해 흔들어주는 저 두 손의 방향은 어딜가? 순간 목이 꺽 멘 리장삼은 창문을 쳐다보며 무릎을 꺾었다.     또 한번은 한 로전사의 취재를 마치고 나와 차 열쇠를 찾으려고 호주머니를 더듬었는데 구겨진 현금이 손에 잡혔다. 자기는 현금을 주머니에 넣은 적이 없었기에 로전사의 안해가 몰래 넣어준 것이 분명했다. 리장삼은 로전사들을 취재하러 갈 때마다 빈손으로 간 적이 없다. 누구를 만나러 가든 경의의 마음을 담아 무언가를 꼭 사들고 갔다. 그러나 이 돈이 그런 물건 값이 아님을 그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리장삼이 돈을 돌려주려고 다시 되돌아갔을 때 대문밖에서 로전사의 안해가 그가 떠난 방향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이는 로전사들을 세심하게 보살피고 아껴주는 리장삼에 대한 깊은 고마움과 믿음의 표현이였던 것이다.     홍색기억을 찾아다니는 려정에서 리장삼은 로전사들로부터 같은 말을 여러번 들었다. “내가 싸웠던 그 지역들을 다시 돌아보고 싶지만 이 몸이 따라주지 않는다.” 이것이 모든 로전사들의 한결같은 바람임을 리장삼은 직감했다.   로전사 한룡철과 그의 부인령혼이라도 목숨 걸고 싸웠던 그 땅을 둘러보길 바라며     지금까지 그가 만난 300명의 로전사중 아직 살아계신 분은 10명에 불과하다. 리장삼은 로전사들의 소원을 풀어주기 위해 세상을 뜬 로전사들의 젊었을 때의 사진들을 수집하여 1.5m 크기로 확대하여 액자에 담은 뒤 그들이 목숨 걸고 싸웠던 변방지역에 세워놓았다. 그들의 령혼이라도 오늘의 그 땅을 둘러보길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지금도 그는 로전사들이 다시 가보고 싶어했던 지역을 찾아다니며 이 뜻 깊은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리장삼은 앞으로도 계속하여 로전사들을 관심하며 홍색자원을 발굴하고 홍색유전자를 계승해나갈 것이라고 했다. 또한 그의 끊임없는 노력과 헌신이 결실을 맺어 후대들에게 진귀한 력사적 재부를 남기고 홍색정신이 더욱 찬란하게 빛나기를 바란다고 했다.   《예술세계》 2025년 제6호
38    박송철, 음악으로 빛나는 삶 댓글:  조회:109  추천:0  2025-12-09
박송철, 음악으로 빛나는 삶 □ 최향미   연변의 문예계를 수십년간 뜨겁게 달군 한 예술가의 열정이 예나 지금이나 관객들의 가슴을 울리고 있다. 박송철지휘가는 처음 지휘봉을 잡던 그 날부터 지금까지, 연변 음악의 력사를 노래하며 관객의 마음속에 깊은 감동을 새겨왔다. 그의 지휘봉은 시대의 숨결을 아름다운 선률로 담아냈고 합창과 관현악의 세계에 혼을 불어넣었다. 고통과 열정, 헌신이 어우러진 그의 음악려정은 한편의 드라마와도 같다.   연변산꽃합창단의 전신은 2007년에 세워진 연변음악가협회 합창단이며 2013년에 연변중화문화촉진회에 소속되면서 ‘연변녀성산꽃합창단’으로, 2018년에 ‘연변산꽃예술단’으로 개칭하였다. 합창단 활동을 두고 말할 때는 흔히 연변산꽃합창단으로 통한다. 이곳에서 오디션을 통해 선발된 연변의 예술을 사랑하는 중로년애호가들은 한목소리로 노래하며 만년의 열정을 불태운다. 박송철지휘가는 합창단 단원들에게 한 음절 한 음절 정성껏 가르치며 합창의 진수를 전했고 단원들은 그의 엄격하고 세심한 지도 아래 진정한 합창의 아름다움을 배워간다.   황순자 부단장은 박송철지휘가의 얘기가 나오면 감동을 금치 못하군 한다.   “박송철선생은 낮에는 합창대를 지도하고 밤에는 음악을 편곡하지요. 마치 소학교 학생을 가르치듯 한 소절씩 정성껏 배워주죠. 우리 합창단 단원중 70%가 음악을 전공하지 않은, 열정만으로 참여한 분들이지요. 그런데도 선생님은 모두에게 세심하게 가르쳐줍니다. 박지휘가님이 없었다면 이 합창단이 존재할 수 없었을 거예요.”   박송철지휘가의 세심한 지도 덕분에 연변산꽃합창단은 연변의 대표적인 녀성합창단으로 성장했다. 2008년, 복건성에서 개최된 해협량안합창절에서 동상을; 2011년, 길림시에서 열린 중국공산당 창건 90주년 기념 길림성합창경연대회에서 2등상을; 2013년, 소주시에서 열린 전국새해맞이예술재능공연에서 특등상을; 2017년, 대만에서 열린 제10회 해협량안합창절에서 동상을; 2019년, 민족풍운계렬활동 및 전통문화 재예전시공연—타이 순회공연에서 금상을; 2021년, 장춘에서 열린 다민족 100인 합창단 경연대회에서 1등상을 수상하였다. 박송철지휘가는 어떻게 이처럼 뛰여난 음악성과를 이끌어낼 수 있었을가?   이에 대해 연변청송문학예술관 류영근 관장은 세가지 핵심적인 요소를 꼽았다. 첫째, 박송철지휘가는 조선 전통합창곡부터 중국 풍격의 곡목, 서양 클래식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쟝르의 곡을 선 보인다. 그는 합창단의 특성과 력량을 정확히 파악하여 최적의 곡을 선택한다. 둘째, 박송철 지휘가의 남다른 지도방식이다. 그는 악보 분석부터 반주 준비, 집중해야 할 부분까지 사전에 꼼꼼히 체크하며 항상 짧은 시간에 최대의 효과를 내는 지도방식을 고수한다. 셋째, 단순한 음악지도를 넘어 사람들을 하나로 묶는 리더십이다. 40여명의 아마츄어 단원들이 한목소리를 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박송철지휘가는 이 어려운 과제를 거뜬히 해결하여 ‘조직 관리의 달인’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혼성합창단과 달리 녀성합창단만의 조화로운 음색이 만들어내는 특별한 아름다움은 박송철지휘가가 연변산꽃합창단을 통해 이루고저 했던 음악적 비전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연변산꽃합창단의 성공은 박송철지휘가의 이러한 노력과 열정이 만들어낸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박송철지휘가는 어떻게 음악의 길에 들어서게 되였을가?   그의 음악 려정은 어린시절부터 시작되였다.   “제 음악인생은 형님과 삼촌의 영향으로 시작되였습니다. 삼촌은 다양한 악기를 다루는 분이였고 형님은 악기연주에 재능이 있었죠. 명절마다 열리는 문화행사에서 저는 형님을 따라다니며 자연스럽게 음악을 접하게 되였습니다.” 이 경험을 바탕으로 박송철지휘가는 소학교와 중학교 시절 음악반에서 리론과 연주법을 배웠고 이후 연변가무단에서 호른선생님을 만나며 본격적으로 음악의 길에 들어섰다. 호른선생님의 엄격하면서도 따뜻한 지도 아래 그는 음악의 깊이를 리해하기 시작했고 연변의 한 중학교에서 음악교사로 근무하며 실전경험을 쌓았다. 더 높은 수준의 음악을 갈구하던 그는 중앙음악학원 통신반에서 4년간 작곡과 음악 리론을 공부하며 탄탄한 기초를 다졌다. 이 시기는 그의 음악인생에서 가장 값진 나날이였다.   그러나 그의 음악인생은 순탄치만은 않았다. 2008년, 암이라는 예상치 못한 시련이 그를 덮쳤다. 건강이 무너져 내리는 어두운 시간 속에서도 그는 음악을 놓지 않았다. 오히려 병상에서도 악보를 펼치고 머리속으로 선률을 그려보았다.   “음악은 어둠 속에서도 빛을 밝히는 등불과 같았습니다. 몸이 아플 때면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어 음악을 더 연구했습니다. 음악이 흐르는 공간에서는 오롯이 자유로울 수 있었습니다. 음악은 제 마음을 알아주는 친구 같았어요. 가끔은 눈물로, 때론 분노로 화음을 만들다 보면 어느새 마음이 가라앉았습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하면 음악은 제 삶을 연장시켜준 령약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는 병마와 싸우는 동안에도 창작과 연구를 멈추지 않았고 결국 음악이 주는 힘으로 다시 무대에 설 수 있었다. 또한 그 뒤에는 한 녀인의 헌신적인 희생이 있었다. 생사를 건 기나긴 병마와의 싸움이 시작되면서 그의 안해는 모든 생업을 포기하고 남편의 가장 든든한 지원군이 되였다. 그녀는 단순히 음식이 아닌 생명을 살리는 건강식으로 남편의 회복을 도왔다. 그녀의 정성은 보이지 않는 치료제가 되여 남편의 몸과 마음을 조금씩 치유하였다.   “무엇보다 음악이 남편을 살린 것 같아요. 남편은 음악에 모든 정력을 쏟아부으며 오로지 음악에만 전념하였습니다. 음악이 큰 힘이 된 것 같습니다.”   안해의 헌신과 음악의 힘으로 그는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 피아노 건반 우에서 흐르는 선률은 고통을 잊게 하는 위안이자 새로운 삶의 동력이 되였다. 박송철지휘가는 지금까지 수십수의 창작곡을 대중들에게 선 보였다. 〈민들레 홀씨〉는 고통의 시간 속에서 피여난 아름다운 예술의 결실이다. 이외 〈진달래여 연변이여〉를 비롯한 다른 창작곡들도 관객들의 열렬한 사랑을 받으며 연변 음악계의 소중한 재부로 남았다. 비록 곡에 담긴 정서는 제각각이지만 모두 고향에 대한 깊은 그리움과 사랑을 담고 있다.   특히 그는 연변조선족자치주 창립 50주년, 60주년, 70주년 등 력사적인 행사에서 대형 광장무용곡을 편곡하여 예술적 기량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무대 우에 펼쳐진 선률들은 고향땅에 바치는 사랑의 편지이자 연변문화의 자부심이였다.   1급 극작가 김정권선생은 이렇게 말한다. “박송철지휘가의 가장 큰 특징은 바로 즉흥적인 창작방식입니다. 당시 핸드폰이 없던 시절인데도 저에게 전화를 걸어 새로 만든 선률을 흥얼거리며 의견을 나누군 했죠. 곡이 완성되면 저를 불러 록음현장에서 함께 들으며 제 의견을 물었고 제가 조언을 하면 즉석에서 수정해 다시 록음하는 등 작업방식이 정말 인상적이였습니다.”   연변음악가협회 부주석 김창근선생은 이렇게 평가했다. “그의 작품세계를 살펴보면 대중가요나 민요풍 가요도 있지만 주를 이루는 것은 품격 있는 예술가요입니다. 예술가요 창작은 대중가요에 비해 더욱 정교한 작곡기법이 요구되며 작곡가의 높은 음악적 소양을 필요로 합니다. 박송철작곡가의 작품은 서정성이 풍부하고 우아하며 창의적이고 폭넓은 음악적 스펙트르를 지니고 있습니다. 특히 그의 곡들은 작곡기법이 매우 정제되여있어 가수들이 자신의 기량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습니다.”   박송철지휘가의 음악에 대한 열정은 피아노 조률에서도 엿볼 수 있다. 그는 수업전마다 악기를 정성껏 다듬는 시간을 가진다. ‘정확한 소리는 모든 음악의 시작’이라는 신념으로 그는 조률을 단순한 작업이 아닌 악기의 령혼과 대화하는 신성한 시간으로 여긴다.   “피아노는 습도를 보장해야 합니다. 온도와 습도의 변화에 민감한 악기라는 점을 꼭 알아둬야 합니다. 더우면 팽창되고 추우면 수축되는 원리에 따라 건조한 겨울에는 줄이 팽팽해집니다. 조금만 잘못하면 줄이 끊어져요. 때문에 항상 습도가 적합한지 류의해야 합니다.”   피아노 조률을 완벽히 마친 후에야 비로소 합창지도를 시작하는 박송철지휘가, 피아노의 정확한 음높이는 합창단 단원들이 따라야 할 절대적인 기준이 된다. 오랜 조률경험은 그의 귀를 더욱 예민하게 만들었다. 그는 합창단 단원들의 미묘한 음정 변화를 순간적으로 포착해내고 수십명의 목소리를 하나의 완벽한 화음으로 이끌어나간다. “목소리는 악기의 음정과 서로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피아노 조률을 철저히 점검해 음정을 완벽하게 맞추는 것으로 작업을 시작하죠. 합창단이 피아노의 선률에 정확히 맞춰 노래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먼저 음정을 완벽히 잡은 후에야 비로소 합창 련습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저는 무엇보다 음정과 리듬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음정이 정확해야만 비로소 아름다운 하모니가 만들어지기 때문이죠. 그래서 단원들과 함께 배우고 성장해나가는 과정에서 저는 직접 피아노를 연주하며 정확한 음악적 기준을 제시합니다. 이러한 세심한 주의와 과정이 합창의 질을 결정 짓는다고 믿습니다.”   박송철지휘가는 합창단 단원들의 목소리를 악기처럼 소중히 다듬으며 음악을 전수하고 따뜻함을 전했다. 그의 인내심은 단원들의 잠재된 가능성을 자연스럽게 꽃 피워주었다.   박송철지휘가의 엄격함과 세심함 그리고 예술에 대한 열정은 관현악단에까지 이어졌다. 그는 지휘봉으로 음악의 령혼을 깨워 악사들이 가장 아름다운 소리를 낼 수 있도록 이끌었고 악기들의 소리를 분석하고 조률하며 완벽한 하모니를 만들어갔다.   “현악기의 부드러운 음색과 관악기의 강렬한 음색은 대비가 뚜렷하기에 연주시 이를 강조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음악이 전반적으로 조화를 이루려면, 다시 말해서 멋 있으려면 악기중에서 저음악기가 아주 중요합니다. 건축에서 말하는 기초가 여기서는 저음악기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때문에 저음악기 연주에 신경을 써주는 것이 지휘가의 역할이라고 봅니다.”   악기의 특성을 꿰뚫는 박송철지휘가의 예리한 통찰력은 현장에서도 빛을 발하였다. 조용한 카리스마로 악단의 전반 흐름을 이끌어나가면서 련습을 거듭하였고 날카로운 청각으로 악기 하나하나의 숨소리를 읽어냈다. 결국 모든 소리들이 그의 손짓에 녹아들어 절절한 화음으로 변신하였다.   연길시로년대학 관현악단 단장 홍순남은 박송철지휘가의 지도방식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어려운 곡을 련습할 때 박지휘가님은 먼저 음악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줍니다. 음악의 흐름과 악절 구성 등 다양한 측면과 더불어 강약 처리, 음악적 감정 등에 대해 종합적으로 설명하죠. 그리고 그 설명에 따라 련습을 할 때는 모든 부분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특히 어려운 소절에 중점을 두어 숙련도를 높이는 방식을 취합니다. 지휘가의 요구가 높기에 대충 넘어가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그 덕에 각 악절을 마무리할 때면 모든 단원들이 음악의 흐름을 제대로 리해하게 되고 자연스럽게 많은 발전을 이루게 되지요.”   박송철지휘가는 수업이 없는 날이면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악보와 씨름하군 한다. 그의 책상 우에는 늘 다양한 악보와 음악 리론책이 쌓여있다.   그는 “련습중에도 좋고 공연중에도 좋고 연주원들이 믿음으로 가득찬 눈으로 저를 바라볼 때면 아픈 것이 다 잊혀집니다. 음악은 최고의 진통제이고 저의 생명을 이어나가는 동력이라고 봅니다.”라고 고백한다. 병마와의 싸움 속에서도 음악이 준 위로와 힘은 그로 하여금 더 깊은 깨달음을 얻게 했다. 이제 주어진 삶은 하루하루가 선물이라는 것을… 그 순간부터 박송철지휘가의 발걸음은 묵묵히 사회를 위한 봉사의 길로 향했다. 그는 자신을 살려준 음악으로 이제는 다른 이들에게 희망을 전하고저 했다. 한곡한곡 악보를 만들고 한 소절 한 소절 멜로디를 생각하며 그는 하루하루 주어진 선물 같은 인생을 사람들과 함께 나누고 싶었다.   안해 장선옥은 항상 남편의 건강을 걱정하고 있다. “제가 항상 얘기하지요. 좀 무리하지 말라고요. 남편은 100% 음악봉사자예요. 어떤 분들은 저한테 ‘남편이 돈을 많이 벌어서 어디에다 씁니까?’라고 묻기도 해요. 정말 모르고 하는 소리죠. 남편이 돈 한푼 따지지 않고 봉사만 한다고 해도 사람들이 잘 믿지 않아요. 합창단 활동도 그렇고 지금까지 의뢰 받은 곡들의 편곡비만 계산해도 어마어마한 금액일 거예요. 그런데 다 무료봉사였죠. 계속 무리하다가 건강까지 해칠가 봐 걱정돼요. 앞으로는 봉사도 좋지만 건강도 잘 챙겼으면 좋겠어요.”   봉사의 삶이 그의 음악인생에 새로운 활력소로 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중을 위한 공연과 후배들을 양성하는 과정에서 그는 오히려 예술의 본질을 깨달았고 이는 그의 음악에 깊이와 진정성을 더했다고 할 수 있다.   지난 7월 11일 오후, 연변산꽃예술단 창립 30주년 기념 음악회는 그 꿈을 향한 또 하나의 도전이였다. 30년의 세월을 담은 특별한 순간, 모두 설레이는 마음으로 이 시간을 맞이했다. 한사람 한사람의 목소리가 하나로 어우러져 아름다운 하모니를 탄생시키고 박송철지휘가의 오랜 꿈이 이 무대에서 찬란한 꽃으로 피여났다.   “30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연변산꽃합창단은 연변의 문화예술을 빛내준 여러분의 사랑 속에서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의 무대는 모든 단원들의 열정과 관객들의 응원이 만들어낸 값진 결실입니다. 특히 이번 음악회에서 저희는 전통과 미래의 희망을 노래로 련결하려고 노력했는데 관객들의 뜨거운 반응이 가장 큰 보람이였습니다. 앞으로도 지역문화의 정수를 전하는 합창단으로 거듭나겠습니다.”   손짓 하나에 울려퍼지는 아름다운 합창의 하모니, 열정으로 빚어낸 찬란한 순간들, 박송철지휘가의 삶은 오롯이 음악으로 새겨진 수십년의 고집이였다. 그의 열정과 헌신은 연변의 문화예술을 더욱 풍요롭게 가꾸며 모두에게 큰 감동을 선사하였다.   “진정한 예술가는 사회적 책임을 다할 때 비로소 완성된다.”고 말하는 박송철지휘가, 음악이 동반된 그의 려정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예술세계》 2025년 제5호
37    배움의 길 댓글:  조회:188  추천:0  2025-06-20
배움의 길 □ 손룡호   2015년, 공무원 생활을 마치고 퇴직하게 된 나는 새로운 삶을 어떻게 채워나갈지 깊이 고민하였다. 오랜 시간 공직에 몸 담으며 쌓아온 경험과 열정을 어디에 쏟아부을지 고민하던 중 문득 영화를 만들어보고 싶었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연변영화드라마애호가협회를 세웠다. 그리고 오늘날까지 거의 9년간 영화제작에 매달리고 있다. 그동안 미니영화 63부, 사회인물 기록영화 22부, 사회문화생활 기록영화 27부, 사회음악예술활동현장 기록영화 15부, 총 127부의 영상작품을 만들어냈다. 그중 6부는 성, 주, 시 인민정부 유관 부문으로부터 우수상을 수여 받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 나는 원래 소설을 쓰던 사람이다. 그래서 퇴직한 뒤 장편소설 몇편을 완성하려고 계획했다. 그러나 소설창작보다 더 강렬하게 내 마음을 사로잡은 것이 바로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욕망이였다. 이 욕망을 굳히게 된 데는 내나름의 몇가지 리유가 있었다. 첫째는 어릴 적부터 영화를 보면서 성장하였고 세상을 읽고 꿈을 키워왔기 때문이다. 영화 속 영웅인물들의 본보기의 힘은 상당히 컸다. 어린시절에는 영웅이 되고 싶었고 영웅처럼 살다가 죽고 싶다는 생각도 가져보았다. 둘째는 2000년초에 있었던 어느 한 만남 때문이였다. 내가 지인들을 조직하여 만든 ‘우리 가족 산악회’란 등산팀에서 젊은 촬영사 허영일을 알게 되였던 것이다. 허영일은 사진과 영상촬영에 아주 능숙하였고 음반도 제작했다. 안도 계관산으로 등산 갔을 때 나는 산꼭대기에서 쉬는 짬에 옆에 앉은 허영일에게 문득 이런 물음을 던졌다. “영일이는 앞으로 무얼 하고 싶소?” “영화촬영을 하고 싶습니다.” 당시 나는 영화촬영을 하자면 장춘영화촬영소나 북경 8.1영화촬영소에 들어가야만 가능하다고 여겼고 그런 촬영소 변두리에도 못 가보고는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해보고 싶다는 생각에야 무슨 죄가 있겠는가? 꿈이 있는 것이 없는 것보다는 낫다.’는 생각에 불가능한 꿈을 접으라는 권유 같은 건 안했다. 그런데 그 날 나눈 대화가 저도 모르게 내 마음속에 단단히 뿌리를 박았을 줄이야! 만약 그 때 허영일과 영화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더라면 나의 영화제작의 꿈이 그렇게 빨리 이루어지지는 못했을 것이다. 영화제작의 꿈은 마치 천메터 넘는 높은 산을 마주했을 때 꼭 올라가보고 싶은 강렬한 욕망과 같았다. 영화는 내게 올라가보지 못한 산이였다. 한번뿐인 인생, 그 산을 오르지 못한 채 바라만 보다가 떠난다면 얼마나 허탈할가? 못해본 일이기에 더 간절히 해보고 싶었다. 하루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는 불장난 같았지만 이미 결심은 굳혀졌다. 당시 연변에는 영화협회가 없었다. 나는 이 분야에 뜻을 둔 사람들을 모아 영화협회를 설립하기로 결심하고 허영일에게 련락하여 함께 준비사업에 들어갔다. 그리고 영화와 드라마 제작에 일정한 기량을 갖춘 애호가들과 함께 협력하고 성장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저 협회이름을 ‘연변영화드라마애호가협회’라고 정하였다. 2016년 7월 8일에 사단법인 허가증을 받고 그해 10월 28일에 연길시 대주호텔 2층에서 설립대회를 열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은 말은 안해도 속으로는 우리 협회가 오래가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내 결심은 드팀없었다. 세상일은 알아서 하는 것이 아니다. 하면서 배우고 배우면서 부족점을 메우고 조금씩 더 성숙해가는 것이 아니겠는가.   1. 10분짜리 무성미니영화 《발자취(足迹)》 2016년 6월에 장춘에서 동북아미니영화축제가 있었다. 국내외적으로 2,178부의 미니영화작품을 접수하고 90편의 후보작 가운데서 사회투표수로 우수작을 선정하기로 했다. 우리 협회에서 만든 10분짜리 무성미니영화 《발자취》가 사회투표 1위로 당당히 선정되였다. 당시 우리 협회는 금방 설립되여 인재, 기술, 자금 등 모든 면에서 부족하였다. 하지만 부족하다고 참여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과감히 참가해야 했다. 나는 자기를 낮추어보고 남을 높이 보면서 뒤로 숨는 것을 제일 혐오한다. 잘났든 못났든 일단 나서보는 것이 자기를 키우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서로 대조하고 비교해야 차이를 분명히 알 수 있잖겠는가. 부족한 여건 속에서도 나는 특별한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사람들이 상상하지 못한 영화를 말이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무릎 아래 다리의 움직임으로 인생을 반영한 영화를 만드는 것이였다. 첫 장면은 태여난 지 한달도 안되는 갓난아이의 포동포동한 두 발이다. 이어 물가에 서있는 서너살 되는 아이의 두 발, 물속에서 장난치는 아이의 두 발, 모래밭에서 장난하는 소년의 두 발, 사랑을 속삭이는 처녀총각의 두 발이 화면에 나타난다. 영화 촬영중 가장 위험했던 두 장면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첫번째는 삶은 위험과 함께 하는 려정이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하여 두 다리가 진흙구뎅이에 빠지는 장면이였다. 8월 중순, 여름 홍수가 지나간 뒤라 강가에 밀려온 진흙이 쌓인 곳이면 촬영이 가능하였다. 어디가 좋을가 궁리하던 중 오래전에 내가 집체호로 내려갔던 마반산의 강이 떠올랐다. 마반강은 부르하통하와 해란강이 합쳐서 흐르는 터라 강가에 진흙이 잘 쌓이였다. 촬영팀을 거느리고 강가에 도착해보니 과연 진흙층이 섬처럼 드러나있었다. 내가 먼저 바지를 높이 걷어올리고 발끝을 저겨디디며 걸었다. 발이 점점 깊이 빠지더니 잠간새에 무릎을 넘었다. 두 다리를 빼기 힘들 정도였다. 바로 여기다 싶었다. 촬영팀은 그 곳에서 먼저 녀자의 두 다리가 빠지는 장면과 남자가 다가와 녀자를 도와 함께 빠져나오는 장면을 촬영했는데 실로 고생이 막심했다. 두번째는 초겨울 살얼음이 낀 강에서의 장면이였다. 사랑하는 녀자가 살얼음이 낀 강을 건너지 못해 강가에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을 때 뒤에서 남자가 나타나더니 녀자를 등에 업고 살얼음이 둥둥 떠있는 강을 저벅저벅 걸어 강 건너에 이른다. 뼈속까지 시린 찬물 속을 걷는 두 다리가 얼마나 시릴지 보는 사람마저 몸서리칠 정도였다. 두 장면 모두 힘들고 위험한 역할인지라 남한테 맡길 수 없어 남자역을 내가 맡았었다. 간난신고 끝에 탄생한 작품이여서일가, 무성미니영화 《발자취》에 대해 어느 영화전문가는 이렇게 높이 평가하였다. “목전까지 무릎 아래 두 다리로 영화를 제작한 단체는 연변영화드라마애호가협회뿐이라고 생각한다. 영화는 착상이 독특하다. 인물형상을 얼굴로 표현한 것이 아니라 갓난아이의 두 발로부터 시작하여 생을 마감하는 늙은이의 앙상한 두 다리로 끝내면서 인생의 희로애락과 삶의 철학을 예술적으로 잘 구현하였다.”   2. 내 연기실력은 어느 정도일가? 극본에서 제시한 인물설정에 알맞는 배우를 선택하는 것은 영화의 진실성과 예술성을 보존하고 향상하는 데서 아주 중요한 환절이다. 가장 효과적인 연기는 감독과 배우의 협력으로 완성되기 때문이다. 우수한 배우는 극본인물에 빠져들어갈 줄 안다. 극본을 읽으면서 이야기줄거리, 인물환경, 배우의 심리를 빨리 포착한다. 영화드라마애호가협회 회장이라면 연기실력도 어느 정도 갖춰야지 않을가 싶은 마음에 나는 치매로인이 등장하는 영화극본을 쓰고 직접 치매로인역을 맡았다. 극본 속 치매로인은 퇴직교원으로 치매에 걸린 후 자식들을 알아 못 보고 밥을 손으로 집어 먹으며 대소변을 가리지 못한다. 그리고 주방에서 밥 짓는 며느리를 ‘엄마’라고 부른다. 이 극에서 아들과 며느리 역은 실제로 나의 아들과 며느리가 맡았다. 내 연기가 리얼했는지 출국했던 친구가 그 영화를 보고 귀국하여 ‘병문안’을 온 우스운 일까지 있었다. 그렇게 꽤 좋은 평판에 나는 은근히 기분이 좋았다. 내 연기실력이 어느 정도 인정 받았으니까. 그래서인지 배우들은 나의 연기지도에 곧잘 따라주었다.     3. 자금 없이 어떻게 영화를 제작할가? 우리한테는 영화제작 경비가 엄청 부족하다. 사람들은 경비도 없이 어찌 영화를 제작하느냐고 고개를 갸우뚱한다. 그러나 우리는 돈 없이도 영화를 계속 만들어내고 있다. 하다면 그 비결은 무엇일가? 한마디로 회원들의 헌신정신이다. 촬영장소로부터 복장이며 교통수단이며 식사비용까지 촬영에 참가한 분들이 도맡는다. 필요한 배우가 부족할 때도 촬영에 참석한 배우와 제작일군들이 토의하여 적당한 배우를 채용한다. 그리고 나는 극본을 쓸 때면 자금투자가 수요되는 촬영장소들과 소품은 피한다. 국내의 큰 도시나 외국을 배경으로 하지 않는다. 비행기에 앉아 가는 장면도 없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가지, 가정집, 우리가 챙길 수 있는 음식 등등 우리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범위로 국한시킨다. 그렇기 때문에 제작경비가 별로 안 든다. 그러나 한가지 부담만은 떨쳐버릴 수 없다. 촬영사들이 젊다는 점이다. 젊은이들은 촬영하여 돈을 벌어야 생계를 유지할 수 있다. 그러니 그들을 한두번만 채용하고 끝내야 한다. 고맙게도 그들은 우리 사정을 잘 알기에 수고한 대가를 요구하지 않는다. 일년에 한두번씩 봉사하는 셈 친다며 웃어넘긴다. 초기에 나는 극본쓰기, 감독 같은 건 혼자 해낼 수 있었지만 촬영과 편집에 대해선 문외한이였다. 특히 편집은 촬영한 장면을 극본에 맞게 하나하나 련결하고 대사를 번역해 자막을 넣어야 하며 적절한 음악을 골라 배경에 깔아주어야 하는 매우 중요한 작업이다. 이런 편집작업은 아주 정교하고 섬세하며 예술적 감각과 세심한 처리능력이 필수이다. 나는 게으름없이 하나하나 열심히 파고들었고 허심히 물어가면서 배움에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런 나였기에 9년 동안 영상을 직접 찍고 직접 편집하였다. 극본, 감독, 촬영, 편집, 자막번역, 음악작업을 모두 내 손으로 해냈다. 이 작업은 본래 여러 사람이 하는 일이다. 그러나 자금 부족으로 혼자서 모든 것을 배워가면서 할 수밖에 없었다. 별다른 투자 없이 영화를 제작해야 하는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하나하나 직접 하다보니 이젠 이 방면에서 일가견이 있다고 자부한다. 올해 3.8국제부녀절 경축작품으로 다큐기록미니영화 《할 일이 있다》를 제작하여 시청자들에게 선물하였다. 촬영에 소요된 시간은 하루 반, 편집작업시간은 일주일, 투자비용은 고작 식비 206원이다. 206원으로 미니영화 한편을 만들어낸 것이다. 누가 곧이 듣겠냐만은 사실 우리 협회는 그냥 이렇게 영화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4. 믿기지 않은 기적 지난해 8월 4일, 미니영화 《즐겁게 날리는 민들레꽃》을 찍기 위해 촬영팀과 연기자들은 연길시 남산 아래에 집합하였다. 그런데 약속시간인 오전 8시 30분이 지나도록 두 주역배우가 나타나지 않았다. 전화련락도 안되고 모두들 실망에 찬 표정들이였다. 나는 그들의 로고를 수포로 돌아가게 하고 싶지 않았다. “다들 올라갑시다. 오늘 촬영은 변함없습니다.” “주인공이 없는데 어떻게 촬영합니까?” “다른 사람한테 맡기겠습니다.” 나는 먼 종친누나의 남편인 김광범에게 련락하여 사정을 설명하였다. 김광범은 마음씨가 착하고 동정심이 많아서 누가 어려운 일에 부딪치면 언제든 도와 나서는지라 갑작스런 요청임에도 시간을 어기지 않고 촬영장소에 나타났다. “매형, 영화촬영을 하는데 군중역을 맡아줘야 하겠소.” 나는 주역배우라고 하면 그가 부담을 가질가봐 군중역이라고 속이였다. “매형이 나오는 장면은 오후에 촬영하겠소. 오전에는 촬영현장을 따라다니면서 남들이 어떻게 연기하는지 잘 관찰하면 되오.” 오후 한시, 점심식사를 마치고 다시 촬영을 시작했다. 두 주역배우가 빠진 상황에서 한 역은 내가 맡고 다른 한 역은 김광범에게 맡겼다. 나는 김광범에게 연기표현을 자세히 설명해주었다. 김광범은 설명에 따라 인츰 촬영에 몰입하면서 맡은 역할을 하나하나 훌륭히 완성했다. 영화 상영식에서 김광범은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손감독의 부름을 받고 남산으로 달려가서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인데 이렇게 훌륭한 영화가 만들어지다니요. 내 눈으로 직접 보면서도 정말 믿기지가 않습니다.” 원칙적으로 영화는 이런 식으로 촬영해서는 안된다. 주역배우 없이 대역으로 하루 만에 촬영을 마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영화제작에 경험이 없는 아마츄어배우가 자기 역할을 출중하게 소화해내 촬영을 성공시켰다. 내막을 모르는 시청자들은 영화를 잘 제작하였다고 칭찬한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해냈다는 사실이다.   5. 끝없는 배움의 즐거움 퇴직하여 영화드라마애호가협회를 세우고 업무적으로나 기술적으로 모르는 일들이 엄청 많았다. 극본은 어떻게 써야 하는지, 극중 대화는 어떻게 설정하는지, 심리연기는 어떻게 표정과 행동으로 표현해야 하는지, 촬영장비는 어떻게 설치하고 록음설비는 어떤 것을 사용해야 하며 또 어떤 위치에 놓아야 록음효과가 좋은지, 주인공의 정서를 잘 살리려면 어떤 음악을 선택해야 하는지… 고민해야 할 기술적인 문제들이 엄청 많았다. 하지만 나는 물러서지 않았다. 모르는 것은 아는 사람에게 물어보면 된다. 한번 물어서 잘 터득이 안 가면 다시한번 물어보면 된다. 상대방이 짜증을 내면서 잘 알려주지 않으면 다른 사람을 찾아 처음부터 다시 물어보면 된다. 나는 영화 제작에 관련해 박준희, 리창균 감독한테서 가르침을 받았고 영화촬영에 능란한 방호범, 영상제작에 능란한 허영일, 정춘길, 강성철 등에게 수없이 문의하면서 응당 장악해야 할 기술들을 하나하나 익혀냈다. 중문으로 자막번역을 하다가 막히면 주위의 슈퍼나 약방의 한족판매원한테 문의하기도 했다. 내가 모르는 것을 정확히 알려줄 수 있는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모두다 나의 스승이였다. 세월이 류수처럼 흘러 연변영화드라마애호가협회를 세운 지 어느새 9년 철을 잡는다. 그러니 내가 모르는 것을 문의하면서 걸어온 해수도 9년인 셈이다. 아직도 모르는 것이 너무 많다. 계속 문의할 것이다. 이제는 문의하는 데 미립이 텄다. 부끄러울 대신에 즐겁기까지 하다. 그렇게 모르는 것을 배우고 익히면서 나는 올해로 70살에 접어들었다. 이제 계속 문의하면서 80살에 접어들 것이다. 숨이 멈추는 날까지 문의는 계속되고 영화는 계속 출품될 것이다. 5.1국제로동절을 맞으면서 내놓은 다큐기록미니영화 《할머니와 손자》를 저마다 눈물을 흘리면서 보았다면서 영화제작 수준이 전보다 많이 향상되였다고 칭찬해주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배움의 용기와 신심을 더 굳히게 된다. 모르는 것을 배운다는 것은 얼마나 대담한 도전인가!    《예술세계》 2025년 제3호
36    연변군중예술관, 전통문화예술의 현시적 가치 재현 댓글:  조회:173  추천:0  2025-04-27
연변군중예술관, 전통문화예술의 현시적 가치 재현 □ 김호       1 연변은 지리적위치가 독특하고 문화관광자원이 풍부할 뿐만 아니라 사시절이 분명하고 생태자연환경도 매우 잘 보존되여있다. 그리고 연변은 최대의 조선족 집거지역으로서 뚜렷한 민족특색을 지니고 있다. 연변의 이러한 우세를 다양한 방식과 플랫폼을 통해 홍보하여 연변의 지명도를 높이는 것이 중요한 요소로 인식되고 있는 요즘이다. 밖에서 연변을 료해하려고 할 때 가장 쉽게 보고 느끼고 체험할 수 있는 것은 민족색채가 농후한 음식과 복식 그리고 문화예술분야라고 할 수 있다. 활력으로 차넘치는 새 연변을 건설함에 있어서 문화예술은 아주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한다. 연변이 지니고 있는 각종 장점을 충분히 보여줄 수 있어야만이 지속 가능한 발전을 이룩할 수 있다. 문화예술을 통해 관광내용을 풍부히 하고 관광체험을 개선하는 것은 장백산문화관광구와 국가급 변경관광시범구를 건설하는 데 긍정적인 역할을 발휘할 것으로 전망된다. 연변의 문화 영향력과 관광 흡인력, 산업 경쟁력을 전반적으로 끌어올리고 전 주 문화관광산업의 고품질 발전을 위하여 연변군중예술관은 장점을 충분히 발휘하여 우수한 예술자원 전파와 문화예술 보급사업을 힘있게 추진하고 있다. 특히 무형문화유산 관련 양성반과 전시공연, 인재육성 등 사업에서 다년간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둠으로써 연변의 문화영향력을 효과적으로 향상시키는 데 일조해오고 있다. 관광의 가장 핵심적 매력포인트는 관광객들이 어디에서도 체험할 수 없었던 독특한 연변의 ‘멋’과 ‘맛’이라고 생각한다. 그 멋과 맛의 면면에는 조선족 전통문화예술이 녹아있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2 1952년 9월 3일, 연변조선민족자치구(1955년에 연변조선족자치주로 바뀜)가 창립되면서 조선족들은 문화예술을 비롯한 각 분야에서 자주적인 권리를 인정 받고 행사하게 되였다. 연변은 중국내 조선족들이 가장 많이 밀집하여 생활하는 지역으로서 당연하게 조선족의 문화예술중심지로 부상하였다. 때문에 전국 각지에 흩어졌던 조선족 문화예술인들이 대거 연변으로 몰려들었다. 이들은 다양한 문화예술단체를 조직하여 다양한 문화행사와 예술공연활동을 활발하게 펼쳐나갔다. 1960년에 설립된 연변군중예술관은 대중적인 문화예술사업을 주관 및 지도, 보급하는 기관단위로서 인민군중들의 문화예술리론 탐구, 우수한 문화예술인재 양성, 사회적인 문화예술봉사 제공, 문예작품창작, 대외교류 등 사업을 기본취지로 하고 있다. 연변군중예술관은 설립 당시부터 조선족 문화예술의 계승과 발전을 주된 목적으로 하였던만큼 민족적, 지방적 색채가 짙은 특색을 유지하면서 한족을 비롯한 여러 민족의 고유한 전통문화를 발굴, 계승, 보급하면서 대중적인 사랑을 받아왔다. 문화예술에 대한 사회적 수요에 비해 과외문예의 토양이 척박하고 전문적인 문예리론연구 인원도 턱없이 부족한 상황에서 연변군중예술관은 민족과 지역 사회의 문화예술발전의 기폭제가 되였는바 여러 민족 인민군중들의 과외문화예술이 전례없이 생기를 띠게 됐다. 최근년간 연변군중예술관은 중화민족공동체의식을 확고히 수립하는 것을 제반 사업의 핵심으로 하면서 과감한 혁신과 돌파를 통해 시민들을 위한 문화예술봉사를 제공함으로써 지역문화 발전에 기여하고 시민들의 삶의 질을 높이는 데 앞장 서고 있다. 특히 연변이 관광도시로 인기를 누리게 되면서 전통문화예술에 대한 관심과 기대가 높아지는 가운데 연변군중예술관은 관광도시로서의 경쟁력을 높이고 지역문화예술 발전에 기여하는 등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기에 노력해왔다. 따라서 연변군중예술관은 지역의 특색 있는 문화예술 자원을 발굴하고 활용하는 데 적극적으로 앞장 섰다. 특히 대중들의 정신문화생활을 풍부히 하는 데 있어서의 문화예술의 대체 불가능한 역할에 모를 박고 농악무 등 지역적, 민족적, 향토적 특색이 짙은 다양한 예술작품을 꾸준히 지도, 창작해왔다. 3 연변군중예술관은 시종 무형문화유산보호사업에 커다란 중시를 돌리고 무형문화유산 발굴과 정리, 보호, 전승, 전승인 양성 등 사업에 심혈을 기울여왔다. 더불어 대중들이 무형문화유산에 대한 의식을 향상하고 무형문화유산의 중요성에 대해 료해하도록 함으로써 문화유산을 사랑하고 아끼는 사회적 분위기를 조성하기에 주력해왔다. 해마다 전국 조선족문화예술 관계부문의 골간양성훈련반을 정기적으로 조직하여 체계적으로 농악무 기초리론과 예술기교를 전수해왔다. 특히 2014년부터 2024년까지 총 7회에 걸쳐 중국조선족무형문화유산(무용류) 양성반(이하 양성반으로 략칭)을 개최하였다. 동시에 전국농악무경연을 정기적으로 조직하면서 문화유산의 보호와 전승에 앞장 서왔다.   연변군중예술관이 주최하는 양성반은 해를 거듭하면서 예술관의 대표적인 양성반으로 자리를 잡았다. 양성반은 조선족 무형문화유산과 전통무용을 계승, 보급하고 후비인재를 양성하여 조선족 전통문화와 전국 여러 형제민족 문화의 융합을 촉진함과 아울러 교류와 소통을 통한 상호의 련대감을 증진하였다. 리론지식과 실전교수 경험을 모두 갖춘 강사들은 명품강습을 통해 참가자들의 문화예술소양을 한층 더 향상시켰다. 이렇게 꾸려온 양성반은 조선족 무용과 무형문화유산을 배움에 있어 권위성과 전문성, 실용성을 모두 갖추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지금까지 동북3성과 내몽골자치구, 산동성 등 지역의 조선족군중예술(문화)관, 소년궁, 조선족무용가협회 등 문예단체의 골간들을 상대로 조선족무용 기초동작, 소고춤조합, 부채춤조합, 가요조합, 조선족타악 및 무형문화유산 민족무용류 특강을 조직하였다. 양성반은 우수전통문화를 전승, 발양하고 업무능력과 문화자신감을 높여주는 데 적극적인 역할을 발휘하면서 수강생들에게 무형문화유산의 정수를 전수했다.     정기적으로 진행되는 양성반은 리론과 실천을 결부하여 조선족 전통예술의 보호와 전승, 홍보에 기여를 하고 있다. 각 지역의 문예골간들은 집중학습을 통해 전문지식과 업무능력을 향상할 수 있는 재충전의 시간을 가지게 되였고 수료후 각자의 자리에 복귀해 해당 지역 업무골간들의 전반적인 소양을 높이고 중국 조선족 무형문화유산의 보호사업을 추진하는 데 힘을 이바지하고 있다. 또한 기타 형제민족들에게 조선족 무형문화유산과 전통예술을 전수함으로써 조선족과 연변에 대해 보다 립체적으로 알리는 창구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양성반은 점에서 선으로, 선에서 면으로, 면에서 공간으로 이어지는 립체적인 흐름과 전파 효과로 조선족민속문화예술을 널리 알리는 데 일조해왔다.   4 연변군중예술관은 지속적으로 다양한 문화예술 양성반과 활동을 계획, 조직함과 아울러 적극적으로 온라인 플랫폼의 파급력을 충분히 활용해 우수한 지역문화와 민족문화를 비롯한 무형문화유산을 홍보하고 전수하는 사업을 열심히 추진하고 있다. 연변군중예술관은 공공문화예술써비스를 제공하려는 봉사정신으로, 시종 광범한 군중들이 평등하게 무형문화유산을 비롯한 다양한 문화혜택을 향유할 수 있게 하는 것을 궁극적인 목표로 삼고 있다. 특히 군중문화활동브랜드를 완벽하게 구축하고 날로 늘어나는 군중들의 문화수요를 충족시키려는 데 주력하고 있다. 또 문화예술의 사각지대를 줄여나가면서 전면적으로 문예사업을 추진하여 규모가 있고 수준이 높고 참여자가 많은 군중문화의 터전을 마련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지도, 강습과 함께 실기와 창작에서도 풍성한 성과를 따냈다. 2013년 군무 〈성세장고〉를 내놓아 국가문화부 제16회 ‘군성상(群星奖)’을 획득하였다. 2021년에는 군무 〈태양고〉를 출품하여 길림성군중무용대회에서 1등의 영예를 떨치며 무용창작에서도 눈부신 성과를 이룩하였다.   연변군중예술관은 향후에도 지속적으로 대중들의 문화적 수요를 만족시키는 등 기층문화건설의 진지 역할을 충분히 발휘할 것이다. 또 광범한 군중들이 공공문화봉사를 충분히 향수 받을 수 있도록 무료개방, 무료강습을 지속적으로 적극 추진할 것이다. 문화예술인들의 혁신적인 노력은 새시대 문예정품 창작에 새로운 지평을 열어가고 있다. 기술발전과 사회변화에 발 맞춰 새롭고 획기적인 예술적 표현방식과 소통방식으로 무형문화유산을 보호하고 전승하는 연변군중예술관 임직원들, 이들의 노력은 대중에게 새로운 감동과 령감을 선사하여 새시대의 희망가를 연주하고 있다. 반세기를 훨씬 넘는 기나긴 세월 속에서 연변군중예술관은 언제나 고유한 민족문화를 지켜나가는 것을 방향으로 삼고 시대의 흐름과 맥박을 같이하면서 문화전승과 문화혁신을 결합시키는 것으로 지역정신문명건설의 도약식 발전을 추진해왔다. 현실에 대한 바른 인식과 미래에 대한 깊은 사고를 바탕으로 민족문화예술번영이란 아름다운 화폭을 만들어가려는 연변군중예술관의 힘찬 발걸음은  계속될 것이다.                                    사진 제공 │ 연변군중예술관  《예술세계》 2025년 제2호
35    평범한 일상, 희망의 노래—뮤지컬 《희망아빠트》를 두고 댓글:  조회:327  추천:0  2025-02-21
평범한 일상, 희망의 노래 —뮤지컬 《희망아빠트》를 두고 □ 한영희     희망아빠트 발코니 뮤지컬은 음악, 무용, 연극표현 등 여러가지 예술을 아우른 일종 무대종합예술이다. 서방에서 산생된 후 20세기 80년대에 국내에 전파되였고 1990년대에 상해대극원에서 《레미제라블》 등 우수한 뮤지컬을 인입하여 공연하였다. 그후 2010년에 중국대외문화그룹(中国对外文化集团), 상해 동방매스컴그룹(上海东方传媒集团) 및 한국 엔터테인먼트 거두 CJ그룹 등이 함께 아시아련합창업(亚洲联创)을 세웠고 중국에서 첫번째 저작권 사용권을 가진 본토화한 뮤지컬 《맘마미야!》를 무대에 올렸다. 2011년 7월, 상해에서의 23차 공연에 이어 전국 20여개 성, 시의 순회공연에서 400여차 공연함으로써 중국 뮤지컬시장의 잠재성을 인지하게 되였다. 근래, 중국 뮤지컬시장은 다원화발전추세를 보이면서 제재와 풍격의 다양성, 소극장 뮤지컬과 연예의 새 공간 등 면에서 새로운 발전을 가져왔고 많은 젊은 관객들을 끌어들이면서 점차 성숙되여가고 있다. 상술한 국내 뮤지컬시장의 배경하에 연변가무단 마학봉연출은 3년간의 고심을 거쳐 2024년 4월에 조선어판 창작뮤지컬 《희망아빠트》를 무대에 올렸고 같은 해 11월에 한어판 소극장 뮤지컬 《희망아빠트》를 무대에 선 보여 사회의 좋은 평가를 받았다. 처음부터 이 뮤지컬 창작의 전반 과정을 보아온 한사람으로서 극본 주제, 배우들의 연기, 음악창작, 무용창작 및 무대미술디자인 등 몇가지 굵은 선에서 소견을 말하려고 한다.   1. 평범한 일상에 담은 큰 주제 뮤지컬 《희망아빠트》는 동북 변강의 작은 도시의 한 아빠트를 배경으로, 가두 주임을 주요 이야기선으로 하고 아빠트 주민들의 일상생활의 이야기를 전개하면서 가두 주임과 경비아저씨의 재미나는 사랑이야기를 삽입하였다. 작품은 이를 통해 조선족, 한족, 만족, 회족 등 다민족이 공동으로 생활하는 ‘희망아빠트’의 들끓는 생활양상을 그려냈다. 내용면에서 보면 이 작품은 아빠트 한단원에 사는 네 가정의 일상생활을 제재로 하였다. 한 가정에는 불고기집영업을 하는 부부가 살고 있고 다른 한 가정에는 페품을 주어 팔면서 생활하는 독거로인이 살고 있으며 한 가정에는 금방 출옥한 후 직장을 찾는 청년이 살고 있고 한 가정에는 주택구입 대출금의 압력을 받는 처녀가 살고 있다. 이 작품은 큰 모순 충돌을 설정하지 않고 주민들의 일상적인 희로애락을 통해 각자의 부동한 내심세계를 보여주면서 인간의 리해와 포용을 노래하였다. 동시에 세간의 용속과 편견을 질타하고 생존의 가치와 의의를 주창하였다. 이 작품은 아빠트의 여러 민족 인민들이 서로 돕고 아끼며 함께 행복한 생활을 꾸려가는 따뜻한 이야기를 표현하면서 변강 인민들이 당과 정부의 지도하에서 화목하게 지내고 나날이 진보하는 시대의 주선률을 보여주었다. 구성면에서 보면 이 작품은 전형적인 산문식 연극구성이다. 작품은 완정한 핵심사건이 없고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연극 충돌이 없다. 그뿐만 아니라 격렬한 충돌과 극 줄거리의 발전을 통해 주제를 보여주는 전통연극과는 달리 네 가정의 일상생활 세부를 통해 잔잔한 분위기에서 백성들의 이야기를 평행적으로 전개하면서 행복한 생활을 꿈꾸고 아름다운 새시대를 지향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인물형상 부각면에서 보면 이 작품에는 모두 아홉 사람이 등장하며 인물마다 개성이 뚜렷하다. 홀로 사는 김할머니는 어질고 부지런하며 내성적이다. 금방 출옥한 장뢰는 내성적이고 우울하며 선량하다. 소연이는 대출금의 압력을 받고 있지만 그래도 명랑하고 열정적이며 진솔하다. 불고기집 사장 명철이는 지저분하지만 활달하고 선량하며 안해 순희는 부지런하며 직설적이고 정직하다. 경비아저씨는 조심스럽고 유모아적이며 보수적이다. 가두주임 왕효연은 명랑하고 활달하며 과단성 있다. 김할머니의 딸 미자는 외향적이고 고집스러우며 리사장은 리기적이고 탐욕스럽다.  이처럼 각이한 성격의 인물들이 매 장면에 등장하여 성격특징을 남김없이 보여주면서 다채롭고 풍만한 장면들로 극의 발전을 이끌어갔다. 특히 불고기집 사장 명철이와 경비아저씨의 형상은 극중에서 취미성과 관람성을 보여주는바 이 작품의 희극성을 나타내는 인물로 주목된다.   2. 다재다능한 배우들의 연기 무대예술의 성공 여부는 배우들의 표현예술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배우들만이 극작가의 사상감정, 연출의 창의성과 미적 추구 등 요소들을 융합할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그들은 최종적으로 무대에서 자체의 연기를 통해 한 작품의 종합적인 미를 관객들에게 보여준다. 이 작품에서도 배우가 어떻게 대사, 노래, 무용 등 요소들을 잘 아우르는가가 관건이다. 연변가무단은 성악부, 기악부, 연극부, 무대미술부, 무용부, 창작편집부 등을 구비한 탄탄한 실력의 예술단체이다. 그리하여 이 작품의 창작에 튼튼한 뒤받침이 되였다. 이 작품 배우팀의 70%는 연변가무단 성악부의 배우들이기에 노래가사와 무대대사가 잘 전달되지 않는 문제, 무대행동의 합리성이 부족한 문제, 인물성격에서 일관성이 결핍한 문제가 존재하게 된다. 하지만 이들은 이 모든 문제들에 과감히 도전하면서 들끓는 열정과 끊임없는 련습 및 작품에 올인하는 정신으로 연출의 뜻을 따랐고 인물성격의 확정과 행동목적 및 대사의 처리와 인물간의 교류 등을 재치 있게 처리하였다. 이 과정에서 이들은 잠재된 천부적인 배우의 장기를 발굴하게 되였고 매번의 공연에서 출중한 연기력을 과시하여 관객들의 갈채를 받았다.                          〈청춘〉의 한 장면                           서막의 무용   3. 내포가 풍부한 음악창작 뮤지컬의 령혼인 음악은 독특한 예술적 매력으로 극에 생명력을 부여한다. 뮤지컬의 음악은 노래음악과 극음악으로 나눌 수 있다.  노래음악은 인물형상부각, 인물정감의 발로, 극중의 분위기 형성 등에 영향을 준다. 이런 시점에서 볼 때 《희망아빠트》의 음악창작은 매우 성공적이다. 첫째, 이 작품에서 매 인물의 노래는 제나름 대로의 풍격이 있다. 뮤지컬의 창법은 일반적인 예술가곡의 창법과 다른바 가사의 뜻을 전달하면서 정감도 전달해야 하는데 부동한 인물성격에 따라 그 풍격도 달라야 한다. 작곡가는 뮤지컬의 이런 특색을 잘 살리면서 매 인물의 성격에 부합되는 곡을 창작하였다. 례하면 김할머니와 장뢰가 전에 살던 생활을 회억하는 장면에서 부드러운 음악 기조, 느슨하고 우아한 절주를 통해 김할머니의 내성적이고 선량한 성격특징, 년령특징, 미래에 대한 희망 등을 보여주었다. 둘째, 이 작품의 노래음악은 인간내심의 정감을 옳바로 드러냈다. 제2막의 불고기집 안해 순희가 남편을 지저분하다고 욕하면서 노래 부르는 장면에서 강렬한 음악기조, 강약이 분명한 절주로 분하기도 하지만 어쩔 수도 없는 순희의 정서를 잘 드러냈다. 극음악은 뮤지컬 장면의 분위기를 조성하고 전반 극 줄거리의 발전을 추진한다. 첫째, 이 작품은 음악과 극 줄거리가 잘 어우러졌다. 서막의 무용장면을 보면 경쾌하고 발랄한 음악과 춤이 어울리면서 관객들의 시선을 집중시켰고 아빠트 주민들의 환락과 화기애애한 생활장면을 보여주었다. 할머니가 꿈속에 들어가는 순간의 음악은 기조가 깊고 몽환의 세계에 들어가는 느낌이 있어 관객들을 숨을 죽이게 한다. 둘째, 이 작품의 음악은 극 줄거리의 발전을 추진하는 작용을 한다. 제6막에서 좌절을 겪은 후 재생을 보여주는데 네집 사람들이 불고기집 명철의 인솔하에 노래하고 춤을 추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현재의 분위기에 알맞는 현시대음악의 특색을 잘 드러내면서 아빠트 주민들의 아름다운 미래를 예시하였다. 이와 같이 뮤지컬 《희망아빠트》의 음악창작팀은 음악이 뮤지컬에서 차지하는 지위와 작용을 충분히 보여주었고 전반 작품의 예술효과를 한층 끌어올리는 데 큰 공헌을 하였다.   조명효과   4. 무대분위기를 조성한 무용 뮤지컬에서 무용은 음악에 못지 않게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무용은 인간의 정감을 깊이 있게 제시하는가 하면 언어로 말할 수 없는 감정을 드러내면서 무대분위기를 조성한다. 무용의 률동적인 표현은 음악과 어울려 아름다움, 슬픔, 기쁨을 보이면서 극의 발전에 좋은 극적인 환경을 만든다. 이 작품의 제7막에서 소연이와 순희가 〈청춘〉을 부르면서 추는 무용이 대표적이다. 서정적인 무용은 아빠트 주민들에게 아름다운 미래가 있음을 제시했고 동시에 그들이 어려움을 극복하고 빛나는 래일을 맞이할 수 있음을 알려주었다. 마지막 설 쇠는 장면에서는 즐거운 무용으로 아빠트 주민들이 가두 주임의 인솔하에 자원봉사쎈터를 세운 이야기를 표현했다. 장뢰와 소연이는 취직했고 불고기집도 개업했으며 경비아저씨와 가두 주임의 사랑도 무르익었다. 이와 같이 작품은 무용으로 주민들이 서로 돕고 보살피면서 손 잡고 함께 하는 아름다운 생활을 그려냈다. 뮤지컬에서 무용의 작용은 더 말할 나위 없다. 특히 이 작품에서 무용요소는 더욱 큰 창작공간을 갖고 있다. 례하면 김할머니와 딸이 꿈속에서 만나는 장면이 그러하다. 이 부분에서 언어와 노래로 표달할 수 없는 한층 깊은 정감을 사실적인 수법이 아니라 쌍무 형식으로 표현하였더라면 그 효과는 더욱 좋았을 것이고 환상적인 꿈의 세계를 잘 그려낼 수 있었을 것이라고 본다.   옛 주민구역 현재의 희망아빠트 5. 도전성이 강한 무대미술디자인 현대무대예술에서 무대미술디자인은 과학기술의 발전에 힘 입어 단일성에서 다원화로 나아갔다. 그리하여 무대미술디자인의 창의성에 끝없는 가능성을 부여하였다. 뮤지컬 《희망아빠트》의 무대미술디자인팀은 제한된 여건에서도 새로운 도전을 시도하였다. 첫째, 소극장임에도 불구하고 대담하게 반기계화의 원형 회전무대를 설치하였다. 원형 회전무대는 낡은 희망아빠트의 거리, 현재의 희망아빠트의 마당, 희망아빠트의 네 가정의 발코니 등 세 부분으로 나뉘여졌다. 지금에 있어서 회전무대 설치는 별로 신기하지 않다. 국내의 대형 극장의 무대는 대부분 회전무대가 있으며 동시에 승강기능도 갖고 있다. 하지만 길이, 너비, 높이가 극도로 제한된 소극장에 회전무대를 설치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네 가정의 발코니 설치는 층수를 계산해야 하기에 극한적인 도전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디자인팀은 모든 난관을 극복해가면서 설계와 제작을 완성하였을 뿐만 아니라 조선족 연극무대에서 처음으로 원형 회전무대로 장면을 바꾸는 작업을 완성하였다. 이런 도전정신은 마땅히 긍정 받아야 한다. 이런 설치는 무대장면을 바꾸는 시간을 단축했고 극 줄거리의 련관성을 이어주는 면에서 매우 좋은 무대시각적 효과를 가져왔다. 둘째, 무대장면의 시각효과에서 홀시할 수 없는 것이 조명효과이다. 조명은 공간범위를 확정할 수 있다. 제6막 장뢰와 소연이 분통을 터뜨리는 장면에서 조명으로 상하층의 발코니를 나누면서 무대시각의 초점을 장뢰와 소연의 표현 구역에 집중시켰다. 그리고 조명으로 공간의 분위기를 조성하였다. 김할머니의 꿈속 장면에서 회색조명을 통해 어슴푸레한 공간분위기를 만들면서 꿈속의 공간을 직관적으로 보여주었고 또 조명으로 인물의 정서를 보여주었다. 제7막 마지막부분, 불고기집에서 순희와 명철이가 정을 나누는 장면에서 두 사람에게 점차적으로 조명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붉은색조명을 첨가하여 두 사람의 뜨거운 정을 시사하였다. 그리하여 강렬한 무대시각적 효과를 가져왔으며 후속이야기를 예시하기도 하였다. 제7막 순희와 소연이 함께 〈청춘〉을 노래하는 장면에서 전반 무대에 밝은 조명을 줌으로써 청춘의 활력과 희망찬 미래를 제시하였다. 설을 쇠는 장면에서는 밝은색과 붉은색이 조합된 조명을 줌으로써 즐겁고 활기찬 음력설 분위기를 연출하였다. 셋째, LED기술을 응용하였다. 무대예술에서 LED기술은 이미 현대무대설계의 중요한 구성부분으로 되였으며 무대의 표현력과 예술적 효과를 극대화하였다. 뮤지컬 《희망아빠트》는 회전무대가 무대공간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기에 조명과 LED배경의 설계에 일정한 제한성을 가져왔다. 특히 무대배경의 연장설계, 스크린의 규격과 내용 및 색채의 선택은 반드시 전반 무대효과와 통일되여야 한다. 이 점에서 LED설계사는 무대의 제한성을 극복하면서 무대공연의 수요에 맞는 배경화면을 제작하였다. 특히 김할머니가 꿈속으로 들어가는 장면이 그러하다. 무대의 높이가 회전무대에 가려지는 상황에서 운무 속에서 배회하는 꿈의 공간환경을 설계한다는 것는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설계사는 교묘하게 구름쪼각의 크기와 색채의 조합을 통해 구름의 조화로운 움직임으로 김할머니의 비몽사몽의 연기를 잘 안받침하였다. 그리하여 매우 훌륭한 무대시각적 효과와 예술적 효과를 창출하였다. 뮤지컬 《희망아빠트》의 창작팀은 많은 어려움을 극복하고 제한된 여건에서도 끊임없이 도전하면서 창의적인 정신으로 이 작품을 창작하였다. 작품은 극본, 음악, 연기, 무용, 무대미술디자인 등 요소들이 연출의 전체적인 구상에 의해 서로 융합되고 작용하면서 뮤지컬예술의 매력을 과시하였다. 뮤지컬 《희망아빠트》는 조선족 연극발전사에서 획기적인 시대적 의의를 띠며 새로운 쟝르로 향한 도전의 효시로 되였다고 할 수 있다.       사진 제공 │ 연변가무단 예술과 《예술세계》 2025년 제1호
34    춘향의 꿈을 찾아서 댓글:  조회:320  추천:0  2025-02-21
춘향의 꿈을 찾아서 —연길시조선족무형문화유산보호중심 창작음악극 《꿈 · 춘향》을 보고 □ 주금파     《꿈 · 춘향》의 한 장면   일전 연길시조선족무형문화유산보호중심 구연부에서 야심차게 준비한 중국 조선족 창작음악극 《꿈 · 춘향》을 관람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음악극은 연극, 음악, 무용, 조명, 미술, 의상, 그래픽 등 모든 예술쟝르를 총동원하여 만들어지므로 예술의 최고 경지라고 한다. 그리하여 나는 극장에 들어가 앉을 때까지 별로 큰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극을 보는 내내 놀라움과 감탄이 전기충격처럼 나를 강타했다. 우리 조선족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춘향전》을 현대감각으로 간략하고 경쾌하게 재해석하여 60분이라는 짧은 시간에 집약해놓았는데 세련되고 우아한 예술적 표현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내 상식으로는 이러한 고차원의 음악극이 만들어진 데는 무조건 국외 명장들의 지도와 도움이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꿈춘향》의 포스터   며칠후 이 작품의 총연출 김영주, 예술총감독 리경화 등 제작일군들과 만날 수 있었다. 작곡가로 익히 알고 있던 김영주 총연출은 초면이였는데 애된 얼굴의 삼십대 초반으로 보이는 청년이였다. 나는 이분들과 진지한 대담을 나누면서 하나하나 의문을 풀어나갔다.  필자: 《꿈 · 춘향》은 어느 나라 예술가들과의 합작품입니까?  김영주: 아닙니다. 연길시조선족무형문화유산보호중심의 배우와 가수들 그리고 우리 연변 현지의 예술가들이 함께 만들어낸 것입니다.  필자: 연변에서도 이런 고차원의 음악극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사실이 참 놀랍습니다. 어떤 계기로 우리 민족의 고전명작 《춘향전》을 음악극으로 만들게 되였습니까? 김영주: 어느 날, 연길시문화라지오텔레비죤방송및관광국 정성무 국장님이 저에게 춘향과 몽룡의 쌍무를 만들 수 있느냐고 문의하였습니다. 그 때 만들 수 있다고 대답하면서 음악극 같은 좀 큼직한 작품을 만들면 좋을 것 같다고 했지요. 그랬더니 국장님께서 그런 큰 그림이 있으면 대담하게 준비해보라고 격려하더군요.  리경화: 배우의 종합능력을 필요로 하는 음악극을 시도한다는 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지요. 하지만 한편으로는 은근히 자신감이 생기더군요. 연길시무형문화유산보호중심은 무형문화유산을 발굴, 보호하는 단위입니다. 구연예술을 한층 더 발굴하고 전승해나가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고 사명이지요. 음악극은 구연과 마찬가지로 종합예술이 아니겠습니까? 저희 예술단에는 말하기, 노래부르기, 악기연주, 춤추기 등 모든 쟝르를 거뜬히 소화해낼 수 있는 팔방미인들이 많지요.  가사창작 토론모임중인 제작진   김영주: 창작평론실, 구연부, 성악부, 무용부의 골간들을 불러서 음악극을 창작할 데 관한 결정을 공포했더니 처음에는 다들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였습니다. 일반 구연극을 만드는 것도 아닌 음악극을 어떻게 만들 수 있느냐며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했지요.  리경화: 고전명작을 잘못 건드리면 본전도 못 건지고 망신만 당할 수 있다는 걸 저도 모르는 바는 아닙니다. 다들 안된다고 할 때 김원희 부국장님이 “세상에 안될 일이 없습니다. 꼭 해내리라고 믿습니다.”라고 격려하였습니다. 그 말에 힘을 입은 저는 단원들을 설득했지요. “함께 지혜를 모아서 한번 우리 민족예술의 힘을 보여줍시다. 이번 작품의 총연출인 김영주작곡가를 믿고 따라가봅시다.” 김영주: 저로서는 부담이 상당히 컸지만 지도부의 믿음에 신심이 생겼습니다. 우선 가사가 직설적이고 간단명료하면서도 철리적인 함축미가 도드라져야 합니다. 저는 김은연과 지화림 이 두 젊은 친구를 가사창작에 투입시켰습니다. 1970년대 조선에서 제작한 《춘향전》의 주제가인, 지금까지 사람들이 즐겨부르는 명곡 〈사랑 사랑 내 사랑〉의 가사 한줄, 선률 한박자도 모방해서는 안됩니다. 순수한 우리의 새로운 창작품이여야 합니다. 좀 어설프더라도 남의 걸 흉내냈다는 느낌을 줘서는 절대 안됩니다. 그리고 음악극이란 우아하고 아름다운 가무와 음악이 집결된 고차원의 예술쟝르이기에 지금까지의 연변 ‘촌티’에서 벗어나야 했지요. 이것은 리경화 예술총감독의 철칙이였습니다. 젊은 친구들과 머리를 맞대고 수십번 고치며 만들어낸 가사들이 점점 내 마음에 들었습니다. 머리속에 이미 만들어진 악상에 맞출 마땅한 가사를 찾아가는 힘든 작업이였지요. 마치 아름다운 웨딩드레스에 얼굴과 몸매, 키가 맞는 녀성을 찾는 것처럼 어려운 작업이였습니다. 드디여 서막의 가사가 완성되였습니다. 가사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옛날 옛날 그 옛날의 진정한 사랑 얘기 리몽룡과 춘향의 진정한 사랑 얘기 청풍명월 달 밝은 밤 맺어진 그 사랑 광한루에서 시작된 두 사람 사랑 얘기 나도 꿈에서라도 이런 꿈 같은 사랑 한번 해봤으면… 합창: 사랑 사랑 사랑 사랑  꿈속 향기는 님의 향기 님의 향기도 꿈의 향기 정녕 꿈도 있고 님도 있고 진정한 너와 나의 사랑 세상 그 어떤 역경이 온다 해도 막을 수 없는 우리 사랑 사랑 사랑 사랑 사랑 사랑—  사랑아 진정한 사랑아  사랑아 영원한 사랑아 꿈에서라도 나도 한번만 그 같은 사랑 원없이 해봤으면 사랑아 진정한 사랑아 사랑아 영원한 사랑아 깨지 말아 꿈 깨면 님 없고 가지 말아 너 너 가면 꿈이 없다 옛날 옛날 그 옛날의 진정한 사랑 얘기 오늘날에 보며는 또 다른 사랑 얘기 저 달 속 궁전 광한전을 지상에 옮겨놓은 광한루에서 다시 보는 두 사람 사랑 얘기 진정한 사랑 얘기 황홀한 사랑 얘기 진정한 사랑 얘기 황홀한 사랑 얘기 허공에서 비추던 달 광한루에 내렸네 남: 사랑— 사랑—  녀: 사랑— 사랑—  남: 사랑— 사랑—  녀: 사랑— 사랑—   리경화: “…한양에 홀로이 계시는 서방님, 보고픈 그리움을 담아서 보내드립니다. 떨어지는 잎새에 서방님 이름 적어 이 밤도 내 님을 그려봅니다…” 이 가사를 볼 때 저는 등골에 소름이 쫙 끼쳤습니다. “떨어지는 잎새에 서방님 이름을 적어…” 이 대목이 압권입니다. 춘향과 몽룡의 사랑이 찬서리를 맞은 잎새처럼 크나큰 고초를 겪게 될 것이란 걸 예시해주지 않습니까?   《꿈 · 춘향》의 한 장면 필자: 음악극의 주인공인 춘향의 첫 등장이 어떤 방식일가 상상했는데 대보름달을 타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장면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김영주: 중국 전설 속의 선녀 항아가 달나라에서 옥토끼와 같이 살았던 곳을 광한전이라고 불렀습니다. 《춘향전》 원작에서도 단오날에 그 광한전을 본 따 지은 광한루에서 그네를 뛰던 춘향이가 몽룡과 처음으로 만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저는 그네줄을 달에 매여서 춘향이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걸로 비약시켰습니다. 필자: 참신한 아이디어였고 참 대단한 도약입니다. 우아하고 아름답게만 만들면 취미성이 약해지겠는데 음악극 《꿈 · 춘향》을 보면 구연에 유머가 담겨있어 재미가 쏠쏠하던데요. 리경화: 이번 음악극에는 구연부가 주축을 이루는 명장면이 꼭 있어야 했습니다. 방자와 향단의 사랑장면, 그리고 관객들의 웃음을 자아낼 수 있는 기생점고장면에서 구연의 극치를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기생점고에 나오는 대부분 출연자들은 구연배우가 아니라 가수들이였습니다. 무대에서 우아한 모습으로 노래 부르던 그들을 완전 망가진 모습으로 우습강스럽게 포재를 피우게 하는 게 힘들었습니다. 인물들의 캐릭터를 설명해주고 일 대 일로 동작들을 하나하나 가르쳤습니다. 김영주: 저도 사실 가수 분들의 표현이 어색할가 봐 근심했는데 리경화 예술총감독이 직접 동작들을 가르치며 채찍질하니 일취월장으로 실력이 올라가더군요.               배우들에게 연기를 지도해주는 리경화 예술총감                  작곡중인 김영주 총연출 필자: 《춘향전》 원작에는 쪽배를 타는 장면이 없었잖습니까? 그 장면이 너무 인상 깊었습니다. 김영주: 관객들이 춘향과 몽룡이 겪게 되는 사랑의 고난을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마주하게 하려고 비바람과 파도 속을 헤가르며 가는 쪽배에 담아봤습니다. 필자: 그리고 한양으로 올라오라는 아버지의 편지를 받는 장면의 예술처리를 아주 재치 있게 잘했던데요. 김영주: 재래식 표현 대로 종이에 적은 서한을 손에 들고 읽게 하면 이야기 전달에는 무리가 없겠지만 예술적으로는 큰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폭이 1.5m, 길이가 6m의 흰 천에 붓글씨를 써서 천정에서 무대바닥까지 드리우게 하고 그 대형 편지를 감싸고 돌면서 주인공 남녀가 곧 리별해야 할 안타까운 심정을 표현하게 했습니다. 필자: 원작에서는 분명 춘향이가 주인공인데 이번 음악극에서는 몽룡과 방자, 향단이가 적지 않은 분량을 차지했더군요. 그리고 지금까지 변학도는 나이 많은 뚱보에다 구레나룻이 더부룩한 것이 대표적인 형상이였는데 이번 음악극의 변학도는 몽룡에 못지 않은 젊고 잘생긴 미남자이던데요. 김영주: 음악극이 성공하려면 주인공 역할도 중요하지만 조연들의 역할도 아주 중요합니다. 전반 극의 흥미와 웃음을 책임진 인물들이니까요. 탐욕스럽고 사치와 주색에 빠진 인물인 변학도가 겉모습은 번지르르하게 잘생겨야 극적 효과를 더 키울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필자: 이번 음악극에서 가장 돋보이는 것이 화려한 우리 민족 전통복장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광한루, 아치형 돌다리, 춘향이가 타고 내려온 둥근달 등의 무대도구들은 간단하면서도 크나큰 시각적 효과를 나타내지 않았나 싶습니다. 김영주: 의상과 무용부분을 책임진 박서경 감독이 복장 앞섶의 핏이 안 좋거나 하자가 있는 복장은 여지없이 페기해버리면서 의상의 완벽함을 추구했습니다. 도구를 책임진 연변가무단의 리경학 감독에게 너무 고마웠지요. 짧은 시간내에 거의 완벽에 가깝게 무대도구들을 마련해줘서 감사하다고 인사말을 했더니 그분이 오히려 자기를 믿어주고 기다려준 것이 고맙다고 하더군요. 이분들의 책임감 있는 욕심이 이번 작품을 한층 더 빛나게 했다고 봅니다. 리경화: 음악극에서 의상이 날개인데 무조건 최고로 만들어야지요. 비용 때문에 예전에 쓰던 의상실의 복장으로 일부를 대체하자는 의견도 나왔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작품에는 어느 것 하나 대충 맞춰서 넘기려는 생각을 하지 말라고 강조했습니다. 경제적으로 뒤심이 되여준 연길시문화라지오텔레비죤방송및관광국 지도부에 진심으로 감사하다는 인사를 전하고 싶습니다.   《꿈 · 춘향》의 한 장면 필자: 춘향과 몽룡의 리별장면에서 작은 아치형 다리가 끊어지던데 결말부분에서는 무대 량쪽에 갈라져있던 대형 아치형 다리가 천천히 마주 다가와 다시 하나로 이어지면서 두 주인공이 상봉하지 않았습니까. 그 장면에서 음악극의 극치를 보여주었다고 보는데요. 김영주: 견우와 직녀가 칠석날에 까치와 까마귀들로 이루어진 오작교에서 만나잖아요. 바로 그 오작교에서 착상을 받아서 형상화한 것입니다. 필자: 전반 조명효과를 보면 복잡하지 않으면서도 화려하던데 조명은 어떤 취지로 활용하였습니까? 김영주: 미술과 조명은 등장인물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도구라고 생각합니다. 조명을 책임진 한택성 부단장님의 역할이 컸습니다. 조명이 지나치게 화려하고 빈번하게 바뀌면 극중 인물의 형상을 오히려 손상시키는 역효과가 날 수 있다는 그분의 관점이 저의 연출의도와 맞아떨어졌지요. 그래서 조명을 될수록이면 아꼈습니다. 적재적소에 필요할 때만 사용하려고 했지요. 필자: 고정무대에서 펼쳐진 음악극이였지만 마치 한편의 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극본을 맡은 김정권선생에게 이 음악극 제작에 참여하면서 느낀 감상 한마디를 부탁 드립니다.  김정권: 재직 때부터 음악극에 흥미를 가지고 몇편 쓴 적이 있습니다. 총연출을 맡은 김영주선생이 우리 민족의 고전명작 《춘향전》을 현대감 있는 음악극으로 만들겠다며 구상을 쭉 얘기하는데 그의 머리속에는 벌써 작품 구성이 어느 정도 완성되였더군요. 우리는 몇차례 만나서 작품을 구상하고 토론하고 합의를 보면서 대본 창작에 들어갔습니다. 그 때 서곡은 작곡이 완성된 상태여서 그 곡을 허밍으로 수십번 들으면서 대본을 창작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음악극은 음악이 생명이고 령혼이다보니 작곡자인 총연출의 의도를 따라야 했습니다. 1차 대본에서 문제점을 찾고 다시 2차 창작에 몰두했습니다. 조선족이라면 거의 모르는 사람이 없을 《춘향전》이지만 아무리 명작이라고 해도 새롭지 않으면 안됩니다. 우리는 어쨌든 ‘퓨전’으로 엮어야 했습니다. 극본은 음악극의 첫단계인 설계도일 뿐입니다. 설계도의 밑그림에 따라 어떤 모양으로 완성될지는 가늠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반년 넘게 몰입하여 작품을 내놓고 제작진에게 모든 것을 맡겼습니다. 처음 공연을 보면서 내내 감탄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가사와 작곡, 편곡이 이렇게 상상을 뛰여넘게 너무나 잘되리라고는 예상을 못했습니다. 아리아, 이중창 , 칸타타, 레치타티보 등 음악요소들이 잘 안받침되였기에 명실공히 음악극이란 쟝르가 완성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꿈 · 춘향》을 보고 나는 연길시조선족무형문화유산보호중심에서 ‘큰 사고’를 쳤구나 싶었다. 연길시가 ‘왕훙’도시로 유명해지면서 전국 각지의 관광객들이 쇄도하고 있는데 그들에게 제일 중요한 세가지 ‘거리’중에 먹을거리와 볼 거리는 다채롭지만 보고 느낄 수 있는 문화적인 거리가 결여된다는 아쉬움이 있었다. 그런데 이번 《꿈 · 춘향》의 탄생이 이 부분을 메꾸어 관광객들에게 정신적인 예술의 향연을 마련해주게 됐다는 뿌듯함으로 가슴이 벅차오른다. 중국 조선족 창작음악극 《꿈 · 춘향》의 창작자 분들에게 다시한번 경의와 감사를 드린다.     사진 제공 |  연길시조선족무형문화유산보호중심 《예술세계》 2025년 제1호
33    훌룬부이르초원이 들려주는 이야기 댓글:  조회:394  추천:0  2024-11-14
훌룬부이르초원이 들려주는 이야기 □ 신기덕       4박 5일 일정으로 차를 타고 시간에 쫓기며 부랴부랴 훌룬부이르초원을 돌아본 것이니 수박 겉핥기인 셈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일망무제한 초원을 돌아보면서 나름 대로 받은 인상이 깊고 느낀 바가 많다. 그래서인지 초원의 모습이 자주 눈앞에 떠오르면서 초원이 조용히 나에게 들려준 그 이야기를 글로 적어야 되겠다는 강한 촉동을 받아 이렇게 필을 든다. 훌룬부이르초원은 내몽골자치구의 동북쪽, 대흥안령의 서쪽에 위치해있다. 말하자면 몽골고원의 최동단이다. 이 초원은 내몽골의 초원 가운데서 면적이 가장 큰 초원으로서 일대천교(一代天骄) 칭기스칸—테무진이 힘을 기르고 천하를 호령하던 력사가 시작된 곳이다. 그의 어머니와 안해도 훌룬부이르초원의 사람이였다. 중국의 력사를 돌이켜보면 중국의 동북지역은 한시기 금조의 지역이였고 칭기스칸이 정복한 다음에는 원조의 땅이였다. 테무진은 몽골의 부족들을 통일하여 원조를 건립한 후 군사를 거느리고 아시아와 구라파의 땅을 종횡무진으로 내달리며 그 강토를 넓혔다. 옛날 쏜살같이 말을 타고 내달리면서 서로 칼을 휘두르며 싸우던 그런 살벌한 시대는 력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한때 전장이던 이 초원에 지금은 풀들이 잘 자라나 소와 양들이 따뜻한 해볕을 받으며 시름없이 풀을 뜯고 있다. 이 초원엔 고요한 평화가 깃들어있다. 전쟁이 없는 평화로운 사회에서 살고 있다는 것은 그야말로 최고로 행복한 일이다. 가없이 펼쳐진 살진 초원을 바라보면서 나는 그냥 자유와 평화의 안온함과 행복을 절감할 수 있었다. 관광뻐스를 타고 달리면서 가없이 넓고 푸른 대초원을 바라보노라니 문뜩 〈초원에 지지 않는 태양이 솟네〉라는 노래의 가사가 떠오르며 그 경쾌한 곡조가 마치 귀전에 들려오는 듯했다. “푸르른 하늘엔 흰구름 흐르고 / 흰구름 아래엔 말들이 달리네 / 채찍소리 사방에 울려퍼지고 / 온갖 새들이 일시에 날아가네 / 누가 나에게 이곳이 어디냐고 묻는다면 / 내 대답하리 이 고장은 우리들의 초원이라고 / 초원에 지지 않는 태양이 솟네 / 지지 않는 태양이 솟네” 우리는 훌룬부이르초원을 유람하면서 〈훌룬부이르대초원〉이란 노래를 들었다. 몽골족노래는 자기의 독특한 개성을 가지고 있다. 나는 〈까다메린(嘎达梅林)〉이란 몽골족노래를 특히 즐기는데 그 곡조는 그야말로 인상적이다. 어딘가 경쾌한 느낌이 강하면서도 깊은 정서가 흐르고 특히 길게 운을 뺄 때 마지막의 그 미묘한 떨림은 말 그대로 사람을 ‘전률’시킨다.   몽골족의 민족악기—마두금 우리 조선족에게 가야금이 있듯이 몽골족에게는 마두금이 있다. 마두금은 몽골족의 대표적인 민족찰현악기의 하나이다. 보통 울림통은 4각형인데 줄감개 웃부분은 말대가리모양으로 되여있다. 그래서 ‘마두금’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마두금의 음색은 사람 목소리에 가까운데 부드럽고 둥글며 특히 서정적이고 부드러운 곡조를 잘 표현한다. 마두금은 악기일 뿐만 아니라 몽골족문화의 상징이기도 하다. 그것의 모양, 재료, 음색 및 연주기교는 몽골족의 생활형태와 민족정신을 반영하고 전형적인 민족예술의 특성을 나타낸다. 마두금은 당송시기로 거슬러올라가는 오랜 력사를 가지고 있으며 수백년의 진화를 거쳐 원조시기에 민간에 널리 퍼졌다. 2006년에 몽골족마두금음악은 제1기 국가급 무형문화유산 대표성 종목에 등록되였다.   몽골족문화의 상징—오포 이번에 려행할 때 차창 너머로 오포(敖包)를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오포는 그 모양이 동일하지 않고 제각각이다. 몽골어로 ‘오포’라는 말은 사실 ‘무지’나 ‘무더기’를 가리키는데 구체적으로 말하면 ‘돌무지’, ‘흙무지’, ‘나무무지’ 등이다. 오포는 처음에 료원한 초원의 길이나 경계를 나타낼 때 사용하였는데 세월의 흐름과 더불어 그 내용과 역할이 부연되여 지금은 여러가지 제사를 지낼 수 있는 장소로 리용되고 있으며 적지 않은 곳에서는 젊은이들이 사랑을 속삭이고 백년가약을 맺는 장소로도 리용된다. 〈오포에서 만나요(敖包相会)〉라는 노래의 가사를 살펴보면 오포의 작용을 알 수 있다. 노래가 정서적이고 부르기가 어렵지 않아 대중들이 즐겨 부르는 ‘십팔번’이다. 이번에 본 오포에는 많은 사람들의 념원을 담은 하다(哈达)가 가득 매여져 참으로 가관이였다.   소수민족지구에 다녀올 때는 그 민족의 특유한 례절을 미리 알아두는 것이 필요하다. 이번 려행에서 나는 관광팀 팀원들을 대표하여 몽골족 주민이 부어주는 인사술을 받아마시게 되였는데 다행히 이전에 울란호트시에 다녀올 때 몽골족 례절을 배워두었기에 그대로 써먹을 수 있었다. 몽골족 녀인이 술을 부어주면 두 손으로 정중히 받고 술잔을 왼손에 쥐고 오른손의 무명지에 술잔의 술을 조금 묻혀서 하늘을 향해, 땅을 향해 술을 튕긴 다음 무명지에 술을 묻혀서 자기의 이마 중간에 바른다. 이는 하늘에 감사를 드리고 땅에 감사를 드리며 조상에게 감사를 드린다는 뜻이다. 이런 과정을 끝내고 나서 술을 조금 마신다. 전에 한 친구가 나에게 평원과 초원이 어떻게 다른가를 물은 적이 있다. 그 때도 설명은 해주었지만 완미하지 못한 것 같아 이 글에서 다시 보충하여 해답하려고 한다. 즉 평원과 초원은 그 계렬부터 완전히 다르다. 평원은 지형계렬에 속하는 것으로 거기에는 평원외에 산지, 고원, 구릉, 분지 등이 포함되며 초원은 생태계렬에 속하는 것으로 거기에는 초원외에 삼림, 사막, 빙천 등이 망라된다.                      《예술세계》 2024년 제5호
32    안도수씨철제품제작기예 성급 대표성 전승인―수진재 댓글:  조회:638  추천:0  2024-08-09
안도수씨철제품제작기예 성급 대표성 전승인―수진재 □ 리아   철제품공예는 한조, 당조 시기에도 존재한 것으로 그 력사가 아주 유구하다. 그 력사의 흔적을 오늘날 안도현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안도수씨철제품제작기예(安图隋氏铁制品制作技艺)는 민간에서 오랜 류전과 전승을 거친, 높은 예술성과 실용성을 갖춘 민간수공업기예이다. 주로 철제 재료와 아크릴 색소를 결합하는 방식으로 공예품을 제작한다. 안도수씨철제품제작기예는 여러 민족의 수공업기예의 우점을 받아들이고 철제품과 미술의 결합을 통해 작품의 립체감을 높여준다. 안도수씨철제품제작기예는 안도현의 대표적인 무형문화유산으로서 중화우수전통문화를 널리 알리고 장백산지역 여러 민족의 민속풍정을 생동하게 표현하며 안도현 특색문화예술자원이 지닌 민족문화가치를 선전하는 데 자못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2011년, 안도수씨철제품제작기예는 제3기 성급 무형문화유산 대표성 종목에 등록되였다. 그리고 2018년, 안도수씨철제품제작기예의 성급 대표성 전승인으로 수진재(隋进才)가 선정되였다.      수진재는 대대손손 철제품가공을 가업으로 삼아온 가문의 영향을 받아 어린시절부터 이 분야에 관심이 많았다. 1989년, 길림예술학원 미술학부를 졸업한 후 20년 가까이 미술교육에 종사하면서 본인이 보고 듣고 느꼈던 현시대 예술에 대한 지식과 집안 어른들에게서 전수 받은 전통적인 철제품제작기법을 결합하여 자신만의 개성을 갖춘 독특한 기예를 탄생시켰다.  그는 많은 작품들 중에서 〈연변생선구이〉와 같은 물고기 형상의 작품들을 대표작으로 꼽는다. 한것은 그가 처음으로 철제품을 제작해보고 싶은 창작욕구가 생긴 까닭이 바로 물고기였기 때문이다. 우연히 밥상에 마른 칼치로 만든 료리가 오른 적이 있었는데 바싹 말라붙은 형태와 질감을 보노라니 이게 생선인지 철가공품인지 헛갈릴 정도였다. 그래서 한번 철로 물고기 형상을 만들어보려 했던 호기심이 예상 밖으로 현재까지 이어져 직업으로 된 것이다. 한편으로는 예술인으로서 자신만의 창작풍격을 모색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고 전공분야인 미술에 점차 자신감을 잃어가면서 막막하기만 하던 미래에 등불을 밝혀준 셈이기도 했다.    그렇게 붓 대신 망치를 들고 화선지 대신 철로 자신의 예술창작을 실천해온 지도 어언 20여년이 흘렀다. 그의 손끝에서 수많은 차거운 쇠덩어리들이 정교한 공예품으로 탈바꿈했고 어느덧 그만의 독특한 예술풍격이 형성되였다. 그동안 수진재는 국내의 크고작은 전시와 콩쿠르에 작품을 출품하여 많은 상을 받아안았다.  2009년, 길림성고등학교시각콩쿠르에서 〈련꽃녀〉가 2등상을 수상.  2014년, 중화인민공화국 창건 65주년 길림성미술작품전시에 〈연변생선구이〉가 입선.  2016년, 전국로혁명근거지수공예술전시에 길림성 대표로 참가하여 표현상을 수상.  2017년, 제12회 중국(의우)문화제품무역박람회에 길림성 대표로 참가하여 작품 〈명태의 아름다운 변신〉을 출품해 혁신디자인상(创新设计奖)을 수상.  2018년, 〈불타오르는 나날〉이 중국당대공업예술미술비엔날레에 입선, 이듬해에 열린 절강 · 중국무형문화유산박람회 전시에 입선. 2019년, 〈해마다 풍요롭길 기원하다〉가 제1회 중화무형문화유산 신전상(薪传奖) 전통공예전시회에서 우수상을 수상. 2022년, 중국무형문화유산음력설문예야회에 참가하여 자신의 대표작품들을 전시하였으며 같은해, 〈우빙을 입은 미인송〉이 2022년 북경동계올림픽을 주제로 한 ‘다채로운 신주’무형문화유산전시에 참가하였다.  이외에도 2018년 세계무형문화유산대회에서 특수공헌상을 수상하였고 선후로 길림성공예술미술대가(吉林省工艺美术大师), 가장 아름다운 무형문화유산 전승인(最美非遗传承人) 영예칭호를 수여 받았다.      2017년, 안도현문화관광부문에서는 안도현 석문진에 수씨철예화(铁艺画)예술작업실을 설립하였다. 최근 몇년간, 수진재는 실업로동자, 빈곤호, 장애인 등 군체를 대상으로 전문적인 철제품제작기예 양성반을 조직해 인재를 양성하고 빈곤퇴치여건을 마련함으로써 안도현 특색관광구역이 민족문화전파공간으로 되게 하였다. 또한 생산, 전승, 판매의 일체화 모식을 도입하여 무형문화유산을 상품화함으로써 빈곤호의 경제수입을 늘이고 안도현의 빈곤퇴치사업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다.  그리고 정기적으로 안도수씨철제품제작기예양성반을 조직해 전문인재 양성사업에 큰 도움을 주었고 무형문화유산 보호사업에 아낌없이 공헌하였다. 이외에도 적극적으로 여러 위챗공식계정과 커뮤니티플랫폼 등 다양한 온라인매체를 통해 안도수씨철제품제작기예의 기초리론지식과 력사문화적 가치 등 내용을 보급하고 문자, 사진, 동영상 등을 활용해 관련 문화지식과 경험을 전파하였다.         다양한 전승보호사업과 전파교류활동을 통해 안도수씨철제품제작기예는 날로 대중화의 특성을 띠면서 국내외 여러 매체의 관심과 더불어 사회 각계층 군중들 속에서의 문화적 지위가 점차 높아졌다. 수진재는 다년간 무형문화유산 전승, 전파, 혁신에서 새로운 발전을 가져왔고 기층문화인재대오 건설 등 면에서 적지 않은 성과를 이루었다. 다년간 지역과 시대에 구애 받지 않는 중화우수전통공예의 문화적 가치를 널리 알리고 짙은 지역특색을 띤 새시대 장백산문화 이미지를 수립하는 데에 많은 심혈을 기울여온 수진재는 민간문화예술인과 기층문화예술사업종사자들의 귀감으로 되고 있다.       사진 제공 │ 수진재 《예술세계》 2024년 제4호
연극인으로 승부한 ‘체육객’ ― 연변가무단 연극부 부장 원용란을 만나다 □ 신철국       “체육에 소질이 있는 사람들은 예술에도 끼가 있답니다.” 헤이, 나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말 그대로 듣다 첫 소리였다. 하지만 이어서 경쾌한 률동에 화려한 몸놀림을 선 보이는 피겨선수들을 떠올리니 어딘가 일리가 있다 싶었다. 허나 첫밗에 체육인과 예술인을 슬며시 갖다 붙이는 ‘의뭉한(?)’ 연극인의 소리 치고는 어딘가 미심쩍었다. 이거 혹시 본격적인 공연에 앞서 “딱!” 하고 상 우에 경당목(惊堂木)을 내려놓는 중국의 전통이야기군들처럼 이제 막 꺼내놓을 드라마틱한 이야기에 변죽을 울리는 게 아닌가 싶었다. 그랬다. 단막극, 장막극은 물론 TV소품, 뮤지컬 등 다양한 쟝르를 넘나들며 40여년간 연극예술의 한우물을 파온 원용란의 빙긋이 웃는 얼굴을 마주하니 말이다.     ‘체육객’이 ‘예술객’으로 1965년 8월, 원용란은 안도현 명월진에서 아버지 원희수, 어머니 김계숙의 3자녀중 차녀로 고고성을 울렸다. 노래도 잘 부르고 손풍금도 제법 잘 다루는 아버지와 춤, 노래에 장기가 있는 어머니를 두어서인지 원용란은 어려서부터 노래와 춤에 싹수를 보였다. 헌데 예술보다 체육에 더 심취했던 그녀는 소학교시절에는 배구선수로, 중학교시절에는 소프트볼(垒球)선수로 맹활약하며 ‘이단’의 길을 걸었다. 그러던 그녀가 예술에 눈길을 돌리게 된 것은 길림성소프트볼팀 선수모집에서의 탈락이였다. 이럴 수가! 도무지 믿기지가 않았다. “전도유망한 체육객” 소리를 들으며 그라운드를 누볐던 그녀였으니까. 하지만 한쪽 문이 닫히면 다른 문이 열린다더니 ‘체육객’ 꿈이 무너졌다고 적잖이 실망한 그녀한테 새로운 무대가 나타났다. 1984년초였다. 당시 막 보급되기 시작한 텔레비죤을 통해 자기 또래의 녀학생들이 예술무대에 등장하는 것을 본 원용란은 자기의 실력이면 그녀들한테 절대 짝지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 다짜고짜 부모에게 예술 쪽으로 발전해보겠다고 떼를 썼다. 그 때까지 쭉 운동에만 매달려왔던 딸애가 갑작스레 예술로 ‘핸들’을 돌리겠다는 말에 부모는 도리질을 했지만 한번 먹은 마음을 쉽게 꺾지 않는 그녀의 고집에 결국 응낙하고 말았다. 그렇게 별로 준비도 없이 전공과목시험에 참가한 원용란은 예상 밖으로 연변예술학교(현재 연변대학 예술학원) 연극전공에 합격하였다. 그러나 입학이 전부가 아니였다. 수업에 참가한 그녀한테 새로운 시련이 닥쳐왔다. 무엇보다 다년간 안주해왔던 체육에서부터 예술에로의 환경 전환이였다. 그중에서도 표현과목 수업은 마치 어릴 적 소꿉놀이를 방불케 했다. 자기가 생각했던 ‘고상한 예술’과는 차이가 있었다. 연극예술이 ‘시시하게’ 느껴졌다. 한마디로 재미가 없었다. 달포도 안돼 집으로 돌아온 그녀는 부모 앞에서 일방적으로 예술에 대한 포기를 선언했다. 그런 그녀를 부모가 엄숙하게 타일렀다. 스포츠도 기초가 우선인 것처럼 예술도 기초부터 튼튼히 다져야 한다는 것, 너는 예술에도 천부가 있으니 열심히 노력하면 된다는 것, 포기란 말은 배추나 셀 때 쓰는 거지 꿈이 있는 사람한테는 해당되지 않는다는 것!… 결국 그녀는 마음을 다잡고 다시 귀교해 동학들과 어울리며 배움에 전력했다.    중학교시절 소프트볼선수로 활약한 원용란               연변예술학교 연극반에서 연극기초훈련을 하는 장면(왼쪽 첫번째)   원주삼(표현), 리화(리론), 향개명(발레), 한룡길(조선족무용), 정정문(성악) 등 선생님들의 자상한 가르침 아래 학교에서 많은 지식을 배우고 1986년, 왕청현문공단에 실습을 내려간 원용란은 소품 〈고추며느리〉 출연팀의 성원으로 연변중청년소품콩쿠르에 참가했다. 그번 콩쿠르에 다른 팀을 대표해 참가한 연극계의 선배 오선옥이 50대 아주머니 역을 맡은 원용란(당시 23세)의 옷매무시를 아주머니처럼 고쳐주면서 이렇게 조언했다. “등수에 연연하지 말자. 자신이 갖고 있는 연기의 장점을 잘 살려서 연기를 하면 등수의 의미를 넘어선다.” 그렇게 따뜻한 조언을 해준 오선옥과 함께 그번 콩쿠르에서 나란히 3등상을 따낸 그녀는 수상무대에서 격동의 눈물을 쏟았다. 이 소품은 그후 리옥희가 ‘수이러우(水肉)’로 소문을 놓은 소품 〈사촌언니〉와 더불어 연변TV 1987년 음력설문예야회 무대에 올랐다. 이튿날, 그녀가 영예증서를 가지고 금의환향하자 부모님은 너무도 기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체육 대신 예술을 선택한 딸에 대해 늘 아쉬워했던 아버지도 ‘체육객’으로부터 ‘예술객’으로 화려하게 변신한 그녀를 보면서 “첫발자국을 잘 뗀 것 같구나. 앞으로 열심히 노력해 더 큰 성과를 이룩하기 바란다.”며 격려해주었다.   룡정시예술단 시절의 원용란 20대부터 ‘아줌마’전문호로 우수한 성적으로 연변예술학교를 졸업한 원용란은 1987년 3월, 룡정시예술단(당시 연길현문공단)에 입단했다. 그녀가 룡정시예술단에 입단한 데는 재미나는 에피소드가 있다. 1987년 3.8국제부녀절이 갓 지나서였다. 졸업식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있던 그녀한테 웬 낯선 사내가 찾아왔다. 룡정시예술단에서 배우모집을 나왔다고 신분을 밝힌 사내는 현재 예술단에서 장막극을 준비하고 있는 중인데 원용란을 채용할 생각이라며 같이 갈 의향이 없냐고 넌지시 묻는 것이였다. 예술학교 선생님들의 소개로 찾아왔다고는 하지만 어딘가 시물시물 웃는 표정이며 힐끔거리는 눈길이 사기군처럼 느껴졌고 게다가 다 큰 처녀애를 그냥 외간사내한테 딸려보낼 수가 없는지라 그녀의 어머니는 그 자리에서 막아버렸다. 그 날 저녁, 퇴근한 원용란의 아버지가 자초지종을 듣고는 “너도 이젠 어린애가 아니니 자신의 앞길은 저절로 선택하라.”고 하면서 당시로는 큰돈인 5원짜리 지페 한장(그 때 안도현에서 룡정시까지 기차표가 1원 50전 가량 됐다고 한다.)을 그녀한테 내밀었다. 그녀더러 직접 룡정시예술단에 찾아가 채용 여부를 확인하고 앞길을 선택하라는 것이였다. 그러면서 사업 배치에 관한 모든 문제와 관련해서는 부서의 일반책임자가 아닌 단위의 제1책임자를 찾아 아퀴를 지으라는 충고도 잊지 않았다. 이튿날, 아버지의 말을 명기하고 룡정으로 간 원용란은 예술단 제1책임자로부터 전날에 그녀의 집에 다녀온 분이 룡정시예술단 연극대 대장인 황철이였으며 현재 준비중인 장막극 〈파묻은 사랑〉의 주역으로 그녀를 눈독 들이고 있음을 알게 되였다. 당시 연변주내에서는 연변연극단과 룡정시예술단에서 주로 연극을 취급하고 있던 터라 지명도가 높은 연변연극단이 더 욕심났지만 햇병아리 연극인으로서는 감히 견줄 수 없는 산이였다. 원용란이 주저하고 있을 때 익숙한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바로 소품 〈사촌언니〉를 열연해 조선족관객들에게 널리 알려진 리옥희였다. 이런 대스타도 몸 담고 있는 곳이니 괜찮겠다는 생각에 그녀는 주저없이 입단서류에 싸인했다.               장막극 〈해구신〉의 한 장면(오른쪽 두번째)          장막극 〈사랑에 지친 녀인〉의 한 장면(오른쪽 첫번째) 입단후 그녀는 데뷔작인 장막극 〈파묻은 사랑〉에서의 주역에 이어 〈사랑은 했는데 젠장〉, 〈사랑과 야심〉 등에서 40~50대 아줌마의 형상을 성공적으로 부각해 동료와 관객들로부터 사랑을 받기 시작했다. 20세기 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까지는 조선족연극의 전성기였다. 따라서 무대에 올리는 연극의 스케일도 방대했고 배우들 사이의 경쟁도 심했다. 그리고 농촌순회공연도 많았다. 한 마을에서 공연을 마치고 다른 마을에 당도하면 마을주민들이 강냉이튀김이며 사과배며 지어는 큼직하게 썬 무우까지 갖춰놓고 이제나저제나 공연단이 오기를 기다렸는데 그 때면 그녀는 소품, 독창 출연에 이어 사회도 보면서 부지런히 자신의 실력을 갈고 닦았다. 그녀가 처음 선 보인 1인극 〈퍼렁녀와 고분녀〉는 그녀의 출중한 연기에 힘 입어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 모자를 비뚤게 쓸 때는 쩍하면 손님들과 걸고들고 봉사를 제대로 하지 않는 수양 없는 복무원인 ‘퍼렁녀’로, 모자를 똑바로 쓸 때는 언제나 손님들을 반겨 맞고 봉사를 잘하는 훌륭한 복무원인 ‘고분녀’로 변신하는 완전히 판이한 두 식당복무원의 모습을 혼자서 그려낸 작품이였다. 특히 그녀는 20대 처녀시절부터 수많은 작품들에서 아주머니, 할머니의 형상을 성공적으로 부각해 관객은 물론 업계의 인정을 받았는데 이는 연변예술학교시절 담임이였던 원주삼선생의 가르침과 갈라놓을 수가 없다. 젊은 녀인보다 중로년 역을 자주 맡기는 게 야속해 잔뜩 풀이 죽어있는 그녀한테 “젊은이의 배역은 생명력이 짧으니 그 대신 오래오래 써먹을 수 있는 어머니나 할머니의 배역을 잘 배워두는 것이 갑절 더 실용가치가 있다.”고 하면서 격려해주었던 것이다. 그녀는 선생님의 가르침을 늘 명기하고 세밀한 캐릭터 분석으로 안정적인 연기력 향상에 왼심을 썼고 결과 20대 처녀시절부터 ‘아줌마전문호’로 무대를 누비며 조선족연극계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되였다.             소품 〈파마점에서〉의 한 장면(가운데)                     장막극 〈하얀 꽃〉의 한 장면(왼쪽 두번째) 재간둥이 연극배우로 1994년 3월, 원용란은 더 큰 꿈을 안고 연변연극단으로 향했다. 조선족연극계의 명망 있는 연출이였던 최인호 감독이 그녀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면접시험을 대기하고 있는 그녀한테 최감독은 이왕의 복잡한 시험절차들은 아예 삭제한 채 그냥 몇몇 간단한 동작들만 시켜보는 것이였다. 그리고는 “너는 원래 크게 연극을 할 재목이로구나!” 하고 충분히 긍정하면서 그처럼 넘기 힘들다는 연변연극단 문턱을 단숨에 통과시켜주었다. 최감독의 인정을 받고 신심 가득히 연변연극단에 발을 들인 원용란은 초심으로 돌아가 최고보다는 최선이란 마음으로 관객들을 위해 연기하는 전방위 연극인이 되고저 노력을 기울였다. 남들이 힘들어 못하겠다고 나눕는 ‘아짜아짜한’ 배역들도 서슴없이 맡으며 극중 인물을 소화해내는 데 온갖 정성을 쏟았다. 장막극 〈사랑에 지친 녀인〉에서는 술집 접대부로, 〈헤톨부대〉에서는 바보스러운 로처녀로, 〈하얀 꽃〉에서는 순박한 농촌녀성으로 조연들을 맡아가면서 몰입도 높은 ‘깨소금맛’ 연기로 관객들의 갈채를 받았다. 중소학교시절 내내 운동을 하면서 모름지기 키워왔던 ‘체육객’의 용감성이 크게 한몫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방미선연출가의 가르침과 영향하에 연변의 첫 뮤지컬인 〈샘〉에서 사기군의 안해 역을 훌륭히 소화해내여 연극배우에서 뮤지컬 배우로 활약할 수 있는 기초를 다지게 되였다. 당시 중국 조선족연극계의 원로였던 저명한 연극인 리영근선생은 배역의 신분을 가리지 않고 서슴없이 맡아나서는 원용란의 용기를 연극인한테 있어서는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치부하면서 그녀야말로 동료들과의 환상적인 호흡으로 전반 작품을 살려주는 아주 대담하고 특이한 배우라며 그녀의 연기력을 충분히 긍정해주었다. 이 무렵 연극인 김동현과 합작출연한 소품 〈갑속에 든 사람〉(리광수 작, 최인호 연출)에서 원용란은 동창모임에 나가기 위해 남편을 사우나통에 가두어놓고 내빼는 40대 아줌마의 형상을 진실하게 창조해 관객들의 폭소를 자아냈다. 이 소품은 길림성 제15차 소품평의와 제4차 연변소품콩쿠르에서 우수작품으로 평의되고 녀주역을 맡은 원용란은 각기 표현 2등상을 탔다. 한석봉과 합작출연한 소품 〈계약서〉(김정권 작, 최인호 연출)에서는 일찍 남편을 잃고 홀로 어렵게 돼지고기장사를 하면서도 생활에 대한 희망을 잃지 않고 열심히 살아가는 부지런한 과부 형상을 성공적으로 표현해 관객들의 우렁찬 갈채를 받았다. 성공의 비결이라면 생활에 대한 그녀의 세심한 관찰과 직접적, 간접적인 체험을 통한 경험이였다. 연극 〈림송숙〉에서 주인공 ‘림송숙’ 역을 맡은 그녀는 인물을 보다 형상적으로 부각하기 위해 15일간 연길시 공원가두 광휘사회구역에 내려가 직접 현장체험을 했다. 이 연극은 2014년 12월에 막을 올렸는데 그녀는 뛰여난 연기력을 펼쳐 맡은 바 배역을 훌륭하게 소화해내는 재간둥이 배우라는 평가를 받았다. 연변연극단으로 자리를 옮긴 후 그녀는 그동안 일반인으로부터 공산당원으로, 일반 연극배우로부터 연극부 부장으로 거듭나면서 〈사랑의 샘〉, 〈사랑의 품〉, 〈심청전〉, 〈둥지〉, 〈고향역〉, 〈주덕해〉, 〈림송숙〉, 〈사회구역 서기〉 등 수많은 극작품들을 열연했다. 그 노력의 성과로 제8회 연변조선족자치주정부 진달래문예상, 길림성 제6회 덕예쌍형(德艺双馨)문예사업자 등 수십여차의 묵직한 상과 영예를 받아안았다. 또한 중국연극가협회 회원, 길림성연극가협회 리사, 연변연극가협회 부주석으로 활약하면서 현시대 연극이 봉착한 문제를 분석하고 개혁 및 발전에 대해 모색하면서 그에 맞는 대안을 내놓기도 했다.   장막극 〈고향역〉의 한 장면(앞줄 왼쪽 첫번째) 연극은 삶의 비타민 2017년 5월, 중국연극 탄생 110돐을 맞으면서 제1회 동북지역 우수극작품전시공연이 료녕성 심양시에서 있었다. 동북3성 15개 극단의 25개 작품중 유일한 조선어작품인 연변가무단의 〈사회구역 서기〉가 심양의 중화극장에서 막을 올렸다. 그 연극에서 주인공 림송숙 서기 배역을 맡았던 원용란은 공연 뒤끝에 있었던 에피소드를 지금도 잊지 못한다. 그번 공연이 끝나자 심양시 서탑지역에 살고 있는 한 조선족아줌마가 애를 셋이나 거느리고 무대 뒤로 그녀를 찾아왔다. 연변의 맛이 살아있는 연극을 정말 보고 싶었다면서 앞으로도 자주 산재지역 조선족들을 찾아줄 것을 부탁하는 말에 그는 연변의 연극이 아직도 살아있음을 페부로 느꼈다. 특히 직접성, 동시성, 현장성을 구비하고 있는 연극은 스크린 매체와 달리 관객이 직접 연극 현장에 참여해 배우들의 생생한 연기와 감정을 느낄 수 있는 것이 매력적이다. 하지만 종합예술로서의 연극을 잘하려면 춤, 노래와 같은 것도 잘해야 하겠지만 언어적인 면의 질도 중시해야 한다. 생활을 떠나 겉치레만 잔뜩 부린 허황한 대사는 관객들의 공감을 사지 못하며 또 그렇다고 해서 너무 생활적인 언어를 강조하면 평범하기 때문에 이 사이에서 줄다리기를 잘해야 한다고 그녀는 말한다. 관객을 웃고 울리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그녀는 연극이야말로 이 사회의 비타민이라고 말한다. 힘들 때가 더 많지만 연극에 몰입해서 모든 것을 발산하고 나면 그렇게 후련하고 보람찰 수가 없다고 한다. 그러나 그러한 연극이 오늘날에는 그전날의 관객이 북적거리던 풍경을 뒤로 하고 저조기를 겪고 있다. 지난날, 그녀와 함께 연변예술학교에서 공부했던 동창들도 지금은 모두 연극무대를 떠나 다른 업종으로 전환했다. 현재 연변가무단과 합병해 연극부로 존재하고 있는 연변연극단에는 전성기에 배우가 200여명 있었지만 현재에는 십여명으로 줄어들었다. 이는 조선족인구의 류실 때문에 관객이 적어진 까닭도 있지만 연극의 매력이 다매체문화의 충격을 견디지 못한 데도 있다고 그녀는 분석한다. 세월이 변했으니 연극도 변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작품이 있어야 무대가 생기고 관객도 생길 것이라며 요즘 같이 뉴미디어가 발전한 시대에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말하는 그녀다. 어느덧 다음해면 퇴직하게 되는 그녀는 그동안 좋은 감독, 씨나리오 작가, 상대배우를 만난 덕에 탄탄대로를 걸어왔다며 이제 퇴직을 해도 불러만 주면, 그리고 암기능력만 따라간다면 한달음에 무대로 달려올 것이라고 한다. “감독은 영화감독이 최고요. 배우는 NG 없이 한방에 끝내는 우리 연극배우가 한수 우랍니다.” 헤이, 나는 또다시 고개를 갸우뚱했다. 하지만 이야기 말미에 다음 회를 예고하며 “딱!” 하고 내려놓는 중국전통이야기군의 은은한 경당목 여운이 살아나 두말없이 힘차게 고개를 끄덕여 동감을 표시했다.   사진 제공 │ 연변가무단 《예술세계》 2024년 제3호
30    바람처럼 떠나가버린 친구 댓글:  조회:1287  추천:4  2024-04-30
바람처럼 떠나가버린 친구 □ 주금파   인연 나는 1993년 12월 10일에 흑룡강성 목릉현 시골에서 혈혈단신으로 연변에 와서 30여년간 살면서 적잖은 인생고초를 다 겪었다. 그동안 나를 이끌어주고 아껴준 선배들도 많았지만 김문혁과는 고운 정 미운 정이 다 든 절친한 사이였다. 하기에 김문혁의 부고는 그야말로 청천벽력 같은 비보였다. 흑룡강성의 시골에 살 때 흑백텔레비죤으로 〈요청무대〉프로를 시청하면서 연변 배우들의 작품을 처음 접하게 되였다. 그 때는 신기하고 놀랍기만 했다. 그러다가 1995년부터 소품극본을 써가지고 연변TV 〈주말극장〉제작팀에 드나들기 시작했고 결국 그 다음해에 소품담당 편집으로 출근하게 되였다. 2년 쯤 출근하다가 〈주말극장〉이 〈토요무대〉로 타이틀을 바꾸면서 계약직인 나는 일자리를 잃고 말았다. 그 때 김문혁이 나에게 구원의 손길을 보내왔다. 당시 김문혁은 연길시구연단의 소속배우였는데 잠시 적을 남겨둔 채 하해(下海)하여 새별예술단을 운영하고 있었다. 평소 별로 가깝게 지낸 사이도 아니였는데 이렇게 도와주니 그 고마움은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그는 나를 극본작가로 초빙하고 싶다고 하면서 월급은 500원씩 주겠다고 했다. 1998년 당시에 500원이면 세집을 맡고 혼자 살아갈 수 있는 금액이였다. 이렇게 7, 8개월 동안 그의 예술단에서 직업작가로 있으면서 나는 그가 수년간 예술단을 운영하면서 수십만원의 빚을 지게 되였다는 걸 알게 되였다. 그러던 차 1999년 봄에 연변TV 청소년부에서 편집을 초빙한다는 소식을 접한 나는 편집부에 찾아갔고 행운스럽게 다시 연변텔레비죤방송국에 출근하게 되였다. 이 사실을 문혁에게 알리자 그는 당장 청소년부 주임에게 전화하여 청소년부의 직원들을 전부 데리고 나오라더니 어느 근사한 음식점에서 크게 한턱 냈다. 자기가 나를 예술단에 데리고 있으면서 제대로 잘해주지 못해 미안하던 차에 청소년부에서 나에게 일자리를 줘서 감사하다면서 말이다. 1년후, 〈스타의 밤〉이란 프로가 새로 창설되여 나는 거기로 자리를 옮겼다. 〈스타의 밤〉은 소품을 위주로 하는 프로이다보니 자연히 김문혁을 비롯한 배우들과 자주 만나게 되였다. 당시 내가 창작한 소품 〈고사리〉를 김문혁이 연출하고 송경철, 김문혁이 출연했는데 지금까지 관객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작품으로 남아있다. 그리고 뛰여난 베테랑 배우인지라 애드리브를 치며 아주 훌륭한 명작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한번은 열흘 넘게 련습한 어느 한 소품에서 갑자기 호칭을 바꿔야 하는 상황이 생겼다. 다른 사람 같으면 무조건 실수가 생겼으련만 김문혁은 용케도 대사 한마디 비끗하지 않고 완벽하게 마무리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 나는 베테랑 배우다운 그의 뛰여난 실력에 또 한번 감탄했다. 수십년간 연변TV에서 소품을 책임진 편집과 연출로 있으면서 느꼈던 바를 총화해보면 조선족중에 배우이면서 직접 극본을 쓰고 연출까지 할 수 있는 사람은 몇명 안된다. 그중 한사람으로 나는 김문혁을 꼽는다. 김문혁의 작품은 대사가 생활적이고 마디마디 폭소를 자아내는 언어로 엮어졌다. 그의 연기 좌우명이랄가, 언젠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채플린이 아닌 이상 어떤 희한한 육체언어(동작)여야 관객을 웃길 수 있겠소? 그렇기 때문에 대사, 바로 유모아적인 생활언어로 관객을 웃기는 게 중요하다고 보오.” 참으로 맞는 말이다. 김문혁이 창작한 〈술장사〉, 〈민들레무역공사〉 등 작품들을 보면 대사들이 맛갈스럽고 재미 있다. 그런데 유감도 없지 않아 있었다. 그의 작품들을 편집하다 보면 어떤 작품은 결말이 뱀에게 발을 붙여놓는 것처럼 그대로 두면 군더더기가 되고 그렇다고 잘라버리면 뭔가 완정하지 못한 감이 들군 했다.   텔레비죤드라마 《샘》의 한 장면(방미선 제공)   인간 김문혁 김문혁은 개성이 강한 친구였다. 두 사람이 모인 자리든 다섯 사람이 모인 자리든 대화하는 법이라고는 없이 줄창 혼자서만 말을 했다. 그래서 롱담 삼아 “김단장, 당신은 왜 대화할 줄 모르오? 대방이 말할 때는 들어주기도 해야지…”라고 하니까 그의 대답이 가관이다. “형님, 중창, 합창 해두 그중에 ‘쏠로’를 하고 싶지 누가 존재감 없이 군중배우를 하겠소? ” 한번은 한 후배가 진지하게 그와 이런 대화를 나누었다고 한다. “형님처럼 말주변이 좋으려면 어떻게 하면 되오?” “책을 많이 읽어보오.” “얼매나 보면 되오?” “한 서너마대 읽어보면 되오.” 확실히 김문혁은 독서광이였다. 고전소설 《삼국연의》를 몇번이나 읽었는지 책 속에 등장하는 수백명의 인물들의 이름, 기호, 사건의 발생년대 등을 줄줄 외웠다. 그가 좋은 작품을 써내고 좋은 연기자로 관객들의 호평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독서를 통해 축적한 풍부한 지식과 갈라놓을 수 없었다. 김문혁의 친구 접대는 지나치다 못해 랑비에 가까웠다. 외지에서 친구들이 오면 돌아갈 때까지 한주든 한달이든 접대하였다. 그러니 만천하에 친구들이 넘쳐났다. 외지 친구들을 접대하다 보면 자신의 월급에다 결혼사회를 해서 번 만원이 넘는 돈도 모자라서 나에게서 돈을 빌릴 때가 여러번 있었다. 그래서 “친구들 접대하는 데 쓰는 게 나쁜 거는 아닌데 자기 형편에서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하는 건 좀 삼가는 게 좋잖니? 접대비에 들어간 돈을 합하면 집 한채 값은 되겠다.”라고 나무라면 “형님, 이것두 다 투자요. 이제 내 결혼만 하게 되면 투자했던 돈이 다 들어오오.”라고 대꾸하군 했다. 나하고 자주 식사자리를 가졌지만 내가 살 때보다 그가 사는 경우가 많았다. 김문혁은 연길 우시장거리(牛市街)에 세집을 맡고 몇년간 살았다. 그가 외지로 회의를 가거나 전국소수민족문예종합공연에 참가하러 갈 때면 적게는 삼사일, 많게는 보름씩 집을 비울 때가 있었다. 그 때면 나 보고 자기 집을 봐달라고 부탁하군 했다. 세집인데 그냥 비워두면 되지 뭐 봐줄 필요가 있느냐고 했더니 새들을 키우는데 먹이와 물을 매일 줘야 한다는 것이였다. 그래서 가보았더니 비좁은 화장실과 주방이 딸린 단칸방이였는데 집안 배치가 이상하고 놀라웠다. 방 중간에 2인용 넓은 침대가 놓여져있었고 침대 주변에는 1m 높이가 넘는 푸른 화초화분이 빙 둘려있었다. 망자를 눕힌 주변에 빙 둘러놓은 화분 같은 느낌이 들어서 오싹하기까지 했다. 새조롱 안에는 앵무새를 포함한 20여마리의 새들이 뛰놀며 재잘거렸다. 새들이 쪼아먹는 좁쌀이 바닥에 가득 널렸고 새똥과 깃털이 날려서 방안의 공기가 혼탁하기가 말이 아니였다. 이러한 안 좋은 느낌을 그한테 곧바로 말하면 자존심이 무척 세고 고집이 강한 그가 받아들일 리 만무해서 빙빙 에둘러서 화분을 침대에 둘러놓지 말고 채광이 좋은 창 곁에 놓고 새조롱도 친구들한테 나눠주고 하나만 두면 좋지 않겠냐고 의논조로 말을 꺼내니 아니나다를가 “내 형님이 무슨 뜻으로 말하는지 알 만하오. 보토리 혼자 사는 집안에 공기 좋으라고 놓은 화초들인데…”라고 하며 내 말을 잘랐다. 17, 18년전 김문혁은 한달에 월급과 결혼식 사회수입을 합하여 15,000원이 넘는 적잖은 돈을 벌었다. 그중 일부는 빚 갚는 데 쓴다고 하지만 집을 사지 않는 것이 리해되지 않았다. 그 리유를 물으니 아빠트 한채를 사려면 수십만원이 드는데 어떻게 사겠냐고 했다. 그래서 선불금(首付款)으로 집값의 30% 정도만 내고 나머지는 대출받아서 다달이 지불하면 된다고 하니 그제야 그런 방법도 있느냐며 놀라는 것이였다. 똑똑한 사람이 왜 이런 데는 신경을 안 쓰는지 리해되지 않았다. 마침 그에게는 부동산 개발을 하는 친구가 있어 그의 도움으로 적합한 가격에 새집을 마련하게 되였다. 반년이 지난 어느 날, 그한테서 전화가 왔다. 퇴근하면 자기 새집에 와서 같이 식사를 하자고 했다. 그리하여 집들이 선물로 휴지와 비누가루를 사가지고 그의 집으로 찾아갔다. 집에 들어서니 TV를 걸어놓은 객실 벽 량옆에 예(艺)자를 쓴 서예작품이 한눈에 보였다. 글자크기는 우로부터 아래로 내려오며 커졌고 똑같은 글자들이 서로 다른 글씨체로 씌여졌으며 한쪽은 한어로, 다른 한쪽은 조선어로 되여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검은색 바탕에 흰색으로 글을 써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기분이 상할 가봐 이리저리 빙빙 에둘러서 이 장식이 좀 이상한 느낌이 든다고 말했다. 그러자 대뜸 “형님 말뜻이 뭔지 알았소! 그런데 형님은 무슨 미신을 그렇게 믿소?”라고 대답하는 것이였다. 본인이 틀렸다는 걸 번연히 알면서도 내 앞에서 곧바로 승인하고 고칠 김문혁이 아니였다. 그래서 한족 연출가 친구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며칠후 문혁의 새집에 간 그 친구는 집에 들어서자마자 초상집 분위기 같은 장식품들을 와락와락 뜯어버리며 다짜고짜 욕설을 퍼부었다. 낯색이 굳어진 문혁은 아무 대꾸도 못하고 고개를 숙인 채 핸드폰만 내려다보는 체하는 것이였다. 그로부터 일년후인 2011년 3월, 나는 뜻밖에도 김문혁이 풍을 맞았다는 소식을 접했다. 병실에 찾아가보니 병문안 왔던 사람들을 배웅하며 병상에서 내려선 그가 왼쪽다리를 절름거렸다. 사실 김문혁은 애주가이고 애연가였다. 한번 앉으면 반근짜리 구기자술 한병을 다 마시고 또 맥주 대여섯병을 마신다. 그리고 담배는 하루에 세갑씩 피운다. 그래서 만날 때마다 잔소리를 하였다. “사람이 절대 술을 못이기네라. 끊으란 말은 안할게. 제발 량을 줄이고 차수를 줄여라. 담배두 적게 피우고… 술담배를 너무 과하게 하니까 녀자들이 싫어하지.” 그러면 그는 이렇게 대답하군 했다. “형님, 내 장가 가서 아이가 있으면 담배는 끊을 수 있소. 그런데 지금은 아니요.” 김문혁의 불행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중풍 맞고 얼마후 한쪽 콩팥을 떼내는 수술을 했다. 원인을 물으니 신장결핵이란다. 그 말을 들으니 옛일이 떠올랐다. 2004년 쯤인가 김문혁이 사는 세집에 불리워가 밥을 먹은 적이 있다. 그 때 그가 하는 말이 세집에서 3년을 살면서 겨울에 석탄불 한번 때본 적이 없다고 했다. 추운 날이면 전기요를 켜고 잤고 겉바람이 셀 때에는 두꺼운 이불을 덮고 자면서 추위를 견뎠다고 한다. 그리고 대부분 밖에서 늦게까지 술 마시다 들어왔기에 추운 줄도 몰랐단다. 아무리 젊은 나이지만 자기 몸을 너무 아끼지 않고 구박한 게 아닌가 싶었다. 3년간 겨울에 불 때지 않은 랭방에서 잤으니 건강이 나빠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김문혁은 풍 맞은 후에도 나하고 위챗으로 계속 련락을 했다. 2015년 여름, 방송국에 사표를 내고 영화제작사를 경영하던 나는 2022년에 코로나로 큰 어려움에 봉착했다. 화는 홀로 오지 않는다고 어느날 저녁부터 아래턱이 뻣뻣해나며 감각이 이상했다. 그러더니 다음날부터 입과 얼굴이 오른쪽으로 비뚤어져갔다. 나는 ‘나도 풍을 맞는구나.’ 하고 한탄했다. 수십편의 작품을 준비해놨는데 코로나가 터져서 3년간 꼼짝없이 움직이지 못한 데다 또 풍까지 맞으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눈앞이 캄캄해났다. 이틀 밤낮을 자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내가 중풍으로 페인이 되면 금방 대학에 붙은 아들 뒤바라지는 어떻게 하며 또 평생 준비해둔 작품들이 제대로 빛도 보지 못했는데 이대로 인생을 마감해야 하나 하는 서러움과 절망에 울고 또 울었다. 그러다가 김문혁에게 전화를 걸어 간단히 내 증상을 말해주고 대처방법을 물었다. “형님, 발음이 똑똑한 거 보니 중풍이 아니고 ‘맨탄(面瘫)’인 거 같소. 왼쪽 팔다리는 잘 움직여지오?”  “응, 입만 비뚤었지 팔다리는 괜찮다. 그런데 ‘맨탄’이란 게 뭐야?” “그게 면풍이요.” 그 말에 내가 깜짝 놀라서 소리 질렀다. “면풍도 풍인데 그게 왜 중풍하고 상관 없니?” “놀라지 마오. 면풍은 중풍하구 아무 상관 없소. 잘 때 얼굴에 찬바람 맞아서 그런 게요.” 그제야 알고지내는 의사들에게 전화를 걸어서 상황을 말해주니 확실히 중풍이 아니라고 했다. 침구치료를 하면 한달내로 정상이 된다는 것이였다. 면풍을 맞은 지 7일째에 연길시 전체의 격리가 풀리면서 병원들이 문을 열었다. 회사와 가까운 병원에 다니며 열흘 정도 침 맞고 물리치료를 받으니 비뚤었던 안면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그 때 나는 김문혁에게 진짜 너무 감사했다.   텔레비죤드라마 《샘》의 한 장면(방미선 제공)   종영자막 2009년 쯤의 어느 저녁 무렵, 청년호 음료매장의 의자에 앉은 우리 두 사람은 이 말 저 말 하다가 김문혁이 나에게 섭섭한 소리를 했다. “드라마를 찍으면서 내게두 부연출 이름을 달아주면 형님께두 도움이 되지, 방해가 되겠소?”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를 내가 아니였다. 드라마작가가 되고 싶어 흑룡강성에서 원고 한주머니를 메고 연길에 온 나는 어렵사리 방송국에 입사하여 10년 넘게 근무하였지만 꿈을 실현하지 못해 광고부에서 촬영사로 근무하는 방호범과 함께 련습용으로 60분짜리 단편작품을 만들었다. 그 작품을 만들 때 찾지 않았다는 섭섭함에서 나온 말이였다. 그래서 그 때 내가 결심 발표하듯 얘기했다. “아직까지 난 작품 같은 작품을 만들지 못했다. 내가 련습용 작품에 아무리 친하다 해도 너 같은 명배우를 어찌 부르겠냐? 이제 다음 작품을 준비 잘해서 꼭 너에게 부탁할게.” 그리고 몇년후인 2011년 9월, 내가 처음으로 직접 극본을 쓰고 연출을 맡은 장편영화 《부모》가 제작되였다. 그런데 그 때는 김문혁이 중풍으로 앓고 있던 시기였다. 이렇게 우리는 영상작품으로 합작을 못한 유감을 영원히 남기게 되였다. 영화나 드라마가 끝날 때 올라가는 종영자막에는 작품에 출연했던 배우와 제작팀의 직종에 따라 이름이 새겨진다. 절대 대부분 사람들은 죽으면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점차 지워진다. 극히 드문 일부분의 명인들을 제외하고는 인류의 력사라는 거대한 세월의 종영자막에 자기의 이름을 남기지 못하고 사라진다. 흔적없이 바람처럼 사라져가는 우리들의 인생은 너무 허무하다. 술담배를 모르는 나에게는 친구가 많지 않다. 몇명 되지 않는 절친중에 김문혁이라는 스타가 있었다는 건 그가 내 인생 한 부분에 굵은 흔적으로 남아있는 친구임을 의미한다. 《샘》, 《백설화》에 주역으로 또 수많은 경전적인 소품무대에서 이름을 날린, 조선족 사회에 널리 알려진 김문혁은 우리 기억의 ‘종영자막’인에 영원한 배우로 이름을 새겨놓고 갔다. 45세에 예술인생을 마감하고 58세에 결국 바람처럼 이 세상을 영영 떠나가버린 친구여, 고통 없는 곳에서 편히 보내기를 바라면서 그의 유덕을 기리는 마음으로 이 글을 마감한다.             주금파 | 연출가 《예술세계》 2024년 제2호  
29    내가 아는 배우 김문혁 댓글:  조회:996  추천:0  2024-04-30
내가 아는 배우 김문혁 □ 방미선     2024년 3월 8일, 내가 아끼고 사랑하던 김문혁배우가 영영 돌아오지 못할 먼길을 떠났다는 애달픈 소식을 접했다. 연기력이 한창 물오른 40대 중반에 갑자기 중풍으로 쓰러졌던 김문혁이 14년간의 힘든 투병생활에 종지부를 찍고 그토록 사랑했던 무대와 관객들의 곁을 떠났다. 이젠 모든 아픔과 힘들었던 세월을 훌훌 털어버렸으니 먼길을 떠나는 걸음이 가벼우리라 생각되면서도 가슴이 먹먹하고 눈앞이 흐릿해졌다. 고 김문혁배우  1. 김문혁배우와 나 1992년에 김문혁배우를 알게 되였다. 당시 최인호 연출가와 함께 신진배우 모집차 길림예술학원 연변분원 연기전공 졸업생들을 만나러 갔는데 그중 퍽 나이 들어보이는 학생이 바로 김문혁이였다. 선생님을 통해 그가 네번이나 시험을 보고서야 음악학부에 입학했고 후에 전공을 연기로 바꾸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은근히 그한테 관심히 쏠렸다. 그후 연길시조선족구연단 공연에서 그가 펼치는 소품연기를 보면서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배우라는 생각이 들었다. 연기 과정에 순간순간 보여주는 톡톡 튀는 생동감과 그 생동감이 끊기지 않고 자연스럽게 지속되는 특징이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연기자에게 있어서 너무나 보귀한 재부이고 쟝르의 구분 없이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고 풍성한 열매를 수확할 수 있는 우수한 ‘종자’임에 틀림없었다. 그 때 나는 그런 보귀한 ‘종자’를 품은 그가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면 꼭 훌륭한 배우로 성장할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연출가는 흔히 중요한 드라마나 연극 혹은 소품을 만들 때면 자연히 극중 주인공이거나 주요 배역 적임자로 먼저 생각나는 배우가 있다. 내가 텔레비죤드라마 《백설화》와 《샘》의 연출을 맡았을 때 주인공 역으로 제일 먼저 떠올린 배우가 바로 김문혁이였다. 1994년에 촬영한 드라마 《백설화》에 출연하기 전에 그는 주로 희극소품연기로 관객들의 인정을 받았을 뿐 드라마 연기를 펼친 적 없었지만 나는 고민 없이 정극 드라마의 주인공으로 그를 선정하였고 1996년에 촬영한 드라마 《샘》의 주인공으로도 역시 그를 택했다. 이 두편의 드라마에서 그는 주인공 형상을 기대 이상으로 출중하게 창조했다. 이렇게 우리는 직장 동료로 지낸 적도 없고 사적으로 막역지우도 아니지만 각자 자신의 예술생애에서 각별히 중요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는 텔레비죤드라마 《백설화》와 《샘》에서 연출가와 주인공 역으로 만난 소중한 인연으로 오랜 시간 특별한 우정을 이어왔다.    텔레비죤드라마 《샘》의 주인공 일가족(오른쪽 두번째 김문혁)   2. 김문혁배우가 들려준 이야기 드라마를 함께 만들면서 나는 그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많이는 내가 의도적으로 화두를 던지군 했는데 그것은 연출가로서 효률적인 연출 진행을 위해 배우를 잘 알아야 할 필요성 때문이였다. 유전 때문인지 그는 어려서부터 책 읽기와 예술에 관심이 많았다. 그의 아버지는 작곡가이지만 책 읽기를 무척 좋아해서 집에 여러가지 책들이 많았다. 그리하여 그는 언제든지 마음껏 책을 읽을 수 있었고 예술학교 근처에 집이 있다보니 매일 보고 듣는 게 노래와 악기 소리였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책 읽기는 물론 음악에도 마음이 쏠려 한때 예술학원의 기량 높은 선생님들의 지도하에 클라리네트와 색소폰을 배우고 손풍금도 쳤고 또 미술공부도 좀 했는데 크면서 흥취가 점차 독서에만 집중되였다. 책을 읽으면서 그는 책 속의 많고많은 이야기와 각양각색의 주인공들의 형상에 깊이 감동하고 감탄하면서 멋진 글을 써내는 작가에 대해 존경과 숭경의 마음을 가지게 되였다. ‘나도 좋은 글을 쓸 수 있을가? 좋은 책을 써내는 훌륭한 작가로 될 수 있을가?’ 작가의 꿈이 서서히 가슴 속 깊은 곳에 싹이 트면서부터 고중생이였던 그는 리과공부를 뒤전으로 하고 작가의 꿈을 이루기 위해 문학서적 읽기에만 전념했다. 청춘의 혈액은 마술사란 말이 틀림이 없는 것 같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당찬 꿈이 마술처럼 순식간에 변해버렸다. 책 속 인물들의 운명에 관심이 쏠리던 데로부터 이야기를 보여주고 들려주는 연극이나 드라마에 관심이 생겼던 것이다. 그렇게 그의 꿈은 신명나게 연기를 펼치는 배우로 바뀌였다. 배우로 되고픈 욕망은 돌연 쓰나미의 기세로 김문혁을 덮쳤다. 강렬한 욕망의 충동하에 문과에만 열중하고 그외 모든 학업을 포기했다. 자리에 누워도 배우꿈, 수업시간에도 배우꿈에 빠지다보니 리과 성적이 바닥을 쳤고 나중엔 아예 고중을 중퇴해버렸다. 그리고 배우꿈을 향한 첫걸음으로 예술학교 응시를 준비했다. 아버지 혼자 월급으로 온 집식구가 살아가는 형편이라 시험을 준비하는 기간에 아무 것도 안하면서 공밥을 먹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는 밥값이라도 벌어보려고 벽돌공장에서 운반공으로도 뛰였고 석탄을 차에 싣고 부리우는 막일도 했고 삼륜차로 작은 식당이나 편리점에 물건을 날라다 주기도 했다. 아무튼 돈이 되는 일은 닥치는 대로 다 했다. 아무리 어지럽고 힘들어도 꿈을 이루는 길이라고 생각하니 모든 걸 극복할 수 있었고 아무리 괴롭고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라도 웃음으로 넘길 수 있었다. 그런데 아무리 애써도 넘기 힘든 언덕이 딱 하나 있었으니 그게 바로 고중시기에 놓쳐버린 수리화(数理化)과목이였다. 그는 련속 3년 예술학원에 응시했다. 전공시험에는 쉽게 합격되였는데 수학, 물리, 화학 시험에 통과되지 못해 세번 다 미역국을 먹었다. 세번째 불합격 통지를 받았을 때는 시험을 보느라 훌쩍 지나버린 3년이 너무 아깝고 여기저기 고된 막일에 부대낀 3년 세월이 너무 억울해서 미칠 지경이여서 아무데라도 화풀이를 해야 속이 시원할 것 같았다. 이리저리 궁리하던 중 어느 날, 날이 어두워지기를 기다려 예술학원 청사를 빙빙 돌다가 음악학부 주임 사무실의 유리창을 묘준해 힘껏 돌팔매를 날렸다. 와장창 소리와 함께 유리창이 박살났다. 그러고도 성차지 않아 캄캄한 예술학원 마당의 한복판에 두 다리를 떡 뻗치고 서서 “예술학원인데 전공이 합격되면 입학시킬 게지, 수리화는 무슨 수리화!” 하고 목이 터져라 소리 질렀다. 그제야 숨통이 좀 열리는 듯했지만 한편으로는 더럭 겁이 났다. 물론 곧 사실이 탄로 나서 예술학원 보위과(保卫科)에 불리워갔다. 이미 엎지른 물이라 다시 퍼 담지도 못하고 퍼담을 생각도 없는지라 어떤 처분이 떨어질지 운명을 그냥 하늘에 맡겨버리기로 했다. 그런데 천만뜻밖에 한바탕 호된 꾸지람만 듣고 무사히 풀려났다. 알고보니 예술학원 지도부에서 그가 저지른 사건이 중대하고 영향이 안 좋지만 얼마나 예술을 사랑했으면 세번이나 시험을 봤겠는가, 얼마나 예술학교에 붙고 싶었으면 이런 일까지 저질렀겠는가고 하면서 선처했던 것이다. 눈물이 찔끔 났다. 물론 교수 아버지의 덕을 많이 입은 건 두말할 것 없지만. 그런데 그 뒤 예술학원에 김교수가 ‘괴물’아들을 두었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고 그는 ‘뿔난’ 아버지를 꽤 오래동안 슬슬 피해다녀야 하는 곤혹을 치렀다. 이듬해 그는 또다시 시험장에 들어섰다. 배짱이 두둑하다고 해야 할지, 얼굴이 두껍다고 해야 할지. 네번째 시험은 그에게 있어서 리상이나 꿈을 떠나서 사활을 건 전투였을지도 모른다. 그번에는 요행 문화과 시험을 통과하여 끝내 음악교육학부에 입학했고 한달후 운 좋게 그 해 마침 새로 설립된 연극학부로 적을 옮겼다. 배우로 가는 길이 마침내 열렸다. 그 길을 걸으면서 그는 속으로 몇십번, 몇백번을 윽벼르며 천번 만번 자기와 굳게 약속했다고 한다. 시험으로 흘려보낸 4년을 꼭 되찾고 앞으로 맞이하는 세월을 더 의미 있고 알차게 살겠다고… 그는 해냈다. 자기와의 약속을 굳건히 지켰다. 다년간 70여부의 소품을 무대와 텔레비죤 화면에 선보였는데 그중 자체로 창작, 연출, 출연한 소품이 40여부나 되고 3부의 텔레비죤드라마에서 주인공 형상을 멋지게 창조했다. 그는 부지런하고 열정적인 연기창조로 조선족의 ‘웃음의 별’ 영예와 함께 수많은 팬을 가진 진정한 배우로 성장했다. 사실 ‘아깝고 억울하게’ 흘려보낸 그 4년은 되려 그가 훌륭한 배우로 성장하는 데 자양분이 된 시간들이였다고 할 수 있다. 그가 읽은 수많은 책들이 그의 기억 창고에 빼곡이, 두텁게 축적되여 예술창조의 자양분으로 발효되였고 그가 비지땀을 휘뿌렸던 벽돌공장 운반공일, 석탄 부리우는 막일 그리고 삼륜차로 물건 나르는 일은 그야말로 그를 ‘웃음의 별’로 탄생시킨 기름진 밑거름이였다. 책에 매달려 책과 씨름했던 세월이 있었기에 극본을 마주하면 곧바로 기억 창고에서 생생한 인물형상을 찾아낼 수 있었고 훌륭한 작품을 창작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눈물로 적셔진 젊은 시절의 다양한 생활체험은 인물형상창조에 단비로 되여 그로 하여금 소품세계의 ‘웃음의 꽃’으로 활짝 필 수 있게 했던 것이다. 텔레비죤드라마 《샘》을 찍을 때 내가 “주인공이 삼륜차를 몰 줄 알아야 하니 촬영에 들어가기 전에 삼륜차 모는 걸 잘 배워야겠소.”라고 했더니 그는 대뜸 “삼륜차 말입니까? 삼륜차 몰기라면 내가 선수지요.”라고 하면서 허허 웃던 모습이 지금도 눈앞에 선하다.   텔레비죤드라마 《샘》의 한 장면   3. 소품 〈딱꿍〉과 두꺼운 혀 나는 김문혁과 단 한번 소품을 함께 만들었는데 그게 바로 2002년에 공연된 〈딱꿍〉이다. 원래는 예술학원 연기전공 학생들의 련습용이였는데 배우를 잘 선택하면 뭔가 좀 될 것 같아서 김문혁을 불렀다. 전화를 받고 곧 달려온 그는 당시 예술학원 학생이였던 애 엄마 역을 맡은 배우와 대사를 맞췄다. 그런데 어쩐지 그의 발음이 좀 이상했다. 소품 제목이 〈딱꿍〉이고 대사 전반에 ‘딱꿍’이란 대사가 쫙 깔려서 처음부터 ‘딱꿍’ 소리를 챙챙하게 내야 되는데 그의 발음에서 ‘딱꿍’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귀를 강구어 자세히 들어도 잘 들리지 않자 대사맞춤을 중지하고 그더러 ‘딱꿍’ 소리를 크게 내보라고 했다. 그랬더니 챙챙한 ‘딱꿍’ 소리는커녕 목소리가 점점 더 흐려지더니 나중에는 헛기침 같은 소리밖에 나오지 않았다. “안되겠어요. 딱꿍 소리가 전혀 안 들리네. 웬 일이지?” 그가 허구픈 웃음을 웃으며 말했다. “방연출, 내 원래 혀가 이렇게 두껍습니다. 보세요.” 그러면서 나를 향해 혀를 쑥 내밀어보였다. “어이구, 쓸데없이 무슨 혀타령이지?” 내가 덩달아 허구픈 웃음을 짓자 그가 정색해서 말했다. “사실 내 혀가 정말 기뚝차게 두껍습니다. 혀가 두꺼운 바람에 발음이 똑똑하지 않아 여태껏 얼마나 고생했는지 압니까? 예술학교 때 연기공부를 하면서 내절로 터득한 건데요, 혀를 구부려야 하는 대사는 내절로 다른 대사로 살짝 수정하군 했습니다. 이건 정말 비밀인데 오늘 요놈 ‘딱꿍’ 탓에 그만 탄로났네.” 그 말에 그의 혀를 다시 자세히 보니 확실히 좀 두꺼워보였다. 그래서 그더러 혀를 입천장에 대보라고 했더니 혀가 너무 두꺼운 탓에 혀가 입천장에 닿지 않고 겨우 앞이 안쪽에 닿았다. 나는 하도 어이 없어 박장대소하며 이렇게 말했다. “소품대왕의 혀가 이 모양일 줄은 몰랐네. 비밀은 꼭 지키겠으니 문혁이 이번 소품은 그만둡시다. 다른 배우를 찾겠어요.” 그랬더니 그가 생억지를 부렸다. “안됩니다. 비밀도 지켜야 되고 소품도 내가 해야 됩니다.” 〈딱꿍〉이 별로 대단한 작품이 아닌지라 나는 그런대로 연기하라고 했다. 하지만 그는 아무리 수수한 작품일지라도 배우 이름에 걸맞게 성의를 다해야 하고 관객들에게 책임을 져야 한다면서 ‘딱꿍’ 소리가 들리지 않는 〈딱꿍〉을 정성 다해 열심히 련습했다. 요즘 위챗계정에 올라온 〈김문혁선생님이 출연한 재미 있는 소품 10편 모음〉에 있는 〈딱꿍〉을 다시 보았더니 그 때 그 일이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머리속에 떠올랐다. 그리고 “‘딱꿍’ 소리를 방연출의 요구 대로 챙챙하게 내지 못하지만 맡은 역할을 잘 소화해서 절대 실망시키지 않겠습니다.”라고 정색해서 말하던 그의 모습도 눈앞에 삼삼하다.   4. 택시 료금에 깃든 우정 2019년 겨울의 어느 하루, 식당에서 친구들과 함께 점심을 먹고 택시를 타려고 길에 나섰는데 그 날 따라 택시가 잘 잡히지 않았다. 배우들과 련습약속을 한 터라 속이 바질바질 탔다. 문득 택시 한대가 속력을 줄이며 내 쪽으로 다가왔다. 찬찬히 보니 조수석에 손님이 앉아있기에 나는 또 락심하고 큰길로 눈길을 돌렸다. 그런데 그 택시 안에서 “방연출! 방연출!” 하는 어눌한 소리가 들려왔다. 급히 머리를 돌려 보니 김문혁이였다. 그가 나 보고 빨리 뒤쪽에 앉으라고 손시늉을 하자 나는 오랜만에 만나 반갑기도 하고 또 시간 때문에 안달이 났던 터라 제꺽 뒤자리에 앉으면서 어디로 가는가고 물었다. 그도 반가운 표정을 지으며 침 맞으러 간다고 하면서 나 보고 어디로 가는가고 물었다. 음력설야회프로 련습하러 텔레비죤방송국에 간다는 말에 그는 옅은 한숨을 내뱉었다. 애처로운 마음에 내가 얼른 “문혁이가 많이 나아져서 참 보기 좋네. 택시를 잡지 못해 애 탔는데 이렇게 만나서 너무 반갑고 고마워.”라고 위로해줬다. 그사이 택시가 연변병원 동문 부근에 다달았다. 택시가 멈춰서자 그는 꼬깃꼬깃 접은 돈 20원을 운전수에게 건넸다. 내가 급히 허리를 굽혀 운전수 손에 놓인 돈을 받아서 그의 손에 쥐여주었더니 돈을 받고 한발 뒤로 물러서면서 운전수에게 빨리 떠나라고 손짓하는 한편 그 돈을 다시 택시 안에 던졌다. 순간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나는 터져나오려는 흐느낌을 애써 참으면서 차창 밖으로 머리를 한껏 내밀어 휘우뚱거리며 저만치 걸어가는 그의 뒤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오래오래 바라보았다…   “배우는 인기를 먹고 산다.”는 말이 있다. 하늘나라에서도 김문혁은 가만히 있지 않을 것 같다. 또다시 작품도 만들고 무대에도 서고 드라마에도 얼굴을 내비치고… 그리고 그의 곁에 또다시 열정적인 팬들이 모일 것 같다. 이게 바로 내가 아는 배우 김문혁이다.     방미선 │ 연출가 《예술세계》 2024년 제2호
28    새시대의 숨결, 문화예술의 물결 댓글:  조회:960  추천:0  2024-04-11
새시대의 숨결, 문화예술의 물결 □ 김호       연변은 조선족들이 가장 많이 밀집하여 생활하는 지역으로서 조선족의 문화예술 중심지로 자리매김하였다. 따라서 중국 각지에 흩어졌던 조선족 문화예술인들은 대거 연변으로 몰려들었다. 이들은 다양한 문화예술단체를 조직하여 문화행사와 예술공연 등 많은 활동을 활발히 펼쳐나갔다. 이와 더불어 연변지역의 예술교육도 발전하였다. 조선족을 비롯한 여러 소수민족들의 문화예술 발전을 독려하는 당중앙의 정책과 연변군중예술관의 제1임 관장으로 지냈던 리두암선생을 비롯한 선인들의 각고의 노력으로 1960년 7월 12일, 연변의 군중문화예술의 ‘사령부’로 불리우는 연변군중예술관이 고고성을 울렸다. 연변군중예술관은 대중적인 문화예술사업을 주관 및 지도, 보급하는 기관단위로서 문화예술리론 탐구, 우수한 문화예술 인재 양성, 사회적인 문화예술 봉사 제공, 문예작품창작, 대외교류 등 사업을 기본 취지로 하고 있다. 연변군중예술관은 설립 당시부터 조선족 문화예술의 계승과 발전을 주된 목적으로 하였던만큼 민족적, 지방적 색채가 짙은 특색을 유지하면서 한족을 비롯한 여러 민족의 고유한 전통문화를 발굴, 계승, 보급하면서 대중적인 사랑을 받아왔다. 연변군중예술관은 줄곧 조선족 문화예술과 무형문화유산의 계승과 발전을 주된 목적으로 하면서 음악, 무용, 기악, 미술 등 문화예술의 다양한 분야를 취급해왔다. 문화예술에 대한 사회적 수요에 비해 과외문예의 토양이 척박하고 문예리론방면의 전문인원도 턱없이 부족하던 상황에서 연변군중예술관의 출범은 민족과 지역사회 문화예술 발전의 기폭제가 되였으며 더불어 여러 민족 인민군중들의 과외문화예술은 전례없이 생기를 띠게 되였다. 연변군중예술관은 여러 민족 인민들에게 문화예술을 전방위적으로 보급하면서 여러세대에 걸쳐 인민군중들에게 다채로운 문화생활과 문화교육, 문화혜택을 마련해주었다. 연변군중예술관은 늘 문화혜민, 문화강주(文化强州)의 전략을 앞세우고 다양한 활동과 공연을 활발히 조직하여 시대의 흐름에 발 맞추어 새시대 문화예술의 맑은 물결을 이루고 있다. 특히 최근 몇년간, 연변군중예술관은 습근평신시대중국특색사회주의사상을 깊이 있게 학습, 관철하고 인민을 중심으로 하는 사업방향을 확고히 견지하면서 문화예술 전파의 물결을 이루어왔다. 새로운 방법과 새로운 사로, 새로운 의식으로 광범한 인민들의 수요를 만족시키고 중화민족공동체의식을 확고히 수립하는 데 모를 박고 전반 문예사업을 전개해나갔다. 따라서 새시대 여러 민족 인민들이 석류씨처럼 똘똘 뭉치여 새시대를 구가하는 정신면모와 인민들의 행복한 생활을 보여주는 작품이나 공연을 끊임없이 선 보이고 있다. 군무 〈왕청농악무〉(왕청현문화관)         군무 〈탈춤〉(룡정시문화관)                   손풍금 표현과 무용 〈즐거운 공연〉(연길시문화관) 특히 2023년 12월 21일, 연변로동자문화예술중심에서 펼쳐진 ‘전 주 정품문예전시공연’은 새시대의 새 기상으로 새 기지개를 켜는 연변인민들의 새 생활을 진실되게 반영해주는 무대였다. 공연은 연변주위 선전부와 주문화라지오텔레비죤방송및관광국에서 주최하고 연변군중예술관과 각 현(시) 문화라지오텔레비죤방송및관광국에서 주관하였으며 각 현(시) 문화관에서 협조하였다.   군무 〈학의 고향〉(안도현문화관)   공연은 우리 주 공공문화써비스체계 구축의 풍성한 성과를 집중적으로 전시하고 대중들이 좋아하는 예술작품을 통해 우리 주 여러 민족 인민들이 중화민족공동체의식을 확고히 수립하고 화합된 공동체의식으로 새시대의 새로운 길을 함께 개척하며 아름다운 삶을 만들어가는 우수한 정신풍모를 보여주는 데 무게를 두고 기획됐다. 공연은 왕청현문화관의 군무 〈성세화개〉로 막을 올렸으며 이어 전 주 각 현(시) 문화관에서 심혈을 기울여 선정한 16편의 우수작품이 차례로 무대에 올랐다. 특히 공연종목에는 조선족 특색이 다분한 군무 〈학의 고향〉, 상모춤 〈휘황〉, 군무 〈장고정〉 그리고 〈왕청농악무〉 등이 있는가 하면 고향특색을 잘 보여주는 민족타악기 표현 〈나래치는 화룡〉, 군무 〈아름다운 훈춘〉, 〈된장고향의 정〉 그리고 사물놀이, 이중창 등 이채로운 종목들도 있었는데 현장을 찾은 관객들의 열렬한 호응을 이끌어냈다.   민족타악기 표현 〈나래치는 화룡〉(화룡시문화관)                            군무 〈된장고향의 정〉(안도현문화관)          군무 〈장고정〉(도문시문화관)   연변군중예술관은 지역사회와 조선족사회의 문화예술을 주관하는 사업단위로서 각종 행사에서 크거나 작은, 보이거나 안 보이는 역할들도 충실하게 수행해왔다. 지난 2023년, 연변군중예술관에서는 제6회 무형문화유산 민족무용양성반을 조직하여 각 지역 문화골간 사업일군들에게 전문지식과 업무능력을 향상할 수 있는 재충전의 기회를 마련해주었다. 정기적으로 진행되는 양성반은 권위성, 전문성, 실용성을 두루 갖추었고 실천과 리론지식을 겸하여 전문적이고 체계적으로 무형문화유산에 대해 가르침으로써 민족문화예술의 전승과 홍보에 크나큰 기여를 하고 있다. 연변군중예술관은 시종 무형문화유산의 보호사업에 커다란 중시를 돌리고 무형문화유산의 발굴과 정리, 보호, 전승, 전승인 양성 등 사업에 심혈을 기울여왔으며 다 함께 문화유산을 사랑하고 아끼는 분위기를 형성하기 위해 많은 정력을 몰부었다. 특히 연변군중예술관은 인민군중들의 정신문화생활을 풍부히 하는 데 있어서의 문화예술의 대체 불가능한 역할에 모를 박고 농악무 등 다양한 지역적, 민족적, 향토적 특색이 짙은 예술작품을 꾸준히 창작해냈다. 또한 새 세기에 들어서면서 전통과 현대를 아우르는 다양한 방식과 플랫폼을 구축해나가면서 시대발전에 적합한 전파수단으로 문화예술의 화원을 가꾸어나가는 데 주력했다. 특히 사회구역이나 학교, 기업, 단위 등 사회 각계층 군중들을 대상으로 량질의 공공문화봉사를 함으로써 날로 향상하는 문화수요를 만족시켰다. 무용, 미술, 성악, 악기연주 등 다양한 문화예술분야의 무료양성반, 문화하향 등 사업을 지속적으로 활발히 전개하여 문화혜민전략을 힘차게 추진해왔다. 연변군중예술관은 계절별, 주제별, 대상별로 시민이 참여하는 활동을 정밀하게 기획하여 규모별로 맞춤형 강습반을 개설해 시대의 요구에 부합되는 문화봉사를 제공하면서 문화예술의 물결이 군중들 속으로 흘러갈 수 있는 길을 개척해왔다. 문화예술의 수준은 한 민족이나 한 나라의 력량을 집약적으로 대변해주고 있다. 연변군중예술관이 수행하는 업무들은 민족사회와 지역사회에 커다란 문화예술의 힘을 부여해주고 있다. 연변군중예술관은 2023년에 또 청소년 방학간예술 무료양성반을 개최하였고 길림성 애만천하아동기금회와 손 잡고 펼치는 무용전문양성반, 소년아동문예공연지도양성반, 조선족장고춤무형문화유산전승연수반, 가야금예술양성반, 길림성우수작사작곡가연수반, 중국 조선족 무용발전포럼 및 무용전시공연과 학습교류회, 중국 조선족농악무대회, 전 주 군중문예정품전시공연, 전 주 도시사회구역문예공연, 전 주 농민문예전시공연 등 다양한 콘텐츠에 기반을 둔 프로젝트들을 추진해왔다. 이외에도 온라인 문화활동도 적극적으로 전개했는데 지난해 위챗공식계정과 틱톡계정을 리용하여 우리 민족의 전통 음악과 무용을 더욱 폭넓고 립체적으로 대외에 홍보하였다. 이외에도 길림성 문화자원봉사자양성반을 주관하여 개최하였는데 양성반에서는 습근평신시대중국특색사회주의사상과 중국공산당 제20차 전국대표대회 정신을 깊이 있게 학습하고 〈중화인민공화국 공공문화봉사 보장법〉과 〈문화자원봉사조례〉를 관철, 시달하였다. 동시에 길림성의 문화자원봉사대오 건설을 일층 강화함으로써 공공문화 건설 진척에서 문화자원봉사가 적극적인 역할을 발휘하도록 추진하였다. 이번 양성반에서는 또 길림성군중문화학회 제7회 회원대표대회와 전 성 문화관 자원봉사모범종목표창대회를 소집했다. 조선족은 ‘문화민족’이다. 그리고 연변은 자치주 정부차원에서도 ‘문화강주’ 전략을 힘있게 추진하고 있다. 연변은 또 ‘가무의 고향’이다. 그만큼 조선족 인민대중들은 문화예술에 남다른 재능을 갖고 있고 문화예술에 대한 요구도 상당히 높다. 연변군중예술관은 매체 전파의 속성이 부단히 변화를 가져오는 현대사회의 신매체, 다매체 환경 속에서 오프라인과 온라인을 적절하게 결합하는 사업모식으로 문화예술의 가치를 극대화해가고 있다. 2023년에 대외교류 문화행사로 ‘봄비프로젝트’ 문화관광지원 변강행 문화교류 시리즈 활동을 가동하였다. 그리고 복건성 복주시와 손 잡고 연변에서 다양한 전시공연활동을 펼쳤고 신강 알타이지역에서 당지 인민들에게 조선족 문화예술의 매력을 선 보이면서 여러 지역, 여러 민족 인민들이 다 함께 중화민족공동체의식을 수립하는 데 커다란 기여를 했다. 연변군중예술관이 조선족 최대 집거지인 연변을 근거지로 하고 조선족인민들이 거주하는 많은 곳에 문화예술의 감로수를 제공하고 또 기타 형제민족과의 문화교류도 진행하면서 전파와 홍보 역할을 확실하게 해나갈 수 있기를 기대한다. 또한 정확한 현실의식과 미래에 대한 깊은 사색을 바탕으로 희망찬 래일의 새로운 번영을 노래하는 문화예술의 물결을 이루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김호│ 연변군중예술관 사진 제공 | 연변군중예술관 《예술세계》 2024년 제1호
27    《예술세계》2024년 1호 목록 댓글:  조회:881  추천:0  2024-04-11
26    인간다운 세상을 그리며 ―드라마 《인간세상》을 중심으로 댓글:  조회:1541  추천:0  2023-12-05
인간다운 세상을 그리며 ―드라마 《인간세상》을 중심으로 □ 마춘옥     리로(李路) 감독의 드라마 《인간세상(人世间)》(2022년)은 국내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이는 량효성(梁晓声)의 원작소설 《인간세상》(2017년)을 각색하여 만든 작품이다. 원작소설은 중국 최고의 문학상인 모순문학상을 수여 받은 작품이다. 작품은 중국 동북의 한 평범한 근로자인 주씨네 삼대 가족사를 통해 지난 50년간 중국사회의 시대적 변화와 그 변화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렸다. 이러한 긴 가족사를 배경으로 하는 드라마는 같은 세월을 걸어온 관객들의 사랑을 받는 것이 보편적이지만 놀랍게도 아이치이(爱奇艺)의 데터에 따르면 관객의 절반 이상이 30세 이하의 젊은 세대라고 한다. 본 문장은 드라마 《인간세상》을 중심으로 이 작품이 이토록 많은 관객, 특히 젊은 관객들의 눈길까지 끌 수 있는 매력코드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에 대하여 분석하려고 한다.     1. 서사위기 시대의 ‘다른 이야기’ 독일의 문예리론 평론가 왈터 벤야민은 미래에 인간은 서사위기를 맞이할 것이라고 예언한 적이 있다. 그는 20세기의 새로운 서사형식인 ‘뉴스(news)’의 탄생은 인간력사에 오래 영향을 준 ‘이야기(story)’의 종말을 예고한다고 보았다. 부동한 두 서사형식의 주요한 차이는 뉴스는 명확하고 단일한 메쎄지를 전달하는 반면 이야기는 다중적인 의미를 전달한다고 보았다. 이야기형식은 인간 력사에서 집단이라는 구조가 형성되는 데 효과적이고 오래된 방식중의 하나이다. 하지만 뉴스라는 새로운 방식의 출현과 함께 이야기의 기능이 약화되고 뉴스의 전달로 이야기가 대치된다고 보면서 이에 대해 깊은 우려를 드러냈다. 벤야민의 추측처럼 오늘날 사람들은 긴 소설, 긴 드라마, 긴 영화보다도 짧은 영상, 짧은 이야기, 짧은 소식 혹은 정보에 길들여졌다. 간단히 말하면, 오늘날 우리는 이미 뉴스화된 짧은 메쎄지만 읽는 시대에 들어섰으며 더 이상 긴 이야기에 시간을 쓰려고 하지 않는다. 이러한 서사위기 시대에 《인간세상》의 성공은 분명 어떠한 매력코드가 작동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에 대하여 난산(暖山)은 “이 드라마에는 중국식 현대화 문화코드를 여는 열쇠가 담겨져있다.”(인민넷)고 평가하였다. 하지만 이는 거시적인 면에서 중국력사의 가장 큰 변화인 개혁개방시기를 한 가족의 인생사에 녹여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보는 평가이다. 본문의 관점은 난산과는 다르다. 왜냐하면 젊은 관객들의 립장에서 이 드라마에 끌린 것은 거대서사가 아닐 것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반면 《인간세상》의 매력코드는 오히려 작은 개인의 서사, 더 정확하게 말하면 무서운 속도로 변화하는 시대 속에서 자신의 방식을 고집하면서 살아가는 하나 또 하나의 작은 인물들의 모습이 더 많은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았다고 본다. 드라마에는 거대서사에서 늘 그려져왔던 신과 같은 존재의 영웅, 희생만 하는 좋은 사람 혹은 악마 같은 나쁜 인간들은 보기 힘들다. 대부분 인물들은 잘못도 저지르고 감정적인 부분도 있는 우리 주변에 실제 살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즉 거대서사에 익숙한 로년층에 비하여 젊은 세대는 력사지식을 전파하거나 도덕교육을 위한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명확하게 알려주는 것 보다도 관객 자신이 뭔가를 터득하는 그런 이야기를 더 좋아한다는 점이다. 젊은 관객들은 더 이상 이쁘고 선량하기만 한 신데렐라이야기나 신격화된 영웅이야기에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 그들은 ‘기존의 이야기’와 ‘다른 이야기’를 기대한다. 이 드라마는 분명 여기서 말하는 ‘다른 이야기’에 속한다.   2. 불확실한 인생을 살아가는 작은 인물들의 이야기 원작 작가 량효성은 한 인터뷰에서 “현시대의 중국사람들은 성공을 권리를 얻거나 재부를 가지는 두가지 경우에 한한다.”고 하면서 “인간은 꼭 이런 ‘성공’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고 하였다. 현시대 사람들의 이러한 ‘성공관’은 많은 사람들이 추구하는 상식적인 인생관이다. 리성적으로 생각하면 자본이 거의 모든 것을 정의하는 시대에 확실한 돈 혹은 돈을 가져오는 권리를 내놓고 추상적인 다른 무엇을 믿고 추구한다는 것은 힘든 일이다. 하지만 이러한 론리를 받아들이면 우리는 한가지 ‘성공’을 향하여 열광적으로 달리며 남보다 조금이라도 뒤떨어질가 봐 불안이라는 마음의 질병을 안고 살아가는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드라마는 가끔 다른 사람보다 뒤져도, 또한 꼭 성공을 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안위의 메쎄지를 던진다. 드라마에서 인간이 처한 상황은 부단히 변화한다. 례하면 주인공의 부모들이 살고 있는 시대에서 지식인은 농민, 로동자보다 낮은 계급이며 많은 경우에 심사를 받고 타도를 받는 대상이다. 하지만 당시에 농민계급에 속한 주씨네 큰아들 주병의(周秉义)는 지식인 가정에서 태여난 학동매(郝冬梅)와 연인관계를 맺으며 또한 동매와의 인연을 저버리지 않기 위하여 승진할 기회마저 포기한다. 이러한 병의의 결정에 리해할 수 없는 젊은이들은 동매가 대체 어떤 녀자인지를 보려고 산을 넘어 찾아오기도 한다. 이후 시대가 변하고 타도 받던 동매의 부모님들이 정부기관에서 중요한 인물로 계급적 상승을 한다. 상황이 뒤집어진 셈이다. 병의와 동매의 가정배경 차이는 그들에게 새로운 도전을 야기한다. 동매의 부모는 자꾸 일을 부탁하는 병의의 가족과 거리를 두려고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동매와 병의는 서로가 서로에게 힘이 되여주면서 그 차이를 미봉해간다. 그들은 자신의 성공을 위하여 사랑을 저버리지 않았다. 그들이 의지해가며 살아가는 모습은 감동적이다. 인간의 삶은 항상 필연과 우연이 겹쳐지며 이어진다. 하기에 인간의 삶은 계획해온 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드라마에서 주씨네 작은 아들 주병곤(周秉昆)과 정연(郑娟)의 삶은 많은 우연으로 엇갈려있다. 사랑은 우연과 필연으로 엮여진 운명이기도 하다. 병곤이 정연을 처음 만났을 때, 그녀는 병곤의 사형 당한 친구 도자강(涂自强)의 안해이며 임신한 상태였다. 그들의 만남은 수상한 두 남자가 병곤을 찾아와서 정연에게 매달 돈을 가져가는 일을 위탁하면서 시작된다. 자주 만나게 되면서 병곤은 사랑에 빠지게 된다. 자신을 좋아하는 교춘연(乔春燕)의 추구에는 무감각하게 대하지만 이미 임신했고 사형 당한 살인범의 안해로 알려진 정연에게는 사랑의 감정을 느낀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병곤은 정연의 아이는 돈을 부탁한 두 남자중 로사빈(骆士宾)이라는 남자의 아이이고 이는 정연이 그에게 강간을 당하여 가진 아이라는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된다. 그후 병곤은 매부가 쓴 시가 문제 되면서 련루되여 감옥에 갇혔다가 풀려나는 재난을 겪게 된다. 그동안 정연은 병환에 든 병곤의 어머니 그리고 어린 조카까지 보살펴준다. 감옥에서 나온 후 그들의 사랑은 끝내 결실을 보게 되고 병곤은 정연의 아이를 친아들처럼 대한다. 세월이 지나 아들은 청화대학에 가게 되고 생물적인 ‘아버지’ 로사빈이 찾아온다. 그 다음해, 아들은 추천으로 미국 류학을 떠난다. 하지만 그는 미국에서 다른 사람을 구하다가 사망한다. 이 절망적인 현실 앞에서 병곤과 로사빈은 다툼이 생긴다. 극도로 격동된 두 사람은 서로 밀치면서 다투다가 우연히 로사빈이 치명상을 입어 죽게 된다. 병곤은 이 사건 때문에 살인죄로 감옥에 가며 아들을 잃은 고통과 함께 절망적인 상황에 처한다. 이 순간 관객들은 아마도 내가 만약 병곤이라면 어떻게 이 현실을 견뎌내겠는지 하는 상상을 잠시나마 했을 것이다. 우리는 많은 경우에 주인공은 좋은 결말을 얻기 바란다. 특히 드라마를 보면서는 더 그러하다. 우리는 정서적으로 주인공의 아바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적인 삶은 이 드라마처럼 좋은 사람에게 좋은 결과만을 주는 것이 아니다. 또한 ‘좋은’은 형용사로서 객관적이 아닌 주관적인 감정이다. 드라마의 결말에 정연의 손을 잡고 걷는, 다음 생이 있으면 또 만나리라는 병곤의 모습도 좋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수년을 감옥에서 살인의 죄명을 쓰고 살아야 하는 그의 하루하루를 누가 ‘좋은’ 과정이라고 보겠는가! 그럼에도 이를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그를 버리지 않은 가족과 친구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드라마는 불확실성이 가득찬 인간의 인생을, 성공과 발전을 위하여 타인도 저버리는 삶이 아닌 마음속의 신념을 지키며 살아가는 인물들의 모습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감동적이다.     3. 욕망의 지배하에서의 인간다운 삶이란 상술한 아름다운 사랑도 이 드라마의 매력적인 부분이지만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인물들의 매 하나의 선택과 그 선택에 따른 행동들에 대한 인간다운 묘사들이다. 인간은 신이 아닌만큼 여러가지 약점을 가지고 있다. 또한 이러한 약점은 악한 인간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잠적해있음을 드라마에서는 여실히 보여준다. 사랑도 주동적으로 추구하고 주변 사람들을 화끈하게 대하며 열심히 돈도 벌어가는 춘연을 보자. 그녀는 병의의 광자구역(光字片) 파가이주방안이 본격적으로 실행단계에 들어가자 갖은 수단을 다 써가며 집을 두채 분여 받으려고 한다. 하지만 병의가 원칙 대로 집 한채만 분여 받을 수 있다고 하자 앙심을 품고 병의에게 부정부패죄를 씌워 고소한다. 결국 평생 정직하게 살아온 병의는 아무런 문제 없이 풀려난다. 수십년간 서로 도와가며 살아왔던 춘연과 병곤 사이의 우정에도 금이 간다. 이처럼 돈과 리익 앞에서 인간의 감정은 유리처럼 취약하다. 그외에도 병곤의 친구 소국경(肖国庆)의 안해 오천(吴倩)도 인간의 약점을 드러내는 인물이다. 병곤은 식당영업이 번창하여 돈을 많이 벌게 되자 큰집을 사고 부모가 살던 작은 집을 친구 부부에게 공짜로 제공한다. 그러다 후에 큰집의 소유권에 문제가 생겨 살 곳이 없게 되자 친구 부부에게 집을 내달라고 사정한다. 하지만 오천은 그동안 받은 도움에 감사해하기는커녕 되려 자신들이 어디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며 자신의 상황만을 고려하며 악을 쓴다. 인간의 가증스러운 면을 너무도 잘 그려냈다. 이러한 욕망은 악한 사람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보통사람 누구나 상황에 닥치면 생길 수 있는 보편적인 마음 상태이다. 하지만 인간이 처한 상황에서도 어떤 선택을 하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오천과는 달리 남편 국경은 자신의 기준을 고집하는 인물이다. 국경은 성격이 괴벽한 편이라 인간관계를 잘 처리하지 못한다. 하지만 인간관계보다 자신의 임무를 정직하게 수행하는 것을 더 고집하는 모습이 관객들에게 더 감동을 안겨준다. 인간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벗어나서 살아갈 수 없다. 하지만 이러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사회의 규칙을 준수하지 않으면 수많은 사회적인 문제를 일으키게 된다. ‘인간관계를 과도하게 중요시하는 사회’는 항상 이러저러한 리유 때문에 공정성을 파괴할 것이며 아는 사람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항상 다른 사람들에게 속하지 않는 례외적인 방식이 통한다. 사실 오늘날 젊은 세대들은 ‘인간관계를 과도하게 중요시하는 사회’보다 모두가 규칙을 지키는 정상적인 사회를 더 바란다. 모든 것이 빨리 돌아가는 오늘날, 우리는 너무 많은 시간을 인간관계에 할애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개인을 중요시하는 시대에 개인의 시간, 개인의 공간, 개인의 선택, 개인의 행복이 중요시되기 때문이다. 드라마에서 국경의 정직함은 ‘인간관계를 과도하게 중요시하는 사회’에서 상식적이지 않다. 제2차세계대전 이후 유태계 독일 출신인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는 나치 전범 아돌프 아이히만의 공개재판을 지켜보고 유명한 저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1963년)을 내놓았다. 이 저서에서 그녀는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을 제기하였는데 즉 모든 사람들이 당연하게 여기고 평범하게 행하는 일이 악이 될 수 있고 악은 명령에만 따르는 사고의 무능성에서 비롯된다는 주장을 제기하여 많은 독자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은 나치범 아이히만 같은 자들을 악마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식적인’ 주장과는 달리 아렌트는 악의 평범성은 사고의 무능에서 기원하였다고 해석하였다. 다시 말하면 기계사람처럼 명령에만 충실하게 따르고 행하는 일이 타인에게 어떤 영향을 이루는지를 사고하지 않는 무사유 그 자체가 악의 평범성을 생성하기 때문이다. 실업을 한 국경에게 병곤은 병의가 있는 군용무기공장에서 문지기 림시직을 찾아주었다. 국경과 함께 문지기를 하는 다른 남자는 동료들이 무기회사의 부분품들을 가만히 숨겨서 판매하는 일을 눈을 감아주고 있다. 다같은 동료들인데 서로의 관계를 파괴하면서 인심을 잃을 필요 없고 또한 그 동료들도 일정하게 담배나 돈으로 보상을 준다는 점에 더 큰 가치를 둔다. 회사는 점점 망해갈 것이고 결국 그들 모두 실업할 미래는 자신들이 상관할 바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또한 거의 모든 동료들은 회사가 망해가는 현실에 이는 상식적인 행위라고 묵인한다. 인간은 많은 경우에 상식적인 관념에 대하여 사고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러한 무사고와 묵인은 필연코 더 나쁜 사회를 만들 것이다. 드라마의 첫시작에서 병곤은 같은 공장에서 일하던 동료 도자강이 사형을 당하는 현장에 참석해야 한다는 명령을 받는다. 대부분 동료들은 사형장에서 사형 당하는 자강에 대해 적대적이다. 억지다짐으로 사형장에 갔던 병곤은 당시 친하게 지냈던 자강의 마지막 모습을 보면서 여러가지 감정에 휩싸인다. 결국 자강이 사형 당하자 병곤도 그 자리에서 쓰러진다. 그는 분명 대부분 사형장에 갔던 사람들과는 다른 눈길로 자강의 마지막 길을 보내준 것이다. 오스트리아 윈에서 출생하고 제2차세계대전 때 아우슈비츠수용소에서 비인간적인 삶을 살았던 유태인 정신심리학자, 빅토르 프랑크(Victor Frankl)는 《죽음의 수용소에서》(1984)라는 자서전적 수기에서 “절망의 삶을 지켜온 것은 바로 그 어떠한 악렬한 상황에서도 인간은 삶의 의미를 찾고 자신의 삶을 책임지려는 의지가 작동되였을 때 생존률이 더 높아지고 더 인간다운 선택들을 할 수 있게 된다.”고 하였다. 그는 “인간이 시련을 가져다주는 상황을 변화시킬 수는 없지만 그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선택할 수는 있다.”고 하면서 인간이 가진 최고의 그리고 최후의 자유는 바로 선택할 수 있는 자유라고 강조하였다. 이러한 상식에만 충성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에 책임지려는 선택의 자유가 인간세상을 더 인간다운 세상으로 만든다고 생각한다. 비록 우리는 현실에서 이처럼 인간다운 선택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지만, 적어도 드라마가 우리에게 이러한 다른 이야기를 선 보이면서, 자본으로 모든 가치를 획일화하는 년대에 불안을 안고 살아가는 모든 이에게 위안이 되여주었다. 이는 모든 것을 유용성으로 판단하고 계산적인 도구적 리성으로 길들여진 사람들에게 다시 한번 문학예술의 가치를 강조하는 작품이다.     《예술세계》 2023년 제5호
25    청춘의 향연, 류행음악의 유망주 댓글:  조회:915  추천:0  2023-08-25
청춘의 향연, 류행음악의 유망주 —연변대학 예술학원 음악표현학과 김성박사 □ 신철국     음악회를 마치고 지난 6월 16일 저녁, 연변대학 예술학원 정률성예술극장에서 신선한 음악회가 펼쳐졌다. 중국조선족류행음악의 유망주로 주목받고 있는 연변대학 예술학원의 김성박사가 모교에 돌아와 가진 첫 음악회무대였다. 객석을 메운 관객들의 열기에 부응해 울려퍼진 쟈즈음악을 선두로 청중들의 호감을 자극하는 멜로디 10여곡이 련달아 심금을 울렸다. 여러 나라 언어로 된 부동한 풍격의 노래가 끝날 때마다 관객들은 뜨거운 환호로 화답했고 황홀한 류행음악의 세계로 초대해 기억 저편에 있는 청춘의 기록들을 소환해준 멋진 미남 보컬에게 아낌없는 갈채를 보냈다. 거기에 전국 각지에서 온 음악인들과 함께 펼친 합동공연까지 더해져 공연장의 열기는 그야말로 빅뱅 직전이였다. 호소력 짙은 무대 주인공의 미묘한 음성은 어느새 필자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부지불식간에 ‘김성’이란 이름이 화인(火印)처럼 뇌리에 각인됐다. 그리고 바로 그 공연이 끝나서 며칠 뒤 운 좋게도 단독인터뷰를 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무대가 아닌 지척에서 마주한 김성박사는 어린 소년처럼 수줍은 인상에 시종 조용한 음성과 잔잔한 미소로 일관했다. 변호사 아버지와 교육자 어머니를 둔 김성박사는 부모님의 권유로 열살 때부터 피아노레슨을 받았는데 일찍 피아니스트 지망생들의 필수곡으로 알려진 쇼뺑의 련습곡들을 소화하는 단계에 들어섰다고 한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 무렵 그의 꿈은 예술가가 아닌 축구선수, 그래서 소학교를 졸업하고 진학한 학교가 연길시체육학교(축구전업)였다. 그러다 그의 꿈이 음악으로 방향을 튼 건 고중에 진학하면서부터였다. 예술인은 아니지만 음악에 뛰여난 소질을 갖고 있는 그의 어머니가 자식의 천부를 발견하고 연변예술학교 작곡전공에 추천했다. 약 1년간 다니다가 북경으로 향발하여 중국음악학원 작곡학부 주임을 력임했던 국내 저명한 작곡가 시만춘(施万春) 교수의 문하생으로 들어가 학문을 닦았다. 그리고 2년 뒤 다시 연변대학 예술학원 작곡전공에 진학했는데 이 때 운명적으로 그의 인생목표를 완전히 음악으로 정조준하게 되는 일생일대의 사건과 조우했다. 중국음악학원 시만춘 교수한테서 작곡수업을 받고 있는 김성 “아마 9월 중순 쯤이였을 겁니다. 학교에서 신입생맞이 축하문예야회를 가졌는데 그 때 학교 축구동아리에 있던 멤버들과 같이 무대에 올라간 적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어떤 곡이였던지 기억이 희미하지만 그 날 오른 무대는 그한테 큰 울림과 감동을 선사했다. 축구만 하는 줄 알았는데 노래도 잘 부른다는 교우와 선생님들의 과분한 평가와 뜨거운 박수갈채를 받아안으며 난생처음 ‘노래하는 사람’으로서의 희열을 느꼈다. 그 때 환장할 만큼 눈부신 무언가가 뇌리를 휘저으며 바로 이것이 너의 꿈이자 목표라고 귀가에 소곤거렸다. 이름할 수 없는 청춘의 격동은 곧 행동으로 옮겨졌고 2010년 4월, 노래와 춤에 장기가 있는 한호, 오성복, 안문천, 김군 등이 그의 주위에 뭉쳤다. ‘완벽한 음성(voice is perfect)’이란 뜻의 영어문구에서 첫 글자들을 뽑아내 ‘VIP’란 감성그룹을 내오고 하루 8~10시간씩 자체로 련습하면서 밤무대로 진출해 연변의 대표적인 류행음악그룹으로서의 내공을 쌓는 데 열과 성을 다했다. 능력은 가능성이요, 실력은 현실성, 준비된 자한테는 기회가 온다는 말이 있다. 그룹 ‘VIP’는 2010년 7월, 제1회 두만강변가요제에서 일거에 대상을 거머쥔 데 이어 이듬해 6월에는 단독콘서트를 개최하여 관객 2천여명을 불러모으는 진풍경을 연출했다. 제2회 두만강변가요제에는 초청게스트로 참여하며 식지 않은 인기를 증명했고 연변TV, 연변위성TV의 〈청춘스타트〉, 〈두만강〉, 〈문화광장〉, 〈파워뮤직〉, 〈뮤직비타민〉 등 프로들에 륙속 얼굴을 알리며 대중문화를 소비하는 현지의 청춘들한테 젊음을 대표하는 그룹으로서의 최고 적임자임을 선언했다. VIP콘서트의 포스터(2011년 6월 11일 촬영) 이 와중에 김성은 연변 최초로 화려한 대형 무대가 아닌 길거리공연에도 나서며 음악에 대한 순수한 사랑을 불태웠다. 또한 그 무렵 연변의 유명한 알앤비(R&B)가수로 활약하고 있던 량국철과 함께 처음 듀엣무대에 오르며 그로부터 화음 처리와 선률, 볼륨 처리를 익히기도 했다. 허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룹 ‘VIP’는 실력이 아닌 모종의 원인으로 일보 지척이였던 한국 K팝계 진출에 좌절을 겪었고 리더였던 김성은 그 때 불쑥 그동안 열심히 해왔던 류행음악에 대해 회의를 가지게 된다. 자신들의 한계에서 오는 회의였다. 보컬과 댄스 실력을 한 차원 업그레이드해보려고 해도 국내에선 배울 곳이 없었고 선생도 없었다. 공백이였다. 당시 국내의 많은 음악그룹들이 직면한 문제이기도 했다. 제1기 두만강변가요제에서 VIP그룹이 1등상을 수여 받는 장면 “고민하던 끝에 일단 저부터 나서기로 했습니다. 누군가는 꼭 해야 할 일이였거든요.” 2012년, 연변대학 예술학원 작곡전공에서 방권일 지도교수의 지도하에 학원 최초로 가진 졸업연주회에 관악자작곡 〈금(禁)〉을 발표해 작곡가로서의 실력도 인정 받은 김성은 류행음악을 확실하게 배워 국내 젊은이들한테 전수할 욕심으로 이듬해 단연히 류학길을 선택했다. 한국 백석대학교 음악대학원 실용음악보컬전공 석사연구생 공부였다. 자기가 그처럼 꿈꾸던 실용음악보컬전공에 학적을 올린 김성은 하늘의 별이라도 딴 기분이였다고 한다. 헌데 웬걸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생각이나 감정의 표현을 떠나 일반 대중을 즐겁게 하기 위해 만들어진 실용음악은 7화음을 보유한 전통음악에 비해 13화음까지 거느린 쟈즈음악이 기초로서 국내에선 일명 ‘대중음악’ 또는 ‘통속음악’으로도 불린다. 그런데 정작 실용음악학과의 내부에 들어서보니 전혀 딴판이였다. 문맹이 따로 없었다. 외래어로 도배된 실용음악 명사와 일반 대화에도 꼬리 물고 다니는 생경한 외래어 교학환경이 첫밗에 발목을 잡았던 것이다. 보컬과 수업은 일 대 일이라 몸으로 때우면 되는데 공동과 수업은 강좌가 위주이기에 교수님의 강의에 귀를 강구어야만 했다. 하지만 아무리 귀를 강구어도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미칠 것만 같았다고 한다. “제가 ‘문맹’이란 단어를 그렇게 페부로 절감하기는 아마 그 때가 처음이였을 겁니다. 꼭 벙어리나 다름없었으니까요…” 송폼(歌曲形式), 인트로(前奏), 인털루드(间奏), 브릿지(桥梁音乐或桥段), 프리코러스(合唱前), 벌스(歌曲的段落), 아웃트로(结尾部分)… 공동과 수업 때면 홍수처럼 쏟아지는 외래어로 된 전공용어 앞에 김성은 우울증에 걸렸고 그대로 나가다간 학업을 포기해야만 했다. 이러한 그를 사지에서 구해낸 건 그의 인내와 오기였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그동안 무대에서 겪어왔던 다양한 경험들이 인내와 오기로 되살아났다. 모르는 외래어로 된 전공용어들을 전부 기록해 숙소에 돌아와 번역기로 돌려 부분적 내용을 소화했고 두툼한 외래어사전을 밤샘으로 뒤져가며 교수님과 학우들의 말을 알아듣기에 고심했다. 그렇게 1년이 지나니 기적같이 귀가 열렸다. 마치 득음(得音)의 경지에 들어선 것만 같았다. 신생(新生)이 따로 없었다! 주변의 모든 것이 활기로 차넘쳤고 갈수록 학업에 재미가 붙었다. 밴드에도 합류하고 음악제작에도 참여하며 성공적으로 석사연구생공부를 마친 뒤에는 바로 한국 상명대학교 일반대학원 공연예술경영학과 박사연구생 공부에 뛰여들었다. 중년의 아저씨들과 함께 박사공부를 하면서 회식이나 모임 때면 구석을 차지하던 ‘꼬맹이’가 2020년 8월, 학위론문 《한국아이돌의 이미지가 중국청소년의 아이돌 관련 상품 구매의도에 미치는 영향》을 발표하면서 ‘상명대학교 일반대학원 공연예술경영학과 최초 외국인박사 졸업생’이라는 영광의 타이틀을 얻게 되였다. 예리한 시각과 넓은 안목으로 시시각각 국내 류행음악교육상황과 취업시장을 진단하며 학과의 전공건설에 은근히 왼심을 쏟고 있던 연변대학 예술학원 지도부에서는 그동안 김성의 성장을 지켜보며 그가 이룩한 학문의 성과에 주목하고 있었다. 최근 국가 1급 본과 학과 건설에서 연변대학의 6개 학과가 전국 A급 학과로 선정됐는데 그중 예술학원의 총 5개 학과중 3개 학과가 국가 일류 본과 학과에 선발돼 이름을 드날리고 있었다. 2020년 10월, 다년간 해외에서 류행음악의 리론과 실기를 체계적으로 배워온 김성박사는 모교에 돌아와 류행음악보컬 강사로 되여 류행음악분야의 후대양성에 정력을 쏟았다. 2021년 8월, 류행음악교연실(현재 현대음악교연실)이 설립되였고 류행음악보컬 본과생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이는 그가 그동안 갈고 닦아온 실력을 아낌없이 펼칠 수 있는 활무대로 되였다. 현재까지 류행음악교연실 강사로는 김성박사가 유일하다. 일주일에 약 24시간, 평균 14명의 학생들을 상대로 일 대 일 수업을 하고 나면 목에 쥐가 날 지경이라고 한다. 하지만 한때 자기가 배우지 못했던 아쉬움을 남한테 배워주는 것으로 치유한다는 것이 그처럼 즐거울 수가 없단다. 따라서 학생들한테 더 많은 가르침의 시간을 할애하다보니 모교에서의 학창시절 전공이였던 작곡은 잠시 소외할 수밖에 없다는 김성박사, 언젠가는 좋은 곡을 써서 학생들과 함께 무대에 오르고 싶단다. “연변은 가무의 고향입니다. 그러니 물론 류행음악도 빠질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더 많은 학생들을 가르쳐 전국에 이름난 류행음악가수, 류행음악교육자로 양성시키는 게 저의 목표이기도 합니다.” 발라드, 팝송, 쟈즈 등 자기가 좋아하는 곡이 따로 있듯이 시대마다 전국을 들썽케 하는 류행곡(류행가)도 따로 있다며 총 24가지 색갈로 류행음악을 색칠해보고 싶다는 김성박사, 시들지 않는 청춘의 향연 속에 오늘날 우리들 류행음악교육의 전초선을 다져나가는 유망주—김성박사의 꿈은 마냥 눈부시기만 하다.   사진 제공 | 김성, 예카이엔터테인먼트 《예술세계》 2023년 제4호
24    젊은 무용수 강매화의 이야기 댓글:  조회:375  추천:0  2023-06-07
젊은 무용수 강매화의 이야기 □리아   어린시절, 한번 쯤은 자신의 미래모습에 대한 동경과 상상으로 꿈을 키워봤을 것이다. 물론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겠다. 어릴 때의 꿈이 성인이 된 이후까지 이어지는 경우도 많지 않고 마찬가지로 우연한 계기로 장래의 꿈을 결정 짓는 경우도 적지 않기 때문이다. 현재 연길시조선족무형문화유산보호중심에서 무용수로 활약하고 있는 강매화의 무용인생 첫시작도 이렇게 시작되였다. 어려서부터 꿈을 키운다고 하는 또래 친구들과 달리 그녀에겐 딱히 그렇다 할 만한 꿈이 없었다고 한다. 어린아이답게 하루하루를 즐겁게 보내는 것이 전부였던 그녀의 인생에 느닷없이 변화가 찾아온 것은 중학교 3학년 때였다. 학교로 학원생 모집을 온 연길시조선족예술단 직원의 눈에 들게 되면서 그 곳의 학원생으로 발탁된 것이다. 처음 접촉해보는 생소한 분야여서 새로운 것에 대한 두려움도 느끼면서 만감이 교차하였지만 어린 나이에 누군가에게 인정 받은 기쁨이 더 컸다. 그렇게 그녀는 불을 향해 뛰여드는 나방이 된듯 어린시절의 겁 없는 패기로 무용의 세계에 뛰여들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아무 준비 없이 들어선 무용의 세계는 참혹했다. 고된 훈련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아프지 않은 곳이 없게 만들었다. 생전 이런 경험을 해본 적이 없던 그녀는 일주일도 채 안되여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울며불며 고집을 부렸고 그런 딸을 보며 부모님은 한달만 버텨보고 그 때도 힘들면 그만두라고 달랬다. 훈련이 힘든 것은 여전했지만 기한을 정하고 보니 은근히 오기가 생겼다. 한달후면 그만둔다고 생각하니 그 고된 훈련도 마치 인생의 마지막을 앞두고 버킷 리스트를 하나하나 해보는 듯하여 아쉬움을 남기고 싶지 않았다. 어느샌가 육체의 고통을 참아가며 훈련하는 데 익숙해졌다. 발톱이 빠지기도 하고 피부가 찢겨지기도 하였지만 훈련을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최선을 다해 훈련을 이어가다가 선생님의 칭찬을 듣게 되였다. 그건 처음으로 들은 무용을 잘한다는 칭찬이였다. 너무나 가슴 벅찬 감동을 안겨주니 스스로 자신은 무용을 잘해낼 수 있구나 하는 자신감을 가지게 되였고 그 일을 계기로 무용수의 꿈을 키우게 되였다. 늦은 나이에 가진 꿈이였기에 욕망 또한 류달리 강렬했다. 2005년에 연길시조선족예술단에 입단한 이래 강매화는 무용수로 성장해가는 길을 고된 훈련으로 꾸준히 걸어갔다. 그럼에도 여전히 무용에 대한 학구열에 갈증을 느끼고 있을 무렵, 2010년에 연변대학 예술학원 무용학부에 입학하여 좀더 전문적으로 무용에 대해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생기게 되였다. 여러 스승들과 만나게 되면서 그들의 가르침하에 무용에 대한 전문리론지식과 더불어 다양한 무용쟝르를 배웠고 무용수로서의 마음가짐도 갖추게 되였다. 여직껏 스스로 좋아서 춤을 췄다면 그 때부터는 관객들이 좋아하는 춤을, 관객과 소통할 수 있는 춤을 추고 싶었다. 그렇게 그녀는 스승들의 사심 없는 가르침을 받으며 무용의 참맛에 취하고 무용의 세계에서 헤여나올 수 없는 경지에 빠지게 되였다. 2014년, 학업을 원만히 마친 강매화는 연길시조선족예술단에서 연길시조선족무형문화유산보호중심으로 개칭된 직장에서 무용수로서 한자리를 차지하고 꾸준히 갈고 닦은 실력을 마음껏 발휘하게 되였다.   군무 〈부채춤〉의 한 장면(가운데 강매화)   군무 〈장고춤〉의 한 장면(가운데 강매화)   사실 강매화는 학원생 때에도 연변대학 재학시절에도 훈련과 학업을 병행하면서 틈틈이 공연무대에 서다보니 무대경험이 여느 선배 무용수 못지 않게 풍부하였다. 학원반에 들어온 이래 각고의 노력을 거쳐 이듬해부터 여러 공연활동과 콩쿠르에 참가하였고 몇년후에는 군무의 리더로 무대에 서면서 많은 성과들을 거두었다. 2010년, 제18회 길림성예술시리즈콩쿠르에서 〈한삼춤〉으로 청년조 1등상을; 2010년, ‘우리는 한가족’ 제2회 전국소수민족대련환활동에서 〈메아리〉로 1등상을; 2012년, 연변조선족자치주 창립 60주년 경축공연에서 〈연변찬가〉로 공헌상을; 2014년, 제22회 길림성예술시리즈콩쿠르에서 〈농악무〉로 1등상을; 2019년, 제11회 전국소수민족전통체육운동회 개막식 공연에서 〈봄의 꿈〉으로 2등상을 수상하였다. 또한 2017년, 제1회 중국 · 연변 조선족문화관광절 개막식 공연; 2018년, CCTV-15 ‘새시대를 노래하다(唱响新时代)’ 공연; 2019년, 내몽골에서 열린 제14회 홍산문화관광절 민족단결우호교류공연; 2022년, 연변조선족자치주 창립 70주년 경축공연 등 다양한 활동에도 참가하였다. 이러한 묵직한 성과와 경력들은 그녀로 하여금 2013년, 2016년, 2017년에 각각 연길시문화라지오텔레비죤및관광국 선진사업자로 선정되고 2019년에 연길시인력자원 및 사회보장국 특수공헌상을 수여 받는 등 개인영예도 얻게 하였다.   군무 〈한삼춤〉의 한 장면(선두에 강매화)   현재 30대 초반의 젊은 나이임에도 강매화는 17년에 달하는 문예사업종사경력을 갖고 있다. 상술한 활동경력들을 제외하더라도 연길시조선족무형문화유산보호중심의 간판이라 할 수 있는 〈계절의 노래〉 공연활동에도 현재까지 1,600여차 참가했고 하향공연에도 100여차 참가했지만 그녀에게 있어 가장 힘들었고 그래서 가장 기억에 남는 활동은 연변조선족자치주 창립 60주년, 65주년, 70주년 세차례 경축공연이였다고 한다. 제일 완벽한 무대를 선 보이고저 팀원들과 함께 며칠씩 훈련실에서 버텼고 점적주사를 맞을 정도로 건강이 나빠졌음에도 훈련에 몰입하군 했다. 공연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나서는 희열에 벅차 눈물까지 흘렸다고 한다. 그리고 전국소수민족전통체육운동회 개막식 공연에 참가하였을 때엔 우리 민족을 전국에 널리 자랑하였다는 생각에 무용수란 직업을 선택하기 참 잘했다는 자부심을 느끼기도 했다. 다양한 무용쟝르를 섭렵해온 강매화는 그중에서도 조선족장고춤에 류달리 애착심도 강하고 그 표현실력에 대한 자부심도 강하다고 한다. 장고를 메고 참가한 2018년, 장춘과 광주에서 열린 관광절설명회; 2021년, 태원, 성도, 란주에서 열린 연길투자유치설명회 등 다양한 무대경험으로 그녀의 장고춤 실력은 현저한 발전을 가져오게 되였다. 그녀의 노력과 열정 그리고 장고춤 실력은 연길시조선족무형문화유산보호중심 지도부의 인정을 받아 조선족장고춤 주급 전승인으로 추천되였다.   독무 〈장고춤〉을 표현하고 있는 강매화 우연한 계기로 무용수의 길에 들어서게 되였고 다소 늦게 시작된 꿈이였지만 이젠 무용을 떠날 수 없는 강매화가 되였다. 이렇게 빠르게 그리고 훌륭히 성장할 수 있게 된 것은 부모님과 여러 스승들, 연길시조선족무형문화유산보호중심 지도부의 관심과 로고가 든든한 뒤받침이 되여준 것이 가장 큰 요인이라고 한다. 앞으로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 더 높은 단계의 무용수가 되여 중국이라는 이 커다란 땅에서 우리 민족의 춤의 맥이 끊기지 않도록, 자손만대에 이어가도록 하는 것이 강매화의 또 다른 꿈이기도 하다.   사진 제공 | 연길시조선족무형문화유산보호중심 《예술세계》 2023년 제2호
23    《예술세계》2023년 2호 목록 댓글:  조회:380  추천:0  2023-06-07
22    민족가무극 〈정률성〉의 총기획자 최옥화를 만나다 댓글:  조회:507  추천:0  2023-03-07
민족가무극 〈정률성〉, 국가급 무대에 오르기까지 —민족가무극 〈정률성〉의 총기획자 최옥화를 만나다 □ 리은희       정률성은 걸출한 작곡자이자 인민음악가이고 무산계급혁명음악의 개척자의 한사람이며 ‘군가의 아버지’로 불리운다. 그는 섭이, 선성해와 더불어 중국 3대 음악가로 불리기에 손색이 없다. 1999년에 광주시가무단에서 창작, 공연한 무용극 〈성해 · 황하〉(문정아 총연출), 2005년에 운남성 옥계시에서 창작, 공연한 〈섭이〉(전동범 총연출)에 이어 2022년 12월 18일, 19일에 중앙가극원과 연변대학 예술학원에서 손 잡고 다듬은 민족가무극 〈정률성〉이 중앙가극원 극장에서 공연되였다. 연변대학 예술학원에서 3년이란 긴 시간을 들여 창작, 공연한 이 야심작은 연변대학 력사상 국가급 무대에 올린 첫 가무극이다. 가무극이 쾌거를 거두게 된 데는 창작팀과 배우들의 로고와 피타는 노력이 깃들어있다. 특히 연변대학 예술학원 최옥화 원장은 이 가무극의 총기획자로서 가무극을 무대에 올리기까지 혼신의 력투를 펼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민족가무극으로 창작되기까지     정률성은 조선반도 남부 광주에서 출생하여 1933년 19살의 젊은 나이에 고향을 등지고 중국에 와서 항일구국의 길을 모색하였으며 중국공산당의 령도하에 혁명예술가로 성장하였다. 그가 창작한 〈연안송〉, 〈중국인민해방군 군가〉(원명 〈팔로군행진곡〉)는 민족독립과 인민의 해방을 위해 용감히 싸우도록 광범한 군민들을 격려하였다.     2019년 봄, 항일가곡연구 프로젝트를 진행하던 최옥화 원장은 ‘군가의 아버지’ 정률성을 더 깊이 연구하고 선전할 몇가지 필요성을 느끼게 되였다.     첫째, 정률성의 이야기는 영화, 연극, 다큐멘터리 등 다양한 형식으로 제작되였지만 모두 인물전기에 중점을 두었고 음악창작면에서 정률성이 열혈청년으로부터 혁명예술가로 성장하는 과정을, 각종 시련을 딛고 ‘군가의 아버지’로 거듭나는 과정을 정리하지 못했다. 정률성은 일생을 음악창작에 바쳤고 음악은 초불마냥 그의 령혼을 비췄기에 음악창작을 주선률로 하면서 그의 혁명예술가의 형상을 그려야만이 정률성의 삶을 진정으로 보여줄 수 있다고 여겼다.     둘째, 당시 우리 나라에는 작곡가 섭이의 이름을 딴 섭이음악학원, 섭이광장, 섭이대극원, 섭이기념관이 있고 선성해의 이름을 딴 성해음악학원, 성해음악청, 성해극장, 선성해기념관, 선성해문화광장, 선성해문화예술창작중심 등이 있었지만 정률성에 관해서는 할빈의 정률성기념관이 전부였다.     셋째, 정률성은 비록 타국에서 태여났지만 중국공산당이 양성한 우수한 혁명예술가이고 항일전쟁을 통해 저명한 인민음악가로 성장하였다. 그는 섭이, 선성해에 이은 또 한명의 걸출한 작곡가이며 무산계급혁명음악의 개척자이다. 정률성은 중국에서 혁명의 길을 걷고 점차 중화를 사랑하는 혁명예술가로 거듭난 인물로서 국제적인 문화 전파가치가 있다. 또 중국문화의 포용성을 발양하고 중국공산당의 영명함과 위대함을 더 널리 선전하며 인류 운명공동체의식을 구축하는 데도 심원한 의의가 있다.     넷째, 정률성은 2009년에 중공중앙 선전부, 조직부, 인민해방군 총정치부 등 11개 부문으로부터 ‘중화인민공화국 창건 특수기여 영웅모범인물 100명중 한사람’으로 선정되였다. 하지만 빛나는 영예에 비해 그의 이름은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못하였다. 하여 관련 예술작품을 창작하여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이 인민음악가를 알려야 했다.   중앙가극원 류운지 원장(오른쪽 세번째)과 연변대학 예술학원 지도부 성원들     마침 2019년은 〈중국인민해방군 군가〉 창작 80주년이 되는 해이자 중국공산당 창건 100주년을 2년 앞두고 있는 해였다. 〈중국인민해방군 군가〉 작곡자인 정률성 관련 작품 창작의 중요성을 절실히 느낀 최옥화 원장은 가무극 〈정률성〉에 대한 초보적인 창작계획을 세우고 연변대학 예술학원 동료들과 함께 정률성의 친우들을 방문, 취재하여 자료를 수집하고 가무극의 실행 가능성에 대해 토론하였다.     2019년 10월 19일, 최옥화 원장은 정률성의 경전작품을 토대로 한 민족가무극 〈정률성〉의 최종 계획안을 연변대학 지도부에 제출하였다. 시대의 주선률을 고양하고 소재가 참신한 이 계획안은 학교 지도부의 주목과 적극적인 지지를 받았다.     그 해 10월, 연변대학 예술학원에서는 민족가무극 〈정률성〉의 창작에 착수하였고 12월에 주요 창작일군 회의를 소집하였다. 회의에서 연변대학 예술학원 원장 최옥화가 총기획을, 중국음악학원 작곡학부 교수 우영일이 예술감독을, 무장경찰부대 정치부 문공단 전임 단장 장길의가 씨나리오를, 연변대학 예술학원 교수 향개명이 총감독을 맡기로 결정하였고 극의 주요사상, 창작류형, 창작내용, 예술형식, 실천기획 등을 기본적으로 확정하였다.       처음에는 가극, 음악극 혹은 무극 형식으로 작품을 표현하려고 계획하였으나 토론을 거쳐 최종 연변대학 예술학원의 음악과 무용 등 방면의 장점을 내세워 가무극 형식으로 시대모범을 노래하고 인민음악가 정률성의 혁명이야기를 엮어가기로 하였다. 또한 조선족은 가무에 능하기에 정률성의 무대형상을 더욱 풍부하게 부각하는 데 가무극이 가장 적합하였다. —민족가무극 〈정률성〉의 총기획자 최옥화의 인터뷰에서       그후 창작팀은 력사자료 수집, 관련 인물 취재, 현장 탐방 등 준비사업을 착실히 진행하였고 200여차의 창작토론회의와 6차례의 수정을 거쳐 2020년 6월에 최종 씨나리오를 완성하여 국가판권국에 등록하였다.   민족가무극 〈정률성〉의 총기획자 최옥화와 총연출 심량(가운데, 중앙가극원), 향개명(오른쪽, 연변대학 예술학원)     2020년 8월 19일, 연변대학 예술학원에 정률성음악연구중심을 설립하여 정률성의 혁명정신을 연구하고 선전하는 데 훌륭한 플랫폼을 갖추게 되였다. 2020년 9월 3일, 민족가무극 〈정률성〉소식공개회를 개최하여 대중들의 관심을 불러모았으며 2020년 10월 25일, 정률성작품음악회를 개최하는 동시에 생방송 형식으로 가무극의 선전활동을 펼쳤다.     2021년 4월 28일, 민족가무극 〈정률성〉이 연길아리랑극장에서 첫막을 열었다. 4막 11장으로 된 이 가무극은 음악창작면에서 일부 대표적인 원작 소재를 채택한 외 기타 음악은 새로운 형식으로 재창작을 거쳤는바 사실주의기법과 전통작곡기법이 결부된, 서로 다른 풍격의 창작가곡 21수를 전반 극에 관통시켰다. 또한 음악으로 인물형상을 부각하고 극의 전개에 알맞는 무용음악으로 작곡가 정률성의 인물성격을 생동하게 보여주어 관객들의 호평을 받았다. 가무극은 2021년 5월에 중화인민공화국교육부 전국 ‘100부 홍색명작우수극종목’ 전시방영명단에 이름을 올려 온라인으로 전국에 전시되였고 그 해 7월에 국가문화및관광부 제2회 전국우수음악극전시공연 극종목으로 선정되였으며 2022년 1월에는 중화인민공화국교육부 대학교사상정치사업 육성건설프로젝트중의 대학교창작문화정품보급행동계획에 입선되였다.       중앙가극원 무대에서 빛을 발하기까지     민족가무극 〈정률성〉의 시연을 마친 후 연변대학 예술학원에서는 세차례나 되는 좌담회를 조직하여 여러 분야 전문인사들의 수정의견을 수집, 정리하였다. 그후 대본, 줄거리, 대사, 무대설계, 음악, 무용, 무대배치, 조명 등을 새롭게 고치면서 중앙가극원과 손 잡고 성공적인 공연을 위해 만단의 준비를 갖췄다.       2022년 8월초, 중국음악가협회 한신안 주석의 소개로 중앙가극원 류운지 원장과 련락이 닿았다. 8월 16일, 북경에서 중앙가극원 책임자들과 만나 북경에서의 공연에 대한 합의를 보았다. 10월 17일, 중앙가극원 창작팀과 연변대학 예술학원 창작팀이 온라인으로 공연협의회를 열어 초보적인 공연시간과 작품의 질적 향상을 위한 연출팀을 결성하였다. 11월 5일, 중앙가극원 감독 심량, 주요 배우인 리상, 곽등등, 무대감독 리신희, 조감독 리환 등 다섯명이 십여일간 연변대학 예술학원 창작팀과 함께 수정방안을 토의하고 최종 방안을 결정했다. —민족가무극 〈정률성〉의 총기획자 최옥화의 인터뷰에서       모두의 노력으로 민족가무극 〈정률성〉은 꼼꼼한 준비과정을 마치고 2022년 12월 9일과 10일에 북경 중앙가극원 극장에서 공연하기로 했다. 하지만 막부득이한 사정으로 공연시간이 12월 18일과 19일로 미루어졌다.   민족가무극 〈정률성〉의 공연을 둘러싸고 토론중인 중앙가극원 류운지 원장(왼쪽)과 총기획자 최옥화     12월 11일, 연변대학 예술학원의 92명 배우들이 북경에 도착하였고 12일부터 중앙가극원 제작진, 배우들과 함께 본격적인 훈련을 진행하기로 하였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그 당시 중앙가극원의 많은 배우들이 코로나19 양성판정을 받았고 연변대학 예술학원 배우들까지도 련이어 감염증상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중앙가극원 책임자들은 공연을 미루자는 제안도 했지만 100여명 배우들과 창작팀 성원들이 북경에까지 가서 공연도 못하고 되돌아온다는 것은 도저히 안될 일이였다. 나의 확고한 의지를 보아낸 중앙가극원 류운지 원장은 함께 곤난을 극복하고 일을 추진시키자면서 적극적으로 나왔다. 그리하여 우리 두 협력단위의 배우 260명 가운데서 80%가 양성판정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예정 대로 이틀간의 공연이 진행되였다. 그 때의 마음고생은 이루 다 말로 형용할 수 없다. —민족가무극 〈정률성〉의 총기획자 최옥화의 인터뷰에서       특수한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12월 18일에는 600여명의 관객들이 현장을 찾아 직접 공연을 관람하였고 19일에는 온라인으로 전국에 생방송되였는데 그 시각 동시 접속인수가 210만명에 달했다. 중앙텔레비죤 제3채널, 북경시텔레비죤방송국에서 공연소식을 보도하였다. 중국문예평론가협회 고문인 우평은 “근래 보기 드문 가무극의 가작이다.”라고 높이 평가하였다.   민족가무극 〈정률성〉의 창착팀과 배우들     민족가무극 〈정률성〉은 북경의 관객들 앞에서 질 높고 참신한 형식과 효과를 자랑하면서 최고의 무대를 선 보였다. 민족가무극 〈정률성〉의 총기획자인 연변대학 예술학원 최옥화 원장은 “이 가무극은 소재가 참신하고 드높은 사상성, 시대성이 충분히 반영되였다는 데서 계획단계부터 학교 지도부 나아가 주당위 선전부, 성당위 선전부와 기업계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인민음악가 정률성의 삶의 려정을 선 보인 이 작품은 정률성을 기념하는 길에서의 첫걸음이다.”라고 표명하였다.     최옥화 원장은 “이번 공연은 사생들의 무대실천능력, 교수연구능력을 향상할 수 있는 기회였다. 시공간을 초월한 예술창작형식으로 전교 사생들을 ‘산업교수 융합’ 실천의 길로 이끌었으며 국가일류본과생 전업인재양성의 새로운 모식을 충분히 보여주었다. 금후 이 작품이 연변대학 예술학원의 재연레퍼토리로, 학생들에게는 특수한 사상정치수업과목으로 되기 바란다.”고 하였다.       향후의 사업에 대해 최옥화 원장은 여러가지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리고 민족가무극 〈정률성〉의 성공적인 공연을 기반으로 굵직굵직한 계획들도 세웠다. “금후 정률성문화예술절을 개최하여 정률성음악 연구, 군가주제 회화, 서예 전시, 문화관광 창의상품 설계전람 등 활동을 조직할 것이며 국내외 고등학교, 예술단체, 과학연구기구와 함께 다양한 형식의 학술교류와 예술문화교류를 진행하여 정률성의 혁명정신과 음악사상을 널리 선전하고 전승하는 데 기여할 것이다.”   사진 제공 | 연변대학 예술학원 《예술세계》 2023년 제1호
21    《예술세계》2023년 1호 목록 댓글:  조회:459  추천:0  2023-03-03
20    《예술세계》2023년 주문통지 댓글:  조회:565  추천:0  2023-0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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