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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리장삼, 로전사들의 소중한 기억을 렌즈에 담아 댓글:  조회:95  추천:0  2025-12-24
    리장삼, 로전사들의 소중한 기억을 렌즈에 담아      □ 김향자           시야가 닿는 곳마다 하얀 눈이 뒤덮인 날이였지만 리장삼은 만나고 싶었던 로전사의 주소를 알게 되자 주저없이 길을 나섰다. 차량으로는 진입이 어려운 곳에 이르러 그는 도보로 목적지를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무거운 촬영장비가방을 메고 얼마나 걸었을가. 쌓인 눈 속에서 반 쯤 드러난 무언가가 그의 시선을 끌었다. 잡아당겨 꺼내보니 헐망하고 색 바랜 옛날식 군복이였다. 력사나 전쟁 주제의 드라마 촬영에나 쓸 법한 복장이였지만 어쩐지 소중하게 느껴졌다. 그는 쭈그리고 앉아 군복에 묻은 눈을 깨끗이 털어냈다. 어떻게 되여 이 옷이 여기에 있을가를 생각하며 걷다보니 어느덧 목적지에 이르렀다.     로전사는 따뜻이 웃으면서 그를 반겨맞았다. 인터뷰시간이 길어질수록, 로전사의 피로 얼룩진 기억 깊이 따라갈수록 그는 감동과 경의에 찬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가렬처절했던 전투를 떠올리며 눈물을 글썽이는 로전사를 바라보며 그 역시 눈물에 목이 메이고 가슴이 울컥했다.     잠시 후 그는 오는 길에 주은 낡은 군복을 꺼내 보였다. 로전사는 군복을 받아들고 이리저리 유심히 살펴보더니 “이건 내 옷이야.”라며 격동을 금치 못했다. 안해가 옆에서 “우리 집에 언제 이런 옷이 있었다구 그래요. 주책이네 정말!”라고 하며 핀잔했지만 그는 “젊었을 때 내가 이런 옷을 입었었어!”라며 울먹였다. 리장삼은 카메라 렌즈 속에 안겨들어오는 로전사의 흥분된 얼굴을 바라보며 렌즈에 홍색 기억을 담기로 마음 먹었다.     여기서 잠간 리장삼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자.   두루마리 화폭을 제작하여 순회 강연을 하고 있는 리장삼        리장삼(李长森), 한족.     1955년 4월 12일, 산동성 제성현에서 출생.     1976년, 참군.     1980년, 중국공산당에 가입.     1981년, 룡정현사탕술공사 단서기 겸 보위간사.     1982년, 화룡현상업직공학교 교원.     1984년, 화룡현위 선전부 간사 겸 과장.     1989년, 화룡현위 판공실 부주임 겸 현위상무위원회 비서.     1993년, 연변국제경제기술합작공사 부경리.     2008년, 룡정시경제투자국 국장.     2015년, 연길시 새일대관심사업위원회 상무부주임.       리장삼은 2014년에 촬영에 입문하였고 2017년부터 카메라 렌즈를 풍경에서 로전사들에게로 돌렸다. 그 때로부터 무려 8년 동안 그는 심양, 장춘, 통화, 농안, 구태 및 연변의 각 현, 시, 림업지구, 광산 일대를 누비며 항일전쟁, 해방전쟁, 항미원조 등에 참전했고 지금까지 생존해있는 로전사들을 찾아다녔다. 그는 300여명의 로전사들을 만나 시급히 기록되고 보존되여야 할 사진과 자료들을 수집해나갔다. 발품을 팔아가며 숱한 고생을 한 끝에 그는 8,300점의 진귀한 순간을 사진에 담았고 12,000자에 달하는 상세하고 정확한 자료를 수집하여 정리했다. 로전사들에 대한 깊은 애정과 홍색 기억이 남긴 력사에 대한 경외심을 품지 않았더라면 결코 완성될 수 없는 작업이였다.     날이 갈수록 리장삼은 시간이 얼마나 긴박한지를 절감했다. 로전사들 중에 최고령자는 102세에 이른 분이였다. 그들을 만날 때마다 하루하루 년로해가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그는 마치 시간과 달리기를 하는 듯한 심정이였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저 산의 진달래는 꽃이 피였다 져도 래년에 다시 피여날 테고 장백산의 설경은 녹았다가도 다음해면 다시 하얗게 덮이겠지만 로전사들이 세상을 떠나면 그 소중한 력사와 기억들은 영원히 시간 속에 묻히고 말 것입니다. 그걸 생각하면 너무나 안타깝습니다.”     리장삼의 마음은 얼마나 조마조마하고 다급했을가! 그는 추운 겨울이든 무더운 여름이든 가리지 않았다. 로전사에 대한 소식을 접하는 즉시 그는 곧바로 달려갔다.     2018년 한겨울, 리장삼은 통화시 이도강 구역에 사는, 항일전쟁에 참가했던 진동안 로전사의 주소를 알게 되자 폭설을 무릅쓰고 7시간을 차로 달려 그의 집에 도착했다. 진동안 로전사는 북경에서 열린 열병식에 두차례나 참가한 경력을 가진 분이다. 첫번째는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개국대전 열병식에서 륙군 열병대 전사로 모택동 주석의 검열을 받았고 두번째는 66년이 지난 2015년, 중국인민항일전쟁 승리 70주년 열병식에 항일전쟁 참전 로전사 대표로 참가했다. 진동안 로전사를 취재하는 과정에서 리장삼은 그와 함께 로전사 대표로 참가했던 분이 5명 더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였다. 리장삼은 이들을 찾는 걸음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마침내 빠른 시일내에 나머지 5명의 로전사들을 모두 찾아내여 그들의 모습을 렌즈에 담았고 그들의 영웅이야기도 기록으로 남길 수 있게 되였다.     조국을 위해 목숨도 아끼지 않고 싸워온 로전사들을 취재하는 과정은 눈물겨운 이야기로 가득했다. 95세의 로전사 왕가흥과의 첫번째 만남은 그분의 집에서 이루어졌다. 당시 그분은 건강상태가 안 좋음에도 아주 락관적인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두번째 만남은 병원 중환자실에서 이루어졌다. 리장삼이 모든 정성과 심혈을 기울여 만든, 로전사들의 모습을 담은 화첩을 보면서 왕가흥은 눈물을 흘렸다. “수많은 전우들이 오늘날의 세상을 만들기 위해 목숨을 바쳤소. 나는 부강해진 이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단 한순간도 그들을 잊은 적이 없소.” 전우들과 함께 했던 세월을 추억하는 그의 마음을 헤아리며 리장삼도 눈물을 흘렸다.   로전사들의 모습을 담은 화첩을 보여주고 있는 리장삼     2017년 12월, 남경대학살 희생자 추모의 날에 리장삼은 94세의 로전투영웅 왕총문을 방문하였다. 로전사는 마침 인터넷으로 추모행사 생방송을 시청하고 있던 중이였다. 리장삼은 미리 준비해간 군복을 로전사에게 입혀드리고 그분이 오래도록 소중히 보관해온 훈장들을 달아드린 후 숙연한 마음으로 샤타를 눌렀다.     촬영이 끝난 후 로전사는 어린아이처럼 군복을 꼭 잡은채 벗으려 하지 않았다. 그로부터 일주일후 그가 세상을 떴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 날 찍은 사진을 유상으로 만들고 싶어하는 유가족의 뜻에 따라 리장삼은 필요한 크기로 두장의 사진을 만들어 직접 전해주었다. 이 일은 리장삼의 마음을 아프게 자극하였다. 그는 군복을 많이 준비해 앞으로 인터뷰할 때 모든 로전사에게 선물하기로 마음 먹었다. 이 소식을 들은 하문의 한 기업가가 감동하여 군복 80벌과 솜옷 40벌을 후원했다. 그후 리장삼은 매번 취재와 촬영을 마친 후 로전사에게 한벌씩 선물로 드렸다.     2023년초,  리장삼은 자신이 비용을 부담하는 건 물론이고 자기와 뜻을 함께 한 전우들의 지원금도 모아 기념 티셔츠 120벌을 구매했다. 리장삼은 이 티셔츠를 취재현장에서 만난 로전사들에게 선물하고 무료로 기념사진을 찍어주었다.   옛 군복을 어루만지며 눈시울을 붉히는 로전사 장명순     홍색자원을 가치 있게 활용하고 홍색유전자를 의미 있게 계승하기 위하여 리장삼은 큰 결심을 했다. 2019년 9월, 그는 연변조선족자치주인민정부 대청에서 중화인민공화국 창건 70주년을 기념하여 ‘로전사들의 정신을 기리고 홍색유전자를 계승하자’는 주제의 사진전람회를 열었다. 그는 관객들이 영상 자료를 통해 함께 공감하고 감동받기를 바랐다.     리장삼은 더 많은 사람들에게 로전사들의 홍색정신을 알리기 위해 2019년말 《영원히 퇴색하지 않는 홍색기억》 화첩을 편집, 출판하였으며 이를 홍색교재로 학교와 가두, 향촌에 보급했다. 그뿐만 아니라 2020년에는 항일전쟁, 해방전쟁, 항미원조를 주제로 한 3부작 대형 화폭을 제작, 인쇄하였다. 여기에는 백여명의 로전사가 담겼으며 각 두루마리의 크기는 너비가 1.2m, 길이가 15m에 달했다. 그는 이 작품들을 소중히 들고 학교와 향촌을 다니며 순회전람을 열었다.     2023년 8월, 그는 연길에서 항미원조 승리 70주년을 기념하여 로전사 주제 개인 사진전람을 열어 80여점의 촬영작품과 진귀한 유물들을 전시하였다. 전람회의 참관 인수는 4,600명을 넘었다.   로전사 한룡철과 그의 부인     리장삼의 헌신과 공헌은 광범한 대중들의 찬사와 주목을 받았다. 그는 ‘연길 좋은 사람’으로 선정되였고 길림성 새일대관심사업 특수공헌상과 새일대관심사업선봉(关工先锋) 등 영예를 받았다. 그의 사연은 《인민일보》, 《해방군보》, 《대공보》, 《문회보》 등 여러 매체에 소개되였고 그의 부분 작품들은 길림성 제대군인사무청, 연변조선족자치주 서류관, 연변미술관에 영구 소장되였다. 작품 〈가장 아름다운 길림의 로전사〉는 제23회 길림성촬영예술전에서 길림이야기 부문  금상을, 〈백명 로전사 군상〉은 길림성 ‘로전사의 자취를 찾고 영웅들의 이야기를 통해 홍색정신을 전승하자’ 주제예술작품전에서 1등상을, 〈불타는 기억〉은 중국홰불잡지사에서 주최한 ‘성세의 빛과 어둠, 홰불의 본보기’ 촬영콩쿠르에서 2등상을 받았다. 리장삼의 이런 사적은 CCTV-4 채널의 ‘대동북(大东北)’에 올랐다.     올해는 중국인민항일전쟁 승리 80주년을 맞이하는 해이다. 이에 리장삼은 연변인물연구위원회와 연길시로구역건설촉진위원회(延吉市老区建设促进会)의 지지하에 특별한 기념활동을 기획했다. 실내 전시의 한계에서 벗어나 30명 로전사들의 초상화를 두개의 실외 기둥광고판(室外擎天柱广告牌)에 선전영상자료로 올렸고 연길백화청사 광고전광판(广告显示屏)과 12개 BRT정류장 광고판에 스크롤형식으로 한달 동안 방영하였다. 또한 백명 로전사들의 모습을 담은 두루마리 화폭을 제작하여 화룡, 훈춘, 돈화, 도문 등지와 연변대학에서 순회전시를 하였다.     로전사들을 촬영하는 려정을 이어가는 과정에서 잊지 못할 장면들이 늘 그의 머리속에서 맴돌았다.     해빛이 정수리를 뜨겁게 비추던 어느 무더운 날, 두 눈을 실명한 로전사를 찾아갔을 때의 일이다. 취재를 마치고 나와 로전사의 안해에게 작별인사를 하는데 로전사의 안해가 자기 집 창문 쪽을 가리켰다. 앞을 보지 못하는 그 로전사가 선물로 받은 군복을 입고 서서 창밖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두 눈으로 무엇을 찾으려는 것일가? 앞을 향해 흔들어주는 저 두 손의 방향은 어딜가? 순간 목이 꺽 멘 리장삼은 창문을 쳐다보며 무릎을 꺾었다.     또 한번은 한 로전사의 취재를 마치고 나와 차 열쇠를 찾으려고 호주머니를 더듬었는데 구겨진 현금이 손에 잡혔다. 자기는 현금을 주머니에 넣은 적이 없었기에 로전사의 안해가 몰래 넣어준 것이 분명했다. 리장삼은 로전사들을 취재하러 갈 때마다 빈손으로 간 적이 없다. 누구를 만나러 가든 경의의 마음을 담아 무언가를 꼭 사들고 갔다. 그러나 이 돈이 그런 물건 값이 아님을 그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리장삼이 돈을 돌려주려고 다시 되돌아갔을 때 대문밖에서 로전사의 안해가 그가 떠난 방향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이는 로전사들을 세심하게 보살피고 아껴주는 리장삼에 대한 깊은 고마움과 믿음의 표현이였던 것이다.     홍색기억을 찾아다니는 려정에서 리장삼은 로전사들로부터 같은 말을 여러번 들었다. “내가 싸웠던 그 지역들을 다시 돌아보고 싶지만 이 몸이 따라주지 않는다.” 이것이 모든 로전사들의 한결같은 바람임을 리장삼은 직감했다.   로전사 한룡철과 그의 부인령혼이라도 목숨 걸고 싸웠던 그 땅을 둘러보길 바라며     지금까지 그가 만난 300명의 로전사중 아직 살아계신 분은 10명에 불과하다. 리장삼은 로전사들의 소원을 풀어주기 위해 세상을 뜬 로전사들의 젊었을 때의 사진들을 수집하여 1.5m 크기로 확대하여 액자에 담은 뒤 그들이 목숨 걸고 싸웠던 변방지역에 세워놓았다. 그들의 령혼이라도 오늘의 그 땅을 둘러보길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지금도 그는 로전사들이 다시 가보고 싶어했던 지역을 찾아다니며 이 뜻 깊은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리장삼은 앞으로도 계속하여 로전사들을 관심하며 홍색자원을 발굴하고 홍색유전자를 계승해나갈 것이라고 했다. 또한 그의 끊임없는 노력과 헌신이 결실을 맺어 후대들에게 진귀한 력사적 재부를 남기고 홍색정신이 더욱 찬란하게 빛나기를 바란다고 했다.   《예술세계》 2025년 제6호
5    박송철, 음악으로 빛나는 삶 댓글:  조회:109  추천:0  2025-12-09
박송철, 음악으로 빛나는 삶 □ 최향미   연변의 문예계를 수십년간 뜨겁게 달군 한 예술가의 열정이 예나 지금이나 관객들의 가슴을 울리고 있다. 박송철지휘가는 처음 지휘봉을 잡던 그 날부터 지금까지, 연변 음악의 력사를 노래하며 관객의 마음속에 깊은 감동을 새겨왔다. 그의 지휘봉은 시대의 숨결을 아름다운 선률로 담아냈고 합창과 관현악의 세계에 혼을 불어넣었다. 고통과 열정, 헌신이 어우러진 그의 음악려정은 한편의 드라마와도 같다.   연변산꽃합창단의 전신은 2007년에 세워진 연변음악가협회 합창단이며 2013년에 연변중화문화촉진회에 소속되면서 ‘연변녀성산꽃합창단’으로, 2018년에 ‘연변산꽃예술단’으로 개칭하였다. 합창단 활동을 두고 말할 때는 흔히 연변산꽃합창단으로 통한다. 이곳에서 오디션을 통해 선발된 연변의 예술을 사랑하는 중로년애호가들은 한목소리로 노래하며 만년의 열정을 불태운다. 박송철지휘가는 합창단 단원들에게 한 음절 한 음절 정성껏 가르치며 합창의 진수를 전했고 단원들은 그의 엄격하고 세심한 지도 아래 진정한 합창의 아름다움을 배워간다.   황순자 부단장은 박송철지휘가의 얘기가 나오면 감동을 금치 못하군 한다.   “박송철선생은 낮에는 합창대를 지도하고 밤에는 음악을 편곡하지요. 마치 소학교 학생을 가르치듯 한 소절씩 정성껏 배워주죠. 우리 합창단 단원중 70%가 음악을 전공하지 않은, 열정만으로 참여한 분들이지요. 그런데도 선생님은 모두에게 세심하게 가르쳐줍니다. 박지휘가님이 없었다면 이 합창단이 존재할 수 없었을 거예요.”   박송철지휘가의 세심한 지도 덕분에 연변산꽃합창단은 연변의 대표적인 녀성합창단으로 성장했다. 2008년, 복건성에서 개최된 해협량안합창절에서 동상을; 2011년, 길림시에서 열린 중국공산당 창건 90주년 기념 길림성합창경연대회에서 2등상을; 2013년, 소주시에서 열린 전국새해맞이예술재능공연에서 특등상을; 2017년, 대만에서 열린 제10회 해협량안합창절에서 동상을; 2019년, 민족풍운계렬활동 및 전통문화 재예전시공연—타이 순회공연에서 금상을; 2021년, 장춘에서 열린 다민족 100인 합창단 경연대회에서 1등상을 수상하였다. 박송철지휘가는 어떻게 이처럼 뛰여난 음악성과를 이끌어낼 수 있었을가?   이에 대해 연변청송문학예술관 류영근 관장은 세가지 핵심적인 요소를 꼽았다. 첫째, 박송철지휘가는 조선 전통합창곡부터 중국 풍격의 곡목, 서양 클래식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쟝르의 곡을 선 보인다. 그는 합창단의 특성과 력량을 정확히 파악하여 최적의 곡을 선택한다. 둘째, 박송철 지휘가의 남다른 지도방식이다. 그는 악보 분석부터 반주 준비, 집중해야 할 부분까지 사전에 꼼꼼히 체크하며 항상 짧은 시간에 최대의 효과를 내는 지도방식을 고수한다. 셋째, 단순한 음악지도를 넘어 사람들을 하나로 묶는 리더십이다. 40여명의 아마츄어 단원들이 한목소리를 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박송철지휘가는 이 어려운 과제를 거뜬히 해결하여 ‘조직 관리의 달인’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혼성합창단과 달리 녀성합창단만의 조화로운 음색이 만들어내는 특별한 아름다움은 박송철지휘가가 연변산꽃합창단을 통해 이루고저 했던 음악적 비전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연변산꽃합창단의 성공은 박송철지휘가의 이러한 노력과 열정이 만들어낸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박송철지휘가는 어떻게 음악의 길에 들어서게 되였을가?   그의 음악 려정은 어린시절부터 시작되였다.   “제 음악인생은 형님과 삼촌의 영향으로 시작되였습니다. 삼촌은 다양한 악기를 다루는 분이였고 형님은 악기연주에 재능이 있었죠. 명절마다 열리는 문화행사에서 저는 형님을 따라다니며 자연스럽게 음악을 접하게 되였습니다.” 이 경험을 바탕으로 박송철지휘가는 소학교와 중학교 시절 음악반에서 리론과 연주법을 배웠고 이후 연변가무단에서 호른선생님을 만나며 본격적으로 음악의 길에 들어섰다. 호른선생님의 엄격하면서도 따뜻한 지도 아래 그는 음악의 깊이를 리해하기 시작했고 연변의 한 중학교에서 음악교사로 근무하며 실전경험을 쌓았다. 더 높은 수준의 음악을 갈구하던 그는 중앙음악학원 통신반에서 4년간 작곡과 음악 리론을 공부하며 탄탄한 기초를 다졌다. 이 시기는 그의 음악인생에서 가장 값진 나날이였다.   그러나 그의 음악인생은 순탄치만은 않았다. 2008년, 암이라는 예상치 못한 시련이 그를 덮쳤다. 건강이 무너져 내리는 어두운 시간 속에서도 그는 음악을 놓지 않았다. 오히려 병상에서도 악보를 펼치고 머리속으로 선률을 그려보았다.   “음악은 어둠 속에서도 빛을 밝히는 등불과 같았습니다. 몸이 아플 때면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어 음악을 더 연구했습니다. 음악이 흐르는 공간에서는 오롯이 자유로울 수 있었습니다. 음악은 제 마음을 알아주는 친구 같았어요. 가끔은 눈물로, 때론 분노로 화음을 만들다 보면 어느새 마음이 가라앉았습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하면 음악은 제 삶을 연장시켜준 령약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는 병마와 싸우는 동안에도 창작과 연구를 멈추지 않았고 결국 음악이 주는 힘으로 다시 무대에 설 수 있었다. 또한 그 뒤에는 한 녀인의 헌신적인 희생이 있었다. 생사를 건 기나긴 병마와의 싸움이 시작되면서 그의 안해는 모든 생업을 포기하고 남편의 가장 든든한 지원군이 되였다. 그녀는 단순히 음식이 아닌 생명을 살리는 건강식으로 남편의 회복을 도왔다. 그녀의 정성은 보이지 않는 치료제가 되여 남편의 몸과 마음을 조금씩 치유하였다.   “무엇보다 음악이 남편을 살린 것 같아요. 남편은 음악에 모든 정력을 쏟아부으며 오로지 음악에만 전념하였습니다. 음악이 큰 힘이 된 것 같습니다.”   안해의 헌신과 음악의 힘으로 그는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 피아노 건반 우에서 흐르는 선률은 고통을 잊게 하는 위안이자 새로운 삶의 동력이 되였다. 박송철지휘가는 지금까지 수십수의 창작곡을 대중들에게 선 보였다. 〈민들레 홀씨〉는 고통의 시간 속에서 피여난 아름다운 예술의 결실이다. 이외 〈진달래여 연변이여〉를 비롯한 다른 창작곡들도 관객들의 열렬한 사랑을 받으며 연변 음악계의 소중한 재부로 남았다. 비록 곡에 담긴 정서는 제각각이지만 모두 고향에 대한 깊은 그리움과 사랑을 담고 있다.   특히 그는 연변조선족자치주 창립 50주년, 60주년, 70주년 등 력사적인 행사에서 대형 광장무용곡을 편곡하여 예술적 기량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무대 우에 펼쳐진 선률들은 고향땅에 바치는 사랑의 편지이자 연변문화의 자부심이였다.   1급 극작가 김정권선생은 이렇게 말한다. “박송철지휘가의 가장 큰 특징은 바로 즉흥적인 창작방식입니다. 당시 핸드폰이 없던 시절인데도 저에게 전화를 걸어 새로 만든 선률을 흥얼거리며 의견을 나누군 했죠. 곡이 완성되면 저를 불러 록음현장에서 함께 들으며 제 의견을 물었고 제가 조언을 하면 즉석에서 수정해 다시 록음하는 등 작업방식이 정말 인상적이였습니다.”   연변음악가협회 부주석 김창근선생은 이렇게 평가했다. “그의 작품세계를 살펴보면 대중가요나 민요풍 가요도 있지만 주를 이루는 것은 품격 있는 예술가요입니다. 예술가요 창작은 대중가요에 비해 더욱 정교한 작곡기법이 요구되며 작곡가의 높은 음악적 소양을 필요로 합니다. 박송철작곡가의 작품은 서정성이 풍부하고 우아하며 창의적이고 폭넓은 음악적 스펙트르를 지니고 있습니다. 특히 그의 곡들은 작곡기법이 매우 정제되여있어 가수들이 자신의 기량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습니다.”   박송철지휘가의 음악에 대한 열정은 피아노 조률에서도 엿볼 수 있다. 그는 수업전마다 악기를 정성껏 다듬는 시간을 가진다. ‘정확한 소리는 모든 음악의 시작’이라는 신념으로 그는 조률을 단순한 작업이 아닌 악기의 령혼과 대화하는 신성한 시간으로 여긴다.   “피아노는 습도를 보장해야 합니다. 온도와 습도의 변화에 민감한 악기라는 점을 꼭 알아둬야 합니다. 더우면 팽창되고 추우면 수축되는 원리에 따라 건조한 겨울에는 줄이 팽팽해집니다. 조금만 잘못하면 줄이 끊어져요. 때문에 항상 습도가 적합한지 류의해야 합니다.”   피아노 조률을 완벽히 마친 후에야 비로소 합창지도를 시작하는 박송철지휘가, 피아노의 정확한 음높이는 합창단 단원들이 따라야 할 절대적인 기준이 된다. 오랜 조률경험은 그의 귀를 더욱 예민하게 만들었다. 그는 합창단 단원들의 미묘한 음정 변화를 순간적으로 포착해내고 수십명의 목소리를 하나의 완벽한 화음으로 이끌어나간다. “목소리는 악기의 음정과 서로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피아노 조률을 철저히 점검해 음정을 완벽하게 맞추는 것으로 작업을 시작하죠. 합창단이 피아노의 선률에 정확히 맞춰 노래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먼저 음정을 완벽히 잡은 후에야 비로소 합창 련습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저는 무엇보다 음정과 리듬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음정이 정확해야만 비로소 아름다운 하모니가 만들어지기 때문이죠. 그래서 단원들과 함께 배우고 성장해나가는 과정에서 저는 직접 피아노를 연주하며 정확한 음악적 기준을 제시합니다. 이러한 세심한 주의와 과정이 합창의 질을 결정 짓는다고 믿습니다.”   박송철지휘가는 합창단 단원들의 목소리를 악기처럼 소중히 다듬으며 음악을 전수하고 따뜻함을 전했다. 그의 인내심은 단원들의 잠재된 가능성을 자연스럽게 꽃 피워주었다.   박송철지휘가의 엄격함과 세심함 그리고 예술에 대한 열정은 관현악단에까지 이어졌다. 그는 지휘봉으로 음악의 령혼을 깨워 악사들이 가장 아름다운 소리를 낼 수 있도록 이끌었고 악기들의 소리를 분석하고 조률하며 완벽한 하모니를 만들어갔다.   “현악기의 부드러운 음색과 관악기의 강렬한 음색은 대비가 뚜렷하기에 연주시 이를 강조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음악이 전반적으로 조화를 이루려면, 다시 말해서 멋 있으려면 악기중에서 저음악기가 아주 중요합니다. 건축에서 말하는 기초가 여기서는 저음악기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때문에 저음악기 연주에 신경을 써주는 것이 지휘가의 역할이라고 봅니다.”   악기의 특성을 꿰뚫는 박송철지휘가의 예리한 통찰력은 현장에서도 빛을 발하였다. 조용한 카리스마로 악단의 전반 흐름을 이끌어나가면서 련습을 거듭하였고 날카로운 청각으로 악기 하나하나의 숨소리를 읽어냈다. 결국 모든 소리들이 그의 손짓에 녹아들어 절절한 화음으로 변신하였다.   연길시로년대학 관현악단 단장 홍순남은 박송철지휘가의 지도방식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어려운 곡을 련습할 때 박지휘가님은 먼저 음악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줍니다. 음악의 흐름과 악절 구성 등 다양한 측면과 더불어 강약 처리, 음악적 감정 등에 대해 종합적으로 설명하죠. 그리고 그 설명에 따라 련습을 할 때는 모든 부분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특히 어려운 소절에 중점을 두어 숙련도를 높이는 방식을 취합니다. 지휘가의 요구가 높기에 대충 넘어가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그 덕에 각 악절을 마무리할 때면 모든 단원들이 음악의 흐름을 제대로 리해하게 되고 자연스럽게 많은 발전을 이루게 되지요.”   박송철지휘가는 수업이 없는 날이면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악보와 씨름하군 한다. 그의 책상 우에는 늘 다양한 악보와 음악 리론책이 쌓여있다.   그는 “련습중에도 좋고 공연중에도 좋고 연주원들이 믿음으로 가득찬 눈으로 저를 바라볼 때면 아픈 것이 다 잊혀집니다. 음악은 최고의 진통제이고 저의 생명을 이어나가는 동력이라고 봅니다.”라고 고백한다. 병마와의 싸움 속에서도 음악이 준 위로와 힘은 그로 하여금 더 깊은 깨달음을 얻게 했다. 이제 주어진 삶은 하루하루가 선물이라는 것을… 그 순간부터 박송철지휘가의 발걸음은 묵묵히 사회를 위한 봉사의 길로 향했다. 그는 자신을 살려준 음악으로 이제는 다른 이들에게 희망을 전하고저 했다. 한곡한곡 악보를 만들고 한 소절 한 소절 멜로디를 생각하며 그는 하루하루 주어진 선물 같은 인생을 사람들과 함께 나누고 싶었다.   안해 장선옥은 항상 남편의 건강을 걱정하고 있다. “제가 항상 얘기하지요. 좀 무리하지 말라고요. 남편은 100% 음악봉사자예요. 어떤 분들은 저한테 ‘남편이 돈을 많이 벌어서 어디에다 씁니까?’라고 묻기도 해요. 정말 모르고 하는 소리죠. 남편이 돈 한푼 따지지 않고 봉사만 한다고 해도 사람들이 잘 믿지 않아요. 합창단 활동도 그렇고 지금까지 의뢰 받은 곡들의 편곡비만 계산해도 어마어마한 금액일 거예요. 그런데 다 무료봉사였죠. 계속 무리하다가 건강까지 해칠가 봐 걱정돼요. 앞으로는 봉사도 좋지만 건강도 잘 챙겼으면 좋겠어요.”   봉사의 삶이 그의 음악인생에 새로운 활력소로 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중을 위한 공연과 후배들을 양성하는 과정에서 그는 오히려 예술의 본질을 깨달았고 이는 그의 음악에 깊이와 진정성을 더했다고 할 수 있다.   지난 7월 11일 오후, 연변산꽃예술단 창립 30주년 기념 음악회는 그 꿈을 향한 또 하나의 도전이였다. 30년의 세월을 담은 특별한 순간, 모두 설레이는 마음으로 이 시간을 맞이했다. 한사람 한사람의 목소리가 하나로 어우러져 아름다운 하모니를 탄생시키고 박송철지휘가의 오랜 꿈이 이 무대에서 찬란한 꽃으로 피여났다.   “30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연변산꽃합창단은 연변의 문화예술을 빛내준 여러분의 사랑 속에서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의 무대는 모든 단원들의 열정과 관객들의 응원이 만들어낸 값진 결실입니다. 특히 이번 음악회에서 저희는 전통과 미래의 희망을 노래로 련결하려고 노력했는데 관객들의 뜨거운 반응이 가장 큰 보람이였습니다. 앞으로도 지역문화의 정수를 전하는 합창단으로 거듭나겠습니다.”   손짓 하나에 울려퍼지는 아름다운 합창의 하모니, 열정으로 빚어낸 찬란한 순간들, 박송철지휘가의 삶은 오롯이 음악으로 새겨진 수십년의 고집이였다. 그의 열정과 헌신은 연변의 문화예술을 더욱 풍요롭게 가꾸며 모두에게 큰 감동을 선사하였다.   “진정한 예술가는 사회적 책임을 다할 때 비로소 완성된다.”고 말하는 박송철지휘가, 음악이 동반된 그의 려정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예술세계》 2025년 제5호
4    배움의 길 댓글:  조회:188  추천:0  2025-06-20
배움의 길 □ 손룡호   2015년, 공무원 생활을 마치고 퇴직하게 된 나는 새로운 삶을 어떻게 채워나갈지 깊이 고민하였다. 오랜 시간 공직에 몸 담으며 쌓아온 경험과 열정을 어디에 쏟아부을지 고민하던 중 문득 영화를 만들어보고 싶었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연변영화드라마애호가협회를 세웠다. 그리고 오늘날까지 거의 9년간 영화제작에 매달리고 있다. 그동안 미니영화 63부, 사회인물 기록영화 22부, 사회문화생활 기록영화 27부, 사회음악예술활동현장 기록영화 15부, 총 127부의 영상작품을 만들어냈다. 그중 6부는 성, 주, 시 인민정부 유관 부문으로부터 우수상을 수여 받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 나는 원래 소설을 쓰던 사람이다. 그래서 퇴직한 뒤 장편소설 몇편을 완성하려고 계획했다. 그러나 소설창작보다 더 강렬하게 내 마음을 사로잡은 것이 바로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욕망이였다. 이 욕망을 굳히게 된 데는 내나름의 몇가지 리유가 있었다. 첫째는 어릴 적부터 영화를 보면서 성장하였고 세상을 읽고 꿈을 키워왔기 때문이다. 영화 속 영웅인물들의 본보기의 힘은 상당히 컸다. 어린시절에는 영웅이 되고 싶었고 영웅처럼 살다가 죽고 싶다는 생각도 가져보았다. 둘째는 2000년초에 있었던 어느 한 만남 때문이였다. 내가 지인들을 조직하여 만든 ‘우리 가족 산악회’란 등산팀에서 젊은 촬영사 허영일을 알게 되였던 것이다. 허영일은 사진과 영상촬영에 아주 능숙하였고 음반도 제작했다. 안도 계관산으로 등산 갔을 때 나는 산꼭대기에서 쉬는 짬에 옆에 앉은 허영일에게 문득 이런 물음을 던졌다. “영일이는 앞으로 무얼 하고 싶소?” “영화촬영을 하고 싶습니다.” 당시 나는 영화촬영을 하자면 장춘영화촬영소나 북경 8.1영화촬영소에 들어가야만 가능하다고 여겼고 그런 촬영소 변두리에도 못 가보고는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해보고 싶다는 생각에야 무슨 죄가 있겠는가? 꿈이 있는 것이 없는 것보다는 낫다.’는 생각에 불가능한 꿈을 접으라는 권유 같은 건 안했다. 그런데 그 날 나눈 대화가 저도 모르게 내 마음속에 단단히 뿌리를 박았을 줄이야! 만약 그 때 허영일과 영화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더라면 나의 영화제작의 꿈이 그렇게 빨리 이루어지지는 못했을 것이다. 영화제작의 꿈은 마치 천메터 넘는 높은 산을 마주했을 때 꼭 올라가보고 싶은 강렬한 욕망과 같았다. 영화는 내게 올라가보지 못한 산이였다. 한번뿐인 인생, 그 산을 오르지 못한 채 바라만 보다가 떠난다면 얼마나 허탈할가? 못해본 일이기에 더 간절히 해보고 싶었다. 하루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는 불장난 같았지만 이미 결심은 굳혀졌다. 당시 연변에는 영화협회가 없었다. 나는 이 분야에 뜻을 둔 사람들을 모아 영화협회를 설립하기로 결심하고 허영일에게 련락하여 함께 준비사업에 들어갔다. 그리고 영화와 드라마 제작에 일정한 기량을 갖춘 애호가들과 함께 협력하고 성장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저 협회이름을 ‘연변영화드라마애호가협회’라고 정하였다. 2016년 7월 8일에 사단법인 허가증을 받고 그해 10월 28일에 연길시 대주호텔 2층에서 설립대회를 열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은 말은 안해도 속으로는 우리 협회가 오래가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내 결심은 드팀없었다. 세상일은 알아서 하는 것이 아니다. 하면서 배우고 배우면서 부족점을 메우고 조금씩 더 성숙해가는 것이 아니겠는가.   1. 10분짜리 무성미니영화 《발자취(足迹)》 2016년 6월에 장춘에서 동북아미니영화축제가 있었다. 국내외적으로 2,178부의 미니영화작품을 접수하고 90편의 후보작 가운데서 사회투표수로 우수작을 선정하기로 했다. 우리 협회에서 만든 10분짜리 무성미니영화 《발자취》가 사회투표 1위로 당당히 선정되였다. 당시 우리 협회는 금방 설립되여 인재, 기술, 자금 등 모든 면에서 부족하였다. 하지만 부족하다고 참여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과감히 참가해야 했다. 나는 자기를 낮추어보고 남을 높이 보면서 뒤로 숨는 것을 제일 혐오한다. 잘났든 못났든 일단 나서보는 것이 자기를 키우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서로 대조하고 비교해야 차이를 분명히 알 수 있잖겠는가. 부족한 여건 속에서도 나는 특별한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사람들이 상상하지 못한 영화를 말이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무릎 아래 다리의 움직임으로 인생을 반영한 영화를 만드는 것이였다. 첫 장면은 태여난 지 한달도 안되는 갓난아이의 포동포동한 두 발이다. 이어 물가에 서있는 서너살 되는 아이의 두 발, 물속에서 장난치는 아이의 두 발, 모래밭에서 장난하는 소년의 두 발, 사랑을 속삭이는 처녀총각의 두 발이 화면에 나타난다. 영화 촬영중 가장 위험했던 두 장면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첫번째는 삶은 위험과 함께 하는 려정이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하여 두 다리가 진흙구뎅이에 빠지는 장면이였다. 8월 중순, 여름 홍수가 지나간 뒤라 강가에 밀려온 진흙이 쌓인 곳이면 촬영이 가능하였다. 어디가 좋을가 궁리하던 중 오래전에 내가 집체호로 내려갔던 마반산의 강이 떠올랐다. 마반강은 부르하통하와 해란강이 합쳐서 흐르는 터라 강가에 진흙이 잘 쌓이였다. 촬영팀을 거느리고 강가에 도착해보니 과연 진흙층이 섬처럼 드러나있었다. 내가 먼저 바지를 높이 걷어올리고 발끝을 저겨디디며 걸었다. 발이 점점 깊이 빠지더니 잠간새에 무릎을 넘었다. 두 다리를 빼기 힘들 정도였다. 바로 여기다 싶었다. 촬영팀은 그 곳에서 먼저 녀자의 두 다리가 빠지는 장면과 남자가 다가와 녀자를 도와 함께 빠져나오는 장면을 촬영했는데 실로 고생이 막심했다. 두번째는 초겨울 살얼음이 낀 강에서의 장면이였다. 사랑하는 녀자가 살얼음이 낀 강을 건너지 못해 강가에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을 때 뒤에서 남자가 나타나더니 녀자를 등에 업고 살얼음이 둥둥 떠있는 강을 저벅저벅 걸어 강 건너에 이른다. 뼈속까지 시린 찬물 속을 걷는 두 다리가 얼마나 시릴지 보는 사람마저 몸서리칠 정도였다. 두 장면 모두 힘들고 위험한 역할인지라 남한테 맡길 수 없어 남자역을 내가 맡았었다. 간난신고 끝에 탄생한 작품이여서일가, 무성미니영화 《발자취》에 대해 어느 영화전문가는 이렇게 높이 평가하였다. “목전까지 무릎 아래 두 다리로 영화를 제작한 단체는 연변영화드라마애호가협회뿐이라고 생각한다. 영화는 착상이 독특하다. 인물형상을 얼굴로 표현한 것이 아니라 갓난아이의 두 발로부터 시작하여 생을 마감하는 늙은이의 앙상한 두 다리로 끝내면서 인생의 희로애락과 삶의 철학을 예술적으로 잘 구현하였다.”   2. 내 연기실력은 어느 정도일가? 극본에서 제시한 인물설정에 알맞는 배우를 선택하는 것은 영화의 진실성과 예술성을 보존하고 향상하는 데서 아주 중요한 환절이다. 가장 효과적인 연기는 감독과 배우의 협력으로 완성되기 때문이다. 우수한 배우는 극본인물에 빠져들어갈 줄 안다. 극본을 읽으면서 이야기줄거리, 인물환경, 배우의 심리를 빨리 포착한다. 영화드라마애호가협회 회장이라면 연기실력도 어느 정도 갖춰야지 않을가 싶은 마음에 나는 치매로인이 등장하는 영화극본을 쓰고 직접 치매로인역을 맡았다. 극본 속 치매로인은 퇴직교원으로 치매에 걸린 후 자식들을 알아 못 보고 밥을 손으로 집어 먹으며 대소변을 가리지 못한다. 그리고 주방에서 밥 짓는 며느리를 ‘엄마’라고 부른다. 이 극에서 아들과 며느리 역은 실제로 나의 아들과 며느리가 맡았다. 내 연기가 리얼했는지 출국했던 친구가 그 영화를 보고 귀국하여 ‘병문안’을 온 우스운 일까지 있었다. 그렇게 꽤 좋은 평판에 나는 은근히 기분이 좋았다. 내 연기실력이 어느 정도 인정 받았으니까. 그래서인지 배우들은 나의 연기지도에 곧잘 따라주었다.     3. 자금 없이 어떻게 영화를 제작할가? 우리한테는 영화제작 경비가 엄청 부족하다. 사람들은 경비도 없이 어찌 영화를 제작하느냐고 고개를 갸우뚱한다. 그러나 우리는 돈 없이도 영화를 계속 만들어내고 있다. 하다면 그 비결은 무엇일가? 한마디로 회원들의 헌신정신이다. 촬영장소로부터 복장이며 교통수단이며 식사비용까지 촬영에 참가한 분들이 도맡는다. 필요한 배우가 부족할 때도 촬영에 참석한 배우와 제작일군들이 토의하여 적당한 배우를 채용한다. 그리고 나는 극본을 쓸 때면 자금투자가 수요되는 촬영장소들과 소품은 피한다. 국내의 큰 도시나 외국을 배경으로 하지 않는다. 비행기에 앉아 가는 장면도 없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가지, 가정집, 우리가 챙길 수 있는 음식 등등 우리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범위로 국한시킨다. 그렇기 때문에 제작경비가 별로 안 든다. 그러나 한가지 부담만은 떨쳐버릴 수 없다. 촬영사들이 젊다는 점이다. 젊은이들은 촬영하여 돈을 벌어야 생계를 유지할 수 있다. 그러니 그들을 한두번만 채용하고 끝내야 한다. 고맙게도 그들은 우리 사정을 잘 알기에 수고한 대가를 요구하지 않는다. 일년에 한두번씩 봉사하는 셈 친다며 웃어넘긴다. 초기에 나는 극본쓰기, 감독 같은 건 혼자 해낼 수 있었지만 촬영과 편집에 대해선 문외한이였다. 특히 편집은 촬영한 장면을 극본에 맞게 하나하나 련결하고 대사를 번역해 자막을 넣어야 하며 적절한 음악을 골라 배경에 깔아주어야 하는 매우 중요한 작업이다. 이런 편집작업은 아주 정교하고 섬세하며 예술적 감각과 세심한 처리능력이 필수이다. 나는 게으름없이 하나하나 열심히 파고들었고 허심히 물어가면서 배움에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런 나였기에 9년 동안 영상을 직접 찍고 직접 편집하였다. 극본, 감독, 촬영, 편집, 자막번역, 음악작업을 모두 내 손으로 해냈다. 이 작업은 본래 여러 사람이 하는 일이다. 그러나 자금 부족으로 혼자서 모든 것을 배워가면서 할 수밖에 없었다. 별다른 투자 없이 영화를 제작해야 하는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하나하나 직접 하다보니 이젠 이 방면에서 일가견이 있다고 자부한다. 올해 3.8국제부녀절 경축작품으로 다큐기록미니영화 《할 일이 있다》를 제작하여 시청자들에게 선물하였다. 촬영에 소요된 시간은 하루 반, 편집작업시간은 일주일, 투자비용은 고작 식비 206원이다. 206원으로 미니영화 한편을 만들어낸 것이다. 누가 곧이 듣겠냐만은 사실 우리 협회는 그냥 이렇게 영화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4. 믿기지 않은 기적 지난해 8월 4일, 미니영화 《즐겁게 날리는 민들레꽃》을 찍기 위해 촬영팀과 연기자들은 연길시 남산 아래에 집합하였다. 그런데 약속시간인 오전 8시 30분이 지나도록 두 주역배우가 나타나지 않았다. 전화련락도 안되고 모두들 실망에 찬 표정들이였다. 나는 그들의 로고를 수포로 돌아가게 하고 싶지 않았다. “다들 올라갑시다. 오늘 촬영은 변함없습니다.” “주인공이 없는데 어떻게 촬영합니까?” “다른 사람한테 맡기겠습니다.” 나는 먼 종친누나의 남편인 김광범에게 련락하여 사정을 설명하였다. 김광범은 마음씨가 착하고 동정심이 많아서 누가 어려운 일에 부딪치면 언제든 도와 나서는지라 갑작스런 요청임에도 시간을 어기지 않고 촬영장소에 나타났다. “매형, 영화촬영을 하는데 군중역을 맡아줘야 하겠소.” 나는 주역배우라고 하면 그가 부담을 가질가봐 군중역이라고 속이였다. “매형이 나오는 장면은 오후에 촬영하겠소. 오전에는 촬영현장을 따라다니면서 남들이 어떻게 연기하는지 잘 관찰하면 되오.” 오후 한시, 점심식사를 마치고 다시 촬영을 시작했다. 두 주역배우가 빠진 상황에서 한 역은 내가 맡고 다른 한 역은 김광범에게 맡겼다. 나는 김광범에게 연기표현을 자세히 설명해주었다. 김광범은 설명에 따라 인츰 촬영에 몰입하면서 맡은 역할을 하나하나 훌륭히 완성했다. 영화 상영식에서 김광범은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손감독의 부름을 받고 남산으로 달려가서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인데 이렇게 훌륭한 영화가 만들어지다니요. 내 눈으로 직접 보면서도 정말 믿기지가 않습니다.” 원칙적으로 영화는 이런 식으로 촬영해서는 안된다. 주역배우 없이 대역으로 하루 만에 촬영을 마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영화제작에 경험이 없는 아마츄어배우가 자기 역할을 출중하게 소화해내 촬영을 성공시켰다. 내막을 모르는 시청자들은 영화를 잘 제작하였다고 칭찬한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해냈다는 사실이다.   5. 끝없는 배움의 즐거움 퇴직하여 영화드라마애호가협회를 세우고 업무적으로나 기술적으로 모르는 일들이 엄청 많았다. 극본은 어떻게 써야 하는지, 극중 대화는 어떻게 설정하는지, 심리연기는 어떻게 표정과 행동으로 표현해야 하는지, 촬영장비는 어떻게 설치하고 록음설비는 어떤 것을 사용해야 하며 또 어떤 위치에 놓아야 록음효과가 좋은지, 주인공의 정서를 잘 살리려면 어떤 음악을 선택해야 하는지… 고민해야 할 기술적인 문제들이 엄청 많았다. 하지만 나는 물러서지 않았다. 모르는 것은 아는 사람에게 물어보면 된다. 한번 물어서 잘 터득이 안 가면 다시한번 물어보면 된다. 상대방이 짜증을 내면서 잘 알려주지 않으면 다른 사람을 찾아 처음부터 다시 물어보면 된다. 나는 영화 제작에 관련해 박준희, 리창균 감독한테서 가르침을 받았고 영화촬영에 능란한 방호범, 영상제작에 능란한 허영일, 정춘길, 강성철 등에게 수없이 문의하면서 응당 장악해야 할 기술들을 하나하나 익혀냈다. 중문으로 자막번역을 하다가 막히면 주위의 슈퍼나 약방의 한족판매원한테 문의하기도 했다. 내가 모르는 것을 정확히 알려줄 수 있는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모두다 나의 스승이였다. 세월이 류수처럼 흘러 연변영화드라마애호가협회를 세운 지 어느새 9년 철을 잡는다. 그러니 내가 모르는 것을 문의하면서 걸어온 해수도 9년인 셈이다. 아직도 모르는 것이 너무 많다. 계속 문의할 것이다. 이제는 문의하는 데 미립이 텄다. 부끄러울 대신에 즐겁기까지 하다. 그렇게 모르는 것을 배우고 익히면서 나는 올해로 70살에 접어들었다. 이제 계속 문의하면서 80살에 접어들 것이다. 숨이 멈추는 날까지 문의는 계속되고 영화는 계속 출품될 것이다. 5.1국제로동절을 맞으면서 내놓은 다큐기록미니영화 《할머니와 손자》를 저마다 눈물을 흘리면서 보았다면서 영화제작 수준이 전보다 많이 향상되였다고 칭찬해주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배움의 용기와 신심을 더 굳히게 된다. 모르는 것을 배운다는 것은 얼마나 대담한 도전인가!    《예술세계》 2025년 제3호
3    연변군중예술관, 전통문화예술의 현시적 가치 재현 댓글:  조회:173  추천:0  2025-04-27
연변군중예술관, 전통문화예술의 현시적 가치 재현 □ 김호       1 연변은 지리적위치가 독특하고 문화관광자원이 풍부할 뿐만 아니라 사시절이 분명하고 생태자연환경도 매우 잘 보존되여있다. 그리고 연변은 최대의 조선족 집거지역으로서 뚜렷한 민족특색을 지니고 있다. 연변의 이러한 우세를 다양한 방식과 플랫폼을 통해 홍보하여 연변의 지명도를 높이는 것이 중요한 요소로 인식되고 있는 요즘이다. 밖에서 연변을 료해하려고 할 때 가장 쉽게 보고 느끼고 체험할 수 있는 것은 민족색채가 농후한 음식과 복식 그리고 문화예술분야라고 할 수 있다. 활력으로 차넘치는 새 연변을 건설함에 있어서 문화예술은 아주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한다. 연변이 지니고 있는 각종 장점을 충분히 보여줄 수 있어야만이 지속 가능한 발전을 이룩할 수 있다. 문화예술을 통해 관광내용을 풍부히 하고 관광체험을 개선하는 것은 장백산문화관광구와 국가급 변경관광시범구를 건설하는 데 긍정적인 역할을 발휘할 것으로 전망된다. 연변의 문화 영향력과 관광 흡인력, 산업 경쟁력을 전반적으로 끌어올리고 전 주 문화관광산업의 고품질 발전을 위하여 연변군중예술관은 장점을 충분히 발휘하여 우수한 예술자원 전파와 문화예술 보급사업을 힘있게 추진하고 있다. 특히 무형문화유산 관련 양성반과 전시공연, 인재육성 등 사업에서 다년간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둠으로써 연변의 문화영향력을 효과적으로 향상시키는 데 일조해오고 있다. 관광의 가장 핵심적 매력포인트는 관광객들이 어디에서도 체험할 수 없었던 독특한 연변의 ‘멋’과 ‘맛’이라고 생각한다. 그 멋과 맛의 면면에는 조선족 전통문화예술이 녹아있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2 1952년 9월 3일, 연변조선민족자치구(1955년에 연변조선족자치주로 바뀜)가 창립되면서 조선족들은 문화예술을 비롯한 각 분야에서 자주적인 권리를 인정 받고 행사하게 되였다. 연변은 중국내 조선족들이 가장 많이 밀집하여 생활하는 지역으로서 당연하게 조선족의 문화예술중심지로 부상하였다. 때문에 전국 각지에 흩어졌던 조선족 문화예술인들이 대거 연변으로 몰려들었다. 이들은 다양한 문화예술단체를 조직하여 다양한 문화행사와 예술공연활동을 활발하게 펼쳐나갔다. 1960년에 설립된 연변군중예술관은 대중적인 문화예술사업을 주관 및 지도, 보급하는 기관단위로서 인민군중들의 문화예술리론 탐구, 우수한 문화예술인재 양성, 사회적인 문화예술봉사 제공, 문예작품창작, 대외교류 등 사업을 기본취지로 하고 있다. 연변군중예술관은 설립 당시부터 조선족 문화예술의 계승과 발전을 주된 목적으로 하였던만큼 민족적, 지방적 색채가 짙은 특색을 유지하면서 한족을 비롯한 여러 민족의 고유한 전통문화를 발굴, 계승, 보급하면서 대중적인 사랑을 받아왔다. 문화예술에 대한 사회적 수요에 비해 과외문예의 토양이 척박하고 전문적인 문예리론연구 인원도 턱없이 부족한 상황에서 연변군중예술관은 민족과 지역 사회의 문화예술발전의 기폭제가 되였는바 여러 민족 인민군중들의 과외문화예술이 전례없이 생기를 띠게 됐다. 최근년간 연변군중예술관은 중화민족공동체의식을 확고히 수립하는 것을 제반 사업의 핵심으로 하면서 과감한 혁신과 돌파를 통해 시민들을 위한 문화예술봉사를 제공함으로써 지역문화 발전에 기여하고 시민들의 삶의 질을 높이는 데 앞장 서고 있다. 특히 연변이 관광도시로 인기를 누리게 되면서 전통문화예술에 대한 관심과 기대가 높아지는 가운데 연변군중예술관은 관광도시로서의 경쟁력을 높이고 지역문화예술 발전에 기여하는 등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기에 노력해왔다. 따라서 연변군중예술관은 지역의 특색 있는 문화예술 자원을 발굴하고 활용하는 데 적극적으로 앞장 섰다. 특히 대중들의 정신문화생활을 풍부히 하는 데 있어서의 문화예술의 대체 불가능한 역할에 모를 박고 농악무 등 지역적, 민족적, 향토적 특색이 짙은 다양한 예술작품을 꾸준히 지도, 창작해왔다. 3 연변군중예술관은 시종 무형문화유산보호사업에 커다란 중시를 돌리고 무형문화유산 발굴과 정리, 보호, 전승, 전승인 양성 등 사업에 심혈을 기울여왔다. 더불어 대중들이 무형문화유산에 대한 의식을 향상하고 무형문화유산의 중요성에 대해 료해하도록 함으로써 문화유산을 사랑하고 아끼는 사회적 분위기를 조성하기에 주력해왔다. 해마다 전국 조선족문화예술 관계부문의 골간양성훈련반을 정기적으로 조직하여 체계적으로 농악무 기초리론과 예술기교를 전수해왔다. 특히 2014년부터 2024년까지 총 7회에 걸쳐 중국조선족무형문화유산(무용류) 양성반(이하 양성반으로 략칭)을 개최하였다. 동시에 전국농악무경연을 정기적으로 조직하면서 문화유산의 보호와 전승에 앞장 서왔다.   연변군중예술관이 주최하는 양성반은 해를 거듭하면서 예술관의 대표적인 양성반으로 자리를 잡았다. 양성반은 조선족 무형문화유산과 전통무용을 계승, 보급하고 후비인재를 양성하여 조선족 전통문화와 전국 여러 형제민족 문화의 융합을 촉진함과 아울러 교류와 소통을 통한 상호의 련대감을 증진하였다. 리론지식과 실전교수 경험을 모두 갖춘 강사들은 명품강습을 통해 참가자들의 문화예술소양을 한층 더 향상시켰다. 이렇게 꾸려온 양성반은 조선족 무용과 무형문화유산을 배움에 있어 권위성과 전문성, 실용성을 모두 갖추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지금까지 동북3성과 내몽골자치구, 산동성 등 지역의 조선족군중예술(문화)관, 소년궁, 조선족무용가협회 등 문예단체의 골간들을 상대로 조선족무용 기초동작, 소고춤조합, 부채춤조합, 가요조합, 조선족타악 및 무형문화유산 민족무용류 특강을 조직하였다. 양성반은 우수전통문화를 전승, 발양하고 업무능력과 문화자신감을 높여주는 데 적극적인 역할을 발휘하면서 수강생들에게 무형문화유산의 정수를 전수했다.     정기적으로 진행되는 양성반은 리론과 실천을 결부하여 조선족 전통예술의 보호와 전승, 홍보에 기여를 하고 있다. 각 지역의 문예골간들은 집중학습을 통해 전문지식과 업무능력을 향상할 수 있는 재충전의 시간을 가지게 되였고 수료후 각자의 자리에 복귀해 해당 지역 업무골간들의 전반적인 소양을 높이고 중국 조선족 무형문화유산의 보호사업을 추진하는 데 힘을 이바지하고 있다. 또한 기타 형제민족들에게 조선족 무형문화유산과 전통예술을 전수함으로써 조선족과 연변에 대해 보다 립체적으로 알리는 창구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양성반은 점에서 선으로, 선에서 면으로, 면에서 공간으로 이어지는 립체적인 흐름과 전파 효과로 조선족민속문화예술을 널리 알리는 데 일조해왔다.   4 연변군중예술관은 지속적으로 다양한 문화예술 양성반과 활동을 계획, 조직함과 아울러 적극적으로 온라인 플랫폼의 파급력을 충분히 활용해 우수한 지역문화와 민족문화를 비롯한 무형문화유산을 홍보하고 전수하는 사업을 열심히 추진하고 있다. 연변군중예술관은 공공문화예술써비스를 제공하려는 봉사정신으로, 시종 광범한 군중들이 평등하게 무형문화유산을 비롯한 다양한 문화혜택을 향유할 수 있게 하는 것을 궁극적인 목표로 삼고 있다. 특히 군중문화활동브랜드를 완벽하게 구축하고 날로 늘어나는 군중들의 문화수요를 충족시키려는 데 주력하고 있다. 또 문화예술의 사각지대를 줄여나가면서 전면적으로 문예사업을 추진하여 규모가 있고 수준이 높고 참여자가 많은 군중문화의 터전을 마련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지도, 강습과 함께 실기와 창작에서도 풍성한 성과를 따냈다. 2013년 군무 〈성세장고〉를 내놓아 국가문화부 제16회 ‘군성상(群星奖)’을 획득하였다. 2021년에는 군무 〈태양고〉를 출품하여 길림성군중무용대회에서 1등의 영예를 떨치며 무용창작에서도 눈부신 성과를 이룩하였다.   연변군중예술관은 향후에도 지속적으로 대중들의 문화적 수요를 만족시키는 등 기층문화건설의 진지 역할을 충분히 발휘할 것이다. 또 광범한 군중들이 공공문화봉사를 충분히 향수 받을 수 있도록 무료개방, 무료강습을 지속적으로 적극 추진할 것이다. 문화예술인들의 혁신적인 노력은 새시대 문예정품 창작에 새로운 지평을 열어가고 있다. 기술발전과 사회변화에 발 맞춰 새롭고 획기적인 예술적 표현방식과 소통방식으로 무형문화유산을 보호하고 전승하는 연변군중예술관 임직원들, 이들의 노력은 대중에게 새로운 감동과 령감을 선사하여 새시대의 희망가를 연주하고 있다. 반세기를 훨씬 넘는 기나긴 세월 속에서 연변군중예술관은 언제나 고유한 민족문화를 지켜나가는 것을 방향으로 삼고 시대의 흐름과 맥박을 같이하면서 문화전승과 문화혁신을 결합시키는 것으로 지역정신문명건설의 도약식 발전을 추진해왔다. 현실에 대한 바른 인식과 미래에 대한 깊은 사고를 바탕으로 민족문화예술번영이란 아름다운 화폭을 만들어가려는 연변군중예술관의 힘찬 발걸음은  계속될 것이다.                                    사진 제공 │ 연변군중예술관  《예술세계》 2025년 제2호
평범한 일상, 희망의 노래 —뮤지컬 《희망아빠트》를 두고 □ 한영희     희망아빠트 발코니 뮤지컬은 음악, 무용, 연극표현 등 여러가지 예술을 아우른 일종 무대종합예술이다. 서방에서 산생된 후 20세기 80년대에 국내에 전파되였고 1990년대에 상해대극원에서 《레미제라블》 등 우수한 뮤지컬을 인입하여 공연하였다. 그후 2010년에 중국대외문화그룹(中国对外文化集团), 상해 동방매스컴그룹(上海东方传媒集团) 및 한국 엔터테인먼트 거두 CJ그룹 등이 함께 아시아련합창업(亚洲联创)을 세웠고 중국에서 첫번째 저작권 사용권을 가진 본토화한 뮤지컬 《맘마미야!》를 무대에 올렸다. 2011년 7월, 상해에서의 23차 공연에 이어 전국 20여개 성, 시의 순회공연에서 400여차 공연함으로써 중국 뮤지컬시장의 잠재성을 인지하게 되였다. 근래, 중국 뮤지컬시장은 다원화발전추세를 보이면서 제재와 풍격의 다양성, 소극장 뮤지컬과 연예의 새 공간 등 면에서 새로운 발전을 가져왔고 많은 젊은 관객들을 끌어들이면서 점차 성숙되여가고 있다. 상술한 국내 뮤지컬시장의 배경하에 연변가무단 마학봉연출은 3년간의 고심을 거쳐 2024년 4월에 조선어판 창작뮤지컬 《희망아빠트》를 무대에 올렸고 같은 해 11월에 한어판 소극장 뮤지컬 《희망아빠트》를 무대에 선 보여 사회의 좋은 평가를 받았다. 처음부터 이 뮤지컬 창작의 전반 과정을 보아온 한사람으로서 극본 주제, 배우들의 연기, 음악창작, 무용창작 및 무대미술디자인 등 몇가지 굵은 선에서 소견을 말하려고 한다.   1. 평범한 일상에 담은 큰 주제 뮤지컬 《희망아빠트》는 동북 변강의 작은 도시의 한 아빠트를 배경으로, 가두 주임을 주요 이야기선으로 하고 아빠트 주민들의 일상생활의 이야기를 전개하면서 가두 주임과 경비아저씨의 재미나는 사랑이야기를 삽입하였다. 작품은 이를 통해 조선족, 한족, 만족, 회족 등 다민족이 공동으로 생활하는 ‘희망아빠트’의 들끓는 생활양상을 그려냈다. 내용면에서 보면 이 작품은 아빠트 한단원에 사는 네 가정의 일상생활을 제재로 하였다. 한 가정에는 불고기집영업을 하는 부부가 살고 있고 다른 한 가정에는 페품을 주어 팔면서 생활하는 독거로인이 살고 있으며 한 가정에는 금방 출옥한 후 직장을 찾는 청년이 살고 있고 한 가정에는 주택구입 대출금의 압력을 받는 처녀가 살고 있다. 이 작품은 큰 모순 충돌을 설정하지 않고 주민들의 일상적인 희로애락을 통해 각자의 부동한 내심세계를 보여주면서 인간의 리해와 포용을 노래하였다. 동시에 세간의 용속과 편견을 질타하고 생존의 가치와 의의를 주창하였다. 이 작품은 아빠트의 여러 민족 인민들이 서로 돕고 아끼며 함께 행복한 생활을 꾸려가는 따뜻한 이야기를 표현하면서 변강 인민들이 당과 정부의 지도하에서 화목하게 지내고 나날이 진보하는 시대의 주선률을 보여주었다. 구성면에서 보면 이 작품은 전형적인 산문식 연극구성이다. 작품은 완정한 핵심사건이 없고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연극 충돌이 없다. 그뿐만 아니라 격렬한 충돌과 극 줄거리의 발전을 통해 주제를 보여주는 전통연극과는 달리 네 가정의 일상생활 세부를 통해 잔잔한 분위기에서 백성들의 이야기를 평행적으로 전개하면서 행복한 생활을 꿈꾸고 아름다운 새시대를 지향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인물형상 부각면에서 보면 이 작품에는 모두 아홉 사람이 등장하며 인물마다 개성이 뚜렷하다. 홀로 사는 김할머니는 어질고 부지런하며 내성적이다. 금방 출옥한 장뢰는 내성적이고 우울하며 선량하다. 소연이는 대출금의 압력을 받고 있지만 그래도 명랑하고 열정적이며 진솔하다. 불고기집 사장 명철이는 지저분하지만 활달하고 선량하며 안해 순희는 부지런하며 직설적이고 정직하다. 경비아저씨는 조심스럽고 유모아적이며 보수적이다. 가두주임 왕효연은 명랑하고 활달하며 과단성 있다. 김할머니의 딸 미자는 외향적이고 고집스러우며 리사장은 리기적이고 탐욕스럽다.  이처럼 각이한 성격의 인물들이 매 장면에 등장하여 성격특징을 남김없이 보여주면서 다채롭고 풍만한 장면들로 극의 발전을 이끌어갔다. 특히 불고기집 사장 명철이와 경비아저씨의 형상은 극중에서 취미성과 관람성을 보여주는바 이 작품의 희극성을 나타내는 인물로 주목된다.   2. 다재다능한 배우들의 연기 무대예술의 성공 여부는 배우들의 표현예술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배우들만이 극작가의 사상감정, 연출의 창의성과 미적 추구 등 요소들을 융합할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그들은 최종적으로 무대에서 자체의 연기를 통해 한 작품의 종합적인 미를 관객들에게 보여준다. 이 작품에서도 배우가 어떻게 대사, 노래, 무용 등 요소들을 잘 아우르는가가 관건이다. 연변가무단은 성악부, 기악부, 연극부, 무대미술부, 무용부, 창작편집부 등을 구비한 탄탄한 실력의 예술단체이다. 그리하여 이 작품의 창작에 튼튼한 뒤받침이 되였다. 이 작품 배우팀의 70%는 연변가무단 성악부의 배우들이기에 노래가사와 무대대사가 잘 전달되지 않는 문제, 무대행동의 합리성이 부족한 문제, 인물성격에서 일관성이 결핍한 문제가 존재하게 된다. 하지만 이들은 이 모든 문제들에 과감히 도전하면서 들끓는 열정과 끊임없는 련습 및 작품에 올인하는 정신으로 연출의 뜻을 따랐고 인물성격의 확정과 행동목적 및 대사의 처리와 인물간의 교류 등을 재치 있게 처리하였다. 이 과정에서 이들은 잠재된 천부적인 배우의 장기를 발굴하게 되였고 매번의 공연에서 출중한 연기력을 과시하여 관객들의 갈채를 받았다.                          〈청춘〉의 한 장면                           서막의 무용   3. 내포가 풍부한 음악창작 뮤지컬의 령혼인 음악은 독특한 예술적 매력으로 극에 생명력을 부여한다. 뮤지컬의 음악은 노래음악과 극음악으로 나눌 수 있다.  노래음악은 인물형상부각, 인물정감의 발로, 극중의 분위기 형성 등에 영향을 준다. 이런 시점에서 볼 때 《희망아빠트》의 음악창작은 매우 성공적이다. 첫째, 이 작품에서 매 인물의 노래는 제나름 대로의 풍격이 있다. 뮤지컬의 창법은 일반적인 예술가곡의 창법과 다른바 가사의 뜻을 전달하면서 정감도 전달해야 하는데 부동한 인물성격에 따라 그 풍격도 달라야 한다. 작곡가는 뮤지컬의 이런 특색을 잘 살리면서 매 인물의 성격에 부합되는 곡을 창작하였다. 례하면 김할머니와 장뢰가 전에 살던 생활을 회억하는 장면에서 부드러운 음악 기조, 느슨하고 우아한 절주를 통해 김할머니의 내성적이고 선량한 성격특징, 년령특징, 미래에 대한 희망 등을 보여주었다. 둘째, 이 작품의 노래음악은 인간내심의 정감을 옳바로 드러냈다. 제2막의 불고기집 안해 순희가 남편을 지저분하다고 욕하면서 노래 부르는 장면에서 강렬한 음악기조, 강약이 분명한 절주로 분하기도 하지만 어쩔 수도 없는 순희의 정서를 잘 드러냈다. 극음악은 뮤지컬 장면의 분위기를 조성하고 전반 극 줄거리의 발전을 추진한다. 첫째, 이 작품은 음악과 극 줄거리가 잘 어우러졌다. 서막의 무용장면을 보면 경쾌하고 발랄한 음악과 춤이 어울리면서 관객들의 시선을 집중시켰고 아빠트 주민들의 환락과 화기애애한 생활장면을 보여주었다. 할머니가 꿈속에 들어가는 순간의 음악은 기조가 깊고 몽환의 세계에 들어가는 느낌이 있어 관객들을 숨을 죽이게 한다. 둘째, 이 작품의 음악은 극 줄거리의 발전을 추진하는 작용을 한다. 제6막에서 좌절을 겪은 후 재생을 보여주는데 네집 사람들이 불고기집 명철의 인솔하에 노래하고 춤을 추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현재의 분위기에 알맞는 현시대음악의 특색을 잘 드러내면서 아빠트 주민들의 아름다운 미래를 예시하였다. 이와 같이 뮤지컬 《희망아빠트》의 음악창작팀은 음악이 뮤지컬에서 차지하는 지위와 작용을 충분히 보여주었고 전반 작품의 예술효과를 한층 끌어올리는 데 큰 공헌을 하였다.   조명효과   4. 무대분위기를 조성한 무용 뮤지컬에서 무용은 음악에 못지 않게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무용은 인간의 정감을 깊이 있게 제시하는가 하면 언어로 말할 수 없는 감정을 드러내면서 무대분위기를 조성한다. 무용의 률동적인 표현은 음악과 어울려 아름다움, 슬픔, 기쁨을 보이면서 극의 발전에 좋은 극적인 환경을 만든다. 이 작품의 제7막에서 소연이와 순희가 〈청춘〉을 부르면서 추는 무용이 대표적이다. 서정적인 무용은 아빠트 주민들에게 아름다운 미래가 있음을 제시했고 동시에 그들이 어려움을 극복하고 빛나는 래일을 맞이할 수 있음을 알려주었다. 마지막 설 쇠는 장면에서는 즐거운 무용으로 아빠트 주민들이 가두 주임의 인솔하에 자원봉사쎈터를 세운 이야기를 표현했다. 장뢰와 소연이는 취직했고 불고기집도 개업했으며 경비아저씨와 가두 주임의 사랑도 무르익었다. 이와 같이 작품은 무용으로 주민들이 서로 돕고 보살피면서 손 잡고 함께 하는 아름다운 생활을 그려냈다. 뮤지컬에서 무용의 작용은 더 말할 나위 없다. 특히 이 작품에서 무용요소는 더욱 큰 창작공간을 갖고 있다. 례하면 김할머니와 딸이 꿈속에서 만나는 장면이 그러하다. 이 부분에서 언어와 노래로 표달할 수 없는 한층 깊은 정감을 사실적인 수법이 아니라 쌍무 형식으로 표현하였더라면 그 효과는 더욱 좋았을 것이고 환상적인 꿈의 세계를 잘 그려낼 수 있었을 것이라고 본다.   옛 주민구역 현재의 희망아빠트 5. 도전성이 강한 무대미술디자인 현대무대예술에서 무대미술디자인은 과학기술의 발전에 힘 입어 단일성에서 다원화로 나아갔다. 그리하여 무대미술디자인의 창의성에 끝없는 가능성을 부여하였다. 뮤지컬 《희망아빠트》의 무대미술디자인팀은 제한된 여건에서도 새로운 도전을 시도하였다. 첫째, 소극장임에도 불구하고 대담하게 반기계화의 원형 회전무대를 설치하였다. 원형 회전무대는 낡은 희망아빠트의 거리, 현재의 희망아빠트의 마당, 희망아빠트의 네 가정의 발코니 등 세 부분으로 나뉘여졌다. 지금에 있어서 회전무대 설치는 별로 신기하지 않다. 국내의 대형 극장의 무대는 대부분 회전무대가 있으며 동시에 승강기능도 갖고 있다. 하지만 길이, 너비, 높이가 극도로 제한된 소극장에 회전무대를 설치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네 가정의 발코니 설치는 층수를 계산해야 하기에 극한적인 도전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디자인팀은 모든 난관을 극복해가면서 설계와 제작을 완성하였을 뿐만 아니라 조선족 연극무대에서 처음으로 원형 회전무대로 장면을 바꾸는 작업을 완성하였다. 이런 도전정신은 마땅히 긍정 받아야 한다. 이런 설치는 무대장면을 바꾸는 시간을 단축했고 극 줄거리의 련관성을 이어주는 면에서 매우 좋은 무대시각적 효과를 가져왔다. 둘째, 무대장면의 시각효과에서 홀시할 수 없는 것이 조명효과이다. 조명은 공간범위를 확정할 수 있다. 제6막 장뢰와 소연이 분통을 터뜨리는 장면에서 조명으로 상하층의 발코니를 나누면서 무대시각의 초점을 장뢰와 소연의 표현 구역에 집중시켰다. 그리고 조명으로 공간의 분위기를 조성하였다. 김할머니의 꿈속 장면에서 회색조명을 통해 어슴푸레한 공간분위기를 만들면서 꿈속의 공간을 직관적으로 보여주었고 또 조명으로 인물의 정서를 보여주었다. 제7막 마지막부분, 불고기집에서 순희와 명철이가 정을 나누는 장면에서 두 사람에게 점차적으로 조명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붉은색조명을 첨가하여 두 사람의 뜨거운 정을 시사하였다. 그리하여 강렬한 무대시각적 효과를 가져왔으며 후속이야기를 예시하기도 하였다. 제7막 순희와 소연이 함께 〈청춘〉을 노래하는 장면에서 전반 무대에 밝은 조명을 줌으로써 청춘의 활력과 희망찬 미래를 제시하였다. 설을 쇠는 장면에서는 밝은색과 붉은색이 조합된 조명을 줌으로써 즐겁고 활기찬 음력설 분위기를 연출하였다. 셋째, LED기술을 응용하였다. 무대예술에서 LED기술은 이미 현대무대설계의 중요한 구성부분으로 되였으며 무대의 표현력과 예술적 효과를 극대화하였다. 뮤지컬 《희망아빠트》는 회전무대가 무대공간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기에 조명과 LED배경의 설계에 일정한 제한성을 가져왔다. 특히 무대배경의 연장설계, 스크린의 규격과 내용 및 색채의 선택은 반드시 전반 무대효과와 통일되여야 한다. 이 점에서 LED설계사는 무대의 제한성을 극복하면서 무대공연의 수요에 맞는 배경화면을 제작하였다. 특히 김할머니가 꿈속으로 들어가는 장면이 그러하다. 무대의 높이가 회전무대에 가려지는 상황에서 운무 속에서 배회하는 꿈의 공간환경을 설계한다는 것는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설계사는 교묘하게 구름쪼각의 크기와 색채의 조합을 통해 구름의 조화로운 움직임으로 김할머니의 비몽사몽의 연기를 잘 안받침하였다. 그리하여 매우 훌륭한 무대시각적 효과와 예술적 효과를 창출하였다. 뮤지컬 《희망아빠트》의 창작팀은 많은 어려움을 극복하고 제한된 여건에서도 끊임없이 도전하면서 창의적인 정신으로 이 작품을 창작하였다. 작품은 극본, 음악, 연기, 무용, 무대미술디자인 등 요소들이 연출의 전체적인 구상에 의해 서로 융합되고 작용하면서 뮤지컬예술의 매력을 과시하였다. 뮤지컬 《희망아빠트》는 조선족 연극발전사에서 획기적인 시대적 의의를 띠며 새로운 쟝르로 향한 도전의 효시로 되였다고 할 수 있다.       사진 제공 │ 연변가무단 예술과 《예술세계》 2025년 제1호
1    춘향의 꿈을 찾아서 댓글:  조회:320  추천:0  2025-02-21
춘향의 꿈을 찾아서 —연길시조선족무형문화유산보호중심 창작음악극 《꿈 · 춘향》을 보고 □ 주금파     《꿈 · 춘향》의 한 장면   일전 연길시조선족무형문화유산보호중심 구연부에서 야심차게 준비한 중국 조선족 창작음악극 《꿈 · 춘향》을 관람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음악극은 연극, 음악, 무용, 조명, 미술, 의상, 그래픽 등 모든 예술쟝르를 총동원하여 만들어지므로 예술의 최고 경지라고 한다. 그리하여 나는 극장에 들어가 앉을 때까지 별로 큰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극을 보는 내내 놀라움과 감탄이 전기충격처럼 나를 강타했다. 우리 조선족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춘향전》을 현대감각으로 간략하고 경쾌하게 재해석하여 60분이라는 짧은 시간에 집약해놓았는데 세련되고 우아한 예술적 표현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내 상식으로는 이러한 고차원의 음악극이 만들어진 데는 무조건 국외 명장들의 지도와 도움이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꿈춘향》의 포스터   며칠후 이 작품의 총연출 김영주, 예술총감독 리경화 등 제작일군들과 만날 수 있었다. 작곡가로 익히 알고 있던 김영주 총연출은 초면이였는데 애된 얼굴의 삼십대 초반으로 보이는 청년이였다. 나는 이분들과 진지한 대담을 나누면서 하나하나 의문을 풀어나갔다.  필자: 《꿈 · 춘향》은 어느 나라 예술가들과의 합작품입니까?  김영주: 아닙니다. 연길시조선족무형문화유산보호중심의 배우와 가수들 그리고 우리 연변 현지의 예술가들이 함께 만들어낸 것입니다.  필자: 연변에서도 이런 고차원의 음악극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사실이 참 놀랍습니다. 어떤 계기로 우리 민족의 고전명작 《춘향전》을 음악극으로 만들게 되였습니까? 김영주: 어느 날, 연길시문화라지오텔레비죤방송및관광국 정성무 국장님이 저에게 춘향과 몽룡의 쌍무를 만들 수 있느냐고 문의하였습니다. 그 때 만들 수 있다고 대답하면서 음악극 같은 좀 큼직한 작품을 만들면 좋을 것 같다고 했지요. 그랬더니 국장님께서 그런 큰 그림이 있으면 대담하게 준비해보라고 격려하더군요.  리경화: 배우의 종합능력을 필요로 하는 음악극을 시도한다는 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지요. 하지만 한편으로는 은근히 자신감이 생기더군요. 연길시무형문화유산보호중심은 무형문화유산을 발굴, 보호하는 단위입니다. 구연예술을 한층 더 발굴하고 전승해나가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고 사명이지요. 음악극은 구연과 마찬가지로 종합예술이 아니겠습니까? 저희 예술단에는 말하기, 노래부르기, 악기연주, 춤추기 등 모든 쟝르를 거뜬히 소화해낼 수 있는 팔방미인들이 많지요.  가사창작 토론모임중인 제작진   김영주: 창작평론실, 구연부, 성악부, 무용부의 골간들을 불러서 음악극을 창작할 데 관한 결정을 공포했더니 처음에는 다들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였습니다. 일반 구연극을 만드는 것도 아닌 음악극을 어떻게 만들 수 있느냐며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했지요.  리경화: 고전명작을 잘못 건드리면 본전도 못 건지고 망신만 당할 수 있다는 걸 저도 모르는 바는 아닙니다. 다들 안된다고 할 때 김원희 부국장님이 “세상에 안될 일이 없습니다. 꼭 해내리라고 믿습니다.”라고 격려하였습니다. 그 말에 힘을 입은 저는 단원들을 설득했지요. “함께 지혜를 모아서 한번 우리 민족예술의 힘을 보여줍시다. 이번 작품의 총연출인 김영주작곡가를 믿고 따라가봅시다.” 김영주: 저로서는 부담이 상당히 컸지만 지도부의 믿음에 신심이 생겼습니다. 우선 가사가 직설적이고 간단명료하면서도 철리적인 함축미가 도드라져야 합니다. 저는 김은연과 지화림 이 두 젊은 친구를 가사창작에 투입시켰습니다. 1970년대 조선에서 제작한 《춘향전》의 주제가인, 지금까지 사람들이 즐겨부르는 명곡 〈사랑 사랑 내 사랑〉의 가사 한줄, 선률 한박자도 모방해서는 안됩니다. 순수한 우리의 새로운 창작품이여야 합니다. 좀 어설프더라도 남의 걸 흉내냈다는 느낌을 줘서는 절대 안됩니다. 그리고 음악극이란 우아하고 아름다운 가무와 음악이 집결된 고차원의 예술쟝르이기에 지금까지의 연변 ‘촌티’에서 벗어나야 했지요. 이것은 리경화 예술총감독의 철칙이였습니다. 젊은 친구들과 머리를 맞대고 수십번 고치며 만들어낸 가사들이 점점 내 마음에 들었습니다. 머리속에 이미 만들어진 악상에 맞출 마땅한 가사를 찾아가는 힘든 작업이였지요. 마치 아름다운 웨딩드레스에 얼굴과 몸매, 키가 맞는 녀성을 찾는 것처럼 어려운 작업이였습니다. 드디여 서막의 가사가 완성되였습니다. 가사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옛날 옛날 그 옛날의 진정한 사랑 얘기 리몽룡과 춘향의 진정한 사랑 얘기 청풍명월 달 밝은 밤 맺어진 그 사랑 광한루에서 시작된 두 사람 사랑 얘기 나도 꿈에서라도 이런 꿈 같은 사랑 한번 해봤으면… 합창: 사랑 사랑 사랑 사랑  꿈속 향기는 님의 향기 님의 향기도 꿈의 향기 정녕 꿈도 있고 님도 있고 진정한 너와 나의 사랑 세상 그 어떤 역경이 온다 해도 막을 수 없는 우리 사랑 사랑 사랑 사랑 사랑 사랑—  사랑아 진정한 사랑아  사랑아 영원한 사랑아 꿈에서라도 나도 한번만 그 같은 사랑 원없이 해봤으면 사랑아 진정한 사랑아 사랑아 영원한 사랑아 깨지 말아 꿈 깨면 님 없고 가지 말아 너 너 가면 꿈이 없다 옛날 옛날 그 옛날의 진정한 사랑 얘기 오늘날에 보며는 또 다른 사랑 얘기 저 달 속 궁전 광한전을 지상에 옮겨놓은 광한루에서 다시 보는 두 사람 사랑 얘기 진정한 사랑 얘기 황홀한 사랑 얘기 진정한 사랑 얘기 황홀한 사랑 얘기 허공에서 비추던 달 광한루에 내렸네 남: 사랑— 사랑—  녀: 사랑— 사랑—  남: 사랑— 사랑—  녀: 사랑— 사랑—   리경화: “…한양에 홀로이 계시는 서방님, 보고픈 그리움을 담아서 보내드립니다. 떨어지는 잎새에 서방님 이름 적어 이 밤도 내 님을 그려봅니다…” 이 가사를 볼 때 저는 등골에 소름이 쫙 끼쳤습니다. “떨어지는 잎새에 서방님 이름을 적어…” 이 대목이 압권입니다. 춘향과 몽룡의 사랑이 찬서리를 맞은 잎새처럼 크나큰 고초를 겪게 될 것이란 걸 예시해주지 않습니까?   《꿈 · 춘향》의 한 장면 필자: 음악극의 주인공인 춘향의 첫 등장이 어떤 방식일가 상상했는데 대보름달을 타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장면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김영주: 중국 전설 속의 선녀 항아가 달나라에서 옥토끼와 같이 살았던 곳을 광한전이라고 불렀습니다. 《춘향전》 원작에서도 단오날에 그 광한전을 본 따 지은 광한루에서 그네를 뛰던 춘향이가 몽룡과 처음으로 만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저는 그네줄을 달에 매여서 춘향이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걸로 비약시켰습니다. 필자: 참신한 아이디어였고 참 대단한 도약입니다. 우아하고 아름답게만 만들면 취미성이 약해지겠는데 음악극 《꿈 · 춘향》을 보면 구연에 유머가 담겨있어 재미가 쏠쏠하던데요. 리경화: 이번 음악극에는 구연부가 주축을 이루는 명장면이 꼭 있어야 했습니다. 방자와 향단의 사랑장면, 그리고 관객들의 웃음을 자아낼 수 있는 기생점고장면에서 구연의 극치를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기생점고에 나오는 대부분 출연자들은 구연배우가 아니라 가수들이였습니다. 무대에서 우아한 모습으로 노래 부르던 그들을 완전 망가진 모습으로 우습강스럽게 포재를 피우게 하는 게 힘들었습니다. 인물들의 캐릭터를 설명해주고 일 대 일로 동작들을 하나하나 가르쳤습니다. 김영주: 저도 사실 가수 분들의 표현이 어색할가 봐 근심했는데 리경화 예술총감독이 직접 동작들을 가르치며 채찍질하니 일취월장으로 실력이 올라가더군요.               배우들에게 연기를 지도해주는 리경화 예술총감                  작곡중인 김영주 총연출 필자: 《춘향전》 원작에는 쪽배를 타는 장면이 없었잖습니까? 그 장면이 너무 인상 깊었습니다. 김영주: 관객들이 춘향과 몽룡이 겪게 되는 사랑의 고난을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마주하게 하려고 비바람과 파도 속을 헤가르며 가는 쪽배에 담아봤습니다. 필자: 그리고 한양으로 올라오라는 아버지의 편지를 받는 장면의 예술처리를 아주 재치 있게 잘했던데요. 김영주: 재래식 표현 대로 종이에 적은 서한을 손에 들고 읽게 하면 이야기 전달에는 무리가 없겠지만 예술적으로는 큰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폭이 1.5m, 길이가 6m의 흰 천에 붓글씨를 써서 천정에서 무대바닥까지 드리우게 하고 그 대형 편지를 감싸고 돌면서 주인공 남녀가 곧 리별해야 할 안타까운 심정을 표현하게 했습니다. 필자: 원작에서는 분명 춘향이가 주인공인데 이번 음악극에서는 몽룡과 방자, 향단이가 적지 않은 분량을 차지했더군요. 그리고 지금까지 변학도는 나이 많은 뚱보에다 구레나룻이 더부룩한 것이 대표적인 형상이였는데 이번 음악극의 변학도는 몽룡에 못지 않은 젊고 잘생긴 미남자이던데요. 김영주: 음악극이 성공하려면 주인공 역할도 중요하지만 조연들의 역할도 아주 중요합니다. 전반 극의 흥미와 웃음을 책임진 인물들이니까요. 탐욕스럽고 사치와 주색에 빠진 인물인 변학도가 겉모습은 번지르르하게 잘생겨야 극적 효과를 더 키울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필자: 이번 음악극에서 가장 돋보이는 것이 화려한 우리 민족 전통복장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광한루, 아치형 돌다리, 춘향이가 타고 내려온 둥근달 등의 무대도구들은 간단하면서도 크나큰 시각적 효과를 나타내지 않았나 싶습니다. 김영주: 의상과 무용부분을 책임진 박서경 감독이 복장 앞섶의 핏이 안 좋거나 하자가 있는 복장은 여지없이 페기해버리면서 의상의 완벽함을 추구했습니다. 도구를 책임진 연변가무단의 리경학 감독에게 너무 고마웠지요. 짧은 시간내에 거의 완벽에 가깝게 무대도구들을 마련해줘서 감사하다고 인사말을 했더니 그분이 오히려 자기를 믿어주고 기다려준 것이 고맙다고 하더군요. 이분들의 책임감 있는 욕심이 이번 작품을 한층 더 빛나게 했다고 봅니다. 리경화: 음악극에서 의상이 날개인데 무조건 최고로 만들어야지요. 비용 때문에 예전에 쓰던 의상실의 복장으로 일부를 대체하자는 의견도 나왔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작품에는 어느 것 하나 대충 맞춰서 넘기려는 생각을 하지 말라고 강조했습니다. 경제적으로 뒤심이 되여준 연길시문화라지오텔레비죤방송및관광국 지도부에 진심으로 감사하다는 인사를 전하고 싶습니다.   《꿈 · 춘향》의 한 장면 필자: 춘향과 몽룡의 리별장면에서 작은 아치형 다리가 끊어지던데 결말부분에서는 무대 량쪽에 갈라져있던 대형 아치형 다리가 천천히 마주 다가와 다시 하나로 이어지면서 두 주인공이 상봉하지 않았습니까. 그 장면에서 음악극의 극치를 보여주었다고 보는데요. 김영주: 견우와 직녀가 칠석날에 까치와 까마귀들로 이루어진 오작교에서 만나잖아요. 바로 그 오작교에서 착상을 받아서 형상화한 것입니다. 필자: 전반 조명효과를 보면 복잡하지 않으면서도 화려하던데 조명은 어떤 취지로 활용하였습니까? 김영주: 미술과 조명은 등장인물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도구라고 생각합니다. 조명을 책임진 한택성 부단장님의 역할이 컸습니다. 조명이 지나치게 화려하고 빈번하게 바뀌면 극중 인물의 형상을 오히려 손상시키는 역효과가 날 수 있다는 그분의 관점이 저의 연출의도와 맞아떨어졌지요. 그래서 조명을 될수록이면 아꼈습니다. 적재적소에 필요할 때만 사용하려고 했지요. 필자: 고정무대에서 펼쳐진 음악극이였지만 마치 한편의 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극본을 맡은 김정권선생에게 이 음악극 제작에 참여하면서 느낀 감상 한마디를 부탁 드립니다.  김정권: 재직 때부터 음악극에 흥미를 가지고 몇편 쓴 적이 있습니다. 총연출을 맡은 김영주선생이 우리 민족의 고전명작 《춘향전》을 현대감 있는 음악극으로 만들겠다며 구상을 쭉 얘기하는데 그의 머리속에는 벌써 작품 구성이 어느 정도 완성되였더군요. 우리는 몇차례 만나서 작품을 구상하고 토론하고 합의를 보면서 대본 창작에 들어갔습니다. 그 때 서곡은 작곡이 완성된 상태여서 그 곡을 허밍으로 수십번 들으면서 대본을 창작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음악극은 음악이 생명이고 령혼이다보니 작곡자인 총연출의 의도를 따라야 했습니다. 1차 대본에서 문제점을 찾고 다시 2차 창작에 몰두했습니다. 조선족이라면 거의 모르는 사람이 없을 《춘향전》이지만 아무리 명작이라고 해도 새롭지 않으면 안됩니다. 우리는 어쨌든 ‘퓨전’으로 엮어야 했습니다. 극본은 음악극의 첫단계인 설계도일 뿐입니다. 설계도의 밑그림에 따라 어떤 모양으로 완성될지는 가늠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반년 넘게 몰입하여 작품을 내놓고 제작진에게 모든 것을 맡겼습니다. 처음 공연을 보면서 내내 감탄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가사와 작곡, 편곡이 이렇게 상상을 뛰여넘게 너무나 잘되리라고는 예상을 못했습니다. 아리아, 이중창 , 칸타타, 레치타티보 등 음악요소들이 잘 안받침되였기에 명실공히 음악극이란 쟝르가 완성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꿈 · 춘향》을 보고 나는 연길시조선족무형문화유산보호중심에서 ‘큰 사고’를 쳤구나 싶었다. 연길시가 ‘왕훙’도시로 유명해지면서 전국 각지의 관광객들이 쇄도하고 있는데 그들에게 제일 중요한 세가지 ‘거리’중에 먹을거리와 볼 거리는 다채롭지만 보고 느낄 수 있는 문화적인 거리가 결여된다는 아쉬움이 있었다. 그런데 이번 《꿈 · 춘향》의 탄생이 이 부분을 메꾸어 관광객들에게 정신적인 예술의 향연을 마련해주게 됐다는 뿌듯함으로 가슴이 벅차오른다. 중국 조선족 창작음악극 《꿈 · 춘향》의 창작자 분들에게 다시한번 경의와 감사를 드린다.     사진 제공 |  연길시조선족무형문화유산보호중심 《예술세계》 2025년 제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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