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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영화를 사랑하는 우리 ‘가족들’(3) 댓글:  조회:1705  추천:0  2022-07-25
영화를 사랑하는 우리 ‘가족들’(3) □ 손룡호     연변영화드라마애호가협회에는 어쩌다보니 화룡시 룡수평사람들이 주력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많다. 그들은 아마츄어배우들이지만 영화를 사랑하는 마음 하나로 주역이든 조연이든 개의치 않고 연기에 열연한다. 소박하고 진실하고 자연스러운 그들의 연기는 시청자들의 마음을 꽉 사로잡고 있다. 이번 호에서는 협회에서 눈부신 활약을 펼치고 있는 룡수평사람들의 이야기를 엮어보기로 하자. 미니영화 《량심》에서의 박철룡 다재다능한 박철룡 박철룡은 한때 영화해설원이였다. 어릴 적부터 박철룡은 여러가지 소리를 잘 모방하여 동네에서 재간둥이로 인기가 많았다. 저녁에는 고양이 울음소리로 친구를 불러냈고 이른새벽에는 수탉 울음소리로 동네사람들을 깨운 적도 있었으며 개구리 울음소리로 또래 친구들을 논판으로 불러내기도 하였다. 학교를 오가는 길에서는 친구들의 뒤에서 느닷없이 개 짖는 소리를 내여 모두를 놀라게 하는 지꿎은 장난도 쳤다. 박철룡의 소리모방 기교를 따라해보는 친구들도 있었지만 모두 두손을 들었다고 한다. 목소리에 변화를 주는 이런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기에 1970년대 중반기에 조선영화 《꽃 파는 처녀》가 중국의 여러 마을에서 상영되였을 때 화룡현영화발행상영공사에서는 박철룡에게 제6방영대 영화해설을 맡기였다. 당시 영화화면을 보면서 남녀로소의 목소리와 억양을 이야기의 발전과 정서에 맞게 변화시키며 표현한 박철룡의 해설에 많은 시청자들이 눈시울을 붉혔다고 한다. 박철룡은 60대 중반을 넘었지만 지금도 40여년전의 《꽃 파는 처녀》 영화 해설을 대본도 보지 않고 줄줄 외우면서 연기해낸다. 그 때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으면 지금까지도 그 실력이 녹 쓸지 않았을가 그저 놀랍기만 하다. 박철룡은 한때 신문사 통신원이였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연변일보사 통신원으로 오래동안 활약하였다. 배움에 게으르지 않고 새로운 문화현상에 남달리 민감했던 그는 처음에 기사만 쓰다가 주인공의 모습을 신문에 사진으로 올릴 필요성을 느끼고 사진기를 사서 촬영기술을 터득하였다. 하지만 인생이란 생각 대로 안되는 법이다. 다재다능했던 박철룡이지만 언제부터인가 고향에 돌아가 조용히 살기 시작했다. 가을이면 파도처럼 넘실거리는 평강벌이 좋았다. 덩실한 기와집, 쭉 뻗어나간 콩크리트길, 아담한 채소밭, 끼마다 하얀 이밥, 시원하고 얼큰한 배추김치, 보글보글 토장국, 한잔 술… 모든 것이 그에게는 행복이였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연변영화드라마애호가협회 설립 소식을 듣게 되였다. 영화해설원, 신문사 통신원으로 활약했던 그의 가슴 밑바닥에서 새로운 욕망이 꿈틀거렸다. 그는 한달음에 협회 설립현장으로 달려갔다. 2017년 1월, 연변영화드라마애호가협회에서 미니영화 《눈물》을 제작하기로 결정하였다. 영화 스토리는 간단하다. 《눈물》이란 영화를 제작하기 위하여 모 영화제작사에서 배우모집을 왔고 배우마다 눈물연기를 하기 위하여 자기 삶을 돌이켜보면서 가장 눈물나는 장면을 얘기하면서 눈물을 흘리는 이야기이다. 나는 박철룡에게 안해가 장기간 외국에 나가 있는 동안 집을 지키며 살아가는 외롭고 초라한 남편 역을 맡겼다. 이미 60 고개를 넘어선 박철룡은 대사암송에서는 약간 뒤처졌지만 표정연기와 눈물연기에서는 다른 사람을 뺨칠 정도였다. 2021년, 국경절 경축작품으로 미니영화 《량심》을 촬영하게 되였다. 《량심》은 김령감이 몸이 아플 때 지부서기한테서 꾸었던 돈을 채 갚지 못하고 있다가 병이 도져서 숨지면서 자기 안해와 딸에게 두 손가락을 쳐들어보이며 2만원을 꼭 갚아주라는 내용의 영화이다. 영화 주역을 맡은 박철룡은 안해 역을 맡은 구정희와 딸 역을 맡은 현순자를 불러 련 며칠 연기훈련을 지도하면서 영화의 순리로운 제작에 최선을 다하였다. 숨이 넘어가는 순간에 두 손가락을 쳐드는 장면을 찍을 때, 그의 리얼한 연기에 현장에 있던 모든 제작진들이 눈물을 떨구었다. 사람이 사람인 것은 ‘량심’이 있기 때문이다. 박철룡은 그 량심을 지켜 평강벌을 떠나지 않았고 영화문화에 몸을 담그고 혼신을 다 바치고 있다. 협회의 일이라면 밤이고 낮이고 룡수평에서 연길까지 무작정 달려오는 그다. 폭우도 설한풍도 그의 열정을 막지 못한다. 박철룡이 우리 영화문화의 발전에 헌신한 업적과 그의 재능을 기리여 협회에서는 화룡시 룡수평 룡원촌에 있는 박철룡의 집을 연변영화드라마애호가협회 촬영기지로 정하고 박철룡을 지사장으로 임명하였다. 이제 머지않아 박철룡 극본, 박철룡 주역이 된 새 영화가 출품될 것으로 보여진다.   미니영화 《눈물》에서의 김기운 훌륭한 영화인이자 만능해결사인 김기운 2018년 2월의 어느 날 오후, 미니영화 《눈물》의 배우 선발에 응해나선 후보들을 테스트하고 있었다. 한 남성이 발음이 똑똑치 않아 탈락되자 박철룡이 자기 친구를 추천했다. 일찍 영화해설원으로 일하면서 영화에 대해서 상식적으로 잘 알고 있는 그의 안목을 믿고 나는 추천을 받아들였다. 부름을 받고 달려온 김기운은 준수한 이목구비, 똑똑한 발음과 부드러운 음성으로 즉시 테스트에 통과되였다. 나는 대본을 주면서 다음날 연기훈련장소로 나오라고 했다. 이튿날 훈련장소에 등장한 김기운은 다른 배우들과 달리 손에 대본을 들고 있지 않았다. 놀라웠다. 어제 늦은저녁에 대본을 받았는데 하루밤 사이에 다 외웠단 말인가? 김기운은 침착하게 대본내용과 정서에 따라 연기를 쭉 이어갔다. 눈가에 고였다가 눈귀로 주르륵 흘러내리는 눈물은 연기가 아닌 진실이였다. 대본을 완전히 소화하여 자기 것으로 흡수하여 아무런 꾸밈도 없이 소박하고 진실하고 자연스럽게 연기를 펼쳐냈다. 그의 놀라운 연기는 현장을 감동시켰다. 그후로 나는 여러 영화에서 그에게 부동한 인물 역을 맡기였다. 《눈물》에서 사랑했던 님을 잃고 가슴 터지는 인물 역을, 《생명》에서 의사 역을, 《설날》에서 뒤집 령감 역을, 《아버지의 유산》에서 약삭바르게 리익을 추구하는 둘째사위 역을, 《빚》에서 암으로 앓고 있는 남편 역을, 《그랬으면 얼마나 좋겠니》에서 ‘홀아비’ 역을, 《깊은 인연》에서 아버지 역을, 《량심》에서 촌의사 역을 맡게 하였다. 그는 그 어떤 역할이든지 완벽하게 소화해냈다. 어떻게 다각적 인물연기를 그토록 잘해낼 수 있는지 놀랍기만 했다. 그의 연기를 두고 억지스러움이 없이 아주 편안하고 익숙한 이웃처럼 여겨진다는 시청자들의 평도 끊이지 않았다. 보매 원체 출중한 영화배우감이였다. 김기운은 교원가정에서 훌륭한 교육을 받으면서 자라왔었기에 례의범절에 밝고 정을 귀중히 여기는 사람이였다. 동창들의 모든 일에 솔선수범으로 나서서 직심으로 자기 일처럼 돕는다. 사회활동무대가 넓고 생활경력이 풍부하며 인간세상을 살아가면서 많은 사람과 일들에 부딪치면서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대담히 주견을 세워 옳바르게 처사하기도 하며 힘 약한 사람들의 고초를 헤아리고 해결해주기도 했다. 그의 성숙한 연기 자체가 곧 그가 살아온 생활이였고 그가 거쳐온 감정세계였기에 연기를 함에 있어서 그는 막힘이 없었고 꾸밈이 없었다. 자기가 느끼는 그대로 표현하는 것이 가장 만족스러운 연기였다. 아마츄어배우들로 모인 협회에서 이런 훌륭한 연기실력을 갖춘 사람을 만난 것은 정말로 행운이 아닐 수 없었다. 김기운은 그동안 수차 여러 영화에서 주역을 맡으면서 다방면 인물연기는 물론 촬영설비, 복장, 소도구, 차량 등 필수품들의 준비와 사용방법에 대해서까지 머리속에 환하게 기억하고 있었기에 현장 조직자 역할을 하는 부감독으로 적격이였다. 영화 《엄마》의 부감독을 맡은 김기운은 주제곡 작곡가를 섭외하는 일에 발 벗고 나섰다. 확신이 없이는 쉽게 나서지 않는 그였다. 과연 그는 국가 1급 작곡가 박송철을 섭외했다. 위해에 있는 박송철은 영화 주제가사를 받은 후 그 날 밤으로 창작에 들어갔다. 미구에 애통함과 후회막급해하는 주인공의 심리와 정서를 아주 잘 반영한 선률이 탄생했다. 이뿐만 아니라 합창을 록음하는 데 드는 비용 역시 김기운이 해결하였고 영화제작인까지 섭외하여 필요한 제작자금을 마련하게 되였다. 부감독이란 이름만 달아주기에는 그의 공로가 너무나도 컸다. 영화제작인이 해낼 일을 그가 거뜬히 해낸 것이다. 그리하여 《엄마》의 제작인 세명중에 그의 이름도 올리게 되였다. 촬영과정에는 예상치 못한 일들이 종종 발생한다. 영화 《아버지의 유산》을 촬영할 때였다. 이미 지정한 녀배우가 중도에서 사유로 그만두게 되였다. 촬영 도중에 어데 가서 알맞는 배우감을 물색한단 말인가? 당황해난 나는 인맥이 넓은 김기운에게 부탁할 수밖에 없었다. “오늘내로 적중한 인선을 물색해주세요.” 과분한 요구임에도 김기운은 두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차를 몰고 떠나갔다. 한시간 만에 그는 녀성배우를 모시고 왔다. 이목구비가 유순하고 평온하여 보모 역에 적중하였다. 김민정이라고 부르는 그녀는 대본내용을 읽어가면서 연기를 상상해보더니 그 날 오후에는 직접 촬영에 나서서 만족스러운 연기실력을 과시하였다. 김기운은 그후에도 허승한, 구정희, 정철복 등 여러 배우들을 추천했다. 이들은 아마츄어배우임에도 《설날》, 《아버지의 유산》, 《황혼의 정》 등 작품에서 주역을 맡아 성숙한 연기를 보여주었다. 영화현장기록(场记) 업무는 십분 중요한 일환이다. 대본을 손에 쥐고 극본에 표기된 대화내용과 촬영요구, 촬영순서가 루락되는 것이 없는지 하나하나 체크하는 일이다. 내가 영화를 찍으면서 내내 마땅한 현장기록원이 없어서 속을 태웠었다. 그러던 중 김기운이 연길시 건공소학교에서 교원으로 근무하다가 퇴직한 로미선선생을 추천해왔다. 나는 로미선에게 영화 《엄마》의 현장기록원을 맡기였다. 로미선은 쾌히 접수하고 기록원 업무를 열심히 수행하였다. 빠진 대목은 즉시 지적하였기에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착착 진행할 수 있었다. 현재 김기운 자신은 물론 그가 추천한 인원들 모두 협회에서 주역배우로, 책임일군으로 활약하고 있다. 김기운은 현재 협회 상무부회장 책임을 맡고서 나와 함께 하나 또 하나의 새로운 영화를 만들어가는 데 열정을 쏟아붓고 있다.   미니영화 《아버지의 유산》에서의 고 허승한 생의 마지막 5년을 빛낸 촌민배우 고 허승한 내가 허승한을 알게 된 해, 그의 나이는 63세였다. 28세 때 차사고로 취장적출수술을 받았다고 하는데 그래서인지 영양섭취가 잘되지 않아 얼굴은 온통 주름투성이였다. 그래서 제 나이보다 열살 넘게 늙어보였다. 할아버지 역으로 충분히 가능한 얼굴이였다. 게다가 목소리까지 웅글진 중음이였다. 후에 가까이 지내면서 알고보니 그는 아주 소박하고 정직하며 속세에 물젖지 않은 착한 분이였다. 처음 그한테 미니영화 《설날》 출연을 제안했을 때 그는 화뜰 놀라면서 뒤로 물러앉았다. “내 평생 연기를 못해봤습니다.” 그러나 곁에서 그를 추천한 김기운이 할 수 있다고 용기를 북돋아주자 그는 특유의 중음으로 조용히 말했다. “잘 지도해주시면 시키는 대로 해보겠습니다.” 그 한마디에 시름이 놓이였다. 배우선택을 하면서 대개 보면 얼굴에 연기실력이 실려있다. 극본내용에 따라 처음 보는 사람도 그의 얼굴에서 채용가능성이 있는가 없는가에 대한 확신을 가지기도 한다. 그만큼 허승한은 자각 못한 잠재적 연기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허승한은 설날을 맞으면서 출국한 아들며느리를 애 타게 기다리는 아버지 역을 맡았다. 설날이면 온다는 엄마, 아빠를 목이 빠지게 기다리는 여섯살짜리 손주 정우가 새벽부터 일어나 할아버지, 할머니를 달고친다. 음식상을 다 차려놓았는데도 기다리는 자식들이 나타나지 않으니 허승한은 뒤집 령감과 함께 뻐스가 바라보이는 동구 밖 언덕에서 추위에 떨면서 눈뿌리 빠지게 기다린다. 촬영 당일은 정말로 몹시 추웠다. 앞집 령감 허승한과 뒤집 령감 김기운은 바람막이 하나 없는 허허광야에서 추위를 이겨내면서 연기임무를 훌륭하게 완성하였다. 허승한의 연기는 소박하고 진솔하고 자연스러웠다. 말수는 적지만 마음속 깊이에 두고 있는 내면적 흐름은 진중했다. 억지로 연기하는 티가 전혀 없었다. 이것이 허승한의 보귀한 특징이였다. 시청자들은 허승한을 영화배우가 아니라 우리 생활 속에서 자주 만나보았던 익숙한 이웃집 로인처럼 친숙하게 받아들이였다. 그후 《아버지의 유산》에서 아버지 역을 맡은 허승한은 죽음의 연기를 실감 있게 해냈다. 미니영화 《고목은 봄을 그린다》에서 허승한은 치매에 걸린 안해를 살틀히 보살펴주는 남편 역을 맡았는데 어찌나 자연스럽고 감동적이였던지 촬영하는 내내 모든 사람들이 눈물을 떨구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마음의 물결이 흘러가는 곳》, 《황혼의 정》에서도 자기가 맡은 역할을 뛰여나게 완수했다. 리창균 감독은 총화모임에서 허승한을 이렇게 칭찬하였다. “허승한의 연기는 전혀 어색함이 없습니다. 억지감이 없는 생활모습 그 자체입니다. 웅글진 목소리는 진짜 성우의 목소리입니다. 성우로 될 기회가 있었다면 크게 성공했을 것입니다.” 허승한은 연기를 잘했을 뿐만 아니라 무던하고 정이 많은 사나이였다. 석달 반이란 촬영기간 내내 그는 자가용차에 배우들을 태우고 다녔다. 아마 1,000킬로메터를 달리였을 것이다. 촬영이 한밤중에 끝나든 새벽에 끝나든 싫은 내색 한번 내지 않았다. 그리고 몸이 허약함에도 청가 한번 맡지 않고 끝까지 열심히 맡겨진 촬영분량을 끝냈다. 말없이 묵묵히 협회 일에 헌신해온 허승한, 협회에는 그와 같은 부지런히 일하는 사람이 필요했다. 하여 그한테 촬영후근을 책임진 부회장직을 맡겼다. 허승한은 자기 직책에 걸맞게 촬영현장이든 협회 행사장이든 어디서나 허실없이 뒤수습을 깐지게 하였다. 하지만 우리의 인연이 다한 걸가. 지난 3월 25일, 허승한은 아쉽게 생을 마감하였다. 허승한에게 생의 마지막 5년은 영화와 인연을 맺은 보람찬 연기자의 삶이였다. 아쉽다. 눈물겹다. 우리는 계속 더 좋은 영화를 만들어가는 것으로 고인의 령전에 성과작을 올릴 것이다.   영화 《황혼의 정》에서의 구정희 ‘연기를 모르는’ 진솔한 연기자 구정희 리창균 감독은 구정희배우를 이렇게 평가한다. “구정희는 연기지도가 별로 필요 없는 자연연기실력파이다.” 그래서 리창균 감독은 구정희한테는 연기훈련을 별로 시키지 않는다. 처음으로 연기를 하는 배우들을 살펴보면 감독이 시키는 대로 하려고 애쓴다. 그러나 구정희는 아니다. 리창균 감독의 평가처럼 그녀는 자연스럽고 자발적인 연기실력을 아낌없이 발휘하였던 것이다. 어느 생일파티에서 우연히 만난 구정희에 대한 나의 첫인상은 실처럼 가는 눈, 해빛에 타서 까무잡잡한 얼굴, 거의 다 빠진 웃이발이 ‘밉상’이였다. 그런데 그 ‘밉상’이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더니 능글거리며 비위를 부릴 줄이야. “나 같은 사람은 영화에 못 나감둥?” 그 때 나는 미니영화 《설날》에서 뒤집 로친 역을 맡을 배우를 물색하던 차였는데 ‘밉상’얼굴이 바로 내가 찾고 있는 우리 농촌할머니의 얼굴이였기에 기뻐서 얼른 맞장구쳤다. “되구말구요. 부를 때 꼭 와주십시오.” 구정희는 그 말을 롱담으로 받아들이며 사람 좋게 웃었다. 곁사람들도 내가 롱으로 하는 소리로 생각하는 눈치였다. 그러나 솔직히 나는 진심이였다. 그녀의 얼굴 생김새나 말투가 농촌주제 영화에 아주 잘 어울린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얼마후 그녀는 배우로 발탁되였다. 과연 내 예상 대로 그녀는 훌륭한 연기실력을 보여주었다. 미니영화 《설날》에서 뒤집 로친 역을, 《고목은 봄을 그린다》에서 치매로친 역을, 《황혼의 정》에서 치매로친 역을 맡았는데 연기를 실감나게 하여 시청자들과 전문가들이 한결같이 인정하는 배우로 뜨게 되였다. 구정희는 우선 생김새로 보나 자그마한 키에 약간 구부정한 체구로 보나 지숙한 농촌아낙네, 농촌할머니 역으로 적격이였다. 그리고 대본에 대한 리해력이 높았고 연기할 때는 자기만의 표정과 언어, 몸짓으로 극 줄거리에 맞게 아주 자연스러운 연기력을 보여주었다. 대본에 따라 지정된 연기를 어떤 감정으로 어떻게 표출해야 할지를 적중하게 고민할 줄 알았다. 훌륭한 배우기질을 갖춘, 실력파 연기자로 거듭나기에 손색이 없는 사람이다.   미니영화 《마음의 물결이 흘러가는 곳》에서의 정철복 감성이 빠른 연기자 정철복 정철복은 1996년에 중국과학기술대학에 입학하였고 졸업후 중앙민족대학에서 민족사연구에 종사하다가 북경시정부에서 공무원으로 20년간 근무하였다. 현재는 연길에서 영어학원과 로보트제조양성학원을 운영하고 있으며 협회의 부회장 겸 비서장직을 맡고 있다. 중어 실력이 뛰여나고 언변이 좋은 그는 협회에서 상영식을 할 때면 숙련된 실력으로 사회를 맡아본다. 이뿐만 아니라 정철복은 연기에서도 남다른 특성을 보였다. 극 줄거리를 잘 장악하고 정서에 빨리 녹아들며 깊이 있고 폭넓게 연기한다. 그러므로 그의 연기는 단조롭거나 애매한 느낌이 전혀 없다. 그리고 부정인물연기에 아주 적합한 배우이다. 지금까지 《빚》, 《마음의 물결이 흘러가는 곳》, 《황혼의 정》, 《량심》 등 4부의 영화에 출연하였는데 전부 부정인물 역할을 맡았다. 도박에 미쳐 가정을 몰라라 한다든가 조강지처가 출국한 기회에 첫사랑 녀자에게 끌려 방황한다든가… 부정적인 역할들을 너무 실감나게 소화해냈다. 여기서 에피소드 하나를 살짝 곁들이려고 한다. 정철복에게는 여섯살짜리 아들이 있는데 아버지가 영화 《빚》에서 도박에 빠져 한창 마작을 놀고 있을 때 웬 할아버지가 불시에 뛰여들어 지팽이로 자기 아버지를 때리는 장면을 보고는 진짜인 줄 알고 울음을 터뜨렸다. 그리고는 집에 돌아온 아버지를 보고 울면서 “아빠, 영화를 찍지 마. 자꾸 맞아대면서…”라고 말하더란다. “나는 지구촌에 사는 모든 선량한 사람들을 위하여 서로 돕고 서로 아끼면서 행복한 삶을 만들어 가는 데 빛과 소금이 되고 싶습니다…” 연기자로서의 감성이 빠르고 생활에서는 긍정적인 마인드를 가지고 있는 정철복의 연기인생이 더욱 빛날 것임을 확신한다.   손룡호 │ 연변영화드라마애호가협회 회장 《예술세계》 2022년 3호
8    프로듀서를 꿈꾸는 아들에게(3) 댓글:  조회:386  추천:0  2022-07-25
프로듀서를 꿈꾸는 아들에게(3) □ 김광현     아들아, 네가 북경에 간 지도 벌써 반년이 다되여오는구나. 네가 일이 재미 있다고 하니 아버지도 한시름 놓인다. 그러나 네가 다큐멘터리 촬영이 재미 있다고 하는 것은 그 환경에 잘 적응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줄 뿐이지 텔레비죤프로의 실질을 알기 시작했다는 의미는 아닌 것 같다. 전번에 네가 다큐멘터리 관련 리론공부를 하고 싶다고 했던 말이 생각나는구나. 그런데 지금 촬영팀에서 조감독을 맡고 있으니 다큐멘터리에 대해 따로 체계적으로 공부할 시간이 없을 것이다. 그래서 내가 예전에 국내외의 다큐멘터리를 제작한 선배들의 경험담을 공부하면서 짬짬이 필기해둔 것과 그동안의 실천경험들을 결부하여 정리해 보내주려고 한다. 이렇게 하면 네가 따로 시간을 내서 전문도서를 읽는 것에 못지 않은 효과를 거둘 수 있으리라고 본다. 다큐멘터리의 정의에 대해서는 한자 그대로 기록(纪录)으로 리해하면 쉬울 것이다. 기록이란 단어를 쓸 때에는 반드시 사실이라는 개념을 떠올리게 되여있다. 문학쟝르에 비유한다면 실화문학에 가장 근접할 것이다. 누가 어떤 사실을 기록할 때 그것을 영상화하면 사진이 되고 영화로 기록하면 기록영화가 되며 여기에 이야기를 가미하면 다큐멘터리가 되는 것이다. 즉 다큐멘터리는 사물의 존재나 인간의 행위 그리고 인간의 형태를 꾸밈없이 기록하면서 PD가 말하고저 하는 의미를 부여하는 예술적 행위인 것이다. 이런 기록은 책, 그림, 사진으로도 할 수 있지만 가장 확실하게 자신의 생각을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살아서 숨 쉬듯 움직이는 동영상이라고 본다. 이것이 다큐멘터리의 실질이다. 내가 다큐멘터리 PD로 있으면서 사귄 외국의 다큐멘터리 감독들은 가끔 이런 말을 해주군 했다. “어느 한 시대를 묘사하는 것은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반영하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시사해주는 방향이자 기준인 것이다. 영화는 극작가나 감독의 예술수준에 따라 감동을 가미하거나 놀라움을 표출해낼 수 있지만 다큐멘터리는 고유의 능력만으로 한 시대를 담아낸다.” 여기서 ‘고유’란 말에 주의를 돌리기 바란다. 이것이 다큐멘터리의 특성이 될 수도 있다. 얼핏 보면 리해하기 힘든 말 같지만 한마디로 다큐멘터리는 어디까지나 실제에 기반을 두어야 한다는 뜻이다. 알아듣기 쉽게 말하자면 다큐멘터리 고유의 특성은 PD가 다루고저 하는 모종의 제재에 그 어떤 허구도 가미하지 않고 사실을 그대로 전하면서 시청자들에게 감동과 여운을 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다큐멘터리의 매력이면서도 초보자들이 해결하기 힘들어 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다큐멘터리 《아름다운 향촌》 촬영중 나는 다큐멘터리 《정률성》을 제작할 때 진실성을 추구하기 위해 많은 지역을 찾아다니며 촬영했다. 정률성이 태여나고 성장한 고향에 가서 생가의 진실성을 기하기 위해 당지의 로인들과 력사학자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인터뷰를 하였다. 그리고 상해, 서안, 연안, 태항산, 북경 등지를 다니면서 당년에 정률성과 함께 항일전쟁에 투신했던 전우들과 음악가들을 찾아 취재하였다. 참으로 힘든 작업이였다. 이렇게 많은 시간과 경비를 들여가며 여러 곳을 찾아다닌 것은 다큐멘터리의 진실성을 보장하기 위해서였다. 사진에다 해설을 곁들이거나 인터뷰로 대체하면 그 진실성과 다큐멘터리의 매력이 많이 떨어지게 된다. 특히 력사다큐멘터리일 경우 많은 사실들이 불확실하게 제기되기도 하는데 이는 PD의 연박한 지식과 세밀한 분석에 의해 처리되여야 한다.  그리고 다큐멘터리는 특정된 상황과 특정방식에 따라 특정된 집단에 의해 제작된다는 점이 중요하다. 이 말이 내포한 의미도 아주 중요하다. 지금 너희들이 촬영하고 있는 다큐멘터리 《중국원림》은 PD를 주축으로 한 특정된 전문가 멤버들이 팀을 이루고 있을 것이다. 이들이 어떤 사람들인가를 잘 파악해두는 게 좋을 거다. 전번에 너희들이 인터뷰한 사진들을 보니 중국의 이름난 학자들과 원예사들이 대거 등장하더구나. 내가 해방전쟁 관련 다큐멘터리 《영원한 기념비》의 PD를 맡았을 때 처음에는 눈앞이 캄캄해나더구나. 오래동안 외국에서 다큐멘터리 공부를 했기에 잘해내고 싶은 욕망은 컸지만 그에 비해 해방전쟁시기 조선족들의 활동상황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오기를 부리고 맡아나선 것은 내 주변에 그 시기의 력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이 많았고 또 해방전쟁에 참가했던 로전사들이 생존해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특수군체의 물심량면의 지원이 없었더라면 그렇게 방대한 력사다큐멘터리에 감히 접근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내가 잘 아는 내용의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면 한결 쉬울 수도 있겠지만 모르는 내용을 취급하면서 공부도 하게 되여 더욱 재미 있었다. 물론 그 과정에 갈등도 많았지만 그런 갈등을 해결하고 통일해나가는 과정이 바로 훌륭한 학습기회였고 다큐멘터리 PD로 성장하는 과정이였다고 생각한다. 근 3년간 연변에서부터 멀리 해남도에 이르는 기나긴 원정취재를 거쳐 제작된 10부작 다큐멘터리 《영원한 기념비》는 살아 숨 쉬는 력사다큐멘터리로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게 되였다.   중앙텔레비죤방송국 사회자 동천과 함께 절강에서 취재중인 김천룡(오른쪽) 그외에도 다큐멘터리는 사실기록과 이야기 형식을 접목하는 데 많은 정력을 할애하게 된다. 이런 접목을 통해 현실의 다양한 모습들을 영상으로 재현하는 것이 텔레비죤프로 특유의 중요한 형식이다. 다큐멘터리는 교양부문이 주요 축을 이루고 있으나 최근에는 그 분야가 차츰 확대되여 보도와 오락 부문에도 활용되고 있다. 다큐멘터리는 그 쟝르적 특성으로 말미암아 력사사실과 밀접하게 련관된다. 이런 연고로 너의 담당PD K도 력사제재의 다큐멘터리에 많이 치중하는 것 같다. 력사다큐멘터리는 한번 재미를 들이면 자꾸 빠져들게 되는 게 그 매력이다. 제작과정이 힘들어 다시는 력사제재에 대한 다큐에 매달리지 않겠다고 결심했다가도 프로가 완성되여 방송되고 나면 성취감이 생기면서 또다시 달라붙게 되는 게 현실이다. 내가 미국 그린빌영상아카데미에서 공부할 때의 필기장을 펼쳐보니 이런 구절이 유표하게 눈에 들어오더구나.  “현대생활을 주도하는 매체로서의 텔레비죤다큐멘터리는 시청자들의 서로 다른 취향과 스타일에 맞게 의미 있는 정보와 다양한 즐거움을 제공하는 데도 그 의의를 둔다.” 말하자면 다큐멘터리 시청자들은 천차만별의 취향을 가지고 있다. 이들의 감상수준과 취미를 골고루 만족시켜야 하는 것은 다큐멘터리 제작자들이 안고 가야 할 힘든 과제이다. 다큐멘터리는 사실적 재현과 허구적 창조라는 이중작업 사이에 위치해있다. 그러면서 텔레비죤 본연의 역할을 동시적으로 수행하는 데 어울리는 프로형식이라 할 수 있다. 네가 보낸 사진을 보니 너희들도 력사사실을 재현하는 것 같더구나. 력사사실에 기초한 재현은 어떻게 보면 허구인 것 같지만 또 진실한 것이기도 하다. 너도 재현에 참가해 군중역할을 맡아했다니 참 잘했구나 싶더라. 비록 재현이기는 하지만 그 시기의 분위기를 느껴보는 것은 앞으로 PD로서의 감각을 찾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다큐멘터리는 어쩔 수 없이 시대적인 분위기가 늘 동반되여야 하기 때문에 나는 ‘일정한 력사사실에 기초한 상상력에 의한 재현은 피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다큐멘터리를 제작할 때 특별히 재현과정을 중시하고 즐겨 조직했다. 내가 만든 다큐멘터리 《시인은 동 트는 곳에서 왔다》는 조선족의 이름난 시인 김철의 일대기를 다루었는데 적지 않은 부분에 재현처리를 했고 좋은 효과를 보았다. 공적 매체로서의 텔레비죤다큐멘터리는 교육적 혹은 계몽적 기능과 오락적 역할이라는 다종의 기능을 담당하게 된다. 다큐멘터리를 둘러싸고 론난이 끊이지 않는 원인 역시 이 두가지 속성에 대한 관점의 차이에 있다.  《다큐멘터리와 력사》란 책에서는 “보수적 집단에 의해 교육적 의무가 지나치게 강조되여 대중성을 상실하는 문제와 반대로 대중성의 요청에 따라 지나치게 오락적이 되여 사회적 비난을 받게 되는 문제, 이는 제작자를 심각한 고민에 빠지게 한다.”고 지적했다. 나도 이런 딜레마에 빠져 고민을 많이 했던 적이 있다. 다큐멘터리는 바로 이러한 이중적 역할을 수행하는 매우 적합한 프로형식으로서 앞으로 더욱 중시를 받게 될 것이다. 오래동안 텔레비죤방송 제작에 종사해온 선배PD들은 한결같은 관점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바로 “근대적 성향이 가장 강한 텔레비죤프로들은 당분간 세계적 차원의 문화교류를 매개하는 채널이 될 것이다.”라는 것이다. 타문화에 대한 관심이 날로 높아가는 글로벌시대에 다큐멘터리 제작에 종사하는 많은 사람들은 전인류적인 문화소통역할을 하게 된다. 시간이 갈수록 무한하게 성장하는 다큐멘터리프로는 대중들의 삶의 거울로 되여 새로운 인간관계의 바람직한 양식과 륜리의 틀을 제공하고 있다. 또한 과거와 미래를 위한 창의적이고 의미 있는 계기를 제공해주는 매우 중요한 문화적, 력사적 작업의 산물이기도 하다. 이것은 많은 다큐멘터리 PD들이 오랜 실천경험을 통해 내린 결론이다. 또 아래와 같은 정리도 있다.  “다큐멘터리를 통해 어제날의 력사를 집단적으로 기억해낼 수 있고 또한 오늘을 생생하게 기록하며 래일의 그림을 창조적으로 그린다. 요컨대 다큐멘터리는 현재 우리 삶의 성찰과 과거의 흔적을 확인하고 미래의 방향탐색을 가능하게 해주는 의미 깊은 사회소통적 실천이자 력사적 글쓰기 자체와 같은 것이다. 과거, 현재, 미래의 복수적인 시간들을 이어주는 련결작업, 타임머신에 의한 시간려행의 의미 있는 작업이다.” 텔레비죤다큐멘터리가 력사 리해의 유용한 수단이 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다양한 다큐멘터리프로의 분석을 통해 우리는 과거, 현재, 미래로 겹쳐지는 력사적 현실을 구체화된 이미지로 인식할 수 있다. 그 이미지영상은 기존의 신문, 잡지들의 문자적, 구술적 정보에 비해 그 력사적 기억보존 효과가 훨씬 크다. 물론 다큐멘터리가 력사 또는 현실 그 자체라는 말은 아니다. 력사와 현실에 대한 특별한 재현물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우리는 다큐멘터리를 통해 당시의 력사를 보는 시선, 현실을 재현하는 틀 그리고 사태를 느끼는 시대적 감수성 등을 알아볼 수 있으며 이에 대한 통찰을 통해 궁극적으로 복잡한 시공간적인 현실에 보다 가깝게 다가갈 수 있다. 이런 리론들을 당분간은 리해하기 어렵겠지만 네가 앞으로 직접 다큐멘터리 제작에 착수하다 보면 리해될 것이다. 나도 1990년대 중기에 처음 다큐멘터리프로의 PD를 맡았을 때는 지금의 너처럼 리론적인 지식도 경험도 없었다. 영화일을 하면서 많은 명작영화들을 본 것이, 한편의 영화를 수십번 반복해보면서 이야기줄거리부터 매 장절의 내용까지 숙지했던 것이 유일한 장점이였다. 그리고 후에 텔레비죤방송국에서 일하면서 리론공부도 하고 경험도 모색하였다. 그러니 다큐멘터리 리론지식을 배우는 데 관해서는 급해하거나 걱정할 필요가 없다. 지금처럼 일하면서 배워도 충분하다. 그리고 다큐멘터리는 종류가 다양하다. 시사다큐멘터리, 의학다큐멘터리, 환경다큐멘터리, 인물다큐멘터리, 문화다큐멘터리, 력사다큐멘터리, 자연다큐멘터리 등이 있다. 지금 네가 조감독을 맡고 있는 《중국원림》은 력사와 자연이 결합된 다큐멘터리에 속한다.  이만하면 다큐멘터리에 대한 리론적인 정의와 력사, 현실적인 작용에 대해 웬만큼 적었다고 생각한다. 시간 날 때마다 요점을 찾아 자주 보기 바란다. 나는 요즘 우리 집 서재를 시골에 옮기는 작업을 마무리했다. 가끔 시골집에 가서 조용히 있노라면 힘들게 일하고 있을 네 생각이 많이 난다. 그러나 그것이 네가 선택한 길이고 가야 할 길이기에 이 아버지는 가슴 아프지 않고 되려 뿌듯해난다. 내 아들이 바야흐로 중국의 주류문화 속으로 들어가고 있으니 말이다. 힘내라, 아들. 연변은 이제 완연한 봄이다. 2012년 5월 21일 《예술세계》 2022년 3호     김광현 프로필 화룡현 농촌이동영화방영대 해설원. 연변영화공사, 연변텔레비죤방송국, 연변위성텔레비죤방송국 등에서 40여년간 프로 사회자, 편집, 번역, 다큐멘터리 프로듀서로 활약. 미국 남캐롤라이나주 그린빌영상아카데미에서 5년간 과외로 다큐멘터리를 공부함. 주요작품: 10부작 력사다큐멘터리 《영원한 기념비》, 12부작 력사다큐멘터리 《중국조선족혁명투쟁사》, 4부작 휴먼다큐멘터리 《정률성》 등 수십편.
7    예술세계 2022년 제3호 목록 댓글:  조회:378  추천:0  2022-07-25
6    영화를 사랑하는 우리 ‘가족들’(2) 댓글:  조회:513  추천:0  2022-04-29
영화를 사랑하는 우리 ‘가족들’(2) 손룡호   소박하고 꾸밈없는 연기자 천수옥 2017년 12월의 어느 날, 연변시조창단 운영자 리영해의 초청으로 시조창단 년말 총화모임에 참가하였다. 60대를 넘어선 시조창단 할머니들이 무대 우에서 펼치는 공연은 판소리, 민요, 독창, 중창, 합창, 춤 등 종목이 다양하여 볼멋이 있었다. 그중에서 유독 생기 넘치는 한 얼굴이 시선에 확 들어왔다. 노래면 노래, 춤이면 춤, 무대 아래우를 주름잡으며 날래게 움직이는 활기에 찬 얼굴이였다. 그녀가 바로 천수옥이다. 화룡사람인 그녀는 시조창단 부단장으로서 몸을 사리지 않고 일에 열의를 다하는, 열정이 식을 줄 모르는 불사조 같은 존재였다. 회식자리에서도 술잔을 들었다 하면 단숨에 쭉 마셔버리는 통쾌한 성격이였다. 나는 그녀를 영화배우로 채용하고 싶어 기회를 타 넌지시 제안했다. “우리 영화협회에서 배우로 쓰고 싶은데요. 부르면 호응할 수 있습니까?” “불러주면 고맙죠.” 천수옥은 사람 좋게 내 말을 받았다. 후에 안 일이지만 그 때 천수옥은 나의 말을 그저 듣기 좋은 롱담으로 받아들였다.   미니영화 《설날》에서 며칠후, 미니영화 《설날》 배우선정 회의에서 천수옥에게 주역인 앞집할머니 역을 맡기기로 하였다. 우리는 정식 영화촬영에 들어가기 전에 확정된 배우들을 모아놓고 먼저 대사련습을 하고 어느 정도 익숙해진 다음 연기련습에 들어간다. 그런데 첫날부터 나는 천수옥의 연기에 실망하고 말았다. 천수옥은 다른 생각을 하면서 집중하지 못하였다. 아마 자꾸 시조창단 활동을 두고 걱정에 잠겨있는 듯하였다. 시조창단 부단장이고 핵심인물이니 당연히 그럴 수도 있었다. 며칠 더 지켜보았지만 그 상이 장상이였다. 비둘기는 콩밭에만 마음이 가있다고 여전히 우리 협회 일보다는 시조창단 일에 더 신경을 쓰는 눈치였다. 내 욕심에 선정하기는 했지만 은근히 서운했다. 아마츄어들이 모여 영화랍시고 찍는다고 색안경을 끼고 보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솔직히 우리 협회를 아마츄어들의 모임이라고 우습게 보는 사람들도 더러 있었으니 내 립장에서는 당연히 그런 짐작을 하게 되였다. “어째 집중을 하지 않습니까? 하기 싫으면 안해도 됩니다.” 그러자 천수옥은 잠시 생각하더니 차분히 입을 열었다. “하루만 시간을 더 줄 수 있나요?” 나는 별 기대없이 그저 고개만 끄덕이였다. 다음 날에도 그 모양이면 단연히 갈아치워야 하였다. 과연 다음 날 천수옥은 제시간에 나왔다. 천수옥은 다른 배우들과 달리 하루밤 새에 대사까지 몽땅 외우고 나왔을 뿐만 아니라 연기도 너무 자연스러웠다. 어제까지만 해도 연기에 집중 못하던 할머니가 하루밤 새에 뭔 둔갑술을 했나 싶을 정도였다. 나는 놀랍고 믿어지지가 않아 나처럼 천수옥에게 편견을 가지고 있었던 극본작가 허룡석과 시선이 마주쳤다. 채용하느냐 못하느냐가 아주 명료해졌다. 잘하면 채용, 못하면 탈락이라고 무언의 약속을 했었는데 천수옥의 연기를 보고 나니 채용여부는 두말할 것도 없었다. 천수옥의 연기는 소박하고 꾸밈이 없어 자연스럽고 진실하다. 이것은 전문 연기훈련을 거친 전업배우들과 다른 점이자 그녀의 남다른 매력이였다. 그녀의 입에서는 우리말 사투리들이 자주, 아주 자연스럽게 쏟아져나왔는데 너무나 친숙하고 생활감이 느껴졌다. 《설날》에서 천수옥은 “야, 추운데 길목에 나와 뭘 함둥… 감기 걸리겠습꾸마.” 등 향토미가 물씬 풍기는 사투리를 맛갈나게 잘 구사하였다. 그리고 감독이 지정한 연기외에도 아주 자연스럽게 소소한 동작들을 스스로 알아서 적절하게 취하여 영화에 생동감과 진실감을 부여했다. 《설날》에서 어린 손자가 새벽에 일어나 불을 때자고 다그칠 때 누워서 손자를 쳐다보다가 천천히 일어날 때의 표정, 설날이라고 엄마, 아빠를 기다리는 어린 손자의 간절한 마음을 헤아리는 듯한 자상한 표정은 시청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리고 영화 《황혼의 정》에서도 그녀는 소박하고 꾸밈없는 연기를 보여주며 시청자들을 울렸다. 자기를 찾아온 사람이 친아들이 확실한지 찬찬히 훑어보고 나서 돌아설 때의 사색에 잠긴 그 눈빛은 지금도 내 머리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천수옥은 자기 분량의 촬영이 끝나면 인츰 자리를 뜨는 것이 아니라 한참 동안 그대로 연기상태에 빠져있군 한다. 이 점은 아주 보귀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아마츄어들은 감독의 컷 사인이 떨어지면 하던 연기를 멈춘다. 그러나 성숙된 연기자는 대본 속 인물의 성격과 정서를 그냥 유지하기에 관성에 의해 연기를 멈추지 않고 계속하게 된다. 사실 이 때 촬영기는 계속 돌아간다. 왜냐하면 후기편집할 때 생각외로 건질 만한 좋은 화면들이 꽤나 있기 때문이다. 미니영화 《마음의 물결이 흘러가는 곳》에서 천수옥은 며느리가 출국한 사이에 아들이 첫사랑과 만나고 있는 사실을 알고 다잡기 위하여 남편한테 일러주는 장면이 있다. 천수옥은 컷 사인이 떨어졌음에도 영화 속 인물정서에 깊이 빠져든 채 속 탄 엄마의 마음을 계속 이어갔다. 그 장면이 훨씬 더 자연스럽고 실감나서 대본에는 없었지만 편집해넣었다. 천수옥의 연기관성은 참으로 귀중하고 영화화면편집에 도움을 줄 때가 많았다.   영화 《황혼의 정》에서 천수옥은 매사에 열의를 다 쏟아붓는 성격의 소유자이다. 영화 《황혼의 정》을 촬영할 때였다. 5월 하순이라 밖은 서서히 여름 기온으로 접어드는데 촬영장소인 지하창고는 아직 한기가 빠지지 않아 여전히 찬기운이 감돌았다. 당시 천수옥은 방광염으로 병원치료를 받고 있는 중이였다. 이날, 찬 바닥에 누워 촬영하는 씬이 있었고 촬영이 반복되면서 찬 바닥에 누워있는 시간이 길어졌음에도 천수옥은 촬영 내내 불평 한마디, 아프다는 소리 한마디 없었다. 결국 방광염이 도져 한주일간 병원에서 입원치료를 받아야 했고 퇴원하자마자 촬영현장으로 달려나왔다. 천수옥은 책임심이 강하고 사업열정이 아주 높아 협회 모든 활동에 팔을 걷고 나선다. 회원들의 모임이 끝나고 그 뒤거두매를 전담하는 사람 역시 천수옥이였다. 남들이 하기 싫어하는 일일수록 몇걸음 더 걸어서, 손에 물을 더 묻혀가고 허리를 더 굽혀서 일하는 그녀, 회원들 속에서 항상 솔선수범하고 전반 국면을 돌보면서 협회사업이 무난히 진척되도록 말없이 뒤받침해주는 그녀, 다른 사람들과 낯을 붉힌 적이 없고 더우기 뒤에서 누구를 힐난한 적이 없는 그녀는 참으로 돋보인다. 천수옥은 일찍 화룡에서 경찰, 부녀사업, 정부공무원으로 근무한 경력이 있는 우수공산당원이였다. 오늘도 그녀는 우리 민족의 전통시조문학을 이어가는 사업에 로심초사하고 중화민족의 영상영화문화공동체의 융합과 발전을 위해 연변영화드라마애호가협회 부회장이란 직책을 걸머메고 인생황혼기에 자기의 혼신을 다 바치고 있다.   손룡호 | 연변영화드라마애호가협회 회장   《예술세계》 2022년 2호
5    프로듀서를 꿈꾸는 아들에게(2) 댓글:  조회:484  추천:0  2022-04-29
프로듀서를 꿈꾸는 아들에게(2) □ 김광현     아들아, 새로운 일에 잘 적응하고 있다니 시름 놓인다. 전번에 너의 메일을 받고 아버지는 몹시 놀랐다. 너의 진보가 그렇게 빠를 줄을 몰랐다. 네가 다큐멘터리 《이화원》의 담당PD K를 곁에서 보필하게 되였다는 것은 아주 빠른 발전이다. 네가 해야 할 일이 정해졌다는 것은 이젠 팀에서 네가 필요한 사람이라는 표징이기도 하다. 이것은 너에 대한 K의 배려이기도 하겠지만 큰 믿음이기도 하다. 절대 사사로운 감정으로 행하는 일이 아니다. 필시 너의 열정과 인간성이 보여졌기 때문이다. 물론 메가폰을 잡는 일도 아니고 팀에서 아무런 결정권도 없지만 이것은 K 가까이에서 어깨너머로 일을 배울 수 있는 좋은 기회다. 솔직히 심부름군이나 다름없다. 물론 K가 모든 걸 책임지고 행하여 너의 부담은 많지 않을 것이다. 너는 비단 K만 보필해야 할 게 아니라 팀의 모든 선배들의 자질구레한 심부름도 해야 하고 지어는 그들의 개인일까지도 부탁 받을 수 있다. 이는 우수한 성적으로 전문대학이나 일류대학을 나오고 또 취직시험에서 최고의 성적을 거둔 사람도 대부분 피치 못할 일이다.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엄청 힘들고 때론 심한 좌절감도 느끼게 될 것이다. 그러나 아주 놀라운 것은 이것이 PD로 발돋움하는 좋은 발판이고 또 이런 무질서한 형태의 작업에서 PD의 진정한 자질이 굳혀진다는 것이다. 이런 작업은 반년이 걸릴 수도 있고 일년이 걸릴 수도 있다. 때로는 중간에 두 손 들고 떨어져나갈 수도 있다. 때문에 K를 보필하는 일은 네가 PD로 성장하는 가장 빠른 지름길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지금은 허드레일이나 하고 심부름이나 하지만 네가 PD의 모든 작업을 곁에서 보고 체험하고 느끼며 배울 수 있는 첩경이다. 촬영을 위한 작업에서도 네가 K 곁에서 도울 일들이 많을 것이다. 이를테면 촬영대본을 챙겨준다든가 작품에 관련된 참고자료를 찾아준다든가 지어는 핸드폰배터리며 커피를 일일이 챙겨야 하는 것도 너의 몫이다. 그리고 시간 나면 촬영시 장면기록도 별도로 해보아라. 보통 이 일은 초보들이 하는 하찮은 일 같지만 특히 영화나 드라마 감독도 이런 일을 기초로 시작한다는 점을 명심하기 바란다.   《중국원림》프로 촬영에 몰입하고 있는 김천룡   네가 팀에서 촬영한 모든 소재(素材)들을 맡아 관리한다니 좀 걱정스럽구나. 그런 중임을 맡는다는 것이 아직 시기상조가 아닐가 하는 생각이 든다. 매일 촬영한 메모리카드를 거두어들이고 외장하드에 옮기는 일은 그 책임이 막중하다. 그러니 매사에 꼭 침착하고 신중해야 한다. 매 촬영기의 메모리카드를 받을 때엔 반드시 기록해두었다가 저녁에 외장하드에 옮기고 번호를 매기는 것과 그외 작업까지 책임지고 마쳐야 한다. 너의 실수로 팀의 촬영결과물이 몇초 사이에 날아날 수도 있고 다시 찍기 힘든 소중한 화면들을 날려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 거기에는 막중한 경제손실도 따르게 된다. 그렇다 해서 지레 겁을 먹으면 더욱 안된다. 내 말은 그 막중한 책임을 실수 없이 해내려면 네가 일에 모든 정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네가 핸드폰을 분실하거나 개인 소지품을 잃어버리는 것과는 성질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니 촬영한 소재를 저장한 외장하드를 생명처럼 귀중하게 간직해야 한다. 믿어주는 만큼 정성과 책임을 다하기 바란다. 어떻게 보면 이건 또 너에 대한 K의 고험일 수도 있다. 네가 이 일이 적성에 맞는지를 소리 없이 테스트하는 것일 수도 있다. K는 북경미디어대학(北京传媒大学)을 졸업한 유능한 사람이다. 그가 이미 찍은 여러편의 다큐멘터리들이 국제상을 수상했고 중국에서도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였다. 한때 CCTV 명프로인 〈동방시공간〉의 담당PD였고 후에 다큐멘터리 PD 쪽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많은 다큐멘터리를 직접 기획, 제작한 K는 명석한 통찰력과 풍부한 현장경험을 갖고 있다. 그는 자신이 선택한 직업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여기고 올인해온 사람이다. 내가 굳이 너를 북경에 보낸 것은 큰 물에서 이런 스케일이 크고 경험이 풍부한 PD를 만나 배우게 하기 위해서였다. 사실 나는 몇년전부터 인맥을 통해 K와 연줄을 달았고 북경에 갈 때마다 찾아 함께 식사도 하고 술도 마시면서 친구처럼 사귀였다. 나는 그 때 K에게 앞으로 혹시 아들을 부탁할지도 모른다고 넌지시 말했고 K는 흔쾌히 맡아주겠다고 대답했다. 사실 우리는 부모로서 네가 곁에 있으면 덜 외롭겠지만 너의 더 나은 미래를 위해 북경에 보냈던 것이다. 네가 다큐멘터리에 관한 책을 사서 읽는다는 말을 듣고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더구나. 다큐멘터리는 기획에서부터 여러가지 준비과정을 거쳐 제작, 방송되기까지 카메라, 조명, 조작기술, 컴퓨터그래픽, 음악, 자료조사 등 각 분야 전문가들의 참여를 필요로 한다. PD는 이들의 의견을 종합해 판단하고 팀을 이끌어가는 지휘자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프로에 대한 최종책임도 PD가 지게 된다. 따라서 PD는 자기의 주장을 고집하기보다 팀의 모든 성원들이 좋은 아이디어를 낼 수 있도록 널리 의견을 경청하는 자세를 취해야 한다. 네가 K를 잘 보필하려면 여러 방면의 지식과 상식을 장악해야 한다. 그렇게 하다 보면 너도 자연스럽게 PD의 역할을 감당하게 될 것이다. 아버지가 지방 텔레비죤방송국에서 다큐멘터리를 제작할 때는 이런 규모 있는 정상적인 절차를 밟을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인력이 부족하여 한개 프로에 많은 사람을 투입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기껏해야 한 팀에 5명, 6명이였기에 새 다큐멘터리를 준비할 때면 곁에 너와 같은 보조를 두고 자료수집 등 여러가지 일을 맡길 형편이 못되였다. 그러다보니 내가 제작하려는 내용에 관련되는 부서와 학자, 전문가 등 인물들을 섭외하는 일은 거의 PD인 나의 몫이였다. 그리고 내가 제작하는 다큐멘터리를 위해 전문가팀을 무어 수시로 그들에게 자문을 구해야 했다. 지금 네가 참여한 대형 다큐멘터리 《이화원》도 력사제재이다보니 어려움이 많을 것이다. 짬짬이 시간을 내 너도 《이화원》 관련 력사자료를 많이 찾아보고 나름 대로 지식을 터득하거라. 우선은 네가 하고 있는 일과 관련된 참고서들을 읽으며 지식을 터득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렇게 배워둔 력사지식은 머리속에서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또한 이런 력사사실이 어떻게 다큐멘터리로 제작되는지를 알게 되면 앞으로 네가 PD로 성장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중국의 이름난 서예가 황영년선생을 취재하고 그리고 너도 따로 PD수첩을 갖추고 매일 촬영현장에서 일어나는 일들과 K의 작업을 기록하고 네가 느끼는 감수를 적어두기 바란다. 또 《이화원》에 응한 력사학자들의 인터뷰 원본을 잘 보관해두는 것을 잊지 말거라. 그들 모두 중국에서 이름난 력사학자나 전문가들이다. 이런 기회가 아니면 앞으로 다시 만나기 어려운 분들이다. 이들의 연박한 지식과 철학적 사유 그리고 높은 인격적 수양은 만민이 우러르는 본보기이다. 짬짬이 이들의 저작이나 작품들을 읽고 터득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너도 훌륭한 사람으로 성장될 것이다. 너희들이 전번에 인터뷰한 여추우(余秋雨) 같은 분은 《힘든 문화려행기》를 비롯한 좋은 작품집을 수두룩이 펴냈으며 력사, 문화, 예술 등 다방면에서 박식한 분이다. 물론 제작할 때에는 인터뷰 내용들을 필요한 부분만 잘라 쓰겠지만 앞으로는 모두 소중한 자료로 남게 될 것이고 꼭 요긴하게 쓰일 때가 있을 것이다. 요즈음 아버지는 전에 촬영했던 내용물들을 정리하면서 참말로 보귀한 인터뷰내용들을 발견하였다. 내가 취재했던 적지 않은 인터뷰상대들은 이미 작고하여 그 자료적 가치가 더욱 소중해졌다. 나는 이제 그 인터뷰내용들을 정리하여 참고서로 만들 생각이다. 앞으로 내가 일하는 데 훌륭한 지침서로 될 것이다. 그리고 항상 K가 어떤 생각을 하고 무엇을 수요하는지를 체크하고 네가 옆에서 잘 챙겨주어라. 이것은 전반 팀의 작업에도 유리하며 네가 K의 긍정을 받는 좋은 일이기도 하다. 팀을 조화롭게 이끌고 촬영사와 조명사, 록음사들과 팀워크를 형성하는 능력을 키워야 한다. 이래야만이 네가 K를 보필한 보람이 있게 된다. 금방 촬영팀에 합류한 네가 K의 중시를 받으면 시샘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들에게 친절하게 잘해주고 허리 굽혀 자세를 낮추어야 한다. 언제나 겸손이 긍정을, 오만이 배타를 낳는 법이다. 나도 일하면서 이런저런 사람들과 많이 접촉해보았는데 항상 자세를 낮추고 허심하게 배우는 사람이 끝까지 견지하더구나. 뭘 좀 안다고 오만방자하게 굴고 일을 시키면 군소리를 하는 사람은 자연히 도태되더라. 남보다 일을 더하고 부지런히 배우고 다른 사람들이 수요하는 것을 제때에 챙겨주면서 일을 배우면 너에게도 성과가 고스란히 돌아올 것이다. 그러하되 모든 것은 진심이여야 한다는 점을 명심하기 바란다. 너의 인간성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런 것들은 내가 겪어보았기 때문에 꼭 말해주고 싶다. 내가 쓰던 사진기도 보내줄 테니 팀에서 가장 세심한 기록자가 되거라. K가 현장에서 일하는 모습도 많이 담아두거라. 이 또한 좋은 학습과정이 될 것이다. 모든 기록은 앞으로 좋은 력사자료로 남는다는 것을 항상 명심하거라. 중요한 소재를 어느 만큼 축적하고 있는지는 앞으로 네가 훌륭한 PD로 성장하는 데 관건적인 요소로 작용할 것이다. 오늘은 이만 줄이려 한다. 이젠 너도 다 성장한 어른이 되였으니 나의 이런 조언들이 혹시 잔소리로 들릴가 저어되기도 한다. 자식한테 잔소리를 끊지 못하는 게 부모의 마음인가 보다. 다음에는 다큐멘터리의 리론에 대해 이야기하려 한다. 지금 너의 형편에서 책을 들고 전문지식을 공부할 여유가 없으니 내가 짬짬이 편지를 써서 리론적인 것만이라도 적어 보내야 네가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짜증내지 말고 내심하게 잘 읽어보기 바란다. 전번에 보낸 나의 편지가 큰 위안이 되였다니 기쁘다. 아들아, 전번에 소화가 잘 안된다고 하더니 이젠 좀 괜찮아졌니? 밖에서 음식을 먹을 땐 항상 조심해서 챙겨먹도록 해라. 그리고 아무리 바쁘더라도 수염을 매일매일 깎거라. 안 그러면 게을러보이고 골기 없어보인다. 이젠 너의 형상도 조직을 대표하는 만큼 신경 써야 한다. 오늘도 말이 길어졌구나. 네가 자주 문자 메시지를 보내주니 우린 한결 시름이 놓인다. 지금은 우리 모두에게 너의 앞날이 묘망하게 느껴지지만 머지않은 장래에 희망이 보일 것이다. 힘내라, 아들. 2011년 9월 20일   《예술세계》 2022년 제2호     김광현 프로필 화룡현 농촌이동영화방영대 해설원. 연변영화공사, 연변텔레비죤방송국, 연변위성텔레비죤방송국 등에서 40여년간 프로 사회자, 편집, 번역, 다큐멘터리 프로듀서로 활약. 미국 남캐롤라이나주 그린별 영상아카데미에서 5년간 과외로 다큐멘터리를 공부함. 주요작품: 10부작 력사 다큐멘터리 《영원한 기념비》, 12부작 력사다큐멘터리 《중국조선족혁명투쟁사》, 4부작 휴먼 다큐멘터리 《정률성》 등 수십편. 
4    《예술세계》2022년 2호 목록 댓글:  조회:416  추천:0  2022-04-29
3    영화를 사랑하는 우리 ‘가족들’(1) 댓글:  조회:529  추천:5  2022-02-28
영화를 사랑하는 우리 ‘가족들’(1) □ 손룡호       드디여 꿈을 이룬 채운보     영화를 즐기지 않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그러나 영화배우가 된다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영화를 너무 좋아하고 또 언젠가는 꼭 스크린에 나타나 관객에게 감동을 주는 연기를 보여주고 싶은 욕망, 아니 불타는 꿈이 있었던 분이 있다.     채운보, 훈춘사람, 중앙민족학원 졸업생, 주법원에서 퇴직, 올해 60대 중반을 넘어선 사람이다.     채운보는 어릴 적부터 혁명영웅을 칭송한 영화를 많이 보아왔다. 한편 막연하게나마 꿈도 가져보았다.     ‘나도 영화배우가 되여 영웅인물을 연기할 수 없을가?’     젊은 시절, 가까운 친구들도 채운보의 훤칠한 키와 름름하게 잘생긴 용모 그리고 문화체육방면에서 늘 남다른 실력으로 항상 선줄을 끄는 그를 보고 영화배우감이라며 혀를 내둘렀다.     그럴 때마다 그의 심저에서는 배우가 되여보고 싶은 욕망의 불길이 활활 타올랐다. 하지만 기회는 도무지 찾아오지 않고 나이도 점점 먹어가면서 영화배우의 꿈은 서서히 사그라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채운보에게 중앙민족학원 동창생 허룡석으로부터 느닷없이 전화가 걸려왔다.     “이보, 운보, 연변영화드라마애호가협회에서 내가 쓴 극본 〈설날〉을 영화로 제작하기로 하였소. 영화에서 다섯살짜리 아역배우가 필요한데 추천해줄 아이가 있으면 추천 바라오.”     “무슨 소리? 아역배우?”     순간 채운보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간 것은 바로 그의 다섯살난 손자였다. ‘그래, 내 생애에서 실현 못한 꿈을 어린 손자한테서 이루는 것도 욕심부릴 만하지.’     “있소. 내 손자가 다섯살이요. 아이가 귀엽게 생기고 총명해서 될듯 싶은데 추천해보지.”     내가 아이를 만나보니 귀염성스럽고 발음도 똑똑하였다. 마음에 들었다. 그러나 연기를 잘할지는 파악이 없었다. 낯선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아이에게 연기를 요구하는 일은 무리라고 생각되여 극본을 채운보에게 주면서 말하였다.     “이 극본을 가지고 집에 돌아가서 아역배우가 등장하는 장면을 잘 본 뒤 아이한테 시켜보세요. 애가 배역을 맡을 수 있는지 없는지를 판단하여 저에게 전화주세요.”     그 날, 밤 8시가 넘었을 때 채운보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감독님, 우리 정우한테 연기를 시켜보았는데 될 것 같습니다.”     자신에 찬 목소리였다.     “그럼 됩니다. 할아버지가 촬영기간 함께 동행해주세요.”     어른이 곁에 있으면 아이들은 마음이 안정되여 시름 놓고 장난질하면서 연기를 해낼 수 있다. 채운보는 어떻게나 이번 기회에 손자의 곁에서 튼튼한 둘러리가 되여 좋은 연기력을 끄집어낼 수 있도록 돕고 싶었다.     정우는 령리하고 집중력이 강했으며 감성이 풍부한 아이였다. 뜻밖에도 내가 요구하는 대로 또박또박 대사를 읊었고 목소리까지 엄마, 아빠에 대한 그리움에 젖어들면서 아이들의 여린 감정세계를 진실하고 자연스럽게 연기해나갔다.     현장에 있는 다른 성인배우와 스태프들도 입을 딱 벌리였다. 정우의 연기에 눈굽까지 찍어가면서 감동하였다. 곁에서 눈물이 글썽하여 손자의 연기를 지켜보는 할아버지 채운보는 자기가 못 이룬 꿈이 손자한테서 이루어지는 현실을 느끼면서 무등 기뻐했다.   미니영화 《설날》에서 손자 역을 맡은 채정우     기회는 꿈꾸는 자에게 찾아온다.     2018년 4월, 미니영화 《아버지의 유산》(김무 극본)을 제작하게 되였다.     나는 협회 회원들 가운데서 극본 요구에 알맞는 배우들을 골라 통지하여 사무실에 모이게 하였다. 먼저 극본을 읽어보면서 자기절로 어느 배역을 할 수 있는지 생각해보라고 하였다.     극본열독이 끝나자 사람들의 얼굴에는 미소가 어리였다. 자기가 맡을 배역이 불 보듯 뻔하니 말이다. 그렇게 배역이 하나하나 배분되고 마지막 한사람이 남았다. 키가 껑충하고 눈섭이 짙고 잘생긴 채운보였다.     “마지막으로 바보아들 역이 남았습니다. 배역을 배분 받지 못한 사람도 채운보입니다. 채운보님, 바보아들 역을 맡아주십시오.”     다들 놀랐다. 채운보 자신은 더구나 접수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손사래를 쳤다.     “배역 배분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돌아가서 극본을 잘 읽어보고 맡은 배역을 어떻게 하면 잘 소화할지 고민해보세요.”     그래도 채운보는 참을성이 있었다. 가타부타 말 없이 극본을 가지고 돌아갔다.     집에 돌아간 채운보는 극본을 들여다보면서 깊은 생각에 잠기였다. 사실 많은 영화들에서 바보 역을 맡는 배우들은 명배우들이였다. 나쁜 일이 아니였다. 극본요구 대로 연기해내면 되는 것이였다. 워낙 도전정신이 강한 채운보는 이 역을 감당하기로 마음 먹었다.     하자고 마음 먹으니 인물의 행동거지며 정신세계가 서서히 그의 몸에 자리 잡아갔다.     ‘그래, 바보배역으로 오래동안 꿈꿔오던 배우꿈을 실현해보자.’     채운보는 극본을 자세히 분석해보며 주인공의 심리, 동작, 얼굴표정 등을 바보스럽게 하나하나 련상하면서 행동들을 익혀갔다. 생각해보니 동작 모방도 중요하지만 표정, 목소리, 몸짓으로 주인공의 내심세계를 표현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여 심사숙고 끝에 눈과 입은 한껏 비뚤어지고 한쪽 팔이 안으로 굽어들고 손가락도 탈리고 한쪽 다리는 밖으로 절룩거리는 연기를 펼치기로 가닥을 잡았다.     극본에서 주인공은 몸이 성치 못하고 지적 장애를 가지고 있더라도 심성이 착한 인물이였다. 형제들이 아버지가 돌아가자 집을 발칵 뒤지면서 유서, 저금통장을 찾으며 란리법석을 떨고 보모를 쫓아내려고 날뛰고 있을 때 바보아들은 자기와 아버지를 여러해 동안 보살펴온 착한 보모를 지키려고 나선다. 동물적인 감각이다. 자기를 보살펴왔던 보모에 대한 믿음이고 존경이고 의뢰심이였다.     지적 장애로 죽음에 대한 의식이 모호하기에 아버지유상에 대고 물을 대접하는 바보아들, 죽은 아버지가 살아있다고 절규하는 바보아들, 프랑스 영화 《빠리 노뜨르담》의 착한 종지기와 흡사하였다.     사실 아버지의 유상을 가슴에 안고 “아버지가 살아있다.”고 웨치는 것은 돈에 혈안이 된 형제들과 사리사욕에 어두워 량심과 착한 인정을 짓밟는 인간들에 대한 단호한 규탄이기도 하다. 정의의 함성이였다. 착한 사람들의 선량한 마음이 살아있다는 울부짖음이기도 하였다.     형제들로부터도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하는, 세상물정을 모르는 바보지만 자기 리익밖에 모르는 금전만능주의 형제들과는 달리 자기를 극진히 관심해주고 보살펴준 아버지와 보모에 대한 고마움과 의뢰심, 보호의식을 갖춘 주인공의 마음가짐은 어느 시대나를 막론하고 찬미 받아야 할 착한 인품인 것이다.     채운보는 영화에서 주인공의 이러한 성품을 너무나 진실하게, 핍진하게 잘 표현하였다.     영화가 방영된 후 채운보는 친구에게서 걸려온 재미나는 전화 한통을 받았다고 한다.     “이보게, 내가 미니영화를 한편 보았는데 영화에서 바보 역을 맡은 배우의 모색이 꼭 당신을 닮았더라구. 연기를 정말 잘하더라이. 당신도 한번 도전해보라니까.”     친구는 영화 속 주인공이 진짜 채운보일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던 것이다. 그후 주인공의 정체를 알고 나서야 친구는 “역시 채운보답다.”며 진심으로 축하해줬다고 한다.     채운보의 연기특점을 모아보면 아래와 같다.     1) 영화에 대한 깊은 리해가 있기에 극본을 손에 쥐게 되면 자기가 맡을 극중인물의 내심세계를 깊이 파고들고 표정과 행동거지를 알맞게 련상하면서 연기실천에 옮긴다.     2) 인물의 내면심리활동을 생활적으로 자연스럽게 잘 연기해낸다.     3) 연기에 몰입하여 최선의 연기를 보여주려고 노력한다.     2018년 9월, 미니영화 《빚》을 제작할 때 채운보를 할아버지 역으로 채용하였다. 또한 채운보의 손녀 채정아를 아역배우로 캐스팅하면서 할아버지와 손녀에게 잊지 못할 추억을 남겨주었다. 《빚》 촬영기간에 채운보는 아주 헌신적이였다. 촬영장소 일곱개중에서 네개 장소를 그가 제공하였다. 제작비가 넉넉치 못한 상황임에도 채운보처럼 헌신적인 ‘영화가족’ 성원들이 있기에 순조롭게 매편의 영화를 제작할 수 있었고 앞으로도 우리 연변영화드라마애호가협회가 크게 발전할 것임을 전망한다.     미니영화 《아버지의 유산》에서 바보아들 역을 맡은 채운보     인생은 누구한테나 단 한번뿐이다. 많은 사람들은 여러가지 원인으로 꿈을 실현하지 못하고 그냥 접는다. 그러나 채운보는 그렇지 않다. 그는 가슴 속에 품은 꿈을 버리지 않고 오래동안 간직하고 있으면서 엄동이 지나면 꽃 피는 따스한 봄날이 온다는 것을 알고 기다려온 게 아닌가 싶다. 손자, 손녀와 함께 오래동안 갈망해왔던 숙원을 이룬 그에게 박수를 보낸다.   손룡호 | 연변영화드라마애호가협회 회장 《예술세계》 2022년 1호
2    프로듀서를 꿈꾸는 아들에게(1) 댓글:  조회:430  추천:0  2022-02-28
프로듀서를 꿈꾸는 아들에게(1) □ 김광현   김천룡, PD의 꿈을 안고     아들아, 너를 북경에 보낸 지 벌써 한달이 되여온다. 네가 간 후 아버지는 많은 걱정을 했다. 새로운 환경에 잘 적응할지, 또 네가 꿈꾸는 다큐멘터리 PD란 직업이 진정으로 너의 적성에 맞을지 말이다. 시청자들은 평소 텔레비죤을 통해 재미 있는 프로그람을 보면서도 그것이 만들어지는 과정이 얼마나 힘들고 간고한지를 모른다. 너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네가 대학을 졸업하고 처음 다큐멘터리분야의 일을 하고 싶다고 했을 때 아버지는 많은 고민을 했다. 네가 텔레비죤 프로제작 사업을 할 수 있는 좋은 여건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대학은 영상매체와 거리가 먼 영문학과를 나왔고 취미생활도 스포츠였으니 말이다. 그런 네가 다큐멘터리에 도전하려고 하니 나부터 잘 달통되지 않았다. 그동안 너는 아버지가 하는 텔레비죤 쪽의 일에 별로 관심도 보이지 않았고 흥취도 없어보였으니 말이다. 너의 일시적인 호기심일가 봐 걱정이 되였던 것이다. 남들이 하니 나도 한번 해보겠다는 장난기 섞인 생각이라면 애당초 발을 들여놓지 말아야 한다. 아까운 시간만 랑비하게 될 것이니 말이다. 그러나 네가 마음을 굳혔다고 하니 동의하는 수밖에 없었다. 한편 네가 내 뒤를 이어가겠다고 하니 그것도 나쁘지는 않았다. 부전자전이니 말이다. 텔레비죤방송 쪽의 일은 보기에는 멋지고 쉬운 것 같지만 남모르는 고생이 수도 없이 반복된다. 하기에 인내심이 필요한 직업이다. 사전 기획부터 자료수집, 기획서 작성, 촬영 허가를 받아야 하는 일까지 어느 하나 쉬운 게 없단다. 세상에 쉬운 일은 없다지만 종합예술로서의 텔레비죤방송사업도 결코 쉬운 것이 아님을 강조하고 싶어 하는 말이다. 많은 젊은이들이 호기심에 접어들었다가 결국 아까운 시간만 허비하고 힘들어 두 손 들고 물러났다. 무더위나 혹한에 무거운 장비를 옮기며 촬영하는 일도 힘들지만 그런 어려움은 근근히 시작에 불과하다. 촬영이 끝난 뒤에는 화면정리를 해야 하고 거듭되는 편집과정은 사람을 숨막히게 한다. 분, 초를 계산하고 따져가며 방송시간을 맞추는 일은 최고의 인내심을 요구한다. 네가 중학교에 다닐 때가 바로 아버지가 다큐멘터리를 촬영하느라 정신 없이 바쁠 때였다. 너도 기억할 거다. 그 무렵, 아버지는 제시간에 퇴근해본 적이 거의 없었다. 늦게 집에 와서도 프로그람을 구상하느라 량미간을 찡그리고 있었지. 그리고 일이 잘 풀리지 않으면 괜히 너한테 화를 내군 했었다. 지금도 그 때 일들을 생각하면 너한테 미안하기 그지없구나. 사춘기였던 너에게 아버지로서 따뜻한 사랑을 주지 못했고 속심의 말도 못 나누었다.     제작에서부터 방송까지 가는 험난한 길은 늘 시간이 부족하고 유감이 남았다. 시간적으로 늘 일에 쫓기다보니 가정적으로도 합격된 남편이나 아버지가 되기 힘들었다. 그리고 사회생활에서 좋은 친구를 사귀기도 힘들었다. 촬영을 나가게 되면 며칠이 걸릴지 모르고 작업현장에서 일에 집중하다보면 남들과 소통할 시간이 부족했다. 한마디로 텔레비죤 쪽의 일은 고생 자체이다. 어려움을 이겨낼 자신이 없으면 아예 일찌감치 다른 일자리를 찾는 게 좋을 거다. 다행히 너는 어릴 때부터 한가지 일을 시작하면 끝을 보고야 마는 끈질긴 아이여서 그나마 시름이 놓인다. 이번에도 너는 인생을 걸고 도전을 시작한다고 생각해야 한다.     어제 너의 책임PD인 K와 련락이 닿았는데 그동안의 너의 상황을 자세히 이야기해주더구나. 다행히 네가 제작팀에서 잘 적응하고 있고 생각 밖으로 팀원들과 잘 어울린다니 한시름 놓인다. 네가 성격이 내성적이라 팀원들과 어울리지 못할가 봐 은근히 걱정했었다. 네가 촬영팀의 팀원들과 원활한 소통을 하고 있다니 그 방면은 아버지가 너를 잘 리해하지 못했던 것 같다. 사실 지금 너는 제작팀에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존재이다. 내가 너를 추천했을 때 K는 그렇게 반기는 태도가 아니였다. 허나 전에 아버지와 한 약속이 있어 시험 삼아 몇달 두고보자고 했다. 그런데 네가 팀에서 벌써 자신의 존재를 나타내고 팀원들의 주목을 받고 있다니 네가 얼마나 열심히 노력하고 있는지 알 것 같다.     먼저 텔레비죤방송사업의 작업환경에 잘 적응해야 한다. 급급히 PD나 촬영 쪽에 붙어 배우겠다는 욕심을 가지지 말거라. 지금은 전반 다큐멘터리 촬영과정을 잘 료해하는 게 중요할 것 같다. 그러자면 부지런해야 한다. K의 말로는 네가 촬영현장에 도착하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절로 사전 준비작업을 잘해놓고 있다니 아주 잘하는 일이다. 그리고 촬영사, 조명사, 록음사들의 일도 알아서 척척 도와주어 모두들 너를 좋아하기 시작했다는구나. 아무튼 먼저 사람과 환경에 잘 적응하는 것이 중요하다. 현재 너의 심정이 어떠할지 아버지는 잘 안다. 촬영팀에서 네가 하는 모든 궂은일, 힘든 일들은 네가 반드시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편할 거다. 아버지도 처음 촬영팀을 따라 나갔을 때엔 자존심이 상하는 일들을 많이 겪었다. 허나 그런 것들은 내가 반드시 겪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며 참았단다. 모든 일을 마음으로 하거라. 어디서나 진심은 통하는 법이다. 그리고 너 자신의 발전에도 리로울 것이다. 아래의 몇가지를 명심하거라.     첫째, 촬영팀의 온갖 자잘한 일들을 도맡아하게 되면 촬영팀이 어떻게 맞물려 돌아가는지를 인차 파악할 수 있다.     둘째, 각 부문의 협력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게 된다.     셋째, 솔직히 말해 부모자식간에도 일이 사랑이라고 네가 남을 잘 도와주면 싫어할 사람이 없다.   김천룡, 다큐멘터리 〈이화원〉 촬영현장에서         아버지는 네가 찍어 보낸 〈이화원〉 촬영팀 작업현장 사진을 보고 깜짝 놀랐다. 50여명이나 되는 스태프들이 맞물려 돌아가는 촬영현장에서 너의 존재가 미약하게나마 알려지기 시작했다는 것이 기뻤다. 아버지가 몸 담았던 지방 텔레비죤방송국에는 한팀에 스태프가 기껏해야 서너명이다. 너희들처럼 방대한 팀은 책임PD가 신경 써야 할 일이 아주 많을 것이다. 그러다 보면 스태프중 어느 누가 제 앞가림을 못하면 전반 촬영팀에 피해를 주게 된다. 하기에 PD는 자연 신경이 날카로워질 수밖에 없다. 성질이 사나운 PD는 입에서 욕이 떠나지 않기도 한단다. 아버지도 다큐멘터리를 촬영할 때 젊은 촬영사나 제작일군들을 많이 다그치고 혼냈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도저히 일을 추진할 수가 없으니까. 저절로 다 알아서 하는 경우도 있지만 PD의 통합적인 조률이 없으면 일이 잘 안될 때가 많다. 물론 촬영이 끝나면 기분을 풀어주지만 비평 받은 사람들은 기분이 좋을 수가 없다. 너희들이 지금 촬영하고 있는 다큐멘터리 〈이화원〉은 력사제재인 만큼 어려움이 더 클 것이다. 나라를 대표하고 세계적인 범위의 시청자를 대상하여 제작하는 방대한 작업인 만큼 어떤 실수도 용납 안되는 일이다. 이 또한 너를 단련시키는 좋은 기회이기도 하다. K는 성격이 급하고 일이 잘 안되면 제작팀을 닥달하기로 이름 나있다. 아마 너한테도 례외가 아닐 것이다. 그러니 눈치를 봐가며 소신껏 알아서 하기 바란다. 어제 전화에서 다음달부터 너를 자기 곁에 두고 보조로 일을 시키겠다고 하더라. 네가 하도 열심히 배우려 하고 눈치껏 잘하니 점 찍고 양성하려나보다. 이것은 아버지가 생각지도 못했을 만큼 빠른 진전이다. 전번에 그가 너한테 한번 호통을 쳤다고 들었다. 그것은 네가 미워 그런 것이 아니라 일하다보면 때론 대신 욕을 먹는 사람이 따로 있기 때문이다. 이제 한달도 안되는 네게 무슨 그렇게 큰 실수가 있어 욕을 했겠니. 말하자면 ‘일벌백계’인 셈이다. 그런 걸 감수해야 앞으로 네 발전에 더 유리할 수 있다. PD 곁에 바싹 붙어서 전반 팀을 어떻게 이끌어가는지를 배우고 일하는 방법도 어깨너머로 배워야 한다. 그렇게 방대한 력사다큐멘터리를 촬영하면서 PD가 따로 너를 챙겨줄 시간이 없다. 모든 것은 너의 열정과 탐구하려는 노력에 달려있다.     너의 팀 성원들 거개가 학교에서 영상매체를 전공한 사람들이라고 들었다. 그렇다고 해서 네가 기 죽을 것까지는 없다. PD는 꼭 전업적으로 배운 사람만이 해야 한다는 규정이 없다. 너처럼 영어를 전공한 사람이 PD가 되는 경우도 많고 수학을 전공한 사람이 PD가 되는 경우도 수두룩하다. 그것은 PD사업에 대한 애착에 따라 결정된다고 본다. 너는 영문학과를 졸업했으니 세가지 언어를 장악한 큰 우세를 갖고 있다. 앞으로 영문 관련 참고서도 마음대로 읽을 수 있고 또 외국에 나갈 기회도 있을 수 있다. 영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으니 영어 원판 다큐멘터리도 마음껏 볼 수 있게 되여 참 잘된 일이다.       물론 방송 관련 전공이 PD의 일에 도움이 되겠지만 그렇다고 꼭 잘한다는 보장은 없다. 아버지의 경험에 비춰보면 전공보다 더 도움이 되는 것은 오히려 인간, 문화, 사회 등 자신을 둘러싼 주변세계에 대한 관심과 애정인 것 같다. 덧붙여 PD라는 직업은 영상 콘텐츠라는 작품을 만들어 대중과 함께 나누는 일이므로 예술적인 감성과 소통능력을 갖고 있으면 그게 큰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너도 잘 알다싶이 아버지도 사실 배운 전공이 따로 없다. 개인의 취미에 따라 영화사업에 종사하게 되였다. 17살부터 영화에 미쳐 날뛴 경력이 후에 다큐멘터리 PD로 되는 데 유조했을 뿐이다. 아버지는 어렸을 때부터 영화에 빠졌다. 영화극본을 달달 외울 수 있을 정도로 내용을 파악하였고 전쟁영화나 사랑영화 등 쟝르를 가리지 않고 보았다. 아버지가 본 영화만 해도 아마 수천편에 달할 것이다. 그리고 미국에서 생활할 때는 다큐멘터리 채널을 고정하고 시간 날 때마다 세계의 유명한 다큐멘터리프로를 많이 보았다. 다행히 아버지는 여러가지 생활경력이 풍부했고 또 어려서부터 독서를 많이 해 다방면의 지식을 두루 쌓았다. 이는 PD생활에 큰 도움이 됐다. 한마디로 아버지는 끈질긴 노력을 했기 때문에 다큐멘터리 PD로 거듭날 수 있었다. 너도 노력만 하면 아버지를 훨씬 초과할 수 있다. 너는 신세대의 산물을 많이 접수했고 또한 컴퓨터에 능하고 집에서 프로그람 제작도  일년정도 한 적이 있으니 말이다. 산이 크면 그림자도 큰 법이다. 북경이라는 이 문화중심에서 너도 생각이 커질 수 있고 멀리 내다볼 수 있기 때문이다. 비록 지금은 림시스태프에 불과하지만 앞으로는 꼭 달라질 것이라 믿는다.   아들과 함께     네가 전번에 나한테 한 질문이 생각난다.     “PD가 되기 위해 먼저 무엇을 해야 합니까?”     우선 참된 인격을 갖춰야 한다. 모든 분야의 전문일군들을 평가할 때 먼저 인격을 론하는 것도 바로 이런 원인이다. 그리고 PD가 되려는 리유를 스스로 정확히 설명할 수 있다면 자연스럽게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게 될 것이다. 그런 고민도 나중에 네가 훌륭한 PD로 성장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될 것이다.     다시한번 강조하지만 모든 것은 첫걸음부터 착실히 시작해야 한다. 급해서 되는 일이 아니다. 노력과 시간이 너를 훌륭한 PD로 만들어줄 것이다. 아버지도 오늘이 있기까지는 오랜 사회경험과 책임감 그리고 텔레비죤방송에 대한 애착과 뼈를 깎는 노력이 컸을 뿐이다. 그런 과정 속에서 쌓은 경험이 오늘 너에게 이렇게 편지를 쓸 수 있는 ‘자산’이 되였다. 네가 진정 텔레비죤방송 직업에 마음을 붙인 것 같아 아버지는 기쁘기 그지없다.     식사를 거르지 말고 건강을 잘 챙기기 바란다. 촬영현장에서 버텨내려면 건강이 첫째다. 너는 신체가 건강하고 운동을 좋아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짬짬이 운동을 견지하거라. 어머니가 네 걱정이 크다. 나한테는 전화 안해도 되지만 어머니한테는 문자라도 자주 하거라. 사랑한다. 아들, 힘내라! 2011년 9월 1일   《예술세계》 2022년 1호     김광현 프로필 화룡현 농촌이동영화방영대 해설원. 연변영화공사, 연변텔레비죤방송국, 연변위성텔레비죤방송국 등에서 40여년간 프로그람 사회자, 편집, 번역, 다큐멘터리 프로듀서로 활약. 미국 남캐롤라이나주 그린별 영상아카데미에서 5년간 과외로 다큐멘터리를 공부함. 주요작품: 10부작 력사 다큐멘터리 《영원한 기념비》, 12부작 력사다큐멘터리 《중국조선족혁명투쟁사》, 4부작 휴먼다큐멘터리 《정률성》 등 수십편.
1    《예술세계》2022년 1호 목록 댓글:  조회:422  추천:0  2022-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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