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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처럼 떠나가버린 친구
2024년 04월 30일 10시 16분  조회:966  추천:4  작성자: 예술세계
바람처럼 떠나가버린 친구
□ 주금파


 
인연
나는 1993년 12월 10일에 흑룡강성 목릉현 시골에서 혈혈단신으로 연변에 와서 30여년간 살면서 적잖은 인생고초를 다 겪었다. 그동안 나를 이끌어주고 아껴준 선배들도 많았지만 김문혁과는 고운 정 미운 정이 다 든 절친한 사이였다. 하기에 김문혁의 부고는 그야말로 청천벽력 같은 비보였다.
흑룡강성의 시골에 살 때 흑백텔레비죤으로 〈요청무대〉프로를 시청하면서 연변 배우들의 작품을 처음 접하게 되였다. 그 때는 신기하고 놀랍기만 했다. 그러다가 1995년부터 소품극본을 써가지고 연변TV 〈주말극장〉제작팀에 드나들기 시작했고 결국 그 다음해에 소품담당 편집으로 출근하게 되였다. 2년 쯤 출근하다가 〈주말극장〉이 〈토요무대〉로 타이틀을 바꾸면서 계약직인 나는 일자리를 잃고 말았다.
그 때 김문혁이 나에게 구원의 손길을 보내왔다. 당시 김문혁은 연길시구연단의 소속배우였는데 잠시 적을 남겨둔 채 하해(下海)하여 새별예술단을 운영하고 있었다. 평소 별로 가깝게 지낸 사이도 아니였는데 이렇게 도와주니 그 고마움은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그는 나를 극본작가로 초빙하고 싶다고 하면서 월급은 500원씩 주겠다고 했다. 1998년 당시에 500원이면 세집을 맡고 혼자 살아갈 수 있는 금액이였다.
이렇게 7, 8개월 동안 그의 예술단에서 직업작가로 있으면서 나는 그가 수년간 예술단을 운영하면서 수십만원의 빚을 지게 되였다는 걸 알게 되였다. 그러던 차 1999년 봄에 연변TV 청소년부에서 편집을 초빙한다는 소식을 접한 나는 편집부에 찾아갔고 행운스럽게 다시 연변텔레비죤방송국에 출근하게 되였다. 이 사실을 문혁에게 알리자 그는 당장 청소년부 주임에게 전화하여 청소년부의 직원들을 전부 데리고 나오라더니 어느 근사한 음식점에서 크게 한턱 냈다. 자기가 나를 예술단에 데리고 있으면서 제대로 잘해주지 못해 미안하던 차에 청소년부에서 나에게 일자리를 줘서 감사하다면서 말이다.
1년후, 〈스타의 밤〉이란 프로가 새로 창설되여 나는 거기로 자리를 옮겼다. 〈스타의 밤〉은 소품을 위주로 하는 프로이다보니 자연히 김문혁을 비롯한 배우들과 자주 만나게 되였다. 당시 내가 창작한 소품 〈고사리〉를 김문혁이 연출하고 송경철, 김문혁이 출연했는데 지금까지 관객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작품으로 남아있다. 그리고 뛰여난 베테랑 배우인지라 애드리브를 치며 아주 훌륭한 명작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한번은 열흘 넘게 련습한 어느 한 소품에서 갑자기 호칭을 바꿔야 하는 상황이 생겼다. 다른 사람 같으면 무조건 실수가 생겼으련만 김문혁은 용케도 대사 한마디 비끗하지 않고 완벽하게 마무리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 나는 베테랑 배우다운 그의 뛰여난 실력에 또 한번 감탄했다.
수십년간 연변TV에서 소품을 책임진 편집과 연출로 있으면서 느꼈던 바를 총화해보면 조선족중에 배우이면서 직접 극본을 쓰고 연출까지 할 수 있는 사람은 몇명 안된다. 그중 한사람으로 나는 김문혁을 꼽는다. 김문혁의 작품은 대사가 생활적이고 마디마디 폭소를 자아내는 언어로 엮어졌다. 그의 연기 좌우명이랄가, 언젠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채플린이 아닌 이상 어떤 희한한 육체언어(동작)여야 관객을 웃길 수 있겠소? 그렇기 때문에 대사, 바로 유모아적인 생활언어로 관객을 웃기는 게 중요하다고 보오.” 참으로 맞는 말이다. 김문혁이 창작한 〈술장사〉, 〈민들레무역공사〉 등 작품들을 보면 대사들이 맛갈스럽고 재미 있다. 그런데 유감도 없지 않아 있었다. 그의 작품들을 편집하다 보면 어떤 작품은 결말이 뱀에게 발을 붙여놓는 것처럼 그대로 두면 군더더기가 되고 그렇다고 잘라버리면 뭔가 완정하지 못한 감이 들군 했다.

 
텔레비죤드라마 《샘》의 한 장면(방미선 제공)
 

인간 김문혁
김문혁은 개성이 강한 친구였다.
두 사람이 모인 자리든 다섯 사람이 모인 자리든 대화하는 법이라고는 없이 줄창 혼자서만 말을 했다. 그래서 롱담 삼아 “김단장, 당신은 왜 대화할 줄 모르오? 대방이 말할 때는 들어주기도 해야지…”라고 하니까 그의 대답이 가관이다. “형님, 중창, 합창 해두 그중에 ‘쏠로’를 하고 싶지 누가 존재감 없이 군중배우를 하겠소? ”
한번은 한 후배가 진지하게 그와 이런 대화를 나누었다고 한다.
“형님처럼 말주변이 좋으려면 어떻게 하면 되오?”
“책을 많이 읽어보오.”
“얼매나 보면 되오?”
“한 서너마대 읽어보면 되오.”
확실히 김문혁은 독서광이였다. 고전소설 《삼국연의》를 몇번이나 읽었는지 책 속에 등장하는 수백명의 인물들의 이름, 기호, 사건의 발생년대 등을 줄줄 외웠다. 그가 좋은 작품을 써내고 좋은 연기자로 관객들의 호평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독서를 통해 축적한 풍부한 지식과 갈라놓을 수 없었다.
김문혁의 친구 접대는 지나치다 못해 랑비에 가까웠다. 외지에서 친구들이 오면 돌아갈 때까지 한주든 한달이든 접대하였다. 그러니 만천하에 친구들이 넘쳐났다. 외지 친구들을 접대하다 보면 자신의 월급에다 결혼사회를 해서 번 만원이 넘는 돈도 모자라서 나에게서 돈을 빌릴 때가 여러번 있었다.
그래서 “친구들 접대하는 데 쓰는 게 나쁜 거는 아닌데 자기 형편에서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하는 건 좀 삼가는 게 좋잖니? 접대비에 들어간 돈을 합하면 집 한채 값은 되겠다.”라고 나무라면 “형님, 이것두 다 투자요. 이제 내 결혼만 하게 되면 투자했던 돈이 다 들어오오.”라고 대꾸하군 했다.
나하고 자주 식사자리를 가졌지만 내가 살 때보다 그가 사는 경우가 많았다.
김문혁은 연길 우시장거리(牛市街)에 세집을 맡고 몇년간 살았다. 그가 외지로 회의를 가거나 전국소수민족문예종합공연에 참가하러 갈 때면 적게는 삼사일, 많게는 보름씩 집을 비울 때가 있었다. 그 때면 나 보고 자기 집을 봐달라고 부탁하군 했다. 세집인데 그냥 비워두면 되지 뭐 봐줄 필요가 있느냐고 했더니 새들을 키우는데 먹이와 물을 매일 줘야 한다는 것이였다.
그래서 가보았더니 비좁은 화장실과 주방이 딸린 단칸방이였는데 집안 배치가 이상하고 놀라웠다. 방 중간에 2인용 넓은 침대가 놓여져있었고 침대 주변에는 1m 높이가 넘는 푸른 화초화분이 빙 둘려있었다. 망자를 눕힌 주변에 빙 둘러놓은 화분 같은 느낌이 들어서 오싹하기까지 했다. 새조롱 안에는 앵무새를 포함한 20여마리의 새들이 뛰놀며 재잘거렸다. 새들이 쪼아먹는 좁쌀이 바닥에 가득 널렸고 새똥과 깃털이 날려서 방안의 공기가 혼탁하기가 말이 아니였다.
이러한 안 좋은 느낌을 그한테 곧바로 말하면 자존심이 무척 세고 고집이 강한 그가 받아들일 리 만무해서 빙빙 에둘러서 화분을 침대에 둘러놓지 말고 채광이 좋은 창 곁에 놓고 새조롱도 친구들한테 나눠주고 하나만 두면 좋지 않겠냐고 의논조로 말을 꺼내니 아니나다를가 “내 형님이 무슨 뜻으로 말하는지 알 만하오. 보토리 혼자 사는 집안에 공기 좋으라고 놓은 화초들인데…”라고 하며 내 말을 잘랐다.
17, 18년전 김문혁은 한달에 월급과 결혼식 사회수입을 합하여 15,000원이 넘는 적잖은 돈을 벌었다. 그중 일부는 빚 갚는 데 쓴다고 하지만 집을 사지 않는 것이 리해되지 않았다. 그 리유를 물으니 아빠트 한채를 사려면 수십만원이 드는데 어떻게 사겠냐고 했다. 그래서 선불금(首付款)으로 집값의 30% 정도만 내고 나머지는 대출받아서 다달이 지불하면 된다고 하니 그제야 그런 방법도 있느냐며 놀라는 것이였다. 똑똑한 사람이 왜 이런 데는 신경을 안 쓰는지 리해되지 않았다. 마침 그에게는 부동산 개발을 하는 친구가 있어 그의 도움으로 적합한 가격에 새집을 마련하게 되였다.
반년이 지난 어느 날, 그한테서 전화가 왔다. 퇴근하면 자기 새집에 와서 같이 식사를 하자고 했다. 그리하여 집들이 선물로 휴지와 비누가루를 사가지고 그의 집으로 찾아갔다. 집에 들어서니 TV를 걸어놓은 객실 벽 량옆에 예(艺)자를 쓴 서예작품이 한눈에 보였다. 글자크기는 우로부터 아래로 내려오며 커졌고 똑같은 글자들이 서로 다른 글씨체로 씌여졌으며 한쪽은 한어로, 다른 한쪽은 조선어로 되여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검은색 바탕에 흰색으로 글을 써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기분이 상할 가봐 이리저리 빙빙 에둘러서 이 장식이 좀 이상한 느낌이 든다고 말했다. 그러자 대뜸 “형님 말뜻이 뭔지 알았소! 그런데 형님은 무슨 미신을 그렇게 믿소?”라고 대답하는 것이였다. 본인이 틀렸다는 걸 번연히 알면서도 내 앞에서 곧바로 승인하고 고칠 김문혁이 아니였다. 그래서 한족 연출가 친구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며칠후 문혁의 새집에 간 그 친구는 집에 들어서자마자 초상집 분위기 같은 장식품들을 와락와락 뜯어버리며 다짜고짜 욕설을 퍼부었다. 낯색이 굳어진 문혁은 아무 대꾸도 못하고 고개를 숙인 채 핸드폰만 내려다보는 체하는 것이였다.
그로부터 일년후인 2011년 3월, 나는 뜻밖에도 김문혁이 풍을 맞았다는 소식을 접했다. 병실에 찾아가보니 병문안 왔던 사람들을 배웅하며 병상에서 내려선 그가 왼쪽다리를 절름거렸다.
사실 김문혁은 애주가이고 애연가였다. 한번 앉으면 반근짜리 구기자술 한병을 다 마시고 또 맥주 대여섯병을 마신다. 그리고 담배는 하루에 세갑씩 피운다. 그래서 만날 때마다 잔소리를 하였다. “사람이 절대 술을 못이기네라. 끊으란 말은 안할게. 제발 량을 줄이고 차수를 줄여라. 담배두 적게 피우고… 술담배를 너무 과하게 하니까 녀자들이 싫어하지.” 그러면 그는 이렇게 대답하군 했다. “형님, 내 장가 가서 아이가 있으면 담배는 끊을 수 있소. 그런데 지금은 아니요.”
김문혁의 불행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중풍 맞고 얼마후 한쪽 콩팥을 떼내는 수술을 했다. 원인을 물으니 신장결핵이란다. 그 말을 들으니 옛일이 떠올랐다. 2004년 쯤인가 김문혁이 사는 세집에 불리워가 밥을 먹은 적이 있다. 그 때 그가 하는 말이 세집에서 3년을 살면서 겨울에 석탄불 한번 때본 적이 없다고 했다. 추운 날이면 전기요를 켜고 잤고 겉바람이 셀 때에는 두꺼운 이불을 덮고 자면서 추위를 견뎠다고 한다. 그리고 대부분 밖에서 늦게까지 술 마시다 들어왔기에 추운 줄도 몰랐단다. 아무리 젊은 나이지만 자기 몸을 너무 아끼지 않고 구박한 게 아닌가 싶었다. 3년간 겨울에 불 때지 않은 랭방에서 잤으니 건강이 나빠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김문혁은 풍 맞은 후에도 나하고 위챗으로 계속 련락을 했다.
2015년 여름, 방송국에 사표를 내고 영화제작사를 경영하던 나는 2022년에 코로나로 큰 어려움에 봉착했다. 화는 홀로 오지 않는다고 어느날 저녁부터 아래턱이 뻣뻣해나며 감각이 이상했다. 그러더니 다음날부터 입과 얼굴이 오른쪽으로 비뚤어져갔다. 나는 ‘나도 풍을 맞는구나.’ 하고 한탄했다. 수십편의 작품을 준비해놨는데 코로나가 터져서 3년간 꼼짝없이 움직이지 못한 데다 또 풍까지 맞으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눈앞이 캄캄해났다.
이틀 밤낮을 자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내가 중풍으로 페인이 되면 금방 대학에 붙은 아들 뒤바라지는 어떻게 하며 또 평생 준비해둔 작품들이 제대로 빛도 보지 못했는데 이대로 인생을 마감해야 하나 하는 서러움과 절망에 울고 또 울었다.
그러다가 김문혁에게 전화를 걸어 간단히 내 증상을 말해주고 대처방법을 물었다.
“형님, 발음이 똑똑한 거 보니 중풍이 아니고 ‘맨탄(面瘫)’인 거 같소. 왼쪽 팔다리는 잘 움직여지오?” 
“응, 입만 비뚤었지 팔다리는 괜찮다. 그런데 ‘맨탄’이란 게 뭐야?”
“그게 면풍이요.”
그 말에 내가 깜짝 놀라서 소리 질렀다.
“면풍도 풍인데 그게 왜 중풍하고 상관 없니?”
“놀라지 마오. 면풍은 중풍하구 아무 상관 없소. 잘 때 얼굴에 찬바람 맞아서 그런 게요.”
그제야 알고지내는 의사들에게 전화를 걸어서 상황을 말해주니 확실히 중풍이 아니라고 했다. 침구치료를 하면 한달내로 정상이 된다는 것이였다.
면풍을 맞은 지 7일째에 연길시 전체의 격리가 풀리면서 병원들이 문을 열었다. 회사와 가까운 병원에 다니며 열흘 정도 침 맞고 물리치료를 받으니 비뚤었던 안면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그 때 나는 김문혁에게 진짜 너무 감사했다.

 
텔레비죤드라마 《샘》의 한 장면(방미선 제공)
 

종영자막
2009년 쯤의 어느 저녁 무렵, 청년호 음료매장의 의자에 앉은 우리 두 사람은 이 말 저 말 하다가 김문혁이 나에게 섭섭한 소리를 했다.
“드라마를 찍으면서 내게두 부연출 이름을 달아주면 형님께두 도움이 되지, 방해가 되겠소?”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를 내가 아니였다. 드라마작가가 되고 싶어 흑룡강성에서 원고 한주머니를 메고 연길에 온 나는 어렵사리 방송국에 입사하여 10년 넘게 근무하였지만 꿈을 실현하지 못해 광고부에서 촬영사로 근무하는 방호범과 함께 련습용으로 60분짜리 단편작품을 만들었다. 그 작품을 만들 때 찾지 않았다는 섭섭함에서 나온 말이였다.
그래서 그 때 내가 결심 발표하듯 얘기했다. “아직까지 난 작품 같은 작품을 만들지 못했다. 내가 련습용 작품에 아무리 친하다 해도 너 같은 명배우를 어찌 부르겠냐? 이제 다음 작품을 준비 잘해서 꼭 너에게 부탁할게.”
그리고 몇년후인 2011년 9월, 내가 처음으로 직접 극본을 쓰고 연출을 맡은 장편영화 《부모》가 제작되였다.
그런데 그 때는 김문혁이 중풍으로 앓고 있던 시기였다. 이렇게 우리는 영상작품으로 합작을 못한 유감을 영원히 남기게 되였다.
영화나 드라마가 끝날 때 올라가는 종영자막에는 작품에 출연했던 배우와 제작팀의 직종에 따라 이름이 새겨진다.
절대 대부분 사람들은 죽으면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점차 지워진다. 극히 드문 일부분의 명인들을 제외하고는 인류의 력사라는 거대한 세월의 종영자막에 자기의 이름을 남기지 못하고 사라진다. 흔적없이 바람처럼 사라져가는 우리들의 인생은 너무 허무하다.
술담배를 모르는 나에게는 친구가 많지 않다. 몇명 되지 않는 절친중에 김문혁이라는 스타가 있었다는 건 그가 내 인생 한 부분에 굵은 흔적으로 남아있는 친구임을 의미한다.
《샘》, 《백설화》에 주역으로 또 수많은 경전적인 소품무대에서 이름을 날린, 조선족 사회에 널리 알려진 김문혁은 우리 기억의 ‘종영자막’인에 영원한 배우로 이름을 새겨놓고 갔다.
45세에 예술인생을 마감하고 58세에 결국 바람처럼 이 세상을 영영 떠나가버린 친구여, 고통 없는 곳에서 편히 보내기를 바라면서 그의 유덕을 기리는 마음으로 이 글을 마감한다.      
 
 
 
주금파 | 연출가
《예술세계》 2024년 제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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