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천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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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    푸름한 그 새벽에 댓글:  조회:548  추천:0  2020-07-24
푸름한 그 새벽에 홍천룡 지루한 밤장막이 바야흐로 걷히게 될 동틀 무렵, 서광이 곧 어리게 될 시각이 각일각 박두해올수록 어둠은 더 짙어만 간다… 새 천년에 들어서기 전이였던 지난 세기말, 밤마다 꾸는 꿈은 파아란 희망이 펼쳐지는 바다가였다. 21세기에 가면 전쟁의 포연도 테로의 폭력도 지진의 재난도 질병의 아픔도 모두 사라지고 하늘가엔 비둘기가 날아예고 록음 속엔 방초가 향기롭고 지구촌은 웃음과 행복만이 여울치는 에덴동산이  될 것이라고 동경해왔었다. 헌데 새 천년 문턱에 들어서자마자 그만 벼락 같은 사건이 터졌다. 지구촌을 전률시켰던 ‘9.11’테로! 그 후 지구의 이곳저곳에서 일어난 지진과 해일로 인류는 어쩔 수 없는 재앙을 맞는다. 차바퀴로 세계를 누벼보겠다던 일본도 해일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였다. 뒤이어 사스가 인류사회에 도전장을 내던지며 걸고 들었다. 그 기염이 살벌했다. 하지만 21세기의 문명에 개화된 인류 역시 만만치는 않았다. 사스의 기염을 꺾고 반복되는 바이러스와의 전쟁에서 혈로를 뚫고 나와 한숨 쉬려고 할 때 이번엔 또 코로나19 바이러스 감염이 들이닥쳤다. 소리없는 괴력으로 인간접촉의 공간에서 게릴라전을 벌리며 육박해왔다. 언제 어디로부터 엄습해올지 모르는 그 공포에 인류가 경악에 떨었다. 삽시간에 모든 것이 얼어붙었다. 2020년 새해벽두의 칼바람이 그처럼 매서울 줄이야! 그제야 너도나도 깨우치는 바가 있었다. 아, 21세기 초반은 아직도 그 푸름한 새벽녘이였구나! 지난 세기 중반부터 우리 고향은 쭉-푸른 숲속에 잠겨왔었다. 앞벌엔 벼모가 푸르렀고 뒤산엔 나무숲이 청청했었다. 목이 마르면 샘물을 바가지로 들이켰고 배고프면 이밥이던 조밥이든 푸른 야채에 된장을 찍고 비벼서 먹었다. 당뇨가 병인지 모르고 살았고 생채기가 생기면 된장을 쭉 발랐으며 열이 나고 감기들면 꿀물을 타서 숟가락으로 퍼마시면 그만이였다. 그때는 화학비료를 밭에다 치는 줄 몰랐고 농약을 곡식에다 치는 줄 몰랐다. 그래서 앓음이란 모르고 살았다. 그 모든 것이 푸름이 안겨다준 덕이였다. 언제부터 우리의 먹거리에 문제가 생겼을가? 며칠 전 시골의 밭머리에서 뜨락또르에 앉은 농민과 목을 빼들고 몇마디 주고 받은 적이 있다 . “저기 저 모아둔게 무엇인가? 얼룩덜룩한게 약병 같은데…” “지금 세월에 농약이 없으면 농사를 어떻게 짓습둥?” 그렇구나! 농약을 치지 않으면 농사를 지을 수 없고 화학비료를 뿌리지 않으면 수확률을 높일 수 없는 오늘날의 현대화농업이구나. 요즘 아이들은 먼지가 뽀얀 북데기 속에 들어가 놀았다간 큰일 난다. 부모들의 줄욕세례는 둘째치고 그 먼지 속에서 세균이나 바이러스에 감염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아이들의 면역력이 살얼음처럼 취약해져 어루쓸어주자고 해도 손이 떨린다. 옛날에는 튼실하지 못한 아이를 온실 안의 화초에 비유하기도 했었다. 온실 속 화초는 푸름을 잃은 식물이다. 그때는 온실이 푸름을 앗아갔다면 지금은 농약이 푸름을 절궈내고 가스가 푸름을 중화시키고 오수가 푸름을 세탁해내고 있다. 이처럼 푸름을 앗아가는 세력을 밀어주는 파렴치한 막후 조종자는 어떤 작자일가? 바로 너도나도 다 좋아하는 돈이다. 돈이 많이 드는 곳일수록 푸름이 밀려나가게 된다. 모든 것이 시장경제로 구축되는 오늘날 자본이 그 경제를 활성화시키고 있다. 자본의 동력은 돈이다. 자본운영에서 원시적인 토대로 닦아지는 산업, 례컨대 광업, 가공, 제약, 제조 등 기초공업에 들어가는 기본원료가 자연을 파고 갉아낸 것들이란다. 공업이 자연을 말아먹는다고 공업을 페지할 수 있는가? 없다. 지금 세계는 인류생활의 수요와 향상의 욕구를 공업으로 실현하고 공업으로 발전해나가고 있다. 그래서 이 사회는 늘 자아모순에 빠지고 인류는 그 내연적인 갈등을 겪게 된다. 그 모순을 해결하고 그 갈등을 조률하고저 사회의 그린리더십이 강한 지도자들이 분분히 나서서 문제의 정곡을 찌르고 해결의 대책을 강구하고 있다. 습근평 주석께서도 다음과 같이 지적하셨다. “록수청산은 금산은산이다.” 그 리념에서 ‘금산은산’을 오로지 경제효익에다만 국한시킨다면 자칫 편면성에 빠질 수 있다. 록수청산이 우리에게 하사해줄 선물에는 보이는 실물도 있고 보이지 않는 무형 선물도 많다. 례컨대 건강학적으로 따져보면 록수청산, 즉 자연의 푸름이 인류에게 안겨줄 가장 큰 선물이 무엇일가? 또한 인류와 병마지간의 전쟁은 지속적인 진행형으로 이어져왔는바 승자와 패자 지간에 관건적인 요인으로 각인되고 있는 것이 무엇이였을가? 툭 찍어말하면 딱 한마디 면역력이다! 푸름을 잃어가는 우리의 ‘고급’ 생활이 우리의 면역력을 떨어뜨리고 있다. 각종 질병, 특히는 이번 코로나19가 휩쓸고 간 뒤에 남긴 교훈이 무엇인가? 너도나도 자기의 인체 면역력에 대해 너무나 홀시해왔다는 후회였다. 우리는 먹거리의 영양분으로, 운동체질의 튼실함으로, 기분의 전환으로 면역력을 높이려고 한다. 하지만 관건적이고 기본적인 것은 환경의 푸르름이다. 환경의 푸르름을 확보하자면 우선 자연조화의 섭리를 잘 체득해야 한다. 인류는 자연의 섭리에 순연히 순응하지  않은 탓으로 숱한 재앙을 겪어왔었다. 우리 연변에서도 식수조림에 등한했다가 골물피해를 당한 동네가 적지 않았다. 작년 여름에 모아산에 가본 분들은 아마도 소름이 바싹 돋는 정경에 경악을 금치 못했을 것이다. 보기만 해도 몸이 오싹해나는 송충이가 떼를 지어 사처에서 바글거렸다. 산기슭 등산길에서 발을 옮겨디딜 자리를 찾지 못해 아가씨들의 놀란 비명이 수시로 터지군 했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꿈질거리는 송충이떼는 정말 보기만 해도 끔찍스러웠다… 왜서 모아산에 이처럼 심각한 충해가 발생했을가? 그것도 2019년이라는 그 시점에서 슬그머니 애꿎은 등산객들을 놀래웠을가? 추측과 의문들이 쏟아졌다. 그 무슨 2019년은 봄이 없는 ‘무춘년’이여서 벌레가 성해졌다는 설도 있었고 지구온난화로 인기된 생태교란이라는 분석도 있었다. 아무튼 자연의 생태구성에 이상한 실금이 생기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였다. 한 여름에도 푸름이 시들 수 있다는 경고장이였고 메시지였다. 대책이 세워져야 했다. 푸름은 푸름으로 지켜내는것이 상책이다. 식수조림, 오물제거, 공업의 ‘점원오염(点源污染)’에 대한 개조, 농업의 ‘면원오염(面源污染)’에 대한 공제는 국가나 정부의 행정추진이고 우리 개개인도 세세한 생활일정에서 푸름을 키워내고 확보해나가야 하지 않겠는가! 개인적으로 푸름의 수호천사가 되자면 두가지 면에 좀 더 노력하고 신경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즉 실내와 실외의 일거일동이다. 실내에서는 거주환경과 음식위생에 주의하고 실외에서는 공공규칙에 언행을 단속하고 이산화탄소의 방출을 최대한 줄이는 것이 기본이여야 한다. 사실 관건은 그래도 마음가짐이다. 생태문화의 고양, 옛날과 현실의 리념차이, 자연속성과 개인심리 갈등, 기분정서와 환경변화 속의 함양적인 수양, 그리고 자각적인 질서 의식에는 차분한 마음가짐이 주추가 되여준다. 지난번 안해와 함께 오월답청 삼아 나물캐러 갔다. 모아산 서쪽골짜기를 넘어서니 완만한 언덕을 따라 푸른 풀이 잔디처럼 깔려 한폭의 풍경화를 이루고 있었다. 약동하는 봄기운이 푸근하게 안겨왔다. 그야말로 ‘저 푸른 초원 우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싶은 기분이랄가! 막바지 언덕자락을 휘도니 발밑으로 톱이가 배긴 잎사귀를 활딱 펼치고 동글납작하게 앉은 민들레가 밟혀왔다. “와, 무슨들레네!” “여기, 여기두… 저기두…” 안해가 떠는 호들갑에 살펴보니 새파란 민들레가 여기저기 쫙 깔려있었다. 요즘 민들레는 웰빙야채로 남새보다 더 귀해졌다. 그 옛날 민들레잎사귀에 달래를 움켜쥐고 토장에 뚝뚝 찍어서 와삭와삭 씹으면서도 “우리가 뭐 토끼냐! 이따위 풀잎을 다 술상에 올리구 그래?”라고 을러메던 뒤집 술고래아저씨의 볼멘 소리가 귀가로 막 울려오는 것만 같았다. 피씩- 절로 새는 웃음을 날리며 나는 미형 군용삽을 꺼내들었다. 많이 캐고 싶은 욕심이 꿈틀거렸다. 한삽에 한포기, 가끔 한꺼번에 두세포기씩 묻어날 때도 있었다. 그러다가 하얀 줄기에 노란 꽃을 피운 민들레도 묻어올랐다. 주위를 살펴보니 여기저기에서 배시시 웃음꽃을 날리는 민들레가 적지 않았다. 안해가 앉은뱅이 걸음질 치며 다가왔다. “여보, 꽃이 핀건 캐지도 마세요.” “왜?” 덩둘해서 묻는 나에게 안해는 고개를 갸웃이 탈며 말했다. “왜는 왜요? 꽃이 피였다는 건 이미 성가한 몸이라는 고백인거죠. 연연한 맛도 없고 쌉살한 맛도 날아나고 질기기만 해요. 그리고 꽃이 핀 걸 놔두어야 씨를 품은 갓털이 영글어지게 되여 락화되는 족족 봄바람을 타고 더 많은 씨를 저기 언덕너머로 날라다 뿌리지요. 그래야 명년엔 더 많은 민들레가 돋아나잖아요.” “어쭈, 와늘 정식이구만! 우리 마누라가 언제 이런 철학가로 탈바꿈했나?” 나는 허리를 쭉 펴며 일어섰다. 저 아래쪽 개울가엔 파란 버들이 휘휘 늘어지며 흐느적거린다. 파란 치마를 두른 공주가 어리광 부리는듯 앙증맞다. 그렇다. 안해의 말에 그 어떤 철리가 담겨져있는 것만 같다. 자연 식물인 민들레를 자주 캐 먹는 것도 신체에 유리한 일이지만 더 많은 사람들이 더 많이 캐서 먹게 하자면 더 많은 민들레가 돋아나도록 해야 자연선행의 베품이 될게 아닌가! 돌아올 때 푸름 속으로 오불꼬불 꼬리를 감추려는 오솔길로 내리막 걸음을 타노라니 허기진 배가 출렁거렸다. 파랗고 노랗고 빨간 등산객들의 오르내림이 푸름 속으로 어룽어룽거린다. 푸른 숲속 사이로 하늘을 쳐다보니 하늘은 파랗게 청청했다. 역시 푸른 숲속 사이로 저 멀리 내려다 보니 곡강분지에 틀고앉은 연길은 뽀얀 운무 속에 잠겨있었다. 홀연, 귀가로 연연히 울려주는 한가닥 선률이 있었다. 그 옛날 농촌에 내려 갔을 때 파란 벼모를 꽂으며 불렀던 노래다.   -푸름한 새벽에 해지는 저녁에… 연변일보 
72    아픔이 건강을 지켜준다 댓글:  조회:1810  추천:0  2013-08-29
아픔이 건강을 지켜준다 홍천룡 이 세상 아픔을 겪어보지 못한 사람도 있을가? 없다. 아픔도 모르는 사람은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픔이란 감각상에서 괴로운 느낌이고 정상적인 안위가 파렬되는 고통이고 불행이다. 아픔에는 대개 두가지 부류가 있는데 살과 뼈를 자극하는 육체적아픔이 있고 뇌신경을 자극하는 정신적아픔, 즉 마음속 아픔이 있다. 무릇 육체적아픔이든 마음속아픔이든 다 사람을 고통에 빠지게 하고 다 사람의 건강을 해친다. 때문에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아픔이 찾아오면 근심에 빠지거나 공포감에 휩싸여든다. 펀펀하던 사람이 어느날 배안의 밸이 뒤탈리듯 아파나면 괜히 위암이 아닌가고 공포감에 떤다. 오른쪽 옆구리가 아파나면 괜히 간암이 아닌가고 의심한다. 배가 아프면 음식을 잘못 먹었거나 급성리질일수도 있다. 헌데 사람들은 아픔이 크면 큰병인가고 여기는 페단이 많다. 왜? 오랜 세월에 걸친 관습적인 사유가 고집을 부리고 있기 때문이다. 고집을 쓰겠으면 쓰라지 무슨 대순가! 헌데 문제는 이런 고집때문에 자기의 건강을 망가뜨리기 쉽다는데 있다. 아픔이 크면 큰병에 걸렸다고 크게 치료하자고 이래저래 돈뭉치까지 준비해 가지고 갔더니 병원에서는 소화불량이라고 소화제 몇알만 달랑 떼주는게 아니겠는가! 그래서 그후부터는 웬간한 아픔은 완전히 무시해 버린다. 그 큰 아픔도 “소아과손님”에 불과한 소화불량이였거늘 요만한 아픔이야 뭐 “뒤잔등가려움”에 불과한거지… “짖지 않는 개가 사람을 문다”는 말이 있다. 요란한 아픔보다 잔잔한 아픔이 큰병을 불러오게 되여있다. 다시 말해서 암과 같은 큰병은 사람을 콱 “물기”전에는 “짖지” 않는게 특징이다. 이런 특징을 무시하게 되면 큰화를 입게 된다. 우리 연변에서는 여름 장마철이 되면 골물이 터질 때가 많다. 골물은 일반적으로 굽이굽이 산굽이를 에돌며 흐르지 않는다. 곧게 기세 사납게 “직통배기”로 흐르나 길게 멀리 흘러가지 못한다. 이와 반대로 초원이나 들판의 잔잔한 하천은 구불구불 꼬불딱거리며 흐르나 길게 멀리로 흘러간다. 우리 집 가친께서는 금년에 90고령에 이르시였다. 남자들 년령이 90세이면 일반적으로 장수한 편으로 인정한다. 친척들이 모여서 가친께서 장수하신 원인을 따져보니 뜻밖에도 앓음이였다. 내가 세상물정에 어섯눈이 트일 때부터 가친께서는 늘 앓음자랑에 약탕관을 달고 계셨다. 앓음이란 늘 아픔을 동반한다. 가친께서 매번 앓을 때마다 그 아픔이 주는 괴로움 때문에 늘 신음소리를 내시군 하셨는데 그 소리에 습관된 어머니는 “또, 또 엄살을 부린다”고 핀잔을 주시군 하였다. 지금도 그 신음소리가 가끔씩 방불히 들리는것만 같다. 그 “엄살”에 앓을 때마다 병원에 가서 검사하고 약을 지어오시군 하셨는데 지금 와서 따져보면 그 앓음, 그 아픔이 암과 같은 큰병을 막아준것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아무튼 지금까지 가친께서는 수술칼을 몸에 대보시지 못했다. 전신 그 어느 곳에서도 금속기구의 타박으로 생긴 흉터를 찾아볼수가 없다. 민간에서는 늘 “황소같던 사람이 불시에 죽었다”는 말을 듣게 된다. 앓음이란 모르고 아픔이란 모르고 늘 건강하게 날파람을 일구며 살아왔던 사람이 하루밤새에 그 머나먼 하늘천당으로 날아갔다면 모두들 믿기지 않아서 귀신이 데려갔다고 한다. 아픔이란 문지기가 그의 건강을 지켜주지 못한 탓이였다. 아픔이란 원래 괴로운 감각으로 고통에 빠지는 불행이지만 오늘날 가만히 따져보면 건강을 지켜주는 좋은 점도 있는것이였다. 아파야 병원에 찾아가게 되고 검진도 하고 그 비싼 약도 사먹게 된다. 아프지 않으면 누가 괜히 돈을 팔며 병원에 가겠는가! 또한 약간 아파서는 병원에 찾아가지 않는다. 이삼일 참고 지나면 언제 아팠더냐 싶게 인츰 나아지니까. 그런데 어떤 병은 아픔을 주지 않고 살금살금 암탉을 노리는 삵괭이처럼 찾아오고 또 어떤 병은 조금씩 아픔을 주며 개구리를 노리는 구렝이처럼 스르륵스르륵 찾아온다. 약간한 아픔이 잦아져서 병원으로 찾아가면 때를 놓칠 때가 있게 된다. 때문에 아프지 않을 때에도 가기 싫은 병원도 가보는것이 좋겠지만 공돈을 팔 때가 있으니까 가지 않아도 되는데 약간씩 아플 때에는 꼭 병원에 가볼 필요가 있다. 작은 아픔이지만 아픔이란 필경 고통스러운 것이다. 고통스러웠기 때문에 또한 그 아픔이 가셔질 때면 더없이 개운해지고 느껴보지 못했던 행복감을 느껴볼수 있는것이다. “아픔이 건강을 지켜준다”는 이 명언이 아닌 명언을 기억해 두시고 늘 건강을 지켜주시길 바라는 바이다.
71    글소리 랑랑했던 그 시절 댓글:  조회:1991  추천:1  2013-08-28
글소리 랑랑했던 그 시절 홍천룡 지난 세기 70년대초에 나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사회로 나왔다. 대학교입시제도가 페지된지 여러해 되였다. 나는 맥주공장의 림시로동자로 들어가 건축일을 하였다. 고된 로동에 지쳐 무거워진 다리를 끌며 대학교문앞을 지나 갈 때면 대학생이 되여보고싶은 욕망이 꿈틀거리군 했다. 허나 림시로동자로서는 그런 엄두도 못낼 처지였다. 그때 삼도탄광에서 로동자모집을 하였는데 나는 부모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불짐을 싸가지고 삼도만으로 갔다. 당시 탄광으로 가면 두가지 좋은 점이 있었다. 한가지는 정식로동자로 빨리 전이될수 있었고 한가지는 로임이 높은것이였다. 우리 작업반의 십오명가량 되는 일군들가운데서 나 혼자만 조선족이였다. 어느날 오후, 왕반장이 반원들을 불러 학습회의를 열었다. 왕반장이 신문을 약 십분간 읽고는 반원마다 돌아가며 발언하라고 재촉하였다. 련이어 몇사람이 열기 띤 발언을 했다. 내차례였다. 그때까지 나는 한어를 제대로 배워내지 못했고 한어로 발언하기는 처음이였다. 처음 몇마디는 한어로 나갔지만 그다음엔 저도 모르게 조선말이 나갔다. 그때 나와 사무상을 사이두고 마주 앉았던 로씨가 야멸차게 한마디 내쏘는것이였다. "니 쩌거 꼬리빵즈, 지리와라디 쟝썬머? 워먼 팅부둥. 깐추이 베쟝라(이 조선놈새끼야, 뭐라고 씨부렁거리는지 알아못듣겠어. 그만해!)" 나는 대뜸 밸이 왈칵 치밀어 올라 맞받아 한마디 내쏘았다. "마세이, 니 쩌거 싼뚱빵즈!(너 누굴 욕하고있어? 이 산동놈새끼야!)" "쩌 쑈투짜이즈, 쩐 뿌샹화. 까이따스타!(요 빌어먹을 새끼, 덜돼먹었어. 잡아쳐!)" 로씨가 벌떡 일어나며 나한테 주먹을 날렸다. 나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옆으로 숙였다. 그의 주먹이 귀전을 스치며 지나갔다. 그가 팔을 거둬들이는 틈을 타서 나도 주먹을 날렸다. 퍽! 하고 그 자식의 면상에서 코피가 탁 터져흘렀다. "쩌 쑈즈, 따런나!(이 자식, 사람을 친다!)" 내곁에 앉았던 녀석이 벌떡 일어나며 내 입술을 쳤다. 나의 입에서도 피가 터져나왔다. 그러자 다른 한 녀석이 사무상우로 풀쩍 뛰여올라 발길로 나의 턱을 걷어찼다. 나는 걸상과 함께 뒤로 벌렁 나자빠졌다. 뒤이어 숱한 사람들의 주먹이 나의 면상으로 날아들었고 숱한 발길이 나의 배며 하신을 걷어찼다. 사지가 얼얼해나며 숨이 꺽 막히는것만 같았다… 다행히 왕반장이 그들을 뜯어말려냈다. 이튿날 나는 매를 맞고도 "리론학습회"를 파괴했다는 죄로 비판까지 받았다. 더는 탄광에 붙박혀 있을수가 없었다. 이듬해 1월에 나는 시정부의 통일배치로 시량식국산하 의 "숙식품가공공장"에 정식로동자로 들어가게 되였다. 나는 인차 사상회보를 써서 당지부에 바쳤다. 당지부 최서기가 나를 찾았다. 그는 나의 어깨를 툭툭 쳐주며 사상회보를 제때에 써낸것을 높이 치하하며 한어를 잘 배워내라고 강조하면서 다음번 사상회보는 한어로 써오라는것이였다. 그후부터 나는 무슨 글을 쓸 일이 있게 되면 틀리든 말든 한자로 썼고 누구와 말을 하거나 회의발언할 때면 꺽꺽거리면서라도 한어로 했다. 그래서 웃음거리를 자아낸 적이 많았다. 1975년도는 나의 일생에서 가장 빛나는 한해였다. 1월 달에 정식로동자로 되였고 그달 중순에는 제2직장 제2조의 조장이 되였으며 4월달에는 공장건축시공대 대장이 되였다. 나는 밤낮이 따로 없이 뛰여다녔다. 그해 12월 28 일에 나는 입당하였고 전시 모범당원이 되여 상장과 영예증서만 해도 대여섯개를 수여받았다. 그해 겨울은 눈바람을 타고 둥둥 떠서 다녔다. 인젠 모든 조건이 다 구비되였다. 대학생추천지표만 내려오면 당상인것이였다. 그야말로 "만사구비에 지결 동남풍(万事俱备, 只欠东南风)"인 셈이였다. 헌데 그해도, 그 이듬해에도 대학생지표는 우리 공장에 내려오지 않았다. 1977년도 겨울에 대학입시제도가 회복되였다. 시험치기 사흘전에 말미를 맡고 이틀동안 복습제강을 대충 훑어보고 시험장으로 들어갔다. 시험문제가 별로 바쁜것 같지 않았다. 헌데 쉽게 여겼던 시험이 결코 쉽지 않았던 모양인지 나는 몇점차이로 락방되였다. 77년도 겨울은 날씨도 혹독하게 추웠다. 추운 겨울이 지나가니 화창한 봄날이 찾아왔다. 78년도 봄은 봄바람도 거세찼고 봄물도 빨리 녹아내렸다. 대학시험바람에 사회적인 공부열이 끓어번졌다. 아마 중국의 5천년 문명사에도 그 전례가 없었을것이다. 10년간 대학시험을 쳐보지 못한 중청년세대들이 모두 복습제강을 들고 나섰다. 가도가도 끝이 없는 광활한 대지가 하루 아침새에 배움의 천당으로 변하는것 같았다. 실안개 감도는 이른 아침이면 어디 앉아 책을 볼 자리를 찾기 힘들게 되였다. 거리에도 강둑에도 숲속에도 책을 보는 사람들로 공간이 다 메워졌다. 만민이 대학생이 되고 만천하가 교정이 된것 같은 성스러운 분위기여서 책을 쥐고 나서면 숭엄해지는 기분이였다. 그 가운데는 학교문을 금방 나온 초중졸업생도 있었고 "로싼제(老三届)"고중졸업생도 있었으며 혼자 나온 사람도 있었고 부부동반하여 나온 사람도 있었다. 개중에는 챤스를 잘보는 "못된 송아지"들도 있었다. 공부도 할겸 련애도 할겸 슬금슬금 처녀애들의 뛰꽁무니를 따라 이 나무 저 나무밑을 기웃거리며 어슬렁거리는 녀석들도 있었다. 한창 나이라 나도 그런 유혹에 빠져들었다. 당시 부르하통하수원지(지금의 연길호텔주변임)에 가면 자그마한 개울물이 흐르고있었다. 개울가곁에 큰 비술나무가 있었는데 나는 아침마다 그 비술나무밑에 가서 복습하군 했다. 어느날 아침에 한 처녀애가 그 비술나무에서 얼마쯤 떨어진 백양나무밑에 와서 공부하는것이였다. 날씬한 몸매라든가 갸름한 얼굴이라든가 어느 모로 보나 총각들의 눈길을 끌만한 처녀애였다. 댕금하니 서서 책을 보는 자태나 앙증맞게 앉아서 글을 쓰는 모습은 정말 한폭의 그림이였다. 더구나 량어깨를 사선으로 이어놓은 두가닥의 쌍태머리가 몸매의 움직임에 따라 한쌍의 깜장나비처럼 어깨우에서 춤을 출 때면 률동미가 시각조화를 이루어주어 더욱 눈뿌리를 뺐다. 아늑한 아침에 미묘한 화면분위기에 매달려 일렁이는 감정파문이랄가! 아무튼 혼쭐이 방향없이 둥둥 떴다. 출근시간때문에 언제나 내가 먼저 아쉬운 자리를 뜨군 했다. 어느 하루아침이였다. 내가 거의 한시간이나 복습제강을 외웠는데도 저쪽 백양나무 밑은 그냥 비여있었다. 허전한 감이 들며 별로 근심스럽기도 했다. 아침복습을 포기했을가 아니면 앓아누웠을가? 시간이 되여 일어나 강뚝길에 올라섰다. 헌데 웬걸, 마침 그 처녀애도 저쪽켠으로부터 강뚝길에 올라서고있었다. 어쩔수 없이 정면으로 마주 띠우게 되였다. 처녀애가 낯을 살짝 붉히면서 고개를 숙이였다. “문과를 복습하죠?” “양. 거긴?” “저도 문과예요. 집체호의 일때문에 늦게 시작하다보니 복습제강을 제대로 얻지 못해서…” “그럼 이걸 가져다가 보오.” “아니 그럼 거긴?” 처녀애는 뒤걸음질 치며 손을 내저었다. 그럴수록 더 대범해지는 것이 남자다. “일없소. 난 또 얻을수 있다니까.” 기실 그 복습제강은 힘들게 얻은것이였다. 나는 우격다짐으로 복습제강을 처녀애의 손에 쥐여주었다. 처녀애가 그걸 받아쥐고 훑어보더니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한어문이구만요. 전 한어로는 안돼요.” 그러면서 처녀애는 복습제강을 되돌려주는것이였다. 갈라질 때 우리는 서로 복습을 잘해서 대학에 붙기를 기원해주었다. 이튿날 아침, 웬 녀석이 내 자리에 앉아 제법 소리를 왕왕 내며 무엇을 외우고있었다. 수시로 백양나무밑에 앉은 처녀애쪽으로 눈을 흘끔거리며… 괘씸했지만 쫓을수도 없어 좀 떨어진 다른 비술나무밑으로 찾아갔다. 한 처녀애와 두 남자애가 갈라져앉은 세곳을 점선으로 이어놓는다면 아마도 직각삼각형쯤은 될것 같았다. 나는 먼저 주동이 되여 보자고 작심했다. 그래서 그 처녀애한테 줄 복습제강도 얻어놓았다. 헌데 그날 아침부터 그 처녀애는 다시 나오지 않았다. 며칠은 무엇을 잃어버린듯 마음이 허전해서 복습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그후 한번도 그 처녀애를 다시 만나지 못했다. 갸름한 얼굴에 새물거리는 실눈이 인상적이였는데… 30여년이 지난 지금도 눈만 감으면 백양나무밑에서 공부하던 그 처녀애의 동탕한 모습이 떠오른다. 시험날을 한달 남겨두고 복습을 다그쳐야겠다고 청가를 달라고하니 아예 부결당했다. 이튿날 나는 예나 다름없이 어머니가 싸주신 도시락을 가방에 넣고 공장으로 나간것이 아니라 공원뒤산으로 올라갔다. 배나무밑에 앉아 복습제강을 외웠다. 배가 고프니 도시락을 꺼내 먹고는 계속 외웠다. 지껄이는 놈이 없어 좋았다. 날씨가 무더우니 옷을 활활 벗어 배나무에 걸어놓고 팬티바람에 앉아 외웠다. 사흘째 되는 날 저녁에 집에 들어서니 분위기가 달랐다. "너 단위로 안나가고 어디로 갔댔냐?" 어머니의 질문에 나는 흠칫 놀랐다. "단위에서 요주석이라는 분이 왔다갔네라. " 요주석이란 우리 공장의 공회주석이다. 요주석의 가정방문은 문제의 심각성을 제시해준다. 이튿날 공장회의실에 가보니 20여명 남녀청년들이 저마다 고개를 푹 떨구고 앉아있었다. 그들도 나처럼 대학꿈을 이뤄보겠다는 공장의 "열혈학도"들이였다. 우리 20여명 직공수험생들의 무조직, 무규률성으로 말미암아 막대한 경제손실이 빚어졌다고 한다. 생산을 책임진 진주임이 일어나서 책상을 치며 대성질호했다. 비판의 초점은 점차 나에게로 돌려졌다. 당원으로서 반면적인 솔선작용을 놀았다는것이다. 혁명의 리익과 개인전도를 두고 관건적인 시각에 어느쪽을 선택하겠는가? 나는 고개도 쳐들지 못했다. 다시 출근해서 나는 될수록 오전에 사무를 보고 오후엔 사무실문을 꾹 닫아놓고 시험공부에 몰두하려고 하였다. 허지만 일은 삐뚤게만 나갔다. 제일 신경질나는것은 전화벨소리였다. 전화가 보급되지 못했던 시기여서 전 공장에 전화가 몇대 없었다. 그래서 전화가 오면 틀림없이 급한 일이거나 중요한 통지였다. 전화가 서너통만 와도 그날 오후복습은 엉망이 된다. 어느날 오후였다. 금방 전화를 받고나서 복습제강을 펼쳐들었는데 또 전화가 울렸다. 신경질이 나서 송수화기 를 들었다가 콱 놓아버렸다. 이어 련속 울렸지만 받지 않았다. 전화벨이 네번째로 울릴 때 방정맞게도 진주임이 들어서면서 송수화기를 집어들었다. 몇번 "오오, 예예"하더니 송수화기를 놓고 내앞에 와서 장승처럼 뚝 박아섰다. "사무실에 앉아있으면서도 왜 전화를 받지 않았소?" "금방 시험문제를 푸느라…" "시험, 시험, 그래 이곳이 시험공부만 하는 장소요? 이따위로 공작하려면 당장 이 자리를 내놓소." "진주임이 내놓으라면 내놓을 자리입니까!" 나는 벌떡 일어나 대들었다. 둘은 서로 삿대질 하면서 말다툼을 벌렸다. 그 소리에 저쪽 사무실사람들이 나와 말렸다. 우리 아버지년세와 비슷한 진주임은 평상시 나를 아들처럼 생각해주시던 분이다. 그날 밤, 잠자리에 들어서 곰곰히 생각해보니 내가 버르장머리없이 놀았다는 자책감이 들었다. 드디어 시험칠 날이 돌아왔다. 시험치는 세날동안 날씨가 특별히 무더웠었다. 시험지를 바치고 밖에 나오면 눈앞이 아물거릴 지경이였다. 대학입학통지서가 날아들던 날 우리 사무실은 왁짝 들끓었다. 20여명가운데서 나만 붙었던것이다. 숱한 사람 들이 와서 축하해주었다. 그 가운데는 진주임도 있었고 요주석도 있었다. 진주임의 지시에 따라 공장에서는 돼지를 엎어놓고 환송연을 베풀기도 했다. 그리고 군용멜가방과 사지옷 이래웃벌을 선사했다. 진주임 한테서 그걸 받아안으며 나는 눈물을 흘렸다.
70    “아리랑”메아리의 메들리 댓글:  조회:1766  추천:1  2013-08-27
“아리랑”메아리의 메들리 홍천룡 “아리랑”이 세계적인 노래로 불리우고 있단다. 할배나 할미들이 보리밭머리에서 시름없이 흥얼대던 하찮은 노래곡조가 오늘날 세계 방방곡곡에서 내노라 하는 현대인들의 심금을 울려주는 명곡으로 되였단다. “아리랑”의 그 길게 숨넘어 갈듯 늘궈붙이는 곡조속에서 사람들은 장장 늘차게 걸어왔던 백의민족의 한많은 생활흐름이 배여서 퀴퀴한 냄새를 풍기며 산곡간의 설핏설핏 흐르는 아지랑이를 타고 멀리멀리 메아리치는 느낌을 감내할 수가 있었다. 궁핍한 생활의 고개고개를 넘어서며 엮었던 가락가락 선률이 흐르고 흐르면서 메들리로 이어져왔다. 한반도의 “강원도아리랑”, “밀양아리랑”에 이어 우리 이 땅에도 “북간도아리랑”, “연변아리랑”이 열창되고 있다. 먼 옛날부터 그 때 그 시절을 거쳐 오늘날까지 “아리랑”메들리는 아름다운 전설을 꾸며주고 수많은 신화를 이루어 내면서 오늘날 세계적인 명곡으로 굳어져 이 세상 산굽이와 물줄기를 굽이굽이 굽이치면서 피고지는 해당화로 금수강산을 화려하게 수놓아왔다. 우리의 문학작품도 “아리랑”곡을 튕기면서 서서히 음달진 개울숲을 지나 저기 저 싱싱한 소나무숲으로 허기영 허기영차 숨 가쁘게 톱아오르고 있다. 그 고개길에는 비바람도 세차고 눈보라도 사나워지겠지만 오르고 오르노라면 못오를 뫼가 있으리오! 세찬 비바람에도 사나운 눈보라에도 소나무는 시들지 않는다. 허나, 긴긴 여름날 그늘밑에서 선선한 부채질에 세속한탄에 해가 지는줄 모를 때가 많다. 해가 지면 길을 잃기 쉽고 “아리랑”곡조 넘기기 힘들어진다. 신들메를 조이고 목청을 돋구자. “아리랑”메들리의 긴 가락이 고개넘어에서 메아리쳐 온다.
69    청춘을 부르는 광활한 천지 댓글:  조회:1619  추천:0  2013-08-26
청춘을 부르는 광활한 천지 홍천룡 청춘시절엔 누구나 다 부푸는 꿈을 안고 약동하는 생활속에 뛰여들어 화려한 꿈자리를 마련하고저 한다. 그래서 청춘들의 눈길은 늘 높아만 간다. 평생을 아득바득 고생구덩이만 파헤치며 살아온 부모들과는 또 다른 인생을, 늘 구질구질한 사무에 매달려 숨 가쁘게 뱅뱅 돌기만 했던 선배들과는 또 다른 삶을 꿈꾸어 보자니 자연 눈이 높아만 갈수밖에 없다. 눈이 높아지니 자연 먼곳의 자연경관들만 어렴풋이 보인다. 묘하게도 어렴풋이 보이는 모습이 더 수려하게 보인다. 거리감이 주는 시각적매력이다. 그래서 혈기가 불렁불렁 끓어넘치는 청춘들이 가만 있을리 만무하다. 원래는 보여주지 말아야 했었는데 높아만 가는 그들의 눈길을 뉘라서 막을소냐! 네가 가면 나도 간다는것이 현대풍기이다. 국내선을 타면 북경, 청도, 상해, 심수이고 국외선을 타면 한국, 일본, 미국이다. 고향에서 벌지 못하는 돈을 타향타국에 가서 뽑아낸다. 가볍게 빼내는 친구도 있고 묵직하게 뽑아내는 친구도 있고 뽑아 내놓고 한쉼 쉬며 다른 구멍수를 노리는 친구도 있다. 물론 먼 곳에 가면 큰돈을 벌수가 있다. 허지만 그만큼 밀어넣는 대가가 커야 하고 위험계수도 높다. 그렇다면 가까운 곳에서는 큰돈을 벌수가 없을가? 잔뜩 높아진 눈이 가까운 주변을 여겨보지 않는것이 가끔씩 문제가 될수도 있다. 가까운 곳에서 큰돈을 벌게 되면 젊은이들의 꿈을 이루는데 빠를수 있고 안전할수도 있다. 지난 세기 60년대에 모주석께서 “농촌은 광활한 천지이다. 거기에는 할 일이 많다”는 말씀을 하셨다. 모주석의 말씀이면 최고지시였던 그 세월에 전국의 수천만 지식청년들이 이불짐을 싸메고 렬차에, 자동차에, 마차에, 소수레에 앉아 농촌으로 산골로 내려가 빈하중농의 재교육을 받으며 자기네들의 리상을 실현하려고 분투했었다. 그 세월에 우리의 농촌은 락후한 농경모식에서 해탈되지 못했고 효률이 낮은 체력로동에 비과학적인 집체관리에 얽매여서 발전이 굼떴다. 많은 청년들이 내려갔지만 농촌의 농업생산에는 별로 도움이 되지 못했고 그들 자신들도 돈버는 재미는 보지 못했었다. 그들의 가장 큰 수확이란 “단련성장”이였다. 광활한 천지에서 단련을 통해 튼튼한 신체를 다져냈고 단련을 통해 굳센 의지를 닦아냈고 단련을 통해 적응력을 키워냈다. 그런 단련을 겪은 그들이였기에 개혁개방시기에 와서도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중견작용을 놀수가 있었던 것이다. 지금 이 나라의 제1인자이신 습근평총서기도 지식청년출신이였고 이 나라의 최고급 지도기구인 당중앙정치국상무위원회 위원 7명중 4명이나 지식청년출신이다. 그들이 사회적으로 발휘한 역할을 가히 짐작할수 있지 않겠는가! 40여년전에 광활한 천지에서는 수천만의 청춘들을 불러다 배불리 먹이지도 못했고 돈도 벌게 못했고 고생만 시키면서 정치적단련, 사상적단련과 육체적단련만 시켜냈다. 그것이 이 나라 개혁개방의 첨병대오에 후비력량을 양성시켜준 훈련장으로 된 셈이였다. 40여년이 지난 오늘 광활한 천지는 또다시 청춘들을 부르고 있다. 오늘의 부름은 그제날처럼 간거한 고험적단련을 하라고 부르는것이 아니다. 오늘의 부름은 시장경제에서 자본의 제1요소인 돈을 벌라고 그것도 크게 벌어서 청춘의 꿈을 화려하게 펼쳐보라고 부르는것이다. 40여년전에는 정치적요구에 따라 지령적으로 부른것이고 40년후에는 경제적리익을 위해 초빙식으로 부르는것이다. 농촌에 가서 돈을 벌라고, 그것도 목돈을? 아니 깨지 못한 꿈결에 중얼거리는 꿈같은 소리가 아닌가? 아니다! 역전은 늘 벼랑끝에서 생기군 한다. 근 30년동안 우리 농촌의 감농군마저도 농사질해서는 자식들 공부시키기도 어렵게 되였다고 농사에서 손을 떼고 농촌을 떠나버렸다. 황차 젊은이들이야 풀어놓은 송아지떼와도 같아 걸음마를 타기 무섭게 떠나버린다. 농촌에 처박혀 있으면 돈도 못벌고 색시맛도 모르고 청춘을 썩여야 하니까. 너도 나도 이 집 저 집 다 떠나는 가운데서 세월은 세월대로 흐르면서 변하고 있다. 논밭 몇마지기쯤 애면글면 다루어 집식구들의 배를 불리고 아이들 공부시키고 자식들 시집장가 보내고 하르르한 초두부에 배갈 한잔씩 꼴깍 할수 있었던 농경시대는 이제 마가을 구름송이처럼 뒤산너머로 서서히 밀려가고 있다. 돈벌이가 안된다고 너도나도 밭에서 손을 다 뗀다음에야 그것이 노다지판으로 되는것이다. 지난 세기 개혁개방초기였던 80년대에 온원개라는 경제투자를 연구하는 학자님이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젊은이들이여, 미래에 누구나 다 하고 싶어 하지만 할수 없는 직업에 종사하고 싶다면 지금 누구나 다 하기 싫어 하지만 앞으로 누구나 다 하고 싶어질 직업을 고르라.” 필자가 보건대 현대농업이 곧바로 온선생님께서 지적해주신 그런 직업가운데서도 앞자리쯤은 차지 할수 있는 특종직업이라고 여겨진다. 왜? 다음과 같은 몇가지 리유가 있다. 첫째는 주지하다싶이 도시건설이 확장됨에 따라 경작지면적이 점점 더 줄어들고 있다. 땅값이 하늘이 낮다고 계속 오르기만 하니 땅이 점점 더 귀해질수밖에 없다. 그러니 그 땅에서 생산되는 곡물이나 채소, 과일 같은 농부산물도 점점 더 값이 올라가기 마련이다. 값이 올라가니 자연 돈을 벌게 되지 않겠는가! “물건은 귀해져야 값이 간다”는 말이 있다. 도시인구는 점점 더 늘어나지만 땅은 점점 더 줄어드니 그 땅에서 나오는 농작물이 점점 더 귀해질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도시에서 별의별 희한한 인간들이 산다고 해도 그 누구든 다 하루 세끼니씩은 꼭꼭 챙겨먹어야 살아날수 있으니까. 중국의 한 학자님이 근간에 만약의 경우 중국에 일이 생기면 먹거리를 만드는 농업에서 먼저 생길수 있다고 지적하셨다. 그만큼 미래농업이 가지는 의의는 자못 중요한것이다. 둘째는 농업에 대한 국가의 보조적인 투자강도가 점점 더 강해지고 그 복사면도 역시 점점 더 넓어진다. 이에 따라 농업에서 높은 수입을 따낼수 있게끔 농촌의 모든 인프라건설과 서비스시스템이 점점 더 완미하게 구축되여 갈것이다. 셋째는 농업의 기계화수준이 점점 더 높아지고 과학영농수준도 계속 첨단화로 나아가고 있기 때문에 몇십헥타르나 몇백헥타르 되는 경작지도 두세 사람이면 얼마든지 다루어 낼수 있어서 큰돈을 벌수 있는 여건이 점점 더 완미하게 마련되여 가고있다. 이밖에도 농업에 대한 서비스업, 농촌금융시장의 활성화, 가공、운송、판매일체화, 농업보험, 자질교육, 의료, 양로 등 모든 면에서 쌀을 많이 내고 채소를 많이 심고 가축가금을 많이 기르고 과일을 많이 따게끔 조건을 지어주고 환경을 마련해 주게 된다. 그리고 농업인구는 크게 줄어들고 관리체계는 점점 더 과학적으로 구축되기에 농업은 얼마든지 큰돈을 벌수 있는 직업으로 부상할것이고 안전하게 목돈을 벌수 있는 직업으로 탈바꿈 할것이다. 앞으로의 농촌은 돈을 벌수 있는 노다지판으로 될 뿐만아니라 살기도 좋은 화원식 별장마을로 변모될것이다. 다만 그때에 가서는 농사질 하자고 해도 마음대로 할수 없게 될뿐이다. 그 곳이 광활한 천지이기는 하지만 부를 때 가야지 부르지 않을 때에는 가자고 해도 받아주질 않는다.
68    구질구질 했던 모내기철 댓글:  조회:1247  추천:0  2013-08-22
구질구질 했던 모내기철 홍천룡 요즘 참 날씨가 더럽다. 5월중순부터 잡아비트는 날씨는 내내 6월중순까지 찌뿌둥해져있다. 하늘이 설익은 시루떡을 먹었을가! 통 기분이 돌아서질 않는다. 그 날씨때문에 멋을 피우고 싶은 아가씨들의 허벅지자랑이 칙— 스톱되는 상황이다. 날씨 좋은 날이면 달랑 들릴가 말가 하는 미니스커트 아래로 떡국대처럼 길고 새뽀얗게 부어뺀듯한 젊은 녀자들의 긴 다리가 또각거리는 하이힐에 반주되여 거리에 절주감을 부여시킨다. 참, 보기만 해도 시원해지던데… 요즘은 요망한 날씨때문에 거리에 나서도 움츠러만 드는 기분이다. 화창한 봄기운이나 초여름의 싱싱함이 구겨진다. 어쩐지 모내기철이면 요렇게 날씨가 변덕스러워질가? 모내기철 내내 구질구질해지는 날씨인데도 누구 하나 모내기에 대해 근심걱정하는 사람이 없다. 하긴 모내기철을 모르고 세월을 보내는 사람들이 대다수이니깐. 몰라도 배를 곯는 법이 없고 그 누구에게 죄송스러운 느낌도 없다. 풍년이 들었다 해서 더 얻어먹는다는 즐거움도 없어졌고 흉년이 들었다 해서 배를 곯는 고통도 없어진 세월이다. 농사를 짓는 농부들 또한 느긋한 심사다. 누구의 방조도 바라지 않고 누구의 동정도 바라지 않는다. 한적한 분위기에 부부간, 또는 부자간, 좀 손이 딸리면 친척친구들, 일손을 돕는다기보다는 모여서 즐거움을 나누는 분위기다. 요즘엔 그런 모임도 잘 안돼여 품앗이두레 비슷한 삯군쓰기가 흥행되고 있다. 사람도 삯으로 쓰고 기계도 삯으로 쓰고 운수판매도 삯으로 리용한다. 쌍방에 다 리익이 되고 일이 빨리 끝나고 뒤끝이 깨끗하다. 농촌에서도 이제는 모든 일에 돈이 통한다. 쌀독에서 인심이 나던 농경시대와는 다르게 자본시대의 특징인 자본이 서서히 돌아간다. 경작지가 점차 소수 경영인에게 집중되면서 우리의 농촌도 점차 기계화작업에 자본화운영이 시작되고있는 추세를 맞이하고있다. 아직 사회주의공유제라는 큰 울타리에 더 기대여 보고싶은 심정이여서인지 좀 어설퍼지는 감정을 금할수가 없다. 요즘 날씨처럼… 구름이 낮게 드리우고 몸이 오싹 떨리게 바람이 소슬해진 날씨에는 의례 속을 덥혀주는 술생각부터 난다. 술 한잔 들어가면 자연히 옛날옛적이 추억속에서 그리워진다. 그제날 공유제의 말단 형체인 생사대에서 모내기철이 닥쳐오면 한 보름쯤은 내내 전투적인 분위기에 휩싸인다. 푸름한 새벽부터 논물관리원이 하루의 모내기를 위해 물도랑을 점검하고 논고를 풀어놓는다. 그러면 써레군들이 모판을 공구고 이어 모내기대군이 출동하고 펄럭이는 기발을 따라 경색도 벌어진다. 비가 구질구질 내리는 날에도 하얀 비닐박막쪼각으로 몸을 무장하고 벼모꽂기가 찰랑찰랑 열을 올린다. 찬비속에서 찬기운을 이겨내는 로동의 즐거움을 맛보며 푸른 주단을 촘촘히 엮어가는 보람찬 화면작성에 풍작을 기대해 보는 희열도 느껴본다. 벼모나르는 총각의 벼모단뿌리기에 어느 처녀의 고운 얼굴이 흙탕물로 얼룩지면 논판은 웃음바다로 번지여진다. 가식없이 통쾌하게 웃어대며 함박꽃 피우던 그 얼굴들…그렇게 정다울수가 없다. 모내기철 내내 음침한 날씨에 랭랭한 랭기가 감돌아도 논판에서 수시로 터지는 폭소에 웃음꽃은 매일과 같이 그칠새 없었다. 더구나 모내기대회전이 승리적으로 끝나게 되는 총결만회는 내내 행복감속에서 기다려진다. 뉘집 돼지를 엎었던간에 그 고기맛이 그렇게 고소할수가 없었다. 볶음료리도 아니고 그저 장국탕에 훌훌 삶아내고 대충 썩뚝썩뚝 저며낸 그 고기가… 그런 분위기, 그런 맛을 지금 다시 음미해볼 수가 있을가! 농사군에게는 하늘이 괘씸한 요술쟁이다. 모내기철이 지나가면 하늘은 기다렸다는듯이 구름을 말끔히 밀어가고 맑은 모습에 해님을 띄워 무더위를 몰아온다. 그러면 또 호미를 얻어쥐고 콩밭기음이나 조이밭기음에 나서 얼굴을 까맣게 태워야 한다. 해살이 쫙 펴지면 논판의 벼모며 언덕밭의 강냉이며 길가의 풀포기며 모든 생장물이 소리치며 우썩우썩 자라면서 싱싱함을 뽐낸다. 아무튼 구름이 꽉 낀 음침한 날씨보다 찬란한 태양이 빛 뿌리는 맑은 날씨가 더 약동적인것 같다. 헌데 그 약동적인 무더위속에서 행복의 웃음꽃이 잘 피여나지 못하고 즐거운 웃음소리가 잘 울려퍼지지 않는다.
오래 살자면 건강하게 살수 없고 건강하게 살려면 오래 살수 없다 홍천룡 생활절주가 점차 느긋해지고 사회가 점차 로령화시대에 들어서면서 사람들의 관심사가 정치시사로부터 점차 건강생활로 전이되고 있다. 그래서 앉으나 서나 화제는 건강이다. 이 세상 누구나 다 건강하게 오래오래 살려는 념원을 가지고 있다. 진시황을 비롯해서 력대의 황제들은 건강하게 오래오래 살려고 세상 좋다는것은 다 먹어보고 무릇 건강에 리롭다면 그무슨 짓거리든지 다 해보았다. 귀신이면 그런 노릇을 해보았을가? 그랬는데도 그들의 수명은 시골의 농부들보다도 더 짧았고 그들의 건강상황 또한 장안가의 베돌이 거지들 상황보다 더 악렬했었다. 하느님은 이렇게 심술쟁이면서도 공평공정했다. 오래 살려고 그것도 건강하게 오래 살려고 아득거리는 욕심쟁이에게는 단명적인 운명을 점찍어 주었고 바라는것 없이 감자에 보리밥으로 설을 쇠는 시골떼기들에게는 건강한 육체를 선사해주었다. 요즘 술좌석에서는 “구구팔팔”이라는 수자성시체어를 안주삼아 자주 되씹군 한다. “아흔아홉살까지 팔팔하게 살아보자”는 뜻이란다. 구령식으로 되여 어감도 좋고 내용상으로는 장수와 건강의 융합을 내포하고 있는데다가 형식상 또한 구호식이여서 선동성이 강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그런 경지를 동경하게끔 매혹시키고 그런 경지에 이를수 있다는 기대감을 자아내게 하여 분발하게 만든다. 헌데 현실적으로 우리가 사회조사를 해보면 “구구팔팔”식으로 장수한 어르신님이 얼마나 될가? 천명에 한분, 만명에 한분?… 신문지상이나 텔레비화면을 통해 우리는 혹간 이런 분을 만날수가 있어 경탄을 금치 못한다. 어떤 나라, 어떤 특수한 지역에는 “구구팔팔”식 로인들이 많을수 있다. 그렇다고 세상 로인들이 다 그런 곳에 가서 살수는 없는 일이다. 현실적으로 우리 주변에는 아흔아홉살고령까지 “팔팔”하게 생존해 계시는 어르신님을 찾아보기가 힘들고 “팔팔”하지는 못해도 시시콜콜 누워 앓으면서 장수기록을 돌파해 가시는 로인은 가끔 볼수 있지만 역시 아주 희소하다. 우리 친척들 가운데, 우리 친구들 가정에, 우리 동네에 팔십고령이 넘은 할아버지가 몇분 계시고 구십고령이 넘은 할머니가 몇분 계실가? 나이를 속이지 못한다는 말이 있다. 세월의 흐름으로 생로병사의 자연법칙을 지켜나가는 하늘의 힘을 그 누가 막을소냐! 인류의 표준수명은 120세까지라고 하는데 우리 주변의 상황을 놓고 보면 그 절반인 60세까지 살면 벌써 로인축에 속하게 된다. 목하, 우리 고장에서 남자의 평균 수명은 칠팔십세이고 녀자의 평균 수명은 팔구십세이다. 지금으로부터 약 삼사십년전에는 남자의 평균 수명이 륙칠십세였고 녀자의 평균 수명은 칠팔십세였다고 하는데 지난 세기 칠팔십년대로부터 또 약 삼사십년전에는 남자의 평균 수명이 오륙십세였고 녀자의 평균 수명은 륙칠십세였다고 하는데 또 그 시기였던 지난 세기 사오십년대로부터 약 삼사십년전에는 남자의 평균 수명이 사오십세였고 녀자의 평균 수명은 오륙십세였다고 하는데… 이처럼 소학교산수원리로 구구식풀이를 해보니 매 삼사십년동안에 인간의 평균수명이 10세씩 연장되였다는 답안을 맞춰낼수가 있다. 그러니까 아무 때나 어느 시기이든 평균수명보다 10년을 더 산다는것이 새 희망이고 남다른 복이였다. 헌데 이런 남다른 복을 얻으려면 적어도 오륙십대부터 “병”과 친구로 사귀면서 병원출입을 소학생이 학교를 다니듯 해야 하고 고통과 불행을 동반해야 가능해진다. 즉 “장수”라는 남다른 복덩이를 얻기 위해서는 이런 “투자”를 해야 하는것이다. 한평생 아글타글 고생해 왔는데 늙으막에 와서 또 “병”과 친구로 사귀면서 고통과 불행을 동반하라구? 아니, 그건 아니지! 건강하고 팔팔하게 만년을 즐겨야지. 먹고 싶은걸 다 먹고 가보고 싶은데 다 가보고 하고 싶은 노릇 다 해보고… 그러면 “장수”라는 이 복덩이를 얻기는 힘들것이다. 운명의 저울대는 언제나 하느님의 손아귀에 쥐여져 있는 법이거늘, 누가 “돈”을 더 내면 생명이라는 시간을 좀 더 떠주고 누가 “돈”을 적게 내면 그만큼 적게 떠주기 마련이다. 하느님의 저울대는 진짜 전자계산기로 가설된 것이지 절대 채소파는 아줌마의 근들이 저울대가 아니다. 중국에는 “무병단명”이라는 고언이 있다. 왜서 “무병”이면 “단명”일가? 건강하다는 표징의 하나가 “무병”인것이다. 병이 있는 사람을 건강하다고 할수 있겠는가? 살다보면 우리는 늘 이런 장면을 목격하게 된다. 한 사람이 친구를 만나 아무개가 사망되였다는 비보를 알리니 대방은 인차 눈이 화등잔이 되여 기겁을 떤다. “뭐라구? 그 생때같은 사람이 왜 죽어? 후—, 나이가 아깝다.” 죽을것 같지 않았던 사람이 죽었다는 현실에 놀라움과 애석함, 왜서 평상시 건강했던 사람이 일단 병에 걸리기만 하면 그처럼 무기력해질가? 여기에는 여러가지 원인이 있을수 있다. 편폭제한으로 일일이 다 해석할수는 없고 한두가지만 언급하려고 한다. 우선 건강한 사람들의 제일 치명적인 단점은 질병에 대한 예방을 홀시하여 병에 걸렸는데도 조기진단을 얻지 못하는 점이다. 몸에 아무 탈도 없는데 누가 병원으로 다니자고 하겠는가! 이 세상에 병원으로 다니길 좋아 할 사람은 없다. 병원에 한번씩 갔다오면 이런저런 검사비에 약값까지 엄청난 경제부담은 물론, 생각밖의 정신적타격에 생기는 심리적부담은 전반 그 사람의 삶의 분위기를 확 바꿔놓을수도 있다. 그래서 대부분 사람들은 몸에 탈이 나서 의혹이 깊어지고 통증이나 고통이 더 참을수 없을 지경에까지 이르렀을 때에야 병원을 찾군 한다. 헌데 신체소질이 원체 건강했던 사람들은 몸에 탈이 나도 이삼일이 지나면 언제 탈이 생겼더느냐 싶이 말끔해지는것이다. 혹간, 이삼일이 지나도 그냥 그 증세라면 정통편같은 약 한두알이면 통증같은 증세가 없어진다. 때문에 병원으로 갈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원래는 건강했던 몸에 탈이 생기면 그것이 일종 경종을 울려주는 신호였는데… 때문에 건강한 사람들이 나중에 큰탈이 생겨 병원을 찾았을 때에는 이미 때를 놓친 뒤끝이 되고마는것이다. 그리고 건강했던 사람들이 일단 병에 걸리면 급속히 악화될수 있는 원인중 한가지는 장기간 각종 질병과의 접촉과 치유과정이 없었기에 모종 특수질병이나 바이러스에 대한 항체가 산생되지 못했기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다다소소 이런저런 병력사가 있는 사람들은 각종 질병과의 치유과정에서 이미 항체가 산생되여 얼마쯤 예방작용을 하는것이다. 이밖에도 여러가지 원인이 있다. 총적으로 오래오래 “장수”하면 인생을 길게 살았다는 우점과 고통스럽게 살아야 하는 단점을 가지고 있고 “팔팔”하게 살면 건강하게 살았다는 우점과 짧게만 살아야 하는 단점을 가지고 있는것이다. 만물의 령장인 인간의 삶이 이럴진대 기타 삼라만상이야 더 말해서 무엇하랴! 올리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게 되는 법이거늘!
66    지킴의 원칙과 대책 댓글:  조회:1298  추천:0  2013-08-20
지킴의 원칙과 대책 홍천룡 옛날 범이 골안어귀를 지켜주었다는 범골마을에 박씨와 최씨가 이웃으로 네것내것 할것 없이 화기애애하게 살았다. 떡을 쳐도 꼬치꼬치 나눠먹었고 닭을 고와도 뒤다리는 쌍으로 남기지 않았다. 그러던 그들 둘지간에 언쟁이 생기면서 티각태각 하더니 끝내는 나중에 손찌검까지 벌어져 최씨의 두눈이 팅팅 붓겼고 박씨의 입술이 터져 피가 줄줄 흐르게 되였다. 구경 무엇때문에? 밭지경때문이였다. 그해 홍수에 밀린 밭지경을 최씨가 다시 빼놓았는데 그것이 화근이 되였다. 귀신의 롱간이라 할가! 최씨네 집에서 올려다 보면 그 밭지경이 꼿꼿하게 이루어진것이 분명한데 박씨네 집에서 내려다 보면 또한 확실히 박씨네 터밭쪽으로 기울어져 보였던것이다. 아무튼 꼿꼿하든 삐뚤어졌든 따지고 보면 손바닥만한 면적도 아니되는 땅때문이였다. 그 밭지경때문에 최씨와 박씨는 해마다 다투었고 그것도 모자라서 자식들 세대에까지 내리내리 아웅다웅 하면서 아귀다툼으로 원을 쌓고 한을 풀었다. 근간에 와서 세계적으로 여러 나라지간에도 자그마한 섬을 가지고 갈등이 커가고 있다. 자그마한 섬이라도 그 어느 나라든 절대 양보하지 않고 있다. 심지어 네가 무력을 쓰면 나도 무력을 쓰겠다는 강경태세로 나오고 있어 괜히 가슴을 조이고 있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땅, 땅, 땅이란 이렇다. 그것은 생존의 기틀이고 재부창조의 원천이며 또한 그 사람, 그 민족, 그 나라의 존엄이기도 하다. 때문에 사사로이 논다는 개인지간에도 그렇고 최대한 공적으로 일을 처리한다는 나라지간에도 그렇고 땅이라면 벌써 신경을 곤두세우고 한치의 양보도 보이지 않으려고 한다. 우리 연변에는 기름진 옥토가 꽤나 된다. 그것도 하얀 이밥을 먹게 하는 수전이 더 많다. 주지하다 싶이 그 수전은 조선족이 개척해놓은것이다. 승냥이떼 우글거리는 갈대숲이나 버들숲을 파헤치고 물을 빼고 물을 대고 하면서 몇세대에 거쳐 오늘의 옥답을 걸구어 놓았던것이다. 헌데 지금 그 옥답 대부분을 타민족이 다루고있다. 빼앗긴것이 아니고 네좋고 내좋고 협상해서 넘긴것이다. 전반 논밭면적의 약 80-90%는 될것이다. 불과 30여년이라는 세월에 이렇게 변했다. 30여년전에는 조선족이 그 옥답 대부분을 다루었던것이다. 논밭면적의 약 80-90%는 되였을것이다. 땅의 신비로움이 이런 대비속에서도 확연히 알린다. 조선족이 벼농사를 지을 때는 집집마다 가정을 지킬수 있었고 아이들을 지킬수 있었고 마을을 지킬수 있었고 학교를 지킬수 있었고 우리의 전통적인 생활문화를 지킬수 있었다. 헌데 지금 벼농사를 짓지 않으니 이 모든것을 지키기 어려워졌다. 이 문제를 가지고 근심하는 사람도 있었고 해결책을 강구한 사람도 있었다. 허지만 근심해서 상황이 변해지는것도 아니고 해결책을 강구했다 해서 해결되는것도 아니였다. 농사에 종사하는 조선족농민이 점점 더 적어지고 조선족농촌마을이 점점 더 줄어들고 있다. 하긴 조선족도 한차원 더 높은 물질생활과 문화생활을 위해서 농사일에서 손을 떼고 외국으로 나가고 도시로 들어오는것이다. 조선족뿐만 아니라 타민족도 그렇다. 일종 시대의 추세다. 누구도 막을수 없다. 더 잘 살기 위해서 떠나는 사람을 어찌 막으랴! 헌데 문제는 래일이다. 래일에 가서는 땅보다 더 귀한 재부가 없게 된다. 외국에 가서 아무리 많이 번다고 땅을 사올수 있는가? 없다! 땅을 잃으면 모든것을 잃게 된다. 물론 지금까지는 경작지의 사용권계약이 대부분 조선족농민들의 수중에 있다. 그 사용권으로 경작지를 임대주고 세를 받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만약 계속 이렇게 나간다면 별로 큰문제는 될것 같지 않다. 헌데 지금 일부 전문가들이 이런 상태가 불합리하다고 지적하고 있다. 우리 연변뿐만아니라 전국적으로 이러한 문제가 심각하게 존재하고 있다. 토지보상금을 비롯한 이러저러한 보상금을 농사를 짓는 사람이 받아서 쓰는것이 아니라 토지를 임대해주는 사람이 받아서 농업비용으로 쓰는것이 아니라 다른데 쓰고있다. 농사를 더잘 지으라고 주는 돈을 다른데 쓰면 이것이 문제로 된다. 그리고 앞으로 구경 누가 진정한 농민이 될것인가? 등등 심각한 문제들이 실제적으로 제기되고있다. 그래서 앞으로 토지사용권법률조례가 부단히 개혁되게 된다. 앞으로 경작지사용권을 가지고 있는 주인도 바뀌게 될수 있다. 이에 대한 대책을 지금부터 세워야 한다. 중국이란 대지에서 살고있는만큼 우선 중국에서 제정한 토지법률은 꼭 지켜야 한다. 이것이 기본원칙이다. 그다음 우리의 대책이 필요한것이다. 지금 어떤 조선족마을에서는 토지를 집중시켜 기계화농장을 꾸리고 경작지사용권을 가진 농호들을 주식제에 참가시켜 주주로 되게 하고있다. 문제는 사람이 농사를 짓던 옛날농법에서 해탈되여 기계로 농사를 짓고 과학으로 농사를 짓게 해야 한다. 기계와 과학이 타민족로동력을 쓰는것을 대체하게 해야 한다. 그러자면 자금이 수요되고 관리인재가 수요된다. 여기에서 또한 우선먼저 주주들의 사상해방과 미래지향적인 통일인식이 요구된다. 앞날을 위해서 앞날의 우리의 벼밭을 지키기 위해서는 통일적인 투자가 필요한것이다. 통일적인 투자가 푼푼하게 되여야 관리인재를 초빙할수도 있고 양성해낼수도 있는것이다. 이 일은 또한 어느 한개 촌마을이나 어느 한 향진에만 국한되지 말고 우리 민족거주구역내의 당정지도계층과 각계각층의 우리 민족 지명인사들이 공동히 협력하여 추진해야만 현실적으로 실현될수 있는것이다. 진정 우리 조선족마을마다 이렇게 된다면 “경자유기전(耕者有其田)”의 기본농법원칙에도 어긋나지 않고 주주들의 외국품팔이도 도시진출도 토지사용권의 후대이양에도 영향이 미치지 않게 될수 있을것이다.
65    작작 벌고 느긋하게 살자! 댓글:  조회:2265  추천:0  2013-08-19
작작 벌고 느긋하게 살자! 홍천룡 휴식일에 등산하는것이 직장인들의 좋은 레저운동이라 생각된다. 전번날 등산한다고 몇몇 산악동아리끼리 도시락까지 싸가지고 떠났다. 한시간쯤은 걸을수록 힘도 나고 기분도 상쾌해졌다. 두시간쯤 걸으니 전신이 해나른해나고 두 다리가 시큰거렸다. 더 걷고 싶지 않았다. 그보다도 더 참기 어려운것은 허기가 들며 배가 고파나는것이였다. 인젠 자리나 정하고 “휘발유”를 넣자고 건의하니 선배멤버님이 나무도 없고 물도 없는 이런 산등성이에서 무슨 기분에 밥이 넘어가겠느냐며 저 산자락 언저리에 내물도 촐랑거리고 나무숲도 우거졌으니 거기 가서 기분좋게 먹자며 좀 더 걷자고 주장했다. 그렇게 좀 더 걸은것이 근 한시간 거리였다. 그 한시간거리는 정말 이를 악물고 걸었다. 맹렬하게 일어나는 시장기를 억누르고 걸음을 재우치자니 땀만 바질바질 났다. 그 한시간 거리가 두시간 걸은 거리보다 더 멀어보였다. 내가 흐르는 땀을 빈번히 훔치며 게두덜거리자 그 선배님이 배가 고플수록 먹는 음식이 더 맛있다고 이제 즐거운 오찬을 위해 배를 더 굶겼다가 배를 두드리며 먹자고 했다. 나는 이제 그 “배를 두드리며 먹을 장면”을 그려보며 허리띠를 더 졸라맸다. 산기슭을 에도는 내가에 이르니 다시금 기분이 돌아섰다. 내물도 시원하게 출렁거렸고 나무숲도 서늘한 그늘을 마련해 놓고있었다. 거기에다 면목이 있는 다른 등산그룹에서 한창 물고기탕을 벌렁벌렁 끓이고있었다. 그걸 맛을 보라며 한 냄비나 되게 우리한테로 보내왔다. 정말 배 고플 때 먹는 음식이 천하별미였다. 볼이 미여지게 먹어대는 그 감미로운 포식감, 인젠 정말이지 먹다가 죽어도 원이 없을것만 같았다. 배가 고파서 참기 어려웠던 그 한시간, 그 고통스러웠던 한시간과 바꿔온 즐거움이 이렇게 사람을 죽여줄 줄이야! 만포식하고 나니 전신이 편안해졌고 시야에 안겨드는 만물이 그렇게 정다워보일 수가 없었다. 참, 음식이란 묘한 물건이다. 먹기전과 먹은 후가 이처럼 다를 수가 있을가! 세상이 콩알만해지는 만족감에 취해 돌아와서 침대에다 벌렁 몸을 던지니 그다음부터 배안에서 합창이 시작되였다. 꾸르륵거리던 배안이 뒤탈리기 시작하면서 복통이 일어났고 급기야 벌떡 일어나 화장실로 뛰여갔다… 그날 밤, 아래로 쏘고 우로 겨우고 야단법석을 떨다가 병원급진실에 실려가 점적주사를 꽂아서야 좀 잠잠해졌다… 후, 그 천하별미로 먹는 재미를 보던 즐거움과 바꿔온 복통이 이렇게 사람을 녹여줄 줄이야! 요즘 이런 사람들도 있다. 집을 두세채씩 가지고 있으면서도 “벽수화원”에다 별장식 아파트 한채쯤은 더 갖춰야겠다는 타산을 해보고 자가용을 굴리면서도 낚시질 하러 갈 때면 “도요다”찦차도 있어야겠다는 생각을 굴려본다. 아들딸의 결혼식을 시내에서 제일 호화스러운 호텔에다 굉장하게 치러주었지만 무언가 남보다 못해주었다는 죄책감으로 슬그머니 가슴을 허빈다. 돈만 좀 더 있었으면 얼마든지… 하고 벼른다. 이미 들어간 돈이 얼만데? 그렇다. 오늘날 물질이 고도로 문명화되면서 상품이 수도물처럼 쏟아지고 있을 때 돈만 있으면 무엇이든 다 살수 있다. 그래서 돈이 자꾸만 모자란다. 그런데 돈을 벌기란 점점 더 어려워진다. 귀신짝 같은 돈이란 벌 때에는 꽤나 두꺼워 보이지만 쓰면 쓸수록 얇아진다. 10년전에 10원을 슈퍼에다 던지면 꽤나 많은 먹거리가 나왔는데 지금은 100원을 던져봐야 10년전의 10원어치보다 섧게 나온다. 그러니 벌어야 한다. 벌어도 웬간히 벌면 오히려 버나마나 하다. 한달에 몇백원, 몇천원씩 번다고 해도 자식들에게 아파트나 자가용을 갖춰주자면 몇십년을 더 벌어야 할가? 아무리 배를 졸라매고 아껴 쓴다고 해도! 그래서 모두들 죽기내기로 돈을 번다. 헌데 문제는 자꾸만 벌어도 남는게 없이 모자란다는게다. 백원을 벌어서 천원어치 사고싶은것이 정상 사람의 심리라고 할가! 왜서 집이 있는데도 별장을 사고 싶어질가? 왜서 자가용이 있는데도 찦차가 욕심날가? 우리는 선조로부터 무엇이나 모자라는 삶을 기나긴 세월에 거쳐 지겹게 영위해왔었다. 그러다가 좀 늦었지만 행운스럽게도 우리 세대에 와서 경제부흥을 맞이하게 되였다. 그러니 배가 고픈 사람앞에 푸짐한 음식상이 차려졌다고 할가! 즐거운 만찬이 아닐수 없다. 아까 등산할 때 배고픔을 기다렸다가 즐거운 오찬을 만끽할수 있었던 정경과 흡사하다고나 할가! 아무튼 벌면 버는만큼 돈이 호주머니로 들어올수 있어서 흥분의 도가니속에 빠져 몸을 달달 볶아낼수가 있었다. 헌데 도가니속에서 놀자면 온도를 잘 공제해야 하는데 웬간한 사람은 그것이 잘 안된다. 도가니속에서는 온도에 따라 액체가 고체로 될수도 있고 고체가 액체로도 될수가 있다. 이 온도조절이 잘 안되여 일이 삐뚤게 나가는 페단이 많다. 개혁개방초기에 연변에는 숱한 조선족기업과 상가들이 우후죽순마냥 일떠섰다. 연길시의 네모번듯한 중심가에 서서 동서남북거리를 올리 훑고 내리 훑어보면 무슨 “조선족국수집”, “조선족개장집”, “조선족복장점”, “조선족약방”, “조선족철물상점” 등 민족색채를 띤 상가들이 즐비하게 들어앉은 풍경을 감상할수 있었다. 헌데 지금은? 지금은 대부분 한국에 나가 벌고있다. 벌면 벌수록 더 벌게 되는 한국에로의 로무송출이다. 한국벌이가 적당하게 벌면 탈도 안나고 결과도 좋았겠는데 온도가 너무 높아가는 바람에 “폭식”하게 되고 “폭식”하니 자연 “배탈”이 생기게 되였다. 생활이란 느긋해야 할 일을 다 할수 있는것이다. 어느 한방면으로 긴장하게 돌아치면 다른 방면을 돌볼 사이가 없어진다. 낳을 아이도 낳을 사이가 없어지고 아이들 교육도 따라가지 못하게 된다. 자식을 잃으면 모든것을 다 잃는 셈이 아닌가! 대가 끊어지면 한 집안도 좋고 한 민족도 좋고 끝을 보게 되는것이다. 또한 너무 긴장하게 돌아치면 건강도 지키기 곤난해진다. 느긋함이 사람의 건강을 제일 잘 지켜준다. 돈을 벌자면 긴장해지지 않을수가 없고 큰돈을 벌자면 더 긴장해진다. 또 번돈을 쓰자고 해도 긴장해지지 않을수 없다. 돈은 많이 쓸수록 더 긴장해진다. 돈많은 집안에 말썽이 그치지 않는 법이다. 때문에 지금 돈많은 사람에게 병이 차려지고 돈없는 사람에게 건강이 차려진다는 설법도 있다. 물론 과학적인 결론은 아니겠지만 일종 사회적페단을 조롱하고 있지 않는가! 인제는 배를 곯았던 세월도 지난지 옛날이 되였고 벌지 않아도 살만한 세월이니 좀 작작 벌고 느긋하게 살아가는 비법을 모색하는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느긋한 생활속에서 갈것은 가고 돌아올것은 돌아올것이다.
64    노벨종소리 또 한번 우리 문단 앞에서 울렸다 댓글:  조회:1521  추천:0  2013-08-15
노벨종소리 또 한번 우리 문단 앞에서 울렸다 홍천룡 스웨리예문학원에서는 2012년도 노벨문학상을 중국의 작가 모옌에게 주었다. 아세아문단에 대해서는 늘 인색하게 굴어왔던 노벨문학상이 오늘 세계최대민족의 문화단지에 선심을 쓴것 같다. 이는 중국작가들에 대한 고무격려이기도 하고 또한 전반 아세아 기타 민족작가들에 대한 일종 추동으로도 될것이다. 1955년도 양띠인 모옌은 중국 당대의 저명한 작가이며 중국작가협회 제8기 위원회 부주석이다. 그는 중국의 산동성 고밀현에서 태여났다. 근로한 중국사람들 가운데서도 산동사람들이 특히나 부지런하고 끈질기기로 소문나 있다. 동년시기에 문화를 싹쓸이하던 “문화대혁명”의 영향으로 겨우 소학교를 마친 그는 고향마을에 돌아와 농가의 잔일에 잔뼈를 굳혀가는 목동이 되였다. 그러다가 스무살 잡아먹고 군부대에 들어가 총가목을 쥐게 되였다. 너도나도 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았던 그 세월에 참군하여 군복을 입는것이 그 시대 젊은이들의 추구였고 희망이였다. 참군하여 그는 반장, 보밀원, 도서관리원, 교원, 간사 등 직무를 력임했었다. 일반적으로 중국의 인민해방군부대내에서는 사천인과 산동인이 간부(군관)로 많이 발탁된다고 한다. 그들의 끈질긴 근면성때문일것이다. 1981년부터 그는 문학창작활동을 시작하였다. 1986년에 해방군예술학원을 졸업하고 1991년에는 북경사범대학 로신문학원 창작연구생반을 수료한 그는 “고하(枯河)”,”추수(秋水)”, “민간음악(民间音乐)” 등 향토작품들을 통해 중국어계 광대한 독자들의 인기를 끌며 점차 향토문학의 대가로 확인되였다. 그는 다산작가이면서도 명품출시에 찬스를 잘보는 작가였다. 그의 데뷔작이라고 할수 있는 “투명한 홍당무(透明的红萝卜)”에서는 “깜둥이”란 소년의 형상을 핍진하게 그려내여 당시 오르기 바쁜 문단의 긍정을 받았고 중견작가로 승화할수 있는 토대를 닦아놓았던것이다. 중편소설 “붉은 수수(红高粱)”는 중국문단이 개화기에 들어서던 1986년도에 발표하여 문단을 들썽해놓았다. 후에 영화로 개편되여 더욱 소문을 놓게 되였다. 1995년에 출판한 그의 장편소설“풍유비둔(丰乳肥臀)은 중문으로 50여만자에 달하는 장편으로써 한시기 말썽을 일으키기도 했었다. 하여 더욱 인기를 끌었던것이다. 2008년에 출판한 장편소설 “개구리(蛙)”는 작년에 중국의 최고문학상인 “모순문학상”을 수상했다. 모옌의 노벨문학상수상은 중국문학 및 아세아문학과 세계문학의 교류가 새롭게 시작되였음을 말해주는 바,전반 아세아문단에 새로운 활력과 생기를 부여할것이다. 그러면서 우리 민족의 한글로 창작된 작품도 오라지 않은 래일에 노벨문학상계관을 따올수 있다는 기대를 걸고있다. 우리 민족의 력사는 그 여느 민족 못지 않게 찬란했고 그 여느 민족 못지 않게 비참했고 그 여느 민족 못지 않게 굴곡적이였다. 그 력사자체가 한부의 서사거작이였고 노벨문학상을 따올수 있는 창작의 글감이였다. 때문에 한글문학작품의 노벨문학상 수상은 시간문제일뿐이다.
63    “점수따기” 댓글:  조회:1469  추천:0  2013-08-14
“점수따기” 홍천룡 “점수앞에서는 사람마다 평등하다”는 법칙이 몇십년간, 몇백년간, 지어 몇천년간 사람들의 머리속에 꼭 박혀왔었다. 봉건사회의 과거제도에서 점수를 제일 높게 딴 자가 급제하여 일약 고관대작이 된다 해도 그 누가 감히 공평하지 못하다고 발설이나 했겠는가! 너무나도 공평한 시험점수에 따라 벼슬했기에 누구도 불만을 가질수 없었다. 오늘날 대학입시에서 높은 점수를 따내여 이 큰 나라의 제일 학부라고 불리우는 “청화”나 “북대”에 척 들어붙으면 그 누구도 의견이 없지 않는가! 점수 높은 자가 제일 좋은 학교에 붙는것은 당연한 일이 아닌가! 오히려 사람들은 박수갈채로 축하를 보내준다. 다른 사람들이 따낼수 없었던 높은 점수를 따낸 덕이라는 그 공평성에 고개가 숙여지는 것이다. 허나 가장 공평한 속에 최대한 불공평한 요소가 잠재해 있을수도 있다. 시험에서 높은 점수를 따내자면 시험문제를 될수록이면 많이 맞추고 될수록이면 많이 풀어내야 한다. 가장 리상적인 경지에 이르자면 시험지안에 꼭꼭 박혀진 문제를 밑뿌리채 빡빡 긁어서 다 맞춰내고 다 풀어내는것이다. 틀림과 오차가 없으면 없을수록 ok다. 이처럼 점수에 높은 자가 학교나 부문의 선택권을 우선적으로 가지게 되고 더 나아가서는 계속 높은 점수를 따낸다면 석사나 박사의 앞자리도 다투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높은 점수를 따낼수 있게 하는 정확한 답안이 사전에 이미 다 정해져 있다는것이다. 이런 답안을 정해놓는 사람들이 우선 먼저 수험생들보다 그 지식분야나 전업부문에서 한발이나 두발 앞선 선배이고 대단한 학자들인 것이다. 수험생들이 몇년간, 몇십년간 머리를 꿍꿍 동여매고 밤을 내내 패가며 쪽쪽 여위여 가면서 악전고투하여 따낸 점수는 결국 남이 다 정해놓은 답안을 맞춰내는것에 그치고 만다. 아무리 높은 점수라고 해도 맞춰내고 풀어낸 명답안에는 새로운 발견도 없고 실용가치도 없는것이다. 다시 말해서 남들이 모르는 새것을 맞춰내는 것이 아니라 남들이 먼저 알고 숨겨놓은 것을 알아맞추고 파내는것이다. 허지만 새로운 발견도 없고 실용가치도 없는 그 높은 점수에는 많은 기회와 선택, 그리고 소수 사람만 향수할수 있는 대우가 따른다. 그래서 그 높은 점수를 따내기 위해서 남들이 정해준 답안을 맞춰내기 위해서 이 나라 수천수만의 푸른 청춘들이 한 종자와도 같이 하얗게 통일된 비닐박막하우스에 들어가 일률로 파란 색상을 띠우며 싹을 움트고 있는것이다. 아무렴 수천수만의 시험대군 가운데서 높은 점수를 따내고 앞자리를 차지한다는것도 조련찮은 일이다. 가히 영웅이라고 할수 있다. 헌데 이런 “영웅”은 언제나 극소수에 불과한것이다. 또한 그래서 남다른 대우를 받아도 응당한 것이다. 백명중 백점짜리 수험생이 하나, 둘 나와도 대단한것이다. 그렇다면 나머지 98명이나 99명은 무엇에 속할가? 학교식으로 따지면 그 가운데는 우수생도 있을것이고 급제생도 있을것이고 락제생도 있을것이다. 일반적으로 대개 우수생과 락제생이 소수이고 급제생이 다수가 되는것이다. 점수제는 이처럼 수자상에서 형태적인 불공평을 이루어놓는다. 아무렴 그 언제나 그 어느 고장에서나 상,중,하의 차이쯤은 늘 점 찍어져 있으니까. 그런데 가만히 좀 깊게 생각해보면 우리의 배움과 실천에는 그 높은 점수보다 더 귀하고 값진것이 가끔씩 반짝일 때가 있다. 그 높은 점수보다 더 귀하다고 하면 응당 그 높은 점수보다 더 높은 점수를 찍어줘야 하지 않겠는가! 헌데 지금 그 귀한것에 더 높은 점수를 주지 못하고 있다. 또한 줄수도 없는 상황이다. 그것이 가장 불공평한 점이다. 제일 귀한것에 가장 높은 점수를 주지 못하는것이 가장 불공평한것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그 귀한것이 무엇일가? 그것이 바로 다름 아닌 발견, 발명, 창조, 창작이다. 우선 발견, 발명, 창조, 창작에는 누가 먼저 정해주는 명답안이 없다. 누가 정해준 답안이 없는걸 맞춰내고 풀어낸다는것, 그 자체가 새롭고 위대하고 실용적인것이다. 다시 말해서 진정 값진것이다. 이처럼 값진것이지만 또한 어떤 때에는 머리를 꿍꿍 동여매지 않고서도 아주 쉽게 맞춰내고 풀어낼수도 있는것이다. 그래서 오히려 어떤 사람들에게서는 불공평성요소가 진하다고 버림받는다. 왜 공부하는가? 점수를 위해? 지식을 배워서 활용하기 위해? 솔직히 말해서 지금 점수를 위해 공부하는 학도가 대부분이다. 때문에 이 큰 나라에 이 많은 학도들 가운데서 교수나 학자들은 점점 더 많아지고 있지만 발명가나 사상가, 예술가나 작가들은 점점 더 적어지고 있다. 이것이 현하 우리 교육의 페단이라고 한다면 이런 페단이 지금 사회적으로도 만연되여 적지 않은 사람들이 “점수따기”에 “투자”를 아끼지 않고 있다. 어느 한 사업부문의 사장님이 그 바쁜 와중에 짬을 짜내 낚시질을 가게 되였다. 묘하게도 금방 입사한 신입사원의 처가마을에 있는 양어장으로 가게 되였는데 그 정보를 수집한 그 신입사원은 처가마을을 동원하여 일체 편리를 도모해주었을 뿐만아니라 점심끼니는 물론, 저녁후 1차, 2차, 3차까지 빈틈없이 배치해놓았다. 며칠후, 인사부장이 술자리에서 그 신입사원의 어깨를 툭툭 쳐주었다. “자네, 전번에 사장님한테서 점수를 톡톡히 땄어.” 과연 몇달후 그 신입사원은 파격적으로 주요부문의 부과장으로 발탁되고 따라서 봉급도 올랐다. 이는 각 부문에서 심심찮게 일어날수 있는 “점수따기”이다. 이보다 더 큰 사회적 이슈로 떠오르고 있는 문제는 상급지도자의 “점수”를 따내기 위해 백성들의 세금으로 이루어진 국가자금을 람용하여 “형상공정”을 어마어마하게 벌린다든가 통이 크게 경축대회를 차린다든가 불필요한 기념대회, 명절모임, 그리고 명목이 번다한 개막식, 제막식, 페막식, 입찰식, 착공식… “점수따기”를 위한 이 식 저 식에 얼마나 많은 랑비가 빚어지고 있는지 모른다. 이러한 “점수따기”가 뜨르르한 형식주의추구를 배태시키고 허위를 불러오고 공담가를 키워내고 있다. 습진평총서기께서는 근간에 이런 말씀을 하셨다. “공담오국, 실간흥방(空谈误国,实干兴邦”, 공담은 나라일을 그르치게 할수 있고 실제 일을 해재껴야 나라가 번창해질수 있다는 뜻인데 참말로 백성들의 속심의 말을 하셨다. 교정에서의 “점수따기”도 불공평성을 띠고 있고 사회상의 “점수따기”도 요망스러운 풍기를 띠고 있다. 특히 일부 지도층에 계시는 량반들은 “점수따기”에 작작 점수를 따고 실제 일을 많이 하여 백성들의 신임을 얻는것이 바람직 하지 않겠는가!
62    무대의 매력 댓글:  조회:1346  추천:0  2013-08-12
무대의 매력 홍천룡 무대는 일반적으로 관중석에 비해 작다. 자그마한 무대이지만 전반 극장이나 구락부에서는 “노란자위”로 된다. 따라서 무대에 오르는 사람도 관중에 비해 극히 적다. 한두 사람이나 몇 사람이 올라서 몇백명 내지 몇천명 사람들의 눈길을 잡아끄는 위치이다. 그래서 아무나 마음대로 오르는 자리가 아니다. 무대에 오르자면 예술적연기나 구술적재능, 또는 마술적기교 등 표연연기기능이 특이하게 구비되여야 한다. 때문에 무대우에서 1분1초를 연기하기 위해서는 밤낮으로 하루이틀이 아니면 한달두달, 지어 수년, 수십년씩 그 기능을 닦아야 한다는 말이 있다. 자그마한 자리에서 적은 사람으로 짧고도 짧은 순간적인 시각에 가장 빛나는 기능으로 폭이 넓게 많은 사람들에게 시각미와 청각미를 선사하면서 그들의 감각기관을 흥분시켜 줄수 있는 곳이 바로 무대인것이다. 때문에 무대는 “천당”과도 같은 곳이다. “천당”에 들어간 사람들은 모두 “신선”과 같은 사람들이다. “신선”들의 황홀한 꿈을 보여주는 곳이 무대이다. 이러한 무대이기에 평생 무대에 올라가 보지 못한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40여년전에 나는 행운스럽게도 무대에 올라가 무용절목을 공연해본 적이 있었다. 처음 무대에 올라선것은 그 옛날 연길시내에서 제일 웅장했던 건물—공인문화궁이였다. (지금 파가이주되여 새 고층건물이 자리잡고 있음) 무대에 올라서면 모든 것이 불빛아래에 드러나고 수백쌍 눈이 지켜보고있기에 그 어떤 미세한 실수도 감출수 없는것이다. 그때 내가 무대에 올라 공연한 첫 절목은 집체무용이였다. 만단의 준비를 하고 마음을 다잡아 먹었지만 전주곡이 울리자 나의 가슴은 토끼새끼를 품은듯 억제할수 없이 풀떡거렸다. 드디어 전주곡이 끝나고 트럼펫 고음선률의 울림과 함께 우리 무용대는 2렬종대로 한결같이 팔을 반공중에서 절주있게 폈다 꺾으며 무대에 나섰다. 무대공간은 휘황하고 현란하기만 했다. 강렬한 조명에 모든것이 하얗게 변해버렸다. 련속적인 박력있는 동작에 무대아래로부터 박수소리가 터져올랐다. 격정이 각일각 고조되여 갔다. 무대우에서는 절대 관람석을 내려다 보지 말라고 무용교원이 늘 강조하셨다. 높은 무대우에서 내려다 보면 눈가녁을 짙게 화장한 눈이 꼭 감겨져 있는것으로 보인다는것이다. 무대우에서 눈이 감겨진 것으로 보이면 우선 전반 얼굴의 광채를 잃게 된단다. 그러니 광채를 잃은 얼굴에서 감정표현같은 것은 더구나 운운할 여지도 없다. 때문에 무대우에서는 눈을 늘 45도 높이를 바라보며 떠야 한다고 했다. 무대우에서는 45도가 아주 중요한 각도였다. 얼굴을 옆으로 돌릴 때에도 90도로 꺾지 말고 45도에 맞추어 탈고 팔을 쳐들 때도 45도 높이, 턱을 쳐들어도 45도 높이… 그런데 나는 호기심을 이기지 못해 몇번 관람석을 내려다 훔쳐보군 했다. 앞좌석 몇줄은 운무속에 잠긴 영상처럼 보얗게 알렸고 뒤쪽은 거뭇한 장막속에 가리운 까막 나라여서 보이지 않았다. 마치도 우리가 구름우에 떠서 해빛을 받으며 춤추는 천사같다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그 황홀함은 이루다 형용할 수가 없었다. 사람의 일생에서 도대체 몇번이나 무아지경 황홀속에 빠져 넋을 잃어본적이 있는가! 그 격동, 또한 한가슴 뿌듯이 부풀어오른다. 그 희열적인 충격감은 무대에 올라가 직접 춤을 춰보지 못한 사람은 감수해낼수가 없다. 수백쌍 선망의 눈길이 지켜보고 열망의 가슴으로 안아주는 무대우에서 두팔을 날개처럼 마음껏 퍼득이며 행복의 요람으로, 희망의 언덕으로, 평화의 천당으로 날아예려는 매 하나의 동작은 아름다운 미에 대한 부각이였고 사랑의 선물이였다…이러한 무대이기에 무대효과 또한 대단하다. 어느 한 가수가 노래 한수만 진정 제대로 잘 불렀다면 극장안의 수백명 청중이 흥분에 들뜰 것이고 더 나아가서는 그 민족 전체가 감동받을것이고 더 나아가서는 그 나라의 수천수만에 달하는 그의 음악팬들이 뭉쳐질것이고 또 더 나아가서는 주변 나라와 전 세계가 알아봐 줄것이다. 그 사회적효과는 물론, 파생되는 경제적가치도 가늠할수 없을 정도로 올라간다. 우리 민족은 노래 잘 부르고 춤을 잘 춘다. 노래와 춤에는 남다른 천부적인 감수능력이 있는것만 같다. 헌데 이 방면에 대한 연구와 발굴, 배양과 제고, 더 나아가서는 무대정품화에 대한 대책들이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것만 같다. 한두개의 전업단체로만 부족하다. 광범한 대중화와 정교한 전업화가 결부되여야 한다. 그래서 우리 마을을 무대로 우리 고향을 무대로 우리 지역을 무대로 우리의 노래와 춤을 새롭게 세계에 보여줄 때가 되였다고 본다. 무대의 이런 매력은 예술분야에만 그치는것이 아니다. 우리의 정치, 경제, 사회 각 분야에서도 무대의 매력과 효력을 충분하게 리용할수 있는것이다.
61    현란한 물보라,찬란한 로정,화려한 조화 댓글:  조회:1295  추천:0  2013-08-08
현란한 물보라 찬란한 로정 화려한 조화 홍천룡 “9.3”60주년경축잔치를 치르면서 연길의 밤하늘이 날따라 현란해지고 밤거리가 찬란해지고 하늘땅공간이 조화로워지고 있다. 잔치는, 그것도 큰잔치는 군소리가 있든 말든 우선 가불간 잘 차려놓고 봐야 한다. 오는 손님도 그렇고 그 손님들을 맞아주는 주인도 그렇고 우선 보이는것이 눈에 즐겁게 안겨와야 성의가 깃든 례법에 맞는다. 밤이면 부르하통하 연길강량안에 저 밤하늘의 은하수별무리들이 내려앉는다. 즐비하게 늘어선 고층건물에 걸린 총총의 별꽃이 수면에 다시 꺼꾸러 비껴 절묘한 야경을 이루는데 금상첨화로 강중심에 가설해놓은 음악분수가 또한 아롱다롱 재롱을 부려 뭇사람들의 눈길을 끌고있다. 장쾌하게, 통쾌하게, 요란하게, 시원하게, 즐겁게, 멋들어지게, 또 어딘가 좀 망망하고 은근스럽게도 말이다. 명쾌하고 환락적인 우리 조선족민요가락의 고저장단에 따라 부동한 형태로 부동한 색조로 부동한 자태로 오만가지 요술을 피우면서 뿜어올리는 분수에 의해 피여나는 물보라가 그처럼 매혹적인 예술감흥력이 있을 줄은 몰랐다. 그것은 한부의 교향곡이였고 한편의 서정서사시였다… 느릿하고 장중한 전주곡에 따라 수십갈래 물줄기가 반공중으로 올리 치솟다가 부채살처럼 푹 퍼지면서 물바래를 이루며 흐물거린다. 장백림해의 파도 저쪽, 하늘반쪽이 희붐히 밝아오던 건국초기에 상처자국이 다닥다닥하던 변강의 오지에 에루화 둥둥 장고소리 울리며 자치주를 세우던 그 시기가 60년전의 전주곡이였다. 그 시기, 모든것이 부족했고 모든것이 귀중했던 그 시기, 말보다 손발이 앞서야 했다. 그래서 선률은 잔잔한 클래식음악으로 흐르고 줄기줄기 련봉을 이루며 넘실대는 물보라는 층층의 계단을 이르며 자주색으로 변한다… 지난 세기 50년대 부르하통하강가의 버들숲, 잔잔한 잔파도를 밀며 들려오는 빨래방치소리 토닥토닥, 강건너 강뚝넘어 공장굴뚝에서 피여오르는 연기가 뭉게뭉게 저녁해를 가리우는데 자갈밭에 이어진 모래톱 저 먼발치에서 발가숭이들의 물장구장난이 심하다… 점차 미파가 출렁이듯 선률이 저음베이스로부터 유연하게 올라가면서 밤하늘에 메아리친다. 선률의 변화에 따라 이번에는 수십갈래의 물줄기가 쌍쌍으로 서로서로 교차되며 타래치더니 연분홍물보라를 펼친다. 긴 치마자락을 흩날리며 너울너울 춤추듯 얼싸안고 빙글빙글 돌다가도 스리살짝 풀리면서 긴 머리태를 폭포처럼 풀어쏟는다. “장고춤”에 “물동이춤”, 거기에 무대를 휘감고 도는 상모돌리기, 아무튼 자치주의 조선족무용은 우아하고 날씬한 매력으로 늘 전국무대에서 날개를 돋치군 했었지… 음악이 흐르고 분수가 물줄기를 뿜어올리고 그 물줄기에 의해 피여나는 물보라가 꽃보라인양 천차만별 변화무쌍으로 모양을 이루고 자태를 바꾸고 색조를 갈면서 운치를 돋구는 예술의 조화에 이른다. 그것은 장백산 줄기줄기 뻗은 련봉을 따라 촘촘히 주름잡힌 골골마다에서 흘러내리는 골물이 해란강을 이루고 구수하를 이루고 가야하를 이루고 흘러내리며 대지를 수놓아 가던 자연적인 조화를 재조명시키는것이다. 새롭게 모습을 보이는 강뚝유보도에 불빛이 찬란해지자 음악선률은 고음으로 고조되면서 밤하늘의 고요함을 화려하게 들볶아 놓는다. 관악기든 현악기든 타악기든 다 동원되여 오케스트라협주곡의 웅장함을 과시한다. 동시에 수십개의 분수입구에서 수십개의 물줄기를 동시에 똑같은 속도로 연신 토해낸다. 마치도 까츄샤포부대가 적진을 향해 불을 토하는 장면처럼 박력있고 기세스럽다. 순간, 저 멀리 아득한 동방최전선에서 쿵쿵거리는 아군의 포소리가 은은하게 들려오는것만 같아 가슴이 다 찌르르 해나기도 한다. 물줄기의 공중소사 뒤끝에는 자욱했던 초연이 가셔지고 하얀 운무가 얇스레 펴진다. 그 하얀 망울이 터지여 축 처질가 할 때 또한 색조가 연분홍으로 변하며 다시한번 꽃보라를 뿌리니 운무가 진달래를 수놓은 기폭으로 변하며 쫙 펴진다. 그것이 또 자주색으로 변하며 장중함을 보여준다. 이때 음악선률이 최고음으로 강강하게 치달아 오르며 천지지간을 흔들어놓는다. 우뢰가 울고 광풍이 몰아치는 풍랑속에서 배전에 부딪치는 파도가 물바래로 퍼지며 하얗게 쏟아진다. 그 가운데로 중심물줄기 한갈래가 굵게굵게 공중으로 치솟아오른다. 아칠한 츠렁바위를 이고 선 범바위너머로 둥근달이 휘영청 걸려서 빙그레 웃는다. 그 한갈래의 물줄기는 달속에 비낀 토끼를 찔러 잡으려는듯 치솟고 치달아 오르다가 앗차! 잠깐 숨이 차서 주춤거리더니 다시 치솟고 치달아 오른다. 그렇다! 오르고 오르고 또 오르면 못오를 산이 있을소냐! 저 반세기전 이 부르하통하량안은 버들숲뿐이였다. 그때 자치주가 저기 저 뒤산 소나무숲속에다 대학교도 세우고 저기 남쪽 모아산기슭을 따라 만무과원도 앉히고 저기 서쪽 수렁늪에다 고수확원전화 벼밭도 일구고 저기 동쪽 갈대숲에다는 용광로도 세우고 했다. 혁명과 건설을 위해 모든것을 바쳐야 할 그 옛날 그 세월에 정상에 오르겠다고 몸부림 치며 달리고 달리던 그때의 그 사람들, 저 장중한 선률가락을 타고 뽀얀 물보라속으로 우렷이 떠오르는것만 같다. 캡을 쓴 인자한 그 얼굴에 벙글써 미소를 담고 다니신 “황소서기”, 농민대학을 세워 “꼴호즈”의 꿈을 꾸며 새벽이슬을 차던 농민모범, 부뜨막아궁이에서 장작개비가 탁!탁! 튀기며 타오르는 불빛을 빌어 장장 수백만자에 달하는 보서통권을 좔좔 내리 외우던 “시골의 수재엄마”, 늘 축구장의 왼선코스를 돌파해나가 꼴문을 열던 “제비11번”의 곱슬곱슬했던 그 “앙골라머리”, 황소를 타고 벙글거리던 그 힘장사 대학생, 빵! 빵! 자동차, 자동차가 귀했던 그 세월에 자동차를 몰고 지구를 몇바퀴 돌면서도 사고 한번 치지 않은 운전사… 그리고 그외 또 면목이 있던 다정다감한 모습들이 줄줄이 떠오른다. 저기 저 물보라속에서 반짝이는 별무리처럼! 음악은 부르하통하강물과 같이 계속 흐르고 분수에서 뿜겨져 나오는 물줄기는 계속 물보라를 일군다. 때론 고요한 새벽안개속 같기도 하고 때론 합수목에서 용용히 소쿠라지는 벽파 같기도 하고 때론 숭엄한 장백산천지 같기도 하고 때론 봄봄이 봄단장에 낙낙하게 교태머금은 아리랑아가씨 같기도 하고 때론… 달빛, 별빛, 불빛이 어룽어룽 어린 수면과 어울리는 음악분수는 화려한 색조로 무지개를 이루고 그 무지개로 연길의 밤하늘은 알록달록한 꿈자리를 펴놓으며 깊어만 간다.
60    장쾌한 그 멋, 그 분위기로 장장 60년 댓글:  조회:1356  추천:0  2013-08-07
장쾌한 그 멋, 그 분위기로 장장 60년 홍천룡 일해도 일같이 하고 놀아도 기분나게 놀고 마셔도 통쾌하게 쭉쭉 마시는 사람들, 천지의 폭포처럼 거침없고 장백의 호랑이처럼 용맹무쌍한 사람들이였다. 60년전에 연길공원언덕바지에서 그들이 목청껏 웨치던 “만세!”소리가 지금도 귀청을 울리는듯 멍멍해 오는데 “옹헤야!” 춤가락속에서 깜장치마폭이 성수나게 휘감게 드는 정경이 또한 눈앞에 선하게 안겨든다. 그날의 그 장쾌한 분위기속에는 그들이 쌓은 장쾌한 기적이 안받침되여있었다. 50여만명 인구에 1만5천여명 렬사의 기념비를 피로 쌓아올린 민족, 천천만만 중화의 50여개 민족들 가운데서 앞자리로 그 비장함을 연주하였던것이다. 암흑이 깔린 밀림속에서 장쾌한 해돋이를 맞이할 그 서광을 따라 앞장에 서서 피를 흘리며 싸워왔던것이다. 동산마루에 해가 둥실 떠서 잠들었던 시골의 벽촌을 깨워줄 제 황소의 영각소리로 아침안개를 헤가르는 사나이의 뒤에는 중화대지에서의 첫 새벽농업합작사 사원들이 포전길에 나선다. 집체화의 장쾌함을 보여주면서! 왜놈들이 버리고 간 페허우에다 필필이 쏟아지는 하얀 종이를 휘감고 새 업적의 기록을 새겨놓던 연변의 제일대 종이제조로동자들, 그들의 장쾌한 일솜씨에 가야하도 너울너울 춤추며 흘렀었다. 새납소리 긴 여운을 타고 장고치는 아낙네의 가락에 맞춰 “도라지타령”이 저기 저 노들방천에서 장쾌하게 메아리치고 시인의 랑랑 읊조림이 푸드득 메새들을 놀래운다. 아츨한 백양나무끝초리에서 구리방울 달랑! 울리며 꼬리치마 펄럭이고 개울가 백사장에 환성이 터지는 가운데 덜먹총각의 장쾌한 씨름솜씨가 황소를 불러온다. 축구장의 빨간 “뽈개지” 9번이 멋진 슛에 그물이 철렁! 만민의 장쾌한 환호소리속에서 “축구의 고향”이란 월계관이 시골에 와서 뚝 떨어졌다. 먹구름이 몰려와서 번개치고 우뢰가 울고 홍수가 범람하던 동란세월에 그 장쾌한 멋이 비에 젖어 축 늘어졌는가 했더니 봄바람이 한번 불더니 또다시 움트고 푸릇푸릇 돋아날 줄이야! 개혁의 아침이 푸름푸름 밝아올 때 다른 사람들은 아직 잠결에서 깨지 못해 눈을 부비고 있을 때 이 민족은 벌써 바지가랭이를 걷어올리고 바다가 옅은 물에 뛰여들어 게새끼랑 바지락이랑 대합이랑 주어다가 생선국을 불룽불룽 끓여놓고 식전 첫잔을 통쾌하게 쭉 굽을 내고있었다. 감수가 빠른 것이 특징이오 행동이 빠른것이 장점이오 끝을 보고야 마는 것이 풍격이오. 그 특징이 선각자를 불러오고 그 장점이 세월의 변천을 당겨오고 그 풍격이 성공의 희열을 안아왔었다. 개방의 문이 삐극삐극 열릴가 말가 할 때부터 남먼저 보따리를 싸메고 뒤산을 넘어 시베리아로 질주했고 앞바다를 날아넘어 땀을 흘렸고 연변의 메마른 땅에다 “물”을 뿌려주었다. 시골의 산간벽지에 아파트가 뿌죽뿌죽 올리 솟구치게 된데는 그들의 피땀이 스며들었기 때문이였다. 장쾌함이 우리 이 민족의 기질이 구체적으로 표현되는 한 방면이다. 연변의 기적은 이런 장쾌함속에서 쌓아졌고 이런 장쾌함속에서 우리의 할아버지, 할머님이 인생길을 개척해오셨고 우리의 아버지와 어머님이 걸어오셨고 우리가 성장해 왔고 우리의 동생들이 뒤를 따라오고있다. 앞으로의 60년 또한 그 장쾌함속에서 맞아올것이다.
59    희망은 언제나 저 푸른 언덕우에 댓글:  조회:1703  추천:0  2013-08-06
희망은 언제나 저 푸른 언덕우에 홍천룡 그 래일이 없으면 사람은 무슨 멋에 오늘을 살가? 그 래일에 가서 좀 더 보람차게 살아보자고 사람들은 오늘을 헛되이 보내지 않는다. 먹고싶지 않은 밥도 푹푹 퍼먹고 하기 싫은 공부도 또박또박 하고 해도해도 끝이 없는 일도 꾸벅꾸벅 하고 가기싫은 외국나들이도 윙윙 날아가고…그 래일에 삶의 희망이 있는가부다. 인젠 60고개를 바라보는 나도 언제나 그 래일을 바라보고 여지껏 별로 쉬지도 않고 걸어온것 같다. 아리숭한 유년시절은 잘 기억나지 않으나 깜장 헝겁가방을 달랑 메고 엄마의 손에 손목을 잡혀 학교로 끌려가던 일은 어제 있었던 일과도 같이 기억에 생생하다. 가기싫은 학교였지만 엄마는 그 학교에 가서 공부를 잘해야 이다음 커서 훌륭한 사람이 된다고 했다. “ㅏ, ㅑ, ㅓ, ㅕ…”를 배우고 “1, 2, 3, 4…”를 외워서 백점을 맞으면 그당시 사먹기 힘들었던 “닭똥과자” 한봉지가 차려졌던것이다. 수수밥에 강냉이떡만 먹었던 그 시절에 “닭똥과자”의 맛이란 영영 고소하기만 해서 그 유혹이 컸다. 그래서 백점을 맞는것이 래일에 희망이였고 그당시 올라가서 뛰놀고 싶었던 푸른 언덕이였다. 그런 푸른 언덕이 있었기에 소학교는 내내 우등생으로 올라갔었다. 초중시절은(당시 고중이 없었음) “문화대혁명”이라는 장마철을 만나 내내 비바람속에서 보냈다. 토끼새끼를 훔쳐다가 키웠고 토끼풀인 “세투리”(씀바귀)캐러 비행장에 갔다가 하남아이들과 무리싸움도 벌리군 했다. 학업이 중지된 상황이여서 매일 무리를 지어 싸다니며 말썽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업이였다. 한번은 권투련습을 한답시고 “컬레브”(권투장갑)를 끼고 대방의 “훅구”(명치끝)를 친다는것이 아래배를 쳐서 그 아이가 배를 안고 대굴대굴 구을면서 비명을 내질렀다. 그 아이가 죽는가 해서 속이 한줌만 해졌다. 헌데 그 아이가 일어나 바지를 벗고 똥을 눈것이 우굴우굴거리는 “거시”(회충)뭉치를 내싼것이였다. 마음이고 몸이고 구렁텅이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을 때 학업이 회복되여 학교에 나가게 되였고 매일 벽돌공장이 아니면 “5·7농장”에 가서 고된 로동교육을 받았다. 그러다가 행운스럽게도 학교의 “모택동사상문예선전대”에 들어 춤노래를 배우게 되였다. 처음 로동자문화궁무대에 올라가 공연할 때의 그 황홀함은 이루 다 말로써 형언할수가 없다. 동틀무렵의 서광이 부채살처럼 비껴오는 저기 저 동산마루를 향해 활개쳐오르는 기분이여서 무아지경 황홀속에 빠져 넋을 잃어버렸다. 수백쌍 선망의 눈길들이 지켜보고 열망의 가슴으로 안아주는 무대우에서 두 다리를 폈다 꺾으며 두팔을 날개처럼 마음껏 퍼득이면서 저 요원한 곳의 행복의 요람으로 희망의 언덕으로 평화의 천당으로 날아예려는 매 하나의 동작, 매 한송이의 웃음꽃은 아름다운 미에 대한 부각이고 고고지성이였다. 무대의 그 예술적 감화력이 나의 심신을 도야시켰고 내가 갈망하는 푸른 언덕이였다. 매 하나의 동작, 매 한곡조의 가락을 익히고 숙련되기까지는 밤에 밤으로 땀동이를 흘리며 땀으로 절궈내야 했다. 매번 공연에서 터득되는것은 예술기능이란 잔혹한 련마속에서 닦아진다것이였다. 그것이 내 인생의 길에서 반짝이는 한점의 불꽃으로 되여주었다. 무대라는 푸른 언덕우에서 뛰놀수 있어 나는 그당시 우리 또래들의 부러움과 질투를 자아내기도 했었다. 그래서 나는 앞날의 나의 일생을 예술로써 장식하려고 다지고 또 다졌었다. 허나 그것은 천진한 아이들의 새벽꿈에 불과했다. 초중을 졸업하고 사회로 나오게 되니 나의 꿈은 다 깨여졌다. 사회는 현실적이였다. 맥주공장에 가서 하루에 1원25전씩 받고 보이라굴뚝을 쌓는 일도 해보고 제약공장에 가서 문틀을 짜는 목수일도 배우고 뜨락또르부속품공장에 가서 주물직장의 주조공으로 쇠물을 붓기도 했고 시정공정처에 가서 길닦기도 해보았다. 그러다가 삼도탄광에 가서 석탄을 캐기도 했다. 탄광이란 돈을 많이 벌어 좋은 곳이기는 하지만 무시무시한 곳이기도 했다. 한 숙사에서 같이 자던 쑹개가 하루밤 밤대거리에 저승의 귀신으로 되는걸 보고는 두말없이 이불짐을 쌌던것이다. 그 시기에는 나의 눈앞에 푸른 언덕이 보이지 않았다. 그후에 나는 시정부 로동국의 배치에 따라 량식국산하에 있는 숙식품가공공장으로 들어갔다. 몇백명 지식청년들로 이루어진 새단위여서 매일 시끌벅적했고 말썽이 많았다. 후근반 반장직을 맡은 나는 밤낮이 따로 없이 뛰여다니며 맡은바 임무를 어김없이 해내군 했다. 학교문예선전대에서 절목연습에 땀을 흘리던 그 본새로 일을 해재꼈던것이다. 아마도 그래서 지도부의 눈에 든것 같았다. 두달후에는 새공장건물을 짓는 건축시공대 대장으로 임명하였다. 후근반 반장으로 있을 때에는 직공 여섯명을 거느렸는데 시공대 대장이면 직공 칠팔십명을 거느려야 했다. 그것이 1975년도 이른 봄 일이였으니까 내 나이가 만 스므살이였다. 나는 우선 미장반, 목수반, 운수반, 후근반 등 각 반조의 반장을 새롭게 바꾸고 일에 달라붙었다. 제일 곤난한 점이 언어였다. 시공대에는 한족이 절반이상이였던것이다. 매번 작업을 포치하고 총결을 지을 때면 한족직공들이 말을 알아못듣겠다고 눈을 희번뜩거리며 야지로운 심술을 부리군 했다. 그래서 나는 한어를 배워내자고 마음먹었다. 마침 그때 당지부에서 청년들한테 당조직을 따라배우라는 호소를 내렸고 사상회보를 써내라고 추동하였다. 나는 인차 사상회보를 써냈는데 최서기가 다음번 사상회보는 한어로 써내라는것이였다. 기실 그때 우리의 한어수준은 소학교수준이였다. 중학교에 올라와서는 기본상 공부를 않했던것이다. 나는 신화자전을 빌려다가 사흘밤에 겨우 편지지 한장에 글을 채웠던것이다. 그걸 최서기께 바쳤더니 그는 손수 만년필을 꺼내 새까맣게 고쳐주는것이였다. 그때 한어를 잘하는 최서기가 그처럼 부러울수가 없었다. 그후부터 나는 무슨 글을 쓸 일이 있게 되면 틀리든말든 한어로 썼고 크고작은 회의를 소집할 때마다 틀리든말든 한어로 사회하군 했다. 그래서 수시로 웃음거리를 자아내군 했다. 처음엔 좀 부끄러웠지만 후에는 낯짝이 두꺼워져 부끄러움도 없이 같이 웃어주군 했다. 한족직공들이 나의 열정에 감동되였는지 후에는 저마다 선생이 되여주느라 틀리면 제때에 시정해주고 모르는걸 알려주기도 했다. 반년후에는 전공장직공대회에서 반시간이상씩 한어로 강화할수 있게 되였다. 당조직에 바치는 사상회보도 한번에 네댓장씩 써낼수 있게 되여 최서기의 칭찬도 여러번 받았다. 당조직에서 나를 중시하기 시작했다. 최서기가 나를 불러다 개별담화를 하고 조직위원이며 공회주석인 요아바이가 당의 지식에 대한 책들을 가져다 주었다. 시공임무가 그렇게 바빴지만 한달동안 당교에 보내 강습을 시키기도 했다. 당교에 가서 무산계급독재리론학습을 하면서 나는 공산주의 불꽃을 튕겼던 빠리공사의 비장한 국제가의 선률을 들었고 자본사회의 비밀을 까밝힌 맑스를 숭경하게 되였으며 세상에 첫 사회주의 사회를 실현시킨 레닌에 대해 감복을 금할수 없게 되였다. 그래서 공산주의서광을 맞아오기 위해 이 한몸을 다 바치리라 마음을 다지고 또 다졌다. 바로 공산주의가 푸른 언덕이 되였던것이다. 그런 푸른 언더우에 락원을 짓는데 한장의 벽돌장이 되여보겠다고 나는 단위에 돌아와서 죽을둥 살둥 모르고 일했다. 늘 시간이 딸려서 공지의 초막에서 밤을 새워가며 일했고 학습심득을 써냈다. 헛된 노력없이 결실은 보람찼다. 원래 1년반으로 계획되였던 공장건물시공을 우리 시공대가 8개월만에 완성하여 그해 12월 28일에 나는 영광스럽게도 “화선입당”을 하여 그 푸른 언덕우에 올라서게 되였다. 그후 나는 선후하여 공장, 량식국, 재무계통의 선진공작자가 되였고 전시 모범당원이 되여 찦차에 앉아 모주석저작학습활용강용회마다 불리워 다니느라 바빴다. 당조직에서는 갈수록 나에게 더 큰 과업을 맡겼다. 민병련 련장, 단총지 전직서기, 정공조(政工组) 조장 등 직책을 맡겼고 후에는 량식국정공과에 올라가 간사로 일하게 하였고 몇달후에는 “시재무계통쌍학판공실(市财贸系统学大庆学 大寨办公室)”로 발탁시켰다. 판공실주임으로는 전시 재무계통을 책임진 시위 부서기 최장부라는 로간부였는데 학식이 깊고 점잖고 세심한 분이였다. 부주임들로는 상업국, 량식국, 은행, 공소사 등 부문의 국장, 행장, 주임들이였는데 일이 있을 때면 모여서 회의를 하군 했다. 구체일은 판공실사업일군 6명이 처리하였다. 회의와 활동이 많았고 상급지시문건과 아래 각 부문에서 올라오는 보고재료들이 많았다. 정말 눈코뜰새 없이 보내야 했다. 내가 나이가 제일 어리고 수준도 제일 낮았다. 쉴새없이 물어보고 청시하면서 일을 처리해야 했다. 허지만 열정이 좋았고 뛰여다니길 좋아했기에 총애를 받기도 했다. 또 후에는 나를 “청년간부양성반”에 보냈다. 그 양성반 학원들 가운데서 리중조, 서수란, 곽세서, 곽순리 등 사람들은 후에 시위 부서기, 시정부 부시장으로 되였고 대부분 학원들이 각 부와 국의 부장, 국장으로 되였다. 그렇게 내가 한창 그 푸른 언덕우에서 활개치며 나가고 있을 때 세월은 다시 한번 돌변했다. “4인무리”가 꺼꾸러지고 대학입시가 회복되였던것이다. 모든 리념과 리론이 뒤바뀌여졌다. 더는 계급투쟁의 적대적리념이 아니였고 무산계급독재리론이 아니였다. 나는 한시기 고민에 빠지고 방황했다가 대학시험을 쳐서 대학으로 갔다. 대학가에서는 시야비야 하는 리론탐구에 열이 올랐고 문학붐이 일고있었다. 방황하고 있던 젊은 나이라 나도 인차 그 바람에 말려들었고 산기슭에 오붓하게 자리잡은 문학동네를 찾아냈고 그 동네 동구밖에 있는 푸른 언덕을 새롭게 발견하였다. (문학이 사람을 만드는 동네구나.) 하늘아래 첫동네에 들어선 기분으로 문학서적을 탐독했고 신성한 창작에 달라붙는다고 필을 끄적거리기도 했다. 가만히 살펴보니 대학가의 문과생들은 그 대부분이 문학도들이였고 문학애호가들이였다. 누가 문학잡지에 한두편의 작품을 발표하면 모두 흠모하군 했다. 그 허영심에 들떠서 나도 모든걸 뿌리치고 창작에만 열중하였다. 정말 미칠정도로 집념에 빠졌다. 거기에 빠지고 보니 정말 파아란 하늘의 햇구름처럼 몸이 동동 뜨기도 하고 한밤중 무덤묘지에서 시퍼런 귀신불을 보듯 몸이 오싹 떨리기도 하고 늪가의 파도속 소용돌이에 몸이 말려드는듯한 절망감을 느껴볼수도 있었다. 혼자서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고 떨기도 하는 그 기묘한 감격과 스릴을 맛볼수 있는것이 너무나도 좋았다. 나의 필끝에서 하나하나의 부동한 인물들의 독특한 개성이 생동하게 그리워져 나온다는것이 또한 신기하기도 했다. 그렇게 잘 쓰느라고 애를 썼고 또한 그처럼 잘된 작품은 없을것이라고 자신있게 투고하면 한강에 돌 던진격이 되고마는것이였다. 실망도 가져봤다. 푸른 언덕이 노랗게 보이기도 했다. 그때 필을 꺾었더라면 나의 후반생은 좀 더 안온한 길에 들어섰을것이다. 그런데 어찌라구 필을 꺾지 않고 계속 원고무지에 골을 처박고 안되는 글을 계속 갈개쳤는지 모르겠다. 아마도 하느님이 그 정신을 귀엽게 봐준것 같다. 그렇게 쓰고 또 쓰다가 “어애가 방귀를 뀌다”는 식으로 “포”를 한방 쿵! 하고 쏘게 되였다. 내가 쓴 단편소설 “구촌조카”가 제2회 “연변문예문학상”을 타게 되였던것이다. “연변문예”잡지가 복간되여서 두번째 문학상인것만큼 당시 문단을 들썽해놓았던것이다. 정말 푸른 언덕우에서 뛰놀다가 제일 고운 들꽃을 딴것이였다. 그 꽃을 가슴에 안고 앞을 내다보니 가없이 펼쳐진 푸른 언덕이 저 요원한 하늘가로 잇대여져 있었다. 그때의 그 끓어번지던 격동, 그 둥둥 뜨던 기분은 지금와서 다시 추억에 잠겨 음미해보아도 그처럼 감미로울수가 없다. 그해가 1981년도였으니까 내 나이가 스물일곱이였던것이다. 한때나마 객기를 부렸던 젊은 시절을 돌이켜 보면 지금도 그 어떤 희망에 가슴이 부풀어 오르는것만 같다. 젊은이나 늙은이나 래일이란 희망을 내다 볼줄 알아야 밤에 꿈이 오고 꿈이 있어야 그걸 현실로 만들고저 한 기운이 생기고 기운이 생겨야 일을 잘할수 있고 좌절과 침체속에서도 꿋꿋이 일어설수 있는것이다. 그래서 마음이란 언덕에 희망이란 잔디풀을 자주 심어야 할것 같다. 그래야 그 언덕이 늘 푸릇푸릇해서 싱싱함을 확보할수 있지 않겠는가!
58    《귀신》철학 댓글:  조회:1718  추천:0  2013-08-01
《귀신》철학 요즘 누가 옛말을 들어봤는지? 지금은 아이들도 옛말을 듣기 싫어한다. 또 들을사이도 없다. 우리가 어렸을 때에는 옛말을 제일 듣기 좋아했었다. 특히 귀신옛말이라면 눈 한번 깜짝하지 않고 오돌오돌 떨며 들었다. 필자가 살던 공신 《웅덩개마을》엔 《성7건(省七建)》에 다니는 미장공아저씨가 계셨는데 허씨였던지 서씨였던지...귀신옛말을 귀신같이 잘했었다. 여름밤, 그집 마당가엔 쑥태를 태우는 연기가 모락모락 피여올랐고 그 주위에는 늘 마을에 조무래기들이 눈이 초롱초롱해서 빙 둘러앉는다. 코를 훌쩍거리는 놈, 쑥태연기에 콜록거리는 놈, 별놈들이 다 있다. 허지만 귀신옛말이 아슬아슬한 정절에 이를 때면 그놈들 코물이 한뼘이나 허옇게 내리드리워도 훌쩍거리지 않았고 쑥태연기가 자오록해도 콜록거리지 않는다. 옛말이 끝나면 집이 코앞인데도 무서워서 못가는 겁쟁이들도 있었다. 그러면 미장공아저씨가 한놈 한놈씩 집까지 안아다주군 했었다. 그처럼 무서운 귀신옛말을 왜서 바들바들 떨면서도 그처럼 듣기 좋아했을가? 귀신옛말에는 유물론적인것도 있고 유심론적인것도 있으며 변증법적인것도 있고 형이상학적인것도 있다. 그 철학적원리를 신선같이 터득하고 귀신같이 활용한것이다. 아마 그래서 청자들의 마음을 꽉 옭아맬수 있었지 않나싶다. 지금 세계적으로 과학환상소설이나 영화, 텔레비드라마들이 인기가 높다고한다. 책으로 찍으면 몇백만, 몇천만씩 나가고 영화로 찍으면 너도나도 앞다투어 본단다. 두루 어떤 장면들을 스쳐보면 그제날 귀신옛말과 흡사한데가 많았다. 그 순식간에 변하고 날아다니는 대형거물들이 대개 귀신옛말에서 나오는 귀신형상들과 엇비슷한 감이 든다. 그래서 요즘은 엉뚱하게도 귀신같이 귀신같은 생각을 가져보기도 한다. 한번 좀 귀신이 되여 귀신같은 글을 써볼수 없을가! 헌데 귀신이 되겠다면 귀신이 될수 있는건가? 지난 세기 60년대말에 적잖은 글쓰는 사람들이 《귀신》으로 몰리웠었다. 《귀신》이 되고싶어 된것이 아니라 남들이 씌워주는 《귀신》모자를 억울하게 쓰고 인간대접을 받지 못했던것이다. 지금 그 량반들더러 다시한번 더 《귀신》이 되여보라고 하면 아마 두주먹을 불끈 쥐고 치를 떨것이다. 이런걸 알고있는 내가 왜서 귀신이 되여보고싶은 미친 생각이 떠올랐을가? 내 미친 생각에는 귀신이 되면 다음과 같은 좋은 점이 있을것 같다. 우선 신비스러워질것이다. 그 사람 귀신이 되였나? 어떻게? 세상 사람들이 의혹을 가지고 다 알고싶어 할것이다. 어떻게 생겼는데? 먼곳에 있는 사람들은 사진이나 찍어 빨리 인테넷에 올리라고 야단일것이다. 지금까지는 공개적으로 공포된 귀신사진이 없었다. 아마 공포되는 날이면 세계유명 보도매체들에서 앞다투어 달려오느라 란리가 날것이다. 초상권양도비는 얼마씩 불러야 할지 지금부터 골머리가 욱씬거린다. 헌데 그 사진에 어떤 모습이 나타날지 귀신이 되여보겠다는 나로서도 신비스럽다. 그 옛날 귀신옛말을 듣고 조무래기들끼리 주고받던 말이 떠오른다. 《나 어제밤꿈에 귀신을 봤어.》 《 어떻게 생겼더니?》 《도깨비처럼 생겼더라.》 《도깨비는 어떻게 생겼는데?》 《귀신처럼 생긴거지.》 《피-, 가짓부리.》 지금은 정말이지 거짓부리가 아닌 귀신이 되여보고싶은 마음이다. 그다음 귀신이 되면 자유스러워질것이다. 귀신의 자유는 일반 자유가 아니다. 인간사회를 초월할수 있는 자유이고 우주의 시공간을 초월할수 있는 자유이다. 달나라화장실에 들어가 뒤를 볼수도 있고 햇님네 꾸린 찜질방에 들어가 한껏 몸을 풀수도 있다. 세번째 좋은 점이라면 더없이 만족스러워지는 감을 느낄수 있을것이다. 컬컬하면 천도복숭아도 따먹을수 있고 술생각이 나면 룡왕생회를 초장에 쳐서 안주할수도 있다. 상아아씨가 고우면 딸라묶음을 안겨줄수도 있고 어느 놈이 괘씸하게 놀면 시뻘건 혀를 날름거리며 한바탕 혼빵나게 해줄수도 있다. 이밖에도 좋은 점이 많고도 많다. 한입으로 한꺼번에 어찌 다 말할수 있으랴! 글쓰는 놈이 귀신이 되여보겠다니 귀신이 된다음에는 그래도 제일 하고싶은 노릇이 귀신같은 글을 써보자는 일일것이다. 글을 귀신같이 쓰면 다음과 같은 좋은 점이 있겠다고 느껴진다.(옛말에서는 귀신의 나쁜 점을 너무 많이 말했었다. 그 엎음갚음으로 오늘은 귀신의 좋은 점을 더 말하고 싶다.) 첫째로는 상상력을 마음대로 펼수 있을것이다. 귀신은 사람들이 하는 노릇도 하고 사람들이 생각하지 못한것도 상상해낸다. 귀신이 되면 벼라별 상상을 다 해볼수 있지 않겠는가! 둘째로는 작품의 깊이를 깊게 파낼수 있을것이다. 지금 작품을 감상하고나면 좀 아쉬운 감이 들 때가 많다. 《야, 요거 한삽만 더 팠더라면...》 그 한삽때문에 독자들에게 실망을 줄 때가 많고 그 한삽때문에 자신도 고민할 때가 많다. 그 한삽을 파자면 힘도 힘이겠지만 머리로써 꾀를 써야 한다. 꾀란 철리성의 활용이다. 우리의 적지 않은 작품들은 철리성이 부족하기에 가벼워보인다. 대개 몸이 가벼운 사람이 빨리 뛴다고 한다. 허지만 승용차는 자체중량이 무거울수록 속도가 빠르고 평온하다. 때문에 일반 승용차는 한둘이서 밀수 있지만 고급승용차는 한둘이서 밀기 빠쁘다. 귀신들에게는 꾀가 많다. 꾀를 쓰기 위해서는 인간이 되였다가 바다밑 물고기로 변하기도 하고 하늘로 날아다니는 새로 둔갑하기도 한다. 세상 있을수 없는 일이지만 우주공간의 자연법칙과 인간사회의 생존법칙은 떠나지 않는다. 웅덩이가 점점 좁아져서 마지막 한삽을 파낼래야 파낼수 없을 때 귀신으로 변하면 꼭 파낼수 있는 꾀가 생길것이다. 귀신같은 꾀가 생길수 있다면 그 어떤 작품의 깊이도 다 파낼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셋째로는 대담하게 글을 써낼수 있을것이다.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것이 무엇이냐? 인간으로서는 죽음의 공포일것이다. 헌데 귀신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대개 귀신들은 한번씩은 죽었다났으니깐. 한번 죽으면 어떻고 두번 죽으면 어떠랴 하는 귀신들의 심리였을것이다. 우리의 작품들도 대개 몇개의 사선을 넘게 된다. 우선 귀천길 행차 자결행위이다. 애면글면 써낸 글이 자기마음에도 들지 않아 목을 매서 자살한다. 그다음 편집출판기관의 내부판결이다. 공개지면에 나갈수 없다는 《사형선고》를 받을 때가 있게 된다. 그리고 독자들의 공개판결도 있다. 발표되여 나간다음 대부분 독자들이 《글같지 않은 글》이라고 인정하게 되면 그 작품은 끝장을 보게 되는것이다. 또 지역, 민족, 제도, 종교적인 판결도 있다. 우리 나라에서 발표될수 있는 작품이 다른 나라에 가서는 발표될수 없는것이 있다. 세월이 흐르노라면 력사의 판결도 있게 된다. 어떤 작품은 력사의 국한성이나 사회의 모종 환경의 제한으로 하여 그당시 발표되고 그당시 인정받지만 세월이 얼마쯤 흘러간뒤, 그 세월의 흐름이 짧을수도 있고 길수도 있는데 문뜩 사회에 해를 끼치는 독초라고 인정되면 곧 사형받게 되는것이다. 이러루한 사선들이 봉쇄선을 치고있기에 글쓰는 사람들은 구상으로부터 집필, 수개, 탈고계단에 이르기까지 이러저러한 제한과 속박을 받게 되고 고려와 우려를 가지게 된다. 그것이 습관이 되여 양성으로 발전하면 《창작성치매증》에 걸리게 될수도 있다. 그런데 만약 귀신이 되여 글을 쓰게 되면 그어떤 제한과 구속도 받지 않을것이고 그어떤 고려와 우려도 가지지 않을것이다. 마음껏 상상하고 통쾌하게 좔좔 내갈길수 있는것이다. 넷째로는 요술스러운 변화기법으로 글을 써낼수 있을것이다. 귀신들의 제일 큰 특점이 요술스러운 변신기교다. 헌데 우리의 일부 작품을 보면 줄거리의 전개나 인물의 형상부각이 너무나 꼿꼿한 전선대와도 같다는 감이 든다. 그렇지 않으면 너무나 잔잔하고 느리게 변화되는것이다. 사계절변화처럼 여름에는 여름옷을 입고 겨울에는 겨울옷을 입는식이라 하겠다. 삼복철 여름날씨에 겨울옷을 입고 한번 서시장 한복판에 나서보시라. 숱한 사람들의 눈길을 한꺼번에 끌어올수 있지 않겠는가! 어느 한 작품의 작중인물이 숨막히게 물크는 여름날 정오에 털외투에 털모자를 쓰고 목수건까지 꽁꽁 둘러치고 서시장 한복판에 섰다고 가설해보자. 《저 사람, 좀 오락가락하는구만. 신수는 멀쩡한데.》 《얘, 잘 생겼다야!》 《아, 고과장이 왜 저래고 나섰지?》 ... ... 숱한 사람들이 신수가 멀쩡하고 기관에서 한자리나 한다는 사람이 왜 여름날 겨울옷을 입고 나섰을가 하는 의혹을 강렬하게 느낀다. 이튿날, 고과장은 미색샤쯔에 빨간 나비넥타이를 착 매고 그 미끈한 체격을 탄력있게 자랑하며 사무실로 출근했다. 습관적으로 사무상을 정리하고는 담배 한대 피워물고 창가에 서서 창밖을 응시했다. 금방 풍문을 얻어들은 국장이 음침한 기색으로 들어섰다. 《고과장, 어제 집에서 뭘 했댔소?》 창가에 그린듯이 서있는 고과장은 까땍 미동도 없다. 파르스름한 담배연기가 그의 곱슬머리를 감쳐물고 타래치며 서려오른다. 침묵이 흐른다. 빠금히 열린 문밖에는 기관의 남자녀자들이 까치발 세워가며 서로의 어깨너머로 기웃거린다. 국장의 면상이 한쪽으로 찌그러진다. 그 면상이 한번씩 찌그러지고 난뒤에는 속으로 눈물을 흘린 녀자도 있었고 뒤에서 가슴을 친 남자도 있었다. 《고과장!》 몸이 오싹해 날것같은 차디찬 목소리다. 미구에 고과장이 서서히 몸을 돌렸다. 그의 눈엔 눈물이 글썽거리고있었다. 《아니, 고과장-》 고과장의 한일자로 담겨진 입은 끝내 열려지질 않았다. 그 다음날, 더욱 놀라운 소식이 기관청사 각 과실로 쫙 퍼져나갔다. 《고과장이 죽었대.》 《왜 죽었다니?》 《어떻게 죽었어?》 술좌석에서도 고과장곁에 앉고싶어했던 녀자들, 평상시 고과장의 능력에 질투해왔던 동료들, 고과장을 제 팔다리처럼 써먹어왔던 국지도어른들, 모두가 다 한결같이 고과장의 죽음에 대해 알고싶어했다... 여름날에 겨울옷을 입은것, 겨울날에 여름옷을 입은것, 특이한 변화라 일시에 거리바닥에서 오고가는 길손들의 눈길을 끌수있는 장면이다. 우리의 작품에서 크게는 이야기줄거리, 인물의 성격과 운명, 작게는 먹고마시고 잠자고 노는 세절에 이르기까지 귀신같은 요술스러운 변화들이 많아야 독자들의 인기를 끌수있다고 느껴진다. 작품이 귀신의 요술처럼 변화무쌍하게 엮어졌다면 그것은 예술의 경지에 이른것이고 또한 그것이 우주공간의 자연법칙과 인간사회의 생존법칙을 위반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예술의 진실에 부합되는것이다. 이밖에도 좋은 점이 많다. 글을 귀신같이 쓰면 이처럼 좋은 점도 많지만 또한 나쁜 점도 많다. 가장 나쁜 점이라면 모험스러운것이다.
57    《말썽》이 없으면 문단이 아니다 댓글:  조회:2251  추천:0  2013-07-31
《말썽》이 없으면 문단이 아니다 그제날 필자가 문단강아지로 발발 기여다닐 때의 일이다. 무슨 모임이였던지는 기억나지 않는데 술좌석이 한창 흐지게 퍼지고있을 때 저쪽 상에서 왁짝 고아대는 소란이 일어났다. 건너다보니 두 선배님이 서로 상대방의 코대에다 상앗대질 하며 입에다 김이 서려날것같은 거품을 끓이고있었다. 《이눔아, 거 망발이지...》 《이자식, 정신 좀 차려...》 당금 손찌검이 투닥투닥 터질것만같이 상태가 험악해지고있었다. 곁에서 벌떡벌떡 일어나 뜯어말렸다... 그때 받은 충격이 심각했었다. (문단에 점잖은 사람들도 그저 그렇게 노는구나.) 소학교저급학년시절 변소에서 나오시는 선생님을 보고 선생님께서도 똥을 누시는걸가 하고 의혹을 가졌던것과 같은 천진한 심리라고 할가! 별로 문단이란 이 샛말간 물에 렴치없이 흙탕물을 뚝뚝 떨궈놓는다는 꽤씸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후에 편집사업을 하게 되면서 문단에 몸을 잠구고보니 《포연》이 자욱한 《전쟁터》에 들어섰구나 하는 《공포감》을 느끼게 되였다. 괜히 오고가는 눈먼 총알에 맞을가봐 입을 단속해야겠다는 생각부터 들었다. 기실 문단에 나서 너좋고 나좋고 다 좋게 놀자고 해도 헐치 않은 일이였다. 때론 회의장소나 모임자리에서 공공연하게 서로 《포》를 쏘아댔고 때론 사무실이나 술좌석에서 뒤로 헐뜯으며 야유조소하기도 했다. 곁에서 맞장구질 쳐주지 않기도 게면적스럽게 된다. 서로간 무슨 모순갈등이 그렇게도 많은지? 크게는 누구와 누구는 한동아리라는 《립장문제》도 있고 작게는 건방지게 인사말 한마디 없었다는《례절문제》도 있다. 작품쟁론으로부터 관점문제, 사람관계, 자리다툼, 돈거래, 출국방문, 대상뽑기, 성격갈등, 주고받는 마음쓰기에 이르기까지《말썽》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다. 혹간 외계친구들과 앉으면 핀잔받을 때가 많다. 《너네 문단에는 말썽거리도 많더구나.》 《글쓰는 사람들은 왜 물고뜯기만 하니?》 ... ... 모르는 소리라고 까박을 주기도 하고 좋은 말로 해석해주면 더구나 넌덜넌덜한 구체실례까지 꼬챙이에다 꿰여가지고 민망하게 흔들어친다. 기분잡치게 돌아와서 곰곰히 생각해보면 확실히 문단이라는 곳이 다른 분야보다 특수하게 《말썽》이 많다는 감이 든다. 필자는 탄광에서도 일해보고 공장에서도 작업해보고 정부기관에서도 사업해보았었다. 다 사람이 모여서 하는 일인만큼 그 어디나 모순으로 충만되여있다. 허지만 탄광에서는 《말썽》이 없다. 모순이 격화되면 대개 툭!탁! 하고 피를 보는 싸움이 벌어진다. 공장에서도 《말썽》이 거의 없을 정도다. 일이 생기면 서로 책임추구다. 기관에는 좀 《말썽》이 있다. 그러나 국장이나 해당부서책임자의 한두마디 《지시》면 《말썽》이 인차 해결된다. 두번 다시 그 《말썽》을 일으켰다간 큰꼴 먹는다. 공장의 작업은 대개 흐름식이다. 만약 한 직장에 사고가 생기면 그 아래 모든 직장작업에 다 영향을 주게 되며 지어 직장밖의 보관, 운수, 판매에까지 영향이 미치게 된다. 한두 사람의 불찰로 전체 직공이 상금을 못탈 때도 있다. 때문에 서로 의존하게 되고 서로 믿게 되며 서로 조작규정을 지키게 되고 서로 시간을 준수하게 된다. 헌데 우리 문단에서의 글쓰는 일은 완전히 개인적인 작업이다. 혹간 집체로 창작할 때도 있다. 소설을 집체로 창작한다는 외국의 실례도 있지만 그건 특수정황이 아니면 창작법칙을 떠난 행위인것이다. 작품창작은 공장작업처럼 눈과 손으로 조작하는것이 아니라 주요하게는 머리로 한다. 전반 인류사회에서 뇌를 쓰는 일은 고급작업에 속한다. 고급작업을 하는 사람은 고급인간이다. 고급인간은 일반인간보다 아는것이 많다. 보편적으로 모르는 사람들의 입이 무겁고 아는 사람들의 입이 빠르다. 여문 곡식일수록 고개를 숙인다는 말이 있다. 아는것이 많으면서도 입이 무거운 사람을 겸손하다고 하는데 기실 이 세상에서 진정 겸손한 사람은 얼마 안된다. 허다한 나라의 정치가들은 그 나라의 고급기둥감들이다. 무슨 선거를 할 때 보면 그들은 어찌 저렇게 뻔뻔스러울수가 있을가 할 정도로 제자랑을 뽐낸다. 대개 입이 드센 연설가들이다. 결국 나라는 그들에게 의해 다스려진다. 우리의 작가들이 작품을 세상에 내놓는것도 일종 제자랑인것이다. 인류의 정감세계에 자기의 공헌을 과시하는것이다. 금전을 바라지 않고 글을 쓴 작가는 고금중외에 꽤나 되였으나 자기의 명성을 고려하지 않고 작품을 발표한 작가는 극히 드물었다. 혹간 환경의 제한으로 또는 개인적수요로 필명을 달고 본명을 피하는 사람들이 두루 있었으나 결국에 가서는 자기의 명예만은 따지고들었다. 앞으로는 필명을 리용하는 사람들이 점차 적어질것이다. 이처럼 아는것이 많고 명성을 날려보겠다는 사람들이 남보다 입을 더 놀려보겠다는것이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작가들이 머리로 써낸 작품은 공장에서 기계로 제조해낸 제품이 아니다. 지금까지 수도물처럼 그렇게 많은 작품들이 쏟아져나왔지만 도작과 모방작을 제외하고는 똑같은 작품이 한편도 없었다. 이것이 또한 문창작에서의 특징이다. 글쓰는 사람마다 제각기 사유가 다르고 개성이 다르다. 개성이 다른 사람들이 한분야에서 서로 교류하자니 자연 오고가는 말들이 서로 융합될수 없다. 그래서 자기의 의도나 관점을 대방에게 해석하고 접수하게끔 강요하니 대방이 또한 사탕알로 얼릴수 있는 삼척동자가 아니다. 오히려 제쪽에서 자기의 의도나 관점을 가지고 반격한다. 그래서 《말썽》이 일어난다. (내가 누군데! 네가 언감생심 내앞에서 굿거리질 해? 말썽을 피워보겠으면 입슬이 다슬도록 피워봐. 나는 나대로 내글 쓰겠다는거야. 이제 내가 써낸 글 좀 봐. 눈이 환히 트일거야.) 글쓴다는 사람이라면 대개 이런 오기쯤은 가지고있을것이다. 세상에서 내 작품과 같은 글을 써낼자 또 누가 있어? 있으면 좀 나서 봐! 세상에 둘도 없는 글을 내놓는 내가 그래 이런 오기쯤 한번 못부려볼손가! 얼마든지 큰소리 땅!땅! 쳐볼수 있는 자격자이다. 네가 큰소리 치면 나도 큰소릴 못칠가! 이렇게 생긴 《말썽》이 아주 자연스럽지 않는가! 정치무대에서는 《말썽》생겼다가 나중에 어느 한쪽으로 쏠리며 통일되여야 성과가 있다고 본다. 허지만 문단에서는《말썽》이 통일되면 그건 오히려 망태기가 된 현상이다. 작품끼리는 서로 개성이 다를수록 좋다. 그걸 써내는 사람들의 사유가 굳어져서 통일되면 공장의 제품처럼 똑같은것만이 뚝뚝 찍혀나오지 않겠는가! 대부분 《말썽》에는 서로의 욕지걸이가 많이 동반된다. 욕지걸이에는 궤변이 많을수 있는데 그 반면에 욕지걸이에도 진리가 있을수 있는가? 정신상태가 격한 감정에 의해 파렬되면서 실신(失神)적으로 튕겨나오는 언어이기에 론리적법칙이 완전하지 못하지만 대개 순간적인 진실과 허위만은 적라라하게 표현하게 된다. 욕지걸이에는 욕하는 사람의 사상경계, 도덕수양, 인식수준, 성격개성, 인간됨됨이 등 여러 방면의 특징이 종합적으로 표현된다. 때문에 누가 자기한테로 욕지걸이를 퍼부어왔다면 그것이 악의적이든 선의적이든, 터무니없든 있든간에 우선 감사를 드려야 한다. 그 리유라면 첫째는 그 사람이 공짜로 당신한테 자기의 종합표현을 감상시켜준것이고 둘째는 당신이나 당신의 작품을 공개적으로 긍정해준것이다. 서로 상대가 되지 않으면 싸우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그 사람이 당신의 명예를 더럽히고 위신을 납짝하게 만들자거나 당신이 지금 앉은 자리에서 끌어내자거나 당신과 친구들지간에 리간을 붙이자거나 하는 비렬한 목적을 가지고 욕지걸이를 해왔다 해도 그럴 때에는 그 사람으로서의 필요성이 있었기때문인것이다. 그 필요성이 당신이나 당신작품을 선택했다는것은 기실 당신이나 당신작품자체를 긍정해준것으로 되는것이다. 세번째는 당신에게 당신의 종합표현을 이 세상에 보여줄수 있는 기회를 그 사람이 마련해준것이다. 세상에 욕지걸이를 얻어먹고도 가만 있을 사람이 별로 없다. 벌레도 밟으면 꿈틀거린다고 하지 않는가! 더구나 문단에 계신다는 고급인간으로서는 체신이 높은덕에 감각이 더 예민해질것이 아닌가! 반격이 가해지면 그 반격이 정의적이든 부정적이든, 옳든 그르든간에 대방의 욕지걸이와 마찰되고 충돌된다. 그것이 마찰되고 충돌되면 소리가 생긴다. 소리가 생기면 사람들의 청각을 자극하여 자연 구경군들이 모여들게 된다. 사람이 많게 되면 자연 시비가 갈라지게 된다. 혹간 시간이 걸려서야 갈라질 시비도 있고 또한 영원히 갈라질수 없는 시비도 있을수 있지만 총적으로 이런 욕지걸이나 《말썽》을 통해 많은 일들과 관점이 명백해진다. 또한 그걸 통해 어떤 사람은 한결 더 위망이 높아갈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위신이 더 납짝하게 될수도 있다. 그리고 그다음 《말썽》에 가서 그 위치가 바뀌여질수도 있다. 문단에 《말썽》이 많은것이 결코 나쁜 현상은 아니다. 물론 《말썽》이 일어나면 서로간의 단결에 불리할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의기소침해져 창작에 영향을 끼칠수도 있고 심리적고통으로 건강에도 해가 될수 있겠지만 할수 없는 일이 아닌가! 자기의 의사대로 돌아가는 문단이 아니잖는가! 애당초 문단에 몸을 잠구지 않았더라면 이런 시달림은 받지 않았을텐데! 그러지 마시고 생각을 한번 바꾸면 되는것이다. 소위 글쓴다는 고급인간으로서, 인류령혼의 공정사라는 신분으로서, 인간의 복잡한 정감세계를 파고들며 생생한 인물형상을 부각해낸다는 작가로서 요만한 《말썽》속의 생활을 한번 체험해볼수 없겠는가! 한번, 두번 체험해보노라면 오히려 면역력이 생겨 창작에도 유리할수 있고 건강에도 유리할수 있고 더 높은 차원의 단결에도 유리할수 있다. 물이 맑으면 고기가 없다는 말이 있고 큰고기일수록 요동치며 일으키는 파문이 크다는 말이 있다. 란세속에서 영웅이 나오듯 《말썽》속에서 명작이 나오고 대가가 나올수 있다. 우리가 존경하는 로신선생도 《말썽》속에서 명작을 써내셨고 김학철로선배님도 《말썽》속에서 붓대를 꺾지 않고 민족의 얼을 지켜오셨다. 무엇이나 통일적인것을 반가워하시는 모주석께서도문화예술분야에다는《백화제방》,《백가쟁명》이라는 방침을 제정해주셨다. 《말썽》도 일종 쟁명이 아니겠는가! 여기에서 주의할것은 《말썽》이 무리한 탈선행위로 번지여져서는 안되고 또한 《말썽》을 통해 파벌을 묶어서는 안된다. 력대로 문단풍격은 《단식치기(单打)》였지 《무리싸움》이 아니였다.
56    문학창작의 세가지 현상시대 댓글:  조회:1738  추천:1  2013-07-30
평론 문학창작의 세가지 현상시대 홍천룡 어느 땐가 문학편집과 작가협회회원들의 문단상황에 대한 견해발표모임이 있다는 전화통지를 받은 적이 있었다. 중요한 모임이라 제딴에는 좀 어마어마하게《포》를 쏘자고 발언고를 준비했었다. 헌데 아쉽게도 그날 모임에서 랑독하지 못했었다. 두가지 원인이였는데 하나는 그날 토론초점이 준비한 발언고내용과는 천리나 떨어진 어느 한 작품에 집중되면서 열렬해졌던것이고 다른 하나는 오찬시간이 다 되여왔기때문이였다. 전번날 《문학과 예술》잡지 주필님과 만난자리에서 그의 원고부탁이 있었다. 《난 평론가도 아닌데…》했더니 그가 작품을 감상한 소감도 좋고 문단상황에 대한 소견도 좋으니 써보라고 고무해주었다. 믿어주고 밀어주는 고마운 부탁이니 써보리라 맘먹었다, 헌데 정작 쓰자니 무얼 어떻게 써야 할지 막연해났다. 애꿎은 담배만 태웠다. 몰몰 피여오르는 담배연기속에서 령감이 떠오른다는 말이 빨간 거짓풍선이라는 감이 들었다. 오히려 타래치는 연기따라 생각이 점점 헝클어지며 퍼지기만 했다. 안되겠다싶어 송구함이나 표시하자고 전화를 드는 순간에 그 발언하지 못했던 발언고가 생각났던것이다. 그래서 부랴부랴 그 발언고를 찾았다. 찾고보니 발언고라 역시 어수선했다. 할수없이 어설픈 발언고를 다시 정리하며 어설프게 써냈다. 어설픈 수준이니 별수 없었다. 《수도물》시대 쏴— 쏴— 무더운 여름날 수도꼭지를 탈아놓으니 시원한 감이 얼굴을 감싸준다. 아들놈이 큰대야에 수도물을 꼴똑 채워놓고 도마도며 참외며 오이를 왈왈 불궈놓는다. 먹기도전에 입안이 썽—해나며 상큼한 감이 든다. 《야, 맥주나 수도물처럼 콸콸 쏟아졌으면 좋겠어.》 《임마, 물 좀 절약하며 써라.》 《야, 아버지두 답답함다. 흔한게 수도물인데두.》 아들놈은 툴툴거리며 대야를 한쪽으로 밀어놓고는 시허연 물줄기로 퍼져내리는 수도물에 골을 들이밀어넣는다. 그리고는 머리며 얼굴을 마구 문대며 연신 푸푸거린다... 그래, 집안에서 제일 많이 써야 하고 제일 쓰기 편리하고 제일 흔하게 쓰는것이 수도물이 아닌가! 몇년전에 일본의 한 경제학자가 세계적인《수도물》시대가 바야흐로 닥쳐오고있다고 예언하였다. 상품이 수도물처럼 쏟아져나오고 광고가 수도물처럼 쏟아져나오고 맥주도 수도물처럼 쏟아져나오고...자연히 책도 수도물처럼 쏟아져나오고 영화며 텔레비드라마도 수도물처럼 쏟아져나오게 될것이라는것이다. 서점에 가보면 책이 점점 더 많아진다. 허리굽혀 들어가는 책가게에도 신문잡지만 수백종 된다. 컴퓨터인테넷에 들어가면 마치도 물고기 왁실거리는 양어장에 뛰여든것 같다. 어느 놈부터 잡아야 할지... 음식도 너무 풍성하게 차려놓으면 맛있는줄 모르고 너무 흔하면 먹고싶은 생각이 없어진다. 사람의 감수란 참, 묘하다. 그 옛날 사랑채세집방에서 살 때 귀한 손님이 오면 퍼런 비닐통을 들고 《쑈풀》(小铺儿)로 달려간다. 땅콩접시에다 짠지쪼각 달랑 놓고 생맥주 한컵씩 카- 하며 넘기고는 명태를 쭉 찢어 짭짭 씹어먹던 그 맛, 세계형세를 론하고 문학을 론하고 인생을 론하던 그 격정, 지구를 안고 세계를 울릴 호기였다. 마시면 마실수록 시원해지던 그 생맥주, 씹으면 씹을수록 쫄낏쫄낏해지던 그 명태쪼각, 말하면 말할수록 호매로워지던 그 마음속 호소, 통쾌하고 한없이 즐거웠던 그 밤, 그 밤이 왜 그토록 짧았던고? 지금은 귀한 손님이 오면 무슨 국제반점이요 세기호텔이요 하는 장소로 번쩍거리게 모신다. 진수성찬에다 고급맥주를 마시지만 기분나게 벌컥벌컥 마셔대는 사람은 별로 없고 맛있다고 료리를 짭짭 소리내며 먹어대는 사람은 더구나 없다. 오고가는 말도 공식적인 인사치례나 건투를 비는 어구들이다. 술이 서너순배만 돌아도지루하다고 자리를 차고 일어나는 친구들이 있게 된다. 중국에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는 말이 있다. 많아서 손해볼게 없고 많아서 나쁠게 없다는것이다. 있는것이 없는것보다 낫고 많은것이 적은것보다 좋다는 우리의 생활론리이다. 우리 민족은 많은것 없이 살아왔고 모든것이 부족하게 살아왔었다. 그 때 그 시절을 생각하면 오늘날 좀 두두룩하게 벌어서 사고싶은걸 사고 먹고싶은걸 먹고 놀고싶은걸 놀며 흔장만장 써보는것도 뭐 크게 잘한다고 춰줄 일은 아니겠지만 나름대로 제멋에 살줄은 안다고 해야겠다. 우리의 문단상황도 대개 이러한것 같다. 없던데로부터 있게 되고 적던데로부터 많아지게 되는 과정을 걸어왔었다. 문학붐이 일기 시작했던 70년대말에는 작품 한편 발표하기가 하늘에 별따기나 다름없었고 책 한권 빌려보기가 이웃집아저씨네 돈꾸기만치나 힘들었다. 대학교 2학년시절이라고 기억된다. 문학작품은 언어예술인데 언어가 풍부해야 써낸 작품도 토실토실한 도야지처럼 잡아먹기 알맞춤하게 살이 진다고 천세봉의 작품을 한번쯤 훑어보는것이 좋겠다는 선배의 조언에 따라 학교도서관을 찾았었다. 천세봉의 《석개울 새봄》을 차용해보자고 도서관의 뒤고방뙤창문같은 그 창구를 얼마나 찾았는지 모른다. 번마다 허리굽혀 골을 들이밀고는 소리쳐본다. 번마다 나간게 안들어왔다는 답복이였다. 몇십번째였던지는 모르겠으나 그날 체육시간에 남몰래 빠져나와 도서관에 갔더니 면바로 그 책을 물리러 오는 조문학부학생과 맞띄우게 되였다. 얼마나 기뻤던지! 책을 넘겨받고보니 싯누런 포장지겉가위에다 시꺼먼 붓글씨로 제목을 써놓은것이였다. 슬슬 피루어보니 너무 보풀이 져서 앞몇페지는 기본상 글씨체가 알리지 않았고 기수페지 오른쪽아래면이 다슬어 반달이 된 곳이 적지 않았었다. 그날은 저녁식사때도 모르고 밤을 패가며 보았다. 색시를 안고 이불밑에서 황홀한 꿈을 꾸기보다 더 들큰한 향수였다. 그당시 얻기 바쁜 책 한권을 빌려다 본다는것이 더없는 행복이였다. 헌데 지금은 책이 많으니 그걸 다 읽어볼 시간도 없거니와 또 읽어본데도 그런 행복감을 느껴볼수가 없다. 작가협회 사오백명되는 회원들가운데서 해마다 작품집이 수십권내지 수백권씩 나오고 거기에 달마다 나오는 각종 잡지에, 날마다, 주일마다 나오는 신문지상에 발표되는 작품들을 합치면 얼마나 되겠는가! 옛날에 비하면 그야말로 콸콸 쏟아지는 수도물이라 할가 봄날의 우후죽순이라 할가! 복받은 독자들은 백화원 꽃밭에 앉아 두리번거리는 나비가 된셈이다. 세월은 글쓰는 사람들에게도 흥그럽게 돌아간다. 작품집이 나오면 무슨 발간의식이요 축하모임이요 좌담회요 하면서 문단의 저명인사들을 모셔놓고 작자에게 꽃바구니를 안긴다 축사를 올린다 하며 서로서로 덕담으로 보듬어주고 분위기를 돋군다. 클라이막쓰는 오찬에 가서 이루어진다. 서로서로 술잔을 나누며 축하도 해주고 고무격려도 해준다... 이런 모임이 빈번해지니 시뚝해서 잔소리를 하는 량반도 있고 곁에서 보아주기 민망하다고 코웃음치는 군자들도 있다. 《허, 또 그 모임이군. 안가면 좋아않아지.》 《그 량반 작품집이 나올 때마다 부산을 떠는구만. 피곤해난다구.》 《그것도 뭐 작품집이라고 내놓고 법썩꾸려.》 ... ... 점차 빈번해지니까 시끄럽고 걱정되여 뒤공론이나 해보는 불평들이라 가히 리해해줄만한 소리들이다. 허지만 필경은 호사인것만큼 좀 너그럽게 봐주면 너좋고 나좋고 다 좋을게 아닌가! 사오십년대에 태여난 사람이라면 최저로 한두번쯤은 호미자루를 만져보았을것이다. 사래 긴 콩밭이나 조이밭김을 두세이랑씩 매고는 밭머리에 나가서 오이랭국이나 감주를 마일 때가 많았었다. 땀발에 익는 몸을 적셔주는 그것이 얼마나 시원컬컬했던가! 농부에게도 순간적으로나마 그런 멋이 있게 된다. 문학창작 역시 고달프고 지겨운 글쓰기농사다. 애타게 써낸 글이라 자기의 작품을 《자식》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많다. 《자식》이 세상에 태여났는데 그래 술 한잔 들어 축하하지 않겠는가! 그 《자식》이 밉든 곱든간에, 그 《자식》이 많든 적든간에 다 귀여운것이다. 때문에 그런 모임이 빈번해진다고 시끄러워하시지 말고 군소리 없이 가서 축하해주는것이 글쓰는 사람으로서의 윈칙이 아니겠는가! 요청을 받지 못했다 하더라도 서로의 사정을 헤아려주고 말없이 축하를 보내주는것도 글쓰는 사람으로서의 량심이라 하겠다. 《뭐, 그것도 작품이라고 내놓고 히뜩거려!》하며 비웃는 사람도 있다. 확실히 어떤 작품은 학교작문이라고 했으면 좋겠는지 개인서신이라고 했으면 좋겠는지 어처구니없이 덜익어 시쿨기만 한것도 있다. 수도물도 맑을 때 있고 흐릴 때가 있다. 자식이 많으면 개중에는 《범새끼》도 있고 《시라소니새끼》도 있게 되는 법이다. 수준이 낮은 작품이 있어야 수준이 높은 작품이 알릴수 있지 않겠는가! 자연적인 동물계의 생태평형규률을 살펴보면 재미나는 현상들이 많다. 쥐들의 번식이 얼마나 빠른가. 지금 쥐를 깨끗하게 소멸할 뾰쪽한 수가 없다. 이쪽에서 약을 친다 착고를 놓는다 하면 벌써 저쪽에 가서 무리로 번식해나간다. 우글거리는 쥐무리를 보면 정말 소름이 끼친다. 헌데 쥐잡이능수인 뱀과 부엉이는 이 세상 그리 많지 못하다. 산양, 들소, 들말 등 초식성동물들은 수십마리, 수백마리씩 무리를 지어다니지만 그걸 잡아먹고 사는 사자나 호랑이같은 육식성동물들은 많지 못하다. 사자는 기껏해야 대여섯마리씩 무리를 지어다니고 호랑이는 단독행동이 많다. 그걸 비유해서 인류력사도 육식하는 민족이 강세할 때가 많았고 소식하는 민족이 그 압박을 받을 때가 많았다고 인정하는 학자들이 있다. 뭐, 그 말이 남녀궁합처럼 딱 들어맞는다고 할수는 없겠지만 내가 알고있는 력사숲을 헤집고 봐도 대개는 그러한것도 같다. 지금 우리의 작품창작에도 이런 경우가 많다. 《사자》나 《호랑이》같은 작품이 적고 《산양》이나 《들소》같은 작품이 많다. 듣건대 장백산야생동북범이 거의 멸종경지에 이르렀다가 요즘 훈춘변두리에서 가끔 두각을 내밀어 가뜩이나 심장이 약한 촌민들을 놀래웠다고 한다. 우리 문학동네에도 동북범같은 《호랑이》몇놈이 슬근슬근 내려와 《따웅!》하고 주변산곡간을 울려놓았으면 좋겠다. 문학동네에는 노루심장을 가진 사람이 별반 없으니 놀라 달아날 우려는 있을것 같지 않다. 저마다 장수이다. 어떤 장수는 적장 한놈을 베고 평생 명장이 되였고 어떤 장수는 평생 천군만마속을 좌충우돌하면서 수없는 병사를 무찌르고 명장이 되였다. 말하기는 부끄럽소만 필자의 경우도 전자에 속하는것 같다. 지금으로부터 근 30년전 대학교 3학년 때라고 기억된다. 한창 철없이 뛰놀 때라 문학동네 강아지가 되여보겠다고 《구촌조카》라는 소설 한편을 써냈다. 뭐, 지금에 와보면 소학교아이들 작문이나 다름없는 작품이였지만 그당시에는 확실히 호랑이새끼의 《따웅!》하는 울부짖음이 되여 시골의 문학동네에 범소리흉내를 냈던것이다.수천수만 독자들의 추천표와 편집과 평론가선생님들의 한결같은 인정을 받아 그해 문학상을 땄던것이다. 그후 세속의 소용돌이속에 빨려들어 허우적거리다보니 거의 붓대를 꺾다싶이 하였다. 지금도 술좌석같은데 앉아 아무개라고 소개하면 모르지만 《구촌조카》하면 대개 50대이상 사람들은 알아봐주는것이다. 그래서 친구들의 놀림을 받아 얼굴이 화끈해날 때도 있다. 《너 뭐 〈구촌조카〉 한편을 던지고 평생 작가라고 점잖을 빼?》 《자식, 내가 언제 점잖을 뺐어?》 고금중외에 소설 한부, 시 한수, 노래 한곡, 그림 한폭으로 평생 대가로 인정받아온 명인들이 적지 않다. 채권놀음과 흡사하다 할가! 어떤 사람들은 채권에 재미를 붙여 수년간 수만원씩 처넣으며 채권을 샀지만 추첨되지 못해 궁지에 빠져서도 그냥 호기를 피우며 돈을 꿔서라도 밀어넣는다. 헌데 어떤 사람들은 별로 궁리도 없이 스치는 호기심으로 단 한번에, 단 몇푼 돈에 추첨되여 승용차를 타거나 몇백만원부자가 된다. 세월속의 어떤 일들은 리해하기조차 어렵게 공평스럽지 못하다. 수십년동안 문학창작에 혼신을 태우며 수백편 작품을 세상에 내놓은 작가가 있다. 어느 한 모임에서 그를 장편 몇부, 중단편 몇백편을 써낸 작가라고 소개하였다. 뒤좌석에 앉은 몇사람이 수군덕거렸다. 갑: 《거 대단한 분이신데 대표작으로는 어떤 작품들이 있는가? 당신 봤나?》 을: 《글쎄, 이름을 들으니 어디서 본것같은데. 이봐 자넨?》 병: 《그렇지. 거 제목이 뭐더라, 한번 보다가 지루해서...》 그 모임에 참가한 사람들은 대개 신문출판방송 등 분야의 기자, 편집, 문화사업일군들이였다. 우리 사회의 제일 고급독자들이라고 인정해야 할 사람들이다. 정상적인 사유법칙으로 추리분석해본다면 수십년동안 수백편 써낸 작품들이 고급독자들에게 준 인상이 아리숭해졌다면 일반 독자들에게는 더 아리숭해졌을게 아닌가! 여기에서 원칙적인 시비가 터진다. 그래 한두편 명작으로 이름 날렸다해서 문학동네좌상으로 모시고 한평생 부지런히 글을 써온 사람은 명작이 없다해서 동구밖파수군으로 내세우면 되겠는가? 구경 어느쪽이 더 위대한 인정을 받아야 하는가? 지금 소시장에 나가 소 한마리를 사자면 몇천원 내번져야 한다. 괜찮은 소는 만원묶음을 내놓고 흥정해야 한다. 헌데 범을 사자면 값이 없다. 자그마한 연길시내에도 백만부자, 천만부자는 물론, 억만부자까지 있다. 값이 있다면 어느 놈이 대부금을 끄집어내서라도 살것이다. 범은 고기뿐만 아니라 뼈다귀마저 명약으로 쓰이지만 너무 귀하다보니 잡아먹게도 못한다. 무송이 오늘날까지 살아남아 다시 범을 때려엎었다면 옥살이를 해야 할것이다. 이처럼 문학에서도 진정한 명작은 값이 없다. 《여보게, 자네 과거에 그처럼 위대한 명작을 써냈는데 요즘 골을 싸매고 들어앉아 다시 명작 한편 더 써내게. 내 몇백만원 메칠테니까.》 옛날에 명작을 써냈다고 오늘 또 명작을 써낼수 있을가? 명작이란 누가 시켜서 써내는것도 아니고 투자해서 그 효과를 보는것도 아니고 계획을 세워서 써내는것도 아니다. (간혹 그런 경우도 있을수 있겠다는것을 절대적으로 부정하는것은 아니지만.) 이런 명작을 누가 한평생에 한편을 써냈든 두평생에 반편을 써냈든 다 위대한것이다. 값이 없는것이니깐. 의례 동네좌상으로 모셔야 할것이 아닌가! 여기까지는 절반 시비를 가른 셈이다. 그래 호랑이만 호랑이라고 소를 무시해서 이 문학동네가 살아갈수 있겠는가? 시골이라 문학동네는 농가들로 이루어진 마을이다. 《문학》이란 밭을 갈아 《창작》이란 농사를 지어먹고 산다. 소가 없는 농부를 제농사군이라 할수 있겠는가! 한때는 《농부 애비없이는 살아도 소가 없이는 못산다》는 말까지 있었다. 최저한 추석날에 소고기국물이라도 마실수 있어야 동네인정이 도는것이다. 소도 부지런히 기르면 새끼치기를 자주 해서 늘어나게 된다. 작품농사도 그런것이다. 부지런해야 식구들도 먹여살리고 동네구제도 할수 있고 동네추렴에도 한몫 낼수있는것이다. 누구나 명작 한편 냈다고 그늘밑에 앉아 부채질만 하다가 건너마을색시가 더 고운가 해서 들락날락하며 세월을 보낸다면 곡식밭이 쑥밭으로 되여 범이 새끼를 칠게 아닌가! 독자들이 명작 한두편만 펼쳐놓고 자꾸 뜯어볼수는 없는것이다. 아무리 좋은 명작이라 해도 벌써 두번 다시 보면 재미없어지는것이다. 한평생 수십편, 수백편씩 되는 작품을 써내온 다산 작가들이 없었다면 우리 문학동네에는 진작 기근이 들어 동냥살이로 뿔뿔이 다 흩어졌을것이다. 그보다 방방곡곡에 있는 독자들이 그동안《배》를 곯아왔을게 아닌가! 기실 우리의 문단화원은 그들의 부지런한 손끝에서 가꾸어지는것이다. 또한 그들이 있기에 여러 가지 꽃이 제각기 울긋불긋 피여날수 있어 백화원을 이룰수 있었던것이다. 그래 이런 량반들을 동네좌상으로 모시지 않으면 되겠는가? 우선 앞으로 문단좌상으로 될 후배들이 들고일어날것이다. 이러고보면 다 위대한 창작가들인것이다. 한평생 명작을 한두편 써낸 사람도 위대하고 한평생 작품을 수십편, 수백편씩 써낸 사람도 위대한것이다. 결론은 무릇 문학창작에 달라붙은 사람이라면 다 위대한 인물인것이다. 그것은 문학창작이 인간을 연구하고 인간을 그려내는 인간수업이기때문이다. 인간이 인간을 연구하는 사업보다 더 위대한 사업은 이 세상에 없다. 이런 위대한 사업을 한평생 한두편 명작을 써낸 사람도 좋고 한평생 수백편 작품을 써낸 사람도 좋고 다 같이 오늘날까지 추진해왔었다. 문제는 래일에는 어떻게 할것인가 하는것이다. 사회가 급속하게 발전하니 우리 문학동네도 하루가 다르게 변해가고있다. 시골마을인데도 아스팔트길이 마을복판을 가로 째놓고 승용차며 농기구들이 들이닥친다. 소궁둥이를 치며 밭갈이하던 목가적인 정경도 점차 찾아보기 힘들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너무도 빠르고 무정하게 뭉개며 나가니 마음만 들볶인다. 이럴 때일수록 철학적인 변증법적 사유가 수요된다. 남들이 승용차를 타고 질주한다고 소 탄 놈이 소궁둥이에다 채찍질만 해서야 되겠는가! 소란 놈은 빨리 달릴수록 멀리 못간다. 문학창작 역시 이러한 리치가 깃들어있다고 생각된다. 작품이 수도물처럼 쏟아져나오고있는 오늘날, 남들이 수도를 탈아놓았다고 나도 덩달아 더 크게 탈아놓으면 그 수도물을 누가 다 쓰는가? 쌀도 일고 빨래도 씻어놓았고 구들장판도 다 닦아놓았는데... 작품의 사회효과성에 대해서도 우려되는 점들이 많다. 누군가는 작품집 이삼십권 찍어 친구들한테 나눠주었다고 한다. 그야말로 《동네개추렴》식이다. 개를 한마리 잡아놓으면 동네분들을 청해다 대접시키고 집식구들이 모여 둬어끼니 잘 먹을수 있을것이다. 물론, 자작작품에 자아도취되고 안해나 아이들이 감상해줘도 역시 일정한 사회효과성이 있었다고 볼수 있고 또한 개인적으로는 기념비를 세웠다고 할수 있겠다. 허지만 우리가 숭엄한 문학의 대문에 들어서서 신성한 창작의 붓대를 들었을 때에는 이런걸 바라고 쓴것이 아니잖는가! 우리 민족의 얼을 지켜나가고 우리 민족의 위용을 떨치자면 속도가 빠른 글로벌시대일수록 마음을 다잡아먹고 질적인 만속도를 추구해야 한다. 문학명작은 속도전이나 돌격전에서 나오는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토끼와 거북의 달리기에서처럼 거북이 되여야 한다는것도 아니다. 부지런히 쓴다고 해서 명작이 나오는것도 아니다. 빠른것과 늦은것, 많은것과 적은것, 다 문제의 관건이 아니다. 관건은 우리의 눈과 머리에 있다. 우리의 눈길로 세상을 잘 관찰하고 세상의 눈길을 우리한테로 끌어올수 있도록 머리를 써야 한다. 연예인들이 세상눈길을 끌자면 특수한 표현재질에 머리를 써야 하고 우리 문학인들이 세상눈길을 끌자면 세상사람들의 복잡한 정감세계에 눈길을 돌리고 머리를 써야 한다.
55    21세기에 살만한 비법− 코로 숨쉬기 댓글:  조회:1867  추천:0  2013-07-29
21세기에 살만한 비법− 코로 숨쉬기 홍천룡 20세기말까지는 늘 앞날이 창창할것만 같아 보였는데 21세기초반에 들어서고 보니 늘 눈앞에 시뿌연 안개만 끼쳐온다. 사스가 돌개바람처럼 불어쳐서 지구촌을 공포에 떨게 하더니 요즘엔 신종플르가 만연되면서 사람마다 마스크를 착용하고 다니게 한다. 하얗고 까맣고 파란… 오늘아침에는 노랑 마스크를 끼고 다니는 사람도 있었다. 마스크를 끼고 다니는 사람만이 어딘가 좀 위생적이고 문명적이고 예방의식이 있는 사람같아 보인다. 신문지상과 텔레비뉴스프로에서는 매일과 같이 어느 나라 어느 곳에서 신종플르에 감염된 사람이 몇천명인데 얼마 치료받고 얼마 죽었다는 보도가 련발되고있다. 그래서 문밖에만 나서면 당장 신종플르바이러스가 입안으로 훅 날아들것만 같다. 사람이 죽고사는 생사고비에 이르는가 하는 일인데 소홀해서야 되겠는가! 마스크가 아무리 비싸다고 해도 10원을 넘는 것이 없는데! 재채기 한번에 몇십만개의 바이러스가 뿜겨져 나간다고 하니 세상살기가 무서운 판이다. 옛날 강냉이”워워”떡에다 시래기장국만 먹었을 때에는 이처럼 무서운 전염병은 안돌았는데… 초겨울에 들어서면서 푸실푸실 내리는 첫눈을 맞고 나도 감기에 걸렸다. 코가 딱 막히고 코물이 쉴새없이 줄줄 흘러내리고 몸이 으슬으슬 떨렸다. 약방에 달려가 “우황해독환”에 정통편을 사다가 생강 끓인 더운물에 몇알씩 먹었지만 별로 효험이 없었다. 말을 해도 코맹맹이소리만 나갔다. 한 친구가 사무실에 찾아왔다가 앉으라는 나의 말에 “야, 너 독감에 걸렸구나. 앗쓸하다!”하며 그자리로 되돌아나갔다. 그 다음날에는 생일파티가 있어 호텔의 술상에 앉게 되였다. 내가 감기에 걸렸다는 소리에 모여 앉았던 사람들의 눈이 허공으로 빙 돌아가는것이였다. 곁에 앉았던 녀석은 저쪽상에 앉은 아무개를 부르며 “저 자식이 오랜간만이구나!”하며 가서 인사수작을 걸더니 아예 거기에 눌러앉는다. 세월의 변화란 무섭다. 작년까지만 해도 감기쯤 걸렸다 해도 서로 끌어안고 입이라도 맞출양 부어라 마셔라 하던 친구들이 아니였던가! 할 수 없이 동네에 있는 작은 진료소를 찾아갔다. 거기에서 나는 평생 지켜나가야 할 예방비법을 알아냈다. 아주 간단한 방법, 너무 간단하여 거짓말 같은 방법, 즉 계절이 바뀌는 환절마다 입을 꾹 다물고 코로만 숨쉬라는 것, 바로 그 방법이다. 코가 꽉 멨는데 어찌 입을 다물고 숨쉬겠는가고 했더니 의사는 코가 막혔기에 코로 숨쉬지 않으면 코안에 코물이 뭉치여 균이 더 많이 생길수 있다고 하였다. 고인물이 썩는다고 하지 않는가! 그러면서 밖에 나가 입을 꾹 다물고 한 20분간 걸어보란다. 입을 다물고 걷자니 숨이 꽉 막혀왔다. 허지만 페의 활량력도 대단했다. 숨이 막히니 페가 가만 있지 못했다. 가슴이 팽창되는듯 부풀고 목대가 뻗뻗해지며 입안이 꽉 조여드는 감에 면부가 경직되면서 코안에서 찌륵찌륵 소리가 났다. 위생지로 코를 탁 풀어버리니 좀 시원해났다. 몇분간 더 걸으니 코안이 완전히 열리면서 페부까지 시원해났다. 약 20분간 걸으니 거짓말 같게 코가 완전히 열렸다. 다만 코물이 쉴새없이 질질 흘러내렸을 뿐… 며칠후, 감기가 떨어진다음 퇴근길에서 그 의사를 만나 감사의 인사를 올렸더니 “어험, 시시하게 아무 사람에게나 눅거리로 가르쳐주는게 아니웨다. 선생이 글을 좀 쓰신다기에…”하고 시큰둥한 자세를 내는지라 “아하, 사은이 지극하신데 어찌 말로만 감사를 드리오리까 오늘저녁은 제가 모시겠습니다. 자−”하며 나는 그를 억지로 끌었다. 그래서 술값보다 더 큰 수확을 얻게 되였다. 의사의 말에 의하면 사람은 주로 코와 입으로 숨쉬는데 코로 숨쉬면 안전하다는것이다. 왜냐하면 코안에는 외부에서 들어오는 공기를 려과시키는 여러가지 “시스템”이 갖추어져 있기에 만약 혼잡한 공기가 들어온다 해도 그걸 “려과”시켜 얼마간 정화된 공기를 페에 공급한다는 것이다. 허지만 입으로 숨쉬면 혼잡한 공기가 그대로 기관지를 통해 페로 직접 들어가기 때문에 각종 세균과 바이러스의 “침습”을 서슴없이 받을수 있어 감염이 빠를수 있다는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감기에 걸리면 코가 막힌다고 대개 입으로 많이 숨쉬니 그 감염이 더 빠를수밖에 없다는것이다. 의학에 문외한인 나로서는 그것이 과학적인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일정한 도리가 있겠다고 믿어졌다. 화는 입으로 드나든다고 하지 않는가! 아닌게 아니라 사람이 살면서 그 입이 통 문제다. 의학적으로 말한다면 우리의 몸에서 각종 질병을 일으킬수 있는 병균이나 바이러스 그 대부분이 입을 통해 들어오고 음식학적으로 말한다면 우리 인체내의 각종 독소를 생성하는 생물체의 영양도 그 대부분이 입을 통해 들어온다. 사회학적으로 말한다면 입으로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일수록 화를 많이 입게 된다. 입을 막고있는 사람일수록 안전하다. 그런데 입을 막을 수가 없다. 코는 막아도 되는데 입은 막으면 생명이 정지되게 된다. 입이란 일단 열기 시작하면 잘 닫아지질 않고 열면 열수록 커지는 법이다. 그래서 사람이 살아가노라면 화를 면치 못한다. 다만 그 입을 놀리는 차수에 따라 화를 많이 입는가 아니면 적게 입는가 하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어르신님께서 젊은이가 물설고 낯선 타향으로 가거나 다른 단위로 전근할 때면 늘 타이르는 말씀 한마디가 있다. “입을 잘 단속하거라. 경 칠라!” 헌데 그 입을 단속하기란 그렇게 수월한 노릇이 아니였다. 지난 20세기에는 입으로 들어오는 것이 적어서 탈이 많이 생겼었는데 21세기에 들어서면서부터는 입으로 들어오는 것이 많아서 화를 면치 못하고있다. 중국에는 “파재면재”(破财免灾)라는 사자성어가 있다. 재산을 털어서라도 화를 면하라는 뜻이다. 그런데 지금은 오히려 재산을 털어서 화를 사들이는 사람들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 매일 입이 놀새가 없게 만든다. 그 입으로 매일 “폭탄주”가 터져들고 그 입으로 매일 “륙,해,공” 삼군이 날아들어 그 입안에는 매일 “포연”이 자욱하다. 제1차세계대전에 사람이 얼마나 죽고 제2차세계대전에 4대양 5대주에서 얼마나 화를 입었던가! 오늘날 제3차대전이 입안에서 매일 벌어지고 있으니 오장륙부가 화를 입지 않고 견디여내겠는가! 화를 당하고 상처를 입은 다음에야 사람들은 “소를 잃고 외양간을 고친다.” 인삼록용을 장복한다, 병원에 가서 항생소가 들어간 닝게르물을 혈관에다 주입한다, 모아산이 낮다고 매일 수십리씩 오르내린다, 밖에 나서면 마스크를 낀다…또다시 다른 화를 불러오고있는것이다.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우리가 속이 편안한 나날을 얼마나 보냈던가? 닭병이 돈다고 닭무리채로 매장하고 광우병이 돈다고 소고기도 마음대로 못먹고 테로사건이 빈발하니 외국에 나간 자식들 때문에 근심에 잠겨 한숨만 쉬고 거기에 사스니 신종플르니 뭐니 하니까 밖으로도 마음대로 나돌지 못하고… 래일엔 또 무슨 무서운 돌개병이 돌지… 구름이 꽉 낀 어스름이 눈앞으로 어설피 밀려만 드는 것 같다. 21세기에 무고하게나마 살아갈수 있을가? 얼마든지 있다. 다리를 쭉 펴고 편안하게 살아나갈수 있는 비법이 다름 아닌 코로 숨쉬기이다. 우선 코로 숨쉬자면 입을 다물어야 한다. 입을 다물고있는데 습관되면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적게 된다. 너무나도 입으로 들어가야 할것이 많아진 세월이라 욕심을 버려야 할 때가 돌아왔다. “작년에 왔던 각설이가 또 찾아왔네”라는 노래처럼 동냥바가지짝을 안고 다니는 거지가 병들어 죽는 법은 없다. 그리고 말이 점점 다사해지는 21세기에 입을 다무는데 습관되면 그만큼 말이 적게 나가기에 그만큼 화를 적게 입게 된다. 그다음 코로 숨쉬게 되면 항생소나 호르몬이 들어간 주사를 적게 맞을수 있고 웬간해서는 마스크를 끼고 다니지 않아도 된다. 소문에는 당시 “사스”에 감염되였거나 예방치료를 받은 사람들 가운데서 대퇴골괴사에 걸린 사람이 적지 않다고 한다. 호르몬성분이 들어간 닝게르주사를 많이 맞은 탓이란다. 그리고 코로 숨쉬면 마스크를 끼기보다 예방효과가 더 좋다. 지금 적지 않은 사람들은 마스크를 껴야 할 곳에서는 끼지 않고 끼지 말아도 될 곳에서는 끼고 다닌다. 즉 밖에 나가서는 끼고 실내에 들어와서는 벗는다. 바뀌여진 예방법이다. 밖에는 공기류동이 잘되고 산소가 충족하고 해빛이 강하기에 일반적으로 바이러스감염이 불가능하지만 실내에서는 특히 겨울에 공기가 혼탁하고 습도가 높고 사람접촉이 많기에 감염이 가능해진다. 때문에 밖에 나가든 실내에 들어오든 입을 꾹 다물고 코로 숨쉬면 마스크를 끼기보다 편리하고 효과도 더 좋다. 그리고 코로 숨쉬는데 습관되면 코가 차고더운 기후변화에 적응되고 향내, 구린내, 비릿내, 지린내 등 냄새에도 후각이 예민해지기에 각종 기후변화에 대응할수 있고 천차만별로 변하는 세월에 자기에게 알맞는 냄새를 찾아서 무난하게 호흡할수 있게 된다. 생명공학에서 지금 생명을 이어나가고 위기에 빠진 생명을 구할수 있는 줄기세포까지 줄기차게 연구되면서 여러가지 과학연구가 인류의 아름다운 미몽을 점차 현실로 접선시켜주고있지만 그 모든 것은 어디까지나 인체밖에 있는 외부조건에 불과한것이다. 인류의 선조, 원시인들로부터 넘겨받아온 인체구조의 생리특점이 지금 오늘날에 이르러서 역시 우리의 생명을 이어주고 우리의 건강을 지켜주는데는 그 무엇보다도 선차적이고 기본적인 작용을 논다. 21세기는 달나라로 별나라로 날아다니는 세월이 된다지만 가장 기본적인 것은 오히려 원시적으로 지켜나가는 것이 더 명지할 것 같다.
54    깨끗하고 맑고 정갈함- 우리네 여자들 댓글:  조회:1422  추천:0  2013-07-26
깨끗하고 맑고 정갈함- 우리네 여자들 홍천룡 우리는 여자를 꽃으로 본다. 곱기 때문에. 고운것은 언제나 깨끗하다. 더러운것이 고와보일수가 없으니까. 헌데 고운것도 더러워질 때가 있다. 그러면 그걸 닦아야 한다. 닦으면 다시 깨끗해지고 고와진다. 우리네들 생활 역시 그렇다. 깨끗할 때도 있고 더러워질 때도 있다. 깨끗할 때에는 더 깨끗해지기 위해 그걸 닦아내고 더러워졌을 때에는 그 더러움을 가셔버리기 위해 닦는다. 집안 살림에는 닦는 일이 많다. 바닥도 닦아야 하고 그릇도 닦아야 하고 식구들지간의 정도 닦아야 하고 원망도 닦아야 한다. 시집살이를 해온 여자들이 걸레나 수세미따위를 쥐여보지 않은 여자가 있을가! 나도 장가를 들어서 여자들의 깨끗함을 진정 알게 되였다.  그래서 기회만 있으면 한번 깨끗한 여자를 쓰고 싶었다. 마침 전번에 무슨 파티에서 김춘택주필님의 원고청탁을 받았었다. 하여 이 기회에 써보고자고 하였던것이다. 쓰고보니 잘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깨끗하고 맑고 정갈한 여자의 형상을 그려보자고 애를 썼다. 깨끗한 여자는 대개 똑똑한 여자다. 조선족여자 치고 깨끔치 못한 여자가 있을가! 없다면 거짓말이다. 확실히 깨끔치 못한 여자도 있다. 생활여건이 제대로 주어지지 않은 처지에서 가정살림이나 아이들의 옷매무시조차 제대로 거두지 못하는 여자들이 지금도 있다. 다행히도 아이들을 많이 낳지 않는 세월이라 그럭저럭 흉내를 내며 지나쳐버린다. 또한 살림살이나 몸치장은 화려하나 마음적으로 도덕적으로 깨끔치 못한 여자들도 적지 않다. 그리고 몸이나 마음이나 다 깨끗하고 맑고 정갈한 여자에게도 깨끔치 못한 면이 있다. 너무나 깨끗해도 더러워진다. 오늘날 물질문명이 고도로 발달하여 오히려 깨끗한 것이 오염을 더 불러오고 결백속에 독이 더 있다. 인간관계에서도 똑똑한 사람이 더 음특하게 놀 때가 있다. 때문에 여자들에게도, 우리에게도 그런걸 닦아낼수 있는 “걸레”가 수요되고 수시로 “걸레”를 “물”에 행구어내고 쥐여짜면서 모든걸 닦아낼 “닦개질”이 수요되는것이다. 소설에서 이런 걸 보여주자고 시도하긴 했는데 제대로 꾸며지질 못하여 좀 어수선해 보인다. 량해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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