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천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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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귀신 • 별찌 • 룡 댓글:  조회:1731  추천:0  2013-06-21
귀신 • 별찌 • 룡 홍천룡 누구나 천진란만했던 동년시절을 겪어왔을것이다. 저 밤하늘의 별처럼 아득하게만 보이는 동년시절, 야- 그 시절엔… 그 시절에 헐벗고 굶주리며 살아왔든 잘먹고 호강스레 살아왔든지간에 동년시절은 그립기만 하다. 등산하다가 촐랑거리는 시내물에 시원히 발을 잠구면 어쩐지 동년시절이 그리워진다. 동년시절에 나는 옛말을 듣기 좋아했었다. 특히 귀신옛말이라면 눈 한번 깜박이지 않고 무서워서 오돌오돌 떨면서도 들었다. 내가 살던 공신촌”웅덩개”마을에서는 정구형님이 귀신옛말을 귀신같이 했었다. 여름 밤, 검푸른 하늘에 별들이 총총할 때면 정구네 마당가엔 쑥을 태우는 연기가 모락모락 피여오르고 그 주위에는 늘 마을의 조무래기들이 눈이 초롱초롱해서 빙 둘러앉는다. 코를 훌쩍거리는 놈, 쑥연기에 콜록거리는 놈, 별놈들이 다 있다. 그러다가도 옛말이 아슬아슬한 정절에 이를 때면 녀석들 코물이 허옇게 드리워도 훌쩍거리지 않았고 쑥연기가 자오록해도 콜록거리지 않는다. 한번은 정구형님이 “… 그 야밤삼경에 솨르르 하는 소리와 함께 갈대밭이 량쪽으로 쫙 갈라진거야. 바로 그때였지…” 라고 하였을 때 뒤쪽에 앉은 “코풀레기”가 “귀신이다!”라고 소리질렀다. 순간, 심장이 뚝 멎는것만 같았다. 밤바람에 옥수수잎이 우수수 떨리는 소리만 소름 끼치게 들려올 뿐이였다. “어디?” “저기!” 그 녀석이 손가락으로 밤하늘을 가리켰다. 모두들 고개를 쳐들고 밤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빨간 불티같은것이 가늘고 긴 꼬리를 감추며 밤하늘에 금을 긋다가 순식간에 사라지는것이였다. “야-” 저마다 나지막하게 감탄을 뽑았다. “귀신이 아니고 별찌야.” 정구형님이 해석해주었다. 허지만 나는 별찌가 귀신이 아니라면 하늘에 있는 귀신이 별찌에 불을 달아준것이라고 생각했다. 분명 빨갛게 타번지고있었는데… 귀신이 못하는 노릇이 없잖아! 귀신옛말을 들어보면 하늘에서나 땅에서나 바다밑에서나 사람이 못하는 노릇을 귀신이 하고있었던것이다. 소학교 3학년 때 어느 한 교학시간이였다. 강선생님이 낡은 사회에서는 제국주의, 관료자본주의, 봉건주의 등 3대큰산이 로동인민의 머리를 지지리 억누루고있었는데 압박이 있는 곳엔 반항이 있기 마련이라며 결국 누가 이 3대큰산을 뒤엎었겠는가 하는 계발성문제를 제기했었다. 누군가 얼마나 큰산이였는가고 묻자 선생님은 자연적인 모아산이나 히말라야산과는 비교할 바도 못되는 어마어마한 사회적인 산이라고 했다. 아이들이 눈이 머룽머룽해서 대답을 못하고있었다. 내가 한창 귀신옛말에 빠져있을 때라 별로 생각도 없이 심드렁해서 “귀신!”하고 내뱉았다. 와! 하고 아이들이 폭소를 터뜨렸다. “뭐, 귀신?” “예!” 나는 당당하게 긍정했다. 그 어마어마한 큰산을 귀신이 아니고서야 누가 뒤엎을수 있단 말인가! “이 동무의 세계관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하학후에 교무실로 선생님을 찾아오시오.” 선생님의 얼굴은 대뜸 배추잎처럼 퍼러딩딩해졌다. 하학후에 교무실에 들어서니 선생님이 나를 세워놓고 호되게 꾸짖는것이였다. 어찌나 달달 볶아댔는지 곁에 남선생님이 보아주기 민망했던지 한마디 끼여들었다. “허허, 그 학생의 상상력이 기발하구만. 귀신까지 련상시키다니. 그렇지 뭐, 당시 3대큰산을 뒤엎기 위해서는 귀신이 있었다면 귀신도 끌어당겼을터였지. 모택동이 단결할수 있는 력량을 다 쟁취하여 통일전선을…” “최선생, 계급관념으로 학생의 세계관을 개조시켜주고있는 이 엄숙한 마당에 그게 무슨 태도입니까, 예? 선생은 그래…” 그 남선생님이 연신 팔을 내둘렀다. “됐소됐소. 나야 뭐 그게 그저 그렇다는거지. 허허.” 후에 강선생님이 어머니를 찾아 단단히 침을 놓은것 같았다. 어머니의 단속에 나는 옛말 들으러 가기 힘들어졌다. 우리 어머니도 귀신은 몰라도 미신은 은근히 믿어온 터였다. 내가 자주 앓는다고 점은 얼마나 쳤고 “방토”는 얼마나 했는지 모른다. 소학시절에 나는 몸이 약해서 늘 앓음자랑을 했었다. 그래서 어머니는 나를 데리고 연길시내 용하다는 의사는 다 찾아다녔다. 5학년 여름방학에 어머니는 명신골에 용한 의사가 있다는 풍문을 듣고 또 나를 데리고 갔다. 우리가 들어섰을 때 까까머리에 흰안경을 코등에 건 의사가 녀환자의 배를 만지며 곁에 앉은 령감과 롱담을 걸고있었다. “녀자들의 배를 슬슬 어루만지며 벌어먹는 내 팔자도 괜찮지.” “또, 또, 쌍소릴…” 내 차례가 되였을 때 그 의사는 나의 얼굴을 훑어보더니 나의 뒤통수를 툭 쳐주는것이였다. “이 녀석이 기가 절반 죽어있구만. 이름이 뭐지?” 나의 본명은 “홍순룡(洪淳龙)”이였다. “어허, 이름이 틀려먹었어. 룡이란 놈은 순박하지 않아. 순수한 놈도 없고. 돼지주둥이에 소대가리에 뱀꼬리에 두루두루 합친 놈이여서 하늘땅 치며 우쭐렁거리는거야. 이름부터 고쳐. ‘순’자를 빼고 하늘 ‘천’자를 넣지.” 그리고는 아예 “홍천룡”이란 이름으로 처방을 떼주는것이였다. 집에 돌아온 어머니는 이튿날로 파출소에 가서 내 이름을 고쳤다. 정말 귀신이 곡할 일이였다. 그때로부터 장장 40여년동안 나는 크게 앓아보지 못했다. 지금까지 입원해보지 못했고 몸에 수술칼 한번 대보지 못했다. 그런 연고가 있어서인지 어떤 때는 정말 귀신이 되여보고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옛날에는 귀신이 하늘에서 별찌를 가지고 놀았지만 지금은 사람도 달나라 별나라로 날아다닌다. 그게 사람이 아니라 “귀신”이다. “귀신”이 아니고서야 어찌 우주공간으로 별찌처럼 날아다닐고! 지금 아이들은 귀신옛말을 듣지 않는다. 허지만 “해리포터”같은 환상소설이나 텔레비드라마는 죽기내기로 본다. 그런 소설과 드라마의 장면을 두루 스쳐보면 그제날 귀신옛말과 흡사한데가 많다. 아이들은 그런걸 보면서 상상의 날개를 키운다. 우리 민족의 후대교양에도 “귀신옛말”같은 교육이 따라갔으면 하는 기대를 걸어본다. 지금 아이들은 학교에 붙으면 교과서가 눈을 가리워주고 시험이 수족을 비끌어매준다. 이런 교육체계를 부정하는것은 아니지만 부동한 기질에 부동한 천부에 부동한 꿈을 꾸는 아이들에게는 부동한 양성대책이 따라가야 할것 같다. 글로벌시대에 우리 민족이 세계선진행렬에 당당하게 들어서자면 아이때부터 “귀신”이 되여보겠다는 자유분방한 상상력을 키워주고 별찌처럼 날아다닐수 있는 날개를 키워주어야 한다. 그래야만 “귀신”이 많이 나올수 있고 “귀신”들의 왕인 “룡”도 나올수 있는것이다.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노벨상수상자명단에는 우리 민족의 이름이 단 한사람만이 올랐다. 평화상을 수여받은 김대중대통령이다. 그밖에 넓고도 넓은 과학분야와 문학방면은 공백이다. 전 민족이 심사숙고해야 할 문제이다. 모든 아이들이 판에 박은듯한 공식속에서 양성된다면 영원히 “귀신”이 나올수 없고 “룡”이 나올수 없고 노벨수상자가 나올수 없게 된다. 귀신이 되여보겠다는 많은 “귀신”들이 요람속에서 요절되여가고있다. 가슴아픈 일이다. 나는 이미 쉰고개를 넘은 사람이지만 다시한번 “귀신꿈”을 꿔보고 싶다.
32    포대기를 버리든지 빗강대를 내리든지… 댓글:  조회:1102  추천:0  2013-06-20
- “아기문화”를 두고 한두마디 홍천룡   세월이 먹고 살만하게 되니 너도나도 “문화”를 관심하고있다. 먹고 살기 바쁠 때에는 “먼저 배나 채우고 봐야지”였고 살림살이가 구차할 때에는 “먼저 돈이나 벌고 봐야지”였다. 그런데 노래 한수를 부르고 몇만원씩 챙겨넣고 그림 한장에 몇십만원씩 메친다고 하니 모두들 눈이 휭- 돌아가고 입이 딱 벌어지지 않을수 없었다. 대합창이나 부르고 구호마디나 웨치던 군중문화속에서 도야되고 입학, 임직, 참군시에 꼭 써넣어야 하는 “문화정도”란에만 관심을 돌렸던 사람들도 요즘에 와서는 “음식문화”요 “패션문화”요 하는 “변두리문화”에까지 눈길을 돌리고있다. 문화란 대체 무엇이길래? 한두마디로 딱 찍어 말하기 곤난하다. 그 범위가 너무 넓고 그 함의가 너무 깊어서… 옛날에는 서당집 온돌방에서 언문풍월을 듣고 나와도 첨지쯤으로는 인정해주었고 후에는 뒤고방 야학당에서 “가, 갸. 거, 겨…”를 배우고 나와도 시골선비쯤으로는 인정해주었었다. 지금은 학교문을 나와야 문화인으로 인정해준다. 나라에는 나라문화가 있고 민족에는 민족문화가 있고 가정에는 가정문화가 있다. 누런 력사책을 뒤적여보면 주먹깨나 쓴다고 펀펀한 사람을 데려다가 자기집 노예로 만든 악인이 있었는가 하면 세세대대로 물려온 자기들의 언어를 버리고 다른 민족의 언어를 받아물고 냠냠거리는 동화족도 있었다. 근대에 와서는 돈깨나 있는 나라들에서 못사는 나라들에 “변리”를 놓아 폭리를 얻었는데 현대에 와서는 차원이 높은 나라들에서 “광대놀음”같은 문화산업으로 다른 나라의 눈길을 잡아끌고있다. 옛날에는 남의 눈에 나면 남먼저 얻어맞는다고 하였지만 지금은 남의 눈에 나야 엽전이 더 날아든다. 뭐, 각설이식 문화경제타령이라고나 할가! 그 문화의 힘이 마력같고 그 문화의 영향이 료원의 불길처럼 퍼진다. 탱크로도 밀어낼수 없고 만리장성을 열개나 더 쌓는다 해도 막아낼수가 없다. 한 녀자가 할일도 없고 돈도 딸리니 필을 들고 긁적거리며 환상소설을 써냈다. 생각밖에도 그것이 베스트셀러가 되여 전세계 언어문자를 가지고 있다는 나라와 민족들이 다 번역해갔고 또한 영화와 드라마를 찍어서 세계각지에서 다 볼수 있게 하였다. 그 경제적가치를 따지니 현대화설비를 갖춘 자동차공장을 몇개 앉힌것보다 더 높다고 하니 기가 딱 막힐 일이다. 그래서 요즘엔 너도나도 “문화”에 뛰여든다. 문화의 중점이 대개 발굴, 계승, 창조에 있는 것 같다. 옛날에 추었던 학춤같은것도 발굴해내고 상모춤같은것도 계승해 받아들이고 새로운 관광문화같은 것을 창조해내기도 한다. 나도 이 기회를 빌어 “아기문화”에 대해 한두마디 해볼가 한다. “아기문화”란 아무래도 아기를 키우면서 쌓아온 경험이나 노하우 같은 것일것이다. 여기에는 먹이는 것, 입히는것, 위생적인것, 교양적인것 등 다방면이 들어있다. 아이 둘을 키워봤지만 남자이니까 아버지란 각도에서 팔짱이나 끼고 잔소리나 좀 했을 뿐이다. 그래서 구체적으로는 말하기 곤난하고 싱거운 포대기문제나 하나 꿰들고 피루어보련다. 털이 많이 나는 서양에서는 어쩌는지 모르겠지만 솜이 많이 나는 동방에서는 아기가 태여나면 대개 포대기에 싸안고 키운다. 요즘에는 뭐 거위털을 깐 업을수도 있고 안을수도 있는 다용적포대기도 있기는 하지만서두…아기는 저항력도 약하고 면역력도 약하기 때문에 포대기에 싸안고 젖도 먹이고 바깥출입도 하는 것이 더없이 필요한 대책이다. 어느 날, 3선뻐스에 올라앉았는데 아기를 포대기에 싸안은 젊은 각시가 오르기에 자리를 내여주었다. 그 뒤로 대여섯 사람이 우루루 따라 오르더니 각시가 앉은 주위를 빙 둘러싸는것이였다. “얘, 이 포대기앞을 좀 젖히자. 애가 숨이 막히겠다.” 몸집이 비대한 50대의 녀인이 숨이 차서 헐떡이면서도 팔을 뻗쳐 포대기의 앞섶을 들려고 한다. 분명 각시의 친정 어머니같았다. 헌데 마중켠에 선 걀편한 녀인이 그 팔을 밀어친다. “이봅소 안사둔, 요즘 류행성감기가 무섭습꾸마. 괜히…” “그래그래! 저 안사돈말이 옳다니.” 뒤에선 50대의 나그네가 목을 왜가리처럼 길게 빼들며 연신 주억거렸다. 젊은 각시는 두 녀인을 번갈아 보더니 조심스레 포대기의 앞섶을 포개놓는다. 전염성병균이라도 들어갈가봐. “자기야, 그래도 애가 좀 숨이나 쉬게 해야지. 자꾸 꽁꽁 싸기만 하면 어떻해?” 삼십대의 젊은이가 아기의 아빠인 것 같았다. 신랑의 권위적인 건의에 각시는 다시 조심스레 포대기의 앞섶을 열었다. 빠금히 열려지는 포대기속으로 아기의 얼굴이 나타나기도 전에 “응아!”하는 울음소리가 튕겨나왔다. 젊은 각시가 “어마나!”하며 다시 포대기앞섶을 조심스레 포개놓으며 신랑을 향해 고운 눈을 할기쭉거린다. “봐요, 자기도 참!” “그래그래. 꽁꽁 덮어라.” 뒤에 선 나그네 둘이 덩달아 께끼여든다… 참, 한 아이를 놓고 두 세대 세 가정이 구순하게 구는 모습이 재미있고 행복해보였다. 포대기속에 꽁꽁 싸인 아기는 자기가 얼마나 행복한지를 알고나 있을가? 모를것이다. 숨이 막혀 쌕쌕거리며 불평스레 발버둥질 쳤을것이다. 이처럼 아기의 불편은 모르고 자꾸자꾸 감싸기만 하는 페단이 우리의 조기교육에 엄중하게 존재하고있다. 일반적으로 아기는 6살까지 대뇌의 모든 갖춤새가 다 갖춰지고 성숙정도가 90%이상에 도달된다고 한다. 대개 6살부터 12-15세가량까지는 모든 사유기관이 발달되면서 객관사물을 접수하고 관념이 형성되기 시작한다고 한다. 그래서 이 시기에 어떤 교양과 환경이 조성되는가 하는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한다. 포대기는 아기가 한두살 때에 수요되고 일단 걷기 시작하면 별로 그다지 수요되지 않는다. 헌데 아기의 첫 교육자인 어머니가 포대기에 대한 애틋한 정과 그걸 써오던 습관을 떼여버리지 못한다. 그래서 그 아기가 나날이 커가는데도 그냥 자꾸만 감싸고 돌기만 한다. 여기에서 60세 넘는 로인도 어머니의 눈에는 아이로 보인다는 말이 나진 것 같다. 하여 커가는 아이도 자꾸만 아기로 보여 늘 시름이 놓이지 않아 잔소리만 나간다. 그것이 아이의 성장에 어떤 영향을 미칠가? 어느 소학교마당에서 신입생입학식이 있던 날이였다. 빨간옷을 입은 신입생이 등뒤에 멜가방을 달싹이며 달려가는데 가방에서 파란 노트가 떨어졌다. 뒤에 따르던 곤색옷을 입은 아이가 그걸 주어가지고 “빨간옷”을 쫓아가서 넘겨주었다. 헌데 “빨간옷”이 자기의 가방안에서 노트를 훔쳐냈다고 “곤색옷”을 오해하고 가슴을 툭 쳤다. 억울하게 된 “곤색옷”이 가만 있을리 만무했다. 역시 주먹을 내들고 “빨간옷”을 쳤다. 두 아이가 서로 얼크러져 돌아가자 학부모들이 모여들어 뜯어놓고 타일렀다. 특히 “빨간옷”이 오해도 풀지 않고 손을 댄 것이 잘못이라고 꾸짖기도 했다. “빨간옷”은 코를 풀쩍이며 고개를 푹 떨구었다. 어딘가 자기의 잘못이 알렸는지…그때 “빨간옷”의 어머니가 나타났다. “빨간옷”이 어머니의 품에 와락 안기며 와-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그 어머니 역시 아들의 잘못을 중복했다. 원인도 캐여묻지 않고 “개학날에 재수없이 아이를 울긴다”고 침방울을 튕겼다… 어머니가 나타나지 않았어도 “빨간옷”은 그날 자기의 잘못을 얼마간 깨달았을것이다. 헌데 어머니가 나타났기에 그는 어머니가 그동안 그자리에 없었기에 자기가 어른들의 꾸중을 받았다는 억울함이 솟구쳐 그 깨우칠가 하던 반성마저도 까맣게 지워버리게 되였다. 이렇게 포대기로부터 인기된 감싸고 도는 습관이 느티나무처럼 아이의 성장에 긴 그늘을 지워준다. 그래서 자립, 자존, 자강정신이 부족하게 된다. 사람은 많으나 인재가 부족하고 천재가 희소한 원인을 따져보면 그 뿌리가 여기에 있다. 사물은 언제나 모순속에 처해있는것이다. 포대기속에서 포근하게 자라던 아이도 걸음마를 떼기 시작하면서 자기의 의사를 고집하고 반항할 때가 있게 된다. 그 반항의 첫 맞적수가 바로 그 어머니이다. 어머니와의 겨룸에서 유아원이나 학교에 입학하기전까지는 아이가 이기는 비례가 더 높다. 학교에 붙게 되면 학교의 요구가 있게 되고 사회의 감독도 있게 되기에 어머니쪽에서 늘 지면서 아이의 요구를 만족시켜 줄수 없게 된다. 그런데 늘 “상승장군”으로 뻗대오던 아이가 어머니의 한두마디에 “투항”하자고 하겠는가? 그래서 “무력”을 쓰지 않을수 없게 된다. 무력을 쓰자면 무기가 좋아야 한다. 어머니들이 흔히 쓰는 무기는 “빗강대”였다. 우리 조선족들이 온돌방에서 쓰는 비는 자루가 짧은 조막비였다. 그것을 거꾸로 거머쥐고 아이의 엉뎅이를 잡아치면 몽둥이로 치는것처럼 뼈를 다칠 위험이 없었고 회초리로 치는것처럼 굴뱀이 갈 흔적을 남기지 않는것이다. “무력”의 허풍으로 아이를 굴복시킬수도 있고 또 가슴 아린 흔적도 남기지 않으면서도 수시로 방구석에서 챙겨잡을수 있는 좋은 “무기”였다. 그 무시무시한 “빗강대취조”에는 아이들중 열에 일여덟은 굴복하고 만다. 한두번의 승전에 재미를 보게 된 어머니들은 아이가 말을 듣지 않을 때마다 빗강대를 집어들군 한다. 그러면 어떤 아이는 어머니가 빗강대를 집어들기만 해도 아예 두손을 들고 “투항”하고 만다. 생활방식이 많이 변한 오늘날 비를 쓰지 않는 집이 많아짐에 따라 “빗강대무력”대신 다른 “폭력”을 쓰지만 실질은 한가지이다. 이것이 점차 어머니들의 고질로 되여 나중에는 무엇이나 다 자기의 의사에 따라 자식들이 해줄것을 강요하게 된다. 이것이 무섭다. 지금 대학입시에서 70-80%가량의 수험생들이 부모의 의사에 따라 지망을 선택한다고 한다. 어머니가 없으면 세계는 없다. 세계는 어머니의 품속에서 돌아가고있다. 어머니의 거룩한 사랑과 위대한 업적은 한입으로 다 표달할수 없다. 그래서 “무엇으로 그 사랑에 보답해야 합니까!”하고 목메여 부른다. 그만큼 거룩하고 그만큼 위대하기에 또한 그만큼 자사적이고 그만큼 비속적인것이다. 세상의 나쁜 습관과 욕망은 어머니들이 싹틔워 준다. 처음에는 “포대기”로 감싸고 돌다가 후에는 “빗강대”로 길들이다가 나중에는 “포대기”와 “빗강대”를 번갈아 교차적으로 리용한다. “포대기”는 아이의 연약성을 감싸주고 “빗강대”는 아이의 개성을 짓눌러버린다. 때문에 아이들은 자기보다 강한 자의 앞에서는 뒤걸음질 치며 보호자를 찾게 되고 찾지 못하면 굴복하고 굴복해도 안되면 아첨하게 된다. 서로들 개성이 부동하게 두드러지질 못했기에 강약이 비슷한 제또래끼리는 평등하기를 요구한다. 누가 좀 삐여질가 하면 자연히 질투하게 되고 꼬집게 된다. 반면에 자기보다 약한 자의 앞에서는 우쭐해지면서 남을 깔보게 된다. 이 점이 또한 우리 민족의 한가지 렬근성이기도 하다. 우리 민족은 왜서 장시기동안 남의 예속하에서 살아왔는가? 물론 여기에는 력사적, 지리적, 문화적인 요소들이 내포되여 있는것이지만 자기민족의 렬근성도 고려해봐야 하는것이다. 문제는 이런 렬근성이 우리의 경제사업에 우리의 문화사업에 우리의 기타 사업에 수시로 장애를 조성시켜 주고있다는 점이다. 짧은 밤에 긴 노래는 부를수 없기에 일일이 실례를 들어가며 언급하기는 곤난한데 일단 우리 모두 우리의 구체사업에서 누가 “포대기”를 안고 다니며 감싸주기를 좋아하고 누가 이래라 저래라 하며 “빗강대”질 하기 좋아하는가를 유심히 살펴보기로 하자. 그런 다음에야 무슨 대책이 있어도 있어야 할게 아닌가!
31    무용-랑만의 깃을 펴는 천사의 날개 댓글:  조회:1144  추천:0  2013-06-19
무용-랑만의 깃을 펴는 천사의 날개 홍천룡 “소곰재(잠자리)꽁-꽁-, 앉은 자리에 앉아라, 먼데 가면 죽는다…” 잠자리를 잡는것이 아이로 자라면서 시작되는 첫 사냥이였다. 그것도 인간의 기만술을 배워서 어설프게 실천하면서 말이다. 배재굽이에서 수수대꼬리를 잡고 식지 하나만 빼들고 잠자리야 고기에 앉으렴 하고 홀린다. 빠알간 꼬리에 유리 같은 날개를 파득이는 잠자리가 앉을가 말가 하다가도 살풋이 내려앉는다. 긴장해서 숨을 죽이는 순간, 엄지를 내밀어 가시발 같은 고놈의 발가락을 잡으려는 찰나, 앗차, 엄지 먼저 식지가 꼬부라진 실수! 고놈이 날개를 파르르 떨며 살짝 날아오른다. 먼데로 날아가면 죽는다는 말에 더 높이는 날지 않고 곧바로 머리우에서 맴돌며 하늘하늘 춤춘다. 붙잡히우지 않았다는 행운을 경축하는 양, 쌍쌍이 돋은 날개를 즐겁게 뱅뱅 돌린다. 아, 날개가 있어 자유스러운 녀석이다. 자유스럽기에 춤을 추는 녀석이다. 자유의 특징적표현방식이 춤이다. 그러니 춤을 춘다는 자체가 자유스러움을 의미한다. 어릴 때에는 춤에 대해 흥취도 없었거니와 춤을 추는걸 구경하기조차 싫어했다. 동네돌이를 해보면 대개 술뒤끝이면 춤판이 벌어지군 했다. 그런 춤판은 혼잡스럽기 그지 없다. 절반은 주정뱅들이 뚱땅거리며 주정부리는 발광이여서 곁에 가서 구경하기도 무섭다. 그다음 좀 점잖은 춤판은 결혼잔치뒤끝에 벌어지는 오락판이였다. 그런 오락판에서는 “주석”의 사회하에 질서있는 차례순서를 지키면서 그 집안에 걸려드는 친척들과 친구들이 자기의 장끼를 보여주면서 분위기를 돋군다. 노래가락이 흐르면 남녀가 팔을 흔들며 좁은 방안을 빙글빙글 돌아친다. 혹간 웃기는 사람들이 있어 볼만한 구경거리로도 되군 했다. 50년대중반에는 무도바람이 불었다. 쏘련의 “마우재”들 “딴스”가 류행되였었다. 마을에서는 직장으로 다니는 직장인들이나 다녔고 농호촌민은 다닐 엄두도 못내였다. 직장인들 가운데서도 젊고 멋이나 부리는 “하이칼라 도끼머리”들 아니면 “스까드 치마”들이 다녔을 뿐이였다. 춤에 대해 흥취를 가지게 된것은 “문화대혁명”시기부터였다. 우사칸마당에서는 아침저녁으로 “충성무”를 배워주었다. 가도주임이 동원해서 배웠는데 우리 어머니도 전에 없던 열성을 보였다. 나갈 때면 꼭 새옷을 바꿔입고 나갔다. 나도 그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그런데 어머니의 동작이 굼떴고 팔과 다리가 맞지 않아 엉거주춤거릴 때가 많았다. 그럴 때면 내가 어머니의 앞에 나서 시범동작으로 리드했던것이다. 집에 돌아와서는 체경과 마주 서서 배운 것을 련습하군 하셨는데 동작이 생각나지 않거나 제대로 되지 않을 때에는 밖에 나가 놀고있는 나를 불러들이군 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다른 사람의 동작을 한두번만 보면 비슷하게 모방할줄 알았다. 그래서 어머니에게 머리, 목, 팔, 손목 등 주요부위의 움직임요령과 선률흐름에 따르는 동작의 변화를 상세하게 가르쳐드리군 했다. “너 정말 어물쩍하구나. 배고프지? 식장안에 달걀이 있어. 딱 하나만이야!” 춤동작을 배워준 “학비”로 아버지께만 드리는 삶은 닭알 하나씩 맛보는 장려를 받군 했다. 그러면 그날 하루는 기분이 둥 떠서 온하루 휘파람을 불어댄다. 지금 말로 피룬다면 “예술적세포”가 있었다고나 할가! 어느날 아버지가 시뻘건 입장권 몇장 가져왔다. 온집 식구가 입이 함박만해져 저녁밥을 일찌감치 해먹고 저마다 새옷을 떨쳐입고 나섰다. 동네골목을 와짝 짜기며 자랑질에 우쭐렁거려보기도 했다. “공인문화궁”이라는 건물앞에 이르러 나는 저으기 주눅이 들었다. 그처럼 웅장한 건물앞에 서보기는 처음이였다. 지금 내가 출근하는 직장인 출판사가 바로 그 옛날 “공인문화궁”과 마주 앉아있어 매일 두세번씩 그 앞을 지나다니게 된다. 매번 그때 생각을 하게 되면 어이없어 웃음이 나오게 된다. 지금 보면 한낱 고태가 력력한 구식건물에 불과한것뿐인데… 그때 나는 처음 무대공연을 관람하게 되였다. 무대우에서의 무용표현은 술놀이 뒤끝에 벌리는 춤판도 아니고 결혼잔치뒤끝에 진행되는 오락판도 아니고 우사칸마당에서 수십명씩 추는 집체무도 아니였다. 좌우량켠의 강렬한 조명이 무대를 신비스러운 다른 한 세계로 만들어놓고있었다. 배경에는 수려한 산천도 나오고 휘날리는 붉은기도 나오고있었다. 우리가 살고있는 세계가 아닌 다른 한 세계처럼 보였고 거기에 올라가 보고싶은 동경심을 자아내는 유혹적인 꿈나라처럼 보였다. 그다음 나의 마음을 황홀한 선경에로 이끈 것은 음악선률이였다. 가끔씩 우사칸회의실에 손풍금수가 와서 풍금을 쳐도 그 소리가 듣기 좋았었다. 고요한 한밤중에 마을에 학철형님이 하모니카를 불어도 그 가느다란 소리가 은은하게 마음을 휘저어놓았는데 지금 이 극장안으로 흐르는 선률은 손풍금소리도 아니고 하모니카소리도 아닌 이름 모를 숱한 악기들이 어울려서 내는 협화음이였다. 때론 잔잔하게, 때론 경쾌하게, 때론 우렁차게 사람들의 심금을 울려놓고있었다. 그리고 인상적이였던 것은 공연배우들의 화장한 얼굴이였다. 들어올 때 입구에서 한 녀배우가 새빨갛게 화장한 얼굴을 해뜩거리며 우리앞으로 지나가는 것을 보았을 때 나는 인차 귀신이 아니냐는 생각부터 들었던것이다. 정구형님의 귀신옛말에서 나오는 요사한 요귀들이 일반적으로 얼굴에 피칠갑을 하고 다녔던것이다. 헌데 무대우에 올라선 배우들의 얼굴은 한결같이 선남선녀와도 같은 아릿다운 모습이였다. 아마도 무대조명의 귀신 같은 조화였을것이다. 정채로운 절목가운데서도 나를 흥분시키는 것은 그래도 무용이였다. 독무도 있었고 쌍무도 있었고 집체무도 있었다. 독무를 추는 녀배우의 날씬한 몸짓, 버들가지처럼 하느작거리는 팔짓, 딛는듯 마는듯 잠자리날개인양 뱅뱅 돌아가는 다리짓에 눈이 가물거릴 지경이였다. 남녀쌍무 역시 동작도 경쾌했고 어울리는 분위기도 흔쾌했다. 큰 폭에 원을 그리다가 잦은 가락에 작은 폭으로 이어대는 앙금질뒤끝에 서로 빙글빙글 돌아서 감기고 스리살짝 풀리면서 돌고 하는 반복동작이 마치도 살짝쿵 소쿠라지는 시내물소용돌이를 보는듯 상쾌해진다. 더욱이 군무는 나에게 격동과 힘을 주었다. 동작들이 힘차고 폭이 컸을 뿐만 아니라 착착 꺾어지고 이어지는 교차성이 일치했고 선명했다. 종적횡적으로 부단히 변화되는 배렬, 원점으로부터 각을 이루며 갈라지는 대각선, 각이 큰 팔짓과 다리짓이 반복되면서 이루어지는 박력감, 일사분란하게 이루어지는 조형감, 군무가 보여주는 것은 앙양되는 투지력이였다… 그 공연을 관람한 후부터 나에게는 한번 무대에 올라가 보고싶은 마음이 간절해졌다. 무대가 천당처럼 신성해보였고 그 우에서 춤추는 배우들이 선녀나 신선처럼 보였던것이다. 그후 나는 어디에서 무슨 공연이 있다하면 비가 오든 눈이 오든, 입장권이 있든 없든간에 무조건 찾아가군 했다. 표가 없으면 보일러작업실을 리용하지 않으면 변소간유리를 깨면서라도 들어갔다. 한번은 들키워서 “로동자규찰대”한테 귀썀을 얻어맞고 극장안에서 쫓겨난적도 있었다. 그러면서 나는 무대에서의 기본 무용동작을 익히느라 애를 썼다. 그래서 동네아이들을 웃길 때가 많았다. “임마, 제 주제꼴이나 좀 보고 너덜거려라. 네가 무대에 올라 춤추면 누가 봐줘?” 헌데 세상에는 이따끔씩 주제에 넘는 일이 생겨나기도 했다. 중학교에 올라가니 학교에는 “학교모택동사상문예선전대”가 있었고 각 반급에는 반급끼리 꾸리는 “반급모택동사상문예선전대”가 서게 되였다. 학교”선전대”와 반급”선전대”의 사이는 모주석의 말씀에 비추면 “양춘백설(阳春白雪)”과 “하리파인(下里巴人)”사이였고 지금 말로 풀이하면 전문직“수준급”과 과외직”아마추어”사이라고 할가? 아무튼 “반급”은 시시한 축에 속했고 “학교급”은 쟁쟁한 축이였던것이다. 공든 탑이 무너지랴! 나도 행운스럽게 “학교급”에 들었던것이다. 당시 허숙자선생님이 지도하신 “연길시3중모택동사상문예선전대”라면 연길시안에서는 제일 기백이 있고 꼴꼴한 공연대였다. 무슨 “5•1절”이요 “7•1절”, “8•1절”, “국경절”이요 하는 기념행사에는 꼭 우리들의 공연임무가 떨어졌고 주, 시혁명위원회의 주요행사에도 공연임무가 떨어지군 했었다. 그러다 보니 방학이란 없었고 절목련습에 밤을 팰 때가 많았다. 공부를 뒤전에다 둘 때라 뭐 학업에는 크게 영향이 없었고 다른 아이들보다 덕을 보게 된 것은 참가하기 싫은 비판회의나 동원대회 같은 정치활동에 빠질수 있었고 의무로동이나 “5•7농장”에 가서 기음을 매지 않았던것이다. 그래서 많은 아이들의 부러움을 자아내기도 했다. 처음 무대에 올라서본 것은 그 웅장한 건물이였던 “공인문화궁에서였다. 주초대소(지금의 주당위사무청사임)에서 점심을 먹고 화장한 다음 렬을 지어 문화궁으로 갔는데 자꾸만 가슴이 두근닥근거렸었다. 무대에 올라서면 모든 것이 불빛아래에 드러나고 수백쌍 눈이 지켜보고있기에 그 어떤 미세한 실수도 감출수 없다는것이다. 우리가 나갈 첫 절목은 “동풍이 불고 전고가 울린다”였다. 전주곡이 울리였는데도 나의 가슴은 그냥 두근거렸었다. 드디어 전주곡이 끝나고 트럼펫 고음선률의 울림과 함께 우리는 2렬종대로 한결같이 팔을 반공중에서 절주있게 폈다 꺾으며 무대에 나섰다. 무대공간은 휘황하고 현란하기만 했다. 모든것이 활 풀리면서 가슴도 뛰지 않았다. 공산주의서광이 비껴오는 저기 저 동산마루로 활개쳐 오르는 기분으로 전환되였다. 무대아래에서 박수소리가 터져올랐다. 격정이 각일각 고조되고있었다. 무대우에서는 절대 관람석을 내려다 보지 말라고 선생님이 늘 강조하셨다. 높은 무대우에서 내려다 보면 눈가녁을 짙게 화장한 눈이 꼭 감고있는것으로 보인다는것이다. 무대우에서 눈이 감긴것으로 보이면 우선 전반 얼굴의 광채를 잃게 된다는것이다. 그러니 광채를 잃은 얼굴에서 감정표현같은 것은 더구나 운운할 여지도 없단다. 때문에 무대우에서는 눈을 늘 45도 높이를 바라보며 떠야 한다고 했다. 무대우에서는 45도가 아주 중요한 각도였다. 얼굴을 옆으로 돌릴 때에도 90도로 꺾지 말고 45도에 맞추어 탈고 팔을 쳐들 때도 45도 높이, 턱을 쳐들어도 45도 높이, 다리를 펴들어도 45도 높이… 그런데 나는 호기심을 이기지 못해 몇번 관람석을 내려다 훔쳐보군 했다. 앞좌석 몇줄은 운무속에 잠긴 영상처럼 보얗게 알렸고 뒤쪽은 거뭇한 장막속에 가리운 까막 나라여서 보이지 않았다. 마치도 우리가 구름우에 떠서 해빛을 받으며 춤추는 천사같다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그 황홀함은 이루다 형용할 수가 없었다. 사람의 일생에서 도대체 몇번이나 무아지경 황홀속에 빠져 넋을 잃어본적이 있는가! 그 격동, 또한 한가슴 뿌듯이 부풀어오른다. 그 희열적인 충격감은 무대에 올라가 직접 춤을 춰보지 못한 사람은 감수해낼수가 없다. 수백쌍 선망의 눈길이 지켜보고 열망의 가슴으로 안아주는 무대우에서 두팔을 날개처럼 마음껏 퍼득이며 행복의 요람으로, 희망의 언덕으로, 평화의 천당으로 날아예려는 매 하나의 동작, 매 한송이의 웃음꽃은 아름다운 미에 대한 부각이였고 사랑의 선물이였다. 그 첫 공연이 있은다음부터 나는 무용련습에 더 땀을 흘리군 했다. 기교를 잘 련마하여 더 많은 공연에 나가 표현하고싶었던것이다. 그래도 나는 일정한 “예술적세포”가 있다는 말을 가끔 듣기도 했다. 당시 우리 선전대의 남대원들의 우상은 발레무용극 “백모녀”에서 등장하는 남배우 “왕대춘”과 “홍색랑자군”에서 나오는 남주인공 “홍상청”이였다. 거리나 영화관에 나붙은 포스터나 팸플릿에서 그들의 형상을 볼 때마다 정신이 분발되고 힘이 막 솟구쳤다. (나도 이다음 꼭 저렇게…) 그들의 형상이 나어린 나의 가슴에 무용이라는 이 희망의 불길을 활활 지펴놓았다. 무용에 나의 일생을 바치리라 속으로 수없이 다지기도 했었다. 무용보다 더 우아하고 더 고상하고 더 예술적인 직업은 이 세상에 없다고 인정했기때문이였다. 허나, 그 랑만에 넘치는 희망이 절망으로 바뀌는 비극이 한발자국 한발자국 소리없이 나에게로 발볌발볌 다가서고있음을 나는 감촉하지 못하고있었다. 후에 연변가무단이 회복되고 시문공단이 서면서 일부 대원들이 추천되고 뽑혀서 전문직 문예일군으로 되였다.지어 심양군구철도문공단이요 북경군구에서도 예술인재들을 모집하러 오게 되였다. 헌데 나는 초벌기음에 속하는 예선에도 뽑히우지 못했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의 “자연조건”이 얼마나 악렬했던지… 속상해서 소리없는 눈물을 얼마나 흘렸는지 모른다. 중학교 3학년으로 올라가면서 다른 아이들의 몸은 종적으로 우썩우썩 키돋음했지만 나의 몸은 어쩌라구 횡적으로 밀밀 뻗어나갔던것이다. 부모님들이 물려주신 “자연조건”임에야 어찌하랴! 허나, 후회는 없다. 오히려 감사한 일이다. 그 시기 짧았던 무대경력이 나의 심신을 예술적으로 도야시켰고 무용에 대한 감성적인식을 가지게 하였던것이다. 생활에서의 무용은 희열의 표현이고 예술에서의 무용은 생활에 대한 반영이고 아름다운 미에 대한 부각이기에 앞으로 계속 훨훨 춤을 추며 천당어귀까지 날아가련다.
30    남으로 북으로 갈래갈래 뻗은 길 댓글:  조회:1057  추천:0  2013-06-19
•수필• 남으로 북으로 갈래갈래 뻗은 길 홍천룡    어릴 때 내가 살던 싸리골 마을에는 길이 여러 갈래가 있었다. 마을 한복판에는 두레박 우물이 있었고 그 우물을 축으로 여러 갈래 길이 오불꼬불하게 가가호호로 통했다. 제일 큰 길은 남쪽으로 곧게 뻗은 신작로였는데 현성과 통했다. 마을을 떠나가는 사람, 동네로 찾아오는 사람 다 그 길을 통해 오고가고 했다. 동네 아저씨들의 말씀을 들어보면 현성까지 가면 세계각지로 다 갈수 있단다. 다만 돈이 없고 가난해서 못갔을 뿐이였지… 그 다음에는 북쪽 뒤산골짜기로 올라가는 달구지길이였는데 수레바퀴에 의해 패인 홈채기가 두 줄기의 철길마냥 길을 따라 평형으로 뻗어올랐다. 온동네 땔나무가 그 길을 통해 실려온다. 동네 어르신님들의 말씀을 들어보면 그 길을 따라 뒤산을 넘어 산발을 타고 계속 가면 운무속에 아아하게 치솟은 백두산까지도 갈수 있단다. 다만 호랑이, 곰, 승냥이 같은 야수가 범람해서 가기 무서웠을 따름이지…  그 외에도 동쪽으로는 푸르른 주단처럼 펼쳐진 논밭으로 통하는 길이 있었고 서쪽으로는 펑퍼짐하게 등을 내민 강냉이밭과 조이밭으로 통하는 길도 있었고 서남쪽으로는 큰강으로 통하는 길도 있었다. 그리고 윗마을, 아랫마을, 앞동네, 뒷동네에서 제각기 마을밖으로 통하는 소로도 많았다. 마을사람들의 발자국이 제일 많이 찍힌 길은 그래도 남쪽으로 뻗어나간 신작로였다. 먼 옛날 할아버지의 아버지이신 노할배께서도 그 길로 노할매랑 할배랑 남부녀대하여 이 마을로 들어왔다가 갈 길이 막히자 짐을 푼 것이 그대로 눌러 앉고말았단다. 그 후에 백부님이 흰 중치막자락을 펄펄 날리며 그 길로 동경고학을 떠나셨고 또 그후에는 삼촌이 가슴에 뻘건 꽃을 달고 그 길로 조선전선으로 나갔었다. 그런데 전쟁이 끝나는 날 꼭 돌아오마 하던 삼촌이 한장의 렬사증으로 되여 돌아올줄이야! 영원한 과부가 되고 영원한 렬사유가족이 된 아주머니가 유복자인 형철이를 업고 늘 동구밖 비슬나무밑에 서서 저녁노을에 가물가물해지는 신작로끝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그 애잔한 모습이 지금도 눈에 삼삼하다. 내가 깜장 헝겊가방을 메고 그 길로 학교를 다닐 때에는 길 량켠에 팔뚝만한 애어린 백양나무가 줄느런히 늘어서있었고 길녘에는 코스모스며 민들레며 할미꽃들이 빨갛게 노랗게 하얗게 피여있었다. 그때 아침해를 맞으며 등교길에서 부르던 노래가 지금도 귀전에 쟁쟁하다. 푸른 가로수는 하늘하늘 춤추고 예쁜 꽃송이는 방울방울 웃어요. 학교로 가는 길은 하냥 즐거워 …… 이 노래를 부르며 나는 구름송이 같은 꿈결에 몽롱히 젖어들었고 민들레의 포자엽 같은 희망의 씨앗을 길녘에 날렸었다. 크면서 나는 그 길로 중학교도 다녔고 그 길로 고중도 다녔고 그 길로 큰 도회지에 있는 대학교로 갔었다. 대학교문을 나와서는 갈래갈래 뻗은 길로 연변 각지도 돌아다녔고 중국 내지도 띄염띄염 돌아다녔을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이며 북조선도 띄염띄염 돌아다녀 봤다. 연변을 놓고 봐도 연길시를 축으로 남쪽으로 나가면 이민사의 흔적이 력력한 룡정이 있고 룡정에서 오랑캐령을 넘으면 북조선 회령이 내다보이는 두만강가에 이를 수 있고 북쪽으로 이란고개를 넘어 가야하를 거슬러 올라가면 빨찌산 옛말이 깃든 왕청에 이르게 된다. 동쪽은 훈춘인데 소반령을 넘어가면 삼국이 내다보이는 두만강하류인 방천에 이르게 되고 서쪽은 이룡산을 끼고있는 안도인데 거기에서 서남쪽으로 달리면 아아한 백두산에 이르게 된다. 대한민국을 놓고 봐도 서울을 축으로 갈래갈래 길이 삼면 바다로 쭉쭉 뻗어나갔다. 동해로 서해로 대한해협으로! 해안가를 따라 점점이 박힌 제도, 군도, 해도들이 하늘에 별무리가 내려 앉은것만 같다. 북조선을 놓고 봐도 평양을 축으로 갈래갈래 길이 동해로 서해로 백두산으로 금강산으로 길게 짧게 뻗어나갔다. 산이 많은 곳이라 벼랑길이 많았고 벼랑길마다 절승을 이루고있었다. 중국의 장강이남은 사철 푸른 봄과도 같다. 항주, 소주, 가흥일대에 가서 뻐스를 타고 한바퀴 빙 돌면 길가에서는 노오란 유채꽃이 끝없이 아우러지는가 하면 파아란 논밭이 층층히 겹놓이여 눈뿌리를 빼준다. 길을 가다가 막히면 나룻배나 보트를 탈수 있다. 농촌마을엔 육로보다 수로가 더 많다. 길마다 골목마다 물이 골똑 차서 찰랑거리는데 문만 열고 나서면 배를 탈수 있다. 가끔씩 고풍스러운 석돌아치교아래에서 패랭이를 쓴 녀인이 몸을 한들거리며 노를 젓는 모습은 유유히 흐르는 한가락 선률을 방불케 한다. 그야말로 “강남수향”(江南水乡)의 싱싱한 싱그러움에 시원히 젖어볼수 있는 곳이다. 허지만 아무리 경치가 좋고 유정한 곳이래도 우리 조선족이 살수 있는 고장은 아니였다. 중국의 중원지구나 남방에는 경치가 수려하고 살기가 좋은 곳이 많다. 허나 우리 조선족이 살기에는 별로 적합한 곳이 없다. 한번은 한국문학작가회의 강원지회를 찾아 강원도 속초시로 가본 적이 있다. 초행이라 모든 것이 신기하게 안겨왔다. 북한강과 소양강 연안을 따라 태백산줄기를 굽이굽이 에돌며 뻗어나간 포장길 연도에는 하얀 읍내거리며 파랗고 빨간 지붕을 인 농촌마을들이 연이어 나타나군 했다. 그림속의 그림 같기도 하고 스크린속에서 이동하는 화면 같기도 했다. 차창 밖으로 쑥 안겨왔다가는 서서히 빙 돌며 뒤로 밀려가는 포전이랑 마을이랑 개울가를 바라보며 나는 속으로 감탄을 금치 못했다. 처음 와보는 고장이라 생소한데도 있었지만 눈에 익은 곳이 더 많았다. 어쩌면 고향 마을의 이웃집 아줌마를 몇년만에 이 고장에서 만난 기분과도 같았다. 왜 이처럼 신통할가? 마치도 우리 고장 룡정에서 회령과 마주 앉은 삼합으로 나가는 길녘 같기도 하고 화룡에서 무산쪽에 있는 남평으로 가는 길 같기도 하고 북조선 원정리에서 나진항으로 나가는 길 같기도 했다. 산기슭을 따라 아담하고 밝게 들어앉은 부락들이며 뙈기뙈기 다루는 포전들이며 펑퍼짐한 언덕바지에 우거진 과일숲이며 그 사이를 거미줄 치듯 굽이굽이 에돌아 흐르는 냇물이며… 바로 이런 고장이다. 산도 있고 물도 있고 포전도 있고 숲도 있고 하늘에서는 제비가 지지배배, 들판에는 둥굴이의 워낭소리 둘렁! 그 어떤 해설도 필요 없고 그 누가 속이자고 해도 속일 수 없는 고장, 백의민족의 하얀 넋이 하얗게 슴배여 응고된 고장이다. 그래서 서로서로가 신통히도 떼닮은 곳들이다. 이런 곳에서 우리 조상들이 세세대대로 살아왔고 우리도 그 속에서 커오지 않았던가! 오늘날 우리 백의민족은 서로 국적이 다르고 제도가 다른 곳에서 살고 있지만 핏줄이 한줄기인 것만은 속일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우리가 가는 길은 서로서로가 다르다. 이명박대통령이 이끄는 대한국민들은 지금 어느 길로 가고 있는지? 김정일국방위원장이 지도하는 북조선인민들 또한 어느 길로 가고 있고 호금도주석의 령도하에 있는 중국의 해외동포들은 또 어느 길로 가고 있는지? 가는 길이 다름에 따라 그 길이 탄탄대로로 이어질수도 있고 가시덤불 오솔길에 들어설 수도 있고 천 길 나락 낭떠러지에 이를 수도 있다. 이런 노래 한마디가 있다. 가시덤불 헤치고 험난을 물리치며 이 발자국 떼노라 길이 어디메냐 묻노니, 길이 발밑에 있거늘 …… 삼천리 강산이 비분에 떨던 그 시기, “한일합방”경술국치에 천만 동포들이 구경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가슴을 치며 낙루하였었다. 이완용은 무릎을 꿇고 매국의 길에 들어섰다. 민족을 모르고 나라를 모르고 살아온 인간이였으니깐. 김구는 애국계몽의 길을 찾아 해외에서 가시덤불을 헤쳤다. 도탄속에 빠진 민족과 망해가는 나라를 구하려고… 충청북도 영동의 시골 마을에서 한 청년이 왜놈 순사를 때려눕히고 마을을 떠나 만주로 향했었다. 낮에는 대통로에 들어설 수 없었고 밤에는 길을 외끼군 했다. 산간벽지로 시골 마을을 에돌며 숲속을 비집고 삼림을 꿰지르고 태산준령을 톺고 강하개천을 헤가르며 길 아닌 길로 두달동안 걸어서 두만강을 건너 북간도 용정에 이르러 명동학교에 들어갔고 거기에서 “독립”이란 나라찾는 길을 찾게 되였다. 그는 자기의 일체를 나라와 민족을 찾는 독립사업에 바치려고 맘먹었고 후에는 독립군에 들어가 백두의 밀림속을 넘나들며 수많은 왜놈들을 무찔렀고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그런데 그가 참의부와 정의부지간의 한차례 충돌에서 대방의 총에 맞아 죽었다. 결국은 다 같이 독립에 나선 사람들의 총에 맞아죽은 것이다. 죽을 때까지 그는 독립을 향한 길에도 당년에 만주로 가던 길처럼 갈래갈래 굽이굽이 다르게 뻗은 길이 많은 줄을 몰랐던것이다. 명년은 “6.25”전쟁 발발 60주년이 되는 해이다. 전쟁은 수많은 미망인을 남겼고 수많은 고아를 만들었고 수많은 이산가족을 초래시켰다. 서로 눈에 불을 켜고 동족끼리 쏘고 찌를 때 그대들이여,집에 계시는 부모님을 생각해 보았는가? 집에서 기다리는 아내를 생각해 보았는가? 눈이 또랑또랑 해서 기다릴 아들딸들을 생각해 보았는가? 그들이라고 왜 생각해 보지 않았겠는가! 허지만 전쟁이란 네가 죽지 않으면 내가 죽게 되는 생사판가리마당이다. 누가 그런 마당을 만들어 놓았는가? 이런 역사의 인간비극을 시나리오로 꾸미고 연출해낸 것도 우리 민족이였고 그걸 역사의 무대에서 공연한것도 우리 민족이였고 그걸 보면서 눈물을 흘린 것도 우리 민족이였다. 60년이 지난 아직까지도 그 전쟁에 대한 “법정”이 개정되지 못하고 있다. 왜 이런 비극이 빚어졌고 오늘까지 이어졌을가? 서로서로의 가는 길이 달라서? 하긴 불행을 많이 당한 것만큼 우리에게도 복이 많이 떨어졌었다. 한국에서나 북조선에서나 또는 중국의 연변에서나를 막론하고 더는 외국인의 예속을 받지 않고 자기의 말을 마음대로 할 수 있고 자기의 글을 마음대로 쓸 수 있게 되였다. 그 어디로 가나 우리 말을 떳떳하게 할 수 있고 그 어디로 가나 우리의 노래를 소리 높이 부를 수 있다. 그래서 우리 민족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웃음과 노래소리가 그칠줄 모른다. 나는 한국에서도 행복하게 사는 가정을 보았고 북조선에서도 행복하게 사는 부부를 보았다. 나진으로 갈 때 저슬령밑에서 돌이 금방 지난 아기를 안고 우리 차에 올랐던 한쌍의 부부가 행복에 겨워 서로 구순하게 굴던 모습이 퍽 인상이 깊었었다. 우리 연길에도 행복하게 사는 집이 많다. 허나 그 집이 행복하다 해서 늘 웃음꽃만 피는 것은 아니였다. 오히려 그런 가정일수록 말썽이 더 많고 갈등이 더 심각할 때가 있다. 한국에 가서 몇 년씩 벌고 돌아온 친구들이 술좌석에 앉아 개탄할 때가 많다. 한국에선 하루 건너씩 농성이다 데모다 하여 소란스럽고 국회에선 당파분쟁이 그칠줄 모르고 거리에 나서면 일하고 먹는 사람이 있는 것 같지 않은데 왜 그렇게 잘 사는 나라로 됐느냐 하고 말이다. 한국은 광주민주화운동이후부터 점차 유신체제에서 벗어나 진정 민주화길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민주화의 힘이 얼마나 무궁무진하다는 것을 우리는 아직 진정 느껴보지 못했다. 오늘날 지금의 이 시각까지도 한국의 각 여당과 야당지간에는 국민의 권리와 리익을 놓고 분쟁이 치렬해지고있다. 분쟁이 치렬해질수록 그것이 통합과 가깝게 통하게 되는것이다. 즉 분쟁속에 통합이 있고 통합속에 분쟁이 있게 된다는 말이다. 차가 많은 한국에 길이 한갈래 뿐이면 어떻게 될가? 당년에 박정희대통령이 경부고속국도건설을 추진시킬 때에 미친 짓을 저지른다고 적지 않은 사람들의 비난을 받았었다. 지금에 와보면 그때 그런 비난속에서도 견정하게 그 일을 추진시킨 것이 얼마나 영명한 결책이였다는 것이 알린다. 북핵문제도 그렇다. 해결의 실마리가 잡힐가 말가 하다가도 툭 끊어지며 시끄럽게 반복에 반복을 중복해왔다. 그래서 한반도가 세계의 주목을 끄는 초점이 되였다. 아직까지 그 어느 회사의 광고나 그 어느 영화의 포스터도 이처럼 놀라운 효과를 낸 적은 없었다. 문제의 해결이 시끄럽게 감기고 얽혀질수록, 무단적이고 극단화에 이를수록 문제는 해결하기 곤난해진다. 해결하기 곤난하다는 점이 바로 해결할 기회가 박두했음을 암시해주는 신호인것이다. 베이징“6자회담”이 진행해온지 이미 6년이 지났으니까 이제 다가올 6년내, 즉 2015년내에는 북핵문제가 철저히 해결될것이다. 정말일가? 우리 서로서로 두눈을 꼭 감고 두손을 모아쥐고 점치기게임을 해보자!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에는 험난도 있고 절벽이 가로 막힐 때도 있게 된다. 허지만 세월이 거꾸로 흐르는 법은 없다. 길이 험난하면 메우고 닦으면 되는것이고 길이 막히면 빙빙 돌아가도 되고 거길 뚫고 터널을 뺄 수도 있다. 길이란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해 빼진것이니까. 길에 나서면 자연 목적지에 도달하려는 희망이 보인다. 동해의 일출을 보려고 동틀무렵의 어둠을 헤쳐 나갈 때의 그런 기대감, 그 희망, 얼마나 숭엄해지는 기분이였던가! 해는 언제나 동쪽에서 뜬다. 그것이 우리에게 매일과 같이 생의 새로운 희망을 안겨준다. 차를 몰고 한강대교위에서 질주하는 중절모사나이여, 대동강유보도에서 치마자락을 날리는 녀인이여, 두만강언덕위에서 소잔등 타고 피리부는 목동아, 백두산정상에 올라 동해의 일출을 바라보고 한나산정수리에 올라 서해의 낙조를 그려보시지 않으려는지… 차를 모는 아저씨, 녀인의 걸음이 더디다고 나무리지 마시라. 녀인의 걸음은 언제나 사뿐사뿐 안전한 걸음. 사뿐사뿐 걸어가는 처녀동무, 목동이 탄 소가 늦다고 나무리지 마시라. 소는 어정어정 걸어야 멀리 가는 법. 소를 타고 늑장 부리는 목동아, 차를 몰고 질주하는 아저씨를 원망하지 말아. 갈 길은 멀고도 먼데 시간은 너무나도 무정하단다. 진보적인 사람들에게는 개혁과 창조의 길을 열어주는 강한 리더십이 있고 보수적인 사람들에게는 보귀한 경험과 우수한 전통이념이 있다. 남으로 북으로 갈래갈래 뻗은 길은 길마다 너무나도 험난하고 장애가 많다. 그걸 소통시키고 연결시켜야 하고 서로서로지간에 리해와 통합이 이루어져야 진정 통일이 실현될수 있다. 마지막으로 필을 놓으면서 친구 김학송씨가 지은 노래를 흥얼거려 본다. 시내물 흘러흘러 가닿는 곳은 꽃구름이 잠자는 가없는 바다 ……   
29    구질구질 했던 모내기철 댓글:  조회:842  추천:1  2012-07-16
요즘 참 날씨가 더럽다.  5월중순부터 잡아비트는 날씨는 내내 6월중순까지 찌뿌둥해져있다. 하늘이 설익은 시루떡을 먹었을가! 통 기분이 돌아서질 않는다. 그 날씨때문에 멋을 피우고 싶은 아가씨들의 허벅지자랑이 칙— 스톱되는 상황이다. 날씨 좋은 날이면 달랑 들릴가 말가 하는 미니스커트 아래로 떡국대처럼 길고 새뽀얗게 부어뺀듯한  젊은 녀자들의 긴 다리가 또각거리는 하이힐에 반주되여 거리에 절주감을 부여시킨다. 참, 보기만 해도 시원해지던데… 요즘은 요망한 날씨때문에 거리에 나서도 움츠러만 드는 기분이다. 화창한 봄기운이나 초여름의 싱싱함이 구겨진다. 어쩐지 모내기철이면 요렇게 날씨가 변덕스러워질가? 모내기철 내내 구질구질해지는 날씨인데도 누구 하나 모내기에 대해 근심걱정하는 사람이 없다. 하긴 모내기철을 모르고 세월을 보내는 사람들이 대다수이니깐. 몰라도 배를 곯는 법이 없고 그 누구에게 죄송스러운 느낌도 없다. 풍년이 들었다 해서 더 얻어먹는다는 즐거움도 없어졌고 흉년이 들었다 해서 배를 곯는 고통도 없어진 세월이다. 농사를 짓는 농부들 또한 느긋한 심사다. 누구의 방조도 바라지 않고 누구의 동정도 바라지 않는다. 한적한 분위기에 부부간, 또는 부자간, 좀 손이 딸리면 친척친구들, 일손을 돕는다기보다는 모여서 즐거움을 나누는 분위기다. 요즘엔 그런 모임도 잘 안돼여 품앗이두레 비슷한 삯군쓰기가 흥행되고 있다. 사람도 삯으로 쓰고 기계도 삯으로 쓰고 운수판매도 삯으로 리용한다. 쌍방에 다 리익이 되고 일이 빨리 끝나고 뒤끝이 깨끗하다. 농촌에서도 이제는 모든 일에 돈이 통한다. 쌀독에서 인심이 나던 농경시대와는 다르게 자본시대의 특징인 자본이 서서히 돌아간다. 경작지가 점차 소수 경영인에게 집중되면서 우리의 농촌도 점차 기계화작업에 자본화운영이 시작되고있는 추세를 맞이하고있다. 아직 사회주의공유제라는 큰 울타리에 더 기대여 보고싶은 심정이여서인지 좀 어설퍼지는 감정을 금할수가 없다. 요즘 날씨처럼… 구름이 낮게 드리우고 몸이 오싹 떨리게 바람이 소슬해진 날씨에는 의례 속을 덥혀주는 술생각부터 난다. 술 한잔 들어가면 자연히 옛날옛적이 추억속에서 그리워진다. 그제날 공유제의 말단 형체인 생사대에서 모내기철이 닥쳐오면 한 보름쯤은 내내 전투적인 분위기에 휩싸인다. 푸름한 새벽부터 논물관리원이 하루의 모내기를 위해 물도랑을 점검하고 논고를 풀어놓는다. 그러면 써레군들이 모판을 공구고 이어 모내기대군이 출동하고 펄럭이는 기발을 따라 경색도 벌어진다. 비가 구질구질 내리는 날에도 하얀 비닐박막쪼각으로 몸을 무장하고 벼모꽂기가 찰랑찰랑 열을 올린다. 찬비속에서 찬기운을 이겨내는 로동의 즐거움을 맛보며 푸른 주단을 촘촘히 엮어가는 보람찬 화면작성에 풍작을 기대해 보는 희열도 느껴본다. 벼모나르는 총각의 벼모단뿌리기에 어느 처녀의 고운 얼굴이 흙탕물로 얼룩지면 논판은 웃음바다로 번지여진다. 가식없이 통쾌하게 웃어대며 함박꽃 피우던 그 얼굴들…그렇게 정다울수가 없다. 모내기철 내내 음침한 날씨에 랭랭한 랭기가 감돌아도 논판에서 수시로 터지는 폭소에 웃음꽃은 매일과 같이 그칠새 없었다. 더구나 모내기대회전이 승리적으로 끝나게 되는 총결만회는 내내 행복감속에서 기다려진다. 뉘집 돼지를 엎었던간에 그 고기맛이 그렇게 고소할수가 없었다. 볶음료리도 아니고 그저 장국탕에 훌훌 삶아내고 대충 썩뚝썩뚝 저며낸 그 고기가… 그런 분위기, 그런 맛을 지금 다시 음미해볼 수가 있을가! 농사군에게는 하늘이 괘씸한 요술쟁이다. 모내기철이 지나가면 하늘은 기다렸다는듯이 구름을 말끔히 밀어가고 맑은 모습에 해님을 띄워 무더위를 몰아온다. 그러면 또 호미를 얻어쥐고 콩밭기음이나 조이밭기음에 나서 얼굴을 까맣게 태워야 한다. 해살이 쫙 펴지면 논판의 벼모며 언덕밭의 강냉이며 길가의 풀포기며 모든 생장물이 소리치며 우썩우썩 자라면서 싱싱함을 뽐낸다. 아무튼 구름이 꽉 낀 음침한 날씨보다 찬란한 태양이 빛 뿌리는 맑은 날씨가 더 약동적인것 같다. 헌데 그 약동적인 무더위속에서 행복의 웃음꽃이 잘 피여나지 못하고 즐거운 웃음소리가 잘 울려퍼지지 않는다.
28    그 때 그 시절의 대학꿈 (홍천룡) 댓글:  조회:1107  추천:24  2010-09-08
  꿈결 2부곡 1 그 때 그 시절의 대학꿈  홍천룡   대학입시제도가 회복된지 30년이 되다니? 어길수 없이 흘러간 세월이였건만 어쩐지 믿어지질 않는다. 대학생이 되여보겠다고 글자도 제대로 보이지 않게 얼푸름히 등사된 복습제강을 밤중이면 서로 바꿔가며 베끼던 정경이 엊그저께 새벽 두시경에 있었던 일 같은데… 지난 세기 60년대초반에는 대학생이라면 그야말로 새중 봉황이요 옥중 옥이였다. 내가 살던 공신 “웅덩개마을”은 백호나 넘는 큰 마을이여서 우리 조무래기들도 아래 마을무리, 윗마을무리 하면서 갈라져 놀았었다. 그 큰 마을에 정구네 큰 형님만이 대학으로 다니는 대학생이였다. 온 동네 아이들을 가진 어머니들의 입에서는 늘 이런 말이 튕겨나오군 했다. “공부를 잘해라. 정구형님처럼 대학생이 되게.” “숙제를 제때에 해라, 정구형님처럼.” “너 공부한다는 꼬라지를 보니 정구형님처럼 대학생이 되긴 백번도 틀려먹었구나.” …… 어머니들의 그 구질구질했던 시까스름이 후날 아이들이 대학꿈을 꾸게끔 흔들어준 요람이 된 것이 아니였겠는가! 세상 무서운줄 모르고 바자굽이골목길을 메우며 동네안팍을 들썩이던 우리 철부지들도 정구 형님만 골목길에 나타나면 인차 조용해진다. 그럴 때면 손등으로 코물을 닦는 놈도 있었고 단추가 떨어져나간 저고리앞섶을 더듬어 포개는 녀석도 있게 된다. 호랑이는 세살먹은 애도 알아본다고 대학생명성이 얼마나 뜨르르 했으면… 62년도 여름은 하늘도 맑았고 대지도 푸르렀다. 배를 쫄쫄 곯던 시절이 지나가며 아이들도 가끔씩 어른들의 손에서 “개눈깔사탕”을 얻어쥐고 냠냠거리게 되였다. 그해 여름에 나는 깜장 새옷에 헝겊책가방을 메고 어머니의 손에 손목을 잡혀 학교로 가게 되였다. “공부를 잘해서 이다음−이다음 크거들랑 정구 형님처럼 대학생이 되여야 해. 알겠느냐?” 앞날에 대한 어머니의 먼 희망이였다. “대학생”이 정구형님이라는것밖에 모르는 나는 그 첫날등교에서 숱한 아이들과 면목을 익힌 흥분과 집에 돌아오니 “닭똥과자” 한봉지와 “개눈깔사탕” 한봉지가 기다리고있었다는 기쁨이 더 컸었다. “ㅏ, ㅑ, ㅓ, ㅕ…”로부터 시작된 공부가 그래도 반급에서는 언제나 앞줄로 간다는 축에 속했다. 가끔 백점짜리 시험지가 나오면 나는 그걸 차곡차곡 개여서 교과서갈피속에 간직했다가 집에 돌아오면 그걸 꺼내 찬장모서리우에다 올려놓고 빈사발을 엎어놓는다. 그러면 “닭똥과자” 한봉지는 문제없이 생긴다. 그때까지 “닭똥 과자”보다 더 맛있는걸 먹어보지 못한 나였다. 어쩌면 세상에 이렇게 맛있는 과자도 있는가! 먹으면 먹을수록 사각거리며 깨고소해지는 “닭똥과자”- 어머니는 백점짜리 시험지만 보면 혼자 시물시물 웃으시였다. 그리고는 무슨 뜨개감이 아니면 그릇 빌리러 간다는 구실을 달고는 몇집 건너편에 있는 정구네 집으로 마실을 나가군 했다. 보나 마나 백점짜리 아들을 자랑하러 가는것이다. 아마도 자랑 할바에는 대학생네 집에 가서 자랑하자는 속셈이였을 것이다. 혹시 대학생네 집에 붙어있는 그 “기”를 묻혀 오자는 심사도 있었는지 모른다. 점치기에 무척 흥취가 있었으니까… 얼마후 과연 그 “기”가 나의 몸으로 옮겨오게 되였다. 어느날 내가 헝겊뽈을 안고 우사칸마당으로 달려가다가 바자굽이에서 그만 웬 사람과 콱 부닥치게 되였다. 올려다 보니 다름 아닌 대학생- 정구형님이였다. 내가 어쩔바를 몰라 쩔쩔 매는데 정구형님은 오히려 나를 내려다 보며 빙그레 웃었다. “오, 백점짜리 선수였구나. 너 계속 백점을 맞으며 공부 해. 그러면 꼭 대학생이 되는거야.” 나는 어망결에 “예!”하고는 인차 몸을 돌려 쫑드르르 꼬리를 뺐다. 그날 밤, 나는 꿈을 꾸었다. 꿈에 헝겊가방을 멘 내가 연변대학가의 큰 비술나무밑에 서서 “닭똥과자”를 먹고있 었다.(당시 연변대학이 우리 소학교서쪽이였고 대학주변은 아름드리 비술나무로 우거져있었음) 그후 점차 헴이 들면 서 나는 배움의 최고학부가 대학이라는 것을 어렴풋하게 나마 깨닫게 되였고 공부에 극성을 부려 5학년까지는 줄곧 우수생으로 되였다. 그런데 5학년 때부터 신문지상에 오함, 등척과 같은 인물들이 나오고 “삼가촌”이란 어느 동네이름 같은 말들이 나오게 되였다. 얼마후 아래동네 철봉형님이 차비도 없이 북경으로 갔다오더니 모주석을 만나보았다고 동네를 들썽 해놓았다. 모주석의 얼굴이 정말 보름달같이 둥굴고 떠오 르는 아침해처럼 불그스레 했다는것이였다. 뒤이어 거리에 대자보가 나붙게 되고 고깔모자를 쓴 사람들이 거리돌림을 당하게 되였다. 그다음에는 반란바람이 불더니 학교마다 수업이 중지되여 우리는 매일 무리를 지어다니며 노는게 업이 되였다. 그 무렵에 철봉형님이 어디서 “똥푸개모자” 를(당시 원예농장 장원들이 인분차를 끌고 다니며 공용 변소를 칠 때면 긴 장대기에다 철갑모를 달아썼는데 우린 그걸 똥푸개모자라고 불렀다) 얻어쓰고 다녔고 거리에서는 무시무시한 “돌팔매시가전”이 벌어지고있었다. 매일마다 어디에 불이 났소 어느 곳은 피바다가 되였소 하는 소문에 우리 조무래기들도 가슴을 조이고있었는데 나중에는 무서운 비보가 확실하게 날아들었다. 철봉형님이 죽었다는 것이다. 그것도 환자들의 생명을 구해줄 의사들을 양성해 낸다는 의학원마당에서 총에 맞아죽었다는것이다. 그 집 어머니가 미쳐났다. 머리를 풀어헤치고 땅을 치며 통곡 하던 그 처참한 모습을 나어린 내 눈으로도 차마 보아낼 수가 없었다. 매일 아침저녁으로 동구밖에 나서서 아들을 피타게 부르던 그 부름소리가 지금도 가끔 귀가에서 울리는것만 같아 가슴이 미여질 때가 있다. 그 “문화 대혁명”이 아니였더라면 철봉형님도 후에 대학생이 되였을 수도 있지 않겠는가! “시가전”이 끝나고 혁명위원회가 설립되더니 우리가 중학생이 되였다고 시3중으로 나오라는것이다. 중학교에 올라가보니 대학생출신이였던 교원들이 한쪽으로 밀려나고 석현제지공장의 “로동자선전대”가 들어와 우리들에게 “어록학습”을 시켰다. 그때 “어록”을 학습하니 정말 한마디가 만마디를 당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무슨 일이 생기든 어떤 난관에 부딪치든 “어록”만 펼치면 그 속에 해결묘방들이 다 들어있었다. 1차방정식이요 2 차방정식  이요 하며 아무리 수학공식을 풀어도 실제문제를 해결하 는가? 골치 아프게 원소주기표를 외울 필요도 없었다. 중학시절 4년동안 우리는 벽돌공장에 가서 로동자들의 일본새를 배웠고 방공호파기삽질에 근육질을 굳혔고 “5•7 농장”의 콩밭기음에서는 의력을 키웠다. 졸업할 때 내가 사회에다 보여줄 “졸업증”은 붉은 사상과 건강한 신체였다. 사회로 나오고 보니 마음 한구석이 허전해졌다. 대학교 입시제도가 페지된지 여러해 되였다. 연변대학서쪽에는 맥주공장이 있다. 나는 맥주공장림시로동자로 들어가 건축 일을 하였다. 고된 로동에 지쳐 무거워진 다리를 끌며 대학교앞을 지나 갈 때면 대학생이 되여보고싶은 욕망이 꿈틀거리군 했다. 그러나 림시공으로서는 그걸 바라볼 엄두도 못낼 처지였다. 나는 자동차운전기술을 배우려고 맘먹었다. 그래서 한 마을에 있는 조갑룡을 형님으로 모시고 그의 차에 따라다녔다. 밤이면 석탄실이를 갈 때 빈차는 내가 몰고가고 돌아올 때는 형님이 몰고 왔던 것이다. 헌데 림시공은 운전면허증취득시험을 치르게 못했다. 우선 정식공이 되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때   삼도탄광에서 로동자모집을 하였는데 가서 잘하면 인차 정식공으로 넘길수 있다고 했다. 나는 부모들이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불짐을 싸가지고 삼도만으로 갔다. 그때나 지금이나 탄광으로 가길 원하는 사람은 별반 없다. 그때는 감옥에서 만기석방된 사람들과 산동, 하북 등 중국관내 에서 온 한족들이 많이 자원해갔었다. 당시 탄광으로 가면 두가지 좋은 점이 있었다. 한가지는 간고하고 위험하고 어려운 곳에 가면 정식로동자로 빨리 전이고정될수 있었고 정치적발전이 빠를수 있었다. (정치적 발전이란 주요하게 당원에 가입하는것인데 그래야 대학교도 추천받아 갈수 있고 간부로 승급할수도 있었음.) 그리고 다른 한가지는 로임이 높은것이였다. 대부분 사람들이 후자를 보고 갔지만 나는 전자를 보고 갔다. 간고한 곳에 가서 자신을 단련하면서 정치적으로 빨리 진보하려고 작심했던것이다. 삼도탄광은 연길시에서 약 200리 떨어진 깊은 산골짜기에 자리잡고있었다. 당시 탄광에는 세개 탄굴이 있었는데 나는 제1호탄갱 제2작업반에 배치되였다. 우리 작업반의 십오명가량 되는 일군들가운데서 나 혼자만 조선족이였다. 대부분 산동사람들이라 혀를 꼬부랑치며 내뱉는 말을 잘 알아들을수가 없는것이 큰 장애였다. 나는 그래도 몇달간 일을 잘하느라고 애를 썼다. 산동사람들은 개인위생을 지킬줄 몰라 좀 더럽기는 했지만 소박했고 아주 근면했다. 그래서 나와 잘 어울렸다. 어느날 오후, 왕반장이 밤대거리에 지쳐 낮잠을 자고 있는 반원들을 깨웠다. 탄광지도부의 지시에 따라 \"무산 계급독재리론\"을 학습하고 심득발표도 해야 한다는것이다. 왕반장이 중공중앙기관지인 《인민일보》를 펼쳐들고 약 십분간 읽고는 반원마다 돌아가며 발언하라고 재촉하였다. 왕반장곁으로부터 련이어 네사람이 열기 띤 발언을 했다. 그다음 내차례였다. 탄광에 와서 처음 참가하게 되는 회의 여서 저으기 흥분되고 긴장해졌다. 더구나 탄광정치공작 조의 장씨라는 간사가 하얀 안경알을 번뜩이며 매 사람들 의 발언을 열심히 적고있었다. 그때까지 나는 한어를 제대로 배워내지 못했고 한어로 발언하기는 처음이였다. 처음 몇마디는 한어로 나갔지만 그다음엔 저도 모르게 조선말이 막 나갔다. 장씨가 알아못듣겠다고 손을 내저 었다. 나는 더구나 얼굴까지 화끈 달아오르며 어쩔줄 몰라 우물거리기만 했다. 그때 나와 사무상을 사이두고 마주 앉았던 로씨가(평상시 나와 매끄럽게 놀던 자식이였음) 야멸차게 한마디 내쏘는것이였다.   \"니 쩌거 꼬리빵즈, 지리와라디 쟝썬머? 워먼 팅부둥. 깐추이 베쟝라(이 조선놈새끼야, 뭐라고 씨부렁거리는지 알아못듣겠어. 아예 입다물어버려!)\"   \"꼬리빵즈\"란 한족들이 전문 조선족을 욕하는 모욕적 언어로 인정된 구두어이다. 만약 그가 다른 말로 욕했다면 혹시 내가 참았을 수도 있다. 나는 대뜸 밸이 왈칵 치밀어 올라 맞받아 한마디 내쏘았다.   \"마세이, 니 쩌거 싼뚱빵즈!(너 누굴 욕하고있어? 이 산동놈새끼야!)\"   \"싼뚱빵즈\"란 산동에서 온 한족을 욕하는 모욕적언어로 인정된 구두어이다.   \"쩌 쑈투짜이즈, 쩐 뿌샹화. 까이따스타!(요 빌어먹을 새끼, 덜돼먹었어. 잡아쳐!)\"   로씨가 벌떡 일어나며 나한테 주먹을 날렸다. 나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옆으로 숙였다. 그의 주먹이 귀전을 스치며 지나갔다. 그가 팔을 거둬들이는 틈을 타서 나도 주먹을 날렸다. 퍽! 하고 코피가 탁 터져흘렀다.   \"쩌 쑈즈, 따런나!(이 자식, 사람을 친다!)\"   내곁에 앉았던 녀석이 벌떡 일어나며 내 입술을 쳤다. 나의 입에서도 피가 터져나왔다. 그러자 다른 한 녀석이 사무상우로 풀쩍 뛰여올라 발길로 나의 턱을 걷어찼다. 나는 걸상과 함께 뒤로 벌렁 나자빠졌다. 뒤이어 숱한 사람들의 주먹이 나의 면상으로 날아들었고 숱한 사람들의 발길이 나의 배며 하신을 걷어찼다. 사지가 얼얼해나며 숨이 꺽 막히는것만 같았다… 다행히 왕반장과 장씨가 그들을 뜯어말려냈다.   이튿날 나는 매를 맞고도 \"리론학습회\"를 파괴했다는 죄로 비판까지 받았다. 그때 \"조선족\"이라는 설음이 북받쳐 혼자 눈물을 흘렸었다. 더는 탄광에 붙박혀 있을수가 없었다. 탄광에서 돌아온 나는 대학생이 되고싶어졌다. 당시 대학은 시험쳐서 붙는것이 아니라 추천받아가게 되여 있었다. 추천받자면 우선 정치적표현이 좋아야 했는데 정치적표현이 좋다는 표징은 공산당에 가입하여 \"당표\"를 얻는것이였다.   이듬해 1월에 나는 시정부의 통일배치로 시량식국산하 의 \"숙식품가공공장\"에 정식로동자로 들어가게 되였다. 그때는 공장에 지식청년이 몇백명 되였다. 나는 날듯이 기뻤다. 로임은 림시로동자로 일할 때의 절반도 안되였지 만 정상적으로 조직생활을 할수 있게 되였다는데서 더 흥분되였다. 나는 인차 사상회보를 써서 당지부에 바쳤다. 당지부 최서기가 나를 찾았다. 그는 나의 어깨를 툭툭 쳐주며 사상회보를 제때에 써낸것을 높이 치하했다. 그리고 어떻게 진보하겠는가에 대해 구체적인 조언을 주었다. 나중에 특히 한어를 잘 배워내라고 강조하면서 다음번 사상회보는 한어로 써오라는것이였다. 그것이 난처한 일이였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나는 동네를 돌아 다니며 한어자전을 찾았다. 자전이나 사전을 찾아보기 힘든 세월이라 대여섯집을 돌아서야 겨우 두부모만큼 크고 두꺼운 《신화자전》을 빌릴수 있었다. 그걸 뒤적거리며 장밤 썼는데 겨우 편지지 반장도 못써내려갔다. 그렇게 사흘밤을 악을 써서야 문장을 마무릴수 있었다. 눈에 피발 이 섰지만 마음은 즐거웠다. 그걸 최서기한테 바쳤더니 그는 손수 만년필을 꺼내 여기저기 틀렸거나 어휘사용이 타당치 못한 곳을 새까맣게 고쳐주는것이였다.   그후부터 나는 무슨 글을 쓸 일이 있게 되면 틀리든 말든 한자로 썼고 누구와 말을 하거나 회의발언할 때면 꺽꺽거리면서라도 한어로 했다. 그래서 웃음거리를 자아낸 적이 많았다. 몇백명이 참가한 직공대회에서 한어발언을 잘못해서 크게 망신당한 적이 한두번이 아니였고 한어말을 잘못해서 비판도 받았고 욕도 얻어먹었고 매도 얻어맞은 적이 있다. 우습고 생동한 일들이 많았는데 그걸 다 쓰자면 너무 길어질것 같다. 그해 가을에 시당교에 가서 \"맑스레닌주의-모택동사상리론\"을 학습하고 심득필기를 써내게 되였는데 나는 장장 만여자에 달하는 글을 한자로 20여페지 써냈다. 잘썼든 못썼든간에 나로서는 대단한 \"걸작\"이였다.   1975년도는 나의 일생에서 가장 빛나는 한해였다. 1월 달에 정식로동자로 되였고 그달 중순에는 제2직장 제2조의 조장이 되였으며 4월달에는 공장건축시공대 대장이 되였다. 나는 밤낮이 따로 없이 뛰여다녔다. \"말띠\" 인 내가 말처럼 뛰여다닌다고 \"말새끼\"란 별명이 붙기까지 했다. 원래 1년반으로 계획되였던 공장건물시공을 우리 시공대가 8개월만에 완성하여 그해 12월 28 일에 나는 \"화선입당\"을 하여 중국공산당 당원이 되였다. 그후 선후 하여 공장, 량식국, 재무계통의 선진공작자가 되였고 전시 모범당원이 되여 상장과 영예증서만 해도 대여섯개를 수여받았다. 그해 겨울은 눈바람을 타고 둥둥 떠서 다녔다.   인젠 모든 조건이 다 구비되였다. 대학생추천지표만 내려오면 당상인것이였다. 그야말로 \"만사구비에 지결 동남풍(万事俱备, 只欠东南风)\"인 셈이였다. 헌데 그해도, 그 이듬해에도 대학생지표는 우리 공장에 내려오지 않았다. 당조직에서는 갈수록 나에게 더 큰 과업을 맡겼다. 민병련장, 단총지 전직서기, 정공조 (政工组)조장 등 책임을 맡겼다. 그리고 학습을 할 기회도 많이 주었다. 단간부훈련반, 공회학습반, 당교리론학습반, 청년간부양성반 등 부동한 강습반을 통해 나의 리론수준도 크게 제고되였다. 후에는 “시 재무계통쌍학판공실(市财 贸系统学大寨学大庆办公室)”로 발탁되여 사업하게 되였 다 . 판공실주임으로는 재무계통을 책임진 시위 부서기 최장부라는 로간부였는데 학식이 깊고 세심한 분이였다. 부주임으로는 상업국, 량식국, 은행, 공소사 등 부문의 제1책임자들이였지만 일이 있을 때만 모여서 회의를 하군 했다. 구체일은 판공실사업일군 6명이 처리했다. 회의와 활동이 많았고 상급지시문건과 아래 각 부문에서 올라오는 보고재료들이 많았다. 정말 눈코뜰새없이 보냈다. 내가 제일 어리고 수준도 제일 낮았다. 끝없이 물어보고 자꾸만 청시하면서 일을 처리해야 했다. 반면에 뛰여다니 며 심부름을 잘했기에 사람들의 총애를 받기도 했다. 1977년도 겨울에 대학입시제도가 회복되였다. 11월말 일이라고 기억된다. 시험치기 사흘전에 시험을 쳐보겠다고 말미를 받으려니 판공실사람들이 모두 놀라는 눈치였다. 그때 우리 판공실을 책임진 최서기의 비서가 하던 말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시험이라니 전도가 양양한 동무가 시험을 치겠다니? 량식국산하 각 단위에도 대학졸업생이 얼마나 많소? 하지만 다 동무보다 못하지 않소? 황차 지금 사업이 이렇게 긴장한데 당원으로서 개인전도보다 혁명사업을 먼저 생각해야 할게 아니겠소? 솔직히 말해서 지금 시조직부에서 동무를 중시하고있단말이오.\"   그 말을 듣고 나오면서 나의 사상은 좀 동요되였지만 대학꿈을 이뤄보겠다는 결심만은 꺽지 못했다. 이튿날 그 일이 최서기께 회보되였는지 나더러 하던 일감을 김동무 한테 인계시키고 집에 들어가 시험준비를 하라고 했다. 산고개에 올라 짐을 풀고 내리막길에 들어선 기분이였다. 그날 밤중까지 돌아다니면서 나는 수학, 어문, 정치 등 방면의 복습제강을 빌리거나 베껴왔다. 이틀동안 대충 훑어보고 시험장으로 들어갔다. 시험문제가 별로 바쁜것 같지 않았다. 중문시험에서 활 펼쳐공포한다는 뜻인 \"披露\"란 단어를 제대로 써넣지 못한것이 후회되던 기억이 지금도 남아있다. 그 단어는 내가 보고문을 쓰거나 비판문장을 쓸 때 가끔 써먹던 단어였는데…   쉽게 여겼던 시험이 결코 쉽지 않았던 모양인지 나는 몇점차이로 락방되였다. 77년도 겨울은 날씨도 혹독하게 추웠다. 시험을 친후 얼마 안되여 나는 본단위로 소환되 였다. 아마도 고집을 부리며 시험을 친 것이 무슨 영향을 끼친 것 같았다. 추운 겨울이 지나가니 화창한 봄날이 찾아왔다. 78년도 봄은 봄바람도 거세찼고 봄물도 빨리 녹아내렸다. 우리 사회에는 가끔 \"바람\"이 잘 부는것이 특징이다. 례하면 전쟁시기의 참군바람으로부터 초급사바람, 약진바람, 도끼 머리에다 금을 쪽 내는 하이칼라바람, 원피스에다 딴스 바람, 문화대혁명시기의 충성무바람… 78년도 봄은 대학 시험바람에 공부열이 끓어번졌다. 아마 중국의 5천년 문 명사에도 그 전례가 없었을것이다. 10년간 대학시험을 쳐보지 못한 중청년세대들이 모두 복습제강을 들고 나섰다. 가도가도 끝이 없는 광활한 대지가 하루 아침새에 배움의 천당으로 변하는것 같았다. 실안개 감도는 이른 아침이면 어디 앉아 책을 볼 자리를 찾기 힘들게 되였다. 거리에도 강둑에도 숲속에도 책을 보는 사람들로 공간이 다 메워 졌다. 만민이 대학생이 되고 만천하가 교정이 된것 같은 성스러운 분위기여서 책을 쥐고 나서면 숭엄해지는 기분이였다. 그 가운데는 학교문을 금방 나온 초중졸업 생도 있었고 \"로싼제(老三届)\"고중졸업생도 있었으며 혼자 나온 사람도 있었고 부부동반하여 나온 사람도 있었다. 개중에는 챤스를 잘보는 \"못된 송아지\"들도 있었다. 공부도 할겸 련애도 할겸 슬금슬금 처녀애들의 뛰꽁무니를 따라 이 나무 저 나무밑을 기웃거리며 어슬렁거리는 녀석들도 있었다. 한창 나이라 나도 그런 유혹에 빠져들 었다. 당시 부르하통하수원지(지금의 연길호텔주변임)에 가면 자그마한 개울물이 흐르고있었다. 개울가곁에 큰 비술나무가 있었는데 나는 아침마다 그 비술나무밑에 가서 복습문제를 외우군 했다. 어느날 아침에 한 처녀애가 그 비술나무에서 얼마쯤 떨어진 백양나무밑에 와서 복습제강 을 외우는것이였다. 날씬한 몸매라든가 갸름한 얼굴이 라든가 어느 모로 보나 총각들의 눈길을 끌만한 처녀애 였다. 댕금하니 서서 책을 보는 자태나 앙증맞게 앉아서 글을 쓰는 모습은 정말 한폭의 그림이였다. 더구나 량어깨를 사선으로 이어놓은 두가닥의 쌍태머리가 몸매의 움직임에 따라 한쌍의 깜장나비처럼 어깨우에서 춤을 출 때면 률동미가 시각조화를 이루어주어 더욱 눈뿌리를 뺐다. 나는 복습제강에 눈길을 집중할 수가 없었다. (이러면 안되는데…)  눈을 팔지 말자고 결심하며 고개를 들지 않고 한동안 죽치고 앉아있노라면 혹시 그 처녀애가 자리를 뜨지 않았나 돌아앉지 않았나 하는 궁금증을 이기지 못해 또다시 고개를 들고 눈길을 그 쪽으로 돌리게 되였다. 혹간 처녀애가 내쪽으로 얼굴을 돌리고 눈길이 옮겨질 때면 나는 바짝 정신이 긴장해지며 흥분에 떨군 했다. 아늑한 아침에 미묘한 화면분위기에 매달려 일렁이는 감정파문이랄가! 아무튼 혼쭐이 방향없이 둥둥 떴다. 그렇게 허황한 분위기속에서 귀중한 아침복습시간을 며칠간 랑비했다. 출근시간때문에 언제나 내가 먼저 아쉬운 자리를 뜨군 했다. 어느 하루아침이였다. 내가 거의 한시간이나 복습제강을 외웠는데도 저쪽 백양나무 밑은 그냥 비여있었다. 허전한 감이 들며 별로 근심스럽기도 했다. 아침복습을 포기했을가 아니면 앓아누웠을가? 시간이 되여 자리를 차고 일어나 강뚝길에 올라섰다. 헌데 웬걸, 마침 그 처녀애도 저쪽켠으로부터 강뚝길에 올라서고있었다. 어쩔수 없이 정면으로 마주 띠우게 되였다. 처녀애가 낯을 살짝 붉히면서 고개를 숙이였다. “문과를 복습하죠?” “양. 거긴?” “저도 문과예요. 집체호일때문에 늦게 시작하다보니 복습제강을 제대로 얻지 못해서…” “그럼 이걸 가져다가 보오.” “아니 그럼 거긴…” 처녀애는 뒤걸음질 치며 손을 내저었다. 그럴수록 더 대범해지는 것이 남자다. “일없소. 난 또 얻을수 있다니까.” 기실 그 복습제강은 힘들게 얻은것이였다. 나는 우격다짐으로 복습제강을 처녀애의 손에 쥐여주었다. 처녀애가 그걸 받아쥐고 훑어보더니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한어문이구만요. 한어로 쳐요? 대단해요. 전 수준이 낮아 한어로는 안돼요.” 그러면서 처녀애는 복습제강을 되돌려주는것이였다. 갈라질 때 우리는 서로 복습을 잘해서 대학에 붙기를 기원해주었다. 이튿날 아침, 예전대로 나갔더니 웬 녀석이 내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제법 소리를 왕왕 내며 무엇을 외우고있 었다. 녀석은 수시로 빨간 내의를 입고 백양나무밑에 앉은 처녀애쪽으로 눈을 흘끔거리고있었다. 괘씸했지만 쫓을수 도 없는 일이였다. 그래서 좀 떨어진 다른 비술나무밑으로 찾아갔다. 한 처녀애와 두 남자애가 갈라져앉은 세곳을 점선으로 이어놓는다면 아마도 직각삼각형쯤은 될 것 같았다. 그 녀석이 언제나 나보다 일찍 나오는 바람에 그런대로 며칠은 대치상태에 들어갔다. 참, 이성지간의 흡인력이란 어쩔수 없는 일이다. 하물며 이십대의 청춘들임에야! 나는 주동이 되여 먼저 “공격”을 개시해보자고 작심했다. 그래서 그 처녀애가 얻지 못했다는 복습제강을 얻어놓았다. 헌데 “공격”을 개시하자고 나갔던 그날 아침부터 그 처녀애는 다시 나오지 않았다. 며칠은 무엇을 잃어버린듯 마음이 허전해서 복습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후회되였다. 강뚝길에서 맞띠웠을 때 집이 어딘가고 물어봐야 했을걸! 그럼 후에 찾아갈수도 있는데… 그후 한번도 그 처녀애를 다시 만나지 못했다. 갸름한 얼굴에 새물거리는 실눈이 인상적이였는데… 30여년이 지난 지금도 눈만 감으면 백양나무밑에서 공부하던 그 처녀애의 동탕한 모습이 떠오른다. 후에 그 처녀애도 어느 대학의 대학생처녀로 되였을것이라고 나는 굳게 믿어왔다. 헌데 지금에 와서 하는 솔직한 말이지만 그 처녀애가 후에 계속 나왔더라면 나의 복습공부는 엉망이 되였을는지도 모른다.    시험날을 한달 남겨둔 6월초라고 기억된다. 복습을 다그쳐야겠다고 청가를 달라고하니 그자리에서 부결당했다. 시험을 치겠다고 나선 사람이 20여명 되니 다 허락해주면 공장이 마비상태에 들어갈수 있다는것이다. 나는 금방 부임되여온 서서기네 집을 찾아가 울며불며 야단을 피웠었다.   이튿날 나는 예나 다름없이 어머니가 싸주신 도시락을 가방에 넣고 공장으로 나간것이 아니라 공원뒤산으로 올라갔다. 배나무밑에 앉아 복습제강을 외웠다. 배가 고프니 도시락을 꺼내 먹고는 계속 외웠다. 지껄이는 놈이 없어 좋았다. 날씨가 무더우니 옷을 활활 벗어 배나무에 걸어놓고 팬티바람에 앉아 외웠다. 선선하고 조용하니 복습제강의 글발들이 머리안으로 쏙쏙 들어와 붙었다.   해가 떨어지고 어둑어둑해질 때 자전거에 올라탔다. 저녁바람이 선들선들 샤쯔자락을 날려주어 기분이 났다. 그렇게 나는 사흘동안 공원뒤산으로 “출근”했다. 사흘째 되는 날 저녁에 집에 들어서니 분위기가 달랐다.   \"너 단위로 안나가고 어디로 갔댔냐?\"   어머니의 질문에 나는 흠칫 놀랐다. 누가 알려주었을까? 이어 아버지가 엄하게 타일렀다.   \"단위에서 요주석이라는 분이 왔다갔네라. 래일 단위로 나가보거라. 너 무슨 노릇을 하겠으면 조직에다 알리고 해야지. 무슨 짓거리를 그렇게 마음대로 하는거냐? 아래우도 없이.\" 요주석이란 우리 공장의 공회주석이다. 요주석의 가정방문은 문제의 심각성을 제시해준다. 이튿날 공장회의실에 가보니 20여명 남녀청년들이 저마다 고개를 푹 떨구고 앉아있었다. 그들도 나처럼 대학꿈을 이뤄보겠다는 공장의 \"열혈학도\"들이였다. 그들 대부분은 공장의 골간이였으며 입당신청서를 낸 당조직의 후비력량들이였다. 그들은 아마 당원인 나의 거동을 주시해온것 같았다. 내가 출근하지 않으니 그들도 약속이나 한듯 몽땅 출근하지 않고 시험공부에 달라붙었던것이다. 하여 후과는 엄중해졌다. 당지부의 서서기, 공장의 진주임, 공회의 요주석 등 지도간부들 로부터 차례로 입을 열면서 비판의 불을 토했다. 우리 20여명 직공수험생들의 무조직, 무규률성으로 말미암아 막대한 경제손실이 빚어졌는바 어떤 직장에서는 부득불 밤대거리를 취소하지 않으면 안될 정도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그 이전에도 우리 공장에서는 비판대회가 여러 번 있었다. 탐오분자를 붙잡아내여 비판한 적이 있었고 남녀문제로 작풍이 단정치 못한 “바람쟁이”를 비판한 적도 있었으며 공자, 림표, 등소평을 비판한 적도 있었다. 허지만 이날처럼 치렬하고 분위기가 험악해져본적은 없었다. 생산을 책임진 진주임이 일어나서 책상을 치며 대성질호했다. 입에서 침방울이 튕겼고 원래 망울이 큰 눈이 당금 삐여져 나올것만 같이 눈을 부릅뜨기도 했다. 이것이 그래 사회주의기업의 담벽을 허무자는 행위가 아니고 무엇인가 하며 문제를 아짜아짜한 경계선에까지 끌어올렸다. 비판의 초점은 점차 나에게로 돌려졌다. 당원으로서 반면적인 솔선작용을 놀았다는것이다. 혁명의 리익과 개인전도를 두고 관건적인 시각에 어느쪽을 선택하겠는가? 입당선서를 할 때에는 무엇이라고 했는가? 지금 당조직에서 너를 고험할수 있는 시각이 닥쳐왔다는것이다. 나는 고개도 쳐들지 못했다. 비판의 대상이 된 기타 수험생들도 고개를 푹 떨군채 입을 다물고있었다. 래일부터 무조건 출근하라고 강요되였다. 그렇지 않을 때에는 당원은 당적을 고려하고 공청단원은 단적을 고려하고 일반 사람은 로동자적을 고려하라는것이였다. 무거운 침묵만 흘렀다. 그때 한 “용사”가 나타났다. 제분직장의 오동무라고 기억되는데 그가 입을 열었다. 그는 대학입시제도의 회복은 당과 국가의 영명한 결책인데 공산당원과 공청단원들이 호응해 나서지 않고 누가 나서겠는가, 시험치는 문제를 가지고 당적문제요 단적문제요 하며 압박을 가하는 것은 그릇된 작법이라고 지적했다. 지금 와서 그런 말은 누구든지 다 할수 있지만 그 당시에는 그런 말을 감히 생각해냈다는 자체가 웬간한 수준이 아니였고 또 그런 말을 그런 회의장소에서 꺼낼수 있었다는 것이 조련찮은 일이였다. 옳지, 그래 그 말이 맞다. 물에 빠진 놈이 지프래기라도 잡은 격이라 할가 우리는 머리가 팩팩 돌았고 흥분되였다. 10년간 빼앗꼈던 권리를 우리가 당당하게 행사해야지. 이것은 결코 당과 국가의 전도에 관계되는 대사이지 어느 한 공장의 생산에 영향이 미치는가 안미치는가 하는 문제가 아니다. 그래 우리가 “죄” 아닌 죄를 졌다고 비판을 받아야 하는가? 이건 아니다! 그래 우리가 누구냐? 공장에서 제일 똑똑한 총아들이 아니고 누구냐! 이어서 우리의 “반격”이 가해지기 시작했다. 원래 똑똑한 녀석들이라 너도나도 입을 터뜨리니 당할 자 없었다. 나중에는 예상외로 타협적인 결과를 보게 되였다.        공장에서 로동력을 다시 조절하여 정상적인 생산운행을 보장하고 수험생들은 생산강위를 지키면서 시간을 짜내 시험공부를 하기로 하였다. 나는 출근해서 될수록 오전에 사무를 보고 오후엔 사무실문을 꾹 닫아놓고 시험공부에 몰두하려고 하였다. 허지만 일은 삐뚤게만 나갔다. 제일 신경질나는것은 전화벨소리였다. 전화가 보급되지 못했던 시기여서 전 공장에 전화가 몇대 없었다. 평생 전화를 쳐보지 못했다는 사람도 있었을 때였으니깐. 그래서 전화가 오면 틀림없이 급한 일이거나 중요한 통지였다. 그러면 그걸 전달해야 했고 활동을 포치해야 했다. 전화가 서너통만 와도 그날 오후복습은 엉망이 된다. 어느날 오후였다. 금방 전화를 받고나서 복습제강을 펼쳐들었는데 또 전화가 울렸다. 신경질이 나서 송수화기 를 들었다가 콱 놓아버렸다. 이어 련속 울렸지만 받지 않았다. 전화벨이 네번째로 울릴 때 방정맞게도 진주임이 들어서면서 송수화기를 집어드는것이였다. 몇번 \"오오, 예예\"하더니 송수화기를 놓고 내앞에 와서 장승처럼 뚝 박아섰다. 올려다보니 두눈을 뚝 부릅뜨고 있었다.   \"사무실에 앉아있으면서도 왜 전화를 받지 않았소?\"   \"금방 시험문제를 푸느라…\"   \"시험, 시험, 그래 이곳이 시험공부만 하는 장소요? 이따위로 공작하려면 당장 이 자리를 내놓소.\"   \"진주임이 내놓으라면 내놓을 자리입니까!\"   나는 벌떡 일어나 대들었다. 둘은 서로 삿대질 하면서 말다툼을 벌렸다. 그 소리에 저쪽 사무실사람들이 나와 말렸다. 우리 아버지년세와 비슷한 진주임은 평상시 나를 아들처럼 생각해주시던 분이다. 그날 밤, 잠자리에 들어서 곰곰히 생각해보니 내가 버르장머리없이 놀았다는 자책감 이 들었다.   시험날자가 하루하루 박두해오면서 나는 더욱 조바심만 났다. 복습제강은 절반도 못외운 꼬락서니였다. 이래 저래 짜증만 났다. 계속 이렇게 나간다면 또 미역국을 먹게 될 판이였다. 하루라도 빨리 결단을 내려야 했다. 다시 서서기를 찾아가니 딱 잡아떼는것이였다. 이튿날 나는 어머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교과서, 필기장, 복습제강을 대충 꿍져가지고 농촌에 있는 외가집으로 꼬리를 감추었다. 하늘이 무너지겠으면 무너져라는 배짱이였다. 끼니마다 외할머니가 보글보글 끓여주는 토장국에다 이밥을 두세사발씩 제끼며 시험공부에만 전념했다. 인츰 효과가 나타났다. 외가집 뒤뜰안의 살구나무밑은 그야말로 천국속의 학당이였다. 기분이 날 때면 왕왕 소리를 내며 읽었다. 가끔 외할아버지가 지나가며 대견스러운지 껄껄 웃기도 하셨다. \"더 크게 읽거라. 온동네에서 우리 외손주가 대학공부를 한다고 알게스리.\" 기운이 났다. 복습제강에 찍힌 글이 그대로 머리에 쏙쏙 들어와 배겼다. 그동안 어머니가 몇번 왔다갔다. 공장에서 사람이 두번 왔다갔다는것이다. 그들이 와서 무슨 말을 했는지 나도 캐여묻지 않았고 어머니도 말씀해주지 않았다. 다만 어머니의 얼굴에 근심에 쌓인 그늘이 비꼈을 뿐이였다.   드디어 시험칠 날이 돌아왔다. 시험치는 세날동안 날씨가 특별히 무더웠었다. 긴장해서 목이 말랐던 기억이 지금도 남아있다. 시험지를 바치고 밖에 나오면 눈앞이 아물거릴 지경이였다. 시험을 다 치고 친구들과 함께 렬군속식당에 가서 생맥주를 대여섯 사발씩 들이켰다. 변두리가 쪼각쪼각 짓쫏겨진 자리에 까만 때가 박힌 큰 국수사발이였다. 그런 사발로 마셨지만 시원컬컬하기만 했다. 배를 두드리며 거나하게 마신탓에 가방까지 두고와서 어머니의 꾸지람을 들었던 기억도 난다.   대학입학통지서가 날아들던 날 우리 사무실은 왁짝 들끓었다. 20여명가운데서 나만 붙었던것이다. 숱한 사람 들이 와서 축하해주었다. 그 가운데는 서서기도 있었고 진주임도 있었고 요주석도 있었다. 진주임의 지시에 따라 공장에서는 돼지를 잡아 엎어놓고 환송연을 베풀기도 했다. 그리고 군용멜가방과 사지옷 이래웃벌을 선사했다. 진주임 한테서 그걸 받아안으며 나는 눈물을 흘렸다.   개학을 앞두고 나는 연변대학을 찾아 교정안팎을 한바퀴 빙 돌아보았다. 그제날 어린 시절의 꿈속에서처럼 대학가 의 비술나무밑에 서서 \"닭똥과자\"라도 한봉지 사서 먹고싶어졌다. 허지만 정작 사먹자니 다 큰 녀석이 길가에 서서 과자를 와삭와삭 씹어먹는다는것이 별로 쑥스러울 것만 같아 그만두었다.   
27    [단편소설]기미(홍천룡) 댓글:  조회:1520  추천:24  2010-08-03
단편소설                         기 미                                                          홍천룡 1 옛날부터 깊숙한 봉산자락 골짜기를 따라 조용히 들어앉은 금불촌을 호박골이라고 불러왔었다. 호박이 잘되는 고장도 아니였다. 오히려 색시들이 호박처럼 둥글둥글 둥그렇게 번지여 벌방마을에서들 부지런히 뜯어들 갔던것이다. 지금은 버들가지처럼 바람에 하느작거리는 녀자를 좋아하지만 그때는 배를 채우기도 힘들었던 세월이라 호박처럼 딜딜 구을릴수 있는 색시를 며느리로 맞아들이길 좋아했었다. 대개 그런 녀자들은 아기도 무우뽑듯 했고 살림살이도 물이 못새게 했고 도야지치기에도 매끄럽지 않았던것이다. 그래서 호박골이라는 별명이 생겼는지는 몰라도 아무튼 척박한 호박골에 곡식은 뭐 그럭저럭 대충대충 됐지만 자식농사만은 잘되는 고장이였다.재해가 빈번했던 세월에도 골안사람들은 제노릇을 슬밋슬밋 해가는 판국이였다. 대약진바람이 불어치던 이듬해는 기해년이라 호박골에서는 희사를 치른 집이 여러호나 되였다. 돼지해라고 복을 받는다나! 뒤마을 바가지 박씨인 금덕이네도 새며느리를 맞아들이게 되였다. 벌방에서 데려온 색시인데 호박골처녀들처럼 얼굴이 호박처럼 두리두리했고 엉뎅이가 펑퍼짐해서 마을아낙네들의 부러움을 자아냈다. 더구나 두 눈섭사이의 미간을 돋보이게 하는 붉은 점이 딱 중심에 박혀있어 남다른 미를 이루고있었다. 처음에 마을사람들은 멋을 피우느라 연지분을 꼭 찍어놓았는가 했었다. 첫날 혼례마차에서 내릴 때 그걸 보고 해괴망측하다고 입을 오무리는 아낙네들도 있었다.\"어마나, 요귀처럼 이마빠기에다 왜 홍점을 찍었나? 나원, 별꼴 다 보겠네.\"\"원, 별말씀을요. 보기가 좋네요. 얼마나 고와보여요.\"지난해에 시집온 젊은 각시가 끼여들었다.\"그럼, 그럼! 골안북데기들이 고운걸 볼줄 알기나 해!\"젊어서 연해주항구도시인 블라디보스또크에 가서 적사공질 해본 적이 있는 사룡이가 희떠웁게 너스레를 떤다.\"영화에서 나오는 모스크바의 미녀들이라든가 인도녀자들은 저렇게 이마에다 빨간 점을 찍어가지고 다닌다구. 그래야… 뭐, 뭐야, 영화란 무엇인가구? 아하, 이걸 어쩌누? 이 안깐덜이 한뉘 영화도 못보고 이 골안에서 썩었구만. 불쌍하구나, 가엽도다, 하느님이여! 영화란 말이야…\"사룡이가 한창 상판을 해뜩거리며 지분거리는데 뒤에선 마을의 왈패 아줌마가 그의 말을 호박 따개듯 썩뚝 짜른다.\"영화는 무슨 영화! 제혼자만 영화를 보았는가베. 색시이마에 저 홍점이 괜히 찍어놓은게 아니라 저절로 난 기미래.\"\"어마나, 신통하게도 박혔어요.\"기미 하나가 수수한 얼굴을 한결 더 예쁘게 다듬어놓은것만 같았다.“복짐이야, 완전히 복받을 기미라구!”동네에서는 복덩이며느리를 삼았다고 줄레줄레 모여들어 축하해주었다. 금덕이내외간은 기분이 둥둥 떠서 그 귀한 쌀을  꿔다가 떡도 더 치고안주거리도 더 푸짐하게 차려놓고 얻기 힘든 고구마술도 더 떠왔다. 어쩌다가 배를두드리며 먹게 된 잔치객들이 새각시의 이마전 기미를 두고 덕담에 열을 올리고있을 때 “시골선비”라 불리우는 앞마을 최학빈이가 괜히 코방귀를 꿨다.“복짐은 무슨 복짐! 길한지 흉한지 누가 알가!”그 말에 둥굴소같이 생긴금덕이네 친척 몇이 왕― 하고감때사납게 덮쳐들었다. 미친놈이 미친 소리를 한다고. 당금 손찌검이 터지고 피를 볼건만 같아 동네나그네들이 말려나섰다. 뭐, 독한 고구마술이 은을냈다고, 술에 취하면 누군들 도깨비가 되고싶어 되겠느냐고, 도깨비와 무슨 시비가 있겠느냐고, 미친놈의 미친소리가 아니고 주정뱅이가 주정부리는거지…헌데 그 말이 미친소리가 아니였고 술에 취한 취중발설이 아니였다. 시아버지로 된 금덕이가 그해여름부터 쨍쨍 내리쬐는 해볕에 낯이 새까맣게 타들어가더니 가뜩이나 도도록하게 뽈록진 이마가 가마밑굽처럼 반질반질해졌다. 호박이 누렇게 뻘겋게 밭고랑에 옹그리고 자리를 틀 철에는 몸이 겨릅대처럼 빼빼 말라갔다. 작년에 입던 저고리를 입고 조이밭머리에 나서니 미풍에도 헐렁해진 품이 너풀거렸고 더구나 내리드리운 소매자락이 삼각기처럼 펄럭거리며 소리를 냈다. 어찌보면 마른 막대기에다 헌 베옷을 걸쳐놓은 허수아비 같기도 했다. 그 형국이 가슴쓰리게 보여 한숨을 길게 내쉬는 사람도 있었다. 벌방에서 시골로 시집온 그 이마전에 붉은 기미를 단 새 며느리―안민옥이는 여늬 색시들처럼 노오란 꿈을 안고 시집살이에 들어섰다. 신랑 박송식이를 만나기전에 그녀한테로 혼사말이 여러 집이 들어왔었다. 헌데 어머니 유씨가 맘고생이 마지막 고생이라며 골안총각 송식이를 마음에 들어했었다. 골안으로 시집간 녀자들이 마음고생하는걸 못봤다면서. 민옥이는 시집오기 전날 밤에 자기의 손목을 쥐고 간곡하게 타이르던 어머니의 말씀을 고이 간직하고있다. \"시집살이란 시부모를 잘 모시는거다. 제집부모처럼 생각하거라. 그래야 너를 친딸처럼 여길게 아니겠냐. 그이상 더 없다.\" 민옥의 노오란 꿈이란 어머니처럼 자식 대여섯을 낳아 튼실하게 키우고 시부모님들과 화락하게 어울려져 사는것이였다. 시집문턱을 넘어서고보니 시집살림살이가 생각보다 궁색하기 그지 없었다. 허지만 그녀는 불만의 내색을 조금도 내비치지 않고 모든걸 달갑게 받아들였다. 시아버지 금덕이도 시어머니인 허씨도 며느리에 대한 인상이 좋았다. 종종 서로 지나치게 생각해주는 바람에 오히려 어색해질 때가 있었다. 여름이 지나가면서 민옥이는 시아버지의 몸이 점점 더 허약해짐을 보고 못내 불안과 근심에 쌓였다.하루는 그녀가 빨래함지를 이고 울안에 들어서는데 삽짝문뒤에서 모이를 쫓던 알낳이 암탉이 불시에 홰를 치며 날개를 퍼득이였다. 흠칫 놀란 민옥이는 하마터면 빨래함지를 떨어뜨릴번 했다. \"괘씸한 년!\"민옥이는 발을 탁 굴렀다. 토종암탉은 살찐 궁둥이를 빼쪽거리며 저쪽으로 달아났다. 그 호함진 궁둥이를 바라보는 민옥의 목젖이 저절로 울떡거렸다. 시집와서 한번도 비비한 고기국물을 마셔보지 못했었다. 약진바람에 그 흔한 물고기도 잡을사이가 없었고 더구나 금덕이네는 잔치 때 진 빚 때문에 온집식구가 허리띠를 졸라매고 밤낮 눈코 뜰새없이 돌아치고있었던것이다.민옥이는 친정어머니가 닭을 잡던 정경을 떠올렸다. 어머니는 할아버지가 몸져눕거나 아버지의 몸이 허약해지실 때면 꼭 살찐 암탉을 잡아서 고와드렸던것이다. 사람의 몸이란 먹새가 관건인 것 같았다. 닭을 고와드리면 어른들은 인차 몸이 개복되군 했었다. 어머니와 자기네 형제자매들은 국물만 마셨지만 그렇게도 구수할 수가 없었다. 민옥이는 빨래함지를 내려놓고 그 토색암탉을 붙잡느라 몸과 머리에 검불을 뒤집어쓰기까지 했다… 금불골안에서 돼지치기능수로 손꼽히는 시어머니 허씨가 지게문에 들어서 밭머리에서 캔 능쟁이를 마루바닥에 쏟다가 이상하다는듯 고개를 쳐들고 코를 벌름거렸다. 명절날에나 맡아볼수 있었던 냄새가 너무나도 강렬하게 허씨의 코를자극했던것이다. 허씨는 능쟁이주머니를 활 뿌려치고 늦김에 쌕쌕김을 뽑고있는 가마뚜껑을 열어젖혔다. 뽀얀 뜬김속에서 노란 닭이 뽀질뽀질 익어가고있었다. 허씨의 상판이 독이 오르기 시작한 고추처럼 벌겋게 달아올랐다.“아이고, 알낳이 암탉을 잡으면 어떡해?”허씨가 처음 새 며느리를 보고 낯을 붉혔다.“아버님께 좀 몸보신해드리려구…”이 집에서 알낳이닭이 귀한걸 모르는 민옥이가 아니다. 잔치때 진 빚을 갚기위해 돼지도 정성껏 치고닭들이 알을 낳으면 한알한알 깰세라 모아두고있는것도 안다. 허지만 시아버님의 기체가 하루하루 안녕치 못해가시는걸 보고 어찌…저녁늦게야 일밭에서 돌아오신 시아버님이 자기때문에 며느리가 알낳이 암탉을 잡았다는 말에 무거운 한숨을 내쉬는것이였다. 오늘따라 얼굴이 더 새까매진것 같았다.“요즘 닭알이 십전까지 올라갔다는데 후―”시아버지는 웃방에 올라가 올방자를 틀고 앉아 마분지 쪼박에다 말린 엽초를 부시여 말아물고는 푸―푸― 태우기만 하셨다.이 집안에 처음으로 시작되는 “랭전”상태였다.대대민병련의 집중훈련을 끝마치고 돌아온 신랑 송식이가 이 난처한 분위기를 깨뜨리며 어색하게나마 넉살을 부려서야 네 식구는 겨우 저녁밥상에 마주 앉게 되였다. 닭은 옹배기에 담아 밥상가운데 놓았다. 허나, 서로 낯빛이 뚝뚝해서 사양하는 바람에 닭곰에는 수저를 대는둥마는둥 했다. 이튿날 아침상에서도 닭곰은 그대로 남게 되였다. 점심에도, 저녁에도…사흘째되는 날 저녁에 민옥이는 닭고기를 잘게잘게 찢어서 다시 푹 삶은다음 시아버님께 따로 독상을 차려올렸다.“아버님, 이 닭고기국을 드세요. 더 둘수가 없어요. 제가 철딱서니 없이 놀아서…”시아버지의 검스레 움푹하니 꺼져들어간 눈확에서는 이슬이 반짝이였다. 목젖이 둬어번 울꺽거리고나서 시아버지는 천천히 숟가락을 드시였다…한밤중에 “거 옹배기가 없느냐!” 하는 시아버지의 부름 소리에 민옥이는 송식의 품을밀치고 일어나 부랴부랴 옷을 주어입고 미닫이문을 열었다. 어느새 아래방에서 허씨가 불을 켜고 세수대야를 찾아들었다. 시아버지 금덕이가 전신을 구불떡거리며 왈왈토하기 시작했다. 삽시간에 낮다란 집안에는 시크무레한 냄새가 역하게 풍겼다. 허씨가 령감의 이마전을 붙잡고 민옥이가 시아버님의 잔등을 토닥여주었다. 뒤늦게 일어난 송식이가 두눈을 흡떴다.“아부지, 웬일이세요?”“에구에구, 그 닭고기가 끝내 재를 쳤구나. 한뉘 토하시는 법을 모르시던 량반이…”허씨가 눈물범벅이 된 면상을 둘레둘레 굴리며 넉두리를 피루어댔다. 그 넉두리가 뾰쪽한 송곳날이 되여 민옥의 가슴을 짜릿짜릿하게 콕콕찔렀다. 괜히 닭을 잡아가지고 이런 부산을 피우게 했는가 하는 후회가 가슴을 허비였다.한참 토하고난 금덕이는 맥이 쭉 빠지는지 물먹은 솜처럼 해나른해지며 잦아들듯 잠자리에 쓰러졌다. 모두들 숨을 죽이고 지켜보고있을 때 미구에 그는 또 되살아나는 뱀처럼 전신을 구불떡거리더니 다시 일어나 목을 늘어뜨리며 왝! 왝! 마른 구역질을 했다. 그러다가 왈칵! 하고 시뻘건 피를 토하는것 이였다…그날 밤부터 금덕이는 병석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공 사위생소의 마의사가 와보고는 연길에 있는 큰병원에 가야 한두해 더 살수 있겠는지 하는혀아래소리를 애매하게 얼버무렸다. 민옥이는 자기때문에 시아버님의 병이 중해졌다고 눈두덩이 벌겋게 되여 울었다. 그래서 무작정 시아버지를 큰병원으로 모시자고 주장해나섰다. 큰병원에 가면 시아버지의 병이 치료될것만 같았다. 동네이웃간에 서로들 찾아와서 은근히 뒤를 당겨주었다. 살릴수만 있다면 연길이 아니라 북경이라도 가야겠지만 환자의 병세가 불보듯 뻔한일이 아닌가! 괜히 공돈만 팔고사람도 구하지 못하고 길가에서 환자만 고생시킨다는것이다. 마지막 길에 무슨 그런시달림을 받게 하겠느냐고. 오히려 집에다 편안하게 모시고 잡숫고싶은걸 다 대접시키면서 무슨 소원이 있으면 그 소원을 풀어드리면서 마지막 길을 즐겁게 보내시는게 좋겠다는것이다. 그것도 그랬다. 교통이 불편한 호박골에서 공사마을까지는 소수레에다 모시고 꼬불꼬불 달구지길로 이삼십리 가야 하고거기에서 하루밤 자고 하루에 한번밖에 통하지 않는 복잡한 뻐스를 타고 백리밖에 있는 현소재지에 가서또 하루밤 자고 새벽기차를 갈아타야 했으니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환자에게는 정말 무리가 아닐수 없었다. 또 바쁜 가을철이 드닥쳐 사원들에게 숨돌릴 기회조자 주지 않았다. 금방 세워진 인민공사의 집체화위력을 과시하느라 철마다 돌격전이다. 생산대에서는 새벽부터 종을 뗑! 뗑! 치며 사원들을 추수돌격전에 몰아붙였고 집집의 아낙네들의 할일도 많아졌다. 그럭저럭 며칠이 지나니 금덕이의 까만 얼굴에 누런 밑바탕이 드러나더니 전신에 “살”이 오르기 시작했다. 넓죽하던 가래발이 아기발처럼 통통 부어올랐다. 하루는 시아버지가 “세치네탕(물고기국)”을 끓여먹던 이야기를 해서 민옥이는 온동네 집집이 다 돌며 “새벽발(초저녁에 도랑물에 퉁발이나 채발을 놓았다가 새벽녘에 나가 걸려든 물고기를 건져오는 고기잡이)”을 쳐서물고기를 잡은 집이 있는가고 알아보았다. 눈코 뜰새없는 가을철이라 “새벽발”을 놓는집이 한집도 없었다. 할수없이 뒤집 장철이네 반두를 빌려가지고 강가로 나섰다. 몸이 오싹해나는 찬물에 들어서서 반나절이나 철벅거려서야 겨우 반사발쯤 잡았다. 그걸 정성껏 끓여서 대접했더니 시아버지는 땀을 줄줄 흘리며 겨우 반공기쯤 축내고 숟가락을 놓으며 게면쩍게 웃었다.“어, 시원하다. 고맙수. 그리구 이봐, 며느리, 나 손주놈이나 보고죽고싶은데…”국이 반쯤 담긴 공기를 들고 일어서려던 민옥이는 몸을 흠칫 떨었다. 시아버님의 정기없는 눈이 자기를 멀거니 바라보고있었다.“네, 아버님, 꼭! …”시아버님이 불쑥 손주가 보고싶다는 말을 하자 민옥이는 가슴속으로부터 뜨거운것이 욱 치밀어올라 눈굽이 젖어올랐다. 순간, 민옥이는 시아버님을 병마에서 꼭 구해내야겠다는 생각이 쭉 일어서며 숭엄해졌다.그날 저녁 민옥이는 시어머니앞에 시집올 때의 뉴똥이요, 베르베또요 하는 례장감을 몽땅 내놓았다. 그걸 처분해서 시아버지를 큰병원으로 모시자것이였다. 허씨는 잠시어쩔줄 몰라했다. 아직 숨이붙어있는 시아버지를 구하겠다는 며느리의 그 마음을 어찌 막으랴! 신랑 송식이도 안해의 거동에 놀랍기도 하고 감동되기도 했다.“오냐, 나라고 령감을 잃고싶겠냐!”나중에 허씨는 며느리의 손을꼭 잡아쥐고 락루하였다.떠나는 날 이른 아침에 마을사람들이 배웅하러 금덕이네 울안으로 웅기중기 모여들었다. 삶은 닭알을 가지고 온 아낙네들도 있었고 시루떡을 보자기에다 싸가지고 온 로친네들도 있었다. 남정네들은 오십전짜리나 일원짜리를 꺼내 송식의 호주머니에 찔러주었다. 생산대에서 수레와 둥굴소를 내놓았다. 수레에다는 짚을 펴고 그우에다 담요를 깔고 민옥이가 첫날이불을 내왔다. 면상이 검누렇게 된 금덕이가 그우에 눕자민옥이가 이불을 턱밑까지 꽁꽁여며주었다. 그 정경을 바라보며 쿨쩍거리는 아낙네들도 있었고 돌아서서 눈굽을 찍는 남정네들도 있었다. 마지막 길이되지 않을가 하는 슬픔이 속에서 여울쳤던것이다.떠날 준비가 다 되여 송식이가 둥글이의 고삐를 잡았다. 시골농의 도회지행차라 송식이는 장가들 때의 “세비로(신사복)”에 캡을 썼다. 그가 고삐를 잡아당기며 “이랴!” 하고 웨치려는 순간이였다. 난데없는 골안바람이 휙- 돌개치며 송석의 도끼머리변두리에  삐딱하게 얹은 캡을 훌 날려버렸다. 캡은 나비연처럼 반공중에서 둬어번 너울거리더니 이어 팽그르르 돌며 급격하게 하강하여 길가 언덕비탈에 떨어져 대굴대굴 굴러갔다.“젠장! 여보, 이걸 쥐오.”송식이는 소고삐를 곁에 선 민옥이한테 넘겨주고는 캡이 떨어진 언덕아래로 달려갔다. 시집오기전에 두엄수레를 자주 몰아본적이 있는 민옥이라 자연스럽게 소고삐를 넘겨받고는 역시 “이랴!” 하며 담차게 소수레를 몰려고 했다. 헌데 둥굴이가 대가리를 움츠리며 앞발을 내뻗치고 퉁방울 같은 눈을 뚝 부릅떴다. 녀석이 녀자라고 골리는것일가! 민옥이가 다시 소고삐를 드세게 잡아채려고 두손으로 그걸 모아쥐려는 순간에 둥굴이가 움츠렸던 상체를 쑥 앞으로 내밀었다. 소의 거대한 몸체가 민옥이를 밀박아쳤다. 민옥이는 어쩔사이도 없이 저만큼 뿌리워나갔다. 둥굴이가 용을 쓰며무작정 앞을 박지르며 내달렸다. 둥굴이에게 메운 수레도 널뛰듯 덜컹거리며 끌려나갔다. 수레에 누운 금덕이가 “어이쿠!” 하고 비명소리를 애처롭게 질렀다. 배웅하러 나왔던 동네사람들이 저마다 눈이 휘둥그래지며 입을 딱 벌렸다. 너무나도 순식간에 벌어진 장면이였다.“날래! 날래!”“저 둥굴이를 붙잡아라!”남정네들이 두주먹을 부르쥐고 내달았다. 성난 둥굴이는 점점 더 미친듯이 내달렸다. 소궁둥이에 매달린 수레가 좌우로 흔들거리며 기우뚱거렸다. 분홍색나는 민옥의 첫날이불이 기폭처럼 수레우에서 너펄거렸고 그속에서 시커먼 금덕의 몸체가 구불떡거리고있었다.“저런, 저런! ”아낙네들이 숨넘어가는 비명을 내질렀다. 수레우에 올려놓았던 옷보자기며 떡보자기들이 불쑥불쑥 튕겨올랐고 닭알이며 떡부스레기며가 길바닥에 돌돌 떨어져 나뒹굴었다. 마을어구 굽인돌이에서 오른쪽 수레바퀴가 큼직한 청석돌에 튕기여 수레가 일찍선을 이루며 허공에 떴다. 그 순간에 담요에 감긴 금덕이가 뿌리워나가 반공중에 포물선을 긋더니 그대로 길가 언덕배기에 홀쭉한 쌀자루처럼 털썩 떨어졌다… 2 령감을 북산에다 모셔놓고 돌아온 날 저녁에 허씨는 전신이 불덩이처럼 달아올라 이발을 덜덜 떨었다. 이불을 두채나 겹덮고 후꾼해나는 가마목에 누웠으나 소용없었다. 령감을 따라 이 골안에 온후부터 앓음이란 모르고 살아온 허씨였다. 송식이가 한밤중에 아래마을 청인집 왕씨네 댁에 가서쭈글쭈글 말라빠진 생강 두쪽을 얻어왔다. 민옥이가 그걸 정성껏 달여서 생강물을 허씨에게 대접시켰다. 그걸 마시고 땀을 내니 몸이 좀 거뿐해나는지 허씨는 미구에 잠이 들었다.  호주(户主)가 없는 집안은 기둥이 빠진 집과도 같다. 시아버님을 잃은 민옥의 가슴도 공허하기 그지 없었다. 그해 겨울부터 민옥의 몸에서는 임신오조가 나타나며 입맛이 떨어졌다.어느 날, 민옥이가 없는 틈을 타서 허씨는 아들 송식이를 조용히 불렀다.“안되겠구나. 아무래도 돌려보내야겠다!”“돌려보내다니? 뭘 말이오?”허씨는 두눈을 쪼프리고 둥굴넙적한 아들의 면상을 올려다보며 아래 입술을 감쳐물었다.“네 각시말이다. 둘이 더는 같이못산다.”“엄마!?”송식이는 아닌 밤중에 이게무슨 홍두깨냐는듯 입을 딱 벌렸다.“이 에미가 요즘 밤잠도 못잤네라. 네 애비가 잘못된것도 그저일이 아니다. 전번날 뒤집 장철에미가 병문안 왔다가 하는 소리가 심상치 않더라. 그날 순돌이였던 생산대의 둥굴이가 용을 쓰게 된것도 네 각시의 그 이마전에 난 기미를 보고놀란거란다. 수다쟁이 학빈령감의 말이 맞는것 같구나. 조만간에 그 기미때문에 우리 이 집안이 망하고말겠다. 네 애비를 잡아먹었으니 인젠 이 시에미를 잡아먹자고 병마를 끌어다 내몸을 문거지. 그다음에는 네 차례일거고 그다음에는…”“엄마, 정신이 있소없소? 대약진시기에 인민공사까지 선 오늘날 무슨 그런 미신소리를 하고있소?”송식이가 어이 없다는듯 눈을흘기며 어머니를 꾸짖는다. 그러건말건 허씨는 팔을 내저었다. 주름이 잡힌눈가에 눈물이 찔끔 솟더니 볼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린다.“어이구, 미신이 아니구 귀신이야. 그래 귀신이 이 에미를 잡아먹겠다는데도 넌 가만있겠다는 말이냐?”“엄마, 그게 그런게 아니구…”“아니구뭐구 있냐? 네가 이 에미를 살리구 너도 살구 이 집안을 지키겠으면 어서 갈라져라. 한시 급하다.”“안되오, 엄마. 그건 안될 소리요. 민옥이가 지금 임신했는데 어떻게…”“뭐, 임신?”허씨는 소스라치며 놀라더니 손등으로 눈물을 닦으며 아들앞으로 바싹 다가앉았다.“그게 정말이냐? 어이구, 아이까지 배면 더구나 큰일이다. 귀신이 붙은녀자가 아이를 낳으면 그 아이가 그 혼을 달고 나오는거란다. 어쩌겠냐. 저 시가지 큰병원에 가면후과없이 깨끗하게 밀어낼수 있다는데…”“엄마, 그게 사람이 할 소리요. 점점 귀신에 미쳤구만. 에익!”송식이는 잔뜩 낯을 찡그리며 벌떡 일어섰다. 생각같아서는 모든걸 마구 들부시고싶어졌다. 자리를 뜨려고 하는데 허씨가 불쑥 그의 왼쪽 허벅다리를 끌어안았다.“송식아, 아들아, 이 에미가 네앞에서 이렇게 빈다. 제발, 제발!”송식이는 왼쪽다리를 빼려고 힘껏 들며 앞으로 내밀었다. 허씨가 집게처럼 꽉 끌안고있었다. 다리의 움직임에 따라 허씨가 앉은뱅이 그대로 질질 끌려왔다. 송식이는 고개를 외로 탈며 어머니를 내려다보았다. 자기를 애처럽게 올려다보는 얼굴은 정녕 눈물범벅이 되여있었다. 가슴이 시큰해나며 눈앞이 흐려졌다. 그는 무릎을 꿇고앉아 어머니의 섬약한 어깨를 끌어안았다. 모자간은 서로 끌어안고 한동안 흐느껴 울었다.“엄마, 녀자치고는 민옥이만한 녀자도 없소. 초롱불 켜들고 찾아다녀도 찾기 힘든 녀자오. 맘씨 얼마나 곱소. 더구나 임신까지 한 녀자를… 엄마, 이렇게 하기오. 민옥이와 방법을 대서 그 이마전의 기미를 없애버리라구 하기오.”나중에 송식이는 이런 절충방안을 내놓았다. 그 말에 허씨는 입을 다물어버렸다. 동의한다는 말도 없고 묵인한다는 고개끄덕임도 없었다.이듬해 봄부터 송식이와 민옥이는 기미를 없애는데 무슨 비방이 있겠는가고 여러모로 수소문해보았다. 수술해보라는 사람도 있었고 뜸을 떠보라는 사람도 있었다. 수술하자면 돈이 들어가야 했기에 먼저 뜸을 떠보기로 했다. 뜸은 들판에 나는 개쑥으로 떠야 좋다고 하기에 송식이는 쑥을한아름이나 베왔다. 헌데 누군가 햇쑥은 독이 있기에 삼년이상 묵은쑥으로 뜸을 떠야 좋다고 의사같은 잔소리를 해서 송식이는 묵은쑥을 찾아다녔다. 다행히도 아래마을 청인집 왕가네 조카가 몇년전에 웅박골에서 양몰이할 때 지은 움막집이 있는데 그 집 마당가에 태우다가 만 쑥태가 있었던것이다.뜸을 뜨기전에 민옥이는 깨끗한 우물을 떠다가 몸도 씻고 머리도 감았다. 기실 민옥이는 뜸을뜨고 싶지 않았고 그 기미를 없애버리고 싶지 않았던것이다. 민옥의 얼굴은 전체가 동글동글하고살결이 두부모처럼 희였지만 곱게 생긴 축은 아니였다. 눈이 가늘고 코가 납짝하고 입이 작았다. 그래서 피끗 보면 늦가을에 익어가는 점박이 호박같다는 련상이 저절로 떠오르게 된다. 더구나 거기에 눈섭꼬리가 아래로 처져 밉상이나 울상이처럼 보일 때가 많다. 헌데 넓고 반듯한 이마에 앵두알만한 기미가 딱 박혀져있어 전반 홍안을 인상깊게 고쳐준것이다. 뭐, 한어에서 하는 왈(曰), 화룡점정(画龙点睛)이라 할가. 아무튼 그 기미가 얼굴의 귀염성을 돋구어주고 복성을 부여해주는것만 같았다. 처녀시절에도 집안에서 제일 벌수가 높은 할아버지께서 요망해보인다고 그 기미를 없애라고 했지만 민옥이가 딱 떼질을 썼다. 그 누구도 감히 다치게 못했다. 거울을 들여다 볼 때마다 먼저 그 기미가 깜찍하게 안겨들어 녀자로서의 일종 만족감을 느껴보군 했었다. 그런 기미였기에 원래는 일생동안 복스럽게 달고가자고 했었다. 헌데 지금은 어쩔수 없는상황이였다. 그것 때문에 시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죄책감에 모대기고있었고 시어머니의 꼿꼿해나는 눈길이 점점 더 무서워났던것이다. 그리고 동네에서도 뒤공론이 쉬쉬하다. 기미에 귀신을 달고다니는 녀자라고. 그래서 남편이 기미를 없애자고 했을때 고통스럽게 고개를 숙이는것으로 수긍했던것이다.송식이와 민옥이는 허씨가 잠든다음에 뜸을 뜨기로 했다. 무슨 시끄러운 일이라도 생겨 속을더 심란하게 해드릴가봐서였다.모든것을 다 갖춰놓고 기다리다가 아래방에서 코고는 소리가 가늘게 들려오자 송식이는 민옥이를 반듯하게 눕혔다. 잔뜩 긴장해진 민옥이는 눈길이 꼿꼿해졌다. 송식이는 손끝으로 뜸쑥을 몽굴하게 비벼 꼬아서 민옥의 이마전 검붉은 기미우에 얹어놓았다. 그리고는 엽초를 부셔서 마분지에다 말아물고 불을 붙였다. 둬어모금 뻐금뻐금 길게 빨고는 불끝에 생기는 하얀 재를 훅 불어버리고 빨간 불을 뜸쑥에 갖다대였다. 파르스름한 연기가 가늘게 피여오르며 쑥향기를 풍겼다. 민옥이가 몸을 떨었다. 송식이가 인차 그녀의 두손을 꼭 쥐여주었다. 뜸쑥의 빨간 불띠가 점점 아래로 내려가고 우에는 까만 재가쀼죽하게 남았다.“앗, 따가와!”“쉬―”민옥이는 참기 어려운 통증이 빚어내는 비명이 뿜겨져나갈가봐 입술을 감쳐물었다. 이마에서는 구슬같은 땀방울이 뾰족뾰족 돋았다. 이발사이로는 신음소리가 끙끙거리며 새나왔다.“참아! 조금만!”송식이는 민옥이의 손을 꼭 잡아쥐고 그녀의 젖가슴에 얼굴을 부볐다. 민옥이의 전신이 바르르 떨렸다. 미구에 민옥이가 호― 하고 한숨을 내쉬였다. 송식이가 고개를 들고보니 뜸쑥이 다 타들어가고 까만 재만모록이 남아있었다. 그는 마분지로 재를 닦아내고 그 뜸자리에 흰 천쪼박을 얹어놓고 그걸 고정시키려고 그우로 빨간 비단자락을 둘러서 머리뒤에다 매놓았다. 그리고는 수건으로 땀을 닦아주었다. 민옥이도 시원해나는지 해시시 웃었다. 이어 둘은잠자리에 들어 코를 쌔근쌔근 골았다.새벽녘이였다. 아래방으로부터 들려오는 “아이구! 아이구!” 하는 신음소리에 민옥이는 눈을 떴다. 동틀무렵이라 방안은 어둑컴컴했다. 민옥이는 손더듬으로 스위치줄을 찾아 잡아당기면서 남편을 깨웠다. 눈을 부비며 깨여난 송식이는 어머니의 신음소리를 듣고는 팬티바람으로 아래방으로 뛰쳐들었다. 불을 켜자15촉짜리 벌그스름한 불빛아래서 허씨가 두손으로 머리를 마구 붙잡고 몸부림치고있었다. 머리가 빠개진다는것이다. 송식이는 급히 안해를 불렀다.“여보, 거 빼랍안에 정통편을! 어서!”남편의 부름소리에 민옥이는 털실내의를 대충 걸치고 경대서랍에서 정통편 두알을 찾아들고 허둥대며 아래방으로 내려갔다. 머리를 싸쥐고있던 허씨가 민옥이를 보자그만 머리에서 두손을 떼며발딱 일어나 앉는것이였다. 두눈이 공포에 질려 동그래지면서 흰자위가 번뜩이였다.“귀신이야!”귀청을 째는듯한 악청이 허씨의 입으로부터 튕겨나갔다. 송식이도 와뜰 놀랐고 민옥이는 “어마나!” 하고 비명을 내질렀다. “어머, 어머머, 귀신이야! 송식아, 날래!”허씨는 와들와들 떨며 아들의 등뒤로 몸을 감추려고 허우적거렸다. 아닌 밤중에 무슨 귀신소리냐고 송식이는 고개를 돌려 방문쪽을 내다보았다. 순간, 그의 눈도 휘둥그래졌다. 입이 저절로 딱 벌려졌다. 벌거스름한 불빛아래 이마에 붉은 천을 두른요녀가 머리를 풀어헤치고 뻘건 입을 함독스레 쫙 벌리고있었던것이다.“으흑!” 송식이도 몸에 찬물을 끼얹은듯 소름끼치여 숨을 들이마시며 몸을 움추러뜨렸다. 아직 잠기에서 벗어나지 못한 환각이였을가! 식은 땀을쫙 흘리고나서야 송식이는 제정신으로 돌아올수가 있었다.“씨, 그렇게 퀭―해 서있으니 사람이 놀랄수 밖에. 어서!”귀신소리에 민옥이도 가슴이 콩닥거리고있었다. 그녀는 오돌오돌 떨면서 남편한테 다가섰다.“어마나―, 귀신이야! 사람잡는다! 아―”허씨는 다가서는 민옥이가 자기한테로 덮친다고 아들의 등을 마구 두드려대더니 그만한쪽으로 스르르 쓰러지는것이였다.“엄마, 엄마!”송식이는 쓰러지는 어머니를 끌어안았다. 입가에서는 흰거품이 부질부질 끓고있었다…민옥의 뜸자리에는 까만 딱지가 앉았다. 원래는 뜸을 열번이상 떠야 효과를 볼수 있다고 하는데 뜸을 뜰수가 없게 되였다. 허씨가 며느리를 보기만 하면 “귀신이야!” 하고 소리치며 거품을 물고 나눕는 바람에 민옥이는 아래방출입도 못하게 되였다. 그녀는 아침일찍 생산대에 나가 일했고 저녁늦게 일밭에서 돌아오면 정지간으로 들어못가고 고양이처럼 웃방문으로 들어서서는 죽은듯이 누워만 있어야 했다. 아래방에서 웃방으로 통하는 미닫이문을 송식이가 대못을 쳐서 고정시켜놓았다. 송식이가 죽어나게 되였다. 가무일에는 손도 대보지 못했던 그가 어설프게 밥을 해서는 어머니께 대접시켜야 했고 안해한테는 따로 떠와야 했다.  모든것이 후딱 뒤집혀졌다. 그런 광경을 차마 보아낼수가 없어 민옥이는 혼자 눈물을 흘리군 했다. 집안에서 뿐만 아니라 일밭에 나가서도 눈물을 흘려야 했다. 동네에서는 이상한 풍문이 돌고있었다. 송식이네 새각시가 이마전에 기미를 없애려고 뜸을 떴는데 기미에 붙어살던 귀신이 궁둥짝이 뜨거워난다고 노발대발해서 작간을 부린 시어머니와 대들어 조화를 부리고있다는것이다. 아침이면 생산대 김대장이 하루일을 배치한다. 동네처녀들이고 아낙네들, 그리고 로친네들이고 모든 녀자들이 다 민옥이와 같이 일하기를 꺼려하였다. 우사마당에서 아침조간회의를 할 때면 민옥이는 그래도 젊은각시들 축으로 가서 앉는다. 헌데 조금만 지나면 하나 둘 자리를 옮겨앉는 바람에 나중에는 민옥이 혼자 그 자리에 댕그랗게 앉아있게 된다. 사람이 사람의 버림을 받는것보다 더 섧은 일은없다. 오직 밤중이 되여 송식이가 곁에 와서 누워주는것만이 큰 위안이 될뿐이였다. 송식이는 부풀어오는 민옥의 아래배를 슬슬 어루만져주며 애기가 태여나면 튼실하게 키워 생산대 일등 공수벌이군으로 만들자는 앞날을 속삭이기도 했다. 그러면 민옥이도 송식의 꺼실꺼실한 턱수염을 어루만지며 뜨거운 눈물을 흘리군 한다. 아기만 태여나면 모든것이 행복해질것만 같았다. 순간적이나마 서로의 애무에 정열을 불태우고나서는 송식이는 어머니의 병환때문에 한숨을 지였고 민옥이는 이마전 기미때문에 한숨을 내쉬군 했다. 약진시기의 젊은 각시로서 미신을 믿는것은 아니지만 어쩐지 그 기미가 앞으로 태여날 아기한테도 무슨 루가미칠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기때문이였다.허씨의 병은 점점 더해갔다. 시도 때도 없이 버럭버럭 소리를 내지르기도 하고 가끔 귀신이 온다고 이불을 뒤집어쓰고 덜덜 떨기도 했다. 송식이가 중돼지를 팔아 첩약을 지어다 써봤지만 효과를 보지 못했다.하루는 생산대에서 저수지공정에 갔다온 일군들을 위로한다면서 돼지를 잡아엎었다. 일년에 돼지고기를 한두번밖에 먹어보지 못했던 시기라 돼지추렴이 있는 날이면 동네명절날이 되여 들끓는다. 민옥이는 순대를 특별히 즐겨 자시던 시어머니가 생각히워서 제발제발 사정하여 왕래장부에 기입하기로 하고 순대밸을 둬어근 가지게 되였다. 민옥이는 시어머니께서 어서 빨리 병석에서 일어나기를 고대하고있었다. 아기가 태여나기전에 완쾌되여야 할텐데 하는 근심이 앞섰다. 맛있는 순대를 대접시키면 시어머니의 병이 절반쯤은 나아질것만 같이 생각되였다. 마대쪼박에다 돼지밸을 싸가지고 집으로 향한민옥의 마음은 즐거워났다. 오랜간만에 이런 심정을 가져본다. 그녀는 둥싯한 몸을오리처럼 뚱기적거리며 걸음을 재우쳤다.그 시각, 가마목에 누워있던 허씨가 어쩌라고 정신이 좀 나는지 벌벌 기여서 마루바닥을 넘어 정지문을 열고 문턱에 걸터앉아 몸을 문설주에 기대고 해볕쪼임을 하고있었다. 몸이 바짝말랐고 눈확이 움푹 꺼져들어가 보기에도 무서웠다. 돼지우리쪽에서 꿀꿀거리는 소리가 들려와서 허씨는 문설주를 짚고 간신히 일어섰다.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으나 집벽에 가리워 돼지우리가 보이지 않았다. 그때 민옥이가 울바자 삽짝문을 밀고 들어섰다. 정지문에 기대여 서있는 시어머니를 보고 흠칫 놀라며 걸음을 멈추었다. (이걸 어쩌나!) 원래는 시어머니가 가마목에 누워있으면 “조앙간(동쪽 사랑채)”시렁우에 살그머니 놓고나오려고 했던것이다. 민옥이가 황급히 돌아서려고 할 때 인기척을 들은 허씨가 삽짝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민옥이를 보는 순간에 허씨는 몸을와뜰 떨었다.“어마나, 귀신이야―”또 귀신소리를 내지르며 팔을둬어번 허우적거리던 허씨는 몸을 비탈며 문턱뒤로 서서히 넘어지면서 민옥의 시야에서 사라졌다.“어마이!”민옥이는 마대쪼박에 싼 돼지밸을 활 팽개치고 다급히 달려갔다. 문턱뒤로 넘어진 허씨는 네각을 벌리고 마루바닥에 쓰러진채 입을 벌리고있었다. 민옥이가 허둥대며 허씨의 상체를 끌어안아 일쿼세우니 머리에서 피가 뚝뚝떨어지고있었다. 만져보니 뜨근뜨근해나는 머리가 흥건히 젖어있었다. 마루바닥에는 땔나무를 패던 도끼가 누워있었다. 아마도 넘어지는 순간에 도끼등에 뒤통수를 맞은것 같았다. 민옥이는 허씨를 안아다 가마목에 눕혀놓고 찬장에서 된장을 한국자 떠다가 상처에 붙인다음 수건으로 머리를 동여매놓았다. 그리고는 동네에 나가 사람들께 알렸다. 기별을 받고 송식이가 달려왔을 때는 허씨가 이미 숨을 거둔 뒤였다… 3 송식이가 변했다.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되였다. 똑똑하게 변한것이 아니라 멍청하게 변해갔다. 꾹 다문 입이 온종일 가도 열려지질 않는다. 밥을 먹을 때만 열려졌고 술을 마실 때만이 열려졌다. 술이 알딸딸하게 들어가야 말을 했고 술이 거나해지면 말이 많아졌다. 원래는 술상을 피해다닌 군자였지만 지금은 술상을 찾아다니는 주정뱅이가 되였다. 술이 귀한 때라 술상이 쉽게 갖춰지지 않았지만 동네어느 구석집에서 술상이 생기면 어떻게 냄새를 맡았는지 꼭 찾아가군 했다. 원래는 체신스럽게 놀던 량반이였는데 지금은 술이라면 체면불구하고 달려드는 애물이 되였다. 처음에는 창피스럽게 밀막아내면 좀 주저주저했는데 후에는 낯가죽이 두꺼워져 몇마디 욕설같은것은 대수로워하지 않았다. 어떤 집에서는 괘씸하다고 술상에 앉은 그를 마구 끌어내기도 했다. 그럴 때면 “딱한잔만 더!” 하고빌붙는데야 어쩌는 수가 없게된다. 원래 시골에는 음식상에서 사람을 쫓는 법이 없다. 그러다가 마을안팎에서 얻어먹는 술도 모자라는지 웃마을과 아래마을로 드나들며 술상을 찾아다녔다.민옥이의 이마전 붉은 기미는 검은 점으로 되였다. 뜸자국이 이쁘기만 하던 기미를 오히려 더 흉하게 만들어놓았다. 완전히 떼버리려면 몇번 더 뜸을 떠야 하지만 허씨마저 세상을 뜬 마당에 기미와 더 싱갱이질 할 필요가 없게 되였다. 게다가 송식이가 점점 페인이 되여가면서 그 기미에 대한 관심이 없어졌다.민옥이는 민옥이대로 고생이 막심해졌다. 아래배가 점점 부풀어올랐다. 배속에다 호박을 품고있는것 같았다. 돼지우리의 굴암퇘지도 배가 점점 더 처졌다. 생산대 김대장이 생산대일에는 빠지라고 했지만 민옥이는 나갈수 있는 날까지 나가려고 했다. 생산대에다 진 빚이 아직도 백원을 넘었다. 거기에 송식이가 일을 제대로 해재끼지 못해 제공수를 받지 못했던것이다. 허씨가 돌아간 다음 민옥이네 부부간은 잠자리를 웃방에서 아래방으로 옮겼다. 인젠 민옥이가 가마목을 차지하게 되였다. 저녁이면 송식이가 어디서 술을 얻어마시고 비틀거리며 들어오면 민옥의 입이 터지게 된다. 어떤 때는 채찍처럼 쨍쨍 울렸고 어떤 때는 도끼로 장작을 패듯툭툭 울렸다. 송식이는 말이되여 그 채찍질에 몸을맡겼고 가둑나무토막이 되여 그 도끼질에 몸을 내맡기군 했다. 송식이에게는 한가지 특점이 있었다. 아무리 채찍질 해도 아프다고 아우성치지 않았고 아무리 도끼질 해도 죽는다고 고아대지 않았다. 다른 웬간한 남정네들처럼 우락부락 대들었으면 볼만한 “전쟁”이 벌어지군 했었을텐데… 민옥이는 오히려 그것이 더 괘씸하다고 련주포를 쏘며 더 극성을 부리군 했다. 허지만 나중에는 제풀에 물앉고만다. 민옥이는 간혹 모든걸 다 팽개치고 본가집으로 돌아갈가 하는 생각도 해보군 했다, 하지만 농촌에서 리혼률이 1프로도 안되였던 그 세월에 시집간 녀자가 되돌아오면 그것은 부모에 대한 제일 큰 불효였던것이다. 그리고 자기의 초라한 모습을 죽어도 부모님들한테는 보이고 싶지 않았던것이다. 그래서 민옥이는 자기의 운명이 어떻게 되든지간에 자기의 몸에 귀신이 붙어 어떤 조화를 부리든지간에 이를 옥물고 뻗쳐내리라고 속다짐했었다. 그녀는 앞으로 생의 희망을 배속의 아이한테 걸고있었다. 비가 구질구질 내리던 밤이였다. 민옥이는 이제나 저제나 하고 남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있었다. 창밖으로는 처마끝에서 떨어지는 비소리가 주르륵주르륵 들려온다. 고독하고 쓸쓸해났다. 그녀한테는 남편밖에 없다. 점점 미워지는 남편이지만… 동네에 나가면 누구도 그녀와 상대를 하려고 하지 않는다. 지어 코를 질질흘리는 코풀레기들마저도 그녀를 보면 공포에 질린 눈을 동그랗게 뜨고슬슬 피해달아난다. 아이들이 점점 더 고와보이는 그녀에게는 그것이 얼마나 큰 슬픔인지 모른다. 그럴 때마다 눈앞이 저절로 흐려오군 했다. 바야흐로 태여날 아이의 앞날이 근심되기도 했다.민옥이는 따끈따끈한 가마목에 누워 아래배를 살살 어루만졌다. 피곤한 몸이라 눈까풀이 자꾸 저절로 내려앉았다. 잠이 들가말가 할 때 우당탕! 하고 정지문이 활 열리며 찬기운이 훅 끼쳐들었다. 민옥이가 놀라 소스라치며 일어나 앉았다.“아이구, 이게 웬꼴이람?”문가에 나타난 송식이는 두손으로 문설주를 부여잡고 몸을 가누지 못해흔들거리고있었다. 어제 금방 빨아 오늘아침에 갈아입힌 작업복은 진흙에 게발리고 비물에 젖어 범벅이 되여있었다. 어디서 술을 얼마나 얻어마셨는지 낯이 퍼렇게 질려있었다. 민옥이가 엉기적엉기적 달려가 오른팔을 붙잡아주었다. 송식이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연신 울꺽울꺽 게트림을 해댔다. 역한 술냄새가 민옥이의 얼굴에 훅 끼쳐 메슥메슥해났다. 겨우 작업복을 벗겨내고 끌다싶이 해서 가마목에다 눕혀놓았다. 그런데 속이 볶아치는지 가만있지를 못했다. 이불이며 담요며 끌어안고 이리뒹굴고 저리 뒹길고 했다. 나중에 구석쪽에 가서 토끼처럼 몸을 잔뜩 옹송그리고 눕더니 그만잠잠해졌다. 잠시 지켜볼려니 이윽토록 감감해있었다. 잠이 들었으면 코를 골텐데 코도 골지 않았다. 별로 숨도 쉬는것 같지 않았다. 구석쪽 찬구들에 오래 누워있으면 감기에라도 걸릴가봐 민옥이는 다가가서 송식의 어깨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했지만 미동도 없다. 안되겠다고 민옥이는 가마목쪽으로 잡아끌자고 송식의 어깨를 잡고힘껏 당겼다. 그 순간에 송식이는 구불떡거리며 상체를 올리 뻗치고 왜가리처럼 목을 길게 드리우더니 욱―하고 토했다. 배설물이 뽐프아구리에서 뿜기는 물처럼 뿜겨져나와 그대로 주르륵 돗자리우에 쏟아져 쫠 퍼졌다. 시큼한 냄새가 고약하게 민옥의 코를 찔렀다. 가뜩이나 메슥메슥해서 속이 울컥거리던 민옥이도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앉아 왝왝토했다.잔뜩 토하고난 송식이가 곁에서 무엇인가 꾸물거리고있는것 같아 고개를 탈며 눈길을 돌렸다. 흐릿해지는 눈확으로 웬 녀자가 입으로 물을 콸콸 토하고있는 장면이 안겨들었다. 그는 눈을흡뜨며 술에 취한 사람같지 않게 발딱 일어섰다.“어, 귀…귀…”송식이는 후들거리며 피한다는것이 그만 자기가 토해놓은 배설물을 딛고 쭉 미끌어서 뒤로 나동그라졌다.“왜 이러세요?”민옥이가 자빠진 그를 부축하려고 손을 내밀었다.“으악!”송식이는 덴겁해서 그 손을쳐버리고는 벌떡 일어나 정지문을 박지르고 나가며 웨쳤다.“엄마, 귀신이요!”밖은 칠흙같이 캄캄한데 여전히 비가 줄줄 내리고있었다. 구들목에 우뚝허니 선 민옥의 눈에서는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미구에 민옥이도 뻘건 풀깍종이우산을 펼쳐들고 집문을 나섰다. 비물이 우산을 우두둑 우두둑 때렸다. 눈앞이 보이지 않아 발더듬으로 삽짝문까지 가서야 점차 야경에 비낀 물체가 눈에 우렷이 익혀왔다. 한발자국씩 내디딜 때마다 흙탕길이 질척거려 미끄러움을 탔다. 그녀는 똥기짝거리며 마을복판길에 들어섰다. 캄캄칠야에 불을 켠 집이라곤 없었다. (어디로 갔을가?) 민옥이는 신랑 송식이가 길가에라도 쓰러져있는가 해서 길량켠을 유심히 살폈다. 민옥이에게는 지금 그 신랑 송식이밖에 없다. 송식이마저 잘못되는 날엔… 문뜩,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가까운 곳에서 들려왔다. 주위를 눈여겨 살펴보니 길녘집 순철이네가 울바자삼아 쪼로롱 심어놓은 잔비술밑에 거뭇한 무엇이 웅크리고 있는것만 같아 보였다. 민옥이는 조심스레 다가서며 부드럽게 불렀다. \"여보! 여보!\"그 거뭇한 물체가 움찔거리자 비술나무가 우시시 떨며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신랑 송식이가 틀림 없었다. 일시 반가움이 북받쳐 민옥이는 우산을 활 내뿌리고 쫑드르르 그 앞으로 달려갔다. 그리고는 몸을 쭈크리고 손을 내밀어 어듬속을 더듬었다. 순간, 그 거뭇한 물체가 휙- 하고 어둠속을 빠져나갔다. 와뜰 놀란 민옥이는 그대로 그 자리에 폭 물앉고말았다. 뒤이어 꿀꿀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뉘집 돼지우리에서 뛰쳐나온 꿀꿀이였다. 말할수 없는 설음이 또다시 몸을 적셨다. 그녀는 그 자리에 그대로 퍼더버리고 앉아 이윽토록 흐늑흐늑 흐느껴 울었다…비물에 눈물에 촉촉이 젖어든 몸을 끌며 밤길을 더듬어 마을을 한바퀴 돌았으나 송식이를 찾지 못했다. 비가 점차 그치며 바람이 일기 시작했다. 찬기운이 서리는 이슬비가 이따금씩 얼굴에 훅 끼쳐들며 몸이 오싹 떨렸다. 방향없이 걷다가 오똑 멈춰선 곳이 내봉하기슭이였다. 굼실굼실 흐르는 내봉하가 안겨들었다. 거폭의 이불천이 바람에 펄럭이는것만 같기도 했다. 허지만 펄럭거리는 소리는 없었다. 강물은 쉬임없이 부지런히 흐르고있었다. 민옥이는 우산을 가두어 바위돌우에 놓고 두손으로 머리를 정히 추슬려올렸다. 딱지가 앉았다가 떨어진 이마전의 기미가 손끝에 껄끄럽게 맞쳐왔다. 손거울이 있으면 한번 어둠속에서라도 비춰보고 싶어졌다. 일찍 자기의 못난 얼굴을 이쁘게 장식해주었다고 고맙게 여겼던 그 기미, 지금 그 기미가 자기의 일생을 망치고 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미여지는것만 같았다. 금불골에서 농사에 미립이 터 \"꼬리없는 소\"라고 불리워왔다던 시아버지도 그 기미 때문에 돌아가셨다지, 도야지 한마리라도 더 치겠다고 이악스럽다 할만치 아득바득 살아오셨던 시어머니 허씨도 그 기미 때문에 돌아가셨다지, 마음씨 고와 \"법 없이도 산다\"는 신랑 송식이도 지금 그 기미 때문에… 당금 태여날 배속의 아기 또한 그 기미 때문에 어떻게 될런지? (민옥아, 넌 왜 이 세상에 기미를 달고 태여났느냐!)시집오기전까지 민옥이는 남한테 해가 끼치는 노릇은 절대 하지않았다. 그런데 지금 자기가 한 가정을 망쳐먹고있지 않는가! 그냥 살아가야 하는가? 하루라도 더 살면 그만큼 남에게 더 해를 끼치게 되는 것이 아닌가? 어릴 때 마을의 농민야간강습소에 문화교원으로 있던 민선생이 하던 말이 떠올랐다. 갈래갈래 강물은 나중에 모두 바다로 흘러드는데 일망무제한 바다는 끝이 없다는것이다. 지구에서 땅보다 바다가 더 크고 넓다고 했다. 그 바다속에는 룡궁이 있고 룡궁속에는 룡왕이 있는데 룡왕은 아주 인자한 왕이여서 무슨 요구나 다 들어주고 그 요구대로 실현시켜 준다고 했었다…민옥이는 다시한번 굼실굼실 흐르는 내봉하를 내려다보며 입술을 감쳐물었다. 민옥이는 두손을 들어 다시금 머리를 추슬려올리고 쓰다듬은다음 옷깃을 여미였다. 그리고는 몸을 돌려 발걸음을 뗐다. 둬어발자국 떼고나서 바위돌우에다 놓은 우산이 생각히웠다. 돌아서려다가 자기에게 우산이 더는 필요없다고 생각하고는 그냥 그대로 내처 걸었다. 강가로 내려가는 숲속오솔길에 들어서니 자갈이 밟혀오면서 잘그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민옥의 눈앞에는 이 자갈길로 신랑 송식이와 함께 물고기를 잡아가지고 오던 정경이 떠올랐다. 송식이는 물고기잡이에 능수였다. 다래끼안에서 팔딱거리는 물고기를 들여다보며 송식이와 깔깔거리며 웃어대던 장면도 떠올랐다.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갈수만 있다면… 민옥이는 또다시 눈물이 솟구치며 눈앞이 흐려왔다. 텀벙텀벙 걸어가니 강변습기가 서늘하게 안겨왔다. 드디여 강가에 이르렀다. 고무신을 벗어 자갈우에 가지런히 놓고 강물에 들어선 민옥이는 두손으로 강물을 떠서 푸푸거리며 둬어번 얼굴을 문댔다. 눈물도 씻기고 서러움도 씻기였다. 모든것이 담담해지는상 싶었다. 앞으로 몇걸음 더 들어서니 물이 정갱이를 넘으며 아래배를 처절썩 쳤다. 차거움이 뼈에 젖어들며 배안이 꿈틀거렸고 약간의 진통이 느껴졌다. 민옥이는 잠시 서서 망설이였다. 그러다가 다시 입술을 감쳐물고 앞으로 나가려고 할 때였다. \"엄마, 귀신이야, 물귀신!\"하는 웨침소리가 밤의 정적을 깨뜨리며 강기슭으로부터 울려왔다. 분명, 신랑 송식이의 웨침소리였다. 민옥이는 몸을 홱 돌렸다. 그리고는 절랑절랑 강물을 헤가르며 기슭으로 되나왔다. 웨침소리는 마을쪽으로 사라지고있었다. 민옥이는 맨발바람으로 그 웨침소리를 따라갔다…민옥이와 송식이는 이삼일이나 들어누워 앓았다. 앓고난 민옥이는 겨우 몸을 움직일수 있었고 송식이는 찐만두처럼 팅팅 붓겼다. 발바닥도 밋밋하게 되여걷기 힘들었고 눈두덩도 부어서 실눈이 되여버렸다. 또 서너날 그냥 집구석에 박혀 몸조리를 해서야 말린 시라기배추처럼 시들시들해졌다. 시들해지니 또 술생각이 나는모양이였다. 그는 민옥이의 잔소리도 마다하고 어정어정 동네에 나가 이집저집 기웃거리며 술냄새를 맡았다.해산 막달이 되니 민옥이는 몸을 움직이기도 가빠졌다. 가끔 진통이 엄습해오기도 했다. 집안이며 뜰안이며 말이 아니였다. 잡동사니들이 자질구레하게 널려져 어지럽기 그지없었다. 그래도 송식이는 매일 동네와 아래부락으로 술마시러 다녔다. 집안일에는 손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얼굴이 늦가을 호박처럼 누렇게 누물누물해졌지만 몸은 점점 말라갔다. 바람부는 날이면 몸을 가누지 못해 휘청거리기도 했다. 그처럼 고대하며 기다리던 첫아이의 출산에 대해서도 무관심해졌다. 밤이면 가끔씩 헛소리를 내질러 민옥이를 놀래우기도 했다.민옥이는 생산대일에 더 나갈수 없게 되였다. 돼지는 금방 새끼를 낳게 될 굴암퇘지만 남기고 나머지 두마리는 팔아버렸다. 그 돈으로 해산한다음 쓸 용품이며 아기의 옷견지며 두루두루 갖추고 나머지는 송식이에게 약을 써줘야겠다고 생각했다. 남산같이 부푼 배를 내밀고 돼지죽통도 들기 힘들었지만 누구 하나와서 거들어주는 사람이 없었다. 편지를 띄워 본가집 어머니나 올케를 오게끔 생각했다가도 포기했다. 본가집에서 자기가 지금 처해있는 궁상을 보게 되면 얼마나 속상해하실가! 민옥이에게는 그것이 더 가슴 아픈일이였다. 오직 아이만 낳으면, 아이만 있으면 모든것이 다 편안해질것만 같았다.우르릉― 꽝! 요란한 우뢰소리에 아기를 안고 놀던 민옥이가 꿈속에서 깨여났다. 아직 해가 넘어가기전인데 창밖이 시커매났다. 급기야 문을 열고 내다보니 검은구름이 뭉게뭉게 밀려왔고 고개너머로 번개불이 하늘을 찢어놓고있었다. 민옥이는 돼지굴꼭대기우에다 펴놓은 겨가루가 생각났다. 좀벌레가 생겨서 말리우느라 헌돗자리를 깔고 펴놓았던것이다. 문턱을 넘어서는데 아래배가 찢어지는듯 아파났다. 숨이 넘어갈듯해서 그녀는 문설주를 부여잡고 서서 아래배에다 힘을주며 진통을 억제시키려고 했다. 이윽토록 서있었지만 진통은 그냥 참을수 없이 밀려들었다. 비방울이 후둑후둑 떨어지기 시작했다. 더는 기다릴수 없어 민옥이는 가까스로 마루터에서 내려 엉기적엉기적 걸었다. 번개불이 날카롭게 번쩍이더니 비가 주룩주룩 쏟아지기 시작했다. 겨우 돼지우리까지 가서 란간을 붙잡았다. 피끗 돼지우리안을 들여다보던 그녀는 이상한 감을 느꼈다. 찬찬히 들여다보니 굴암퇘지가 비스듬히 누워서 숨넘어갈듯이 헐떡거리고있었다. 눈알이 당금 튕겨나올듯이 충혈되였다. 아래쪽을 여겨보니 꼬리밑이 피범벅이 되여있는데 그속으로 해말간것이 꼼지락거리며 나올듯말듯 하고있었다.“어마나, 끝내…”민옥이는 우리안으로 들어가려고 쪽문삼아 빗장살삼아 가로 걸쳐놓은 널판자쪽으로 몸을 옮기려고 했다. 헌데 다리가 움직일수 없게경직되였다. 뒤이어 극심한 통증이 엄습해왔다. 입술을 옥물고 다시 왼다리를 들려고 하니 하신이 찢어지는듯 숨이꺽 막혀왔다. 누군가 량쪽에 갈라서서 다리를 잡아당기는것만 같은 감이 들었다. 두손으로 아래배를 끌어안으며 내려다보니 다리를 타고 흘러내린 피가 허연 코신을 붉지그레 물들이고있었다. 너무도 아파서 눈을 찔끔감으며 아래배에다 힘을 주었다. 하신이 스르륵 내려앉는것만 같았다. 두마령 내리막길에서 뻐스에 앉은 감각이였다. 뒤이어 사타구니밑이 후끈해났다. 눈앞이 아물아물해졌다. 죽는것만 같아소리치려고 했다.“아, 아-”숨이 차올라 소리가 나가지 못했다. 겨우 숨을 돌리고 뒤집쪽에 대고 다시 입을 열었다.“아주머니―”허나 육중한 우뢰소리가 그녀의 가냘푼 비명을 말아먹었다…그 시각, 송식이는 아래마을 청인집 왕가네 뜨락에서 왈왈 토하고있었다. 왕가네는 오늘 둘째며느리를 맞아들이고있었다. 호박골 몇개 부락치고 한족이 그 한집밖에 없는데다가 평상시 마음을 후하게 써서 잔치객들이 많았다. 송식이는 점심부터 술상에 앉아 연신굽을 냈다. 낯이 새파랗게 질려가는걸 보고 한상에 앉은 동네사람들이 그를 밀어냈다. 그는 다른상에 옮겨앉아 또 연신굽을 냈다. 곁사람들이 보기조차 무섭게 마셔댔다. 마지막까지 이상 저상돌아앉으며 마시다보니 나중에는 흙이 되고말았다. 집안에서 토하기 시작한걸 누군가 잔치집을 어지럽힌다고 밖으로 끌어냈던것이다. 온몸을 구불떡거리며 토하던 송식이는 몸을 가누지 못하고 몇발자국 비틀거리더니 앞으로 푹 꼬꾸라졌다. 엎어져서도 계속 꾸역꾸역 토했다. 동네 젊은이 박철이와 종수가 각각 그를 겨드랑이에 껴서 일쿼세웠다. 더 토할것이 없는지 누런열물만 게질게질 나왔다. 번개치고 우뢰소리가 터지니 그들은 송식이를 왕가네 마구간으로 끌고들어갔다. 짚덤불우에다 비스듬히 눕혀놓으니 잠시 잠잠해졌다. 헌데 미구에 다시 토하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시뻘건 피를 콸콸 토했다. 당황해난 박철이가 뛰쳐나가 사람들을 불러들였다. 년세있는 나그네들이 들어와 보고는 역시 놀라서 일시 어쩔줄 몰라했다. “이거 큰일 나겠구나. 박철이와 종수가 냉큼 돌아가서 김대장과 이집각시한테 알려라. 어서!”박철이와 종수는 두주먹을 불끈쥐고 달음박질 쳤다. 둘이 동네어귀에 들어설 때 소낙비가 좌르르 쏟아졌던것이다. 박철이가 김대장이네 집으로 향하고 종수가 송식이네 집으로 향했다. 종수가 질척거리는 진탕길로 철버덕철버덕 달려서 송식이네 집에 이르렀을 때에는 정지문이 활 열려져있었고 집안은 텅 비여있었다.밖에 나와 “아주머니! 아주머니!” 하고 몇번 불렀는데 응답이 없었다. 혹시나 해서 채마전 한쪽끝에 세워놓은 거적같은 변소앞에 가서도 몇번 불러보았다. 역시 응답이 없었다. 하늘가에서 우뢰소리만이 들려올 뿐이였다. 할수없이 돌아가려고 삽짝문을 나섰다가 이 집에 돼지우리가 있고 또한 금방 새끼를 낳을 굴암퇘지가 있다는 생각이 번개처럼 피뜩떠올랐다. 그는 다시 돌아서서 집뒤에 있는 돼지우리쪽으로 돌아갔다. 돼지우리앞에 이른그는 아연해지고말았다. 눈앞에 나타난 참상에 그는 눈을 찔끔 감았다가 다시 떴다. 돼지우리안에서는 굴암퇘지가 새끼를 낳고있었고 돼지우리밖에는 민옥이가 쓰러져있었다. 비물이 그녀의 하반신으로부터 슴배여나온 피를 씻어내리고있었다. 오른쪽 팔소매를 꽉 앙다문 민옥이가 눈을꼭 감고있었다. 비물이 얼굴에 떨어지면서 뽀얀 물보라를 일구고있었다. 종수는 주춤주춤 하다가 끝내는 민옥이의 어깨를 툭툭 쳤다.“아주머니, 아주머니!”민옥이는 천천히 눈을 뜨면서 팔소매에서 입을 뗐다.“아주머니, 송식형님이 지금 왕가네 집에서 피를 토하고있소.”민옥이는 그 말을 들었둥말았는둥 팔을내밀어 뒤집 장철이네 집을가리켰다.“저… 가위를…”종수는 인차 그 뜻을 알아차리고 날렵하게 울바자를 뛰여넘어 뒤집 장철이네 정지문을 활짝 열어젖혔다.뒤이어 장철의 어머니와 아버지가 허둥지둥 뛰쳐나왔고 종수와 장철이도 그뒤로 따라나왔다. 그들은 두집사이에 경계선인 울바자를 활활 번져놓고 민옥이를 안아다 장철이네 가마목에 눕혔다. 미구에 집안으로부터 “응아!” 하는 아기의 첫 고고성이 터져나왔다. 호박같이 생긴 아들이였다. 그 시각, 왕가네 마구간에서 피를 다 토하고난 송식이가 마지막 숨을 거두고있었다… [<장백산> 2009년 6호]
26    세월아, 좀 천천히 가려무나! 댓글:  조회:932  추천:0  2009-09-14
아기를 키우는 엄마라면 누구나 다 그 아기가 하루라도 빨리 자라나기를 원할것이다. 걸레짝처럼 구질구질한 세월을 끌어당겨다 지릿한 아기의 기저귀마냥 꾹꾹 짜서 한나절의 해볕에 말리우듯, 쪽박으로 아침저녁 물을 주며 콩나물을 기르듯 하루볕이 새롭게 느껴지는 심정이다. “어서어서 자라고 빨리빨리 크거라!” 하루가 다르고 한달이 다르게 크는 아이들을 바라보는 그 심정은 얼마나 뿌듯할가! 헌데 어떤 엄마는 그것도 성차지 않아 키가 크는 생장소를 먹인다, 이러저러한 비타민을 먹인다고 A, B , C를 부른다. 10년, 20년이 지나 그 아기가 제멋에 자랐다고 워들렁거리며 요람을 떠나 밖으로 물덤벙술덤벙 나돌아다닐 때에야 세월이 너무나도 빨랐구나 하는 원망과 근심에 쌓이게 된다. 우리 사회의 발전도 대개 아이들의 성장과 비슷한 점이 있다. 금년은 공화국건립 60돐을 맞는 뜻깊은 해이다. 60년이란 로정을 걸어온 공화국도 인젠 바야흐로 무르익어가는 사과가 되였다. 초가을에 과원에 가서 무르익어가는 사과를 살펴보면 양지쪽을 향한 면은 발가우리하게 익어가고 음달쪽을 향한 면은 여전히 익지 않은 상태로 퍼러딩딩해있는것을 볼수 있다. 그런 사과는 잠시 따지 않고 둬두면 늦가을에 가서야 다 붉어진다. 공화국의 첫 30년은 사과의 퍼런 면이 익는것처럼 그 발전이 굼떴다. 인간이 사는 세상이라면 우선 먹고 입고 자는 집이 첫째 요소일것이다. 첫 30년은 공화국에서 먹는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했었다. 최저한 굶어죽지 않는 생존문제는 해결하였으나 수요에 따라 먹을수 있는 풍요로운 환경은 지워주지 못했었다. 가불간 몇십년 동안 6억 인민이 “워워터우”(옥수수가루로 찐 떡)를 떠날수 없었으니깐. 그것도 배부르게 먹을수 있는 집이 몇집이 안되였다. 지금은 그것이 건강식품이라고 다시 해들고 그제날 옛맛을 재차 음미해보는 사람들도 두루 있긴 있다. 그다음 6억 인민이 몇십년 동안 입어온 옷맵시를 살펴보자. 우선 색상이 단조로웠다. 침침한 검정색이 아니면 곤색이였다. 후에 “문화대혁명”이 터지는 덕분에 누런 국방색이 첨가되여 좀 생기를 띠기도 했었다. 국방색웃옷에다 곤색바지를 받쳐입으면 그당시 청춘남녀들의 류행되는 패션이였다고 할수 있겠다. 필자가 연길시3중 “모택동사상문예선전대”에 있을 때 대원들의 공연복으로 국방색웃옷을 갖추야 했고 거기에 하얀 셔츠도 갖춰야 했다. 안에다 하얀 셔츠를 입고 그우에다 국방색웃옷을 받쳐입고 단추를 채우면 목깃둘레에 실오리 같은 하얀 선이 레이스처럼 내돋친다. 고 햐얀 선이 없기와 있기가 완전히 한 사람의 형상을 바꿔놓는다. 참 귀신 같은 디자인수작이라고 할가! 헌데 한번 공연에 땀에 절은 셔츠를 빨아야 했기에 최저 두세벌 갖추어야 했다. 당시 집집의 가정형편을 보아 한 아이에게 셔츠를 두세벌 갖춰줄 형편이 못되였다. 그래서 우리는 깃만 달린 가짜 셔츠를 만들어서 겨드랑밑으로 줄을 껴서 어깨우에다 걸쳐놓군 했는데 그것이 마치도 녀자애들의 젖싸개와도 같아 매번 그걸 낄 때마다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군 했었다. 그 세월에 낡은 옷을 기워입고 다니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을가! 시집온 새색시의 일솜씨가 낡은 옷을 깁는데서 엿보였고 아줌마들이 제일 부러워한 것이 재봉침이였다. 재봉침만 있으면 낡은 옷을 새옷처럼 만들어낼수 있었고 무릎도리나 엉뎅이쪽을 곱게 기워낼수 있었던것이다. 그다음은 잠자리나 꿈자리가 있는 집이다. 공화국 첫 30년동안에 대부분 백성들은 한집에 한구들로 아이들을 평균 대여섯명씩 키워냈었다. 밤이 되면 한구들에 형님오빠, 누나언니 할것없이 한이불을 덮고 쪼로롱 누워 자야 했다. 그러면 집안이 발을 옮겨디딜 자리도 없게 된다. 한 녀석이 사타구니에다 이불을 감고 딜딜 구을면 끝머리에 서너놈은 발가숭이로 태질하다가 옹송그린채 잠을 자야 했다. 장밤 알몸에다 바람 맞고도 이튿날 한놈도 배앓이를 하는 녀석이 없었다. 참, 괴상한 현상이였다. 더 괴상한것은 우리의 아빠와 엄마가 그런 환경속에서 어떻게 “밤작업”을 했는가 하는것이다. 그래도 거침없이, 거창하게 했기에 곰같은 동생들이 련이어 나왔겠지. 우리 웃집에는 자식이 9명이였는데 맏아들과 막내의 년령차이는 20살이였다. 그 가운데서 물에 빠져죽은 다섯째를 내놓고도… 스무평방이나 될가말가한 집안에서 말이다. 지금에 와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였다. 우리 “웅덩개마을” 북쪽 언덕위, 지금의 공원소학교운동장 남쪽에는 뿌연 기와에 철근콩크리트로 지은 아담한 일본식가옥이 한채 있었다. 공원가에서는 아마도 제일 좋은 고급가옥으로 첫손 꼽아야 할것이다. 저명한 화가 석희만선생님의 저택이였는데 광복전에 지은 집이였다. 80년대후기에 들어와서 파가이주 바람에 무너졌다. 근 40년동안 전반 공원가에서 그 집이 민가중 첫자리를 굳혀왔으니 연길시 가옥건설발전이 얼마나 굼떴다는것이 알고도 남음이 있지 않겠는가! 이와 상반대로 공화국 후 30년은 그 발전이 상상외로 빨랐다. 우선 먹는 문제가 해결되였다. 배를 두드리며 먹을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먹고싶은것을 다 먹을수 있게 되였다. 너무 잘 먹어서 탈이 나고있다. 옷견지도 수시로 바꿔입을수 있는 수준에 이르렀다. 색상도 봄날의 화원처럼 울긋불긋 각양각색이고 디자인도 요란스레 기괴할 정도이다. 어떤 녀자들은 바지가랭이 아래도리를 아깝게도 툭 잘라서 내버리고 시뻘건 정갱이를 내놓고 다닌다. 뭐, 그것도 류행이라나! 전번에 한 중년녀자가 급병으로 죽었다. 함께 태워서 하늘로 날려보낼 옷견지들을 꺼내놓으니 몇 박스나 되였다. 대부분 한번도 입어보지 못한 새옷들이였다. 천당에 올라가서 몇백년은 몰라도 몇십년쯤은 슈퍼에 갈 필요가 있을것 같지 않았다. 지금은 시민들의 거주조건도 많이 개선되였다. 옛날처럼 대여섯이 한이불을 덮고 자는 아이들이 없어졌다. 집집마다 침실, 거실, 서재, 주방, 위생실이 따로따로 있게 되였다. 연길시내를 한바퀴 돌아도 공용변소를 찾아보기 힘들게 되였다. 80년대초반이라고 기억되는데 주정부 북쪽켠에 4층 아빠트가 지어져 어느 한 집으로 초대되여 식사한 적이 있었다. 술상을 차려놓고 누군가 마중켠 위생실에 들어가 쏴- 하고 소리를 내며 갈기니 녀자들이 캐득거렸다. 좀 별란감이 들었다. 깨끔치 못하게 집안에서 대소변을 보게 만들다니! 헌데 지금에 와서는 집안에 위생실이 없는 집에 들어가면 오히려 별란감을 느낀다. 개명치 못하게 집안에 위생실도 안 앉혔나! 지금은 새집에 들어 벌써 5, 6년 살고나면 양식이 낡았다고 더 좋은 신식아빠트로 이주해가는 집들이 적지 않다. 공화국 후 30년이 이렇게 발전이 빨랐고 그와 동시에 세계경제도 발전이 아주 빨랐다. 서울에서 아침에 비행기를 타고 상해로 출근했다가 저녁이면 또 퇴근해서 서울로 돌아가는 보스가 있다니 정말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일이다. 지구가 바야흐로 한동네로 되고있다. 죄꼬만 연길시내바닥에서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동네마실 다니듯 서울행차를 하고있다. 발전이 빠르니 자연 그 덕을 백성들이 본다. 아츨한 아빠트가 수풀처럼 일어서고 차흐름이 개울물처럼 도시의 골목길을 메우며 흐른다. 지금 만원쯤은 큰돈이 아니다. 일년에 수십만원, 수백만원씩 버는 사람이 꽤나 된다. 중산층이 일떠서고 부호층이 앞자리를 다투는 단거리시합이 벌어지고있다. 시합에 참가하고보니 숨이 차오른다. 숨이 차도 그 시합에 참가해야 남못지 않게 살수 있는 세월이니깐. 숨이 차도 남에게 뒤떨어져서는 안된다. 그러니 자연 부르튼 타발이 튕겨나간다. 제밀할것! 인간세상은 원래 좋을수록 불만이 많은 법이다. 그래서 자꾸 더 발전! 발전! 하며 닫는 말에 채찍질을 하게 되는것이다. 금년은 소해이다. 말이란 놈은 그래도 채찍질 하면 빨리 뛰면서도 갈 곳까지는 간다. 헌데 소란 놈은 궁둥이를 쳐서 빨리 달리도록 하면 멀리 못 간다. 필자가 말하고저 하는 중심이 바로 여기에 있다. 지금 전쟁보다 그 피해가 더 무섭다는 차사고를 분석해보면 십중팔구는 초속에 그 원인이 있다고 한다. 발전이 빠르면 좋은 점이 많다. 또한 그만큼 나쁜점도 초래하게 된다. 이럴 때에 모주석의 2분법을 다시 외워보면 그 위대함이 절실하게 느껴진다. 발전이 너무 빠르면 우선 자원이 고갈된다. 석유, 석탄, 광철… 그다음 자연생태환경이 균형을 잃어버리게 된다. 내몽골에서 호도거리책임제를 실시하게 되니 양, 말, 소가 대량으로 늘어났다. 개인도 돈을 벌고 가공업도 일떠서고 나라에도 공헌이 컸다. 네 좋고 내 좋고 다 좋은 판이 되였다. 허나 좋은 판국은 언제나 오래 못간다. 먹새좋은 양들에 의해 풀이 없어졌다. 풀이 없는 땅에 바람이 부니 먼지가 일고 모래가 일었다. 새파란 초원이 점차 누런 사막으로 변해갔다. 사막에서 양을 길러낼 뾰족수가 있는가! 아무리 발전이 빠르다고 해도 아직까지는 모래알만 먹고 자라는 우량종양은 개량해내지 못했다. 그러니 개인도 양을 더 기를수 없게 되고 가공업도 파산되고 나라에서도 황사피해를 입게 되였다. 한시기 세계경제도 급속히 발전했다. 월가의 금융거두들이 피우던 려송연을 한번 툭 털면 사대양 오대주에 그 재가 흩날릴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경제의 급속한 발전은 주식시장를 흥성케 한다. 앉아서 커피나 차물을 후르륵 후르륵 마시면서도 몇만원, 몇십만원씩 벌수 있었다. 돈이 돈을 버니 너도나도 돈주머니를 안고 달려와서는 여기에다 한줌, 저기에다 한줌, 툭툭, 사처에다 미련없이 처넣는다. 하루아침새에 신사적인 투자인이 되여 슬슬 열매만 따먹는다. 그 피땀으로 바꿔온 거금들이 주식시장으로 사품치며 흘러드니 모든 업계가 새끼에 새끼를 치면서 팽창한다. 대출이 빈번해지고 리식이 올라가는데도 도처에서 자금을 인입하느라고 야단이다. 돈만 주면 할아버지다. 돈이 많이 들어오면 얹혀둘 필요가 없다. 그 돈으로 더 큰돈을 벌어야 하니까. 그래서 웅대한 계획이 세워지고 사처에서 집을 짓고 기업을 앉힌다. 땅값이 개구리처럼 풀꺽풀꺽 뛰여오르지만 별문제다. 그만큼 집값을 올리고 제품을 더 많이 생산해내면 되는거다. 하루밤사이에 집값이 한층, 두층씩 올라가니 도무지 하늘끝이 바라보이질 않는다. 전기사닥다리라는 엘레베터를 타고서도 늦다고 발을 동동 구른다. 그러니 거품이 안생기게 되겠는가! 고요한 물에다 자갈을 서너대야씩 한꺼번에 뿌려보시라, 거품이 안생기는가고! 이번에 전 지구촌을 휩쓴 금융위기가 전세계에 다시한번 경종을 울렸다. 오바마가 아메리카합중국의 대통령이 되였다고 국면이 돌려질가! 누구도 예측하기 어렵다. 반드시 금융헌병대가 조직되여 세계금융기구를 정돈하고 주식시장이 더는 도박판이 되게 해서는 안된다. “말아, 좀 천천히 달리려무나…” 저기 저 일망무제한 초원의 끝머리로부터 녀중음가수 마옥도의 웅글진 노래가락이 미풍에 서서히 실려오는것만 같다. 말을 탄 녀석도 인젠 고삐를 늦출 때가 되였고 소를 탄 녀석도 유유하게 피리나 불 때가 되였다. 소란 놈은 원체 엉기적거리며 뜨적뜨적 걷기를 좋아한다. 그 성격에 맞춰줘야 목적지까지 무난하게 갈수 있는것이다. 옛날 로인들도 무정하게 흘러가는 세월을 두고 한탄했었다. 그래서 “백구과극(白驹过隙)”이란 말도 나왔고 일대 거인인 모택동은 “손가락 튕기는 순간”이라고 개탄했었다. 세인들은 무슨 뚝이라도 쌓아놓고 세월의 흐름을 막고 무슨 금실이라도 늘여서 세월의 발목을 동여매자고 무등 애를 써왔었다. 필자도 엊그저께 학교를 졸업하고 편집부문을 살며시 열고 들어선것 같은데 벌써 근 30년 세월이 흘러 60고개를 바라보게 되였다. 후, 어쩌노? 해야 할 일을 절반에 절반도 못해놨는데… 오십고개를 넘어서부터는 시간이 총알처럼 나간다. 하루하루가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겠다. 꺼풋하면 하루가 지나간다. 정상적인 사업실무를 내놓고도 저녁술이 떨어지면 최저한 그날 뉴스프로는 들어야겠지, 최저한 련속드라마 한집쯤은 봐야겠지, 최저한 인터넷에 들어가 한고패 “헤염”쳐봐야겠지, 전화를 받고는 최저한 친구생일에 가서 술잔이라도 나누어야겠지, 최저한 천당으로 가시는 분에게 묵도라도 드려야겠지, 최저한 결혼잔치에 부조라도 해야겠지, 최저한 아들딸의 일에 참녜해야겠지, 최저한 손주녀석을 안고 곱다고 해줘야겠지, 잠자리에 들면 최저한 마누라의 허벅다리라도 슬슬 어루만져줘야겠지, 최저한 량쪽 부모님집에 한번쯤은 들려봐야겠지, 최저한 친척나들이쯤은… 숨이 차오른다. 언제면 만사구애없이 남산소나무그늘아래에서 보고싶은 책이나 뒤적이며 세월을 보낼수 있을가! 세월이 사람을 너무 숨가쁘게 만든다. 백년도 못살 인생을 천년만년 살것처럼 뛰고 뛰고 또 뛴다. 국내로도 뛰고 외국으로도 뛴다. 오십이 넘었다면 좀 쉬면서 뛰자! 할 일이 많다 해도 할 일을 다 해놓으면 우리의 후배들이 무얼 하겠는가! 옛날에는 남산에도 범이 둥지를 틀고있었다는데 우리의 로선배들이 다 잡았기에 지금은 우리가 범을 잡자고 해도 범을 찾아볼수가 없게 되지 않았는가! 무슨 일이나 천천히 해서는 랑패가 없다. 중화민족의 한가지 고유한 특점이 “만만디(慢慢地)”가 아닌가! 그 “만만디”가 앞으로 이 지구의 땅떵어리에다 거대한 기적을 이뤄낼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오늘날 너무나도 빨리 흘러가는 세월에 대고 한마디 웨치고싶다. 세월아, 좀 천천히 가려무나!
25    [소설] 호박골의 떡호박(하) 댓글:  조회:1025  추천:27  2009-07-27
4     두달후에 촌장선거가 끝났다.    “세월이 둔갑하고있나? 나원 더러워서, 퉤퉤! 이제 호박골이 망해빠지는 꼴을 어찌 보나. 일찌감치 북망산에 가서 눈을 감아버리는것이 상책이지.”    “모두들 제정신이 있소? 그 바보같이 엉뚱한 눔을, 아무것도 모르는 도깨비를 촌장시키다니? 나원 기가 딱 막혀서!”    “아니 금년엔 서기와 촌장을 겸임시킨다더니 왜 비당원을 시킨다오? 그래 우리 금불촌 당원들이 다 죽었는가!”    “암, 알구두 모를 일이야. 그 봉철이 아새끼는 왜 종덕이를 올려놓지 못해 그렇게 악을 쓴다우?”    “그러게 말이우 성님, 난 봉철이 그 아새끼보다 종수란 눔이 더 괘씸하더라이. 그눔이 돈깨나 쓰며 뒤에서 종덕이를 올리받쳤다네!”…    동구밖의 비술나무아래에서 몇몇 동네령감들이 모여앉아 선거끝의 불만을 토해내고있다. 모두들 입에서 뱀이 나가는지 구렝이 나가는지 모르고 침방울을 튕기고있을 때 맨끝에 앉아 담배만 폴싹폴싹 피우던 최학빈령감이 담배꽁초를 부벼끄고 일어나면서 “에헴!” 하고 마른 기침을 깇어댔다.    “관들 두시우! 하늘이 무너지겠수. 똑똑하다구 잰내비처럼 들볶아치던 눔들이 할 때보담 무뚝뚝한 눔들이 걸썽걸썽 할 때가 더 잘되더라니 이제 두고 보시우, 에헴!”    최학빈령감은 해수로 꼬부장한 등을 연신 촐싹이며 마을로 내려갔다. 모두들 그 령감이 내려가는 뒤모습을 바라보며 입을 다물어버렸다. 어느때든가 마을내에서는 최학빈령감이 신을 업었다는 뒤소문이 돌기도 했었다.    박종덕이가 촌장이 되였다. 호박골도 웃겼을뿐만아니라 린근 촌부락도 웃겼다. 촌장이 된 종덕이 몸에서는 여전히 어리무던한 촌티가 흘렀다. 두가지만은 변했다. 하나는 김봉철서기의 조언에 따라 고기잡이를 그만두고 신문잡지에 눈길을 돌린것이고 다른 하나는 리종수 원촌장의 요구대로 아래우 깜장 양복에 까만 구두를 신고 다니게 된것이다.    첫 한두달은 촌내 두개파의 “전쟁”으로 “포연”속에서 보냈다. 봉철이네 “보수파”와 종수네 “개혁파”지간의 “전쟁”이였는데 승자도 없었고 패자도 없었다. 량자간에 “피”만 흘리고 손실만 보았던것이다. 촌민위원회는 7명으로 새롭게 조직구성을 짰는데 종덕이를 제외하고 봉철이네 인마가 3명, 종수네 인마가 3명, 소위 “무소속” 지명인사가 1명이 들어가게 되였다.    진정부나 상급에서 촌장회의를 부르게 되면 종덕이는 회의내용과 상황에 따라 봉철이를 보내지 않으면 종수를 보내군 했다. 촌민들이 무슨 일이 있어 찾아오면 역시 일에 따라 봉철이를 내세워 처리하게 하지 않으면 자연 봉철이와 종수가 촌에서나 촌 밖에서나 촌장행세를 할 때가 많았다. 그래도 종덕이는 개의치 않았다. 일이 잘되든 못되든 헤벌쭉거리며 잘했다고 춰주기만 했다. 헌데 어떤 때는 봉철이가 처리한 일을 종수가 꼬집고 나설 때가 있었고 종수가 처리한 일을 봉철이가 꼬리잡고 나설 때가 있었다. 그래서 그들 둘지간에 개니 쇠니 하며 말다툼 할 때가 있었고 때린다 친다 하며 손찌검질 할 때도 있었으며 지어 죽인다 살린다 하며 낫이나 삽자루를 들고 서로 허둥거릴 때가 있었다. 그럴 때면 종덕이가 중간에 끼여들어 이쪽에 대고 헤벌쭉 저쪽에 대고 헤벌쭉거리며 말리느라 땀동이를 쏟군 하였다. 괜히 중간에 들어섰다가 애매한 매를 맞을 때도 있었다. 지어 코피가 터져 상판이 피칠갑이 되여가지고서도 계속 헤벌쭉거리며 말린다. 어찌보면 고양이와 쥐싸움에 뜯기우고 할퀴우고 밟히는 병아리새끼라고 할가. 종덕이는 자기의 여린 마음으로 어찌나 그들 지간의 모순을 화해시키려고 애를 썼다. 허지만 그들 지간의 “내전”은 점점 거칠어져만 갔다. 한두마디에도 서로 눈에 쌍불을 켜고 입으로 불을 토했다. 종덕이에게는 그것이 제일 큰 골치거리였다. 그들의 “내전”으로 촌민위원회에서는 아무 일도 할수 없었고 동네가 부산하기 그지없었다. 그럭저럭 그해 년말이 닥쳐왔다. 년말 총결을 지어야겠는데 촌에는 술 살 돈도 없었다. 왕년에는 그래도 돼지를 엎지 않으면 송아지를 엎어놓고 동네사람들뿐만아니라 린근촌의 촌간부들을 청해오고 진정부의 간부들도 청해오군 하였다. 누군가 한족집 왕가네 둘째를 찾아가 사정해보라고 귀띔했지만 종덕이는 찾아가질 않았다. 그는 어머니가 알뜰하게 기른 돼지 두마리를 잡아엎게 했다. 민옥이가 안된다고 락루하면서 막아나섰지만…이듬해 모내기 뒤끝에 현에서는 리종수문제를 락착 짓겠다고 두번째로 조사조를 내려보내기로 했다. 그 소식을 접한 종덕이는 급기야 직방 지현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현장, 아니 형님, 내가 촌장질 할 때까지는 조사조를 내려보내지 말기를 바라오.”    “종덕아, 이건 당의 기률에 따르고 나라의 법에 따라 처리되는 일이니 그 누구도 간섭할 권리가 없다. 그러니…”    “그래도 안되오. 형님. 조사조가 내려오면 난 쫓아버리겠소.”    “어허, 촌장사업까지 한다는 네가 이렇게 무지막지할줄은 몰랐구나. 내 지금 너한테 정중하게 경고한다. 절대 이 일에서 경거망동하지 말거라!”    전화가 탁 끊어났다. 다시 련속 서너번 했는데 그쪽에서 받아주질 않았다.     이튿날 오전 9시경에 까만 승용차가 촌사무실앞에 와서 멈춰섰다. 차에서 네명의 사업일군이 내렸다. 실팍하게 생긴 중년남자가 조사조 장명조장이라며 잘 협조해줄것을 부탁하였다. 종덕이는 촌의 상황을 회보하고나서 조사를 미루어주길 요구했다. 그러나 조사조에서는 현당위 지시니 할수 없다고 했다. 한창 쟁론끝에 싱갱이질이 생겼고 나중에 결이 난 장조장이 이곳저곳 해당부문에다 전화를 치는것이였다. 미구에 진파출소의 경찰차가 앵― 앵― 경보기를 울리며 들이닥쳤다. 사태는 엄중해졌다. 온 마을사람들이 까맣게 모여들었다. 뒤이어 경찰들과도 싱갱이질이 벌어졌다. 종덕이는 겅찰들앞에서도 추호의 두려움도 없이 떳떳하게 팔을 내저으며 시비를 캐고있었다. 마을사람들은 종덕이를 다시 보게 되였다. 대견스럽게 보였고 영웅답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들과 경찰지간에 밀고닥치는 몸싸움이 벌어졌고 서로 한데 엉켜서 돌아갔다. 나중에 경찰측에서는 과단한 조치를 대여 종덕이와 종수를 진파출소로 호송해갔다.    이튿날 종덕이는 풀려나왔고 종수는 현으로 호송되여갔다. 파출소울안에서 나온 종덕이는 현으로 올라가는 뻐스를 탈가말가 주저하다가 생각을 고쳐먹고 금불촌으로 내려가는 길에 들어섰다. 털썩털썩 거리며 바위굽이를 도는데 앞에서부터 봉철이가 자전거를 타고 달려오고있었다.    “종덕아, 벌써 여기까지 왔냐? 난 네가 풀려나온다는 소식을 얻어듣고 지금 막 마중하러 오는중이다.”    “김서기 고맙습꾸마. 무슨 이렇게 여기까지…”    둘은 서로 껴안았다. 하루사이라도 경난을 겪고난 뒤의 만남이란 또 다른 감정이 있는것이다.    “자, 우리 여기 앉아서 담배나 한대 꼬슬리구 숨이나 돌렸다가 다시 돌아가자.”    둘은 길가의 백양나무밑에 가서 나란히 앉았다.    “종덕아, 어 아직 어리구나. 어제는 왜 그렇게 머절싸하게 헤덤볐니? 봐라, 영향이 얼마나 나쁜가! 너 금방 입당지원서를 쓰구 그게 뭐냐? 종수, 그새끼 조사를 받아야 하구 엄중하면 콩밥까지 먹어야지. 차라리 이럴 때에 그새끼를 아예…”    “김서기,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함둥? 지금 저의 곁에는 김서기도 있어야 하고 그 종수삼촌도 있어야 되는데 그럼둥?”    봉철이는 종덕의 얼굴표정을 슬쩍 곁눈길해보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 네가 아직 어리구 경험이 부족하니 곁에 사람이 있어야 한다. 허지만 종수 같은 사람은 없어야 한다. 있으면 너의 전도에 불리하고 우리 촌의 발전에 불리하다. 봐라, 그새끼가 쩍하면 걸구드는 바람에 할 일도 못하구 동네가 부산해지구. 그새끼가 지금 널 내세우고 생각해주는척 하지만 기실은 제앞의 불을 끄기 위해서란다. 지금 현에서 그눔의 재료를 다 장악했다. 잘못하면 곁사람도 물려들어간다. 조심해라!”    종덕이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잠자코 듣기만 했다. 봉철이는 그의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한거라고 짐작했다.     “그리구 당원이 되자면 관점이 명확해야 하구 립장이 견정해야 하네라. 지금 종수의 문제가 그저 일반 착오가 아니야. 일단 법적추긍을 받게 되면 그건 성질이 달라지는거야. 이럴 때 조직에서는 너의 태도를 본다. 너를 고험하는거지. 감싸주어도 안되고 그저 보기만 해도 안되고 맞서서 투쟁해야 해. 알겠냐?”    종덕이가 고개를 더 숙였다. 봉철이는 그의 기색변화를 주의깊게 살피며 품속에서 허연 서류묶음을 꺼내쥐였다.    “종덕아, 너 그눔의 가면에 얼리워 넘어가지 말라. 이전에는 그눔이 너를 어디 사람으로 보았냐? 지금은 제가 바쁘게 되니 너를 통해 지현장의 관계를 리용해먹자는 심보밖에 없어. 내 솔직히 알려주마. 그눔이 인제 볼장을 다 봤어. 이것봐라, 내가 장악한 재료만으로도 얼마든지 콩밥을 먹게 되였느니라.”    봉철이가 서류묶음을 종덕의 앞으로 내밀었다. 천천히 고개를 쳐들며 그걸 받아보던 종덕이가 불시에 벌떡 일어섰다.    “김서기, 이게 무슨 짓임둥? 전번에 익명으로 김서기가 보낸것입지비. 에익―씨!”    종덕이는 그 서류를 쫙쫙 찢어서 길가의 도랑물에다 활 뿌렸다. 허연 종지쪼박들이 사처로 흩날렸다. 뜻밖에 일어난 정경에 봉철이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그도 부들부들 떨며 일어섰다.    “그게 어떤 자료라고?! 이자식!”    그의 오른팔이 허공으로 반쯤 올라갔다 내려오면서 종덕의 왼쪽뺨에가 철썩 하고 들어붙었다. 불깃한 얼굴에 퍼런 빛이 번개처럼 스쳤다. 종덕이는 몸을 휘청거리다가 다시 반듯이 섰다. 왼쪽코구멍으로 빨간 액체가 가는 선을 긋더니 입술 언저리에까지 와서 멈췄다. 그런대로 종덕이는 미간을 찌푸리고 이윽토록 서있다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봉철의 씩씩거리는 숨소리를 등뒤에 달고…    이튿날 종덕이는 진당위 방서기를 찾아가서 촌민들의 의견을 여실히 반영하였고 자기의 의향을 내놓았다. 그런데 방서기는 현위의 구체지시가 아직 내려오지 않았다며 회의를 핑게대고 몸을 빼는것이였다. 종덕이는 현에 올라가 직접 지현장을 찾았다. 헌데 회의참석중이라고 만나볼수가 없었다. 전번 일이 노여워서인지 아니면 정말 회의가 중해서인지… 종덕이는 먼 친척벌 되는 집에 주숙을 정하고 점심에는 광천수에 빵을 사서 에때우며 련 사흘이나 현위사무청사를 드나들었다. 경비일군들의 눈에 들어 몇번 쫓겨나기도 했다. 나흘째 되는 날 아침에 현위 울안에서 지현장이 승용차에 올라 차문을 닫으려는 순간에 종덕이가 차문을 잡았던것이다.    “형님!”    저으기 놀란 지현장이 아니꼬운 눈길로 종덕이를 쏘아보는것이였다.    “어허, 너 개고기보다 더 질긴 눔이구나. 나 지금 바쁘니 오후 2시에 다시 보자!”    오후 2시부터 비서실에서 기다린것이 4시에야 지현장과 마주앉을수 있었다. 지현장의 태도는 간단하고 명백했다. 리종수에 대한 조사는 계속 진행하고 사람은 이미 내놓기로 결정했다는것이다. 그 말에 종덕이는 헤벌쭉 웃었다. 갈라질 때 지현장이 종덕이의 이마를 툭 튕겼다.     “자식, 이제 다시한번 이 일에 헤덤볐다가는 혼쌀 먹을줄 알아!”    종덕이는 다시 지현장을 향해 헤벌쭉 웃었다.    림시수용소에서 풀려나온 리종수를 보니 열흘도 되나마나한 동안에 열살이나 더 먹은듯 훨씬 겉늙어보였고 몸이 몹시 수척해졌다. 그는 대문가에서 자기를 기다리고있는 종덕이를 와락 껴안고 엉, 엉! 황소울음을 터뜨렸다. 이번 일에 그는 진정 종덕이를 알게 되였다. 원래는 자기 몸을 빼기 위해 허수아비로 내세우자고 했는데 지금은 그게 아니였다. 자신이 궁지에 빠지게 되니 평상시 먹어라 써라 하며 그렇게 믿음직하게 놀던 친구들도 자기의 옷섶에 불티가 튕길가봐 이런저런 구실을 대고 비실비실 피해감을 이번에 그는 똑똑히 보아냈다. 헌데 종덕이는 그런 인간이 아니였다. 자기와는 애잡짤한 관계도 아닌데 완전히 몸을 내번지며 나섰다. 백살도 못사는 사람일생에서 진정 믿을수 있는 사람이 곁에 있다는것이 얼마나 복스러운 일인가! 자기가 왜 이 녀석을 좀 더 일찍 보아내지 못했을가 하는 자책감도 들었다.    종수는 풀려나온 이튿날부터 앓아누웠다. 그간 제대로 먹지 못해 몸이 허약해진탓이라고 마누라가 영양보충을 한답시고 공대를 잘했는데 그게 아니였다. 현병원에 가서 검사해보고 주급 병원에까지 가서 검사해보았다. 암은 암인데 양성반응을 보였다가 음성반응으로 넘어가 확실한 진단을 내리지 못했다. 하여 북경으로 해서 상해까지 가려고 했다. 미국에 있는 딸이 딸라를 부쳐왔고 국내에서 안되면 국외로 나오라는 기별도 왔단다. 북경으로 떠나가는 날 종덕이를 비롯한 촌간부 몇몇이 연길공항까지 가서 바래였다. 친척들은 하늘로 날아오르는 비행기를 보고 울음을 터뜨렸다. 마지막 길이 아니되였는가 해서!    종수가 없게 되자 금불촌은 봉철의 세상으로 되여버렸다. 아마도 손바닥만한 호박골에 범 두마리까지는 용납하기 곤란한 모양인가부다.   봉철이는 요즘 기분나게 돌아쳤다. 어쩜 세월을 거슬러 가는가! 대여섯살쯤은 더 젊어진건만 같았다. 무슨 새 마을건설계획전망도를 내온다, 무슨 치부정보를 수집해서 기업을 앉혀 항목을 연구한다, 무슨 집집마다 만원수입을 올릴 부업거리를 쥐라고 호소한다 하며 마을안팎을 들볶아놓는다. 완전히 금불촌의 제1선줄군이요, 제1대변인이요, 제1개혁자의 자태로 나서고있었다.     종수를 보내고 난 종덕이는 기분이 잡쳐져 무슨 일이나 갈피를 잡을수 없었다. 그런 정신없는 겨를에 봉철이가 이런걸 한다 저런걸 한다 하며 날뛰는 꼴이 아니꼽게 보였지만 촌민들을 위해 하는 일이라서 건성으로라도 지지해주는수 밖에 없었다.    하루는 종덕이가 아래마을 한족집 둘째와 함께 내봉하기슭을 오르내리며 지형을 살폈다. 내봉하 저쪽켠에 인가는 없지만 경치가 좋고 산나물이 많고 땅이 비옥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농한기가 되면 허리치는 강물을 건너가 나물도 캐오고 화전식으로 경제작물도 심어 걷어오군 했다. 사람만 다닐수 있는 공중다리라도 놓으면 건너편에다 대면적의 황무지도 개발할수 있고 소방목지도 얻을수 있는것이였다. 몇년전에 촌에서 해당수속까지 다 밟아놓았지만 자금난으로 손을 대지 못했던것이다. 내봉하에서 매일 고기잡이를 할 때부터 종덕이는 어느때엔가 꼭 자기의 힘으로 다리를 놓겠다는 자그마한 소망을 꿈꾸어왔던것이다. 지금도 걸림돌은 자금난이였다. 그래서 왕가네 둘째를 찾았다. 왕가네 둘째는 그만한 돈은 낼수 있는데 다리가 락성된 다음에는 건너가고 건너오는 사람들에게서 길세를 받아야겠다는것이였다. 원, 기가 막혀! 돈이 돈을 번다고 돈버는데 이골이 튼 녀석들과는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는다고 바락 화를 냈었다. 한 골안에서 한갈래 강물을 마시며 서로 의지해서 살아온 고향사람들지간에 무슨 길세냐고. 정 그렇게 옴니암니 따지겠으면 림시호구로 이 골안에 와서 땅을 부치고있는 너의 친척들을 다 쫓아버리고 경작지를 되찾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그러자 왕가네 둘째가 누그러들었다.    “박촌장, 나두 그런 인간이 아니우. 내 뭐 그 다리를 놓아 돈을 벌겠소? 내 돈이 들어갔으니 그저 알아봐달라는거지.”    그렇게 타협을 본 둘이 지형을 돌아보았고 저녁에는 왕가네 집에서 푸짐히 한끼니 얻어먹었다.    온 하루 끌려다녀 다리가 시큼시큼해났지만 기분이 좋았다. 그래서 촌사무실에 들려 혼자 흥얼흥얼거리는데 봉철이가 두툼한 자료를 안고 벌떡 뛰여들었다.    “야, 종덕아, 끝내 찾았구나, 찾았어!”    봉철이는 어찌나 흥분되였는지 얼굴이 붉스그레 상기되여있었다.    “뭘 찾았다는 말습입둥?”    “자, 이거 한입으로 어떻게 다 말할가! 우리 전촌 촌민들이 다 벼락부자가 되고 우리 촌의 락후한 면모를 일신시킬수 있는 치부항목을 찾았단 말이다. 알겠느냐?”    그 말에 종덕의 귀도 번쩍 트이였다.    봉철이가 말하는 치부항목이란 녹두알만한 인공진주구슬을 낚시줄 같은 실에 꿰여서 각종 공예품이나 일용품을 짜내는것이였다. 채색사진으로 소개된 샘플들은 그야말로 정교하면서도 깜찍스러웠다. 자료의 소개에 따르면 학비를 내고 반달간 그 기술을 배워내고 한두달 견습한 다음 기본 원자재를 사가지고 정식작업에 들어갈수 있는데 한사람이 하루에 작은것은 2~3건 짜낼수 있고 큰것은 절반이나 되는 반성품이나 완성품 하나쯤은 짜낼수 있다는것이였다. 작은것은 가공비가 백원가량이고 큰것은 몇백원, 지어 천원짜리도 있었다. 말하자면 하루 일을 제일 작게 쳐도 2~3백원은 넘는다는것이다. 이런 호떡이 세상에 또 어디 있을가! 항목경영에서 첫 걸림돌로 되고있는 직장건물, 기계설비, 동력전기, 물공급 등 경영조건은 하나도 필요없다는것이다. 남녀로소가 다할수 있는데 특히 손부리 여문 녀자들이 하면 효률이 높다는것이다. 이제 호박골사람들은 불시에 돈낟가리에 올라앉아 돈을 어떻게 쓸지 몰라 허둥대지 않을가!    허나, 만일의 경우를 위해서 심중하지 않을수 없었다. 그래서 촌민대회를 열고 이 일을 대토론에 붙였다. 반팔 노란 샤쯔에 나비넥타이를 받쳐 맨 봉철이가 나서 이 가공항목에 대해 자세히 소개하고 설명을 가했다.    돈이란 귀신 같은 마력을 가지고있다. 돈을 하루에 몇백원, 한달에 만원, 일년에 몇십만원씩 벌수 있다고 하니 전촌 촌민들이 격동을 금치 못했다. 수시로 우야! 라고 환성이 터졌다. 사기 오른 봉철이 두팔을 저력있게 흔들었고 그사이에서 나비넥타이가 보기 좋게 나풀거렸다. 겨울에도 녀자들은 따스한 가마목에 모여앉아 우스개를 피우면서 돈을 벌수 있다니 부녀들도 야― 하고 환성을 올렸다. 몇년만에 처음 들어보는 녀자들의 환성이다.      봉철이가 령솔자로 부녀주임과 손부리가 여문 처녀를 데리고 떠나기로 했다. 북경에 가서도 여기로 오기만큼이나 더 가야 한다는 절강성 온주로 가자니 세 사람의 차비, 주숙비도 웬간한 돈이 수요되였고 거기에 학비까지 하니 2만여원이 수요되였다. 원자재구입비는 매호에서 먼저 백원어치씩 사오기로 했다. 그 돈이 4만여원이 되였다. 만약의 경우 사기를 당했거나 잘못된다 해도 백원쯤 떼우는것은 개개의 집집의 정황을 놓고 말하면 큰 손실이 아니라는것이였다. 먼저 적게 가져다가 시험해보고 확실하면 두번째부터 많이 구입해보자는 시골사람들의 총명이였다.    이튿날 그들은 온 마을사람들의 배웅을 받으며 떠났고 진정부에 들려 소개신까지 떼가지고 갔다. 한달후에 돌아온 그들은 각가지 견본도 가지고 왔고 매호에 나눠줄수 있는 원자재도 가지고 왔다. 밤마다 우사마당에 200볼트짜리 전구알 대여섯개씩 걸어놓고 세 사람이 세 분조로 나뉘여 구슬꿰는 기술을 촌민들에게 전수했다. 그런 다음 통일적으로 정식작업에 들어갔다. 봉철이와 부녀주임이 품질검사원이 되여 집집이 돌아다니며 질을 보장하라고 강조했다. 어찌나 돌아다니며 닥쳐댔는지 둘은 입술이 다 부르텄다. 백원어치의 원자재를 어떤 집에서는 사나흘 동안에 해냈고 어떤 집에서는 다시 반복해서 하다보니 이레씩 걸렸다. 그걸 회사측 요구대로 포장한 다음 현 기차역까지 싣고 가서 부쳤고 봉철이와 부녀주임이 따라갔다. 며칠후에 그들 둘은 비행기를 잡아타고 돌아와서 집집이 인건비를 나눠주었다. 백원어치를 가공했고 그것도 촌민위원회에 20프로의 관리비를 떼고도 집집이 3백원내지 4백원씩 돌아갔다. 마을에선 경사가 났다. 우사마당에서는 밤중까지 술상이 벌어졌고 집집마다 별다른 음식을 갖춰놓고 축하했다. 돈이란 정말 보배중의 보배다. 사람들은 래일의 희망을 내다보게 되였다. 그래서 이번에는  집집마다 통이 크게 접어들 예산이였다. 호박골이 물이 고이지 않는 고장이라고 평소에는 돈잎이 그리워 전기세도 제대로 내지 못하는 집이 많았다. 그런데 이번 두번째 원자재구입에는 제일 곤난한 빈곤호에서도 3천원 이상씩 냈다. 2만원, 3만원씩 낸 집들이 푸술했다. 어떤 집에서는 친척집 돈을 꿔왔고 어떤 집에서는 자식들의 대사에 쓰자고 저축해두었던 돈을 꺼냈고 어떤 집에서는 미국으로 가자고 준비했던 돈도 꺼냈다. 적지 않은 집들에서는 소와 돼를 내다 팔았다. 며칠사이 몇백만원 거금이 모아졌다. 그걸 진거리 신용사를 통해 회사측 은행구좌에 송금한 다음 즉시 봉철이와 부녀주임이 연길공항까지 가서 비행기를 탔다.     마을에서는 집집이 청소도 하고 벽도 회칠하고 창고도 정리하면서 만단의 준비를 갖췄다. 그리고는 가셔지지 않은 흥분의 여운속에서 물건과 그들이 돌아오기를 손꼽아 기다렸다. 비행기를 탔으니 당날로 도착했을거고 그날 저녁은 회사측 책임자들과 술잔이나 나눴을거고 이튿날엔 부친 돈 액수에 따라 포장정리했을거고 사흗날엔 역전에 나가 부쳤을거고 아니, 몇백만원어치의 엄청난 물건을 하루사이에 역전까지 다 날라갈수 있단 말인가? 이틀은 걸려야 할걸. 물건이 온주로부터 여기까지 오자면 며칠이나 걸릴가? 사흘, 나흘… 그런데… 그런데 한주일이 지나가고 열흘이 지나가고 보름이 지나갔는데도 전화 한통도 없다. 사람마다 속이 타서 가슴에 재가 들어앉는것만 같다. 어떤 사람은 입술이 초들초들 말라들었고 어떤 사람은 밤잠도 자지 못해 눈이 벌겋게 충혈되기도 했다. 온 마을에서 웃음소리라도 들을수 없었고 밤이면 괴괴한 마을이 귀신나라 같았다. 종덕이도 눈이 벌겋게 충혈되였다. 회사측에다 하루에도 몇번씩 잔화를 했는데 번마다 뚜― 뚜― 하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그들이 떠나서 열이레 되는 날 아침에 촌사무실에 전화가 따르릉― 하고 울렸다. 종덕이가 번개처럼 와락 송수화기를 집어들었다.    “종… 종덕아…”    봉철의 목소리였다.    “김서기! 김서기!”    종덕이가 미친듯이 부르짖었다.    저쪽에서는 이윽토록 울먹거리며 말을 못하고있었다.    “종덕아, 난 인젠 끝장이다.”    순간, 종덕이는 집안이 빙그르르 돌아가는것만 같은 현기증을 느꼈다.    그래서 눈을 꼭 감았다. 미구에 정신을 가다듬었을 때에는 대방에서 전화를 끊은 뒤였다. 종덕이는 앞이 캄캄해났다. 일이 틀려진것만 확실해졌다. 이 뒤수습을 어떻게 할가? 머리속에 하얀 안개가 끼는것처럼 생각이 전혀 돌아가지 않았다.    점심에 그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먹고싶지 않았던것이다. 저녁에도 억지로 민옥이와 밥상에 마주앉았다. 처음으로 밥알이 모래알처럼 느껴졌다. 어머니에게 근심을 끼쳐드리지 않으려고 억지로 밥술을 드는둥마는둥 했다.    그때 문이 벌컥 열리며 회계가 뛰여들었다.    “박촌장, 날래 가보우. 김서기네 집에서 지금 란리가 터졌소. 무슨 재국이 날것 같소.”    종덕이는 밥술을 던지고 내복바람에 맨발로 뛰여나갔다. 아마도 김봉철이와 부녀주임이 밤중에 마을로 돌아온것 같았다.     김봉철네 울안에선 손전지불이 어지럽게 흔들거렸고 숱한 사람들이 까맣게 모여들고있었다. 종덕이가 방안에 들어서니 벌써 성질이 불 같은 몇몇 장년들이 봉철이를 붙잡고 얼크러져 돌아갔고 봉철의 마누라는 사람을 죽인다고 악, 악 비명을 지르고있었다.    여기저기에서 수시로 유리가 깨여지는 소리가 짤라당, 짤라당! 울렸고 이쪽저쪽에서 울음소리가 터져나왔다. 남자건 녀자건 모두 제정신이 아니였다. 눈에 달이 올라서 퍼렇게 번뜩이고있었다. 돈을 벌 때에는 더 큰돈을 벌겠다고 내놓았는데 정작 떼우게 되니 그게 아니였다. 그게 어떤 돈인가? 피땀으로 바꿔온 돈이고 한잎 두잎 귀중한데 쓰려고 모아둔 돈이고 사정사정 손이야 발이야 빌어서 꿔온 돈들이다. 무고한 마을사람들과 무슨 원쑤진 일이 있다고 우리 돈을 홀려서 남방에다 처넣었는가? 죽일 놈, 죽일 놈이다! 죽여라! 사태는 험악하게 돌아갈것만 같았다. 종덕이가 부엌으로 씽하고 달려가더니 넙죽한 한족식칼을 집어들었다. 그걸 비껴들고 그는 방안에 들어가 높직한 걸상우에 올라섰다. 그리고는 악! 악! 소리를 지르며 천장우의 장식등을 련속 세개나 쳤다. 팍, 팍! 퍼런 불이 연신 번쩍이더니 방안이 절반 어두워졌다.     “조용해라! 거 김서기를 놔라! 놓지 않으면 내 이 식칼을 뿌리겠다!”    종덕이가 한족식칼을 번뜩이며 추켜들었다. 방안은 삽시간에 조용해졌다. 마을사람들은 지금 두번째로 종덕이를 다시 보게 되였다. 그저 유들유들하고 바보스럽기만 해보이던 종덕이가…    “기실 이번 일은 김서기탓이 아니꾸마. 내가 그 정보를 얻어다가 김서기한테 맡겨 연구하게 했던것입꾸마. 그러니 죽이려면 나를 죽입소. 자, 이 식칼로!”    종덕이는 네귀 번듯한 한족식칼을 구들바닥에 철렁 던졌다. 허나 누구도 그 식칼을 집어드는 사람은 없었다.    “여러분, 좀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깁소. 돈을 번다고 좋아서 벌자고 한노릇입지비. 우리 어마이두 저를 장가보내겠다고 모아둔 돈을 몽땅 털어내왔스꾸마. 그게 어떤 돈입둥? 내 이 한몸을 칼탕쳐서라도 한잎도 곯지 않구 갚아드리겠스꾸마.”    사내들은 고개를 푹 숙였고 아낙네들은 소리를 죽여가며 쿨쩍거렸다. 종덕이가 다시 입을 열었다.    “여러분, 래일 우선 먼저 우리 촌간부들이 김서기와 부녀주임을 데리고 현공안국에 가서 이 사건을 보고하고 현당위와 현정부를 찾아 정황을 회보한 다음 구체적지시를 요청할 예정이꾸마. 그런 다음 마을에 돌아와 김서기와 부녀주임 전체 촌민들께 사건의 자초지종을 말씀드리게 하겠스꾸마. 거기에 맞춰 돈을 찾아올 방도를 내오고 만약 찾아올수 없을 정황이라면 어떻게 손실을 미봉할것인가를 연구해야 되지 않겠슴둥? 기실 제가 갚는다고 했지만 제 한몸으로 갚자면 몇십년, 아니 몇백년 벌어야 그걸 다 갚겠슴둥? 김서기와 저를 죽인다고 그걸 갚을수 있겠슴둥? 여러분의 지혜와 힘을 합해야 저도 그걸 하루빨리 갚을수 있는게꾸마. 자, 김서기를 봅소. 오죽했으면 반쪽이 되여 돌아왔겠슴둥? 지금은 그에게 매를 안겨줄것이 아니라 휴식할 시간을 줘야 하지 않겠슴둥?”    사람들은 하나 둘 방안에서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문밖으로 나서며 오열을 토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사람들이 다 빠져나가고 수라장이 된 방안이 어지럽게 남았다.    “종덕아!”    눈이 퀭해진 봉철이가 종덕이를 와락 끌어안더니 엉, 엉! 하고 황소울음을 터뜨렸다.    봉철이도 원래는 종덕이를 허수아비로 내세우고 자기가 뒤에서 모든것을 좌우지 하려고 했던것이다. 그러나 이 시각 그는 종덕이를 다시 알게 되였다. 내심으로부터 종덕이에게 감복되지 않을수 없었다. 그는 왜 일찌감치 종덕이를 보아내지 못했을가 하는 자격지심이 들기도 했다. 5     그들 일행은 봉두산 정상인 박두봉을 향해 톱아오르고있었다. 갈수록 심산이라더니 오를수록 산은 험해졌고 오를수록 절경이였다. 깎아지르는듯한 절벽밑을 지나면 우중충한 소나무숲이 우거지고 썰렁할가말가한 소나무숲속을 빠져나오면 파아란 비탈이 사선으로 뻗어져있기도 했다. 호박바위굽이를 지나오니 저 아래 깊숙한 골짜기로 은띠 같은 내봉하가 구불구불 산기슭을 에돌아 흐르고있었다.    “딩호우, 따따디 딩호우!(너무 좋아, 정말 너무 좋아!”    진작 땀투성이 되여 런닝그샤쯔까지 다 벗어버린 팡리사장은 연신 엄지손가락을 내밀었다. 육중한 몸체인 팡리사장의 살집은 하얀 두부모 같았다. 희번뜩한 얼굴 역시 하얀 만두처럼 희한했다. 그가 검누런 고급려송연을 꺼내 물자 종수가 눈치 빠르게 라이타불을 찰칵! 켜서 붙여올렸다.    “원래는 저기 저 아래쪽 강폭이 좁은데다가 다리를 놓자구 했습지비…”    종덕이가 내봉하물이 산기슭굽이를 에돌아 마을쪽으로 빠지는 곳을 가리켰다.    “뿌, 뿌, 나리 뿌싱. 하이쓰 짜이쩌얼 샤밴 즈제 다거쵸쭈이호우. 요칸 왠잰.(아니, 아니, 거긴 아니야. 그래도 이 아래쪽에 직접 다리를 놓는게 좋아. 원견성이 있어야지)”    팡리사장은 앞으로 풍경구의 전망을 내다보며 다리를 놓아야 한다는것이다. 풍경이 제일 좋은 곳에다 다리를 놓아야 저쪽 산과 이쪽 산의 정체적인 조합을 이를수 있다는것이다. 자기는 세계의 명승지란 명산을 두루 다 돌아보다싶이 했는데 이 봉두산경치가 금강산이나 묘향산, 한라산에 비기지는 못하지만 또 그보다 별다른 특색이 있다는것이다. 면적이 작고 거대감은 없지만 흐르는 물이나 수직으로 깎아지른 절벽이나 산세들이 아주 정교하게 맞물려 아늑한 선경 같은 황홀감을 이뤄준다는것이다. 거기에 이제 구름다리까지 놓으면 그림 같은 풍경구가 될수 있고 많은 투자인들의 눈길을 끌것이라고 그는 예언까지 했다. 그가 지금 내봉하에 구름다리를 놓고 주변환경개조에 거금을 투자하겠다고 나선 사람이다. 그도 광풍의 어느 한 산간벽촌에서 자란 농민이였다고 한다. 개혁개방초기에 돼지치기를 해서 목돈을 벌고 그 돈으로 사료업에 진출해서 떼돈을 벌고 그 돈으로 부동산업에 뛰여들어 거금을 모으고 그 거금으로 지금은 북경에다 어마어마한 회사를 꾸려놓고 관광, 금융투자업에 종사하고있단다. 그리고 예쁘장하게 생긴 막내딸 쇼팡이를 비서삼아 데리고 다니는데 쑈팡은 영어는 물론 한국말과 일본말도 아주 류창하게 했다. 팡리사장은 종수가 북경병원에 가서 입원치료를 받을 때 같은 입원환자로 친한 사람이였다. 암으로 여겼던 종수의 병이 암이 아니고 일반 종류가 생긴것이여서 수술하고 완전히 완쾌되였던것이다.    마을에 돌아온 종수는 금불촌을 위해 몇가지 실질적인 일을 해놓았다.    확실히 머리가 잘 돌아가는 사람이였다. 그전에는 그 머리를 개인적 명예와 리익만 따지는 흑심에다 썼었다. 이번에 와서는 종덕이를 봐서라도 금불촌을 위해 진심으로 일해보자고 속심을 다졌던것이다. 그러다가 현에서 봉두산풍경구를 건설할 의향이 있다는 말을 듣고 팡리사장을 초청했던것이다. 현에서도 이에 고도의 중시를 돌렸다. 지현장이 직접 전 대의 사업을 지휘했다. 전번날에는 친히 팡리사장을 배동하여 장백산천지관광까지 하고왔다. 봉두산 풍경구건설은 지현장이 일찍부터 품어왔던 꿈이였다…    “그리고 앞으로 저기 저쪽 츠렁바위아래로 길게 뻗어내려간 산자락을 리용해서 스키장을 앉혔으면 좋을것 같습니다.”    김봉철이가 팡리사장에게 광천수병을 넘겨주며 이런 의견을 내놓았다.    “호우주의 니먼쩌니 더 뚱지쬬창, 짼거 쏘싱 화쉐창덕화 뚱지예커이 쪼다이 화쉐미. 워꾸지 샤쉐즈허우 쩌얼 더 펑징껑 미런.(좋은 건의웨다. 여긴 겨울철이 길어서 소행스키장을 앉힌다면 겨울에도 손님을 끌수 있을거웨다. 눈이 내린 다음의 경치가 더 볼만 할거웨다)    “그러면 스키장건설계획도 환경개조건설 첫 단계 계획에 넣으시겠습니까?”    봉철이는 완전히 흥분되였다.    “쩌쓰 이챈 메이샹또더. 뿌리, 또스허우칸칸바.(이건 생각지도 못했던 일인데요.  허지만 그때 가서 봅시다)”    “감사합니다. 리사장님은 정말 우리 호박골의 은인이시구 또한 저의 은인이십니다. 전 평생 이 은혜를 잊지 않을겁니다. 풍경구건설에 이 한몸을 바치는것으로 그 은혜에 보답하렵니다.”    봉철이는 늘씬한 허리를 버들가지처럼 굽히며 굽썩 경례를 올렸다. 아닌게아니라 봉철이게는 은인으로 될만한 리사장이였다.    그 구슬공예품가공항목에 사기당한 풍파가 있은 다음에 현공안국에서 적극적으로 온주공안부문과 련계를 달고 사건해명진전을 알아보았다. 얼마후에 공안부문에서 사건조작자들을 전부 나포하였다. 그들은 전국을 상대로 수천만원을 사기쳤던것이다. 지금 그들의 부정축재금과 장물을 절반쯤 몰수해들였는바 사건해명이 끝나면 일부분은 돌려받을수 있는것이였다. 불행중 다행이라 할가 봉철이는 한절반 숨을 쉬게 되였다.  헌데 빚군들의 성화에는 견뎌낼수가 없었다. 많은 가정에서 한달내지, 두달만 쓰고 갚겠다고 꿔온 돈들이였다.     마을로 외지빚군들이 매일 들이닥쳤고 봉철이네 문앞에서는 아침저녁으로 “전쟁”이 벌어지군 했었다. 봉철의 마누라가 농약을 마시고 자살한다고 번져지기도 했고 봉철이도 어느날 종덕이를 찾아와 살고싶지 않다고 눈물을 흘렸었다. 그때 종덕이가 봉철의 멱살을 거머쥐고 내봉하기슭으로 질질 끌었다. 죽겠으면 혼자 죽지 말고 같이 죽자고! 강기슭에 개울물에 옷이 흥건히 젖어들 때 봉철이가 다시는 그런 말을 꺼내지 않겠다고 다짐해서야 종덕이는 그의 멱살을 풀어주었던것이다.    빚군들의 성화가 더 가심해지고있을 때 종수가 초청한 팡리사장이 마을로 찾아왔던것이다. 촌간부들이 그를 배동하여 여기저기 돌아보기도 하고 촌사무실에 앉아 좌담하기도 했다. 하루는 그들이 우사마당으로 들어서는데 몇몇 외지빚군들이 기세 사납게 달려오더니 다짜고짜 봉철이를 휘여잡고 밀치락거렸다. 종덕이는 손님앞이라 창피스럽다고 그들을 한쪽구석으로 몰아붙였다.    점심식사를 하면서 팡리사장이 그 일에 대해 궁금증을 내비쳤다. 그래서 종덕이가 그 사건의 자초지종을 말해주었다. 그는 눈을 지그시 감고 딸의 번역에 귀를 기울였다. 표정을 보니 별로 시답게 여기는것 같았다. 다 듣고나서 서서히 눈을 뜨더니 그는 그 돈을 자기가 선대해주겠으니 바쁜 목을 풀라는것이였다. 종덕이는 너무나도 고마와서 그의 손을 덥썩 쥐고 련신 흔들었다.     “쎄쎄! 쩐 쎄쎄!(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자기가 세계적인 명승지나 풍경구를 많이 돌아보았는데 주변 사람들은 가난뱅이가 없고 모두 부자였다는것이다. 앞으로 이 호박골사람들도 다 부자가 될것이라며 부자가 된 다음 그 본전을 갚으라는것이다. 부자가 된 다음에는 같은 사람도 받는 사람도 기분이 다 좋다는것이다. 그때 가면 리식이 본전보다 몇갑절 더 넘어날게 아닌가고 그는 종덕이에게 눈을 찔끔거려보았다.    오후에 딸 쑈팡이가 봉철이를 찾아 수요되는 돈액수와 촌의 신용사구좌번호를 물어보고 즉시 북경에 있는 본사에 팩스로 보냈다. 이튿날 송금이 되여 또 한번 온 동네가 감격으로 들끓었다. 숱한 사람들이 줄레줄레 꼬리에 꼬리를 물고와서 면목도 없던 팡리사장께 굽썩굽썩 경례를 드렸고 어떤 사람들은 엎드려 절까지 올렸다. 팡리사장은 그 장면에 어쩔줄 몰라했고 저으기 감동을 받는듯했다.    “쩌리더 런민 떠우쓰 춘푸싼량더 호우런, 호우런 까이 궈 호우르즈라.(여기 사람들은 다 순박하고 선량한 좋은 사람들이구만요. 좋은 사람들이 좋은 나날을 보내게 돼야죠)”    봉철이는 팡리사장을 끌어안고 “따거(형님)”로 모시겠다며 뜨거운 눈물을 흘렸었다…    팡리사장이 돌아가게 되였다. 저녁에는 마을에서는 환송만회를 열기로 했었다. 지현장과 현 해당부문의 책임자들도 참석하기로 되여있었다.종덕이는 김봉철서기더러 팡리사장 일행을 우사마당으로 모시라고 해놓고논 종수의 옷자락을 슬며시 당겼다. 종덕이와 종수는 버드나무숲속으로 들어가 바위돌우에 나란히 앉았다.    “삼촌, 내 조카로서 후배로서 이런 말을 해야 되는건지… 며칠 고민했소. 말이 떨어지질 않소만 어쨌든 한마디 해야겠소.”    “무슨 말?”    종수는 미간을 쪼푸리며 심각해지는 종덕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다.    “삼촌, 전번에 삼촌이 북경으로 치료받으러 간 다음에 현에서 파견한 두번째 조사조가 내려와서 삼촌의 재료를 해갔소. 아마 충분히 해갔을거요. 이번엔 마지막으로 또 내려와 보충할건 보충하고 확인할건 확인한다오. 내 생각에는 그들이 내려오기전에 삼촌이 모든걸 숨김없이 깨끗하게 다 털어놓고 자백하는것이 좋을듯 하오. 이번에 삼촌이 부디 호박골을 위해서, 아니 전현을 위하여 대공을 세웠소. 이건 현위 렴서기도 공정했고 지현장도 공정했소. 그러니 립공속죄가 되겠소. 기회가 좋으니 시원히 다 털어버리고 거뿐하게 사는것이 좋을것 같소.”    그 말을 듣고난 종수는 눈을 지그시 감으며 이윽토록 말이 없었다. 미구에 그는 천천히 일어섰다. 종덕이도 일어섰다.    “내 알았다. 네 말대로 하마!”    둘은 서로 손을 뜨겁게 잡았다.    우사마당에다는 200볼트짜리 전구를 대여섯개 내다 걸었다. 촌에서는 소를 한마리 잡아엎었다. 음식에 미립이 튼 아낙네들이 명절분위기에 휩싸여 가분가분 돌아가며 음식을 정성껏 갖췄다.    정면의 길다란 상에는 오른쪽에 손님측인 팡쟈망 일행이 앉고 왼쪽에 지현장을 비롯한 현지도일군들이 앉고 그 상 맞은켠 네모난 상에 촌간부들이 앉았다. 그뒤로는 로인들은 로인들끼리, 젊은이들은 젊은이들끼리, 부녀들은 부녀들끼리, 끼리끼리 둥근상을 에워싸고 널려앉았다.    이제 환송만회가 시작되면 촌을 대표하여 김봉철서기가 환송사를 읽게 되고 그다음 팡리사장이 호박골 풍경구건설전망과 구체공정계획에 대한 설명이 있게 되고 나중에 지현장의 중요연설이 있게 된다.    정면 중간상에 앉은 지현장과 팡리사장이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수시로 껄껄 웃음보를 터뜨리고있었다. 그러다가 지현장이 불현듯 무슨 생각이 스쳤는지 종덕이를 불렀다.    “종덕아!”    “예, 형님!”    지현장이 팡리사장과 자기가 앉은 공간사이에 대고 손을 흔들었다.    “이 중간에 앉으실분을 모셔오지 않았구나.”    “어마이를 모셔오너라!”    “아니 형님두 이런 장소에 어떻게…”    “아니다. 오늘은 8월 8일 길일이다. 꼭 어마이를 모셔온다고 하느니라.”    로인들과 부녀들이 앉은 상에서 그래야 한다고 몇몇이 일어나 팔을 내저었다.    “앗따실루, 이것 참!”     사람들에게 밀리여 민옥이 끌려나온다.    가리마가 선명하게 쪽 빗어넘긴 하얀 머리, 이마전엔 주름이 얼기설기했지만 중간에 박힌 기미만은 여전히 유표하게 도드라져있었다.                                        끝
24    [소설] 호박골의 떡호박(상) 댓글:  조회:1244  추천:48  2009-07-27
1     호박골은 예나제나 경치 하나만은 사람들의 눈뿌리를 뽑아줄 지경이다. 랑떠러지기 절벽이 얼음층처럼 줄무늬졌는가 하면 늬연한 비탈은 주단처럼 한쪽으로 비스듬히 펼쳐져있다. 봄이면 붉은 진달래꽃과 하얀 살구꽃이 울긋불긋하고 여름이면 싱싱한 곡식자람새가 파랗게 물들고 가을이면 누런 황금으로 주름잡힌다. 날카로운 해빛과 부드러운 달빛에 변색하며 희롱하는 카멜레온이라 할가!     그가운데로 내봉하가 산굽이를 따라 굽이쳐 흘러내린다. 남산꼭대기에 올라서서 멀찌감치 내려다 보면 뱀새끼가 꼬불딱거리는것 같고 산자락으로 내려서서 가까이에서 보면 미풍에 흐느적거리는 푸른 비단 같다. 고기새끼가 꼬리치는 고장이라 근간에 와서는 낚시군들 걸음이 잦아졌다. 신작로가 오불꼬불 늘어져 다니기 편리해졌고 그보다도 오염없는 물에 고기가 생신하다고 찾아든다.    경치 좋고 공기 좋고 물이 좋아서인지 종덕이는 애비없이도 둥글둥글하게 잘 자랐다. 어릴 때에는 동네 개구쟁이들의 놀림감이 되였고 학교시절에는 남자애들이 걷어차는 “축구공”이요 녀자애들이 화풀이 할수 있는 “배구공”이였다. 학교문을 나와서 몇년간 농사를 지으면서 그는 다시 동네사람들의 말밥에 “밑반찬거리”가 되여버렸다.    “너 이자식, 종덕이 사촌이 되고싶냐? 늘 머절스럽게만 노니?”    “야, 뒤마을 ‘풍덩개과부’라도 좀 채라. 종덕이처럼 녀자맛도 못 보구 늙자구?”    “이놈아, 좀 발라맞출줄도 알고 똑똑하게 놀아라. 한뉘 종덕이처럼 출세도 못해보자구 그러느냐?”…    지난 세기 약진년대에 호박골의 박씨네가 새 며느리를 맞았었다. 벌방 녀자로 호박골색시처럼 얼굴이 호박처럼 두리두리하고 엉뎅이가 펑퍼짐하여 마을아낙네들의 부러움을 자아냈다. 더구나 두눈섭사이에 미간을 돋보이게 하는 붉은 점이 딱 중심에 박혔다. 헌데 그 점때문에 녀인은 고생스러운 인생을 살게 되였다. 어느 점쟁이가 그 점이 악재를 가져다준다고 했고 시어머니는 그 점때문에 시아버지가 돌아갔다고 했으며 나중에 시어머니가 미쳐죽게 되고 남편까지 술중독으로 아들이 태여나는 날 죽어버렸다. 그 점때문에 귀신이 붙었다고 온 가정이 풍지박산이 났다고 소문이 자자해서 마을에서 따돌림을 당했다.    박종덕, 돼지굴어귀에서 비오는 날 태여난 녀석이다. 태여난 그날부터 아버지 없이 자란 과부의 아들이다. 그 아들 하나만을 보고 살아온 과부 민옥이에게는 설음이 많았었다. 아무리 섧어도, 아무리 분해도, 아무리 억울해도, 아들이 기시를 받아도 그 아들 하나만을 위해서는 모든걸 다 참아왔었다. 아들에 대한 기대도 크지 않았다. 앓지 않고 건실하게만 자라길 바랐다. 학교 다닐 때에는 아들이 락제점수를 맞고와도 좋아했고 다 큰 다음에는 동네에 나가 돈을 떼워도 뉘집 잔치부조를 해준것만큼이나 여겼다. 그 아들이 서른고개를 넘어서고 자기도 쭈글쭈글한 로파가 되여가면서 아들의 혼인대사와 손자를 안아보고싶은 념원이였다. 헌데, 귀신이 붙은 과부네 집 아들이라고 혼사말이 들어오지 않는다.    세월이 개혁개방되면서 별스레 녀자들의 몸값도 올라가서 웬간한 촌구석 처녀애들도 종덕이쯤은 곁눈으로도 보지 않았었다.     그렇게 자란 종덕이는 생김새와 같이 둥글둥글하게 굴러다니는 법을 배웠다. 누가 호박처럼 생겼다고 “호박새끼” 하고 놀려줘도 그저 헤벌쭉 웃고말고 누가 걸음걸이가 느리고 건방져보인다고 뒤에 와서 궁둥이를 걷어차도 돌아다보며 벌씬 웃고만다.     어느 한시기에는 이상하게도 종덕이와 접촉한 사람들까지 다 탈이 생겨났다. 종덕이네 집에 가서 공짜술을 얻어마신 녀석들은 배탈이 났고 종덕이를 놀려준 녀석들은 입술이 부르텄고 종덕의 궁둥이를 실없이 걷어찼던 녀석은 교통사고로 다리가 부러지고… 그래서 마을사람들은 남녀로소를 불문하고 그를 외면했고 그를 따돌렸다. 누구도 그와 말을 걸지 않았고 누구도 그와 놀아주질 않았다. 그래도 종덕이는 늘 벌씬거리며 혼자 잘 놀았다. 산에 올라가 꿩둥우리를 털어 꿩알을 얻어오기도 하고 심심하면 강변에 나가 물고기잡이를 하기도 했다. 물고기를 한다래끼 잡으면 그걸로 생선장국을 끓여놓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붙잡지 않으면 외지 낚시군들을 불러들여 술잔을 함께 나누기도 했다. 인품을 후하게 쓰니 개핀 땅에 물이 고인다고 점차 친구들이 생기게 되였다. 공짜를 좋아하는 동네친구들, 술을 좋아하는 아래마을 친구들, 신세를 지려는 외지의 낚시군들…    종덕이네 돼지굴곁에는 오얏나무가 있는데 해마다 오얏이 잘 열렸다. 하루는 난데없이 찦차 두대가 달려오더니 그 오얏나무 그늘밑으로 빠진 달구지길어구에 와서 멈춰섰다. 신사 같은 남자 넷과 꽃같은 녀자 셋이 차에서 내렸다. 그때 마침 종덕이가 물고기를 한구럭 골똑 잡아가지고 왔다. 호기심에 찬 그 사람들이 우루루 모여들어 구럭을 헤쳐보았다. 펄떡펄떡 뛰는 물고기들이 생신해보였다. 그걸로 생선국을 끓이면 맛있겠다는 사람도 있었고 붕어새끼로 생회를 쳐서 술안주로 하면 그저 그만이겠다고 입을 다시는 사람도 있었다.    “그럼 들어가깁소. 제가 끓여드릴테니까.”     “아니, 어찌 그런 페를 끼치게…”    그 사람들은 은근히 좋아하면서도 미안함을 금치 못했었다. 종덕이는 아무 사람이건 자기 집에 와서 술을 마셔주면 좋아했었다. 종덕이는 그 사람들을 울안으로 청해들인 다음 무르익은 오얏을 한대야 가득 뜯어다놓고 맛을 보며 기다리라고 해놓고는 로모 민옥이와 함께 불을 지핀다, 밸을 딴다 하며 돌아쳤다. 그 꽃같이 고운 녀자들도 팔을 걷어부치고 그들 모자를 도와나섰다. 그바람에 종덕이는 더 신바람이 나서 엎딘김에 절이라고 암탉까지 한마리 잡고 처마밑에 말린 물고기도 풀어내렸다. 나중에 푸짐한 술상이 갖춰졌다. 종덕이가 근들이 술을 떠오려고 허연 비닐통을 들고 나서니 그 사람들이 말리면서 찦차에서 고급술 몇병을 꺼내오는것이였다.    술이 서너순배 돌자 술상 분위기가 흥그러워졌고 종덕이도 연신 굽석거리며 잔을 비웠다. “야, 술이 정말 유하꼬마.”    두리두리한 면상이 불그스레 퍼져 보기 좋았다. 모두들 중간에 앉은 통통한 사람을 “지부장”이라고 불렀는데 아마도 꽤나 급이 있는 사람 같았다. 지부장은 가마목에서 “궁둥이운전”을 하고있는 민옥이에게 손수 술을 부어올리는것이였다.    “어마이, 이집 장맛이 정말 구수합니다. 옛날 우리 어마이가 끓여주시던 그 장국맛을 다시 맛보는것 같습니다.”    지부장이 감개무량해하자 곁사람들도 덩달아 구수하다며 연신 후르륵거리며 국물을 마셔댔다.    기분이 도도해지는데 촌장인 리종수가 촌의 모모한 량반들을 거느리고 들이닥쳤다.    “지부장께서 진작 오신줄 모르고 우린 눈이 빠지게 기다렸습니다. 저기 부녀주임네 집에다 하늘을 나는 놈, 땅에서 기여다니는 놈, 륙, 해, 공군을 몽땅 출동시켰으니 지부장께서 이런 루추한 곳에서 식사하시지…”리촌장이 크게나 차리고 기다렸다는 자부심으로 불깃한 얼굴에 아첨발린 웃음을 담고 벌씬거리는데 지부장의 못마땅한 음성이 찬물에 불궜다가 꺼낸 가죽채찍처럼 꽛꽛하게 안겨왔다.    “어허, 무슨 소릴!”    지부장의 둥그레한 얼굴도 불깃해졌다. 면상이 일그러지며 량미간에 내천자가 그려졌다.    “루추하다니? 나도 이런 루추한 집에서 자란 놈이요. 만약 루추하다고 께름직하면 돌아가서 당신에 그 륙, 해, 공군이나 거느리시구려.”    천만 생각밖이였다. 가죽채찍에 한매 얻어맞은듯 종수의 얼굴이 삽시간에 변하여 볼편 근육이 푸들거렸다. 머리도 뗑― 해났다. 머리에 털이 나서부터 이런 축객령을 받아보기는 처음이다. 돌아서야 할지 그냥 서있어야 할지 아니면 구들에 올라가 앉아야 할지…    그때 가마목에서 뱅글뱅글 돌아치던 민옥이가 긍지에 빠진 종수를 끄잡아냈다.    “생원이―” 민옥이는 종수에게 남다른 감정을 가지고있었다. 종수가 남편이 생전일 때 “형님”이라고 불렀고 자기를 “아주머니”라고 불러주었었다. 그보다도 돼지굴옆에서 소낙비를 맞으며 종덕이를 낳을 때 마침 종수가 찾아와서 다행히 모자 목숨을 구해준 일이 너무나 고마워서 평생 그 은혜를 잊지 말자고 속다짐했던것이다. 그래서 아들의 이름을 지을 때에도 종수라는 “종”자에 덕이라는 “덕”자를 골라잡았던것이다.    “생원이, 날래 올라가 술잔이라도 드시우. 전번에두 암탉을 고아놓고 오시라고 해도 오시지 않더니만 마침 잘됐수. 날래!”    민옥이가 종수의 팔소매를 잡아당겼다.    기실 종수는 민옥이와 그의 아들 종덕이를 께름직하게 여기고있었다. 뭐 군생활도 해보고 당원에까지 든 그가 동네토배기들처럼 미신적관념에서 께름직한것은 아니지만… 뭐 구차하게 산다고, 뭐 루추한 집에서 산다고, 뭐 사람축에 못 간다고… 뭐 딱 찍어 무엇이라고 말할수는 없지만 아무튼 전 촌 4백여명 되는 촌민들이 차례로 자리잡고있는 촌장의 심중에는 민옥이와 그의 아들 종덕이가 제일 마지막 꼴찌자리였다. 특히 앞뒤를 재일줄 모르고 굴러다니는 종덕이가 숱한 사람들앞에서 “삼촌! 삼촌” 하며 헤벌쭉거릴 때면 속이 부글부글해나면서 뒤틀린다. 웃는 낯에 침 못 뱉는다고 철 모르는 녀석이 좋다고 부르는데다 랭수바가지를 퍼부을수는 없었다. 자기의 이미지를 자키기 위해서라도.    한창 지부장에게 술을 부어올리던 종덕이는 종수네가 들어서는걸 보고 입이 헤벌쭉해졌다. 오늘은 녀석이 제세상이나 된듯 벌거이드르르해서 흐물넙적거린다.    “아하, 삼촌, 삼촌이 어쩌다가 우리 집에 발을 들여놓았소? 해가 서쪽에서 뜨겠구만. 반갑소, 어서!”    에미 아들이 맞장구를 치며 지부장앞에서 자기의 이미지를 납작하게 만든다고 속이 꼬부장해났지만 어쩌는 수가 없었다. 괘씸한 종덕이 녀석이 손을 잡아끌 때에는 귀쌈이라도 한매 후려붙이고싶었지만 꾹 참았다.억한 심정으로 끌리워 겨우 서먹서먹하게 술자리에 끼여앉았는데 현에서 내려온 간부들은 알은체도 안하고 완전히 그를 무시한채 지부장을 위시해서 자기네끼리만 자기네 말만 주고받았다.    “이 집에 토장이 구수하면서도 시원해서 국물을 마시면 가슴이 활― 열리는것만 같습니다 그려. 허허!”     퍼그나 격동되였는지 지부장이 술잔을 들고 일어서더니 민옥이 앞으로 나가섰다.    “어마이, 오늘 우연하게 댁에 들어와 페를 끼치며 토장국맛을 보았습니다. 정말 구수합니다. 저의 이 술잔을 들어주십시오.”    민옥이는 진작 얼굴이 시루떡이 되였다.    “난 술이라고…”    민옥이는 입으로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손으로는 술잔을 받는것이였다.    “고맙소이. 시골노댁이 담군 장이 맛이 있으면 얼마나 있겠소만 정 맛이 있다면 갈 때 가지고 가소. 많이 담궜으니 가져갈바엔 푹푹 떠갑소.”지부장이 엄지손가락을 내든 오른팔을 힘있게 내저었다.    “동무들, 들었습니까? 이것이 곧바로 우리 어머님들의 인품입니다.”    또 박수갈채가 터졌다. 술상 분위기가 바야흐로 무르익어가고있었다. 민옥이가 겨우 술 한잔을 두번 꺾어 마시고는 둬어번 캑캑거렸다.    “고맙습니다. 어마이, 전 오늘 이 집에 들어서면서 고향집에 들어선 감을 느꼈습니다. 저도 이런 루추한 초가집에서 자란 촌놈이였습니다. 특히 어마이를 보는 순간에 저는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우리 어머님을 다시 뵙는것 같았습니다. 어머님은요 우리 칠남매를 키우시느라 평생 고생만 하시다가 돌아가셨습니다. 자식들에게 효도할 기회조차 주시지 않고 말입니다. 지금 생전이시라면 정말 얼마나…”    지부장의 목소리가 점차 떨렸고 눈에는 이슬이 반짝이였다.    “어마이, 저는 경박한 사람이 아닙니다. 기관에서 어떤 사람들이 양딸을 삼는다, 양아버지를 모신다고 서로 치근덕거리는걸 보고는 싱거운 녀석들의 단정치 못한 작풍이라고 여겨왔댔습니다. 허지만 오늘 그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어마이는 겉으로 보는 외모도 우리 어머니와 같고 인품도 우리 어머니처럼 후하신것 같습니다. 어마이께서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시겠지만 저는 어마이를 어머니로 모시며 효도하고싶습니다.”    술을 좀 마셔 얼굴이 불깃했지만 지부장의 태도는 아주 진지했다. 민옥이는 당황해났고 술상에 앉은 사람들도 저으기 놀라는 눈치였다.    “아니꼬마. 촌구석에 일개 허줄한 노댁이 어찌 높이 계시는 량반의… 아슴채이소만 너무나도 황감해서…”    민옥이가 입을 싸쥐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생각밖으로 지부장이 무릎을 꿇어앉더니만 그 육중한 몸을 꾸부리며 넙죽 절을 하는것이였다.    “이 아들의 절을 받으십시오.”    민옥이뿐만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다 아연해졌다.…    그 이튿날부터 그 소문이 마을내에는 물론 린근 동네에까지 파다히 퍼져나갔다. 종덕이를 바보 취급해왔던 마을내 촌민들의 태도가 하루아침새에 급변했다. 골안바람이 아무리 회오리친다고 이처럼 돌개바람처럼 치지는 않았건만! 이 골안에서 제밖에 없노라고 턱을 잔뜩 쳐들고 다니던 촌간부들도 찌그러질듯한 종덕이네 집으로 발길이 잦아졌다.    얼마후에는 종덕이의 어머니 민옥이의 이마에 난 기미에는 재앙을 부르는 귀신만 앉아있는것이 아니라 복덩이를 굴리는 신선도 앉아있는다는 소문이 돌았다. 원래 귀신과 신선은 쌍둥이였다고 하며 재앙이 없으면 복이 없고 복이 없으면 재앙이 없다는 설이였다. 과연 그 설법에 일리가 있다고 증명하기라도 하듯 그 이듬해 이른봄 현 인민대표대회에서는 원 현위조직부 부장 지동구를 현장으로 임명할 결의안을 한결같이 채택하였다.    양아들로서의 지현장은 양어머니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다고는 할수 없겠지만 그래도 명절때면 잊지 않고 사람을 시켜서 먹을것이며 입을것이며 한구럭씩 보내오군 했다. 거기에 공무때문에 몸 뺄수가 없어 가뵙지 못해 죄송스럽다는 전갈까지 붙여보내 민옥이를 울리군 했다. 어마어마한 현장으로서 그쯤 해도 조련찮은 일이라고 이웃들에서 더 감동을 받았고 부러워도 했다. 2     그해 촌장 기바꿈을 앞두고 금불촌아래우 몇개 동네에서는 몇개 파가 은근히 각축전을 벌리고있었다. 금불촌에는 종친적으로 세개 파가 세력이 컸는데 이 근년에 와서는 리종수가 촌장이 되면서 리씨네들이 우세를 차지했고 그다음 김씨였는데 대표인물로는 촌지서인 김봉철이였다. 옛날 김대장의 맏아들이다. 인구비례를 따지면 박씨네가 제일 많았지만 어쩐지 대중을 휘동할만한 인물이 못 나오고있었다. 리종수와 김봉철이는 나이도 비슷했고 경력도 비슷했다. 둘 다 군대에 가서 입당까지 하고 돌아온 제대군인이였다. 고향에 돌아와 고향건설에 공헌이 큰 사람들이였고 그만큼 조직능력이나 사회능력이 뛰여났었다. 그래서 봉철이가 촌장질 할 때에는 종수가 지부서기사업을 맡았었고 후에 종수가 촌장으로 되니 봉철이가 지부서기로 된것이였다. 촌급 간부보조로임때문에 대개 다른 촌에서는 한사람이 서기와 촌장을 겸임했지만 금불촌에서만은 이 두 사람때문에 좀 특수하게 되였다. 둘사이에는 늘 분쟁이 생겨 네탈내탈 했지만 일단 의견이 소통되면 손발이 잘 맞아떨어졌다. 그렇게 재작년부터 둘사이는 완전히 버성기여 고양이와 쥐가 되여버렸다. 이 호박골에서 네가 있으면 내가 꺼져버리고 내가 있으면 네가 굴러가야 한다고 촌민들앞에서 여러번 다투기도 했었다. 한 골짜기에 범이 둘이 있을수 없고 한 나라에 임금이 둘이 있을수 없다는것이다. 탈은 종수네 딸과 봉철네 아들 지간에서 생겨났던것이다. 마을에서 현소재지 고중에 붙어 공부하는 고중생은 대여섯명밖에 안되는데 그중 종수네 딸과 봉철네 아들이 눈이 맞아 좋아했었다. 방학이면 둘이 함께 돌아와서 같이 붙어다녀서 그또래 친구들의 질투를 자아내기도 했었다. 헌데 봉철네 아들이 대학에 붙은 다음 종수네 딸을 차버리고 같은 대학생처녀와 좋아했었다. 그 일로 종수네 안해와 봉철네 안해가 우사마당에서 서로 머리채를 끄잡아당기며 물고뜯고 허비면서 동네를 웃겼던것이다. 그것이 도화선이 되여 종수와 봉철이 사이도 마침내 크게 폭발되였던것이다. 그래서 이번 기바꿈에 어디 좀 보자고 서로들 벼르고있었던차 서로 내가 되지 못할지언정 너만은 되지 못하게 하겠다는 앙심을 품고있었다. 헌데 민심의 동향은 분명 종수쪽으로 더 기울고있었다. 우선 래일에 가서는 어떻게 되든지간에 현임 촌장의 덕으로 보는 사람이 더 많았다. 크나 작으나 시골사람들은 덕을 보면 배은망덕하지 않는다. 그다음 농촌사람들의 애정관은 시종일관할것을 주장한다. 좋아했던 녀자를 차버리고 대학생처녀의 치마꼬리를 잡았다는 봉철의 아들은 도덕상에서 벌써 모든 촌민들의 비난을 받게 되였다. 엎친데덮친다고 거기에 몇년전 봉철이가 촌장질 할 때 과수원을 한족집 왕가네한테 눅게 준것이 뒤로 돈을 챙겨받고 한 짓거리였던것이라는 뒤공론이 요즘 일고있다.    앞뒤를 재여볼줄 아는 봉철이는 요즘 집에다 술상을 자주 차려놓고 이 구실 저 구실 대며 마을사람들을 청해들였고 또한 마을에 누구네 집에 일이 생기면 부조돈도 푹푹 쥐여주었다. 그러면서 사람들의 오고가는 말끈을 뜯어다가 저울질해봤다. 확실히 균형을 잡기 곤난하게 저쪽으로 기울고있었다. 희망이 없게 되였음을 통감한 그는 자기가 되지 못할바에는 종수도  못하게 만들자고 생각했다. 그는 한편으로 종수의 이미지를 깨버릴수 있는 “죄장”을 수집해서 여론조성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촌장이 될수 있는 인물을 골라잡아야 했다. 좋기는 자기 말을 잘 듣고 뒤에서 자기가 조종할수 있는 인물이였으면…    요즘 종수는 자신심에 배포유해졌다.(봉철이 네깐 놈이 그따위 덕성으로 나와 겨뤄보라구. 어림도 없지.) 종수도 똑똑한 축이였다. 사람을 부려먹을줄도 알고 선심 쓸줄도 알았다. 그래서 그의 뒤꽁무니에 늘 졸졸 따라다니는 사람이 많았다. 그의 심중에 벌써 수자가 있었다. 누구 누구는 문제 없을거고 누구누구는 동요하겠지만 어찌어찌 해놓으면 저절로 벌벌 기여들것이고 누구누구는 얼리고 닥쳐도 왜지밭으로 달아날것이다. 그런 완고한 반대파들에 대해서는 헛돈을 팔 필요도 없고 풋정을 베풀 필요도 없었다. 오히려 드세게 드잡아 깔아뭉개야 한다. 종수도 요즘 인심을 후하게 썼다. 하지만 봉철이처럼 모든 사람을 다 좋게 대하는척 한것이 아니라 자기의 안목에 따라 부동하게 대했다. 특히 자기의 반대편에 설 사람들이 무슨 일이 있어 찾아오면 추호의 양보도 주지 않았다. 동네집 개도 궁둥이를 치면 돌아서 무는 법이다. 어느때부터인지는 몰라도 마을 구석구석에서 사람들이 끼리끼리 모여 수군덕거리더니 종수에 대한 험담이 새벽안개처럼 솔솔 퍼져나왔다. 무슨 수로 대학에 붙지 못한 딸을 미국에 보냈는가? 대서양 저쪽 부귀의 천당 아메리카 합중국으로 가자면 적어도 인민페 20만원 이상은 메쳐야 한다는데? 그 돈이 어디서 왔는가? 일년에 한번씩이나 가실가말가 하는 렬군속, 오보호 모임도 촌장부가 거꾸로 섰다고 이집 저집 잔돈을 끌어모아 하는판에? 외국으로 품팔이 나간 집들에서 내놓은 경작지를 왜서 무턱대고 한족집 왕가네 집에다만 주는가? 종수가 촌장질해서부터 지금까지 왕가네 줄을 놓아 이주해온 한족집이 벌써 열대여섯호가 늘어나고있다. 그래 그 사람들이 일전 한푼 팔지 않고 호박골로 들어와서 자리를 잡고 터전을 닦고 벽돌기와집을 짓고 산단 말인가? 호박골의 황금은 그들이 다 파간다. 왕가네가 지금 재산이 얼마나 되고 돈을 얼마나 저축했는지 그 누구도 짐작할수 없다. 촌에서 돈이 딸릴 때면 그 집 돈을 먼저 선대해서 쓴 일도 여러번 된다. 한번은 빚대신에 촌민들이 그 집 콩가을까지 해준 일이 있었다. 그때 성질이 괴벽한 사내 몇이 종수의 멱살을 거머쥐고 우리가 도대체 머슴이냐 소작농이냐며 조겨대기까지 했었다.    지금 선거를 앞두고 이런 말들이 오고가니 자연 옛일들이 떠오르게 된다. 그것이 고요해졌던 사람들의 심중에 던져진 돌이 되여 파문을 일렁이게 했다. 그런 회상에 빠지니 자연 종수에 대한 믿음이 한쪽으로 무너져내리기도 했다.    촌장질 하면서 조금씩 얻어먹는 일이 누구에겐들 없겠느냐!    강가에 나서 누군들 바지가랭이를 젖히고싶어 젖히겠냐! 마을사람들을 잘 이끌수만 있다면 그런 일은 별문제라고 시시하게 여기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그런 의문이 자그만하게 파문을 일렁이더니 이번에는 큰 파도를 출렁이게 하는 험담이 나돌았다. 종수가 최학빈이네 셋째딸을 깔아뭉갠적이 있었다는 소문이다. 호박골에서는 금시초문이였다. 말도 안되는 헛소리! 종수는 오십을 바라보는 나그네고 최학빈이네 셋째딸 미려는 스무살 금방 벗어난 꽃송이다. 말하자면 애비와 딸 같은 년령차이다. 미려는 호박골에서 제일 곱게 생긴 처녀애다. 개천에서 룡이 난다더니만 시골에도 드문드문 간혹 봉이 깃드는 모양이다. 초롱초롱한 눈이라든가 앵두 같은 입이라든가 오뚝한 코날이라든가 조물주가 그걸 크지도 않고 작지도 않게 애호박 같은 얼굴에다 맞춤하게 그림 같이 붙여놓은것 같았다. 입을 벌리고 웃으면 요란한 목단이요, 입을 다물고 있으면 조용한 수련이였다. 미려는 학교시절부터 가수가 되겠다, 영화배우로 되고싶다며 호들갑을 떨기도 떨었다. 헌데 옥에 티라고 할가. 보기에는 그 어느 녀자애보다 령리하고 총명해보이는 미려가 천성적으로 어딘가 아둔한데가 있었다. 녀자야 뭐 인물이 환하게 생기면 그만이지 머리가 좀 둔한게 무슨 탈이 되겠소만 예술학교에 해마다 시험친것이 해마다 떨어지는것이 문제로 되였다. 그래서 한때는 강물에 빠져 물귀신이 되겠다, 농약을 먹고 하늘로 날아오른다 하며 온 동네가 소란스러울 지경으로 야단법석을 피우기도 했었다. 죽어날게 부모들이였다. 그래서 종수가 나서 문예계통에서 한자리 하고있는 부대전우를 찾았고 최학빈이가 소를 판 돈을 밀어넣어서야 겨우 예술학교 예습반의 자비생으로 들어가게 되였던것이다. 그때 도와준 일이 고맙다고 미려의 어머니가 종수에게 고급양복 아래웃벌을 사주기도 했었다. 동네에서도 종수가 “뒤문”관계가 세다고 인정해주었을뿐 다른 뜬소문은 없었다. 헌데 지금 선거를 앞두고 말도 안되는 뜬소문이 돌고있다. 큰 시내 한복판에서 종수가 미려를 끼고 식당놀이를 하는걸 보았다느니 여름방학 기간에 중둥바위아래 옥수수밭으로 미려가 종수의 옷자락을 쥐고 기여들어가는걸 보았다느니 모기가 앵앵거리는 저녁무렵에 둘이 홀딱 벗고 내봉하에 뛰여들어 노는걸 보았다니 뭐니 하면 별소리가 다 떠돌았다. 지금 뭐 도시에서는 한자리 한다는 녀석들이 자기의 비서나 문서아가씨들을 놀이감처럼 데리고 놀아도 그저 덜된 인간이라고 손가락질 할뿐 별로 심각하게 여기지는 않는것 같다. 허지만 농촌에서는 완전히 다르다. 남녀작풍문제에서 잘못 걸리면 그의 정치생명은 칼도마우에 오르게 되는것이다. 종수는 아직 칼도마에는 오르지 않았지만 그 소문이 준 타격은 엄청나게 컸다. 그도 벌써 동네사람들이 자기를 바라보는 눈길이 달라졌음을 감촉했었다. 가슴 한쪽이 서늘해옴을 느꼈다. 헌데 더 큰 타격은 뒤에 있었다. 어느 녀석이 이 모든것을 서류로 작성해서 현위에다 익명신으로 보냈던것이다. 하여 현위에서 파견한 조사조가 마을로 내려와 그의 뒤조사를 하게 되였던것이다. 당금 무슨 일이 벌어질것만 같은 분위기였다. 3     요즘 촌지서 김봉철에게는 새 습관이 하나 더 붙었다. 동네사람들이 나들이가 잦아질 쯤인 점심무렵이면 옷맵시 깨끗하게 차리고나서 어슬렁어슬렁 점잖게 지부서기답게 뒤짐을 지고 마을길을 한바퀴 빙 돈다. 젊은이건 낡은이건 아낙네건 나그네건 사람을 만나면 길쭉한 얼굴에 아래입이 쫙 째지게 환한 웃음을 짓고 허리를 살짝 굽혀보인다. 그러다가도 어떤 사람을 만나면 “별일이 없으면 한잔 좀 할가?” 하고 자기네 집으로 꼬신다. 김서기로서의 “인심끌기공정”이다.     오늘은 어슬렁어슬렁 걷다가 내봉하기슭으로 통하는 달구지길에 들어섰다. 벌써 사흘째 다니지 않던 이 길에 들어서는 셈이다. 호젓한 이 길로는 다니는 사람이 별로 없다. 길 아래쪽 오얏나무밑에는 종석이네 집이 게딱지처럼 들어앉아있다. 봉철이는 좀 묘한 사람이다. 사람을 청해다 술을 먹여도 “자식, 곱다고 먹이겠나, 촌장선거가 있으니 먹이는거겠지.” 하는 불안감을 주지 않기 위해 될수록이면 자연스럽게 장면을 만들기에 애를 쓴다. 분위기와 효과를 따진다.    내봉하기슭에 거의 가닿는데 버들숲속으로부터 초모자를 쓴 녀석이 고기다래끼를 흔들며 올라오고있었다.    “야, 이게 호박새끼 종덕이 아니냐? 호박골에서는 네가 제일 운이 트는구나. 쟈, 어디 보자구나. 고기를 얼마나 잡았냐?”    봉철이는 두팔을 벌리고 너스레를 떨며 당금 끌어안기라도 할듯 반기였다.    “허허, 김서김둥! 요즘 물이 쫄아 얼마 잡지 못했습꾸마.”    종덕이는 어줍게 고기다래끼를 봉철이 앞으로 내밀었다. 그걸 봉철이가 헤쳐보며 다시 부산을 떨었다. “와야! 생칠하구나. 이 먹음직한것을 그저 둘수야 없지. 자자, 이걸 가지구 우리 집으로 가자. 우리 집에 좋은 술도 있거든.”    봉철이는 종덕의 손에서 고기다래끼를 슬쩍 나꿔챘다.    “아니 김서기네 집까지 가서 아주머니께 끼칠거야… 아예 우리 집에서 그저…”    여직껏 마을사람들의 따돌림을 당해왔던 종덕이로서는 마을의 모모한 김서기가 집으로 청하니 좀 황송하기도 하고 쑥스럽기도 했다.    “어허, 이놈이 셈이 드는가부다. 한동네끼리 페는 무슨 페야!”    종덕이는 뒤더수기를 긁적거리며 어줍게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돌렸다.    “그럼… 헌데 요까짓걸 가지구 어떻게… 내 집에 들어가 마른걸 더 거둬가지구…”    “그래? 그럼 그래! 그럼 네 아주머니가 오죽 반기겠냐!”    종덕이는 집쪽으로 털썩털썩 달아갔다. 타원형 호박이 삐그덕삐그덕 굴러가는것만 같았다.    그 뒤모습을 바라보며 봉철이는 시무룩 혼자 웃었다. (그래, 내 생각이 맞아. 저런 놈을 앞세우는것이 옳아. 진심이구 고분고분하거든.) 기실 봉철이는 엉뚱한 궁리를 하며 종덕이를 찾아온것이다. 이번 선거에 박종덕이를 내세워보겠다는 기발한 착상이였다. 제딴에는 무슨 평형관전투작전이나 찜놓은듯해서 흥분했는데 녀편네는 너무나도 어이없다고 봉철의 이마전을 짚어보기까지 했다.    “동무, 온기나 있는 소릴 합까? 어디 고장나도 든든히 고장났구만요. 숨구멍이나 좀 짚어보쇼. 제정신이 아닌것 같습다. 동네를 한번 웃겨보자고 그럼까?”    봉철이는 자기 녀편네 하나도 설복시키지 못하면 다른 사람은 더구나 설득시킬수 없다는 도리쯤은 알고있었다. 그는 이틀저녁이나 이불밑에서 녀편네를 끌어안고 슬슬 녹여냈다. 녀자란 원래 열을 가하면 질질 녹아나는 법이거늘! 그가 박종덕이를 내세우자는 건덕지는 대개 이러했다. 종덕이가 마을사람들의 따돌림을 당하며 자라왔지만 마을사람들과 척을 진적이 없는지라 속으로 그를 미워하는 사람이 없다는것, 특히 박가네들이 다 밀어줄것이라는것, 군중기초는 없지만 동네에서 사회적위치가 완전히 달라졌다는것, 능력은 없지만 마음이 후해서 덕으로 민심을 끌수 있다는것 등등이고 자기의 타산으로서는 라이벌인 리종수를 재껴버릴수 있다는것, 그리고 중요한것은 종덕이를 내세우면 자기가 뒤에서 얼마든지 조종할수 있다는것, 즉 다시말해서 력사드라마에서 나오는 황태후처럼 “수렴청정(垂帘听政)”할수 있다는것이다. 그래서 녀편네도 해시시 해졌었다…    봉철이가 종덕이를 꽁무늬에 달고 들어서니 해반주그레하게 생긴 봉철의 녀편네는 본가집 동생이나 맞아들이듯 아양을 떨며 부산을 피웠다. 여지껏 녀자들의 애교스러운 대접을 받아보지 못했던 종덕이는 송구스러우면서도 마음은 즐거워났다. 농촌집 같지 않게 모든게 다 알른거려 종덕이는 발을 어떻게 옮겨디딜줄 몰라 선자리에서 디디장 디디장거리며 헤벌쭉 헤벌쭉 웃기만 했다. 봉철의 녀편네가 끌어안다싶이 끌어다가 밥상곁에 앉혔다.    술이 서너잔 들어가자 종덕의 얼굴이 불깃불깃해졌고 봉철이도 홍당무우가 되였다.    “너 금년에 몇살이더라?”    “서른셋이꾸마.”    “벌써? 자, 그럼 장가부터 들어야겠구나. 그래 봐둔 색시라도 있냐? 자자, 이잔 들구.”    “나 같은데로 누가 오겠습둥?”    “아니아니, 너희 집엔 좋은 색시 들어와야 한다. 너네 어마이두 한뉘 고생했재. 자, 여보, 여보!”    찰랑거리는 반잔 술을 찰랑! 상우에 놓고 봉철이는 부엌간으로 고개를 돌리며 안해를 불렀다.    “예, 예, 올라감다. 자, 물고기튀김이예요!”    봉철의 녀편네가 노랗게 튀긴 물고기를 알른거리는 유리접시에 담아들고 한들거리며 올라와서는 종덕의 곁에 납쭉 붙어앉는다. 싱긋한 녀자체취가 기분 좋게 종덕의 코를 간지럽힌다.    “여보, 그 흥지촌에 일남이가 그렇게 좋은 색시를 얻었다메?”    봉철이가 녀편네한테 한쪽 눈을 슬쩍 찔끔거려 보인다.    “예. 동무 말두 맞습죠. 색시 영 좋슴다. 웬체 그 부엉이 같은 에미나와는 비기지도 못함다. 곱기루 어찌나 고운지 한입 꼭 물어주고싶습데다. 말두 잘하고 똑똑하구 맘씨두 곱구… 일남이두 흥지촌 촌장이 되면서 신세를 고치게 된게 아니구 뭡꺄! 전 현적으로 제일 젊은 총각 촌장이라구 소문이 나자 숱한 혼사말이 들어왔지 않구 뭡꺄! 촌장이 되더니만 일등 미인을 골라끼구 고래등 같은 기와집두 지어놓구. 우리 그 마다매가 입이 함박만해졌지 않구 뭡꺄!”    봉철이는 연신 “그래, 그래.” 하고 맞장구를 쳐주며 고개를 주억거린다.    “그래 그렇지. 옛날 똥별을 달구 전방으로 나갈 때에는 늙은 엄마밖에 바래주는 사람이 없었다지만 장군이 되여 개선하자 숱한 서울 미녀들이 성밖에 나가 줄을 치며 영접했다 하지 않나. 사람이란 크나작으나 ‘자’자를 달아야 빛갈이 나는거지. 자, 우리 종덕이 한번 좀 촌장질 안해볼래? 그럼 색시두 생길거구. 그럼 때벗이를 쫠 할게구. 어때?”    종덕이는 수집어서 몸을 비틀며 머리를 사타구니에 틀어박는다.     “내 같은게 언제…”    “야, 이놈아, 한뉘 호박새끼처럼 딩실 구을기만 하면 다겠냐! 정신 좀 차려. 이 못난 녀석아!”    봉철이가 그의 뒤통수를 건너받아 툭 쳤다. 그제야 종덕이는 고개를 쳐들고 민망스레 헤벌쭉거렸다.    “종덕아, 나는 너를 진심으로 생각해서 하는 말이다. 누가 너를 관심해주겠냐! 아직 나이가 어리니 앞날을 생각해야지. 전도 말이다. 밤낮 령감두상들처럼 고기잡이나 하고 세월을 보내겠냐! 내 말을 듣거라. 내가 그래도 너 보다 소금알을 더 녹였고 건너온 다리가 네가 걸은 길보다 더 길면 길었지 짧지는 않았을거다. 무슨 일이나 내가 다 배치해놓고 밀어줄테니 너는 그저 자보만 하고 명확하게 하면 되는거다. 이 자식아!”    그 말을 듣고나서야 종덕이는 그저 일이 아님을 감촉하고 저으기 긴장해났다.    “그… 그런데 김서기, 저 같은 놈이…”    “야, 근심 말어! 너 같은 놈이 어째? 너도 당당한 이 나라의 공민이구 금불촌 촌민이다. 안될게 뭐야? 더구나 이 당당한 공산당 김봉철서기가 밀어주는데야! 자신감을 가져! 사내놈이 그런 똥담도 없이 그걸 무겁게 달고 다닐게 있냐? 활 떼버리고말지.”    “호호, 그래요. 종덕이가 될수 있구말구요. 지현장 같은 든든한 뒤심이 있겠다 박씨네 종친들이 많겠다 왜 안되겠어요? 기운 내요. 우리 김서기는 종덕이 같은 진투를 좋아하거든요.”    봉철의 녀편네도 곁에서 돼지오줌깨 뿔구듯 입김을 불어넣는다.    잔뜩 긴장해서 앉아듣던 종덕이가 점차 탕개를 느슨히 풀며 눈을 띠룩거렸다.    “그럼… 야, 이거 정말… 그럼 밑져 본전이라구 한번…”    “그래, 그래야지. 인제야 사내답구나. 너의 아버지 송식이 형님도 술좌석에서는 장군이였네라. 쟈, 우리 래일의 금불촌 촌장 박종덕의 휘황한 앞날을 위해서 한잔!”    그 시각 금불촌 현임 촌장 리종수도 사처에 사람을 띄워 종덕이를 찾고있었다. 종수는 지금 단가마우에 오른 개미신세가 되여 안절부절이다. 현에서 내려온 조사조가 한단락의 뒤조사를 끝마치고 이제 돌아갔다. 그동안 생활하기 불편한 마을에 내려와서 고생이 많았다고 개를 한마리 잡아 부녀주임에 집에 삶아놓고 청했는데 한사람도 오지 않았을뿐만아니라 그동안 주숙비를 규정대로 일전 한푼 곯지 않게 물고 갔다. 그것이 더구나 속에 퀭기였다.    무슨 단서를 쥐고 간것만 같았다. 그러찮으면 왜 개고기 한끼니도 먹지 않고 가겠는가? 도대체 어디까지 파고들었을가? 그것이 가슴에 찔렸다. 어제밤 느즈막이 그는 누구도 모르게 왕가네 둘째를 찾아갔다. 무명농장이나 다름없는 왕가네 가정군체에서 둘째가 모든것을 쥐고 흔들어대고있었다.     둘째가 가슴을 치며 담보했다. 자기의 입으로는 털끝만치도 토하지 않았다는것이다. 다만 자기의 소개로 이주해온 친척이 십여호에 수십명 되는데 그가운데는 입이 빠른 녀석도 있고 거짓말 못하는 고지식한 사람도 있고 앞뒤를 재일줄 모르고 나발불기를 좋아하는 인간도 있는데 조사조가 그들을 일일이 찾아본것이 속에 걸린다며 그들의 입에서 뱀이 나갔는지 구렝이 나갔는지는 아직 자기도 모른다는것이였다.    집에 돌아와서도 종수는 새벽잠을 이루지 못했다. 접대용 “중화표”고급담배를 두갑이나 꺼내 다 피워버렸다. 량심적으로 일을 처사해왔고 밑구멍이 깨끗하다면야 현이 아니라 중앙에서 내려와도 발편잠을 얼마든지 잘수 있었을텐데… 종수는 지금 자기가 재수없게 마을안의 미친개한테 물렸다고 한탄했다. 촌장질을 해먹은 녀석치고 밑구멍이 깨끗한 녀석이 도대체 몇이나 되느냐고 그는 자기나름대로 이를 몰라주는 하늘을 저주하고있었다. 그는 자기를 문 미친개가 다름 아닌 촌지서 김봉철이라고 넘겨짚었다. 그를 내놓고는 그런 서류를 작성할만한 인간이 마을안에는 없다는것이다. 이가 갈리고 치가 떨렸다. 부엌간의 나무패는 도끼를 집어들고 한달음에 달려가 그 여우같은 놈의 뒤통수를 단박에 까부시고싶은 생각도 불쑥 들군 했다. 담배가 꿈틀거리면 솟구치는 그 흉념을 억제해주었다. 아직 똑똑한 근거를 쥐기전에는 절대 경거망동해서는 안된다고 수없이 자기를 채찍질했다.    지금 종수를 놓고볼 때 촌장선거가 급선무인것이 자기의 운명이였다. 물에 빠진 이상 지푸라기라도 붙잡아야 했다. 평상시 내봉하에 가보면 지푸라기 아니라 별것이 다 뜬다. 나무토막, 널판자, 풀잎 지어는 구불거리는 뱀도 떠내려간다. 헌데 지금 자기가 물에 빠지고보니 나무토막은커녕 지푸라기도 보이지 않는다. 돈이 날개라고 돈만 내밀면 뚫지 못할 벽이 없었는데 관건적인 시각엔 돈이 아니라 사람이라는것을 그는 절감했다.  자기에게 구원의 손길을 뻗쳐줄 사람이 없는게 한스러워났다. 그는 자기가 얻어먹을것을 저울질해보았다. 등곬에 식은땀이 쭉 흐르는듯 섬찍해났다. 그까짓 촌장이야 누가 되든말든… 아니, 아니지. 그 여우 같은 봉철이가 되면 안된는거야. 호박골에서 제일 막된놈이 되더라도 그 여우 같은 녀석이 되면 안돼. 어떻게 한다? 그는 또 담배를 피워물었다. 파르스름한 연기속에서 벼라별 인간이 다 떠오른다. 웃는 얼굴, 찡그린 상판대기, 찔 갈기는 눈길, 고통에 빠진 몰골… 담배불에 두 손가락 사이로 뿌지직 타들어가는 순간에 그는 옳지! 하고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는 담배꽁초를 거실바닥에 대고 힘껏 부벼댔다. 번개불 같이 번쩍 스치는 순간을 빌어 그는 여우같은 그녀석을 밀어벌수도 있고 또 구명은인도 찾을수 있을것만 같은 칠색무지개다리를 얼핏 보아냈다. 그는 두팔을 쫙 펴고 기지개를 켰다. 뼈마디 관골마다에서 우두둑 소리가 났다. 창문카텐을 활 열어젖혔다. 강렬한 해빛에 눈이 부시여났다. 아니 벌써? 벽시계를 올려다보니 시침이 열한시를 가리키고있었다. 그는 부랴부랴 옷을 주어입고 문밖에 나섰다. 그리고는 내봉하쪽으로 종종걸음을 놓았다.    게딱지만한 초가집문을 삐꺽 열고 들어서니 시크무레한 냄새가 기분 나쁘게 코를 찔렀다. 부엌간에서 민옥이가 돼지죽을 끓이고있었다.     “아주머니, 무고하셨수? 그간 자꾸만 와본다 하면서두 일이 어찌 밀리는지…”    “아니 이거 누구여? 생원이, 오랜만이우. 어서 날래!”    종수가 구들 복판에 올라가 올방자를 틀고앉아 담배를 꺼내 피워물고있다.    “종덕이는?”    민옥이가 거무스레한 행주에 손을 닦으며 일어섰다.    “몰라. 아까 마른고기 한꾸레미 찾아들고 허둥대며 나가더니…”    “아주머니, 미안하오. 평소 관심이 부족해서. 마음속엔 그래두 늘 생각이 있었는데 어째 생각대로 안되오. 생전 송식이형님과의 정분을 봐서두 이 집에 등한해서는 안되는건데…”    종수가 자책에 빠진듯 미간을 찌푸리며 담배연기를 길게 내뿜는다.    “어이구, 무슨 그런 말씀을. 아슴채이케. 생원의 은혜야 내가 눈에 흙이 들어가두 잊지 못할건데.”    민옥이는 문득 찾아든 종수가 얼마나 반가운지 모른다.    그 옛날 민옥이가 종덕이를 키우며서 절반 배를 곯으며 정말 죽지 못해 살 때에도 종수는 이 집에 얼굴 한쪽 내밀지 않았다. 그래도 민옥이는 종수에 대한 고마움을 고이고이 품고있었다. 지금 이렇게 문득 찾아들어와도 더 고맙고 더 반가울수 밖에 없었다.    “아주머니, 지현장 그 량반께서는 기별이라도 있소?”    “어이구, 생원이, 말도 마오. 난 송구스러워 못 살겠소. 명절마다 빼놓지 않구 한꾸레미씩 보낸다오. 맨 얼럭덜럭한 고급으루. 사램이 어쩌면 그렇게두 지극한지. 그걸 어떻게 갚자고 내가 주면 주는대로 다 받는지. 우리야 뭐 보낼게 있어야지. 그저 장떼나 떼서 보내구 종덕이 그녀석이 말린 물고기나 보낼뿐이요…”    “그러면 되는거지요. 아주머니, 그게 그 사람들에게는 제일 좋은거라오. 아주머닌 정말 양아들을 잘 뒀소.”    “글쎄 말이우. 생원이, 난 이게 꿈인지 생신지 통 분간 못하겠소. 늘그막에 어쩌다가…”    “자, 가만 있자. 아주머니, 그 이마의 기미가 보통 기미 아니오. 그 기미가 아주머니의 전반생에 숱한 화근을 빚어내더니만 인젠 그 화가 다 보내고 복만 남아있는게요. 아니요. 보오, 그래서 세상에 둘도 없는 양아들이 저절로 생겨난게 아니겠소? 그리구 이제 종덕이한테도 대운이 터서 출세두 하고 색시를 얻을게구 그러면 손자두 생겨 안아볼게구…”    “어이구, 생원이 이렇게 고마울 법이라구야. 정말 그렇게 될가?”    민옥이는 구들우에 올라와 무릎걸음으로 벌벌 기여와 종수의 두손을 꼭 잡았다. 감격에 울먹거렸다.    “어이구, 이렇게 고마울 법이라구야. 앗차, 내 이 정신 좀 보지. 생원이, 잠간만! 내 인차 차릴테니.”    “아니아니, 시간이 없스꾸마. 다음에 종덕이를 찾아야 할텐데…” 일어나 인사를 남기고는 문밖으로 나왔다. 그리고는 부녀주임과 치보주임을 시켜 당장 종덕이를 찾아오도록 했다. 그들이 반나절이나 찾았지만 찾지 못했다. 누구도 그 시각 종덕이가 봉철이네 집에서 고급대우를 받아가며 고급술을 마시고있을줄을 몰랐다.    어슬렁 황혼에 이르러서야 종덕이가 내봉하기슭에 나타났다. 강바람이 그의 옷자락을 시원히 흩날려준다. 종덕이는 지금 평생처음 인생이요 전도요 하는 문제를 가지고 숭엄한 기분에 잠겨본다. 아이들 듣기에 떡소리를 하지 말아야 한다더니 봉철의 전도교육을 받고보니 종덕이에게도 새롭게 삶을 살아보고싶은 욕망이 꿈틀거려났다. 한번 해보기로 작심하니 가슴이 후두두 떨려왔다. 이렇게 가슴이 떨려보기는 그의 인생에서는 처음이다. 그는 강가에 내려가 두손으로 강물을 떠서 푸― 푸― 거리며 얼굴이고 머리고 마구 적셨다. 시원해났다. 그때 “종덕이! 종덕이!” 하고 부르는 녀자의 목소리가 울려왔다. 부녀주임이였다. 종덕이는 부녀주임한테 끌려서 종수앞으로 오게 되였다. 종덕이를 대하는 종수의 태도는 이왕과는 완전히 달라졌다. 말투부터 친삼촌 같이 부드러운 어조였다.    “너 오늘 술 마셨구나. 술도 작작 마시고 몸도 가꿔와. 이게 무슨 주제냐! 옛다. 이걸 가지구 아래우 몇벌 갖춰라. 젊은 놈이 멋이 있어야 녀자애들두 따르지.”    종수가 종덕이 손에 인민페 백원짜리를 여라문장 쥐여준다.    “아니 삼촌, 이… 이것… 안되오.”    엉겹결에 돈을 받아쥔 종덕이는 당황해서 그걸 다시 되돌려주려고 팔을 내민다.    “임마, 잔소리 말고 집어넣어! 삼촌이란 허울을 썼으니 삼촌값을 해야지. 이제껏 삼촌노릇을 제대로 못했는데 량해해라. 앞으론 삼촌이 좀 너를 꼴기 있는 놈으로 키워야 하겠다. 그러니 내 말 잘 들어.”    종덕이를 바라보는 종수의 눈길에는 일종 기대감이 차있었다. 이게 오늘 웬 일인가 하여 종덕이는 좀 어안이 벙벙해져 눈을 꺼부럭거렸다.    “종덕아, 너 형님의 지일이 언제냐?”    “형님이라니? 누굴 그리오?”    “앗따 실루. 이놈이 철딱서니 없구나. 너네 엄마가 지현장을 양아들로 삼았으니 네게는 형님벌이 될게 아니겠냐?”    “아, 지현장 말이요? 생진이 언제인지 잘 모르겠수.”    종덕이는 재국를 친 아이처럼 뒤더수기를 긁적거렸다.    “야, 이 답답한 놈아, 아직 셈이 못들었구나. 남은 그런 인맥을 만들자구 해두 차례가 없는데 입안에 들어온 떡도 못 먹어! 덕을 입었으면 갚을줄 알아야 사람이 되느니라. 지현장의 지일을 알아보고 좀 다녀라. 인간이란 서로 오고가고 주고받는데서 정이 생기는 법이다. 알겠냐?”    “양! 꼭 그렇게 하겠수, 삼촌!”    종수는 저으기 흡족해났다. 꽝꽝 얼어붙었던 가슴 한끝이 스르르 녹아내리는것만 같기도 했다. 엊저녁에 잠못 이루며 고민하던 끝에 고안해낸 첫 작전계획이 소기의 예측대로 돌아갈것 같았다. 종수는 지금 자기를 구해줄수 있는 “구명환”이 아니라 지푸라기마저도 없다. 시누런 흙탕물이 가슴팍을 칠뿐이다. 그래서 생각해낸것이 지현장이다. 지현장이라는 그 큼직한 “구명환”을 잡기 위해서는 그 사람이 구경 어떤 위인이라는것을 알아내야 했다. 지금까지 촌장질도 해보고 서기질도 해보면서 크고작은 지도일군들과 많이 접촉하였고 그 와중에 그로서의 그런 인물들의 부동한 속성을 장악해둔것이 있었다. 어떤 지도일군은 돈을 특별히 좋아한다. 돈만 들이밀면 푸른 등을 켜준다. 어떤 지도일군들은 색을 좋아한다. 인물도 인물이겠지만 성격, 애호, 품위 등 방법이 차원적으로 어금지금한 녀자를 어울려주면 일체는 오케이다. 또 어떤 지도일군은 돈도 아니요, 색도 아니요 의리를 중히 여긴다. 우환이 없도록 기반을 닦는거다. 그리고 어떤 지도일군은 사업상의 새로운 돌파를 아주 중시한다. 기층간부가 자기의 그 어떤 리념에 따라 새로운 경험을 모색해낸다면 그것을 그 무엇보다도 중하게 여긴다. 그렇다면 지현장은 어떤 속성을 가진 인간일가? 종수에게는 그것을 알아내는것이 급선무였다. 구멍을 봐가며 쐐기를 깎으라 하지 않았는가! 그걸 알아내자면 종덕이를 리용해야 했다. 그뿐만아니였다. 종덕이를 리용해서 여우 같은 봉철이를 밀어내야 했다. 세상에 별라게도 돌아간다. 종덕이가 이렇게 대단해질줄이야! 관건적인 시각에 자기의 운명과 관계되는 가장 중요한 인물이가 될줄이야. 종수는 입을 한쪽으로 실룩거리며 쓰겁게 픽 웃고는 종덕이를 자기앞으로 불러앉혔다.“종덕아, 근간에 이 삼촌이 너무 다망했구나. 숨이 찬다. 그래서 쉬면서 좀 숨이나 돌려야겠다. 그저 쉬는게 아니라 내가 물러앉고 너한테 기회를 주마. 사람이란 기회를 잘 틀어쥐고 자기를 다듬을줄 알아야 하네라. 네가 지금껏 한절반 죽어있었는데 네가 어떤 눔이라는걸 내가 잘 알지. 말은 안했어두 인젠 잠에서 깰 때가 된것 같구나. 서른살이 됐지? 내 후임으로 촌장질이나 해봐!”    종덕이는 생각밖이라는듯 눈을 슬쩍 치떴다. 점심에 봉철서기가 제기했던 문제가 아닌가! 다만 오늘 하루가 이상한 감이 들었다. 서기와 촌장이 하루도 아닌 반날사이에 동일한 문제를 제기한것이 별스럽게 생각될뿐이였다.    “삼촌, 내 같은게 촌장질 하문 누가 내 말을 듣겠수?”    “그건 문제없다. 아무렴 금불촌에서 너를 사람으로 보는 인간이 몇이나 되겠느냐만 내가 뒤에 서있으면 누구도 찍소리 못할게다.”    “그럼 삼촌부터 내 말을 듣겠수?”    “그건 문제없다. 아무렴 금불촌에서 너를 사람으로 보는 인간이 몇이나 되겠느냐만 내가 뒤에 서있으면 누구도 찍소리 못할게다.”    “그럼 삼촌부터 내 말을 듣겠수?”    멀쩡해보이는 종덕이지만 엉뚱한데가 있는 녀석이다.    “어허, 이눔 봐라. 되겠어. 어벌때기 있는 눔이구나. 되겠다, 되겠어.그래그래 내부터 말을 잘 듣지. 웃기는 녀석이다. 으하하하!”    종수는 다가와서 종덕의 어깨를 툭툭 쳐주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물론, 애로가 많을거다. 촌민들이 아이들 장난이라구 가소롭게 여길거구 진당위에서도 동의하지 않을거다. 이건 내가 뒤에서 깨끗하게 밀어버릴테니까 근심말어. 자, 우리 집으로 가자. 오늘은 너의 찬란한 앞날을 위하여 우리 아재비 조카끼리 한번 통쾌하게 마셔보자!”                                 계속해...  
23    문학동네 “강아지”들 댓글:  조회:1036  추천:34  2009-06-02
연변농촌의 조선족동네를 두루 돌아다니며 보면 참 유정스럽다. 신작로에서 멀찍이 들어앉은 벌방마을이나 오불꼬불 달구지길을 따라 들어앉은 산간벽촌이나 다 아담해보이고 오붓한 감을 준다. 뻐스에서 내려 아무 동네에로나 터벅터벅 발길을 옮겨 마을어귀에 들어서면 마치도 외가집으로 찾아들어가는듯한 기분에 잠기게 된다. 낯선 인간이 나타났다고 집집의 “수호천사”인 강아지들이 마루턱에 올라서서 목을 빼들고 “왕!왕!” 짖어대는것이 또한 그 동네의 점경이라 하겠다. “네 감히 우리네 초가삼간대청을 엿보려나? 어림도 없지! 왕! 왕!” 주인들이 일밭으로 나간 대낮에는 강아지들의 사명이 자못 신성해지고 위대해진다. 초가삼간과 터전이란 “강산”을 지켜내고있지 않는가! 그 보수로 아침저녁 뜨물죽을 홀짝홀짝 마실수 있다. 그 멀건 뜨물죽만 먹고도 어디서 그런 기운이 솟구치는지 달리기시합을 벌린다면 아마도 가축들가운데서는 챔피언으로 손을 꼽아야 할것 같다. 말의 특종인 다리 짧은 몽고말과는 그 속도를 비기지 못하나 일반 말보다는 속도도 더 빠르고 폭발력도 더 세다고 한다. 동네 뉘집에 암캐가 새끼를 낳았다고 가보면 정말 귀여워서 못봐줄 지경이다. 부얼부얼한것들이 오골보골 서로 품을 파고들며 오구작작거리는 모습은 요람속의 평화인양 눈을 즐겁게 해주고 뜬김속의 호함진 닭곰인양 구미까지 돋궈준다. 안고 보듬어주고 싶고 안고 뽀뽀해주고 싶다. 까만 녀석들은 까마반드르르해서 귀엽고 노란 녀석들은 노르므레해서 귀엽고 알록진 녀석들은 알락달락해서 귀엽다. 고것들이 좀 더 커서 서로 재롱을 부릴 때면 더 귀여워난다. 농가의 강아지들과 친해서 데리고 놀며 두루 살펴보면 대개 다음과 같은 특징들이 있는것 같다. 우선, 녀석들은 천성적으로 충성스럽다. 개만큼 주인에게 충성하는 가축은 이 세상 더 있는상 싶지 않다. 주인을 위해 목숨까지 바치는 개, 개로 하여 목숨을 건지게 된 주인, 이러루한 감동적인 실례는 많고도 많다. 혹시 지금 이 글을 보고 계신다면 자기가 겪은 사실이거나 누구한테서 들은 이야기도 좋으니 개가 주인에게 충성한 실례를 한두가지씩만 련상해보시라. 그러면 한족속담 “작은 은혜도 크게 보답하라 (滴水之恩,涌泉相报)”는 함의를 더 깊이 체득할수 있을것이다. 둘째는 녀석들에게 존귀비천이 없다. 매일 쏘세지를 먹는 강아지나 매일 뜨물죽을 먹는 강아지나 뜨물죽도 없어서 밖에 나가 똥무지를 뚜지고 뼈다귀를 핥는 강아지나 다 주인에 대한 충성심이라든가 울안을 지켜주는  책임심은 똑같은것이다. 매일 쏘세지를 준다고 해서 크게 더 충성하는것도 아니고 매일 뜨물죽만 준다고 해서 슬쩍 충성하는체 가상만 보이는것도 아니다. 강아지의 충성심과 책임심에는 거짓이 없다. 세번째는 녀석들이 용감한것이다. “하루강아지 범 무서운줄 모른다”는 말이 있지 않는가! 금방 걸음마를 타기 시작한 아이앞에 흉측스러운 몰골을 해가지고 주먹을 내흔들어보이면 아이는 금시 무섭다고 울음보를 터뜨린다. 역시 금방 걸음마를 타기 시작한 강아지앞에 흉측스러운 몰골을 해가지고 주먹을 내흔들어보이면 녀석은 금시 앞발을 살구며 아르릉— 입을 짝 벌린다. 그 주먹을 물겠다고! 주인의 호령에 따라 곰과 싸우는 개들을 보았는가! 정말 처절하고 비장한 장면이다. 녀석들은 용맹스럽기도 하고 지혜롭다. 네번째는 녀석들이 인정스럽다는것이다. 돼지에게 돼지죽을 줄 때에는 꿀꿀거리며 좋다고 텁썩텁썩 먹어댄다. 허지만 먹거리를 주지 않고 가만히 서서 지켜보기만 하면 녀석도 시무룩해지면서 눈만 꺼부적꺼부적거리다가 제멋에 들어누워 쿨쿨 자버린다. 헌데 강아지는 다르다. 먹거리를 주나 안주나 주인만 보면 꼬리를 내저으며 별 아양을 다 떤다. 나들이 행차로 객지에서 묵을만큼 묵고 돌아와서 삽작문을 열면 우선 강아지부터 먼저 반겨준다. 그 반겨주는 꼴이 또한 천태만상이다. 좀 함양이 있는 녀석은 수집다고 한쪽으로 몸을 꼬며 머리를 아래로 탈며 꼬리질 친다. 좀 왈패스러운 녀석은 아예 앞발로 주인의 아래배를 짚고 목을 잔뜩 빼들고 뽀뽀나 하려는듯 주둥이를 내흔들어친다. 개란 정말 사람 못지 않은 령물이다. 주인집에서 무슨 기쁜 일이 생겨 웃고 떠들면 녀석도 같이 덩달아 좋다고 쉴새없이 꼬리를 내젓는다. 주인집에서 무슨 상심한 일이 생겨 입을 다물고있으면 녀석도 한쪽구석에 엎드려 묵묵히 침묵만 지킨다. 혹간 동네우사칸마당에서 돼지추렴이라도 있는 날이면 온동네 강아지들도 명절을 쇠듯 올리뛰고 내리뛰고 하면서 분위기를 돋군다. 고기 한점 먹어보지도 못하면서… 다섯번째는 녀석들이 락천적인것이다. 눈이 오는 날에도 강아지들은 좋다고 눈속에서 뒹굴며 논다. 한여름, 장마철에 비가 구질구질 내려도 강아지들은 진창길에서 흙탕물을 뒤집어쓰며 놀아댄다. 그래서 뒤고방 령감들은 담배대통을 툭툭 치며 “궂은 날은 아이들과 강아지들 세상”이라고 했다. 녀석들은 태평세월에도 그랬고 란세속에서도 그랬다. 깡깡 마른 뼈다귀 하나만 던져주어도 서로 물고 빼앗고 쫓고 으르렁거리며 일대희극을 벌리며 논다. 이밖에도 강아지들의 특점을 례로 들자면 수두룩하다. 지난 세기 80년대초반이라고 기억된다. 문학편집부의 명의로 문학학도들을 불러 문학강습을 조직한 적이 있었다. 연변의 저명한 작가와 시인들을 모시고 강단에 오를 때였다. 누군가 이런 말을 던졌다. “말짱 햇개지들이구만!” 그 말에 모두들 웃음을 터뜨렸다. 어딘가 좀 초학자들을 얕잡아 풍자할가 하는 야유감이 푹 풍기는 말이였지만 아주 형상적인 비유였고 또한 다른 면으로는 어딘가 참, 대견스럽다, 귀엽다, 보듬어주어야겠구나 하는 관심에 젖은 허물없는 롱조인것 같기도 했다. 나도 한시기는 문단강아지가 되여 덜렁수캐처럼 뛰여다녔었다. 강아지가 되면 무서운게 없다. 벌써 대여섯만 모여들어도 오골보골 끓는다. 18전짜리 생맥주 열사발쯤씩 마셔야 저마다 시인이 되고 저마다 소설가가 되고 저마다 문단대가가 되는 판이였다. 명작구상이 맥주 쏟아내듯 흘러나오고 명태짝을 찢듯이 문단혹평이 가해지는 가운데 혹간 주제파악이 제대로 되지 못해 삐뚤게 나갈 때도 있었다… “쟈, 요즘엔 그 장항항이라는 한족기집애가 써낸 작품은 편편마다 명작이더라. 틈을 타서 모두 뚜져봐!” “어느? 그 북대황집체호에 있었다는 새애기말이냐?” “응, 그래. 나기도 참, 잘 났대.” “야야, 그 장항항이 약혼했다니?” “야, 취했나, 미쳤나? 약혼했으면 어떻구, 약혼 안했으면 어쩔 셈이냐?  그 녀자가 너희들 같은걸 외눈깔로나 보겠느냐! 이 답답한 촌구석개지들아!”  “자식, 사람을 우숩게 보지 말아. 그 녀자가 뭐 그리 대단해? 금방 내가 선포했잖아. 최후의 세계명작은 내손에서 나온다구. 그러면 난 세계적인 대문호가 되는거구 그 녀자는 소설가의 안해가 되고마는거지. ” 으하하하! … … 그때는 왜 밤이 그렇게 짧았던지! 밤을 패가며 열변을 토해도 배안의 “명작”들이 다 나오지 못해 속이 늘 그들먹해서 이튿날 아침에는 해장국을 둬어사발씩 재껴야 했다.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아도 그때 그 시절이 제일 행복한것만 같다.늘 강아지로만 뛰여다녔으면 좋았겠는데… 지금도 뭐 문학동네에서는 강아지나 다름없지만서두… 그 당시에 문학동네에는 “강아지”들이 많고도 많았었다. 그 어디로 가나 부얼부얼한것들이 오골보골 끓어번졌었다. 시내돌이를 하다가 컬컬하면 아무 상점이나 뛰여들어도 낯익은 문학도 서너명은 만날수 있어 맥주를 벌컥벌컥 마시고 열변을 토할수 있었고 농촌에 가서도 뉘집온돌에 올방자를 틀고 앉으면 문학도 서너명쯤은 배갈병을 차고 찾아들군 했었다. 문학동네에 “강아지”들이 많으니 언제나 잔치집처럼 들썽들썽해서 좋았다. 문학동네 “강아지”들이 놀던 모습을 두루 돌이켜보면 대개 다음과 같은 특점들이 있은것 같다. 우선 겁이 없다. 하늘이 높고 땅이 낮은줄 모르니까 세상에서 자기가 제일인줄 안다. 그래서 장백산도 낮다고 한발에 딛고 넘어가려고 한다. 뭐, 맹동적인 기분에 불과하겠지만 “강아지”로서는 그런 웅심이 있어야 할것 같다. 생각이 커야 구상도 커지고 써낸 작품도 클것이 아니겠는가! 많은 문단 “강아지”들은 처녀작으로 명성을 날렸엇다. 아마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것 같다. 다음으로는 구속감이 없다. 자유자재로 논다. 체면이 깎이울가봐 념려되는 근심도 모르고 말하고 싶은걸 말하고 쓰고 싶은걸 써낸다. 그러니 자연 상상의 나래를 마음껏 펼수있는것이다.  “도깨비”같은 글이라도 어떤것은 엉뚱한데가 있게 된다. 창작에서 제일 귀중한것을 가지고있는 셈이다. 그다음으로는 열이 높다. 늘 펄펄 끓는다. 문학도들이 겨울에 털모자를 쓰고다니는걸 못봤다. 열이 심하니 추운줄 모른다. 밤잠을 자지 않고 열변을 토하고서도 이튿날이면 싱싱해서 깡충거렸고 밤잠을 자지 않고 원고지를 메우고서도 이튿날이면 눈이 또릿또릿해서 발발 기여다닌다. 이밖에도 “고기점”이라도 던져줄만한 특점들이 많다. 반면에 이러저러한 약점들도 많이 보인다. 주요하게는 채 성숙되지 못한 까닭에 면역력이 약하다. 그래서 이러저러한 사회의 류행성유혹에 잘 넘어간다. 대개 중도반단하고 필을 꺾게 된 문학도들을 진찰해보면 이런 류행병에 걸려들어 제대로 되는 치료를 받지 못한것이 그 주요원인으로 되고있다. 요즘 세월에 농촌에 가보면 덩실한 새 주택들이 줄지어 일어서고있는데 강아지를 찾아보기가 힘들어졌다. 우리 “외가집”이 있던 동네가 옳은가고 의혹이 들 지경이다. 역시 문학동네에 들려봐도 “강아지”들이 엄청나게 줄어들고있다. 어설푼 감이 서늘하게 스며든다.  “부모”님들의 “계획생육”이 잘되였다는 현상일가? 아니면 “밤작업”이 원활하게 되지 못한 원인이였을가? 상전벽해라 아무튼 문학동네도 세월의 흐름속에서 변해가고있으니 별수 없는 일이다. 다만 그제날 행복했던 시절을 그려보며 또 어느 땐가에는 “강아지”들이 다시 문단어귀에서 오골보골 법썩 끓어번질수 있기를 기대해 볼뿐이다.
22    문학동네 “강아지”들 댓글:  조회:1054  추천:0  2009-06-01
문학동네 “강아지”들                       홍천룡   연변농촌의 조선족동네를 두루 돌아다니며 보면 참 유정스럽다. 신작로에서 멀찍이 들어앉은 벌방마을이나 오불꼬불 달구지길을 따라 들어앉은 산간벽촌이나 다 아담해보이고 오붓한 감을 준다. 뻐스에서 내려 아무 동네에로나 터벅터벅 발길을 옮겨 마을어귀에 들어서면 마치도 외가집으로 찾아들어가는듯한 기분에 잠기게 된다. 낯선 인간이 나타났다고 집집의 “수호천사”인 강아지들이 마루턱에 올라서서 목을 빼들고 “왕!왕!” 짖어대는것이 또한 그 동네의 점경이라 하겠다. “네 감히 우리네 초가삼간대청을 엿보려나? 어림도 없지! 왕! 왕!” 주인들이 일밭으로 나간 대낮에는 강아지들의 사명이 자못 신성해지고 위대해진다. 초가삼간과 터전이란 “강산”을 지켜내고있지 않는가! 그 보수로 아침저녁 뜨물죽을 홀짝홀짝 마실수 있다. 그 멀건 뜨물죽만 먹고도 어디서 그런 기운이 솟구치는지 달리기시합을 벌린다면 아마도 가축들가운데서는 챔피언으로 손을 꼽아야 할것 같다. 말의 특종인 다리 짧은 몽고말과는 그 속도를 비기지 못하나 일반 말보다는 속도도 더 빠르고 폭발력도 더 세다고 한다. 동네 뉘집에 암캐가 새끼를 낳았다고 가보면 정말 귀여워서 못봐줄 지경이다. 부얼부얼한것들이 오골보골 서로 품을 파고들며 오구작작거리는 모습은 요람속의 평화인양 눈을 즐겁게 해주고 뜬김속의 호함진 닭곰인양 구미까지 돋궈준다. 안고 보듬어주고 싶고 안고 뽀뽀해주고 싶다. 까만 녀석들은 까마반드르르해서 귀엽고 노란 녀석들은 노르므레해서 귀엽고 알록진 녀석들은 알락달락해서 귀엽다. 고것들이 좀 더 커서 서로 재롱을 부릴 때면 더 귀여워난다. 농가의 강아지들과 친해서 데리고 놀며 두루 살펴보면 대개 다음과 같은 특징들이 있는것 같다. 우선, 녀석들은 천성적으로 충성스럽다. 개만큼 주인에게 충성하는 가축은 이 세상 더 있는상 싶지 않다. 주인을 위해 목숨까지 바치는 개, 개로 하여 목숨을 건지게 된 주인, 이러루한 감동적인 실례는 많고도 많다. 혹시 지금 이 글을 보고 계신다면 자기가 겪은 사실이거나 누구한테서 들은 이야기도 좋으니 개가 주인에게 충성한 실례를 한두가지씩만 련상해보시라. 그러면 한족속담 “작은 은혜도 크게 보답하라 (滴水之恩,涌泉相报)”는 함의를 더 깊이 체득할수 있을것이다. 둘째는 녀석들에게 존귀비천이 없다. 매일 쏘세지를 먹는 강아지나 매일 뜨물죽을 먹는 강아지나 뜨물죽도 없어서 밖에 나가 똥무지를 뚜지고 뼈다귀를 핥는 강아지나 다 주인에 대한 충성심이라든가 울안을 지켜주는  책임심은 똑같은것이다. 매일 쏘세지를 준다고 해서 크게 더 충성하는것도 아니고 매일 뜨물죽만 준다고 해서 슬쩍 충성하는체 가상만 보이는것도 아니다. 강아지의 충성심과 책임심에는 거짓이 없다. 세번째는 녀석들이 용감한것이다. “하루강아지 범 무서운줄 모른다”는 말이 있지 않는가! 금방 걸음마를 타기 시작한 아이앞에 흉측스러운 몰골을 해가지고 주먹을 내흔들어보이면 아이는 금시 무섭다고 울음보를 터뜨린다. 역시 금방 걸음마를 타기 시작한 강아지앞에 흉측스러운 몰골을 해가지고 주먹을 내흔들어보이면 녀석은 금시 앞발을 살구며 아르릉— 입을 짝 벌린다. 그 주먹을 물겠다고! 주인의 호령에 따라 곰과 싸우는 개들을 보았는가! 정말 처절하고 비장한 장면이다. 녀석들은 용맹스럽기도 하고 지혜롭다. 네번째는 녀석들이 인정스럽다는것이다. 돼지에게 돼지죽을 줄 때에는 꿀꿀거리며 좋다고 텁썩텁썩 먹어댄다. 허지만 먹거리를 주지 않고 가만히 서서 지켜보기만 하면 녀석도 시무룩해지면서 눈만 꺼부적꺼부적거리다가 제멋에 들어누워 쿨쿨 자버린다. 헌데 강아지는 다르다. 먹거리를 주나 안주나 주인만 보면 꼬리를 내저으며 별 아양을 다 떤다. 나들이 행차로 객지에서 묵을만큼 묵고 돌아와서 삽작문을 열면 우선 강아지부터 먼저 반겨준다. 그 반겨주는 꼴이 또한 천태만상이다. 좀 함양이 있는 녀석은 수집다고 한쪽으로 몸을 꼬며 머리를 아래로 탈며 꼬리질 친다. 좀 왈패스러운 녀석은 아예 앞발로 주인의 아래배를 짚고 목을 잔뜩 빼들고 뽀뽀나 하려는듯 주둥이를 내흔들어친다. 개란 정말 사람 못지 않은 령물이다. 주인집에서 무슨 기쁜 일이 생겨 웃고 떠들면 녀석도 같이 덩달아 좋다고 쉴새없이 꼬리를 내젓는다. 주인집에서 무슨 상심한 일이 생겨 입을 다물고있으면 녀석도 한쪽구석에 엎드려 묵묵히 침묵만 지킨다. 혹간 동네우사칸마당에서 돼지추렴이라도 있는 날이면 온동네 강아지들도 명절을 쇠듯 올리뛰고 내리뛰고 하면서 분위기를 돋군다. 고기 한점 먹어보지도 못하면서… 다섯번째는 녀석들이 락천적인것이다. 눈이 오는 날에도 강아지들은 좋다고 눈속에서 뒹굴며 논다. 한여름, 장마철에 비가 구질구질 내려도 강아지들은 진창길에서 흙탕물을 뒤집어쓰며 놀아댄다. 그래서 뒤고방 령감들은 담배대통을 툭툭 치며 “궂은 날은 아이들과 강아지들 세상”이라고 했다. 녀석들은 태평세월에도 그랬고 란세속에서도 그랬다. 깡깡 마른 뼈다귀 하나만 던져주어도 서로 물고 빼앗고 쫓고 으르렁거리며 일대희극을 벌리며 논다. 이밖에도 강아지들의 특점을 례로 들자면 수두룩하다. 지난 세기 80년대초반이라고 기억된다. 문학편집부의 명의로 문학학도들을 불러 문학강습을 조직한 적이 있었다. 연변의 저명한 작가와 시인들을 모시고 강단에 오를 때였다. 누군가 이런 말을 던졌다. “말짱 햇개지들이구만!” 그 말에 모두들 웃음을 터뜨렸다. 어딘가 좀 초학자들을 얕잡아 풍자할가 하는 야유감이 푹 풍기는 말이였지만 아주 형상적인 비유였고 또한 다른 면으로는 어딘가 참, 대견스럽다, 귀엽다, 보듬어주어야겠구나 하는 관심에 젖은 허물없는 롱조인것 같기도 했다. 나도 한시기는 문단강아지가 되여 덜렁수캐처럼 뛰여다녔었다. 강아지가 되면 무서운게 없다. 벌써 대여섯만 모여들어도 오골보골 끓는다. 18전짜리 생맥주 열사발쯤씩 마셔야 저마다 시인이 되고 저마다 소설가가 되고 저마다 문단대가가 되는 판이였다. 명작구상이 맥주 쏟아내듯 흘러나오고 명태짝을 찢듯이 문단혹평이 가해지는 가운데 혹간 주제파악이 제대로 되지 못해 삐뚤게 나갈 때도 있었다… “쟈, 요즘엔 그 장항항이라는 한족기집애가 써낸 작품은 편편마다 명작이더라. 틈을 타서 모두 뚜져봐!” “어느? 그 북대황집체호에 있었다는 새애기말이냐?” “응, 그래. 나기도 참, 잘 났대.” “야야, 그 장항항이 약혼했다니?” “야, 취했나, 미쳤나? 약혼했으면 어떻구, 약혼 안했으면 어쩔 셈이냐?  그 녀자가 너희들 같은걸 외눈깔로나 보겠느냐! 이 답답한 촌구석개지들아!”  “자식, 사람을 우숩게 보지 말아. 그 녀자가 뭐 그리 대단해? 금방 내가 선포했잖아. 최후의 세계명작은 내손에서 나온다구. 그러면 난 세계적인 대문호가 되는거구 그 녀자는 소설가의 안해가 되고마는거지. ” 으하하하! … … 그때는 왜 밤이 그렇게 짧았던지! 밤을 패가며 열변을 토해도 배안의 “명작”들이 다 나오지 못해 속이 늘 그들먹해서 이튿날 아침에는 해장국을 둬어사발씩 재껴야 했다.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아도 그때 그 시절이 제일 행복한것만 같다.늘 강아지로만 뛰여다녔으면 좋았겠는데… 지금도 뭐 문학동네에서는 강아지나 다름없지만서두… 그 당시에 문학동네에는 “강아지”들이 많고도 많았었다. 그 어디로 가나 부얼부얼한것들이 오골보골 끓어번졌었다. 시내돌이를 하다가 컬컬하면 아무 상점이나 뛰여들어도 낯익은 문학도 서너명은 만날수 있어 맥주를 벌컥벌컥 마시고 열변을 토할수 있었고 농촌에 가서도 뉘집온돌에 올방자를 틀고 앉으면 문학도 서너명쯤은 배갈병을 차고 찾아들군 했었다. 문학동네에 “강아지”들이 많으니 언제나 잔치집처럼 들썽들썽해서 좋았다. 문학동네 “강아지”들이 놀던 모습을 두루 돌이켜보면 대개 다음과 같은 특점들이 있은것 같다. 우선 겁이 없다. 하늘이 높고 땅이 낮은줄 모르니까 세상에서 자기가 제일인줄 안다. 그래서 장백산도 낮다고 한발에 딛고 넘어가려고 한다. 뭐, 맹동적인 기분에 불과하겠지만 “강아지”로서는 그런 웅심이 있어야 할것 같다. 생각이 커야 구상도 커지고 써낸 작품도 클것이 아니겠는가! 많은 문단 “강아지”들은 처녀작으로 명성을 날렸엇다. 아마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것 같다. 다음으로는 구속감이 없다. 자유자재로 논다. 체면이 깎이울가봐 념려되는 근심도 모르고 말하고 싶은걸 말하고 쓰고 싶은걸 써낸다. 그러니 자연 상상의 나래를 마음껏 펼수있는것이다.  “도깨비”같은 글이라도 어떤것은 엉뚱한데가 있게 된다. 창작에서 제일 귀중한것을 가지고있는 셈이다. 그다음으로는 열이 높다. 늘 펄펄 끓는다. 문학도들이 겨울에 털모자를 쓰고다니는걸 못봤다. 열이 심하니 추운줄 모른다. 밤잠을 자지 않고 열변을 토하고서도 이튿날이면 싱싱해서 깡충거렸고 밤잠을 자지 않고 원고지를 메우고서도 이튿날이면 눈이 또릿또릿해서 발발 기여다닌다. 이밖에도 “고기점”이라도 던져줄만한 특점들이 많다. 반면에 이러저러한 약점들도 많이 보인다. 주요하게는 채 성숙되지 못한 까닭에 면역력이 약하다. 그래서 이러저러한 사회의 류행성유혹에 잘 넘어간다. 대개 중도반단하고 필을 꺾게 된 문학도들을 진찰해보면 이런 류행병에 걸려들어 제대로 되는 치료를 받지 못한것이 그 주요원인으로 되고있다. 요즘 세월에 농촌에 가보면 덩실한 새 주택들이 줄지어 일어서고있는데 강아지를 찾아보기가 힘들어졌다. 우리 “외가집”이 있던 동네가 옳은가고 의혹이 들 지경이다. 역시 문학동네에 들려봐도 “강아지”들이 엄청나게 줄어들고있다. 어설푼 감이 서늘하게 스며든다.  “부모”님들의 “계획생육”이 잘되였다는 현상일가? 아니면 “밤작업”이 원활하게 되지 못한 원인이였을가? 상전벽해라 아무튼 문학동네도 세월의 흐름속에서 변해가고있으니 별수 없는 일이다. 다만 그제날 행복했던 시절을 그려보며 또 어느 땐가에는 “강아지”들이 다시 문단어귀에서 오골보골 법썩 끓어번질수 있기를 기대해 볼뿐이다.
21    귀신 별찌 룡 댓글:  조회:791  추천:26  2009-05-08
누구나 천진란만했던 동년시절을 겪어왔을것이다. 저 밤하늘의 별처럼 아득하게만 보이는 동년시절, 야- 그 시절엔… 그 시절에 헐벗고 굶주리며 살아왔든 잘먹고 호강스레 살아왔든지간에 동년시절은 그립기만 하다. 등산하다가 촐랑거리는 시내물에 시원히 발을 잠구면 어쩐지 동년시절이 그리워진다. 동년시절에 나는 옛말을 듣기 좋아했었다. 특히 귀신옛말이라면 눈 한번 깜박이지 않고 무서워서 오돌오돌 떨면서도 들었다. 내가 살던 공신촌”웅덩개”마을에서는 정구형님이 귀신옛말을 귀신같이 했었다. 여름 밤, 검푸른 하늘에 별들이 총총할 때면 정구네 마당가엔 쑥을 태우는 연기가 모락모락 피여오르고 그 주위에는 늘 마을의 조무래기들이 눈이 초롱초롱해서 빙 둘러앉는다. 코를 훌쩍거리는 놈, 쑥연기에 콜록거리는 놈, 별놈들이 다 있다. 그러다가도 옛말이 아슬아슬한 정절에 이를 때면 녀석들 코물이 허옇게 드리워도 훌쩍거리지 않았고 쑥연기가 자오록해도 콜록거리지 않는다. 한번은 정구형님이 “… 그 야밤삼경에 솨르르 하는 소리와 함께 갈대밭이 량쪽으로 쫙 갈라진거야. 바로 그때였지…” 라고 하였을 때 뒤쪽에 앉은 “코풀레기”가 “귀신이다!”라고 소리질렀다. 순간, 심장이 뚝 멎는것만 같았다. 밤바람에 옥수수잎이 우수수 떨리는 소리만 소름 끼치게 들려올 뿐이였다. “어디?” “저기!” 그 녀석이 손가락으로 밤하늘을 가리켰다. 모두들 고개를 쳐들고 밤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빨간 불티같은것이 가늘고 긴 꼬리를 감추며 밤하늘에 금을 긋다가 순식간에 사라지는것이였다. “야-” 저마다 나지막하게 감탄을 뽑았다. “귀신이 아니고 별찌야.” 정구형님이 해석해주었다. 허지만 나는 별찌가 귀신이 아니라면 하늘에 있는 귀신이 별찌에 불을 달아준것이라고 생각했다. 분명 빨갛게 타번지고있었는데… 귀신이 못하는 노릇이 없잖아! 귀신옛말을 들어보면 하늘에서나 땅에서나 바다밑에서나 사람이 못하는 노릇을 귀신이 하고있었던것이다. 소학교 3학년 때 어느 한 교학시간이였다. 강선생님이 낡은 사회에서는 제국주의, 관료자본주의, 봉건주의 등 3대큰산이 로동인민의 머리를 지지리 억누루고있었는데 압박이 있는 곳엔 반항이 있기 마련이라며 결국 누가 이 3대큰산을 뒤엎었겠는가 하는 계발성문제를 제기했었다. 누군가 얼마나 큰산이였는가고 묻자 선생님은 자연적인 모아산이나 히말라야산과는 비교할 바도 못되는 어마어마한 사회적인 산이라고 했다. 아이들이 눈이 머룽머룽해서 대답을 못하고있었다. 내가 한창 귀신옛말에 빠져있을 때라 별로 생각도 없이 심드렁해서 “귀신!”하고 내뱉았다. 와! 하고 아이들이 폭소를 터뜨렸다. “뭐, 귀신?” “예!” 나는 당당하게 긍정했다. 그 어마어마한 큰산을 귀신이 아니고서야 누가 뒤엎을수 있단 말인가! “이 동무의 세계관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하학후에 교무실로 선생님을 찾아오시오.” 선생님의 얼굴은 대뜸 배추잎처럼 퍼러딩딩해졌다. 하학후에 교무실에 들어서니 선생님이 나를 세워놓고 호되게 꾸짖는것이였다. 어찌나 달달 볶아댔는지 곁에 남선생님이 보아주기 민망했던지 한마디 끼여들었다. “허허, 그 학생의 상상력이 기발하구만. 귀신까지 련상시키다니. 그렇지 뭐, 당시 3대큰산을 뒤엎기 위해서는 귀신이 있었다면 귀신도 끌어당겼을터였지. 모택동이 단결할수 있는 력량을 다 쟁취하여 통일전선을…” “최선생, 계급관념으로 학생의 세계관을 개조시켜주고있는 이 엄숙한 마당에 그게 무슨 태도입니까, 예? 선생은 그래…” 그 남선생님이 연신 팔을 내둘렀다. “됐소됐소. 나야 뭐 그게 그저 그렇다는거지. 허허.” 후에 강선생님이 어머니를 찾아 단단히 침을 놓은것 같았다. 어머니의 단속에 나는 옛말 들으러 가기 힘들어졌다. 우리 어머니도 귀신은 몰라도 미신은 은근히 믿어온 터였다. 내가 자주 앓는다고 점은 얼마나 쳤고 “방토”는 얼마나 했는지 모른다. 소학시절에 나는 몸이 약해서 늘 앓음자랑을 했었다. 그래서 어머니는 나를 데리고 연길시내 용하다는 의사는 다 찾아다녔다. 5학년 여름방학에 어머니는 명신골에 용한 의사가 있다는 풍문을 듣고 또 나를 데리고 갔다. 우리가 들어섰을 때 까까머리에 흰안경을 코등에 건 의사가 녀환자의 배를 만지며 곁에 앉은 령감과 롱담을 걸고있었다. “녀자들의 배를 슬슬 어루만지며 벌어먹는 내 팔자도 괜찮지.” “또, 또, 쌍소릴…” 내 차례가 되였을 때 그 의사는 나의 얼굴을 훑어보더니 나의 뒤통수를 툭 쳐주는것이였다. “이 녀석이 기가 절반 죽어있구만. 이름이 뭐지?” 나의 본명은 “홍순룡(洪淳龙)”이였다. “어허, 이름이 틀려먹었어. 룡이란 놈은 순박하지 않아. 순수한 놈도 없고. 돼지주둥이에 소대가리에 뱀꼬리에 두루두루 합친 놈이여서 하늘땅 치며 우쭐렁거리는거야. 이름부터 고쳐. ‘순’자를 빼고 하늘 ‘천’자를 넣지.” 그리고는 아예 “홍천룡”이란 이름으로 처방을 떼주는것이였다. 집에 돌아온 어머니는 이튿날로 파출소에 가서 내 이름을 고쳤다. 정말 귀신이 곡할 일이였다. 그때로부터 장장 40여년동안 나는 크게 앓아보지 못했다. 지금까지 입원해보지 못했고 몸에 수술칼 한번 대보지 못했다. 그런 연고가 있어서인지 어떤 때는 정말 귀신이 되여보고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옛날에는 귀신이 하늘에서 별찌를 가지고 놀았지만 지금은 사람도 달나라 별나라로 날아다닌다. 그게 사람이 아니라 “귀신”이다. “귀신”이 아니고서야 어찌 우주공간으로 별찌처럼 날아다닐고! 지금 아이들은 귀신옛말을 듣지 않는다. 허지만 “해리포터”같은 환상소설이나 텔레비드라마는 죽기내기로 본다. 그런 소설과 드라마의 장면을 두루 스쳐보면 그제날 귀신옛말과 흡사한데가 많다. 아이들은 그런걸 보면서 상상의 날개를 키운다. 우리 민족의 후대교양에도 “귀신옛말”같은 교육이 따라갔으면 하는 기대를 걸어본다. 지금 아이들은 학교에 붙으면 교과서가 눈을 가리워주고 시험이 수족을 비끌어매준다. 이런 교육체계를 부정하는것은 아니지만 부동한 기질에 부동한 천부에 부동한 꿈을 꾸는 아이들에게는 부동한 양성대책이 따라가야 할것 같다. 글로벌시대에 우리 민족이 세계선진행렬에 당당하게 들어서자면 아이때부터 “귀신”이 되여보겠다는 자유분방한 상상력을 키워주고 별찌처럼 날아다닐수 있는 날개를 키워주어야 한다. 그래야만 “귀신”이 많이 나올수 있고 “귀신”들의 왕인 “룡”도 나올수 있는것이다.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노벨상수상자명단에는 우리 민족의 이름이 단 한사람만이 올랐다. 평화상을 수여받은 김대중대통령이다. 그밖에 넓고도 넓은 과학분야와 문학방면은 공백이다. 전 민족이 심사숙고해야 할 문제이다. 모든 아이들이 판에 박은듯한 공식속에서 양성된다면 영원히 “귀신”이 나올수 없고 “룡”이 나올수 없고 노벨수상자가 나올수 없게 된다. 귀신이 되여보겠다는 많은 “귀신”들이 요람속에서 요절되여가고있다. 가슴아픈 일이다. 나는 이미 쉰고개를 넘은 사람이지만 다시한번 “귀신꿈”을 꿔보고 싶다.    
20    맛이 없게 해서 맛이 있게 먹자 댓글:  조회:781  추천:38  2009-05-08
사람이 살면서 먹는것보다 더 중요한게 있을가? 없다. 그래서 세계명산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했다. 세월이 좋아지니 하루 세끼니 배를 곯지 않고 먹게 되였다. 배가 부르니 좀 더 맛있는걸로 먹자는것이 사람입이 내미는 욕심이다. 옛날에는 돼지고기국을 해놓아도 땀을 뻘뻘 흘리며 먹었다. 요즘에 와서 땀을 뻘뻘 흘려가며 돼지고기국을 먹는 사람이 있을가? 전번 날, 축하할만한 일이 생겨 남자에 녀자들 두루두루 맞춰 한상에 마주 앉았다. 녀자들 환심을 사느라 누군가 “궈보뤄(탕수육)도 청하지. 녀자들 전매특권이니까” 라고 호기를 피웠다가 그만 말밑천도 못찾고말았다. “지금 그런걸 누가 먹습니꺄! 집에 각시가 그런걸 먹습디꺄?” “허, 이 녀자들 입이 점점 고양이입이 되여가는구만. 그래 무얼 먹겠소?” “남자들이 사줄 때 맛있는걸로 콱 먹어야겠는데… 야, 우리 무얼 먹을가?” “글쎼말이, 요즘은 입에 맞는 음식이라곤 없더라.” 점점 높아가는 입덕에 골머리를 앓는 사람도 적지 않게 늘어간다. 랑군님의 안해로 된 새각시들, 아이들 어머니로 된 주부들, 아침상엔 무얼 올려놓을가, 저녁상준비는 어떻게 할가, 때시걱마다 근심이 앞선다. 끼니마다 맛이 있게 해서 정성껏 갖춰줘도 언제한번 맛있게 먹었다는 소릴 못들어본다. 그다음에는 돈깨나 벌려고 분식점이나 식당같은 음식업을 벌려놓은 주인들이다. 손님들 구미를 맞춰주기 점점 힘들어진다. 지금은 입이 입이 아니고 검사의기가 된듯 싶다. 먹으러 다니는것이 아니라 검식하러 다니는것 같다. 이게 이 맛이 아니고 저게 저 맛이 아니라고 송곳질 하며 꼬집어낼 때에는 정말 주인으로서는 입이 아홉개라도 할말이 없어진다. 이런저런 맛있다는걸 다 구입해다가 요런조런 조미료를 다 쳐서 이래저래 주물럭거려 삶고 삶은걸 볶으고 볶은걸 지지고 지진걸 튀기고 튀긴걸 걸러서 올려놓았는데도 맛이 없다고 하니… 어처구니 없다. 어처구니 없어도 그 손님이 “황제”이니 어쩔수 없다. “먹거리업은 밑지는 법이 없다”는 명언을 성지처럼 받들고 시작한 일이 아닌가! 더 맛있게, 오직 더 맛있게만 하면 손님들도 “ok!”고 주인도 “ok!”다. 그래서 골을 질끈 동이고 머리를 짜면 수가 생긴다. 그 질긴 소고기도 어찌어찌 주물럭거려놓으면 두부모처럼 몰씬몰씬해지고 튀긴걸 어떻게 또 튀기면 그 땅땅하던 닭뼈가 사각사각 씹히다가도 사르르 녹아내리기까지 한다. 끓인걸 또 끓이고도 모자라서 가스렌지까지 상우에 올려놓고 자꾸자꾸 끓인다. 거기에다 연변고추가루요 사천후추가루요 하며 푹푹 뿌려서는 훌훌 불며 먹으니 입안이 짱- 열리며 얼벌벌해진다. 세상 별맛이다. 그런 특이한 맛을 보기 위해 한두번 찾아가는것쯤은 별문제가 아니다. 헌데 어떤 량반들은 그런 맛에 맛을 들이면 하루이틀이 멀다하게 찾아다닐 뿐만 아니라 친구들을 선동하기까지 한다. “야, 거기 그 맛이 한절반 죽여준다. 가자, 오늘저녁은 내가 쏠게!” 모두들 우르르 쓸어가서 그 맛을 보고는 엄지손가락을 내든다. 세상 별맛이라고! 그 사람들 돌아가서 또 제각기 제친구들을 꼬드긴다. 그러면 손님이 기하학적으로 늘어나고 그 식당엔 대박이 터지게 된다. 식당에 대박이 터져서 주인은 돈을 버는데 그 식당으로 드나드는 단골객들의 위와 간을 비롯한 장기들은 어떻게 되여갈가? 음식물을 끓이면 끓일수록, 기름에 튀기면 튀길수록 인체에 해로운 물질이 더 많이 생겨난다는 점은 이미 전문가들의 과학실험에 의해 검증되였다. 그래서 어느 한 전문가는 이렇게 대성질호하고있다. “식당으로 한번 가는것이 무덤으로 한걸음 다가서는것과 같다”고. 좀 지나친 말이 아닌가! 곰곰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음식은 맛이 있을수록 독이 된다”는 말도 있는데 뭐 과학적수치로 검증해낸 결론은 아니지만 많은 실례로 증명해줄수 있는 조언은 될수 있겠다. 중국력대의 황제들 수명이 모두 길지 못했었다. 40대중반에 요절한 황제가 많았다. 그 락후했던 세월에 맛있다는걸 돌아가며 다 맛본 황제일수록 더 일찍 죽어나갔다. 지금 우리 주변을 자세하게 관찰해보면 잘먹는 사람들이 병에 걸리는 비례가 높다는걸 보아낼수 있다. 내가 아는 사람들 가운데 젊어서 외국에 나가 돈을 무척 벌어온 친구가 있었다. “먹다가 죽으면 후회없다”고 늘 마음을 쓰며 놀고먹고 락천적으로 보냈는데 간암이란 진단을 받고 상해에 가서 수술까지 하고나니 그게 아니였다. 그제야 하루라도 더 살겠다고 애를 써봤지만… 먹거리가 흔장만장할 때일수록 입단속을 잘해야 한다. 음식물도 돈처럼 많아도 탈이요 적어도 탈이다. 먹을것이 적었을 때에는 별 우수운 일들이 다 있었다. “대식품시기”에는 음식이 맛이 있는가 없는가를 따지며 먹은것이 아니라 먹을수 있느냐 없느냐를 따져서 먹었다. 무릇 먹을수 있다면 그것이 풀뿌리든 나무껍질이든 벌레든간에 가리지 않고 다 먹었다. 먹을수 있다는것만으로도 충분히 맛을 돋굴수 있었던것이다. 먹는 방법도 강구하지 않았다. 삶는것이 위주였다. 조미료도 소금간장뿐이였다. 멀건 푸대죽에 소금을 툭 쳐서 차려놓아도 맛이 없다고 타발하는 사람이라곤 없었다. 며칠씩 감자만 삶아줘도 그처럼 맛있게, 일년내내 강냉이떡만 쪄줘도 그처럼 맛있게…모든 음식이 그처럼 맛이 있었던 세월이였다. “문화대혁명시기”에는 먹는것을 놓고 로선분석도 하고 계급투쟁도 벌렸었다. 맛이 있는것만 먹고 살아온 사람들은 지주나 자본가와 같은 자산계급이고 맛이 없는것만 먹고 살아온 사람들은 로동자나 빈하중농같은 무산계급이였다는것이다. 중학시절의 어느 한 겨울방학이라고 기억된다. 우리 “웅덩개”마을에서는 계급투쟁교육을 강화한다고 과외보도원선생님이 빈농 최할아버지를 모셔다 놓고 “이쿠스탠”(忆苦思甜)활동을 조직했었다. 널찍한 우사칸회의실안에 마을의 소학생과 중학생들이 사오십명 빙 둘러앉았다. 암흑했던 구사회를 추억하는 보도가 시작되자 환한 전등을 끄고 초불 몇대를 켜놓았다. 그런다음 녀자애들이 우사칸 소여물을 끓이는 가마에다 쪄낸 겨떡을 대야에 담아 군데군데 나눠놓았다. 어두운 초불밑에서 그 쓰디쓴 겨떡을 먹으며 지난날의 쓴맛을 체험해보라는 뜻이였다. 나도 자그마한 걸로 골라 한입 떼여 먹어보니 입안이 껄껄해났다. 뱉아버리고싶었다. 벌써 저급학년 철부지들이 앉은 쪽에서는 퉤! 퉤! 하고 뱉아버리는 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과외보도원선생님의 준절한 질책소리도 엄엄하게 들려왔다. “누구야? 계급감정도 없어!” 다시 조용해지면서 우물우물 씹는 소리만 들렸다. 최할아버지의 보고는 눈물겨웠다. 과거회억부분이 끝나고 최할아버지가 “마침내 해방이 되였습니다” 라고 하시자 누군가 스위치줄을 탁 당겨 전등을 켰다. 회의실안이 대낮처럼 밝아졌다. 뒤이어 녀자애들이 이번에는 대야에다 맛있는 과자를 골똑골똑 담아서 군데군데 나눠놓았다. 아이들이 서로서로 팔을 뻗쳐 한웅큼씩 쥐여다가는 볼이 미여지게 먹었다. 목이 메여 꿱꿱거리는 아이들도 있었다. 달콤한 과자를 먹으며 새사회의 행복을 느껴보라는 뜻이였다. 그런데 보고가 끝나서 문제가 생겼다. 아이들이 벌떡벌떡 일어나 우루루 쓸어나가자 구석구석에 먹다가 버린 겨떡들이 지저분하게 나타났던것이다. 녀자애들이 그걸 거둬서 모으니 대여섯 대야나 되였다. 그걸 중간에 놓고 과외보도원선생님이 몇몇 학생골간들과 함께 밤중까지 로선분석을 하느라 열을 올렸었다. 아무리 열을 올린들 어찌하랴, 맛이 있는걸 좋아하고 맛이 없는걸 싫어하는 아이들의 입을! 개혁개방이 되면서 음식물도 개방되였고 또한 새롭게 많이 개발되기도 했다. 지어 먼 옛날 황제들만 맛볼수 있었던 궁전음식도 다시 개발되여 평민들도 마음대로 맛을 보게 되였다. 헌데 10년 배부르게 먹고 10년 맛있게 먹고나니 먹는 수준이 사람마다 프로급이 되였다. 외국인들도 중국에 와보고는 입을 딱 벌린다. 맛있는 먹거리들이 너무나도 많다. 동북에는 동북맛이 있고 남방에는 남방맛이 있고 북방에는 북방맛이 있다. 어느 한 고장에 가보면 무엇부터 어떻게 먹어야 할지 몰라 한다. 한 접시에 몇만원짜리 고급료리도 있는가 하면 한개에 오십전짜리 전병도 별맛을 돋구는것이 있다. 맛있는걸 더 맛있게 해먹기 위해 벼라별 방법을 다 쓴다. 조미료도 열가지, 스무가지, 무엇이 맛을 돋굴수 있다면 무엇이든 다 버무려쓴다. 삶고 닦고 지지고 볶고 튀기는것도 모자라서 태우고 굽고 내굴에 그슬러 먹기도 한다. 날것, 생것 그대로 먹는것도 모자라서 동물이나 곤충을 산채로 잡아다 먹는 료리도 있단다. 지어 한때는 남방에서 원숭이를 산채로 잡아다 놓고 눈알이 판들거리는 고놈의 정수리를 뾰쪽망치로 쳐서 뇌즙을 빨아먹는 료리까지 있었다고 한다. 도대체 사람이 할 노릇인지! 무슨 일에나 한계가 있다. 옛날 사람들은 그것을 “도”라고도 했다. 그 “도”를 넘으면 일은 비뚤어질 경우가 많아지게 된다. 음식도 대개 먹을만한 맛이 있으면 되는건데 맛이 있는걸 자꾸 더 맛있게 해먹다보니 그 음식에 문제가 생기게 되는것이다. 지금은 맛있는 음식이 사람들의 건강을 해치고있다. 맛있는 음식에는 대개 다음과 같은 나쁜점이 있다. 첫째, 맛있는 음식이 있으면 대부분 사람들이 평상시보다 더 먹게 된다. 맛있는걸 해놓으면 서로서로 더 들라고 권한다. 이것이 먹는 법도의 례절이고 우리 사회의 인품이다. 과식이 불식이라는 말이 있다. 일년에 한두번이나 한달에 한두번쯤 과식하는건 별문제이겠지만 자꾸자꾸 과식하게 되면 문제가 생긴다. 그 문제가 하루이틀이나 일이년내에 나타나는것이 아니라 몇년, 지어 몇십년후에 나타난다. 시간이 길게 나타나는 문제일수록 인체의 치명적인 약점으로 될수 있다. 좋은 음식일수록 적게 먹어야 “보약”이 된다. 둘째, 맛있는 음식은 대개 종합적인 배합물이다. 식당에 가보면 료리사들이 조미료를 열가지이상씩 놓고 쓴다. 료리의 맛을 돋구는 가장 관건적인것은 소금이다. 국제위생조직에서는 매일 매인당 소금흡수량을 6그람으로 제한할것을 요구하고있다. 헌데 료리 한접시에 들어가는 소금량이 6그람을 초과할 때가 있게 된다. 소금이 적게 들어가면 맛이 없다는 고객들의 의견이 홍두깨처럼 들이닥친다. 그러니 맛있는 료리를 많이 먹을수록 소금흡수량이 늘어나게 된다. 소금흡수량이 늘어나면 인체에 불리하다는 점은 누구나 다 아는 도리가 아닌가! 셋째, 맛있는 음식은 대개 연하고 부드럽고 만만하고 시원하면서도 거뿐한 자극을 준다. 지어 사르르 녹아나는 감을 주는것도 있다. 이것이 우리의 이발을 해친다. 지금 일부 사람들은 얼마든지 씹어서 먹을수 있는것도 더 맛있게 더 시원하게 먹는다고 믹스에다 갈아서 마신다. 무슨 음식이나 씹으면 씹을수록 맛이 나고 씹으면 씹을수록 묽어져서 물이 된다. 그걸 하필이면 영양세포를 파괴시키면서 이발을 무르게 하면서 전기를 랑비하면서 갈아 마실건 뭔가! 누가 승냥이가 산포도를 뜯어먹는 장면을 보았는가? 까맣게 무르익어 몽글몽글해진 산포도를 승냥이는 찔긴 날고기를 먹을 때처럼 텁썩텁썩 물어뜯어서는 까등까등 힘주어 씹어먹는다. 만약 사람이 그걸 뜯어먹는다면 입안에 넣고 오물오물 녹여먹을것이다. 다 같은 산포도이지만 까등까등 씹어먹은것과 오물오물 녹여먹은것이 위안에 들어간다음의 효과는 다른것이다. 이것이 총명한 사람의 무지한 약점이라고나 할가! 넷째, 맛있는 음식은 조합과정에서 많은 오점이 생긴다. 례를 들면 파와 두부를 섞어먹으면 인체에 불리한 물질이 생성된다. 그런데 우리는 모두부를 먹을 때 양념간장에 생생한 파를 송송 썰어서 넣는다. 그래야 맛있다. 일반적으로 무엇과 무엇을 섞어서 만들어 먹을 때 그 영양가치나 인체에 리로운가를 따지는것이 아니라 맛이 있느냐 없느냐를 따지다 보니 인체에 불리한 물질을 생성시켜 먹을 때가 있게 된다. 중약재도 잘 조합시키면 약이 되고 잘못 조합시키면 독이 된다. 이밖에도 맛있는 음식에 보이지 않는 약점이 수두룩하다. 그렇다면 음식을 맛이 없게 해서 맛이 없게 먹어야 하는가? 여기에서 어떻게 먹는가 하는것이 중요하다. 관건은 맛있게 먹는것이다. 무릇 맛있는 음식도 맛있게 먹어야 하고 맛이 없는 음식도 맛있게 먹어야 한다. 음식을 맛이 없게 먹으면 병이 생긴다. 그런데 맛이 없는 음식을 어떻게 맛이 있게 먹는단말인가? 여기에 먹는 예술이 수요된다. 첫째, 음식먹는 분위기를 조성할줄 알아야 한다. 혼자 먹거나 여럿이 함께 식사를 나누든지간에 각자의 성격, 애호, 환경, 조건에 따라 자연스럽게 시각, 청각, 후각의 작용을 동원시켜 미각을 자극할수 있게 해야 한다. 둘째, 음식량을 잘 조절할줄 알아야 한다. 사람마다 체중이 다르고 종사하는 직업이 다르고 성별이 다르기때문에 공통적인 표준량은 있을수 없다. 일반적으로 식사후 서너시간이 지나면 배고파날수 있는 량으로 조절하고 습관화시키면 좋다. 배고파날가말가 할 때 먹는것이 좋다. 배고픈 시간이 길면 위에 문제가 생길수 있다 셋째, 특수한 음식을 먹었을 때에는 상응한 대책을 대야 한다. 례를 들면 기름기 있고 느끼한것을 먹었을 때에는 운동량을 좀 늘이고 마른 음식을 먹었을 때에는 물을 더 마시는것이 좋다. 그래야만이 다음 끼니를 맛있게 먹을수 있다. 넷째, 맛이 없는 음식일수록 오래 씹어야 한다. 오래 씹으면 무엇이나 다 맛이 난다. 문제는 맛이 없는것이라고 일반적으로 오래 씹기 싫어한다. 한번 쓴맛이 나는것을 오래 씹어보면 알수 있다. 이밖에도 맛이 없는 음식을 맛이 있게 먹을수 있는 비결이 많다. 또한 각자가 자기의 특점에 따라 자기로서만의 독특한 비결을 찾아낼수도 있는것이다. 사람에게 제일 중요한것은 생명이다. 생명은 건강으로 지켜야 한다. 건강을 지키사람이 살면서 먹는것보다 더 중요한게 있을가? 없다. 그래서 세계명산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했다. 세월이 좋아지니 하루 세끼니 배를 곯지 않고 먹게 되였다. 배가 부르니 좀 더 맛있는걸로 먹자는것이 사람입이 내미는 욕심이다. 옛날에는 돼지고기국을 해놓아도 땀을 뻘뻘 흘리며 먹었다. 요즘에 와서 땀을 뻘뻘 흘려가며 돼지고기국을 먹는 사람이 있을가? 전번 날, 축하할만한 일이 생겨 남자에 녀자들 두루두루 맞춰 한상에 마주 앉았다. 녀자들 환심을 사느라 누군가 “궈보뤄(탕수육)도 청하지. 녀자들 전매특권이니까” 라고 호기를 피웠다가 그만 말밑천도 못찾고말았다. “지금 그런걸 누가 먹습니꺄! 집에 각시가 그런걸 먹습디꺄?” “허, 이 녀자들 입이 점점 고양이입이 되여가는구만. 그래 무얼 먹겠소?” “남자들이 사줄 때 맛있는걸로 콱 먹어야겠는데… 야, 우리 무얼 먹을가?” “글쎼말이, 요즘은 입에 맞는 음식이라곤 없더라.” 점점 높아가는 입덕에 골머리를 앓는 사람도 적지 않게 늘어간다. 랑군님의 안해로 된 새각시들, 아이들 어머니로 된 주부들, 아침상엔 무얼 올려놓을가, 저녁상준비는 어떻게 할가, 때시걱마다 근심이 앞선다. 끼니마다 맛이 있게 해서 정성껏 갖춰줘도 언제한번 맛있게 먹었다는 소릴 못들어본다. 그다음에는 돈깨나 벌려고 분식점이나 식당같은 음식업을 벌려놓은 주인들이다. 손님들 구미를 맞춰주기 점점 힘들어진다. 지금은 입이 입이 아니고 검사의기가 된듯 싶다. 먹으러 다니는것이 아니라 검식하러 다니는것 같다. 이게 이 맛이 아니고 저게 저 맛이 아니라고 송곳질 하며 꼬집어낼 때에는 정말 주인으로서는 입이 아홉개라도 할말이 없어진다. 이런저런 맛있다는걸 다 구입해다가 요런조런 조미료를 다 쳐서 이래저래 주물럭거려 삶고 삶은걸 볶으고 볶은걸 지지고 지진걸 튀기고 튀긴걸 걸러서 올려놓았는데도 맛이 없다고 하니… 어처구니 없다. 어처구니 없어도 그 손님이 “황제”이니 어쩔수 없다. “먹거리업은 밑지는 법이 없다”는 명언을 성지처럼 받들고 시작한 일이 아닌가! 더 맛있게, 오직 더 맛있게만 하면 손님들도 “ok!”고 주인도 “ok!”다. 그래서 골을 질끈 동이고 머리를 짜면 수가 생긴다. 그 질긴 소고기도 어찌어찌 주물럭거려놓으면 두부모처럼 몰씬몰씬해지고 튀긴걸 어떻게 또 튀기면 그 땅땅하던 닭뼈가 사각사각 씹히다가도 사르르 녹아내리기까지 한다. 끓인걸 또 끓이고도 모자라서 가스렌지까지 상우에 올려놓고 자꾸자꾸 끓인다. 거기에다 연변고추가루요 사천후추가루요 하며 푹푹 뿌려서는 훌훌 불며 먹으니 입안이 짱- 열리며 얼벌벌해진다. 세상 별맛이다. 그런 특이한 맛을 보기 위해 한두번 찾아가는것쯤은 별문제가 아니다. 헌데 어떤 량반들은 그런 맛에 맛을 들이면 하루이틀이 멀다하게 찾아다닐 뿐만 아니라 친구들을 선동하기까지 한다. “야, 거기 그 맛이 한절반 죽여준다. 가자, 오늘저녁은 내가 쏠게!” 모두들 우르르 쓸어가서 그 맛을 보고는 엄지손가락을 내든다. 세상 별맛이라고! 그 사람들 돌아가서 또 제각기 제친구들을 꼬드긴다. 그러면 손님이 기하학적으로 늘어나고 그 식당엔 대박이 터지게 된다. 식당에 대박이 터져서 주인은 돈을 버는데 그 식당으로 드나드는 단골객들의 위와 간을 비롯한 장기들은 어떻게 되여갈가? 음식물을 끓이면 끓일수록, 기름에 튀기면 튀길수록 인체에 해로운 물질이 더 많이 생겨난다는 점은 이미 전문가들의 과학실험에 의해 검증되였다. 그래서 어느 한 전문가는 이렇게 대성질호하고있다. “식당으로 한번 가는것이 무덤으로 한걸음 다가서는것과 같다”고. 좀 지나친 말이 아닌가! 곰곰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음식은 맛이 있을수록 독이 된다”는 말도 있는데 뭐 과학적수치로 검증해낸 결론은 아니지만 많은 실례로 증명해줄수 있는 조언은 될수 있겠다. 중국력대의 황제들 수명이 모두 길지 못했었다. 40대중반에 요절한 황제가 많았다. 그 락후했던 세월에 맛있다는걸 돌아가며 다 맛본 황제일수록 더 일찍 죽어나갔다. 지금 우리 주변을 자세하게 관찰해보면 잘먹는 사람들이 병에 걸리는 비례가 높다는걸 보아낼수 있다. 내가 아는 사람들 가운데 젊어서 외국에 나가 돈을 무척 벌어온 친구가 있었다. “먹다가 죽으면 후회없다”고 늘 마음을 쓰며 놀고먹고 락천적으로 보냈는데 간암이란 진단을 받고 상해에 가서 수술까지 하고나니 그게 아니였다. 그제야 하루라도 더 살겠다고 애를 써봤지만… 먹거리가 흔장만장할 때일수록 입단속을 잘해야 한다. 음식물도 돈처럼 많아도 탈이요 적어도 탈이다. 먹을것이 적었을 때에는 별 우수운 일들이 다 있었다. “대식품시기”에는 음식이 맛이 있는가 없는가를 따지며 먹은것이 아니라 먹을수 있느냐 없느냐를 따져서 먹었다. 무릇 먹을수 있다면 그것이 풀뿌리든 나무껍질이든 벌레든간에 가리지 않고 다 먹었다. 먹을수 있다는것만으로도 충분히 맛을 돋굴수 있었던것이다. 먹는 방법도 강구하지 않았다. 삶는것이 위주였다. 조미료도 소금간장뿐이였다. 멀건 푸대죽에 소금을 툭 쳐서 차려놓아도 맛이 없다고 타발하는 사람이라곤 없었다. 며칠씩 감자만 삶아줘도 그처럼 맛있게, 일년내내 강냉이떡만 쪄줘도 그처럼 맛있게…모든 음식이 그처럼 맛이 있었던 세월이였다. “문화대혁명시기”에는 먹는것을 놓고 로선분석도 하고 계급투쟁도 벌렸었다. 맛이 있는것만 먹고 살아온 사람들은 지주나 자본가와 같은 자산계급이고 맛이 없는것만 먹고 살아온 사람들은 로동자나 빈하중농같은 무산계급이였다는것이다. 중학시절의 어느 한 겨울방학이라고 기억된다. 우리 “웅덩개”마을에서는 계급투쟁교육을 강화한다고 과외보도원선생님이 빈농 최할아버지를 모셔다 놓고 “이쿠스탠”(忆苦思甜)활동을 조직했었다. 널찍한 우사칸회의실안에 마을의 소학생과 중학생들이 사오십명 빙 둘러앉았다. 암흑했던 구사회를 추억하는 보도가 시작되자 환한 전등을 끄고 초불 몇대를 켜놓았다. 그런다음 녀자애들이 우사칸 소여물을 끓이는 가마에다 쪄낸 겨떡을 대야에 담아 군데군데 나눠놓았다. 어두운 초불밑에서 그 쓰디쓴 겨떡을 먹으며 지난날의 쓴맛을 체험해보라는 뜻이였다. 나도 자그마한 걸로 골라 한입 떼여 먹어보니 입안이 껄껄해났다. 뱉아버리고싶었다. 벌써 저급학년 철부지들이 앉은 쪽에서는 퉤! 퉤! 하고 뱉아버리는 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과외보도원선생님의 준절한 질책소리도 엄엄하게 들려왔다. “누구야? 계급감정도 없어!” 다시 조용해지면서 우물우물 씹는 소리만 들렸다. 최할아버지의 보고는 눈물겨웠다. 과거회억부분이 끝나고 최할아버지가 “마침내 해방이 되였습니다” 라고 하시자 누군가 스위치줄을 탁 당겨 전등을 켰다. 회의실안이 대낮처럼 밝아졌다. 뒤이어 녀자애들이 이번에는 대야에다 맛있는 과자를 골똑골똑 담아서 군데군데 나눠놓았다. 아이들이 서로서로 팔을 뻗쳐 한웅큼씩 쥐여다가는 볼이 미여지게 먹었다. 목이 메여 꿱꿱거리는 아이들도 있었다. 달콤한 과자를 먹으며 새사회의 행복을 느껴보라는 뜻이였다. 그런데 보고가 끝나서 문제가 생겼다. 아이들이 벌떡벌떡 일어나 우루루 쓸어나가자 구석구석에 먹다가 버린 겨떡들이 지저분하게 나타났던것이다. 녀자애들이 그걸 거둬서 모으니 대여섯 대야나 되였다. 그걸 중간에 놓고 과외보도원선생님이 몇몇 학생골간들과 함께 밤중까지 로선분석을 하느라 열을 올렸었다. 아무리 열을 올린들 어찌하랴, 맛이 있는걸 좋아하고 맛이 없는걸 싫어하는 아이들의 입을! 개혁개방이 되면서 음식물도 개방되였고 또한 새롭게 많이 개발되기도 했다. 지어 먼 옛날 황제들만 맛볼수 있었던 궁전음식도 다시 개발되여 평민들도 마음대로 맛을 보게 되였다. 헌데 10년 배부르게 먹고 10년 맛있게 먹고나니 먹는 수준이 사람마다 프로급이 되였다. 외국인들도 중국에 와보고는 입을 딱 벌린다. 맛있는 먹거리들이 너무나도 많다. 동북에는 동북맛이 있고 남방에는 남방맛이 있고 북방에는 북방맛이 있다. 어느 한 고장에 가보면 무엇부터 어떻게 먹어야 할지 몰라 한다. 한 접시에 몇만원짜리 고급료리도 있는가 하면 한개에 오십전짜리 전병도 별맛을 돋구는것이 있다. 맛있는걸 더 맛있게 해먹기 위해 벼라별 방법을 다 쓴다. 조미료도 열가지, 스무가지, 무엇이 맛을 돋굴수 있다면 무엇이든 다 버무려쓴다. 삶고 닦고 지지고 볶고 튀기는것도 모자라서 태우고 굽고 내굴에 그슬러 먹기도 한다. 날것, 생것 그대로 먹는것도 모자라서 동물이나 곤충을 산채로 잡아다 먹는 료리도 있단다. 지어 한때는 남방에서 원숭이를 산채로 잡아다 놓고 눈알이 판들거리는 고놈의 정수리를 뾰쪽망치로 쳐서 뇌즙을 빨아먹는 료리까지 있었다고 한다. 도대체 사람이 할 노릇인지! 무슨 일에나 한계가 있다. 옛날 사람들은 그것을 “도”라고도 했다. 그 “도”를 넘으면 일은 비뚤어질 경우가 많아지게 된다. 음식도 대개 먹을만한 맛이 있으면 되는건데 맛이 있는걸 자꾸 더 맛있게 해먹다보니 그 음식에 문제가 생기게 되는것이다. 지금은 맛있는 음식이 사람들의 건강을 해치고있다. 맛있는 음식에는 대개 다음과 같은 나쁜점이 있다. 첫째, 맛있는 음식이 있으면 대부분 사람들이 평상시보다 더 먹게 된다. 맛있는걸 해놓으면 서로서로 더 들라고 권한다. 이것이 먹는 법도의 례절이고 우리 사회의 인품이다. 과식이 불식이라는 말이 있다. 일년에 한두번이나 한달에 한두번쯤 과식하는건 별문제이겠지만 자꾸자꾸 과식하게 되면 문제가 생긴다. 그 문제가 하루이틀이나 일이년내에 나타나는것이 아니라 몇년, 지어 몇십년후에 나타난다. 시간이 길게 나타나는 문제일수록 인체의 치명적인 약점으로 될수 있다. 좋은 음식일수록 적게 먹어야 “보약”이 된다. 둘째, 맛있는 음식은 대개 종합적인 배합물이다. 식당에 가보면 료리사들이 조미료를 열가지이상씩 놓고 쓴다. 료리의 맛을 돋구는 가장 관건적인것은 소금이다. 국제위생조직에서는 매일 매인당 소금흡수량을 6그람으로 제한할것을 요구하고있다. 헌데 료리 한접시에 들어가는 소금량이 6그람을 초과할 때가 있게 된다. 소금이 적게 들어가면 맛이 없다는 고객들의 의견이 홍두깨처럼 들이닥친다. 그러니 맛있는 료리를 많이 먹을수록 소금흡수량이 늘어나게 된다. 소금흡수량이 늘어나면 인체에 불리하다는 점은 누구나 다 아는 도리가 아닌가! 셋째, 맛있는 음식은 대개 연하고 부드럽고 만만하고 시원하면서도 거뿐한 자극을 준다. 지어 사르르 녹아나는 감을 주는것도 있다. 이것이 우리의 이발을 해친다. 지금 일부 사람들은 얼마든지 씹어서 먹을수 있는것도 더 맛있게 더 시원하게 먹는다고 믹스에다 갈아서 마신다. 무슨 음식이나 씹으면 씹을수록 맛이 나고 씹으면 씹을수록 묽어져서 물이 된다. 그걸 하필이면 영양세포를 파괴시키면서 이발을 무르게 하면서 전기를 랑비하면서 갈아 마실건 뭔가! 누가 승냥이가 산포도를 뜯어먹는 장면을 보았는가? 까맣게 무르익어 몽글몽글해진 산포도를 승냥이는 찔긴 날고기를 먹을 때처럼 텁썩텁썩 물어뜯어서는 까등까등 힘주어 씹어먹는다. 만약 사람이 그걸 뜯어먹는다면 입안에 넣고 오물오물 녹여먹을것이다. 다 같은 산포도이지만 까등까등 씹어먹은것과 오물오물 녹여먹은것이 위안에 들어간다음의 효과는 다른것이다. 이것이 총명한 사람의 무지한 약점이라고나 할가! 넷째, 맛있는 음식은 조합과정에서 많은 오점이 생긴다. 례를 들면 파와 두부를 섞어먹으면 인체에 불리한 물질이 생성된다. 그런데 우리는 모두부를 먹을 때 양념간장에 생생한 파를 송송 썰어서 넣는다. 그래야 맛있다. 일반적으로 무엇과 무엇을 섞어서 만들어 먹을 때 그 영양가치나 인체에 리로운가를 따지는것이 아니라 맛이 있느냐 없느냐를 따지다 보니 인체에 불리한 물질을 생성시켜 먹을 때가 있게 된다. 중약재도 잘 조합시키면 약이 되고 잘못 조합시키면 독이 된다. 이밖에도 맛있는 음식에 보이지 않는 약점이 수두룩하다. 그렇다면 음식을 맛이 없게 해서 맛이 없게 먹어야 하는가? 여기에서 어떻게 먹는가 하는것이 중요하다. 관건은 맛있게 먹는것이다. 무릇 맛있는 음식도 맛있게 먹어야 하고 맛이 없는 음식도 맛있게 먹어야 한다. 음식을 맛이 없게 먹으면 병이 생긴다. 그런데 맛이 없는 음식을 어떻게 맛이 있게 먹는단말인가? 여기에 먹는 예술이 수요된다. 첫째, 음식먹는 분위기를 조성할줄 알아야 한다. 혼자 먹거나 여럿이 함께 식사를 나누든지간에 각자의 성격, 애호, 환경, 조건에 따라 자연스럽게 시각, 청각, 후각의 작용을 동원시켜 미각을 자극할수 있게 해야 한다. 둘째, 음식량을 잘 조절할줄 알아야 한다. 사람마다 체중이 다르고 종사하는 직업이 다르고 성별이 다르기때문에 공통적인 표준량은 있을수 없다. 일반적으로 식사후 서너시간이 지나면 배고파날수 있는 량으로 조절하고 습관화시키면 좋다. 배고파날가말가 할 때 먹는것이 좋다. 배고픈 시간이 길면 위에 문제가 생길수 있다 셋째, 특수한 음식을 먹었을 때에는 상응한 대책을 대야 한다. 례를 들면 기름기 있고 느끼한것을 먹었을 때에는 운동량을 좀 늘이고 마른 음식을 먹었을 때에는 물을 더 마시는것이 좋다. 그래야만이 다음 끼니를 맛있게 먹을수 있다. 넷째, 맛이 없는 음식일수록 오래 씹어야 한다. 오래 씹으면 무엇이나 다 맛이 난다. 문제는 맛이 없는것이라고 일반적으로 오래 씹기 싫어한다. 한번 쓴맛이 나는것을 오래 씹어보면 알수 있다. 이밖에도 맛이 없는 음식을 맛이 있게 먹을수 있는 비결이 많다. 또한 각자가 자기의 특점에 따라 자기로서만의 독특한 비결을 찾아낼수도 있는것이다. 사람에게 제일 중요한것은 생명이다. 생명은 건강으로 지켜야 한다. 건강을 지키자면 먹는것이 관건이다. 관건문제를 해결하는 열쇠는 과학이다. 과학적으로 음식을 만들자면 우리의 입맛과 달라질 때가 많게 된다. 일반적으로 맛이 없는 음식이 인체에 리롭다. 마치도 “쓴것이 약”이라는 도리와 같다고나 할가! 영양학적으로 따지면 음식은 간단하게 만드는것이 좋다. 대개 간단하게 만들어낸 음식이 맛을 돋구지 못한다. 허지만 오늘날 우리는 자기의 건강을 위해서는 그것을 맛이 있게 먹어야 한다. 사람이 살면서 먹는것보다 더 중요한게 있을가? 없다. 그래서 세계명산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했다. 세월이 좋아지니 하루 세끼니 배를 곯지 않고 먹게 되였다. 배가 부르니 좀 더 맛있는걸로 먹자는것이 사람입이 내미는 욕심이다. 옛날에는 돼지고기국을 해놓아도 땀을 뻘뻘 흘리며 먹었다. 요즘에 와서 땀을 뻘뻘 흘려가며 돼지고기국을 먹는 사람이 있을가? 전번 날, 축하할만한 일이 생겨 남자에 녀자들 두루두루 맞춰 한상에 마주 앉았다. 녀자들 환심을 사느라 누군가 “궈보뤄(탕수육)도 청하지. 녀자들 전매특권이니까” 라고 호기를 피웠다가 그만 말밑천도 못찾고말았다. “지금 그런걸 누가 먹습니꺄! 집에 각시가 그런걸 먹습디꺄?” “허, 이 녀자들 입이 점점 고양이입이 되여가는구만. 그래 무얼 먹겠소?” “남자들이 사줄 때 맛있는걸로 콱 먹어야겠는데… 야, 우리 무얼 먹을가?” “글쎼말이, 요즘은 입에 맞는 음식이라곤 없더라.” 점점 높아가는 입덕에 골머리를 앓는 사람도 적지 않게 늘어간다. 랑군님의 안해로 된 새각시들, 아이들 어머니로 된 주부들, 아침상엔 무얼 올려놓을가, 저녁상준비는 어떻게 할가, 때시걱마다 근심이 앞선다. 끼니마다 맛이 있게 해서 정성껏 갖춰줘도 언제한번 맛있게 먹었다는 소릴 못들어본다. 그다음에는 돈깨나 벌려고 분식점이나 식당같은 음식업을 벌려놓은 주인들이다. 손님들 구미를 맞춰주기 점점 힘들어진다. 지금은 입이 입이 아니고 검사의기가 된듯 싶다. 먹으러 다니는것이 아니라 검식하러 다니는것 같다. 이게 이 맛이 아니고 저게 저 맛이 아니라고 송곳질 하며 꼬집어낼 때에는 정말 주인으로서는 입이 아홉개라도 할말이 없어진다. 이런저런 맛있다는걸 다 구입해다가 요런조런 조미료를 다 쳐서 이래저래 주물럭거려 삶고 삶은걸 볶으고 볶은걸 지지고 지진걸 튀기고 튀긴걸 걸러서 올려놓았는데도 맛이 없다고 하니… 어처구니 없다. 어처구니 없어도 그 손님이 “황제”이니 어쩔수 없다. “먹거리업은 밑지는 법이 없다”는 명언을 성지처럼 받들고 시작한 일이 아닌가! 더 맛있게, 오직 더 맛있게만 하면 손님들도 “ok!”고 주인도 “ok!”다. 그래서 골을 질끈 동이고 머리를 짜면 수가 생긴다. 그 질긴 소고기도 어찌어찌 주물럭거려놓으면 두부모처럼 몰씬몰씬해지고 튀긴걸 어떻게 또 튀기면 그 땅땅하던 닭뼈가 사각사각 씹히다가도 사르르 녹아내리기까지 한다. 끓인걸 또 끓이고도 모자라서 가스렌지까지 상우에 올려놓고 자꾸자꾸 끓인다. 거기에다 연변고추가루요 사천후추가루요 하며 푹푹 뿌려서는 훌훌 불며 먹으니 입안이 짱- 열리며 얼벌벌해진다. 세상 별맛이다. 그런 특이한 맛을 보기 위해 한두번 찾아가는것쯤은 별문제가 아니다. 헌데 어떤 량반들은 그런 맛에 맛을 들이면 하루이틀이 멀다하게 찾아다닐 뿐만 아니라 친구들을 선동하기까지 한다. “야, 거기 그 맛이 한절반 죽여준다. 가자, 오늘저녁은 내가 쏠게!” 모두들 우르르 쓸어가서 그 맛을 보고는 엄지손가락을 내든다. 세상 별맛이라고! 그 사람들 돌아가서 또 제각기 제친구들을 꼬드긴다. 그러면 손님이 기하학적으로 늘어나고 그 식당엔 대박이 터지게 된다. 식당에 대박이 터져서 주인은 돈을 버는데 그 식당으로 드나드는 단골객들의 위와 간을 비롯한 장기들은 어떻게 되여갈가? 음식물을 끓이면 끓일수록, 기름에 튀기면 튀길수록 인체에 해로운 물질이 더 많이 생겨난다는 점은 이미 전문가들의 과학실험에 의해 검증되였다. 그래서 어느 한 전문가는 이렇게 대성질호하고있다. “식당으로 한번 가는것이 무덤으로 한걸음 다가서는것과 같다”고. 좀 지나친 말이 아닌가! 곰곰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음식은 맛이 있을수록 독이 된다”는 말도 있는데 뭐 과학적수치로 검증해낸 결론은 아니지만 많은 실례로 증명해줄수 있는 조언은 될수 있겠다. 중국력대의 황제들 수명이 모두 길지 못했었다. 40대중반에 요절한 황제가 많았다. 그 락후했던 세월에 맛있다는걸 돌아가며 다 맛본 황제일수록 더 일찍 죽어나갔다. 지금 우리 주변을 자세하게 관찰해보면 잘먹는 사람들이 병에 걸리는 비례가 높다는걸 보아낼수 있다. 내가 아는 사람들 가운데 젊어서 외국에 나가 돈을 무척 벌어온 친구가 있었다. “먹다가 죽으면 후회없다”고 늘 마음을 쓰며 놀고먹고 락천적으로 보냈는데 간암이란 진단을 받고 상해에 가서 수술까지 하고나니 그게 아니였다. 그제야 하루라도 더 살겠다고 애를 써봤지만… 먹거리가 흔장만장할 때일수록 입단속을 잘해야 한다. 음식물도 돈처럼 많아도 탈이요 적어도 탈이다. 먹을것이 적었을 때에는 별 우수운 일들이 다 있었다. “대식품시기”에는 음식이 맛이 있는가 없는가를 따지며 먹은것이 아니라 먹을수 있느냐 없느냐를 따져서 먹었다. 무릇 먹을수 있다면 그것이 풀뿌리든 나무껍질이든 벌레든간에 가리지 않고 다 먹었다. 먹을수 있다는것만으로도 충분히 맛을 돋굴수 있었던것이다. 먹는 방법도 강구하지 않았다. 삶는것이 위주였다. 조미료도 소금간장뿐이였다. 멀건 푸대죽에 소금을 툭 쳐서 차려놓아도 맛이 없다고 타발하는 사람이라곤 없었다. 며칠씩 감자만 삶아줘도 그처럼 맛있게, 일년내내 강냉이떡만 쪄줘도 그처럼 맛있게…모든 음식이 그처럼 맛이 있었던 세월이였다. “문화대혁명시기”에는 먹는것을 놓고 로선분석도 하고 계급투쟁도 벌렸었다. 맛이 있는것만 먹고 살아온 사람들은 지주나 자본가와 같은 자산계급이고 맛이 없는것만 먹고 살아온 사람들은 로동자나 빈하중농같은 무산계급이였다는것이다. 중학시절의 어느 한 겨울방학이라고 기억된다. 우리 “웅덩개”마을에서는 계급투쟁교육을 강화한다고 과외보도원선생님이 빈농 최할아버지를 모셔다 놓고 “이쿠스탠”(忆苦思甜)활동을 조직했었다. 널찍한 우사칸회의실안에 마을의 소학생과 중학생들이 사오십명 빙 둘러앉았다. 암흑했던 구사회를 추억하는 보도가 시작되자 환한 전등을 끄고 초불 몇대를 켜놓았다. 그런다음 녀자애들이 우사칸 소여물을 끓이는 가마에다 쪄낸 겨떡을 대야에 담아 군데군데 나눠놓았다. 어두운 초불밑에서 그 쓰디쓴 겨떡을 먹으며 지난날의 쓴맛을 체험해보라는 뜻이였다. 나도 자그마한 걸로 골라 한입 떼여 먹어보니 입안이 껄껄해났다. 뱉아버리고싶었다. 벌써 저급학년 철부지들이 앉은 쪽에서는 퉤! 퉤! 하고 뱉아버리는 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과외보도원선생님의 준절한 질책소리도 엄엄하게 들려왔다. “누구야? 계급감정도 없어!” 다시 조용해지면서 우물우물 씹는 소리만 들렸다. 최할아버지의 보고는 눈물겨웠다. 과거회억부분이 끝나고 최할아버지가 “마침내 해방이 되였습니다” 라고 하시자 누군가 스위치줄을 탁 당겨 전등을 켰다. 회의실안이 대낮처럼 밝아졌다. 뒤이어 녀자애들이 이번에는 대야에다 맛있는 과자를 골똑골똑 담아서 군데군데 나눠놓았다. 아이들이 서로서로 팔을 뻗쳐 한웅큼씩 쥐여다가는 볼이 미여지게 먹었다. 목이 메여 꿱꿱거리는 아이들도 있었다. 달콤한 과자를 먹으며 새사회의 행복을 느껴보라는 뜻이였다. 그런데 보고가 끝나서 문제가 생겼다. 아이들이 벌떡벌떡 일어나 우루루 쓸어나가자 구석구석에 먹다가 버린 겨떡들이 지저분하게 나타났던것이다. 녀자애들이 그걸 거둬서 모으니 대여섯 대야나 되였다. 그걸 중간에 놓고 과외보도원선생님이 몇몇 학생골간들과 함께 밤중까지 로선분석을 하느라 열을 올렸었다. 아무리 열을 올린들 어찌하랴, 맛이 있는걸 좋아하고 맛이 없는걸 싫어하는 아이들의 입을! 개혁개방이 되면서 음식물도 개방되였고 또한 새롭게 많이 개발되기도 했다. 지어 먼 옛날 황제들만 맛볼수 있었던 궁전음식도 다시 개발되여 평민들도 마음대로 맛을 보게 되였다. 헌데 10년 배부르게 먹고 10년 맛있게 먹고나니 먹는 수준이 사람마다 프로급이 되였다. 외국인들도 중국에 와보고는 입을 딱 벌린다. 맛있는 먹거리들이 너무나도 많다. 동북에는 동북맛이 있고 남방에는 남방맛이 있고 북방에는 북방맛이 있다. 어느 한 고장에 가보면 무엇부터 어떻게 먹어야 할지 몰라 한다. 한 접시에 몇만원짜리 고급료리도 있는가 하면 한개에 오십전짜리 전병도 별맛을 돋구는것이 있다. 맛있는걸 더 맛있게 해먹기 위해 벼라별 방법을 다 쓴다. 조미료도 열가지, 스무가지, 무엇이 맛을 돋굴수 있다면 무엇이든 다 버무려쓴다. 삶고 닦고 지지고 볶고 튀기는것도 모자라서 태우고 굽고 내굴에 그슬러 먹기도 한다. 날것, 생것 그대로 먹는것도 모자라서 동물이나 곤충을 산채로 잡아다 먹는 료리도 있단다. 지어 한때는 남방에서 원숭이를 산채로 잡아다 놓고 눈알이 판들거리는 고놈의 정수리를 뾰쪽망치로 쳐서 뇌즙을 빨아먹는 료리까지 있었다고 한다. 도대체 사람이 할 노릇인지! 무슨 일에나 한계가 있다. 옛날 사람들은 그것을 “도”라고도 했다. 그 “도”를 넘으면 일은 비뚤어질 경우가 많아지게 된다. 음식도 대개 먹을만한 맛이 있으면 되는건데 맛이 있는걸 자꾸 더 맛있게 해먹다보니 그 음식에 문제가 생기게 되는것이다. 지금은 맛있는 음식이 사람들의 건강을 해치고있다. 맛있는 음식에는 대개 다음과 같은 나쁜점이 있다. 첫째, 맛있는 음식이 있으면 대부분 사람들이 평상시보다 더 먹게 된다. 맛있는걸 해놓으면 서로서로 더 들라고 권한다. 이것이 먹는 법도의 례절이고 우리 사회의 인품이다. 과식이 불식이라는 말이 있다. 일년에 한두번이나 한달에 한두번쯤 과식하는건 별문제이겠지만 자꾸자꾸 과식하게 되면 문제가 생긴다. 그 문제가 하루이틀이나 일이년내에 나타나는것이 아니라 몇년, 지어 몇십년후에 나타난다. 시간이 길게 나타나는 문제일수록 인체의 치명적인 약점으로 될수 있다. 좋은 음식일수록 적게 먹어야 “보약”이 된다. 둘째, 맛있는 음식은 대개 종합적인 배합물이다. 식당에 가보면 료리사들이 조미료를 열가지이상씩 놓고 쓴다. 료리의 맛을 돋구는 가장 관건적인것은 소금이다. 국제위생조직에서는 매일 매인당 소금흡수량을 6그람으로 제한할것을 요구하고있다. 헌데 료리 한접시에 들어가는 소금량이 6그람을 초과할 때가 있게 된다. 소금이 적게 들어가면 맛이 없다는 고객들의 의견이 홍두깨처럼 들이닥친다. 그러니 맛있는 료리를 많이 먹을수록 소금흡수량이 늘어나게 된다. 소금흡수량이 늘어나면 인체에 불리하다는 점은 누구나 다 아는 도리가 아닌가! 셋째, 맛있는 음식은 대개 연하고 부드럽고 만만하고 시원하면서도 거뿐한 자극을 준다. 지어 사르르 녹아나는 감을 주는것도 있다. 이것이 우리의 이발을 해친다. 지금 일부 사람들은 얼마든지 씹어서 먹을수 있는것도 더 맛있게 더 시원하게 먹는다고 믹스에다 갈아서 마신다. 무슨 음식이나 씹으면 씹을수록 맛이 나고 씹으면 씹을수록 묽어져서 물이 된다. 그걸 하필이면 영양세포를 파괴시키면서 이발을 무르게 하면서 전기를 랑비하면서 갈아 마실건 뭔가! 누가 승냥이가 산포도를 뜯어먹는 장면을 보았는가? 까맣게 무르익어 몽글몽글해진 산포도를 승냥이는 찔긴 날고기를 먹을 때처럼 텁썩텁썩 물어뜯어서는 까등까등 힘주어 씹어먹는다. 만약 사람이 그걸 뜯어먹는다면 입안에 넣고 오물오물 녹여먹을것이다. 다 같은 산포도이지만 까등까등 씹어먹은것과 오물오물 녹여먹은것이 위안에 들어간다음의 효과는 다른것이다. 이것이 총명한 사람의 무지한 약점이라고나 할가! 넷째, 맛있는 음식은 조합과정에서 많은 오점이 생긴다. 례를 들면 파와 두부를 섞어먹으면 인체에 불리한 물질이 생성된다. 그런데 우리는 모두부를 먹을 때 양념간장에 생생한 파를 송송 썰어서 넣는다. 그래야 맛있다. 일반적으로 무엇과 무엇을 섞어서 만들어 먹을 때 그 영양가치나 인체에 리로운가를 따지는것이 아니라 맛이 있느냐 없느냐를 따지다 보니 인체에 불리한 물질을 생성시켜 먹을 때가 있게 된다. 중약재도 잘 조합시키면 약이 되고 잘못 조합시키면 독이 된다. 이밖에도 맛있는 음식에 보이지 않는 약점이 수두룩하다. 그렇다면 음식을 맛이 없게 해서 맛이 없게 먹어야 하는가? 여기에서 어떻게 먹는가 하는것이 중요하다. 관건은 맛있게 먹는것이다. 무릇 맛있는 음식도 맛있게 먹어야 하고 맛이 없는 음식도 맛있게 먹어야 한다. 음식을 맛이 없게 먹으면 병이 생긴다. 그런데 맛이 없는 음식을 어떻게 맛이 있게 먹는단말인가? 여기에 먹는 예술이 수요된다. 첫째, 음식먹는 분위기를 조성할줄 알아야 한다. 혼자 먹거나 여럿이 함께 식사를 나누든지간에 각자의 성격, 애호, 환경, 조건에 따라 자연스럽게 시각, 청각, 후각의 작용을 동원시켜 미각을 자극할수 있게 해야 한다. 둘째, 음식량을 잘 조절할줄 알아야 한다. 사람마다 체중이 다르고 종사하는 직업이 다르고 성별이 다르기때문에 공통적인 표준량은 있을수 없다. 일반적으로 식사후 서너시간이 지나면 배고파날수 있는 량으로 조절하고 습관화시키면 좋다. 배고파날가말가 할 때 먹는것이 좋다. 배고픈 시간이 길면 위에 문제가 생길수 있다 셋째, 특수한 음식을 먹었을 때에는 상응한 대책을 대야 한다. 례를 들면 기름기 있고 느끼한것을 먹었을 때에는 운동량을 좀 늘이고 마른 음식을 먹었을 때에는 물을 더 마시는것이 좋다. 그래야만이 다음 끼니를 맛있게 먹을수 있다. 넷째, 맛이 없는 음식일수록 오래 씹어야 한다. 오래 씹으면 무엇이나 다 맛이 난다. 문제는 맛이 없는것이라고 일반적으로 오래 씹기 싫어한다. 한번 쓴맛이 나는것을 오래 씹어보면 알수 있다. 이밖에도 맛이 없는 음식을 맛이 있게 먹을수 있는 비결이 많다. 또한 각자가 자기의 특점에 따라 자기로서만의 독특한 비결을 찾아낼수도 있는것이다. 사람에게 제일 중요한것은 생명이다. 생명은 건강으로 지켜야 한다. 건강을 지키자면 먹는것이 관건이다. 관건문제를 해결하는 열쇠는 과학이다. 과학적으로 음식을 만들자면 우리의 입맛과 달라질 때가 많게 된다. 일반적으로 맛이 없는 음식이 인체에 리롭다. 마치도 “쓴것이 약”이라는 도리와 같다고나 할가! 영양학적으로 따지면 음식은 간단하게 만드는것이 좋다. 대개 간단하게 만들어낸 음식이 맛을 돋구지 못한다. 허지만 오늘날 우리는 자기의 건강을 위해서는 그것을 맛이 있게 먹어야 한다. 자면 먹는것이 관건이다. 관건문제를 해결하는 열쇠는 과학이다. 과학적으로 음식을 만들자면 우리의 입맛과 달라질 때가 많게 된다. 일반적으로 맛이 없는 음식이 인체에 리롭다. 마치도 “쓴것이 약”이라는 도리와 같다고나 할가! 영양학적으로 따지면 음식은 간단하게 만드는것이 좋다. 대개 간단하게 만들어낸 음식이 맛을 돋구지 못한다. 허지만 오늘날 우리는 자기의 건강을 위해서는 그것을 맛이 있게 먹어야 한다. 사람이 살면서 먹는것보다 더 중요한게 있을가? 없다. 그래서 세계명산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했다. 세월이 좋아지니 하루 세끼니 배를 곯지 않고 먹게 되였다. 배가 부르니 좀 더 맛있는걸로 먹자는것이 사람입이 내미는 욕심이다. 옛날에는 돼지고기국을 해놓아도 땀을 뻘뻘 흘리며 먹었다. 요즘에 와서 땀을 뻘뻘 흘려가며 돼지고기국을 먹는 사람이 있을가? 전번 날, 축하할만한 일이 생겨 남자에 녀자들 두루두루 맞춰 한상에 마주 앉았다. 녀자들 환심을 사느라 누군가 “궈보뤄(탕수육)도 청하지. 녀자들 전매특권이니까” 라고 호기를 피웠다가 그만 말밑천도 못찾고말았다. “지금 그런걸 누가 먹습니꺄! 집에 각시가 그런걸 먹습디꺄?” “허, 이 녀자들 입이 점점 고양이입이 되여가는구만. 그래 무얼 먹겠소?” “남자들이 사줄 때 맛있는걸로 콱 먹어야겠는데… 야, 우리 무얼 먹을가?” “글쎼말이, 요즘은 입에 맞는 음식이라곤 없더라.” 점점 높아가는 입덕에 골머리를 앓는 사람도 적지 않게 늘어간다. 랑군님의 안해로 된 새각시들, 아이들 어머니로 된 주부들, 아침상엔 무얼 올려놓을가, 저녁상준비는 어떻게 할가, 때시걱마다 근심이 앞선다. 끼니마다 맛이 있게 해서 정성껏 갖춰줘도 언제한번 맛있게 먹었다는 소릴 못들어본다. 그다음에는 돈깨나 벌려고 분식점이나 식당같은 음식업을 벌려놓은 주인들이다. 손님들 구미를 맞춰주기 점점 힘들어진다. 지금은 입이 입이 아니고 검사의기가 된듯 싶다. 먹으러 다니는것이 아니라 검식하러 다니는것 같다. 이게 이 맛이 아니고 저게 저 맛이 아니라고 송곳질 하며 꼬집어낼 때에는 정말 주인으로서는 입이 아홉개라도 할말이 없어진다. 이런저런 맛있다는걸 다 구입해다가 요런조런 조미료를 다 쳐서 이래저래 주물럭거려 삶고 삶은걸 볶으고 볶은걸 지지고 지진걸 튀기고 튀긴걸 걸러서 올려놓았는데도 맛이 없다고 하니… 어처구니 없다. 어처구니 없어도 그 손님이 “황제”이니 어쩔수 없다. “먹거리업은 밑지는 법이 없다”는 명언을 성지처럼 받들고 시작한 일이 아닌가! 더 맛있게, 오직 더 맛있게만 하면 손님들도 “ok!”고 주인도 “ok!”다. 그래서 골을 질끈 동이고 머리를 짜면 수가 생긴다. 그 질긴 소고기도 어찌어찌 주물럭거려놓으면 두부모처럼 몰씬몰씬해지고 튀긴걸 어떻게 또 튀기면 그 땅땅하던 닭뼈가 사각사각 씹히다가도 사르르 녹아내리기까지 한다. 끓인걸 또 끓이고도 모자라서 가스렌지까지 상우에 올려놓고 자꾸자꾸 끓인다. 거기에다 연변고추가루요 사천후추가루요 하며 푹푹 뿌려서는 훌훌 불며 먹으니 입안이 짱- 열리며 얼벌벌해진다. 세상 별맛이다. 그런 특이한 맛을 보기 위해 한두번 찾아가는것쯤은 별문제가 아니다. 헌데 어떤 량반들은 그런 맛에 맛을 들이면 하루이틀이 멀다하게 찾아다닐 뿐만 아니라 친구들을 선동하기까지 한다. “야, 거기 그 맛이 한절반 죽여준다. 가자, 오늘저녁은 내가 쏠게!” 모두들 우르르 쓸어가서 그 맛을 보고는 엄지손가락을 내든다. 세상 별맛이라고! 그 사람들 돌아가서 또 제각기 제친구들을 꼬드긴다. 그러면 손님이 기하학적으로 늘어나고 그 식당엔 대박이 터지게 된다. 식당에 대박이 터져서 주인은 돈을 버는데 그 식당으로 드나드는 단골객들의 위와 간을 비롯한 장기들은 어떻게 되여갈가? 음식물을 끓이면 끓일수록, 기름에 튀기면 튀길수록 인체에 해로운 물질이 더 많이 생겨난다는 점은 이미 전문가들의 과학실험에 의해 검증되였다. 그래서 어느 한 전문가는 이렇게 대성질호하고있다. “식당으로 한번 가는것이 무덤으로 한걸음 다가서는것과 같다”고. 좀 지나친 말이 아닌가! 곰곰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음식은 맛이 있을수록 독이 된다”는 말도 있는데 뭐 과학적수치로 검증해낸 결론은 아니지만 많은 실례로 증명해줄수 있는 조언은 될수 있겠다. 중국력대의 황제들 수명이 모두 길지 못했었다. 40대중반에 요절한 황제가 많았다. 그 락후했던 세월에 맛있다는걸 돌아가며 다 맛본 황제일수록 더 일찍 죽어나갔다. 지금 우리 주변을 자세하게 관찰해보면 잘먹는 사람들이 병에 걸리는 비례가 높다는걸 보아낼수 있다. 내가 아는 사람들 가운데 젊어서 외국에 나가 돈을 무척 벌어온 친구가 있었다. “먹다가 죽으면 후회없다”고 늘 마음을 쓰며 놀고먹고 락천적으로 보냈는데 간암이란 진단을 받고 상해에 가서 수술까지 하고나니 그게 아니였다. 그제야 하루라도 더 살겠다고 애를 써봤지만… 먹거리가 흔장만장할 때일수록 입단속을 잘해야 한다. 음식물도 돈처럼 많아도 탈이요 적어도 탈이다. 먹을것이 적었을 때에는 별 우수운 일들이 다 있었다. “대식품시기”에는 음식이 맛이 있는가 없는가를 따지며 먹은것이 아니라 먹을수 있느냐 없느냐를 따져서 먹었다. 무릇 먹을수 있다면 그것이 풀뿌리든 나무껍질이든 벌레든간에 가리지 않고 다 먹었다. 먹을수 있다는것만으로도 충분히 맛을 돋굴수 있었던것이다. 먹는 방법도 강구하지 않았다. 삶는것이 위주였다. 조미료도 소금간장뿐이였다. 멀건 푸대죽에 소금을 툭 쳐서 차려놓아도 맛이 없다고 타발하는 사람이라곤 없었다. 며칠씩 감자만 삶아줘도 그처럼 맛있게, 일년내내 강냉이떡만 쪄줘도 그처럼 맛있게…모든 음식이 그처럼 맛이 있었던 세월이였다. “문화대혁명시기”에는 먹는것을 놓고 로선분석도 하고 계급투쟁도 벌렸었다. 맛이 있는것만 먹고 살아온 사람들은 지주나 자본가와 같은 자산계급이고 맛이 없는것만 먹고 살아온 사람들은 로동자나 빈하중농같은 무산계급이였다는것이다. 중학시절의 어느 한 겨울방학이라고 기억된다. 우리 “웅덩개”마을에서는 계급투쟁교육을 강화한다고 과외보도원선생님이 빈농 최할아버지를 모셔다 놓고 “이쿠스탠”(忆苦思甜)활동을 조직했었다. 널찍한 우사칸회의실안에 마을의 소학생과 중학생들이 사오십명 빙 둘러앉았다. 암흑했던 구사회를 추억하는 보도가 시작되자 환한 전등을 끄고 초불 몇대를 켜놓았다. 그런다음 녀자애들이 우사칸 소여물을 끓이는 가마에다 쪄낸 겨떡을 대야에 담아 군데군데 나눠놓았다. 어두운 초불밑에서 그 쓰디쓴 겨떡을 먹으며 지난날의 쓴맛을 체험해보라는 뜻이였다. 나도 자그마한 걸로 골라 한입 떼여 먹어보니 입안이 껄껄해났다. 뱉아버리고싶었다. 벌써 저급학년 철부지들이 앉은 쪽에서는 퉤! 퉤! 하고 뱉아버리는 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과외보도원선생님의 준절한 질책소리도 엄엄하게 들려왔다. “누구야? 계급감정도 없어!” 다시 조용해지면서 우물우물 씹는 소리만 들렸다. 최할아버지의 보고는 눈물겨웠다. 과거회억부분이 끝나고 최할아버지가 “마침내 해방이 되였습니다” 라고 하시자 누군가 스위치줄을 탁 당겨 전등을 켰다. 회의실안이 대낮처럼 밝아졌다. 뒤이어 녀자애들이 이번에는 대야에다 맛있는 과자를 골똑골똑 담아서 군데군데 나눠놓았다. 아이들이 서로서로 팔을 뻗쳐 한웅큼씩 쥐여다가는 볼이 미여지게 먹었다. 목이 메여 꿱꿱거리는 아이들도 있었다. 달콤한 과자를 먹으며 새사회의 행복을 느껴보라는 뜻이였다. 그런데 보고가 끝나서 문제가 생겼다. 아이들이 벌떡벌떡 일어나 우루루 쓸어나가자 구석구석에 먹다가 버린 겨떡들이 지저분하게 나타났던것이다. 녀자애들이 그걸 거둬서 모으니 대여섯 대야나 되였다. 그걸 중간에 놓고 과외보도원선생님이 몇몇 학생골간들과 함께 밤중까지 로선분석을 하느라 열을 올렸었다. 아무리 열을 올린들 어찌하랴, 맛이 있는걸 좋아하고 맛이 없는걸 싫어하는 아이들의 입을! 개혁개방이 되면서 음식물도 개방되였고 또한 새롭게 많이 개발되기도 했다. 지어 먼 옛날 황제들만 맛볼수 있었던 궁전음식도 다시 개발되여 평민들도 마음대로 맛을 보게 되였다. 헌데 10년 배부르게 먹고 10년 맛있게 먹고나니 먹는 수준이 사람마다 프로급이 되였다. 외국인들도 중국에 와보고는 입을 딱 벌린다. 맛있는 먹거리들이 너무나도 많다. 동북에는 동북맛이 있고 남방에는 남방맛이 있고 북방에는 북방맛이 있다. 어느 한 고장에 가보면 무엇부터 어떻게 먹어야 할지 몰라 한다. 한 접시에 몇만원짜리 고급료리도 있는가 하면 한개에 오십전짜리 전병도 별맛을 돋구는것이 있다. 맛있는걸 더 맛있게 해먹기 위해 벼라별 방법을 다 쓴다. 조미료도 열가지, 스무가지, 무엇이 맛을 돋굴수 있다면 무엇이든 다 버무려쓴다. 삶고 닦고 지지고 볶고 튀기는것도 모자라서 태우고 굽고 내굴에 그슬러 먹기도 한다. 날것, 생것 그대로 먹는것도 모자라서 동물이나 곤충을 산채로 잡아다 먹는 료리도 있단다. 지어 한때는 남방에서 원숭이를 산채로 잡아다 놓고 눈알이 판들거리는 고놈의 정수리를 뾰쪽망치로 쳐서 뇌즙을 빨아먹는 료리까지 있었다고 한다. 도대체 사람이 할 노릇인지! 무슨 일에나 한계가 있다. 옛날 사람들은 그것을 “도”라고도 했다. 그 “도”를 넘으면 일은 비뚤어질 경우가 많아지게 된다. 음식도 대개 먹을만한 맛이 있으면 되는건데 맛이 있는걸 자꾸 더 맛있게 해먹다보니 그 음식에 문제가 생기게 되는것이다. 지금은 맛있는 음식이 사람들의 건강을 해치고있다. 맛있는 음식에는 대개 다음과 같은 나쁜점이 있다. 첫째, 맛있는 음식이 있으면 대부분 사람들이 평상시보다 더 먹게 된다. 맛있는걸 해놓으면 서로서로 더 들라고 권한다. 이것이 먹는 법도의 례절이고 우리 사회의 인품이다. 과식이 불식이라는 말이 있다. 일년에 한두번이나 한달에 한두번쯤 과식하는건 별문제이겠지만 자꾸자꾸 과식하게 되면 문제가 생긴다. 그 문제가 하루이틀이나 일이년내에 나타나는것이 아니라 몇년, 지어 몇십년후에 나타난다. 시간이 길게 나타나는 문제일수록 인체의 치명적인 약점으로 될수 있다. 좋은 음식일수록 적게 먹어야 “보약”이 된다. 둘째, 맛있는 음식은 대개 종합적인 배합물이다. 식당에 가보면 료리사들이 조미료를 열가지이상씩 놓고 쓴다. 료리의 맛을 돋구는 가장 관건적인것은 소금이다. 국제위생조직에서는 매일 매인당 소금흡수량을 6그람으로 제한할것을 요구하고있다. 헌데 료리 한접시에 들어가는 소금량이 6그람을 초과할 때가 있게 된다. 소금이 적게 들어가면 맛이 없다는 고객들의 의견이 홍두깨처럼 들이닥친다. 그러니 맛있는 료리를 많이 먹을수록 소금흡수량이 늘어나게 된다. 소금흡수량이 늘어나면 인체에 불리하다는 점은 누구나 다 아는 도리가 아닌가! 셋째, 맛있는 음식은 대개 연하고 부드럽고 만만하고 시원하면서도 거뿐한 자극을 준다. 지어 사르르 녹아나는 감을 주는것도 있다. 이것이 우리의 이발을 해친다. 지금 일부 사람들은 얼마든지 씹어서 먹을수 있는것도 더 맛있게 더 시원하게 먹는다고 믹스에다 갈아서 마신다. 무슨 음식이나 씹으면 씹을수록 맛이 나고 씹으면 씹을수록 묽어져서 물이 된다. 그걸 하필이면 영양세포를 파괴시키면서 이발을 무르게 하면서 전기를 랑비하면서 갈아 마실건 뭔가! 누가 승냥이가 산포도를 뜯어먹는 장면을 보았는가? 까맣게 무르익어 몽글몽글해진 산포도를 승냥이는 찔긴 날고기를 먹을 때처럼 텁썩텁썩 물어뜯어서는 까등까등 힘주어 씹어먹는다. 만약 사람이 그걸 뜯어먹는다면 입안에 넣고 오물오물 녹여먹을것이다. 다 같은 산포도이지만 까등까등 씹어먹은것과 오물오물 녹여먹은것이 위안에 들어간다음의 효과는 다른것이다. 이것이 총명한 사람의 무지한 약점이라고나 할가! 넷째, 맛있는 음식은 조합과정에서 많은 오점이 생긴다. 례를 들면 파와 두부를 섞어먹으면 인체에 불리한 물질이 생성된다. 그런데 우리는 모두부를 먹을 때 양념간장에 생생한 파를 송송 썰어서 넣는다. 그래야 맛있다. 일반적으로 무엇과 무엇을 섞어서 만들어 먹을 때 그 영양가치나 인체에 리로운가를 따지는것이 아니라 맛이 있느냐 없느냐를 따지다 보니 인체에 불리한 물질을 생성시켜 먹을 때가 있게 된다. 중약재도 잘 조합시키면 약이 되고 잘못 조합시키면 독이 된다. 이밖에도 맛있는 음식에 보이지 않는 약점이 수두룩하다. 그렇다면 음식을 맛이 없게 해서 맛이 없게 먹어야 하는가? 여기에서 어떻게 먹는가 하는것이 중요하다. 관건은 맛있게 먹는것이다. 무릇 맛있는 음식도 맛있게 먹어야 하고 맛이 없는 음식도 맛있게 먹어야 한다. 음식을 맛이 없게 먹으면 병이 생긴다. 그런데 맛이 없는 음식을 어떻게 맛이 있게 먹는단말인가? 여기에 먹는 예술이 수요된다. 첫째, 음식먹는 분위기를 조성할줄 알아야 한다. 혼자 먹거나 여럿이 함께 식사를 나누든지간에 각자의 성격, 애호, 환경, 조건에 따라 자연스럽게 시각, 청각, 후각의 작용을 동원시켜 미각을 자극할수 있게 해야 한다. 둘째, 음식량을 잘 조절할줄 알아야 한다. 사람마다 체중이 다르고 종사하는 직업이 다르고 성별이 다르기때문에 공통적인 표준량은 있을수 없다. 일반적으로 식사후 서너시간이 지나면 배고파날수 있는 량으로 조절하고 습관화시키면 좋다. 배고파날가말가 할 때 먹는것이 좋다. 배고픈 시간이 길면 위에 문제가 생길수 있다 셋째, 특수한 음식을 먹었을 때에는 상응한 대책을 대야 한다. 례를 들면 기름기 있고 느끼한것을 먹었을 때에는 운동량을 좀 늘이고 마른 음식을 먹었을 때에는 물을 더 마시는것이 좋다. 그래야만이 다음 끼니를 맛있게 먹을수 있다. 넷째, 맛이 없는 음식일수록 오래 씹어야 한다. 오래 씹으면 무엇이나 다 맛이 난다. 문제는 맛이 없는것이라고 일반적으로 오래 씹기 싫어한다. 한번 쓴맛이 나는것을 오래 씹어보면 알수 있다. 이밖에도 맛이 없는 음식을 맛이 있게 먹을수 있는 비결이 많다. 또한 각자가 자기의 특점에 따라 자기로서만의 독특한 비결을 찾아낼수도 있는것이다. 사람에게 제일 중요한것은 생명이다. 생명은 건강으로 지켜야 한다. 건강을 지키자면 먹는것이 관건이다. 관건문제를 해결하는 열쇠는 과학이다. 과학적으로 음식을 만들자면 우리의 입맛과 달라질 때가 많게 된다. 일반적으로 맛이 없는 음식이 인체에 리롭다. 마치도 “쓴것이 약”이라는 도리와 같다고나 할가! 영양학적으로 따지면 음식은 간단하게 만드는것이 좋다. 대개 간단하게 만들어낸 음식이 맛을 돋구지 못한다. 허지만 오늘날 우리는 자기의 건강을 위해서는 그것을 맛이 있게 먹어야 한다.  
19    호박골의 떡호박 댓글:  조회:1222  추천:55  2009-05-08
1   호박골은 예나제나 경치 하나만은 사람들의 눈뿌리를 뽑아줄 지경이다. 랑떠러지기 절벽이 얼음층처럼 줄무늬졌는가 하면 늬연한 비탈은 주단처럼 한쪽으로 비스듬히 펼쳐져있다. 봄이면 붉은 진달래꽃과 하얀 살구꽃이 울긋불긋하고 여름이면 싱싱한 곡식자람새가 파랗게 물들고 가을이면 누런 황금으로 주름잡힌다. 날카로운 해빛과 부드러운 달빛에 변색하며 희롱하는 카멜레온이라 할가! 그가운데로 내봉하가 산굽이를 따라 굽이쳐 흘러내린다. 남산꼭대기에 올라서서 멀찌감치 내려다 보면 뱀새끼가 꼬불딱거리는것 같고 산자락으로 내려서서 가까이에서 보면 미풍에 흐느적거리는 푸른 비단 같다. 고기새끼가 꼬리치는 고장이라 근간에 와서는 낚시군들 걸음이 잦아졌다. 신작로가 오불꼬불 늘어져 다니기 편리해졌고 그보다도 오염없는 물에 고기가 생신하다고 찾아든다. 경치 좋고 공기 좋고 물이 좋아서인지 종덕이는 애비없이도 둥글둥글하게 잘 자랐다. 어릴 때에는 동네 개구쟁이들의 놀림감이 되였고 학교시절에는 남자애들이 걷어차는 “축구공”이요 녀자애들이 화풀이 할수 있는 “배구공”이였다. 학교문을 나와서 몇년간 농사를 지으면서 그는 다시 동네사람들의 말밥에 “밑반찬거리”가 되여버렸다. “너 이자식, 종덕이 사촌이 되고싶냐? 늘 머절스럽게만 노니?” “야, 뒤마을 ‘풍덩개과부’라도 좀 채라. 종덕이처럼 녀자맛도 못 보구 늙자구?” “이놈아, 좀 발라맞출줄도 알고 똑똑하게 놀아라. 한뉘 종덕이처럼 출세도 못해보자구 그러느냐?” … 지난 세기 약진년대에 호박골의 박씨네가 새 며느리를 맞았었다. 벌방 녀자로 호박골색시처럼 얼굴이 호박처럼 두리두리하고 엉뎅이가 펑퍼짐하여 마을아낙네들의 부러움을 자아냈다. 더구나 두눈섭사이에 미간을 돋보이게 하는 붉은 점이 딱 중심에 박혔다. 헌데 그 점때문에 녀인은 고생스러운 인생을 살게 되였다. 어느 점쟁이가 그 점이 악재를 가져다준다고 했고 시어머니는 그 점때문에 시아버지가 돌아갔다고 했으며 나중에 시어머니가 미쳐죽게 되고 남편까지 술중독으로 아들이 태여나는 날 죽어버렸다. 그 점때문에 귀신이 붙었다고 온 가정이 풍지박산이 났다고 소문이 자자해서 마을에서 따돌림을 당했다. 박종덕, 돼지굴어귀에서 비오는 날 태여난 녀석이다. 태여난 그날부터 아버지 없이 자란 과부의 아들이다. 그 아들 하나만을 보고 살아온 과부 민옥이에게는 설음이 많았었다. 아무리 섧어도, 아무리 분해도, 아무리 억울해도, 아들이 기시를 받았도 그 아들 하나만을 위해서는 모든걸 다 참아왔었다. 아들에 대한 기대도 크지 않았다. 앓지 않고 건실하게만 자라길 바랐다. 학교 다닐 때에는 아들이 락제점수를 맞고와도 좋아했고 다 큰 다음에는 동네에 나가 돈을 떼워도 뉘집 잔치부조를 해준것만큼이나 여겼다. 그 아들이 서른고개를 넘어서고 자기도 쭈글쭈글한 로파가 되여가면서 아들의 혼인대사와 손자를 안아보고싶은 념원이였다. 헌데, 귀신이 붙은 과부네 집 아들이라고 혼사말이 들어오지 않는다. 세월이 개혁개방되면서 별스레 녀자들의 몸값도 올라가서 웬간한 촌구석 처녀애들도 종덕이쯤은 곁눈으로도 보지 않았었다. 그렇게 자란 종덕이는 생김새와 같이 둥글둥글하게 굴러다니는 법을 배웠다. 누가 호박처럼 생겼다고 “호박새끼” 하고 놀려줘도 그저 헤벌쭉 웃고말고 누가 걸음걸이가 느리고 건방져보인다고 뒤에 와서 궁둥이를 걷어차도 돌아다보며 벌씬 웃고만다. 어느 한시기에는 이상하게도 종덕이와 접촉한 사람들까지 다 탈이 생겨났다. 종덕이네 집에 가서 공짜술을 얻어마신 녀석들은 배탈이 났고 종덕이를 놀려준 녀석들은 입술이 부르텄고 종덕의 궁둥이를 실없이 걷어찼던 녀석은 교통사고로 다리가 부러지고… 그래서 마을사람들은 남녀로소를 불문하고 그를 외면했고 그를 따돌렸다. 누구도 그와 말을 걸지 않았고 누구도 그와 놀아주질 않았다. 그래도 종덕이는 늘 벌씬거리며 혼자 잘 놀았다. 산에 올라가 꿩둥우리를 털어 꿩알을 얻어오기도 하고 심심하면 강변에 나가 물고기잡이를 하기도 했다. 물고기를 한다래끼 잡으면 그걸로 생선장국을 끓여놓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붙잡지 않으면 외지 낚시군들을 불러들여 술잔을 함께 나누기도 했다. 인품을 후하게 쓰니 개핀 땅에 물이 고인다고 점차 친구들이 생기게 되였다. 공짜를 좋아하는 동네친구들, 술을 좋아하는 아래마을 친구들, 신세를 지려는 외지의 낚시군들… 종덕이네 돼지굴곁에는 오얏나무가 있는데 해마다 오얏이 잘 열렸다. 하루는 난데없이 찦차 두대가 달려오더니 그 오얏나무 그늘밑으로 빠진 달구지길어구에 와서 멈춰섰다. 신사 같은 남자 넷과 꽃같은 녀자 셋이 차에서 내렸다. 그때 마침 종덕이가 물고기를 한구럭 골똑 잡아가지고 왔다. 호기심에 찬 그 사람들이 우루루 모여들어 구럭을 헤쳐보았다. 펄떡펄떡 뛰는 물고기들이 생신해보였다. 그걸로 생선국을 끓이면 맛있겠다는 사람도 있었고 붕어새끼로 생회를 쳐서 술안주로 하면 그저 그만이겠다고 입을 다시는 사람도 있었다. “그럼 들어가깁소. 제가 끓여드릴테니까.” “아니, 어찌 그런 페를 끼치게…” 그 사람들은 은근히 좋아하면서도 미안함을 금치 못했었다. 종덕이는 아무 사람이건 자기 집에 와서 술을 마셔주면 좋아했었다. 종덕이는 그 사람들을 울안으로 청해들인 다음 무르익은 오얏을 한대야 가득 뜯어다놓고 맛을 보며 기다리라고 해놓고는 로모 민옥이와 함께 불을 지핀다, 밸을 딴다 하며 돌아쳤다. 그 꽃같이 고운 녀자들도 팔을 걷어부치고 그들 모자를 도와나섰다. 그바람에 종덕이는 더 신바람이 나서 엎딘김에 절이라고 암탉까지 한마리 잡고 처마밑에 말린 물고기도 풀어내렸다. 나중에 푸짐한 술상이 갖춰졌다. 종덕이가 근들이 술을 떠오려고 허연 비닐통을 들고 나서니 그 사람들이 말리면서 찦차에서 고급술 몇병을 꺼내오는것이였다. 술이 서너순배 돌자 술상 분위기가 흥그러워졌고 종덕이도 연신 굽석거리며 잔을 비웠다. “야, 술이 정말 유하꼬마.” 두리두리한 면상이 불그스레 퍼져 보기 좋았다. 모두들 중간에 앉은 통통한 사람을 “지부장”이라고 불렀는데 아마도 꽤나 급이 있는 사람 같았다. 지부장은 가마목에서 “궁둥이운전”을 하고있는 민옥이에게 손수 술을 부어올리는것이였다. “어마이, 이집 장맛이 정말 구수합니다. 옛날 우리 어마이가 끓여주시던 그 장국맛을 다시 맛보는것 같습니다.” 지부장이 감개무량해하자 곁사람들도 덩달아 구수하다며 연신 후르륵거리며 국물을 마셔댔다. 기분이 도도해지는데 촌장인 리종수가 촌의 모모한 량반들을 거느리고 들이닥쳤다. “지부장께서 진작 오신줄 모르고 우린 눈이 빠지게 기다렸습니다. 저기 부녀주임네 집에다 하늘을 나는 놈, 땅에서 기여다니는 놈, 륙, 해, 공군을 몽땅 출동시켰으니 지부장께서 이런 루추한 곳에서 식사하시지…” 리촌장이 크게나 차리고 기다렸다는 자부심으로 불깃한 얼굴에 아첨발린 웃음을 담고 벌씬거리는데 지부장의 못마땅한 음성이 찬물에 불궜다가 꺼낸 가죽채찍처럼 꽛꽛하게 안겨왔다. “어허, 무슨 소릴!” 지부장의 둥그레한 얼굴도 불깃해졌다. 면상이 일그러지며 량미간에 내천자가 그려졌다. “루추하다니? 나도 이런 루추한 집에서 자란 놈이요. 만약 루추하다고 께름직하면 돌아가서 당신에 그 륙, 해, 공군이나 거느리시구려.” 천만 생각밖이였다. 가죽채찍에 한매 얻어맞은듯 종수의 얼굴이 삽시간에 변하여 볼편 근육이 푸들거렸다. 머리도 뗑― 해났다. 머리에 털이 나서부터 이런 축객령을 받아보기는 처음이다. 돌아서야 할지 그냥 서있어야 할지 아니면 구들에 올라가 앉아야 할지… 그때 가마목에서 뱅글뱅글 돌아치던 민옥이가 긍지에 빠진 종수를 끄잡아냈다. “생원이―” 민옥이는 종수에게 남다른 감정을 가지고있었다. 종수가 남편이 생전일 때 “형님”이라고 불렀고 자기를 “아주머니”라고 불러주었었다. 그보다도 돼지굴옆에서 소낙비를 맞으며 종덕이를 낳을 때 마침 종수가 찾아와서 다행히 모자 목숨을 구해준 일이 너무나 고마워서 평생 그 은혜를 잊지 말자고 속다짐했던것이다. 그래서 아들의 이름을 지을 때에도 종수라는 “종”자에 덕이라는 “덕”자를 골라잡았던것이다. “생원이, 날래 올라가 술잔이라도 드시우. 전번에두 암탉을 고아놓고 오시라고 해도 오시지 않더니만 마침 잘됐수. 날래!” 민옥이가 종수의 팔소매를 잡아당겼다. 기실 종수는 민옥이와 그의 아들 종덕이를 께름직하게 여기고있었다. 뭐 군생활도 해보고 당원에까지 든 그가 동네토배기들처럼 미신적관념에서 께름직한것은 아니지만… 뭐 구차하게 산다고, 뭐 루추한 집에서 산다고, 뭐 사람축에 못 간다고… 뭐 딱 찍어 무엇이라고 말할수는 없지만 아무튼 전 촌 4백여명 되는 촌민들이 차례로 자리잡고있는 촌장의 심중에는 민옥이와 그의 아들 종덕이가 제일 마지막 꼴찌자리였다. 특히 앞뒤를 재일줄 모르고 굴러다니는 종덕이가 숱한 사람들앞에서 “삼촌! 삼촌” 하며 헤벌쭉거릴 때면 속이 부글부글해나면서 뒤틀린다. 웃는 낯에 침 못 뱉는다고 철 모르는 녀석이 좋다고 부르는데다 랭수바가지를 퍼부을수는 없었다. 자기의 이미지를 자키기 위해서라도. 한창 지부장에게 술을 부어올리던 종덕이는 종수네가 들어서는걸 보고 입이 헤벌쭉해졌다. 오늘은 녀석이 제세상이나 된듯 벌거이드르르해서 흐물넙적거린다. “아하, 삼촌, 삼촌이 어쩌다가 우리 집에 발을 들여놓았소? 해가 서쪽에서 뜨겠구만. 반갑소, 어서!” 에미 아들이 맞장구를 치며 지부장앞에서 자기의 이미지를 납작하게 만든다고 속이 꼬부장해났지만 어쩌는 수가 없었다. 괘씸한 종덕이 녀석이 손을 잡아끌 때에는 귀쌈이라도 한매 후려붙이고싶었지만 꾹 참았다. 억한 심정으로 끌리워 겨우 서먹서먹하게 술자리에 끼여앉았는데 현에서 내려온 간부들은 알은체도 안하고 완전히 그를 무시한채 지부장을 위시해서 자기네끼리만 자기네 말만 주고받았다. “이 집에 토장이 구수하면서도 시원해서 국물을 마시면 가슴이 활― 열리는것만 같습니다 그려. 허허!” 퍼그나 격동되였는지 지부장이 술잔을 들고 일어서더니 민옥이 앞으로 나가섰다. “어마이, 오늘 우연하게 댁에 들어와 페를 끼치며 토장국맛을 보았습니다. 정말 구수합니다. 저의 이 술잔을 들어주십시오.” 민옥이는 진작 얼굴이 시루떡이 되였다. “난 술이라고…” 민옥이는 입으로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손으로는 술잔을 받는것이였다. “고맙소이. 시골노댁이 담군 장이 맛이 있으면 얼마나 있겠소만 정 맛이 있다면 갈 때 가지고 가소. 많이 담궜으니 가져갈바엔 푹푹 떠갑소.” 지부장이 엄지손가락을 내든 오른팔을 힘있게 내저었다. “동무들, 들었습니까? 이것이 곧바로 우리 어머님들의 인품입니다.” 또 박수갈채가 터졌다. 술상 분위기가 바야흐로 무르익어가고있었다. 민옥이가 겨우 술 한잔을 두번 꺾어 마시고는 둬어번 캑캑거렸다. “고맙습니다. 어마이, 전 오늘 이 집에 들어서면서 고향집에 들어선 감을 느꼈습니다. 저도 이런 루추한 초가집에서 자란 촌놈이였습니다. 특히 어마이를 보는 순간에 저는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우리 어머님을 다시 뵙는것 같았습니다. 어머님은요 우리 칠남매를 키우시느라 평생 고생만 하시다가 돌아가셨습니다. 자식들에게 효도할 기회조차 주시지 않고 말입니다. 지금 생전이시라면 정말 얼마나…” 지부장의 목소리가 점차 떨렸고 눈에는 이슬이 반짝이였다. “어마이, 저는 경박한 사람이 아닙니다. 기관에서 어떤 사람들이 양딸을 삼는다, 양아버지를 모신다고 서로 치근덕거리는걸 보고는 싱거운 녀석들의 단정치 못한 작풍이라고 여겨왔댔습니다. 허지만 오늘 그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어마이는 겉으로 보는 외모도 우리 어머니와 같고 인품도 우리 어머니처럼 후하신것 같습니다. 어마이께서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시겠지만 저는 어마이를 어머니로 모시며 효도하고싶습니다.” 술을 좀 마셔 얼굴이 불깃했지만 지부장의 태도는 아주 진지했다. 민옥이는 당황해났고 술상에 앉은 사람들도 저으기 놀라는 눈치였다. “아니꼬마. 촌구석에 일개 허줄한 노댁이 어찌 높이 계시는 량반의… 아슴채이소만 너무나도 황감해서…” 민옥이가 입을 싸쥐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생각밖으로 지부장이 무릎을 꿇어앉더니만 그 육중한 몸을 꾸부리며 넙죽 절을 하는것이였다. “이 아들의 절을 받으십시오.” 민옥이뿐만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다 아연해졌다.… 그 이튿날부터 그 소문이 마을내에는 물론 린근 동네에까지 파다히 퍼져나갔다. 종덕이를 바보 취급해왔던 마을내 촌민들의 태도가 하루아침새에 급변했다. 골안바람이 아무리 회오리친다고 이처럼 돌개바람처럼 치지는 않았건만! 이 골안에서 제밖에 없노라고 턱을 잔뜩 쳐들고 다니던 촌간부들도 찌그러질듯한 종덕이네 집으로 발길이 잦아졌다. 얼마후에는 종덕이의 어머니 민옥이의 이마에 난 기미에는 재앙을 부르는 귀신만 앉아있는것이 아니라 복덩이를 굴리는 신선도 앉아있는다는 소문이 돌았다. 원래 귀신과 신선은 쌍둥이였다고 하며 재앙이 없으면 복이 없고 복이 없으면 재앙이 없다는 설이였다. 과연 그 설법에 일리가 있다고 증명하기라도 하듯 그 이듬해 이른봄 현 인민대표대회에서는 원 현위조직부 부장 지동구를 현장으로 임명할 결의안을 한결같이 채택하였다. 양아들로서의 지현장은 양어머니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다고는 할수 없겠지만 그래도 명절때면 잊지 않고 사람을 시켜서 먹을것이며 입을것이며 한구럭씩 보내오군 했다. 거기에 공무때문에 몸 뺄수가 없어 가뵙지 못해 죄송스럽다는 전갈까지 붙여보내 민옥이를 울리군 했다. 어마어마한 현장으로서 그쯤 해도 조련찮은 일이라고 이웃들에서 더 감동을 받았고 부러워도 했다.     2   그해 촌장 기바꿈을 앞두고 금불촌아래우 몇개 동네에서는 몇개 파가 은근히 각축전을 벌리고있었다. 금불촌에는 종친적으로 세개 파가 세력이 컸는데 이 근년에 와서는 리종수가 촌장이 되면서 리씨네들이 우세를 차지했고 그다음 김씨였는데 대표인물로는 촌지서인 김봉철이였다. 옛날 김대장의 맏아들이다. 인구비례를 따지면 박씨네가 제일 많았지만 어쩐지 대중을 휘동할만한 인물이 못 나오고있었다. 리종수와 김봉철이는 나이도 비슷했고 경력도 비슷했다. 둘 다 군대에 가서 입당까지 하고 돌아온 제대군인이였다. 고향에 돌아와 고향건설에 공헌이 큰 사람들이였고 그만큼 조직능력이나 사회능력이 뛰여났었다. 그래서 봉철이가 촌장질 할 때에는 종수가 지부서기사업을 맡았었고 후에 종수가 촌장으로 되니 봉철이가 지부서기로 된것이였다. 촌급 간부보조로임때문에 대개 다른 촌에서는 한사람이 서기와 촌장을 겸임했지만 금불촌에서만은 이 두 사람때문에 좀 특수하게 되였다. 둘사이에는 늘 분쟁이 생겨 네탈내탈 했지만 일단 의견이 소통되면 손발이 잘 맞아떨어졌다. 그렇게 재작년부터 둘사이는 완전히 버성기여 고양이와 쥐가 되여버렸다. 이 호박골에서 네가 있으면 내가 꺼져버리고 내가 있으면 네가 굴러가야 한다고 촌민들앞에서 여러번 다투기도 했었다. 한 골짜기에 범이 둘이 있을수 없고 한 나라에 임금이 둘이 있을수 없다는것이다. 탈은 종수네 딸과 봉철네 아들 지간에서 생겨났던것이다. 마을에서 현소재지 고중에 붙어 공부하는 고중생은 대여섯명밖에 안되는데 그중 종수네 딸과 봉철네 아들이 눈이 맞아 좋아했었다. 방학이면 둘이 함께 돌아와서 같이 붙어다녀서 그또래 친구들의 질투를 자아내기도 했었다. 헌데 봉철네 아들이 대학에 붙은 다음 종수네 딸을 차버리고 같은 대학생처녀와 좋아했었다. 그 일로 종수네 안해와 봉철네 안해가 우사마당에서 서로 머리채를 끄잡아당기며 물고뜯고 허비면서 동네를 웃겼던것이다. 그것이 도화선이 되여 종수와 봉철이 사이도 마침내 크게 폭발되였던것이다. 그래서 이번 기바꿈에 어디 좀 보자고 서로들 벼르고있었던차 서로 내가 되지 못할지언정 너만은 되지 못하게 하겠다는 앙심을 품고있었다. 헌데 민심의 동향은 분명 종수쪽으로 더 기울고있었다. 우선 래일에 가서는 어떻게 되든지간에 현임 촌장의 덕으 로 보는 사람이 더 많았다. 크나작으나 시골사람들은 덕을 보면 배은망덕하지 않는다. 그다음 농촌사람들의 애정관은 시종일관할것을 주장한다. 좋아했던 녀자를 차버리고 대학생처녀의 치마꼬리를 잡았다는 봉철의 아들은 도덕상에서 벌써 모든 촌민들의 비난을 받게 되였다. 엎친데덮친다고 거기에 몇년전 봉철이가 촌장질 할 때 과수원을 한족집 왕가네한테 눅게 준것이 뒤로 돈을 챙겨받고 한 짓거리였던것이라는 뒤공론이 요즘 일고있다. 앞뒤를 재여볼줄 아는 봉철이는 요즘 집에다 술상을 자주 차려놓고 이 구실 저 구실 대며 마을사람들을 청해들였고 또한 마을에 누구네 집에 일이 생기면 부조돈도 푹푹 쥐여주었다. 그러면서 사람들의 오고가는 말끈을 뜯어다가 저울질해봤다. 확실히 균형을 잡기 곤난하게 저쪽으로 기울고있었다. 희망이 없게 되였음을 통감한 그는 자기가 되지 못할바에는 종수도  못하게 만들자고 생각했다. 그는 한편으로 종수의 이미지를 깨버릴수 있는 “죄장”을 수집해서 여론조성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촌장이 될수 있는 인물을 골라잡아야 했다. 좋기는 자기 말을 잘 듣고 뒤에서 자기가 조종할수 있는 인물이였으면… 요즘 종수는 자신심에 배포유해졌다.(봉철이 네깐 놈이 그따위 덕성으로 나와 겨뤄보라구. 어림도 없지.) 종수도 똑똑한 축이였다. 사람을 부려먹을줄도 알고 선심 쓸줄도 알았다. 그래서 그의 뒤꽁무니에 늘 졸졸 따라다니는 사람이 많았다. 그의 심중에 벌써 수자가 있었다. 누구 누구는 문제 없을거고 누구누구는 동요하겠지만 어찌어찌 해놓으면 저절로 벌벌 기여들것이고 누구누구는 얼리고 닥쳐도 왜지밭으로 달아날것이다. 그런 완고한 반대파들에 대해서는 헛돈을 팔 필요도 없고 풋정을 베풀 필요도 없었다. 오히려 드세게 드잡아 깔아뭉개야 한다. 종수도 요즘 인심을 후하게 썼다. 하지만 봉철이처럼 모든 사람을 다 좋게 대하는척 한것이 아니라 자기의 안목에 따라 부동하게 대했다. 특히 자기의 반대편에 설 사람들이 무슨 일이 있어 찾아오면 추호의 양보도 주지 않았다. 동네집 개도 궁둥이를 치면 돌아서 무는 법이다. 어느때부터인지는 몰라도 마을 구석구석에서 사람들이 끼리끼리 모여 수군덕거리더니 종수에 대한 험담이 새벽안개처럼 솔솔 퍼져나왔다. 무슨 수로 대학에 붙지 못한 딸을 미국에 보냈는가? 대서양 저쪽 부귀의 천당 아메리카 합중국으로 가자면 적어도 인민페 20만원 이상은 메쳐야 한다는데? 그 돈이 어디서 왔는가? 일년에 한번씩이나 가실가말가 하는 렬군속, 오보호 모임도 촌장부가 거꾸로 섰다고 이집 저집 잔돈을 끌어모아 하는판에? 외국으로 품팔이 나간 집들에서 내놓은 경작지를 왜서 무턱대고 한족집 왕가네 집에다만 주는가? 종수가 촌장질해서부터 지금까지 왕가네 줄을 놓아 이주해온 한족집이 벌써 열대여섯호가 늘어나고있다. 그래 그 사람들이 일전 한푼 팔지 않고 호박골로 들어와서 자리를 잡고 터전을 닦고 벽돌기와집을 짓고 산단 말인가? 호박골의 황금은 그들이 다 파간다. 왕가네가 지금 재산이 얼마나 되고 돈을 얼마나 저축했는지 그 누구도 짐작할수 없다. 촌에서 돈이 딸릴 때면 그 집 돈을 먼저 선대해서 쓴 일도 여러번 된다. 한번은 빚대신에 촌민들이 그 집 콩가을까지 해준 일이 있었다. 그때 성질이 괴벽한 사내 몇이 종수의 멱살을 거머쥐고 우리가 도대체 머슴이냐 소작농이냐며 조겨대기까지 했었다. 지금 선거를 앞두고 이런 말들이 오고가니 자연 옛일들이 떠오르게 된다. 그것이 고요해졌던 사람들의 심중에 던져진 돌이 되여 파문을 일렁이게 했다. 그런 회상에 빠지니 자연 종수에 대한 믿음이 한쪽으로 무너져내리기도 했다. 촌장질 하면서 조금씩 얻어먹는 일이 누구에겐들 없겠느냐! 강가에 나서 누군들 바지가랭이를 젖히고싶어 젖히겠냐! 마을사람들을 잘 이끌수만 있다면 그런 일은 별문제라고 시시하게 여기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그런 의문이 자그만하게 파문을 일렁이더니 이번에는 큰 파도를 출렁이게 하는 험담이 나돌았다. 종수가 최학빈이네 셋째딸을 깔아뭉갠적이 있었다는 소문이다. 호박골에서는 금시초문이였다. 말도 안되는 헛소리! 종수는 오십을 바라보는 나그네고 최학빈이네 셋째딸 미려는 스무살 금방 벗어난 꽃송이다. 말하자면 애비와 딸 같은 년령차이다. 미려는 호박골에서 제일 곱게 생긴 처녀애다. 개천에서 룡이 난다더니만 시골에도 드문드문 간혹 봉이 깃드는 모양이다. 초롱초롱한 눈이라든가 앵두 같은 입이라든가 오뚝한 코날이라든가 조물주가 그걸 크지도 않고 작지도 않게 애호박 같은 얼굴에다 맞춤하게 그림 같이 붙여놓은것 같았다. 입을 벌리고 웃으면 요란한 목단이요, 입을 다물고 있으면 조용한 수련이였다. 미려는 학교시절부터 가수가 되겠다, 영화배우로 되고싶다며 호들갑을 떨기도 떨었다. 헌데 옥에 티라고 할가. 보기에는 그 어느 녀자애보다 령리하고 총명해보이는 미려가 천성적으로 어딘가 아둔한데가 있었다. 녀자야 뭐 인물이 환하게 생기면 그만이지 머리가 좀 둔한게 무슨 탈이 되겠소만 예술학교에 해마다 시험친것이 해마다 떨어지는것이 문제로 되였다. 그래서 한때는 강물에 빠져 물귀신이 되겠다, 농약을 먹고 하늘로 날아오른다 하며 온 동네가 소란스러울 지경으로 야단법석을 피우기도 했었다. 죽어날게 부모들이였다. 그래서 종수가 나서 문예계통에서 한자리 하고있는 부대전우를 찾았고 최학빈이가 소를 판 돈을 밀어넣어서야 겨우 예술학교 예습반의 자비생으로 들어가게 되였던것이다. 그때 도와준 일이 고맙다고 미려의 어머니가 종수에게 고급양복 아래웃벌을 사주기도 했었다. 동네에서도 종수가 “뒤문”관계가 세다고 인정해주었을뿐 다른 뜬소문은 없었다. 헌데 지금 선거를 앞두고 말도 안되는 뜬소문이 돌고있다. 큰 시내 한복판에서 종수가 미려를 끼고 식당놀이를 하는걸 보았다느니 여름방학 기간에 중둥바위아래 옥수수밭으로 미려가 종수의 옷자락을 쥐고 기여들어가는걸 보았다느니 모기가 앵앵거리는 저녁무렵에 둘이 홀딱 벗고 내봉하에 뛰여들어 노는걸 보았다니 뭐니 하면 별소리가 다 떠돌았다. 지금 뭐 도시에서는 한자리 한다는 녀석들이 자기의 비서나 문서아가씨들을 놀이감처럼 데리고 놀아도 그저 덜된 인간이라고 손가락질 할뿐 별로 심각하게 여기지는 않는것 같다. 허지만 농촌에서는 완전히 다르다. 남녀작풍문제에서 잘못 걸리면 그의 정치생명은 칼도마우에 오르게 되는것이다. 종수는 아직 칼도마에는 오르지 않았지만 그 소문이 준 타격은 엄청나게 컸다. 그도 벌써 동네사람들이 자기를 바라보는 눈길이 달라졌음을 감촉했었다. 가슴 한쪽이 서늘해옴을 느꼈다. 헌데 더 큰 타격은 뒤에 있었다. 어느 녀석이 이 모든것을 서류로 작성해서 현위에다 익명신으로 보냈던것이다. 하여 현위에서 파견한 조사조가 마을로 내려와 그의 뒤조사를 하게 되였던것이다. 당금 무슨 일이 벌어질것만 같은 분위기였다.     3   요즘 촌지서 김봉철에게는 새 습관이 하나 더 붙었다. 동네사람들이 나들이가 잦아질 쯤인 점심무렵이면 옷맵시 깨끗하게 차리고나서 어슬렁어슬렁 점잖게 지부서기답게 뒤짐을 지고 마을길을 한바퀴 빙 돈다. 젊은이건 낡은이건 아낙네건 나그네건 사람을 만나면 길쭉한 얼굴에 아래입이 쫙 째지게 환한 웃음을 짓고 허리를 살짝 굽혀보인다. 그러다가도 어떤 사람을 만나면 “별일이 없으면 한잔 좀 할가?” 하고 자기네 집으로 꼬신다. 김서기로서의 “인심끌기공정”이다. 오늘은 어슬렁어슬렁 걷다가 내봉하기슭으로 통하는 달구지길에 들어섰다. 벌써 사흘째 다니지 않던 이 길에 들어서는 셈이다. 호젓한 이 길로는 다니는 사람이 별로 없다. 길 아래쪽 오얏나무밑에는 종석이네 집이 게딱지처럼 들어앉아있다. 봉철이는 좀 묘한 사람이다. 사람을 청해다 술을 먹여도 “자식, 곱다고 먹이겠나, 촌장선거가 있으니 먹이는거겠지.” 하는 불안감을 주지 않기 위해 될수록이면 자연스럽게 장면을 만들기에 애를 쓴다. 분위기와 효과를 따진다. 내봉하기슭에 거의 가닿는데 버들숲속으로부터 초모자를 쓴 녀석이 고기다래끼를 흔들며 올라오고있었다. “야, 이게 호박새끼 종덕이 아니냐? 호박골에서는 네가 제일 운이 트는구나. 쟈, 어디 보자구나. 고기를 얼마나 잡았냐?” 봉철이는 두팔을 벌리고 너스레를 떨며 당금 끌어안기라도 할듯 반기였다. “허허, 김서김둥! 요즘 물이 쫄아 얼마 잡지 못했습꾸마.” 종덕이는 어줍게 고기다래끼를 봉철이 앞으로 내밀었다. 그걸 봉철이가 헤쳐보며 다시 부산을 떨었다. “와야! 생칠하구나. 이 먹음직한것을 그저 둘수야 없지. 자자, 이걸 가지구 우리 집으로 가자. 우리 집에 좋은 술도 있거든.” 봉철이는 종덕의 손에서 고기다래끼를 슬쩍 나꿔챘다. “아니 김서기네 집까지 가서 아주머니께 끼칠거야… 아예 우리 집에서 그저…” 여직껏 마을사람들의 따돌림을 당해왔던 종덕이로서는 마을의 모모한 김서기가 집으로 청하니 좀 황송하기도 하고 쑥스럽기도 했다. “어허, 이놈이 셈이 드는가부다. 한동네끼리 페는 무슨 페야!” 종덕이는 뒤더수기를 긁적거리며 어줍게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돌렸다. “그럼… 헌데 요까짓걸 가지구 어떻게… 내 집에 들어가 마른걸 더 거둬가지구…” “그래? 그럼 그래! 그럼 네 아주머니가 오죽 반기겠냐!” 종덕이는 집쪽으로 털썩털썩 달아갔다. 타원형 호박이 삐그덕삐그덕 굴러가는것만 같았다. 그 뒤모습을 바라보며 봉철이는 시무룩 혼자 웃었다. (그래, 내 생각이 맞아. 저런 놈을 앞세우는것이 옳아. 진심이구 고분고분하거든.) 기실 봉철이는 엉뚱한 궁리를 하며 종덕이를 찾아온것이다. 이번 선거에 박종덕이를 내세워보겠다는 기발한 착상이였다. 제딴에는 무슨 평형관전투작전이나 찜놓은듯해서 흥분했는데 녀편네는 너무나도 어이없다고 봉철의 이마전을 짚어보기까지 했다. “동무, 온기나 있는 소릴 합까? 어디 고장나도 든든히 고장났구만요. 숨구멍이나 좀 짚어보쇼. 제정신이 아닌것 같습다. 동네를 한번 웃겨보자고 그럼까?” 봉철이는 자기 녀편네 하나도 설복시키지 못하면 다른 사람은 더구나 설득시킬수 없다는 도리쯤은 알고있었다. 그는 이틀저녁이나 이불밑에서 녀편네를 끌어안고 슬슬 녹여냈다. 녀자란 원래 열을 가하면 질질 녹아나는 법이거늘! 그가 박종덕이를 내세우자는 건덕지는 대개 이러했다. 종덕이가 마을사람들의 따돌림을 당하며 자라왔지만 마을사람들과 척을 진적이 없는지라 속으로 그를 미워하는 사람이 없다는것, 특히 박가네들이 다 밀어줄것이라는것, 군중기초는 없지만 동네에서 사회적위치가 완전히 달라졌다는것, 능력은 없지만 마음이 후해서 덕으로 민심을 끌수 있다는것 등등이고 자기의 타산으로서는 라이벌인 리종수를 재껴버릴수 있다는것, 그리고 중요한것은 종덕이를 내세우면 자기가 뒤에서 얼마든지 조종할수 있다는것, 즉 다시말해서 력사드라마에서 나오는 황태후처럼 “수렴청정(垂帘听政)”할수 있다는것이다. 그래서 녀편네도 해시시 해졌었다… 봉철이가 종덕이를 꽁무늬에 달고 들어서니 해반주그레하게 생긴 봉철의 녀편네는 본가집 동생이나 맞아들이듯 아양을 떨며 부산을 피웠다. 여지껏 녀자들의 애교스러운 대접을 받아보지 못했던 종덕이는 송구스러우면서도 마음은 즐거워났다. 농촌집 같지 않게 모든게 다 알른거려 종덕이는 발을 어떻게 옮겨디딜줄 몰라 선자리에서 디디장 디디장거리며 헤벌쭉 헤벌쭉 웃기만 했다. 봉철의 녀편네가 끌어안다싶이 끌어다가 밥상곁에 앉혔다. 술이 서너잔 들어가자 종덕의 얼굴이 불깃불깃해졌고 봉철이도 홍당무우가 되였다. “너 금년에 몇살이더라?” “서른셋이꾸마.” “벌써? 자, 그럼 장가부터 들어야겠구나. 그래 봐둔 색시라도 있냐? 자자, 이잔 들구.” “나 같은데로 누가 오겠습둥?” “아니아니, 너희 집엔 좋은 색시 들어와야 한다. 너네 어마이두 한뉘 고생했재. 자, 여보, 여보!” 찰랑거리는 반잔 술을 찰랑! 상우에 놓고 봉철이는 부엌간으로 고개를 돌리며 안해를 불렀다. “예, 예, 올라감다. 자, 물고기튀김이예요!” 봉철의 녀편네가 노랗게 튀긴 물고기를 알른거리는 유리접시에 담아들고 한들거리며 올라와서는 종덕의 곁에 납쭉 붙어앉는다. 싱긋한 녀자체취가 기분 좋게 종덕의 코를 간지럽힌다. “여보, 그 흥지촌에 일남이가 그렇게 좋은 색시를 얻었다메?” 봉철이가 녀편네한테 한쪽 눈을 슬쩍 찔끔거려 보인다. “예. 동무 말두 맞습죠. 색시 영 좋슴다. 웬체 그 부엉이 같은 에미나와는 비기지도 못함다. 곱기루 어찌나 고운지 한입 꼭 물어주고싶습데다. 말두 잘하고 똑똑하구 맘씨두 곱구… 일남이두 흥지촌 촌장이 되면서 신세를 고치게 된게 아니구 뭡꺄! 전 현적으로 제일 젊은 총각 촌장이라구 소문이 나자 숱한 혼사말이 들어왔지 않구 뭡꺄! 촌장이 되더니만 일등 미인을 골라끼구 고래등 같은 기와집두 지어놓구. 우리 그 마다매가 입이 함박만해졌지 않구 뭡꺄!” 봉철이는 연신 “그래, 그래.” 하고 맞장구를 쳐주며 고개를 주억거린다. “그래 그렇지. 옛날 똥별을 달구 전방으로 나갈 때에는 늙은 엄마밖에 바래주는 사람이 없었다지만 장군이 되여 개선하자 숱한 서울 미녀들이 성밖에 나가 줄을 치며 영접했다 하지 않나. 사람이란 크나작으나 ‘자’자를 달아야 빛갈이 나는거지. 자, 우리 종덕이 한번 좀 촌장질 안해볼래? 그럼 색시두 생길거구. 그럼 때벗이를 쫠 할게구. 어때?” 종덕이는 수집어서 몸을 비틀며 머리를 사타구니에 틀어박는다. “내 같은게 언제…” “야, 이놈아, 한뉘 호박새끼처럼 딩실 구을기만 하면 다겠냐! 정신 좀 차려. 이 못난 녀석아!” 봉철이가 그의 뒤통수를 건너받아 툭 쳤다. 그제야 종덕이는 고개를 쳐들고 민망스레 헤벌쭉거렸다. “종덕아, 나는 너를 진심으로 생각해서 하는 말이다. 누가 너를 관심해주겠냐! 아직 나이가 어리니 앞날을 생각해야지. 전도 말이다. 밤낮 령감두상들처럼 고기잡이나 하고 세월을 보내겠냐! 내 말을 듣거라. 내가 그래도 너 보다 소금알을 더 녹였고 건너온 다리가 네가 걸은 길보다 더 길면 길었지 짧지는 않았을거다. 무슨 일이나 내가 다 배치해놓고 밀어줄테니 너는 그저 자보만 하고 명확하게 하면 되는거다. 이 자식아!” 그 말을 듣고나서야 종덕이는 그저 일이 아님을 감촉하고 저으기 긴장해났다. “그… 그런데 김서기, 저 같은 놈이…” “야, 근심 말어! 너 같은 놈이 어째? 너도 당당한 이 나라의 공민이구 금불촌 촌민이다. 안될게 뭐야? 더구나 이 당당한 공산당 김봉철서기가 밀어주는데야! 자신감을 가져! 사내놈이 그런 똥담도 없이 그걸 무겁게 달고 다닐게 있냐? 활 떼버리고말지.” “호호, 그래요. 종덕이가 될수 있구말구요. 지현장 같은 든든한 뒤심이 있겠다 박씨네 종친들이 많겠다 왜 안되겠어요? 기운 내요. 우리 김서기는 종덕이 같은 진투를 좋아하거든요.” 봉철의 녀편네도 곁에서 돼지오줌깨 뿔구듯 입김을 불어넣는다. 잔뜩 긴장해서 앉아듣던 종덕이가 점차 탕개를 느슨히 풀며 눈을 띠룩거렸다. “그럼… 야, 이거 정말… 그럼 밑져 본전이라구 한번…” “그래, 그래야지. 인제야 사내답구나. 너의 아버지 송식이 형님도 술좌석에서는 장군이였네라. 쟈, 우리 래일의 금불촌 촌장 박종덕의 휘황한 앞날을 위해서 한잔!” 그 시각 금불촌 현임 촌장 리종수도 사처에 사람을 띄워 종덕이를 찾고있었다. 종수는 지금 단가마우에 오른 개미신세가 되여 안절부절이다. 현에서 내려온 조사조가 한단락의 뒤조사를 끝마치고 이제 돌아갔다. 그동안 생활하기 불편한 마을에 내려와서 고생이 많았다고 개를 한마리 잡아 부녀주임에 집에 삶아놓고 청했는데 한사람도 오지 않았을뿐만아니라 그동안 주숙비를 규정대로 일전 한푼 곯지 않게 물고 갔다. 그것이 더구나 속에 퀭기였다. 무슨 단서를 쥐고 간것만 같았다. 그러찮으면 왜 개고기 한끼니도 먹지 않고 가겠는가? 도대체 어디까지 파고들었을가? 그것이 가슴에 찔렸다. 어제밤 느즈막이 그는 누구도 모르게 왕가네 둘째를 찾아갔다. 무명농장이나 다름없는 왕가네 가정군체에서 둘째가 모든것을 쥐고 흔들어대고있었다. 둘째가 가슴을 치며 담보했다. 자기의 입으로는 털끝만치도 토하지 않았다는것이다. 다만 자기의 소개로 이주해온 친척이 십여호에 수십명 되는데 그가운데는 입이 빠른 녀석도 있고 거짓말 못하는 고지식한 사람도 있고 앞뒤를 재일줄 모르고 나발불기를 좋아하는 인간도 있는데 조사조가 그들을 일일이 찾아본것이 속에 걸린다며 그들의 입에서 뱀이 나갔는지 구렝이 나갔는지는 아직 자기도 모른다는것이였다. 집에 돌아와서도 종수는 새벽잠을 이루지 못했다. 접대용 “중화표”고급담배를 두갑이나 꺼내 다 피워버렸다. 량심적으로 일을 처사해왔고 밑구멍이 깨끗하다면야 현이 아니라 중앙에서 내려와도 발편잠을 얼마든지 잘수 있었을텐데… 종수는 지금 자기가 재수없게 마을안의 미친개한테 물렸다고 한탄했다. 촌장질을 해먹은 녀석치고 밑구멍이 깨끗한 녀석이 도대체 몇이나 되느냐고 그는 자기나름대로 이를 몰라주는 하늘을 저주하고있었다. 그는 자기를 문 미친개가 다름 아닌 촌지서 김봉철이라고 넘겨짚었다. 그를 내놓고는 그런 서류를 작성할만한 인간이 마을안에는 없다는것이다. 이가 갈리고 치가 떨렸다. 부엌간의 나무패는 도끼를 집어들고 한달음에 달려가 그 여우같은 놈의 뒤통수를 단박에 까부시고싶은 생각도 불쑥 들군 했다. 담배가 꿈틀거리면 솟구치는 그 흉념을 억제해주었다. 아직 똑똑한 근거를 쥐기전에는 절대 경거망동해서는 안된다고 수없이 자기를 채찍질했다. 지금 종수를 놓고볼 때 촌장선거가 급선무인것이 자기의 운명이였다. 물에 빠진 이상 지푸라기라도 붙잡아야 했다. 평상시 내봉하에 가보면 지푸라기 아니라 별것이 다 뜬다. 나무토막, 널판자, 풀잎 지어는 구불거리는 뱀도 떠내려간다. 헌데 지금 자기가 물에 빠지고보니 나무토막은커녕 지푸라기도 보이지 않는다. 돈이 날개라고 돈만 내밀면 뚫지 못할 벽이 없었는데 관건적인 시각엔 돈이 아니라 사람이라는것을 그는 절감했다. 자기에게 구원의 손길을 뻗쳐줄 사람이 없는게 한스러워났다. 그는 자기가 얻어먹을것을 저울질해보았다. 등곬에 식은땀이 쭉 흐르는듯 섬찍해났다. 그까짓 촌장이야 누가 되든말든… 아니, 아니지. 그 여우 같은 봉철이가 되면 안된는거야. 호박골에서 제일 막된놈이 되더라도 그 여우 같은 녀석이 되면 안돼. 어떻게 한다? 그는 또 담배를 피워물었다. 파르스름한 연기속에서 벼라별 인간이 다 떠오른다. 웃는 얼굴, 찡그린 상판대기, 찔 갈기는 눈길, 고통에 빠진 몰골… 담배불에 두 손가락 사이로 뿌지직 타들어가는 순간에 그는 옳지! 하고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는 담배꽁초를 거실바닥에 대고 힘껏 부벼댔다. 번개불 같이 번쩍 스치는 순간을 빌어 그는 여우같은 그녀석을 밀어벌수도 있고 또 구명은인도 찾을수 있을것만 같은 칠색무지개다리를 얼핏 보아냈다. 그는 두팔을 쫙 펴고 기지개를 켰다. 뼈마디 관골마다에서 우두둑 소리가 났다. 창문카텐을 활 열어젖혔다. 강렬한 해빛에 눈이 부시여났다. 아니 벌써? 벽시계를 올려다보니 시침이 열한시를 가리키고있었다. 그는 부랴부랴 옷을 주어입고 문밖에 나섰다. 그리고는 내봉하쪽으로 종종걸음을 놓았다. 게딱지만한 초가집문을 삐꺽 열고 들어서니 시크무레한 냄새가 기분 나쁘게 코를 찔렀다. 부엌간에서 민옥이가 돼지죽을 끓이고있었다. “아주머니, 무고하셨수? 그간 자꾸만 와본다 하면서두 일이 어찌 밀리는지…” “아니 이거 누구여? 생원이, 오랜만이우. 어서 날래!” 종수가 구들 복판에 올라가 올방자를 틀고앉아 담배를 꺼내 피워물고있다. “종덕이는?” 민옥이가 거무스레한 행주에 손을 닦으며 일어섰다. “몰라. 아까 마른고기 한꾸레미 찾아들고 허둥대며 나가더니…” “아주머니, 미안하오. 평소 관심이 부족해서. 마음속엔 그래두 늘 생각이 있었는데 어째 생각대로 안되오. 생전 송식이형님과의 정분을 봐서두 이 집에 등한해서는 안되는건데…” 종수가 자책에 빠진듯 미간을 찌푸리며 담배연기를 길게 내뿜는다. “어이구, 무슨 그런 말씀을. 아슴채이케. 생원의 은혜야 내가 눈에 흙이 들어가두 잊지 못할건데.” 민옥이는 문득 찾아든 종수가 얼마나 반가운지 모른다. 그 옛날 민옥이가 종덕이를 키우며서 절반 배를 곯으며 정말 죽지 못해 살 때에도 종수는 이 집에 얼굴 한쪽 내밀지 않았다. 그래도 민옥이는 종수에 대한 고마움을 고이고이 품고있었다. 지금 이렇게 문득 찾아들어와도 더 고맙고 더 반가을수 밖에 없었다. “아주머니, 지현장 그 량반께서는 기별이라도 있소?” “어이구, 생원이, 말도 마오. 난 송구스러워 못 살겠소. 명절마다 빼놓지 않구 한꾸레미씩 보낸다오. 맨 얼럭덜럭한 고급으루. 사램이 어쩌면 그렇게두 지극한지. 그걸 어떻게 갚자고 내가 주면 주는대로 다 받는지. 우리야 뭐 보낼게 있어야지. 그저 장떼나 떼서 보내구 종덕이 그녀석이 말린 물고기나 보낼뿐이요…” “그러면 되는거지요. 아주머니, 그게 그 사람들에게는 제일 좋은거라오. 아주머닌 정말 양아들을 잘 뒀소.” “글쎄 말이우. 생원이, 난 이게 꿈인지 생신지 통 분간 못하겠소. 늘그막에 어쩌다가…” “자, 가만 있자. 아주머니, 그 이마의 기미가 보통 기미 아니오. 그 기미가 아주머니의 전반생에 숱한 화근을 빚어내더니만 인젠 그 화가 다 보내고 복만 남아있는게요. 아니요. 보오, 그래서 세상에 둘도 없는 양아들이 저절로 생겨난게 아니겠소? 그리구 이제 종덕이한테도 대운이 터서 출세두 하고 색시를 얻을게구 그러면 손자두 생겨 안아볼게구…” “어이구, 생원이 이렇게 고마울 법이라구야. 정말 그렇게 될가?” 민옥이는 구들우에 올라와 무릎걸음으로 벌벌 기여와 종수의 두손을 꼭 잡았다. 감격에 울먹거렸다. “어이구, 이렇게 고마울 법이라구야. 앗차, 내 이 정신 좀 보지. 생원이, 잠간만! 내 인차 차릴테니.” “아니아니, 시간이 없스꾸마. 다음에 종덕이를 찾아야 할텐데…” 일어나 인사를 남기고는 문밖으로 나왔다. 그리고는 부녀주임과 치보주임을 시켜 당장 종덕이를 찾아오도록 했다. 그들이 반나절이나 찾았지만 찾지 못했다. 누구도 그 시각 종덕이가 봉철이네 집에서 고급대우를 받아가며 고급술을 마시고있을줄을 몰랐다. 어슬렁 황혼에 이르러서야 종덕이가 내봉하기슭에 나타났다. 강바람이 그의 옷자락을 시원히 흩날려준다. 종덕이는 지금 평생처음 인생이요 전도요 하는 문제를 가지고 숭엄한 기분에 잠겨본다. 아이들 듣기에 떡소리를 하지 말아야 한다더니 봉철의 전도교육을 받고보니 종덕이에게도 새롭게 삶을 살아보고싶은 욕망이 꿈틀거려났다. 한번 해보기로 작심하니 가슴이 후두두 떨려왔다. 이렇게 가슴이 떨려보기는 그의 인생에서는 처음이다. 그는 강가에 내려가 두손으로 강물을 떠서 푸― 푸― 거리며 얼굴이고 머리고 마구 적셨다. 시원해났다. 그때 “종덕이! 종덕이!” 하고 부르는 녀자의 목소리가 울려왔다. 부녀주임이였다. 종덕이는 부녀주임한테 끌려서 종수앞으로 오게 되였다. 종덕이를 대하는 종수의 태도는 이왕과는 완전히 달라졌다. 말투부터 친삼촌 같이 부드러운 어조였다. “너 오늘 술 마셨구나. 술도 작작 마시고 몸도 가꿔와. 이게 무슨 주제냐! 옛다. 이걸 가지구 아래우 몇벌 갖춰라. 젊은 놈이 멋이 있어야 녀자애들두 따르지.” 종수가 종덕이 손에 인민페 백원짜리를 여라문장 쥐여준다. “아니 삼촌, 이… 이것… 안되오.” 엉겹결에 돈을 받아쥔 종덕이는 당황해서 그걸 다시 되돌려주려고 팔을 내민다. “임마, 잔소리 말고 집어넣어! 삼촌이란 허울을 썼으니 삼촌값을 해야지. 이제껏 삼촌노릇을 제대로 못했는데 량해해라. 앞으론 삼촌이 좀 너를 꼴기 있는 놈으로 키워야 하겠다. 그러니 내 말 잘 들어.” 종덕이를 바라보는 종수의 눈길에는 일종 기대감이 차있었다. 이게 오늘 웬 일인가 하여 종덕이는 좀 어안이 벙벙해져 눈을 꺼부럭거렸다. “종덕아, 너 형님의 지일이 언제냐?” “형님이라니? 누굴 그리오?” “앗따 실루. 이놈이 철딱서니 없구나. 너네 엄마가 지현장을 양아들로 삼았으니 네게는 형님벌이 될게 아니겠냐?” “아, 지현장 말이요? 생진이 언제인지 잘 모르겠수.” 종덕이는 재국를 친 아이처럼 뒤더수기를 긁적거렸다. “야, 이 답답한 놈아, 아직 셈이 못들었구나. 남은 그런 인맥을 만들자구 해두 차례가 없는데 입안에 들어온 떡도 못 먹어! 덕을 입었으면 갚을줄 알아야 사람이 되느니라. 지현장의 지일을 알아보고 좀 다녀라. 인간이란 서로 오고가고 주고받는데서 정이 생기는 법이다. 알겠냐?” “양! 꼭 그렇게 하겠수, 삼촌!” 종수는 저으기 흡족해났다. 꽝꽝 얼어붙었던 가슴 한끝이 스르르 녹아내리는것만 같기도 했다. 엊저녁에 잠못 이루며 고민하던 끝에 고안해낸 첫 작전계획이 소기의 예측대로 돌아갈것 같았다. 종수는 지금 자기를 구해줄수 있는 “구명환”이 아니라 지푸라기마저도 없다. 시누런 흙탕물이 가슴팍을 칠뿐이다. 그래서 생각해낸것이 지현장이다. 지현장이라는 그 큼직한 “구명환”을 잡기 위해서는 그 사람이 구경 어떤 위인이라는것을 알아내야 했다. 지금까지 촌장질도 해보고 서기질도 해보면서 크고작은 지도일군들과 많이 접촉하였고 그 와중에 그로서의 그런 인물들의 부동한 속성을 장악해둔것이 있었다. 어떤 지도일군은 돈을 특별히 좋아한다. 돈만 들이밀면 푸른 등을 켜준다. 어떤 지도일군들은 색을 좋아한다. 인물도 인물이겠지만 성격, 애호, 품위 등 방법이 차원적으로 어금지금한 녀자를 어울려주면 일체는 오케이다. 또 어떤 지도일군은 돈도 아니요, 색도 아니요 의리를 중히 여긴다. 우환이 없도록 기반을 닦는거다. 그리고 어떤 지도일군은 사업상의 새로운 돌파를 아주 중시한다. 기층간부가 자기의 그 어떤 리념에 따라 새로운 경험을 모색해낸다면 그것을 그 무엇보다도 중하게 여긴다. 그렇다면 지현장은 어떤 속성을 가진 인간일가? 종수에게는 그것을 알아내는것이 급선무였다. 구멍을 봐가며 쐐기를 깎으라 하지 않았는가! 그걸 알아내자면 종덕이를 리용해야 했다. 그뿐만아니였다. 종덕이를 리용해서 여우 같은 봉철이를 밀어내야 했다. 세상에 별라게도 돌아간다. 종덕이가 이렇게 대단해질줄이야! 관건적인 시각에 자기의 운명과 관계되는 가장 중요한 인물이가 될줄이야. 종수는 입을 한쪽으로 실룩거리며 쓰겁게 픽 웃고는 종덕이를 자기앞으로 불러앉혔다. “종덕아, 근간에 이 삼촌이 너무 다망했구나. 숨이 찬다. 그래서 쉬면서 좀 숨이나 돌려야겠다. 그저 쉬는게 아니라 내가 물러앉고 너한테 기회를 주마. 사람이란 기회를 잘 틀어쥐고 자기를 다듬을줄 알아야 하네라. 네가 지금껏 한절반 죽어있었는데 네가 어떤 눔이라는걸 내가 잘 알지. 말은 안했어두 인젠 잠에서 깰 때가 된것 같구나. 서른살이 됐지? 내 후임으로 촌장질이나 해봐!” 종덕이는 생각밖이라는듯 눈을 슬쩍 치떴다. 점심에 봉철서기가 제기했던 문제가 아닌가! 다만 오늘 하루가 이상한 감이 들었다. 서기와 촌장이 하루도 아닌 반날사이에 동일한 문제를 제기한것이 별스럽게 생각될뿐이였다. “삼촌, 내 같은게 촌장질 하문 누가 내 말을 듣겠수?” “그건 문제없다. 아무렴 금불촌에서 너를 사람으로 보는 인간이 몇이나 되겠느냐만 내가 뒤에 서있으면 누구도 찍소리 못할게다.” “그럼 삼촌부터 내 말을 듣겠수?” “그건 문제없다. 아무렴 금불촌에서 너를 사람으로 보는 인간이 몇이나 되겠느냐만 내가 뒤에 서있으면 누구도 찍소리 못할게다.” “그럼 삼촌부터 내 말을 듣겠수?” 멀쩡해보이는 종덕이지만 엉뚱한데가 있는 녀석이다. “어허, 이눔 봐라. 되겠어. 어벌때기 있는 눔이구나. 되겠다, 되겠어. 그래그래 내부터 말을 잘 듣지. 웃기는 녀석이다. 으하하하!” 종수는 다가와서 종덕의 어깨를 툭툭 쳐주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물론, 애로가 많을거다. 촌민들이 아이들 장난이라구 가소롭게 여길거구 진당위에서도 동의하지 않을거다. 이건 내가 뒤에서 깨끗하게 밀어버릴테니까 근심말어. 자, 우리 집으로 가자. 오늘은 너의 찬란한 앞날을 위하여 우리 아재비 조카끼리 한번 통쾌하게 마셔보자!”     4   두달후에 촌장선거가 끝났다. “세월이 둔갑하고있나? 나원 더러워서, 퉤퉤! 이제 호박골이 망해빠지는 꼴을 어찌 보나. 일찌감치 북망산에 가서 눈을 감아버리는것이 상책이지.” “모두들 제정신이 있소? 그 바보같이 엉뚱한 눔을, 아무것도 모르는 도깨비를 촌장시키다니? 나원 기가 딱 막혀서!” “아니 금년엔 서기와 촌장을 겸임시킨다더니 왜 비당원을 시킨다오? 그래 우리 금불촌 당원들이 다 죽었는가!” “암, 알구두 모를 일이야. 그 봉철이 아새끼는 왜 종덕이를 올려놓지 못해 그렇게 악을 쓴다우?” “그러게 말이우 성님, 난 봉철이 그 아새끼보다 종수란 눔이 더 괘씸하더라이. 그눔이 돈깨나 쓰며 뒤에서 종덕이를 올리받쳤다네!” … 동구밖의 비술나무아래에서 몇몇 동네령감들이 모여앉아 선거끝의 불만을 토해내고있다. 모두들 입에서 뱀이 나가는지 구렝이 나가는지 모르고 침방울을 튕기고있을 때 맨끝에 앉아 담배만 폴싹폴싹 피우던 최학빈령감이 담배꽁초를 부벼끄고 일어나면서 “에헴!” 하고 마른 기침을 깇어댔다. “관들 두시우! 하늘이 무너지겠수. 똑똑하다구 잰내비처럼 들볶아치던 눔들이 할 때보담 무뚝뚝한 눔들이 걸썽걸썽 할 때가 더 잘되더라니 이제 두고 보시우, 에헴!” 최학빈령감은 해수로 꼬부장한 등을 연신 촐싹이며 마을로 내려갔다. 모두들 그 령감이 내려가는 뒤모습을 바라보며 입을 다물어버렸다. 어느때든가 마을내에서는 최학빈령감이 신을 업었다는 뒤소문이 돌기도 했었다. 박종덕이가 촌장이 되였다. 호박골도 웃겼을뿐만아니라 린근 촌부락도 웃겼다. 촌장이 된 종덕이 몸에서는 여전히 어리무던한 촌티가 흘렀다. 두가지만은 변했다. 하나는 김봉철서기의 조언에 따라 고기잡이를 그만두고 신문잡지에 눈길을 돌린것이고 다른 하나는 리종수 원촌장의 요구대로 아래우 깜장 양복에 까만 구두를 신고 다니게 된것이다. 첫 한두달은 촌내 두개파의 “전쟁”으로 “포연”속에서 보냈다. 봉철이네 “보수파”와 종수네 “개혁파”지간의 “전쟁”이였는데 승자도 없었고 패자도 없었다. 량자간에 “피”만 흘리고 손실만 보았던것이다. 촌민위원회는 7명으로 새롭게 조직구성을 짰는데 종덕이를 제외하고 봉철이네 인마가 3명, 종수네 인마가 3명, 소위 “무소속” 지명인사가 1명이 들어가게 되였다. 진정부나 상급에서 촌장회의를 부르게 되면 종덕이는 회의내용과 상황에 따라 봉철이를 보내지 않으면 종수를 보내군 했다. 촌민들이 무슨 일이 있어 찾아오면 역시 일에 따라 봉철이를 내세워 처리하게 하지 않으면 자연 봉철이와 종수가 촌에서나 촌 밖에서나 촌장행세를 할 때가 많았다. 그래도 종덕이는 개의치 않았다. 일이 잘되든 못되든 헤벌쭉거리며 잘했다고 춰주기만 했다. 헌데 어떤 때는 봉철이가 처리한 일을 종수가 꼬집고 나설 때가 있었고 종수가 처리한 일을 봉철이가 꼬리잡고 나설 때가 있었다. 그래서 그들 둘지간에 개니 쇠니 하며 말다툼 할 때가 있었고 때린다 친다 하며 손찌검질 할 때도 있었으며 지어 죽인다 살린다 하며 낫이나 삽자루를 들고 서로 허둥거릴 때가 있었다. 그럴 때면 종덕이가 중간에 끼여들어 이쪽에 대고 헤벌쭉 저쪽에 대고 헤벌쭉거리며 말리느라 땀동이를 쏟군 하였다. 괜히 중간에 들어섰다가 애매한 매를 맞을 때도 있었다. 지어 코피가 터져 상판이 피칠갑이 되여가지고서도 계속 헤벌쭉거리며 말린다. 어찌보면 고양이와 쥐싸움에 뜯기우고 할퀴우고 밟히는 병아리새끼라고 할가. 종덕이는 자기의 여린 마음으로 어찌나 그들 지간의 모순을 화해시키려고 애를 썼다. 허지만 그들 지간의 “내전”은 점점 거칠어져만 갔다. 한두마디에도 서로 눈에 쌍불을 켜고 입으로 불을 토했다. 종덕이에게는 그것이 제일 큰 골치거리였다. 그들의 “내전”으로 촌민위원회에서는 아무 일도 할수 없었고 동네가 부산하기 그지없었다. 그럭저럭 그해 년말이 닥쳐왔다. 년말 총결을 지어야겠는데 촌에는 술살 돈도 없었다. 왕년에는 그래도 돼지를 엎지 않으면 송아지를 엎어놓고 동네사람들뿐만아니라 린근촌의 촌간부들을 청해오고 진정부의 간부들도 청해오군 하였다. 누군가 한족집 왕가네 둘째를 찾아가 사정해보라고 귀띔했지만 종덕이는 찾아가질 않았다. 그는 어머니가 알뜰하게 기른 돼지 두마리를 잡아엎게 했다. 민옥이가 안된다고 락루하면서 막아나섰지만… 이듬해 모내기 뒤끝에 현에서는 리종수문제를 락착 짓겠다고 두번째로 조사조를 내려보내기로 했다. 그 소식을 접한 종덕이는 급기야 직방 지현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현장, 아니 형님, 내가 촌장질 할 때까지는 조사조를 내려보내지 말기를 바라오.” “종덕아, 이건 당의 기률에 따르고 나라의 법에 따라 처리되는 일이니 그 누구도 간섭할 권리가 없다. 그러니…” “그래도 안되오. 형님. 조사조가 내려오면 난 쫓아버리겠소.” “어허, 촌장사업까지 한다는 네가 이렇게 무지막지할줄은 몰랐구나. 내 지금 너한테 정중하게 경고한다. 절대 이 일에서 경거망동하지 말거라!” 전화가 탁 끊어났다. 다시 련속 서너번 했는데 그쪽에서 받아주질 않았다. 이튿날 오전 9시경에 까만 승용차가 촌사무실앞에 와서 멈춰섰다. 차에서 네명의 사업일군이 내렸다. 실팍하게 생긴 중년남자가 조사조 장명조장이라며 잘 협조해줄것을 부탁하였다. 종덕이는 촌의 상황을 회보하고나서 조사를 미루어주길 요구했다. 그러나 조사조에서는 현당위 지시니 할수 없다고 했다. 한창 쟁론끝에 싱갱이질이 생겼고 나중에 결이 난 장조장이 이곳저곳 해당부문에다 전화를 치는것이였다. 미구에 진파출소의 경찰차가 앵― 앵― 경보기를 울리며 들이닥쳤다. 사태는 엄중해졌다. 온 마을사람들이 까맣게 모여들었다. 뒤이어 경찰들과도 싱갱이질이 벌어졌다. 종덕이는 겅찰들앞에서도 추호의 두려움도 없이 떳떳하게 팔을 내저으며 시비를 캐고있었다. 마을사람들은 종덕이를 다시 보게 되였다. 대견스럽게 보였고 영웅답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들과 경찰지간에 밀고닥치는 몸싸움이 벌어졌고 서로 한데 엉켜서 돌아갔다. 나중에 경찰측에서는 과단한 조치를 대여 종덕이와 종수를 진파출소로 호송해갔다. 이튿날 종덕이는 풀려나왔고 종수는 현으로 호송되여갔다. 파출소울안에서 나온 종덕이는 현으로 올라가는 뻐스를 탈가말가 주저하다가 생각을 고쳐먹고 금불촌으로 내려가는 길에 들어섰다. 털썩털썩 거리며 바위굽이를 도는데 앞에서부터 봉철이가 자전거를 타고 달려오고있었다. “종덕아, 벌써 여기까지 왔냐? 난 네가 풀려나온다는 소식을 얻어듣고 지금 막 마중하러 오는중이다.” “김서기 고맙습꾸마. 무슨 이렇게 여기까지…” 둘은 서로 껴안았다. 하루사이라도 경난을 겪고난 뒤의 만남이란 또 다른 감정이 있는것이다. “자, 우리 여기 앉아서 담배나 한대 꼬슬리구 숨이나 돌렸다가 다시 돌아가자.” 둘은 길가의 백양나무밑에 가서 나란히 앉았다. “종덕아, 어 아직 어리구나. 어제는 왜 그렇게 머절싸하게 헤덤볐니? 봐라, 영향이 얼마나 나쁜가! 너 금방 입당지원서를 쓰구 그게 뭐냐? 종수, 그새끼 조사를 받아야 하구 엄중하면 콩밥까지 먹어야지. 차라리 이럴 때에 그새끼를 아예…” “김서기,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함둥? 지금 저의 곁에는 김서기도 있어야 하고 그 종수삼촌도 있어야 되는데 그럼둥?” 봉철이는 종덕의 얼굴표정을 슬쩍 곁눈길해보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 네가 아직 어리구 경험이 부족하니 곁에 사람이 있어야 한다. 허지만 종수 같은 사람은 없어야 한다. 있으면 너의 전도에 불리하고 우리 촌의 발전에 불리하다. 봐라, 그새끼가 쩍하면 걸구드는 바람에 할 일도 못하구 동네가 부산해지구. 그새끼가 지금 널 내세우고 생각해주는척 하지만 기실은 제앞의 불을 끄기 위해서란다. 지금 현에서 그눔의 재료를 다 장악했다. 잘못하면 곁사람도 물려들어간다. 조심해라!” 종덕이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잠자코 듣기만 했다. 봉철이는 그의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한거라고 짐작했다. “그리구 당원이 되자면 관점이 명확해야 하구 립장이 견정해야 하네라. 지금 종수의 문제가 그저 일반 착오가 아니야. 일단 법적추긍을 받게 되면 그건 성질이 달라지는거야. 이럴 때 조직에서는 너의 태도를 본다. 너를 고험하는거지. 감싸주어도 안되고 그저 보기만 해도 안되고 맞서서 투쟁해야 해. 알겠냐?” 종덕이가 고개를 더 숙였다. 봉철이는 그의 기색변화를 주의깊게 살피며 품속에서 허연 서류묶음을 꺼내쥐였다. “종덕아, 너 그눔의 가면에 얼리워 넘어가지 말라. 이전에는 그눔이 너를 어디 사람으로 보았냐? 지금은 제가 바쁘게 되니 너를 통해 지현장의 관계를 리용해먹자는 심보밖에 없어. 내 솔직히 알려주마. 그눔이 인제 볼장을 다 봤어. 이것봐라, 내가 장악한 재료만으로도 얼마든지 콩밥을 먹게 되였느니라.” 봉철이가 서류묶음을 종덕의 앞으로 내밀었다. 천천히 고개를 쳐들며 그걸 받아보던 종덕이가 불시에 벌떡 일어섰다. “김서기, 이게 무슨짓임둥? 전번에 익명으로 김서기가 보낸것입지비. 에익―씨!” 종덕이는 그 서류를 쫙쫙 찢어서 길가의 도랑물에다 활 뿌렸다. 허연 종지쪼박들이 사처로 흩날렸다. 뜻밖에 일어난 정경에 봉철이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그도 부들부들 떨며 일어섰다. “그게 어떤 자료라고?! 이자식!” 그의 오른팔이 허공으로 반쯤 올라갔다 내려오면서 종덕의 왼쪽뺨에가 철썩 하고 들어붙었다. 불깃한 얼굴에 퍼런 빛이 번개처럼 스쳤다. 종덕이는 몸을 휘청거리다가 다시 반듯이 섰다. 왼쪽코구멍으로 빨간 액체가 가는선을 긋더니 입술 언저리에까지 와서 멈췄다. 그런대로 종덕이는 미간을 찌푸리고 이윽토록 서있다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봉철의 씩씩거리는 숨소리를 등뒤에 달고… 이튿날 종덕이는 진당위 방서기를 찾아가서 촌민들의 의견을 여실히 반영하였고 자기의 의향을 내놓았다. 그런데 방서기는 현위의 구체지시가 아직 내려오지 않았다며 회의를 핑게대고 몸을 빼는것이였다. 종덕이는 현에 올라가 직접 지현장을 찾았다. 헌데 회의참석중이라고 만나볼수가 없었다. 전번 일이 노여워서인지 아니면 정말 회의가 중해서인지… 종덕이는 먼 친척벌 되는 집에 주숙을 정하고 점심에는 광천수에 빵을 사서 에때우며 련 사흘이나 현위사무청사를 드나들었다. 경비일군들의 눈에 들어 몇번 쫓겨나기도 했다. 나흘째 되는 날 아침에 현위 울안에서 지현장이 승용차에 올라 차문을 닫으려는 순간에 종덕이가 차문을 잡았던것이다. “형님!” 저으기 놀란 지현장이 아니꼬운 눈길로 종덕이를 쏘아보는것이였다. “어허, 너 개고기보다 더 질긴 눔이구나. 나 지금 바쁘니 오후 2시에 다시 보자!” 오후 2시부터 비서실에서 기다린것이 4시에야 지현장과 마주앉을수 있었다. 지현장의 태도는 간단하고 명백했다. 리종수에 대한 조사는 계속 진행하고 사람은 이미 내놓기로 결정했다는것이다. 그 말에 종덕이는 헤벌쭉 웃었다. 갈라질 때 지현장이 종덕이의 이마를 툭 튕겼다. “자식, 이제 다시한번 이 일에 헤덤볐다가는 혼쌀 먹을줄 알아!” 종덕이는 다시 지현장을 향해 헤벌쭉 웃었다. 림시수용소에서 풀려나온 리종수를 보니 열흘도 되나마나한 동안에 열살이나 더 먹은듯 훨씬 겉늙어보였고 몸이 몹시 수척해졌다. 그는 대문가에서 자기를 기다리고있는 종덕이를 와락 껴안고 엉, 엉! 황소울음을 터뜨렸다. 이번 일에 그는 진정 종덕이를 알게 되였다. 원래는 자기 몸을 빼기 위해 허수아비로 내세우자고 했는데 지금은 그게 아니였다. 자신이 궁지에 빠지게 되니 평상시 먹어라 써라 하며 그렇게 믿음직하게 놀던 친구들도 자기의 옷섶에 불티가 튕길가봐 이런저런 구실을 대고 비실비실 피해감을 이번에 그는 똑똑히 보아냈다. 헌데 종덕이는 그런 인간이 아니였다. 자기와는 애잡짤한 관계도 아닌데 완전히 몸을 내번지며 나섰다. 백살도 못사는 사람일생에서 진정 믿을수 있는 사람이 곁에 있다는것이 얼마나 복스러운 일인가! 자기가 왜 이 녀석을 좀 더 일찍 보아내지 못했을가 하는 자책감도 들었다. 종수는 풀려나온 이튿날부터 앓아누웠다. 그간 제대로 먹지 못해 몸이 허약해진탓이라고 마누라가 영양보충을 한답시고 공대를 잘했는데 그게 아니였다. 현병원에 가서 검사해보고 주급 병원에까지 가서 검사해보았다. 암은 암인데 양성반응을 보였다가 음성반응으로 넘어가 확실한 진단을 내리지 못했다. 하여 북경으로 해서 상해까지 가려고 했다. 미국에 있는 딸이 딸라를 부쳐왔고 국내에서 안되면 국외로 나오라는 기별도 왔단다. 북경으로 떠나가는 날 종덕이를 비롯한 촌간부 몇몇이 연길공항까지 가서 바래였다. 친척들은 하늘로 날아오르는 비행기를 보고 울음을 터뜨렸다. 마지막 길이 아니되였는가 해서! 종수가 없게 되자 금불촌은 봉철의 세상으로 되여버렸다. 아마도 손바닥만한 호박골에 범 두마리까지는 용납하기 곤란한 모양인가부다. 봉철이는 요즘 기분나게 돌아쳤다. 어쩜 세월을 거슬러 가는가! 대여섯살쯤은 더 젊어진건만 같았다. 무슨 새 마을건설계획전망도를 내온다, 무슨 치부정보를 수집해서 기업을 앉혀 항목을 연구한다, 무슨 집집마다 만원수입을 올릴 부업거리를 쥐라고 호소한다 하며 마을안팎을 들볶아놓는다. 완전히 금불촌의 제1선줄군이요, 제1대변인이요, 제1개혁자의 자태로 나서고있었다. 종수를 보내고 난 종덕이는 기분이 잡쳐져 무슨 일이나 갈피를 잡을수 없었다. 그런 정신없는 겨를에 봉철이가 이런걸 한다 저런걸 한다 하며 날뛰는 꼴이 아니꼽게 보였지만 촌민들을 위해 하는 일이라서 건성으로라도 지지해주는수 밖에 없었다. 하루는 종덕이가 아래마을 한족집 둘째와 함께 내봉하기슭을 오르내리며 지형을 살폈다. 내봉하 저쪽켠에 인가는 없지만 경치가 좋고 산나물이 많고 땅이 비옥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농한기가 되면 허리치는 강물을 건너가 나물도 캐오고 화전식으로 경제작물도 심어 걷어오군 했다. 사람만 다닐수 있는 공중다리라도 놓으면 건너편에다 대면적의 황무지도 개발할수 있고 소방목지도 얻을수 있는것이였다. 몇년전에 촌에서 해당수속까지 다 밟아놓았지만 자금난으로 손을 대지 못했던것이다. 내봉하에서 매일 고기잡이를 할 때부터 종덕이는 어느때엔가 꼭 자기의 힘으로 다리를 놓겠다는 자그마한 소망을 꿈꾸어왔던것이다. 지금도 걸림돌은 자금난이였다. 그래서 왕가네 둘째를 찾았다. 왕가네 둘째는 그만한 돈은 낼수 있는데 다리가 락성된 다음에는 건너가고 건너오는 사람들에게서 길세를 받아야겠다는것이였다. 원, 기가 막혀! 돈이 돈을 번다고 돈버는데 이골이 튼 녀석들과는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는다고 바락 화를 냈었다. 한 골안에서 한갈래 강물을 마시며 서로 의지해서 살아온 고향사람들지간에 무슨 길세냐고. 정 그렇게 옴니암니 따지겠으면 림시호구로 이 골안에 와서 땅을 부치고있는 너의 친척들을 다 쫓아버리고 경작지를 되찾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그러자 왕가네 둘째가 누그러들었다. “박촌장, 나두 그런 인간이 아니우. 내 뭐 그 다리를 놓아 돈을 벌겠소? 내 돈이 들어갔으니 그저 알아봐달라는거지.” 그렇게 타협을 본 둘이 지형을 돌아보았고 저녁에는 왕가네 집에서 푸짐히 한끼니 얻어먹었다. 온 하루 끌려다녀 다리가 시큼시큼해났지만 기분이 좋았다. 그래서 촌사무실에 들려 혼자 흥얼흥얼거리는데 봉철이가 두툼한 자료를 안고 벌떡 뛰여들었다. “야, 종덕아, 끝내 찾았구나, 찾았어!” 봉철이는 어찌나 흥분되였는지 얼굴이 붉스그레 상기되여있었다. “뭘 찾았다는 말습입둥?” “자, 이거 한입으로 어떻게 다 말할가! 우리 전촌 촌민들이 다 벼락부자가 되고 우리 촌의 락후한 면모를 일신시킬수 있는 치부항목을 찾았단 말이다. 알겠느냐?” 그 말에 종덕의 귀도 번쩍 트이였다. 봉철이가 말하는 치부항목이란 녹두알만한 인공진주구슬을 낚시줄 같은 실에 꿰여서 각종 공예품이나 일용품을 짜내는것이였다. 채색사진으로 소개된 샘플들은 그야말로 정교하면서도 깜찍스러웠다. 자료의 소개에 따르면 학비를 내고 반달간 그 기술을 배워내고 한두달 견습한 다음 기본 원자재를 사가지고 정식작업에 들어갈수 있는데 한사람이 하루에 작은것은 2~3건 짜낼수 있고 큰것은 절반이나 되는 반성품이나 완성품 하나쯤은 짜낼수 있다는것이였다. 작은것은 가공비가 백원가량이고 큰것은 몇백원, 지어 천원짜리도 있었다. 말하자면 하루 일을 제일 작게 쳐도 2~3백원은 넘는다는것이다. 이런 호떡이 세상에 또 어디 있을가! 항목경영에서 첫 걸림돌로 되고있는 직장건물, 기계설비, 동력전기, 물공급 등 경영조건은 하나도 필요없다는것이다. 남녀로소가 다할수 있는데 특히 손부리 여문 녀자들이 하면 효률이 높다는것이다. 이제 호박골사람들은 불시에 돈낟가리에 올라앉아 돈을 어떻게 쓸지 몰라 허둥대지 않을가! 허나, 만일의 경우를 위해서 심중하지 않을수 없었다. 그래서 촌민대회를 열고 이 일을 대토론에 붙였다. 반팔 노란 샤쯔에 나비넥타이를 받쳐 맨 봉철이가 나서 이 가공항목에 대해 자세히 소개하고 설명을 가했다. 돈이란 귀신 같은 마력을 가지고있다. 돈을 하루에 몇백원, 한달에 만원, 일년에 몇십만원씩 벌수 있다고 하니 전촌 촌민들이 격동을 금치 못했다. 수시로 우야! 라고 환성이 터졌다. 사기 오른 봉철이 두팔을 저력있게 흔들었고 그사이에서 나비넥타이가 보기 좋게 나풀거렸다. 겨울에도 녀자들은 따스한 가마목에 모여앉아 우스개를 피우면서 돈을 벌수 있다니 부녀들도 야― 하고 환성을 올렸다. 몇년만에 처음 들어보는 녀자들의 환성이다. 봉철이가 령솔자로 부녀주임과 손부리가 여문 처녀를 데리고 떠나기로 했다. 북경에 가서도 여기로 오기만큼이나 더 가야 한다는 절강성 온주로 가자니 세 사람의 차비, 주숙비도 웬간한 돈이 수요되였고 거기에 학비까지 하니 2만여원이 수요되였다. 원자재구입비는 매호에서 먼저 백원어치씩 사오기로 했다. 그 돈이 4만여원이 되였다. 만약의 경우 사기를 당했거나 잘못된다 해도 백원쯤 떼우는것은 개개의 집집의 정황을 놓고말하면 큰 손실이 아니라는것이였다. 먼저 적게 가져다가 시험해보고 확실하면 두번째부터 많이 구입해보자는 시골사람들의 총명이였다. 이튿날 그들은 온 마을사람들의 배웅을 받으며 떠났고 진정부에 들려 소개신까지 떼가지고 갔다. 한달후에 돌아온 그들은 각가지 견본도 가지고 왔고 매호에 나눠줄수 있는 원자재도 가지고 왔다. 밤마다 우사마당에 200볼트짜리 전구알 대여섯개씩 걸어놓고 세 사람이 세 분조로 나뉘여 구슬꿰는 기술을 촌민들에게 전수했다. 그런 다음 통일적으로 정식작업에 들어갔다. 봉철이와 부녀주임이 품질검사원이 되여 집집이 돌아다니며 질을 보장하라고 강조했다. 어찌나 돌아다니며 닥쳐댔는지 둘은 입술이 다 부르텄다. 백원어치의 원자재를 어떤 집에서는 사나흘 동안에 해냈고 어떤 집에서는 다시 반복해서 하다보니 이레씩 걸렸다. 그걸 회사측 요구대로 포장한 다음 현 기차역까지 싣고 가서 부쳤고 봉철이와 부녀주임이 따라갔다. 며칠후에 그들 둘은 비행기를 잡아타고 돌아와서 집집이 인건비를 나눠주었다. 백원어치를 가공했고 그것도 촌민위원회에 20프로의 관리비를 떼고도 집집이 3백원내지 4백원씩 돌아갔다. 마을에선 경사가 났다. 우사마당에서는 밤중까지 술상이 벌어졌고 집집마다 별다른 음식을 갖춰놓고 축하했다. 돈이란 정말 보배중의 보배다. 사람들은 래일의 희망을 내다보게 되였다. 그래서 이번에는 집집마다 통이 크게 접어들 예산이였다. 호박골이 물이 고이지 않는 고장이라고 평소에는 돈잎이 그리워 전기세도 제대로 내지 못하는 집이 많았다. 그런데 이번 두번째 원자재구입에는 제일 곤난한 빈곤호에서도 3천원 이상씩 냈다. 2만원, 3만원씩 낸 집들이 푸술했다. 어떤 집에서는 친척집 돈을 꿔왔고 어떤 집에서는 자식들의 대사에 쓰자고 저축해두었던 돈을 꺼냈고 어떤 집에서는 미국으로 가자고 준비했던 돈도 꺼냈다. 적지 않은 집들에서는 소와 돼를 내다 팔았다. 며칠사이 몇백만원 거금이 모아졌다. 그걸 진거리 신용사를 통해 회사측 은행구좌에 송금한 다음 즉시 봉철이와 부녀주임이 연길공항까지 가서 비행기를 탔다. 마을에서는 집집이 청소도 하고 벽도 회칠하고 창고도 정리하면서 만단의 준비를 갖췄다. 그리고는 가셔지지 않은 흥분의 여운속에서 물건과 그들이 돌아오기를 손꼽아 기다렸다. 비행기를 탔으니 당날로 도착했을거고 그날 저녁은 회사측 책임자들과 술잔이나 나눴을거고 이튿날엔 부친 돈 액수에 따라 포장정리했을거고 사흗날엔 역전에 나가 부쳤을거고 아니, 몇백만원어치의 엄청난 물건을 하루사이에 역전까지 다 날라갈수 있단 말인가? 이틀은 걸려야 할걸. 물건이 온주로부터 여기까지 오자면 며칠이나 걸릴가? 사흘, 나흘… 그런데… 그런데 한주일이 지나가고 열흘이 지나가고 보름이 지나갔는데도 전화 한통도 없다. 사람마다 속이 타서 가슴에 재가 들어앉는것만 같다. 어떤 사람은 입술이 초들초들 말라들었고 어떤 사람은 밤잠도 자지 못해 눈이 벌겋게 충혈되기도 했다. 온 마을에서 웃음소리라도 들을수 없었고 밤이면 괴괴한 마을이 귀신나라 같았다. 종덕이도 눈이 벌겋게 충혈되였다. 회사측에다 하루에도 몇번씩 잔화를 했는데 번마다 뚜― 뚜― 하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그들이 떠나서 열이레 되는 날 아침에 촌사무실에 전화가 따르릉― 하고 울렸다. 종덕이가 번개처럼 와락 송수화기를 집어들었다. “종… 종덕아…” 봉철의 목소리였다. “김서기! 김서기!” 종덕이가 미친듯이 부르짖었다. 저쪽에서는 이윽토록 울먹거리며 말을 못하고있었다. “종덕아, 난 인젠 끝장이다.” 순간, 종덕이는 집안이 빙그르르 돌아가는것만 같은 현기증을 느꼈다. 그래서 눈을 꼭 감았다. 미구에 정신을 가다듬었을 때에는 대방에서 전화를 끊은 뒤였다. 종덕이는 앞이 캄캄해났다. 일이 틀려진것만 확실해졌다. 이 뒤수습을 어떻게 할가? 머리속에 하얀 안개가 끼는것처럼 생각이 전혀 돌아가지 않았다. 점심에 그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먹고싶지 않았던것이다. 저녁에도 억지로 민옥이와 밥상에 마주앉았다. 처음으로 밥알이 모래알처럼 느껴졌다. 어머니에게 근심을 끼쳐드리지 않으려고 억지로 밥술을 드는둥마는둥 했다. 그때 문이 벌컥 열리며 회계가 뛰여들었다. “박촌장, 날래 가보우. 김서기네 집에서 지금 란리가 터졌소. 무슨 재국이 날것 같소.” 종덕이는 밥술을 던지고 내복바람에 맨발로 뛰여나갔다. 아마도 김봉철이와 부녀주임이 밤중에 마을로 돌아온것 같았다. 김봉철네 울안에선 손전지불이 어지럽게 흔들거렸고 숱한 사람들이 까맣게 모여들고있었다. 종덕이가 방안에 들어서니 벌써 성질이 불 같은 몇몇 장년들이 봉철이를 붙잡고 얼크러져 돌아갔고 봉철의 마누라는 사람을 죽인다고 악, 악 비명을 지르고있었다. 여기저기에서 수시로 유리가 깨여지는 소리가 짤라당, 짤라당! 울렸고 이쪽저쪽에서 울음소리가 터져나왔다. 남자건 녀자건 모두 제정신이 아니였다. 눈에 달이 올라서 퍼렇게 번뜩이고있었다. 돈을 벌 때에는 더 큰돈을 벌겠다고 내놓았는데 정작 떼우게 되니 그게 아니였다. 그게 어떤 돈인가? 피땀으로 바꿔온 돈이고 한잎 두잎 귀중한데 쓰려고 모아둔 돈이고 사정사정 손이야 발이야 빌어서 꿔온 돈들이다. 무고한 마을사람들과 무슨 원쑤진 일이 있다고 우리 돈을 홀려서 남방에다 처넣었는가? 죽일 놈, 죽일 놈이다! 죽여라! 사태는 험악하게 돌아갈것만 같았다. 종덕이가 부엌으로 씽하고 달려가더니 넙죽한 한족식칼을 집어들었다. 그걸 비껴들고 그는 방안에 들어가 높직한 걸상우에 올라섰다. 그리고는 악! 악! 소리를 지르며 천장우의 장식등을 련속 세개나 쳤다. 팍, 팍! 퍼런 불이 연신 번쩍이더니 방안이 절반 어두워졌다. “조용해라! 거 김서기를 놔라! 놓지 않으면 내 이 식칼을 뿌리겠다!” 종덕이가 한족식칼을 번뜩이며 추켜들었다. 방안은 삽시간에 조용해졌다. 마을사람들은 지금 두번째로 종덕이를 다시 보게 되였다. 그저 유들유들하고 바보스럽기만 해보이던 종덕이가… “기실 이번 일은 김서기탓이 아니꾸마. 내가 그 정보를 얻어다가 김서기한테 맡겨 연구하게 했던것입꾸마. 그러니 죽이려면 나를 죽입소. 자, 이 실칼로!” 종덕이는 네귀 번듯한 한족식칼을 구들바닥에 철렁 던졌다. 허나 누구도 그 식칼을 집어드는 사람은 없었다. “여러분, 좀 가슴에 손을 없고 생각해보깁소. 돈을 번다고 좋아서 벌자고 한노릇입지비. 우리 어마이두 저를 장가보내겠다고 모아둔 돈을 몽땅 털어내왔스꾸마. 그게 어떤 돈입둥? 내 이 한몸을 칼탕쳐서라도 한잎도 곯지 않구 갚아드리겠스꾸마.” 사내들은 고개를 푹 숙였고 아낙네들은 소리를 죽여가며 쿨쩍거렸다. 종덕이가 다시 입을 열었다. “여러분, 래일 우선 먼저 우리 촌간부들이 김서기와 부녀주임을 데리고 현공안국에 가서 이 사건을 보고하고 현당위와 현정부를 찾아 정황을 회보한 다음 구체적지시를 요청할 예정이꾸마. 그런 다음 마을에 돌아와 김서기와 부녀주임 전체 촌민들께 사건의 자초지종을 말씀드리게 하겠스꾸마. 거기에 맞춰 돈을 찾아올 방도를 내오고 만약 찾아올수 없을 정황이라면 어떻게 손실을 미봉할것인가를 연구해야 되지 않겠슴둥? 기실 제가 갚는다고 했지만 제 한몸으로 갚자면 몇십년, 아니 몇백년 벌어야 그걸 다 갚겠슴둥? 김서기와 저를 죽인다고 그걸 갚을수 있겠슴둥? 여러분의 지혜와 힘을 합해야 저도 그걸 하루빨리 갚을수 있는게꾸마. 자, 김서기를 봅소. 오죽했으면 반쪽이 되여 돌아왔겠슴둥? 지금은 그에게 매를 안겨줄것이 아니라 휴식할 시간을 줘야 하지 않겠슴둥?” 사람들은 하나 둘 방안에서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문밖으로 나서며 오열을 토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사람들이 다 빠져나가고 수라장이 된 방안이 어지럽게 남았다. “종덕아!” 눈이 퀭해진 봉철이가 종덕이를 와락 끌어안더니 엉, 엉! 하고 황소울음을 터뜨렸다. 봉철이도 원래는 종덕이를 허수아비로 내세우고 자기가 뒤에서 모든것을 좌우지 하려고 했던것이다. 그러나 이 시각 그는 종덕이를 다시 알게 되였다. 내심으로부터 종덕이에게 감복되지 않을수 없었다. 그는 왜 일찌감치 종덕이를 보아내지 못했을가 하는 자격지심이 들기도 했다.     5   그들 일행은 봉두산 정상인 박두봉을 향해 톱아오르고있었다. 갈수록 심산이라더니 오를수록 산은 험해졌고 오를수록 절경이였다. 깎아지르는듯한 절벽밑을 지나면 우중충한 소나무숲이 우거지고 썰렁할가말가한 소나무숲속을 빠져나오면 파아란 비탈이 사선으로 뻗어져있기도 했다. 호박바위굽이를 지나오니 저 아래 깊숙한 골짜기로 은띠 같은 내봉하가 구불구불 산기슭을 에돌아 흐르고있었다. “딩호우, 따따디 딩호우!(너무 좋아, 정말 너무 좋아!” 진작 땀투성이 되여 런닝그샤쯔까지 다 벗어버린 팡리사상은 연신 엄지손가락을 내밀었다. 육중한 몸체인 팡리사장의 살집은 하얀 두부모 같았다. 희번뜩한 얼굴 역시 하얀 만두처럼 희한했다. 그가 검누런 고급려송연을 꺼내 물자 종수가 눈치 빠르게 라이타불을 찰칵! 켜서 붙여올렸다. “원래는 저기 저 아래쪽 강폭이 좁은데다가 다리를 놓자구 했습지비…” 종덕이가 내봉하물이 산기슭굽이를 에돌아 마을쪽으로 빠지는 곳을 가리켰다. “뿌, 뿌, 나리 뿌싱. 하이쓰 짜이쩌얼 샤밴 즈제 다거쵸쭈이호우. 요칸 왠잰.(아니, 아니, 거긴 아니야. 그래도 이 아래쪽에 직접 다리를 놓는게 좋아. 원견성이 있어야지)” 팡리사장은 앞으로 풍경구의 전망을 내다보며 다리를 놓아야 한다는것이다. 풍경이 제일 좋은 곳에다 다리를 놓아야 저쪽 산과 이쪽 산의 정체적인 조합을 이를수 있다는것이다. 자기는 세계의 명승지란 명산을 두루 다 돌아보다싶이 했는데 이 봉두산경치가 금강산이나 묘향산, 한라산에 비기지는 못하지만 또 그보다 별다른 특색이 있다는것이다. 면적이 작고 거대감은 없지만 흐르는 물이나 수직으로 깎아지른 절벽이나 산세들이 아주 정교하게 맞물려 아늑한 선경 같은 황홀감을 이뤄준다는것이다. 거기에 이제 구름다리까지 놓으면 그림 같은 풍경구가 될수 있고 많은 투자인들의 눈길을 끌것이라고 그는 예언까지 했다. 그가 지금 내봉하에 구름다리를 놓고 주변환경개조에 거금을 투자하겠다고 나선 사람이다. 그도 광풍의 어느 한 산간벽촌에서 자란 농민이였다고 한다. 개혁개방초기에 돼지치기를 해서 목돈을 벌고 그 돈으로 사료업에 진출해서 떼돈을 벌고 그 돈으로 부동산업에 뛰여들어 거금을 모으고 그 거금으로 지금은 북경에다 어마어마한 회사를 꾸려놓고 관광, 금융투자업에 종사하고있단다. 그리고 예쁘장하게 생긴 막내딸 쇼팡이를 비서삼아 데리고 다니는데 쑈팡은 영어는 물론 한국말과 일본말도 아주 류창하게 했다. 팡리사장은 종수가 북경병원에 가서 입원치료를 받을 때 같은 입원환자로 친한 사람이였다. 암으로 여겼던 종수의 병이 암이 아니고 일반 종류가 생긴것이여서 수술하고 완전히 완쾌되였던것이다. 마을에 돌아온 종수는 금불촌을 위해 몇가지 실질적인 일을 해놓았다. 확실히 머리가 잘 돌아가는 사람이였다. 그전에는 그 머리를 개인적 명예와 리익만 따지는 흑심에다 썼었다. 이번에 와서는 종덕이를 봐서라도 금불촌을 위해 진심으로 일해보자고 속심을 다졌던것이다. 그러다가 현에서 봉두산풍경구를 건설할 의향이 있다는 말을 듣고 팡리사장을 초청했던것이다. 현에서도 이에 고도의 중시를 돌렸다. 지현장이 직접 전 대의 사업을 지휘했다. 전번날에는 친히 팡리사장을 배동하여 장백산천지관광까지 하고왔다. 봉두산 풍경구건설은 지현장이 일찍부터 품어왔던 꿈이였다… “그리고 앞으로 저기 저쪽 츠렁바위아래로 길게 뻗어내려간 산자락을 리용해서 스키장을 앉혔으면 좋을것 같습니다.” 김봉철이가 팡리사장에게 광천수병을 넘겨주며 이런 의견을 내놓았다. “호우주의 니먼쩌니 더 뚱지쬬창, 짼거 쏘싱 화쉐창덕화 뚱지예커이 쪼다이 화쉐미. 워꾸지 샤쉐즈허우 쩌얼 더 펑징껑 미런.(좋은 건의웨다. 여긴 겨울철이 길어서 소행스키장을 앉힌다면 겨울에도 손님을 끌수 있을거웨다. 눈이 내린 다음의 경치가 더 볼만 할거웨다) “그러면 스키장건설계획도 환경개조건설 첫 단계 계획에 넣으시겠습니까?” 봉철이는 완전히 흥분되였다. “쩌쓰 이챈 메이샹또더. 뿌리, 또스허우칸칸바.(이건 생각지도 못했던 일인데요.  허지만 그때 가서 봅시다)” “감사합니다. 리사장님은 정말 우리 호박골의 은인이시구 또한 저의 은인이십니다. 전 평생 이 은혜를 잊지 않을겁니다. 풍경구건설에 이 한몸을 바치는것으로 그 은혜에 보답하렵니다.” 봉철이는 늘씬한 허리를 버들가지처럼 굽히며 굽썩 경례를 올렸다. 아닌게아니라 봉철이게는 은인으로 될만한 리사장이였다. 그 구슬공예품가공항목에 사기당한 풍파가 있은 다음에 현공안국에서 적극적으로 온주공안부문과 련계를 달고 사건해명진전을 알아보았다. 얼마후에 공안부문에서 사건조작자들을 전부 나포하였다. 그들은 전국을 상대로 수천만원을 사기쳤던것이다. 지금 그들의 부정축재금과 장물을 절반쯤 몰수해들였는바 사건해명이 끝나면 일부분은 돌려받을수 있는것이였다. 불행중 다행이라 할가 봉철이는 한절반 숨을 쉬게 되였다. 헌데 빚군들의 성화에는 견뎌낼수가 없었다. 많은 가정에서 한달내지, 두달만 쓰고 갚겠다고 꿔온 돈들이였다. 마을로 외지빚군들이 매일 들이닥쳤고 봉철이네 문앞에서는 아침저녁으로 “전쟁”이 벌어지군 했었다. 봉철의 마누라가 농약을 마시고 자살한다고 번져지기도 했고 봉철이도 어느날 종덕이를 찾아와 살고싶지 않다고 눈물을 흘렸었다. 그때 종덕이가 봉철의 멱살을 거머쥐고 내봉하기슭으로 질질 끌었다. 죽겠으면 혼자 죽지 말고 같이 죽자고! 강기슭에 개울물에 옷이 흥건히 젖어들 때 봉철이가 다시는 그런 말을 꺼내지 않겠다고 다짐해서야 종덕이는 그의 멱살을 풀어주었던것이다. 빚군들의 성화가 더 가심해지고있을 때 종수가 초청한 팡리사장이 마을로 찾아왔던것이다. 촌간부들이 그를 배동하여 여기저기 돌아보기도 하고 촌사무실에 앉아 좌담하기도 했다. 하루는 그들이 우사마당으로 들어서는데 몇몇 외지빚군들이 기세 사납게 달려오더니 다짜고짜 봉철이를 휘여잡고 밀치락거렸다. 종덕이는 손님앞이라 창피스럽다고 그들을 한쪽구석으로 몰아붙였다. 점심식사를 하면서 팡리사장이 그 일에 대해 궁금증을 내비쳤다. 그래서 종덕이가 그 사건의 자초지종을 말해주었다. 그는 눈을 지그시 감고 딸의 번역에 귀를 기울였다. 표정을 보니 별로 시답게 여기는것 같았다. 다 듣고나서 서서히 눈을 뜨더니 그는 그 돈을 자기가 선대해주겠으니 바쁜 목을 풀라는것이였다. 종덕이는 너무나도 고마와서 그의 손을 덥썩 쥐고 련신 흔들었다. “쎄쎄! 쩐 쎄쎄!(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자기가 세계적인 명승지나 풍경구를 많이 돌아보았는데 주변 사람들은 가난뱅이가 없고 모두 부자였다는것이다. 앞으로 이 호박골사람들도 다 부자가 될것이라며 부자가 된 다음 그 본전을 갚으라는것이다. 부자가 된 다음에는 같은 사람도 받는 사람도 기분이 다 좋다는것이다. 그때 가면 리식이 본전보다 몇갑절 더 넘어날게 아닌가고 그는 종덕이에게 눈을 찔끔거려보았다. 오후에 딸 쑈팡이가 봉철이를 찾아 수요되는 돈액수와 촌의 신용사구좌번호를 물어보고 즉시 북경에 있는 본사에 팩스로 보냈다. 이튿날 송금이 되여 또 한번 온 동네가 감격으로 들끓었다. 숱한 사람들이 줄레줄레 꼬리에 꼬리를 물고와서 면목도 없던 팡리사장께 굽썩굽썩 경례를 드렸고 어떤 사람들은 엎드려 절까지 올렸다. 팡리사장은 그 장면에 어쩔줄 몰라했고 저으기 감동을 받는듯했다. “쩌리더 런민 떠우쓰 춘푸싼량더 호우런, 호우런 까이 궈 호우르즈라.(여기 사람들은 다 순박하고 선량한 좋은 사람들이구만요. 좋은 사람들이 좋은 나날을 보내게 돼야죠)” 봉철이는 팡리사장을 끌어안고 “따거(형님)”로 모시겠다며 뜨거운 눈물을 흘렸었다… 팡리사장이 돌아가게 되였다. 저녁에는 마을에서는 환송만회를 열기로 했었다. 지현장과 현 해당부문의 책임자들도 참석하기로 되여있었다. 종덕이는 김봉철서기더러 팡리사장 일행을 우사마당으로 모시라고 해놓고논 종수의 옷자락을 슬며시 당겼다. 종덕이와 종수는 버드나무숲속으로 들어가 바위돌우에 나란히 앉았다. “삼촌, 내 조카로선 후배로서 이런 말을 해야 되는건지… 며칠 고민했소. 말이 떨어지질 않소만 어쨌든 한마디 해야겠소.” “무슨 말?” 종수는 미간을 쪼푸리며 심각해지는 종덕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다. “삼촌, 전번에 삼촌이 북경으로 치료받으러 간 다음에 현에서 파견한 두번째 조사조가 내려와서 삼촌의 재료를 해갔소. 아마 충분히 해갔을거요. 이번엔 마지막으로 또 내려와 보충할건 보충하고 확인할건 확인한다오. 내 생각에는 그들이 내려오기전에 삼촌이 모든걸 숨김없이 깨끗하게 다 털어놓고 자백하는것이 좋을듯하오. 이번에 삼촌이 부디 호박골을 위해서, 아니 전현을 위하여 대공을 세웠소. 이건 현위 렴서기도 공정했고 지현장도 공정했소. 그러니 립공속죄가 되겠소. 기회가 좋으니 시원히 다 털어버리고 거뿐하게 사는것이 좋을것 같소.” 그 말을 듣고난 종수는 눈을 지그시 감으며 이윽토록 말이 없었다. 미구에 그는 천천히 일어섰다. 종덕이도 일어섰다. “내 알았다. 네 말대로 하마!” 둘은 서로 손을 뜨겁게 잡았다. 우사마당에다는 200볼트짜리 전구를 대여섯개 내다 걸었다. 촌에서는 소를 한마리 잡아엎었다. 음식에 미립이 튼 아낙네들이 명절분위기에 휩싸여 가분가분 돌아가며 음식을 정성껏 갖췄다. 정면의 길다란 상에는 오른쪽에 손님측인 팡쟈망 일행이 앉고 왼쪽에 지현장을 비롯한 현지도일군들이 앉고 그 상 맞은켠 네모난 상에 촌간부들이 앉았다. 그뒤로는 로인들은 로인들끼리, 젊은이들은 젊은이들끼리, 부녀들은 부녀들끼리, 끼리끼리 둥근상을 에워싸고 널려앉았다. 이제 환송만회가 시작되면 촌을 대표하여 김봉철서기가 환송사를 읽게 되고 그다음 팡리사장이 호박골 풍경구건설전망과 구체공정계획에 대한 설명이 있게 되고 나중에 지현장의 중요연설이 있게 된다. 정면 중간상에 앉은 지현장과 팡리사장이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수시로 껄껄 웃음보를 터뜨리고있었다. 그러다가 지현장이 불현듯 무슨 생각이 스쳤는지 종덕이를 불렀다. “종덕아!” “예, 형님!” 지현장이 팡리사장과 자기가 앉은 공간사이에 대고 손을 흔들었다. “이 중간에 앉으실분을 모셔오지 않았구나.” “어마이를 모셔오너라!” “아니 형님두 이런 장소에 어떻게…” “아니다. 오늘은 8월 8일 길일이다. 꼭 어마이를 모셔온다고 하느니라.” 로인들과 부녀들이 앉은 상에서 그래야 한다고 몇몇이 일어나 팔을 내저었다. “앗따실루, 이것 참!” 사람들에게 밀리여 민옥이 끌려나온다. 가리마가 선명하게 쪽 빗어넘긴 하얀 머리, 이마전엔 주름이 얼기설기했지만 중간에 박힌 기미만은 여전히 유표하게 도드라져있었다.  
18    홍천룡 프로필 댓글:  조회:851  추천:31  2009-05-08
홍천룡1954년 중국 길림성 연길시 출생1974년 연길시 량식국 근무1982년 연변대학 중문학부 졸업1981년 《연변문예》잡지에《구촌조카》를 발표하여 문단 데뷔                                                  작품《구촌조카》,《경력담》등 수십편《연변문학》잡지사 소설편집 력임.현재 연변인민출판사 《농가》잡지 주필.2010년 연변문학 제30회 윤동주문학상 소설 본상 수상.
17    [단편] 구촌조카 (홍천룡) 댓글:  조회:1045  추천:28  2009-05-08
조선사람은 사돈에 팔촌까지 따지면 다 일가친척으로 걸린다는 말이 있다. 혹시 어느 친척집에 결혼잔치거나 환갑잔치 같은 대사가 있어 가보면 과연 그 말이 옳은 것 같다. 무슨 아즈바이요 올케요 당질이요 생질이요 하며 법석일 때면 나는 머루덩굴처럼 뻗은 그 복잡한 관계로 하여 만나는 친척들을 어떻게 부르며 인사를 어떻게 올렸으면 좋을지 몰라한다. 그래서 이상벌 되는 남자면 돌아가며 아즈바이라 존칭했고 녀자면 무조건 아주머니라고 불렀다. 이 때문에 친척들의 폭소를 자아낸 적이 한두번이 아니다. 셈이 든 녀석이 아직도 촌수를 가릴 줄 모른다고 말이다.     그래도 도시에서 온 친척들은 이런데 대해 별로 개의치 않았는데 농촌 친척들이 이런 복새판에서는 독판을 치며 더 야단이였다. 그럴 때마다 나는 익지 않은 개살구나 먹은듯이 입이 쓰거워나서 말도 않했다.     〈문화대혁명〉이 터지던 해의 양력설에 있은 사촌형님의 결혼식 때였다. 잔치를 치른 이튿날 아침에 멀고 가까운 친척들이 이 상 저 상에 모여앉아 해정술에 이야기꽃을 피웠다. 내가 앉은 술상에는 촌수를 모를 분들이 몇이 앉아있었다.    《하, 젊은이 잔을 내오.》    나의 옆에 앉은 허리가 늘씬하고 거쿨지게 생긴 장년이 벌쭉거리며 나더러 술을 죽죽 내라고 권했다. 그는 시체에 따르는 멋을 피우느라 검정 사지옷 앞섶을 헤쳐놓고 새하얀 와이샤쯔 깃을 내놓았지만 시골티만은 여전하였다. 엊저녁 오락판에서 그가 곱새춤을 추며 잔치손님들을 웃기던 장면이 떠올라 나는 터지는 웃음을 가까스로 참으며 술잔을 들었다.     《아즈바이, 그럼 같이 냅시다.》    나의 말에 그는 무릎을 탁 치며 삼검불 같은 머리를 흔들어댔다.     《허, 이거 참, 아즈바이라니? 술만 술이라구 체신 없이 초면인사를 홀딱 잊어먹었구만. 이 젊은이와 내가 어떻게 걸리길래 나를 아즈바이라고 하는가?    《우리 셋째 숙부님의 맏아들이요.》    사촌형님이 이렇게 소개하자 모두들 또 촌수를 캐고 들기 시작했다. 그들은 이런 시시한 문제에 들어가선 밑뿌리까지 캐고야 마는 괴벽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어느 옛날에 북산에다 모신 증조할아버지로부터 내리훑고 올리 세더니 무슨 꼬부랑 셈을 셋는지 글쎄 그 사람이 나의 구촌조카벌 된다는 것이였다. 이렇게 되고 보니 나는 더욱 난처했다. 년세가 아버지와 엇비슷한 사람을 조카라고 부르지는 못하겠고 거기에 〈님〉자를 붙여 부르자고 해도 별로 거북했다. 그렇다 하여 계속 아즈바이라고 부를수는 더욱 없었다. 허나 그는 오히려 젊은 아즈바이를 만난것으로 하여 반갑다면서 연신 술잔을 기울였다.     헤여질 때 그는 우선수선한 얼굴을 해가지고 돈 5원을 나의 손에 쥐여주었다. 내가 극구 사양하니 그는 벌컥 성을 냈다.    《왜 이러오? 나는 농민이래두 그렇게 좁쌀을 켜는 인간은 아니오. 구차하게 살 때도 제 앞의 인사는 다 차렸을라니 이젠 살림도 펴이는데 그래 처음 만난 아즈바이를 보고 가만 있겠소?》    나는 할수 없이 그 돈을 받았다.    집에 돌아와 그 돈을 내여놓으며 사연을 말했더니 어머니는 대뜸 받지 말아야 할 돈을 받았다면서 나를 크게 나무랐다.     《그 술주정뱅이가 너를 곱다고 돈을 주겠니? 이제 봐라. 또 문턱이 다슬도록 다니지 않는가구. 에그, 철부지야! 어째 그리두 세변을 모르니?》    불똑불뚝하는 동생이 방안에서 라지오를 조립하다가 어머니의 바가지 긁는 소리가 시끄러워 소리쳤다.     《어머니, 좀 그만 하십시오. 돈 5원을 가지구 뭘, 이다음 오면 돌려 주지요 뭐. 그래도 자꾸 오면 쫓아버리구…》    어머니는 그래도 머나 가까우나 친척인데 어찌 그럴수 있느냐고 동생을 나무랐다.    소금물을 더 많이 마신 사람이 다르긴 달랐다. 이듬해 가을을 잡아든 어느 장날에 나의 구촌조카가 정말 우리 집으로 찾아왔었다. 그는 아래우를 모두 검정 골덴으로 해 입었다. 습관인지 앞섶을 헤쳐 누르끼레한 퇴색한 와이샤쯔깃을 내놓았는데 로출된 목젖 아래살이 햇볕에 타서 벌거우리했다.    《지금 농촌에 별게 있슴둥? 자 이거 아즈바이들에게 맛이나 보입소.》    그는 작은 보따리를 헤치고 어머니앞에 애들 주먹만한 사과배를 한 열댓근 되게 내놓았다. 어머니는 얼굴에 손님을 반기는 기색이라곤 띠우지 않았지만 그래도 장마당으로 나가 고기며 남새들을 사들고 와서는 한상 푸짐히 차려놓았다. 나의 구촌조카는 입이 헤벌쭉해서 아버지와 같이 술을 나누었다. 60도짜리 술이 둬 잔 들어가 배안을 들볶아 놓자 그는 말이 많아졌다. 네가지 낡은것을 타파하는 것이 좋긴 좋은데 족보를 태우고 새각시들이 너울을 못 쓴다고 하니 서운하다고 하고 나서 주석어르신님이 나라대사를 처리하시는데 영명하시지만 다만 무지한 농민들더러 대자보를 쓰라고 하신 일이 골치 아프다고 했다가는 또 그것을 부정하기도 하며 지꺼분하게 늘여놓았다.    《조부님―》그는 자기와 나이 비슷한 아버지를 이렇게 존칭했으나 반말을 썼다. 《그 잔을 마저 내오. 난 이래봐도 밭고랑을 타고 세계혁명을 내다보는 빈고농이요. 그저 돈이 없어 세계각지를 돌아보지 못했을 따름이지. 돈만 있으면야 나도 윁남이랑 아프리카같은데 가서 혁명을 해보겠소. 아니 그런데 이거 글쎄 돈을 좀 벌어야겠는데 농사가 영 형편없이 되여가고 수입이란게…》   《에익! 골이 뗑해 이거 못해 먹겠다.》   내가 한창 구촌조카 입에서 무슨 현행죄에라도 걸릴 말이 나올가봐 속이 조마조마해서 연신 헛기침을 에헴에헴 깇어대는데 마침 책상에 엎드려 반도체 라지오를 수리하던 동생이 이렇게 한마디 내뱉고는 후닥닥 일어섰다. 그 바람에 마실을 나왔던 아래집 아주머니도 정지간에 앉아서 두 눈을 치뜨고 입을 딱 벌렸다.    그가 떠나갈 때 어머니는 아이들에게 사탕과자나 사주라고 돈 5원을 주었다. 그는 그 돈이 엇갚음이라는 의미를 알아차렸는지 아니면 친척들간에 이렇게 오고 가는 성의가 있어야 한다는 의미에서인지 별로 사양치 않고 넙적 받아넣는 것이였다.    그후 2,3년동안에 그는 장보러 올 때마다 얼근하게 몇 잔 하고 우리 집에 들려서는 서너근씩 되는 찹쌀을 쏟아놓지 않으면 삶은 풋강냉이 같은 것을 내놓군 했다.     허나 이런 일도 오래 가지 못했다. 〈대혁명〉이 심입됨에 따라 공장에서 림시공을 처리하는 바람에 나도 밀려나왔고 어머니도 더는 〈5․7〉도로를 걷지 못하게 되였으며 동생은 절름발이여서 집체호로 내려가지 못하고 집에 들어박혀 반도체를 가지고 장난쓰며 하루 건너씩 돈비럭질하였다. 그러니 아버지 월급 50원에 매여 살자니 자연 돈잎이 그리웠고 돈 때문에 말다툼할 때가 많았다. 이런 형편에 귀한 손님이 와도 반갑지 않겠는데 나의 구촌조카는 시내에서 사는 사람은 돈을 물쓰듯 한다고 여기는지 드나드는 차수가 점점 더 잦아졌다. 인제는 무슨 쌀되나 강냉이 같은것을 가지고 다니는 것이 아니라 어린아이도 없는 집으로 왜지나 살구 같은 것들을 들고 다녔다. 그것도 술이나 적게 마셨으면 괜찮으련만 늘 리태백이 되여가지고는 아버지와 〈대채평공〉을 하면 무슨 좋은 점이 있는가고 꼬치꼬치 캐여묻는가 하면 또 자기는 총각 때 힘이 장수여서 팔도금광이며 이도백하벌목장으로 막벌이를 자주 다녀 돈을 많이 벌었다고 자랑하였다.     집식구들의 눈에는 그가 점점 미워났다. 아버지의 엄한 눈길이 아니였다면 동생은 벌써 그를 집에서 쫓아냈을 것이다.     77년도 모내기철이였다. 나의 구촌조카는 장을 본 빈 마대를 둘러메고 또 우리 집에 들렸다. 때마침 이날은 일요일이라 집식구들이 모여앉아 물만두를 빚고있었다.    《허허, 내 다리 길긴 긴데. 거 좋은 걸 하는구만!》   그가 입이 벙글써해서 우스개를 피웠지만 누구 하나 마주 보고 웃는 사람이라곤 없었다.    《어째 또 왔소?》   아버지도 이젠 그가 주책없이 다니는데 대해 슬그머니 역증이 나시는지 물어보는 말투가 퉁명스러웠다.   돼지 팔러 왔소, 빌어먹을 거, 80원에 흥정을 붙였더니 60원이상은 더 못 간다고 하지 않겠소. 젠장 다른 때 같으면 안 팔 걸 돈 쓸 일이 생겼으니 할수 없단 말이요. 그래 그까짓 거 뭐, 시끄러워서 60원에 팔아치웠소.」   그는 바로 대장부답게 헐값으로나 팔아버렸다는 듯이 옷을 훌훌 벗어내치고는 사양도 하지 않고 아버지 밥상앞에 퍼더버리고 마주 앉아서는 아버지가 따라주는 술잔을 넙적 받아서 쭉 들이켰다. 나는 어쩐지 속이 몹시 불쾌해났고 동생도 분이 치밀어 씩씩거렸다.   《벌써 모내기는 끝냈소?》   아버지의 물음에 그는 코방귀를 뀌였다.    《흥, 어느 천년에 끝나겠소. 숱한게 한데 몰켜서는 자가사리 끓듯 하니, 꼴보기 싫어서 원!》    《아니, 자넨 그래 모내기도 안 끝났는데 흥뚱흥뚱 나다닌단 말인가?》    《흥, 모내기고 뭐고 난 그렇게는 일해먹고 싶지 않소. 농사군이란게 그래두 씨종자 하나를 뿌려서는 낟알 한줌 얻는 재미가 있어야지. 하, 그런데 이거라구야, 일을 하나 안하나 그 본새요. 많이 한 놈이나 적게 한 놈이나 모두 한 사발에 뜬 숭늉물처럼 대하니 일할 맥이 나야지.》    그는 춤방울을 튕기며 괜히 술잔을 들었다 놓았다 하였다.    《자네 형세에 뒤떨어졌군, 지금은 〈4인무리〉가 독판칠 때가 아니란 말이요. 나라를 다스리기 위해 너나없이 모두 일떠나 계급투쟁고리를 더 억세게 틀어쥐고 있는 판인데 아직도 무슨 농사법이고 뭐고 할게 있소.》    《아따, 이거 과연 실루, 계급투쟁인지 뭔지 우리 농사군과는 하등 상관이 없단 말이요. 그래…》    그가 한창 입에서 뱀이 나가는지 구렝이 나가는지 모르고 횡설수설하고 있는데 동생이 불뚝해서 드레지게 쐐기를 박았다.     《그런 말은 집에서 하는것보다 장마당에 나가 하는것이 좋겠습꾸마!》    나도 그런 말을 하면 좋지 않다고 하니 그는 술잔을 다시 쥐며 《그래, 그래! 자네들의 말이 옳네! 백성들이 정치를 운운해서 무슨 먹을 알이 있나? 자, 조부님, 술이나 들기요.》하고는 술을 한잔 쭉 들이켰다. 그리고는 입을 쓱 닦고나서 화제를 슬쩍 돌려 일가친척들 가운데서 잔치 치른 문제를 가지고 줄연설을 하다가 아버지의 기색이 돌아진것을 보자 때를 놓칠세라 비위 좋게 싱글거리며 속에 품고 왔던것을 꺼냈다.    《허허, 조부님, 알겠지만 우리 부친 환갑이 금년이 아니오? 글쎄 남처럼 버젓이 차릴수는 없지만 또 차리지 않을수도 없지 않소, 헌데 지금 농촌에 어디 돈이 나올 구멍이 있소? 그래 가을에 바치자던 돼지나 팔아 옷감과 큰상감을 마련하자고 했던 것이 글쎄 돼지값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바람에 옷감값도 모자라는 판이요. 어찌겠소, 또 공걸음을 할수도 없고 해서 이 집에 와 먼저 한 10원쯤 꾸자고 하는데…》    《아유, 10원이 아니라 20원이래두 있으면야 드려야 합지. 헌데 글쎄 이번 달엔 주인이 출장나가 진 빚을 몽땅 갚고 쌀을 타고보니 지금 부엌바닥이 반반해지는데 석탄도 못 사들이고 있는 형편이꾸마.》    어머니가 그의 말꼬리를 밟으며 곤난한 소리를 했다.    《아니, 엊그저께 나온 돈을 벌써 다 썼단 말이요?》    아버지의 이 말에 옆에 앉은 나까지도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하지만 어머니는 눈치코치 없는 아버지한테 눈을 흘기며 천연스레 픽 웃었다.     《어이구, 돈을 그리 많이 받으며 큰 소리는? 받자마자 그 자리에서 다 없어졌습꾸마.》    《하, 이거 딱하게 됐군. 좀 어떻게 다른 방법을 대서라도 꿔줍소. 다음에 올 땐 꼭 갚아드리겠으니.》    늘 큰소리만 땅땅 치던 그가 우리 집에 와 이렇게 궁한 사정을 해보기는 처음이였다.      《그럼 내 저 아래 장동무한테 가서 호조금이나 좀 꿔오지.》     아버지가 저가락을 놓고 일어서려고 하자 어머니가 버럭 성을 냈다.     《그저 쩍하면 호조금이요. 그만두오, 내 이웃집에나 가보지.》    어머니는 씽하니 문을 열고 나갔지만 이웃집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허청간에 들어가더니 인차 5원짜리 두장을 쥐고 나왔다. 정작 발각발각하는 돈을 내놓으니 그처럼 사정하던 그가 어쩐지 낯빛이 흐려지며 안받겠다고 손을 움츠러뜨렸다. 아버지가 그의 팔을 끌어당겨 손에 돈을 쥐여주어서야 그는 마지못해 받으면서 다음에 올 때 꼭 갚아 드리겠다고 재삼 다짐했다.     그런데 그해 여름이 지나가고 가을이 지나갔지만 그는 오지 않았다.     《에그, 그 돈 10원을 다 받았구나, 없을 땐 1전이 다 그리운데.》    어머니는 손에서 돈잎이 떨어질라 하면 나의 구촌조카를 외워대면서 이렇게 랭가슴을 앓았다.    《친척간에 그까짓 돈 10원을 가지구 자꾸만 외울게 있소?》    어머니의 푸념에 아버지는 이와 같이 엇섰다.   《한다리 사이가 천리라고 팔촌, 구촌이 다 뭡니까? 그까짓 돈 10원이 문제인것이 아니라 허풍치며 다니는 꼴이 더 괘씸스럽단 말입니다.》    아버지가 입을 다무시면 동생이 또 결이 나서 이처럼 두덜거렸다.어쨌든 우리 집식구들은 그 돈 10원에서 그 구촌조카가 어떤 위인이라는것을 알고도 남음이 있다고들 하였다.     그해 동지달 눈보라가 기승을 부리던 어느날 저녁 무렵이였다. 동생이 텔레비죤을 조립하겠으니 돈을 내라고 어머니와 졸라대니 어머니는 없는 돈을 어디 가 도적질해 오라는가고 밥그릇들을 왱강댕강 들었다 놓으며 신경질을 썼다. 집안이 너무 부산하여 내가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니 마당엔 온몸에 눈을 새하얗게 덮어쓴 어떤 사나이가 아이를 데리고 서성거리고 있었다.   《누구십니까?》   《내……내가 왔네.》   눈바람이 떨리는 그의 목소리를 안고 휙 후려치는 바람에 나는 고개를 돌렸다가 다시 쳐들며 여겨보았다. 그 사람은 홑옷바람에 머리에는 세수수건을 동였고 그의 오른쪽 다리에 딱 붙어선 아이는 발끝까지 내리닿은 헌 솜옷을 둘쳐입고 솜이 비죽비죽 내민 개털모자를 푹 눌러쓰고 서서 오돌오돌 떨고있었다.   《아빠, 난 추워! 빨리 집에 가자, 응―》   《응, 그래! 이 아저씨네 집으로 들어가자! 어이구, 아저씬게 아니라 너에게는 큰할아버지 벌이 되겠구나.》    그 말에 나는 문을 열며 집안의 불빛으로 그 사람을 다시 한번 찬찬히 뜯어보았다. 아, 원래 나의 그 구촌조카였다. 눈확이 푹 꺼져들어가 면상이 더 험악해보였다.     그가 아이를 데리고 문안에 들어서며 인사를 하는 바람에 집안에서 모자간이 다투던 소리가 딱 그쳤다. 그는 어머니와 동생의 눈치를 흘끔흘끔 엇갈아 보며 조심스레 구들구석 쪽으로 올라가 앉더니 아이를 끌어다 무릎에 앉히고는 모자를 벗겨주었다. 아이는 대여섯살 먹어보이는 녀자애인데 앙상하게 여윈 파리한 얼굴에 한쌍의 귀염스러운 쌍까풀눈을 또릿거리며 초들초들 말라터진 입술을 반쯤 벌리고 할할거리더니 콜록콜록 기침을 깇어댔다.    나의 구촌조카는 습관대로 옷섶을 헤쳤지만 와이샤쯔깃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송구스럽게 두손을 마주 비비며 주책없이 겨울집을 저물어 뛰여들어 안됐다고 어머니에게 연신 사과하는것이였다. 우선우선한 얼굴로 집안을 떠들썩하게 만들던 그가 오늘은 수척해진 얼굴에 수심을 푹 끼고 송곳방석에 앉은듯 어쩔줄 몰라하는 모양이 어찌보면  불쌍하고 가련하기도 했다. 그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동안 집에 이러저러한 일들이 생겨 한번도 놀러오지 못하게 된 사연을 쭉 말했다. 허지만 그 돈 10원은 이미 잊어버린것으로 치고 수염을 쓱 닦고 나앉자는 셈인지 한마디도 없었다. 어머니는 가마목에 오금을 꺾고 사려앉아서는 듣는지 마는지 가타부타 응대도 없고 동생은 책상에 마주 앉아 씩씩거리고있었다. 그도 저 혼자서 말하기가 무색해나는지 말을 얼버무려버리고는 담배를 말아물고 묵묵히 앉아있었다. 집안의 공기는 당금 폭발할듯 팽팽히 죄여들었다. 다만 가마에서 몇줄기의 하얀 밥김이 푸르륵거리며 내뿜기고있었다. 아버지 무릎에 앉은 어린이는 그 밥가마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손가락을 빨며 아버지 가슴에 대고 자주 몸을 비벼댔다. 나의 구촌조카는 담배를 한모금씩 빨고는 무슨 말을 하려고 그러는지 몇번 입술을 실룩거리다가도 어머니의 굳어진 얼굴을 보고는 입을 꾹 다물어 버리군 했다. 담배를 태운 다음 그는 어머니를 향해 조심스럽게 물었다.     《조부님은 이렇게 늦게 퇴근하심둥?》    참 그도 꽤 역은 축이다. 이 집에 와서 무엇을 좀 얻으려면 다른 사람과는 아무리 사정해 봤대야 헛수고이고 오직 아버지만이 수월하다는것을 그는 잘 알고 있기에 지금 아버지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모양이다.    《퇴근이고 뭐고 외지 출장을 나갔수다.》    어머니의 부르튼 소리에 그는 한매 얻어나 맞은듯 몸을 흠칫 떨었다. 이때 동생이 벌떡 일어서며 《사람이 나살이나 그만큼 잡쉈으면 좀 똑똑하게 놀란 말입니다. 말하면 말한대로 해야지, 흥!》하고 내쏘아봍이고는 방문을 박지르고 나갔다. 싸늘한 바람이 콱 몰켜들며 소름이 끼치도록 천정이 펄럭펄럭함에 따라 구촌조카의 낯색이 변해지더니 몸을 무섭게 떨었다. 꺼머꺼먼 눈확에 박힌 두 눈을 뚝 부릅뜬 그 기상이 당금 무슨 일을 저지를 것만 같았다. 불뚝성이 살인한다고 어머니도 사태가 잘못된것을 보자 당황하게 자세를 고쳐앉으며 그의 눈치만 살폈다. 밖에선 눈보라가 의연히 윙윙 기승을 부리며 창문을 두드린다. 그는 이윽고 입술을 피터질듯 깨물더니 갈퀴 같은 큰 손으로 천천히 웃호주머니에서 돌돌 만 돈뭉치를 꺼내 부들부들 떨며 어머니 앞에 갖다놓고는 제자리에 와 앉았다. 어머니도 그걸 받지 못했다. 이때 한쪽  구석에 앉아 이 광경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녀자애가 쪼르르 달려가 뼈마디  말랑말랑한 손으로 그 돈을 담쏙 잡아채 가지고는 아버지 앞에 와 뾰로통해서 작은 입술을 내밀었다.     《언니가 가마니 짜서 번 돈을 왜 남줘?》    아버지는 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목메인 소리로 얼렸다.    《자, 우리 해옥이 말 잘 듣지? 이 돈을 저 할머님께……어서 빨리!》    《응―난 싫어 그럼 내 때때옷은?》    해옥이는 누가 돈을 빼앗기라도 하는듯 가슴에 갖다 꼭 움켜쥐고 고집스레 몸을 흔들었다. 아버지는 안되겠는지 《그럼 못 써!》하며 해옥이를 끌어당겨 그애 손에서 돈을 빼앗아 내려고 팔목을 쥐여잡았다. 그래도 해옥이는 입술을 옥물고 기어코 놓지 않으려고 발버둥질쳤다.     《에그, 이거 그만둡소!》    《하, 이러지 마십소!》    어머니와 내가 일어서서 그들 부녀를 떼여놓으려 하자 구촌조카가 숨을 거칠게 몰아쉬더니 《못 놓겠니?》하고 벼락같이 소리치며 커다란 손을 쫙 펴서 해옥이의 앙상한 뺨을 찰싹 후려쳤다. 해옥이의 애리애리한 뺨에는 커다란 손가락자국이 시퍼렇게 났다. 그러자 해옥이는 와―하고 울음을 터뜨리며 손에 쥐였던 돈뭉치를 구들장판에다 활 뿌리치고는 아버지의 목에 와락 매달렸다.    《엉엉, 아빠 나……난, 때때옷 안해 입을래, 엉엉―》     눈물범벅이 된 해옥이는 아버지 일이 섧다고 작은 손으로 그의 가슴을 마구 허비였다.       아버지는 딸애를 꽉 끌어안으며 어깨를 들먹거렸다. 그는 물기 오르는 커다란 두 눈을 꺼벅거리더니 닭알같이 툭 불거져 나온 목젖을 꿈틀거리며 몸을 홱 돌려 문가로 다가갔다. 문을 나선 그는 맨발바람에 달려나오는 어머니를 나오지 말라고 손짓하며 《이거 참 안……》하고는 목이 꺽 메는지 말끝을 맺지 못하고 눈보라속으로 휘감겨 들어갔다.     나는 인츰 집안으로 들어와 온 구들에 널린 돈을 한장한장 주어모았다. 모두 10전, 20전, 50전, 1원짜리였는데 1전한푼 차나지 않는 10원이였다. 그 외에도 꾸겨진 종이쪼각들이 있었는데 그것을 펼쳐보니 약처방과 입원수속증이였다. 입원수속증에는 어린애가 급성페염에 걸렸다는 의사의 진단과 입원보증금 30원이라는 수자가 적혀있었다. 나는 그것과 어머니한테서 20원을 더 가지고 병원으로 줄달음쳤다. 나는 곧추 소아과병동으로 들어가 그 입원수속증을 내보이면서 환자를 찾았다. 의사는 그것을 보더니 《지금 우리도 이 환자를 기다리고 있는 중입니다. 이애 아버지가 입원보증금이 모자라서 친척집에 가 꿔가지고 오겠다며 아이를 데리고 나갔는데 아직도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이 추운 겨울에 환자가 밖에 오래 있으면 좋지 못한데》라고 근심어린 표정을 지었다. 나는 어쩐지 가슴이 짜릿해 나며 눈굽이 젖어오름을 금할수 없었다. 머리속엔 입술을 실룩거리던 구촌조카의 얼굴과 그 돈 10원을 꼭 쥐고 《내 때때옷》이라고 애처롭게 울던 해옥이가 떠올랐다.     병원에서 나온 뒤 나는 그들이 어디로 갔을가고 생각해보았다. 그들이 나갈 때는 이미 차시간이 다 지난 뒤여서 차는 못 탔을 것이고 려관에 들자 해도 돈을 다 털어놓은 그가 어떻게 려관에 든단 말인가, 다른 친척도 없을 텐데……    나는 인차 룡성골로 향한 신작로를 따라 달음질쳤다. 한 시오리 길을 달려 청석바위가 솟은 굽인돌이를 지나는데 바람을 등진 으늑한 길옆 바위아래서 흑흑 느껴우는 소리가 어슴프레 들려왔다. 손전지로 그곳을 비춰보니 바로 그들이였다. 전지불이 비쳤는데도 구촌조카는 그냥 딸 해옥이를 품에 안고 앉아서 락루하고있었다. 나는 그 정상을 보니 가슴이 쓰려나기도 하고 반갑기도 해서 한달음에 달려가 그의 품에 안겨 있는 해옥이부터 보려 했다.    《해옥이가 어떻슴둥?》    그제야 그는 산중에 범이 내려와 해옥이를 채간다고 여겼는지 악 소리를 지르며 몸을 비틀어 해옥이부터 등뒤로 재껴 업었다.    《제가 왔습꾸마!》    내가 손전지로 자신을 비춰서야 그는 아이를 도로 내리워 가슴에 안으며 나를 무섭게 쏘아보는것이였다.    《자네 왜 왔는가?》    나는 가슴이 미여지는듯 하여 말이 나가지 않았다. 내가 입원수속증과 돈을 꺼내자 그는 부릅떴던 눈을 내리덮으며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지었다.   《필요없네.》   《예?!》나는 그의 가라앉은 차디찬 목소리에 서리발처럼 온몸을 휘감는 불길한 예감이 쑥 들었다. 그 솜옷안에서는 할할거리는 소리도 기침소리도 없었다. 나는 정신없이 달려들어 미친 사람처럼 솜옷을 헤치고 해옥이의 얼굴을 비쳐보았다. 입가에 노르끼레한 거품이 물려있고 두 눈은 꼭 감겨져 있었는데 오똑한 코밑만이 미약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쇼크상태에 처한것 같았다. 더 지체할수 없었다.    《아이를 이리 보냅소. 내가 업고 갈테니.》    내가 다짜고짜로 그의 품에서 아이를 받아안으려고 하자 그는 아이를 콱 나꾸채며 비분과 절망에 빠진 어조로 무서운 소리를 질렀다.    《이러지 말어! 내 속에 불이 인다!》   목갈린 소리지만 날이 서지 않은 그 말이 나의 가슴을 마구 허비였다.    《이러지 마십소, 노여운 일들이 많으리라고 생각되는데 앞으로 제가 사죄하겠으니 량해하십소. 허나 지금은 이 아이를 구해야 하지 않겠습둥?》    나의 말에 그는 두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흑흑 느껴울었다. 나는 그를 더 안위할 새도 없이 해옥이를 둘쳐업고는 쏜살같이 산아래 마을로 달려가서 병원에다 전화를 쳐서 구급차를 불렀다…     그해 겨울이 지나가고 해토가 되여 대지에 봄기운이 돌 때 나의 구촌조카는 생산대의 선대금으로 산 송아지를 끌고 우리 집에 들려 돈 30원을 내놓으며 그때 입원보증금을 보충해 주었길래 해옥이가 위험에서 벗어나 지금은 건실한 몸으로 유치원에 다닌다고 알리면서 새해부터는 어쩐지 하는 일 없이 시간이 바쁘다면서 어머니가 점심식사를 준비하는것을 보면서도 랭수 한 사발만 마시고 돌아가더니 그후엔 까딱하지 않았다.     머나 가까우나 다니는 것이 친척이라고 그래도 그 구촌조카가 이 몇해동안 드나들던 정이 있어서 나는 장날이면 혹시 그가 오겠는가고 속으로는 은근히 기다려 보기도 했다. 그후에 나는 다시 취업하게 되였고 아버지 봉급도 올라갔으며 어머니도 가두일을 하면서 일정한 보수를 받았다. 동생은 텔레비죤 수리소를 세울 준비에 바삐 돌아치고 있었다. 이제 구촌조카가 놀려오면 절대로 푸대접을 시키지 않으리라 나는 속으로 별렀다. 어머니도 그런 생각인지 어째 놀러오지 않는지 모르겠다고 몇번이나 외우는것이였다. 허나 그는 두해나 지나가도 오지 않았다. 나는 어쩐지 그가 그리워났다.     80년대 첫 음력설을 앞두고 어느날 나는 동생을 데리고 거리에 나가 설맞이 물건들을 사가지고 오다가 무선전〈귀신〉인 동생한테 끌리워 오금상점으로 갔다. 상점안은 고객들로 들끓었다. 라지오며 텔레비죤을 사들고 머리를 내젖는 사람들을 보면 태반은 엉성하게 멋을 피운 농촌의 청장년들이였다. 우리가 텔레비죤부속품 진렬대앞에 이르자 웬일인지 모였던 사람들이 우르르 헤여지는것이였다. 동생이 흩어져가는 사람들속에서 무엇을 봤는지 사람들속을 마구 비집고 들어가며 판매원에게 성급하게 물었다.             《텔레비죤 주파수 대역선택 스위치가 왔습니까?》    《하, 이 동무 오늘은 한발 늦었구만, 방금 다 팔렸소.》    《예?! 야, 이거 참 맹랑하군!》    동생은 한발 늦게 온 것이 너무나 맹랑해서 머리를 긁적거리며 판매원에게 사정했다.     《판매원동무, 혹시 창고에 남겨둔 것이 없는지요. 우리 소조의 몇몇 구직청년들이 텔레비죤수리부를 내오자고 수리시험에 달라붙었으나 요즘 이 스위치가 없어 부득불 시험을 정지하였습니다. 어떻게 좀 방법을 대주십시오.》    《지금은 상품이 오면 다 매대에 내놓기에 창고에는 남은 것이 없습니다. 참 안됐습니다.》    《에참, 다 형님 탓이요. 부식품상점에 가 줄만 서지 않았더라면……》    실망한 동생은 또 나에게서 탈을 잡으며 해내려고 했다.     《젊은이, 사정이 정 그렇게 딱하다면 내 샀던걸 주지.》    뒤에서 누군가 걸걸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하며 동생의 어깨를 툭툭 쳤다. 〈정말 고마운분이 다 있구나!〉나는 이렇게 생각하고 동생은 떡함지나 안겨준다고 좋아서 《정말입니까?》하고 소리치며 고개를 돌렸다. 그 사람의 얼굴이 눈에 안겨드는 순간, 나와 동생은 입을 딱 벌리고 말았다. 이게 누군가? 후리후리한 키에 광대뼈가 불끈 돋은 길죽한 얼굴, 그 얼굴에 박힌 어글어글한 우멍눈이며 우뚝한 매부리코며 벙글써 열려진 큰 입……나의 구촌조카가 틀림없었다. 그는 국방색 양털외투를 어깨에 걸치고 안에는 커피색 텔릴렌중산복을 입었는데 헤쳐진 앞섶으로는 눈같이 희디흰 와이샤쯔깃이 내보였다. 발에는 번쩍번쩍하는 방한용 목구두를 신었는데 쭉 차리고 선 그의 자태는 아주 름름하고 위풍 있었으나 어딘가 아직도 시골티를 가시지 못했다.     《자, 이걸 받고 60원을 내놓소.》    그는 아직 털모자를 눌러쓴 우리를 알아보지 못한것 같았다. 내가 모자를 벗으며 인사를 올리려는데 저쪽으로부터 《아버지, 이런 걸 샀어요.》하는 야무진 소리와 함께 쪼르레기가 달린 인조가죽 저고리에 빨간 털실수건을 친 녀자애가  돛천 멜가방을 들고 구촌조카앞으로 달려오고있었다. 발가우리한 능금볼에 한쌍의 새별같은 눈을 가진 녀자애는 그야말로 눈 속에 핀 한송이의 꽃을 방불케 했다. 그 깜직한 쌍까풀눈이 아니였더라면 나는 그가 해옥이라는것을 알아내지 못했을것이다.    《해옥아, 너 이렇게 컷구나.》     내가 해옥의 팔목을 끌어당기는 바람에 어리둥절해서 나와 동생을 번갈아 뜯어보던 구촌조카는 그제야 우리를 알아보고 빙그레 미소를 짓는것이였다.     《하, 난 또 누구라구, 그간 무사히들 보냈소?》    《예! 해옥이가 정말 충실해졌습니다.》    나는 이렇게 인사를 받았으나 동생은 면구스러워 우물쭈물하며 머리를 들지 못했다.         《자, 작은 아즈바이 이걸 받소!》    그는 텔레비죤수상기주파수대역스위치가 들어있는 종이함을 동생의 손에 억지로 쥐여주었다. 동생이 안 받으려 하니 그는 벌컥 성을 냈다.    《이거 참, 아즈바이틀을  차리느라고 이러오? 그래 정말 안받겠소?》    동생은 하는수 없이 그걸 받은 다음 돈지갑을 들췄다. 텔레비죤수상기의 부속품들을 사려고 그는 늘 많은 돈을 가지고 다녔는데 이날 돈지갑을 몽땅 털어봐도 50원밖에 안되였다. 그는 얼굴을 붉히며 슬그머니 나의 옆구리를 꾹꾹 찔렀다. 그래서 나는 가방을 내려놓고 돈지갑을 꺼내려고 서둘렀다.     《하, 그까짓 돈 10원을 가지고 뭘, 그만두오, 이 돈도 원래 받지 말아야 할 텐데 그러면 또 이 작은 아즈바이가 물건을 안받을게구, 이거 정말, 쯧쯧!》    그는 할수 없이 받는다는듯이 머리를 슬슬 외로 탈아치며 동생의 손에서 돈을 받아쥐고는 나의 팔을 끌어내리우며 혀를 끌끌 찼다. 그바람에 쭈물거리던 동생도 활발해져서 다리를 절뚝거리며 구촌조카를 잡아끌었고 나도 해옥이의 팔목을 쥐여끌면서 상점문을 나와 집으로 향했다.    집에 들어서니 아버지와 어머니도 반갑게 맞아들였다. 집안은 웃음꽃이 피여 명절을 쇠듯 끓었다. 구촌조카는 외투며 웃옷을 활활 벗어내치고 와이샤쯔에다 회색 털쪼끼바람에 아버지와 마주 앉아서 술을 나누며 흥에 겨워 이야기를 하다가도 껄껄 크게 웃었다. 그는 두해 동안에 닭치기, 돼지치기에다 소를 세 마리나 길러 팔아 몇천원 벌어서 빚을 다 갚고 텔레비죤까지 갖추었는데 명년에는 고래등 같은 기와집을 지을 계획이라고 하면서 이젠 일밭에 나가 일을 할라치면 일욕심이 점점 더 많아져 기운만 난다고 기껍게 말했다.   《자, 조부님, 그 잔 마저 내오. 앞으로는 농촌생활이 도시생활보다 나으면 나았지 못지 않을게요. 조부님도 퇴직하면 우리 마을로 오라이! 살기 좋소! 먹을게 적어 걱정이겠소, 돈잎이 그립겠소, 몇해만 지나면 집집마다 텔레비죤을 다 갖춰놓겠는데 부러울게 뭐 있소? 하, 이젠 차비를 팔지 않고서도 뜨끈한 구들에 토시고 앉아 세계각지를 다 볼수 있단 말이요.》    《그 집에 있는 텔레지죤이 외국제입니까 국산입니까?》    그가 한창 주흥에 입심을 부리는데 웃방에 있던 동생이 이렇게 물었다.     《우리 집 텔레비죤 말인가? 상해제네. 말똥떼두 상해제라면 좋다더니만 거 좋긴 참 좋았는데 하, 글쎄 며칠전에 이 해옥이라는년이 숱한 제 또래들을 데리고 와서 어떻게 주물러놓았는지 스위치를 마사놓았단 말이요. 그래 오늘 소장 보러왔던 김에 오금에 들려보니 마침 그 스위치가 있어 샀던게요.》    《텔레비죤수리 같은 건 저 우리 둘째가 잘하오. 갸들이 몇이서 무선전수리소를 내왔는데 영업허가증은 탄지 오래지만 자금이 모자라 지금 개업을 못하고 있소.》    아버지의 이 말에 구촌조카는 무릎을 탁 치며 성낼 때처럼 목에 핏줄을 세웠다.        《아니, 그래서야 되겠소? 자금이 얼마나 모자라오?》    《한 천여원 모자라는 소리를 하더구만.》    《천여원이라……》    그는 입속말로 중얼거리며 무슨 속구구를 하는지 미간을 찌프리고 생각하더니 불시에《자―》하고 소리치며 손을 놀려 털조끼 밑으로부터 빨간 비단에 싼것을 내놓았다. 집식들은  모두 의아해서 눈이 휘둥그래졌다.    《이건 소 사러 가지고 왔던 돈 500원일세. 아직 봄도 이른데 바쁘지 않으니 작은 아즈바이 요긴한 일에 먼저 보태게나!》    집식구들은 모두 감동되였다. 동생은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해서 구촌조카의 손을 으스러지게 틀어잡았다.     《속이 좁게 논 저를 용서해 줍소. 이제 꼭 수리소를 잘 꾸려 이 크나큰 방조에 보답하겠습꾸마!》    《아따 과연 실루, 지나간 일들을 가지구 무슨 그럴게 있나?》    그는 동생의 어깨를 툭툭 치며 너그럽게 웃었다.     《어이구, 모두 그 개도 안먹는 돈 때문이지. 그렇지 않으면야 무슨……》    어머니는 이렇게 말하며 행주치마자락으로 눈굽을 찍었다.     《아니꾸마! 절대 돈 때문이 아닙지비. 저도 이전엔 돈이란게 사람의 인심을 박하게 하는 몹쓸게라고 생각했댔지만 지금에 와 곰곰히 생각해 보니 절대 그런것이 아니꾸마! 내 이 이태 동안에 벼락부자가 된게 무엇 때문이겠슴둥?》    《옳소, 절대 돈문제가 아니오.》    그의 말에 아버지도 이렇게 수긍하셨다.    《이게 다 공평한 정책이 우로부터 내려왔기때문이꾸마. 헌데 글쎄, 그전에는 〈대채평공〉이요 뭐요 하고 평균주의를 실시하니 누가 맥을 내겠슴둥. 밭에선 범이 새끼를 치는데도 밭머리에선 계급투쟁을 합네 하구 입씸질만 하니 그게 무슨 정책이란 말임둥? 젠장!》     나의 구촌조카는 누구와 다투기라도 하듯이 눈을 부릅뜨고 침방울을 튕겼다.      해옥이가 옆에 앉았다가 귀여운 눈으로 아버지를 흘겨보며 앵두입을 삐쭉거렸다.     《아버지두, 참 지나간 옛말은 그만하시고 재미나는 이야기나 하세요.》     그 바람에 모두들 즐겁게 웃었다. 구촌조카도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해옥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옳다. 너희들이 커서 일할 때면 그런 일이 생기지 않을거야! 그때 가면 정말……》    그는 말을 하다 말고 고개를 들어 웅숭 깊은 두 눈으로 창밖의 먼산들을 이윽토록 바라보는 것이였다.    
16    숙녀들, 좀 더 뽐내봐 댓글:  조회:854  추천:23  2009-05-08
무더운 여름날, 맥주점 북쪽 음달진 창턱밑 좌석은 언제나 꾀죄죄한 녀석들이 차지하고있다. 서늘한 곳에 앉아 시원한 맥주를 마시며 지나오고 지나가는 녀자들의 풍채를 마음껏 흠상할수 있고 이러쿵 저러쿵 제멋대로 평가도 할수 있는 자리였다. 한번은 점잖은 친구를 만나 맥주점으로 들어갔다. 면바로 그 창턱곁에 남은 좌석이 있었다. 서로 우아하게 사양하면서 앉은 다음 잔을 들기 시작했다. 천천히 잔을 비우며 조용하게 정세흐름이나 론하자고 했는데 뒤좌석에서 무슨 시비를 캐는 말소리가 번주그레하게 들려와서 우리를 소란스럽게 굴었다. “야, 고년이 정말 여우야, 여우! 여우처럼 논다니까. 홀랑거릴 때는 정말 간이 다 녹아나, 녹아빠지지. 간이 녹아난 다음에는 제 안속만 홀랑 챙기는거야. 내 더러워서 콱 차버릴가 하다가도… 에익, 씨—” “임마, 네게는 그년이 칼라카메라지. 계집은 그래도 여우같은 녀자가 좋네라. 너 그래 돼지같은 녀자를 끼고 살겠냐? 흐흐! ” “응, 그래! 난 돼지같은 녀자가 좋겠어. 꿀꿀, 먹기두 잘먹구 말도 잘 듣구. 이거라구야 요래조래 다 빨아내구 말라빠져 시들면 홀랑 꼬리를 뺄게 아니겠어.” “임마, 남자란 그 홀림에 빠지는 멋에 사는거야.” “야, 그럼 너나 그 홀림에 빠져 살아봐.” “임마, 그럼 너 돼지같은 녀자를…” 슬며시 돌아다보니 명태같이 길쭉한 녀석과 호박같이 둥근 녀석이 서로 삿대질해가며 벌거이르르하게 열을 올리고있었다. 웃기는 녀석들! 곁사람들까지 걸쭉하게 웃기고있었다. 구경 여우같은 녀자가 좋으냐, 아니면 돼지같은 녀자가 좋으냐! 두 술군의 술상머리에서 벌어진 주정이나 다름없는 입씨름이라 용속된 비유로 찧고박고 했지만 무언가 깔려있는듯한 화제같기도 했다. 사람의 몸이 천근 간다면 눈이 팔백근 간다는 말이 있다. 참, 지당한 말씀이다. 눈이 귀신같다. 꽃과 풀이 동시에 눈에 안겨올 때면 풀보다 꽃이 깜찍하고 화려해보인다. 우선 꽃잎이 풀잎보다 앙증하게 펴지고 좁은데는 좁고 넓은데는 넓어지면서 곡선을 이룬다. 거기에 풀잎처럼 한층이나 한마디에 외잎으로 삐여지는것이 아니라 둘, 넷, 여섯, 여덟… 우수나 셋, 다섯, 일곫, 아홉… 기수로 동시에 삐여지면서 원형이나 각을 형성하면서 원활한 꽃부리조형을 이룬다. 또 거기에 어떤 꽃은 폭이나 길이가 좀 작은 속잎이 련이어 겹치면서 층차의 립체감도 이루어준다. 그리고 또 거기에 웅성, 자성을 띤 꽃술이 생겨나 화심을 만들며 절경을 이룬다. 또한 거기에 빨간색, 노란색, 자주색, 흰색 등 색치마를 주름잡으며 현란하고 화려함을 이룬다. 그것이 아양을 떨고 애교를 부리며 사람의 눈을 즐겁게 해준다. 거기에 어떤것은 그윽한 향기까지 뿜어 사람의 심성도 희롱한다. 그래서 꽃은 녀자의 상징물로 되였다. 녀자가 있어야 눈이 즐겁고 녀자가 있어야 심성도 즐겁고 녀자가 있어야 웃음이 있고 녀자가 있어야 사랑이 있고 녀자가 있어야 행복이 있다. 눈을 가진 남자들이 고운 녀자를 보게 되면 눈부터 즐거워난다. 눈이 반짝반짝 광채를 띠며 가만 있지를 못한다. 보고 또 보고싶어진다. 그래서 길을 가다가도 두세번씩 고개를 돌리느라 애매한 길손들의 어깨를 쳐놓거나 발등을 디디여 정상적인 교통질서를 혼란시키는 페단도 생기게 된다. 정말 꽃처럼 고운 녀자는 집에 가져다가 화분처럼 가꾸고싶다. 그러면 보고싶을 때엔 보고 보고 또 볼수 있지 않겠는가! 얼마나 즐거운 일일가! 헌데 눈이 즐거우면 인차 피곤해진다. 세상이 돌아가는 도리가 다 그렇구 그렇다. 조물주가 얼마나 랭철한가! 고운 꽃도 시들 때가 있다. “열흘 붉은 꽃이 없다”고 하지 않았는가! 고왔던 꽃도 시들면 곱지 않다. 문제는 여기에서 터진다. 시들면 꽃 자신도 더 어여쁘게 뽐내 볼수가 없고 곁에서 그걸 보아주는 눈도 즐거워질수가 없게 된다. 그래서 가꾸는 문제가 제기된다. 꽃을 가꾸자면 시간, 영양토, 물, 해빛, 공기, 시비, 살충, 전지 등 자연물질과 인공기술이 수요된다. 녀자도 꽃이인것만큼 가꿔야 시들지 않는다. 녀자란 꽃을 가꾸는데는 주요하게 세가지 방면이 있다. 첫째는 천성적인 유전요소인데 고운 얼굴, 날씬한 몸매, 총명한 두뇌는 부모에게서 따온다. 둘째는 환경요소인데 영양, 가정, 사회, 교육, 직업이다. 셋째는 인공기술인데 주요하게는 자기절로 자기를 가꾸는 기술이다. 여기에는 여러가지 방면에 부동한 전업기술의 전수와 숙달이 수요된다. 례를 들면 건강해야 아름다워질수 있는데 그럼 건강을 어떻게 지켜야 하느냐, 정결한 위생습관을 키워야 맑아질수 있는데 그럼 위생습관을 어떻게 키워야 하느냐, 보건미용을 잘해야 생생한 피부를 보존할수 있는데 그럼 보건미용은 어떻게 해야 하는냐 등등, 이밖에도 음식, 의복, 화장, 심리, 혼인, 생육… 지어 손톱과 발톱을 어떻게 가꾸겠는가 하는데도 깊숙한 학문이 있다고 한다. 녀자들이 예뻐지지 않을래야 않을수 있겠는가! 지난세기 60-70년대에는 녀대학생이 극히 희소했다. 구경 어떤 녀자들이 대학생이 되였느냐고 궁금증이 심한 싱겁쟁이들이 대학가에 가서 힐끔힐끔 훔쳐보고는 무릎을 탁 쳤다. 대학가에는 미인이 없었구나! 그럼 그렇겠지! 그런데 삼사십년이 지난 오늘날 대학가에 가보면 말짱 미니미녀들이다. 크게 말하자면 사회가 발전한 결과라고 말할수 있고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녀자들이 자기를 부단히 가꿔온 보람이 아니겠는가! 녀자는 우리 사회를 장식해주는 장식품이다. 녀자가 없는 사회가 아름다울수 있을가! 지금 우리 사회가 아직까지 리상적으로 아름다와지질 못하고 추악하고 더러운것이 지저분하게 널려있는데는 녀자들이 져야 할 책임도 크다. 이 사회가 백화만발한 화원이 되자면 천송이 만송이 갖가지 꽃들이 저마다 활짝활짝 피여나야 한다. 하지만 이 사회의 꽃으로 되고있는 많은 녀자들이(부동한 지역에 따라 그 비례수가 부동함) 아직까지 자기를 활짝 피우지 못하고있다. 꽃이 활짝 피지 못하는데는 가물거나 해빛을 보지 못하는 등 원인이 있다. 녀자들도 자기를 활짝 피우지 못하는데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다. 신체건강원인도 있을수 있고 사상, 신앙 원인도 있을수 있고 심리, 성격원인도 있을수 있고 가정, 사회적원인도 있을수 있다. 제일 주요한 원인은 자기가 자신의 이파리를 펴지 못하게 감고있는것이다. 그걸 펴야 한다. 자기를 나타낼줄 알아야 한다. 자아표현은 녀자의 천성이다. 녀자는 뽐내야 예뻐보인다. 뽐내는데는 여러 가지 류형이 있고 여러 가지 형태가 있고 여러 가지 예술적기교가 있다. 맥주점 그 창턱밑 좌석에 앉아 지나가고 지나오는 녀자들을 유심히 살펴보면 각양각색이다. 앙골라토끼털같은 머리로 굽실굽실 파도를 이루며 또각또각 절주있는 구두소리를 내며 걸어오는 녀자, 고개를 다소곳이 숙이고 한쪽으로 스며들듯 잦아들듯 사뿐사뿐 걸어가는 녀자, 만져보고싶도록 앙증한 엉뎅이를 달싹달싹 추슬리며 걷는 녀자… 제가끔 제멋대로 걸음걸이를 뽐내고있는것이다. 녀자는 뽐내야 남자의 눈길을 끌수 있다. 세계를 정복하는 주력군은 남자다. 그 남자들을 정복하자면 우선 그 남자들의 눈길부터 끌어야 한다. 어떤 녀자는 고운 얼굴에 함박꽃 피우며 그 눈길을 끌고 어떤 녀자는 날씬한 몸매를 하느적거리며 그 눈길을 끈다. 녀자는 뽐내야 남자의 마음을 잡아끌수 있다. 남자의 마음에는 세계를 담고있다. 그 세계를 함께 가지려면 남자의 마음을 끌어당겨야 한다. 어떤 녀자는 깨끗한 순정을 바쳐 그 마음을 끌고 어떤 녀자는 포근한 보금자리를 만들며 그 마음을 끈다. 녀자는 뽐내야 들말같은 남자를 순양으로 만들수 있다. 남자는 천성적으로 충격적인 공격형동물이다. 그 야성으로 많은 비극이 빚어질수 있다. 그 야성을 길들일수 있는 순록사가 녀자들이고 제일 효과적인 비방은 녀자들의 부드러움이다. 어떤 녀자는 뽐내기도 하고 온순하기도 하며 남자를 길들인다. 녀자로서의 예술이다. 녀자는 뽐내야 사랑스럽고 귀엽다. 요염하게 뽐내든 수집게 뽐내든 다 아름답다. 아름다움에는 캐야 할 도리가 없다. 녀자는 뽐내야 젊어지고 싱싱해진다. 싱싱하지 않으면 남자들의 싫증을 사게 된다. 이밖에도 녀자들이 뽐내야 할 리유는  많고도 많다. 뽐낼수 있는 녀자는 그만큼 밑천이 있다는걸 말한다. 허지만 턱없이 뽐내면 싱거워보인다. “뽐내는 녀자를 보면 달라는것 없이 밉더라”란 말이 이런걸 두고 하는 소리일것이다. 싱겁긴 하지만 안 뽐내는 녀자보다는 낫겠다고 보아진다. 왜냐하면 아직도 수많은 녀자들이 뽐내지 않고있으며 지어 뽐낼줄 모르고있다. “녀성이 해방되는 날이면 세계가 해방되는 날이다.” 그어떤 사상, 신앙, 종교, 습관, 압박, 리념에 의해 많은 녀자들이 억눌려서 뽐내지 못하고있다. 아직도 남녀균형은 젖은 걸레처럼 한쪽으로 축 처지게 기울어지고있다. 그걸 쭉 짜서 말리우고 균형을 잡자면 녀자들이 한결 더 뽐낼수 있게 되여야 한다. 이 세상이 녀성이란 꽃으로 만발할 때 세상 불행한 남자들이 그 속에서 위안을 얻고 즐거움을 찾을수 있을것이다. 그날을 위해 숙녀들 좀 더 뽐내봐!
15    생활 예술 천당 댓글:  조회:896  추천:28  2009-05-08
상전벽해라 나도 어느덧 손주녀석을 안게 된 할아버지가 되였다. 톡 치면 깨여질듯한 말쑥한 유리살결에 깜장 포도알처럼 또릿거리는 눈을 가진 손주녀석을 들여다보면 볼수록 한장의 예술사진 같다. 아직은 엄마와 엄마의 젖밖에 모르는 아이를 놓고 벌써 곁에서 아이의 먼 장래를 위해 “날개”를 달아준다. 인기많은 예술가로 되겠냐, 돈많은 기업가로 되겠냐, 아니면 학식깊은 학자로 되겠냐고. 텔레비에서 아름다운 선률이 흘러나오면 아이가 그쪽으로 귀를 벌쭉거린다. 그러면 또 새로운 “발견”이 생긴다. 봐라, 예술세포가 있는 아이가 아무데가 달라도 다르다. 생일상에서 아이가 복판에 있는 빨간 사과에 눈독 들여 왼손을 내밀자고 오른손으로 상을 짚었는데 그 손에 백원짜리 지페가 집히게 되였다. 봐라, 돈복이 있는 아이가 다르긴 다르지. 이다음 틀림없는 갑부야. 아이가 방안에서 벌벌 기여다니다가 아빠가 떨군 볼펜을 주어들고 아무데나 대고 긁적거린다. 봐라, 학문을 닦을 아이는 벌써 아이때부터 알린다. 필을 쥔 모양부터 다르거든… 나는 예술에 대해 잘 모른다. 어려서부터 예술의 감화를 받으며 심신을 도야시키지 못하고 자랐다. 내가 자라던 동네는 백여호나 되는 큰마을이였지만 라지오가 있는 집이 두세집밖에 없었으니까 정규적인 음악소리를 제대로 들어보지 못했었다. 초저녁부터 밤중까지 들을수 있는 리듬적인 곡조래야 동구밖 개울가와 논밭으로부터 울려오는 개구리들의 대합창이였다. 방문을 활짝 열어젖히면 자갈사태가 쏟아지듯 요란했고 방문을 꾹 닫으면 자장가인양 요요하게 귀전에서 멀리 메아리친다. 그 자장가속에서 도야지나 강아지와 뒹구는 목동적인 꿈나라로 들어가군 했다. 어느 날, 복순이네 집앞을 지나다가 그 집의 라지오에서 우렁차게 울려나오는 “사회주의 좋다”란 노래소리를 듣게 되였다. 얼마나 박력있고 경쾌한 선률이였던가! 나는 그집장재(널판지로 세운 울바자)에 매달려 넋을 잃고 들었다. 빨래를 널고있던 복순의 어머니가 나를 발견하고 놀랍게 악청을 뽑았다. “요놈, 뭘 도적질하자구 눈이 빨개 거기 매달려있느냐? 냉큼 물러가지 못해! ” 얼마나 아쉬웠던지! 헌데 이웃집 선희누나가 그 노래를 흥얼거리고있었다. 나는 감자“까마치”(누룽지)를 주면서 그 누나한테서 그 노래를 배워냈다. 그래서 지금도 그 노래를 가사 한마다 틀리지 않고 부를수 있게 된것이다. 당시 우리 조무래기들이 다룰수 있는 악기라고는 버들피리따위였다. 봄에 물이 잘 오른 버들가지를 꺾어가지고 손칼로 손가락만큼 잘라서 속대를 쏙 뽑아낸다음 중간쯤에 구멍을 뚫고 입술에 물고 낯이 지지벌게 나도록 불면 비단폭이 찢어지는 소리가 난다. 그것도 짧게 한것과 길게 한것이 소리가 다른데 길게 하자면 속대를 뽑아내기 곤난해진다. 잘못 뽑아 바늘귀만한 구멍이라도 생기면 소리가 제대로 나지 않는다. 별로 듣기좋은 소리는 아니였지만 그걸 해서 불면 그래도 아이들이 좋다고 모여든다. 그것이 소리의 매력이였을가! 내가 소학교에 입학하던 해였다고 기억되는데 동네에서는 큰 사건이 벌어졌다. 복순이네 큰오빠인 광이라는 청년이 있었는데 마을에서는 그를 “풍각쟁이”, 혹은 “빠이롱쟁이”라고 불렀다. 지금에 와서 기억을 더듬어봐도 온동네 치고 그마큼 훤칠하고 멋있게 생긴 사람은 없었던것 같다. 한번은 우사칸마당에서 무슨 경축대회가 열려서 동네의 남녀로소들이 까맣게 모여들었다. 북장단에 새납소리가 요란한 가운데서 할아버지들이 퉁소를 불고 아줌마들이 꼬리치마를 펄럭이며 너울너울 돌아갔다. 나중에 그 “풍각쟁”광이가 구경군들의 박수갈채를 받으며 중간에 나섰다. 점잖게 말 몇마디 하고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였다. 노래를 얼마나 잘 불렀던지는 모르겠으나 그 목청이 둥글소의 영각소리처럼 웅글졌고 입을 어찌나 크게 벌렸던지 저 입이 귀밑으로 올리 짜개지면 어쩌나 하는 근심이 앞섰던 기억이 난다. 그처럼 멋있던 “풍각쟁이”가 이웃집 강철네 훗어미와 함께 뒤산 수수밭에서 서로 끌어안고 죽었다는것이다. 그 수수밭으로는 우리 조무래기들이 늘 “깜부지”(꺼먼 수수벌레통)를 따먹으러 다녔던 곳이다. 얼굴이 하얗고 갸름하게 생긴 강철네 훗어미를 마을에서는 “멋따개”라고 불렀다. 심양이라는 고장에서 한 문공단에 다니며 춤을 유명하게 췄다는데 무슨 어떠어떠한 문제로 쫓겨나서 여기로 오게 되였고 강철네 훗어미로 되였다는것이다. 멀쩡한 총각이 유부녀와 함께 죽었다는 사실은 그당시 사람들로는 아무리 어떻게 생각해봐도 리해할수 없는 일이였다. 당시 “웅덩개마을”사람들은 대부분 줄집에서 살았는데 우리 앞줄에 소학교에서 음악을 가르치는 림선생님이 계셨다. 림선생님은 그들 둘의 죽음을 두고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둘이 마음껏 살수 없으니까 극락세계나 찾아보자고 천당에 올라간거지.” 마을에서 글깨나 깨쳐본다는 사람들은 림선생님의 말씀에 수긍했고 매일 집안먹거리때문에 부지런히 뛰여다니는 사람들은 미친 년놈들이 마을 풍기를 더럽히고 동네망신만 시켰다고 욕설을 퍼부었다. 굿거리에 놀아났던 할망구들의 말을 들어보면 천당은 매일 노래 부르고 춤을 추며 즐길수 있는 극락세계라고 한다. 인간세상에서는 먹고 입고 살기 위해서 고달프게 일해야 하고 고달프니 병이 생기고 병이 생기니 죽음이 있게 되고 죽음이 있게되니 비통하고 비통하니 일하고싶지 않게 된다. 일하지 말고 잘먹고 잘살자니 남을 얼리고닥치고 남과 싸워야 했고 싸움이 있으니 쫓겨나고 피를 흘리고 또 죽음이 있어야 했다. 그래서 인간세상에서 살자면 번한 날이 없게 된다는것이다. 번한 날이 없는데 언제 노래부르고 춤추며 흥얼거릴 겨를이 있겠는가! 사람은 즐거워야 노래를 부르게 되고 춤을 추게 된다고 한다. 또한 노래 부르고 춤을 추게 되면 자연 심정이 즐거워진다고 한다. 그 도리를 나는 “사회주의 좋다”라는 노래를 배우면서 깨우쳤던것이다. 곁에 “까마치”친구들이 없어 심심할 때면 그 노래를 혼자서 흥얼거려본다. 그러면 인차 신바람이 나서 가만있지를 못한다. 흥이 나면 그 선률에 맞춰 “깔락뜀”을 뛰기도 했다. 확실히 노래와 춤에는 이런 매력이 있었다. 그래서 “풍각쟁”광이와 “춤추개” 강철네 훗어미는 이런 매력에 끌려 매일 함께 노래 부르고 춤추려고 했던것이 그렇게 되지 못하니 “천당”으로 올라갔단 말인가! 그런데 문제는 우리 인간세상에서는 왜 매일 고달프게 일만 하게 되고 “천당”에서처럼 매일 노래부르고 춤추며 즐길수 없느냐는것이다. 미신깨나 믿는다는 할망구들의 말을 들어보면 “천당”에는 농사질 같은 고달픈 일이 없다는것이다. 자연적으로 자라는 “천도복숭아” 한알을 따먹어도 몇백년쯤은 살수 있다니깐. 그러니 “천당”에는 고달픈 일들이 없고 병도 없고 얼리고닥치고 하며 싸울 필요도 없다는것이다. 그윽하고 안온하니 심정이 즐거울수 밖에 없고 즐거우니 매일 노래 부르고 춤출수 밖에 없고 노래 부르고 춤추니 자연 더 즐거워질수 밖에 없다는것이다. 그후 나는 공원소학교에 입학하게 되였다. 학교를 다니면서 나는 많은 노래를 배웠다. 글도 배우고 노래도 배우니 학교가 “천당”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학교를 지각할세라 부지런히 잘 다녔다. 당시 공원소학교 북쪽에는 지금처럼 넓은 공원로가 동으로부터 서쪽으로 쭉 올리 뻗었는데 비포장도로여서 혹간 화물차가 지나가면 누런 모래먼지가 일군 했었다. 그 길 북쪽에는 요란스러운 목재가공소가 있었다. 가공소울안에는 한아름씩 되는 원시적인 통나무가 군데군데 산더미처럼 쌓여있었다. 가공소내에는 그 통나무를 부리우고 쌓고 다시 허물어서 가공소직장안으로 메여나르는 목도군이 이삼십명 있었다. 한여름, 그들은 런닝그바람에 통나무를 날랐는데 고동색근육이 불끈불끈 살아나서 육색이 좋았었다. 통나무를 메여나르는  작업은 대개 이러했다. 두가닥짜리 큰 쇠갈구리를 통나무에 걸고 갈구리웃쪽 구멍에 멜대를 꽂은다음 좌우에서 그 멜대를 어깨에 메고 통일지휘에 따라 함께 일어서고 함께 발을 떼고 나가야 했다. 그들은 둘둘씩 짝을 맞추고 통나무의 크기에 따라 여섯, 여덟, 혹은 열명씩 한팀이 되여 통나무 한대를 메여날랐다. 통나무가 많이 들어올 때에는 가공소울안면적이 제한되여있었으므로 높이 쌓아야 했다. 기중기가 없는 세월이라 그 육중한 통나무를 몽땅 목도군들이 인력으로 한대한대 올리 쌓아야 했다. 목도군들은 두껍고 긴 널판자를 둬어메터가량 사이를 두고 두줄로 꼭대기까지 편다음 그걸 딛고 통나무를 메여올린다. 만약 열 사람이 통나무 한대를 메여올린다면 열사람의 보조가 일치해야 한다. 한 사람이라도 보조를 맞추지 못하면 큰사고를 빚어낼수 있었다. 우리 학교에서는 반급대렬행진할 때면 반장의 “하나, 둘, 셋…” 하는 구령에 따라 보조를 맞추군 했었다. 하지만 목도군아저씨들은 그처럼 위험하고 긴장한 작업을 하면서도 딱딱한 구령소리로 보조를 맞추는것이 아니라 아주 구성지고 고저강약리듬이 완연한 선소리먹임으로 보조를 맞췄던것이다. 열명중 한사람이 선소리를 치면 기타 사람들이 후렴식으로 따라 부르면서 발을 맞춰 목도를 메였던것이다. 그 장면은 그야말로 예술의 종합적인 표현형태였다. 청아하게 울리는 선소리군의 목소리, 그에 따르는 웅글진 목도그루빠의 후렴소리, 한뼘의 오차도 없이 기계처럼 절주있게 움직이는 열사람의 스무개 다리, 해빛에 반사되여 뾰족뾰족 돋아나는 등곬의 땀방울, 지렁이처럼 불끈거리는 이마의 피줄들… 선소리군들이 먹이는 선소리에는 고정된 내용이 없었다. 무엇을 보거나 무엇이 생각나면 즉흥적으로 말을 꾸며 불렀는데 호언장담도 있었고  패설육담도 있었고 고달픈 하소연도 있었다. 지나가는 고운 녀자를 보고 희롱질 치는 선소리도 있었다. 무더운 날, 듣기싫은 선생님의 강의에 잠기가 꺼풋꺼풋 습격해서 흐리마리해질 때면 목재가공소로부터 울려오는 선소리가 자장가인양 교실안을 흔들어놓는다. 그 선소리가 어떤 때에는 경쾌하게 들리고 어떤 때에는 비장하게 들리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날, 목재가공소안에서 큰사고가 일어났다. 산더미처럼 쌓였던 통나무무지가 무너져내리면서 사람이 깔려죽었다는것이다. 목재가공소로 인파가 골물처럼 밀려들었다. 마침 하학시간이라 우리들도 책가방을 둘러메고 사람들속에 끼여들어 이리저리 기웃거렸다. 홀연, 인파가 량쪽으로 쫙 갈라지더니 등뒤에 아기를 업은 어머니가 머리를 풀어헤치고 팔을 허우적거리며 달려왔고 그 뒤로 일여덟살 되여보이는 남자애가 눈물범벅이 되여 아버지를 부르며 따라왔다. 여기저기에서 동정에 어린 한숨소리가 터져나왔다. “어이구, 저 불쌍한것들을 남겨놓구 가다니!” “그래두 죽은게 불쌍합지비.” “고달픈 일을 고달프게 하다가 끝내 천당으로 갔구만.” … … “천당?” 나는 할망구들이 말한 적이 있는 그 극락세계를 떠올렸다. “천당”으로 간다면야 왜 아기업은 저 어머니가 저렇게 울며불며 통곡하고있을가! 나는 나의 일생에서 공연예술과는 인연이 없을것으로 추정했는데 “문화대혁명”이라는 력사가 나에게 기회를 주었다. 중학교에 올라가 학교의 “모택동사상문예선전대”에 들게 되였던것이다. 지금에 와서 나도 일찍 학교문예선전대의 일원으로 무대에서 활약했다고 하면 누구도 곧이 듣지를 않는다. “당신이? 좀 작작 불라구.” “보기와는 다르구만. 어디한번 좀 표현해보지. 확실하게!” 생활가운데서 우리는 늘 이런 현상을 보게 된다. 예술적인것이 아닌 것 같은데 예술품인것이 있고 예술품인것 같은데 예술이 아닌것이 있다. 무엇이나 결핍했던 그 세월에 우리의 공연절목은 대개 우렁찬 혁명가곡에 주먹을 내흔들며 대렬을 바꾸는것이 많았다. 예술절목이라기보다는 률동적인 집단체조표현에 더 가까운것이였다. 그런데도 많은 관중들의 절찬을 받았고 지어 외국손님을 모셔놓고 공연하기도 했었다. 70년도 겨울이라고 기억되는데 우리는 농촌순회공연을 나가게 되였다. 홍군의 2만5천리장정정신을 따라배운다고 도보로 돌아다녔다. 하루에 이삼십리씩 걷고는 저녁이면 절목을 공연했다. 대부분 우사칸마당에서 로천무대를 리용했고 조건이 괜찮은 고장이면 학교구락부같은데서 공연했다. 전기가 없는 고장이면 뜨락또르헤드라이트를 켜놓고 공연했고 뜨락또르도 없는 고장이면 아예 헝겊뭉치에 디젤유를 쳐서 불을 단다음 홰불처럼 사처에다 피워놓고 우등불공연을 했던것이다. 오히려 그것이 더 격정적이고 랑만적인 분위기를 돋궈주기도 했다 .당시 우리 선전대는 모든것이 군사화였고 전투화였다. 농촌의 로천무대였지만 제대로 무대화장을 하고 나섰고 복장이나 공연도구도 제대로 다 갖춘다음에야 나서게 했다. 한번은 한 녀대원이 날씨가 춥다고 까만 장갑을 끼고 무대에 나섰다. 그랬다고 그날 밤, 총화에서 호된 비평을 받았었다. 자산계급아가씨들의 생활작풍을 무대에 옮겨놓았다는것이다. 눈물을 똑똑 떨구며 자기의 잘못을 반성하는 그 녀대원의 모습에 우리는 측은해나는 감을 금치 못해 눈을 감아버렸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농촌인심이란 후했다. 우리가 간다고 찰떡을 치고 두부를 앗고 지어 어떤 곳에서는 돼지를 잡아엎기도 했다.(당시 돼지 한마리를 잡자면 소대, 대대, 공사의 비준을 받아야 했음.) 구경군들의 열정도 대단했다. 어떤 고장에서는 집체로 손잡이뜨락또르를 타고 몇십리밖에서 달려오기도 했었다. 그 열정에 우리도 온하루 “장정”한 피곤을 싹 잊고 만강의 열정으로 공연했던것이다. 도끼봉기슭에 자리잡고있는 석산촌으로 갈 때였다. 당시 석산촌에는 전임 연변조선족자치주 주장이였던 전철수동지가 대대당지부 부서기 겸 민병련장책임을 맡고있었다. 그날 아침부터 눈이 펑펑 쏟아졌었다. 한 시오리쯤 눈길을 헤치고 가고나니 대원들은 저마다 기진맥진해졌다. 눈은 그치지 않았는데 바람이 일면서 눈보라가 치기 시작했다. 금방까지 낯이 빨개지면서 땀흘리며 왔는데 조금 모여앉아 쉬게 되니 인차 낯이 파래지면서 추워져 몸을 오돌오돌 떨게 되였다. 다시 일어나서 걷자니 다리가 천근무게나 되는상 싶었다. 대원들은 저마다 자기의 공연도구들을 지고메고 떠났는데 그 짐이 적지 않았다. 특히 손풍금이나 바레동, 북과 같은 악기들은 체적이 컸을 뿐만 아니라 무게도 꽤나 무거웠다. 비록 서로 엇바꿔가면서 메주고 들어주었지만… 앞에는 높다란 산마루가 아츨하게 가로 놓여있었다. 그 령을 넘어야 석산촌에 이를수 있었다. 대지의 모든것이 눈속에 파묻혀 주위는 하얀 면사포에  감겼고 눈보라에 그 면사포가 파르르 떨고있었다. 눈보라에 길도 알리지 않았다. 올리막에 들어서면서 숨이 점점 더 가빠졌다. 어떤 대원들은 벌벌 기기도 했다. 산중턱까지도 올라가지 못했는데 어떤 녀대원들은 아예 퍼더버리고 앉아 엉!엉! 울기 시작했다. 난감한 일이였다. 뒤이여 대여섯명 되는 녀대원들이 련이어 덩달아 퍼더버리고 앉아 울어댔다. 아직은 열대여섯살밖에 안먹은 나긋나긋한 소녀들이였으니깐. 그 녀대원들앞에 남대원들이 모여들었다. 한명씩 업고 올라갈수만 있다면… 할수 없는 처지에 빠졌으니 부득불 돌아갈수 밖에 없다는 의견이 나왔다. 그 의견에 동의한다는 뜻인지 녀대원들의 울음소리가 더 높아졌다. 헌데 돌아간다는것도 막연한 일이였다. 절반도 더 걸어왔는데 돌아가자면 또 반나절이나 걸리게 된다. 지도교원과 대장이 용단을 내리지 못하고 애타게 서성거렸다. 어떤 대원들은 배고프다고 눈을 움켜쥐고 서걱서걱 씹어 먹기도 했다. 눈보라가 휙 몰아오자 모두들 몸을 오싹 떨었다. 더는 지체할수가 없었다. 돌아가면 가고 돌아 안가면 계속 올라가야 했다. 그런데 이 퍼더버리고 앉아 울고있는 녀대원들은 어떻게 하고?… 그때 뒤켠에 선 누군가 굵직하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장정”이란 노래를 흥얼거렸다. “홍군은 원정의 곤난을 두려워하지 않네 만수천산을 한가로이 넘어가네……” (红军不怕远征难,万水千山只等闲…) 인차 두세 사람이 따라 불렀다. 가락이 리듬에 맞춰지면서 모든 남대원들이 따라 불렀다. 노래소리가 점차 격앙되면서 우리의 가슴이 끓어번지기 시작하였다. 대장이 앞으로 썩 나서며 두팔을 힘차게 휘둘며 지휘했다. 노래소리는 눈보라를 타고 산골짜기에로 메아리쳐갔다. 가슴이 부풀어오르며 기운이 막 솟구쳤다. 대장이 먼저 눈우에 퍼더버리고 앉아 울고있는 가장 나어린 녀대원한테로 달려가서 짐을 몽땅 벗겨 자기가 짊어지고 한쪽 팔을 그 녀대원의 팔짱에 끼워넣고 부축해서 일쿼세웠다. 우리들도 저마다 달려가서 눈우에 퍼더버리고 앉은 녀대원들의 짐을 빼앗아메고 그녀들을 부축해서 일쿼세웠다. 노래소리는 멎지 않았다. 더욱 우렁차게 울려퍼졌다. 우리는 다시 산마루를 향해 올리 톱기 시작했다. 이어 노래는 모주석의 어록에 곡을 단 “결심을 내리고 희생을 두려워 하지 말며 만난을 물리치자”로 바뀌였다.우리는 사기가 충전해져 숨가쁜줄도 몰랐다. 설산을 넘는 홍군전사가 되였다는 느낌이 들었다.누가 미끌어 넘어지면 서로 달려가 부축했고 누가 무얼 떨구면 그걸 주어가지고 자기가 걸머메군 했다. 어록노래가 끝날무렵에 녀자들의 합창이 꼬리를 물고 터졌다. “앞으로! 앞으로! 전진! 전진! 전사의 책임 중하고 부녀의 원한 깊다네… 우리 랑자군들도 총을 메고…” 랑랑한 그 노래소리가 우리 남대원들을 더욱 흥분케 했다. 랑자군을 거느린 “당대표”가 된 기분이였다. 그제날 적진을 무찌르는 홍군전사가 영웅이였다면 오늘날에는 내가 영웅이 아닐소냐! 마치도 눈보라속에서 눈길을 헤치며 령을 톺아오르느라고 곤난을 겪고있는것이 아니라 천당에서 꽃보라속에서 행복에 겨워 흥분에 들떠 춤추고 노래부르고있는것만 같았다. 전반 중학교시절을 돌이켜보아도 그 시각만큼 행복하고 즐거웠던 시각은 없었던것 같다. 나중에 우리는 남자가 녀자의 손을, 녀자가 남자의 손을, 서로서로 손에 손잡고 노래를 부르며 령마루로 톺아올랐다. 어디서 그런 힘이 솟구쳤는지? 지금에 와서 그 기억을 더듬어보아도 역시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내리막길에서는 서로서로 팔짱을 끼고 미끄럼질 치며 궁둥방아를 찧으며 즐거운 웃음소리를 반공중에 흩날리며 내려왔다. 얼마나 즐겁고 유쾌했던지! 꿈만 같은 시각이였다. 천당에 가서도 이처럼 생생한 쾌락을 맛볼수 있을가! 석산촌우사칸 회의실구들에 저마다 걸레처럼 축 늘어졌을 때에야 비로소 배가 못견디게 고파났고 얼었던 발이 녹아나면서 아려나는 고통을 느꼈다. 그때에야 인간세상이 천당이 아님이 분명해졌다. 천당에는 극락세계만 있다지만 인간세상에는 천당같은 극락세계도 있고 지옥같은 고통세계도 있는것이다. 고통을 겪어봐야 락을 진정 알게 된다. 극락이 있으면 극통이 있게 되고 극통이 있으면 극락이 있게 되는 법이다. 예술의 매력이란 극락과 극통을 전형적으로 가공하고 반영하는데 있다. 오늘날 나는 우리의 사회가 나날이 발전하고있을 때, 우리의 생활도 점차 예술화되였으면 얼마나 좋을가고 천진한 생각에 잠겨보기도 한다. 그러면 천당에 갈 필요가 없게 된다. 예술화된 우리의 생활자체가 천당이니깐!  
14    미래의 부자는 그 누구? 댓글:  조회:790  추천:14  2009-05-08
우리 사회가 시장경제에 들어서면서 우리는 돈많은 사람을 부자라고 선망했다. 부자가 되지 못한 자신을 원망했고 부자가 될 래일에다 희망을 걸고 아득바득 애를 써왔다. 허지만 대부분 사람들이 나와 같이 오늘 이 시각까지도 부자가 되지 못한 궁지에 빠져있다. 남은 진작 부자가 되여 고급주택에 고급자가용에 고급식당으로 드나들고있는데… 동지날 팥죽 끓이듯 속이 부글부글 끓어번진다. 도대체 얼마만큼 벌어야 부자가 되는 판국인가? 20여년전에는 만원만 벌면 한뉘 놀고먹는 부자가 될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성질이 급한 사람들은 하루빨리 부자가 되겠다고 어렵게 가진 공직에 아깝께 쌓은 공령을 다 버리고 “바다(下海)”에 뛰여들었다. 한 십여년전에는 십여만원만 벌면 부자가 된다고 하여 포근했던 친인들의 품을 떠나 비행기를 잡아타고 외국으로 날아갔다. 한국으로, 일본으로, 미국으로, 로씨야로… 지금은 한 백만원쯤 있어야 부자라고 할가? 세상에는 올리막 길이 얼마 있으면 내리막 길도 얼마 있는 법이다. 슬슬 잘 풀려나가던 세계란 대목이 요즘에 와서는 금융위기라는 폭풍설을 맞아 잎이 누렇게 시들고있다. 단꺼번에 부자가 되여보려던 황금몽을 깨고 일어날수 밖에 없다. 한국에 나가 한달에 인민페로 칠팔천원씩은 벌수 있었는데 지금은 사오천으로 뚝 떨어졌다. 세계적인 화페라고 늘 묵직했던 딸라도 그 가치가 뚝 떨어졌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집에 생활비마저 못 보내고있는 상황이다. 이번 금융위기가 이처럼 심각해지리라고는 세계적으로 그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었다. 미국의 대통령 부시나 오바마도, 한국의 대통령 리명박도. 그리고 세계의 저명한 경제학자들도… 일찍 1997년도에 한국, 태국 등 동남아지구를 휩쓴 IMF외환위기가 세계금융계에 빨간 신호를 보냈던것이다. 하지만 이번처럼 심각해질줄은 상상밖이였다. 자본주의사회가 아직 독점계단에 들어서기전이였던 19세기에 맑스가 자본주의사회의 생존과 발전을 이어주는 세포인 상품을 분석하고 상품경제발전법칙에 따르는 경제공황이 주기적으로 일어난다고 지적하였다. 그후 과연 세계적인 자본주의경제위기가 몇번 일어났었다. 상가에서 상품을 불태워버리고 농장에서 우유를 강물에 쏟아버리는 현상도 나타났었다. 허지만 이번 금융위기는 상품생산과잉으로 생기는 위기가 아니라 은행가와 보험사들에서 주가와 펀드, 각종 금융상품들을 내놓고 또한 부동산업계에서는 고층건물을 내놓고 “콩닦기”를 하듯이 한번 볶아내면 될것을 두번, 세번… 볶으면서 “거품”을 만들어내고 “풍선”에 바람만 불어넣다가 그것이 푹 터지고 가라앉는 위기였다. 그래서 어떤 회사의 상품은 시장에서 자취를 감춘지 오란데 그 회사의 주가는 주식시장에서 계속 오르락내리락 하는가 하면 어떤 곳의 집값은 밤을 자고나면 평방당 몇백원, 몇천원씩 껑충껑충 뛰여오르는 괴의쩍은 현상들이 나타났던것이다. 이런 위기는 그 어느 나라의 대통령이나 그 어느 나라의 재정대신이 예측해내고 막아주고 조절해줄수 있는것이 아니였다. 아직까지는 그 옛날 맑스가 상품을 가지고 전반 자본주의경제에 대한 리론체계를 구축해내듯이 화페를 연구하여 전반 자본주의 금융시장에 대한 리론체계를 내놓은 사람이 없다. 오히려 경제에 대해 좀 안다고 하는 사람들이 이런 위기앞에서 더 맹동적으로 놀고있다. 간혹 아는것이 해가 되고 모르는것이 복이 될 때도 있다. 세상살이를 하면서 두루 주변사람들의 변화를 여겨 보느라면 무엇이나 다 안다는 사람이 부자가 되는 경우가 아주 적고 오히려 하나만 알고 둘을 모르는 사람이 부자가 되는 경우가 있게 된다. 이런 현상을 그 어떤 공식적인 도리나 법칙으로 해석하기에는 곤난하다. 부자가 되는 도리를 터득하고 부자가 되는 법칙을 장악한다음 부자가 된 부자가 이 세상에 별로 없다. 지금 어떻게 하면 돈을 벌고 어떻게 하면 억만부자가 되겠는가 하는 비결을 종합해놓은 책들도 많고 인터넷에 들어가봐도 얼마든지 찾아볼수 있다. 유태인들이 어떻게 돈을 벌었는가, 일본인들이 어떻게 세계시장을 점했는가, 한국인이 어떻게 기업을 꾸렸는가 등 답안은 책속에 다 있다. 부자가 된 경험을 열가지로 종합해놓은것이 있는가 하면 스무가지로 종합해놓은것도 있고 백가지로 종합해놓은것도 있다. 헌데 그것은 몇십년전에 외국사람들이 부동한 시기에 부동한 사회제도하에서 쌓은 경험들이였다. 21세기에 연변사람들, 특히 우리 조선족이 부자가 된 경험을 종합해놓은 책이 나왔는가? 아직 나오지 못했다. 그걸 우리가 써내야 하지 않겠는가! 물론, 외국사람들이나 우리 선배들의 경험을 학습하고 참고하는것은 제창할만한 일이다. 허지만 그런 경험을 다 학습하고 다 터득한 다음에 부자가 되려고 해서는 안된다. 또 그럴수도 없다. 돈을 벌겠다고 밤낮이 따로 없이 돌아치고있는 사람들이 언제 퍼더버리고 앉아 그걸 학습할 사이가 있겠는가! 복잡한 경제적법칙이나 외국사람들의 치부경험 같은것은 자기가 알만큼 알면 되는것이다. 그걸 다 알려고 하자면 세월이 다 흘러간다. 어떤것은 몰라도 괜찮다. 모르는것이 오히려 부자가 되는데는 더 유리할수도 있다. 이런 일이 있었다. 학교때 산수시간이 되면 늘 응용문제를 풀지 못해 선생님으로부터 “돌대가리—석두”란 별명을 선사받은 아이가 있었다. 몇십년후에 그 아이가 대부자로 되였다. “그 석두가? ” 그 아이의 어마어마한 씀씀이에 동창생들은 내놓고 말은 못했지만 속으로 뱅뱅 돌아친것은 “그 돌대가리로 어떻게 돈을 벌었을가?” 하는 궁금증이였다. 그 아이가 그동안 특별히 총명해졌을가? 물론, 세월이 사람들의 머리를 총명하게 만든다. 세월은 공평한것이다. 원래 그 아이보다 머리가 더 좋은 아이들도 더 총명하게 만들어놓은것이다. 문제는 그 아이가 총명해져서 모든걸 다 알고 귀신같이 돈을 번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지금도 돈계산에 들어가서는 늘 틀려서 손가락을 꼽았다 폈다 한다. 총명한 사람만 부자가 되는것이 아니다. 총명한 사람도 될수 있고 총명하지 못한 사람도 될수 있고 학문이 있는 사람도 될수 있고 학문이 없는 사람도 될수 있고 외국인도 될수 있고 중국인도 될수 있고 한족도 될수 있고 조선족도 될수 있는것이다. 물론, 모든걸 다 알고 부자가 되면 좋겠지만 웬간히 몰라도 부자가 될수 있다. 일반 사람들을 놓고볼 때 모든걸 다 알 필요가 없다. 다만 기본적인것만 지켜도 부자가 될수 있는것이다. 그런데 대부분 사람들이 그 기본적인것을 제대로 지켜내지 못하고있기때문에 부자가 되지 못하고있다. 그렇다면 그 기본적인것이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신비한것도 아니고 그 무슨 비결도 아니다. 지구란 땅떵어리에 발을 붙이고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지켜낼수 있는것이다. 들어보면 기본적인것이 아닌것 같은 기본이다. 우선 부자로 될 사람은 부자가 되겠다는 생각부터 버리고 한두가지 일에 흥취를 가져야 한다. 부자가 되겠다는 생각을 품으면 마음이 급해진다. “왜 남처럼 돈이 모아지질 않을가?” 그래서 돈을 따라다니게 된다. 묘하게도 돈이 부자를 만들어내지만 돈만 따라다니는 사람이 부자가 되는 비률은 아주 낮다. 개중에는 혹간 번개같이 벼락부자가 되였다가 벼랑에서 떨어지는 “깜짝쇼부자”도 있다. 그런 부자는 진정한 부자라고 할수 없다. 한 20여년전, 연길시 하남가 장백로와 천지로의 동쪽머리로부터 서쪽으로 쭉 올라가면서 길량켠을 돌아보면 대부분이 조선족들이 경영하는 상가였다. 헌데, 오늘날 다시 장백로와 천지로의 동쪽머리로부터 서쪽으로 쭉 올라가면서 훑어보시라. 고층건물이 즐비하게 늘어선 길량켠에 조선족이 경영하는 상가들이 도대체 몇집이나 되는가를! 개혁개방초기에는 확실히 조선족들이 앞장서 돈을 벌었다. 그런데 기초를 닦아놓고는 더 큰 “집”을 짓겠다고 대부분 외국으로 빠졌다. 외국에 있는 돈을 따라간것이다. 지금 몇년간 한국나들이에서 괜찮게 번 사람들의 재산이 대개 얼마나 될가? 뭐, 세밀한 조사를 해보기는 곤난한 일이지만 대략 짐작해보면 아빠트 몇채쯤은 가지고 세돈이나 챙기고있는걸로 어림잡게 된다. 헌데 장백로나 천지로에서 상가를 경영하고있는 주인들의 그 상가집 한채가 지금 시세로 얼마나 갈가? 보통 몇백만원, 몇천만원이다. 문제를 이처럼 표상적으로 비교하는것은 아니겠지만 어느 정도 측면적인 해석은 될것 같다. 여러개 측면으로 이 문제를 본질적으로 해석을 가할수는 있지만 지면제한으로 구구히 다 설명할수는 없다. 그리고 여러 가지 재간을 가지고있는 사람이 부자가 되는 경우가 적다. 어느 한 항업에서 그 항업의 달인이 되여보시라. 그러면 부자가 안되겠다고 발버둥질 쳐도 소용없이 저절로 부자가 된다. 돼지는 울안에서 먹고자는 재간밖에 없으면서도 피동피동 살찌지만 새는 만천하를 날아다녀도 살찌는 법이 없다. 두번째 기본은 건강을 지키고 가정을 지키는것이다. 건강이 중요한것은 누구나 다 알고있지만 일단 돈벌이에 들어서면 건강을 따지지 않는 사람이 많다. 굶어죽지 않는 이상 무슨 돈벌이를 하려면 꼭 자기의 건강에 유리한가 불리한가부터 따져 선택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체력로동에서는 고된 로동강도거나 악렬한 작업조건을 따지지만 뇌력로동에서 속을 썩이는 일인가, 늘 스트레스를 받는 일인가, 감정충격으로 풀어나가야 할 일인가, 죄의식을 가지고 해야 할 일인가에 대해서는 따지지 않는 페단이 많다. 기실 이런 일이 건강에 더 해롭다. “영웅이 미인관을 넘기 바쁘다”는 말이 있다. 경제시대에는 돈을 버는 부자가 영웅인것이다. 돈이 생기면 남자나 녀자나 좀 풍류적으로 놀아보자는 욕망이 꿈틀거리게 된다. “사람의 일생이 얼마라고 돈이 있을 때 락을 누려보자. 죽으면 그만인데!” 역시 틀린 말은 아니다. 인륜지락에는 크게 세가지 락이 있다. 먹는 락, 노는 락, 혈연에 따르는 천륜지락인데 아마도 먹고노는 락이 제일 클것이다. 그 가운데서도 남자와 녀자가 배가 맞아 돌아가는 락이 제일 즐거울것이 아니겠는가! 즐거움이 과하면 죄를 낳는다. 그래서 남자가 녀자에 망하고 녀자가 남자에 녹아나는 일이 비일비재로 나타나는것이다. 얼마나 많은 부자들이 그 락에 빠져 헤여나오질 못했던가! 때문에 가정지킴에 있어서 안해나 남편을 지키는것이 가장 중요하고 그다음에는 자식을 지켜주는 일이다. 자식농사도 잘하면 풍년을 맞아올것이요, 잘못하면 흉년을 맞아오게 된다. 자식때문에 망한 부자가 얼마라고! 때문에 조강지처를 지켜내지 못하고 자식을 지켜내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아예 부자가 되려는 꿈도 꾸지 말아야 한다. 세번째 기본은 원가의식을 키우고 실수를 피해야 한다. 돈벌이에 들어가선 누구나 다 원가와 리윤을 따져보게 된다. 이 점에 대해서는 구구히 설명할 필요도 없다. 그런데 생활, 교육, 건강, 시간, 인간관계에 들어가서 원가를 따지지 않는 페단이 많다. 일반적으로 작은 돈을 들여서 큰 효과를 보는것이 정확한 원가의식이라고 하지만 교육, 건강같은 방면에는 큰돈을 들여 작을 효과를 보더라도 장원한 관점에서 득실을 따져야 한다. 그리고 크고작은 일에서 될수록 실수를 피해야 한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이다”라는 말이 있는데 도리에 맞고 아주 철리성이 있는 말이다. 특히 기업을 꾸리는 기업가가 간난곡절을 겪어보지 않고 어찌 기업을 꾸려낼수 있었겠는가! 발명가가 실패를 보지 않고 성공할수 있었겠는가? 없다! 하지만 기업가나 발명가라고 해서 다 부자인것은 아니다. 부자가 되려면 될수록 실수를 피해야 한다. 글쎄 “잰내비도 나무에서 떨어질 때가 있다”는데 그 기나긴 부자로 되는 길에서 어찌 실패가 없겠냐만 명기해야 할것은 부자가 되는 길은 온당한 길이라는것이다. 지금 “모험하지 않고서는 큰돈을 벌수 없다”는 말이 명언처럼 떠돌고있다. 그렇다. 모험해야 큰돈을 벌수 있는것이다. 허지만 큰돈을 벌었다해서 다 부자가 되는것은 아니다. 모험해서 큰돈을 번 사람이 또 모험해서 크게 망할 때가 있게 된다. 개혁개방초기에 연길에도 모험하기를 즐기는 모험가들이 때를 만났다고 땅! 땅! 큰소리를 치며 큰돈을 번 사람들이 적지 않았었다. 헌데 그 가운데서 지금 진정 부자로 된 사람이 몇이나 되는가! 이밖에도 부자로 되는 기본이 따로 있을수도 있다. 운명에 따르는것도 있을수 있고 우연한 기회에 따르는것도 있을수 있다. 하지만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상술한 세가지 기본만 에누리없이 지켜나가가만 한다면 꼭 부자가 될수 있다. 언제되는가 하는 시간적문제는 각기 다르겠지만! 만약 이 글을 보고계시는 당신이 오늘부터 이 세가지 기본을 지켜내겠다고 결심을 내리고 꾸준히 드팀없이 노력해나가기만 하신다면 미래의 부자는 다름 아닌 당신이 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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