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립) 우리민족 해방투쟁의 길을 모색하던 시기이다. 청나라 말기이후에 북양군벌통치의 어두운 현실에서 거세찬 불길이 타오르던 그런 시기이다. 신해혁명이며 5.4운동과 같은 대격변을 거치면서 피로써 민족해방운동의 길을 탐색하던 시기이다. 이런 형편에서 우리 민족해방의 길은 어디에 있느냐? 어떻게 걸어야 하느냐? 우리민족의 선각자, 지성인들은 중국의 국제도시인 상해에서, 중국의 정치도시인 북경에서, 중국의 당시 혁명의 중심지인 광주에서 민족해방의 길을 탐색하게 됐다.
아시아 동방의 국제도시 상해, 지금도 황포강 기슭의 외탄(外滩)에는 수많은 관광객들이 모여들고 있다. 취재팀이 상해에 도착한 것은 2003년 9월 22일이였다. 상해의 가장 유명한 상업거리 남경로에서 쇼핑을 하고 난 관광객들은 황포강반에서 다리 쉼도 하고 시원한 강바람을 쏘이기도 한다. 서양식 옛 건물이 즐비하게 늘어선 앞으로 누런 황포강 물결이 출렁이고 수시로 커다란 화물선이 강에서 오고간다.
강가 유보도에 서서 출렁이는 강물을 하염없이 바라보노라니 사색은 어느덧 백년 전으로 달려간다.
아시아 대지에 검은 구름이 뒤덮인 1911년 봄, 중국의 국제도시 상해에 굴강한 조선 사나이 한 명이 도착한다. 한쪽 눈은 날카롭게 늘 흘겨보고 있었고 월리암식 수염이 강직하게 치켜 있는 30대 초반의 사나이였다. 그는 상해에 도착하자 진보적인 신문인 <민생보(民生报)>를 통해 송교인(宋教仁), 진기미(陈其美), 황흥(黄兴), 서천복(徐天复) 등 동맹회의 중견인물들과 사귀게 되었으며 이름을 신정(申柽)으로 고쳤다.
예관 신정이 바로 조선의 저명한 혁명가 신규식이다. 1879년 1월 13일, 조선 충청북도 문의군 동면 계산리에서 태여난 신규식의 자는 공집(公执)이고 호는 예관(睨观)이다. 어려서부터 문무가 겸비한 그는 륙군무관학교를 졸업한후 1902년 륙군보병 참위로 임명된다. 그러나 보국의 뜻을 지닌 신정의 뜻과는 달리 당시 조선의 국운은 날로 쇄락 되어가고 있었다. 조선 의병운동이 일어나자 군대와 청년들을 규합해 일제와 싸우려던 신정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절망에 빠진다. 죽음으로 보국할 생각으로 독약을 복용한 신정은 가족들의 구원으로 살아남았지만 눈 신경을 다쳐 오른쪽 눈이 바르게 보지 못하게 되었다.
한일합방으로 모든 국권이 상실되자 1911년 신정은 망국의 울분과 구국의 길을 찾아 중국으로 망명한다.
중국 신해혁명에 참가한 최초의 조선족 투사이며 박달학원(博达学院)을 세우고 동제사(同济社)를 결성함으로써 중국과 조선 혁명가들의 협력을 이끌어내는데 거대한 기여를 한 신정은, 조선의 독립과 해방을 위해 독특한 길을 개척한 선구자이기도 하다.
(권립) 상해로 온 신정은 손중산선생의 동맹회에 참가했고 무창봉기에 참가했다. 그는 손중산 대통령을 축하하노라 등 시를 써서 손중산 선생을 노래하고 손중산선생이 창도한 공화제도를 노래했다.신정은 남사에 참가하고 동제사를 세워서 우리 백의동포의 대단결을 모색해 왔다.
1912년 신정은 동제사를 발기, 결성하였다. 동제사란 중국 성구 동주공제(同舟共济)에서 따온 이름으로서 생사를 함께 한다는 뜻이다. 동제사는 중국혁명에 의지한 조선독립 목표를 세운 비밀조직이였다. 동제사는 북평, 천진, 만주, 연해주, 구미, 일본 등지에 지사를 두었고 본부는 상해에 설립했다. 최초 회원은 3백여명에 달하였는데 본부 리사장은 신정, 총재는 박은식이 담당하였다. 신정을 위수로 한 동제사에는 박은식(朴殷植), 김규식(金奎植), 신채호(申采浩), 홍명희(洪命熹), 조소앙(赵素昂), 문일평(文一平), 신건식(申建植), 조성환(曹成焕)을 비롯한 쟁쟁한 거물급 조선지사들이 활약 하였다.
신정은 동제사의 영향력을 넓히고 더욱 많은 지원을 받기 위해 동제사의 협력단체 신아동제사(新亚同济社)를 조직하였다. 송교인, 호한민(胡汉民), 료중개(廖仲凯), 추로(邹鲁), 대계도(戴季陶), 진과부(陈果夫) 등 중국 거물급 인물들이 신아동제사에 가입하게 됨으로써 그 영향력은 크게 확대되였다.
한편 신정은 1913년 12월 7일 상해 프랑스 조계지 명덕리에 박달학원을 개설하였다. 우수한 민족독립 인재를 양성하기 위한 이 학교에서는 박은식, 홍명희, 조소앙, 조성환 등이 교학을 담당하였다. 학원은 3기에 걸쳐 조선인 졸업생 백여명을 양성하였다. 신정은 중국내 진보인사들과의 친분관계를 통해 많은 조선청년들을 보정군관학교, 천진군수학교, 남경해군학교, 호북강무당, 운남륙군강무당에 보내 무장투쟁을 위한 힘을 키웠다. 그 대표적 인물은 리범석 장군이다. 그는 신정과 당계요(唐继尧)의 주선으로 운남륙군강무당에서 군사를 배우게 되었던 것이다.
20세기 20년대 더욱 많은 조선인 애국청년들이 중국에 들어오면서 광주 중산대학이나 황포군관학교에 입교할 수 있은 것도 신정과 동제사의 역할을 떠날 수 없었던 것이다.
조선에서 3.1운동이 일어나자 신정은 려운형, 선우혁, 한진교, 김철, 현순 등과 토의하여 1919년 3월 하순 프랑스 조계지 보창로에 조선독립 림시사무소를 설치하고 본격적인 정부조직사업에 착수하였다. 4월 10일 제1회 림시의정원 회의가 개최되였고 13일 대한민국 림시정부가 수립되였다. 신정은 11월 상해림시정부 법무총장에 취임하게 된다.
그러나 상해림시정부는 처음부터 혼란을 겪게 되었다. 여러 가지 원인으로 림시정부 대통령도 없고 국무총리도 떠나 버린 상황이 빚어졌다. 1921년 5월 신정은 국무총리 대리에 취임하고 또 외무총장도 겸임하게 되었다. 그는 손중산 대통령이 이끄는 중국 호법정부와 적극 협조하여 외교적인 성과를 이룩하였다. 이해 11월 3일 신정은 손중산 대통령의 접견을 받아 외교관계를 정식 설립하게 된다.
손중산과 호법정부는 상해림시정부를 정식 승인하였고 여러 군사학교에 조선청년들을 수용, 양성할 것을 명령하였으며 차후 북벌전쟁이 완성되면 조선민족 국권회복운동을 전력으로 원조해 줄 것을 약조하였다. 이는 림시정부의 외교적 대 성과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외교적인 성과와 전 민족의 기대에도 불구하고 상해 림시정부는 로선과 경영면의 내분으로 고뇌에 시달리고있었다.1922년 신정은 국무총리를 사퇴하고 파국으로 치닫는 림시정부와 조선독립운동전선의 분렬상태에 비관한 나머지 마침내 심장병과 신경쇠약으로 병석에 눕고 말았다. 이때 광동군벌 진형명이 반란하여 손중산의 혁명 역시 큰 좌절을 겪게 되었다. 손중산은 광동을 떠나지 않을수 없었다.
(권립) 손중산은 그를 로동지라 부르며 높은 평가를 했다. 물론 신정은 손중산이 가리킨 길에서 우리민족 해방투쟁의 길을 모색한 분이다. 때문에 손중산 선생과 더불어 곡절을 겪지 않으면 안됐다. 1922년 광동군벌 진형명이 영국제국주의와 결탁해 반혁명 폭란을 일으켰다. 손중산은 광주를 떠나 해외로 망명했다.
이를 안타깝게 생각한 신정은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중국의 불행이 어찌도 이다지도 심하단 말인가? 중산선생이 고심히 경영해온 혁명사업이 이제 전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구나. 이는 중국의 불행일뿐만 아니라 한국의 큰 불행이다.(中国之不幸, 抑如何是之甚? 中山先生苦心经营之事业,全成泡影.此不仅是中国之大不幸, 亦韩国之大不幸.)”
중국 신해혁명과 같은 자산계급 민주주의혁명으로 일제를 몰아내고 국권을 회복하려던 신정은 끝내 지대한 절망속에 빠지고 말았다. 신정은 모든 치료를 거부하고 단식하던 중 이해 8월 5일 숨을 거두었다. 끝까지 민족과 운명을 걱정하던 예관 신정은 지대한 절망을 안고 세상을 하직하였던 것이다.
공화국 새날이 밝아오고 [共和新日月]
낡은 세상 새로이 바뀌노니 [重辟旧乾坤]
사해의 만민이 기뻐하며 [四海群生乐]
손중산 우러러 높이 모시네 [中山万世尊]
<손중산 대통령을 축하하여>라는 제목으로 된 이 한시는 신정이 신해혁명의 승리를 이끌어낸 중국의 혁명가 손중산을 축하해 지은 시이다.
반일투사이며 민주주의혁명의 선행자이며 저명한 시인, 작가, 교육가인 신정선생은 44세를 일기로 상해 애인리 57번지에 있는 그의 거소에서 세상을 떴다. 그의 령구는 상해 만국공동묘지에 모셨다.
만국공동묘지는 지금의 송경령 공묘(公墓)로 이름을 바뀌였다. 20세기 상해에서 희생된 수많은 조선인 투사들이 이곳에 모셔졌던 것이다. 취재팀이 이곳을 찾았을 때는 저녁녘이였다. 푸른 잔디밭에 정방형 흰 비석들이 촘촘히 누워있었다. 황혼빛이 비쳐드는 묘지에서 수많은 렬사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찾아보고 확인하기란 쉽지 않았다. 고이 잠든 투사들의 넋을 욕보일까 두려워 일행은 두 손으로 조심조심 풀과 락엽을 쓸어내며 더듬어 갔다. 신규식, 박은식, 로백린, 김인전, 안태국, 김립...너무나도 쟁쟁한 이름들이였다. 조국을 찾겠노라 드넓은 중국대지를 누비며 싸워왔던 투사들, 망국의 한을 지니고 광복을 보지 못한 채 그들은 이곳에 조용히 잠들었다. 석양이 만국공동묘지를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투사들의 혼이 깃든 비석들도 황혼의 금빛에 서서히 물들어가고 있었다.사진설명: 1 신정(신규식) 2 상해 만국공동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