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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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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제64회 하북성 섭현의 남장 댓글:  조회:3647  추천:1  2014-02-10
무연한 황토고원(黃土高原)과 화북평원을 동서로 량분하면서 남북으로 길게 뻗은 태항산맥(太行山脈)은 항일전쟁시기 적후 유격투쟁이 가장 치렬하였던곳이다. 태항산의 옛 명칭은 대형산(大形山)인데 산세가 웅장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태항산은 지세가 험악하고 요새가 많아 유격전을 펼치기가 적성인 곳이다. 일본침략자들을 소멸하기 위하여 중국공산당이 령도하는 팔로군은 태항산을 중심으로 적후에 깊이 들어가 싸웠다. 조선혁명자들은 무한에서 조선의용대를 창립한 다음 반일최전선에 나가 싸우기 위해 단연히 북상하여 태항산구에 진입하였다. 그들은 팔로군과 운명을 함께 하면서 항일전쟁 최전선에서 피 흘리며 적과 싸웠다. 하늘 높이 치솟은 태항산의 장엄한 뭇 봉과 가없이 펼쳐진 황토고원의 두터운 황토, 편벽하고 검소한 마을마다 조선의용군 전사들의 씩씩한 모습이 비껴있고 그들이 남긴 자욱이 력력히 남아있다.   유유히 흐르는 청장하 하북성 섭현의 명소 왜황궁 녀와 광장 옛건물을 수선해 축조한 관광명소 왜황궁 한단에서 간단한 점심식사를 마치고 우리는 하북성 섭현(涉縣)으로 향했다. 한단시 거리에서 택시를 타고 섭현까지 갈수 없는가고 문의하였다. 녀기사가 갈수있다고 하자 가격을 흥정하고 섭현으로 떠났다. 한단시를 벗어날 때 녀기사는 집에 들려 남편을 불러냈다. 자기는 길을 잘 모르니 남편이 모셔다 준다는것이다. 차는 한단시를 벗어나 309국도를 따라 서부로 달렸다. 잘 닦아진 고속도로에는 차들이 많지 않았지만 석탄을 가득 싣고 달리는 트럭을 많이 볼수있었다. 석탄이 많이 나는 산서성으로부터 석탄을 날라 화북평원을 통해 멀리 수송해 가는것이였다. 석탄트럭이 많이 다니기때문에 길바닥에는 석탄먼지가 많았다. 차가 지날 때마다 수면에 파문을 내듯이 검은 석탄먼지가 길바닥에서 맴돌았다. 산서성과 린접한 섭현은 한단과 20, 30킬로메터 떨어져있다. 섭현은 1,500여평방킬로메터 면적에 38만 인구를 가지고있다. 이곳은 풍부한 지하자원과 호두를 비롯한 농산물이 유명한 고장일뿐만아니라 관광명소이기도 하다. 섭현 현성에서 12킬로메터 떨어진곳에 왜황궁(媧皇宮)이라는 관광명소가 있다. 왜황궁은 봉황산(鳳凰山) 산허리에 축조된 1450년전의 건물이다. 4, 5층 정교한 루각이 산 벼랑에 축조되여 반공중에 걸린 것이 그야말로 귀부신공(鬼斧神工)의 걸작이다. 왜황궁은 돌로 구멍난 하늘을 막고 흙으로 인간을 빚어냈다는 중국의 유명한 전설의 주인공인 녀와씨(女媧氏)를 기념해 만들었는데 북제(北齊) 시기부터 축조되였다. 지금 이 건물은 하북성 10대 고대건물의 하나로 유명하다. 섭현의 선전부와 이미 련락이 되였기때문에 차는 곧바로 섭현 현정부에 도착하였다. 선전부의 언론담당인 리숙영(李淑英)과장이 우리를 기다리고있었다. 리숙영과장은 30대 젊은 녀성이였는데 매우 활달하고 친절했다. 그녀는 우리를 현정부 초대소(招待所)로 안내해 주었다. 비교적 괜찮은 호텔이였다. 섭현의 선전부 부부장 장화평(張華平)과 문학예술가련합회 부주석 강옹군(江擁軍)이 호텔에서 기다리고있었다. 사전에 우리의 답사 목적을 알려주었기때문에 이들은 원 섭현 당사판공실 주임이였던 리사화(李士華)로인을 모셔왔다. 로인은 섭현에서 학식이 가장 뛰여나다하여 《섭현공부자(涉縣孔夫子)》라는 아호를 가진 분이다. 섭현의 공자님이라는 뜻이다. 서로 인사를 나누고 호텔방에 모여 앉아 인터뷰를 시작하였다. 리사화로인은 71세 고령이였지만 몸은 퍽 건장하였고 또 매우 건강해 보였다. 그는 섭현의 중원촌(中原村), 남장(南莊), 석문촌(石門村) 등지에 조선의용군의 사적지와 유적이 많다고 소개하면서 섭현은 태항산에서 활동하던 조선의용군의 사적지와 유적지가 가장 많이 집중된 곳이라고 하였다. 이미 저녁이 가까운 시간이였으므로 다른 곳을 답사하지 못하고 우리는 호텔에서 리사화 로인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렸다.   섭현의 "공자" 리사화 로인(좌)와 중앙당학교 최룡수 교수(우)  리사회로인의 이야기[1]: 1943년에 태항산 항일근거지 인민들의 생활은 매우 어려웠다. 적들의 철벽같은 포위로 물품이 아주 결핍하였고 쌀도 많지 않았다. 당시 섭현에 머물던 조선의용군 전사들은 긴장한 학습과 훈련, 대적 선전공작을 진행함과 동시에 대생산 운동에 참가했다. 그들은 산에 올라가 옥수수, 감자를 심었고 적후의 련락소를 통해 소중한 물품을 구해왔다. 극도로 빈곤한 근거지의 의용군 식생활을 보면 야채와 나물이 고작이였고 대부분 좁쌀 죽으로 끼니를 에워야했다. 조선의용군 전사들이 자리잡고있는 남장촌(南莊村) 뒤산 골짜기에는 낡은 절이 있었다. 절에는 사묘(司苗), 사과(司果)라는 중 두명이 있었는데 두 사람 모두가 일제가 파견한 밀정이였다. 사묘와 사과는 늘 팔로군의 행적과 조선의용군의 활동정보를 일제 본부에 전했다. 그리고 틈이 나면 팔로군이나 의용군 전사들에게 접근하여 금전과 부귀로서 회유하려 들었다. 한번은 무정사령이 조선의용군 전사들을 거느리고 산에 가서 감자를 심는 일을 하게 되였다. 휴식할 때 사묘와 사과는 혼자 있는 의용군 전사 차만길(車萬吉)에게 접근했다. 두놈은 나물과 죽을 먹으며 이곳에서 고생하지 말고 일본군으로 넘어오라고 차만길을 구슬렸다. 조선의용군과 팔로군의 정보를 알려주면 많은 돈을 줄것이며 또 큰 도시에 가서 호강시켜주겠다고 했다. 차만길은 짐짓 생각해보겠다고 하고서는 두놈이 떠난후 즉시 무정사령에게 보고하였다. 무정은 전사들을 거느리고 절에 찾아가 사묘와 사과를 체포하고 심문하였다. 놈들은 일제의 파견을 받고 이곳에 왔다고 실토하였고 의용군은 마을에서 군중대회를 열고 두놈의 죄장을 밝힌 다음 총살해 버렸다. 리사화로인의 이야기 [2]: 조선의용군 무정사령은 섭현 중원향(中原鄕) 중원촌에 있을 때 한 지주 집에 지휘부를 설치하였다. 중원촌은 강을 사이 두고 팔로군 사령부와 마주하고있었다. 그러나 장마철에 물이 불때면 강을 건널수 없어 고생이였다. 한번은 무정사령이 긴급한 상황을 팔로군 사령부에 전해야 했는데 공교롭게도 장마철이라 강을 건널수 없었다. 무정에게는 애지중지 키우며 잘 훈련시킨 군견 한 마리가 있었다. 그는 편지를 군견의 목에 매달아 강을 건너게 하였다. 주인의 뜻을 안 군견은 재치있게 헤염쳐 강을 건너 편지를 전했고 또 답장까지 받아가지고 왔다 한다. 우리는 저녁까지 리사화로인의 구수한 이야기를 들었다.   하남점진 남장의 희대, 우리글로 "중조한 우의기념대"라고 쓴것이 흥미롭다 남장유아원, 원 조선청년간부 학교 터 화북조선청년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유적지 10월 23일은 태항산지역 답사를 시작한 네번째 날이였다. 섭현에는 답사할 곳이 많고 내용도 많기에 아침식사를 마치고 일찍 일에 달라붙었다. 섭현의 《공자님》 리사화로인이 선뜻 길 안내를 나섰고 선전부의 리숙영과장이 우리를 배동해주었다. 우리는 먼저 하남점진(河南店鎭) 남장촌으로 향했다. 청장하(淸漳河) 기슭에 자리잡은 하남점진은 섭현 현성에서 2킬로메터 떨어진 곳에 위치했다. 진정부 동남쪽으로 10여분 걸어가면 남장촌에 이르게 된다. 대부분 흙으로 만든 집이였고 이따금 검푸른 벽돌로 지은 기와집이 보였다. 원래는 마을이 위치가 낮은 청장하 기슭에 자리잡았지만 물이 자주 지기때문에 부근의 산언덕으로 옮겼다 한다. 남장촌에는 근 4,000명 인구가 살고있다. 항일전쟁시기 조선의용군은 바로 이 마을에 주둔했던것이다. 마을 입구에 들어서니 커다란 공지가 나타났고 거기에는 커다란 로천 무대가 있었다. 현지인들은 로천무대를 《희대(戱臺)》라고 불렀다. 명절이면 《희대》에서 공연이 있었고 마을 사람들은 공지에 모여 재미나게 여러가지 공연을 구경하였다 한다. 벽돌과 콩크리트로 만든 무대건물 웃부분에는 모택동 초상이 걸려있고 그 아래에 남장이라고 씌여있었다. 더욱 재미나는것은 남장이라고 쓴 아래에 우리 글로 《중조한우의기념대》라고 밝혀놓은것이였다. 중국과 조선, 한국이라는 뜻이다. 한국과 수교하기전에는 무조건 《중조우의기념대》라고 했을 텐데 지금은 한국을 포함해 넣었다는것이 흥미로웠다. 구태여 외교적인 문제까지 생각하고 싶지 않았지만 항일전쟁시기 조선의용군과 함께 지냈던 현지인들이 자연스럽게 조선과 한국을 동일시하고있음을 느낄수있었다. 그만큼 모든것을 포용할수 있는 현지인들의 그 넉넉함에 감탄을 보내고 싶었다. 지금 이 기념대는 남장의 문화센터로 사용되고있다. 자주 사용되는건 아니지만 명절이나 큰 대회가 있으면 이곳에 모여 공연도 하고 촌민회의를 소집하기도 한다. 《희대》는 항일전쟁시기 조선의용군 군사간부학교가 설립될 때 학교 설립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었다고 한다. 조선의용군 전사들은 이곳에서 마을 사람들을 모아놓고 항일을 선전하는 연설을 하거나 재미나는 공연을 선보였던것이다. 섭현은 하북성과 산서성의 린접한 곳에 위치하였다. 지형적으로 보면 태항산 중심부분과 가까운 이곳은 또한 태항산 중심에서 하북평원으로 진출할 수 있는 길목이기도 하다. 조선혁명가들은 대체적으로 1943년경에 섭현에 모여 활동하였다. 이때 조선의용대는 이미 조선의용군으로 개편되였고 조선혁명가 무정이 사령원을 맡고있었다. 조선혁명가들은 자체의 군대로서 조선의용군을 가지고있었고 당으로서 조선독립동맹을 조직하였다. 그리고 혁명과 투쟁의 수요에 따라 많은 정치군사 간부를 양성하기 위해 학교를 꾸렸는데 섭현의 조선혁명군정학교가 비교적 유명하였다. 《중조한우의기념대》가 있는 공지 한쪽에는 남장 유아활동중심(幼兒活動中心)이 있었다. 새로 지은 건물 곁에 철대문이 있었고 문을 들어서니 작은 마당이 있었다. 마당 주변에 단층으로된 벽돌기와 건물이 둘러있었다. 그중 서쪽의 단층 벽돌집이 바로 조선혁명군정학교 옛터였다. 건물구조를 보아 옛날 절간으로 사용한 건물임을 짐작할수있었다. 문 옆에는 조선혁명군정학교 옛터라고 밝힌 현판이 붙어있었다. 현판의 소개를 보면 조선혁명군정학교는 1943년부터 1945년까지 2년간 이곳에 있었다. 1943년 4월 조선의용군 본부와 조선독립동맹은 남장촌에 주둔하였으며 이해 9월, 남장촌에 조선혁명군정학교를 설립하였다. 학교에서는 조선혁명을 위해 당, 정, 군 간부 300여명을 양성하였다. 항일전쟁시기 조선혁명가들은 각 곳에 많은 군정학교를 설립하였는데 이곳을 《화북조선청년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혹은 《태항산군정학교》라고도 불렀다. 1943년 12월, 일제에 대한 대반격을 준비하기 위하여 조선의용군 주력은 연안에 집결하였다. 그때 태항산근거지에 있던 대부분 조선혁명가들은 연안으로 떠났지만 무정은 계속 남아 팔로군의 사무를 보면서 조선청년 간부양성에 몰두하였다. 동북과 화북에서 일제의 강제징병을 피하여 태항산근거지에 온 많은 조선청년들은 섭현 남장에 있는 이 조선혁명군정학교에서 교육과 훈련을 받았으며 졸업직후 연안으로 가거나 다시 지하투쟁 임무를 맡고 적후로 들어갔다. 조선의용군 출신인 고철(高哲)선생이 회억한데 의하면 1944년, 남장 마을 어귀에 빈 절간이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몰래 절에 와서 불공을 드리고 갔기때문에 조선의용군 전사들이 훈련을 마치고 돌아오면 절에는 늘 향불이 피워져있었다. 당시 성냥이 몹시 귀했는데 마을 사람들이 피워놓은 향불은 전사들의 담뱃불로 잘 씌였다한다. 100여명 학원들이 학교에서 학습하고 훈련을 받았다. 그러나 간소한 시설로 하여 많은 고생을 하였다. 조선의용군 출신인 리섭(李涉)선생이 남긴 회억록에 의하면 낡은 절간을 보수해 만든 학교는 교탁이나 책걸상이 따로 없었다. 학원들은 얇은 이불을 깔고 앉아 무릎우에 필기장을 놓고 공부하였다. 이처럼 간고한 환경속에서 조선혁명군정학교의 학원들은 팔로군과 함께 대생산운동을 하였고 선전과 군사훈련에 열중하였으며 또 상급의 지시에 따라 적후를 넘나들면서 정보를 수집하고 항일근거지에 필요한 약품과 물자를 날라왔으며 필요시에는 무기를 들고 적의 토벌을 반대하는 전투에 참가하였다. 그들은 어려운 환경속에서 어엿한 조선의용군 전사로, 조선혁명 간부로 성장했던것이다. 1945년 3월 1일에 태항산 군정학교가 재 출범하였는데 그때 전교에 293명 학원이 있었다. 무정이 교장을 맡고 무정, 양계(楊界), 박무 3명이 정치과를 맡았다. 그리고 교무주임에 장지민, 교무간사에 공명우(孔明宇 일명 주성 朱星)이 맡았다.  
63    제63회 진기로예 렬사릉원 댓글:  조회:3815  추천:0  2014-02-07
중국항일전쟁사에서는 팔로군의 “랑아산의 다섯용사”를 영웅의 전범으로 간주한다. 우세한 일본침략군에게 포위된 팔로군의 다섯용사가 랑아산의 천길 벼랑에 몸을 던져 불굴의 의지를 보여주었다. 우리민족의 항일영웅 손일봉, 박철동, 한청도의 장렬한 희생도 이에 조금도 무색하지 않는 영웅적 행동이였다. 죽을때까지 원쑤 일본제국주의자들을 소멸하려는 의욕으로 적을 붙안고 수류탄을 터쳐 함께 죽음을 선택하였던 손일봉과 한청도 그리고 탄약과 수류탄이 다 떨어진 상황에서도 총검을 비껴들고 적과 마지막 힘을 다해 백병전을 하였던 박철동, 이들은 자랑찬 우리민족의 항일영웅으로 꼽히기에는 조금도 손색이 없다. 아울러 이들은 조선인민을 포함한 모든 피압박민족의 해방을 위해 중국대지에 피흘리며 싸운 영웅이였다. 이들의 빛나는 이름은 항일전쟁시기 중국의 태항산기슭의 호가장 전투와 더불어 영원히 사람들 마음속에 살아있을 것이다! 답사팀이 석가장 근교의 호가장 전적지를 답사하고나서 다른 한 목적지 한단으로 출발한 것은 10월 22일 아침이였다. 우리는 석가장 장거리 뻐스역에서 뻐스를 타고 한단으로 출발하였다. 중국 화북대지에서 희생된 렬사들을 기념하는 진기로예 렬사 릉원이 한단에 있었고 거기에는 조선의용대의 지도간부였던 진광화와 윤세주 렬사 묘비가 있었던 것이다. 한단까지는 고속도로를 리용해 4시간 정도 시간이 수요된다. 하북성 남부에 위치한 한단은 동력과 원자재 특히는 방직공업으로 유명한 공업도시일뿐만 아니라 남부로부터 하북성에 들어오는 교통중추이기도 하다. 고대문화도시인 한단은 전국시기 조(趙)나라 도읍이였는데 진시황은 전국을 통일한후 이곳에 한단군을 설치하였다. 한(漢)나라초기 한단은 5대 상업도시의 하나로 유명했다. 그리하여 지금도 한단 부근에는 전국시기 유적을 많이 찾아볼수 있다. 한단시에 도착하여 진기로예(晉冀魯豫) 렬사릉원을 찾아가는 길에 우리는 한단시 기차역광장의 호복기사(胡服騎射)라는 유명한 조각상을 보았다. 가벼운 복장에 투구와 갑옷을 거치고 활을 들고 말을 달리는 무사의 동상이였는데 이는 고도인 한단의 상징이라고 한다. 호복기사 동상(한단 기차역 앞에 세운 호북기사 동상) 현지인에게 물어보니 호복기사에는 이러한 전설이 깃들어있다 한다. 전국시기 조나라 무령왕(武靈王)이 즉위할 때 조나라는 국세가 약화되여 외부의 침습을 많이 받았다. 특히 북방의 유목민족의 습격과 겁탈을 많이 당했는데 조나라 군대는 이들과의 접전에서 늘 패하군 하였다. 무령왕은 수차의 싸움 끝에 조나라 군대가 실패한 원인을 밝혀냈다. 조나라 병사들은 소매가 너른 불편한 복장을 한데다가 무거운 갑옷을 거치고 또 굼뜬 전차를 따라 다녔기에 기동성이 약했다. 반면 가벼운 차림을 한 유목민족의 기병들은 신속히 돌진하였을 뿐만아니라 활을 백발백중으로 쏘았던것이다. 무령왕은 보수적인 여러 왕공대신(王公大臣)들의 고집을 꺾고 단연 병사들의 군복개혁을 실시하였으며 가벼운 차림으로 전투에 나서게 하였다. 결과 조나라는 수차의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어 전국시기 군웅(群雄)의 위치를 지키게 되었다 한다. 호복기사란 북방유목민족의 옷을 입고 말을 달려 활을 쏜다는 뜻이다. 옛 이야기였지만 개혁개방을 실시하여 경제성장과 인민의 생활향상에 전념하는 중국의 현황을 설명해주는것 같기도 하였다. 한단시 기차역에서 동쪽으로 굽어져 릉원로(陵園路)를 따라가면 록음이 우거진 거대한 릉원을 볼수있는데 이곳이 바로 진기로예렬사릉원이다. 릉원로에 의해 남북으로 나뉘여진 릉원은 항일전쟁시기 팔로군총부 전방사령부와 정치부, 진기로예군구 희생자들 그리고 팔로군 129사의 렬사들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었다. 1946년에 착공하여 1950년 10월에 준공된 릉원은 우리나라에서 비교적 일찍 축조되고 규모가 비교적 큰 렬사릉원이다. 철대문으로 된 정문 한쪽에는 흰 대리석판이 있었는데 거기에는 진기로예렬사릉원이라고 밝혀있었다. 그리고 1986년 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의 비준을 거쳐 전국중점 렬사기념건축물보호단위로 되였다고 밝혀있었다. 1995년에는 국가민정부에서 이곳을 전국 애국주의 교양기지로 명명하였다. 남원과 북원으로 나뉘여진 릉원은 320무의 부지면적을 가지고있다. 정문이 있는 북원에 들어서면 하늘높이 치솟은 회색 기념탑이 보인다. 탑에는 모택동이 쓴 《무상광영(無上光榮)》이라는 금빛 글발이 새겨져있었다. 북원은 렬사기념탑을 제외하고도 인민영웅기념묘소, 진렬관, 4.8렬사각(四八烈士閣), 렬사기념당, 좌권장군묘(左權將軍墓), 좌권장군기념관을 비롯한 건물이 있었다. 항일전쟁시기 진기로예변구는 1937년 겨울부터 개척되기 시작하였다. 《7.7》사변이후 국민당의 주력부대가 정면전장에서 거듭 실패하자 북상한 팔로군 각 부대는 태항산에 의지해 적후항일근거지를 개척하였다. 팔로군 115사는 평형관(平型關)전투에서 승리한후 산서북부, 차할, 하북북부에 근거지를 창설하였고 129사는 태항산을 중심으로 산서, 하북, 하남, 산동을 포함한 광활한 진기로예항일혁명근거지를 굳혀나가기 시작하였던것이다. 항일전쟁시기 진기로예변구에만 하여도 무려 10만 7천여명 장병들이 희생되였다. 릉원 중심부에 모셔진 좌권장군묘에서 우리는 발걸음을 멈추었다. 팔로군 부총참모장이였던 좌권장군은 항일전쟁시기 희생된 팔로군 최고 간부였다. 좌권장군은 황포군관학교를 졸업하고 홍군시기 조선혁명가 양림의 후임으로 홍군 제1군단의 참모장을 맡았다. 항일전쟁시기 그는 팔로군 부총참모장을 담임했고 태항산 항일근거지에서 일제와 싸웠다. 1942년에 일본침략자들은 많은 병력을 동원해 태항산 항일근거지를 토벌하였고 팔로군 전방사령부를 집중적으로 공격하였다. 1942년 5월 일본침략자의 포위토벌을 반격해 싸운 전투를 이라고 한다. 좌권은 5월의 혈전에서 조선의용대를 포함한 팔로군총부 전투부대를 지휘하여 총부 지휘원들을 엄호하다가 장렬히 희생되였다. 당시 조선의용대의 조선혁명가 진광화(陳光華)와 윤세주도 5월의 반포위토벌전에서 희생되여 좌권장군과 함께 태항산에 매장 되었다가 해방후 한단렬사릉원으로 옮겨졌다. 답사팀을 함께 했던 중앙당학교 최룡수 교수는 이렇게 소개했다. “여기는 한단 기열료 렬사릉원입니다. 이 뒤에 보이는 것이 좌권장군 묘이고 그 곁에 진광화 렬사 묘입니다. 1942년 5월 태항산의 반소탕전에서 희생되였는데 좌권은 항일전쟁시기 희생된 최고급 간부입니다.진광화렬사 묘소는 그 곁에 모셔졌습니다. 그러니 진광화렬사 역시 대단한 분입니다." 진기로예 렬사릉원의 기념비 렬사릉원 간판 팔로군 부참모장 좌권장군 묘소 릉원의 기념동상 조선혁명가 진광화의 묘소 진광화렬사 묘지 진기로예렬사릉원 북원에 위치한 좌권장군묘소 한켠에 좌권장군과 함께 희생된 렬사들의 묘소가 있었는데 그 가운데 조선혁명가 진광화(1911―1942)렬사묘가 있었다. 원형으로 된 묘소곁에는 바람벽처럼 만들어놓은 렬사들의 묘지(墓誌)가 있었다. 그 가운데 진광화렬사의 묘지는 다음과 같이 썼다. 《조선혁명렬사 진광화동지묘지, 광화렬사의 원명은 김창화(金昌華)이다. 조선 평안남도 대동군(大同郡) 고평면(古平面) 평천리(平川里) 사람으로서 1911년에 태여났다. 그는 1931년, 국내에서 중학교를 졸업한후 반일에 뜻을 두고 중국에 건너왔다. 그는 1937년에 광주에서 중국 국립중산대학 교육학부를 졸업하였으며 일찍 한국국민당, 조선청년전위단 그리고 중국청년항일동맹에 참가하였다. 1936년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고 38년에 화북태항산항일근거지에 도착해 중국공산당 북방국 진기예구(晉冀豫區) 당부에서 중요한 사업을 맡았다. 1941년에 화북 조선청년련합회를 설립, 령도하였다. 1942년 5월 28일, 태항산 반포위토벌전역에서 싸우다 산서 편성(便城) 화옥산(花玉山)에서 장렬히 희생되였다. 진기로예변구 당정군민 및 조선독립동맹(朝鮮獨立同盟), 조선의용군 화북지대는 렬사의 공적을 추모하여 묘를 만들고 비석을 세워 기념한다. 중화민국 31년 10월 10일 세움.》 진광화는 1929년에 평양상업중학교에서 공부하면서 한국혁명당 산하단체인 철혈단(鐵血團)에 가입하였고 기관지 《우리길》을 발간하여 독립사상을 고취하였다. 학교에서 그는 광주(光州)학생운동을 지원하는 동맹휴학을 조직하기도 하였다. 1931년에 그는 학교를 졸업하고 중국 남경으로 건너와 오세(五世)중학교에 입학하였다. 남경에서 그는 남경 조선인 류학생회 간사로 활동하다가 남경의 조선인협회인 한교회(韓僑會)의 중앙간부로 활약하였다. 그러다가 1933년에 그는 중국 광주에 가서 국립중산대학 문학원 교육학부에 입학하였다. 중산대학에는 30여명 조선학생들이 있었다. 진광화는 조선학생들을 단합시키고 진보적인 중국학생들과 접촉하면서 많은 활동을 전개하였다. 1936년 중국공산당에 가입한 그는 광동의 당조직을 회복할 때 중산대학 당지부 서기를 맡았다. 조선학생이 중산대학 당지부서기를 맡았다는것은 쉬운 일이 아니였다. 그만큼 진광화는 학생들가운데서 덕망이 높았고 조직력도 강하였던것이다. 학교시절 그는 리소문(李蘇文)을 비롯한 조선학생들과 함께 《12.9》애국학생운동을 조직하였다. 사후 일부 학생들이 체포되였는데 그 가운데 7명 조선학생도 포함되였다. 학교측에서는 리소문을 강제 퇴학시켰다. 조선학생들은 학교당국의 결정을 반대하면서 체포된 학생들을 보석 석방할것을 교장에게 요구했고 또 강제 퇴학령을 취소할것을 요구하였다. 그렇지 않을 경우 조선 학생들은 집단퇴학할 것이라고 하였다. 진광화가 령도한 이번 학생투쟁에서 학교측은 할수없이 학생들의 정의적인 요구를 들어주게 되였다. 진광화는 또 로신서거 기념대회에 참가해 감동적인 연설을 하였다. 그는 연설에서 일제 침략하에 있는 조선인민의 고통을 이야기하여 장내 1,000여명 중산대학 학생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겨주었다. 1937년 7월, 진광화는 중산대학을 졸업하고 혁명의 성지 연안으로 갔다. 그는 연안에 있던 중앙당학교에서 학습하였고 1939년에는 팔로군 전방사령부 정치부에서 근무하였다. 그후 진광화는 진기로예변구 당학교 교무과장, 조직과장 겸 총지서기로 있었고 조선청년련합회 진기로예지회 회장, 조선의용군 화북지대 지도원 사업을 맡아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1942년 그는 태항산에서 적의 포위를 뚫고 나오다가 윤세주와 함께 장렬히 희생되였다. 렬사릉원 남원의 렬사공묘 남원에 모셔진 조선혁명가 윤세주 렬사묘비 한국의 렬사유가족이 윤세주 렬사묘소를 참배하고있는 장면 진기로예렬사릉원 남원은 북원과 길하나를 사이두고있었다. 길을 건너 남원에 들어서니 커다란 광장이 있었고 정면에 장엄한 비석 하나가 서있었다. 비석에는 인민해방군진기로예렬사공묘(烈士公墓)라고 씌여있었다. 광장을 지나니 넓은 평지에 정연하게 렬사들의 묘지가 배렬되여있는 것이 보였다. 이곳에는 약 200명 렬사가 고이 잠들고있다. 렬사들의 고혼을 깨울세라 우리는 조심스럽게 발을 옮겨 조선혁명렬사 윤세주의 묘소를 찾아갔다. 장방형으로 된 정결한 묘소 앞에는 검은 대리석 묘비가 있었다. 거기에는 중문과 조선글로 《석정윤세주렬사(石鼎尹世冑烈士)》라고 씌여있었다. 윤세주(1901―1942)는 경상남도 밀양에서 태여났다. 《3.1》운동시 그는 윤치형(尹致衡)과 함께 밀양의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윤세주는 일제가 1년 6개월이라는 궐석재판을 언도하자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그는 류하현(柳河縣) 고산자(孤山子)에 있는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하여 군사훈련을 받았다. 1919년 11월 9일, 윤세주는 김원봉을 만나 함께 길림에서 조선의렬단을 창단하고 단의 요원으로 활동하였다. 1920년 6월에 의렬단 대부분 단원들이 조선내에 들어가 암살과 파괴 활동을 전개하려했지만 행적이 발각되여 많은 단원들이 일제에게 체포되였다. 윤세주는 당시 7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일제의 악착같은 고문에도 굴하지 않은 윤세주는 출옥후 다시 중국에 와서 독립활동에 종사하였다. 그는 다시 김원봉과 합류하였고 조선혁명당의 요원으로 활동하였다. 1932년 윤세주는 조선민족혁명간부학교를 제1기로 졸업하고 학교 교관으로 있었으며 1935년 4월에는 중국 중앙군관학교 락양분교의 조선인 특별반 교관으로 있었다. 1938년 그는 무한에서 김원봉과 함께 조선의용대 창건을 주도하였고 조선의용대 요원으로 활동하였다. 조선의용대 선전사업을 맡은 그는 조문판(朝文版) 주필을 맡고 간행물 《전고(戰鼓)》를 편찬하였다. 무한이 함락된후 김원봉과 함께 중경에 갔던 윤세주는 김원봉의 파견을 받고 조선의용대 주력을 거느리고 화북으로 진출하였다. 화북조선청년련합회(華北朝鮮靑年聯合會)와 조선의용대 화북지대의 조선청년과 혁명자들은 투쟁경험이 풍부하고 학식이 많은 윤세주를 매우 존경하였다. 1942년 5월에 그는 태항산에서 진광화와 함께 장렬히 희생되였다. 민족독립의 그날을 보지 못하고 중국 태항산에 뼈를 묻은 진광화렬사와 윤세주렬사를 생각하니 우리는 마음이 아파났다. 국화꽃을 사서 렬사들의 묘소에 증정하면서 우리는 렬사들의 령전에 묵도를 드렸다. 민족해방을 위해 목숨을 각오하고 싸웠던 렬사들, 우리의 귀전에는 윤세주가 작사한 유명한 노래 이 들려왔다. 진기로예렬사릉원에 정중히 모신 진광화렬사와 윤세주렬사의 불굴의 투쟁사를 생각하면서 우리는 렬사들의 투쟁행적을 찾아 다시 길을 떠났다. 조선민족 투사들이 영용히 싸웠던 태항산, 중국대지에 우뚝 솟아 일본제국주의자들을 영용히 항격했던 태항산은 우리를 부르고있다.  
62    제62회 화북에서 희생된 조선의용대 4렬사 댓글:  조회:3527  추천:0  2014-02-04
피비린내와 화약내가 풍기던 처절한 호가장전투는 끝났다. 적과 함께 죽을 각오를 하고 수류탄을 터친 손일봉과 한청도, 적과 육박전을 치르다가 총창에 쓰러진 박철동......이들의 영웅적 행동과 자아희생정신은 사람들의 기억속에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것이다. 호가장전투가 있었던 호가장마을은 중국 화북대지의 작은 마을로서 지도에서 찾아보기도 힘든 고장이다. 마을 구석구석에는 옛날 사용했던 우물이며 석마가 보였다. 단풍든 마을 뒷산으로 오불꼬불한 산길이 하나 있었다. 룡팔채로 통한다는 바로 이 길로로 조선의용대 대원들이 철수하였던 것이다. 호전증서기는 1941년 당시 조선의용대 대원 몇 명이 이 마을에서 희생되였다는 것을 마을 로인분들에게 들었다고 한다. 희생자들은 마을뒷편에 묻혔다가 후에 다른곳으로 이장하였다한다. 호전증서기는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 "후에 로혁명가들이 이 마을에 찾아 온적이 있습니다. 로혁명가들의 자손까지 두차례 찾아왔습니다. 당시 의용대는 동남구로부터 왔다가 서산으로 철수했습니다. 적의 기관총 사격으로 많은 사람이 희생되였습니다. 이곳이 바로 룡팔채로 통하는 좁은 산길입니다. 그들은 뒤편 산길로 철수했습니다”     호가장 뒷산길, 조선의용대 대원들은 이곳으로 철수하였다.  조선의용대는 창립되여서부터 수많은 크고작은 전투를 겪었지만 대부분 경우는 주로 선전과 정보탐지와 전문해독임무를 맡았기때문에 일선 전투에서 싸우지 않았다. 그러므로 호가장전투는 조선의용대가 겪은 가장 치렬한 혈전의 하나였다. 전투에서 네명의 대원이 장렬히 희생되였고 대장 김세광이 중상을 입었으며 대원 김학철이 부상을 입고 체포되였다. 전투가 끝난후 현지인들이 희생자들을 찾아 마을 부근에 매장하였다. 담사팀은 조선의용대 대원들이 철수하였다는 호가장 마을 뒤산, 룡팔채로 통하는 전적지를 보고나서 다시 마을에 들어왔다. 마을 뒤편에 크지 않은 평지가 있었는데 말린 옥수수대를 가득 쌓아놓고있었다. 호전증서기는 평지를 가리키면서 호가장전투에서의 희생자들은 일차로 이 평지에 매장하였다가 다시 찬황현의 황북평(黃北坪) 마을로 옮겨갔다고 소개하였다. 1995년부터 조선의용대를 연구하는 사람들이 호가장 마을을 수차 방문하였다. 호전증서기가 소개한데 의하면 의용군 자녀들도 호가장에 왔었다 한다. 그들은 희생자들이 묻혔다고 하는 호가장마을 평지부근을 여러차례 파보았지만 유감스럽게 아무런 유물도 발견하지 못했다고 한다. 당시 현지인들은 박철동을 비롯한 희생자들의 유체를 찾아 비교적 안전한 곳으로 옮겨갔던것이다. 호가장은 적이 자주 출몰하는 곳이기때문에 팔로군 진기로예변구(晉冀魯豫邊區) 제1분구 사령부가 있었던 황북평마을에 정중히 이장하였다. (권립교수) “전투가 있은후 1942년 2월 27일, 중경에서 추도회를 가졌습니다. 주은래, 동필무, 등영초 등이 대련()을 드렸고 주덕, 팽덕회도 만련을 보냈습니다." 1941년 12월 15일, 조선의용대 대원, 찬황현 각계 인사 수백명이 황북평마을에 모여 호가장전투에서 희생된 렬사들을 위한 성대한 장례식을 진행하였다. 이듬해 2월 7일 중경에서도 성대한 추도회가 있었다. 주은래, 동필무, 등영초, 주덕, 팽덕회 등이 모두 추모의 글을 썼다. 하북성 찬황현 황북평향 황북평촌은 한단시 이북에 위치하였다. 차로 약 3시간 거리이다. 마을에는 지금도 팔로군 제1분구 사령부 옛터가 있고 마을 뒤편에는 2002년경에 잘 보수해 놓은 조선의용대 렬사 묘소가 있다. 마을 뒤산으로 가면 세멘트로 잘 닦아 놓은 평지와 계단이 보인다.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언덕에 낮은 담으로 둘러놓은 4명 렬사들의 묘소가 있다. 묘소와 비석은 박철동, 손일봉, 리정순(일명 왕현순), 최철호(일명 한청도) 순으로 되여있다. 렬사묘소는 동향으로 되었는데 고향인 조선을 그리는 렬사들의 마음을 헤아려서라고 생각되였다. 황북평마을의 렬사묘소를 새로 보수할 때 당시 의용대 대원들이 사용하였던 잉크병과 조선의용대 휘장을 비롯한 소중한 유물도 발견되였다 한다. (권립교수) "손일봉동지는 중앙군사학교 락양분교를 졸업하고 또 광주군사학교에 가서 포병기술까지 배우고 로구교사변후 포병련장으로 있다가 1940년에 락양에서 조선의용대에 참가한 청년이였습니다."   호가장전투에서 희생된 손일봉(1912-1941)은 평안북도 의주에서 태여났다. 의주에서 공립일반학교를 졸업한 그는 한동안 목재공장에서 일하다가 1931년 중국 청도에 건너왔다. 청도에서 반일투쟁을 전개하려던 그는 일제 경찰들의 감시가 심해지자 뜻을 이루지 못하고 다시 상해로 갔다. 그는 상해에서 조선민족해방투쟁동맹에 가입하고 독립활동에 종사하기 시작하였다. 1934년 3월 3일에 손일봉은 기타 애국청년들과 함께 폭탄으로 상해에 있는 일본대사와 륙전대(陸戰隊) 사령을 암살하려 시도했지만 비밀이 루설되여 실패하고말았다. 행적이 적 밀정에게 발각된 손일봉은 할수없이 상해의 전우들과 작별하고 하남성 락양으로 떠났다. 상해를 떠난 손일봉은 중국국민당의 지원을 받아 조선청년들을 교양하는 중앙륙군군관학교 락양분교에 입학하였다. 그는 그곳에서 군사지식을 배웠고 중국혁명과 조선혁명에 관한 지식을 배웠으며 또 많은 조선혁명자들과 사귀게 되었다. 1935년 중앙륙군군관학교 락양분교를 졸업한 그는 광주에 가서 계속 공부하기로 하였다. 광주에서 그는 1938년까지 중앙륙군군관학교 광동분교에서 공부하였다. 졸업후 그는 중국군 포병련장의 신분으로 1939년 9월에 있은 장사대회전(長沙大會戰)과 1940년 6월에 있은 신양회전(信陽會戰)에 참가하였다. 1938년 무한을 점령한 일본침략군은 수차에 걸려 호남성 장사를 포위공격하였다. 그러나 중국 군민의 완강한 저격에 부딛쳐 번번히 실패하였다. 장사대회전에서 중국군민들은 수만명 일본침략군을 소멸하는 전과를 올렸다. 국민당군 포병련장이였던 손일봉도 이 회전에 참가하여 중국 군민과 함께 일제를 유력하게 타격하였으며 그후 신양회전에도 참가하였다. 장사회전과 신양회전에서 싸우던 시기 손일봉은 조선민족혁명당 당원의 신분으로 조선의용대에 가입하였으며 후에는 조선의용대 주력과 함께 태항산 항일근거지에 진입하였고 호가장전투를 겪게 되었던것이다. 일본침략자들과의 육박전에서 총검에 찔려 희생된 박철동(1915-1941)은 충청북도 사람이였다. 그는 일찍 충주 학생운동에 참가하였다가 일제의 감시가 심해지자 1931년에 중국 심양에 건너와 활동하였다. 그는 심양에서 점원으로 일하는 한편 밤이면 야학에 다녔다. 야학에서 그는 조선혁명당의 소개로 중국 관내에 들어와 활동하게 되였고 1934년 1월에 중앙륙군군관학교 락양분교 제2기에 입학하였다. 1935년 7월, 그는 조선혁명당에 가입하고 당의 파견을 받고 화남으로 가게 되였다. 남하도중 그는 복건성 천주(泉州)에서 일본밀정들에게 체포되여 3년간 일본의 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다. 1938년 출옥한 박철동은 다시 중국 화북에 들어와 조선청년들을 규합해 활동하였다. 1939년 조선의용대 주력이 북상하기 위해 락양에 모였을 때 이들과 회합한 박철동은 정식 조선의용대에 가입하였다. 그후 1941년 호가장전투에 참가했다가 장렬히 희생되였다. 일본침략군과 함께 죽을 각오를 하고 마지막 수류탄을 터쳤던 한청도(1915-1941)의 원명은 최철호였다. 그는 조선충청남도 대전(大田) 사람으로서 1935년부터 중국 남경에서 활동하였다. 그는 1938년 5월, 제6기로 중국륙군군관학교 특별훈련반을 졸업하고 무한에서 조선청년전시복무단에 가입하였다. 그러던중 그는 새로 창립된 조선의용대에 참가해 중국 제5전구와 제1전구를 전전하면서 대적 선전공작을 진행하였다. 1940년 조선민족해방동맹에 가담한 한청도는 의용대의 파견을 받고 서안에서 활동하다가 1941년 조선의용대 화북지대의 일원으로 활약하였으며 그해말 호가장전투에서 희생되였다. 손일봉, 박철동, 한청도와 함께 찬황현 황북평마을에 매장된 조선혁명 렬사 왕현순(王現淳 1918-1941)의 원명은 리정순이다. 평안북도 벽동(碧潼)에서 태여난 그는 1933년에 중국 남경에서 김원봉중심으로 운영된 조선혁명군정학교(朝鮮革命軍政學校) 제2기를 졸업하였다. 그후 1938년에는 중앙륙군군관학교 특별훈련반을 졸업한후 조선의용대 제2지대에 편입되여 싸웠다. 그는 조선의용대를 따라 호남에서 대적선전공작을 하다가 화북으로 진출해 형대(刑臺) 전투에 참가하게 되였던것이다. 당시 중국의 관련 자료에는 호가장전투라는 어구를 찾아볼 수 없고 형대전투라는 표현이 있다. 호가장은 너무나도 작은 마을이기때문에 직접 호가장전투라는 표현을 하지 않고 호가장이 소속되여있던 형대현의 지명을 따서 형대전투라고 개괄하고 있다. 1941년말 형대부근에서 호가장전투를 포함한 수차의 전투가 있었는데 이를 통칭하여 형대전투라고했던것이다. 이로하여 조선의용대 대원들의 희생소식을 보도한 당시 기사들도 다소 혼란을 보이고 있다. 호가장전투에 직접 참전한 조선의용대 대원들의 회억에 의해 손일봉, 박철동, 한청도의 희생과정은 구체적으로 알려지지만 다른 두 조선의용대 렬사인 왕현순과 주동욱(朱東旭)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밝혀지지 않고있다. 조선의용대 대원 왕현순, 주동욱이 현대전투에서 희생되였다는 당시 보도를 보아서도 왕현순과 주동욱 렬사는 호가장전투에서 싸운 것이 아니라 호가장 부근에서 진행된 다른 전투에서 희생되였고 이들이 함께 형대전투 조선의용대 희생자들로 보도되였던것으로 추측된다. 1942년 2월 19일호 《신화일보》에 형대전투에 관련한 기사가 실렸다. 신문은 1941년 12월 26일 화북 형대부근의 한차례 혈전에서 아군은 적들에게 커다란 타격을 안기고 많은 전리품을 획득했다고 쓰면서 제3지대의 손일봉, 최철호, 왕현순, 주동욱 네 동지가 장렬히 희생되였다고 밝혔다. 그리고 이들의 약력을 적고있다. 손일봉은 중앙군관학교 제12기를 졸업하고 최철호는 중앙군관학교 특별반 제6기를 졸업하였으며 왕현순은 조선혁명간부학교 제2기 졸업, 주동욱은 조선혁명간부학교 제3기 졸업이라고 밝혀졌다. 기사에서 밝힌 12월 26일로 보아서 호가장 전투와 형대부근의 전투를 종합해서 보도한것이 분명하다. 기사에서 지적한 제3지대는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를 말한다. 전쟁년대였던 당시 보도의 정확성에 여러 가지 의문이 있을수도 있겠지만 아무튼 호가장전투를 포함한 형대전투에서 조선의용대 대원들은 용감히 적과 싸웠으며 또 장렬히 희생되였다. 황북평 마을에 묻힌 손일봉, 박철동, 한청도, 왕현순 렬사 그리고 아직 희생지마저도 찾지 못한 주동욱렬사 이들은 모두 우리민족의 훌륭한 아들이였고 자랑찬 청년들이였다.    호가장 마을의 옛집 호가장 마을의 옛집 마을의 옛 우물 방과한 호가장 소학교 어린이들 화북에서 희생된 조선의용대 4렬사를 기리는 사람들 답사팀이 호가장마을 전적지에 대한 답사를 마무리할때는 이미 해가 기울기 시작한 저녁녘이였다. 석양에 비낀 호가장 마을은 더없이 적막하였고 금빛 단풍은 노을속에서 더욱 빛났다. 이따금 얼굴을 스치는 바람결에 수류탄을 들고 적을 향해 달려가는 영웅적 조선의용대 대원들의 멸적의 함살소리가 들려오는 듯 싶었다. 우리는 호가장전적지에 대한 답사를 마치고 귀로에 올랐다. 수업을 마치고 귀가하는 소학생들의 활기찬 웃음소리가 고요한 마을에 다소나마 생기를 보태주었다. 금빛으로 물든 아름다운 산간마을 호가장을 떠나 차는 다시 석가장으로 향했다.  
61    제61회 호가장전투 댓글:  조회:7974  추천:0  2014-02-01
항일전쟁시기 국민당 통치구를 벗어나 태항산 항일근거지로 진출한 조선의용대는 팔로군과 함께 만악의 일제와 피흘리며 싸웠다. 그들의 항쟁은 중국관내 조선인 반일투쟁사에서 가장 빛나는 한페지로 엮어지고 있다. 1941년말에 있었던 호가장전투는 조선의용대의 항일투쟁사에서 가장 처절했던 전투의 하나였다. 무한에서 창립된 조선의용대 대부분 대원들은 적후에서 활발한 항일전을 전개하려는 념원을 안고 화북으로 진출해 화북지대를 편성하였다. 조선의용대 화북지대 용사들은 팔로군과 함께 적후에서 유격전을 전개하고 선전공작을 활발히 진행하였다. 대적공작과 민중선전을 진행하던 조선의용대는 호가장 마을에서 뜻하지 않게 적의 공격을 받아 혈전을 치르게 되였다. 석가장에서 주문빈렬사의 동상이 모셔진 화북렬사릉원을 보고나서 2003년 10월21일 오후 답사팀은 유명한 호가장전투가 있었던 원씨현(元氏縣) 호가장으로 출발하였다. 원씨현 현성을 거쳐가려면 길을 많이 에돌아 가야했기때문에 차는 곧추 호가장 마을로 달렸다. 석가장시를 벗어나 근 한시간정도 달리니 낮은 산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태항산의 여맥인 이곳 산들은 대체적으로 높지 않았지만 산줄기와 언덕이 많았다. 산에는 단풍이 들어 황금빛으로 물들었고 이따금 산기슭을 따라 오붓한 마을들이 보였다. 30여분 더 가니 산간에 위치한 호가장 마을이 나타났다. 산세를 타고 가옥들이 줄지어있었는데 집들은 모두 지붕이 평평한것이 특징이였다. 집집마다 지붕에 옥수수이삭과 옥수수대를 말리고있었다. 마을 바른편 언덕에는 감나무들이 많았다. 감을 따는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모습이 멀리 보였다. 할아버지가 사닥다리를 타고 나무에 올라가 감을 따면 할머니는 밑에서 그것을 바구니에 담았다. 한없이 정적한 산간 마을, 그림같이 아름다운 고장이였다. 하북성 석가장시 원씨현 호가장마을 감따는 늙은 량주 마을입구 호가장 촌민위원회  마을 어귀에서 곡식을 말리는 로인에게 물어 촌주임을 찾아갔다. 촌정부에 가보니 사무를 보는 사람은 없었고 어린아이 하나가 얼굴을 빠끔히 내밀고 호기심에 찬 눈길로 우리를 바라보고있었다. 다시 마을 사람들에게 물어 촌의 호전증(胡栓增 1945년생)서기를 만났다. 호전증서기는 우리가 조선의용대의 호가장전투에 관련해 알아보려고 왔다고 하자 선뜩 우리를 안내해 주었다. 그는 1995년에 조선의용대 출신인 로인 분과 그들 자녀들이 이 마을에 찾아 온적이 있다고하였다. 호가장 마을은 아득히 먼 수(隋) 나라 때 형성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당시 호씨 성을 가진 한 관리가 전란을 피해 이곳에 오게 되였다. 그후 그 관리의 가족을 중심으로 인가(人家)가 점차 많아지면서 드디어 마을이 형성되였다. 900여명 인구를 가진 마을은 현재 200여 세대가 살고있는데 모두 성이 호씨이다. 마을 청장년들은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나가고 마을에는 로인과 아이뿐이였다. 마을 뒤쪽에는 호가장소학교가 있었다. 낡은 교실에서 수십명 어린이들이 공부하고있었다. 소학교를 지나 마을 뒤에 이르니 골짜기 너머 뒷산으로 향한 오솔길이 있었다. 이곳이 바로 조선의용대가 철거하던 전적지였다. 호전증서기는 오솔길을 가리키면서 당시 조선의용대 대원들은 이 길을 따라 뒤산으로 철수하였다고 알려주었다. 그는 마을 로인에게서 당시 전투상황을 조금 들었다면서 오솔길을 따라 산을 넘으면 룡팔채(龍八寨)라는 곳이 있는데 의용대 대원들은 그쪽으로 피신하였다고 하였다. 가을을 마친 호가장 마을 렬악한 조건에서도 열심히 공부하고있는 호가장마을 어린이들 조선의용대의 호가장 전투에 대해 설명해주는 호전증서기(오른쪽 두번째) 조선의용대 전사들이 철수하였다는 마을 뒷길 팔로군이 통제하고있는 화북지역에 모인 조선의용대는 1941년에 화북지대로 편성되여 팔로군과 함께 적후에서 투쟁하기 시작하였다. 화북지대의 지대장은 박효삼이고 부지대장은 리익성이였으며 김학무가 정치지도원을 맡았다. 새롭게 편성된 화북지대는 무장선전활동과 간부양성, 적후 조직활동을 비롯한 3대 방침을 확정하였다. 특히 화북지대는 무장선전 활동에서 커다란 성과를 이룩함으로써 전민의 항전을 크게 고무해주었다. 1941년에 들어와 중국의 항일전쟁은 대치단계에 들어서게 되였다.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는 화북의 인민들을 항일에로 이끌고 일본군을 와해하며 화북에 있는 조선인을 쟁취하기 위해 본격적인 무장선전 활동을 전개하였다. 화북지대는 3개대로 나뉘여 평한철도(平漢鐵道 북평으로부터 무한까지)연선에서 활동하였다. 제1대는 대장 리익성과 지도원 진한중(陳漢中)의 인솔하에 하북성 한단(邯鄲)이남에서 활동하였고 제2대는 대장 김세광(金世光)의 인솔하에 석가장 부근의 원씨, 찬황(贊皇), 림성(臨城) 부근에서 활동하였으며 제3대는 대장 왕자인(원명 최인 崔仁), 지도원 박무(朴茂)의 인솔하에 석가장 이남 한단 이북의 사하(沙河), 형대(刑臺), 무안(武安) 부근에서 활동하였다. 대원들은 마을에 내려가 사람들을 모아놓고 좌담회, 련환회, 군중집회를 가지고 그들의 항일의지를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적의 진지에 접근해 적군을 와해시키는 함화(咸話)를 진행하였다.   (권립교수) “1941년 12월에 있은 호가장 전투. 그날 화북지대 제2대 대장 김세일 동지는 전사 스물아홉명을 거느리고 호가장에서 군중대회를 열고 선전사업을 했고 항일조직사업을 도왔습니다다.”   김세광이 이끄는 화북지대 제2대는 1941년 11월 중순경에 무장선전 활동을 개시하였다. 20여명 대원들은 의용대 총부 소재지인 산서성 동욕진(桐峪鎭)을 출발해 원씨현에 이르렀다. 그들은 석가장 지역 각지 정세를 살피고 그곳 군중들을 동원할 선전물을 준비해가지고 길을 떠났다. 원씨현에 도착한 그들은 현지의 항일무장부대인 원씨현 독립영(獨立營)의 환영을 받았다. 조선의용대 대원들은 원씨, 북영(北營), 왕가장(王家莊) 등지를 다니며 좌담회와 군중집회를 가졌고 또 무장(武莊)의 적 보루에 접근하여 대적 함화를 하였다. 마을에 들어서면 조선의용대 전사들은 각각 자신의 역할을 발휘하였다. 일부 대원들은 마을 사람들을 모아 놓고 연설도 하고 노래도 배워주면서 군중집회를 가졌다. 이때면 다른 대원들은 일제를 반대하는 구호를 바람벽에 써놓거나 삐라를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위험한것은 대적 함화였다. 의용대 대원들은 적진과 50킬로메터 거리를 두고 메가폰으로 반전선동을 진행하였다. 그들은 류창한 일본말로 제국주의와 군국주의 죄행을 폭로하면서 죄악의 전쟁을 멈출것을 권고하였다. 함화는 대체로 밤에 진행하기때문에 적들은 상황을 파악하지 못해 일반적으로 출동하지 않았다. 이처럼 선전활동을 활발히 전개하던 제2대 대원들은 12월 11일, 찬황으로 가던 도중 호가장 마을에서 숙영하게 되였다. 원씨현 경내에서 활동하던 조선의용대 제2대는 12월 11일 첫 전투를 맞이하게 되였다. 이날 새벽 일본군 30여명과 괴뢰군 40여명이 선옹채(仙翁寨)를 습격하였다. 적정을 발견한 전투원들은 신속히 반격에 나섰다. 조선의용대 대원들은 독립영 전사들과 함께 유리한 지세를 점하고 일제히 사격하였다. 뜻하지 않은 반격을 받고 적들은 많은 시신을 남기고 도주하였다. 선옹채 전투에서 의용대와 독립영은 사상을 내지 않은 상황에서 100여명의 적들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선옹채 전투가 있은 다음 조선의용대 제2대는 서안사변 기념일인 12월 12일에 호가장 마을에서 선전활동을 진행하기 위해 호가장으로 갔다. 선옹채에서 호가장 마을까지는 산길로 30여분 거리였다. 밤이 깊어지자 대원 고상철(高相喆)이 보초를 서고 기타 대원들은 호가장 마을의 큰집을 빌어 투숙하였다. (권립교수) “그날 밤, 그들은 수백명의 일본군에 의해 포위되였습니다. 동틀 무렵부터 피타는 포위망 탈출전투가 시작됐습니다.” 이튿날 날이 밝아오자 마을 밖에서 뜻하지 않은 총소리가 자지러지게 울렸다. 대원들은 신속히 일어나 집 앞에 집합하였다. 제1분대 분대장인 조렬광(趙烈光)은 대원 장례신(張禮信)에게 적정을 살피도록 명령하고 기타 대원들과 함께 탈출계획을 연구하였다. 호가장마을에 살던 괴뢰군 가족이 의용대의 상황을 적에게 보고했던것이다. 적은 찬황, 획록(獲鹿), 정형(井陘)의 200명 병졸을 끌어 모아 3면으로 마을을 포위하고있었다. 부근에서 활동하던 팔로군 독립영 1련이 경계하던중 적과 접전하게 되였다. 독립영은 호가장 마을의 의용대를 지원하려했지만 적의 포위를 뚫지 못했다. 적정보고를 받은 김세일대장은 마을북쪽으로 철수하라고 명령하고 손일봉(孫一峰), 박철동(朴喆東), 김학철(金學哲)등과 함께 엄호를 맡았다. 대부분 대원들은 포위를 뚫고 나왔지만 엄호를 맡은 대원들은 부상을 입고 뒤에 처졌다. (권립교수) “손일봉은 탄알이 다 떨어지고 수류탄도 하나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일본군 8명이 산굽이를 돌며 그를 향해 덮쳐들고있었습니다. 손일봉은 비호같이 덮쳐들어 일본 소대장 한놈을 끌어안고 옆에 있는 바위로 들이쳤습니다. 수류탄의 폭음과 함께 손일봉은 일본군 8명을 저승에 보내며 장렬히 희생되였습니다.” 손일봉은 탄약이 떨어지자 수류탄을 들고 일본군 소대장에게 덮쳤다. 《쾅》하는 굉음과 함께 손일봉은 7, 8명 놈들과 함께 쓰려졌다. 전우가 장렬히 희생되는것을 본 박철동은 계속 적들과 육박전을 치르다가 적의 총검에 찔려 희생되였다. 이들과 함께 엄호를 맡았던 한청도(韓淸道) 역시 적들과 싸우다 희생되였다. 그는 총탄이 떨어지자 원쑤들과 함께 죽을것을 각오하고 수류탄을 터쳤다. (권립교수) “스물여섯살의 전사 박철동은 일본군 두놈과 육박하여 두놈을 쓸어눕혔지만 온몸이 피투성이 되였고 맨 주먹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날창을 꼬나든 일본놈이 또 덮쳐들었습니다. 그는 가슴을 내밀고 ‘찔러라, 강도놈아!’하고 웨치며 장렬히 최후를 마쳤습니다. 이 전투에서 우리 의용대 전사 네명이 희생되고 많은 부상자를 났습니다. 대장 김세일도 중상을 입었습니다. 김학철 선생도 이 전투에서 체포되여 일본감옥으로 압송되였습니다.” 기타 대원들은 계속 접전하면서 산기슭 오솔길을 따라 독립영이 있는 룡팔채쪽으로 퇴각하였다. 호가장전투에 직접 참가한 장례신선생은 후날 전투 경과와 손일봉, 박철동, 한청도 세대원의 희생경과를 회억하는 글을 남겼다. 그리고 후에 중국 조선족 문단의 거장으로 된 김학철선생도 바로 호가장전투에서 다리에 총탄을 맞고 일제에게 체포되여 옥고를 치렀던 것이다. 60여년전 피비린내와 화약내를 확확 풍긴 처절한 전투가있었던 호가장마을은 지금 적막에 잠겨있다. 중국인민의 항일전쟁에서 겪은 수많은 대규모 전투에 비하면 호가장전투는 큰 싸움이 아니였다. 그러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마지막 순간까지 일제를 소멸하였던 손일봉, 박철동, 한청도를 비롯한 조선의용대 전사들의 영웅적 행동은 사람들을 크게 감동시켜주었다. 그들은 실제행동으로 조선의용대는 수적으로는 적지만 철 같은 대오이고 영웅적 대오이며 조선인민은 두려움 모르는 불굴의 민족이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들의 빛나는 투쟁정신과 영웅적 행동은 널리 전해지면서 항쟁에 나선 천백만 조선인민과 중국인민을 크게 고무해 주었다.   이곳에서는 옥수수를 지붕에 말린다 호가장 마을의 낡은 담벽과 대문 의용대 전사들이 수류탄을 터쳐 죽음으로 왜놈들을 소멸했던 탈곡장    한국에서 찾아온 가족들이 손일봉, 박철동, 한청도  렬사의 묘소를 참배하고있다   《불멸의 발자취》김성룡저 민족출판사 2005
60    제60회 보정과 석가장에서의 답사 댓글:  조회:4275  추천:0  2014-01-20
로구교사변이 있은후 중국의 국공합작이 이룩되여 전면적인 항일전쟁이 개시되였지만 중국의 위기는 더욱 커갔다. 야망의 일본침략군은 흔구전역에서 국민당국을 격파한후 태원을 함락하였고 송호회전을 거쳐 상해, 남경, 항주를 련이어 강점하였다. 일제는 장개석과 국민정부를 굴복시키기 위해 남경에서 30만명에 달하는 무고한 시민들을 학살하는 피비린 만행을 저질렀다. 일제의 만행앞에서 군민들은 일떠났지만 정면전쟁에서의 국민당군의 실패는 거듭되였다. 비록 리종인이 서주에서 대아장전역의 국부적인 승리를 이룩했지만 전세를 돌려세울수 없었다. 급급히 무한으로 공격해오는 일본군을 막기 위해 장개석은 황하의 언제를 폭파하는 비상수단까지 동원하였다. 이는 비록 일제의 공격을 잠시 제지시키기는 하였지만 황하류역 수많은 농가와 밭들이 물에 잠겼고 천만명에 달하는 백성들이 목숨을 잃고 가옥을 잃고 류리걸식하게 되었다. 화북, 화동, 화중의 광활한 국토가 일본침략자들에게 강점되고 수억 중국인민이 일제에게 짓밟힐 위기의 시각이 닥쳐왔다.   (권립 교수) “중국공산당이 령도하는 팔로군과 신사군은 화북과 화동지역에서 새로운 적후항일근거지를 개척함으로써 일본침략자들을 유력하게 타격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항일전쟁시기 팔로군은 태항산을 중심으로 피어린 항쟁을 진행하였습니다. 연안으로부터 온 수많은 조선혁명자들과 국민당 통치구를 떠난 조선의용대 주력이 태항산에서 팔로군과 함께 일제와 싸웠습니다. 그리고 많은 조선혁명가들이 계속 국민당 각 전장에서 싸웠고 도시에서 지하투쟁을 전개하였습니다. 하늘을 치받고 솟은 태항산의 장엄한 뭇봉과 가없이 펼쳐진 황토고원의 두터운 황토, 편벽하고 검소한 마을마다 조선의용군 전사들의 씩씩한 모습이 비껴있고 그들이 남긴 력력한 자욱이 아직까지 남아있습니다.” 항일전쟁시기 피어린 항쟁을 한 조선혁명자들의 행적을 찾아 태항산으로부터 연안까지의 답사를 시작한 것은 2003년 10월 20일이였다. 가을이 한창 무르익는 때라 날씨는 쾌청하고 하늘은 한결 맑았다. 연변텔레비죤방송국 기획부의 서봉학주임, 중앙인민방송국 박군기자 그리고 중앙당학교 최룡수교수와 함께 오전 8시 북경을 출발하였다. 우리는 북경 서역에서 기차를 리용하여 보정으로 향했다. 하북성 중부에 위치한 고도 보정시는 항일전쟁시기 하북성 성 소재지였고 줄곧 하북성의 물류중심이고 교통중추였다. 동으로는 유명한 항일전적지 백양전(白洋澱) 담수호가 있고 서쪽으로는 태항산에 린접해 있는 보정시는 북경의 남대문으로 불리우기도 한다.   보정시의 볼거리는 많았지만 우리가 답사해야할 곳은 보정사범학교(保定師範學校)와 보정륙군군관학교(保定陸軍軍官學校) 옛터였다. 북경에서 보정까지는 130킬로메터, 기차로 두시간 정도의 거리였다. 보정사범학교는 기차역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보정시 서하관가(西下關街)에 위치하였다. 검은 담과 기와로 정교하게 만든 학교 옛 교문은 많이 낡아 지금은 사용되지 않고 있었다. 관리일군을 찾아 교문을 열어보니 아치형 교문 너머로 정원에 세워진 정교한 조각상 하나가 보였다. 하얀 대리석으로 된 녀대생의 모습이였는데 단발머리에 짧은 치마를 입고 책을 든 모습이었다.     보정녀자사범학교 원 사범학교 교장 동금의(오른쪽 두번째) 로인 고풍적인 학교도서관 학교기념관에 전시된 학교혁명사-김산(장명)의 행적이 밝혀있다   학교 력사교원인 왕병강(王炳剛) 부교수가 우리를 안내 해 주었다. 학교 정원으로부터 시작해 우리는 학교의 옛 도서관 전시실, 7.6렬사기념관(七六烈士紀念館)을 참관하였다. 사범학교 교장으로 있었던 동금의 로인이 우리의 답사를 돕기 위해 모처럼 학교에 나와 학교관련 력사를 설명해 주었다. 1904년에 설립된 보정사범학교는 유구한 력사를 가진 학교다. 옛날에는 직예 제2사범학교로 불리웠고 후에는 하북성립사범학교로 불리다가 지금은 보정사범학교라는 공식명칭을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민간에서는 아직도 이사(二師)로 불리우고 있다. 1923년 학교에 중국공산당 당조직이 있었고 많은 진보적인 교원과 학생들이 이곳에서 학습하였다. 《9.18사변》후 교원과 학생들은 일본침략자들에게 저항하지 않는 당국에 항의하여 투쟁하였다. 1932년 7월 6일, 보정사범학교에 공산당원이 많다는 것을 탐지한 국민당 당국에서는 일제밀정과 함께 학교에 돌입하여 진보적인 교원과 학생을 체포하려 하였다. 당시 학교에는 80% 사생들이 공산당원과 공청단원, 반제대동맹, 좌익작가련맹에 참가한 진보 인사들이였다. 이들은 학교를 보위하고 공산당원들을 보호하기 위해 당국에 대항하여 싸웠다. 당국에서는 군대와 경찰을 동원해 이들의 투쟁을 진압하였는데 진압과정에서 36명이 체포되고 9명이 피살되였다. 이들을 7.6렬사라하고 학교에는 이들을 기념하는 7.6렬사기념관이 있었다. 동금의 로인은 학교의 관련자료를 찾아 조선혁명가 장명(김산)이 학교에서 활동했던 사적을 이야기 해 주었다. 당시 김산은 장명이라는 이름으로 학교 력사교원으로 있었다. 당 대표의 신분으로 당 조직을 발전시키던 그는 적이 추적해 오자 진보적인 교장과 학생들의 도움을 받아 피신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학교자리에는 2층으로 된 교수청사와 학생기숙사 옛 건물이 그대로 보존되여있었다. 그리고 학교정원에는 학교 초창기에 심었다는 고목이 남아있었다. 우리는 해묵은 나무 그늘아래 학생들과 모여 앉아 지식을 론하고 혁명사상을 전하는 조선혁명가 김산의 모습을 그려보면서 보정사범학교에 대한 답사를 마쳤다.   사범학교를 보고나서 간단한 점심 식사를 하고 오후에는 다른 한 답사지인 보정륙군군관학교 옛터로 향했다. 조선의용군 사령으로 있었던 조선혁명가 무정이 다녔다는 보정륙군군관학교 옛터는 보정시 동북교외인 위생로(衛生路) 북쪽에 위치해 있었다. 5, 6층 낡은 주민아파트와 가로수가 늘어선 좁은 거리, 편한 모습으로 거리를 걷는 행인들...보정시는 번화한 상업도시라기보다는 비교적 조용한 소도시였다. 주민구를 벗어나 동북쪽으로 가니 널찍한 거리가 나타났고 봉건시대 관아의 문(衙門)과 흡사한 건물이 나타났다. 다른 점이라면 문 앞에 위엄을 부리는 돌사자가 없을 뿐이였다. 붉은 기둥에는 보정군교기념관(保定軍校紀念館)이라는 간판이 붙어있었다.   보정군관학교 상무당 학교를 졸업한 명사들을 소개하는 담벽   보정군관학교 기념관앞에서 최룡수(오른쪽) 교수와 함께 붉은 대문을 열고 들어서니 커다란 정원이 나타났다. 정면에는 상무당(尙武堂)이 있었고 주변에 단층집 몇 채가 줄지어 있었다. 단층집은 유물들을 전시하는 전시관으로 사용되고있었다. 상무당 뒷벽에는 군관학교 1기부터 9기까지 졸업생들의 상황을 밝히고 또 명단을 적은 도표가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훑어보아도 무정이라는 이름을 찾을수 없었다. 최룡수교수는 아마도 무정은 변성명을 했을 가능성이 많고 원적도 중국 동북으로 했을 가능성이 크다면서 비슷한 것을 찾아보라고 하였다. 보정사범학교 왕병강부교수는 륙군군관학교에 관련한 력사를 많이 연구한 분이였다. 그에게서 제공받은 자료에는 륙군군관학교를 졸업한 전부 명단이 있었다. 하지만 거기에도 무정이라는 이름을 찾아볼수 없었고 또 무정이라고 추정할만한 이름도 없었다. 우리는 커다란 의문을 안고 륙군군관학교 기념관을 돌아보았다. 기념관은 아직 준비단계여서 본격적으로 개방되지 않고있었다. 더욱 상세한 자료를 찾을수도 없었다. 학계에서는 이시기 무정은 보정륙군군관학교 혹은 산서의 북방군관학교를 졸업했다는 두 가지 설이 있지만 모두가 분명하지 않다. 보다 유력한 증거인 무정의 친필 약력을 보면 무정은 1923년초에 중국에 들어왔다가 1925년 장가구에서 입당하였다. 그러므로 무정이 륙군군관학교에 입교할 수 있는 시간은 1924년이 분명하다. 그리고 하북성의 장가구에서 입당하였다니 멀리 산서성의 북방군관학교를 다닌 것이 아니라 같은 하북성에 위치한 보정에 있었다는 것이 더욱 유력한 추측이다. 더욱이 무정이 팔로군 포병퇀 퇀장을 맡았을 때 포병퇀 정치부 주임으로 있었던 중국인 원광(袁光)은, 무정은 보정군관학교 출신이라고 한 증언이 있다. 보정륙군군관학교는 1912년부터 1923년까지 도합 9기로 학생들을 졸업시킨 당시 중국에서 규모가 비교적 큰 근대적인 군사학교였다. 학교전신은 원세개가 1902년에 설립한 륙군학당이다. 륙군학당은 근대적인 군사교육체계를 형성하기 시작했지만 1911년에 신해혁명이 폭발하면서 대부분 학원들이 부대에 돌아갔기때문에 학교 운영이 중지되였다가 1912년부터 다시 보정륙군군관학교로 출범하였다. 이때까지 학교는 3기에 거쳐 240여명을 졸업시켰다. 1923년, 학교는 군벌혼전을 겪은데다가 또 운영경비마저 부족한 탓으로 일년간 중지되였는데 그때까지 도합 5기로 510명 학원을 졸업시켰다. 1924년에 갖은 어려움을 극복하고 제7기 입교생을 받았다. 그뒤 다시 북벌전쟁이 일어나는 등 많은 혼잡이 빚어졌기때문에 1924년후의 졸업생 관련자료가 자상하지 않을수도 있다. 그러므로 무정은 1924년 제7기(1912년부터 계산)로 보정륙군군관학교 포병과에서 수업한 것으로 추정된다. 보정륙군군관학교는 장개석, 진성, 류치(劉峙), 설악, 장치중, 부작의(傅作義), 도치악, 엽정, 동진당(董振堂), 하기풍(何基豊)을 비롯한 수많은 중국 고위장령들을 배출하였다. 이들 가운데서 엽정, 동진당, 하기풍은 중국공산당을 따라 혁명하였고 장치중, 부작의, 도치악도 선후로 중국공산당쪽으로 넘어왔다. 장개석이 회억한데 의하면 그가 입교할 때 절강성에서만 하여도 천여명이 보정륙군군관학교에 지망하였는데 합격되여 정식 입교한 자는 겨우 14명 뿐이였다한다. 그만큼 입교가 어려웠고 엄격한 시험이 있었던 것이다. 당시 북경에 온 무정은 입교시험을 통과해 보정륙군군관학교 포병과에 입학하였고 꾸준한 학습을 거쳐 우수한 포병전문가로 성장하였던 것이다. 보정륙군군관학교 옛터를 떠나면서 우리는 무정에 관련한 더욱 유력한 증거를 찾지 못해 유감스러웠다. 더욱 많은 연구가 따라가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보정륙군군관학교를 답사한 다음 서둘러 보정시를 떠나 석가장으로 갔다. 우리는 뻐스를 리용하기로 하였다. 뻐스역에는 석가장으로 가는 소형 관광뻐스가 많았다. 우리는 자리를 정하고 오후 4시가 넘어서 하북성 소재지인 석가장시로 출발하였다.   차는 북경에서 석가장으로 통하는 경석(京石) 고속도로를 따라 2시간후에 석가장에 도착하였다. 성 소재지인 것만큼 석가장은 보정시 보다 퍽 번화했고 상업적인 분위기도 다분하였다. 우리는 석가장의 굉원대주점(宏苑大酒店)에 입주하였다. 비교적 괜찮은 호텔이였다. 저녁에 호텔을 나와 발 가는 대로 거리를 거닐다가 한식점에서 간단한 식사를 하였다. 10월 21일 아침, 석가장에 있는 화북렬사릉원(華北烈士陵園)으로 가 보았다. 석가장시 중심부의 중산서로(中山西路) 343번지에는 남향으로 축조된 거대한 릉원이 있다. 검은 대리석판으로 된 정문에는 중국인민해방군 화북군구 렬사릉원이라는 금빛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정문을 들어서니 넓은 광장에 키 높이 솟은 렬사기념탑이 보였다. 광장 주변의 푸른 소나무 숲이 우거진 속에 기념관 건물이 몇 개 있었다. 기념탑 뒤로 걸어가니 푸른 잔디밭이 있었고 거기에는 기념동상들이 3줄로 배렬되여있었다. 그 가운데서 가장 앞자리에 조선혁명가 주문빈 렬사의 반신 동상이 있었다. 동상을 받쳐주는 기념비에는 주문빈 렬사에 대한 다음과 같은 소개문이 적혀있었다. 《주문빈 1908-1944. 원명은 김성호, 조선평안북도 의주군 홍남동 사람. 원 중공 기열변(冀熱邊) 특구 조직부장. 항일전쟁전에는 로동운동에 종사. 1944년 가을 풍윤현 양가포 전투에서 희생.》 우리민족의 자랑인 주문빈 렬사가 하북성 동부에서 항일하다가 희생된 후 그의 유해는 당산에 있는 기동렬사릉원에 모셨다가 격이 더 높은 이곳으로 이장하였던 것이다. 정원 한쪽에 렬사들의 묘지가 있었다. 흰 돌로 정교하게 만든 묘지가 줄 지어있었는데 가운데 주문빈 렬사의 묘소가 있었다. 답사팀 일행은 묘소 앞에 묵도를 드리면서 일본침략자들과의 피어린 전투에서 영용히 희생된 주문빈 렬사의 빛나는 한생을 그려보았다. 1937년, 항일전쟁이 전면 개시되자 팔로군 115사는 산서성의 오대산(五臺山)을 중심으로 적후 항일유격근거지를 창설하기 시작하였다. 주문빈 렬사는 유격대를 거느리고 하북성 동북부에서 싸웠다. 8년간의 피어린 항쟁을 거쳐 근거지는 료녕성 금주(錦州)이남 발해(渤海)서부 산서, 차할, 하북의 광활한 지역을 포함한 진찰기 해방구로 확대되였다. 석가장 화북렬사릉원 주문빈렬사의 동상 동상비석의 비문   부지면적이 21만평방메터에 달하는 석가장 화북렬사릉원은 화북전장에서 일본침략자들과 싸우다가 희생된 렬사들을 기념하기 위해 축조한 릉원이다. 항일전쟁 승리후 1948년, 주덕 총사령은 석가장에 렬사릉원을 만들어 화북대지에서 희생된 렬사들을 기념할 것을 제기하였다. 그리하여 렬사릉원은 1953년에 준공되여 이듬해부터 대외로 개방되기 시작하였다.
59    제59회 무정부주의자 류자명 댓글:  조회:4744  추천:0  2014-01-17
우리민족 독립운동사에는 중요한 정치리념의 하나로 무정부주의가 있었다. 무정부주의(無政府主義)는 서방 리론으로서 유럽의 그리스어 《아나르코(anarchos)》에서 기원한다. 아나르코란 지배자가 없다는 뜻이다. 모든 사람이 평등하고 자유롭게 살아가는 세상을 의미하기도 한다. 때문에 지금 많은 저서들은 무정부주의를 아나키즘(Anarchism)이라고 하지만 이 사상이 동방으로 전파될 때 일본학자에 의해 무정부주의로 번역되면서 계속 무정부주의라는 표현을 쓰게 되였다. 우리민족 독립운동사에서 리회영(李會榮), 정화암(鄭華巖)과 함께 무정부주의 대표로 평가받고있는 반일투사가 바로 류자명이다. 이들은 모든 지배자와 억압자들을 반대하고 개인의 절대적 자유를 숭상하는 무정부주의 리념으로 일본침략자들을 반대하고 자유로운 조선을 건립하기 위한 항쟁에 나섰던 것이다. 류자명은 중국망명후 의렬단에 참가해 요원으로 활약하였으며 조선혁명자련맹을 이끌고 중국내 조선혁명자들의 통합을 위한 조선민족전선련맹의 구축을 적극 주도한 지도자의 한사람이다.   청년시기의 류자명 북해공원에서 이야기하는 최룡수 교수와 류자명의 딸 류득로 녀사 2003년 10월 28일에 답사팀은 북경의 유명한 관광명소인 북해공원(北海公園)에서 류자명의 딸 류득로(柳得櫓) 녀사를 만났다. 편한 양복을 입은 류득로 녀사는 부리부리한 두 눈이 매우 인상적이였다. 강한 인테리적 느낌을 주는 그는 중국과학기술대학(中國科學技術大學) 재료물리(材料物理)와 화학학부 교수, 박사 지도교원으로 사업하고있었다. 북해공원의 조용한 곳을 찾아 자리를 정해 앉은 후 류득로 녀사는 아버지의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아버지께서는 다년간 비밀활동을 하셨기 때문에 많은 일들이 알려지지 않고있습니다. 그리고 평소에 아버님은 말쑤가 적으셔서 우리에게 이야기하지 않았고 어머님도 이야기하지 않아 우리도 잘 모릅니다. 생활면에서 보면 아버지는 매우 검소한 분입니다. 밥 한 그릇에 김치가 있으면 식사가 되지요. 우리 집 김치는 아버지께서 담그는 방법을 가르쳐서 어머니가 알게 되었고 저도 배워서 좀 담글 수 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김치를 아주 즐겨 잡수셨거든요. 그리고 아침에는 차를 마십니다. 그이는 노래도 하지 않았고 춤도 몰랐습니다. 언제나 엄숙한 표정이셨습니다. 젊었을 때는 수영을 좀 했다고 하지요. 그리고 바둑을 좀 알뿐 기타 문예활동은 몰랐습니다. 젊어서부터 그러셨나 봅니다.》 딸 류덕로 녀사가 회억하는 류자명은 언제나 소박하고 엄숙한 사람이였다. 다년간의 혁명활동에 종사하는 가운데서 형성된 성격일 것이다. 류자명(1894-1985) 류자명(1894-1985)은 충청북도 충주(忠州)에서 태여났다. 3남매중 막내로 태여 난 그의 원명은 류흥식(柳興湜)이였고 류자명은 중국내에서 활동할 때 사용하던 이름이였다. 1910년, 충주 보통학교를 졸업한 그는 부모들의 의사에 따라 봉건혼인을 치르고 이듬해 충주 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어려서부터 농학자의 꿈을 키워온 류자명은 그후 수원(水原) 농림학교를 졸업하고 충주 간이농업학교(簡易農業學校)에서 교원으로 사업하다가 “3.1”운동을 겪게 되였다. 그는 학생중심의 시위를 계획한 것으로 일본경찰의 감시를 받게 되여 중국 상해로 망명하였다. 상해에서 류자명은 림시정부 충청도 대표의원으로 선출되여 한동안 활동하다가 1921년 서울을 거쳐 중국 북경에 도착하였다. 북경, 천진 지역에서 류자명은 신채호, 김약산을 비롯한 혁명자들을 만나 의렬단의 요원으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김약산의 부탁을 받고 단재 신채호를 만나 함께 의렬단 선언을 작성하였다. 1923년에 의렬단 선언인 《조선혁명선언》이 발표되여 조선혁명가들의 심금을 크게 울려주었다. 이 시기 류자명은 또 조선식산은행(朝鮮殖産銀行)과 동양척식회사(東洋拓植會社)에 폭탄을 던진 의사 라석주(羅錫疇)의 의거를 비롯해 의렬단의 수차 의거에 깊이 관여하는 등 활동력을 보였다. 1927년 2월, 류자명은 김규식을 비롯한 혁명자들과 함께 남경에서 동방피압박민족련합회(東方被壓迫民族聯合會)를 조직하였다. 동방피압박련합회는 국민당의 후원을 받았고 회장에 김규식을 선출하였으며 기관지 《동방민족》을 영문, 중문, 조선문으로 발간하였다. 류자명은 련합회의 각국 대표들의 련락과 비밀지부 설립, 영향력 확장 등 사무에 참가하였다. 1930년대 류자명은 상해에서 많이 활동하였다. 그는 상해 강만(江灣)에 위치한 농업학교 립달학원(立達學院)에서 교원으로 사업하면서 남화한인청년련맹(南華韓人靑年聯盟)을 결성하고 남화통신(南華通信)을 간행하였다. 당시 상해에는 리회영, 정화암, 류수인(柳秀人), 박기성(朴基成)을 비롯한 많은 무정부주의자들이 모여있었다. 이들은 1931년 9월 18일 일본의 중국 동북 3성 강점과 더불어 남화한인청년련맹을 조직하여 반일사상을 적극 선전하였고 비밀결사를 조직해 친일파들을 응징하였다. 1937년 7월 7일, 중국의 전면적인 항일전쟁이 폭발하자 류자명은 조선혁명자들의 통일전선을 도모하였다. 줄곧 평범한 교원의 신분으로 비밀적으로 반일투쟁을 전개하던 그는 이 시기 조직적이고 통일적인 활동을 적극 모색하기 시작하였다. 이해 류자명은 남화한인청년련맹의 주요 맹원들을 토대로 조선혁명자련맹을 조직하였다. 조선총독부 경무국 자료를 보면 류자명이 조선혁명자련맹의 위원장을 맡고 류기석(柳基石), 박성기, 리승래(李升來), 정화암, 리종봉(李鐘鳳)이 위원으로 있었다. 그후 더욱 광범위한 통일전선조직을 구성하기 위하여 류자명은 조선혁명자련맹을 이끌고 조선민족혁명당, 조선민족해방자동맹, 조선청년전위동맹(朝鮮靑年前衛同盟) 등 단체들과 함께 민족련합전선인 조선민족전선련맹을 묶었다. 그는 김원봉, 김규광, 최창익(崔昌益 일명 리건우 李健宇)과 더불어 이 련맹의 대표자의 한사람으로 활동하였다. 남경이 일제에게 함락된후 련맹은 무한으로 옮겼다. 1938년 4월 10일 조신민족전선련맹의 기관지인 《조선민족전선》 창간호에는 련맹이 결성된 경위에 대한 류자명의 설명이 실렸다. 류자명은 글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본련맹은 주의나 사상이 각이한 단체들이 자기의 립장과 조직을 확보하면서 공동한 강령에 따라 실행하는 련합적인 조직이다. 련합전선(聯合戰線)의 전범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련맹을 절대 조선혁명 대중의 머리우에 군림한 지도단체로 간주하지 않는다. 우리는 련맹을 가장 완벽한 전민족의 통일전선을 구축하는 시점으로 할뿐이다. 때문에 가장 완벽한 통일전선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전선통일에 적극 노력해야한다. 우리는 이러한 통일전선이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는 투쟁에서나 미래 독립되고 자유롭고 행복한 국가를 건립할 때에나 모두 여러 당파의 공동노력을 수요한다는 것을 굳게 믿는다. 오직 이렇게 해야 만이 진정 조선민족의 자유롭고 행복한 생활을 가져올수 있기 때문이다.》 무한에서 류자명은 조선민족전선련맹의 대표리사의 한사람으로 조선의용대의 창립에 참여하였다. 그는 김원봉, 김규광, 김학무와 더불어 조선의용대 지도위원 사업을 맡아보았다. 무한이 함락된후 류자명은 김원봉과 함께 여러 곳을 거쳐 중경에 갔다. 김구(앞줄 좌로 두번째) 모친를 장례를 치르고, 앞줄 오른쪽 첫사람이 류자명 대한민국 림시정부 요원들 어려서부터 농학자의 꿈을 키워온 류자명은 1941년 중경을 떠나 복건성 농업개진처의 농업실험장에서 사업하였다. 그는 복건성 영안(永安)에 거처를 잡고 농예연구와 농작물 재배실험에 달라붙었다. 농예면에서 일정한 성과를 올렸기때문에 중국의 관련 학자들과 고위관원들이 류자명을 주목하게 되었고 여러곳에서 초청이 오기도 하였다. 그는 계림(桂林)에 농장을 세우고 농업기술을 지도하였다. 1943년 류자명은 중경으로 갔다. 그는 농장운영에 관련해 중경의 고위관원들을 만나고 또 중경에 있는 조선혁명가들인 김구와 김약산의 단합을 촉구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1944년 일본침략자들은 불리해진 정세를 돌려세우기 위해 발악적인 전역을 발동하였다. 일제는 중국내의 주력부대를 집중하여 예상계(豫湘桂) 전역을 감행하여 하남, 호남, 광서의 많은 지역을 점령하고 국민당군에게 커다란 타격을 주었다. 이해 류자명은 중경에 가서 조선혁명 각 당파 통일회의에 참가하고 림시정부 헌법기초위원의 한사람으로 일했다. 일제가 계림으로 공격해 오자 류자명 일가는 다시 복건성 영안으로 갔다. 그는 영안에서 전시 고아들을 거두어주는 강락신촌(康樂新村)에서 일을 보다가 항일전쟁 승리의 소식을 접하게 되였다. 류자명은 1946년 대만에서 장관공서(長官公署) 농림처에서 기술실 주임으로 사업하다가 《대만농업실험소》 소장을 맡았다. 대만농업실험소는 중국의 첫 농업과학연구소였다. 그후 류자명은 조선으로 가려 했지만 일이 쉽게 풀리지 않았다. 그는 향항을 거쳐 상해에 왔다가 1950년부터 호남성 장사(長沙)에서 호남대학 농예학부 주임으로 사업하게 되였다. 그때로부터 수십년간 류자명은 농학교수로, 교육자로 많은 연구를 하였고 신생한 공화국의 농예사업에 큰 기여를 하였다. 류자명은 원예면에서 지위가 매우 높았다. 특히 그는 포도재배에서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호남에는 포도를 재배하지 못하는 줄 알았지만 그의 연구로 하여 포도재배에 성공하게 되였다. 호남에는 여러종류의 귤이 많았는데 류자명은 귤 전문가로 소문이 높았다. 그리고 마왕퇴에서 출토한 농작물과 중국벼의 기원이란 론문을 발표해 국제사회의 광범위한 주목을 받기도 하였다. 류자명의 딸 류덕로 녀사는 《호남대학에 2급 로임을 받는 사람은 아버지와 부교장 두 사람》뿐이라고 하였다. 호남대학 학생들은 류자명의 집을 제집 다니듯이 다녔다고 한다. 또 일부 학생들이 일본어를 배우려 하자 류자명은 일어교원은 아니였지만 스스로 교과서를 만들어 학생들을 배워주기도 하였다. 그는 늘 농장이나 밭에서 학생들을 가르쳤고 연구사업에 몰두하였다. 류자명은 만년을 비교적 편하게 보냈다. 비록 문화대혁명의 시련도 있었지만 그는 조선 국적이였고 또한 주변의 많은 사람들과 잘 친했기때문에 욕을 보지 않았다. 당시 호남농업대학 지도부와 교원, 학생들은 모두 류자명과 가까이 지냈으며 그를 존경하였다. 문화대혁명시기 집 문앞에 《국제우호인사 류자명 선생댁이니 돌입하지 말라》는 간판을 붙여 주었다. 때문에 그는 동란기를 무난히 넘길수 있었다. 류자명은 또 중국의 대 문호인 파금(巴金)과도 매우 친숙하게 보냈다. 중국의 대표적인 무정부주의자였던 파금은 무한에서 류자명을 알게 되었고 그때부터 뜻을 같이한 두 사람의 우정이 시작되였다. 비록 늘 함께 있지 않았지만 해방후에도 파금과 류자명은 계속 가까이 친하는 훌륭한 벗이였다. 중국에서 우수한 농학자로 사업해 온 류자명은 1985년 4월 17일 호남성 장사에서 파란만장한 한생을 마쳤다. 그는 세상 뜰 때까지 끝내는 다시 조선에 가지 못하고 말았다. 저명한 농학자 류자명 류자명(오른쪽 두번째)부부와 중국의 명사들 중국의 저명한 소설가 파금이 류자명에게 보낸 서한 한국 독립훈장 증명서 북해공원의 시원한 바람결에 나뭇가지가 흔들린다. 류덕로 녀사는 잘 정리해둔 사진과 자료들을 펼쳐들면서 우리에게 설명해주었다. 청년시절의 류자명, 농학자로서의 류자명, 백범(白凡) 김구와 함께 찍은 사진들이 있었다. 확고한 무정부주의 리념으로 모든 인간의 평등을 주장하였던 류자명은 아무런 정치적 야심도 없이 오로지 민족의 해방과 전반 약소민족의 해방을 위해 묵묵히 항쟁해온 투사이다. 그는 평범함 학자의 신분으로 반일투쟁을 전개했으며 각파 정치세력이 첨예한 모순을 드러낼 때는 조용히 다시 학자의 신분으로 세상을 지켜보았다. 전반 인민의 광범위한 의지와 요구는 꼭 실현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며 살아왔던 것이다.
58    제58회 독립운동가 김철남 댓글:  조회:3986  추천:1  2014-01-14
가렬처절한 항일전쟁시기, 수많은 조선인 혁명가들과 독립지사들이 중국관내에서 중국 군민과 함께 피 흘리며 일본침략자들과 싸웠다. 적후 항일근거지에서 싸운 지사도 있었고 대도시에서 지하투쟁을 견지한 혁명가도 있었으며 항쟁의 제일선 전투에서 직접 싸운 투사들도 있었다. 또한 중국 항공부대에서 방어사무를 맡아본 장교도 있었는데 그가 바로 독립운동가 김철남이다. 독립운동가 김철남은 중국에서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 일찍부터 민족독립의 길을 찾아 중국에 들어온 그는 제1차 국내혁명전쟁시기부터 중국혁명에 참가하였다. 그러나 줄곧 국민당 장교의 신분이였기때문에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다. 독립운동가 김철남(1895~1952)은 또 김병두(金炳斗) 라는 별명도 있다. 3.1운동후 그는 중국 상해로 망명했고 광주의 황포군관학교를 졸업하고 줄곧 국민당군에 복무하였다. 항일전쟁시기 김철남은 국민당군 방공총감부(防空总监部) 과장을 지냈으며 1941년에는 귀양항공대대(贵阳航空大队) 대령()으로 근무하였다. 중국에서도 김철남은 반일활동을 활발히 진행하였다. 1921년 12월 그는 손두환과 함께 중국 각지의 조선인동지들을 규합하기에 힘썼고 기관지 을 발행하였다. 그후 상해에 거주하면서 한인의 친목과 단합을 도모하기 위해 한인구락부를 조직하고자 발기취지서를 작성하였다. 김철남은 1943년 11월에 림시정부 교통부 차장을 겸직하고 이듬해 12월에 다시 참모차장에 임명되였다. 1945년 2월 7일 동지들과 함께 신한민주당을 창당하고 14명 중앙집행위원의 한사람으로 되였다. 그가 서거한뒤 1972년에 한국정부는 그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한국정부가 발급한 독립메달 김철남의 부인 역소군 2004년 1월 21일에 답사팀은 음악공연과 교수에 다망히 보내는 김정평 교수와 련락을 가지고 그의 동생 김중평 교수의 집에서 만나기로 하였다. 김정평 교수와 김중평 교수가 바로 조선독립운동가 김철남의 장남과 차남이다. 김철남의 부인 역소군 녀사가 장남 김정평, 차남 김중평,넷째 아들 김인평, 막내딸 김애평과 함께 북경에서 생활하고있고 셋째 아들 김야평은 미국에서 사업하고 있었다. 이 가정은 말 그대로 음악가정이였다. 1929년 생인 김정평 교수는 중앙민족대학 음학학원의 교수이며 북경대학 음악감독 겸 지휘로 사업하고 있다. 차남 김중평씨는 중앙음악학원을 졸업하고 무한군구 가무단에서 사업하다가 퇴직하였으며 셋째 김야평씨는 중앙악단에서 근무하다가 미국에 갔고 넷째 김인평씨는 북경음악주보 부총편으로 사업하다 퇴직하였다. 그리고 막내딸 김애평씨는 음악교원으로 사업하다 퇴직한 분이다. 뿐만 아니라 이들의 자녀들까지도 음악에 남다른 재주를 보여 국제음악 대상을 수여받는 화려한 활약상을 보이고 있다. 독립운동가인 김철남에 관련해 알아보고저 한다고 하자 이들은 어머니 역소군 녀사를 모시고 한자리에 모였던 것이다. 96세인 역소군 녀사는 청각이 좀 불편했을뿐 퍽 건강해 보였고 자녀들의 도움으로 우리의 질문을 조금씩 알아듣고 아득한 추억을 더듬어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장남 김정평 교수도 이따금 내용을 설명해주었다. 사업에만 열중하고 늘 집을 돌보지 않았다는 아주 평범한 일로부터 이야기는 시작되였다. 독립운동가 김철남은 1895년 9월 12일, 조선 황해도 신천의 몰락해 가는 봉건지주가정에서 태여났다. 일본의 식민지 통치로하여 가정이 날로 몰락해갔기때문에 그는 어릴때 학교 다니기도 힘들었다. 그리하여 그는 미국 목사가 꾸리는 학교에서 청소를 하고 등갓을 닦는 등 잡일을 하면서 공부하였다. 어려서부터 부지런하고 총명한 그는 미국 목사의 도움을 받아 대학까지 가게 되었다. 그는 늘 교회에 가서 교회음악을 들었고 바이올린을 배우기도 하였다. 1915년 5월에 김철남은 서울 경신학교를 졸업한 뒤 독립운동을 할 념원으로 중국 상해에 왔다. 그는 상해, 남경지역을 전전하면서 혁명의 길을 찾았다. 그러던 김철남은 조선인 혁명자들의 규합에 심혈을 기울리다가 복건성 복주의 군관학교에 입학하여 군사지식을 배우게 되었다. 1924년 손중산이 광주에서 황포군관학교를 설립하자 김철남은 이 학교에서 사업하였다. 그는 황포군관학교 제3교도퇀 부퇀장으로 있으면서 교장판공실 부관으로있던 조선독립지사 손두환과 익숙히 지냈고 또 학교의 다른 조선인 지사들과도 함께 활동하였다. 북벌전쟁시기 김철남은 북벌군을 따라 광주로부터 강서성 남창으로 진격하였다. 북벌군이 승전한후 그는 남창에서 중국 녀성 역소군을 만나 결혼하였다. 그후 그는 국민당 총사령부를 따라 상해를 거쳐 남경에서 다년간 활동하였다. 상해, 남경에서 김철남은 국민당 고위 장교로 있었기 때문에 가정은 비교적 유족한 편이였다. 그는 이 시기 많은 조선혁명가와 독립운동가들과 접촉하면서 독립운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당시 상해, 남경에 오는 조선혁명자나 청년지사들은 모두 김철남을 찾아와 도움을 받았다. 그때면 김철남은 그들이 좌파든 우파든 헤아리지 않고 무릇 조선인이면 애써 도와주려 하였던 것이다. 그는 늘 조선혁명자와 조선청년들을 집에 수용하였고 그들이 혁명활동을 진행하도록 지원해주었다. 상해에서 김철남은 한 고향 사람이며 경신학교 선배인 최중호(崔重鎬1891-1934)와 의형제로 지냈고 김구, 김원봉과도 많이 접촉하였다. 최중호는 조선의용대의 한 사람이였던 최채(崔采 1914-현재)의 부친이다. 그리고 로씨야 비행학교를 졸업하고 온 장성철과 가까이 보냈고 녀동생을 그에게 시집보냈다. 락양군관학교를 졸업하고 온 박시창, 최창석(崔滄石 최용덕)도 김철남 일가의 많은 도움을 받았다. 김철남 일가는 많은 조선혁명가들을 도와주면서 묵묵히 독립운동에 기여한 혁명가족이다. 남경에 있을 때 그들은 삼산리(三山里) 1번지 화패루(花牌樓) 곁에서 살았다. 량쪽 부모에 많은 자녀까지 두었기 때문에 모든 가정부담은 김철남의 부인인 역소군 녀사가 짊어지게 되였다. 게다가 자주 찾아오는 조선혁명자들까지 도와주어야 했다. 역소군 녀사는 아무런 원망도 없이 이 임무를 감당해 나섰다. 돈이 없으면 물건을 저당 잡혀서 혁명자들의 로비를 마련해 주었고 손수 옷가지를 만들어 입혔으며 혁명자들을 집에서 먹이고 재워주었다. 김철남 일가가 상해, 남경에 있을 때 장성철, 손두환, 안공근(安恭根 안중근 의사의 동생), 최창석 그리고 녀류 비행사 권기옥(權基玉) 부부와 가깝게 지냈다. 황포군관학교 출신이고 또 국민당 조기 항공학교를 졸업한 장성철은 기술이 뛰여난 행기술자였다. 장개석을 비롯한 국민당의 군정 요원들의 비행기가 뜨기 전에 꼭 그에게 비행기 점검을 맡겼다고 한다. 장성철은 비행기의 발동소리를 듣고 고장난 곳을 정확히 짚어 내였다. 당시 국민당 공군의 가장 중요한 비행기 수리소가 곤명에 있었는데 장성철은 그 공장의 공장장이자 공정사로 있었다. 손두환도 황포군관학교 출신으로서 다년간 조선혁명가들을 많이 도와주었고 또 독립운동사에서 큰 기여를 한 인물이다. 최창석은 건강이 좋지 못한데다 일자리도 없어 상해에서 고생이 많았다. 최창석 일가는 늘 김철남 일가의 도움을 받았지만 최창석은 끝내 상해에서 병으로 별세하였다. 중국 운남항공학교를 졸업한 권기옥은 조기 녀류 비행사였다. 그의 부부는 김철남 일가와 이웃하였다. 조선의 진보적인 혁명가들과 접촉이 많았기때문에 이들은 늘 밀정들의 감시를 받아야했다. 권기옥 부부는 한동안 김철남의 집에서 피신하다가 체포된 일도 있었다. 그때 김철남은 집에 없었기 때문에 일을 모르고있었다. 역소군 녀사는 조용히 뒷문으로 빠져나가 집에 밀정이 있으니 오지 말라고 김철남에게 알려 무사할수있었던것이다. 김철남이 조선혁명가들과의 련락이 빈번하고 거기에 공산주의자들도 포함되였기때문에 국민당 특무들이 그를 주시하기 시작하였다. 1930년대에 김철남은 공산당 혐의를 받았고 밀정들을 눈을 피해 한동안 상해에 잠복해 있기도 하였다. 그의 어려운 처지를 헤아려 황포군관학교 시절부터 사귀였던 국민당의 많은 장교들이 도와 나섰다. 그리하여 그는 화를 입지 않았고 후에는 중앙륙군군관학교(中央陸軍軍官學校) 교관으로 학교에서 일어를 배워주었다. 황포군관학교 제8기 사생 명록을 보면 김철남은 외국문교관으로 나온다. 항일전쟁이 폭발되자 김철남은 국민당군 방공(防空) 부문에서 일하게 되였다. 그는 소극방공처(消極防空處) 처장으로서 소주(蘇州)에서 일본침략군의 폭격을 막기 위한 공습방어체계를 설립하다가 후에는 호남, 호북 공습방어 사령부에서 대령 군관으로 있었다. 김정평 교수는 항일전쟁시기 아버지의 사적을 이야기하였다. 항일전쟁시기 인재가 많이 필요했기때문에 김철남은 다시 군사위원회 공습방어 총감독부 소극방어처 처장으로 있게 되었다. 그는 적기가 오면 경보를 울리고 정보를 전하는 일을 도맡아 하였다. 일본침략군이 상해를 공격할 때 김철남은 소주에 가서 공습방어 초소와 공습방어 시스템을 구축하였다. 하늘에서는 적의 비행기가 빈번히 날아와 폭탄을 던졌지만 김철남은 태연하게 전화로 방어와 반격 작전을 지휘하였다. 송회호전이 끝난 후 그는 호남에서 공습방어사령부 사령으로 있었다. 무한회전을 비롯해 호남성 장사는 일제 주력부대의 수차로되는 공격을 받았다. 그러나 강의한 중국 군민들은 일치단합하여 장사전역의 승리를 이끌었으며 많은 적을 사살하였다. 그 가운데서 공습방어부대의 역할도 자못 컸던 것이다. 국민당군이 패퇴하여 중경에 수부를 옮기게 되자 그는 선후로 사천성 기강(綦江), 감숙성 란주, 사천성 성도(成都) 강진(江津) 군용비행장의 방공시설 구축사업에 참가하였다. 이때 그의 신분은 국민당 군사위원회 방공총감부(防空總監部) 과장(科長)이였다. 국민당군을 따라 일제와 싸우는 수차의 전투에 참가하는 동시에 김철남은 조선혁명가들의 반일혁명 투쟁에도 적극 참가하였다. 1937년 로구교사변이 일어나자 김철남은 민족전선을 결성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는 남경에서 손건(孫建), 리연호(李然浩)와 더불어 어느 단체에도 속하지 않는다는 개인신분으로 각 단체의 통합을 주도하였다. 그들의 노력으로 조선민족혁명당, 조선민족해방운동자동맹, 조선혁명련맹 3단체의 조선민족전선통일 촉성회가 출범하게 되었고 그후 수개월의 노력을 거쳐 12월 드디어 조선민족전선련맹이 출범하게 되였다. 1940년의 조선총독부 경무국의 자료에는 김철남이 김병두라는 이름으로 김규광이 이끄는 조선민족해방동맹의 주요 성원으로 기록되여있다. 중경에서 김철남은 계속 국민당의 관직을 보류한 상황에서 한국 림시정부 의정원 의원으로 교통부 차장을 지냈고 1944년에는 림시정부 참모차장으로 있다가 항일전쟁 승리를 맞이하였다. 김철남은 중경에서 포츠담 회의에 관련 소식을 접하게 되였다. 특히 이 회의에서 조선반도를 3.8선으로 분단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큰 실망을 안고있었다. 사상적으로 공산주의에 많이 접근했던 김철남은 림시정부를 따라 한국에 가지 않았다. 수십년간 일제통치하에서 억압과 착취에 시달렸던 조국과 인민이 진정한 자유와 독립을 누려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검은 구름은 가셔지지 않았고 드디어 새로운 전쟁이 터졌다. 다년간 민족의 독립과 해방을 위해 고심하고 투쟁해 오던 김철남은 커다란 마음의 상처를 안고 병석에 눕게 되였다. 중화인민공화국 창건후 북경인민예술극원(北京人民藝術劇院)에서 사업하던 그는 1952년, 페암으로 세상을 하직하였다. 장남 김정평 차남 김중평 넷째 아들 김인평 막내딸 김애평(왼쪽)과 독립운동가 장성철의 딸 장동옥(오른쪽) 김정평 교수는 아버지에게서 조선말을 배우지 못한것이 유감이였지만 혈액속에 흐르는 민족의 피는 예술면에서 큰 성과를 이룩하도록 격려해주었다고 말했다. 그는 아버지께서 남겨주신 민족의 정서와 정감은 그의 온 가정이 예술에 몸담게 된 가장 중요한 요인이라고 하였다. 음악에 관련되는 이야기가 나오자 예술인 가정 일동이 모두 흥미진진해졌다. 말쑤가 적던 김중평 선생은 이때 《윤극영이 작곡한 노래 은 아버지께서 가사를 중국어로 번역하여 전파하였다》고 알려주었다. 중국에서도 잘 아는 이 노래가 조선 독립운동가 김철남에 의해 전파되였다고 하니 놀랍기도 하였다. 정열에 넘쳐있던 김정평 교수가 제의하여 모두가 노래 《반달》을 부르기로 하였다. 장동옥씨가 피아노 연주를 하고 김정평 교수가 지휘를 맡아 모두들 노래를 부르며 조선독립운동가 김철남을 기념하였다. 
57    제57회 조선의용군의 북상 댓글:  조회:4854  추천:2  2012-12-03
.TRS_EDitor p{text-algin:justify; text-indent:1em;} .TRS_EDitor p font{text-indent:1em;} .TRS_EDitor div{text-algin:justify; text-indent:1em;} .TRS_EDitor div font{text-indent:1em;} .TRS_EDitor font{text-indent:1em;}   독립운동 원로들의 지지를 받은 김구는 이들을 중심으로 중경에서 한국림시정부를 계속 이끌어나갔다. 그리고 기강에서 한국독립당을 새롭게 만들며 장개석과 국민당의 신뢰를 얻은 김구는 림시정부 요원들을 이끌고 중경에 진입하게 되었으며 김원봉과 조선의용대를 통제하기 위한 목적으로 한국광복군의 창립을 주도하였다. 이와 반면 수적으로 우세한 소장파 진보적 청년들을 이끌었던 김원봉은 점차 국민당의 배척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조선민족혁명당과 조선의용대 대다수가 항일 제일선으로 나갈 것을 탄원하면서 직접 일제와 싸울 것을 결의하였다. 그리하여 1940년 중경에서 형식적으로 한국광복군이 창립되였고 이를 반대해 1941년 조선의용대 주력이 팔로군 통제구역으로의 북상이 있게 되었다.   사천성 기강현에 대한 답사를 마치고 중경에 돌아왔을때는 점심시간이 퍼그나 지난 오후였다. 비는 계속 구질구질 내리고있었다. 우리는 련화지 림시정부 청사 부근에서 음식점을 찾아 점심을 들었다. 비교적 활달한 가경해 관장이 우리를 초대하였다. 식사후 가경해 관장을 따라 우리는 중경의 다른 유적지를 찾아보았다. 1940년 중경에 옮겨온 한국림시정부는 처음에 양류가에 자리를 정했지만 일제의 폭격에 가옥이 파손되자 석판가로 옮겼다. 그러나 역시 일제의 폭격이 잦아 다시 오사야항 1호(號)로 이주했다. 오사야항이 바로 지금의 화평로 2항(巷)이다. 유중구 화평로(和平路) 2항에 이르니 찌그러진 2층 집들이 보였는데 헐망한 집에는 아직까지도 주민이 살고있었다. 나무와 얇은 벽을 발라 만든 건물은 금방 무너질것만 같았다. 이곳 5, 6, 7번지 건물이 당시 김구와 림시정부 요원들이 거처를 잡고 사무를 보던 곳이다. 중경시절 림시정부는 이곳에 가장 오래 머물러 있었고 김구는 여기에서 《백범일지》의 후반을 완수하였다. 오사야항 유적지에는 작은 기념비가 있었는데 한자로 《대한민국림시정부구지(大韓民國臨時政府舊地)》라고 새겨져 있었다. 기념비는 1995년 련화지의 림시정부 기념관을 만들 때 함께 세웠다 한다. 건물 위층은 복도로 서로 이어져있었고 김구는 당시 2층에 거주했다고한다. 지금 이곳에는 9가구가 살고있었다. 중경시 도시개발계획에 속한 이곳의 위험가옥은 곧 허물게 된다. 가경해 관장은 도시개발계획에 따라 언녕 허물어야할 건물이였지만 건물 앞 기념비가 있어 연장되였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곳을 보수하든지 아니면 새로 복원해 만들든지 조치를 취하도록 관련부문에 반영하련다고 말했다.   화평로 2항(옛 오사야항 1호)의 대한민국림사정부 거처 추용로 37번지, 한국 광복군 사령부가 있었던 곳(지금은 미원이라는 가게로 변함)   화평로의 림시정부 유적지를 보고나서 우리는 추용로(鄒容路)로 갔다. 추용로 37번지는 한국 광복군 사령부가 있었던 곳이다. 기강으로부터 중경에 본거를 옮긴후 김구는 림시정부 산하의 한국광복군을 창립하기에 서둘렀다. 조선독립운동진영의 통합을 요구하던 장개석도 이때 김구와 한국림시정부를 수락하고 조선의용대가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한국광복군의 창립을 허락하였던 것이다. 1940년 9월 17일 오전 중경 가릉빈관에서 한국광복군(Korean Independence Army)창립식이 있었다. 광복군 총사령은 리청천, 참모장은 리범석, 총무처장은 최용덕, 참모처장은 채형세(菜衡世), 부관처장은 황학수(黃學秀), 경리처장 겸 정훈처장은 안훈(安勛), 훈련처장은 송호, 군무처장은 류진동(劉振東)이였다. 광복군 창립식에는 림시정부 요원과 중국 국민당의 손과, 오철성(吳鐵城), 공산당의 주은래를 비롯해 100여명이 참가하였다. 광복군이 창립되였던 가릉빈관 자리는 지금 가릉 신촌(新村) 아파트 단지로 변해 버렸다. 광복군은 창립된후 각지에서 선전공작과 초모활동을 진행하였다. 사령부는 중경 추용로 37번지에 있는 국민당 군사위원회 군정부 건물에 정했다. 추용로에 도착하니 3층 낡은 건물이 나타났다. 낡은 건물이였지만 정면은 새롭게 장식하였고 1층은 미원(味苑)이라는 음식가게 였다. 이시기 한국광복군은 몇 개 지대로 나누어 활동하였다. 리준식(李俊植)이 제1지대장으로, 공진원(公震遠)이 제2지대장으로, 김학규(金學奎)가 제3지대장으로, 라월환(羅月煥)이 제5지대장을 맡았다. 광복군은 대부분 기간 본부를 서안에 정했기 때문에 중경의 추용로에 오래 머물지 않았다.   중경지역 답사를 시작해서 사흘째 되는 날인 11월 20일, 우리는 김원봉과 조선의용대의 행적을 찾아보기로 하였다. 아침 9시에 일어나 샤워하고 길을 떠났다. 날씨는 그냥 흐렸지만 비는 내리지 않아 다행이였다. 빈관앞에서 택시를 타고 중경시 남안구 탄자석(彈子石)으로 갔다. 거기에는 조선민족혁명당과 조선의용대 본부 옛터, 김원봉의 거주지, 광복군 제1지대 본부 옛터를 비롯한 유적이 있다. 중경시 남안구는 장강 이동과 이남지구가 포함된다. 탄자석은 남안구의 북부에 위치했다. 한시간 뒤 우리는 탄자석에 도착하였다. 우리는 먼저 조선민족혁명당과 조선의용대 본부가 있었던 탄자석 묘배타(苗背沱) 81번지를 찾아갔다. 묘배타는 산과 골짜기가 많은 곳에 위치했기 때문에 정확한 주소를 찾기가 여간 힘들지 않았다. 택시기사가 현지인들에게 열심히 물어서야 겨우 남안구 탄자석 묘배타 81번지를 찾아냈다. 옛날에는 손가화원(孫家花園)이라는 공원이 있던 곳인데 지금은 사천성 물자저장 관리국이 자리하고있었다. 이곳은 비교적 평탄한 곳이였다. 민가들이 촘촘히 들어선 골목길을 따라 들어가니 커다란 정문이 나타났는데 거기에는 국가저비국(國家儲備局) 435처(處)라고 씌여있었다. 정문 뒤로 커다란 공지가 있었고 한쪽에 새로 지은 3층 건물이 있었다. 옛날의 손가화원 정원과 건물은 가뭇없이 사라져 버렸던 것이다. 1940년 3월 중경에 온 김원봉은 조선민족혁명당 요원들과 함께 조선의용대 본부를 거느리고 이곳에 거처를 잡고 군사훈련을 하였다. 이시기 김원봉이 이끄는 조선민족혁명당과 김구가 이끄는 한국독립당은 통합을 이루지 못한 상황이였다. 당시 주소는 남안구 탄자석 아궁보(鵝宮堡)였다. 탄자석 묘배타는 비록 중경시에 속한다 하지만 주민 대부분은 농민이였고 생활도 넉넉하지 못한 편이였다. 묘배타를 보고나서 탄자석 대불단(大佛段)으로 향했다. 탄자석 상업구를 지나니 좁은 골목길 량켠에 크고 작은 가게와 난전을 펼친 시장거리가 나타났다. 비가 온 뒤라 길에는 흙물이 고여있었고 사람들로 붐볐다. 사람이 많고 길이 좁았기에 차를 시장 입구에 대기시키고 도보로 걸어 들어갔다. 시장길을 반쯤 더 들어가니 대불단 150호 건물 표식이 보였다. 2층 낡은 벽돌건물이였는데 지금은 유명한 동군각대약방(桐君閣大藥房) 분점으로 되여있었다. 이곳은 1942년 광복군 제1지대 본부가 있던 곳이다. 1940년 김구와 한국 림시정부가 중경에 자리를 잡자 곧 한국광복군의 창립을 이룩해냈다. 그리하여 국민당 통치구역에는 두 개의 조선인 반일부대가 있게 되였다. 하나는 국민정부 군사위원회에서 지지하는 조선의용대이고 다른 하나는 국민당이 지원하는 한국광복군이였다. 이 두 조선인 부대를 통합하기 위해 각 측은 많은 노력을 기울렸다. 이시기 조선민족혁명당과 조선의용대의 소장파 청년들은 일제와 직접 싸울수 있는 북상진로를 주장하였다. (권립 교수) "조선의용대 대장인 김원봉도 조선의용대를 광복군에 통합시키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조선민족혁명당 대회에서 북상을 결정하고 조선의용대 각 부대는 하남성 락양에 집결하여 북상항일 준비를 다그쳤습니다." 조선의용대 주력이 북상하여 팔로군 통제지역으로 가자 장개석과 국민정부는 광복군쪽으로의 통합을 요구하였다. 1941년 11월 김원봉은 조선민족혁명당 제6차 대회를 소집하고 림시정부에로 방향을 돌렸다. 그리하여 한국림시정부에는 한국독립당과 조선혁명당 두 당이 경쟁하는 국면이 나타났고 광복군을 재편성하게 되였다. 1942년 5월 조선의용대는 광복군 제1지대로 편성되고 김원봉은 광복군 부총사령 겸 제1지대 지대장으로 임명되였다. 그러나 이때는 조선의용대 주력이 북상한 뒤였기 때문에 사실 중경에 남은 대원들은 50여명 정도뿐이였다. 제1지대 본부에는 부지대장 신악, 비서에 리달(李達), 총무조장에 리집중, 조원에 한지성 등이 있었는데 이들은 중경 탄자석 대불단 150호에 거주하였다. 광복군 제1지대부가 있었던 대불단 150호로부터 조금 더 나가면 대불단 172호가 나타난다. 이곳은 광복군 부총사령이며 제1지대 지대장이였던 김원봉의 거처였다. 3층 벽돌건물이였지만 지금은 더욱 헐망하였다. 아래층은 간소한 음식을 만들어 파는 가게였고 그 곁에는 소매점과 동군각대약방 다른 분점이 있었다. 중경에서 조선혁명가들과 독립운동가들은 치렬한 경쟁을 계속 진행하였다. 한국림시정부내의 권력과 중국측의 지원금 사용을 비롯한 문제를 가지고 진행된 이러한 경쟁과 투쟁은 1945년 일제의 항복할 때까지 지속되였고 마침내는 단합이 이루어지지 못한채 각자가 귀국행로에 올랐던 것이다.   남안구 탄자석(손가화원 옛터), 조선의용대 본부가 있었던 곳 대불단 150호, 광복군 제1지대가 있었던 곳 광복군 1지대 김원봉, 2지대 리범석, 3지대 김학규(좌로부터) 대불단 172호, 김원봉가 있었던 거처 옛터   탄자석의 사적지들을 답사하고나서 다시 중경시 조천문으로 갔다. 저녁 배를 타고 중경을 떠나야 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타야할 배편은 바로 항일전쟁시기 조선의용대 주력이 북상하여 태항산 지역으로 나가던 배길과 비슷하였다. 11월 20일 저녁 우리는 조천문 부두에서 우의호(友誼號) 관광선에 올랐다. 3층으로 된 륜선은 관광객으로 가득했다. 우리의 방은 307번이였다. 4명이 함께 방 하나를 썼는데 침대는 상하 두 층으로 모두 6개가 있었고 방에 화장실 하나가 있었다. 날이 어두워져서 배는 네온등불빛이 휘황한 중경부두를 떠나 서서히 동으로 달렸다. 중국의 최대하천인 장강의 옛 명칭은 양자강(揚子江)이다. 세계의 지붕으로 불리우는 청장고원(靑藏高原)에서 발원하여 동해로 흘러드는 장강의 총길이는 6380㎞이다. 장강은 사천경내에서 민강(岷江), 타강(沱江), 가릉강과 합친뒤 무수한 산을 지나면서 세계적인 명소인 장강삼협을 형성했다. 구당협(瞿塘峽), 무협(巫峽), 서릉협(西陵峽)으로 구성된 삼협은 서부 봉절(奉節), 백제성(白帝城)에서 시작되여 호북성 의창까지 총 거리가 192㎞이다. 배가 중경시를 벗어나자 밖은 캄캄하여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이따금 울리는 뱃고동소리와 바람소리, 물소리가 들려올뿐이였다. 침대에 누워 조선의용대의 북상항일로선을 생각해 보았다. 조선의용대 출신인 최채 선생은 《태항산근거지를 찾아서》라는 글에서 그 경과를 자상히 서술하였다. 1941년 1월 1일, 조선의용대 부지대장인 박효삼과 정치지도원인 석정 윤세주는 의용대 제1지대와 제3지대 대원들을 인솔하여 《민생호》륜선을 타고 중경을 떠났다. 조선의용대의 태항산 진출은 김원봉이 비밀리에 중경 팔로군 판사처에서 사업하는 주은래와 련계하여 이룩되였다. 이를 모르는 국민당의 고위 관원들이 연회를 베풀어 이들을 전송하기도 하였다. 최채 선생의 증언에 따르면 김원봉은 의용대의 북상을 엄호하기 위해 중경을 떠나지 못했던 것이다. 김원봉마저 움직인다면 의용대의 북상행로의 정체가 드러나 누구도 국민당 통치구를 벗어날수없었기때문이다. 조선의용대 1지대와 3지대 대원들은 배를 타고 산간도시인 만현(萬縣)에 도착하여 하루 묵은후 1월 3일 봉절에 도착하였다. 이튿날 이들은 천하명승인 구당협, 무산(巫山) 12봉을 구경하면서 의창부근에 이르렀다. 당시 의창은 일제에게 강점되였기때문에 의창으로 가지 못하고 자귀(秭歸)에서 배를 내렸다. 이들은 다시 륙로로 호북성 로하구(老河口)를 거쳐 락양에 도착하였다가 맹진(孟津) 나루를 통해 황하를 건너 태항산근거지로 진출하였던 것이다.   아름다운 장강 소삼협 장강삼협의 웅위한 산봉들   11월 23일, 우리가 탄 배는 구당협을 거쳐 무산에 이르렀다. 장강의 지류인 대녕하(大寧河)가 이곳에서 장강에 흘러드는데 소삼협은 대녕하 상류에 위치했다. 우리는 작은 배를 바꿔 타고 천하절경인 소삼협을 관광하였다. 맑은 물과 울긋불긋 단풍이 든 산, 이따금 보이는 산간마을들은 참으로 선경인 듯 싶었다. 북상항일에 나선 조선의용대 대원들은 이 아름다운 삼협을 지나면서 어떤 생각들을 했는지? 무척 궁금했다. 역시 우리와 같이 장쾌하고 아름다운 경관에 매료되여 경탄을 련발했을 것이고 드넓은 중국대지를 누비며 일제를 타격할 의지를 더욱 굳혔으리라 생각하였다. 배는 계속 동으로 달렸다. 푸른 물결은 쉬임없이 흐르고 천태만상의 산봉들은 련달아 눈앞에 아득히 펼쳐졌다. 하나하나의 산봉들의 미묘한 자태를 눈에 새기기도 전에 또 다른 산봉이 나타나 숨까지 가빠났다. 철석같은 몸으로 장강을 조이는 듯 기문(夔門)은 웅위로운 남성의 미를 한껏 자랑하였고 구름이 허리에 감도는 신녀봉(新女峰)은 아름다운 소녀의 몸매를 련상시켰다. 웅위한 구당협, 수려한 무협, 위태한 서릉협을 거쳐 날이 어두워져서야 우리는 의창에 도착하였다. 의창에서 밤을 보내고 이튿날 비행기편으로 북경에 돌아와 중경에 대한 답사를 마쳤다.
56    제56회 7당 통합대회 사적지 댓글:  조회:4771  추천:3  2012-11-30
항일전쟁시기 중경지역에 모인 조선 독립지사들과 혁명가들은 또 다른 시련을 겪게 되었다. 조선의용대를 중심으로 부분적인 자체무장을 갖추었지만 대원 다수가 국민당 부대에 흩어졌기 때문에 특별한 전과를 기대하기 어려웠다. 게다가 국민당 통치구에서의 국공 량당간의 암투가 자못 치렬하여 조선반일지사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장개석과 국민당은 황포군관학교 출신이라는 관계로 김원봉과 조선의용대를 많이 신뢰하였지만 조선의용대 대원들 가운데 사상이 좌적이고 공산주의를 지향하는 사람이 많았기에 점차 이들을 신뢰하지 않기 시작하였다. 도리여 김구와 림시정부를 정통으로 간주하고 본격적인 지원을 주려하였다. 장개석은 김구와 한국 림시정부의 중경 진입을 처음에는 허락하지 않았다. 조선인의 통합을 전제조건으로 내 세웠던 것이다. 중국내 조선인 지사들 가운데서 가장 유력하고 통합된 당파를 만들어야 계속 지원을 줄수있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김구와 리청천을 비롯해 한국림시정부 요원들은 대부분이 사천성 기강에 머물게 되었고 각 당파간의 단합에 고심하게 되였다. 2004년 11월 19일, 새벽부터 보슬비가 구질구질 내렸다. 약속시간을 맞추어 우리는 가경해 관장을 만나 함께 기강으로 떠났다. 중경시 동남부에 위치한 기강현은 귀주와 린접하고 있다. 인구는 92만여명에 달하고 면적은 2,000여㎢이다. 중경으로부터 귀주의 준의(遵義)로 가는 고속도로가 기강으로 통하여 교통이 비교적 편리하였다. 40여분 달리니 기강현 경내에 들어섰다. 기강은 경내로 기강하(綦江河)가 흐르면서 생긴 이름이다. 귀주성에서 발원하는 기강하는 북으로 흘러 기강현을 지나 장강에 흘러든다. 때문에 기강현의 수상운수도 비교적 발달한 편이다. 달리는 차에서 가경해 관장은 사천과 중경의 인문특점을 자랑삶아 이야기해주었다. 중경지역을 포함한 사천은 산이 많고 습한 고장이다. 산이 많기 때문에 사람들은 늘 도보로 언덕을 오르내려야했다. 그리하여 이곳 사람들은 대부분 키가 작고 내력이 강하다. 또한 안개가 많고 비가 자주 내리기 때문에 습하기 그지없는 날씨로하여 이 고장 사람들의 인내력은 더욱 강하다. 뼈를 에이는듯한혹한이나 볕이 강한 혹서가 아니라 일년내내 미적지끈하게 덥고 습하기 때문에 수천년간 이곳 사람들의 지구력과 근면성을 키워냈던 것이다. 가경해 관장은 또, 사천사람들은 자기 고향에서는 보잘 것 없지만 일단 사천을 벗어나 활동하면 대부분 명인이 된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등소평과 같은 위인도 사천사람이고 공화국을 일떠 세운 10대 원수중 주덕, 섭영진, 류백승, 진의 네사람이나 사천사람이라고 하였다. 가경해 관장의 이야기를 재미나게 듣는 사이에 차는 어느덧 기강현에 들어섰다. 우리는 우선 기강현의 상승가(上昇街)로 찾아갔다. 거리목에 이르니 커다란 작업장이 나타났다. 일군들이 한창 길을 닦고있었다. 작업장에서는 누런 흙을 파헤치고 있었고 량쪽으로는 민가들이 줄지어 있었다. 상승가는 가면 갈수록 지형이 점점 높아진다고 하여 가진 이름이다. 새로 닦고 있는 길 량쪽으로 좁은 석판길이 있었고 현지인들은 지게에 여러 가지 물품을 지고 석판 길을 따라 상승가를 오르내리고있었다. 가경해 관장은 길을 닦기 위해 상승가 입구의 많은 가옥을 허물었다고 한다. 거기에는 기강의 한국 림시정부 옛 건물들도 포함되여 있는데 지금은 작은 옛 건물 하나만 남아있었다. 그것도 이제 곧 허물 것이라고 한다. 그러니 1939년부터 1940년까지 있었던 기강의 한국 림시정부 자리는 지금 도로 건설장으로 변해 버린 셈이다. 우리는 석판 길로 건설공지를 지나 계속 걸어갔다. 빗물이 석판에 떨어져 귀 맛 좋은 소리를 냈고 석판 길은 비에 젖어 한결 빛났다. 길을 따라 한동안 가다가 상승가 107번지에 멈춰 섰다. 거기에는 4합원 구조의 낡은 옛집 한 채가 있었다. 1939년 기강에 온 림시정부 의원과 조선청년들이 이곳에서 거주하였다한다. (가경해관장) “이 집의 구조는 비교적 옛 모습 그대로입니다. 벽도 가운데 나무쪼각을 하고 거기에 흙을 발라 만든 벽입니다. 이쪽은 벽돌로 되었는데 후에 지은건물이고이 정면을 보면 기둥의 조각이라든가 계단 조각을 보면 당시의 옛 모습을 알 수 있습니다. 리청천은 이쪽 낡은 건물에 살았습니다. 그리고2,30명 조선인 임정요인들이 이곳에서 함께 살았습니다.”   중경시 기강, 건설장으로 변해버린 상승가의 입구 곧 허물어 버릴 상승가 입구의 대한민국 림시정부 유적지의 부분적 건물 비가 내리는 기강의 상승가 석판길 지게로 물건을 나르는 중경시 기강 사람들 상승가 107번지, 리청천과 청년 독립운동가들이 거주하던 곳   문을 들어서니 정면과 오른편에 벽돌기와 건물이 있었고 왼편에는 낡은 흙집이 있었다. 집은 모두 2층 건물이였는데 왼편의 흙집은 옛 건물 그대로이고 벽돌건물은 후에 보수한 건물이였다. 집은 현지의 염상(鹽商)으로 있던 부자의 집이였다. 중경부근은 천연 소금이 나는데 천연 소금은 바다 소금에 비해 맛이 독특하다. 그러므로 옛날 이곳에는 소금장사로 부자가 된 사람이 많았다고한다. 당시 이곳에 20, 30명 조선인이 거주했고 1940년 광복군 총사령으로 된 리청천과 부인도 이곳에 거처를 잡았다고 한다. 림정의원으로 있던 손일명(孫一鳴)은 이곳에 거주하다가 병사하였는데 그의 묘지가 부근의 산언덕에 있다는 것이 후에 밝혀졌다. 그러나 아무리 찾아보아도 묘지를 찾지 못했다. 가경해 관장은 그 묘를 다시 확인하고 증인을 찾기 위해 기강에 왔던 것이다. 그러나 여러 로인분들을 찾아 문의해 보았지만 끝내는 확인하지 못했다. 상승가 입구의 림시정부 청사 옛집을 허물 때 옛집을 복원하기 위해 측정작업을 하였는데 그때 현지 로인이 손일명의 묘지가 있다고 증언하였다한다. 그리고 리선자 부관장을 비롯해 묘지를 이미 확인하였고 지금 남은 사항이라면 증언자의 싸인을 받아 가는 일이라고 가경해 관장이 소개하였다. 비는 그냥 내렸다. 갈피를 잡을수 없이 여러 로인분들의 이야기를 듣다보니 시간도 퍼그나 지났다. 그러나 묘 자리와 증언하는 로인은 끝내 찾지 못하고 말았다.   보슬비는 그냥 멎지 않았다. 상승가를 본 다음 우리는 차를 돌려 기강현 타만진(沱灣鎭)에 갔다. 기강하 기슭의 언덕에 민가들이 촘촘히 들어서 있는 마을이 보였는데 그곳이 곧 타만진이였다. 타만 65번지에 가니 비탈진 곳에 낡은 가옥이 보였다. 빈터에 다 망가지고 나무 기틀만 약간 남아있는 집이 바로 1939년 김구가 머물던 곳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부근에 림시정부 요원이였던 리동녕(李東寧)과 조소앙(趙素昻)의 거처가 있었다. 모두 헐망한 가옥이였는데 지금은 집주인들이 창고로 쓰는 듯 하였다. 때문에 번지수도 명확하지 않아 관련 연구일군들만이 확인할 수 있다. 이곳에서 기강하는 큰 굽이를 지며 흘렀다. 강폭은 100여m 정도였고 물은 자못 깊었다. 이따금 화물을 가득 실은 배가 강에서 오고갔다. 기강에 머물 때 조선인 청년들은 체력을 증강하고 전장에 나가 싸울 일념으로 기강하에서 수영훈련을 하기도 하였다한다. 그리고 한 독립지사는 기강하 기슭을 거닐며 망국의 한과 고향에 대한 사무침에 시달리다가 강에 투신 자살하였다고 하였다. 유감스럽게 그 의사의 명함에 대해 가경해 관장은 명확히 밝혀주지 못했다. 타만에서 멀리 산봉이 있었는데 거기에는 루각 하나가 어렴풋이 보였다. 비가 내리기 때문에 길이 미끄러워 산으로 올라갈수 없었다. 가경해 관장은 그곳엔 관음묘가 있었고 부근에 또 동굴하나가 있었는데 일찍 조선인 청년공작대가 거기에 거주하면서 군사훈련을 하였다고 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관음묘는없어지고 새로 지은 루각 하나가 있을뿐이라고 했다. 타만에 머물면서 김구와 림시정부 요원들은 다당련합회(多黨聯合會)를 준비하였고 조선인 각 당파와 혁명단체의 통합을 이룩하려 했다. 국민정부의 장개석은 조선인 내부의 불화와 분렬을 지적하면서 통합이 여의치 않으면 재정지원도 고려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그리고 통합이 이룩될때까지 림시정부의 중경진입을 허락하지 않고있었던 것이다. 김구는 기강의 타만 거처에서 여러가지 고민에 빠져있었고 후세에 남긴 《백범일지(白凡逸志)》을 집필하고있었다. 그는 각 당파와 단체의 요인들과 만나 독립과 민족해방을 이야기했고 투쟁방향을 두고 치렬한 론쟁을 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세월속에 사라져 가는 타만의 유적지를 보노라니 가슴이 아파났고 비속에 하염없이 흐르는 기강하 물결을 보노라니 마음은 슬퍼지기만 하였다. 중외를 진동한 윤봉길 의사의 의거로 한국림시정부와 김구는 국민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지만 시국은 갈수록 어지러워졌던 것이다. 지대한 희망과 기대를 걸었던 국민정부는 일본군의 공격앞에 너무나도 무력하였고 드디어 중경이라는 오지로 천도하기에 이르렀다. 상해, 항주, 무한, 장사, 광주의 련속되는 함락을 겪으면서 헐벗고 굶주린 피난민 신세로 기강에까지 온 한국림시정부의 상황은 애처롭기 그지없었다. 게다가 각 파벌의 언쟁은 끊기지 않고있었다. 현실은 모든 사람들의 의지를 꺾어버리고 모든 항쟁의욕을 말살해 버리기에는 너무나도 충분하였다. 그러나 이대로 물러설수없었다. 수십년간 중국에서 온갖 고생을 겪으면서 이끌어온 독립투쟁을 이대로 방치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기강의 타만진 리동녕, 조소앙의 기강 타만진 거처로 추정되는 곳 김구가 백범일지를 쓰면서 7당 통합대회를 준비하였던 곳, 지금은 몇개 집 틀과 허물어진 담만 남음 기강 타만진의 중산로소학교 입구 7당 통합대회 옛터를 가르키는 가경해 관장   중경시 기강현 중산로(中山路) 18번지에 이르면 작은 소학교 하나가 있다. 길거리에서 보면 잘 알리지 않지만 길가의 광고판들을 자상히 살피면 그속에 중산로소학교(中山路小學校)라고 쓴 작은 간판아래 교문이 보인다. 교문으로 들어가니 3층 교수청사가 있고 운동장이 있었다. 교수청사 바른편으로 새 아파트와 낡은 2층 건물이 있었다. 가경해 관장은 그쪽을 가르키면서 당시 이곳에는 옛 사원이 있었고 그 곁에 영산빈관(迎山賓館)이 있었는데 조선혁명가들의 7당 통일회의가 바로 영산빈관에서 진행되였다고 하였다. 1939년 8월 27일, 좌익진영인 조선민족혁명당, 조선민족해방동맹, 조선혁명자련맹, 조선청년전위동맹과 민족주의진영인 한국국민당,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 대표들이 기강의 영산빈관에 모여 통일회의를 열었다. 중국 내 반일단체의 대통합을 위한 또 한차례 좌우합작 노력이였다. 중국내 조선 독립운동진영은 두 개 큰 정당이 주도하였다. 하나는 김규식과 김원봉이 이끄는 조선민족혁명당이고 다른 하나는 김구와 조소앙이 이끄는 한국독립당이였다. 1937년 조선민족혁명당을 핵심으로한 조선민족통일전선련맹이 형성되여 막강한 실력을 과시하였다. 그러나 민족혁명당 내부도 서로 주장이 달랐기 때문에 통합과 분렬을 거듭하는 상황이였다. 기강에 도착한 김구와 림시정부는 우익진영을 강화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리하여 1937년 한국국민당, 조선혁명당, 한국독립당은 한국광복운동단체련합회(韓國光復運動團體聯合會)를 결성하였다. 조선혁명가들과 독립운동가들이 사천성 기강에 머물고있을 때 장개석 국민당은 이들에게 다소 랭담한 태도를 보였다. 장개석은 국민정부의 본격적인 지원을 받으려면 통합된 당파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한국림시정부의 중경 진입도 쉽게 허락해 주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김구와 김원봉은 1939년 5월 공동선언을 발표하고 합작과 단결을 강조하였다. 중국 항일전쟁의 비상시기에 열린 기강의 7당 통합대회는 중국 내 조선반일투쟁 력량을 집중, 통일하고 중국 국민정부와의 협동을 강화하기 위한데 목적이 있었다. 그러나 각 당파간의 모순과 분쟁은 도저히 극복되지 못했다. 우선 개인중심의 통합을 반대한다는 리유로 조선청년전위동맹과 조선민족해방동맹이 탈퇴하였다. 9월에는 기타 5당 대회가 속개되였지만 김원봉과 김구, 조선민족혁명당과 림시정부간의 모순이 극복되지 못했다. 그리하여 김원봉과 조선민족혁명당이 리탈하였다. 결국 한국국민당,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을 비롯한 전통적인 김구세력만의 통합이 이루어졌다. 1940년 5월 조완구, 엄항섭을 대표로하는 한국국민당, 리청천, 최동오(崔東旿)를 대표로하는 조선혁명당, 조소앙, 홍진을 대표로한 한국독립당이 새로운 한국독립당으로 합병하였다. 새로운 한국독립당은 사실상 한국림시정부의 집권당 역할을 하게 되였다. 김구와 림시정부는 저들의 정통을 주장하면서 국민당과 장개석의 지원을 요청하였고 조선의용대와 경쟁할 수 있는 한국광복군 창립을 요구하였다. 그리하여 1940년 9월, 기강의 조선독립운동가들은 장개석의 허락을 받고 중경으로 본거를 옮겼고 중경 가릉빈관(嘉陵賓館)에서 한국광복군을 창립하게 되었던 것이다.  
55    제55회 중경의 한국림시정부 유적지— 댓글:  조회:4983  추천:70  2008-04-11
항일전쟁시기 중경은 국민정부의 전시 수도였다. 1937년 말 남경이 함락되자 국민정부는 무한을 거쳐 중경으로 옮겼다. 국민정부 군사위원회는 산과 물이 많은 서북의 천험을 리용해 일본군의 침입을 방어하려했던 것이다. 1941년 태평양전쟁이 발발한후 중경은 동맹국 원동지휘중심의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중경은 화북대지와 화동지역 적후(敌後) 항일지휘중심인 연안과 더불어 중국 전민항쟁의 주요한 지휘체계를 형성하였다. 중국 관내 조선독립운동의 주요 력량이였던 김구와 림시정부, 김원봉과 조선의용대 본부 그리고 기타 당파들도 이시기 중경에 집결하였다. 무한 함락후 김원봉과 조선의용대 본부는 국민당의 요원들과 함께 류주로 이동하였다가 다시 전시 수도인 중경으로 갔다. 한편 상해와 남경에서 활동하던 수많은 독립운동가들도 김구와 림시정부를 찾아 중경으로 향했다. 림시정부 요원과 그 가족, 남녀로소 백여명이 험난한 피난길에 나섰다. 그들은 천신만고로 계림, 류주를 거쳐 사천성 기강에 이르렀고 국민당의 지원을 받아 다시 중경에 거처를 잡게 되었다. 항일전쟁이 승리할때까지 수많은 독립운동가들과 혁명가들이 이곳에서 항쟁을 견지하였다. 그 가운데 일부는 일제의 폭격에 희생되였거나 병사하기도 하였다. 북경에서 연변텔레비죤방송국의 서봉학 주임을 만나 중경답사를 시작한 것은 2004년 11월 18일이였다. 아침 8시 35분 북경공항을 출발하여 2시간 반 후 중경시 강북(江北)공항에 도착하였다. 공항은 생각보다 퍽 간소했고 려객도 많지 않았다. 공항을 나와 시내로 들어가는 택시를 잡고 괜찮은 호텔로 안내하라고 부탁하였다. 중국 서남부의 중요한 력사문화 도시인 중경은 가릉강(嘉陵江)과 장강의 합수목에 위치했다. 기원 581년 수조(隋朝)는 이곳에 유주(渝州)를 설치했기때문에 약칭으로 중경을 유(渝)라고도 한다. 1189년 남송(南宋)의 조돈(赵惇)이 이곳 왕으로 책봉 받았다. 얼마뒤 다시 황위를 계승한 조돈은 희사가 겹쳤다는 의미에서 자기의 원 저택을 중경부(重庆府)로 명했다한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이곳을 중경이라고 부르게 되였다. 1997년 중경시는 북경, 상해, 천진에 이어 중국의 네 번째 중앙직할시로 승격하였다. 중경은 산간도시이지만 철도, 도로 교통이 발달하고 하천운수도 비교적 편리하다. 장강 상류인 중경으로부터 장강을 통해 무한, 남경, 상해에 직접 도달할 수 있다. 중경시 유중구(渝中区) 광장빈관(广场宾馆)에 입주한 답사팀은 간단한 점심식사를 마치고 중경의 한국 림시정부 청사 유적지를 찾아 떠났다. 광장빈관 부근에서 택시를 잡고 중경 림시정부 청사 유적지를 찾아가려 했지만 택시 기사들마다 그곳을 모른다고 하였다. 유중구 칠성강(七星岗) 련화지(莲花池) 38번이라고 거듭 이야기했지만 웬 영문인지 모른다거나 갈수 없다고 하였다. 택시를 여러개 잡아봤지만 대답은 비슷하였다. 우리는 할수없이 쉽게 찾아갈 수 있는 팔로군 중경판사처 유적지로 가자고했다. 그러니 기사는 아무 말도 없이 차를 몰았다. 증가암(曾家巖) 50번지에 위치한 팔로군 중경 판사처 유적지는 우리가 투숙한 빈관에서 10분도 안되는 거리였다. 해빛 밝은 언덕에 넓은 공지가 나타났고 공지에는 주은래 동상이 있었다. 동상 뒤편으로 2층으로 된 벽돌기와 건물이 있었는데 바로 팔로군 중경 판사처 유적지였다. 1938년 겨울 중국공산당 대표단은 무한으로부터 중경에 옮겨와 이곳에 자리를 정했다. 주은래는 이곳을 임대해 들고 대외로 《주공관(周公馆)》이라고 하였지만 실제로 중국공산당 남방국(南方局) 지도기관과 중경 주재 팔로군 판사처의 사무를 보았다. 비록 국공합작이라고 하지만 국민당은 늘 밀정을 배치해 이곳을 감시하였다. 그러나 평화와 민주를 지향하고 적극적으로 항일하려는 각계 인사들은 늘 이곳에 찾아와서 혁명활동에 종사하였다. 중경에 있던 조선혁명가들도 반일전선에 나가기 위해 이곳을 많이 찾아왔다. 그들은 비밀리에 팔로군 판사처 일군들과 접촉하면서 팔로군이 통제하는 항일근거지로 갈 의향을 표했고 또 주은래를 비롯한 공산당 주요지도자들의 적극적인 건의를 접수하기도 했다. 조선의용대 주력이 태항산으로 북상한 것도 팔로군 중경 판사처의 협조와 지도가 있었기 때문에 이루어졌다고 추측된다. 중경 팔로군 판사처 유적지를 보고나서 사업일군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유중구 련화지의 한국 림시정부 청사 유적지에 대해 문의하였다. 전문일군인지라 대뜸 안다고 하면서 그냥 번지수를 대서는 찾아가기 힘드니 상해일백(上海一百)이라는 백화상점으로 가자면 기사들이 다 안다고 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유해청사(渝海大厦)를 찾고 그 곁으로 가면 기념관이 보인다고 자상히 알려주었다. 다시 택시를 잡고 상해일백이라고 하니 기사는 군말 없이 차를 몰았다. 한동안 가니 번화가에 커다란 백화상점이 나타났는데 상해일백이라는 간판이 붙어있었다. 그곳에서 조금 더 가니 유해청사도 보였다. 청사 곁에는 한국식 표기법으로 《중경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 진열관》이라고 쓴 커다란 알림표시가 보였다. 우리는 저도 몰래 환성을 지르며 차에서 내려 진렬관으로 갔다. 유해청사 옆 골목으로 들어가니 낮은 평지에 주차장이 있었고 주차장 바른편 언덕에 위치한 림시정부 진렬관 건물이 보였다. 검 푸른색 칠을 한 담이 둘러있는 속에 벽돌기와 건물들이 있었다. 널문으로 된 정문 우에는 우리식 표기법으로 《대한민국림시정부》라고 씌여있었다. 진렬관 입구에서 기자들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기념관 가경해(贾庆海) 관장이 나와 맞아주었다. 서로 인사를 나누자 가경해 관장은 더욱 반가워하면서 직접 우리를 기념관으로 안내하고 해설해 주는 것이였다. 반백이 넘은 가경해 관장은 소박하고 진지하며 열정적인 사람이였다. 진렬관 정문을 들어서니 둔덕으로 올라가는 돌계단이 있었고 계단 주변에 서로 이어진 2층, 3층 건물이 둘러있었다. 계단은 깨끗하게 청소되여 있었고 량쪽에 열대 화초를 심은 화분을 배렬해 놓아 건물에 생기를 보태주었다. 계단 왼편 건물은 옛 건물을 보수하여 전시관으로 사용하고있었다. 전시관에는 중경의 사적지 소개, 림시정부 이동로선과 활동 소개, 광복군 조직체계 소개, 관련 인물 소개를 비롯한 풍부한 내용이 포함되여있었다. 가경해 관장은 관련 내용을 열심히 소개해 주었다. 1938년 일본군의 중국 침략이 가심해지자 국민당의 정면 전장은 실패를 거듭하면서 수많은 도시들이 함락되였다. 당시 호남성 장사에 있던 한국 림시정부 주석 김구와 정부 요원들은 부득이 광동으로 자리를 옮기지 않을수 없었다. 그러나 광동도 위태해지자 광서성 류주로 옮겨갔다. 전란속에서 림시정부의 안식처를 찾기 위해 고심하던 김구는 중경에 가서 국민정부와 련락을 취하고 지원을 요청하였다. 국민정부는 현지정부에 명령해 류주에 있는 림시정부 요원과 그 가족을 중경 부근의 기강에 이동시켰다. 김구와 림시정부는 1940년 9월 중경으로 입주하기 전까지 일년 남짓한 동안 기강에서 활동하였다. 이들은 기강에서 각 당파를 통합하기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았지만 큰 성과를 이룩하지 못했다. 지금도 기강에는 7당 대회 옛터, 김구 거처 유적지, 리청천을 비롯한 림시의정원 요원 거처 유적지가 남아있다. 그리고 기강에서 병사하거나 과로사한 조선인 묘소가 남아있다. 간고하고도 어려운 전란속에서 김구주석의 장남 김인을 포함해 조선지사 80여명이 중경지역에서 병사했다. 김구와 림시정부는 항일전쟁시기 대부분 시간을 중경에서 보냈다. 중경에서 림시정부를 재조직하고 한국광복군을 창립함으로써 반일투쟁과 미래 건국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렸다. 중경이 일본군의 끊임없는 폭격을 받았기 때문에 림시정부 사무청사는 여러곳으로 옮겨 다니지 않으면 안되였다. 처음에는 양류가(杨柳街)에 자리 잡았다가 석판가(石板街)로 옮겼으며 다시 오사야항(吴师爷巷)으로 이주했다가 1945년 1월 유중구 칠성강 련화지 38번지에 위치한 지금의 진렬관 자리에 옮겨 11월 귀국할 때까지 사무를 보았다. 진렬관을 나와 돌계단을 따라 올라갔다. 가경해 관장은 진렬관 오른쪽 두 번째 건물은 원 모습 그대로 되어있다고 했다. 건물에는 김구 주석과 국무위원 리시영, 림시정부 외무부장 조소앙, 내무부장 신익희(申翼熙)가 사용하던 방이 있었다. 1945년 일본이 항복하자 귀국행로에 나선 독립지사들은 바로 이 청사의 돌계단에 모여 기념사진을 남겼던 것이다. 중국에서 중국국민당의 지원을 받으며 운명을 함께 했던 조선인 독립운동가들은 자체의 군력을 키우기도 전에 해방을 맞게 되었으며 급촉한 걸음으로 귀로에 올랐던 것이다. 중경시 유중구 칠성강 련화지 38번지에 위치한 한국 림시정부 청사 유적지는 1995년에 개방하였고 2000년 9월 17일 광복군 창립 60주년을 기념하면서 보수하고 전시내용을 확대하였다. 림시정부 청사 유적지를 떠나면서 래일 기강으로 함께 갈 것을 가경해 관장과 약속하였다. 가경해 관장은 기강에 볼일이 있다면서 기꺼이 안내해 주겠다고 대답하였다. 해질때까지 아직 시간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계원을 찾아보기로 하였다. 중경시 중산4로(中山四路)에 위치한 계원(桂园)은 1945년 국공담판을 위해 중경에 온 모택동이 거주함으로써 유명해 졌고 지금도 유람객들의 발목을 잡고 있다. 련화지에서 나와 택시를 잡으려 했는데 역시 여의치 않았다. 중경의 거리는 100m의 평탄하고 곧은 길이 없을 정도다. 굽은 길이 아니면 비탈진 길이여서 중국이 “자전거 왕국”이라는 불리우지만 중경에서는 자전거를 볼 수 없다. 비탈길이 많기 때문에 자전거를 탈수없기 때문이다. 계원에 이르니 2층으로 된 벽돌건물이 나타났고 아래층에 아치형 입구가 있었다. 입구로 들어가니 작은 정원이 나타났고 2층으로 된 정교한 건물이 있었다. 이곳이 바로 계원의 주 건물로서 모택동이 머물렀던 곳이다. 1945년 8월 항일전쟁 승리후의 국가대사를 토의하기 위해 장개석은 3차에 거쳐 전보로 모택동을 중경에 초청하였다. 당시 국민당의 고위장교이고 정치부 부장을 맡았던 장치중은 연안까지 가서 모택동을 영접해 왔다. 그리하여 중경담판이 시작되였다. 모택동의 안전을 돌보기 위해 장치중은 자기의 개인 사택인 계원을 내주었다. 그리하여 모택동은 밤에는 교외의 홍암촌(红巖村) 팔로군 판사처에서 취침하고 낮에는 계원에서 사무를 보았다. 그리고 계원의 회의실에서는 주은래가 국민당과 치렬한 담판을 진행하였다. 그리하여 10월 10일 드디어 담판이 이루어지고 국공 량당은 평화를 위한 《쌍십협정(双十协定)》을 체결하였다. 모택동은 계원에서 중경의 각계 인사들을 만나보았고 중경 림시정부 요원들을 접견하였다. 모택동 비서의 일정기록에서 9월 3일 모택동이 한국 림시정부 요원을 접견하였다는 기록이 나오고 있다. 그러나 한국 림시정부의 관련 자료들이 많이 분실되였기때문에 모택동이 구경 어떤 요원들을 만났고 또 어떤 내용의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알길이 없다. 그러나 다만 접견이 있었다는 것으로도 중국 내에서 활동하고있는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중국 공산당의 중시정도를 알 수 있었다. 북경에서 살고있는 김규광의 아들 두건씨는 중경에 있을 때 어머니와 함께 팔로군 판사처에 간 적이 있다고 회억하였다. 그는 당시 주은래가 팔로군 판사처에서 중경의 독립운동가들을 위해 연회를 베풀었다고 증언하였다. 김규광의 안해 두군혜 녀사와 주은래의 부인 등영초 녀사는 아주 가까운 사이로 지냈기때문에 두군혜는 연회에 아들을 데리고 갔던 것으로 생각된다. 아무튼 중국공산당의 지도자들도 그만큼 한국 독립운동가들을 중시하고있었던 것이다. 모택동이 사용했던 사무실과 객실, 그리고 국공담판이 치렬하게 진행되였던 회의실은 모두 원 모습대로 정리되여 있었다.
54    제54회 정면전장에서의 조선의용대 댓글:  조회:6448  추천:72  2008-04-11
     로구교 사변을 통해 중국에 대한 본격적인 침략을 발동한 일본침략군은 1938년 6월까지 일년 시간을 들여 중국 장강 이북의 광활한 령토를 통제하였다. 태원부근에서 진행된 흔구전역, 서주를 중심으로 한 서주회전을 통해 일제는 장강이북의 전략요새들을 점령하고 북에서 남으로 무한을 포위하였다. 뱃길로 상해에 도착한 다른 한갈래 일본군은 송호회전을 거쳐 상해, 남경을 강점한후 장강을 따라 서쪽으로 공격해왔다. 그리하여 무한은 세면으로 막강한 적의 공격을 받게 되었다. 국공합작과 전민의 항전에 크게 고무된 중국 군민들은 피와 살로 침략자들의 비행기와 땅크에 대항하며 싸웠다. 인력과 자원의 제한을 받은 일제는 속전속결을 원했다. 수개월간의 공격을 통해 국민정부의 항복을 받아내려고 했던 그들은 십여개 사단의 수십만 정규군을 동원해 무한을 포위공격하였다. 국민당은 110만 군대를 모아 이에 항격하였다. 일본침략군은 6월에 안경을 공략하고 7월에는 호구, 구강을 침점하였다. 려산과 파양호의 유리한 지세를 리용해 부분적 국민당군은 적시적으로 반격을 조직해 적에게 막대한 손실을 주었다. 침략군은 계속 지원병을 보내 더욱 강한 공격을 조직한 반면 국민당은 실력을 보존하기 위해 주력부대를 후방으로 빼돌렸다. 그리하여 중국군은 부분적인 승리를 이룩했음에도 불구하고 승세를 잡지 못하고 계속 철수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10월에 이르러 무한 남부방어선이 무너졌고 장강이북 수비도 여의치 못했다. 1938년 10월 24일, 장개석은 실력을 보존하기 위해 전면 철수를 명령하였다. 그리하여 25일과 27일 무한 3진이 전부 함락되였다. 무한 외곽전투의 포화속에서 창립된 조선의용대는 비록 정규군에서 적들과 직접 싸우지는 못했지만 활발한 대적선전공작을 진행했으며 무한에 정신적인 폭탄을 남겨놓았다.   (권립 교수) “조선의용대는 무한을 제일 마지막으로 철퇴하였습니다. 조선의용대가 창립될 때 무한은 일제의 포위공격을 받고있었습니다. 일제의 화약냄새가 무한으로 스며들고있었습니다. 무한에 있던 국민당의 당정기관들이 다투어 중경으로 철퇴하고 무한의 주민들이 뒤질세라 피난을 떠났다. 공장마다 상점마다 언녕 문을 다 닫아버렸습니다. 그러나 대포소리속에서 태여난 조선의용대는 포소리나 화약냄새를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가을바람이 부는 쓸쓸한 무한거리를 다니며 일본글로 반일구호를 썼습니다. 넓은 아스팔트길에 높은 굴뚝에 커다란 담벽에 높은 수탑과 전선대에 일본글로 구호를 썼습니다.”   10월 24일, 조선의용대 지휘원과 장병들이 땀을 흘리며 선전구호를 쓰고있을 때 국민당 정치부 제3청의 청장이였던 곽말약이 철수를 앞두고 무한거리를 시찰하였다. 두려움 모르고 마지막까지 싸우고있는 조선의용대 대원들의 행동에 큰 감동을 받았다. 곽말약은 후에 자기가 본 이 감명깊은 광경을 저서 <홍파곡>에 적어놓았다. 조선의용대의 드높은 항일열정과 두려움 모르는 전투정신에 감동된 곽말약은 직접 주은래를 찾아가 보고하였다. 정치부 부주임으로 있던 주은래는 이날 저녁 곽말약의 보고를 듣고 직접 조선의용대를 찾아갔다. 그는 대원들과 일일이 악수하고 더욱 큰 투쟁을 위해 즉각 철수할 것을 요구하였다.   (권립 교수) “조선의용대 용사들은 그 길로 부두를 향해 철거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이튿날 일제가 무한시내로 승냥이마냥 덮쳐들었습니다. 이렇게 시작한 조선의용대의 투쟁사는 두단계로 나누어 볼수있습니다. 첫단계는 성립되여서부터 2년동안, 이 기간은 전선으로란 구호밑에 정면전장에서 싸운 2년입니다. 넓디넓은 싸움터에서 지대별로 흩어져서 싸운 2년이였습니다. 두 번째 단계는 그 다음의 4년 10개월입니다. 이 기간은 적후로란 구호밑에 중국공산당의 령도하는 화북의 적후근거지에서 싸운 시기이고 하나로 뭉쳐서 싸운 시기입니다.”   4개월 남짓이 진행된 무한회전은 중국 항일전쟁에서 최대규모의 전역이였다. 하남, 안휘, 강서, 호남, 호북을 비롯한 광활한 지역이 혈전의 전장으로 되었고 수십만 중국 장병들이 피와 살로 침략자들의 비행기와 땅크를 비롯한 선진적인 장비와 맞써 싸웠다. 그러나 국민당의 편면적인 항전로선과 소극적 방어전략으로 하여 중국은 광활한 토지를 잃고 막대한 손실을 빚어냈다. 더욱이 국민당내 파벌이 군립하고 부분적인 장교들이 부패무능하고 죽음을 두려워 소극적으로 전투를 피했기 때문에 더욱 막대한 손실을 빚어내게 되었던 것이다. 일년 남짓한 공격전에서 일본침략자들은 중국의 100여만 평방킬로메터에 달하는 령토를 강점하였다. 중국군민의 항전은 일본침략자들에게도 막대한 타격을 주었다. 무한회전에 전례없던 40만 병력을 동원한 일본침략자들은 비록 무한을 강점했지만 막대한 손실을 보았다. 근 20만 병사들이 죽거나 부상을 입었다. 아시아를 제패하려던 일제는 무한회전을 겪으면서 드디어 인력과 자원 결핍이라는 이 현실적 문제를 정시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일제는 이와 같은 대규모의 전역을 더 치러낼 인력과 물력이 없었다. 그리하여 중국의 항일전쟁은 전략적인 수비 단계로부터 점차 대치단계에 들어가게 되었다. 로구교사변으로부터 무한회전에 이르기까지 16개월간의 전쟁을 통해 중국항일전쟁은 두가지 변화가 나타났다. 하나는 국민당이 연해지역의 전략적 물력과 인력을 중경으로 중심으로 한 서북 대후방으로 적시적으로 철수하였다. 다른 하나는 일제 강점지역에 광범위한 항일유격근거지가 나타났다. 공산당이 령도하는 팔로군과 신사군이 화북과 화중지역에서 활발한 투쟁을 진행하고있었고 부분적인 국민당 부대도 적후에서 유격전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변화는 중국 항일전쟁을 확고하고도 지구적인 대치단계에 들어가도록 한 조건이였다.   (권립 교수) “조선의용대의 정면전장에서의 투쟁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무한으로 떠난 조선의용대는 각 전장으로 흩어지게 됐습니다. 본부는 제4전구로 즉 광서 계림으로 이동하고 제1구대는 제9전구로 호남성 평강현 일대로 옮기고 제2구대는 호북성 호하구일대로 갔습니다. 후근부와 가족들은 중경으로 이동하였습니다. 이렇게 흩어져있었지만 일년이 지나서는 대오가 근 배로 늘어나 155명으로 됐습니다. 그리하여 재 본부를 총부로 고치고 제1구대를 제1지대로 제2구대를 제2지대로 고치고 또 제3지대를 증설하였습니다.”   조선의용대 총대부는 대장 김원봉의 인솔하에 중국 중앙군을 따라 이동하였다. 대장에 김원봉, 기밀주임에 신영삼(申榮三), 총무조장에 리집중(李集中), 정치조장에 김규광이였고 부대원에 리형래(李瀅來), 주세민(周世敏), 리춘암(李春岩), 석성재(石成才), 김인철(金仁哲), 한지성(韓志成), 윤세주, 진일평(陳一平), 김석락(金錫洛) 등 도합 13명이였다. 이들은 국민당 제4전구에서 활동하였다. 광서성 계림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제4전구 국민당 부대는 그후 광서가 일제에게 함락되자 중경으로 패주하였고 의용대 총대부는 1940년 초에 중경으로 갔다. 조선의용대 제1구대 43명은 구대장 박효삼의 인솔하에 제구전구에서 싸웠다. 부구대장에 김세일(金世日), 정치지도원에 왕통(王通)이고 제1분대장에 최경수(崔敬洙), 대부에 장중광(張重光)이고 제2분대장에 조렬광(趙烈光), 대부에 리해명(李海鳴)이였으며 제3분대장에 섭홍덕(葉鴻德), 대부에 리지강(李志剛)이였다. 제1구대는 전원이 조선민족혁명당 당원들로서 주로 호남성에서 활동하였다. 호남성 장사에 사령부를 정한 제9전구에는 국민당의 최 정예부대가 집결해 있었다. 일본침략군이 무한을 강점한후 수차 장사를 공격하였다. 장객석은 초도항전을 주장하면서 장사를 불태워 일본군을 막으려 하였다. 이때 조선의용대 1구대 대원들은 화재로 인한 리재민 구출과 도시 복구 사업에 적극 참가하였다. 그리고 장사에서 벽신문을 만들고 <우리의 살길>이라는 순간잡지도 펴내면서 선동사업을 강화해 나갔다. 1939년말부터 1구대 대원들은 국민당 제9전구 각 부대로 흩어져 배속되였다가 광서로 옮기고 다시 부분적으로 중경으로 갔다. 그들은 광서 류주(柳州) 부근의 곤륜산회전(昆崙山會戰), 상북회전(湘北會戰), 장사회전(長沙會戰)에 참가해 대적선전을 적극 진행하였다. 1구대 대원들은 적 진지에 접근하여 함화(喊話)하는 방식으로 비정의적인 싸움을 하지 말 것을 일본군 병사들에게 호소하였다. 그리고 표어와 벽보 선전도 활발히 진행하였다. 1구대 대원들은 또 남로공작대(南路工作隊)에 배속되여 곤륜산 전투에 참가하였다. 그들은 적 진지에 접근하여 함화하거나 노래하는 방식으로 적의 전의를 약화시켰다. 조선의용대 제2구대 41명은 구대장 리익성의 인솔하에 국민당 제1전구와 5전구에서 활동하였다. 부구대장에 진원중(陳元仲), 정치지도원에 김학무(金學武)였고 제1분대장은 리세영(李世榮), 대부에 장중진(張重鎭)였으며 제2분대장은 강진세(姜振世), 대부에 호철명(胡哲明)이였고 제3분대장은 리영신(李永新), 대부에 한득지(韓得志)였다. 이들은 조선청년전위동맹 맹원 및 기타 단체의 소속원이였다. 제2구대는 조선의용대 지도위원회 위원의 한사람인 김학무를 따라 무한에서 표어와 벽보를 통한 항일선전활동을 하다가 가장 마지막에야 철수하였다. 곽말약이 목격했던 조선의용대 대원들이 바로 제2구대 대원들이였다. 김학무는 부분적인 대원들을 거느리고 하남성 락양을 중심으로 한 국민당 제1전구에서 활동하였고 리익성은 나머지 대원들을 거느리고 호북성 로하구에 사령부를 둔 국민당 제5전구에서 활동하였다. 1939년 2월 호북성 수현(隨縣)에서 싸우던 2구대 대원들은 적 참호에 다가가 높은 나무위에 일본어 표어가 적힌 대형 현수막을 걸어놓았다. 거기에는 “일본의 형제들이여!우리의 공동의 적은 바로 일본군벌이다”, “일본 병사 형제들이여. 무엇하러 머나먼 타국에 와서 아까운 목숨을 버리려 하는가?”, “어서 총부리를 그대네 상관에게 돌리라”는 내용의 글을 써놓았다. 그들은 또 적진에 접근해 일본말 연설하거나 반전노래를 부르기도 하였다. 1939년말에 이르러 의용대 대원이 많아지자 제1구대의 부분적 대원과 새로 확보한 대원 그리고 일본군에서 귀순한 청년들까지 포함해 제3구대를 편성하였다. 이들은 부분적으로 제1구대와 함께 국민당 제9전구에서 활동하고 또 일부는 새로 설립한 국민당 제3전구에 배속되여 연해지역에서 활동하였다. 이때로부터 조선의용대는 재 편성을 거쳐 구대를 지대로 고쳤다. 제1지대 대장에 박효삼, 정치지도원에 왕통이였는데 도합 78명이였다. 제2지대는 리익성이 대장을 맡고 림평(林平)이 정치지도원을 맡았는데 도합 75명이였다. 제3지대는 김세일이 대장을 맡고 양민산(楊民山)이 정치지도원을 맡았다. 제3지대는 도합 63명으로 통계된다.   (권립 교수) “일본말로 방송하여 적을 와해시키는데 큰 기여를 하였습니다. 동시에 제1, 2, 3 지대는 각기 당지 사령부를 도와서 적정을 수집하고 대적 사업일군 도합 6만여명을 양성했습니다. 그리고 50여만부의 반일삐라를 쓰고 인쇄했습니다. 전지선전대를 조직하여 대적선전사업을 하고 유격선전대를 조직하여 적후에 들어가서 무장투쟁을 하였습니다.”   조선의용대는 2년 남짓한 동안 6개 전구의 13개성을 전전하면서 적투적 자취를 남겼다. 일제침략군과 싸우는 거의 모든 전투에서 활발히 선전활동을 진행하는 의용대 대원들의 모습을 찾아 볼수있었다. 그들은 총칼로 이룩할수 없는 거대한 전과를 올렸다. 조선의용대는 선전대였고 정찰대였으며 또한 전투부대였다. 1939년 5월부터 9월까지 대원들은 적 460여명을 격살하였고 적의 차량 121대를 파괴하는 전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각 전구에 파견된 조선의용대 대원들은 그 자질과 능력이 높이 평가되였고 소규모 부대였지만 정치적 의의가 컸고 선면의 효과가 좋았다. 더욱이 두려움 모르는 투쟁정신은 중국 군민의 항쟁을 크게 고무해 주었다.
53    제53회 조선의용대의 창건지 답사 댓글:  조회:3817  추천:79  2008-04-11
    국공분렬과 국민당내 군벌혼전을 거치면서 각지에 흩어졌던 조선혁명가들은 제2차 국공합작이 이룩되고 1937년 전면적인 중국 항일전이 개시되자 다시 무한에 모이기 시작하였다. 1938년 하반기 상해, 남경이 일본침략자들에게 강점되자 상해, 남경 등지에서 활동하던 대부분 조선혁명자들이 무한에 왔다. 이들은 중국의 항일전쟁에 적극 참가하면서 조선 각 혁명단체와 당파의 대단결을 이룩해 나갔다. 공산주의자, 무정부주의자, 민족주의자 할것없이 무한에 모여 새로운 투쟁을 준비하고있었다. 이들 가운데서 김원봉을 위수로 한 조선민족혁명당, 조선청년전시복무단(朝鮮靑年戰時服務團), 조선민족해방동맹(朝鮮民族解放同盟)과 조선혁명자련맹(朝鮮革命者聯盟)이 대표적인 당파였다. 조선민족해방동맹은 조선혁명자 김규광과 박건웅(朴建雄), 김산(장지락)을 주축으로 1936년에 창립되였다. 일찍 중국공산당을 따라 광주봉기에 참가했던 이들은 안전하게 광주를 탈출한후 장시기 상해에서 활동하다가 상해가 함락된후 무한으로 왔던 것이다. 조선청년전시복무단(朝鮮靑年戰時服務團)도 이때 한구에서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공산주의를 지향하는 50여명 조선 열혈청년들이 최창익(崔昌益 일명 리건우 李健宇)을 단장으로 한 조선청년전시복무단을 조직하였다. 이들은 각종 군중집회에 참가하고 거리에서 연설하였으며 또 여러 가지 만화를 그려 항일전쟁을 선전하였다. 조선청년전시복무단은 조선민족혁명당내의 열성자들이였다. 남경에서 군사교육을 받은 김학무(金學武), 리상조(李相朝), 장지민(張志民)을 비롯한 수많은 열혈청년들은 왕지연(王志延 일명 한빈 韓斌)과 함께 전시복무단을 조선청년전위동맹(朝鮮靑年前衛同盟)으로 개칭하고 계속 활동을 견지하였다. 조선의용대 출신이였던 고 문정일(文正一) 선생은 다음과 같이 회억하였다. 《이때는 무한이 위기일발의 시각에 처한 때라 우리는 김학무를 단장으로 한 <조선청년전시복무단>을 조직하고 중국공산당의 외곽조직인 <중화민족해방선봉대(中華民族解放先鋒隊)>와 함께 한구에서 항일선동사업을 하였는데 반일연설도 하고 연극도 했다. 나는 허정숙(許貞淑--최창익 부인) 등과 함께 걸상을 가지고 거리와 부두로 나아가 걸상에 올라서서 반일선동연설을 했다. 연설할 때 우리는 조선의 혁명청년들이라고 자기 소개를 하고 조선이 망국한 뼈저린 아픈 력사를 이야기하고 항일하지 않으면 중국도 조선처럼 망국하게 되므로 중국과 조선이 단합하여 일본침략자를 물리쳐야 한다는 내용으로 열변을 토하고 삐라를 살포하였다.》 1938년 10월, 무한 외곽에서 중국군과 일본침략군과의 치렬한 공방전이 계속되고있었다. 수시로 떨어지는 적의 폭격과 포격을 무릅쓰고 이들 조선혁명자들은 한구에서 조선의용대를 성립하였다. 조선청년전위동맹을 포함한 조선민족혁명당, 조선민족해방동맹, 조선혁명자련맹 각 단체와 당파의 공산주의자, 무정부주의자, 민족주의자들이 단합하여 조선민족전선련맹(조선민족전선련맹)을 이룩하고 조선의용대를 창립해냈던 것이다.   (권립 교수) “당시 무한에는 김약산을 수반으로 하는 조선민족전선련맹 산하에 우리민족 청년 181명이 있었는데 그 대부분이 중앙군사학교와 기타 군사학교 출신이였습니다.”   무한에서 조선의용대의 창립지를 찾기는 여간 힘들지 않았다. 무한 답사에서 첫 과제가 이곳을 찾는 일이기때문에 만나는 사람마다 문의해 보았지만 대답은 애매하기만 하였다. 우리에게는 한구 홍삼로(虹槮路) 8번지라는 옛 주소만을 가지고있을뿐이였다. 그리하여 지명판공실(地名辦公室)에 찾아가 홍삼로의 지금 명칭을 확인해 보아야 했다. 그러나 지명 판공실을 찾는 일도 바다에서 바늘 건지기나 마찬가지였다. 알려준 주소에 따라 겨우 찾아갔더니 문지기 이곳에서 이사갔다는 것이다. 민정국 산하인 지명 판공실은 지금 일원로(一元路)에서 사무를 본다는 것이다. 다시 수많은 길을 에돌아서 겨우 찾아냈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5층까지 올라가서 사무실 문을 두드리니 40대 사나이가 맞아주었다. 책임자를 찾는다고 하니 자기가 책임자라고 하면서 용건을 물었다. 소개신과 기자증을 보이고 책에 수록된 지명을 주면서 지금 어느 곳인가를 찾아달라고 하였다. 그분은 두말없이 철로 된 궤를 열더니 책 몇 권을 꺼내 열심히 찾아보는 것이였다. 그는 이곳에서 사업한지 오래되는데 이런 지명은 처음 들어본다고 하였다. 혼자서 찾기 힘들 것 같아 우리도 다른 책을 펼쳐들고 함께 찾아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찾아보아도 없었다. 어떻게 되어 이런 이름이 나왔는지 도무지 갈피를 잡을수 없었다. 책임자는 무한시민정국 지명처(地名處)의 조우생(曹雨生) 처장이였다. 조처장도 미안한 눈치였다. 그러면서 자기도 옛날 입대하였을 때 연변에서 근무하였다고 한다. 그러니 연변사람들을 만나 매우 반가운데 도와주지 못했다고 하였다. 우리도 연변에 익숙한 사람을 만났으니 타향에서 고향사람을 만난 기분으로 즐거웠다. 반갑게 다시 인사를 나누자 조처장은 우리에게 지명 책까지 주면서 후에 다른 단서가 있으면 알려주겠다고 하였다. 책의 기재한 주소로는 찾을 수 없었다. 다른 책에는 조선의용대가 기독교청년회(基督敎靑年會)에서 성립대회를 소집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래서 기독교청년회를 찾아가기로 하였다. 박물관의 주관장과 무한혁명정부 유적지의 서관장이 알려준 대로 려황피로(黎黃陂路) 10번지를 찾아야 했다. 그곳에 기독교청년회가 있다는 것이다. 이때 안내하던 기사가 혼잡을 빚어냈다. 분명 려황피로라고 했는데 황피로(黃陂路)에 갔던 것이다. 그곳은 옛날 영국, 프랑스 조계지 자리여서 옛건물들이 많았다. 아무리 수소문 해 보아도 알수 없었다. 여러 거리를 헤매던 중 우연히 기독교녀성청년회(基督敎女性靑年會)라는 간판을 보았다. 아무튼 들어가 물어보기로 하였다. 녀성 두명이 사무실에 앉아있었는데 기독교청년회는 려황피로에 있고 이곳은 황피로라고 알려주었다. 황피로가 아니고 려황피로가 맞는가고 다시 확인하려고 물었다. 그러자 분명하다고 퉁명스럽게 알려주는 것이다. 사람말을 믿지 않는다고 나무리는 눈치까지 보였다. 고맙다고 그곳을 나왔다. 부근의 담배가게에서 한담하는 주민들을 찾아가 려황피로는 어떻게 가는 가고 물었다. 로인 한분이 길을 가르키면서 조금 더 나가면 된다고 하였다. 그래도 우리의 마음은 그냥 믿음이 서지 않았다. 황피로에서 조금 더 나가니 길가에 려황피로라는 남색 도로표식이 보였다. 우리는 저도 몰래 환성을 터쳤다. 이번엔 10번지만 찾으면 되었다. 거리를 따라 도보로 한참 걸으니 담으로 둘러싸인 큰 건물이 나타났다. 건물구조를 보아 분명 우리가 찾는 기독교 청년회인 것 같았다. 서양식 4층 건물이였다. 창문마다 남색 갓을 달아 광선을 얼마간 가리고있는 것이 인상적이였다. 우리가 막 촬영을 하고있는데 한 사업일군이 다가왔다. 무한기독교청년회 주임 손효병(孫曉兵)이였다. 우리가 찾아온 사연을 이야기하자 손주임은 잘못 되었다고 알려주었다. 30년대 이 건물은 미국 해병들의 구락부(俱樂部)였고 기독교청년회는 후에 이곳에 이사왔다고 설명해주었다. 나는 1938년 이곳이 분명 기독교청년회 자리였다는 기재가 있다고 하면서 그럼 려황피로 10번지가 어디냐고 물었다. 손주임은, 이곳은 분명 일본이 무한을 점령하기 전 미국 해군이 주둔하던 해군구락부라고 하면서 이전에도 한국인이 이곳에 찾아왔었는데 이런 오해가 있었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이 거리를 따라 조금 더 나가면 큰 청사 하나가 보이는데 그곳이 옛날 기독교청년회가 있던 곳이라고 알려주었다. 나도 마음을 진정하고 곰곰이 생각하니 그럴법도 하였다. 인사를 하고 거리를 따라 한 50여메터 걸어가니 큰 백화점 하나가 보였다. 백화점 한쪽 벽에는 건물유적을 설명하는 검은 안내문이 새겨져 있었다. 《기독교청년회한구회소구지(基督敎靑年會漢口會所舊址)》라고 씌여있었다. 벽돌과 나무로 된 옛 건물은 3층이였고 1916년에 착공하여 1919년에 락성되였다한다. 카나다의 상인 반미(潘美)가 돈을 냈기때문에 건물 명칭을 《반미당(潘美堂)》이라고 하였고 건물은 1944년 미군이 일본군을 폭격하던 중 파괴되였다고 씌여있었다. 주소는 한구 중산대도(中山大道) 1090번이였다. 수많은 수수께끼들이 돌에 새겨진 이 안내문에 의해 풀려졌다. 안내문 마지막에 건물은 옛 모습대로 복원되였다고 밝혀있었다. 그러나 우리가 보는 백화점은 5층 현대건물이였다. 그러니 복원된 건물도 파괴되여 지금 이 석판 안내문만 남아있는게 분명하였다. 30년대 기독교청년회 옛터, 바로 이곳에서 자랑찬 우리민족 의용대가 창립되였고 이들은 중국항일전쟁에 참가하여 항쟁의 발자욱을 중국 전역에 아로새겨 놓았던 것이다. 아무튼 조선의용대 창설지를 확인하였으니 고생한 보람이 있었다. 그리고 한국인도 미국 해군구락부옛터를 먼저 찾아온 것도 우리의 기재에도 문제가 있음을 설명한다. 답사하면서 몸소 찾아보는 것만이 가장 분명한 것이다. 조선의용대 창설지에 대한 잘못된 서술을 바로잡고 새롭게 연구를 할수있게 되었다고 생각하니 성취감도 들었다. 1937년 로구교사변이 일어나자 중국의 본격적인 항일전쟁이 시작되였다. 중국공산당과 국민당은 재차 합작하여 공동으로 일본침략자들에 대항하였다. 국공합작을 토대로 한 항일민족통일전선의 결성은 관내 각지의 제 조선인 반일단체에 훌륭한 본보기를 보여주었으며 크나큰 고무와 추동을 주었다. 그리하여 분산과 갈등, 그리고 파쟁을 계속하던 조선 반일운동단체들도 조선민족의 대동단결을 열망하게 되었다. 1937년 11월 12일, 좌익진영인 조선민족혁명당, 조선민족해방동맹, 조선혁명자련맹, 조선청년전위동맹을 비롯한 단체가 남경에서 회의를 열고 통일적인 《조선민족전선련맹(朝鮮民族戰線聯盟)》을 결성하고 김원봉, 김학무, 김규광, 류자명을 리사로 선출하고 석정(石正 윤세주 尹世冑), 한일성(韓一成), 왕지연(王志延), 박차정(朴次貞), 신악(申岳)을 간사로 하였다. 12월초 련맹의 대부분 성원들이 한구에 모여 창립선언을 정식 발표하였다. 1938년 10월 10일 무한 외각전투의 포성속에서 관내 조선민족의 첫 번째 무장대오인 조선의용대 창건의식이 한구 기독교청년회에서 성대히 진행 되였다. 중국공산당 중앙대표이며 국민정부 군사위원회 정치부 부부장으로 있던 주은래가 창립의식에 참석하여 동방피압박 약소민족의 해방에 관련해 연설하였고 정치부 제3청 청장인 곽말약(郭沫若)도 시를 지어 축하하였다. 조선의용대는 국민정부(國民政府)군사위원회 정치부 산하의 조선의용군 지도위원회(指導委員會)의 지도를 받았다. 지도위원회는 중국측 대표 4명에 조선측 대표 4명이 있었다. 조선민족혁명당을 대표한 진국빈(陳國斌 김원봉), 조선민족해방동맹의 김규광, 조선청년전위동맹의 김학무, 무정부주의자 대표 류자명이 조선인 위원으로 지도위원회에서 사업하였다. 의용대 창건시 대원이 도합 120여명이였고 김원봉이 의용대 총대장을 맡았다. 그리고 두 개 구대(區隊)로 나누어 편성하였는데 박효삼(朴孝三)이 제1구대 구대장으로 임명되고 왕통(王通)이 정치지도원으로 임명되였다. 제2구대는 구대장에 리익성(李益星), 정치지도원에 김학무가 임명되였다. 1939년 대원이 300여명으로 늘어나자 제3구대를 새로 편성하고 한지성(韓志成)을 지대장으로 임명하였다. 10월 13일, 무한청년회관에서 의용대 창립 경축모임이 있었다. 모임에서 의용대 대원들이 가무를 공연하였고 《3.8》녀성가창단, 한구시 후원선전대대, 한구시 청년항전협회, 아동보육원, 아동구제협회, 동자군 등 6개 단체에서 내놓은 종목이 공연되였다. 의용대의 활동 초기, 성과가 가장 크고 또 가장 특색 있는 반일투쟁 방식은 적군에 대한 정치공세였다. 의용대는 창건된후 즉각 무한 보위전 외각전선에 나가 선전활동과 부상자 구조, 전투지원에 진력하였다. 무한 함락의 막바지에 이르러 국민당 당, 정, 군 요인들은 서로 앞다투어 전이하기에 급급했지만 의용대는 2주야를 걸쳐 한구를 거대한 정신적 보루로 만들어 놓았다. 그들은 사닥다리를 메고 다니며 거리 담벽과 아스팔트 길바닥까지 콜타르로 큰 표어를 써 놓았다. 그들은 일본글로 《일본형제들이여, 착취자들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지 말라!》, 《총구를 상관에게 돌리라!》, 《병사들은 전선에서 피를 흘리고 재벌들은 후방에서 향락을 누린다!》라는 내용을 써 놓았다. 일본침략군이 무한 시내를 전부 점령하기 두시간 전까지 의용대 대원들은 줄곧 반일표어를 쓰고있었다. 이 광경을 목격한 국민당 정부 군사위원회 정치부 제3청 청장으로 있던 곽말약은 자기의 저서 《홍파곡(紅波曲)》(인민문학출판사 1979년)에서 이렇게 적고있다.《이런 구호들은 내가 전날 만든 글귀인데 오늘 벌써 담벽과 물 땅크 그리고 거리바닥에 나 붙었다. 그것은 조선의용대 친구들에게 감사를 드려야 한다. 그들은 철수하기 며칠전에 동원되여 이 사업을 맡았던 것이다....후에 포로들의 진술을 통하여 안 일이지만 적들은 무한시를 점령한후 그 표어들 때문에 큰 골머리를 앓았던 것이다. 적들은 옹근 사흘이 걸려서야 그 표어를 지울수 있었다! 하지만 거리에 써놓은 표어는 지울수 있어도 머릿속에 박힌 것은 지울수도 없었던 것이다. 내가 탄 차가 후성거리를 지날 때 표어를 쓰는 사람들은 일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들은 네댓씩 한조가 되어 콜타르나 뼁끼를 들고 사닥다리를 메고 다니면서 부지런히 시간을 다그치며 일하고있었다. 그것은 나에게 제일 큰 감격을 주었고 또 나를 제일 부끄럽게 한 광경이였다는 것을 나는 승인하여야 하겠다. 그들은 모두가 조선의용대의 친구들이고 중국사람은 확실히 한사람도 없었다. 우리 중국에도 일본 문을 아는 인재는 적지 않을 것이다. 일본 류학생만 하여도 최저로 수십만명은 되지 않겠는가? 그런데 무한이 위험을 앞둔 이 시각 대적표어를 쓰고있는 것은 조선의 벗들 뿐이였다.》
52    제52회 무한에서 만난 원계성 교수 댓글:  조회:4734  추천:65  2008-04-11
  1937년부터 1938년까지 일제의 중국대륙 침략은 본격화되였다. 로구교 사변을 통해 하북을 점령한 일본군은 선후로 산서성 태원과 화북의 요충인 서주를 공격하였다. 1937년 9월 중국공산당이 령도하는 팔로군 115사는 림표, 섭영진의 인솔하에 평형관(平型关)에서 일본군 이다가끼 사단의 천여명 적들을 섬멸하는 승전을 올렸다. 평형관 섬멸전은 전면적인 항일전쟁이 개시된후 이룩한 첫 승리로서 전국인민의 항쟁의지를 크게 고무시켜 주었다. 1938년 4월 정면전장에서 리종인(李宗仁)이 서주 부근의 국민당군을 지휘하여 대아장부근에서 만 천여명의 일본군을 섬멸하는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전반 정세는 호전되지 않았다. 일본침략군은 화북을 점령하고 뱃길로 공격하여 상해와 남경을 점령하고 중부도시 무한을 위협하였다.   (권립 교수) “일제는 1938년 3월까지 화북을 거의 다 강점하고 화중지구의 상해, 남경까지 불바다로 만들고 남경에서 30만 민중을 학살한 남경참안을 빚어냈습니다. 1938년 7월부터 일제는 25개 사단으로 무한을 포위했다. 공격전이 개시되였습니다. 장개석의 부대는 뒤걸음만 쳤습니다. 중화민족이 가장 위험한 시기에 처한 이때 무한에 모였던 우리민족 청년들이 조선의용대를 조직하였습니다.”   2004년 2월 7일부터 광주, 서금, 남창, 구강에 대한 답사를 마치고 구강에서 무한으로 출발한 것은 10일만인 2월 17일 오전이였다. 장강을 사이두고 구강시 바른편은 호북성 소지진(小池鎭)이였다. 버스는 구강시를 빠져나와 거창한 구강장강대교(九江長江大橋)를 건너 호북 경내로 들어갔다. 무한까지 4시간 거리였는데 길 량쪽은 산이 없고 모두 무연한 평지였다. 호북성 소재지인 무한은 예로부터 무한 삼진으로 불리웠다. 무창, 한구(漢口), 한양(漢陽) 세 진의 통칭인 것이다. 만리 장강이 무창과 한구, 한양을 남북으로 갈라놓았고 장강의 지류인 한수(漢水)가 다시 한구와 한양을 동서로 갈라놓았다. 그러나 지금은 장강과 한수에 다리가 놓여져 무한 3진이 한 도시로 되었다. 장강의 중류에 위치한 무한은 중국 중부의 중요한 수륙 교통과 문화 중심지였다. 손중산의 무창봉기가 이곳에서 일어났기때문에 많은 혁명자들에게 있어서 이곳은 혁명의 성지로 간주되였다. 북벌군이 무한을 공략한 이후 중국의 혁명중심지는 광주에서 무한으로 옮겨졌다. 많은 조선혁명자들도 무한에 모여와 혁명투쟁에 참가하였다. 20세기 20년대초에 무한에는 벌써 중한호조사가 있어 조선 이주민들과 중국혁명지사들이 함께 활동하였다. 그들은 중국인민이 조계지를 회수하는 투쟁에 참가하였다. 중국혁명이 고조됨에 따라 더욱 많은 조선혁명자들이 이곳에 모여왔다. 의렬단은 단장 김원봉을 따라 본거를 무한에 정하고 조직세를 크게 확장하였다. 1937년 중국의 전면적인 항일전쟁이 일어나자 조선혁명자들은 다시 무한에 모였다. 그들은 중국의 국공합작 정세에 비추어 여러 당파들의 대 단결을 주장하였고 표면적으로나마 통합을 이루렀다. 그 산물이 바로 무한에서의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 창립이였다. 우리는 무창에서 중앙인민방송국 무한 기자소의 소개로 신의대주점(新宜大酒店)에 투숙하였다. 호텔 부근에서 점심식사를 마친 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기때문에 먼저 호북성 당사판공실(黨史辦公室)에 찾아가 관련 단서를 찾아보기로 하였다. 성정부는 무창의 홍산로(洪山路)에 있었다. 기자증을 보이고 당사 판공실의 관련일군들을 찾아갔다. 우리가 찾아온 영문을 이야기하고 도움을 바란다고 하자 관련 일군들이 여러 가지 관련 자료를 내놓았다. 차를 마시며 열심히 자료를 뒤져보았지만 유감스럽게도 참고될만한 것이 없었다. 연구일군들과 문의해 보아도 조선의용대에 관하여 잘 모르고있었다. 책에서 본 생각은 나지만 구체적으로 연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우리가 관련 자료들을 뒤질 사이에 연구원은 전화로 이곳저곳 문의하였지만 아무런 결과도 없었다. 그는 미안하다면서 무한 박물관에 가서 문의하라고 하였다. 우리는 아무런 소득도 없이 돌아서고 말았다. 이런 결과를 사전에 생각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였지만 조선인 반일투쟁사에 대해서는 사실 중국 연구원들의 연구가 너무나도 빈약하였다. 광주의 황수생 연구원의 말처럼, 지금 연구일군들은 연구과제를 선택할 때 언제나 쉽게 전문가들의 호감을 살 수 있고 또 성과를 낼 수 있는 부분을 택하기때문에 조선반일투사들과 관련된 연구과제는 연구하는 사람이 없다. 이 과제로 직함이나 학위를 따기 힘들고 연구성과를 내기 힘들다는 것이다. 중국 관련 연구분야에서 우리 반일투쟁사가 많이 홀시 되고 있는데 대해 못내 가슴 아팠다. 그러면서 우리가 하는 일에 대한 사명감이 더 커졌다. 중국내 조선인 반일투사들의 력사와 종적은 우리가 답사하고 찾아야하고 연구해야하였다. 방송기자인 우리는 비록 전문 연구일군이 아니지만 조선민족 투쟁사를 배우고 이를 널리 선전할 용의가 있다. 중국 조선족에게 알려주어야 할뿐만 아니라 세계 모든 우리민족에게 객관적이고 보다 정확한 력사를 알려주어야 하며 또 중국내 기타 민족에게도 우리민족의 자랑 찬 력사를 널리 선전해야되겠다는 생각을 더욱 굳히게 되었다. 전화약속으로 중남재경대학(中南財經大學)의 원계성(袁繼成) 교수를 찾아간 것은 2월 18일 저녁이였다. 중남 재정경제 대학은 우리가 투숙한 호텔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위치하였다. 학교 교원 사택을 찾아가 전화를 하니 원계성 교수가 만면에 웃음을 담고 마중 나왔다. 원교수 저택은 생각보다 헐망하였다. 아파트는 오래된 건물이였고 방도 세 개였지만 부인이 안 계시는지 지저분하였다. 그러나 교수는 소탈하게 웃으면서 아무것도 개의치 않았다. 교수는 중화민국사와 국민혁명정부 무한시기, 항일전쟁 시기의 무한력사에 대한 연구가 깊은 분이였다. 그는 다년간 서류국, 각종 문헌, 신문자료들을 찾으며 연구를 깊이 했다. 그는 중경시기 국민당 자료들을 가득 필기한 노트와 자기의 론문을 꺼내면서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원교수의 소개에 따르면 조선혁명자들이 무한에서 활동하면서 주로 중국의 세 개 력사사건에 개입하였다. 하나는 한구 주민들이 영국 조계지를 회수하는 사건이였다. 시민들의 반제운동이 한껏 고조를 이루었을 때 영국, 일본, 프랑스 조계지의 인디아 고용인들이 윁남, 조선인들과 련합하여 무한에서 동방피압박민족 조직을 만들었다. 조선혁명가 권준이 동방피압박민족 련합회의 조선인 대표로 출석해 대회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되였다는 기재도 있다. 동방피압박민족 련합회에 참가한 조선인들은 영국 조계지 회수를 적극 도와주었고 한구 시민들의 시위에 동참하였다. 원교수는 그때 조선인들의 영향은 비교적 컸다고 평가하였다. 다른 하나는 황포군관학교 무한분교를 중심으로 수많은 조선청년들이 조직을 묶고 중국 대혁명에 적극 참가하였다. 학교측에서는 광주에서 황포군관학교 정치과 5기 학생들을 무한에 전이시키고 무한에서 전국을 대상으로 학생들을 모집하였다. 이때 조선인 청년회에서 전국 각지에 널리 수많은 조선청년들을 학교에 입학시켰다. 이들은 황포군관학교 6기로 입학하였다. 또한 리제심이 광주에서 공산당을 탄압하자 광주의 많은 조선혁명자들도 무한에 왔다. 김원봉이 거느린 의렬단 요원들도 이 시기 무한에 와서 활동하였다. 원교수는 이때 조선혁명가 최용건도 무한에 왔다고 하지만 분명한 자료는 찾지 못했다고 말하였다. 북벌군이 무한을 공략한후 중국군 장교로 있던 조선인들이 한구에 왔고 화북과 상해를 비롯한 각지에 있던 많은 조선청년과 학생들도 이곳에 모여왔다. 혁명정부가 광주로부터 무한에 옮겨온후 의렬단을 중심으로 한 진보적인 조선혁명가들은 조선청년들과 군관들을 단합시켜 무한에서 류악한국혁명청년회를 비롯한 진보적인 단체를 조직하였다. 무한의 청년회에는 근 50명에 달하는 회원이 있었다. 이 가운데서 백득림(白得林), 권준, 홍의표(洪義杓), 리검운(李劍雲), 오세진(吳世振), 리우각(李愚慤), 로세방(勞世芳) 등은 황포군관학교 출신이거나 쏘련에서 국민혁명군내에 파견한 군관들이였다. 그리고 중앙군사정치학교(中央軍事政治學校) 무한분교 재학생들인 진공목(陳公木), 진갑수(陳甲秀), 사검인(史劍仁), 안동만(安東晩), 류광세(劉光世), 박우균(朴禹均) 등 24명이 있었다. 뿐만 아니라 무창중산대학(武昌中山大學)과 남호학병단(南湖學兵團), 항공국(航空局)의 학생들 그리고 4명의 교민대표가 청년회에 참가하였다. 류악한국혁명청년회는 민족독립혁명과 사회혁명에 종사하며 세계혁명대중과 련합하여 세계혁명 완수에 기여한다는 기본강령을 제기하였다. 청년회는 상무집행위원으로 사무부에 권준, 재무부에 안동만, 선전부에 홍의표, 조직부에 진갑수, 조사부에 진공목을 선정하고 후보위원으로 사검인과 로세방을 선출하였다. 청년회가 조직되자 청년회 비서 권준은 1927년 류악혁명청년회의 설립을 중국 국민당 중앙집행위원회에 통보하고 청년회 승인과 지원을 받아냈다. 그후 항일전쟁이 폭발하자 각지에서 활동하던 청년회 간부진과 회원들은 다시 무한에 모여 조선의용대 성립의 기간 력량으로 되였다. 세 번째로는 항일전쟁시기 무한 함락을 앞두고 많은 조선혁명가들이 다시 무한에 모여 조선의용대를 설립하였다. 이 시기 중국 동북, 상해, 남경이 모두 선후로 일본침략군에게 강점되였다. 당시 국민당은 중경에 정부를 옮겼다지만 많은 기관과 사회단체들은 무한에 체류하고있었고 외국 사절들도 무한에 있었다. 남경이 함락된후 국민당의 거물급 인물들인 장개석, 왕정위, 공상희(孔祥熙), 풍옥상이 무한에 있었고 공산당 대표로 왕명(王明), 주은래, 동필무(董必武) 등이 무한에 있었다. 조선교민들은 모두 무한을 보위하는 항전에 적극 참가하였다. 원계성 교수는 1937년 12월부터 1938년 10월 무한이 함락되기까지는 국공합작이 가장 좋은 시기였다고 이야기하면서 이러한 중국정세에 비추어 조선혁명자들의 좌우익 단합도 이 시기 비교적 성과가 컸다고 주장하였다. 그 표징으로 조선의용대의 성립이라고 하였다. 이 시기 무한에는 조선청년 전시봉사단이 있었다. 봉사단의 조선청년들은 병사들을 위문하고 난민들을 구조해 주었다. 1938년 4월 10일, 한구에서 조선민족통일전선을 묶고 《조선민족전선(朝鮮民族戰線)》이라는 반월간을 출판하였다. 조선민족전선운동이라는 기구도 있었다. 간행물 주필은 김규광과 류자명(柳子明)이였다. 잡지는 중국의 항일을 적극 지원하였고 조선은 일본의 노역과 통치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중국인민과 함께 일제와 싸워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1938년 10월 10일 일본침략군이 곧바로 무한을 강점하게 될 무렵, 조선청년들은 무한에서 단연히 조선의용대를 성립하여 무한 보위전에 투신하려 하였다. 원계성 교수는 또, 조선의용대 성립일에 관련해 자기의 주장을 내놓았다. 연구를 거쳐 10월 10일에 성립되였고 신문에 피로된 것이 10월 13일이라고 하였다. 이날 원계성 교수에게서 소중한 자료들을 많이 확인하게 되어 성취감이 있었다. 그리고 무한에도 이처럼 조선민족의 항일투쟁사를 잘 알고있는 교수가 있어 기뻤다. 원교수를 작별하고 호텔로 돌아오고 저녁에는 무한의 야경을 구경하였다. 장강에 정박한 륜선들과 장강대교, 강기슭의 유보도, 각이한 옛 청사들이 모두 네온 빛 속에서 한결 황홀해 보였다.
51    제51회 중국항전의 최전선에서 싸운 김자렬과 강석훈 댓글:  조회:5011  추천:62  2008-04-11
  중국인민의 항일전쟁은 1937년 7월 7일 로구교사변(盧溝橋事變)으로 시작된다. 로구교사변전 비록 동북과 대만, 하북 등지가 일제의 통치와 예속을 받았지만 반동군벌과 국민당의 타협정책으로 하여 전민의 항일전은 시작되지 않았다. 1936년 12월 12일, 국민당의 애국장령 장학량(張學良)과 양호성(楊虎城)이 서안사변(西安事變)을 일으켜 중국은 재차 국공합작의 국면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침략군이 로구교사변을 일으켜 중국에 대한 대거 침략을 시작하자 중국 전민의 항일전이 개시되였던것이다. 그러므로 중국력사는 로구교사변으로부터 1945년 일본의 항복까지를 항일전쟁시기로 규명하고있다.   (권립 교수) “항일전쟁시기는 7.7사변부터 45년 8월에 일제가 투항하고 연안에 있던 우리 동포들이 동북을 향해 진군할때까지입니다. 이 시기는 말 그대로 8년간의 항일구국전쟁시기이고 중화민족의 생사존망을 결정하는 관건적인 력사기입니다. 5천년 문명을 갖고있던 중국이 일제의 예속하에 식민지로 되느냐 아니면 독립을 고수하느냐 하는 력사시기입니다. 이시기에 중공과 전국여러민족인민들의 노력에 의하여 제2차 국공합작이 실현되였습니다. 그리하여 국민당군대는 정면전장에서 싸우게 되었고 중공의 령도하의 섬북의 홍군은 국민혁명군 8로군으로 남방의 홍군은 신편 제4군으로 편성되여 적후 항일근거지를 개척하고 적후에서 일제와 판가리싸움을 벌였습니다.”   2004년 1월 7일, 답사팀은 중국 항일전쟁의 전면개시를 의미하는 유적지 로구교로 갔다. 북경시 풍대구(豊臺區) 완평성(宛平城)에 위치한 로구교는 시 중심과 20㎞ 거리를 두고있다. 로구교는 완평성밖의 영정하(永定河)에 놓여있다. 답사팀은 번화한 시가지를 벗어나 서남쪽으로 30분 가량 달려 완평성에 도착하였다. 성루와 성곽이 비교적 완벽하게 보존된 완평성을 지나자 다리 란간에 수많은 돌사자가 줄져있는 로구교가 보였다. 동쪽 다리목에는 로구효월(盧溝曉月)이라는 오랜 비석과 정자가 있었다. 연경(燕京) 8경의 하나로 소문난 이 비석은 청나라 건륭(乾隆)황제가 썼다는 로구효월 넉자로 하여 더 유명해졌던것이다. 비석 뒷면에는 로구교 시가 적혀있었다. 로구효월 비석을 지나 로구교 다리에 올라섰다. 지금은 다리로 사용하지 않고 관광지로 개방하고있었다. 전부 돌과 조각으로 축조된 이 다리는 800여년의 유구한 력사를 가진 중국 고대 3대 명교(名橋)의 첫 자리를 차지한다. 기재에 의하면 1189년부터 축조된 이 다리는 처음에는 광리교(廣利橋)로 부르다가 다리 밑으로 흐르는 강이 로구하(盧溝河 후에는 영정하)였기때문에 후에 로구교라고 불리웠다고 한다. 11개 다리 기둥을 가진 로구교의 길이는 260여m였고 너비는 근 10m에 달했다. 다리는 흰 돌로 만들었고 다리 란간에는 정교한 돌사자를 조각하여 놓았다. 자세히 살펴보면 돌사자의 머리, 등, 배, 발 밑에 형태가 각이한 작은 돌사자들이 숨어있는것이 보인다. 크고 작은 돌사자가 너무 많기때문에 현지에는 로구교의 돌사자는 헤아릴수 없다는 속어가 있다. 현재 초보적인 통계에 의하면 돌사자가 도합 498개가 남아있다 한다. 바로 이 아름다운 옛 다리에서 일본침략자들을 저격하는 전투가 시작되였고 국민정부군에 있던 조선인 장교 김자렬(金子烈)과 강석훈(姜錫勳)도 부대와 함께 일본군과의 초기접전을 치렀던것이다. 1937년, 국민당군 29군 10만 장병이 하북, 차할(察哈爾), 북평, 천진 지역을 수비하고있었다. 당시 북평에 주둔하고있던 일본군은 빈번히 군사연습을 진행하면서 본격적인 중국침략의 구실을 찾고있었다. 7월 7일, 일본군은 병사 한명이 실종되였다는 구실로 완평성내로 들어와 수색하려 하였지만 중국군의 거부를 받았다. 그리하여 쌍방간의 충돌이 일어났고 8일부터 일본군은 완평성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11일 새벽, 로구교를 사수하던 중국군이 반격을 시작하여 부근의 적들을 물리쳤다. 일본주둔군은 타협의 환상을 버리지 않는 중국 당국과 계속 담판하는 한편 주력부대를 북평쪽에 집결시키고 대규모의 공격전을 준비하였다. 국민당은 일본에 사죄하고 사건 조작자를 징벌하며 로구교 주변의 정규군을 철수하는 등 일본의 터무니없는 조건을 들어주면서 이른바 《진덕순(秦德純), 송정(松井) 협정》을 체결하였다. 사태확대를 두려워하는 국민당 장교들의 심리를 리용해 주력부대를 끌어 모은 일본침략군은 드디어 협정을 찢어버리고 북평, 천진을 전면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29군은 우세한 적들과 영용히 싸우다가 철수하였다. 국민정부군의 유명한 항일명장인 장자충(張自忠)부대에는 조선인 장교 김자렬(金子烈)과 강석훈(姜錫勳)이 있었다. 김자렬은 180사단 소장급 참모장으로 있었고 강석훈은 113려단 228단 상좌급 부관으로 있었다.   (권립 교수) “전국적인 정면항전의 첫 전투가 로구교전투였습니다. 로구교를 지키던 부대가 바로 항일명장 장자충의 제29군 장병들이였습니다. 여기에는 운남강무학당 제12기생이며 일본 와세다대학 정치학부를 나온 김자렬 소장이 있었습니다. 김자렬 장군은 장자충의 명령을 받들고 진공해들어오는 일본군의 큰 타격을 안겼습니다.”   김자렬의 원명은 김정흡이고 호는 동천이며 또 김세준(金世晙)이라는 별명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그는 조선 강원도 철원군(鐵原郡) 사람으로서 1913년에 일본으로 가서 도꾜 와세다대학 정치학부에서 경제학을 전공하였다. 그는 일본에서 중국공산주의운동의 선구자 리대소를 알게 되였다. 1914년 겨울, 구국의 뜻을 품은 김자렬은 홀몸으로 삭풍이 몰아치는 압록강을 건너 중국 북경에 왔다. 그는 중국말을 익힌 후 상해에 갔다가 항주(抗州)의 절강체육전문학교 제3기에 입학하였다. 졸업후 선후로 녕파(寧波) 경찰청과 항주시 소방대에서 근무하였다. 1916년에 다시 상해에서 조선인보습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던 그는 리범석(李範奭)을 비롯한 지사들과 함께 운남강무학당(雲南講武學堂) 12기 포병과에 입학하여 군사기술을 배웠다. 학교를 졸업한후 김자렬은 상해에서 3.1운동 소식을 접하였고 또 상해림시정부 수립을 보았다. 그러나 조선독립의 희망을 국제적 승인과 원조에 기탁하고 혁명군대 양성과 무력투쟁을 중시하지 않는 림시정부에 실망을 느끼고 북상하여 북경, 동북지역에서 활동하였다. 1921년 김자렬은 동북의 독립군과 각 단체들을 통합시킬 뜻을 품고 북경에서 박용만, 신채호, 신숙 등 지사들과 함께 군사통일주비회의를 소집하였다. 이들은 동북과 관내 각지의 군사단체의 통합을 주장하고 림시정부 불신임안을 채택하고 국민대표대회 소집을 내놓았다. 1923년 상해에서 국민대표대회 소집이 이룩되였으나 아무런 결과를 보지 못하자 김자렬은 다시 중국 동북을 주무대로 활동하였다. 그사이 그는 로씨야에 가서 조선독립운동 지원을 요구하였고 조선에 잠입해 폭동을 조직하기도 하였다. 1924년 북경에서 《앞장》이라는 간행물을 창간하고 반일활동경비를 모금하고있던 김자렬은 리대소를 만나 그의 소개로 중국 서북군 장령 풍옥상이 꾸린 장가구(張家口) 국민군간부학교(國民軍幹部學校) 포병과를 졸업하였다. 김자렬은 항일사상이 강한 풍옥상을 따라 서북에서 군벌들과 싸웠고 1927년 봄에 북벌군과 회합하였다. 그후 풍옥상과 함께 장개석을 반대하는 중원대전에 참가했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1931년, 김자렬은 제29군 38사의 장자충 부대에 편입되여 려단참모장으로 임명되였으며 후에는 180사단의 참모장으로 임명되여 장자충장군을 따라 항전의 첫 전투인 로구교전투에 참가하였다. 그후 대아장(臺兒莊)전투, 서주(徐州)전투에 참가하였고 1940년에는 호북성 조양(棗陽) 남과점(南瓜店) 전투에도 참가하였다. 그 전투에서 부대 사령관이였던 장자충이 적들에게 포위되여 장렬히 전사하였다. 장자충이 희생된후 김자렬은 일선부대를 떠나 국민당 후근부에서 근무하면서 조선독립운동을 적극 동조해주었다. 1945년, 항일전쟁이 승리하자 조선으로 나가려 북경에 왔지만 가지 않고 1961년에 북경에서 병사하였다.   (권립 교수) “유명한 항일장군 장자충의 부대에는 또 강석훈이라는 연변의 훈춘에서 항일투쟁에 참가한 상좌부관이 있었습니다. 강석훈 상좌는 7.7사변 당시에 전사들을 거느리고 랑방역으로 들이닥친 일제를 요정냈습니다. 1938년에는 산동성의 다섯차례의 전투에 뛰여들어 용맹을 과시했습니다. 제3차 회전에서 그는 일제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강석훈은 일제가 투항할때까지 줄곧 최전선에서 싸웠습니다.”   강석훈은 북경부근의 랑방(廊房) 역에서 장자충 부대의 113려의 228단과 기관총련을 지휘하여 일본침략군과 싸웠다. 그는 1896년 조선 종성군의 한 가난한 농민가정에서 차남으로 태여났다. 중국 연변의 훈춘에서 어린시절을 보낸 그는 중국 동북에서 독립군으로 활약하였고 청산리전투에도 참가하였다. 이 시기 그는 조기공산주의자 리동휘의 소개로 고려공산당에 가입하였고 1921년에 상해에서 손중산의 소개로 풍옥상의 서북군에 가게 되였다. 1937년에 강석훈은 풍옥상의 지시에 따라 29군 113려단의 소좌부관으로 랑방에 주둔하고있었다. 로구교사변이 일어난후 그는 중국측을 대표하여 랑방을 통과하는 일본군인들을 단속하였다. 7월 18일, 수백명 일본군이 천진으로부터 랑방을 거쳐 북평쪽으로 가려하였다. 그는 이를 가로막고 거듭 교섭하다가 끝내 접전을 시작하였다. 강석훈은 228단의 기총련을 거느리고 랑방역 부근에서 사수하였다. 날이 밝을 때까지 그들은 수많은 일본군을 사살하고 승세를 잡았지만 명령에 따라 철수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후 강석훈은 재정비한 장자충의 제59군을 따라 산동성 림기(臨沂)전역에 참가하였다. 그가 소속된 38사와 김자렬이 참모장으로 있던 180사는 59군의 두개 주력부대였다. 부대는 차엽산(茶葉山)전투, 사자령(沙子嶺)전투에서 영용히 싸웠다. 59군은 림기지역에서 일본침략군의 두 주력의 하나인 이다가끼(板桓征四郞)의 제5사단의 공격을 수차 물리쳤다. 그리하여 이다가끼의 지원과 협동을 받지 못한 다른 한 일본군 주력인 10사단은 대아장(臺兒莊)부근에서 만여명의 사상을 내면서 거의 전멸되다싶이 하였다. 림기전투와 대아장전투로 이어진 대아장전역의 승리는 중국의 정면전쟁의 첫 대승으로서 일본군의 불가전승이라는 신화를 깨뜨렸다. 그러나 국민당의 피동적인 전략으로 정면전장의 불리한 국면은 돌려세우지 못하였다. 그후 강석훈은 계속 국민당부대를 따라 일제와 싸웠으며 기회가 있으면 공산당부대와 조선의용대를 도와주었다. 1941년, 그는 조선의용대를 도와주다가 국민당 특무들에게 발각되여 옥고도 치렀지만 풍옥상의 담보로 석방되였다. 항일전쟁 승리후 그는 제33집단군의 명령에 따라 하남성 상구(商丘)에서 일본군의 투항을 접수하였다. 중국 항일전쟁의 전면개시를 의미하는 로구교 유적지를 떠나 완평성에 들어갔다. 완평성은 옛 성루와 성곽이 비교적 완벽하게 보존되여있었다. 성내에는 지금도 수많은 단층집들이 있었고 동서남북으로 뻗은 몇갈래 길이 있었다. 완평성 중심에는 1987년에 대외로 개방한 중국인민항일전쟁기념관이 있다. 흰 현대식 건물이였는데 기념관 정원은 잔디와 각가지 화초, 기념조각으로 장식되여있었다. 안내원의 설명을 들으며 기념관에 들어서니 길이가 18m, 높이가 5m에 달하는 거대한 구리조각이 눈앞에 안겨왔다. 군인, 지식인, 농민, 로동자, 상인, 아동들이 꿋꿋이 선 자세로 침략자들을 항격한다는 내용이였다. 공화국 국가에서 쓴것처럼 《우리의 피와 살로 새로운 장성을 축조(用我們的血肉鑄成新的長城)》한다는 내용이다. 아무 말도 없이, 아무런 표정도 없이 정숙하게 서있는 구리조각 인물들은 관람자들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고있다. 대청 천정에는 8개의 커다란 옛 종이 걸려있었다. 종은 8년 항일전쟁을 의미하고 외래침략자에 항격하는 경종을 계속 울린다는 뜻을 내포하고있다. 5000㎡나 되는 전시청은 종합내용, 일본침략군의 폭행, 인민의 항쟁, 항일선렬 네부분으로 나뉘여 5000여점의 소중한 사진과 문물, 친필유고, 서적들을 전시하고있었다. 8년간 지속된 중국의 항일전쟁은 로구교로부터 전면 시작되였던것이다. 중국인민의 항일전쟁에는 수많은 조선혁명가들이 참여하였다. 로구교 전투를 치른 장자충부대에 김자렬과 강석훈이 있었고 기타 부대에도 많은 조선인이 참가하였다. 로구교사변후 1938년에는 무한에서 조선의용대가 창립되였다. 중국 관내 조선혁명가들은 중국의 국공합작과 함께 전례없는 통합의 모습을 보이고 중국 관내 각 전장에서 일본침략자들과 싸웠다.  
50    제50회 남경에서의 김원봉의 활동 댓글:  조회:4724  추천:87  2008-01-28
  1930년대 남경은 중국 관내 조선인 혁명자와 독립운동가들의 활동 중심지로 부상하였다. 김구와 한국 림시정부가 남경에 와서 민족통합운동을 전개하였을 뿐만 아니라 김원봉을 단장으로 한 의렬단도 남경으로 본부를 옮겼다. 김원봉은 대일전선통일을 이룩해내고 각파 혁명가들을 규합해 조선민족혁명당을 창건하였으며 우수한 조선청년들을 훈련시키면서 본격적인 반일투쟁을 준비하였다. 중국 내 수많은 조선혁명가와 독립운동가들이 김원봉과 김구의 호소에 따라 남경에 규합되였고 새로운 투쟁력량을 형성해 나갔다. 상해, 해염, 가흥에 대한 답사를 마치고 남경으로 떠난 것은 2003년 9월 25일이였다. 장강 하류평원 중부에 위치한 남경시는 력사적으로 금릉(金陵), 건업(建业)으로 불리우다가 14세기 명나라 개국황제 주원장(朱元璋)이 이곳에 도읍을 정함으로써 남경으로 불리게 되였다. 기원전 472년 월왕(越王) 구천(勾践)이 와신상담(卧薪尝胆)하여 오(吴)나라를 멸망시킨후 이곳에 성을 쌓으면서 도시가 생기게 되였다. 그후 력대 봉건왕조가 이곳에 도읍을 정했고 근대에 와서는 국민정부가 이곳에 수도를 정했다. 중국의 가장 큰 하천 부두를 가지고있는 남경은 장강 수로를 통해 중부와 서부의 무한, 중경에 이를 수 있고 동쪽으로는 상해를 거쳐 바다로 진출할수 있다. 뿐만 아니라 남북으로 륙로 교통이 발달하여 강소성의 정치, 경제, 문화중심으로 되고있다. 남경은 자금산(紫金山), 현무호(玄武湖), 진회하(秦淮河)를 비롯해 산과 호수, 강을 가진 아름다운 도시이다. 송나라때의 유적이 있는 현무호, 전형적인 강남의 정취를 느낄수 있는 진회하 그리고 자금산에 위치한 중국 근대의 혁명선구자 손중산의 릉원인 중산릉(中山陵)은 많은 관광자들이 선호하는 명소이다. 9월 26일 오전 답사팀은 남경시 지명판공실에 찾아가 옛 지명과 지금의 지명을 대조해 보고나서 의렬단 본부 옛터인 호가화원(胡家花园)으로 향했다. 남경에서의 조선인은 대체적으로 진회하 이북의 도시 남부인 지금의 남경시 백하구(白下区)에서 거주하고 활동하였다. 백하구의 집경로(集庆路)와 명양로(鸣羊街) 부근에는 남경의 유명한 원림인 우원(愚园)이 있다. 우원은 명나라때 중산왕(中山王)의 놀이터였는데 청나라시기에 와서 호(胡)씨 집안이 이곳에 원림을 만들면서 생겨났다. 흙을 쌓아 산을 만들고 땅을 파서 늪을 만들었으며 각가지 진귀한 화초를 심고 정교한 루각을 수십채 지어 이곳은 유명한 원림으로 변했다. 우원은 청나라말기에 공원으로 개방되여 더욱 많이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호씨 집안이 만든 화원이였기때문에 현지인들은 우원을 그냥 호가화원이라고 불렀다. 1932년 남경에 도착한 김원봉은 백하로(白下路) 명양가에 위치한 호가화원 부근의 가옥에 거처를 정하고 의렬단 주요 간부들과 함께 기거하면서 활동을 전개했던 것이다. 김원봉(1898-1958)은 경상남도 밀양군 부북면(府北面) 감천리(甘川里)의 한 농가에서 태여났다. 그의 호는 약산(若山)이고 선후로 최림(崔林), 진국빈(陈国斌)이라는 가명을 사용하였다. 어려서부터 국권을 상실한 조선이 일제의 유린을 받고있는 참상을 목격해온 김원봉은 일제를 몰아내고 조국을 되찾을 큰 뜻을 품었다. 1916년 그는 중국에 건너와 선후로 천진 덕화학당(德华学堂)과 남경의 금릉대학(金陵大学)에서 공부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있은후 김원봉은 무장항일의 뜻을 품고 중국 동북에 세운 독립군 양성학교인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하였다. 학교에서 그는 군사지식을 학습하는 한편 뜻이 맞는 지사들을 규합시켜 11월 9일 길림에서 비밀회의를 열고 조선의렬단을 창단하였다. 김원봉과 윤세주(尹世冑), 량건호(梁健浩), 한봉근(韩凤根), 한봉인(韩凤仁), 김옥(金玉), 강세우(姜世宇), 리성우(李成宇), 서상락(徐相洛), 권준, 신철휴(申哲休), 곽재기(郭在骥), 량동선(梁东宣) 등 13명이 “정의로운 일을 맹렬히 실행”한다는 취지로 의렬단을 조직하였다. 그들은 조선의 독립과 세계의 평등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다할 것을 맹세하였다. 의렬단 단장으로 추대된 김원봉은 일제 식민통치 기관과 기구, 폭압기구를 남김없이 파괴하고 일제 요인과 민족반역자를 암살, 응징함으로써 일제의 식민통치 기반을 무너뜨릴데 관한 행동방침을 확정하였다. 창단후 김원봉은 의렬단 본거지를 북경에 옮기고 단재 신채호의 반 림시정부 성토문을 적극 지지하면서 무력항쟁을 주창하였고 또 <조선혁명선언>을 의렬단 행동강령으로 확정하면서 의렬단을 확대하였다. 20세기 20년대 의렬단은 선후로 부산, 밀양 경찰서 폭탄투척 의거, 조선총독부, 동양척식회사, 도꾜 니주바시(二重桥) 폭탄의거, 상해 황포탄 의거를 비롯한 의렬활동을 전개함으로써 조선뿐만 아니라 일본, 중국 도처에서 일제에게 타격을 주었고 동방 피압박민족의 항쟁을 크게 고무시켰다. 1926년 김원봉은 최림이라는 가명으로 중국 광주에 갔다. 단순한 의렬투쟁 보다는 대중운동을 이끌고 자체의 군대를 조직해야함을 깊이 인식한 그는 의렬단 단원들을 이끌고 황포군관학교 4기에 입학하여 군사지식을 배우는 한편 중국의 반제반봉건 투쟁에 참가하였다. 1927년 국공분렬후 김원봉은 하룡부대에 입대하여 남창봉기에 참가하였다가 봉기가 실패하자 상해를 거쳐 북평으로 갔다. 북평에서 그는 공산주의 리론가들인 한위건(韩伪健), 안광찬(安光瓚)을 만나 공산주의와 대중운동을 학습하였으며 레닌주의 학교를 세우고 조선공산당 재건사업을 이끌었다. 1932년 김원봉은 더욱 많은 혁명자들을 규합하고 중국 내 모든 반일지사들을 단합하여 대일통일전선(对日统一战线)을 형성하기 위해 남경으로 왔다. 남경에서 그는 진국빈(陈国斌)이라는 가명을 사용하였다. 그는 황포군관학교 시절의 동학이였던 국민정부 고위관원인 황소미(黄绍美), 관린정(关麟征)과 련락을 달고 또 중국항일 구국단체인 “동북의용군후원회(东北义勇军後援会)”, “동북난민후원회(东北难民後援会)”의 지원을 받았다. 황소미는 아시아문화협회를 주도하였고 관린정은 국민군 제25군 군장이며 진포로(津浦路) 경비 사령관이였다. 특히 동기생인 삼민주의력행사(三民主义力行社) 서기인 등걸(藤杰)의 도움이 컸다. 김원봉은 등걸을 통해 대일작전에 관한 의렬단의 다음과 같은 계획을 장개석에게 전했다. 첫째, 일본과 만주 요인을 암살하고 중요 기구를 파괴한다. 둘째, 재만 반일단체와 손잡고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한다. 셋째, 조선, 만주의 로동자와 농민계층에 심입해 혁명군 조직을 준비한다. 넷째, 지페를 위조하여 만주의 경제를 교란한다. 다섯째, 테로활동을 실행하고 물자를 확보한다. 장개석은 의렬단 지원 사항은 삼민주의력행사에서 맡아보도록 하고 매달 3,000원을 활동경비로 제공할 것을 지시하였다. 의렬단 본부 옛터인 남경시 호가화원은 지금 옛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변했다. 다년간 정돈하지 않았던 탓으로 쓰레기가 쌓이고 늪은 오염되여 악취를 풍겼다. 화원부근에 이따금 헐망한 가옥들이 보였다. 지금은 많이 낡았지만 옛날에는 그럴듯한 집이 였음을 짐작할수 있었다. 그러나 명확한 번지수가 없고 또한 비슷한 건물들이 많았기 때문에 더욱 구체적인 위치는 확인할 길이 없었다. 삼민주의력행사의 도움으로 중국 국민정부의 지원을 받은 김원봉은 1932년 10월 20일 남경 교외의 탕산(汤山) 선사묘(善祠庙)라는 사찰에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를 세웠다. 이때 국민정부는 군사위원회 간부훈련반을 탕산에 세웠는데 훈련반은 6개 대로 나뉘였다. 그 가운데서 6대가 조선청년들이 수용되였는데 곧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였다. 보안을 위해 교외에 학교자리를 정했고 대외로는 중국군사위원회 간부훈련반 6대로 지칭하였다. 탕산은 남경시 동부 교외에 위치하였다. 9월 26일 오후 답사팀이 남경시 탕산진에 가 보았지만 지금 학교 옛터에는 나무와 잡초만 무성할뿐 아무것도 없었다. 기재에 따르면 당시 이곳에는 주변을 철사로 둘러막은 선사묘라는 사찰이 있었다. 사찰은 세 개 건물로 되었는데 가운데 건물에는 신상(神像)이 모셔졌고 곁의 큰방은 학생들의 기숙사로 사용되고 작은 방은 교관실로 사용되였다한다. 그러나 지금은 선사묘 종적은 찾을길 없고 빈 옛터만 남아있었다.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는 1932년 10월 개교되여 1933년 4월까지 제1기생 26명을 이곳에서 졸업시켰다. 학교운영은 김원봉과 의렬단 지도부가 담당하였다. 황포군관학교 출신인 리집중(李集中), 신악(申岳), 김중(金鐘), 로을룡(卢乙龙), 박건웅, 권준을 비롯해 왕현지(王现之 리영준), 한일래(韩一来), 리철호(李哲浩)가 군사, 정치, 총무를 맡은 교관으로 있었다. 김세일(金世日), 윤세주, 리륙사(李陆史)를 비롯한 26명 학원이 제1기로 졸업하였다. 김세일과 윤세주는 후에 조선의용군의 주요간부로 항일전장에서 활약하였고 리륙사를 비롯한 많은 학원들은 각지에서 반일활동을 전개하던 중 체포되여 희생되였다. 1933년 9월 학교는 강소성 강녕진(江宁鎭)에 옮겨 제2기를 운영하였다. 지금의 남경시 교부영(教敷营)에 자리를 정했다고하지만 명확하게 확인할수없었다. 1934년 4월 까지 리원대(李元大), 문명철(文明哲), 리정순(李正淳), 관건(关键), 윤공흠(尹公钦)을 비롯한 55명 학원이 졸업하였다. 1935년 4월 김원봉은 남경 교외의 상방진(上坊鎭) 황룡산에서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제3기를 교육시켰다. 1기와 2기를 졸업시켰던 탕산과 강녕진의 학교위치가 일제 밀정에게 탐지되였기 때문에 제3기는 남경에서 멀리 떨어진 상방진의 편벽한 산속으로 자리를 옮기지 않으면 안되였다. 27일 오전 답사팀 일행은 상방진 황룡산을 찾아갔다. 그곳에는 제3기 학원들이 거처를 잡았던 옛 절인 천녕사(天宁寺)가 지금도 남아있었다. 남경의 우화대(雨花臺)를 거쳐 남부로 30킬로메터 정도가면 상방향(上坊乡)이 나타난다. 당시의 상방진은 지금의 상방향으로 변했고 황룡산도 장산(长山)이라고 한다. 상방향에서 얼마간 더 가면 산중 우묵진 곳에 이르렀다. 산은 가파롭지 않았지만 비교적 편벽하여 나무와 대숲이 어거져 있었다. 우리는 탕산림장(汤山林场) 장산(长山) 작업터, 천녕사 작업대라는 글이 어렴풋이 새겨져있는 돌비석 두 개를 발견하였고 평지쪽에 있는 낡은 절을 발견하였다. 가까이 가보니 공지를 둘러싸고 세면에 단층 건물이 있었는데 정면 건물에 천녕사라는 붉은 글이 새겨져있었다. 이곳이 바로 당시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제3기 학원들의 훈련장소로 사용되였던 황룡산 천녕사였다. 왕통(王通), 한대성(韩大成), 호유백(胡维白)을 비롯한 36명 학원이 반년후인 1935년 10월 졸업하였다. 제3기는 양민산, 윤세주, 리춘암(李春巖) 등이 정치교관으로, 김세일, 리상지(李相之), 신악이 군사교관으로 있었고 김두봉(金枓奉)이 조선의 력사, 지리를 강의하였다.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의 교장으로서 김원봉은 국민당 삼민주의력행사의 전폭적인 도움으로 조선청년들을 양성하기에 힘썼다. 학원들은 아침 6시에 기상하여 저녁 9시에 취침하면서 엄격한 정치교육과 군사훈련을 받았다. 한편 김원봉은 김구가 락양에 한인특별반을 설립하자 그곳에도 조선청년들을 파견하였고 남경에 있는 중국 중앙군관학교에도 분산적으로 조선청년을 파견하여 영향력을 넓히는 동시에 민족의 반일력량을 키워나갔다. 1932년부터 1935년까지 김원봉은 남경에 학교를 세워 조선청년들을 양성했을뿐만 아니라 남경에 모인 여러 당파들과의 련대를 강화하고 전민족의 대일통일전선을 구축하기 위해 힘썼다. 1932년 10월 조선혁명당과 한국독립당, 한국혁명당, 의렬단, 광복단(光复团)을 비롯한 단체들이 상해에 모여 대일전선통일동맹(对日战线统一同盟)을 결성하였다. 김원봉은 또한 1935년 7월 4일 5개 당파단체들을 규합시켜 조선민족혁명당(朝鲜民族革命党)을 창당하였다. 남경 금릉대학 강당에서 소집된 창당대회에서 일제에 항격하여 독립을 이룩하고 민주국가를 건설하자는 원칙을 토대로 당강과 정책을 확정하였고 676명 당원을 받아들였다. 아울러 조선혁명당, 한국독립당, 신한독립당(新韩独立党), 대한독립당, 조선의렬단 5개 단체의 해체를 선포하고 조선민족혁명당에 통합하였다. 그리하여 조선민족혁명당은 중국 내 조선인 반일투쟁의 가장 큰 당으로 되었다. 김규식이 당 주석을 맡고 김원봉이 총비서로 선거되였다. 1937년 일제가 남경을 공격하자 김원봉은 조선혁명당 본부를 거느리고 남경을 철수하여 무한으로 갔다. 무한에서 그는 여러 혁명군사학교를 졸업한 청년들을 재규합하여 중국항일전쟁시기 중요한 역할을 일으킨 조선의용대의 창립을 이룩해 냈다. 천녕사 유적지를 보고나서 답사팀은 귀로에 올랐다. 설레이는 대나무숲으로부터 바람을 타고 씩씩 조선청년들의 노래 소리가 들려오는 듯 싶었다. “꽃피는 고국은 빛 잃고 물이 용솟음치듯 대중은 들끓는다. 억압받고 빼앗긴 우리 삶의 길 들끓는 것만으로 되찰을수 있으랴. 갈 길 방황하는 동포들이여 오라 이곳 배움의 마당으로. 조선에서 자라난 아이들이여 가슴의 핏줄기 들끓는 우리 동포여 울어도 소용없다 눈물 머금고 결의 굳게 모두 일어서라. 한을 푸는 성스러운 싸움에 필승의 의기 이곳에 용솟음친다.”  
49    제49회 절강성 가흥의 피난처 옛터 댓글:  조회:4289  추천:76  2008-01-27
  1931년 9.18사변을 통해 일본침략자들은 중국 동북을 강점하였다. 부유한 동북대지는 일제가 더욱 큰 야망을 실현하는 중요한 기지로 전락되였고 수천만 동북사람들이 일제의 압박과 략탈에 시달려야 했다. 일제의 중국대륙침략은 수억 중국인민의 강렬한 반항을 불러일으켰다. 진보인사들은 일제와 싸울 것을 호소하면서 일제와 타협하는 국민정부에 강력히 항의하였다. 그러나 장개석 국민정부는 전면적인 항일전쟁이 두려워 계속 공개적인 항일을 시도하지 못하였다. 1932년 4월 29일 일제 침략자들에게 일격을 가한 윤봉길 의사의 의거가 있은 후 중국 관민들은 조선 독립운동의 힘을 알게 되었고 조선독립을 위한 조선독립운동가들의 반일투쟁을 동조하고 적극 도와주기 시작하였다. 김구와 부분적 림시정부 요원들이 중국 진보인사의 도움을 받아 가장 먼저 피난한 곳은 절강성 가흥시였다. 1932년 5월, 홍구공원 폭탄사건이후 김구와 안공근은 중국의 진보인사 저보성의 배치에 따라 엄항섭의 호송을 받으며 상해에서 기차를 타고 가흥으로 갔다. 저보성은 일찍 신해혁명에 참가했고 절강성 주석, 상해 항일구원회 회장, 상해법학원 원장을 력임했던 인물이였고 가흥의 부호였다. 저보성은 김구를 가흥 남호(南湖)기슭의 매만가(梅湾街)에 피신시켰다. 해염현에서의 답사를 마치고 간단한 점심식사를 한후 우리는 절강성 북부의 유명한 도시 가흥시로 향했다. 강남의 시골풍경을 만끽하면서 가흥시에 도착한 것은 오후 3시였다. 가흥은 력사가 유구하고 물산이 풍부한 강남의 명소이다. 이곳은 산이 없었다. 가로세로 뻗은 수로가 평지의 무수한 하천과 호수를 이어주고 있는 물의 고장이였다. 가흥은 또한 명인이 많이 나는 고장이기도 하다. 근대 위대한 애국주의자 심균유(沈钧儒), 현대문학거장 모순(茅盾), 저명한 시인 서지마(徐志摩)가 이곳 태생이고 오늘의 무협소설 대가 김용(金庸)도 이곳 사람이다. 가흥의 관광명소로는 남호(南湖)가 으뜸이다. 600여무의 면적을 가진 호수 중심에는 작은 섬 하나가 있다. 섬에는 연우루(烟雨楼)를 비롯한 옛 원림식 건축물들이 있어 호수의 문화적인 정취를 보태주고있다. 중국 송(宋)나라 이후로 가흥의 남호는 항주의 서호(西湖), 소흥(绍兴)의 동호(东湖)와 더불어 절강의 3개 유명한 호수로 불리우고 있다. 가흥시 남호 풍경구에 위치한 매만가는 시중심의 상업구역과 이어져 있었다. 륙지로는 가흥시 남부와 옛 시구역으로 갈 수 있었고 수로로는 남호를 거쳐 운하로 통했다. 이곳에는 중국민주동맹(民盟) 창시인인 심균유(沈钧儒) 선생의 옛집, 신해혁명의 원로이며 93학사 창시인인 저보성 선생의 옛집 유적이 있고 근대 녀혁명가 추근(秋瑾)이 혁명활동을 위해 세웠던 남호학당(南湖学堂)이 있다. 매만가에 도착해 76번지를 찾아가니 물가에 지은 작은 2층 건물 보였다. 검은 기와에 흰 벽의 건물이였는데 건물 정면은 널로 만든 겉벽에 싸여있었다. 뒤쪽으로 들어가니 작은 방 하나가 있었다. 창이 없는 검은색 널문이 굳게 닫혀있고 그 곁에 한자로 “대한민국 김구선생 피난처”라고 밝혀있었다. 이곳이 바로 1932년부터 1936년사이 김구가 피신하여 기타 독립운동가들과 비밀리에 접촉하던 곳이다. 당시 가흥에 도착한 김구는 우선 호수가의 수륜사창(秀纶丝厂)이라는 비단공장에 몸을 숨겼다가 매만가 76번지인 이곳으로 옮겼던 것이다. 건물은 저보성의 양자인 진동생(陈桐生)의 집으로서 민국초기에 축조된 2층 3진(三进) 구조였다. 거실 창가에 앉으면 남호의 아름다운 풍경이 한눈에 안겨온다. 주동생은 부근의 농장을 운영하였는데 일이 끝나면 늘 이곳에 들려 김구와 한담을 하군 하였다한다. 답사팀이 도착했을 때는 공교롭게도 옛 건물을 한창 보수하는 중이였다. 몇몇 로동자가 열심히 일하고있었다. 안내일군이 우리에게 건물의 구조를 자상히 설명해주었다.   (안내원) “뒤의 이 집이 김구 선생이 살던 곳입니다. 우리는 이번에 이쪽을 헐고 한국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잘 보수하려합니다. 건물은 현대적인 서양식 건물인데 집 밑으로 물이 흐릅니다. 김구 어머니와 아들은 김구 선생이 이곳에 있는지를 몰랐습니다. 김구 선생은 거의 모든 일을 중지하고 있었습니다. 주애보라는 녀성과 함께 선상생활을 하였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전반적으로 보면 괜찮은 건물입니다. 이곳에 작은 구멍이 있는데 이는 밖을 내다보는 구멍입니다.”   건물에는 1층에서 2층으로 올라가는 비밀계단이 있었다. 강남은 대부분 숨겨놓은 벽 궤가 있었지만 이 집은 궤가 아니라 비밀계단이 있었다. 그리고 2층에는 밖을 내다볼 수 있는 작은 구멍이 있었다. 김구는 이곳으로부터 밖의 상황을 살폈다고 한다. 상황이 위급하면 비밀 통로를 따라 1층으로 내려가 배를 타고 직접 강으로 피신할 수 있다고 한다. 김구는 1936년 2월까지 이곳에 있다가 남경으로 갔다. 그 사이 김구는 해염으로 피신하여 반년간 있었고 또 신분을 감추기 위해 가흥의 주애보(朱爱宝)라는 뱃사공 녀성과 함께 선상 생활을 하기도 했다. 그는 홀몸으로 다니면 더욱 위험하다는 저보성의 아들 저봉장(褚凤章)의 권유를 받아들여 주애보와 함께 있기로 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김구는 주애보와 함께 늘 운하와 호수에 배를 띄워 몸을 피하군 하였다. 60여년이 지난 뒤 <가흥일보(嘉兴日报)>의 기자이며 절강성 녀류 소설가인 하연생(夏輦生)이 김구와 주애보의 사랑이야기를 다룬 소설 <선월(船月)>를 발표하였다. 소설은 후에 한국문판으로 출판되여 한국 정부상까지 받았다. 하연생은 또 장편소설 <호보류망(虎步流亡)>과 <회귀천당(回归天堂)> 두 작품을 출판하였다. 한류삼부곡(韩流三部曲)으로 불리우는 이 세 작품은 김구와 윤봉길의 문학적 형상을 성공적으로 부각하여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조용한 가흥에 피신한 김구는 이 시기 한국 독립운동에 대해 전면적으로 회고하고 깊이 있게 반성함으로써 미래 투쟁방향을 확정하였다. 그는 오직 전민족의 통합만이 일제를 전승하고 민족독립을 실현하는 길이라고 인식하게 되었다. 아울러 중국과 한국 두 민족의 통일전선을 이룩해야하고 수중에 잘 훈련된 군대가 있어야함을 인식하게 되였다.   (안내원) “이쪽은 김구 선생이 손님을 만나고 식사하던 곳입니다. 아래층입니다. 이 집은 밖에서 보면 작아보이지만 안은 이렇게 큽니다. 물론 밖에서는 층집인줄 모릅니다. 이것이 문인데 김구선생이 와서 이 문에 칠을 했습니다. 이쪽에 보이는 것이 운하입니다.”   매만가 76번지의 김구선생 피난처는 한창 보수중이였다. 가흥시 정부에서는 이곳 옛 건물을 잘 보수하고 집 주변을 잘 정돈하여 강남의 관광명소로 개발하려는 계획이라고 한다. 매만가 76번지의 김구선생 피난처에서 200m정도 떨어진 곳에는 리동녕(李东宁)을 비롯한 한국 림시정부 요원들이 피신하였던 유적지가 있다. 주소는 가흥시 남문(南门) 일휘교(日晖桥) 17번지이다. 도보로 몇분간 걸으면 앞에 높은 담에 둘러싸인 커다란 2층 건물이 나타난다. 청나라 말기에 축조된 건물 앞에는 정원과 높은 담이 있었다. 담에는 검은 널문이 있었다. 녹 쓴 쇠고리가 달린 문에는 일휘교 17번지라는 작은 주소표가 붙어 있었고 문 곁에는 “한국림시정부요원주처(韩国临时政府要员住处)”라는 기념석판이 있었다. 가흥시 정부에서 2001년에 만든 기념석판이였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가운데 좁은 공지를 둘러싸고 3면에 빼곡이 들어앉은 2층 낡은 건물들이 보였다. 한창 보수중이여서 건물의 원 모습은 명확하지 않았지만 대가족이 오붓하게 모여 살수있을 만큼 방도 많았다는 것을 짐작할수있었다.   (안내원) “이곳은 한국 림시정부 요원들의 피난지입니다. 림시정부 요원에는 김구 선생의 어머니와 아들이 포함됩니다. 이들도 이곳에서 2년여 있었습니다. 후에 이곳은 다른 사람들에게 사용되였습니다. 1999년부터 이곳 원 주민들을 철수시켜 원 건물모습을 회복하고있습니다. 이곳에 한국 독립기념관에서 보내준 사진전시를 하는데 지금은 보수 작업을 하기 때문에 잠시 전시를 하지 않고있습니다. 아마 2004년에 가야 전부 보수하여 개방할 것 같습니다. 아래층은 림시정부 요원들이 식사하고 일상생활을 하던 곳이고 위층은 휴식하던 곳입니다. 당시 상해에 있던 림시정부는 각지로 흩어졌는데 일부가 이곳에 오고 많은 사람들은 항주에 갔습니다. 김구 선생은 안전을 위해 이곳에 거주하지 않고 부근의 매만가에 거주했습니다.”   우리는 설명을 들으며 건물을 살펴보았다. 1932년 5월 중순 한국 림시정부 요원인 리동녕, 김의한(金毅汉), 박찬익과 그 일가가 저보성의 배치에 따라 상해를 떠나 가흥에 오게 되었다. 그들은 이 집을 세내여 거처로 정했다. 며칠후 엄항섭이 김구와 안공근을 호송해 상해로부터 가흥에 도착하였다. 엄항섭과 안공근도 이 집에 거주하면서 비밀리에 김구와 련락하였다. 그후 조선국내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탈출한 김구의 모친 곽락원(郭樂园) 녀사가 두 손자 김인(金仁)과 김신(金信)을 데리고 찾아와 역시 이곳에서 기거하였다. 이들은 남녀로소 한곳에 모여 살았기에 방대한 대가족을 련상 시켰다. 현지인들은 줄곧 이들을 광동에서 온 대가정으로 생각하였다. 알아듣기 어렵지만 말투가 부드러운 광동방언이 우리말과 비슷했기 때문일 것이다. 김구가 가흥에 도착한후 이곳은 림정의 비밀거점으로도 사용되였다. 몇몇 림시정부 요원들만이 김구가 부근에 피신하고있다는 사실을 알고있었다. 김구도 역시 이들을 통해 기타 독립운동가들과의 련계를 확보할수있었다. 김구가 가흥으로 피신할 때 상해에 있던 대부분 림시정부 일군들은 사처로 흩어졌고 일부는 절강성 항주로 이동하였다. 항주에도 림시정부 유적지가 여러 곳이 있다지만 그곳까지 답사할 여유가 없어 다소 유감이였다. 1933년 5월 김구와 안공근, 엄항섭은 가흥으로부터 남경에 가 장개석을 만나 재정면의 지원을 허락 받았다. 중국측의 적극적인 지원을 이끌어낸 김구는 다음 보조로 림시정부 조직체계를 강화하고 미래 반일투쟁 방향을 확정함이 시급하다고 느꼈다. 그러나 항주에 모인 림시정부 주요인사들과의 분쟁이 나타나 여러 가지 애로를 겪게 되었다. 크게 실망한 김구와 리동녕은 항주에 머물지 않고 계속 가흥에서 생활하면서 비밀리에 림시정부 내부 통합을 주도하였다. 장개석을 만난 후 김구는 중국 측의 제의를 받아들여 중국 중앙륙군군관학교(中央陆军军官学校) 락양분교(洛阳分校)에 설치한 한인특별반(韩人特别班)을 운영하였다. 우수한 조선청년들을 규합하기 위해 그는 동북에서 활동하던 리청천(李青天)과 손잡고 중국 동북과 조선 국내로부터 청년들을 모집하였다. 1934년 2월 락양분교의 한인특별반이 정식 개교하였는데 당시 92명 청년들이 모였다. 김구가 고문자격으로 전반운영을 책임지고 리청천이 총교관(总教官)을 맡았으며 리범석(李范奭)이 학생대장을 맡았다. 그리고 오광선(吴光鲜), 조경한(赵擎韩), 윤경천(尹敬天), 한헌(韩宪)이 교관으로 있었다. 그러나 특별반 운영에서 김구와 리청천이 서로 학생들을 자기쪽으로 규합시키려 했기 때문에 갈등이 생기게 되었다. 심화되는 모순을 해결할수 없게 되자 김구는 자기쪽 25명 입교생을 남경으로 소환하기도 하였다. 락양분교의 한인특별반은 일년 뒤 62명을 졸업시켰지만 이를 탐지한 일본측이 중국측에 강경한 외교적 압력을 가함으로써 페쇄되고 말았다. 가흥에 피신한 김구와 림시정부 요원들은 이시기 또한 림시정부 재정비에 성공하였다. 1935년 11월 림시정부 의정원 비상회의가 드디어 가흥의 남호에서 소집되였다. 리동녕, 조완구, 김구, 조성환, 리시영, 송병조, 차리석을 비롯한 16명 의정원이 모인 자리에서 김구와 리동녕, 조완구가 국무위원으로 보충 선거되고 제13기 림시정부가 출범하였다. 가흥의 매만가의 김구선생 피난처와 림시정부 요원거처 유적지를 답사하고 가흥의 명소 남호에 도착했을때는 늦여름의 태양이 뉘엿뉘엿 지고있을 때였다. 수려한 남호의 동남안에는 복구해 만든 유람선 한 척이 조용히 떠 있었다. 길이가 16m이고 너비가 3m인 유람선 중앙에는 탁상과 다기들이 놓여있었다. 1921년 중국 공산당 제1차 대표대회에 참가했던 대표들은 바로 이 유람선에서 마지막 회의를 소집했던 것이다. 가흥에서의 답사를 마치면서 1935년 한국림시정부 비상회의 역시 가흥 남호의 한 유람선에서 소집되였다는 사실이 무척 흥미롭게 느껴졌다. 그 대회에서 김구는 사실상 한국림시정부의 실권을 장악하기 시작하였으며 드디어 민족주의 진영의 수반으로 부상하였던 것이다.  
48    제48회 김구피난처와 재청별장 댓글:  조회:5559  추천:54  2008-01-27
  세인들을 경악시킨 윤봉길 의사의 홍구공원 폭탄 투척사건은 조선반일투쟁의 힘을 과시하였고 중국과 조선 두 나라 인민의 항쟁의지를 크게 고무해 주었다. 사건이 방생한후 상해의 일본당국은 사건 배후를 들춰내기 위해 혈안이 되었다. 이때 김구는 <홍구공원 폭탄사건의 진상>이라는 글을 언론에 발표함으로써 이번 사건은 자기 혼자서 획책한것이라고 밝혔다. 일제는 60만원이라는 거액의 현상금을 걸고 김구를 수배하였다. 당시 3원이면 일반인이 한달을 족히 살수있었으니 60만원은 엄청난 금액이 아닐수 없었다. 그리하여 애국단을 조직하여 반일투쟁을 진행해오던 김구와 림시정부는 상해를 떠나게 되었다. 그들은 중국 유지인사들의 도움으로 상해 이남의 절강성 해염(海盐), 가흥(嘉兴), 항주(杭州) 등지를 전전하면서 험난한 피난길에 들어섰다. 상해에서 절강성 해염현가지는 118킬로메터 거리였다. 9월 24일 상해에서의 답사를 마무리한후 답사팀 일행은 김구가 반년간 피신해 있었던 해염현 남북호(南北湖)의 유적지인 재청(载青) 별장을 찾아갔다. 절강성 해염현은 전당강(钱塘江)이 바다로 흘러들어 형성된 항주만(杭州湾) 북안에 위치했다. 현의 인구는 27만명이고 지역면적은 500여 평방킬로메터이다. 물이 많고 벼가 잘 되며 비단이 유명한 이곳은 예로부터 부유한 고장이였다. 더욱이 지명에서 알수있듯이 이 고장은 바다 소금이 많이 나기 때문에 옛날에는 소금 장사로 부자가 된 사람이 많았다. 해염현 남부의 전당강 기슭에는 강남의 명승인 남북호가 있다. 세면이 산으로 둘러있고 남부가 항주만과 이어진 호수 가운데는 긴 언제가 있다. 언제는 호수를 남과 북으로 나누었기 때문에 호수이름을 남북호라고 합쳐 부르게 되었다. 우리가 찾는 재청별장이 바로 남북호 기슭의 금우산(金牛山)을 등진 언덕에 자리하고있었다. 현성에서 서남부로 얼마간 가면 남북호가 보였고 주변에 낮은 산이 보였다. 그러나 재청별장은 비교적 외딴 곳에 위치했기 때문에 찾기가 쉽지 않았다. 현지인의 도움을 받으며 한동안 찾아가니 대나무 숲이 우거진 곳에 옛 건물들이 있었고 좁은 길목에 도로표식 하나가 있었다. 나무로 만든 표식에는 <명인문화처(名人文化处)>, <김구피난처(金九避难处)>등 부근의 명소들이 적혀있었다. 그곳으로 조금 더 나가니 대나무와 각가지 나무숲에 에워싸인 가옥이 나타났다. 낮은 문 곁에는 검은 기념석판이 박혀있었다. 거기에는 푸른 글발로 <재청별서(载青别墅)>라고 씌여있었고 1997년 해염현 인민정부에서 이곳을 현급 문화보호단위로 확정했음을 밝히고있었다. 재청별장은 두 부분으로 되었다. 한쪽은 김구선생 전시청이 있고 다른 한쪽은 별장의 주요 건물들이 있었다. 재청(载青)이라는 이름을 가진 이 별장은 1916년에 축조된 남북호의 첫 근대적인 건물이다. 남향으로 된 별장은 정실 3개에 주방하나, 객실 하나가 있었다. 김구 전시관은 별장의 해 빛 밝은 정실에 정해져있었다.   (김구피난처 해설원) “김구피난처 전시관은 2001년 5월에 보수하여 정식 개방했습니다. 96년에 김구선생의 차남 김신 선생이 찾아와 옛집을 확인하였습니다. 지금 한국인이나 중국인들이 많이 찾아오고있습니다. 전시관의 사진들은 한국 독립기념관에서 제공했습니다. 그들은 이곳에 와서 직접 전시관을 설계하고 제작해 주었습니다.”   전시관에 들어서니 김구의 반신 동상이 모셔져있었고 동상 뒤에는 좌우 량쪽으로 “독립정신(独立精神)”과 “량심건국(良心建国)”이라고 쓴 김구의 서예작품이 걸려있었다. 기념관은 몇 개 구역으로 나누어 김구선생과 림시정부의 사적을 설명해주는 사진들을 전시하고 있었다. 1932년 6월 가흥(嘉兴)에서 한 달간 피신하였던 김구는 그곳 상황이 어렵게 되자 중국의 유지인사 저보성(褚辅成)의 도움으로 해염의 재청별장에 와서 피신하게 되었던 것이다.   (해설원) “당시 저보성 선생이 김구를 이곳에 피신시켰습니다. 저보성은 국민당의 원로이고 이곳의 대 부자였습니다. 그분이 김구를 도와 상해에서 가흥에 갔고 다시 재청별장에 오게 했습니다. 저보성의 며느리인 주가예라는 녀인이 김구선생을 모셔왔습니다. 주가예는 사상이 비교적 개방된 중국녀성이였습니다. 김구선생은 백범일지에서 주가예에 대해 서술한 기록이 있습니다.”   재청별장의 주인은 주찬경(朱赞卿)이였다. 그의 질녀 주가예(朱佳蘂)는 가흥의 명인이며 중국국민당 원로인 저보성의 맏며느리였다. 주가예는 시아버지의 분부에 따라 위험을 무릅쓰고 김구를 직접 호위해 해염의 재청별장에 피신시켰다. 한국 림시정부를 이끌고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험난한 항쟁을 해온 백범(白凡) 김구는 우리민족 중국 관내 반일투쟁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다. 김구(1876-1949)는 1876년 조선 황해도 해주(海州) 백운방(白云坊) 기동(基洞)에서 태어났다. 1893년 그는 백성들을 억압하는 탐관오리들을 응징하려는 일념으로 동학(东学)당에 참가하여 해주성 공격전에 참가하였다. 해주성 공격전에서 실패를 본 김구는 신천군(信川郡)에 사는 안태훈(安泰勳) 진사를 찾아가 몸을 숨겼는데 안태훈 진사의 아들이 바로 안중근 의사였다. 중국으로 망명할 때까지 김구는 세 차례 옥고를 치렀다. 1896년 2월 김구는 안악군(安岳郡)에서 일본군 중위 한 명을 찔러 죽였다. 그는 담벽에 명성황후(明成皇后)를 시해한 원쑤를 갚기 위해 일본군인을 죽였노라 쓰고 자기 성명과 주소까지 밝혀놓고 자리를 떴다. 5월 11일 그는 집에서 체포되여 옥고를 치르다가 1898년 탈옥했다. 1908년 김구는 지사들과 함께 신민회(新民会)를 조직하고 구국운동에 앞장섰다. 그러나 이듬해 그는 안중근 의사의 의거에 련루되여 투옥되였다가 증거가 불충분했기 때문에 석방되였다. 1910년 량기탁의 집에서 소집된 신민회 간부회의에 참가한 김구는 리동녕, 안창호, 리시영, 안태국 등 여러 애국지사들과 함께 중국 동북에 독립 전초기지를 마련하기로 계획하고 량기탁과 김구는 이를 위한 모금을 책임졌다. 그러다가 1911년 일제가 신민회를 대거 검거할 때 김구는 세 번째로 체포되여 17년 징역을 선고받았다. 4년간 옥고를 치르던 김구는 1915년에야 감형되여 출옥하였다. 1919년 3.1운동이후 상해로 망명한 김구는 리동녕을 만나 림시정부의 경무국장(警务局长)에 취임하여 한국 림시정부의 사무에 관여하기 시작하였다. 초기의 거듭되는 혼잡을 겪은 후 1926년 12월 림시정부 국무령(国务领)에 취임하여 림시정부를 이끌었다. 그러나 일제의 탄압과 내분 그리고 자금난으로 하여 림시정부는 계속 시련을 겪게 되었다. 조직력을 강화하기 위해 김구는 1928년 리동녕, 리시영과 함께 한국독립당(韩国独立党)을 창당하고 민족 진영의 단합을 모색하였다. 1930년 재차 국무령에 선거된 김구는 이듬해 한인애국단(韩人爱国团)을 조직하였다. 애국단은 무력행동으로 일제에 대항하고 세인들의 항쟁을 고무시키기로 하였다. 1932년 1월 애국단에 가입한 리봉창(李奉昌)이 일본 도꾜에 가서 일본천황 히로히도(裕仁)를 저격하려 했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그는 관병식에 참석하려던 히로히도의 행렬에 폭탄을 던졌지만 목표를 명중하지 못하고 기수와 근위병에게 부상을 입혔다. 리봉창 의사는 현장에서 체포되여 그해 10월 일제에게 살해되였다. 그뒤 4월 29일 김구는 윤봉길 의사를 파견해 홍구공원에서 일제의 요원들을 폭사시키는 쾌거를 이룩해 냈다. 윤봉길 의거후 김구는 절강성 가흥에 피신하게 되었다. 1931년 9.18사변이 있은후 중국 국민당 정부의 실력자였던 진과부(陈果夫)는 조선지사들을 통해 동북의 일제를 타격하려고 계획하였고 중국 국민당 당원이며 한국 독립당인 박찬익(朴赞翊)과 접근하였다. 그러다가 홍구공원 폭탄 사건이 있게 되자 진과부는 김구를 가흥에 피신시킬 것을 지시하였고 그 일을 동북의용군 후원회 회장이였던 저보성에게 맡겼다. 뿐만 아니라 진과부는 장개석과 김구의 면담을 촉성시켰다. 1933년 5월 김구는 안공근(安恭根 안중근 의사의 동생), 엄항섭(严恒燮), 박찬익과 함께 남경 중앙륙군군관학교에 가서 국민정부의 총통(总统) 장개석을 만나 본격적인 지원을 얻게 되었다. 그는 중국측의 도움으로 림시정부를 이끌어 나갈 경비를 마련하게 되었고 또 락양군관학교에 특별반을 설립해 조선청년들을 훈련시켰다. 11월 김구는 가흥에서 림시의정원 비상회의를 소집하고 기구를 강화하면서 국무위원으로 피선 되였다. 그리고 리동녕, 차리석(车利锡)과 함께 한국국민당(韩国国民党)을 창당하고 자기의 기반을 닦았다. 1940년 가흥, 장사(长沙), 류주, 광주, 기강 등지를 전전하다가 중경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중경에서 김구는 림시정부 국무위원회 주석으로 선출되고 한국독립당 집행위원으로 되었으며 림시정부 산하의 광복군을 창설하였다. 이로써 김구는 중경 한국림시정부의 실권을 장악하고 계속 민족진영의 독립운동을 주도해 나갔다. 관리일군이 소개한데 의하면 지금 볼 수 있는 재청별장은 옛터에 복원해 지은 건물이다. 원 건물은 1960년대 창고로 사용되다가 처마가 내려앉아 무너졌다. 1996년 건물을 다시 복원해 놓았다. 그후 한국인들이 많이 찾아오기 시작하였고 또 한국 독립기념관에서 전시관을 설계, 제작해 주어 2001년 5월 김구 전시관이 개방되게 되었던 것이다. 별장의 침실, 객실, 서재, 주방은 모두 간소하였지만 정교하게 느껴졌다. 바람이 불어 대나무 숲이 낮아지면 창으로 아름다운 남북호 전경을 볼수있었다. 해염의 재청별장에서 반년간 체류하면서 김구는 독립운동을 잊지 않고있었다. 그는 흩어진 림시정부 요원들과 련락을 취했고 측근들과 함께 중국 국민당과의 교섭도 적극 모색하였다. 그러나 해염현은 너무나도 편벽한 시골이였기 때문에 피신하기는 적성이였지만 활동하기에는 애로가 많았다. 게다가 현지 경찰들이 이때 김구를 의심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김구는 흩어진 림시정부를 재정비하고 비밀리에 계속 반일지사들을 규합하기 위하여 해염을 떠나 가흥으로 갔다.  
47    제47회 상해 림시정부 옛터 댓글:  조회:4791  추천:66  2008-01-27
  20세기 20년대 상해 프랑스 조계지에 수립된 한국 림시정부를 중심으로 많은 조선 독립지사들과 혁명자들이 상해에서 각자의 활동을 적극 전개하였다. 공산주의자들과 무정부주의자, 의렬단 이들은 각자의 정치주장에 따라 구국의 길과 반일투쟁의 길을 적극 모색하였다. 이 시기 중국력사의 획기적인 의의를 가지는 위대한 중국공산당이 상해에서 창립 되였다. 상해의 조선공산주의자들은 중국 공산당과의 관계를 수립하고 중국공산주의 운동에 관여하기도 하였다.   상해 복단대학 한국연구소의 석원화 교수는 상해시절 조선혁명자들과 독립운동 단체들이 중국 공산당과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강조해 설명하였다.   (석원화) “조선 공산주의자들도 상해에서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하였습니다. 원래는 조선공산당이 있었는데 상해에는 고려공산당이라고 했습니다. 독립적인 조직이였습니다. 1929년 이후 고려공산당도 국제공산당의 지부였고 중국공산당도 국제공산당의 지부였습니다. 이때로부터 국제공산당에서는 한나라에한개 공산당만 있어야 한다고 규정했습니다. 그리하여 30년대 상해에는 중국공산당 한인지부가 나타났습니다. 이는 중국공산당 강소성 법남구 당위원회 산하의 한 개 지부였습니다. 이들은 당시 중국 쏘베트 운동을 지원한다든가 잡지를 내고 한국 교민들을 조직해 중국 홍군을 위해 의연금과 의연 물품을 내게 하였습니다.”   상해의 조선인 공산주의 운동은 림시정부의 요원으로 있었던 리동휘와 려운형에 의해 주도 되였다. 국제공산당에 의해 중국공산당 강소성 법남구(法南区) 한인지부로 된후 조봉암, 홍남표(洪南杓), 한용(韩鎔), 김원식(金元植) 등이 지부성원으로 활약하였다. 이들은 중화쏘베트정부를 적극 지원하였고 간행물을 만들어 반일투쟁을 적극 선전하였으며 국내에 대표를 파견해 조선국내 공산중의 운동을 이끌었다. 상해의 림시정부 유적지를 보고 나서 답사팀은 중국공산당 제1차 대표대회유적지를 찾아갔다. 림시정부 유적지에서 멀지 않은 곳이였다. 마당로와 흥업로가 만나는 곳으로부터 100메터도 안되는 거리를 두고 중국공산당 제1차 대표대회가 열렸던 건물이 나타났다. 주소는 로만구 흥업로 76번지이다. 원래는 망지로(望志路) 106번지였는데 그 사이 번지수가 바뀌였다. 역시 석고문식 층집이였는데 2층으로 되어있었다. 푸른 색과 붉은 색의 벽돌을 섞어 지은 건물 정문은 검은 널대문이였다. 거기에는 동으로 만든 커다란 문고리가 달려있었다. 문 오른쪽에는 중국공산당 제1차 대표대회 개최지 기념관이라고 씌여있었고 왼쪽에는 상해력사박물관이라고 씌여있었다. 문위 벽에는 수덕리(树德里)라는 큰 글자가 새겨져있었는데 수덕리는 1920년대 이곳 주소였다. 1925년에 축조된 이 건물은 중국공산당 창립대회에 참가한 리한준(李汉俊)의 형 리서성(李书城)의 저택이였다. 1921년 7월 23일 건물 1층의 18평방메터 되는 작은 방에 모여 13명 대표들이 중국공산당 제1차 대표대회를 소집하고 중국공산당의 창립을 이룩해 냈던 것이다. 방에 들어서니 정방형 모양의 식탁이 보였다. 식탁 주변에는 12개 작은 나무걸상이 둘러있었고 식탁에는 꽃병과 다기가 놓여져 있었다. 너무나도 간소하고 작은 회의실이였지만 장중하고 숙엄한 분위기를 느낄수 있었다. 기념관에는 별도의 전시실이 없이 회의장 벽에 모택동, 동필무(董必武)를 비롯한 13명 대표의 사진이 걸려있었을 뿐이였다. 중앙당학교 최룡수 교수는 중국 공산주의자들이 조선독립운동과 혁명에 적극적인 동조를 준 상황을 소개해 주었다.   (최룡수 교수) “1917년 로씨야 10월혁명의 승리는 동방 식민지, 반식민주 국가 인민의 민족해방운동을 크게 불러일으켰습니다. 그리하여 1919년 조선에서는 3.1운동이 폭발했고 중국에서는 5.4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중국 5.4운동의 지도자였던 리대소와 진독수는 조선의 3.1운동을 높이 평가했습니다. 진독수는 자기의 글에서 조선의 3.1운동은 위대하고 비장한 운동이며 무력으로가 아닌 민의로서 력사의 새 기원을 개척해 놓았다고 말했습니다. 3.1운동과 5.4운동에 참가한 혁명투사들은 서로 동정하고 지지하면서 20세기 중조 인민의 혁명적 친선관계의 새로운 페지를 장식했습니다. 중국공산당을 5.4운동의 적극적인 성과라고 본다면 한국 림시정부도 3.1운동의 성과라고 할수있습니다. 조직의 성격과 형식은 다르지만 다같이 레닌의 커다란 지지와 관심을 받았습니다. 창립초기에 중국공산당은 상해 림정을 적극 지원했고 밀접한 관계를 가졌습니다. 그것은 조선독립운동과 중국혁명사업이 다 세계 무산계급의 구성부분으로 되기 때문이며 조선공산주의자인 리동휘 등이 림시정부의 주요직을 맡았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후에 중국공산당의 훌륭한 당원으로 조선인 한락연, 김훈, 장지락 등 동지들은 한때는 한국 림시정부의 활동에도 참가하였습니다…1928년후에 제3국제의 결정에 따라 상해에서 활약하던 조선공산주의자들은 중국공산당에 참가하여 중국공산당 강소성 지부를 창설하여 많은 일들을 하였습니다.”   수덕리의 원 건물을 중심으로 중국공산당 제1차 대회 개최지 기념관은 1952년 개관하였다. 50여년래 무려 천여만명이 이곳을 방문하였다. 1997년 6월 중공중앙 선전부에서는 이곳을 전국 애국주의 교양 시범기지로 확정했다. 로만구의 한국 림시정부 유적지와 중국공산당 제1차 대표대회 개최지에 대한 답사를 마치고 만국공동묘지를 찾아 떠났다. 당시 상해에서 활동하던 많은 조선인 지사들이 만국공동묘지에 안장되였다. 상해시 정안사로(静安寺路)에 위치한 만국공동묘지는 지금 송경령 릉원으로 개칭되였고 정안사로도 송원로(宋园路) 개칭되였다. 로만구의 회해중로를 빠져나와 회해서로를 지나 송원로 21번지에 도착하니 거대한 릉원이 나타났다. 중국의 혁명선구자 손중산의 부인이며 중국의 유명한 민주인사였던 송경령 녀사를 기념하기 위해 1981년부터 이곳을 송경령 릉원이라고 했다. 부지면적인 12헥타르에 달하는 릉원은 록음이 우거지고 푸른 잔디가 깔려있는 아름다운 원림으로 되여있다. 릉원 중앙에는 송경령 묘소와 기념관이 있고 묘소 동서 량쪽으로 외국인 묘지와 명인 묘지가 지금도 보존되여있다. 외국인 묘원(墓园)에 이르니 타원형 비석 하나가 있었다. 거기에는 외국인 묘원이라고 밝혀있었는데 이곳이 바로 옛날 만국공동묘지 자리이다. 외국인 묘원은 드넓은 잔디밭에 자리잡고있었다. 무성하게 자란 풀을 헤치면 하얀 대리석으로 만든 묘비가 나타난다. 답사팀 일행은 묘지에 밝힌 이름들을 하나하나 검증하기 시작하였다. 한국 림시정부 제2대 대통령을 지냈던 박은식(朴殷植), 림시정부 법무총장, 국무총리 대리 겸 외무총장을 지냈던 신정, 군무총장과 국무총리를 력임하였던 로백린(卢伯麟), 인성학교 교장이였던 김태연(金泰渊), 림시정부 국무원 비서장 김립(金立) 그리고 김구의 부인 최준례 녀사를 비롯해 수십명 민족독립 지사들과 일반 조선인 유해가 안치되여있었다. 1993년 박은식, 신정, 로백린을 비롯한 지사들의 유해는 한국으로 봉환해 갔기 때문에 지금은 묘비만 남아있다. 1859년 황해도 황주(黄州)에서 태여난 박은식은 일찍부터 문필활동에 종사하였다. 그는 선후로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 주필로 활약하였고 중국 상해에서 신규식, 홍명희 등과 더불어 <동제사>를 조직하기도 하였다. 박은식은 상해에서 독립활동에 종사하는 한편 박달학원을 세워 조선청년들을 교육하였고 민족사학 저작인 <한국통사>를 저술하였다. 1919년 그는 한국 림시정부 기관지인 <독립신문>사 사장을 맡고 민족언론을 주도하였다. 1924년 박은식은 림시정부의 국무총리를 맡았고 대통령 대리를 겸했다. 1925년 리승만 대통령의 탄핵 면직 사건이 있은뒤 그는 림시정부 제2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그러나 이시기 림시정부는 내외로 극심한 곤경을 겪고있었다. 곤경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는 전민족의 대단결을 주장하면서 정부의 조직력을 강화하기에 힘썼다. 이해 그는 제2차 헌법개정을 거쳐 대통령제를 국무령 중심체제로 바꾸었다. 년로함에도 불구하고 민족독립을 위해 로심초사하던 박은식은 1925년 11월 1일 상해에서 병으로 영면하였다. 로백린은 1873년 황해도 송화(松禾)에서 태여났다. 무예와 한문에 능한 그는 일찍 일본 륙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무관으로 있었다. 조선이 국권을 상실하자 그는 안창호, 량기탁, 리동휘, 신채호 등과 함께 신민회를 조직하고 중국 동북에 독립운동 기지를 건립할 계획을 작성하였다. 그는 또 고향인 송화에서 뜻이 있는 청장년들을 양성하기도 하였다. 3.1운동이 일어나자 로백린은 즉시 상해로 달려가 한국 림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였다. 미래 전쟁에서 막강한 군력을 키우려면 기술이 뛰여난 비행사가 많이 수요된다는 것을 파악한 그는 1920년 림시정부 군무부 총장의 신분으로 미국에 건너가 비행사 양성소를 설립하였다. 미국의 조선인들이 복격적으로 도와주었기 때문에 이 양성소는 선후로 수십면 조선인 비행사를 양성해냈다. 1921년 로백린은 다시 상해로 와서 무관학교 출신인 청년들을 규합해 일제에 대한 무력항쟁을 적극 준비하였다. 이듬해 그는 리승만의 지명으로 국무총리 대리를 맡았고 1923년에는 정식 국무총리로 추대되여 림시정부를 이끌었다. 1924년 박은식이 대통령으로 당선되자 그는 국무총리에 임명되였고 군무총장을 겸직하면서 계속 독립운동을 위해 활동하였다. 1926년 1월 22일 상해에서 병으로 세상을 떴다. 인성학교 교장으로 있었던 김태연은 1891년 황해도 장연(长渊)에서 태여났다. 그는 1919년 5월 상해에서 려운형과 함께 상해한인거류민단(上海韩人居留民团)을 조직하고 상해지역 조선인들을 단합하여 림시정부 활동을 지원하였다. 이해 그는 또 려운형과 함께 대한적십자회(大韩赤十字会)를 조직하고 손정도(孙贞道) 등과 함께 교육회(教育会)를 조직하기도 하였다. 상해 한국 림시정부에서 김태연은 황해도 의원으로 사업하였다. 1921년 11월 그는 인성학교 교장으로 선임되여 중국 상해의 조선인 교육에 진력하다가 병사하였다. 어느덧 저녁녘이 되어 황폰빛이 비쳐들기 시작하였다. 만국공동묘지에서 수많은 지사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찾아보고 확인하기란 쉽지 않았다. 고이 잠든 지사들의 넋을 욕보일까 두려워 일행은 두 손으로 조심조심 풀과 락엽을 쓸어내며 더듬어 갔다. 신규식, 박은식, 로백린, 김인전(金仁全), 김태연, 안태국(安泰国), 김립…너무나도 쟁쟁한 이름들이였다. 조국을 찾겠노라 맹세하고 중국에 망명하여 싸워왔던 지사들, 망국의 한을 지니고 해방을 보지 못한 채 이들은 이곳에 조용히 잠든 것이다. 석양이 만국공동묘지를 붉게 물들이고있었다. 투사들의 넋이 깃든 비석들도 황혼의 금빛에 서서히 물들어 갔다.
46    제46회 상해의 사적지 답사 댓글:  조회:3832  추천:59  2008-01-27
1932년 4월 29일 상해 황포강반에 울렸던 멸적의 폭음소리는 아득히 사라졌지만 사람들의 마음속에 남겨진 커다란 그 충격은 아직까지도 가셔지지 않고 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로신공원의 기념정자인 매정을 찾아와 윤봉길 의사를 기념하고 있다. 사람들은 일제침략자들에게 정의적인 일격을 가한 윤봉길 의사의 업적과 헌신적인 정신에 경탄을 표하면서 숙연히 머리를 숙인다. 일본 침략자들의 간담을 써늘하게 하였던 홍구공원 폭탄투척 사건, 일제의 야수적인 폭압에 시달리던 조선인과 중국인의 항쟁의지를 크게 고무하여주었던 윤봉길 의사의 장쾌한 거사는 조선반일투쟁사에서 있어서 아주 중요한 의의를 가질뿐만 아니라 중국인민의 항쟁도 크게 고무해 주었다. 아울러 조선민족은 불굴의 민족이고 견강한 민족임을 세계에 과시해주었다. 중국 국민정부도 바로 이 사건을 통해 조선인 독립운동을 알게 되었고 그 힘을 알게 되었으며 물심량면으로 조선인의 독립운동을 지지해주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상해 로신공원 매원의 기념정자는 1994년에 축조되고 2002년 12월 29일부터 대외로 개방하였다. 윤봉길 의사가 폭탄을 던졌던 홍구공원, 지금의 로신공원에서 남쪽으로 15분쯤 걸어가면 상해의 유명한 문화명인 거리인 다륜로(多伦路)에 이르게 된다. 중국의 쟁쟁한 현대 문학거장들인 로신, 모순(茅盾), 곽말약(郭沫若), 엽성도(叶圣陶) 뿐만 아니라 정령(丁玲), 유석(柔石)을 비롯한 중국좌익작가련맹(中国左翼作家联盟)의 주요인사들이 문학창작활동을 하면서 족적을 남긴 곳이기도 하다. 1930년 3월 2일 중국공산당이 령도하는 혁명문화단체인 중국좌익작가련맹이 바로 이 거리에서 창립대회를 소집하였다. 당시 상해에 체류하고있던 조선인 혁명가이며 리론가이며 문필가인 김규광(김성숙)도 이 조직에 참가하였다. 그는 일찍 북경에서 <혁명>잡지를 꾸렸고 후에는 조선민족통일전선 활동과 조선의용대 창설을 적극 주도하면서 <민족전선>과 <조선의용대통신>을 주필하기도 하였다. 고풍적인 거리를 가노라면 량켠에 대부분 2,3층 되는 작은 건물들이 줄지어있다. 윗층은 주민들의 거주용으로 사용되고 1층은 도자기, 서예작품, 문방구 같은 것을 파는 매점으로 되어있었다. 다륜로 201농(弄) 2번지에 이르면 3층으로 된 서양식 작은 건물 하나가 나타나는데 이곳이 바로 중국좌익작가련맹 유적지이다. 유적지는 지금 기념관으로 개방되여있었다. 기념관 간판이 있는 문을 들어가면 정원이 나타나고 정원을 거쳐 건물에 들어서는 농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소학교 교실과 같은 느낌을 받았다. 작은 흑판 하나가 정면에 붙어있고 그 앞에는 검은 교탁이 놓여져 있었다. 그리고 방에는 기다란 나무걸상이 한 줄에 4개씩 두 줄 놓여있었다. 벽에는 좌익작가련맹의 주요인물들인 로신, 심단선(沈端先), 전행촌(钱杏村), 전한(田汉), 정백기(郑伯奇), 홍령비(洪灵菲)의 사진이 걸려있었다. 이들은 모두 좌익작가련합회의 상무위원이였다. 중국좌익작가련맹의 기수였던 대문호 로신은 조선유지인사들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있었고 조선의 독립투쟁과 혁명활동을 많이 동정하고 지지해주었다. 상해시절 로신은 많은 조선청년들을 만나 동방 약소민족의 해방을 지지하고 문학창작에 진력할 것을 이야기했다. 당시 동아일보 상해 특파기자로 있던 신언준선생이 로신을 방문하고 로신방문기를 썼다. 방문기는 중국 신문화운동을 연구하는 중요한 참고자료로 되고 있다. 20세기 30년대 중국 사상문화전선의 전투적인 기치로서 중국혁명사와 현대문학사에 빛나는 한페지를 남긴 좌익작가련맹이 이토록 간소한 곳에서 열렸다고 생각하니 그만큼 힘들고 엄연했던 당시의 환경을 느낄수있었다. 상해에서의 조선인 혁명활동과 독립운동은 두 줄기로 파악할 수 있다. 하나는 림시정부 수립과 그 활동이며 다른 하나는 림시정부외 기타 혁명단체의 활동이다. 상해답사에서 만났던 상해 복단대학 한국연구센터의 석원화(石源华) 교수는 30년대 상해에서의 조선혁명가들의 투쟁상황에 대하여 비교적 전면적으로 소개해 주었다.   (석원화) “조선이 국권을 상실한 다음 한국 교민들이 가장 많이 간 곳이 중국 동북입니다. 그 다음으로 상해에 비교적 많이 찾아왔습니다. 왜냐하면 상해는 한국에서 바다 길로 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낡은 중국의 상해에는 제국주의자들의 조계지가 있었습니다. 조계지는 중국정부에서 독립되여 그 관할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각국 정치 망명자들, 혁명자들이 상해에 모여오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때문에 한국을 놓고 볼 때 많은 교민들 특히는 비교적 중요한 직업 혁명가들이 상해에 집결하게 되었습니다. 맑스주의를 신앙하든지 무정부주의를 신앙하든지 혹은 자본주의 민주주의를 신앙하든지 조선봉건왕조의 복벽을 주장하는 사람이든지 부동한 신앙과 주장을 가진 많은 정치인들이 모여왔다. 상해에서의 한국 독립운동의 주요표징은 1919년 4월 3.1운동이후 상해에 수립된 한국 림시정부입니다. 지금 남아있는 유적지는 1919년 림시정부 자리가 아닙니다. 당시의 유적지는 지금 찾을수 없습니다…”   동방의 최대높이의 동방명주(东方明珠) 방송탑이 하늘높이 솟아있고 거대한 금융무역 빌딩이 위용을 자랑하는 상해 포동(浦东)지구는 급속한 중국 경제장성을 상징하기도 한다. 황포강을 사이 두고 포동의 대안은 서양식 옛 건물이 즐비한 금융중심지인 외탄(外滩)이다. 3.1운동이 있은 후 상해에 모인 조선혁명가들은 림시정부의 출범을 준비하였다. 1919년 3월 17일 려운형(吕运亨), 현순(玄楯), 선우혁(鲜于赫)을 비롯한 지사들은 상해에 림시 사무소를 정하고 림시정부 설립을 서둘렀다. 그리하여 4월 11일 설립된 상해 한국 림시정부의 첫 지점이 보창로(宝昌路)에 생기게 되었다. 지금 상해에는 보창로가 없다. 보창로는 후에 하비로(霞飞路)로 바뀌였다가 지금에는 회해중로(淮海中路)로 고쳤다. 기재에 따라 원 보창로 321번지나 329번지에 따라 회해중로에 가서 찾아보았다. 다행히 번지수는 바뀌지 않아 림시정부 옛터는 대체적으로 확인할수있었다. 지금 그 자리에는 대형 백화점이 들어 앉아있었다. 2003년 9월 23일 답사팀은 상해의 한국 림시정부 유적지를 찾아갔다. 급격히 변화되는 외부환경과 내부의 끊임없는 분쟁으로 하여 림시정부는 많은 시련을 겪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리고 그 사무지점도 여러 곳으로 옮겨다녔다. 1919년 10월 상해의 일본인 세력은 림시정부가 폭탄 제조를 비롯한 폭력활동을 주도한다는 구실로 림시정부를 프랑스 조계지에서 축출할 것을 조계 당국에 강력히 요구하였다. 그뒤 1922년 김익상, 오성륜의 유명한 다나까 저격사건이 있은후 상황은 더욱 어려워져 림시정부는 영미 조계지로 옮겼다. 지금 상해에 남아있는 림시정부 유적지는 림시정부가 상해를 떠나게 되는 1932년까지 마지막으로 머물고 사무를 보던 곳으로서 보경리(宝庆里) 4번지에 위치했다. 보경리 4번지는 지금의 상해시 로만구(盧湾区) 마당로 306농 4번지이다. 회해중로에서 작은 골목길인 마당로(马当路)를 따라 300메터쯤 걸어가면 마당로와 흥업로(兴业路)가 만나는 십자길에서 조금 더 가면 보경리 4번지에 이르게 된다. 그곳에는 상해 전형적인 석고문(石库门)식 건물의 3층 가옥 한 채가 있다. 검은 칠을 한 널문에는 동으로 된 문고리가 두 개 있었고 거기에는 마당로 306농 4번지라는 주소가 밝혀진 하늘색 패쪽이 붙어있었다. 문을 들어서니 건물벽에 대한민국림시정부 옛터라고 밝혀져 있었고 작은 비석 하나가 있었다. 유적지는 지금 기념관으로 개방되여 있었고 많은 소중한 사진과 비디오 영상자료로 림시정부의 력사를 관광자들에게 자상히 소개해주고있었다. 3.1운동의 결실인 한국 림시정부는 1919년 4월 11일 상해에서 성립되였다. 당시 로씨야, 상해, 서울 등지에 6개 림시정부가 각기 설립되였는데 국민의 념원에 따라 상해의 림시정부에 통합되였다. 상해 림시정부는 <림시헌법>을 비롯한 법규를 제정하고 외교, 재정, 군사, 교육면의 노력을 기울렸다. 초기에는 국무총리제를 실시하고 리승만을 국무총리로 선거하고 내무총장에 안창호, 외무총장에 김규식, 군무총장에 리동휘, 법무총장에 리시영, 재무총장에 최재형(崔在亨), 교통총장에 문창범(文昌范)을 둠으로써 정부의 체제를 갖추어 출범하였다. 그후 다시 대통령제, 국무령제, 국무위원제를 실시하다가 상해를 떠나 중경에 간후로 국무주석제를 실시하였다. 리승만이 계속 미국에 있었기 때문에 림시정부는 처음부터 혼잡을 거듭하였다. 리동휘, 신정, 박은식, 리상룡(李相龙), 홍진(洪震), 김구(金九)등이 선후로 림시정부를 이끌어나가는 견인차적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내부 각 파벌의 분쟁은 끊임없었던 탓으로 자체의 영향력과 힘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했다. 림시정부는 상해에서 13년간 머물러있었다. 중국에서의 림시정부 활동은 세 개 단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 단계는 정부에서 조선국내에 관원을 파견하였다. 이들은 조선 각지에서 일본총독의 임명한 관리와 대항하여 싸웠다. 그러나 조직이 방대하고 목표가 컸기 때문에 일제의 탄압을 받아 많은 사람들이 체포되여 실패하고말았다. 두 번째 단계는 폭력적 암살행동을 개시하였다. 림시정부에서 애국지사나 의사들을 파견하여 일제 기관, 공장을 파괴하고 일본침략군 두목을 사살하게 하였다. 이단계의 가장 큰 성과는 리봉창 의사의 일본 천황 습격행동과 윤봉길 의사의 홍구공원 폭탄투척 사건이였다. 윤봉길 의사의 의거가 있은 후 일제의 수색이 심했기 때문에 림시정부는 상해에 발을 붙일수 없어 상해를 떠나게 되었다. 그리하여 림시정부는 세 번째 단계의 투쟁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이 시기는 중국 측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아 자체의 군력을 키우는데 주력하게 되었다. 상해에 림시정부가 있게 됨에 따라 더욱 많은 조선혁명자들과 지사들이 상해에 모여왔다. 그리고 림시정부와 같지 않은 정견을 가진 사람들도 이곳에서 나름대로의 활동을 전개함으로써 20세기 20, 30년대 상해는 조선혁명과 독립운동의 중요한 장소로 되었다. 상해에 모여온 조선지사들은 중국 현대력사의 전과정에 관여하였다. 5.4운동, 5.30운동, 북벌전쟁, 광주봉기, 중화쏘베트활동, 항일전쟁 중국의 중요한 력사 사변에 모두 활약적인 조선인의 그림자를 보게 되었으며 이들은 중국혁명과 아울러 민족의 독립과 자유를 지향하여 굴함없이 싸웠던 것이다. 보경리 4번지 림시정부 청사는 지금은 잘 보수되였지만 당시에는 작은 숙소에 지나지 않았다. 한 사람씩만 겨우 올라갈 수 있는 나무 계단, 침대 세 개 밖에 놓을수 없는 침실 그리고 작은 회의실과 검소한 주방은 모두 독립지사들의 어려운 삶을 보여주고 있었다. 림시정부 유적지를 떠나면서 한국인 관광자를 만나 답사팀의 조향란 기자가 취재했다.   (한국 관광자) “우리의 독립지사들이 이렇게 많이 고생했다는 것을 느끼고 또 중국 사람들이 많이 도와주었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중국과 한국이 더 가까워져서 세계적인 국가 되는 것을 기원합니다.”   중국의 최대도시 상해시의 옛 골목길에 자리한 한국 림시정부 유적지는 중한 수교이후로 많은 한국인들이 찾아오고 있다. 최근 10년사이만 하여도 련인수로 60여만명 관광자가 이곳을 찾아왔고 한국 로무현 대통령을 비롯해 대통령 세분이 이곳을 방문하기도 하였다. 유적지를 떠나면서 답사팀은 국제화로 나아가고 있는 오늘의 시점에서 상해의 림시정부 유적지가 협력과 친화력을 강화하는 훌륭한 역할을 계속 잘 발휘하기를 희망하였다.  
45    제45회 윤봉길의사를 기념하는 매원 댓글:  조회:8555  추천:58  2007-12-31
     제2차 국내혁명전쟁시기 중국공산당은 피압박 인민을 이끌고 토지혁명을 진행하고 제국주의와 국민당 반동파와 피어린 투쟁을 전개하였다. 홍군은 2만 5천리 장정을 거쳐 섬북으로 진출하였으며 지하전선의 우수한 공산당원들도 당조직을 확보하면서 반제애국운동을 적극 전개하였다. 조선의 우수한 혁명자들은 중국 정세에 비추어 중국공산당의 령도하에 적극적인 투쟁을 전개하였다. 한편 망국의 한을 지니고 중국 상해에 망명한 조선 독립운동가들은 상해 림시정부를 중심으로 험난한 투쟁을 계속해 왔다. 비록 중국당국의 지원을 받지 못하고있었지만 자체로 어려운 생활을 영위하면서 새로운 투쟁의 길을 적극 모색하고있었다.   (권립 교수) “제2차 국내혁명전쟁시기 우리민족의 혁명대오에는 리철부나 김산처럼 공산주의 기치밑에서 당의 지하사업에 종사한 분들이 있었을뿐만 아니라 윤봉길처럼 반일민족주의 기치하에 우리 민족의 헌신적인 정신을 잘 체현한 분도 많았습니다.”   매헌(梅轩) 윤봉길(尹奉吉 1908-1932)은 1908년 조선 충청남도 례산(礼山)에서 태여났다. 11세에 덕산공립보통학교(德山公立普通学校)에 입학하였지만 일제의 노예교육이 싫어서 1919년 스스로 학교를 중퇴하였다. 3.1 독립운동이 고조되는 가운데 어린 그의 마음속에도 애국사상이 불타올랐다. 그는 전통적인 민족교육을 받기 위해 사설(私设) 서당인 오치서숙(乌致书塾)에서 한학을 공부하였다. 한학을 배우면서 그는 국내 진보적인 잡지와 신문을 열심히 읽으면서 선전적인 사상을 접수하기 시작하였다. 조선 농민들의 운명에 남다른 애착심을 가진 그는 농민들을 위해 독서회를 조직하고 문맹퇴치에 고심하였다. 1929년 윤봉길은 월진회(月进会)를 조직하고 이를 통해 농민의 단결과 민족정신의 고양 그리고 애국사상을 고취시키는 농촌운동을 적극 전개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가혹한 착취와 억압, 탄압하에서 농촌운동을 성공할수 없다고 판단한 그는 새로운 길을 찾아 1930년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그는 집을 떠나면서 “대장부 집을 나서면 살아 돌아오지 않노라”라는 명언을 남기고 떠났다.   (권립 교수) “1930년 갓 스물세살에 난 윤봉길 의사는 일제와의 결사적인 투쟁을 굳게 맹세하고 고향을 떠났습니다. 그는 청도를 거쳐 상해에 도착하여 고생을 하면서 일제에게 치명타를 안길 기회를 노리고있었습니다.”   중국 각지를 전전하던 윤봉길은 1932년 봄 상해에 도착하였다. 그는 홍구공원 부근에서 야채장사를 하다가 림시정부 국무위원이며 상해 한인교포(韩人侨胞) 단장으로 있던 김구를 만났다. 당시 김구는 침체상태에 처한 림시정부와 독립운동에 활력을 부여하기 위해 의렬투쟁을 주도하고있었다. 드디어 기회가 왔다. 상해에 진입한 일본군이 4월 29일 천황의 생일을 맞으며 성대한 천장절(天长节) 의식과 상해 점령 승전축하식을 가지기로 했던 것이다. 이날 행사는 상해 홍구공원(虹口公园)에서 진행하게 되며 상해에 있는 일본 거류민은 도시락과 수통, 입장권만을 가지고 행사를 관람하라는 보도가 상해 매일신문에 실렸다. 김구와 윤봉길은 이 기회를 타서 일본군 수뇌를 사살하기로 계획을 잡았다. 1932년 1월 28일 일본침략군은 중국 동북을 강점한데 이어 상해에 대한 대거 침공을 개시하였다. 격전은 상해 교외의 갑북(闸北)에서 진행되였다. 국민혁명군 애국 장령인 장광내(蒋光鼐)와 채정개(蔡廷锴)는 19로군을 거느리고 막강한 적들과 완강히 싸웠다. 치렬한 혈전은 33일간 지속되였고 뜻을 이루지 못한 일본침략군은 세 번이나 통수를 교체하였다. 국민정주의 타협정책으로 하여 19로군은 전선에서 철수하지 않을수 없었지만 그들의 영웅적인 항전은 중국에 대한 일본침략자들의 침략을 저지시켰다. 상해를 강점한 일본침략자들은 4월 29일 홍구공원에서 성대한 경축행사를 진행하였다. 일본군 사령관 시라가와(白川义则) 대장, 해군 함대사령 노무라(野村吉三郎) 중장, 제9사단장 우에다(植田谦吉) 중장, 주중공사 시게미쯔(重光葵), 거류민단장 카와바다(河端贞次), 주중 총령사 무라이(村井仓松), 민단간부 도모노(友野盛)을 비롯해 상해에 있던 일제 군정요인들이 모조리 행사에 출석하였다. 홍구공원의 의거를 위해 김구와 윤봉길은 주밀한 계획을 짰다. 행사 며칠전부터 윤봉길은 홍구공원 식장에 가서 현지를 면밀히 조사하였다. 그는 어느 곳이 주석대이고 어느곳이 검열대이며 어느곳이 경계선이며 어느곳이 관중들이 설 자리인가를 세밀하게 파악하였다. 4월 26일 윤봉길은 김구가 조직한 애국단(爱国团)의 신분으로 맹세하였다. 윤봉길은 “나는 적성(赤诚)으로써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여 한인 애국단의 일원이 되어 중국을 침략하는 적의 장교를 도륙(屠戮)하기로 맹세하나이다.”라는 비장한 선언을 남기고 최후를 준비하였다. 4월 29일 김구와 함께 아침식사를 마친 윤봉길은 수통과 도시락으로 위장된 폭탄을 받았다. 그는 자기의 새 손목시계와 김구의 낡은 시계를 바꾸고 몸에 지녔던 돈을 전부 김구에게 넘겨주고 홍구공원으로 떠났다.   (권립 교수)  “4월 29일 오전 상해 홍구공원에는 일본인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습니다. 윤봉길은 일본인으로 가장하고 폭탄을 들고 홍구공원에 들어섰다. 검열대에는 일본의 군정 요인들이 서있었습니다.”   오전 7시 50분에 즈음해 윤봉길은 공원안에 들어가 미리 보아두었던 유리한 지점에 서서 폭탄을 던질 시간을 기다렸다. 당시 홍구공원에는 수만의 인파가 운집하였고 중앙의 검열대를 중심으로 일본 관민이 둘러서있었다. 검열대 좌우로는 일본 륙군, 해군 방대가 호위해 섰고 그뒤로 몇메터 간격을 두고 경비원이 이중, 삼중으로 경계하고있었다. 일반인은 그 뒤에 서게 되었다. 11시 20분에 공식행사가 시작되였다. 대회 식순이 있은 후 축하하러 온 외국인이 다 떠나고 일본인만 남아서 검열을 진행하려하고있었다. 11시 40분이였다. 이 시각을 기다리던 윤봉길은 드디어 폭탄 덮개를 열고 앞으로 나갔다. 그는 앞사람을 헤치고 2메터 나아가 주석대로 폭탄을 던쳤다. 폭탄은 노무라 중장과 주중공사 시게미쯔의 면전에 명중하여 폭발하였다. 굉음과 함께 폭탄연기가 사라졌다. 일본군 사령 시라가와 대장은 몸에 많은 파편을 맞고 신음하다 5월 24일 숨졌다. 제9사단장 우에다는 다리를 절단하게 되었고 해군총사령인 제3함대 사령인 노무라는 실명하고말았다. 뿐만 아니라 주중공사 시게미쯔는 다리가 부러져 절름발이가 되었고 거류민단장인 카와바다는 창자가 끊어져 즉사하였다. 검열대에 있던 총령사 무라이와 민단간부 도모노도 각기 중상을 입었다. 일제의 경축행사장은 아수라장이 되었고 윤봉길의 폭탄 투척은 커다란 전과를 올렸다. 폭탄을 던진 윤봉길은 태연하게 서서 폭탄 투척이 가져다준 전과를 흐뭇하게 검증하고있었다. 그는 현장에서 일제 군경에게 피체되여 상해 일본 헌병대에서 갖은 혹형을 받았다. 5월 25일 일제 상해 파견군 군법회의에서는 윤봉길을 사형에 언도하였다. 이해 11월 18일 윤봉길은 오사까의 형무소로 압송되였다가 12월 19일 오사까 교외의 한 작업장에서 26발의 적탄을 맞고 장렬히 최후를 마쳤다.   (권립 교수) “윤봉길 의사는 그해 12월 19일에 만 스물네살의 아까운 나이로, 그러나 자랑스럽고 떳떳하게 빛나는 한생을 마쳤습니다.”   중국 상해 홍구공원에서 폭탄이 터진지 어언 70여년의 세월이 흘렀다. 많은 세월이 흘렀지만 중국과 조선인민은 민족의 지사 윤봉길을 잊지 않고있다. 지금도 상해에는 그를 기념하기 위한 매원이 있어 중국과 조선인민들이 참관하고 기념하고있다. 2003년 9월 22일 답사 팀 일행은 윤봉길 의사 의거현장을 찾아 상해 로신공원으로 갔다. 로신공원은 상해시 동북쪽의 사천북로(四川北路) 2288번지에 위치했다. 이 로신공원이 바로 당시의 홍구공원(虹口公园)이다. 1956년 중국의 위대한 사상가이며 작가인 로신을 기념하기 위해 로신의 골회를 이곳에 이장하고 그 곁에 로신기념관을 만들면서 로신공원으로 변했다. 공원에는 윤봉길을 기념해 만든 매원(梅园)이 있다. 공원 호수가에 자리잡은 매원 입구에는 돌 두 개로 만든 비석이 있었다. 작은 돌에는 한자로 “윤봉길 의거 현장. 1932.4.29”이라고 씌여있고 큰돌에는 중문과 조선문으로 된 “윤봉길 의사 업적 소개”글이 새겨져 있었다. 매원에 들어서니 검은 기와에 나무로 축조한 2층 정자가 있었고 처마에는 “매정(梅亭)”이라고 쓴 간판이 걸려있었다. 28평방메터 정도인 일층에는 <매헌(梅轩) 윤봉길 의사 생애사적 전시회> 전시장으로 되어있었다. 윤봉길 의사의 생애와 사적을 사진으로 알기 쉽게 전시한 곳이다. 정면에는 윤봉길 의사의 독사진이 전시되여있었다. 양복을 입고 머리를 단정하게 빗어넘겼으며 한손은 의자 손받이에 놓고 다른 한손은 무릎에 올려놓은 전신 사진이였다. 두눈은 부드러운 빛을 띄였지만 한 일자로 꾹 다문 입술은 강인함을 보여주고있었다. 그리고 꿋꿋이 편 허리는 조국의 광복을 위해 끝까지 싸우려는 그의 드팀없는 의지와 투지를 나타내는 듯 싶었다. 전시실에는 거사 준비과정으로부터 의거전의 선서장면, 의거전 김구와 바꿔 찬 회중시계, 의거에 사용했던 물통형 폭탄과 도시락형 폭탄, 선서문 그리고 의거현장을 돌아본후 이날의 감회를 시로 적은 <신공원에서 답청하며>라는 시고, 사형직전의 모습…그의 위대한 의거가 모두 사진으로 전시되여있었다. 사형직전 일본헌병들이 윤봉길 의사의 눈을 가리고 십자모양의 나무형틀에 묶는 모습과 처형직후 일본헌병이 쏜 총탄이 윤봉길 의사의 이마 한 가운데를 관통한 처참한 모습을 담은 빛바랜 사진을 보며 오랜 세월이 흐른후에도 결코 우리민족의 마음속에서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민족의 영웅 윤봉길 의사의 장렬한 최후로하여 눈시울이 뜨거워남을 어쩔수 없었다. 특히 의사의 안해 배용순의 사진과 두 아들 종과 담의 귀여운 모습을 담은 사진을 보며 나라의 독립과 민족의 해방을 위해 사랑하는 가족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그리고 기꺼이 떠났던 열혈 사나이의 대의정신에 숙연한 마음 금할길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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