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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카테고리 : 《불멸의 발자취》
세인들을 경악시킨 윤봉길 의사의 홍구공원 폭탄 투척사건은 조선반일투쟁의 힘을 과시하였고 중국과 조선 두 나라 인민의 항쟁의지를 크게 고무해 주었다. 사건이 방생한후 상해의 일본당국은 사건 배후를 들춰내기 위해 혈안이 되었다. 이때 김구는 <홍구공원 폭탄사건의 진상>이라는 글을 언론에 발표함으로써 이번 사건은 자기 혼자서 획책한것이라고 밝혔다. 일제는 60만원이라는 거액의 현상금을 걸고 김구를 수배하였다. 당시 3원이면 일반인이 한달을 족히 살수있었으니 60만원은 엄청난 금액이 아닐수 없었다. 그리하여 애국단을 조직하여 반일투쟁을 진행해오던 김구와 림시정부는 상해를 떠나게 되었다. 그들은 중국 유지인사들의 도움으로 상해 이남의 절강성 해염(海盐), 가흥(嘉兴), 항주(杭州) 등지를 전전하면서 험난한 피난길에 들어섰다.
상해에서 절강성 해염현가지는 118킬로메터 거리였다. 9월 24일 상해에서의 답사를 마무리한후 답사팀 일행은 김구가 반년간 피신해 있었던 해염현 남북호(南北湖)의 유적지인 재청(载青) 별장을 찾아갔다.
절강성 해염현은 전당강(钱塘江)이 바다로 흘러들어 형성된 항주만(杭州湾) 북안에 위치했다. 현의 인구는 27만명이고 지역면적은 500여 평방킬로메터이다. 물이 많고 벼가 잘 되며 비단이 유명한 이곳은 예로부터 부유한 고장이였다. 더욱이 지명에서 알수있듯이 이 고장은 바다 소금이 많이 나기 때문에 옛날에는 소금 장사로 부자가 된 사람이 많았다.
해염현 남부의 전당강 기슭에는 강남의 명승인 남북호가 있다. 세면이 산으로 둘러있고 남부가 항주만과 이어진 호수 가운데는 긴 언제가 있다. 언제는 호수를 남과 북으로 나누었기 때문에 호수이름을 남북호라고 합쳐 부르게 되었다. 우리가 찾는 재청별장이 바로 남북호 기슭의 금우산(金牛山)을 등진 언덕에 자리하고있었다.
현성에서 서남부로 얼마간 가면 남북호가 보였고 주변에 낮은 산이 보였다. 그러나 재청별장은 비교적 외딴 곳에 위치했기 때문에 찾기가 쉽지 않았다. 현지인의 도움을 받으며 한동안 찾아가니 대나무 숲이 우거진 곳에 옛 건물들이 있었고 좁은 길목에 도로표식 하나가 있었다. 나무로 만든 표식에는 <명인문화처(名人文化处)>, <김구피난처(金九避难处)>등 부근의 명소들이 적혀있었다.
그곳으로 조금 더 나가니 대나무와 각가지 나무숲에 에워싸인 가옥이 나타났다. 낮은 문 곁에는 검은 기념석판이 박혀있었다. 거기에는 푸른 글발로 <재청별서(载青别墅)>라고 씌여있었고 1997년 해염현 인민정부에서 이곳을 현급 문화보호단위로 확정했음을 밝히고있었다. 재청별장은 두 부분으로 되었다. 한쪽은 김구선생 전시청이 있고 다른 한쪽은 별장의 주요 건물들이 있었다.
재청(载青)이라는 이름을 가진 이 별장은 1916년에 축조된 남북호의 첫 근대적인 건물이다. 남향으로 된 별장은 정실 3개에 주방하나, 객실 하나가 있었다. 김구 전시관은 별장의 해 빛 밝은 정실에 정해져있었다.
(김구피난처 해설원) “김구피난처 전시관은 2001년 5월에 보수하여 정식 개방했습니다. 96년에 김구선생의 차남 김신 선생이 찾아와 옛집을 확인하였습니다. 지금 한국인이나 중국인들이 많이 찾아오고있습니다. 전시관의 사진들은 한국 독립기념관에서 제공했습니다. 그들은 이곳에 와서 직접 전시관을 설계하고 제작해 주었습니다.”
전시관에 들어서니 김구의 반신 동상이 모셔져있었고 동상 뒤에는 좌우 량쪽으로 “독립정신(独立精神)”과 “량심건국(良心建国)”이라고 쓴 김구의 서예작품이 걸려있었다. 기념관은 몇 개 구역으로 나누어 김구선생과 림시정부의 사적을 설명해주는 사진들을 전시하고 있었다.
1932년 6월 가흥(嘉兴)에서 한 달간 피신하였던 김구는 그곳 상황이 어렵게 되자 중국의 유지인사 저보성(褚辅成)의 도움으로 해염의 재청별장에 와서 피신하게 되었던 것이다.
(해설원) “당시 저보성 선생이 김구를 이곳에 피신시켰습니다. 저보성은 국민당의 원로이고 이곳의 대 부자였습니다. 그분이 김구를 도와 상해에서 가흥에 갔고 다시 재청별장에 오게 했습니다. 저보성의 며느리인 주가예라는 녀인이 김구선생을 모셔왔습니다. 주가예는 사상이 비교적 개방된 중국녀성이였습니다. 김구선생은 백범일지에서 주가예에 대해 서술한 기록이 있습니다.”
재청별장의 주인은 주찬경(朱赞卿)이였다. 그의 질녀 주가예(朱佳蘂)는 가흥의 명인이며 중국국민당 원로인 저보성의 맏며느리였다. 주가예는 시아버지의 분부에 따라 위험을 무릅쓰고 김구를 직접 호위해 해염의 재청별장에 피신시켰다.
한국 림시정부를 이끌고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험난한 항쟁을 해온 백범(白凡) 김구는 우리민족 중국 관내 반일투쟁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다.
김구(1876-1949)는 1876년 조선 황해도 해주(海州) 백운방(白云坊) 기동(基洞)에서 태어났다. 1893년 그는 백성들을 억압하는 탐관오리들을 응징하려는 일념으로 동학(东学)당에 참가하여 해주성 공격전에 참가하였다. 해주성 공격전에서 실패를 본 김구는 신천군(信川郡)에 사는 안태훈(安泰勳) 진사를 찾아가 몸을 숨겼는데 안태훈 진사의 아들이 바로 안중근 의사였다.
중국으로 망명할 때까지 김구는 세 차례 옥고를 치렀다. 1896년 2월 김구는 안악군(安岳郡)에서 일본군 중위 한 명을 찔러 죽였다. 그는 담벽에 명성황후(明成皇后)를 시해한 원쑤를 갚기 위해 일본군인을 죽였노라 쓰고 자기 성명과 주소까지 밝혀놓고 자리를 떴다. 5월 11일 그는 집에서 체포되여 옥고를 치르다가 1898년 탈옥했다.
1908년 김구는 지사들과 함께 신민회(新民会)를 조직하고 구국운동에 앞장섰다. 그러나 이듬해 그는 안중근 의사의 의거에 련루되여 투옥되였다가 증거가 불충분했기 때문에 석방되였다. 1910년 량기탁의 집에서 소집된 신민회 간부회의에 참가한 김구는 리동녕, 안창호, 리시영, 안태국 등 여러 애국지사들과 함께 중국 동북에 독립 전초기지를 마련하기로 계획하고 량기탁과 김구는 이를 위한 모금을 책임졌다. 그러다가 1911년 일제가 신민회를 대거 검거할 때 김구는 세 번째로 체포되여 17년 징역을 선고받았다. 4년간 옥고를 치르던 김구는 1915년에야 감형되여 출옥하였다.
1919년 3.1운동이후 상해로 망명한 김구는 리동녕을 만나 림시정부의 경무국장(警务局长)에 취임하여 한국 림시정부의 사무에 관여하기 시작하였다. 초기의 거듭되는 혼잡을 겪은 후 1926년 12월 림시정부 국무령(国务领)에 취임하여 림시정부를 이끌었다. 그러나 일제의 탄압과 내분 그리고 자금난으로 하여 림시정부는 계속 시련을 겪게 되었다. 조직력을 강화하기 위해 김구는 1928년 리동녕, 리시영과 함께 한국독립당(韩国独立党)을 창당하고 민족 진영의 단합을 모색하였다.
1930년 재차 국무령에 선거된 김구는 이듬해 한인애국단(韩人爱国团)을 조직하였다. 애국단은 무력행동으로 일제에 대항하고 세인들의 항쟁을 고무시키기로 하였다. 1932년 1월 애국단에 가입한 리봉창(李奉昌)이 일본 도꾜에 가서 일본천황 히로히도(裕仁)를 저격하려 했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그는 관병식에 참석하려던 히로히도의 행렬에 폭탄을 던졌지만 목표를 명중하지 못하고 기수와 근위병에게 부상을 입혔다. 리봉창 의사는 현장에서 체포되여 그해 10월 일제에게 살해되였다. 그뒤 4월 29일 김구는 윤봉길 의사를 파견해 홍구공원에서 일제의 요원들을 폭사시키는 쾌거를 이룩해 냈다.
윤봉길 의거후 김구는 절강성 가흥에 피신하게 되었다. 1931년 9.18사변이 있은후 중국 국민당 정부의 실력자였던 진과부(陈果夫)는 조선지사들을 통해 동북의 일제를 타격하려고 계획하였고 중국 국민당 당원이며 한국 독립당인 박찬익(朴赞翊)과 접근하였다. 그러다가 홍구공원 폭탄 사건이 있게 되자 진과부는 김구를 가흥에 피신시킬 것을 지시하였고 그 일을 동북의용군 후원회 회장이였던 저보성에게 맡겼다. 뿐만 아니라 진과부는 장개석과 김구의 면담을 촉성시켰다. 1933년 5월 김구는 안공근(安恭根 안중근 의사의 동생), 엄항섭(严恒燮), 박찬익과 함께 남경 중앙륙군군관학교에 가서 국민정부의 총통(总统) 장개석을 만나 본격적인 지원을 얻게 되었다. 그는 중국측의 도움으로 림시정부를 이끌어 나갈 경비를 마련하게 되었고 또 락양군관학교에 특별반을 설립해 조선청년들을 훈련시켰다. 11월 김구는 가흥에서 림시의정원 비상회의를 소집하고 기구를 강화하면서 국무위원으로 피선 되였다. 그리고 리동녕, 차리석(车利锡)과 함께 한국국민당(韩国国民党)을 창당하고 자기의 기반을 닦았다.
1940년 가흥, 장사(长沙), 류주, 광주, 기강 등지를 전전하다가 중경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중경에서 김구는 림시정부 국무위원회 주석으로 선출되고 한국독립당 집행위원으로 되었으며 림시정부 산하의 광복군을 창설하였다. 이로써 김구는 중경 한국림시정부의 실권을 장악하고 계속 민족진영의 독립운동을 주도해 나갔다.
관리일군이 소개한데 의하면 지금 볼 수 있는 재청별장은 옛터에 복원해 지은 건물이다. 원 건물은 1960년대 창고로 사용되다가 처마가 내려앉아 무너졌다. 1996년 건물을 다시 복원해 놓았다. 그후 한국인들이 많이 찾아오기 시작하였고 또 한국 독립기념관에서 전시관을 설계, 제작해 주어 2001년 5월 김구 전시관이 개방되게 되었던 것이다.
별장의 침실, 객실, 서재, 주방은 모두 간소하였지만 정교하게 느껴졌다. 바람이 불어 대나무 숲이 낮아지면 창으로 아름다운 남북호 전경을 볼수있었다.
해염의 재청별장에서 반년간 체류하면서 김구는 독립운동을 잊지 않고있었다. 그는 흩어진 림시정부 요원들과 련락을 취했고 측근들과 함께 중국 국민당과의 교섭도 적극 모색하였다. 그러나 해염현은 너무나도 편벽한 시골이였기 때문에 피신하기는 적성이였지만 활동하기에는 애로가 많았다. 게다가 현지 경찰들이 이때 김구를 의심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김구는 흩어진 림시정부를 재정비하고 비밀리에 계속 반일지사들을 규합하기 위하여 해염을 떠나 가흥으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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