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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항일전쟁사에서는 팔로군의 “랑아산의 다섯용사”를 영웅의 전범으로 간주한다. 우세한 일본침략군에게 포위된 팔로군의 다섯용사가 랑아산의 천길 벼랑에 몸을 던져 불굴의 의지를 보여주었다. 우리민족의 항일영웅 손일봉, 박철동, 한청도의 장렬한 희생도 이에 조금도 무색하지 않는 영웅적 행동이였다. 죽을때까지 원쑤 일본제국주의자들을 소멸하려는 의욕으로 적을 붙안고 수류탄을 터쳐 함께 죽음을 선택하였던 손일봉과 한청도 그리고 탄약과 수류탄이 다 떨어진 상황에서도 총검을 비껴들고 적과 마지막 힘을 다해 백병전을 하였던 박철동, 이들은 자랑찬 우리민족의 항일영웅으로 꼽히기에는 조금도 손색이 없다. 아울러 이들은 조선인민을 포함한 모든 피압박민족의 해방을 위해 중국대지에 피흘리며 싸운 영웅이였다. 이들의 빛나는 이름은 항일전쟁시기 중국의 태항산기슭의 호가장 전투와 더불어 영원히 사람들 마음속에 살아있을 것이다!
답사팀이 석가장 근교의 호가장 전적지를 답사하고나서 다른 한 목적지 한단으로 출발한 것은 10월 22일 아침이였다. 우리는 석가장 장거리 뻐스역에서 뻐스를 타고 한단으로 출발하였다. 중국 화북대지에서 희생된 렬사들을 기념하는 진기로예 렬사 릉원이 한단에 있었고 거기에는 조선의용대의 지도간부였던 진광화와 윤세주 렬사 묘비가 있었던 것이다.
한단까지는 고속도로를 리용해 4시간 정도 시간이 수요된다. 하북성 남부에 위치한 한단은 동력과 원자재 특히는 방직공업으로 유명한 공업도시일뿐만 아니라 남부로부터 하북성에 들어오는 교통중추이기도 하다. 고대문화도시인 한단은 전국시기 조(趙)나라 도읍이였는데 진시황은 전국을 통일한후 이곳에 한단군을 설치하였다. 한(漢)나라초기 한단은 5대 상업도시의 하나로 유명했다. 그리하여 지금도 한단 부근에는 전국시기 유적을 많이 찾아볼수 있다.
한단시에 도착하여 진기로예(晉冀魯豫) 렬사릉원을 찾아가는 길에 우리는 한단시 기차역광장의 호복기사(胡服騎射)라는 유명한 조각상을 보았다. 가벼운 복장에 투구와 갑옷을 거치고 활을 들고 말을 달리는 무사의 동상이였는데 이는 고도인 한단의 상징이라고 한다.
호복기사 동상(한단 기차역 앞에 세운 호북기사 동상)
현지인에게 물어보니 호복기사에는 이러한 전설이 깃들어있다 한다. 전국시기 조나라 무령왕(武靈王)이 즉위할 때 조나라는 국세가 약화되여 외부의 침습을 많이 받았다. 특히 북방의 유목민족의 습격과 겁탈을 많이 당했는데 조나라 군대는 이들과의 접전에서 늘 패하군 하였다. 무령왕은 수차의 싸움 끝에 조나라 군대가 실패한 원인을 밝혀냈다. 조나라 병사들은 소매가 너른 불편한 복장을 한데다가 무거운 갑옷을 거치고 또 굼뜬 전차를 따라 다녔기에 기동성이 약했다. 반면 가벼운 차림을 한 유목민족의 기병들은 신속히 돌진하였을 뿐만아니라 활을 백발백중으로 쏘았던것이다. 무령왕은 보수적인 여러 왕공대신(王公大臣)들의 고집을 꺾고 단연 병사들의 군복개혁을 실시하였으며 가벼운 차림으로 전투에 나서게 하였다. 결과 조나라는 수차의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어 전국시기 군웅(群雄)의 위치를 지키게 되었다 한다. 호복기사란 북방유목민족의 옷을 입고 말을 달려 활을 쏜다는 뜻이다. 옛 이야기였지만 개혁개방을 실시하여 경제성장과 인민의 생활향상에 전념하는 중국의 현황을 설명해주는것 같기도 하였다.
한단시 기차역에서 동쪽으로 굽어져 릉원로(陵園路)를 따라가면 록음이 우거진 거대한 릉원을 볼수있는데 이곳이 바로 진기로예렬사릉원이다.
릉원로에 의해 남북으로 나뉘여진 릉원은 항일전쟁시기 팔로군총부 전방사령부와 정치부, 진기로예군구 희생자들 그리고 팔로군 129사의 렬사들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었다. 1946년에 착공하여 1950년 10월에 준공된 릉원은 우리나라에서 비교적 일찍 축조되고 규모가 비교적 큰 렬사릉원이다.
철대문으로 된 정문 한쪽에는 흰 대리석판이 있었는데 거기에는 진기로예렬사릉원이라고 밝혀있었다. 그리고 1986년 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의 비준을 거쳐 전국중점 렬사기념건축물보호단위로 되였다고 밝혀있었다. 1995년에는 국가민정부에서 이곳을 전국 애국주의 교양기지로 명명하였다.
남원과 북원으로 나뉘여진 릉원은 320무의 부지면적을 가지고있다. 정문이 있는 북원에 들어서면 하늘높이 치솟은 회색 기념탑이 보인다. 탑에는 모택동이 쓴 《무상광영(無上光榮)》이라는 금빛 글발이 새겨져있었다. 북원은 렬사기념탑을 제외하고도 인민영웅기념묘소, 진렬관, 4.8렬사각(四八烈士閣), 렬사기념당, 좌권장군묘(左權將軍墓), 좌권장군기념관을 비롯한 건물이 있었다.
항일전쟁시기 진기로예변구는 1937년 겨울부터 개척되기 시작하였다. 《7.7》사변이후 국민당의 주력부대가 정면전장에서 거듭 실패하자 북상한 팔로군 각 부대는 태항산에 의지해 적후항일근거지를 개척하였다. 팔로군 115사는 평형관(平型關)전투에서 승리한후 산서북부, 차할, 하북북부에 근거지를 창설하였고 129사는 태항산을 중심으로 산서, 하북, 하남, 산동을 포함한 광활한 진기로예항일혁명근거지를 굳혀나가기 시작하였던것이다. 항일전쟁시기 진기로예변구에만 하여도 무려 10만 7천여명 장병들이 희생되였다.
릉원 중심부에 모셔진 좌권장군묘에서 우리는 발걸음을 멈추었다. 팔로군 부총참모장이였던 좌권장군은 항일전쟁시기 희생된 팔로군 최고 간부였다.
좌권장군은 황포군관학교를 졸업하고 홍군시기 조선혁명가 양림의 후임으로 홍군 제1군단의 참모장을 맡았다. 항일전쟁시기 그는 팔로군 부총참모장을 담임했고 태항산 항일근거지에서 일제와 싸웠다. 1942년에 일본침략자들은 많은 병력을 동원해 태항산 항일근거지를 토벌하였고 팔로군 전방사령부를 집중적으로 공격하였다.
1942년 5월 일본침략자의 포위토벌을 반격해 싸운 전투를 <5월의 혈전>이라고 한다. 좌권은 5월의 혈전에서 조선의용대를 포함한 팔로군총부 전투부대를 지휘하여 총부 지휘원들을 엄호하다가 장렬히 희생되였다. 당시 조선의용대의 조선혁명가 진광화(陳光華)와 윤세주도 5월의 반포위토벌전에서 희생되여 좌권장군과 함께 태항산에 매장 되었다가 해방후 한단렬사릉원으로 옮겨졌다.
답사팀을 함께 했던 중앙당학교 최룡수 교수는 이렇게 소개했다.
“여기는 한단 기열료 렬사릉원입니다. 이 뒤에 보이는 것이 좌권장군 묘이고 그 곁에 진광화 렬사 묘입니다. 1942년 5월 태항산의 반소탕전에서 희생되였는데 좌권은 항일전쟁시기 희생된 최고급 간부입니다.진광화렬사 묘소는 그 곁에 모셔졌습니다. 그러니 진광화렬사 역시 대단한 분입니다."
진기로예 렬사릉원의 기념비
렬사릉원 간판
팔로군 부참모장 좌권장군 묘소
릉원의 기념동상
조선혁명가 진광화의 묘소
진광화렬사 묘지
진기로예렬사릉원 북원에 위치한 좌권장군묘소 한켠에 좌권장군과 함께 희생된 렬사들의 묘소가 있었는데 그 가운데 조선혁명가 진광화(1911―1942)렬사묘가 있었다.
원형으로 된 묘소곁에는 바람벽처럼 만들어놓은 렬사들의 묘지(墓誌)가 있었다. 그 가운데 진광화렬사의 묘지는 다음과 같이 썼다.
《조선혁명렬사 진광화동지묘지, 광화렬사의 원명은 김창화(金昌華)이다. 조선 평안남도 대동군(大同郡) 고평면(古平面) 평천리(平川里) 사람으로서 1911년에 태여났다. 그는 1931년, 국내에서 중학교를 졸업한후 반일에 뜻을 두고 중국에 건너왔다. 그는 1937년에 광주에서 중국 국립중산대학 교육학부를 졸업하였으며 일찍 한국국민당, 조선청년전위단 그리고 중국청년항일동맹에 참가하였다. 1936년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고 38년에 화북태항산항일근거지에 도착해 중국공산당 북방국 진기예구(晉冀豫區) 당부에서 중요한 사업을 맡았다. 1941년에 화북 조선청년련합회를 설립, 령도하였다. 1942년 5월 28일, 태항산 반포위토벌전역에서 싸우다 산서 편성(便城) 화옥산(花玉山)에서 장렬히 희생되였다. 진기로예변구 당정군민 및 조선독립동맹(朝鮮獨立同盟), 조선의용군 화북지대는 렬사의 공적을 추모하여 묘를 만들고 비석을 세워 기념한다. 중화민국 31년 10월 10일 세움.》
진광화는 1929년에 평양상업중학교에서 공부하면서 한국혁명당 산하단체인 철혈단(鐵血團)에 가입하였고 기관지 《우리길》을 발간하여 독립사상을 고취하였다. 학교에서 그는 광주(光州)학생운동을 지원하는 동맹휴학을 조직하기도 하였다. 1931년에 그는 학교를 졸업하고 중국 남경으로 건너와 오세(五世)중학교에 입학하였다. 남경에서 그는 남경 조선인 류학생회 간사로 활동하다가 남경의 조선인협회인 한교회(韓僑會)의 중앙간부로 활약하였다. 그러다가 1933년에 그는 중국 광주에 가서 국립중산대학 문학원 교육학부에 입학하였다.
중산대학에는 30여명 조선학생들이 있었다. 진광화는 조선학생들을 단합시키고 진보적인 중국학생들과 접촉하면서 많은 활동을 전개하였다. 1936년 중국공산당에 가입한 그는 광동의 당조직을 회복할 때 중산대학 당지부 서기를 맡았다. 조선학생이 중산대학 당지부서기를 맡았다는것은 쉬운 일이 아니였다. 그만큼 진광화는 학생들가운데서 덕망이 높았고 조직력도 강하였던것이다. 학교시절 그는 리소문(李蘇文)을 비롯한 조선학생들과 함께 《12.9》애국학생운동을 조직하였다. 사후 일부 학생들이 체포되였는데 그 가운데 7명 조선학생도 포함되였다. 학교측에서는 리소문을 강제 퇴학시켰다. 조선학생들은 학교당국의 결정을 반대하면서 체포된 학생들을 보석 석방할것을 교장에게 요구했고 또 강제 퇴학령을 취소할것을 요구하였다. 그렇지 않을 경우 조선 학생들은 집단퇴학할 것이라고 하였다. 진광화가 령도한 이번 학생투쟁에서 학교측은 할수없이 학생들의 정의적인 요구를 들어주게 되였다.
진광화는 또 로신서거 기념대회에 참가해 감동적인 연설을 하였다. 그는 연설에서 일제 침략하에 있는 조선인민의 고통을 이야기하여 장내 1,000여명 중산대학 학생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겨주었다.
1937년 7월, 진광화는 중산대학을 졸업하고 혁명의 성지 연안으로 갔다. 그는 연안에 있던 중앙당학교에서 학습하였고 1939년에는 팔로군 전방사령부 정치부에서 근무하였다. 그후 진광화는 진기로예변구 당학교 교무과장, 조직과장 겸 총지서기로 있었고 조선청년련합회 진기로예지회 회장, 조선의용군 화북지대 지도원 사업을 맡아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1942년 그는 태항산에서 적의 포위를 뚫고 나오다가 윤세주와 함께 장렬히 희생되였다.
렬사릉원 남원의 렬사공묘
남원에 모셔진 조선혁명가 윤세주 렬사묘비
한국의 렬사유가족이 윤세주 렬사묘소를 참배하고있는 장면
진기로예렬사릉원 남원은 북원과 길하나를 사이두고있었다. 길을 건너 남원에 들어서니 커다란 광장이 있었고 정면에 장엄한 비석 하나가 서있었다. 비석에는 인민해방군진기로예렬사공묘(烈士公墓)라고 씌여있었다.
광장을 지나니 넓은 평지에 정연하게 렬사들의 묘지가 배렬되여있는 것이 보였다. 이곳에는 약 200명 렬사가 고이 잠들고있다.
렬사들의 고혼을 깨울세라 우리는 조심스럽게 발을 옮겨 조선혁명렬사 윤세주의 묘소를 찾아갔다. 장방형으로 된 정결한 묘소 앞에는 검은 대리석 묘비가 있었다. 거기에는 중문과 조선글로 《석정윤세주렬사(石鼎尹世冑烈士)》라고 씌여있었다.
윤세주(1901―1942)는 경상남도 밀양에서 태여났다. 《3.1》운동시 그는 윤치형(尹致衡)과 함께 밀양의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윤세주는 일제가 1년 6개월이라는 궐석재판을 언도하자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그는 류하현(柳河縣) 고산자(孤山子)에 있는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하여 군사훈련을 받았다.
1919년 11월 9일, 윤세주는 김원봉을 만나 함께 길림에서 조선의렬단을 창단하고 단의 요원으로 활동하였다. 1920년 6월에 의렬단 대부분 단원들이 조선내에 들어가 암살과 파괴 활동을 전개하려했지만 행적이 발각되여 많은 단원들이 일제에게 체포되였다. 윤세주는 당시 7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일제의 악착같은 고문에도 굴하지 않은 윤세주는 출옥후 다시 중국에 와서 독립활동에 종사하였다. 그는 다시 김원봉과 합류하였고 조선혁명당의 요원으로 활동하였다.
1932년 윤세주는 조선민족혁명간부학교를 제1기로 졸업하고 학교 교관으로 있었으며 1935년 4월에는 중국 중앙군관학교 락양분교의 조선인 특별반 교관으로 있었다. 1938년 그는 무한에서 김원봉과 함께 조선의용대 창건을 주도하였고 조선의용대 요원으로 활동하였다. 조선의용대 선전사업을 맡은 그는 조문판(朝文版) 주필을 맡고 간행물 《전고(戰鼓)》를 편찬하였다. 무한이 함락된후 김원봉과 함께 중경에 갔던 윤세주는 김원봉의 파견을 받고 조선의용대 주력을 거느리고 화북으로 진출하였다. 화북조선청년련합회(華北朝鮮靑年聯合會)와 조선의용대 화북지대의 조선청년과 혁명자들은 투쟁경험이 풍부하고 학식이 많은 윤세주를 매우 존경하였다. 1942년 5월에 그는 태항산에서 진광화와 함께 장렬히 희생되였다.
민족독립의 그날을 보지 못하고 중국 태항산에 뼈를 묻은 진광화렬사와 윤세주렬사를 생각하니 우리는 마음이 아파났다. 국화꽃을 사서 렬사들의 묘소에 증정하면서 우리는 렬사들의 령전에 묵도를 드렸다. 민족해방을 위해 목숨을 각오하고 싸웠던 렬사들, 우리의 귀전에는 윤세주가 작사한 유명한 노래 <최후의 결전>이 들려왔다.
진기로예렬사릉원에 정중히 모신 진광화렬사와 윤세주렬사의 불굴의 투쟁사를 생각하면서 우리는 렬사들의 투쟁행적을 찾아 다시 길을 떠났다. 조선민족 투사들이 영용히 싸웠던 태항산, 중국대지에 우뚝 솟아 일본제국주의자들을 영용히 항격했던 태항산은 우리를 부르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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