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금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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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단편소설] 붉은 닻-금희 댓글:  조회:487  추천:0  2019-07-18
금희 붉은 닻   쿠첸밥솥에서 증기가 뿜어나올 시각, 주화는 본능적으로 눈을 떴다. 영수는 곁에 없었다. 언제나처럼 샤쯔를 입고 단추를 채운 뒤 주화는 1층으로 내려갈 차비를 했다. 부부의 침실 바로 옆에 있는 손님방을 지날 때 주화는 걸음을 잠간 멈췄다. 엊저녁 영수가 또 그곳에서 밤을 지냈던 모양, 동그란 손잡이의 방문이 약간 벌어져있었다.   주화는 손을 뻗어 문고리를 잡았다. 그냥 닫을가 하다가, 다음 순간 참지 못하고 반대방향으로 확 밀어버렸다. 일인용 간소한 침대 하나와 수수한 책상, 그 앞의 걸상과 벽 쪽 귀퉁이의 플라스틱 서랍장이 화들짝 놀라며 주화 앞에 무참히 민얼굴을 드러냈다. 간밤에 사람이 묵고 갔는지 자취조차 알아볼 수 없게 잘 정돈된 방이였다. 주화는 약간 후회했다. 웬지 영수에게 무례한 행동을 저지른 것처럼 께름직해나서였다. 주화는 머쓱한 기분으로 책상 우 바깥 쪽으로 비스듬히 기울어진 전화기를 바라보았다. 찬기를 보내고 난 열흘간 영수가 매일 저녁 지키고 있었을 전화기였다.   침대머리에 한쪽 다리를 올리고 걸터앉아, 또는 걸상 우에 올라가 올방자를 튼 채 한 손으로 전화선을 탈탈 꼬며 영수는 찬기의 전화를 받았을 것이였다. “어떠니? 사람들은 좋으냐? 학교는 멀지 않고? 시차는 적응됐니? 음식은…” 그러면 찬기는 이렇게 대답했을 것이다. “괜찮아요, 엄마. 난 괜찮아요. 그래요, 그런거 같아요…” 주화를 닮아 성격이 불같은 려나하고는 달리 어려서부터 괜찮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아이였다.   삐걱거리는 나무계단을 밟고 주화는 내려왔다. 집안은 조용했다. 짙은 갈색의 가죽쏘파가 널직한 거실 한가운데에 마취제를 맞고 쓰러진 흑곰처럼 길게 엎드려있었다. 애들 방과 서재, 지하실로 내려가는 계단 쪽에서는 아무 기척도 들리지 않았다. 거실 남쪽 대형 유리너머 영수가 손수 가꾸는 정원에서는 늦가을의 붉은 국화가 스러지고 있었다. 주화는 머리를 돌려 주방 쪽을 한번 보고는 그대로 거실창문 앞에 서 있었다.   나지막한 참대나무바자의 정원 앞쪽에 아빠트단지에서 만든 인공련못이 먼지 쌓인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한여름에는 팔뚝만한 잉어들이 노닐던 곳이였다. 주화네 이웃 별장에 사는 로부부의 장난꾸러기 강아지는 저녁산책을 나올 때 가끔 그 련못에 뛰여들어 유유히 수영을 하군 했었다. 련못 우에는 작은 아치형 돌다리가 걸쳐있었고 돌다리의 건너편에는 좌우로 한바탕 노랗게 마른 잔디밭이 펼쳐졌는데 벌써 손 빠른 사람들이 뙈기뙈기 차지하여 가을배며 대파를 줄느런히 널어놓았다. 영수는 한번도 그네들처럼 가을배추를 널어본 적이 없었다. 통통하고 하얀 배추를 사다가 매년 김장을 담그긴 했지만, 백김치(酸菜)감으로 제격인 푸른 긴 배추는 사지 않았다. 주화네 집에 백김치를 한포기씩 가져다 주는 사람은 그의 어머니와 누이동생이였다. 영수를 만나 살아온 지 20년, 다른 것은 그만두고도 입맛 쪽에서라면 영수가 주화네를 따른다기보다 주화가 영수를 닮아갔다는 편이 더 옳았다.   21살의 애젊은 주화가 처음 영수를 만날 때만 해도 아침마다 국이나 찌개에 밥을 먹는 한국인의 풍습을 도무지 받아들이기 어려워했다. 주화가 알고 있는 한, 무릇 아침이란 흰 만두에 좁쌀죽, 삶은 계란 하나와 한두가지 짠지를 곁들여 먹는 것이 가장 맛있고 속 편한 식사였다. 혹간 국물을 넣은 면을 먹을 때도 있었고 속을 넣은 찐만두나 꽈배기, 훈툰(馄饨) 따위를 먹을 때도 있었지만 아침부터 찌개에 밥을 먹는 경우란 거의 없었다. 밥은 점심이나 저녁때에 볶음채랑 함께 먹는 것이였고 끼니마다 꼭 있어야 하는 것도 아니였다. 쌀밥이란 것은 밀가루음식과 틀려서 끼니마다 먹었다간 틀림없이 며칠을 못가서 속이 쓰려날 것이라고 어른들이 가르쳐주었기 때문이였다.   20년이 지난 지금, 주화는 영수처럼 매일 아침 찌개에 밥을 먹었다. 혹간 영수가 좁쌀죽을 원할 때가 있었지만 주화쪽에서 오히려 밥이 없으면 허전해 견딜수 없을 정도였다. 어머니에게는 그닥 반가운 일이 아니지만 이제 주화는 영수표 반찬과 료리에 온전히 길들여져있었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영수도 정말 부득이한 상황이 아니라면 아무리 힘들고 귀찮아도 아침밥을 짓지 않는 일은 삼갔다. 주화의 몹쓸 성격이 도져 아주 불쾌한 상황을 겪고 나서라 하더라도 말이다.   그러나 이 아침, 주방에서 한창 분주히 서둘러야 할 영수는 거기에 없었다. 주화가 일어나기 전에 벌써 식탁 우에 배추김치며 시금치무침, 멸치볶음과 김을 올려놓고 집을 나서버린 것이다. 밥은 밥솥 안에, 된장찌개는 가스렌지 우에 다소곳이 주화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니 영수는 참 좋은 녀자였다. 더이상 무엇을 바랄 수 있을가. 이처럼 부지런하고 건강하며 매사에 똑 부러진 녀자가 그리 흔하지는 않지 않은가. 영수는 그녀의 형제들 중에서도 가장 생활력이 강했고 악착같이 돈을 벌고 모으고 불리는데 천부적인 재주를 가졌다. 게다가 그녀는 자신보다 네살이나 더 어린 중국대륙의 남자에게 시집을 온 한반도 남쪽의 녀자였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지금도 그랬지만), 특히 국제결혼 서류를 작성해주는 이들이 그들의 결합에 의뭉스러운 시선을 보냈다. 그들의 가족이나 친지들은 더욱 그러했다.   까만 색의 중화를 운전하고 가게로 가는 내내 주화는 하릴없이 인행보도를 걷는 녀자들을 힐끗거렸다. 젊은 청년의 시절처럼 예쁜 녀자를 보고 휘파람을 불어대는 천박한 짓은 하지 않았다. 10년동안의 한국에서의 생활을 마치고 주화를 따라 중국으로 들어온 영수가 그랬었다. “당신, 왜 휘파람을 부는 거죠? 그렇게 하면 녀자들이 좋아할 것 같은가요? 제발 그러지 마. 그런 천박한 짓은 양아치들이나 하는 거잖아.” 9살 난 려나는 소학교에 입학시키고 세돌박이 찬기를 등에 업은 채 영수가 뒤따라오며 또박또박 말했다. 영수는 주화의 못된 성깔들을 그렇게 오래 보아오고도 그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녀는 본인이 생각하기에 옳은 일이고, 반드시 말해야 할 가치가 있다는 필요를 느낀다면 상대의 기분이 어떠하든지를 제쳐두고라도 조목조목 리성적으로 얘기하는 성격이였다. 영수는 애들 앞에서 담배를 뻑뻑 피우는 시누이한테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얘기했다. “연(娟), 넌 어떻게 애들 앞에서 담배를 피울 생각을 하니? 애들이 아니더라도 여긴 집안이잖아. 게다가 내 집이고. 난 담배연기가 내 집에 배이는 걸 아주 싫어하거든. 그리고, 사실은 담배 피는 자체가 네 몸에 좋지 않은 거잖아. 안 그래?” 도시 외곽의 염가아빠트에서 놀러 온 시어머니를 보고는 이렇게 말한 적도 있었다. “어머니, 울 집에 와서는 아무 것도 하지 마시고 가만 계셔요. 저를 도와 밥을 한다거나 설겆이를 한다거나 청소를 해야겠다는 생각조차 하지 마세요. 제 주방은 제가 잘 알고, 무슨 반찬을 할지도 제가 알아서 한답니다. 걸레질은 아예 손대지 않는 게 좋아요. 어머님이 하시더라도 제가 다시 해야 하니까요.”   영수는 그렇게 특이한 녀자는 아니였지만 주화를 만나다 보니 의식하지도 못한 사이 그닥 평범치는 않은 삶을 살게 되였다. 처음 영수를 만나던 날, 주화는 일년동안 일을 해온 식당에서 자리를 옮길가 고민하던 중이였다. 딱히 무엇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가 아니라 자리를 옮겨야 봉급을 올리기 수월하다는 말을 들어서였다. 고등학교 2학년 첫 학기에 주화는 중퇴를 당했다. 학교마다 파벌이 많았고 잔인한 무리싸움도 흔했던 시절이였다. 주화는 어쩔 수 없어 싸움에 가담한 범생이 쪽이 아니라 늘 사건의 선동자요, 최전방에서 온몸을 날려 의리와 명예를 위해 싸우는 열혈남아였다. 그는 교장실에 불리워가서 조사를 받고 중퇴처벌을 받은 일에 대해 자부심을 느꼈다. 그럼으로써 그는 자신이 진짜 ‘대장부’라는 것을 증명해보인 셈이였다. 주화와 그의 ‘의로운’ 친구들은 머리가죽과 얼굴과 가슴팍 등에 영광스러운 흔적을 남긴 채 학교대문을 나서 거리를 쏘다니기 시작했다. 거리에서도 그들의 빛나는 행보는 계속 되였다. 마음에 들지 않는 구멍가게 주인에게 행패를 부리고, 너무 반짝거린다는 리유로 멋진 상점의 창문유리에 돌을 던지고, 어쩌다 어깨를 부딪쳤거나 눈을 마주친 아저씨들을 길거리 바닥에서 톡톡히 ‘훈계’했다. 그렇게 사회의 음침한 골목에서 잔뼈를 키워가던 중, 한번의 작지 않은 실수로 주화는 인명사고를 낼 번한 적이 있었다. 그 사건으로 주화는 중국을 뜰 계획을 세웠으며 마침 찾아온 뜻하지 않은 기회를 잡아 한국으로 가는 화물선의 밑창에 타게 된 것이였다.   한국에서 주화는 거의 다른 사람으로 살아갔다. 당연한 일이였다. 문화도 가치관도 풍습도 달랐을 뿐만 아니라 말 자체가 통하지 않는 나라였다. 주화는 식당에서 주방보조로 일을 했다. 억울함과 괴로움과 분노와 외로움이 켜켜이 쌓였지만 아직 해소할 수 있는 때가 오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일을 관두고 돌아올 수도 없었다. 영수를 만날 즈음에는 처음보다 좋아져서 말귀도 좀 알아듣고 일도 익숙해졌으며 그 나라의 물정도 약간 깨달았을 시기였다. 그러나 여전히 서럽고 힘든 이방인이였다. 가끔씩 주화는 옛 성깔이 되살아나 주방식구들에게 한바탕 불같은 화를 내군 했다. 영수는 그 사실을 주방 찬모에게서 들었다. “왜? 저 망나니가 잘생겨 보이니? 아서라, 중국인이고 뭐고 떠나서 저런 성깔머리 더러운 애하고는 처음부터 상종을 안하는 게 나으리…”   주화는 확실히 잘생겼다. 검은 털이 숭숭 난 종아리를 내놓고 다니는 주방장이나, 여드름투성이에 작고 괴죄죄한 눈을 가진 정과장이나 두꺼운 입술의 느끼남 송씨 등 주방식구들을 통틀어서 아니, 온 식당의 일군들 중에서도 주화만큼 잘생긴 남자는 없었다. 그의 훤칠한 키와 검은 일자 눈섭과 매서운듯 정기 있는 눈매와 분명한 코선과 양기 넘치는 남성적 분위기는 90년대 홍콩의 남자배우들을 련상케 했다. 스물다섯, 지방의 한산한 동네에서 서울로 상경한 지 8개월밖에 안되는 영수에게 주화의 우울한 눈빛과 가끔 번뜩이는 분노는 오히려 더 공감 가고 감싸주고 싶은 아픔이였다.   “안녕하세요?” 하고 영수가 인사를 하면 주화도 그녀를 따라서 “안녕하세요?” 했다. 점심 장사를 끝내고 식당 식구끼리 밥을 먹을 때 영수가 “잘 먹겠습니다.” 하면 바로 따라서 주화도 “잘 먹겠습니다.” 했고, “많이 드세요.” 짠한 마음에 영수가 말하면 그녀를 향해 머리를 끄덕이며 “많이 드세요.” 하고 같이 인사를 했다. 주화의 이상한 억양과 어눌한 표정이 재미있어서 영수는 키득키득 웃었다. 드라마 주인공처럼 잘생긴 젊은 남자가 자신의 밝은 웃음 앞에서 쩔쩔매는 것을 보는 일이 영수는 즐거웠다. 그들은 어느덧 말을 하지 않고도 눈빛으로 서로의 마음을 읽을 수 있게 되였다. 신기한 일이였다.   주화와 함께 일을 했던 식당에서 영수는 인생에서 가장 랑만적인 한달을 보냈다. 그처럼 마음이 둥둥 뜨고 일을 해도 지겹지 않고 괜히 감정이 예민해지기는 처음이였다. 온 세상이 커다란 풍선같이 비현실적이고도 아름답게 보였다. 미래는 더없이 찬란했고 과거의 어두운 기억들은 어느 땅굴 속으로 숨어들었는지 나타나지도 않았다. 좀 다른 느낌이였지만 그 시간은 분명 주화에게도 일생일대에 다시 없는 특별한 시간이였다. 싸움이라면 수없이 많이 경험해보았지만 녀자에 대해서라면 거의 제로에 가까운 주화였다. 매력적인 이성에 대한 막연한 갈구는 있었지만 이렇듯 분명하고 구체적인 한 이성과 몹시 개인적인 감각을 나누는 느낌은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했다. 주화는 이 감정을 어떻게 키워가야 하는지, 영수라는 녀자를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에 대해 전혀 알 수 없었다. 간대로야 이것이 정말 사랑일가, 이 녀자랑 진짜 끝까지 갈수 있을가, 주화는 애초부터 아무 희망도 걸지 않았다. 바로 그런 무책임한 의심 때문에 주화는 담대하게 사랑을 진행시킬 수 있었고 끝내는 결혼에까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이였다.   가게에 가까이 오면서 주화는 미리 주차할 자리를 눈여겨보았다. 그들이 가게를 얻은 8년전보다 엄청나게 번화해진 거리였다. 가게는 영수가 발품을 들여 찾은 곳이였고 그 안의 물건들도 영수가 종류별로 선정해서 한국과 일본에서 들여온 것이였다. 영수는 매일 가게에 나오지 않았지만 가게가 돌아가는 상황을 빤히 알고 있었다. 영수는 탁월한 상인기질에 근거하여 어떤 상품들이 인기리에 팔릴 것인가 하는 것을 족집게처럼 잘 판단했다. 영수가 밀어붙인 상품들은 불티나게 팔려나갔고 다른 가게에서 그들을 본따기 시작할 때 그녀는 벌써 새로운 상품을 엄선해 들여오고 있었다. 돈이 한바탕 모이면 영수는 잽싸게 돈뭉치를 들고 잠재가치가 있는 부동산을 선택해 투자했다. 발품을 아끼지 않고 돌아다니며 비교하고 형세를 파악한 다음에는 과감히 팔건 팔고 사야 할건 사버렸다. 그들에게는 든든한 빽이나 유력 친지를 통한 관계망, 정보망도 없었지만 수년 만에 아빠트와 상가, 차고 모두 해서 9개의 부동산을 가질 수 있는 성과를 누릴 수 있었다. (부동산 투기 방지차원에서 제정된 법률조항들이 지금처럼 세세히 나오지 않았을 시기였다) 이제는 수입상품가게가 아니더라도 그 여러채의 건물에서 나오는 세만 가지고도 애들 둘의 류학비를 감당하면서 충분히 먹고 살 수 있는 정도였다.   차를 아빠트단지안의 골목 쪽에 세워놓고 주화는 가게로 들어갔다. 사장이 나오지 않아도 점원들끼리 잘할 수 있는 가게였지만 주화는 원칙상 매일 가게로 나갔다. 사촌 당숙이 소개해온 ‘잘 아는 형’네 집의 아들녀석은 남자직원을 졸졸 따라 다니며 물건을 정리하고 있었다. 주화네 가게에는 별 필요 없는 인력이였다. 계산대를 지키는 녀직원은 주화의 눈치를 흘끔거리며 걸레를 적셔 여기저기 먼지를 닦아냈다. 스물두셋이나 될 법한 어린 녀자였는데 영수에 대해 알지 못하는 애숭이여서 간 크게도 주화에게 지나친 애교를 부리군 했다. 주화는 그런 녀자들을 싫어하지 않았다. 기분 좋을 때면 보너스도 챙겨주고 작은 선물 같은 것을 해주기도 했다. 그러나 가게에 오래 두지는 않았다. 그 아이들은 아직 철이 없어서 필요 이상으로 담대할 수 있었으니까. 그 아이들이 영수를 보았더라면 어떻게 생각했을가. 주화랑 너무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할지도 모를 것이다. 주화는 지금도 너무 멋진 사내였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브랜드를 따져가며 코디를 하고 다녔지만 영수는 외관상 너무나도 평범한 주부였기 때문이였다.   영수는 늘 일하기에 편한 옷을 선호했다. 한국에서도 그랬고 중국에서도 그랬다. 한번 산 옷은 잘 관리해서 최소한 5년 이상을 입었다. 특이한 개성의 예쁜 옷들을 골라 입었지만 류행을 따르거나 브랜드의 옷은 입지를 않았다. 화장도 잘 하지 않는 편이였고 곱슬머리도 그대로 길러서 낮은 포니테일로 묶고 다녔다. 길거리에 나서면 전혀 튀지 않는 스타일이였지만 사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목구비가 조각처럼 예뻤다.   영수를 처음 보는 순간 주화는 80년대 대륙의 드라마 《서유기》를 떠올렸다. 금빛찬란한 황금관을 쓰고 긴 너울을 드리운 리령옥(李玲玉) 분연의 옥토끼 요정(玉兔精), 그녀처럼 빨간 곤지를 찍고 동그란 코걸이를 걸었더라면 영수가 더욱 인도공주 같았을 거라고 주화는 생각했다.    누가 당신을 내게로 데려왔을가   (是谁 送你来到我身边)   저 둥근 명월 명월이 아니던가   (是那 圆圆的明月 明月)   …     영수의 커다란 쌍겹눈과 토끼요정처럼 귀밑에 반달모양으로 휘우듬히 꼬부라진 한가닥 곱슬머리를 보면서 주화는 속으로 〈천축소녀(天竺少女)〉 노래를 흥얼거렸다. 잽싸게 손을 놀려 빈 그릇을 담아오거나 급하게 종종걸음을 칠 때면 그녀의 통통한 흰 팔과 발목에서 짤랑짤랑 경쾌한 방울소리가 들려오는듯 싶었다. 영수의 짜랑짜랑 맑은 목소리와 해처럼 밝은 웃음 앞에서 주화는 자신이 마치 하얗고 높은, 깃털 장식의 혼례두건을 쓴 당승처럼 코믹해진 것 같았다. 영수가 “안녕하세요?” 인사를 하자, 주화도 엉겁결에 그녀를 따라 “안녕하세요?” 인사했다. 영수가 밥상 앞에서 “잘 먹겠습니다.” 말하는 것을 보고 곧바로 뒤따라 “잘 먹겠습니다.” 소리쳤다. 주화는 영수가 어디서 갑자기 나타난 녀자인지 알수가 없었다. 이 세상에, 한국 같은 나라에 이런 녀자가 살고 있었다는 것도 믿기지 않았다.   후날 주화는 영수의 친정어머니와 그녀의 언니, 오빠들을 차례로 만나보았지만 그래도 여전히 리해할 수 없었다. 그 사람들은 그저 영수가 주화를 혼란시키기 위해 갑자기 만들어낸 허구의 가족들 같았다. 그녀의 가족들은 예상보다도 더 주화를 싫어했다. 물론 그녀의 어머니가 가장 로골적으로 불만을 표했는데, 지어 그들이 작은 시골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리는 날에마저 자녀들에게 당부하여 아무도 참석하지 못하게 했다. 어머니에게는 자식중에서 제일 예쁘고 똑 부러진 막내딸을 위한 아름다운 계획이 있었고, 그래서 딸의 후진 안목과 성급한 결정에 아주 섭섭해했다.   영수는 주화보다도 더 씩씩하게 그 아픔을 잘 이겨냈다. 전보다 더 열심히 일을 하여 차곡차곡 돈을 모아 전세집도 하나 마련했다. 그 첫번째 전세집에서 영수를 닮은 인형처럼 앙증맞은 려나가 태여났다. 그리고 얼마큼 모은 돈을 중국에 있는 시댁에 송금해주었다. 주화는 고향동네에서 별안간 부자로 인정받았고 많은 길거리패 젊은이들의 훌륭한 본이 되였다. 찬기가 태여나고 얼마 되지 않아 주화는 더이상 한국에 있고 싶어하지 않았다. 겪어야 할 것들은 다 겪어보았고 돈도 웬만큼 모았다고 생각한 모양이였다. 계속 머물러있으면 돈은 더 모이겠지만, 그렇다고 평생 거기서 살 수는 없지 않는가. 어차피 돈을 벌기 위해 머물고 있던 나라였고, 언제든지 돈만 모이면 중국으로 돌아오리라 마음먹었으니까. 비자와 다른 수속 때문에 주화가 먼저 중국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3개월 뒤에 영수가 아이들을 데리고 남편의 뒤를 따라 들어왔다. 바깥 날씨가 제법 쌀쌀한 5월이였다.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여라   내놓지 않으면   구워서 먹으리    거북등처럼 둥글고 평평한 야트막한 동산, 그 푸른 산 정상에서 노래소리가 들려온다. 마르고 갈라진 석쉼한 소리다. 노래말은 단순하고 길지 않다. 특유의 저음에 꺾기와 뒤집기 창법이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한 남자가 운을 떼면 다른 남자들이 뒤말을 잇는다. 어린아이들과 녀자는 그 의식에서 소리를 하지 못한다. 소리를 선도하는 남자들은 모두 여섯, 이 고장에서 태여나고 자란 사람들은 아니다. 마을사람들과 자칫 충돌이 일어날 번한 적도 있다. 그러나 여섯 남자 모두 그닥 호전적이지 않았고 그들의 손에는 청동검이 들려있었다. 젊고 활력 넘치며 지혜 있어 보이는 남자들이다. 그들은 분명 마을사람들보다 세상 여러 구석을 더 많이 보았고 더 많이 알고 있었다.   노래는 온종일 지속된다. 마을 추장들이 먼저 흙 한줌씩 쥐여뿌리며 제단 주위를 돈다. 오래전부터 마을사람들이 함께 제를 지내온 거대한 돌제단이다. 그 앞에서 한 약속들은 어길 수가 없다. 남자들도 그들과 같이 돈다. 다른 마을사람들도 그 행렬에 가담한다. 미구에는 아이들과 녀자들까지 함께 소리를 하며 춤을 춘다. 이제 이 근방 모든 부족사람들이 모두 자원으로 제의에 동참한 것이다. 그들은 서로를 적으로 삼지 않고 련맹친구로 같이 번영하기를 기원한다. 사람들은 모두 기쁨에 찬다. 어떤 신성한 분위기에 휩싸여 온힘을 다해 자아를 잊고 오직 그 분위기 속에서 마음으로 거대한 하나를 이룬다. 여태 이런 일은 없었다. 뭔가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 조짐이다. 그날 밤, 모닥불 주위에서 부족들의 성대한 잔치가 드디여 끝난다. 추장들은 다른 고장에서 온 남자 여섯을 새로운 리더로 인정한다. 그중 한 남자가 다른 다섯 남자의 추종을 받는다.   남자는 과연 모든 사람들의 예상을 뛰여넘어 매우 훌륭한 리더십을 선보인다. 산을 중심으로 올망졸망 흩어졌던 부족들을 모조리 굴복시켜 자신의 세력범위 안에 두게 된다. 남자를 비난하고 남자에게 복종하지 않는 부족들도 있었지만, 결국은 인정한다. 그 상황에서 남자를 대신할 만한 리더는 다시 없다. 특히 남자가 가지고 온 새 기술ㅡ철의 기술은 부족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것은 나무나 돌하고는 비교할 수 없는 신기한 힘을 가졌다.   남자는 또 바다길에 대해 큰 그림이 있었다. 어선을 개조하고 항해를 격려하며 길을 열어 다른 지방이나 섬나라와 장사문을 튼다. 이 지방이 이처럼 흥성해보기는 처음이다. 사람들은 남자를 좋아했지만 날로 커지는 리익 앞에서 서로간의 다툼을 온전히 그치지는 못한다. 각 세력간의 힘의 평형을 위해 남자는 결혼을 주저한다. 그러나 언제까지 그렇게 있을 수는 없다. 차세대의 리더를 준비하고 양육해야만 이 련맹국가를 든든히 유지할 수 있다. 어느 세력파의 집안과 혼인을 할 것인가, 자칫 잘못하면 또다시 혼란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상황이 될 수 있다. 남자는 깊이 고민한다…       핑크 리봉으로 머리를 묶은 려나는 바깥 쪽에, 더듬더듬 몇개의 단어밖에 말할 줄 모르는 찬기는 안쪽에 앉히고 영수는 비행기를 탔다. 처음 가보는 중국이였다. 주화와 결혼을 한 것은 실감나는 일이였지만 중국인과 결혼했다는 생각은 한번도 해보지 못했다. 영수는 이제 자신의 가족과 함께 공항으로 마중 나올 주화를 상상했다. 그의 모습을 애써 그려볼수록 주화는 더욱 낯선 사람이 되였다. 처음으로 영수는 주화가 두려워졌다. 자신이 여태껏 아무 것도 모르는 남자와 십년을 살아온 것처럼 느껴졌다. 모든 것은 한국에서와 다를 것이였고 주화에 대해서도 처음부터 다시 알아가야 할 필요를 막연히 느꼈다. 참으로 공포스러운 일이였다. 찬기는 창문에 붙어 우와-- 우와-- 놀고 있었지만 려나는 엄마의 불안한 심기를 눈치챘는지 조그만 입술을 꼭 다물고 긴장을 풀지 않았다. 영수는 그 아이의 경직된 얼굴이 너무 가슴 아팠다.   10년전의 장춘공항은 한산하고 어두웠다. 비행기에서 내린 사람들도 많지 않았다. 그들은 차문이 잘 닫기지 않는 뻐스를 타고 덜컹거리며 공항 입구에 도착했다. 한국에서는 한창 초여름이라 반팔에 무릎까지 오는 치마를 입었는데 동행한 승객들 중에는 아무도 그렇게 얇게 입은 사람이 없었다. 영수는 애들을 데리고 한참을 기다려 짐을 모두 찾았다. 커다란 트렁크 하나와 그 우에 박스 하나를 얹고, 자기 키만한 베낭을 둘러메고 핸드백을 어깨에 대각선으로 멘 채 찬기를 한 팔에 안고 걸었다. 려나는 그보다 작은 트렁크를 끌고 자기의 려행가방을 메고 따라왔다. 아무래도 어린 것의 힘에 겨운 무게인지 려나는 대여섯 발자국 걷다가는 멈춰서서 가방을 추스렸다. 그들은 거의 마지막 승객으로 출구를 빠져나갔다.   서늘하고 어두침침한 대기실에는 아직 나오지 않은 승객을 기다리는 것으로 보이는 한무리의 사람들이 있었다. 영수는 그 속에서 주화를 찾아보았다. 려나가 먼저 소리를 질렀다. “아빠--!” 다음 순간 영수는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한 남자를 보았다. 연푸른 샤쯔에 긴 바지를 입은 남자였다. 남자는 영수의 앞에까지 걸어오더니 손에 들었던 생화 묶음을 내밀었다. 이 세절은 영수가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것이였다. 한국에서도 가끔 엉뚱한 이벤트를 해주긴 했지만 이 상황에서 생화를 들고 공항에 나오리라는 기대는 하지조차 않았다. 그 시절, 서울에서도 애 둘을 낳은 마누라에게 느닷없이 생화 선물을 해주는 남편은 드물었으니까.   붉은 장미에 하얀 백합화 두송이를 가운데 꽂은 부케였는데 장미의 가장자리 꽃잎들이 시들시들 말라있었다. 영수는 뜻하지 못한 선물을 받고 멍하니 서 있었다. 주화가 그녀에게서 베낭을 받아메는 사이, 그 한무리의 사람들이 모두 영수네를 향해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어림짐작 스무명 가까이 되는 사람들이였다. 녀자도 있었고 남자도 있었으며 젊은 청년도 있었고 나이 든 할머니, 할아버지도 있었다. 그들은 한개 련의 군사들처럼 영수네 앞으로 몰려와 그녀와 아이들을 외계인 구경하듯 훑어보았다. 주화가 소개했다. “이 분이 내 어머니이시고, 이 분은 울 아버지고. 이 분은 큰아버지, 그 옆에는 큰어머니, 이쪽은 둘째아버지, 둘째어머니… 여기는 큰 이모, 큰 이모부… 이 애는 둘째 이모네 조카, 그리고 여기는 당숙네 아이…” 영수는 할 말을 잃었다. 이게 중국이란 곳이구나, 내 남편 주화는 이런 곳에서 살던 사람이구나… 영수는 그 얼굴들을 하나도 분별하지 못한채 머리를 숙여 인사만 했다. “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고맙습니다…”   택시를 타고 주화가 마련한 아빠트로 돌아가는 길에 영수는 왈칵 울음이 터졌다. 바깥은 한없이 펼쳐진 검은 옥수수밭이였는데 갓 싹이 올라온 연두색의 옥수수 포기들이 그렇게 안스러울 수가 없었다. 어머니는 영영 떠날지도 모르는 딸과 외손군들을 배웅하러 나오지도 않았다. 영수와 아이들을 외래 종족 취급하는 언니와 오빠만 나왔을 뿐이였다. 언니는 어린 찬기는 좀 안아주었지만 려나한테는 쌀쌀맞게 굴었다. 려나도 이모를 좋아하지 않았다. “이모, 우리가 무슨 전염병환자야? 왜 항상 그런 표정으로 우리를 쳐다봐?” 려나는 이모에게 눈을 똑바로 뜨고 그렇게 물었다. “내가 뭘? 얘 좀 봐라, 어른한테 하는 말본새 하고는…” 언니가 려나에게 눈을 흘기면 려나는 픽 입을 삐죽거렸다. “말 안해도 티가 다 나. 울 아빠가 중국사람인 게 그렇게 불편해? 그래도 사람 앞에서까지 무안 주고 그러지 마. 이모네 전세 맡을 때도 울 엄마가 얼마큼 꿔줬잖아, 이사할 때도 울 아빠가 가서 다 도와줬으면서…” 오빠는 애들에게 용돈이라며 각자 5만원씩 세여서 건네주었다. 오빠가 옷가게니 식당이니 장사를 접을 때마다 갚아주었던 돈에 비하면 섭섭한 금액이였다. 그러나 무슨 일에든 새언니의 안색을 살펴야 하는 오빠의 립장을 리해해야 했다. 짐들을 다 부치고 영수는 애들과 함께 대기실로 들어갔다. 두 남매는 유리칸막이 바깥 쪽에서 그녀에게 손을 흔들어보였다. 이렇게 떠나면 다시 한자리에 모이기 어려운 삼남매였다. 사람들 속에 묻혀갈 무렵 언니가 머리를 돌리는 것이 잠간 보였다. 형제의 연이란 이렇듯 짧은 것이구나, 하고 영수는 생각했다. 영수는 비행기에 들어와 앉아서도 울지 않았다. 어차피 인생은 혼자서 가는 것이 아니던가. 그 진리만 굳게 잡고 간다면 그다지 슬플 일도, 애잔한 일도 없을 것이였다.   그런데 막상 무연히 굴곡진 옥수수밭을 보고 영수는 눈물이 쏟아졌다. 세상이 이렇게 넓었다는 것, 그것을 여태 모르고 살아온 자신이 너무 작아보인다는 것이 슬퍼져서였다. 영수는 자신이 처음 만났던 주화를 상상하려고 애썼다. 다시 십년전으로 돌아가 그의 감정을 느껴보고 싶었다. 처지는 이제 바뀐 것이였다. 여기서 문화도 풍습도 말도 통하지 않는 쪽은 영수였다. 십년전의 주화는 영수보다 젊었고, 십년후의 영수는 주화에게 없었던 아이들과 거처할 집이 있었다. 어느 쪽이 견디기에 더 나은 상황인지 분별하기 어려웠다. 젊은 시절의 주화는 훨씬 불안한 상황이였지만 대신 언제든지 그만둘 수 있는 자유도 있었다. 그러나 영수에게는 더이상 퇴로가 없었다. 오직 인생을 이곳에, 주화에게 올인해야만 행복을 꿈꿀 수 있었다. 영수는 악착같이 적응해나갔다. 외롭고 힘들다는 말은 아무에게도 할 수 없었다. 그녀는 주화를 도와 가게를 시작했고 재산을 불려 투자를 했으며 시댁식구들에게 할 만큼의 도움도 주었다. 친지들 중에서 영수의 지위는 확고했다. 그녀의 근면함과 일관성 있는 원칙적인 일처리와 소박한 생활자세를 두고 누가 뭐라 할 수 있을가. 그녀의 침착함과 성숙됨은 주화의 성급함과 경망스러움을 더 나타낼 뿐이였다.     밝은 달은 언제부터 있었을가   (明月几时有)   술잔을 들고 하늘에 물어본다   (把酒问青天)   과연 천상의 궁궐에선   (不知天上宫阙)   오늘밤이 어느 해런지   (今夕是何年)   …   사람에겐 슬픔과 기쁨과 리별과 만남이 있고   (人有悲欢离合)   달에겐 밝고 어둡고 둥글고 이지러짐 있으니   (月有阴晴圆缺)   이런 일은 예로부터 완전하기 어려워라 …        (此事古难全)    영수는 소동파의 〈수조가두〉(水调歌头)를 여러번 읊었다. 읊으면 읊을수록 아름답게 느껴졌다. 너무 황홀하고 아름다워서 도무지 주화와 같은 나라, 같은 민족의 시인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였다. 영수에게 중문을 가르치는 선생님도 주화와 전혀 다른 느낌이 나는 신사였다. 영수는 그 선생님의 수업을 가장 열심히 들었다. 그러나 그 선생님의 삶은 그가 가르치는 〈수조가두〉와 달리 별 재미가 없을 것 같았다. 물론 풍파가 많다고 해서 꼭 재미있는 삶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풍파를 만들기 위해 주화가 트집을 잡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은 정말 많이 싸웠다.   영수는 주로 말로 잘못을 따지려 들었고 영수처럼 따박따박 근거를 댈 수 없는 주화는 물건을 던지거나 깨부수는 것으로 자신의 불만을 표했다. 손에 잡히기 쉬운 열쇠뭉치나 재떨이를 던지는 것은 다반사였고 좀더 분노의 수위가 높아졌을 때에는 화분이나 그릇들을 팽개치기도 했다. 아이들에 대해서도 대화로 풀기보다 일단 가장의 권위를 내세워 ‘버릇을 뗀다’는 명목으로 자주 밀걸레대를 뽑아들었다. 찬기는 맞을 짓도 덜했고 아빠의 분노에 금방 굴복하는 성격 때문에 상대적으로 적게 부딪쳤지만 려나는 달랐다. 려나는 절대 쉽사리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아무리 불리한 상황에서도 결코 자비나 관용을 구하지 않았다. 그 아이는 화가 나면 날수록 눈을 더 동그랗게 치뜨고 아빠에게 대들었다. “내가 뭘 잘못했는데? 난 잘못한 거 없다고! 그래도 때려? 그냥 때리고 싶은 거겠지, 차라리 때려서 나를 병신 만들지 그래?!” 그러면 주화는 정말 미쳐서 돌아버리기 일보 직전이였다. 그 아이와 주화는 말 그대로 앙숙이였다.   얼마나 많은 밤 영수는 그들 부녀사이에서 속을 졸였는지 몰랐다. 어떤 날은 너무나 감당하기 힘들어서 주화를 달래 침실 안에 들여보내고 몰래 바깥으로 문을 잠근 적도 있었다. 집안의 방문고리들이 너덜너덜해진데는 다 그만한 리유가 있었다. 아이들이 학교로 나가고 화가 풀린 점심이나 오후면 주화는 집으로 들어와 쏘파에서 빨래를 개는 영수의 무릎을 베고 누웠다. 화내느라 에너지를 다 써버렸다면서 응석을 부려 영수에게서 전복죽을 얻어먹었다. 딱 한번 영수가 더는 참을 수 없어 려나를 데리고 집을 나간 적이 있었다. 이 사람하고는 더이상 엮이고 싶지 않다, 평생 그렇게 할 것이다, 하고 영수는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려나는 엄마를 따라가기 원했다. 영수는 찬기에게는 말하지 않았다. 찬기까지 데리고 나오면 주화는 금방 무너질 것이였다.   모녀는 심양행 기차표를 끊었다.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심양은 그닥 멀지 않고 한국인들도 꽤 많이 산다고 들어서였다. 기차가 거의 출발할 무렵, 영수는 차창 밖으로 달려오는 주화를 보았다. 어떻게 알고 뒤쫓아왔는지 신기했다. 주화는 표도 없었던 것 같았다. 제복을 입은 철로의 일군들이 그를 제지시키면서 뭐라고 말했지만 주화는 모두 뿌리치고 성난 사자처럼 달려왔다. 그가 영수네를 찾기 전에 기차는 문을 닫고 서서히 출발했다. 영수는 창문으로 주화가 두리번거리며 기차를 따라 달리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기차가 막 속력을 내려던 무렵에야 주화는 영수를 알아보았다. 영수는 순식간에 주화의 눈앞에서 휙 사라졌다. 그들 모녀가 심양에 내려 한국인 거리를 찾아 호텔에 든 이튿날, 주화는 기어이 그들을 찾아냈다. “어디로 가든 내가 못 찾아낼가 봐. 잔말 말고 빨리 짐 다시 싸! 내 허락 없이는 절대 떠날 수 없다는 걸 분명히 가르쳐줘야겠어!” 영수는 그런 남편을 둔 자신이 너무 창피하고 부끄러웠다. 그 뒤로 그녀는 다시 그런 시도를 하지 않았다. 한번씩 화를 내고 나서 주화는 어떻게든 영수의 마음을 보듬어주려고 갖은 애를 썼다. 죽으라면 죽는 시늉까지 완벽하게 내보였다. 어떤 일에서나 똑 부러지고 원칙 있게 행동하는 영수였지만 주화에게는 방법이 없었다. 주화는 그녀의 소원대로 바뀌지도 않았고 그녀를 버리거나 그녀와 헤여지기를 원하지도 않았다. 영수는 이제 주화를 거의 포기했다.        남자는 신하 신귀간(神鬼干: 금관가야 김수로왕의 신하)을 부른다. 김해 바다 남쪽 해안으로 사람들을 데리고 가보라고 명을 내린다. 그곳은 장사배들이 자주 드나드는 나루터다. 이미 여기 사람들과 거래를 튼 배들도 있었고 새로이 거래를 트려고 찾아온 배들도 있다. 드물기는 하지만 해안을 따라 모험을 나온 배들도 만나군 한다. 신귀간 등이 바다가로 나간다. 푸른 남보석 같은 바다물이 모래사장을 철썩철썩 들이친다. 하얀 갈매기가 낮게 날아예고 모래톱에는 작은 게들이 발랑발랑 기여다닌다. 그 외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얼마나 기다렸을가, 문뜩 희미한 하늘과 푸른 바다가 이어진 지평선 저쪽에서 작고 부연 점이 하나 보인다. 붉은 빛갈이 감도는 점이다. 사람들은 긴장하며 그 붉은 점을 주시한다. 아름다운 꽃 한송이가 두둥실 떠오르는 것 같다. 그것은 가까이 더 가까이 바다가로 나온다. 붉은 닻을 내리고 붉은 기발을 날리며 다가오는 배다.   스무명 남짓의 종들이 타고 있다. 입고 있는 옷의 양식도 주변 부족들에서 보지 못했던 것이다. 배가 나루터로 들어온다. 긴 바줄을 던져 배를 바다 기슭 건실한 나무에 정착시키고 승객들은 하나 둘 내리기 시작한다. 거개가 건장한 남자들이였고 녀자들은 불과 대여섯 밖에 안된다. 붉은 비단너울을 길게 드리운 녀자 하나가 다른 녀자들의 시중을 받으며 천천히 배에서 내려 뭍으로 올라온다. 이목구비가 매우 또렷하고 눈도 크다. 여기 부족의 녀자들하고는 많이 다른 용모였지만 우아하고도 아름다운, 명문가의 기품이 느껴지는 녀자다. 녀자를 뒤따라서 역시 위엄 있는 남자(허황옥의 오빠: 장유, 스님) 하나가 내린다. 황토빛 품 너른 옷을 입은 남자는 목에 큰 구슬 목걸이를 걸고 있다. 머리카락을 모두 밀어버려 살가죽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 특이하게 보인다.   녀자는 주위를 둘러보고는 모래톱에 읍하고 서 있는 신귀간 등에게 묻는다. “저는 해안선을 따라 오래동안 려행해 왔답니다. 여기는 무슨 고장이죠? 당신들의 왕은 누굽니까? 어디에 있나요?” 녀자는 자신의 이름이 허황옥이라고 한다. 나이는 열여섯, 아유타국의 공주라고 자칭한다. 녀자의 붉은 배는 화려하다. 종들이 내온 상자는 틀림없이 귀한 보물로 채워져있는 것 같다. 신귀간 등은 바로 홰불을 올린다. 궁에 있는 남자에게 좋은 소식을 알리는 것이다.   녀자는 그들을 따라 바로 남자의 궁으로 들어가기를 원치 않는다. 입고 있던 비단바지를 벗어 산신에게 페백으로 바치고 남자가 례를 갖춰주기를 기다린다고 한다. 시기도 시기려니와 이처럼 마음에 드는 녀자는 없다. 남자는 흥분에 겨워 서둘러 대궐에서 나와 아래쪽에 녀자를 맞이할 간이장막을 하나 치도록 분부한다. 남자는 그 앞에서 속을 졸이며 녀자를 기다린다. 녀자를 태운 수레가 드디여 멀리 남쪽에서 나타난다. 산전수전 다 겪어보아서 이만한 일 쯤 괜찮으리라 생각했는데 마음보다 가슴이 더 활랑거린다. 어떤 녀자일가, 처사를 보면 예사 재력과 지혜와 결단력을 가진 녀자가 아니였지만 실제로 성격은 어떨지, 용모는 어느 정도일지 너무 궁금하다.   수레에 앉은 녀자 또한 속 졸이기는 마찬가지, 이 고장 왕이라고는 들었지만 신하들의 행색이며 지나쳐온 마을들의 살림이며를 보아선 자신이 떠나온 본국보다 형편이 훨씬 처지는 듯하다. 왕이라고 모두 현명한 것도 아니고, 반드시 친절하거나 보기 좋게 생긴 것도 아닐 것이다. 최악이 아니기를, 너무 형편없지만 않기를, 녀자는 기도한다. 마침내 흔들거리던 수레는 멈추고 바깥에서 사람들이 열어준 카텐너머로 한 남자가 보인다. “어서 오시요, 당신만을 기다렸습니다.” 진중하면서 부드러운 목소리다…       수업이 끝났지만 영수는 금방 자리에서 일어나기 싫었다. 수업을 들을 적이면 영수는 자신이 마치 청춘소녀로 돌아간 것 같아서 좋았다. 지난 20여년간, 그녀는 정말 너무 많은 일을 했다. 쉴새없이 일을 하여 오로지 돈을 벌었다. 그녀는 마치 일을 하고 돈을 벌기 위해 이 세상에 태여난 사람 같았다. 재력도 학력도 없는 그녀가 그처럼 많은 돈을 벌었다는 것이 자신도 잘 믿기지 않았다. 그 많은 돈을 모두 어디에 썼던가. 아빠트를 사고, 또 아빠트를 사고, 가게를 사고, 또 가게를 사고, 차고를 사고 또 차고를 사고… 주화에게 멋진 옷을 사주고 새 차를 뽑아주고, 려나와 찬기 모두 미국으로 류학 보내고, 시댁식구들 중 어려운 사람이 있으면 꿔주고, 친정엄마가 아프다 그러면 좀 보내주고… 이럴려고 번 돈이였던가. 정작 그녀 자신은 아끼고 쪼개 썼다. 그러는 동안 20년이 훌쩍 지난 것이다.   다시한번 인생을 살았더라면, 스물다섯 주화를 처음 만난 식당으로 돌아갔더라면 여전히 같은 선택을 했을가. 아마 그렇지 않았을 확률이 높을 것 같았다. 영수의 잘못이라면 너무 겁이 없었다는 것이였다. 그녀는 처음부터 주화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녀는 인생이라는 것을 너무 아름답게 설정했다. 이제 열아홉, 열세살이 된 남매를 모두 떠나보내고 친구 하나 없는 중국어 학원에 와서 당시송사(唐诗宋词) 수업이나 들으며 보내는 삶이 과연 그녀가 바라던 행복이였을가.   교실에 사람들이 하나도 남지 않은 것을 보고 영수는 일어났다. 뻐스를 타면 40분 정도 걸리는 거리였다. 그녀는 평소처럼 뻐스를 타지 않고 걸어서 집으로 가기를 택했다. 저녁해가 도시를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쌀쌀한 늦가을 바람이 목안으로 파고들어서 영수는 목도리를 단단히 고쳐맸다. 1시간 40분 정도 걸으면 도착할 것이였다. 저녁에는 주화에게 무슨 반찬을 해줄가 걸으면서 영수는 생각했다. 며칠전부터 갈비타령을 했는데 갈비찜으로 메뉴를 정할가 고민했다. 식당가 앞거리를 지날 때 영수는 익숙한 좁쌀죽 냄새를 맡았다. 노란 좁쌀죽이 참 먹고 싶다고 영수는 생각했다. 여러 재료를 수북이 넣고 참기름에 달달 볶아 걸죽하니 끓인 한국식 죽이 아니라, 물 많이 넣어 후륵후륵 간편히 먹을 수 있는 중국식 죽을 말이다.   영수는 의식적으로 가게 쪽을 흘낏거렸다. 찬바람이 부는 거리, 불빛이 알른거리는 가게들 앞편에서 초라한 행색의 할아범이 꾀죄죄한 좌판을 펴고 바닥에 앉은 것이 보였다. 살 생각도 없고 구경할 마음도 없었지만 영수는 그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진때가 묻은 구리불상, 무늬가 희미해진 옛날 엽전, 그리고 록색 구슬로 된 목걸이,‘문화대혁명’시대의 잡화들이 띄염띄염 놓여있었다. 골동품이라고는 부를 수 없는 허술한 모조품들 뿐이였다. 영수는 그중 한 물건을 들고 할아범에게 흥정을 거는 사람을 지나쳤다. “이거 진짜 계피석 아니죠?” 붉은 페인트로 일부러 칠해놓은듯 주홍색 무늬가 선명한 돌이였다. “그냥 장난감으로 사시지유, 그래도 망부석이니깐유.” 할아범이 쭈밋거리다 대답했다. 영수는 잠간 멈춰서 그것을 들여다보았다. 웃쪽 작은 부분과 아래쪽 더 크고 긴 부분이 련결된 것이 특이하긴 했지만 사람모양새를 련상하기에는 좀 무리였다. 할아범이 돌을 받아들고 각도를 돌려서 보여주었다. 머리를 쪽지고 허리를 약간 구부린 채 서 있는 사람의 형상이 희미하게 나타났다. 녀자로 보이기도 하고 남자로 보이기도 했다. 망부석(望夫石)인가, 망부석(望妇石)인가. 문뜩 파도소리가 들렸다. 외로운 갈매기소리와 처절썩처절썩 노 젓는 소리도 들렸다. 배에는 순항을 지켜주리라 소망을 기원한 5층 파사석탑이 실렸고 배머리에는 물고기 두마리가 새겨져있다. 주위는 온통 검푸른 바다물일 뿐이다.   찬기의 류학을 고민할 무렵, 려나가 그랬다. “이것저것 너무 재지 말고 걍 보내. 언어는 어릴수록 배우기가 쉬우니까. 걱정 마, 내가 있으니까 금방 적응할거야. 어차피 언젠간 류학 보내려고 생각했었잖아.” 영수는 려나에게 미안했다. 이제 중학교 1학년을 들어간 찬기도 너무 안스러웠다. 한창 사춘기 격변시대를 겪어야 할 아이, 부모의 손길이 아직도 너무 필요한 아이였다. “려나야, 엄마가 미안해. 내가 선택한 삶 때문에 니들도 나 같은 운명을 겪는 것 같아서 미안하다.” 그 말에 려나가 어른처럼 대답했다. “아니야, 엄마. 그럴 필요 없어. 어차피 인생은 혼자 가는 거잖아.” 려나는 언제 영수의 마음을 읽었을가. 영수 스스로 생각할 때에는 별 느낌이 없었는데 려나의 입에서 그런 말을 들으니 기분이 묘했다. 주화가 들었으면 정나미가 떨어져야 할 말이였다. “애들을 어떻게 키웠길래 이 모양이야? 왜 얘네들은 이렇게 자기중심적이야? 통 한가족이란 개념이 없잖아!”   영수는 할아범에게서 그 망부석을 샀다. 가격은 할아범이 부른 절반으로 깎아버렸다. 돌에 대해서 알지도 못하고 공예품을 좋아하지도 않았지만 그냥 샀다. 이런 돌이 진짜로 서 있는 바다가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물밀듯 치밀었다. 날이 어둑어둑 해가 지기 시작했다. 영수는 베낭을 추스르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초록 신호등을 받고 사거리를 지나는데 뒤에서 갑자기 자동차가 빵빵거린다. 경적소리가 상식 이상으로 너무 가깝게 들렸다.       주화는 하루종일 가게에서 빈둥거리다가 거리를 조금 싸돌아다녔다. 점심은 영수가 싸준 도시락을 먹었다. 오후나절에는 옛날 ‘영광스런 흔적’을 가졌던 친구들 둘을 만나 기분 좋게 술을 마셨고 늦은 저녁이 되기 전 술상을 파했다. 녀석들도 이제는 녀편네의 눈치를 웬간히도 보는 모양이였다. 음주운전 검사 경찰을 피하기 위해 골목길로 운전하여 돌아오면서 주화는 어머니한테 전화를 넣었다. 무슨 용건이 있어서가 아니라 하루건너 한번씩 드리는 안부전화였다. “로마요?(老妈呀) 나야, 황주화. 당신 큰아들. 그래, 식사했쥬? 별 일 없구요?” 혹시 용돈이 필요하면 더 보내주겠다고 주화는 큰 목소리로 말했다. 늙은 어머니는 그 말에 매우 반가워했다. “이잉, 아직 저번에 준 게 있다는데두. 하긴 요즘에 날이 부쩍 추워져서 양털 내복 하나 사야겠다 생각은 하고 있었다만…” 주화는 하하 웃으며 걱정 말라고, 자신이 알아서 사드리겠다고 장담을 했다.   늙은 어머니도 기분 좋게 웃었다. “그래, 애들 에미하고는 별일 없제? 요즘도 접때처럼 싸우는 거 아니지?” 려나를 류학 보내기로 결정하기 전, 주화네 집에 들렸다가 두 내외가 대판 싸우는 것을 보고 내내 걱정스러웠던 모양이다. “됐어! 다 됐다구! 이제 아빠하고는 끝이야, 평생 안 보고 살고 싶어!” 주화에게 귀썀을 얻어맞은 려나가 이를 앙다물고 못된 말을 내뱉었다. 그 애는 한다면 하는 애였다. 영수가 려나 편을 들었다가 눈 깜짝할 새에 주화가 던진 재떨이에 이마를 맞았다. 영수는 분을 가라앉히며 숨을 고르다가 처음으로 주화처럼 손에 잡히는 물건을 던져보았다. 맞아도 그리 아플 것 같지 않는 책이였다. “이 년이 미쳤나? 감히 누구에게 뭘 던져?!” 책이 땅에 떨어지기도 전에 주화가 바람같이 달려들어 영수를 내리쳤다. 늙은 시어머니는 찬기의 부축을 받으며 서서 그 요란한 장면을 보고 부들부들 떨었다. 영수의 이마에서 피가 새는 것을 보고 주화는 멈췄다. 그는 가장 빠른 속도로 전화를 찾아들고 119를 불렀다. “영수야, 괜찮아? 많이 아파? 미안해, 내 잘못이야. 미안해 여보…” 그리고는 119가 오기도 전에 영수를 벌떡 둘쳐업고 주차장으로 달려갔다. 살갗이 긁혔을 뿐 큰 문제는 없었다. 그 다음달 영수는 주화 몰래 려나의 류학준비에 착수했다.   “싸우긴요? 우리가 뭐 더 싸울 게 있겠어요? 이젠 둘밖에 없는데…” 하고 주화는 전화에 대고 하하 웃었다. 려나를 보내고 한동안은 정말 큰 다툼 없이 잘 지냈었다. 영수는 려나가 걱정되여서 저녁마다 밤을 지새우며 전화를 지켰었다. 그러다가 차차 전화도 뜸해지고 영수도 그다지 려나의 전화에 집착하지 않았다. 생활은 전보다 더 명랑해진 것 같았다. 려나가 보고 싶은 것은 주화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 애한테 잘해주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려 애정을 찬기에게 쏟기 시작했다. 찬기는 아빠가 무슨 얘기를 해도 “네. 괜찮아요, 그래요, 아빠.” 하고 대답했다. 그것이 영수를 화나게 했다. “당신이 얼마나 억압적이였이면 애가 그래 괜찮다는 말밖에 할 줄 모르겠어? 이 애는 자기가 원하는 게 뭔지 종래로 분명히 얘기할 줄 모른단 말이에요. 자기 스스로도 그걸 아는지 몰라.” 찬기의 표현은 확실히 애답지 않았다. 주화는 시간을 내여 찬기와 농구도 하고 수영도 해보았지만 무엇을 하든 찬기의 반응은 매번 똑같았다. “이거 할까?” 그러면 “네 괜찮아요, 아빠” 했고, “저거 할까?” 그래도 “네. 좋아요, 아빠.” 대답했다.   그래, 그 아이도 나 때문에 보냈겠지, 주화는 골목길에서 차를 끌고 나오면서 그렇게 생각했다. 중점중학교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자 영수는 조바심을 냈다. 중점이 아닐 바엔 미국에 가서 영어라도 확실히 배우고 오는 편이 나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찬기의 인격이였다. 어떻게 건강하게 자기의 욕구를 표현하는지, 자신의 정당한 욕구를 채우기 위해서는 타인과 어떻게 협상하고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 그 나이대의 아이들이 장악할 만한 정도의 기교에 대해 찬기는 도무지 알지 못했다. 얼핏 보아 착하고 평화로운 아이처럼 보이지만 사실 자신의 정체성을 찾으려고도 하지 않는 아이였다. 이런 상태는 려나보다 훨씬 나빴다. 주화가 우겨서 찬기와 같이 월드컵 축구경기를 보는 밤, 영수는 결단을 내렸다. 나이가 좀 어리긴 하지만 언어학습에는 더 나을 거라고 자아위안하면서. 아이 둘 다 주화의 곁에서 떠나보내는 것, 사실 심양에서 돌아오며 은밀히 혼자 세웠던 계획이 아니던가. 생각보다 이르긴 했지만 어쩌면 차라리 잘된 일이였다. 그래야만 다음 행보로 넘어갈 수 있었으니까…   차는 벌써 주화네 아빠트단지로 들어가고 있었다. 아이들이 곁에 없는 건 괴로운 일이지만, 학교를 마치면 곧 돌아올 테고, 그때면 그들도 장성해서 지금처럼 부딪치지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영수가 곁에 있으니 좀 한산해도 견딜 만한 게 아닌가? 찬기까지 떠나고 나서 주화는 하루에도 몇번 자신에게 그렇게 말했었다. “그렇지? 싸우지 않는다니 됐다. 애들 다 키워놓고 보면 부부한테는 결국 서로밖에 없느니라.” 어머니가 말했다. “그럼요, 알죠, 걱정마세요.” 주화는 차고에 차를 들여놓고 현관문을 따고 집으로 들어갔다.   집안은 캄캄했다. 1층에도, 2층에도 어느 방에도 불은 없었다. 저녁을 먹고 들어왔기에 배는 일단 고프지 않았다. 영수도 수업이 끝나고 아는 사람이랑 밥을 먹고 들어오나? 생각하면서 주화는 쏘파에 기대앉아 티비를 켰다. 아직 늦은 저녁이 아니였다. 티비에서는 퀴즈프로가 한창이였다. 주화가 좋아하는 프로그램이였다. 20분이 지났을가, 처음 참가한 녀자들이 모두 탈락하고 최후의 2인만 남았을 때까지 기다렸지만 영수는 돌아오지 않았다. 주화는 핸드폰을 찾아 전화를 걸었다. 뚜-- 뚜-- 신호 가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이내 뚝 끊어졌다.     티비에서는 사회자가 마지막 퀴즈를 내고 있었다. “손이 책상을 뚫지 못하는 리유가 뭘까요? 네. 당연한 일이지요. 손은 책상을 뚫지 못합니다. 그런데 정확히 무슨 힘 때문에 그렇게 되는 걸까요? 마찰력, 전자기력, 중력. 자, 1, 2, 3, 어느겁니까?” 주화는 다시 전화를 걸었다. 이번에는 뚜뚜뚜뚜 통화중인 것 같은 신호음이 들려왔다. 2명의 후보중 한 사람이 맞췄는 모양이였다. 화면 안에는 떠들썩한 함성이 울려터졌다. “네. 맞습니다. 바로 전자기력입니다! 손을 구성하는 원자와 책상의 원자는 본질이 서로 다른 물질이죠. 아무리 가까이 가더라도 각자의 원자핵 바깥에서 춤추는 전자들은 절대 서로 다른 상대를 용납하지 못한답니다. 가까이 갈수록 엄청난 배척력을 느끼게 되는 거지요…”   주화는 잠간 티비를 바라보다가 다시 다이얼 버튼을 눌렀다. 전화 안에서는 한참동안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러더니 잠시 뒤 “지금 련결할 수 없는 상황” 이라는 안내음이 흘러나왔다. 주화는 음울한 신음소리를 내며 핸드폰을 탁자 우에 던지고 쏘파 깊숙이 물앉았다. 찬기도 류학생활에 적응하고 나면 영수가 더는 밤새 손님방에서 전화기를 지키지 않겠지, 그러면 두 사람에게 정말 새로운 삶이 시작될 수 있을 거라고 주화는 생각했었다. 영수가 바라는 게 그것이 아니였던가? 그것이 아니였단 말인가? 주화는 슬금슬금 불안해났다. “나 허락 없이 떠날 생각 같은 거 하지조차 말라.”고 소리지르던 날, 영수는 창 밖을 내다보며 또박또박 말했었다. “뭐? 자기 허락 없으면 떠날 생각을 말라고? 흥! 알았어, 알았다고. 당신이 정 그렇다면 나도 내 방식대로 할 거야. 반드시 그렇게 할 거야…” 벌써 3년 전의 일이였다.   주화는 손을 약간 떨며 핸드폰을 다시 찾았다. 영수는 오늘 중국어학원에 갔을 것이다. 수업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일 것이다. 오다가 잠간 무슨 일이 있어 늦어지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주화는 영수가 다니는 중국어학원이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했다. 영수의 동료나 친구들의 전화번호도 몰랐다. 뚜ㅡ 뚜ㅡ 신호가 가는 소리가 들리다가 바로 끊어져버렸다. 휑뎅하고 서늘한 집안에는 주화 혼자 뿐이였다. 다투는 소리도 웃음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이 집에서 한 녀자와 그녀의 아이들과 같이 10년을 살았다는 것이 조금도 실감나지 않았다.   고영수는 대체 어디에서 온 녀자일가? 부부는 일심동체라는데 왜 그 녀자와 하나가 되는 일은 이다지 어려울가? 주화는 검은색의 거실창문 앞으로 다가갔다. 혹시라도 지금 막 택시를 타고 집으로 들어오고 있는 영수를 볼가 싶어서였다. 붉은 헤드라빛이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붉은 닻을 내리고 붉은 기발을 펄럭이는 한척의 배였다. 종래로 본 적 없었던 배였다. 배머리에 금빛찬란한 례관을 쓰고 신부의 너울을 길게 늘어뜨린 천축소녀가 찬바람을 맞으며 그림처럼 서 있었다. 가까이 더 가까이 녀자는 다가왔다.       “려나야, 다시한번 생각해줄래? 류학이란 것은 공부만 하는 게 아니라 그 나라의 문화를 배우러 가는 거란다. 젊은 시절에 몸에 익힌 문화란 사람의 일생을 좌우할 수도 있지. 그러니까, 니가 미국에서 돌아온다 해도 엄마나 아빠랑은 더 멀어질 수도 있게 된단다. 니가 아니? 문화차이란 얼마나 대단한 건지?”“물론 알지. 다른 사람의 몸에 배인 습관을 절대 흉내 내지도, 받아들일 수도 없다는 거, 그게 문화차이가 아닌가? 엄마가 하는 얘기, 뭔 말인지 알아들어. 엄마는 지금 아빠랑 도무지 모든 걸 공유할 수 없어서 쓸쓸해하고 있는 거잖아.” 3년전 려나의 출국수속 절차를 밟으면서 영수가 물었던 것이였다. 영수는 택시를 타고 달리고 있었다. 집으로 간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왠지 점점 더 멀어져 가는 느낌이였다. 어떤 거대한 힘이 그녀가 앉은 택시를 집에 가까이 갈수록 점점 더 강렬하게 밀어내고 있는 것 같았다. 택시는 주화가 있는 집주위에서 불규칙적인 원을 그리며 빙빙 돌았다.   멀리 해변가에 남자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영수는 본능적으로 그 사람이 주화인 것을 알아보았다. “저기에요, 저기! 바로 저 집이란 말이에요.” 하고 영수는 간곡히 부탁했다. 그러나 아무리 해도 영수는 주화의 나라에 닿을 수 없었다. 주화에게 다가가는데 방해되는 것은 모두 버렸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남은 것은 더 이상 버릴 수 없는 자신의 발 아래 자리밖에 없는데.
12    [단편소설] 바람구멍-금희 댓글:  조회:318  추천:0  2019-07-18
금희   바람구멍     며칠동안의 고민 끝에 수한씨는 A시로 자리를 옮겼다. 그럴 만한 연고가 있는 것은 아니였다. 중학교를 나온 뒤 잠간 머물며 일을 했던 곳이였고 딱히 친하다고 할 수 없는 동창 서넛이 살고 있다는 도시일 뿐이였다. A시의 역전은 붐볐다. 땀에 삭은 티셔츠를 입은 수한씨의 행색은 람루했다. 누르끼레한 머리카락은 귀를 덮었고 해볕에 그을린 피부는 놋쇠같이 어두웠으며 끼니를 등한히 챙겨먹인 몸은 바싹 말라있었다. 역을 나와 가장 가까이에 있는 시내뻐스를 타고 수한씨는 무작정 H구역으로 왔다. 뻐스로선지도를 보고 대충 중간 쯤이라 싶은 곳에서 내린 것이였다. 수한씨가 내린 지역은 이 도시에서 번화한 곳에 속하진 못했지만 그렇게 구석진 곳도 아니였다. 2차선대로가 쭉 뻗어나간 길옆으로 큰 식당이며 높은 상가들이 번듯하니 줄서있었고 좀더 안쪽 좁은 길로는 여러 레벨의 아빠트단지들이 오밀조밀 모여있었다. 수한씨는 베낭을 메고 끌신을 탈탈 끌며 채색 타일이 깔린 인행보도를 걸어갔다. 뻐스정류장이나 전보대, 슈퍼의 유리창 혹은 아빠트의 바람벽에 붙여진 세방광고들을 까근하게 훑어보면서. 아직 해는 중천에서 얼마 더 기울지 않았다. 운만 좋으면 저녁내로 고만고만한 세방 하나 쯤은 찾을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저녁밥을 먹기전까지 수한씨는 스무통이 넘는 전화를 했다. 광고지중의 어떤 번호는 이미 없어진 전화번호였다. 서너번의 통화에서는 세방이 다 나갔다는 소식만 전해들었다. 직접 가본 경우는 세번이였다. 첫번째 집은 꽤 멀끔한 아빠트단지의 3층에 있었다. 새 아빠트는 아니였고 관리사무소도 눈에 띄우지는 않았지만 주차장에 세워진 차들이 반반한데다가 복도에 쓰레기도 없었다. 수한씨는 그곳이 맘에 들었다. 하지만 세집주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흰 머리카락이 군데군데 드러난 늙은 남자는 팔짱을 끼고 눈망울을 희번득이며 마뜩찮은 표정으로 수한씨를 참빗질해보았다. “우리 집에는 세방이 두갠데, 지금 있는 청년은 꽤 체면있는 직장에 다니고 있다네, 자네는… 아무래도 다른 데 가서 알아보는 게 좋을 거야. 뭔 말인지 알아먹겠지?” 그 사람은 수한씨를 월세도 내기 힘든 빈민가의 막로동자나 소위 ‘농민공’으로 취급하는게 틀림없었다. 남자가 말해준 ‘체면 있는 직장에 다닌다는 청년’을 수한씨도 운 좋게 볼 수 있었다. 짧은 머리에 무스를 바르고 잉크색 넥타이에 브랜드가 의심스러운 정장을 입은 젊은 남자였다. 젊은 남자는 두고 간 서류를 찾으러 왔는지 옆구리에 누런 봉투를 끼고 총총히 그들을 지나쳐 집안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총총히 계단으로 내려가버렸다. 십중팔구 그런 인간은 부동산 중개소의 직원일 것이였다. 진짜 엘리트들이 하고 다니는 것보다 명찰의 줄부터가 허름해보였으니까. 두번째 세방주인은 현관문을 빠끔히 열고 얼굴만 내밀었다. 깨끗이 소제된 문앞에는 빨간색의 네모난 융단이 깔려있었고 그 곁에는 림시로 신발을 올려두는 간이 신발장까지 비치된 집이였다. 잠옷 바람에 머리띠를 두른 채 화장기 없는 얼굴을 내민 녀자는 이렇게 말했다. “세방을 찾는다구요? … 근데 우리 집은 녀자들만 들인답니다. 딴데 가서 알아보시죠.” 아무래도 그 녀자는 수한씨의 개인청결상태가 께름직했던 것일 것이였다. 녀자가 둔중한 방범철문을 쾅 닫아버리자 수한씨도 그 집의 알른알른한 복도 앞에다 찍 침을 뱉어버렸다. “뭐? 녀자만 들인다구? 통화할 때는 남자인 줄 몰라서 오라 했을까? 누구를 아주 거지 취급하네, 썩은 무우처럼 재미없게 생긴 녀편네 같으니라구…” 수한씨는 눈높이를 더 낮추는 수 밖에 별 도리가 없었다. 그런데도 세방은 금방 나타나주지를 않았다. 길고 긴 여름해가 북방도시의 저편 너머로 다 기울어가고 나서도 한식경이 지나서야 수한씨는 세번째 세방으로 들어가볼 수 있게 되였다. 외벽은 오랜 시간 바람을 맞고 비물에 씻기면서 애초의 모습을 련상하기 어려웠으며 창틀마다 진득한 기름때와 녹쓴 자국이 훤히 보이는 아빠트단지였다. 얼마되지 않는 잔디밭은 뙈기뙈기의 파밭 혹은 배추밭으로 란도질되여있었고 그 가운데를 질러가는 오솔길 돌판 사이로는 무릎까지 치고 올라오는 잡초들이 무성했다. 낡은 아빠트단지에는 쓰레기통이 비치돼있지 않아 골목귀퉁이에 야트막이 쌓인 세멘트담 안으로 갖가지 오물봉지들이 진물 흐르는 주검처럼 악취를 풍기며 쌓여있었다. 먹다 남은 수박껍질, 빈 음류수통, 주방 씽크대에서 건져낸 음식물 쓰레기, 말라죽은 화분식물 따위와 택배포장박스… 가장 꼴불견인 것으로는 갈색 혈흔마저 알아볼 수 있는, 생리대가 삐죽이 튀여나온 화장실 쓰레기였다. 그야말로 온갖 것을 집어삼킨 상어의 위속마냥 지리멸렬한 풍경이였다. 가까운 곳에서 인기척이 한번씩 나면 쓰레기더미 우에 다닥다닥 붙어있던 파리들이 윙― 징그럽게 날아올랐다. 세방주인을 기다리는 동안 수한씨는 아빠트아래 대문앞 공지에 베낭을 벗어놓고 그 우에 앉아 다리쉼을 하면서 그런 쓰레기를 버렸을 인간들을 생각했다. 추잡한 인간일수록 버리는 쓰레기도 지저분한 법, 여기 이곳 인간들하고는 대체 얼마만큼 같이 지낼 수 있을가? 북방도시가 남방도시보다 청결치 못한 것을 감안하더라도, 예상했던 것보다는 더 나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수한씨는 내심 바랐다. 세방주인은 허리가 곱은 늙은 할망구였다. 그녀는 큰길 건너편의 마트 앞 광장에서 춤구경을 하다가 돌아오는 길이였다. 광장무의 음악에 한창 빠져있을 때였던지 로인네는 수한씨의 전화를 티나게 귀찮아했다. “뭐라? 누기? 세방? 세방을 보겠단 말이여? 그러니까, 울 집에 세들어 살고 싶다 이 말이제?…” 요란한 노래소리가 들리는 속에서 로인네는 꽥꽥 소리를 지르며 몇번이나 확인을 했다. 수한씨는 한 손으로 하루살이떼들을 홰홰 쳐내면서 걸어오는 할망구를 단박에 알아보았다. 그러나 할망구는 베낭 우에 오도카니 앉아있는 수한씨를 본체만체 지나쳐버렸다. “에그 에그 허리야, 다리야, 늙으면 거저 죽어야제…” 수한씨는 할망구가 자신의 앞을 그대로 지나쳐 대문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급히 전화를 걸었다. 할망구의 모습이 사라진 컴컴한 계단입구 쪽에서 삐리리 전화벨소리가 심상찮게 울려퍼졌다. “여보세요? 네, 저 아까 전에 전화한… 네, 그 세방 보려고 온 사람인데요…” 수한씨는 베낭을 둘러메고 할망구의 뒤를 쫓아 헐씨근 올라갔다. 로인네는 겨우 2층까지 오르고는 헐떡헐떡 숨을 톺으며 멈춰섰다. “에그 에그, 요 다리만 덜 아프면 딱 살 것 같두만…” 할망구의 집에는 세를 놓는 방이 세개였다. 원체 크지 않은 두칸짜리 집이였는데 거실 한구석을 합판으로 막아 방 하나를 더 만들어서 세를 주고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바로 거실이였고 왼편에는 주방, 그 너머에 방 하나, 맞은켠에는 화장실, 오른편에 방 두개(거실의 간이방까지)가 나란히 있었다. 좁고 습기찬 주방에는 잡동사니 가득 쌓여있어서 발 들여놓을 곳조차 마땅치 않았는데, 식탁 놓는 자리에는 간소한 상 하나와 각양각색 거죽의 이불들과 보따리들이 무져있는 침대 하나가 있었다. 상 우에는 반쯤 마른 삶은 옥수수토막, 말라붙은 요구르트병, 바퀴 떨어져나간 장난감 자동차… 같은 것들이 아무렇게나 얹어져있었고 누더기 보를 편 침대 우에는 등과 목이 훤히 드러난 런닝에 삼각팬티만 입은 아이가 아이패드로 만화를 보고 있었다. 할머니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아이는 흥분된듯이 새된 소리를 지르며 발딱 일어나 침대에서 뛰여내렸다. 그 참에 아이 엉덩이에 깔려있던 기름기 묻은 얇다란 비닐봉지가 함께 나풀나풀 날려 내렸다. 그렇게 수한씨는 A시에서의 첫 세방을 잡았던 것이였다. 수한씨의 방은 거실을 합판으로 막아 만든, 바로 그 ‘잉여’의 방이였다. 문을 달아줄 여력까지는 없었던지 그 방의 출입구는 기다랗게 드리운 꽃천으로 대체했다. 물론 방안의 가구 또한 매우 간소했다. 철제 1인용 침대 하나, 버려진 옷장 같은데서 떨어져 나온 듯한 상자 겸 밥상(또는 상), 그리고 강렬한 해볕에 색이 다 날아버린, 좀만 무거운 짐을 얹으면 폴싹 바스러질 것 같은 플라스틱 수납장 하나, 그것이 전부였다. 수한씨는 베낭을 멘 채 그 방 침대 옆에 우두커니 서있었다. 18년 동안의 떠돌이 생활 중 이보다 못한 방에서 살아본 적이 없지는 않았지만 그건 옛날 얘기였고, 근년에 살던 방들은 거개가 이보다는 넓고 깨끗하고 조건이 좋았다. 꽃천 뒤에서 할망구의 탁한 목소리가 세입자에 대한 경멸의 어투로, 하지만 사실은 애원의 감정이 섞인 것인지도 모르는 어투로 말하고 있었다. “세는 다른 방보다 30원이 싸야, 이만큼 싼 방은 근처에 눈 씻고 봐도 없제. 집도 절도 없는 놈이니께 눕고 일어날 자리만 있으면 됭거 아닌겨?” 할망구는 아이가 앉았던 침대에 올라가서 그 주위를 한바퀴 빙 두를 수 있는 카텐을 죽 잡아당기고는 그 뒤에 누웠다. 샤와는 가능하지만 자주 할 경우(일주일에 세번 정도) 추가비용을 들여야 하며 밥은 일절 해먹을 수 없다고 할망구는 쐐기를 박았다. 친절한 주인은 결코 아니였다. 그래도 최악은 아닌상 싶었다. 일단 쉬고, 일자리부터 찾고 나서 보리라고 수한씨는 생각했다. 어찌됐든 오늘 밤 잘 자리는 생겼군 그래 라는 생각이 드는 다음 순간, 무지막지한 피곤이 수한씨를 향해 성난 곰처럼 사납게 덮쳐왔다. 수한씨는 베낭을 벗어 침대 밑에 쑤셔넣은 뒤 옷도 벗지 않고 그대로 쓰러져 잠이 들었다. 수한씨는 깊은 잠 속에 빠져 이튿날 점심까지 내처 잤다. 다른 세입자들은 모두 출근 나가고 아이는 동네 유치원으로 가고 늙은 할망구는 불안한 손길로 수한씨의 꽃천을 여러번 가만히 펼쳐들었다 놓았다.   어두웠다. 느낌이란 것이 언제 어떻게 시작되였는지, 의식이란 것이, 자아라는 존재가 어떻게 태여났는지 알 수 없었지만, 처음에 그 어두움은 고요했다. 아니, 사실은 그 자체가 들리지 않는 아우성이였을지도 모른다. 기억도 없었고 느껴지는 것도 없고, 그래서 아무 의미도 없이 영원히 공허한 우주 속에 부유하고 있었다. 죽은 것도 아니고 잠 자는 것도 아닌 것은 확실했지만 그렇다고 그 상태를 삶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그러다 뭔가 고독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주변이 있다는 것을, 그 주변이 크고, 더 크고, 무한히 크다는 것을, 그 속에는 무엇인가 존재하고, 또 존재하고, 무수히 많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였다. 그것들은 서로 얽히고 설켜서 매우 혼란스럽게 관계하고 있는 듯했는데 사실은 오히려 상상초월할 정도로 정교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것들끼리의 일이였다. 그것들이 언제부터, 어떻게 돼여 서로 관계하게 되였는지 알 수 없었다.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고 아무도 관계 속에 초청하지 않았다. 그래서 외로움에는 소외감이 덧씌워졌다. 누군가 공들여 써놓은 씨나리오 속에 원체 존재하지도 않았던 캐릭터로 덜컥 등장을 해버린 것 같았다. 이건 무엇인가? 어떻게 발생한 일인가? 의문은 메아리쳐서 우주 끝까지 퍼져나갈 뿐이였다. 시초의 기억은 아무리 해도 복구할 수 없었고 고독을 느낀 뒤로부터 불가사의하게도 초읽기의 시간이 저절로 가동되였다. 당혹스러웠고 불안하고 두려웠다. 자꾸자꾸 란할이 되더니 그다음에는 더 복잡하고 더 커졌다. 안과 밖이 생기고 우와 아래가 구분되였다. 많은 칸들이 생겨나고 그 칸들 하나하나에 각기 다른 것으로 채워져갔다. 그것들은 무럭무럭 자라고 꾸준히 분렬되였으며 스스로 제 령역을 정교하게 다듬어갔다. 그것들은 최초의 순간에 느낀 그 무한한 것을, 무수히 많은 것들을 정교하게 다루고 있는 그 공허한 것을 닮아가려고 애쓰고 있었다. 언제부터인지는 그것들을 통해 소리도 듣고 빛도 느끼고 양분과 그렇지 않은 것을 흡수하거나 내뱉기도 했다. 그런 방식으로 주변을 의식하는 일은 매우 미련하고 서툴고 느리며 불완전한 것이였다. 그에 비해 시초도 알 수 없고 의지를 마음대로 온전히 조종할 수도 없는 자아는, 그럼에도 그런 한심한 방식보다는 훨씬 빠르고 정확하며 통찰력 있게 주변의 인격을 인식할 수 있었다. 심장이 뛰고 뇌세포가 늘며 간과 콩팥이며 위와 장과 혈관들이 생겨났다. 온 몸에 솜털이 덮이고 손톱과 발톱이 자라나고 발차기를 할 수도, 손가락을 빨 수도, 표정을 지을 수도 있게 되였다. 이젠 밤이구나, 낮이구나, 이건 엄마 목소리, 좋은 음악이로구나… 기관은 더욱 세밀해졌고 느낌은 더욱 섬세해졌다. 38개의 주일, 266번의 저녁, 6384시간이 지나갔을 즈음 자아는 이제 제법 사람모양의 육체를 갖추게 되였다. 양수중에 표류하고 있어서 공기를 직접 들이마실 수 있는 페만이 아직 발달하지 못한 상태였다. 종일 꾸르륵꾸르륵 장이 움직이는 소리, 졸졸졸 쿨쿨쿨 혈액이 흐르는 소리, 씨익쌔액 공기가 페를 거쳐 드나드는 소리, 쿵쾅쿵쾅 심장이 팽창하고 수축하는 소리, 그리고 여러 사람들의 말소리와 그릇 부딪치는 소리, 차소리와 청소기 소리를 들었다. 육체가 거하는 공간은 좁아져서 돌아누울 틈도 많지 않았다. 육체는 더이상 그곳에 머물러 있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는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자신과 련결된, 자신의 숙주이자 그를 품고 있는 모체에게 명령에 가까운 신호를 보냈다. 모체의 육체도 같이 반응하도록, 그가 탈출할 수 있는 길과 타이밍을 만들 수 있도록, 그가 독립되여 분리된 다음에도 당분간 그에게 제공해줄 수 있는 양분의 생성을 위해 준비하도록. 그동안 자아가 인식한 대로라면 모체를 완전히 신임할 수는 없었지만. 그러나 그 일은 모체 말고 다른 어느 개체에게도 명령하거나 도움을 청할 수 없었다. 자아는 물끄러미 육체의 바쁜 움직임을 주시했다. 바깥세상이 얼마나 혼란스럽고 위험하며 각처에 추악과 잔혹이 도사리고 있는지 자아는 알고 있었다. 나와봤자야 더 좋을 것도, 더 나쁠것도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마지막 순간 육체는 웅크리고 앉아서 잠시 동작을 멈췄다. 자아가 의식하고 있는 것을 육체도 느꼈던 모양이였다. 그러다가 그는 울분을 토하듯 폭발적인 힘을 일으켜 몸을 앞으로 쭉 뻗었다. 그에게는 사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초읽기의 시간처럼 한번 분렬이 시작되고 난 다음에는 어쩔 수 없이 계속 앞으로 달릴 수 밖에 없는 것이였다. 육체는 사방이 죄여드는 캄캄한 통로로 접어들어 그곳을 빠져나가기 위해 혼신의 에너지를 깡그리 쏟아부었다. 죽음과 삶이 엇갈아 육체를 압박했다. 육체를 돕기 위해 자아는 죽음의 문이 열리는 순간, 대소천문 (대천문과 소천문: 신생아의 이마와 정수리 사이 뼈 없이 마름모꼴의 물렁한 부위. 세모꼴 모양의 뒤 숨구멍)을 닫아주었다. 곧바로 자아에게도 흑암이 잠시 찾아왔다. 한번도 분리되여본 적 없던 육체와의 소통이 찰나에 끊겨버린 것이였다. 자아는 무수한 개체들이 서로 얽히고 설킨 거대한 뇌속 회로 같은 세상 속으로 육체가 기어이 미끄덩 나오는 장면을 지켜보았다. 죽음을 통과한 육체가 억울함도 희열도 아닌 목소리로 으앙― 첫 울음을 바스러지게 터뜨리며 첫번째 페호흡을 시행하는 것을 보고 자아는 침묵했다. 이제 단순 무식하던 육체는 나날이 소위 ‘성장과 성숙’을 도모하겠지만 자아의 힘은 현저히 약해갈 것이였다. 어쩌면 그 것은 이미 프로그래밍 된 시초의 설계, 그들의 숙명이였을지도 모른다.     수한씨는 검색 끝에 세방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의 인력시장 위치를 알아냈다. 회사이름을 붙인 손잡이 달린 패말을 들고 있거나 플래카드를 걸어놓은 책상에 마주 앉거나, 혹은 A4용지에 굵은 매직펜으로 몇글자 적어들고 서있는 사람들 속에 수한씨도 련 며칠을 함께 있었다. 오전 열시경부터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하여 정오가 되면 가장 붐볐다. 오후에는 북적거리던 인파가 많이 빠져나가고 세시 쯤부터는 오가는 이 얼마 없이 한산해지는 것이였다. 수한씨는 그곳에 나온 회사들을 일일이 둘러보았다. 거개가 대졸을 원했고 최소한 고졸을 받으려고 했다. 그들은 수한씨의 행색을 보고 나선 말조차 섞기 싫어했다. 그렇다고 식당이나 좀 규모있는 점포의 청소부로 들어갈 수는 없었다.(그들도 수한씨를 고려해볼 만한 대상 안에 넣지 않았지만) 택배 배달원이나 메이퇀(美团)배달 따위를 해볼가도 잠시 생각했지만 종일 전동 오토바이를 운전해야 되는 일이라 안전상 위험했다. 아니, 사실은 방향감각이 치명적으로 약한 수한씨에게 그 일은 거의 불가능한 것이였다. 아무런 학력도 기술도 필요치 않는 건축현장의 운반공 같은 일은 더욱 할 수 없었다. 그런 노가다를 하기에 수한씨는 너무 허약했으니까.    남방도시에서 하던 것처럼 공장 직원으로 들어가고 싶었지만 A시에는 공장이 그렇게 많지 않은 탓으로 구인광고가 희소했다. 운전면허증도 가지고 있었지만 그런 곳에 와서 기사를 찾는 이는 드물었다. 그렇게 사나흘이 지나도록 아무 진전이 없다가 드디여 수한씨는 마루자재 도매업자를 만나게 된 것이였다. A시에서 규모 있는 인테리시장에 가게들을 여럿 가지고 있는 오십대 초반의 중년 남자였다. 수십종의 마루자재들을 분별하고 정확하게 수자를 세며, 예매된 물건들을 단골집에 배송해줄 수 있는 사람을 찾는다고 했다. 남자는 수한씨를 맘에 꼭 들어하지는 않았지만 사정이 긴박한지 당장이라도 가게에 같이 가봤으면 했다.   A시에서의 첫 직장은 그렇게 정해졌다. 일은 쉽지 않았지만 너무 어려운 것도 힘이 드는 것도 아니였다. 마루자재는 벽돌보다 가벼웠고 종일 메고 날라야 하는 것도 아니였다. 창고에 쌓인 수십종의 자재들을 분간하는 것, 그리고 배송해주어야 할 단골가게들의 위치를 파악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창고와 가게마다 녀자 직원들이 한명씩 앉아 상담업무를 맡고 있었고 트럭을 운전하는 기사 두명과 그보다 작은 전동차로 배송하는 직원이 셋 있었다. 그 외에 이런저런 잔심부름에 가끔 전동차로 배송을 돕기도 하는 직원이 한명 더 있었다. 일거리가 적은 날에는 이미 있던 직원들로도 감당할 수 있었지만 좀만 일거리가 많아지는 날에는 일손이 현저히 부족했다. 수한씨의 일이 바로 그런 것이였다. 그중 일거리가 가장 많은 가게에 출근하면서 잡일들을 돕기도 하고 가끔 배송도 하다가 다른 가게에 빠지는 일손이 있다거나 갑자기 일거리가 많아지면 바로 그쪽으로 차용되여야 하는 립장이였다. 여느 사장들도 마찬가지겠지만 그래서 그 중년남자도 수한씨가 웬만큼 눈치 빠르고 엉덩이 가볍고 쾌활한 성격에다가 성실했으면 하기까지 바라고 있었다. 물론 그것은 그 남자의 바람일 뿐이였다. 수한씨가 아니라 그 전의 어느 한 직원도 남자의 바람을 만족시켜 본 일은 없었다. “그니께 거저 제 모에 띄운 일만 잘 허고, 사람이 너무 얌체짓 말고 성실하기만 한다면야 난 만족이요.” 남자는 그렇게 말했다. 매일 아침 수한씨는 6시반에 일어나 세수를 하고 나가서 아침밥을 사먹은 다음 뻐스를 타고 가게로 출근했다. 다른 세방살이 남자들은 그보다 늦은 시간에 기상을 했다. 농촌에서 상경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 나어린 애들이였는데 전에는 둘이 같은 식당으로 출근했던 모양이였다. 그들하고는 부딪치는 일이 많이 없었다. 그들이 퇴근하여 돌아오는 시간이면 수한씨는 이미 자리에 누워있었다. 머리카락을 바짝 밀어버려 거의 대머리 수준의 아이는 집에 한 사람이 더 늘어난 것이 좋은 모양이였다. 수한씨가 화장실에서 벌컥벌컥 발을 씻거나 침대 우에 누워 핸드폰으로 뉴스를 볼 때 아이는 가끔 장난기어린 눈으로 수한씨를 가만히 훔쳐보다가 도망가군 했다. 아이의 부모는 리혼을 한건지 돈 벌러 외지에 나간건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아이에게나 늙은 할망구에게 안부를 묻는 전화도 없었다. 할망구는 매일매일 자신의 허리와 다리에게 욕설을 퍼부으며 세개의 세방 요금을 받아 근근득식 살아가고 있었다. 할망구의 집으로 자주 마실 오는 친구 할머니가 있었는데 언제 봐도 친절한 미소를 가득 띄운 얼굴이였다. 그 할머니의 표정은 수한씨의 주인 할망구와 너무 대조되였다. 둘 사이의 대화도 아주 웃겼다. “오늘 오전 큰길 앞 마트에서 오이를 1원 50전에 팔더라구…” 하고 친구 할머니가 먼저 운을 떼면 주인집 할망구는 찌뿌둥한 얼굴로 “뭬야? 1원 50전이라구? 어디서 시들시들 말라빠진 팔아먹다 나머지 치가 아닝가?” 하고 답을 했다. 친구 할머니가 그렇지 않다고, 본인이 가서 샀는데 좀 자름하고 약할 뿐이지 먹을 만은 하더라고 해명을 하면 주인집 할망구는 전날까지 비싸게 팔아먹다가 갑자기 20전을 내려서 파는 마트의 직원들을 욕했다. 한번 욕설이 터지면 끊임없는 불평이 그 뒤를 이었다. 비닐봉지 하나를 더 주라 했는데 못들은 척한다느니 그 뜨거운 해빛 아래서 로인네가 문 열기를 기다리는 걸 보면서도 5분 쯤 먼저 열어주지 않는다느니 접때의 휴지는 포장만 뜯었을 뿐 한장도 쓰지 않았는데 물러주지 않았다느니 하는 따위의 비난이였다. 어떤 것은 억지라는 것을 할망구도 알고 있었다. 그녀가 언짢아진 주된 원인은 그저 전날에 이미 오이를 1원 70전에 사버렸다는 사실 때문이였다. 매사가 항상 그런 식이였다. 친구의 어떤 화제도 할망구를 기쁘게 해주지 못했고 할망구의 어떤 불평도 친구 할머니 얼굴의 미소를 사라지게 할 수 없었다. 그녀들은 매일같이 만나 그 코미디 장면들을 시리즈로 연출하군 했다. 친구분은 참 여유 있게 행복하게 사시는가 봐요, 하고 수한씨가 할망구에게 한마디 건넨 적이 있었는데 할망구는 그 말에 채머리를 달달 떨었다. “여유는 개뿔?” 할망구는 수한씨를 묘한 표정으로 쳐다보더니 픽 랭소하며 돌아섰다. 그런 것은 아무 상관이 없었다. 더 나은 일자리를 찾거나, 현재 일하고 있는 가게에서 짤리게 되면 수한씨는 곧 세방을 옮길지도 몰랐다. 출근을 시작한 첫날부터 수한씨는 직원들의 눈 밖에 나는 일을 저질렀기 때문이였다. 직원들은 거개가 돈도 절약하고 시간도 아낄 겸 해서 점심 도시락을 싸왔는데 수한씨는 당연히 준비하지 못했다. 가게마다 돌면서 장부를 관리하는 사장 부인이 ‘특허’를 내려, 수한씨는 부근의 식당가에서 점심을 해결하고 돌아오도록 지시를 받게 되였는데 그만 방향을 잃어버리는 바람에 두시간이나 지체해버렸다. 직원들이 대충 가리켜준 방향으로 가다가 마라탕집을 만나고 란주국수집을 지나고 물만두집과 햄버거가게를 지나쳐서 계속 우로 우로, 그담엔 맘에 드는 가게가 없어서 좌로 좌로, 그러다가 다시 우로 우로 돌다보니 마침내 방향을 잃어버린 것이였다. 딤섬이며 죽을 파는 집에 들어가 점심은 먹었다만 다시 돌아오는데 많은 시간이 걸렸다. 이제 돌아가면 모두들 언짢아하겠구나, 하고 수한씨는 생각했다. 그렇다고 돌아가지 않을 수도 없었다. 서른다섯이나 먹은 사내가 방향을 잃어버려 돌아오지 못했다고 하면 곧이곧대로 믿을 사람이 얼마나 있을가. 과연 가게에서는 갑자기 ‘실종’된 수한씨를 두고 의견이 분분했던 모양이였다. 사장 부인은 억이 막힌다는 표정으로 듣고 있었고 상담 녀직원 왕군은 그게 아니겠지 하는 눈초리로 수한씨를 곁눈질해보았다. 기사 정씨의 얼굴에서는 빙글빙글 미소가 돌고 있었고 가장 년장자인 김씨는 못들은 척 자기 일만 했다. 첫날의 실수는 그쯤해서 넘어가주기로 했다. 련이은 두날은 최선을 다해 심부름을 하고 배송도 다녀왔다. 아직 자재를 정확히 분간하기까지는 믿음직스럽지 못해 왕군이나 김씨가 물건을 찾아주었다.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단골집이라 배송도 어렵지 않았다. 전동차가 가벼워서 굽이를 틀 때마다 살짝 위험해질 번한 적도 있긴 했지만 다행히 무사하게 일을 마쳤다. 점심은 김씨가 가리켜준 대로 국수집에 배달을 시켜 창고문턱에 걸터앉아 먹었다. 면은 붇고 육수는 짜고 조미료 냄새가 심해서 아주 맘에 들지 않았다. 다른 직원들은 쪽걸상이며 포개놓은 벽돌장, 파손된 마루자재 우에 앉아 제마끔 도시락을 퍼먹었다. 점심 뒤에는 각자 자신이 가져온 차물로 입가심을 했다. 그들은 몇가지 화제를 놓고 심심풀이 수다를 떨기도 하고 담배 한대씩 피우기도 했다. 그들 사이의 동료애도 그다지 훌륭하지는 않다는 것을 수한씨는 느꼈다. 가정마다 어려운 문제들이 있고 지금 이 직업을 사랑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알 수 있었다. 힘들게 사는 이들은 자신의 스트레스를 어떤 방식으로든 표출하기를 원하는 법, 그래서 그들은 약속이나 한듯 주의력을 수한씨에게 돌리고 있는 것이였다. 수한씨는 그들 중의 약한 고리, 모두들 그의 앞에서 고참이라는 티를 내고 싶어하는 기색이 력력했다. 다행히 사장이 들려 서 큰 실수가 없었는지만을 묻고 갔다. 그러나 그 다음 다음날 아침 수한씨는 늦잠을 잤다. 흐린 날이였고 련 며칠동안의 육체로동 때문에 많이 피곤한 상태였다. 오전 열시가 넘어 겨우 눈을 뜬 것은 배가 아파서였다. 몇년동안 잠잠하던 장염이 또 도진 것이였다. 일어나기 바쁘게 설사를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토가 나왔다. 하늘은 찌뿌둥한 채 멈출 기미도 없이 면면한 비줄기를 드리우고 있었고 수한씨는 위속의 액까지 게워버려 기진맥진했다. 이렇게 늦은 마당에 전화를 해서 아프다고 하면 좋아하지 않겠지, 하고 수한씨는 생각했다. 그러나 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수한씨는 사장 부인에게 전화를 걸어 솔직하게 말했다. 아침 하늘이 흐려서 늦잠을 잤는데, 일어나고 보니 설사와 토가 나오더라, 아무래도 수년동안 잠잠하던 장염이 도진 것 같다, 이 상태로 일 나가기는 힘들고 우선 병원에 가봐야겠다, 오늘 하루 일단 병가를 맡겠다… 라고. 전화기 저쪽에서 한참 대답이 없었다. 한심해서 말이 나오지 않는다는 느낌이 전달되였다. 주인집 할망구보다는 쪼끔 더 친절한 사장 부인이 이렇게 말했다. “수한씨, 이제 정식 출근하기로 했고, 다른 직원들 눈도 있는데 하늘이 흐려서 늦잠 잤다는건 말이 안돼요. 일어나기가 피곤하면 알람을 해놓고 자세요. 오늘은 몸이 그렇게 아프다니 일단 병원에 가보고, 결과는 다시 얘기해주세요.” 그 녀자는 지금 많이 참고 있다는, 본인으로서 할 도리는 하고 있다는 억양으로 또박또박 말했다. 이상한 일은 아니였다. 많은 사람들이 친절을 베풀 때 곁들이는 표정이니까. 그날 수한씨는 병원에 갔다. 사장 부인은 그가 세방 근처의 작은 진료소에 들려서 빨리 처방을 받고 오후에라도 가게에 나오기를 원했지만 수한씨는 작은 진료소 따위를 믿을 수 없었다. 그는 인터넷을 검색하여 비교적 가까운 큰 병원을 찾아갔다. A시에서 내노라 하는 큰 병원중의 하나였는데 진찰실마다 대기하는 사람들이 입을 딱 벌리게 하도록 많았다. 의료시설이 빈약한 교구나 농촌에서 올라온 환자들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벌써 시간이 많이 늦어 오전중으로는 절대 의사를 만날 수 없었고 또 큰 병원인 만큼 혈액검사니 대변검사니 하다 보면 오후 퇴근하기까지도 처방을 받을 수 있을가 하는 것이 의심되였다. 게다가 그 몇시간동안을 약도 먹지 못하고 정신력으로 버텨야 한다는 사실이 굉장히 비인간적으로 생각되였다. 결국 수한씨는 사장 부인의 말대로 아빠트구역의 보건소에 가보았다. 예상대로 장염이였고 먹는 약과 더불어 링게르 하나를 꽂아주었다. 그날의 치료가 끝난 다음 의사가 그랬다. 그리 심한 장염이 아니라서 래일부터는 약만 먹어도 괜찮다고, 음식을 조심하고 될수록이면 한 닷새 푹 쉬는 것이 좋다고. 수한씨는 의사의 진단과 조언을 그대로 사장 부인에게 전했다. 뻐스를 타고 세방으로 돌아가는 길에 그녀가 먼저 전화를 걸어왔다. 울다가 잠이 든 아이처럼 하늘은 비는 그쳤지만 여전히 울먹거리고 있는 중이였다. “그래, 병원에서는 뭐라 하던가요? 주사는 맞았나요?” 녀자가 물었다. 성실한 수한씨가 전달한 의사의 조언을 듣고(한 닷새 푹 쉬는 게 좋다는) 녀자는 가느다란 한숨을 내쉬였다. “수한씨…”하고 녀자는 더 말을 잇지 못했다. 그 정도면 진짜 꽤 착한 녀자였다. 수한씨는 전화를 들고 가만히 서서 녀자가 말을 이어주기를 기다렸다. 조금 지나 용기를 내여 녀자가 계속했다. “수한씨, 일단 오늘은 나오지 말고 집에 들어가 푹 쉬여요. 약 드시고, 죽 같은 거 사 드시고, 찬물은 피하시고… 그래요, 수한씨, 래일 다시 봅시다.” 전화를 끊고 나서 수한씨는 안도의 숨을 길게 내쉬였다. 바위 같은 짐이라도 내려놓은 것 같았다. 그 녀자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였다. 그 녀자는 수한씨와의 대화를 아주 힘에 겨워하곤 했으니까. 그 다음날 수한씨는 출근시간 한시간 뒤에 가게에 도착했다. 아침에 일어나고 보니 속은 한결 편했다. 의사 말대로 심한 장염은 아니였던 모양이였다. 토도 나오지 않았고 좁쌀죽이 먹고 싶어지기도 했다. 수한씨는 사장 부인의 전화를 생각하면서 가게에 나갔다. 녀자는 수한씨를 보고 의외라는듯이 웃었다. 꽤 만족스러워하는 눈치였다. “잘 나왔어요, 수한씨! 내 맘 같아서는 하루 이틀 쉬라고 하고 싶지만, 여기도 엄연히 직장이고, 일도 많고, 또 다른 직원들 눈도 있으니까…” 녀자는 점심시간에 아무 것도 먹지 않고 앉아있는 수한씨에게 살짝 말했다. 그게 무슨 큰 비밀이라도 된다는듯이. 녀자는 꽤 괜찮은 사람이였지만 역시 그 것을 이미 의식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였다. 수한씨는 해쓱한 얼굴로 그저 핏 웃어보였다. 일주일이 지나고 열흘이 지나면서 수한씨와 사장 부인이 걱정하던 ‘직원들’사이의 골은 점점 깊어갔다. 그전에는 다른 직종에 있어서 몰랐는데, 이 일을 하면서 보니 수한씨는 약간의 색맹도 있는 것 같았다. 정상인이라면 며칠동안의 훈련에 걸쳐 이제는 구분이 되여야 할 마루자재의 색갈들이 수한씨에게는 그렇게 어려웠다. 아무리 얘기해도 이게 저거 같고 저게 이거 같았다. 수한씨는 또 꼼꼼한 성격이 아니였다. 그 부분은 전의 직장에서 일을 할 때에도 여러번 지적받았었다. 굉장히 성실한 것 같은데 일 마무리가 깔끔하지 못하고 일솜씨도 날렵하지 못했다. 엿새가 지나가자 왕군이나 김씨, 그리고 다른 직원들은 더이상 수한씨를 도와주려 하지 않았다. 사실 가게에는 일거리가 늘 산적해있었다. 자재는 사나흘에 한번 걸러 새로 들어왔고, 배송되여 나간 빈 자리는 계속 정리정돈을 해주어야 했다. 온 하루 배송일만 해도 눈알이 팽팽 돌아가야 했다. 그러다가 반품이나 교통사고, 혹은 다른 문제라도 생기면 또 바로바로 해결책을 내야 했다. 직종의 특성상 문제거리와 시비거리가 자주 생기는건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그러니 직원들은 당연히 자신들의 일거리를 나눠서 함께 감당해줄 수 있는 동료가 필요했다. 특별히 한가하지 않는 이상 수한씨를 챙길 여력은 아무에게도 없었다. 게다가 그들은 약속이나 한듯 본능적으로 수한씨를 보는 처음 순간부터 공동으로 그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들은 수한씨의 어눌한 말투, 약간 멍청한 표정, 그리고 빠리빠리하지 못한 몸놀림 따위를 한눈에 파악하고 그런 부분에 혐오를 가졌다. 마치 닭들이 병든 동족을 쪼아놓기를 좋아하듯이. 수한씨가 무슨 말을 하거나 어떤 행동을 취했을 때, 그것들이 저들의 상식범위 내에 들어있지 않는다면  저들은 무슨 큰 비밀을 공유하듯이 서로 눈길을 주고받았다. 될수록 은밀하고 티나지 않게. 어떤 경우에는 서로 눈길을 주고받고 하지는 않았지만 저들의 마음은 이미 그렇게 평가하고 있었다. 수한씨는 정말이지 그런게 몹시 싫었다. 그런 것은 수한씨가 인생 내내 겪어오던 것이였다. 동네에서, 학교에서, 그리고 직장생활에서. 그런데도 수한씨는 사람들의 그런 태도에 적응되지 않았고 잘 받아들여지지도 않았다. 이런 문제를 본질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 뿐이였다. 즉 그들이 인정하는 상식범위내의 말과 행동을 하고 그들이 좋아하는 방식대로 관계를 맺는 것이였다. 그런데 불행히도 수한씨는 여태 노력했지만 그것이 되지를 않았다. 물론 수한씨의 노력이 좀 모잘랐거나 더 유효한 방법을 찾지 못해서였을지도 몰랐다. 매번 수한씨는 이번엔 어떻게 잘해봐야지 마음 먹었다가 똑같은 문제에 부딪칠 쯤 되면 금방 두려움이 몰려와서 더이상 노력해볼 마음이 안개처럼 사라졌다. 두려움에 이어 초조함과 랑패감, 자괴감이 들다가 자기 련민이 오기도 하고 나중에는 자신의 마음이 더이상 상처받지 않도록 모든 문제를 저들에게 돌리게 되는 것이였다. 이 가게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반복 연출되였다. 이제 직원들은 모두 수한씨를 괴물 대하듯 했다. 녀자직원들은 수한씨와 눈길조차 마주치기를 꺼려했고 가장 입심이 센 기사들은 그를 대놓고 무시했으며 전동차 기사들은 일의 결국이 어떻게 되는지 궁금하다는듯 비아냥거리는 눈빛으로 수한씨의 일거일동을 주시했다. 김씨만이 그런 짓거리에 관심이 없다는 듯 늘 자기의 일만 수걱수걱했다. 사장은 퇴근할 무렵이면 슬쩍 들려서 대충 상황을 파악하려 했다. 그는 직원들의 얼굴빛이 모두 수한씨를 향해 그리 좋지 않은 것을 보고 눈살을 찌프리며 돌아갔다. 사장의 부인은 안스럽게도 몇번이나 수한씨를 불러 상담하려고 했다. “수한씨, 전에 직장에서는 어떻게 일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뭐 우리 가게가 그리 큰 가게는 아닐지라도 엄연히 직장이고 직장내 동료들 사이 관계라는 것이 있는데… 일단 일솜씨 얘기는 하지 않을게요, 근데 동료들 사이 관계는 잘됐으면 좋겠어요. 도무지 열명 뿐이 안되는 직원들이고 내가 변명하는 게 아니라 우리 직원들 정말 그 정도면 착한 축이거든요. 매일매일 얼굴 맞대고 일을 해야 하는데 서로 껄끄러우면 어떻게 일을 잘할 수가 있겠어요, 그찮아요?” 수한씨도 녀자에게 대꾸했다. “글쎄요, 동료들하고 잘 해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누군들 하지 않겠어요? 근데 그 인간들이 내게 그렇게들 대하니까 잘될 수가 없지요.” 녀자는 수한씨의 말을 듣지 않고 있었다. 녀자의 인식상으로는 수한씨가 ‘우리 가게 직원들’을 그녀만큼 알지 못했기 때문이였다. 수한씨가 얘기한 부분은 직원들의 총체적인 성품에 있어서 아주 작은, 별 큰 문제거리가 되지 않는 것에 속하는 것이였다. 한편 녀자가 봤을 때 직원들의 문제보다는 혼자 ‘따’를 당하고 있는 수한씨의 문제가 당연히 더 큰 것이였다. (서렬이 가장 낮은 수한씨에게서 다른 직원들보다 더 열심히 더 주동적으로 일을 찾아하려는 자세가 보이지 않았으니까.) 녀자는 랭정한 얼굴로 수한씨에게 말했다. “무슨 얘긴지 알겠는데, 수한씨, 사람은 누구나 완벽하지는 않잖아요, 우리 직원들 역시 모든 부분에 있어 다 훌륭하다는건 아니에요, 뭐 수한씨 느끼기에 좋지 않았던 부분이 있을 수도 있었겠죠. 그래도 전체적으로 보면, 례를 들어 백점 만점짜리 점수라도 매긴다면 어느 정도는 줄 수 있지 않을까요? 어떤가요? 왕군도 그렇고 정씨도 그렇고…” 그 말에 수한씨는 아무런 계산도 없이 느끼는 그대로 솔직히 말해버렸다. “직원들이 그래도 괜찮은 축이라고요? 제가 느끼기엔 아닌데요, 그 사람들 안 좋아요, 정씨는 특히 나빠요. 점수요? 급제를 주기도 아까워요, 김씨이라면 모를까.” 녀자는 픽 어이없는 비웃음 같은 것을 웃었다. “그런가요? 그럼 수한씨는 어떤 것 같나요? 본인은 몇점이나 될 것 같나요?” 그래서 수한씨가 답했다. “저요? 저는 그래도 80점은 될 것 같은데요.” 그 대답을 듣고 녀자는 곧 얼굴이 굳어졌다. 이 사람은 도저히 자신을 모르는, 반성이라고는 할 줄 모르는 완악한 인간이로구나. 하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였다. 이제 이 가게에서 출근하는 것은 더이상 어려울 것이라고 수한씨는 예상했다. 녀자의 얼굴빛에서 수한씨는 그 녀자가 받아 감당할 만한 한계가 어디까지인지를 알아버렸다. 녀자는 급제선에서 오르락 내리락하고 있는 인간이였다. 수한씨는 그런 인간들과 그보다 못한 인간들을 수도 없이 보아왔었다. 인간들의 교만과 위선, 잔혹함과 추함에 대해서 수한씨는 구역질나게 보아온 사람이였다. 그들은 수한씨를 바보스럽게, 멍청하게, 무능력한 약골에다 자기 한몸도 먹여살리기 힘든 한심한 인간으로 인식할 것이였지만 수한씨 역시 그런 자신을 대하는 저들의 태도에서 저들 내면의 추함을 너무 뼈저리게 느끼며 살았다. 저들은 수한씨가 그런 것도 느끼지 못하는 인간인 줄 착각하고 마음 내키는 대로 함부로 대했지만 인간들의 내면의 실체에 대해서는 저들보다 수한씨가 오히려 더 분명하고 정확하게 느낄 수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상담을 끝내면서 녀자가 그랬다. “그러게요, 사람은 항상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후하고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박하죠. 그런게 아닐까요? 수한씨…” 녀자는 수한씨에게 권해주고 싶은 말이 아직도 많은 표정이였다. 그러나 다행히 그 정도에서 멈춰주었다. 열이틀의 출근이였다. 사장은 혀를 쯧쯧 차며 그동안의 수당을 계산해주라고 지시했다. 수한씨는 녀자에게서 돈을 받고 나왔다. 또 하나의 감옥 속에서 탈출한 듯한 느낌이였다. 아주 맑게 개인 하늘이였다. 뻐스에도 사람이 많지 않아(출퇴근 시간이 아니였으니까) 모처럼 의자에 앉아왔다. 그런 기분이라면 종일 뻐스를 타고 달려도 좋을 것 같았다. 실제로 수한씨는 내친 김에 종점까지 타고 갔다. 거기서 내려 먹거리를 사서 대충 끼니를 에운 뒤 아홉 정거장을 걸어서 세방으로 돌아왔다. 길거리에서 만난 녀자들은 여름 해볕을 피하기 위해 빨갛고 하얀 꽃양산들을 들고 걸어갔다. 몸이 좀 난 아줌마도 아직 늘씬하고 가녀린 아가씨들도 모두 보기 좋았다. 그날 수한씨는 A시의 녀자들을 원없이 많이 구경했다. 세방으로 돌아올 때에는 해가 열기를 잃고 기울어가는 중이였다. 수한씨는 끌신을 탈탈 끌며 낡은 아빠트를 향해 걸어왔다. 두어시간을 내처 걸었더니 다리가 후들거리고 허리도 아파왔다. 이제는 그저 빨리 방으로 돌아가 침대 우에 편히 누워 한식경 쯤 쉬고 싶은 생각 뿐이였다. 파리떼가 윙윙 날아오르는 쓰레기 지대를 지났다. 열려있는 세집의 창문이 보였고 그 아래 쪽걸상을 놓고 주인 할망구가 한산히 앉아있는 모습도 보였다. 친구 할머니도 같이 쪽걸상을 놓고 앉아있었다. 오늘은 또 무슨 소재의 코미디일가? 그러고 보니 그녀들 곁에 한 사람이 더 서있는 것이 보였다. 지나가던 행인이 잠간 멈췄겠지 싶었지만 그게 아니였다. 두 손을 바지주머니 속에 지르고 서 있는 그 사람은 벌써 오래동안 그녀들 곁에 서있었던 것 같은 분위기였다. 머리를 살짝 끄덕여 두 늙은 녀자에게 인사를 건네며 수한씨는 그 사람 곁을 지나갔다. 얼굴이 넙적하고 오관이 큼직하게 생기고 피부에 윤기가 도는, 수한씨 나이 또래의 체격이 아주 건장한 젊은 사내였다. 친구 할머니네 아들이구나, 추측하는 순간 수한씨는 사내와 본의 아니게 눈이 마주쳤다. 아주 투명하고 고집스럽고 멍한, 이 세상의 것들 하고는 별 관계를 가지지 않는 눈빛이였다. 갑자기 수한씨는 마음이 아파왔다. “여유는 개뿔”이라던 할망구의 한탄이 리해되려고 했다. 너무 멀쩡한 육체를 가지고 있었지만 사내는 분명 정신이상자였다. 친구 할머니가 수한씨에게 예나 다름없는 그 친절한 미소를 보이고 있었다.   육체는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입술에 닿은 것을 빠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던 육체는 악착같이 인간의 기능들을 갖춰나갔다. 많은 부분은 가르침을 받아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였다. 육체는 최선을 다해 젖을 빨았고 양분을 섭취하여 자신의 기관들을 공급하는 한편 발전시켰으며 수천수만번의 실험을 감행하여 그 기관들의 사용법을 익혔다. 육체는 잘 때에도 쉬지 않고 뇌속으로 배운 것을 거듭 련습하며 기억에 새겨두려 했다. 그의 학습욕구와 학습능력은 실로 소름 끼칠 정도였다. 자신의 팔다리를 조종할 수 없어 목적 없이 허우적거릴 줄 밖에 모르던 육체는 얼마 지나지 않아 엎치는데 성공했다. 그다음에는 머리를 들었고 혼자 곧게 앉아 버티다가 무릎과 손바닥을 리용해 기기 시작했으며 끝내는 스스로 서고 독립적으로 걸음마까지 탔다. 처음에는 울음으로만 단순한 의사를 표현했지만 점점 울음소리를 달리하여 더 많은 상황을 표현했다. 옹알이를 련습했고 특정 사물이나 사람을 지칭하는 음을 구분했으며 크게 소리를 지를 수도 있게 되였다. 육체의 목적은 다른 성인 개체들처럼 목소리를 리용하여 언어를 구사하는 것이였다. 처음엔 마마 빠빠… 그다음엔 한두 단어, 그러다가 토를 뺀 문장을 구사, 정말 쉬운 일이 아니였지만 육체는 끝내 해냈다. 직립보행 할 수 있다는 것은 육체에게 굉장한 혁명이였다. 누워만 있던 육체의 내장기관들이 직립하면서부터 위치가 새로이 편성되였고 시야가 몇배로 넓혀졌을 뿐만 아니라 훨씬 다양한 자극을 경험하면서 사고능력이 본격적으로 발달하게 되였다. 풍부하고 복합적인 자극들은 특히 뇌세포 뉴런과 시냅스간의 신경망 형성에 크게 기여를 했다. 뇌는 복잡하고 정교하며 비할 데 없이 아름다운 소우주로 발전해갔다. 뇌가 점점 발달됨에 따라 육체는 자아를 통해 주변을 인식하기보다 뇌를 통해 인식하려고 하는 경향을 보였다. 자아와 뇌의 그것은 완전히 서로 다른 방식이였다. 자아는 슬펐다. 자아는 계속하여 자신의 방식대로 육체와 교제를 지속하려 했지만 육체는 자아에게 집중하려고 하지 않았다. 육체는 3차원의 물질상태로 존재하는 만큼 그 립장이 자아와는 달랐다. 육체는 어떻게 하나 물질세상에서 살아남아야 했고 그렇게 되자면 생존의 기능들과 법칙을 처음부터 익혀야만 했다. 언젠가 모체랑 까꿍놀이를 하다가 육체는 문뜩 깨달았다. 까꿍― 까꿍― 모체는 손바닥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리웠다 펼쳐보이면서 그 행위를 몇번이나 반복했다. 손등이 보이다가 모체의 얼굴이 보였고, 그러다가 다시 손등, 그 다음 순간에는 모체의 얼굴… 얼마나 반복했을가. 갑자기 육체는 그 행위의 의미를 깨달았다. 아, 그렇구나, 손등이 모체의 얼굴로 바뀌였다가 다시 손등으로 변하는 게 아니였구나. 얼굴은 그저 손등 뒤에 있었던 거였구나. 그것에 가리워서 보이지 않았을 뿐이였구나. 세상에! 보이지 않더라도 없어지지 않는 게 있었다니, 이렇게 놀라울 수가! 육체는 까르르 웃었다. 세상이란 참 묘한 곳이라고 생각하면서. 모체도 기쁘게 웃었다. 그치, 우리 아기. 재밌지, 재밌지롱, 까꿍―! 자아는 씁쓸했다. 시각신경이니 후두엽이니 그런 것으로 ‘보려고’ 하니까 그렇지. 어떤 것이 그 자리에 있는지, 어떤 것이 이미 사라진 건지, 혹은 곧 사라질 건지, 또는 더 오래 존재할 것인지, 그런 것에 대해서라면 자아의 직관이 신경세포들의 틀에 박힌 보고서보다 훨씬 정확한데. 겨우 그 정도 가지고 육체의 기능을 믿으려 하다니…  또 언젠가는 모체에게 안겨 거울이라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그전에도 수없이 보았겠지만 그때에는 육체의 기관들이 그만큼 발달되지 않아 어떤 자극을 느낄 수 없었었다. 그날은 달랐다. 육체는 거울 속의 조그만 개체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 정도로 작은 개체를 처음 보는 것은 아니였다. 육체는 그런 작은 개체들을 많이 보았었고 그것들을 만져보기도 잡아보기도, 혀를 내밀어 맛을 보기도 했었다. 말랑말랑하고 부드러웠으며 모유와 땀이 섞인 냄새가 났다. 그런데 그날의 작은 개체는 달랐다. 그것은 육체가 안겨있는 모체랑 똑같은 성인 개체에게 안겨 있었다. 육체는 모체와 거울 속의 성인 개체를 번갈아보았다. 육체에게 입혀진 옷하고 거울 속의 작은 개체가 입고 있는 옷도 비교해보았다. 너무 비슷해서 분간이 도무지 가지 않았다. 육체는 흥흥 소리를 내며 거울을 손가락질했다. 모체는 즐겁게 웃음을 터뜨리며 육체를 안고 가까이 갔다. 아니, 작은 개체가 이렇게 딴딴하고 차겁다니. 아닌데, 이전에 만져본 작은 개체들은 이렇지 않았는데. 거울 속의 성인 개체도 마찬가지였다. 잡히지 않았다. 온기를 느낄 수 없었다. 그런데도 그것들은 그 안에서 자꾸 움직였다. 살아있는 것처럼. 혹시, 해서 거울 뒤로 가보았지만 숨박꼭질하던 때와 달리 그곳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모체는 계속하여 말해 주었다. 이게 거울이야, 거울, 거― 울. 이 안에 이 아이가 누굴가? 누굴가요? 그렇지, 바로 우리 아기지― 우리 아기―, 이건 엄마, 이건 우리 아기…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인지… 그러다가 알게 되였다. 아, 저게 나, 저게 나라고? 저게? 육체는 태여나 처음으로 자신의 몰골이 어떤지 알게 되였다. 멋대로 자란 가는 머리카락, 동그랗고 살찐 볼에 박힌 눈, 코, 입과 짧은 목… 저게 나란 말이지? 저렇게 생긴 개체가? 그럼, 그전에 보았던 개체들은 모두 내가 아니란 말이겠군. 그렇지, 그럼 이 모체도 내가 아니고, 저 삐뚜름히 앉아 티비 보기 좋아하는 개체도 내가 아니였다는 말이란 말이지? 그 날 이후 육체는 자아와 더욱 교제를 멀리 했다. 배속에서는 거의 분리할 수 없을 만큼 하나로 있다가 세상에 나와서는 꾸준히 자신만의 방식을 발전시키더니 그날 시각적으로 물리적인 자신의 육체를 알아본 이후에는 그 표상을 자신의 유일한 자아라고 인정하려 했다. 그러지 마, 니가 어떤 곳에서 어떻게 살든 우리는 여전히 하나야. 너의 진정한 자아는 나라구 하고 자아가 호소했다. 그러나 육체는 침울하게 대답했다. 글쎄.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건 내 몫이야. 그래, 내 몫이라구. 너의 방식대로 인식하는건 이 세상에서 도움이 별로 안돼. 난 여태 계속 실험해왔어. 너하고 공존하는 방식도 계속 탐구해왔어. 근데 점점 느껴. 거의 불가능하다는 걸. 주위를 봐. 어느 개체가 그렇게 살든? 성인 개체일수록, 이 세상에서 강한 개체일수록 그 인간들이 어디 자아랑 친하게 지내는 걸 봤니? 미안하지만 나도 그렇게 하고 싶어. 나는 일단 살아야 하고, 더 잘 살아야 하니까. 그게 아닌데… 그렇게 살면 더 강해질듯이 보이지만 그래도 그게 아닌데… 자아는 갖은 방법으로 감정과 의식을 동원하여 메시지를 전했다. 육체의 기관들이 성인 개체와 닮아갈수록 자아의 힘은 쇠약해져 메시지는 육체에게 힘겹게 도달했다. 육체는 자아의 메시지를 무시했다. 그러다가 어느 날 그는 끝내 중대한 결단을 하나 내렸다. 자아의 메시지를 가장 먼저, 직감적으로 접수할 수 있는 자아의 문― 대천문을 닫아버린 것이였다. 자아는 이제 그 문 바깥에 내쳐지게 되였다. 그제날 스스럼없이 그 문을 통해 육체를 드나들 수 있었던 시절은 지나가고 말았다. 자아는 안깐힘을 다해 문을 두드렸다. 문 열어, 나 들어가게 해줘. 나는 너와 하나야. 너 없이 나는 내가 아니고, 나 없이 너도 너가 아니야. 우린 같이 있어야 돼. 같이 먹고 같이 보고, 같이 생각해서 결정해야 한다구. 육체는 문을 열지 않았다. 한번 닫힌 문을 열 수 있는 방법도 육체에겐 없었다. 어떤 알 수 없는 무한한 존재의 숨결이 닿았던 곳, 령의 세상과 물질세상이 이어진 곳. 자아가 태여나고 육체가 시작되고 그들이 둘이면서 하나처럼 만나서 무람없이 얘기하던 곳, 그래서 속칭으로 숨구멍이라고도 불리우던 곳, 그곳 대천문은 이제 팽창된 전두엽, 두정엽, 측두엽을 감싸기 위해 자라난 두개골 조각들에 의해 가뭇없이 메워져 버렸다. 육체는 세상에 대해 적극적으로 반응하기 시작했다. 자아와 령의 세상 따위는 잊어버리고 물질계에 대한 정보와 기억으로만 머리속을 채워나갔다. 육체는 다른 개체들을 부지런히 흉내 내였고 놀라운 속도로 그들을 따라갔으며 종내는 모체와 다른 성인 개체들의 독려하에 자신과 비슷한 크기의 개체들과 함께 기차길 만드는 놀이에 성공했다. 어머! 대단하다! 우리 애들 이제 협동심이 뭔지를 알게 되였어요― 하고 성인 개체들이 하하 호호 웃어댔다. 그녀들의 웃음을 보니 육체도 뿌듯했다. 자아는 육체의 마음을 통해 육체에게 말했다. 협동심이라고 했니? 아닌데… 내가 아는 진정한 협동심하고는 뭔가 차이가 나는데… 자아는 시공간을 거스르며 보았던 것을 육체에게 전했다. 아주 오래전에도 인간들은 그렇게 말했었지.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자… 물론 육체는 그 환상을 거절했다. 다른 모든 육체들과 마찬가지로.   “이보세요, 잔 좀 쭉쭉 냅시다, 난 이런 자리에 와서 빼는 게 (얌체짓) 정말 싫어요… 그러지 말자, 우리. 어?…” 하얀 티셔츠에 청바지를 입은 남자가 말했다. 그 상에는 남자 혼자서 네명의 녀자를 상대하고 있었다. 말투를 보아하니 서로 동창인 것 같았다. 남자는 벌써 불그레 취기가 오르고 있었고 녀자들은 맨숭맨숭한 얼굴로 서로의 눈치만 보고 있었다. “얘들아, 어제 니들 못 봐서 그렇지, 영철이 걔, 그치, 내 친구, 우리 정말 친했잖아… 걔 얼마나 밉살스럽게 놀던지. 다들 모른 척 들어주는데, 내가 한마디 했다. 그래, 한마디가 아니라 좀 다퉜지. 난 그런 사람 정말 싫어요. 허풍을 떨겠으면 장사치들하고 떨든가, 동창회에 와서 친구들하고 떨건 뭐냐? 안 그래?” 말끝에 남자는 또 술 한잔을 권하면서 먼저 쭉 들이켰다. 녀자들 네 사람 다 입에 대는 척하다가 그만 내려놓는 것이였다. 남자는 녀자들의 무성의한 표정을 보았는지 말았는지 계속하여 의분에 차서 떠들어댔다. “참 돈이 문제인 것 같더라. 돈을 좇아 살다 보니 사람이 변하는거 아니겠냐. 사회가 그러니 개인이 얼마나 청고하게 살 수 있겠냐마는 그래도 영철이 그 녀석은 너무하더라. 그렇게 사는 게 부끄럽지도 않고 마지못해 하는 짓도 아니고 그게 뭐 대단하고 자랑스러워 보이나 봐요. 나는 그 태도가 싫었어. 인간이 최소한의 반성도 없이 살아간다는 건 이미 인간성을 잃어버렸다는 거 아닌가?…” 녀자들은 이미 듣고 있지 않았다. 핸드폰으로 열심히 채팅을 하거나 둘이서 머리를 맞대고 소곤소곤 다른 얘기를 하고 있었다. 그중 단발머리를 한 녀자가 듣다 못해 남자를 말렸다. “그래, 영철이 걔가 좀 그런 면이 있지. 그런 사람은 어디 가나 다 있잖아? 그니까 그저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면 되지, 넌 그걸 꼭 꼬집어 말해야 시원하니?” 량심이란 것이 가장 많이 남아있는 녀자였다. 정곡을 찔린 남자는 피씩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하하, 그렇지. 니가 정직하게 말해주는구나. 난 이렇게 실말을 해주는 사람이 좋아요. 그렇지 않은 사람들 앞이라면 나는 한낱 우스운 인간 밖에 되지를 않거든…” 티셔츠에 청바지를 입었어도, 동료들에게 비아냥을 받을 만큼 어수룩하더라도 그 남자는 진정한 엘리트였다. 수한씨는 그것을 느꼈다. “그래, 직장은 아직이라고?” 딱히 친하다고 할 수 없는 수한씨의 동창 S가 무심하게 물었다. S는 지금 수한씨를 불러낸 것을, 술기분에 동창모임 위챗그룹에서 수한씨와 말을 걸었던 것을 후회하고 있었다. “뭐? 김수한? 뭐냐, 항상 뒤자리 구석 쪽에 앉았던 그 수한이, 맞니?” 하고 S가 수한씨에게 문안했었다. S는 수한씨에게 “야, 이게 몇년 만이야? 20년 다 돼지 않았나? 너 이 자식 어디 숨어서 여태 채팅방에 올라오지도 않았는가?” 감탄하면서 지금은 어디냐고 물었었다. A시라는 말을 듣고 S는 제 흥에 겨워 “뭐? A시? 나도 여기 있는데… 그럼 자식, 우리 한번 만나 술 한잔 해야겠네.”라고 했다. S는 D와 C도 같이 데리고 나왔다. 그들은 A시에서 십여년을 살았고 이제는 웬만큼 자리를 잡은 모양이였다. S는 아우디를, D는 쉐보레를, 그리고 C는 제다를 운전하고 나왔다. 그들은 수한씨 말고 다른 사람 둘을 더 불렀다. 그중 한 사람은 모 은행의 부행장이라고 했다. 그들이 만든 자리는 수한씨를 위한 것이 아니였다. 부행장이라는 작자는 특히 특산품 무역 사업을 하는 S에게 중요한 사람이였다. S와 다른 친구들은 비굴할 정도로 그 대머리 작자에게 굽신거렸다. 학교때는 수한씨나 다름없이 성적도 형편없고 발언도 못하더니 지금은 언변이 청산류수였다. 눈동자는 민활하게 주위 상황과 상대의 얼굴빛을 감찰하고 있었고 술잔을 든 손은 언제든지 대머리 작자를 위해 봉사할 수 있도록 각성되여 있었다. D와 C도 질세라 술을 권하고 마시고 했지만 S만큼 로련하고 강력하지는 못했다. 수한씨는 투명한 광천수를 한잔 부어 앞에 놓고 그들의 수작을 멀거니 구경했다. 시간이 갈수록 하품이 나왔다. 그러다가 옆상 남자의 말을 엿듣게 된 것이였다. 취기가 오름에도 그 남자는 특유의 이상하게 투명한 눈빛을 잃지 않았다. 남자는 그것을 알고 있을가? 자신이 눈빛을 통해 주변에 방출하는 메시지가 말로 하는 것보다 더 많다는 것을. 녀자들은 이제 남자의 거창한 웅변에 기가 질렸다. 그녀들은 몇번이나 시간을 확인했다. 남자는 여전히 흥분에 떨며 스스로 잔을 채워 혼자 마시다가 갑자기 말했다. “근데 너희들 얼굴이 그게 뭐니? 무슨 일이야? 넷이 꼭같이 뭐에 씌운 것처럼 시커매졌잖아.” 녀자들은 서로 얼굴을 돌아보았다. 아닌데, 그대로인데, 어디가 시커멓다고 하는 거지? 그러다가 한 녀자가 과감히 말해버렸다. “미안한데, 나 먼저 일어나야겠다. 일이 좀 있거든. 너 A시에 이틀 더 있는다면서? 오늘만 날인가, 래일이나 모레 다시 보자.” 다른 녀자들도 그 절호의 기회를 놓칠세라 우르르 함께 일어났다. 저마다 각자의 가방을 단단히 쥔 채로였다. 남자는 웃었다. “니들은 뭐가 그리 바쁘냐? 우리 지금 20년 만에 만난 거잖어. 오늘만큼은 이런저런 생각하지 말고 순수하게 옛날 일 떠올리면서 그저 무담없이 얘기들 나누면 좀 좋니?” 남자는 어느 녀자도 그를 위해 남아주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녀자들의 반응이 별로 이상하지도 않다는 표정이였다. 아마도 그는 그러루한 상황들을 많이 겪어왔을 것이였다. 결국 그들은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한씨는 녀자들 속에 묻혀 혼자 비틀거리며 걷는 남자의 뒤모습을 한참 구경했다. 저 남자는 몇점이나 줄 수 있을가? 수한씨는 S에게 가만히 귀띔을 하고 그만 일어났다. 그 자리에 앉아있을 수록 더 바보가 될 뿐이였다. 서늘한 밤공기를 마시며 수한씨는 타박타박 걸었다. 겨우 서너개의 별이 보였다. 뻐스는 이미 끊겼다. 힘에 부치기전까지는 걸어보고 싶었다. 직장에서는 짤렸고 아직 새 직장을 찾을 마음도 없었다. A시에서 만난 사람들이 별로라서 이곳에 계속 있을지도 확실하지 않았다. 직장이 좀 온건해지면 집에 련락하리라고 마음을 먹었었는데, 련락은 또다시 늦춰질 수 밖에 없었다. 그래도 뭐, 이젠 어느 정도 적응이 되였겠지? 나는 내놓은 자식이니까. 걸으면서 수한씨는 자신이 태여나서 자란 작은 시골동네를, 동네를 뛰여다니며 놀던 자잘한 추억들을 회상했다. 무던히도 애를 태웠지, 나 때문에 울 엄마는… 하고 수한씨는 잠간 어머니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러다가 급히 머리를 털었다. 아니야, 이런 건 다 쓸데없어. 그저 내가 잘살아야 좋아하시는데… 도시를 가로지르는 이통하의 다리를 건너면서 수한씨는 강변바람을 맞았다. 고흐가 본 밤하늘이 이랬을가. 쓸쓸하고 아름다웠다. 누군가 별처럼 눈을 깜빡이며 수한씨를 내내 지켜보는 것 같았다. 누구지? 아버지의 혼령인가? 신인가? 아니면 내 마음인가? 그 이상 더 알 수는 없었다. 주머니 속의 지페를 확인해보고 수한씨는 택시를 잡았다. 할망구네 아빠트는 가로등도 없이 까맸다. 수한씨는 건너편 좀 큰 길목에서 내려 걸어 들어왔다. 할망구와 아이와 두 세입자도 모두 잠이 들어있었다. 그들에게 방해가 될가 봐 수한씨는 치솔만 살짝 하고 방에 들어가 누웠다. 또 하루가 잘도 지나갔다.   그런 눈으로 나를 보지 말아요. 안스럽다거나 동정을 해야 한다거나 그런 생각도 하지 말아요. 당신이 어떤 생각을 하면서 나를, 이 세상을 바라보는지, 그게 내 눈에 다 보이니까요. 그래요, 어쩌면 당신의 눈에는 내가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네요. 당신은 항상 눈으로 나를, 이 세상을 보려고 하니까. 그 방법을 신뢰하니까. 그런 방식으로 보면 당신 눈에 비친 나는 참 불쌍하거나 형편없는 사람이겠네요. 나는 당신처럼 세상의 리치에 밝지 못하고, 세상의 유희법칙에 능숙하지 못하고, 세상을 잘 살아가게 하는 기술에 대해 아는 게 정말 적고… 그래서 세상의 순위 리스트에서는 하위중의 하위에 속했으니까. 그래요, 그런 면에서 나는 참 한심한 인간이죠. 이 세상에서 아웃되여도 조금도 안타깝거나 이상하지 않은 사람이죠. 그런데도 무슨 미련이 있는지, 아니면 너무 겁쟁이여서 그런지 계속 이 세상에 빌붙어 살아가고 있구요. 이 점이 더 웃기긴 하다만 그래도 될수록이면 순리대로 살아보려구요. 이런 것도 일종의 겸손이라 하더군요. 자신의 하찮음을 인정하고, 나팔소리가 울릴 때까지 노력해도 훌륭해지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그렇기 때문에 다른 이들의 존중을 바랄 수 없다는 것을 이미 수긍한 상태에서 계속 살아간다는 것 말이예요.   그런데 한가지는 말해주고 싶네요. 나는 당신이 보고 있는 세상외의 것을 볼수 있다고. 당신의 눈으로는 절대 볼 수 없는 것들이 내 눈에는 보인다고. 물론 그렇다고 해서 꼭 더 나아지는 건 아니지만 말이예요. 당신들이 흔히 쓰는 그 기술을 발전시키지 않은 반면, 나에게는 다른 종류의 기술이 있다는 것 정도만 알려주려구요. 이 종류의 기술을 쓰는 사람은 많지 않아요. 이 세상에서 이런 종류의 기술로 인식하고 살아간다는 것은 참 쉽지 않기 때문이죠. 이 세상의 법칙은 이런 종류의 기술의 힘과 대치될 때가 너무 많고 그래서 이런 기술을 발전시키기에 매우 좋지 않은 환경을 제공하니까 말이죠. 많은 사람들이 처음에는 시도를 하다가 차차 방향을 전환하고 맙니다.(아마 당신도 그중의 한 사람일 걸요) 꼭 이런 기술을 보존해야 할 리유도, 그 결과에 대해서도 사실 아무도 알 수 없는 것이구요. 요즘에는 어린아이들마저 더이상 버텨볼 생각을 않고 일찌감치 포기해버리더군요. 그 대가로 전세대보다 더 빨리 세상을 알아갈 수 있지만요. 내가 당신보다 이 기술에 대해 더 알고 있다고 해서 으시대는 건 아닙니다. 이렇게 되고 싶어서 여기까지 온 게 아니라 당신네들처럼 하지 못하는 바람에 본의 아니게 알게 된 것일 뿐이니까요. 마치 구뎅이에 빠진 이가 우연찮게 그 안의 보화를 발견한 것처럼 말이죠. 아주 드물지만 그 보화를 가지고 다시 구뎅이 바깥으로 나간 사람들도 있답니다. 내가 알기로 그런 사람들은 당신네들이나 나 같은 족속들에게나 모두 존중을 받고 있지요. 그럼요, 그런 사람들은 존중을 받을 만합니다. 나는 그렇지 못해요. 나는 이미 수없이 많은 당신네들 같은 인간들에게서 무시와 비웃음과 형편없다는 평판을 받았답니다. 이후로도 아마 수없이 많은 사람들한테서 정죄를 받으며 살아갈 거구요. 나는 이 모든 것을 알고 있지만 그래도 어쩔 수가 없어요. 나는 대체 왜 이렇게 살아가는 걸가요? 누군가 내게 우리 인간들은 모두 기억상실증에 걸렸다고 그러데요. 시초에 원인이 무엇이였던지, 어떻게 시작된 일인지 아는 이가 하나도 없으니까. 어떤 이는 우리가 빛으로부터 왔다 그러고, 어떤 이는 우리가 흑암으로부터 왔다 그러더군요. 무엇이 되였든 간에 우리가 빛이나 흑암에서 파생된 것이지 그 자체가 아닌 것만은 분명합니다. 그래요, 나는 눈이 아니라 마음으로 세상을, 당신을 봅니다.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많은 경우 나는 마음이 주는 메시지를 받습니다. 때로 나는 시각을 리용하지만 마음을 신뢰할 때가 더 많습니다. 나는 누가 내 마음을 감동시키는지, 어떻게 그런 메시지들을 내 마음속에 넣어주는지 모릅니다. 내 마음 뒤에는 어떤 세상이, 내가 알지도 못하고 볼 수도 없는 세상이 존재하는지도 모르구요. 어쨌든 나는 그런 족속이에요. 당신이 아주 습관적으로, 편하게 당신의 기술을 쓰며 살아가는 것처럼 나도 아주 습관적으로, 편하게 나의 기술을 쓰면서 살아가지요. 내게 보이는 당신을 묘사해볼가요?… 아니, 싫은가요?… 한가지만은 분명히 알려드리지요. 내게 보이는 당신은, 이 세상은, 당신이 생각하고 있는 것하고 많이 다르답니다. 이 세상이 얼마나 소란스럽고 혼란스러우며 얼마나 창피하고 지저분한지, 어느 정도로 뻔뻔스럽고 대책없고 잔인하고 부패한지 당신은 상상도 못할 겁니다. 아름다운 것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절대 당신이 생각하는 만큼 많지 않습니다. 때로 그것은 순식간에 피여나다가 눈 깜짝할 사이에 추한 것으로 변해버리기도 하지요, 또한 어떤 아름다움은 가장 약한 모습으로 악의 틈사리에 끼워 불가사의하게 공존하기도 하구요. 진정한 아름다움은 이 세상에서보다 보이지 않는 마음 저편의 세상에서 더욱 인정받는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나는 그런 것을 만나면 슬프답니다. 이런 것들이 바로 당신들이 즐거워할 때 내가 웃지 않고 당신들이 비통해할 때 내가 슬퍼하지 않는 리유랍니다. 이렇게 되려고 마음 먹은 적은 한번도 없습니다만 나는 지금 이렇게 살아가는 중입니다. 대체 누가 내게 이런 마음을 주고 이렇게 생각하게 하는지 알 수도 없지만요…   다른 직장을 찾아볼 건지, 아니면 도시를 옮길 건지 수한씨는 고민 중이였다. 수한씨를 수한씨대로 받아줄 도시가 이 세상 어느 곳에 있을가, 그것은 알 수 없는 일이였다. 다음 세방료금을 낼 때까지 수한씨는 일단 할망구네 집에 머물러 있기로 했다. 다른 세방을 옮길 수 있는 처지도 되지 않았으니까. 매일 아침 늦잠에서 깨여나 수한씨는 죽집 혹은 국수집에 가서 조반 겸 점심을 먹었다. 하루종일 침대에 누워 인터넷을 뒤적거리는 날도 있었고 조반을 먹은 그 길로 뻐스를 타고 나가 저녁 무렵까지 시내를 돌다가 돌아오는 날도 있었다. 꿈, 행복한 가정, 안정된 직장, 웬만한 수입, 자기 명하의 작은 집, 자신을 닮은 아이 한명… 그런 것을 수한씨는 바라지 않았다. 수중의 돈을 다 쓰기전에 다시 일을 시작하여 다른 이들에게 너무 부담이 되지 않기를, 될수록이면 오래오래 아프지 않기를, 좀 더 늙고 아픈 시절이 오면 갑자기 이 모든 것이 끝나버리기를, 주변 사람들에게 감당하기 어려운 민페는 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였다. 가끔 수한씨는 친구 할머니네 아들을 아빠트 아래 풀밭에서 만나군 했다. 그 친구는 좀처럼 입을 열어 말하는 법이 없었다. 그는 먹기도 하고 자기도 하고 잘 걸어다니기도 했다. 그러나 결코 웃을줄은 몰랐다. 아빠트단지의 사람들은 모두 그 친구를 꺼려했지만 주인집 할망구네 손녀 아이는 무서워하지 않았다. 그 친구는 언제나 바지주머니에 두 손을 지르고 서서 아이가 장난스레 던지는 공을 맞았다. 수한씨는 때로 다른 바람을 마시기 위해 세방의 창문을 열었다가 자신의 마음처럼 붉게 타오르는 석양 아래 검은 아빠트 건물을 배경으로 우두커니 서있는 그들의 뒤모습을 한참 바라보았다.  
11    [단편소설] 불타는 수용소-금희 댓글:  조회:390  추천:0  2019-07-17
 금희 불타는 수용소       이상하게 더운 여름이였다. 쌀쌀한 초봄이 되돌아오듯 기온이 뚝 떨어졌다가 문뜩 예고도 없이 콜타르를 녹일 정도의 고온 날씨가 덮쳐오는 일이 반복되면서 어느 날 갑자기 여름이 시작되였다. 하얀 재빛의 태양은 마지막 열기를 내뿜는 상상불가 고온의 숯불덩어리 같았다. 철선공주가 머물던 화염산의 해볕이 이렇듯 지글거렸을가. 사람들은 모자나 양산, 그것마저 가지지 않았을 때엔 손에 들고 있던 전단지 혹은 가방 따위로 이마를 덮고서 징그럽게 쏟아지는 불볕의 열기를 차단해보고자 했다. 혹간 바람이 불어오기도 했지만 그것은 습기가 조금도 묻혀있지 않는 건조한 열풍이였다. 그것을 들이킬 때마다 페가 바싹바싹 타들어가다가 마침내 내장 전체가 말라비틀어질 것 같은 느낌이 들었지만 별다른 뾰족한 수는 없었다. 에어컨을 빵빵하니 틀어놓고 고객들의 지갑을 노리는 대형백화점이나 마트, 그리고 사시장철 어두운 얼굴로 우중충 서있는 정부청사 같은 건물을 제외하고는 거의 어느 곳이나 속절없는 무더위가 사람들을 숨막히게 포위했다. 매년 이맘때면 이 고장에서 흔히 겪는 더위였지만 올해는 어딘가 느낌이 달랐다. 아무리 더워도 자정을 넘기면서부터 아침까지는 사그라있던 열기였는데 이번에는 그렇지 않았다. 온기 없는 물로 샤와를 하고 얼음을 띄운 랭수를 마시고, 대나무자리를 깐 침대에 누워도 더위는 금세 다시 기승을 부렸다. 새벽녘이면 오히려 오슬오슬 한기 때문에 침대구석으로 차던졌던 홑이불을 다시 끄당겨 덮군 하던 여름이 아니던가.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가. 아남은 흐리멍텅한 머리로 애써 그가 기억하고 있던 여름을 떠올려보았다. 안해는 입을 반쯤 벌린 채 가쁜 숨을 몰아쉬며 잠속으로 곯아떨어져있었다. 활짝 열어놓은 창문으로는 한줄기의 바람도 날아들지 않았다. 무더위가 지속된 며칠간 밤잠마저 제대로 잘 수가 없어 아남은 배변을 시원히 보지 못한 아이처럼 본인이 능히 조절할 수 없는 불쾌감과 짜증에 휩싸였다. 머리속은 텁텁하고도 짙은 연기에 싸인 화산마냥 혼잡한 가운데 언제 터질지 모를 스트레스의 압력으로 꽉 차있었다. 얼마나 이 상황을 더 견뎌낼지 알 수 없었다. 안해는 끙 돌아누우며 맨다리를 아남의 배우에 천연덕스럽게 올려놓았다. 친정집에서도 잠버릇이 심했던 모양, 매일 밤 안해는 이불이며 베개를 혼자서 다 차지하고 나서도 성차지 않은지 꼭 다리를 아남의 배우에 올려놓고 자려고 했다. 가무잡잡한 피부는 어스름달빛에 가리워서 그닥 신경을 자극하지 않았다. 앞으로 툭 튀여나온 이몸과 생쥐처럼 판들거리는 작은 두 눈도 지금은 선명히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안해는 그런대로 보통의 녀자가 갖출 수 있을 만큼의 몸매는 가지고 있었다. 큰 만두처럼 불거져나온 가슴도 제법 컸고 삼각의 팬티 아래로 거반 드러나 있는 엉덩이도 둥그스름하니 굴곡이 있었다. 차라리 지금같이 흐릿한 조명 아래서라면 아남도 얼마간 적극적으로 욕정을 태워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안해는 항상 불을 켜고, 것도 있는 대로 환하게 켜놓고 그 일을 진행하기를 원했다. 그 거무튀튀하고 거칠거칠한 피부하며, 크고도 허연 입술, 도무지 귀염성스런 구석을 찾아볼 수 없는 한심스러운 오관의 조합을 마주보면서 일을 치러야 하는 것이 제 남편에게 얼마나 큰 고역인 줄 알지도 못하면서 말이다. 아남은 거의 매번마다 눈을 질끈 감거나 차라리 안해의 몸우에 누워서 목을 어긋맞고 베개만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베개우에서는 아남이 알고 있던 녀배우들의 얼굴이 쉬임없이 떠올랐다. 일을 마치고 나서 아남은 급급히 일어나 샤와를 했다. 끈적거리는 땀냄새도 싫었거니와 그 상태로 한동안 더 껴안기고 싶어하는 안해를 피하기 위해서였다. 아남은 사실 누가 봐도 혀를 내두를 정도의 멀끔한 미남자였다. 일곱살때 배속에 물이 들어차는 병(간암복수)으로 돌아가신 아남의 생모가 보기 드문 미인이였다. 그녀는 M구역의 공사병원에서 일하던 큰오빠의 연줄로 그 곳에 청소부로 취직했다. 진한 청색의 품너른 작업복을 입었지만 그녀는 항상 예뻤다. 피부는 분을 칠한듯 뽀얗고 알릴듯 말듯 머금은 홍조는 누가 봐도 귀여웠다. 눈섭은 그린듯 선이 고왔고 꿈꾸는 듯한 맑은 눈망울은 반짝반짝 빛이 났다. 게다가 패션이라는 개념마저 있다고 할 수 없는 시절, 학생복이면 학생복, 군복이면 군복, 작업복이면 또 작업복 대로 어떤 옷을 입든 간에 도무지 말살할 수 없는 경쾌한 맵시가 났다. 아남은 어머니가 남긴 여러장의 사진속에서 그 아름다운 모습을 수도 없이 확인했다. 아름다운 어머니는 사진속에만 있을 뿐 아남의 머리속에는 남아있지 않았다. 그가 기억하는 어머니란 부드러운 목소리와 숨막힐 듯한 따듯한 포옹, 귀가를 간지럽히던 기분 좋은 숨결과 볼에 짓눌려오던 말캉한 젖무덤 같은 것뿐이였다. 아남네랑 오래동안 이웃에 살아온 아빠트 사람들은 그를 만나기만 하면 혀를 찼다. “쯧쯧, 불쌍한 것! 어떻게 저 녀석은 저렇게 제 어미를 똑 빼다 닮았을꼬? ” 아남은 어느 정도 철이 들 때까지 그들이 왜 자신을 볼 때마다 슬픈 기색을 짓는지, 왜 도리머리를 흔들며 혀를 차는지 알지 못했다. 그날 보육원에서 돌아온 아남은 많은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진치고 있는 2층의 자기 집에 들어가지 못했다. 1층 계단을 올라가기도 전에 아남은 할머니에게 허리를 잡히고 말았다. “착하지, 우리 남이. 할미가 눈깔사탕 사줄게. 할미랑 같이 가자…” 그래서 아남은 사형선고를 받고 퇴원하여 불과 한달도 버티지 못하고 돌아간 어머니의 마지막 모습을 보지 못했다. 아남은 어머니가 죽었다는 것을 알고 난 다음에도 울지 않았다. “얘야, 이제 네 어머니는 하늘나라로 갔단다. 멀고도 먼곳이지. 거기는 너무너무 멀어서 한번 가면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곳이란다. 알겠지?” 어른들은 그 얘기를 해주면서 아남의 눈치를 살폈다. 아남은 그들이 모두 긴장된 얼굴로 자신을 주시해보고 있음을 느꼈다. 그들은 초조해하며 뭔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치 무슨 연극을 련습하듯, 자신들의 대사가 끝나고 나서 아남의 대사를 기다리는 것 같았다. 그러나 아남은 자신이 말해야 할 대사가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그게 뭘가? 뭐라고 해야 옳은가? 저들은 대체 무엇을 기다리고 있단 말인가? 결국 아남은 연극 따위를 포기하고 약간 김빠진, 아니, 거의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서서 집을 나갔다. 그 자리에 더 머물다가는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았기 때문이였다. 아남은 문밖을 나서기 바쁘게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등뒤에서 어른들이 나직이 한숨 짓는 소리, 혀를 차는 소리, 울먹울먹한 목소리로 뭔가 넉두리를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 이상한 여름의 공기가 바로 그때와 흡사하게 불쾌했다. 하지만 아남에게 있어서 사실 행복한 공기를 마시며 살아온 기억은 별로 없었다. 그는 자신의 인생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한번도 없었다. 그는 그냥 살아지는 대로 쭉 살아왔고 불행이 공격해올 때마다 고스란히 당해주었다. 사람의 인생라는 것이 워낙에 별다른 뾰족한 수가 없지 않지 않는가. 어쩌다가 그에게도 기쁘고 벅차고 감동 넘치는 날이 찾아오기도 했지만 그것은 그가 겪어온 수많은 외롭고 막막하고 두렵고 아팠던 날들에 비할 바가 못되였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런 힘든 나날 속에서도 아남은 한번도 그 유쾌하지 않는 생을 그만두겠다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더 아름답고 활기차고 행복한 생이 펼쳐질 기적 같은 것을 바란 적도, 그런 역전의 생을 위해 나름대로의 피타는 노력을 해본 적도 없었다. 보통의 사람들처럼 그는 사정이 허락하는 만큼 공부를 했고 학교를 나와서는 여기저기서 일을 했으며 혼기가 꽉 차자 주위의 불안한 시선을 의식하면서 먼 친척이 소개해준 대로 선을 보고 결혼을 했다. 어머니가 하던 병원 청소부의 일을 계속하게 된 것은 퇴직을 앞둔 큰외삼촌의 배려였다. 그 병원은 이제 거대한 몸집으로 자라난 도시에 비해 아주 작고 낡고 허름한 곳으로 되여버렸다. 몇년전부터 리모델링을 다시 한다는 풍문이 나돌았지만 하루에 얼마 되지 않는 환자들의 수를 보아해서는 오히려 직원들의 봉급을 걱정해야 할 소문이였다. 아남은 매일 그 어두침침하고 생기 없는 곳에서 다른 청소부 두명과 함께 일을 하고 있었다. 처가에서 마련해준 한칸짜리 낡은 아빠트에 신혼방을 차린 것은 불과 3~4개월전의 일이였다.   침대에서 베개를 끌어안고 늑장을 부리는 안해 대신 아남이 아침식사를 준비했다. 그녀가 주방에 들어서기를 기다리다가는 둘 다 지각할 것이 뻔했다. 향긋하게 대파를 볶다가 도마도를 넣고 익혀서 물을 넉넉하니 부어 아남은 도마도 계란면을 끓여냈다. 도마도계란면은 결혼 뒤 안해에게서 배운 것이였다. 안해는 잘할 수 있는 료리가 몇 종류 없었는데 그중 하나가 도마도계란면이였다. 고중을 나와서부터 번번이 바뀌던 일자리를 따라 전전긍긍 돌아다니던 시절을 생각하면 이만한 아침식사는 더없이 훌륭한 것이였다. 깔끔하고 균형 잡힌 몸가짐에 황금비률의 오관을 가지고 있었지만 아남은 심한 말더듬이였다. 아남은 아버지가 한국으로 떠나기 전에 사준 양복을 입고 구두공장의 림시직원, 식당의 잡부, 광천수회사의 물배달원 등 일들을 했었다. 그의 상전이나 동료들은 그가 양복을 입고 일하러 나온 것에 대해 별로 달가워하지 않았다. 말하자면 도시의 하층인에 속한 사람이 어울리지도 않게 무슨 양복이냐 하는 것이였다. 게다가 그 일들은 전부 몸을 많이 쓰며 쉴새없이 자세를 바꾸어줘야 하는 직종이기 때문에 아무래도 양복은 편리하지 않았다. 나중에 아남은 출퇴근할 때만 양복을 입고 근무할 시에는 직장의 작업복을 착용함으로 그 문제에 대해 타협했다. 여름에는 하얀 샤쯔와 까만 양복바지만 입었고, 봄, 가을에는 샤쯔우에 단추가 네개 달린 조끼를 걸쳐입다가 좀더 추워지면 그 우에 양복을, 더 추운 겨울이면 코트를 걸쳐입었다. 그렇게 정장을 입고 가다듬은 자세로 걸어가는 아남의 모습은 가히 젊은 시절의 아름다운 어머니와 짝지을 만한 것이였다. 실제로 아남은 출퇴근길을 혼자 걸으면서 그런 상상을 수도 없이 해보았다. 아남의 팔짱을 낀 채 그와 함께 보조를 맞추며 걷는 어머니는 소녀처럼 머리를 뒤로 젖히며 까르르 웃기도 하고 열렬한 사랑에 빠진 련인처럼 속 깊고 정겨운 눈빛으로 그를 흐뭇이 올려보기도 했다. 안해와 결혼하기 전까지 아남은 그런 식으로 어머니와 자유로이 만나 때때로 함께 출퇴근했다. 아남은 그 이야기를 아무에게도 한 적이 없었다. 안방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안해의 푸석한 얼굴이 거실문곁에 나타났다. 싸구려 물감을 들인 노란색의 머리카락이 부스스 한 광주리만큼이나 부풀어올랐고 피곤이 덕지덕지 붙은 얼굴은 채 가시지 않은 졸음기로 덮여있었다. “몇신데? 벌써 일어나 밥 먹어?” M시의 교구에 살던 농민출신의 부모에게서 자란 안해는 그 억양에 동북 사투리의 흔적이 많이 있었다. 툭 튀여나온 상악골 때문에 발음이 항상 얼마간 먹히우기까지 해서 아남은 그녀의 말을 잘 리해하지 못할 때가 많았다. 처가집에서는 아남을 한번 보고 혼사를 서둘러 준비했지만 정작 결혼식 날 안해는 시아버지가 보내준 한복을 입지 않았다. (그녀는 웨딩샵에서 빌린 드레스와 빨간 봉황이 그려진 치파오를 입었다.) 아남은 부지런히 놀리던 저가락을 내려놓고 김이 문문 나는 냄비안에서 면발을 건져 국물과 함께 국그릇에 담아 안해의 자리에 가져다 놓았다. 안해는 커다란 입술이 찢어지도록 하품을 하고 나서는 그 참에 눈귀로 밀려난 눈물과 눈곱을 같이 닦아냈다. “언제 끓인거야? 이런, 면발이 다 풀어졌네…” 아남은 못 들은 척 대꾸도 하지 않고 자기의 식사를 계속 했다. 저가락으로 두어번 면발을 휘저어보던 안해는 못마땅한 대로 면을 건져 후르륵 먹기 시작했다. “망할 놈의 날씨, 아침 대바람부터 이렇게 덥다니…” 하고 안해는 다른 화제를 꺼냈다. “온밤 선풍기를 틀어놓아도 아무 소용 없지 않아? 젠장, 날씨 때문에 밥맛까지 도통 없네. 우리 이따가 저녁에는 뭐 좀 맛있는거 해먹자…” 안해는 쉴새없이 지절거리며 아남을 건너보았다. 아남은 가타부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깨끗이 비운 자신의 그릇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 주방으로 들어갔다. 안해의 수많은 잔소리와 쓸데없는 수다와 억지가 대량 섞인 넉두리에 관해서는 일절 대꾸하지 않는 편이 나았다. 외모와 정비례된다고 볼 수는 없지만 안해는 변덕도 엄청 심했다. 안해가‘무심히’거는 말에 생각도 없이 대답했다가 난데없는 꼬투리를 잡힌 적이 어디 한두번이였던가. 수세미에 퐁퐁을 약간 묻혀 그릇과 저가락과 냄비를 닦은 다음 아남은 손을 비누로 깨끗이 씻고 옷을 갈아 입었다. 결혼식때 새로 마련한 하얀 샤쯔가 아남의 얼굴을 환히 빛나게 했다. 넥타이는 아버지가 사서 보내준 것과 아남의 ‘정장사랑’을 알고 있는 주위 친지들한테서 얻은 것 중에서 흰줄과 청색, 푸른색 줄이 규칙적으로 배렬된 것을 선택했다. 옷매무시를 단정히 한 다음에는 가는 빗으로 까맣고 숱 많은 머리도 가지런히 빗어넘겼다. 숱진 눈섭은 한일자로 얼굴 한가운데 맞춤하니 자리잡고 있었고 그 아래 정기있는 두 눈은 검은자위 흰자위가 또렷했다. 조각가가 다듬은 듯한 코날, 다른 오관과 잘 조화되는 륜곽 선명한 입술… 이제 거울속의 아남은 영국 황실의 황자만큼이나 름름한 신사가 되였다. 아남은 앞뒤 좌우로 돌아가며 혹여 머리카락이나 먼지 같은 것이 붙어있지 않나 꼼꼼히 비춰보고 나서 드디여 흡족한 얼굴로 전동자전거의 열쇠를 벗겨내여 손가락에 걸고선 집문을 나섰다. 무슨 낌새를 용하게나 알아챘는지 안해는 예나 크게 다르지 않는 남편의 일거일동을 유심히 살펴보고 있었다. 아버지가 곧 돌아온다는 소식을 아남은 아직 안해에게 알려주지 않았다.   아버지가 온다, 래일이나 모레, 곧 우리 아빠트로 들어올 것이다… 라는 생각을 할 때마다 아남은 그 장면을 상상하며 기괴해했다. 여러 진찰실을 돌아다니며 빈 링게르, 일회용 주사바늘, 알콜을 묻힌 솜뭉치와 환자들이 쓰던 피자국진 깔개 같은 쓰레기를 수거하면서 아남은 아버지에 관한 것들을 떠올려보았다. 계단 아래쪽을 합판으로 막은 삼각의 작은 창고로 들어가 마스크를 잠간 벗고 대걸레며 비자루, 물통 따위 청소도구들이 오구구 몰려쌓인 중에 비집고 앉아쉬면서도 아남은 계속하여 생각했다. 이상해, 이상해, 아버지라니, 아버지가 나의 집에 온다니… 이게 무슨 일인가? 다른 청소부들이 담배를 피운다거나  물병 가득 채워온 록차를 마시는 동안 아남은 맥심 믹스커피를 마시기 좋아했다. 그 커피는 아버지가 한국에서 다른 선물들과 같이 거의 정기적으로 보내주는 것이였다. 프림과 설탕이 몸에 좋지 않다는 뉴스를 보고 나서부터 아남은 커피봉지를 찢어 자신이 들고다니는 유리병속에 넣기 전에 먼저 손바닥에 그 안의 내용물을 쏟아부었다. 하얀 가루분말들은 되도록 쓰레기봉지속에 버리고 갈색의 작은 덩어리들만 손바닥안에 남겨두려고 노력했다. 그런 다음 아남은 유리병속에 뜨거운 물을 가득 따랐다. 아무도 아남의 그 연갈색 액체를 맛보고 싶어 하지 않았다. 아남은 그것을 ‘커피국물’ 이라고 스스로 명명했다. 어딘가 탄내 나는 숭늉 같은 맛이 느껴지는 ‘커피국물’이였다. ‘커피국물’을 두모금 들이키는데 아남의 눈앞으로 홀연히 한 남자아이가 불쑥 나타났다. 가로로 쭉 째진 눈에서는 날카롭고도 차거운 눈빛이 뿜어나왔다. 이렇게 오랜 세월 지났는데도 그 아이의 모습이 그렇듯 생생하게 나타나는 것이 아남 스스로도 신기했다. 그 아이는 아남을 경멸의 시선으로 쏘아보다가 휙 돌아서 사라져버렸다. 아남보다 다섯살이 더 큰 그 아이는 늘 그런 눈빛으로 아남을 보았었다. 그 아이를 뒤따라 나가 같이 놀고 싶었던 아남은 단 한번도 그 소원을 이뤄본 적이 없었다. 아남은 눈을 둬번 껌적거리고 나서 다시 ‘커피국물’을 한모금 들이켰다. 아버지를 떠올리려고 했지만 그 왜소하고 볼품없는 인간 대신 다른 한 녀자가 냉큼 아남의 눈앞으로 뛰여들었다. 좀전의 남자아이와 꼭 닮은 눈에 아남을 흘겨보는 경멸의 시선마저 똑같았다. 녀자의 얇은 입술이 여닫히며 뭐라고 말들을 총알같이 내뱉는 순간, 아남은 움칠 놀라며 몸을 떨었다. 말할 수 없는 괴로움이 어두운 산처럼 그를 짓눌렀다. 오래전의 과거가 둥그렇게 입을 벌리고 다시 아남을 그 속으로 빨아들이려고 마력을 쓰고 있었다. 온몸이 따끔거리며 아파오기 시작했고 마음은 납덩이를 매단 잠수부처럼 어떤 불쾌한 심연 속으로 축 가라앉고 있었다. 아남은 머리를 흔들었다. 예전의 기억은 현재의 그의 삶에 조금도 도움이 되지 못했다. 전날의 상처와 아픔이 되살아나 생생하게 느껴질 때면 그는 그 몹쓸 감정에 휘둘려서 도무지 어찌해야 할 바를 몰랐다. 다른 사람과의 얘기중에서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그는 삽시간에 격해진 억양으로 더욱 심하게 말을 더듬으며 자신의 분노를 목표도 없이 이리저리 마구 표출했다. 그러나 만약 혼자만의 상념중에서라면 분노를 쏟아부을 상대가 없어 부르르 제 몸을 떨다가 아무도 알아듣지 못할 욕지거리를 하면서 손에 잡히는 대로 물건을 집어던지는 수도 있었다. 사정이 어찌됐든 이런 행동은 사람들이 반길 만한 것이 못되였다. 아남이 분노할수록, 침을 튕기며 말을 더욱 급히 더듬을수록 그들은 침착한 눈초리로 아남을 쏘아보군 했다. ‘저 대책 없는 얼간이 같으니라구.’ 그들이 모두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아남도 알고 있었다. 그들의 표준에 따른다면 자신이 영낙없는 ‘얼간이’라는 것도 부인하지 않았다. 그러니 과거 따위가, 그 녀자와 남자아이, 그리고 아버지 같은 인간이 대체 아남과 무슨 상관이 있어야 한단 말인가. ‘커피국물’을 다 마시고 나서 아남은 다시 일어나 대걸레로 복도를 닦기 시작했다. 아남에게 있어서 가장 낯선 사람이 바로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어머니가 살아계셨을 때나 돌아갔을 때, 그리고 그 녀자(계모)가 들어와 살림을 했을 때에도 항상 아남과 한집에서 살았지만 동시에 누구보다 아남에게 무심했던 사람이였다. 아버지는 M시의 크지 않은 국영기업에서 출근하던 로동자이였다. 그는 특징적인 부분이 거의 없는 평범한 사람이였고 생활을 대함에 있어서는 정취라고 꼬물만치도 모르는 재미없는 인간이였다. 본인의 무능력과 시대의 암울함 등 리유가 그를 그런 사람으로 만들어갔을 것이였다. 아남의 기억속에 아버지는 항상 입을 꾹 다물고 량미간을 찌프린 채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는 듯한 표정이였다. 그러나 솔직히 말하면 정말로 무엇을 생각하는 것은 아니였다. 그는 늘 무표정한 얼굴로 밥을 먹었고 밥상을 물린 뒤에는 가타부타 아무 말없이 이불을 펴거나 출근을 나갔다. 말하는 사람은 항상 계모였다. “오늘도 월급이 밀렸다구요? 뭔 놈의 공장은 맨날 월급을 미룬대? 혹시라도 당신이 딴데 빼돌린건 아니구요?”, “뭐라구요? 아남이 학비 낼 돈요? 월급을 타쓴 지가 언젠데 그 돈이 남아있겠어요? 쥐꼬리만한 월급밖에 못 벌어오면서…”, “아니에요, 이번엔 정수 신발을 사줘야 돼요. 그 애는 달리기시합에 나가야 한단 말이에요. 아남이 신발은 아직 신을 만하잖아요. 당신 혹시 정수가 제 몸에서 난 애가 아니라고 차별하는건 아니죠…”, “당신은 맨날 밖에서 일하다 나니 무슨 수로 알겠어요? 아남이 얘 고집이 정말 장난 아니라니깐요. 뭔 애가 심술은 얼마나 많은지, 정수 거라면 무조건 샘을 내고 눈독을 들이는 게 나참, 그만큼 욕심 많고 마음 비뚤어진 애가 없어요…” 아버지는 계모의 말에 토를 달거나 짜증을 부리지 않았다. 그는 계모의 말처럼 정수를 차별하지도 않았고 아남을 더 귀해하지도 않았다. 어쩌면 그는 후처나 그녀의 아이, 또는 자신의 아이까지 모두 귀찮았을지도 모른다. 그는 그저 죽을 수가 없어서 살아가는 사람이였다.  아남이 소학교 2학년이나 3학년 쯤이였을가. 50전어치 월표를 사서 뻐스를 타고 학교를 다닐 적이였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새로 이사한 집은 학교에서 더 멀리 떨어졌었다. 15분을 걸어 정류장에 도착하고 다시 뻐스를 40분 남짓 타고 가야 했다. 금방 1학년생이 되였을 때만 해도 할머니가 시골에서 올라와 같이 뻐스를 타고 등하교를 했다. 2학년이 되여서 계모가 들어오면서부터 그렇게 할 수 없었다. 할머니는 시골로 돌아갔고 아버지는 아침 일찍 다른 뻐스를 타고 출근하고, 정수는 언제나 먼저 떠나갔고… 그래서 아남은 혼자 뻐스를 타고 등하교를 했다. 뻐스안은 사람이 많아 공기가 아주 나빴다. 아남은 사람들 틈에 비집고 서서 차가 급정거를 할 때마다 넘어지지 않으려고 안깐힘을 다 해 의자 등받이를 꼭 붙잡았다. 그래도 차가 멈칫하는 사이 다른 사람의 몸우에 넘어지거나 어른들의 신발에 밟히우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뻐스를 타는 긴 시간동안 자리가 나는 기회는 자주 있었지만 번번이 힘센 다른 어른들에게 앉아갈 기회를 빼앗겼다. 어느 여름날의 오후, 집으로 돌아오는 뻐스에서 어쩌다 앉아가게 된 아남은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갑자기 정신이 들어 밖을 내다보니 내려야 할 정류장에 이미 도착했다. 뒤문쪽에는 다음 역이나 그 다음 역에서 내릴 사람들이 빽빽이 몰려있었고 뻐스는 벌써 치익-- 문을 닫으며 떠나려고 움직이는 중이였다. 한 정류장 더 가게 되면 20분은 족히 걸어서 되돌아와야 했다. 더이상 생각할 사이가 없이 아남은 반쯤 열려있는 유리창을 힘껏 밀어제끼고 책가방을 둘러멘채 의자에 올라가서 그 유리창으로 훌쩍 뛰여내렸다. 땅바닥에 나동그라지고 나니 발목이 시큰거렸다. 뻐스 기사가 백미러로 그 장면을 보았는지 빵빵 경적을 두번 울렸다. 차장을 비롯한 차우의 사람들이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아남을 멍하니 내려보았다. 지나가던 사람들도 아남을 흘끔흘끔 돌아보았다. 아남은 발목을 조금 주무르다가 이내 책가방을 주어메고 일어섰다. 반바지를 입은 무릎의 살갗이 벗겨져 검붉은 피가 배여나왔다. 손바닥으로 피방울을 쓱싹 닦은 다음 앞으로 몇발자국 걸었는데 바로 그곳에 아버지가 서있는 것을 아남은 보았다. 아남은 주춤 그 자리에 서버렸다. 방금전 자신이 차에서 뛰여내리는 모습을 아버지가 전부 보았겠다는 생각이 확 들었다. 그는 책가방끈을 만지작거리며 숨을 죽이고 아버지의 얼굴표정을 훔쳐보았다. 그날에도 아버지는 아무말이 없었다. 아버지는 어두침침한 얼굴로 자신의 어린 아들을 잠간 바라보았다. 차라리 욕지거리라도 했더라면 와-- 하고 반가운 울음을 터뜨릴 수 있으련만 아버지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돌아서서 뚜벅뚜벅 집쪽으로 길을 잡아 걸어갔다. 자신을 따라 오라는 신호였다. 뚜벅뚜벅, 뚜벅뚜벅… 아버지의 등은 그렇게 높고 크고 두꺼워보였다. 그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아버지가 아남의 마중을 나온 날이였다. 그 뒤로는 다시 그런 일이 없었다. 그 녀자가 죽고, 정수가 집을 나간 다음 아버지는 고중을 금방 나와 공장에서 견습공 노릇을 하는 아남을 혼자 둔 채 한국으로 떠났다. 그것도 벌써 십년전의 일이였다. 처음 5~6년 동안은 거의 소식이 없다가 최근 3~4년에 들어서야 아버지는 련락을 했다. 편지는 없었지만 속옷이나 양말, 시시한 생활용품과 중국에 없는 먹거리들 따위는 서너달에 한번씩 모아 상자로 보내주었다. 휴대전화가 보편화되면서는 짧게 통화를 하기도 했는데, 주로는 부쳐준 물건에 관한 얘기였다. 어떤 게 좋았냐, 어떤 게 더 필요하냐, 이 외에 혹시 갖고 싶은건 없냐… 등등. 아남이 무슨 일을 하며 어디에서 주숙하며 건강상태는 어떤지 하는 것에 대해서는 한두마디로 끝냈다. ‘잘 있으면 됐다’, 그 이상 자세한 것은 알고 싶어하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아버지는 자신의 상황도 구구절절 늘어놓지 않았다. 아남 역시 아버지에게 이것저것 묻지 않았다. 아남은 아버지의 구체적현실에 대해 궁금하지 않았고 자신이 그것에 대해 알아야 할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다. 아버지는 이 세상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는, 그가 어려서부터 알고 있는 사람중의 하나였다. 언젠가 아버지가 죽으면 다시는 선물상자를 받지 못하겠지… 이런 생각을 하면서 아남은 상자속의 과자와 커피를 먹었다.   얼음을 띄운 랭면을 먹던 저녁, 아버지가 아남네 아빠트 현관문을 두드렸다. 아버지가 탄 비행기는 오후나절에 M시 공항에 내렸는데, 그는 아남에게 전화를 넣지 않고 아들이 위챗에 남긴 주소만 가지고 혼자 찾아왔다. 그는 사람들에게 물어 언녕 아남네 아빠트를 찾아냈지만 젊은 내외간의 퇴근시간을 기다리느라 부근의 놀이터 벤치에 여태 앉아있었다. 아남은 소고기를 조금 넣고 끓여서 식힌 육수에 미리 얼려놓은 얼음을 부셔넣었다. 냄비안에서는 면이 부글부글 거품을 일며 끓고 있었다. 가스불앞에 선 아남은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땀줄기를 연신 팔뚝으로 훔쳐댔다. 누런 기름때가 끼여있는 창살바깥으로 마라탕의 노린내가 끊임없이 풍겨 올라왔다. 아남네 아빠트 바로 아래층이 작고 꾀죄죄한 마라탕집이였다. 노크소리가 몇번 울리자 안해가 뒤뚱거리며 다가가서 문을 열었다. “세이야?!(谁呀?)” 안해는 높고 칼칼한 목소리에 짜증을 섞어서 문뒤의 불청객에게 물었다. 갑자기 아남은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혹시, 하고 생각하는 순간 문이 열렸고 안해가 미지의 손님에게 말을 거는 소리가 들렸다. “세이? 니 자오세이야?(谁? 你找谁?)…” 그러나 손님의 말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 황당하고도 어색한 침묵. 아남은 그 손님이 아버지라고 거의 확신할 수 있었다. 그는 저가락으로 면발을 젓던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면발은 맞춤하니 익었다. 더 놔두면 탄력을 잃을 것이였다. 아남은 급히 불을 끄고 행주로 남비 손잡이를 싸서 그대로 싱크대안에 넣으며 수도물을 틀었다. 현관으로 달려가고 보니 저가락을 든 채로였다. 아남의 기척소리를 듣고 안해가 몸을 돌이켰다. 그제야 아남은 아버지를 보았다. 챙이 있는 하얀 모자아래로 희슥희슥 머리카락이 드러난 작고 여윈 늙은이였다. 아버지는 당신이 끌고 온 한개의 짐가방과 그 우에 얹어왔을 두개의 상자와 함께 계단어귀에 나란히 서있었다. 아들의 얼굴이 나타나는 것을 보고 늙은이는 피끗 안도의 미소 같은 것을 지었다. “그래, 내가 잘 찾긴 찾았네…” 아버지는 입귀를 두어번 실룩거렸지만 더이상의 감탄사는 말하지 못했다. 십년동안 훌쩍 커버려 거뭇한 어른이 다 된 아들을 그저 경탄의 눈길로 바라볼 뿐이였다. “아부지, 미리 전화를 하시지 그랬어요?…”하고 아남이 그에게 말했다. 만약 길가에서 만났더라면 아남은 도무지 아버지를 알아보지 못했을 것이였다. 아버지는 아남의 상상 속의 그 사나이가 아니였다. 아버지를 안내하여 거실로 들이고, 그의 짐들을 하나하나 옮겨주면서도 아남은 혹시 자신이 낯모를 사나이를 아버지라 착각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그 늙은이는 아남의 이름을 알고 있었고 안해와 결혼한 일자도 대충 알고 있었다. 그는 지어 안해에게 떠듬거리며 사돈식구들의 안부를 묻기도 했다! 아남은 먼저 끓인 면발을 소쿠리에 건져놓고, 남비에 새 물을 받아 면을 좀더 삶았다. 육수가 부족하여 얼음을 있는 대로 더 넣고 나눠먹을 수밖에 없었다. 아남은 안방안에 세워두었던 선풍기를 꺼내 거실에 놓고 돌렸다. 식탁에는 플라스틱 걸상을 하나 더 가져다 놓았다. 끈적하고도 무더운 선풍기 바람이 윙윙 식탁을 향하여 불어치고 있었다. 세 사람은 더없이 어색하고 불편한 분위기 가운데 첫번째 저녁식사를 같이했다. 방이 하나밖에 없어서 아남은 생각끝에 아버지를 위해 거실 한쪽 구석에다 간이 침대를 펴주기로 했다. 아남이야 어디서 자든 상관이 없었지만 안해는 분명 그렇지 않을 것이였으니까. 안해는 맞춤한 두께의 이불을 찾는 아남을 붙들고 작은 눈을 희번덕거리며 묻기 시작했다. “뭐에요? 아버지라구요? 당신 아버지?… 나참, 결혼때도 못 오던 아버지가 갑자기 웬 일이래요? 그래서, 얼마나 있을건데요? 뭐하러 오셨대요?…” 아남은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흔들었다. “몰라, 모른다구,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아남의 태도가 시원찮은 것을 보고 안해는 더욱 소리를 높여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아남은 아무 대꾸도 없이 이불을 들고 거실로 나와버렸다. 간이침대는 아남이 전에 혼자 살림을 할 때에 쓰던 것이였는데 결혼하면서 혹시 손님이 올 때를 대비하여 사용하려고 남겨두었다. “아부지, 좀 불편하시겠지만 먼저 여기다 자리를 봐드릴게요. 창문을 열면 여기가 안방보다 더 시원해요.” 아버지는 작은 쏘파에 앉아 안절부절하면서 아남이 이불을 깔아주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래, 알았다. 괜찮다.” 하고 아버지는 입속으로 중얼거렸다. 아남이 그 일을 하는 동안 아버지는 부시럭거리며 상자를 뜯어 여러가지 주방용품들과 건조시켰거나 진공포장한 먹거리들을 주섬주섬 꺼냈다. 아들 내외에게 선물하려고 준비한 듯한 화장품세트가 그 중에서 가장 비싼 것으로 보였다. 아남이 아버지의 침대자리를 다 깔고난 동시에 아버지도 상자속의 물건들을 모두 꺼내 진렬을 마쳤다. “이거, 어디다 둘까?” 하고 아버지는 아남을 올려보았다. 잘못을 저지른 아이가 부모의 선처를 바라는듯 애원에 가까운 눈빛이였다. 아남은 그것들을 보면서 저도 몰래 한숨을 쉬였다. 그것들은 모두 아남이 즐겨먹는 것이였지만 안해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였다. 아남은 주방용품들만 골라내고 먹거리들은 다시 상자속에 집어넣었다. 아버지가 말없이 지켜보는 속에서 아남은 상자를 주방의 선반우에 올려놓았다. 아버지는 짐가방을 풀어 개인 물건들을 조심스레 정리했다. 버려도 아깝지 않을 낡은 컵을 하나 달라고 하더니 거기에 자신의 치솔을 꽂고는 침대아래에 두었다. 품 너른 하얀 런닝을 갈아입고 침대에 음전하게 앉은 아버지는 흡사 고동색의 거죽아래 마른 뼈만 남은 꼭두각시 같았다. 그는 이튿날 새벽 일찌감치 일어나 전기압력밥솥에 아침밥을 지었다. 그 밥솥도 아버지가 가져온 것이였다. 아침부터 아버지는 집안의 텁텁한 공기를 헤가르며 거실과 주방, 화장실 사이를 오가기 시작했다. 밥솥이 뿜는 하얀 수증기도 집안의 온도를 높이는데 일조했다. 아버지는 당신이 가져온 마른 미역으로 국을 끓이고 엊저녁 먹다 남은 오이를 채 썰어 랭채를 무쳤다. 아버지의 기척소리에 아남은 더 오래 누워있지를 못하고 일어나 세수를 했다. 그러나 안해는 베개밑에 머리를 파묻고 뒤척거리며 신경질을 부렸다. 아버지는 식탁우에 밥을 떠놓고 젊은 내외가 일어나기를 기다렸다. 밤잠을 량껏 자지 못한 아남은 그닥 달갑지 않은 얼굴로 식탁에 마주 앉았다. “아부지, 먼저 드세요. 저네는 언제 일어날지 몰라요.”하고 아남은 아버지에게 식사를 권했다. 아버지는 아들내외의 반응에서 무언가를 느꼈는지 랑패를 당한 모습으로 수저를 들었다. 그들은 서로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조신하면서 묵묵히 밥을 먹었다. 아남은 되도록 천천히 먹으려고 애를 썼다. 안해가 좀 일찍 일어나 같이 먹어주기를 바래서였다. 안해는 그들 부자가 거의 먹어갈 때에 휙-- 하니 방에서 나오더니 자기를 위해 차려놓은 그릇 앞에 턱 주저앉았다. 그녀는 야들야들한 미역들이 담긴 국물을 숟가락으로 휘휘 저었다. 조금 떠서 맛을 보는 척하다가 덜렁 내려놓고 저가락으로 오이랭채를 집어 깨작거리며 밥을 먹었다. 하지만 그 밥도 절반이나 공기안에 남겨둔 채 량미간을 찌프리며 일어섰다. 아남은 조바심을 내며 아버지의 표정을 건너보았다. 아버지는 눈을 내리깔고 그만 식탁에서 물러나 그릇을 부시러 주방에 들어갔다. 몸이 마음처럼 잘 따라주지 않는 늙은이는 설겆이를 하는 내내 채머리를 연신 부들부들 떨었다. 공기와 국사발이 쟁그랑 쟁그랑 부딪치는 소리가 싱크대안으로부터 울려퍼졌다. 아남은 늑장을 부리는 안해 먼저 치솔을 하고 샤쯔를 갈아입었다. 어김없이 더운 날이였고 예나 다름없는 시간에 출근을 해야 했다.   아남이 수거하는 쓰레기는 무더위가 지속될수록 더욱 악취를 풍겼다. 마스크는 그 기분 나쁜 냄새를 차단하는데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몇시간동안 열심히 일을 하다 보면 온몸에 열이 나서 자신의 입안에서마저 쓰레기와 비슷한 악취가 나는 것 같았다. 숨이 턱턱 막혔다. 잠시 쉬는 사이 아남은 병원 바깥으로 나와 문어귀에 기대섰다. 그곳에서는 썩은 냄새는 덜했지만 열기는 더 심했다. 바로 앞골목에서 공사가 진행중이라 차가 지나가면 뽀얀 흙먼지가 한참씩 연막처럼 일어났다. 매캐한 먼지가 확 덮쳐오는 것을 보면 아남은 다시 마스크를 끼고 병원으로 되돌아갔다. 쓰레기수거옆으로는 진저리가 나서 다가설 념을 못하고 복도에 있는 걸상에 걸터앉아 유리벽을 통해 바깥을 내다보았다. 공사구간을 피해 빙 에둘러 오가는 사람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무덤덤했다. 안전모를 쓰고 느릿느릿 벽돌을 나르는 인부들도 주름이 자글자글 잡힌 얼굴이였다. 그들은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최면에 걸린듯 수걱수걱 제 할 일을 끊임없이 반복하거나 비밀스런 명령을 받은 것처럼 똑같은 보조로 걸어가고 있었다. 매일마다 보는 광경이였지만 아남은 문뜩 왠지 수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는 아남도 알 수 없었다. 수상해, 뭔가 수상해… 이게 뭐지? 아남은 도무지 잘 돌아가지 않는 머리를 애써 굴렸다. 엉뚱하게도 언젠가 꿈속에서 보았던 익숙한 화면중에 자신이 빨려들어온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익숙한 하늘, 익숙한 사람들, 익숙한 온도와 분위기… 아남은 멍해졌다. 주위를 둘러보고 자신이 입은 작업복을 내려보면 꿈이 아니라 현실이라는 생각이 더 압도적으로 들었다. 갑자기 하얀 승용차 한대가 급정거를 했다. 끼익-- 하는 아츠러운 소리가 귀가에서 들리는 것 같았다. 지나가던 행인들이 차를 피해 빙 둘러가면서 머리를 돌려 바라보았다. 사람들의 틈너머로 작고 날렵한 몸집의 까만 것이 훌쩍 뛰여 도망가고 있었다. 그것은 아남이 이 부근에서 한번도 보지 못했던 길고양이였다. 아버지는 벌써 일주일간을 아남의 집에 머물렀다. 결혼식에는 오려고 했지만 운 나쁘게도 려권을 잃어버려서 날자에 맞춰 올 수가 없었다고 했다. 아버지는 근간에 들어 건강이 좋지 않아졌다고 하면서 지금 막 하던 일을 사직하고 잠간 쉬였다 갈 계획이라고 했다. 안해는 그 말을 듣고 판들거리는 작은 눈을 동그랗게 흡떴다. “뭐요? 잠간 쉬였다 간다구요? 얼마나 오래?” 아남도 그것이 념려스러웠다. 아버지는 정확한 일자를 짚어 말하지 않았다. “그냥 상황 봐서…” 하고 아버지는 우물우물 대답했다. 자신의 일은 신경 쓰지 않아도 좋다고 그는 덧붙였다. “아직까지 내 앞가림은 할 만한 정도니까.” 하지만 그의 말에는 확신이 들어있지 않았다. 아남의 집에 머무는 동안 아버지는 매일같이 장을 보아주었다. 처음에는 아들 내외의 퇴근시간에 맞춰 저녁밥까지 지어놓았다. 그는 최선을 다해 중국식으로 료리를 볶았지만 좀처럼 며느리의 입맛을 맞출 수가 없었다. 안해는 그 슴슴하고도 맛없는 료리를 더이상 먹을 수 없다고 선언했다. 아남은 아버지에게 정 원한다면 장만 봐달라고 요청을 했다. 저녁 료리는 안해와 아남 두 사람이 번갈아했고 아침은 아남과 아버지가 번갈아했다. 새벽마다 아버지는 일찍 일어나 소리를 죽이고 핸드폰으로 한국 드라마를 봤다. 어떤 날은 안해가 너무 짜증을 부려서 조용히 아침시장에 나가 파 한단을 사가지고 왔다. 아버지가 오면서 집안은 더욱 더워졌다. 그러찮아도 비좁은 집안에 어른 한명이 더 불었으니 그 체온만 해도 족히 내실온도의 상승에 적잖은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것이였다. 아남은 이제 밤일 같은 것은 시도도 하지 않았다. 아버지 때문에 불편한 것도 있었지만 너무 더워서 사람의 곁에 가까이 가는 것 자체가 더 싫어서였다. 안해는 그 상황을 굉장히 못마땅해했다. 안해의 외모와 지능상태를 보고는(그녀는 사람들한테서 ‘좀 덜 떨어진 녀자’라고 불리우고 있었다) 아무도 상상할 수 없을 것이였지만 그녀는 그 일을 진심으로 즐겨했다. 그녀는 일단 흥분이 되면 창문이 활짝 열려져있다는 것, 그들의 집은 2층 높이 뿐이 안된다는 것, 또는 벽이 얇아 방음이 잘되지 않는다는 것 등의 상황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아남은 흥분중의 그녀가 가끔 짐승처럼, 말 그대로 본능밖에 모르는 한마리의 짐승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지금, 안방문을 활짝 열어놓아 아버지의 기척소리마저 모두 들을 수 있는 환경에서 안해는 그 일을 진행하지 않는다고 아남에게 화를 냈다. 그녀는 잠옷을 훌떡 벗어버리고 팬티와 브래지어만 입은 알몸으로 아남에게 추근거렸다. 아남은 머리를 외로 꼬고 그녀를 피해 이쪽저쪽으로 옮겨누웠다. 그녀가 가까이 올 때마다 그녀 몸에서 뿜어나오는 뜨거운 열기가 아남을 몹시 괴롭혔다. 아남은 그저 조금이라도 더 편하게, 시원하게 있고 싶을 뿐이였다. 결국 소원을 이루지 못한 안해는 앵돌아져서 두 다리로 아남의 배와 엉덩이와 허벅지를 마구 차댔다. 아남은 아버지가 이 추잡스런 소리들을 모두 듣고 있을가봐 속을 졸였다. 한나절 실랑이를 벌이다가 마침내 안해는 침대 저쪽 모퉁이, 창문밑에서 잤고 아남은 침대 이쪽 변두리끝에서 잤다. 간혹 잠버릇이 나쁜 안해가 이쪽으로 굴러올라치면 아남은 그녀의 뜨거운 열기를 느끼고 진저리를 치며 일어났다. 반쯤 벌린 안해의 입에서도 집안 온도를 높이는데 일조하는 열기가 생산되여 나오는 것 같아 짜증이 났다. 한 집안에 있으면서도 서로 가까이 올가 두려워하는 아남의 가족들. 이것은 틀림없이 이상한 여름, 기괴한 가족이였다. 밤중에 더위에 지쳐 일어나 혼자 괴괴한 어두운 집안을 둘러보면 아남은 대체 이게 무엇인지 알 수가 없어 답답한 눈만 껌뻑거렸다. 그런 밤에는 머리속에 넣어두었던 모든 말들을 잊어버렸고 생각할 수 있는 능력마저 상실한 것 같았다. 아남은 퀭하니 앉아서 죽은듯이 자고 있는 안해를 바라보았다. 오줌을 누러 화장실에 나왔다가는 거실에 멈춰서서 좁다란 간이침대에 누워 푸-- 푸-- 괴로운 숨을 내쉬는 아버지를 한참 지켜보았다. 어떤 날에는 쏘파에 쪼그리고 앉아 잠이 들어있는 어머니를 보는 날도 있었다. 그것은 움츠리고 앉아있는 사람의 것 같은 희끄무레한 형상이였다. 아남은 본능적으로 그것이 어머니란 것을, 그리고 어머니는 그닥 편안한 자세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버지가 떠나가기 전날, 아남은 출근중에 갑자기 어지럽고 메슥메슥해나서 쓰러질 번했다. 낮 최고기온은 40도에 육박했고 뉴스에서는 앵커들이 매일마다 지구 온난화에 대해 거품을 물고 떠들어댔다. 어느 지역 방송에서는 녀자 앵커가 얇게 썬 삼겹살을 가져다 아스팔트길우에 가지런히 배렬해놓았다. 잠시뒤 카메라화면에는 삼겹살이 지글지글 익어가는 모습이 징그럽게 포착되였다. 아남은 여태 한번도 병가를 낸 적이 없었지만 그가 휘청거리는 모습을 보고 리주임이 집으로 돌려 보냈다. 아남은 물을 조금 마시고 정신을 차린 뒤에 병원을 나왔다. 파란 철판으로 인행보도를 길게 막은 공사구간을 지나 사거리를 가는 길로 접어들었다. 인부들은 여전히 상통을 찌그린 채 아무 말없이 스적스적 일을 했다. 도대체 몇달이나 씻지 않았는지 얼굴이며 옷에 먼지와 때가 껍질처럼 붙어있었다. 공사구간을 거의 지나는데 전동자전거 바퀴 앞으로 까만 공 같은 것이 휙 지나갔다. 그것은 파란 철판 뒤쪽으로 숨어들고는 머리를 돌려 아남을 매섭게 쏘아보았다. 눈이 노란 고양이였다. 아남은 점심 쯤에 집에 도착했다. 아버지는 한창 식탁에 마주 앉아 점심을 먹고 있었다. 아침시장에 가서 조금 사온 것인지 벌건 고추물을 들인 후줄근한 짠지가 작은 비닐봉지속에 담겨 그의 앞에 놓여있었다. 아침에 먹다 남은 밥과 당신이 한국에서 가져온 순창 고추장이 곽채로 식탁우에 올려있었다. 아버지는 그 시간대에 갑자기 들이닥친 아들을 보고 좀 놀랐다. 큰 일은 아니고 잠간 쉬러 들어왔다는 말에 늙은이는 시름을 놓으며 말했다. “그럼 얘, 미리 말하지. 밥이라도 새로 지어놓게.” 아버지는 서둘러 밥솥을 부시고 거기에 새 쌀을 씻어넣었다. 쾌속모드로는 15분이면 밥이 된다고 아버지가 설명했다. 아버지는 아남네가 퇴근하여 돌아오면 일러주려고 미리 짐을 싸두었다. G시에 있는 당신의 형네 집도 들르고 T시에 있는 누이동생네 집에도 들러보고 나서 한국으로 가련다고 아버지는 말했다. 아버지의 짐가방은 창문아래 간이침대곁에 어머니를 잃은 어린애처럼 오도카니 서있었다. 아남은 그 가방을 보지 않으려고 눈길을 돌렸다. 매일 밤 아버지가 그 침대우에 앉아있는 모습은 “꿔온 보리자루” 그 자체였다.  아남은 잠간 숨을 돌린 다음 아버지와 함께 식탁에 앉았다. 아버지는 급하게 지은 꼬들꼬들한 새 밥을 듬뿍 떠서 아남의 앞에 가져다 놓았다. 료리는 없었다. 부자의 앞에는 꾀죄죄한 김치쪼가리와 고추장 뿐이였다. 아남은 얼굴이 붉어졌다. 오래전의 어느 점심, 새로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아남의 담임선생님이 아이들의 도시락을 하나하나 열어보던 일이 생각났다. 어린 아남은 입술을 꼭 사려물고 머리를 푹 수그렸다. 그 선생님은 왜 도시락을 열어보려고 하는지 아무리 해도 리해되지 않았다. 도시락 뚜껑이 달그락 달그락 열리고 닫혀지는 소리를 들으며 아남은 숨을 죽였다. 수자들이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지만 계속하여 머리를 수그린 채 연필을 꼭 쥐고 있었다. 마침내 선생님이 말했다. “…이건 김치랑 고추장 뿐이네. 누구야? 누구 도시락이야?…” 아남은 두 팔로 얼굴을 감싸고 책상우에 엎드렸다. 애들이 킬킬 웃는 소리가 귀가에서 맴돌았다. 당장 그 도시락을 빼앗아 선생님 앞에서 멀리멀리 던져버리고 싶었다. 정수는 한번도 김치와 고추장만을 싸간 적이 없다는 것을 아남은 알고 있었다. 그 순간 아남은 살의를 느꼈다. 매일 아남을 ‘머저리’라고 욕하는 정수와 온갖 모욕적인 언사로 그를 달달 볶는 계모를 향해 시퍼런 칼을 찾아 겨누고 싶었다. “죽여버릴거야! 언젠가는, 반드시, 죽여버릴거야!…” 그 녀자는 아버지와 헤여진 뒤에 자궁암을 앓았다. 아버지는 그 소식을 듣고 며칠간 술을 퍼마시다가 한번 보러 간 적이 있었다. 같이 사는 내내 사이가 좋지 않았던 두 사람이 그 상황에서 무슨 말을 나눌 수 있었을가. 아버지는 애당초 그 녀자의 집에 들어가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사실 두 사람이 만나 한마디라도 얘기를 했을 가능성도 있었다. 죽음 앞에서 인간은 어떤 식으로든 평안을 찾으려고 애쓰기도 하니까. 뻐스를 타고 혹간 그 녀자가 사는 아빠트 부근 지역을 지나칠 때면 아남은 자신이 어림짐작한 방향으로 멀리 내다보았다. 그곳에는 총총히 서있는 낡은 아빠트들만 보였지만 아남은 더럽고 습한 침대우에 누워있는 그 녀자를 상상했다. 아남은 랭담한 시선으로 생의 마지막 한때를 보내고 있는 그 추한 녀자를, 그녀가 통증을 호소하는 모습을 쏘아보았다. 상상 속에서 아남은 계모가 참회를 하며 자신에게 용서를 구하는 장면을 끊임없이 떠올렸다. “아남아, 제발 나를 용서해다오. 나의 이 죽을병이 너의 저주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단다. 그러니 제발 나를 그만 놓아다오. 그저 편히 갈 수라도 있게 해주렴…” 그 녀자의 뺨은 움푹 꺼졌고 눈은 빛을 잃었으며 갈쿠리 같은 손가락은 말라서 뼈밖에 남지 않았다. 매번 아남은 그녀가 힘없이 손을 내려뜨리며 숨을 거둘 때까지 꼼짝 않고 처음 자세 그대로 그녀를 쏘아보았다. 그녀가 죽었다는 소문을 들은 후에야 아남은 온몸 가득 팽팽하니 품고 있었던 살기를 풀었다. 아남은 자신이 마침내 ‘살인자’가 되였다는 것을 알았다. 시장에서 사온 김치는 시고도 들큼했다. 고추장은 그런대로 먹을 만했다. 그들 부자는 조용히 밥을 먹었다. 실로 오랜만에 두 사람만 먹는 밥이였다. 밥을 다 먹고 그들은 랭수를 컵에 따라 마셨다. 뭔가 대단히 어려운 미션 하나를 완수한듯한 만족스러움이 희미하게 아버지의 얼굴을 비껴갔다. 그는 그저 운이 없고 불행하며 무능한 사나이였다. 게다가 이제는 사나이라고도 할 수 없는 늙은이였다. 안됐지만 바로 이 사람이 아남의 아버지였다. 그러니 더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가. 아남은 아버지에게 며칠 더 놀다 가라는 따위의 만류를 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아남의 집에서도, 큰아버지와 작은 고모의 집에서도 모두 짐덩어리일 뿐인 것이였다. 아버지는 다시 한국으로 갈 것이였고 괜찮은 일자리를 찾으면 한동안은 ‘자기 앞가림’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건강이 몹시 나빠질 수 있는 상황이 오기도 하겠지만 그것은 나중의 일이였다. 거기에 관해 아남이 지금 장담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아버지는 아남에게 가만히 통장 하나를 보여주었다. 언젠가는 그 통장을 물려줄 것이라며 연필로 노트에 비밀번호를 적어주었다. 통장 속의 수자들은 바로 아버지의 삶을 악착같이 보슬보슬 갉아낸 인생의 부스레기였다. 아버지는 당신이 돌아가신 뒤에도 그 수자들은 얼마간 남기를 바랐다.   아버지는 그 다음날 새벽에 기차역으로 떠나갔다. 그는 전처럼 압력밥솥에 쌀을 씻어 안쳐놓고 김이 씩씩 나는 것을 보고 나서야 활짝 열려있는 안방문을 똑똑 두드렸다. 아남은 저만치 널부러져 자고 있는 안해에게 홑이불을 덮어주며 일어났다. “왜 이렇게 빨리 가세요? 표는 샀어요? ” 아남이 묻자 아버지가 머리를 끄덕거렸다. “응, 어제 오후에 역전에 가서 미리 샀지. 아침 일찍 서둘러야 오후 나절에 들어가니까.” 아버지는 연신 채머리를 떨었다. 그럼 밥이라도 먹고 갈 것이지 빈속에 시장하지 않겠냐는 말에는 휘휘 손을 내저었다. “아니야, 역전에 가서 계란전병 같은 거 사먹을란다. 그런 걱정을랑 하지 말아.” 아남은 급히 정장바지를 꿰입고 전날 씻어 다려놓은 하얀 샤쯔를 걸쳤다. 대충 물을 묻혀 얼굴을 닦고 나서 아버지를 따라 현관을 나섰다. 아버지는 벌써 짐가방을 들고 뒤뚱뒤뚱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다. 아남은 문을 닫고 뛰여내려가 아버지의 손에서 가방을 빼앗아들었다. 가방은 바싹 줄어든 아버지의 몸무게처럼 갑삭했다. 이른아침의 거리는 한산했다. 아버지는 종종걸음으로 어제 당신이 탔던 뻐스역을 찾아 앞장서 걸어갔다. 그들은 뻐스역에서 초조해하며 첫차를 기다렸다. “아부지, 혹시라도 불편하시면 다시 우리 집에 오세요…” 하고 아남이 떠듬거리며 말했다. 검버섯 같은 반점이 피부 군데군데에 돋아난 늙은이는 부시럭거리며 가방에서 잔전을 찾아 손안에 쥐였다. “응, 괜찮다. 너나 잘 살아라.” 뻐스가 오는 것을 보고 아버지는 기사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어쨌든, 이렇게 와 보니까 이제 한시름 놨다.” 아버지는 뻐스에 올라가면서 아남을 돌아보았다. 그들은 차창을 사이에 두고 멀거니 서로를 쳐다보았다. 뻐스는 떠나가면서 검은 매연을 아남의 하얀 샤쯔에 한가득 뱉어주었다. 아남은 집에 돌아왔지만 밥을 먹고 싶은 생각이 없어서 꼼꼼히 세수를 다시 한 다음 그대로 출근길에 나섰다. 전보다 좀 일찍한 출근이였다. 웬일인지 여느때보다 머리가 맑아진 것 같았다. 아남은 자전거를 천천히 몰았다. 바퀴살이 사르르 돌아가는 소리가 귀가에 들려왔다. 다시 불덩이 같은 해가 떠오르면서 아남의 등줄기에서는 땀이 흐르고 있었다. 이 기괴한 여름이 언제든 끝날 날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파란 철판을 길게 둘러놓은 공사구간이 저만치 보일 때 아남은 가쁜 숨을 헉헉 들이켰다. 아남은 아침부터 꾸뻑꾸뻑 일하고 있는 인부들을 지나쳤다. 그들은 초점 없는 눈으로 아남을 퀭하니 쳐다보았다. 갑자기 아남은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파란 철판들이 활활 타고 있는 불길에 싸여있는 것을 보았다. 주위는 그대로였고 멀지 않은 곳의 병원도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그러나 파란 철판으로 둘러싸인 공사장은 이미 불타는 감옥으로 되여있었다. 시간이 찰나 아남에게서 사라진 것 같았다. 많은 사람들이 검은 그림자처럼 불길속에 서있었다. 아남에게 익숙한 얼굴들도 여럿 보이고 있었다. 아남은 그들을 알아보았지만 다음 순간 바로 누구였던지 잊어버렸다. 좀더 오래 기억속에 남은 사람은 아버지였다. 그들은 서로 마주친 눈빛에서 생전에 아버지와 아들로 맺어졌던 인연을 기억해냈다. 불길은 자꾸 밖으로 퍼져 어느새 아남과 아남의 자전거까지 삼켜버렸다. 질식할 만큼 더웠다. 아버지가 견디기 힘들어하는 모습이 보였지만 그러나 힘들기는 아남 역시 마찬가지, 그들은 불길속에 말라가느라 서로의 고통을 보고도 아무런 도움이 돼줄수가 없었다. 사람들속에는 계모의 얼굴도 잠간 보였다. 아남은 후들후들 떨리는 다리로 자전거에서 내렸다. 까만 길고양이가 아츠러운 비명을 지르며 그의 자전거 앞으로 뛰여들었다. 아남은 자전거핸들을 부여잡은 채 땅우에 넘어졌다. 하늘과 땅과 불길과 사람들의 그림자가 빙빙 눈앞에서 소용돌이쳤다. 좋지 않은 예감을 느끼며 아남은 입술을 깨물었다. 여기가 지금 이 세상 현실인지, 아니면 꿈속 음부인지 아남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10    [단편소설]상냥한 친구들 댓글:  조회:339  추천:0  2019-07-17
상냥한 친구들 금희   내 친구 영란은 여러 날의 고민 끝에 결국 그번의 동창모임에 출석하기를 결정했다. 미국은 최초의 흑인대통령이 집정하고 있었으며 중동 등 일부 개별적인 지역을 제외하고는 무력보다 대화를 강조하는, 비교적 평화스러운 시기였었다. 20세기 70년대 태생인 영란은 같은 세기 30년대에 있었던 세계대전의 혼란을 틈타 조선에서 중국으로 이주해온 조부모 덕분에 28살까지 쭉 그곳에서 살아온 경력이 있었다. 신장 153센치의 영란은 키가 좀 작은  편이였고 약간 말랐다 싶은 체형에 이례적으로 어딘가 서구적인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 실리콘을 넣지 않았다 그러면 믿기 어려울 정도로 코가 날이 섰고 동양인 치고 쉽게 마주칠 수 없는 크고도 륜곽 선명한 쌍가풀눈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싸구려 캐쥬얼을 입기 좋아할 뿐 아니라 좀처럼 화사한 화장도 하지 않아 세련됨과는 거리가 있는 녀자라서 많은 사람들과 함께 섰을 때 그 속에 묻히기 십상인 축에 속했다. 가난하고 착하며 자신감이 결여된 조선족 부모에게서 자란 다수의 사람들이 그러하듯 영란은 말수가 적었고 늘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려고 지나치게 애썼으며 반대로 자신의 욕구를 정확하게 표현하는데는 어딘가 서툴렀다. 말하자면 “김치찌개 먹을가, 된장찌개 먹을가?”라고 물을  때마다 거의 매번 동행한 사람의 입맛을 생각하며 “아무거나.” 라고 대답하는, 때로 사람 속 터지게 하는 그런 타입이였다. 속눈섭이 길고 까만 그녀는 늘 반짝이면서도 조심스러운 눈빛으로 주위 사람들을 바라보군 했는데 어쩌다 한번 까르르 웃음이 터질 적이면 사실 자신의 눈의 라인이 얼마나 아름답게 꼬리쳐 올라가는지 스스로 잘 느끼지 못하기도 하는 사람이였다. 물론 나의 조부모님도(다른 동창들의 할아버지와 할머니도) 조선인이였으며 나 또한 영란과 마찬가지로 중국의 조선족 동네에서 소학교와 중학교를 마쳤었다. 영란이 남편과 함께 한국으로 떠난 뒤 나는 여전히 중국에 남아 직장을 다니며 생활하고 있었으므로 그 번의 동창모임 같은 경우는 내게 있어 고민거리가 될 수 없었다. 아주 돈이 많거나 약간 모자란 ‘칠부(칠푼이)’들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우리의 중학교 동창들 중 일부러 비행기 왕복티켓을 사서, 것도 별로 정중하지도 않은 모임을 위해 날아가고 싶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니까.  나는 위챗에다가 모임에 동참하고 싶지만 이번엔 유감이라고 문자를 남겼고 친구들 역시 모두 그런 나를 리해해주었다. “그러게, 이럴 때 서로 얼굴 보면 얼마나 좋겠냐만 시간도 안되고 장소도 그러니까…”, “담엔 우리 중국에서 보자.” 정말이지 다들 친절했고 어른스러워졌으며 서로를 존중할 줄 알았다. 하긴, 우리 나이도 이제 마흔이 넘어가니까. 중국에서 자란 사십대 초반의 조선족이란 말은 그가 전쟁의 잔허로 잉태되고 그 후유증 속에서 자랐으며 개혁개방이란 사춘기를 거쳐 지금 평화공존의 새 천년을 살고 있다는것을 의미하기도 하지 않던가. 그러나 영란은 나와 상황이 달랐다. 영란이 출근하는 신세계백화점은 대림동에서 지하철로 반시간 정도의 거리에 있었고 그녀가 세내여 살고 있는 빌라 역시 한시간 내로 이동할 수 있는 반경 안에 있었다. 게다가 그들이 잡은 모임날자는 바로 영란의 휴일날이기도 했다. (실은 그들이 날자를 정할 때 한 사람이라도 더 모이게 하기 위해 영란의 휴일을 물어 참고사항에 넣은 것이였다.) 영란은 그들에게 답장을 보내기 전에 먼저 내게 음성메시지를 보내왔는데 그렇게 가까운 곳에서 휴일을 조절해야 하는 번거로움 없이 참석할 수 있는, 7~8년만에 꽤 많은 수의 동창들을 단번에 볼 수 있는 모임이라 할지라도 별로 가고 싶지 않다는 의사를 밝혔었다.  “싫은건 아닌데, 그렇다고 꼭 가고 싶다는 마음도 아니야.” 그 즈음 목욕탕관리사로 일하던 그녀의 남편이 실직하면서 미처 받지 못한 권리금이며 어쩌다 방학 기간 그녀의 아이를 데리고 한국으로 왔다가 허리를 다쳐 누워있는 시어머니를 생각하면 그녀에게 동창들과의 만남을 순수하게 즐길 수 있는 여유가 부족한 것은 얼마간 당연해 보였다. 그러나 한편 내가 알고 지낸 영란을 생각하면 여태 어떤 상황 속에서든지 언제 한번 기꺼이 그런 모임에 참석해 본 적도 없었던 것 같았다. “그래, 그럼. 시어머니 병시중을 구실 삼으면 되겠네.” 하고 내가 대답했다. “그렇지? 그러면 되겠지? 이렇게 가까운 곳에서도 안 간다고 누가 뭐라고 하진 않겠지? 하긴, 나 하나 빠진다고 어느 누가 신경이나 쓰겠어?” 내 답장을 보고 반나절이나 지나서야 영란은 음성으로 메시지를 보내왔는데 분위기가 모름지기 아쉬운 듯 느껴졌다. 어렸을 때부터 소꿉친구로 쭉 같이 자라왔던 터라 그녀를 너무 잘 알고 있는 나는 그 메시지를 듣고 이렇게 답했다. “얘, 너 가고 싶으면 그냥 가. 누가 꼭 챙겨줘야 가냐? 가서 너 보고 싶었던 사람 만나고 재밌게 수다 떨고 그러다가 오면 되지.” 그랬더니 영란은 다시 반나절이 지나서(퇴근하기를 기다려) “글쎄…” 라는 애매한 문자를 보내왔었다.  다음날 점심 쯤 영란은 내게 그 모임에 나갈 거라고 알려주었다. 그들한테 시어머니 병시중 때문에 가지 못할 것 같다고 말했더니 아니 어디가 얼마나 아프냐고, 곁에 사람이 없으면 안될 정도냐고 물었다 했다. 융통성이 부족해 둘러대기를 잘하지 못하는 영란은 급히 그 정도는 아니라고, 실은 남편도 실직이라 집에 있긴 하다고 했다 한다. 그러자 친구들은 하긴 너 여태 출근도 했으니까 반나절 쯤 더 잔업(加班)한다 셈 치고 오면 되겠네 하며 영란 대신 결론을 보더라 했다. 그 말을 듣고도 영란이 여전히 주밋거리자 보다 못한 다른 한 친구가 그녀에게 에이 정말 이러기냐고? 누구처럼 먼데 있는 것도 아니요, 정말 오지 못할 상황도 아니면서 자꾸 못 온다 그러는게 말이 되냐고, 일부러 너 시간 맞추려고 미리 휴일날자 물어본 줄 다 알면서 그런다고 약간 세게 밀어붙였다고 했다. 그렇게 되고 보니 영란은 자신이 너무 자기중심적으로만 고려했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 친구들한테 미안해지려는 마음까지 생기는 바람에 그만 소심하게 웃음으로 그들의 결론에 암묵적인 동의를 표할 수 밖에 없었다고 했다.  “그럼 뭐. 가보면 되겠네. 오랜만에 옛친구들 만나면 좀 좋냐? 가서 옛날 생각 하면서 얘기도 하고 스트레스도 풀고.” 나는 영란에게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이틀이 지난 뒤 영란은 또다시 번민스러운 어투로 내게 메시지를 남겼다. “얘, 이번엔 창옥이도 온다네. 걘 미국 갔다길래 당연히 못 올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창옥은 미국에서 한국으로 들어온 지 수개월 쯤 된다는 것이였다. 학교시절에도, 더 어렸을 적에도 사람 북적이는 것을 좋아했던 친구라 이런 모임을 마다할 리가 없었을 것이였다. 전직 기러기아빠였다는 한국 남자와 갓 재혼한 창옥은 수원에서부터 남편의 차를 끌고 서울로 올라갈 것이라고 자신의 열의를 보였다고 했다. 영란은 내심 그녀의 지나친 열정이 반갑지 않았지만 친구의 열정이 불편해서 이미 내린 자신의 결정을 번복하는  것은 유치한 일이라 생각되여 아무 내색도 하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모임에 가기만 하면 어쩔 수 없이 마주치게 될 창옥을 상상하고 그녀와 있었던 여러 껄끄러운 일들을 떠올리며 찝찝해하던 나머지 나라면 자신의 기분을 알아주지 않을가 라는 마음으로 내게 문자를 했던 모양이였다.  ‘창옥’이라는 이름을 듣자 내 머리 속에서도 몇컷의 별로 유쾌하지 않았던 장면들이 스쳐지났다. ‘창옥’은 영란과 나와 같은 소학교, 중학교를 다녔던 바로 우리와 한 동네에 살았던 친구였다. 여느 동창들 보다도 많은 시간을 함께 했던 친구였지만 동시에 가장 만나고 싶지 않은 친구이기도 했다. 창옥은 우리 셋 중 키가 제일 크고 입고 다니는 옷도 제일 비쌌으며 성격마저 활달하고 자신감 넘쳤었다. 리해관계에도 셈이 밝아 친구들 속에서 어떻게 하면 주도권을 빨리 잡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여서 어렸을 적 그녀는 항상 우리에게 새로운 놀이를 가르쳐주고 어떤 놀이를 어떻게 할 것인가를 결정해주는 역할을 맡았었다. 어떤 바보 같은 경우에는 누구랑 친하게 지내야 할 것인가 하는 것까지 조종하려고 했지만 말이다.  영란이 재정대학원을, 내가 연변대학을 다니던 어느 겨울, 고향동네로 설 쇠러 돌아온 동창들 여럿이 만났던 자리에 창옥도 끼여있었는데 나는 그 뒤로 아직 그녀를 직접 만나본 일이 없었다. 그날의 창옥은 그 시절의 최신 류행을 쫓아 두꺼운 입술선을 그리고 골병환자처럼 보이게 하는 진한 커피색의 립스틱을 바르고 있었는데 빽 안에는 어느 정도 있는 사람들만 차고 다니던 BP호출기도 가지고 있었다.  그때 우리는 술을 좀 마셔서 약간 들떠있는 상태였었다. 누군가 창옥이 낸 돈으로 사온 구운 닭을 뜯으며 넌 참 잘 나가는가 부다, 고 운을 떼자 다른 친구들도 그녀의 옷이며 핸드빽이며 반지 따위에 대해 궁금했던 것을 물어보기 시작했다. 고중을 중퇴하자 바로 사회생활에 뛰여든 창옥은 우리들의 눈에 이미 성숙되고 로련한, 뭘 좀 꽤 아는 사람처럼 보였었다. 창옥은 ‘사회’라는 곳에 대해, 중국의 개혁개방을 좇아 들어온 외국기업들에 대해 그리고 인간관계 처리의 기술에 대해, 지어 인생에 대해 뚝을 넘은 강물마냥 거침없이 지절거렸다. 그녀에 따르면 ‘사회’는 ‘학교’와 완전 다른 곳이며 중국은 지금 도처에 ‘기회’라는 것이 발에 채일 정도로 넘쳐나고 있는  중이니 따라서 이 같은 호시절에는 학교에서 ‘죽은 글’을 배우고 있을 것이 아니라 사회에서 ‘살아있는 경험’을 쌓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했다. ‘모든 것이 돈을 향하는一切向钱看’ 시대가 왔으니까. “나 고중도 졸업하지 못했잖어? 근데 나 지금 우리 회사 사장님 통역 겸 비서야. 그 말이 뭔고 하니, 중국어 한마디도 못하는 우리 사장님, 모든 결재를 나 없이는 못한다는 얘기지. 저번 달 우리 회사에서 새로 뽑은 대학생들만 셋이거든. 대학만 나오면 뭐하게? 사회경험 제로에 시키는 일 밖에 모르는 위인들인데…” 그녀의 말에는 신비한 령적 세상을 실질적으로 체험했다는 종교인의 것 같은 구체적인 확신이 있었다. 그녀는 그 같이 웅변을 펼치며 자신을 둘러싼 친구들을 둘러보면서 야릇한 자신감에 찬 웃음을 지었다.  공교롭게도 그날 모인 친구들 중 소위 ‘대학’을 다니면서 ‘죽은 글’을 배우고 있는 애들이라곤 나와 영란 뿐이였고 모임 내내 ‘시키는 얘기’ 밖에 하지 않고 소심하게 구석자리를 지키고 앉은 사람도 우리 둘이였다. 창옥처럼 학교를 중퇴했거나 대학에 진학하지 못한 탓으로 취직자리를 알아보고 있던 다른 친구들은 그녀의 웅변에 십분 공감하며 기분 좋게 웃을 수 있었지만 나와 영란은 그렇지 못했다. 대학의 입학률이 많이 낮았던 그 시절, 우리는 그녀가 얼마나 ‘대학’에 가고 싶어했고 특히 성적 면에서 얼마나 영란에게 뒤떨어지고 싶어하지 않았는 지를 알고 있었다.   지금 우리는 모두 그 날 창옥이 쓴 돈은 사실 노래방에서 술을 마시거나 혹은 더 은밀한 행위를 통해 벌어들인 돈이라는 것을 떠도는 풍문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그 뒤 창옥은 실제로 한국 독자기업에 취직했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정말 사장님의 통역 겸 비서가 되기도 했었다. 그녀는 청도 중심가에 꽤 고급스런 아빠트를 사서(물론 회사돈으로) 사장님과 함께 지내며 일을 했는데 얼마간 지난 뒤에는 자신의 명의로 된 아빠트를 고향 읍내에 사놓기도 했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매번 딸이 보내온 고급 화장품이며 옷이며 보약 따위와 돈깍지를 자랑하기 위해 부지런히 동네 마실을 다녔고 한쪽 눈의 초점이 약간 빗나간 영란의 어머니한테 와서는 유별나게 액수를 강조하기도 했다. 그때 창옥의 아버지는 벌써 그녀의 어머니를 떠나 다른 집의 안방으로 들어가 산지 여러 해가 넘었었다.  영란은 왜 창옥과의 만남을 불편하게 생각했을가. 혹은 창옥의 동창모임 출현에 대해 왜 영란이 유독 심한 거부반응을 느끼게 된 것일가. 영란의 오랜 규방친구闺蜜로서 나는 혹시 영란이 아직도 중학시절과 창옥이 중퇴하기 전까지의 고중시절에 겪었던 어떤 암울한 감정들을 내내 마음속에 두고 있지 않는지 추측해보았다. 정상적인 사춘기 소녀라면 누구라도 겪어보았을 자질구레한 사건들에 얽매인 감정을 말이다.  그중 한가지만 짚고 넘어가보자. 중학교를 다닐 적이였다. ‘베틀린장벽을 허물어달라’는 레이건의 연설이 있은 뒤였고 쏘련은 아직 해체되기 직전이였으며 영원한 적이리라 생각했던 중국과 미국이 공식수교한지 10년이 거의 되가는 때였다. 총알이 비발치듯 날아다니고 폭격기의 폭탄에 신체 일부가 떨어져나가는 그런 진정한 전쟁은 우리에게 실감을 주지 못했지만 자라는 내내 ‘봉쇄’니 ‘제재’니 하는 랭전의 용어들은 귀따갑게 들었던 것 같았다. 중학교에 올라오면서부터 반이 달라진 나는 더 이상 창옥이나 영란과 함께 붙어다니지를 못했는데 한반으로 편성된 그 두 사람 역시 예전 같은 사이는 되지 못했었다. 씀씀이가 헤프고 대인관계에 적극적인 창옥은 친구들 사이에 주도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위치에 이르렀고 그녀와 비슷한 다른 두명의 녀자애들과 ‘세송이 장미파’를 결성했었다. 반대로 영란은 소학교시절과 너무 달라진 중학교의 분위기에 압도당하여 전보다 더 소심하게 처신하면서 평범하다 못해 애들에게 자주 잊히는 존재로 그 시절을 살아갔었다. 창옥은 ‘학급의 꽃(班花)’만큼의 미모는 아니였지만 자신의 외모에 대해 자신감이 있었고 실제로 남학생들한테 상당한 인기를 가지고 있었는데, 해서 그런 그녀가 경쟁력이라곤 거의 론할 수 없는 영란에게서 느낀 질투라기보다 부당하다고 생각한 감정은 그만큼 더 굳고 강했을 것이였다.  문제남은 중3때 우리 학교로 온 전학생이였다. 중키에 다부진 근육을 가졌고 눈섭과 눈 모두 가로로 쭉 째여진, 날카로운 인상의 남학생이였다. 전학생들에게 처해지는 관례에 따라 그는 골목길에서 일곱명의 남학생들의 급습을 받았는데 학교사상 최초로 그들을 모두 때려눕힌 ‘영웅’이 되였었다. 소문에 의하면 문제남은 싸움질에 이골이 터서 퇴학처분을 받았다 했고 그 나이 또래 남학생들이 의례 그러하는 련애질에는 오히려 천성적으로 무뎠던 것 같았다. 창옥은 명색이 ‘장미’인 자신에게 별 관심을 가지지 않는 문제남에게 신경이 씌여했고 같은 반에 있지 않는 나 같은 ‘대중’조차 느낄 수 있을 만큼 그에 대한 호감을 로골적으로 드러내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제남은 여전히 남학생들 하고만 히히덕거릴 뿐 창옥을 비롯한 다른 ‘장미’나 녀학생들과는 말조차 섞는 일이 드물었는데 그러던 어느날 그가 뜬금없이 갑자기 영란에게 말을 걸기 시작한 것이였다. 처음에는 만년필을 빌려달라, 공책 한장만 찢어주라 하더니 유치한 초딩처럼 욕설을 적은 종이뭉치를 그녀 뒤통수로 던지는가 하면 가방에 죽은 개구리를 넣어 자지러지게 소리를 지르게 하기도 했었다. 엉겁결에 사람들의 구설수에 오르게 된 영란은 창피하고 수치스러워서 피하다 못해 화를 냈다. 영란에게 있어서 문제남의 그런 식의 관심은 전혀 반갑지 않을 뿐더러 다만 그에게서 괴로운 감정만을 느꼈을 뿐이였다.  그런 와중에 영란은 다른 종류의 불안한 공기를 함께 느끼고 있었는데 그것은 중학교에 오면서부터 멀어지기 시작했던 창옥의 그림자가 다시 그녀에게로 가까이 눌러오고 있다는 것이였다. 영란이 무의식간에 뱉은 어떤 말들이 창옥에게는 영란의 위선을 증명할 수 있는 빌미로 잡혔으며 녀학생들 사이에서 모종의 분위기를 조성하는데 성공하여 얼마 동안 나는 영란이 매일 혼자 앉아 밥을 먹는 모습을 안스럽게 지켜보기도 했었다. 졸업식이 가까와와서 대형 ‘사교무’ 종목을 련습할 때 문오文娱위원인 창옥은 자신의 파트너로 문제남을 세웠고 영란에게는 헐렁한 셔츠를 입혀 어느 녀학생의 우습강스러운 ‘남자’ 파트너로 분장해주었다. 우리는 대부분 그것이 의도된 ‘배려’라는 것을 알았고 영란 자신도 남자로 분장한 자기 모습에 대해 굴욕감을 느꼈다. 영란에게 차례진 셔츠는 가장 누르께하고 가장 컸으며 그녀가 손잡고 돌려줘야 하는 파트너는 때로 정상적인 분별을 할 수 없어서 아무도 가까이하고 싶어하지 않는 위인인데다가 그녀보다 키까지 더 컸기 때문이였다.  영란은 후날 고중에 진학해서도 키가 별로 더 크지를 못했지만 전체적으로는 더 예뻐지고 총명해졌다. 항상 하위권이던 성적은 점점 우로 올라가더니 어느 월별 시험에서는 가까스로 중위를 유지하던 창옥을 앞지르기도 했다. (성적이 꽤 좋았던 나와 한반으로 되여 우정을 계속 쌓을 수 있었던 것이 그녀에게 적지 않은 위로가 되였던 것 같다.) 그러나 그때부터 사실 창옥은 급속히 살이 찌기 시작했고 다른 학교의 어중이떠중이들과 어울려 다니느라 성적 또한 가파른 하강선을 그리기 시작했던  것이였다.  이것은 모두 사실이였고 또한 이미 지나간 사실이였다. 매일매일 홍수처럼 터져나오는 국제뉴스와 민간언론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이제는 아무도 그때처럼 유치하고 집요하게 살려 하지 않는 세상이 되였다. 누구에게나 불편한 과거와 껄끄러운 친구와 바보 같았던 자신의 ‘흑력사(黑历史)’가 있지 않는가. 그래서 나는 영란에게 말했다. “얘, 이젠 다 지나간 일이야. 그땐 우리 모두 철이 없었잖아. 너 설마 아직도 그런 것 가지고 창옥을 불편해하는 건 아니겠지?” 나는 또 이렇게 말했다. “불편해하는 사람이 여전히 약자라는 거 알고 있지? 다른 애들은 다 괜찮은데 그리고 창옥이 걔는 너 만나는 거 아무렇지도 않을텐데 너만 바보같이 그렇게 생각하는 거 아니야?” 그리고 나서 나는 몇년전에 만났던, 내가 편견을 가지고 기억하고 있었던 몇몇 동창들의 경우를 생각해보았다. 녀학생들을 그렇게 많이 집적거리던 ‘바람둥이’ 남학생은 의젓한 가장이 되여 마누라에게 충성을 다하며 살고 있었고 입이 너무 가벼워 친구들 사이에 성실치 못하다고 외면을 당하던 어떤 녀학생은 누구보다 열심히 직장생활을 하고 있었으며 자신의 주먹을 믿고 다른 애들을 괴롭히는 것을 일삼던 어떤 이는 상상 외로 양같이 순한 남성이 되여 술자리 구석을 지키고 있는 모습도 보았었다. 살아가고 있는 사람의 상황은 반드시 변하는 법, 사춘기 극단으로 치우치던 한때의 모습을 가지고 서뿔리 그의 평생을 판단할 수는 없는 노릇이였다. 나는 그런 나의 생각을 영란에게 모두 말해주었다. 리해심이 많은 그녀는 정말 그런 것 같다고, 아마도 그녀 자신이 아직 편견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던 것 같다고, 이제 그냥 정말 평정심(平静心)으로 모임에 나가보겠다고 대답했다.    그래서 영란은 모임날자에 맞춰 남편에게 량해를 구한 뒤 그녀 옷장에서 가장 어리게 보이고 가장 값져보이는 캐쥬얼 정장을 찾아입고 대림동의 어느 숯불갈비집으로 갔다. 노란 은행나무잎들이 우수수 그녀의 신발 아래 떨어져있었고 담장 너머 어느 집 마당가에는 빨간 홍시를 달랑이고 있는 감나무가 그녀를 내다보고 있었다. 십년 가까이 치열하게 일하면서 살아온 서울이였지만 그날 서울의 거리는 마치 처음 만난 새로운 거리마냥 몰라보게 아름답고 정겨웠었다. 돼지갈비집에는 그 모임을 주선하고 영란의 휴일날자를 ‘특별히’ 체크해보던 몇몇 친구들이 벌써 와있었다. 한 친구는 인천의 60평대 아빠트에서 남편과 두 아이와 살고 있다 했고 한 친구는 중국과 한국을 오가며 무역회사를 경영하고 있다고 했고 다른 한 친구는 려행사 사장이 되였다고 했다. 그중 한명은 왕년에 창옥이랑 같이 결성했던 그 ‘세송이 장미’ 중의 한송이였다. 모두들 영란의 이름과(성을 포함해서) 그녀의 옛모습을 기억해내려고 애썼으며 친근한 목소리로 인사를 나눴다. 분위기는 영란의 예상보다 더 화기애애하고 흥겨웠는데 그녀는 신발을 벗고 올라가면서 무의식적으로 친구들 속에 창옥의 모습이 보이는지를 살폈다고 했다. “어머, 영란이 아니니? 조영란! 맞지? 세상에, 이게 얼마 만이니?” 하는 새된 소리가 들려 고개를 돌려보니 화장실에서 손을 씻고 나오는 창옥이가 등뒤에 서있더라고 했다. 얼굴피부는 탄력이 약해지고 엉덩이살도 처져버린 아줌마가 되였지만 꼼꼼한 화장과 멋스런 셋팅펌으로 풀어헤친 머리와 럭셔리한 옷차림 덕분에 여전히 친구들 속에서 튀여보이더라고 영란은 느꼈단다. 아무 그늘 없이 웃으며 자신을 반기는 창옥을 보면서 영란은 어정쩡하게 선 채로 일전 자신의 불합리한 념려들을 다소 자책했다고 했다. 영란은 순간, 창옥을 알게 된 이후 처음으로 그녀의 파란만장했던 인생에 대해 그녀에 근접한 립장에서 생각해보게 되였으며 왜 전에는 그녀를 좀더 립체적인 인간으로 바라보지 못했던가 하는 아쉬움이 들기도 했다 한다. 아버지의 바람기와 어머니의 히스테리, 부모의 리혼과 학교중퇴, 유부남과 동거하며 흘러보낸 청춘, 급작스런 결혼, 잇따른 리혼과 이민생활에서의 재혼… 그러고 보니 사람마다 자신의 이야기가 있는 것이였고 누구의 인생이나 록록치 않다는 생각도 들어 거기 앉은 친구들 모두가 그렇게 친근해보이더라고 했다. 매번 원족이나 파티 때 영란의 존재에 대해 관심도 없고 그녀의 소심함과 민감한 정서를 배려하지도 않았으며 지어 한동안은 그녀와 함께 앉아 밥 먹기조차를 거부했던 친구들이 말이다. 영란이 그들과 함께 돼지고기를 구워먹고 있을 때 나는 아이의 려권을 신청하러 시공안국에 갔었다. 차례를 기다리는 동안 차거운 의자에 무료히 앉아있다가 나는 간간이 올려지는 그들의 사진을 열어보았다. 고기가 깨끗한 숯불그릴에 올려지고 아직 색갈마저 변하지 않았을 때, 그들은 같은 상에 모여앉은 수대로 집게를 들거나 저가락을 든 채 브이자를 그리며 사진을 찍었다. 영란의 얼굴은 창옥이 찍힌 사진 속에 함께 나와있었다. 창옥은 사진에서 영란이 후날 묘사하던 모습보다 훨씬 우아하고 화사하게 찍혔고 변두리 쯤에 앉은 영란은 내가 화상채팅을 할 적마다 보던 그 얼굴보다는 약간 촌스럽고 비률이 어색하게 나와있었다. 둥그스름하니 모여앉았던 터라 끝자리에 있을수록 얼굴이 변형되기 쉬웠을 까닭이였다.  어느 정도 먹고 마시고 나서 그들은 또 다른 사진들을 올렸는데 남자와 녀자, 이 상과 저 상의 친구들이 뒤죽박죽 섞인 채로 여러가지 표정들과 포즈를 취하고 찍은  것이였다. 연거퍼 일여덟장을 올렸지만 영란의 모습은 모두 보이지 않았다. 모임을 주선했던 친구들이나 창옥의 얼굴은 자주 보였다. 불그스름하니 취기가 오른 창옥은 찍힌 사진마다에서 약간 과장된 포즈로 활짝 웃고 있었는데 그 웃음 속에서 나는 아스라이 멀어지던 그녀의 옛모습을 무심히 기억해내였다. 마지막으로 올라온 두어장의 사진 속에는 영란도 있었다. 술에 약한 영란은 얼굴이 빨개진 채로 술잔을 들고 수줍게 다른 친구의 잔과 부딪치는 중이였다. 그릴 우의 고기들은 까맣게 그을렀고 밑반찬 접시들은 여기저기 포개져있었으며 엉거주춤 얼굴을 반쯤 돌린 영란의 옆모습은 얼핏 즐거운 듯 보였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여전히 그 분위기에 잘 녹아들지 못한 듯 서툴게 느껴졌다.  요추가 어느 정도 나아진 시어머니를 아이와 함께 중국으로 돌려보내고 나서 영란은 그날의 모임에 대해 얘기해주었다. 그녀의 짝꿍과 그녀의 아래침대에 있던 친구를 만났고 그녀 뒤자리에 앉았던, 그녀와 꽤 친했던 친구는 일본에 간 뒤로 어느 동창과도 련락이 닿지 않았다고 했다. 어떤 애들은 살이 많이 쪘고 어떤 애들은 벌써 머리숱이 현저히 적어졌으며 어떤 애들은 완전 다른 사람으로 착각할 만큼 더 예뻐지고 밝아졌더라고 했다. 떠들썩한 분위기 속에서 영란은 덩달아 즐거워졌는데 창옥이 열정적으로 권하는 바람에 얼결에 그녀와 같은 상에 앉게 되였다고 했다. “그래서, 별 다른 얘기는 하지 않았냐?”고 나는 영란에게 물었다. “글쎄, 그냥 다른 친구들처럼 소소한 수다를 떨었을 뿐.”이라고 영란은 대답했다.  창옥은 반짝이는 집게를 들고 능숙한 솜씨로 그 상의 그릴 우의 갈비를 구워선 싹둑싹둑 잘라 친구들에게 집어주더란다. “야, 넌 아직도 고 만큼 밖에 자라지를 못했니? 신랑은 키가 좀 큰 사람으로 찾았는지 몰라…” 창옥의 웃음기 섞인 롱에 친구들이 영란을 돌아보며 가볍게 웃었다. 작은 키에는 아래우 같은 계렬의 컬러의 옷으로 코디를 해줘야 좋다고 창옥은 부드럽게 자신의 노하우를 알려주었다. 아직 젊은 나이인데 화장도 좀 하고 다니라는 조언과 함께. 창옥은 다른 친구들에게 준 것보다 더 많은 갈비를 집어 영란의 대접에다 놓아주었다. 어느 친군가 지나가는 소리처럼 창옥에게 너 오늘 술 마시면 어떻게 운전하고 내려가겠느냐고, 느그 새 남편한테 한소리 듣지 않겠냐고 말하자 그녀는 쿨하게 웃어버렸다. 사람마다 모두 자기 인생 사는 거지 무슨 남편의 기분 때문에 동창모임도 제대로 못하는 답답한 인생을 살겠냐고 그녀는 멋지게 받아쳤다. 사실 새 남편과는 미국에서부터 알고 지냈는데 그들의 결합은 상대의 사생활에 대한 불간섭과 서로의 인격에 대한 상호 존중을 가장 기본적인 전제조건으로 이루어진 것이라는 설명도 덧붙였다. 당대 가장 민주적이며 최고 선진국에서 생활해본 사람다운 말투였다. 그녀의 설명을 들은 다음 다시 그러루한 물음을 그녀에게 묻는 친구는 없었다. 술병들이 하나 둘 비워지기 시작하자 창옥은 다시 바빠져서 이 상 저 상 다니며 친구들과 열정적으로 건배하며 활기찬 목소리로 금후의 우의를 새롭게 다졌다. 영란은 남편과 짧게 통화하여 시어머니와 아이의 상태를 확인하였고 그러는 동안 점점 뜨거워지는 모임의 분위기를 느끼고 있었다. 좀 더 수위 높은 육담과 롱담들이 친구들 사이에서 오가기 시작했고 벌써 알콜의 힘을 빌어 허풍을 떨어대는 남자들도 생겨났다.  친구들의 상을 한바퀴 다 돌고 돌아온 창옥은 여직 그 상에 오도카니 앉아있는 영란을 보고 넌 참, 술이란 원체 서로 붓고 마시는 재민데… 혀를 차며 잔을 채워주었다고 했다. 창옥은 팔소매를 둥둥 걷어올려 붙인 채 재빠른 손놀림으로 같이 앉은 친구들의 잔을 찰찰 채워주면서 챙챙한 소리로 영란에게 이렇게 말했다. 사람 사는게 그런 거지, 응? 이렇게 친구들 자주 만나고 만나서는 부어라 마셔라 통쾌하게 놀아주고… 이런 게 사람 사는 재미 아니겠니? 영란도 모처럼의 모임분위기에 맞춰보려 애쓰는 마음에서 창옥의 잔을 채워주려고 했지만 곁에 앉은 다른 친구가 손에 들고 있던 술병을 벌써 창옥의 잔으로 가져가는 것을 보고 그냥 있었다고 했다. “내가 워낙에 소심하잖니? 이런 건 아직도 서툴러서 그래…” 하며 영란은 스스로 용기를 내여 친구들에게 웃어보였다. 창옥은 잔을 들어 친구들의 것과 부딪치면서 영란에게 “넌 어쩜 학교 때나 지금이나 아직도 고대로냐? 소심한 게 뭐 자랑이냐? 그 성질머리 고쳐라 좀…” 하고 오랜 친구답게 선의의 핀잔을 주었다. 그 말을 들은 같이 앉은 친구들 역시 모두 영란을 보며 웃음을 지었다.  그러고 보니 창옥의 말처럼 “술자리의 룰”에 능숙한 친구들은 끊임없이 서로의 잔을 채워주고 자신의 잔을 들고 이런저런 권주제의를 하였으며 개중 어떤 이는 중국정부의 관리들 만큼이나 멋들어진 연설을 중국어로 선보이고 있었다. 몇번이나 용기를 내여 친구들한테 술을 붓고 간단하나마 권주제의를 해보려고 했지만 영란은 끝내 한번도 성공하지 못했다. 매번 그녀가 술병을 잡으려고 결심한 순간, 이미 술병을 확보하고 일어선 다른 친구들이 그녀의 소심한 용기를 꺾어버렸다. 결국 영란은 그런 짓거리를 포기하고 친구들이 연설을 하면 들어주고 술을 부어주면 마시고 권하면 함께 잔을 부딪쳐주는 역할을 자청했다.  분위기가 점점 흐트러져가며 친구들의 화제도 다양했는데 무역회사를 경영한다는 친구의 사업얘기며 려행사 사장의 여러 나라 풍속얘기며 60평대 아빠트에서 산다는, 이제 한국적이 된 친구의 애들 교육얘기… 같은 것들이 모두의 관심을 일으켰었다. 친구들은 창옥의 영어실력과 미국생활에 대해서도 듣고 싶어했다. 그들은 모두 열심히 잘살고 있는 듯 보였으나 그들의 화제에 참견할 수 없었던 영란은 그들이 얘기하는 내내 옛날의 짝꿍이랑 학교 시절을 회상하며 간간이 수다를 떨었다고 했다. 자신의 얘기를 다 마치고 난 창옥이 영란에게 넌 어떻게 살고 있는지 말 좀 해봐라며 시어머니의 허리와 남편의 실직 그리고 할머니 손에서 자라는 그녀 아이에 대해 물어보았다. 일시에 친구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쏠리는 것을 느끼며 영란은 얼마간 불편했는데 적당히 둘러대는 화술에 약한 그녀는 약간 얼굴을 붉히면서도 그 별로 유쾌하지 않은 상황들을 비교적 가감없이 얘기해주었다. 친구들은 영란의 얘기에 머리를 끄덕이며 약간의 안스러움을 표했고 곧 다시 일어나 자자, 오늘은 그냥 아무 생각 말고 즐겁게 마시자는 식으로 서로의 잔을 부딪쳤었다.  모임이 파하고 돌아오면서 영란은 왠지 자신이 말수는 적었지만 쓸데없는 말은 가장 많이 한 사람처럼 느껴졌다고 했다. 사는 건 누구나 비슷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웬걸 자신만 그 친구들보다 더 불행하게 살고 있는 듯이 비춰진 것도 찝찝했다. 창옥만 하더라도 식당 마당의 구석에서는 현 남편과(아마도) 화를 내며 통화하는 것을 보았는데 말이였다. 그녀는 모임에 참석하기로 했던 자신의 결정을 후회하지 않으려고 즐거웠던 순간들을 계속하여 생각해보았다고 했다. 그녀가 먼저 일어나겠다고 귀띔하자 모임을 주선한 친구들은 강력하게 말렸다고 했다. 특히 창옥은 그녀에게 이젠 련락 좀 하면서 살아라, 카카오 스토리에다 사진도 많이 올리고. 하며 미국식으로 왜소한 그녀를 껴안아주기도 했다 한다. “나 참, 나 너하고도 여태 허그(그 명사는 창옥에게서 들은 것) 못해봤는데 창옥이 걔랑 그런 거 하게 될 줄은 몰랐다 얘.” 영란은 그 장면을 생각하며 큭큭 웃었다. 향수냄새와 폭탄주냄새가 어우러 풍겨나는 창옥의 품안에서 영란은 여러가지 감정을 느꼈지만 정확히 무슨 감정들이였는지 말할 수 없을 것 같다고 알려주었다.  암튼, 당분간은 다시 그런 동창모임에 가고 싶은 생각이 없다고 영란은 말했다. 그 ‘동창’들 속에 앉아있어보니 그녀는 여전히 작아보이고 가난해보이고 촌스러워보이고 서투르게 보인다고 느꼈던 때문이라 했다. 그녀는 내가 또다시 “그렇게 느끼는 사람이 약자라는 거 알지?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라고 말해줄가봐 급히 한마디 덧붙였다. “알아, 내 문제라는 거 알아. 나는 너무 민감하고 소심하고 약해. 어쩌겠어? 그렇게 생겨먹었는데.” 나는 그녀의 말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이 모든 것이 그녀만의 문제라고 하기에는 어딘가 부당하다는 것을 나는 느꼈다. 나는 그 얘기를 영란에게 해줄 수 없었는데 왜냐 하면 영란을 그런 감정 속으로 밀어뜨린 짓거리에서 나 자신도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였다. 나는 영란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세상 사는 게 참 그렇지? 꼭 누군가를 약자로 만들어야 자신이 강하게 되는 것은 아니지만, 실제로 우리는 모두 그렇게 살고 있잖아? ” 나는 뉴스얘기를 하면서 그 말을 해주었다. 인류에게 참혹한 상처를 남겨준 전쟁은 다시 벌어져서는 안되며 어떤 경우에든 폭력은 정당화될 수 없으며 오직 평화로운 번영을 위해 상호 협력해야 한다는 도리를 누구나 다 아는 시대에 말이다. “세상 참 어떻게 돌아가려는지 몰라. 모두들 말은 옛날보다 훨씬 문명하게 하면서도 무기는 전보다 더 치명적인 것으로 만들고 있잖아.”    그로부터 30여년이 지난 뒤 과연 세상은 다시 전쟁얘기로 날이 갈수록 분위기가 긴장해져갔다. 하지만 언제나 그랬 듯 일각에서는 이 모든 것이 곧 지나갈 것이며 이런 유치한 상황이 벌어지는 것은 인류가 아직 덜 성숙해서라고, 그러니까 좀더 나이가 들면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분명해질 날이 있다고 해석하고 있었다. 다행히 이미 나이가 많아진 나는 나의 아이들보다는 그런 정세에 덜 두려워했다. 해볕이 잘 들어오지 않는 작은 아빠트에서 옛날 물건들을 정리하면서 나는 영란과 나와 창옥이 찍힌 사진 한장을 찾아내고는 한참 동안 가물가물 멀어져간 우리의 어린 시절을 애써 떠올려보았다. 낮고 찌그러진 지붕의 영란네 집, 김치소 만두를 그렇게 맛나게 쪄주던 그녀의 어머니와 말을 더듬는 그녀의 아버지, 같은 증세를 보이는 그녀의 오빠며 그 오빠가 나와 영란에게 보여주던 작은 참새새끼, 높고 반듯한 창옥네 집, 큰 키에 멋쟁이였던 그녀의 어머니, 익살맞은 롱담으로 항상 아줌마들한테 인기짱이였던 그녀의 아버지, 유난히 그녀를 예뻐해주었던 그녀의 외사촌오빠, 그 오빠가 들고 다니던 나무권총… 마을 어린이집에서 금방 서로를 알게 되였을 때, 선생님이 접어준 노란 배의 한 귀퉁이가 찢어지자 창옥은 영란에게 서로의 배를 바꿔가지자고 했단다. 창옥의 배는 노란색이였고 영란의 배는 초록색이였으므로. “적극적인 애들은 그만큼 공격성도 강한 것 같애. 얘, 내가 그 배 찢어진 거 보고 바꾸기 싫다고 하니까 바로 내 손에서 뺏어가더라. 아주 눈 깜짝할 새에.” 언젠가 영란이 그런 얘기를 해주었었다. 녀자애들이니까 이 정도지 영란의 오빠 같은 경우에는 골목대장 창옥의 외사촌오빠한테 정말 많이 맞으며 자랐다고 했다. 그건 나도 아는 사실이였다. 그때 귀쌈을 너무 많이 맞아서 오빠가 바보스럽게 되였는지, 해서 평생 제 노릇 한번 똑똑하게 못하고 사는 건지 모르겠다고 영란이 말했다. “그래서 얘, 난 창옥을 보는 게 싫어. 걔는 내게 너무 비참한 과거를 떠올리게 하거든.” 그렇게 얘기했던 영란이 이미 뇌졸증으로 이 세상에서의 삶을 마쳤다는 것을 나는 남아있는 동창들을 통해 전해들었다. 죽기에는 좀 아까운 나이라고 다들 유감을 표했었다. 창옥은 아직 건재했는데, 영란이 혹시 병원비 때문에 적정 치료기간을 놓친 게 아닐가고 애석해했다.  살아있을 날들이 많지 않았으므로 나는 그 즈음 시간을 거슬러올라가 옛날의 일들을 자주 생각하고 있었다. 거의 본능에 의해 움직이던 우리의 동년과 그 전, 우리가 잉태되였던 시절 그리고 그 시절을 존재하게 했던 어떤 ‘전쟁’을 말이다. 이미 돌아간 지 오래된 조부모님의 말로는 아주 유치하다 못해 야만스러운 전쟁이라 했는데 그 때문에 그들은 평생 지키며 살았던 자신의 것들을 모두 빼앗겼다고 했었다. 따뜻한 해빛 한줄기가 비쳐드는 창문가에서 나는 옛사진을 들고 30여년 전의 그날 영란과 창옥이 ‘허그’했다는 그 동창모임의 력사적인 한 장면을 생각해보았다. 나는 입을 벌리고 영란처럼 큭큭 웃었다. 청청한 하늘 아래, 영란이 걸었다던 노란 은행나무잎 수북한 인행도로며 빨간 홍시 달랑이는 감나무 보이는 담장을 그려보면서.  출처:2017 제2호
9    밤하늘의 투명한 시선들 댓글:  조회:219  추천:0  2019-07-17
밤하늘의 투명한 시선들 금희         여섯, 일곱살 무렵이였던가. 소피를 보러 바깥에 나갔다가 밤하늘 가득 반짝이는 별들을 보았다. 누군가 놀이 끝에 그대로 버려두고 간 것 같은 작은 구슬들 혹은 그 순간의 나처럼 온전히 혼자인 인간을 신비스럽게 내려보는 수많은 눈동자들을.    온 세상이 그들의 눈빛 속에서 불경한 소리를 죽였다. 나도 내 숨소리를 멈췄다라기보다 내 페도 저절로 움직임을 멈췄다. 너무 크고 너무 까맣고 흠잡을 데 없이 매끄럽고 둥근 하늘 그리고 너무 많고 너무 작고 너무 순수한 별빛들. 그들 앞에서 나는 X광선에 찍힌 흉곽사진처럼 속속들이 투시되였다. 뭐라고 더 말할 수 있을가.    서늘한 여름밤의 공기가 나를 부드럽게 스쳤다. 홀로 무한한 허공을 마주했던 그 순간이 아마 내가 처음으로 자의식에 대해 질문이 생겼던 때 같다. 눈을 몇번이나 껌뻑거렸던가. 나는 내가 정말 나로 살아있는 건지 그것이 문뜩 의심스러웠다. 방금 전까지 나와 함께 집안에 있던 가족들, 지금이라도 몸을 돌려 문을 열면 곧 다시 볼 수 있는 어머니, 오빠 … 이들이 과연 내 가족이고 내가 알고 지낸 사람들이 옳은 건지, 이 모든 것이 사실은 나를 따돌리고 저들 끼리 연출하는 연극은 아닌지 하는 상상을 했다.    그 느낌은 뭐라고 할가. 실은 아주 달콤하고 매혹적이면서도 견딜 수 없을 만큼 쓸쓸하고 외로웠다. 마치 액체상태인 물이 수증기로 변하듯이 어떤 이상한 주문에 걸린 내가 자신의 육체와 실재의 환경 속으로부터 탈피하여 다른 한 차원 속으로 공기처럼 날아가는 듯한, 빨려가는 듯한 혹은 사라지는 듯한 느낌이였다.    그런 체험 때문이였을가. 오래동안 나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원론자로 살아왔던 것 같다. 내게 있어서 세상은 불완전하고 악한 것이며 육체는 정신보다 하등한 것이여서 현실의 삶보다는 내면의식의 성숙이 훨씬 값어치 있는 것이였다. 그것은 데카르트의 심신이원론이나 칸트의 실천적이원론보다 오히려 플라톤의 이원론이나 혹은 령지주의에 가까운 것이였다.    어머니의 사랑과 은혜를 작문 속에 구구절절 써넣으면서도 정작 살갑게 어깨 한번 주물러 드리지 못하는 것, 그렇게 많은 실수와 부적절한 행위를 저질러놓고도 마음만은 그렇지 않았다고 스스로 안위 삼는 것, 그리하여 어느 순간 최선을 다해 작은 일상의 삶을 사는 이들을 향해 무가치한 일이라 비웃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 것이였다.    지금 나는 그 시절의 나에게 박수쳐주고 싶은 생각이 없다. 세상은 나에 대해 온전하고 선한 것이며 육체는 정신과 따로이 분리되여 론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인간의 존재 자체와 존재의 목적이란 동전의 량면성 같은 것이지 우렬의 순위가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러므로 인간에게 있어서 때로 가장 어려운 것은 고매한 리상이 아니라 하루하루의 일상이 될 수 있는 것, 나는 바로 그 평범함을 어려워하면서 매일매일을 조바심 내며 살고 있다.    소설 쓰는 일도 어서 그리되였으면 싶다. 이것은 인간의 령혼에 관한 조명의 시도가 아니라 잡지사에서 맞춰준 기한 내에 보내야 하는 것, 그 이상의 것이 되여서는 안된다고 오늘도 자신을 설득한다. 변명 같아보이지만 형이상학적 경향으로 살아가는 나에게 참으로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세상에 단단히 발을 붙이고 살자, 동년의 시절에 보았던 밤하늘 따위는 부디 잊고 살자. 먹고 입고 자고 살아가는 동안은 그렇게 하는 것이 이 세상에 대한 례의다. 눈을 뜨면 또 하루, 오늘도 제때에 잘 먹고 잘 자고 해야 할 일상들 잘하게 해주세요… 아침부터 기도를 통해 자신에게 일러둔다.     그러나 잊는다고 해서 무의식에서까지 잊은 것은 아니였다. 그 깊고 내밀한 역에서는 점점이 무수히 밝은 별빛들이 자유롭게 왕래하도록 내버려두었다. 언젠가 정말로 다른 차원의 세상으로 떠날 즈음에 인생을 정리할 시간이 있다면 다시 꺼내 펼쳐놓고 볼 수 있도록. 어느날 내가 다시 동년의 수많은 별빛 앞에 적라라히 서는 순간이 온다면 나는 과연 부끄러워 무너지지 않을 정도로 잘 버틸 수 있을가. 그 생각만 하면 살아가는 순간마다 아찔하다.    그러나 나는 본디 한줌의 흙이고 먼지인 것을, 아직 진흙덩어리처럼 실감나게 세상을 살아가는 법도 배우지 못한 것을. 그럴듯한 삶을 흉내낸 소설 하나 주물러놓지도 못한 것을.    내가 만들어낸 소설들이 마지막날, 그것들을 속속들이 들여다 볼 수많은 별의 눈동자 앞에 펼쳐지는 찰나를 생각한다. 그들의 눈에 찍힌 사진 속에는 과연 무엇이 남아있을가. 이 일을 더 이상 할 수 없을 때까지, 내 삶을 마치기까지 그들의 시선을 두려워하는 마음만은 늘 가지고 살고 싶다.  출처:2017 제2호  
8    [단편소설] 신사 Z의 별장-금희 댓글:  조회:327  추천:0  2019-07-16
 금희    신사 Z의 별장     한동안 나는 Z선생과 가까이 지낸 적이 있었다. 그는 신사였고 학자였으며 유능한 상인이자 천재적인 예술가, 내지 대단한 수집애호가였다. 그의 별장 2층에는 아무도 들어가본 적이 없는 어마어마하게 큰 규모의 서재가 있었는데, 높고 넓은 여러 간벽면마다에 줄줄이 선반을 박아넣고 크고 작은 책들과 세계 여러 나라의 공예품들, 내가 듣도 보도 못한 희귀한 장신구들과 박물관에 있음직한 골동품, 그리고 뭣에 쓰는지 통 알 수 없는 별의별 실험기기들을 진렬해놓았다. 가끔 Z선생은 스위치를 눌러 눈 깜짝할 새에 내 눈 앞에서 벽속으로 사라질 때도 있었는데 그의 말투를 보아해서는 그 속에 별도의 비밀창고가 있는 것이 분명했다. 서향으로 주방과 맞붙은 벽면 선반아래에는 긴 아일랜드식 책상이 있었고 그 우에는 대형 모니터들이 여러개 이어져있었는데, Z선생은 매일 그곳에서 책을 읽거나 금융거래를 하거나 미니 홈페이지를 관리하고 음악을 듣군 했다. 나는 바깥에서 창문너머로 그의 서재를 구경했다. 그의 서재는 바로 곁에 있는 거실, 주방, 그리고 작은 공장을 방불케 하는 작업실과 개방형의 긴 복도로 이어져있었으며 남향의 바깥벽은 특수재질의 유리로 되여있었다. 물론 Z선생은 내가 그의 허락 없이 창문을 통해 함부로 그의 일거일동을 들여보는 것을 싫어했다. 충분히 리해할 수 있는 일이였다. 나 역시 집을 거둔다거나 설겆이 또는 료리를 할 때 누군가 창문너머로 지켜보는 것이 싫었으니까. 게다가 괴물 같은 까맣고 둥근 눈동자라니, 그 커다란 유리구슬이 나의 창문 밖에서 슴벅거리고 있다는 것은 상상만 해도 끔찍한 일이였다. Z선생의 별장은 볼수록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사실 그의 별장은 대단히 호화롭고 사치스럽고 기발하고 또 ‘첨단적’이였다. Z선생은 한번도 나를 그 안으로 초대하지 않았지만 마음에 내키는 대로 내가 바깥에서 이리저리 둘러보는 것은 허락하군 했다. 그의 별장은 엷고도 강한 콩크리트와 비슷한 재질과 목조가 혼합된 복층의 지중해풍 건물이였다. 파란 지붕들은 각기 다른 방향으로 경사져내렸고 유백색의 벽은 깔끔하게 미장되였으며 정밀하게 설계된 여러 기능의 방들은 오밀조밀 빈틈없이 이어져있었다. 2층의 긴 복도와 이어지는 발코니에는 넓고 상쾌한 마루가 깔려있었고 머리를 식히기에 좋을 편한 벤취와 하얀 양산이 달린 탁자도 배치되여있었다. 1층에는 인공잔디가 깔린 더 넓은 테라스가 있었는데 조화라고는 믿기 어려울 여러 종류의 아름다운 화분과 식물이 별장의 운치를 더해주고 있었다. 별장 둘레에는 야트막한 나무울바자가 쳐져있었고 뒤켠으로 돌아가보면 작은 폭포가 굽이쳐 흐르는 가상공원도 만들어져있었다. 1층에는 다용도실과 세탁실, 화장실 겸 샤와실, 그리고 드레스룸과 침실 같은 사적 공간의 방들이 위주여서 카텐을 치고 있는 시간이 많았다. 나는 주로 그가 2층 공간으로 올라오는 시간대에 그의 별장을 구경하군 했다. 낮에 그는 서재로 올라와 간단한 스트레칭을 마친 뒤 책상에 마주앉아 환률을 조회하고 주식시장을 돌아보고 여기저기 인터넷뉴스를 뒤적거리다가 소일거리로 흥미로운 실험 한두가지를 해보거나 작업실에 들어가 작은 도구들을 개량하기도 했다. (그가 사용하고 있는 간단한 도구들은 거개가 스스로 개량한 것이였다.) 지치거나 지루하면 완벽한 멀티미디어 시설을 갖춘 거실에 나와 음악을 듣거나 3D영화를 보거나 게임을 했고 배가 고프면 주방에 들어가 스탠드바에 걸터앉아 과일조각이며 과자, 혹은 간단한 식사를 하군 했다. 하루에 한두번 머리를 식힐 겸 마실 것을 들고 발코니로 나와 하얀 양산의 탁자에 마주앉기도 했는데 그때가 Z선생이 비교적 한가한 시간대라서 나는 내 시간만 허락된다면 그와 이런저런 한담을 즐길 수 있었다.     그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참으로 경이로운 일이였다. 그는 메소포타미아의 수메르문명에서부터 고대 이집트, 고대 그리스세계와 로마, 인더스문명과 황하문명과 마야문명, 중세를 거쳐 현대의 세계에 대해,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에 이어 토마스 아퀴나스, 데카르트, 칸트, 헤겔과 하이데거, 들뢰즈, 자크 데리다 등 철학가들에 대해, 길가메시와 오딧세우스와 시경, 아라비안나이트, 햄릿과 파우스트, 부활과 농담, 백년의 고독 등 위대한 문학작품에 대해, 비슷한 맥락의 음악과 미술과 종교에 대해, 그리고 잡다한 전설과 신화와 일반상식에까지 모두‘조예가 깊었다.’사실은 그의 류창하고도 방대한 담론들을 거의 대부분 알아들을 수 없기 때문에 나는 당연히‘조예가 깊을 것’이라고 지레 짐작하는 것이였다. 그는 활달하고 친절하고 유모아적인 사람이여서 대화 분위기를 유쾌하게 끌고 나갈 줄 알았다. 그러나 나는 그 무슨 해박한 지식이나 신사적인 매너보다 Z선생이 말을 하는 자체에 더 매혹되군 했다. 깨알처럼 작은 입을 열었다 닫았다 하면서 야무진 목소리로 말을 하는 그의 모습은 내게 언제나 무한한 상상력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40대의 중년남자였지만 여전히 건강하고 발랄한 멋쟁이였다. 갈색의 머리결과 네모 안경속의 큰 눈, 그리고 오똑 솟은 코날과 도톰한 입술은 어딘가 바비의 남자친구 켄을 닮았다. 잘생긴 그의 외모에 매료되여 멍하니 앉아있는 나를 Z선생은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이런 천박한 표정의 사람과 대화하는 것은 자신의 품위를 떨어뜨리는 일이라 생각되서였다. “이보시오, 금자씨. 제발 부탁인데 그런 표정으로 나를 보지 말았으면 해요.” 그렇게 안타까이 말하고 있는 Z선생에게 “네, 네, 그럼요, 그러지요…” 역시나 홀린 듯한 얼굴로 대답해주고 나면 그는 한숨을 쉬며 머리를 흔들었다. “이게 문명의 차이지요, 암. 금자씨만 그런게 아니라 전에 내가 만나본 많은 사람들이 모두 그랬답니다.” 하지만 Z선생의 고뇌스러운 얼굴표정이라든가 후-- 한숨 짓는 모습도 사실 여간 귀여운 게 아니였다. 그가 알았더면 원통해할 일이였겠지만, 그가 머리를 잘래잘래 흔들며 쯧쯧 혀를 차는 순간이면 나도 모르게 그를 반짝 안아들고 그 매끄럽고 잘생긴 얼굴에 진한 키스라도 한바탕 퍼붓고 싶은 충동을 느끼군 했다. 물론 나는 최대한 그 욕구를 자제했다. 필경 그는 햄스터나 강아지가 아니였으니까. 그는 입맛이 까다로운 편이였지만 내가 성의껏 만든 음식을 조금 덜어 건네는 따위는 허락했다. 하루나 이틀에 걸러 신선한 과일 디저트, 그리고 약간의 마실 것 등을 발코니의 탁자우에 놓아두는 것도. 하긴, 그런 사항들은 계약서에 이미 명시되여있었다. 그는 주방의 랭장고에 일정한 분량을 보관했다가 언제든지 원할 때 그것들을 꺼내먹었다. 때로는 전자렌즈와 전기남비를 리용하여 입에 맞는 간단한 료리를 직접 해먹기도 했다. 좋아하는 소스와 빵과 양념들의 이름을 내게 알려주었고 그것들이 바닥이 나면 다른 생필품들과 같이 목록과 그람수를 적어 발코니의 탁자우에 정중히 놓아두었다. 그는 내가 뭔가를 먹고 있다가 참 맛있다고 생각되여서 그만 자제력을 잃은 채 그의 창문을 두드려 한조각 건네는 행위를 몹시 기분 나빠했다. 먹고 남긴 음식을, 아무리 맛나고 깨끗한 음식일지라도 들이미는 것은 더구나 말할 것도 없었다. “제발 금자씨, 아무리 천한 교육을 받았기로소니, 어쩜 이렇게 몰상식할 수가… 다시 정중하게 말씀드립니만, 저는 제가 먹고 싶을 때 먹고 싶은 것만 먹습니다. 저를 그냥 내버려두세요, 햄스터 취급하지 말아달란 말이에요…” 아, 그가 얼굴을 붉히면서 화까지 내다니, 정말 기묘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신기하게도 나는 그가 화를 내면 낼수록 그의 사생활이 더욱 궁금해졌다. 그가 랭장고에서 수박조각을 꺼내 잘게 썰어 조그만 접시에 담는 모습, 밥알 하나를 죽처럼 짓뭉개고 거기에 여러 야채를 송송 다져 비빔밥을 만드는 모습, 그리고 예쁜 포트에 물을 발랑발랑 끓여서 커피를 내리는 모습… 아무리 보아도 신물이 나지 않았다. 저녁이면 그는 마지막 식사를 마치고 와인 한잔을 손에 든 채 1층 침실로 내려가군 했는데, 정말이지 내가 가장 보고 싶은 장면이 바로 그가 샤와하는 모습과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는 모습이였다. 욕망으로 번쩍이는 내 눈빛을 느끼는 Z선생은 계단 입구에 멈춰서서 내게 익살궂게 말했다. “이봐요, 금자씨. 뭘 더 보고 싶은 거죠? 우리 같이 지내는 동안, 최저한도의 매너는 서로 지킵시다? 계약서에 썼잖아요…” 학교 다녀온 아이가 곤히 잠든 밤, 나는 거실에서 Z선생의 침실의 환한 불빛을 바라보았다. 그는 매일 밤 거기서 무엇을 하고 있을가. 불빛은 흔히 자정너머까지 켜져있었다. 아이를 씻기고 돌아와보면 그의 샤와실에서도 쏴-- 물소리가 들리군 했다. 그의 화장실에도 변기가 있을가? 세면대는 어떻게 생겼을가? 세탁기는 어떻게 돌아가고 보일러는 또 어떤 식으로 작동하는 걸가? 나는 늘 그런 것들을 궁금해했다. 보드라운 물줄기 아래에 서있는, 혹은 따뜻한 물을 가득 채운 욕조 안에 잠겨있는 그의 알몸이 더 궁금했다고 하는 편이 차라리 옳았다. 그의 가슴과 허리와 다리, 그리고 가운데의 성기를 생각하면… 세상에, 그는 정말 그게 있을가 웃음이 나왔다. 둥근 단추만 한 얼굴에, 키가 펜만큼 컸으니 사실 그는 진짜 사람이 아니라, 그냥 인형이 아니였을가. 기막히게 사람을 닮은, 인조피부를 덧씌우고 그 안에는 풀떡풀떡 살아숨쉬는 장기대신 각종 정교한 부품과 센서들이 빼곡이 담겨있는 인공지능로보트말이다. 신기하고 호화로운 그의 별장은 겨우 바비의 집보다 한뽐 정도 더 컸을 뿐이였다.   나는 Z선생의 별장을 교외의 국도곁에서 발견했다. 아이를 교외 조용한 아빠트단지에 있는 부모님 댁에 잠시 맡기고 돌아오는 길이였다. 조숙한 아이는 나의 리혼을 알면서도 모르는 체 꼬치꼬치 캐묻지 않았다. 아이의 아버지는 건장했고 유능한 편이였지만 독재자이기도 했다. 나와는 어려서부터 같은 지역에서 살아온 익숙한 사람이였다. 우리들의 고향은 완만한 산세의 아름다운 산이 있는 작은 시골마을이였다. 산에는 복숭아꽃, 살구꽃, 진달래꽃이 만발했고 달래와 고사리와 취나물도 흔했다. 옛날에는 오소리, 너구리, 여우와 고라니, 가끔은 호랑이까지 출몰했다는 산이였다. 산자락으로 내려오면서 뙈기뙈기의 논밭이 옥수수밭 사이에 층층이 있었는데 논밭을 감도는 시내물에는 붕어, 잉어, 메기며 버들치가 자리를 잡고 살고 있었다. 바자를 친 마당안에서, 동네 길목 해묵은 비술나무아래에서, 그리고 강가 들꽃 만발한 비탈길에서 나는 어린 친구들과 함께 열심히 소꿉놀이를 했다. 해가 뜨면 약속도 없이 동네길로 뛰여나가 서로 만나고 해가 지면 래일 보자는 인사도 없이 각자 제집으로 달려 들어가던 시절이였다. 가끔은 다툼이 있고 시기와 분쟁도 생기군 했지만 대체로 평화로운 분위기였다. 친구들도 부모님을 닮아서 온화한 편이였다. 물론 례외는 항상 있었다. 또래들 속에는 반드시 그 아이들을 좌지우지하고 싶어하는 ‘대빵’들이 있어서 놀이의 규칙을 정하거나 ‘외세의 침입’에 항거하거나 아이들 속의 분쟁을 중재하군 했다. 그 대가로 늘 아이들을 마음대로 조종하거나 공동의 리익중‘노란자위’만을 차지했지만 말이다. 어쩌면 그렇게 평온한 분위기의 아이들이 다수였기 때문에 소위‘대빵’이란 존재가 생겨났는지도 몰랐다. 나의 기억속에서 전남편은 그런 류의‘대빵’이 아니였다. 오히려 그는 ‘대빵’의 지휘 아래 무슨 제안이든지 모두 곰상곰상 양처럼 순복하던 사람이였다. 적어도 겉으로는 그랬었다. 우리가 청춘남녀로 자라 련애를 시작할 즈음에도 그는 무엇이든 받아들이고 포용할 사람처럼 보여졌었다. 특별히 랑만적인 로맨스가 있었던 건 아니였지만 그와 함께했던 자잘한 일상들이 편하고 즐거웠었다. 결혼 후에는 모든 것이 차차 달라졌다. 집도 사고 차도 장만하고 아이도 낳아기르려 하자니 그의 부담이 커진 것도 사실이였다. 가정의 책임자로서 크고 작은 문제를 늘 해결해야 하며 그때그때 정확한 결단을 내리고 리익의 경중에 따라 어떤 것들은 과감히 버리기도 해야 했다. 그는 당연히 자신이 그 역할을 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도 반대하지 않았다. 우리는 모두 고향시절의 ‘대빵’시스템에 물든 사람이였던 것이다. 우리는 열심히 노력하여 집도 사고 차도 사고 아이도 낳았다. 그러나 그동안 세상이 많이 바뀌였고 따라서 예상치 못했던 많은 문제들도 같이 발생했다. 우리의 고향마을은 ‘시대에 뒤떨어졌다’는 표제를 달고 서서히 몰락해갔다. 무엇이 ‘뒤떨어진 것’인지 기준은 모호했다. 개개인의 인격과 성향을 무시했다는 설도 있었고 감정표현에 너무 린색했다는 주장도 있었으며 직관적인 감각과 현세계에 대한 향락과 인간 육체의 본능을 너무 억제했다는 의견도 있었다. 현대에 있어서 도시란 무엇이고 문명이란 무엇인가. 바로 이 오래동안 잘못 저질러진 모든 행위에서 완전 다른 방향으로 바꾸어가는 것이 아니던가. 더 개인적으로, 더 감성적이고 본능적으로, 더 순간적이며 현실적이게, 더 자유롭고 심플하고 쿨하게…     나날이 현란한 속도로 바뀌여가는 세상 속에서 나와 전남편은 여러가지 문제들의 시험대에 밀려 올라갔다. 서로 모르고 살았던 가장 내밀한 성격문제, 취향문제, 그리고 살아가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어느덧 많이 달라진 가치관과 인생관 문제 등등. 결혼생활 13년, 아이가 열한살 생일을 쉬는 주일, 우리는 서로를 더이상 용납할 수 없게 되였다는 것을 알아버렸다. 원망이 있었고 미움이 있었고 책임 전가하는 다툼이 여러번 있었지만 다행히 소송까지는 가지 않았다. 아이 앞에서 최저한도의 체면은 유지한 셈이였다. 그에게는 이미 젊은 녀자친구가 있기 때문에 나는 그에게 아이를 내줄 수 없었다. 그는 내게 정신 피해 보상금으로 자신의 이름하에 있던 아빠트 한채를 내주었고 앞으로 1, 2년간 먹고살 만한 금액을 계좌로 이체했다. 아이에 관해서는 다달이 약정한 양육비를 보내고 성인이 될 때까지 한달에 한두번 만나보는 것으로 관계를 유지하려 했다. 나는 합의서에 서명했다. 결혼기간 그가 항상 나보다 더 많은 경제적 리익을 창출한 것도 사실이였고 안전문제나 경조사, 큰 사건이나 사고가 났을 경우 주된 책임을 진 것도 사실이였지만 나는 그 속에서 보호를 받았다기보다 간섭 내지 조종을 당했다고 느끼는 경우가 점점 많아졌다. 그가 독자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면 할수록 나의 의견은 설 자리가 없었고 결과적으로는 해결된 문제 자체에 불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의견이 무시되였다는 것에 자주 분노를 느끼게 되였다. 그것은 곧 나의 인격에 대한 불존중으로 받아들여져서 나는 기분이 몹시 나쁘게 된 것이였다. 민정국에서 나온 다음 그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내게 악수를 청했다. 우리는 왜 더이상 함께 해보지 못했을가 하는 아쉬움도 없지 않았다. 이제는 그의‘세력 범위’안에서 벗어났다는 홀가분함과 같이 이제부터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가 하는 막막함도 나를 엄습했다. 어찌됐든 다시 옛날처럼 살 수는 없었다. 미래 내가 나가야 할 길을 고민하는 동안, 리혼으로 피페해진 내 몸과 마음도 추스릴 겸 아이는 친정 부모님께 잠간 맡겨두기로 한 것이였다. 코스모스가 한들거리는 국도로 한참 달려가고 있는데 먼발치의 길가에 눈부신 은빛의 상자가 떨어져있는 것이 보였다. 주변에 쓰레기통이 없는 걸 보아 어느 화물차에서 떨어진 것으로 보여졌다. 가까이 달려가면서 나는 생각을 바꿨다. 그냥 평범한 상자가 아니라 매우 깨끗하고 정교해보이는 상자 같아보였기 때문이였다. 게다가 재질이 보통의 종이상자가 아니라 단단하고 강한 금속이였다. 나 같은 대중들이 쉽게 접할 수 없는, 뭔가 첨단과학의 산물이 그 안에 들어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것이 내게 쓸모가 있는지 또는 위험한 것인지 누가 알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속도를 늦추며 금속상자에서 눈길을 떼지 않으면서도 그런대로 서서히 지나치려고 했다. 그때 운전대를 쥔 내 눈이 무슨 빛줄기에 찔러졌다. 금속상자의 뚜껑 한켠, 태양에네르기 전자판을 닮은 장치에서 뿜어나온 빛줄기였다. 신기하게도 그 빛줄기는 이동하는 나의 동선을 따라 정확히 내 눈을 겨냥하고 있었다. 불빛은 깜빡깜빡 여섯번 비춰졌다가 멈췄는데, 잠간 지나 다시 깜빡깜빡 비춰졌다. 순간 내 머리속에는 SOS 불빛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문뜩 떠올랐다. 설마 하는 순간 내 귀에는 삐 삐 경보신호도 들려왔다. 확실히 그 속에서 나오는 소리였다. 나는 그것을 지나쳐 30메터 쯤 되는 곳에 차를 세운 뒤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내려가 보았다. 혹시 안에 시한폭탄이 들어있지는 않나 하는 로파심 때문에 바로 접근하지 못하고 먼발치에서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완벽하게 밀봉된 금속상자가 아니라 여러 조각들로 정교하게 조립된 상자였으며 뚜껑과 벽 군데군데에 작은 구멍도 뚫려있었다. 주변의 인기척을 탐지했는지 상자는 부르르 진동했다. 상자 쪽에서도 내가 위험하지 않은 물체로 인식되였는 모양, 뚜껑으로부터 한 조각의 금속이 스르르 젖혀졌다. 작은 지붕과 베란다의 창문 한귀퉁이가 빠끔히 보였다. 첨단 시스템의 집모형 장난감 같았다. 스스로 구조신호도 보내고 경보신호도 울리며 보안포장의 시스템도 가지고 있는 장난감이라니, 너무 대단했다. 나는 두려운 마음을 접고 조심스레 다가가 그것을 만져보았다. 촉감이 단단하고 정교했다. 악의 없는 내 손길에 평화로운 반응을 하는 것처럼 그것도 금속조각들을 하나하나 젖혀주었다. 파란 지붕과 마루바닥인 베란다와 서재, 주방, 거실 등 공간들이 보이는 긴 유리벽, 건물의 2층 전체 구조가 내 눈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세상에, 이렇게 복잡한 구조를 지닌 집모형이라니. 이 많은 작은 가구들과 물건들을 어떻게 만들어 넣어두었을가, 쇼파와 책장과 모니터와 싱크대와 랭장고와 각종 냄비와 식탁과 의자… 모두 진짜와 똑같은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어느 부분도 대충 생략하고 넘어가지 않고! Z선생은 그 즈음에 계단을 통해 2층으로 총총히 올라왔다. “안녕하세요? 녀사님.” 하고 그는 내게 인사를 했다. 나는 그날 말로만 듣던 ‘티컵인(茶杯人)’의 실체를 처음으로 보게 된 것이였다. 별로 믿음직스럽지 못한 여론의 통계에 따르면 현재 전세계에는 약 수천명의 티컵인이 존재한다고 했다. 절대적인 것은 아니지만 그들 대부분은 소위‘선진국’사람이였고 학벌이나 재산의 정도도 상대적으로 괜찮은 편이라고 했다. 티컵인으로 산다는 것은 아무래도 주류의 인간들이 받아들이기 힘든 삶의 방식이였지만 그들은 그 방식을 기꺼이 원해서 선택한다고 했다. 그들은 법적으로 아직 통과되지 않은 시술을 통해 티컵인이 되고자 하는 자신의 소원을 이루었다. 한편 지금까지는 정상인으로 되돌릴 수 있는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시술전 자신의 모든 주변을 정리하고 로후까지 대비할 방도를 미리 생각해두는 게 현명했다. 그러나 보통의 경우 이런 사람들은 정리할 주변이 거의 없었고 로후에 대해서도 집착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들은 번거로운 사회적 의무를 거절했고 어느 공동체에 속하기도 원하지 않았으며 철저히 자유로운 개인생활을 원했다. 인간관계에 있어서도 집착하지 않아서 가정이나 절친이나 이웃이나 동료 같은 특정한, 지속적인 역할의 사람들을 원하지 않았다. 그들은 다만‘만나는 대로’‘인연이 가는 대로’동거인과 더불어 살려고 했다. 그들의 추구하는 바가 그랬다.‘어떤 만남이든 일단 소중히 여겨라’, ‘우연히 만난 사람과 최대한 즐거운 시간을 보내라’, ‘즐겁게 만나고 행복하게 동거하며 쿨하게 헤여져라’, ‘로화와 림종도 쿨하게 맞이하라’ 등등. 언제나 나는 그것은 나와 요원한 일, 일생을 살면서 거의 마주칠 확률이 없는 일이라고 여겨왔는데 아니였다. 내가 사는 나라에서도 내가 구사할 수 있는 언어를 할 줄 아는 티컵인을 만날 수 있었다는 게 놀라울 따름이였다. 혹시 그는 주변의 다른 나라에서 특수한 사정 때문에 이 나라로 건너왔을 수도 있었다. 세상은 아마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 더 빠른 속도로 발전하고 있는 모양이였다. Z선생은 티컵인답게 먼저 나에게 자신에 대해 간단히 소개했다.       “안녕하세요? 녀사님. 저는 유쾌한 자유인 Z랍니다.” 하고 Z선생이 말했다. 사람들은 편한 대로 그들을 티컵인이라 부르지만 그들 자신은 스스로를‘자유인’또는‘오메가인’이라 지칭한다고 했다. Z선생은 그 외의 많은 정보를 공개하지 않았다. 국적과 민족, 가정배경과 경력 등에 대해서 그는 지금까지도 굳이 소개하려 하지 않았다. 보통의 사람들에게는 그런 개인적인 신상에 대해서 시간을 두고 천천히 나누자 생각하는 경향이 더 많다면 그들에게는 별 필요성을 느끼지 못함으로 나누지 않는 경향이 더 많았다. 어떻게 되여 그런 교외의 국도 길가까지 오게 되였는지 하는 경위에 대해서도 그는 얘기하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현재, 이 순간, 나를, 그에게 호기심을 가지는, 느낌이 괜찮은 한 녀인을 만났다는 것이였다. “실례지만 어떻게 호칭을 해드릴까요? 녀사님?” Z선생이 기분 좋은듯 싱글싱글 웃으며 물었다. 작지만 아주 호남형의 얼굴이였다. 티컵인 시술을 받기 전에 미리 성형을 했을 수도 있었다. 나는 금자라고, 손금자라고 내 이름을 떠듬떠듬 알려주었다. “아, 네 금자씨. 금자씨라고 불러도 괜찮을까요? 반갑습니다, 금자씨!” Z선생이 머리를 까댁이며 내게 작은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세상에! 내가 정말 티컵인을 만나 그와 악수를 하다니! 친구들이 알면 도무지 믿을 수 없을 것 같은 일이였다. 놀라면서도 신기해하는 나의 표정을 Z선생은 유심히 지켜보았다. “금자씨, 제가 지금 잠깐 어려움이 있어서 구조신호를 보냈는데요, 혹시 지금 가능하시다면 저를 도와주실 수 있을까요?” 그제야 나는 뭔가 이상한 점들이 있음을 생각해보게 되였다. 이렇게 멀쩡히 살아있는 티컵인이 국도가에 있다니, 얼마나 오래동안 이곳에 있은 것일가. 그동안 무엇을 먹었으며 난방은 어떻게 해결했을가 등등. Z선생은 내게 가능하면 전기와 인터넷과 물이 있는 곳으로, 물론 신변안전을 보장할 수 있는 곳으로 옮겨달라고 부탁했다. 여태까지는 태양에네르기 전자판으로 최저한도의 전기만 쓰면서 겨우 버텼지만 이제는 배터리도 배터리거니와 비상식량과 물을 보충하지 않으면 안될 상황이라고 했다. 말이 쉽지 그런 곳이 어디 흔한가? 솔직히 말해 안전이 가장 문제였다. 범죄률이 나날이 높아가고 있는 도시에서 량심 있는 선량한 시민, 또는 그런 사람들이 모이는 공공장소를 찾아내기란 쉽지 않은 일이였다. 그러나 이 국도 곁에 이대로 방치하는 것도 위험한 일이였다. 야산에서 들고양이들이 내려올 수도 있고 비상식량이 모두 떨어질 수도 있으며 다른 위험한 인물들을 만날 수도 있는 것이였다. 나의 착잡한 얼굴표정을 읽으면서 Z선생이 말했다. “너무 깊이 고민하지 마세요. 일단 물땅크에 물을 채우고 며칠 분량의 전기만 충전하더라도 제게는 큰 도움이 되는 일이라서요.” 나는 더이상 망설이기가 저어하여 그의 별장을 들어 차로 옮겼다. 1층 아래로 지하층 같은 공간이 붙어있어서 별장은 보기보다 꽤 무거웠다. 차 트렁크에 별장을 싣고 나서 Z선생은 내 곁의 조수석으로 올라와 앉았다. 도시에만 가면 와이파이 터지는 곳이 많을 테니 인터넷으로 비상식량과 생필품들을 주문해 보충할 수 있을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그러나 그렇게 주문하더라도 구체적인 주소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단 며칠 만이라도. 나는 어쩔 수 없이 나의 아빠트를 련상했다. 물과 전기와 인터넷이 모두 있었고, 내 나름대로 안전하고 편한 장소라 판단할 수 있었기 때문이였다. 그러나 나의 아빠트로 Z선생의 별장을 옮겨온다는 것은 그리 가볍게 넘길 일이 아니였다. 막말로, 강아지 한마리를 입양하려고 해도 여러모로 물질적 심리적 정신적 준비를 해야 하는데, 아무리 작아도 어엿한 사람이 아닌가? 그의 성격과 취향과 습관과 과거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상태인데 덥석 집에 들인다는 것은 나의 립장에서 금방 결단하기 어려운 일이였다. Z선생은 나의 마음을 충분히 리해할수 있다는 표정으로 머리를 끄덕였다. “어떤 념려들을 하고 있는지 짐작이 갑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두 그런 고민을 거친답니다. 하지만 어쩌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저희 ‘자유인’의 특성상 좋은 동거인을 만난다는 게 최대의 행운이지만, 그것은 언제까지나 우리 두 사람의 합의에 의하여서만 실현이 가능한 것이거든요. 저는 금자씨가 나의 동거인으로서 참 좋겠다 생각이 되는데, 금자씨는 개인 여건상 편한지 어떤지, 혹은 원하는지 그렇지 않은지, 념려스러운 부분이 있으면 그대로 말씀해주세요…” Z선생이 이렇게까지 얘기하자 오히려 내 쪽에서 피동이 되고 말았다. 내 아빠트로 오는 동안 나는 그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으며 결국에는 그의 제안을 고려해 림시계약서를 쓰고 거실 베란다의 한 모퉁이를 그에게 ‘세’주기로 결정했다. Z선생은 그 베란다를 꽤 맘에 들어했다. 삼면이 유리로 둘러싸여서 해빛도 충족하고 전망도 괜찮았으며 더욱이 상하수도 시설이 있어서 그의 별장을 비치하기에는 최적의 장소였다. 거실하고는 간이 미닫이문으로 원하는 동안 격리시킬 수도 있었으니 거의 독립된 공간이나 다름없이 편했을 것이였다. 그는 서둘러 지하실을 열어 호스 두개를 꺼내 내게 건네주었다. 하나는 물땅크와 련결된 호스였고 하나는 오물땅크와 련결된 호스였다. 하수구로 오물이 빠져나가고 대신 깨끗한 물이 물땅크와 뒤마당 가상공원 폭포에 차오르는 동안 그는 또 코드를 꺼내 충전을 부탁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곧 보일러가 돌아가고 가전제품들이 작동하기 시작했으며 서재의 대형 컴퓨터 모니터도 밝아졌다. (대형 컴퓨터라 해봤자야 핸드폰 크기나 매한가지였지만) 별장 안팎의 조명들이 일시에 반짝 빛나는 모습이 ‘위대한 개츠비’의 저택마냥 황홀하고 아름다웠다. Z선생은 집안에서 분주히 돌아쳤다. 비상모드에 들어갔기 때문에 가구나 벽 속에 수납되였던 물건들과 기기들을 꺼내 원위치로 복귀시키는데 거의 한나절이 걸렸다. 저녁은 내가 삶아 내놓은 만두로 끼니를 때웠다. 만두 하나의 팔분의 일이면 그의 한끼 식량으로 충분하고도 남았다. Z선생은 이렇게 맛있는 만두를 먹어보기는 처음이라고 나의 음식솜씨를 칭찬했다. 체면 때문에 말을 하지 못해서 그렇지 그동안 얼마나 배가 고팠을가. 그날 저녁, 림시계약서에 서명을 하고 나서 그는 바로 석달치의 선불금을 내 계좌로 이체했다. 전에 ‘세’들어 살았던 집의 아이에게 좋지 않은 기억이 있었던지 지원이 얘기가 나오자 아이에게 자신의 정확한 신분을 우선 알려주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청구했다. 그리하여 삼주 지난 뒤에 온 지원이는 Z선생의 별장이 내가 친구에게서 잠간 맡아주기로 한 실물모형이라고 알게 되였다. Z선생 자신은 웬만한 대화가 가능한 최신 지능인형으로 소개되였다. 그가 거금을 들여 주문제작한 초소형 가전제품들과 실험기기들과 작업실의 기계와 여러 물건들 역시 실물과 몹시 흡사하게 생긴 소품에 불과하게 되였다. 지원이는 서재나 작업실에 박혀있는 Z선생보다 그의 별장을 더 신기해하였고 숙제를 마치고 나서 가끔 다가가 이곳저곳 만져보았다. 그 호기심도 며칠동안에 그쳤고 다음부터는 집안에 의례 놓여있던 가구나 소품 취급을 했다. Z선생 립장에서는 안전하게 된 셈이였다. 우리의 ‘동거’는 그렇게 시작되였다.       나는 내친 김에 직장을 한동안 쉬기로 했다. 리혼으로 나의 일상생활이 어쩔 수 없이 달라져야 하는 리유도 있었다. 무엇보다 내게는 시간상 더 자유로운 일거리가 필요했다. 새 일을 찾기까지 나는 지원이를 학교뻐스에 태워보내고 한낮에는 산책을 하거나 장을 보고 돌아와서 집을 치운 다음 약간의 번역알바만 했다. 자칫하면 우울하기 쉬운 나날에 Z선생이 있음으로 그나마 무난히 보냈던 것 같다. 나는 그에게서 많은 력사, 문화와 과학기술에 대한 견해를 들을 수 있었다. 너무 어렵고 방대하고 학파간의 주장 차이로 헛갈리고 실생활에 별 도움이 되지는 않았지만 최소한 어떤 지식을 계속 입력받고 있다는 느낌이 잠시나마 내 마음의 공허함을 채워주었던 것 같았다. 내 보이지 않는 미래와 답답한 현실에 대해 갑갑증이 나는 날에는 삶의 고민을 어느 정도 나누기도 했다. 어떤 부분에 있어서 Z선생은 괜찮은 조언자였다. “금자씨, 얼굴 좀 펴세요. 금자씨는 웃는 모습이 참 사랑스럽단 말이예요.” 하고 Z선생은 종종 나를 위로하기도 했다. 전남편은 요즘 전쟁소식 때문에 경기가 좋지 않다고 약정한 양육비를 기한대로 보내지 않았다. 그의 새 아내가 임신했다는 풍문을 친정어머니가 내게 흘려주었다. 한번 만나서 정확히 짚고 넘어가자는 내 제안을 그는 거절했다. 만날 필요도 없고, 만나서 해결될 문제도 아니라고 그는 딱 잘라 말했다. 기한을 좀 넘기더라도 약정된 만큼은 꼭 보낸다고 다시 약속을 했다. 이제는 자신의 피줄까지 방치하려는 고약한 사람이 되였나, 또는 남남이 되였다고 이렇게까지 매정하고 불협조적으로 나오는 건가, 하는 생각 때문에 울분이 치밀었다. 그러나 그 정도 악한은 아니였던지 두주가 지나서 입금하기는 했다. 새 아내의 눈을 피해 약속을 지키고 있는 것이였다. 친정 부모님의 건강은 그럭저럭 견딜 만했지만 아버지가 한번 심장질환으로 입원한 적이 있었다. 큰 문제는 아니였지만 병원에서는 생명 위험을 운운하면서 겁을 주었고 결국 입원하여 페로부터 위, 간, 담낭 등 거의 모든 장기들의 검사를 거쳐 나중에야 심장 대동맥의 문제라고 진단을 내렸다. 병자는 병자대로 곤욕을 치렀고 가족들은 가족들대로 마음과 물질상의 손해를 입었다. 의사들의 뻔한 횡포에도 별도리 없이 당해야 하는 나 자신이 너무 초라하고 기분 나빴다. 그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라고 친구들이 위로를 해왔지만, 그 말에 더욱 우울해졌다. 도무지 개선할 수도, 개선되지도 않을 것 같은 상황들이 사회 구석구석에 징그러운 뱀들처럼 똬리를 틀고 있었다. 경제문제도 골치덩이였다. 우선 지원이를 돌보면서 직장을 다닌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였다. 리력서를 여기저기 넣어보았지만 출퇴근시간이 빡빡해서 아이의 등하교시간을 맞출 수 없는 것은 물론 ‘가정숙제’와 학부모회의도 제때에 참여할 수 없는 직장이 대부분이였다. 직장에서는 당연히 최선을 다해 업무를 보는 일에 집중하기를 원했다. 혼자 작은 가게를 경영해볼가 고민도 해보았지만 그것도 한가하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였다. 초창기에는 아무래도 직장보다 더 부지런히 뛰여다니며 시장을 조사하고 연구하고 직접 맡아서 해야 성공할 확률이 높지 않겠는가. 더욱 불안한 것은 창업에 실패를 하더라도 생계를 영위할 수 있는 보장이 없다는 데 있었다. 한마디로 나 같은 서민들은 아프지도 말아야 하고 사고도 나지 말아야 하고 실패도 하지 말아야 하는 요지경 세상이였다. 품위와 량심과 엄마로서의 역할 모두를 지키면서 돈 되는 일을 할 수 있는 길은 아직 내게 보이지 않았다. 지원이를 생각하면 더 막막했다. 대학공부까지는 어떻게든 시켜보겠지만 더 이상 밀어줄 힘이 내게는 없었다. 청년실업률이 이렇게 높은 시대, 지원이가 살아가야 할 세상은 지금보다 훨씬 척박하고 어려울 텐데 어떻게 그 아이의 생존경쟁력을 높여줄 것인가. 그 아이는 과연 충성스럽고 리해심이 많은 배우자를 만날 수 있는 것인가. 걱정만 해서 해결될 일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념려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주위에서는 나의 사정을 보고 더러 재혼을 권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리혼의 악몽에서 벗어나지 못한 나는 그렇게 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무슨 선택이나 대가가 따르는 법, 재혼의 삶은 필경 지금 내가 누리고 있는 많은 권리와 자유를 포기하게 할 것이였다. 사실 나는 그보다 또다시 한 사람과 밀접한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일이 두려웠다. 많은 사생활을 공유해야 되고, 인생관, 가치관, 세계관을 조절해야 되고, 습관과 취향과 성격을 새로이 맞춰가야 한다는 사실이 귀찮고, 버겁고, 또 공포스러웠다. 세상과 사회와 인간관계에 대해 이토록 부정적인 생각만 한다는 것은 내가 많이 약해졌다는 증거일 것이였다. 그 대목에서 Z선생은 이렇게 권유했다. “꼭 금자씨의 문제 때문만은 아니지요. 해아래 새 것이 없다고 인류의 력사가 시작되는 순간부터 이런 문제는 계속 있지 않았습니까?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 기성권력과 신생세력, 다수의 리익과 소수의 리익간의 갈등… 사회는 언제나 부조리하고 불공평하고 해결책이 딱히 없는 문제들로 가득차 있지요. 어느 나라에 가나 문제는 산재해있더군요. 개개인이 열심히 노력해 산다고 해서 해결되는 일들이 아니였어요. 뭐 우리네 인생사도 비슷하지 않습니까? 누구 하나 마음 편한 삶을 사는 이가 없지요. 믿을 수 있는 사람이나 사랑하는 사람 때문에 산다고들 하지만, 솔직히 말해보세요. 그들로 인한 기쁨이 더 많은지, 다른 상황들로 인한 고통이 더 많은지. 인간이라면 당연히 누리고 살아야 할 자유와 행복이 대체 얼마나 있습니까?…” Z선생의 열변을 듣다 보면 나도 모르게 머리가 끄덕여지고 한숨이 나오면서 내 삶을 좀더 근원적으로 들여다보게 되였다. 그렇지, 그래, 삶이란 너나없이 이렇게 고통스러운 것을. 인간이라고 태여났지만 항상 세상에, 사회에, 타인에 휘둘리며 살지. 어디 하루라도 제 소원대로, 저 하고픈 대로 다 하며 살 수 있는가.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였다. Z선생은 그 모든 문제가 바로 자신을‘자유인’으로 만들게 한 리유였다고 말했다. “금자씨, 그래서요, 저는‘자유인’이 되기로 마음 먹었답니다. 기존의 사회와 삶의 방식으로서는 도무지 진정한 인간다운 자유의 삶을 살 수가 없는 것이라는 걸 어느날 문뜩 깨달은 거죠. 하긴, 제가 살던 나라에는 미리 깨달은 사람들이 좀더 많아서,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 그들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가 없었지요. 저도 어떤 ‘자유인’과 동거하면서 그의 삶과 그때의 제 삶을 비교해보게 되였답니다. 나는 그렇게 힘들고 지치고 버겁게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지만 저와 동거하던 ‘자유인’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금자씨도 제 삶을 보세요, 매일 내가 원하는 일을 하고 원할 때 먹고 원하는 사람과 얘기하고 원하는 만큼 쉬거나 즐기지 않습니까. 인간관계에서도 최대한 간섭과 상호의지를 자제하고 독립적이고도 자유로운 감정생활을 영위하려고 노력하지요. 언제 어떤 이변이 생기더라도 그 때문에 큰 영향을 받지 않도록 말입니다. 물론 이 삶도 아직 완벽하지는 않습니다만 주류 인간들이 사는 방식보다야 훨씬 자유롭고 평화로운 생활이랍니다. 그러니 제게 무슨 금자씨가 념려하는 것 같은 걱정거리들이 있겠습니까?…” 그런가? 그랬다. 정말 그런 듯했다. 왜 세계에서도 유독 ‘선진국’에서, 그것도 학력과 재산 모두 괜찮은 사람들이 그런 삶의 방식을 선택하는지 리해가 될 것 같았다. 앞으로는 더 많은 나라의 사람들이 이 대렬에 가담할 것이라고  Z선생은 내다보았다. 인간은 소위 정치제도와 경제구조와 사회질서에 신물이 날 것이며 어떤 개혁도 결코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라고 연설했다. 그의 리론에 따르면 그들이야말로 어쩌면 인류의 마지막 세대를 주도하게 될‘신인류’일 수가 있으며 그런 맥락에서 스스로를‘오메가인’이라고 부른다는 것이였다. Z선생이 열변을 토하는 동안 나는 턱을 괴고 조용히 앉아서 그와 그의 별장을 바라보았다. 내가 만약 그와 같은 티컵인이 된다면 나는 과연 어떤 삶을 살 수 있을가. 전남편과 그의 새 아내와 친정 부모님과 아이를 모두 잊고 오직 나의 삶에 집중한다면 어떨가. 직장과 가게와 번역알바와 모든 자질구레한 일들도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면 나는 매일 무엇을 하면서 살고 있을가. 나는 어렸을 때 배우다가 그만둔 피아노를 다시 배우고 싶었다. 바이올린과 가야금과 드럼에도 도전해보고 싶었다. 미술공부를 하고, 여러가지 수공예품도 만들어보고 싶었다. 매일 아홉시까지 늦잠을 자고, 여유롭게 식사를 하고, 울다가 웃으며 드라마, 영화를 보고 춤을 추거나 운동을 하는 것으로 일상을 보내고 싶었다. 수다를 떨고 싶으면 티컵인 동호회 채팅방에 들어가 마음껏 떨면 되는 것이였다. 어차피 만나지 못할 친구들이기 때문에 복잡하고 피곤한 관계로 엮이지 않을 것이니까… 이 모든 것이 현실적으로 정말 가능한 일일가. Z선생과 한담을 마치고 나서 나는 혼자 침대로 돌아와 무거운 한숨을 내쉬였다. 나의 삶은 여전히 칙칙하고 답답하고 어두웠다.       구질구질 장마비가 내리던 날, 지원이의 학부모회의에 가는 길에서 나는 결국 사고를 내고 말았다. 골목길을 가로지르는 중학생을 피하기 위해 핸들을 급히 꺾었다가 마주 오는 차량의 앞부분을 들이박은 것이였다. 다행히 인명사고는 없었지만 상대의 전조등 하나를 부숴버렸고 철판도 우묵하게 눌러버렸다. 내 차의 손실은 미처 세세히 체크해볼 사이도 없었다. 까만 눈을 빛내며 나만 기다릴 지원이를 생각하니 속이 바질바질 탔다. 교통경찰을 부르지 않고 합의하여 해결하려니 상대 쪽에서 부르는 가격이 너무 터무니없었다. 우산을 들고 서있었지만 이따금씩 세차게 부는 바람에 한 모퉁이가 자주 뒤집혔다. 차가운 비줄기가 나 따위는 우습다는듯 잽싸게 얼굴을 얼얼하니 때리고 지나갔다. 하늘은 우울했고 상대는 야만스러웠으며 나는 바보같이 떠듬떠듬 마땅한 말을 찾지 못했다. 사진을 찍어 보험회사에 넘기고 나서야 나는 차를 끌고 그 혼란중에서 나올 수 있었다. 전남편에게 대신 학부모회의에 참석하라고 련락을 할가 몇번 망설이다가 그냥 담임선생님께 련락을 했다. 아이가 혼자 기다리고 있는 학교에 도착하여 나는 어머니의 전화를 받았다. “어떡하니? 금자야, 늙으면 빨리 죽어 없어져야 하는데…” 어머니는 체통이고 뭐고 할것없이 전화기를 붙든 채 흐느꼈다. 년세가 들어가면서 부모님은 나날이 약해갔고 내가 리해할 수 없는 일들도 많이 저질렀다. 이번에는 로후자금으로 예치해둔 은행카드였다. 아버지가 자칭 은행직원이라는 낯선 이의 전화를 받았고 카드의 주인이 범죄사건에 련루되여 그 계좌로 예치했던 모든 금액이 경찰서로 넘어가야 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전형적인 전화사기였지만 두 로인네는 쉽게 넘어갔다. 아버지는 그 길로 현금인출기로 달려가 전화가 알려주는 대로 이것저것 건판을 눌렀다. 산처럼 믿고 살던 거액의 자금이 눈 깜짝할 새에 날아가버린 것이였다. 지원이를 데리고 나온 그 길로 나는 친정에 돌아가 부모님을 모시고 경찰서에 들렀다. 곽밥을 시켜 먹던 중년의 경찰 한 사람이 사건을 접수했다. 그는 아버지의 어눌한 발음에 짜증을 참지 못하고 마뜩찮은 말투로 자주 되물었다. “네? 뭐라고요? 다시한번 말씀해주세요. 네, 그래서요… 네? 다시…” 마음이 급한 어머니는 정서를 가라앉힐 수가 없어 둘 사이의 대화에 격앙된 표정으로 끼여들었다. “아니, 경찰량반, 이게 지금 얼마나 큰 돈인데… 우리 늙은 것 둘이서 손에 쥐고 있는 것이란 이 통장 뿐이라우. 나중에 갑자기 아프기라도 해서 자식 발목 잡는 짐이라도 된다면 어떻게 한단 말이요? 제발…” 나는 어머니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이런 말단 경찰한테 그렇게 애원을 해보았자 별 효과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였다. 그는 그저 경찰이라는 직업인이였을 뿐 개인적으로 다른 이의 고통에 대해 같이 안달해할 아무런 의무도 없었다. 진술서를 작성하고 나서 그는 비슷한 경위를 당한 사람들에게 수없이 반복했을 말을 우리에게도 해주었다. “요즘 이런 전화사기가 부쩍 늘었답니다. 로인들을 상대로 한 사기가 상대적으로 많으니까 항상 조심하셔야 돼요… 이 사건에 관해서는 최선을 다해 추적해볼겁니다. 소식이 있으면 알려드리지요. 련락전화나 남기고 가세요.” 그 외에 그가 또 무슨 말을 해줄 수 있었을가. 부모님을 집까지 모셔드리고 나는 밤중에야 집으로 돌아왔다. 운전하는 내내 앞바퀴에서 삐걱거리는 소리가 작게 들렸다. 주차장은 이미 만원이였다. 지원이는 피곤했던지 조수석에 앉아 잠들어있었다. 나는 차를 아빠트단지 바깥의 길거리에 세우고 아이를 깨웠다. 달도 별도 보이지 않는 흐릿한 밤하늘이였다. 희미한 가로등이 구부정한 허리로 무심하게 서있었다. 예상했던 것보다 빨리 일을 시작해야 할 것 같았다. 혹은 이 아빠트를 좀더 작은 평수로 바꿔 자금을 마련해볼가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엘리베터를 타고 올라가는데 순간 눈앞이 아찔해났다. 깜빡거리는 표지판에 5까지 바뀌는 것을 보았지만 그 뒤로는 기억이 없었다. 갑자기 낮아진 혈압이 문제였다. 잠간이긴 했지만 그렇게 정신을 잃어본 적은 처음이였다. 그 뒤로 련 며칠 나는 몹시 우울했다. 살아가는 게 너무 힘이 든다는 생각이 내 머리 속을 꽉 채웠다. 내가 감당하고 해결해야 할 문제들은 나의 능력보다 훨씬 커보였고 그래서 감당하고 싶은 마음도 희미해져가고 있었다. 삶의 락이 무엇인지, 이렇게 사는 게 맞는 건지, 왜 나는 이렇게 살아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모든 게 귀찮았다. 모든 것에서 떠나 오직 나만 생각하고 싶었다. 아이가 학교로 가고 나면 Z선생은 2층 발코니로 나와서 멍을 때리고 있는 나를 살펴보았다. 나는 말없이 수걱수걱 집일을 계속했지만 Z선생은 나의 우울한 기분을 알아챘을 것이였다. 그는 길 잃은 한마리의 양을 기다리는 목자처럼 안타까운 눈빛으로 나를 잠간씩 바라보군 했다. 그러나 그는 다시 유쾌하고 자유로운 사람으로 돌아갔다. 혼자 료리를 해먹고 커피를 내리거나 차를 우려 마시고 좋은 음악을 듣고 좋은 영화를 보고 익숙한 채팅방에 들어가 수다를 떨거나 혼자 그림을 그리고… 그의 세계에는 누릴 수 있는 것들로 무궁무진한 것 같았다. 혹은 그의 세계에는 정말 이 세상의 삶 같은 고민거리들이 없는 것 같았다. 저녁, 아이가 잠이 들고 나서 그는 내게 와인을 한잔 권했다. 그는 나의 거대한 유리잔에 자신의 잔을 가볍게 부딪쳤다. “금자씨,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보지는 않겠습니다만… 한잔 하실까요?” 그것은 며칠전 특별히 나를 위해 인터넷으로 주문한 좋은 와인이라고 했다. 그의 성의를 무시하는 것이 미안하여 나도 과일을 두어가지 잘게 잘라서 그가 마주앉은 발코니 탁자우에 놓았다. 한모금 마시고 나니 속이 후끈해지는 것 같아 더 마시고 싶었다. “사람이 산다는 게 그렇지요, 이 일이 끝나면 저 일이 생기고… 끝나지 않는 문제 천지지요.” 친구들하고 미처 나누지 못했던 얘기들을 나는 그날 와인의 힘을 빌려 Z선생에게 쏟아버렸다. Z선생도 충분히 리해된다는듯 와인잔을 굽냈다. 나는 병을 들어 두 사람의 유리잔을 다시 채웠다. 습한 밤바람이 열어놓은 창문사이로 솔솔 불어왔다. 달빛을 감싸안은 카텐이 창문가에서 펄럭이였다. 나와 Z선생은 권커니 작커니 어느새 반병의 와인을 마셔버렸다. 처음에는 느낌이 별로 없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취기가 슬슬 오르기 시작했다. 좀 과했구나 싶어서 나는 말을 절제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내 목소리는 의지보다 높아졌고 대화내용도 얼토당토하게 흘러가는 것 같았다. 오랜만에 있어보는 흥분이였다. Z선생도 평소보다 많이 마셨다. 그 역시 얼굴이 불그스레해졌는데 나를 위로한답시고 작은 손을 내밀어 내 얼굴을 쓰다듬기까지 했다. “그러니까, 금자씨. 그렇게 사는 게 얼마나 힘이 듭니까. 저는 그게 무슨 생활인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답니다.” 그는 내게 또 이렇게 말했다. “차라리 금자씨, 그냥 나처럼 자유인이 되세요. 얼마나 편하고 좋습니까? 자유인의 삶은 온전히 자신의 것이에요… 그렇게 된다면 어쩌면 우리 서로 원하는 동안 사랑을 해볼 수 있게 될지도 모르겠는데요. 후훗…” 그는 그 얘기를 하고는 배를 부여잡고 웃었다. 내가 미처 대답을 하기도 전에 그는 다시 정색하며 말했다. “사랑은 롱담이구요, 자유인이 되라는 건 진담이에요.” 나는 뒤죽박죽 혼란스러워지려는 머리를 겨우 가누었다. “그건 불가능해요. 저는 부모님도 있고 아이도 있다구요. 선생님은 혈육들이 없으니까 그게 가능하겠죠.” 내 말에 Z선생은 도를 닦는 사람처럼 초연히 웃었다. “꼭 그런 건 아닙니다. 우리 자유인 중에는 금자씨처럼 부모 자식 다 살아있는 경우도 있답니다. 어떤 분은 금슬 좋은 부부생활을 하기도 했구요. 출가하는 사람도 그렇지 않습니까? 가족들이 있고 없고는 출가의 결정적인 원인이 될 수 없는 거죠.” 나는 Z선생의 말에 취하여 자꾸자꾸 와인을 마셨다. 나중에는 내가 누구랑 대화하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나는 점점 작아지고 있었고 내 주변의 물건들은 계속하여 커지고 있었다. 어느 시점에 다달아서 나는 Z선생만큼 작아져버렸다. Z선생은 이제 내게 티컵인이 아니라 정상인이 되였다. 그는 비칠거리는 나를 이끌고 그의 별장으로 들어갔다. 푹신한 쇼파와 예쁜 탁자, 벽마다 빼곡이 공예품들로 진렬된 서재와 깔끔한 스테인리스강로 장식한 주방, 그리고 여러가지 기계들이 놓여있는 작업실까지… 나는 그의 손에 이끌리여 그 공간들을 일일이 들려 보았다. 실제로 들어가보니 더 화려하고 더 아름답고 더 완벽했다. “어때요, 금자씨? 이런 곳에서 세상 념려는 다 잊어버리고 매일매일 원하는 일만 하면서 여유롭게 사는 겁니다…” Z선생은 매일 이런 곳에서 이런 기분으로 살고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그 시점의 내게도 들었다. “그래요, 선생님은 정말 행복한 삶을 살고 있는 것 같네요…” Z선생은 약간 우쭐해나서 나의 손을 잡고 1층 계단으로 이끌었다. “모처럼 이 안에까지 오셨으니 이참에 1층 공간도 보여드릴까요? 거긴 정말 제 사적인 공간인데…” 나는 허공에 들뜬 발걸음으로 쿵쾅거리며 그를 따라 계단을 내려갔다. 빨간 불, 초록 불이 빼곡이 들어온 커다란 계기판이 있는 곳이 이 별장의 슈퍼컴퓨터가 내장된 곳이였다. 드럼세탁기가 놓여진 세탁실도 있었고 커다란 욕조가 비치되여 있는 따듯한 샤와실도 있었으며 사계절의 옷들이 스타일별로 빼곡이 걸려있는 넓은 드레스룸도 있었다. 그는 내게 자신의 침실도 보여주었다. 랑만적인 원형의 침대가 침실 가운데에 있었고 간단한 가구들이 딸려있었는데 벽에는 70인치의 모니터가 걸려있었다. 우리는 비칠거리며 침대로 다가가 그 우에 쓰러져버렸다. 푹신하고 향긋한 침대였다. 뭔가 둥그스럼한 것이 이불 아래에 깔려있는것 같아 나는 금세 일어나 앉았다. Z선생이 이불을 젖히고 실리콘으로 된 녀자인형을 꺼내 머리맡의 서랍 속에 치워두었다.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며 큭큭 웃었다… 문뜩 내 귀에 삐걱거리는 문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이 별장에 무슨 손님이 있을가 신기해하며 고개를 돌렸는데 침실문의 손잡이를 잡고 있는 지원이가 보이는 것이였다. “엄마, 지금 뭐하세요?” 하고 지원이가 물었다. 나는 게슴츠레한 눈으로 아이를 쳐다보았다. “뭐하긴? 아저씨랑 와인 한잔 하고 있었지. 얘, 아저씨네 별장, 안에 들어와 보니까 바깥에서 들여다보기보다 훨씬 좋아.” 지원이가 가까이 다가와 나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아저씨는 무슨? 엄마 지금 누구 얘기하는 거에요? 이 과일조각들은 다 뭐구요?” 순간, 지원이가 아직 Z선생을 모르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웃음이 나왔다. 흥분의 상태중에서 나는 참지 못하고 실상을 말하여버렸다. “그래, 너에겐 일부러 얘기하지 않았지. 이 별장에 사시는 분, 이 별장의 주인 되시는 분은 Z선생이셔. 이 분은 사실 ‘자유인’이란다. 알지? 사람들이 말하는 티컵인…” 지원이는 그 말에 충격을 받은듯 멍하니 두 눈을 흡떴다. 나는 Z선생을 만난 경위며 그의 학식과 매너와 예술가적 기질과 그의 고상한 인생관, 가치관에 대해서 한참 떠들어댔다. “세상에 대해 많은 것을 내려놓으신 분이야. 쿨하고 멋지고 자유로운 인생을 즐기는 분이지. 나도 상황만 되면 그렇게 살고 싶다만… 그래, 상황이 문제가 아니라 나는 아직 이 분만큼 깨닫지를 못한 거지, 안 그러니? 아들?” 그 말에 지원이는 드디여 어떤 결심을 내린듯 내 손을 꽉 잡아일으켰다. 내 손에 쥐여졌던 와인잔이 거실 마루바닥에 떨어져 쨍그랑 한 모퉁이가 깨졌다. “엄마, 정신 차리세요.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에요?” 나는 엉거주춤 일어나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나는 Z선생의 별장앞에 있었고 Z선생이 마시다만 글라스는 발코니의 탁자 우에 놓여있었다. 그는 아까 전에 벌써 1층 침실로 내려갔는 모양이였다.     지원이는 한심스럽다는듯 나를 쏘아보았다. “자유인이라니요? 고상한 가치관이라고요? 이런 삶이 부러워요? 엄마 정말 몰라서 그렇게 말하는 거에요? 말이 듣기 좋아 티컵인이지, 사실 그냥 애완인일 뿐이잖아요.” 시원한 바람 한줄기가 내 이마를 스쳐지났다. 가물가물하던 정신이 화들짝 놀라며 돌아왔다. 너무 솔직해서 꺼림직한 단어가 이 아이의 입에서 저리 쉽게 나와버렸다니…   아빠트를 작은 평수로 옮기는 동안 나는 Z선생과 어쩔 수 없이 헤여지게 되였다. 이사하게 될 작은 아빠트는 방이 하나 뿐이였고 베란다도 없었다. 방은 지원이에게 주고 나는 거실에 침대 하나를 들여놓아 방삼아 지내기로 했다. 화장실도 비좁아서 세탁기를 겨우 들일 정도였으니 Z선생의 별장은 둘 수 없었다. 대신 나는 얼마큼의 차액을 챙길 수 있어서 작은 슈퍼라도 해볼 요량으로 길가의 가게 하나를 세냈다. 부모님이 와서 이사를 도왔다. 그전에 나는 미리 Z선생에게 상황을 설명해주었다. 그는 쿨한 ‘자유인’답게 그 일들을 받아들였다. Z선생의 새로운 거처를 위해 그나마 믿음직한 시설이나 친구들에게 물어볼가 생각했지만 Z선생은 그렇게 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금자씨, 이런 일까지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우리 ‘자유인’의 인생철학이 바로 이런 거 아닙니까. ‘즐겁게 만나고 행복하게 동거하며 쿨하게 헤여져라’” 그는 비상식량을 창고에 무더기 쌓아놓고 랭장고와 물땅크도 가득 채운 다음, 별장의 시스템을 비상모드로 전환했다. 해빛이 충족한 곳이면 태양에네르기 전자판으로 최저한도의 전기를 꽤 오래동안 계속 사용할 수 있다고 했다. 웬만한 기계와 가구들이 벽 속으로 자취를 감춘 다음, 내가 처음 보았던 은빛의 금속판들이 지하실 벽아래부터 나와 별장을 스르륵 올리싸고 있었다. 마지막 금속판이 닫힐 무렵 그는 내게 악수를 청했다. “금자씨, 같이 있는 동안 정말 즐거웠습니다. 금자씨도 즐거웠길 바래요… 이번에는 제 별장을 이 도시의 가장 큰 공원 나무숲 길가에 놓아주세요. 그런 곳에는 아직 가보지를 못해서요.” 나는 그를 설득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그의 제안에 동의했다. 그는 성인이였고 충분히 자신의 삶을 결정할 권리가 있었다. 이사를 마친 후 나는 짐을 정리하다가 Z선생과 썼던 계약서를 보게 되였다. 지원이가 서랍 속에서 발견한 것이였다. 계약서에는 이런 사항들이 적혀있었다.                   갑: Z선생   을: 손금자 갑은 을의 이런 제공들이 필요합니다. 쾌적한 주거공간, 전기, 물, 인터넷 및 오물처리와 쓰레기처리. 아주 적은 분량의 음식, 식용수, 음료와 각종 생필품. (단 먹다 남은 음식은 사절입니다.) 안전 보장, 사생활 보장. (의류나 화장품 등 선물은 반드시 을의 자원에 따릅니다.) …   계약서 다른 한쪽에는 또 이런 것들이 씌여있었다.   갑은 을에게 이런 것들을 제공해줍니다. 합리한 주거세, 전기세, 물세 및 쓰레기 처리비용. 음식 가공비용, 류사한 서비스 비용. 친절하고 유쾌한 말 상대, 흥미로운 볼거리와 색다른 재미. (덤으로 제공할 수 있는 것: 방대한 지식과 상식. 을의 책임감과 인내력, 친화력 강화. 특별한 경우, 갑의 자원 하에 신체적인 접촉을 허락할 수도 있음…)   지원이는 그 계약서를 훑어보고는 구겨서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 쓰레기는 짐을 다 정리할 때까지 계속 나왔다. 검은 비닐봉지로 싸서 던진 우리의 쓰레기봉투곁에 이웃집의 고장난 햄스터우리가 같이 던져졌다. 그 뒤로 나는 Z선생을 아직 만나지 못했다. 그는 어디에서 어떻게 지내는지 아마도 다시는 알 수 있는 길이 없을 터였다. Z선생의 말대로 나는 그것까지 신경쓰지 말아야 했다. 그렇게 하는 것이 그를 존중하는 일일 것이였다. 하지만 나는 그 후로부터 국도를 달리다가 길가에 떨어진 상자 같은 것을 보는 날이면 속으로 꿈틀 놀라군 했다. 아름답고 정밀한 최첨단의 별장이 그 안에 있어서 세상 삶에서 도피하고 싶은 나를 다시 유혹할가 걱정되서였다.         
7    [단편소설] 이원혼(二元婚)-금희 댓글:  조회:332  추천:0  2019-07-15
 금희   이원혼(二元婚)     처음 B를 만난 것은 아빠트 엘리베터 에서였다. 친구와 약속한 카페로 나가는 길, 밤 열시경이였고 빨갛게 빛나는 예약버튼 우의 화면 안에서 성인 남자 한명의 실루엣이 깜빡거렸다. 문을 열기전까지 나는 그 남자와의 동승을 살짝 고민했다. 요즘 들어 아빠트 무단침입범죄사건이 늘어나고 있다는 뉴스가 생각나서였다. 더 안전한 보안시스템의 아빠트는 그만큼 세가 비쌌다. 엘리베터가 도착하는 것을 보고 순간 나는 그만 습관적으로 열림버튼을 누르고 말았다. 캐주얼한 정장을 입고 단정하게 머리를 빗어 넘긴 동양혈통의 남자가 그 안에 있었다. 남자는 한쪽으로 비켜서면서 가볍게 머리를 끄덕여 인사를 했다. 짙은 눈섭 아래 크고 깊은 까만 동자의 눈이였다. 등뒤에는 커다란, 정말로 커다란 검은색 베낭이 삐죽이 솟아있었다. 나는 꼼짝 않고 서서 깜빡깜빡 변하는 층 수자만 올려보았다. 설마 심상치 않은 무엇이 들어있지는 않겠지. 엘리베터가 48개의 층을 쏜살같이 내려가는 동안 나는 머리 속으로 둔중하거나 예리하거나 독극물이 묻었거나 혹은 어떤 기체가 뿜겨나오는 도구들을 닥치는 대로 상상했다. 의외로 남자에게서는 나무의 껍질, 또는 강변의 잡초 냄새 같은 향이 은근히 풍겨왔다. 너무 자극적이지도, 너무 선정적이지도 않아서 오히려 신뢰감이 들게 하는 향이였다. 처음 맡아보는 향인데다가 이미 많이 휘발되여서 본인의 체취에 가리워지고 있는 중이였는데도 왠지 나는 그 향에 신경이 쓰였다. 지하 1층에서 남자가 먼저 내릴 때, 나는 그의 얼굴을 한번 더 들여다보았다. 그는 방금 전과 같이 가벼운 목례를 했는데, 이번에는 알릴 듯 말 듯한 미소를 지었다. 어떤 예감이 적중했다기라도 한 듯이. 친절한 사람이거나, 약간 엉뚱한 사람일 수 있겠다고 나는 추측했다. 한달 쯤 지난 뒤, 부근의 운동클럽에서 다시 만나고 보니 그는 그냥 보통의 트레이너(教练)였다. 약력도 제대로 보지 않고 무작위로 선택한 트레이너였는데 그일 줄은 생각지 못했다. 그는 너무 헤프지도 너무 심각하지도 않은 사람이였다. 지나치게 열성적이지도 않았고 반대로 소심하지도 않았다. 자신이 누구인지 아는 사람, 자신의 한계를 시험해본 적 있는 사람, 내면이 충실하게 차올라 있는 사람, 그는 그런 사람의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 “우리 언제 한번 본적 있죠? 난 기억나는 데, 그쪽은 생각나는지 모르겠네…” 나의 트레이너가 된 B가 그날처럼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그의 미소는 그의 향수 처럼 사람을 묘하게 끄는 데가 있었다. 그것은 비슷한 기대치에 있는 이성이 발산하고 있는 ‘생물학적 매력’하고는 달랐다. 인격적 성숙이 풍기는 자연스런 힘 같은 것이라고 할가, 아니면 특정한 인간들이 품고 있는 신비스런 기운이라고 해야 할가. 촉이 그만큼 예민하지 못한 나는 그게 뭔지 알 수 없었다. 아무튼, 그가 바로 B였다. 독신생활 3년만에 만난 사람, 내 오래된 삶의 방식을 바꾸도록 결심을 내리게 한 사람. 그 즈음 나는 목과 허리에 무리가 생겨 휴식과 적절한 운동을 권장받았다. 일감에 정신이 팔려 두세시간동안 쉬지 않고 내처 그림을 그린 탓이였다. 나는 꽤 실력 있는 전자출판사의 삽화가였고 한달에 한두번 정도 만나는 동료와 선배들의 말에 따르면 디스크는 우리들의 직업병이였다. 아침에 일어나면 온몸이 뻐근했다. 2, 3년전만 해도 약간의 스트레칭에 사라지던 불편감이였는데 이제는 아니였다. 삽화가로 살아온지 8년, 서른다섯이란 나이도 무시할 수 없는 악조건이였다. 뒤골이 뻐근해남을 느끼면서부터는 각별히 주의를 가한다고 했지만 가끔 팔 안쪽까지 저려올 때도 있었다. 현대인에게 있어 그만한 증상쯤은 아무리 감기처럼 흔한 증상이라 해도 더 불편해지기 전에 관리해주는 것이 현명했다. 뭉친 근육도 풀어주고 근력도 강화할 목적으로 운동클럽들을 뒤져보다가 결국 자동차를 끌고 가지 않아도 되는 부근의 것으로 정했다. 가상의 훈련장들은 가격이 착했지만 이번 만큼은 돈 좀 쓰고라도 제대로 하고 싶었다. 클럽에서는 부근 아빠트의 주민이라는 리유로 10%를 할인해주었다. “트레이너는 어떤 분으로 하고 싶습니까? 인종이나 성격, 외모 … 선호하는 스타일이 있으세요? ” 상담 아가씨가 물었을 때 나는 머리를 저었다. “아니요, 특별히 엄격하신 분이 아니라면 상관없어요.” 하지만 사실 나는 어떤 종류의 인간하고도 잘 지내는 타입이 아니였다. 차라리 어떤 종류의 인간하고도 그닥 잘 지내지 못하는 사람이라 하는게 더 나을상 싶다. 너무 자상한 사람은 부담스럽고, 너무 열정적인 사람은 숨막히고, 너무 차겁거나 소심한 사람은 답답하고 짜증 나며 나랑 비슷한 사람은 비슷해서 싫었다. 티나게 싫어하는 건 아니였다. 작심하고 내 속을 들여다보지 않는 이상, 사람들은 나를 이럭저럭 주위와 별 말썽 없이 잘 지내는 사람으로 인식했다. 그러나 유심히 들여다보면 그들 역시 나와 비슷한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해서 나는 인간들에게 기대를 높게 걸지 않았다. 어차피 지내다보면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너무 많을 테니까. 상담아가씨는 내 얼굴을 올려보더니 컴퓨터 화면을 빠른 속도로 번져넘겼다. “그렇군요… 그럼 이 분으로 할가요? ××쪽에서 일하시다가 부근으로 이사 오면서 옮겨왔거든요. 경력도 많으시고 인기도 좋으셨던 분이네요.” 나는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말을 경청하는 척했지만 화면 속의 사진도 자세히 보지 않았다. 약간의 개성차이는 있겠지만 트레이너 역시 ‘고급 서비스’직이라 모르긴 해도 거의 순서대로 움직일 터였다. 그러니 누구를 선택한들 무엇이 그리 크게 달라질 것이겠는가. 아가씨는, “어쩌면 두 분이 잘 지낼 것 같다.” 라고 하면서 그래도 혹시 무슨 불편한 점이 있으면 언제든 련락하라고 나에게 조언했다. 할머니는 내가 그 비싼 종합운동련습권을 끊었다는 말을 듣고 전에도 그랬던 것처럼 어딘가 억지스러운 처방을 내려주었다. “그게 다 너 혼자 사느라 얻은 병이네라. 막말로, 니가 그 나이에 결혼도 하고 애도 낳고 살림을 사느라면 언제 둬서너시간씩 컴퓨터앞에 죽치고 앉아있을 새가 있겄냐.” 듣고 보니 그럴 듯도 했다. 시대가 아무리 변했다 하더라도 결혼 후의 료리나 청소, 육아 같은 집일에는 남편보다 안해가 신경을 더 써야하는 법이니까. 나 같은 자유직업자들에게는 지나친 집중력이 오히려 건강을 해칠 수가 있어서 할머니 말대로 ‘가족들에게 방해받는 삶’이 되려 장기적으로 육체의 평형을 유지해주는 ‘무공해’ 수단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였다. 그러나 결혼이라는 것이, 15좌우의 유전자중 3개가 일치하지 않는 사람과 가족공동체를 이룬다는 것이 어디 그리 쉬운 일인가? 할머니에 따르면 ‘옛날’(할머니 세대) 사람들에게 있어 결혼은 그리 쉬운 것은 아니였지만 그래도 대개의 ‘정상인’들이 모두 할 수는 있는 것이라고 했다. 그 시절에도 독신, 리혼, 일부다처, 이중 결혼 … 등 ‘비주류’의 방식으로 사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1부1처 전통적인 결혼제도를 압도할 만한 수는 절대 아니였다고 했다. 할머니는 20세기 후반기 즈음에 출생한 사람이였다. 할머니에게 자식이라고는 딸레미 하나가 전부였는데 그것은 그녀의 출산 시기가 정부의 계획생육 프로젝트에 걸쳐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할머니의 딸, 그러니까 내게 엄마가 되는 녀자는 명이 그리 길지 못했다. 3년간의 결혼생활은 무난했던 걸로 짐작되였지만 내가 어린이집으로 들어갈 나이에 엄마는 위암으로 덜컥 돌아가버렸다. 아버지는 2, 3년뒤에 재혼을 했고 나는 열두살까지 친할머니네 집에서 길러졌다. 그동안 지금의 내 유일한 혈족, 곧 외할머니는 외국에서 가사도우미로 쭉 살아왔으며 친할머니와 할아버지의 건강 때문에 련락받고 왔을 때에는 이미 예순일곱의 ‘젊은 로인’이 되여있었다.         처음 할머니와 만나던 날, 나는 예상밖으로 키가 훤칠하고 등허리 꼿꼿한 그녀를 보고 좀 놀랐었다. 힘든 로동을 하며 살아왔다고 들었는데 막상 만나고 보니 친할머니보다 활기가 넘쳤다. 그녀는 나를 만나기 위해, 또는 수년간 보지 않고 살았던 사돈식구들 앞에 나서기 위해 고심해서 맞춘 듯한 물빛정장을 차려입었다. 그녀가 옷을 입었다기보다 옷이 그녀 몸우에 가까스로 걸쳐있는 듯 어색한 차림이였다. 친할머니의 우려대로 그녀는 좀 무식한 데도 있었다. 그녀는 사돈식구들 앞에서 걱정말라고, 애 하나 먹이고 입히고 공부시키는 건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장담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교육에 대해, 시국이나 형세, 식품의 칼로리와 안전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별로 많지 않음이 곧 드러났다. 차라리 정부에서 운영하는 시설학교에 나를 맡길가 하고 친할머니는 재다시 망설이기 시작했다. 그들이 1층에서 얘기하는 동안 나는 내 방에 올라가 조용히 짐을 챙겼다. 나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재혼한 아버지에게는 자식이 둘 있었고, 그 오누이형제는 어려서부터 친할머니와 친할아버지에게 사랑받는 비결을 훨씬 많이 터득하고 있었다. 나는 명절과 휴가철을 증오하며 자랐다. 그때가 되면 아버지는 그 오누이형제를 데리고 그들의 엄마와 함께 친할머니네 집에 들렸기 때문이였다. 그 며칠간은 나 자신이 이 세상에서 괜한 존재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기에 충분한 시간이였다. 그들은 아버지와 엄마와 누나와 동생과 할머니, 할아버지였지만 나는 무엇이란 말인가. 어머니가 죽음으로 내게는 더이상 가족다운 가족이 있을 리가 없는 것이였다. 친할머니네가 최선을 다해 나를 돌보았음에도 그 느낌은 가셔지지를 않았다. 방울이는 그것이 나의 관계감성지수가 낮은 탓이라고 말했다. 물론 엄마를 일찍 잃어 원만한 가정 속에서 자라지 못한 객관적 원인도 있다고 했다. 그러나 나보다 더 심한 폭력과 모순과 랭대와 방치를 겪으며 자란 사람들도 수두룩하다고 했다. 그 아이의 말은 일정한 참고가치가 있었다. 자전거동호회에서 만난 친구들을 보아도 나보다 나은 상황에서 자란 이들이 별반 없었다. 물론 아직도 전통적 가정에서--할머니가 말하는 그 ‘옛날’방식으로 쭉 자라온 이들이 있긴 했다. 하지만 그들은 소수자, ‘비주류’였고 우리 대부분은 그들이 말하는 ‘전통가정의 분위기’에 대해 공감할 수가 없었다. 언젠가 식품자판마트에서 전통가족으로 보이는 남자와 녀자, 그리고 아이 둘을 본 적이 있었는데 가게마다 우르르 쓸어모여가는 모습이 너무 불가사이했다. 전통가족이란 저런 것인가? 년령과 취향과 성별이 모두 서로 다른 사람들끼리 저렇게 정신 사납게 몰려다니는 것이? 뭔가 색다른 분위기였고 어떤 말할 수 없는 생기가 그속에 도는 것 같았지만 한편으로는 너무 복잡하고 모순 많으며 서로에 대한 불만과 짜증이 산발하는 관계 같았다. 같은 전통가족이였지만 그들은 ‘기적의 가족들’이란 국민 토크쇼에 초대받았던 사람들보다는 그다지 행복해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그것이 전통가족의 약한 고리이며 진실된 모습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할머니는 나와 생각이 달랐다. 그녀는 강인한 사람이였다. 그녀는 나젊은 외동딸을 먼저 잃었고 나를 데려다 키우면서 다시 남편을 보내였다. 그녀는 나의 친할머니와 할아버지, 나의 생부와 그의 안해가 돌아가는 것을 모두 지켜보았다. 그녀는 농민, 공장의 직원, 식당주방 보조, 건물 청소부, 가사 도우미, 그리고 환자료양원 등 다양한 직업들을 가졌었으며 여러 도시와 시골에서 많은 종류의 사람들을 만나보았었다. 한 세기 가까이 살아온 그녀는 또 세상의 수많은 변화들을 겪어낸 사람이기도 했다. 얼마나 넓은 면적의 토지들이 세멘트로 덮였는 지, 도시의 아빠트들은 어떻게 최고 7층에서부터 50층내외로 높아지게 되였는 지, 거리의 자동차는 어떻게 많아지기 시작했으며 또한 어떤 식으로 정리되였는 지, 국가와 도시와 사람들의 삶은 어떤 과정을 거쳐 점점 체재화 되여왔는 지 등을 모두 체험했었다. 매번 최신형의 핸드북이나 가전제품들을 사가지고 방문할 때면 그녀는 늘 입버릇처럼 말하군 했다. “참 편리한 것들이 나오는구나. 사람 점점 약하고 게을러지게.” 실제로 할머니는 자판슈퍼를 싫어해서 일부러 매장 직원이 있는 마트를 골라 다녔다. 정말 피곤한 날이 아니면 료리도 손수 장을 봐서 해드셨다. 저번 휴가 차 내가 우겨 소형료리기계를 사드렸지만 그것을 쓰지 않는 날이 더 많은 것 같았다. 그녀는 아직까지 반나절짜리 ‘학원’을 다니고 있었는데 년세가 있는 지라 걱정이 되여 다른 많은 로인네들처럼 그냥 ‘오피스텔’에 들라고 몇번이나 얘기해도 귀등으로 넘겨들었다. 일단 ‘오피스텔’ 주민이 되자면 정부의 복지금 가지고는 많이 모자랐다. 소소한 일상과 식단에서부터 건강관리, 취미생활, 간단한 알바활동 등 삶 전체를 돌보아주기 때문이였다. 비용이야 내가 얼만큼씩 대줄 수 있다고 귀띔해도 할머니는 념두에 두지 않았다. 할머니는 ‘오피스텔’에서의 삶 자체를 싫어했다. 그 녀는 늘 그곳을 ‘안락사 하기 딱 좋은 감옥’이라고 불렀다. 대신 할머니는 내가 방울이의 동생 달랑이를 그녀 집에 들이는 것을 허락했고 집안 곳곳에 있는 감지기들과 카메라, 그리고 항상 몸에 지니고 다니는 핸드북을 통해 자신의 일상 정보들을 매일 내게로 전송해주었다. 요즘 들어서는 그녀도 많이 약해졌는지 전보다 ‘옛날’ 얘기 꺼내기를 더 좋아했다. 대개의 로인들이 그러하 듯 그녀 역시 현대의 물건들을 리용하며 살면서도 여전히 ‘옛날’이 더 좋았다고 기억을 했다. “그때는 어디를 가나 사람이 많았고 그때 사람들은 무식하긴 했지만 요즘 인간들처럼 차겁지는 않았다.”는 것이 그녀의 주요 주제였다. “너그 엄마는 대학입시 시험을 치르고 나서 바로 운전면허를 땄는데, 출근하는 첫날 새로 뽑은 차를 주차장에서 박았지 뭐니…” 엄마가 박은 차의 주인이 나의 생부였는 모양, 할머니는 그 장면을 상상하면서 큭큭 재미있게 웃었지만 나는 도무지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세상에, 보통의 사람들이 전부 면허를 따서 직접 운전하고 다녔다니… 얼마나 피곤하고 위험한 일이였을가. 물론 지금도 전문 경주자들이나 운전 동호회의 회원들은 직접 핸들을 잡는다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소수의 전문인이 하는 것이였다. 도로와 도시 전체가 체제화 된 지금은 당연히 자율운전 자동차가 합리적이였으니까. 예약버튼만 누르면 출행에서부터 주차까지 전체 로선을 감지기가 통제하고 있었으므로 충돌사고나 주차곤란 같은 불편들이 있을 수 없었다. 그것은 AI에게서 교육훈련을 받기 시작한 서너살의 꼬마라도 리해할 수 있는 상식이였다. 길가에 서서 손을 흔들어 택시를 잡았다는 말도 내게는 참 신기하게 들렸다. 특정된 보행도로가 아니면 자동차 바깥에 서있는 사람을 볼 수 없었으니까. 거리마다 작은 옷가게들이 즐비했고 몸집이 큰 백화점과 사무건물과 정부청사들이 있었는데 그안에는 사람들로 바글거렸다는 말도. ‘지페’라는 것을 저축하거나 꺼내기 위해 ‘은행’이란 실체의 건물에 가서 대기표를 끊었다고 했고 시장에 가면 손질되지도 포장되지도 않은 야채들이 종류별로 무득무득 쌓여있었다고 했다. 그리고 세상에, 정말 믿기 어려운 일이였는데 ‘신분증’이란 것을 발급받기 위해 몇주일 기다려야 했다는 얘기도 있었다… 온통 불편하고 야만적이고 더럽고 무질서한 그림이였지만 할머니는 그것을 ‘지금보다 생기 있는 삶’이라고 표현했다. “사람은 사람을 만나면서 살아야 하는 거다. 사람 만나는게 귀찮고 불편하고 짜증날 때가 많지만 그래도 그게 산다는 거야. 어디 요즘처럼 통 사람구경하기가 힘들어서야…” 방울이는 할머니의 푸념을 전송받을 때마다 입을 삐죽거렸다. “나 참, 로인네두. 누나, 말 좀 해봐요. 나는 사람 아닌가? 내 동생은 사람 아닌가? 24시간 붙어있으면서 말동무해주고 보살펴드려도 기계사람이라고 꼭 저리 차별을 하신다니까.” 나는 그림을 그리다 말고 의자에 걸터앉아 방울이의 기계적인 안마를 받으면서 대답해주었다. “임마, 넌 아직 사람 될려면 멀었어. 니가 한 된장국은 도무지 할머니 한 것이랑 비교가 안되거든. 거봐, 지금도 여긴 살살 풀어주고 저길 꼭꼭 눌러달라고 해도 영 시원치 않게 하잖아.”   사실 나는 그 순간 나의 트레이너(教练)가 된 B를 생각하고 있었다. 상담 아가씨에게서 예약시간을 통보받고 클럽으로 갔더니 커다란 검은색 베낭을 멘 B가 기다리고 있었다. 어딘가 분위기가 익숙하다 싶었는데 베낭을 벗어 무릎과 손목, 발목 보호대를 찾아 착용하면서 몸을 내쪽으로 돌리는 모습을 보고야 그인줄 생각이 났다. 워낙 한 아빠트라 해도 얼굴을 본 사람이 적었고 또 그의 향수가 특이하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는 그날 파란 줄을 띄운 검은색 운동복을 입었는데 그러고보니 그의 몸은 정말 일반인들과 달리 단단하고 강해보였다. 내가 불안해하던 베낭속에는 야구 방망이와 테니스, 배드민턴 채와 내가 처음 보는 신기한 휴식용품들이 있었다. 저런 것을 모두 들고다니다니, 그것도 체력훈련의 방법인가? 하고 나는 생각했다. “배드민턴부터 시작하고 싶다고요? 가볍게 몸풀기에는 좋은 운동이죠. 좀 따분하긴 하지만 정기적으로 몸을 운동해주는 것도 근력강화에 좋구요, 한달에 한번으로 끊었죠? 야외등반운동이요…” 그는 다시한번 꼼꼼하게 나의 운동권에 포함된 내용들을 체크해보았다. 목, 허리, 손목과 발목 등을 풀어주는 유연체조를 하고 나서 그는 기본동작부터 가르치기 시작했다. 배드민턴채를 다리와 다리사이에 세워서 악수하 듯이 잡아라, 항상 그 자세로 들고 있어라, 공이 날아오지 않는다고 절대로 멍하니 내려놓고 있으면 안된다고 B 가 말했다. 공을 여러 각도에서 번갈아치기를 10분정도 한 다음 본격적인 회전하는 법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어깨와 팔꿈치를 뒤로 당기면서 상체를 오른쪽으로 엽니다, 이게 원래의 자세로 되돌아오는 자세지요… 이제 큰 원을 그리듯 어깨가 크고 자연스럽게 돌아가도록 칩니다, 이렇게… 탕! 별로 어렵지 않은 동작인 거 같은데 몇번 따라하고 나니 벌써 땀방울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역시 가상훈련과는 차원이 달랐다. “좋습니다, 그 자세 그대로 유지하고요, 다시 갑니다, 아니요, 좀더 크게, 좀더 자연스럽게, 물 흐르 듯이, 어깨 팔뚝에 힘 풉니다…” 동작중에 간간히 노래를 부르 듯 코치해주는 B의 목소리도 컴퓨터나 방울이보다 호소력이 있었다. 이런 맛에 사람들이 갑절의 돈을 주고라도 전문직 트레이너를 쓰고 싶어하는구나 느껴졌다. 잠간의 휴식타임, 내게 다시 친절하게 근육을 풀어주는 유연체조를 가르치는 B를 보며 나는 생각했다. 이 사람은 매일 진짜 사람들을 상대하면서 살아가겠구나. 얼마나 피곤할가? 혹은 정말 재미가 있을가? 나는 그가 가르치는 대로 열심히 뛰여보고자 했지만 마음처럼 몸이 쉽게 따라주지 않았다. 련습시간이 아직 십분 남았는데 나는 벌써 땀동이가 되여버렸다. “힘드시죠? 그래도 첫날치고 잘 따라오네요. 전에 다른 운동을 했었나봐요…” 저녁에는 근육이 뭉칠 수가 있으니 온수로 샤와하고 방울이에게서라도 안마를 받은 뒤에 취침하라고 그는 조언했다. “여기를 이렇게 이런 식으로 풀어주고요, 다리도 이렇게… 해달라고 부탁하세요…” 내 팔과 어깨를 가볍게 주물러주며 그가 시범을 보였다. 그의 손이 한번 스치고 지났을 뿐인데 어깨가 많이 시원해진 느낌이였다. 모르긴 해도 업계에서 이만한 실력을 쌓자면 노력깨나 들였겠다 싶었다. B와 함께 운동을 시작하면서 내 생활에는 예상치 못한 변화들이 슬그머니 생겨났다. 그림을 그리다가 령감이 고갈되면 괜히 방울이 트집을 잡는게 아니라 음악을 뒤져 노래를 흥얼거렸고 일이 끝나고는 먼저 친구에게 련락을 해서 안부를 물었으며 출판사 사장이 물량을 상식 없이 늘렸을 때에도 좀더 부드럽게 대처할 수 있었다. 이래서 뉴스마다 운동, 운동하는 듯 싶었다. 몸을 움직이고 팔다리를 조화시켜 어떤 동작을 완성하거나 목표물을 적중시킨다는 것, 거기에서 오는 쾌감과 가뿐함과 생기는 게임이나 4D영상 같은 것으로 대체할 수 없는 것이였다. B의 미소와 친절한 목소리도 나의 상쾌한 기분에 긍정적인 효과를 냈다. 물론 자신의 고객이라 서비스차원에서, 혹은 직업도덕의 차원에서 베푸는 친절이였겠지만 왠지 내가 느끼기에 그 정도의 얍삽함은 아닌 것 같았다. 그는 정말로 자신의 일을 사랑하는 듯이 보였으며 그래서 고객에게 최선의 것을 권장해주려고 애쓰는 것 같았다. 그는 내게 가끔 식단상황을 묻기도 했고 소소한 일상이나 작업습관을 문의하기도 했으며 내게 뭐니뭐니해도 건강한 생활방식과 삶의 자세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 자신은 직접 료리를 해먹기도 하고 운전도 수동으로 할 수 있다는 말을 듣고 나는 할머니가 말하던 그 ‘옛날’세대들이 생각났다. 몸으로 벌어먹는 사람이라 그런가? 어떻게 아직도 그런 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있단 말인가? 내게는 그와 같은 성인남자가 직접 찌개를 끓이고 핸들을 잡고 있는 모습이 잘 상상되지 않았다. 그러나 혹시 그라면, 식품자판마트에서 보았던 전통가족의 남자보다 훨씬 여유롭고 품위 있어 보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날씨가 좋아지기를 기다려 야외등산운동을 가게 된 전날, 나는 아빠트 엘리베터안에서 다시 그를 만났다. 나는 그런것을 두고도 인연이라 할 수 있나 싶었다. 1000세대가 같이 사는 아빠트에서 이렇게 가까운 시일내에 다시 만나게 되는 동일인은 그리 흔치 않았으니까. 그날 그의 곁에는 그의 안해와 예닐곱살로 보이는 딸아이가 같이 있었다.   내가 엘리베터속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고 B는 의외라는 듯 눈을 크게 떴다. 나에게 반가움의 미소를 지어보인 뒤 B는 얼굴을 살짝 기울여 안해에게 낮은 목소리로 나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그 모습은 정말 정겨워보였는데, 그러나 내게는 어딘가 낯설게 느껴졌다. 무슨 원인이였던지 알 수 없어도 나는 그동안 B가 당연히 독신자일 줄 알고 있었다. B는 다시 내게 그의 안해와 아이를 소개시켜주었다. 갈색머리에 초록 눈동자를 가진 B의 안해가 가볍게 목례를 하며 B의 것과 비슷한 미소를 지어보냈다. 성형을 한 티는 나지 않았고 지방흡입시술을 했는지도 잘 알 수 없었지만 원체 빼여난 미인임에는 틀림없었다. 그녀는 사랑으로 가득찬 엄마들이 그러하 듯 자신을 빼닮은 딸아이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어린 소녀는 엄마의 또렷한 이목구비와 아버지의 머리카락 색상을 물려받았다. 예쁘고 사랑스러운 소녀였다. 나 또한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어린 녀자아이를 보는 것이 오랜만의 일이였다. 기계들의 전문분야가 날로 넓어가면서 공공장소의 사람의 수는 점점 적어져 갔는데 특히 아이들을 볼 수 있는 기회는 더욱 드물었다. (저출산과, 사이버학교 교육의 결과였다.) 주차장가 저만치 보이는 1층 응접실에서 먼저 내릴 때 나는 B의 가족을 향해 인사를 했다. B와 그의 안해는 맞인사를 했지만 소녀는 말똥말똥 눈만 깜짝이며 우리를 쳐다볼 뿐이였다. 다정한 부모는 딸의 어깨를 감싸안으며 나에게 답인사를 해보도록 격려했지만 소녀는 시종 고집스레 입을 다물고 서 있었다. 오누이형제를 데리고 떠나가는 아버지에게 인사하기를 거부하던 어린 내 눈빛이 저러했을가 하는 생각이 잠간 스쳤다. B와 그의 가족들을 우연찮게 만나본 저녁, 나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그동안 사귀였던 남자들을 떠올리게 되였다. 한때는 나도 용감하게 ‘사랑’이니 ‘결혼’이니 하는 가치에 도전해본 적이 있었다. 세월이 아무리 흐르고 시대가 어떻게 바뀌더라도 그런것들의 가치는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었다. 보통의 청춘이라면 너나없이 한번쯤 해보았던 생각이였을 것이였다. 나는 내 생각들을 증명해 보일 짝이 필요했다. 사이버 중학교에서 알게 된 사람, ××동호회에서 만난 사람, 친구의 모임에 들렀다가 눈이 맞은 사람도 있었다. 처음에는 서로에게 주체할 수 없이 끌려 그게 바로 ‘사랑’인줄 쉽게 생각했었다. 그러나 련인관계를 시작해서부터는 차츰 일상의 소소한 문제들 땜에 힘들어졌다. 마지막 남자였던 X의 경우는 동거기간이 가장 길었고 ‘결혼’ 직전까지 갈 정도로 서로에게 잘 어울린다 생각했으므로 오히려 헤여짐의 상처도 제일 아팠다. 지금도 나는 가끔 음악사이트를 뒤지다가 ‘사랑해, 안나!’ 의 주제곡이 흘러나오면 마음이 쌉싸름해난다. 그의 아빠트에서 함께 뒹굴며 놀았던 게임, 함께 료리기계를 조종하여 새로운 퓨전료리를 해먹던 일, 함께 욕탕으로 들어가 샤와기로 물을 뿜으며 장난하던 장면이 찰칵찰칵 떠오른다. 안식월을 얻었을 때는 같이 자동차를 타고 도시를 떠나 세계 여러 명승지들을 둘러보던 것도 기억난다. 만년설이 뒤덮인 천산을 마주하고 따뜻한 호텔에서 보내던 그 뜨거운 밤도… 그 모든 격정과 랑만과 감동들을 겪고 나서도 오해와 갈등과 권태는 여전히 우리들을 찾아왔다. 우리는 철이 없고 어리석어서 그런 문제들을 현명하게 대처하지 못했다. 상대의 습관과 상황과 마음을 리해하고 받아들이고 감싸안기보다는 일단 자신의 편리와 리익, 자존심을 앞세웠다. 불신과 모순의 골이 더욱 깊어져서 도저히 해결하고 싶은 마음도 힘도 생기지 않게 되자, 헤여짐에 합의를 했다. 그의 아빠트를 떠나오기 전날 밤, 마지막 사랑을 나누면서 우리는 울었다. 우리의 실패한 사랑에 대해, 더이상 지속시킬 수 없는 우리의 관계를 위해, 더이상 감당할 수 없었던 우리의 나약함에 대해. 그런 면에서 볼 때 B의 결혼과 가족관계는 실로 흔치 않은 성공의 사례였다. 서로를 향한 존중과 사랑의 눈빛과, 아이에게 베푸는 인내와 독려의 자세… 그런 성숙한 관계를 형성하기까지 지불했을 막대한 대가를 상상하니 그들 부부가 존경스러워졌다. 할머니는 그런 말을 듣고도 B에 대해 여전히 시답지 않아했다. “겉으로 봐서 뭘 알갔니? 된장은 찍어 먹어봐야 알고 사람은 지내봐야 안다고 했다…” 할머니는 특히 B의 외모를 마음에 들지 않아했는데 내가 그와 함께 야외등산을 떠난다는 말을 듣고는 더욱 불만스러워했다. “뭐? 그 기생 오래비 같이 생긴 놈이랑 야외를 나간다구? 카메라 감지기가 하나도 없는 곳으로? 둘만 가는 거야? 다른 사람들 없이?” 나는 B가 보내준 소지품 내역서와 대조하면서 준비물을 하나하나 챙기기 시작했다. “고만 좀 하세요 할머니, 걱정할가봐 미리 알려두는데, 그 사람은 벌써 가족이 있네요. 것도 1대1 전통가족에 일곱살난 녀자아이까지.” 방울이가 나를 도와 사계절 옷들과 여러 물건들이 종류별로 정리해진 벽장들을 하나하나 살펴주었다. 베낭과 모자, 실외 운동복과 등산화, 세면도구와 예쁜 원피스… “엥? 누나, 근데 예쁜 원피스는 뭐에요? 등산 간다면서요?” 필요한 물품들을 일일이 꺼내 쏘파우에 무져놓다가 방울이는 물었다. 글쎄, 그거야 뭐… 가는 도중에 다른 프로그램이 혹시 있지 않을가… 나도 어물거렸다. 헷갈리거나 실수할 량반이 아니니 그렇게 챙겨 오도록 한 리유가 꼭 있을 것이였다. 방울이는 머리를 갸웃거리면서 ‘예쁜’ 원피스 몇장을 한꺼번에 꺼내왔다. “암튼 누나, 어디 예쁜 걸로 직접 골라보세요.” 예쁜 원피스라, 어떤 스타일을 말하는 것일가. 갑자기 B의 앞에 이런 원피스를 입고 나설 내가 어색하게 느껴졌다. B와는 트레이너와 고객으로 만났으니 만날 때마다 거의 운동복차림이였던 것이 자연스러웠으니까. 나는 치마의 길이와 가슴이 패인 정도와 재질의 투명성과 전반 분위기를 고려하여 겨우 그중 하나를 선택했다. 내가 한벌한벌 신중히 옷을 고르고 있는 동안 방울이는 의뭉스러운 표정으로 그런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괜히 그 애한테 무슨 책잡힐 일을 하고 있는 것 같아서 나는 부랴부랴 짐정리를 끝내버렸다. 이튿날 간단히 아침을 해결한 다음 약속시간에 맞춰 1층로비로 내려갔더니 벌써 주차장에서 스포츠카(跑车)를 불러낸 B가 차안에 앉아 대기하고 있었다. 캐주얼한 셔츠에 청바지를 입은 B는 까만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다. 자유롭고 랑만적인 분위기가 흠씬 풍겨서 이제껏 내가 보아온 그의 스타일하고는 또 많이 달랐다. “좋은 아침! 잘 주무셨어요? ” 하고 B가 쾌활한 음성으로 내게 물었다. 차문을 열어 내가 들어가 앉을 수 있도록 도와준 다음 B는 나의 베낭을 받아 뒤칸에 넣어주었다. 나는 치마자락을 잡아올리며 그의 곁에 앉아서 버튼을 눌러 반투명한 안전조끼를 착용했다. 말로만 듣던 수동식 스포츠카(跑车)였고 X이후 다른 사람이랑 한 차를 타는 것도 처음이였다. 반원형의 핸들이 불쑥 튀여나온 운전석에서 B는 머리를 돌려 나의 몸 아래우를 빠르게 훑었다. “… 원피스가, 예쁘네요… 산우에 올라가 땀도 식히고 샤와도 한 담에 바꿔입고 사진 찍으면 좋은 추억이 될 것 같아서 챙기라고 했습니다만…” 하고 그는 빙긋 웃었다. 순간 나는 얼굴이 붉어졌다. 비싼 종합운동권도 처음 끊어보았고 트레이너와 함께 등산도 처음이여서 내역서를 보고도 제대로 리해하지 못한 것이였다. “뭐, 이미 입었으니까 그대로 계시다가 산에 도착해서 다시 운동복으로 갈아입으시죠. 덕분에 내 눈은 호강하겠습니다…” B는 버튼을 눌러 내 안전조끼를 벗기고 손수 원피스의 옷깃과 치마자락을 꼼꼼하게 정돈해주고 나서 다시 입혀주었다. “조금 시간이 걸릴 거에요. 속도를 많이 내지는 않겠습니다만 이런 방식의 운전이 낯설어서 겁날 수도 있을 거에요. 맨 나중 한구간은 비행모드로 강우를 날아지날 텐데 아마 그때 차체가 조금 흔들릴 수 있습니다. 참고하시구요, 걱정되면 언제든 얘기하세요…” 그는 실내운동을 시작할 때처럼 여러 주의사항들을 안내서로 친절하게 짚어주었다. 붕-- 발동이 걸리자 운전석 앞유리 전면에 넓게 부착된 모니터에 주변 차들의 이동상황이 순식간에 실시간으로 나타났다. B는 한손으로 핸들을 잡고 다른 한손으로 기어를 넣어 차를 출발시켰다. 빳빳이 경직되여있는 나를 느꼈던지 그는 얼굴을 돌려 일부러 안심하라는 뜻의 미소를 지어보였다. 몇분이 지난 뒤, 여유로운 자세로 핸들을 조종하는 그를 보면서 나는 차츰 긴장을 풀었다. 드디여 투명한 철옹성벽을 지나 초대형 컴퓨터의 성곽도시를 벗어나 교외 도로에 진입하자 B는 차뚜껑을 반쯤 열어제꼈다. 시원한 자연의 바람이 나의 긴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어루쓸었다. 평야를 지나 둔덕을 내려올 때면 자동차가 30초쯤 붕 떠서 날아내려왔다. 상쾌한 환성이 절로 입에서 터져나왔다. 오래동안 묵은 체증처럼 쌓이고 쌓였던 스트레스가 확확 뒤편으로 날려가고 있었다. B는 흥분된 나의 모습을 조심스럽게 지켜보면서 이따금씩 내 얼굴을 휘감은 머리카락을 목 뒤로 넘겨주었다. 그의 손가락이 내 귀바퀴에 닿을 때마다 나는 모든 트레이너들이 다 B처럼 고객에게 이토록 친절할가 생각했다. 혹은 B는 자신의 모든 고객에게 다 내게 하는 것처럼 해줄가 하고. B의 말처럼 산자락아래 굽이쳐흐르는 푸른 강물우를 날아지나는데 한줄기 돌풍이 불어 자동차가 10센치메터 쯤 덜컥 내려앉았다. 어머! 하고 내가 소리를 질렀다. 발밑으로는 넘실거리는 강물이 넓은 가슴을 헤치고 우리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이대로 강물 속에 처박히지 않을가, 만약 그럴 경우 이 스포츠카(跑车)는 수영모드가 따로 있을가, 만에 하나 B가 버튼을 잘못 누르기라도 하면 어떻게 될가 하는 념려들이 일시에 내 머리 속을 까만 거미떼처럼 덮쳐버렸다. B는 기어를 놓고 오른손을 뻗어 안전조끼의 자락만 붙들고 있는 내 손을 덥썩 잡았다. 강우를 모두 지나고 다시 도로우에 자동차가 내려 달리고서야 그는 내 손을 놓아주었다. 등반센터 휴계소의 탈의실에서 운동복을 바꿔입으며 나는 내 손에 코를 대고 킁킁 맡아보았다. 이제는 그게 B의 향수냄새인지 그의 체취인지 아니면 내 땀내인지도 잘 분간할 수 없었다. 향을 들이키자 갑자기 가슴이 후득후득 뛰며 이상한 예감이 들었다. 좁고 가파른 산길을 올라가면서 이런저런 수다를 떨다가 나는 B에게 물었다. “혹시 《사랑해, 안나!》 그 영화 보셨어요?” 그는 뒤로 돌아서서 내가 다가오기를 기다려 손을 내밀었다. “그럼요, 요즘 치고 그만큼 훌륭한 영화 만나기가 쉽지 않잖아요, 한 남자와 한 녀자만의 전통적인 사랑이라… 일각에서는 고리타분하기 그지없다고 하지만 그건 분명 그 영화의 진가를 보아내지 못한 것입니다 …” 그는 나의 손목을 잡고 둔덕을 올라오도록 힘껏 잡아당겼다. 잠간 휘청거리던 내 허리에 그의 팔이 감겨졌다. “정서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역시 한 남자와 한 녀자의 사랑만이 가장 건강하고 진실되고 고상하고 또 황홀한 거죠, 우리 몸이 워낙 그렇게 사랑하도록 만들어지지 않았습니까?”하고 B는 모자채양 아래 나의 얼굴을 피끗 들여다보았다. 느닷없이 내 머리 속에서 엊저녁 엘리베터 안에서 보았던 그의 안해가 떠올랐다. 선명한 이목구비와 에메랄드빛 눈동자와 시원스레 굴곡진 육감적인 몸매까지. ‘황홀한 사랑’ 이란 말에 나는 문득 오래동안 잊고 살았던 육체적 희락의 순간들이 생각났다. 희미하면서도 은근스럽게. 나는 B의 눈빛을 피해 모자채양을 약간 더 눌러썼다. 예약된 지점, 산을 관통한 휴계소의 엘리베터를 통해 스포츠카(跑车)의 짐들이 올라와있었고 내가 샤와하는 동안 B는 나를 위해 작은 천막을 쳐주었다. 화덕 안에서 장작불도 지피고 먹음직스런 꼬치를 직접 구워주는가 하면 양철로 된 컵에 구수한 커피도 보글보글 끓였다. “내려갈 때는 엘리베터를 리용할 것이니까 이제부터는 여유를 가지고 쉬세요. 주위 숲속을 둘러봐도 좋고 사진도 찍으시고 피곤하면 천막안에서 쉬여도 괜찮습니다. 하산할 시간이 되면 제가 다시 올테니까요.” B는 부드러운 장미빛 탄자가 깔려 있는 천막 안으로 나를 안내했다. 반쯤 열린 창문으로 바람이 들어와 커튼을 흔들었고 나지막한 침대 요 우에는 얇은 담요와 베개가 놓여있었다. 벽걸이 컴퓨터안에서는 차분한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상큼한 해살이 날아들어오는 가운데 나는 침대 요 우에서 뒹굴며 영화를 보다가 까무룩 잠이 들었다.   깨여나고 보니 몸은 게나른하고 주위는 조용했다. 컴퓨터는 어느새 꺼졌고 내 배우로 담요 하나가 더 덮여있었다. 문을 열고 바깥에 나와 둘러보니 사락사락 나무잎이 바람에 쓸리는 소리, 찌르륵 찌르륵 풀벌레가 우는 소리가 가만가만 들려왔다. 어디선가 쪼르르 쫑-- 예쁜 새소리가 들려 숲을 헤치고 걸어들어가는데 작고도 노란 산꽃들이 무덕무덕 피여있는 잔디밭이 나타났다. 풀꽃과 나무, 부식토의 향이 한데 어우러져서 페부로 몰려들었고 팔랑팔랑 날아다니는 나비의 여유로움에 나도 그만 아름다운 날개를 얻고 싶었다. 깊은 산속에 나만 홀로 있는 느낌이였다. 온 산과 하나가 된 기분이였다. 내가 그림 속으로 들어왔는지 이 풍경 속에 워낙 내가 있었던 건지 헷갈렸다. 나는 홀린 듯이 앞으로 자꾸 앞으로 걸어들어갔다. 편백나무, 옻나무, 소나무들이 우거진 곳을 지나 약간 트인 공간이 나타났는데 그 풀밭우에 누군가 나를 등지고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요지부동한 기마자세로 두 손을 앞으로 쭉 뻗은 채 서 있는 그는 영낙없는 B였다. 그는 마치 살아있는 조각, 이 산에서 움터 자란 인간식물 같았다. 어떤 신비롭고도 평안한 기운이 그의 주위에 깔려있었다. 나는 그 기운의 바깥 변두리에 멈춰서서 그의 뒤잔등을 바라보았다. 사람의 기척을 느낀 모양인지 B가 천천히 가세를 가다듬더니 두 팔을 내리고 내게로 돌아섰다. 방금전까지 느껴지던 기운이 스르르 사라지고 산들산들 산바람만 우리 사이에서 불고 있었다. “혹시 지금 기수련하신 거에요?” 하고 내가 묻자 B가 웃었다. “역시 기에 대해 민감하시네요, 수련을 안했을 뿐이지 J님도 대단한 잠재력자에요.” 천막을 정리하고 엘리베터를 타고 내려가면서 내가 그랬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죠? 기수련은 옛날얘기가 아닌가요? 언녕 맥이 끊어졌다고 들었는데 아직도 전승인들이 있다는 말인가요?” 나는 영화에서 본적 있는 고대 중국의 기공이며 인도의 요가 같은 것들을 두루 떠올렸다. “인간은 사실 늘 더 높은 차원을 갈망하는 존재이지요. 수련을 통해 몸 구석구석에 있는 기 구멍들을 열고 하나하나의 세포들을 깨워 가장 민감한 상태로 승화 시킨 다음 주변의 기를, 자연의 기를, 나가서 우주의 기를 감지하는 거에요. 소위 우주와 하나가 되고 자신이 또 하나의 소우주로 되는 것도 느낄 수가 있구요…” 믿기 어려운 말이지만 수련을 하다보면 나중엔 다른 차원의 우주도 감지할수 있으며 종내에는 더 높은 차원으로 옮겨갈 수도 있다고 B가 말했다. 그것은 내게 있어 너무 어려운 말이였다. 현실 속에서 바로 얻을 수 있는 것도 있는 데 그게 부정적이고 왜곡된 마음과 병환을 겪는 육체의 치유라고 했다. 나의 베낭을 받아 그의 천막곁에 나란히 넣어두고 나서 B는 발동을 걸었다. “아, J님도 나랑 같이 수련해보면 참 좋을 텐데. 워낙 천부가 있는 사람은 배로 빠르답니다. 한번만이라도 체험해보시면 이게 얼마나 좋은 것인지 알게 되실 텐데.” 바람이 불어 금방 샤와를 마친 B의 몸에서 은근한 향내가 내게로 실려왔다. 전의 것과 거의 비슷하면서도 다른 향이였다. 좀더 달큼하고 좀더 매혹적인 향이였다. 거기에 취해서인지 나는 그만 아무 생각없이 말해버렸다. “그래요? 그럼 뭐 재미삼아 해보지요 뭐.” 나는 아빠트로 돌아와서야 제정신이 들었다. 내가 끊은 종합운동권에는 기수련항목이 없었고, B에게서 수련을 배울 경우 따로 비용을 추가해야 하는 생각 때문에 약간 골치가 아팠다. 그러나 이미 다음번 실내운동부터 반시간가량을 더 늘여서 시작해보기로 약속된 뒤였다. ‘설마 이 사람, 이런 옵션으로 돈을 버는 트레이너인가?’하는 의구심이 탐조등처럼 머리 속을 스쳤다. 한편으로는 여직껏 그가 보여주었던 성실과 친절함에 대해 너무 무례한 억측을 하는게 아닌가 하는 죄책감도 들어하면서. 나는 할머니에게 B와 기수련을 하기로 했다는 것을 숨겼다. 방울이에게도 알려지는게 좋지 않을 것 같아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어느덧 비밀을 만든 것이였다. 때때로 나 자신이 한창 어리석은 짓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일단 한번 체험해보고 다시 그들에게 공개하겠다고 마음먹었다…       지금에 와서야 나는 B가 한 말의 뜻을 대부분 리해할 수 있었다. 우주의 기운이 무엇인지, 어떻게 우주와 하나로 되며 다른 차원의 우주는 어떻게 들어가는지 하는 것들을. 정확하게 말하면 운동권이 끝나는 마지막 수련때에 그런 경이로운 체험들을 해본 것이였다. 그런 느낌은 한번도 있어보지 못한 것이였고 그후에도 아마 없을 것이였다. 나는 다시 운동권을 끊지 않았고 우연한 기회에 상담아가씨를 통해 B 역시 그날부러 직장을 옮겼다는 소식을 전해들었다. B는 애초부터 려행자라고 했으며 한 도시에 2 3개월씩 머물며 한명이나 두명의 고객만을 받은 뒤 끝남과 동시에 다른 도시로 옮긴다고 알려주었다. 이제는 떠난 사람이나 이만한 신상정보쯤이야 공개해도 괜찮을 것 같다는 아가씨의 주책덕분에 내 마음은 좀 편해졌다. 아빠트 엘리베터를 탈 때나 로비에서 자동차를 호출할 때나 혹은 부근의 슈퍼를 거닐 때마다 B를 만나지 않을가 마음 졸이지 않아도 되였으니까. 기운이 많이 딸려하는 할머니는 마지막 유언마냥 또다시 나더러 사람 같은 사람 좀 만나며 살라며 닥달했고 방울이마저 나의 삶을 안스러워했다. “누나는 참, 딱 봐도 독신체질이 아닌데, 제발 누나가 원하는 대로 살아요. 아닌 척 좀 하지 말고. 남 눈치 보지도 말고, 비겁하게 구실만 대지도 말고.” 나는 그들의 잔소리에 넌더리가 나서, 그리고 B가 내 주위를 떠났다는 안도감에 외출시간을 늘리기로 했다. 친구들도 더 자주 만나고 일감을 받기 위해서는 일부러 출판사 사무실까지 들렸으며 돌아오는 길에는 가까운 휴양지를 거쳐 오거나 각종 전시회와 미술관도 둘러보군 했다. 한번은 어느 미술관에서 〈성녀 테레사의 환희〉란 베르니니의 모사품을 보고 깜짝 놀랐다. 천사의 불화살에 가슴을 꽂힌 성녀, 그녀의 고통인 듯 황홀인 듯 반쯤 열린 입과 정신을 거의 잃고 감겨버린 눈, 느슨한 후드의 긴 옷자락 아래로 맥없이 떨어진 손과 발을 보는 순간 나는 예술가가 표현하고자 하는 느낌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소름 끼치도록 생생한 표현이였다. 이 조각가, 그게 어떤 기분인지 아는 모양이구나… 자동차를 타고 아빠트로 돌아오면서 나는 그날밤의 B와 그의 기운을 생각했다. … 그 즈음, 실내운동이 끝나고 샤와를 마친 다음 나는 반시간에서 사십분씩 그의 개인 수련실에서 함께 수련했다. 그의 수련실은 거대한 클럽내부의 은밀한 구석에 있었는데 가는 길이 하도 꼬불거려 수련이 끝나는 동안 나는 한번도 스스로 길을 찾아나온 적이 없었다. 신기한 종류의 식물들이 그의 수련실 곳곳에 재배되여 있었고 외부와 철저히 격리된 공간 속에서 여러 식물들의 은근한 향내만 감돌고 있었다. 그 신기한 향내는 B가 속한 수련자공동체에서 자체 배합한 것이라고 했는데 비률의 차이에 따라 안정제와 최면제 또는 흥분제 등 다른 역할을 한다고 했다. 최음제의 효능도 있다는 것은 처음부터 말해주지 않았다. 벽에는 현대파 유화들과 여러 민족의 수공예품, 그리고 특이하게 생긴 장신구들이 구석구석 걸려있었고 바닥에는 아랍풍의 붉은 카펫이 두툼하니 깔려 있었다. 공기순환기가 따로 있었는지 창문이 보이지 않았는데도 갑갑하지 않았고 조명 또한 최대한 자연광을 모방하여 낮은 조도에도 불편감이 없었다. 나는 매번 바깥 수련실에서 B가 가르쳐준 대로 련습했고 B는 항상 안쪽 별도의 수련실에서 따로 련습했다. 내가 련습할 때 B가 가끔 안쪽방에서 나와 가르쳐주었으나 나는 그의 방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두주가 지나서부터는 말초신경이 예민해져 손끝, 발끝, 머리끝에서 모두 기가 감지되였으며 뜨거운 기운, 찬 기운, 서늘한 기운들을 단전에다 모았다가 몸 구석구석으로 보낼 수 있게 되였다. 어느날엔가는 눈꺼풀 아래로 피부 모공 사이로 겨자씨 같은 벌레들이 꼬물꼬물 수없이 기여나오는 듯했고 어느날엔가는 온몸이 날아갈 듯 가벼움을 느꼈으며 어느날엔가는 내 속이 점점 텅 비여감을 느끼기도 했다. B의 예상대로 나는 매우 빠른 속도로 하단전과 중단전을 열었으며 상단전도 거의 열리려 하는 상태가 되였다. B는 책이나 영상을 통해 가르치는 것보다는 직접 기를 움직여주면서 코치해주었다. 하루하루 점점 더 선명해지는 느낌에 정말 재미있고 신기했다. 내가 B랑 같이 기수련을 하고 있다는 말에 할머니는 탄식했다. “네 년이 혼자 너무 오래 살더니 드디여 정신머리가 이상해졌구나…” 그녀는 나의 생생한 체험에 대해 일제히 ‘환각’이나 ‘신경’ 탓으로 일축해버렸다. 다른 지식과 정보들처럼 체계적으로 정리되지 않고 공개하기에도 애매한 부분이 많았지만 그래도 무조건 부정적 결론을 내리기에 아직 이르다고 나는 우겼다. 페활량이 확실히 늘어났고 시력이 좋아졌으며 몸이 유연하고 가벼워져서 디스크의 아픈 증상이 모두 사라져버렸기 때문이였다. 그림을 그리다가 잘 풀리지 않으면 나름대로의 만다라를 그리면서 마음의 평정을 찾았고 여태 맛보지 못했던 어떤 충실감이 내 속에서 자라는것 같았다. “좀 만 더 하면 제가 오히려 J님의 도움을 받겠네요, 허허…” B는 나의 진보를 진심으로 기뻐해주었다. 그는 수련비용을 따로 받지 않았는데 그것이 수련자공동체의 암묵적인 규례라고 했다. “혼자서 더 높은 차원까지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공동체가 필요한거죠, 서로 합심하여 수련하고 한단계 한단계 서로 부축하며 올라가야 되는 것이니까. 나중에 J님도 우리 공동체 안에 들어왔으면 좋겠는데, 때가 되면 내가 우리 사부한테 추천해드릴게요…”   그날밤, 수련에 들어간지 이십분쯤 되여 기를 모아 머리 끝으로 내보내고 있었는데 B의 시원하고도 강한 기운이 느껴졌었다. B가 한번씩 코치를 해주면 훨씬 빠르고 쉽게 기구멍을 열 수 있었으므로 그날도 나는 아무 거부감 없이 그의 기운을 순수하게 받아들였다. 그러고보니 그날 B의 기운은 어딘가 다른 구석이 있었다. 그의 향도 비률을 달리했는 지 생소하게 느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B의 기운 속에 온전히 휩싸여서 온몸의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잔잔한 음악소리는 점점 희미하게 들렸고 몸은 나긋나긋 해졌으며 머리 속에는 아무런 생각도 판단도 떠오르지 않았다. 의식이 점점 웅크러져 깨알처럼 뭉치는 가운데 육체는 점점 멀어져가고 있었으며 나 자신이 점점 사라져가는 대신 주변의 공기의 흐름은 더욱 세밀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다음 순간에는 방안의 모든 물건들의 기가 느껴지기 시작했고 그것들과 능히 교감할 수 있겠다는 기분도 들었다. 이런 것이 우주와 하나가 된다는 것일가 나는 내 의식 속에서 간신히 생각했다. 나는 어떻게 B의 안방 수련실 침대우로 옮겨왔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혼미상태에 가까운 의식 속에서 온몸이 뜨겁고 간지럽고 갈급해서 무엇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느낌만 생각난다. 반쯤 뜨인 내 눈 안으로는 벽에 걸린 여러 자세의 천사와 성녀들과 부처의 그림들이 한데 얽혀 소용돌이쳤다. 그 와중에 황궁 12도의 별자리가 둥그렇게 펼쳐졌으며 황소와 오리온이, 전갈과 백조의 식으로 무질서하게 마구 뒤엉키고 있었다. 누군가의 숨소리가 귀가에 다급하게 들려왔고 “오 나의 성녀여, 천사여, 후르아여, 황홀이여… 나를 극락으로 나를 영원으로…”하고 횡설수설 부르짖는 기도소리도 간간히 들려왔다. 서늘하고도 강한 기운이 구체적인 물질이 되여 내 속으로 압박해 들어올 때 나는 갑자기 정신이 확 깨지면서 본능적으로 모든 기구멍들을 닫아버렸다. 쌀알같던 의식이 삽시간에 온몸에 퍼지며 다시 내 몸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고 생각와 판단력이 찰나에 회복되였다. 내 우에 엎드러진 B의 매끄러운 잔등에 땀방울이 맺혀있는 것이 보였다. 수련실을 나가기 전 나는 B에게 물었다. “당신은 대체 뭐에요? 카사노바? 위선자? 정신환자 아니면 사이비 광신자?” 나의 눈앞에서 단정한 정장으로 갈아입은 B가 허리띠를 추스리며 말했다. “글쎄요, 다 아닌 것 같은데… 뭐 일종의 신비주의 추종자라고 하면 그나마 비슷할래나? 당신들 말에 따르면 영지주의에 가까운 신비주의지요.” B는 전처럼 나를 위해 문을 열어주고 클럽 정문까지 나가는 길을 친절하게 안내해주었다. “J님은 대단해요, 좀만 때를 맞춰주었더라면 우리 두 사람 모두 극치의 황홀경 차원으로 들어갈 수 있었을텐데요, 아쉽네요…” 거대한 유리창으로 바깥의 해살이 눈부시도록 쏟아들어왔다. 정신은 더없이 맑아졌고 모든게 어처구니없는 꿈 같았다. 그래도 한가지 궁금한 것이 있어서 물었다. “그럼 당신 안해는요? 아이는요? 당신한테 뭡니까? 한 남자와 한 녀자 사이에서만 극치의 사랑이 가능하다면서요.” 그때 상담아가씨의 사무실이 저만치 보이는 정문이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B는 빙긋 미소를 지으며 나에게 악수를 청했다. “아, 그 부분이 마음에 걸렸을 수 있었겠네요. 그래서 때를 포기했나봐요. 생각보다 더 대단하신 분이네요.” 나는 그가 내민 손을, 부드럽고 하얀 아름다운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내가 그 인사에 응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느낀 B는 그제야 손을 내리고 어깨를 으쓱했다. “음, 그러니까 저를 1대1 전통가족으로 착각하셨을 수 있었겠네요, 하지만 사실 저는 이원혼자랍니다. 법적으로는 1대1 결혼자와 똑같은 의무를 리행하지만 사적으로는 서로의 사생활을 철저히 존중하죠. 아이의 양육에 대해서도 각자가 맡은 부분에만 최선을 다하기로 했죠, 그래서 매달 그들에게 약정된 생활비를 송금하고 약속된 날자에 면회하고 정기적으로 정서적인 교제도 한답니다. 뭐 둘 다 원한다면 그때 육체적인 교제도 할 수 있는 거구요… 물론 이 모든 것은 안해와 혼전에 미리 협의된 사항들이지요…”  그가 말했던 한 남자와 한 녀자의 극치의 사랑이란 결국 그 순간의 물리적 행위에 불과한 것이라고 나는 리해했지만 그는 그런 리해는 편면적인 것이며 실제로는 그 순간에 육체와 마음과 령, 삼위일체의 ‘립체적인 사랑’이라고 해야 좀 더 완벽할 것 같다고 정정했다. 그것이 나와는 전혀 다른 ‘이원혼’자의 사랑관이였다.   내가 “그 남자, 알고 보니 이원혼자라네.”하고 메시지를 보냈더니 할머니가 기다렸다는 듯 냉큼 답장을 해왔다. “거 봐라, 뭔가 요상하다고 했더니만 내 직감이 맞았지. 넌 애시당초 그런 놈팽이랑 어울리지도 않았다.” 오랜만에 할머니가 가르쳐준 대로 옛날 국수를 끓여먹고 있는데 친구가 내 모니터를 두드렸다. 친구는 내 얘기를 듣고 나서 깔깔거리며 웃어댔다. “얘, 넌 정말 1대1 결혼체질인가봐. 백년전에 출생한 할머니한테서 자라 그런가? 아무튼, 이꼴저꼴 다 보기 싫으면 재미없고 힘들더라도 넌 니 방식대로 살아야지. 어때? 너 같이 고리타분한 1대1 결혼 지망자 소개시켜줄가?” 달랑이한테서 할머니의 림종날자를 짐작받은 날, 나는 고속렬차를 타고 할머니가 있는 도시로 출발했다. 소형 비행기보다는 좀 더 많은 사람들을 구경할 수 있는 교통도구였다. 나는 내가 도착할 때까지 할머니를 이 세상에 머물게 해달라고 신께 기도했다. 기도가 끝나고 눈을 떠보니 내 맞은켠에 한 남자가 전자책을 보고 있었다. 이럴 때 백년전의 인간들은 서로에게 어떤 말을 건넸을가 하고 나는 생각했다. 기차는 여전히 앞으로, 오로지 앞으로만 달리고 있었다.    
6    [단편소설] 사거리의 불빛-금희 댓글:  조회:421  추천:0  2019-07-15
 금희  사거리의 불빛    17년전의 어느 여름밤, 아버지는 괴이한 어둠들이 어슬렁거리고있는 사거리에서 종이돈을 태우는 녀자를 만났다. 할머니네 아빠트 뒤문으로 들어가는 골목길이였는데 온 저녁 들이마신 소주와 맥주때문에 아버지의 오줌보는 터질듯 팽팽히 불어났다. 아버지는 차를 길가 낡은 가로등대 아래에 세워놓고 급히 그곁 담벽앞으로 달려갔다. 작고 볼품없는 초등학교의 오래된 벽돌담벽에는 아버지 같은 취객들이 질러놓은 오줌자국들이 군데군데 축축하니 번져있었다. 지린내 진동하는 그 음습한 곳에 마주서서 아버지는 허리춤을 끄르고 서둘러 자신의 “연장”을 꺼내놓았다. 순간, 그의 방광과 뇨도와 구불구불한 창자에까지 꽉 들어차있는것 같던 뜨거운 오줌이 마치 성문을 밀어젖히고 쓸어나온 노한 군중마냥 쏴아- 사정없이 뿜겨졌다. 세상에, 얼마나 시원했던지 몸은 물론 마음까지 날아갈듯 가뿐해졌는데 그 처치곤난한 구정물이 빠져나간 자리로는 어떤 종류의 순도 높은 행복감이 충만하게 차오르는것마저 뚜렷이 느낄수 있었다. 그것은 이제껏 살면서 맛보았던 다른 수많은 종류의 행복, 다정다감한 큰 딸과 약간 퍅하긴 하지만 그래도 너무 애교스러운 작은 딸, 이제는 눈빛만 보내도 알아서 척척 챙겨주는 현숙한 안해와 가끔 있는 애된 녀자들과의 색다른 섹스, 점점 넓어져가는 인맥이며 영향력, 그에 따르는 상상해본적 없었던 부와 명예… 그 모든것들을 어렵사리 소유하고 누리면서 얻었던 행복과는 같지 않았다. 이 통쾌하면서도 직접적인 원초의 행복감이 밀려오자 다른것들은 전부 허접한 가짜였다는듯 흐물흐물 형체도 없이 사라지고 잊혀진 가운데 아버지는 심지어 혼돈의 우주속에 홀로 우뚝 서있는 진실한 자아를 소름 끼치도록 생생히 느꼈다고 했다. 시간이 바로 그런 찰나에서 멈춰버렸더면 얼마나 좋겠냐고, 아버지는 언젠가 내게 그날의 신비한 방뇨에 대해 떠들어댄적이 있었다. 키스도 사랑도 아니고, 성공과 명예, 평화나 희생… 이런 우아한것들은 관두고라도 하다못해 먹는 순간마저도 아닌 싸는 순간이라니? 아버지는 확실히 나의 경멸을 받아 마땅한 인간이였다. 정말이지 아버지가 배출한것이라면, 그가 먹고난 자리나 자고 깬 침대, 제니(珍妮)에게 뱉는 욕설이나 싸질러놓은 자식들까지 어느것 하나 지저분하지 않은것이 없었다. 아무튼, 그날 체내에 남은 마지막 한방울의 오줌까지 모두 짜보낸 뒤, 그토록 생생하게 차오르며 강력하게 자신을 붙들고있던 행복감이 갑자기 빛의 속도로 사라져버린것을 아버지는 알아버렸다. 무한한 우주속에 오직 하나뿐인 진실한 존재로 튼실하게 서있던 아버지는 눈 깜짝할 사이에 지린내 나는 담벽앞의 추잡한 취객으로 돌아와있었다. 이게 무엇인가, 대체 이게 다 무엇이란 말인가. 한줄기 연기와도 같은 인생의 시말을 모두 깨달아버린듯한 허무감이 후줄근히 늘어진 “연장”을 집어넣고 줄레줄레 바지지퍼를 올리는 아버지를 엄습했다. 아버지는 얼떨떨한 정신으로 가로등대아래에 세워놓은 차를 지나친채 공허한 걸음으로 쿵쾅거리며 어두운 골목길의 굽이를 틀었다. 아빠트를 둘러싼 철창바자가 저만치 보였고 그 검은색의 바자와 아버지사이에 작은 교차로 같이 사거리 하나가 나있는 그곳에서 벌건 불길이 활활 밤을 태우고있었다. 긴 꼬챙이를 손에 쥐고 쭈그리고 앉아 불길속으로 연신 뭔가를 집어넣는 녀자의 실루엣이 날름거리는 불의 혀와 묵직하게 사방을 누르고있는 어둠의 그림자를 기괴하게 이어주고있었다. 아버지는 직감적으로 녀자가 태우고있는것이 누런 종이돈임을 알아차렸다. “귀신날”이 그쯤이라는것도 알고있었으므로 아버지에게 그것은 그리 희한한 장면도 아니였다. 할아버지, 곧 그의 아버지가 고향마을에서 조상들에게 제를 지낼 때 그 역시 무덤앞에 머리를 조아린 뒤 장에서 사온 종이돈과 종이원보(元宝) 같은것들을 함께 태웠었다. 아빠트로 이사 온 다음에는 고향에 내려가기가 수월치 않았고 그보다 정부의 권고대로 조상님의 관을 모두 화장해버린탓으로 그 밤의 녀자처럼 사거리에다 원을 긋고 종이돈을 태울수밖에 없었다. “할머니, 할아버지, 증조모, 증조부… 요즘에는 다들 어찌 잘 지내시는감요? 저 리만창, 당신들의 손군이 용돈 좀 보내드리려 찾아왔구만유…” 사거리는 무덤앞과 달리 받는 주소가 애매해서 아버지는 조상들에게 돈을 태워드리기전 항상 거처없이 떠도는 고혼들을 달래기 위해 먼저 그들에게 약간의 “위로금”을 태워주었다. 용돈 챙겨줄 후손이 없는 그들은 한편 불쌍한 처지이기도 했고, 한편 조상님들의 용돈을 먼저 앗아갈 잠재적 위험군체이기도 했으니까. 아버지는 또 할아버지에게서 배운대로 저승의 사자와 관리들에게 뇌물로 줄 돈을 따로 더 태웠다. 그래야 거기서 사는 조상님들이 좋은 곳으로 거처를 옮기거나 한층 편한 삶을 살수 있었다. 재산이 점점 불어남에 따라 태워드리는 종이돈의 두께도 점점 늘렸지만 아버지는 자신의 잘 나가는 인생이 저승에서 힘을 써주신 조상님들 덕이라고 확신하지는 않았다. 어쩌다 청명이나 추석을 건너뛰고 종이돈을 태우지 않았을 때 가족중 누가 몸이 아프면 허겁지겁 치성을 드리기도 했지만 그때뿐, 그가 매년 종이돈을 태우는 리유는 그렇게 해서 나쁠것이 없다는 신조와 가문의 어른들을 섬겨야 한다는 전통적인 “효심”외에 다른것은 없었다. 실제로 아버지는 굉장히 리기적인 사람이여서 거래하는 사업가들이나 정부인사들, 지어 친구들한테까지 거짓말을 밥먹듯 했지만 할아버지와 할머니에 대한 효심만은 각별했다. 아들을 낳고 후손을 번성시키는 목적이 무엇인가. 끊임없이 출생하는 후손들의 섬김으로 점점 기력을 잃어가는 년장자들이 편한 생을 살아가는것, 그것이 중국식의 가장 자연스러운 복지방법이며 한 가문이 소멸되지 않고 저승에서까지 영원히 흥왕할수 있는 비결이기도 하지 않는가. 저승에서까지… 라고 하기에는 좀 그랬다. 사람에게 령혼이 있는지 없는지도 가름 나지 않은판에 그곳을 실재하는것처럼 론한다는건 오버였다. 설령 그런 곳이 실재한다더라도 용돈을 태워드려야 한다는것이나 그곳의 관리들에게 뢰물을 안겨야 한다는것 등의 설법이 아버지가 보기에도 그리 “공정”하지는 않는것 같았다. 그러나 그날, 활활 타오르는 불길앞에서 어떤 상념에 깊숙이 사로잡힌 녀자를 보는 순간 아버지는 여태 살면서 한번도 있어본적 없는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평온하면서도 진지한 녀자의 표정은 무엇인가 확실히 느낄수 있는 존재들과 교감하는듯 보였는데 꾸미지 않은 경건함이 그속에서 흘러나와 보는 이로 하여금 숙연해지기까지 했었다. 녀자는 정말 아버지가 모르는 무언가에 대해 확신이 있었단 말인가. 허면 그 “확신”은 과연 보편적이 될만한것이였을가. 바람을 따라 춤추는 불꽃의 그림자가 녀자의 얼굴우에서 소리없이 뛰놀고있었다. 그 불꽃의 리듬에 맞추어 녀자 주위의 어둠들도 술렁거리며 함께 움직이는것 같았다. 아버지는 술기운을 물리치려고 머리를 세차게 털면서 계속하여 걸음을 앞으로 옮겨갔다. 좀 더 가까이 사거리에 이르렀을 때 아버지는 그제야 긴 꼬챙이를 쥔 녀자의 행동을 똑똑히 볼수 있었다. 당연히 종이돈을 태우고있으리라 생각했던 녀자는 되감기 버튼을 누른 영화장면처럼 오히려 불길속에서 끊임없이 종이돈을 꺼내고있었다. 검은 그슬음조차 없는 새 종이돈들을 말이다. 너무 어처구니없는 일이라 아버지는 자신의 눈을 믿을수가 없었고 그다음에는 오싹 소름이 끼쳤다. 아버지는 그 자리에서 곧장 돌아섰다. 절대 뒤를 돌아보아서는 안된다고 스스로를 닥달하면서 아버지는 뻣뻣해진 다리를 질질 끌고갔다. 갓 오줌을 지른 담벽과 낡은 가로등대가 보이자 그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차문을 열고 재빨리 차안으로 기여들어갔다. 할머니네 아빠트로 올라가 침대에 쓰러진 뒤로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채 깊은 잠에 빠져버렸다. 며칠이 지난뒤, 새벽잠에서 깨여난 아버지는 침대에 비스듬히 누워 담배를 피우면서 그날밤의 일들을 곰곰히 생각해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자신이 본게 무엇이였던지, 혹은 시각이나 신경세포의 착란이였던지 알수가 없었다. 만약 망상이 아니라면 그 녀자는 무엇이였단 말인가. 정말 누군가 태워놓은 종이돈을 가져가고있던 야귀라도 된단 말인가, 아니면 그런 야귀를 가장한 다른 한 종류의 령적존재였단 말인가. 그것의 실체가 무엇이든 아버지는 본능적으로 그 시점에서 반드시 어떤 행동이든 취해야 한다는 긴박감을 느꼈다. 카텐을 들어 아직 밝지 않은 동녘을 향해 푸른 담배연기를 뿜어내다가 아버지는 드디여 새로운 계획 하나를 세웠다. 그 도시의 가장 크고 좋은 대학교에 가서 제일 머리 좋고 건강한 (가급적이면 예쁜) 녀학생 하나를 꼬시는것이였다. 아버지는 그 계획을 곧바로 시행했고, 가장 크고 좋은 대학은 아니지만 그래도 본과인 대학에서 사지 멀쩡하고 엉덩이가 펑퍼짐해보이는 녀학생 하나를 꼬시는데 성공했다. 그 멍청하고 허영심 많은 녀학생은 아버지의 비싼 차에 홀려서 몇개월 버티지도 못하고 큰 저항 없이 그의 오피스텔까지 따라갔는데 그렇게 하여 1년반쯤뒤 태여난 아이가 바로 나였다.       나는 전형적인 사생아였고 제니는 사람들이 말하는 그 내연녀였다. 큰어머니(아버지의 정실)는 좀처럼 상스런 욕설을 퍼붓지 않았지만 고모와 숙모는 화가 날 때 가끔 나를 “야생아이(野孩子)”, “덜돼먹은 자식”, “훔쳐서 낳은 놈(偷生的)” 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나는 속칭 “토호(土豪)” 리만창의 유일한 아들이자 리씨가문의 향불을 이을수 있는 마지막 희망의 주자였으며 동시에 가족중 가장 껄끄러운 존재였다. 어린 나의 무의식속 제일 밑바닥에 깔려있던것은 하얀 목도리를 길다랗게 드리운 제니의 희미한 모습이였다. 내가 그 모습을 기억한다고 하면 제니는 움찔 놀라며 “허튼소리”라고 빈정댔다. “니가 뭘 봤다고? 거짓말 말어. 넌 그때 겨우 여덟달이였는데. 잘 먹여서인지 애가 올돼서 걸음마도 꽤 탔다만, 그런걸 기억할리는 없어. 이 작은 사기군아, 넌 어쩜 입만 열면 그렇게 거짓말이 정말처럼 술술 나오니?” 몇번 제니에게 당하고나서 나는 나의 기억들이 진짜 나의것인지, 아니면 누구에게서 귀동냥으로 들었거나 또는 인터넷으로 본 일들을 적당히 버무려서 억지로 집어넣은것인지 분간할수 없게 되였다. 그러나 좀 더 컸을무렵에는 이런 기억도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 집 문밖에서 웅성거리고있었고 하얀 가운을 입은 사람들이 안방 침대에서 제니를 들어내가는 장면이였다. 누렇게 색이 바랜 이불아래에 무서운 표정으로 입을 앙다물고 누운 제니, 그녀의 입귀에 흐르던 거품까지 생각이 나는데 그것도 내가 상상해낸것이란 말인가. 제니의 말로는 그것은 내가 두돌쯤 되였을 때의 일이였고 이불색갈이 실제상황과 들어맞지 않는걸 보아 역시 신빙성이 없다고 했다. “어쨌든 그런 일이 있긴 있었다는거네? 그럼 그때 이불은 무슨 색갈이였는데? 왜 그렇게 들려나갔는데?”하고 내가 바투 물었다. 제니는 눈을 부라리며 “이불은 무슨 개뿔 이불이냐고, 너그 바보같은 아버지의 코트였었지.” 하다가 또 이내 “아니, 그런 일은 애초에 있지도 않았다.”고 되는대로 지껄였다. 대여섯살쯤 되였을무렵, 나는 제니가 아빠트 옥상으로 올라가서 뛰여내리겠다고 아버지를 협박하는 장면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았었다. 그제야 나는 나의 기억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비로소 똑똑히 알게 되였다. 아버지는 추잡하고 리기적이고 랭혹한 인간이였으며 제니는 멍청하고 탐욕스러운데다가 성가시고 귀찮은 녀자였다. 아버지는 대학생이였던 제니에게 분명히 말했었다. 아버지에게는 행복한 가정이 있으며 그의 안해와 자식들에게 어떤 고민거리나 불편을 끼칠 생각은 조금도 없다고. 그에게 필요한것은 첩이나 소실이나 뭐 그따위 년들이랑 차린 딴 살림이 아니라 그저 아들녀석일뿐이라고. 고추 달린 애를 베기까지 정기적으로 섹스를 하고 그동안의 비용, 이를테면 밥을 먹고 쇼핑을 하고 혹 녀아가 임신되여 류산이 필요할시 들어갈 비용은 섭섭치 않게 쳐줄것이며 그렇게 해서 일이 성사만 되면 당장 아빠트 두채를 사주겠다고 약속했다. 물론 원하는 아이를 낳은 다음에는 제니가 아버지 인생에서 깨끗이 사라져주어야 한다는 조건이 덧붙여있었다. 농촌마을 가난한 집 태생인 제니는 과부어미의 장녀였다. 본명은 호이아(胡二丫)였는데 아버지를 만나 제니로 고쳐불렀다. 제니는 죽어라 공부를 해서 현성의 고중에 진학했고 그다음에는 명문대학은 아니더라도 그리 녹녹치 않은 사범대학에 들어갔다. 머리가 남들보다 월등 좋은편도 아니고 남자들을 후릴만한 빼여난 외모를 가진것도 아니였다. 아버지의 차가 제니의 대학교 캠퍼스안에서 유유히 달리는것을 보고 그녀는 가슴이 뛰였다고 했다. 변변한 련애라는것도 해보지 못한 제니였지만 물고기처럼 매끄럽게 달리는 차를 보고 순간 그것과, 현실적으로 말해서 그것을 운전하는 사람이랑 자보고싶다는 충동이 들었다. 아버지의 목표는 더 예쁘고 섹시한 녀학생들이였지만 미끼를 문 사람은 처녀라는것 외에 딱히 내놓을것이 없는, 아직도 촌티가 꾀죄죄하게 남아있는 제니뿐이였다. 좀 더 공을 들여 다른 녀학생들을 사냥해보았더라면 만족스러운 결과가 있을지도 몰랐지만 그렇게 하기에는 시간이 아까웠다. 어차피 데리고 살 녀자도 아니고 건강한 아들만 낳아준다면 촌스런 외모쯤은 참아보자고 아버지는 생각했다. 유전이 되더라도 아들애니까 외모가 그리 중한것도 아니고, 오히려 잘된 일인지도 몰랐다. 매력적이지 않은 녀자이기에 정들 일도 없을테니까. 나를 낳고 산후조리가 끝나자 아버지는 제니가 묵고있던 오피스텔을 그녀의 이름으로 서류를 고친 뒤 약속대로 다른 한채의 아빠트도 사주었다. 나의 호적을 올려야 했으므로 부득불 큰어머니한테 나의 존재를 얘기하긴 했지만 차마 키워달라는 말은 못하고 아버지는 나를 할머니한테 맡길 심산이였다. 그 대목에서 제니는 젖이 너무 불어 아프다고, 젖 뗄 동안만 나랑 같이 있게 할수 없냐고 제안했다. 그쯤 아버지네 집안에서는 나의 출생때문에 사람마다 예민해져서 란리도 아니였었다. 큰어머니는 멍청한 제니처럼 “자살소동”따위는 일으키지 않았지만 머리를 싸맨채 안방에 틀어박혀 무언의 시위중이였고 이미 대학생이 된 리의란(李依然)과 고중 2학년생인 리아란(李亚然)은 충격을 금방 사그라뜨릴수 없어서 아버지와의 “관계를 끊겠다.”고 선언했다. 워낙 성깔이 더럽고 충동적인 아란은 선언 후 스스로 학교를 중퇴하고 3개월간 가출까지 했다. 그게 다 나때문만은 아니라는것을 이제는 모두가 알고있다. 아란은 공부라면 질색이였고 핑게거리가 없어 학교를 그만두지 못하는 상황이였는데 마침 어떤 불량배와 위험한 “련애놀이”에 빠져서 집을 나간것이였다. 할머니네 상황도 별로 좋지 않았다. 풍을 살짝 맞은 할아버지의 건강이 옛날같지 않아서 할머니는 늘 마음 졸이며 나날을 보내고있었다. 그러니 당장 어느 누구에게 피덩이 같은 나를 맡길수 있었을가. 결국 아버지는 제니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제니의 배가 부르면서부터 오피스텔에 와있은 제니의 엄마는 며칠 걸러 한번씩 고기를 사오거나 용돈을 던져주고 가는 아버지를 어려운 사위 모시듯 깍듯이 대접해주었다. 자신보다 겨우 네살 아래인 아버지가 애젊은 제니랑 몸을 섞을 안방 침대를 그녀는 정성껏 정리해주었다. 누가 뭐라고 해도 그녀에게 아버지는 그저 제니의 남자이자 외손군인 나의 아빠였으니까. 그녀는 늘 아버지더러 들으라는듯 그의 앞에서 나를 안고 높은 소리로 “요놈의 작은 조상아(我的小祖宗啊)” 하고 불렀다. 그녀의 손에서 자라는 동안 나는 그 호칭을 귀에 못박히도록 들어서 한때는 내 이름이 “작은 조상(小祖宗)”인줄 알았다. 그녀는 제니가 한번, 또 한번의 자살소동을 거쳐 아버지와 나의 곁에 계속하여 남아있도록 조언하고 도와주었다. 여덟달이 되여서 내가 젖을 떼자 아버지는 다시 제니에게 그만 사라져달라고 부탁했다. 일이 이렇게 된바하고 할머니, 할아버지가 가장 먼저 아버지를 받아주었던것이였다. 며느리 눈치보기가 좀 그랬을뿐 그들에게는 사실 나의 존재가 기분 나쁘지 않았다. 건강이 악화되면서 할아버지는 전보다 더 “향불 이을 사람”이 필요해졌는데 지병으로 자궁을 들어낸 큰어머니한테 그것을 바랄수는 없었다. 큰어머니가 머리를 싸매고 앓으면서도 나를 내치지 못한것 또한 그런 연유에서였다. 오랜 공산당원의 딸이였고 본인 또한 철저한 무신론교육을 받아온 공무원이였지만 전날 그렇게 자상했던 시아버지의 소원앞에서는 그녀 역시 마음을 모질게 먹을수가 없었다. 곧 목숨이 끊어질 로인네가 붙잡고싶은 유일한 구원의 동아줄이라는데 그것을 어떻게 막을수가 있으랴. “그랴, 우리 리씨가문이 너한테 큰 빚을 졌다 셈치자. 그래도 어떡하겄니? 우리 가문의 향불을 이어줄 하나뿐인 피줄인데. 나 저승에 가서도 너 위해 복을 빌련다. 넌 우리 가문의 은인이나 다름없어.” 드라마 대사 같은 할아버지의 말이 끝나자 큰어머니는 침묵했다. 가문의 생존, 종족의 번식은 아메리카합중국의 독립선언문에서와 같이 그 누구에게도 양도할수 없는 권리가 아니던가. 큰어머니마저 아버지를 받아주자 고모와 삼촌과 아버지의 딸들도 더 이상 아버지를 배척하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항상 아버지의 돈이 필요했으니까. 웬만한 친지들도 이제 제니와 나에 대해서 모두 알고있었고 한동안 쉬쉬거리더니 곧 어느정도 조용해졌다. 그들은 내가 없었던 평온하고 질서 있는 생활보다는 내가 있음으로 “토호” 리만창을 비난하고 씹을수 있게 된 삶을 더 재미있어하는것 같았다. 이제 아버지에게는 더 이상 제니를 곁에 둘 리유가 없었다. 겉보기보다 제니의 성욕은 대단해서 그 점이 좀 아쉬웠지만 말이다. 애가 젖을 뗐고, 그래서 젖이 붇지 않아 아프지도 않을것이니 조용히 다른 곳으로 가 직장을 다니든지 젊은 남자를 사귀든지 하라고 아버지는 권했다. 제니는 며칠 밤을 침대에 머리를 틀어박고 울어대더니 그날 오후, 아버지가 들리겠다고 말한 시간에 좀 못미쳐 하얀 비단천을 카텐 고리에 높게 매달았다. 최초의 자살시도는 그녀의 엄마가 가르쳐준것이 아니였다. 그녀의 엄마는 장보러 나가서 곁에 없었고 돌아온 다음 딸이 벌인 행각을 보고 혼이 나갈듯 통곡하면서 아버지를 붙잡고 란리쳤기때문이였다. 어찌됐든 그 사건을 통해 그녀들은 한가지 중요한 교훈을 배울수 있었다. 사람의 마음은 필경 고기덩어리로 만들어졌다는것, 아무리 랭혹한 인간이래도 죽음을 무릅쓰고 “떼”를 부린다면 차마 못들은척하지는 못한다는것을 말이다. 한동안 즘즉하던 아버지가 다시 떠나라는 말을 꺼내기만 하면 제니는 곧 행동에 들어갔다. 약을 먹기도 하고 팔을 긋기도 하고 아빠트옥상우에 올라가기도 했다. 옥상우에 올라갔을 때에는 시의 소방차마저 불려와서 제니는 난생처음 “도시석간신문(城市晚报)”에 핫뉴스의 주인공으로 실렸었다. 일이 이쯤 되자 이제는 아버지가 문제가 아니라 제니가 모든 가족의 “공공의 적”으로 되였다. 모든 가족의 미움을 일제히 받으므로 제니는 가족들을 오랜만에 끈끈히 단합시켰다. 그 바보같은 녀자는 리씨가문에서 자신이 그런 역할을 맡고있다는것도 깨닫지 못한채 계속하여 불쾌한 종양처럼 그 집에 붙어살았다. 유아기의 나는 고모네와 삼촌네와 할머니, 그리고 큰어머니네 집과 고모의 딸네 집까지 전전긍긍 돌아다니며 얼마동안씩 키워졌는데 한집에 머무르는 기간이 수개월을 넘기지 못하고 제니의 성화에 못이겨 다시 그녀의 곁으로 돌아오군 했다. 하지만 제니는 자상하거나 친절하거나 가슴깊이 새끼를 사랑하는 엄마가 돼주지 못했다. 학교에서 돌아와보면 그녀는 늘 술에 절어있었고 때로는 혼자 노래방 기계를 켜놓은채 꽥꽥거리며 노래를 부르기도 했었다. 내가 돌아오는 시간에 맞춰서 따스한 밥을 지어놓거나 정성들여 만두따위를 빚어주는 일은 아주 드물었다. 우리 집 현관에는 늘 여러 식당의 전단지들이 널려있었고 배고프면 밥솥을 열어보는 대신 휴대폰부터 찾는게 상책으로 되였다. 캔맥주와 음료수와 말라비틀어진 과일 몇알씩만 들어있는 랭장고, 라면국물이 말라붙은 싱크대, 계절의 구분 없이 쌓이고 걸려있는 옷가지들, 며칠에 한번씩 무져지는 쇼핑백들, 휴지뭉치와 빈 맥주캔이 굴러다니는 거실, 이상한 향수냄새가 진동하는 안방의 거대한 침대. 제니의 집은 평소에 대충 이런 모양새였다. 제니의 엄마는 이제 농촌 집으로 돌아가서 명절때나 특별한 일이 있을 때만 올라왔고 아버지는 일주일에 한두번, 혹은 두주일에 한번 정도로 들려주었다. 제니는 다른 젊은 남자와의 새로운 생활을 꿈꾸지 않았으며 자존심 있는 녀자로서의 떳떳한 삶도 동경하지 않았다. 그녀는 아버지에게서 받아 물쓰듯 하는 용돈이 아까워서 더 이상 아버지를 떠나 살고싶어하지 않았다. 큰어머니의 명분을 탐내지도, 사랑타령을 하지도 않았고 다른 사람이랑 다른 모양의 삶을 시작하는것이 귀찮으니 그저 아버지와 그 상태만큼의 관계만 줄곧 유지하고싶어했다.       나는 그런 분위기속에서 하루하루 자라났다. 나는 가족들이 한편 나를 받아주려 애쓰면서 한편 경계와 경멸을 멈추지 못하는 태도를 진저리나도록 보아왔다. 어느 집에 가나 나는 사실상의 “잡종”, “비정상인간”, “그들과는 다른 위험한 족속”, “천덕꾸러기”였다. 그들은 나를 더러운 벌레 취급하면서도 또 어딘가 나를 두려워하였다. 그들은 내가 동년배의 아이들보다 훨씬 큰 몸집으로 자라는것과 저들이 감당할수 없을 정도로 조숙하는것을 보고 더욱 나를 싫어했다.   현대 인류사회의 정상질서를 위반하며 태여나 하늘의 노여움을 샀기때문이였던지 나는 확실히 가증스러운데가 있었다. 눈도 깜빡이지 않고 똑바로 어른들을 쳐다보며 거짓말을 주워댔고 나보다 몸집이 작은 또래애들을 선생님 몰래 괴롭히기를 즐겨했다. 나는 또 어른들이 넘겨짚지 못할 정도로 머리가 약아서 그들지간의 리해관계를 손금 보듯 빤히 꿰고있었다. 얼키고 설킨 그들의 관계사이에 자주 끼여들어 참견을 함으로 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미움을 받았다. 거기까지는 그래도 아직 어렸을적 얘기여서 “장난 좀 심한 아이”나 “불건강한 가족분위기의 피해자” 정도로 봐줄수 있었다. 하지만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나서 나는 번데기로부터 탈피한 나방마냥 자신의 본색을 겉잡을수 없이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것은 련 며칠 장마비가 쏟아진 뒤의 후덥지근한 여름밤이였다. 내가 태여나던 해부터 중풍에 걸려 운신이 자유롭지 못하게 된 할아버지는 8년가까이 혹 좀 나아진듯 보이기도 하고 혹 많이 못해진듯 보이기도 하면서 가까스로 버텨오다가 드디여 마지막 기력을 모으는 단계에 접어들었다. 대소변을 받아내며 가족들도 알아보지 못한것이 벌써 반년째, 식구들은 할아버지의 생명에 대해 더 이상 희망을 가지지 않았고 다만 조금이라도 더 평안하고 쉽게 이 생에서의 삶을 마치기를 바랐다. 련 네댓새를 드시지도 못하고 혼미상태에 빠져있다는 말을 듣고 가족들이 모두 할머니네 집으로 모였다. 누렇게 뜬 할아버지의 얼굴은 튀여나온 광대뼈때문에 더욱 음침하고 무섭게 보였다. 도우미 아줌마가 정기적으로 몸을 닦아주어서 냄새는 그럭저럭 견딜만했다.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소리를 듣자 예상밖으로 할아버지는 혼미상태에서 깨여나 다시 죽을 드시고 대변을 보았다. 이틀이 지나서는 입귀로 침을 질질 흘리면서도 대충 자식들의 얼굴마저 알아보는것 같았다. 할아버지의 회생에 식구들은 얼마간 실망하며 바쁜 일정을 핑게 대고 하나 둘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아버지도 큰어머니도 제니도 일상에 복귀하였고 넓은 아빠트에는 할머니와 도우미 아줌마와 내가 남아있었다. 그쯤 제니의 술버릇이 장난이 아니여서 나는 제니를 따라 돌아가지 않았다. 어차피 여름방학이였고 밤에는 아버지가 돌아와 같이 잘것이였다. 아래층 북향방 침대에 누워계신 할아버지에게 죽을 드시게 한 뒤 다들 각자 방으로 돌아가 누운 자정이였다. 나는 갑자기 잠에서 깨여 복도로 걸어나왔다. 아버지는 아직 돌아온 기척이 없었고 나는 목이 말라 주방쪽을 향해 걸어갔다. 할아버지의 방문은 비스듬히 열려있었는데 그앞으로 지나치려니 끄응 끙 신음소리가 약하게 들렸다. 나는 문을 밀고 그의 방안으로 들어가서 조도가 낮은 벽걸이 등을 켰다. 이불을 가슴우까지 젖힌 할아버지는 마른 갈고리 같은 손을 들어 앞으로 뻗은채 부들부들 떨고있었다. 혹시 나처럼 목이 마른게 아닐가싶어서 침대머리 작은 탁자우에 놓아둔 잔에 물을 따라주었지만 그것이 아니였던지 반응이 없었다. 그는 마치 자신의 유일한 손자를 알아본것처럼 입귀를 푸들푸들 끌어올리며 우, 우, 짧은 소리를 냈다. 그의 눈빛이 전에없이 반짝이고있어서 나는 잔을 놓고 그의 손을 잡아주었다. 그다음, 내 아물아물한 기억속에서 오래동안 말을 할수 없었던 할아버지가 그랬다. “얘야, 나 지금 곧 죽을려나 보구나. 너 무섭지 않니?” 어두운 불빛아래에서 나는 할아버지의 얼굴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이렇게 분명하게 말씀하시다니, 꼭 꿈을 꾸고있는것만 같았다. 나는 머리를 저었다. 무서워하고있는 사람은 내가 아니라 할아버지라는것을 나는 느낄수 있었다. 나를 애절하게 바라보는 그의 눈은 꺼져가는 그속의 빛을 살려보려고 안깐힘을 쓰고있었다. “그다음에는 어떻게 되는지 모르겠어. 내가 정말 사라지는건 아니겠지?” 나는 아무 대답도 할수 없어서 묵묵히 그를 내려다보았다. 할아버지는 그나마 나의 버팀목이였었고 나라는 존재를 받아주기로 한 첫번째 인간이였다. 이윽고 마지막숨을 톺는건지 할아버지의 숨이 가팔라지기 시작했다. 내 손을 잡은 그의 손에도 어느새 불쾌한 느낌의 힘이 들어가있었다. 나는 그만 내 손을 빼내고싶었다. 그대로 있다가는 그가 가는 저승길에 나도 함께 딸려 들어갈것 같았다. 당황하는 나를 보고 할아버지는 고통스레 일그러진 얼굴로 큭큭 웃었다. “그래, 니가 살아있는 한 나는 사라지지 않아. 너의 몸속에 내 피도 흐르고있을테니까.” 여덟살짜리 손자의 눈앞에서 턱을 뚝 떨구어버린 할아버지의 얼굴은 더없이 추악했다. 자신의 삶과는 물론 죽음조차와도 싸워 이겨서 어떤 형식으로든 살아남으려는 인간의 비장함을 나는 그때 보았다. 나는 아버지가 돌아와서 할아버지의 방에 들릴 때까지 그 침대에 잠자코 앉아 있었다. 위대한 인간의 후손으로서 더 이상 나는 자신의 출생이 지저분하지 않았다. 아버지와 제니와 큰어머니와 및 모든 가족들과 세상사람들, 무릇 인간의 본능을 위한 그들의 우습강스럽고도 추접스런 행위를 전부 용서할수 있을것 같았다. 빠끔히 열려진 창문너머 까만 쇠살창사이로 습하고 더운 밤바람이 불어들어왔다. 할아버지의 혼을 데리러 온 저승의 포졸들이 그 밤바람속에 숨어있었는지도 모르는 일이였다. 그것들이 내 얼굴을 가벼이 스치자 나는 어쩔수없이 한모금 들이마셨다. 그제야 뭔가 갑자기 머리속이 정리되면서 인간의 삶이라는것을 확실하게 깨달아버린 느낌이 들었다. 새벽이 가까워 돌아온 아버지가 할아버지의 죽음을 온 집안에 알리며 법석을 떨을 때, 나는 웃층에 있는 창고에 들어가서 보따리들속에 웅크리고 누운채 혼자 깊은 잠속에 빠져들었다. 그뒤로부터 나는 아버지가 보내는대로 다른 가족들의 집에서 수개월씩 머무는 대신 스스로 가고싶은 집을 선택하여 며칠 혹은 몇주일을 머물렀다. 나는 그들의 집에서 더는 눈치를 보지 않았으며 팬티바람으로 거실과 다른 방을 돌아다니는가 하면 밤중이라도 허전하면 스스럼없이 랭장고를 열어 요구르트와 과일 따위를 꺼내먹었다. 나는 허우대뿐인 삼촌과 천성적으로 약골인 고모부의 “개인금고” 위치를 추적하여 때때로 그들의 비상금을 꺼내 용돈으로 썼고 가끔 로처녀가 다 된 리아란이 자신의 방에서 남자친구와 즐기고있는줄을 알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불쑥 쳐들어갔다. 남은 식구들중 나를 가장 안스럽게 여기는 할머니네 집에는 들리는 회수를 줄였고 하루하루 늙어가는 주제에 아직도 아버지의 바지가랭이를 붙잡고 늘어진 제니의 집과 여전히 품위 있고 우아한 큰어머니네 집을 번갈아 들락거렸다. 제니의 집에는 내가 가지고싶은것이 별로 없었지만 큰어머니네 집에는 탐나는것이 많았기때문이였다. 아버지의 명품 가방, 지갑과 혁띠에서부터 아란의 최신형 핸드폰, 빽과 구두, 그리고 여러가지 공예품들과 서화, 지어 큰어머니의 속옷까지 내게 필요하든 그렇지 않든, 내가 쓸수 있든 그렇지 못하든 상관하지 않고 챙길수 있는만큼 챙겨넣었다. 아무도 그런 나의 행각을 반가워할리 없었다. “저놈이 해빛을 보지 못하고 태여나더니 과연 음험하게 사는구나.” 하고 그들은 나에게 손가락질했다. 소학교 5학년에 벌써 나이보다 훨씬 빨리 자라 건장한 청년의 모습이 된 나에게 그들은 예전처럼 함부로 하지는 못했다. 내가 들렸다 하면 그 집에서는 귀중품들과 챙겨가기 쉬운 물건들을 단단히 감춰두느라 많은 신경을 썼다. 어느 한번 삼촌네 집에서 모태(아버지한테 뇌물로 들어왔던것)를 포장상자채로 챙겨넣다가 숙모에게 딱 걸린적이 있었다. “너 지금 뭐하는거야? 술이 먹고싶은거니? 아니면 팔아서 돈 쓰려고 그러는거니?”하고 숙모가 물어서 “그냥 가지고싶어서요.”라고 대답했다. 숙모는 어이가 없다는듯 코웃음을 치며 눈을 둥그렇게 흡떴다. “얘, 그건 네것이 아니잖아. 아무리 친척지간이라 해도 우리 집 물건이 어떻게 몽땅 네 물건으로 될수 있겠니? 이건 상식 아니야? 인간이라면 누구나 자기가 갖고싶다고 해서 그것들을 모두 가져서는 안된다는 상식.” 그래서 내가 말했다. “왜요? 왜 가지고싶은걸 가지면 안되는데요?” 숙모는 얼굴이 빨개지며 나한테 삿대질을 했다. “이놈으 자식, 말하는거 좀 봐라. 너 일부러 그러는거지? 어렸을 때 너한테 좀 듣기 싫은 말했다고 지금 나 엿먹이려는거지?” 숙모는 삼촌한테 나를 가리키며 “리씨집안의 끔찍한 망종”이라고 욕했다. 삼촌이 내 눈치를 보며 끙끙 갑자르고있는 틈을 타서 나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자기가 가지고싶은것을 모두 가져서는 안된다.”는게 상식이였던가? 내 경험으로 미루어본바에 의하면 “가져서는 안되”는게 아니라 “가질수 없는것”이 아니였던가? 제니나 아버지, 고모와 삼촌, 할머니와 할아버지, 그리고 큰어머니까지, 모두들 득과 실의 총량에 견주어보아 본인의 능력 한계내에서 가질수 있는것을 차지하며 살아가고있지 않는가. 물질이나 명예가 아니라면 하다못해 량심의 평안이라도 얻어가고싶어하니까. 어쩌면 우리는 정말 리처드(리처드 도킨스, 옥스퍼드대학 진화생물학자, 저서《리기적인 유전자》)의 말처럼 태생적으로 “리기적인 유전자”의 조종을 받아 살아가는 생체기계였을지도 모른다. 도덕이란 군체와 개인의 공생을 위한 더 령리한 전술일지도 모르고. 그러니 모든 사람들의 본능에 따른 목적은 그저 살아남는것과 더 잘 더 오래 살고자 하는것이 아니겠는가. 더 잘, 더 오래 살고자 하는 게임에서 제니는 세상이 돌아가는 룰을 제대로 읽어내지도 못하고 불쑥 끼여든 서투른 삐에로였다. 그녀는 다른 승자들의 흉내를 내보았지만 내공이 부족했던탓에 의도했던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오히려 사람들의 웃음거리로 전락해버렸다. 고모와 숙모는 물론 이제는 어엿한 성인이 된 리의란과 아란까지 제니를 무시하고 경멸했다. 십수년을 같이 부대끼며 살아왔으면 고운 정이 없더라도 미운 정은 들었을법한데도 제니는 아버지를 제외한 가족중 어느 누구도 자기편으로 만들지 못했다. 춘절이나 추석, 또는 집안에서 큰 일이 있을 때면 어쩌다 가족들 모임에 얼굴을 드러내기도 했지만 아무도 반가워하거나 체면상으로라도 수다를 떨어주지 않았다. 제니의 비천하면서도 초라한 처지를 지켜보면서 나는 좀 더 능숙해져야 하겠다는 필요를 느꼈다. 그 점에 있어서 가장 좋은 모델은 큰어머니였다. 하는 짓마다 못남뿐이라고 나를 악평하는 제니나, 대놓고 나를 비난하며 내 버릇을 아버지한테 고자질하는 다른 가족들과 달리 큰어머니는 대개 비교적중립의 발언으로 아버지의 노를 눅잦혔다. “여보, 화내지 마. 그 애 립장에서는 충분히 그럴수 있어. 아직 애가 작잖아. 좀 더 크면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그 애도 알 날이 있을거요. 누구보다 령리한 애라는걸 당신도 알잖소.” 아버지는 그렇게 말해주는 큰어머니에게 항상 고마워했다. 아버지는 내가 큰어머니의 염색체를 물려받지 못한것을 진심으로 애석해했다. 큰어머니는 리씨가문의 명실공한 맏며느리자 실세였고 고모와 삼촌은 물론 할머니의 존경마저 차지하고있었다. 속생각이야 어떻든지 그녀는 내게도 제니보다 훨씬 친절해서 그녀가 몸소 빚어준 따끈한 물만두를 먹고있을 때면 나도 몰래 자신이 정말로 그녀의 아이가 된것 같은 착각에 빠지군 했다. 아버지와 그녀가 안방이나 거실에서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는 모습을 보는 순간이면 나도 몰래 그들 사이에 비집고 들어가앉아 여느 집 애들처럼 응석이라도 부려보고싶은 충동을 느낀적도 있었다. 이제는 그렇게 하더라도 예전처럼 아란의 유치한 질투를 받지 않겠지만 의란의 9살배기 딸아이가 오는 날이면 온전히 그 아이의것이 되여버린다. 큰어머니를 보면서 나는 그 소망 역시 스스로의 환상에 불과하다는것을 깨달았다.   많은 변화와 고민을 거친끝에 중학생이 된 나는 식구들과의 직접적인 충돌을 가급적이면 피하는 삶의 방식을 택했다. 눈에 띄우는대로, 특히 아버지나 큰어머니의 물건에 손을 대는 짓을 삼갔으며 학교에서도 될수록이면 말썽을 일으키지 않았다. 가족들은 전보다 조용해진 내 겉모습에 “어렸을 때 그리 말썽을 부리더니 이제 철이 드나봐?”라고 미심쩍게 바라보았다. 이런저런 쓸데없는 생각과 감정에 빠지지 않으려고 나는 마음과 머리를 비웠다. 별반 힘들이지 않고도 성적은 중등에 들수 있었지만 늘 불량스러운 친구들속에서 하루하루를 무뇌의 인간처럼 되는대로 보냈다. 그 애들중에는 부모 몰래 오토바이를 사서 밤거리를 달리는 아이, 한반 친구들이나 선생님 지갑까지 슬쩍하길 잘하는 아이, 걸핏하면 무리를 지어 싸움을 하는 아이, 그리고 벌써 여러명의 녀학생들을 건드려놓아 임신시킨 아이들도 있었다. 나 역시 그 애들 친구로서 그 모든 짓거리들에 함께 참여했다. 주로 휴일날을 리용하여 나는 그들과 어울려 도시의 유흥가를 굶주린 늑대무리처럼 누비고 다녔다. 호프집에서 폭탄주를 마시고 KTV에서 노래를 부르고 나이트에서 미친듯이 춤을 추거나 볼살이 얼얼하도록 찬바람 맞으며 오토바이를 달려보았다. 친구들이 하는대로 상대를 바꿔가며 때론 술기운을 힘입어 기상천외한 자세로 섹스를 해보기도 했다. 그 시절, 나는 인간이 경험할수 있는 수많은 종류의 쾌락에 도전해보았다. 어차피 인간이란 본능을 위한 더 령리한 생물이라면 젊고 건강하고 돈이 있을 때에 누릴수 있는것들을 모두 누려야 수지가 맞지 않는가. 례년보다 기온이 훨 낮아진 늦가을의 어느 토요일, 아침부터 하늘이 찌뿌둥해서 점심시간이 가까워오기까지 늦잠을 자고있는데 친구녀석들이 전화를 걸어왔었다. “니가 언제 휴일날 집에서 복습을 했다고 그래? 시험을 잘보지 못하면 네 아버지 돈 내고 고중 가면 되잖아.” 몸살기운이 좀 남아있어서 요란하게 놀고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녀석들이 내가 없으면 안된다고 하도 졸라대는통에 그 날도 응낙하고말았다. 주섬주섬 옷을 주워입고 거실을 질러 현관으로 향하는 나를 큰어머니가 만류했다. 날도 춥고 오후에 아버지가 일찍 들어온다고 했으니까 간만에 저녁을 같이했으면 좋겠다고 그녀는 말했다. 나는 알겠다고, 저녁을 먹기전까지는 들어오겠노라고 그녀와 약속을 했다. 종전처럼 녀석들과 술집으로 몰려가서 술을 퍼먹고 흥청거렸지만 몸살때문인지 술맛도 없고 흥도 나지 않았다. KTV에서는 녀석들이 소개시켜준 다른 학교의 녀자애랑 붙안고 노래를 부르다가 별생각 없이 지하방에 들어갔고 일이 끝나자 시간을 확인하며 방을 나섰다. 온종일 흐렸던 하늘에서 그해의 첫눈격으로 가는 눈발이 점점이 흩날렸고 까만 아스팔트길바닥은 눈석임물로 젖어 미끄러웠다. 큰어머니네 집부근에 사는 친구녀석이 오토바이에 나를 태워달렸다. 느닷없이 내린 눈때문에 차가 막히자 친구놈은 길가 가게앞의 주차장들을 요리조리 비집고 들어가 골목길에 접어들었다. 우리 도시에서 건설된지 가장 오래된 립체교까지 와서 어둡고 한산한 다리밑을 지나는데 예상치 못한 피로감이 갑자기 온몸을 엄습했다. 내가 지금 어디로 가고있는지, 왜 이렇게 사는건지 모든게 귀찮다는 생각이 갈마들었다. 열이 오르면서 고막이 얼얼해나서인지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눈에 들어오는 모든 장면은 음소거 버튼을 누른 침묵의 티비화면 같았고 낡고 네모난 돌기둥사이로 언뜻언뜻 보이는 무표정의 행인들은 마치 령혼을 빼앗긴 허깨비 같았다. 여직껏 살면서 사람들이 그렇게 보이기는 처음이였다. 그다음 순간, 다리를 거의 지나쳐 한창 대로의 일차선에 합류하고있는 우리의 오토바이를 왼쪽으로부터 무리하게 끼여든 중형화물차가 그대로 박아버렸다. 눈깜짝할새에 친구녀석은 화물차 바퀴아래에 깔렸고 나는 길가 가로수와 돌덩이가 있는 비탈길로 뿌리웠다. 나는 얇은 종이 인형처럼 붕 떠서 날아갔다. 생각해보면 그동안 그렇게 많은 위험한 짓을 벌였음에도 그런 사고쯤 당하지 않고 살아온것 이 오히려 신기했다. 병원침대에서 정신을 차려 눈을 뜬 나는 의사를 붙잡고 다급히 상황을 묻는 아버지의 뒤잔등을 보았다. “…네? 의사선생님, 얘가 사내구실을 못할수도 있다고요?…” 내 얼굴에는 겹겹이 붕대가 싸였고 눈꺼풀외의 다른 곳은 아직 움직일수 없어서 마치 다른 사람의 육체안에서 세상을 내다보는것 같았다. 초록색 수술가운을 입은 의사와 그곁의 간호사와 그들을 둘러싼 여러명의 사람들속에 아버지가 서있었다. 구부정한 뒤잔등에 희슥한 머리카락의 아버지는 17년전 낡은 학교의 벽돌담벽아래에서 기운차게 오줌을 지르던 그 사내가 아니였다. “그럴수는 없습니다. 이 아이가 어떤 아이라구요, 내가 어떻게 만든 아인데… 선생님, 그게 아니라, 이 아이는 우리 집 대를 이을 유일한 아이랍니다…” 아버지는 “토호” 리만창답지 않게 덜덜 떨면서 횡설수설했다. 제니는 사람들한테 가리워 울음소리만 들렸다. “아이고오, 이게 무슨 일이란가요? 수술 잘 끝났다면서요? 돈은 얼마든지 드릴테니까 선생님, 다시한번 잘 좀 봐주세요…” 제니는 거기까지 말하고 나서 또다시 어이어이 흐느꼈다. 그녀의 울음소리를 좇아 시선을 움직이다가 나는 큰어머니의 얼굴을 찾아내였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평소의 침착한 모습 그대로였다. “사내구실”이라는 말에 그녀의 얼굴우로 드디여 평안의 빛이 한줄기 스쳐지났다. 버겁고도 오래된 짐, 어느 곳에도 부려놓을수가 없어서 마냥 지고만 있던 짐을 끝내 처치할수 있게 된듯한 얼굴이였다. 나는 본능적으로 그날 오후, 벌써 얼굴조차 아리송하니 잊어버린 녀자애의 몸속에 뿌려넣은 나의 분신, 나의 정자들을 떠올렸다. 긴 꼬리를 꼼지락거리면서 그것들은 아직 잘 헤염치고있을가. 나는 곧 다시 정신을 잃었다. 파렬된 장기들과 신경회로들이 치열하게 복구작업을 하는 동안 나는 환영속에서 오줌을 지르고있는 거대한 아버지를 만났다. 그는 천지를 나눈 반고(盘古)라도 된것처럼 거인이였는데 혼돈의 우주속에 외롭게 서서 벌써 수억년동안 오줌을 지르고있었다.“뭐하고있는거예요? 아버지.”하고 내가 물었다. 아버지는 그 자세 그대로 서서 내게 대답했다. “내가 살아있는지 확인하는중이야. 나는 이렇게 쌀 때만이 내가 살아있다는걸 느낄수 있거든.” 아버지는 자신이 언제부터 거기에 서있었는지 알수는 없지만 이미 그렇게 된 이상 계속 살아가고싶다고 말했다. 아버지가 싸지른 오줌줄기를 마시고 땅에서는 수많은 도시의 건물들과 고가도로와 차들과 공장과 기계… 그리고 예술품들이 생겨나고있었다. 그것들은 자꾸자꾸 쌓이더니 아버지보다도 더 높게 우주의 경계끝을 향해 위태로이 올라갔다. 드디여 우주가 찢어지며 강렬한 빛이 쏟아져 들어오자 아버지와 아버지가 만든 모든것이 무너지고 흩어지고 산산히 조각이 나고있었다…       하마트면 “사내구실”을 못할번했던 사람은 내가 아니라 한쪽 소태를 절단당한 친구녀석이였다. 머리가죽이 한손가락남짓 터지고 목뼈와 늑골이 부러진 나는 다행히 위험한 부위를 다치지 않아서 끈질긴 잡초처럼 푸릇하게 되살아났다. 그러나 내가 퇴원한 뒤로 아버지가 심장질환으로 다시 입원하는통에 우리 집안은 더 큰 비상에 걸렸다. 아버지가 중환자실에서 나오기 바쁘게 제니는 령감탱이를 붙들고 유언장 얘기를 꺼냄으로 온 가족들의 질타를 받았으며 유난히 성깔 센 리아란의 귀쌈도 된통 얻어맞았다. “지금이 어느때라고 아픈 사람앞에서 그런 얘기가 나오냐? 망할년, 겨우 내연녀 주제에 어디 감히 유산까지 넘 봐? 이 십수년동안 너 먹여주고 내치지 않은것만 해도 감지덕지해야 할판에… 분수도 모르는 얼떨한 년!” 제니는 자기보다 다섯살 아래인 아란한테 볼따귀가 벌겋게 부어나도록 얻어맞고는 분해서 나한테 달려와 엉엉 울었다. “아들, 나한텐 너밖에 없다. 너그 아버지 돌아가고나면 저년들이 나를 어떻게 할지 뻔하지 않냐? 그니까 넌 나를 위해 반드시 성공해야 한다!…” 아버지는 퇴원했지만 원기가 크게 상했다. 여태 아버지의 뒤를 봐주고 큰 힘이 되여준 정부의 어느 어른이 비리사건에 말려들어 심사를 받게 되자 그의 부동산개발 사업체도 위태롭게 되였다. 자칫하다간 벌금은 물론 여생을 감옥에서 지낼수도 있다고 누군가 귀띔해주어서 아버지는 그 나이에 국외로 도피해야 하나 고민하고있었다. 가세는 완전히 기울어진 셈이였다. 복은 쌍으로 들어오고 화는 혼자 다니지 않는다는 말이 이 시점의 우리 집안에 적격이였다. 큰어머니는 단위에 진단서를 내고 집에 들어앉았다. 그녀 역시 여러가지 걱정거리때문에 수개월사이에 폭삭 늙어버렸다. 하얀 머리가 많이 생겼는데도 좀처럼 염색할 기분이 없어 했다. 그해 봄이 오기전 리아란이 큰어머니의 성화에 못이겨 평범한 직장인과 조촐한 결혼식을 올렸고 오월달에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할머니의 장례식에서 큰어머니는 아버지보다 더 슬퍼하는것 같았다. “어머이, 어머이 이제 아버님 만나셨는가요? 우리 애아빠, 일 좀 잘 풀리게 해달라고 힘 좀 써보시지요… 아버님, 저승에서도 저를 위해 복을 빌겠다고 하셨잖아요, 제 로년을 평안하게만 보낼수 있게 지켜주셔요…” 큰어머니는 할머니를 위해 많은 종이돈을 태우셨으며 그후에도 신기 있는 녀자를 찾아 아버지를 위해 치성을 드렸다. 큰어머니는 생전에 그런 일이 처음이라고 했다. 그해의 추석, 인적이 드문 교외의 어느 사거리에서 원을 그려놓고 종이돈을 태우며 큰어머니는 내게 그랬다. “이젠 정말 너밖에 없구나, 이 가문이 살아남을지, 우리 늙은이들이 편히 눈감을수 있을지는 너 하기에 달린거다…” 누런 종이돈은 활활 잘도 타올랐다. 뜨거운 불길우로 연기를 따라 까만 재가 날아올랐다. 고요한 어둠을 등진채 앉아있는 큰어머니의 얼굴은 어른거리는 불빛에 비춰져 처음 보는 사람의것마냥 낯설었다. 모든것이 그토록 비현실적으로 느껴질수가 없었다. 나는 저주받은 시지프도 아니고 바벨땅의 니므롯도 아니였다. 나는 심지어 자신이 어떤 욕망의 환영이 아니라 실체로 살아있는지 조차 의심스러웠다. 모든것은 그저 한편의 길고긴 피영극(皮影戏)일뿐이였다.  
5    [중편] 노마드 (김금희) 댓글:  조회:1732  추천:1  2016-06-03
중편소설 노마드 김금희 1 창밖으로 내다보는 하늘은 여전히 신비하리만치 순수한 파아란 색이다. 4년전의 그 하늘처럼.   “근데, 그 새로 온 이모 말야. 슬이 누나 말고... 왜, 그 키 좀 작고, 단발퍼머한... ” “음, 그래서?...” “중국사람이야?” “아니.” “그럼, 한국사람?” “아~니!” “설마, 북한... 이야?” 박철이는 커피 한잔을 받쳐들고 창밖을 내다보다가 파란 등받이를 씌운 의자 뒤를 잠깐 훔쳐다보았다. “아~니, 조선족이야.” “그러니까 중국사람 맞네.”   “엄마는, 니가 중국 본토사람이냐고 묻는줄 알았지.” 의자 짬 사이로 젊은 여자와 남자아이의 목소리가 가만가만 새여 나오고 있었다. 아무에게나 함부로 들려지고 싶지 않다는 의도를 눈치챌수 있을 정도로 자제하고 있는 목소리였으나 벌써 박철이의 귀는 그 목소리에 민감해 지고 있었다. 미세한 물방울들이 유리창에 부딪쳐 아름답게 부서지며 날리고 있었다. 위에도 아래에도 온통 안개같이 뽀얗고 시원한 물방울들이였다. 엷은 구름층을 지나가는 모양이였다. “손님,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예의바른 미소를 예쁘게 띄우고 스튜어디스 한명이 박철이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박철이는 다 마시고 굽이 드러난 빈 커피잔을 아가씨한테 건네주었다. 유난히 희고 가는 손목의 아가씨한테는 어떤 범접하지 못할 생소한 아름다움이 배여 있었다. 박철이는 다시 머리를 돌리고 그 거대한 공기바다속에 시선을 잠그어 버렸다. 4년전, 중국땅을 떠나 한국의 하늘로 날아가던 그 날처럼. 땅위에 있을 때는 도무지 볼수도 없고 상상할수도 없었던 풍경이 펼쳐 있어서 박철이는 그 날 잠시 넋을 잃은 듯 입을 하 벌리고 창밖을 내다보았었다. 더구나 비행기가 이륙하기 전까지 땅위에서 보았던 하늘은 장대같은 비줄기들을 사정없이 내리 던지고 있는 무겁고 어두운 구름들 뿐이였었다. 이런 날에도 비행기가 뜰수 있을라나 괜한 걱정으로 전전긍긍 하고 있을 때 비행기는 용케도 활주로를 달리기 시작했고 조금 심한 흔들림이 아닌가 싶어서 출발을 후회하고 있을 때 끝내 그 두꺼운 구름층을 뚫고 날아올랐었다.   거짓말같이, 기적처럼 하늘위의 하늘은 그렇듯 평온하고 황홀하고 아름다웠었다. 한 번도 본적없는 태고의 궁창같은 신비스러운 쪽빛, 그 무연히 펼쳐진 아득한 공기 바다속에 유유히 떠있는 구름섬들, 첩첩산중같기도 하고 자유롭게 달리는 말떼들 같기도 한 그 구름들을 보며 박철이는 순간 가슴이 꺽 메여 왔었다. 떠나기 정말 잘했어, 하고 박철이는 그 날 혼자 앉아서 중얼거렸었다. 썰렁하고 딱딱한 구들위에 팔베개를 하고 누워서 꾸던 모든 꿈들이 정말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영화나 소설처럼 이루어 질수도 있다는 생각에 박철이는 터덕터덕 튀여 나올것 처럼 심하게 날치는 심장을 어찌 할 수가 없었었다. 돈을 벌어 집을 사고, 색시를 얻어서 시내에 나가 자그만 가게라도 열어 먹고 살아야지. 열심히 일하고 돈을 벌어서 애기도 기르고, 엄마 아부지도 모셔와야지. 그것이 박철이가 꾸던 꿈이였다. 다른 재주없이 오로지 땅만 파서 먹고 살던 부모 슬하에서, 내노라 하는 학벌도 갖추지 못하고, 장사속에 유난히 머리가 트지도 못한 박철이로선 그만한 꿈도 언감생심이 아닐수 없었다.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일을 찾아서 자기 입이나 겨우 챙기던 박철이에게 한국으로 시집을 가 주겠다던 누나는 일생에 몇 명 안되는 귀인임이 분명했다. 누나가 보낸 초청장으로 마침내 한국 입국 비자를 받을수 있게 된 박철이는 그래서 사람들이 쥐구멍에도 빛이 들 날이 있다고 말하는줄 깨달았다. “엄마, 장춘은 많이 춥대? 베이징이나 상해는 춥지도 않고 그렇게 좋다던데...” 박철이와 등을 맞대고 의자 뒤쪽에 앉은 방금전 그 남자아이의 약간 붕 ㅡ들뜬 목소리가 낮게 흘러 나왔다.   “아빠 회사일땜에, 놀러 다닐새가 없을거야...” 흥분한 아들애와 달리 한층 가라앉은 여자의 목소리는 대충 거두다 만 씽크대처럼 어수선 하게 마무리를 짓고 있었다. 중국에 와서 사업하는 집안인가? 박철이는 펼쳐져 있던 탁자를 탁! 소리나게 접어서 의자옆으로 붙였다. 이제 이 거대한 철물 덩어리속에서 불과 반시간만 더 버티면 비행기의 목적지이자 박철이의 목적지가 될 중국 땅에 도착할수 있었다. 그 텁텁하고 씁쓰레 한것 같으면서도 약간 누린것 같기도 하였던 중국냄새, 정확히 어떤 냄새였던지 기억을 할 수는 없었으나 분명 박철이는 어둑스런 저녁녘에 우리를 찾아 들어가는 닭이나 양처럼 지금 그 냄새가 그리워서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거무튀튀해서 밝지는 못하지만 부담이 가지 않는 중국사람들의 색깔, 언어의 종류도 다르고 교양있는 말투도 아니지만 약간 우잡스럽고 무식한듯 하면서도 아직 순진함이 남아있는 표정과 억양이 박철이 자신과 서로 닮아 있어서 중국사람들은 한결 편한 것이였다. 애초부터 중국을 떠난것은 중국에 돌아오기 위함이였다. 중국에 와서 사업하는 한국 사람들이 반드시 돈을 번다는 보장이 없었던것 처럼 박철이도 한국에 가기만 하면 무조건 돈을 벌수 있다는 헛된 상상은 하지 않았었다. 다만 열심히 일을 하고, 악착같이 돈을 모으면 꿈을 이룰 가능성이 영 없지 않다는 생각을 했을 뿐이였다. “거기 가서 일할때는 그저 나 죽었다 생각해야 되는기라.” 한국생활경험이 있는 “선배”들은 하나같이 이런 조언을 빼먹지 않고 무료로 반복해서 들려주군 하였다. “참말로, 놈(남) 밑에서 일하자믄 그만한 각오없이 되겄나? 걱정 말아이.” 돈만 벌믄 되제, 내가 뭐 거기서 평생을 살끼가? 누가 뭐라 카든 상관없다! 하고 박철이는 나름대로 생각했지만 정작 어느 “놈” 밑에서든지 “죽었다”하고 살아있기가 생각보다 훨씬 어려웠었다.   그의 온 몸 각 기관들은 이미 전 국민 모두 “절대평등”해야 한다는 무의식속에 깊숙이 물들었는바 머리는 “죽었”는것 같은데 입이 살아있어서, 입을 겨우 “죽였”는데 눈이 살아 있어서, 눈까지 “죽였”다고 방심하고 있을 때는 주제넘게 손가락이 불쑥 살아날 때도 있어 박철이는 봉급도 챙기지 못하고 자주 짤려나가군 하였었다. 죽은 듯 살아있는 법을 터득할 때까지는 제법 시간이 걸렸는데 마음먹고 해보니 또 안되는것도 아니였다. 죽어야 할 때와 살아야 할 때가 있다는 요령도 알아 냈는바 뭐니뭐니 해도 효율로 살아가는 그 나라에서는 열심히 일해주는 것외에 다른 어떤 첩경이 없다는것도 뒤늦게나마 깨달았다. 능숙하고 성실한 일솜씨로 “놈”들의 인정을 받아 내기전까지는 철저히 죽어야 한다는 것, 일단 인정을 받은 후에 자신의 가치를 정확히 받아 내야 할 때는 자신있게 살아나야 한다는 것, 이 두 가지 철칙이 박철이의 깨달음의 정화였다. “근데 너, 학원에서 배운 중국말로 대화할수 있겠어?” “으음,.. 해보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알아?” “나중에 엄마 미용실에 나와서 그 조선족 이모랑 중국말로 대화 해봐라.” 조선족을 그냥 조선족이라고 말한것 뿐인데도 박철이는 한국사람의 입에서 “조선족”이란 단어를 들을 때가 가장 미묘하게 불쾌해났다. 무의식간에 “중국 조선족인데, 일 잘해!”라고 칭찬하던 사장들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였다. 그런 평범한 칭찬 앞에는 마치 “중국 조선족은 워낙 한국 사람과 달라서 일 잘 못하는데...”라는 전제조건을 이미 깔아두었을것 같은 느낌 때문에 박철이는 항상 그런 말들을 다만 글자 그대로 받아 들일수가 없었다.   중국이란 온통 다른 종류의 언어를 시끄럽게 지껄이는 말들속에서 살아오다가 박철이가 처음으로 볼수 있었던 한국은 무궁화 위성이 보내주는 17인치 크기의 모니터 화면이였다. 티비에서는 절대로 흘러 나올수 없다고 생각한 조선말이 (물론 억양과 말투는 차이가 있었지만) 정말로 티비에서 흘러 나왔을 때, 박철이는 순간 온 몸이 떨리는 전율 ㅡ감동이란것을 느껴보기도 했었다. 그것은 태여나서부터 사람에게 순화되여 살고 있던 세퍼드가 어느날 갑자기 같은 혈통을 가지고 생활하는 야생 이리무리를 만났을 때 느낄수 있는 흥분 같은것이라고나 할가. 문뜩 몸에서 잠잠히 흐르고 있던 피줄기들이 요동을 치면서 자신의 원천을 그리워 하는, 강렬한 소망같은것이 불쑥 생겨난것이였다. 물론 그 이유만으로 떠난 길은 아니였지만, 돈을 벌어 시내에서 살고싶은 박철이의 꿈이 더 큰 이유가 됐었지만, 어차피 떠나는 것이라면, 바로 그 원천이 흐르고 있는 곳으로 가고 싶었던것이다. 멀리 비행기 아래로 푸른 겨울바다와 장난감 성곽같은 하얀 도시가 내려다 보였다. 하늘위에서 내려다 보기에는 중국이든지 한국이든지 가난한 동네든지 부유한 도시든지 다 똑같이 아름다워 보였다. 그 땅의 실체를 알자면 비행기나 위성으로선 모자라도 한참 모자라다는 말이다. 일에 대한 입장의 차이외에 박철이가 난감했던것은 단지 같은 말을 하고 있다는 이유로 그 나라 사람들한테 무의식간에 걸었던 근거없이 높은 기대였었다. 다만 그들과 다른 것이 영어가 많이 섞여있는 교양있는 말투나, 세련된 옷차림이나, 그리고 교통질서 위생습관 음식솜씨 등등 뭐 대체로 그런 자잘한것들 뿐이라고 어리석게 단정한 박철이는 마침내 그런 자잘한것들이 합쳐서 기어코 넘을수 없는 큰 벽이 되었다는 사실을 실감해야 했었다.   종족은 한 종족이되 이제는 도무지 한 무리에 어울러 살아갈수 없는 야생 이리와 세퍼드처럼, 액체는 같은 액체지만 한 용기에 부어 놓아도 도무지 섞일수 없는 물과 기름처럼, 박철이는 결코 그들중의 한 사람이 될수 없음을 인정해야 했었다. 그래서 박철이는 축구경기에서 승리하는 “대한민국” 때문에 짜잔ㅡ짜 짠짜! 박수치기 보다는 참패하는 “중국” 때문에 괜히 냄비뚜껑위의 라면을 참담하게 집어 먹으며 마음이 짠해지였고 “중국산 **에서 또다시 **이 검출되였습니다...”라고 떠드는 아홉시 뉴스를 볼 때마다 목덜미위로 용암처럼 솟구치는 분개를 느끼군 하였다. 한국사람들이 말하던 “중국”조선족이란 이름을 박철이 자신이 공식적으로 인정한 셈이 된것이였다. 이왕에 “중국산”이라면, 다만 4년이란 시간동안 한국물로 코팅되였을 뿐인 “중국산”이라면, 정말 “중국산”답게 중국 브랜드로 살아가야 하지 않을까? 그렇게 박철이는 원천을 찾아, 꿈을 찾아 떠나던 원위치로 다시 돌아오기를 마침내 결단한것이였다. 사실 돌아와야 하는것 외에 박철이가 또 선택할수 있는 길은 없었지만 만약 한국 사람들이 박철이를 가리켜 말할 때 굳이 “중국”이란 규정어를 붙이지 않았더라면, 북에서 중국을 거쳐간 사람들에게 하던것 처럼 “비자”라는것을 요구하지 않았더라면, 아니 그냥 “중국산”으로도 충분히 불편없이 살아갈수 있게 했더라면 그것은 또 다른 얘기가 되는 것이였지만 어쨌든 그 만약들은 박철이에게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것들이였다. “아빠 회사 얼마나 멀어? 아빠 나오실거지?” 아직 꿈이 많은 남자아이의 목소리는 중국땅이 가까워 올수록 더 흥분하고 있었다. “으응... 당연히, 나와야겠지?” 그러나 여자의 목소리는 중국땅이 가까워 질수록 더 불안하게 떨리고 있었으며 박철이는 어느 순간 그속에서 잠깐 번뜩이는 과일칼 같은 차거움도 느낄수 있었다.   이상한 이 예감은 뭐지? 자신의 근거지를 떠나 낯선 곳에 떨어져야 하는 외로움? 경계심? 아니면 다른 종류의 어떤 불안함? 물론 그것은 박철이와 전혀 상관없는 일이였다. 그들은 중국 장춘으로 날아가는 비행기에 하나의 등받이를 기대고 선후 의자에 우연히 같이 앉았을 뿐이였지만 사실 그 여자가 아닌 다른 어떤 사람이 앉았다고 해도 박철이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일이였으니까. 그 여자가 선화나 수미같은, ... 박철이가 알고 지내던 여자가 아닌 이상 말이다. 그녀들의 얼굴이 문뜩 떠오른것은 박철이가 미리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였다. 이제 언제 다시 한국으로 들어가겠는지 묘연하기만 한데, 그렇게 서로의 인연들이 줄 끊어져 날아가는 연 마냥 애달프게 멀어질것만 같은데, 이 시점에서 문뜩 그녀들이 생각키운건 아마도 한 의자에 등을 기대고 앉아있는 그 여자의 목소리 때문이였을지도 몰랐다. 차분하게 흐르면서도 단호함을 내내 잃지 않았던 수미의 목소리, 그 부드러우면서도 애절한듯한, 가슴을 흔드는 목소리 때문에 박철이는 수미를 영원히 기억할수 있을것 같았다. “기집복은 지지리도 없는 놈...” 박철이는 허리를 깊숙이 의자에 묻고 눈을 지긋이 감아 버렸다. 그 녀의 이름이 수미인지 아니면 다른 무엇이였는지 박철이는 알수가 없었다. 그냥 고달프고 외로운 이국 노가다 생활에서 그 녀를 만난것이 정말 숨이 트인 일이였다는것 외에는. 일을 하고 자리를 붙이고 돈을 모으기만 하면 성공이라고 생각했는데 정작 그렇게 되고보니 허전하고 외로워지는건 날로 더 해갔다. 몇 년만 더 “죽은듯이” 일하다 보면 돌아가서 버젓이 꿈을 이룰거라고 매일매일 자신을 설득해 보았지만 그의 육체는 몇 년후에 이룰 자그만 꿈 따위에 소망을 갖기보다 당장 누리고 채우고 싶은 무고한 욕망에 더 집요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의지로 육체를 다스릴수 있는 사람이 과연 이 세상에 얼마나 있을까? 우리는 그런 사람을 가리켜 “성인”이라고 거룩히 일컫지만 불행스럽게 박철이와 그 외 많은 평범한 사람들 모두 “성인”이 될수는 없었다. 박철이에게는, 마땅히 결혼할 나이가 훨 넘은 노총각에게, 먹고 입고 자는것 처럼 아주 중요한 욕구가 또 하나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여자에 대한 갈급함이였다. 그런 박철이에게 호소력 넘치는 목소리를 들려준 수미는 결코 지나쳐 버릴수 없는 여자였었다. 비행기 기체가 흔들거리면서 고도를 조절하고 있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하얀 지평선이 조금씩 경사지고 있었다. 곧 기장의 안내방송이 나오고 박철이는 둔중한 안전벨트를 다시 허리에 착용해야 하였다. 이제 끝났군, 완전히 끝났겠지... 그렇게 그리웠던 중국 땅에 비행기 바퀴가 닿아 덜컹! 하고 떨리는 순간, 박철이는 곧 심장이 퍽! 터져 나올것 같은 기쁨과 동시에 문뜩 펑! 하고 터져버린 풍선마냥 쓸쓸하고 허전함을 함께 느끼고 있었다. 거기 사람들과, 그 땅하고 이제 이렇게 끝나버린건가... 내 꿈이 이제 정말로 이루어 지기를 시작하는건가... 비행기가 완전히 멈추어 서고 안전벨트를 풀고 일어서서 짐들을 정리하며 박철이는 흘끔 뒤 의자를 쳐다 보았다. 코선이 뚜렷한 곱살스런 얼굴을 가진 아들 옆에 생각보다 젊어 보이는 갸름한 얼굴의 여자가 서있었다. 눈길이 마주친 박철이에게 보일듯 말듯 고개를 끄덕여 보이는 여자, 아마 박철이의 한국식 깔끔한 옷차림 때문에 “중국 조선족”인지 아니면 동족“한국인”인지 얼핏 분간이 가지 않아서였을 것이다.   수미보다 예쁘진 않았지만 “미용실 사장”답게 화장이나 헤어 스타일이 한국 여자들 속에서도 튀고 있는 세련된 여자였다. 사실 연예인 말고 조선족 가운데서 수미만한 여자도 없을거라고 박철이는 늘 생각하고 있었다. 황홀하다거나 섹시하다기보다는 그냥 정말 고운 여자였다. 눈초리가 유난히 길어서 살포시 감겨 올라간 눈은 그 녀의 깊은 마음을 다 끌어내올수 있었으며 자연스럽게 오똑 선 코날 아래의 도톰한 입술은 언제 보아도 육감적이였다. “어서 오세요, 뭐 드실거예요?” 멍청하게 넋놓고 자신의 얼굴만 쳐다보고 있는 박철이에게 수미가 건넨 첫 인사였다.   드르륵 드르륵 짐가방을 끌고 공항밖으로 나오니 중국 장춘의 겨울은 예상했던것보다 훨씬 매섭게 추웠다. 훅 ㅡ 찬공기를 들이마시기 바쁘게 목은 쏙 움츠러 들어가고 코끝은 쨍 ㅡ하고 1미리나 얼어드는것 같았다. 구정을 앞에 두고 한창 추울 때 도착했으니 더욱 그럴 법 하였다. 공항은 떠나던 날보다 많이 커지고 깨끗해 진것 같았지만 공항 주위의 옥수수밭은 여전히 넓고 조용한것 같았다. 새로 만든 주차장에서 얼쩡거리고 있는데 빨간 색 택시의 창문이 열리면서 더부룩한 머리의 기사가 중국인 특유의 느끼하고 높다란 목소리로 박철이를 불러 세웠다. “취 날? 워 쑹니야?” 마치 몇 달 전부터 사귀여온 친구를 부르듯 스스럼없는 그 반가운 말투에 박철이는 저절로 걸음이 멈추어 졌다. 물론 기사의 반가움은 박철이를 보았을 때가 아니라 그의 지갑을 생각했을 때 나온것이였겠지만 어찌되였거나 박철이는 자신의 지갑이라도 반겨주는 그 친구가 싫지는 않았다.   그것은 롯데 백화점의 점원 아가씨한테서 “손님, 사실거 아니면 만지지 말아 주세요.” 하고 예의바른 미소가 깔린 충고를 들었을 때와는 완전 다른 기분이였다. 박철이는 자신의 지갑을 반겨주지 않는 그 아가씨한테서 무릇 이제 원피스 따위는 사지 않을거라고 얼굴을 붉히며 결심하고 누나의 팔을 잡아끌고 신세계백화점으로 갔었다. 통장에 저축한 돈이 얼마가 되던 지간에, 얼마나 성실하게 일을 해주던 지간에, 그의 몸속에서 30여년동안 꽈리를 틀고 숨어 있었던 중국냄새가 완전히 사그라지지 않는 한, 그런 일은 얼마든지 다시 있을수 있는 일이였다. 그런데 정작 중국냄새의 진원지인 여기에는 하나의 것이 아니라 몇 십개의 냄새가 뒤죽박죽 섞여 있어서 사람들은 누구의 냄새가 어떤 냄새인지 별로 신경을 쓰지도 않았다. 냄새가 어딘가 자기의 것과 다르다고 여기면서도 어차피 “중국”냄새라는 것에서는 동일하다고 생각하기에 그들은 차라리 지갑의 두께 따위에 더 관심을 보이는 것이였다. “엄마 중국말도 잘 못하잖아, 주소만 갖고 어떻게 찾아간다고 그래?” 끌고 오던 트렁크를 짐칸에 넣고 택시 운전석 옆 차문을 열고 있는데 귀에 익은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에 당해 보지 못했던 혹독한 추위때문에 언짢아져버린 뒤좌석의 아들애가 빨갛게 언 코등을 실룩거리며 저만치 떨어진 곳에 짜증내며 서있었다. 나와 있을거라고 짐작했던 남편이 보이지 않자 여자는 겁도 없이 서툰 중국어로 택시 기사한테 흥정을 붙이고 있었던 모양이였다. 무리에서 떨어진 아기 상어를 발견했듯이 벌써 여러 대의 택시가 합동작전을 펼치는 어선들 마냥 그들 주위로 엉기성기 “포위망”을 펼치고 있었다.   “ 떠우 이거 쨔! 쭤 나꺼 처 예 이양!” 돈 좀 있어보이는 외국인들을 보면 빈대같이 달려드는 중국인들, 이제 그들의 땅에서 더 이상 고상해지지 못할 한국 여자의 표정을 핏 ㅡ 깨고소하게 비웃다가 박철이는 문뜩 기사한테 소리쳤다. “덩 ㅡ훨!” 도움을 바라는듯 간절한 여자의 눈빛과 어쩔수 없이 딱 마주쳤기 때문이였다. “어디 가세요? 시내까지 합승할까요?” 정작 어렵게 결심을 내린 박철이의 제의를 듣고 여자는 한국말을 하긴 하지만 분명 신분을 확인할수 없는 낯선 남자와 합승하는 것이 과연 더 안전한 일인지 선뜻 판단이 서지 않았는 모양이였다. “거기서 뭐해? 안에서 좀만 더 기다리지... 애 다 얼리겠네...” 여자가 결정을 내리기 전에 좀 늦어지긴 했지만 어딘가 언짢은 얼굴의 남자가 마침 나타나준것은 굳이 긁어 부스름을 만들고 싶지 않았던 박철이에게도 역시 잘된 일이였다. “고맙습니다.” 여자는 아들애를 데리고 남편이 타고 온 봉고차쪽으로 총총히 달려가기전 머리를 까댁거려서 박철이가 베풀어준 소극적인 호의에 대해 가벼운 인사를 표했다. “간이 큰 건가? 순진한 건가? 중국이 무섭지도 않은가베.” 박철이는 차안으로 들어가 문을 쾅! 닫아버리고 혼자 기우뚱거리며 그의 앞으로 질러가는 봉고차를 무심히 내다보았다. “미림성형사출회사”라는 회사의 차량이였다.     2     자갈을 깔아서 반듯하게 수리된 마을길에 들어서면서 박철이는 슬금슬금 놀라고 있었다. 초가집은 거의 없어지다 싶이 적어지고 대신 벽돌집에다 번듯한 2층 시멘트집까지 생겨났다. 심지어 마을 입구에는 웬만한 주차장까지 갖춘 식당들이 조선말로 된 간판을 버젓이 들고 서있었다. 헛, 저 집이 이대장네가 아닌가? 무슨 카페라고 쓴 집은 동식이네고, 어쭈, 저건 뭐야? 노래방이잖아? 장사가 되나보지? 공항에서 시내로 들어갔을 때 까지는 워낙 시내니까 그동안 많이 변했겠지 예상하고 있었지만 읍내도 아닌 그들의 동네에 이런 변화가 있을줄은 미처 생각지 못한것이였다. “야, 박철이! 바, 박, 박철이 맞제?” 조용한 마을길에서 혼자 스적거리며 뻘쭘하게 걷고 있던 박철이의 어깨를 탁! 무식하게 두드리는 사람이 있어 깜짝 놀라 뒤돌아보니 울퉁불퉁한 얼굴에 유난히 큰 입을 가진 익숙한 얼굴의 사내였다. “이게 누꼬? 호영이 이 짜슥!” 어렸을 때부터 한동네서 쭉 커오다보니 허물없는 친구였으며 중학교때 그 유명한 “4인방”의 맴버이기도 하였다. “야~ 오래간만이네! 참말로 반갑데이!” 덩치가 산만한 남자 둘이서 끌어안고 치고 박고 하니 금새 조그만 동네가 떠나갈듯 요란해졌다.   “그래, 그동안 잘 있었나? 시방은 뭐하고 있노?” 호영이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집으로 오면서 박철이는 그간 궁금했던 문안들을 하나하나 꺼내놓기 시작하였다. 물어보고 싶었던것, 알아보고 싶었던것이 사실 너무 많았다.   “내사 마, 할 일이라꼬 벼, 별, 별게 있갔나? 배 두 번 타, 타아고 왔다. 니, 니는 마, 하, 하안 ㅡ국사람 다 됐네이!” 앞머리가 눈썹을 찌르도록 머리가 텁숙한 호영이는 예나 지금이나 외모상에서 별로 달라진것이 보이지 않았으나 박철이는 자신이 보기에도 이제 “한국물감”이 많이 물들여진것 같았다. “짜슥, 내는 내지, 한국사람은 무슨... 야, 그보다도, 그 짜슥들은 시방 다 뭐하고 있노?” 박철이가 말하는 그 짜슥 들이란 바로 한 마을에서 쭉 중학교까지 다녔던 “4인방”친구들이였다. “명수 그, 그 놈은 일본 갔고, 추,운 ㅡ식이 그 놈은 시방 남방에서 큰 회사 다닌다 카더라!” 호영이의 큰 입술이 소꿉친구를 만난 흥분때문인지 슥슥 ㅡ 바람이 나가면서 자제력을 상실한듯 푸들푸들 떨리였다. “짜아슥, 내를 보니께 그라고 좋나? 찬찬히 야그 해보거라.” 학교를 나와서 내지로 돈벌이 나갔다가 돌아왔을 그 때 처럼, 아니, 학교를 다니는 내내 그렇게 했던것처럼, 박철이는 급하면 말을 먹곤 하는 호영이를 위해 어깨를 편하게 툭툭 다독거려주었다. 이윽고 이어지는 호영이의 브리핑 ㅡ, 처음부터 “아무개는 **로 떠나갔고” 로 시작한 것이 결국 마지막까지 “아무개는 **로 갔고...” 로 끝나 버렸다. “개네 한국에서 몇 년 잘 벌었재? 그냥 중국에서 살끼지 와 또 가노?” 돌아오면 끝이라고 생각한 박철이의 머리로는 또다시 떠나갔다는 아무개들이 금방 이해되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 시작되는 호영이의 “심층분석”ㅡ: 아무개는 여기서 시름놓고 살만큼 벌지 못했다 그러고, 아무개는 와서 무슨 시작을 하기도 전에 쓸만큼 다 썼다 그러고, 또 아무개는 읍내에 아파트 하나 사고나서 다시 할 일을 찾지 못했다 그러고...   아무튼 그들도 박철이처럼 방랑 끝 ㅡ이라고 생각하고 돌아 왔던 모양인데 그 끝이 자의든 아니든 다시 떠나가는 길의 시작으로 되었다는 말이였다. 박철이는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고 페 속에 갇혀 지내고 있던 답답한 공기들을 푸 ㅡ 내다 뿜었다. 그러면, 아무개들의 끝이 또다시 떠나는 길의 시작이 되었다면, 박철이의 끝은 어떤 시작이 될까? 아까 마을길 입구에서 보았던 넓고 휑뎅그렁한 논밭도 겨울이라는 계절 때문이 아니라 버리고 간 주인네들 때문에 저렇게 처량하게 누웠으리라. “그란데, 이 동네 장사는 잘 되나보제? 그 식당이랑, 까페는 뭐꼬?” “빵빠ㅡ앙!” 굽인돌이를 틀어서 자기 집 담장쪽으로 들어가려던 박철이는 난데없는 차소리에 깜짝 놀라 말을 하다 말고 얼결에 뒤를 돌아보았다. 착각인가 할 새도 없이 까만 자가용은 엉거주춤 길옆에 비켜선 두 친구를 스치면서 매끄럽게 마을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읍내서 내려오는 식당 손님들이 꽤 많다! 다 한족들이 내려와 하는기다! 저어기, 쬐매한 쑈츠뿌 보이재? 저건 엣날에 매점하던 절뚝발이가 하는 기고...” 이제는 촌동네에 저런 차들의 출입이 별로 신기하지도 않은 듯 호영이는 씨엉씨엉 앞에서 걸어갔다. 버리다 싶이 헐값에 넘겨버린 집에다 고급스런 식당을 차려놓고 읍내의 지갑들을 청해 모으는 한족들이라... 아직도 빠지다 만 노인네의 이발같이 드문드문 박혀있는 페가들과 생기를 잃은 논밭, 그리고 조선말 간판을 들고 욱적북적 수다를 떠는 한족 식당들을 바라보며 박철이는 홀로 낯선 섬에 버리워진듯한 허전함, 그리고 손에서 떨어진 겨떡을 강아지한테 앗기운듯한 안타까움과 동시에 어둠이 내려오기전 한시 급히 산에서 빠져 나와야 하는 긴장감도 함께 느끼고 있었다.   “ 이게 누꼬? 우리 철이 왔네예! 철이 아부지, 빨리 좀 와보소!” 집안에 들어서기 바쁘게 아들이 그리웠던 어머니는 눈굽을 찍으랴, 소리를 지르랴 야단도 아니였다.   그간 그리웠던 회포를 풀고, 서로 떨어져 살아왔던 얘기를 하면서 박철이와 호영이는 시간이 어느 곬으로 흘러갔는지 알수가 없었다. “ 그 짜슥들은 다 색시 있갔재? 호영이 니는? 니는 있나, 없나?” 어머님이 손수 차려준 술상을 마주하고 기분좋게 술을 마시다가 취기가 불그스럼 오르기 시작한 박철이는 넌저시 눈을 거슴푸레 뜨고 황소숨을 씩씩 거리는 호영이를 쳐다보았다. “ 내사 마, 색시를 하믄 뭐하갔노? 내가 먹고 살기도 그란데... 니는? 니는 있갔재?” 저가락으로 물고기 요리를 집다가 박철이는 푸욱! 하고 웃어 버렸다. “ 니나, 내나 별거 있나? 기집들은 널렸는디, 나하고 살라카는 기집은 없더라.” 거퍼 5년만 지나면 마흔줄에 들어설 두 노총각은 아직 그 흔한 기집하나 데리고 살지 못하는 자신들의 신세가 답답하여서 허구픈 웃음을 지을수 밖에 없었다. 창문밖으로 어두움이 질척질척 흘러 내렸고 온 마을을 숨막히게 뒤덮었을 텁텁한 어두움속에서 젊은 여자의 맑은 웃음소리나 부드러운 잔소리따위는 들리지 않을것 같았다. 있다고 해도 식당이나 노래방에서 취객들과 한족말로 지껄이는 여자들의 꾸며낸 웃음소리뿐 일것이였다. 거나하게 술이 취해서 비틀거리며 일어나는 호영이를 박철이가 대문밖까지 바래다주는데 끌떡끌떡 딸꾹질을 하며 호영이가 취중인지 참말인지 알수 없는 한마디를 던져놓고 가는 것이였다. “실은, 박철아, 내, 색시 하나 있었다!... 선화라꼬 꽤 쓸만한 기집애였는디... 끄억..꺽...” 박철이는 끝도 없는 터널같은 어둠속으로 사라져 가는 호영이의 뒤모습을 우두커니 지키고 있었다. “ 선화라꼬? 선화...선아...”     이튿날 아침, 밥상을 물리고 박철이는 읍내에 가서 두루두루 구정준비를 할 양으로 일어나 옷을 챙겨 입었다. “참, 어무이, 호영이 말인데예?...” 아버지가 한사코 입으라고 내놓은 털내복에 다리 하나를 꿰고 학처럼 서있다가 박철이는 문뜩 어제밤 색시타령을 하던 호영이가 생각 키웠다. “색시 있었어예?” 가끔씩 전화로 동네 문안을 할 때 도무지 들어보지 못했던 얘기였었다. “있긴 있었다고 해야 제. 시방은 없꼬마는.” 어머니는 왈랑절랑 그릇들을 대야에 넣고 헹구고 있다가 한숨을 가벼이 내쉬였다. “그기 무신 말인겨? 그라믄 잔치도 했어예? 와 내한테는 그란 말 없었심꺼?” 안방과 주방사이 문턱에 앉아 담배를 태우시던 박노인이 얼굴을 험상궂게 찡그리며 버릇처럼 혀를 쩟쩟 차고 있었다. “색시만 얻었스믄 됐제, 잔치는 무신놈의 잔치? 니라믄 그라고 싶겄나?” “그려, 밥 한 때는 묵였으니께, 그라믄 된겨.” 박철이는 두꺼운 청바지에 오리털 잠바까지 걸치고 목도리를 둘렀다. “그라이께, 대체 무신 말임껴? 애 딸린 과부여? 산 동네 되놈이여? 아님 다리나 저는 여자여?” “멀쩡하니 잘 생긴 체네여. 호영이 그놈아 보다야 백배 낫제. 조선여자라 그란거지…” 박철이는 가방을 챙기다 말고 뻐끔뻐끔 쓸쓸하게 담배연기를 뿜어내는 아버지의 된 서리내린 허연 뒤통수를 멀거니 쳐다보았다. 놀랄것 하나 없는 일이였다. 가끔 정신이 나갔다 들어왔다 하는 어머니에, 아래를 쓰지 못한지 몇 년 잘 되는 아버지를 제쳐두고라도, 호영이 자신마저 말 먹는것뿐이 아닌 어딘가 모자란듯 바보스러울 때가 많은 녀석이였다. 그런 호영이네 집이 잘 살 리가 없었고 그런 호영이를 보고 야물딱진 조선족여자가 작정하고 시집와줄리 없었다.   “우찌나 예빘던지... 뼈다구다 가죽 입혀난거나 같았재? 을매나 굶었으믄, 밥알도 차마 몬 묵었다카더라. 쯧쯧, 불상한 아재...” “그라이 묵이고 살리므 뭐 하노? 다 소용없는 짓이다.” 어머니는 그 여자가 가엾다고 혀를 찼고 아버지는 그런 여자를 가엾어 하는 어머니가 한심하다고 혀를 찼다. 그러나 지금 이 시각 박철이가 마음에 걸린것은 몹쓸 조선여자가 아니였다. “그 여자,... 이름이 선화 맞심꺼?” “아마 그랬제?” 호영이의 “색시”가 정말 있었다는것, 그 “색시”의 이름이 선화 라는것, 그리고 그 여자가 조선여자라는것에 박철이는 슬며시 머리가 아파오기 시작하였다. 가방을 어깨에 둘러메고 박철이는 짐짓 태연한척 거울앞에 서서 허흠, 기침도 한번 깇었다. 그래서 박철이에게 이야기 하지 않았는 모양이였다. 아무리 멀쩡하니 잘 생겼다 해도 조선여자는 호영이에게 자존심 상하는 일이였을것이다. 호영이만 그리 생각한것이 아니라 “밥 한끼 묵었으믄 됐제, 잔치는 무슨...”하고 말하던 박철이의 부모님도 그리 생각하여서 잠자코 모두들 덮어두고 계셨던 모양이였다. 언제 어디로 튈지 모르는 조선여자, 호영이의 색시뿐만아니라 박철이가 한국으로 떠나기전 이미 동네에 있었던 여러명의 조선여자들이 지금은 하나도 남지 않았다고 하였다. 아무개 색시는 시내 음식점에 다니면서 일을 하다가, 아무개 색시는 방앗간 집 돈을 몇 천원 꾸더니, 또 아무개네는 3돌배기 얼라를 재워놓고 떠난것이... 거퍼 5년을 버틴 여자들이 없다고 했다. 이제는 노총각들이 더 가난한 동네 한족 여자들을 데려오는것을 훨씬 낫게 여긴다고 하였다.   읍내 시장에는 박철이처럼 구정준비를 하려고 들른 사람들이 애벌레 한 마리를 놓고 뜯고 있는 개미떼들처럼 까맣게 모여서 북작거리고 있었다. 누덕누덕 기운 이불로 꽁꽁 싸안고 내온 싱싱한 야채들이며, 살얼음이 낀 수조안의 파닥거리는 물고기들이며, 중국인 특유의 제조법으로 훈제한 돼지다리와 발쪽이며, 그리고 광주리안에 움츠리고 있다가 뜀질하며 나오는 다리 묶인 토닭들과 아직도 열기가 식지 않아 김이 문문 나는 돼지고기와 소고기... 역시 중국은 먹거리만큼은 절대 풍성한 나라였다. 피기름에 때까지 반들반들 묻은 외투를 입은 구레나룻 사나이한테서 박철이는 모처럼 먹고 싶었던 싱싱한 소고기와 큼직한 소꼬리며를 사서 가방에 넣었다. “우리 시집에서는 내가 입쌀도 못 먹다가 왔는줄 알더라.” 한국으로 날아간 그 날에 누나네 집에서 박철이는 삼겹살을 구워 먹었었다. 살고 있는 자그만 아파트는 “전세”라고 하였으며 삼겹살을 굽고 있는 형부의 얼굴에서는 크게 선심을 쓴다는 비장한 표정이 력력하게 그려져 있었었다. 박철이는 삼겹살들의 기름기가 빠지기를 기다려서 김치 잎에 돌돌 싸 바작바작 씹어 삼키면서 가여운 누나가 이제 소고기를 먹어보기는 몇 년동안 글렀겠다고 안타깝게 생각하였었다. 소고기만이 아니였다. 치약을 위로부터 짜는지 아래로부터 짜는지와 같은 사소한 습관에서부터 괴팍한 삐형과 소심한 에이형의 성격차이, 십년이란 터울에서 오는 세대차이, 그리고 엄연히 서로 다른 나라에서(공산과 자본)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온 문화의 차이... 등 가지가지의 문제들에 부딪쳐 누나와 형부는 자주 기진맥진 하였다.   형부는 직원 두명에 아르바이트 학생 한 명뿐이 없는 회사의 “김대리”였으며 경기가 널뛰기를 할 때마다 오늘 짤릴지 내일 짤릴지 전전긍긍하는 사람이였다. 평소에는 그럭저럭 괜찮다가도 술만 마셨다 하면 주정이 끝이 없어서 주위에 올똘한 친구 몇 명이 없이 살고 있었다. 형부는 누나가 웬만한 한국여자들보다 젊고 예쁘니까 그녀들처럼 살림도 잘 하고 애기도 잘 키우는 줄 알았던 모양이였다. 그러나 하나부터 열까지 다시 배워야 하는 살림을 살면서, 혼자 친구도 없이 외롭게 애기를 키우면서, 매일 가계부를 써도 좀처럼 붇지 않는 통장을 보면서 누나가 형부의 술주정까지 달래줄수는 없었다. 한국에서 일을 한 첫 두해 박철이는 누나의 집에서 구정이라고 명절을 쉬였지만 매번 반복되는 부부싸움을 겪어보고 외롭더라도 조용하게, 홀가분하게 혼자 명절을 쉬는 것이 더 나은 휴식일거라고 생각을 바꾸었다. 겉모습은 다르지만 호영이네도 아마 본질적으로는 비슷한 문제에 시달렸을 것이였다. 호영이는 조건이 열악했고 더 자유롭고 더 나은 삶을 원하는 그의 “색시”는 조건이 성숙되자 또 다른 탈출을 꿈꾸었을 것이였다. 가족들에게 도움이 되기를 기대해서 결혼을 결정한 누나처럼 그들의 결합에도 각자의 필요때문이라는 이유가 먼저였을것 이었다. 호영이는 아마 “안해”보다는 우선 “여자”가 필요했을 것이고, 그 여자는 “남편”보다는 우선 “살 곳”이 필요했을 것이다. 호영이가 “여자”를 “안해”로 대우해주기도 전에 그 여자는 “살 곳”이 다른 데도 많다는것을 알게 되였고, 이 전망없는 “살 곳”이 평생을 같이 해야 하는 “남편”으로 될가봐 두려웠을 것이다. 그렇게 떠나간 여자, 그 여자는 정말 중국 다른 곳에서 살고 있을까? 아니면... 혹시...그 선아처럼 한국에...   시장안에서 야채며 고기에다 과일까지 한 가방 가득 사고 나온 박철이는 추운듯 몸을 움씰 떨었다. 아니야, 어떻게 그런 우연이? 수미가 수미인지 알수 없었던것 처럼 박철이가 한국에서 만난 선아라는 여자도 정말 선아인지 선화인지 알수 없었다. 선화라고 하더라도 반드시 잠깐동안 호영이의 “색시”였었던 그 선화라는 장담을 할수 없었다. 굵고 까만 고집스런 눈썹에 또렷한 이목구비가 개성적인 그녀의 성격과 잘 매치되였었다. 잘 생긴 여자였다. 체격도 육감적이라고 하기보다는 건강한 여자였다. 수미가 부드럽고 따듯한 수프라면 그녀는 잘 갈리지 않은 신선한 땅콩쥬스였다. 수미는 언제나 합리적인 말을 골라 하려고 애를 썼지만 그녀는 생각을 미처 가공하지 않은 채 툭툭 튀여나오는 덩어리들을 함부로 뱉을 때가 있었다. “고아예요, 저는.” 그녀가 그렇게 알려 주었기에 꽤 오래동안 박철이는 그녀가 정말 시설에서 자란줄 알았었다.   “인마, 고만 조져라이!” 노란 칠이 덕지덕지 벗겨져 버린 호영이네 구들위에서 박철이는 한사코 건배하자고 우기는 호영이의 손목을 잡고 있었다. “괘않다, 우리 집이니께, 묵꼬 너부러지믄 그만인겨! 체 나라!” 워낙 푸들거리를 잘 하는 호영이의 커다랗고 두꺼운 입술이 들들 떨리고 있었다. 방울처럼 멋쩍게 큰 눈은 자주 초점을 잃어버려 핑 ㅡ 하니 풀렸다가 겨우 원위치를 회복하군 하였다. 단단히, 속시원히 취하고 싶었던 모양이였다. “알았다, 고마! 마셔라! 마시고 죽으믄 고만이제! 니나 내나 뭐가 아깝겠나?” 박철이는 머리를 뒤로 훌쩍 젖혀서 술잔에 반쯤 채워져 있던 흰 술을 쭈ㅡ욱 들이켰다.   “허ㅡ어... 니는 와 죽자고 마시노? 니는 살아야제, ... 돈도 벌어왔으니께 인자 집도 사고, 색시도 얻고, 얼라도 낳고... 그라이 살아야제..어이? 억, 억, 허억...” 급기야 호영이는 눈물 코물을 비실비실 짜내면서 오열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박철이는 이 시각, 호영이 보다 돈 좀 더 있다는 사실에, 호영이 보다 좀 더 잘 났다는 사실에 괜히 미안해나서 어깨를 들썩거리는 못난 소꿉친구를 안쓰럽게 바라볼 뿐이였다. “내도...헉, 얼라 있었다! 니 모르제? 선화 그 가시나가 고만...내 얼라를 ... 윽, 윽윽... 석달밖에 안 됐다카던데... 어~어~억... ” “에잇 못난 놈...” 박철이는 한숨을 푹 ㅡ 쉬다가 다시 혼자 잔에 술을 채워서 답답하니 막혀있는 목구멍으로 억지로 밀어 넣었다. - “중국 사람한테 가서... 석달만에 도망쳐 나왔어요...” 언젠가 같이 포장마차에서 술을 마시다가 선화라는 여자가 박철이에게 말한 적이 있었다. “허긴... 얼라까지 싸놓고 내빼으믄 내 어예 살갔나? 우찌됐든간에 2년동안 내캉 살아 줬으니께 그만한 돈은 줘야겠제...” 눈물을 훔치며 호영이는 방금전보다 많이 덤덤해졌다. “그긴 또 무신 소리고? 돈 가지고 튀였더나?” 박철이는 도둑이 와도 탐날것 하나 없어보이는 고물천지인 호영이네 가장집물들을 둘러보았다. 칼자국이 선명한 짧은 다리 책상에, 따귀를 많이 얻어 맞은것 같은 귀머거리 텔레비에, 유리창이 반쯤 나가서 지난 해의 달력으로 대충 가린 이불장 문에, ... 거기다가 건너편 방에서는 흐음흐음 하고 정신이 온전치 못한 호영이의 어머니가 코를 골고 있었다. “니가 무신 돈이 있다꼬 그걸 갖고 튀나? 독한 가시나...” 선화의 고집스러운 눈썹이 떠올랐다. “난요, 살아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어요... 다시 돌아간다면... 그땐 죽어야겠지요...”   “아이다, 내가 배에 있을 때 울 엄니 밥 끓여주고 울 아버지 송장 치른 아다. 내가 준기다. 그 돈...” “으이구, 그래, 니 잘 났다. 못난 놈...” 기어이 떠나가는 여자앞에서 호영이가 또 무엇을 할수 있었을가? 박철이는 저가락을 들어 밥상을 내리 치기 시작하였다. “그러던 그 어느날, 선녀가 떠나갔어요. 하늘높이 .... 선녀가 떠나갔어요~~ 선녀를 찾아주세요, ...아니 선화를 찾아주세요, .... 허헉, 흐흐흐 ... 근데 임마, 대체 그 가시나 선화냐? 선아냐?...” 호영이는 벌써 밥상에 코를 푹 박아버리고 크르륵 크르륵 잠이 들어 있었다. “선아야, 니가 맞냐? 니가 선화야? 아니재? 니가 수미를 ... 아니재? 차마 니가 그랐겠나? 으이? ...독한 가시나, ...”     3 박철이는 그때 자그만 고물회사로 옮겨서 일을 하고 있었었다. 고물중에서도 낡은 전선만 취급하는 회사, 까놓고 말해서 쓰레기 수거점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는 말이였으나 굳이 “회사”라고 이름을 붙이는 이유는 그 전선의 피복들을 기계로 깐다는 그것 때문이였다. 기계라고 해도 전자동이 아니라 수동이여서 능숙한 일솜씨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일자리였다. 허술한 공장외모와 달리 경쟁이 치열하지 않고 현금이 바로 들어올수 있어서 오히려 장마철에는 놀다 싶이 해야 하는 알짜 노가다보다 수입이 못지는 않았다.   사장과 직원 다 합해봐야 박철이까지 겨우 네사람, 두 사람은 동업하는 사장들, 한 사람은 대리, 그리고 박철이는 중국 아저씨라 불리는 직원이였다. 박철이는 괜찮은 일자리에서 더 많이, 더 오래 벌고 싶어서 성심껏 일했고 동업하는 두 사장은 그런 박철이를 아주 흡족해하였었다. 추석을 앞두고 모처럼 일을 일찍 끝낸 그들은 돼지갈비를 먹기로 합의를 보았었다. “여기 고기가 맛있다고 소문 났다드라.” 이렇게 운을 떼며 식당문에 들어선 그들을 맞아준 여자가 바로 수미였다. “어서 오세요, 뭐 드릴까요?” 수미의 고운 얼굴을 보는 순간, 박철이는 오래전부터 알고 지냈던 사람을 다시 만난것마냥 이름할수 없는 친밀함이 본능적으로 느껴졌었다. 포장은 비슷해도 본질적인 내용은 항상 서로 다르던 무리속에서 살다가 마침내 만난 그 “진정한 동지” ? 수미를 만나는 순간부터 박철이는 더 이상 한국생활이 외롭지가 않아졌다고 그 후에도 쭉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어~서 오냐고? 집에서 오지. 아따, 언니는 언제봐도 이쁘다~” 능글거리며 수미한테 농을 거는 사장과 대리를 보면서 박철이는 이상스럽게 벌써 미미한 질투같은것도 느끼고 있었다. “인마, 너 결혼 안했다 그랬지?” 주문을 받고 돌아서는 수미의 등을 물끄러미 쳐다보는 박철이에게 사장과 대리들이 마음 가렵게 쿡쿡 찌르고 있었다. “저 언니 이쁘지? 교포래~” 혹시 수미한테 그 말들이 들려질까봐, 아니 혹시 그 말을 듣고 얼굴이 불컥 불거진 자신을 돌아 볼까봐 박철이는 막 화까지 슬슬 올리 받쳤다. “에이 참, 그만해요...” 수미가 저만치서 돼지갈비 5인분을 큰 그릇에 받쳐들고 그들앞에 다가오자 노총각을 놀려먹는 재미에 더없이 즐거워진 유부남들이 또다시 지껄였다. “언니, 중국에서 결혼했어?” 가스불을 켜고 고기를 올려놓다 말고 수미가 박철이를 흘끔 쳐다보는 것이였다.   “ 왜요? 좋은 사람이라도 있으시게요?” 농담인지 진담인지 알수 없는 야릇한 미소를 띤 수미의 얼굴을 보는 순간, 박철이의 심장이 갑자기 작살 맞은 물고기처럼 퍼덕퍼덕 심하게 뛰놀기 시작하였다. 수미를 보고 입만 다시는 유부남들은 그 대리만족이라도 채우려고 박철이를 내세워 강하게 밀어붙이기 시작했으며 수미는 수미대로 받아 주는듯 아닌 듯 묘하게 넘겨버리기만 하였고 박철이는 박철이대로 흥분에, 짜릿한 즐거움에 고기를 어느 구멍으로 집어 넣었는지도 몰랐다. 그렇게 시작된 수미와의 인연, 박철이는 기회만 되면 뻔질나게 수미가 일하는 갈비집으로 드나들었다. 수미와 이런저런 농도 걸어보고, 더 자세한 내용들을 알아보고 싶었으나 수미는 좀처럼 잡힐듯 말듯 박철이의 눈앞에서 나비처럼 팔랑거리며 날아다니기만 할뿐이였다.   그러기를 얼마동안, 그 해 추석이 되여 한 도시에서 일을 하며 가끔 전화로 연락을 하던 윗동네 친구녀석이 박철이를 찾아 왔었다. 워낙 붙임성이 좋고 성격이 능글맞아서 박철이의 초청을 기대하지도 않고 저좋으면 아무때고 문뜩 들이닥치는 주제가 좀 넘치는 친구였다. “ 야, 추석 어떻게 보낼까 걱정했지? 나 와줘서 정말 다행이지?” 일년동안 쉬지 않고 일하고 겨우 추석 연휴 사흘에 목숨걸어야 하는 박철이인데 수미가 아닌 살벌한 녀석이랑 같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반갑지 않았다. “ 넌 애인도 없냐? 그 많던 애인들을 다 어떻게 먹어버렸대?” 박철이의 입이 퉁명스럽게 튀여 나온것을 보고 녀석도 무슨 감을 잡았는 모양인지 눈을 껌뻑거리면서 집요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 이상하다, 넌 친구도 없고 여자도 없어서 반가워 할줄 알았는데… 왜? 너 애인이라도 생겼냐?” 애인이란 두 글자를 듣는 순간, 박철이는 알몸으로 샤워를 하다가 짝사랑하는 여자에게 들킨 남자처럼 얼굴이 불끈 달아올랐다. “ 애, 애인은 무슨… 아니야, 절대 아니야…” 염치좋은 윗동네 바람둥이 친구는 손까지 내저으며 완강히 거부하는 박철이의 모습을 보고 웃음을 참지 못하였다. “ 얌마, 아니면 아니지… 뭐 그렇게 까지 긴장을 하고 그러냐? 여자가 있긴 있는 모양이네ㅡ, 왜? 유부녀야? 하긴, 애인중에 처녀나 과부보다 유부녀가 젤로 짜릿하다더라…짜식, 재간 좋네ㅡ” 한국생활 7년에, 산전수전 다 겪었다는 녀석은 꺼리끼는 기색도 없이 박철이의 심기를 자극하는 말들을 툭툭 내뱉었다. “ 아니라니까! 그만 해!” 드디여 박철이가 화내기 시작하자 그제야 그 속없는 친구는 “정말 아니야? 아니면 됐고…” 라고 씁쓸하게 마무리를 짓는것이였다. 기어코 자기가 저녁 사겠다는 녀석을 데리고 수미네 갈비집으로 간것은 몰래 녀석에게 수미를 자랑하고픈 박철이의 욕심이였나 보았다. 자기는 사귄 여자가 셀수 없이 많았다는둥, 한국에서 같이 동거해본 여자만 해도 한타스는 된다는둥, 어떤 여자는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자기가 박사라는둥, 박철이는 남자로서 전혀 매력이 없어 보인다는둥, 이제 기회가 되면 자기가 손수 여자를 소개시켜주고 기술을 전수하겠다는둥… 하늘아래 뻥이란 뻥은 모조리 치고싶어 안달이 났던것 같았다. 그날 저녁장사가 끝나면 수미도 사흘 추석휴가가 난다고 하였다. 완벽한 조각상처럼 예쁜 수미의 얼굴을 보는 순간, 수미의 눈초리가 박철이를 향해 미묘하게 떨리는것을 보는 순간, 이 뻥쟁이 카사노바는 당금 얼이 나가는듯 멍청해졌다.   “ 얌마, 어디서 저런 일품의 여자를… 야ㅡ, 너 다시 봐야겠다…” 수미가 상을 보러 나간 사이 뻥쟁이 카사노바는 연신 침을 흘리면서 수미의 탱탱한 엉덩이를 느끼한 시선으로 쫓고 있었다. “ 그만해, 아직은… 아니야…” 박철이는 녀석의 느끼한 시선이 불쾌해나서 일부러 팔굽에 힘을 단단히 주고 옆구리를 쿡 ! 필요이상으로 아프게 찔러주었다. “ 뭐? 아직 손에 안들어온거야? 야, 그럼 우리 똑같이 경쟁하는거다! 아싸, 오늘 봉잡았네ㅡ!” 뻥쟁이 카사노바는 옆구리를 슬슬 만지면서도 신이 나서 어쩔줄을 몰라했고 박철이는 기분이 잔뜩 잡쳐서 녀석을 노려보기만 하였다. 이게 뭐야? 이게 아닌데… 큰일났다! 뻥쟁이는 과연 카사노바답게 식당 문어귀에 잠복하고 있다가 서빙언니들 가운데 수미가 묻어 나오는것이 보이자 으흠 으흠 유식한 신사답게 목청을 가다듬으며 다가서는것이였다. “ 실례가 안된다면… 차라도 한잔…” 작업멘트의 기질이 다분한 느끼한 목소리의 뻥쟁이와 그 뒤에 숨어 어쩔바를 모르는 순진한 노총각을 번갈아보며 서빙언니들이 까르르 한바탕 웃는것이였다. “ 얘, 수미야, 차 한잔 하겠다잖니? 빨리 가봐라, 정말 차 한잔뿐이죠? 술이라면 우리 같이 가주고 싶은데…” 허구프면서도 어딘가 즐거웠던지 수미는 손에 땀을 쥐고 서성거리는 박철이를 향해 피씩 웃고 말았다. 대신 수미도 같은 자취방에 있다는 여자친구를 불러와서 짝기러기 넷이 앉아 술을 마실수 있었다. 이제 곧 연휴라 긴장했던 탕개도 풀렸고 오랜만에 같은 입장의 동지를 만나 편하기도 했고 그리고 아직 풋풋이 젊은 이성들끼리 만나 미묘하기도 했다. 감수성이 민감한 소년, 소녀시대로 되돌아간것 같기도 하여 정말 즐거웠던 밤이였다. 그 밥맛 떨어지는 뻥쟁이만 아니였으면 너무 완벽했지 않았을까?     #G3b57gjSTips { position: absolute; left: 9999999999em; z-index:999999999;width:56px; height:24px} #G3b57gjSTips a { background: url(http://mat1.gtimg.com/www/sogou/sogou_tips_v1.png) no-repeat 0 0; display: block; width: auto; height: 24px; line-height: 24px; padding-left: 23px; color: #000; font-size: 12px; text-decoration: none; _position:relative; margin: -32px 0 0; } #G3b57gjSTips a:hover { color:#45a1ea; background-position: 0 -34px } 搜索
4    [단편] 슈뢰딩거의 상자 댓글:  조회:742  추천:0  2016-06-03
단편소설     슈뢰딩거의 상자   김금희       빛이다. 마치 미리 겨누고 오기라도 한 듯, 빛 줄기들이 정확히 그녀의 머리 위에, 주춤 멈춰 선 허벅지 위에 무작위로 내리 꽂힌다. 따갑다. 그리고, 낯설다. 요즘 도시들은 거개가 거기서 거기라지만 아는 사람 하나 없는 X시가 낯선 만큼, 그녀에게는 그 도시의 빛마저도 못 견디게 생소하다. 지금쯤 식구들은 뭐하고 있을까. 그녀는 잠시 자전거를 타고 출근길을 달릴 남편의 차가워진 앞이마와, 시어머니의 펑퍼짐한 등에 업혀있을 아들녀석의 통통한 엉덩이를 떠올린다. 그 위에 쪼여질 익숙하고 푸근한 그 도시의 빛들을 그려본다. 코펜하겐이 그랬던가. 광자는 동시에 두 개의 창문을 지난다고. 그게 진실이라면, 하고 그녀는 갑자기 엉뚱한 상상을 해본다. 사람도 동시에 두 공간에 머무를 수 있는 방법이 있게 되지 않을까. 잠깐만이라도 그 익숙한 도시의 빛을 쬐고 왔으면 싶다. 순간, 알싸한 그리움이 날 세운 면도칼처럼 그녀의 가슴을 쓰윽 싸악 훑으며 지난다.   “툭” 누군가 그녀의 어깨를 밀친다. 어깨에 걸쳤던 가방끈이 주르르 팔꿈치께로 흘러 내린다. 그녀를 예의 없이 밀치고 지나간 여자는 오히려 제 쪽에서 더 짜증난다는 얼굴로 돌아본다. 이런, 하고 그녀가 미처 깨닫기 전에 “툭, 투둑” 더 많은 사람들의 어깨가 연신 그녀를 건드리며 총총히 지나치고 있다. 신호등이 바뀐 것이다.   서둘러 가방을 고쳐 메고 그녀도 걸음을 내딛는다. 주위 사람들의 무심한 얼굴은 마치, 한 공장에서 주문한 가면이라도 맞춰 쓰고 나온 듯  서로 무척이나 닮아 있다. X시 스타일이다. 그네들 속에서 영 조화롭지 못하게 뚜걱뚜걱 걷고 있는 사람은 오직 하나 그녀 뿐이다.   X시에 온지 삼일 째, 막 면접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였지만 그녀는 이 거대한 도시가 여전히 실감나지 않는다. 판타지 영화 속이나 만화 속 인형마을에 온 것 같은 착각에 자주 깜박깜박 속는다. 매일 아침 일어나 침대에서 내려 머리를 숙이고 슬리퍼를 찾아 발을 꿰 신을 때, 그 때가 그녀는 가장 실감이 나지 않았다. 어제도 오늘도 그녀는 여전히 그녀인데, 그녀가 베던 베개와 덮던 이불과 침대와 슬리퍼가, 아니, 그녀의 방 통째로가 감쪽같이 바뀌여져 버린 것이다. 그녀가 익숙했던 그녀의 모든 물건들과 곁에 있었던 식구며 친지들이 언제 있었냐 싶을 정도로 자취도 없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녀는 자신이 마치,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툭 떨어진 비 방울처럼, 느닷없이 딴 세상으로 덜컥 와버린 것 같다고 생각하였다. 사실이지만 믿을 수가 없을 때, 사람들은 실감나지 않는다고 하지 않던가. 그녀는 그 실감보다는 사실을 믿고 싶어서 하루에도 몇 번씩 자신에게 단단히 일러주군 한다. 여기는 X시야, 실재하는 곳이지. 며칠 전에 왔잖아, 기차 타고 너 혼자. 아무도 X시에 가라고 그녀를 강요하지 않았다. 애는 커가고, 돈은 필요하고, 직장은 찾아야겠고, 집 주위에는 취직기회나 조건이 좋지 않았고… 인터넷으로 전국 다른 도시들에 이력서를 넣었는데 X시의 회사로부터 면접통지가 날아 온 것 뿐이였다. 그녀의 마음처럼 따지고 선택할 상황이 아니였다. 열심히 일해서 돈 벌어 보낼게. 자리를 잡으면, 우리 다 그쪽으로 옮길지도 모르잖아. 그녀는 조국의 지도를 펼쳐놓고 X시와의 거리를 가늠해보는 남편의 시무룩한 얼굴을 훔쳐 보았다. 떠나기를 작정한 누군가라도 지껄일 수 있는 시시한 약속이었다. 남편은 그 약속을 몹시 믿을 수 없어 하는 눈치였으나 일단 가서 보자며 짐을 챙기는 그녀에게 떠나지 않아도 될 다른 대책을 내놓지도 못하였다. 아들녀석의 눈초리를 마주하는 일이란 훨씬 어려운 것 이여서 그녀는 녀석의 눈을 잠 재워 감겨 놓은 뒤에야 짐 가방을 끌고 살그머니 집을 빠져 나왔었다.  뿌연 어둠 속에서 끄덕끄덕 졸던 계단은 그녀가 한장 한장 디딜 때 마다 터덕터덕 깨여났고, 아파트 정문 앞에서 마지막 버스를 기다릴 때 밤하늘 허공에서는 미지근한 비 방울이 투둑 떨어졌었다. 그 비 방울이 그녀의 얼굴에 닿아서 주륵 흘러 내릴 때의 처연한 느낌, 그런 느낌이 생생하게 살아 오를수록 X시는 그녀에게 더욱 실감나지 않았다.   ㅡ도시 전체가 어떤 커다란 막 안에 들어 있는 것 같애. 세 집을 잡고, 짐을 정리한 뒤에 그녀는 비좁은 방안 낡은 침대 옆 벽에 걸려 있는 청동색 테두리의 거울을 들여다 보았었다. 중세시대 북유럽풍의 타원형 거울 안에는 아직 X도시에 속하지 못한 생 얼굴의 그녀가 핸드폰을 들고 있었다. ㅡ아무리 찔러도 휘저어도 터지지 않는 막 같은 거 말야. 여기 사람들은 다 그 속에서 살아 가는데, 나만 바깥에 남겨진 것 같다? 그녀는 먼저 번 세입자가 남기고 간 걸레로 거울 앞 칠이 벗겨진 테이블을 닦았다. 친구는 아무 말 없이 그녀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ㅡ그 무심한 인간들 표정 보면, 나는 무슨 투명인간 같더라. 하긴, 지들이 나랑 무슨 상관이 있겠니? 걸레를 꾸깃 접어서 한 쪽으로 밀어놓고 그녀는 왼 손으로 턱을 고였다. 거울 안의 그녀는 오른 손으로 얼굴을 받치고 있었다. ㅡ다 그래, 처음에는. 한참만에야 듣는 친구의 목소리는 별거 아니라는 듯, 자신은 이미 겪어보았다는 듯, 평온했다. 정말, 그 친구는 외국생활 벌써 4년째구나 하는 생각이 반짝 들었었다. 친구도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는 것과 지금 저리 버젓이 적응하고 있다는 사실에 그녀는 잠시 위로가 되는 듯 하였다. 그렇겠지? 그런 건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 지겠지? 거울 속에서 그녀가 그녀에게 되물었었다. 버스 터미널에 있는 기다란 의자에 엉덩이를 걸치면서 그녀는 가방 속에 손을 집어넣어 더듬거린다. 네모난 금속덩어리가 손안에 잡히우자 그녀는 안궁환을 찾은 심장병환자처럼 안도의 숨을 내쉰다. 꼭 집에 전화를 하려는 건 아니다. 이 시간대는 모두들 바쁘다는 걸 그녀는 잘 안다. 폴더를 열어 통화내역을 보는 것 만으로도, 그 익숙한 도시의 지역번호를 보는 것만으로도 그녀는 많이 침착해진다. 바탕화면에 뜬 아들녀석의 얼굴을 엄지로 싹싹 문질러 본다. 보들보들한 어린 아이의 피부가 손가락 표피세포에 닿는 듯 하다. 지금 이 핸드폰은 그녀가 여기에서 숨을 쉴 수 있는 유일한 창이다. 그녀가 이제껏 어떤 세상에서 확실히 살아 왔었다는 사실을 증명해주는 도구이자, 또한 이 거짓말 같은 세상에서 옛날의 진실한 세상을 간간히 느껴볼 수 있는 유일한 통로다. “어때, 지금? 자?” 전날 저녁에도 거울 앞에서 그녀는 핸드폰을 열었었다. “애들이 그렇지 뭐. 아까까지 찾다가 우유 먹고 지금 잔다.” 남편은 반가운 기색은 티 나게 감추고, 억지로 심드렁한 목소리를 애써 살렸다. 그것은 결국 자신을 떠나간 그녀가 괘씸스럽고, 그립다는 얘기다. “밤에 두 번쯤 오줌을 쌀 거니까 명심해서 깨워. 쉬 통은 변기 뒤에 있어.” 떠나기전 이미 당부했던 사항이지만 그녀는 다시 한번 강조했다. 그 외 식구들의 양말을 넣은 서랍들의 위치와, 긴 팔 티만 개켜넣은 옷장 문 순서와 냉장고 속 야채들의 “유통기한”까지 일일이 다시 곱씹어주었다. 남편은 별 도움이 안되는 얘기를 되풀이하는 그녀에게 알았다를 반복하여 되돌려 주었지만 전화를 놓지는 않았었다. 통화를 끝내고 폴더를 닫아 내릴 때, 그녀는 다시 허상의 세계로 굴러 떨어진 것 같은 허탈감에 몸서리를 쳤었다. 거울 속 그녀의 머리 위쪽에서 벽시계의 분침이 또각또각 태연히 돌아가고 있었다. “디리릭” 갑자기 핸드폰이 그녀의 손안에서 떨기 시작한다. 딱딱한 전자음악소리도 어설프게 흘러 나온다. 면접을 갔던 회사다. “네? 래일요? 그럼요, 괜찮죠 …” 실감이란, 실제와 다른 거라고 생각하며 그녀는 빛을 받아 반짝거리는  핸드폰을 내려다 본다. 믿기든 믿기지 않든, 내일부터 정식 출근이다. 그것은 X시가 그녀에게 흔들어 보인 첫 손짓이라고 그녀는 생각한다. 그와 동시에 그녀가 기다리던 버스가 드디여 치익치익 정류장으로 들어오고 있다. 그 높고 큰, 새 도시의 버스 속으로 그녀는 쑤욱 발을 집어 넣었다.       ※                 ※            ※  “안녕하세요?” 그녀가 인사를 건넨다. 자기 이름과 더불어 잘 부탁한다는 말도 형식처럼 의례 덧붙인다.  남자 한 명과 여자 한 명, 그녀까지 모두 세 사람이 함께 일해야 하는 공간이다. 그러니까 여기가, 하고 그녀는 사무실을 휘익 둘러본다. 내 이름을 불러주는 첫 번째 거점이 되겠지. 그녀는 그녀가 사용하게 될 책상 앞으로 다가가 조용히 서랍을 정리한다. 전임사원이 남기고 간 물건은 많지 않다. 쓸만한 것들은 다 가져갔고, 못쓰게 된 펜 두 개와 딱딱해진 껌 따위며 꾸깃한 종이 몇장이 구석구석 숨어 있었다. 그것들을 하나하나 찾아내여 버리고 나서 그녀의 노트와 펜, 휴지 같은 물건들로 서랍 가득 채우고 나니, 정말 그녀의 책상이 된 것 같다는 실감이 살짝 든다. 남자동료는 누군가와 통화하다가 벌떡 일어서 나가고, 그녀보다 어려 보이는 맞은 켠 여자는 얼굴이 모니터에 가려져 있어 뭘 하는지 알 수가 없다.  사장이 맡기고 간 서류를 번역 타이핑을 시작한지 몇 분도 안 되는 사이에 그녀는 자판중의 “ㅇ”자가 잘 먹히지 않는다는 사실과 문서중에 “ㅇ”자가 유난히 많다는 사실을 느껴 버린다. 이런, 젠장 하필이면 이럴 때 전자시계는 더 힘차게 깜빡거리고, 그녀는 “ㅇ”자가 들어간 단어를 볼 때마다 속을 졸이며 미리 조바심을 낸다. “타다닥, 타닥..” 몇 번을 썼다 지웠다 싱갱이질을 하는 와중에 누군가 “저기요” 속삭이는 것 같다. 모니터 옆으로 맞은 켠 여자의 얼굴이 반쯤 나와 있었다. “왼쪽 모서리에다 힘을 주세요, 그게 워낙에 오래 된거라서…” “아, 네 ㅡ” 그녀는 고맙다고 생각되기 보다는 놀랍다는 생각을 한다. “저기요”라는 말은 누군가와 어떤 관계를 맺을 시 처음으로 사용되는 말이 아닌가, 그녀는 그 도시를 둘러 싸고 있던 투명하고 질긴 막이 퐁 구멍이 뚫리는 것을 느낀다.   퇴근하여 돌아오는 길은 출근할 때 보다 퍽 낯익다. 마냥 무심해만 보이던 사람들의 얼굴에도 사실 희로애락의 서로 다른 표정이 실렸다는 것을 희미하게 나마 느낀다. 세 방 부근까지 와서는 야채과일 가게에 들러 대머리 아저씨한테서 감자 몇 알과 사과 서너 알도 같이 산다. 실감이라는 건, 먹는 데서 가장 빨리 느낄 수 있지 않는가 하고 그녀는 혼자 깝자른다. “나 출근했어.” 저녁을 먹고 커피 한 잔을 들고 거울 앞에 앉으며 그녀는 남편에게 전화를 건다. “괜찮은 것 같애, 여러모로…”그녀는 회사 환경과 번역하던 서류와 적지 않은 급여를 떠들어 댄다. “다행이네, 괜찮아서…” 그녀가 괜찮아서 오히려 퍽 야속스럽다는 듯 남편의 목소리는 샐쭉하다. “아 참, 거기는 어때? 잘 지내?” 자기 얘기가 얼추 끝나갈 때 그녀는 문득 그쪽 세상이 생각 키운다. “잘 있지 그럼, 지구는 너 없이도 잘 돌아가니까.” 그제야 남편의 심통이 들린다. 그런 투정쯤은 괜찮다고 그녀는 생각한다. 살짝 애교를 떨며 먼저 분위기를 풀어주고, 집안 식구들의 상황을 꼬치꼬치 캐묻는다. 알고 싶은 것도 있지만 그래야 한다는 의무감도 없지는 않다. 못이기는 척 남편이 일일이 대답하는데 아들녀석이 자다가 깨였는지 와락 전화를 빼앗아 소리 지른다. 엄마야? 엄마 왜 안 와? 아이의 목소리가 바로 곁에 있는 것처럼 너무 가깝게 들린다. 서슬에 그녀의 머리 속은 뒤죽박죽이 된다. 간신이 쌍아 올렸던 그 무엇인가가 순간 와르르 덧없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다. 지금 뭐 하고 있는 건지, 왜 이러고 있는 건지 그녀 자신도 헷갈린다. 전화를 겨우 끊었을 때 거울 속에서 그녀는 이미 코물을 훌쩍거리고 있었다. 이제 막 익숙해지려던 침대와 이불과 베개가 다시 낯설어진다. 약해지지 말자, 훅 ㅡ 코물을 휴지에 풀고 나서 그녀는 핸드폰의 알람을 6시 반으로 맞춘다. 다음 번엔 좀 덜 아파하자고 생각하며 그녀는 선뜩한 이불 속으로 기여 들어간다.     “광자는 동시에 두 개의 창문으로 들어 가지만, 관측자가 관측하는 순간 하나의 창문만을 선택하여 들어간다.” 코펜하겐의 실험은 상식을 뛰여넘는 일이 또 하나 실존한다는 것을 증명하였고, 상상하기 좋아하는 다른 아저씨들에게 그것을 토대 삼아 한 술 더 뜰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주었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는 정말 우리가 모르는 어마어마한 비밀이 있는지도 모른다. 여러 개의 세상이 겹쳐서 공존하는, 평행우주 같은 것이 말이다.”   한 때 그녀도 그 황당한 가설에 푹 빠졌었다. 코 아저씨가 보여준 자유 때문이였다. 한낱 땅 위를 꼬물거리던 굼벵이에게 날개가 돋혀 하늘을 날아 보았을 때의 자유 말이다. 세상에, 하늘이 이렇게 높고 컸었다니… 굼벵이는 아마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세상 어떤 기적이나 불가사이한 일들도 가능할 것 같다는 자유, 그 동안 그녀를 가두어 놓았던 어떤 마법의 힘들이 풀어지는 것 같다는 황홀한 느낌, 그녀는 그것을 친구에게 조잘대였었다. “얘, 그러니까, 확률상 가능한 모든 세계 중에 수없이 많은 내가 동시에 존재한다는거지.” 친구는 그녀보다 훨씬 현실적이였다. 그 애는 가소롭다는 듯 핏 웃으며 “너도 참, 그게 사실이라고 생각하냐? 그럼 왜 우리는 다른 세상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거니?” 하고 반문했었다. 그녀는 훨씬 더 진지해져서 “그러니까 평행우주 지. 여러개의 우주가 교차점이 없이 평행으로만 존재한다니까. 말하자면 이 세상 의 나는, 어떤 세상의 어떤 상황속의 나 하고도 아무런 상관없이 존재한단 말이지.”라고 우겼었다.   그때 그녀가 그렇게 우겼던 것은 그 모든 가설이 책에만 적혀있었기 때문 이였다. 책 속에서만 존재하는 세상, 현실세계와 교차점을 이루지 못하는 그것도 어찌 보면 하나의 평행우주가 아니였을까.   어느 날인가 블루 원피스를 입고 출근했었다. “어머 언니, 블루랑 잘 어울리네요.” 하고 맞은 켠 여자가 그녀를 춰올렸었다. 그녀는 고마워 라고 대답하며 자리에 앉았지만 정말 그런가, 이전에는 왜 몰랐지 하고 의아했었다. 언젠가는 남자 동료가 뽑아 준 블랙 커피를 예의상 마셔주었는데 그 뒤로 사람들에게 “블랙커피 좋아한다”고 전해지기도 했었다. 회식 때 찬 음료수가 늦게 나와서 시원해 보이는 맥주 한 잔 마셨던 탓으로 그녀는 “맥주 꽤 하는 여자”로 되기도 하였으며, 우연히 누군가와 수다를 떨다가 “ㄴ시 에 있을 때” 얘기를 두 개 했을 뿐인데 그 뒤로 ㄴ 시의 집값을 구체적으로 물어보는 사람도 생겼었다.   그녀는 이 모든 사람이, 이 새로운 세상이 자신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놀라운 것은, 얼마 뒤 자신이 정말 블루 원피스랑 잘 어울린다는 사실을, 블랙 커피도 맛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였다. 그녀는 헷갈리기 시작하였다. 이건 뭔가, 그 사람들의 착각이나 오해가 아니란 말인가. 그렇다면 자신이 변했다는 말인가, 아니면 원래부터 그런 가능성이 있는 자신을 몰랐던 것인가.   그리고 또, 맞은 켠 여자가 불쑥 언니 고향집은 어디야? 라고 물었을 때, 그녀는 무심하게 응, *시야. 대답했었다. *시 *향 *촌이란 것이 사실이였지만 그녀는 그것까지 일일이 말해주지 않았다. 아, *시구나. 우리 삼촌네도 *시 개발구에 있는데. 하고 여자가 반가와 하는 목소리에 그녀는 어딘가 뜨끔했지만 끝내 덧붙여서 촌스런 마을이름까지 말해주지는 않았다. 그런 건 별 상관이 없지 않냐고 그 때는 그렇게 생각했었다.  사장님이 이력서를 보고 **회사에서도 일했으니 베테랑이군 하고 흡족해 했을 때에도 그녀는 임신 때문에 **회사에서의 경력은 겨우 석달밖에 안된다는 사실과 그 전의 더 초라했던 경력에 대해서 일절 함구하고 있었다. 지나간 일들이 뭐가 중요한가, 지금 잘 하면 되지 않는가 하는 생각에서였다. 회사내에서 옛날 세상에서와 다른 새로운 자신에 대한 소문이 퍼지는 것을 들으면서 그녀는 그런 생각이 들어 버린 것이다. 아, 이 세상은 나를 모르기 때문에, 나는 여기서 내가 원하는 다른 모습의 나로도 살아갈 수 있는 거구나. 그래도 괜찮은거 아닌가. 어차피 이 세상은 옛날 그 세상하고 아무 상관도 없는 것인데. 그것은 마치, 불안하면서도 동시에 유혹을 떨칠 수 없는, 부작용을 알 수 없는 새로운 항암제 같은 것이였다. 세상에, 평행우주란 이런 것이란 말 인가.     ㅡ얘 넌, 언제 올꺼니? 외국 오퍼가 수고했다며 밥을 사주던 날, 평소보다 늦어져 집으로 돌아온 그녀는 청동색 테두리의 거울 앞에 앉아서 친구의 전화를 받았었다. 술을 마신 탓인지 그녀의 목소리가 여느 때보다 컸던 것 같았다. ㅡ글쎄, 지금 가면 뭐하나 싶기도 하고, 한 번 나오기 힘든데 몇 해 더 벌어서 가야 될 것 같기도 하고 … 친구는 언제 오냐 란 말만 나오면 은근히 말끝을 흐리웠다.  거울 속 새 퍼머를 한 그녀가 머리를 흔들었다. ㅡ글쎄라니? 요즘 X시에서 한창 유행하는 단발 웨이브 퍼머의 컬이, 들인 돈 아깝지 않게 잘 나왔었다. ㅡ 딸레미가 가을에 초등학교 들어가게 생겼잖아, 기집애야… 그녀는 얼굴을 찡그리며 친구를 닥달했다.   언젠가 남편에게서 들은 친구의 소문이 생각키웠다. ㅡ너 혹시, 그쪽에 다른 사람… 있는 거 아냐? 친구의 침묵에 이어지는 한숨은 인정한다는 뜻으로 들려왔다. 사람의 마음이 어떻게 이리 간사할까. 두 돌짜리 딸애를 떼여놓고 울고불고 질질 짜던 때는 언제고. ㅡ정신차려 기집애야, 언젠가는 돌아와야 할거 아냐? 아직 자신에게 그만한 분별력은 있다고, 지금 귀띔해야 한다고 그녀는 생각하였다. ㅡ알어, 나도. 첨엔 다 그렇게 생각하지… 근데 지금은 여기서 이렇게 사는 게 왜 안되나 싶다. 어차피 여기랑 거기랑은 서로 상관없는 세상이잖아. 안 그래?  당연히 아니지, 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그녀는 그때 친구를 반박할 유력한 이유가 당장 생각나지 않았다.   여기랑 거기랑 도대체 어떤 상관이 있는 거지? 길고 가는 전화선 하나? 아니면 통장갈피 속에 찍힌 은행계좌번호 몇 개?  아무 결론도 없이 전화를 끊은 뒤 그녀는 멍하니 거울을 바라보았다. 실제로 두 세상을 이어주는 것이 정말 있기나 할까 하고 그녀는 처음으로 의심하였다. 파란 불이 깜빡깜빡 들어오는 핸드폰을 내려놓는 거울 속 여자의 얼굴이, 문득 어딘지 모르게 서먹해진 것 같은 밤이였다.     ※                   ※               ※   피카소는 거울 앞에 선 여자와 거울 속에 비친 여자의 서로 다른 모습을 그렸고, 이상은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빙자하여 세상을 비추는 시를 지었다지. 고대인들은 거울을 주술에까지 썼다고 했으니 사람의 상상을 불러 일으킬 만큼 신비스러운 것임에 틀림없었다. 언제부터였던가. 매일 아침 화장을 끝내고 돌아서 방을 나올 때, 그녀는 어떤 확실치 않은 이상한 예감을 슬금슬금 느끼군 하였다. 뭐지? 딱히 알 수는 없지만 뭔가 곧 벌어질 것 같은 느낌, 한창 무엇인가 배후에서 진행되고 있다는 불안감, 영문없이 찾아오는 신경통처럼 그녀는 가끔씩 그런 직감에 따끔따끔 찔렸다.   회사생활은 별 큰 문제가 없었다. 여느 직장에서나 그렇고 그렇듯이, 일 잘해서 칭찬받은 날 있고 실수해서 욕먹는 날이 있고, 동료들과 사이좋은 날이 있는가 하면 아무개랑 얼굴을 붉힌 날도 있었다. 매일 아침 세수를 하고 화장을 하고 조반을 사먹은 뒤 붐비는 지하철을 타고 출근하고, 회사에서는 서류를 만들거나 회의를 하거나 하층 공장을 방문하거나 오퍼의 통역으로 뛰여다녔고, 저녁에 퇴근하면 누군가와 밥을 먹거나 아니면 집에 돌아와 느긋이 책을 뒤적거리던가 인터넷을 휘젓고 돌아다니기도 하였다. 주말이면 친해진 여자 동료들과 번화가에 놀러 가기도 하였고 아주 가끔씩 인근 도시에서 친구들이 놀러 올 때도 있었다. 너무 자연스럽고 실감나게 시간은 이 도시 본연의 항로대로 똑딱똑딱 흘러가고 있었다.    뭐가 문제지? 실감은 실제와 다를 수도 있다는 거? 실재했던 X시가 실감나지 않았던 것처럼, 지금 이렇게 실감나는 이 도시의 생활이 실재하지 않을 수 있지 는 않을까 하는 황당한 억측? 그것은 말도 안되는 것이라고 그녀는 생각하였다.    아마 저번에 집전화를 받은 날부터였던 것 같기도 하였다. 거울 앞 테이블 위에서 컴퓨터를 켜고 친구랑 메신저를 하는 중에 받은 전화였다. ㅡ어, 난데. 별 일 없지? 언제나 그랬듯이 남편의 목소리는 애정결핍증을 앓는 아이의 것처럼 고깝게 들려왔다. 그럼, 뭔 일 있겠어? 거기는? 그녀는 핸드폰을 턱과 어깨사이에 끼우고 머리를 갸웃한 채 계속 타닥타닥 자판을 두들겼었다. ㅡ여기도 뭐, 별 큰일은 없어… 라고 하다가 남편은 그제야 생각이 났다는 듯 근데, 나 그 까만 색 츄리닝 어딨어? 라고 물었었다. 그녀는 츄리닝 하나 찾지 못해 장거리전화를 건 남편이 약간 귀찮아졌었다. ㅡ있던데 있지, 잘 찾아 봐. 그러자 남편은 사실 그게 용건이 아니였다는 듯 대답도 없이 또 다른 질문을 하였다. ㅡ거 애 가을내의 말이야. 어디서 사? 글고 아 참, 예방주사는 언제 맞히지? 그녀는 남편이 왜 그런 일들을 그녀에게 묻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얘기해줄만한 것들은 이미 다 얘기했고, 그리고 그것들은 이젠 그녀와 상관없는 그쪽 세상의 일들이 아니였던가. 남편의 문의가 끝날 무렵에는 아들녀석이 전화를 받기도 하였다.  그 아이는 어른들보다 훨씬 현실적이여서 자기가 있는 세상에 이미 충실히 적응하며 살아가고 있는 중이였다. 엄마야? 엄마 뭐해? 벌써 그 아이에게 그녀는, 그리움 이나 아픔이 아니라 그냥 전화에서 흘러 나오는 어떤 목소리가 된 모양이였다. 아이는 자기가 누군가와 전화로 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에 흥분되여 들까불면서 “엄마”라는 목소리의 물음에 건성으로 대답하기도 하였고 할머니가 시키는 대로 발음이 시원찮은 노래도 한마디 불러 주었었다. 엄마가 보고 싶냐고 그녀가 마지막 질문을 했을  때 아이는 이미 인형 루비에게 주사를 놓기 위해 쌩 하니 달려가버렸었다.    그래서 정말, 전화를 끊고 나서도 아프지가 않았다. 금방 식구들과 통화하 였다는 사실마저도 실감나지 않았다. 그렇게 진실했던 과거의 세상이 실존하였 다는 사실과 지금도 어디선가에서 존재할거라는 사실이 도무지 느껴지지가 않았다. 마치 여태 누군가에게 있지도 않은 과거를 쇠뇌당했던 것처럼.   바로 그때였던가. 그녀를 마주 바라보던 거울 속 여자가 희미하게 냉소 같은 것을 입가에 걸었던 것이. 그녀는 깜짝 놀라 눈을 비비면서 크게 뜨고 거울을 쳐다 보았었다. 거울 속 여자도 놀란 시늉을 하며 눈을 뜨고 있었다. 아마 잘못 본 모양이군 하고 생각하며 그녀는 다시 모니터에 눈길을 돌렸었다. 잠깐잠깐 거울 속으로 눈길을 돌려 보았으나 다시 그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었다.  그때만 하여도 그녀는 대수롭게 생각하였었다. 그러다가 어느 주일날 아침, 언젠가 밥을 사준적이 있었던 단골 오퍼에게서 전화가 온 것이였다. 쉬는 날인지 알고 있지만 사적으로 도움을 청하고 싶다고, 그래도 괜찮겠느냐고 남자가 물어왔었다. 워낙 하는 일이 번역 통역이라 가끔 이렇게 도움을 청하는 사람이 있었지만 그녀는 잠깐 망설이였다. 남자가 다른 오퍼들에 비해 젊은 편이고, 호감 가는 얼굴이라는 것이 어쩐지 마음에 걸렸다. 밥을 사주던 날, 그녀에게 식구들 생각나냐고 묻던 남자의 저의가 무엇이던지 알쏭하던 것도 왠지 불안하였다.  결국 그날 그녀는 나갔고, 남자와 하루 낮을 함께 보내였다. 정장대신 심플한 점퍼를 걸치고 나온 남자는 언제부터 가고 싶었다며 그녀를 끌고 골동품거리와 실크시장을 골목골목 훑었었다. 맥도널드에서 치킨버거를 먹고, 거리에서 아이스크림을 들고 다닐 때, 그녀는 남자에게 예상외로 유머스런 면이 있었다는 것과 장난끼도 다분하다는 것을 느꼈었다. 남자는 호텔앞에서 그녀에게 택시를 잡아주며 있다가 전화할게요 인사했었다. 그래서 그녀는 집으로 돌아오기 바쁘게 걸려온 전화가 남자의 것 인줄 착각했었 다. ㅡ나야, 뭐해? 예의없고 무뚝뚝한 남편의 목소리인줄 확인하는 순간,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짜증을 바락 냈었다. ㅡ왜? 뭔 일 있어? 남편의 목소리는 주춤 끊겼다가 뭔 일 없으면 전화하지 말아야 되나? 하고 나직이 시부렁거렸었다. 그녀는 어딘가 미안해져서 아니, 그런게 아니라,… 지금 급한 일이 있어서… 라고 얼렁하게 둘러대였다. 남편은 기분 좋지는 않지만 이해는 한다는 듯 ㅡ그래? 알았어. 다음에 할게… 라는 말로 전화를 끊었었다.  후유 ㅡ 하고 안도의 숨을 내쉬며 핸드폰 폴더를 덮다가 그녀는 살짝 죄책감 같은 것이 들었다. 왜 그랬을까? 급하긴 뭐가 급하다고… 그러나 그녀는 폰 벨이 다시 울리자 부리나케 목소리를 가다듬고 받았다. 무사히 잘 들어 갔냐, 수고 많았다, 고마웠다, 다음에 기회 봐서 갚아 주겠다 뭐 대충 그런 인사치례차 전화였었다. 그녀는 언제 짜증을 내기라도 했냐는 듯 맑은 목소리로 네, 아닙니다, 저두요, 고맙습니다. 라고 친절히 대답을 했었다.   전화를 끊은 뒤 그녀는 뜨거운 물을 틀어놓고 샤워를 했었다. 샤워를 하고 잠옷을 입었는데도 개운하지가 않았었다. 거울 앞 테이블위에 놓인 스킨 뚜껑을 열어 손바닥에 두 방울 떨구면서, 그녀는 자연스레 거울 속 여자를 보게 된 것이였다. 여자도 잠옷을 갈아입고 스킨을 손바닥에 떨구는 중이였다. 병을 내려놓고 손바닥을 마주 비볐다가 얼굴에 가져갈 때, 그녀는 화들짝 놀랐었다.  거울 속 여자는 아직도 두 손바닥을 마주 비비고 있지 않겠는가. 어떻게 이럴수가? 그녀는 저번처럼 눈을 비비고 나서 크게 치떠보았었다. 거울 속 여자도 매우 놀란 듯 눈을 크게 치뜨고 그녀를 보고 있었다. 다시 한번 그녀가 왼 손바닥을 얼굴에 가져갔다. 거울 속 여자도 잠시 망설이다가 오른 손을 얼굴로 가져가는 것이였다. 그녀는 이번에도 잘못 본거겠지 라고 되뇌이며 침대로 올라갔었다. 그러나 놀랐던 가슴이 팔딱거려서 금방 잠이 오지는 않았다.     거울 앞에서 돌아설 때마다 이상한 느낌이 드는 건 그 후부터였다. 거울 속 여자가 그녀를 바라보는 눈빛도 껄끄럼하니 점점 더 낯설어져갔다. 그녀와 모든 것을 공감하는 그녀의 그림자가 아니라, 다른 하나의 인격체가 된 것 같은 느낌, 그녀가 보지 않을 때의 거울 속에서는 분명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만 같은 생각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아무에게도 그것을 얘기하지 않았다. 그건 그냥 느낌일 뿐이였고, 다른 어떤 확실한 일은 일어나지 않아서였다. 그녀는 될 수록이면 거울을 보지 않으려고 했으며, 또 회사 일이 바빠질수록 실제로 거울을 들여다 보고 앉아 있을 시간이 점점 더 적어졌다.      인터넷의 어떤 심리학자는 자신의 눈을 믿지 말라고 충고해주었다. 이른바 착시현상이나 환영이나 모두 실제보다 시각이란 감각기관만 믿었기때문에 생기는 현상이라고 했었다.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았다. 그녀는 상식과 경험이라는 실제의 세계를 믿기로 하고 더 열심히 일을 했다. 그간 모은 돈을 집에다 부쳐주고 사나흘에 한 번 꼴로 전화를 넣어주기도 하며 회사에서는 자진하여 야근을 하거나 동료들과의 모임에도 자주 나갔었다.    그 단골오퍼도 가끔씩 연락을 해왔으며 회사에 들를 때에는 꼭 그녀의 통역을 요구하였다. “사적인 도움이 필요”해서 그녀는 남자와 두 번 더 만났었다. 남자의 농담이 즐거워질수록 한편으론 내가 왜 이럴까 하고 자책하기도 했었다.  그런 자책감 때문에 그녀는 더는 친구에게 뭐라고 자신있게 닥달할 수가 없어졌다. ㅡ그래, 요즘은 어떠니? 하고 묻는 그녀에게 친구는 ㅡ그렇지 뭐. 이렇게 사는 게 맞는 건지 잘 모르겠다. 고 대답하였었다. 그녀는 혼란에 빠져 기운이 없는 친구가 안쓰러워 나서 너 많이 힘들겠다 라고 말해주었다. 친구는 갑자기 자신에게 관대해진 그녀가 이상했던 모양인지 ㅡ기집애, 갑자기 왜 그래? 뭔 일 있어? 라고 그녀에게 되물었다. 그녀는 저번 날의 친구처럼 떠듬거리며 ㅡ글쎄… 뭐 사람 사는 게 다 그렇지 않나 … 하는 말로 어색하게 얼버무렸었다. ㅡ 나 말이야, 아무리 거기랑 상관없이 산다고 해도 거기서 살던 일을 잊어버릴 수는 없더라. 친구는 한숨을 쉬며 말했었다. 그렇지, 그런 것이였지. 사람들의 어제와 오늘을 잇고, 그녀의 옛날 세상과 X시를 잇고 있는 것이  바로 기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집을 나설 때 밤하늘에서 떨어지던 비 방울과, 정신차려 기집애야 친구를 닦달하고, 회사에서 “아무개는 다중인격”이라고 흉을 보던 자신이 생각났다. 남자와 먹던 치킨버거와 남편의 전화에 괜히 짜증을 내던 일들도 밤거리의 네온간판 처럼 그녀의 머리속에 환히 떠올랐다. 기억이 있어서 그것들은 서로 상관되고 그럼으로 어떤 자유는 자유로울 수가 없는 것이였다.     기억을 평생 외면할 수 없거나 상실할 수도 없다면, 답은 하나 뿐이지 않은가, 하고 그녀는 생각했었다. 친구는 왜 답은 하나라고 하느냐, 여기 세상도 지금 너무 진실하다, 꼭 돌아가야 한다는 법이 어디 있느냐고 꼬치꼬치 캐물었었다. 나중에는 코물을 훌쩍거리면서 내 나이 서른하난데, 살아 갈 날이 살아 온 날보다 더 많은데… 아 나는 왜 이리 이기적인가 하고 넉두리를 했었다. 그녀는 더 이상 뭐라고 말해줄 수가 없었다. 친구의 말도 틀리지 않았다. 진실한 세상이란 그저 자기가 더 오래 머물러 있는 곳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튿날, 한창 혼란스러운 그녀를 사장이 불렀었다. 다음 주 출장 가능하냐고, 그녀의 단골오퍼가 초청했는데 그녀를 지명했다고. 집으로 돌아와 컴퓨터 앞에 앉아서 그녀는 남자의 감성적인 목소리와 장난끼 어린 얼굴을 떠올려 보았다. 바로 어제 만났던 것처럼 감자튀김을 씹을 때 움직이던 남자의 관자노리까지 생생하게 떠오르고 있었다. “그 사람 실력자야…”하고 혼자말처럼 중얼대던 사장의 말도 머리속을 맴돌았다. 뭔가 인생에 전환점이 올 것 같은 예감에 가슴이 쿵쾅거렸다.  눈치 없는 낡은 핸드폰은 그 때 울린 것이다. “디리릭 디리릭” 온 몸을 부르르 떨면서 딱딱한 전자음악소리를 함께 내였다. 집이였다. ㅡ또 왜? 9시 전에는 전화하지 말랬잖아. 알 수 없는 화가 슬그머니 치밀어 오르고 있었다. 집은 이유없이 화를 내는 그녀가 황당하였던지 잠시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어색한 기운이 차갑게 돌고 있었다. 그러니까, 하고 그녀는 수습해야 되겠다는 심사로 하는 수 없이 소리를 낮추었다. ㅡ무슨 일이야? 집은 굉장히 당황스러웠다는 듯 뿌루퉁해서 ㅡ뭔 신경질이야? 얼마나 대단한 일 하시기에 전화 받는 것도 짜증이 셔? 하고 쏘아 붙였다. 누구의 목소리였던가 싶을 정도로 멀고 낯설었다. ㅡ 아니, 이 시간대는 회사 일을 하고 있을 때가 많아서… 그래, 뭔 일이냐고? 집이라는 목소리는 매우 내키지 않는 듯 시부렁거리다가 ㅡ 다음 주 국경절 휴가 나잖아, 올 수 있어? 라고 겨우 용건을 말해 주었다. 그녀는 휴가는 뭔 놈의 휴가냐고, 사립회사가 뭐 국가단위랑 같은 줄 아냐고 냉소를 하였고 집은 애 때문에 그러는데, 아님 내가 그쪽으로 갈까 하고 제의하였다. 그녀는 비좁은 침대와 하나밖에 없는 슬리퍼를 내려다 보며 글쎄, 다음 주 회사 스케줄이 어떻게 될지 몰라서 라고 둘러 대였다. 컴퓨터에 새 메일이 도착하고 있었다. 남자의 주소였다. 알았어, 다음에 보자며 서둘러 그녀는 전화를 끊어 버렸다.  바로 그 때였다. 거울 앞 테이블 벽 뒤로 연결된 인터넷선이 당기우며 뽑아져 나온 것 같아 몸을 일으켜 그 쪽으로 다가갔던 것이. 어쩔 수 없이 피끗 거울을 보게 되였는데, 세상에, 이럴 수가! 거울에 비친 그녀는, 아니 그 여자는, 그녀가 사본적이 없는 잠옷을 입고 구경해본적도 없는 귀걸이며 액세서리를 하고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것 이였다. 아악! 터져 나오는 경악의 소리를 입으로 막고 그녀는 그 자리에 굳어져 버렸다. 아무리 눈을 비비고 깜박거려 보아도 환영이 아니였다.  그 여자도 그 녀를 그제야 발견하였다는 듯 소스라쳐 놀라는 표정을 보이며 벌떡 일어서는 것이였다. 뭐라고 새되게 소리지르는 것 같았지만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녀보다 그 여자가 더 놀란 듯 새파랗게 질려서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마치 그 여자에게는 그녀가 허상이라도 되는 것 처럼. 여자의 움직임이 너무 진실하여서 그녀는 자신이 정말 진짜일까 의심이 들 정도였다. 그럴 수는 없었다. 매일 출근하고 열심히 일하고 사람들과 밥을 먹고 이야기를 하면서 얼마나 진실하게 살고 있는데, 이 삶이 모두 허상이라니, 그럴 수는 없었다. 그 여자는 이 현상을 어떻게 해석해보려는 듯 머리를 흔들어 보기도 하고 거울 앞에서 이리저리 오가며 서성이기도 하다가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급히 침대위를 뒤적이며 뭔가를 찾고 있었다. 그렇지, 핸드폰! 멍하니 서서 그 여자가 부산히 움직이는 것을 바라보고만 있다가 그녀는 문득 핸드폰이 생각났다.  X시의 누군가에게 연락을 해보면 알수 있을 것 같았다. 그녀도 부리나케 테이블이며 침대를 뒤적여서 핸드폰을 찾아 내였다. 폴더를 열고 숨을 고르다가 맞은 켠 여자 동료의 전화번호를 찾아 눌렀다. 뚜 ㅡ 뚜 ㅡ 신호음이 한참 가더니 어떤 낯선 여자의 목소리가 지금은 연락이 안된다고, 죄송하다고 기계처럼 말해주는 것이였다. 그녀가 알고 있던 다른 동료의 전화번호는 그 외 두 개 더 있었는데, 하나는 이미 꺼져 있었고, 다른 하나는 신호음만 갈 뿐 통 받아주지를 않았다.  그녀는 갑자기 현기증을 느꼈다. 이 모든 것이 하나의 거대한 거짓말 세상이 아니였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은 바로 이런 순간에 미치지 않을까 싶었다. 거울을 얼핏 보니 여자도 아무하고 연락이 안되였던 모양인지 핸드폰을 손에 든채 멀거니 서있었다. 빨리 거울 앞에서 사라지고 싶었다. 이 거짓말 같은 밤이 지나고 아침이 오면, 모든 게 해명될 것 같아서 그녀는 허겁지겁 불을 끄고 침대위로 숨어 들었다.     ※                   ※               ※    “실재는 실험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실재에 대한 엉성한 가설 주위를 맴도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자신들이 실재를 가지고 얼마나 위험한 장난을 하고 있는지 모르고 있다…” 빛의 이중성을 최초로 증명한 사람이 아인슈타인이였지만 그는 기어이 코 아저씨의 해석에 동의하지 않았다. 관측에 따라 물리량이 변한다면, 우리가 보지 않는다고 하늘에 떠있던 달이 사라지는게 아니지 않은가. 그러나 코 아저씨 계열의 학자들은 그 관측이란 개념부터 재정립해야 한다고 반박했었다.   고양이는 그렇게 슈뢰딩거의 가상의 가스 상자속으로 들어간 것이라고 하였다. 진실을 가리기 위하여. 상자가 열리기까지 고양이는 삶과 죽음이란 두 세계의 중첩상태에 있다고 할 것인가, 아니면 살았던 죽었던 이미 결판난 상태에 있다고 할 것인가.     친구는 그 세상에서 살기로 결정하였다고 하였다. ㅡ 나 정말 못된 인간이야, 그치? 그렇게 되자고 한게 아니라, 살다보니 그렇게 되더라. 애한테 미안해서 어쩌지? 그녀는 아무 대답도 못하고 가만히 듣기만 하였다. ㅡ 근데 사람은 말야, 새끼도 품안에 있을 때 새끼지, 새끼 때문에 인생을 선택하지는 못하겠더라. 나만 이렇게 못된거니? 결정을 내린 친구의 목소리는 이제 혼란스럽지는 않았다. ㅡ 아냐, 사람이 다 그렇지 뭐, 그럴 수 있어. 그녀는 자기 스스로에게도 위안삼아 말해준다. 깜빡깜빡 아이가 있다는 사실도 잊어버리는 자신에게, 아이의 목소리도 낯설어지는 자신에게, 친구의 결정은 오히려 위안이 되려 한다. ㅡ 나, 열심히 살거다. 후회 않을 만큼 행복해질꺼다. 너 나 이혼녀라고 무시하면 안돼, 알았지? 친구의 목소리가 울음을 참느라 떨리고 있었다. 왈칵 눈물이 나올려 한다. ㅡ 기집애, 그게 친구 하는 거 하고 뭔 상관이래? 이왕 결정한 거, 그래, 인생에 무슨 놈의 답이 하나밖에 없겠니? 잘 살어, 나한테 너는 언제든지 너야.   전화를 끊고 그녀는 이마를 잠시 유리창에 갖다 대였다. 18층 빌딩의 복도 유리창이다. 주변의 단층건물들과 그 건물들사이에 난 길들, 그리고 군데군데 파란 숲들이 내려다 보인다. 빛이다. 미리 작정하고 날아온 것처럼, 새로운 아침의 빛 줄기들이 정확히 그녀의 머리 숨구멍 위에 내리 꽂힌다.  유리창에 언뜰 그녀의 모습이 희미하게 비친다. 사장이 사무실 문을 열어 보인다. 금방까지 뭔가를 보고 드리던 다른 부서 직원이 나가고 사장이 그녀를 향해 손짓을 한다. 그녀는 숨을 들이 마신다. 이제 그녀의 차례다. ㅡ이번엔 못갈 것 같아서요. 그녀는 어제 밤 거울 속의 여자를 떠올린다. 지금 그녀는 슈뢰딩거처럼 위험한 실험을 하고 있는 중이다. 아니, 누군가가 그녀를 거울과 함께 이미 상자속으로 집어 넣은 것이다. 사장이 묻는다. ㅡ 왜? 좋은 기횐데. 중첩된 상태였든 하나의 상태였든, 상자를 열면 결과는 보이는 것이다. 그녀는 이를 살짝 깨물었다. ㅡ 다음 주엔 남편이 휴가 나서 아이랑 온대네요. 몹시 화목한 가정이였다는 듯 그녀는 해맑은 웃음을 지어 보인다. ㅡ그래? 가족은 다음에 볼 수도 있겠지만, 이런 기회는 다시 오기 힘든데… 사장은 아쉽다는 듯 한 번 더 설득하다가 그녀의 말없는 미소를 보고 ㅡ글쎄, 가족이 더 중요하다면야. 설마 이다음에 뭐 다른 기회가 없을라고. 하면서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이제 한 세상이 선택되고 한 세상은 붕괴되는 건가. 그녀는 사장실을 나와서 자기의 사무실로 들어간다. 맞은 켠 책상의 여자가 커피 두 잔 뽑아놓고 그녀를 기다린다. ㅡ 언니, 엊저녁 전화 했었어? 나 그 후진 세집, 신호가 영 안 좋아서. 여자가 그녀를 보고 웃음을 짓는다. 인간다운, 자연스러운 웃음이다. 문득, 여태 여자에게 고향이 어딘지도 물어보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연락이 안되였던게 아닌가 싶다. ㅡ응, 별일은 아니고. 심심하면 놀러 오라고. 그녀는 여자에게 뭔가를 보여주고 싶다. 가방안을 뒤적거리며 핸드폰을 찾아내여 여자에게 바탕화면에 뜬 아들녀석의 얼굴을 넘겨준다. ㅡ 우리 아들이야. 다음 주에 아빠랑 놀러 온대. 여자는 어머 너무 귀엽다 하며 호들갑을 떨다가 언니, 나 얘 보러 언니네 가야겠네. 하고 덧붙인다. 그녀는 고마워 하고 나직이 속삭인다. X시가 드디여 그녀의 옛 세상과 진실하게 이어지는 것을 실감나게 느낀다. 평행우주 같은 게, 있다고 해도 상관없다. 나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이후에나 항상 나 일거니까. 하고 그녀는 생각한다.      ㅡ 이제 20분이면 도착한다. 하고 남편이 들뜬 목소리로 전화한다. 그녀는 걸레로 집안 구석구석을 훔치는 중이다. ㅡ 알았어. 있다가 출구에서 보자. 침대머리도 닦고, 테이블 위도 닦고, 컴퓨터 모니터와 자판도 닦는다. 청동색 엔틱 거울 테두리를 보고, 그녀는 테이블위로 올라가 무릎을 꿇고 앉아서 거기도 닦는다. 거울 속 그녀도 열심히 같이 닦고 있다. 언제 그녀와 달랐던가 싶게 꼭 같은 모습으로 꼭 같이 움직이고 있다.   청소를 마무리하고 나서 그녀는 서둘러 가방을 찾아 들고 방문을 나선다. 방문이 닫기려는 순간, 그녀는 본능적으로 얼굴을 돌려서 거울을 쳐다본다. 거울 속 그녀도 방문을 막 닫으려는 순간이다. 이제 이 문이 닫기면, 또 어떤 세상이 펼쳐질까.  그녀는 알 수 없다. 그녀가 살았던 세상이 진실한 건지, 지금 사는 세상이 진실한 건지, 아니면 거울 속 세상이 진실한 건지, 거울 밖 세상이 진실한 건지. 그날 밤 본 것들이 진실이였는지 마저 그녀는 알 수 없다. 진실을 알 수 있는 사람은 없는 것이다. 슈뢰딩거의 고양이처럼, 사람은 바로 그 진실속에 살기 때문에.  그리고 그런 건 중요하지도 않다. 중요한 건 고양이는 한 마리 뿐이였고, 순간순간 숨을 쉬고 있었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녀는 이제 슈뢰딩거의 상자속에서 기여 나와, 거울을 꺼냈다. 빛은 언제나 참, 따갑다.   (끝)                   2010.     9.      [ 2010년 5호]
3    제비야 제비야 (하) 댓글:  조회:1611  추천:0  2012-08-13
중편소설 제비야 제비야 김 금 희 4 할머니가 나의 친할머니가 아니라는것은 내가 한참 크고 나서야 알게 된 사실이였다. 생각해보면 참 웃기는 일이였다. 내가 그토록 든든해하고, 닮고싶어하고, 좋아했던 할머니가 워낙에 나와 피 한방울 섞이지 않은 남이였다니. 나에게 굳이 말해줄 필요를 느끼지 못해서였던지, 아니면 아직 때가 되지 않았다고 여겨서인지 사실을 알고 있는 할머니와 엄마와 삼촌고모들과 오빠, 어느 누구하나 나를 붙잡고 엄숙하게 얘기해주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큰 고모와 큰 삼촌이 내 동생들을 하나 둘 셋 낳아서 코흘리개들로 자래울때까지 나만의 착각속에서 아무 걱정없이 즐겁게 지낼수 있었다. 할머니란 단어는 내게 여전히 정겨운것이였고, 설날은 내게 여전히 1년중 가장 신이 나는 대목이였었다. 내가 지금 기억하고 있는 할머니네 설은 대체로 이러하였다. 삼촌들은 동네 아무개네 집의 돼지나 소를 잡는데 쏘다녔고, 오빠와 막내삼촌은 까투리나 참새들을 곧잘 잡아왔었다. 코흘리개 동생들이 볼을 빨갛게 얼리우며 바깥에서 폭죽을 터뜨리면서 놀때에 나는 고모들과 마실 온 동네 아낙들이랑 따끈한 구들위에 앉아서 송편이나 만두나 떠오뽀우 같은 떡을 빚었다. 할머니네 동네는 크지는 않았지만 여느 잡거지구의 조선동네처럼 평안도,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등 여러 출신이 함께 섞여 살고 있었으므로 집집마다 음식솜씨가 조금씩 달라있는것이 오히려 당연하였다. 그중에서 할머니네는 주로 경상도와 강원도의 조리법을 대충 절충해서 음식을 만들군 하였으며 한족동네들 틈바구니에 살아가는 세월이 길어지면서는 그네들의 생활풍습이나 조리법 같은것도 터득하여 함께 적용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어떤 집에서는 송편을 빚어서 찌기도 하지만 할머니네의 송편은 먼저 쌀가루를 쪄내여 익반죽을 한 다음에 빚어내군 하였다. 고모들은 양철고뿌들을 가지고 와서 얇게 밀어진 떡반죽위에 팥소를 놓고 다시 한번 반죽을 끄당겨 소를 덮은 뒤에 고뿌언저리로 반달모양이 되게 꾹 찍어내군 하였다. 그렇게 찍어내고 남은 사이사이 삼각무늬의 뜨거운 떡반죽을 그대로 뜯어서 훌훌 거리며 입에 넣고 씹어 넘기는 맛이란 또한 뜨끈뜨끈 쫀득쫀득 별미였었다. 절편무늬를 내는 판이 없어서 할머니네는 소주잔으로 꽃모양을 찍어주군 하였다. 반죽을 길고 좁게 밀어준후에 일정한 간격으로 소주잔을 엎어서 동그랗게 원을 찍고 , 바로 돌려와 밑둥으로 그 원안에 꽃을 찍어주었다. 마침 그것은 오각의 별처럼 예쁘게 보였었다. 한 동네에 시집을 간 큰 고모는 만두피를 잘 밀군 하였다. 식구들이 많아서 항상 만두를 몇백개씩 빚어야 했는데 만두만큼은 여자들뿐이 아니라 남자들인 삼촌들까지 모여앉아 빚어주군 하였다. 개중에서 만두피를 미는 일은 할머니가 아니라 한족여자들처럼 한꺼번에 두세개씩 쥐고 미는 큰 고모가 맡았었다. 그러나 큰 고모마저 지금까지도 온전히 배워내지 못한것이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할머니의 입쌀순대였다. 그믐날 저녁 온 식구랑 같이 먹고 마시고 춘절만회를 구경하면서 늦게까지 지새우다가 아침일찍 일어나기란 사실 그리 쉽지 않은 일이였다. 그럼에도 내가 알고 있는 한 할머니의 입쌀순대는 언제나 설날 아침 새벽에 만들어졌었다. 하얀 성에꽃이 두껍게 피여있는 창문바깥은 아직 컴컴하였고, 댈그덕 거리는 소리에 어느 삼촌의 커다란 신을 꿰신고 부엌에 나가보면 바로 할머니가 둘째나 셋째 고모와 같이 순대를 하고 있는 모습을 볼수 있었다. 커다란 대야에, 불린 입쌀이며 탕을 친 야채며 돼지피같은 양념들을 함께 버무려 소를 만들어 담고 그 앞에 앉아, 길고 긴 돼지창자에 쇠줄을 끼워서 아구리를 동그라니 벌려 숟가락으로 소를 바지런히 퍼넣고 있는 것이었다. 그 많은 식구들이 매일 먹을수 있는 여러가지 풍성한 먹거리들은 결코 그냥 하늘에서 떨어지는게 아니였다. 내 기억속의 할머니네 다섯개의 조선가마와 서쪽 방 부엌에 걸린 하나의 커다란 한족가마는 늘쌍 바지런히 움직이는 할머니와 같이, 항시 무엇인가를 바글거리며 끓여내고 있었던것 같았다. 풍성한 설날 아침상을 내오기전에 할머니는 해마다 빼먹지 않고 할아버지 상을 먼저 따로 차려내군 했었다. 법대로 다 할수는 없지만 항상 성의를 다하여 갖출수 있는 모든것들을 깔끔히 갖추어 내놓은 할아버지 상에는 늘 밥을 두둑이 퍼담은 공기에 놋쇠 숟가락이 곧게 꼳혀있었다. 삼촌들이 술을 붓고 절을 한 뒤는 오빠차례였으며 나와 동생들은 절대신 경례를 했던것 같았다. 평소 그렇게 자유스러운 할머니였지만 할아버지 상앞에서만큼은 우리들이 하는 매 동작 하나하나를 하나도 놓치지 않고 유심히 살펴보군 하였다. 특히나 막내 삼촌과 오빠의 차례에 다가와서는 숨소리마저 죽이고 긴장하며 서있었다. 그때 할머니는 혹시 제비 두마리를 떠올리지 않았을까. 녕감, 이 아이들을 굽어살펴주소. 신통허니 넝감을 닮아가는 막내아들이유. 서나답게 생겨묵었으이 앞날로 어쨌거나 잘 풀리게 지캐주소. 그라고, 벼락도 몬친다는 7대 장손이요. 얼매나 귀하게 생기고 얼매나 바르게 자랐는지 좀 보소. 공부를 고라고 잘 헌다니 영낙없이 출세할 감이잖우. 그렇게 할아버지와 얘기를 나누지 않았을까. 할머니를 모시고 우리들의 세배도 끝난후에 아침상까지 물리고 나면 한참나절이 지나군 하였는데 그 다음부터는 다시 동네 장정들과 청년남자들의 세배인사가 시작되군 하였다. 고모들과 나는 그날 종일 집밖을 나가지 못했지만 삼촌들과 오빠는 나가서 동네 가장 연로하신 어른들 집부터 시작하여 돌아다니며 세배를 드리군 하였다. 언제 되돌이켜보아도 그런 장면들은 항상 흐뭇한것이였다. 온 동네가 한 집안이 된것처럼 서로의 아들이 서로의 부모에게 인사하고 서로의 부모가 서로의 아들에게 덕담을 해주는것을 극히 자연시하고 당연시하던 날들이였다. 그래서 할머니와 엄마, 그리고 고모나 삼촌들까지 내게 굳이 그 얘기를 해주지 않았는 모양이였다. 할머니가 나의 친할머니가 아니라는 사실이 그런 분위기의 민족과 집안에게 있어서, 내가 생각하는것 만큼이나 중요한것은 아니였기때문이였다. ㅡ친할머니지, 왜 아니야? 친할아버지의 할머니니까. 그것이 그들 모두의 이유였다. 얼떨결에 알아버린 할머니의 신상은 나를 잠시동안 혼란에 빠트리였다. 나는 곰곰히 앉아서 내가 혼란에 빠진 이유를 생각해보았다. 아무래도 큰 삼촌과 큰 고모가 낳은 그 동생들이 원인인것 같았다. 나보다 한참 어린 그 애들을 보고도 할머니는 “내 새끼”라고 불러주었는데 나는 그 호칭이 나를 불러주던 그 “내 새끼”하고는 절대 같지 않을것이라고 단정지었었다. 나를 “내 새끼”하고 불러 줄때에는 고작해서 품에 그러안고 뒤잔등을 썩썩 문질러주었을 뿐이였는데 그 애들을 “내 새끼”불러 줄때에는 번쩍 안아들고 볼을 비비거나 입을 맞추어주기도 하였으니까. 그것때문에 나는 한동안 꽤 울적해했었다. ㅡ얘, 너는 이제 명후년이면 중학생이다. 걔들은 아직 어리잖니? 하고 엄마가 나를 달랬었다. ㅡ아니야, 어쨌든 친손녀가 아니니까 다른거야. 친할아버지도 없고, 아버지도 없잖아. 여전히 나를 “우리 김씨네 장손녀”라고 만나는 사람들마다에게 알리고있었고, 여전히 나를 “어이구 내 새끼”라고 불러주었지만 나는 그때부터 할머니의 진심을 의심하기 시작하였다. 아직 할머니네 사정을 잘 알지 못하는 다른 동네사람들이 “장손녀”인 나와 큰 삼촌의 딸레미를 번갈아 볼때면 할머니는 이렇게 덧붙이군 하였다. ㅡ이잉, 우리 녕감 큰 아들 국주네 딸이여. 그려, 일찌기 없어지고 아들 딸 하나씩 남겼제. 그 전에도 이렇게 설명을 덧붙였던지, 내가 어려서 기억을 못했던것 뿐인지 알수가 없었지만 그즈음의 나는 할머니의 억양에서 미묘한 변화를 애써 찾아내군 하였다. 왜 우리 녕감 큰 아들이라고 할까? 그리고 뒤끝에 ㅡ불쌍한거 하는 말은 왜 붙일까? 그래서 나는 동생들과 같이 서서 누룽지를 받아 먹을때 할머니가 크게 뜯어주어도 의심하였고, 작게 뜯어주어도 새침해하였다. 마실 온 동네사람들앞에서 자식자랑을 늘여놓을때 나는 살그머니 곁에 앉아서 막내 삼촌과 오빠 둘 사이에서 할머니가 누구를 더 많이 거론하던가 하는것을 따져보기도 하였다. 그 다음해의 겨울에 나는 처음으로 할머니네로 가기를 거부하였다. ㅡ왜? 할머니 기다리시는데… 아직 장가를 가지 않은 둘째 삼촌이 나를 데리러 들렀으나 나는 머리를 잘래잘래 흔들었다. ㅡ오빠랑 가세요. 이번 설에는 엄마랑 같이 쉴거예요. 거기는 사람들이 많잖아요. 나와 같은 이유에서였는지 모를 일이지만 엄마는 항상 이런저런 핑게를 대고 우리들만 할머니네로 보내고 늘 혼자 남아 설을 쇠군 하였었다. ㅡ여자는 시집에 가서 설을 쇠야지만, 이해해주세요, 어머이. 애들은 보낼께요. 그것은 아마도 엄마와 할머니사이에 도무지 넘을수 없는 마지막 장벽이였나 보았다. 피줄의식이 거의 사라져가는 시대에 남자들마저 자리에 없는 상황에서, 남편의 친어머니도 아닌 여자에게 설을 쇠러 간다는것은 엄마가 기어이 받아들이지 못하는 주책이였던 모양이다. 오빠도 어느핸가는 엄마곁에 남아 설을 쇤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 해 한번뿐이 였을뿐 그 다음해에는 다시 할머니네로 갔었다. 오빠는 언제나 나보다 철이 든 아이였었다. 나는 그 해 이후로 연속 몇해동안,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 졸업을 앞두기까지 다시 할머니네로 설을 쇠러 가지 않았었다. 사춘기의 반항심리도 한몫 하였던것 같았다. 그러나 그때 할머니와 삼촌들과 고모들은 어느 누구 하나 나의 반항을 근거있게 나무라지 못하였다. 땅을 나누고, 시집장가들을 가고, 또 무언가들을 갈라가면서 사람들의 마음도 마침내 나뉘기 시작했던것일까. 예전에 동네총각이랑 눈이 맞아 도망가다가 머리채를 잡힌 고모의 종아리를 후려치던것처럼 할머니는 왜 내 뒤잔등을 털썩 후려치지 못했을까. ㅡ 이 문디 가시내, 누구를 닮아서 못되먹은 속아지야, … 하고 왜 야단 한번 시원히 치지를 못했을까. 몇년동안 들어보지 못한 할머니의 욕설이 그리워서 설날 즈음이면 나는 몰래 슬퍼했다. 그런 나의 유치한 슬픔을 누가 알수 있을까. 오빠라면 알수 있을것 같기도 하였다. 벌써 어엿한 대학생이 되였던 오빠, 항상 나보다 철이 먼저 들어있던 오빠는 내 슬픔을 다 알수 있을것 같았다. ㅡ대단한 사람이야, 할머니는. 그게 오빠가 계속 할머니네로 다녔던 이유였다. ㅡ강하고, 바른 여자지. 이것은 엄마의 이유였다. 그 시절의 나는 그 말의 뜻을 다 이해할수 없었다. 나는 그저, 막연히 오빠와 엄마의 판단이 옳을거라고 인정하였다. 친손녀가 아니였는데도 나를 “내 새끼야”하고 불러주었다는것 만으로도 할머니는 “대단한 사람”이였을거라고 나는 생각하였다. 그렇게 불러주던 마음이 도대체 얼마나 진심이였을까 하는것을 어떻게 따질수가 있겠는가. 내가 들어온 어떤 부름보다도 듣기에 좋았다는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한게 아니였던가. 나는 나 자신을 그리 설득하였다. 다시금 버스를 타고, 한 동네서 사는 큰 고모부의 오토바이뒤에 앉아서, 나는 할머니네로 가 설날아침에 올망졸망 더 많이 늘어난 동생들과 같이 공손히 세배를 드렸다. 동생들보다 머리가 더 크다는 이유로, 할머니의 말을 빌자면 “장손녀”란 이유로 내가 받은 세배돈은 그애들보다 더 많았다. 언니야 보고싶었다. 하면서 찰싹찰싹 달라붙는 여동생들과 처음 보는 나에게 누나 누나 애교를 떠는 남동생들을 보며 나는 이상야릇한 책임감도 희미하게나마 잠시 느꼈던것 같았다. 그애들은 하나같이 생기있고 활발하고 건강하고 대수롭게 자라가고 있는듯 하였지만 사실 그들중 어떤 애는 부모가 벌써 이혼하였고, 어떤 애는 매일같은 전쟁가운데서 살아가고 있었으며, 어떤 애는 술주정뱅이 아버지를 잃어버렸었다. 엄마와 오빠도 인정한 할머니의 다른 한 대단함은 바로, 얼마나 복잡하고 얼마나 어려운 생활배경속의 아이들이라도 하나같이 구김살 없이 밝고 명랑하게 키워낼수 있다는, 그것이였다. 5 할머니에게도 왜 욕심이 없었을까. 건강하고 밝은 아이들을 키우는것 외에 다른 어떤 더 많은 무엇을 이룰수 있는 아이 하나쯤 키워내는것, 그런 바램이 왜 없었을까. 한 동네 평범한 청년한테 시집을 갔거나, 이웃동네 싸움대장과 눈이 맞아 도망을 갔거나, 기껏해서 읍내 말단 공무원과 식을 올린 고모들은 제쳐놓고, 그렇다 할 일자리가 없어 마작으로 소일하는 둘째와 자그만 구멍가게로 근근히 살아가는 첫째 아들을 보면서 할머니도 이웃들과 비교란것을 하지 않았을까. 할머니의 마지막카드는 막내 삼촌이였다. 오빠와 같은 중학교를 다니다가 도중에 학교를 그만 둔 막내 삼촌 명이는 할머니가 길러낸 자식들중에서 학교를 가장 오래 다닌 아들이였다. 어려서부터 명이는 동네애들의 용감하고 의리있고 지혜로운 대장이였다. 명이는 동네 애들을 지휘하여 아무개네 집 뒤뜨락의 오이를 감쪽같이 서리하였으며 도랑에 나가 붕어새끼와 미꾸라지들을 한 대야씩 잡아 오기도 하였고 더 자란 후에는 다른 동네 소년들과의 축구시합을 지휘하거나 심지어는 패거리싸움을 주도하기도 하였다. 한 반에 다니는, 이웃동네에 살고 있던 모 여학생을 희롱했다는 이유로 중학생인 명이가 불량뱅이 몇명이랑 싸움을 벌였는데 그 중 약하고 겁많은 불량뱅이 하나의 귀가 찢어지는 바람에 명이는 그만 학교생활을 접게 되였다. 천성적으로 뛰여난 눈썰미와 물불 가리지 않는 대담한 실험정신이 군인으로서 여장까지 지냈던 할아버지를 연상케 하였었다. 검실검실한 피부에 튼튼한 근육, 번뜩이는 눈매와 끝매가 올라간 숱진 눈섭, 나는 엄마보다 할머니를 더 좋아하듯 오빠보다 명이를 더 좋아할때가 많았다. 명이에게는 청고한 선비같은 오빠에게서 도무지 느낄수 없는 어떤 통솔자의 강하고 호방한 분위기같은것이 있어서 주위 사람들을 매혹시켰었다. 항상 일을 찾아서 움직이는 할머니를 닮아서 명이도 새벽같이 일어나 늘 바지런을 떨었었다. 학교를 나오고 철이 들어가면서부터는 집안의 고장난 기계를 수리하거나, 성능이 더 뛰여난 충전기를 만들어내거나, 손잡이 트럭트를 운전하고 밭에 나가 일을 돕는다거나 하면서 하루하루를 충실히 보냈었다. 바라던것 이상으로 그는 동네사람들의 신임을 얻었으며 인근의 한족동네들에서까지 탐내는 젊은 기술일군이 되였다고 하였다. 누구네집 텔레비와 누구네집 탈곡기와 누구네집 트럭트를 수리해주거나, 명실공한 전공의 수입까지 합쳐서 명이의 수입은 동네 어느 청년치고 더 짭짤했던 모양이였다. 도시의 대문들이 농촌청년들을 향해 열리는 시대를 맞아서 막내 삼촌 명이는 첫 사람으로 동네를 떠났고 떠난지 얼마 되지 않는 시간에 동네사람 모두가 생각지도 못했던 돈을 벌어 보내왔다. 그것은 할머니를 참으로 득의하게 만드는 일이였다. 우리 막내 고것은… 하고 시작되는 할머니의 자랑은 그렇게도 자신있고 흐뭇한것이였다. 아직 시작다운 시작을 하지도 않은 마당에 할머니는 벌써 명이가 이미 금의환향이나 한것처럼 매듭지어 얘기하였다. ㅡ머리를 했던 놈은 결국 어데로 가든지 머리만 하는기라. 명이보다 공부도 더 많이 했고 시내에 힘있는 친척들도 있다는 아래 집 아줌마가 아들자랑을 꺼낼라치면 할머니는 곧 왕년의 암펌기세를 부리면서 무자비하게 눌러놓군 하였다. 오직 할머니는 오빠가 있는 자리를 꺼려했는데 하늘 높은줄 모르고 침을 튕겨가며 자랑을 늘어놓다가도 오빠가 들어서는것을 보면 흐릿하게 말끝을 거두어버리군 하였다. 멀끔하고 총기있는 대학생을 대하는 자비감이였을까, 아니면 마지막 남은 한 어미의 자존심이였을까. 나는 그것이 그때 즈음 온 동네에, 온 도시에 퍼진 “비교의식”때문이 아니였을까 생각하군 한다. 비교를 하는 가운데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너”와 “나”로 나뉘여졌고 그렇게 갈린한 누가누가 더 나을까? 에 대한 답안을 집요하게 추궁하기 시작했다. 대학졸업이 하루하루 다가오는 오빠를 볼때마다 그런 분위기속의 할머니는 제비 두 마리 생각이 나지 않았을까. 한 놈은 둥지에 앉았고, 한 놈만이 훨훨 날아갔다는 그 태몽이 말이다. 왜 할머니의 태몽에 대한 신념이 그리 확고했는지 모를 일이였다. 누가 법으로 정해놓기라도 했단 말인가? 둥지에 앉은 제비는 평범한 인생을 뜻하고 훨훨 밖으로 날아간 제비는 출세한 인생의 징조라는것을 말이다. 은연중에 그것을 믿기는 엄마도 매한가지였다. 할머니의 태몽을 듣는 순간부터, 할머니가 아직 그 제비가 오빠일거라고 덧붙이기도전에 엄마는 벌써 스스로 오빠의 출세를 철석같이 믿었었다. 양친에게서“우수한 유전자”를 가지고 태여난(엄마의 착각일수도 있지만) 오빠는 과연 세살에 수자를 백까지 달달 외울수 있었으며, 다섯살에 20이내의 더하기 빼기셈을 할수 있었다. 수자뿐만 아니라 글자를 기억하는 능력도 비상하여서 달리 가르친적이 없는데도 숙제장을 검사하는 엄마의 어깨너머로 많은 한자를 깨우쳤다고 하였다. 오빠의 천재성은 결코 엄마가 날조한것이 아니였다. 초등학교, 중학교, 그리고 고등학교를 거치면서 단연 앞자리만을 차지했던 오빠의 성적표가 그 유력한 증거물이 되였다. 오빠는 그가 다녔던 학교들의 살아있는 전설로 남았었다. ㅡ교과서를 통째로 달달 외울수 있었대. 또는 ㅡ선생님이 대답하지 못한 문제를 풀었다나. 이러루한 부러움의 찬사들은 4년이 지나 그 학교 그 학년에서 공부하는 내 귀에까지 흘러들어왔었다. 자신의 바램을 무너뜨리지 않고 중점대학교까지 성내 1등의 성적으로 가준 오빠가 엄마는 얼마나 대견스러웠을까. 엄마는 늘 그녀답게 겸손한 어투로 오빠를 자랑하였었다. ㅡ 뭐 성적이야 나와 봐야 알지요. 애가 워낙 덜렁거려서… 하고 엄마는 오빠보다 성적이 많이 못한 애들의 부모에게 말해주군 하였다. 둘째 삼촌의 결혼식에서 만난 할머니에게서 명이에 대한 자부심을 전해 들었을때, 엄마는 안됐다는듯이 머리를 저으며 ㅡ글쎄, 그 좋은 재주에 공부만 좀더 했더라면… 하고 쯧쯧 혀를 차주었다. 엄마는 아마 정말로 안타까워서 그렇게 말했을지 모르겠으나 나는 그순간 갑자기 불편하게 굳어진 할머니의 얼굴근육을 볼수가 있었다. 할머니는 동네 다른 어른들에게 하던것처럼 허세를 부리며 당장에 반박을 하지 않고, 말없이 김치를 집어 써걱써걱 잡수셨다. 나는 그때 그 순간의 엄마가 별로 존경스럽지 않았다. 엄마의 몸에는 타고난 교만같은것이 항상 배여있었는데, 나는 그런 근거없는 자신감이 도대체 어디로부터 왔는건지 알수가 없었다. “우수한 유전자”? “양호한 교육배경”? 그런것은 과연 얼마나 근거 있는것일까? 엄마는 자신이 생각하기에 타고난 좋은 것과, 노력해서 이룬 좋은 것을 가지고 늘 주위사람들을 내려다보군 하였다. 자신의 그런것들보다 못하다고 해서 꼭 기시하고 조롱하는것은 아니였다. 더 많이는 가여워하고 동정하였다. 그러나 바로 그런 기울어진 동정이 은연중에 항상 존재하던 자신의 교만을 나타내고, 다른 사람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존중을 막아버린다는것을 그녀는 알지 못하였다. 바로 그런것으로 부터 시작된것 같았다. 오늘에 와서 이렇게 버성겨지고, 이렇게 서로에게 상처를 입히게 된 우리가 된 원인이 말이다. 6 ㅡ친척은 무슨, 사기꾼도 그런 사기꾼이 어디 있어요? 오빠와 결혼한지 3,4년 되는 새 언니가 분개했었다. ㅡ 뭐 형님같았고 친구같았던 삼촌이라고요? 헛, 세상에 가장 기본적인 인간도 못되는 사람이예요. 새 언니는 필경 남이였다. 다른 세상에서 살다가 오빠에게로 시집와 같이 살게 된 새 언니는, 그 전의 오빠와 막내 삼촌 명이의 관계를 다 알수 없었다. 한 해에, 한 달에 태여나 쌍둥이처럼 자란 오빠와 명이삼촌, 그들지간에는 다른 삼촌고모들과 있을수 없는 어떤 동지애가 있었었다. 오빠보다 겨우 열흘 앞서 태여난 명이는 그 강한 성격에 누가 봐도 탄복하리만치 유별나게 오빠를 위해주군 하였다. 할머니동네 애들과의 군사놀이에서 명이의 빽으로 오빠는 그나마 졸개를 면하고 무슨 장 하나를 차지할수 있었으며 같은 중학교 한 반을 다닐때에는 여러번의 패거리싸움에서 오빠를 구해주었었다. 오빠는 명이를 대놓고 “삼촌”이라고 부르지는 않았지만 철이 들면서부터는 사람들앞에서 항상 “명이삼촌”이라고 호칭했었다. 나름대로 오빠는 명이에 대한 의리를 지켜주었는데, 예하면 이웃동네 아무개와 “혈전”을 하러 간 명이의 행방을 절대 할머니한테 고해바치지 않는가 하면 학교 지도부의 “담배피운 애들의 명단”같은데에 절대로 명이의 이름을 적어넣지 않는것이였다. 그것은 다른 애들한테는 크게 의리시되지 않을수도 있지만 성실을 목숨같이 여기는 오빠에게는 대단한 희생이였었다. ㅡ그런 시시컬컬한 옛날얘기를 해서는 뭐해게요? 이제 너도나도 다 변한 세상에. 새 언니는 오빠와 내게서 그런 얘기를 다시 듣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녀는 명이가 사기쳐서 가져갔다고 생각하는 오빠의 돈만 생각하고 있었다. 한동안 나도 분을 참을수가 없었다. 둘사이에 어떻게 구두계약을 하고 어떻게 자금조달을 했는지 목격하지 못하여서 구체세절은 알수가 없었으나 암튼 시종일관 성실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오빠에게 결코 하자가 있을수 없다고 판단하여서였다. 20만원, 그것이 적은 액수의 돈이란 말인가. 물론 그것은 상대적인 수자로서 백만장자의 눈에는 형제간의 의리까지 상하게 할 금액은 아닐수 있었다. 그러나, 오빠같이 횡재의 기회가 전혀 없는, 가장 성실한 노력으로 더디게 치부할수 밖에 없는, 한 기업의 월급쟁이한테 그만한 금액은 다시 모으기에 너무 힘이 드는 수자였다. 게다가 그것의 일부는 현금이 아니라 동료와 친구들한테서 빌린 빚이였다고 생각해보라. 그런 사람의 아내로서 새 언니의 속은 얼마나 까맣게 그을렸겠는지. ㅡ어머니, 저 그 사람 용서 못해요. 아니, 안해요. 현이아빠는 마음이 너무 약해서 참고있겠지만, 전요, 언제든지 그 사람 찾아가서 다 받아낼거예요! 새 언니는 이제 막 뛰여다니기 시작한 조카애를 둘쳐업고 엄마의 집에 찾아와 눈물코물 범벅이 되여 하소연했었다. ㅡ어머니, 우리 현이아빠가 어떻게 모으고 어떻게 빌린 돈인지 다 알잖아요. 우리가 지금 어떻게 살고있는지도 다 알잖아요. 근데 어떻게 우리한테 그럴수가 있어요? 그것도 무슨 삼촌이란 사람이? 나 정말 억이 막혀서… 엄마는 며느리의 하소연을 들을때마다 눈을 내리깔고 탁자위에 놓인 물컵을 바라보며 후우ㅡ 한숨을 내쉬기만 하였다. 퇴직하고 집에 있은지 얼마 되지 않은 사이에 엄마는 폭삭 늙어버렸었다. 새 언니는 말이 좀 많은게 탈이였지만 남편한테는 무척이나 잘 하는 여자였었다. ㄱ시의 유명한 초등학교에서 음악선생을 하고 있는 그녀는 업외시간에 주위 아파트의 아이들에게서 피아노레슨비를 벌어 생활비에 보태군 하였다. 천재성만 있었지 현실성이 약한 오빠와 달리 그녀는 무척 현실적인 여자였었다. 오빠의 령도나 동료들과의 관계를 매끄럽게 처리해주는것도 그녀의 한낱 재주였었다. 오빠의 승진은 본인의 능력과 절대 무관하지 않았으나 그렇다고 새 언니의 직접적인, 간접적인 참모나 도움과도 절대 무관하다고 할수는 없었다. 그렇게 오빠는 대학졸업 10년만에 겨우 제1자동차공장의 부문 경리로 아득아득 승진을 하게 된것이였다. 새 언니를 만나 결혼하고 애를 낳으며 살아가는 동안, 엄마에게서 물려 받을것이 없는 오빠는 모든것을 스스로 해결했어야 했는데, 그 중에서 가장 어려웠던것이 아파트를 사는 일이였을것이다. 눈앞에서 날아간 아파트가 생각키울때면 새 언니는 ㅡ요즘 세상에 나같은 바보가 어디 있겠어요? 아파트 하나 갖추지 못한 사람한테 덜렁 시집부터 온 여자가. 하고 심사가 바줄처럼 꼬인 말을 내뱉군 하였다. 새 언니같이 바보스런 여자는 사실 많은 남자들에게 필요한것이였다. 이런 희생적인 정신을 갖추지 못한, 너무 지혜로운 여자들뿐이라면 과연 적당한 나이에 결혼을 할수 있는 남자가 얼마나 될까. 하긴, 그 희생정신의 대가로 새 언니는 오빠의 “아파트 구입금 모으기”작전에 몸소 참가해야만 했었다. 50여평 남짓한 낡은 단칸 아파트에 세들어 살면서, 지출을 최대한 줄이고, 두 사람의 봉급을 차곡차곡 모았지만 아무래도 그리 순조롭지만은 않았던것이다. 당장에 먹고 쓰고 할 돈은 걱정없었지만 몇십만원짜리 아파트를 사는 일에는 한참이나 무리였었다. ㅡ에이, 지금 세상에 꼬박꼬박 봉급을 타가지고야 어디 언제 집을 사겄나? 바로 그 시점에서 오래동안 서로 연락을 하지 못하고 지내온 막내 삼촌 명이가 그들앞에 불쑥 나타난것이였다. 오빠네 낡은 아파트단지의 좁고 더러운 길곁에, 윤기 알른거리는 까만색 벤츠를 주차하고 차문을 열고나서 명이는 흔히들 말하는 “사장님”의 행색으로 내려섰다고 하였다. 이마가 벌써 벗어지기 시작한, 온통 번쩍거리는 명품들로 두둑하게 아래배가 나온 몸을 휘감은 명이를, 오빠는 금방에 알아보지 못하였었다. 대학을 나오고 일을 하면서 첫 몇해는 꼬박꼬박 할머니네로 설을 쇠러 갔지만 그 후에는 그렇게 하지 못하여서 오빠는 명이를 몇해동안 만나보지 못하였었다. 나도 예전처럼 할머니네로 다니지 못하였다. 내가 금방 대학을 나오고 연해도시의 한 기업에 취직했을 즈음에는 한창 출국붐이 고조를 이룰 때였었다. 여느 조선족가정들처럼 할머니네도 줄줄이 출국을 했는데 몇년동안 온 가족이 통째로 옮기다 싶이 했었다. 게다가 할머니의 국적도 회복이 되여서 몇년뒤에 만난 할머니는 명실공히 외국사람이 되여 있었던 것이다. 내가 할머니네로 찾아갔던 그 해 설에는 마침 할머니와 고모 둘이 들어와있어서 나는 오랜만에 그들을 어렵사리 만날수가 있었었다. 내가 기억하고 있던 나즈막한 초가집과 벼짚이 무더기로 쌓여있던 마당과 허줄한 싸리나무대문은 이미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막내 삼촌 명이의 후원으로 지었다는 높고 큰 기와집이 나를 내려다보며 기다리고 있었다. 온 동네에서 유일하게(처음이였으니까) 기름 보일러를 시공한 집이라고 하였다. 외국에서 몇년동안 살아온 사람들답게 삼촌들과 고모들과 할머니의 품위가 높아졌는 모양이였다. 세개나 되는 아궁이에 번갈아 불을 넣으며 우글거리는 식구들의 때시걱을 해야 했던 할머니네는 보일러와 씽크대 덕분에 전에 없이 깨끗하고 조용해졌다. 할머니네도 이렇게 깨끗하고 조용할수 있다는 사실이 나는 믿기지가 않았다. 그렇다고, 깨끗하고 조용하기때문에 그것이 할머니네 집이 아니라고 할수도 없지 않는가. 나는 내 봉급으로 사가지고 간 할머니의 스웨터 한벌을 가방에서 꺼내놓았었다. 내 기억속에서 항상 검은색 방한용 조끼만을 입고 계시던 할머니가 생각키워서 딴엔 백화점에 가 반나절을 돌아다니며 고른것이였다. ㅡ이잉, 그려, 고맙데이. 이 늙은거 잊지도 아니허고. 우리 장손녀, 철이 다 들었네이. 할머니는 스웨터를 손에 들고 두어번 만져보고는 뒤자리에 놓으셨다. ㅡ엄마, 장손녀 장손녀 하면서 그렇게 귀해 하더니만, 헛짓을 한건 아니였네. 고모들이 나를 보며 웃어주었다. 나는 한국식퍼머를 한 고모들의 밝은 색 티셔츠를 보면서 혹시 내가 고른 스웨터가 촌스럽지는 않았을까 걱정하였다. 우리가 그렇게 앉아 있을때에 바깥에서 욱적대는 소리가 들리더니 낯선 아이들 몇이 우르르 들어오고 있었다. ㅡ 엄마엄마, 누구야? 하고 나를 가리키며 막내고모에게 묻던 여자아이는 신통히도 그녀를 닮아있었다. ㅡ응, 언니지, 큰 언니. 내가 처음 보거나 그간 훌쩍 커버려 몰라 보게 된 내 동생들이였다. ㅡ큰 언니는 매화언니잖어. 하고 그 중의 한 아이가 의문을 제기하였다. 큰 삼촌네 큰 딸레미를 이르는 말이였다. 그러니까, 하면서 나는 할머니를 피끗 바라보았었다. 항상 이런 질문을 들을때면 나서서 교통정리를 해주던 할머니, 나는 어느새 습관적으로 할머니의 대답을 기다리게 된것이다. ㅡ매화언니는 매화언니고, 이 언니가 젤로 큰 언니여. 첨 봤제? 니들은? 하고 할머니가 늘 그랬던것처럼 몸소 답변을 맡았었다. ㅡ아~ 하고 한 애는 머리를 끄덕이며 놀러 나갔고, 다른 한 애는 ㅡ그럼 어느 큰아버지네 딸이야? 매화언니네 아버지가 젤로 큰 큰아버지라고 했잖어. 하고 한 질문 더 보태였다. 나는 그 어린것의 고집스럽게 찌프려진 양미간을 들여다보았다. 이 아이는 왜 이런것에 흥미를 가질까. 정말이지 나는 이제 더이상 이런 질문과, 이런 질문에 관한 할머니의 답변을 듣고싶지 않았다. 어떤 대답을 얻어 듣던지 나는 그만 지칠것 같았다. ㅡ이잉, 다른 한 큰아버지가 있었어. 지금 돌아가셨지만. 그 집의 큰언니여. 할머니도 많이 피곤한것 같았다. 나를 설명하는 일을 반평생이나 해오셨던 할머니도 이젠 쉬고 싶어하는것 같았다. 그때 막내 삼촌 명이에게서 전화가 왔던것이였다. ㅡ 잉… 잉…그려… 몰러, 엊다 썼는제, 암튼 다 썼어. 글씨, 보일러기름만 혀두 한달에 만원이여… 알아서 보내. 누나들이야 용돈벢에 더 주갔나? … 이잉, 그려… 명이한테 후원을 요청하는듯한 할머니의 목소리는 언제 피곤했냐 싶게 우렁차게 들려왔다. 나는 그때 명이삼촌의 상황을 대충 전해 들을수 있었다. 도시로 나가 옷공장, 식당, 공사판등을 전전긍긍하며 막벌이를 하던 명이는 출국대열에 섞이여 바다에서 고기도 잡고, 육지에서 샷시도 짜보았다고 하였다. 그러나 “어데서든지 머리를 할 감”인 명이는 그런 막노동을 하는데 그리 오랜 시간을 투자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모모 외국“사장님”들과 함께 돌아와 이런저런 사업들을 벌리기도 하고, 혼자 국경선내외를 들낙거리며 이런저런 장사도 하다가, 그즈음에는 한창 위성안테나 사업을 크게 벌리고 있는 중이라고 하였다. 마침 뜨거운 출국붐으로 하여 외국 방송에 대한 수요가 급증하던 시기라 명이의 사업은 예상했던것보다도 겉잡을수 없이 잘 돼갔다고 하였다. 명이는 짧은 시간동안 많은 돈을 벌어들였는데 가장 신형의 벤츠는 물론, 그 시내 중심지역에만 해도 세채의 아파트를 갖고 있었다고 하였다. 명이는 벌어들인 돈 그 일부의 일부를 떼여서 할머니네 초가집을 밀어버리고 웬만한 소도시의 아파트값에 맞먹는 지금의 기와집을 지었으며, 뿐만아니라 여기저기 움푹움푹 패여서 운전하기 힘든 동네의 길도 수리하였다고 하였다. 이제 김명이란 이름은 할머니네 동네, 지어는 그 동네가 속한 전 진의 자랑이자 표지가 되였다고 하였다. ㅡ그려, 느이 오빠는 잘 있제? 명이에 대한 자랑을 가까스로 멈추고서 할머니가 내게 당신의 “장손”을 물었었다. 명이의 화려한 경력을 듣고나서 나는 갑자기 말문이 막히였다. 아니, 말을 하고싶다는 의욕을 상실했던것 같았다. 비좁고 어두운 단칸방 세집의 기름때 찌든 씽크대앞에서 면을 삶아내던 새 언니의 땀에 절은 뒤잔등과, 그날 밤 현관문앞의 빈 공간에다 일인용 간이접이식 침대를 펴고 쪼그리며 자던 오빠의 구푸린 허리가 떠올라서 나는 한두마디로 얼버무렸던것 같았다. ㅡ예, 뭐, 그저… 다행이 할머니네는 미리 어디서 얻어들은 사전지식이 있었는 모양인지 아니면 그 대답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여겼던지 더 캐묻지 않았다. 택시를 타고 동네를 나와서 다시 버스를 타고 엄마의 집으로 돌아가며 나는 내가 왜 낭패함을 느꼈을까 하고 생각하였다. 오빠와 새 언니는 열심히 일을 하고 있었고, 그들의 사업단위도 쟁쟁하니 이름있었으며, 더욱이 그들은 옛날의 할머니네나 엄마같이 그 정도로 궁색하게 살고 있지는 아니질 않는가. 그들은 지금 시대 많은 사람들보다도 더 풍족하게 더 버젓하게 살고 있지 않는가. 무엇때문에 나는 할머니네 앞에서 그들 얘기하기를 꺼려했을까. 7 “사기꾼”이란 말은 새 언니가 생각해낸것이였고, 사실 오빠는 그렇게 명이를 정의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오빠도 명이를 더이상 믿지 않고 있음은 말을 않고도 알아챌수 있었다. 오빠와의 불유쾌한 사건이 있은뒤 지금까지 연락이 끊어진 명이를 오빠는 이제 다시 기억하고 싶지 않아했다. ㅡ 돈이란건 말이여, 다니는 길이 있는 법이제. 하고 오빠에게 명이가 말했다고 하였다. 명이는 그 즈음에 위성 안테나 사업을 접고 다른 사업에 손을 대였다고 하였다. 운전석에 비스듬히 기대고 앉아서 에어폰을 귀에 꽂고 간간히 다른 “사장님”들과 통화하며 한손으로 핸들을 돌리는 명이를 보면서 오빠는 명이의 말을 철석같이 믿었다고 하였다. 돈이 다니는 길을 틀림없이 알고 있을거라고. 그러면서 오빠는 먼저 명이를 찾아가지 않은 사실을 다행으로 생각했었다. 천재 대학생으로서 낡은 단칸방세집에 사는 오빠의 자존심도 있었겠지만, 혹시라도 명이한테 무의식적인 부담을 주지는 않을런지, 아니면 어떤 불필요한 오해라도 사지 않을지 싶어서 오빠는 더욱더 먼저 명이를 찾아가지 않았다. ㅡ야, 이렇게 가까운데 있는데. 이후엔 서로 연락하며 살자. 하고 명이가 일식집의 주차장에 벤츠를 세웠다고 하였다. 그날에 두 사람은 모처럼만의 회포를 나누었고, 둘 사이의 정이 이후로도 변함없기를 기원하였다고 하였다. 아마 그순간의 기원만큼은 진실한것이였을지도 몰랐다. 오빠의 아들애가 백일을 지낼때 명이는 2시간 남짓 떨어진 ㄴ시에서 부러 찾아와 통이 큰 “사장님”답게 두툼한 부조 봉투를 새 언니손에 쥐여 주었다. 부조라는 명목외에 오빠가 다른 명목의 돈은 더 받지 않을것이였으니까. 그날의 잔치에는 할머니도 엄마도 모두 오셨었다. 둘째 삼촌의 결혼식 이후, 10여년 만에 만난 두 여자는 서로가 많이 달라졌다고 생각하였다. 민감한 피부때문에 머리물감을 들이지 못하는 엄마는 희슥한 머리때문에 겉늙어보인 반면, 아직 정정하신데다가 외국 스타일을 많이 본딴 할머니의 진한 커피색 물감을 들인 파마머리는 오히려 엄마보다 더 젊어 보이셨었다. ㅡ그려, 똘망하니 지 애비 닮아서 잘 생겼네이. 하면서 증손주를 안아본 할머니는 빨간 봉투에 빳빳이 집어 넣은 몇장의 대단결을 엄마한테 넘겨주었다. ㅡ아니, 뭐 이런걸 다… 하고 주춤주춤 봉투를 받는 엄마에게 다시 증손주를 넘겨주면서 할머니는 벌써 취하셨는지 당신의 손자와 증손자들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었다. 어느 놈은 돐 때에 열다섯상을 차렸으며, 어느 놈은 시 중심의 ** 호텔에서 돌잔치를 치렀으며, 또 어느 놈의 잔치때에는 시의 어느 어르신이 왔었다는 등등의 자랑들을 끝도 밑도 없이 끄집어 내였다. 엄마는 묵묵히 할머니곁에서 콩나물김치를 집어 먹고 계셨다. 미구에 할머니는 그만 족하다고 생각되셨는지 입술에 튕겨진 침방울을 닦으며 ㅡ그려, 애들 아파트는 몇평이나 된것이여? 하고 대수롭게 물었었다. 콩나물대가리를 한창 꼬들꼬들 씹으시던 그 찰나에, 갑자기 부자연스레 굳어진 엄마의 표정은 옛날 둘째 삼촌네 결혼식에서 잠시 굳어졌던 할머니의 것이랑 신통히 닮아 있었던것 같았다. ㅡ 뭐 아직, 차차 모아서 사야죠. 라고 힘겹게 말을 만들어 내는 엄마에게 ㅡ 그려? 난 또… 그라고 좋은 대학을 나왔으니께 당연히 … 하긴 요즘 세월은 옛날같지 않아서… 하고 혀를 쯧쯧 차보이는 할머니, 나는 그 순간의 할머니가 옛날 명이삼촌을 안됐다고 동정하던 엄마처럼 별로 존경스럽지가 않았다. 아마 그때의 할머니도 꼭 오빠의 단칸 세집을 업수이 보아서 한 말은 아니였을지도 모른다. 할머니는 다만 오빠가 더 너르고 더 좋은 아파트를 사지 못한것에 대해 안타까워 했을수도 있었다. 그러나, 다시 돌이켜보면, 그 더 너르고 더 좋은 아파트를 사지 못했다는 이유로 왜 오빠를 안타까워해야 한단 말인가. 그것은 아파트나 돈을 근거로 한 할머니의 다른 한 교만이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할머니가 몸소 세운 근거는 아니였다. 그리고 할머니만이 의거하는 근거도 아니였다. 삼촌들과 고모들도 당연시 인정하는 근거였으며, 엄마와 오빠와 형님과 나 마저도 피해갈수 없는 근거였었다. 엄마와 오빠네 부부와 내가 만약 그런것따위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굳이 할머니네 앞에서 어색하게 웃어 보이며 손발이 쭈들릴 필요가 뭐가 있겠는가? 그래서 지금 나는 막내 삼촌 명이에 대해 처음처럼 분개를 표할수가 없다. 아들들의 이익문제로 하여 도무지 화해할수 없는 엄마와 할머니에 대해서도 뭐라고 말할수가 없다. 엄마는 눈 한번 깜짝않고 오빠 전부의 재산을 가져간 명이를, 명이를 두둔해나서는 할머니네를, 얼마나 증오하고 있을지 아니면 그냥 서운함을 느낄지 모르겠지만 할머니 또한 자신을 도우려했다는 동기는 쏙 빼고 명이에게 악명만 뒤집어 씌운 오빠를, 그 오빠를 두둔할수 밖에 없는 엄마에 대해 얼마나 원망하고 있거나 아니면 그냥 섭섭해 할지 모르는 일이였으니까. 오빠에게 투자 어쩌구따위의 말을 꺼낼 때 명이는 아파트 셋을 다 밀어넣고, 회사를 말아먹고, 빚까지 지고 있다는 얘기는 하지 않았었다. 단순히 사업을 담론할때 그것들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해서였을지도 모르겠다. 암튼, 명이는 아메리카쪽에서 쟈켓의 오다를 가져오는 사장님을 알고 있는데, 독자적으로 하청 공장을 찾아서 물건을 만들어내고 수출하여서, 그중의 이윤을 뜯을수 있는 일이라고만 하였었다. 오다를 주는 회사의 가격과 하청 공장의 원가를 잘 맞추기만 하면 생산할 필요도 없고, 영업할 필요도 없고, 바로 그 중간차액을 차지할수 있다는것이였다. 이미 명이와 그 사장님은 질량과 가격이 다 적당한, 믿을만한 하청공장을 찾았고, 몇번의 거래를 통해서 톡톡한 수입을 보았다고 하였다. ㅡ이런 장사를 하다보면 다른 건 눈에 들어오지도 않어. 그치만 아무데서나 딱 맞닥뜨릴수 있는 흔한 기회도 아니지. 안그래? 하고 명이가 여유작작 술을 마시면서 오빠를 건너 보았었다. ㅡ10만원에 2만원이라, 그렇게 좋은 장사가 없긴 한데… 왜 그 사장님은 그 좋은 돈을 혼자 벌지 않는대? LC는 어떻게 여는지, 계약은 어떻게 썼는지, 여러가지 미세한 부분에 대해서도 오빠는 차곡차곡 알아보았다고 하였다. ㅡ문제는 자금이지. 거래가 잘 되면 오다는 더 많아지기 마련이고, 하청 공장이야 발품을 팔아서 찾으면 그만이지만, 먼저 생산을 가동할 자금은 우리가 내야 하거든. 지금 막 들어오는 오다를 미처 소화시킬새가 없어졌어. 지금 놓치면 다른 사람에게로 건너갈거잖어. 호방한 성격의 명이는 우유부단하고 앞뒤를 너무 재이는 오빠를 나무랐다고 하였다. 대개 그러루한 상황이였다. 워낙 의심많고 조심스러운 오빠였지만 새 언니가 매일 쓰고 있는, 조그맣고 녹이 쓴 개수대를 생각하고, 자주 막히지 않으면 냄새가 역으로 올라오는 화장실의 변기를 생각하면서 결국 결정을 내렸던것이다. 처음 보낸 10만원에 아직 2만원이 붙어 돌아오기도 전에 명이는 재다시 10만원을 보내라고 하였었다. 물건이 곧 나가고 있으며 그쪽에 도착하는 당날로 계좌에 입금시켜준다며, 또 다른 하나의 오다가 들어와서 급하게 돈을 돌려 써야겠다고 했었다. 명이의 당당하고도 성급한 목소리는 오빠의 심사숙고를 무너뜨렸는 모양이였다. 당장에 보내주지 않으면 비겁하고, 의심많고, 경제원리를 모르는 무능력한 소인배가 될까봐 오빠는 흐리멍텅하게 돈을 보냈었던것이다. 그리고 이어진 무한정의 기다림, 일주일만 참으라던 말은 열흘로 연장되고, 또다시 이번달 말과 다음달 중순으로 미루어지였다. 모든 사람들이 그런 상황에서 그러하듯 오빠는 기다리다가 불안해하고, 의심하다가 원망하고, 분개하다가 자포자기 했던것이다. 그런 뒤의 어느날엔가부터 뚝 끊겨진 명이의 연락, 어디로 간것인지 무엇을 하는건지 지금 이 순간까지도 도대체 알수가 없어졌다. 오빠가 바질바질 속을 태우는 동안, 엄마는 얼마나 더 가슴이 아팠을까. 할머니한테 전화를 건 사람은 그러나 엄마가 아니라 새 언니였다. 새 언니는 명이의 모든 행위를 악하게 판단하고 할머니네에게 죄책감을 지워서 다문 얼마의 돈을 받아내자는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담화의 과정중에 형님은 혈기를 참지 못하고 불손한 태도로 불경한 말들을 뱉었으며, 아직 왕년의 “암펌기세”를 간직하고 있던 할머니에게 되려 호되게 책망당했던것 같았다. 돈이란 것은 주고 받은 당사자들끼리 해결해야 할 문제이며, 명이가 고의적인 “사기”를 쳤다는 증거는 불충분하며, 지금 명이의 행방을 모르고 있기는 할머니네도 마찬가지일 뿐만아니라, 조카 며느리로서의 새 언니의 태도가 너무 건방졌다는 내용이였다. 이것들이 내가 듣고, 내가 기억하고, 내가 추측해낸 이야기의 전부다. 그 전화 이후로 다시 이어지지 못한 할머니네와 엄마와의 연락, 시간이 흐르면서 분은 점점 가라앉기 마련이지만 명이가 아직 말을 하지 않은 이상, 오빠의 돈이 아직 돌아오지 않은 이상, 화해를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하는것은 어느 누구도 함부로 결정할수 없어했다. 그렇다고 우리가 할머니를 잊은것은 아니였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엄마는 그 “에미 손이 곱더라”하던 새 시어머니를, “이 천하에 못된 거”하면서 두들겨패던 강인한 여자를, 어찌 잊을수가 있었겠는가. 나도 그랬다. 만나는 사람마다에게 “김씨네 장손녀”라고 알리고 싶어하던 할머니를, “어이구 내 새끼”안아주면 뒤잔등을 쓸어주던 할머니의 손길을 결코 존재하지 않았던 일처럼 잊어버릴수는 없었다. 할머니는 어떠할까? “어머이, 피줄이 무섭긴 무섭지 예?”하고 나를 흘기던 며느리의 고운 눈을 벌써 잊어버렸을까, 자신의 품안에서 그리 득의해하며 행복해하던 손녀의 웃음을 다시 기억하지 못하고 있을까. 사실 얼마전 엄마네 집으로 가는 도중, 나는 부러 할머니네 동네를 지나쳐 가본적이 있다. 동네를 들어가보지는 않았고, 택시에 앉아 천천히 한바퀴를 돌아보기만 하였었다. 반쯤 넘어 돌고 있을때 나는 기적처럼 그 동네의 하늘에 불쑥 나타나 날고 있는 제비 두 마리를 보았었다. 그랬다, 꽁지가 갈라지고 날렵하게 내리 꼰지며 우아하게 비행하는 폼이 영낙없이 제비였다. 검푸른 몸에 적갈색나는 띠가 둘러져 있는것이 우리 고장에서는 그리 흔치 않은 귀제비였다. 그 두마리 귀제비는 쏜살같이 하늘로 솟구쳐 날아 올랐다가 바람처럼 어느결에 지붕위로 꼰져 내려오군 하였다. 두 마리가 서로 엉켜서 날기도 하고 눈 깜짝할새에 반대방향으로 멀어지기도 하였다. 통 무슨 사인지, 무슨 분위기인지 알아 맞출수가 없었다. 다정한 부부인가, 오랜만에 만난 친구인가, 아니면 둥지를 가지고 싸움을 벌이는 원쑤인가? 택시는 할머니네 동네를 빙빙 돌다가 다시 방향을 새로이 접고 길을 떠났었다. 내가 내다보던 유리창바깥의 하늘도 택시를 따라 덜덜 떨며 이동하였고 그 하늘에서 그림처럼 날아예던 제비 두 마리는 끝내 더 따라오지 못하고 그만치서 사라지고 말았다. 당연한 일이였다. 모든것이 그렇게 나타났다가 그렇게 사라지는 법이 아니던가? 다만 나는, 아직 지나가지 않은 멀지 않은 우리의 장래마저도 그렇게 흐지부지 하는 중 돌이킬수 없는 아쉬움만을 남긴채 그렇게 사라져버리지 않을까 하는 그것이 맘에 내키지 않았다. 차창문을 닫아 올리면서 나는 아직 천방지축 하늘을 날고 있을 철없는 제비들에게 혼자 속으로 그렇게 말했었다. 둥지에 앉아 있어도 좋고, 훨훨 날아다녀도 좋지만, 다시는 아이를 잉태한 어떤 어머니의 꿈속에 날아들지 말라고. 설령 그것이 하나의 장난이였거나 실수에 불과하였더라 할지라도.
2    제비야 제비야 (상) 댓글:  조회:1543  추천:0  2012-08-13
제비야 제비야 김 금 희 ㅡ 제비 두 마리가 날아왔었지비. 하고 할머니가 얘기했었어. ㅡ 그래서요? ㅡ 한 눔은 둥구리에 토라앉었고, 한 눔은 바께로 휘여 ㅡ 날아 가삐더만. 그렇게 말했었지. ㅡ 나참, 그런데요? ㅡ 태몽이래. 느이 막내 삼촌이랑 오빠랑. 그순간 나는 어두운 허공에 대고 핏 웃어버렸었다. 신문지로 도배를 한 두꺼운 흙벽에 네모난 뙤창문이 움푹 꺼져있고, 노란 전등불빛이 나즈막한 천정아래의 구들장을 기웃거릴때, 그 좁다란 구들장위 허름한 대나무장농앞에서 허연 목천의 요를 깔고 나란히들 누워있는 할머니와 엄마의 모습이 생생하게 떠올라서였다. 거기다가 똑같이 언덕처럼 솟아오른 배라니? 얼핏보면 두마리의 단봉낙타가 나란히 꿇어앉아 있는것 같지 않았을까? 엄마는 핏핏거리며 코웃음치는 나를 흘겨보고나서 계속 주접을 떨었었다. ㅡ 그때는 어느 애가 날아간 제비일까 참 궁금도 했었지. 속으론 어떻게 생각했을지 모르겠다만 느이 할머니는 그 애가 오빠일거라고 꼭 덧붙이더라. 그래서 나는 헛헛거리며 센불에 데쳐진 새우처럼 허리를 꼬부러뜨리고 웃었었다. 이렇게 오래동안 할머니네와의 연락이 썩뚝 끊겨버린 마당에, 무슨놈의 “제비 두마리 같은”, 구질구질 냄새나는 옛말을 꺼내는 엄마의 저의가 갑자기 나를 웃겨서였다. 아직 할머니네와 화해를 하지 못한 시점에서, 아니, 그렇게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결정조차 하지 못한 때에 엄마는 뭐하러 그 얘기를 꺼내고 싶어했을까. 그런건 더 나중에 가서,확실하게 뚜껑을 열어본 다음에야 들먹이는게 아니던가. 엄마는 나의 경망스런 웃음때문에 흥기가 싸악 가셔버렸던 모양인지 ㅡ그래, 다 지나간거 뭐하러 자꾸 꺼내겠니 하시면서 결국 쌩하니 돌아누웠었다. 그럴때는 아무리 엄마라지만 참으로 어이없어질수도 있어 나는 금방에 지쳐버렸 던것 같았다. 할머니라면 어찌하였을까. 아마도 ㅡ이노무 가시내! 으른말이 모가 우끼나? 하면서 단박에 달려들어 내 뒤통수를 털썩 후려쳤을 가능성이 아주 많지 않았을상 싶지다. 바로 그런 무지막지한 욕설과 미처 막아볼새 없이 빠른 매질때문에 나는 엄마보다 할머니를 더 좋아할때가 많았다. 젊은 시절에 심양시내에서 버스를 운전했다는 (별로 신빙성이 없는 얘기지만) 할머니는 툭하면 영광스런 과거지사를 들먹이면서 머리가 다 커버린 아들들과 딸들과 며느리들과 사위들의 기를 죽여놓군 하였었다. ㅡ 내 오날 또 노펜즈를 돌려야 쓰겄다. 으이? 이것들아… 할머니는 이러루한 서막의 형식을 무척이나 좋아하였는데 무슨 옛날 자작거리에서 이야기꾼들이 수호전 1장1회를 시작할때처럼 두마디 안짝에 한번씩 탁! 하고 밥상이나 구들장을 내려치군 하였었다. 삼촌들과 고모들과 숙모들과 고모부들은 그런 놀래킴따위에는 이제 아주 익숙해졌는 모양인지 태연스레 밥을 먹거나 담배를 빨거나 가려운 목덜미를 긁으면서 편하게들 앉아 듣고 있었지만 나는 그 탁! 내려치는 갑작스런 동작과 소리에 움쩍 놀라서 팔딱 일어나 자리를 고쳐 앉으며 몸을 단단히 도사리고 눈까풀을 반뜩거리군 하였었다. 무섭다고 여긴적은 없었다. 온 조선족동네에, 아니 인근의 한족동네들에까지 쫘악 알려진 할머니의 사나운 암펌기질이 장손녀인 내게는 도무지 해가 되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나를 감싸주고 위해주는 방패라는 사실을 알고있었기때문이였다. 그것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유약하고 나긋했던 내게 얼마나 든든하고 다행스런 일이였던지 몰랐다. 아버지가 없다는 구실을 대고 어린 나는 늘 무의식중에 자신을 위축시켰는데, 나의 그런 자아위축은 다시 친구들의 조소나 동정같은 건강치 못한 태도를 불러왔었다. 참 재밌는것은 그런 자아위축이 할머니네에 가서는 언제 그랬냐싶게 말끔히 사라진다는 것이였다. 말없이 수걱수걱 살아가는 엄마와 달리 주위 사람들을 무참히 압도하는 할머니의 드센 기가 엄연한 그녀의 장손녀인 나를 치료하였으며 심지어는 약간의 허세까지 부추기였었다. 나는 진정으로 호가호위의 진맛을 아는 사람이였다. 나는 지금도 “할머니”하면, 이런 장면을 떠올리기를 즐겨한다. 칼날같이 매서운 겨울바람을 맞으면서 삼촌들을 따라 올라 탄 낡고 붐비는 버스, 툴툴툴툴 뒤뚱뒤뚱 논길을 달리는 삼륜차의 딱딱한 나무판자, 하얗고 텅 빈 논밭 저머너로 올망졸망 늘어선 초가집들, 허름한 초가지붕아래 빙 둘러싼 싸리나무 울바자, 그리고 납작돌들이 깔린 마당과 헝겊이불로 겉을 싸버린 정지문, 내가 아직 문고리를 잡아 당기기도 전에 그것을 박차며 뛰쳐나오는 혈기넘치는 할머니… “어이구 내 새끼…”할머니는 꼭 이렇게 나를 부르곤 하였는데 나는 지금까지 그 호칭보다 더 듣기에 좋은 다른 부름을 들어보지 못했던것 같다. 할머니가 나를 품에 꼭 그러안고 눈물을 찔끔거리며 커다랗고 툭박진 손으로 내 가냘픈 등허리를 썩썩 쓰다듬어 내리던 기억도 도무지 잊혀지지가 않았다. 나는 어미왕의 등에 업힌 새끼 원숭이처럼, 할머니의 품에 온전히 안겨서 이런 역사적인 감동의 장면을 지켜보고 있는, 마실왔던 이웃집 아줌마와 울바자구멍으로 빠끔히 넘겨보던 조무래기들을 거만하게 둘러보군 하였다. 지금 생각하면 얼마나 가소로운 일이였던가. ㅡ 으잉, 우리 김씨네 장손녀야. 하고 만나는 사람들마다에게 나를 알리고 싶어하는 할머니때문에 정말 “장손녀”는 특별한 신분인가보다 하고 착각했던 시절이 말이다. 피줄의 원리대로 따지자면야 “장손녀”보다는 아무래도 오빠의“장손”이 권위가 있겠지만 다시 돌이켜보면 장손이든 장손녀든 세상에 태여난 순서를 알리는것 외에 또 다른 무엇이 실제로 있기나 했던것일까. 이것은 내가 꺼내기 오래전에 엄마가 벌써부터 의심했던 일이였다. 거기다가 반드시 남자의 성을 이어받는 피줄의 원리에서, 정작 당사자인 남자들은 그 자리에 없었다면 말이다. 과연 그것은 얼마나 오래동안 유효한것이 될까. 여자는 왜 그 의무를 짊어져야 하며 또 실제로 그것을 짊어질수 있기나 했던것일까. 그것은 엄마와 할머니의 첫 만남이였다고 하였다. 또한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12년만의 만남이였다고 하였다. 반백이 넘은 아버지와 한창 정력이 북받치는 아들, 그리고 둘다 해산달을 맞고 있던 아내들, 얼마나 어색하고 불편한 자리였을까. ㅡ 고등학교 2학년때 중퇴했었지. 늘 집밖을 겉돌던 아버지가 끝내 돌아오지 않기로 했으니까. 할아버지를 만나러 오기 전, 아버지는 엄마에게 대충 상황을 설명해주었다고 하였다. ㅡ경상도 출신이였고, 어렸을때 우쑤리로 건너가서 중학교를 마쳤었대. 조선전쟁에 군인으로 참전하였다가 중국지원군쪽에 편입이 되였던 모양이야. 워낙 물불 가리지 않는 성격때문에 전쟁에는 요긴하게 쓰였겠지, 메달이며 휘장같은것이 꽤 있었으니까. 전쟁이 끝나고 심양에서 살때에는 풍족한 편이였어, 뭐 늘쌍 겉돌다보니까 자식한테는 풍족하게 보태줄 사이가 없었겠지만. 아버지는 그때까지 할아버지를 완전히 용서하지 못했던것 같았다고 하였다. 하긴 그즈음 시절의 조선족가정에서는 흔해빠진 얘기였지만 말이다. 철부지 시절에 부모가 매듭지어준 혼인, 반도와 열도와 대륙의 사람들사이에서 도무지 그치지 않는 전쟁, 한치앞을 가늠하기 어려운 생사 불분명한 인생, 어느 곳에도 누구에게도 존속되지 못하고 떠나기를 반복하는 무의미한 삶… 그 시절 동북에 살았던 여느 집의 할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나의 할아버지도 가정다운 가정을 지키고 살아야겠다는 의욕을 잠시 잃었던것 같았다. 할아버지가 가정을 지켰든 버렸든 그것과 상관이 없이 아기였던 아버지는 그 사이에 하루하루 자라가고있었던것이였다. 철이 들어가면서부터 전쟁터에 나가신 아버지를 기다리며, 그저 건강하게 무사하게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소년이 되였고, 정작 무사하게 건강하게 돌아온 아버지앞에서 눈물 한번 제대로 흘려보지 못하고 다시 집밖으로 다른 여인들의 품으로 떠나보내야 했으며, 언제 그 허전한 마음을 접고 돌아오겠지 외로운 엄마와 지겹게 기다리다가 어느새 청년이 되였던것이였다. 학교 중퇴이후로 두 부자는 다시 만나지 못했다고 하였다. 아버지는 가슴 한가득 끓어오르는 울분을 안고 용감한 홍위병이 되여서 반혁명분자들을 투쟁하는 일에 앞장을 섰으며, 할아버지는 여자관계가 복잡한데다가 술버릇마저 좋지 못하여 국가와 인민을 모독하는 주정을 했다는 이유로 관직에서 파면당하고 길림쪽의 소도시로, 또 거기서 더 작은 진으로, 진에서 그 농촌동네로 미끄럼을 타듯 어찌해볼길 없이 술술 밀려내려갔다고 하였다. ㅡ넌 그때 잘 나간다고 하지 않았냐? 다 장성한 아들과 술상을 마주하고 할아버지가 물었다고 하였다. ㅡ처음에는 그랬죠. 근데 사람 인생 한번 꼬이기 시작하면 점점 이상해지더라니 까요. 어쩌구 저쩌구 해서 내가 반혁명이 되였지 뭡니까. 3년을 옥에 있었지요. 허허 하고 만나서 처음으로 아버지가 어깨를 들썩거리며 웃었다고 하였다. ㅡ그려, 그랬구나. 참, 사람 사는게 거시기하제? 그기 인생이다. 인생이 별건줄 알았더냐? 할아버지는 웃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눈물이나 비슷한 액체같은것도 보이지는 않았다고 하였다. 그제서야 아버지는 할아버지곁에 앉아있는 할머니를 마주 바라보았다고 하였다. 할아버지보다 열댓살남짓 어린 할머니는 그때도 미인의 흔적을 살리고있었는데 까맣고 긴 머리를 가르마 내여 곱게 뒤로 쪽지고, 하얀 저고리 검정치마차림을 한채 커다란 배를 그러안고 대나무장농에 허리를 기대고 앉아서 아버지의 눈길을 당당하게 받아 안았다고 하였다. ㅡ이번달이… 해산달이라고요?… 우리 집사람도6월인데… 아버지는 원래 다른 말을 하려던것 같이 보였다고 하였다. 마당에서 놀던 올망졸망 삼촌들 셋이 뛰여들어와 땅콩볶음과 계란볶음을 올린 술상앞에 오구작작 모여서서 똘망똘망 까만 눈들로 아버지를 마주보며 때국이 흐르는 입술을 감빨았다고 했었다. 처음으로 보는 동생들에게 매서운 눈빛으로 겁을 주는 할머니를 보면서 아버지는 그렇게 말머리를 돌릴수 밖에 없었던것 같았다고 하였다. 게다가 코흘리개 고모들은 더 형편없었다고 하였다. 반에 반웅큼도 되지 않는 수적은 노란머리를 대충 빨간 게실로 묶어매고서 양볼에 말라붙은 코딱지를 그린채 고모 둘이 시끌벅적 쳐들어왔다고 하였다. ㅡ엄마, 빨리 와봐! 명주가 달갤 먹었다! ㅡ곰방 난거 둥구리서 꺼내 깨먹었다! 먼지 낀 창살밖으로 꼬꼬댁 닭들이 똥을 밟으며 퍼덕퍼덕 도망다니고있었고, 그 서슬에 무슨 양재기들이 왈라당 절라당 부딪치는듯 하였으며, 명주가 누군가에게 된욕을 당하고 있는듯한 소란소리며가 잡음을 걸르지 못한 녹음처럼 생생하게 들려왔다고 하였다. 명주의 꼬락서니를 구경하려고 누가 먼저 운을 떼였는지 와아ㅡ 하고 고함을 지르며 삼촌들과 고모들이 오구작작 바깥으로 뛰쳐나갔다고 하였다. 이렇게 많은 애들이 이렇게 비좁은 집에 이렇게 소란스레 모여있는 모습을 처음으로 구경한 새각시의 엄마는 어쩔줄을 몰라하며 금방 퍼머를 한 짧은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면서 아버지곁에만 붙어앉아있었다고 하였다. ㅡ이 놈의 자슥들을 그냥…! 윽 하고 일어서려던 할머니는 얌전히 앉아있는 엄마의 커다란 배를 보고나서 후ㅡ 한숨을 쉬더니 복주야ㅡ!하고 큰 고모를 불렀다고 하였다. ㅡ나둬, 오늘은 걍 넘어가제. 하고 느긋이 말하면서 할아버지는 술 한잔 더 따랐다고 하였다. ㅡ크으, 좋다! 미느리가 사온 술이 별나게 달다야! 할아버지는 얼근히 기분좋게 취하셔서 눈을 지긋이 감고 머리를 흔들면서 밥상 언저리에다 놋쇠저가락을 두드리며 소리를 하기 시작했다고 하였다. 두만~강 푸른 물에, 노젓는 배~사공~ 흘러간 그 옛날에 내 님~을 싣~고, 떠나~간 그 사람은 , 어데로 갔~나~ 그리운 내 님이여~~ 그리운 내 님이여~~ 언제나 오~려~ ~나 에서부터 시작하여 “타향살이 몇해던가,”에로, 그리고 엄마의 러시야어 실력으로 겨우 간간히 알아들을수 있는 러시야 민요도 두 마디 불렀으며 나중에는 아버지와 같이 내가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도 불렀다고 하였다. 두 사나이는 낮다막한 구들위에서 술상을 가운데 놓고 올방자를 틀고 마주앉아, 어깨를 들썩이면서 저가락으로 박자를 쳐가면서, 목에 핏대를 세우고 소리소리 노래를 하였다고 하였다. ㅡ그만 하소. 색이지도 못하는 술을 와 죽자고 퍼먹노… 할머니의 푸념이 채 끝을 맺기도 전에 할아버지는 술상앞에서 밑둥 잘려진 통나무처럼 뒤로 푹 쓰러지셨다고 하였다. ㅡ으이구, 죽일놈의 영감탱이, 내 이럴줄 알았지. 간이고 뭐고 다 썩어 문드러져야 정신차릴까나… 아버지는 취중에도 할아버지의 쓰러짐이 보였던지 저가락장단을 그치였고 엄마는 배를 그러안고 뒤뚱거리며 다가가서는 어찌할바를 몰라 했다고 했었다. 그렇게 그날의 연회는 단락을 고했는 모양이였다. 할머니는 할아버지의 양 겨드랑이 안쪽에 팔목을 집어넣고 어깨를 감아 잡고서 질질 끌다싶이하여 윗목의 이불속에 밀어넣었다고 하였다. 큰 고모 복주가 와서 할머니를 거들어 상을 내가고 아버지는 어린 동생들과 잠깐 마당에서 장난을 치셨다고 하였다. 그날 밤, 한 다리만큼의 사이를 두고 북쪽 구들에는 고모넷과 엄마와 할머니가 나란히 누웠으며 남쪽 구들에는 삼촌셋과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누웠다고 하였다. ㅡ참 이상도 허지, 기별도 몬받고 했는데 꿈이 보이더라. 하고 할머니가 누워서 그 태몽얘기를 엄마한테 해주었다고 하였다. ㅡ큰 사람이 참말로 고상 많았데이. 허긴, 저 영감탱이도 속 다 문드러짔제. 그 속은 무신놈에 속이갔나? 그 말을 들으면서 엄마는 푸르스름한 달빛속에서 반짝이고 있는 할머니의 눈망울을 보았다고 하였다. 천정을 향하고 반듯이 누운 할머니였기에 엄마의 시각에서는 반얼굴의 윤곽만 보였다고 하였다. 평평하고 말끔한 이마와 그 아래 오뚝 선 코날이 그런 밤의 달빛속에서 그렇게 아름다울수가 없었다고 하였다. ㅡ에미는 손이 참말로 곱더라. 하고 할머니가 엄마의 배위에 올려져있던 손을 잡아서 꾹 힘을 넣어 쥐여주었다고 하였다. 훤칠하고 건장한 할머니곁에 누워서 단아한 체격의 엄마는 꺼끌하면서도 힘있는 시어머니의 그 손을 잠잠히 느껴보았다고 하였다. 사범을 나오고 시골 초등학교서 교직을 지내던 엄마는 그때까지 수줍음을 많이 타서 처음 보는 시부모님과 더 많은 말을 나누지 못했다고 하였다. 이튿날 아침, 고하고 길을 나설때에도 엄마는 눈웃음만 지어 보일뿐 다른 인사를랑 하지 못했다고 하였다. ㅡ그려, 가 봐. 잘~ 살고. 축 내려앉은 쌍겹의 눈꺼풀을 슴벅거리면서 희슥머리의 할아버지가 아들 며느리를 향해 거친 손등을 두번 앞으로 떠밀어보였다고 하였다. 아버지는 허리를 깊이 숙이고 머리를 아래로 떨어뜨린채 경례자세로 한참을 그대로 서있었다고 하였다. 아버지가 땅에 떨구었던것이 눈물이였는지 다른 것이였는지는 아무도 보아낼수 없었다고 하였다. 그것이 부자지간의 마지막 만남이 되였을줄 그때는 아무도 알수 없었다고 하였다. 동구밖 홰나무뒤로 할아버지네의 모습이 점점 작아져갈때 할머니가 문뜩 ㅡ고맙데이, 에미야! 하고 소리질렀다고 했었다. 할머니는 무슨 예감이 있었던것일까. 왜 갑자기 엄마에게 고맙다고 했을까. 고달픈 나그네인생을 마감하기전의 할아버지께 아직 화해하지 못한 아들과 태속의 손자를 보여주러 온것이 고마웠던것일까, 아니면 할아버지의 뒤를 따라서 비명에 저세상으로 가버린 아버지에게 이런 기회를 잡아주었던것이 고마웠던것일까. 2 4살위인 오빠에게는 그나마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어슴츠레 남아 있었겠지만 나의 기억속에는 애초부터 아버지에 대한 기억따위가 조차마저 없었다. 문혁때 책을 잡혔던 할아버지의 작풍문제는 여전히 해결보지 못한 상태여서 정부의 보조금은 시종 심사중에 있었으며, 농사일에 문외한인 할아버지와 오롱조롱 딸린 애들의 머리수가 많았던 이유로, 그 많은 전공의 메달과 휘장이 무색할 정도로 할머니네의 궁색한 살림은 계속 되였던것 같다고 하였다. 궁색하긴 엄마의 생활도 마찬가지라고 하였다. 군인말고 다른 일을 더 알지 못했던 할아버지처럼 아버지도 생산대에서 공수를 버는 일에 영 신통치 못했다고 하였다. 게다가 요즘으로 말하면 취미생활도 웬간히 다양하셔서 열심히 일을 나가도 시원찮을 마당에 걸핏하면 산고개 두개를 넘어가 진에 가서 새로 개봉된 영화를 보는가 하면, 장마비가 구질구질 내리는 날에 차라리 집에 눌러앉아 수묵화를 그리거나 노래를 지어 부르면서 하루를 떼우기도 하였다고 했었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고 아버지도 집을 나가 며칠씩 떠돌다 오기를 즐겨하셨는데 때로는 강줄기를 따라 저수지에 가서 막을 치고 이틀씩 묵으면서 물고기를 잡아오셨는가 하면 때로는 다른 도시나 조선족농촌을 들낙거리면서 고추가루, 미역, 신발, 심지어 밀방약재와 홍송목재 등등의 돈이 될법한 장사도 닥치는대로 하셨다고 하였다. 장마비에 뚝이 터져서 온 동네가 물난리를 겪던 그 전날밤에, 아버지는 아래배에 얇게 헤여진 수건을 두르고 쌔근쌔근 잠이 든 오빠와 나의 머리를 쓰다듬다가 엄마에게 불쑥 말했다고 하였다. ㅡ여보야, 우리 떠날까? 산도 있고 물도 있고 풀밭도 있는데 찾아서 애들 데리고 떠나버릴까? 열흘만에 돌아온 아버지는 늘 그랬던것처럼 그 기간동안 생산대에서 벌수 있는 만큼의 먹거리를 벌어오지 못했다고 하였다. 한낱 여자의 월급으로 온 식구가 먹고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은 가장인 아버지의 마음을 더 아프게 했던 모양이였다. 할아버지처럼 가정에 무책임한 가장이 되지 않겠다고 굳게 내렸던 맹세, 주체할수 없는 끼를 가졌지만 한번 피여보지 못하고 꺾이여버린 허황한 꿈들, 결국 그토록 원망했던 할아버지와 똑같은 길을 걷고있는 자신을 보면서 아버지는 더없는 무기력함과 낭패감을 느꼈을것이였다. 그래서 그날밤의 아버지는 유난히 슬퍼보였다고 하였다. 한 팔로 뒤머리를 고이고 반듯하게 누워서 다른 한 팔에 엄마의 머리를 눕히우고 아버지는 가느다란 한숨을 푸우 내쉬였다고 하였다. 열어놓은 창문바깥으로 얄포스름한 달빛이 마당앞의 백양나무를 고느적이 감싸안고있었고 백양나무 뒤쪽의 길가 풀숲에서는 이름모를 벌레들이 쓰르락 쓰르락 울고있었다고 하였다. 두번 다시 들어본적 없는 평화로운 밤이였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 이튿날 아버지가 떠나갔다. 이른 아침, 엄마가 아직 오빠를 데리고 시골학교로 출근을 하기전에, 두돌배기였던 나를 봐주던 이웃집 모르지아매가 봉창을 두드리기전에, 아버지는 또다시 떠나갔다고 하였다. 구질구질 지겹게도 내리는 비줄기를 맞으며 바자문을 걸어나선 아버지는 다시 그 문을 걸어서 들어오지 못했다고 하였다. 장마비는 온종일 시름시름 끊어질듯 말듯 이어져서 내리다가 드디여 저녁을 먹고 자리에 들었을맘때에 가서는 굵직한 장대비로 커져서 자그만 동네를 사정없이 휘갈겼다고 하였다. 그렇게 한시경쯤 지난지 싶었는데, 동네 한가운데를 흐르던 강물이 윗목 저수지에서 예고없이 방류되는 바람에 갑자기 불어나버렸고 기세등등하니 흘러내려오다가 급기야 뚝이 약한 곳을 넘어뜨렸다고 하였다. 느슨히 닫겨졌던 정지문이 벌컥 열리면서 봉당에 누런 흙물이 거품을 물고 쳐들어 왔다고 하였다. ㅡ 넌 애기였으니까 기억이 없지. 하고 후날 오빠가 얘기했었다. ㅡ 자다가 갑자기 깨였는데, 다행이 물이 많지 않아서 봉당에서만 넘실거리고 구들까지는 올라오지 못했어. 엄마는 앙앙거리며 울고있는 너를 품안에 그러안고있었고, 나는 엄마곁에 꼭 붙어앉아서 아무 소리도 못내고 바들바들 떨었었지. 무슨 일인지 몰랐으니까. 그때 엄마의 나이가 몇이였던가. 아이 둘을 키우는 지금의 내 나이와 비슷하지 않았을까. 바다 한 가운데의 외로운 섬에 갇혀버린것처럼, 물들이 뙈기만한 구들을 에워싸고 강도처럼 널름거릴때에, 마당과 봉당과 부엌칸에서 둥둥 떠다니는 싸리비자루와 요강과 앉은뱅이 나무걸상과 누구네집 오리새끼와 암탉이 들어앉아 병아리를 깨우던 닭둥지와 그리고 모든 땅바닥에 놓여있던 뜰수 있는 것들을 바라보면서 엄마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아버지처럼 훌쩍 떠나고싶다는 생각은 한번도 하지 않았을까. 엄마한테 물으면 당연한 대답을 들을수 있었다. ㅡ니들을 보면 어떻게 그런 지독한 생각을 할수 있겠니? 그것이 엄마와 아버지가 다른 점이였다. 그리고 내가 아버지에 대해 전혀기억을 하지 못하는데에 비해 엄마에 대해서는 얼핏얼핏 신기한 기억을 가지게 된 이유이기도 하였다. 물이 빠진 그 다음날, 흙탕범벅이 된 집안과 마당을 청소하던 엄마에게 이웃 한족마을의 남정네들 몇사람이 동네어른들 두어명하고 찾아와서 아버지의 익사를 알렸다고 하였다. 급히 부은 강물위의 위험한 나무다리를 건너서 다른 동네로 가는 길이였던지 아니면 엄마의 동네로 오는 길이였던지 그것은 알바가 없었으며, 노한 강물이 다리를 휩쓸어가기를 기다렸던것인지 아니면 휩쓸려가는 다리위에서 필사적으로 언덕을 향해 달려왔던것인지 그것도 알바가 없었다고 하였다. 무튼 그렇게 엄마는 정말 “김씨네 집안”에게 고마운 사람이 되였던것이였다. 김해김씨네 장남의 대를 남겨준 사람, 엄마는 본의 아니게 바로 그런 사람이 되였던것이다. 갑작스런 장사를 치르고서 엄마는 한동안 묵묵히 지내셨다고 하였다. 마당 한구석에 흙으로 쌓은 아궁이앞에서 너덜거리는 파초부채를 부치면서 불을 지피다가 가끔씩 바깥으로 물씬 뿜어져나오는 독한 연기에 기침을 클럭거리며 눈물을 찔끔 짜내기도 하였다고 했다. 어쩌다 한번씩 정말 꺼무스런 연기가 매웁게 눈망울을 마구 덮쳐버릴때, 엄마는 손등으로 눈을 비비면서 할머니를 원망하군 하였다고 했다. 첫 만남에서 에미야 에미야 왜 그리 살갑게 불러주었으며 날아간 제비는 오빠일거라고 왜 그리 자신있게 말해주었으며 에미 손이 곱다고 왜 그리 부드럽게 만져주었으며 동구밖 홰나무뒤에서 고맙다고 왜 그리 애절하게 소리질러 주었을까 하고 엄마는 매캐한 연기속에서 할머니를 원망했다고 하였다. 그리고 한참동안 끊겨진 할머니네와의 연락, 처음 한동안은 황당하여서 엄마쪽에서 소식을 띄우지 않았다고 하였다. 오빠와 내가 태여나고 자라는 동안 겨우 두번 엄마한테 들러 본 할머니, 엄마가 아는 사람을 통해 소식을 띄웠을때 할머니네는 벌써 그 마을을 떠났다고 하였다. 엄마는 할머니네 동네사람들에게 소식을 남겨두고 돌아왔으나 그후로는 의식적으로 다시 할머니네의 상황을 캐지 않았다고 하였다. 엄마는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였다. 자신한테 고마워해야 할 시부모님을 마음껏 원망하기 위하여 아무일없듯이 조용하게 기다리고 있었을것이다. 늦가을이 되여 날씨가 차져서 드디여 집안 부엌아궁이에 불을 지필수 있을때, 확확 뜨겁게 당겨오르는 불길을 보면서 엄마는 가슴속의 눈물을 바짝 말리웠을것이다. 눈물이 거지반 마르고 피마저 말라갈때 엄마에게는 그 슬픈 기억의 동네를 떠날수 있는 기회가 생겼었다. 더 큰 운동장의, 더 많은 학생들이 있는 학교로 전근을 하게 된것이였다. 드디여 엄마에게 시부모님을 원망할 더 탄탄한 구실이 생긴것이였다. 나를 둘쳐업고 오빠의 손목을 잡아끌고, 유일한 형제였던 외삼촌과 함께 손잡이 트럭트에 올린 크고 작은 보따리들 틈에 앉아서 동네사람들의 배웅을 받으며 엄마는 새 동네로 떠나갔다. 손잡이 트럭트가 쿨럭쿨럭 연기를 내뿜으며 할머니네 인근의 한족동네들을 멀리 에둘러 지날때에도 엄마는 그쪽으로 눈길 한번 돌려주지 않았다고 하였다. 그 고집스럽게 찌프린 눈섭을, 아무도 범접하지 못할 비장한 눈빛을, 도무지 속을 내보이지 않는 덤덤한 표정을 나는 내 눈으로 보지 않고도 충분히 상상할수 있다. ㅡ그래도 애들은 김씨네 애들인데, 알릴건 알려야지. 하고 외삼촌이 말했을 것이다. ㅡ아니, 이제 이 애들은 우리 이씨네 애들이예요. 저 이순희의 애들이라고요. 엄마의 목소리는 차겁고도 단호했을것이다. 후우ㅡ 하고 외삼촌이 머리를 저었지 않았을까. 아직 너무 젊고 너무 고운 여동생의 구만리같은 인생을 생각하면 외삼촌의 가슴은 터질듯 미여져왔을것이다. 어떻게 김씨네 애들이 이씨네 애들로 될수 있겠는가. 그것은 철부지 여동생의 어리석은 미련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언젠가는 만나게 될 김씨네 사람들앞에서, 그 집 사람들의 한치의 도움없이 버젓이 키워낸 그 집 장손과 장손녀를 보여주며 ㅡ저 할만큼 했습니다 오로지 그 말 한마디를 못박아주기 위해 바득바득 버티고 싶어하는 철부지 여동생. 하지만 인생이란 그 숙엄한 단어를 어떻게 그런 한마디 말따위하고 바꿀수가 있겠는가. 아마도 약간의 시간이 필요할것이라고 외삼촌은 생각했을것이다. 살아보거라, 그리고 다시 생각해보거라, 지금보다 더 힘든 날들이 너를 찾아 올거다, 그때 내 다시 오마. 하고 외삼촌은 떠나갔었다. 3 외삼촌의 말은 조금도 그른데가 없었다. 거짓말처럼 밭은 일하는 사람의것이 되였고 아버지처럼 떠돌기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장사는 그제서야 정말 돈이 되는 시절이 되였지만 혼자 몸으로 아이 둘을 거느려야 했던 엄마에게는 역시 녹녹치 않은 세상이였다. 빈 털털이로 새 동네에 와서 새 생활을 시작해야 했던 엄마에게는 유한한 봉급을 쪼개쪼개 쓰는 방법뿐이 없었다. 탈곡장 보초막집 신세를 면하려고, 나와 오빠를 집같은 집에서 길러보려고 엄마는 악착같이 모았었다. 요즘으로 말하면 엄마는 “리재”의 귀재였었다. 아껴먹고 아껴쓰고 티끌같은 돈을 차곡차곡 모으는 일은 둘째라면 서러워할 엄마의 장끼였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아무래도 턱없이 부족했을것이였다. 예하면 오빠가 친구들에게서 좀처럼 넘겨받지 못하는 축구의 패스거나, 새로 사귄 친구들이 물을때 내가 도무지 당당히 대답해줄수 없는 우리 집 상황같은것이 말이다. ㅡ 얘는 아버지가 없어, 얘건 적게 받자구. 마을 어린이집 선생님들이 학비를 받을때마다 수군거리며 나를 돌아보던 그 눈길을, ㅡ느이 아버지는 어디 갔냐? 하고 능글거리며 내게 말을 툭툭 던지던 동네 부랑뱅이 아이들의 그 웃음을, 나는 평온하게 받아들일수가 없었다. 나만 그러했을까. 어스름 저녁녘에 돌아온 새침한 오빠의 피멍든 입귀는 무엇이였으며 담장너머로 엄마에게 실없는 농을 걸다가 자기 아내에게 끌려가는 동네 아저씨들은 또 무엇이였을까. 그렇게 살아가는 동안 엄마는 외삼촌의 마음을 차차 알아갔을것이다. 할머니네가 아직 엄마를 찾아오기전에, 외삼촌의 “좋은 일”이 먼저 우리를 찾아왔었다. ㅡ부인이 이태전에 병으로 돌아갔단다. 단위 좋고 집도 있고, 큰 시내 사람이여서 그쪽으로 전근도 될거다. 그만한 자리가 어디 흔겠냐? 그것이 외삼촌의 “좋은 일”이였다. 외삼촌이 자전거를 밀고 마당을 지나 바자문에 잠깐 멈추어섰을때 나는 한창 마을 어린이집에서 선생님께 격려상으로 받은 초록색 종이제비를 손에 들고 달려오는 중이였다. ㅡ그쪽 애들은 다 컸다지만, 그래도 둘다 데리고 가기는… 하고 말하다가 외삼촌이 문뜩 나를 내려다보는것이였다. ㅡ오라버니! 엄마가 화를 내듯 반짝 머리를 들며 언성을 높였었다. ㅡ안다, 알어. 그게 아니라… 암튼 얘기는 해야지 않겠니? 내가 하마, 김씨네 집안에도 무슨 법이 있을게 아니냐? 외삼촌은 자전거핸들을 잡고 잠깐동안 여동생의 가엾은 어깨를 측은히 내려다보았었다. 하나밖에 없는 여동생이 자신의 살덩어리 둘을 데리고 재가를 결정해야 할때, 그 살덩어리들의 원천에게 알려야 할 의무와, 그 애들을 누릴수 있는 권리에 대한 허락을 받아내야 하는 동시에, 오라버니로서 여동생이 몇해동안 혼자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온것에 대한 이해와 인정도 같이 받아내고 싶었을것이다. 외삼촌이 자전거에 몸을 훌쩍 태우고 떠나가고 나서 엄마는 묵묵히 내 손을 잡고 돌아섰다. 집을 에워싸고 쌓은 나즈막한 토담 귀퉁이에서 팔각 군대모자를 눌러 쓴 오빠가 불쑥 나타나더니 아무말없이 우리를 지나쳐서 쌩하니 집안으로 들어가는것이였다. 그러나 그는 여느때와 같이 숙제를 깔끔히 완성하였고 엄마를 도와 이웃집 대장 할아버지네에 가서 물도 두 바게쯔 길어왔었다. 부뚜막곁에 세워진 배불뚝이 물독안에 찰랑찰랑 물을 부어넣으면서 오빠는 그렇게 얘기했었다. ㅡ엄마, 시내에서는 이렇게 물을 길어먹지 않아도 된다면서? 그러고는 윗방으로 올라가 책을 펼치고 앉아 밥이 되기를 기다리는 것이었다. 나는 오빠보다 어렸고, 오빠처럼 철이 들지도 못하였다. 뭔가 심상치 않음과 불안함을 느끼면서도 나는 그것들이 다 무엇인지 알수가 없었다. 엄마가 아궁이앞에서 불을 지필때 불빛이 어른거리던 얼굴만이 흑백의 예술사진처럼 내 기억에 남았다. 걱정과 수심이 가득 찬듯한 눈망울, 불안하게 고요한 표정의 얼굴, 미구에 애원하듯 나를 바라보는 흔들리는 그 눈빛. 엄마는 아무것도 알수 없고 아무런 결정도 내릴수 없는 내게 물어보고 싶어했다. ㅡ새 집에 이사갈까? 불을 피우지도 않고, 구들에 연기도 나지 않는 시내집에. 거기 학교는 훨씬 더 크고, 친구들도 훨씬 더 많대. ㅡ싫어, 하고 내가 대답했었다. ㅡ왜? 엄마의 목소리는 나를 설득시키는 것이 아니라 내게 설득당하고 싶어 하는듯이 들렸다. ㅡ큰 학교가 뭐가 좋아서? 친구 많다는것도 거짓말이야. 여기 있는 내 친구 봉순이는 어쩌라구? 나는 얼마나 이기적이였던가? 내 친구와 내 책상과 내 이불과 내 익숙한 모든것을 떠난다는게 싫어서 나는 무조건 싫다고 하였었다. ㅡ그래? 엄마는 이 집에서 사는게 힘이 드는데. 불이 잘 들지 않으면 구들을 뜯어야지, 이영 한번 올리자해도 동네 사람들 손을 빌려야지… 그래서 내가 약빠르게 대답했었다. ㅡ엄마는 그게 힘이 들어? 이영이야 2년에 한번씩 올리는거고, 구들 뜯을때는 오빠랑 내가 도와주잖아. 내가 더 많이 할께, 그러면 되잖아. 엄마는 지금도 가끔 그날의 얘기를 외우군 하였다. ㅡ너 때문이야. 어린것이 뭔 구실을 그럴듯이 조목조목 대여가면서 나를 설득하더라. 나는 그런 말을 들을때마다 어이가 없었다. 나도 내가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했던지 알수가 없는데 어른이였던 엄마는 왜 그것을 내게 뒤집어씌울수 있단 말인가. 더군다나 엄마는 새 아버지와 새 오빠들 얘기는 꺼내지도 않았던것 같았다. 물론 그 얘기를 꺼냈더라해도 나는 똑같이 머리를 흔들며 ㅡ싫어, 새 아버지는 내 아버지가 아니고 나는 내 오빠가 있는걸 뭐. 하고 대답했겠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엄마가 또 무슨 방법이 있어 나를 구슬릴수 있었겠는가. ㅡ그래, 그치만, 엄마는 남편이 필요하단다. 니들의 아버지가 아니더라도 니들에게 약간의 그늘이 될수 있다면 나는 그런 사람이 필요하단다. 하고 엄마는 내가 절대로 이해할수 없는 얘기들을 할수 있었을까. 그것은 애초부터 온전히 엄마 혼자서 결정해야 할 일이였다. 엄마가 해야 할것은 점을 치듯 아무것도 모르는 내게 선택을 맡기는것이 아니라, 혼자만의 결정이 끝난후에 나와 오빠에게 그것을 통보하는 일, 그리고 우리가 새 생활에 적응할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 그런것이여야 하였다. 엄마는 과연 엄마답게 기어이 그 책임을 내게 지우려고 애를 썼다. 얼떨결에 내가 엄마의 또 하나의 원망이 되였던것이다. 담장너머에 부리워놓은 작은 산같은 석탄더미를 보면서 그 다음날의 저녁녘에 퇴근하고 돌아온 엄마는 내게 소리를 질렀다. ㅡ 빨랑 가서 광주리 갖고 와라! 새 집에 가면 이런 고생 안해도 된다 그랬지! 멍청한 기집애! 엄마가 정말로 화가 많이 난것 같아서 나는 찍소리 한번 못내고 쪼르르 창고로 달려가 광주리를 내다 끌고 갔었다. 화가 나면 힘도 더 세지는것 같았다. 엄마는 광주리에다 석탄을 그득 퍼담았고 힘에 부쳐 어깨가 찌그러지는 오빠와 둘이서 각기 손잡이 한쪽씩 잡아들고 창고로 바지런히 날라갔었다. 나는 나대로 도운답시고 바닥에 구멍이 난 작은 양철소랭이에다 석탄을 조금씩 담아가지고 질질 끌어서 날라갔었다. 얼굴이며 손이며 옷섶마다에 석탄가루가 거뭇하게 묻어났었다. 몇번을 들락거리고 나서 나는 곧 숨이 턱에 닿아 헥헥거렸다. 오빠도 얼굴이 벌겋게 상기되여 땀을 줄줄 흘리며 비칠거리고있었다. 엄마만이 갈수록 힘이 더 생겨나는지 씨익씨익 숨을 몰아쉬면서 퍽퍽 힘차게 삽질을 해대는 와중에도 나한테 바락바락 고함을 질러대고있었다. ㅡ 겨우 고깟거 담고서 빨랑빨랑 못가냐? 지집애, 옷소매에 검댕이 묻히지 말라고 했어 안했어? 할머니와 큰 삼촌은 바로 그 때에 우리 집뒤 담장을 따라 보따리를 이고 나타난것이었다. 엄마와 오빠가 먼저 앞서서 창고로 들어갔고, 나는 한창 소랭이에 석탄을 담아서 낑낑거리며 밀고 바자문에 들어서려던 참이였다. ㅡ 이 집이랬제? 하고 할머니가 삼촌에게 묻고있었다. 나는 허리를 굽히고 엉덩이를 내밀고 땅바닥에 붙은 소랭이를 밀던 자세에서 기여 일어나 검푸른 어두움의 자락을 덮고 온 두 사람을 조심스레 올려다 보았다. 근육이 잘 발달된 건장한 체격의 청년과 아직 정정한 곧은 체격의 할머니였다.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하여 두 사람의 얼굴은 자세히 들여다 볼수 없었지만 두 사람 모두 깡마르고 작달막한, 아직 담장높이만큼도 자라지 못한 나를 내려다보고 있음은 느낄수가 있었다. 나는 갑자기 어딘가 부끄러워나서 꾀죄죄한 손을 옷섶아래에 감추고는 운동화로 석탄이 담긴 양철 소랭이를 슬쩍 옆으로 밀어버렸다. 그들이 아직 뭐라고 말을 묻기 전에 기척을 들었는지 머리에 흰 수건을 동여맨 엄마가 빈 광주리를 들고 창고에서 오빠와 같이 스적스적 걸어나왔다. 내 앞 바자문곁에 서있는 두사람을 보았지만 미처 알아보지 못하고 곧장 그들의 앞에까지 같은 속도로 걸어나왔다. 할머니가 먼저 엄마를 알아보았던 모양이였다. 이고있던 보따리를 땅에 버리듯 던져내려놓더니 흠, 흑! 울음을 터뜨리며 엄마앞에로 한걸음에 다가서는것이였다. ㅡ 그려, 옳거이! 이 못된것아! 헉… 어이구 ~ 이 천하에 못된거!... 할머니는 쓰러지듯 엄마의 어깨를 부여잡고 엄마의 둥둥 소매를 거둔 맨 팔뚝을 주먹으로 퍽퍽 소리나게 내려치였다. 엄마의 광주리는 할머니의 주먹질때문에 땅바닥에 댕그렁 나동그라졌고 엄마의 어깨는 그제서야 우스스 떨리고있었다. 얼마나 지독하게, 얼마나 오래동안 참았던 울음이였을까. 할머니의 사정없는 주먹질때문에 엄마는 우리가 보는데서 처음으로 엉엉 소리내여 울었던것 같았다. 그래서 그날밤은 참말로 개운하고 기분좋은 밤이 되였었다. 오빠는 석탄 광주리를 씨엉씨엉 날라주던 삼촌의 힘있는 팔뚝이 좋았을거고, 나는 할머니가 이고 온 보따리속의 먹을것들이 좋았었다. 옛다 하면서 한줌 가득 사탕을 쥐여주며 할머니가 구슬리자 나는 단박에 지조를 잊고 넘어가서 “할머니!”하고 입에 설은 호칭을 불러주었었다. 그 한마디에 할머니는 다시금 끅 목이 메여하시더니 “오냐, 내 새끼” 하면서 나를 한품에 그러안고 숨이 막히게 안아주는것이였다. 나는 할머니의 품에서 간신히 코구멍을 벌름거리며 내게도 정말 할머니가 생겼다는 실감나는 기쁨에 겨워서 전에 없이 흥분되였던것 같았다. ㅡ헛참, 어머이, 쟤들 좀 보세요. 피줄이 무엇인지… 하면서 엄마가 까르륵 뛰여 다니며 장난질 치는 나를 곱게 흘겼던것 같았다. 미구에 더는 졸음을 이길수가 없어서 할머니와 엄마의 가운데를 비집고 들어가 누워서 줄나게 하품을 하였던것 같았다. ㅡ고상 많았제? 말 하믄 머 하겄나? 안해도 뻔하제. 까무룩 내가 잠들기전에 할머니가 그렇게 말하였었다. ㅡ욕 많이 했제? 시집이 너무 무심타고. 그러나 엄마의 목소리는 시종간 들려오지 않았었다. 무슨 얘기를 어떻게 나누었던지 할머니와 엄마는 그날 이후 다시 사이좋은 고부간이 되였었다. 엄마는 우리처럼 매년 겨울방학에 할머니네로 가서 설을 쇠지는 않았지만 우리를 할머니네로 보내는 일에는 반드시 명심을 하군 하였다. 그리하여 나는 오빠와 나를 데리러 오는 큰 삼촌이나 둘째 삼촌을 따라 사람과 짐들이 붐비는 버스를 타고, 또 툴툴툴툴 뒤뚱뒤뚱 논밭길을 달리는 삼륜차를 타고, 한적한 시골인 할머니의 동네로 매년 겨울마다 갈수 있었던것이다. 악착같이 모아서 집을 사고, 책을 사고, 교육비용을 저금하며 살아가는 엄마와 달리 할머니는 아주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었다는것도 그때부터 느끼기 시작하였다. 엄마는 수많은 위인전을 사주며 우리에게 읽히면서 부담스런 기대를 하고 사셨지만, 할머니의 양육이념은 “몸도 튼튼, 마음도 튼튼”한마디로 일축할수 있을만큼 소박하고 현실적이였다. 할머니는 종래로 자식들에게 싫어하는 공부를 강제로 시키는 짓을 하지 않았으며, 사람들앞에서 책잡히지 말도록 예의바르고 눈치있게 행동해야 한다고 강조하지도 않았다. 애들을 생겨먹은 그대로, 기죽이지 않고 키워내겠다는 것이 할머니의 신조인듯 하였다. 창고에 늘 풍족한 먹거리들도 우선 건강하게, 먹고 싶은건 먹으면서 살아야 한다는 할머니의 변함없는 생각때문인것 같았다. 내가 갈때마다 설대목이였다는 것도 있었지만 동네 여느 집보다도 항상 풍성하게 먹었다는것, 당장 먹을것이 없으면 먼저 꿔서라도 먹고 본다는 할머니네 가풍은 굳이 광고를 내지 않아도 인근에서 다 알고있던 사실이였다. 이젠 칠칠한 청년들이 되버린 고모들과 삼촌들과 같이 노는 일도 무척이나 즐거웠었다. 자신의 상황에 너무 민감했던 나머지 스스로 친구들 중심에 서지 못하고 늘쌍 변두리에서 끄적거리던 답답한 우리 형제와 달리 또래들을 모아놓고 다짜고짜 호령을 하는 우락부락한 성격의 삼촌들 모습은 내게 참으로 신기한것이였다. 친구랑 늦게까지 돌아다녔다고 비자루를 거꾸로 잡아드는 할머니를 피해 쏜살같이 도망가면서도 킬킬 웃어대거나 칼칼거리며 한두마디 대드는 고모들의 모습도 참으로 신선한 충격이였다. 아, 사람은 저렇게도 살아갈수 있는것이구나 하고 그때의 나는 어떤 의미에서의 자유를 느꼈던것 같았다. 아버지가 없다거나, 살림이 궁색하다는것 모두가 결국 자아위축의 구실이 될수 없다는것을 심심히 깨달았던것이다. 엄마가 알려주었었다. 나의 아버지가 익사하기 벌써 전에 할아버지가 먼저 돌아가셨다고. 화재였었다고 했다. 어지럽고 지저분한 마당과 부엌과 안방 윗방 할것없이 불이 잘 당기는 물건들로 널려있었는데다가, 곤드레 낮술에 취해서 미처 정신을 추스리지 못한 할아버지는 그 맹렬한 불길을 뚫고 나오지 못했다고 하였다. ㅡ미리 연기에 취했던기라. 그라고 마이지 몬하게 했는데도 무신 소용이던가? 다ㅡ 지 팔자탓이제. 석탄을 날라주던 그날밤에 할머니가 엄마에게 얘기했었다고 했다. ㅡ정신이 없는기라. 마, 넝감은 없고, 집은 다 태삐맀고, 철읍는 서나들은 찡찡 거려쌌고, 하늘이 노래지는기라. 그라도 어쩌갔나? 살아야제. 안 그렇나? 하고 할머니가 덤덤하게 말했다고 하였다. 그 순간 엄마는 문득 할머니가 가여워졌다고 하였다. 원망할 시집조차 없는 할머니, 위로받을 친정마저 없는 할머니, 할머니에게 있었던것은 부랑뱅이 남편이 남기고 간 일곱명의 자식들뿐이였다. 무슨 이유로 이런 시어머니에게, 그것도 남편을 낳지도 않은 새 시어머니에게 원망같은것을 할수 있단 말일까. 엄마는 아마 그 시각 할머니가 존경스러워졌을지도 모른다. 
1    [중편]빼앗긴 것들(김금희) 댓글:  조회:1971  추천:27  2010-08-03
중편소설  빼앗긴 것들 김금희 1세상을 살다가 드디여 간절히 원하던 그 무엇을 얻었을 때 당신은 문뜩 그런 생각을 해본적이 있는가? 사실 얻음에는 그 어떠한 경우에도 엄연한 대가가 있었다는것을. 당신은 그 얻음의 대가를 미리 알아서 지불하기를 원했을수도 있고 혹은 대가가 있다는것을 감감 모른채 얻는것에만 급급했을수도 있다. 그것을 얻고나서 정신을 바짝 차리고보았을 때는 이미 원하지 않던 그 무엇을 빼앗겼을수도 있다. 그런면에서 볼 때 이 세상은 참으로 공평하다고 말할수도 있을것 같다. 그런데 사람들은 흔히 세상이 공평하길 바라면서도 자신한테만은 다른 사람에게보다 좀 더, 좀만 더 너그럽기를 바라고있지 않는가? 사람과 사람 사이 최초의 충돌과 모순은 바로 그런 생각에서 생겼을수도 있다. 아담의 첫아들인 가인은 하나님이 동생 아벨의 제사만 기꺼이 받으셨다고 질투한 나머지 돌로 쳐죽이는 참사를 빚어냈다고 하니 그후의 인간들은 더 말할나위도 없을것이다.  북적거리며 일을 하던 직원들과 들락날락 분주히 굴던 손님들이 다 빠져나가 내장을 훑어낸 한마리 상어 같은 텅빈 회사건물을 나오면서 나는 홀로 쓸쓸하게 그런 생각들을 해보았다. 넓은 주차장에도 혼자 구을러갈수 있는 성한 차들은 다 구을러나가고 문이 뜯겨졌거나 바퀴가 빠졌거나 또는 휴지처럼 쭈그러진 철판으로 겨우 몸을 가리고있는 심한 “중증환자”들만 구석에 덩그러니 남아있었다. 그러면 내가 얻은것은 무엇이고 빼앗긴것은 무엇일가? 얻은것이 더 큰 리익일가, 빼앗긴것이 더 큰 손실일가? 그것에 대해서 나는 당장 뭐라고 정리를 할수가 없었다. 어떤것들은 반드시 일정한 시간이 지난 뒤에야 돌아보고 진실한 평가를 내릴수 있기때문이다. 그럼에도 나는 이 회사 대문을 나오는것을 서슴치 않았다. 지금 나로서는 이렇게밖에 할수 없다고 자신을 설득하였지만 아직 나자신이 나의 선택에 대해 자유로운것은 아니였다. 대문을 나서며 경비실을 지날 때 래일이나 모레, 혹은 좀 더 지난후의 회사가 어떻게 될지 전혀 모르고있는 경비아저씨가 문을 열고나와 허리를 굽실거리며 친절하게 인사를 했다. “임경리님, 늦게 퇴근하시네요.”만약 이 량반이 회사가 곧 부도날수도 있다는것을 알았더라면 어떻게 했을가? 그때에도 나에게 이렇게 깍듯이 임경리님, 하고 불러 줄가? 그것은 아무도 장담할수 없는 일이였다. 십중팔구의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않을것임을 나는 알고있기때문이다. “성심자동차정비유한공사” 회사대문에는 11개월전에 새로 올린 간판이 그대로 덩그러니 붙어있었고 그아래에는 “성심성의로 당신을 모시겠습니다”라고 쓴 광고구가 양복 받쳐입고 넥타이 단정히 맨 허풍쟁이 신사처럼 위선이 가득한 웃음을 짓고있었다. “성심성의라?”나는 이런 광고글귀가 회사의 본질과는 전혀 상관이 없을수 있다는것쯤을 아는 사람이다. 나는 허무하게 입을 한번 쩝 다시면서 이쯤에서 티끌의 미련도 없이 돌아서기로 하였다. 사실 나는 제법 눈치가 빠르며 두뇌회전도 빨라서 아둔한 사람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썩 약아빠지거나 사람을 마음대로 휘두르는 성격도 아니다. 나를 보고 “착”하다고 하는 사람들이 꽤 많았지만 솔직히 나자신은 그런 말을 듣는것이 별로 기쁘지는 않았다. 요즘에 들어서 “착”하다는 말은 자칫 “바보스럽”다거나 “제 밥그릇 하나 못챙기”는, 뭐 그런 물렁한 사람에게 자주 쓰이기때문이다. 돌이켜보면 나는 정말 “자기 밥그릇 한번 완벽하게 지켜본”일이 없었던 사람이다. “밥그릇 한번 지키려고” 다른 사람들과의 충돌이 불가피하게 될 때마다 나는 차라리 일찍 포기해버리는수가 많았었다. 사람들은 자칫 내 밥그릇이 될번했던것들을 가져가면서 나더러 사람 참 “착”하다고 하였지만 사실 따지고보면 나 역시 내 밥그릇쯤은 제대로 지켜보고싶었던 사람이였다. 길을 건너 모퉁이를 돌아서 나는 새로 지은지 얼마 되지 않은 전철역으로 들어섰다. 내가 있는 아빠트까지는 거리가 한참 되여서 택시를 타기에는 돈이 아깝고 뻐스를 타기에는 너무 붐벼서 여직 이렇게 전철을 타고 다녔다. 퇴근시간이라 사람들이 꽤 많았다. 전철에서 좋은 자리는 중간쪽보다 의자가 많은 앞뒤 량켠이다. 그중에서도 의자 바로 앞, 낮은 손잡이가 달려있는 구석진 저 자리는 한꺼번에 4개의 의자를 마주하고있어 앉아갈수 있는 기회가 가장 많은 자리에 속한다. 나의 맞은켠에서 항아리 같은 허리를 휘두르며 걸어오던 한 중년아줌마 역시 그 자리를 눈독들이고있는것 같았다. 나는 좋은 자리나 순서따위를 가지고 사람들과 “눈치싸움”을 해본적이 얼마 없었다. 그것은 내가 “고상”해서라기보다는 그런 싸움에서 반드시 이겨낼 자신이 부족했기때문이다. 패배당한 사람이 아니라 일부러 져준듯한 여유를 부리는 사람의 표정을 짓는것, 그것은 나의 특기였다. 나는 어쩔수 없이 그런 인간이다. 그런면에서 나는 삼촌과 너무 닮지 않았다. 만약 내가 삼촌을 닮아서 사람들과의 “기싸움”에 아주 능한 사람이였더라면 어떠했을가? 삼촌은 자신을 닮아 “밥그릇 빼앗기”에 능한 내가 자랑스러웠을가 아니면 이렇게 “착”하기만 해서 아무에게나 밥그릇을 내주는 내가 더 다행스러웠을가? 나는 지금도 삼촌의 마음을 다 알수는 없었다. 아니, 이제 그 회사를 나온 마당에 삼촌에 관한 것이나 다른 어떤것도 알고싶지 않을거라고 나는 생각했다. 결국 나는 “명당자리”를 아줌마에게 내여주고 그옆의 손잡이에 몸을 기대섰다. 의자 넷을 마주하고 선 아줌마가 우선 순위였고 그다음은 곧바로 내게 기회가 차례질수 있기때문이였다. 전철이 덜컹거리며 달리는 동안 먼저 내릴 손님이 누구일가고 앉은 사람들의 표정에 너무 티나게 신경을 쓰고있는 아줌마와 달리 나는 머리를 수굿하고 핸드폰을 꺼내 짐짓 게임을 하는 여유도 보였다. 사람들에게 온갖 체면 다 구기며 작은 리익 챙기는 가소로운 인간이기보다 “고상”하게 살다가 문득“행운”을 거머잡은 인간으로 보여지고싶었다. 그래서 나는 삼촌과 근본적으로 다른 사람인것이다. 삼촌과 다른것이 너무 당연한 리유는 우리들의 피에 물이 절반 섞여있기때문이다. 나의 친 할머니는 삼촌의 생모가 아니였기에. 지금도 삼촌을 생각하면 나는 어렸을 때 돌아가신 할아버지 생각이 떠오른다. 할아버지는 그리 잘 생긴 사람은 아니였지만 삼촌처럼 카리스마가 대단한분이라고 했다. 타고난 군인기질로 하여 부대에서 사령관직에까지 올랐으며 품은 녀인들도 많아서 내가 알기로도 네명이나 되였다. 조선에서 만난 첫째 녀인을 제쳐두고 정식으로 혼인을 한 둘째 녀인한테서 아버지를 보았다고 하였고 세번째 녀인은 종군간호사출신으로 둘사이에 자식이 없었으며 지금 있는 할머니, 즉 삼촌의 생모하고는 족히 열한살차이로 삼촌을 비롯한 아들 셋에 딸 넷을 보았다. 그외 잠시 만난 녀자들이 얼마나 더 있었는지 이루 헬수 없었고 만난 녀인들마다 미인들이였다고 한다. 차가 어느역에인지 도착하자 아줌마가 호시탐탐 노리던 네 의자중 두 의자에 앉았던 사람이 한꺼번에 훌쩍 일어나 내려가는 바람에 자리가 두개씩이나 나지게 되였다. 아줌마가 배추통 두개를 합쳐놓은것 같은 엉덩이를 그중 하나의 의자에 밀어넣고 앉자 드디여 내 차례라고 움찔 앞으로 한걸음 내디디는데 뒤쪽에서 마른 팔꿈치 하나가 불쑥 튀여나와 신사처럼 느긋이 움직이는 나를 헤집고 간발의 차이로 내 먼저 의자에 털썩 앉아버리는 사람 하나가 있었다. …?! 이런, 몰상식한 인간이라구야. 큰 일도 아니고 기껏해봐야 잠간 앉아갈수 있는 의자 하나였을뿐인데도 나는 기분이 영 더러웠다. 게다가 그 얌체 같은 사람은 나보다 썩 후에 차에 오른 사람이였으며 서있는것이 힘에 부칠것 같은 로약자도 아닌 젊은 남자였다. 누가 굳이 써붙여놓지 않아도 이 도시에서 전철을 탈 때에는 이런 규칙이 있었으니 첫째는 로약자한테 자리를 양보하는것과 둘째는 먼저 오른 사람 순위, 혹은 의자와 가까운 거리에 서있던 사람의 순위로 자리를 차지한다는 그것이다. 이런것들은 의무가 아니고 량심에 따라서 하는것들이기에 간혹 가다가 이렇게 량심이나 도덕원칙보다 자기 리익을 먼저 앞세우는 인간들때문에 약간의 흐트러짐을 보이기도 한다. 어쩜, 쯧쯧… 나는 놀이방에서 잘 놀고있다가 문득 다가온 다른 아이한테서 장난감을 빼앗긴 어눌한 아이처럼 맹랑하고 불쾌해났다. 아마 내가 어렸을 때 놀이방이 정말 있었더라면 실제로 그런 일들이 비일비재하지 않았을가 나는 생각하였다. 세상을 살면서 자기 밥그릇 지킨다는것이 바로 이렇게 자리 하나를 차지하는것과 별반 다르지 않을수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어떻게 해야 자기것을 지킬뿐만아니라 더 많은것을 차지할수 있는가 하는것은 나만한 정도의 경험과 지력을 갖고있는 사람이면 다 알만한 도리이다. 다만 그렇게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머리속으로 생각만 할뿐 도무지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는 사람이 있을따름이다. 불행스럽게 나는 할아버지의 “우수한” 기질을 물려받지 못한 아버지를 닮아서 역시 밥그릇 빼앗기에 서툰 사람이였다.네 아들중 할아버지의 유전자를 가장 많이 얻어가진듯한 사람은 바로 우리 회사의 공장장, 큰 삼촌이였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실 때에 이미 장성한 아버지는 어머니와 결혼하여 따로 살림을 하고있었던차라 딱히 계모와 가까이 하고 지낼 리유가 없다고 생각했는지 돌아가시기전에 한두번정도만 찾아뵈였다고 하였다. 그러나 유난히 피줄에 집착하는 할아버지의 마지막 반려자답게 할머니는 여전히 아버지를 장남으로, 나를 장손으로 받들고있어서 나는 피 한방울 섞이지 않은 할머니를 나의 할머니이상으로 마음속에 모시고 자주 찾아뵈였었다. 할머니한테만은 무서운 효자였던 삼촌도 어르신의 생각을 받들어서 언제 한번 형노릇 제대로 못해본 아버지였지만 “우리 큰 형”이라고 아무앞에서나 당당히 말했으며 방학때마다 찾아가는 나에게도 “우리 큰 조카, 임씨네 7대 장손”이라고 부르며 극진히 굴었었다. 그랬다. 그때는 정말 그랬었다. 내가 삼촌을 존경하고 따랐던만큼 삼촌도 나를 아끼고 사랑했던것 같았다. 다른 어떤 리유나 속셈 같은것이 없이 순수한 혈육의 정에서 말이다. 전차가 거의 다달은 역은 오르내리는 인파가 기중 많은 큰 역이였다. 나는 멋없이 꺼내들고있던 휴대폰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내앞에 앉았던 사람들뿐만아니라 다른 곳에 앉았던 사람들도 륙속 엉덩이를 의자에서 떼여내고있었다. 삽시간에 전철안은 입구쪽으로 가서 내릴 준비를 하려는 사람들과 그틈에 좋은 자리를 먼저 차지하고 앉으려는 사람들로 뒤죽박죽이 되였다. 이런 상황에서는 아까 말했던 “누가 굳이 써붙이지 않아도 다 아는” 그런 원칙은 사라지고 먼저 엉덩이를 의자에 붙이는 사람이 임자였다. 인간들이란… 저렇게 작은 리익에도 몸살을 앓으니… 만약 경제공황이나 자연재해나 또 3차대전 같은 전쟁이라도 나게 된다면 인간세상은 과연 어떻게 될가? 자기 한 몸만 살겠다고 별짓을 다 할거다. 살려면 그렇게 해야 되고 그렇게 해야만 살수 있으니… 참, 육신을 입고 세상을 살아야 하는 인간노릇을 하기도 쉽지만은 않은 일이다. 이제 두역만 지나면 도착할수 있었으므로 나는 끝까지 “고상한” 품위를 지켜서 자리쟁탈전에 참가하지 않기로 하였다. 고작 5분동안 앉아가려고 사람들과 엉덩이를 밀치락거리고싶지 않았기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나다. 자신의 “본질”을 지키기 위해 작은 리익쯤은 쉽게 포기하는 “착”한 사람. 물론 오늘 내가 회사를 나오면서부터 나의 “착한 본질”에는 이미 타격을 입게 되였지만 말이다. 처음으로 내 이미지를 거슬러서 해본 선택, 하지만 일개 인간이 완전히 새 성품으로 바뀌자면 아마도 얼마간의 련습이 필요한 모양이다.  아빠트에 올라와서 나는 주섬주섬 물건들을 정리하였다. 회사까지 나온 마당에 이 도시도 하루속히 떠나고싶었다. 혼자 사는 로총각의 물건은 그리 많지 않는 법이다. 옷 몇견지와 신발 몇켤레, 그외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서류봉투와 카드 몇개뿐이니 큰 트렁크 하나면 족했다. 침대머리에 있던 책상서랍을 뒤지니 낡은 앨범 하나가 오도카니 남아있었다. 앨범속에는 아직 싱싱하고 순수한 소년의 모습이 담겨져있었다. 그중에서 나는 외제차를 타고 손을 차창밖으로 흔들어보이는 대학교시절의 촌티나는 사진을 보고 저도 모르게 푸-!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대학교 신입생일 때 삼촌도 금방 결혼하여 이 도시에 올라와 신접살림을 차렸었다. 몇호 안되는 조그만 시골동네에서 주먹이나 휘두르며 “왕노릇”을 하던 삼촌도 결혼을 하면서 도시진출을 해야만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모양이다. 워낙 가방끈이 짧은데다가 완전 “시골뜨기”인 삼촌은 조그만 정비공장에서 견습공노릇부터 시작했던것이다. 그래도 삼촌은 어른이랍시고 얼마 안되는 견습공 월급봉급에서 숙모 몰래 다문 얼마를 꺼내 나에게 찔러주기도 하였다. 사진은 언젠가 찾아와 밥을 사준 삼촌이 나의 기를 살려주느라고 그랬는지 들통나면 혼이 날것 같은 고객의 비싼 외제차를 끌고와 학교 대문앞에 세워놓고 기어이 찍어준것이다. 그뿐이랴, 오고가는 선후배들앞에서 민망스러울만큼 세모눈을 희번뜩이며 특유의 큰 목소리로 “우리 조카야, 우리 조카… 전 성에서 3등성적으로 이 학교 왔잖아…”하고 떠들어대기까지 하였다. 아마 그때 가방끈이 짧은 삼촌한테는 대학생 조카가 있다는것이 엄청 자랑스런 일이였었나보다. 새로 사귄 동료나 친구들과의 술자리에도 자주 나를 부르군 하였는데 “우리 조카 일류대학교 학생이야.”라는 말은 어디 가나 빼놓지 않는 맨트였다. 나를 대견스러워하고 나에게 살뜰히 하려고 애쓰는 삼촌이 그때는 진심으로 고마웠고 존경스러웠다. 물론 이런것은 모두 아주 오래전의 이야기들이다. 학교를 나와 7,8년간 전국각지를 떠돌아다니며 직장생활을 하다가 김사장을 만나 다시 엮이게 된 삼촌과의 나날들… 차라리 그때 삼촌과 엮이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가? 나와 삼촌은 오늘에 와서도 옛날 같은 정이 그대로 남을수 있을가?  2  물건들을 대충 정리하고 나는 아빠트를 내려와 부근의 음식점으로 발길을 옮겼다. 혼자 궁상맞게 밥 해먹기 싫어서 자주 들리던 식당, 이제 여기서 먹는것도 오늘 밤이 마지막일듯싶다. 아니, 이 모든것이 김사장때문일수도 있어. 나는 늘 시켜먹던 삶은 개발쪽 한접시를 상우에 놓고 매콤한 소힘줄무침을 반찬으로 맥주를 마시기 시작했다. 만약 내가 김사장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만약 김사장이 정비업에 뛰여들려고 했을 때 말렸더라면, 아니 삼촌만 소개시켜주지 않았더라면, 김사장이 기어이 삼촌이랑 합작하겠다고 우기지만 않았더라면… 그랬다. 삼촌과 김사장이 만나서 그 정비공장을 세우기까지 사실 너무나 많은 “만약”들이 도처에서 반전을 꾀하고있었다. 일이 이렇게 된 마당에 와서 그 많은 “만약”들이 다 무슨 소용이 있겠냐만 나는 그 “만약타령”이라도 해보아야 할걸 다 해보았다고 말할수 있을것 같았다. 흠, 그래. 삼촌의 정비기술은 이 업계에서 최고였지. 경영경험도 10년 가까이 됐었고. 일개 견습공에서 업계 최고가 되였다니 삼촌은 역시 삼촌다웠다. 발도 넓어서 이 지방 유지들을 거의 꿰차고있었기에 사업하는데 큰 도움이 될것도 당연한 일이였다. 정비업에 관심을 가지게 된 김사장을 도와 정보를 수집하다가 우연히 마주치게 된 삼촌은 그때 한창 잘 나가는 정비회사에서 나와 스스로 공장 하나를 세우려고 투자자를 찾던중이였다. 그런 삼촌을 놓칠리 없는 김사장이였다. 그때는 오히려 삼촌이 뜸을 들이며 확답을 주지 않았고 김사장이 나를 내세워 어찌하나 삼촌을 설득시키려 애쓰던 때였다. 삼촌이 겨우 머리를 끄덕여 본격적으로 일을 벌려나가자 그제서야 나는 처음부터 피동이던 김사장의 립장이 더욱 몰릴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할수 있게 되였다. 참, 불쌍한 량반. 그러게 나하고 해오던것처럼 승산이 있는 무역에만 손을 댈것이지 왜 이 나라, 이 도시까지 와서 삼촌 같은 사람이랑 엮여 기어이 사업 한번 거창하게 해볼 꿈을 꾸었다던가? 사업이라도 좋았다. 어차피 한국에서 하던 사업은 접고 몇년동안 장사로 짭짤한 수입을 보았으니 슬슬 들어와 정착하는것도 좋았다. 문제는 접어든 일에 깜깜 “문외한”이였다는것, 그럼에도 선진국냄새를 피우며 “과학경영”을 밀고 나갔다는것이다. 투자자로서 회사의 번영에 지극한 관심을 갖는 김사장도 김사장이겠지만 그렇다고 삼촌이 회사경기가 좋지 않기를 바랐겠는가? 스물셋부터 시작했으니 이십년 하고도 사년을 더 이 업계에서 잔뼈 굵어온 삼촌이 정비공장이 돌아가는 원리를 모를턱이 없었다. 들어오는 고객의 차를 받아서 기술공에게 넘겨주고 진단이 내려진후에 부품을 맞춰 주문하고 차가 완전히 출고하기까지 모든 과정을 속속들이 꿰뚫고있는 삼촌이다. 벤츠와 오디, 보마 같은 비싼 외제차 수리에서는 업계에서 삼촌의 기술을 릉가할 사람이 없다고 소문이 났었다. 어떻게 해야 직원들이 범할수 있는 오류를 최소화하고 전체 사원들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시킬수 있는가 하는것 또한 속셈 빤한 삼촌이다. 그런데 그의 체제를 사나흘에 한번꼴로 선진국 경영방식으로 바꿔보려는 김사장은 효률을 내기는커녕 사내 원칙을 헛갈리게만 하여서 직원들이 갈팡질팡 헤매게 한것이다. 삼촌과 의견이 갈리면서 다툼이 잦아지자 의심은 더 심해져서 늘 직원들에게 당일 들어온 차넘버를 일일이 확인하고 회사에 빚을 진 고객들의 신상을 조사하고 비싼 부품의 주문가격에 대해 도무지 믿어마지못해하였다. 나라면 몰라도 삼촌 성격에 그런것을 다 받아줄리 만무했다. 또 내가 김사장이라면 느긋하게 앉아서 경영을 삼촌에게 완전히 맡기고 투자금이나 회수했을것이다. 경영권 월권행위로 늘 다투던 두사람은 그예 개인감정까지 크게 상해버렸다. 벌써 다섯병째 마시고있지만 오늘 맥주는 물에 술을 탔는지 술에 물을 탔는지 씁쓰레하면서도 취하지는 않았다. “아줌마, 맥주 두병 더…” 나는 빈 술병을 주방에 대고 흔들어보였다. 알콜이 얼마간 들어가자 내 목소리도 두코드 높아진것 같았다. 아줌마는 “네-”하고 대답만 할뿐 머리를 들어보이지도 않고 자기 손의 일을 마무리하고있었다. “아이 씨- 술 떨어졌다는데…” 간덩이가 좀 커져서 나도 삼촌흉내를 내여 꼬장 한번 부려보려고 했지만 그것도 생각대로 잘되지는 않았다. 종종걸음으로 내게 다가와 빈 술병을 받아내가며 새 술 두병 더 갖다놓는 아줌마의 눈길이 “웬 안하던 주정이냐”라는 식으로 집요하게 내 얼굴을 따라다녔다. “보긴 뭘 봐? 으이씨-!”하고 삼촌이 혹시 주먹이라도 휘두르지 않을가 걱정되여 나는 마른 엉덩이를 반쯤 치켜들었는데 다행이 김사장한테 차마 그런 무지막지한 행각을 벌릴수는 없었는가보다. 라이터가 아니라 꺼져가는 담배불 하나만 들고있어도 전체 건물이 “쿵- 쾅-!” 폭발해버릴것만 같은 분위기의 사무실, 그날 내가 사무실에 들어섰을 때 삼촌과 김사장은 책상 하나를 사이두고 요행 마주친 암컷때문에 납작 엎드려 신경전을 벌이는 발정 난 수컷의 아나콘다 같이 씩씩거렸다.물어보나마나 경영상의 문제로 두사람이 또 크게 다툰것 같았다. 두사람의 의견은 점점 극단으로 치달아 서로 한치의 협상의지도 보이지 않던 무렵이였다. “쒸익-!” 삼촌은 바람소리가 들릴 정도로 몸을 휙 돌려 팔을 휘저으며 씨엉씨엉 걸어나갔고 홀로 남은 김사장의 눈길은 차가운 레이저빛마냥 삼촌의 단단한 등허리를 따라 열려있는 문께로 가다가 “ 탕-!” 문이 닫히는 순간 거기에 왕창 부딪쳐 산산이 흩어지고말았다. 그리고 그날 저녁이였다. “어, 그래, 왔니? 앉아라.” 삼촌은 다른 친구 두사람과 술잔을 마주치다가 한발 늦어 도착한 나에게 아는체하였다. 상우에는 삼촌이 주문했을 개발쪽 한접시와 삶은 개고기 한접시에 몇가지 볶음료리가 푸짐히 올라와있었다. “임경리, 한잔 하지.” 삼촌과 꽤 가까운 사이로 지내는 운송회사 진사장이 내게 수작을 걸어오며 술을 권하였다. “아니, 절로 하겠습니다. 맥주밖에 마실줄 몰라서…” 나는 유들유들한 목살을 출렁이며 내 술잔에 술을 기울이려고 하는 진사장을 급히 만류하였다. “아가씨, 여기 맥주요!” 모처럼 따라주는 술인데 주제에 사양한다고 생각할가싶어 나는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아가씨를 불렀다. 아닌게아니라 자리에 엉덩이를 겨우 소심하게 붙이고 앉아 달싹거리며 곁눈으로 훔쳐보니 진사장이나 그옆에 앉은 공안국 국장이나 삼촌까지 웬지 나를 보는 눈이 영 곱지 않은것 같았다. “쟤는 맥주만 마셔.”라고 설명하는 삼촌의 말에도 웬지 알수 없는 묘한 비웃음 같은것이 섞여있는것 같았고 “그럼 자기 편한대로 마셔야지.”라고 맞장구를 치는 두 술친구의 대답에도 이름모를 고까움 같은것이 스며있는듯싶었다. 이도저도 아니면 내 신경이 너무 예민해서 그런 느낌이 드는지도 모를 일이였다. 드디여 구원병 같은 맥주가 올라오고 나는 늦게 오면 석잔 마셔야 한다는 중국사람의 법대로 혼자 따라서 련이어 석잔을 꿀꺽꿀꺽 굽내였는데 오히려 삼촌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은 나의 “성심”에 대해 별 흥미도 없는 심드렁한 표정들이였다. 애초부터 그들의 상대가 될만한 인물이 아니였다는것을 나도 알고는 있었다. 7, 8년후에 다시 만난 삼촌은 그런 식이였다. 필요하다고 생각되면 “우리 조카”하고 살갑게 부르다가도 그것이 아니다싶으면 내 기분이나 감정따위를 무시해버리기 일쑤였다. 적지 않게 당했으면서도 나는 “우리 조카…”하고 부르는 삼촌의 소리에 금방 달려가군 하였으며 불러놓고는 나의 존재를 망각해버리는 삼촌에게 여러가지 핑게거리를 손수 만들어 리해해주려고 하였다. “이 바닥에서 영향력있는 인물들이니 교분을 두툼히 쌓아놓는게 급선무지…” 그날도 나는 삼촌한테 이런 핑게를 만들어주었다. 나를 이런 자리에 끼워주었다는 자체가 나에 대한 삼촌나름의 배려가 아닐가 하고 나는 한술 더 뜨기까지 하였다. 호탕한 웃음들을 터뜨리다가 연신 잔을 마주치며 변치 않는 “우정”을 약속하는 그들을 바라보노라니 나는 괜히 둘러리처럼 앉아있는 자신이 멋적어졌다. “그래, 임공장장, 걱정말라구. 당신 회사가 내 관할범위에 있는한 내 말 한마디면 결판이 날게 아닌가…” 공안국 국장이란 작자가 벌겋게 충혈된 눈을 여유있게 끔벅거리면서 삼촌의 어깨를 툭툭 쳤다. “국장님 그 말 한마디면 제가 시름놓죠. 일단 일이 제대로 해결되면… 국장님의… 그건 꼭… 제 말 무슨 뜻인지 알죠?…” 삼촌도 술이 꽤 잘되였는지 과장된 몸짓으로 공안국장의 손을 잡고 흔들어대였다. “단, 나는!… 공과 사를 철저히 구분하는 사람이라니까. 임공장장과 친한건 개인감정이고… 공무는 공무인것이라! 언제나 우린 법대로 일을 한다니까. 그건 임공장장 당신이 항상 명심해야 하는거라고…” 정계에 몸을 담은지 몇십년 더 될 이런 인물들의 말은 아직 사회생활에 령활하지 못한 나 같은 초학자가 들을 때에 자칫 정말로 대공무사한 관리인줄로 착각하게 하는 것들이였다. “그럼, 그럼. 당연히 그래야지. 당신은 아무 걱정없이 착실히 공무만 집행해주면 된다니까. 우리도 법에 어긋나는 일을 벌릴 위인은 아니지… 안그런가 임공장장?” 운송회사 진사장이 한마디 거들고 나섰다. 내가 오기전 이들사이에 무슨 말이 오고 간게 확실하였다. 삼촌이 혹시 일이라도 꾸미기로 했단 말인가? 술자리가 파하기까지 나는 혼자 맥주를 들이키며 불안한 추측에 시달렸다.  “아줌마, 이게 무슨 료리냐구? 이렇게 짜게 해서 손님들 다 고혈압 걸리게 할건가?”내앞에 앉았던 남자들 넷이 안주를 놓고 술을 마시다가 무엇이 고까왔는지 트집을 잡기 시작하였다. “손님, 죄송합니다… 제 입에는…” 나한테 눈살을 직선으로 꽂아주던 아줌마는 나보다 소리도 크고 덩치도 큰 손님들 앞에서 설설 기고있었다. “아니, 이게 그래 괜찮단 말이요? 이 아줌마 오늘 장사 다했네…” 남자들이 그릇을 덜러덩거리면서 귀에 거칠은 쌍소리를 주저없이 내뱉었다. “아니, 아닙니다. 당장 바꿔드릴게요… 새로 해드릴게요…” 절반 가까이 축이 난 료리그릇을 내여가며 아줌마는 연신 주방을 독촉했다. “그 료리는 싫으니까 다른걸로 해줘요!” 남자들이 한술 더 떴다. 세상은 그렇다. 약한놈한테 강하고 강한놈한테 약한척하는 것이 세상인것 같았다. 나도 한번 술병이라도 둘러메쳐볼가나… 일곱번째병의 맥주를 마시면서도 나의 간덩어리는 좀처럼 그 남자들만큼 부어오르지 못했다. “개자식,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2차로 노래방으로 옮겨 다시 술상을 벌렸을 때 나는 삼촌옆에 바투 다가가앉아 물었다. “삼촌, 정말… 하려구요?” “너 오늘 그 자식 나한테 하는 꼴 봤지?… 벵신… 나를 잡아보겠다고?… 내 이넘을… 넌 암말 말고 나 하는대로 따라만 와라.” 살이 툭 불거져나온 삼촌의 세모눈에서 살기가 번뜩거렸다. “삼촌, 나는…” 나는 두사람의 싸움에 관여하고싶지 않다고 말을 꺼내려는데 욱작욱작 혼잡한 소리가 나며 험상궂게 생긴 장정 서넛이 문을 탕 차고 들어왔다. “어, 임형! 어쩐 일이단가? 이 아우한테 련락을 다 하고…” 그들중 우두머리나 되는듯한 남자가 삼촌만큼이나 커다란 목소리로 지껄이며 다가와서 손을 내밀었다. “오랜만이유, 임형! 요즘 잘 나가신다면서…” “잘 나가긴 무슨… 암튼 잘왔다. 이쪽은 시 공안국 국장이시고 이쪽은 진형이다… 다들… 서로 잘 알고있지…” 삽시에 신분이 묘한 장정들과 이미 온 친구들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나돌았다. “알지, 우리도 구면인걸.” 공안국장이 눈을 가슴츠레 뜨며 느릿느릿 일어서서 장정이 내민 손을 한번 슬쩍 쥐였다 놓았다. 요란한 음악소리도 그쳐서 분위기가 더 조심스러워졌다. “그간 무사히 계셨습니까? 국장나리. 우리가 뵌지도 한참 되는것 같네요…” 장정들중 머리를 빡빡 밀은자가 선글라스를 벗어 웃쪽호주머니에 집어넣으며 머리를 까댁거려보였다. “왜들 이러시나? 여기 앉게…” 살벌한 분위기에 삼촌도 약간 당황한듯하였다. “임형, 이거 미안하게 됐수. 아우가 눈치없어서 타이밍을 제대로 맞추지 못했으니…” 빡빡머리가 부하들을 데리고 건들거리며 돌아섰다. “아니, 그럴 필요 없네. 나는 일이 있어 먼저 가야 하니…” 공안국장이란자가 휘익 일어나서 그네들 앞서 문가로 걸어나갔다. “국장님…” 삼촌이 따라나서자 그자는 멈춰서서 빡빡머리일행을 돌아보았다. “임공장장, 알만해. 어떻게 할려는지… 나는 오늘 이 사람 못본걸로 해주게… 얘기들 나누고 무슨 결정이 나거든… 그때 다시 얘기합세…” 빡빡머리들과 껄끄러운 사이임이 분명하였다. 흑과 백의 사람들을 다 꿰차고있다던 삼촌이 혹시 정말… “짜아식, 건방떨긴! 지나 내나 다 이 바닥 민생을 위해 일하는게 아닌가? 법대로 하면 저런놈들이 더 꺼먼놈들이라니까. 내 오늘 임형만 아니였으면…” 공안국장이 나간 뒤 껌을 짝짝 소리내여 씹으며 빡빡머리가 기분 나쁘게 씨벌여대였다. “형님, 어쩌겠습니까? 아량이 넓은 우리가 참아드려야지… 야, 야, 니년들은 술도 안가져오고 뭣하러 거기 섰냐?” 빡빡머리의 부하들이 거들먹거리면서 복도에 대기하고 서있는 웨이터들을 불렀다. “계집들은 다 얼어죽었다냐? 새로 들어온 계집들 불러봐라…” 복도에 어정쩡하니 서있던 웨이터들이 술을 날라오고 마담이 직접 아가씨들을 줄지어 데리고 들어왔다. “삼촌…” 분위기가 영 심상치 않았다. 그러나 삼촌은 그네들과 아주 익숙한듯 자연스럽게 술상을 다시 벌리고있었다. “혹시… 그쪽사람들이요?” 술잔을 부딪치며 흥청망청 분위기가 무르익어갈 때 나는 삼촌한테 넌지시 물어볼수 있었다. 삼촌은 대답대신 한쪽눈을 질끈 감아보이기만하였다. 삼촌이 김사장한테 화가 난건 리해가 되지만 이런 사람들까지 부르다니, 나는 아마 평생 가도 다시 마주칠 일이 없을 건달들과 부득불 술잔을 마주치면서 속으로 생각하였다. “알았어… 임형, 그런 일은 일도 아니지… 알어… 어느 정도 선에서 해달라는가 말만 해!” 시끄러운 음악소리, 노래소리속에서 “빡빡머리”가 하는 말은 띄염띄염 내귀에 들려왔다. 나는 삼촌이 언제부터 그런 생각을 가지고 그런 사람들을 만났는지 알지 못한다. 그날 있은 다툼때문에 충동적으로 먹은 마음인지 아니면 처음부터 이런 상황을 미리 예기하고 준비하고있었던것인지… 만약 처음부터 삼촌이 이런 계획을 가지고있었다면… 나는 삼촌이 점점 낯설어졌다. “그래서 너는 아직 멀었다…” 삼촌이 나를 쳐다보며 어깨를 툭툭 치면서 빙그시 웃었을 때 나는 씁쓸한 생각이 들어 대답을 할수 없었다.  3 언제 식당을 나왔는지 나는 정처없이 밤거리를 걷고있었다. 일이 어찌됐거나 우리들중에 결과적으로 가장 손해를 본 사람은 삼촌이 아니라 김사장이였다는 생각에 죄책감 같은것이 슬며시 가슴에 차기 시작해서 다시 참을수 없이 괴로워났다. 필경 김사장을 삼촌한테로 밀어넣은 사람이 나였기때문이다. 김사장과 내가 알고 지낸지는 3년, 원래 내가 다니던 회사의 거래처 사장으로 한국에서 자그만 규모의 자동차부품회사를 경영하고있다가 경기가 좋지 못하자 회사를 처분하고 다른 투자항목을 검토하던중이였다. 나와 알고 지내면서 “착하고” “믿음직스러운” 바보기질이 마음에 들었는지 여러 항목에 관한 시장조사를 많이 부탁했었다. 그 기간에 나는 충실하게 자료를 작성하여 보내주면서 신뢰를 꾸준히 쌓았고 김사장은 나에 대한 고마운 마음에 나를 한국에 초청해주기도 하였다. 그뒤 김사장은 나의 도움으로 중국과 한국간의 상품을 수출입하면서 꽤 짭짤한 수입도 보았다. 김사장이 정비업에 관심을 가지게 된것은 지난해 겨울부터였다. 업계 최고라는 평을 가진 사람이 나의 삼촌임을 안 김사장은 나를 내세워 백방으로 일을 성사시키려 하였다. 다른 서비스업보다 리윤이 훨씬 많은 정비업은 초창기만큼은 아니지만 아직도 호황이였다. 사실 회사를 세워서부터 김사장과 삼촌의 “기싸움”만 아니였더라면 그만하면 장사도 잘된편이였다. 설비도 그 도시 최고시설로 들여왔고 건물도 넉넉히 평수를 잡아서 일반고객의 휴식터는 물론 VIP고객룸까지 완벽하게 꾸며놓았다. 각종 신문과 텔레비죤에도 황금시간대에 광고를 넣었다. 설립후 세번째달부터는 매일 모수입이 7,8000여원 되였으니 비수기인 여름철을 감안한다면 결코 적지 않은 수입이였다. 거기다가 현금으로 들어오는 돈이 많아서 세무쪽 일을 보기에도 한결 쉬웠다. 내가 처음부터 찝찝하였던 일은 투자 당시 투자금을 전부 내 개인통장으로 들인 일과 내 이름으로 법인을 삼은 삼촌이였다. 여느때 같으면 서류를 확실하게 준비하고 시작했겠지만 상대방이 삼촌인만큼 나는 주저하지 않을수 없었다. 독자기업이나 합자기업은 여러가지 귀찮은 절차들이 있어서 수속을 번거롭게 하지 말자는 리유도 있었고 조카인 나의 개인자산이 투입되였다는 리유도 있어서 김사장을 설득시켰다. 물론 투자금 거의 대부분이 김사장의것이였지만 내가 투입한 자산도 내게 있어서는 전부나 다름없어서 국내법인을 세울거면 차라리 내 이름으로 하자는게 삼촌의 리유였다. 삼촌이야 투자금 한푼도 들이지 않았고 대신 기술과 인맥을 바탕으로 장사를 하였으니 자신은 회사지분도 싫고 공장경영에만 신경을 쓰겠다고 했었다. 나와 삼촌, 그리고 나와 김사장지간의 관계를 따져볼 때 중립상태인 나의 신분이 가장 그럴듯해서 결국 김사장이 삼촌과 따로 합의서를 쓰기로 하고 삼촌의 제의를 받아들인것이였다. “흠, 그래. 지금 김사장, 그 사람은 더 한심하겠지…” 나는 길가 차거운 벤취우에 너부러졌다. 늦가을 차가운 밤공기가 페부를 뚫고 흘러 들어왔다. “몰라, 이젠 아무도 몰라… ”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을거라고, 아무에게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을거라고 나는 입속으로 마녀가 일러준 주문을 외우듯이 혼자 내처 주절거렸다. “임경리, 왔어?” 그날 김사장은 한창 문어귀에서 점원아가씨들한테 뭐라고 교육을 시키고있었다. 새로 올린 간판에 특색요리사진까지 식당외벽에 붙여놓아서 그런대로 깔끔한 분위기가 풍기는 한식당이였다. 주방과 홀은 투명한 유리로만 칸을 사이두어서 손님들이 주방의 일거일동을 감독할수 있게 하였다. 홀에는 한국분위기를 내느라고 절반은 퇴마루식으로 낮은 조선밥상을 놓았고 절반은 다리가 뻣뻣한 중국사람들을 위하여 중국식밥상을 놓았다. 벽에는 김사장이 한국에서 가져온 인형이며 장구 같은 한국전통수공예품들을 걸어놓았고 남쪽벽 전체를 허물어서 탁 트인 유리벽으로 가득한 해살을 가게에 끌어들였다. 그외 2층은 칸칸이 막아 구들을 놓아서 조용한 이야기를 나누고싶어하는 손님들의 취향에 맞추었다. 그만하면 깔끔하고 고급스런 분위기의 인테리어였다. “며칠동안 회사에도 나오지 않고…” 김사장과2층의 방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 나는 문안삼아 말머리를 떼였다. 혹시 삼촌한테서 무슨 낌새라도 챈건가? “어, 식당도 신경써야지… 아직 매니저가 없어서 애들이 제멋대로다.” 오십대줄에 들어선 김사장은 나이보다 훨씬 젊어보이는편이였다. 젊었을 때는 따르는 녀자들이 한트럭은 되였을 미남형 얼굴에 수심 같은것이 잠간 흘러지나갔다. 자동차정비업도 그러했고 한식점도 그러했고 항목이 좋지 않은건 아니지만 모두 김사장의 전문이 아니라는것에 나는 반대표를 던졌다. 사업과 장사는 분명 틀린것이다. 중국과의 조그만 무역에서 리득을 보았다고 사업도 꼭 성공하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그러나 김사장 고집도 웬만하지 않아서 결국 내 의견을 무시하고 식당까지 벌이기로 하였다. 대신 돈을 그만큼 부은이상 위치도 가장 좋은 곳에 평수도 넉넉한 가게를 잡을수 있었다. 가게계약에, 식당영업허가증 수속에, 인테리어까지 내가 따라다니지 않을 때가 없었다. “뭐 이제 곧 온다면서요, 매니저.” 아직 삼촌한테서 얘기를 못들은건가 나는 유심히 김사장의 얼굴을 살폈다. 두가지 업을 한꺼번에 벌려놓으니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다. 삼촌은 회사경영을 맡아 한시도 회사를 떠날수 없었고 나는 요즘 회사재무부를 맡아 거의 매일 묶여있었다. 아무래도 식당까지는 무리라서 삼촌이 수소문하여 찾아본 매니저가 래일쯤 온다고 하였다. “알어, 공장장이 얘기했어.” 공장장이란 말을 뱉으면서 김사장은 눈썹을 약간 떨었다. 영 내키지 않은 모양이였다. 왜 그렇지 않을가? 여태 나하고 일을 할 때에는 전적으로 김사장한테 결정권이 있었고 나 또한 전심전의로 김사장의 사업을 위해 충실히 일을 해왔었다. “니말대로 식당은 나중에 하는거였다.” 김사장이 나에게 턱짓을 해보였다.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에는 약간의 후회와 미련, 흔들리는 믿음과 의심 같은것이 어죽속의 재료들처럼 한데 질척하니 섞여있었다. “그런데 뭐 일이 여기까지 온이상 이제는 물러설 길도 없다. 잘해내는수밖에는…” “그럼요, 잘해야죠, 다 잘돼야죠…” 김사장의 눈길이 당장 예리한 칼날처럼 내 마음속을 베고 들어올것 같아서 나는 머리를 돌렸다. “그래도 니가 있어서 다행이다.” 금방 교육을 받던 아가씨 하나가 낙지전골 냄비를 들고 미닫이문을 열었다. “내가 뭘요…” “너의 사람됨을 잘 알기때문에 내가 여기까지 온게 아니냐? 나는 친구와 적은 알아 볼줄 아는 사람이다. 물론 친구를 섭섭하지 않게 할것이고.” 부탄가스에 냄비를 올려놓자 냄비속의 재료들이 금방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김사장은 집게로 잠간새에 오그라든 낙지를 집어 가위질을 하였다. “써억, 썩-!” 토막난 낙지다리들이 벌건 국물안으로 첨벙첨벙 잘려들어갔다. 내 어깨를 다독이는척하며 예방주사를 단단히 꽂아주는 김사장이였다. 친구? 문득 “친구와 한평생을 같이 가네. 친구의 이름을 부르면 고개 돌리는 그대여…”라는 노래 가사가 떠올랐다. 나는 김사장이 나를 친구로까지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있었다. 김사장과 3년동안 교제를 하면서 행동보다 말만 앞서는 여느 한국 소상인들하고 별로 다를바없다는것을 나는 몸소 체험해보아서 알고있었다. 김사장은 그간 나한테 준 보수가 합당하다고, 지어 넘친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말을 하지 않았을뿐 나는 사실 그 보수에 만족하지 않았다. 장사가 시작되기전에 나하고 정한 보수가 장사 끝났을 때는 수입이 좋았음에도 꼭 여러 구실을 책 잡아 매번 깎았기때문이다. 내가 심드렁해져서 일에 열성이 떨어질가 하면 김사장은 보나스랍시고 약간의 위로금을 보내주군 하는식이였다. 그럼에도 그와 꾸준히 래왕한 까닭은 말했다싶이 내가 “착해 빠진” 녀석인것도 있었고 그만하면 김사장이 너무 악덕사장은 아니다싶어서였다.  벤취에 누우면 잠이 들것 같았는데 찬바람이 불어오면서 오히려 술이 깨기 시작했다. 꼭 껴안고 벤취옆을 지나가던 젊은 남자와 녀자가 혼자 꺼멓게 앉아있는 나를 보고 기겁을 하였다. “우리 집 사람 혹시 전화오면 식당얘기는 절대 비밀이다. 알지?” 그래도 가정은 마음에 걸리는지 김사장이 부탁처럼 말을 해왔다. 그럼, 그걸 내가 왜 모를가봐. 식당에 투자한 인민페 70만원어치의 돈은 김사장 부인의 친정 돈이라고 했다.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다니던 아들딸에게 학비를 벌어주고 부인과의 로후를 생각해서 확실한 재산을 재여놓으려고 어려운 중국행을 결심하였다고 했다. 돈을 많이 벌어서 든든한 가장노릇을 하고싶은게 모든 남자들의 공통된 소원이 아니겠는가! 김사장이라고 례외일수 없었다. 그래서 그날 나는 김사장이 더 안쓰러워졌다. “다시 봐도 내 아들놈만큼 잘난 녀석은 없는것 같다니까. 안그래? 임경리?” 술이 좀 되고나서 김사장은 의례처럼 품안의 지갑속에 들어있던 가족사진을 꺼내 내게 보였다. “그거야 김사장님 아들이니까 그런거지… 우리 엄니보고 물어보세요, 제가 젤 잘났다고 그럴겁니다.” 내가 기분좋게 비꼬아주자 김사장은 허허 웃었다. “그런가? 그래도 나는 우리 딸네미가 젤 이쁜걸. 우리 집사람 젊었을 때를 꼭 빼닮았어…” 나는 그런 자랑 같지 않은 자랑을 하는 김사장이 가장 인간스러웠다. 그런 김사장앞에서는 잠시 회사고 돈이고 다 내려놓고 정말 인간 선후배로서 따뜻이 얘기 한번 해보고싶었다. 사실 굳이 삼촌이 아니라 이국타향에서 산다는 자체가 얼마나 불안한 일이겠는가. 돈은 좀 있겠지만 온통 낯선 사람들속에서 혼자 외롭게 자신의것을 지키려고 애를 쓰는 이 남자가 문득 안돼보인것도 그럴 때였다. 어느 누구라도 익숙하고 편안한 곳을 떠나 한치앞도 내다볼수 없는 낯선 곳에서 도박하고싶지는 않을것이다. 그러니까 삼촌이 아니면 나만이라도 정직해야지 않을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삼촌과 정면충돌할 마음은 없었지만 량심적으로 김사장의 피해를 최소화시킬수는 없지 않을가 하고 혼자 생각하였다.“마셔.” 김사장이 술잔을 들었다. 어쩌면 이 량반은 그런 내 심사를 알아채고 일부러 더 살갑게 구는것인지도 몰랐다. 나의 “착한 마음”을 충분히 리용해먹으려고. 4  녀자들은 어두운 조명이 깔린 넓은 홀 긴 쏘파에 아무렇게나 앉아있었다. 가슴이 깊게 패여 가슴골짜기가 훤히 드러나보이는 웃옷을 입었는가 하면 허벅지까지 올라와 팬티를 겨우 아슬아슬하게 가린 짧은 치마를 입고있는치들도 있었다. 내가 가까이 걸어가자 그녀들은 낮은 소리로 시시껄렁한 잡담을 하거나 무표정한 얼굴로 담배를 빨다가 약속이나 한듯 머리를 돌려 일제히 내쪽을 쳐다보았다. 삽시에 나는 난감해졌다. 이건 뭐 내가 아가씨를 고르는것이 아니라 녀자들이 나를 가늠해보는것 같아서 기분이 영 더러워졌다. 그러게, 하필이면 이런 곳에 와서 익숙치도 않는 짓을 기어이 해보려할건 뭔가?나는 원래 녀자에 대해 그리 관심도 많지 않을뿐더러 그래서 잘 알지도 못하는 녀석이였다. 이제 원래의 나를 버리고 새로운 나로 살기를 선택했다면 이 짓거리를 하는것이 또 뭐가 그리 나쁠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벤취에서 일어나 택시를 잡아타고 이 노래방에 들어온것이다. 어차피 나는 이 도시에서 갈곳도 없고 만나고싶은 사람도 없다. 래일 떠나면 어쩌면 몇년 혹은 더 오랜 시간 다시 돌아올 일이 없을지도 모른다. 헤어스타일이며 입은 옷들이며 화장이며가 제각각이였지만 그녀들에게서 풍기는 어떤 분위기랄가 하는것들은 이상하게 서로 닮아있었다. 굳이 이 녀자가 저 녀자보다 예쁘다거나 나아보이지는 않았다. 나는 슬슬 후회하기 시작했다. 꼭 이 짓을 해야만 새 사람이 되는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많은 미인들중에 그래 마음드는 애가 하나도 없단 말이야?” 내뒤에 따라온 짙은 화장을 한 마담이란 녀자가 속살거렸다. 화장품냄새와 향수냄새가 코를 진동했다. 제발 그런거 좀 적게 뿌리고 다니지… 그런다고 뭐 더 예뻐지고 고상해지나? 물론 나는 그런 티를 전혀 내지 않았다. “아니, 그게… 좀 더 청순한 스타일은 없나…” 나절로 말해버리고도 얼굴이 확 붉어지였다. 이런 말을 할 때는 좀 더 당당하게 목을 빼들고 트집을 잡으며 얘기를 해야 하는건데 나는 들어가려고 모지름을 쓰는 목소리를 겨우 뽑아내서 약간 비굴하기까지 한 어투로 말하고있었던것이다. 마담이란 녀자가 눈꼬리를 길게 늘어뜨리며 깔깔 웃었다. “음-, 청순한 스타일? 그런 애 좋아하는구나. 있지, 그럼. 왜 없어? 정희야- 정희 어디 갔니?” 앉아있던 녀자들이 정희를 부르는 마담의 목소리에 나에 대한 신경을 그만 끄고 다시 하던 잡담을 계속하거나 담배를 계속 피우기 시작하였다. 나는 괜히 멋쩍어져서 정희든 영희든 3초내로 나타나지 않으면 그만 구실을 대고 이곳을 떠나야 하겠다고 속으로 별렀다. 이게 다 그녀때문이야.내가 기어이 이 도시에서 마지막밤을 녀자와 보내고싶어하는 리유가. 내가 그녀를 사랑했든지 아니면 그녀가 나를 얼마간이라도 좋아했든지 그런것은 이제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건 이제 내가 더이상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그것이였다. 그녀를 잊어버리기 위해 이 도시, 이 밤에 모든 해묵은 추억들을 영영 묻고 떠나고싶어서 나는 오늘 일을 내고싶은것이다. 정희란 녀는 내가 하나, 둘, 셋! 하고 셀 때에 복도쪽에서 걸어나왔다. 아까 말했듯이 여기 있는 녀들은 기껏해야 헤어스타일이 다르고 입은 옷이 다르고 눈코입이 약간 다르게 생겼을뿐 그 풍기는 분위기들은 다 거기서 거기였다. 굳이 어느 녀자는 청순하고 어느 녀자는 섹시하고 또 어느 녀자는 귀엽다는 그런 다양한 스타일들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최소한 나는 그렇게 느끼고있었다. “어때? 괜찮지?” 마담이 그 정희란 녀자를 내앞으로 끌고와서 자신있게 눈을 깜빡거렸다. “얘 좋아하는 손님 무지 많다. 오늘은 마침 시간이 있어 땡잡은거야!” 늙은 녀자는 그렇게 말하면 내가 더 좋아할것이라고 생각했겠지만 나는 그 말을 듣고 더욱 구역질이 났다. 좋아하는 손님이 많다는 말은 그만큼 많이 “사용된적”이 있는 아가씨란 말이 아닌가? 정말 원래의 나 같았으면 금방 뿌리치고 도망갔을걸 새로운 내가 되고싶은 나는 억지로 그 기분을 참아내였다. 녀자와 함께 방으로 들어가며 나는 곁눈으로 살짝 훔쳐보았다. 나의 편견을 모조리 뺀다면 사실 그만하면 괜찮은 녀자였다. 들어갈 곳은 들어가고 나올 곳은 충분히 나와있었고 아직 얼굴이며 엉덩이에 탄력이 그대로 있는것이 겨우 스물두셋쯤으로 보이는 나이였다. 마담이 이 녀자를 청순하다고 여기는 리유는 연한 화장을 한 아직 애티나는 얼굴에 허리까지 오는 긴 생머리때문이였던것 같았다. 그래도 그 머리때문에 나는 한숨돌릴수 있었다. 그녀와 닮은 한가지라도 이 녀자한테서 찾을수 있었기때문이였다. 그러니까 내가 처음 그녀를 만난것도 이 도시에서였다. 10년전의 나, 아직 싱싱하고 순진하고 귀여운 구석이 흠뻑 묻어있던 철부지 대학생, 그랬다. 그런 나의 눈에 비쳐진 그녀는 청순하고 아름답고 고상했었다. 내가 다니던 자동차과에는 리과여서 그런지 녀학생들이 영 시원치 않았었다. 사범대에 예쁜 녀학생들이 많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연줄이 없어서 갈수가 없었는데 마침 친구녀석의 주선으로 미팅에 나갔다가 만난것이였다. 톡톡 튀는 개성의 세련된 그녀는 일시에 그날 미팅에서 남학생들의 주목을 받게 되였다. 긴 생머리를 허리까지 늘어뜨리고 귀여우면서도 예쁜 원피스를 차려입은 그녀, 오똑한 코와 생글생글 웃는 눈이 참 인상적이였다. 게다가 활달하고 령리하여서 분위기도 곧잘 맞추었고 눈치가 빨라서 어수선한 틈이 보이면 금방 메워주군 하였다. 나도 그녀가 참 괜찮다고 생각했지만 그때는 그뿐이였다. 워낙 련애질에는 뒤전이라서 어떻게 녀자들한테 잘 보여야 되는지 알지도 못했고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냥 아름다운 이성을 만나보고 같이 이야기를 나누고 기껏 밥을 먹는다거나 영화를 보거나 춤을 추는것만으로 나는 충분히 만족을 느꼈었다. 그때는 그랬다. 지금도 녀자에 대해서는 모르는것이 너무 많은 나였다. 그녀에 대해서도 나는 줄곧 그러했다. 그녀를 알수가 없었고 알려고 하면 할수록 더 헛갈리는것 같았다.  녀자는 푹신한 쏘파우에 다리를 꼬고 앉아서 굽높은 하이힐을 까댁거리며 나를 쳐다보았다. 음악이 요란하게 나오고있었고 대형 모니터에는 가슴과 엉덩이만 겨우 가린 녀자들이 해변에서 갖가지 야한 포즈를 취하고있었다. 나는 목이 갈한듯 얼굴을 찡그려보이며 “술-” 하고 나직이 뱉으면서 술병을 가리켰다. 녀자가 술잔에 맥주를 찰찰 부어 내손에 쥐여주었다. 빨간 매니큐어를 칠한 손톱이였다. 아니, 청순한 스타일을 연출하자면 이런 칼라는 피할것이지… 나는 녀자의 손을 그대로 감싸쥐고 술을 꿀꺽꿀꺽 마셔버렸다. 더 취해야 하는데… 오늘은 일을 내야 하는데… 나는 술병을 거꾸로 들고 입안에 꿀꺽꿀꺽 나머지 술을 모조리 털어넣었다. “넌… 얼마냐? 얼마면 되냐?” 무슨 드라마 대사 같은 말을 내뱉고보니 스스로도 여간 우스운게 아니다. 나어린 아가씨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 녀자의 눈에는 내가 어떻게 보여졌을가? 별것도 아닌 일에 혼자 비장한척 호들갑을 떠는 위선자? 그녀라면 어떠했을가? 그때 그녀는 나를 어떻게 생각했을가? 그녀와 잠간 마주친 손끝이 달달 떨렸다. 나는 서툴지만 그녀는 노련했다. “야, 진짜 예쁘다-” 친구녀석이 내옆에 와서 의자를 붙들고 겨우 몸을 가누어섰다. 그녀는 우리한테 매혹적인 웃음을 날려보내며 다른 친구녀석이랑 손을 잡고 신나게 인라인 스케이트를 타고 바람처럼 스쳐지나갔다. “야, 쟤 사범대 얼짱이라잖니. 정말 예쁘지?” 내옆에 서있던 녀석은 아쉬운듯 입을 쩝 다셨다. “이번엔 나이트다! 내가 쏠게! 야 임마, 나 좀 팍팍 밀어줘라!” 인라인 스케이트를 잘 타는 다른 녀석에게 그녀를 “빼앗기고” 도무지 마음을 주체할수 없었던 모양인지 그 녀석은 내게 단단히 부탁을 하고있었다. 그러나 정작 디스코곡이 울려나오고 다들 흥분하여 취한듯 몸을 흔들어댈 때 그녀는 그 친구녀석을 피해서 내앞에 왔었다. 변변찮은 춤솜씨때문에 나는 당금 얼굴이 벌개지였다. “고향은 어디예요?” 시끄러운 음악소리속에서 그녀는 얼굴을 내 얼굴 가까이에 대고 물어왔다. 녀자 특유의 달콤하면서도 약간 비릿한듯한 냄새가 아찔하게 코로 흘러들어왔었다. “그러니까… 뭐요? 고향이요?” 그녀가 너무 가까이 얼굴을 들이밀어서 코등의 잡티까지 볼수 있을 정도였다. 나는 갑자기 너무 긴장한 나머지 내 고향이 어디든지 생각이 나지를 않았다. “흐흐흣…” 그녀는 자신때문에 정신을 못차리는 내가 재밌었던 모양인지 어깨를 들썩이며 귀엽게 웃었다. 혼잡한 사람들속에서 이리저리 밀리는 바람에 나는 본의아니게 자주 그녀와 부딪치군 하였다. 그때 부딪쳐본 그녀의 어깨, 허리, 그리고 엉덩이… 나는 썩 후날까지 그 생생한 촉감을 잊을수가 없었다. 나는 정말로 그 “청순한” 아가씨의 어깨를 그러안고 휘청휘청 호텔방으로 들어가고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서 나는 녀자를 보기좋게 침대에 쓰러눕혔다. 녀자는 몸을 틀어 자신을 무겁게 짓누르고있는 나를 활 밀쳐내고 빠져나갔다. “저 먼저 씻을게요…” 나는 벌렁 천정을 보며 팔다리를 대자로 쫙 펴고 돌아누웠다. 이게 무슨 짓인가? 낯도 코도 모르고 말 한번 제대로 해보지 못한 생면부지의 녀자랑 뭘 어찌하겠다고 여기까지 왔을가? 화장실에서 쏴- 하고 물소리가 들리자 나는 그만 흥정했던 돈만 침대우에 뿌려놓고 그대로 도망가고싶어졌다. 그래, 이제라도 가면 되는거야. 그렇게 싫은걸 왜 해? 다른 일도 아니고, 남녀가 육체적으로 가장 친밀하게 밀착하여서 치루어야할 이런 일은 서로 원하고 서로 주고싶을 때에 해야 하는거 아닌가? 원래의 나는 아직 죽지 않고 내 머리속에서 쉬임없이 이런 말들을 주절거렸지만 나는 침대에 버티고 누워있었다. 별거 아니야, 이 세상에 반드시 해야 하는것과 하지 말아야 하는 일이 어디에 있겠는가? 다 사람들이 자신의 리익에 맞춰서 정해놓은 원칙이라구. 그런 원칙이나 기준따위에 신경쓰지 말자. 나도 한번 방종해보자. 되는대로 살아보자. “ 당신도 씻을거예요?” 젖은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털며 나오는 어린 나이의 녀자, 인생을 산 세월은 나보다 적어도 잠자리경험은 한참 선배일것 같았다. 큰 목욕타월로 몸을 헐렁하게 감싸고 나와서 어깨와 다리가 함부로 로출되였다. 나는 눈을 가슴츠레 뜨고있다가 일어나 앉았다. 뭔가 가슴이라도 뛰든가 몸이라도 달아오르든가 해야 일을 치르겠는데 정작 반라의 녀자를 마주하고 내 몸은 내 의지대로 되주지를 않았다. 지금 씻지 않으면 당장 일을 시작해야 할것 같아서 그럴바엔 차라리 욕실에라도 들어가있기로 하였다. 나를 유혹하는 녀자가 그녀라면 어땠을가? 그럴리가 없겠지만 한번이라도 그녀가 내앞에서 저런 포즈를 취하게 할수 있다면… 아니, 그런다고 해서 달라질것이 무엇이겠는가? 지금 그녀나 이 아가씨나 다를게 뭐가 있겠는가? 한사람은 노래방에, 다른 한사람은 밖에 있다는 그것 말고는… 만약 그때, 그 대학시절, 나에게 이것저것 물으며 관심을 보이던 그녀에게 내가 좀 더 다가갔다면… 더 적극적으로 그녀에게 데이트를 신청하고 그녀와 교제를 해나갔더라면… 그래서 정말 대학졸업시 결혼이라도 하게 되였더라면… 있을수 없는 일이지만 만약 그렇게 되였더라면 그녀는 지금 리혼하지도 않았을거고… 어쩌면 그런 모습으로 살아가지도 않았을는지 모른다. “그냥 아무말 말고 저 안아주면 안될가요?” 10년후 같은 도시에서 다시 만난 그녀, 그녀는 이제 청순하기보다는 한결 매혹적이고 섹시한 모습이였다. 어쩌면 이런 인연이… 혹시 그녀가 정말 나의 반쪽이 아닐가 하는 부질없는 생각도 그때 들었었다. “일이 힘들어? ” 삼촌의 소개로 김사장의 식당에 매니저로 들어온 그녀, 식당에서 정비공장 직원들의 회식이 끝나고 다들 돌아간후에 우리는 작은 술집에 들어가 조용히 이야기를 할수 있었다. “아니요,…” 그녀가 내잔에 맥주를 채웠다. 손톱끝에 바른 핑크빛의 매화무늬 매니큐어가 키스해주고싶을만큼 예뻤다. “그럼… 다른 무슨 귀찮은 일이 또 있는거야?…” 이런 말을 하는건 좀 주제넘지 않을가 하고 생각도 했었지만 이제는 그녀의 사생활에 좀 더 깊이 들어가보고싶었다. 술잔만 돌리며 아무 얘기를 않던 그녀, 나는 정말 그녀의 말대로 한번 가볍게 안아주려고 하였다. 식당에 들어온 첫날, 그녀를 알아보고 우리는 이렇게 작은 술집에서 이야기를 했었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냐는 안부에 그녀는 몇년간의 직장생활과 풍파 많았던 결혼생활에 대해 요약적으로 간단히 이야기해주었다. 나는 그녀가 도대체 어떤 녀자인지, 어떤 인생을 살아왔고 어떤 아픔들이 있었는지 다 알지 못한다. 그냥 그날 얘기가운데서 애가 없이 살아온 4년동안의 결혼생활을 청산했다는것, 그뒤 직장이며 장사며 닥치는대로 일을 하고 살았다는 토막토막의 사정이야기밖에 나는 모른다. 나한테 안기고싶다던 그녀, 안겨서 울고싶어하던 그녀가 젊은 리혼녀로 살아오면서 그간 많이 힘들었을거라는 짐작만 어렴풋이 하고있을뿐이였다. 그녀때문에 나는 퇴근하고 식당에 들리는 일이 눈에 띄게 많아졌다. 김사장을 만난다는 구실을 달고 말이다. 써빙하는 아가씨들을 제법 능숙하게 다루는 그녀를 보면서 나는 혼자 그녀와의 미래를 렴치좋게 꿈꾸어보기도 하였다. 정비공장에서 내가 들인 투자금을 회수하는거야. 잘되면 더 많은 리익을 보겠지. 그녀와 자그마한 가게를 차려도 좋고 정식으로 무역회사를 시작해보는것도 괜찮을것 같았다. 이제껏 나혼자 벌고 쓰고 했지만 그녀와 가정을 이룬다면… 그녀와 함께 일을 해나간다면… 행복할것 같다는 생각도 주제넘게 들었다. 그녀는 식당일이 바빠서 내게 신경쓸새가 없다고 자주 오지 말라고 했지만 나는 그것도 그녀의 호의로 흐뭇하게 받아들였다. 그렇게 얼마간의 시간을 보내고난 뒤의 그날밤 나는 그때 그녀가 왜 우는지를 알수가 없었다. “그냥 안고있어만 주세요…”하고 혼자말로 중얼거리는 그녀를 나는 정말 멍청하게 안고만 있어주었다. 허리까지 길었던 생머리가 비싼 퍼머머리로 변신했으며 녀자 고유의 비릿하면서도 달큼했던 냄새가 은은한 매혹적인 향수냄새로 바뀌였다. 그녀는 어깨를 가늘게 떨며 쿨쩍이고있었다. 술을 많이 마셔 취했던건지, 자신한테 관심을 보이는 나를 보고 감격했던건지, 아니면 그냥 아무나 붙잡고 울어보고싶었던건지… 하여튼 그녀는 오래간만에 만난 애인한테 안긴 녀자처럼 편안하게 나한테 안겨서 흐느꼈다. 그래서 나는 그녀를 더욱 동정하게 된것 같았다. 녀자 혼자서 얼마나 힘들었으면… 나라도 옆에 든든히 있어주어야 하는데… 하는 유치하고 단순한 바보 같은 생각도 그 때 하게 된것이다.  더는 샤워를 구실로 욕실에 계속 처박혀있을수는 없었다. 나는 숨을 크게 한번 내쉬고 전쟁터에 나가는 병약한 군졸처럼 겨우 정신을 추슬러서 방으로 걸어나왔다. 아가씨는 몸에 흰 타월 하나만 걸치고 침대에 누워있었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나? 벌써 속이 덜덜 떨리는것 같았다. 아가씨가 태연할수록 나는 더 긴장되였다. 이건 도대체 누가 누굴 위해 봉사하는건지 모르겠다. 어쩌면 수없는 남자들과 이 짓을 하는 아가씨에게 돈을 주며 하려 하는 나보다 돈도 받고 순수한 총각맛도 볼수 있는 이 아가씨가 훨씬 수지가 맞을것 같았다. 그래서 저렇게 태연하게 타월을 벗고 맨 알몸뚱이로 내게 다가오는가? 녀자는 천천히 나의 목을 그러안았다. 뜨거운 입김이 나의 얼굴로 불어왔다. 이제는 어떻게 해야 되지? 키스를 할 차례인가? 아니면 먼저 녀자를 안고 애무를 시작해야 하는가? 갑자기 머리속이 뒤죽박죽이 되면서 손이 말을 듣지 않았다. 녀자의 매끄러운 손이 나의 국부를 애매하게 두르고있는 타월을 벗겨내였다. 희고 가는 손가락이 나의 가슴에서 원을 그리고있었다. 찹쌀만한 내 젖꼭지가 꼿꼿이 살아났다. 됐다, 이제 됐다. 일이 잘되여가는 징조다. 요염한 눈길로 나를 올려다보는 녀자의 얼굴에서 나는 계속 그녀의 그림자를 찾고있었다. 어차피 오늘밤 이 녀자는 그녀의 데타인걸.정말 한번만은, 단 한번쯤은 그녀와 열렬한 정사를 치르고싶었다. 그녀의 속옷을 벗겨내고 하얀 유방을 손안에 잡아보고 알몸 구석구석을 키스해주고… 할수만 있다면 그렇게 하고싶었다. 그런데 그녀는 그날 분명히 김사장과 같이 있었다. 회사일을 마치고 삼촌이랑 술을 마시다가 문득 그녀가 생각나서 전화를 넣었지만 받는 사람이 없었다. 혹시… 하는 생각에 걱정이 되여 삼촌한테 핑게를 대고 한달음에 식당으로 뛰여갔었다. 2층 작은방 하나에만 불이 켜져있어 그녀가 거기 있을거라는 예감이 피끗 들었다. 혼자 힘들게, 고독하게 있을줄 알았던 그녀가, 혹시 혼자 청승맞게 앉아서 쿨쩍이고있지나 않을가 걱정이 되여 계단을 두개씩 뛰여올라갔는데… 그녀의 환희에 찬 신음소리를 들었을 때… 내가 아닌 다른 남자랑 한창 즐거워하는 그녀의 소리를 들었을 때… 나의 랑패감이란… 나는 내 코앞에 바투 얼굴을 들이대는 녀자를 덥썩 끌어안았다. 녀자한테 내 붉어진 얼굴을 보여주기 싫었기때문이였다. 녀자의 입술을 빨았다. 코며 얼굴이며 턱이며 목이며 닥치는대로 빨았다. 녀자를 바닥에 쓰러뜨리고 거칠게 다루기 시작하였다. 왜? 왜 김사장이냐고? 나한테 안겨서 청승맞게 흐느낄 때는 언제고… 얼마나 알고 지냈다고 김사장의 품에 안겨서… 갑자기 뭐가 뭔지 감이 잡히지 않아 복도에 우두커니 서있는 나의 귀속으로 분명 그녀의 애교스런 목소리가 파고 들어왔다. “아- 아- 김사장님- 아이… 안된다니까… 하아…” 나는 귀를 틀어막고 계단을 도망치듯 뛰여내려왔다. 식당문을 나서서 거리로 미친듯이 뛰여가는데도 그녀의 교성이 계속 들려오는듯싶었다. 김사장과 한몸이 되여서 파마머리를 출렁이며 허리를 들썩이는 그녀를 눈앞에서 보는듯싶었다. 아, 그래서 녀자를 믿지 말라고 했던가? 거기에 비하면 대가까지 지불하고 아가씨의 하루밤을 산 나는 너무나 정정당당한 사람이 아닌가? 어떻게 하면 그녀처럼 신음하게 할것인가? 어떻게 하면 그녀 같은 소리를 지를수 있게 할것인가? 나는 씩씩 가파른 숨을 내쉬며 녀자의 몸속으로 들어가려고 애를 바등바등 썼다.강하고 거칠게 들어가서 녀자가 죽어가는 신음소리를 지를수 있게 하려고 나는 안간힘을 다 썼다. 그런데 이게 뭔가? 어느새 나의 페니스에 힘이 다 빠져버렸던것이다. 이발 빠진 종이호랑이? 녀자는 그런 얼렁한 인간이 아니였나란 식으로 눈이 올롱해서 나를 쳐다보았다. 아마 그래서 이 자리에 오기까지 내가 그처럼 망설이고 주저하고 불정상적인 행동을 보이지 않았나 하는 추측을 하고있었을거다. 억울하고 창피하고 화가 났다. 마지막 자존심이라도 세워보려고 부득부득 몇번을 더 도전했지만 한번 물러진 그 녀석은 좀처럼 다시 살아나지를 않았다.아, 내 인생에 그보다 더 창피할 때가 또 있을가? 내가 나가든 녀자를 내보내든 둘 중 뭔가는 해야 내가 살것 같았다. 나는 와락 일어나서 웃옷 호주머니속의 지갑을 꺼내 흥분된 손길로 큰장 몇개를 뽑아내여 녀자한테 쥐여뿌렸다. “가, 빨리 가버려!” 녀자가 나를 뭐라고 하든 상관없었다. 기껏해야 그 노래방에, 어두운 홀 긴 쏘파에 비스듬히 앉아서 어느 아가씨한테나 “그날 그 변태가…” 하고 지껄일뿐이겠지. 녀자는 주섬주섬 옷가지들을 몸에 두르고 지페를 주어서 문을 열고 나가며 “흥, 별 꼬라지야…”하고 가시돋친 말을 기어이 내 가슴속에 박아놓았다. 정작 녀자가 나가자 초라한 싸구려호텔방에 혼자 남은 내 처지가 더 궁상맞고 허무해보였다. 뭐 하는짓인가? 얼마나 많은, 서로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몸을 섞는 녀자와 남자들이 내가 앉아있는 이 침대에서 삐걱거렸을가? 나는 벌떡 일어났다. 녀자를 쓰러눕히던 바닥의 카펫을 내려다보며 여기에서도 낯모를 녀자와 남자들이 수없이 많은 밤을 딩굴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결국 옷을 허겁지겁 주어입고 그 방에서 도망쳐나와버렸다. 호텔의 호자도 보이지 않는 골목으로 멀리멀리 도망쳐버렸다. 다 그녀때문이야. 그녀만이 아니라 김사장때문일수도 있어. 어디 손벽이란 한손으로 치는 법이던가? 5  “삼촌, 그 매니저 말이야… 잘 아는 녀자야?” 어쩌다 조용한 기회를 잡을수 있어서 나는 삼촌한테 슬쩍 물었다. 삼촌은 한창 벤츠 하나를 앞에 놓고 컴퓨터로 전자회로를 검사하고있던중이였다. “왜? 그 녀자 괜찮니?” 삼촌의 눈이 이상한 분위기를 풍기며 나를 비웃고있는것 같았다. “아니, 뭐 그렇기보다는… 믿을만한 녀잔가 그 말이지 뭐…\" 그녀에 대한 마음을 들켜버린것 같아서 나는 어물어물 넘겨버리려고 애를 썼다. “야, 산아! 가서 도구상자 가져와라!” 곁에 서서 한눈 팔세라 삼촌의 움직임을 보던 직원은 도구상자를 가져오라는 말에 시쁘둥해서 입이 대뜸 한발이나 나왔다. 점검을 마치고 고장난 부위를 수리할 관건적인 시각이 되면 삼촌은 이렇게 기술공들을 따돌리군 한다. 이 업이 워낙 기술일이라 기술만 로출되면 곰상스레 앉아서 직원을 하겠다는이들이 없어지기때문이다. “믿을만하냐는게 무슨 말인데? 다른건 모르겠고 식당일은 믿을수 있을거야. 니 숙모하고 어떻게 다리가 걸리는 사이거든.” 그래서 삼촌이 그녀를 식당에 들여왔는가? 어쨌든 서로 걸리는 사이라서… 식당 매니저란 자리도 잘만 하면 후려먹을게 많은 자리였다. 김사장과 한창 긴장한 사이인 삼촌이 자기편 사람으로 안배하자고 그녀를 들여온것 같은데… 그럼, 김사장과 재미를 보는 그녀는 또 어떻게 해석해야 할가? “근데 말이야… 그녀자… 김사장… 아니, 그러니까 그게…”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난감하게 되였다. 내가 말끝을 얼버무리자 삼촌이 하던 일을 멈추고 나를 쏘아보았다. “응, 그애하고 김사장… 나도 대충 알고는 있다. 두고봐라. 김사장한테서 식당까지 넘겨받지 않는가, 내손으로 하는게 아니라 그애 손으로 해야지…” 이발을 부득 가는 삼촌의 이마에서 혈관이 툭 튀여나온 관자노리가 욱씬 움직였다. “사부님, 여기 도구상자요!” 아까 심부름을 시켰던 산이가 돌아와 도구상자를 열어보였다. 나는 삼촌한테서 돌아서며 흠칫 몸을 떨었다. 꼭 그래야만 하겠는가? 회사면 됐지 식당까지 꼭 그래야겠는가? 그래서 그녀를 미끼삼아 식당에 들인건가? 그녀의 손을 빌어 아니, 몸을 빌어 식당까지 가로채자고? 그러는 그녀는 또 뭔가? 그렇게 하기 위해 삼촌과 미리 짜고 들어왔단 말인가? 김사장과의 관계도 그때문에 그렇게 신속히 발전시킨건가? 다들 무서운 사람이네. 나한테 안겨 울던 그녀와 김사장의 품에 안겨 환희의 신음을 지르는 그녀가운데 어느것이 그녀의 진실한 모습인지 알수가 없었다. 어느것도 진실한 그녀라고 말할수 없었으며 그녀 자체가 자신에 대해 과연 얼마나 진실할가 하는 문제도 알수 없었다.  머리가 빠개지는듯한 아픔이 나를 잠에서 불러냈다. 나는 초상난 집처럼 썰렁한 내 아빠트의 침대에서 이불을 뒤집어쓴채 허리를 꼬부리고 모로 누워있었다. 해가 한참 뜬것 같았지만 온 몸이 나른해서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귀찮았다. 이럴 때 꿀물 한 컵 따라주는 사람이라도 있었으면 그처럼 고마울데가 없을것 같았다. 물론 그런 사람이 내 집안에 있을리 만무했지만 말이다. 얼마간 버티고 누워있다가 나는 하는수 없이 자리에서 스적거리며 일어나 앉았다. 짐은 어제저녁 트렁크에 다 정리해넣었으니 이제 몸을 추스리고 떠날 일만 남았다. 그래 떠나자. 이 도시만 떠나면 새로운 인생을 살수 있을것 같았다. 어눌하게 서서 삼촌을, 김사장을, 그녀를 리해해보려고 애쓰던 나를 버리고말이다. 내가 그런 노력을 했다고 해서 나한테 고마워하는 사람은 사실 아무도 없었다. 그들은 내가 아니라 그 누구의 리해도 바라지 않고있었던것이다. 아무의 리해도 바라지 않고 자신의 인생을 철저히 스스로 책임져 나가겠다는 그들의 생각도 어쩌면 틀렸다고만 할수는 없을것 같았다. 나는 비칠거리며 일어나서 욕실로 들어갔다. 치솔질을 하고 세수를 하고 깔끔하게 면도도 하였다. 아무리 몰래 떠나는 길이라지만 도망가는 티를 너무 내고싶지는 않았다. 려행가는것처럼 그래, 려행이라도 떠나는 사람처럼 가볍게, 홀가분하게 떠나고싶었다. 어차피 이놈의 인생도 려행길과 다를게 뭐가 있겠는가? 김사장도 떠나갈 때 이런 생각을 했을가? 아니면 다른 어떤 생각을 했을가?당연히 김사장이 더 비참해보일것이다. 회사에 들어간 돈이 나보다 훨씬 많았으니까. 그러나 김사장도 할수 있는만큼 다 해본 사람이였다. 내가 김사장을 안됐다고 본것은 순전히 그 사람을 한수 얕보았기때문이였다. 나만 그런것이 아니라 삼촌도 그랬다. 자신의 편이라고 믿었던 그녀를 김사장의 품안에 밀어넣은것도 그때문이였다. 그래서 세상 녀자는 믿을수가 없었다. 김사장의 수단이 좋아서인지 그녀의 욕심이 지나쳤는지 어쨌든 그들은 흐뭇하게 앉아서 결과를 기다리고있던 삼촌의 뒤통수를 보기좋게 후려갈겨주었다. 삼촌이 김사장에게 류동자금을 무리하게 더 요구한것도 그 뒤통수 맞을 시간을 스스로 앞당긴거나 다름없었다. 회계가 회사를 그만두어서 그때 회사장부는 나와 출납이 관리하고있었으며 세무서에는 나혼자 뛰고있었다. 어느 회사나 세무서에 내는 장부와 회사내부 장부, 이렇게 두부씩은 갖고있지만 우리 회사는 김사장이 모르는 또 하나의 장부가 있었으니 그것은 나와 삼촌만 아는 장부였다. “삼촌, 이렇게 까지…” 처음 장부를 따로 할 때 나는 영 마뜩치 않아했다. 벌써부터 이렇게 하면 나중에 서로간의 신용이 뭐가 되겠는가? 그런데 삼촌은 삼촌 나름대로 리유가 있었다. “중국에서 사업하자면 접대비가 얼마나 들어가는줄 아니? 외상은 또 얼마나 되고? 이런걸 일일이 김사장한테 얘기했다간 서로 리해하기는커녕 얼굴 붉히고 싸울 일밖에 더 있을것 같냐?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 바닥에서 장사를 할수가 없다. 그리고 나중에 어떻게 될지 모르는데… 비상금이라고 생각하고 암말 말고 해둬.” 내가 영 찝찝해하는 표정을 지어보이자 삼촌은 내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짜식, 삼촌말 들어라. 이 회사 법인은 너다. 이렇게 해서 네게 나쁠것은 없으니까.” 그리고 삼촌은 김사장에게 끝없이 류동자금을 더 요구해왔다. 좀만 더 투자하라고, 몇달 지나면 리윤이 보일거라고, 이번달엔 이런 설비 꼭 들여와야 한다고… 리유도 매번 각가지였다. 둘이 심하게 다투고나서 돈을 요구하는 삼촌은 더 로골적이고 횡포해져갔다. “그래야 김사장 그 자식이 배기지 못하고 스스로 포기할거다.” 삼촌은 술상에서 큰 목소리로 떠들며 웃었다. 나는 고래와 상어가운데 끼인 문어처럼 어떻게 할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들의 싸움을 내가 뜯어말릴수도 없었고 어느 쪽이 터지는것을 구경할수도 없었다. 내 한몸은 다치지 말았으면 하는 초라한 바램뿐이였다. 삼촌의 “조르기”작전에 배겨내지 못하고 드디여 그들이 나를 찾아왔다. 아무래도 삼촌보다는 내가 더 어눌하고 물렁하게 보였기때문일것이다. 김사장의 팔짱을 끼고 같이 들어선 그녀를 보는 순간 카페에 앉아 얼음물을 마시던 나는 피가 거꾸로 솟구치는것 같은 모욕감을 느꼈다. “임경리, 임경리를 믿어서 여기까지 왔다. 아무리 삼촌이라지만 이건 너무한거 아닌가? 임경리가 나와의 교분을 생각한다면, 량심을 생각한다면…” 김사장이 나를 똑바로 쳐다보며 또박또박 말을 뱉었다. 희끗한 눈썹마디가 파르르 떨리고있었다. “삼촌을 이 공장에서 해임해버려라. 어차피 지분도 없으니 나가면 그만이다. 회사는 처분해서 투자금을 얼마라도 회수하겠다.” 김사장이 갑자기 이렇게 강경하게 나올줄은 미처 생각지 못했던 일이였다. 하긴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고 했으니… “김사장님, 랭정하게 생각하세요. 지금 그러시면 서로 손햅니다. 삼촌이야 일전한푼 없이 들어왔으니 나가도 손해볼건 없어요. 사장님 그 돈들은 이 공장을 살려야 돌아오는건데, 지금 이러시면…” 그것은 김사장도 미리 각오한 일이였을것이다. 지금부터 김사장을 따돌리려고 애를 쓰는 삼촌인데 공장이 잘되여 돈을 많이 번다한들 그 돈들이 김사장손으로 들어갈리 만무했다. “긴말 할것 없고… 다 필요없으니까… 내가 보는 손해는 임경리가 신경쓸거 없다. 삼촌만 내보내라. 공장장은 다른 사람으로 초빙해서 임경리가 운영해도 좋다.” 삼촌과 임사장, 이제 이들 둘은 하나의 산속에 같이 살아갈수 없는 두마리의 호랑이가 된셈이였다. 김사장 립장에서 충분히 그런 제의가 나올만하였다. “김사장님… 그건…” 삼촌이냐 김사장이냐 나는 이들 둘가운데서 한사람을 선택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삼촌을 배반하자니 필경 물에 섞인 혈육이라도 혈육인것이고 김사장을 외면하자니 내 량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지 말고 삼촌과 앉아서 협의를 봅시다. 삼촌한테 경영을 완전히 맡기고 매달 김사장의 투자금을 얼마간씩 갚아가는 식으로요…” 나로서는 중립의 위치에 설수 있는 가장 좋은 제안을 내놓았지만 김사장은 시원치 않아했다. “칫,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데? 김사장님 한국에 돌아만 가면 돈을 갚긴 뭘… 지금 돈 되는것 팔아버리는게 그나마 덜 손해보는거라니까요.” 나와 김사장사이에 불쑥 끼여든 사람은 뜻밖에 그녀였다. 화장은 더 짙어지고 치마는 더 짧아진것 같았다. 나는 처음 보는 사람을 대하듯 낯선 눈길로 그녀를 샅샅이 훑어보았다. 이번엔 또 어떤 얼굴로 연출할것인가? 저 녀자는? 그녀는 나와 전혀 모르던 사이처럼, 완전히 김사장의 사람처럼 립장을 하고있었다. “그러니까 임경리, 회사를 처분하는건 내가 주선할테니까 여기에 싸인만 해주게.” 하긴 그녀의 말이 틀린데가 없었다. 삼촌은 충분히 그럴 사람이였다. 지금 김사장의 립장에서는 그렇게 하는것이 최선의 선택이였다. 식당이라도 받기로 됐나? 저 녀자가 왜 이 일에 김사장의 립장에서 끼여드는거지? 아니면 한국에 데려가 별장을 주면서 첩이라도 시킨다 했나? 나는 그녀를 훑어보면서 머리를 굴려보았다. 둘사이에 무슨 거래가 있는것이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래도 걸리는 사이라고 믿고있는 삼촌을 까맣게 배반할수가 없었다. 서로 “사랑해서”라는 말은 젖먹이 어린아이한테도 먹히지 않을것이였다. 나는 그녀가 봉투에서 꺼내 김사장한테로 넘겨주는 서류를 받아보았다. 나의 법인대표자리를 포기하는 문서였다. “… 나 임성호는 성심자동차정비회사 대표리사직을 사직하며 이를 김기태한테로 양도한다… 모든 지분도 김기태 명하로 귀속한다… 금후 성심자동차정비회사에서 발생하는 모든 리익이나 경제문제와 아무런 상관도 없다…” 대체로 그러루한 내용이였다. 그녀가 변호사를 고용하여 작성한것인가? 서류를 든 나의 손이 가늘게 떨리였다. 회사설립시 내가 투자한 금액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었다. 물론 그것은 김사장의 투자금에 비하지 못할것이만 나한테 있어서는 전부의 재산이였다. “김사장님, 내가 투자한 금액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았네요…” 그 말까지 하지 못할 위인의 나는 아니였다. 기분이 불쾌해나서 목까지 붉어졌을것이다. 내 투자금이란 말은 처음 듣는 얘긴지 그녀가 올롱해서 김사장을 건너다보았다. 아마 그녀한테는 나와 삼촌을 투자 한푼 없이 남의 돈 날로 먹으려는 비렬한 한통속으로 몰아부쳤는가보았다. “지금 당장 회사를 처분하면 내 투자금을 절반도 회수못하는 상황이 아니냐? 거기서 어떻게 니것을 생각하겠느냐? 막말로 니가 그동안 모은 돈도 내가 벌어준 돈이 아니였나?” 김사장은 눈초리 하나 까딱않고 나를 쏘아보았다. 이제야 이 량반 본심이 나오는구나. 그래, 나를 여태 그 정도로 생각했단 말이지. 친구는커녕 먹다남은 콩고물이 있으면 먹고 살라며 던져주고 아무때나 시키면 시키는대로 일을 해줘야 하는 그런 정도의 사람? 이제 필요없으니 나더러 빈손으로 나가달란 말이 아닌가. 만약 김사장이 투자금의 비률을 따져 회사를 처분한 금액을 나누자고 말을 했더라면 오히려 내쪽에서 얼마 안되는 내것보다 많은 손실을 입은 김사장의 립장을 더 생각했을것이다. 이렇게 나오는 김사장한테서 나는 일멸의 량심 같은것도 더이상 느끼지 않아주기로 하였다. “싸인 못하겠다면요?” 내 얼굴도 일그러져갔다. 나의 반응을 어느 정도 예상하고있었던 모양인지 김사장은 그리 놀라는 기색이 아니였다. 그녀가 봉투에 달린 노끈을 만지작거렸다. “그래? 그럼 뭐 법정에서 보는수밖에. 이건 명백한 사기라고. 내가 못할것 같나? 돈 더 들여서라도 이 회사 엎을거다. 얘, 그만 가자!” 김사장이 그녀를 재촉하며 의자를 드르륵 빼고 일어섰다. 차가운 눈빛으로 나를 쏘아보는 김사장의 팔을 부드럽게 잡으며 그녀가 나를 한번 스윽 내려다보았다. 그동안 그녀나 김사장이나 리해해보려고 애썼던 내자신이 바보스러웠다. 자신의 리익을 위해서 스스럼없이 뭉치는 그들, 그들과의 정이나 교분을 생각해서 주저하던 나하고는 달리 너무 당당하고 떳떳하게 나선 그들이였다. 그럴바엔 삼촌을 선택하고싶었다. 아니, 우선은 그들의 말대로 해주고싶지 않았다. 회사를 처분하든 설비를 팔아먹든 법인은 내 이름으로 되여있으니 나의 싸인이 없이는 어찌할수가 없는 그들이였다. 그런데 법정이라니? 이 일이 정말 사기건으로 고소될수 있는지 삼촌을 만나 상의해봐야 했다.  트렁크를 끌고 아빠트를 내려가면서 나는 손을 흔들어 지나가는 택시를 불렀다. 집세는 미리 반년치를 냈으니 집주인이 손해볼것은 없었다. 이제 얼추 정리가 다 된건가? 택시에 앉아 문을 닫으면서 나는 담배냄새가 고약한 작업복을 입고있는 기사를 한번 흘낏 쳐다보았다. “역전이요!” 그래 떠나자, 훌훌 털어버리고 다 떠나자! 아무도 소용없었다. 나자신외에는. 사람이란 그런것 같았다. 자기의 리익에 선을 그어놓고 다른 사람이 건드리지 않으면 정이니 교분이니 하면서 평화롭게 지낼수 있었지만 일단 자기 리익범위에 들어온다면 그것들을 뜯어간다거나 망칠 일을 한다면 그때에는 정이니 교분이니 신용이니 하는 것들도 다 하루아침의 이슬처럼 흔적없이 사라지게 되는것이다. 그중에서 례외인 사람은… 아직 내 주변에 없었다. 삼촌은 한창 1층 사무실에 앉아 녀자직원들에게 호통을 치고있었다. “뭐 일을 이따위로 해놨어? 머리가 있는거야 없는거야? 당체 생각들이 없다니까…” 어느 직원이 결산지를 잘못 뽑아내여 삼촌이 던져버렸는지 온 사무실에 결산지가 제멋대로 날아다녔다. 녀자직원들 모두 머리를 수그리고 쩔쩔 매고있어서 어느 누가 장본인인지 금방 알수가 없었다. 삼촌의 호통에 다들 넉살이 나간것이다. “삼촌…” 이 아슬아슬한 분위기에 내가 끼여들자 야단을 맞던 애들은 이제 살았다는 표정이고 한창 더 욕설을 퍼부어야 속이 후련할것 같은 삼촌은 얼굴이 재빛이 되였다. “뭐야? 바쁜 일이야?!…” 김사장일만큼 큰 일이 어디 있겠는가? “김사장일이야…” 내가 의미있는 눈짓을 해보이자 그제야 삼촌은 꼿꼿해있던 눈살을 풀고 나를 따라 바깥으로 나왔다. “아까 김사장 그 녀자랑 같이 나를 찾아왔었어…” “그 녀자랑 같이”라는 대목에 와서 무슨 뜻인지 전혀 모르겠다는 삼촌이였다. “한속이 됐더라구. 지금쯤 식당이름 그 녀자걸로 변경했는지도 몰라…” 흰 자위가 점점 많아지는 삼촌의 눈이였다. “뭐? 그년이?… 헛! 내가 지금 믿는 도끼에 발등이 찍혔단 말인가?… 이 년놈들…!” 호된 한방을 맞아서 삼촌은 이가 부득부득 갈리는 모양이였다. 삼촌 성격에 자신이 해꼬지하면 했지 좀체로 이렇게 당해본적은 없었기때문이였다. “내 당장 가서…” 삼촌이 주먹을 으스러지게 쥐며 돌아섰다. 나는 급히 삼촌을 붙잡았다. 아직 말도 채 끝나지 않았는데 찾아가서 뭘 어쩌겠다는건가? “삼촌, 내 말 다 들어보라구…” 나는 직원들의 눈에 띄지 않는 구석으로 삼촌을 끌고가서 내가 듣고 보았던것을 남김없이 이야기해주었다. “그러니까… 나를 내보내려 했다? 내가 어떤 인물인지 좀 알아나 보고 그러시지… 글고 뭐? 너보고 권리포기각서를 써달라고 했다? 법인이름 넘겨받아서 이 회사 당장 팔아치우게?” 삼촌은 쓰겁게 웃었다. “걱정말아, 니 싸인이 없으면 이 회사는 건드리지 못하는거고. 법으로 하겠다? 사기죄로 고소한다? 증거가 어디 있어서?” 삼촌은 팔짱을 끼고 여유있게 웃었다. “흑으로 오나 백으로 오나 나는 겁날게 없는 사람이다. 그래서 처음부터 투자금을 니 개인통장으로 들여오자고 우겼지. 증거를 없애자고…” 삼촌은 큰 배를 내밀고 흐흐 징그럽게 웃었다. “암튼 내가 주선할테니 저녁에 술상 하나 차리자…” 삼촌의 자신있는 말에 나도 덩달아 잠시 걱정을 매달아놓을수 있었다. 정말 삼촌이란 사람은 감당할수 없는 사람이였다. 그런 삼촌과 같이 일을 한다는것이 든든하게 생각되기도 하였지만 모름지기 섬찍하기도 하였다.  역전에는 항상 가야할 사람과 오고있는 사람들로 북적이는 법이다. 나는 매표소앞의 길다란 줄에 끼여섰다. 어디로 갈가? 내가 몇년동안 근무하면서 많이 익숙해진 ㄱ시는 동시에 김사장과 만나서 장사를 하던 곳이라 어딘가 찝찝했다. ㄱ시 말고… 그래, 이 나라 최남단도시로 가자. 일단 거기에 대학교때 친구녀석이 자리를 잡고있다니 거기서부터 다시 시작하는거야. 이 도시와 가장 멀리 떨어져있는 천애지각으로… 매표창구의 직원이 물어오자 나는 주저않고 그 도시이름을 대였다. “예, 거기요. 침대칸이 있다구요? 예, 아래층 말고 웃층이요. 몇시간 가야 된다구요?” “자, 자, 술들 들지…” 삼촌은 껄껄 웃으며 삼촌다운 큰 목소리로 술을 권하고있었다. 시 법원에 있다는 검사와 변호사 두명을 초청한것이다. 도수 높은 안경을 걸고 교만스러운 웃음을 흘리고있던 두사람은 삼촌한테 술잔을 들어보였다. “오늘 임공장장 마작운이 좋지 않아 미안해서 어떡하지?” 검사라는 작자가 전혀 미안해하지 않는 표정을 짓고 심드렁하니 웃었다. “아니 뭐, 다 재미로 하는거지요. 잘되는 날이 있고 안되는 날이 있는걸. 중요한건 기분좋게 놀아야 한다는것 아니겠습니까?” 삼촌이 대수롭잖은 일이라는듯 손을 내흔들었다. 이번엔 또 얼마를 “상납”했을가? 세 개? 두사람이니까 네개? 마작을 논다는건 눈가림수에 속할뿐이였다. 이긴 사람도 진 사람도 서로 그 내막을 빤히 꿰뚫고있었다. 직접 돈을 받지 않아서 법에도 문제될것 하나 없었다. 까탈스런 공무원들을 “사들이는”데는 이 방법이 최고였다. 삼촌은 이런 일에 아주 이골이 튼 사람이였다. 그리고 이런 방법은 삼촌이 여태 쭉 살아온 이 북방도시에서 보다 더 효력을 볼수 있었다. “상납금”이 만족스러웠던지 그네들의 입에서도 말들이 줄줄이 나오기 시작했다. 사기죄라면 우리 같은 경우에 증거가 불충분하다는게 그들의 판단이였다. 가장 중요한 회사설립자금이 내 개인통장으로 나갔기때문이였다. 나와 김사장사이를 증명해줄수 있는 서류나 사람도 없는 형편이여서 김사장의 돈이 바로 회사설립자금이라는 설도 충분한 근거가 없다고 했다. 돈을 보낼 당시 환률을 생각해서 암시장거래로 보냈기때문이였다. 또 설사 김사장의 돈이라는 증명이 있다고 해도 둘사이에 아무런 서류가 남지 않아서 대체 무슨 의도로 보낸 돈인지 불명백하다고 하였다. 내쪽에서 그 돈이 김사장과 장사할 때 나한테 진 빚이였다고 하면 엎을 길이 묘연하다고 했다. 김사장이 어떤 증거물을 제시할지 알수 없는 일이지만 이 사건은 최악의 경우에도 사기죄보다는 경제안건으로 남을 가능성이 훨씬 많다고 하였다. 알다싶이 일단 경제안건으로 판명이 나기만 한다면 돈이 없다는 핑게를 백방으로 만들어내여 시간을 거의 무한정으로 끌어갈수도 있어서 실질적인 배상을 하지 않을수도 있게 되는것이다. 거기다가 시 법원 원장까지 매수한다면 일은 떼여놓은 당상이였다. 법률에 대해 전문은 아니지만 그들의 말을 듣고보니 확실히 일리가 있는 말이였다. “하, 그렇게 된다면야 걱정할게 뭐 있겠습니까? 원장님께 잘 얘기해서 한번 식사나 하시지요…” 삼촌의 얼굴이 불그러니 잘 익어있었다. 나도 술병을 들고 두사람에게 허리를 굽실거리며 연신 잔을 채워주었다. “그럼, 그럼요… 임공장장님 통이 크다고 잘 말씀드리지… 글고, 어차피 팔은 안으로 굽어야지 안그렇습니까? 그쪽은 한국 아닙니까? 우리 다 같은 중국인으로서 당연히 중국인의 송사에 귀를 기울여야지요…” 검사란 작자도 얼근하게 잘 취해있었다. 술이 들어가니 얼굴표정도 많이 풀어져 있었고 더워서 갑갑한지 반듯하게 매고있던 넥타이도 비뚤렁하니 반쯤 풀어헤치였다. “아, 지당한 말씀이지요… 이럴때 서로 똘똘 뭉쳐야지… 암튼, 며칠후에 마작판 한 번 더 벌립시다. 원장님 모시고 조용한 곳에서…” 삼촌은 내게 눈을 슴벅거려왔다. 이제는 확실한 타산이 섰다는 얘기다. 나도 숨이 활 나왔다. 이제 김사장은 전투기가 아니라 미사일을 가지고 덤벼든다 해도 별 승산이 없을것이다. 그러게, 삼촌이 어떤 인물이라고 간 크게 덤벼들어?  기차는 점심때에 출발하여 옹근 하루 하고 반나절 더 가야 한다고 하였다. 나는 기차에 올라 트렁크를 질질 끌며 표에 찍힌 내 자리번호를 찾아갔다. 좌우, 아래우 해서 한칸에 네사람의 침대가 들어있었다. 내 침대 아래칸에는 벌써 그 주인이 짐들을 정리하고 먹을것들을 꺼내 탁자우에 놓느라 부산을 떨고있었다. 맞은켠 아래침대의 주인이 아직 도착하지 않은 틈을 타서 공용해야 하는 탁자위의 공간을 더 많이 차지하려고 필요한것 없는것 죄다 꺼내서 쭉 배렬해놓았다. 또 시작인가? 지긋지긋한 자리싸움? 나는 씁쓸히 웃으며 내 트렁크를 번쩍 들어 웃 침대인 내 자리로 들어올려갔다. 어느 도시를 가나, 어떤 사람들을 만나나 이런 일들은 인간세상에서 피면할수 없는 일인것 같았다. 뭐 선진국사람들은 다 자리가 있고 문명스러워서 그렇지 않을거라고 생각하겠지만 분명 그 나라, 그 인간들사이에는 또 다른 형태의 “자리싸움”이 존재할것이다. 어쩌면 기껏 걸상 하나나 편안한 자리 하나같은 작은 리익에 연연하는 우리보다 더 큰 리익을 사이에 놓고 살벌하게 싸우고있을지도 모르는것이다. 그게 인간의 본래 모습인가? 아니면 이 세상살이에 길들여진 외곡된 현상인가? 누구를 말할것도 없었다. 먼저 자기의 리익을 생각하는것은 어느 누구나 다 같은 것이였으니까. 김사장은 그후에도 나한테 전화와서 곧 령사관에 이 일을 넘길것이며 법정에서 나와 삼촌을 부르는 일이 있을거라고 두어번 경고했지만 그뒤로는 한동안 소식이 없어졌다. 식당은 내 예측대로 이미 다른 사람한테 양도되였으며 계약을 함께 체결한 사람이 바로 그녀였다는것을 새 주인의 말에서 짐작해낼수 있었다. 그리고 그후 그녀는 김사장과 같이 떠났는지 연기처럼 사라져버렸다. “흥! 망할것들! 나를 어떻게 해보겠다고? 어림반푼도 없지!” 삼촌은 그들을 떠올리며 분이 차올라 씩씩거렸다. 나는 만일을 대비하여 주중 한국대사관에다 한국인 신분으로 이런 류형의 사건에 대해 자세한 문의를 해보았다. 거기에서 해주는 대답도 저번 변호사의 말과 크게 다르지 않았으며 난감한 말투로 서류 하나 없이 투자금을 그런 식으로 보낸게 잘못이란 말만 해주었다. 결국 법으로는 이 일이 사기죄로 성립될수 없다는 얘기였다. 김사장도 그걸 알았는지 다시 법으로 어떻게 할거란 장담의 전화는 오지 않았다. 대신 얼마간 지나서 갑자기 내게로 만나고싶다는 전화를 해왔었다. “우리가 또 만나야할 리유가 있나요?” 나도 이제 김사장을 만나는것이 싫었다. 이제 서로 얼굴을 찢은 마당에 만나서 할 말이 뭐가 있겠는가? 기분 나쁘게 헤여질 일밖에 더 있겠는가? 그리고 나는 다시 김사장의 옆에서 그녀를 보게 될가봐 두려웠다. 좋은 기억들만 남겨두고 갈것이지… 꼭 그렇게 너절하고 더러운 모습을 내게 보여줘야만 했는가? 만약에 만에 하나라도 나에게 호감 같은것이 한점 남았다면 말이다. “임경리, 인간적으로 생각해보게. 임경리가 나라면 어떻게 했을것 같은가?” 김사장의 어투가 많이 누그러져 있었다. 이제 도무지 해볼 도리가 없으니까 다시 나한테 량심이니 교분이니 들먹이고있었다. “임경리가 나서서 삼촌을 고소하는 방법밖에 없네. 만약 그렇게만 한다면 내 이 일을 두고두고 잊지 않을거네…” 나는 한숨을 푸- 하고 내쉬였다. “김사장님도 인간적으로 생각해보세요. 김사장님이 나라면 어떻게 했을가요? 까놓고 말해서 김사장과 나는 남남이지만 삼촌과는 가족입니다. 김사장님은 가족을 배반하고 팔아넘길수 있을가요?” 저쪽에서 김사장이 후- 하고 한숨을 길게 쉬는 소리가 들렸다. 아무말 않고 전화를 들고만 있는 그를 대하자 내 마음 한쪽이 짠해난다. “그래, 김사장님 지금 어디세요?” 이 량반이 잘 알지도 못하는 나라에 와서 제대로 먹고나 다니는지 모를 일이였다. 그러게 참, 일이 왜 이렇게 되였을가? 우리는 왜 이런 관계가 되여버린건가? “그럼 나더러 이대로 망하고 돌아가란 말이냐?” 김사장이 아니라 어느 누구라도 마음이 편할수 없을것이였다. “그러니까 삼촌과 만나서 협의해보세요. 저도 삼촌 설득해볼게요…” 가능성이 별로 없는 제의지만 나로서는 그것밖에 해줄수가 없었다. 김사장은 한숨만 쉬다가 아무말 않고 끊어버렸다. 내 머리도 내 머리겠지만 그 사람의 머리도 지금 빠개질것이다. 그 서슬에 기뻐난 사람은 삼촌뿐이였다. 매일 사람들을 불러 술자리를 만들어 흥청망청 먹고 마시였다. “내 임대관이가 어떤 사람인지 똑똑히 가르쳐줄거야. 함부로 덤비지들 말라고…” 삼촌은 득의양양해하였지만 나는 계속 속이 편하지가 않아서 삼촌이 주선하는 술자리에 핑게를 대고 빠져주었다. 삼촌의 공모범으로 보여지기 싫어서였다. 내 나름대로 량심껏 했다는 평을 듣고싶었다. 하긴 그런 마음이라도 먹고있었기에 김사장이 나를 빼고 삼촌만 찾은것 같았다.  6  기차는 덜컹거리며 잘도 나아갔다. 웃층침대에 팔베개를 하고 누워서 나는 창밖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정작 차가 떠나고 눈에 익었던 도시를 떠나게 되니 그렇게 쓸쓸할수가 없었다. 대체 내 인생의 종착역은 어디란 말인가? 이 도시로 돌아올 때는 이제 여기서 결혼도 하고 사업도 하고 애도 키우며 살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고작 1년이라니? 1년도 채 버티지 못하고 이 도시를 떠나야 한다니? 나를 반기고 기다리는 도시는 어디에도 없었다. 인생에는 처음부터 무슨 종착역 같은것이 존재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살다가 죽는 곳이 바로 종착역이겠지. 허무하고 외로웠다. 이 넓은 세상에 나를 위한 도시가, 나를 위한 사람이 단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 혈육이면 어떠한가? 비록 물이 섞인 피라지만 삼촌만 생각하면 뜨끈뜨끈한것이 욱 치밀어오르던 그 시절은 핥아먹은 개 밥그릇처럼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는걸. 최소한 삼촌이 있어서 떠올리면 기분이 좋아지던 도시였다. 그런데 지금 나는 삼촌을 지우기 위해 이 도시를 떠나는걸. 그래서 솔로몬이 그런 시를 지었다던가?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것이 헛되도다! 나는 눈을 스르르 감아버렸다.  삼촌이 당했다. 친구들과 기껏 술을 퍼마시고 비칠비칠 집으로 들어가다가 아빠트 입구에서 낯선 사내 둘에게 폭행을 당했다. 술에 너무 취해 어떤 사람들인지 미처 볼 새도 없었고 그렇게 퍽퍽 맞은 뒤에 간신히 집으로 올라왔단다. 김사장이 그런 일을 저질렀다는건 묻지 않아도 뻔할 뻔자였다. 허연 붕대로 얼굴이며 팔을 둘둘 감고 삼촌은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그래, 이제 백으로 안되니까 흑으로 해보자는거지? 좋았어, 오늘 나를 죽이지 않은 것이 네놈의 실수다!” 그냥 당할 삼촌이 아니였다. 나는 골절에 좋다는 웅담을 술에 담궈가지고 삼촌한테 주고 오면서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렇게 해서라도 김사장 분이 사그러진다면… 이쯤에서 무슨 타협을 볼수 있다면… 차라리 속편하겠다…” 거퍼 이틀이 지나지 않아 고객룸에 삼촌의 “아우”라던 그 “빡빡머리”가 애들을 데리고 득의양양해서 들어왔다. “임형, 찾았소! 그 자식이 말이야…” 아직 얼굴에 파스를 더덕더덕 붙이고 사무실에 앉아있던 삼촌이 용수철마냥 벌떡 튕겨올랐다. “흥, 제깟놈이 내 눈을 피할수 있다고? 오늘 내 손에 죽었다!” 나는 속이 철렁하였다. 주먹질로 이름났던 삼촌은 결혼전 무리싸움에 끼여들었다가 사람 목숨을 빼앗은 사고도 냈었다. 내막을 잘 알순 없었지만 몇년전에도 무슨 사고로 한동안 피해다닌적이 있었다고 하였다. 저렇게 불 같은 성격의 삼촌이 김사장을 만난다면… 정말 또 무슨 일을 칠지도 모를 일이였다. “삼촌! 랭정해요, 삼촌! 일 치지 말고…” 삼촌이 씽긋 웃으며 나를 돌아보았다. “내가 여직껏 준비하던 일인데 제쪽에서 선수를 쳤으니 이제 나도 칠 명분이 생긴거다. 걱정말아. 이 도시로 끌고와서 조용하게 손 볼꺼니… 이 도시에선 아무일 없다. 다 내 사람들이라서…” 삼촌이 공안국 국장이며 “빡빡머리”며를 자주 만나던 일이 이런 때를 대비하여 눈감아달라는 차원에서였다는것을 나는 새삼 깨달았다. 삼촌은 정말 그의 말대로 “흑으로나 백으로나” 다 준비를 단단히 하고 김사장을 끌어들인것이였다. 무서운 사람! 저 사람한테 김사장이 걸려들었으니… 워낙에 서로 맞수가 되지 못하는 사람들이였다. 나는 김사장이 어느 정도로 당했는지 알지 못한다. 그것까지 알려고 하기엔 내 마음이 너무 여렸다. 삼촌의 성격을 보아 자신이 당했던것보다 더 하면 했지 덜 손봐줄 위인이 아니였다. “개자식, 너무 바빠서 오줌을 다 갈기더라. 야 임마, 너도 그거 봤어야 하는데…” 그날 저녁, 술상을 차리고 삼촌은 호탕하게 배를 두드리며 웃어대였다. “이것 봐라, 이제 그 자식은 끝났어. 이 회사는 이제 우리거다!” 삼촌이 품안에서 종이 두장을 꺼내보이며 껄껄 음흉하게 웃었다. 우리 정비공장 명예고문자리를 포기한다는 내용의 증명 하나와 일전 장사에서 나한테 진 빚을 갚기 위해 돈을 보냈다는 내용의 수지 하나였다. 김사장의 비뚤비뚤한 싸인과 도장밥으로 찍었는지 피로 찍었는지 언뜻 알수 없는 뻘건 손도장이 찍힌것들이였다. 먼저 구타하고 나중에 억지로 찍어낸 모양이였다. “이 증명만 있으면 경제안건도 성립되지 않는거야. 그 자식이 우리 회사와 아무런 관계도 없어지는거라고…” 삼촌이 내 어깨를 껴안고 술냄새를 팍팍 풍기며 흥분되여 말했다. “그래? 김사장이 우리 회사와 아무 관계없는 사람이 되였다고? 그 사람… 이제 맨몸으로 돌아갔겠네?” 삼촌은 너무 기뻐서 나를 흔들어대였지만 나는 그렇게 기뻐할수가 없었다. 결국 이렇게 끝난건가? 김사장 이렇게 거꾸러지면 다시 일어설수나 있을가? 중국으로 들어오고싶은 생각은 까맣게 없어질것이다. 돈 날리고 회사 빼앗기고 몸까지 다쳤는데 아무도 편이 되주는 사람이 없었으니… 꼼짝 못하고 악 소리 한번 제대로 질러보지 못하고 삼촌한테 당한것이다. 나는 아가씨들을 주무르며 술을 퍼넣는 삼촌을 바라보았다. 삼촌은 정말 아무런 거리낌도 없는것일가? 김사장을 맨몸으로 쫓아내고 정말 두다리 쭉 뻗고 편안하게 잠잘수 있을가? 도대체 인간이란 어느 정도까지 잔인해질수 있는것일가? “삼촌- 삼촌은 정말 마음이 편해? 김사장 쫓아보내고?-” 술에 곤드레 취해서 나도 삼촌의 어깨를 부둥켜안고 흔들었다. 할수만 있다면 삼촌의 마음이 어떻게 생겼는지 들여다보고싶었다. “야, 이 자식아. 나라고 그러고싶어 그랬겠니? 내가 어떻게 이 자리까지 왔는데… 너, 내가 그 개* 같은 견습공에서부터 어떻게 기술공이 되고… 어떻게 경리가 되고… 어떻게 이 업계에서 자리를 굳혀왔는지 알기나 하니? 아무도 내편은 없었다. 돈도 없고 배운것도 없고 부모빽도 없고… 다 나혼자서… 이 험한 세상에서… 아득아득 살아왔어… 날 건드리지만 않았으면 나도… 이렇게까지 하지 않았을거다. 회사 잘 경영하고 돈벌어서 투자금 좀씩 갚고… 그담에 그담에 내가 먹으려고 했지… 흐흐… 원래 이 바닥에서 장사는 그렇게 하는거다.누구 탓할거 아니다!내가 아니라 다른놈 만났더라도 그 사람 그렇게 됐을거다… 다 제그릇이 너무 작은게 탈이지… 나만한 사람을 감당할수 없었던게…” 비칠거리며 택시에서 내려 사우나로 걸어가면서 삼촌은 주절주절 말들을 털어놓았다. 그래, 건드리지만 않았으면… 그게 중요한것이다. 그렇게 일찍 건드리지 않았으면 김사장은 얼마간의 투자금은 회수했을것이다. 결국 그렇게 따지자면 김사장은 이 도시에 들어온것부터가 잘못되였다. 일찍 건드리든 늦게 건드리든 아니면 건드리지 않았다 할지라도 삼촌은 어차피 그 회사를 손아귀에 넣고자 했을것이다. 일찍 건드렸기에 일찍 빼앗겼을따름이다. 그럼 나는 어떠했는가? 나는 애초부터 삼촌을 건드리지도 아니, 건드릴 생각조차 해보지 않았었다. 그런 나에게 삼촌은 왜 그랬을가? 사람의 욕심이란 끝이 없는 법이다. 어느 정도 선에서 만족하겠다는 자신의 생각도 전혀 믿을수 없는 노릇이다. 세상에서 가장 간사한것이 사람의 마음이니까. 굳이 녀자의 마음만 갈대라고 빗대여 욕할 필요가 없다. 리익앞에서 남자나 녀자나 사람이면 다 같은 마음일거니까.  삼촌이 혹시 나에 대해서도 다른 마음을 먹을수 있다는 생각은 그녀의 전화를 받고 서였다. “저예요. 잘… 있죠?” 한창 령수증을 “위조”하고있다가 그녀의 전화를 받고 나는 깜짝 놀랐다. 이 녀자가 무슨 생각으로? 아직도 김사장과 관련된 일인가? “무슨 일이야? 어디야?…” 영 마뜩지 않아하는 내 어투를 알아차리고 그녀는 조용히 말을 이었다. “오해하지 마세요, 김사장하고 상관없어요. 나는 나예요, 누구하고도 상관이 없는 사람이예요…” “…?” 그건 또 무슨 말인가? 도대체 이 녀자는 무슨 말이 하고픈걸가? “저 지금 떠나는 길이예요… 이 도시… 이 나라…” “…” “가기전에… 이제 다시 만날 일 없겠지요, 우리…” 그녀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고있었다. 정작 그녀가 떠날것이라고 생각하니 기분이 영 구릿구릿하였다. “그래…” 떠나지 않는다면 또 달라질것이 뭐가 있겠는가? 이미 나는 그녀와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인걸. 내 마음이 그런 그녀를 다 받아줄만큼 너그럽지는 못한걸. “그래서 얘기하는건데요, 나는 아무도 믿지 않는 사람이예요, 나자신외에는… ” 그러니까 김사장이나 다른 어떤 누구라도 그녀 자신의 계획에 따라 만나는거지 정에 흔들린다는 말은 아니라는 말일것이다. 역시 속을 알수 없는 무서운 녀자… “당신도 믿지 마세요, 아무나… 장사로 만나는 사람도 그렇고 혈육이라 하는 사람도 그렇고… 녀자도 마찬가지예요. 자신외에는 아무도 믿지 마세요…” “그게 무슨 말이야? 지금 누구를 말하는거야?” 나는 전화기를 귀에 바투 들이대였다. 이 녀자는 나보다 많은 정보를 알고있었다.김사장은 갔고 혈육이라면 혹시… 삼촌을… “그래요, 까놓고 말해서 삼촌이예요…” 녀자는 삼촌이란 말을 하면서 가볍게 랭소하였다. “삼촌이 왜? 내가 그 말을 믿을것 같아?” 녀자는 픽하고 웃어버렸다. “그러게… 아무도 믿지 말라고 하잖아요… 삼촌도 나도…” 그래서 나는 그녀의 말을 어디까지 믿어야 하나,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하는 일로 잠간 고민하였다. 이 도시를 떠난건지, 이 나라를 떠난건지는 알수 없지만 그렇다고 그녀가 남아있을 리유도 없었던것 같았다. 김사장과 상관없다니? 식당이 처분되고 돈을 받은 다음에 그녀는 김사장과 더 같이 있을 리유도 없었을것이다. 그녀말대로 그녀는 아무도 믿지 않는 사람이였고 아무하고도 상관없이 그냥 자기가 하고픈 일을 선택해서 이루었을뿐이였을수도 있다. 이것이 그녀의 진실일수도 있다. 그럼 떠나는 마당에 굳이 나한테 찝찝한 전화 한통 하고싶었던 그녀는 또 무엇이였을가? 나는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더이상 알고싶지도 않았다. 알았다 한들 또 무엇하랴. 아무 소용없는 짓들이였다. 라면냄새가 코로 흘러들어왔다. 내 아래층 주인이 탁자에 자신의 물건들을 가득 놓고 그중 책 한권우에서 컵라면을 먹고있었다. 맞은켠 손님과 공유해야 하는 탁자라 자신의 지경을 좀이라도 더 넓히려고 선수를 쳐서 저녁을 먹는것이였다. 그 밴댕이 속알딱지만한 속이 다 드러나보였다. 좀, 좀, 저러지 좀 말지. 다들 바보도 아닌데 그 속을 모를가봐. 왜 어떤 인간들은 꼭 저렇게 치사스럽게 살아야 하는지 모르겠다. 나는 흘끔 그 친구의 맞은켠 침대에 누워있는 손님을 내려다보았다. 어떤 반응일가 궁금해서였다. 같이 물건을 탁자우에 밀어놓으며 신경전을 벌이겠는지 아니면 포기하고있는지. 맞은켠 침대의 그 사람은 누워서 책을 보고있었다. 빼앗기여서 불쾌한 표정을 일부러 양보했다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바꾸어서 말이다. 그 사람의 “고상한” 표정을 확인하는 순간 나는 갑자기 숨이 확 트이면서 기분이 좋아지였다. 이 세상에 나 같은 사람이 또 있다는 사실에 알수 없는 안도감도 느낄수 있었다. 괜히 그 사람과 말이라도 한번 걸어보고싶은 충동이 일었다. “저기요, 지금 몇시예요?” 기차를 타본 사람이라면 이러루한 물음이 바로 말꼬리의 시작이라는것을 다 알수 있을것이다. 거의 모든 화제는 이러루한 물음으로부터 시작된다. 몇시예요? 방금 지나간것이 어느 역이예요? 어디까지 가시는데요?… 뭐 이런식으로 말이다. 나와 일련의 뉴대감이 느껴지는 그 “동지”는 눈을 들어 나를 쳐다보았다. “몇시냐구요? 음- 5시네요. 5시 5분…” 7 그녀의 전화는 무슨 악성바이러스 같아서 한번 대뇌세포속에 침입해들어온 이후 쉽사리 나가주질 않았다. 그러고보니 요즘 삼촌이 나를 대하는 태도도 점점 이상스러워진듯하였다. 전 같으면 퇴근후마다 벌려지는 이러루한 술자리에 인사차원만으로도 꼭 나를 부르군 하던것이 언제부터인가는 나오라는 전화 한통 없다. 물론 내가 술을 좋아하는것도 아니고 삼촌의 술친구들과 다 교분이 있는것도 아니여서 나오라고 할 때마다 다 나가는 내가 아니였다. 그런데 삼촌을 믿지 말라는 그녀의 전화를 받은후부터 괜히 삼촌이 나를 따돌리려고 그러는건 아닐가 하는 의구심이 들어서 영 불쾌해나군 하였다. 일때문에 먹는 술도 많았지만 삼촌자신이 친구들과 마시는 술도 많았는데 그런 용도로 나가는 돈들이 다 회사장부에 접대비용으로 올려지군 하였다. 김사장이 떠난후에 회사에는 장부를 두개만 두었는데 만에 하나, 삼촌이 다른 마음을 먹었다면 나한테 올려오는 장부 말고 아래층에 또 하나의 장부가 있을것이였다. 장부만큼은 아니라도 차 두어개의 수리비만 올려오지 않아도 구멍이 생길게 뻔하였다. 사달은 월말 영업수익을 작성할 때 생겼다. 자동차 부품값 외상장부는 다 맞았는데 고객들의 외상 수리비장부가 맞아떨어지지를 않았다. 어떤 경우에는 손님이 며칠만 말미를 달라해놓고 실제로 몇주일, 몇달이 지나도 갚지 않을 때가 있다. 그러면 그 장부는 아래층 직원의 컴퓨터에 미결로 남아있고 나한테는 전달되지 못한다. 나는 그런 외상장부가 있다는것조차 모를수 있었다. 그런 장부가 갚아진다면 그중에 얼마든지 틈이 생길수 있는것이다. 누구의 호주머니속에 현금이 들어가도 나는 감감 모를수가 있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아래층 녀자직원들을 의심했었다. 만약을 대비하여 아래층에서는 고정된 직원이 돈을 받고 장부를 관리하는것이 아니라 컴퓨터 네트워크로 세명의 녀자직원들이 동시에 장부를 관리하고 돈을 받을수가 있게 시스템이 되여있었다. 때문에 세명이 한꺼번에 짜고든것이 아니라면 손쓰기가 어려운것이다. 어쨌든 장부의 틈사리를 조사하기 위하여 아래층 컴퓨터로 들어가보니 그동안 외상으로 들어와서 내 장부에 아직 올려오지 못한 자동차가 몇건 잘되였다. “이건 공장장님이 먼저 놔두라고 해서…” 녀자애들이 떠듬거리며 나의 눈치를 보고있었다. “ 이건 어제 공장장님 카드로 들어왔대요… 결산장부는 공장장님이 임경리님 가져다준다고 했는데…” 녀자애들이 미결한 장부 몇개를 가리켜보이며 설명을 덧붙였다. “이건 공장장님이 무상으로 해주라고 해서…” 그 금액들을 대충 훑어보아도 만단위가 훌 넘어갔다. 적지 않은 구멍이였다. “그래? 알았어…” 나는 다른말 않고 조용히 내 사무실로 올라왔다. 그녀의 말이 사실인가? 삼촌이 정말 다른 마음을 먹은건가? 아니면 용돈이 모자라 장부 몇개 슬쩍 했을뿐인가? 정말 마음먹고 해먹자면야 삼촌은 얼마든지 나몰래 해먹을수 있었다. 부품도 삼촌절로 다 주문하고 큰 사고가 난 차량들은 반드시 가격을 협상해야 하니… 이 바닥에서 어떻게 해먹고있는지 나도 뻔히 잘 아는 일이다. 기사들만 보아도 그렇다. 정부기관에 근무하는 기사들은 더욱 그러했다. 약한 사고를 당하고도 일부러 부품을 바꾸러 오는가 하면 사고를 당하지 않고도 와서 비싼 부품을 바꾸는이들이 많았다. 어차피 수리비용은 기관에서 나가는거니까. 멀쩡한 부품을 바꾸어넣어서(어떤 경우에는 근본 바꾸지 않을 때도 있다) 부품 하나를 그냥 얻은데다가 높은 수리비를 받은 회사에서는 기사에게 수고비를 찔러주군 한다. 그 수고비맛에 기사들은 일정한 간격을 두고 단골회사를 찾는것이다. 이런것들은 거의 공개된 비밀이나 다름없었다. 아직 이 나라, 이 도시 정비업은 그랬다. 비싼 외제차일수록 부르는것이 값이였다. 다른 회사에서 찾아내지 못한 문제점을 우리 회사에서 해결하였다면 가격은 우리 마음이였다. 아니, 삼촌 마음이라고 해야 옳은가? 삼촌도 마음만 먹으면 고객들한테서 회사장부에 알려지지 않는 수리비를 챙길수 있었으며 부품주문시에도 따로 카드를 만들어 수고비통장을 만들수 있었다. 어차피 구입비용은 회사장부대로 회사돈으로 나가야 하는것이니까. 그렇게 따지자면야 문턱마다 함정이고 덫일수 있었다. 어느선까지는 서로 알아도 모른척, 한쪽 눈을 감아주고 지내야 시끄럽지 않을가 하는 생각에 나는 김사장이 나간 뒤의 첫두달을 그렇게 버텼다. 그런데 삼촌편에서 나의 꼬투리를 잡으려는 낌새가 날로 더 로골적으로 보여지는 것이였다. 왜? 나는 삼촌을 건드리지 않았을뿐만아니라 여태 피하기까지 했는데… 내 아래층친구는 컵라면을 다 먹고도 부산하게 계속 탁자우의 물건들을 이리저리 옮겨놓았다. 하루반을 이 기차에서 지내야 하니 다음끼니에도 탁자를 또 써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렇지, 내릴 때 가지고 내릴것도 아니면서 자기가 다 쓰고나면 다른 사람이 쓸수 있게 자리를 얼마간 비워두어야지… 어떤 사람들은 그랬다. 항상 자기가 응당 가져야할 그 이상을 욕심내고있었다. 더 많이 가지고싶다는 생각은 어느 누구에게나 있겠지만 그들은 너무 로골적이고 너무 솔직했다. 너무 많은것을 차지하려고 하다보니 항상 다른 누군가와 충돌이 생기게 된다. 자기의 리익범위를 지나 다른 사람의 리익범주를 침입하였기에… 나는 충돌자체를 싫어하는 사람이여서 될수록 자신의 리익범주내에 얌전히 웅크리고있으려고 하지만 그들은 더 많은 리익을 위해서 충돌을 불사한다. 단순 용감한 그들은 또 충돌에서 이기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더 자신있게 부딪칠 준비를 하고있는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삼촌이 내게 걸어온 문제들은 시시껄렁한 작은것들에서부터 시작되였다. 사무실 컴퓨터 전원을 켜놓고 갔다느니… 아침부터 웬 지각이냐느니… 령수증을 잘못 찢었다느니… 하는것에서부터 지출명세가 불확실하다느니… 장부가 명확하지 않다느니… 세금을 왜 이렇게 많이 내게 장부를 했느냐… 등등과 같은 민감한 문제로 이어졌다. 처음에는 삼촌의 의도가 명확히 느껴오지 않아서 나의 잘못들을 인정하고 넘어갔는데 점점 많아지는 문제들이 그냥 장난이 아니였다. 인정하기 싫은 일이지만 이건 분명한 트집이였다. 나는 명의상 법인이였을뿐이고 삼촌은 실질상 회사의 주인으로 회사내외에 확실히 자리매김하고싶었던것이다. 자신의 착오는 죽어도 인정하지 않으면서 나의 문제점은 직원들앞에서까지 공공연하게 내놓고 떠들어댔다. “이렇게 해서 어떻게 회사에 책임진다고 말할수 있어? 직원들한테 본이 되는가?”서른명남짓한 직원들이 밥을 먹고있던 식당칸에서 삼촌이 눈을 부라리며 내게 소리쳤을 때 정말이지 당장 집어치우고 뛰쳐나오고싶었다. “아무도 믿지 마세요… 삼촌? 그래요, 삼촌말이예요…”하고 마지막 귀띔을 해주던 그녀의 말이 언뜻 머리에 떠올랐다. 나보다 눈치가 빠른 그녀는 처음 자신을 식당에 들여오며 구슬리던 삼촌의 입에서 그 인간됨을 미리 알아챘던 모양이였다. 그래서 그녀는 삼촌한테 당하기전에 먼저 선수를 치고 도망간것이였다. 나한테는… 바보 같이 순진하게 삼촌만 믿고있는 내가 안쓰러웠을가, 아니면 우스웠을가 암튼 그런 복잡한 마음에서 주저하다가 전화를 걸어준것 같았다. 다들 나보다 한참 선수들이였다. 나 같이 얼쩡한 인간이 또 어디에 있을가? 거의 일년간 회사를 경영하면서 장부를 손에 쥐고있다지만 한푼도 허투루 쓰지 않으려고 했고 내 호주머니는 더우기 청결하게 지키였다. 그뿐이랴. 응당 그전부터 얼마간씩이라도 회수했어야할 나의 투자금도 삼촌의 이런저런 구실때문에 차일피일 미루고있었던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도 뻔한 스토리였다. 김사장한테 하던것과 똑같은 방법을 내게 쓰고있는 삼촌이였다. 구실을 잡아 트집을 걸고 장부를 빼돌리고 돈줄을 졸라매여 나 스스로 숨이 막히게 하는… 너무 티나는 수단들이였다. 그럼에도 나는 삼촌이기에 나의 혈육이기에 절대로 나한테 그럴리가 없을거라는 바보스러운 믿음 하나로 그것들을 다 외면하였던것이다. 삼촌의 속내를 떠보기 위해 나는 그날 저녁 삼촌을 회사로 불렀다. “뭐 급한 일이냐? 급한 일 아니면 다음날 보고… 나 피곤하다…” 내 전화를 받는 삼촌은 예상대로 영 심드렁한 말투였다. 삼촌은 워낙 나 같은것을 안중에도 두지 않고있었다. “착해빠져서” “밥그릇만 빼앗기는” 나를 상대하는 일은 삼촌한테 있어서 일도 아니였을것이다. “삼촌, 아무래도 회사일에 내가 적성이 맞지 않는것 같기도 하고 이제 결혼하고 내 일도 새로 시작해야 할것 같아서 말인데…” 내가 어눌하게 말을 꺼내자 삼촌은 비스듬히 의자에 포개고 앉아서 나를 지긋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이것도 삼촌 예상안의 일일것이다. 무조건 “조르기”로 나혼자 포기하고 나가주기를 바라는… “그래서?” 삼촌이 손으로 턱을 쓰다듬었다. 나는 숨이 막힐것 같아 연신 침을 꿀꺽꿀꺽 삼켰다. “그래서 말인데… 내가 투자한 금액을 빼주었으면…” 일전 한푼 들이지 않은 사람은 삼촌이였지만 나는 내 돈을 처넣고도 오히려 삼촌한테 사정하고있었다. 이 세상은 워낙 이런 세상이였던가? “흠- 투자금이라…” 삼촌은 일부러 말꼬리를 길게 늘어뜨리였다. 제발 그러지 말았으면… 김사장한테 하던 식으로 나를 내보내려고 하지 말았으면… 나는 삼촌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삼촌은 과연 어떤 대답을 줄것인가? “야, 임마, 너도 회사장부 다 쥐고있으니 알겠지만… 우리 회사 세운지 이제 일년도 안됐어. 김사장 그놈이 떠난지는 이제 석달째고… 아직 제궤도에 들어서지도 않은 회사에서 투자금을 빼겠다니… 나보고 어떡하라구? 아직 공장도 더 확충해야 되고 설비도 더 들여와야 하는데… 아직 먼저번 설비값도 다 물지 못했다는건 니가 더 잘 알잖니… 야- 난감하다… 니가 이렇게 나오니…쯧쯧…” 삼촌의 얼굴에는 한치 미안함이나 어색함도 없었다. 너무 당당하게 너무 도리있게 말을 하고있었다. 나는 삽시에 뒤머리가 아파났다. 삼촌이 정말… 정말로 나까지… “그러면 매달마다 얼마간이라도 빼주면 어때요? 그러면 부담이 덜 가겠는데…” 김사장한테 해보라고 제의했던 최후의 수단이였다. 설마 삼촌이… 나는 눈 하나 깜짝않고 삼촌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삼촌은 김사장이나 나나 똑같이 취급할셈이였던가? “글쎄… 지금은 어렵잖겠니… 몇달 지나서 겨울장사 들어가면 좀 나을런지… 지금은 할게 너무 많다… 회사부터 살리고 봐야지, 투자금이야 차차 회수하면 되는거고…” 삼촌은 너무도 자연스럽게 뻔한 거짓말을 내앞에서 스스럼없이 하고있었다. 아, 삼촌이란 사람은… 나는 더이상 뻔뻔스러운 삼촌의 얼굴을 대하고있기가 싫었다. 내가 어눌하고 “착”한건 사실이지만 그만한 말귀 알아듣지 못하는 바보는 아닌것이다. 나는 그날 삼촌의 진면모를 충분히 들여다볼수 있었다. 결국 그날 나와 삼촌은 반년에 걸쳐 내 투자금을 뽑아낸후에 나의 모든 지분과 명의를 삼촌한테 양도하기로 구두합의를 보았다. 그때 삼촌이 정말로 내 투자금은 뽑아 주겠다고 생각하고있었는지 나는 지금도 알수가 없었다. 내가 그녀의 말대로 아무도 믿지 않기로 결단을 내렸기때문이였다. 내 아래층친구는 코노래까지 흥얼거리며 탁자아래에서 보온병을 꺼내 뜨거운 차 한잔 마실 생각을 하였던 모양이다. 탁자우에는 그의 휴지, 과자, 햄, 책, 그리고 핸드폰과 꽤 비싸보이는 보온컵까지 올망졸망 쌓여있어서 완전 역전앞 길거리난전을 련상케하였다. 비싸보이는 보온컵에 차잎 한스푼을 넣고 뜨거운 물을 부은 그는 돌아서서 이불우에 던져놓은 가방을 뒤적이고있었다. 워낙 둔중한 몸집이라 자리를 다른 사람보다 배는 더 차지하게 생겼으니 자신의 엉덩이가 탁자우의 책을 슬슬 밀어버리고있다는것을 도무지 느끼지 못하고있었다. 책이 밀리면서 온 탁자우의 난잡하게 놓여진 물건들이 련쇄반응을 일으키듯 다같이 밀리기 시작하였다. 유리로 된 보온컵이 가장자리로 막 밀려나고있었다.“엇…” 내가 웃몸을 일으켜 아래로 내려다보는 순간 맞은켠 아래침대에 있던 그 “고상한 동지”도 동시에 그 장면을 목격하고있었다. “저기요, 컵 떨어지겠어요…”하고 웨치면 될걸 나는 입을 다물고 내려다보기만 하였다. 그 “고상한 동지” 역시 빤히 쳐다만 볼뿐이였다. “짤랑-!” 유리컵이 바닥에 사정없이 떨어지면서 깨져버리고 뜨거운 차물은 유리쪼각과 함께 사방으로 튕겨나갔다. “마야, 내 컵!” 그 친구가 발등에 뿌려진 뜨거운 차물때문에 덴겁하여 소리지를 때 나와 그 “동지”는 하나, 둘, 셋 하고 약속이나 한듯 눈을 서로 마주치였다. 내가 그런거 아니야… 알어, 내가 그런것도 아니야… 그냥 우리는 보고도 말을 해주지 않았을뿐이지… 그렇다. 이것이 바로 나였다. 반드시 삼촌처럼 당한만큼 당장 갚아주는 위인은 아니였어도 고상한척 양보하는척 얌전히 물러가서 엎드려 기다리고있다가 일단 기회라는것이 오면 손가락 한번 까딱하는것으로 대방에게 치명적인 손실을 입히고싶어하는… 나는 바로 그런 사람이였다.  8  만약 삼촌이 나와 약속한대로 매달 투자금을 좀씩 빼주었다 해도 지금의 상황은 또 많이 달라져 있었을것이다. 애초부터 그러지 않기로 마음먹었던건지 아니면 하다보니 경영이 차차 부실해져서 리익이 좀씩 줄어들어서 그랬던건지 삼촌은 두번째달부터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사실 장부와 현금이 다 내손에 있어서 내가 마음만 먹으면 할수 없는 일도 아니지만 나는 끝까지 회사원칙대로 공장장인 삼촌의 싸인을 받고 지출하려고 했었다. “야, 이번달은 그냥 넘어가고… 다음달 보자… 정비실 하나 더 늘여야 되고 겨울 난방시설도 들일 준비를 해야 하니…” 1층사무실에 앉아 고객들과 얼리고 닥치며 흥정을 하고있던 삼촌은 가뜩이나 험상궂은 얼굴을 더 심하게 얼그러뜨리며 귀찮은 사채업자를 쫓아내는양 나를 밀어내였다. 화가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내가 지금 여기서 무슨 짓을 하고있는지 한심스러웠다. 더이상 어떻게 해주랴? 처음 김사장을 따돌릴 때는 “우리 회사”라고 하면서 반반씩 나누자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이야기를 해놓고 그래, 워낙 그것까지는 바라고있지 않던 나라서 내 투자금만 회수하겠다고 했는데… 그러면 지분이니 명의니 다 양도할거라고… 사실 삼촌의 기술도 기술이였거니와 당시 내가 중간에 서서 김사장을 설득하고 또 내 돈을 몽땅 넣지 않았으면 김사장도 들어올리가 없었다. 그런것들을 생각해서 이렇게 하면 안되지… 한꺼번에 다 빼달란 말도 아니고 매달 얼마간씩일뿐인데… 이것까지 못하겠다 그러면… 실망스러웠고 배신감이 팍 들었다. 이제 다시는 삼촌과 협상자체를 하기 싫었다. 아무 소용없는 짓이였으니까. 그래서 김사장은 삼촌과의 협상을 피하고 대신 분을 풀려다가 자신이 배로 당한것이였다. 다 지긋지긋하고 다 싫어졌다. 나는 조용히 사무실에 들어가 내것을 챙기기 시작하였다. 삼촌은 아직 나를 다 알지 못하였다. 하긴 나도 내자신이 그럴거라고 예상하지 못했는데 삼촌이라고 어찌 알수가 있었을가? 나는 끝까지 “착”하고 “고상”하고 “빼앗”기기만 할거라고 생각했는데 사람이 몰리다보면, 몰리고 몰려서 더는 물러설 자리가 없게 되면… 그렇다. 그게 가장 무서운것이다. 궁지에 몰린 개가 높은 담을 넘듯이 사람도 몰리게 되면 예상밖의 큰일을 저지를수 있는것이다. 따지고보면 워낙에 악한 사람도 끝까지 착한 사람도 존재하지 않는것 같았다. 얼마나 짓눌리느냐에 따라서 밀가루반죽이 모양을 내듯이 사람도 변형하는것 같았다. 어느 누구라도 탓할것이 못되였다. 내가 김사장이라도 그렇게 했을것이고 내가 삼촌이라도 그런 마음을 먹었을것이니… 결국 삼촌이 나였더라도 그런 선택을 했을것이다. 이제 와서 무슨 말을 더하랴. 하늘은 내게 기회를 주었고 나는 그 기회를 충분히 리용했을뿐이였다. 나의 손가락 아래에서 삼촌은 자기 손안에 들어왔다고 여긴 거의 모든것을 하루아침에 잃게 되였다. 나는 차마 그렇게 하지 못할거라고 삼촌은 생각하고있었는지 모른다. 만약 그런 생각을 했더라면 그것이 삼촌의 가장 큰 실수였다. 차라리 삼촌이 옛날처럼 기름때가 죄죄한 작업복을 입고 와서 나의 손에 억지로 용돈을 밀어넣어주던 그 옛날처럼 그렇게 했다면… 아니 그것까지는 바라지 않고 처음 회사를 설립했을 때 김사장의 투자금을 끌어들이는데 성공했던 그 날처럼 내 손을 잡고 “늬의 아버지, 내 큰형 말이다… 돌아가기전에 나를 찾아왔었지… 자기가 없는 날에는 바로 내가 늬들의 아버지나 다름없다고…”그런 말을 하면서 위선의 눈물이라도 흘렸더라면 나는 이 막판뒤집기를 포기했을지도 모른다. 꼭 그렇게 했을것이다. 삼촌이 내 아버지나 다름없는데 내가 왜 삼촌과 리익싸움을 하겠는가? 내것이 삼촌거요 삼촌것이 내것이겠는데…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것이 헛되도다! 해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헛된것이로다…  나는 회사장부를 말끔히 정리하기 시작하였다. 물론 회사는 삼촌이 다 경영하는것 이지만, 삼촌이 돈을 번다고 하지만 나의 손가락밑에서 나가는 장부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삼촌은 아직 다 알지 못했다. 나의 손가락 다섯개면 충분히 회사 하나를 엎을 만큼 조작할 능력이 있었다. 이 방면에서 삼촌은 전문이 아닐뿐더러 설마 내가 그렇게 할가 시름놓고있었던것이다. 어떻게 할가? 어느 정도로 할가? 삼촌 몰래 다른 투자자를 만나 회사를 넘기는 방법도 있었고 삼촌눈을 속이고 미리 부도를 내버리는 방법도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하려면 매일마다 회사에 나와 각 부문의 보고를 받는 삼촌의 눈을 속이는 일이 불가능했다. 어떤식으로 결판을 보든 우선은 회사장부가 깨끗해야 했다. 세무서에서 탈세 혐의라도 하는 날이면 일이 복잡하게 꼬일것이니… 그래서 나는 외부장부를 깨끗이 하는 반면 내부장부는 오래두어서 좋을점이 없다는 핑게를 대여 말끔히 없애버렸다. 내부장부를 없애버리니 삼촌은 현금액이 얼마나 되는지 정확히 참고할 수치가 없게 되였다. 매주일 출납이 1층에 내려보내는 현금장부는 나의 능력한도내에서 일정한 조작이 가능했다. 은행에 있던 회사의 현금도 내 개인통장으로 인출해버렸다. 은행장부야 회계를 맡고있는 나이기에 혼자 얼마든지 조작이 가능했다. 외부장부만 깨끗하면 그 수자만 계좌에 있으면 법적으로도 아무 이상이 없었다. 나의 외부장부로 보면 빚도 없고 이익도 없는 겨우겨우 살아가는 그런 회사가 되여버렸다. 그렇게 준비를 차근차근 해나가는 나에게 기회는 뜻밖에 앞당겨서 찾아왔다.  기차는 덜컹거리며 어느 시골역을 지나고있었다. 저녁은 식당칸에서 대충 볶음밥을 시켜먹고 나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드러누웠다. 창밖에는 벌써 짙은 어둠이 온통 깔려 있었다. 어디가 어딘지, 산을 지나는지 다리를 건너는지 잘 알아보기도 힘들었다. 불빛들이 어지럽게 널려있는 곳을 지날 때에야 그곳이 자그만 현성이라는것을 알아볼수 있었다. 간간히 불빛속으로 사람들이 자전거를 타고 가거나 툴툴거리는 삼륜차가 철길옆에서 기다리고있는 모습이 비쳐들었다. 갑자기 기차가 속력을 낮추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끼익- 끽 하고 역도 아닌 곳에 멈추어버렸다. 시가지에 들어와서는 워낙 교통이 혼잡하여 기차는 속력을 줄이는 법이다. 간혹가다 맞은켠 기차가 지나가기를 서서 기다릴 때도 있었다. 요즘에는 시설도 좋고 교통상황도 좋아져서 그런 경우가 드문데… 한참 기다려도 기차는 떠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뭔 일이래?” 구경할거리가 없어서 다들 적적했던차라 서로 차창밖을 내다보며 수군거렸다. “맞은켠 기차를 기다리는거겠지.”하고 추측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요즘에도 그러나 뭐? 혹시 사고난거 아니야?” 하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에이, 설마 그런 방정맞을 일이…” 기차는 모든 사람들의 궁금증을 풀어주기라도 하겠다는듯 다시 서서히 떠나기 시작하였다. “어 저기네, 저기…” 기차가 떠나가서야 우리는 기차머리가 멈추어서있었을 그 십자가에 승용차 두대가 포개있는 모습을 차창밖으로 내다볼수 있었다. “사고는 사고맞네, 우리 기차랑 난게 아니여서 다행이지만…” 그 교통사고때문에 일시에 십자거리가 혼란스러워 기차가 멈추었던 모양이였다. 나는 엎드려서 창밖을 내다보았다. 어둑스레한 불빛때문에 똑똑히 보이지는 않았지만 당황스러워 뛰여다니는 사람들의 모습은 대충 알아볼수 있었다. 그래, 이게 바로 운명이 아니겠어? 사람이 주체할수 없는 가운데의 하나가 바로 사고인것이다. 누가 그것을 미리 알수 있단 말인가? 아무리 “빽”이 많다고 으시대던 삼촌도 례외일수 없었다. 그래서 세상은 그래도 공평하다고 하는가? 삼촌은 회사를 거의 꿰찰무렵에 사람을 치여죽였다. 밤늦게까지 술을 마시고도 겁내지 않고 혼자 운전하여 집으로 가다가 한산한 골목길에서 갑자기 튀여나온 녀자 하나를 치여 뭉개버렸다. 덜컹, 하고 차가 흔들리자 삼촌은 정신이 들어 허겁지겁 차머리를 돌려 도망간것이였다. 나는 그때 한창 장부를 마무리하고 삼촌의 눈을 피할 기회만 엿보고있었다. 삼촌이 매일 회사에 나오는 이상 나는 쉽게 손쓸수가 없었다. 그날 아침 회사로 나가니 그 시간대에 조회를 하고있을 삼촌이 나오지 않고있었다. 나보고는 지각이니 뭐니 하면서… 나는 입을 삐죽거리며 별다른 생각없이 그대로 올라갔다. 점심때가 거의 되여서 직원들이 이르기를 삼촌이 출국한다고 하였다. 그뒤에도 나는 감감 모르고있다가 이튿날 갑자기 들이닥친 경찰들에게서 교통사고 소식을 들었다. 이 도시의 정비공장마다 순회하며 수색할것이 있다는것이였다. 곧 신문과 텔레비 뉴스에 사고소식이 대문짝만큼 크게 보도되기도 하였다. 끔찍하게 짓뭉개져버린 녀자의 시체를 부분이나마 화면으로 보면서 나는 등골이 오싹해났다. 같은 해아래에서 같이 숨을 쉬며 부딪치며 살아가던 사람을 치여죽이다니? 그리고 바로 뺑소니쳐버린 가해자… 설마설마하면서도 걱정되여 사고위치, 차모양, 번호 등을 여기저기 물어본 결과 삼촌이 금방 수리한 고객의 외제차하고 여러가지 상황들이 거의 맞아떨어졌다. 수리가 아직 덜 끝났지만 운전하고 다닐수는 있던 차여서 워낙 으시대기를 좋아하는 삼촌이 그날 손수 끌고 나갔던것이였다. 비싼 외제차라 이 도시에 수량이 극히 적어서 조사결과가 나오는 시간도 빨랐다. 다 들통나버린 마당에 돌아오지 않을수 없었다. 호출령이 내려서 돌아오지 않으면 그대로 영영 가족과 생리별당할수도 있었으니까. “어떡하겠니? 니가 보증을 좀 서라…” 하는수 없이 입국한 삼촌은 나를 찾아와서 사정하였다. 회사 법인대표의 명의로 내가 보증을 서면 피해자와 합의를 보는 동안 삼촌은 가석방될수 있었다. 그래야 삼촌은 또 자신의 그 “흑백”동아리들을 동원하여 문서를 꾸밀수 있는것이였다. 골목길이라서 책임을 전적으로 운전기사가 질수는 없고 피해자를 설득하여 배상하는 방법으로 고소를 막아서 일단 행사처벌은 면하겠다는 속셈이였다. 만약 내가 보증을 선 기간에 삼촌이 몽땅 정리하여 외국으로 도망간다면 나는 일정한 벌금이나 15일동안의 구류형에 처해질수 있다고 했다. 방법이 없었다. 내가 나서지 않으면 삼촌이 감방에 당장 들어가게 생겼는데… 돈이 문제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삼촌의 몸까지 상하는것을 기어이 내 눈으로 보고싶지는 않았다. 삼촌이 잘 안다던 그 공안국 국장한테 찾아가서 굽실거리며 싸인을 하고 삼촌을 꺼내왔는데 오히려 삼촌쪽에서는 고맙다, 미안하단 말 한마디 없었다. 피해자에게도 미안하단 말이 없어서 합의에 문제가 생겼는데 삼촌은 더 높은 사람을 찾아야 한다는 리유로 회사의 현금들을 보이는족족 가져가기 시작했다. 자신의 교만과 넘쳐난 욕심에 대해서 일말의 후회도 보이지 않는 삼촌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마지막뒤집기를 결단한것이다. 삼촌이 회사를 떠나 밖으로 나도는 동안 나는 먼저 출납을 파직시켜 내보내고 구제트럭과 외제차 검측기기 같은 가장 값나가는 설비들을 팔아버렸다. 부품도 재고를 정리한다는 리유로 부품장사군들한테 넘겨주었다. 건물은 임대한것이라 어찌할수가 없었지만 그대신 반년치를 한꺼번에 내야 하는 집세와 물세, 전기세나 부품 외상값도 다 합치고보면 만만치 않은 금액이라 구실을 대고 기한을 미룬 다음 내 통장으로 모조리 빼돌려버렸다. 직원들이 느끼고 불안해 할가봐 자연스럽게 눈에 금방 띄이지 않으면서도 실질적으로 가장 중요한것에만 손을 대였다. 그외의것들은 값이 나가지 않을뿐더러 매일 영업할 때 써야 하는것이니… 내 투자금액의 몇배가 되는 거액의 돈들은 모두 내 통장으로 흘러들어왔다. 그리고 나는 침착하게 금고에서 삼촌의 싸인만 있는 빈 종이를 꺼내 서류를 작성하였다. 저번에 모 회사와 자동차수리에 대한 계약서를 작성하다가 만일을 대비하여 삼촌의 싸인을 미리 몇장 더 받아놓은것이였다. “…나 임성호는 성심자동차정비회사의 대표이사직위와 모든 지분을 임대관한테 양도한다… 금후 성심자동차정비회사의 모든 경제문제는 나 임성호와 무관하다…” 삼촌이 그렇게 가지고싶어하던 회사의 대표리사직, 나는 그날 빈껍데기에다 빚만 남은 회사의 사무실에서 혼자 그 서류를 꾸미였던것이다. 자신의 사고안건때문에 동분서주하는 삼촌대신 내가 서류를 그 면목있는 변호사한테로 넣어주었다. 워낙 삼촌이 내놓고 원했던 일이라 그 변호사도 아무 의심없이 수리해주었다. 물론 수고비를 넉넉히 준 사람도 나였다. 그렇게 나는 그 우유곡절 많은 회사와 관계를 청산하고 떠난것이다. 내가 더는 회사의 법인이 아니였기에 공안국에서 삼촌의 보증을 섰던 그 서류가 어느때까지 효력을 낼수 있을런지 모를 일이였다. 만약 삼촌의 동아리들이 힘을 미처 쓰지 못해 안건이 공안국에서 법원으로 넘어간다면 나의 보증은 효력을 상실하게 되는것이다. 삼촌이 내가 벌인 일들을 다 알아버리는데 과연 며칠이나 더 걸릴지 모를 일이였다. 사실 사고만 아니였더라면 삼촌이 회사를 넘겨받아 영업을 잘해서 다시 돈을 모을수도 있었다. 그러나 피해자와의 합의금을 그러모으자면 당장 껍데기에 빚뿐인 회사에서 무엇을 얻어낼수가 없을것이다. 삼촌은 회사를 처분하여 돈을 만들든지 아니면 회사를 담보로 또 돈을 꾸든지 그런 방법을 쓸수밖에 없을것이다. 그나마 회사법인을 삼촌한테 양도하고 떠났으니 삼촌 마음대로 회사를 처리할수 있어서 뭐 꼭 손해봤다고 할수도 없었다. 워낙 삼촌은 동전 한푼 없이 들어왔으니까. 물론 삼촌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수도 있었다. 통째로 삼키려 했던 육질 좋은 회사에서 기름기와 고기들은 내가 다 가져가고 빈 거죽만 남았다고 생각하면 이를 갈수도 있었다. 마음먹기에 달린 노릇이였다. 나의 계산방법에 따르면 대충 이러한 결과가 나온다. 김사장: 거액의 경제손실과 정신적피해를 입었음. 그녀: 자신이 지불한 “대가”그이상의 경제리익을 얻었음. 나: 투자금의 몇배를 수취하였음. 삼촌: 투자 한푼 없이 회사를 얻을수 있게 됨.과정이야 어찌됐든 결과만 본다면 김사장의 재산을 우리 세사람이 찢어 나눠가진셈이 되였다. 처음부터 의도한것은 아니지만 내가 그중에서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게 된것도 사실이였다. 우리 세사람은 어느 누구도 누구한테 떳떳할수가 없었다. 일이 여기까지 온이상 이제 다시 되돌아갈수는 없었다. 나는 뺏고 빼앗기는 그들의 싸움속에서 이리저리 밀리고 치이다가 요행 선수를 칠 기회를 잡아 빠져나온것이였다. 누구도 다치지 말았으면 하는 마음은 나만 다치지 말았으면 하는 바램으로 이어지다가 결국 이렇게 나부터 살고보자란식으로 바뀌게 된것이다. 다시는 삼촌을 보고싶지 않았지만 혹시 삼촌의 그 안건이 잘 해결되지 않으면 어떡하나 하는 마음도 한구석에 내내 자리를 지키고있었다. 몰라, 아무도 몰라. 어느 누가 내 립장에서 나를 위해 생각해본적이 있었던가? 그것은 삼촌도 똑같았다. 아니, 삼촌이였기에 내가 느낀 배신감이 더 컸다. 밤은 완전히 깊어졌고 기차안의 불들도 취침시간이라 다 꺼졌다. 나는 다만 덜컹덜컹 레루우를 무작정 달리고만 있는 철바구니속에 누워서 모든것을 잊으려고, 이 모든것에서 자유로워지려고 가엾게 애를 쓰고있을뿐이였다.  ****  나는 역에서 트렁크를 드르륵거리며 끌고나와 대합실에 앉아 그 도시에 있다는 친구녀석의 전화번호를 찾고있었다. 머리를 숙이고 휴대폰을 꾹꾹 누르고있는 내앞에 어떤 낯선 구두가 조용히 멈추어 서있었다. “죄송한데요…”하고 겨우 말머리를 떼며 조심스런 눈길로 나를 내려다보는 사람은 나와 비슷한 또래의 젊은 남자였다. “무슨 일이예요?” 나는 그 남자의 의도를 금방 알아낼수가 없었다. 차라리 옷차림이 헐망하거나 때국이 좔좔 흐르는 사람이였더라면 그 의도를 더 빨리 알아챌수 있었을것이다. 그런데 남자는 나보다도 더 깔끔한 정장을 입고 게다가 반들반들 닦은 까만 구두를 신고있기까지 하였다. 끌고있는 트렁크도 내것보다 훨씬 비싸보이는것이였다. 뭘 물어보려는것인가? 그런데 왜 이렇게 말을 떼기 곤란해하는거지? 내가 우물쭈물 말을 잇지 못하고 서있는 남자를 빤히 쳐다보고있는데 남자의 가족으로 되여보이는듯한 할멈 하나가 옆에 다가와 섰다. “얘가 이렇게 얼굴거죽이 얇아서 말을 못한다네… 젊은이, 사실 우리 아들이 나를 데리고 이 도시에 려행나왔다가 바로 몇시간전에 기차표며 지갑을 몽땅 잃어버렸다네…” “…”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나는 잠시 눈을 깜빡거리며 아들이라는 남자와 엄마라는 할멈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래서 말인데… 젊은이… 어렵겠지만 돈 좀 꾸어줄수 없겠는가?” 남자는 암울한 눈빛으로 바닥만 쳐다보고있었고 할멈은 얼굴에 부자연스러운 웃음을 바르며 나한테 사정을 하였다. “글쎄요…” 낯선사람이 돈을 꾸어달라? 이건 뭐 열에 여덟은 사기가 아닐가? 꾸어준 돈을 어디가서 받게? 차라리 그냥 달라고 하지… “그래, 그래, 어렵겠지… 우리라고 해도 낯선 사람한테 어찌 돈을 꾸어주겠나?… 그래서 몇시간째 이러고있었다네… 자네가 기중 착해보여서…” 할멈은 지푸라기라도 잡아야겠다는 표정으로 나를 애절하게 바라보면서 내 마음속에 아직 사라지지 않고 웅크리고있던 동정심이란것을 끄집어내려고 애를 썼다. “어머니, 그만 됐습니다…” 젊은 남자는 창피스러웠던지 포기하고 저쪽으로 가서 앉아 한숨만 풀풀 내쉬였다. 할멈은 그런 아들이 안쓰러워서인지 그래도 내게 일루의 희망을 품고 계속 서있었다. “어떻게… 좀 안되겠나… 이 늙은이가 여기 이러고있기도 힘에 부치네…” 내 성격에 “돈 없으니까 저리 가보세요.”라는 말은 철저히 변하지 않은이상 아직 할수가 없었다. “글쎄요, 나도 현금이 얼마 없는데… 얼마나…” 내 말에서 희망을 본 할멈은 활짝 웃으며 머리를 끄덕거렸다. “한 칠백원이면 될것 같은데…” “이잉?…” 그렇게 많이? 하는 표정이 내 얼굴에 그대로 쓰여졌을것이다. 할멈은 급히 내게 해석을 해주었다. “우리가 ㄴ시까지 가야 하니 두사람의 기차표에 두루 쓸것 하면 그만큼 있어야 하네…” 그래도 이건 너무 심했다. 내가 주머니를 열어줄 낌새를 보이지 않자 할멈은 다급해났다. “그럼 먼저 오백만… 다른 사람한테 또 사정해볼테니… 젊은이… 제발… 아, 그렇지… 얘야, 얘…” 할멈은 갑자기 무슨 좋은 생각이 났던지 자기 아들한테로 달려가는것이였다. “이걸 보게나. 우리 아들 ㄴ시 **회사 건축공정설계사일세… 여기 전화번호며 련락주소… 다 있다네…” 할멈이 가져온것은 남자의 명함장이였다. 아주 고급스런 명함장이였다. 남자의 옷차림과도 어울리여보였다. 정말인가? 정말 지갑을 잃어버린 사람들인가? 나는 잠시 혼란스러웠다. “우리 ㄴ시에 돌아만 가면 자네 계좌로 꼭 돈을 부쳐보낼거네. 아니, 리자를 쳐서 아니, 감사한 마음으로 이백원 더 보내주겠네. 회사이름에 주소도 있으니 자네가 얼마든지 찾아볼수도 있을거네…” 할멈이 우겨서 남자의 핸드폰이라는 번호도 눌러보았다. 분명 남자쪽에서 벨이 울리기까지 하였다. 할멈은 또 눈치 빠르게 종이와 펜을 가져와서 내 이름을 묻고 계좌번호도 적어달라고 하였다. 나는 얼결에 그것들을 적어주고나서 주머니속의 지갑을 꺼내 지페 5장을 세여주고말았다. 그들이 대합실을 떠나 시야에서 사라진후에 나는 문뜩 이상한감을 느꼈다. 보통 명함은 지갑속에 넣고 다니는데 지갑은 잃어버리고 명함은 있다니… 핸드폰이 있으면 자기의 친지들과 련락을 하여서 무슨 방법이든 댈수 있었을텐데… 명함 하나 가지고는 아무것도 증명해보일수가 없었다. 나는 급히 핸드폰을 꺼내 중복발신 다이얼을 눌렀다. “지금 거신 전화는 이미 꺼져있습니다…” 전화에서는 통신회사 녀직원의 록음테프소리만 반복하여 들려오고있었다. 나는 픽 - 하고 소리내여 웃어버렸다. 아무도 믿지 않을거라던 내가, 내 아버지 버금으로 가는 삼촌마저 배신해버린 내가 또 당한건가? 햇내기 사기군한테? 이 세상은 이렇게 속이지 않으면 속아서 살아야 하는 법인가?  세상을 살다가 드디여 간절히 원하던 그 무엇을 얻었을 때 당신은 문뜩 그런 생각을 해본적이 있는가? 사실 얻음에는 그 어떠한 경우에도 엄연한 대가가 있었다는것을. 당신은 그 얻음의 대가를 미리 알아서 지불하기를 원했을수도 있고 혹은 대가가 있다는것을 감감 모른채 얻는것에만 급급했을수도 있다. 그것을 얻고나서 정신을 바짝 차리고보았을 때는 이미 원하지 않던 그 무엇을 빼앗겼을수도 있다.저 남자와 할멈이 얻은것은 무엇이였을가? 오백원이란 현금? 아니면 또 한번의 사기성공경험? 그들이 세상에 살면서 진정으로 얻고싶었던것, 원하던것이 그래 겨우 그것이란 말인가? 그렇다면 그들이 치른 대가는 무엇이였을가? 비굴하고 치사한 구걸연기? 아니면 깨끗한 량심? 나는 트렁크를 끌고 대합실을 나섰다. 해살은 나의 기분과는 상관없이 눈부시게 온 땅우의것을 찬란하게 비춰주고있었다. 남부도시의 강한 해빛에 나는 눈을 쪼프리고 슴벅거렸다. 그렇다면 내가 얻은것은 무엇이였던가? 거액의 현금? “밥그릇 빼앗기의 성공경험?” 돈을 얻은것보다 더 중요한것은 나도 이제 “제 밥그릇” 챙길수 있다는것, 그런 싸움에서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챙길수 있는 요령이 생겼다는것이다. 아직 련습이 더 필요하겠지만 나는 이제 원래의 “착”해빠져서 빼앗기기만 하는 얼렁한 인간이 아니였다. 좀 더 훈련을 거친다면, 더 많은 경험을 쌓는다면, 마음을 더 모질게 먹는다면 나는 더 잘 빼앗고 더 잘 속이고 더 많이 챙겨서 보다 더 누리고 살수 있는 인간으로 탈바꿈하게 될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면 내가 빼앗긴것은 무엇이였을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가 빼앗긴것은 사실 내가 원하지 않았던 그 무엇이였을가? “착”하고 믿음직스러웠던 심성? 혈육간의 정? 혹은 신용? 사랑?… 아니면 이 세상 사람들에 대한 나의 믿음? 이제는 아무도 나를 믿어주지 않을것이며 나 또한 아무 사람도 믿을수가 없을것이다. 나는 혼자서, 코뿔소의 외뿔처럼 혼자서 인생을 고독하게 걸어가야 하지 않을가? 어느 도시의 역전앞이라도 항상 이렇게 가고오는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법이다. 내 앞에서 혼잡하게 짐을 끌고 가는 사람들이 지금 한창 여러갈래의 길들을 만들어보이고있었다. 끝[<도라지> 2009년 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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