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룡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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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금메달 리스트로 된 두 사람 댓글:  조회:1552  추천:0  2016-08-08
금메달 리스트로 된 두 사람 김몽     브라질 리우 올림픽이 한걸음 한걸음 다가오고 있다.  리우 올림픽을 눈앞에 둔 지금 지구촌이 벌써부터 열광에 들떠있다.       그런데 문득 올림픽을 떠올리니 서글프고 안타까운 생각이 갈마드는것은 웬 일일까.     그것은 울림픽 력사에 우리 민족으로서는 영원히 지워버릴수 없는 아프고도 서러운 사실이 있었기 때문이다.       1937년에  독일 베를린에서 제11차  올림픽 이 있었다. 당시 독일은 당장 2차대전을 일으킬  만단의 준비를 마친 상황하에서 세인의 이목을 가리고저 세계평화니 민족평등이니 하는 간판을 내걸고 올림픽을 개최하였다.       그번 경기에서 아시아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조선인 손기정이 마라톤에서 세계신기록을 깨고 우승의 금메달을 따내 세상을 크게 놀래웠다. 하지만 그의 얼굴에는 기뻐하는 기색이 조금도 없고  침울하였다. 종점을 통과하자 손기정은 슬그머니 자리를 떴고 기자들의 질문에도 응하지 않았다. 조선은 당시 일제의 식민지였기에 손기정은 부득불 일본 일장기가 새겨진 유니폼을 입고 뛰였던것이다. 손기정은 비록 일등을 하였지만 망국노로서 일본을 대표하여 운동에 참가한것이 죄라고 생각했다. 일설에는 손기정이 종점을 통과한 다음 겉에 입었던 일장기가 새겨진 유니품을 벗어버리고 미리 밑에 입었던 태극기가 새겨진 옷을 입고 “대한민국만세”를 불렀다고 한다. 그러나 정말 그렇게 하였는지  아니면 애국심이 강한 우리 민족들이 꾸며낸 사건인지는 딱히는 모른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것은 올림픽이 끝나고 서울에 돌아온 후인 8월 3일에 당시《동아일보》 편집국장이던 리광수가 손기정을 인터뷰하고 신문에 커다랗게 손기정의 사진을 실었는데 유니품에 새겨져있던 일장기표식을 지워버렸다. 이 사건으로 《동아일보》는 페간되고 리광수는 편집국장에서 해임되였다. 이것이 이른바 일장기사건이다. 그후부터 손기정은 마라톤경기에 한번도 참가하지 않았다. 더는 일본의 얼굴에 분칠을 해주고싶지 않았던것이다. 이렇듯 손기정은 민족심이 강한 애국자였다.       제11차 올림픽에 손기정 외에 또 한명의 조선인 녀자 륙상선수가 참가했는데 아시아인으로서는 처음으로 800메터에서 금메달의  월계관을 따내 세상을 놀라게 했다. 가능하게 많은 사람들이 이 사실을 모르고 있을것이다.       1936년, 금릉녀자대학(金陵女子大學)에 강미려(姜美麗) 라는 평양 출신의 녀대생이 있었다. 그녀는 마라톤선수로 유명했다. 중국 국내의 큰 경기 때마다 우승을 했으나 중국국적이 아니라는 리유로 번마다 수상이 인정되지 않았다. 그래서 김구가 여러모로 노력하였고 학교 측에서도 적극 나섰으나 일이 그냥 꼬이기만 했다. 이 일로 강미려 본인도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이때 강미려에게 눈독을 들이는 한 일본외교관이 있었다. 그 일본외교관이 일본정부로부터 강미려를 쟁취하여 일본국적을 만들어 미구에 독일에서 열리는 제11차 올림픽에 내보내라는 비밀지시를 받았다. 일본외교관이 중국정부 중앙철도국의 국장인 장경립(張競立)에게 강미려를 유인하여 쟁취하라는 임무를 주었다. 장경립은 친일파였다. 마침 장경립의 집이 금릉녀자대학 근처에 있었고 그의 둘째 딸이 금릉녀자대학에서 공부하고 있었다. 장씨 부부는 둘째 딸을 내세워 강미려를 자주 집에 초청하여 맛있는 음식도 해먹이고 선물도 사주면서 은혜를 베푸는척 하였다. 일정한 시간이 흐르자 때가 성숙되였다고 생각한 장경립이 중국에 있으면 전도를 망치게 되고 일본에 가면 앞길이 창창할것이라고 꼬드겼다.  장경립이 달콤한 말로 꼬드기니 강미려의 마음이 동요하기 시작했고 거기다 장씨가 부지런히 쐐기를 박았다.        애국단 단원들로부터 이런 상황을 회보받은 김구는 일본인들의 흉계를 반드시 파탄시켜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무리 궁리해도 뾰족한 대책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때 김구의 한 측근이 김구를 보고  강미려가 영화황제 김염의 독실한 팬이라고 귀뜀했다. 김구가 김염을 불러 강미려의 마음을  돌려세워달라고 부탁했다.        김염은 당시 촬영 스케쥴이 빽빽했지만 상해로 가지 않고 곧장 강미려를 찾아갔다. 그는 강미려 앞에서 일본인들이 조선반도와 중국땅에서 저지른 침략만행을 낱낱이 성토하고 나서 조선인으로 민족의 기개와 량심을 잃어서는 안된다고 당부하였고 만약 일본국적으로 넘어가 일본을 위해 일하면 매국역적이나 다를바 없다고 단단히 모를 박았다. 강미려는 자기의 우상이였던 김염이 몸소 찾아와서 타이르는지라 그 자리에서는 자못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김염은 자신이 가지고 간 사진에다 싸인까지 해주었고   “나라와 민족에 루를 끼치는 삶을 선택해서는 안된다. 언제 어디서나 백의동포라는것을 절대 잊지말라!”는 쪽지까지 써주고 돌아갔다.   하지만 김염의 수고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강미려는 허영심과 금전의 유혹을 이겨내지 못하고 학교를 자퇴한 다음 장경립의 집에 얼마간 머물러 있다가 곧장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체육총회에 가입했고 프로선수가 되였다.        강미려는 이름을 안창숙으로 바꾸고 일본국적을 취득했다. 일년 후에 베를린에서 거행된 제11차 올림픽에서 녀자 800메터 금메달을 따내 아시아권 최초의 육상메달리스트로 되였다.       결국 제11차 올림픽에서 조선인이 큰 종목에서 금메달을 두개나 따낸것이다. 그러나 금메달 두개가 모두 일본의 몫으로 되여버렸다. 애국자 손기정의 이름은 오늘까지도 빛을 뿌리고 있다. 하지만 조국을 배반한 강미려의 이름은 력사에 영원히 매몰되고 말았다.  잡지 2016-4호  
20    해체와 융합과 그리고 초월 댓글:  조회:1418  추천:0  2016-04-13
해체와 융합과 그리고 초월   글/김몽   시대가 변하고 있다. 지금의 세계는 이데올로기를 빼놓고는 서로가 벽을 허무는 시대이다. 시대가 변하는 이런 시점에서 자기것만을 고집하는것은 세계화의 흐름을 막는 우둔한 생각이다. 요즘의 사회현상을 “해체”와 “융합”, “초월”이라는 단어에 모든것이 귀결되고 있다. 해체와 융합을 하지 않으면 안되는 까닭은 그것이 세계적 추세이기 때문이다.  결국 해체란 기존의것이 지니고 있던 고유한 틀을 해체함으로써 다양한 가치와 그로인한 존재적 의미를 확대하는것이다. 한마디로 해체를 통해 융합을 이루며 융합을 통해 초월에 이르는것이다. 오늘 문학이나 력사, 철학이라는 지엽적 경계의 벽이 허물어지고 “인문학”이라는 용어로 통합되고 있다. 문학에서도 각 장르가 서서히 해체가 시작되여 서로가 기존의 틀을 깨고 들락거리면서 시적 소설이니, 소설적 시니, 시적 수필이니 ,수필적 시 등등 새로운 문학이 고개를 쳐드는 시대이다. 이런 현상은 어느 분야든 마찬가지이므로 만약 융합과 해체가 서로 충돌하며 새로운것을 창조하지 않는다면 존립에 영향을 받게 된다. 자기것만을 옳다고 여기며 어느 하나만을 진리라고 생각하던 시대는 이미 녹이 쓴 과거로 되고 말았다. 복식문화는 언녕 해체되였다. 지구촌 촌민 모두가 복식이 비슷하여 단지 복식만으로는 그 소속 민족을 구분하기 어렵다. 가장 전형적인것은 청바지와 양복이다. 150여년전 미국의 광산로동자들이 입던 청바지를 지구촌 어디에 가서도 볼수 있으며 지난날 영국신사들이 입던 양복이 누구나 입을수 있는 평상복으로 변해버렸다. 지금은 더욱 고급화에로 치달아 매일이다싶이 새로운 복장이 시장에 진출하고 있다. 음식문화도 그렇다. 지구촌 촌민들이 자신들의 전통적인 음식만 먹던 시대는 지나갔다. 김치가 더는 우리만의 점유물이 아니며 짜장면이 더는 중국인의것만이 아니며 치즈가 더는 유럽사람들만이 먹는 음식이 아니다. 사람들은 자기의 구미에 맞으면 민족여하를 떠나서 자기것으로 만들며 나아가서는 창조성을 발휘하여 더 새로운것으로 변모시킨다. 융합을 하자면 수용의 자세와 버림(해체)의 자세가 있어야 한다. 타자의 장점을 취하고 자신의 약점을 버릴줄 알아야 한다. 해체와 융합의 진정한 목적은 이를 통해 자신을 초월하려는데 있다. 해체와 융합과 초월의 례를 중국의 축구를 통해 생생하게 보아낼수 있다. 중국은 축구의 발생지이다. 하지만 여태껏 월드컵에서 우승을 해본 적이 없다. 금년에도 월드컵선발예선전에서 유감스럽게도 탈락하고 말았다. 오늘 중국은 축구꿈을 실현하기 위해 전력을 다하고 있다. 습근평 주석은 아르헨티나를 국사방문했을 때 중국에서 월드컵을 개최하는것이 평생의 소원이라고 말한바 있다. 중국은 축구에서 당하고 있는 수모를 설원하고 축구강국으로 부상하기 위해 있는 힘을 다하고 있다. 우선 축구에 대량의 투자를 하여 외국인 감독과 선수들을 많이 영입하였다. 16개 슈퍼리그에 진입한 팀의 감독이 모두 외국인이며 각 팀마다 외국인 선수가 평균 3,4명 있다. 이들한테 투자하는 금액은 적어도 해마다 수십억원이 될것이다. 중국축구는 외국인감독과 선수들한테서 많은것들을 배웠고 그 과정에 서로 다른 민족들과의 우의도 돈독하게 다졌다. 그 결과 초월이 이루어져 지난해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 광주 항대팀이 월계관을 안아왔고 이에 13억 중국인이 미친듯이 환호하였다. 가령 중국이 그냥 민족성이나 자력갱생을 운운하면서 외국인 감독이나 선수들을 영입하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였을까? 불 보듯 뻔한 일이다. 외국인을 영입한것은 바로 자기에 대한 해체과정이며 수용의 자세이며 융합이다. 남들의 우수한 점을 배우는것은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남의 장점을 알고 자기의 단점을 아는 사람이야말로 지혜로운 사람이다. 남의 장점은 적극적으로 배우고 자기의 단점은 아낌없이 버리는 자세를 취한다면 가능하게 그 어느 날엔가는 초월이 이루어질지도 모른다.  해체와 융합 그리고 초월의식은 국가나 단체뿐 아니라 개개인에게도 필요하다. 지구촌 모든 사람들이 이런 의식으로 살아간다면 세상은 크게 변할것이다.▣  잡지 2호 
19    신뢰가 행복을 만든다 댓글:  조회:2002  추천:3  2016-02-04
북유럽국가 덴마크는 세계에서 가장 부유하고 가장 살기 좋은 나라중의 하나이다. 지난해 타임스지의 통계에 따르면 덴마크가 181개국중에서 행복지수가 1위를 차지한다고 한다. 무슨 힘이 덴마크를 이러한 나라로 만들었을까? 바로 신뢰이다. 덴마크 사람들은 개인과 개인 사이, 이웃과 이웃 사이, 국민과 나라와의 사이에서 신뢰를 우선으로 내세운다. 로씨아의 작가 아. 톨스토이는 일찍 “신뢰는 두번째 생명”이라고 말한바 있다. 덴마크 사람들이 신뢰를 삶의 신조로 삼기에 덴마크를 부유한 나라, 행복한 나라로 만들수 있었다. 이 나라에는 기차역이나 뻐스역에 매표원이 없다. 국가가 국민들을 믿기 때문이다. 고객들은 스스로 표를 사고 차에 오른다. 그렇다고 하여 CCTV를 설치한것도 아니다. CCTV를 걸치하면 국민을 믿지 않는것으로 되기에 설치하지 않은것이다. 농장주들이 자기가 생산한 농산품을 길거리에 있는 무인매대점에 진렬해놓으면 고객들이 가격표에 따라 돈을 놓고 물건을 사간다. 농장주가 고객들을 믿기 때문에 무인가게에서 상품거래가 이루이지는것이다. 이웃간에도 신뢰로 살아간다. 서로가 서로를 믿기 때문에 말다툼이 없으며 자물쇠가 뭔지 모르고 산다고 한다. 신뢰는 감옥에서도 이루어진다. 죄수들은 일주일에 한번씩 집에 가서 집식구들은 만나고 온다. 감옥이 죄수들을 믿기 때문이다. 죄인들은 하루가 지나면 어김없이 감옥으로 돌아온다. 간수들은 죄인들에게 두려움이나 위압감을 주지 않기 위해 총을 휴대하지 않으며 평소에 죄인들과 친구처럼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누면서 교화시킨다. 이리하여 간수와 죄수 사이에 자연스럽게 교감이 형성되고 죄수들은 새사람으로 다시 태여난다. 이런 연고로 덴마크는 세계에서 감옥이 제일 적고 죄인이 제일 적은 나라로 알려져 있다. 감옥이 많고 죄인이 많은 나라는 국가와 국민사이에 신뢰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며 결국 그러한 나라는 전도가 암담하다. 덴마크국왕이 거주하는 왕궁에는 보초병이 없다. 역시 국가가 국민을 믿기 때문이다. 국왕은 가끔 호위병도 없이 길거리에서 국민들과 스스럼없이 대화를 나누면서 정부에 대한 국민들의 견해를 듣군 한다. 다른 나라 같으면 어림도 없는 일이고 천방야담같은 이야기지만 덴마크에서만은 희귀하 일이 아니다. 일년전에 덴마크에 다녀온 한 문우로부터 이러한 이야기를 듣고 반신반의 했지만 엊저녁 텔레비죤을 보고서야 진정으로 믿게 되였다. 덴마크는 세계에서 세금을 가장 많이 내는 나라이다. 월소득의 35% 내지 50%를 국가에 납부하지만 국민들은 불만이 없다. 그것은 국민들이 나라를 믿기 때문이다. 국민들은 자기들이 납부한 세금을 국가가 병원, 학교, 로인복지 등 사회 공공시설 및 서비스에 쓰며 결국 세금이 자기들을 위해 쓴다는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에서 데모나 폭력같은 사건이 제일 적게 발생하는 나라도 덴마크이다. 중요한 원인은 국민들이 국가를 신뢰하기 때문이다. 데모나 폭력이 잦다는것은 국민과 국가간에 소통이 잘 안되고 국가를 믿지 않는다는것을 의미한다. 그러한 나라일수록 경찰이 많고 감옥이 많기 마련이며 나라는 전도가 암담하다. 덴마크는 또 세계적으로 부정부패가 가장 적은 나라이기도 하다. 국회의원들의 월급이 일반 공무원보다 약간 높고 특수대우도 없으며 출퇴근할 때 자전거를 리용한다고 한다. 그리고 정부관리들이 대부분 청렴하다고 한다. 그러니 어찌 국민들이 국가를 믿지 않겠는가. 불신은 엄청난 파워를 갖고 있다. 불신은 갈등으로 발전하고 갈등은 살육으로 이어진다. 최근 몇년간 미국에서는 총기살인사건이 련이어 발생하고 있다. 그중에서 흑인과 백인간의 마찰이나 갈등으로 인한 살인사건이 다수를 차지한다. 불신은 개인지간에는 살인으로 치닫을수 있고 국가지간에는 전쟁을  유발시킬수도 있다. 오늘 세계의 방방곡곡에서 총포소리가 요란하고 수많은 생령들이 억울하게 죽어가고 있는데 근원을 캐고 보면 집단과 집단 사이, 국가와 국가 지간에 불신의 곬이 깊기 때문이다.   중국정부가 제창하고 있는 부강, 민주, 자유, 화해, 우애 등 12가지 정책은 캐고 보면 그 뿌리가 신뢰이다.   오늘 지구촌에서 가장 절실하게 필요한것이 상호 신뢰다. 지구촌 곳곳에서 신뢰의 탑이 구축된다면 세계는  평화와 번영의 일로를 걷게 될것이다. ▣ 잡지 2016년 1호  
18    광고는 진실해야 한다 댓글:  조회:2134  추천:2  2015-10-29
광고는 진실해야 한다                         김몽   광고는 시장경제의 산물이다. 시장경제가 실시되기 전까지 중국의 백성들은 광고가 무엇인지도 몰랐다 헌데 지금은 광고가 하도 범람하여 백성들이 짜증을 내고 신경질을  부릴 정도다.    광고도 하나의 문화현상이다.  광고는 리윤을 목적으로 한다. 속되게 말하면 돈벌이를 목적으로 한다. 실사구시적이고 진실한 광고는 기업에 리윤을 창출해줄뿐 아니라 사회발전에 기여하고 소비자들에게도 혜택을 주므로 마땅히 제창하여야 한다. 하이얼(海尔)이나와하하(娃哈哈),노바이진(脑白金),세리팅(泻痢停 )같은 상품들이 지금까지 왕성한 생명력을 이어 오게 된것은 바로  진실성 으로  소비자들의 신뢰를 받아왔기때문이다. 이에 반해 잔뜩 부풀린 허위성 광고는 그 사기성으로 말미암아 나라도 해치고 사회도 해치고 특히는  소비자를 해친다. 허위성 광고는 잠시는 득을  보는것 같지만 종당엔 허위성과 사기성의 대가를 톡톡히 지불하게 된다. 그런데 지금도 계속되여 허위성광고가 활개를 치고있는것은   량심에 곰팽이 낀 사람들이 있기때문이며   해당기관의 관리와 단속이 허술하기때문이다.                       허위성 광고에서 가장 두드러지고 가장 엄중한것이 약과 의사에 대한 광고이다.   그러므로 이 글에서는 약과 의사에 대한 광고만을 화두에 올리려고 한다. 잡지나 신문,  그리고 판플레트로 찍여나오는 수많은 의학광고들을 보면 손바닥만한 연길에 저명한  의사와 유명한 교수가 우글우글하고 못 떼는 병이 없다. 그런데 아이니컬하게도 인구 비례로 따지면 연변지구에 환자가 제일 많다고 한다.   허위성광고는 의사와 잡지사 혹은 신문이 짜고들어 만든 이다. 광고를 내 주는 편에서도 돈을 위해서이고 광고를 내는 쪽도 돈을 벌기 위해서인데 부플리기 재능이 이만저만이 아니여서 어리무던한  백성들이  거기에 속혀워 피땀으로 번 돈을 날치기당하고 있다.    허위광고의 례를 들자면  수두룩하지만  몇가지만 말하려고 한다  필자가  아주 잘 알고있는 한 의사는 소학교도 변변히 졸업못했건만 어느 잡지는 그가 미국 모 대학에서 박사칭호를 받웠다고 소개하고 명의라고 춰 세워 수많은 환자들이 사기를 당했다. 알고 보니 이른바 박사증은 돈을 주고 돈을 주고 산것이였다. 그 는 할아버지때부터 내려오는 비방이라고 하면서 페병환자나 간경화환자나 심장병환자나를 불문하고 모두에게 쥐똥같이 생긴  똑 같은 약을 준다. 이 잡지는 한번도 아니고 근 십여년간 잡지표지에다  의 사진늘 번듯하게 올려놓고  똑 같은 내용의 광고를  게재하였다.  어느 한번은 건강신문에 조선에서 배워온 비방으로 위병을 잘 때는 명의사가 있다는 광고가 실렸다. 광고를 낸 의사는  “만약 병을 떼지 못사면 내 손바닥에 장을 지지겠다”고 장담하였다.  위병이 있는 필자는 반신반의하며서도 의사를 찾아갔고 약을 사 먹었지만 아무런 효과도 없었다. 신문사에 가서 시비를 따지니 자기네들은 의사의 말대로 했기에 잘못이 없다고 변호했고 의사를 찾아가 “당신의 손바닥에  장을 지지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더니 자기는 절대로 그런 말을 한적이 없고 신문사에서 자기들의 맘대로  그렇게 쓴것이라고  변명하였다. 알고 보니 그 의사는 의사증도 없는  사람이였다. 단지  광고만 보면 정말 화타가 왔다가 울고갈 지경이다. 대부분의 의학광고를 보면 거의 다가 들이고 그들이 쓰는 약은 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라는 말에 속히운다. 남성정력제    광고를 보면 대개가 장족비방,묘족비방, 몽골 비방, 아랍비방, 궁중비방,조상때부터 내려오는 비방 등등인데 한개 료정을 복용하면    굵기가 5-6cm, 길이가 8-9cm증가된다고 소개한다. 터무니없어도 너무나 터무니없건만 이런 광고를 믿고 행여나 하여 헛돈을 쓰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또 어떤 광고를 보면 한가지 병만 제대로 떼도 대단한데, 뗄수  있다고 하는 병이 보통 수십가지에 이른다. 우에서도 말했지나 이렇게 명약이 많고고 명의가 많은 연변에 인구 비례로 따지면 연변이  전국에서 화자가 제일 많다고 하니 참 소  웃다  꾸레미 터질노릇이 아닐수 없다. 한번은  당뇨병과  암을 때는 명의사가 있다는 광고도 보았다. 당뇨병과 암은 세계적으로도 못 때는 병인데  자그마한   연길에 이런 병을 떼는 명의가 있다고 하니 정말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다.  광고를 낸 의사도 황당하고 한심하지만 그런 광고를 내는 사람들 역시 무지해도 한참이나 무지하다.   필자는 허위광고로 사기치는 현상이 유독 연길뿐이 아닐것이라고 생각한다.  약과 의사는 환자의 생명과 련관되여 있으므로 제발 부탁하거니와 약과 의사를 홍보하는 광고는 천만 진실하고 진지하고  엄숙해야 한다. 돈벌이에 눈이 어두어 백성을 사기치는 광고는 당장  근절되여야 한다. 광고를 내려는 사람과 광고를 내 주는 사람들은  모두 량심을 지켜야 하며  위생국을 비롯한  유관부문은 허위광고가 발을 못 붙히도록 최선을  다 해야 할것이다.   2015년 9월 17일  
17    보수와 진보 댓글:  조회:1240  추천:2  2014-08-25
    김몽 우리들의 두뇌는  오래동안 보수는 다 나쁘고 진보는 다 좋다는 쪽으로 쇠뇌(洗脑)되여왔다. 즉 보수(保守)는 지금의것을  그대로 지켜나간다는 뜻으로, 진보(进步)는 현재를 부정하고 개조하고 앞으로 나아간다는  뜻으로만 리해하여왔으며  따라서  진보는 흔히 혁명으로, 그리고 보수는    낡은것을 고수한다는 수구( 守旧)와 같은 개념으로 인지하여왔다.    그러나 보수와 진보는 서로 상반되는 절대불변의 대립되는 개념인것은 아니다.  많은 사례들을 통해 우리는 보수와 진보는 변증법적법적관계를 를  갖고있다는것을 발견하게 된다. 아주 재밌게도 보수가 때로는 진보로 될수 있고 진보가 때로는 보수로 될수도 있다. 이것들을 분별하고 가늠하는 자대가 바로  진리(真理)와 정의(正义)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어느쪽이  인류에게 리롭고 사회발전에 리로운가 하는것이 판단의 표준이다.  진리와 정의를 고수하려는 보수는 옳은 보수가 될것이고 그런 보수를 반대하고 다른 무엇을 추구하는 진보라면 그것은 그릇된 진보일것이다.  보수를 다른 표현으로 우파라고 말하기도 하고 진보를 좌파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 개념은 프랑스대혁명시기에 열렸던  프랑스국회회의에서 유래된것이다.  이 회의에서 왼쪽에는 왕정을 무너뜨리고 프랑스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려는 공화당파가 앉았고 오른쪽에는 왕정체제를 그대로 유지하려고저 하는 왕당파가 앉았다. 이렇게 급진적이고 개량적이고 진보적인 성향을 지닌 파들이 왼쪽에 앉았기때문에 좌파라고 부르고 점진적이고 보수적인 성향을 지닌 파들은 오른쪽에 앉았기때문에 우파라고 부르게 되였다. 오래동안 많은 사람들이 보수를 낡은것만 고집하는 수구파라고 인정하여왔는데 사실은 완전히 그런것만은 아니다. 시대의 상황에 따라, 집권당의 상황에 따라 보수와 진보는 성질이 달라지게 된다. 보수와 진보는 진리와 정의라는 전제하에서 판단해야지 단순히 개념 자체를 가지고 판단하면 오류의 기로에 들어서게 된다. 보수에도 옳은 보수가 있고 그른 보수가 있고 진보에도 옳은 진보가 있고 그른 진보가 있다.  중국의 근대사와 현대사를 떠올려 보자. 손중산이 천창만공이 된 청정부를 뒤엎기 위해 일으킨 신해혁명이 중국의 력사를 바꾸어놓은 위대한 혁명이고 청사에 특기할만한 진보적행위였다면 낡고 썩어빠진 청왕조를 계속 보전하려고 날뛰였던 왕정파들의 행위는 력사의  질타를  받아야만 했던 보수적 행위였다. 제국주의와 봉건주의를 철저하게 반대하고 국가의 주권과 령토완정을 수호하기 위해 벌린 5.4운동은 중국에서의 신민주주의혁명의 발단이였으며 위대한 진보행위였다. 반면에 5.4운동을 피비리게 진압한 당시의 군벌정권은 력사의 심판을 받아야 할 한심한 보수였다. 항일전쟁초기 소극항전, 적극반공을 한 국만당정부, 항전승리후 내전을 발동하여 동족상잔의 비극을 초래한 국민당정부의 모든 정책은 중국의 발전을 저애하는 보수였고 그에  맞선 중국공산당의 정책은 중국을 광명에로 이끄는 진보였다.  중화인민공확국이 창건된후 중국공산당은 새 중국을 건설하는 여러가지 정책을 실시하여 큰 성과를 걷우었는데 당시로서는 이런 로선을 지켜내고 견지하는것이 정확한 였고 새 중국을 뒤엎으려는 국민당반동파들의 적대적행위는 인것이 아니라  반동였고 반혁명이였다.  중국의 대약진과 인민공사, 특히 중국을 대 재난으로 몰고간 문화대혁명은 중국의 현대사와  모택동의 위대한 업적에 큰 허물로 남은 유감의 력사였고 중국의 발전을 퇴보시킨 력사에 보기 드믄 대비극이였으며 이런 비극을 극대화시키고 견지하고 실행한 강청을 비롯한 4인방은 천추에 용서못할 보수파들이였다. 그리고 대약진이나 인민공사나 문화대혁명을 반대한 팽덕회나 류소기, 등소평은 중국을 재앙에서 구해내려는 진보파였다. 오늘 중국공산당과 중국정부는 개혁개방의 기치를 높이 추켜들고 화해롭고 조화로운 분위기속에서 중국의 거창한 꿈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고있으며 그결과 중국은 경제대국, 군사대국으로 부상하여 세계를 경악케 하고있다.  때문에 13억중국인들은 오늘과 같은 정책이 계속 유지되기를 바란다. 즉 현실을 하려고 한다. 만약 그 누가 라는 명분을 내걸고   개혁개방을 반대하고 조화로운 사회건설을 반대한다면 이런 는 가 아니라 의 탈을 쓴 퇴보이며 반혁명이다. 보수와 진보라는 이 상충되는 개념은 가정, 직장, 집단, 공동체 안에서도 늘 존재할수 있다. 우에서도 간단히 말했지만 이럴 때  시비를 가늠하는 가장 정확하고  가장  간단한 자대가 정의와 진리이다.   
16    브라질월드컵을 말하다 댓글:  조회:2238  추천:1  2014-07-21
한달동안 온 지구를 뜨거운 도가니처럼 달구던 브라질월드컵이 마침내 아쉽게 막을 내렸다. 월드컵은 세계인이 함께 즐기는 대축제이다. 정당도 종파도 리념도 뛰여넘는 월드컵에서는 모든 사람이 한 덩어리가 되여 자기 나라팀의 응원에 열을 올린다.   월드컵은 하나의 큰 잔치이면서 또한 하나의 큰 초상이기도 하다. 이긴 팀은 기쁨의 눈믈을 흘리며 미친듯이 환호하고 진 팀은 애통함을 금치 못해 통곡한다. 허나 어찌하랴. 이런것이 바로 월드컵인것을. 모든 팀이 다 이길수는 없다. 무릇 이기는 팀이 있으며 지는 팀이 있기 마련이다. 승부를 두고 투혼을 다 하는 아짜아짜한 대결, 손에 땀을 쥐고 지켜보는 수만의 관중들, 그러다가 꼴이 들어가는 순간 폭풍처럼 터지는 환호성, 그리고 다른 한쪽에서 토지는 절망의 신음소리, 거기다 심판의 오판을 비웃는 야유성, 비신자적인 파울을 하는 선수들에게 던지는 비난성, 여기에 바로 월드컵의 재미가 있다.     축구는 이미 겨루기의 의미를 넘어 한 나라의 이미지와 응집력을 과시하는 상징으로되였으며 때로는 진한 정치색채를 띠기도 한다. 뉴욕 타임스지가 브라질월드컵에 진출한 16개국 국민을 상대로 한 설문조사에서  월드컵에서 지기를 원하는 국가를 묻는 질문에 한국은 당연히 일본을 꼽았고 일본도 서슴없이 한국이 지기를 원했다. 숙적인 아르헨티나와 브라질의 경우 아르헨티나 관중들은 브라질이 다른 팀한테 지기를 바랐고 브라질 역시 아르헨티나가 상대팀한테 지기를 바랐다. 재미로 보는 축구가  때론 재앙을 불러오기도하고 때론 평화를 낳기도 한다. 1969년 온두라스와 엘살바도르는 월드컵 예선전 17일후 전쟁을 벌렸다. 엘살바도르와의 경기에서  온두라스가  지자 온두라스정부는 엘살바도르와의 외교관계를 단절했고 이에 본노한 엘살바도르는 온드라스를 침공하였다. 그번 전쟁에서 4천여명이 죽었다. 이렇게 죽구가 전쟁을 발발시켰는가 하면 평화를 낳게도 하였다. 코트디부아르가 사상 최초로 얼드컵에 진출한 2006년 코트디부아르팀의 주장 디디에 드로그바가 텔레비에 나와 무릎을 꿇고 “우리는 조국을 위해 최선을 다했으니 부디 일주일만이라도 전쟁을 멈머취달라”고 애원했다. 이듬해 정부군과 반군은 5년간 끌어오던 전쟁을 끝냈다.     브라질월드컵은 력사상 이변(异变)이 가장 많은 축제,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한 가장 잔혹한 축제, 악몽과도 같은 축제였다. 무적의 함대라고 불리우던 세계 링킹 1위 스페인이 조예선에서 참패를 당해 16강문턱을  넘지 못하는 수치를 당했고 유럽의 강팀으로 소문난 잉글랜드도 16강문턱을 넘지 못하고 무너지고말았다. 특히 축구종주국이라고 불리우던 영국이 16강에서 탈락하여 톡톡히 망신을 당했다. 8강을 장담하던 한국과 일본을 포함하여 이란과 호주도 16강에서 밀려나 아세아축구체면도 여지없이 구겨지고말았다. 그중에서 가장 큰 이변은 독일과 브라질팀의 격돌이였다. 브라질이 독일한테 1:7로 대패하여 온 세상을 경악케 했다. 브리질의 축구위신이 일락천장하는 순간, 믿기 어려운 참패에 수모와 분노를 참지 못한 브라질국민들이 대성통곡하였고 수많은 사람들이 “브라질축구는  죽었다”고 소리쳤으며 분이 극도에 달한 브리질축구팬들이 대소동을 일으켜 4명이 숨지기까지 하였다. 독일은 24년만에 네번째우승을 함으로써 남미에서 열리는 월드컵에서 유럽국가가 한번도 우승을 못했던 력사를 바꾸어놓았다.   이 기회를 빌어 월드컵의 력사를 간단히 거슬러 보기로 한다. 많은 사람들이 영국을 축구종주국이라고 부르고  영국인들도 이로하여 무한한 자부심을 갖고있다. 1848년에 영국 캠브리지대학에서 현대축구가 첫발을 뗐고 1866년에 정식으로 축구규칙이 만들어졌다. 하지만 그때가지만 해도 문지기가 없다가 1871년에 문지기기 있게 되였다. 그후 영국의 축구가 스페인을 통해 유럽 각국에 전파되였고 축구가 유럽에서 큰  인기를 끌게 되였다. 1904년에 프랑스, 스위스, 벨기에,스페인,  네들랜드, 스웨덴, 덴마크 등 7개국이 프랑스 파리에 모여 처음으로 국제관리기구인 국제축구련맹   즉 피파(FIFA)를 산생시켰다. 오늘FIFA에 가담한 나라가 208개에 달한다.    그런데 사실 축구의 원뿌리를 캐보면 축구의 진정한 종주국은 영국이 아니라 중국이다. 일찍 기원전 2,700 여년전  황제시기에  소박한 축구의 싹이 트기 시작했고 기원전 135년 한무제시기에 중국 장안에서 정식으로  축구가 있게 되였다.  그러나 당시 축구는 게임을 통한 재미가 아니라 군사들의 체력증진을 위한 목적으로 진행되였다. 공안에 땅땅한 물체를 다져넣어 무겁게 함으로써 군사들이 공을 차는 운동을 통해 하체의 힘을 힘을  증강하게 하였다. 장소는 네개의 벽이 있는 넓은 마당을 택하였는데 각각 12명으로 구성된 두팀이 승부를 겨루었다. 경기를 할 때마다 황제가 구경하였고 이긴 틈에 상을 주었다. 네개의 벽에다 먹으로  일정한 크기의 네모칸을 만들고 그 안에 공을 많이 차넣는 팀이 이겼다. 알고보면 축구는 동양철학의 발현이고 실천이였다. 옛 중국인들은 철학을 운동과 결합시키는 지혜를 갖고있었다. 둥근 공은 태양을 상징하고  네개의 벽면은 사계절을 의미하고 12명의 선수는 1열두달을 의미하였다. 말하자면 자연과 우주의 조화를 념두에 둔 철학적사고의 발상이였던것이다.  손을 쓰지 않고 발로만 하는 운동이였기에 족구(足球)라고  하였다. 그러나 당시 축구는 오늘의 축구처럼 구체적은 규칙은 없었다. 후에 축구가 중국에서 일반화, 광범화 되지 못하고 근근히 사대부들의 사치한 유희거리로 되다가 점차 중국땅에서 사라져버렸다. 그러다가 1848에 영국캠브리지대학에서 축구가 다시 산생하여 오늘의 세계인의 대축제인 월드컵으로 발전하였다.     우에서 간단히 살펴보았지만 엄격한 의미에서  중국이 분명 축구종주국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부끄럽게도 중국의 축구는 말이 아니다. 금년 브라질월드컵은 물론이려니와 력대의 월드컵에 중국팀은 한번도 얼굴을 내밀지 못했다.  13억인구가 월드컵경기장이 아니라 단지 안방에서 텔레비를 통해 남의 잔치를 함께 즐겨야 하는 신세니 참 한심하고도 하고   얼굴이 뜨겁기도 하다.   중국의 웅장하고 화려한 꿈에는 중국의 축구도 포함되여있다.  중국은 꼭 중국의 축구꿈을 실현하여 엉망으로 구겨진 축구종주국의 체면을 살려야 한다. 첫단계로 16강을 바라보아야 하고 점차 8강 ,4강을 노리고 최후에는 우승의 월계관을 탈취하여야 한다. 이런 야심을 현실로 만들자면 축구에 대한 전 사회의 관심과 정부의 적극적인 지지가  있어야 한다. 탁구를 중시하듯 축구를 중시한다면 중국축구도 언젠가는 쨍 하고 해뜰 날이 있을것이다.   우선 독일처럼 어릴적부터 축구영재를 발견하고 잘 키워야 한다. 다음으로 축구에 대한 정부의 어수선한 관리가 정리되여야 한다.  중국의 축구부진은 정부에도 문제가 있고 감독에게도 문제가 있고 선수들에게도 문제가 있다.   온 사회가 축구를 관심하고 정부가 축구를 중시하고 감독과 선수들이 배가로 분발한다면 중국의 축구꿈은 실현될수도 있을것이다.   월드컵에서 중국구팀이 오성붉은기를 휘날리며  그라운드에 들어서는 그런 날, 월드컵경기장에 중국국가가 우렁차게 울리는 그런 날, 그리고 최종적으로 월드컵에서 우승하여 13억의 마음을  기쁨의  눈물로 흠뻑 적실 그런 날을 기대해본다. 해란강닷컴 2014-7-18
15    «동양평화론»의 선구자 ㅡ 안중근 댓글:  조회:2231  추천:1  2014-04-14
금년은 안중근(安重根)의사 순국 104주년이 되는 해이다. 안중근의사는 비단 불굴의  반침략투사일뿐만아니라 동방의 평화를 위해 목숨을 바친 국제주의전사이기도 하다. 그가 순국한후 한국인뿐만아니라 수많은 중국인들도 그의 장거를 칭송하고 그의 죽음을 두고 슬퍼하였다. 중국인들은 안중근의사를 자기들의 친밀한 벗으로 생각하였다. 당시 손중산과 주은래 , 우우임(宇佑任) 등이 안중근의사의 영웅적거사를 높이 칭송하였고 심지어 원세개마저도 안중근의사가 순국하자 《동방의 영웅호걸》이라는 제사를 써서 안중근을  추모하였다.   오늘까지도 중국인민들은 인중근의사를 잊지 않고있다. 중국정부는 안중근의사 순국 104주년을 맞으면서 할빈에다 안중근의사기념비를 세웠다. 자기의 유골을 할빈에 묻어달라는것이 안중근의 유언인데 그 유언을 다름아닌 중국정부가 풀어준것이다. 비록 유골을 찾지 못해 안치하지 못했지만 기념관이 섰으니 구천에 있는 안중근의사도 만족의 미소를 띄울것이며 중국정부에 감사를 드릴것이다. 지난3월 2일, 네델란드(荷兰)의 국제회의때 박근혜대통령은 습근평주석에게 중국에서 안중근의사기념관을 세워준데 대해 심심한 감사를 표시하였다. 안중근의사기념관의 설립은 중한 두 나라의 우의를 돈독히 하고 발전시키는데서 하나의 디딤돌로 될것이다.   헌데 최근 일본의 외부장관이라는 자가 중국에서 안중근의사기념관을 세운데 대해 유감을 표시하고 안중근의사를 “테러리스트”라고 모독하여 한국인들과 중국인들의 분노를 자아냈다. 침략자에겐 진실이나 정의나 원칙이라는것이 근본상 없다. 그들에게는 오직 어불성설인 궤변밖에 없다. 104년전 안중근의사를 사형에 언도할 때도 일본법원은 안중근을 “테러분자”라고 판결을 내렸었는데 오늘 일본정부가 자기네들의 침략조상이 한 말을 곱씹으면서 또다시 안중근을 “테러리스트”라고 모독하고있는것이다.   갑오중일전쟁이 일어난지 120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동아시아는 동란과 불안이 사라지지 않고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무엇보다 우선시되고 필요한것이 동아시아의 평화와 안정이다. 이렇다고 보면 104년전에 처음으로 내놓은 안중근의사의 《동양평화론》 구상은  금후 동아시아의 평화를 도모하고 동아시아지역의 공동체를 구성하는데서 중요한 참고가치를 갖고있다고 보아야  할것이다.   1909년 10월 26일, 한국의 의병참모중장 안중근이 할빈역에서 일본 총리 겸 조선총독부 총감인 이또 히로부미(伊藤博文)를 격살하였다. 이또 히로부미는 조선을 강점하고 중국침략을 획책한 악명높은 침략자로서 중국인민과 조선인민의 공동의 원쑤였다.   1910년 3월 26일, 안중근의사는 려순의 일본관동도독부감옥에서 33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안중근은 심문을 당할 때마다 자신은 테러분자가 아니라 의병중장의 신분으로 정정당당하게 동양의 평화를 위해 정의로운 일을 했다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일본법원은 테러죄로 판결을 내리고 교수형을 내렸다. 안중근의사는  자기가 평생 생각해왔던《동양평화론》을 집필하려고 사형집행연기를 요청하였으나 거절당하고말았다. 안중근의사는 감옥에서 《동양평화론》을 집필하기 시작했다. 원래의 구상은 선언, 전감( 前鍳),현상(现状),복선(伏线),문답(问答) 등 5개 부분이였지만 애석하게도 선언과 전감의 일부분밖에 쓰지 못하고 교수형을 당하고말았다. 가령 《동양평화론》이 제대로 완성되였더라면 력사는 안중근에 대해 더욱 무게있고 찬란한 평가를 했을는지도 모른다.   《동양평화론》이 비록 미완성이긴 하지만 상당히 완정한 동양평화구상을 담고있다. 내용을 귀납하면 아래와 같다.   1. 일본은 이웃 나라에 대한 침략을 정지하여야 한다. 2. 일본은 일로전쟁에서 불합리하게 차지한 대련과 려순을 중국에 돌려주어야 한다. 3. 중국 려순에서 회의를 열고 동양의 영구한 평화를 위한 방책을 토론하여야 한다. 4. 려순에 큰 은행을 세우고 중.일.한이 공동으로 사용할수 있는 화페를 발행하여야 한다. 5. 중.일,한 청년들로 구성된  군단(军团)을 조직하고 려순항을 동양의 평화근거지로 되게 하여야 한다.   사형을 앞두고 쓴 《동양평화론》, 지금 읽어봐도 가슴이 뭉클하게 한다. 얼마나 동양을 사랑했으면, 얼마나 평화를 사랑했으면 사형을 눈앞에 둔 사람이 《동양평화론》을 썼겠는가. 실로 고금에 보기 드믄 평화의 수호신이라고 할만하다.   안중근의사의 《동양평화론》은  21세기 동아시아의 평화유지와 동아시아공동체를 도모하는데 중요한 참고가치를 제공하기에  더더욱 소중하다. 《동양평화론》을 보면서 우리는 서유럽의 《슈만계획》을 떠올리게 된다. 2차세계대전이 끝난 5년후인 1950년에 프랑스의 외교부장 라벨 슈만은 적대국이였던 독일과 손잡고 다음과 같은 계획을 내놓았다. 프랑스와 독일의 중요한 석탄, 강철기지를 바탕으로 서유럽 각국의 석탄, 강철 공업부문과 련합하여 초국가적인 련합경영기구를 건립하고 각국이  공동으로 관리한다. 이것이 세계적으로  소문난 《슈만계획》이다. 이 계획은 당시 막강한 세력을 갖고있던 미국과 쏘련에 대응하여 안정하고 강대한 유럽을 세우려는 의도에서 출발한것이였다. 이 계획은 서유럽 각국의 호응을 받아 1951년 4월 18일 《유럽석탄강철련합경영》이라는 이름으로 기초되였다가 다시 《슈만계획》으로 작성되였다. 그것이 후에 유럽련맹으로 발전, 장대해졌고 오늘까지 이어지고있다. 지금 유럽련맹은 전지구화(地球化) 정도와 구역화(区域化) 정도에서 세계의 앞장에 서고있다. 련맹국가지간에 아무런 규제가 없이 제집처럼 마음대로 들락거리며 같은 화페를 사용하고있다. 유럽련맹은 이렇게 하면서 화목하고 함께 발전하고 함께 번영하는 리상적인 사회를 구축해가고있다.   이에 반해 동아시아는 지구와와 구역화 정도에서 상당히 뒤떨어지고있다. 인원, 물자, 화페의 교류에서 오히려 동아시아구역 외의 국가들의 관계가 동아시아국가들의 관계를 초월하고있다. 비자만 보더라도 일본과 한국은 동아시아 외의 허다한 국가들에게는 무비자 입국을 허락하지만 유독 이웃인 중국에 대해서만은 까다롭고 엄격한 비자심사제도를 실시하고있다.   더욱 근년에 들어와서 일본과 한국, 중국과 일본지간에 령토분쟁으로 모순과 갈등이 나날이 불거지고있다.   이런 악화된 상황에서 절실히 필요한것이 《슈만계획》과 같은 조치이다. 최근에 료녕대학 력사학원 교수이며 료녕대학 동아시아관계연구센터 주임인 권혁수( 权赫秀)가 아래와 같은 구상을 내놓았다. 요약하면 이러하다.   104년전에 내놓은 안중근의사의 《동양평화론》은 오늘에도 커다란 의의를 갖고있는바 그의 정신을 이어 보다 건강하고 평화롭고 발전된 동아시아를 구축하여야 한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중, 로, 한, 일은 력사연원(历史缘源)을 갖고있다. 동아시아론단과 동아시아평화기금을 설립하고 동아시아 평화와 합작에 관계되는 각종 연구사업을 지원하며 노벨평화상과 류사한 의의를 갖는 동아시아평화상을 건립한다. 또한 초국가적인 성격의 동아시아평화발전은행을 세우며 이로써 동아시아 각국의 인원, 물자, 화페교류 등 각항 사업과 공정을 지지하고 추진한다.   훌륭하고 리상적인 구상이라고 할만하다. 이렇게만 된다면 동아시아는 평화와 번영의 시대, 강대한 동아시아시대를 안아오게 될것이다. 물론 동아시아공동체의 구축에서 가장 적극적인 태도를 보여야 할 나라가 일본이다. 왜냐하면 력사적으로 보면 일본이 동아시아의 혼란과 불안과 위협을 초래한 주요한  장본인이였기때문이다.   104년전에 안중근의사가 바랐던 《동양평화론》 구상이 21세기의 동아시아식의 《슈만계획》으로 되고 그것이 현실로 된다면 동아시아는 모든 갈등과 모순을 해소하고 평화롭고 행복하고 강한 동아시아로 탈바꿈할것이다. 그리고 진정 이렇게만 된다면 하늘에 계신 안중근의사께서도 행복의 미소를 지을것이다. 해란강닷컴  
14    날조와 궤변의 능수 아베 댓글:  조회:1590  추천:0  2014-03-13
최근 들어 아세아의 정국이 아주 불안정한데 캐고보면 주요원인이 일본정부, 특히는 일본총리인 아베때문이다. 미끄라지 한마리가 온 웅뎅이물을 흐리운다는 말이 있다. 아베야말로 아세아라는 평화의 호수를 흐리우는 명실상부한 한마리 미끄라지가 아닌가  싶다. 아베는 집정이후 갖은 파렴치한 망언을 쏟아부으면서 력사에 보기 드믄 추태극을 연출하여왔다. 위안부문제,  남경대학살문제, 한국의 독도와 중국의 조이도(센카이코) 문제 등에서 한번도 진실을 말한적이 없고 모두 흑백이 뒤섞인 궤변투성이 말을 하여 세상의 인심을 잃고 배척을 당하고있다.  이웃 나라들로부터 미움을 받아 외로운 신세가 된 이베가  사면초가에 빠진  궁상을 얼마간이라도 만회하려고 중국, 한국과 대화를  시도하려 하지만 력사의 진실을 밝히고 사죄하지 않는한   두 나라는 일본과 대화를 하지 않을것이다. 최근에 아베는 또 “침략전쟁에 대한 그 어떤 정의도 없다”는 괴상하고도 무지한 망언을 하여 세인을 경악케 하고 분노케 하였다. 아베의 뜻인즉 일본이 지난날 아세아 각국을 침략한것이 침략전쟁이 아니라 아세아의 안녕과 평화와 공영(共荣)을 위한 미행(美行)이였다는것이다. 그야말로 소 웃다가 꾸레가 터질 노릇이다. 정상적인 사람의 입에서는 나올수  없는 괴담인즉 필자는 아베를 이라고 부른다.  사실 아베의 궤변은 그의 발명품이 아니라 어제날의 일본군국주의의 미친 소리를 그대로 옮긴데 불과하다. 아베의 조부되는  사람이 일본 군국주의의 두목의 한 사람이였으니 그럴법도 할만하다.   82년전, 조선을 침략하여 식민지로 만들고  중국의 동북을 점령하고  괴뢰 을 세운후 일본은 자기네들의 행위가 동방의 안전을 위협하는 서방국가들의 침입을 막고 아세아의 안녕과 번영, 공영을 위한것이였다고 하면서  침략전쟁을 정당화하고 미화하였켰다.  에 아래와 같은 구절이 있다.   “로씨야가 만주를 침략한것은 바로  동방을  침략한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백색인종이  유색인종을  괄시한것이다. 동방은 반드시 동방인의 동방으로 되여야 한다. 일본,조선, 만주, 중국은 반드시 공존공영하는 국가군체로 되여야 한다.  그러므로 미국이나 영국을 포함해 그 어떤 서방국가도 동방에 대해 부당한 행위를 하여서는 안된다. 오직 동방의 맹주인  일본만이 동방 각 민족의 안녕과 행복을 지키는 위대한 사명을  갖고있다.”( 제3페지) 보다싶히 일본은 아세아에 대한 침략전쟁을 아세아의 안녕고 행복을 지키는 미행이라고 나발불고있으며 그 을 오직 그들만이 할수 있다고  미친 소리를 하고있다. 후에 이른바 그 이 수천만의 아세아인을 학살하는 만행으로 되였다는것은 세상이 다 알고있는바이다. 그런데 80여년이 지난 오늘 아베가 또 옛 일본군국주의자들의 미친 넉두리를 그래로 외쳐대고있다. 그 의도는 너무나 명백하다. 군국주의 부활을  시도해보겠다는것이다. 그제날 일본은 아세아에 대한 지배와 통치를 꿈 꾸며 침략전쟁을 일으켰다가 처참하게 패망하였다.  여기서 일본은 마땅히 심각한 교훈을 섭취하고 자신을 침통하게 뉘우치고 바른 길로 가야 할텐데 도리여 더욱 창궐하게 군국주의라는  비틀린 외길을 가려고 고집하고 있으니 실로 미욱하기를 그지없다 하겠다. 요지음 일본이 요란스레 집단자위권을 부르짖는것도 실상은 보통국가의 신분으로 타국에 군대를 파병알수 있는 명목을 갖추겠다는 것으로서  속셈은 역시 군국주의 부활에 있다.  아베정부가  아무리 군국주의 미몽을 실현하려고 갖은 애를 다 쓰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미친자의 망녕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오늘의 아세아는 그 옛날의 연약하고 무능하고 락후하던 아세아가 아니기때문이다. 특히 어제날 아세아의 로 업신받았던 중국이 오늘 경제대국, 군사대국으로 우뚝 솟아 그 누구도 감히 건드리기 어려운 무서운 존재로 부상하고있다.  아베와 그 정부는 정세를 직시하고 자신을 반성하고 날조와 궤변을 멈추어야 한다. 며칠전에  한국의KBS에서 “반성 없는 아베, 거꾸로 가는 일본 ”이라는 테마로 시사단평을 했는대 아주 지당한 평가라고 생각된다. 반성하고 참회하고 사과를 하고 용서를 빌고 바른 길로 간다면 지난날이야 어쨌든간에 세계가 량해하여 줄것이다.     한달전인가 이스라엘정부가 독일청리 메리켈에게 칭호를 수여하여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하였다. 세인이 다 알지만 2차세계대전때 독일 파시스트는 수백만의 유태인을 학살하여 천인공노할 큰 죄를 지었으며 이로하여 독일은 유태인들의 철천지원쑤가 되였다. 그런데 독일의 총리가 유태인 나라의  으로 된것이다. 까닭은 독일의 진심으로 되는 허심한 반성과 사과에 있다.   전쟁이 끝난후  독일은 자기들의 저지를 죄를 뼈아프게 뉘우치고 이스라엘을 비롯하여 지난날 독일한테 피해를 입은 모든 나라들에 죄를 인정하고 반성하고  사과하고 용서를 빌었고 배상금을 지불하였다.   독일이 명지한 선택을 하였기에 세인의 량해와 용서를 받게 되였던것이다.  지금 독일의 피해를 입은 나라들중에서 독일을 저주하거나 증오하는 나라가 하나도 없다고 한다.  오죽하면 이스라엘정부가 원쑤의 나라 총리에게 < 영예시민>의 칭호를 주었겠는가. 그런데 일본은 오늘까지도 자기들의 침략행위를 승인하려 하지 않고 있으며 죄를 승인하려 하지 않고 있으며 반성과 사과는 더구나 하려 하지 않고 있다. 오히려 모든 죄악을 날조와 궤변으로 대체하려고 한다.   아배아 아베정부는  독일을  본보기로 하여 정신을 차려야 한다. 파렴치하고 몰지각적인 행위를 걷어들이고 제정신으로 돌아서야 한다. 아직도 늦지 않았으니 허심하고 죄를 뉘우치고 진심오로 반성하고 사과하여야 한다.  오직 이 길만이 일본이 지구촌에서 마음놓고 살아갈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13    배우는것과 익히는것 댓글:  조회:1595  추천:1  2014-02-11
  «론어(论语)»의 의 첫구절이 “배우고 때대로 익히니 어찌 기쁘지 않으랴. 먼  곳에서 벗이 오니 어찌 즐겁지 않으랴.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노여워하지 않으니 어찌 군자가 아니랴.”(學而時習之不亦说乎,有朋自遠方来不亦樂乎,人不知而不怄不亦君子乎)이다. 이 구절의 핵심을 배움과 익힘, 벗, 군자 등으로 나누어 풀이할수 있는데  이 글에서는 론의상의 편리를 위해 배움과 익힘만 담론하려 한다. 학습은 배울 학( 學)과 익힐 습(習)으로 이루어졌다. 배우는것과 익힌는것 중에서 배움도 중요하지만 익히는것이 더욱 중요하다. 그 까닭은 배우는것보다 익히는 일이 더 어렵고 의의가 더 크기 때문이다. 배우는 목적은 전적으로 익히려는데 있다. 많은 사람들이 습(習)을 이미 배운것을 복습(复習)하는것이라고만 생각하는데 사실은 그런것이 아니고 실천(實践)한다는 의미다. 습(習)자를 분해하면 우에 날개 우(羽)가 있고 밑에 흰백(白)이 있다. 털도 나지 않은 하얀 어린 새가 날기 위해 날개짓(羽)을 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습(習)을 행동을 한다는 의미, 실천을 한다는 의미로 읽어야 한다. 우리 조상들은 일찍부터 실천의 중요성을 알고있었다. 그것이 속담으로도 증명된다. 우리 속담에 “부뚜막의 소금도 집어 넣어야 짜다”는 말이 있다. 이 속담에는 아무리 쉬운 일도 힘을 들이지 아니하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뜻 외에 어떤 도리나 리치를 알고있어도 행동하지 않으면 일을 성사시키지 못한다는 다른 의미도 함께 지니고있다. 또 “백번 듣는것이 한번 보는것만 못하고 백번 보는것이 한번 해보는것보다 못하다 ”는 속담도 있다. 역시 실천의 중요성을 강조한 말이다. 지난 날 우리들은 을 리해함에 있어서 만 중시하고 을 경시하였다. 위대한 공산주의전사 뢰봉은 나라와 집체와 다른 사람을 위하는 것을 락으로 삼았기에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그가 죽은 후 모택동, 주은래, 등소평, 주덕, 류소기,동필무  등 50여명의 중앙 수장들이 제사를 썼다. 모택동은 “뢰봉을 다라 배우자!”고 썼고 등소평은 “진정한 공산주의 전사가 되려면 뢰봉동지의 품덕과 품성을 따라 배워야 한다”고 썼다. 하여 한때 전국적으로 뢰봉을 따라 배우는 열조가 일어났으나  오늘에 와서 뢰봉정신은 많은 정도로 희미해지고말았다. 다 일다싶히  “인민을 위해 복무하자!”는 구호는 온 나라 방방곡곡에 걸려있으며 13억 인구가 “인민을 위해 복무하자!”는 소리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다. 하여 무릇 중국인이라면 뢰봉을 모르는 사람이  없고 인민을 위해 복무하는것이 좋은 일이라는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지 않은 사람들한테는 뢰봉이 생소하고 “인민을 위해 복무하자!”는 구호는 단지 구호일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말하자면 행동하고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오늘 당과 정부에서는 당내의 부정부패를 척결하기 위해 강력한 조치를 취하고있으며 전당,전민이 일떠나 부정부패를 폭로하고 적발하고 뿌리뽑으라고 호소하고있다. 이것은 인민의 념원이고 나라의 념원이고 당의 념원이다. 하지만 부정부패, 비리라는 바이러스가 의연히 살아숨쉬면서 나라와 인민을 해치고있다. 까닭은 여러 가지겠지만 그중의 하나가 부정부패와 비리의 해로운 점을 번연히 알면서도 고치지 못하거나 과감하게 실제행동으로 부정부패를 막지 못하기때문이다. 이 경우 해로운 점을 알았다는것은 에 속하고 고치고 막는것은 에 속한다. 단지 배운것으로만은 부족하다. 익힘이 없는 배움은 무의미하다. 배움은 익힘을 위한 전제이며 중요한것은 익힘이다. 그러므로 언제나 배우는것과 익히는것을 결합하여야 한다.
12    狂者의 妄言 댓글:  조회:1984  추천:0  2014-01-17
  요지음 동아시아의 분위기가 전에없이 팽팽해지고있다. 그 장본인은 일본이다. 미꾸라지 한 마리가 온 웅뎅이물을 흐리운다고 했듯이 일본이 무모하게 갖은 집탈을 만들어 동아시가 그 어느때보다도 시끌버적해졌다.   일본 아베정부와 정부를 옹호하는 일부 우익분자들이 해괴한 망언을 서슴치 않고 쏟아내면서 시비를 전도하고있다. 망언이 여러가지지만 그중에서 몇가지 골자만 골라서 광자의 음흉한 속셈을 알아보기로 한다. 첫째, 위안부문제에서의 망언이다. 일본정부는 위안부문제에서 위안부는 강제로 모집한것이 아니고 자원이였다고 하면서  후안무치한 낯짝으로 당치도 않은 궤변을 련발하고있다. 2차대전때 일제에 의해 만들어진 위안부는 세계인권력사에서 전례가 없던 인권침해다. 하기에 70여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세계인의 분노를 자아내고있다. 심지어 미국의 인권단체에서는  위안부소녀상을 세워놓고 전 세계에다 일본침략자들의 죄행을 고발,성토하고있다. 2차대전때 일제는 아시아전역에서 강제로 위안부를 모짐하여 일군의 성도구로 제공하였다. 일제는 위안부를 모집할 때 입으로는 간호사, 방직공으로 모집한다고 기편하였다. 강제로 끌려간 수많은 위안부들이 야만적인 일군에 의해 참혹한 유린을 당했다. 그중 적지 않은 위안부들이 고통에 시달리다못해 자결하였다. 위안부의 피해를 가장 많이 받은 나라가 한국과 중국이다. 오늘 요행 살아남은 위안부들이 일본정부를 향해 천인공노할 죄를 인정하고 배상금을 지불하것을 강경히 요구하지만 파렴치한 일본정부는  이른바 위안부는 강제모집이 아니고 자원모집이였다고 흑백이 뒤섞인 망발을 쏟아붓고있다. 둘째, 남경 대학살에 대한 망언과 외곡이다. 19세기 30년대에 중국의 땅에 남경대학살이라는 인류의 최대의 비극이 벌어졌다.  1937년 11월 13일부터  6주동안 남경을 점령한 일군은 천인공노할 대학살을 감행하여 세상을 놀래웠다. 짦디짧은 6주동안에 일본침략자들은 근 37만에 달하는 백성과 포로들을 총살하거나 생매장하였다.  한 일군의 자백에 의하면 적수공원의 백성들을 묶어놓고 날창으로 누가 더 많이 죽이는가  내기를 벌렸고 마지막에는 날창이 무디여 더 죽일수 없었다고 한다. 일본침략군은 대학사를 감행하는 한편 수많은 부녀들을 강간했다.  어떤 녀인들은  집식구들 앞에서 강간당했고 어떤 부녀들은 륜간을 당하기도 했도  어떤 부녀들은 강간당한후 살해되기도 했다. 일본침략군은 남경을 점령한 후 근 88만책에 달하는 도서와 문서를 략탈했는데 이는 당시 도쿄 상야(上野)도서관의 장서 87만권보다 더 많은 수자다. 일본군의 야만적인 행위는 이에서 그친것이 아니다. 일본침략자의 야만적인 행위에 의해 남경시의 삼분의 일의 건물이 파괴되거나 소각되였으며 남경시  재산의 절반 이상이 훼손되였다. 남경대학살은 인류사에 없던 비인간적인 죄행, 오직 야만인만이 할수 있는 천추에 용납못할 죄행이다. 하여 오늘까지도 중국인민을 포함해  평화를 사랑하는 모든 인들이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고있는것이다. 력사의 죄인으로서의 일본은 마땅히 남경대학살의 죄를 인정하고 중국인민에게 천만번 용서를 빌어도 시원치 않겠는데   일본정부는 죄를 인정하기는커녕 되려 세상 사람들 모두가 혹은 이라고 부르는  참사를 그들만은 이라고 하면서 죄악을 덮어감추려 하고있다. 그들은 남경참살에서 죽은 사람이 2,3만명에 불과하며 그것도 참살이나 도살이 아니라 전사(战死)라고 변명한다. 전쟁중에서 싸우다가 죽었으니 정상적인 죽음이라는 뜻이다.  광자의 망언은 이렇듯 황당하다.   셋째, 령토확장과 침략에 혈안이 된 망언이다. 일본제국주의 본질은  침략이다. 1592년에 일본은 조선을 침략하여 임진왜란을 일으켰고 명나라때 명나라의 연해지방을 략탈했었다. 1910년에 조선을 강점하였고 1932년에 중국의동북을 점령하고 위만주국을 세웠으며 이어 중국을 비롯한 아시에전역에 침략의 마수를 뻣쳤다가 1945년에 망하였다. 이렇듯 일본은 침략에 광분하는 나라이다. 일본의 령토확장야욕과 침략 야욕은 지금도 계속되고있다. 아베정부는 한국의 독도를 자기네들의 죽도( 竹岛)라고 우기며 중국의  (钓鱼岛)를 자기네들의 센카쿠군도라고 우기고있다. 일본의 이러한 에누리없는 강도론리는 동북아평화, 나아가서는 세계평화를 위협하는 화근으로 되고있다. 하기에 중국과 한국은 일본의 엉터리주장에 대해 추호도 양보가 없는  강경한 립장을 취하고있다. 넷째, 집단적자위권에 대한 망언이다. 2차대전후 유엔에서는 일본은 전쟁도발국이므로 군대를 두지 못하고 단지 치안을 유지하는  방위청만을 두게 했는데 그것이 자위대로 명칭이 바뀌였다. 후에 일본은 자위대를 22만 5천명으로 발전시키고 현대화장비로 무장시켰으며 현재 일본은 막강한 군사력을 보유하고있다. 군사전문가들은 일본이 유사시에는 순간에 100만명 이상의의 군인을 확보할수 있다고 보고있다.  집단적자위권이란 다른 국가가 무력공격을 받을 경우 밀접한 관계가 있는 국가가 피공격국을 원조하여 하여 공동으로 방위할수 있는 권리를 말한다. 집단적자위권을 행사할 경우 일본군대가   보통 정상적인 나라의 군대와 마찬가지로 해외에다 군대를 파견할수 있는 권리를 갖게 된다. 이 말은 또 침략을 할수 있는 명분을  갖춘다는 말과 통하기도 한다. 결국 이전의 전쟁도발국으로서의 일본이 집단적자위권을 행사한다는것은 백번 말해도 어불성설이다. 근간에 일본은 미국까지 동조하니 집단적자위권행사에 미친듯이 열을 올리고있다. 우리들은 일본의 망발을 군국주의의 부활로 받아들여야 한다. 아시아 여러 나라들은 경각성을 높여 일본의 일거일동을 면밀히 주시하고 그들이 만약 무모하게 행동한다면 엄정하게 대처하여야 할것이다. 미친개에게는 몽둥이가 제격이다. 마지막으로 아시아에서 물의를 빚고있는 일본의 력사교과서문제를 보기로 하자. 일본의 아베정부는 력사교과서수정에 막대한 정력을 소비하고있다. 본심은 자기네들의 침략력사를 미화하고 후대들에게 일본인의 자긍심과 애국심을 주입시키기 위한데 있다. 일본의 우익들은 아시아를 침력한것은 침략이  아니라 대동아공영(大同亚共荣)이라고 변명했으며 더 나아가 아시아를 서방국가들로부터 보호하고 미개한 아시아 국가들을 문명에로 이끌기 위한 미행(美行)이였다고 당치도 않는 망발을 하여왔고 지금도 하고있다. 즉 그들은 침략을 정당화 하면서  력사교과서에다 자기네들의 추악한 침략사를 아시아공영사(亚州共荣史)로 둔갑시키려는것이다. 력사는 광명정대하고진실하다. 둔갑은 언제나 단지 둔갑자체에 그치고말것이다.  지난 11월 한국의 박근혜대통령이 동북아공동력사교과서를 편찬할것을 제의하였다. 이렇게 하면 력사에 대한 공통한 인식을 바탕으로 동아시아 나라들지간의 상호 리해와 소통, 평화에 도움이 된다는 계산에서였다. 중국정부도 이 제안에 열렬한 지지를 표시했으나 일본만은 극구 반대하였다. 말하지 않아도 뻔하다. 일본정부는 자기들의 죄를 인정하지 않고 자기들의 침략를 계속 미화하면서 군구주의를 부활시키려고 하려는것이다. 일본이 어떻게 궤변하든 모두 광자의 망언에 불과하다. 력사는 속이지 못한다. 왜냐하면 력사는 곧 진리이기때문이다.  아베정부의 일련의 비리성적인 망언이나 망발은 근근히 가랑잎으로  눈 가리도 아웅하는데 불과하다. 력사는 그들의 허을을 벗겨버릴것이며 일본의 무모한 행위는 돌을 들어 제 발등을 까는것으로서 세계인민의 질타를 면하지 못할것이다.
11    “모난 돌” 에 대한 생각 한줌 댓글:  조회:3030  추천:1  2014-01-06
우리 속담에 “모난 돌이 정(釘)을 맞는다”는 말이 있고 중국속담에는 “槍打出頭鳥”(머리를 내민 새가 총을 맞는다)는 말이 있다. 그 뜻을 대충 풀이하면 대개 세가지로서 첫째로는 두각을 나타내는 사람이 남한테 미움을 받게 된다는 뜻이고 둘째로는 강직한 사람이 남의 배척이나 공격을 받는다는 의미이고 쌧째로는 말과 행동에서 특별히 모(각)가 나면 남의 미움을 받는다는 뜻이라 하겠다.  하다면 우리는 “모난 돌이 정을 맞는다”를 어떻게 어떤 시각으로 보아야 할것인가? 필자는 긍정과 부정 두가지로 갈라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경우에 따라서 모난 돌이 되어 정을 맞아야 할 때가 있고 모난 돌이 되지 말고 정을 맞지 말아야 할 때가 있다. 헌데 적지 않은 사람들이 불문곡직하고 정을 맞지 않기 위해 모난 돌이 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여 많은 부모들이 자식들을 교육할 때 우리 조선족들은 “남의 일에 참견하지 말라”고 타이르고 한족들은 “別管閑事”(쓸데없는 일에 삐치지 말라”고 훈계한다. 알고보면 이러한 사상은 많공맹지도의명철보신(明哲保身)에서 비롯된것이다. 명철보신은 자사자리의 일종의 표현이다. 이러한 영향을 받아 일부 사람들은 깡패들이 길가에서 무고한 사람을 마구 구타해도 못본척 그냥 지나치며 소매기군들이 돈을 훔치는것을 보고서도 모르쇠를 치며 정치권에서도 어떤 정치인들은 상급이 범한 착오나 비리를 번연히 알면서도 일신의 안정과 승진을 위해 그것을 적발하고 폭로할 대신 함구무언하거나 강 건너 불보듯 한다. 이런 사람들은 저질적인 소인배로서 마땅히 질타를 받아야 한다.  력사를 보면 모가 나서 정을 맞았지만 후세에 방명을 남긴 위인들이 적지 않다. 그들은 자기들이 정을 맞을줄을 번연하 알면서도 정의와 진리를 위해 과감하게 모를 세움으로써 천추를 두고 그 이름이 찬연히 빛을 뿌리고있다.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이는 그때까지만 해도 영구불멸의 철칙으로 되여있던 천동설을 부정하고 지동설을 주장하다가 종교재판을 받아 화형을 당했다. 장학량과 양호성은 국공이 합작하여 항일을 하기 위해 장개석을 연금하였다가 변을 당했다. 윤봉길은 일제를 타도하고 나라를 찾기 위해 홍구공원에 폭탄을 던졌다가 일제에 의해 장렬히 희생되였다. 팽덕회는 대약진과 인민공사를 반대하는 글을 올렸다가 화를 입었다. 이들은 자기들이 탄압이나 보복을 당할줄을, 심지어는 목숨까지 잃을줄을 번연히 알았지만 자기들이 하는 일이 정의라고 믿었기에 서슴치 않고 “모난 돌”로 되었던것이다. 보다싶히 인민을 위해 나라를 위해,정의와 진리를 위해 “모난 돌”이 되는것은 영광스러운 일이다. 이상은 긍정적인 측면에서 “모난 돌”을 풀이한것이다. 다음으로 부정적인 측면에서 “모난 돌”로 되지 말아야 할 까닭을 알아본다. 우선 화목한 가정을 위해서 “모난 돌”로 되지 말고 두루뭉실한 돌로 되어야 한다. 가정이 단란하자면 자기 주장만 내 세우지 말고 여러 식솔들의 견해를 따라야 한다. 한 사람의 생각만 고집하면 불화의 불씨가 될수 있어 정상이 엄중하면 가정의 파탄으로도 이어질수 있다, 그러므로 원칙적인 문제가 아닌 이상 될수록 자기만 옳다고 우기지 말고 여러 식구들의 의견을 존중하여 자기의 생각을 그들의 생각속에다 용해시켜 둥글게 만들어야 한다. 친구 사이, 이웃 사이에서도 마찬가지의 리치이다. 둘째로 민족의 리익을 앞세우고 민족공동체의 호흡에 자기의 호흡을 맞추어야 한다. 다시말하면 민족공동체의 번영과 발전에 위배되는 중뿔난 행동을 하지 말아야 한다. 한 사람의 행동이 민족공동체라는 원 밖으로 벗어나게 되면 민족공동체의 배척을 받게 된다, 즉 민족공동체가 내리는 징벌을, 정을 맞게 된다. 우리가 항일전쟁을 주제로 하는 영화에서 흔히 보게 되는 민족의 반역자나 한간이 그 일례라 하겠다.  다음으로 국민으로서의 개개인은 나라의 대기후에 따라야 한다. 오늘 중국의 대기후는 개혁개방을 견지하고 중국특색이 있는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것이다. 로마에 가면 로마의 노래를 부르라고 했듯이 우리는 오늘 모두 중국특색의 사회주의라는 합창을 열창하면서 화합속에서 둥굴어져야 하다. 합창에 합류하지 않고 엉뚱한 소리를 내는 어긋나는 행위는 “모난 돌”로서 그에 해당되는 징벌, 인민민주주의독재가 휘두르는 강력한 정을 맞게 된다. 강도, 강탈, 강간,절도. 탐오, 회뢰, 사기,등 모든 범죄는 나라와 인민을 해치는 “모난 돌”이다. 한마디로 우리는 긍정적인 면으로서의 “모난 돌”을 제창하고 부정적인 면으로서의 “모난 돌”을 배격하여야 한다.  중국민족잡지 6호  
10    중용지도를 말하다 댓글:  조회:2571  추천:1  2013-10-21
황희(黃喜, 1363~1452)는 조선조 오백년 력사에서 누구에게나 강직하고 청백한 관리이자자 명재상으로 잘 알려진 인물이다. 그는 정치 일선에서 원칙과 소신을 견지하면서도 때로는 관용의 리더십을 발휘하여 조선의 안정에 기여하였다. 1418년에 태종이 세자를 폐위시키는 일이 일어났다. 이에 황희가 나서서 폐장립유(廢長立幼:세자를 폐위하고 다른 아들을 세자로 책봉하는 일)는 재앙을 불러온다고 하면서 극구 반대하다가 강직되여 전라도 남원으로 유배하였다. 황희는 정치에서 원칙과 소신을 지키면서도 인간관계에서는 처처에서 관용의 미덕으로 처처에서 타인을 배려하는 사람이였다. 공무에 잠깐 짬을 내어 집에 있을 때의 일이었다. 집의 여종이 서로 시끄럽게 싸우다가 잠시 뒤 한 여종이 와서 “아무개가 저와 다투다가 이러이러한 못된 짓을 하였으니 아주 간악한 년입니다.””라고 일러바쳤다. 그러자 황희는“네 말이 옳다.”고 하였다. 또 다른 여종이 와서 꼭 같은 말을 하니 황희는 또 ““네 말이 옳다.””고 하였다. 마침 황희의 조카가 옆에 있다가 화가 나서“아저씨 판단이 너무 흐릿하십니다. 아무개는 이러하고 다른 아무개는 저러하니 이 아무개가 옳고 저 아무개가 그릅니다.”하며 나서자 황희는 다시 또 “네 말도 옳다.”고 하며 독서를 계속하였다고 한다. 언뜻 보면 주관이 없는 자세이다. 세상사 시시비비를 논하면 여러 가지 이유로 우리는 한쪽의 입장만을 듣게 된다. 오히려 황희가 보여준 자세를 견지하는 것이 더 쉽지 않다. 그런 점에서 주관이 없기 보다는 ‘역지사지(易地思之: 상대편과 처지를 바꾸어 생각한다는 뜻 )’라 했던가, 다른 사람의 입장을 충분히 배려할 줄 아는 자세로 보아야 하지 않을가? 우리는 황희의 몸에서 중용사상을 엿볼수 잇다. 황희가 두 녀종의 말과 조카의 말을 모두 옳다고 한것이 바로 중용사상의 체현이다. 그는 세 사람의 말을 모두 옳다고 함으로써 세 사람의 인격을 모두 존중하였다. 중용지도(中庸之道) 혹은 중용사상은 수천년간 내려오면서 중국은 물론 동아시아 각국에 거대한 영향을 미쳤을뿐 아니라 오늘까지도 큰 영향을 주고있다. 중용지도는 지난날 인격을 완성하는 립신철학(立身哲學)의 핵심으로서 많은 지성인들의 중용지도를 자아수양의 최고목표로 삼았다. 중용을 분석해 보면, 중(中)은 양극(兩極)의 합일점이고, 용(庸)은 영원한 상용성(常用性), 즉 지나치거나 모자람이 없는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정이(程頤)는 “치우치지 않는 것을 중이라 하고 바뀌지 않는 것을 용이라 한다(不偏之謂中 不易之謂庸).”고 하였는데, 이것은 곧 중은 공간적으로 양쪽 끝 어느 곳에도 편향하지 않는 것인 데 비하여, 용은 시간적으로 언제나 변하지도 바뀌지도 않는 것을 의미한다. 공자는 “도가 행하여지지 못하는 까닭을 내가 알겠도다. 지자(知者)는 지나치고 우자(愚者)는 미치지 못하는구나. 도가 밝혀지지 못하는 까닭을 내가 알겠도다. 현자(賢者)는 지나치고 불초자(不肖者)는 미치지 못하는구나(중용 제4장).”라 했다. 또, 공자는 군자와 소인을 비교하여 말하기를, “군자는 중용을 체행(體行)하고 소인은 중용에 반(反)한다. 군자가 체행하는 중용은 군자로서 시중( 時中)함이요, 소인이 중용에 반함은 소인으로서 거리낌이 없음이다(중용 제2장).”라고 하여 군자의 중용은 때에 따라 알맞게 도를 행하는 것임을 강조하였다. 중국의 현대사에서는 주은래 총리가 중용지도의 전범이라고 할만한 인물이다. 그는 중국력사의 긴요한 시기마다 정치적원칙을 견지하면서도 관용의 자세로 많은 문제들을 해결하였고 많은 사람들을 살려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문화혁명시기의 주은래 총리의 태도이다. 그는 문화혁명으로 많은 고급간부들이 피해를 입었을 때 모주석의 뜻을 크게 거슬리지 않는 전제하에서 일을 령활하고 타당하게 처리하여 억울하게 페해를 입은 수많은 사람들을 고해에서 건져냈다 중용지도는 한 개인의 인격수양에서도 적용되지만 나라의 정책이나 국제적인 외교관계에서도 나타난다. 중국의 근대사에서 있은 1차국공합작과 2차국공합작은 모종 의미에서 말하면 중용지도의 발현이다. 그것은 중국이 중용지도의 출산국였기에 가능할수 있었다. 다른 나라 같으면 이루어지기 어려운 일이다. 정치적으로 사분오렬이 되고 경제적으로 엉망진창이 된 낡은 중국을 건지기 위해 국민당과 공산당은 리념이 달랐음에도 불구하고 최선의 방책으로 제1차 국공합작을 합작을 선택하게 되었고 항일전쟁때는 외세를 몰아내는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였으므로 국공합작이 가능했다. 중용지도는 한 나라의 국내정치에서도 실행될수 있고 국제사무에서도 실행될수 있다. 일례로 중국이 56개민족에게 베푸는 관용의 정책은 모종의미에서의 중용이며 여기에도 치우치지 않고 저기에도 치우치지 않는다는 중립국들의 태도도 역시 중용지도로 풀이할수도 있다. 그 외 나라와 나라지간에도 중용지도가 통할수 있다. 혹여 이떤이들은 중용지도와 명철보신을 혼동할수도 있는데 량자는 차원이 다르고 본질적으로 다르다. 중용지도에는 자기의 인격을 고상히 하면서도 남을 배려한다는 관용의 미덕이 있지만 명철보신하는 사람들은 정의와 진리를 모두 본체만체하고 오로지 지신의 안위만을 위한다. 중용지도가 개인과 개인 사이, 가정과 가장 사이, 이웃과 이웃사이,나라와 나라사이에 타당하게 적용하면 평화와 화목이 도모될수 있다. 그러므로 살아가면서 가끔씩 중용에 대해 생각해보는 것도 좋을것이다. 중국민족 2013년 제5호  
9    뒤를 돌아보면 앞이 보인다 댓글:  조회:2486  추천:43  2012-11-09
사람들은 각종 회때마다 흔히들 틀에 박힌 말로 앞을 향해 줄기차게 전진하라, 만사대길하라면서 고무격려한다. 강조되고있는것이 “전진”과 “앞”이다.  하지만 뒤를 돌아보라는 말은 크게 하지 않는다. 앞을 향해 줄기차게 전진하라는 말은 과시 틀린 말은 아니다. 전진은 약동이고 생명의 증명이고 그리고 앞이라는건 곧 목표나 희망이나 성공을 의미하기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흔히 달리기전의  준비사업을 홀시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준비여하를 불문하고 무조건 앞으로 달리라고 하는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착실한 준비가 없이 서둘러 달리다가는 자칫하면 무언가에  걸려 넘어지거나 엎어질수도 있고 상할수도 있으며 심지어 생명을 잃을수도 있다. 자신의 지난날을 돌아보는 행위인즉 어제를 검토하고 성찰하는 과정으로 지난날을 돌아보는 사고방식이다. 참다운 자기성찰은 인간의 정신을 가볍게 만들어 달리기가 훨씬 쉬워진다. 성찰은 도덕적완성에로 이르는 필요불가결의 요소로서 성찰을 통해 인간은 무거운 짐이 되는 여러가지 오물들을 부려놓고 새로운 자아로 거듭  태여나 홀가분한 육신으로 목적지를 향해 달려간다. 중국 속담에 “과거를 징계하여 금후를 삼가하라”는 말이 있다. 과거의 잘못을 거울로 삼으라는 뜻으로 어제를 잘 총화하는것이 금후의 행로에 큰 도움이 된다는것으로 풀이된다.  사람은 누구나 이러저라한 흠집이 있다. 다만 크고작음의 구별이 있을뿐이다.  위대한 인물도 례외가 아니다. 그래서 옥에도 티가 있다는 말이 생겨났을것이다. 뒤를 돌아볼줄 모르면 개인일 경우 상황이 엄중하면 개인을 망칠수도 있으며 나라를 책임진 사람일 경우 나라를 망칠수도 있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뒤를 돌아보는 작업은 모든 사람들의 몫이 되여야 할것이며 돌아봄의 미학이 모든 철학의 앞장에 서야 할것이다.   기독교신자들이 성경을 읽고 기도를 하고 승려들이 목탁을 두드리며 념주를 헤고 좌선(坐禪)하는 과정 모두가 사실은 뒤를 돌아봄의 미학이다. 우리가 독서를 하는 과정도 다른 방식으로서의 뒤를 돌아봄의 미학 역시 다를바없다. 다만 그 정도가 차이가 있어 어떤 사람들은  착실하게 하고 어떤 사람들은 건성으로 할뿐이다. 인간을 타락의 심연으로 몰고가는 부정적인 물욕, 귄세욕, 정욕, 치부욕, 패왕욕 등이 사회를 썪게 하는 근본인데 이런 사악은 법률과 함께 돌아봄의 미학으로 치유하여야 한다. 한 사람의 행위는 후세에 거대한 영향을 준다. 일개 가장일 경우 그의 흐트러진 삶이 자녀에게 영향을 줄것이요, 스승일 경우 스승의 일거수일투족이 제자에게 이런저런 양향을 줄것이다. 서산대사가 아래와 같은 명시를 써 후세를 경계한바 있다. 눈덮힌 벌판을 걸을 때(踏雪野行去) 부디 함부로 걷지 말지어다(不須胡亂行) 오늘 남기 내 발자취가 (今日我行跡) 후날  뒤사람의 리정표가 될지리니(逐作後人程) 내가 걸어온 발자취가 곧은지 비뚠지는 반드시 뒤를 돌아보아야 알수 있다. 뒤를 볼아보고 바르지 못한것이 있다면 바로잡아야 한다. 성찰이 잘 된다면 도박쟁이는 더는 도박쟁이가 아닐것이며 사기군은 더는 사기군이 아닐것이며 부랑뱅이는 더는 부랑뱅이가 아닐것이다. 마찬가지로 성찰이 잘 안되면 도박쟁이는 영원한 도박쟁이로, 사기군은 영원한 사기군으로 남을것이다. 친구사이, 이웃사이, 가정생활, 직장생활 등에서도 항상 뒤돌아보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리고 돌아봄의 미학은 작은 일에서도 필요하거니와 큰 일에서도 필요하며 소인에게서도 필요하거니와 위인에게서도 필요하다. 가령 히틀러나 일본천황 히로히토가 고금중외의 전쟁사를 참답게 돌아보았더라면 모든 침략전쟁은 모두 패한다는것을 알았을것이고 따라서 세계를 재패하려고 무모하게 침략전쟁을 발동하지 않았을것이다. 결국 그들은 지난날을 착실하게 돌아보지 않았기때문에 멸망을 자초하고말았다. 모택동은 중화인민화국을 창건한 국부이며 위대한 인물이다. 하지만 그도 일시 돌아봄의 미학을 홀시한 까닭에 빛나는 일생에 오점을 남겼다. 만약  모택동이 문화혁 직전이라도 반우파투쟁과 대약진, 인민공사 등 극좌적인 정책이 나라와 인민에게 불리한 정책이라는것을  알았더라면 중국을 비극에로 이끈 문화혁명이 결코 발생하지 않았을것이다.  돌아봄의 미학은 개인에게도 필요하고 군체에도 필요하고 나라에도 필요하다. 뒤를 돌아보면 앞이 보인다.
8    귀중한 선물, 감동의 드라마―'장백산아래 나의 집' 댓글:  조회:2516  추천:2  2012-09-25
9월 3일부터 9월 19일까지 중앙TV에서 황금시간대에 30부 드라마 ‘장백산 아래의 나의 집’을 상영했는데 사회 각계의 열렬한 환영을 받고있다. 이 드라마의 성공을 축하하여 최근 길림성에서 전문가들이 모여 ‘순박함으로 미를 창출한 성공작’이라는 표제로 좌담회를 거행하기도 했다.   이 드라마는 연변조선족자치주 창립 60주년 헌례작품이며 바야흐로 열릴 중국공산당 제18대 당대회를 앞두고 내놓은 민족단결의 드라마이며 중화인민공화국이라는 이 대가정이 그 구성원의 일원인 조선족에게 주는 귀중한 선물이다.   드라마 장백산아래 나의 집'은 순수하고 풍부한 제재와 소박하고 감동적인 스토리로 광범한 시청자들의 심혼을 사로잡은 성공작이다. 궁정투쟁편, 전쟁편, 간첩전, 피비린내 나는 무술편, 고부간의 알륵이나 동서지간의 알륵을 다룬 암투편, 개인우상주의편 등 드라마에 지루하던 청중들은 순박하면서도 진솔하고 삶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장백산아래 나의 집'을 보고 신선한 감동의 도가니에 휩싸이고있다.   이 드라마는 두개 가정의 4대 인물들의 겪는 비환리합(悲欢离合)을 주선으로 조선족들이 걸어온 60여년의 세기의 풍운을 감동적으로 그려내고있다. 드라마는 4세대가 엮고있는 운명의 기복과 복잡다단한 인생궤적, 따스한 정감세계와 변화무상한 심령의 발자취들을 생생히 보여주고 조선족들의 삶의 실태와 생존의지, 생명가치를 사시적으로 폭넓게 그려내고있으며 민족의 화해와 문화융합을 감명깊게 펼쳐보이고있다.   이 드라마가 청중들의 사랑을 받고있는 까닭은 아래와 같은 특징을 안고있기때문이다.   첫째로 조선민족의 정신실질을 리얼하게 그려내고있다. 한 민족이 자강자존하자면 반드시 독특하고 풍부한 민족정신이 뒤받침해주어야 한다. 이러한 민족정신은 한 순간에 형성되는것이 아니라 장기적인 축적과정을 거쳐야 한다. 작품에서 김은준과 리창선이라는 로일대들의 숭고한 정신이 표본으로 되였기에 그 후대들이 그런 정신을 이어받아 민족정신의 정기를 발휘하게 된다. 김인준은 외손녀 박순옥에게 '남한테는 웃는 얼굴을 보이고 눈물은 속으로 삼키라'고 교육하고 리창선은 박순옥에게 큰 산과 같은 마음가짐을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하여 박순옥은 그들의 말대로 하여 고상한 인간미를 소유한 인간으로 성장한다. 드라마는 조선족의 순박하고 근면하고 용감하고 강의한 성격기질과 춤을 잘 추고 노래를 잘 부르는 조선민족 고유의 천성적인 기질을 스토리의 갈피갈피에 자연스럽게 관통하고 투사시키면서 조선족인민들이 중국공산당의 령도하에 이룩한 간고한 창업사와 더불어 생존지혜와 찬란한 문화, 농후한 정감세계를 감동의 화폭으로 펼쳐보이고있으며 조선족의 귀중한 민족정신을 소리 높이 구가하고있다. 그 정신이 곧 가정과 나라를 열애하는 정신이며 고생을 이겨내고 간고분투하는 정신이며 성실과 신용을 앞세우는 정신이며 어른을 존중하고 아이들을 사랑하고 인정과 우의를 중시하는 륜리정신이며 문화를 중히 여기고 과감하게 전진하며 아름다운 미래를 추구하는 창업정신이다.   다음으로 이 드라마는 조선족의 독특하고 선명한 민족특색과 지방색채를 진하게 보여주고있다. 울울창창한 장백산, 그로부터 뻗어나간 면면한 산발, 그밑으로 유유히 흐르는 해란강과 부르하통하, 화려한 조선족춤, 감미롭고 흥겨운 조선족의 음악, 하늘하늘 나붓기는 조선족의 치마, 특이한 생활방식과 생산방식, 그 어느 민족과도 구별되는 례의범절 등이 상세하게 소개되고있어 이 한편의 드라마로 조선족을 속속들이 리해할수 있다. 그러되 이러한것들이 경박하거나 단독으로 펼쳐지는것이 아니라 인물의 운명궤적에 부착되여 자연스럽게 흐르면서 조선민족의 령혼을 부각시키고있다.   또한 이 드라마는 특징의 하나로 정(情)이 전반 드라마의 령혼과 귀속점으로 되고있다. '장백산아래 나의 집'이 성공할수 있은것은 바로 이 정이 뜨겁게 숨쉬고있기때문이다. 박순옥과 권광식의 진지한 사랑, 죽은 남편을 그리며 양언문과 장영묵의 사랑을 거절하는 김정숙의 정조관, 김인준과 리창선의 특이한 우정, 리영강과 진정의 파란 많은 사랑 로맨스, 박순옥과 무용교원 로혜선과의 도타운 사생지간의 우정, 한기섭주장과 리창선의 혁명적 우의, 정록수의 짝사랑이야기…… 등등, 인정을 교감의 바탕으로 하는 여러가지 이야기들이 전반 드라마의 세절에 적당히 가미되면서 입맛을 돋구어준다.   그리고 '장백산아래 나의 집'은 선명한 장백산문화를 창출하고있다. 이 드라마의 화면에서 장백산의 장엄한 풍경, 해란강반의 우미한 자연과 인문풍광이 자연스럽게 어울리면서 연변특유의 문화가 창출된다. 작품은 대량의 렌즈언어들을 동원하여 장백산문화의 정화를 빼여나게 펼쳐보이고있다. 장백산은 길림성과 동북지역문화의 상징이다. 중국문화와 중화문화의 중요한 조성부분인 장백산문화는 장백산지역의 각족 인민들이 사회발전과정에서 창조한 물질재부와 정신재부의 총화이다.   끝으로 '장백산아래 나의 집'은 민족의 단결과 융합을 구가하고있다. 향촌의 한족의사 장영묵은 리영강이 상했을 때 정성을 다해 살뜰히 보살피며 조선족인 김정숙을 사모한다. 상해처녀 진정은 부모들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연변의 조선족사나이 리영강과 결혼한다.   총적으로 조선족인민들에게 선물한 '장백산아래 나의 집'은 사시특색, 민족특색, 자연특색을 교모하게 결합시키면서 사상성, 예술성, 흔상성의 유기적통일을 이루고있다.   드라마 '장백산아래 나의 집'은 길림성의 드라마백화원에 민족제재 헌례드라마라는 새로운 품종을 증가시켰으며 우리 나라 민족제재드라마 창작에 새로운 경험과 범례를 제공해주었다고 할수 있다.
7    스스로 죽이기 (3)ㅡ무너진 사회과학원 댓글:  조회:3293  추천:7  2012-07-26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것이 새로운것을 세우는것이요 가장 쉬운것이 이미 세워진것을 무너뜨리는 일이라 하겠다. 이러한 난수이파(難樹易破)의 도리는 크고 작은 일 모두에 통한다.  하나의 층집을 짓는데 빠르면 1년, 길면 몇년이 걸리지만 그것을 허무는데는 불과 한달여, 과학이 고도로 발달된 요즘에는 폭발약해체법을 채용해 단지 눈깜할 사이에  거대한 고루대하(高樓大廈)를 단번에 허물어버린다. 각필하고 오늘은 십여년전에 사라져버린 연변사회과원을 아릿한 추억으로 떠올려본다. 중국에는 모두 30개의 민족자치주가 있는데 사회과학원이 있는 자치주는 유독 연변뿐이였다. 실로 자랑스럽고 영광스러운 일이다. 연변사회과학원을 일떠세우는데 적어도 4.5년의 시간이 걸렸다. 문화혁명이 결속된후 연변의 학자들이 북경을 4,5차례 드나들면서 연변사회과학원의 설립을  청원하였다.  성(省)의 아래에 있는 지구급의 자치주에 과학원을 세운다는것은 불가능한 일이였지만 중앙정부는 연변지구가 문화가 발달했다는 사정을 감안하여 그리고 그 간절한 소망에 감화되여 선례를 타파하고 특수한 우대정책을 베풀어 연변사회과학원의 성립을 비준하였다. 이 특수한 은혜와 배려에 대해 우리 조선족은 중앙정부에 향해 고두백배 (叩頭百拜) 사례하여야 할것이다. 연변사회과학원은 설립된후 민족문화를 발전시키기 위해 많은 일들을 하였다.  헌데 그 누가 알았으랴. 이러한 과학원이 십년도 되나마나하여 사라지리라고는. 알고보면 이 역시 스스로 빚어진것이였다. 연변사회과학원이 무너지기 직전 1,2년 사이에 내부에서 1.2등 보좌를 놓고 두파로 나뉘여 자리다툼이 심하였다.   이러하 상황을 보고 대노한 주정부에서는 2002년에 연변사회과학원을 해체해버렸다. 자체로 결정해서 해체를 했는지 아니면 중앙정부의 동의를 거쳐 해체했는지 똑똑한 내막은 모르겠으나 아무튼 연변사회과학원이 해체된것만은 사실이다. 이리하여 근 20년간 존속하던 연변사회과학원이 력사속에서 영영 사라고말았다. 이에 분개한 연변의 지성인들이 연변사회과학원의 부활을 위해 수많은 활동을 벌렸으나 이미 엎지른 물이요 행차뒤의 나발이라 별무도리였다. 지금 5층짜리 건물만 외롭게 남아 지난 력사를 아프게 추억하고있다. 해체의 원인을 캐보면 손금보듯 환하다. 첫째는 민족과 나라를 생각하지 않고 권력에 혈안이 되여 암투를 일삼은 원 과학원 지도층의 더러운 소행때문이다. 그들이 화근을 빚어낸 죄의 장본인이다. 다음으로는 해체의 결단을 너무 조급히 내린것이다. 웬간하면 능력이 있는 새 지도부를 물색하여 어렵게 세운 과학원을 유지하는데로 나아가야 했건만 무슨 영문인지 너무 급급히 해체를 했다는 생각이 든다. 상술한 요인이 작동하여 연변사회과학원을 무너뜨리는 “폭파약”이 돼버렸다. 한번 무너뜨린것을 새로 세운다는것은 천만 불가능하다. 그리고 지금 아무리 목청을 높혀 말한다해도 소잃고 외양간고치기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서 큰 교훈을 섭취해야 한다. 다시는 자기에게 차례진 귀중한것을 소중히 여기지 않고 쉽게 팽개쳐버리는 불미스럽고 부끄러운 일이 발생하지 말아야 한다.
6    만져주기 긁어주기가 흠 댓글:  조회:2602  추천:0  2012-06-21
95년도 문단대문을 노크하다말고 머리를 잠시 뒤로 돌려보면 대체적으로 큰 말썽거리가 없이 조용하고잠잠하게 살아왔다는것이 우리 보선족문단가족의 상황이다. 그런데 너무 조용하고 잔잔하다는 그 자체가 곧 평범무이함을 의미하고 선행의식, 초탈의식, 갱신의식의 결여를 의미하고 궁극적으로는 물의를 일으킬만한 작품(명작도 좋고 시비거리문 제작품도 좋다)들이 별반 없었음을 의미한다. 어느 편집부에선가 1등을 줄만한 작품이 없어 빈 자리로 남겼다는 이야기도 들은적 있지만 사실 지난해 조선족문단에는 괄목할만한 작품, 격절탄상할만한 작품이 별로없었다. 문단기후가 너무 순후하여 빼여난 작가와 작품을 낳지 못했는지 빼여난 작가와 작품이 없어 문단기후가 순후해졌는지 생각할수록 아리숭하지만 아무튼 그 주요책임을 평론계가 안아야 할것 같다. 공명정대하고 엄숙하면서도 뜨거움이 흐르는 평론이나 너른 마당쓸기나 반지르르한 겉치레가 아닌 구체작품에 정식호적을 붙이고(절대 림시호적이 아니다) 그 내면세계를 알뜰히 파헤친 평론, 한마디로 선도적역할을 하는 평론이 적었기때문이라고 제멋대로 생각해본다. 우리 평론이 좀 더 성실한 태도로 적극적이고 책임적인 자세로 나왔더라면 혹시 우리가 그저 그러루하다고 보고 무심히 스쳐지나왔던 작품들중에서 시비거리가 될만한 색다른 작품을 찾아냈을지도 모른다. 또 가령 그런 새 맛이 나는 작품이 있었다 할 때 론단에 올려놓고 열을 올렸더라면 사방에서 과 을 느껴 문단이 지금보다는 훨씬 활기를 띠였을지도 모른다. 그저 만져주고 긁어주면서 편안히 잠재워주는것이 우리 흠이다. 그러니 추물도 푸물인지 모르고 난쟁이도 난쟁인줄 모르고 미인도 미인인줄 모른다. 이것은 좋은 징후가 아니다. 정상적인 현상이 아니라 비정상적인 현상이다. 이것은 어제에 대한 만족의 일종 다른 모슴에지나지 않으면 현유를 부정하고 더 높은 문학봉우리를 점령할만한 용기가 없다늗데 대한 스스로의 투항에 다름아니며 명철보신의 대명사에 다름아니다. 포식의 만족감과 무조건적인 슨응에 매달리기보다는 항시 배고품을 느껴야 할것이고 모험을 동반한 엉뚱한 행위가 있어야 할것이고 그 대가를 선뜻이 치를만한 여유작작한 용기와 담략이 있어야 할것이라고 제 구미에 맞게 생각해본다. 이것이 곧 문단이 쳄체에서 벗어나는 길이 아닐가. 춘하추동이 선명한 속에서 일취월장하는 길이 아닐가, 진정으로 정상의 길에 들어서는 길이 아닐가. 그런데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이 지난해의 묻능을 두고 얼마간 안위를 얻을수 있는것은 다행히도 문단의 고요한 호수에서 생생한 파문 몇쪼각을 주어들 수 있기 때문이다. 8월에 박화시인이 에 김성휘시비(詩碑(락성과 관련해 란 글을 실어 처음으로 파문을 일으켰다. 글의 골짜는 한 시인이 詩碑를 세우는데 도대체 무슨 是非가 그리도 많으냐 하는것이였다. 이에 화답해 전국권 평론가도 (에 대한 是非 )라는 글을 써 두 번째 파문을 일으켰다. 그 골짜는 우리 문단에 문인상경, 문인우애의 분위기가 형성되였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하는것이였다. 이어 감학철선생이 라는 글을 써 를 30년 우려먹는 현상이비단 [관계벼슬마당 ]이나 [관리사회]에만 있는게 아니라 우리 문단에도 역시 나타나고있다면서 세 번째 파문을 만들었다. 이리하여 잠잠하던 침묵의 귀퉁이가 조금 열리게 되었고 문단은 약간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상술한 분들이 문단에다 생기를 불어넣어준것이야말로 얼마난 반가운 일인가. 이분들의 글들은 각이 선명하고 날이 예리하여 문단에다 적지 않게 충격을 주었다. 그런데 곰곰ㅎ ㅣ따지고보면 여기에도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가 전혀 없는것은 아니다. 세분의 글들은 평론으로서는 흠잡을나위없이 훌륭하지만 문단도덕에만 차중하여 열을 올리고 구체적인 작품에 대하여는 시야비야를 외면해버렸기에 작가와 작품을 키우는 작업ㅇ에 큰 도음을 줄수는 없었다. 문단의 기후와 문단의 도덕에 대해 운운하는것도 확실히 필요한것이고 앞으로도 언제나 있어야겠지만 지금 우리에게 선차적으로 절실히 요구되는것은 구체적인 작품에 대한 성실하고 랭정한 해중고 이로부터 기대되는 유망한 작가, 빼여진 작품들의 속출이지 이러저러한 여론에 대한 해명은 부차적인것 같다. 문단기후와 문단도덕에 지나치게 기울어지는 경우 까딱하면 불필요한 배척이 생기고 불화의 씨가 심어지는 등 평론의 붓끝이 엉뚱한 곩으로 향해질수 있다는것도 념두에 두어야 할것이다.
5    6월의 시첩에서 댓글:  조회:2347  추천:0  2012-06-18
6월의 시첩에서 -기울어진 저울대 ㅡ참여의식 요지음 시의 모습이 궁금하여 6호, 3호, 3호를 뒤적거려보았다.  우리의 시들은 점차 진정한 자아왕국으로 들어가고있고 그 자아왕국의 대문에 누구도 범접못하게 견고하고도 성스러운 잠을쇠를 잠그려 하고있다. 대부분 시인들이 자신을 그 왕국의 주인으로 임명하고 그 신 ※※ 울리는 당당한 자시와 목소리로 자기중심의 노래를 엮어가고있다. 총적으로 보아 주류를 점하는 밝은 색갈의 시들도 그렇고 지류를 이루는 흐린 색갈의 시들도  그렇고 기쁨이니 슬픔의 뿌리를 시인 자신의 **련결시킬뿐 객관세계와 크게 련력시키지 않는다. 이와 반대로 자아중비을 떠나 참여의식으쪽으로  향하려는 시들은  감정의 촉수를 객관세계에로 뻗치며 대결으 양상을 띤다. 시인의 아믕속에서 괴여오르는 아픔이나 불만족  즉 심리불평형이 객관세계의 부조리때문이라고 느껴질 때 그 심리배설이 나무람, 원망, 트집, 한으로 나타나며 그것은 또 충자와 폭로, 고발과 관계를 맺게 도니다. 세 잡지에 틀고앉은 6월의 시들을 보면 참여의식의 시가 근근히 세수 정도로서  시의 중량이 기본상 에 쏠리고 참여의식의 시들은 렬세와 위축에 빠지게 되였다.  
4    스스로 죽이기(2) ㅡ민족언어와 민족문자위기 댓글:  조회:3246  추천:11  2012-04-17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짓이 스스로를 죽이는 일이다. 남들의   핍박에 못이겨  죽는것은 동정과 안타까움을 자아내지만 남들이 살라고 극력 부추키는데도 굳이 죽겠다고 하는것은 웃음거리밖에 되지 않는다. 오늘 이 글에서는 민족의 언어와 문자위기를 화두의  대상으로 삼는다, 중국은 56개민족으로 구성된  대가정이다. 이 대가정속에서 모든 민족은 일률로 평등하게 정치,경제,문화의 향수를 받으면서 중국특색이 있는  사회주의를 건설하기 위해 진력하고있다. 중국은 세계적으로 소수민족정책이 잘된 나라로 평판이 나있다. 우선 행정에서 소수민족 집거지구에 자치구, 자치주,자치현을 설치하여  소수민족들이 각 분야에서 자유롭게 발전할수 있는 조건과 기틀을 만들어주었다, 소수민족에 대한 이러한 혜택적인 정책은 세계의 그 어느 국가에서도 찾아볼수 없다. 미국을 포함하여 많은 나라들에서는  소수민족들이 자기의 권리를 제대로 행사하지 못하고있다. 한때 구쏘련은 소수민족들에 대해 를  실시하여 마치도 쏘련이 세상에서 가장 우월한 소수민족정책을 펴는것처럼 떠들었다, 얼핏 보면 소수민족들에게  이라는 나라를  선물하였으니 얼마나  통이 큰 소수민족정책인가. 허나 실질을 캐보면 껍대기는 풍성하고 화려하나 내막은 엉성하고 초라하고 창백하였다. 대로씨아주의를 강행하여 각 가맹곡화국에서 일률로 로씨야어를 사용하고 소수민족언어와 문자의 사용을 강박적으로 금지시켰다. 쓰탈린도 분명히 소수민족인 그루지아아인인데 그가 어찌하여 대로씨아주의를 강행하면서 소수민족의 언어와 문자를 말살시키려 했는지 실로 모를 일이다. 쓰딸린의 대로씨아주의의 강행으로 이른바 사회주의 쏘련이라는 나라에서 모든 소수민족의 언어와 문자는 한 때 몽땅 사라지고 말았다. 우리 민족도 큰 피해를 받아 쏘련 이주 1세대가 우리 말과 글을 좀 알고있을뿐 2,3세대는 기본상 모르고있다. 민족은 혈통도 무시할수 없지만 주요하게는 문화에 의해 결정된다. 자기의 문자와 언어를 모르면  민족기질과 민족혼이 갖추어질수 없으며 따라서 그런 사람은 민족구성원의 일원으로 될 자격이 없다. 그가 만약 자기민족의 언어와  문자를 전혀 모르고 한결같이 다른 민족의 언어와 문자를 가지고 살아간다면 그는 자기가 현재 사용하고있는 언어와 문자의 주인, 그 민족의 무리에 가담하여야 한다. 신규식선생은 1920년에  쓴 《한국혼》에서 이렇게  말한바있다. “민족혼이 없으면 나라가 있어도 없는것이요, 민족혼이 있으면 나라가 없어도 있는것이다. ” 뜻인즉  민족혼의 유무(有無)에 의해 민족의 생존과 파멸이 결정된다는것이다. 중국정부는 건국이래 시종 소수민족의 언어와 문자의 발전에 대해 큰 관심을 돌려왔다. 심지어 자기의  문자가 없는 어루춘족 같은 민족에게는 정부에서 새로이 문자를 만들어주어 민족혼을 지키도록 배려를 돌려주었다. 하다면 우리 민족은 어떠한가. 우리 민족의 언어와 문자도 다른 소수민족들과 마찬가지로 정부의 일관된 관심을 받아왔다. 우리 민족의 언어와 문자는 세인이 공인하는 우수한 언어요, 문자다. 우리는 이로하여 무한한 자호와 긍지를 느끼고있다. 우리글의 우수성과 아름다움은 날이 갈수록 세인들의 인정과 선호를 받고있다. 지금 중국의 여러 대학에서 조선어(한국어)계를 설치하였고 민간에서도 전례없던 조선어학습열조가 일어나고있다. 뿐만아니라 전 세계적으로도 조선어(한국어)계를 설치한 대학이 백여개를 넘으며 적지 않은 나라의 고등학교들에서 조선어를 제2 혹은 제3 외국어로 배우고있는 상황이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우리 민족공동체중의 어떤 사람들은 눈에 곰팽이가 끼였는지 보물을 보물인줄 모르고 마치 누더기인양 스스로 팽개치려고 하고있으니 한심해도 이만저만 한심한게 아니다. 정부에서는 소수민족의 언어와 문자를 보존하고 발전시키라고 하는데 일부 사람들이 왜서 그 아름다운 민족어를 괄시하고 팽개치려는 하는지, 왜서 부득부득 스스로 죽이려고 하는지 그 저의가   참으로 궁금하다. 이런 사람들은 민족문화의 상실이 곧 민족의 사멸과 이어진다는 극히 간단한 도리도 모르고있는것  같다. 만약 알면서 그랬다면 그는 민족의 반역자이다. 우리 나라의 력사에서 이러한 사례를 찾아볼수 있다. 만족은 명나라를 멸한후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한족을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한어와 한자를 통치언어로 정하고 자기의 언어와 문자를 포기했다. 다시 말하면 자기의 언어와 문자를 팔아서 《청》이라는 나라를 산것이다. 민족혼과 나라를 바꾼것이다. 그후 청나라가 망한후 어떻게 되였는가. 둥지도 잃고 알도 잃고 나무까지도 잃고말았다. 오늘 만족은 자기의 언어와 문자가 없다. 정부에서 만족어복원사업을 시도했으나 만족어에 능한 학자가 없어 큰 가망이 없다고 한다. 오늘 만족은 말이 만족이지 사실 명실상부한 민족이 아니다. 단지 호적상의 만족으로, 껍대기로만 존재하면서 실상의 아닌 허상으로서의 민족구실을 할뿐이다.   만족은 한개 나라를 영원히 통치하려다가 모든것을 잃고 후손들에게 천추에 다    못갚을 큰 죄를 남기고말았으니이것이야말로 만족의 최대의 비극이  아닐수 없다. 이제 우리 민족을 말해보자. 정부에서는 소수민족의 언어와 문자를 보존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소수민족지구에서는 해당 소수민족언어와 문자를 첫자리 놓게 하였다. 그 관철의 구체적인 일환으로 간판에서 우에다 민족어를 쓰고 밑에다 전국  공용인 한자를  쓰도록 규정했다. 이것은 분명 히소수민족에 대한 크나큰 배려이다. 헌데 우리 민족의 지도자들중에 이런 배려를 배려인줄 모르고 싫다고 거절하는 일부 사람들이 있으니 참 기막힌 일이다. 그런 사람들로 하여 민족어의 존엄과 위상이 나날이 저락되고있다. 사람들은 주덕해  시기를 그리워하고있다. 그때는 연변지구에서는 그 어디를 가든 친근하고 정다운 우리 말이 으로 행세하여 짜장 조선족자치주다왔다. 그러다가 문화대혁명후부터 점차 민족문화를 홀시하는 일부 어르신네가 나타나 지위에 있던 조선어, 조선말이 급기야 의 지위로 일락천장하고말았다. 지금 줄느런히 걸린 간판만을 보면 일색으로 우에는 조선어로 되여있어 소수민족정책관철이 아주 잘된것 같은 착각을 주지만 일단 내막을 파고들면 판판 다르다. 은행,호텔,기차역,공안국, 법정, 등에 가서 일을 보려면  한어를 해야만 의사소통이 가능하다. 모든 크고작은 회의는 한어로 하고 일체 문건이 한어로 작성되고 하달된다. 회의 참가자중 조선족이 50-60명이고 한족이 한둘이 끼여도 한어로 회의를 진행한다. 마치도 “모든 회의를 일률로 한어로 하라”는 국무원의 최고지시나 비밀지령을 받은것처럼말이다. 모든 일에서 한어를 모르면 안되니 한어를 잘하는 사람은 큰 불편이 없지만 로인들이나 한자나 한어에 약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힘을 빌리지 않고선  모든것이 불가능한지라 큰 불편을 겪는다. 특히  한국에서 온 손님들이 불평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무슨 일을 하려면 본지통역이 없이는 만사불형통이다. 그들은 조선족자치주에서 조선말이 통하지 않으니 참 괴상하다고 말한다. 이러한 사례는 중국소수민족정책의 형상에 먹칠을 하는것으로 된다. 다시 말하면 중국을 망신시킨다는 것이다. 스스로 자기의 언어와 문자를 괄시한 대가로 조선어무용론이 태여나 적지 않은 조선족가정들에서 자녀들을 한족학교에 보내는 바람이 불어 교육위기가 우려되고있는 상황이며 이러한 교육위기가 또 문학,예술, 출판업계에까지 파급되고있는 사정이다. 우리 모두는 지금 깊이 사고하지 않으면 안될 시점에 와있다. 우리는 우수하고 귀중한 우리의 언어와 문자를 아끼도 사랑해야 한다. 어느땐가 청도에서 외자유치회의를 했었는데 그때 내몽골 포두시와 연길시에서도 참가했다. 포두시의 몽골족시장은 몽골어로 발언하고 비서가 번역하게 하였는데 연길시의 조선족시장은 직접 한어로 연설했다. 그 당시 회장에 있던 조선족기업인들이 “저 자식이 조선족이 맞긴 맞아?” 하면서 뒤에서 손가락질을 했고 그 시장은 외자유치에서 빈 손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포두의 몽골족 시장이 한어가 약해서 몽골어로 발언했겠는가? 아니다. 민족의 위상과 존엄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민족어를 죽이려는  사람들은 민족어를 말살한 덕으로 정부의 칭찬을 바랄지 몰라도 중국정부는 결코 소수민족 자신이 자기의 문화를 훼멸하고 동화시키는 행위를 결코 찬성하지 않을것이다. 그것은  정부의 소수민족정책에 위배되기때문이다. 정부는 겉치례만 화려한 민족자치를 바라지 않을것이며 속과 겉이   모두 튼실한 그러한 명실상부한, 진짜로 된 민족자치를  바랄것이다. 우리 민족이 나라의 건설에서 큰 기여를 하자면  자신을 충실히 하여야 한다. 그 충실속에 언어와 문자를 비롯한 제반 문화건설도 포함된다. 이쯤하면 구태여 긴 말이 필요없다.우리는 우수하고 귀중한 우리의 언어와 문자를 아끼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진정으로 당의 민족정책을 관철하는 길이다. 이미 지나간 일은 더 캐지 말고 이제부터라도 우리 민족공동체 성원 모두가 일심동체가 되고 특히 민족공동체의 지도자들이 솔선수범이 되여 우리 말, 우리 글 지키기에 총궐기 하여야 할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진정으로 우리 민족을 지키는 길이요, 우리 민족의 부강창성을 이룩하는 길이 될것이다.
3    스스로 죽이기(1) ㅡ 민족인구위기 댓글:  조회:3010  추천:16  2012-03-26
세상에 어떤 사람들은 꼭 말하지 말았으면 하는것이  다른 어떤 사람들에게는  꼭 말하지 않으면 안되는것으로  되는 경우가 많다. 즉 어떤 사람들은 회피하고 감추고 싶어하는데 어떤 사람들은 당당히 나서서 진실을 파내고싶어한다. 오늘의 작은 화두는 민족인구위기에 관한 얘기가 될터인데 민족인구위기를 조장한 일부 장본인들은 이런것을 꺼내는것을 무척 꺼려하고 두려워할것이지만 민족의 오늘과 미래를 걱정하는 민족의 지성인들은 그것을 꼭 끄집어내여 꼬집어야 직성이 풀릴것이다. 이러한 꼬집음이 “귀한 자식 매 한매 더 때린다”는 선의의 다른 한 표현이므로  림시는 아플지 몰라도 민족의 렬근성을 치유하고  민족의 번영창성을 위하서는 필요적실한 약임을 귀띰하고싶다. 거두절필하고, 지금 우리 조선족은 인구의 감소를 두고  큰 몸살을 앓고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위기가 그 누가 시킨것도 아니고 완전히 스스로가 자초한 자작지얼(自作之孼)이고 돌을 들어 제 발등을 깐 무지한 소행의 결과라는데서 무척이나 당혹스럽고 아니러니하고 또 슬프기도 하다. 중화인민공화국의 건립초기  전 중국의 인구는 4억 5천만이였고 조선족인구는 2백 10여만이 좀 넘었다. 63년이 지난 오늘은 어떤가. 중국의 인구는 3배가 훨씬 넘어 14억이지만 우리 민족의 인구는 고작 2백만이 될까말까 하는 가련한 꼴이다. 증가는커녕 뒤걸음을 친것이다. 하다면 그 까닭은 어디에서 돋은것인가? 계획생육이다. 1955년 1월, 북경대학 교장이며 유명한 경제학 박사인 마인초(馬寅初)가 《신인구론》이라는 책을 써 계획생육이라는 새로운 인구리론을 주장했다. 그 당시 마인초가 언감생심 “사람이 많으면 힘이 크다”(人多力量大)라는 모택동의  인구론에 맞섰으니 무사할리 있었겠는가. 마인초의 《신인구론》은 중국의 실정에 어울리는 진보적인 론리이고 모택동의  인구론은 중국의 실정과 어긋나는 그릇된것이였지만 마인초는 한마디가 만마디를 당한다는 를 반대한 죄로 반동으로 락인되여  북경대학교장직에서 해임되였다. 1979년, 문화대혁명이 결속된후 마인초의《신인구론》이 진리로 확증되여 전국적으로 전대미문의 계획생육 대열조가 일어났다. 중국정부는 계회생육을 중요한 국책의 하나로 결정하였다. 그렇지만 계획생육은 인구가 과잉속도로 늘어나는 한족을 상대한것이였지 소수민족을 겨냥한것은 아니였다. 헌데 계획생육에서  전국적으로 제일 앞장에 서서 내달린것이 조선족, 특히는 연변지구였다. 연변지구는 해마다 계획생육모범이 되여 찬란한 면류관을 썼다.아주 철저하게, 아주 견결하게, 아주 확고하게 계획생육정책을 밀고나갔다. 심지어는 세번째 아이를 낳으려고 심심산골에 숨어  분만을 준비하는 임신부를 찾아내여 배를 가르고 8개월이 넘는 아이를 류산시킨, 이러루한 사건도 한두번이 아니였다. 그 결과 지도자들은 해마다 계혜획육모범이 되여 꽃다발을 달고 상장을 타고 급을 췄지만 조선족인구는 처참할정도로 내리막기을 걸었다. 몽고족, 위글족,장족들은 계획생육을 하지 않아 인구가 오뉴월의 오이덩굴처럼 잘도 뻗어나갔건만 조선족인구는 십년 가물을 만나 곡식처럼 난쟁이꼴을 면하지 못했다.. 이것은 죄악이다. 해방후 한족과 기타 소수민족들은 인구가 거의 3.5배 증가되였만 조선족인구는 줄어들었다. 다른 민족의 비례대로 성장했더라면 한다면 지금쯤 우리 민족의 인구가  적어도  6백만 내지 7백만을 웃돌아야 정상이다. 지금 우리 민족은 인구가 2백여만이지만   중국의 사회주의건설에서 큰 기여를  하는 과학가,정치가. 군사가, 예술가들이 비례적으로 그 어느 소수민족들보다 많다. 가령 우리의 지금 인구가 6백만이나 7백만이 된다고 한다면 필연토 지금보다  3,4배가 넘는 인재들이  나타나 사회주의  건설에서 큰 위력을 발휘하였을것이다. 생각할수록  가슴이 아프다. 우리는 깊이 반성해보아야 한다. 중국처럼 소수민족정책이 잘 된 나라는 없다. 중국정부는 종래로 소수민족을 보고 아이를 적게 낳으라고 강요했거나 명령한적이 한번도 없다. 모두가 우리 스스로 자초한 결과이다. 그 뿌리를 캐보면 우리 민족이 무엇이나 어디에서나 앞장서기를 좋아하는 기질때문이 아닌가 싶다. 앞장서기가   다 좋은것이 아니다. 좋은 일에서는 앞장서야 하지만 나쁜 일에서는 꼴찌면 꼴찌일수록 좋다. 항일전쟁과 해방전쟁에서 우리 민족은  그 어느 민족보다도 많이 참가하였고 제일 피를 많이 흘렸고 제일 많이 희생되였으며 제일 큰  공을 세웠다. 이런 위대한 일에서는 천번 만번 앞장서도 과분하지 않다. 그런데 반우파투쟁과 대약진, 문화대혁명에서도 가장 앞장에 서서 우쭐거린것도 조선족이다. 원인은 세가지, 하나는  언제나 앞장서기를 좋아하는 기질때문이고 다음은 판단에 대한 무지이고 그 다음은 상급의 지시라면 오금을 못펴고 무조건 복종하고 칭찬을 받기 좋아하는 허영심때문이다. 한 민족의 발전은  민족공동체를 전제로 하며  민족공동체는  개개인의 집합으로 이루어진다. 사람이 없이 어찌 민족공동체를 운운할수 있으며 더구나 민족의 흥성이니 번영창성이니 하는것을 론할수 있겠는가. 조선족인구의  위기, 이를 두고 우리 민족공동체가 함께 고민해야 되고 함께 가슴 아파해야 되고 함께 슬퍼해야 되고 함께 방도를 모색해야 될것이다. 후대에 죄를 짓지 말아야 한다. 지금도 너무 늦지는 않았으니 이제부터라도  인구줄이기운동이 아니라  아니라 인구늘이기운동에 앞장서면 어떨가.     
2    인내의 철학 댓글:  조회:2654  추천:5  2012-03-23
일력을 들추어보니 어느덧 립춘이 코앞이다. 립춘, 얼마나 포근하고 따스한 이름이냐. 립춘을 생각하니 금시 사쁜사쁜 봄이 걸어오는 발자국소리가 들려오는듯 싶고  아지랑이가 나풀나풀 날아와 온몸을 감싸안는듯 싶다. 아마도 석달이라는 기나긴 기다림끝에 만나게 되는 봄이여서 그 즐거움이 배가 되는것이리라. 봄과 얽힌 우리 조상들의 이야기 하나가 생각난다. 고려시대의 선비들은 겨울이 시작되면 큰 종이에다 꽃송이가 백개 달린  매화나무를 그려넣고  하루밤 자고나면 한송이씩 지워버렸다. 100송이의 매화꽃이 다   지워지는 날이면 드디여 창밖에서 진짜 매화꽃이 피기 시작했다.  급해하지 않고 여유작작하게  차분한 마음으로  봄을 기다릴줄 아는 智慧로운 그 마음 가짐이 참으로 넉넉하고 군자답다. 흔히 우리 민족을 일컬어 “빨리빨리”민족, 한족을 일컬어 “만만디” 민족이라고 말들 한다. “빨리빨리”라는 말속에는 칭찬보다는 모든것을 너무 성급하게 처리한다는 비하적인 색채가 더 많이 섞여있다.  허물을 캐면 듣기 싫지만 승인할것은 과감하게  승인하여야 한다. 세상에 우리 민족처럼 이사를 자주 하는 민족도 드물다. 우리 민족은 어디에 가면 느긋이 안착하지 못하고 쩍하면 이사짐을 챙긴다. 회사에 입사했어도 어느 떡이  더  클가 하여 자주 자리를 옮기는 페단도 많다. 다른 민족한테도 이런 현상이 없진 않겠지만 상대적으로 우리 민족이 더한것 같다.. 인내가 부족하기때문이다. 인내가 없으니 때론 남한테 가볍게 보이고 사람들로부터 믿음을 잃을 때도 있게 된다. 헌데 뿌리를 캐보면 우리 민족은  사실 아주 자랑할만한 인내의 민족이다. 우리 민족은 탄생초기부터 인내의 철학에 뿌리를 두었으니말이다. 단군신화(檀君神話)가 그 증거다. 단군신화에 의하면 천제(天帝) 환인(桓因)의 아들 환웅(桓雄)이 천부인(天符印) 삼백개를 가지고 태백산 신단수아래에 내려와 신시(神市)를 열고 세상을 다스릴 때 곰 한마리와 범 한마리가 한굴에서 살고있었다. 그들이 인간이 되고싶어 환웅을 찾아와 인간이 되게 해달라고 간청하였다. 이에 환웅이 신령스러운 쑥 한줌과 마늘 21개를 주면서 100일간 꾸준히 먹으면 사람이 되리라 하였다.  그 말에 응해 그날부터 곰과 범은 사람이 되고자 실행에 들어갔다. 그러나 성급한 범은 견뎌내지 못하고 중도이페하고 곰은 환웅이 시키는대로 끝까지 견지하여 마침내 아릿다운 웅녀로 되여 환웅과 배필을 묻고 아이를 낳으니 그 아이가 곧 단군인 왕검이다. 곰은 100일간의 인고를 거쳐 우리의 시조모로 된것이다. 인내의 철학에 뿌리를 둔 민족은 아마도 이 세상에서 유독 우리 민족 하나뿐이 아닌가싶다. 인내는 귀중한 진리이고 인간이 갖추어야 할 덕목의 하나이다. 인내는 큰 일에서도 필요하지만 작은 일에서도 필요한바 거창한 일에서 성공을 할수 있는 한 요인으로 작동할수 있을뿐아니라 친구지간의 우정, 이웃간의 화목, 가정의 우애 등을 도모하는데서도 필요하다. 조상의 인내의 피를 물려받은 우리거니 우리도 항상 인내를 생각하면서 살아가야 하지 않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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