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옥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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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단편소설] 최고의 선물-김옥희 댓글:  조회:406  추천:1  2019-07-17
김옥희 최고의 선물     출근해서 따뜻한 커피잔을 막 들려는 찰나 폰이 울렸다. 매번 내가 꼭 커피를 마시려는 순간이면 누군가 전화를 걸어온다는 게 참 신기하기도 했다. 폰을 열어보던 나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프렸다. ‘또 너야? 김해연!’ 김해연, 그는 언니가 가슴으로 낳은 귀하디귀한 딸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큰언니가 여섯번의 류산 끝에 얻은 천금보다 귀한 아이였다. 태여난 순간부터 우리 가문의 보물1호가 돼있었던 특별한 아이, 그 아이가 어느새 서른이 눈앞이니 벌써 30여년전의 일이다. “웬일이야, 아침부터?” “웬일은 무슨. 보고 싶어 전화했지롱.” “우리 며칠전에도 봤잖아!” 나는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커졌다. “이모, 지금 나한테 화내는 건 아니지?” “그게… 헌데 할 말이 없으면 끊어. 나 일해야 돼.” “잠깐만! 나 할 말이 있어요.” “할 말이라니?” “전화로 하긴 그렇구요. 우리 만나요.” “만나긴 뭘 만나. 그냥 해, 지금.” “진짜 중요한 얘기라서 그래요. 제발 만나주세요. 예?” 나는 커피를 마시다 말고 폰을 열어보았다. 이제 막 8시가 가까워오고 있었다. 그의 하루 일정을 나는 손금 보듯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언니랑 한 아빠트에 산 세월이 저그만치 5년이였다. 이 시간은 밤샘을 한 그가 조찬도 거른 채 실컷 자고 있어야 할 시간이다. 헌데 그는 깨여있고 내게 전화를 걸어왔으니 뭔 일이 있긴 있는 모양이였다. “너한테 진짜 중요한 얘기가 있을리 없잖아? 혹시 취직이 된 건 아니지?” “당연히 아니죠.” “그럼 뭐야?! 너한테 지금 취직보다 중요한 게 뭐가 있다구?!” 나는 진짜 폰을 꺼버리고 싶은 걸 겨우 참고 있었다. “진짜 화를 내는거예요?” “그래, 나 너한테 화내는거 맞어. 그러니 바쁜 사람 귀찮게 하지 말구 끊어.” 내가 일방적으로 폰을 끄려는 순간. “이모, 나 남자 생겼어요.”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너 방금 뭐랬어?” “나 남자친구 생겼다구요. 갑자기 결혼을 하고 싶어졌어요.” “뭐? 갑자기 결혼을 하고 싶어졌어?” “예. 진심이에요.” “참, 너 진심이 뭔지나 알어? 진심 좋아하구 있네.” 대놓고 질러대는 내 빈정거림에 폰 저편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나는 갑자기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제대로 된 련애 한번 못해본 애가 결혼을 하고 싶어졌다니? 이건 참 말도 안되는 소리였다. 마른하늘에서 천둥이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냥 롱담처럼 해버린 말이 아닌 것 같았다. 방금전 느낌이 그랬다. 목소리가 예전과 달리 진지해서 놀랐다. 그 어떤 커다란 불안감이 스물스멀 가슴을 짓눌러왔다. 가령 해연의 말이 사실이라면… 문득 머리끝에서 화가 치밀어올랐다. ‘어떤 자식인데 순진한 내 조카를 꼬셔서 이렇게 분별력마저 잃게 만든거야. 그 녀석 안 봐도 뻔해. 요즘같이 험한 세상에 나쁜 녀석들이 천지간에 어디 한둘인가? 헌데 하필이면 내 조카가 걸려들다니…’ “안돼!” “왜? 이모는 그 사람 얼굴도 못 봤잖아요. 헌데 왜 반대부터 해요?” “글쎄 안되는 건 안되는거야.” “울 엄마보다 이모가 더 무섭네.” “그래, 그래서 너도 나한테 먼저 고백한거 아니야?” “와아, 신기해. 심리치료사다워요, 이모.” “야, 됐구. 우리 만나자. 점심때 전에 만났던 나즈까페서 봐.” “콜!”   점심때 나즈카페에서 만난 해연이는 멀쩡했다. 자기 친구가 요즘 갑자기 결혼 을 하고 싶다고 문자가 와서 그냥 그걸 자기 일처럼 고백해서 내 반응을 보고 싶었다고 했다. 그런 줄도 모르고 나는 해연이가 갑자기 결혼을 하고 싶다고 해서 정말 말도 안되는 상상을 했었다. 요즘 20~30대처럼 불안한 삶을 사는 세대는 없는 듯했다. 심리치료사로 일하면서 가장 많이 상담받는 게 이 또래들이였다. 뭐 하나 확실한 게 없는 삶 자체에 끝없이 흔들리고 방황하는 그들이 떠안고 있는 고민을 내 딸 서연이도, 언니의 딸 해연이도 똑같이 겪고 있는 듯했다.   그날 오후, 회사에 돌아와서도 나는 한동안 해연에 대한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해연이를 보고 있으면 자꾸 2년전의 일이 떠올랐다. 2년전, 언니와 형부의 갑작스런 리혼도 우리에겐 쓰나미 같은 엄청난 충격이였다… 진중하고 언니한테 각별했던 형부한테 사랑하는 녀자가 생겼다는 걸 알았을 땐 이미 엎질러진 물이였다. 그날은 주말이였다. 막 세탁기를 돌리려고 세면실로 향하던 언니는 갑작스런 노크소리에 아무 생각 없이 문을 열었다. 헌데 단 한번도 본 적 없는 낯선 녀자였다. 녀자의 직감으로 그 녀자의 불러있는 배를 보고 의아해하던 그는 문득 층계 저편에서 어정쩡하게 모습을 드러내는 한 사람을 보았다. 남편이였다. 지금 이 상황이 뭔지 언니는 짐작할 수 없었다. 허나 쏘파에 앉아 남편이 들려주는 얘기는 언니의 예상과 빗나갔다. 남편에게 녀자가 있었다. 그리고 자기보다 열세살이나 어린 그녀가 남산만한 배를 그러안고 자기를 찾아왔다. 일이 이 지경에 이르기까지 자신은 아무 것도 몰랐다. 이 어이없고 황당한 상황이 그에겐 받아들이기 어려울 정도로 벅차고 버거웠다. 그 경황없는 순간에도 남편을 용서해야 한다는 생각만은 확실했다. 남편의 실수를 용서해주고 싶었다. 모든 재산을 그녀한테 주는 대가를 치뤄서라도 남편을 돌려받고 싶었다. 그가 이런 생각을 정리해서 막 입을 열려는 찰나, 남편이 갑자기 그녀가 보는 앞에서 자기 앞에 무릎을 꿇는 게 아닌가. “여보, 당신은 나 없이도 잘살 수 있지만 이 녀잔 나 없인 못살아. 살 수가 없어.” 언니는 놀란 가슴을 가까스로 누르며 담담하게 남편을 바라보았다. “나도… 당신 없인 못살아… 우리에겐… 해연이도 있어. 해연이가… 우리한테 어떤 딸인지… 당신도 알잖아. 나두 해연이두 당신 없인 안돼… 당신… 우리 해연일 버리고… 살 수 있어?” “내가 당신이랑 해연이한텐 평생 죄인인거 알아. 나두 일이 이 지경이 될 줄은 몰랐어. 결국 고민 끝에 저 여린 녀자를 버릴 수 없단 걸 알았어…” “어떻게… 그런 말을 해?” 언니는 남편이 원망스러웠다. 살아오는 동안 단 한번도 얼굴을 붉히며 싸운적 없는 부부인데 헤여진다는 게 말이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늘이 두쪼각이 난다고 해도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였다. “당신은 강한 녀자잖아. 우리 해연이두 이젠 대학을 나왔구 성인이야. 내가 아빠의 도리는 다 할게. 우리 딸 시집갈 때 아빠로서 최선을 다할게.” ‘뭐? 최선을 다해? 아빠의 최선이 뭔지 당신이 알아? 우리 딸이 바라는 건 아빠가 자기 옆에 있어주는 거라는 걸 왜 몰라?! 당신 정말 나쁜 사람이야! 어린 처녀한테 빠져 가족을 버린 아빠를 우리 딸이 용서할 수 있을 것 같애!’ 머리속에 떠오른 이런 말들이 목구멍안에서만 맴돌았다. 언니는 자기 가슴을 움켜쥐고 어쩔 줄을 몰라했다. 이렇게 허망하게 남편을 보낼 순 없었다. 나도 저 녀자처럼 강하지 않다고, 그러니 제발 나랑 우리 해연이를 떠나지 말라고 애원하고 싶었다. 헌데 쏘파에 앉아있는 것마저 힘들고 위태로워보이는 그녀의 잔뜩 불어난 배에 자꾸 시선이 갔다. 언니는 남편이랑 그녀가 언제 집을 나갔는지 몰랐다. 정신이 들었을 땐 자신이 쏘파에 누워있다는 걸 발견했다. 그새 잠이 든 것이다. 그는 이 모든 게 꿈일 거라고 생각했다. 가끔 불면증에 잠을 잘 못 자면 안 좋은 꿈이 찾아오군 했는데 이번 꿈도 례외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는 서둘러 폰을 꺼내들었다. 남편의 폰으로 전화를 해보았지만 꺼져있었다. 그제야 상황의 심각성을 느낀 언니는 벌떡 일어나 옷을 입기 시작했다. 그날, 형부의 전화를 받자마자 집으로 달려온 나는 아빠트앞 작은 공원의 그네에 앉아있는 언니를 발견했다. 한방에 무너져버린 터덜터덜한 모습이였다. 남편이 그 녀자의 손을 잡고 나가는 걸 보는데 억장이 무너지더라. 언니의 가슴속 깊은 곳에 머물러있는 큰 슬픔을 말해주기라도 하듯 그 크고 동그란 두 눈에서 눈물이 샘처럼 흘러내렸다. 평소에 덤덤하듯 무심한듯 살아온 언니였다. 그런 언니가 다소 답답했지만 그런대로 진중하고 고지식한 형부를 만나 무탈하게 잘살아서 얼마나 다행스러웠던가. 언니는 형부랑 부부로 산 세월이 저그만치 수십년이다. 순한 양처럼 불평 한번 안 부리고 형부만 믿고 의지했던 언니였는데 이런 배신을 당하고 과연 괜찮을가 싶었다. 나는 너무 기가 막히고 어이없고 화가 났다. 이 세상 남자들이 다 바람을 피운다 해도 형부는 아닌 줄 알았다. 너무 착하고 고지식해서 평생 언니 하나만 믿고 사는 형부일 거라는 우리의 예상을, 우리 가족의 절대적인 믿음과 오랜 신뢰를 이렇게 허망하게 송두리채 흔들어놓고 어떡해. 녀자의 마음을 갈대라고 하더니 참으로 알 수 없는 게 남자의 마음이였다. 내 마음이 이런데 언니의 마음을 어떨가 싶어서 또 한번 가슴이 먹먹해졌다. 나는 멍 때리고 앉아있는 언니를 가슴에 꼬옥 그러안았다. “언니, 다 괜찮아질꺼야. 기운 내. 알았지?” 언니는 잠자코 있었다. 나는 그가 조금씩 안정을 찾아갈 수 있기를 바랐다. “해연이, 언니 딸 해연이한텐 아직 비밀로 하자. 응?” “다… 다 내 탓이야. 내가… 부족해서…” 언니는 혼자말처럼 중얼거렸고 다시 눈가에 이슬이 맺히기 시작했다. “그게 왜 언니 탓이야? 언니도 나도 형부에 대해 몰랐던 게 있었어.” “너… 형부… 뭐라 하지 마… 그 사람 좋은… 사람이야.” “허나 형부는 우릴 속였어. 형부가 주식을 했던 건 알고 있었어?” 나는 뻔한 걸 물었다. 그걸 언니가 알 리 없었다. 언니의 놀란 시선이 그 사실이 금시초문임을 말해주었다. “나도 얼마전에야 듣고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 그러니까 우리가 지금까지 몰랐던 형부의 또 다른 얼굴이 있었단 말이지.” 언니의 손을 잡고 나는 내가 들은 형부에 관한 이야기를 천천히 언니한테 들려주었다… 형부한텐 주식을 하는 한 친구가 있었다. 그를 통해 그녀랑 알게 됐고 주식이 뭔지 모르던 형부가 그녀의 덕분에 난생처음 꽤 큰돈을 벌었던 게 화근이 됐다. 한번 두번 빠져들면 들수록 점점 손이 커져 나중에 그녀의 돈까지 빌려 주식을 했다가 그마저 망해서 절망에 빠져있을 때 그녀가 제안을 하나 해왔다. 형부가 그녀한테서 빌린 돈이 무려 백만원이였다. 백만원! 그 엄청난 돈을 갚지 않아도 된다고. 대신 자기랑 결혼하는 걸 전제로 하자고 했다. 형부는 언니를 사랑했다. 그리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정말 힘들게 얻은 소중한 딸 해연이가 그에겐 전부였다. 그녀의 제안에 형부는 어이없어했다. 정말 말이 안되는 제안이라 그저 롱담이라 받아들이는 형부한테 그녀는 사랑한다고, 진심으로 좋아하고 있다고 했다. 형부는 믿기지 않았다. 허나 당장 그 엄청난 돈을 갚을 길도 없어 우왕좌왕했다. 그는 이 엄청난 사고를 전혀 알지 못하는 안해에 대한 미안함, 큰 빚이 짓누르는 위압감에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그 빚을 떠안고 사느니 차라리 홀로 죄값을 치르는 게 안해나 딸을 위한 길이였다. 고민 끝에 결국 그는 그녀의 소원을 들어주기로 했다. 그리고 한달이 막 지나던 어느 날 그는 그녀가 임신한 사실을 알게 됐다. 청천벽력이였다. 놀라긴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단 한번 그녀를 품었을 뿐인데 임신이라니? 그녀의 임신은 언젠가는 사랑하는 안해와 딸한테 돌아가려 했던 형부의 마지막 희망마저 산산이 쪼각냈다. 임신을 빌미로 그녀는 아예 마음을 굳힌 듯했다. 외국에서 일하는 부모한텐 잠시 비밀에 붙이고 형부와의 동거를 시작했던 것이다. 그리고 배가 남산만해졌을 때 그녀는 형부를 앞세우고 언니네 집을 찾아와 언니 앞에 무릎을 꿇었던 것이다… 나는 단정짓듯 말했다. 형부의 그 빚때문에 같이 산다고 해도 평생 행복할 수 없다고, 리혼이 최선의 선택이고 차라리 잘된거라고. 언니는 고개를 떨구고 한식경이나 아무 말도 못했다. 나는 축 처진 언니의 어깨를 가만히 그러안았다. 언니는 어깨를 들썩이기 시작했다. 그런 언니의 슬픔이 내게로 전해졌다. 나는 알 것 같았다. 언니가 힘들어하는 건 남편의 배신이 아니라는 걸. 일이 이 지경이 되도록 바보같이 아무 것도 몰랐던 자신이 언니는 너무 슬프고 가슴이 아픈 것이리라.   다 지난 얘기지만 나는 언니부부의 드라마 같은 이야기가 아직도 믿기지 않았다. 내 예상을 완전히 뒤집어버린 두 사람이였다. 내 눈에는 두 사람만큼 잘 어울리고 금슬 좋은 부부가 이 세상엔 없었다. 허나 그들은 결국 헤여져 남이 되였다. 참 아이러니하게도 그렇게 리별한 뒤 채 한달도 안되여 형부가 그 녀자랑 결혼식을 올렸다. 뭐가 그리 바빴을가. 어차피 녀자가 임신을 했으니 결혼은 시간문제였겠지. 헌데 왜 그렇게 서둘러서 언니의 가슴에 또 한번 비수를 꽂아야 했을가. 나는 친오빠처럼 믿고 의지했던 든든한 형부가 이제 남이 됐다는 사실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리고 형부가 그렇게 서둘러 결혼에 올인할 줄은 꿈에도 상상 못했다. 이건 해도 해도 너무했다. 형부가 이 정도 형편없고 리기적인 남자였다니?! 세상에 이런 배신은 없다고 생각하니 언니가 너무 가엽고 안스러웠다. 근 한달사이에 갑작스런 리혼과 남편의 결혼을 두루 겪으며 언니가 받아야 했을 슬픔의 무게를 나는 짐작할 수 있었다. 언니가 우울증이라도 걸릴가봐 매일 언니한테 전화를 걸어 목소리를 들었다. 다행히도 언니는 차츰 시간이 흐르면서 평온을 되찾은 듯했다. 그런 대형사고를 당한 당사자인 언니가 너무 태연한 척, 씩씩한 척하는 게 자꾸 신경 쓰이고 불안했다. 허나 한달 쯤 지났을 때, 언니는 정말 아무 일 없는듯 자기의 일상을 되찾아갔다. 다행이였다. 사랑하던 남편이 어느날 갑자기 딴 녀자한테 갔는데 저렇게 태연할 수 있을가 싶을 정도로 정말 괜찮아보이는 언니의 눈빛을 보고 있으면 내 가슴 한가운데로 전률이 느껴지기도 했다. 뭐야? 마음이 독해진거야 아니면 지나치게 무심한거야?   언니의 딸 해연이가 갑자기 짜잔! 하고 집에 돌아온 건 바로 그 무렵이였다. 미대를 졸업한 후 상해의 한 대형광고회사에 취직해 잘 나가던 해연이가 예고도 없이 우리 앞에 나타났을 때 제일 충격받은 건 언니였다. 이렇게 사전에 말 한마디 없이 불쑥 돌아올 만큼 무모한 애가 아니여서 다들 처음엔 휴가를 온거라고 추측했었다. 헌데 그가 돌아온 3일후 그의 물건들이 속속 도착하자 다들 입을 딱 벌렸다. “딸, 말해봐. 이거 엄마가… 네가 세집 잡았다고 해서… 보내준… 전기밥솥이랑 이불… 침대세트잖아… 이게… 이게 다 뭐야?” 나는 잔뜩 화가 나있는 언니를 의식했다. 살면서 이렇게 화를 내는 언니의 모습을 본 게 언제던가. 말수도 적고 화도 잘 안 내는, 꼭 말을 해야 할 경우에도 꾹꾹 참는 언니를 볼 때면 나는 미칠 것 같았다. 워낙 말을 조곤조곤 조리 있게 못하는데다 화가 나니 말을 더 버벅거리는 언니. 그는 말이 좀 어눌한 편이였다.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였다. 언니는 해연이를 임신했을 때 어느 날 갑자기 실어증에 걸려 우리 모두를 얼마나 당황하게 했는지 모른다. 그후 치료를 해서 나았지만 예전처럼 말을 잘 못하고 지금 이 정도 하는 것도 하늘이 내려준 기적이였다. “엄마, 지금은 내가 돌아온 게 싫은지 모르겠지만, 이제 두고봐. 엄만 내가 너무 고맙고 감사할꺼야. 내가 그렇게 만들꺼야.” “미… 미쳤어? 너… 너 엄마… 죽는거… 보고 싶어?” “아니, 그럴 리가. 난 엄마랑 잘 살아보려구 왔어. 진짜 잘 살아볼려구…” 해연이는 담담하게 대꾸하더니 한켠에 못마땅한 얼굴로 우두커니 서있는 나를 바라보았다. “이모, 그런 눈으로 보지 마. 1년 만에 보는건데 내가 반갑지도 않아?” “그래, 잘 왔어. 이모는 네가 보고 싶었어. 헌데 궁금해. 왜 갑자기 왔어?” “그냥 오고 싶어서. 그래야 할 것 같아서.” 순간 나는 언니의 떨리는 시선을 보았다. “김해연! 너… 엄마 허락 없이 돌아오지 마… 래일… 돌아가, 당장!” “미안한데 엄마, 나 이제 안 가. 아니, 못 가!” “해연아? 너… 너까지… 왜 이래?!” 어머, 언니의 목소리가 이렇게 컸어? 나는 억지로 언니를 쏘파에 눌러앉히고 나도 그옆에서 붙어앉았다. “언니, 제발 진정해. 해연인 언니가 보고 싶어 잠깐 집에 온거야. 이제 집에서 며칠 푹 쉬고 나서 돌아갈거야. 거기에 좋은 직장두 있구 월급도 엄청 많이 받구 잘 나가는데 뭐하러 집에 돌아오겠어? 안 그래?” “헌데… 이… 이 짐들은…” “애가 워낙 돈을 많이 버니까 더 좋은 걸로 사놓으려구 집에 갖고 온거겠지. 언니가 사준거니까, 버리긴 아까우니까. 안 그래? 해연아?” 나는 해연이를 넌지시 응시하며 제발 내 뜻에 따라주라고 눈치를 주었다.  “아닌데요. 이모, 나 진짜 돌아온거예요.” “해연아, 너까지 왜 이래? 진짜 다들 왜 이러냐?!” 나는 깜짝 놀랐다. 내가 알던 해연은 눈빛 하나만으로 나랑 텔레파시가 통하는 아이였다. 나는 이 세상에서 언니다음으로 해연이를 사랑하는 건 나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우린 친구보다 더 친구 같은 이모랑 조카였다. 해연이랑 동갑인 내 딸 서연이는 그게 늘 서운하다고 대놓고 내 앞에서 불만을 쏟았다. 엄마가 진짜 내 엄마 맞냐고. 헌데 언니를 바라보는 해연이의 표정은 진지했다. “엄마, 나 사직했어.” “뭐? 사직?!” 찰싹! 언니의 손이 해연이의 귀쌈을 후려쳤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였다. 나도 해연이도 놀라 굳어졌다. “언니! 지금 뭐하는거야? 미쳤어? 해연이가 언니한테 어떤 딸인데.” “엄마, 미안해. 미리 말을 못한거 정말 미안해. 헌데 난 결국 돌아오기로 했어. 이건 내 선택이야.”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할 말을 또박또박 다 하는 해연이를 보면서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이게 언니 인생의 최고의 선물이자 언니 자부심인 해연이란 말인가! 내가 알고 있는 해연이는 공부밖에 모르는 모범생이요, 너무 착해서 요즘같이 험한 세상엔 좀 걱정이 되는 스타일이였다. 헌데 대졸 후 좋은 직장에 취직해 산뜻한 출발을 한 그를 보면서 그 걱정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 알았다. 언니 앞에서 내색은 안했지만 나는 그가 내 딸이 아니고 언니 딸인 게 너무 부럽고 아쉽기까지 했다. 아무튼 처음 보는 해연이의 강경한 모습은 너무 낯설었다.   그날 밤, 집에 돌아온 나는 자리에 누웠지만 잠들 수 없었다. 방금전 해연이가 했던 말이 자꾸 가슴을 먹먹하게 했다. “엄마, 아빤 엄마를 떠났지만 난 엄마한테 돌아왔어. 이제부터 나만 믿구 나한테 의지해. 나두 엄마만 있으면 돼. 엄마만 있으면…” 해연이는 이참에 아예 집에 눌러앉기로 작정한 것 같았다. 허나 내 생각은 언니의 생각이랑 다르지 않았다. 해연이가 있어야 할 곳은 이 작은 도시가 아니였다.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해연이를 설득해 되돌려보내리라 작심했다. ‘헌데 언니 부부의 리혼을 아는 사람은 우리 가족외에 거의 없는데 누가 해연이한테 이 사실을 알려줬지? 설마 서연이가?’   나는 문득 며칠전 서연이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그날 아침, 내가 출근을 서두르는데 서연이가 부수수한 얼굴로 자기 방에서 나오는 게 아닌가. “너, 또 밤샜어?” “응, 창업이 어디 쉬운가. 엄마, 나 이제 거의다 온 것 같애.” “저런, 엄마가 그 말 믿으라구?” “그럼, 믿어야지. 엄마가 제 딸두 못믿으면 너무 가여운거 아냐?” “터진 입이라구 말은 참 근사하다. 헌데 니가 뭘 안다고 창업씩이나…” “그렇게 부정적이지만 말구 기왕 이렇게 된거 조금만 더 기다려봐.” “3년을 기다렸어. 이제 뭘 또 더 기다리라는거야? 참, 나 이젠 너무 창피해서 친구들 만나기도 겁이 나. 내 친구 선미 아들까지 이번에 공무원시험에 합격하면, 나만 꼴랑 남거든. 다들 자식들이 척척 취직두 잘하구 돈 벌어 효도한다는데 내 꼴은 이게 뭐야. 나 언제면 백수 딸 엄마라는 소릴 안 들을까. 휴우--” “딱 1년 만 기다려보라니까. 헌데 엄마, 해연이한테 부모님 리혼한 거 말해줘야 하는거 아니야?” “뭐? 어른들 일이야. 관심 꺼.” “그게 왜 어른들 일이야. 해연의 일이기두 하지.” “천천히 말해줄꺼야. 무슨 좋은 소식이라고.” 나는 할 말을 참지 못하는 서연이가 은근히 걱정되여 한수 더 모를 박았다. “너 어른들이 말하기 전에 선수 치지마. 알았어?” 서연이는 리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혼자 중얼거렸다. “엄마, 그렇게 자식 생각한다는 어른들이 할 짓 못할 짓 다 저질러놓구 이제 와서 자식이 상처 입을까봐 걱정하는거, 너무 웃기구 리기적인 거 아니야?” “야, 넌 말을 해도 꼭 그렇게밖에 못해? 네가 뭘 안다고 어른들 일에 참견이야?!” “참, 나도 래일 모레 서른이야. 어린애 아니란 말이야. 내 말을 듣는 척이라도 해, 제발.” “말 같은 말이라야 들어줄꺼잖아. 그래 니 나이 래일 모레면 서른이야. 그러니 이제 그만 속 썩이고 제발 내 눈앞에서 사라져주라. 응? 제발 련애만 하지 말고 시집가란 말이야.” “어으, 또 그 시집소리. 이제 슬슬 지칠 때두 됐는데 왜 이러시나. 나 평생 시집 안 간다고 몇번이나 말했어. 엄마 진짜 갱년기 심하시다. 엄마, 나랑 병원 가자. 응?” “야! 다시 말하지만 해연이한텐 아무 소리하지 마. 알았어?!” “와아, 살벌하다, 살벌해. 엄마 그러다 입이 돌아가시겠어.” “뭐?” “거울을 한번 봐봐. 엄마는 친구들이랑 아빠 앞에선 미소천사인데 내 앞에선 완전 악녀로 변해. 엄마를 보면 드라마에 나오는 악녀 캐릭터가 생각나.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 이중적일 수가 있지? 내 엄마가 맞는지 의심되니까 우리 유전자검사나 해볼까? 엄마랑 나 전생에 원쑤였나봐…” “뭐? 너 창업이구 뭐구 얼른 시집이나 가. 내 눈앞에 안 보이는 게 효도하는 거니까!” “엄마가 그렇게 원하시는데 어떡하지? 나 평생 엄마랑 한집에서 지지고 볶고 그렇게 살껀데.” “어우, 저 원쑤!”   아무리 별 볼일 없고 백수인 딸이지만 그렇게 엄마가 당부를 했는데 그새를 못 참고 해연에게 말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럼 누구지? 하긴 이제 와서 그걸 따진들 뭐하랴 싶었다. 마음이 착잡해났다. 해연이가 엄마를 생각하는 마음은 알겠는데 남 다 부러워하는 직장을 훌쩍 팽개치고 돌아온 건 참말로 무모한 짓이라고 따끔하게 말해줘야 할 것 같았다. 3년동안 아무리 애써도 취직도 못하고 맨날 창업타령이나 해대는 딸 서연이를 보면서 그동안 내 속이 새까맣게 타들어갔다는 걸 의식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에미 된 마음에 너무 속상하고 가슴이 아렸었다. 그래서 해연이의 갑작스런 환향을 나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고 싶었다.   허나 해연의 마음을 돌리기엔 역부족이란 걸 느끼는데 고작 두달도 채 걸리지 않았다. 언니는 해연의 옆에서 서서히 마음의 안정을 찾아갔다. 남편이랑 헤여지고 잠간 우울증 증세를 보였던 그의 얼굴이 예전처럼 밝아지는 게 선명하게 보였다. 허나 해연의 어깨는 점점 처져만 갔다. 미대를 나오고 큰 도시의 대형광고사에서 잘 나가던 그가 막상 이 작은 도시에서 선택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월급이나 대우가 낮은 건 그런대로 참을 수 있는데 앞으로의 자기발전에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는 게 너무 절망적이였다. 평생 엄마 옆을 지키려던 그가 깊은 고민에 빠진 건 그 무렵이였다. 생계를 위해 미대지망생들에게 그림을 가르치면서 해연이는 이 일이 자기의 직성에 맞지 않다는 걸 발견했다. 너무 지루하고 재미가 없어서 시작한 지 한달도 못돼 접어야 했다. 광고회사에 취직했지만 림시직이고 아무 비전이 없어 그만두었다. 엄마가 걱정할가봐 그는 내색 한번 내지 않고 이런저런 일을 찾아 전전긍긍했다. 그러다 차가운 가을바람이 옷깃에 스며들고 락엽이 우수수 거리에 내릴 때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이 일어났다. 해연이가 서연의 뒤를 이어 마침내 ‘백수’의 훈장을 꿰찬 것이다. 믿던 기둥이 뿌리채 뽑히는 기막힌 상황에 나는 아연실색했다. 문득 얼마 전에 고인이 된 80대 친정엄마가 생각났다. 친정엄마는 생전에 늘 자신을 일 안하고 놀고먹는 ‘백수’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는데 그때마다 다들 맞장 구를 치며 그게 당연한거 아니냐며 웃었었다. 그후 서연이가 ‘백수’ 의 계보를 이어갔을 때도 다들 별로 놀라는 기색은 아니였다. 워낙 남들이 다 가는 대학에도 못 갔으니 3년이 아니라 5년을 백수로 지낸다 해도 너그럽게 봐줄 수 있다는 동정어린 시선이 지배적이였다. 헌데 이번에 세번째로 ‘백수’가 나타났을 때 가족들의 반응은 엄청 컸다. 마치 약속이나 하듯 다들 한결같이 선의적이지 않은 시선들이였다.  제일 초조해하는건 언니였다. 이 모든 게 자기 때문인 것 같아 한사코 딸을 도시로 떠밀어보았지만 허사였다. 해연인 해연이 대로 엄마 옆에 껌딱지처럼 붙어서 떠날 념을 안했던 것이다. “언니, 이젠 포기하고 해연일 받아주라. 응? 같은 백수지만 해연인 우리 서연이랑 달라. 해연인 자기 직성에 맞는 확실한 일을 찾고 있을 뿐이야. 그러니 언니만큼은 해연일 믿어줘야 해. 언닌 엄마잖아!” 내 말은 진심이였다. 잠간 갈 길 잃은 미아가 돼있지만 해연이는 언니나 가족들을 실망시킬 애가 아니라고 나는 거듭 강조했다. 헌데 언니가 의아한 눈길로 나를 바라보는 게 아닌가. “넌 서연이두… 믿어. 해연이처럼.” “뭐? 나도 그러고 싶지. 헌데 두 아이는 레벌이 달라. 백수라 해도 똑같은 백수가 아니란 걸 아니까 더 속상해.” “속상한건… 서연이야.” “그게 뭔 말이야? 서연인 뭔가 생각이란 게 없는 애야. 언니두 참, 그동안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다 알면서 그런 말이 나와?” “니 딸… 얼마나 애쓰는데… 난… 보이는데… 넌… 안 보여?” “참, 언니는 그걸 위로라고 해? 난 전혀 위로가 안되는데…” “야! 니가… 엄마야?!” 나는 뭉클했다. 언니한테 서연이는 친딸이나 다름없었다. 결혼해서 우리 자매는 인차 아이를 갖지 못해 속앓이를 했다. 서로의 간절함을 잘 알기에 아이를 갖기 위해 그 쓰거운 한약을 천첩이나 먹었다. 그 피타는 노력이 하늘에 전해져 해연이와 서연이가 태여난거라고 우린 믿고 있었다. 헌데 모유가 없어 고역을 치르는 나에 비해 언니는 옷이 흥건히 젖어들 정도로 모유가 넘쳐서 서연이가 배를 곯는 일은 없었다. 그런 연유에선지 아주 어릴 때부터 언니는 서연이한테 각별했다. 나는 내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딸이 늘 창피하고 속상했다. 대학에 갈 재목이 아니니 그동안 한푼두푼 아껴두었던 돈을 죄다 꺼내서 디자이너 공부를 시켜놨더니 반년도 못돼서 돌아와버렸다. 평생 하고 싶은 꿈이 아니니 포기했다는 게 리유였다. 그리고 벌써 3년째 백수의 삶을 즐기고 있는 서연이다. ‘언니가 내 마음을 알아?’   해연이가 집에 눌러앉은 지 1년이 훌쩍 넘던 어느 날, 갑자기 언니가 내게 문자를 보내왔다. “우리 애들 동업한대. 이게 말이나 되니?” 나는 속이 꿈틀했다. 한동안 둘은 시간만 나면 붙어다녔다. 서연이가 해연보다 가방 끈도 짧고 별로 머리 좋은 애도 아니라는 내 기준에 쫓아 나는 은근히 둘의 이런 변화와 행보에 그 어떤 기대를 걸고 있었다. 헌데 언니는 자기 딸 해연이가 서연이랑 있는 게 뭔가 탐탁치 않은 게 분명했다. 언니의 그 마음을 알지만 애들을 떼여놓을 생각은 없었다. 나는 내가 참 리기적인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다. 허나 그건 그만큼 오랜 ‘백수’로 살아가는 딸이 해연이를 만나 뭔가 달라지길 바라는 내 마음이 그만큼 절박하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후유-- 언니, 미안해. 언니한텐 미안하지만 그래도 모르잖아. 서로 너무 다른 두 아이가 만나면 그 어떤 기적 같은 일을 만들어갈지. 이게 내 욕심인거 알지만 그래도 우리 애들 한번만 믿어주자. 응?’ 나는 언니한테 아직은 모르니 일단 지켜보자는 말로 슬쩍 상황을 종료했다. 헌데 내 예상은 적중했다. 엄마들의 속을 팍팍 썩이며 ‘백수’의 삶을 즐기던 해연이와 서연이의 ‘반란’이 시작된 건 그 무렵이였다. 미대를 나온 우등생 해연이와 그냥 미술학원을 두루 다니며 그림에 어섯눈이나 뜬 서연이, 두 사람 다 좋아하는 일이고 그게 동업으로 이어지기만 한다면 나는 팍팍 밀어줄 생각이 있었다. 내 친구의 애들중에는 엄마가 입이 마르게 칭찬할 만큼 잘 나가는 애들이 여럿 있었다. 요즘은 뭐든 시험을 쳐서 합격해야 취직이 가능한 시대이다. 박사를 나오고도 좋아하는 직장에 취직을 못하고 서른을 훌쩍 넘긴 나이에 뭐 하나 확실한 게 없어 우울증을 앓는 애들을 보고 있으면 가슴이 서늘할 때 많았다. ‘바랄 걸 바라자. 이제 그만 내 욕심을 접고 애가 좋아하는 일을 하게 선처를 베풀자.’ 나는 그걸 굳이 ‘선처’라고 꼬집어서 말하며 딸을 자극하군 했다. 서연이는 그런 엄마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일체 대꾸를 안하고 맨날 창업이요, 체험이요 하면서 팽이처럼 돌아쳤다. 한창 련애할 나이에 근심이 가득하니 련애는커녕 그 흔하디흔한 미팅 한번 못하는 딸의 궁색한 모습을 보면서 목구멍까지 올라왔던 말도 되삼키군 했다. 그런 딸이 너무 안스럽고 불쌍했으니까. 요즘 녀자 나이 서른 쯤 되면 그럭저럭 적당히 봐줄 만한 좋은 나이이긴 하다. 헌데 늘씬한 키를 빼곤 남자애들의 시선을 확 사로잡을 만한 미모를 가진 것도 아닌데다 멋 부리는 것도 사치라 여기며 맨날 똑같은 청바지만 입고 다니는 서연이를 볼 때면 엄마인 내 걱정도 산그늘만큼이나 커져갔다. ‘저래서 시집은 가겠어?’   토요일 저녁, 나는 친구모임에 나가기 위해 서둘렀다. 벌써 5년째 이어져온 정기모임이였다. 남편의 저녁상을 준비해놓고 집을 나서다 말고 나는 아무 생각없이 벽에 달린 큰 거울을 바라보았다. 거울속에선 한 낯선 녀자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녀자로서 쉰살이란 나이는 매우 중요한 시점인 것 같았다. 제법 날씬했었던 몸매가 페경 후 눈 뜨이게 펑퍼짐해져 갔다. 이젠 뭘 입어도 옷티가 나지 않아 옷 한벌 사입는 것도 귀찮고 신경쓰였다. 문득 나는 쏘파에 앉아 낚시프로에 빠져있는 남편을 돌아보았다. 밥만 챙겨주면 남편은 아무 의견이 없었다. 안해가 아무리 늦게 돌아와도 기다리는 법도 없었다. 쉰살을 넘기면서 나는 가끔 내가 평생 이 남자랑 어떻게 부부로 살아왔지를 반문하군 했다. 이런 나의 심경의 변화에 남편은 지나치다 할 정도로 덤덤했다. 같이 늙어가면서 이 정도로 무심해도 되는지 물어도 남편은 그저 담담하게 웃으며 입버릇처럼 말했다. “같이 서서히 늙어가면서 부부가 해줄 수 있는 게 뭔지 알아? 서로 편하게 하고 싶은 거 하게 내버려두는거야. 그게 최고의 사랑이지… 참, 이 나이에 사랑타령하는거 영 쑥스럽구만 크크…” 하늘이 무너져도 만사태평인 사람이 남편이였다. 요즘 그의 관심사는 오로지 자신의 취미생활이였다. 이젠 처장이란 자리도 남에게 내주고 별 볼일 없는 자리에서 서서히 있는듯 없는듯 살아가는 삶! 그런 직장에서의 삶을 그는 엄청 만족해했다. 오랜 세월 부부로 살았는데 우리 부부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는 게 신기하고 한심하기까지 했다. 이젠 성 쌓고 남은 돌마저 아닌 상황인데도 남편은 전혀 서운해하지 않았다. 서연이가 이런 아빠를 완벽하게 닮아가는 것 같아서 나는 너무 어이없고 속상했다. 그런 나날이 몇년째 이어지고 있었다. 달리는 택시에서 나는 갑자기 “무자식이 상팔자”라는 말이 떠올랐다. 사실 얼마전부터 이 모임에 나가는 게 은근히 싫었다. 나가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였다. 오늘도 례외는 아니였다. 허나 내가 나타나지 않으면 나는 대뜸 친구들의 화제의 중심에 서게 될 게 뻔했다. 그렇게 뒤담화의 주인공이 된다는 건 정말 너무 싫었다. 가뜩이나 자식자랑에 열을 올리는 친구들이 한두명이 아닌데 그런 그들한테 팍 기죽은 내 모습을 보여주어 그들의 흥미와 재미를 유발시킨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봐도 본전도 못 찾는 상황이라 주저앉고 나왔지만 기분이 영 씁쓸했다. 작고 아담한 한식집에서 맛있게 저녁을 먹었다. 식사후 조용한 카페에서 차 한잔 하는 건 의례적인 코스였다. 헌데 식사할 때부터 찔끔찔끔 아파오던 명치끝에서 또다시 이상한 통증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조금 기다려봐도 점점 더 자주 오는 통증에 나는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왜? 벌써 가려구?” 대여섯명 친구들중에서 잘난 척하기로 소문난 지순애가 눈꼬리를 치켜들고 말을 건넸다. 방금전 밥을 먹는 내내 부동산회사 사장인 아들 자랑에 지나치게 열을 올려서인지 목소리가 영 푸석거렸다. “속이 좀 더부룩해서…” “그거 참 이상하네. 똑같이 먹은 우리는 다들 이렇게 멀쩡한데. 너 혹시 아까 내가 니 딸 얘기를 해서 삐친 건 아니지?” “지금 뭔 소리 하는 거야? 아니야. 그런 거…” “아니면 다행이구. 난 그저 니 딸이 백수로 사는 게 너무 안타까워서 해본 소리였어. 내 친구의 딸이면 내 딸이나 마찬가지지. 너무 걱정돼서 한 소리란 걸 알지?” ‘알긴 뭘 알아? 너 여기에 와서도 그 백수 소릴 또 할거야? 그렇게 진심으로 걱정되면 잠자코 있는 게 날 도와주는거야. 지금 누굴 약 올리구 있어.’ 지순애의 눈빛이나 말투에선 빈정거림이 가득했다. 나는 갑자기 토할 것 같았다. 이런 상황에 확 일어나 가버리고 싶은 걸 애써 진정하는데 옆에 앉았던 선미가 내 팔을 당겼다. “조금만 앉았다 가자. 나도 오늘은 먼저 일어나야 하니까 우리 같이 가자.” 중학시절 3년 내내 내 ‘짝꿍’이였던 선미가 나의 불편한 심경을 읽은듯 다짜고짜 화제를 바꿔버렸다. “우리 애들 얘기는 이제 그만해. 우리 자신들 얘기나 하자.” 지순애는 못마땅한 눈빛으로 나와 선미를 번갈아보더니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난 아직 우리 아들 자랑을 채 못했는데…” 제발 그만두라며 다른 친구들까지 손사래를 치는 바람에 순애는 잠간 주춤했다. 허나 그것도 잠시 손에 들었던 차잔을 갑자기 내려놓았다. “아참, 너 심리치료사인지 뭔지 한다고 하지 않았어?” “벌써 몇년째 하고 있는데 왜 그래? 새삼스레…” 선미가 나를 대신해 앞질러 입을 열었다. 나는 오늘 내가 아무 리유없이 지순애한테 여러번 당하는 기분이 들었다. 애써 담담한 척 웃어보였지만 이런 상태에 나는 정말 약했고 어쩔 바를 몰라했다. 그런 내 약점을 아는듯 지순애는 오늘따라 더더욱 내게 집착했다. 나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지순애의 얘기에 바짝 긴장되는 걸 어쩔 수 없었다. “넌 언제나 지적이구 멋있어. 난 너같은 친구가 있다는 게 나쁘지 않아.” 나는 희미하게 웃어보였다. 아직 그의 의중을 알 순 없지만 태연하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래? 고마워. 그 말이 진심이라면야…” “야, 어쩐지 니 말에 가시가 있는 것 같다. 난 단 한번도 진심이 아닌 적 없는데. 내 말이 직설적이긴 해. 허나 우리가 남이야? 우린 몇십년 친구잖아. 이 나이에 뭔 말인들 못 받아줘. 안 그래?” “듣자 듣자 하니, 넌 뭘 또 꼬집고 싶어서 안달이야?” 내 말에 지순애는 손사래를 쳤다. “오해야 오해. 우리 사이에 오해라니. 정말 말도 안되는거 아니야?” 정말 어이없는 건 나인데 목소리는 지순애가 한수 우였다. “그나저나 너 심리치료사 맞아? 그렇게 사람 마음을 몰라서야 그걸로 어디 밥 벌어먹겠어? 정말 진심으로 걱정된다니까. 호호호…” 그 말은 치명적이였다. 그동안 참고 참았던 내 인내심이 갑자기 터진 골물처럼 폭발했다. “너 터진 입이라고 할 말을 다하는데, 좋아. 이제 나도 한마디 하자. 난 니가 내 딸 얘기를 꺼낼 때마다 힘들었어. 그래도 좋게 봐주려고 했어. 너의 말처럼 우린 친구니까… 헌데 나중에 네가 자꾸 내 딸 얘기를 반복하는 게 너무 싫었어. 왜? 아무리 듣기 좋은 얘기도 세번 들으면 질리니까! 그렇게 온갖 잘난 척 다 하는 네가 그걸 모를 리 없구. 그럼 뭐야? 왜 그렇게 남의 아픈 가슴을 팍팍 찌르는데? 왜?!” 그 말을 할 때 나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률이 일었다. 선미가 내 옷깃을 당겼다. “너까지 왜 이래? 이러다 너희 두 사람 진짜 싸우겠다.” “그래, 이참에 어디 한번 제대로 붙어보지 뭐. 안 그래도 손이 근질거려 죽는 줄 알았는데.” 내 말에 지순애는 자리에서 발딱 일어섰다. “너, 지금 나랑 싸워보겠다는 거야?!” “그래 다들 자릴 비켜줄래?!” “어머, 무섭다. 진짜 단단히 삐쳤구나. 난 진심으로…” “그만해! 사양할게! 너의 그 진심! 그래, 우리 딸 백수야. 한달도 아닌 몇년씩이나 그렇게 사는 딸을 보면서 엄마 된 내 마음이 어떤지 알어? 마음이 아파! 나 너무 아파서 본의 아니게 내 딸 구박도 많이 해. 허나 참아야 했어. 기다려야 했어! 내 마음이 이렇게 아픈데 내 딸 마음은 오죽할가 싶어서… 헌데 니가 뭔데? 니가 대체 뭔데 그런 내 마음을 더 아프게 해?!” “난 그저…” “너의 아들 얼마나 잘난 아들인지 알아. 허나 우리 서연이도 내겐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딸이야! 이 말을 꼭 해주고 싶어. 우리 이제 얼굴 보지 말자. 우리가 앞으로 엮일 일은 죽어도 없을 거야. 그러니 제발 나나 내 딸한테서 신경 꺼! 알았어?!”   그날 이후, 나는 친구들 모임에 나가지 않았다. 화김에 한 말이 아니였다. 선미가 여러번 자리를 만들어 화해를 시도했지만 허사였다. 수십년간의 우정이 이렇게 허망하게 사라져가는구나 싶어 잠간 기분이 쓸쓸하기도 했지만 그때 뿐이였다. 선미랑 다른 친구들에겐 조금 미안했다. 허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였다. 그렇게 모든 게 서서히 잊혀져가는  듯했다. 헌데 전혀 예기치 못했던 일이 생길 줄이야.   “엄마, 아빠, 두분께 드릴 말씀이 있어요.” 주말 아침, 모처럼 셋이 나란히 앉아서 아침을 먹는데 불쑥 서연이가 입을 열었다. “뭔데 이렇게 표정이 진지해?” “역시 아빠 눈은 정확해. 사랑해, 아빠.” “그거 알지? 아빤 영원히 니 편이란거.” “알지.” “돈이 필요하면 말해, 언제든지. 아빤 이 집을 팔아서라두 도와줄꺼야.” “참, 부녀지간에 죽이 척척 맞아서 좋겠네. 헌데 당신은 지금까지 서연이가 말아먹은 돈이 얼만지 알기나 해?” “정확한건 몰라. 허나 자식이 뭘하겠다면 부모로 생겨서 그 정도 밀어주는 것도 당연한거야. 우리 서연이가 얼마나 열심히 하는지 당신이 더 잘 알잖아. 헌데 왜 제 딸을 그렇게 못 믿어?” “믿게 해야 믿지.” “여보?” “너무 오냐오냐하는 거 서연이한테 전혀 도움이 안되요.” “그만해. 서연아, 너 할 말이 있다며, 해봐.” “나중에… 나중에 말씀드릴게요.” ‘내 말이 너무 심했나? 아니, 그래도 할 말은 하고 따질 건 따져야지.’ 결국 조금 망설임 끝에 나는 입을 열었다. “너 요즘 해연이랑 맨날 붙어있더니 고작 생각해낸 게 문신이였어?” 내 말에 서연이는 놀라서 소리쳤다. “엄마 그걸 어떻게 알았어?” “문신이라니? 그게 뭔 소리야?” “여보, 당신 딸이 지난 몇년동안 그 고생을 해서 선택한 게 뭔지 아세요?” “서연아, 아빠 생각에도 문신, 그건 아닌 것 같구나.” “아빠, 그게…” “장서연! 너 언제까지 엄말 속일 생각이였어? 그래도 해연이가 너보다 착해. 내가 따져묻자 이실직고하더라. 맨날 창업 창업하더니 기껏 선택한 게 문신이라니. 너 정말 이 정도밖에 안되는 애였어?” “엄마, 그 일, 내가 해보고 싶은 일이야. 그렇게 함부로 말하지 마.” “나 너한테 너무 실망했어. 비싼 돈 들여서 그림을 배웠는데 기껏 생각해낸 게 문신이라니? 그것도 녀자애 둘이서 대체 너희 두 사람 생각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뭐? 오픈 준비까지 다 마친 상태라구?” “그래요, 엄마. 엄마가 반대해도 소용없어. 미리 말씀 못드린 건 죄송하구 미안해. 허지만 나는 할거구. 열심히 해서 반드시 성공할거야. 그래야 그동안 정말 힘들게 여기까지 온 나 자신한테 덜 억울할꺼잖아.” “뭐? 그래서 이렇게 막 나가겠다?!” “엄마, 내 말은 그게 아니잖아?!” “그게 그거지. 결국 지금 엄마 말 완전 무시하고 니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겠다는 거잖아. 그러면 그동안 너의 뒤바라질해온 이 엄마는 뭐가 되니?! 너만 힘들었어? 이 엄마도 너무너무 힘들었단 말이야!” “엄만 내가 뭘해도 안 믿잖아! 엄마가 얼마나 날 무시하는지 나두 알아. 그래서 엄마한테 미안해. 허지만 나 이제 찾았어. 내가 좋아하는 일이고 돈두 벌 수 있는 일인데 엄마가 한번만 믿고 따라주면 안되겠어?!” “꿈 깨! 돈을 못 벌어도 제발 니 직성에 맞는 정상적인 일을 하란 말이야. 문신? 그건 절대 안돼! 하지 마!” “여보, 제발 그만해!” “이제부터 나 너의 일 간섭 안할게. 너, 하고 싶은 대로 해. 문신을 하든 거리 청소를 하든 니 인생 니가 알아서 해!” “알았어! 그 약속 나 반드시 지킬게! 아빠, 엄마, 미안해!” 나도, 서연이도 격해진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동안 알게 모르게 쌓인 게 많았던 모양이였다. 단위에 출근해서 나는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 그날, 서연이도 온종일 방안에만 처박혀있었다.   그로부터 며칠후, 내 폰에 이런 문자가 떴다. “연연 문신방 오픈!” 해연이랑 서연이가 자기들 이름의 뒤글자를 따서 문신방을 오픈한 것이다. 나와 언니는 고개를 저었다. 저렇게 하다가 그만두겠지 하는 생각에 일단 내버려두기로 했다. 그 오픈을 계기로 서연이는 아예 문신방에서 자취생활을 시작했다. 나는 그가 그런 오기로 얼마나 버티는지 지켜보기로 했다. 헌데 그 봄이 지나서 여름이 오고 다시 락엽이 거리에 내려앉는 11월이 오자 상황은 내 예상을 완전히 비껴갔다. 그날, 서연이가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해서 나는 해연에게 문자를 보냈다. 함께 비빔밥을 시켜놓고 나는 잠간 서연의 생각을 했다. 너무 보고 싶었다. 딸을 못 본 지 한참 됐다. 바쁘다는 핑게로 서연이는 오픈한 뒤 단 한번도 집에 오지 않았다. 가끔 밖에서 아빠랑 만나는 눈치였지만 나한텐 절대 련락하는 법이 없었다. 나는 기다렸었다. 그가 스스로 그 일을 접고 다시 내게로 돌아오기를. 해연이가 말했다. 현재 서연인 잘해내고 있다고. 서연이가 가게의 보스이고 자신은 보스 밑에서 일하는 일군이라고. “이모, 서연이 잘 지내요. 아마 래년 이맘때면 2호점도 오픈하게 될 거예요.” “그게 정말이야? 장사가 그렇게 잘 돼?” “그럼요. 얼마 전에 투자자도 생겼는걸요.” “뭐? 투자자? 그게 누군데?” “있어요. 그렇게 궁금하면 한번 와보세요. 직접 보시면 딱 짐작 갈텐데…” “아니야. 그냥 소식을 들었으니 됐어.” “이모, 서연이 변했어요. 가게를 오픈한 후 얼굴이 밝아지구 몰라보게 이뻐졌어요. 몸매야 워낙 좋은거구. 따르는 남자도 엄청 많아요.” “그럴 리가? 헌데 요즘 문신하는 남자들 다 그렇고 그런거 아니야? 그런 남자를 잘못 사귀면 인생을 완전 망치는 수도 있어.” “이모, 서연이가 얼마나 야무진데요. 서연이를 믿어요. 아참, 또 한가지 빅뉴스 있는데… 아직은 비밀이라서…” “비밀? 어서 말해봐. 너무 궁금하니까.” “안돼요. 서연이한테 직접 물어보세요.” “헌데 너 그 표정은 뭐야? 혹시 우리 서연이가 사고쳤어?” 해연이가 끝까지 함구하는 바람에 나는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헌데 서연에게선 아무 소식도 없었다. 결국 내가 참지 못하고 문자를 보냈다. 헌데 서연이가 내게 전화를 걸어올 줄이야. “엄마.” “서연아, 엄마야.” “미안해.” “아니야, 엄마가 미안해. 후회하고 있었어.” “그런 약한 모습을 보이니 내가 더 미안해지잖아.” 서연의 젖은 목소리가 수화기 저편에서 들려왔다. “엄마.” “그래, 엄마 듣고 있어.” “저 남자친구 생겼어요.” “뭐?” 그제야 해연이가 말한 그 빅뉴스가 무엇인지 짐작이 갔다. “그 사람 언제 보여줄꺼야?” “다음 주 금요일에.” “뭐?” “저희 두 사람 생각인데, 량가 부모님을 모시고 정식으로 인사드리려구.” “그럼 그전엔 얼굴도 못 본다는거야?” “암튼 그걸로 상견례를 대신하고 나면 저희 두 사람 결혼식 대신 제주도에서 두 사람만의 시간을 보내기로 했어.” “아니, 이게 무슨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야.” “경우가 아닌 건 알겠는데 그 친구 엄마가 엄청 반대를 해서 우리끼리 그렇게 하기로 했어.” “그 집 엄마가 반대를 하다니? 왜? 내 딸이 어디가 어때서 반대를 해?” “그 사람이 가진 조건이 나보다 월등해요.” “그렇게 대단한 집안이야?” “그건 중요하지 않아. 단 내가 그 사람 좋아한다는 게 중요하지.” 나는 서연이의 배포에 어지간히 놀랐다. “엄마는 그 집 엄마가 그렇게 반대하는 게 마음에 걸리는데 넌 괜찮아?” “응, 결혼은 우리 두 사람이 하는거니까…” 장소는 다시 문자로 보내준다며 서연이는 폰을 껐다. 아직 물어볼 게 많은데 그렇게 일방적으로 꺼버려서 서운하기 그지없었다. 내게 참 쌓인 게 많은가 보다 싶었는데 내가 생각한 것보다 서연이는 훨씬 더 큰 상처를 입은 것 같아서 갑자기 가슴이 짠했다.  며칠후, 나는 서연이가 사귄다는 남자친구 김군에게 데이트를 요청했다. 물론 해연이가 서연이 모르게 약속을 잡아주었다. 해연이를 통해 서연이가 만나는 남자가 지순애의 아들이란 말을 들었을 때 나는 그만 기절초풍했다. ‘세상에 어찌 이런 일이?!’ 그날 이후, 우린 단 한번도 얼굴을 본 적 없었다. 헌데 그런 우리가 어찌 사돈이 된단 말인가? 나는 너무 기가 막혀서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해연이가 두 사람에 관해 속속들이 얘기해주었다. 서연이한테 2호점을 제안한 것도, 그 투자자도 다름 아닌 서연의 남자친구 김군이였다. 두 사람은 결혼을 전제로 교제한 지 1년 쯤 됐다. 김군이랑 사귀면서 서연은 자신감을 찾았다. 일과 사랑, 두마리 토끼를 다 얻으면서 서연이는 늘 엄마생각을 했다고 했다…   대지에 따스한 해살이 가득 내려앉던 날, 강변둔치에서 나는 미래의 내 사위가 될 김군을 만났다. 훤칠한 키꼴에 준수한 외모… 나는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멋진 미남이 서연의 남자친구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나는 지순애의 아들이 이 정도로 괜찮을 줄을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이런 아들을 둔 엄마는 좀 잘난 척해도 괜찮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지순애를 보면 죽어도 엮이고 싶지 않았다. 헌데 그 아들은 엄마랑 완전 딴판이였다. 너무 괜찮은 젊은이였다. 나는 지순애한테서 어떻게 이런 아들이 나왔는지 정말 신기했다. 우리는 강변을 따라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다섯살이였던가? 아주 어렸을 때 한두번 봤던 꼬맹이가 어느새 30대초반의 의젓한 젊은이로 변했다는 게 너무 신기하고 놀라웠다. “엄마랑 나, 썩 좋은 사이가 아닌 걸 알고 있지?” “예.” “엄마가 서연이가 내 딸인 거 알고 반대를 한건가?” “예. 제가 폰에 있던 서연의 사진을 보여드렸는데 그날로 바로 서연에 대해 다 알아보셨더군요.” “놀랐겠네. 나두 엄청 놀랐는데.” “예. 세상이 참 좁다고. 저랑 인연이 아니라고 딱 잘라 말했어요.” “그래서? 그래도 엄마 말인데 무시할순 없잖아.” “엄마께 말씀드렸어요. 저를 믿냐구?” “그랬더니?” “믿는대요. 그래서 절 믿고 제가 사랑하는 녀자를 받아달라고 했는데 갑자기 우시는거예요. 우시는 엄마를 보니 불효를 짓는 기분이 들었어요. 가슴이 아팠어요. 겉으론 강해보여도 단순하고 마음이 엄청 여려요. 말이 직설적이고 차가워도 내 사람이다 싶으면 하늘의 별도 따주실 사람이 엄마인걸요. 시간이 걸리겠지만… 서연이와 저는 어머니 두 분이 축복해줄 때 정식으로 식을 올리기로 했어요.” 나는 듬직하고 선한 눈빛을 가진 김군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고마워. 우리 서연이의 손을 잡아줘서.” “제가 아무리 잘해준들 어머니만큼 하겠어요? 서연이를 만나면서 점점 더 이 녀자를 놓칠 수 없다는 생각을 했어요. 저렇게 예쁜 천사를 낳아주신 어머니가 너무 고마웠어요.” 나는 아주 잠간 지순애의 얼굴을 떠올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모자의 공통점을 찾을 수 없었다. 이건 누가 봐도 반칙이였다. “헌데 난 그게 궁금해. 김군은 우리 서연의 어디가 그렇게 좋아?” “어쩜 우리 엄마랑 똑같은 질문을 하세요? 어머니도 서연이가 저보다 많이 부족하다 생각하세요?” “내 딸이지만 그건 사실이니까.” 문득 김군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았다. 나도 그의 시선을 따라 하늘을 바라보았다. 구름 한점 없는 파아란 하늘에선 이름 모를 작은 새 두마리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날고 있었다. “어머니, 저기 하늘을 나는 저 새들을 보세요. 저 애들이 저랑 서연이에요. 전 그냥 좋아요, 서연이가. 제 눈엔 서연이가 이 세상에서 제일 이쁜 녀자로 보여요. 제 나이 서른에 처음으로 제 가슴을 뛰게 만든 녀자가 서연이였어요.” 나는 그의 진심어린 고백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저와 서연인 저 새들처럼 자유로운 삶을 원해요. 보세요. 저 새들도 저렇게 하늘을 날면서 비바람도 만나고 천둥번개도 만나겠죠. 허지만 그런 걸 감수하면서도 서로에 의지해 비상을 즐기는거잖아요. 저게 왜 저 새들만의 일이겠어요? 어머니. 저희 두 사람 자신 있어요. 잘살게요…” 내 눈에서 예고도 없이 주르르 눈물이 흘러내렸다. 기쁨의 눈물이였다. 언제부터였을가. 내 눈에 서연이는 그저 엄마의 속을 팍팍 썩이는 미운 오리새끼요, 잘난 애들로 차고 넘치는 이 세상의 틈새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엄마의 아픈 새끼손가락이였다. 헌데 그런 서연이가 이렇게 멋진 남자의 사랑을 독차지할 만큼 엄청난 안목을 갖고 있는 줄은 몰랐다. “서연이가 그러더군요. 자기한텐 꿈이 있다고. 그 꿈은 잘 살아서 엄마한테 효도하는 거라고. 그게 30년을 키워준 엄마에 대한 최고의 선물이라고…” “서연이가? 우리 서연이가?” 김군은 고개를 힘있게 끄덕여보였다. 나는 이제 곧 내 사위가 될 김군의 준수한 얼굴을 정답게 바라보며 또다시 눈시울이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어머니, 서연의 남자가 된 증표로 저 서연이한테 약속했어요. 서연의 꿈이 이제 저랑 서연이의 꿈이라고. 어머니, 저도 서연이랑 함께 서연이의 그 꿈을 이뤄드릴게요…” 나는 이 순간의 감동을 절대 못 잊을 것 같았다. 이 남자라면 이젠 서연이를 내 마음속에서 아무 걱정없이 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김군, 내가 한번 안아봐두 돼?” 김군은 웃으며 나를 향해 두 팔을 벌렸다. “어머니, 제가 안아드릴게요.” “그… 그럴래?” 말은 그렇게 해도 너무 쑥스러워서 나는 한사코 손사래를 쳤다. “아니야, 롱담이야. 나중에 꼭 해줘. 내가 주책이지? 미안!” 김군은 내 말에 소리 내서 웃더니 다시 진지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어머니, 전 이 세상에서 저의 엄마가 제일 창피할 때 있었어요.” 그 말에 나는 깜짝 놀랐다. “저의 엄마랑 어머니, 두 분 자주 만나셨으니까 아실 거예요. 사춘기때, 전 엄마가 내 엄마인 게 너무 창피하고 싫어서 엄마를 학부모회의에도 못 가게 했어요. 제가 최고가 아닌데 엄만 맨날 제가 최고라고 떠들고 다녔거던요. 헌데 서연이를 만나면서 생각이 바뀌였어요. 서연이가 그러더군요. 자기 자식이 이 세상에서 최고라고 믿는, 믿어주는 그런 엄마가 최고의 엄마라고. 친구들 앞에서까지 잘난 척 하던 저를 되돌아보게 한 것도 서연이였어요. 오래동안 밖으로만 돌며 가족에 소원했던 절 가족한테 돌아가게 만든 것도 다름 아닌 서연이였어요…”   김군과 헤여진 뒤, 나는 홀로 강변도로를 걸었다. 갑자기 서연이가 못 견디게 보고 싶었다. ‘서연아, 엄마는 널 믿지 못한 게 아니라 내가 상처받는 게 두려웠던거야. 허나 그걸 아니? 엄마에겐 네가 하늘에서 내려준 최고의 선물이란 걸… 사랑해. 그리구 미안해…’ 나는 머리를 들어 허공을 날아예는 이름 모를 새떼들을 보았다. 적어도 백여마리는 될듯 싶었다. 아득한 창공을 가르는 새떼들을 따라 내 마음도 풍선처럼 부풀어올랐다. 며칠후 있게 될 상견례가 벌써부터 기다려졌다  
2    [단편] 리별뒤에 (김옥희) 댓글:  조회:406  추천:1  2017-05-21
▣ 단편소설  리별 뒤에   김옥희 ​     안해가 갑자기 돌아갔다. 정씨는 자기한테 이런 일이 생길줄은 꿈에도 상상못했다.   안해는 그보다 네살 우였다. 정씨는 일흔셋, 안해는 예순아홉으로 살만큼 살았다고 해도 되는데 이웃들은 참 나이가 아깝다고 했다.    거의 50여년간 한 동네에서 이웃으로 산 그들이다. 그들은 알고있었다. 이 로부부가 늘 신혼때처럼 그 흔한 부부싸움 한번 안하고 참 아기자기하게 지냈다는걸.    그들에겐 아들이 셋, 며느리 셋, 손자손녀 셋이 있었다. 특별히 잘사는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사는게 팍팍하지도 않고 다들 평범한 삶에 만족하며 로부부에게 근심걱정을 끼치는 일이 거의 없었다.    안해랑 살아오는 동안, 그는 안해한테만 의지해 살았다. 집안의 일은 전혀 하지 않았다. 안해는 남편에게 많은걸 바라지 않았다. 늘 옆에서 떠나지 않고 남편을 돌봐주는걸 천직으로 생각하는 그녀였다.   부부는 동심일체였다. 그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없어서는 안되는 존재라고 생각하며 살았다. 그날은 비가 내렸다. 어제밤 예고에는 없던 비가 아침부터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했다. 안해는 하늘을 쳐다보며 잠깐 망설였다.   (보양식엔 그래도 삼계탕이 최곤데…) 안해가 기어이 우산을 찾아쥐고 길을 나서자 정씨는 말리지 않았다. 며칠전부터 안해는 몸이 허한 정씨를 위해, 그가 즐겨 먹는 보양식을 해주겠다고 별렀다. 헌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시장에 가기 위해 집을 나서려는 순간, 난데없이 하늘에서 굵은 비방울이 뚝뚝 떨어지는게 아닌가.    예고에도 없던 비였기에 잠깐 내리다가말겠지 하면서 안해는 기어이 집을 나섰다.   23선 공공뻐스를 타고 시장에 도착한건 그로부터 20분뒤였다. 비가 오는데도 시장은 여느때와 마찬가지로 사람들로 붐볐다. 그는 시장 맨 동쪽 모퉁이에 있는 닭 파는 가게를 향해 부지런히 걸어갔다. 벌써 7, 8년째 단골로 다니는 집이였다.   사장님이 닭우리에 들어가더니 제법 생생하게 뛰여다니는 검정닭 한마리를 쥐고 나왔다. 다른 손님들은 그 자리에서 닭을 손질해서 가져 가는데 그녀는 산채로 요구했다. 살아있는 닭을 비닐봉지에 잘 싼 다음 사장님은 삼계탕에 들어갈 각가지 재료들도 포장해서 함께 건네주었다. 그녀가 아무 말을 안해도 척척 알아서 해주는 서비스정신이 투철한 사장님이였다. 번마다 산채로 집에 가지고 가서 직접 손질해서 삼계탕을 만들면 그 맛이 정말 일품이였다.   그녀가 시장을 나와 공공뻐스를 기다리고있을 때, 갑자기 비가 더 크게 쏟아졌다. 목을 길게 빼들고 살펴봐도 23선 공공뻐스는 오지 않았다.  문득 그녀의 핸드폰이 울렸다. 남편이였다. “여보, 언제 와?”  “지금 닭을 사가지고 막 시장을 나오고있어요.” “그래? 그럼 오늘 삼계탕을 먹을수 있는거야?” “그럼요. 조금만 기다리세요.” “알았어. 헌데 비두 오는데 택시를 타구 와.” “택시를 타면 10원두 넘게 나와요. 길이 막혀서.” “그래두 타. 맨날 타는것두 아닌데.” “예. 제가 알아서 할께요.” 그녀가 핸드폰을 막 끄려는데 갑자기 남편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참, 꿀이 떨어졌어. 올 때 사갖구 와.”   안해는 다시 시장안으로 들어갔다. 시장 중심에 위치한 “꿀 전문가게”를 향해 걸어가는데 어디선가 휙 바람이 날아와 그녀가 쥔 우산을 덮쳤다. 손에 쥐고있던 우산이 허공을 향해 홀랑 뒤집혀지는바람에 그녀는 한손에 들고있던 닭을 하마트면 떨어뜨릴번했다. 가까스로 우산을 바로잡아서 손에 쥐고보니 어느새 어깨가 비에 흠뻑 젖어있었다.  그녀가 꿀을 한박스 사가지고 나왔을 때, 비방울은 훨씬 굵어져있었다. 바람도 점점 례사롭지 않았다. 이젠 무조건 택시를 타야 한다고 생각하며 그녀는 걸음을 다그쳤다.    총총히 오가는 사람들 틈새에 끼워 시장거리를 거의 빠져나왔을 때, 난데없이 택배오토바이가 총알같이 빠져나오더니 순식간에 그녀를 덮쳤다. 그녀는 오토바이를 피하려다가 땅에 넘어졌다. 그녀의 손에서 벗어난 검정닭이 걸음아 날 살려라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녀의 손에 쥐고있던 꿀박스는 어디로 날아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급기야 꿀박스는 포기한채 그녀는 검정닭을 쫓아가기 시작했다. 헌데 요리조리 숨박꼭질하던 검정닭이 몇메터앞에 나타났다. 그녀는 주먹을 쥐고 쫓아갔다. 허나 검정닭을 손에 막 잡으려는 순간, 그녀는 그 자리에 푹 주저앉고말았다.   비에 흠뻑 젖은채 쓰러져있는 그녀를 행인들은 아무도 일으켜주지 않았다. 시간이 10여분 지났을 때, 문득 어떤 40대 아줌마가 그녀앞으로 다가왔다. 그 아줌마의 손에는 어디서 찾아왔는지 꿀박스와 삼계탕에 들어갈 양념이 들어있는 비닐주머니가 들려있었다. 그녀의 두눈은 빛났다.   “할머니, 이거 할머니꺼 맞죠?” 그녀는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너무 감격해서 하마트면 눈물을 왈칵 쏟을번했다.  “걸을수 있겠어요? 제가 택시 있는데까지 모셔다드릴께요.” 아줌마는 그녀를 부축해서 일으켜 세우며 말했다. 아줌마의 말은 너무 고마운데 그녀는 극구 사양했다. 검정닭을 찾아가지고 가야 했던것이다. “고마워요. 저 혼자 갈수 있어요.”   아줌마는 비 내리는 하늘을 쳐다보다말고 걱정스런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비가 점점 많이 오는데…” 그녀는 마음씨 착한 아줌마한테 얼른 가라고 손짓했다. 아줌마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그녀는 시장 한모퉁이를 찾아 겨우 앉았다. 발목이 따끔거렸지만 거기에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다.    (어서 검정닭을 찾아야 한다. 그건 우리 령감 몸보신에 쓸 귀한 닭이다.) 잠깐 숨을 돌리고 일어났을 때 그녀는 손에 쥐고있던 우산이 없어진걸 발견했다. 그렇게 비속에서 검정닭을 찾아헤맨지 20여분이 흘렀을 때 그녀는 더이상 걸을수 없었다. 몸에 기운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녀는 손에 들고있던 무거운 꿀박스를 내려놓고 비닐봉지를 가슴에 그러안은채 땅에 쭈그리고 앉았다. 이제 검정닭은 포기하려고 하던 찰나, 어떤 젊은 총각이 그녀의 검정닭을 들고와 건네주었다.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이렇게 고마울 변이 있는가.   그녀는 고개를 숙인채 연신 고맙다고 인사를 했다. 헌데 이게 웬 일인가. 고맙다고 말을 하려는 순간, 말이 목구멍에서 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당황했다. 갑자기 실어증에 걸린게 아닌지 불안하고 초조해서 그녀는 이젠 빨리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며 몸을 일으켰다.    헌데 바로 이때, 누군가 그녀의 앞에 10원짜리 한장을 놓고 가는게 아닌가. 처음에 그녀는 이게 무슨 뜻인지 몰랐다. 난생처음 겪는 일이였다. 헌데 또 누군가가 10원짜리 두장을 그녀의 앞에 던져놓고 사라졌다.      그제야 그녀는 사태의 엄중성을 느꼈다. 그녀는 자기앞에 떨어져있는 10원짜리 돈 석장을 보았다. 그녀의 눈에 저도 모르게 이슬이 맺혔다. 이때 또 누군가가 다가오자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자기의 큰아들또래의, 30대의 점잖은 신사가 눈앞에 서있었다.    비물이 줄줄 흐르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던 신사는 그녀앞에 놓인 10원짜리 석장과 그녀의 얼굴을 번갈아보더니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급기야 호주머니 에서 지갑을 꺼내는 신사를 보고 그녀는 진저리 쳤다. 그녀는 이게 아니라고 말하고싶었으나 목구멍이 꽉 막혀 소리가 나 오지 않았다. 그녀는 고개를 흔들어보이며 극구 아니라고 해봤지만 허사였다. 이미 늦었다. 신사가 백원짜리 두장을 꺼내서 그녀의 손에 쥐여주며 친절하게 미소까지 지어보이곤 어디론가 사라졌다.   (난 졸지에 적은 돈은 돈 같이 여기지 않는, 거지중의 상거지가 됐구나.) 비속에 멍하니 서서 그녀는 흐느꼈다. 문득 남편이 보고싶었다. 남편이 기다리고있는 집으로 빨리 가고싶었다. 허지만…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가. 비속에 서있던 그녀의 머리우로 어둠이 내리기 시작했다. 그 많던 사람들이 다 어디로 갔을가. 시장거리는 한산해지기 시작하는데 가게문을 닫은 가게주인들이 우르르 쏟아져나오고있었다. “어머, 아주머니. 여기서 뭘 하세요?” 거의 실신상태인 그녀를 알아본건 닭집 사장님부부였다. “저… 절 택시 있는데까지 데려다…”   그녀는 말대신 눈빛으로 말했다. 그러자 사장님이 다짜고짜 그녀를 등에 업었다. 그녀의 손에 들려있던 검정닭과 꿀박스를 손에 쥔 사장님 안해가 뒤에서 따라오며 소리쳤다. “여보- 우리 먼저 병원에 가야 하는거 아니예요?” “어? 그런가? 할머니, 우리 병원에 가요.” 그녀는 사장님 등에 업힌채 고개를 저었다. 문득 사장님 안해가 소리쳤다. “여보, 이 할머니 이상해요. 갑자기 말을 못하시는게 아무래도…” “뭐? 할머니, 많이 아프신거 아니예요?” 할머니가 사장님의 등에 업힌채 자기의 목에 걸고있던 핸드폰을 건네주며 손가락 하나를 내밀었다. “할머니, 1번 누르면 돼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참후, 택시에 그녀를 앉힌 사장님이 1번을 눌렀다. “예. 전 닭집 사장님인데요. 혹시 할머니의 남편 되세요?” “예. 헌데 우리집사람이 닭을 산다고 갔는데 아직 돌아오지 않아서.” “거기 어디죠? 제가 지금 모시구 가겠습니다.”   그날밤, 그녀는 열이 나서 온밤을 사경에서 헤맸다. 정씨는 병원에 가자고 여러번 재촉했지만 그녀는 괜찮다고, 병원에 가서 쓸데없이 돈만 쓸게 없다고 약을 먹고 침대에 누웠다.   이튿날 아침, 밥 먹을 때가 돼서도 그녀는 일어나지 않았다. 지난 50년동안 같이 살면서 이런적이 한번도 없었다. 어제밤 고열에 시달렸으니 좀 더 푹 자게 내버려두려고 정씨는 혼자 일어나 마당에 나갔다.    평소에 그는 집에서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그래도 전에 소학교 교원을 한 그였는지라 퇴직금이 꽤 많았다. 그게 그들에겐 유일한 생활 원천이였다. 그 돈이면 부부가 먹고 쓰고 필요한 지출을 하는데 풍족하진 않지만 부족하지도 않았다. 단 한번도 누구한테 돈을 빌린적이 없으면 그걸로 만족하며 살아온 부부였다. 정씨는 1원짜리 돈을 들고 집앞에 있는 슈퍼에 가서 두부를 사가지고 돌아왔다. 그리고 집앞 채소밭에서 오이며 고추도 따서 들고들어왔다. 그리고나서 딱히 할게 없어서 안방을 들여다보니 안해는 여전히 누워서 꼼짝을 안했다.   갑자기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아침 6시반이면 부부의 조찬시간이였다. 이 시간을 지난 반세기동안 단 한번도 거른적 없는 안해였다. 생물종이 어김없이 조찬시간을 알려주는데도 안해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는 참다못해 들어가서 안해를 깨우기로 했다.   헌데 안해옆으로 다가가던 그는 깜짝 놀라 굳어졌다. 어쩐지 안해가 이상했다. 안해의 입귀에서 피가 흘러나와있는게 보였다. 정씨는 안해를 흔들어보았다. 모로 누워있던 안해가 힘없이 늘어졌다. 안해는 이미 싸늘해있었다.   정씨는 혼이 나간 사람처럼 어쩔바를 모르다가 급기야 큰아들한테 전화를 걸었다. 가까이에 사는 큰아들이 5분만에 달려왔다. 눈앞의 상황에 큰아들은 주먹같은 눈물을 흘리며 120에 전화를 걸었다.   안해는 언제 어떻게 숨을 거뒀는지, 정씨는 알지 못했다. 그런 아버지를 아들들은 용서하는듯 했다. 그렇게 갑작스레 가면서 유언 한마디 못한 안해였다. 허나 그는 눈물이 나지 않았다. 세 아들이 넋 놓고 울었다. 평소에 효도한번 안하던 세 며느리가 지은 죄가 있는지 목놓아 울 때 그는 덤덤해있었다. 세 손자손녀는 학교를 간다는 핑게로 한 놈도 얼굴을 내밀지 않았다. 화장터에서 안해를 보내고 집으로 돌아온 정씨네 식구들은 하루사이에 가족을 잃은 슬픔에 다들 기분이 우울해있었다. 허나 그것도 잠시, 큰아들이 하루밤새 폭 늙어버린 정씨의 손을 잡더니 한마디 했다.   “아버지, 이제부터 아버지 혼자 사신다는건 좀 그래요. 제가 맏이니까 모실께요. 저의 집에 오세요.” 그 말을 듣고있던 큰며느리가 입을 삐쭉거리며 남편의 뒤에 대고 무성의 눈총을 쏘는걸 정씨는 똑똑히 보았다. “아니야. 사실 난 너의 엄마가 없이는 안된다. 할줄 아는게 없으니 자립을 못해.” “알아요. 그래서 저희한테 오시라는거예요.” “여보, 당신만 아들인건 아니잖아요. 둘째랑 셋째도 있는데 당신 혼자 결정할 일은 아니라고 봐요.” 일이 상서롭지 못하자 큰며느리가 도전적으로 나왔다.   “그래. 우리두 아들인데 아버질 모시는걸 너한테만 밀어맡길순 없다. 나랑 셋째도 도울께.”  둘째아들이 입을 열었다.  “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그러니까 모시긴 우리가 모시는데 두 아드님이 돕겠다? 뭐 그런 말씀이세요?” “역시 큰형님은 똑똑하시네요. 그 말이 그 말이예요.” 둘째동서의 카랑카랑한 목소리는 언제 어디서 들어도 짜증나고 싫었다. “뭐야? 형님이랑 형수님이 있는데 당신이 왜 나서는데?” 둘째아들은 안해의 개입이 못마땅하다는 표정으로 안해를 흘겨보았다. “그래요. 전 둘째니까 그저 맏이네가 하자는대로 하면 되죠. 그럼 말씀들 나누세요. 전 출근해야 해서 이만…” 쌩 찬바람이 나게 둘째며느리가 밖으로 나가버렸다. “여보, 저도 나가봐야 해요. 자리를 비우면 월급이 짤려요.”   언제봐도 셋째며느리는 이런 상황에 미꾸라지처럼 피하는덴 프로였다. “그래. 당신이 있어봤자 그렇지뭐. 아니다. 나두 가봐야 해. 할일이 있는거 깜박했어. 여보, 우리 같이 가.” 셋째아들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두 형을 보고 말했다. “형들이 결정해. 난 형들의 의견에 따를테니까. 돈을 내라면 내고 보모를 구해야 한다면 찾아볼께.” 둘째아들이 어두운 표정을 지으며 나무랐다. “뭐? 보모? 요새 보모들이 얼마나 영악한지 몰라서 그래? 보모는 됐구. 이제 우리 셋이서 한집에서 한달씩 모시는게 좋겠어. 남들두 그렇게 하던데 그래야 의견이 없구 공평하다구 했어.”   큰며느리는 막 일어서 나가려는 셋째동서를 안 좋은 시선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셋째동서는 어머님생전에 가장 사랑을 많이 받았는데 그렇게 받은 사랑을 이제 아버님한테 되돌려드려야 하는게 인지상정 아니야?” “예? 제가 뭘 또 그렇게 사랑을 많이 받았다구 그래요.” “그렇게 시치미를 떼두 소용없어. 여기 앉은 사람들이 다 아는 일인데.” 셋째며느리는 얼른 이 자리를 피하고싶은듯 남편을 닥달했다. “여보, 우리 안 가?” “어? 가야지. 큰형, 둘째형. 전화해. 나두 형들과 똑같이 효도할꺼야.”   휭하니 집안에서 나가버린 두 사람. “저것들은 맨날 저래. 대체 저들이 뭘했다구 맨날 효도효도하는건데?” 큰아들은 아버지 정씨의 얼굴을 보았다. 당장 울것처럼 일그러진 아버지의 모습이 너무 안쓰러웠다. “아버지, 걱정마세요. 무슨 일이 있어도 전 아버질 내버려두진 않을꺼예요.” 정씨는 말없이 침대에 가서 누웠다. 큰며느리가 갖춰놓은 밥을 그는 먹지 않고 그대로 죽은듯이 누워있었다. 큰아들이 맏이구실을 하느라고 옆을 지키고 앉아있었다. 밤 일곱시가 되자 학교에서 돌아오는 아들을 챙겨 먹여야 한다며 큰며느리는 기회를 만났다는듯 확 나가버렸다. 둘째아들은? 그는 언제 집안에서 사라졌는지 알수 없었다.   정씨는 눈을 감고 생각했다. 여태 한번도 얼굴을 붉힌적 없이 화목하고 형제들의 우애가 깊어서 자기와 안해는 얼마나 자랑하고 다녔던가. 헌데 이렇게 완벽해보이던 가정이 안해의 부재로 단번에 콩가루 집안이 될 상황에 직면한것 같았다. 이튿날, 정씨는 밤새 옆에서 자기를 지킨 큰아들에게 혼자 살아보겠다고 실토정했다. 큰아들이 반대를 하자 딱 한달만 그렇게 살아보겠다고 해서 동의를 얻었다. 안해의 빈자리만 있을뿐 모든게 변함이 없었다.    슬픔에 아무것도 먹을수 없던 정씨가 어느 한순간부터 직접 밥을 지어서 먹기 시작했다. 한번도 밥을 지어본적 없어 처음엔 밥이 질척거렸지만 그것도 한두번 시행착오를 더 겪고나니 제법 먹을수 있는 밥이 만들어졌다. 옷이 더러워지니 옷을 씻기 위해 세면실에 갔다가 그는 안해의 생각에 소리내서 실컷 울기도 했다. 헌데 운다고 돌아와줄 안해는 아니였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보니 이것저것 막막한게 한두가지가 아니였다.    그렇게 한달이 막 지나던 어느날, 정씨는 마침내 결심을 내렸다. 보모를 찾자! 큰아들과 찾아달라고 전화를 걸었지만 큰아들은 출장중이라고 했다. 둘째아들에겐 조심조심 말을 꺼냈다. 헌데 “요즘 보모들은 믿을수 없는 악바리들”이라고 엄청 욕을 해대는바람에 말을 꺼냈다가 본전도 못 건졌다.    셋째아들은 자식들중에서 제일 작다는 리유 아닌 리유로 아버지의 문제를 알려고도 하지 않아서 아예 말도 못 꺼냈다. 처음으로 정씨는 딸이 없는게 한스러웠다. 딸이 있으면 아버지가 이런 말을 꺼내기도 전에 알아서 척척 했으리라.  결국 정씨는 이웃에게 부탁해서 보모를 얻어달라고 했다.   며칠후, 보모가 들어왔다. 보모는 50대 중반의 농촌아줌마였는데 순박하고 단순했다. 시골사람다운 인정이 더 마음에 들어 정씨는 흡족해했다. 반찬도 알뜰하게 잘해줬고 집안 구석구석을 정성들여 닦고 또 닦아서 안해가 있을 때보다도 더 집이 알른알른 빛이 났다. 차츰 안해의 빈자리는 보모아줌마로 인해 메워지는듯 했다.    정씨의 삶이 다시 원래의 질서를 찾아가기 시작했다. 이젠 사는데 아무 불편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안해가 있을 때보다 더 윤택해지는 느낌이였다.  보모아줌마는 부지런한 녀자였다. 그녀는 정씨네 집에 오자마자 칙칙한 카텐부터 바꾸었다. 하늘색의 새 카텐으로 단장한 집안을 둘러보며 정씨는 입이 함박만해졌다. 집안 분위기를 밝게 만들어주는데 큰 돈이 들지 않아서 좋았다. 안해가 수십년간 쓰던 누르무레한 그릇들을 보모아줌마는 다 버리고 가볍고 깔끔한 색갈의 그릇들을 종류별로 사서 찬장에 옹기종기 얹어놓았다.    처음엔 안해가 다루던 그 집기들에 그녀가 손을 대는것 자체가 너무 싫고 눈에 거슬렸다. “그거 놔두오. 아직 쓸수 있는걸 왜 버리려구 그러오. 돈을 한푼이라두 아껴야지. 왜 쓸데없이 그런데 돈을 쓰구 그러오? 돈을 쓰기 쉽지 벌기는 얼마나 힘든데. 쯔쯔…” “깨진 그릇이예요. 이가 다 빠졌는데 어떻게 써요. 그게 돈이 몇푼 간다구…” “제 돈이 아니라구 물 쓰듯 하다니. 정말 돈 아까운거 모르는 사람이구만. 자네한테 살림을 맡겼다간 일년두 못 가서 내 재산이 다 거덜나게 생겼구려…” “어그, 또 잔소리세요? 알았어요. 새 그릇을 사더라도 제 돈으로 살꺼예요. 암튼 전 저 깨진 그릇은 절대 쓰고싶지 않아요.” “뭐? 당신의 돈? 당신의 돈이 어딧어?” “왜 없어요. 령감님이 매달 주는 돈이 있잖아요.” “보모비?”   “예. 제가 령감님의 보모노릇해서 정정당당하게 받는 제 돈. 그건 제 돈이예요.” “보모비로 주는 돈도 내가 주는 돈이야. 그러니 내 돈이지.” “어머, 그 말씀 어이없는거 본인도 아시죠? 제가 그냥 받아요? 저 온종일 령감님 시중을 들어주구, 밥 해드리구, 옷 씻어드리구, 집안 청소해드리구… 그렇게 엄청 많은 일을 해서 받는, 정직한 제 돈이예요. 이거 왜 이러세요?” 정씨는 이쯤에서 조금 밀리는게 느껴지는지 한발 물러섰다.   “됐어. 됐구. 정 바꾸겠으면 내가 돈을 줄께. 대신 한개라두 깨뜨리지 말구 아껴서 써. 내 죽을 때까지 쓰란 말이여.” “알았어요- 참. 구두쇠가 따로 없어.” “뭐라구? 방금 날 욕했어?” “욕이라니요? 제가 보모인 주제에 어찌 감히 선생님 같이 유식한 분을… 아니예요.” 유식하다는 말에 그제야 흡족한듯 입가에 빙그레 미소를 띄우는 정씨를 보모아줌마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바라보면서 웃었다.    농촌에서 농사일밖에 모르던 그녀는 남편이 돌아가고 하나뿐인 아들이 대학에 들어가자 시내에 들어와 일을 찾았지만 여의치 않았다. 한동안 그녀는 식당에서 막일도 해보았지만 농사일보다 더 힘들었다. 또한 가는 곳마다 나이가 많다고 꺼리는바람에 언제 해고될지 몰라서 전전긍긍하다가 누군가 이 집의 보모로 소개해줘서 오게 된것이다.   정씨네 집은 그녀에겐 조용한 항만(港湾) 같은, 의식주가 다 해결이 되는 따뜻한 보금자리였다. 아들을 대학으로 보내자 무작정 상경한 그녀가 받았던 수많은 애로사항들이 여기서 종지부를 찍을줄은 몰랐다. 이곳저곳 일자릴 찾아 동분서주하던 그녀의 마음은 비로소 안식처를 찾은 셈이였다.   보모아줌마의 생각에 정씨는 아무것도 할줄 모르지만 심성이 착했다. 셋이나 되는 아들들도 자주 드나들지 않아서 다행이였다. 또 보모비로 받는 돈도 정씨가 직접 자기의 퇴직금에서 주기에 정씨의 아들, 며느리들의 눈치를 볼것도 없어서 그게 제일 편하고 좋았다.    정씨와 동고동락하면서 차츰 그녀는 욕심이 생겼다. 그녀는 알고있었다. 정씨가 이젠 자기가 없이는 삶이 불가능하다는것을.   그녀는 정씨만 괜찮다면 평생 이 집에서 정씨랑 살아도 나쁘진 않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자신은 소학교도 채 졸업못한, 글귀나 겨우 깨친 무식한 농촌녀자에 불과했다. 그런 자신에 비해 정씨는 소학교 선생까지 지낸 교육자요, 지식인이였다.    그녀는 유식한 사람을 제일 존경했다. 자신이 무식해서 그런것 같았다. 그는 가끔 정씨가 커다란 종이를 펼쳐놓고 글을 쓰는걸 멍하니 지켜보군 했다. 글을 쓸 때 보면 정씨는 이제 별 볼일없는 70대 늙은이가 아니였다. 그는 섬세한 손놀림으로 한자한자 써내려갔는데 그렇게 나온 글이 세상에서 최고로 멋져서 그녀는 얼마나 놀랐던가. 무식한 그녀의 눈에도 그것은 대단한 필치였던것이다.   그녀는 정씨와 자기가 거의 20년이란 나이 차이가 있다는걸 개의치 않아했다. 그녀는 유식한 정씨가 너무 존경스러웠다.   보모아줌마가 정씨네 집에 온지 한달이 다 돼가던 어느날, 정씨의 큰아들이 찾아왔다. 깨끗해진 집안을 둘러보던 큰아들의 얼굴에는 대번에 미소가 어렸다. 아버지와 마주앉으니 예전보다 신수가 훤해진 아버지의 모습이 선명하게 알렸다. 특히 머리에 염색을 한 아버진 10년은 더 젊어보였다.   “아버지. 한참 못 본 사이에 이렇게 젊어지셨네요? 적어도 10년은 젊어보여요.” “요즘 보는 사람마다 그렇게 말한다. 이게 다 보모아줌마 덕분이야. 다 늙었는데 염색은 무슨 염색이냐 했더니 한번만 해보자구 너무 조르는통에 할수없이 했어. 리발소에 가서 머리만 깎고 아줌마가 약을 사다가 직접 염색해주니 돈도 별로 안 들었어.” “약을 사다가 직접 염색해줬어요? 보모아줌마가?” “그랬다니까.” “야, 보모아줌마 보기보다 다르네. 돈 한푼이라두 아끼려구 그런 고생을 하셨군요.” “고생은 무슨? 재미있다구 했어.” “저, 아버지.” “응?” “보모아줌마가 어때요?” “뭐가? 인물이? 인물이야 없지. 박색이야. 박색!” “그게 아니라 아버지한테 잘해주시냐구요?”   “잘하지. 나 이젠 보모아줌마 없인 안돼. 매일 밥 해주구, 옷 씻어입히구, 집안을 거둬주구. 어디 그뿐이야? 앞마당에 있는 터밭의 채소들두 혼자 다 가꿨어. 비료도 안 친 록색채소라고 너희들도 갖다 먹어야 한다구 하더라.” “우리까지 챙기려는걸 보니 보모아줌마 마음씨도 너무 이쁜것 같아요.” “나두 처음엔 낯선 사람이라 불편했는데, 사람이 부지런하구 무엇보다 정이 많으니 말동무도 되구 좋아.”   그날, 큰아들은 집으로 돌아가자마자 핸드폰으로 두 동생에게 전화를 했다.  반시간후, 세 사람은 윗챗으로 의견을 주고받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보모랑 진짜 부부가 된다면 우린 우리대로 늘 신경쓰지 않아도 되니 좋은거잖아?” 맏이의 건의에 둘째가 심드렁하게 응수해왔다. “요즘 보모랍시고 주인의 재산에 눈독들이는 녀자들 많아. 참 무서운 세상이지.” 셋째의 생각은 두 형과 달랐다.  “울 아버지 재산이 어디 있어? 지금 사는 집? 그 집 비워놔도 들어가 살 사람이 없어. 팔아봤자 돈 몇푼 안돼. 아버지 돌아가시면 그 집 보모한테 주면 그만이야. 간단하게 생각해. 뭐가 그리 복잡해?”   맏이는 그게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라는걸 두 동생한테 확인시키고싶었다. “그 집 뚱챈(动迁: 건물 철거로 다른곳으로 이주하다)에 들면 돈이 되는 집이야.” “그게 언제 된다구. 10년후? 20년 후? 아버지가 보모한테 새 장가들든 혼자 사시든 난 전혀 관심이 없으니까 두 형이 알아서 결정해.” 셋째의 말은 상의할 여지조차 없었다. 맏이는 이제 희망을 둘째한테 걸며 좀 더 강한 의지를 보였다. “요즘 세월에 이렇게 착하구 알뜰한 보모를 구하기도 힘들어. 그렇다구 우리 형제 셋이 아버질 모셔올 상황도 아니니, 우리 두분 결혼을 허락하자.”   “난 반대야. 왜? 요즘 보모들 겉보기엔 착해보여도 음험하니까. 아버지의 퇴직금을 야금야금 제 호주머니에 채울수도 있으니 못 믿겠어. 지금은 괜찮지만 아버지가 치매라도 걸리면? 그땐 아버지 통장을 그 녀자가 마음대로 할수 있다구. 앞을 내다봐야지. 앞을!” 둘째의 반대는 생각보다 심했다. 결국 이 일은 없던 일이 되고말았다.   하늘이 조금씩 높아지고 가끔 서늘한 바람이 한낮의 열기를 식혀주던 어느날, 정씨네 집에 손님이 찾아왔다. 60대로 보이는 중년녀자였다. 보모는 그녀의 단정한 옷차림, 품위 있는 걸음걸이, 세련된 말솜씨를 보고 단번에 지식인인걸 알아차렸다. 보모는 이렇게 우아하게 늙은 녀인을 난생처음 보았다. 그녀의 얼굴은 풍상고초를 한번도 겪지 않은듯 희고 고왔다. 그 나이의 녀자들에게서 흔히 볼수 있는 반점 같은것도 전혀 없었다. 굽슬굽슬 파마를 곱게 해서 단정하게 올린 머리카락은 까맣고 윤기가 흘렀다. 정씨와 손님은 오늘 만나기로 벌써 약속이 된것 같았다. 그제야 보모는 정씨가 왜 며칠전부터 자신을 닥달했는지 알아차렸다.    정씨는 염색을 해주겠다고 했을 때 전처럼 반대를 하지 않았었다. 그는 하얀 셔츠가 두벌이나 있는데도 기어이 보모를 시켜서 한벌 더 사오게 했었다. 멀쩡한 구두도 발에 안 맞는다고 투정을 부리더니 스스로 서시장에 가서 구두 한컬레를 새로 사가지고 돌아오기도 했다. 이런 정씨의 변화가 뭘 의미하는지 보모는 몰랐었다. 다만 그렇게 차려입으니 훨씬 젊어보여서 기분이 좋았었다. 헌데 이 모든게 다 이 손님, 우아하게 늙은 중년녀인한테 보여주기 위한 “치밀한 준비”였단 말인가. 후유- 보모는 기분이 축 처져서 주방에서 서성거렸다.   이때 정씨가 주방으로 들어왔다. “뭔 준비가 그리 늦어?” “예? 아, 내 정신봐라. 인차 차 들여갈께요.” “차라니? 커피를 들여와. 커피를!” “커피? 그건 탈줄 모르는데.” “모르면 타지 말구… 됐어. 내가 하리다.” 그는 스스로 커피잔과 커피, 설탕과 프림을 들고 거실로 들어갔다. 보모는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한번도 이런 느낌을 받은적 없었다. 방금전 자신을 바라보는 정씨의 표정에는 무식한건 정말 참을수 없다는 기색이 력력했었다. 보모는 갑자기 뒤통수를 한대 맞은 기분이 들었다. 수박을 쪼개는 그녀의 손이 떨렸다. 그깟 수박을 쪼개는게 뭐라고 이렇게 손이 떨리지? 헌데 다 쪼개놓고 보니 수박은 크고작고 정말 혼자 보기 아까울 정도로 가관이였다. 그렇다고 이제 다시 가서 사올수도 없었다.   (입에 들어가면 다 한가지다. 그 수박이 그 수박이지뭐.) 그녀가 수박을 들고 거실로 향했을 때 반쯤 열어놓은 거실안에선 웃음소리가 새여나왔다. 살며시 안을 들여다보니 두사람이 나란히 앉아 옛날 사진앨범을 보고있었는데 분위기가 제법 아기자기했다. 탁자에 놓은 커피잔 두개에선 커피향이 솔솔 풍겨나오고있었다. (둘이 옛날 첫사랑이라두 되나보지? 아예 좋아죽네. 흥. 커핀지 계핀지 난 쓰거워 그냥 공짜로 줘두 싫던데 저 녀인두 저게 좋은가봐.) 사람이 밥을 먹지 분위기를 먹고 사나. 보모는 혼자 중얼거리며 수박이 든 쟁반을 들고 거실안으로 쑥 들어갔다. “아이, 사람이 왜 노크두 안하구…” 정씨가 놀란 표정으로 보모를 흘겨보았다. “문이 열려있었어요.”   워낙 “노크는 무슨 노크예요!”라고 말하려 했는데 그 말은 입안에서 맴돌뿐 밖으로 튕겨나오지 않았다.  “아주머니, 제가 오는바람에 공연히 고생만 시키네요. 어서 와 편하게 앉으세요. 저보다 나이가 어린것 같은데.” 손님치곤 참 교양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마음씨까지 이뻤다. 보모가 그 말에 금방 안 좋던 기분이 풀려서 막 앉으려는 순간, 정씨가 한마디 했다. “자넨 앞마당에 나가서 도마도랑 고추, 가지, 오이를 따다가 한꾸럭 준비해줘. 이 친구 갈 때 가져가게.” “정선생님, 저의 집에도 있어요. 뭐하러 힘들게. 아주머니 앉으세요.” 앉지도 서지도 못한채 엉거주춤하던 보모는 아예 맞은편 쏘파에 앉아버렸다. 정씨가 뭐라 하든 그녀는 이번엔 앉아서 버틸 태세였다. 이 나이의 유식한 사람들은 마주앉으면 대체 어떤 대화를 하는지 너무 궁금해 진심으로 듣고싶었던것이다.    “이 집주인은 난데 이젠 주인의 말도 안 듣겠다이거요?” “정선생님, 왜 그러세요? 사람 무안하게.” 중년녀인이 오히려 이 상황을 민망해 어쩔줄 몰라하는데 보모가 친절하게 수박 하나를 쥐여 중년녀인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괜찮아요. 전 이것만 드리구 나가려구 했어요.” “동년밴데 같이 얘기하면 좋은데…” “정선생님이 싫어하잖아요. 전 주인이 싫어하는 일은 못해요. 보모잖아요.” “고마워요. 잘 먹을게요.” 중년녀인은 진심으로 고마워하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 따뜻한 시선이 너무 인간적이였다.    터밭에서 보모는 제일 크고 싱싱한 채소들을 가득 뜯어서 한박스 담아놓았다. 비록 이 집 보모의 신분이지만 보모면 또 어떤가. 이 우아한 중년녀인에게 자신의 넉넉한 인심을 보여주리라. 사실 이 채소들이 내것이 아닌 정씨의것이란 생각이 들자 그녀는 너무 우스워 혼자 입을 싸쥐고 웃었다. 날이 어두워질무렵, 중년녀인과 함께 밖으로 데이트하러 나갔던 정씨가 돌아왔다. 보모가 보니 정씨의 기분이 고무풍선처럼 붕붕 떠있었다.  (늙은 남자도 남자니 별수 없구나.) 우아한 중년녀인을 만나고 돌아오니 안색부터 확 달라진 정씨였다. 보모가 아무것도 묻지 않았는데 정씨가 싱글벙글 웃으며 그녀의 곁으로 다가왔다.   “아까 그 녀자는 내 사범학교때 첫사랑이야.” “예? 첫사랑? 그럼 죽은 사모님은 두번째 사랑인가요?” “참, 말을 해도 꼭 그렇게 투박하게 해야 쓰겠어?” “그럼 어떻게 말해요? 원래부터 투박한걸. 그 첫사랑인지 하는 녀자랑 저녁두 먹구 오지 그랬어요. 그럴 때 쓰려구 악착같이 돈을 아낀거 아니였어요?” “내가 언제 또 악착같이 아꼈어?” “아님 말구요. 헌데 저녁은 뭘 드실래요?” “랭면이 먹고싶어.” “참,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것도 아니구. 랭면 안 좋아하시잖아요. 왜 갑자기 랭면을?” “사오라면 사오지. 뭔 말이 그리 많어?” 보모는 오늘은 별로 정씨랑 긴 말을 하고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냥 랭면을 사러 나왔다. 랭면집까진 10분거리였다.  길 량옆에는 작은 머리방들이 따닥따닥 붙어있었다. 문득 낮에 본 그 중년녀인의 파마머리가 생각났다. 그녀의 발걸음이 어느새 한 머리방앞에 와 멈춰섰다.   “어머, 처음 보는 손님이네요. 머리 하실려구요?” 어느새 20대 녀자애가 그녀앞에 와서 생글거렸다. “머리 하는데 제일 싼 값이 얼매요?” “80원인데, 70원에 해드릴께요.” “어이구, 돈을 거저 떼먹으려구 하는구만. 30원에 해주오.” “아줌마, 지금 30원짜리 파마 어딧어요?” “그럼 됐소. 머리방이 어디 여기뿐인가?” 다른 머리방을 기웃거리는 그녀의 팔을 나꿔챈 녀자애가 쿨하게 말했다. “아줌마, 내 우리 엄마 같아서 양보할게요. 60원! 60원에 해줄게요!” “50원!” “안돼요. 그럼 저 해주고 사장님한테 욕먹어요.” “처녀는 이 집 사장님이 아니요?” “예. 전 이 집에서 일하는 일군이예요. 먹고살기 힘들어요.”   보모는 순간 그 앳된 녀자애가 안쓰러웠다. 자기랑 처지가 똑같은, 남의 집에서 일해서 먹고사는 인생이였다. “알았어. 내 래일 아침에 올게. 50원! 그깟 돈 쓰지뭐.” 보모가 랭면을 사들고 돌아왔을 때 정씨는 쏘파에 기대여 잠들어있었다. 머리방앞에서 흥정을 하다보니 시간이 꽤 지체됐다. 그녀는 랭면을 얼른 챙겨서 밥상우에 놓고 정씨를 깨웠다. “랭면 사왔어요. 어서 드세요.” “랭면? 아- 자네나 먹게.” “예? 아까 랭면 먹고싶다고 해서 사왔는데 드셔야죠.” “랭면은 자네가 좋아하잖아. 원없이 실컷 먹게.” 말을 마친 정씨는 안방으로 들어가 누웠다. 이내 코고는 소리가 주방까지 들려왔다.   그제야 보모는 정씨가 왜 랭면을 사오라고 했는지 짐작되였다. 낮에 자기의 첫사랑 앞에서 그녀를 구박줬던게 마음에 걸려서, 그래서 사과한다는 뜻에서 그녀가 좋아하는 랭면을 사오게 했던게 틀림없었다.    랭면 두그릇을 앞에 놓고 그녀는 눈물이 글썽해졌다. 별것도 아닌 랭면 두그릇이 그녀의 가슴속에 전률이 일게 했다. 소학교도 못 나온 그녀의 전남편은 사람이 무뚝뚝하고 잔정이 없었다. 살면서 남편의 사랑이 뭔지 단 한번도 느껴보지 못한 그녀는 정씨의 이런 은유적인 표현이 낯설었다. 허나 정씨의 관심이 느껴져 저도 모르게 울컥했다.    (이게 다 지식이 있으니, 먹은 물이 있으니 가능한거지.) 그녀는 또 한번 정씨에 대한 존경심이 그들먹하게 차올랐다.  랭면 두그릇을 게눈 감추듯 먹어버린 그녀는 정씨의 옷가지들을 들고 밖에 있는 수도가에 가서 씻기 시작했다.  (덤으로 랭면 한그릇 더 먹었으니 열심히 일을 해야지.) 땀을 뚝뚝 흘리며 빨래를 하는 동안, 낮에 본 그 우아한 중년녀인의 모습이 자꾸 눈앞을 스쳤다. 녀자인 그녀가 봐도 너무 고운 60대 녀인이였다. 그 정도 녀인이 돼야 정씨에게 어울리는 상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내가 잠시나마 내 처지를 착각한거야. 이 사람들은 나랑 노는 물이 달라. 후유- 난 역시 이런 사람들속에 있으면 물우에 뜬 기름 같애. 겉돌뿐이지 섞일수가 없는거야. 제 주제를 알아야지. 제 주제를…)   생각할수록 잠깐이나마 정씨를 마음에 두었던게 부끄러웠다. 자신은 그동안 자기한테 거친 욕 한번 안한 “유식하고 존경스런 어른”인 정씨의 보모로 있다는것에 만족해야 하리라.   문득 그녀는 정씨의 보모도 정씨의 신분에 맞아야 하며 너무 처지면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이 늘 가슴속에 잠재해 있어서 머리방을 기웃거렸는지도 모를 일이였다.   이튿날, 그녀는 일찍 머리방에 가서 파마했다. 염색을 하고 파마하는데 50원을 쾌척하고 돌아오면서 그녀는 후회되였다. 그 돈이 사실 너무 아까웠던것이다.  50원이 아니라 단 돈 5원도 자기를 위해 써본 기억이 없었다. 아들이 대학을 졸업하면 결혼을 시켜줘야 했다. 남편도 없이 홀로 아들이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돈을 대주기도 벅찼다. 그런 엄마의 마음을 잘 알고있는 아들은 대학에 입학한 그날부터 알바를 뛰였다. 그녀는 어떤가? 단 돈 한푼이라도 아꼈다가 아들한테 보태주고싶은 엄마의 마음이였다.    헌데 분명 무슨 귀신에게 홀리워 엄청난 일을 저질렀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귀신이 정씨인지 정씨의 첫사랑인지는 알수 없었다.   (미쳤어. 미쳤지. 파마를 한다고 달라질게 뭐 있어. 누구의 보모든 보모는 보모일뿐인데.)   그날, 정씨의 큰아들은 우연하게 아버지집에 들렸다. 헌데 아버진 산책을 나가셨는지 집에 없고 보모가 막 집안으로 들어서고있었다. 파마를 한 보모를 정씨의 큰아들은 알아보지 못했다. 보모가 먼저 아는척해서야 알아보고 너무 놀라서 굳어진 정씨 큰아들. “아줌마, 파마 하나 했을뿐인데 사람이 너무 달라보여요.” “달라보이다니? 너무 촌스러워요? 하긴 나두 어색하긴 해요.” “그게 아니라… 아줌마, 너무 멋있어요. 너무 젊구 이뻐요.” “말은 고맙지만, 그런 말은 저에겐 안 어울려요. 아참, 아버질 찾아왔겠는데 어쩌나. 아버진 모임이 있다구 나가셨는데.” “괜찮아요. 아무 일 없어요. 헌데 아줌마, 사진 한장 찍어드릴께요. 파마를 한 기념으로. 아줌마 아들한테도 보내드리면 좋잖아요.”   “예? 우리 아들한테요?” 정씨의 큰아들이 핸드폰을 들더니 보모를 앞마당에 있는 앵두나무앞에 세워놓고 한장 찍어주었다. 그는 그 자리에서 보모에게서 아들의 핸드폰 번호를 알아내선 윗챗으로 보내주었다.     그 사진을 받아본건 보모의 아들뿐이 아니였다. 정씨네 아들며느리, 손자손녀까지 동시에 받아보고 놀람을 금치 못했다. 그냥 촌녀자로만 알았던 보모가 파마 한번에 이렇게 괜찮아보인다는걸 누구도 상상 못했다.   정씨의 큰아들은 윗챗을 할줄 모르는 아버지를 위해 사진관에 가서 사진까지 뽑아서 갖다주는 정성을 보였다. 정씨는 그날 밤늦게 집으로 돌아왔다. 그가 들어온줄도 모르고 보모는 자기 방에서 자고있었다. 정씨는 방금 들어오다가 문앞에서 큰아들을 만나서 사진을 받아쥐고 들어왔다. 돋보기를 걸고 그 사진을 들여다보던 정씨는 깜짝 놀랐다. 눈매가 서글서글한 이 녀자는 누군가?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이긴 했지만 누구인지 딱히 떠오르진 않았다.    이튿날 아침, 정씨는 마당에서 오이를 뜯고있는 보모를 보고 굳어졌다. (무슨 녀자가 남의 집 터밭에서 오이를 뜯고있나? 혹시 도적인가?) “일어나셨어요? 어제밤엔 죄송해요. 곤해서 깜빡 잠들어서 들어오시는것도 몰랐어요.” (이게 누군가? 설마…) “호호호. 진짜 절 못 알아보세요? 어제 이 집 큰아들도 몰라보더니…” “파마는 왜 해가지구 사람을 헷갈리게 해.” 그녀의 변신은 무죄였다. 말은 그렇게 해도 너무 근사해진 그녀를 보고 정씨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녀가 그 돈 50원이 너무 아깝다고 하자 정씨는 지갑을 열고 백원짜리 두장을 꺼내주었다.   “파마만 하면 뭐해. 이걸루 옷 한벌 사입구 와.” “예? 정말 이 돈… 저 주시는거예요? 이 돈 저 주시고 제 월급에서 까시는건 아니죠?” “아니야. 이쁜걸로 사입어.” “야, 좋아라. 령감님. 아니 선생님, 감사합니다.”   (세상에. 오늘은 정말 운수 좋은 날이야!)   그 길로 그녀는 서시장에 가서 60원을 주고 연두색 원피스를 하나 샀다. 그녀는 농촌에 살 때 늘 고무신을 끌고다녀서인지 발이 거칠고 보기 흉해서 고운 신을 신어본적이 없었지만 고르고 또 골라서 30원짜리 구두를 하나 샀다. 내친김에 5원을 주고 하얀색 양말을 두컬레 샀다. 정씨와 자기가 똑같은 양말을 신는다고 상상하자 얼굴이 붉어졌다. 시장에 와서 한꺼번에 이렇게 신나게 돌아다닌적 있던가. 95원! 머리에 털이 나고나서 이렇게 큰 돈을 자기를 위해 처음 써보았다. 그녀는 가슴이 두근거리고 심장이 뛰였다.    (돈을 준다고 이렇게 왕창 써버리면 어떡해. 이 돈은 내 월급에서 깎으라고 해야겠다.)   그녀는 기분 좋게 쇼핑을 마치고 돌아왔다. 무슨 전시를 하듯 사온 물건들을 일일이 꺼내보이자 정씨가 그걸 입어보라고 란리다. 그는 방으로 들어가 “꽃단장”하고 나와서 정씨앞에 섰다. 헌데 정씨가 그녀의 아래우를 훑어보다가 갑자기 박수를 치는게 아닌가.   “됐어. 이젠 내 첫사랑 앞에서도 기 죽지 않겠어.” “예?” “합격이야. 합격!” 정씨가 그렇게 환히 웃는 얼굴을 본적이 없었다. 보모는 웬지 모르게 자신감이 생기면서 기분이 좋아졌다.  저녁을 먹은 후, 그녀는 남은 돈 105원을 정씨앞에 내놓았다.   “제가 령감님의 신세가 얼마나 많은데 이 돈을 받겠어요. 전 령감님한테 바라는게 없어요. 보모도 다 돈을 받고 하는 일인데, 이 돈 제가 왜 받아요? 잠깐 공짜에 눈이 어두웠지만, 그래두 고마웠어요.” “줄만하니까 주는거야. 받게. 내 마음이라 생각하고.”   “아니예요. 전 받을꺼 다 받고있어요. 그저 이 집에서 나가란 소리만 안하시면 돼요. 전 우리 아들을 장가 보내야 해요. 그래서 돈이 필요해요. 말이 나온김에 할께요. 우리 아들 장가갈 때까지만 저 령감님 옆에 있게 해주세요… 부탁드릴께요.”   정씨는 가슴이 뭉클해났다. 전에 자기가 알던 그녀가 아니였다. 겉으론 내색안해도 그녀를 알게 모르게 구박했던건 사실이였다. 헌데 파마를 하고 연두색원피스를 입은 그녀는 이제 보니 정말 근사한 녀인이였다. 자기의 첫사랑, 그녀가 지적이면서도 세련된, 곱게 늙어가는 우아한 60대 녀인이라면 지금 눈앞에 있는 보모, 그녀는 시원시원한 이목구미에 앞마당에 있는 오이나 상추같이 싱싱한, 때묻지 않고 순수한, 이제 막 50대를 바라보는 꽃중년 녀인이였다. 정씨는 이런 녀인을 알아보지 못하고 농촌아줌마라고 은연중 무심하게 대했던 지난 시간들이 후회되였다.   “아까 우리 맏이가 전화로 그랬어. 우리 둘이 결혼하라구.” “예? 설마?” “나두 그 애들이 그렇게까지 나올줄은 몰랐어.” “그 애들이라면 둘째, 셋째도 같은 생각을 한단 말씀이세요?” 정씨는 고개를 끄덕였다. “안돼요. 파마를 했다고 제가 달라진거 뭐 있겠어요. 여전히 촌녀자고 무식하구…”   “미안해. 그 무식하단 소리 내가 참 많이 했지?” “어머, 왜 이러세요. 무식한거 무식하다 했는데. 다 사실이잖아요. 저 그것때문에 삐지거나 마음 상한적 없어요.” “그럼 다행이구. 헌데 내가 안돼.” “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나 간암말기야. 이제 남은 시간이 별루 없어.” “예? 거짓말! 저랑 살기 싫으시니까 그런 말씀하시는거 알아요. 그럴 필요 없어요. 령감님의 아들들이 우릴 맺어주려구 해도 그건 그들 생각이죠. 전 아니예요. 령감님은, 아니, 선생님은 선생님에게 어울리는 그런 녀자를 만나서…” “간암말기야. 그래서 내가 자네한테 말을 못한거야.”   “?” 정씨는 말했다. 이 일은 정씨의 아들뿐만아니라 그의 지인들도, 그의 첫사랑도, 아무도 모르는 일이라고. 병은 반년전 학교에서 퇴직교원들에게 정기검진을 시켜줬는데 그때 발견했었다. 큰 병원에 가서 다시 검사받을 필요가 있겠냐는 그의 물음에 의사는 그럴 필요는 없다고 했다. 그래서 그만두었다. 이제 살 날이 얼마인지 의사는 알려주었다.    “아침저녁으로 옷깃으로 바람이 스며들 때면 가게 될것입니다.” 의사의 말은 적중했다. 지금은 여름이 거의 끝나가는 길목이다. 요즘따라 그는 부쩍 몸에 이상이 느껴졌다. 그는 의사를 찾아가 상황을 얘기했다. 의사는 참을수 없이 아플 땐 련락하라고 하면서 전화번호 하나를 건네주었다. 그는 그 번호에 전화를 걸어보고나서야 그곳이 “친친양로원”이란걸 알았다. 말이 양로원이지 그곳은 사람이 죽기전, 정말 힘들 때 가는 곳이였다. 작년에 정씨의 친구도 그 병원에서 한달가량 있다가 저세상으로 갔다. 그것은 암환자들이 마지막으로 머무는 곳이였다. 별다른 치료는 없었다. 그저 진통제 하나에 의지해 인간의 마지막 아픔과 싸우는 곳이였다.    어제도 정씨는 보모아줌마에게는 모임에 간다 해놓고 은행에 가서 자신의 잔고를 정리했다. 그에겐 세 아들이 모르게 안해가 죽기전에 남겨준 꽤 큰 돈이 있었다. 그 돈을 안해는 두 사람중 남아있는 한사람이 어쩔수 없이 홀로 여생을 살게 될 때 쓰자고 약속했었다. 정씨보다 일찍, 그리고 갑자기 죽을것을 미리 예견하기라도 한듯 안해는 아주 오랜 세월 그 돈을 차곡차곡 끈질기게 모아왔다. 그러는동안 부부는 그 누구도 약속을 어기지 않았다. 그래서 그 돈은 영원히 그들 부부만 아는 돈이 되였던것이다.    보모는 정씨의 “비밀”을 알고난 후에도 담담했다. 그녀는 예전과 다름없이 그의 수발을 들어주었다. 하루가 다르게 정씨의 기력은 못해졌다. 몇번이고 정씨의 큰아들에게 이실직고하고싶은걸 그녀는 겨우 참았다.   마침내 큰아들이 아버지에게서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을 땐 그의 병이 이제 마지막 고비를 향해 가고있을 때였다. 그가 가슴을 치며 자신의 불효를 후회했지만 정씨는 더이상 그의 효도를 기다려줄 기력이 남아있지 않았다.   정씨는 멀쩡해보이다가도 가끔 정신을 잃고 까무러치기도 했다. 음식을 먹을수 없었고 밤이면 가슴을 저미는 통증에 한숨도 못 자고 고통에 시달렸다. 그는 이제 자기가 이생에 남아있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걸 알았다.    정씨는 스스로 병원에 전화를 걸어 방을 예약했다. 그리고 전에 안면이 있던 변호사를 자기 집으로 불렀다. 수중의 돈을 세몫으로 나누어 유서와 함께 변호사에게 맡겼다. 그리고 그걸 자신이 운명한 뒤에 처리해줄것을 간곡히 부탁했다. 정씨가 “친친양로원”에 들어갈 때 보모도 같이 갔다. 보모는 가족의 이름으로 매일 그의 병실을 떠나지 않았다. 전문 간호사가 있어 그럴 필요가 없다고 해도 그녀는 고집을 부렸다. 정씨의 큰아들이 그런다고 보모비는 더 줄수 없다고 하자 그녀는 알고있다고 했다.    거기에 들어간지 열흘째 되던 날, 정씨는 아침에 보모에게 뭔가 눈짓을 해왔다. 보모가 목욕하고싶은가고 묻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젠 말하는것조차 어려운 정씨였다. 헌데 그를 맡은 간호사가 다른 일로 밖에 나가고 없었다. 간호사를 기다리다가 정씨가 잘못되기라도 할가봐 보모는 자기가 해드리겠다고 나섰다. 원장님의 동의하에 그녀는 정씨를 안고 방 한옆에 딸린 욕실에 들어갔다.    그녀의 손에서 깨끗한 모습이 된 정씨는 침대에 누워 그녀를 향해 고개를 끄덕여 고맙다고 했다. 그녀는 말도 못하고 힘들어하는 정씨가 너무 안쓰러워 그의 손을 두손으로 꼭 잡아주었다. 그리고 한시간쯤 지났을 때, 그녀한테 손을 잡힌채 정씨는 조용히 아름다운 하늘나라로 떠나갔다.   리별 뒤에 남는건 정뿐이였다. 정씨의 큰아들은 슬픔에 잠겨있는 그녀에게로 다가와 그동안 고마웠다고, 무조건 아버지의 유언에 따르겠다고 했다. 너무 슬퍼서 우느라 그녀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듣지 못했다.   며칠후, 보모의 아들은 학교에 날아온 한통의 문서를 받았다. 정씨가 생전에 공증처에 위탁해서 보낸 집문서였다. 정씨는 자기의 이름으로 된 집을 보모의 아들 이름으로 변경해놓았었고 이미 공증도 마친 상태였다. 집문서속에는 정씨가 직접 쓴, 멋진 서화체로 쓴 쪽지가 한장 들어있었다.   “…너의 엄마랑 함께 보낸 시간들은 짧았지만 내 마지막을 함께 해준 너의 엄마에게 해줄수 있는게 이것밖에 없구나. 허름하나 많은 추억이 깃든 이 집에서 엄마랑 행복하기를…”   도라지 2015년 제4호
1    [단편] 누가 쏜 화살인가 댓글:  조회:1649  추천:0  2015-06-06
단편소설   누가 쏜 화살인가 김옥희   늦은 오후, 추적추적 내리는 비는 멎을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누가 쏜 화살이 하늘을 밑창냈나보지. 녀자는 요즘 자기 사고방식이 다 이런식으로 생뚱맞다는 생각을 하며 창밖을 내다보았다. 이러기를 벌써 다섯번째다. 급기야 녀자는 화가 난듯 서둘러 가게문을 닫아버렸고 집을 나섰다. 이렇게 갑자기 거리에 뛰쳐나가야 하는 확실한 리유란 없었다. 다만 오늘처럼 무작정 거리에 나서는 날은 그저 거침없이 거리를 활보하는것만으로도 기분이 날아갈것 같았다. 특별한 목적지가 없다는게 좋았고 무작정 길을 따라 걷고 또 걷고, 뭐 하나 거칠게 없다는 자유로움, 그런 단순한 삶의 순간들이 맘에 들었다. 언제부터인가 녀자는 이런 리듬을 즐기기 시작했다. 문득 녀자는 작년 이맘때 등산 갔다가 나무가지우에서 석양이 부드럽게 타고있는걸 보았던 기억이 났다. 벌써 1년전 일인데 어제일처럼 생생했다… 그날, 비술나무가지에 머물러있던 노을은 얼마나 남달랐던가. 오랜만에 눈여겨본 노을빛, 하늘 가득 물들인 그 고운 빛의 신비로운 조화, 그걸 보고있으려니 느닷없이 가슴밑바닥으로부터 이름모를 전률이 일며 온몸을 쿵쿵 관통하는 소리가 들렸었다. 참 오랜만에 경험해보는 신선한 피의 흐름, 충격적이였다. 40대초반인 녀자는 열여덟살 사춘기소녀의 엄마이기도 하다. 녀자는 자신의 가슴 어디에 20대들만의 특허인 이런 싱싱한 젊은 피가 남아있었을가 궁금했다. 그는 주위를 휘익 둘러보았다. 마침 산자락엔 눈에 띄는이가 아무도 없었다. 녀자는 한바탕 소리라도 지르지 않고서는 도무지 이런 충격을, 농축된 즐거움의 비명을 수습할수 없다는걸 알고있었다. 오랜만에 찾아온 내심의 격정을, 그 넘치는 정열을 핑게 대며 녀자는 하늘을 향해 두팔을 벌리고 서서 하하호호 소리내서 웃기 시작했다. 허파에 바람이 들 때까지 녀자는 그렇게 소리내여 넋나간듯 웃었다.  가슴이 터지도록 채워오는 정열을 웃음으로 씻어낸 녀자는 아무 일도 없었던듯 씁쓸하게 산을 내리며 홀로아리랑을 흥얼댔다. 모처럼 기분 좋은 등산길, 호젓한 산중에서 이게 웬 주책이냐 할 사람도 없고. 녀자는 그게 너무 좋아 죽겠다는 표정을 지어보았다. 아무도 나를 본 사람은 없겠지. 보면 또 어때? 녀자는 가슴을 쭉 펴고 씩씩하게 걸었다. 홀로 하는 등산의 묘미가 바로 이런거구나 하는 생각으로 서서히 산을 내리는데, 누군가 녀자의 앞을 딱 가로막는게 아닌가. 아니, 가로막은게 아니라 누군가 녀자의 앞에 서있었다. 바위처럼 크고 단단한 몸체-녀자의 눈엔 그렇게 보였다. 40대후반의 남자였다. 등산객? 아니, 갑자기 하늘에서 내려왔나, 땅에서 솟았나. 산에서 사람을 만나는것만큼 두려운건 없다더니. 녀자는 더럭 겁이 났다. 하필이면 이렇게 좁은 등산길에서 만나다니. 태연히 지나치려 하는데 왜 숨이 멎는거지? 빨간 등산복이 썩 잘 어울리는 남자가 살짝 옆으로 비켜서며 길을 내여주건만 녀자는 여전히 등골이 서늘했다. 녀자에게 먼저 길을 내주는 사람이면 어느 정도 례의는 갖춘 사람이라 생각되여 얼마간 안심은 되였지만 방심할순 없었다. 인적없는 산중인데다 날도 저물어 무서운 마음에 심장박동이 례사롭지 않았다. 어서 가. 빨리 여기서 빠져나가야지. 걸음아 날 살려. 녀자가 그렇게 마음을 추슬리며 부랴부랴 몇걸음 옮겼을 때였다. 《저기요.》 남자가 불렀다. 고개도 돌리지 않은채 녀자는 그 자리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이젠 죽었구나 하는 생각이 지배적이였다. 《저기요. 사람이 불렀으면 대답을 해야지…》 그 소리는 아득히 먼 곳에서 들려오는 메아리 같았다. 《내 말 무시합니까?》 《그게 아니라… 그게 그러니까…》 녀자의 두다리가 사시나무 떨듯 했다. 《이리 오십시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남자가 되려 녀자쪽으로 다가왔다. 《꼼짝 마요! 제발 오지 마세요!》 녀자의 놀란 동공속으로 거쿨진 남자의 체구가 날아들었다. 어느새 녀자의 손엔 작은 과일칼이 들려있었다. 어느 경황에 가방안에서 그걸 꺼내 손에 꼬옥 쥐였는지 녀자 스스로도 알수 없는 일,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나마 호신용으로는 그것밖에 없었으니. 남자는 두눈이 휘둥그래서 녀자가 쥔 앙증맞게 작은 과일칼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앙천대소하는게 아닌가. 《왜 그래요? 왜 웃어요?》 《당신이 웃기니까 그러지.》 또다시 한바탕 웃고나서 남자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제야 마주보니, 남자는 눈빛이 선했다. 험상궂지도 밉상도 아닌, 반듯한 외모에 목소리 또한 아나운서처럼 부드럽고 웅글졌다. 보아하니, 나쁜 사람은 아닌듯 했다. 그런데 왜 웃지? 기분 나쁘게. 녀자는 갑자기 심기가 불편했다. 오로지 이 자릴 떠나야겠다는 생각, 그 생각이 등을 떠밀자 녀자는 차갑게 한마디 내뱉었다. 《가던 길을… 가셔야죠.》 《그래야 하는데…》 《뭐예요?》 녀자의 신경이 날카로워진걸 느꼈던지 남자가 그제야 정색을 했다. 《사실… 머리우에 엉뚱한 녀석이 점잖게 앉아있습니다.》 《네? 내 머리우에요?》 《그럼 내 머리우겠습니까? 내 머리우를 거울도 없이 내가 어찌 본다고…》 《뭐예요? 벌… 벌레요?》 남자가 고개를 끄덕이자 녀자는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어쭈, 그놈 생각보다 고집스럽네. 안떨어질려구 기를 써요. 기를…》 녀자는 기겁을 하며 다시 세차게 머리를 흔드는데 눈앞에 불꽃이 일었다. 남자의 말이 혹시 거짓말? 나에게 접근하려는 허튼 수작? 녀자는 남자의 말이 미덥지 않아 슬며시 자기의 머리우를 만져보았다. 생각보다 엄청 큰 벌레였다. 손끝에 느껴지는 길고 껄끄러운 털의 촉감, 벌레는 머리줄을 따라 녀자의 목덜미쪽으로 직진하고있었다. 녀자는 미칠것만 같았다. 오. 하늘이시여! 《도와주세요. 제발…》 녀자가 눈을 딱 감고 애원했다. 그러자 남자는 성큼 다가와 녀자의 머리우에서 벌레를 떼내여 나무가지우에 살며시 놓아주었다. 《왜 놓아줘요?》 《잘 모르지만 해충을 잡아먹는 좋은 벌레일수도 있으니까요. 벌레도 생명인데 함부로 죽이거나, 해쳐서도 안되지요…》 《좋은 사람인것 같아요.》 《사람을 쉽게 믿는군요. 그러면 마음이 다치는데…》 《그게 아니라… 아무튼 고마워요. 난 기겁해서 죽는줄 알았는데…》 녀자가 피씩 웃는데 남자도 따라 웃었다. 둘이서 산을 내리는 동안 그들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산행을 좋아하느냐, 주로 어느 산에 오르느냐, 산에서 먹는 음식가운데 제일 맛있는게 뭐냐… 하는 별로 중요하지도 않는 그런 가벼운 대화를 나누는 사이, 저도 모르게 친절하고 따뜻한 뉴대감이 생기며 서로의 시선을 부드럽게 해주었다. 혼자보다 둘이서 하는 산행이 좋아보였다. 녀자는 사람의 마음이 이렇게 어처구니없는 사소한 일로도 달라질수 있다는게 새삼 신기하기도 했다. 어디에 사는 누구인지도 모르는 남자, 그건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서로 헤여져 갈길을 가고 다시 자신들만의 일상으로 돌아갔지만 녀자는 알수 있었다. 그 일말의 풀벌레와 남자, 그들이 남긴 첫인상은 컸다. 벌레도 생명이니 함부로 죽이거나 해쳐서는 안된다던 남자, 그뒤로 한번도 그 산에 간적은 없지만 그해 겨울이 다 갈 무렵, 나무잎이 다 떨어져버린 라목을 바라보며 녀자는 그가 지금도 그 산에 오를가를 열번도 넘게 생각하고 또 생각해보았다. 그리고 손님이 드물어 가게가 한가한 시간, 콩나물을 다듬던 손을 멈추고 녀자는 자기 머리를 매만지며 그날의 정경을 되새기군 했다. 그러는사이 1년이 훌쩍 흘렀다… 하늘 가득 내리던 비는 거짓말처럼 멎었다. 어느새 녀자의 발길은 1년전의 그곳- 등산길 낮은 산언덕에 머물러있었다. 산천은 변함없는데 싱그러운 풀향기만 코끝을 즐겁게 한다. 작년 이맘때, 강아지풀이 유난히 많았던 작은 산언덕, 모든게 그대로였다! 찬바람이 불어오고 모든 풀들이 스러지는 그때까지 두치 정도밖에 자라지 못하는 난쟁이로 끝끝내 꽃술줄기를 피워올리는 강아지풀, 제 씨를 뿌리고 죽겠다는 강인한 생명력, 그 지독스러움, 그 경이로움… 참 놀랍다. 녀자는 강아지풀을 볼 때마다 놀라는 자신이 더 신기하고 한심해서 피씩 웃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가. 녀자는 고개를 들었다. 억척스레 강아지풀을 뜯느라 벌써 주위에 어둠이 내린줄도 몰랐다. 하늘을 향한 녀자의 시야 가득 황홀한 석양빛이 어룽거렸다. 이제 밤의 등산길이 좋아질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다나만 아니라면 이렇게 밤산행을 즐기고싶었지만 아직은 그럴수 없었다. 다나, 정확히 윤다나- 열여덟살 고중생 다나는 녀자에겐 금쪽 같은 새끼요, 유일한 피붙이였다. 다나가 3살일 때, 50대 시부모가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고 일년도 안돼 남편도 하늘나라로 떠났다. 그것도 외지로 출장가던 길에 허망하게도 기차에서 숨이 멎었던 남편, 심근경색이였다. 그것이 그렇게 무서운 병인줄 알았을 때 녀자는 이미 과부가 돼있었다. 그후 다나랑 둘이서 십오년세월을 서로 의지하며 살아왔다. 때로는 자상한 엄마이기도, 때로는 털털한 엄마이기도, 그렇게 세월의 냄새에 길들여지는 동안, 어느새 중년이란 불혹의 시간을 맞게 됨을 녀자는 외면할수 없었다. 길지도 짧지도 않은 그 세월을 견뎌내며 살아온 세월의 부피만큼이나 녀자와 다나, 두 모녀는 서로의 존재와 의미를 가슴으로 느끼고있었다. 다나, 살아오는 동안 그것 하나만을 위해 그 어떤 녀자보다도 억척스런 엄마로 변신한 자신의 모습을 한번도 후회하지 않았던 녀자다. 지금의 녀자에겐 먹고 살아야 하는것만큼 절실한것이 없었다. 먹고 살기 위해선 잡초가 된다 해도 괜찮았다. 녀자는 다나만 있으면 더이상 다른걸 생각할수가 없었다. 그만큼 다나의 존재는 녀자에겐 인생 그 전부였으니… 다나가 집에 돌아올 시간까지 한시간쯤 남아있었다. 서둘러 산을 내려야 그 시간에 맞출수 있다는 생각이 녀자의 걸음을 다그치게 했다. 산은 올라올 때보다 내려갈 때가 훨씬 힘들었다. 두다리가 휘청거렸고 가끔 땅에 희미하게 드리운 나무가지들에 꼼짝없이 발이 걸리군 했다. 산을 내리며 녀자는 오늘은 앞을 막는 사람이 없다는게 조금은 서운하다는 생각을 했다. 아까부터 혹시 이번에도 산중에 그가 나타날가, 나타나면 그건 우연이겠지. 혹 만날지 모르지만 만나면 참 반갑겠다, 난 이런 마음인데 그 사람은 전혀 그게 아니라면 나만 이상해지겠지? 그런 생각이 녀자의 가슴을 기대 반, 실망 반으로 초조하게 만들었다. 산을 내리니 눈앞은 아스팔트길이다. 어둠이 깃을 펴는 산자락을 내려서면 넓고 환하게 펼쳐진 신작로, 지금은 오가는 차량들이 밤에도 줄을 잇고있어서 이맘때면 거리는 언제나 차들의 헤드라이트불빛과 가로등불빛이 한데 어우러져 은은하다. 그속을 녀자는 홀로 걷고있었다. 잠시나마, 아주 잠간이나마 어떤 스쳐가는 인연에 발목이 잡혀있었던 자신이 스스로의 생각에도 민망하고 한심하고 어처구니없었다. 다나가 알면 또 뭐라 핀잔주겠지? 엄마, 그까짓 한번 만난 사람, 엄말 기억이나 해주겠어? 그런 사람을 찾아 온종일 산중에서 헤맸단 말이야? 나처럼 사춘기두 아니고 왜 그래? 하긴 녀자는 40대에 두번째 사춘기를 겪는다고는 해. 그렇다구 그렇게 허망하게 만난 사람, 뭘 믿구 찾아간거야? 울 엄마 요즘 련애하고싶은가봐. 그런거야? 아니, 그게 아니라니까. 나 오후에 갔어. 비는 한정없이 내리고 가게에 손님은 없고. 그래서 산책하러 간거야. 강아지풀? 갑자기 그게 그렇게 보고싶어진거야. 그래서 간것뿐이야. 헌데 엄마, 암만 생각해두 그게 이상하잖아. 다른것두 아니구 왜 하필이면 강아지풀이 보고싶었을가? 그것두 비오는 날에… 너무 로맨틱하지 않어? 글쎄, 그건 나두 모르지, 그게 왜 갑자기 보고싶어졌는지… 엄만 1년전 산에서 만났다던 그 아저씨가 보고싶어 산에 간건가? 얘는 말도 안돼. 딱 한번 만났던, 그것도 우연히 등산갔다가 마주쳤던 사람인데 내가 왜? 그렇게 간절하게 보고싶었으면 1년이나 지난 뒤에 가? 벌써 수십번이나 다녀왔지. 너 정말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제발… 헌데 엄마, 엄마 얼굴을 보니  화내는것 같아. 화를? 내가 왜 화를 내. 그것두 끔찍하게 사랑하는 내 딸한테. 내 눈엔 그렇게 보이는데? 아니야. 너 한창 사춘기라 모든걸 예민하게 받아들여서 그래. 정상이야. 아무 이상없어. 지금까지 우리가 만들어온 우리 모녀 둘만의 사는 모습, 너무 근사하지 않았어. 우리 딸? 그때, 녀자는 어느새 훌쩍 커버린 딸애옆에 서있는 작고 초라해보이는 자신을 발견하곤 몸을 움찔했었다. 우리 딸 언제 이렇게 컸어? 다나, 그는 168센치의 늘씬한 키를 가진, 학교에서도 소문난 얼짱이요, 명문대를 바라보는 공부짱이다. 언젠가 밤늦게 학교에서 돌아오는 다나랑 오랜만에 온천사우나에 간적이 있었다. 모녀 둘만의 기분전환 방식치곤 꽤 근사한 장소였다. 다나야. 넌 왜 너또래 애들이 그렇게 많이 돋는 청춘여드름도 안나니? 글쎄, 아직 미숙해서 그런가? 호호호… 다나는 어깨까지 들썩이며 웃어댔다. 누가 소똥이 굴러가도 웃을 때가 아니랄가봐서. 너 젊은게 부럽다. 엄마두 젊구 이뻐. 아직… 엄만 40대야. 언제 이렇게 나이 먹구 주글주글해졌는지 모르겠다. 이 손등을 봐. 너무 고생해서 그래. 나때문에. 그래, 널 위해서 내가 못할게 뭐 있겠니. 먹구 살기 위해 잡초가 된다 해도 후회는 없어. 잡초? 난 그게 싫은데. 나 힘들게 감자탕가게를 한지 벌써 10년 넘었어. 그동안 별 보잘것 없는 사람들한테두 당하구, 잘난 놈들은 잘난대로 사람 무시하구… 참 내가 많이 초라해보였는데. 나중에… 정말 나중에 생각해보니까 괜찮아지더라구, 이 모든게 너랑 나랑 먹구 살기 위해선, 잘 먹구 잘 살기 위해선 반드시 거쳐야 할 고비다… 그렇게 생각하니 훨씬 마음이 편해졌지… 난 다 알아. 엄마가 힘들고 고달팠던거. 생각하면 나 엄마땜에 가슴 아픈적 많았는데. 이제 커서 어떻게 엄마한테 잘하지? 어떻게 하면 엄마가 내게 준것, 그 반이라두 갚을수 있을가 걱정되기두 하구… 쓸데없는 걱정은 하지 마. 그 시간이면 한글자라두 더 보겠다. 엄마, 내 말 롱담 아니야. 난 지금 내 마음을 심각하게 표현하구있는거야. 알았어. 헌데 그건 부질없는 생각이야. 엄만 지금이 좋아. 이렇게 우리 모녀가 아무 걱정없이 편하게 살만큼 됐다는게 너무 좋아. 너 알아? 지금 우리 사는거 정상이야. 모든게 다. 하지만 미안한데 엄마, 난 말이야. 이젠 정말 그 정상이란것에서 해탈되고싶어. 우리 인생에 뭔가 엄청난 사건이 일어났으면 좋겠다구. 사건? 그것두 엄청난? 너… 너 왜 갑자기 머리 뜨거워졌어? 요즘 너무 공부만 하더니 머리가 어떻게 된거 아니야. 열이 나? 아니야. 나 멀쩡해. 헌데 왜? 우리가 이렇게 사는데 불만이라도 있어? 불만까지야 뭐, 엄마, 나 공부를 열심히 해서 엄마가 바라는대로 반드시 명문대학에 갈거야. 맹세해. 이제 고작 1년 남았어. 난 이제 엄마옆을 떠나게 돼있어. 우리가 함께 있을 시간이 단 1년밖에 안남았는데 엄마, 내가 그렇게 훌쩍 가고나면… 엄마는? 엄마는 어떡해? 어떡하긴. 엄만 엄마대로 어깨에 실린 무거운 짐 하나 덜었으니 얼마나 다행스럽구 기쁘겠니. 아, 우리 딸 이제 자신의 봄꿈을 찾아 날개짓을 하며 훨훨 하늘을 날수 있게 됐구나, 엄마로서 내가 해줄건 여기까지다. 그러니 이제 나는 나대로 내 방식대로 살면 그만이다… 그렇게 생각하구 살면 되지. 헌데 그게 아니잖아! 엄만 그렇게 못하잖아! 제발 그래줬으면 좋겠는데 엄만 그걸 못하는 바보잖아. 엄마는 평생 나 하나만 바라보며 그렇게 살거잖아! 아니야. 너 아직 엄마를 잘 몰라. 엄마가 그동안 너만 바라본건 그래야 되기때문이였어. 엄마나 아빠를 훨씬 초월해 기막히게 공부 잘하는 내 딸, 아빠도 없는 그 빈자리에, 반듯한 엄마라도 지켜주지 않으면 네가 너무 가여울가봐, 그래서 그러기로 한것뿐이야. 엄마?! 이제 네가 대학가면 엄만 허구한날 너만 그리워하며 그렇게 살순 없잖아. 내가 그러면 네가 얼마나 걱정이겠어? 엄만 네게 그렇게 큰 짐이 되는거 정말 싫거든. 그래서 마음먹었어. 충분히 나만 생각하며 그렇게 살거라구. 네 말이 맞아. 우리 생활에 뭔가 화끈한게 부족해. 그러니 변화라두 주자구. 엄만 너 대학간 뒤에 좋은 남자친구라두 있으면 사귈거야. 아빠한텐 많이 미안한 일이지만 너만 반대 안하면 그럴려구 해. 결혼까지는 아니더라두 내게 애인이라두 있으면 우리 딸 근심을 안할거니까. 엄마가 그렇게 못할줄 다 아는데 허풍치지 마. 허풍? 허풍 아닌데. 우리 딸이 원하는 일이면 애인 하나 사귀는거 시간문제야. 엄마, 엄마답지 않게 애인타령까지 다 하구. 진짜 변한거야? 엄마다운게 뭔데? 그건? 허지만 제발 그렇게 됐으면 좋겠어. 지금 나만큼 되는 딸애를 둔 엄마들을 봐. 다들 신나게 자기 삶을 즐기고있는데 엄마는 뭐야. 맨날 감자탕가게에서 떠날줄 모르고. 이 손을 봐. 일하는 손치구 이렇게 망가졌을수가. 너무 속상하단 말이야. 내가 죄짓는 기분이 들어. 왜 이래? 이래뵈두 이 손 보배손이야. 너 알지? 이 손으로 우리 통장에 거금이 들어있는걸. 너랑 나, 그 돈이면 일생 사는거 문제없어. 호- 그래두 엄마가 웃으니 기분 좋네. 부탁인데 이제 나머지 인생도 이렇게 웃으며 살아줘, 엄마. 40대 사춘기를 놓치지 마. 좋은 남자랑 련애도 하구, 녀자몸으로 고달프게 돈만 벌지 말고 이제 남자 돈도 좀 써보고 그것도 한번 해볼만 하잖아. 이쁘게 입구 근사한 남자랑 어울려 등산도 다니고, 이런 사우나에도 가고, 려행도 나란히 같이 가고, 아예 그림이 딱 나오네. 그림? 너무 환상적이지 않아? 그래야 제맛인거지. 그래야 나도 시름놓고 련애를 하든지말든지 할건데. 하. 이제야 너 그 본심을 알겠다. 엉뚱하긴. 헌데 엄마, 엄마입에서 애인소리두 나오고. 엄마한테 이런 면이 있었다니? 놀랍구 신기해. 울 엄마 이런 씩씩한 엄마였나? 헌데 난 왜 여태 몰랐지? 네가 긴가민가 하는거 알아. 하지만 한가지는 믿어. 내 생각이 이러니까 아직 좋은 인연을 못만나서 그렇지 나도 내 인연이 다가오면 붙잡을거야. 제발 그래야 하는데… 뭐야? 호호호… 지나가는 택시를 불러세웠다. 다나가 올 림박에 집에 다다를수 없을것 같아서였다. 달리는 차창에 비낀 녀자의 반쯤 숙인 이마가 인상적이였던지 50대초반으로 보이는 택시기사가 말을 걸어왔다. 《요즘엔 밤에 등산을 즐기는 등산객들이 점점 늘고있습니다.》 《그래요?》 《모르셨어요?》 《저는 산엔 별로 안다니는지라…》 《네. 올 봄 산중에 가로등을 설치해놓은 뒤로 밤에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부쩍 많아졌답니다. 등산객이 너무 많아서 무섭기는커녕 시끄럽다나요. 비오는 날이라구 례외는 아닌가봐요. 오늘 벌써 세번째 손님인걸요.》 《그래요?》 녀자는 하마트면 혹시 손님중에 빨간 등산복 입은 남자 보셨어요 할번 했다. 녀자는 자신의 속내가 드러날가 두려워 화제를 돌렸다. 《저기 보이는 다리가 연신교가 맞아요?》 《네. 멀리서 보면 저렇게 작아보입니다. 뚝을 새로 한 뒤로는 물도 제법 많아지고 수심도 깊고. 저 강때문에 이제 이 도시도 강을 낀 도시라는 말을 듣는다고 들었습니다. 》 그렇게 시작된 기사아저씨의 말은 끝도 없이 길어지기 시작했다. 연신교아래 흐르는 강, 그 강은 녀자에게도 남다른 의미의 강이다. 사는 동안 지치고 힘들 때마다 찾아가던 강이다… 매번 녀자는, 그저 담담하고 초연하게 제 모습을 갖추어 흐르고있는 강을 바라보군 했었다. 깊은 침묵의 강, 녀자는 천지간에 딸-다나랑 단둘이라는 그같은 외로움에 우울했고 슬펐었다. 그것은 오랜 세월에 거친 일깨움이기도 했었다. 때로는 그 강을 사이두고 넓게 훤하게 펼쳐진 들판을 바라보기도 했다. 봄날의 싱싱한 들판, 그걸 보고있으면 저도 모르게 느껴지는 꿈결같은 평화가 례사롭지 않았다. 들판에선 소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고있었다. 이 들판에 주인은 없는듯, 주인 없는 들판의 봄은 유난히 현란했었다. 사람이 없이도 계절은 바뀌고 꽃은 피는것이다. 녀자는 그렇게 느끼는 봄기운에 용기를 얻으면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 감자탕집 마담답게 팔소매를 걷어붙이고 억척스런 본연의 자기를 되찾곤 했었다. 입은 옷은 이미 충분히 람루하건만 마음만은 봄향기로 가득해서 말이다. 그런 날이면 《감자탕 한그릇입니다-》 하고 길게 웨치는 그 소리에도 커다랗게 물이 올라있었다. 감자탕집, 거기엔 세월과 싸운 당당함과 너그러움이, 또 외로움이 깃든 중년의 그녀- 다나의 엄마가 있을뿐이였다… 혼자 말하던 택시기사가 무안한듯 어느새 입을 다물고있어서 녀자는 조금 미안했다. 이 녀자 왜 갑자기 침묵이지? 하는 기사량반의 의아해진 눈총을 외면한채 녀자는 피곤하다는듯 두눈을 꼬옥 감았다. 그러자 환영인듯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다. 그 사람도 1년전 그날이후론 쭈욱 등산하러 안나간 모양이지? 그렇게 믿고싶어졌다. 녀자의 이런 궁금증은 이제 서서히 구체적이고 확실한데로 치닫고있었다. 그 남자, 빨간색 등산복이 너무 잘 어울리던 남자, 어디 사는 누구지? 어쩐지 낯설지 않구 아는 사람 얼굴 같은데 대체 누구지? 그 사람 나처럼 아들이나 딸 하나 데리구 혼자 사는 남자일수도 있잖아. 같이 살던 녀잔 하늘나라에 계실가? 아니면 혹시 리혼? 에이, 이게 뭐냐. 윤다나 엄마가. 지금까지 십오년이나 윤다나 엄마로만 사는데 만족했는데 왜 갑자기 이렇게 생뚱맞은 남자에게 관심이 다 생기구,  웬 운명에도 없던 욕심을 부리고 란리야. 다나야. 엄마가 오늘 왜 이럴가. 아마도 넋이라두 나갔나봐. 다나야. 이건 분명 엄마두 인젠 몸도 마음도 다 늙어간다는 징표일거야. 어떡해. 나 아직 이러면 안되는데. 우리 다나 아직 물가에 내놓은 애인데 엄마라는 사람이 이렇게 약해진 모습 보이면 안되잖아. 다나야. 엄만 오늘 막 속상해질려구 그런다. 다나야. 사랑하는 엄마 딸! 그날 밤. 《엄마, 차 한잔의 여유, 어때?》 《좋지.》 《자. 엄만 커피, 난 록차.》 《늦어서 미안해, 네가 오기전에 도착할려구 했는데…》 《미안하긴, 내가 뭐 어린앤가. 헌데 엄마, 산에 갔었나보지.》 《어떻게 알았어?》 《신을 보구 알았지. 그 싱그러운 흙냄새.》 《들켜버렸네.딸년한테.》 녀자는 뜨거운 커피잔을 받아들고 소녀처럼 호호 불었다. 《아까 가게에 밥 먹으러 갔었는데 문이 잠겨있더라구.》 《그랬어? 혼자 갔었니?》 《아니, 커플하구 둘이서.》 《커플? 너 커플 생겼니?》 녀자는 쥐고있던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응.》 《언제?》 《래일이면 한달.》 《그래? 벌써 그렇게 오래됐어. 헌데 왜 말을 안했지?》 《그냥. 다른 뜻은 없구, 그냥.》 《비밀로 하구싶었구나. 나한텐.》 《역시 내 엄마다. 아이큐가 높다니까.》 《너 지금 엄마가 가방끈 짧다구 무시하는거지.》 《왜 이래. 공연히 삐지면서.》 《글쎄 네가 나한테 언제 비밀 같은게 다 있게 됐냐구.  안하던짓 하니까 엄마 슬슬 기분 나빠질려구 그런다. 그래두 탄백안해?》 《커플이 있다는게 뭐 별건가?》 《별것 아닌게 아니잖아. 비밀이라며?》 《아니야.》 《너 지금 엄마 무시하니? 가방끈 짧은 사람이 알면 얼마나 알가. 이런거야?》 《리론과 실제가 다를수도 있다는걸 깨우치지 못한걸 보니 울 엄마 아직도 학생티를 벗지 못하셨나봐. 엄마, 우리 같이 처음부터 다시 공부할가?》 《다나, 너 잘했어. 엄마가 기분 나빠하는데두 흥분하지 않구, 그 흔들리지 않는 여유, 부럽다, 엄마는…》 《엄마, 나 이런 면, 멋있었어? 터프해?》 《그래. 어유 잘난것!》 녀자와 다나, 모녀의 대화는 언제나 이런 식이다. 공방전이 따로 없었다. 어느해였던가. 감자탕에 들어가는 갈비를 잘못 들여와 장사가 엉망이 됐던적이 있었다. 그러잖아도 여름철이라 장사가 잘 안되던 판국에 그런 사건까지 겹쳐 녀자는 눈앞이 깜깜해서 울상이 되였는데, 그때도 다나는 엄마의 어깨를 감싸안으며 이웃가게에서 다 듣게 큰소리로 괜찮아를 련발해서 소문이 났던것이다. 《엄마, 한번 실수는 병가상사(兵家常事)래. 우리 이제부터 각별히 조심해요. 그까짓거.》 《그까짓거 아니야.》 《그러면 또 어때. 엄마, 우리 한번 실수에 연연해하지 말자. 응? 그건 이미 엎질러진 물이니까.》 《허지만…》 《그래, 엄마 마음 다 알아. 하지만 실수앞에서 당황해하며 우물쭈물한다면 나중엔 더 큰 실수를 부를지도 몰라. 이제 우리 엄마 이런 실수 두번 다시 하지 않는다! 오케이?》 《오케이.》 그날 밤, 다나는 베개를 안고 녀자의 이불속에 기여들어와 누웠다. 자신의 따스한 온기로 상처입은 엄마 마음이 치유될수 있기를 바라며. 밤새도록 잠 못이루는 엄마의 등을 다나는 꼬옥 감싸안았다. 《생각보다 엄만 몸매 좋네.》 《어쩐지 날씬하다는 말로 들린다.》 《그래. 맞아.》 《나 위로하느라 애쓰지 마. 나 괜찮아.》 《그래. 엄만 잘할수 있어. 이번엔 운이 나빴던거야.》 《…》 《누구든 다 겪는 시련이야. 나중에 성공하면 나 모른척 하지 마.》 녀자는 딸애 말에 저도 모르게 피씩 웃었다. 《왜 웃어?  롱담 아닌데.》 《엄마 말이다. 평소에 늘 하던것도 제대로 못하는 엄마가 이제 뭘 더 할수 있겠어?》 《처음부터 성공하면 재미없잖아. 극적인 반전이 더 스릴 넘친다고. 그러니 엄마, 우린 극적인 반전! 그걸 노리자구!》 《그만해. 지금 엄만 여기저기 다 아파. 귀찮으니까 네 방에 가서 자.》 《사람은 다 아파, 이제 건강해지면 엄마, 나랑 데이트하자.》 《싫어. 시간이 없어. 엄마 돈 벌어야지.》 《엄마가 지금 뭘 말하는지 하나도 안들려. 그렇게 목소리에 기운이 없어서야 무슨 힘으로 감자탕을 팔아요. 엄마, 요즘은 호랑이한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호랑이가죽까지 얻을수 있다고 해. 그러니…》 《엄마, 힘내세요. 다나가 있잖아요. 엄마. 힘내세요. 다나가 있어요…》 이럴때 보면 다나의 노래는 가수못지 않은 수준급이다. 감정이나 표정연기도 더이상 좋을수 없을 정도로 거의 완벽에 가깝다. 매번 위기에 빠진 엄마가 당황해하면 다나는 이런 여유로 엄마 마음을 감싸주고 어루쓰는데 참으로 능숙한, 속내 깊은 18세 소녀였다. 녀자도 알고있었다. 다나랑 대화를 하면 기분이 좋아진다는걸. 아무리 렬악한 상황일지라도 말이다. 딸은 사람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재주가 있었다. 녀자는 친구 같은 딸이 옆에 있어서 정말 다행스럽고 든든하다는 생각을 늘 했다. 《엄마두 커플 있어야 하는데. 나처럼. 그래야 질투 안하구 우리 두사람 이뻐해줄건데.》 《커플? 이 나이에 커플은 무슨…》 《커플은 나이랑 상관없어. 지금은 70대 할머니들두 커플을 찾는다는데, 우리 엄마 생각하는게 너무 아닌게 아닌가?》 《헌데 생각한다구 다 되는게 세상 일 아니잖아. 난 포기다. 너나 잘하세요.》 《내가 소개해줄가? 정말 괜찮구 근사한 사람인데…》 《아빠가 하늘나라에서 굽어보시며 섭섭해하실거야.》 《아빠도 엄마가 이렇게 오랜 세월 외롭게 사시는걸 원하지 않을거야. 여보당신, 이제 그만해도 돼, 이럴거란 말이야.》 《그래도 안돼.》 《이번 학기에 새로 오신 영어선생님이셔. 키도 늘씬하고, 성격도 부드럽고, 나이도 엄마랑 비슷하고, 딱 엄마가 좋아하는 타입이야.》 《너 자기 선생님을 엄마한테 소개시킨다고? 그게 무슨 배짱이니?》 《너무 좋은분이시니 그러지. 벌써 말씀드렸는걸.》 《뭐라구?》 《이번 주말에 우리 감자탕가게에 오신다고 했어. 나랑 같이 오기로 약속했단 말이야. 그러는 선생님, 40대치곤 너무 화끈하지 않아?》 《너… 왜 시키지도 않은 일을 저질러.》 《엄마가 그랬잖아. 등산 가보면 빨간색 등산복을 입은 사람들이 제일 멋져보인다고.》 《내가 언제?》 《웬 건망증? 그럼 내가 어찌 알아요. 등산하러 한번도 못가본 내가.》 《그래서?》 《우리 선생님 언제나 빨간색 등산복을 입고계시거든. 혹시 알아? 엄마가 등산길에 만났다던 그 남자인지?》 《아예 소설을 써라. 소설을!》 《엄마가 딱 한번의 등산길에서 만났다던 그 남자, 1년이 넘도록 잊혀지지 않아 다시 찾아간 그  남자, 오늘 만나지 못한게 분명한데. 그러나 아직 실망하기엔 너무 이른것 같아. 우리 선생님이 혹시 그 남자라면, 물론 이건 가상이지만, 모르잖아. 두사람의 인연이 천연이라면, 그리고 두사람은 과부에 홀아비니, 이거야말로 금상첨화다 이거지 뭐.》 《그런것까지 알아냈어? 선생님이 홀아비라는것, 확실한거야?》 《왜? 안된다더니. 갑자기 관심이 생겨?》 《너…》 《아무튼 나 할수 있는거 여기까지야. 엄마, 나중에 잘해봐. 파이팅!》 《몰라.》 그 주말에 다나의 영어선생님은 약속대로 녀자의 감자탕가게에 왔다. 바로 1년전 그 빨간색 등산복차림 그대로 말이다. 오, 하늘이시여, 이런 인연두 있나이까. 헌데 다나는 보이지 않았다. 공부때문에 못나왔다는것이다. 《등산외에도 테니스가 취미라구요?》 《네.》 《테니스에 대해선 잘 모르지만 저도 꼭 배우고싶은 운동의 하나였는데.》 《그래요? 건강에 테니스만큼 좋은 운동도 없는데. 배워보시지요.》 《글쎄 기회가 있으면… 헌데 테니스는 어떻게 하게 됐어요?》 《아, 예, 그건… 말하자면 좀 긴데…》 《아, 그래요? 그럼 나중에…》 《예, 제가 테니스에 대해 알고있는 모든걸 얘기해줄게요.》 《그럼 제가 밥을 살게요.》 《예? 밥을…》 《아니, 내 뜻은…》, 《아예 매일 감자탕집에서 만납시다. 밥을 먹고나서 어쩌면 제가 직접 테니스를 가르쳐주겠다고 할지도 모르니까. 사 던김에 술까지 사세요.》 《예?》 다나가 없이도 둘의 대화는 거칠것 하나 없었다. 원래부터 인연이란 사람이 만들어가는것. 세월의 모든것을 묵묵히 안아주는 산이 좋아 산을 찾는 사람들, 세월의 무심한 흐름속에서도 지워지지 않는 그리움처럼 산행길에서 만들어지는 아름다운 인연들, 누구도 알수 없는 그 인연의 시작과 끝은 어딜가? 풀과 바람과 새들만이 알것이다. 누가 쏜 화살인지.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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