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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김옥희
1
희연이는 몰랐다. 확실히 그가 이 도시에 없다는 예감이 절실해지기까지는 그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그는 정말 어디로 갔는가. 이번 영태의 실종의 징후는 느낌이 별로 좋지 않았다.
희연이는 아침부터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어젯밤 느닷없이 닥친 시어머니를 위해 아침상을 차리면서 그녀의 쏘는 시선을 불편하게 느껴오던 희연이는 밥술을 놓자 씽하니 일어서는 시어머니의 등 뒤를 그저 보고만 있었다.
하루만이라도 놀다 가세요, 그러지도 못했다. 안경알을 번뜩이며 노인은 밖으로 사라졌다.
시어머니에게 잇어서 희연은 용납할 수 없는 가족이었다. 그것은 친정집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것을 알면서 그는 결혼을 생각했고 결정했고 그리고 자기의 엄격한 가족에게 통고해 버렸었다.
주위에 벗어놓은 옷이 허물처럼 보였다. 그걸 세탁기에 집어넣으면서 희연이는 아직도 눈초리를 타고 줄줄이 흘러내리는 눈문이 멈추기를 기다렸다.
왜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을, 그리고 어느 날인가는 내게로 돌아올 수도 있다는 생각을 되풀이할 수는 없는가, 나는.
희연이는 종일 거의 방에서 꼼짝을 하지 않았다. 방에 불이라도 켜ㅆ으면 갑자기 전화벨이 울렸다. 희연이는 그것이 순기의 전화라는것을 알았고 그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냉큼 일어나 전화기를 들면서 희연이는 "순기 씨 맞지? 정확히 이 시간에 전화 올 사람은 순기 씨 밖에 없다고 생각했단 말이야. 뭘 하구 있어? 방학인데, 집에만 내내 있었어? 그동안 류학이라도 훌쩍 떠나 버렸나 했어. 김 교수 딸 하구 안 떠났어 아직?"
숨이 차게 빠르게 지껄여댔다.
순기는 숨을 딱 죽이고 듣고만 있다가 부드럽게 낮은 목소리로 "다 말했니? 더 떠들게 기회 한번 만들어줄까."했다.
"반가워서 그래. 바쁘면 안 그래도 좋지만 그래도 만들어주면 좋지."
"내 전화...기다렸어?"
"...아니...기다린 건 아니었어."
"나 만나고 싶어하는거 같아. 희연이가."
"내 목소리가 많이 들떴어?"
"아니 별루 그렇진 않아."
"건데, 왜?"
"내가 만나구 싶어 전화 했어. 지금 나올래?"
"지금? 지금은 안되는데. 내일 만나."
"내일은 안돼."
"왜 안돼?"
"누구랑 만나기로 약속했어. 배경이 좋은 집 딸인데 북경서 여행산지 뭔지 한대."
"김교수 딸보다 배경이 좋대?"
"글쎄...집에서 나만 아무것도 몰랐는가봐. 아무도 아는게 없어."
"순긴 좋겠다. 그런 기분 나는 일도 다 있고. 그 여자 만나구나서 만나. 그게 더 좋잖아? 할 말도 있고? 할 말두 있고."
"그럴까? 그럼 오늘은 그냥 노우(NO)? 아마 안될 걸. 내가 말이야."
"웬 일이야. 새삼스레 내가 그리워졌어? 순기한테 아무 것도 아닌 날 생각하고 있었어? 고마워."
고마워하는 말끝에 묻어있는 울음 같은 비애를 순기는 놓치지 않고 새겨듣고 있었다.
정확하게 20분 후 희연이는 교우다방에 나타났다. 검정색 코트를 걸쳐서인지 희연이의 가느다란 몸매는 더 길어보였다
"어디 아파?"
"아니. 화장을 안 해서 그렇게 보이겠지." 순기는 화장기 없는 희연이의 마른 얼굴을 주시해보았다.
"어둡구나 여긴. 등불을 켠 다방은 처음이다."
그러면서 희연이는 자리에 앉았다.
"기분 없어 보인다. 너무 그럴 필요는 없잖아?"
희연이는 그러는 순기를 바라보았다.
"벌써 알았어? 오늘까지 십오일 지났어. 어데서도 그의 소식은 안 들려. 혹시..."
"혹시 뭐야?"
"혹시 이제는 완전히 끝내구 아예 내게 안 오기로 작정을 했나봐. 그 사람 스스로 말이야."
"혼자 결정하고 혼자 챙겨 갖구 혼자 훌쩍 떠나는 그런 짓, 잘 해. 벌써 세번쨰야. 이제 다음은 없을거야, 아마."
"그래서 어쩌려고?"
희연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희연이의 커피 잔에 각설탕을 집어넣어주면서 순기는 떄려주고 싶을 정도로 반들거리는 이마를 가진, 차라리 여자이십시오 할 정도로 희고 말끔한 얼굴의 영태를 떠올리고 있었다. 거기뿐이면 몰라도 훤칠한 체격에 말주변 좋은 영태에 대해서 순기는 질투는커녕 질투의 희망조차 품어보지 못했었다. 녀석만 생각하면 재수 없어져서 세상은 한심하게 돌아간다고 생각해왔던 순기였다.
녀석은 사랑면에서도 인물이었다. 대학때 어찌하다 재수없이 임신까지 했던 희연이를, 도저히 용서 못할 과거가 있는 그런 희연이에게 청혼하고 결혼하기까지 그 많은 우여곡절도 무난하게 넘는 걸 보면 끈질기면서도 순수한 구석이 있는 녀석이기도 했다.
"그가 어떻게 하든 난 할말이 없잖아?"
"말도 안돼! 네게 있었던 허물 같은 과거를 꼭 그런 식으로 복수하는 건. 그 녀석 그렇게 교활하게 좋은 머리는 아니잖아?"
학급에서 공부는 그저 그렇고 그랬는데 그 배경 좋은것 떄문에라고 급장을 4년씩이나 해먹을 수 있었던 영태였다.
"그 사람에게 난 상당히 부족한 사람이야. 어느 모르 보나..."
"그렇게 생각해?"
"늘 그래. 난 처녀도 아니면서 그 사람한테 시집가구. 나는 다행이었지만 그 사람한테 그건 불행이었을 수도 있잖아? 물론 그 사람 원해서 한 일이지만 난 맘에 걸려. 영원히 그럴거야. 이런 느낌은..."
"......"
"그리고 웬 영문인지 임신이 안되잖아. 2년째."
"그게 어디 네 탓만 되겠어?"
"내 탓이래. 시집 식구들, 시아버지 시어머니 모두 의산 걸 너도 알잖아 . 그들 말이 자기 아들은 펀펀한데 내가 문제래. 의사 말인데 믿고 안 믿고 그럴수는 없잖아?"
"그건 음모야. 그게 다 그럴 이유가 있어서 넌 불행하게 만드느라 꾸미는 음모인 줄 넌 몰랐어?"
"아닐 거야. 시집 식구들 날 좋아 안해도 시아버진 내게 따뜻해. 아버지 없는 내게 너그럽고 인자하셔. 그분이 그랬어, 임신 안되는 원인이 내게 있다고."
"그렇게 단정할 수 있도록 검사 한번 받아봤어?"
"검사는 받았지만 결과는 번마다 내겐 이상이 없다고 해."
"그러니 문제되지 뭐야. 바보 같이. 그렇게 단순한 것도 분별이 안돼?"
"오진이란 건 얼마든지 있지 않니?"
"그건 누구 말이야. 네 말이 아니지?"순기는 무섭게 고함쳤다.
"성내지 마." 희연이 고개를 들었다.
"난 그 사람 한번 쯤 바람피웠으면 해. 그러면 우린 똑같게 되잖겠어? 미안할것도 없어. 그 사람 어느 정도 그러다가 제 곬으로 돌아오겠지. 그날까지 난 참을수 있어. 그래. 참을수 있고 말구."
"너 고개를 들고 내 눈을 봐."
희연이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우니?"
고개를 들지 않은채 희연이가 말했다.
"아니."
"눈물 닦아."
"난 ...괜찮아."
울고 있는 것을 알리기 싫어서 숨소리조차 죽이는 희연이.
등잔불의 어스름 같은 광명과 그 앞에 조각처럼 꿇어앉은 여자를 순기는 서글픈 심정으로 바라보았다.
그렇게 무서운 십자가를 지고 어디까지 가려는가. 이여자는. 이 여자를 위해 안타까워하고 번민하고 화내고 하면서도 그를 위해 내가 한것은 없다. 대학때도 글허고 졸업해서 희연이랑 같이 대학에 남고 그 후 3,4년을 쭉- 거슬러오면서 내처 그렇게만 살아온 자신이 정말 그렇게 아무 힘도 없는 사람인게 한심했다.
순기는 꾸역꾸역 밀려오는 쓰디쓴 오열을 삼키며 무릎 위에 놓인 희연이의 한 손을 당겨다 손에 쥐었다.
"그래. 그렇게라도 네 짐이 가벼워진다면...잘해 봐. 그리구 힘내서 살아. 그래도 세상은 생각보다 살만하겠지. 희연이 말이 맞내서 살아. 그래도 세상은 생각보다 살만하겠지. 희연이 말이 맞아. 정말 이제 모든게 좋아진다구 생각하는 거야."
영태가 더 이상 돌아오지 않는대도 외로울것 없어. 네겐 내가 있잖아. 어찌 보면 이날을 기다려 내가 여태 혼자 살고 있는 것인지도 몰라. 다 잘될거야. 이제 난 너와 결혼할거야. 같이 대학에 나가고 같이 논문을 쓰고. 기회만 되면 같이 외국에도 나가구. 거기가 좋으면 그만 거기서 눌러 살거야. 아들ㄹ딸 구별 없이 하나씩 낳아 키우면서...
10초나 20초쯤 지났을까.
순기는 희연이의 손을 잡아 쥔 자기 손에 힘이 모아지고 잇음을 어렴풋이 느꼈다. 그리고 손을 놓으면서는 비로소 가슴이 뛰는 느낌이 보통때와 훨씬 다른 것을 알았다.
그것은 상당한 쾌속이었다.
2
아침에 자리에서 눈을 떳을 때 문 두드리는 소리를 들엇다. 희연이는 귀를 세우고 그 소리에 집중했다.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날은 이미 밝아있고 카다란 유리벽으로 밖이 훤히 내다보였다. 엄청 많은 눈이 날리고 있었다. 자리에 누운 채 잠깐 영태를 생각했다. 영태는 지금 어디서 이 눈을 보고 있을까.
그 무렵. 영태가 북경에 들어가 할일없이 장안거리를 쏘다니고 있는줄 희연이는 모르고 있었다. 국제여행산지 하는데 취직하기 위해 단위에 사직서를 내고 북경으로 또났고, 거기서 기회만 잡히면 어떻게 해외에 가 살려고 궁리를 헀고, 거기에 필요한 돈 땜누이라도 어머니에게 솔직한 얘기를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의 모든 속내를 ㅇ희연이는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오후에 희연이는 자기를 찾아온 시어머니에게서 이모든것을 알아냈다.
역시 나는 무모했는가. 이런 확실한 타산을 그는 언제부터 본격적으로 해왔는가. 그런 내색을 나는 왜 전혀 눈치 채지 못했는가.
밤 열시쯤 시어머니가 다시 왔다.
이외였다. 그는 낮에 입었던 줄이 간 노란 적삼 위에 어두운 색깔의 얇은 솜옷을 입은 그대로 약간 흥분을 띠고 있었다
이번에는 까만 구두를 벗었다. 낮에처럼 얼굴 한번 쳐다보지 않고 그는 뭔가 작정하고 돌아온 사람처럼 거침없이 구두를 벗고 올라왔다.
"더 긴말 할것 없다."
문만 열면 곧장 객실인데 객실 끝머리에 선 채로 그는 한숨처럼 참담한 음성으로 그렇게 말했다.
희연이는 순한 양처럼 고개를 숙이고 서있었다. 그리고 의자를 가져다주었다.
시어머니는 의자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오랫동안 서있었다. 어색한 고요가 한동안 미적거렸다.
희연이는 지금 밖에서 바람이 불고 있을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바람은 아직 그 전조만을 보이고 있을 따름이라고 생각했다.
시어머니의 눈길을 희연이네 결혼사진에 가 머물렀다가 벽 한가운데 걸린 액자속의 "인" 자에가 머물렀던가. 다시 희연이에게로 옮겨와 멈칫했다.
"귤 드시겠어요?"
결국은 침묵은 희연이가 깼다. 가볍게 고개를 저울뿐 그는 역시 그대로 서있었다.
다시 얼마동안 조용했다. 벽시계 돌아가는 소리만이 규칙적으로 들려올 뿐.
"녹차는 ... 없어요."
이번에 차라리 미동도 없었다.
희연이는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나 몰래 나갔다고 그일 원망 안 해요. 그런 일은 있을수 있어요. 급다 더 험악한 일도 얼마든지 많은데..."
부부 사이에. 젊은 부부 사이에 그런 일은 얼마든지....하려다가 그만두었다.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
그 한마디에 완전히 눌러버렸다.
"내가 말하고 싶은 건 딴거다."
더 긴말 할 것 없다는 그다음으로 처음 입을 뗐다.
"냉정하게 내 말을 듣고 이어라. 영태와 너의 결혼은 애초부터 잘못된 거였어. 그걸 영태는 이제야 깨친 거다. 그런 영태를... 용서해줘라. 이제 다시 시작해도 늦지 않다. 너희들은."
"북경에 가서."
그러면서 그는 얼굴을 주름살을 폈다.
"한동안 일만 하면서 마음을 정리하겠다구 하더라. 이제 넌 잊으려구 노력하겠지 아마. 너의 과거때문에 그러는 것만은 아닌것 같다. 그런 너에게 장가들만큼 널 좋아했으니까."
갑자기 그녀는 수다스러워지기 시작했다.
"그땐 정말... 집요했단다. 못 말렸지. 내가 난 자식인데ㅐ 내 말은 전혀 안 들었으니까. 처음부터 우린 반대였다. 경우야 어찌 됐던 넌 우리 눈에 기분 나쁘게 걸렸다. 대학때 임신했따는게 어찌 사랑에 빠진 남자의 성급한 행위에만 비롯되겠니. 그런 상황이멩도 버려진 너를 , 책임도 못 져주는 남자와 임신 정도의 지극히 깊은 관계를 가졌던 너를 영태가 사랑한다는 걸 알았을때... 그 충격은 컸다. 우리 집안에 상상도 못할 일이 였지. 끝내 일은 터지고 2년이 지났다..."
"......"
"아픈 곳을 만지는 구나, 내가."
그러면서 그는 희연이를 보았다.
희연이는 잠자코 있었다. 새삼스레 수치스러워할 건 없었다. 끊임없이 눈치를 살피며 끊임없이 긴장을 했고 그리고 끊임없이 비난을 당했던 희연이었다. 새삼스레 비참하다든지 비참해서 기가 막힌다든지 그런것에 신경을 쓸 까닭이 없었다. 그런 과정은 얼마든지 이썼꼬 그런 아픔과 절망을 다 딛고 넘어선 오늘이었다.
"넌 순진하구 착한 애다. 얼마든지 좋은 남자는 생길거다."
희연이는 피씩 웃었다. 재미나는 TV연속극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이쯤의 연극은 충분히 잘 해낼수 있을것 같았다.
"난 내게 얼마든지 좋은 남자 생길거라고 생각 안해본적이 없어요.:"
"그렇게지. 물론."
"그래서 영태 씰 만났죠. 영태 씬 날 쫗아하고 나도 그가 좋구. 우리 사이엔 이상이 없어요."
"그렇게 생각하니?"
"그렇게 생각해요."
"그는 떠났다 널. 그리구 다시 오지 않겠다구 했다."
침묵. 다시 이어지는 침묵.
"그래서 지금은 우리가 할말이 없게 됐어. 영태 실은 걔가 나쁜 놈이다. 역시 널 책임지기 싫어서 집까지 떠난 게고."
"난 책임져달라고 그러지 않아요."
"안다."
그는 한심한 듯 내뱉었다.
"한번 냉정해 봐. 난 에미로서 아들 마음을 안다. 엄마와 아들의 관계는 천륜이란다. 그는 너를 좋아한다. 그러나 거기에 그치지 않고 있다. 그는 떄떄로 네가 다른 남자와 깊이 관계있었던 여자이고 임신했던 여자라는 걸, 그리고 자기하고 살면서는 전혀 그것이 가망 없다는 걸 의식하고, 의식하면 할수록 참을수 없어하고 비참해하고 도무지 널 그냥 좋아한다는데 그치지 못하는게 그의 불행일가 아니면 너의 불행일까? 나 몰래 병원에 가 두 번이나 검사받았다. 나도 몰랐지만 너도 물론 몰랐겠지."
"......"
"서로가 마음이 겉도는데 억지로 맞추고 할 그럴 필요는 없다구 생각한다. 네 생각엔?"
"...."
"내 눈을 봐라. 내가 묻고 있다. 지금 네게."
"......"
"그냥 말 없는 걸로 동감이라고 믿어도 되겠니?"
희연이는 얼굴을 들어 그를 보았다.
그 얼굴은 전에 없이 인자하고 부드러웠다. 눈 속엔 불안이 있었다.
"공 들이지 마. 그래서 되는게 아니여."
말하는 그의 눈에 희연이로부터 분명하게 집고 넘어가려는 집요함이 있었따.
희연이는
"그이의 잘못을 용서하고 있어요. 잊어야 한느지는 제가 알아서 해요."
그래버렸다.
순간 그의 얼굴은 참을수 없는 노기로 일그러졌다. 미간이 잡혀지면서 그 많은 주름살들이 단번에 일어서면서 그녀를 적어도 칠팔년은 더 늙어보이게 했다.
그는 말없이 돌아서 갔다. 아니 한마디는 헀다. 목에 둘렀던 흰 스카프를 홱 벗겨 고쳐 매며 그는 잔인하게 한마디 했었다.
"원해도 원하지 않아도 소용없다."
그는 두 손을 주먹 쥐고 서 있는 희연이를 노려보며 잔인하게 말했었다.
희연이는 희미하게 웃다가 조금 소리 내서 웃다가 큰소리로 웃어대기 시작했다. 그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3
시어머니가 다녀갔던 그 후 달포쯤 인가. 순기와 함꼐 상해복단대학에 다녀온 직후였다.
새 학기부터 업무량이 부쩍 늘어나 정신없이 바쁘던 때 순기는 희연이의 방문을 받았다. 상해복단대학에 한글을 배우는 조선어문전업이 정식으로 설치되고 거기에 같이 초빙되여 두달간 강의를 하고 돌아온 후로는 처음 만남이였다. 학교에서는 눈에 뜨이지않았따. 가끔 희연이가 얼굴이 영 못쓰게 된다고 하는 사람도 있었꼬 그 곱던 얼굴이 몰라보게 미워졌다고, 마치 그것이 자기가 고와지는것이 되기라도 한듯 즐겁게 얘기하는 여교원들도 있었다. 전에도 희연이를 시기하고 질투하던 녀교원들이 한둘이 아니였다.
시어머니가 다녀간 후로 기분이 없어하고 무시로 당황해하고 기다림에 지쳐하고 갑자기 말수가 적어지고 목소리가 낮아지고... 그런것쯤은 순기도 짐작이 갔다. 혼자 살면서 어떤 일이 있어도 밤늦게는 다니지 않는다던 희연이가 이 시간에 순기앞에 나타났다는 것만으로 순기는 벌써 예감하고 있었다. 다시 희연이한테 무슨 일을 저질렀는가. 의학원 교수라는 여자가, 아직은 명색이 시어머니인 여자가 이번에는 또 어떤 식으로 이 여자를 들먹였을까. 그런데 희연이는 이외로 명랑했다. 얼굴빛이 맑았다.
"일찍 들어가기 싫어서 왔어."
"갑자기 이상하게 보인다. 희연이가."
"그래? 사실 오늘은 이상한 날이 거든. 갑자기 이시간에 술 먹고 싶었어."
"뭐야?"
"그런 눈으로 보지마. 나라고 술 못한다는 법 어디 있어?"
"그래? 말해봐. 어디로 갈까?"
"신라호텔로 가."
"가봤어?"
"거기서 내 친구 경자가 아기 첫돌 생일을 치렀어. 얼마전의 일이야."
"거기 술맛 좋았니?"
"알게 뭐야. 아무튼 거기로 가."
거리로 나서면서 희연이는 소곤거렸다.
"누가 봐도 우린 연애하는 사람처럼 보이겠지."
"응. 그럴거야."
"순기 씨하구 팔까지 끼면 안되겠지. 우리는 동창입니다. 그 외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렇게 소리쳐도 누구하나 안 믿겠지? 사실은 진실인데."
"네가 기분 좋으니까 나두 덩달아 좋아."
"그래? 호텔 같은 델 술 마시러 다 다니구 신난다. 오늘 밤."
칵테일 두잔을 주문하고 희연이는 또 소곤거렸다.
"이 넓은 홀에 우리 둘밖에 없잖아?"
"정말 그렇구나."
"연길이란 곳이 워낙 작은 도시라 서로 보면 거의 안다는데. 저 카운터 아가씨가 여길 흘끔거리잖아? 이거 혹시 순기씨한테 안 좋은거 아니야? 순기씬 아직 총각인데..."
""이거 웃기지 마. 생뚱같이 별 걱정 다 하는군."
희연이는 입을 가리고 호호 웃었다.
"아무튼 오늘 희연인 신나는 일 있는 사람 같다."
"그래?"
붉은 빛깔의 술이 들어있는 술잔을 손에 쥐고 희연이는 한참을 조용했다.
"사실 난 오늘 여기에 혼자 오고 싶었어. 집을 나서는데 갑자기 마음이 울적하잖아."
"왜 그랬을까?"
"오늘 병원에 갔다가 갑자기 맥 없구 머리가 어지러워서 거기 갔다가 글쎄, 임신이라잖아."
뒷말이 미약하게 떨려나왔다.
"그래?"
술잔을 기울이다말고 순기는 놀란 눈으로 희연이를 바라보았다.
"축하해"
"고마워."
그러고 나서 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홀짝홀짝 잔을 기울임녀서 갑자기 할말을 잃은 사람들처럼 눈길을 주고받는 일도 없이 덤덤하게 잔만 비웠다. 순기는 카운터의 아가씨를 불러 술을 다시 부탁했다.
"벌써 석달이래. 전혀 몰랐어. 아무 반응도 없었고. 정말 믿기지 않아."
"그래서 ...영태가 다시 네게 올것 같니?"
어쩐지 불유쾌한 기분이 되였다.
"아마...그럴 수도 있겠지."
"시어머니한테도 알렸니?"
"아니 . 순기씨한테 처음 말한거야."
"그게 뭔가 틀렸잖아. 순서가."
"그럼 어떡해. 영태 씬 어데 있는지도 모르고 시어머니한텐 알리기 싫어. 언제고 알게 되겠는데 뭘. 그리고 지금 나 옆엔 순기씨밖엔 없잖아?"
맑고 큰 눈이 순기를 향해 반짝였다. 너무 커서 겁 많아 보이는 눈이었다. 그 깊고 깊은 눈에 알수 없는 우울 같은게 어려 있었다.
희연이는 잔을 들어 이번에는 반쯤 남아있는 술을 거의 다 삼켜ㅆ다. 그리고 갑자기 희연은 말이 없어졌다. 넓은 홀을 휘휘 둘러보던 짓거리도, 카운터의 아가씨가 어쩌다 힐끔거리던 짓거리도, 긔외 아무것도 더하지 않았다.
"순기씬 모르지. 어제 그 사람 일본 갔대."
문득 희연이가 입을 열었다. 잠깐의 사이를 두었다가
"연락이 왔었니?"
순기가 흥미 없는듯 무심하게 물었다.
"아니. 다 알아지더군."
희연이는 나직이 말을 이었다.
"정선이한테서 알았어."
정선이는 우리 학급에서 림대옥이라 불렀던 예쁘게 생긴 여자애다. 영태를 은근히 좋아했다가 영태가 희연이와 좋아하는 바람에 그런 마음 한번 비쳐보지도 못했다는것, 그리고 한 고향에서 온 대학 선배와 좋아하게 됐고 그 선배를 따라 북경에 갔다가 국제방송국인가에 취직했고 애랑 셋이서 재미있게 사는 사이에 어였한 시민이 되였다는걸 순기나 희연이는 썩 후에야 알았었다.
"정선이 소개로 북경에 있는 일본회사에 취직했나봐. 영태씨는 중국 말, 일본 말 막히지 않는걸 순기씨도 알지. 북경에서 정선이와 자주 만나는 가본데. 신세도 지구. 기회가 좋아서 이번에 영태씬 일본에 있는 본사에 가 연수받게 됐는데 같이 간다나. 마침 정선이도 일본 수속이 됐나봐. 공항에서 내게 전화 한건 정선이 였어. 영태 씨 곁에ㅐ 있으면 바꿔달라고 하니까 아직 나오지 않았다는 거였어. 그동안 아무것도 몰랐어? 정선이가 그러는 바람에 갑자기 할말이 생각 안나는거야. 아니야. 알아. 알지만 목소리 한번 더 듣고 싶어서 그래. 했어. 그랬더니 그 애 말이 남편 잃지 않도록 전화도 자주 하구 그래. 하는거야. 이거 미치겠어. 나중에 아무리 기다려도 영태 씨 전화는 없었고..."
"......"
"재미있어? 내 얘기."
"응. 들을 만해."
"남의 일처럼 담담한 게 이상해."
"기분이 어땠어?"
"뭐 별루 특별하진 않았어. 그날은. 아직은 내게 돌아올 생각이 안 된거지. 그때까지 어떻게 기분 나쁘든 참아보자고 했으니까 참는거다. 그저 그렇게 가벼웠어. 슬프다거나 분하다거나 그렇진 않았어."
"......"
오히려 북경에서 아무곳에도 정착을 못하고 할일 없이 빈둥거리다 나쁘게 잘못되기라도 하면 어떡해. 그한테 무심했던걸 얼마나 가슴치며 후회하겠냐 말이야. 내가. 헌데 그는 생각밖에 잘 해내잖아. 일본에 간다는게 쉬워?" 정말 다행이다 싶고. 속힌것처럼 억울한것 같기도 하구. 아무튼 복잠한 내 기분은 어떤 말로도 표현 못하겠어."
"표현 안해도 돼."
순기는 자꾸 심술이 났다. 영태 그 자식한테는 무작정 부드럽기만 싶은 여자가 희연이다. 자기 멋대로 형편없이 거칠게 사는 그녀석의 안하무인격인 오만, 무책임, 나그네 같은 방황 따위를 연민의 눈으로 감싸고 다독이고 하는 여자가 희연이다. 결혼을 한 그러나 결혼을 안 한 남자처럼 떠나고 싶어지면 아무때건 떠나고 돌아오고 싶으면 아무때건 돌아오는 (?)그런 사람을 무한정 기다려주는 어리석은 여자가 희연이다.
순기는 뜻 모를 열망으로 목안이 자꾸 말라들면서 가슴이 갑갑해났다. 눈살을 찌푸리며 순기는 희연이를 힐끗 쳐다보았다.
"희연이도 모르는게 있어."
"그래? 뭔데?"
가쯘하게 고른 이를 드러내며 희연이의 눈이 생기 있게 빛났다.
"어제 어떤 아가씰 만났는데 말이야. 벌써 세 번째야."
희연이의 입이 딱 다물어졌다.
"솔직한 말이지만 그처럼 예쁘게 생긴 아가씬 처음 본다."
"김교수 딸보다도 예뻣어?"
"김교수 딸 말이야? 뭐랄까. 하늘과 땅차이라면 과장이 좀 되는거고."
"맘에 들었어?"
"응. 학교 체육장을 거닐면서 추워하겠지. 이 코드를 어깨에 걸쳐줬더니 글쎄 눈을 가늘게 하구 날 쳐다보는데. 이렇게 말이야."
그러면서 순기는 희연이 앞에서 제법 근사한 흉내를 보여주었다.
"그건 추파나 유혹, 거기에 가깝구나 뭘."
"추파나 유혹이 뭘 나빠? 난 기분 좋던데."
"그래서?"
"당했어."
"당했어?"
희연이 소리쳤다.
"그래. 내가 아니고 그 아가씨가 내게 당했어. 손도 쥐어보고 앵두 입술에 키스도 하구 그래줬어. 애가 물찬 제비처럼 너무 싱싱하더라."
희연이 입을 싸쥐고 웃었다.
"거짓말. 거짓말이지?"
"아니 진짜 그랬어."
"정말?"
"정말이래도."
"...그래서?"
목소리가 한 옥타브 낮아졌다.
"그 앤 남자손에 한번두 손목 잡혀 본것 같지 않더군. 키스 하는데 막 울잖아? 내가 싫어서 그러냐 했더니 아니래. 입술을 도적맞힌 기분이다 싶어서 그런대. 키스 한번에 정근까지 다 잃은 것처럼 당황해 하구. 내 어꺠에 기대어 오면서는 아예 별수 없다는 듯 체념하는 눈치였어. 너무 순진하니까 내가 악한처럼 생각됐어, 뭔가 잘못하구 있는거 같아 견딜수 없구. 두루 그랬어. 몹시 미안하더군. 그래서 다독여서 보내줬구. 우린 끊어졌어."
"그런 아가씨면 요즘 같은 '풍진'세월에 흔치 않는데... 왜 그랬어?"
"그렇게 하고 싶었어."
"다시 찾아서 ...결혼해."
"다 끝난 일이야. 다시란게 없어."
"걱정하고 싶어. 순기씰."
"그래줘."
순기의 그 말은 정말이었다. 말하고 있는 그 순간에만은 진실이었다.
그러나 호텔을 나오면서 적당히 술기운이 오른 뒤에 제법 쌀쌀한 초봄의 한기를 느끼면서, 차들이 줄줄이 대기하고 서 있는, 아직은 유흥에 떠있는 노래방이며 찻집들의 환한 불빛들을 보고 있으면서 그들읠 발길을 그 이상 더디어질수 없는 정도로 더디어졌다.
그들은 알고 있었다. 어떤 마음은 말로 표현이 안 된다는 것을.
기다릴 가치도 없는 녀석, 그 예깜은 백퍼센트 적중할 것이다. 그런 미친 녀석을 한점 흐트러짐이 없이 기다린다고 고집하는 희연이나 희연이에게 끌린 나머지 그 어떤 여자에게서도 사랑을 느낄수 없는 처량한 자기 자신은 못난이 같고 바보 같다고 순기는 생각했다.
죽어두 이 여자를 포기할수 없겠구나 싶어서 더더욱 참담한 기분이 돼갔다.
순기의 입가에 살짝 비웃음이 스쳤다.
"나는 알아. 지금 희연이가 영태 생각을 하는 걸."
"그래 맞아. 갑자기 그리워져. 보고싶고"
어쩔 수 없는 랑패감에 순기는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지금쯤 정선이랑 좋아 지낼수도 있잖아? 얼마나 가능한 일인데. 그래도 괜찮아?"
"상대가 정선이라면 괜찮지, 정선이 총명하고 예쁘고. 전에 영태씰 좋아도 했고 자연스럽게 어울리겠지. 둘은 . 그리고 나서... 언제든 돌아오겠지. 남자는 몰라도 여자는 그래. 여자는 애인하구 있어도 자기 남편, 자기 아이 생각을 한다잖아. 다 그래 여자는"
희연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한번 터진 봇둑은 막을 수 없는 건데...정선이 그런다고 영채가 그럴까? 아닐걸. 모르긴 해도 희연인 영태가 거기서 그치지 못하고 계속 지저분할수도 있다는 생각은 못해 봤어?:
"안 해봤어."
"넌 바보다."
"울 엄마나 언니도 그래. 바보라고."
"알면서 바보 노릇하는게 희연이야?"
"그래. 알ㄹ면서 난...기다려. 마음에 십자가 지구는 ...나 못사는 거 순기 씬 알지?"
"그래. 기다려봐. 기다려 보라고!"
순기의 넥타이 부근에서 희연의 시선은 어지럽게 방황했다. 그리고 잠시후에 희연은 평온하게 순기의 얼굴을 보았다.
희연이는 착각했다. 화내고 소리 지르고 하는 순기의 모습을 보는 그 순간만은 누가 뭐라 해도 순기가 자기를 사랑하고 있다는 착각을. 그레 착각이 아니라는 생각은 못했다. 그거 그런 착각을 하게 해준 순기가 그지없이 고맙고 고마워 그녀는 눈물이 글썽해졌다.
누가 그 사람을 내게 베풀었는가.
나를 위해 끝없이 안타까워하는 사람, 내가 어떻게 망가진대도 외면하지 않을 사람-순기씨.
자기는 그의 다정함, 그의 순순한 배려, 그의 편안함을 고루고루 즐겨왔던것 같았다.
순기가 없으면 허전하고 힘들고 사는게 외롭고 그랬다. 그러나 순기가 있어도 허전하고 힘들고 사는게 외롭고 그럴때 있었다. 순기의 있고 없고가 자기의 생활에 그처럼 중요한것이면서 꼭 그런것만은 아닌것 같기도 했다.
임신하고 버려진 자기를 한품에 그러안고 사랑한다는 그 말을 해줄때 그녀에게는 더 이상 아무도 없었다. 영태뿐이였다.
그 한번에 그녀는 자기의 운명이 결정지어졌음도 알았다. 그 절실한 고마움에 목이 메고 가슴이 뜨거웠다.
지금 와서 영태가 어떻게 변한대도 좋았다. 가치 없는 허무의 기다림이 되어도 그것이 억지사랑이래도 좋았다. 그 사랑에 의지해서 무엇을 꽃피워야 하는지도 몰랐다. 그래도 그녀에겐 영태뿐이다. 그럴 마음이 돼 있는게 그녀의불행이래도. 굴레가 되어도 그녀는 거기서 빠지지 못할 것이다. 영원히. 영원히...
문득 희연이는 걸음을 멈추었다. 광명 아파트 21이 눈앞에 성큼 들어왔다. 집에 다 온것이다. 아파트 정문에 기대서서 멀리 어둠속에 사라지려 하는 순기의 그림자를 쫓아가며 희연이는 눈앞이 뿌옇게 흔들렸다. 울고 싶었다. 말 한마디 없이 등을 보이고 돌아서는 순기가 야속해서 가슴이 찡하니 쓰라렸다. 그만큼 그를 위해 한것이 없음녀서 나는 늘 그에게 서운한게 있었고 그 서운한 것에 나는 얼마나 민감해 있는가.
잘 자. 그 한마디만 들었어도 그 밤은 참 잘 잘 수 있었겠는데 하고 희연이는 생각했다. 그 밤, 그녀는 실면 했다.
4
영태는 돌아오지 않았다. 꼬박 3년이 지나고 가을을 맞아 학교 정원에 노오란 낙엽이 쭉 깔릴 그 무렵, 희연이는 영태에게서 오는 세번째 소포를 받았다.
처음 두번은 아이 것만 보내왔는데 자기 것도 끼워 있어서 희연이는 놀랐다. 앙증맞게 고운 아이 옷이 여러벌 있는 가운데 하늘쌕 코드가 눈에 띄었다. 색깔이 눈부시게 화려했다. 그걸 집어서 얼굴에 비벼보았다. 부드러운 감각이 영태의 분신이기라도 하듯 희연이는 가슴에 꼬옥 그러안았다. 소포는 오는데 편지는 안 온다. 소식은 번번이 다른 곳에서 듣는다.
일본에서 정선이와 동거해 산다는 얘기, 이제 곧 아이까지 있게 된다는 얘기, 대학 선배 된다는 정선이 남편 역시 다시 결혼해 산다는 얘기, 그리고 시어머니가 이제 곧 태어날 그들의 아기 때문에 보모 노릇하러 일본에 가게 된다는 얘기, 많은 얘기를 희연이는 들어서 알고 있었다.
이제는 잊어야지. 그래서 나도 무거운 굴레에서, 자기 번뇌에서 벗어나야지, 생각은 했다. 하지만 어쩐지 잊는다는게 잘 안되었다. 금방 다 잊은것 같은데 눈을 감으면 꿈속에서마저 영태와 함꼐 있는 자신이 발견되고 그래서 다시 베개를 적셔야 하는 희연이었다.
이제는 잊어지겠지. 그래서 순기하구 결혼하구 사는 거야, 생각은 했다. 하지만 생각 외로 그 일도 아득하고 묘연했다. 희연이가 원한담녀 당금이라도 우리 결혼하자 그래줄줄 알았는데 순기는 지금 어떤 배경 좋은 집 딸이라는 여자와 매일 만난다,. 여자와 매일 만나면서 순기는 변했다. 얼굴이 불그레 윤기 흐르고 가슴이 쭉 펴지고 자못 당당해지고 의젓해 갔다.
그에게 여자가 있다는 사실에 희연이는 어쩔수 없이 휘둘린다. 당황해 하다가 못견디게 힘들어하다가 까닭없이 우울해 한다. 순기는 어떤가. 그런 희연이 마음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한 듯 담담하고 여름 내내 그저 그렇게 씁쓸하다가 가을의 갈림목까지 이르었다. 전화로 만나자고 하면 못마땅해 할때도 더러 있고 한마디로'오늘은 안돼'하고 무안을 줄때도 있다.
희연이는 걸었다. 대학정물을 빠져나와서 무작정 걸었다. 순기와 함께 많이 걸었ㄷ던 연신교 언덕 위를 혼자 걸으면서 혼자 기운내서 웃어보았다. 멀리 빈 대만 서있는 옥수수 밭이 한눈에 안겨왔다,' 이제 거기서 바람이 불려 하나.' 코드 자락이 날렸다. '바람이 부는가 지금.'
어디선가 바람이 보였다. 이제 바람은 이 세상 어지러운 모든것들을 모조리 그러안고 어디론가 사라지겠지. 그리고 이계절을 넘어서면 아름답고 평화로운 이 대지위에 또다시 햇살은 차고 넘치리라.
묵묵히 언덕을 내리면서 희연이는 이제부터 할 일을 정리했다.
아들 진이는 매일 커간다. 아들이 커가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모자가 재미있게 살 궁리를 하자 그밖에 할일은 무지무지 많다. 모든 하고 싶은 말은 다 생략하면서. 모든 할수 있는 말은 다 생략하면서 그녀는 가볍게 언덕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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