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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편소설
리별 뒤에
김옥희
안해가 갑자기 돌아갔다. 정씨는 자기한테 이런 일이 생길줄은 꿈에도 상상못했다.
안해는 그보다 네살 우였다. 정씨는 일흔셋, 안해는 예순아홉으로 살만큼 살았다고 해도 되는데 이웃들은 참 나이가 아깝다고 했다.
거의 50여년간 한 동네에서 이웃으로 산 그들이다. 그들은 알고있었다. 이 로부부가 늘 신혼때처럼 그 흔한 부부싸움 한번 안하고 참 아기자기하게 지냈다는걸.
그들에겐 아들이 셋, 며느리 셋, 손자손녀 셋이 있었다. 특별히 잘사는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사는게 팍팍하지도 않고 다들 평범한 삶에 만족하며 로부부에게 근심걱정을 끼치는 일이 거의 없었다.
안해랑 살아오는 동안, 그는 안해한테만 의지해 살았다. 집안의 일은 전혀 하지 않았다. 안해는 남편에게 많은걸 바라지 않았다. 늘 옆에서 떠나지 않고 남편을 돌봐주는걸 천직으로 생각하는 그녀였다.
부부는 동심일체였다. 그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없어서는 안되는 존재라고 생각하며 살았다.
그날은 비가 내렸다. 어제밤 예고에는 없던 비가 아침부터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했다. 안해는 하늘을 쳐다보며 잠깐 망설였다.
(보양식엔 그래도 삼계탕이 최곤데…)
안해가 기어이 우산을 찾아쥐고 길을 나서자 정씨는 말리지 않았다. 며칠전부터 안해는 몸이 허한 정씨를 위해, 그가 즐겨 먹는 보양식을 해주겠다고 별렀다. 헌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시장에 가기 위해 집을 나서려는 순간, 난데없이 하늘에서 굵은 비방울이 뚝뚝 떨어지는게 아닌가.
예고에도 없던 비였기에 잠깐 내리다가말겠지 하면서 안해는 기어이 집을 나섰다.
23선 공공뻐스를 타고 시장에 도착한건 그로부터 20분뒤였다. 비가 오는데도 시장은 여느때와 마찬가지로 사람들로 붐볐다. 그는 시장 맨 동쪽 모퉁이에 있는 닭 파는 가게를 향해 부지런히 걸어갔다. 벌써 7, 8년째 단골로 다니는 집이였다.
사장님이 닭우리에 들어가더니 제법 생생하게 뛰여다니는 검정닭 한마리를 쥐고 나왔다. 다른 손님들은 그 자리에서 닭을 손질해서 가져 가는데 그녀는 산채로 요구했다. 살아있는 닭을 비닐봉지에 잘 싼 다음 사장님은 삼계탕에 들어갈 각가지 재료들도 포장해서 함께 건네주었다. 그녀가 아무 말을 안해도 척척 알아서 해주는 서비스정신이 투철한 사장님이였다. 번마다 산채로 집에 가지고 가서 직접 손질해서 삼계탕을 만들면 그 맛이 정말 일품이였다.
그녀가 시장을 나와 공공뻐스를 기다리고있을 때, 갑자기 비가 더 크게 쏟아졌다. 목을 길게 빼들고 살펴봐도 23선 공공뻐스는 오지 않았다.
문득 그녀의 핸드폰이 울렸다. 남편이였다.
“여보, 언제 와?”
“지금 닭을 사가지고 막 시장을 나오고있어요.”
“그래? 그럼 오늘 삼계탕을 먹을수 있는거야?”
“그럼요. 조금만 기다리세요.”
“알았어. 헌데 비두 오는데 택시를 타구 와.”
“택시를 타면 10원두 넘게 나와요. 길이 막혀서.”
“그래두 타. 맨날 타는것두 아닌데.”
“예. 제가 알아서 할께요.”
그녀가 핸드폰을 막 끄려는데 갑자기 남편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참, 꿀이 떨어졌어. 올 때 사갖구 와.”
안해는 다시 시장안으로 들어갔다. 시장 중심에 위치한 “꿀 전문가게”를 향해 걸어가는데 어디선가 휙 바람이 날아와 그녀가 쥔 우산을 덮쳤다. 손에 쥐고있던 우산이 허공을 향해 홀랑 뒤집혀지는바람에 그녀는 한손에 들고있던 닭을 하마트면 떨어뜨릴번했다. 가까스로 우산을 바로잡아서 손에 쥐고보니 어느새 어깨가 비에 흠뻑 젖어있었다.
그녀가 꿀을 한박스 사가지고 나왔을 때, 비방울은 훨씬 굵어져있었다. 바람도 점점 례사롭지 않았다. 이젠 무조건 택시를 타야 한다고 생각하며 그녀는 걸음을 다그쳤다.
총총히 오가는 사람들 틈새에 끼워 시장거리를 거의 빠져나왔을 때, 난데없이 택배오토바이가 총알같이 빠져나오더니 순식간에 그녀를 덮쳤다. 그녀는 오토바이를 피하려다가 땅에 넘어졌다. 그녀의 손에서 벗어난 검정닭이 걸음아 날 살려라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녀의 손에 쥐고있던 꿀박스는 어디로 날아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급기야 꿀박스는 포기한채 그녀는 검정닭을 쫓아가기 시작했다. 헌데 요리조리 숨박꼭질하던 검정닭이 몇메터앞에 나타났다. 그녀는 주먹을 쥐고 쫓아갔다. 허나 검정닭을 손에 막 잡으려는 순간, 그녀는 그 자리에 푹 주저앉고말았다.
비에 흠뻑 젖은채 쓰러져있는 그녀를 행인들은 아무도 일으켜주지 않았다. 시간이 10여분 지났을 때, 문득 어떤 40대 아줌마가 그녀앞으로 다가왔다. 그 아줌마의 손에는 어디서 찾아왔는지 꿀박스와 삼계탕에 들어갈 양념이 들어있는 비닐주머니가 들려있었다. 그녀의 두눈은 빛났다.
“할머니, 이거 할머니꺼 맞죠?”
그녀는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너무 감격해서 하마트면 눈물을 왈칵 쏟을번했다.
“걸을수 있겠어요? 제가 택시 있는데까지 모셔다드릴께요.”
아줌마는 그녀를 부축해서 일으켜 세우며 말했다. 아줌마의 말은 너무 고마운데 그녀는 극구 사양했다. 검정닭을 찾아가지고 가야 했던것이다.
“고마워요. 저 혼자 갈수 있어요.”
아줌마는 비 내리는 하늘을 쳐다보다말고 걱정스런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비가 점점 많이 오는데…”
그녀는 마음씨 착한 아줌마한테 얼른 가라고 손짓했다. 아줌마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그녀는 시장 한모퉁이를 찾아 겨우 앉았다. 발목이 따끔거렸지만 거기에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다.
(어서 검정닭을 찾아야 한다. 그건 우리 령감 몸보신에 쓸 귀한 닭이다.)
잠깐 숨을 돌리고 일어났을 때 그녀는 손에 쥐고있던 우산이 없어진걸 발견했다. 그렇게 비속에서 검정닭을 찾아헤맨지 20여분이 흘렀을 때 그녀는 더이상 걸을수 없었다. 몸에 기운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녀는 손에 들고있던 무거운 꿀박스를 내려놓고 비닐봉지를 가슴에 그러안은채 땅에 쭈그리고 앉았다. 이제 검정닭은 포기하려고 하던 찰나, 어떤 젊은 총각이 그녀의 검정닭을 들고와 건네주었다.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이렇게 고마울 변이 있는가.
그녀는 고개를 숙인채 연신 고맙다고 인사를 했다. 헌데 이게 웬 일인가. 고맙다고 말을 하려는 순간, 말이 목구멍에서 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당황했다. 갑자기 실어증에 걸린게 아닌지 불안하고 초조해서 그녀는 이젠 빨리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며 몸을 일으켰다.
헌데 바로 이때, 누군가 그녀의 앞에 10원짜리 한장을 놓고 가는게 아닌가. 처음에 그녀는 이게 무슨 뜻인지 몰랐다. 난생처음 겪는 일이였다. 헌데 또 누군가가 10원짜리 두장을 그녀의 앞에 던져놓고 사라졌다.
그제야 그녀는 사태의 엄중성을 느꼈다. 그녀는 자기앞에 떨어져있는 10원짜리 돈 석장을 보았다. 그녀의 눈에 저도 모르게 이슬이 맺혔다. 이때 또 누군가가 다가오자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자기의 큰아들또래의, 30대의 점잖은 신사가 눈앞에 서있었다.
비물이 줄줄 흐르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던 신사는 그녀앞에 놓인 10원짜리 석장과 그녀의 얼굴을 번갈아보더니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급기야 호주머니 에서 지갑을 꺼내는 신사를 보고 그녀는 진저리 쳤다. 그녀는 이게 아니라고 말하고싶었으나 목구멍이 꽉 막혀 소리가 나 오지 않았다. 그녀는 고개를 흔들어보이며 극구 아니라고 해봤지만 허사였다. 이미 늦었다. 신사가 백원짜리 두장을 꺼내서 그녀의 손에 쥐여주며 친절하게 미소까지 지어보이곤 어디론가 사라졌다.
(난 졸지에 적은 돈은 돈 같이 여기지 않는, 거지중의 상거지가 됐구나.)
비속에 멍하니 서서 그녀는 흐느꼈다. 문득 남편이 보고싶었다. 남편이 기다리고있는 집으로 빨리 가고싶었다. 허지만…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가. 비속에 서있던 그녀의 머리우로 어둠이 내리기 시작했다. 그 많던 사람들이 다 어디로 갔을가. 시장거리는 한산해지기 시작하는데 가게문을 닫은 가게주인들이 우르르 쏟아져나오고있었다.
“어머, 아주머니. 여기서 뭘 하세요?”
거의 실신상태인 그녀를 알아본건 닭집 사장님부부였다.
“저… 절 택시 있는데까지 데려다…”
그녀는 말대신 눈빛으로 말했다. 그러자 사장님이 다짜고짜 그녀를 등에 업었다. 그녀의 손에 들려있던 검정닭과 꿀박스를 손에 쥔 사장님 안해가 뒤에서 따라오며 소리쳤다.
“여보- 우리 먼저 병원에 가야 하는거 아니예요?”
“어? 그런가? 할머니, 우리 병원에 가요.”
그녀는 사장님 등에 업힌채 고개를 저었다. 문득 사장님 안해가 소리쳤다.
“여보, 이 할머니 이상해요. 갑자기 말을 못하시는게 아무래도…”
“뭐? 할머니, 많이 아프신거 아니예요?”
할머니가 사장님의 등에 업힌채 자기의 목에 걸고있던 핸드폰을 건네주며 손가락 하나를 내밀었다.
“할머니, 1번 누르면 돼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참후, 택시에 그녀를 앉힌 사장님이 1번을 눌렀다.
“예. 전 닭집 사장님인데요. 혹시 할머니의 남편 되세요?”
“예. 헌데 우리집사람이 닭을 산다고 갔는데 아직 돌아오지 않아서.”
“거기 어디죠? 제가 지금 모시구 가겠습니다.”
그날밤, 그녀는 열이 나서 온밤을 사경에서 헤맸다. 정씨는 병원에 가자고 여러번 재촉했지만 그녀는 괜찮다고, 병원에 가서 쓸데없이 돈만 쓸게 없다고 약을 먹고 침대에 누웠다.
이튿날 아침, 밥 먹을 때가 돼서도 그녀는 일어나지 않았다. 지난 50년동안 같이 살면서 이런적이 한번도 없었다. 어제밤 고열에 시달렸으니 좀 더 푹 자게 내버려두려고 정씨는 혼자 일어나 마당에 나갔다.
평소에 그는 집에서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그래도 전에 소학교 교원을 한 그였는지라 퇴직금이 꽤 많았다. 그게 그들에겐 유일한 생활 원천이였다. 그 돈이면 부부가 먹고 쓰고 필요한 지출을 하는데 풍족하진 않지만 부족하지도 않았다. 단 한번도 누구한테 돈을 빌린적이 없으면 그걸로 만족하며 살아온 부부였다.
정씨는 1원짜리 돈을 들고 집앞에 있는 슈퍼에 가서 두부를 사가지고 돌아왔다. 그리고 집앞 채소밭에서 오이며 고추도 따서 들고들어왔다. 그리고나서 딱히 할게 없어서 안방을 들여다보니 안해는 여전히 누워서 꼼짝을 안했다.
갑자기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아침 6시반이면 부부의 조찬시간이였다. 이 시간을 지난 반세기동안 단 한번도 거른적 없는 안해였다. 생물종이 어김없이 조찬시간을 알려주는데도 안해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는 참다못해 들어가서 안해를 깨우기로 했다.
헌데 안해옆으로 다가가던 그는 깜짝 놀라 굳어졌다. 어쩐지 안해가 이상했다. 안해의 입귀에서 피가 흘러나와있는게 보였다. 정씨는 안해를 흔들어보았다. 모로 누워있던 안해가 힘없이 늘어졌다. 안해는 이미 싸늘해있었다.
정씨는 혼이 나간 사람처럼 어쩔바를 모르다가 급기야 큰아들한테 전화를 걸었다.
가까이에 사는 큰아들이 5분만에 달려왔다. 눈앞의 상황에 큰아들은 주먹같은 눈물을 흘리며 120에 전화를 걸었다.
안해는 언제 어떻게 숨을 거뒀는지, 정씨는 알지 못했다. 그런 아버지를 아들들은 용서하는듯 했다. 그렇게 갑작스레 가면서 유언 한마디 못한 안해였다. 허나 그는 눈물이 나지 않았다. 세 아들이 넋 놓고 울었다. 평소에 효도한번 안하던 세 며느리가 지은 죄가 있는지 목놓아 울 때 그는 덤덤해있었다. 세 손자손녀는 학교를 간다는 핑게로 한 놈도 얼굴을 내밀지 않았다. 화장터에서 안해를 보내고 집으로 돌아온 정씨네 식구들은 하루사이에 가족을 잃은 슬픔에 다들 기분이 우울해있었다. 허나 그것도 잠시, 큰아들이 하루밤새 폭 늙어버린 정씨의 손을 잡더니 한마디 했다.
“아버지, 이제부터 아버지 혼자 사신다는건 좀 그래요. 제가 맏이니까 모실께요. 저의 집에 오세요.”
그 말을 듣고있던 큰며느리가 입을 삐쭉거리며 남편의 뒤에 대고 무성의 눈총을 쏘는걸 정씨는 똑똑히 보았다.
“아니야. 사실 난 너의 엄마가 없이는 안된다. 할줄 아는게 없으니 자립을 못해.”
“알아요. 그래서 저희한테 오시라는거예요.”
“여보, 당신만 아들인건 아니잖아요. 둘째랑 셋째도 있는데 당신 혼자 결정할 일은 아니라고 봐요.”
일이 상서롭지 못하자 큰며느리가 도전적으로 나왔다.
“그래. 우리두 아들인데 아버질 모시는걸 너한테만 밀어맡길순 없다. 나랑 셋째도 도울께.”
둘째아들이 입을 열었다.
“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그러니까 모시긴 우리가 모시는데 두 아드님이 돕겠다? 뭐 그런 말씀이세요?”
“역시 큰형님은 똑똑하시네요. 그 말이 그 말이예요.”
둘째동서의 카랑카랑한 목소리는 언제 어디서 들어도 짜증나고 싫었다.
“뭐야? 형님이랑 형수님이 있는데 당신이 왜 나서는데?”
둘째아들은 안해의 개입이 못마땅하다는 표정으로 안해를 흘겨보았다.
“그래요. 전 둘째니까 그저 맏이네가 하자는대로 하면 되죠. 그럼 말씀들 나누세요. 전 출근해야 해서 이만…”
쌩 찬바람이 나게 둘째며느리가 밖으로 나가버렸다.
“여보, 저도 나가봐야 해요. 자리를 비우면 월급이 짤려요.”
언제봐도 셋째며느리는 이런 상황에 미꾸라지처럼 피하는덴 프로였다.
“그래. 당신이 있어봤자 그렇지뭐. 아니다. 나두 가봐야 해. 할일이 있는거 깜박했어. 여보, 우리 같이 가.”
셋째아들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두 형을 보고 말했다.
“형들이 결정해. 난 형들의 의견에 따를테니까. 돈을 내라면 내고 보모를 구해야 한다면 찾아볼께.”
둘째아들이 어두운 표정을 지으며 나무랐다.
“뭐? 보모? 요새 보모들이 얼마나 영악한지 몰라서 그래? 보모는 됐구. 이제 우리 셋이서 한집에서 한달씩 모시는게 좋겠어. 남들두 그렇게 하던데 그래야 의견이 없구 공평하다구 했어.”
큰며느리는 막 일어서 나가려는 셋째동서를 안 좋은 시선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셋째동서는 어머님생전에 가장 사랑을 많이 받았는데 그렇게 받은 사랑을 이제 아버님한테 되돌려드려야 하는게 인지상정 아니야?”
“예? 제가 뭘 또 그렇게 사랑을 많이 받았다구 그래요.”
“그렇게 시치미를 떼두 소용없어. 여기 앉은 사람들이 다 아는 일인데.”
셋째며느리는 얼른 이 자리를 피하고싶은듯 남편을 닥달했다.
“여보, 우리 안 가?”
“어? 가야지. 큰형, 둘째형. 전화해. 나두 형들과 똑같이 효도할꺼야.”
휭하니 집안에서 나가버린 두 사람.
“저것들은 맨날 저래. 대체 저들이 뭘했다구 맨날 효도효도하는건데?”
큰아들은 아버지 정씨의 얼굴을 보았다. 당장 울것처럼 일그러진 아버지의 모습이 너무 안쓰러웠다.
“아버지, 걱정마세요. 무슨 일이 있어도 전 아버질 내버려두진 않을꺼예요.”
정씨는 말없이 침대에 가서 누웠다. 큰며느리가 갖춰놓은 밥을 그는 먹지 않고 그대로 죽은듯이 누워있었다. 큰아들이 맏이구실을 하느라고 옆을 지키고 앉아있었다. 밤 일곱시가 되자 학교에서 돌아오는 아들을 챙겨 먹여야 한다며 큰며느리는 기회를 만났다는듯 확 나가버렸다. 둘째아들은? 그는 언제 집안에서 사라졌는지 알수 없었다.
정씨는 눈을 감고 생각했다. 여태 한번도 얼굴을 붉힌적 없이 화목하고 형제들의 우애가 깊어서 자기와 안해는 얼마나 자랑하고 다녔던가. 헌데 이렇게 완벽해보이던 가정이 안해의 부재로 단번에 콩가루 집안이 될 상황에 직면한것 같았다.
이튿날, 정씨는 밤새 옆에서 자기를 지킨 큰아들에게 혼자 살아보겠다고 실토정했다. 큰아들이 반대를 하자 딱 한달만 그렇게 살아보겠다고 해서 동의를 얻었다.
안해의 빈자리만 있을뿐 모든게 변함이 없었다.
슬픔에 아무것도 먹을수 없던 정씨가 어느 한순간부터 직접 밥을 지어서 먹기 시작했다. 한번도 밥을 지어본적 없어 처음엔 밥이 질척거렸지만 그것도 한두번 시행착오를 더 겪고나니 제법 먹을수 있는 밥이 만들어졌다.
옷이 더러워지니 옷을 씻기 위해 세면실에 갔다가 그는 안해의 생각에 소리내서 실컷 울기도 했다. 헌데 운다고 돌아와줄 안해는 아니였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보니 이것저것 막막한게 한두가지가 아니였다.
그렇게 한달이 막 지나던 어느날, 정씨는 마침내 결심을 내렸다. 보모를 찾자!
큰아들과 찾아달라고 전화를 걸었지만 큰아들은 출장중이라고 했다. 둘째아들에겐 조심조심 말을 꺼냈다. 헌데 “요즘 보모들은 믿을수 없는 악바리들”이라고 엄청 욕을 해대는바람에 말을 꺼냈다가 본전도 못 건졌다.
셋째아들은 자식들중에서 제일 작다는 리유 아닌 리유로 아버지의 문제를 알려고도 하지 않아서 아예 말도 못 꺼냈다. 처음으로 정씨는 딸이 없는게 한스러웠다. 딸이 있으면 아버지가 이런 말을 꺼내기도 전에 알아서 척척 했으리라.
결국 정씨는 이웃에게 부탁해서 보모를 얻어달라고 했다.
며칠후, 보모가 들어왔다. 보모는 50대 중반의 농촌아줌마였는데 순박하고 단순했다. 시골사람다운 인정이 더 마음에 들어 정씨는 흡족해했다. 반찬도 알뜰하게 잘해줬고 집안 구석구석을 정성들여 닦고 또 닦아서 안해가 있을 때보다도 더 집이 알른알른 빛이 났다. 차츰 안해의 빈자리는 보모아줌마로 인해 메워지는듯 했다.
정씨의 삶이 다시 원래의 질서를 찾아가기 시작했다. 이젠 사는데 아무 불편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안해가 있을 때보다 더 윤택해지는 느낌이였다.
보모아줌마는 부지런한 녀자였다. 그녀는 정씨네 집에 오자마자 칙칙한 카텐부터 바꾸었다. 하늘색의 새 카텐으로 단장한 집안을 둘러보며 정씨는 입이 함박만해졌다. 집안 분위기를 밝게 만들어주는데 큰 돈이 들지 않아서 좋았다. 안해가 수십년간 쓰던 누르무레한 그릇들을 보모아줌마는 다 버리고 가볍고 깔끔한 색갈의 그릇들을 종류별로 사서 찬장에 옹기종기 얹어놓았다.
처음엔 안해가 다루던 그 집기들에 그녀가 손을 대는것 자체가 너무 싫고 눈에 거슬렸다.
“그거 놔두오. 아직 쓸수 있는걸 왜 버리려구 그러오. 돈을 한푼이라두 아껴야지. 왜 쓸데없이 그런데 돈을 쓰구 그러오? 돈을 쓰기 쉽지 벌기는 얼마나 힘든데. 쯔쯔…”
“깨진 그릇이예요. 이가 다 빠졌는데 어떻게 써요. 그게 돈이 몇푼 간다구…”
“제 돈이 아니라구 물 쓰듯 하다니. 정말 돈 아까운거 모르는 사람이구만. 자네한테 살림을 맡겼다간 일년두 못 가서 내 재산이 다 거덜나게 생겼구려…”
“어그, 또 잔소리세요? 알았어요. 새 그릇을 사더라도 제 돈으로 살꺼예요. 암튼 전 저 깨진 그릇은 절대 쓰고싶지 않아요.”
“뭐? 당신의 돈? 당신의 돈이 어딧어?”
“왜 없어요. 령감님이 매달 주는 돈이 있잖아요.”
“보모비?”
“예. 제가 령감님의 보모노릇해서 정정당당하게 받는 제 돈. 그건 제 돈이예요.”
“보모비로 주는 돈도 내가 주는 돈이야. 그러니 내 돈이지.”
“어머, 그 말씀 어이없는거 본인도 아시죠? 제가 그냥 받아요? 저 온종일 령감님 시중을 들어주구, 밥 해드리구, 옷 씻어드리구, 집안 청소해드리구… 그렇게 엄청 많은 일을 해서 받는, 정직한 제 돈이예요. 이거 왜 이러세요?”
정씨는 이쯤에서 조금 밀리는게 느껴지는지 한발 물러섰다.
“됐어. 됐구. 정 바꾸겠으면 내가 돈을 줄께. 대신 한개라두 깨뜨리지 말구 아껴서 써. 내 죽을 때까지 쓰란 말이여.”
“알았어요- 참. 구두쇠가 따로 없어.”
“뭐라구? 방금 날 욕했어?”
“욕이라니요? 제가 보모인 주제에 어찌 감히 선생님 같이 유식한 분을… 아니예요.”
유식하다는 말에 그제야 흡족한듯 입가에 빙그레 미소를 띄우는 정씨를 보모아줌마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바라보면서 웃었다.
농촌에서 농사일밖에 모르던 그녀는 남편이 돌아가고 하나뿐인 아들이 대학에 들어가자 시내에 들어와 일을 찾았지만 여의치 않았다. 한동안 그녀는 식당에서 막일도 해보았지만 농사일보다 더 힘들었다. 또한 가는 곳마다 나이가 많다고 꺼리는바람에 언제 해고될지 몰라서 전전긍긍하다가 누군가 이 집의 보모로 소개해줘서 오게 된것이다.
정씨네 집은 그녀에겐 조용한 항만(港湾) 같은, 의식주가 다 해결이 되는 따뜻한 보금자리였다. 아들을 대학으로 보내자 무작정 상경한 그녀가 받았던 수많은 애로사항들이 여기서 종지부를 찍을줄은 몰랐다. 이곳저곳 일자릴 찾아 동분서주하던 그녀의 마음은 비로소 안식처를 찾은 셈이였다.
보모아줌마의 생각에 정씨는 아무것도 할줄 모르지만 심성이 착했다. 셋이나 되는 아들들도 자주 드나들지 않아서 다행이였다. 또 보모비로 받는 돈도 정씨가 직접 자기의 퇴직금에서 주기에 정씨의 아들, 며느리들의 눈치를 볼것도 없어서 그게 제일 편하고 좋았다.
정씨와 동고동락하면서 차츰 그녀는 욕심이 생겼다. 그녀는 알고있었다. 정씨가 이젠 자기가 없이는 삶이 불가능하다는것을.
그녀는 정씨만 괜찮다면 평생 이 집에서 정씨랑 살아도 나쁘진 않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자신은 소학교도 채 졸업못한, 글귀나 겨우 깨친 무식한 농촌녀자에 불과했다. 그런 자신에 비해 정씨는 소학교 선생까지 지낸 교육자요, 지식인이였다.
그녀는 유식한 사람을 제일 존경했다. 자신이 무식해서 그런것 같았다. 그는 가끔 정씨가 커다란 종이를 펼쳐놓고 글을 쓰는걸 멍하니 지켜보군 했다. 글을 쓸 때 보면 정씨는 이제 별 볼일없는 70대 늙은이가 아니였다. 그는 섬세한 손놀림으로 한자한자 써내려갔는데 그렇게 나온 글이 세상에서 최고로 멋져서 그녀는 얼마나 놀랐던가. 무식한 그녀의 눈에도 그것은 대단한 필치였던것이다.
그녀는 정씨와 자기가 거의 20년이란 나이 차이가 있다는걸 개의치 않아했다. 그녀는 유식한 정씨가 너무 존경스러웠다.
보모아줌마가 정씨네 집에 온지 한달이 다 돼가던 어느날, 정씨의 큰아들이 찾아왔다. 깨끗해진 집안을 둘러보던 큰아들의 얼굴에는 대번에 미소가 어렸다. 아버지와 마주앉으니 예전보다 신수가 훤해진 아버지의 모습이 선명하게 알렸다. 특히 머리에 염색을 한 아버진 10년은 더 젊어보였다.
“아버지. 한참 못 본 사이에 이렇게 젊어지셨네요? 적어도 10년은 젊어보여요.”
“요즘 보는 사람마다 그렇게 말한다. 이게 다 보모아줌마 덕분이야. 다 늙었는데 염색은 무슨 염색이냐 했더니 한번만 해보자구 너무 조르는통에 할수없이 했어. 리발소에 가서 머리만 깎고 아줌마가 약을 사다가 직접 염색해주니 돈도 별로 안 들었어.”
“약을 사다가 직접 염색해줬어요? 보모아줌마가?”
“그랬다니까.”
“야, 보모아줌마 보기보다 다르네. 돈 한푼이라두 아끼려구 그런 고생을 하셨군요.”
“고생은 무슨? 재미있다구 했어.”
“저, 아버지.”
“응?”
“보모아줌마가 어때요?”
“뭐가? 인물이? 인물이야 없지. 박색이야. 박색!”
“그게 아니라 아버지한테 잘해주시냐구요?”
“잘하지. 나 이젠 보모아줌마 없인 안돼. 매일 밥 해주구, 옷 씻어입히구, 집안을 거둬주구. 어디 그뿐이야? 앞마당에 있는 터밭의 채소들두 혼자 다 가꿨어. 비료도 안 친 록색채소라고 너희들도 갖다 먹어야 한다구 하더라.”
“우리까지 챙기려는걸 보니 보모아줌마 마음씨도 너무 이쁜것 같아요.”
“나두 처음엔 낯선 사람이라 불편했는데, 사람이 부지런하구 무엇보다 정이 많으니 말동무도 되구 좋아.”
그날, 큰아들은 집으로 돌아가자마자 핸드폰으로 두 동생에게 전화를 했다. 반시간후, 세 사람은 윗챗으로 의견을 주고받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보모랑 진짜 부부가 된다면 우린 우리대로 늘 신경쓰지 않아도 되니 좋은거잖아?”
맏이의 건의에 둘째가 심드렁하게 응수해왔다.
“요즘 보모랍시고 주인의 재산에 눈독들이는 녀자들 많아. 참 무서운 세상이지.”
셋째의 생각은 두 형과 달랐다.
“울 아버지 재산이 어디 있어? 지금 사는 집? 그 집 비워놔도 들어가 살 사람이 없어. 팔아봤자 돈 몇푼 안돼. 아버지 돌아가시면 그 집 보모한테 주면 그만이야. 간단하게 생각해. 뭐가 그리 복잡해?”
맏이는 그게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라는걸 두 동생한테 확인시키고싶었다.
“그 집 뚱챈(动迁: 건물 철거로 다른곳으로 이주하다)에 들면 돈이 되는 집이야.”
“그게 언제 된다구. 10년후? 20년 후? 아버지가 보모한테 새 장가들든 혼자 사시든 난 전혀 관심이 없으니까 두 형이 알아서 결정해.”
셋째의 말은 상의할 여지조차 없었다. 맏이는 이제 희망을 둘째한테 걸며 좀 더 강한 의지를 보였다.
“요즘 세월에 이렇게 착하구 알뜰한 보모를 구하기도 힘들어. 그렇다구 우리 형제 셋이 아버질 모셔올 상황도 아니니, 우리 두분 결혼을 허락하자.”
“난 반대야. 왜? 요즘 보모들 겉보기엔 착해보여도 음험하니까. 아버지의 퇴직금을 야금야금 제 호주머니에 채울수도 있으니 못 믿겠어. 지금은 괜찮지만 아버지가 치매라도 걸리면? 그땐 아버지 통장을 그 녀자가 마음대로 할수 있다구. 앞을 내다봐야지. 앞을!”
둘째의 반대는 생각보다 심했다. 결국 이 일은 없던 일이 되고말았다.
하늘이 조금씩 높아지고 가끔 서늘한 바람이 한낮의 열기를 식혀주던 어느날, 정씨네 집에 손님이 찾아왔다. 60대로 보이는 중년녀자였다. 보모는 그녀의 단정한 옷차림, 품위 있는 걸음걸이, 세련된 말솜씨를 보고 단번에 지식인인걸 알아차렸다. 보모는 이렇게 우아하게 늙은 녀인을 난생처음 보았다. 그녀의 얼굴은 풍상고초를 한번도 겪지 않은듯 희고 고왔다. 그 나이의 녀자들에게서 흔히 볼수 있는 반점 같은것도 전혀 없었다. 굽슬굽슬 파마를 곱게 해서 단정하게 올린 머리카락은 까맣고 윤기가 흘렀다. 정씨와 손님은 오늘 만나기로 벌써 약속이 된것 같았다. 그제야 보모는 정씨가 왜 며칠전부터 자신을 닥달했는지 알아차렸다.
정씨는 염색을 해주겠다고 했을 때 전처럼 반대를 하지 않았었다. 그는 하얀 셔츠가 두벌이나 있는데도 기어이 보모를 시켜서 한벌 더 사오게 했었다. 멀쩡한 구두도 발에 안 맞는다고 투정을 부리더니 스스로 서시장에 가서 구두 한컬레를 새로 사가지고 돌아오기도 했다. 이런 정씨의 변화가 뭘 의미하는지 보모는 몰랐었다. 다만 그렇게 차려입으니 훨씬 젊어보여서 기분이 좋았었다. 헌데 이 모든게 다 이 손님, 우아하게 늙은 중년녀인한테 보여주기 위한 “치밀한 준비”였단 말인가. 후유- 보모는 기분이 축 처져서 주방에서 서성거렸다.
이때 정씨가 주방으로 들어왔다.
“뭔 준비가 그리 늦어?”
“예? 아, 내 정신봐라. 인차 차 들여갈께요.”
“차라니? 커피를 들여와. 커피를!”
“커피? 그건 탈줄 모르는데.”
“모르면 타지 말구… 됐어. 내가 하리다.”
그는 스스로 커피잔과 커피, 설탕과 프림을 들고 거실로 들어갔다.
보모는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한번도 이런 느낌을 받은적 없었다. 방금전 자신을 바라보는 정씨의 표정에는 무식한건 정말 참을수 없다는 기색이 력력했었다. 보모는 갑자기 뒤통수를 한대 맞은 기분이 들었다.
수박을 쪼개는 그녀의 손이 떨렸다. 그깟 수박을 쪼개는게 뭐라고 이렇게 손이 떨리지? 헌데 다 쪼개놓고 보니 수박은 크고작고 정말 혼자 보기 아까울 정도로 가관이였다. 그렇다고 이제 다시 가서 사올수도 없었다.
(입에 들어가면 다 한가지다. 그 수박이 그 수박이지뭐.)
그녀가 수박을 들고 거실로 향했을 때 반쯤 열어놓은 거실안에선 웃음소리가 새여나왔다. 살며시 안을 들여다보니 두사람이 나란히 앉아 옛날 사진앨범을 보고있었는데 분위기가 제법 아기자기했다. 탁자에 놓은 커피잔 두개에선 커피향이 솔솔 풍겨나오고있었다.
(둘이 옛날 첫사랑이라두 되나보지? 아예 좋아죽네. 흥. 커핀지 계핀지 난 쓰거워 그냥 공짜로 줘두 싫던데 저 녀인두 저게 좋은가봐.)
사람이 밥을 먹지 분위기를 먹고 사나. 보모는 혼자 중얼거리며 수박이 든 쟁반을 들고 거실안으로 쑥 들어갔다.
“아이, 사람이 왜 노크두 안하구…”
정씨가 놀란 표정으로 보모를 흘겨보았다.
“문이 열려있었어요.”
워낙 “노크는 무슨 노크예요!”라고 말하려 했는데 그 말은 입안에서 맴돌뿐 밖으로 튕겨나오지 않았다.
“아주머니, 제가 오는바람에 공연히 고생만 시키네요. 어서 와 편하게 앉으세요. 저보다 나이가 어린것 같은데.”
손님치곤 참 교양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마음씨까지 이뻤다. 보모가 그 말에 금방 안 좋던 기분이 풀려서 막 앉으려는 순간, 정씨가 한마디 했다.
“자넨 앞마당에 나가서 도마도랑 고추, 가지, 오이를 따다가 한꾸럭 준비해줘. 이 친구 갈 때 가져가게.”
“정선생님, 저의 집에도 있어요. 뭐하러 힘들게. 아주머니 앉으세요.”
앉지도 서지도 못한채 엉거주춤하던 보모는 아예 맞은편 쏘파에 앉아버렸다. 정씨가 뭐라 하든 그녀는 이번엔 앉아서 버틸 태세였다. 이 나이의 유식한 사람들은 마주앉으면 대체 어떤 대화를 하는지 너무 궁금해 진심으로 듣고싶었던것이다.
“이 집주인은 난데 이젠 주인의 말도 안 듣겠다이거요?”
“정선생님, 왜 그러세요? 사람 무안하게.”
중년녀인이 오히려 이 상황을 민망해 어쩔줄 몰라하는데 보모가 친절하게 수박 하나를 쥐여 중년녀인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괜찮아요. 전 이것만 드리구 나가려구 했어요.”
“동년밴데 같이 얘기하면 좋은데…”
“정선생님이 싫어하잖아요. 전 주인이 싫어하는 일은 못해요. 보모잖아요.”
“고마워요. 잘 먹을게요.”
중년녀인은 진심으로 고마워하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 따뜻한 시선이 너무 인간적이였다.
터밭에서 보모는 제일 크고 싱싱한 채소들을 가득 뜯어서 한박스 담아놓았다. 비록 이 집 보모의 신분이지만 보모면 또 어떤가. 이 우아한 중년녀인에게 자신의 넉넉한 인심을 보여주리라. 사실 이 채소들이 내것이 아닌 정씨의것이란 생각이 들자 그녀는 너무 우스워 혼자 입을 싸쥐고 웃었다.
날이 어두워질무렵, 중년녀인과 함께 밖으로 데이트하러 나갔던 정씨가 돌아왔다. 보모가 보니 정씨의 기분이 고무풍선처럼 붕붕 떠있었다.
(늙은 남자도 남자니 별수 없구나.)
우아한 중년녀인을 만나고 돌아오니 안색부터 확 달라진 정씨였다. 보모가 아무것도 묻지 않았는데 정씨가 싱글벙글 웃으며 그녀의 곁으로 다가왔다.
“아까 그 녀자는 내 사범학교때 첫사랑이야.”
“예? 첫사랑? 그럼 죽은 사모님은 두번째 사랑인가요?”
“참, 말을 해도 꼭 그렇게 투박하게 해야 쓰겠어?”
“그럼 어떻게 말해요? 원래부터 투박한걸. 그 첫사랑인지 하는 녀자랑 저녁두 먹구 오지 그랬어요. 그럴 때 쓰려구 악착같이 돈을 아낀거 아니였어요?”
“내가 언제 또 악착같이 아꼈어?”
“아님 말구요. 헌데 저녁은 뭘 드실래요?”
“랭면이 먹고싶어.”
“참,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것도 아니구. 랭면 안 좋아하시잖아요. 왜 갑자기 랭면을?”
“사오라면 사오지. 뭔 말이 그리 많어?”
보모는 오늘은 별로 정씨랑 긴 말을 하고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냥 랭면을 사러 나왔다. 랭면집까진 10분거리였다.
길 량옆에는 작은 머리방들이 따닥따닥 붙어있었다. 문득 낮에 본 그 중년녀인의 파마머리가 생각났다. 그녀의 발걸음이 어느새 한 머리방앞에 와 멈춰섰다.
“어머, 처음 보는 손님이네요. 머리 하실려구요?”
어느새 20대 녀자애가 그녀앞에 와서 생글거렸다.
“머리 하는데 제일 싼 값이 얼매요?”
“80원인데, 70원에 해드릴께요.”
“어이구, 돈을 거저 떼먹으려구 하는구만. 30원에 해주오.”
“아줌마, 지금 30원짜리 파마 어딧어요?”
“그럼 됐소. 머리방이 어디 여기뿐인가?”
다른 머리방을 기웃거리는 그녀의 팔을 나꿔챈 녀자애가 쿨하게 말했다.
“아줌마, 내 우리 엄마 같아서 양보할게요. 60원! 60원에 해줄게요!”
“50원!”
“안돼요. 그럼 저 해주고 사장님한테 욕먹어요.”
“처녀는 이 집 사장님이 아니요?”
“예. 전 이 집에서 일하는 일군이예요. 먹고살기 힘들어요.”
보모는 순간 그 앳된 녀자애가 안쓰러웠다. 자기랑 처지가 똑같은, 남의 집에서 일해서 먹고사는 인생이였다.
“알았어. 내 래일 아침에 올게. 50원! 그깟 돈 쓰지뭐.”
보모가 랭면을 사들고 돌아왔을 때 정씨는 쏘파에 기대여 잠들어있었다. 머리방앞에서 흥정을 하다보니 시간이 꽤 지체됐다. 그녀는 랭면을 얼른 챙겨서 밥상우에 놓고 정씨를 깨웠다.
“랭면 사왔어요. 어서 드세요.”
“랭면? 아- 자네나 먹게.”
“예? 아까 랭면 먹고싶다고 해서 사왔는데 드셔야죠.”
“랭면은 자네가 좋아하잖아. 원없이 실컷 먹게.”
말을 마친 정씨는 안방으로 들어가 누웠다. 이내 코고는 소리가 주방까지 들려왔다.
그제야 보모는 정씨가 왜 랭면을 사오라고 했는지 짐작되였다. 낮에 자기의 첫사랑 앞에서 그녀를 구박줬던게 마음에 걸려서, 그래서 사과한다는 뜻에서 그녀가 좋아하는 랭면을 사오게 했던게 틀림없었다.
랭면 두그릇을 앞에 놓고 그녀는 눈물이 글썽해졌다. 별것도 아닌 랭면 두그릇이 그녀의 가슴속에 전률이 일게 했다. 소학교도 못 나온 그녀의 전남편은 사람이 무뚝뚝하고 잔정이 없었다. 살면서 남편의 사랑이 뭔지 단 한번도 느껴보지 못한 그녀는 정씨의 이런 은유적인 표현이 낯설었다. 허나 정씨의 관심이 느껴져 저도 모르게 울컥했다.
(이게 다 지식이 있으니, 먹은 물이 있으니 가능한거지.)
그녀는 또 한번 정씨에 대한 존경심이 그들먹하게 차올랐다.
랭면 두그릇을 게눈 감추듯 먹어버린 그녀는 정씨의 옷가지들을 들고 밖에 있는 수도가에 가서 씻기 시작했다.
(덤으로 랭면 한그릇 더 먹었으니 열심히 일을 해야지.)
땀을 뚝뚝 흘리며 빨래를 하는 동안, 낮에 본 그 우아한 중년녀인의 모습이 자꾸 눈앞을 스쳤다. 녀자인 그녀가 봐도 너무 고운 60대 녀인이였다. 그 정도 녀인이 돼야 정씨에게 어울리는 상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내가 잠시나마 내 처지를 착각한거야. 이 사람들은 나랑 노는 물이 달라. 후유- 난 역시 이런 사람들속에 있으면 물우에 뜬 기름 같애. 겉돌뿐이지 섞일수가 없는거야. 제 주제를 알아야지. 제 주제를…)
생각할수록 잠깐이나마 정씨를 마음에 두었던게 부끄러웠다. 자신은 그동안 자기한테 거친 욕 한번 안한 “유식하고 존경스런 어른”인 정씨의 보모로 있다는것에 만족해야 하리라.
문득 그녀는 정씨의 보모도 정씨의 신분에 맞아야 하며 너무 처지면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이 늘 가슴속에 잠재해 있어서 머리방을 기웃거렸는지도 모를 일이였다.
이튿날, 그녀는 일찍 머리방에 가서 파마했다. 염색을 하고 파마하는데 50원을 쾌척하고 돌아오면서 그녀는 후회되였다. 그 돈이 사실 너무 아까웠던것이다.
50원이 아니라 단 돈 5원도 자기를 위해 써본 기억이 없었다. 아들이 대학을 졸업하면 결혼을 시켜줘야 했다. 남편도 없이 홀로 아들이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돈을 대주기도 벅찼다. 그런 엄마의 마음을 잘 알고있는 아들은 대학에 입학한 그날부터 알바를 뛰였다. 그녀는 어떤가? 단 돈 한푼이라도 아꼈다가 아들한테 보태주고싶은 엄마의 마음이였다.
헌데 분명 무슨 귀신에게 홀리워 엄청난 일을 저질렀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귀신이 정씨인지 정씨의 첫사랑인지는 알수 없었다.
(미쳤어. 미쳤지. 파마를 한다고 달라질게 뭐 있어. 누구의 보모든 보모는 보모일뿐인데.)
그날, 정씨의 큰아들은 우연하게 아버지집에 들렸다. 헌데 아버진 산책을 나가셨는지 집에 없고 보모가 막 집안으로 들어서고있었다.
파마를 한 보모를 정씨의 큰아들은 알아보지 못했다. 보모가 먼저 아는척해서야 알아보고 너무 놀라서 굳어진 정씨 큰아들.
“아줌마, 파마 하나 했을뿐인데 사람이 너무 달라보여요.”
“달라보이다니? 너무 촌스러워요? 하긴 나두 어색하긴 해요.”
“그게 아니라… 아줌마, 너무 멋있어요. 너무 젊구 이뻐요.”
“말은 고맙지만, 그런 말은 저에겐 안 어울려요. 아참, 아버질 찾아왔겠는데 어쩌나. 아버진 모임이 있다구 나가셨는데.”
“괜찮아요. 아무 일 없어요. 헌데 아줌마, 사진 한장 찍어드릴께요. 파마를 한 기념으로. 아줌마 아들한테도 보내드리면 좋잖아요.”
“예? 우리 아들한테요?”
정씨의 큰아들이 핸드폰을 들더니 보모를 앞마당에 있는 앵두나무앞에 세워놓고 한장 찍어주었다. 그는 그 자리에서 보모에게서 아들의 핸드폰 번호를 알아내선 윗챗으로 보내주었다.
그 사진을 받아본건 보모의 아들뿐이 아니였다. 정씨네 아들며느리, 손자손녀까지 동시에 받아보고 놀람을 금치 못했다. 그냥 촌녀자로만 알았던 보모가 파마 한번에 이렇게 괜찮아보인다는걸 누구도 상상 못했다.
정씨의 큰아들은 윗챗을 할줄 모르는 아버지를 위해 사진관에 가서 사진까지 뽑아서 갖다주는 정성을 보였다.
정씨는 그날 밤늦게 집으로 돌아왔다. 그가 들어온줄도 모르고 보모는 자기 방에서 자고있었다. 정씨는 방금 들어오다가 문앞에서 큰아들을 만나서 사진을 받아쥐고 들어왔다.
돋보기를 걸고 그 사진을 들여다보던 정씨는 깜짝 놀랐다. 눈매가 서글서글한 이 녀자는 누군가?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이긴 했지만 누구인지 딱히 떠오르진 않았다.
이튿날 아침, 정씨는 마당에서 오이를 뜯고있는 보모를 보고 굳어졌다.
(무슨 녀자가 남의 집 터밭에서 오이를 뜯고있나? 혹시 도적인가?)
“일어나셨어요? 어제밤엔 죄송해요. 곤해서 깜빡 잠들어서 들어오시는것도 몰랐어요.”
(이게 누군가? 설마…)
“호호호. 진짜 절 못 알아보세요? 어제 이 집 큰아들도 몰라보더니…”
“파마는 왜 해가지구 사람을 헷갈리게 해.”
그녀의 변신은 무죄였다. 말은 그렇게 해도 너무 근사해진 그녀를 보고 정씨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녀가 그 돈 50원이 너무 아깝다고 하자 정씨는 지갑을 열고 백원짜리 두장을 꺼내주었다.
“파마만 하면 뭐해. 이걸루 옷 한벌 사입구 와.”
“예? 정말 이 돈… 저 주시는거예요? 이 돈 저 주시고 제 월급에서 까시는건 아니죠?”
“아니야. 이쁜걸로 사입어.”
“야, 좋아라. 령감님. 아니 선생님, 감사합니다.”
(세상에. 오늘은 정말 운수 좋은 날이야!)
그 길로 그녀는 서시장에 가서 60원을 주고 연두색 원피스를 하나 샀다. 그녀는 농촌에 살 때 늘 고무신을 끌고다녀서인지 발이 거칠고 보기 흉해서 고운 신을 신어본적이 없었지만 고르고 또 골라서 30원짜리 구두를 하나 샀다. 내친김에 5원을 주고 하얀색 양말을 두컬레 샀다. 정씨와 자기가 똑같은 양말을 신는다고 상상하자 얼굴이 붉어졌다. 시장에 와서 한꺼번에 이렇게 신나게 돌아다닌적 있던가. 95원! 머리에 털이 나고나서 이렇게 큰 돈을 자기를 위해 처음 써보았다. 그녀는 가슴이 두근거리고 심장이 뛰였다.
(돈을 준다고 이렇게 왕창 써버리면 어떡해. 이 돈은 내 월급에서 깎으라고 해야겠다.)
그녀는 기분 좋게 쇼핑을 마치고 돌아왔다. 무슨 전시를 하듯 사온 물건들을 일일이 꺼내보이자 정씨가 그걸 입어보라고 란리다. 그는 방으로 들어가 “꽃단장”하고 나와서 정씨앞에 섰다. 헌데 정씨가 그녀의 아래우를 훑어보다가 갑자기 박수를 치는게 아닌가.
“됐어. 이젠 내 첫사랑 앞에서도 기 죽지 않겠어.”
“예?”
“합격이야. 합격!”
정씨가 그렇게 환히 웃는 얼굴을 본적이 없었다. 보모는 웬지 모르게 자신감이 생기면서 기분이 좋아졌다.
저녁을 먹은 후, 그녀는 남은 돈 105원을 정씨앞에 내놓았다.
“제가 령감님의 신세가 얼마나 많은데 이 돈을 받겠어요. 전 령감님한테 바라는게 없어요. 보모도 다 돈을 받고 하는 일인데, 이 돈 제가 왜 받아요? 잠깐 공짜에 눈이 어두웠지만, 그래두 고마웠어요.”
“줄만하니까 주는거야. 받게. 내 마음이라 생각하고.”
“아니예요. 전 받을꺼 다 받고있어요. 그저 이 집에서 나가란 소리만 안하시면 돼요. 전 우리 아들을 장가 보내야 해요. 그래서 돈이 필요해요. 말이 나온김에 할께요. 우리 아들 장가갈 때까지만 저 령감님 옆에 있게 해주세요… 부탁드릴께요.”
정씨는 가슴이 뭉클해났다. 전에 자기가 알던 그녀가 아니였다. 겉으론 내색안해도 그녀를 알게 모르게 구박했던건 사실이였다. 헌데 파마를 하고 연두색원피스를 입은 그녀는 이제 보니 정말 근사한 녀인이였다. 자기의 첫사랑, 그녀가 지적이면서도 세련된, 곱게 늙어가는 우아한 60대 녀인이라면 지금 눈앞에 있는 보모, 그녀는 시원시원한 이목구미에 앞마당에 있는 오이나 상추같이 싱싱한, 때묻지 않고 순수한, 이제 막 50대를 바라보는 꽃중년 녀인이였다. 정씨는 이런 녀인을 알아보지 못하고 농촌아줌마라고 은연중 무심하게 대했던 지난 시간들이 후회되였다.
“아까 우리 맏이가 전화로 그랬어. 우리 둘이 결혼하라구.”
“예? 설마?”
“나두 그 애들이 그렇게까지 나올줄은 몰랐어.”
“그 애들이라면 둘째, 셋째도 같은 생각을 한단 말씀이세요?”
정씨는 고개를 끄덕였다.
“안돼요. 파마를 했다고 제가 달라진거 뭐 있겠어요. 여전히 촌녀자고 무식하구…”
“미안해. 그 무식하단 소리 내가 참 많이 했지?”
“어머, 왜 이러세요. 무식한거 무식하다 했는데. 다 사실이잖아요. 저 그것때문에 삐지거나 마음 상한적 없어요.”
“그럼 다행이구. 헌데 내가 안돼.”
“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나 간암말기야. 이제 남은 시간이 별루 없어.”
“예? 거짓말! 저랑 살기 싫으시니까 그런 말씀하시는거 알아요. 그럴 필요 없어요. 령감님의 아들들이 우릴 맺어주려구 해도 그건 그들 생각이죠. 전 아니예요. 령감님은, 아니, 선생님은 선생님에게 어울리는 그런 녀자를 만나서…”
“간암말기야. 그래서 내가 자네한테 말을 못한거야.”
“?”
정씨는 말했다. 이 일은 정씨의 아들뿐만아니라 그의 지인들도, 그의 첫사랑도, 아무도 모르는 일이라고. 병은 반년전 학교에서 퇴직교원들에게 정기검진을 시켜줬는데 그때 발견했었다. 큰 병원에 가서 다시 검사받을 필요가 있겠냐는 그의 물음에 의사는 그럴 필요는 없다고 했다. 그래서 그만두었다. 이제 살 날이 얼마인지 의사는 알려주었다.
“아침저녁으로 옷깃으로 바람이 스며들 때면 가게 될것입니다.”
의사의 말은 적중했다. 지금은 여름이 거의 끝나가는 길목이다. 요즘따라 그는 부쩍 몸에 이상이 느껴졌다. 그는 의사를 찾아가 상황을 얘기했다. 의사는 참을수 없이 아플 땐 련락하라고 하면서 전화번호 하나를 건네주었다. 그는 그 번호에 전화를 걸어보고나서야 그곳이 “친친양로원”이란걸 알았다. 말이 양로원이지 그곳은 사람이 죽기전, 정말 힘들 때 가는 곳이였다. 작년에 정씨의 친구도 그 병원에서 한달가량 있다가 저세상으로 갔다. 그것은 암환자들이 마지막으로 머무는 곳이였다. 별다른 치료는 없었다. 그저 진통제 하나에 의지해 인간의 마지막 아픔과 싸우는 곳이였다.
어제도 정씨는 보모아줌마에게는 모임에 간다 해놓고 은행에 가서 자신의 잔고를 정리했다. 그에겐 세 아들이 모르게 안해가 죽기전에 남겨준 꽤 큰 돈이 있었다. 그 돈을 안해는 두 사람중 남아있는 한사람이 어쩔수 없이 홀로 여생을 살게 될 때 쓰자고 약속했었다. 정씨보다 일찍, 그리고 갑자기 죽을것을 미리 예견하기라도 한듯 안해는 아주 오랜 세월 그 돈을 차곡차곡 끈질기게 모아왔다. 그러는동안 부부는 그 누구도 약속을 어기지 않았다. 그래서 그 돈은 영원히 그들 부부만 아는 돈이 되였던것이다.
보모는 정씨의 “비밀”을 알고난 후에도 담담했다. 그녀는 예전과 다름없이 그의 수발을 들어주었다. 하루가 다르게 정씨의 기력은 못해졌다. 몇번이고 정씨의 큰아들에게 이실직고하고싶은걸 그녀는 겨우 참았다.
마침내 큰아들이 아버지에게서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을 땐 그의 병이 이제 마지막 고비를 향해 가고있을 때였다. 그가 가슴을 치며 자신의 불효를 후회했지만 정씨는 더이상 그의 효도를 기다려줄 기력이 남아있지 않았다.
정씨는 멀쩡해보이다가도 가끔 정신을 잃고 까무러치기도 했다. 음식을 먹을수 없었고 밤이면 가슴을 저미는 통증에 한숨도 못 자고 고통에 시달렸다. 그는 이제 자기가 이생에 남아있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걸 알았다.
정씨는 스스로 병원에 전화를 걸어 방을 예약했다. 그리고 전에 안면이 있던 변호사를 자기 집으로 불렀다. 수중의 돈을 세몫으로 나누어 유서와 함께 변호사에게 맡겼다. 그리고 그걸 자신이 운명한 뒤에 처리해줄것을 간곡히 부탁했다.
정씨가 “친친양로원”에 들어갈 때 보모도 같이 갔다. 보모는 가족의 이름으로 매일 그의 병실을 떠나지 않았다. 전문 간호사가 있어 그럴 필요가 없다고 해도 그녀는 고집을 부렸다. 정씨의 큰아들이 그런다고 보모비는 더 줄수 없다고 하자 그녀는 알고있다고 했다.
거기에 들어간지 열흘째 되던 날, 정씨는 아침에 보모에게 뭔가 눈짓을 해왔다. 보모가 목욕하고싶은가고 묻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젠 말하는것조차 어려운 정씨였다. 헌데 그를 맡은 간호사가 다른 일로 밖에 나가고 없었다. 간호사를 기다리다가 정씨가 잘못되기라도 할가봐 보모는 자기가 해드리겠다고 나섰다. 원장님의 동의하에 그녀는 정씨를 안고 방 한옆에 딸린 욕실에 들어갔다.
그녀의 손에서 깨끗한 모습이 된 정씨는 침대에 누워 그녀를 향해 고개를 끄덕여 고맙다고 했다. 그녀는 말도 못하고 힘들어하는 정씨가 너무 안쓰러워 그의 손을 두손으로 꼭 잡아주었다. 그리고 한시간쯤 지났을 때, 그녀한테 손을 잡힌채 정씨는 조용히 아름다운 하늘나라로 떠나갔다.
리별 뒤에 남는건 정뿐이였다.
정씨의 큰아들은 슬픔에 잠겨있는 그녀에게로 다가와 그동안 고마웠다고, 무조건 아버지의 유언에 따르겠다고 했다. 너무 슬퍼서 우느라 그녀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듣지 못했다.
며칠후, 보모의 아들은 학교에 날아온 한통의 문서를 받았다. 정씨가 생전에 공증처에 위탁해서 보낸 집문서였다. 정씨는 자기의 이름으로 된 집을 보모의 아들 이름으로 변경해놓았었고 이미 공증도 마친 상태였다. 집문서속에는 정씨가 직접 쓴, 멋진 서화체로 쓴 쪽지가 한장 들어있었다.
“…너의 엄마랑 함께 보낸 시간들은 짧았지만 내 마지막을 함께 해준 너의 엄마에게 해줄수 있는게 이것밖에 없구나. 허름하나 많은 추억이 깃든 이 집에서 엄마랑 행복하기를…”
도라지 2015년 제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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