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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 > 《중국대륙의 겨레렬사기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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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겨레렬사비6]겨레 항일항공렬사 김원영(1) 댓글:  조회:1213  추천:0  2017-03-15
건군 90돐 기념 특별기획-중국대륙의 겨레렬사기념비 (6) □ 리 함 1   김원영(金元英) 렬사 풍경이 그림같이 아름다운 남경 자금산(紫金山) 북쪽기슭에는 남경항일항공렬사공묘(南京航空烈士公墓)가 있다. 중국, 구쏘련, 미국, 한국 등 나라의 항일항공렬사 3300여명 이름이 여러 비림(碑林)에 새겨져있는데 그중 전상국(田相国)비행사와 김원영(金元英)비행사가 한국인(조선인)으로 나타나 우리에게 다가온다. 이제 전상국에 이어 김원영 이야기가 펼쳐지니 김원영은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새로 발굴된 참신한 자료에 따라 세번에 나누어 보여드리게 된다.   김원영(金元英, 1919-1945.3.24)은 황해도 장연(長渊) 출신으로 알려진다. 김원영의 출생을 두고 1919년 설과 1922년 설 두가지가 있는데 한국의 김원영 독립유공자 공훈록 등 여러 주요자료들에서 1919년생이라고 밝혔기에 본문은 1919년 설을 따르기로 한다. 중국에서의 부름은 구양명(欧阳明)이고 1935년 일제측 “중화민국재류불령선인단체의 정황”(中华民国在留不逞鲜人团体의 情况) 보고서에는 김원영(金元瑛, 张阳明)으로 기재되여있다. 중국땅에서 활동한 조선인 비행사로 알려지기전 김원영은 이름난 항일독립지사인 김보연(金甫渊)의 아들로 나타난다. 김보연은 1919년 4월 상해에서 설립된 대한민국림시정부의 초대 의정원 의원으로서 1920년에 상해 대한인민단 간사와 상의원을 지내고 1921년에 상해 대한교민단 총무, 1922년-1926년에 류호(留沪)청년회, 림시정부 경제후원회 등 부문에서 활동하면서 상해림시정부 수립에 주추돌 역할을 한 사람으로 유명하다. 김원영의 아버지 김보연은 바로 이런 사람이다. 후날 대한민국림시정부 주석 김구(金九)선생과 동향(同乡)인 관계로 김구선생의 상해진출에 도움을 주게 되였으니 이 도움이 김구선생의 자서전 《백범일지》에 그대로 적혔다. -이튿날 나는 벌써부터 가족을 데리고 상해에 와있던 김보연의 집을 찾아가서 거기서 숙식을 하게 되였다. 김군은 내가 장연에서 교육사업을 총감하는 일을 할 때에 나를 성심으로 도와주던 사랑하던 청년이였다. 김군의 소개로 전부터 잘 알고있던 리동녕(李东宁), 리광수(李光洙), 김홍서(金弘叙), 서병호(徐炳浩) 등 옛 동지를 만났다. (도서출판 耕慧社, 2006년 2월 초판,제283페지) 김구선생의 회고는 1919년 3.1운동 직후 상해로 망명하던 시절의 일로서 항일독립지사들인 김구와 김보연과의 관계가 이만저만이 아님을 잘 알려주고있다. 1876년생으로 이해 44세인 김구선생은 자기보다 후배인 동향친구를 “사랑하던 청년”이라고 부를만도 했다. 또한 김원영을 포괄하는 김보연 일가가 상해에서 생활하였음도 지적하여준다. 이와 동시에 한국정부에서 고인이 된 김원영의 공훈을 기리여 2001년에 추서한 건국훈장 애국장 공훈록에 따르면 김원영은 “어려서 부모를 잃은 까닭에 안원생(安原生)에게 시집간 누이 김영애(金永爱)의 거처인 북평에서 거주하였다”고 밝히여 김원영의 중국으로의 진출은 상해시절에 앞서 북평에서 이미 생활하였음을 알린다. 모순되는 점은 아버지가 항일독립지사로 살아계시는데 “어려서 부모를 잃은 까닭에” 시집간 누이 따라 북평에서 생활하지 않으면 안되였다는 부분이지만 김원영의 북평생활은 사실인것 같다. 2 어느덧 김원영은 17살 젊은이로 자라났다. 17살 되던 이해 1935년 2월, 김원영은 아버지와 김구선생의 배려로 김구선생이 중국측과 교섭하여 남경에 설치한 조선인 학생훈련소에 입소하여 군사훈련을 받았다. 학생훈련소는 남경의 중국 중앙군관학교에 입교하기전 학생들에게 예비교육을 실시할 목적으로 설치되면서 남경성내 동관두(东关头) 23호에 자리잡았다. 동관두는 옛수도(古都)로 이름난 남경의 유람명승지 부자묘(夫子庙)와 진회하(秦淮河) 가까이에 위치하여 기분도 한결 좋았다. 김원영은 남경의 학생훈련소를 거쳐 남경중앙군관학교를 제19기로 졸업한후 1935년 8월 하순 김학무(金学武), 리성황(李成煌), 정성언(郑成彦) 등이 조직한 사회주의 비밀결사 혁명동지회(革命同志会,일명 10월회)에 입회하여 활동하는 모습을 보였다. 중국땅에서 활동하는 조선인 혁명가로서의 참된 모습이다. 1939년 2월 광서 류주(柳州)에서 조선인 청년들의 항일단체조직-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韩国光复阵线靑年工作队)가 결성되였다. 김원영은 이 청년공작대의 30여명 대원중의 한사람으로서 그 시절 동지인 김자동(金自东)의 회고문 “중국 상이군인(부상병들을 가리킴) 위문공연 펼친 조선 청년들”에서 생생한 모습으로 나타나 고무를 주고있다. 남경항일항공렬사기념관 밖에 전시된 당년 비행기 모형 후일 대한민국림시정부 기념사업회장으로 활동하는 김자동은 자기의 회고문에서 “류주시내에 당나라때의 문인 류종원을 기념하는 류후공원(柳候公园)이 있는데 광복진선계 청년들의 합숙소가 그 근처에 있었다.”면서 “공원은 공기도 좋고 운동을 즐기기에 좋은 곳이였다. 림정(临政)이 류주에 머무는 동안 나는 거의 매일 공원과 합숙소에 들려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고 회고문에 쓰고있다. 김자동은 또 이렇게 회고하고있다. 류주에서도 일본군의 공습이 몇차례 있었다. 공습경보 싸이렌이 울리면 모두 근교로 피신했다. 류강(柳江) 건너편은 산과 가까왔으므로 천연동굴로 피했으며 시중심쪽에 있던 우리는 공동묘지쪽으로 나갔다. 묘지사이에 방공호를 파놓아 비행기가 접근하면 그속으로 들어가게 돼있었는데 실제로는 경보가 해제될 때까지 묘지사이에 앉아 시간을 보내는것이였다. 방공호속에는 길이가 한자 넘는 큰 지렁이들이 보일 때도 있었다. 후날 알게 됐지만 그곳 사람들은 이 지렁이를 별미로 료리해 먹고있었다. 김자동의 회고인용은 류주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 시절 김원영을 보는듯이 리해하는데 큰 도움으로 나선다. 김자동의 회고에 따르면 1937년 7.7사변후 중국의 전면 항일전이 시작되면서 중국군의 희생은 막대하고 부상병들이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았다. 이에 김원영 소속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는 1939년 3월초 3.1절 기념행사에 이어 중국군 부상병 위문과 모금연예활동을 활발히 벌리였다. 3 위문과 모금연예활동은 류주에서 가장 크다는 류주대극원(大戏院)에서 치러졌다. 이날 류주대극원 1층 일반석은 전부 매진되고 2층은 중국군 부상자들 초대석이였다. 연예가 시작되자 청년공작대 소년대원들이 “푸른 하늘” 등 가요를 부르며 춤추며 돌아갔다. 연극은 중국인 연예단과의 합동으로 펼쳐지면서 김자동이 피난민 소년 역을 맡아나섰다. 공작대의 막내둥이 녀성대원 오희영(吴姬英)이 피난민 소년으로 분장한 김자동의 누나노릇을 하였다. 연극의 노래는 우리 말이지만 연극은 모두 중국어로 펼쳐졌다. 관중과 부상자들은 반일정서를 고무하는 조선동지들의 연극에 열광적인 환호를 보내며 무대와 관중석을 하나로 이어놓았다. 이날 공연에서의 또 하나의 연극은 동북의 항일유격대를 배경으로 한 “전선의 밤”이였다. 연극의 주연배우는 미남으로 총애받는 김원영이고 대사는 역시 중국어로서 청년공작대의 전원이 출연에 나섰다. 김원영은 중국군 비행사에 앞서 연극의 주연배우로 등장할만치 재능있는 미남청년이였다. 김원영을 모르면 상상이 잘 가지 않는 인생려정 한부분이다. 2005년 8월 대한민국림시정부 기념사업회에서 광복 60돐을 맞으면서 대학생을 주축으로 하는 100여명 답사단을 조직해 상해-중경 10일 현지답사를 조직하였다. 이들 답사단이 광서 류주를 거치면서 보니 당년의 연예활동 보도 신문이 남아있고 그 기사를 썼던 기자가 90대 로인으로 이들을 맞아주었지만 그제날 공연극장은 1939년 4월 이후 조선동지들이 류주를 떠난 뒤 일본군의 폭격으로 완파되였다고 한다. 기념비 구내 비림속에서 전상국, 김원영 비림을 찾은 필자.  /2013년 9월 19일 현지촬영 류주를 떠난후 김원영의 인생려정은 크게 바뀌여진다. 김원영은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를 떠나 중국의 군관학생으로 되였다. 이를 증실하는 자료가 최근년간 사천성 성도시당안관에서 발견된 1942년의 “각국교민등기표”이다. 여기 각국교민등기표에 따르면 김원영은 이름을 구양명이라 밝히면서 국적란에 한국, 나이는 22세, 다닌 군관학교는 중앙군관학교 제18기 학원이라고 적었다. 성도시당안관의 소개에는 김원영이 1943년에 18기 군관학교 학습을 마치고 공군비행사로 진출한것으로 알려지지만 공군비행사로의 시초 경력은 잘 알려지지 않는다. 한국에서 알려지는 관련자료에 따르면 김원영은 1944년에 미군이 지원하는 프로젝트에 따라 이해 2월 인도에 가서 비행훈련을 추가로 받다가 중미련합항공대에 배속되고 1945년 1월 상해로 돌아왔다고 한다. 이는 사실인것으로 보이지만 가장 얼떠름한 부분이 바로 이 시절 김원영의 행적이다. 연구자료들에 따라 김원영을 중국군 공군군관학교 제15기생이라고 하지만 이는 이제 뒤에서 제15기생이 아님이 사실로 드러난다. 그럴 때 1960년 국민당 공군본부에서 출판한 《공군충렬록(共軍忠烈錄)》 제1집 제508페지에 김원영의 간략한 소개가 있어 주의를 모은다. 김원영, 구양명이라고도 함. 중화민국 11년(1922년) 9월 6일 출생. 본적지 한국, 우리 나라 적에 가입한후 상해사람으로 되다. 공군군관학교 제16기 구축조(驱逐组)를 졸업. 공군 제5대대 제29중대 소위 3급 비행원으로 임명. 34년(1945년) 3월 24일, 김원영은 호남 지강(芷江)에서 상양(湘阳)의 일본군을 향해 출격하려고 리륙할 때 비행기사고로 순국… 유족으로 부모가 있음. 김원영이 비행기사고로 순국? 이는 김원영연구에서 가장 주의를 끄당기는 부분이기도 한데 하나는 비행기사고라고 하고 하나는 아니라고 한다. 어찌하든 김원영이 1945년 1월 상해로 돌아왔음을 알게 되였으니 그후의 김원영 발자취를 추적해보기로 하자. 2015년 7월 초고, 2017년 2월 보충정리
5    [겨레렬사비5]겨레 항일항공렬사 전상국 댓글:  조회:1153  추천:0  2017-03-15
건군 90돐 기념 특별기획-중국대륙의 겨레렬사기념비 (5) □ 리 함 1         전상국 렬사    남경 자금산(紫金山) 북쪽 기슭에 자리한 남경항일항공렬사공묘(南京抗日航空烈士公墓)에는 중국, 구쏘련, 미국, 한국 등 나라의 항일항공렬사 3304명 이름이 여러 비림(碑林)에 새겨져 있다. 그중 조선인(한국인)이 2명이니 그들로는 전상국(田相国) 비행사와 김원영(金元英) 비행사라 한다. 중문 인터넷을 통해 항일항공렬사들을 검색하다가 이 소식에 접한 필자는 몹시 흥분되였다. 지체할세라 남경사범대학 외국어학원 한국어과 주임인 유성운박사와 련락하고 남경으로 달려갔다. 때는 2013년 9월 19일, 고속철 시대라 고속렬차는 뻐스로 평소 4~5시간 잘 달려야 하는 거리를 한시간 50분 만에 조여주었다.   남경남역에 내리니 유성운박사가 친구와 같이 승용차로 맞아주었다. 승용차는 남경시가지를 거치며 곧추 남경 자금산 북쪽 기슭으로 달리였다. 두어식경 지나니 자금산 북쪽 기슭의 남경항일항공렬사공묘 도착이다. 우리 일행 셋은 유성운박사의 안내하에 먼저 공묘 오른쪽에 위치한 남경항일항공기념관 입구를 찾았다. 정문입구내에 들어서니 금자탑모양의 대형 유리건물이 선참 우릴 맞아주었다. 남경항일항공기념관 주체건물이였다. 실외는 쌍날개 비행기, 실내에는 단날개 비행기가 전시되여 항일항공기념관의 의미를 짙게 하여주었다. 항일항공기념관내에 들어서니 기념관은 지상지하 2층으로 되고 기념관 전시물들은 지하1층에 전시되여 있었다. 기념관 소개를 보니 중국의 항일전쟁기간 중국공군 비행기는 도합 21597차 출격하여 일제놈들 비행기 599대를 격추하고 110대를 격상하였으며 적함 8013대를 격몰격상시키는 휘황한 승리를 취득하였다. 그 가운데서 손실도 커서 중국공군비행사 880명이 희생되고 7897명 공군관병들이 부상 또는 잔페로 되였다. 중국의 항일항공에 지원차로 나선 그 시절 쏘련 항공인원 236명과 미국 항공인원 2186명, 한국 항공인원 2명도 중국의 항전을 위하여 영용히 희생되였다. 숭엄한 기분이란 어떤 감정인가를 알것 같았다. 숭엄한 기분 그대로 기념관내 미국항공렬사들과 쏘련항공렬사들, 중국항공렬사들 사진과 소개를 주의하여 살피였다. “중국공군속 한국렬사” 부분에 이르러 우리는 발걸음을 멈추었다. 중국공군속 한국렬사는 김원영과 전상국, 미남형 두 겨레인물 사진이 맑은 인상으로 우릴 보고있었다. 사진곁에는 간단한 문자소개가 곁들여지면서 숭엄한 기분속으로 이끌었다. 내가 530여키로메터를 달리며 남경을 찾은것은 무엇때문이였던가? 바로 우리 겨레 김원영과 전상국 두 항일항공비행사를 찾기 위해서가 아니였던가. 2 두 조선인(한국인) 가운데서 선참 찾아보는이는 전상국. 전상국(田相国,1907.12.22-1938.8.21)은 황해도 신천군(信川郡) 사람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아직 전상국 신상관련 구체적인 자료는 수집하지 못하였지만 지금까지 전해지는 자료들은 전상국은 일찍 일본 다치가와(立川) 비행학교를 졸업한후 일본에서 항공학교 교관을 하다가 중국으로 망명하였다고 밝히고있다. 그후 전상국은 중국 중앙항공학교 교관으로 근무하게 되며 1931년에는 2등비행사 자격으로 중국 공군에 입대하여 항공항일활동을 하는 모습을 보인다. 1935년 7월, 남경에서 한국독립당, 신한독립당, 조선혁명당, 대한독립당, 의렬단의 5당 대표 14명이 모여 조선인(한국인) 들의 항일통일전선체조직-민족혁명당(民族革命党)을 결성하게 되였다. 일본침략자들과는 한하늘을 떠이고 살수 없다고 보는 전상국이기에 1936년에 결연히 민족혁명당에 가입하게 된다. 조선인 비행사 전상국의 활약상을 보여주는 항일독립투사의 참다운 삶이라 하겠다. 그후 전상국의 삶은 어떻게 이어져갈가? 관련자료들에 따르면 전상국은 1938년 8월 중일전쟁 당시에 국민당 남경정부 륙군소좌로서 비행대 대장으로 복무하면서 양자강(杨子江)전투에서 일본군과 싸우다가 전사하였다고 전해진다. 한국정부가 전상국의 항일공훈을 기리고저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할 때의 독립유공자 공훈록도 이같이 쓰고있다. 남경항일항공릉묘내 남경항일항공렬사기념비  /2013년 9월 19일 현지촬영 그러나 남경항공친목회(南京航空联谊会) 부회장 왕견(王坚)의 연구결과는 이와 판판 다르다. 남경항일항공렬사공묘 현지답사를 하면 우리는 이곳 항일항공렬사공묘의 남경항일항공렬사기념비는 1993년 5월에 정초식을 가지고 1995년 5월 항일전쟁승리 50돐을 기념하면서 중국, 로씨야, 미국, 한국 등 나라 정부관원들과 항공계 지명인사 등 5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성대한 제막식을 가지였음을 인츰 알수가 있다. 이날의 제막식에는 한국의 원 공군참모장인 김신(金信)도 귀빈으로 참석하게 되면서 남경항공친목회 왕견 부회장은 김신과 깊은 인연을 가진다. 그때 왕견은 김신장군과 한국 항일항공렬사인 전상국 그리고 김원영의 출신, 가족관계 등을 부탁하게 되였다. 왕견이 알고있는 전상국 자료는 너무도 간략하여 상위대장이고, 1907년생이고, 1938년 8월 21일 희생되였다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그후 왕견은 계속되는 연구와 조사를 거치면서 1960년 국민당측 공군총사령부에서 편찬한 《공군충렬록》 (空军忠烈录) 제1집 제209페지에서 끝내 전상국의 신상자료를 찾아내게 되였다. 3 전상국렬사, 본적 한국, 중국적에 가입한후 강소성 강녕현 사람, 중화민국 기원전 5년 출생. 일본항공학교와 우리 나라 중앙항공학교 제2기 고급반 졸업. 처음 일본항공학교 교관으로 임직하다가 망국의 아픔 안고 우리 나라 공군에 가입… 27년 (1938년) 8월 21일, 공무로 한구(汉口)에서 C.B기 74호로 사천 성도로 가다가 발동기 고장으로, 호북(湖北) 의창(宜昌) 서쪽 60키로메터 남타강(南沱江)에 추락, 순국. 유가족으로 안해와 딸 하나가 있음. (田烈士相国,祖籍韩国,入我国籍后为江苏省江宁县人,生于中华民国纪元前五年。在日本航空学校及我国中央航空学校第二期高级班毕业,初任日本航校教官,因怀亡国之痛,遂归我国投效空军……二十七年(1938年)8月21日,因公由汉口驾C.B机74号飞往四川成都,因发动机故障,坠落于湖北宜昌西60公里南沱江中殉职。遗妻及女一。)   남경항일항공기념관내 김원영-전상국 사진전시앞에서 유성운박사(우)와 함께     /2013년 9월 19일 현지촬영 전상국렬사 연구에서의 결정적인 일환이라 할가. 왕견의 소개에 따르면 《공군충렬록》 제1집에서 전상국은 애국열성으로 넘치는 전형적인 군인출신이라고 소개하고있다. 그 시절 전상국의 조국-삼천리강산은 일제의 철제아래 신음하는데서 전상국은 직접적으로 간악한 일제놈들과 싸울수 없었다. 울분에 넘친 전상국은 결연히 중국행을 선택하고 국적을 강소 강녕사람으로 만들어버렸다. 중국에서라도 일제와 싸우며 조국에 보답하려는 열혈청년의 헌신적인 패기였다. 과연 전상국은 여간내기가 아니였다. 7.7사변후 항전초기에 전상국은 벌써 중국항공대의 일원으로 출격해 17차에 달하는 공중운송과업과 일본군에 대한 15차의 폭격투하과업을 출중히 완수하면서 항일전 중국공군의 당당한 상위로 떠올랐다. 불행하게도 전상국은 32살의 한창나이에 비행기 기계고장으로 공무중 순국하였으니 중국공군이나 그가 태여나고 자란 고국으로 말하면 크나큰 손실이 아닐수 없었다. 최근년간 왕견이 부회장으로 근무하는 남경항공친목회에서는 한국 김신장군의 도움으로 일본에 정착하여 생활하는 전상국렬사의 안해와 딸 련락주소를 알게 되였다. 그들은 너무도 기뻐 인차 렬사의 안해와 딸과 련락을 가지였다. 이는 일본에서 생활하는 전상국렬사의 친인들을 흥분시키였다. 4 2005년 10월 27일 오전 10시, 전상국렬사의 딸 전혜경(田惠卿)녀사는 81세 고령인 외삼촌 한유동(韩有东)과 더불어 드디여 남경항일항공렬사공묘를 처음 배알하게 되였다. 아버지 전상국이 중국의 항일전장에서 순국하여 67년만에 찾아보는 걸음이였다. 남경항일항공렬사공묘에 들어선 전혜경녀사는 계단 넘어 저 산등성이에 거연히 일어선 항일항공렬사기념비와 기념비 주위 비림(碑林)을 둘러보면서 경탄을 금치 못하였다. “이곳 남경의 항일항공렬사공묘가 이다지도 웅위롭고 보호가 잘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전혜경녀사는 항일항공렬사기념비 오른쪽 비림속에서 아버지 전상국 상위대장의 거룩한 존함을 찾아내고는 흐르는 눈물을 금치 못하였다. 녀사는 지닌 가방에서 소중히 간직한 사진 3장을 꺼내고는 아버지와 맘속말을 터놓았다. “아버지 보세요. 이 사진은 어머니 사진이예요. 어머니는 세상을 뜨셨어요. 이 사진은 아버지 큰외손자 사진이구요. 이 외손자가 태여난후 외할머니는 이눔이 사위(전상국을 가리킴)를 신통히도 닮았다구 하셨어요. 이 사진은 아버지 딸 일가족의 사진이예요. 봐요, 아버지 세 외손자지요. 모두 잘 지우고있어요…” 2005년 10월 27일, 전상국렬사의 딸 전혜경녀사가 아버지 명함이 새겨진 기념비앞에서. /자료사진 남경항일항공렬사공묘에서의 전혜경녀사의 회고에 따르면 아버지 전상국과 어머니 한씨는 조선에서 이미 결혼하고 중국에 왔으며 1936년에 남창에서 딸애 전혜경을 낳았다. 아버지가 순국할 때 녀사는 겨우 두살에 지나지 않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신후 어머니는 어린 딸애를 데리고 친정어머니 댁을 찾아서 외삼촌네와 같이 생활할수 밖에 없었다. 중국의 항전이 승리한후 1946년 전혜경녀사는 어머니와 외삼촌을 따라 상해에서 륜선으로 귀국하였으며 후에는 삶을 찾아 일본땅에 옮겨 앉게 되였다. 알고보면 전혜경의 아버지 전상국이 순국한후 안해 한씨는 남편이 묻힌 곳을 알지 못하여 찾아갈수도 없었다. 1995년 5월, 남경항일항공렬사기념비 제막식에 참석한 한국 원 공군참모장 김신장군이 귀국한후 거듭되는 끈질긴 노력과 수소문을 거쳐 전상국렬사의 안해 한씨와 딸애 전혜경이 일본에서 생활하고있음을 알고 련락이 닿게 되였다. 전혜경이 외삼촌 한유동과 함께 중국 남경행에 오른것은 이런 노력의 결과였다. 5 력사연구로 보는 전상국 인생발자취와 딸 전혜경이 남경을 찾은 진실한 이야기를 나름으로 헤아려 보았다. 남경항일항공기념관 현지답사를 마친후 우리는 기념관 뒤부분에 펼쳐진 항일항공렬사기념비를 찾았다. 산중턱 수림속에 일어선 남경항일항공렬사기념비는 비행기 몸체를 형상하는 두가닥 기념비로 주체기념비를 이루고 주변은 담장모양을 이룬 많고많은 비림군체들이 총총히 서있었다. 비림들은 미국, 쏘련, 중국 등 항일항공렬사군체로 나뉘여졌고 그중의 한 비림에 김원영과 전상국 두 이름과 생년월일이 적히여 여기가 한국(조선) 항일항공렬사비림임을 알리였다. 우리는 남경항일항공기념관에 이어 항일항공렬사기념비에서도 기념사진을 남기였다. 유성운박사는 남경에서 살면서도 이곳에 주의를 돌리지 못하다가 리선생 덕분에 이곳 항일항공기념관과 기념비를 처음 찾아본다면서 깊은 감회를 터놓았다. 그 감회에 받들리여 우리는 기념비 구간을 내리면서 강소성문물보호단위로 된 남경항일항공렬사공묘를 하나하나 눈주어보았다. 그 아래구간은 남경항일항공기념관과 항일항공렬사기념비, 항일항공렬사공묘로 이루어진 남경항일항공렬사공묘의 왼쪽켠 입구와 출구를 이루고있었다. 남경항일항공렬사기념비 구간 비림에 새겨진 김원영, 전상국 렬사 이름. /자료사진 남경에서의 두번째 현지답사지는 김원영이 남경의 중국 중앙군관학교에 입교하기전 예비교육을 받았다는 남경성내 동관두 23호. 유성운박사의 덕분으로 성운박사의 친구 승용차를 리용한데서 신속하고도 순조로이 동관두 23호에 이르러 고풍과 현대멋으로 흐르는 동관두를 두루 돌아볼수가 있었다. 동관두는 말그대로 옛수도(古都)로 이름난 남경의 유람명승지 부자묘(夫子庙) 와 진회하(秦淮河) 구간에 자리잡았는데 남경에 이를 때면 의례 선참 찾아보는 곳이 그림같이 아름다운 이곳 부자묘였다. 남경 도심의 동관두 23호는 또 항일독립운동가이며 시인인 송몽규가 1935년 봄과 여름 남경행에서 중앙륙군군관학교 락양분교 조선인특별반 제2기생 학원으로 군사교육을 받은 의미있는 고장이기도 하였다. 내가 동행한 두 후배친구에게 송몽규를 떠올린데서 우리의 감회는 한결 깊어만 갔다. 현지답사 겸 유람으로 보낸 남경에서의 즐거운 하루였다. 2015년 7월 10일, 강남 두앵원에서 
4    [겨레렬사비4]추수봉기를 빛낸 국제주의전사 진룡학 댓글:  조회:1844  추천:0  2017-03-07
건군 90돐 기념 특별기획-중국대륙의 겨레렬사기념비 (4) □ 리 함 1 중국혁명사와 중국인민해방군 군사에서 1927년에 조직된 남창봉기와 추수봉기, 광주봉기를 3대봉기로 일컫는다. 이같은 3대봉기에 모두 우리 겨레가 참가하였으니 1927년 8월 1일에 일어난 남창봉기에 우리 겨레 수십명이 참가하고 피를 흘렸다면 이 해 12월 11일 광주봉기에는 200여명 조선동지들이 피못에 쓰러졌다. 이해 9월 9일의 추수봉기에는 조선동지-진룡학(陈龙鹤) 한 사람이 참가하였지만 진룡학은 국제주의전사인데서 그 의의는 자못 깊어 추수봉기를 말할 때면 자연히 진룡학을 떠올리게 된다. 조선인 진룡학의 주요 활동무대는 강서 정강산으로 펼쳐진다. 2013년 8월 27일, 진룡학의 발자취 따라 정강산 현지답사길에 올랐었다. 이날 아침 7시 정강산시를 떠난 택시는 답사의 첫 역인 강서 영신현성으로 달린다. 진룡학이 참가한 그제날 영신현(永新县)성 진공 전투는 진룡학 연구에서 꼭 풀어야 할 선참 과제였다. 오늘에 와서 필자가 3만자에 달하는 진룡학전기를 집필하기전까지 진룡학에 대해 알려지는 연구자료는 너무도 빈약하였다. 진룡학은 황포군관학교 제4기생이고 국민혁명군 제2방면군 총지휘부 경위퇀 전사이고 이 경위퇀을 토대로 개편된 중국로농혁명군 제1군 제1사에 소속되여 모택동이 지도한 1927년 9월 추수봉기에 참가하고 추수봉기부대를 따라 정강산투쟁에 참가하였다, 정강산 시절 중국로농홍군 제4군 제11사 제31퇀 1영 1련 1패 패장으로 오두강전투 룡원구 전투, 영신 3차 전투에 참가하였다, 1932년 4월 복건 장주전역에서 희생되였다 등이 전부였으니 진룡학을 알자면 현지답사길에 오르지 않을수 없었다. 진룡학은 삼만개편에도 참가했다. 사진은 삼만개편기념관과 그 뒤로 보이는 삼만개편기념비. 진룡학이 참가한 정강산지구 여러 전투들중 영신 3차전투는 1928년 5월과 6월 사이 모택동이 사장을 겸한 제11사 제31퇀을 따라 참가한 전투들이였다. 택시는 그런 영신현성을 바라고 달리고 달리며 정강산 라소산맥(罗霄山脉)의 중간부에 위치한 만양산(万洋山)의 한 산령을 넘어선다. 산령을 퍼그나 내리니 아스팔트길 왼쪽에 “하자진 옛집”(贺子珍故里)이 나타난다. 하자진(1909-1984)의 옛집은 영신현 연각향 황죽령촌(永新县烟阁乡黄竹岭村)에 자리하고있었다. 하자진의 옛집은 정강산시와는 16키로메터, 영신현성과는 22키로메터 상거한 지점이였다. 하자진의 옛집을 찾아보고 산을 내리니 산아래는 영신현성이고 영신현성에는 “하자진기념관”이 자리하고있었다. 하자진기념관은 2007년 11월에 개관한 기념관으로서 영신현성에서 가장 큰 홍색주제공원으로 손꼽히는 삼만공원(三湾公园)내에 위치하고있었다. 정강산시절 진룡학은 영신을 세번 치는 전투 모두에 참가한것으로 보이지만 오늘의 영신현성에서는 그 흔적을 찾을수가 없었다. 2 정강산 현지답사의 두번째 역은 영신현성에 이어 룡원구전투현지. 주변이 모두 산으로 둘러있는 룡원구(龙源口)는 현성과의 거리라야 40리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현성에서 룡원구진까지는 불과 16키로메터 밖에 안되는데 도중에 정강산 시절의 대형 홍군조형 구조물-물 흐르는 좁은 구간 높은 거도우에 정강산근거지 군민생활을 반영하는 조형물과 돌다리 전부를 “십송홍군”(十送红军) 다리로 꾸미고 다리우에 산 사람을 방불케 하는 여러 홍군조형물이 보이여 (여기가 정강산이구나!) 하는 강한 인상을 심어주었다. 택시는 어느덧 룡원구진을 지나고 룡원구 마을을 지나 정강산의 상징으로 되는 룡원구다리에 이르렀다. 룡원구다리는 궁형을 이룬 돌다리로서 청나라 도광(清道光) 17년(1837년)에 건설되였다고 한다. 다리 길이는 33메터, 너비는 2.5메터, 높이는 9.2메터다. 모르면 강서에서 흔히 대할수 있는 한낮 평범한 시골다리로 볼수 있겠지만 실상은 1928년 6월 룡원구 전투가 벌어진 력사적인 고장이고 정강산의 상징으로 된 다리여서 그저 지나칠 다리가 아니였다. 이런 다리우로 우리의 진룡학이 걸어오고있다. 필자한테는 그렇게만 보인다. 오죽하면 룡원구 옛 다리 사진이 해방후 제2조 3원짜리 인민페 지페도안으로까지 되였을가. 진룡학이 참가했던 룡원구전투 현지-룡원구다리. 이 다리는 정강산의 상징으로 되여있다. 영신현성과 룡원구다리에 이어 당년의 삼만개편현지는 세번째 역으로 나섰다. 력사적인 삼만개편현지를 찾자면 삼만촌으로 가야만 한다. 삼만촌은 영신현 서부의 구롱산북쪽(九陇山北麓), 영신-정강산-련화(莲花)-호남 차릉(茶陵 )4개 현, 시의 교차지에 위치하지만 영신현성과의 거리는 고작 39키로메터, 큰길가 룡원구진과의 거리는 더욱 가까와 큰길 따라 나아가는 택시로는 한식경이면 달릴수 있는 거리로 나타난다. 하지만 삼만촌은 필경 시골마을이여서 큰길가에서 오른쪽으로 골안 따라 몇리 들어가야 하였다. 삼만촌으로 굽이지는 큰길 왼쪽가에는 삼만개편 관련 대형 기념광장이 선참 펼쳐져 오고가는 길손을 반기고있었다. 기념광장은 한창 건설중이라지만 세멘트 등으로 잘 닦아진 넓은 기념광장우에 20여개 철근기둥으로 받쳐진 지붕모양의 엄청 크기의 붉은 당기가 경사지게 조성되고 그 옆에 2층으로 된 주체건물이 세워져있었다. 영신현 삼만개편현지로 이어지는 큰길가에 마련된 대형 기념광장과 당기 모형 흥미로움은 붉은 당기 옆으로 날던 이름모를 검은 나비 한마리가 필자주위를 빙빙 돌다가 필자앞 기념광장 바닥에 살짝 내려앉은것. 그런 검은 나비의 두 날개는 앞뒤로 검은색과 푸른 으로 되고 날개 뒤부분은 반달형 붉은 선들이 여러 점 박히여 아름답기가 그지없다. 진룡학 찾아 먼길을 달려온 길손을 반기는 나비런가, 워낙 나비만 보면 카메라에 잡아두기 좋아하는 필자는 반가운 기분으로 조심조심 다가가 련속 사진화하니 기분이 그야말로 짱이다. 큰길가 삼만개편기념광장을 떠나 오른켠 삼만촌 향촌길로 굽어드니 향촌길 어구에 “개방번영으로 행복을 수놓자”(开放繁荣秀美幸福)는 선전문이 세워져 당지에서 삼만개편현지를 중시하고있음을 직감적으로 알려주고있었다. 삼만촌을 앞두고는 “삼만개편 빛뿌린다”(三湾改编放光芒)는 선전문이 뒤를 이었다. 이곳 선전문을 지나니 삼만촌 전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3 오늘의 삼만촌은 시골마을이 아니라 삼만 전체 옛 마을을 홍색관광지로 꾸미여 참신한 모습을 보이였다. 삼만에 들어서자 천지만엽을 자랑하며 소소리 솟아오른 세그루 옛 단풍나무가 첫 발목을 잡았다. 거대한 우산모양으로 다가왔다. 양산을 들어도 얼굴을 지지는듯한 남방의 열기속에 제법 훌륭한 그늘을 이루어주지만 천혜의 그 혜택을 누릴 겨를이 못된다. 부지런히 돌아쳐야 할 시점이였으니까. 세그루 옛 단풍나무는 삼만개편의 상징나무여서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로 떠오르며 “풍수평”(枫树坪)이라고 불리웠다. 단풍나무아래에는 나지막한 모택동 반신동상이 자리하고있었다. 모택동 반신동상의 래력은 옆의 단풍나무 관광안내비가 알리였다. 관광안내비에 따르면 1927년 10월 3일 이른아침, 삼만개편후의 추수봉기부대는 여기 풍수평에서 모임을 가지였고 모택동이 중요강화를 하고 행군기률을 선포하였었다. 이는 또 황포 4기생 진룡학도 단풍나무아래서 모택동의 중요강화를 들었음을 잘 알려주고있었다. 삼만개편의 상징나무로 된 삼만개편 현지의 세그루 옛 단풍나무 풍수평(枫树坪)/이상 사진 2013년 8월 27일 현지촬영 그래서일가, 삼만의 세그루 옛 단풍나무는 그지없이 정다와보였다. 차마 발길이 떨어지질 않는다. 필자의 시야에는 모택동의 중요강화를 듣는 진룡학의 모습이며, 중요강화가 끝난후 곧 정강산 진군길에 오르는 추수봉기부대가 안기여든다. 환영이 아니였다. 추수봉기부대며 그 부대속의 진룡학이 분명 보이고있었다. 분명 그렇게 보이는 마음의 격랑이였다. 그렇게 인 마음의 격랑은 좀처럼 사그러들줄을 몰랐으니 세그루 옛 단풍나무 뒤산 언덕에 솟아오른 붉은기를 떠인 삼만개편기념비를 보며 그러하고 좁은 평지를 이룬 풍수평 왼쪽에 일떠선 “삼만개편기념관”을 보며 그러하다. 격랑은 격랑으로 사품쳐간다. 그 격랑속에서 답사의 발길을 먼저 오른쪽 퇀부자리-민국 초년에 지었다는 종가사(钟家祠)로 돌리였다. 력사속의 종가사란 종씨들로 똘똘 모여 세운 종친들만의 사찰이란 말이니 삼만의 이들 종씨는 진씨(陈氏), 리씨 등 50여호로 이루어진 성씨중의 한갈래였다고 한다. 그러던 종가사에 삼만에 이른 진룡학 소속 추수봉기부대 퇀부가 머물고있었다. 추수봉기부대가 삼만을 떠나간후 국민당부대는 홍군이 거치여간 집이라고 1929년 8월에 불태워버렸다고 하니 필자의 시야에 안기여든 옛집은 1967년에 지은 집으로서 약간명 사람들이 종가사 내부를 한창 정리하며 페인트칠에 여념이 없었다. 추수봉기 력사속으로 들어가보면 진룡학 소속 추수봉기 부대가 삼만에 앞서 강서 수수(修水)를 중심으로 추수봉기를 단행할 때 봉기군은 5000여명에 이르렀다. 그러던 추수봉기 부대가 영신현 삼만에 이르렀을 때는 1000명에도 미치지 못했다. 력사적인 삼만개편을 거치면서 원래의 사를 한개 퇀으로 축소하고 퇀아래에 1영과 3영 두개 영을 설치하였다. 제1영은 1련, 2련, 3련 세개 련, 제3영은 7련, 8련, 9련 세개 련으로 무어지고 퇀 산하에 특무련, 군관대, 위생대, 치중대(辎重队,즉 군수품대)를 더 설치하였다. 4 삼만개편을 거치면서 진룡학은 제1퇀 제1영 제1련 제1패 패장을 맡아나섰다. 패장이라고 급별이 낮다고 보지 마시라. 진룡학 소속 제1퇀내 군관대, 위생대, 치중대를 제외하고도 퇀 산하에는 특무련까지 모두 7개 련을 두었다. 패로 말하면 21개 패라는 말이 되는데 진룡학은 이 21개 패가운데의 한 로농혁명군 패장이다. 그 시절 모택동의 로농혁명군 근 1000명중 퇀부 간부와 련부 간부 도합 29명이고 패장이 21명이라 할 때, 중국 최초 홍군대오의 50명 장관가운데의 한 사람이라 할 때 이들 50명 장관들속에 끼이는 조선인 진룡학의 지위나 급별은 결코 낮은것이 아니였다. 세그루 단풍나무와 퇀부자리-종가사 현지답사를 마친후 “삼만개편기념관”을 찾았다. 기념관은 2층으로 이루어지면서 1층은 삼만개편 진렬실과 영상청, 휴식실, 2층은 하자진과 영신출신 장군 전시, 문물창고, 사무실로 나타났다. 기념관의 한 강사와 황포 4기생 진룡학을 물으니 1층 진렬실에 삼만개편에 참가한 황포생 명단이 있다면서 가보라고 한다. 그러면 그렇겠지, 정신이 번쩍 드는 순간이다. 지체할세라 기념관 1층 진렬실로 발길을 돌리였다. 1층 진렬실 한 구간 벽에는 “로농혁명군 제1군 제1사 제1퇀 조직기구표”와 더불어 “삼만개편에 참가한 황포생 명단”이 전시되여 있질 않는가. 삼만개편에 참가한 황포생 명단에는 모두 18 황포생 이름이 적히였는데 이들 18명 명단에서 진룡학의 이름이 열두번째에 밝혀져있었다. 삼만개편기념관 1층 진렬실에 전시된 삼만개편에 참가한 황포생 18명 명단 마음은 다시 세찬 격랑이 일었다. 그럴수 밖에 없는 필자이다. 중국홍군을 찾아, 그 홍군대오속의 진룡학을 찾아 산동 위해서 앞당겨 소흥으로 돌아갔고 소흥에서 다시 강서 정강산을 찾았으니 그 먼먼길에 여름방학 휴식도 마다하고 정강산을 찾은 필자가 아니였던가. 그런 필자한테 조선인 진룡학이 추수봉기에 참가하고 삼만개편에 참가한 황포생중의 한 사람으로 우렷이 떠오른다. 진정 정강산을 헛찾지 않았다. 조선인 진룡학이 추수봉기에 참가하고 삼만개편에 참가하고 정강산투쟁에 참가했다는 이 한마디면 족했다. 마음은 한없이 후련해난다. 그러면 중국혁명에 뛰여든 우리 조선사람들은 남창봉기에도 참가하고 광주봉기에도 참가하고 추수봉기에도 참가하였으니 중국혁명사와 중국인민해방군 군사에 대서특서된 3대봉기 모두에 우리 민족의 불멸의 위훈이 아로새겨지게 되였다. 필자는 그런 진룡학을 중국대륙에 솟아오른 또 하나의 불멸의 기념비라고 생각한다. 그래 불멸의 기념비지, 추수봉기를 빛낸 불멸의 기념비. 이 기념비는 오늘도 중국인민해방군 건군사의 리정표로 되는 저명한 삼만개편에, 정강산지구의 영신현 삼만개편기념관에서 빛나고있으니 삼만개편기념관에 이어 모택동과 주덕의 정강산 회사지점으로 되는 정강산시 룡시진을 거치며 정강산의 중심을 이루는 산속의 차평에 돌아가는 발걸음 내내 가볍기만 하다. 2017년 2월 13-14일 정리
3    [겨레렬사비3] 8.1남창봉기와 우리 겨레들 댓글:  조회:1091  추천:0  2017-03-01
건군 90돐 기념 특별기획-중국대륙의 겨레렬사기념비 (3) ■ 리 함 1 2009년 7월 9일 여름방학 시간을 타서 대학에 다니는 쌍둥이 큰딸애 설이와 함께 강서 남창 도심의 8.1남창봉기기념관을 찾았다. 때는 오전 9시경. 8.1남창봉기기념관은 남창시 중산로 380번지에 위치하고있었다. 남창봉기기념관 정문에 들어서니 1983년 5월 처음 찾았을 때와 많이 다른 모습이 눈길을 끌었다. 기념관 주체건물 전체가 참신한 모습으로 안겨들었다면 기념관 정문 오른쪽에 보이는 8.1남창봉기 군인형상 동상군체와 일대영웅호걸로 불리우는 주은래, 주덕, 하룡, 엽정 등 립체동상도 그지없이 돋보였다. 1983년 그 시절엔 볼수 없은 최근년간의 산물이였으니 근 30년 세월속 거대한 변화를 알것 같았다. 4층 주체건물(중심부 건물은 5층)을 이루는 웅위로운 기념관내에 들어서니 련속 펼쳐지는 봉기 관련 많은 력사사진 전시와 설명도 완연 달랐다. 동북의 연변사람인 나에겐 동북항일련군의 “8녀투강” 모습을 형상화한 왕성렬(王盛烈)의 1957년 작품-대형국화가 그토록 친근하게 안겨들었으니 동북사람의 감정은 속일수가 없었다. 8녀투강중의 주요인물인 안순복과 또 하나의 녀전사 리봉선은 조선족이여서 그 감정이 보다 짙은가부다. 남창봉기기념관에서 겨레의 북벌전쟁렬사 김준섭 관련 사진전시와 렬사의 유물을 선참 주의하여 살피였다. 그런데 기념관을 마지막까지 돌아보아도 김준섭 그림자도 찾아볼수 없었다. 이어 남창봉기 유적지들을 찾아보다가 강서혁명렬사기념당에서 김준섭렬사 사진 전시와 유물을 찾게 되여 감개가 무량하였다. 강서 남창에 있는“강서혁명렬사기념당” 정면 모습. 김준섭렬사의 사진자료와 유물이 이곳에 전시되여있다. 강서혁명렬사기념당은 남창 8.1대도(大道) 399번지에 위치하였다. 기념당의 한 자리에 조선인 북벌전쟁 렬사인 김준섭의 략력과 북벌군 추모대회 사진, 희생된 자리인 악화역(乐化车站)사진, 렬사의 회중시계(怀表)가 전시되여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1983년 남창봉기기념관을 찾았을 땐 김준섭렬사 추도대회 사진과 회중시계 등이 8.1남창봉기기념관내에 진렬되였더니만 2009년 현재는 강서혁명렬사기념당내에 진렬되여있었다. 알고보면 김준섭은 양림 등과 더불어 황포군관학교 시절 중공당원들이였다. 김준섭은 함경북도 명청군 사람으로서 일명 강화일로 불리웠다. 그는 그 시절 쏘련의 한 군관학교 기관총전문과를 졸업하고 광주로 갔는데 국민혁명군에서는 그를 제6군 제55퇀 기관총련의 소좌교관으로 임명하였다. 그후 제6군에서는 광동성 혜양현에 기관총훈련반을 꾸리고 각 기관총련의 련장, 패장, 반장들을 훈련시켰는데 김준섭이 교관이였다. 2 1926년 5월 20일, 중국공산당은 국민정부를 통하여 우리 당의 직접적인 령도밑에 있는 국민혁명군 제4군 엽정독립퇀을 북벌군의 선견대로 삼아 우선 호남에 진격하게 함으로써 북벌전쟁의 서막을 열어놓았다. 7월 1일에 국민정부는 우리 당의 영향력과 추동밑에 “북벌선언”을 발표하였으니 7월 9일에 8개 군의 약 10만명이나 되는 국민혁명군은 서로, 중로, 동로 세갈래로 나뉘여 정식으로 북벌을 시작하였다. 그때 황포군관학교에는 200여명의 조선인 학생이 있었는데 각 군의 장령들은 저마다 조선인들을 자기 부대에 끌어들이려 하였다. 결국 대부분은 제4군에 편입되고 일부가 각기 주배덕의 제3군, 정잠의 제6군, 당생지의 제8군에 편입되였다. 서로 북벌군은 대부분 조선인들이 들어있는 제4군을 주력으로 삼고 엽정독립퇀을 선봉으로 하여 호남, 호북으로 진군하였다. 서로북벌군은 장사, 악양을 공략하고 8월 26일에는 정사교를 공격하였다. 정사교는 무한삼진의 남대문이다. 3면이 물에 둘러싸이고 한면은 험요한 산을 끼고있어 방어하기 좋고 진공하기 어려운 군사요새지였다. 정사교를 탈취하는것은 북벌군의 승리를 결정하는 관건적인 전역이였다. 오패부는 여기에다 2만여명의 병력을 집결시켰다. 북벌군은 련속 몇차례의 공격을 들이댔지만 살상자를 냈을뿐 함락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서로군 총지휘부에서는 총예비대로 두었던 김준섭 소속부대를 엽정독립퇀과 함께 정사교를 공격하게 하였다. 김준섭은 기관총련을 지휘하여 밀집사격으로 적의 화구를 봉쇄하였다. 엽정독립퇀은 이 틈을 타서 우익공격을 맹렬히 들이댔다. 난공불락을 자랑하던 정사교는 마침내 북벌군에게 함락되였다. 이어 무한삼진도 함락되였다. 김준섭 기관총련이 엽정독립퇀과 배합작전을 잘한것으로 하여 김준섭은 부대의 표창을 받았다. 그후 김준섭 소속부대는 서로를 떠나 남창으로 진군하였다. 강서혁명렬사기념당내에 전시된 김준섭 등을 추모하는 대회의 사진 중로북벌군은 광동으로부터 출발하여 손전방세력을 소멸하는것을 주요한 목표로 삼고 강서를 진공하였다. 이 북벌군에는 공산당원 리부춘, 림백거가 령도하는 제2군과 제6군이 있었는데 이 두 개 군도 역시 북벌군가운데서 전투력이 보다 강한 부대였다. 11월초에 북벌군은 치렬한 전투를 거쳐 구강을 점령하고 8일에는 남창을 공략하였다. 북벌군 제2군의 조선인 포병련장 강파는 남창보위전투에서 장렬히 희생되고 제6군의 조선인포병련장 리검운은 구강공격전에서 지휘를 잘했기에 포병영 영장으로 승급되였다. 이 영의 부영장 권준과 영부 부관 안동만도 조선인이였다. 제6군이 남창 악화역을 공격할 때 김준섭은 전우들과 함께 세정의 기관총으로 적의 화력을 제압하였다. 그는 진격로를 개척하려고 앞뒤로 뛰여다니며 지휘하다가 그만 복부에 중상을 입고 풀밭에 쓰러졌다. “김교관! 김교관!” 전우들은 김준섭을 애타게 불렀다. 그 부름에 그는 천천히 눈을 뜨고 전우들을 둘러보며 “너무 슬퍼하지들 마오. 혁명은 피를 흘리기마련이요…”라고 말하고나서 영영 눈을 감았다. 제6군에서는 악화역을 함락하고 남창을 점령한후 김준섭의 추도회를 성대히 열고 비석을 세워주었다. 1983년까지만도 남창시 “8.1남창봉기기념관”에 김준섭렬사의 유물인 회중시계와 당년의 장례의식사진을 전시하였는데 후에는 조절을 거쳐 남창 8.1대도(大道) 399번지에 위치한 강서혁명렬사기념당에 옮겨져 우리 부녀간을 맞아주었다. 그러니 발걸음이 잘 떨어지질 않았다. 3 2009년 7월 9일 그날, 필자는 딸애와 함께 8.1남창봉기관과 더불어 여러 전적지들인 8.1공원, 남창시제2중학교내 엽정지휘부 옛터, 남창시민족박물관에 자리한 하룡지휘부 옛터, 강서성가무극원내 전적지 옛터, 라가당로(罗家塘路) 82번지 천주교회당 전적지 옛터, 남호에 자리한 행화루(杏花楼) 전적지 옛터,주덕군관교육퇀 자리, 강서혁명렬사기념당을 차례로 현지답사하여 보았다. 현지답사의 중심은 의연히 8.1남창봉기기념관이였다. 기념관의 한 구간에 이르니 8.1남창봉기 참가자 명단 소개가 기념관내 길다란 한면을 차지하고있었다. 긴장과 흥분속에서 숨을 죽이며 명단 하나하나를 살펴가는데 어느 순간인가 양림(필사제)의 이름이 나타난다. 우리 겨레 양림이 남창봉기에 참가했다는 력사적 사실이 현실로 펼쳐지는 순간이여서 만세라도 부르고싶었다. 나와 딸애는 필사제로 나타나는 양림의 이름을 보며 이윽토록 떠날줄 몰랐다. 강서혁명렬사기념당내 김준섭렬사 관련 사진 전시앞에서 양림의 남창봉기 참가는 8.1남창봉기기념관에서 산 《남창봉기사화》에서도 증실되였다. 남창봉기사화는 력사편, 인물편, 기념편으로 엮어지면서 인물편 “남창봉기를 거쳐온이들”(他们从南昌起义走来)에서 남창봉기 참가자 2만여명중 현재 이름을 아는 참가자가 858명이라면서 그중 한 사람으로 필사제(양림)를 밝히고있었다. 《남창봉기사화》를 집필한 편집진이 남창봉기기념관 연구일군들이고 책도 2년전인 2007년 6월 출판으로 된 최신연구판이여서 믿음이 갔다. 일찍 1964년 중공길림성위 지방당사자료연구실에서 작성한 관련 연구자료에서도 양림(필사제)이 북벌전쟁과 남창봉기에 참가했다고 지적하고있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모든 연구와 연구물들을 통털어도 남창봉기에서의 양림의 모습을 알리는 그 어떤 자료도 보이지 않는다. 대신 남창봉기에 참가한 조선동지들의 자료는 가담가담 보이여 위안을 주기도 한다. 흘러간 력사를 거스르면 1926년 7월에 정식으로 시작된 기세 드높은 북벌전쟁은 중국의 혁명세력을 주강류역으로부터 장강류역에로 발전시키지 않았던가. 혁명의 승리가 눈앞에 보이고 전국이 희열과 흥분에 잠기였다. 바로 이러한 때 국민당내의 장개석과 왕정위집단은 1927년 4월 12일과 7월 15일에 선후로 혁명을 배반하고 공산당원과 혁명군중에 대해 피비린 체포와 도살을 감행하였다. 중국의 절반땅을 휩쓴 북벌전쟁은 중도에서 실패되고말았다. 4 중국혁명은 칠성판에 올랐다. 중국공산당은 혁명을 만구하기 위하여 우리 당의 영향과 장악하에 있는 부분적 국민혁명군, 즉 북벌군으로 남창에서 무장봉기를 단행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때 엽정이 지휘하는 제2방면군 제11군의 24사, 섭영진, 주사제 등이 지휘한 제4군 제25사, 하룡이 지휘하는 제20군은 우리 당이 장악한 무장력량이였다. 주덕이 령도한 제3군 군관교육퇀, 무창국민정부 경위퇀, 중앙군사정치학교 무한분교도 우리 당의 지도를 받았다. 상술한 병력은 3만여명으로 헤아려졌다. 그중 조선사람들이 적지 않았는데 그들 모두가 북벌에 참가한 동지들이였다. 1927년 8월 1일 새벽 2시, 세방의 총소리가 이른새벽의 대기를 썰며 남창시를 들깨웠다. 몇발의 붉은 신호탄이 새벽하늘을 헤갈랐다. 엄밀히 대기하고있던 우리 봉기군은 주은래를 서기로 하는 중공전적위원회와 하룡, 엽정, 주덕, 류백승 등의 령도하에서 비호같이 적진으로 육박하였다. 엽정부대 제11군 24사는 적의 중요거점인 천주교회당과 광려중학교를 맹공격하였다. 이 부대 제 72퇀의 박인, 김철강 등 조선인전사들은 전우들과 함께 적 제3군 23퇀과 24퇀을 답새겼다. 8.1남창봉기기념관 정문 오른쪽에 세워진 “일대 영웅호걸” 동상. 여기 두 개 퇀은 적군 주력이였다. 헌데 간밤에 23퇀 퇀장과 24퇀 정, 부 퇀장 셋이 주덕이 베푼 “연회”에 끌려들었기에 지휘자를 잃었다. 적들은 미처 손쓸사이도 없이 몽땅 들리였다. 화룡현 개산툰 정동학교 출신인 박인은 이 전투에서 무비의 용맹을 떨치였다. 적 제6군 57퇀이 봉기군의 진격로를 막아 나서자 봉기군 제24사 71퇀 3영은 인차 돌격대를 무어가지고 천주교회당의 대문을 짓부시며 들어갔다. 돌격대의 조선인 방월성은 전우들과 더불어 정면공격을 들이댔다. 다른 봉기군부대가 배후공격을 들이대자 적들은 투항하는수 밖에 없었다. 하룡부대 제20군은 적의 제5방면군 총지휘부를 들이쳤다. 적의 총지휘부는 봉기군 제20군 지휘부와 거리 하나를 사이두었는데 거리 서쪽에는 옛 성루가 솟아있었다. 적들이 유리한 지형을 차지하고 화력으로 성문을 봉쇄한데서 봉기군은 쉽사리 뚫고 나갈수 없었다. 하룡과 류백승은 몸소 전투를 지휘하였다. 20군의 조선인 전사 강석필, 홍범기, 김래준 등은 탄우속을 헤치며 성루에 뛰여올랐다. 높은 지세는 싸움에 유리했다. 분노의 총탄은 적들을 무리로 쓸어눕혔다. 적들은 더 배겨내지 못하고 손을 들었다.   5 봉기군 제20군 교도퇀과 제6퇀은 적군 제9군 79퇀, 80퇀을 소멸할 과업을 맡았다. 8월 1일 새벽 이들은 적과 벽 하나를 사이두고 대기하고있다가 불의습격을 들이댔다. 적의 군영은 수라장을 이루었다. 적의 군영에 뛰여든 조선인 김래준 등은 적들을 꼼짝달싹 못하게 만들었다. 79퇀의 적들은 거개가 옷도 바로 입지 못하고 손을 들어야 했다. 전투는 우리의 승리로 끝났다. 불과 4, 5시간만에 적 3000여명을 섬멸하고 남창시를 통제하였다. 봉기에 참가한 실제부대는 2만여명인데 그중 밝혀지는 조선인 전사가 수십명으로 헤아려진다. 제4군 교도퇀의 박영, 리용 등 200여명 조선인 전사들은 국민당 신군벌 장발규의 강박하에 부대와 함께 남하하였다가 광주봉기의 주력으로 되였다. 8월 2일 남창시 5만여명 군중들은 새로 창립된 혁명위원회의 지도밑에 성대한 집회를 가지고 남창봉기의 위대한 승리를 열광적으로 경축하였다. 8월 3일부터 6일까지 기간에 봉기군은 남창에서 물러나 광주로 남하하였다. 봉기군은 남하하는 도중 우세한 적들에게 포위되여 큰 손실을 당했다. 남창봉기에서 용맹을 떨쳤던 연길현 동불사사람 김철강, 훈춘현 대황구사람이고 룡정 은진중학교출신인 강석필, 왕청현 라자구사람 리범홍, 밀산현 사람 홍범기 등 조선인 전사들은 해륙풍지구전투에서 영용히 희생되였다. 8.1남창봉기기념관 정면의 한 모습   /이상 사진 2009년 7월 9일 현지촬영 남창봉기는 국민당반동파에게 첫 총을 쏘았다. 남창봉기는 우리 당이 무장투쟁을 독립적으로 령도하기 시작하였다는것을 세상에 장엄히 선포하였다. 주덕, 진의가 거느린 일부 부대는 1928년 4월 정강산에 이르러 모택동이 령도하는 추수봉기부대와 합치여 로농홍군 제4군으로 편성되였다. 8월 1일은 후에 중국인민해방군의 건군절로 되였다. 중국혁명사에 길이 빛날 남창봉기—이 봉기에는 양림-리추악 부부와 더불어 박인(화룡현), 김약산, 성준용, 김철강(연길현), 방월성, 강석필(훈춘현), 홍범기(밀산현), 김래준, 리범홍(왕청현), 김영준(동녕현), 방국성(녕안현), 김강(녕안현), 권상선(녕안현), 전승익(화룡현), 최관일(훈춘현) 등 수십명 조선인전사들이 참가하였으매 마음은 한없는 감격으로 높뛰기만 한다. 8.1남창봉기기념관측 자료부족으로 남창봉기 참가자 명단에 그들 이름이 보이지 않아도 좋았다. 양림 등은 8.1남창봉기에 참가한 조선민족의 영웅 아들들이 아니던가. 8.1남창봉기와 우리 겨레, 남창시 “8.1남창봉기기념관”과 강서혁명렬사기념당에 모셔진 양림과 김준섭렬사의 회중시계와 당년의 장례의식사진은 중국대륙에 일어선 또 하나의 남다른 조선동지 “기념비”였다. 2017년 2월 11일 정리
2    [겨레렬사비2] 화북렬사릉원의 주문빈렬사기념비 댓글:  조회:1647  추천:1  2017-02-18
건군 90돐 기념 특별기획-중국대륙의 겨레렬사기념비 (2) ◈ 리 함     주문빈  /자료사진 근 20년전까지만도 조선족항일운동사 연구가로서의 모택동주석의 높은 긍정과 평가를 받은 1938년 봄 개란탄광대파업이 당년 중공당산사업위원회 서기로 부임된 조선족 주문빈에 의해 조직지도되였다는것을 알았지만 주문빈의 묘소가 하북성 석가장시 화북렬사릉원에 안치되였다는것을 잘 몰랐다. 1999년 5월 석가장에 갈 기회가 있었던 필자는 전국중점렬사기념건축물 보호단위인 시안의 화북렬사릉원을 배알하다가 뜻밖에도 광주봉기렬사릉원에 이어 중화대지에 일어선 또 하나의 조선족렬사기념비를 접하였다. 이 주인공의 이름은 주문빈, 뒤늦게야 주문빈의 사후행적을 알고 마음은 세차게 뛰고뛰였다.   1 화북렬사릉원의 전칭은 화북군구렬사릉원으로 알려진다. 하북성 성소재지인 석가장시 중산서로 2단 165번지에 자리잡은 이 렬사릉원의 유래는 당년의 주덕총사령과 이어진다. 1948년 5월, 진찰기해방구의 진찰기군구가 화북군구로 바뀌였다. 이해 가을 주덕총사령은 석가장을 시찰하다가 그때 시안의 “승리공원”을 수건하여 화북땅에서 쓰러진 렬사들을 기념하는 렬사릉원으로 할것을 제의하였다. 드디여 1953년 6월에 화북군구렬사릉원이 준공되여 1954년 8월 1일에 장중한 락성식을 가지였다. 화북군구렬사릉원은 건국초기 우리 나라에서 수건이 빠르고 규모가 크고 조형예술이 독특한 렬사릉원으로 정평이 났다. 화북렬사릉원은 총면적이 21만평방메터로 헤아려지고 남북으로 자리를 잡았는데 릉원내에 들어서면 울울창창한 송백과 고목들이 래빈을 숙연한 기분속에 잠기게 한다. 렬사릉원 정문가에 다가서면 한어문으로 된 “중국인민해방군 화북군구렬사릉원”이란 금빛글자가 선참 시야에 안겨든다. 정문에 들어서면 만명을 받아들일수 있다는 추모광장이 펼쳐지면서 세개 조로 된 대형 동조각상이 반겨준다. 동쪽의 한조는 총가목을 거머쥔 팔로군전사의 조각상이고 서쪽의 한조는 지뢰배설을 경계하는 남녀민병의 조각상일 때 광장중앙의 주체조각상은 전신무장한채 8.1군기를 추켜들고 앞을 주시하는 중국인민해방군 전사 3명으로 이루어졌다. 추모광장의 북쪽가에 명비당(铭碑堂)이 자리잡았다. 명비당은 이 렬사릉원의 중심기념건축물로서 300여명 렬사의 영명록(英名录)이 명비당 중앙에 모셔졌다. 당내 네면 벽에 새겨진 류소기, 주덕, 팽덕회, 서향전 등 당과 국가 지도자들이 쓴 글자비가 인상적이다. 이런 수령인물들 글자비는 혁명렬사들에 대한 높은 중시와 고도로 되는 평가를 보여준다. 렬사릉원에 안치된 렬사들의 묘소는 명비당의 뒤쪽가에 모셔졌다. 동서 두개 묘소구로 된 렬사묘군(烈士墓群)은 3개 중심비로 련결된 하나의 정체로서 렬사묘마다 규격이 대동소이한 화강암묘를 만들고 묘뒤에 한백옥(汉白玉)비를 세워주었다. 필자가 놀라마지 않은것은 이곳 렬사들의 묘소군체에서였다. 렬사묘소군체에는 317명 렬사들이 울울창창한 송백속에 안치되였는데 제일 앞자리 뚜렷한 위치에 우리 조선족을 빛내이는 수령인물의 한분이신 주문빈렬사의 묘소가 자리잡고있었다. 전혀 상상밖의 일이다. 그래서 필자가 받은 감동을 한두마디로 형용하기가 어렵다. 알고보면 20세기 30년대 후반의 주문빈은 당당한, 당년 기동항일근거지를 창설한 중공기동지위서기이고 팔로군 제1지대 정치부주임, 중공기열변(冀热边)특위 조직부장으로서 렬사묘군체의 앞자리에 모실만도 하였다. 헌데 주문빈렬사는 1944년 10월 17일에 하북성 풍윤현 양가포에서 희생되였는데 어찌하여 석가장에 묘소가 있을가, 충격적인 현실앞에서 궁금증은 갈수록 커만 갔다. 2 짙은 궁금증을 안은채 신형의 기념건축물인 렬사기념당에 들어섰다. 부지면적이 1400평방메터를 헤아리는 렬사기념당은 렬사릉원의 최북단에 자리잡았는데 기념당내 중간청은 진찰기혁명기념관으로서 풍부한 혁명렬사사진들과 혁명문물들이 진렬되여 있었다. 궁금증을 풀지 못한 필자는 렬사기념당에서 또 한번 놀랐다. 기념당 한쪽벽에는 “주문빈동지”라고 밝힌 가운데 렬사의 사진과 략력, 회고담을 적은 글, 당년의 투쟁모습을 반영하는 그림 두장이 설명문과 함께 꾸며져있었으니 말이다. 수백명을 헤아리는 렬사들속에서 기념당의 벽 한모퉁이씩 차지하면서 사진으로 소개된 렬사는 극히 소수인데 주문빈렬사가 그 소수인속에 들어있었으니 그때 받은 충격은 근 20년이 지난 오늘도 이 마음을 흔들어놓는다.   화북렬사릉원 기념당 벽 한모퉁이에 꾸며진 주문빈 관련 소개   /1999년 5월 현지촬영 기념당에 이어 700여명 선렬들의 골회를 모신 기념당 동쪽의 렬사골회안치실과 서쪽의 렬사유상실(遗像室), 기념당앞 광장 동서량측에 일어선 원 홍5군단 군단장 동진당과 홍5군 부총지휘 조박생렬사의 기념비정(纪念碑亭)을 돌아보았다. 그래도 필자는 주문빈렬사에 대한 추적에서 헤여나오지 못했다. 화북렬사릉원은 굉장하면서도 숙연함을 주는 렬사릉원이였다. 추모광장, 명비당, 렬사묘군체, 렬사기념당, 동진당기념정, 조박생기념정, 국제주의전사들인 베쮼의사릉묘, 커디화의사릉묘, 애드화박사기념비, 빠수의사기념비 등으로 이루어진 이곳 렬사릉원은 모택동, 류소기, 주은래, 주덕 등 로세대 혁명가들이 선후로 릉원을 시찰하고 친필제사를 쓰시여 렬사릉원의 품위가 한결 오르고있었다. 1999년 그때까지의 불완전한 통계에 따르면 해마다 화북렬사릉원을 찾는 사람들이 70여만명에 달하고 100여개 국가와 지구에서 온 외빈들이 렬사릉원을 첨앙하였다고 한다. 이에 따라 우리 조선족의 수령인물의 한분이신 주문빈렬사도 국내외에 널리 알려졌다. 3 렬사릉원을 배알하다가 뜻밖에 찾은 주문빈 렬사묘소와 행적에 필자는 진한 흥분과 궁금증을 어이할수 없었다. 그래서 배알을 마치고 렬사릉원 선전교양과를 찾았다. 동승의(董胜义)라고 부르는 중년연구일군이 필자가 연변서 왔다는데 흥취를 가지며 하북성 애국주의교양기지 자료총서의 하나로 된 《화북렬사릉원》이란 책자를 내주었다. 1996년 9월, 하북인민출판사 출판으로 된 이 책자에는 화북군구렬사릉원 소개와 함께 18명 혁명렬사의 략력이 서술되였는데 주문빈렬사도 그 18명 가운데의 한 사람이였다. 주문빈략력에는 앞부분이 이렇게 씌여졌다. 주문빈(1908-1944), 원명 김성호, 조선 평안북도 사람, 1914년에 부친을 따라 통현에 이주한후 중국국적에 가입, 1916년 통현 로하소학교에서 공부, 1922년 로하중학교에 입학, 이 기간에 둘째형 김영호의 영향밑에서 사상이 진보하고 마레주의 기본원리를 학습하기 시작하고 사회활동에 적극적으로 참가. 1926년에 중국공산당에 가입. 1927년, 대혁명이 실패한후 백색공포하에서도 개인안위를 돌보지 않고 계속 당의 비밀활동을 견지. 선후 5~6명의 당원을 발전시키고 중공로하중학지부를 건립. 지부서기를 맡음. 1928년에 로하중학을 졸업한후 당조직의 배치대로 당의 비밀사업에 나섬.   수건된후 화북렬사릉원내 주문빈 동상  /자료사진 주문빈렬사의 조선에서의 이주와 통현에서의 중소학교시절 략력이다. 연변서 알고있는 렬사의 사적과 시간상 어울렸다. 다만 략력이여서 상세한 생애가 그려지지 않았을뿐이였다. 내가 이 점을 환기시키자 동선생은 략력에서 좀더 알고있지만 자기들은 당신들 조선족연구가들처럼 그렇게 상세하고도 깊이있게 알지 못한다고 했다. 이런 형편에서 조선족연구가들을 찾고싶었는데 잘되였다면서 서로간 련계를 바랐다. 통현이라 함은 북경시 통현을 가리킨다. 오늘의 북경에서 동으로 약 20키로메터를 가게 되면 그제날의 사립로하중학교 옛자리인데 현재는 통현제1중학교로 통한다. 1927년에 통현에서의 첫 중국공산당지부가 이 학교에서 조직되였는데 그 조직자는 다름아닌 조선족 김성호(즉 주문빈)와 그의 형님 김영호였다. 필자가 통현로하중학교 당지부는 통현에서의 첫 중공조직일뿐만아니라 통현일대 혁명활동의 중심이였다고 강조하자 그는 전적인 동감이였다. 그날은 1999년 5월 8일이다. 필자는 그날 동선생과 오랜 지기처럼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 주문빈렬사의 생애를 돌이켜보고 궁금증도 풀게 되였다. 4 1928년 가을, 김성호는 화북렬사릉원의 략력이 보여주는것처럼 당조직의 파견으로 북경시 지하당기관에서 비밀사업에 종사하면서 연경대학과 보인대학의 중공당원들을 지도하게 된다. 1933년에는 료녕성 무순탄광으로, 1936년에는 당산에 파견되여 중공당산시위 공위서기(工委书记)를 맡아본다. 이때의 김성호는 언녕 주문빈으로 탈바꿈했다. 개란광산지구의 당산, 조각장 등지는 그의 지도범위였다. 1938년 3월 16일에 주문빈은 선참 조각장탄광대파업을 조직하고 지도하였다. 림서탄광과 당가장탄광, 당산탄광, 마가구탄광에서도 파업투쟁에 궐기하니 탄광로동자들의 파업은 5개 탄광 로동자들의 총파업으로 번져갔다.   수건된후 렬사기념당내 주문빈 관련 사진들과 소개를 참관하고있는 학생들 /자료사진 개란광무국 산하 상기 5개 탄광의 동맹총파업은 50일간이나 지속되다가 로동자들의 승리로 막을 내리였다. 총파업의 승리는 개란 5개 탄광 로동자들의 단결전투의 성과로서 중공당산사업위원회 서기이기도 한 주문빈의 탁월한 조직재능과 기여를 그대로 보여준다. 중국혁명사에서 빛나는 한획을 긋는 수만명 탄광로동자들의 개란대파업을 조선동지 주문빈이 직접 발기하고 지도했다는것은 특히 대서특서할만한 일이다. 이에 필자가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개란대파업의 소식이 중공중앙 화북군을 통해 모택동주석께 전해지고 모택동주석은 “참 잘 령도했습니다. 로동계급의 각성이 높습니다!”라고 높이 평가했다고 하자 동선생은 머리를 끄떡이면서 주문빈렬사를 통해 조선족의 헌신투쟁정신을 알게 되였다면서 주문빈렬사는 화북렬사릉원에 모셔진 주요지도자의 한분이라고 열을 올리였다. 5 우리의 화제는 주문빈렬사의 발자취를 따라 기동땅으로 옮겨갔다. 개란 5개 탄광 동맹총파업후 주문빈은 선후로 중공기동지위 서기 겸 팔로군 제1지대 정치부 주임, 중공기열변구특위 조직부장 등 중책을 짊어지고 기동이란 이 광활한 천지에서 줄기찬 항일투쟁에 뛰여들었다. 그러던 1944년 10월 16일, 기열변구특위는 하북성 풍윤현 장장자(张庄子)에서 해당 감조감식회의를 하다가 절대적으로 우세한 일위군(日伪军)놈들에게 포위되였다. 이날밤 회의참가자들인 풍윤, 란현, 천안현의 간부들이 주문빈의 지휘하에 소부대로 나뉘여 남쪽의 리장자쪽으로 전이했으나 이튿날 이른새벽에 또 적들의 습격을 받았다. 리장자이북 가까이 양가포에서 주문빈과 그의 일행은 재차 우세한 적들과 맞다들었다. 우리 전사들이 적들과 피어린 혈전을 벌릴 때 특위기관은 주문빈의 지휘하에 적의 포위를 헤치며 결사적인 전투를 벌리였다. 한편 주문빈은 리도와 함께 전사들의 후퇴를 엄호하며 한개 고지를 차지하고 적 66명이나 쏘아죽인 쾌거를 이룩하였다. 허나 그 찰나 주문빈은 적탄에 머리를 맞고 장렬히 희생되였다. 이날은 1944년 10월 17일, 희생될 때 주문빈의 나이는 만 36세, 희생지점은 하북성 풍윤현 양가포(杨家铺)! 시초 화북렬사릉원에서 주문빈묘소를 알게 된후 궁금증은 점차 풀리였으니 주문빈은 희생된후 당조직과 동지들에 의해 풍운현 양가포 전모산아래 한 소나무곁에 묻히였다. 그러나 주문빈은 화북대지의 주요한 당지도자였다. 그래서 1953년 6월에 화북군구렬사릉원이 석가장시 원 승리공원에 준공된후 주문빈렬사의 묘소는 석가장시 화북군구렬사릉원에 모셔졌던것이다. 벌써 반세기나 되는 력사속의 이장이였다.   화북렬사릉원 정문가에 세워진 안내비에서 필자 /1999년 5월 현지촬영 필자는 동선생과의 이야기를 마치고 그의 배웅밑에 렬사릉원 추모광장에 다시 나섰다. 나의 시야에는 1996년 5월 이후 렬사릉원내에 새로 일떠섰다는 웅장한 렬사기념비가 안겨들었다. 렬사기념비를 바라보면서 필자가 감회에 젖어들자 동선생은 1996년 이후 릉원내에는 또 혁명문물청, 영시청(影视厅)이 새로 일떠서고 명비당도 새롭게 수선되였다고 열정스레 알려주었다. 그로부터 옹근 10년이 지난 2009년 8월 15일, 하북성과 산서성 접경지대에 위치한 태항산항일근거지 전면답사차 석가장에 들려 화북렬사릉원을 다시 찾아보았다. 헌데 화북렬사릉원은 입구내와 주변을 대대적으로 수건하는중이여서 제대로 되는 현지답사를 할수가 없었다. 그후 새롭게 변모한 화북렬사릉원을 다시 찾아보지 못하였다. 했으나 세인들앞에 참신한 모습으로 떠오른 화북렬사릉원, 렬사릉원내의 주문빈기념비는 해방직후 1954년에 광동성 광주시 광주봉기렬사릉원에 세워진 중조인민혈의정과 더불어 중화대지우에 일어난 또 하나의 조선족렬사기념비였다. 2017년 1월 18일 재정리
1    [겨레렬사비1] 남녘땅 광주봉기렬사릉원 찾아서 댓글:  조회:2538  추천:2  2017-02-08
[건군90돐기념 기획련재-중국대륙의 겨레 렬사기념비](1) ◈ 리 함 건군90돐기념 기획련재를 시작하면서 답사길에서의 리함선생  1 지금으로부터 30여년전 연변대학 조문학부 재학시절에 조선문학사 강사 리정문선생한테서 1927년 남녘땅 광주봉기에서 100여명 조선족전사들이 싸우다가 희생되였다는 비장한 이야기를 듣고 광주로 달려가고픈 마음을 어찌할수 없었다. 종내 기회가 오고야 말았다. 대학을 마친 이듬해 1983년 5월말, 개자귀나무꽃이 붉게 피는 계절에 남녘땅 광주에 첫발을 들여놓게 되였다. 처음 광주에 가는 사람들 치고 양성(羊城)이라 이름 높은 광주시 전경을 눈아래 굽어볼수 있는 월수(越秀)공원을 돌아보지 않으면 유감이라 하지만 나는 선참 광주봉기렬사릉원을 찾았다. 그날이 어제런듯 해맑은 6월 1일. 중국출국상품교역회를 벗어난 광주시내 1호전차는 동으로 동으로 달리였다. 차창밖으로는 사시절 봄과 같은 아열대풍취가 안겨들고 남녘땅에 특유한 오동나무가로수들이 줄달음쳐 왔다가는 소리없이 뒤로 물러선다. 1호전차는 어느덧 중산기념당, 광주농민운동강습소를 지나 광주봉기렬사릉원앞에 멈춰섰다. 때는 대학을 졸업한 이듬해인 1983년 여름의 일이였다. 광주봉기렬사릉원은 당년에 봉기전사들이 피 흘리며 싸웠던 시안의 홍화강(红花岗)에 자리잡고있었다. 1954년에 벌써 수건된 이 렬사릉원은 릉원과 원림 두개 부분으로 나뉘여졌는데 전체 릉원 면적은 26헥타르에 달했다. 렬사릉원밖은 그 세월 내 고향 연변에서는 흔치 않은 잘 가꿔진 잔디밭이고 릉원 정문 량쪽은 짙은 민족풍격을 띤 정자지붕형 대형기둥벽으로서 대형기둥벽에는 주은래의 친필로 된 “광주봉기렬사릉원”이란 금빛 글발이 새겨졌다. 대문에 들어서면 휘넓은 광장이다. 광주봉기렬사릉원내의 광주봉기 렬사묘   /2007년 5월 18일 현지촬영 광장량켠에는 뭇꽃들이 다투어 피는 20개의 큰 화단들이 펼쳐지고 측백나무를 비롯한 나무들이 우중충하여 한결 장중하고 숙연한 감을 안겨준다. 광장을 지나 오른쪽으로 꺾어들면 푸른 송백속에 모셔진 광주봉기렬사묘가 나타난다. 렬사묘는 옛 황릉들처럼 거대한 하나의 웅위한 묘인데 렬사묘를 둘러싼 콘크리트담장 정면에는 “광주봉기렬사지묘”라고 쓴 주덕동지의 친필제사(题词)가 숙연히 안겨든다. 높은 콘크리트담장에 둘러싸인 기둥체 꼭대기마다에는 앞발을 척 뻗친 40마리 돌사자가 올려져있었는데 렬사묘를 옹위한 그 위용이 이만저만이 아니였다. 렬사릉원 안내자의 소개에 따르면 광주봉기에서 쓰러진 용사들이 많은데다가 한데 쌓여 누가 누군지 분간할수 없어 무덤군을 이루었다고 하는데 이 렬사묘에는 조선족렬사들도 적지 않게 묻히였다고 동을 달았다. “?!” 나는 일순 할말을 찾지 못하고 정면에서 머리 숙여 묵도하고는 숙연한 기분으로 렬사묘 둘레를 천천히 거닐었다. (이름 모를 조선족 전사들은 누구누구일가?…) 머리에는 온통 이 생각뿐이였다. 그러면서 두어깨에 지워진 조선족력사탐구자의 책임이 자못 무겁다는것을 새삼스레 깊이 느끼였다. 2 렬사묘를 내려 고색이 짙은 울창한 푸른 송백속을 지나면 넓은 호수속에 2층의 정자지붕으로 된 호수 정자가 나타난다. 호수에서는 천진란만한 아이들과 어린이들이 마침 6.1절이라 명절배놀이를 하고있는 모습들이다. 그 모습들을 지켜보니 저 아이들은 얼마나 복 많은 세대들인가 하는 생각이 북받쳤다. 유람지를 지나 조금 나아가면 푸르른 나무들과 꽃밭속에 잠겨있는 “중조인민혈의정(中朝人民血谊亭)”이 시선을 잡는다. 중조인민혈의정은 장방형모양의 2층 정자형으로 되였는데 혈의정 복판에는 거대한 대리석비석이 모셔지고 비석 정면에는 “중조 두 나라 인민의 전투적우의는 만고에 길이 빛나리!”(中朝两国人民的战斗友谊万古长青!)라는 엽검영동지의 금빛 제사가 새겨져 있다. 대리석 비석 뒤면의 비문은 이런 글로 엮어졌다. 1927년 12월 11일, 광주 로동계급과 혁명사병들은 중국공산당의 지도하에서 기세 드높은 무장봉기를 단행하였다. 봉기에 참가한 혁명사병들 가운데는 조선청년 150여명이 있었다. 이들은 중국전우들과 더불어 의기(义旗)를 높이 들고 어깨 겯고 싸웠으며 나중에 사하전투에서 진지를 고수하다가 대부분 영용히 희생되였다. 이들은 위대한 무산계급국제주의정신과 두려움 모르는 혁명영웅기개를 표현하였다! 광주봉기에서 희생된 조선동지들은 영생불멸하리! 중조 두 나라 인민의 전투적 우의는 만고에 길이 빛나리! 중조인민혈의정내 대리석비석, 정면에 엽검영동지의 제사가 씌여져 있다.   /2007년 5월 18일 현지촬영 정말이지 숙연한 기분속에서 인차 헤여나오지 못했다. 이 세상에 태여나 20대 후반을 잡으며 그때 그 시각처럼 조선족의 자부심을 느껴본적은 없었다. 남녘땅 광주봉기와 그에 앞선 위대한 북벌전쟁에 수백명에 달하는 조선족전사들이 참가했고 광주봉기에서만 150여명 아닌 200여명이 희생되였다는것은 대단하고도 획기적인 일이 아닐수가 없었다. 그 시각 “중조인민혈의정”을 천천히 거닐다가도 가까이 “중쏘인민혈의정”에도 가보고 민족풍격이 짙은 혈의정 뒤 정자군체의 유람지에도 들어가 보았다. 그 가운데서도 유난히 시선을 끄당기는것은 중조인민혈의정 정자도안으로 된 진달래도안이다. 진달래도안은 중조 두 나라 인민의 친선을 상징하고있었는데 그 의미는 자못 깊었다. 오늘날 진달래는 동북변강의 내 고향 연변에서 자치주 주화(州花)로 높이 받들리고있다. 일찍 30년 썩 전인 1980년대 초반에 남녘땅 광주에서 진달래도안을 흔상하였다는것은 그저 스치고 지날 일이 아니다. 진달래는 조선민족을 상징하고 선렬들의 붉은 피를 상징한다고 할 때, 또 저명한 하경지시인이 “산마다 진달래요, 마을마다 렬사비”라고 읊조렸을 때 50년대 그 세월 진달래도안 설계자와 결책자들에게 머리가 수그러지지 않을수 없었다. 3 “중조인민혈의정”에로 다시 돌아오면 혈의정 중심정자 량켠엔 각기 L자형 길다란 랑하와 정자가 있어 휴식의 한때를 보낼수 있다. 혈의정앞 작은 인공못에는 갓 피여난 소담한 연분홍 련꽃-수련송이가 물에 동동 떠있고 분수는 반공중에 새하얀 포물선을 그으며 인공못에 이채를 더해준다. 정녕 잊지 못할 광주봉기렬사릉원이였다. 허나 대학을 마친지 얼마 안되는 나로서는 위대한 광주봉기와 우리 겨레 전사들에 대해서 깊은 연구와 자료가 따르지 못하였다. 그래서 렬사묘 아래에 자리잡은 광동성혁명렬사박물관을 찾아 해당 연구일군들로부터 조언을 받았다. 박물관의 일군들은 내가 머나먼 연변조선족자치주에서 왔고 조선족이라고 소개하자 대번에 엄지손가락을 내들며 “당신들 조선민족은 대단한 민족!”이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때 중년을 잡은 한 녀성연구일군은 중조인민혈의정 대리석 비석에는 조선청년 150여명중 거의가 희생되였다고 씌여있지만 계속되는 연구에서 보면 희생자가 200명을 넘어선다고 조용히 말하였다. 그러면서 그 녀성은 박물관내 한 진렬대로 안내하였다. 진렬대 유리안에는 한 조선족전사가 사용했다는 막심기관총이 진렬되여 있었는데 이름도 모를 그 전사는 광주쏘베트정부와 총지휘부의 안전을 보위하기 위하여 이 막심기관총을 휘두르며 적진에 돌입하여 적들을 무더기로 쓰러눕혔다고 한다. 그리곤 자기의 나젊은 생명을 바쳤단다. 이야기 도중 중년녀성이 특히 마지막까지 사하를 지켜서고 철거를 엄호한것은 조선사람들로서 광주봉기연구에서 조선족은 주요한 연구대상이라고 이야기 할 때 나는 눈굽이 찡 젖어들었다. 그때로부터 나의 조선족연구의 한 주요과제는 북벌전쟁과 광주봉기로서 관련 론문이나 소개글들을 해당 학보나 조선문 신문, 잡지들에 발표하여 조선족사회에 광주봉기와 조선족을 널리 알려왔다. 더우기 광주봉기 61돐 기념일을 맞으며 1988년 12월 10일부 《길림신문》 제3면에 “광주봉기에서의 조선사람들” 장편글을 실었는데 편집부를 대신하여 쓴 “편집자의 말”에서 필자는 광주봉기와 조선족을 이렇게 개괄하였다. 12월 11일은 광주 봉기 61돐 기념일이다. 위대한 광주봉기에 200여명의 조선인 혁명가들이 참가하였는데 그들은 조선본토와 동북, 쏘련 연해주, 모스크바, 일본 등지에서 모여든 20대의 열혈청년들이였다. 거개가 이름있는 정치, 군사, 활동가들인 그들은 1919년 조선 3.1 운동전후 일제의 기반에서 조국을 구하고저 중국에 모여든 당년의 조선혁명의 선구자들이였으며 중국에서 활약한 조선인들의 정화(精华)였다. 애석한것은 철퇴의 명령을 제때에 받지 못하여 봉기에 참가한 우리 겨레 200여명이 남녘땅에 쓰러졌다. 그후 중앙쏘베트구역에 조선동지들이 희소했고 2만 5천리 장정에 참가한 조선인이 10여명밖에 안된것은 그번 봉기에서 조선인 혁명선각자들 거개가 희생된데 기인될것이다. 중국의 절반땅을 누빈 위대한 북벌전쟁에 우리 겨레 수백명이 참가하였고 남녘땅 광주봉기에서 우리 겨레 200여명 혁명자들이 장렬히 붉은 피를 뿌렸다. 이는 세인들앞에서 너무나도 떳떳이 납함할 겨레의 긍지와 자랑이다. 아마 신문지면으로 처음 상세히 소개되는 광주봉기 글이 진동이 꽤나 되는 모양이였다. 연변력사연구소 시절인데 《길림신문》 편집부를 통하여 문의하거나 감사하다는 전화나 전갈이 가끔 전해졌다. 그럴 때마다 나는 큰 위안을 느끼군 하였다. 광주봉기렬사릉원내에 있는 중조인민혈의정   /2007년 5월 18일 현지촬영 력사로 보아도 1927년 12월 11일 이른새벽에 폭발한 광주봉기에는 북벌전쟁에 참가하였던 수백명 조선민족전사들이 참가하였었다. 조선인 김규광이 당책임자로 있던 교도퇀 제2영 제5련은 모두가 조선동지들로 이루어졌다면 황포군관학교 특무영의 200여명 전사들중에도 조선민족전사가 150여명이였다. 또 광주봉기 폭발을 앞둔 력사적인 시각에 교도퇀 사령부에서 봉기동원 연설과 전투과업 포치가 있을 때 모스크바 홍군대학을 졸업한 조선인 리용이 교도퇀의 새 퇀장(엽검영이 홍군 부총지휘로 되였음) 엽용의 군사정치고문 즉 참모장으로 임명되였다는 사실은 특기할만하다. 광주봉기 주력부대인 교도퇀의 참모장이 우리 겨레라는 말이다. 이에 앞서 정규적인 군사훈련을 받은 조선인들이 국제공산당의 파견을 받고 각 봉기부대의 군사참모, 포병지휘관, 포사격수, 기관총수로 활약하고있었다. 교도퇀 각 중대와 소대의 당대표들중 조선인 공산당원들이 적지 않았다. 군벌 장발규경위퇀의 조선인 공산당원 문손적, 김형평 등은 중국인 전우들과 함께 대부분의 관병들을 광주에로 이끌었다. 12월 4일, 중공광동성위 서기 장태뢰가 광주시내의 황화강(黄花岗)에서 교도퇀내 공산당원 활동분자회의를 열고 무장봉기의 의의와 교도퇀이 짊어져야 할 과업에 대해 피력할 때도 양달부, 김규광, 리용, 박영, 김은혁, 리빈 등 수십명 조선인 공산당원들이 참가했으니 조선동지란 존재는 광주봉기에서 특수한 의의를 띠였다. 12월 13일, 철퇴하는 봉기주력부대의 엄호를 특무영의 조선동지들이 맡았는데 그들은 사하에서 싸움을 벌리였다. 그러던 이들이 한때 사하를 점령하였으나 철퇴명령을 받지 못하여 끝내 우세한 적들에게 포위되고말았다. 후에 안 일이지만 봉기사령부에서는 철퇴중에 그들을 잊고 련계하지 못했던것이다. 하여 특무영의 150여명 조선동지들이 희생되는 비극을 초래한것이다. 결과 광주봉기에서 희생된 조선족전사는 도합 200여명이나 된다. 당년 중국에서 활약한 조선족들의 정화가 광주봉기에서 쓰러졌다는 말이 되겠다. 이런 고로 광주봉기렬사릉원에 이르면 쉽게 발걸음이 떨어지질 않는다. 나도 례외가 아니다. 더우기 광주봉기렬사묘와 중조인민혈의정에서 1년이고 2년이고 서있고만 싶은 심정이였다. 4 렬사릉원은 진정 아름다운 유람지로, 행복의 락원으로 꾸려졌다. 명절의 분위기로 차넘치는 6.1절호수가에는 붉은넥타이들이 환락에 들끓고있었고 어린이들을 태운 놀이배들은 잔파도 일으키며 앞으로 미끄럼치고있지 않는가. 그날 6.1아동절 렬사릉원에서 어떻게 중조인민혈의정에서 발길을 떼였고 어떻게 렬사릉원 정문을 나섰는지 기억에 잘 남지 않는다. 머리속에 온통 광주봉기 아니면 조선동지들이였으니 그렇게 된것 같다. 남녘땅 광주봉기렬사릉원, 이 렬사릉원을 다녀온지도 어언 35년이 지났다. 그 사이 강남 절강에 가서 대학교편을 잡던 2007년 5월 두번째로 광주봉기렬사릉원을 찾아보았다. 그후도 광주봉기와 홍1군단 참모장 양림, 홍군음악가 최음파 등 연구차 광주봉기렬사릉원에 수차 다녀왔다. 35년전이나 몇해전이나 광주봉기렬사릉원 구내는 정문입구 구내에 유람물들을 좀더 늘였을뿐 다른 변화는 보이지 않았다. 광주봉기렬사묘나 중조인민혈의정은 여전하였다. 어찌 잊으랴, 광주봉기렬사릉원을ㅡ 어찌 잊으랴, 광주봉기에서 쓰러진 우리 겨레들을ㅡ 마음은 늘 젊음에 넘치던 그시절, 그후도 수차 찾아본 광주봉기렬사릉원 옛터로 달려간다. 그러면 광주봉기 우리 민족의 영웅전사들과 맘속대화를 주고받는다. 2017년 1월 17일 재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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