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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등산가족산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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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찬 바람의 세례 댓글:  조회:1423  추천:31  2009-01-27
찬 바람의 세례 기축년 1월 24일 토요일 아침 우리가족산악회 일행 다섯명은 연길기차역부근 장도뻐스정류소에서 연길-화룡향 뻐스에 올랐다. 뻐스가 화룡토산자관문산 다리역에서 멈추었다. 우리일행은 뻐스에서 내려서 다리를 건늬였다. 관문산의 찬바람은 맵짰다.  장갑속안의 다섯손가락과 신안의 발가락이 먼저 얼어들었다. 우리는 지레 다섯손가락을 안으로 굽혀 주먹을 쥐였다. 그러면 합쳐지는 손가락과 손바닥이 방출하는 열량에 의하여 추위를 몰아낼수 있으니말이다. 인체피흐름도표를 보면 피는 손과 발에서 손가락과 발가락 바로 문전에서 활모양으로 돌아서 심장으로 간다. 손가락과 발가락까지 일일히 돌지 않는것이다. 그러니 혈관이 제일 적고 열량이 제일 적은 곳이 손가락과 발가락이 된다. 하여 추위에 제일먼저 겁먹는곳이 손가락과 발가락이다. 허나 우리는 얼어드는 손가락과 발가락을 안으로 움추려 주먹쥐는 방식으로 추위를 막아냈다. 사람은 후천적으로 배워서 아는 공능이 있고 배우지 않고 원초적으로 주어진 공능을 활용하는 공능이 있다.  손가락을 안으로 굽혀 추위를 막는 방법이 바로 원초적인 공능을 활용하는 일례이다.    우리는 관문산골짜기에 들어섰다. 바람도 즘즘했다. 옴폭 패인 골짜기이고 바람을 등진 곳이였다. 우리는 한보한보 바작바작 눈을 밟으면서 관문산정상으로 올랐다. 정상에 올라서니 바람소리가 기승을 부렸다. 윙윙 잉잉이였다. 그러나 바람은 보이지 않았다. 만질수도 없었다. 그저 바람에 시달림을 받는 나무들이 아픈 소리를 내고있었다. 우리의 얼굴은 바늘로 쑝쑝 찌르는듯이 아파났다. 찬바람은 찬공기의 집합체이다. 비중이 무겁다. 그래서 하늘서 아래로 꼰진다. 더운 공기는 비중이 가볍기에 우로만 증발한다. 한 여름 벼락소나기는 더운 기류와 찬기류의 만남에서 생기는 자연현상이다. 오늘 찬기류는 마치 스키선수가 가파로운 산을 쏜살같이 내리꼰지며 부가되는 가속도로 산아래 평지를 지나 다시 산위로 올라오는 모습과 흡사하였다. 산을 핥으며 정상의 가위선에서 지랄스레 몸부림을 쳐댔다. 그 몸부림을 우리는 바람에 부대끼는 나무에서 읽을수 있었다. 우리의 두다리는 그냥 산맥을 따라 저벅저벅 움직였다. 우리의 두 코구멍에서는 그냥 코물이 줄줄 흘러내리였다. 서로서로 거리를 두고 걷기에 불편은 없었다. 서로 가까운 거리에서 코구멍으로 흘러내리는 코물을 마주본다면 그야말로 마주볼수 없는 흉한 몰골이리라.  코물을  자꾸자꾸 풀어대도 그냥이다. 나는 우리대원들에게 우스운 수수께끼를 낸적이 있었다. 왜서 추우면 코구멍에서 코물이 자꾸자꾸 흘러내리는가고 말이다. 대원들은 정말 그렇다고 하면서도 아직까지 답을 올리지 못하고있었다. 나는 내 나름대로 짐작하고 추리하고있었다. 추우면 코구멍에서 코물이 흘러내린다. 사람은 코로 산소를 호흡하여 페속에 들여보낸다. 인체의 정상온도는 36도이다. 추운 겨울 코밖의 온도는 령하이다. 령하의 산소가 그대로 코구멍을 통하여 페속으로 들어간다면 페는 언녕 얼것이고 그러면 심장도 얼어서 멈출것이다. 그런데 그렇치 않은 도리는 바로 코물이다. 추울 때, 추위가 더 해갈때 코구멍에서는 코물이 더 흘러나온다. 코물은 찬기류의 침입을 차단하고 코구멍으로 들어가는 산소의 온도를 인체의 정상온도가 되겠끔 덮혀준다. 하여 페속에 들어가는 겨울산소의 온도도 인체의 온도와 같은 온도로서 페에 흡수된다. 코물은 이렇게 코밖의 찬기류의 침입을 막고 페로 흘러드는 산소의 온도를 인체의 온도와 같게 하는 작용을 한다. 코물은 한낱 값없는 분비물이 아니라 정상적 인체공능을 맡아 집행하는 위대한 생명의 문지기인것이다. 코구멍이 큰 사람이 코물이 더 많이 흘러나온다. 구멍이 크기에 들어가는 찬기류도 많다. 그래서 더 많이 코물을 내보내 찬기류의 침입을 막게 된다. 코구멍이 작은 사람은 코물도 적다. 우리가 얼굴에 마스크를 끼게 되면 코물이 적거나 없게 된다. 지레 마스크밖에서 찬공기를 차단하였으니 마스크를 통해 코안으로 들어오는 공기는 인체정상온도로 인츰 덮혀지니 말이다. 산맥을 이미 여러개 넘었다. 산정상에는 나무가 적었다, 바람피할곳도 없었다. 어떤 곳은 머리를 빡빡 밀어놓은것처럼 나무 한대 없는 벌거숭이였다. 그런데서는 바람이 더 혹심했다. 바람을 등지고 바람에 밀리며 한고개 두고개 여라문고개를 넘어서 해발이 천메터를 넘는 화룡이룡산으로 바로 꺽어드는 산맥까지 도착했다. 우리는 바람이 덜 부는 곳에 멈춰섰다. 우리가족산악회 촬영가 김성길은 그 추운 속에서도 반드시 찍어야 할 풍경사진은 찍고넘어갔다. 인간의 의식있는 행위였다. 사진에 바람을 찍을수는 없었다. 사람이 만들어낸 촬영설비로 지금까지 바람을 찍은 사진은 한장도 없는 줄로 안다. 다 바람이 불어 흔들리는 사람의 눈으로 볼수 있는 대상물을 찍어서 바람이 불고있음을 증명한것이다. 바람은 확실히 존재하고 육감으로 느낄수 있는 존재이나 눈으로 볼수 없다. 눈으로 보는것이 전부가 아니다. 정말로 사람의 눈으로 이 세상 존재하는 모든것을 다 볼수 있다면 사람이 어찌 살아갈가가 걱정된다. 손에서 이글거리는 세균을 볼수 있다면 그 손으로 어찌 음식을 짚어 먹을수 있으랴? 적당히 볼수있는것이 사람이 살아가기 편안한 시력거리이고 시력배수가 아닐가? 우리는 총명한 김춘동이 가져온 오미자 술을 네 한잔 내 한잔 나눠 마시였다. 깜쪽새에 술한병이 밑굽까지 거덜났다. 술은 위속에서 따금해나며 열량을 방출하였다. 몸이 후끈해났다. 술은 한기를 몰아내는데 도움이 되였다. 농부들이 추운 겨울이면 집소를 울안에 가둬두지 않고 밭으로 풀어놓는다. 그것은 소들이 밭에 있는 마른 풀을 뜯어먹어 위속에 음식물이 들어가면 음식물을 소화시키기 위하여 위에 피가 집중되면서 열량이 방출된다. 그 열량이 바로 한기를 쫓는 방법인것이다. 허나 추운 겨울 어디서 누구가 술을 마시고 힘이 빠지고 방향을 잃고 쓰러져 제때에 사람에 의해 구조되지 못하여 객사한 일들은 심심찮게 들려온다. 여름이면 술에 취해도 별문제이지만 겨울은 아니였다. 우리가 마신 술은 취할정도와는 거리가 멀었다. 우리가 화룡뻐스정류소근처의 밀가루음식점에 도착하였을 때는 오후 두시였다. 그러니 오전 아홉시반부터 네시간반을 찬바람불어치는 산에서 행군했던것이다. 촐촐한 배는 먹이를 강요하였다. 우리는 맥주두병에다 작은 그릇의 채를 섞어가며 목을 추기였다. 소고기탕에다 삶은 긴 밀가루국수탕을 하나 재끼고나니 속이 후련하였다. 산행하고 내려와서 먹는 음식이 제일 맛있었다. 하루동안 불어친 찬바람은 새삼스럽게 평시엔 생각지도않았던 손가락을 굽혀 주먹을 쥐여 추위를 쫓는 원초적 공능이며 코물의 작용이며 술의 좋은 점과 나쁜 점이며 보이는것이 전부가 아니다는 밝은 의식이며 산행후의 음식맛이며를 새롭게 실감하게 하였다.      우리는 표를 끊고 화룡-연길향 뻐스에 오르니 잠이 스르르 몰려왔다. 사람은 결국 자기집으로 가게 되여 있었다. 2009년 1월 24일  
16    2008년 우리가족산악회 산행총결보고서 댓글:  조회:1562  추천:41  2009-01-23
 2008년 우리가족산악회 총결보고       낮과 밤은 하루 24시간을 반은 어둡게 반은 환하게 여실히 반영하여 왔습니다. 그렇게 하루가 생겨나고 지나면서 부단한 반복끝에 사람들이 정해논 일년 365날은 우리의 눈앞에서 깜쪽같이 새여나갔습니다. 2008년도에 몸을 잠그고 있을 때는 일년이 꽤나 긴 것 같았으나 지나고 보니 언제 지났는지 마음이 아쉽네요. 세월은 손가락사이에서 새여흐르는 물과 같습니다. 붙잡을수도 멈추게 할수도 없습니다. 우리가 거기에 순응하여 알찬 일들을 많이 만들어 추억의 저장고에 좋은 추억거리를 저장해야 합니다. 추억도 하나의 재산입니다. 하나의 인생회고문화입니다. 추억거리가 많으면 사는 것이 흥미있습니다. 즐겁습니다. 지난 한해에 우리모두는 나름대로 열심히 산행하면서 추억의 흔적을 만들었습니다. 함께 산행한 회원들은 모두 27명입니다. 함께 오른 산이 53개, 새로 개척한 산이 31개, 그 중 연길주위 산 20개, 도문 주위 산 4개, 룡정주위 산 9개, 화룡주위 산 8개, 왕청 주위 산 8개, 안도 주위 산 4개, 북경산하나였습니다. 해발 천메터를 넘는 산으로는 룡정천불지산, 천보산, 화룡룡왕산, 사향산, 로리커후였습니다. 모두의 참가차수합계는 422차, 모두의 교통비지출총액은 7165원, 모두의 총참가차수는 422차, 평균보수 만오천을 곱하여 633만보입니다. 이는  13187리에 해당합니다.     김성길이 인터넷 태극사진첩에 올린 산행 사진은 2201장, 태극블로그에 올린 산행수기는 42편, 국내인터넷사진첩과 블로그에서 인기블로그로 부상했으며 그 외에도 번마다 핸드폰으로 산행통지를 52차 하였습니다. 허성운이 조글로 산행홈페지에 114장의 가공된 예술사진을 올려 박수갈채를 받았고 리승희 20편, 손룡호가 30편의 좋은 글과 산행수기를 올려 우리가족의 문화적인 분위기를 부상시켰습니다.  점심장국 료리준비에 채영춘,  윤혜자,  김성길이였습니다. 아래에 등산날수가 제일 적은 사람부터 평해보겠습니다.                                                                                                                                       1, 하루라고 비웃지 마세요                                   산행날수 하루, 걸음보수 1만 5천보                                     연변교육출판사 부사장-방덕빈         산이 싫어 오르지 않았나 일이 많아 오르지 않았나산행뒤의 맥주한병 싫어 오르지 않았나그냥 몇번은 함께 올라야 하는데그 몇번을 한번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오늘 등산총결기록부에 하루라는 흔적을 남겼습니다하루지만정녕, 어머니 효도에는 성심껏정녕, 일터의 사업에는 최선다시 새해엔 손잡고 올라보겠습니다  2,효성으로 보낸 한해 산행날수 하루, 걸음보수 1만 5천보            연변주문화국-강영숙      정말로 산으로 가고팠습니다하얀 구름 송이송이 떠있는 산으로푸른 생명 소리치며 합창하는 산으로그냥 그냥 가고팠습니다 못갔습니다한번 밖에 못갔습니다몸져누워 계시는 시아버지 시어머니를 두고갈수 없었습니다평생 산전수전 다 껵으며마지막 병으로 누워계시는 분들 두고 갈수 없었습니다정성껏 마지막 호리를 하였습니다  시부모님은 날 산으로 가라고시간내주시면서 떠나셨습니다조용히마음을 정리하고새해엔 산으로 오를가 합니다  3, 이천 팔년 마지막 날 등산 산행날수 하루, 걸음보수 1만5천보연길시 영일영상제작사-허영일 왜서인지 모르겠습니다그냥 돈은 벌어야 하고둘째 아들도 생기고연길서 상해로 몇달씩 건너뛰며할일을 찾고 분주히 뛰였습니다  제일 나이 어린 나였지만일이 바쁘다는 핑게로아직은 건강하다는 믿음으로산을 찾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다 2008년 마지막 31날한번도 산을 오르지 못하고총결모임에 참가할수 없어 억지로 나섰습니다 두다리가 천근같아 겨우겨우 걸었습니다건강은 나이로 보는 것이 아니였습니다일에만 빠지면 건강은 젊은 몸에서 사라집니다 종내 정상에 올라 얼어붙은 오도 저수지를 보았습니다  건강을 제고할 하늘과 땅사이를 발견하였습니다  4, 즐거운 하루 산행날수 두날, 걸음보수 3만보주신문출판국-김금 맘속엔 산이 있어요맘속엔 가정이 있어요휴식날엔 안팎으로 쌓인 일들다 내가 해야 하는 일들그 누구도 도울수 없는 일들  그래서 못왔어요그래서 가자가자 하면서딱 두번만 기회를 잡았어요 그 한번에 화룡 청룡산에 올라산허리를 감고 도는 구름속에 열광했어요구름가신 뒤의 청룡하를 굽어 보았어요 가장 깨끗하고 살지고 맛있는 산천어물고기를 맛보았어요정말로 즐거운 하루였어요빛나는 하루였어요  그냥 산좋고 물좋고 생선좋은 곳에자주 산행을 마련해줘요  5, 단 두번이지만 잊을수 없는 사람들 산행날수 두날, 걸음보수 3만보주적십자협회주석-김광현   윤혜자의 소개로우리가족산악회에 가담했습니다함께 여러해를 산행하였습니다여러분들과 따뜻한 사랑을 나누었습니다문학동인들과도 함께친절한 대원들과도 함께모두가 좋은 분들이였습니다돕지 못해 마음을 썩이는 분들이였습니다 두번 함께 산행을 하였습니다차수는 감정을 대신못합니다 좋은 사람들좋은 마음들속세를 벗어난 사람들그들이 좋아서그들과 함께 산으로 가고픕니다  6, 끈질긴 모델문화의 전파자 산행날수 6날, 걸음보수 9만보연변항공모델학교교장-최옥금     우리학교는 연길시 연변2중 바로 길건너편에 있어요학교 학생은 백명이 넘어요연변각지에서 응시해온 체격조건이 합격되는 애들이예요  키만 멀쩡해 뭘해요?사상과 지식을 주입시켜애들이 전면적으로 개성있게 발전하여사회에 진출하여 경쟁에서 이기고자기 한 자리를 궃히면서자기 인생을 살아가게 하는거죠  학교안팎일에 정신없다보니산행은 6날밖에 못했어요학교교육과 관리에 혼신을 다 바쳤어요그런데도 일들은 그냥 매끈하지 않아요  시작이 절반이라고산을 오르듯이 꼭 학교운영의 정상에 오를거예요  6, 나 할일 많아요 찾지 마세요산행날수 9홉날, 걸음보수 13만 5천보연변인민출판사 농가잡지 주필-홍천룡           나는 나를 찾는 사람을 좋아안합니다올해 등산날수 9홉날이니내가 9홉날동안 내 할일을 못했단 얘기가 됩니다나는 남의 계획에 맞추어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난 산에서 땀흘리기도 싫어하는 사람입니다 신문을 그냥 보아야 하고농가잡지도 펴내야 하고문학작품도 써내야 하고인민출판사에 온지도 해수로 3년이 되지만농가잡지는 아직도 출판못하고 있습니다아무튼 로임을 주니 내 손해되는것은 없지만농가잡지를 기다리는 농민들이 안스럽습니다.  새해엔 선진이 되고싶은데            가망이 있는것 같지 않습니다       아무튼 노력은 해보겠습니다  7, 긍정적 힘으로 병마와 싸워 이긴 녀걸산행날수 열날, 걸음보수 15만보연변조선족자치주 래신래방판공실-정경자     놀랐습니다아픈데 없는데 종양덩어리 하나수술했습니다삶은 얼마나 귀중한 것인지 실감했습니다건강은 얼마나 생명의 귀중한 대들보인지 절감했습니다 아플때 찾아온 우리의 대원들 고마웠습니다퇴원하여 매일 모아산으로 산행합니다  산은 생명을 잉태하고생명이 건강하게 자라고생명을 구원하는 자연병원입니다 피가 맑아지고 심장공능을 좋아지게 하며피돌림이 좋아져 면역력을 증가하여 건강회복의 목적에 도달합니다   몸은 많이 좋아졌습니다내 심장속에서 흐르는 붉은 피도내 가슴속에서 솟구치는 함성도하나에 모아집니다건강 만세!생명만세!8, 저 산위 하늘에서 날아예는 코기러기산행날수 12날, 걸음보수 18만보        연변주위선전부 부부장-채영춘         인생나이  60고개 래일모렌데아서라 나이가 산행에 방해될소냐  큰형은 함께 산행을 합니다 큰 짐을 걸메고 불굴의 투지로사업에 몸과 마음 다 바쳐 왔습니다  평화롭고 안정한 연변민족출판의 공익성을 재확립시키고연변문화사업단위개혁을 심화하여주내간행물들이 연변인민출판사로 집중되게 하였으며민족출판이 태양따르는 해바라기처럼 웃게 하였습니다 샘이 깊은 물은 마를 줄 모릅니다력사가 깊고 문화가 있는 민족은 사멸되지 않습니다큰 형의 피속에서는 아주 용용히 뜨거운 피가 흐르고있습니다그 피와 뿌리가 있기에 우리민족은 희망이 있는것입니다  사랑합니다큰형존경합니다큰형이천구년은 아홉고개입니다함께 넘어갑시다            9, 각설이는 노래하고있다 산행날수 12날, 걸음보수 18만보연길시각설이 노래방 사장-오순자       각설이 타령 부르며 쌀 빌어먹던 세월은 까마득한 력사각설이 노래방 찾아 부르고싶은 노래 부르는 것은 배우들만의 일이 아니였다  너도나도 찾아온다각설이 노래방으로너도나도 불러댄다자기만의 노래를   각설이는 각설이 노래방경영에 하루 절반시간넘어 할애하면서도 잊지 않았다 산을 찾는것을좋은 산을 찾는것을좋은 우리회원들과 함께 산행하는것을그래서 12날이란 기록을 창출했다  날수는 문제가  아니였다맘속에 산이란 의식이 있는 것이 소중했다자연과 인간인생과 자연그것을 련계시키려는 숨은 노력이 보기 좋았다   10, 친구의 의리를 지켜온 한해 산행날수 12날, 걸음보수 18만보연길시북대김치제품제조회사-사장  리금숙        아침밥상에 없어서는 안되는 우리김치산품  매일 매운 마늘 매운 고추 손에 바르며매운 돈 버는 일 맵기도 했어라 한포기 두포기백포기 천포기일년 365섯날생산되는 김치산품금숙의 성의였다인생이였다  산에서 12날을소개인 순자의 낯을 보아주어하루도 더 초과하지 않고또 하루도 곯치 않았다 친구의 의리를 지켜온 금숙이였다  11, 사향산의 녀 전사 산행날수 13날, 걸음보수 19만 5천보  연변주위강사단-황보금자        나이는 뜬금없이 헤맬때가 아니였다 신체는 뜬금없이 과할수 없었다마음만은 끝없이 나래칠수 있었다몸앞서 달려가는 마음은 쫓을수 없었다 청산리사향산에서였다어애가 온 몸에 따닥따닥검은 곰이 산위에서 숨어보는데해가지는 서녘으로승희따라 두남두녀가 보무당당히항일빨찌산되여 숲속으로 사라지였다  이름도 장관이엿다황보 성이 두자금자  이름두자였다 잘 키운 두 딸의 어머니였다행복하게 웃으며 살고있는 만족한 녀자였다  12, 화끈한 남자 산행날수 13날, 걸음보수 19만 5천보 연변대학학보총편집-박기병 부리부리한 눈은 높다란 연변대학 언덕위에서아래를 살핀다 우리가족산악회가 어디로 가는가고눈 녹고 땅에서 아지랑이 아롱거리자 어슬렁어슬렁 내려왔다봄철이면 바짝 산행날수를 올리면서재밋는 유머를 표현하고호주머니를 헌헌히 털어 때시걱도 마련해주며우리마음속에 난로같이 화끈한 인상을 심어주었다 여름맞아 자취를 감추었다뜨거운 여름전국대학들에서는 학술세미나가 요동친다세미나명의로 명승고적 구경시킨다올해 12월 13일해발 1470메터눈이 허리까지 오는 장백산아래 로리커후에 올랐다 기병이였다정말 끼가 있는 기가 찬 기병이였다그래서 우린 기병이 없으면 우울증에 걸린다제발 새해엔 산행날수를 절반넘어다오 13, 2008년에 남긴 자욱-안미란산행날수 14날, 걸음보수 21만보       우리주 문화사업발전에우리주 여러계층 독자의 수요에만족을 주고저 불철주야 동분서주하는 녀사다 시대의 발전은 곧 문화의 발전이고문화의 발전은 곧 우리정신생활의 향상이다자연박물관에서 도서품종의 다양성을 절감하였다피고지는 꽃들을 보면서 도서관의 백화만발을 그려보았다올리막을 오르면서 오를수록 멋진 풍경은 우에 있는것을 감수하였다. 힘든 고전문학번역임무를 출중히 완성하였다국가도서관리국의 인정을 받고 선진으로 당선되였다주도서관은 더 큰 규모로 재건설에 들어가게 되였다집이 작아서야 어찌 많은 도서를 저장하랴허나 섭섭하게도찬 겨울이면 산으로 오를수 없다우리는 따스한 봄날 산에 꽃이 만발할때산에서 방긋 웃는 미란의 모습을 기다려본다          14, 가장 편안한 남자        산행날수 17날, 걸음보수 25만 5천보                    연변인민출판사 사장조리-리명호           장소가 많은 남자였다벌리는 일은 장소가 있는 법다 자기를 위해서가 아니였다일터를 위해서였고 남을 위해서였다 연변인민출판사 사장조리로서사의 경영에 옳바른 조언을 올려야 했고경제효익임무도 완수해야 했다열심히 잘 크고 있는 두 아들의 뒤바라지도 해야 했고친척, 친구들이 끊임없이 불러대는 일들에도나서고 도와주어야 했다  가장 편안한 남자가장 곱게 생긴 남자술 안마시면 말수가 적은 남자술 마시면 수필이 줄줄 나오는  남자  멋있는 머리모양 영원하고그 고운 얼굴 그냥 고왔으면 한다.  15, 고향의 아침은 찬란하다          산행날수 23날, 걸음보수 34만 5천보         연변텔레베죤방송국 리승희            키를 보면 높이를 알수 있고사람보면 넉넉함을 알수 있고 함께 산행하면 맘속깊이를 알수 있다자연을 닮은 남자 속을 비우고 사는 남자꿈이 있는 남자 리승희 고향의 아침사람들이 살아가는 풍경하늘과 땅사이에서 선택하여고향의 문화를 세상만방에 파급하면서고향의 문명건설에 막대한 로동을 할애하였다  험난한 산을 즐기는 남자숨찬 곳일수록 올라가는 남자고향의 아침 프로제작도 그렇게 하고있다. 누가 보아도 사귀고 싶은 멋진 남자누가 보아도 여유가 있는 멋진 남자우리가족산악회의 하늘을 떠이고 서있는거인이였다.  16, 장하다 춘동아 더 높이 훨훨 날아다오산행날수 26날, 걸음보수 38만보       연변삼우헌문화전파유한회사 사장-김춘동       말없이 선배들을 따라 산으로 올랐다삼복염천에 시원한 맥주를 정상에서 선물하였다산을 오르면서 우리맘속에 들어왔다자기의 희생으로 우리의 신뢰를 얻었다아니 우리가 춘동의 신뢰를 얻었다  춘동이는 선배들의 총명과 재질을     하나하나 배워갔다춘동의 말을 빈다면 춘동이는 산을 오르면서 우리의 지혜를 <도적>질하였다  아름다운 <도적>이였다배워야 발전할수 있는 <도적>이였다열심히 배우고 슬기롭게 응용해야 하는 것이였다  산행을 하면서 춘동이가 바라보는 세상은 더 넓어졌다할일은 더 많아졌다춘동이를 올해의 선진으로 추천한다      (열렬한 박수)        17, 삭막해가는 방언의 뿌리를  찾아서     산행날수  26날, 걸음보수39만보        연변육재컴퓨터유한회사 사장-허성운신비의 그늘이다아무리 바쁜 일이 있어도 산행만은 빼놓치 않는 사람이였다그러던 그가 하반년에 갑자기 사라졌다산에서 사라지고우리맘속에서 사라지기 시작하였다애써서 리해해주려고 하였지만모질게 섭섭하였다 사랑이 깊으면 미움도 깊은 법이다허성운이 그새 사라져 무엇을 했을가?당연히 집두채 날리며 십년을 연구해온쾌속영어동화글자제작프로그램연구에  혼신을 다하였다당연히 시대적산물로서 우리연변에서 생겨나고 또 사라져 가는 방언을 찾아 수집하였다.잋혀져가는 방언사전을 펴내고싶었다 시간이 모자랬다     산행도 포기해야 했다   찾고 또 찾았다     파고 또 팠다         닦고 또 닦았다 ......  18, 가장 일많은 사람의 여유있는 안배산행날수 31날, 걸음보수 34만 5천보연변주인사국 윤혜자무작정 남을 돕기에 앞서는 의식과 행동     우리를 감동시켰다      세상을 감동시켰다 사람의 덕을 앞세우고재간을 유용히 발휘하게 하면서사회의 발전을 도모하였다  혜자맘속에는 우리대원들이 다 소중한 존재였다우리에게 장국료리를 성심껏 선물해왔다헌신적으로  언니와 누나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좋은 언니였다  좋은  누나였다 함께 생의 끝까지 갈수 있는 밈음직한 지기였다건강을 찾으면서 좋은 마음을 전파하는 녀자 그녀자가 있어서 우리는 행복하다  19, 2008년 길잃은 큰 사고 장본인 "연길아바이" 산행날수 41날, 걸음보수 61만 5천보연변인민춮판사 심독원 김성호   언제부터 누구부터 불렀는지 모른다김성호를 다정히 "연길아바이"라고 부르기 시작하였다산에서 자기몸의 세가지수치를 과학적으로 조절하다보면 가파로운 언덕을 피해야 했고 격렬한 운동을 피해야 했다그래서 우리는 "연길아바이"라고 부르기 시작하였다  "연길아바이"는 실수가 없다방향감각이 뛰여나다 일년 52번의 등산에서 51번은 틀리지 않다가딱 한번 만은 꼭 틀려야 시름놓는 아바이다  그 한번 틀림이 하늘을 놀라게 하였고 산에 눈보라가 몰아치게 하였으며우리의 마음을 크게 옥죄이였다  산길은 꼭 큰 길과 이어져 있다는 신념이 동요되는 사건이였다길따라 걸었는데 더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해는 손가락 하나 남았다 "연길아바이"는 등이 후끈 달아  올랐다사위를 자기눈으로 확인할 시간은 한시간도 남지 않았다악쓰고 제일 높은 산으로 기여 올랐다해넘어가기전에 정확한 하산방향을 잡아놓아야 했다우리는 찾았다혹혹시나 내리막길에서 쓰러지지나 않았는지 김성호  김성호 …… 불러도 불러도 대답없었다 홀연 윤혜자의 핸드폰이 울렸다아주아주 위대하고 커다란 감동을 주는 <유언>을 남기였다“혜자, 내 걱정을 말고 먼저 가라고 하오. 내 천천히 갈게” 정말로 눈물이 왈칵 솟아나오는 감동이다길잃고 사경에 처한 사람이막 어두워오는 산의 어둠속에서 살속까지 긁어대는 혹한속에서 꼬르륵 울어대는 창자의 신음을 들으면서구조를 바라지 않고  자기때문에 동행한 다른 대원들의 귀가시간이 지체될가봐미안해서 나온 위대한 부탁이였다. 김성호 "연길아바이 "당신이 사경속에서도 남을 먼저 배려하는 넉넉한 마음의 여유가 어디서 나왔단 말인가?아무나 할수 없는 일이다.맑고 밝은 령혼의 빛나는 이슬 빛이였다   20, 우리의 희생적 산행영웅       산행날수 46날, 걸음보수 69만보     연변인민출판사 부사장-김성길   매주 금요일 오후면핸드폰으로 띠띠띠 전해오는 산행통지50차 울린 산행통지진군 나팔소리같은 산행통지 우리는 그 통지를 받고 준비했고그 통지를 받고 산행했고 그 통지를 받고 산행력사를 써왔다  일전도 차이없는 교통비용지출문세자기교통비는 자기절로 책임지면서그 계산을 김성길에게 맡기였다     에누리없었다일전을 더 붙히지도 더 빼지도 않았다당신의 교통비를 당신이 사용한대로투명한 장부를 만들어냈다 대원들은 깜짝놀랐다 탄복했다2008년도  제일 투명한  장부였다     산행중에 즐거운 때가 식사할 때였다장국 끓이는 액체가스통 그냥 김성길의 가방에 있었다장국료리도 종종 함께 동행하였다그의 가방은 항상 다른 사람의 가방보다 더 무거웠다    자기를 위해서가 아니였다 대원들을 배려해서였다자기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이였다 남을 위해서 무거운 짐을 앞서서 메고가는 착한 사람이였다     그랬기에 그가 산행중에 흘린 땀은 그 누구보다 더 많았다 속옷과 겉옷이 다 젖어서 항상 옷을 갈아입어야 했다     너무도 수고가 많았다   너무도 탈수가 많았다 너무도 탈진하였다    너무도 희생적이였다     2008년 산행속에 영원한 기억으로 남아갈 영웅임에 손색이 없다 21, 천사의 산행기록        산행날수 49날, 걸음보수 73만 8천보      연길시가정문제상담소 조해원-리미화            2008년이 막을 여는 1월 4일이였다이란망향산맥의 하아얀 눈속에 목짧은 신발을 신고 키작은 녀자가 막대기를 짚고 나타났다  다른 사람의 뒤도 아니고 범같은 손룡호의 뒤에 나타났다믿기 어려운 체력이였다 그 다음 산행날에는 전신무장한 빠알간 녀자였다2000원을 팔아 신발이며 옷이며 수갑이며 다 준비하였다  일년 365섯날하루도 빠짐없이 모아산산행을 해오는 녀자였다어떤 리유로 하루도 빠짐없는 산행을 한단 말인가? 리유는 그만이 알고있었다  산아 산아난 널 찾아 간다모아산을 혼자서 6년 오르다가 비행기에서 최옥금을 만나우리가족산악회의 대원이 되였다 산에서 걷기 힘든 사람의 발이 되여주고때시걱을 바로 챙기지 못하는 사람의 어머니가 되여주고집의 가장 값지고 맛있고 영양가 있는 음식과 차물을 우리대원들에게 선물하였다자기집의 널다란 구들에서 개를 잡아 우리대원들을 뜨끈히 대접하였다  아름다운 언행은 아름다운 마음에서 온다아름다운 언행은 남을 위하는 일에서 표현된다 우리는 미화의 살뜰한 사랑을 너무너무 고맙게 받았다미화는 항상 대오의 맨 앞에서 도움의 최선에서빛나는 한해를 아름답게 장식해왔다 미화는 우리가족산악회의 령혼인물이다2008년 우리가족산악회의 선진인물이다따라배우자!22, 길을 선물하는 사나이산행날수 47날, 걸음보수 70만 5천보연변주신문출팍국-손룡호   언제나 산행의 맨 앞에 서있다범같은 호기로 앞서간다옳바른 길을 뒤따라 오는 대원들에게 선물하려고그것이 앞서가는  리유였다의무였다 책임감이였다  새해 산행타산독자적 산행을 위주로 하면서 갈수 없는 좋은 산일 때는 다른 산악회와 함께 가본다우리를 부르는 사람에 연연하지 않고 우리를 부르는 가보지 못한 산에 연연한다산행길에서 체력차이를 인정하여 안전하고 책임성있는 산행을 선호한다산에서 필요한 통화통신설비를 마련한다.     2009년,  회원 여러분 모두가 편하게 사업과 산행관계를 잘 접목하고 좋은 건강과 좋은 사업실적으로 개인, 가정, 산악회,  사회에 더  즐거운 영광을 보태가기 바란다                                                  우리가족산악회 회장                                                               손룡호                                                                               2009년 1월 17일  
15    말들의 고매한 사랑 댓글:  조회:1413  추천:53  2008-09-20
글    이슬 빛 사진 김 성 길  여름이 광분하는 푸른 8월 산천은 허리를 펴고 생명을 노래한다 나란히 나란히  수요를 느낌으로 읽으며  맞추어 갈 때  세상은 조화롭고 평온하다 위대한 거사도 그렇게 평온속에 조용히 이루어 갈수 있다.  숫말은 침울해 있는 암말을 돌아다 보며 속 사정을 알고파 한다 말로 태여나 그 언제까지 살아가야 할지는 알수도 생각할수도 없는 미물이지만 함께 있을 때만은  있는 그 감각으로 교류하며 살아간다 이들의 력사를 이들을 키워가고 부려먹는 인간이 지켜보며 적어간다.
14    아름다움... 댓글:  조회:1314  추천:71  2008-04-23
 아름다움이란 마음을 즐겁게 하여 주는 색상이나 음악 그리고 도덕적행위표현을 말한다. 아마 더욱 좋은 정의가 있을법도 하지만 먼저 이만치 정의를 내려본다. 오늘 마음을 즐겁게 하여주는 음악을 들었다. 바로 리희아의  피아노연주이다. 리희아가 연주하는 음악은 너무도 아름다웠다. <<너무도>> 아름다웠다는 리유는 꼭 음악자체가 즐거웠고 아름다웠다는 의미뿐만은 아니다. 피아노를 연주하는 리희아의 성장과정과 리희아가 전하는 멧세지가 감동을 주엇기에 아름다웠다고 하는 것이다.   리희아, 그는 무릅아래로 다리가 없다. 그는 관절이 없는 무릅으로 걷는다. 그는 두손에 두개의 손가락만을 갖고 있다. 그는 네손가락으로 음악을 연주한다. 하지만 희아는 자기의 장애를 감추려고 하지 않앗고 장애로 인하여 주늑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장애를 드러내고 가는곳마다에서 자신의 장애를 사랑을 나누는 그릇으로 활용하고 있다.   지난 4월17일, 나는 다행이 희아를 만나볼수 있는 기회를 가지였다. 만나보고난후 이 23살의 103센치메터밖에 되지않는 작은 키의 희아에게서 큰 감동을 받았다. 그 감동의 샘은 희아의 밝은 성격에 있었다. 희아는 줄곧 웃고 즐거워 했다. 무엇이 그렇게 웃으웠고 무엇이 그렇게 즐거웠는지? 절세의 미인 포사도 웃지않아 봉화를 올려서야 겨우 희쭉 웃을 정도였고 서시도 별 웃음이 없어 서시의 이앓이가 남들에게 웃음으로 보였을만큼 웃음에 린색했다고 한다. 모나리자의 그 잔웃음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웃음이라고 하지만 아마 그 웃음이 쓴 웃음인지 유혹의 웃음인지 사랑을 머금은 웃음인지 지금까지 그 누구도 그 웃음의 의미를 단정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희아의 웃음이야말고 대방에 즐거움을 주고 행복을 주고 용기를 주는 명랑한 웃음임에 분명하였다. 자그마한 선물에 큰 감동을 받고 짤막한 인사 한마디에도 행복을 감지하는 희아는 아마도 천사의 분신인듯 했다. 관절이 없는 소지가 늘 아프지만 음악을 한곡 부탁하면 오히려 부탁해서 고맙다고 하면서 한곡 선물하는 희아이다. 세상에서 가장 혹독한 장애를 가지고 있음에도 두팔을 잃은 연길시에 사는 연화어린이에게 동정의 눈물을 흘리며 도와주기를 부탁하는 그 용기 또한  놀라웠다. 리희아가 가장 치기 어렵다고 하는 쇼팽의 <<즉흥환상곡>>까지 무난히 연주하면서 국제적인 무대에 오르기까지는 어머니의 <<채찍>>과 또 다른 <<나>>를 이기려는 희아의 마음의 채찍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채찍이 있었기에 엄지와 소지로  피아노를 연주하기에는 절대적으로 불가능 하다던 <<망상>>을 가능으로 실현시켰다. 아마 하늘이 희아의 네손가락을 통해서 가장 아름다운 음악을 연주하게 하고 네손가락에 담아서 가장 아름다운 네가지 멧세지를 전하려는 것은 아닌가 생각된다. 그 아름다운 멧세지가 바로 세상을 사랑하고 세상에 행복을 채우며 세상을 즐겁게 하고 세상에 용기를 주려는 것이라고 생각해본다.  
13    나는 누구인가? 댓글:  조회:1395  추천:54  2008-04-23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는 철학적인 질문을 내놓았다. 피히테는 <<나는 나이다>>고 철학적인 답안을 내놓았다. 그리고 데카르타는 <<나는 사유를 한다. 때문에 나는 존재한다>>는 유명한 공식같은 정의를 내놓았다. 듣고보면 뭐가 뭔지 모르겠다. 아마 안다면 더 이상해지고 더 말썽일지도 모르는 철학적인 <<명구>>들이다.   하지만 살아가면서 누구나 몇번쯤은 스스로 <<나는 누구인지?>> <<왜서 존재하는지?>>>를 생각하게 된다. 비록 오리무중에 빠질지라도 사람이기에 사람다운 질문을 스스로 하게 된다. 그러나 정확히 대답하는 사람은 지금까지 아무도 없다. 종교인은 종교적으로 철학자는 철학적으로 답안을 찾고 의사는 생명체로 교양인은 도덕의 범주에서 분석하고 대답할것이 뻔하다. 그리고 또 망나니들일지라도 나름대로 대답이 있을것이니 무엇을 기준으로 해야할지 모른다.   그러니 100점짜리 정답을 기대할수 없다. 오직 나름대로 대답하고 나름대로 채점하는것이 현명하다. 데카르트는 세상의 모든 것이 거짓이고 의심스운 존재라고 했다. 그러니 굳이 거짓스럼고 의심스러운 자대를 가지고 <<나는 누구인지?>> 재여보고 분석할 필요가 있겠는가? 깊이 알려고 하면 정신과 치료를 받을상싶은 느낌까지 받게 되니 너무 피곤하게 자기를 알려고 할 필요까지는 없다.    그러나 오직 거짓이 없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나의 몸이다. 나의 사상도 나의 리념도 나의 사유도 때때로 거짓스러울때가 있지만 나의 몸만은 거짓이 아니다. 아프면 아프고 괴로우면 괴롭고 즐거우면 즐겁다. 그러니 믿을 것은 나의 몸과 나의 몸에서 반응되는 존재일뿐이다.  <<나는 누구인가?>> 하면 나는 내몸에서 반응되는 그 존재자체이라고 말하고 싶다. 무엇을 더 가하지도 덜지도 않겠다.  
12    살바위(락타산) 댓글:  조회:1381  추천:65  2008-04-14
  맑고 깨끗한 공기를 한껏 들이키며 안도현 량병대진의 남쪽에 위치한 살바위에 오른 것은 4월12일 오전 12시경...  살바위는 멀리서 보면 락타와 흡사하여 일명 락타바위라고도 한다. 봉우리까지의 해발고도가 비록 높지는 않으나 너무 가파로워서 웬만한 용기가 아니면 오르기가 어렵다. 살바위는 두개의 거대한 바위덩이로 이어졌는데 가운데 뾰족하게 돌기한 바위가 있어 생각하기나름으로 웃음을 자아낸다.  등산코스(산릉선)를 따라 가노라면 살바위는 중심으로 한바퀴를 돌게 되는데 어느면으로 보아도 살바위는 가관이다. 추천할만한 산행코스이다.   조선말의  <<살>>은 고유한 언어이다. 보통 수레바퀴살, 부채살등으로 쓰이며 또는 몸을 이루는 물질로 명사적으로 쓰이기도 하고 모양의 문양,발을 나타내는데 쓰이기도 한다. 이외 <<화살>>등 명사와 수사적으로 사용하지만  살바위란 이름은 어떻게 되여 지어졌는지가  궁금하다. 모르기는 하지만 조선말의 <<살>>자는 어떤 독기를 가지고 있거나 위험함을 나타내는 단어로도 사용되기도 하는데  례를 들어 <<살을 맞다>>하면 미신적이기는 하지만 어떤 액운을 당한것을 말한다.  그리고 타인에게 본의 아니게 해로움을 주거나 어떤 일을 파탄시키는 사람을 두고 <<살이 쎄다>>라고 할때도 있다. 이런 의미에서 살바위는 위험이나 액운을 품은 바위 도는 액운을 가져다주는 바위라는 미신적관념에서 나온 이름이 아니겠는가 생각된다. 이외에도 바위의 모양이 활촉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일지도 모른다.  <<살문>>혹은 <<홍살문>>이라는 말도 있는데 종묘나 릉묘. 관아마을앞에 세워 액을 쫓는 문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었는데 후에는 렬녀, 의부, 충신의 집문앞에도 세워 영광을 나타내는 뜻을 가지기도 했다. 이렇게 볼때 <<살바위>>는 마을을 지켜주는 바위라는 뜻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살바위>>는 순 조선말이니 조선이주민들이 들어와 붙혀준 이름이다.
11    초모정자 댓글:  조회:1378  추천:62  2008-03-29
3월29일 산행목적지: 초모정자 ( 왕천현 배초구진 태평촌부근)해발고도: 789메터산행인: 우리가족등산팀과 천지 백두산 대자연등팀과 합동로  선:  7시10분에 동북아려객운수소에서 발차. 9시 30분경에 태평촌에 도착. 우리가족등산팀의 4명대원이  43분만에 초모정자주봉에 올랐다. 다음 약 20분만에 또다른 주봉에 올랐다. 다른 등산팀의 초모정자주봉 도착시간은 일정하지 않는데 우리팀의 선두대원들과 약 20분 늦어 도착.등산경과:  초모정자로 오르는데는 두갈래길이 있다. 한갈래는 마을에서 약 4백메터 떨어진 서쪽골자기로 오르는 길이고 다른 한갈래는 마을을 꿰질러 직접 오르는 길이다. 우리 일행은 마을을 꿰질로 올랐다 처음부터 줄곧 올리막이여서 힘겨웠다. 주봉까지 오른 다음에는 이미 페가 충분히 열리고 호흡이 조절된뒤라 별로 힘이 들지 않았다. 그 다음의 주봉코스는 별로 힘들지 않았다.  올해에 들어와서 처음으로 가지는 합동등산이였다. 하지만 흥취는 별로다. 어떤 등산팀의 등산은 등산이 목적이 아니고 산책인지 아니면 그저 따라가는건지 시발점에 돌아와서 그들을 기다리는 시간이 너무 피곤하다. 진달래를 꺽고 약재인지 뭔지를 따면서 늦게야 도착하고도 조금도 미안한 기색이 없다.    초모정자에는 오가피나무와 드릅나무가 많다. 산은 모두 참나무와 가둑나무로 덮히고 소나무와 락엽송은 별로 보지 못했다. 지난해 봄에 심은듯한 소나무가 있다.  초모정자는 큰길과 가까이에 있다. 하지만 산은 비교적 깊고 물이 많아 등산코스로는 B급이라고 할수 있다.   첫 코스를 오르는데 힘이 들었다 또 눈길이여서 매우 미끄러웠다. 두번째 봉우리는 사면이 모두 가파로웠는데 특히 동쪽이 더욱 가파로웠다 거기에다 눈까지 덮혀있어 오르는데는 모험이였다. 하지만 우리가족등산팀의 5명괴 천지팀의 2명대원이 위험한 동쪽구간으로 올랐다. 일단 미끌거나 발을 헛디디면 후과를 상상하기 어렵다. 하지만 손과발이 따로없이 한발작한발작 기여올라 무탈하게 올랐다. 우리팀의 리미화여성은 올라오지 말라고 소리를 쳤는데도 기어이 올라왔다. 그 용기에 모두 놀라움을 금치못했다. 우리팀의 2명대원과 다른팀의 1명대원이 서쪽비탈로 올랐다. 그외의 등산팀은 오르지 않았다.느낌: 등산은 힘겹다. 그러나 힘겨운 등산을 기어이 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그것은 등산이 힘겹기때문이다. 만일 등산이  강변길이나 공원길을 산책하는것처럼 즐거운 길이라면 모두가 강변길이나 공원길을 여유작작히 거닐것이지 왜 하필 등산을 택하는가? 그것은 힘겨운 길이 도전의 길이기 때문이다. 오르기 힘든 산길과의 도전, 그리고 힘든 산길앞에서 오르느냐 멈추느냐하는 자기와의 싸움에서 이기려는 의지,이 모든 것이 등산을 통하여 짜릿하게 이루어진다.  자기를 이기고 주봉에 올랐을때의 성취감은 진한 느낌을 안겨준다. 등산을 하면서 자연을 새록새록 알게 될뿐만아니라 또 다른 나를 발견하고 나를 키워가게 된다.   등산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 등산은 의지와 느낌으로 한다. 의지와 느낌이 없는자는 스스로 물러나게 된다.
10    나를 믿는 기술 댓글:  조회:1290  추천:60  2008-03-28
1. 부정적인 자신의 이미지를 버려라자신이 모자란다고 생각하면 꿈꿀 수가 없다자신의 부족한 면에 애써 집착하지 말라2. 나도 행복해질 수 있다고 믿어라불행하다고 느낀다면 더욱 활발히 행동하라작은 일에도 보람을 찾다보면 그 누구보다도 행복한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3. 고난이 찾아오면 더 최악의 상태를 생각하라벼랑 끝에 서있는 사람이라도 이미 그 아래로추락한 사람 보다는 상황이 낫다4. 목표를 세우면 공허감이 사라진다누구나 현실을 극복해갈 수 있는 작은 목표를 가질 수 있다그것들을 하나하나 이루면서 눈덩이처럼큰 목표를 향해 나아가라5. 기회가 왔을 때 겁내지 말고 뛰어 들어라기회란 항상 오는 것이 아니다그럴 때 안전을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6. 실패에 직면하여 자책감에 사로잡히지 말라실패는 누구나 하는 것이다7. 마음의 감옥을 부수고 평화를 찾으라마음이 평화로우면 초가삼간도 천국처럼 느꺼지는 법이다8. 자신의 시간을 보석처럼 아껴라자신의 시간을 존중하면 자신을 사랑하는 기술도터득할 수 있다
9    해탈의 길 댓글:  조회:1190  추천:59  2008-03-19
등산은 번뇌와 집착을 훌훌 버리려는 마음의 선택이다. 아마 그래서 산행을 하는 사람들의 마음가짐은 가벼운 것인가?아마 그래서 산행에는 유마와 웃음과 노래가 흘러넘치는 것이가?.누가 말했는지 ?<<범부는 구속하고 성인은 해탈한다>>한다고그러고보니 산행하는 이들은 아마 성인인가 본다. 번뇌와 집착과 질투를 일구는  세상을 몰아내고 구속에서 해탈하려고 하니깐.그러고보니 산행을 하는 이들은 범부가 아닌가 본다. 사계절을 푸른 하늘과 들과 그리고 산과 물과 동속이 되여구속에서 벗어나려고 하니깐사람은 림종을 앞두고서야 비로서 세상사가 덧없을 깨닫는다고 한다. 세상사가 무엇인지? 왜 얽매여 사는지? 누가 세상사를 만들어 내는지?그 세상사로하여 육체가 멍이 들고 마음이 병든다.하지만 그 멍과 병은 스스로 자처한것이다.술이 사람을 취하게 하는것이 아니로되 사람이 스스로 취하니깐.색이 사람을 현혹하는 것이 아니로되 사람이 스스로 현혹되니깐.그러니 자업자득농부의 말로는 내가 뿌린 씨앗 내가 거둔다고 한다.세상의 진리는 가슴을 채우는 것이요. 자연의 진리는 가슴을 비우는 것이다. 아마 그래서인지 세상을 택한 이들은 가슴을 채우려고 하고아마 그래서인지 산을 택한 이들은 가슴을 비우려 한다.그래서 어떤 사람은 올가미를 목에 걸지 못해 안달아나고그래서 어떤 사람은 올가미를 풀어내려고  땀을 흘린다.세상의 죄인은 바로 나다.나의 죄를 구제할 자는 오로지 나뿐이니 내가 나를 구지하지 않으면 누가 구제하리.세상의 복자는 바로 내다.나의 복을 빼앗을자는 오로지 나뿐이니내가 내 복을 지키지 않으면 누가 지켜내리아마 그래서인지 죄를 삭이려고 자연을 택하는 걸가?아마 그래서인지 복을 일구려고 세상을 버리는 걸가?산, 산행. 해탈, 복 세상, 집착. 구속, 죄단 하루를 살아도 행복할수 있는 길이 해탈의 길이라면 그래서 행복할수 있다면  서슴치 않고 그 길을 택하고 싶다.
8    당신때문에 댓글:  조회:1476  추천:78  2008-02-01
우리의 등산가족들이여힘들어 하지 마세요.물러서지 마세요.당신이 있기에 행복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당신이 있기에 살맛난다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당신이 있어주어 위안이 되고당신이 있어주어 감사를 느낌니다.나의 존재가당신들께 무슨 의미로 되겠느냐 하겠지만당신때문에 웃음을 나누고 행복을 나눕니다.당신이 주는 그리움으로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당신도 누구때문인가위안을 받고 감사해하겠지만당신때문에 그 모든 것을 받아드리는 사람도 있다는것을 잊지 마세요.화이팅!
7    믿음직한 작전 참모의 이모저모 댓글:  조회:1383  추천:65  2008-01-17
글 사진 이슬 빛       매주 토요일마다 산을 찾아 오르는 로선을 천기와 산지세, 등산대원들의 체력까지 감내하여 정확히 등산로선을 몇개씩 내놓고 손대장과 그날그날의 최선의 로선을 결정짓는 작전참모이다.        성명은 김성길 1959년 9월 25일 흑룡강동녕성에서 출생, 돼지띠, 키 172cm, 체중 65공근, 현재사업단위 연변인민출판사, 직무 부사장이다.  우리등산가족 성원들은 누구나 다 존중하고 부러워하며 엄지손가락을 내 흔드는 명실에 부합되는 작전참모, 부대장이다.     원래 지질탐사대에서 지질탐사와 관측에 익숙한 분이다. 몸에는 항상 해발고도측정의, 방향의기, 걸음기록의기가 휴대 되여있다. 성격은 곧고 직설적이고 자기의 관점을 숨기지 않는다. 여러사람의 근본리익을 대표하여 감히 상사의 틀린점도 짚어주는 인격이다. 핸드폰으로 등산통지를 발송한것도 이 분의 착안이다. 중국(网易博客: blog.163.com)에 자기의 블로그 http://blog.163.com/jchj-2002/를 올려 능숙한 중국어로 13억인구가 즐겨볼수 있는 해학적이고 유머가 있고 째인 문맥으로 글을 올리고 우리등산가족의 등산사진첩을 필림처럼 올려가는 분이다. 컴퓨터에 연구가 깊고 고전문학에 흥취가 있고 못하는 술이지만 친구들과 앉으면 흔쾌히 술량을 넘나드는 분이다.  솔직하고 투명하고 열정적이여서 누구나 좋아하는 분이다. 흥겨우면 춤도 잘 춘다. 전세계에서 찾기 힘든 춤동작이다. 우리는 이런 작전참모와 등산부대장이 있기에 항상 즐겁다. 우리의 보배 김성길작전참모, 좋은 사람에게는 좋은 일이 많을 것이다.   힘든 등산하산길에도 차안에서 대원들에게 웃음을 선물하고있다.     등산대원의 생일연회축하모임에서 즐거운 춤을 선물하고 있다.     대원들에게 대접할 장국가마와 국료리를 한가방 가득 메고 산마루에 오르고 나니 등은 땀으로 질벅히 젖었다.      힘들어 하는 대원의 가방까지 메고나니 두 가방무게가 어깨를 짓눌러도 힘들다는 말 한마디 없이 대원들이 선택한 곳에서 열심히 사진을 찍어준다. 이 몇해간 찍어준 사진만 해도 천여장을 넘는다.      찜통 더위가 폭팔하는 삼복염천에 개울에서 옷을 벗어 휘돌리면서 삶의 시원한 모습을 연출하고있다.  
6    물 건너 다리 건너... 댓글:  조회:1297  추천:54  2008-01-17
  사진 김성길 1       토요일은 어김없는 등산날이다. 오늘은 왕청현배초구진 안전촌에서 약 5공리 떨어진 대길령으로 가려고 아침 8덟시 30분에 연길로객운잠에서 왕청으로 떠나는 뻐스에 올랐다. 일행은 7명이였다. 뻐스는 왕청-연길 분계선을 지나 배초구진 안전(安田)촌에서 멈추었다. 차에서 내리니 우리가 오르고저 하는 대길령이 한눈에 안겨왔다. 해발이 668메터이고 산우에 올라서면 연변에서 이름난 유람지 만천성(万田星)발전댐호수가 한눈에 안겨온단다. 우리는 내리자마자 걸음을 다그쳤다. 갔던 산으로는 다시 가지않고 번마다 새로운 산을 찾아 오르기에 오늘 우리앞길은 어떨지 우리자신도 모르고있었다. 모르기에 모험이 있고 모험이 있기에 자극이 있으며 자극이 있기에 체험이 깊어지고 체험이 있기에 추억거리가 만들어진다. 추억은 인생의 아름다운 회억이다.     우리는 우리앞에 점잖게 앉아있는 대길령(大吉岭)으로 걸음을 다우쳤다.      오늘은 6월24일이다. 낮이 가장 길고 정오의 태양 높이도 가장 높아지는 하지가 시작된지도 삼일째다. 하지는 망종과 소서 사이에 있는데 올해는 양력 2006년 6월 21일부터 시작되였다. 지난 풍속에 의하면 하지가 지날 때까지 비가 오지 않을 경우 기우제(기우제란 가뭄이 들었을 때 강우를 기원하며 지내는 제사. 도우(禱雨)라고도 한다. 비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농업의 특성상 한발은 농경사회에서 가장 큰 재앙이었다. 따라서 기우제는 조정으로부터 자연마을에 이르기까지 나라 전체가 지내는 가장 큰 행사였다고 한다.)를 지냈다고 한다. 속담에는  하지를 지내면 발을 물꼬에 담그고 산다고 한다. 의미인즉 우기가 시작되여 비가 줄창내려 땅이 마를새 없다는 뜻이다. 과연 어제 오후에 쏟아진 비물이 그냥 길가의 웅덩이에 고여있었다.    발걸음이 빠른 손대장과 허성운이 앞서 가다가 개울을 꽉 메우고 흐르는 물에 걸음을 멈추었다. 개울물은 어제 오후에 내린 비에 꽉차서 흐르고 있었다. 보매 허리까지 치달아 오를 상 싶었다. 들어서기가 선뜩하였다. 허나 대길령으로 가자면 꼭  이 물을 건너야 하였다. 손대장과 허성운은 뒤 사람들이 도착하여 꼭 막힌 개울물 때문에 동요하고 동요해서 시간을 허비하지 말고 무작정 강을 건너게 하고저 먼저 둘이 바지벗고 강을건너가 있어야한다고 생각했다. 본보기의 힘은 크니말이다. 손대장과 허성운은 군소리 없이 신발과 바지벗고 개울물을 건넜다. 평소에는 발목이나 넘을가 하는 물이 과연 허리까지 적셔대였다. 둘이 방금 건너자 대원들이 도착하였다. 대원들은 이미 건너간 손대장과 허성운을 보면서 궁리하기 시작하였다. 더우기 녀성대원 윤혜자는 녀성이기에 더 망설이였다. 허리까지 오는 물이여서 업어건널수도 없었다. 참 묘하게도 이때 이미 건너간 쪽 길에서 농부가 큰 소수레를 몰고 다가왔다. 손대장은 그 농부와 인사하고 대길령으로 등산하러 왔으니 개울저쪽 사람들을 건늬여 달라고 하였다. 나이 지숙한 농부는 사람좋은 웃음을 지으면서 소를 몰아 건너가서 대원들을 수레우에 싣고 건늬여 주었다.         우리등산가족 제일 큰 영춘형은 농부의 소행에 고맙다고 인민페 20원을 내놓았다. 농부는 견결히 사절하였다. 응당한 일을 했는데 돈을 받으면 사람이나? 허나 영춘형은 술이라도 사서 마시라고 마구 밀막아 주었다. 농부는 어처구니 없다는 듯 돈을 받고서는 우리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오래도록 바래주었다.     얼마 안가니 또 개울이 나타났다. 손대장이 건너보니 무릎아래까지 물이 와 닿았다. 이번엔 손대장이 자기의 대원들을 업어건네주려고 작심하였다. 이 길로 오기로 결정한 그로서 자기의 책임을 알기때문이였다. 사실 손대장은 모험의식이 강한 사람이였다. 모험을 오락으로 즐기는 사람이였다. 수월한 길보다 힘든 길을 선택하고 에돌아가는 길보다 곧게 직선으로 올라가는 길을 선택하고 길없는 곳을 헤치기를 즐기였다. 손대장은 금방 뒤에 나타나서 개울물을 보면서 망설이는 대원들을 토론도 없이 하나둘 등에 둘쳐 업었다.      한 사람이 수고하니 여러사람이 편하였다. 여러사람을 위하여 자기의 제한된 힘이나마 쏟아부으면서 살아가려는 것이 손대장의 인생신조였다. 등에 엎힌 사람들도 따뜻함을 느끼면서 다시 자기도 대원들을 위하여 이 사회 아픈 사람들의 아픔을 힘이 자라는 대로 등에 짊어지고 아픔을 나누어야 한다고 스스로 생각하고있었다.     개울물 두개를 건느니 수십개 수백개의 산골짜기에서 흘러내린 골물들이 합성한 큰 강이 나타났다. "가야하"였다. 물고기가 많기로 소문난 강이였다. 골물에 물면은 짙은 황색을 띠고있었다. 수심이 깊은 곳은 몇메터는 실히 되여보였다. 이 강은 다리가 없으면 건널 수 없었다.      강역에서 강건너 마을이 있는 곳을 바라보며 강을 거슬러 올라갔다. 마을이 있는 곳에 강을 건느는 다리가 있을 것이니 말이다. 과연 다리가 나타났다. 다리기둥은 철이요 철을 튼튼히 옭아매는 것은 손목만한 쇠사슬이였다.  다리널판자도 쇠사슬로 드놀지 않게 고정시켜놓아 꽤나 믿음직한 다리였다. 시가지에서 사는 우리로는 이런 다리를 보자고 해도 볼수 없었다. 이 다리는 이 동네 조상들로부터 궁리하고 만들어놓고 발전시킨 삶의 생존다리였다. 이 강우에 이런 다리가 서너개는 있다고 한다. 우리는 흔들리는 다리우를 흔쾌히 건넜다. 일부는 아래로 흐르는 물을 보면서 어지름증과 더불어 겁기도 먹었지만 안전한 다리여서 별 물의가 없이 모두다 통과하였다.    다리를 건느니 와룡촌이라고 써놓은 석비가  나타났다.     인젠 석비옆으로 뻗어나간 길따라 산으로 향해 올라야 했다. 얼마 안가서 우리 모두는 무춤 멈춰섰다. 길가운데 검은 색갈의 독사한마리가 도사리고앉아 우릴 어디서 온 놈들인가고 빠끔히 쳐다보고 있으니말이다.      손대장은 이 산의 주인인 뱀을 죽여서는 안된다면서 나무 꼬챙이로 뱀을 가볍게 다치여 갈길을 가게 하여주었다.      물건너고 다리를 건너고 마중나온 뱀까지 바래고난 대원들은 본격적으로 대길령을 오르기 시작하였다.     이때 해는 꼭뒤에서 쨍쨍 내리쬐이고 산에서는 풀냄새가 시큼털털하게 코밑을 자극하였다. 대원들은 해빛을 피하기 위하여 나무가 우거진 산등성이를 타기 시작하였다. 이미 길에서 지친 대원들은 산을 오르면서 숨이차서 할싹거렸다. 대원들은 이미 온 몸이 땀에 흠뻑 젖었다. 손대장도 마찬가지였다. 허나 그는 그냥 버릇대로 맨 앞에서 걸었다. 뒤에 사람들을  보이지 않게 떨궈놓고 호각을 불어 방향을 알려주며 얼굴에 자주 붙어대는 거미줄을 쳐 없애면서 산봉으로 한보한보 박근하였다. 손대장은 오늘같은 날엔 가능하게 대원들이 힘들어 일부 대원들이 산봉까지 오르기 곤난할것이라고 생각하고 자기만이라도 산봉에 올라 자욱을 남겨놓고 싶어서 의식적으로 앞서 걸었다. 아니나다를가 4명대원이 중도에서 멈춰섰다. 정상에는 손대장과 부대장 김성길이가 톱아 올랐다. 손대장은 체력적으로 오를수 있는 체력을 갖추었으나 김성길이는 체력적으로 약한 편이였다. 허나 그는 언제 힘들다고 말해대는 사람이 아니였다. 솔직히 그의 체력으로는 오르기 힘든 고봉도 그는 악을 쓰고 오르고야 마는 성미이다. 산봉에서 과연 만천성댐호수가 한눈에 안겨왔다. 손대장과 김성길이는 서로 디지털카메라로 흔적을 남기였다. 부대장 김성길 대장 손룡호     오늘 하루 등산은 물건너 다리건너 등산이였다. 물 넘어에 산이 있고 산 넘어에 산이 있으며 마을 넘어에 산이 있다. 같은 말로 사람 넘어에 사람이 있는 것이다. 인생은 부단히 새로운 사람을 만나서 익숙한 사이가 되고 다시 또 새로운 사람을 만나 익숙해지며 자기를 충실히 해가는 과정이 아닐가? 부단히 역경속에서 앞을 내다보면서 새로운 자아를 키우고 발견하고 충전해가는 과정이 아닐가? 등산은 육체적인 운동으로부터 무엇인가 잊혀지거나 망각하고 있던 인생의 무언가를 찾아내는 길이기도 하였다.  (2006년 6월 27일 )      parent.ContentViewer.parseScript('b_8564207');
5    새해 첫 등산 댓글:  조회:1455  추천:52  2008-01-10
  1 오늘은 우리가 등산하는 날이다     오늘은 양력 2008년1월 5일, 음력으로는 2007년 11월 28일, 새해 첫 토요일이다. 올해 우리중국북경서 제29회세계올림픽대회가 열리게 된다. 그날이 255날 남았다. 그리고 래일은 소한(小寒)이다. 겨울은 입동(立冬)으로 시작해서 대한(大寒)으로 끝이난다. 입동이 지난해 11월 7일이였고 대한이 올해 1월 20일이고 입춘(立春)이 양력 2월 4일이니 겨울은 별로 길어보이지 않는다. 우리 여기서는 겨울서 가장 추운 날이 대한이 소한집에 놀러왔다가 얼어죽었다는 설도 있다. 그만치 소한이 춥다는 말이 된다. 헌데 래일 소한인데도 오늘 날씨는 바람 한점 없고 하늘은 맑고 푸르다. 인류의 발전이 이미 자연환경을 심각한 정도로 파괴시킨줄로 아는 오늘 아마 온난화현상이 아닐까고 생각도 해본다.    아무튼 날씨는 추울 때 추워야 하고 더울 때 더워야 하는 것이 정상이 아니겠는가? 그렇치 않으니 다른 생각이 들수밖에! 그리고 오늘은 또 인류력사에서 어느 위인이 탄생한 날일 것이고 어는 위인이 서거한 날일 것이다. 위인만 사람이 아니다. 오늘은 무수히 많은 새 생명이 태여날거고 또 산전수전 다 껵은 어느 분이 세상과 고별하는 날일수도 있다. 아침에 뜨는 태양은 저녁이면 진다. 다시 이튿날 아침에 동천에 떠오른다. 사람은 한번 태여났다가 죽으면 영 되살아 날수 없다. 허나 인류는 선인들이 남겨논 자식들에 의해 대를 이어가면서 끊끼지 않는 인간세상을 계속해왔다. 그리고 확실한 것은 오늘은 우리가 등산하는 날이다. 23대 5 오늘 우리는 아침 8덟시반에 서시장에서 출발하였다. 우리의 등산은 항상 힘든 쪽으로 하기에 여성대원들이 늘지 않는다. 와서 몇번 해보고는 너무 힘들게 한다면서 발길을 끊는다. 하여 이 몇해간 등산에서 여자대원 수자가 남자대원수자를 초과한 적은 단 한번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해왔다. 헌데 오늘은 남자 3명, 녀자 5명이다. 기적이였다. 3명의 여자가 우리등산팀에 처음으로 찾아와서 첫 날 등산에 참가하였다. 한분은 오십대에 들어서고 다른 한분은 사십대중반이고 나머지 한분은 사십문턱에 들어섰다. 나는 새로 참여한 세 여대원을 보면서 전에 우리와 함께 등산하다가 너무 힘들어 가버린 여대원들이 떠올랐다. 이분들도 아마 전에 찾아와서 등산하다가 손들고 사라진 분들처럼 몇번 하고는 사라질 것이다. 허나 그것을 생각할 필요가 없다. 한번이던 두번이던 그 수가 중요하지 않다. 오늘 하루를 함께 산을 탄다는 것이 더 의미가 있다. 이것이 곧 연분이다. 오늘 하루의 연분을 중시하고 아끼자. 힘들어도 함께, 즐거워도 함께 등산을 하는 것이 바람직한 일이리라. 3 등산속셈     우리일행은 서시장에서 연길-이란소형뻐스를 타고 민흥촌 다리목에서 내리였다. 그때는 오전 아홉시 반이였다. 이란하는 얼어붙어 있었다. 우리는 민흥촌 마을 가운데 길로 들어서서 길따라 걷다가 북쪽으로 마을을 벗어나서 다시 동쪽 산을 톱아 올랐다. 눈덮힌 언덕은 가파로왔다. 게다가 미끌기까지 하니 한발한발 발가락에 힘을 주어 눈속에 박으면서 올라가야 했다. 등산하면서 터득한 일이지만 산으로 오르기전에 평길을 걸으면서 숨이 윤활하게 조절된 상황에서 산을 오르면 숨이 덜차게 된다. 헌데 오늘은 그렇치 못했다. 평지길이 짧다보니 지레 산을 타기 시작하니 대원들은 여간만 숨 가빠하지 않았다.    오늘 로선은 나의 머리속에 있었다. 나는 대원들로부터 핀잔을 받을 각오를 하고 산으로 대원들을 끌고 올라가야 했다. 산우로 올라가면 싫어도 방법없이 그냥 가야 하는 경우가 있으니 말이다. 나는 새로 온 3명 여대원들에 대해 파악이 없었다. 아침에 서시장에서 만나 간단한 대화가 있었을 뿐이다. 둘은 다른 팀에서 다녀보았다고 했고 한 분은 모아산으로 여러해 다녔었다고 했다. 그러니 좀 힘들게 해보는 것도 무리는 아닐 상 싶었다.     우선 산으로 곧추 올라 산등성이에 올라서서 망향산호림방화탑까지 다가가서 하산하기로 작심하였다. 점심은 원 이란진정부소재지마을 국도역 상점에서 먹기로 하였다. 전에도 여러번 들려본적 있는 상점이였다. 우리등산대원의 고모네 집이였다. 고모는 일찍 1968년도에 성시에서 이란진으로 집체호로 내려왔다가 당지총각한테 시집들어 지금 껏 눌러있었다. 길역에 있는 자기집의 유리한 점을 리용하여 식품상점을 꾸려놓고 경영하고있는것이다. 우리가 따뜻한 온돌에 엉덩이를 붙이고 불렁불렁 장국에다 밥을 말라 먹고 맥주를 마셔주면 수입도 근사하게 올라갈 것이였다. 일거량득이였다.    이것이 내가 대원들하고는 대강 말하고 내 속으로는 줄을 세운 오늘 하루 등산속셈이였다.     4 생각보다 강한 체력    나도 헐떡이며 올랐다. 나도 속적삼이 다 젖어갔다. 머리끝에 굴러내린 땀방울은 얼어서 고드름이 되였다. 나는 호각을 불면서 노래까지 뽑아대면서 내가 올라가는 위치와 방향을 뒤 사람들에게 알려주었다. 겨울이여서 유표한 발자국을 남기게 되여 길을 오낄 상황은 별로 없었으나 우리먼저 다녀간 사람들의 발자국과 나의 방향이 교차되는 곳에서는 혹 방향을 오낄수도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런 곳에서는 나무꼬챙이로 눈우에 화살표를 그어놓았다. 몇고개를 지났는지 모른다. 정상인듯한 산봉에 오르면 또 더 높은 산이 보였다. 산줄기를 타고 다시 올라서면 또 앞에 산이 있다. 산우에 산이 있다.     나의 체력은 우리팀에서 괜찮은 셈이다. 그래서 나는 항상 맨 앞에 선다. 혼자서 뛴다. 앞서서 내가 하는 일은 정확히 길을 잡는 일이다. 겨울이라 나무잎사귀들은 다 떨어져서 눈앞은 아주 투명하다. 서로가 보이기에 길을 잃어먹을 상황은 별로 없었다. 여름이면 십메터만 떨어져도 앞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나는 앞서서 한고개 두고개 계속 넘었다. 내가 산등성이가 확실히 보이는 곳의 봉우리에 올라서서 여기서 중간 휴식을 취해야겠다고 생각하고 멈춰섰다. 뒤의 대원들이 나하고 꽤나 떨어져 있을 것이고 나의 뒤를 따라 두번째로 올라설 대원은 우리등산팀의 큰형 채영춘일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큰형은 체력이 좋고 또 승벽심이 강한 사람이다. 누구한테 지는 것을 싫어하는 성미였다. 그가 아마 두번째로 따라 올라설 것이라고 믿고있었다. 헌데 이게 누군가? 약소한 체구의 리미화가 두 손에 나무꼬챙이를 쥐고 앞 손의 연장으로 땅을 짚으면서 올라서지 않는가?     놀라웠다, 깜짝! 신발도 눈덮힌 산을 등산하기에는 적합하지 않는 밑바닥이 미끄는 목이 낮은 등산신을 신고말이다. 친구들과 함께 모아산으로 몇해 다녔다는 분이였다. 대단한 체력이였다. 리미화는 나의 곁에 와서 멈춰섰다. 나는 덩둘하여 물었다. 《힘들지 않소?》 《아니요. 산이 정말로 좋슴다. 여지껏 모아산 등산만 하면서 이렇게 눈덮힌    산을 타보기는 처음입니다. 정말로 눈앞이 열리고 마음이 열립니다.》    미화는 감개무량하여 말하였다. 바쁘다는기색이 아니였다. 참말로 보기좋은 풍경이였다. 그 뒤로 미화를 우리팀에 소개한 연변항공승무원학교 최옥금교장이 올라섰다.    또 여자였다. 여자의 이악스러움은 남자들도 비할수 없는가본다.     다음에 큰형이 올라섰다. 큰형은 설산을 좋아한다. 새해 첫 등산이고 또 눈이 온 것을 아는 그로서 이 기회를 놓칠수 없었다. 사진기를 목에 걸고 산을 타는 것이다. 이 구간에서 사진 필림을 다 소모해버리였다. 그러니 늦을수 밖에! 또 어떤 작품이 나오는지 기대되였다. 다음은 주인사국윤혜자가 올라섰다.  5 훌륭한 등산보모-김성호     먼저 올라온 대원들이 쉬면서 아직 뒤에 남아있는 세 대원을 기다렸다. 50대에 들어선 주래신래방판공실 정경자와 개체호로 일하는 백정옥이 우리와 함께 처음인데 우리의 능숙한 대원 김성호가 있으니 시름이 놓이였다. 우리는 건너산쪽을 바라보았다. 아니라다를가 움직이는 세사람이 보이였다. 그 움직임이 눈앞에 다가올수록 명확해졌다. 맨 마지막에 선 사람이 김성호였다. 뒤에서 리드를 하고 있었다. 숨차하면 잠간 쉬기도 하고 바빠하면 우스운 롱담으로 부담감을 소화시키면서 두 여대원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힘든 봉우리를 다 넘어서게 하였다. 참으로 훌륭한 등산보모 김성호였다. 오늘 뿐이 아니였다. 전에도 그냥 그렇게 해왔다. 오늘 그의 작용이 새로 참석한 여대원들에게서 확실하게 작용하였다. 이래서 우리는 등산가족이라고 하는 지 모른다. 산우에서 우리는 잠간 쉼을 쉬였다. 숨도 돌리고 과일도 맛보면서 충전을 하였다.     6 《다음 번에 또 오겠습니다》    망향산봉우리에 도착하니 오후 한시가 넘었다. 오전 9홉시반부터니까 세시간 반을 걸었다.     돌아온 산을 굽어보니 가슴이 뿌듯해냈다.   이제 하산하자면 한시간이 좋이 걸릴 것이였다. 눈이 덮힌 산에서 하산 할 때 더 조심해야 했다. 이번엔 큰형이 앞섰다. 나는 뒤의 대원들을 흘끔흘끔 돌아다 보면서 하산하였다. 눈이 덮힌 골에서 우리는 떄로는 지레 앉아 썰매를 탔다.    8명대원이 무사히 하산하여 이란진상점집에 들어서니 오후 두시가 방금 넘었다. 그런데 상점집 고모는 없었다. 한족청년이 있었다. 집주인이 어디에 갔는가고 물으니 한국으로 갔단다. 부부간이 함께 말이다. 이 한족아이는 이 집을 지켜준단다. 상점은 그냥 하고 있었다. 우리조선족은 이렇게 집을 비우고 외국으로 나가서 돈벌며 살고있었다.    먼저 도착한 큰형은 여대원들이 없을 때 다 젖은 적삼을 벗어서 따뜻한 가마우에 널어놓았다. 나의 가방에서 큰형의 장국끓이는 가마가 나오고 장국료리가 나오자 장국언니 윤혜자가 솜씨를 보이였다.    장국은 끓고 입맛은 당기고 힘들어도 뭔가 해낸 느낌에 여럿은 정서가 분발되여있었다. 생각밖이였다. 백정옥은 바른 쪽 입검까지 붙기여 볼이 닭알모양으로 부어 있었지만 아픈 티를 내지 않았다. 그저 입검이 부어 맥주를 마시지 않아서 물어서야 상황파악을 할수 있었다. 3대 5, 1월 5일 8명등산, 비록 눈속에서 네시간을 보내면서 진땀을 무지하게 뺴고 속옷이 다 젖었었지만 누구하나 힘들다는 말이 없었다. 나는 그것이 이상하여 한마디 했다. 《등산은 힘이 듭니다. 바쁘면 자기절로 알아서 하시요.》 《괜찮습니다. 다음에 또 오겠습니다!》  우리모두는 입을 벌리고 웃었다. 2008년 1월 5일  
4    소가 죽는다. 댓글:  조회:1904  추천:49  2007-12-26
글 사진 손룡호    2007년 6월 9일 토요일이다. 우리 등산가족일행 여덟명은 아침 8시 45분, 연길역전뻐스잠에서 연길-안도향 버스에 올라 안도현 석문향소재지에 당도하기 직전 차에서 내렸다. 우리가 오르려는 산은 석문진에서 남쪽방향에 있는 해발이 500메터를 좀 넘는 낮은 산이였다. 오늘 따라 날씨가 맑고 더웠다. 기온이 31도였고 바람 한점 없고 해가 꼭뒤에서 바글거리고 있었다. 우리 일행 팔명은 신풍1대로 들어가는 길에 들어섰다.     마을을 꿰질러 산으로 오르는 기슭을 찾아 등산을 시작하였다. 산은 산아래 땔나무를 공급하는 산이였다. 그래서 올라가며 보아도 키넘는 나무를 보기가 힘들었다. 나무가 커야 그늘이 큰 법이다. 대원들은 올라가며 확확 올리미는 열기에 숨이 가빠 할싹거리였다. 높지 않은 산이지만 오르면서 서너번은 쉬였었다. 그늘이 린색한 산에서도 그늘을 찾아서 쉬고 있다.     등산은 자기를 괴롭히고 맘속에 쌓여있던 스트레스 덩이를 해소해 버리는 건강운동이였다. 누구나 그런 마음에서 산을 찾았다. 땡볕에 온 몸은 흠뻑 땀벌창이 되었어도 좋았다. 시가지에 있는 집안에 붙어있으면 이런저런 사람과 사람간의 일로 엉키는 속에서 여러 가지 스트레스거미줄에 동이여서 아까운 하루를 탕진하고 말것이였다. 산은 높지않으나 앞서 닥친 여름철이여서 여간만 힘들지 않았다. 해볕에 열기는 우로 확확 뿜겨져 오르고 바람한점없어 산소가 모자랐다. 숨이차고 온몸은 젖었다. 그래서 그느지를 찾고 숨조절을 하면서 올라야 했다. 산마루에 올라 또 한숨을 쉬고 인젠 산 골짜기를 타고 하산하여야 했다. 손대장, 박원묵, 허성운이 앞서서 골짜기를 타고 내리였다. 골짜기에는 어제 내린 빗물과 땅속의 샘물이 합쳐셔 작은 개울물을 이루고있었다. 내려가면서 물이 모여 물량이 점점 많아졌다. 봄맞아 싹트고 피여나는 여러 가지 식물들은 제일 좋은 성장기를 맞은 듯하였다. 하늘에는 양기가 충족하고 땅밑에는 수분이 충족하였다. 생명은 가장 좋은 성장기를 맞은 것이였다.      손대장, 박원묵, 허성운이 골짜기를 거의 빠져 멀리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이르렀을 때였다. 이삼십메터 되는 왼편 개울가에 소두마리가 서 있었다. 살도 잘 지었다. 헌데 이상하게 두 소가 다 개울가에 못박힌듯 서 있었고 머리를 아래쪽으로 내리드리우고 있었다. 물도 먹지 않으면서 말이다. 저 것들이 왜 저렇게 서 있는가? 낮선 사람들이 나타났으면 대가리라도 움직이련만? 아무래도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손대장은 소한테로 다가가 보았다. 아뿔사! 과연 소 한 마리가 개울가에 넘어져 있었다. 세 마리의 소를 달아나지 말라고 주인이 소뚜레의 긴 끈을 세곳에 고정시켜 놓은 것이 어떻게 되여 쓰러져 있는 소의 발목에 여러겹으로 칭칭 감겨져 있었다. 물먹으려고 모여들었다가 감겨졌는가 아니면 발정한 수놈인지 암놈인지 덮쳐들었다가 이 모양이 되였을까? 보지 못하였으니 알바가 아니였다. 분명 소는 최후발악을 하였을 것이였다.  소가 필사적으로 발악하며 땅을 파헤치면서 허위적거린 현장     소는 지혜가 없는 둔한 동물이다. 살겠다고 발악 할수록 노끈은 더 조여들었다. 코뚜레에 동여져 있는 끈은 소머리를 몽둥아리밑쪽으로 깔게 하였다. 그랬기에 소를 발견했을 때 소대가리가 보이지 않았었다. 소대가리를 찾아서 보니 커다란 소눈은 담박 튀여나올 상 싶었다. 코구멍으로는 가냘픈 코숨이 약간 알릴 뿐이였다. 공중으로 허망 들린 다리는 막대기처럼 일자로 꿋꿋하였다. 세상 짐승들이 장렬하게 최후를 마칠 때 다 그렇듯이 다리는 마지막 힘을 빼느라고 일자로 공중에 쳐들러 있었다.    <<소가 죽는다!>>   내가 소리치자 박원묵이가 달려왔다. 나와 박원묵은 53세 나이다. 둘은 소학교동창생이였다. 또 70년대에 <광활한 천지 농촌으로 내려가 빈하중농의 재교육을 받으면서> 들에 매논 소들이 코뚜레끈에 목을 감거나 발을 감고 왼쪽으로 넘어져서 생을 마감한 장면들을 종종 보고 듣군하였었다. 소는 왼쪽으로 넘어지면 죽게 된다. 소의 심장이 왼쪽켠에 있는데 왼쪽으로 넘어지면 소의 웅장한 페부의 중량이 심장을 압박하면서 심장마비가 와 죽게 된다. 소가 클수록 중량이 커서 더 빨리 생을 마감한다. 바로 눈앞의 현실이 그랬다. 박원묵은 아무 고려도 없이 쓰러진 소의 발목에 꽁꽁 묶어져 있는 바줄을 풀려고 손톱을 사리고 악을 썼다. 허나 바줄은 풀리지 않았다. 맥 좋은 세놈이 악을 쓰면서 잡아당겨 옥매여 놓은 끈이 어찌 사람의 힘으로 풀어지랴? 나는 세소의 코뚜레에 련계된 끈을 풀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끈들은 다 말뚝에 박혀있을 것이였다. 내가 끈을 따라 씽하니 달려가니 끈은 쇠꼬챙이에 동여서 땅에 박혀 있었다. 손으로 잡아 당기니 힘이 들지 않고 쑥 뽑히였다. 내가 하는 동작을 보고 곁에서 안타까이 종주먹을 쥐고있던 허성운이도 쇠꼬챙이에 고정되여 땅에 박혀있는 끈을 잡아당겼다. 세놈의 소의 세 개의 바줄꼬챙이가 다  뽑히였다. 끈은 대번에 느슨해지였다. 박원묵이는 바줄을 이내 풀었다. 박원묵이와 나는 왼쪽으로 넘어져 있는 소를 안아 일으켰다. 소는 얼빤하여 비칠거리더니 그래도 네다리를 도사리고 서려고 하였다. 비칠거리면서 걸어가는 소의 코구멍으로 액체가 뿜기면서 막혔던 숨이 활하고 나왔다. 소는 저만치 가서 풀숲우에 종내 버티고 섰다. 숫놈이였다. 배가운데에 달려있는 성기로 오줌을 유감없이 흘려댔다. 다음 꼬리를 쳐들더니 걸직한 똥까지 하사했다. 혀로 감각이 좋치 않은 부위를 핥아대기도 하였다. 얼마나 바빴을까? 그런데도 발정한 살진 암놈은 뒤로부터 죽다 살아난 중 숫송아지의 등뒤에 올라타려고 덮치였다. 정말로 짐승은 짐승이였다. 우리는 부득불 세 소를 갈라서 거리를 두고 코뚜레와 련계된 끈을 박아놓았다. 소는 농민들의 중요한 생산도구이다. 소한마리 값이 2천원이다. 하마터면 이 소가 자기 생의 중간나이에 저 세상으로 갈번하였다. 그러면 소임자는 2천원을 손해보게 된다.     <<소야, 다행이다. 오늘 우리가 여길 지나지 않았으면 너는 낙제없이 죽었을 거다.>>    소는 말할 줄 모른다. 허나 자기를 구해준 우리쪽으로 정중히 돌아서며 눈을 감았다. 고맙다고 말이다. 감사하다고 말이다.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하는가고 말이다. 소는 은혜를 갚기 위해 주인을 위해 더 열심히 일하면 된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소가 살아나는 것이였고 살아나서 더 건강하게 자기의 생을 보내는 것이였다. 구할 때 아무런 이유도 조건도 없었다. 오늘 등산은 소를 구하기 위하여 온 것 같다.  죽다 살았어!  감사합니다!  소를 살려놓고 소의 인사를 받고 있는 박원묵이다.   (2007년 6월 10일) 
3    댓글:  조회:2334  추천:50  2007-12-26
       6월 24일 왕청현 대길령등산을 끝마치고 내려온 뒤  이튿날 또다시 배초구로 가볼 일이 있어 배초구개고기록색식품제조회사 부동사장으로 일하고 있는 등산대원 김춘동이를 불렀더니 춘동이가 오른 쪽 다리를 거두고 나한테 보이면서 다리가 붓긴다고 하였다. 과연 왼쪽 다리와 대조해보니 붓겨있었고 손으로 만져보니 열이 올라 화끈거리였다.    상처는 발목 신발목우에 있었다. 무엇에 물린듯 이발자리 두개가 나 있었다. 여러해를 등산해도 아직 뱀에게 물려보지 못한 나로서도 이 상처가 어떤 놈이 내준건지 알수는 없었지만 부둥부둥 붙기는 원인은 바로 이 상처때문이라고 인정할수 있었다.      풍설에 독사에게 물리면 다리가 붓기고 심장마비가 오면서 사람이 죽을수도 있다는 소리를 들었었다. 헌데 이상한 것은 춘동이가 어제 물리고 오늘 붓긴다고 하니 도대체 뱀인지 무엇인지 알수 없었다. 아무튼 병원으로 가보아야 하였다. 마침 배초구로 가는 길에 배초구 위생원을 찾았다. 의사선생은 찬찬히 관찰하더니 뱀에게 물린 자리 같다고 하면서 응급치료를 하기 시작하였다. 먼저 침두가 독사대가리처럼 생긴 삼각형모양의 쇠침으로 상처자리에 대고 찔러댔다. 춘동이는 아프다고 눈을 감고 낮살을 찡그리였다. 다음 의사는 빨대의료기로 피가 흐르는 상처에 대고 피를 빨아내기 시작하였다. 피속에 있는 독소를 뽑아내야 하기 때문이였다. 한참 빨아서 더 이상 피가 나오지 않차 해독닝게르주사를 맞으라고 하였다.      주사를 맞는 동안 의사는 또 환자에 대한 높은 책임감으로 배초구진에서 뱀약을 가지고 있는 친구한테 전화를 걸어 뱀독을 해제하는 약 한통까지 구해다 주었다.      리덕생사약환이라고 써있는 이 약은 전문 뱀에게 물렸을 때 사용하는 약인데 효과가 아주 좋다고 한다. 한 통에 인민페로 20원이니 값이 비싸지도 않다. 먼저 열알을 먹은후 6시간 건너서 다시 열알을 먹는단다. 의사선생은 어제 물렸으니 처음에 지레 스무알을 먹으라고 하였다. 이 약은 또 부작용이 없다고한다. 약을 먹어 두시간후에 붓긴것이 눈에 뜨이게 내려가고 화끈하던 장단지도 원모습을 찾아갔다. 이튿날 다시 보니 말끔히 낳았다. 배초구위생원의 의사선생님께 감사가 가는 일이였다.      산에서 자주 만나게 되는 뱀, 뱀을 확실히 알아야 하는 것이다. 뱀에게 물렸을 때 응급조치를 알아야하는 것이다. 뱀에게 물리지 않도록 주의해야하는 것이다. 산을 찾는 우리에겐 반드시 알아두어야 할 일이였다.     독사에는 혈액독을 가진 까치독사, 살모사, 불독사가 있고, 신경독을 가진 코브라와 방울뱀 등이 있다. 신경독을 가진 코브라와 방울뱀 등은 우리주에 없기 때문에 주로 혈액독에 의한 중독이다.   혈액독은 용혈현상을 일으켜 혈관벽의 내벽파괴, 적혈구 용혈, 조직세포의 파괴로 내출혈이 일어난다.(특히 뇌에 내출혈이 일어날 때는 경련을 동반하기도 한다.)   담배의 타르(니코틴: 유기화합물로서 담배의 주된 알칼로이드. 식물 특히 잎 속에 존재한다. 담배(Nicotiana tabacum)와 화합물의 명칭은 1550년 담배씨를 파리로 보낸 포르투갈 주재 프랑스 대사 니코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는 그 자체로도 맹독성이 있어 적은 양으로도 작은 동물이나 곤충을 죽일 수 있다. 그래서 예전에 방충을 하는데 사용되었고 산에서 뱀을 퇴치하는 데에도 이용되기도 한다.   산에서 뱀에게 물렸을 때 움직임을 최소화하고 절대안정을 취해야 하며 독이 퍼지는 것을 예방하기 위하여 상처위 근위부에 심장으로 유입되는 혈액(정맥)이 차단될 수 있도록 묶어주고 1자로 절개후  입안에 상처가 없는 사람이 독을 빨아준다. 그리고 얼음주머니, 찬물 등으로 교상부위를 덮어 독의 퍼짐을 최소화한 후 신속하게 병원으로 이송해야한다.    숲속에 들어갈 때에는 항상 긴바지와 발목위로 올라오는 부츠를 신어 독사의 위협에서 어느정도 안전할수 있다. 그리고 한가지 알아야 할 것은 뱀은 먼저공격하지 않는 것이다. 절대로 자신의 생명이 위험하다고 느끼지 않을경우 먼저 공격하지 않는단다. 그러니 숲을 마구 해치거나 뛰어다니지 않는다면 뱀은 물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뱀을 본후 위협하지 않고 그냥 피하게 나두어야한다.      (참고:우리곳에는 없지만 상식적으로 알아두기위해 뱀독중에 가장무서운 신경독에 대해 잠간 알아보자. 독거미와 독사 복어 이런녀석들도 신경독을 가지고있는 것이 있다. 독을 타면 고통스럽고 몸이 마비되고 호흡을 할수 없어 죽게 된다. 신경독을 먹거나 물렷다면 생명이 정말로 위험하다. 예를들어서 출혈독을 가진 뱀에게(한국의독사) 물렷을경우 4시간안에 병원에가면 무사하다. 물론 어떤 치료를 햇느냐와 어떤상황이냐에 따라서 다를수 있지만 그런데 신경독을 가진 녀석에게 물렷다면 모든 응급처치를 한후에도 병원에 1시간안에 가지못하면 죽는다고한다. 이 정도로 출혈독과 신경독의 치사율은 큰차이가 있다. 응급처치 방법도 혈액독을 탔을 때와 차이가 있다. 신경독의 독사에게 물렷을경우 절대로 빨아내선 안된다. 빨아내면 병원에서 피를 검사해서 어떤 녀석에게 물렷나를 알아내기가 힘들어진다. 그리고 중화제도 만들기가 어렵다. 그러니 빨아내선 안된다. 그냥 묵어서 독이 퍼지는것을 지연시키는것이 단순하지만 가장완벽한 응급처치 방법이란다. 그레야 나중에 더빠른 완벽한 치료를 병원에서 할수 있다고한다. 묵는방법은 물린상처위부터 아레로 너무세지않게 적당히... 물린부위를 낮게하고 뛰거나 흥분하지말고...여기서 또 알아두어야 할 것이 대부분의 출혈독사는 강한이를 가지고있어서 관통률이 높기에 독이 깊이 들어간단다. 하지만 신경독을 가진 뱀들은 이가 약해서 관통률이 낮아 독이 깊이 들어가지 않는단다. 물론 두놈을 비교햇을겨우에요 다그런것은 아니지만 거의 모든녀석이 그렇단다.     자료-인터넷통합검색에서 검색발취)                                                     2006년 6월 28일
2    설산은 끓는다. 댓글:  조회:1175  추천:42  2007-12-26
 설산은 끓는다      겨울등산은 추위와의 접전(接战)이기도 하다.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고 찬바람이 몰아치며 눈이 펑펑 쏟아지는 한 겨울에 산을 찾아 오르는 사람들을 나는 몇 해전까지만 해도 이상하게 생각했었다. 헌데 나는 이미 그 이상한 사람이 되고도 남음이 있는 사람이 되였다.  그 혹독한 추위속에 산에 눈이 덮혀 미끌텐데 어떻게 산으로 오른단 말인가? 미스테리였다. 우리등산가족엔 15명 대원이 있다. 그들도 처음엔 다 나처럼 생각해왔었다. 허나 오늘 그들은 눈덮힌 산을 찾는 사람이 되였고 눈덮힌 산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였다. 이들 중에 나이 지숙한 한 분이 매번 겨울 등산때면 스스럼없이 손수 소형장국가마와 장국료리까지 챙기여 등에 걸머메고 산으로 오른다. 그래서 그의 가방은 항상 남의 가방보다 배로 무겁고 그의 등은 항상 땀에 후줄근이 젖는다. 한 사람이 챙기여 열사람이 덕을 본다. 설산에서 끓는 장국은 추위를 몰아내고 우리대원들의 마음을 훈훈하게 덮혀준다. 정말로 고마운 분이다. 정말로 따뜻한 국탕이다. 우리는 국탕 임자를 친절히 <<국탕 형님>>이라고 부른다. 등산장국의 유래는 재작년 동불사 남 도끼봉에서부터였다.    그날은 겨울 치고도 날씨가 몹시 차고 바람까지 불어 눈보라가 흩날리였다. 어찌보면 겨울 하늘의 식솔들이 총동원하여 우리 앞을 막아보려던 날인 것 같았다. 아침에 연길역 버스정류소에서 안도향 버스를 타고 동불사 택시역에 도착하니 아홉시가 넘었다. 산엔 눈이 두텁게 깔려 있기에 발목으로 눈이 들어가지 않게 우리모두는 내려서 각반을 챙기였다. 오늘은 모든 것이 발전하여 옛날처럼 넓고 긴 끈을 무릎아래에 돌려가며 감지 않는다. 물이 새지 않는 방수특수천으로 만들어진 각반은 신발우의 걸택에 단추를 고정하고 신발목과 장단지를 가운데 넣고 사서 쪼르래기를 닫으면 된다. 모든 준비를 마친 우리는 북쪽으로 길 따라 걸었다. 길역의 촌민들에게 남도끼봉이 어디냐고 물으니 15리는 가야한다고 하였다. 걷는 것이 좋았다. 평지에서 걷고 산으로 오르면서 걷고 모든 것이 걸어서 목적지에 이른다. 동불사 진소재지를 지나 다리를 건너 언덕길에 오르니 찬바람이 통째로 우리 몸에 들 쏟쳐왔다. 밋미스름히 아득히 뻗어간 평야가 눈앞에 펼쳐졌다. 벌 량옆엔 산들이 산맥을 이루면서 길길이 뻗어 있었다. 두산 사이에 푹 꺼진 넓다란 평야였다. 찬 바람은 저애없이 그대로 딩굴어 온다. 산의 릉선을 타고 그대로 내리 꼰진다. 더운 바람보다 중량이 있어 높은 곳에서부터 아래로 마구 내리꼰지면서 중력가속도까지 붙어서 평야를 싹 쓸이하였다. 파도처럼 덮쳐왔다. 우리를 모질게 때렸다. 우리는 할수 없이  상체를 앞으로 숙이고 걷다가고 돌아서서 등을 돌리고 뒤걸음치며 걸었다. 한 시간을 퍼그나 더 소비하여 남도끼봉아래 마을에 이르렀다. 서로 마주보는  대원들의 얼굴은 모두 익지 않은 수박속처럼 벌거데데했고 코구멍과 입에서 나오는 더운 김은 나오자 마자 입을 감싼 수건밖에 서리로 굳어져버렸다. 추웠다. 춥다고 그만두자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여기까지 왔는데 돌아갈소냐? 겨울 추위는 누구에게나 똑 같았다. 공정했다.  춥다고 돌아 설 마음을 가진 사람도 있었지만 입을 다물고 있었다. 이제부터 우리는 산등성이를 타고 본격적인 등산을 해야 했다. 길역에서 산봉은 보이지 않았다. 해발이 605메터인 남도끼봉은 날씨가 맑은 날 연길 하남다리에서 우에서도 보이는 산이다. 우리는 산등성이를 타기 시작하였다. 산등성이를 타면 산의 좌우가 환히 시야에 들어와서 방향을 판단하는데 유리했다. 그리고 또 산등성이에는 나무가 성기고 길이 있었다. 마을과 가까운 산엔 갈색의 어린 가둑나무 잎들이 산의 피부토양에 뿌리박고 찬 바람에 와시시 소리내며 떨고 있었다. 가둑나무는 우리주 야산에서 제일 흔하게 볼수 있는 나무중의 하나이다. 일단 겨울이 오면 추위를 제일 먼저 타서 잎사귀가 죽는다. 먼저 죽어 잎사귀로 증발되는 수분소모를 줄이고 나무의 동면을 위한 것이다. 허나 온 겨울 이듬해 봄까지 붙어있는 나무 잎도 가둑나무 잎이다. 갈색의 산은 바람에 떨며 우리 대원들을 올라오라고 하는지 올라오지 말라고 하는지 바람에 합창 하고 있었다. 언덕이 가파로와 지면서부터 대원들 사이에는 나름대로 거리가 형성되였다. 체력차이인 것이다. 허나 뒤에 떨어졌다고 질책대상이 아니다. 앞에 섰다고 장군이 아니다. 다 자기의 체력과 호흡조절에 맞는 마땅한 보행을 선택하여 걷는 것이다. 자기의 보행속도는 자기절로 조절된다. 가장 과학적인 등산보행속도는 산의 모양이 만들어준다. 산이 가파로우면 보행속도가 늦어지고 밋미스름하면 빨라진다. 우리는 이미 암석바위로 형성된 봉우리를 두개나 넘어섰다. 그래도 남도끼봉은 점잖게 저 앞에서 내색이 없다. 앞은 내리막이였다. 내려가서 다시 기슭을 타고 올라야 했다. 눈이 덮힌 산은 내리막에서 자칫하면 넘어진다. 눈속에 있는 돌과 나무뿌리들이 다 걸택이 되여 걸리면 넘어질 수밖에 없다. 그러니 한보한보 발밑을 확인하며 내려가야 했다. 대원들이 산우의 산을 내려서 다시 남도끼봉주봉산허리에 도달했을 땐 이미 기진 맥진한 때다. 힘이 들땐 쉬여야 했다. 숨이 찰땐 숨을 돌려야 했다. 마구는 무리였다. 무리는 건강에 리롭지 않다. 앞선 사람들이 서서 뒤에 오는 사람들을 기다렸다. 뒤떨어진 사람들이 올라오는 모습은 참말로 힘들어 하였다. 겨우겨우 한발 두발을 떼여 놓는다. 뒤 떨어진 사람은 거개가 여성들이였다. 다 50세 미만이였다. 모두가 모여 잠시 숨을 돌린후 대오는 다시 주봉으로 올랐다. 경사도가 험해서 직선 거리는 백메터도 안되지만 숨이 턱에 딱딱 맠혀 고배의 체력이 들었다. 이미 여기까지 온 이상 올라야 했다. 바쁘면서 하는 것이 등산이다. 인간의 인내는 끈질긴 것이다. 앞사람의 발자욱을 따라 서있는 나무들을 잡고 한보두보 올랐다. 정상에 다 오르자 모두는 털썩 눈우에 주저 앉았다. 눈이 차서 엉덩이가 차나니 바람이 잠적한 곳을 찾아 앉았다. 그때는 오후 한시가 넘었섰다. 배가 촐촐하였다. 빈속으로 산을 내릴 체력은 없었다. 헌데 밥을 어떻게 먹는단 말인가? 수수께끼였다. 그래도 먹어야 했다. 바로 이때다. 큰 형이 메고 올라온 가방을 풀고 액체가스가마와 배가 불룩한 비닐구럭을 내놓고 아주 숙련된 솜씨로 액체가스가마에 불을 달았다. 그리곤 작은 유리병 마개를 열고 열받아 따가워지는 가마안에 쏟는다. 노오란 콩기름이였다. 기름이 바작바작 기포를 올리자 싹싹 썰어가지고 온 파이를 한줌 넣고 시큼 텁텁한 토장덩이 하나를 넣고 같이 비빈다. 냄새가 좋았다. 다음 샘물병의 물을 쏟는다. 두병이 다 들어갔다.  아무리 먹어도 새나지 않은 두부가 작은 칼에 가로세로 베여져 들어간다. 노란 감자쪼각도 들어간다. 배추김치쪼각도 들어간다. 파란 고추쪼각도 들어간다. 짓뭉갠 마늘도 두 숟가락 들어간다. 소금과 다시다도 살짝 들어간다. 큰 형의 손등은 추위에 붉어지였다. 불은 따스함의 대표다. 바람이 잠풍한 곳이고 여러사람들이 둘레에 모여서 있으니 바람이 에돌아 가며 빠알간 불은 가마밑굽을 핥으면서 좋아라고 사면에서 타 올랐다. 좀 있으니 가마가 서서히 끓기 시작한다. 우리마음도 끓기 시작하였다. 덮개가 춤춘다. 불렁불렁 춤춘다. 굶은 우리였다. 등이 싸늘해 오는 우리였다. 더운 것이 바램이였다. 먹어야 했다. 먹자! 큰 형은 국탕을 국자로 떠서 한 사람 한 사람 식은 밥우에 쏟아주었다. 우리는 부지런히 숟가락을 입으로 갖다댔다. 게걸스레 먹어댔다. 급자기 입안으로 더운 것이 들어가니 더운 김이 코를 자극하여 코구멍에서 물이 내려와도 그걸 감각할 새 없었다. 모든 것이 다 맛있었다. 세상에 이렇게 맛이 있는 밥이 어디 있는가? 집에서는 맛이 수술하던 밥이 이렇게 맛을 돋굴 줄이야? 장국이 어느새에 굽이 났다. 더 먹고 싶었다. 더 없는가? 큰 형은 싱긋이 웃으면서 또 샘물 두병을 쏟아넣고 신라면 두개와 양념까지 넣는다. 신라면은 빨리 익었다. 물이 시원하고 그 물에 밥을 말라 먹으니 또 별미다. 모두가 불렁불렁 국탕에 배부르게 먹었다. 속이 훈훈해왔다. 제 좋으니 다 좋은 것 같았다.     열사람은 속을 덮혔고 채웠다. 속이 더우니 겉도 더워났다. 가장 추울 때 가장 지쳤을 때 장국은 우릴 구했다. 큰 형은 우릴 구했다.     그때부터 장국은 우리등산에 정착되였다. 그냥 큰 형이 가마와 국거리를 메고 오른다. 금요일 오후면 채소시장에 가서 손수 국거리를 사고 집에 와서 깨끗이 씻은 다음 칼도마에 올려놓고 곱게 썰어서 비닐구럭에 넣어 이튿날 등산가방에 넣어가지고 온다.    오늘도 큰 형은 불룩한 가방을 메고 앞에서 산을 오른다. 오르면서 뒤를 돌아보며 우리보고 고개를 기웃거리면서 등에 멘 가방을 흥청거려 보인다. 가방안엔 사랑이 꽉 찼다. 사랑이 꽉 찬 가방은 무거웠다. 우리모두가 다 그 가방안에 있는것이다.                                                              2006년 2월 1일
1    [re] 그날 이야기도 많았다. 댓글:  조회:1759  추천:49  2007-12-25
글 사진 / 이슬 빛  1 작전    우리는 토요일마다 주안의 산같은 산들을 골라서 등산한다. 전번 주 토요일에는 우리등산가족박원묵의 딸이 혼사를 치르게 되여 오전에 가까운 모아산에 올랐다가 내려와서 혼사에 참석하였다. 그러니 이번 토요일에는 좀 힘든 등산을 했으면 하는 것이 우리의 바램이였다. 헌데 체력이 약한 대원들과 나이 지숙한 분들은 힘든 등산을 꺼리였다.      어떻게 할 것인가? 나와 작전참모-김성길이는 여러가지 로선도를 보면서 생각을 거듭하였다.  룡정비암산아래 해란강건너 철길남쪽길로부터 범코등 산으로 불리우는 산에 올라 남쪽으로 향하는 로선이 비교적 힘이들고 모험성이 있어보이였다. 범코등산이란 산모양이 먼데서 보면 범의 코등처럼 생겼다는데서 이름지어진 것이다.     지난해 겨울에도 범코등산우에 오른적 있었다. 그때 산봉에 올라 남쪽을 바라보니 정말로 끝이 보이지 않는 장대가 남으로 남으로 그냥 누워있었다.      한번 걸어볼만한 로정이였다.  나는 작전참모 김성길에게 이튿날 등산의 힘든점을 솔직히 강조하여 대원들에게 정신적 준비가 있게 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그래서 통지를 받고 오면 알고 왔기에 다른 군소리는 없을 것이고 안 오면 온 사람만치 계획대로 등산할수 있으니말이다. 통지는 그렇게 나갔다.  체력이 좋고 승벽심이 강한 큰형은 성에서 손님이 와서 접대해야겠기에 갈수 없다고 청가를 해왔다. 우리는 애수했다. 큰 형님과 함께 힘든 등산을 하는 것이 우리의 소원이였다.  사람은 다 제한성이 있는 것이다. 함께 해보지 못하면 공동어가 없다. 함께 걸어보아야 좋고나쁘고를 같이 떠들어댈수 있는 것이다. 2택시값    이튿날은 올해도 다가는 마지막 달 15일이였다. 약속한 시간에 버스정류소에는 김춘동, 김성길, 김성호, 리승희, 허성운, 손룡호가 와 있었다. 일행은 8시 20분 연길-룡정뻐스에 올랐다. 룡정에 도착하여 범코등산까지 가려면 평지길로 약 45분간 걸어야 했다. 그 길을 걸어가자면 다음 로정을 완수하기 힘들어진다. 그래서 이 구간은 룡정서 택시두대를 세내여 탰다.     택시값도 쌌다. 이 구간이 룡정서 해란강을 따라 약 십오리 거슬러 올라가는데 연길 같으면 적어도 20원은 달라고 할 것이였다. 헌데 룡정택시는 10원만 달라고 하였다. 10원이면 너무 눅었다. 눅으면 좋았다. 우리는 두 택시에 올랐다. 내가 뒤 택시에 김춘동, 허성운이와 앉았다. 차가 뛰는 동안 나는 차값이 눅어서 기사하고 물었다. 기사는 한족이였다. 하루낮에 벌어서 차주인한테 바치는 돈이 얼만가고 물으니 60원이라고 하였다. 우리는 깜짝 놀랬다. 룡정과 연길은 40리를 사이두고 있는데 소비수평은 반으로 차가 나 있었다. 연길서 택시기사가 차주인에게 바치는 하루낮의 표준은 120원 위이다. 그런데 룡정은 60원이란다. 순간 택시기사가 측은하게 느껴졌다. 돈 벌기 힘든 세월에 그 먼 길을 달리고 10원을 달라니? 마음이 아파났다. 택시기사는 울툴불퉁한 길로 달리면서 10원이 적다고 푸념도 내뱉었다. 나는 그 푸념을 중동무이시켰다. 잔말말고 몰기나 하라. 네가 달라고 안해도 내가 더 주고 싶은 심정이다.  5원을 더 주는 것이 아니라 10원을 더 주어 20원을 주면 하루 주인에게 바치는 60원 수입의 3분의 1을 버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나는 나의 시티폰을 꺼냈다. 앞차에 출납원 김성길이가 앉아 있으니 그하고 차가 목적지까지 도착한 다음 한 택시에 20원씩 주라고 말이다. 그런데 나의 시티폰은 신호가 나타나지 않았다. 이때 뒤좌석에 앉은 김춘동이 자기 핸드폰으로 연락하였다. 허나 허사였다. 이때 뒤좌석에 앉은 허성운이 자기의 구식 시티폰을 꺼냈다. 보기에도 스산하였지만 허성운이 꺼낼 때는 다 파악이 있었다. 허성운은 지금까지도 시티폰이고 핸드폰이고 휴대전화를 가지고 다니지 않는다. 그에게는 이런 일들이 다 자기가 하는 사업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였다. 허성운은 대학 중문계를 필업하였다. 영어공부는 해보지도 못하였었다. 헌데 앞으로 영어가 세계 공동어가 되고 영어를 알아야 세계를 알수 있다는 정보를 일찍 정확히 파악하고 어쩌면 영어를 모르는 아이들이나 어른이나 아주 수월히 영어를 배울수 있을까고 궁리하던 끝에 종내 창조성적인 아이디를 생각해냈다. 그것인 즉 영어문자를 그림화하여 그림이 동적으로 움직이면서 영어자모가 되고 발음까지 내는 영어문자, 그림, 발음이 함께 조합된 삼위일체의 소프트웨어를 개발해내였다. 이 성과는 우리나라 소프트웨어 개발 평가회의에서 전국 일등의 영예를 지니였다. 정말로 깜짝 놀랄만한 성적이다. 이런 연구에 종사하는 허성운은 이미 움직이는 자모 천여개를 만들언 냈다. 허성운에게는 하루가 귀중한 시간이다. 그는 모든 일 배치를 해놓고 산으로 간다. 그도 안다. 그냥 연구에 몰박아 있으면 자기 연구가 성공될 때에는 신체가 무너질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그래서 아무리 일이 바빠도 꼭 토요일이면 산을 찾는 것이다. 그런 허성운에게서 시티폰이 나왔다는 것은 과히 놀랄만한 일이다. 성운이는 멋으로 시티폰을 휴대하지 않았다. 련계할 일이 있으니 휴대한 것이다. 과연 그 구식 시티폰이 앞차에 앉은 김성길이의 핸드폰과 련계가 이어졌다. 나는 허성운에게서 시티폰을 받아 전화를 걸었다. 택시값을 한 차에 20원씩 주자고 하였다. 김성길이도 같은 생각이였다. 그렇게 두 택시 운전수는 20원을 받고 입이 벌려졌다. 돈벌기 얼마나 힘들면 이 흙길에 20원을 받고 입을 벌리고 웃을까?3모함     택시에서 내리자 허성운이 나하고 물었다.    《형님, 내 시티폰을 주오?》    《시티폰을 달라니?》     나는 깜짝 놀랐다. 내가 허성운의 시티폰을 받아서 전화를 했기 때문이다.    《아차?》 나는 호주머니를 들추었다. 바깥 호주머니며 안호주머니며를 다 들추었다. 그래도 시티폰은 없었다. 일행은 나를 도와 궁리를 같이 하였다. 혹시 전화를 하고 앉은 자리에 두지 않않았을까? 이때 나와 한 차에 앉은 김춘동이 입을 열었다.    《손대장이 전화를 치고 시티폰을 허선생에게 주었어요.》     김춘동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그가 뒤에서 내가 허성운의 시티폰을 받아들고 전화를 한다음 되돌려 주었다고 증명하였다. 그러니 허성운은 자기 호주머니를 들추기 시작하였다. 가방까지 열고 뒤졌지만 시티폰은 나오지 않았다. 이때 김성길이가 자기 핸드폰에 들어온 허성운의 전화번호를 확인하고 다시 번호를 눌렀다. 답은 전화를 이미 껐다는 것이였다. 그러니 우리는 망연자실해졌다. 핸드폰은 분명 차안에 있을것이였다. 기사가 발견하고 욕심나서 꺼버린 것이리라. 택시값을 후하게 치렸건만 어쩌면 사람들이 이럴수 있단 말인가? 우리는 섭섭해났다. 이때 허성운이 한마디 했다.    《내가 전화할 곳이 있으면 전화하고 끄는 습관이 있소.》     무슨 말인가? 그러면 시티폰이 허성운의 몸에 있단말인가? 허성운은 길을 걸으면서 호주머니를 다시 들추었다. 결국 산에 올라 조용히 가방열고 가방밑굽까지 들추니 비닐주머니에 감긴 시티폰이 나왔다. 성운이는 미안했다. 자기 가방안에 시티폰을 넣었는데 어떻게 되면 가방 밑까지 내려가서 비닐에 감겨져 있었단 말인가? 허성운의 시티폰은 결국 까근한 허성운의 습관 때문에 잠시 숨겨지고 너무 까근하였기에 본인도 찾지 못한 것이였다. 잊었다고 생각 한 자기 물건을 찾게 되면 시름이 놓이고 마음이 열리는 것이다. 우리는 함께 걱정을 덜고 계속 길을 재촉하였다. 4 론쟁     나와 리승희는 앞에서 걸었다. 앞에서 차를 몰고 나오는 사람을 보았는데 그 사람은 우리앞에서 차를 세우고 불조심하라고 일깨워주었다. 잔소리처럼 들렸지만 산을 오르면서 우리는 불에탄 나무들을 만나게 되었다. 아마 지난해에 화재가 난 모양이였다. 산마루의 쓸만한 둑실한 나무들이 불에타서 시꺼멓게 그을러 있었다.     우리 뒤로는 김성길이와 허성운이가 따라 왔다. 그 뒤로는 김성호와 김춘동이 따랐다. 쉽게 영어배우기 소프트웨어를 개발한 허성운이가 오늘은 좀 이상하였다. 앞서가는 김성길의 뒤에서 자꾸 방향을 꼬집었다.      그냥 가면 안된다면서 아래로 향한 길로 내려가자는 것이였다. 김성길이는 한번 말하면 그대로 내버려 두고 싶었지만 자꾸 말하니 참을수 없었다. 그래서 콱 쏘아주었다.   《손대장과 리승희가 바로 산마루를 타고 앞으로 나갔는데 우리가 중간에서 아래로 내려가면 뭐가 되오? 오늘 우리 목적지는 이 산발의 끝점이요. 그 곳에 백금으로 통하는 신작로가 있을 것이요. 지도는 거짓말을 하지 않소. 룡정-백금도로가 나타나면 그길로 동쪽으로 돌아져서 룡정-삼합도로로 걸어가는거요!》    김성길이는 일찍 지질대에서 선전부장사업을 한 적이 있었다. 그는 지리에 대하여 애호가 깊고 파악이 있었다. 그는 매번 토요일 등산로선을 확정할 때마다 지도를 보고 오를 산과 나아갈 방향을 연구한 다음 정확히 등산로선도를 내놓는 것이다. 정말로 둘도 없는 작전참모이다. 그가 선택한 길을 따라 걸으면서 우리는 한번도 길을 오껴본 적이 없었다.     허나 허성운이는 감각으로 로선을 판단하는 것이다. 사람의 감각이란 복잡다단한 산지형에서 자주 방향감각이 헝클어지면서 착각이 오는 것이다. 제때에 말을 하지 않을수 없는 허성운이였다. 또 허성운은 담이 작다. 혼자서는 어디로도 못 간다. 산에 사람이 있는 것 같고 짐승이 있는 것 같고 개가 있는 것 같아서였다. 그래서 평시에는 말수가 적지만 산에서는 짐승들이 사람소리를 듣고 멀리 가라고 주동적으로 소리를 어허 하고  뽑는다.     오늘 허성운이가  이러쿵 저러쿵 안전등산을 많이 강요하였다. 아무리 말을 안하는 사람이래도 산에서는 자기 나름대로 자기 태도를 표현한다. 길을 잃거나 위험에 봉착하여 생명의 위험이 있다면 그것은 장난이 아니니 말이다. 남이 당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직접 당할수 있기에 양보가 없다. 게다가 복잡한 산의 지형은 여러사람의 정확한 판단을 헝클어 놓는다. 다 자기의 생각이 옳다고 뻐기기가 일수다. 앞에 불에 탄 숲이 나타났다. 불에 탄 곳을 지나니  다시 나무숲이 나타났다.     사람은 산에서 장난을 칠수 있지만 산은 장난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때로는 허성운의 꼬집음이 도움이 될 때도 있었다. 적어도 앞선 사람이 랭정하게 방향을 판단할수 있게 끔 랭철해지게 한다. 둘의 론쟁은 앞선 우리와 만날 때까지 계속 이어지였다.  5가시덤불     우리는 오후 한시가 될 무렵에 산의 마지막이라 할까 하는 곳에 도착하여 걸음을 멈추었다. 산아래를 내려다보니 우리가 올라선 산과 동쪽산의 가운데 협곡으로 곧게 앞으로 난 산길이 보이였고 그 산길 웃쪽에 곧게 앞으로 뺀 전선줄이 보이였다. 전선줄밑은 넓게 벌초하여 마른 풀들이 보였다.  전선줄은 사람이 있는 곳으로 통하는 법이다. 그래서 산을 내려서 그 전선줄 밑으로 앞으로 나가려고 하였다. 우리가 산에서 내려 전선줄밑 풀밭에 들어섰다. 그런데 걸으면서 보니 발앞에 이리저리 쓰러진 나무가지들이 너부러져있었다.     좀 걸으면 없거니 하면서 걸었지만 그냥 마찬가지였다.  앞에는 또 홈채기까지 있었다. 우리는 그 홈채기로 내려가서 네발로 기여 올랐다. 그러니 앞에 또 더 깊은 홈채기가 나타났다. 이거야 말로 가시덤불과 같았다. 이런 계곡을 몇 개를 건너고 보면 지레 지쳐서 쓰러질 것 같았다. 그래도 이미 들어선 몸이니 울며겨자먹기로 앞을 헤치였다. 겨우겨우 헤쳐서 길 같은 길에 나서자 지레 아래로 내려갔다. 아래에는 사람이 다니면서 낸 길이 있으니 말이다. 앞질러서 가시덤불을 헤치다가가는 지쳐서 쓰러질것이니 말이다. 걷다걷다 이런 가시덤불밭을 걷기도 처음인것 같았다.6 정보     우리가 골안을 완전히 빠져서 룡정-백금도로우에 들어서니 오후 두시가 넘었다. 그래도 큰길이니 맥은 없어도 시름은 놓이였다. 큰길로 가다가 버스가 오면 잡아 타면 되니 말이다. 그런데 한참을 걸었어도 차 한 대도 오가지 않았다. 그러니 우리는 그냥 두발로 걸을 수밖에 없었다.     인젠 배속도 꼴꼴 운다. 두다리도 지쳐서 휘청거린다. 열발가락도 신안에서 물퉁기를 일구면서 아파난다. 앞서 가던 이승희가 멈춰섰다. 가방안의 만두를 꺼내놓았다.      김춘동이 반근드리 술병과 작은 마른 고기를 고추에 섞어서 기름에 볶은 음식을 내놓았다. 정말로 귀여웠다. 제일 나이어린 김춘동이는 항상 가방속에서 일행이 딱 먹고싶은 음식을 내놓군 하였다. 술병마개에 술을 쏟고 한잔 쪽 드니 목부터 위속까지 쨍해난다. 아-좋았다! 술이 몸을 뜨겁게 한다. 한 사람이 두잔씩 마시니 술이 밑굽이 났다. 술로 만두로 속을 추기고 우리는 또 걸었다. 한참 걸어가니 앞에 목재검사소가 나타났다.      목재 검사소가 있으면 그 곳에 꼭 개가 있는 것이다. 산속에서 사람은 개를 길러 자기보호를 한다. 개들의 짖음소리가 곧 정보였다. 혹 개들이 함부로 날뛰여 죄없는 사람을 물어놓을가봐 개들의 목에 사슬을 옥매여 붙들어 두는 것이다. 그래도 어찌 아는가? 혹시 풀어놓은 개들이 있겠는지? 나는 지레 산에서 방향을 알리느라고 휴대하고 있는 호각을 여러번 불었다. 개도 짖지만 그 개를 밖에 내맨 집안 사람이 호각소리를 듣고 나와서 개관리를 하라고 말이다. 과연 문이 열리면서 한 사람이 나왔다. 그 사람은 우리 일행을 돌아보며 뭘 하는 사람들인가고 궁금해 하는 것 같았다. 그 사람이야 무슨 생각하던 나는 우선 버스가 몇시에 있는가고 물었다. 오후 두시반에 있다고 하였다. 그러니 그냥 이 길로 걸어가다가 차를 만나 타야 했다. 우리는 계속 걸었다. 한참 걸으니 소나무밑 껍질을 사선으로 벗기고 그 아래에 비닐을 매놓아 둔 곳에 이르렀다.      처음 보는 현상이였다. 다가가 보니 소나무에서 흘러나오는 송진을 받느라고 하는 짓거리였다. 귀중한 소나무 겁질을 도려낸 것이 우리 몸의 피부를 발가낸 것처럼 느껴지여 마음이 탐탁치 않았다. 그곳에서 좀 나가니 앞이 보이였다. 큰 길은 반달모양으로 산밑으로 빙 돌아 있었고 그 길 가운데에 촌부락이 있었다. 길 따라 걷자면 더 에돌면서 걸어야 하겠기에 앞서 가던 우리 일행은 지레 직선으로 길을 잡으려고 지레 마을로 향한 오솔길로 들어섰다. 이때 뒤에서 따라오던 손대장이 몇시인가고 앞으로 걸어가는 대원들에게 물었다. 김성길이 시계를 보더니 2시 15분이라고 하였다. 그럼 이제 15분이면 버스가 큰길에 나타나는 것이다. 지칠대로 지친 우리가 거리를 단축하느라고 큰길에서 마을로 향한 오솔길로 들어섰지만 이길로 그냥 가면 큰길에 버스가 나타났을 땐 강건너 불 보듯 속수무책이 되는 것이다.  체력소모를 줄이려고 직선거리를 선택하였지만 되려 더 큰 체력을 소모하게 된다. 나는 앞선 대원들을 향해 소리쳤다.   《큰 길로 올라오시오. 두시반에 버스가 있소!》    일행은 지칠대로 지쳤다. 버스가 온다니 누가 올라오지 않겠는가? 정말로 오는지 파악은 없었지만 마음과 다리는 그래도 큰 길로 향했다. 모두가 큰 길에 올라서서 좀 걸으니 과연 뒤에서 차소리가 났다. 버스였다. 아주 낡은 농촌 버스였다. 시가지에서는 버리고 쓰지도 않을 버스였다. 그래도 좋은 버스였다. 우리를 싣고 룡정으로 갈 버스가 아닌가? 눈물나게 고마웠다. 손대장이 2시30분에 버스가 있다는 목재검사소 일군이 알려준 정보를 장악하고 정확하게 오솔길에 들어선 대원들을 불러 큰 길로 올라서게 하였기에 버스를 잡아 탈수 있었다. 정보는 곧 생산력이였다. 정확한 정보는 승패의 관건으로 작용할수도 있다. 대원들은 심심히 정보의 중요성을 느꼈다. 버스를 타고 룡정에 도착하여 전에 들린적 있는 활발한 녀주인 장국집을 찾았다. 여주인은 오랜 친구를 만난듯이 환한 웃음을 지으면서 우리를 반기였다. 우리는 식당에 들어가서 한 칸을 차지하고 짐을 풀었다. 사온 밥통을 꺼내였다. 채도 두 개를 요구하여 한 사람이 맥주한병씩 마시기 시작하였다. 비록 힘들었어도 오래동안 잋혀질것 같지 않은 등산행이였다. 밥을 다 먹고 녀주인의 배웅을 맞으면서 밖으로 나올 때는 오후 네시반이 다 지났다. 밖은 이미 캄캄하였다. 그래도 우리 마음은 밝고 즐거웠다. 잊지 못할 오늘 등산을 우리가 나이를 먹고 생각 할 때면 정말로 음미할 가치가 많을 것 같았다. 오늘의 주인공들인 여섯 사람, 김성길, 김성호, 김춘동, 이승희, 허성운, 손룡호! 그래 그날 이야기 많았었지!...아마 우리는 후날 이렇게 기억의 서두를 뗼것이였다.  (2007년 12월 21) parent.ContentViewer.parseScript('b_1335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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