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련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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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가슴 시린 치유의 풍경 댓글:  조회:242  추천:0  2019-07-18
가슴 시린 치유의 풍경 허련순       언제나 변하지 않는 생각이지만 나의 삶은 너무도 따분하고 단조롭다. 그야말로 액자의 뒤면처럼 소설 속에 숨어있었다.  소설이 전부인 양 자신을 괴롭혀왔다. 전생에 죄가 많은 사람이 현세에 작가로 태여난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작가의 생활은 '자택감금'과 같은 고된 '옥고'를 치르는지도 모르겠다.     소설 안에서는 모든 것이 자유롭고 가능할 것만 같았는데 그렇지 못했다. 갈수록 심산이라고 낯설고 모호하기는 처음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다. 손에 제대로 잡히는 것이 딱히 없다. 이거다 싶으면 어느새 손아귀를 벗어나 보이지 않는 곳으로 숨어버린다. 실체는 없고 상상만 있을 뿐이다. 어릴 적 술래잡기보다 더 어렵다. 그래서 더 집착하고 매달리는지 모르겠다. 암튼 나는 어두운 거리에 서있는 영원한 술래임은 분명하다. 끊임없이 진화하고 끊임없이 변화해야 하는 것이 작가의 운명이니 달리 다른 길은 없는 것 같다.    소설은 다양한 삶의 흔적을 장님처럼 손으로 더듬어내는 작업이다. 그 뿌리의 근원을 찾아가는 일은 결국 소설을 쓰는 리유를 찾아가는 길이며 자신의 실존을 증언하는 일이기도 하다. 내 글쓰기의 힘은 인간다운 삶에 대한 욕망과 현실을 견뎌내는 힘에 있다. 나는 문학창작이란 자신의 가장 불안한 상태를 견디여내는 일이였다고 굳게 믿고 있다. 견딘다는 것은 그냥 참는 것은 아니다. 묵인하는 것도 아니고 용인하는 것도 아니며 불행이나 어려움을 수용하는 것도 아니다. 그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고 꾸준히 묵묵히 때가 되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단편소설 은 억압된 인간의 심적 목소리를 복원하는 작업이였고 결국 존재의 시원을 쫓아가는 려정이였다고 말하고 싶다. 이는 인간의 죄의식과 구원을 향한 메시지이며 존재의 외로움에 대항하는 인간의 비망록이기도 하다. 인간은 사랑하는 누군가가, 사랑하는 무엇인가가 있어야 온전해진다. 마음을 줄 무엇, 기대고저 하는 곳이야말로 인간에게는 이다. 돌아갈 곳이 없을 때 삶은 지옥이다. 주인공은 이 지옥의 한가운데에 서있었다. 그리하여 남자는 방황한다.    "왜 이러지?" 라는 모호한 의문으로 소설은 시작한다. 인간의 불확실한 삶의 요소들을 응시하고 싶었다. 그래서 모호함의 전략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다. 남자가 가는 곳을 녀자가 끊임없이 뒤쫓아가는데 그 끝에는 마치 어마어마한 불륜이 숨겨져있는듯하다. 하지만 소설의 끝에는 불륜이 아니라 현실을 마주한 남자의 고민과 귀환적 절차가 펼쳐진다. 이런 것을 소설에서는 반전이라 하던가?    상처 입은 한 령혼이 또 다른 령혼에 상처 입히고 그 령혼이 또다시 상처를 되돌려주는 형식으로 끝이 없을듯 보이던 갈등구조가 남자가 자신의  트라우마와 정면조우하면서 놓쳐버리고 말았던 가족애, 혹은 인간애로 다가서면서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펼쳐준다. 형에 대한 증오와 혐오, 이것이 작품 속에서의 남자의 딜레마였다. 증오는 인간을 구속하는 가장 심각한 적페라 함이 좋을듯 싶다. 그것은 증오의 대상 뿐만 아니라 증오의 주체를 구속하고 한 사회의 근본까지 흔들리게 할 수 있는 악의 축이다. 어릴 적 이붓형은 고의적으로 남자를 강에 빠뜨린다. 이 일로 남자는 목숨을 잃을 번하고 형은 집을 나간다. 아버지는 집을 나간 아들에 대한 그리움으로 남자를 멀리하고 그 자신은 형을 집을 나가게 한 장본인이라는 죄의식에 시달리며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떠나버린 형을 미워한다.    이붓형이 차사고로 식물인이 되여 돌아오자 형에게 복수하고 싶어 그의 곁을 지키겠다고 자처하지만 남자는 복수 대신 죽음을 앞두고 있는 형 앞에서 망설이고 의심하고 회의한다. 형에 대한 혐오로 그와 만나고 돌아오면 자기 몸에 세번씩 비누칠을 해가며 형에 대한 기억을 지우고 싶어하며 지어 그런 날은 자기 녀자와 잠자리마저 꺼린다. 형과의  화해가 영원히 불가능하게  보였던 남자가 형이 운명을 하자 심장이 멎은 뒤에도 죽은 자의 귀는 3분간 열려있다는 의사의 말을 듣고 형의 귀에 대고 '미웠다'는 말 대신 '돌아와주어서 고맙다'는 말을 들려준다. 그리고 안도의 숨을 쉰다. 형을 용서하고 자신을 형에게서 해방시킨 셈이다.    자신의 자아를 찾아가는 행위에서 타인이 아니라 자아의 내면에 있는 어떤 것을 되찾아가는 과정, 혹은 자아와의 옳바른 관계를 재정립하고 싶었다. 그렇다면 그가 마주한 내면의 어떤 것이란 무엇일가? 그것은 '인간성'이라 부를 수도 있고 '량심'이라 부를 수도 있고 '선'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들이다. 그의 내면에 감추어지고 숨어있던 인간성의 쪼각들이 나비처럼 부활하면서 그의 진정한 자아를 완성시킨 셈이다…   이 소설을 통하여 나는 인간 존재의 모호한 출발점, 생의 근원을 모색함과 동시에 가슴 시린 치유의 풍경을 보여주기로 하였다. 결국 소설은 인생이라는 트랙 안에서 미움과 증오가 아닌 공존으로만이 가능해지는 순리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믿음 속에서만 가능해지는 삶에 대한 태도를 말해주는 것에 충실하고 싶었다. 그렇게 되였는지는 모르지만. 출처:2017 제5호
2    [수필]산 자의 고별식 댓글:  조회:334  추천:0  2019-07-18
산 자의 고별식 허련순   제나름, 망자 고별식은 사후에만 치르는 것인 줄로 알고 있었다. 산 자들이 죽은 자를 기리기 위하여 행하는 장례식이 바로 고별식이 아닌가? 그러니 사후에 고별식을 치르는 것은 당연지사이다. 산 사람을 놓고 장례식을 치를 수는 없지 않는가? 바보거나 혹 남다른 뇌구조를 가졌다면 모를가, 세상에 일관된 상식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듯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삼스럽게 이를 화제로 삼는 것이 어리석은 일은 아닌지 살짝 고민스럽지만 이 또한 독자의 판단에 맡긴다. 일전에 미국에 사는 한 지인으로부터 그가 포트로더데일 싸우스웨스트 렌치스에 있는 ‘선교치유센터’에서 백여명의 친지들을 모시고  ‘미리 하는 고별식’을 올렸다는 소식을 들었다. 비록 고령이기는 하나 아직 퍼렇게 살아계신 분이 고별식이라니, 한동안 내 귀를 의심할 수 밖에 없었다. 혹시 잘못 들은 것은 아닌지… “고… 별식이라니요? … 혹시 장례식 말씀하십니까? …” 다시 물어보기에도 민망하고 딱한 일이였다. 그래서 저도 몰래 말을 더듬었다. 살아있는 분을 놓고 장례식을 운운하다니. 송구하고 황송했다.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그 엄청난 사건을 전해듣고도 아무렇지도 않은듯 묵묵히 있는 것도 무례일듯 싶어 가까스로 뱉어낸 말이다. 하지만 그 쪽 반응은 오히려 담담했다. “네. 장례식 맞습니다. 제가 80돐 생일을 맞으면서 생일파티 겸 마지막 고별식을 미리 치렀습니다…” 그 말을 들으면서 나는 왠지 가슴에 총을 맞은듯 먹먹해났다. 경이로움과 처연함, 그리고 짠한 슬픔과 이름할 수 없는 쓸쓸함까지 한꺼번에 밀려들었다. 찬사를 드려야 할지 아니면 위로를 드려야 할지 나는 그만 할 말을 잃었다. 이런 경우에는 대체 어떤 말을 해야 하는 것일가? 무슨 말이든 이어나가야 하는데 나는 그저 방아개비 더듬이 더듬듯  “어떻게… 어떻게…”라는 말만 곱씹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왠지 그 말조차 비정해보여서 쉽게 입밖에 낼 수 없었다. 얼 빠진 듯한 내 모습이 딱했던 모양이다. 오히려 그 분이 위로를 건넸다.  “허작가님, 놀랄 것 전혀 없습니다. 제가 처음도 아닙니다. ‘미리 치른 장례식’의 전례를 보면 3년 전에 카나다 동포 의사 이재락박사가 암으로 6개월 시한부 선고를 받은 후 생전에 미리 장례식을 치렀고 또 미국인으로는 1938년 테네시 시골의 펠릭스 브리질씨가 당시 73세였는데 건강한 몸으로 ‘미리 하는 장례식’을 치렀습니다. 그러고 나서 7년 후에 사망했지요. 북미에서는 이미 두차례가 있었습니다. 그러니 제가 세번째인 셈이죠.” 하지만 나는 오래동안 가슴이 떨렸다. 이런 상황을 뭐라 하면 좋은 것일가? 죽음에 대한 초탈이라 해야 하는 게 맞는 것일가? 아니면 삶에 대한 초탈이라고 해야 하는 게 맞는 것일가? 혼란스러웠다.   ‘미리 하는 장례식’을 올린 이 지인이 바로 한국의 대표적인 서정시인 김영랑시인의 아들인 김현철선생이다. 그는 한국 MBC 서울본사 기자, 한겨레 동아 중앙 마이애미 지국장을 력임하고 1974년에 미국에 이주하여 미국 동포신문을 창간한 발행인 겸 편집인이다. ‘’ 나는 2014년 겨울 한국의 저명한 평론가 임헌영선생의 소개로 김현철선생을 알게 되였다. 당시 김현철선생께서는 《김영랑시집》을 중국어로 번역출간하려고 추진하던 중이였는데 중국에 일면식도 없는 상황이라 내가 나서서 그 일을 돕게 되였다. ‘북도에는 김소월, 남도에는 김영랑’이라고 할 만큼 김영랑시인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서정시인이다. 그의 시는 자연을 통한 섬세하고 감각적인 언어로 인간 내면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시가 대부분이다. 김영랑선생의 시에 대한 리해를 돕기 위하여 김현철선생께서 서울에 있는 누이에게 부탁하여 《김영랑시선집》과 본인이 저술한 《아버지에 대한 회억》 등 3권의 책을 부쳐왔다. 덕분에 나는 김영랑시인의 시를 체계적으로 읽는 호사를 누리게 되였다. 그것은 일종의 향수요, 즐거움이였다. 나는 김영랑시인의 시가 가지고 있는 상징과 응축의 묘미에 깊이 매료되였다. 그것은 은혜였다. 김영랑선생의 시에 대한 공감으로 나는 김현철선생과 이메일로 많은 시간을 문학에 대하여 아낌없이 담론할 수 있었다. 같은 문학인이라 그런지 통하는 데가 많아 토론은 항상 즐겁고 유익했다. 최근 나는 집필하고 있는 장편소설 《춤추는 꼭두》에 대하여 고언을 청해 듣기도 하였다. 오랜 시간 미국에서 언론인의 삶을 살았던 분이라 사유가 자유롭고 신선하여 그의 고견을 듣는 것은 작가인 나에게 더없는 행운이였다. 특히 작가의 문제의식이나 사회의식에 대한 김현철선생의 관점은 이번 소설의 구성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그럴 즈음에 김현철선생으로부터 ‘미리 하는 고별식’을 했다는 소식을 전해들었다. 나로서는 너무 충격적이였고 생소하고 낯설었다. 한편 궁금하기도 하였다. 산 사람의 장례식은 대체 어떻게 하는 것일가? 진짜처럼 빈소를 설치하고 장송곡을 울리는 걸가? 나의 마음을 읽기라도 하듯 김현철선생께서 설명을 보태셨다. “장송곡은 당연히 울렸죠. 망자와의 고별식인데 장송곡이 없어서야 되겠어요?” 그는 마치 가벼운 일상을 말하듯 엷게 웃기까지 했다. 아, 나는 비명처럼 짧게 탄식을 뱉었다. 아무리 절차에 따라 하는 것이라 해도 그렇지, 산 사람 앞에서 장송곡을 울리는 것은 너무도 잔인한 일이라 생각되였다. 하지만 그것은 기우였다. 장송곡 자체가 잔인한 것은 절대 아닐 것이다. 아마도 죽음에 대한 극도의 두려움 때문에 그리 느껴졌을 수도 있다.  80돐 생일 축하 파티가 끝나고 영화 《아메리칸 스나이퍼American Sniper》의 주제곡인 이 은은히 장내에 흐르면서 고별파티가 시작되자 이날의 주인공인 김현철선생께서 고별파티에 참석한 손님들에게 인사말을 건네는 순서가 되였다. “팔순이 되니 전보다 죽음이 가까워져서인지 자주 죽음에 관해 생각을 하게 되더군요. 죽음이라는 단어는 ‘모든 게 다 끝났다, 이제 아무 것도 남는 게 없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죽음은 령혼이 몸을 떠나서 본래 왔던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뜻도 있으니 ‘죽었다’ 보다는 ‘돌아갔다’로 표현함이 옳은 것 같습니다…” 그는 자신이 죽은 후 역겨운 시신을 조문객들에게 보여주어 불쾌감을 주는 것이 싫었다고 한다. 더우기 사후 장례식에 누가 다녀갔는지, 또 누군가가 읊은 조사가 어떤 내용인지, 정작 당사자인 망자 본인은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사후 장례식은 아무 의미도 없기에 죽기 전에 한번 더 보고 싶은 사람들을 만나서 함께 소박한 식사를 하고 담소도 나누면서 정감 넘치는 작별인사를 하고 싶었다고 했다. 더구나 장례식 때 조의금을 챙기고 조화를 받고 번거로운 장례의식 절차를 거치는 것 또한 적성에 맞지 않으며 지금은 아주 건강하지만 90세까지 산다는 자신이 없어서 팔순잔치 때 마지막 파티를 겸하기로 했다고 이날 파티를 열게 된 리유를 밝혔다. 인사말을 마치고 김현철선생은 천상병시인의 을 읊었고 이어 가곡 를 부인과 함께 열창했다. 그리고 아들이 “아버지가 부르셔야 할 노래를 대신 부른다”면서 프랑크 씨나트라의 그 유명한 를 불렀다. 장송곡에 이어 까지 울려퍼지자 고별식의 분위기가 한껏 고조되였다. 어떤 이들은 손수건으로 슬쩍슬쩍 눈물을 훔치면서 속으로 울음을 토해냈고 어떤 이들은 아예 참지 못하고 소리를 내여 흑흑 흐느꼈다. 살아있는 사람의 죽음이 시사하는 의미는 비통 뿐만이 아니였다. 삶에 대한 애틋함을 더 애틋하게 하고 살아있음의 소중함을 더 각인시켜주었다.   자, 이제 마지막이 가까워졌네 인생의 마지막 장을 맞이하게 되였어 친구, 분명히 말해두고픈 게 있네 내가 확신했던 내 삶의 방식을 얘기하려고 하네 난 내 인생을 충실히 살아왔고 살아오면서 수많은 일을 겪었어 하지만, 그 무엇보다 중요한 건 난 내 방식대로 삶을 살았다는 거지   사랑했고, 웃었고, 울었지 고생도 했고, 쉬염쉬염한 적도 있었지 이제 눈물이 말라가면서 난 그 모든 게 재미있어보이는 거야 그 모든 것을 내가 다 거쳐왔다는 것이 그리고, 이렇게 말해도 될가 난 당당하게 내 방식대로 해왔어…   는 마치 평생 비리와 타협하지 않고 ‘언론인의 정조’를 오롯이 지켜온 김현철 전 언론인의 지난날을 말해주는 듯 구구절절 사람들의 마음을 아프게 후벼팠다. 이보다 더 아름다운 노래가 있을가. 죽음을 삶으로 살아냈으며 죽음을 아름다운 삶으로 완성시킨 김현철선생에게 너무도 잘 어울리는 노래였다. 죽음이란 결국 삶을 죽는 것이다. 그러니 삶이 없는 사람은 죽을 것도 없게 된다. 죽음이 없어 좋은 것일가? 천만에! 세상에 죽을 것이 없는 자 만큼 불쌍하고 불행한 사람은 없다. 죽음을 미리 추모하고 삶을 리별할 수 있는 사람은 죽을 수 있는 삶이 있는 사람들인 것은 분명해 보인다. 적어도 이들은 죽음을 알고 죽음을 초탈한 사람들이다. 죽음을 안다는 것은 결국 삶을 잘 살았다는 증거다. 솔직히 죽음이 두렵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신조차도 죽음 앞에선 통곡을 한다. 항아리 그림인 〈멤논의 죽음을 슬퍼하는 에오스〉는 죽음 앞에 애통해하는 신의 눈물을 보여준 증거다. 이 그림은 새벽의 녀신인 에오스(Eos)가 인간과 사랑하여 낳은 아들인 멤논이 트로이전쟁에 참전했다가 아킬레우스에게 죽임을 당하자 슬픔에 겨워 통곡하는 장면을 그렸다. 신화에 의하면 새벽에 내리는 이슬은 에오스가 아들의 죽음을 슬퍼하여 새벽마다 흘리는 눈물이라고 전해진다.  인간은 물론이고 신조차도 슬퍼하는 죽음을 처연하게 대면하고저 한 ‘미리 하는 고별식’을 대면하여 재삼 죽음을 두려움 없이 즐겁게 맞이하고저 했던 소크라테스를 떠올리게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듯 싶다. 아테네정부의 잘못된 기소로 독약을 받고 죽음을 맞게 된 소크라테스는 곧 숨이 넘어가는 순간에 “아스클레오피스에게 닭 한마리를 빚졌다”는 유명한 유머를 남겼다. 아스클레오피스는 그리스의 의술의 신이다.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앓던 병이 치료되면 감사의 표시로 의술의 신 아스클레오피스한테 닭 한마리를 바치는 습관이 있었다. 그렇다면 독약을 마시고 억울한 죽음을 맞이한 소크라테스는 왜 죽는 순간에 아스클레오피스한테 닭을 빚졌다고 했을가? 혹시 자신의 죽음을, 비록 억울한 죽음이긴 하지만 병과 고통에서부터 치유되는 것으로 간주했던 것일가? 이승의 삶이 육체의 구속이였다면 저승에로의 죽음은 어쩌면 령혼의 자유이며 해방일 수도 있다. 살아있는 동안 죽음에 대한 수많은 명언을 남기며 누구보다도 죽음과 가까이한 소크라테스라면 충분히 가능한 해석이라고 본다. 소크라테스는 인간의 본질은 혼魂에 있다고 보았다. 신체는 물론이거니와 혼과 신체가 섞인 것조차 인간을 설명할 수 없으며 오직 순수하고 독립적인 혼만이 인간을 규정한다고 보았다. 어찌됐든 죽음을 앞두고 남긴 소크라테스의 마지막 한마디는 난해한 오묘함으로 인해 오랜 세월 동안 회자화되고 있다. 하지만 삶과 죽음에 대한 가장 소크라테스다운 풍자인 것만은 확실하다.      죽음을 태연하게 맞이할 수 있는 것은 인간 본연에 대한 리해, 특히 령혼과 육체의 관계를 리해하는 깊이와 밀접하게 련관되여있지 않을가 싶다. 만약 죽음이 전혀 아무 것도 남기지 않는다면 정녕 그렇다면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할 리유는 전혀 없다. 우리는 우리가 태여나기 전에는 존재하지 않았었다. 그리고 결국 그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두려움도 느끼지 않잖는가. ‘살아서 미리 하는 고별식’을 치른 김현철선생도 죽음은 육체의 사멸일 뿐 령혼은 왔던 데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라 인식했기에 죽음을 두려움이 아니라 축복 속에서 맛볼 수 있었던 게 아닐가. 처음엔 충격으로 다가왔지만 어쩌면 ‘살아서 하는 고별식’이야말로 죽음에 대한 가장 큰 례의이고 축복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다른 것은 몰라도 죽음을 끌어안고 하고 싶은 말을 채 하지 못한 사무침에 땅을 치는 일은 없을 테니 얼마나 좋은가. 미리 할 말을 다했으니 산 자와 죽은 자의 사이에 서로 빚은 없을 듯 싶다. 빚이 없이 가볍게 갈 수만 있다면 떠나는 이나 남아있는 이나 이보다 더 좋은 리별이 더 있을가. 이것은 사람이 살아서 인간의 권리로 할 수 있는 삶에 대한 마지막 례의이고 또한 자기 죽음에 대한 신고식이 된다는 의미로 더없이 멋진 일이 될  것이다.  출처:2017 제5호
1    [대담]문학을 살아내는 작가 댓글:  조회:477  추천:0  2019-07-18
문학을 살아내는 작가 허련순&김홍란     초대작가: 허련순(소설가, 연변작가협회 전임 부주석) 진행자: 김홍란(《도라지》잡지사 전임 주필)   일시: 2017년 7월 5일 장소: 연길시 백산호텔 커피숍   김홍란(이하 김):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가진 허련순선생님과의 만남이 ‘작가를 만나다’는 대담코너 자리여서 반가운 마음이 훨씬 큽니다.   작가로서 성공한 허련순선생님은 많은 사람들이 본받고 싶어하는 분이예요. 오늘 대담이라는 형식을 통해 선생님께서 그동안 살아온 문학인생과 이룩하신 창작성과, 우리 문단을 빛내신 업적을 조명할 수 있어 기쁘게 생각합니다.    허련순(이하 허): 정말 오랜만입니다. 보고 싶었는데 이렇게 문학대담으로 만나게 되여 더 기쁘고 즐겁습니다. 또 하나의 아름다운 기억이 될 듯 싶네요.     김: 일전에 선생님께서는 소주에 가서 한동안 체류하며 창작을 하신 걸로 알고 있어요. 전혀 익숙하지 않은 낯선 고장을 찾아가 눌러있으면서 창작을 하시거나 지어 노트북 하나만 달랑 들고 카페를 찾아가 온종일 앉아있으면서 글을 쓰시는 건 선생님이 오래전부터 그려온 풍경이였지요. 그런 행보는 스스로의 창작에 가장 적합한 환경을 찾아다니며 최상의 창작상태를 받쳐주려는 의도된 노력일 수 있겠지만 흔히 주변 환경이 바뀌면 글이 잘 안 나온다는 다른 작가들과는 달리 낯선 환경에서 오히려 신선한 감각을 찾고 충전을 하고 젊은 느낌을 이어가려는 선생님의 남다른 실천이 아닐가 생각해요. 그래서 지금까지 주옥 같은 소설을 수두룩 펼쳐낸 선생님의 앞으로가 더욱 많이 기대되는 리유이기도 하죠.    허: 저도 원래는 자기 서재에서만 창작하는 것을 고집했던 사람입니다. 그게 가장 안정적이고 편안했거든요. 그런데 1996년부터 달라졌어요. 그 해 겨울에 한국에서 생활하면서 30만자에 달하는 장편에세이 〈노래방에서 우는 사람〉을 출판사와 계약을 하고 쓴 적이 있습니다. 그 때 낯선 곳에서의 글쓰기가 력동적이고 박진감이 넘치고 작가의 절심함도 더 치렬했던 경험을 하게 되였지요. 3개월 동안 집중해서 작품을 다 쓰고 나니 시력도 떨어지고 귀도 잘 들리지 않아서 ‘이제 창작을 하지 못할  수도 있겠구나.’ 그런 처절한 생각이 들더군요. 그 때의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진저리쳐지고 소스라쳐요. 그만큼 부담도 크고 긴장된 상태였지요. 제시간에 완성하지 못하면 돈을 받지 못한다는 불안감, 매일마다 조선족의 현장을 취재하면서 써야 한다는 부담감, 제한된 체류시간 등 어느 것 하나 편한 것이 없었어요… 그래도 지금까지 작품을 쓰면서 그 때처럼 치렬했던 적은 없었던 것 같아요. 가끔씩 그 때처럼 박절하고 절실한 순간을 꿈꿀 때가 있답니다. 그게 작가에게 최상의 창작상태가 아니였을가 싶어요.     이번에 집필장소를 소주로 한 것도 아마 그런 상황을 원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장편소설 는 다 완성한 상태에서 련재한 것이 아니라 한편으로 쓰면서 련재를 시작했기 때문에 제시간에 이어대지 못할가봐 심리적 압력이 컸어요. 그러다 보니 외부와 철저히 차단된 환경으로 떠나야만 한다는 절박함이 있었어요. 그리고 그쪽으로 가게 된 더 중요한 리유는 작품 속에서 ‘꼭두’가 태여난 고향이 강서성 위수치여서입니다. 그 곳은 우리 나라에서 가장 후지고 가난한 곳이라고 들었어요. 자료로는 알고 있었지만 직접 그 곳의 하늘과 땅, 바람, 풀, 물, 집, 사람 그리고 냄새까지 다 체험하고 싶었답니다. 가보니 하늘은 맑고 땅은 붉고 그리고 농촌은 마을사람들이 다 도시로 삯일을 떠나버려 텅텅 비여있더군요. 얼마 남지 않은 마을 늙은이들이 문앞에 쪽걸상을 놓고 앉아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고 있었어요. 집은 아직도 흙집이나 판자집이 그대로 있었고 집에 들어가 보니 천정으로는 하늘이 보이고 방바닥은 흙바닥이더군요. 분명히 바람과 함께 사라져가는 것들이 눈에 보였어요. 막연했지만 그 사라짐 속에서 저는 위수치의 욕망을 읽었습니다. 그것이 저의 소설의 배경이 된 리유입니다.     소주에서 꼭 반년을 살았어요. 작품을 마치고 나니 한 세월이 흘렀더군요… 앞으론 자주 소주를 리용할 예정입니다. 봄과 겨울이 구분이 없어 세월이 흘러도 오히려 그 차이를 동북보다 덜 느끼겠더라구요. 그래서 덜 우울할 수 있었습니다. 새롭고 낯선 장소에서 글을 쓰는 것은 긴장된 스릴이 있어요. 낯선 곳에서의 낯선 느낌은 새로움이죠. 제가 산 동네는 소주 남쪽에 위치한 천연호수인 윤산호尹山湖가 있는 곳입니다. 새로 개발된 곳이라서 그런지 소주 본토인은 반도 안되고 전부 외지에서 온 ‘이민자’들이더군요. 중국 각 지방에서 온 사람들을 매일 엘레베터에서 이웃으로 만나게 되죠. 그리고 아침저녁으로 정원에서 산책하면서도 만나게 되구요. 만남은 소통의 시작이 아니겠어요? 자연히 그들의 문화에 대하여 귀 기울이게 되더군요. 그런 기분을 뭐라 할가요? ‘내가 이제야 제대로 중국에서 사는구나.’ 그런 기분이였어요. 그 사람들은 오히려 우리 부부를 ‘로와이老外’ 즉 외국인이라 불렀지만 말입니다.(웃음)     김: 충전이 될 수 있는 신선한 선택인 것 같네요. 허련순선생님은 지난 90년대부터 우리 소설문학을 견인해온 가장 대표적인 작가중의 한분이십니다. 몇년 전에 펼쳐낸 인물평전 《사랑주의》는 중국어, 한국어, 영어, 일어 등 4개국 언어로 번역, 출간되면서 높은 인기를 얻었죠. 그럼에도 선생님은 ‘외도’는 그 한번으로 족하다며 인기 뒤에 따라오는 평전과 인물전기 청탁을 거절하시면서 작가로서 자신이 추구하는 소설쓰기에만 전념하겠다고 하셨어요. 30여년 간 소설을 써오신 선생님에게 소설쓰기란 어떤 것일가요?    허: 저는 소설가입니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도 소설로 문학을 말하려고 노력하죠. 제가 소설 외에 다른 글을 쓰는 것을 피하고저 하는 것은 다른 것에 기웃거리는 동안 소설적인 감각이 떨어지는 것을 경계해서입니다. 솔직히 소설 외의 다른 문학에 손을 대면 왠지 저의 옷이 아니라 남의 옷을 걸친 듯 어색하고 마음이 편치 않아요. 소설 아닌 다른 것으로 상을 받았을 때는 더하죠. 조금 부끄럽거나 미안한 생각까지 들어요. 남의 령역의 풀을 뜯어먹은 것 같아서요. (웃음)   저에게 소설은 저의 존재에 대한 증언입니다. 소설을 씀으로써 자신이 살아있다는 것을 증언하는 거죠. 그러니 소설은 저의 전부의 삶이라고 할 수 있어요. 소설을 쓰지 못하면 저의 존재도 사라지겠죠. 소설이 없는 저의 존재는 가치가 없다는 의미입니다. 저는 작가로서의 삶을 살면서 인간이라는 제 삶에서는 한발 물러서있었던 것 같아요. 액자의 뒤면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생계 그 이상의 소명의 자리에서 소설을 쓰면서 오늘까지 버텨왔어요. 소설쓰기는 결국 자신의 가장 불안한 상태를 견디여내는 일이였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제가 소설을 쓴다는 의미는 한마디로 소설을 살아낸다는 의미인 거죠.     김: 1973년, 19세에 처녀작인 시를 《홍소병》잡지에 발표, 1980년에 연변대학 조문학부를 졸업한 뒤 연길시소년궁 창작실, 연길시아동도서관, 연길시문화관 창작실, 연길시창작평론실을 전전, 12년 사이에 시, 가사, 수필, 소품, 극본을 쓰며 문단을 조심스레 노크하던 선생님은 1986년 단편소설 를 《청년생활》잡지에 발표하며 본격적인 소설 창작 활동을 시작하였으며 그 후 지금까지 오롯이 작가의 외길만을 고집하고 걸어오면서 발자취를 무척이나 깊이 찍어오셨어요.    일찍 어린 열두살 나이에 일기를 쓰고 싶었던 선생님은 아버지께서 일기책을 안 사주시자 혼자 개구리를 잡아 팔아서 일기책을 샀던 일화가 있죠. 그 때부터 자신이 본 것과 생각한 것을 진솔하게 일기책에 적어놓았구요. 문학에의 꿈은 어쩌면 그 때 이미 꾸기 시작했고 일기책 장만하던 당찬 행동은 문학을 향한 집념의 싹이 아니였나 싶어요.    허: 그 때는 솔직히 작가가 되겠다는 그런 야무진 꿈 같은 건 없었죠. 없은 것이 아니라 아예 생각도 못할 때죠.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작가를 꿈꾸도록 일깨운 사람이 없었으니까. 다만 제가 어릴 때부터 집념이 강한 아이였던 것 같아요. 모내기를 도우려고 시내에서 온 중학교 언니들이 저의 집 한쪽 칸에 류숙하게 되였는데 일하러 나갈 때면 노트를 이불 우에 놓고 나가는 언니가 있었어요. 처음에는 이쁜 노트가 신기해서 손에 들었는데 차츰 그의 일기에 빠진 거죠. 그래서 그들이 일하러 나간 틈을 타서 훔쳐보기 시작했는데 그 때 처음으로 일기를 써야겠다는 생각을 한 거예요. 아버지한테 일기책을 살 돈을 요구했지만 계집아이가 무슨 일기냐며 일언지하로 거절하시더군요. 저는 그 날부터 한주일 동안 개구리를 잡아서 큰 항아리에 가두었습니다. 반자루 정도 되자 그걸 이고 십리 길을 걸어서 연길 동쪽 한족동네에 팔러 갔죠. 천으로 된 자루라 개구리들이 오줌을 싸서 란리도 아니였어요. 머리카락이 다 젖었고 옷도 아주 엉망진창이 되였죠. 다행히 한 한족 할머니가 집에서 키우는 닭한테 먹이로 주겠다며 1원 40전을 주고 몽땅 샀습니다. 60전으로 밤색 노트를 사고 24전인가 주고 비닐 지갑을 사서 남은 돈을 지갑에 넣고 집으로 왔는데 호주머니에 넣었던 지갑은 어디서 잃어졌는지 없더군요. 그래도 노트를 잃어버리지 않아서 다행이였죠.(웃음)    그 때부터 저는 매일 일기를 썼어요. 완정하지는 않았지만 아이로서 세상을 보는 자신의 생각을 가감없이 적었죠. 그렇게 일기를 쓰면서 세상과 대화하는 법을 배웠던 것 같아요. 노트 한권을 거의 채워갈 무렵에 그걸 읽어보신 담임선생께서 잘 썼다는 생각이 드셨나 봐요. 선생님들의 아침 조회시간에 몇편을 골라서 읽어주셨다고 하더군요. 그 후부터 저는 학교에서 글 잘 쓰는 아이로 소문이 났죠. 복도로 지나다닐 때마다 다른 반 선생님들까지도 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군 했는데 그 순간이 정말 짜릿하고 행복했어요. 아마도 그 순간을 잊지 못해 지금까지 열심히 글을 쓰고 있는지 모르겠네요. 유치하죠? (웃음)    김: 아니요, 그런 좋은 시작이 있은 게 부러운 걸요. 언젠가 선생님의 문학자서전에서 읽은 기억인데 집에서 다섯째딸로 태여난 선생님은 아들을 원하시는 아버지에게는 환대받지 못한 존재였다죠. 태여나는 날 아버지는 가출하셨고 몇달이 지나도록 이름 지어주기를 거부하셨으며 결국 놀러 왔던 6촌오빠에 의해 지어진 이름. 그래서 선생님은 자기 이름에 정이 가지 않았다고 하셨고 “결국 내 문학의 근원은 아버지였음을 알게 되였다.”고 했어요.    허: 그래요. 어린 시절 저는 이름에 관련하여 지울 수 없는 아픈 태생의 기억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저의 평생의 트라우마라고도 할 수 있겠죠. 아버지가 아닌 남이 지어준 이름으로 글을 쓰면서 저는 자주 이름을 바꾸고 싶은 충동을 느끼군 했죠. 여직 한번도 그 생각을 멈춰본 적이 없어요. 왠지 남의 집에 세 들어 사는 세입자처럼 자기 이름에 정이 가지 않았어요. 가끔씩 누가 제 이름을 부르면 깜짝 놀랄 때가 있을 정도로 낯설거나 어색해요. 이름에 대한 콤플렉스가 너무 깊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인지 필명으로 작품을 발표하고 싶을 때가 아주 많았어요. 하지만 매번 같은 고민을 하면서도 결국은 필명이 아니라 본명을 써버리게 되더라구요. 싫어하면서도 왜 끝까지 버리지 못하는 건지, 그런 제 마음을 저도 알 수 없어요. 이름에 담긴 슬픈 이야기를 잊지 못해서일가요? 아마도 태생의 조건이 결핍이였다면 그 결핍마저도 자신의 정체성이라 여기는지 모르겠습니다.      맞아요. 결국 저의 문학의 근원은 아버지였음을 최근에 와서 알게 되였어요. 아버지에 대하여 저는 눈빛으로 기억합니다. 아버지 눈빛의 깊이를 파고들고 그것을 넘어서는 과정이 바로 제 문학이였다는 생각이 드네요. 보고 있으면서도 보고 있지 않는 듯한 먼 눈빛, 아버지는 늘 그런 시선으로 저를 바라보았어요. 밀어내는 듯한 눈빛이였고 저는 늘 그 시선을 참을 수 없어했어요. 그 시선에서 어린 나이에 벌써 인간의 소외와 차별과 슬픔을 경험했고 그것이 인간이 인간에게 행해지는 가장 큰 부정과 비애임을 알아버린 것 같아요.     제가 네살 되던 해 여름, 아버지는 셋째삼촌의 아들(사촌오빠)을 양자로 삼았어요. 온 동네가 보란 듯이 아버지는 저보다 여섯살이나 더 큰 사촌오빠를 업고 마실을 다녔습니다. 아들을 등에 업어보는 것이 아버지의 소망이고 꿈이였던 모양이예요. 아버지의 등뒤에서 행복하게 출렁이던 사촌오빠의 긴 다리를 지금도 잊을 수 없네요. 그 기억이 진짜 네살짜리의 기억인지 아니면 어머니가 후에 말씀해준 것을 기억하고 있는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말입니다.       절대적으로 의존해야만 하는 부모로부터 받는 소외감은 이 세상 그 어떤 상처보다 큰 트라우마가 되는 것 같아요. 그 상처가 저의 문학의 근원이고 본질이라고 하는 리유는 아버지가 최초로 저에게 ‘녀자로 태여난 슬픔’을 경험하게 했고 최초로 ‘녀자인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가지게 했기 때문입니다.     김: 네. 그래서 어느 한 평론가는 “어린 시절의 소외와 고독은 허련순선생님을 작가로 잉태시킨 자궁”이였다고 했지요. 아버지로부터 받은 성차별대우와 소외의식은 선생님으로 하여금 녀성정체성에 대한 남다른 관심과 사색을 하게 했으며 출생의 결핍은 녀성성의 결핍으로 선생님의 소설에 고스란히 녹아들었지요. “나의 문학은 자기 이름 찾기”였다는 선생님은 결국 녀성의 정체성 찾기로부터 소설쓰기를 시작했어요. 그 대표소설로 (1997), (2004), (2004) 등이 있지요. 선생님은 이런 중단편소설의 창작을 통하여 “페미니즘적인 시각으로 녀성의 삶과 처지, 운명, 지위의 변화 등에 대해 다룸으로써 녀성의 정체성 확립에 이바지” 하셨어요.    허: 그렇게 말씀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선생님도 아시겠지만 작가는 대체로 유년기적 체험의 범주에서 작품활동을 하기 마련입니다. 아버지로부터 소외되였던 유년기의 독특한 체험이 저의 문학적 자산이 되였고 그건 슬픈 일이지만 작가인 저에게는 다행스러운 일이기도 하죠. 어쩌면 오늘을 위하여 그 때 그런 슬픈 이야기가 만들어지지 않았나 싶어요. 그런 의미에서 저는 행운아인 거지요. 아, 그 말이 생각나네요. 한국의 문학평론가인 황송문선생은 저의 소설에 대하여 이런 말씀을 해주셨어요. “슬픈 이야기를 쓰는데 아름답다.” 저는 이 평을 좋아합니다. 왜냐 하면 우리가 문학을 하는 리유는 슬픔을 쓰기 위한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슬픔으로 아름다움을 말해주는 데 있기 때문이니까요.     김: 단편소설 은 “격정이 충만된 필치로 한 거룩한 어머니의 형상을 부각하면서 추호의 리기심도 없이 오로지 자식들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는 모성애를 구가”한 작품이며 소설에서 우주의 자궁은 녀성성을 상징하는 이미지이기도 합니다. 그런가 하면 단편소설 〈녀자는 여섯살에 다 크는가?〉는 선생님의 소설묘미를 충분히 보여주는 수작으로서 35세의 가정주부인 ‘나’와 여섯살의 ‘나’, ‘강 건너에서 온 녀자’와 ‘나’의 어머니가 겪는 불안과 두려움, 자신의 자궁을 잃어버린 억울함과 분노를 보여주고 있으며 그러한 삶의 어두움을  “이름도 시간도 뛰여넘는 어떤 성스러움”으로 밝히려고 한 작품입니다. 소설은 “녀성성 탐구라는 측면에서 〈우주의 자궁〉의 자매편으로 읽혀지는 작품”이라는 평을 받기도 하죠. 그리고 단편소설 는 조선족사회에서 자아의식이 각성되여가는 녀성형상과 무너져 내리는 남성중심주의 현실을 잘 그려낸 소설로서 페미니즘적인 주제성향을 보여주는 가장 대표적인 소설입니다. 예술적 표현의 여러 면에서도 높은 완성도를 보여주는 소설은 고중조선어문교과서에 수록되기까지 했어요.    김관웅교수님은 “허련순이 추구하는 녀성문학은 단순한 성차별주의, 부권주의, 남성우월주의의 일반화된 설명을 넘어서서 성의 불균형과 불등성不等性이 어떻게 조성되며 어떻게 변하는가에 대한 연구를 념두에 두고 있다.”고 하셨어요. 페미니즘적 주제경향을 갖고 있는 우리의 소설들 중에서 가장 대표성을 띠고 있다는 평을 받고 있는 이런 소설들이 작가 허련순선생님에게는 어떤 의미로 남아있는지 궁금하네요.    허: 제가 녀성성에 특별히 천착했던 것은 사실입니다. 제가 추구했던 녀성성은 김관웅선생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단순한 성차별주의나 부권주의나 남성우월주의에서 철저히 벗어나고저 함이였죠. 녀성이 어떻게 녀성으로서 온전히 자신의 본질적 자아와 존재적 자아를 찾을 수 있는가에 대답하고저 했던 것이 저의 소설입니다. 세속에서는 아이를 낳지 못하는 녀성은 녀성이 아니라고 보기도 하죠. 녀성 스스로도 아이를 낳지 못하면 녀성으로 완성되지 못한 것이라 자책하기도 하구요. 제가 추구하는 녀성성은 생육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에서 보여준 어머니 형상은 아이를 낳지 못한 녀성이 남의 자식을 자기 자식처럼 헌신적으로 키우는 것을 통하여 생리적인 엄마 이상의 녀성의 형상을 만들어내려 했고 〈녀자는 여섯살에 다 크는가?〉는 자궁을 잃은 한 녀성이 여섯살의 어린 아이의 의식으로 돌아간 어머니의 엄마로 되는 것으로서 녀성성의 상실감을 극복하고 영원한 의미의 녀성성을 새로 찾는 데에 가치를 둔 소설이예요. 문학성의 의미는 인간 자체의 힘으로 도저히 불가능한 것에서 가능한 의미와 가치를 창출하는 데에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김: 지금까지의 소설창작에서 선생님이 중단편소설을 통해 주로 페미니즘적 시각으로 녀성문제를 다루었다면 장편소설을 통해서는 디아스포라의 시각으로 조선족의 민족정체성에 대한 깊은 사고를 담아내면서 민족문제에 작가적 관심을 기울여 왔습니다. 1990년대에 들어서며 조선족 엘리트들은 자기 민족의 정체성에 대한 사색을 하기 시작하는데 이와 거의 같은 시기에 선생님은 소설을 통해 디아스포라로서의 조선족 정체성 문제를 다루기 시작했어요.     1989년, 조선족작가로서는 가장 먼저 한국을 방문한 선생님은 그로부터 오늘까지 변함없이 해마다 한두차례 한국을 방문하였으며 이를 통해 조선족이 겪고 있는 중국 공민으로서의 국민 정체성과 조선민족으로서의 민족정체성 사이에서의 갈등 즉 이중정체성에 대해 관심을 갖고 깊이 고민하게 되였고 그것을 주제로 소설의 굵은 축을 이루면서 문학적으로 형상화하게 됩니다.    허: 작가의 개성이란 작가가 일관되게 추구하는 창작방법론이며 작가 특유의 발견이고 기법이죠. 90년대 초에 들어오면서 제가 조선족의 정체성 문제에 사로잡히게 된 것은 한국을 알게 되면서예요. 정체성이란 인격동일성을 말합니다. 통일된 하나의 인격을 가지고 자기가 누구인가를 잘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정체성 찾기가 필요하지 않겠죠. 정체성이 파괴되였거나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만 필요한 것이며 또한 필수적인 것이예요. 통일된 신분이나 인격에 대한 갈망은 거의 본능적인 욕구이기 때문이죠.     중국의 조선족은 반세기가 넘는 세월을 중국의 합법적인 공민으로 살아오는 속에 중국인의 락인을 찍어온 동시에, 무시로 할아버지 세대의 종족적인 기억을 일깨워주는 한국과 조선이라는 나라를 의식하게 되였죠. 저는 경계 지대에서 일찍 인과률이 어긋난 모순된 세계를 발견했던 것 같고 그것이 제가 조선족의 정체성 문제에 집착하게 된 요인인 것 같아요. 그동안 억제되였던 혈연적인 기억이 활발해지면서 한국땅을 자주 오갔지만 오히려 그 곳에서 자신이 이방인인 것을 알아차렸어요. 이방인의 존재상실의 원죄를 걸머지고 태여난 존재라는 걸 치렬하게 경험한 거죠. 그것은 마치 녀자로 태여나서 가족에게 소외되였던 그런 설음과 비슷한 느낌이더군요. 결국 저의 태생의 조건은 녀자임과 동시에 이주민의 후예라는 것을 철저히 인식하게 된 거죠. 그 때로부터 저는 ‘녀자인 나는 누구인가’로 부터 ‘인간인 나는 누구인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가지게 됩니다. 그 질문으로 씌여진 것이 바로 첫 장편소설 《바람꽃》이예요.     김: 선생님의 장편소설중 《바람꽃》(1996), 《누가 나비의 집을 보았을가》(2004), 《중국색시》(2014)를 일방에서는 3부 자매작이라고도 하는데요, 1996년에 시작하여 거의 10년 간격으로 출간되였죠. 그중 《바람꽃》은 불법체류자의 신분으로 한국에서 겪는 조선족의 아픔을 그리였으며 조선족 나아가 인간이 부딪친 다양한 정체성을 소설화하고 있습니다. 《바람꽃》이 조선족사회와 한국에서 동시에 반응이 좋았던 것은 이민의 력사를 안고 사는 조선족의 애환을 다루었기 때문이 아닐가요?    허: 그런지도 모르겠어요. 아무튼 장편소설 《바람꽃》이 1996년 7월에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에서 3,100권이 출간되여 몇달 사이에 완판된 후 그 해 12월에 한국 범우사에서 재판이 되였어요. 그 때 국내에서도 그렇고 한국에서도 상당히 인기가 있었습니다. 한국에 가면 저의 이름을 ‘바람꽃’으로 부르는 사람도 있었고 지어 작품 속의 주인공 이름으로 불러주는 사람도 있었어요. 그 기분이 그야말로 짜릿하더군요. 작품 속의 주인공 이름을 기억해주는 것은 내 이름을 불러주는 것보다 훨씬 기분이 업되였어요. 소설에서 인물창조는 생명입니다. 인물이 전반 소설을 완성시키니깐요…    암튼 《바람꽃》은  흑룡강신문 신춘문예상에 이어 1999년도에 전국 제6회 소수민족문학 준마상을 받았지요. 한국에서는 KBS, 《조선일보》, 《동아일보》, 《경향신문》, 《한계레》, 《중앙일보》, 《문화일보》 등 한국의 주요 신문에 전격 소개되기도 했어요. 그 때가 저의 첫번째 전성기였지 않았나 싶어요.     김관웅교수님은 “허련순작가는 디아스포라문학의 새로운 탐구로 중국조선족문단의 새로운 주제를 개척했다.”고 평가하기도 하였고 미국 시카코대학 사회학 박사이며 한국 고려대학교 사회학과 교수인 윤인진교수님은 《코리안 디아스포라》란 책에서 《바람꽃》을 코리안디아스포라를 설명하는 근거로 하였으며 선문대학교 국제 유엔학과 최우길교수님도 론문집 《중국조선족 연구》에서 《바람꽃》을 조선족문제를 연구하는 근거로 제시하였습니다. 이미 《바람꽃》에 대한 20여편이 넘는 론문들이 나왔어요.     김: 《바람꽃》의 인기는 지금도 진행형인 듯 싶네요.    그 후 선생님은 ‘코리안드림’을 안고 밀항선에 오른 밀항자들이 벌이는 생명을 넘나드는 사투를 그린 장편소설 《누가 나비의 집을 보았을가?》를 펼쳐내죠. 정체성을 찾지 못해 방황하며 불행의식에 사로잡힌 조선민족, 여기저기 ‘집’을 찾지 못해 애처로운 날개짓만 하는 가여운 나비 같은 소수자의 슬픔을, 그들의 이야기들을 선생님은 밀항배에 담아냅니다. 《누가 나비의 집을 보았을가?》는 《바람꽃》의 주제적 성향의 계승과 승화로서 방황하는 조선족의 정체성 문제를 성공적으로 다루어낸 ‘력작’, 디아스포라의 정체성 위기와 그들의 비극적 운명을 잘 그려낸 ‘교과서’라는 평을 받고 있어요. 두 소설에서 그린 ‘바람꽃’과 ‘밀항배’는 결핍으로 흔들리는 조선족사회의 ‘상징’에 다름 아니지요.    허: 그래요. 두 작품 모두 조선족의 삶과 그들의 정체성을 다룬 작품인 건 맞아요. 하지만 《바람꽃》이 막연한  뿌리 찾기였다면 《누가 나비의 집을 보았을가?》는 ‘해체되는 조선족사회의 현주소’라고 보면 됩니다.     2000년 초에 저는 기존의 문학의 가치나 질서에 큰 혼란을 겪으면서 그 해탈의 방법으로 한국 류학의 길을 선택했어요. 한국 광운대학 대학원에서 문학 석사과정을 수료하면서 세계적인 문학의 흐름 속에서의 내 문학의 길을 새롭게 모색해 나가기 시작했죠. 조선족문단은 리념에 함몰되였던 80년대의 문학의 해탈과 더불어 무거운 이데올로기 문제나 굵직한 사건중심의 작품에서 벗어나 90년대부터는 일상의 문제를 감각적인 문체를 통해 표현하는 쪽으로 돌아섰어요. 일상적인 소재와 감각적인 문체로 독자들과 공감하는 것은 좋았는데 너무 사소한 일상에 치우침과 지나친 특별한 자아표현의 쏠림 현상에 회의가 들더군요. 한마디로 작품의 힘과 긍정적 에너지가 느껴지지 않았죠. 그래서 한 개인의 특별한 자아의식보다 우리가 살아온 공동체 사회의 현실을 확인하는 소설을 쓰고 싶었습니다.     장편소설 《누가 나비의 집을 보았을가?》는 바로 이 시기에 씌여졌어요. 소설은 《장백산》잡지에 련재한 다음 연변인민출판사에서 출간, 한국에서 2차 출간, 중국작가협회 번역지원으로 작가출판사에서 중국어로 출간, 무려 5차례 출간했고 김학철문학상을 수상했습니다.     김: 영광입니다. 그만큼 매력 있는 소설임을 말해줍니다.   디아스포라의 삶에 깊은 관심과 주의를 돌리면서 조선족들의 피해의식을 많이 다루어왔던 선생님은 장편소설 《중국색시》를 통해서는 갈등구조를 넘어 소통을 통한 인간의 리해와 가치를 말하고 정체성 문제도 변화할 수 있음을 보여줌으로써 정체성 찾기 문학에서의 새로운 화두를 던져줍니다. 디아스포라의 치유와 소통의 꿈을 담은 《중국색시》는 소설주제의 새로운 승화를 이루면서 조선족 디아스포라문학에서의 또 하나의 새로운 리정표가 되였어요.    “이왕의 조선족의 실존적 의미를 조국이나 민족의 개념에 두었다면 지금은 그것을 탈피하여 개인의 의식을 통해 확립하고저 고심해야 할 것 같다… 좀더 범인류적인 사고로 시작해 인간 내면에 실재하는 욕망의 문제, 진솔한 삶의 문제로 조선족이라는 특수한 상황을 보편적 인간의 정서에 대면시키고저 한다.”고 선생님은 말합니다.     허: 조선족의 정체성 문제를 새로운 시각에서 조명하고 싶었던 거죠. 《중국색시》는 소통과 치유를 말하며 그 속에서 자신을 넘어서는 진정한 자아를 찾아가는 소설입니다. ‘부모를 잡아먹을 아이’로 태여났다는 어두운 태생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단이와 교통사고로 부모를 잃고 한쪽 다리를 잃은 한국 남자 도균이의 외줄타기와 같은 아슬아슬한 ‘사랑’이야기를 통하여 정체성이 불투명한 단이라는 새로운 인물형상을 창조함으로써 인간존재에 대한 본질적인 의구심 해결에 끊임없이 천착하려 했으며 인간이란 결국 서로 동떨어진 존재가 아님을 암시하여 무기력하기 그지 없는 개인의 자아는 결국 타인과의 소통으로 이어져야 함을 강조하고저 했습니다. 고립되지 않는 타인과의 소통을 통해야만 자신을 넘어서는 진정한 자아찾기가 이루어질 수 있음을 믿게 하고 싶었고 《중국색시》를 통하여 저는 조선족만의 고립적인 디아스포라문학이 아니라 소통으로 경계를 넘어서는 디아스포라문학의 새 길을 열고 싶었어요.     《중국색시》는 2013년에 중국작가협회로부터 중점작품 창작지원을 받았으며 《연변문학》잡지에 련재된 후 선후로 연변인민출판사와 한국 새미출판사에서 출간되고 2016년도에 연변조선족자치주정부 진달래문예상, ‘한송문학상’을 받았으며 ‘한국세종도서’로 선정되였습니다.     김: 2004년 9월, 선생님은 서울 광화문 교보문고에서 《누가 나비의 집을 보았을가?》 싸인회를 개최, 1시간에 400권을 파는 기록을 올리고 교보문고와 연풍문고의 베스트코너에 책이 진렬되는 호황을 누리였어요. 한국사이트 다움과 네이브에 들어가서 선생님의 이름을 검색하면 선생님의 사진, 략력과 함께 한국에서 출간한 작품과 한국에서의 문학활동을 그대로 읽어볼 수 있는데 한국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이 오르는 자리에 버젓이 한자리 차지하고 있는 선생님을 보며 자랑스러웠어요. 일찍 첫 한국방문에서 선생님은 자신의 문학을 돌아보게 되고 한국을 통해 세계문학의 새로운 흐름에 눈을 뜨게 되며 진정한 문학의 가치가 무엇인지 고민하게 되였죠. 그 후 쭉 이어온 한국 행은 ‘부단한 껍데기 벗기’이자 가장 적당한 창작상태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이였고 서울 광운대학교 대학원에서의 늦깎이 문학공부는 의도적이고 체계적인 ‘키 크기’였으며 기를 쓰고 자신의 문학을 한국에 옮겨놓으려고 노력하는 것은 자신 문학의 조선족지역 문학에서의 탈출을 꾀함이였다고 선생님은 말씀하십니다.    허: 네, 그렇습니다. “한 나무 밑에 사흘을 서있지 말라”는 말이 있지요. 한곳에 오래 머물러있으면 썩게 되여있어요. 작가로서 제가 가장 두려워하는 건 변하지 않는 것, 침체되는 것입니다. 문학 하는 사람은 자신의 과거를 파괴하는 것으로만이 새로워질 수 있다고 봐요. 저는 장편소설 한편을 완성하면 한국으로 가군 했어요. 한 작품에 쏟아낸 에너지를 다시 채우기 위한 노력이죠. 그리고 또 다른 한가지 목적이 있는데 다름아닌 자신의 문학공간을 확장하려는 의도적인 행위였습니다. 2004년에 한국에서 싸인회를 했던 것도 바로 자신의 문학공간을 확장하기 위한 일환이였어요. 90년대 초부터 저는 한국에 저의 작품을 알리는 일을 해왔어요. 그런데 요즘에는 오히려 중국 문학권에 들어가고 싶은 생각이 더 강렬합니다. 중국작가협회의 창작지원과 번역지원 그리고 출판지원까지 이루어지고 있어요. 우리가 한국에서 받는 대우보다 중국에서 받는 대우가 훨씬 좋아졌죠. 요즘 저의 과제는 한족 독자들에게 재밌게 읽혀지고 그들에게 어필될 수 있는 작품을 쓰는 겁니다. 또 한차례 자신의 소설을 갱신해야 하는 리유가 생긴 거죠.    김: 항상 작가적 혜안으로 시대를 앞서가시는 선생님의 젊은 사유와 노력이 돋보입니다. 선생님 개인의 문학공간 확장은 결국 우리 문학의 공간확장이기도 하죠. 지금껏 조선족문학의 경계를 넘어서려고 애써오신 허선생님께서 이제부터는 당당하게 중국문단에 들어서서 조선족문학을 전 중국에 널리 알리는데 큰 기여를 하시리라 믿습니다.   한편, 문학이 언어의 예술인 만큼 작가는 언어의 대가가 되는 게 바람직한 일 아니겠어요. 선생님께서 한국을 다니는 또 하나의 리유가 “작가에게 고향이란 말 만큼 소중한 문학언어를 공부하기 위함”이라고 하셨어요. 실제로 선생님은 조선어와 한국어의 비교라는 제목으로 서로 다르게 쓰이는 말들을 수집하여 책으로 정리하고 있다고 들었는데요. 그런 부지런한 노력이 있어서일가요, 현실세계는 물론 인간의 내면세계까지 생생하게 전달해주고 있는 선생님의 소설언어는 그래서 한국의 독자들에게도 낯설지 않게 다가설 수 있었나 봐요.    허: 제가 1990년에 한국 《동아일보》에서 첫번째 소설집 《사내 많은 녀자》를 냈을 때 출판사에서 거의 백여곳에 주석을 달아 출간했습니다. 그들이 우리의 언어를 알아보지 못하는 단어가 한책에서 백여개나 있다는 말이죠. 그 때 충격을 받았어요. 문화적 차이로 서로 다르게 쓰는 것도 있었지만 우리가 잘못 쓰는 어휘들도 상당히 많았어요. 독자를 사로잡는 데에 잘못 쓰는 언어는 걸림돌이 될 수 밖에 없어요. 어느 독자가 사전을 찾아가면서 소설을 읽겠어요.    한국 출판사들에서 조선족작가들의 책을 출간하면서 가장 어려워하는 것이 바로 언어문제라는 것을 안 뒤부터 저는 우리가 다르게 쓰는 언어와 잘못 쓰는 언어를 수집하게 되였는데 책 한권의 분량이 된 거죠. 덕분에 지금은 한국에서 책을 내도 주석을 달지 않습니다. (웃음)   김: 90년대 초반에 선생님은 다니고 있던 직장에 서슴없이 사직서를 내셨어요. 개혁개방의 물결 타고 ‘하해’의 바람이 몰아치던 시기, 사직의 리유가 ‘어이없게’도 ‘하해’가 아닌 글쓰기 때문이여서 많은 사람들이 그 사실을 선뜻 받아들이지 못했죠. 보잘 것 없는 원고료로는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운 실정이였으니까요. 하지만 세계문학의 흐름에 합류하는 길을 걸어야겠다는 야망을 키우던 선생님은 그 목표에 이르기 위한 첫걸음으로 그런 대담한 선택을 하신 겁니다. 그렇게 선생님은 일찍 문학에 모든 걸 다 걸었고 오로지 작가의 외길만을 걸으며 문학에 몽땅 투신해왔어요. 그런 작가정신이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키기도 했죠. “나의 삶은 바로 문학”이라는 선생님에게서 문학은 어떤 의미일가요?    허: 문학에 저의 전부를 건 것은 1989년부터입니다. 첫 한국방문을 통하여 자신의 문학 한계를 발견하고 자성을 했죠. 아, 나는 아직 작가도 아니구나, 그런 생각을 치렬하게 했어요. 작가가 자신을 아는 것은 참 중요한 것 같아요. 자신을 알고 자신의 한계를 알게 되니 그 한계를 넘어서려고 노력하게 되더군요. 90년대 초에 제가 조선족사회에 갇히지 말고 조선족 사회를 넘어서는 작가가 되자 그런 이야기를 했을 때 일부 사람들이 “가장 조선족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다”는 말로 저를 반박하기도 했어요. 그 자체는 참 훌륭한 명제죠. 하지만 자칫 자기 함정에 빠질 수도 있어요. 즉 내 안에서 내 것만 옳다는 아집에 빠질 수 있죠. 남의 것을 알고 내 것을 주장하는 것은 지혜지만 남의 것을 외면하고 자기 것만 고집하는 것은 아집이지요. 우리가 조선족문학을 넘어서지 않으면 스스로 자기 우물에 갇히게 되며 그렇게 되면 자연히 도태될 수 밖에 없어요. 저는 자신을 넘어서고 지역문학을 넘어서기 위한 첫걸음으로 직장에 사표를 냈던 거예요. 작가가 되기 위하여 밥줄이 되는 직장에 사표를 내는 것은 당시로서는 쉬운 일이 아니였지만 창작에 도움이 안되는 모든 껍데기들을 벗어던지는 일이 저한테는 절실했어요. 당시 36살이였는데 늦었다는 생각이 들면서 조급했거든요. 지금 생각하면 그 때 선택이 옳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김: 참 담대한 결단이였던 것 같아요. 그런 선택은 선생님으로 하여금 흔들림 없이 앞만 보고 달리게 하였으며 40년이 넘는 작가 생애에 선생님은 정말로 풍성한 성과를 이룩하셨지요. 장편소설 《바람꽃》(4판), 《누가 나비의 집을 보았을가?》(4판), 《뻐꾸기는 울어도》(4판), 《잃어버린 밤》, 《중국색시》(2판), 《춤추는 꼭두》(련재중), 소설집 《우주의 자궁》(2판), 《바람을 몰고 온 녀자》, 《유혹》, 《사내 많은 녀자》, 《그 남자의 동굴》, 인물평전 《사랑주의》(조, 한어 20여쇄) 출간. 단편소설 , 가 각기 초중, 고중 조선어문교과서에 선정. 10집 드라마 , 20집 드라마 , 장막극 , 등 수편 창작. , , 등 중단편소설이 중국어로 번역되여 《민족문학》과 《소설선간》에 실렸습니다. 그 중 《민족문학》에 발표된 소설로 《민족문학》 년도상을 련속 세번이나 받았어요. 그리고 제6회 전국소수민족문학 준마상, 길림성정부 소수민족문학상, 제1회 단군문학상 등 30여차례의 문학상 수상. 연변작가협회 부주석 력임. 중국작가협회 회원, 국가 1급 작가, 제11회 연변조선족자치주 정협위원… 이런 주렁진 문학성과와 화려한 경력 우에 “나는 소설을 쓸 때만이 비로소 숨을 쉬고 있음을 확인한다.”는 선생님의 목소리가 겹쳐지며 원고지만 채우면서 열심히 살아오신 선생님 모습이 우렷이 떠오릅니다. 뚜렷한 인생목표를 갖고 작품을 벼낟가리 쌓듯 차곡차곡 쌓아올렸지만 그 길이 마냥 순탄하지만은 않았을 거라 생각해요. 한편 또 한편의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 선생님은 끊임없이 사색하고 고민을 거듭했을 겁니다. 현재 선생님 앞에 놓인 문학에 대한 고민 들어볼 수 있을가요?    허: 고민이 참 많습니다. 모르고 글을 쓸 때는 편안했는데 지금은 알아서 불편한 것 같아요. 새로운 소설을 쓸 때마다 어떻게 새로와질 수 있을가, 어떻게 지난 것을 돌파할 것인가? 그것을 가장 치렬하게 고민해요. 문학의 생명은 돌파와 새로움에 있으니깐요. 소설이 담고 있는 주제 뿐만 아니라 인물, 형식에 이르기까지 모두 새로워지려고 고민합니다. 아, 고민거리가 또 있어요. 작품성과 대중성을 동시에 얻어내고 싶은 게 또 다른 고민이기도 해요. 작품이 너무 대중성에만 기대면 품격이 떨어지고 작품성에만 기대면 독자를 잃게 되죠. 두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는 좋은 작품으로 독자들에게 많이 팔렸으면 좋겠어요. 작년에 연길 신화서점에서 장편소설 《뻐꾸기는 울어도》 싸인회를 연 적 있는데 국내에서는 처음 가진 싸인회였지만 많은 독자들이 찾아주셨어요. 오전 두시간 반 만에 거의 800권을 팔았거든요. 싸인회라는 게 독자들과 직접 교감할 수 있는 자리여서 그들이 뭘 원하는지를 알게 되죠. 작가들이 이런 자리를 많이 만드는 문화적 풍토가 만들어졌으면 좋겠습니다.    김: 선생님께서 선코를 뗐으니 앞으로 많이 이어졌으면 좋겠네요. 금년 1월부터는 또 장편소설 를 《연변문학》에 련재하고 있는데 어떤 소설인지 간단한 소개 부탁드립니다. 앞으로의 창작에서는 또 어떤 타산이 있으신지 궁금하네요.    허: 는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조건을 이야기하는 소설이며 이 시대 가장 힘 없는 사회적 약자와 소외된 사람들의 이야기예요. 가난과 부서진 가족의 이야기인 동시에 아프고 힘들어도 항상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상황을 바라볼줄 아는 슬프지만 따뜻한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주인공 ‘꼭두’라는 이름은 상여 우에 세워놓은 인형인데 망자를 위로하여 무덤까지 동행하는 존재예요.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의로운 일을 한다는 의미의 상징이죠. 그 의미를 살리려고 주인공의 이름을 ‘꼭두’라고 지었어요.     한마디로 는 부모로부터 버려진 고아들의 이야기예요. 버려졌지만 끊임없이 자신이 왔던 곳으로 돌아가고저 하는 아이들의 행위를 통하여 인간의 일상적인 신중함 속에 숨겨진 부조리와 삶에 감춰진 진실을 끈질기게 파고들면서 인간의 본능적인 근원에로의 회귀의식을 쓰고저 했어요.     앞으로의 타산에 대하여 물으셨는데 쓰기 전에 많이 말씀드릴 수는 없고 짧게 말씀드릴게요. 급변하는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의 고민을 다루는 장편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김: 네. 조선족문단에서 지금껏 취급하지 않은 제재여서 신선할것 같아요. 앞으로 좋은 작품 많이 기대합니다.   모처럼 만나 참으로 소중한 얘기 많이 들었어요. 우리 문학에 굵은 력점 찍으며 멋지게, 빛나게 살아오신 선생님의 인생에 박수를 보내드립니다. 그리고 저 자신에게 게으름을 쫓아내고 좀더 열심히 살도록 채찍질 할 수 있는 충전의 시간이여서 좋았어요. 고맙습니다.   허: 제가 오히려 많이 배우고 갑니다. 애쓰셨어요! 아프지 말고 부디 건강하기를 기원할게요!   출처:2017 제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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