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련순
아름다운 령혼으로 마주할 수 있는 빛
하필이면 그날은 ‘9·3’이였다. 일부러 그날을 택했던 것은 아니다. 명절에 대한 개념이 없는 나에게 다만 그날 시간이 있었을 뿐이다. 나의 방문이 김영금 선생님한테는 썩 반갑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아플 땐 어떤 방문도 귀찮은 법이니깐. 하지만 선생님께서는 내색하지 않고 편안하게 맞아주셨다.
지난해부터 다섯번씩이나 병원에 입원했다 퇴원하기를 반복했다는 김선생은 후덕했던 옛모습과는 전혀 다르게 불면 날아갈듯 여위고 수척하였다. 하지만 여전히 단아하고 품위가 있었다. 집안 정리도 정갈했고 옷차림새도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고 소박하고 단정했다. 어떠한 경우에도 그는 늘 그랬다.
몸이 불편하여 오래 앉아있지를 못하신다는 말씀에 나는 마음이 초조했다. 어차피 긴 대화는 무리였다. 쫓기는 사람처럼 나는 서둘렀고 그런 자신이 스스로도 산만하고 부산스럽기 짝이 없었다. 선생님도 눈치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시종 모르는 척하셨다. 요즘은 수면제가 아니면 잠을 잘 수 없다고 하셨지만 사유가 분명하고 기억력도 짱짱하셔 당신이 취재하셨던 과학가들의 이름이나 나이 같은 것 그리고 과학상식에 대하여 거침없이 외웠다.
늘 그랬듯이 소가 여물을 새김질하듯 덤덤하면서도 느릿느릿한 그의 말투에는 세상을 달관한 듯한 무심함이 묻어있었다. 작년에 돌아가신 남편의 이야기를 할 때도 사회적으로 성공한 세 자식의 이야기를 할 때도 남의 이야기를 하듯 덤덤했다. 마치 슬픔이나 사랑이나 열정 모두를 덤덤함 속에 녹여내는 듯싶었다. 그래서 그의 말은 울림의 파장이나 감동이 더 짙게 우러나는지 모르겠다. 그에게서는 모든 삶을 살아낸 절제된 품위의 고귀함과 온화함, 그리고 정직함이 다분히 느껴졌다. 이미 인간으로 사는 일의 고통과 환희에 대해 심오한 리해에 도달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생님께서는 1987년에 출간한 첫 소설집 《바다가에서 만난 녀인》을 비롯하여 올해에 출간한 수필집 《흘러간 세월의 흔적을 지우고 싶지 않다》에 이르기까지 모두어 24권의 작품집을 냈다고 말씀했다. 그 말에 나는 깜짝 놀랬다. 언제 이리 많은 책을 쓰신 것일가? 글을 많이 쓰신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24권이나 출간했다는 사실은 처음 알았다. 그동안 시류에 휩쓸리지 않고 조용히 자기만의 일에만 몰두해온 게 분명하다.
그의 서재 속에 정연하게 렬을 짓고 있는 24권의 책을 손가락으로 헤다가 책갈피 속에서 조용히 흘러가고 있는 그의 80년의 인생이 느껴져 아련했다. 참으로 존경스러웠다. 그야말로 한 삶을 오롯이 글 쓰는데만 받쳐온 셈이다. 그를 수없이 보아왔지만 수없이 지나쳤던 시간들이 너무 아쉽고 후회되였다.
선생님은 평생 각별히 누군가에 더 깃들거나 다정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누군가를 더 미워하거나 랭대하지도 않았다. 그저 글을 쓰는 일을 소명으로 삶았을 뿐이다. 그가 진정 원한 것은 오롯이 글 쓰는 삶이였다. 생각하고 읽고 쓸 수 있는 단순한 삶 말이다. 그는 다른 사람들의 평가에 무심한 편이다. 타인의 말에 신경 쓰기 시작하면 신경 쓸수록 거미줄에 걸린 곤충처럼 자꾸만 감겨들게 된다고 하셨다. 남들이 하는 뒤담에 대해서도 “성공한 사람은 당연히 거쳐야 하는 과정” 이라고 심드렁하게 일축했다. 자신에게 속해있지 않은 것으로부터 손쉽게 휘둘리지 않는 확고함에서 그의 강인함과 평온한 자부심을 느낄 수 있었다.
뱀이 욱실거리고 가끔씩 호랑이가 어슬렁거리는 깊은 산골인 훈춘시 오도구촌에서 태여난 그는 류달리 작고 여윈데다 머리까지 노래서 어린 시절 ‘노랑머리’로 불리웠다. 그녀는 낮잠을 쉬고 있는 할아버지의 상투에서 동곳을 빼내다가 돼지우리 앞에서 땅을 뚜지면서 놀았던 개구쟁이 소녀였고 상투가 흐트러진 할아버지가 비자루를 거꾸로 들고 야단을 치자 돌을 뿌리듯 동곳을 홱 팽개치고 꽁무니를 뺐던 철부지 소녀였다. ‘어릴 적부터 길쌈을 삼고 베실을 비비고 도꾸마로 솜실을 뽑거나 식구들의 양말을 떴던’ 부지런하고 근면한 소녀였고 ‘피낟밥과 강냉이떡, 베치마 미투리 따위를 먹고 입었던’ 가난한 소녀였다. 중학교에 붙었던 첫날 아는 친구가 없어 남들의 눈을 피해 종이 울릴 때까지 화장실에 피해있었던 숫기 없고 부끄러움 많은 소녀였으며 앞에 나서는 것을 꺼리고 늘 뒤자리에 조용히 서 있었던 겸손한 어른이였다.
그랬던 소녀와 중년은 세월 속에서 사라지고 정작 우리 앞에는 운신이 어려운 80의 늙은이가 만신창이 된 육신을 거느리고 돌아왔다. 조석으로 마주 바라보며 함께 살았던 남편을 작년에 먼저 하늘나라로 보내고 그는 죽음에 대하여 더 가깝게 다가옴을 느낀다 했다. 있을 때 남편한테 잘해주라고 나한테 부탁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있을 땐 몰랐는데 그 빈자리가 너무 쓸쓸하다”는 말에는 먼저 보낸 남편에 대한 회한이 가득해보였다. 누군들 그 길을 가지 않겠는가. 다만 먼저 가고 후에 가는 것뿐인데 후에 가는 사람은 먼저 간 사람의 슬픔마저 짊어지고 가야 하니 더 슬픈 법이다.
한평생 직업녀성인 채 남편의 안해로 아이들의 어머니로서 그 어느 한가지도 내려놓지 못하고 그 모두를 운명처럼 혼자 짊어지고 그것들의 무게와 속울음을 각혈을 하듯 치렬하게 글로 토해냈다. 그리고 그 흔적을 지우고 싶지 않아 다시 책속에 부지런히 주어담아왔던 분이다. 그는 30여년의 기자생활을 하면서 누구도 감히 넘보지 못할 만큼의 기사와 문학작품을 써왔다.
기자생활을 접고 퇴직한 뒤에는 여느 작가들이 감히 생각지도 못했던 조선족 과학자들을 찾아나서는 일을 시작했다. 출장비와 출판비, 숙박비는 모두 자비를 털었다. 전국 10여개의 성을 돌아다니면서 쏟아부은 돈에 대해서 아깝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단다. 오히려 충분히 행복하고 보람이 있어 뿌듯하다고 했다. 그렇다고 집안생활이 유족했던 것은 아니다. 자식 셋을 석사, 박사생으로 공부시키면서 생활은 늘 빠듯했다. 경비를 아끼려고 그는 열시간 스무시간씩 지어 서른시간씩 렬차를 타고 뻐스를 갈아타기를 반복했으며 한번의 취재를 마치고도 미타하면 두번 세번을 찾아가고 그러고도 모자라서 전화를 하고 편지를 쓰는 방식으로 그 어려운 첨단기술과 과학명사 그리고 수자들을 정확히 밝혀냈다.
1993년 그는 전국 소수민족 소년아동 신문잡지회의에 참석했다가 대형 차사고를 당한 적이 있다. 그들이 탄 소형뻐스가 벽돌을 실은 대형트럭과 충돌하여 당장에서 5명이 즉사하고 합석한 모든 사람들이 중상을 입었다. 뻐스 안에서 밖으로 6메터나 튕겨나간 그는 오른쪽 얼굴 연골과 코뼈가 부러지고 팔다리뼈도 부러져 온 얼굴에 붕대를 칭칭 감고 팔다리도 움직이지 못한 채 두달간이나 낯선 신강의 병원에서 죽은 사람처럼 지냈다. 그러다 점차 얼굴의 상처도 나아지고 팔다리도 움직일 수 있어 보행기를 밀고 화장실도 갈 수 있게 되였을 때 연길로 돌아왔는데 채 낫지 않는 몸으로 또다시 과학자들에 대한 취재를 위해 북경으로 떠났고 딸의 부축을 받으며 과학자들을 찾아다녔다.
10년 동안 그는 70여명의 조선족 과학자들과 사회학자들의 사적을 책으로 써내 조선족과학자들의 새 력사를 기록해놓았다. 그의 살신성인 정신이 없었더라면 애초에 이루어질 수도 없는 력사다. 하나의 새 력사를 만드는데는 누군가의 희생이 동반되기 마련이다. 그는 자신을 그 희생자로 자처한 것이다.
김선생의 어느 수필에서 본 “그 시대 우리들은 모두 영웅이였다”는 말에 사무치게 공감한다. 어느 홍수피해지역에 취재를 갔다가 그는 갑작스러운 급성맹장으로 병원으로 호송된 적이 있다. 맹장이 터지기 일보 직전이였고 그는 수술실로 직행했다. 곧 수술을 시작해야 하는데 그는 수술전에 기사를 써내야 이튿날 신문지면을 채울 수 있다며 수술실에서 병원 호사 용지에 원고를 썼다. 그러다 보니 수술이 반시간이나 지체되였다.
그는 시종 자신의 뿌리로부터 타자와 교감하기 위한 속깊은 글을 써왔다. 그의 작품에서 우리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들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들과 마주하게 된다. 수필집 《훈춘―내 고향, 내 이야기》만 보더라도 지극히 부분적이고 개인적인 이야기지만 그 안에 전체적이고 공적이며 거시적인 구조를 단단하게 구축하고 있어 압도적이다. 그래서 이 작품은 20세기 조선족 민족사나 정신사적 차원을 이루어낸 기념비적 작품이라고 감히 단언한다.
작가는 시종 존재의 진정한 근원과 실질적 가치를 발견하고자 했던 것 같다. 고향을 찾아가 그가 던진 한마디 “그때의 내 동무들은 모두 어디서 살가?”란 질문은 치명적이다. 한방에 독자들의 가슴을 멍멍하게 만들기에 족했다. 이는 인간에 대한 그리움을 넘어선 인간 본연의 질문에 다름없다. 이 질문은 그의 다른 작품들에서도 거듭 다채롭게 되물어진다. 존재의 뿌리로 내려가려는 작가의 의도된 서사적 전략이 아닐가 싶다.
“그들은 누구인가?”가 아닌 “그들은 어디로 갔을가?”란 질문은 인간존재의 궁극적인 귀속에 대한 질문인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일가?”에 맞물린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을 숙연해지게 한다. 글에서 나오는 인물들은 화려하지도 않으며 손쉬운 세속의 양식에 기대지도 않는다. 우리들의 할아버지, 할머니, 할아버지의 삼촌, 아버지, 어머니, 고모, 이모, 동생, 조카들에 이르기까지 모두 우리의 삶을 돌이키게 하는 우리들의 아픈 이름들이고 버릴 수도 자를 수도 없는 우리들의 뿌리이며 속살이며 가지들이다. 그래서 그의 글이 우리에게 더 사무치고 아프고 그립고 애틋한 것이리라.
한때는 분명히 존재했지만 지금은 세상의 어딘가에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존재들에게, 어딘가에 고독하게 유페되여 있거나 닳아지고 소멸되고 상실되여가는 모든 것들에 대해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끊임없이 질문하는 것이 바로 그의 작품이다. 사라진 것들에 대한 단순한 아쉬움이나 그리움 때문이였을가? 단지 그뿐만이라 말하기에는 무거움이 너무 록록치 않다. 아마도 인간 존재로서 영원히 질문하고 답해야 하는 인간 일반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이여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모든 사라지는 것에 대해 안타까워하는 그의 따뜻함이 타인의 가슴에 스며들어 공감을 이루어내는 아름다운 미학에 성공했다고 본다. 그의 글은 그의 성격만큼이나 절제되여있다. 스스로 작품 속에 갇히거나 밀착하지 않고 한발 빼고 바라보는 덤덤한 시각과 까다롭지 않고 편안하게 읽히는 언어와 서사체가 오히려 심연을 울리는 충만함과 떨림을 주는 저력을 확보하지 않았나 싶다.
이제 그의 과제가 무엇일가?
나에게 커피를 타준다며 돌아선 그의 뒤모습을 보면서 나는 궁금했다. 마지막 수필집을 내고서 큰 딸이 “이제, 이게 마지막이다.”고 그의 절필을 권유했다고 한다. 하지만 아직도 글 쓰는 사유가 멈춰지질 않아 불편한 몸을 움직여 생각나는 대로 짬짬이 필기장에 메모한다면서 그는 나에게 세개의 노트를 한데 묶은 하늘색 뚜껑의 필기장을 보여주었다. 그것은 남편을 하늘나라로 떠나보내고 난 뒤의 감정을 적은 것이였다.
〈유언〉, 〈그가 떠난 뒤의 고독〉 등 자극적인 표제가 나의 눈에 들어왔다. 펼쳐보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지만 〈유서〉라는 제목의 무게가 너무 커서 감히 책장을 열어보지 못했다. 선생님께는 당신이 한평생 글에서 써온 고향의 자연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숙연했다. 그래서 감히 보여달라는 말을 꺼내지 못하고 다만 세권의 노트에 깨알같이 빼곡이 적혀있는 저 감성만으로도 책 몇권은 더 나올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을 뿐이다. 하지만 그 말을 하지 않았다. 자식들로부터 글 쓰는 작업을 제지당한 상태라는데 그의 마음을 꼬드기고 싶지 않았다.
아, 하마트면 잊을 번했다. 선생님에게는 화려하고 아름다운 작품이 또 있었다. 바로 그의 자식농사이다. 큰아들은 고급경제사로서 림업관리국 장백산 삼림집단공사 부총재이고 큰딸은 천진시 사회과학원 일본 연구소 연구원이고 법학박사였다. 작은딸은 북경대학 지구물리석사를 나오고 장학금으로 독일에서 자연과학 박사를 취득한 뒤 함부르크 대학해양연구소에서 일하고 있다. 어쩌면 이리도 탐스럽고 풍요롭게 자식농사를 잘 지었는지, 그 뿌듯함만으로도 선생님은 로년이 그다지 외롭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짧은 시간이였지만 그와 함께 있은 시간은 무중력의 무한대 속으로 흘러들기 시작한 혜성처럼 자유롭고 평온했다. 우리 문단에 김선생님과 같은 분이 계시는 것은 후배작가들인 우리들에게도 선물이고 축복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나는 그의 저택을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