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연산 선생은 1957년 8월 12일 당시 화룡현 서성진 북대촌에서 출생했다. 1982년 7월 연변대학교 조문학과를 졸업했고 1988년 광주 중산대학교에서 1년간 연수를 받았다. 1982년 8월부터 연변인민출판사 문예편집부 편집, 주임, 종합편집부 부장, 총편조리 등 직을 력임했고 2007년 연변대학교에 교수로 전근해 글짓기기초, 문학개론, 문예창작심리학, 소설창작론 등 학과목을 강의했다.
마음이 뜨거운 작가
2012년 1월 17일 연변방송국에 근무하는 필자는 고 류연산타계1주기추모특집을 방송한 적이 있다. 이때 우리 문단의 유명한 작가인 리혜선 선생과 우광훈 선생을 특별초대석에 모시고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는데 류연산 작가에 대한 그분들의 인상이라면 독서가, 장서가였고 수집광이라는것이다.
류연산 선생은 소설가로서 문학작품을 많이 읽었다. 세계명작은 그의 표현으로 말한다면 닥치는대로 읽은것이다. 특히 중국의 고전들은 더 많이 읽었었는데 “수호전”이나 “삼국연의”같은 작품과 중국고대의 경전들인 문심조룡이나 손자병법같은 작품도 읽었다. 수호전은 거의 암기를 할 정도로 읽었다. 그래서 중학교를 다닐 때에는 마을에서 책을 제일 많이 읽은 사람으로 통했고 책을 본 이야기를 듣겠다고 마을 또래들이 줄레줄레 찾아오기까지 하였다. 지금의 표현이라면 마을 또래들 중에서는 인기짱이였다. 그런데 아마 그때부터 력사하고는 무슨 인연이 있었나 본다. 력사소설이 더 많았고 그 후 소설창작에서도 력사제재를 많이 다루었다. 그의 소설의 대표작인 “흑치상지”, “수리재의 망부석”이 그렇고 작품집에 나오는 소설작품도 대부분이 력사제재이다. 이건 그의 독서 분야와 련관이 있다.
장서로 보면 문학작품과 력사서적이 반반이라고 보아야 할것이다. 후에 력사연구와 력사기행, 인물전기쪽으로 매료되면서 력사서적은 필요한 공구서적 그 자체였었다. 1992년에 우광훈 작가와 류연산 선생이 한국에 함께 간 적이 있다. 그때 한국의 서점에서 책을 구입한다는것은 월급쟁이 수준으로서는 언감생심 엄두를 못낼 때였다. 그래서 찾아다닌 곳이 낡은 책을 파는 고서점을 전전하는것이였다. 그곳에 가면 욕심나는 책들을 값싸게 구입할수 있었으니깐. 그런데 귀국할 때 책보따리가 너무 무거워서 우정국에 가서 부쳐야 했는데 우편료가 한화로 40만원이 들었다. 그때 백여원의 월급에 한화 40만원이면 인민페로 4천원이 넘는 어마어마한 거금이였다. 그때 그가 구입한 책들은 대부분 문학작품으로 그중에 세계명작이 많았다.
류연산 선생의 후기 창작이 력사와 인물전기에 치중해 있다 보니 취재가 필수의 전제조건이였다. 1995년 첫 력사인물을 한국의 한국일보에 련재를 시작하면서 그는 취재에 필요한 록음기, 사진기, 비디오촬영기를 구매했다. 그러다보니 사진기는 세개나 바꾸고 렌즈도 몇개를 구입하였다. 지금 그의 유물중에는 취재중의 록음테프가 백여개, 취재수첩이 십여권, 사진이 수천장이 되고 비디오테이프도 수백시간이 된다.
류연산 선생은 수십년간 발로 뛰는 조사와 연구, 불면불휴의 집필을 통해 동년배들의 추종을 불허하는 많은 우수한 작품을 남겼다. 늘 미래지향적인 열린 의식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사물을 관찰하면서 인생공간을 부단히 확대했다. 류연산 선생은 소설, 칼럼, 수필, 문화기행, 전기 등 다양한 쟝르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출중한 재능을 보여주면서 수십년간 근 천만자에 달하는 작품을 남겼다. 특히 장편문화기행 “혈연의 강들”, “심여추평전”, “류자명평전”, “최채평전”은 우리 민족의 빛나는 발자취와 우리 민족 영령들의 파란만장한 일대기를 다룬 문화기행과 전기문학작품으로서 선후로 중국 장백산문학상, 한국 기록문화상 등을 수상했는데 이러한 작품들은 우리 문단 보고문학 수준을 한단계 높이고 력사다큐멘터리붐을 일으켰다고 할수 있다.
류연산선생은 뛰여난 사회활동가로서 일찍 연변작가협회 소설창작위원회 주임, 흑룡강신문사 론설위원으로 활약했을 뿐만 아니라 제11기, 제12기 연변조선족자치주 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위원, 교육과학문화위생위원회 위원, 대표자격심사위원회 위원 등 사회직무를 맡고 활동했다. 상품경제의 충격으로 조선문잡지, 출판계통이 충격을 받고 있을 때 그는 사회조사에 적극 나서서 여러측의 의견을 청취한 뒤 정부의 정책적인 지원을 이끌어냄으로써 민족문화건설에 큰 기여를 했다. 뿐만 아니라 류연산 선생은 남한테 도움이 되는 인생을 살자, 챙기기만 하고 베풀 줄 모르는 삶처럼 가증스러운것은 없다는 좌우명을 갖고 늘 사재를 털어 가난한 이웃들을 껴안고 보듬어주었다.
연변대학에 자리를 옮긴 후에도 류연산은 막강한 실력을 보여줬다. 류연산 선생이 교직에 몸담은 기간은 짧지만 언제나 열정적이고 겸허한 자세로 스승을 존중하고 제자들을 사랑하면서 맡은바 교수와 연구사업을 깔끔하게 완수하였다. 특히 연변대학교 개교 60주년에 즈음하여 모교에 대한 불같은 사랑을 안고 수많은 관련 인사들을 취재하고 밤낮없이 붓을 달려 연변대학교의 력사와 인물, 일화를 다룬 “연변대학산책”을 펴냄으로써 모교의 축제에 소중한 선물을 하였다.
류연산 선생의 유언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세상은 참 아름다운 곳이다. 단 며칠을 살더라도 한번 왔다 갈만한 곳이다. 만약 천국이 있다면 나는 천국에 가서 우주공간에서 가장 좋은 관광코스는 지구의 인간세상이라고 홍보를 하고 다닐것이다.”
작가는 인간의 홍보대사이다. 이처럼 그는 생활과 자기의 직책에 충실했다. 류연산 선생이 암투병을 한다는 소문이 나자 먼 통화에서 제자들이 문병을 왔다. 제자들에 대한 사랑이 지극했기에 제자들이 불원천리하고 찾아올수 있었던것이다.
발로 뛰는 정열의 작가
우광훈 작가는 류연산 작가의 성공비결을 그의 꾸준함과 민족에 대한 사랑과 력사에 대한 깊은 리해력이라는 일가견을 내놓았다. 우리 민족의 민족사는 아직 정리가 잘 되지 못했다. 특히 류연산 선생이 력사연구를 시작하고 취재를 시작하던 때는 더욱 그러했다. 아마 이런 현실이 더더욱 류연산 선생을 민족력사연구에 치우치게 했을지도 모른다.
우선 류연산 선생은 노력가였다. 언제나 쉴새없이 연구하고 답사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부지런히 창작해왔다. 둘째는 행동성이였다. 사실 류연산 선생의 작품 대부분은 취재가 없이는 도저히 쓸수 없는 르포쟝르였다. 연변인민출판사에서 편집으로 근무했고 후에 연변대학에서 교수로 후학들을 가르치면서 취재를 떠나기에는 상당한 애로가 있었을것이다. 더구나 취재가 이곳 연변에 국한된것이 아니고 전국 어디나 널려있는 상황이였다. 그러나 그는 작품을 위해 필요한 순간이면 출발했다. 명절의 휴가, 휴식일, 출장의 기회를 모두 할애해버렸다. 바로 이런 행동성 즉 결심을 하는 순간 실천을 하는 행동성이 성공의 비결의 하나라 할수 있겠다. 마지막으로 민족에 대한 깊은 사랑이다.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이 모태가 되지 않는다면 그 어려운 탐방과 취재, 그리고 창작의 외로움을 이길수 없었을것이다.
류연산 선생은 방방곡곡에 답사 흔적을 남겼다. 그런 바탕이 작품의 환경과 인물과 주제로 살아 숨쉬게 됐다. 두만강, 압록강, 송화강, 흑룡강 이 4개 강 류역에 우리 중국 조선족의 뿌리가 있다. 우리는 조선반도로부터 이곳에 이민을 와 이 땅을 개척했고 또 이곳에서 이 땅을 지켜 일제와 피 흘리며 싸웠으며 감격의 해방도 이 땅에서 맞았고 지난 반세기 남짓한 기간 이 땅을 건설해 왔다. 그리고 이 땅에서 우리는 중국 조선족으로 자리매김을 했고 력대의 정치운동과 파란만장한 세월을 겪어오면서도 우리는 이 땅에서 변함없이 우리 민족의 문화와 전통을 지켜왔으며 그러면서 개혁개방을 맞았다. 그런 의미에서 류연산씨는 이 4개 강을 통털어 혈연의 강이라고 불렀다.
류연산 선생은 생전에 도합 11년의 시간을 들여 4대강을 답사했다. 11년간 두만강, 압록강, 송화강, 흑룡강 이 4대강 류역 1만 5천리를 걸어서 답사, 이 강들에 깃든 우리 민족의 이민사, 개척사, 투쟁사를 발로 써왔다.
특히 “혈연의 강들”을 보면 그의 발자취가 잘 보인다. 흑룡강을 취재할 때의 정경은 마치 드라마를 보는듯이 드라마틱하기도 했다. 령하 40, 50도가 넘은 혹한속에서 사진기가 얼어서 샤타가 눌러지지 않을 정도였다. 그리고 혈혈단신으로 낯설고 땅선 수림속을 헤쳐 가는 길에 수백리를 가도 차 한대 볼수 없는 무인지대를 거쳐 가기도 했다.
흑룡강을 취재하고 돌아와서 그렇게 혹한인 세상을 그렇게 인적이 드문 수림속의 길은 처음이라고 혀를 내둘렀다. 그러면서 이곳에서 차가 고장이라도 생기면 얼어 죽을것이라는 생각이 들더라고 하면서 웃었다. 사실 사고를 겪지 않은것도 아니였다. 압록강을 답사하면서 집안으로 가는데 이도백하에서 집안 가는 사이에 길에서 택시가 고장이 나서 중간에 가지도 오지도 못하게 되였다. 눈길에 차를 밀수도 없고 저녁 어둠은 짙어 가는데 오가는 차도 없고 완전 끝장이라는 생각이 들더란다. 그래서 걸어서 마을을 찾아 떠나 경운기라도 빌려 차를 끌어오려니까 눈길에 떠날수 없다고 가려는 사람이 없더란다. 그래 사람이 죽게 된다고 사정사정해서 겨우 경운기를 빌려서 차를 끌어왔는데 천신만고해서 집안성에 들어서니 새날이 밝더란다. 그리고 차가 물에 빠져 온밤 젖은 몸으로 떨던 일들도 있었다. 확실히 그의 취재는 바로 이런 신고속에서 이루어진것이였다. 바로 이런 책임감 있고 력사의 현장과 흔적을 하나라도 놓치면 안된다는 진실에 대한 추구가 있었기에 그의 작품은 베스트셀러가 될수 있었고 중국에 오는 력사학자들이나 민족의 력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의 필독서로 될수 있었다.
류연산 선생은 다산작가이고 다재이다. 초기에 소설창작이 위주였지만 후에는 력사, 수필, 칼럼 등 많은 쟝르를 섭렵하고 작품을 창작했다. 특히 후기에 섭렵한 칼럼과 수필들은 력사감 뿐만이 아니라 정론성, 인간성적인 면이 많이 부각되였다. 류연산 작가는 우선 소설로부터 실화문학에로의 변신을 성공한 문학가이다. 류연산 하면 우리 사람들은 흔히 그를 소설가로 아는 선입견이 있다. 대학교 때부터 소설을 써오던 류연산은 담임교원 박정양 선생님으로부터 자신이 수집해오던 컨텐츠를 제공 받는다. 백제의 장군으로 백제가 망한 후 당나라 장수로 빛나게 살았던 흑치상지와 고구려후손인 왕모중에 관한 자료를 넘겨받게 된다. 박교수님과 합작으로 두 분의 자료에 기초해 중편력사소설을 쓰면서 류연산 선생은 우리 민족의 고대사를 접하게 됐다. 그 기초에서 1982년 연변대학을 졸업하고 연변인민출판사 문예부에 배치받은 그는 항일렬사들의 이야기집 장백의 투사들의 책임편집을 맡으면서 우리 민족의 현대사도 접하게 됐고 이 과정에서 민족사의 연구가 충분하지 못함을 발견하게 되였다.
특히 그의 가족사적인 영향도 간과할수 없는데 증조할아버지와 할아버지는 독립운동에 참여한 분이기도 하다. 독립운동의 의병장이시고 민족의 독립운동사에서 중요한 분이신 증조부벌이 되는 류린석 장군과도 인척관계가 있다. 증조할아버지는 유학을 공부하셨는데 류린석 장군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이런 가족사적인 뉴대가 그를 민족력사에 심취하게 된 원인중 하나이고 그때로부터 민족사에 사랑과 흥취를 갖고 연구하게 됐다.
류연산 선생은 우리 문단에서 한국에 가장 일찍 간 사람의 하나이며 고국과의 교류에서 가장 일찍 력사의식이 튼 문인이기도 하다. 어느날 그는 친구 다섯명을 불러서 조선족이주실록을 만들자고 제의했으며 자신의 원고료 800원을 선뜻이 내놓았다.
류연산 선생은 이에 머무르지 않고 1991년과 1992년 해마다 3개월씩 한국에 체류해 있으면서 한국에 가있는 조선족들을 찾아 취재, 그들의 애환에 절은 삶을 료해하고 그것을 집필해 1993년부터 실화 “서울바람”을 《청년생활》잡지에 1년간 련재, 사회적으로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류연산 선생의 창작에서 가장 잘 알려진 글로는 “혈연의 강들”을 들수 있다. 그는 허구로 만들어진 소설이 날따라 독자들의 관심에서 멀어지고 있는 현실에서 우리 민족의 력사사실 그대로를 문학의 방식으로 쓴다면 사람들에게 력사도 알려주고 감명도 줄것이라고 인정했었다. 그때가 바로 1994년 11월이다. 그는 이때로부터 자기의 로임으로 우리 민족의 력사가 스며있는 두만강변에 대한 답사를 시작했다.
그는 도보로 다녔기 때문에 경비는 얼마 들지 않았다고 겸손하게 말한적 있다. 사실 당시 두만강변에는 차도 없었다. 류연산은 그 엄동설한에 화룡 숭선으로부터 룡정 삼합에 이르기까지 도보로 10일간 답사를 했다. 공사소재지에 가면 려관에 들고 촌에 가면 촌에서 가장 년로한 분을 찾아 그분들 집에서 류숙하면서 흘러간 옛 이야기들을 들었다.
이듬해인 1995년 2월부터 류연산 선생은 기행문학 답사기를 쓰는대로 한국 서울신문에 련재하기 시작했다. 그 원고료를 받아 3월부터 두달에 걸쳐 또다시 룡정 삼합, 개산툰, 선구로부터 도문의 량수, 훈춘의 경신 방천 즉 두만강 상류로부터 하류에 이르는 두만강 답사를 했다. 하지만 두만강 답사로 로정이 끝난것이 아니였다. 류연산 선생은 계속하여 1995년 5월부터 7월까지 압록강을, 1996년 10월부터 송화강을, 1997년에는 흑룡강을 답사했다.
1997년 6월, 북극과 가까운 흑룡강의 발원지 막하에 찾아갔는데 밤 10시에 해가 지고 새벽 2시에 해가 뜨더란다. 그해 12월에 또 막하에 갔는데 아침 10시에 해가 뜨고 오후 2시에 해가 지더란다. 12월의 기온은 령하 54-55도였다. 류연산 선생의 가족은 물론 친구들도 그 곳에 가지 말라고 권고했었다. 그런데 그렇듯 렬악한 환경에서도 막하 2만명 인구에 우리 조선족이 216명이 사는것을 발견했다. 처음 혼자 그 곳에 찾아갔을 때 정처없이 거리를 걷는데 길옆에 “아리랑개장집”이라는 간판이 보였더란다. 문을 밀고 들어가니 조선족이라고 그렇게 반가와할수가 없더란다. 그의 출현은 현지인들속에서 큰 반응을 일으켰다. 연변에서 작가선생님이 왔다며 조선족들이 하나둘 모이기 시작, 남녀로소마다 반갑다고 손을 잡아주었고 그곳에서 먹여주고 재워주며 우리 민족의 막하에로의 이주로부터 지금의 삶에 이르기까지 밤 새는줄 모르고 이야기해 주었다. 물론 술도 억수로 마시게 되였다. 조선족작가가 그 먼 곳에서 왔다니 아리랑, 도라지를 부르고 춤을 추는데 그때 민족의 정이라는것이 얼마나 귀중한것인가를 새삼스레 느꼈고 민족의 혼을 잊지 않고 살아가는 그들의 모습에서 더욱 큰 책임감을 느꼈다고 했다.
이렇게 씌여진 류연산 선생의 글은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답사기 두만강 1000리 , 압록강 2000리 , 송화강 5000리 , 흑룡강 7000리는 한국 서울신문에 1995년 2월부터 1998년 7월까지 매주 1회로 3년반 동안 련재되였다. 련재가 끝나자 그것을 “혈연의 강”들로 묶어 책으로 출판했다.
이 책 초판 서문에서 김병민 교수는 “혈연의 강”들을 읽으면서 문학작품을 읽는다는 쾌감보다는 민족의 력사와 삶의 현장속에 서있다는 숭엄한 느낌을 진하게 받았다고 평가했고 정판룡 교수는 이 책의 재판본 서문에서 이 장편기행문은 중국에 사는 우리 민족의 력사와 현황을 백과전서처럼 집대성한 책이라고 할수 있다고 평가했다. 왜냐하면 “혈연의 강”들은 우리 민족의 삶의 현장 뿐만 아니라 우리 민족의 고대사, 민족의 삶의 애환과 이주의 참담한 과정도 그려냈기때문이다.
류연산 작가의 창작반경은 국내 뿐만 아니라 해내외로 길게 이어졌다. 2005년 류연산 선생은 중편실화 “한 독립운동가의 운명”을 창작하여 한국에서 제41회 신동아 실화문학 우수상을 타기도 했다. 그리고 2003년과 2005년 그가 한국에서 출간한 책 두권은 한국 문화관광부에서 지정한 인문부문과 력사부문의 청소년 추천도서로 선정되기도 했다. 류연산 선생은 소설집, 수필집, 기행문학, 인물전기문학 등 지금까지 모두 22권의 책을 출판했다. 그중 중국에서 출판한것은 12권이고 한국에서 출판한것은 10권이다. 2004년 한해에만도 책 4권을 출간한 기록을 남겼다. 류연산 선생은 생전에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나는 력사학가가 아닌 문학가이다. 문학과 력사의 만남에서 문학의 형식으로 력사를 반영했다. 내가 갖고 있는 자료들은 그 력사시대를 살아온 분들이 직접 겪고 보고 듣고 느낀것들이다. 그것을 나의 력사지식으로 려과하고 찾을수 있는데까지 력사자료들을 찾아 대조하며 문학으로 반영했다. 하지만 력사학의 견지에서 보면 나 스스로도 결함이 보인다. 이 면에서는 내가 공를 더 많이 해야 하고 력사학가 차원에서 나를 제고시켜야 한다. 우리의 력사사실을 더욱 재미있게 풀어나가고 많은 사람들이 우리 민족의 력사를 취미로 읽을수 있도록 필력을 닦겠다.”
지난 세기 90년대 중반부터 류연산 선생이 수집한 자료들은 상당한 분량이고 모두가 소중하다. 그 많은 자료를 책으로 출판하지 못하는것으로 하여 류연산 선생은 생전에 여간만 애간장을 태우지 않았다. 그동안 많은 로인님들이 사망되면서 우리 민족의 산 력사들이 소실되고 더는 복원될수 없는 일들이 많기 때문이다. 류연산 선생은 자신의 답사가 10년 더 앞당겨 진행됐더라면 더 많은 우리 민족의 력사를 발굴했을수 있었을것이라는 후회를 안고 있었다. 이런 조급한 마음으로 그는 력사를 기억하시는 분들이 한분이라도 더 세상을 뜨기 전에 자료들을 수집하느라 악전고투했던것이다.
생활을 무척 사랑했던 류연산 선생께서 55세의 아까운 나이로 3년 전에 우리 곁을 떠났으니 참으로 아쉽고 절통한 일이다. 비록 그의 육신은 이 세상을 떠났지만 그는 우리 모두에게 너무나 소중한 정신적 유산을 남겨주었다. 류연산 선생의 일대기는 우리 민족 문화발전사에서 한페지를 차지할 분량이기도 하다. 한생을 골몰히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순방답사한 그의 숨결은 오늘도 두만강에, 압록강에, 송화강에, 흑룡강에, 해란강에 도도하게 이어질것이고 남긴 저작들은 후세들의 보물고로 충당될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류연산 작가는 비록 떠나갔어도 혼신을 다 바친 그의 문학정신은 살아 숨쉬며 아울러 결사적인 혈투를 보인 작가적인 문학인기품은 우리가 영원히 본받을 귀감이다.
"중국민족"잡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