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호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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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아버지 성함 (외 6수) 댓글:  조회:216  추천:0  2023-08-07
아버지- 시킨 듯 깝죽거리며 호칭 실타래를 풀어뜨리다   기다마케 되감아도 길 찾는 술래다   그렇게   아-름차도록 버-젓하도록 지-혜를 늘이려나   아버지가 나를 코 꿴 고삐로 하오동 아리랑 열두 고개를 넘노라니   아-름답게 버-거운 지-름길   말뚝으로 기다리다 기둥으로 만나다   아버지 묘역 아버지 동네!     릉소화의 집   생잎이 떡잎이도록 채 줏지 못했다 감아서야 담았으니 눈알은 방안이다.     산의 보모들   산이 산을 업으니 등짐이 멜짐을 이다 산을 산에 주었다고 잎주머니 뿌리 입을 먹다   산은 산만 보았을 때 갈 때가 올 때다.     정영수 뜰에   먼 세월을 막차로 놓쳐도 곁의 옷자락만은 잡은 채 노 젓던 강변의 산천어와 아리랑고개의 계곡 들어섰다   맨발이 빙하수를 마시고 포옹한 숲의 장딴지들이 탁족회를 열면 너울 쓴 구름과 가마 타던 정월 눈보라 궂은비로 세수하던 뒤안길 따라 올가미에 걸려들었다   무지개를 짓뭉갠 홍분 입맞춤 가슴을 얼룩진 코수염새우 쇼후즈 설렁탕 서로끼리 나누면 래일의 차표 잎이 꽃 속에 고속도로 달리고 뿌리가 줄기한테 헬기 몰고 와 우듬지 화라지에서 어제와 래일이 어깨 겯다   실망과 원망이 갈망과 희망의 오누이 분노와 분개가 분발과 분투의 쌍둥이 한줄 김밥처럼 나란히 손잡고 오작교를 넘어서니   뜰에는 아직도 정영수(精英树) 한그루 정미소를 지켜 사랑 겉곡식을 풋바심으로 방아 찧으란다 쿵더쿵-쿵쿵-쿵더쿵-칙칙폭폭···   껍질을 벗은 알몸들이 봉당에 허청에 원앙금침 펴고 동방화촉을 치르면 기장쌀이 팥꼬투리와 동거한다니 찰강냉이 록두와 석삼년 동침이란다   이제는 정원수로 맞벌이로 뒤란에조차 다락방을 짓는다 정영수 뜰에 앞뒤 구중궁궐에 하오동 평대문이 솟대를 높인다.     문턱을 넘다   꽃 폈다고 봄인 줄 알았는데 매화는 겨울에야 웃다 새 울면 생리별이 아니라 짝짓기 뒤풀이다 모르는족족 깨닫듯이 보이는 대로 비껴야리 향기도 눈물 밟고 걷거늘···     고향 어머니   꽃송일 잎이 받들었다 꽃과 잎을 뿌리가 이었다 그 꽃과 잎과 뿌리도 땅이 안았다   만삭이 된 채 동구 밖에서 날 기다리는 똬리의 동이 인 어머니 업고 선 지구가 무거워 떤다.     소리 속에서   무수한 소리들이 허공에 만났다 부딪치고 깨진다 더러는 우로 뛰고 일부는 추락한다 별로 돋은 건 청아한 옥음이고 떨어진건 꽃으로 다시 핀다 언제 보나 허무는 큰 소리만 칠 뿐 시나브로 종내는 사라지고 만다 보이는 숨결은 밤에도 소나무로 짙푸르다 나에게로 돌아온 소리의 날개에 나를 송두리째 태운다. 연변일보 
22    시조 별꽃밤나비(외 8수) 정호원 댓글:  조회:1184  추천:0  2020-08-07
시조          별꽃밤나비(외 8수)                                    정호원 어둠을 핥아 먹는 별 입술은 길잡이다 하늘의 식탁에서 대지의 먹이 찾아 혀바닥 날름거리며 존재위치 발하다 멀리를 눈짓하며 자체로 만든 광명 토한대로 길이 틔여 뙤창의 호롱불로 헤맴을 마무리하여 또 찾아낸 려행지 2019년 10월 23일 수요일 2019년 12월 20일 금요일 연변일보 발표      앙금의 보석 추억의 침전물이 숨은 힘 고여주어 덜 빠진 악의 늪이 평화의 무풍지대 해달의 웃거름 먹어 싱싱해진 삶의 날 2019년 10월 25일 금요일 2019년 12월 20일 금요일 연변일보 발표      애솔 선풍기 관청과 려염집의 소나무 차양아래 왕 침전 내려주던 궁궐도감 은병(銀甁) 두 개 청송이 볕의 차단기로 가리개 된 병풍틀 지붕이 된 생솔가지 더위 막는 차일장은 매달려 바친 향기 익어서 녹은 체온 이제는 한옥의 처마가 초당지붕 날개짓 2019년 10월 25일 금요일 2019년 12월 20일 금요일 연변일보 발표      달빛의 표정 마당발 구두주걱 갈라서 비킨 구석 바꾼 방향 꺾은 고개 휘여든 휘장속에 좀처럼 다르지 않는 허수아비 초상화 꼴지를 사렸으니 뒤쳐진 홀로 비표 나만의 력사 된다 몰려든 박물관에 조명을 바꾼들 각광이랴 보는 이는 렌즈 뿐 2019년 10월 31일 목요일 2019년 12월 20일 금요일 연변일보 발표      이삭까치밥 넘어져 줏는 별빛 일어서 만진 해살 등 대고 누운 잔디 몰몰 서린 향기입김 마고자 배자를 걸친 가슴 시린 날의 보자기 2019년 10월 31일 목요일 2019년 12월 20일 금요일 연변일보 발표     륭안악(隆安樂) 별곡 벽계수 성대모사 물안개 드레스폼 가두리 둔치에서 보리밥 냄새 짙어 오호라 다듬이돌이 수족관의 돌고래 2019년 10월 31일 목요일 2019년 12월 20일 금요일 연변일보 발표 구절초처럼 아홉번 죽어 아홉번 살어리랏다 둘이나 하나여서 몸과 맘 합쳐지나 낱개로 쌍을 이뤄 엉기는 송두리다 생김새 확 다른만큼 생각만은 덞기매 살맛이 부쩍 동해 살멋이 울컥 솟아 순간의 천년만끽 모질게 으시대듯 어화라 되도록이면 가슴처럼 푹하매 2019년 10월 30일 수요일 문학부에서 2019년 12월 20일 금요일 연변일보 발표     벨칸토 극장 서로를 가지려고 서로의 서로가 돼 나밖의 나로서도 너마저 내 안이다 다가서 녹아내릴 때 들엉기여 굳히리 2019년 10월 31일 목요일 2019년 12월 20일 금요일 연변일보 발표      인연 삼박자 스치면 만남 되고 머물면 연분이매 지나는 바람보다 깃들인 향기이매 어설픈 엇박자 아닌 속이 박힌 아람치 버무려 섞은 혼잡 추려서 가린 알짜 비치는 어둠속에 걸러낸 해살 한톨 마무리 뒤끝에서조차 첫 단추를 채운 손 2019년 10월 31일 목요일 2019년 12월 20일 금요일 연변일보 발표
21    [수필] 설 아닌 설날 댓글:  조회:834  추천:0  2019-07-14
설 아닌 설날 정호원   세월의 한고개 또 올라서도 갖고 온 솔방울은 여전히 꿈의 씨앗이다! 이제 넘을 언덕길에서 상록수 한그루 심으라고 전설처럼 들려주는가 싶다. 그래서 제야의 종소리도 새해의 일출도 공론화처럼 더불어 살아가는 속세의 멤버들과 속심을 나누고 일상을 토론하고 싶은가 보다. 본연의 숨결이 빚는 향기 속에 력동적인 스토리를 엮자고 말이다. 살았던 나날의 바라지가 살아갈 마무리를 전담한다니 다행으로 추억은 예이제 없이 아름다울 것이다!  그런데 올 송구영신에도 은근히 품은 유감은 여전히 발작한다. 왜 굳이 설빔이라는 대목에서만 인사하고 안부를 전하나 하는 반발 같은 의심이다. 혈통의 정영수와의 밀회 같은 커뮤니케이션도 무덤으로 통하는 터널이다. 장벽의 길은 폭파하고 파괴하고 나중에 정복이다. 기실 우리에겐 365일을 제외한 시간이 아닐지라도 얼마든지 교류할 공간이 푸짐하다. 그럼에도 종무식, 시무식 같은 고비사위에야 부랴부랴, 그것도 경직되고 고루한 축복이나 메시지가 오가는 게 심히 비좁고 액색한지도 모르겠다. 설에 나누는 덕담이 물론 훈훈하고 여유롭게 들려 회고와 감회를 유발하면서 새날의 희망과 새해의 다짐이 될 에너지가 맞는다.  허나 가급적 설이 아닌 평소에도 늘 따뜻하고 규칙적인 인사수작 내지 안부인정을 버릇하자는 게 발설의 단초이다. 그런 교류가 빈번하게 치러질 경우 전환기에 담긴 자타의 일상이나 여유는 늘 풋풋하고 활기로 넘칠듯 싶다. 그래서 올해는 나부터 설보다는 원단 춘절 전날이나 이튿날 혹은 련휴나 토요일, 일요일 등 범상한 나날에도 지인에게, 친구에게, 동료에게, 동향인에게 무작정 정례회처럼 공식적으로 파티를 가지거나 회식을 조직해 제목 없는 편안한 교류를 시도할가 한다. 무화과나무가 자살의 가지를 드리우고 있다면 배신자는 올가미를 받아야 한다. 시행착오를 단죄하고 구새 먹은 신화는 곰팡이를 벗겨야 한다. 가해자가 피해자로 된 원고와 피고간의 소송처럼 세말사엔 거창한 설법이 점철된다. 설에 죽음을 떠올리는 건 생명의 시한부를 전달해줄 의무에서다. 난청지대엔 전화도 걸고 타인을 통해 문안도 전해주면서 소통의 장을 극대화하련다. 각주구검에서 해탈되는 패턴이렷다. 매일과 같이 명절기분으로 상차림을 마련해 초대하고 환대하는 인정이 출범한 계기이다. 보다 넉넉하면서도 딱딱치 않은 리셉션이 되기를 바라는 설맞이 소감인지도 모르겠다.  얼마 전 대련의 와방점에 진출한 숙부댁을 독행으로 찾았다. 명절을 앞둔 인사였건만 내심으론 겸연하다. 방문자 역시 경직되고 고로한 답습에 로봇으로 작동되는 례속에 시달린다. 세간의 전통적인 세시풍속이라기보다 기존의 틀에 얽매인 수동이였으니 말이다. 차량의 동음이 드릴로 정서를 갉아먹는다. 쿠션도 송곳방석으로 배기다. 내가 조금만 생각을 달리한다면 이런 불행은 자초를 피면할 텐데 말이다. 하여 각도를 바꾸어 숙부를 내 위치에 모셨다. 나를 찾아오시면 어떠랴 하고 감히 주제넘은 망상을 발설한 계기이다. 립장이 다르니 견해도 부동하다. 버릇 따윈 차치하고 모던시대에 이런 통설이 정립되기까진 아직 시간과 과정이 필요함을 안다. 몸이 추워난다. 감수가 얼어든다. 문전옥답에서는 밭두렁, 논두렁 사이 두고 오곡백과를 가꾸면 능히 풍성한 결실은 가능하다. 먼곳의 어르신을 조카 앞으로 세배를 오라는 건 당연히 불효라고 자타가 꾸지람할 것이다. 과연 개념적이고 형식적인 제례除例로도 누리고 즐기고 풋풋한 여백의 지속으로 되는 일상은 설만이 아닐 것이다. 룰을 허물고 장벽을 없애는 통일의 오픈이 되는 타깃이 이 설에서 출발해야 함을 원하지만 말이다. 조금 위안스럽고 느긋한 모꼬지인 것 같다. 나부터 설을 쇠는 의미에 안주함이 우선이렷다. 제야의 종소리나 음력설의 폭죽소리 들리는 시점에서 정초의 다른 정설을 글로벌 화두로 제기하련다. 세초를 통해 설음을 토로한 것 같아 안스럽지만 언젠가 이런 구상이 보다 활기로운 맥락이 되지 않을가 싶다. 더는 옹색하고 경직된 세리머니의 타성에서 맴돌지 말고 이제라도 살아가는 울렁임의 비공식적인 퍼레이드가 되길 바라는 설의 입문개입이자 존속가치이다. 씁쓸하게 자제하는 컨트롤로 개년改年의 또 다른 모멘트이자 잠재력을 이끌어낼 의향은 그래서 가변성을 견주는지 모르겠다.  와방점에서 아니나 다를가 곤혹을 치렀다. 다음 해엔 숙부가 날 방문하라는 악의 없는 익살에도 대방은 대뜸 노기등등해 야단친다. 항간의 프로필이자 시대의 자화상이다. 난 개의치 않는다. 이미 준비한 바가 있었다. 굳이 규정된 스케줄에 얽매워 일맥상통이 아닌 허례허식의 수다를 떨거나 맞절을 주고받는 게 작히나 꼭두각시 탈춤이랴? 설에 미루었던, 묵었던, 겹쳤던 인사나 효도 혹은 안부를 한꺼번에 쏟아내 봉창하는 것 같아 심히 찜찜하고 꿀꿀한 것은 몇년 전부터의 고민이였다. 해프닝이지만 내심을 원맨쇼로 보여주어 드디여 조금 개운하다. 이제 세수岁首 아닌 평일에도 해후 같은 기분을 동반한 인사수작이 빈번할 때 우리 동네, 우리 회사, 우리 혈육, 우리 친구, 우리 패밀리가 더 밀도 있는 통기성을 가질게 아닐가? 평소에 눅잦혔고 숨겼고 스쳤던 진실들을 공유하는 것으로 설의 편협적 타이틀에 도전했다. 명절의 새삼스런 의의가 푸짐하다. 틀에 박힌 답습을 당장 전격 소환해 응징하고 보다 참신하고 활성화된 페스티벌을 확실하게 발족, 보급함을 수긍하지 않을 수 없다. -조카, 가만히 보니 네 말이 일리 있다. 담 설엔 내가 연변 가마!… 며칠 뒤 숙부가 느닷없이 전화를 걸어왔다. 고백과 탄백이 동시에 묻어났다. 일요일이나 명절 아닌 평소에 마주치는 막걸리사발이 설에 마시는 모태주보다 더 향기로울지 모르겠다. 부담없이 자작자음하듯이 자유롭고 편안한 심성이 휴식과 차분함의 감미를 시식하게 할 테니깐. 설이 기다려진다. 숙부를 맞이할 준비에 설렘을 눙친다. 아니 할랑거린다. 서재의 독실에라도 궁궐처럼 환대하련다. 어쩌면 최초의 새해맞이 법전인지도 모른다. 생산적이고 건설적이다. 매년 설이면 년하장, 엽서, 선물들이 전보, 우체국, 교통도구를 리용해 배달되던 진력하고 질린 이왕지사들을 현재 나로부터 외면하며 선웃음을 짓지 않는가? 자업자득의 실수를 반복하지 말고 이제는 보다 똘똘 뭉치고 짱짱하게 빈틈을 메울 살맛 나는 만남을 핍진하게 가질 수 있을가? 더는 세배나 안부가 설에만 행할 수 없다는 사실을 떠나서 보다 광역화를 노린다는 점에서는 나중에 마침내 공감에로 골인할 것임을 믿어의심치 않으련다.  -복무대로 랭면 한그릇이면 만족이야! 글구 썩장과 도라지무침… 투도온면도… 숙부가 이튿날 또 전화를 주셨다. 초대에 부담을 덜련다는 의지가 내비쳤다. 메뉴선정이 고작 토속적이고 꽤 사치한 저급이다. 그럼에도 일파만파로 퍼지는 설의 또 다른 기류가 동네방네 안방을 감돌아든다. 도시와 외곽 그리고 해내외를 풍미하면서 새 전설을 만들어내려는 시도가 선명하고 간절하다. 파격적이고 이설적인 돌직구일지라도 나중엔 초연하게 동조하리라 본다. 리액션보다 실험 내지 호응 또는 관행이 이뤄지지 않을가 하는 호기심은 사유기제전환이 완성할 여분의 잠재력이다.  -아니요, 숙부님! 제가 실례했습니다. 제가 담해도 찾아가 세배 드리고… 대련  해산물 생회로 청도맥주 나눕시다! 이번엔 내가 사과와 감응으로 굴복과 투항을 선고한다. 설의 래왕에서 세태의 보완과 향유를 달성한 경지에 이른 것이다. 첫눈에 반한 이성은 덧정이 들고 처음 타개한 민속은 실행으로 고착된다. 설 아닌 설날이 나에게 우리에게 어떤 포지션을 갖다줄가? 떡국, 삼색나물, 찹쌀식혜, 나박김치의 또 다른 맛을 그런 퍼포먼스로 걸맞게 만끽할가 한다.  숙부를 떠올리며 또 아직 개방적으로 통하지 못한 구석을 포함해 가깝게 부닐고싶다. 설익은 설보다 설설 끓는 또 다른 설날에 우리 자주 상봉할 시대적 감수성에서이리라! 드링크는 물론 새 메뉴들의 무한리필은 계절 없이 오픈해 성업 중에 있다. 오시라, 혼행처럼 부담없고 완주처럼 스릴을 감내하며 환득환실할 것이깐.  -흐흐… 그럼 조카가 나한테 장훈을 친 걸 되물리나? 빅장?!… 숙부가 변죽을 울린다. 난 도전에 태클을 당한 역습이지만 되려 흐뭇하다. 비난의 블랙홀은 명절콘서트로도 규정이 가능한 리유에서다. 한결로 엉켜 스케줄이 담뿍 찬 설을 비우고 보다 풍성한 실속을 누림이 소원이다. 이것 또한 레지스탕스와 자률의 오케스트라 통합이라 할가 한다. 진부한 고태의연에서 떠나 새 마을, 새 도시로 옮기는 게 의식전환이자 사상해방이다. 설에 대한 외곡 내지 롱간이 이제 어떤 풍파 내지 물의를 일으킬 걸 미리 감오한다. 추세이자 동향이렷다.  꺾이는 상승세와 급증하는 신드롬의 대결이 시나브로 교체기를 만든다. 아직은 자원봉사자나 시민단체에서조차 발기된 청원서와 전단지도 없는지라 그냥 일각에서는 나름 대로 제안하는 바이다. 다행스럽고 고마운 건 숙부처럼 혁신으로 다가오는 선각자가 간세지재처럼 계시여 덜 불미스럽다. 자기를 허물고 신선한 것이라면 바이러스조차 수납할 그릇뚜껑을 여는 손짓이 돋보일 따름이다. 정경유착 있듯이 전통세시와 시대민속의 접목합성이 치르는 미풍량속의 새 버전 콤비이다. 몸집을 크게 불린 설 아닌 설날을 자수서처럼 낱낱이 이실직고하며 그렇게 쇠고 싶다.  설 아닌 설날이 더는 핫이슈가 아닐 줄 믿어야 하는 까닭을 오프라인 모멘트에 게시한다. 장님도 귀머거리도 까꿍- 한번 불러주면 어떠랴 싶다. 초강수의 앵글숏인지 몰라도 감히 배독을 권장할가 한다. 갑질고객처럼 잡음을 튕긴다고 구시렁거린들 아직은 참작할 시점인 까닭도 짓씹자고 말이다… 출처:2018 제4호
20    연변조선족자치주인구 댓글:  조회:1187  추천:0  2018-06-21
장백산 아래 오붓한 백도라지마을이라면 당연히 연변조선족자치주 판도를 지칭하는 상징패턴이라겠다. 치마저고리, 렬사탑, 민속촌, 용드레우물, 만무과원, 백옥미, 인삼, 담비가죽, 록용···조선족집단지의 외곽 이미지이다. 허나 최근 들어 인구감소가 급격하다고 아우성이다. 인구규모, 인구구성, 인구동태 등과 같은 인구의 특성은 경제성장, 건강, 교육, 가족구조, 범죄류형, 언어, 문화 등 다양한 분야에 영향을 주고 있으며 인류사회의 거의 모든 면들이 인구추세에 관련되여있다고 일찍 인구학은 제시했다. 2000년 11월 1일 0시까지 연변 상주인구는 220만 9646명이다. 돈화시 48만 834명, 연길시 43만 239명, 룡정시 26만 1551명, 왕청현 25만 5882명, 안도현 22만 315명, 화룡시 21만 5266명, 훈춘시 21만 1091명, 도문시 13만 2368명이다. 도합 71만 1845세대의 가정이 있으며 남자가 113만 4382명으로 51.34%이다. 특기할 것은 한족인구가 134만 3239명으로 60.79%를 차지하며 여러 소수민족인구가 86만 6407명으로서 39.21%를 점한다. 2000년 연변조선족자치주 조선족인구는 80.12만명이다. 1990년 제4차 조사 때와 비하면 한족인구가 15만 5977명으로 13.14% 증가하고 여러 소수민족인구가 2만 6233명 줄어들어 2.9% 감소되였다. 여러 소수민족인구의 범위는 물론 조선족이 절대 다수 비중을 점함을 알아야겠다. 도시인구가 148만 5483명으로 67.23%이고 농촌인구가 72만 4163명으로 32.77%를 차지한다. 이 공보는 인공수표 방법으로 쾌속 종합한 총수자이다. 그러나 꼭 주해로 제기하고픈 건 상기 조선족인구수자 속에 몇십년 전에 연변내의 한족들이 사사로이 암거래로 배우자 일방을 소수민족으로 고쳐 자식을 조선족, 만족, 회족, 몽골족, 쫭족, 시버족, 묘족… 등 15개 소수민족 일원으로 출생신고를 등록했다는 사실이다. 결과 86만 6407명 여러 소수민족인구 속엔 한족개입이 호적화, 법률화, 합헌화됐다는거다. 2010년 전국인구조사 수자에 의하면 연변의 상주인구는 227만 1600명이 된다. 2000년 11월 1일 0시의 제5차 전국인구 조사와 대비할 때, 십년간 모두 6만 1950명이 증가되였고 2.80% 증장되였으며 년평균 증장률은 0.28%였다. 연변상주인구중, 모두 84만 8380가구가 있는데 인구는 219만 4868명이며 평균 매 가구의 인구는 2.59명이다. 이는 2000년 제5차전국인구조사중의 2.99명보다 0.40명 감소된 셈이다. 2010년말까지 연변에는 조, 한, 만, 회 등 20여개 민족이 살고 있다. 조선족인구는 82만명으로 37.7%를 차지하며 한족이 59.29%를 차지하고 기타 소수민족이 3.01%를 차지했다. 2013년말 기준 연변주 인구 227만 6000여명중 조선족은 79만 9000여명으로 전체의 35.1%를 차지했다. 2016년말, 호적 총인구는 146.6만명으로서 총인구의 69.2%를 차지했다. 인구 출생률은 8.36%, 사망률은 6.87%, 자연증장률은 1.49%였다. 2016년말, 총인구중 조선족인구는 75.9만명으로서 총인구의 35.8%를 차지했다. 연변조선족자치주 인구감소는 흑룡강성, 료녕성 산재지역과는 다른 그 자체의 특수한 시대적 배경이 있다. 한국을 비롯한 기타 우리 민족이 집중한 여느 나라에서도 동포인구 감소가 비일비재라는 보도가 나돌고 있으나 필경 연변 경우와는 이질적으로 다르다. 자치주인구라는 통계수치가 시사하는 바를 결코 간과해선 안될 줄 안다. 조선족이 주축의 35.8%라는 집계는 수자렬세, 인구감소라는 위기에 몰닉했음을 판정한다. 패밀리 사이즈가 국가제정의 생육지표도 완성 못해 ‘락제생’부부들이 부지기수렸다. 현행 ‘연변조선족자치주 위생 및 계획생육위원회’라는 간판의 내함을 체크하지 않을 수 없다. 연변조선족자치주 인구감소가 주는 충격 내지 화제는 왜라서 이처럼 심각하고 민감한가?! 그것은 바로 연변조선족자치주가 중국권내에서 제일 처음 조선족자치주라는 민족공동체 패찰을 단 종족집단 부호의 위력 때문일 것이고 다음은 전반 연변판도가 조선족이 제일 많이 모여사는 집거구라는 데서일 것이다. 이 량자의 우세특징으로 규정된 연변이미지는 집중과 중심의 매력으로 각광을 받았기에 그만큼 오늘날 실망감 역시 큰 걸로 해석된다. 단순한 자치주인구라는 통계이지만 공동체의 존재가치를 시사한 까닭도 역시 세대교체의 사명감이다.
19    [수필] 현재의 존재 (정호원) 댓글:  조회:1017  추천:0  2017-07-19
수필   현재의 존재   정호원     생명치고는 오늘만큼 화려하고 진실한 게 없다. 시간치고는 금일만치 신선하고 감격적인 게 없다. 그렇다. 목하야말로 활력이고 숨결이다. 어제는 이미 살아버린 흔적이고 래일은 미지수의 약속이다. 그 사이를 오가며 세월은 가장 절실한 사연으로 생체를 보호하고 향수하고 인도한다. 이제 곧 태여날 갓난애도, 바야흐로 저무는 황혼에 스러질 락엽도 작금의 시금석으로 가치존재를 판별한다.   어제는 일요일, 교외의 채석장과 유허비 몇군데 바장이다가 해질녘에 강변에 머물렀다. 연집강에 류입하는 눈석임물을 한동안 관찰했다. 그저께는 당구장 어구에서 포스터를 감상하며 가로등이 사지를 놀리는 가상공간운동을 그려보았다. 래일은 려행사에 가 고종형의 비자신청을 대행해주어야 한다. 다 진실하고 그럴 듯한 명목의 스케줄궤적일텐데 유감스럽게도 오늘 행적만은 배제됐다. 가끔 지나간 춘추와 닥쳐올 미래구상에만 신경을 부리고 투자를 준비하나 막상 맞고 겪는 시처위에 한해선 홀시한다. 그래서 시나브로 루락되는 현실편린이 점차 불거져 나중엔 붕괴수위를 넘어선다. 무시무시한 변이는 늘 작은 펑크가 낳은 소산물인줄을 모른다.   수녀 마더 데레사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 오늘이고 세상에서 가장 큰 만족감은 책임완수’라고 명토를 박았다. 맞는 일가견이다. 오늘이 담겨진 생명에 대한 최고례절과 최대의무는 현재를 리드하는 운전기술에 비롯된다. 평준화보다 목전의 시점에서 자아를 성찰하고 문제를 분석할 때 그 성공효과비중은 놀랍게 극치를 릉가할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 사랑만 아니다. 애념을 주축으로 회전하는 핵심적인 전환점이 포인트다. 목금의 포장 속에 치밀한 안전성과 넉넉한 보장성을 제공받으면서 진행될 때 그 정감은 보다 완미하고 극진하다. 지방에서 도심으로 상경해 살아오면서 보노라니 오늘이 점점 무겁고 오염되고 거치장스럽다. 그러기에 윤택나게 닦으려 행주와 걸레를 자주 꺼내든다. 초침의 많은 음률 가운데 딱 금천(金天)의 숨결만 선거해 추천하는 리유는 그 것의 함의지배가 우선인 탓이다. 어설픈 풀뿌리에 매달린 이슬의 잔명처럼 가냘프게 그네를 뛸 것이 아니라 계절의 주근(主根)에 단단히 내릴 포착을 고려함이 우선이다. 아, 생태계를 가늠해보는 시험대에 나를 내세웠음을 시인하고 만다. 숲은 저만치 고요한데 살래살래 고개 젓는 향기의 재채기는 어런더런 환희에로 부르기에 충분하구나…   나를 관목림에 얼른 비끄러매고 잔생들과 호흡을 맞춘다. 최대 승부처인 자연을 모토로 삼고 오늘의 고삐를 세근에조차 동여맬가 한다. 유력후보처럼 나를 지지하는 목소리를 가까이 듣는다. 누굴가? 도전장을 내밀던 날벌레들이다. 그들은 이 생로를 포기한 채 카지노의 플레이어로 소일한지 오래된다. 자칫 오늘이라는 공간이 흥망성쇠의 진원지로 주목받기 십상이라는 결론을 미리 판단한다.   오늘에 초청장을 정중히 건네준다. 중국 삼국시대에 촉나라의 재상 제갈량이 출병하면서 후왕에게 적어 올린 글이 있었다. 우국(忧国)의 내용이 담긴 명문장으로 유명하다. 출사표의 유래이다. 후에는 출병할 때에 그 뜻을 적어서 임금에게 올리던 글로 통했다. 나의 오늘에 내든 출사표를 무죄판결서류처럼 거뜬하게 이첩한다. 작봉(爵封)치고는 꽤 파격등용이다. 작비금시(昨非今是)에 느닷없이 놀라 듯 갑자기 자격지심을 의심한다. 하다면 어느 목적지로 어떤 속도로 어떻게 출발할 것인가? 위치감각을 조절하는 사이 오늘의 스타트가 어느새 발목에 각반을 동여주고 대님을 재정비한다. 나는 발차를 앞둔 간이역에서 본일(本日)과 악수할 수밖에 없다···   홀제 밀림에서 파도가 쇄도한다. 놀라서 그 쪽에 눈길을 돌린다. 원시림의 틈바구니에서 일어나는 열광의 소동이 즐겁다. 나에 대한 지지률은 갑자기 반등을 보이더니 어느날엔가 또 하락될지 모른다고 엄포처럼 으름장을 놓는다. 떡갈나무가 단추를 벗기고 아름드리 잣나무가 송두리째 앞섶을 흔들리며 목도리를 풀어 내친다. 주재자는 그래서 건방지고 당당한가! 공천에도 시비가 헛갈리거늘 까짓 개인정감구축에 오류 없으랴! 하여 무효화는 개정이 필요하지 않기에 고집대로 초심에 등불을 더 밝게 켤 따름이다.   뒤를 돌아본다. 어제는 환경위생관리처 골목의 후미진 뒤안길로 꼬리를 사렸다. 아득히 비껴간지라 대봉류소(大凤流苏)처럼 추풍에 흩날린다. 상여의 네 귀에 늘어뜨리는 큰 매듭술 치고는 꽤 너덜너덜하다. 이번엔 시선을 돌려 해란강 너머 과수원을 키 돋음해 내다본다. 백화청사 꼭대기 안테나를 넘어 비암산이 희미하게 안겨온다. 호텔의 스카이라운지를 지나 모아산 봉황대 유허의 전망대를 운무 속에 찾아본다. 건물에 막힌 차단 속에서 용케 더듬어주는 고향의 바지랑대가 흘린 시간의 지휘탑으로 안내한다. 량극을 오가는 사이 갑자기 몸을 담았던 바위가 흔들거린다. 놀랍다. 나는 지각운동으로 전률하는 산을 의심한다. 잠시 기거한 야외에서 몸살을 앓는다. 간이역에서 하루살이로 착근한 신세가 충격으로 떤다. 들쑹날쑹한 산악이 가벼운 펀칭(punching)으로 나를 거부할 줄이야··· 계곡도 수림도 오늘을 포기한 자를 수납하지 않는 공성소유자일 줄이야···   다시 휴대폰의 스케줄관리메뉴를 클릭한다. 오늘의 일력이 나리꽃처럼 붉게 피여난다. 금방 재생되는 화면의 디자인은 설계만 아니라 표출의 의상을 벗기며 내면으로 비추는 네온싸인이다. 완교지를 받아든 편자의 기쁨인들 이처럼 생동할가?! 과연 내 맘의 정토에 활착률을 내린 식재성공은 얼마나 %를 가질가? 홀로 너덜겅을 벗어나 외진 동네로 떠난다. 둘러보고 싶고 냄새라도 맡고 싶다. 사름률이 높은만큼 보람을 느낄 것이다. 교룡기(交龙旗)는 임금이 거둥할 때에 행렬의 앞에 세우던 기만 아니다. 탐검의 행보에 온갖 잡초도 오색기를 흔들며 사열대에 모신단다. 오솔길에서 오월의 요정이 장미다발을 들고 게걸스럽게 유혹을 아끼지 않는다.   오늘을 말하기엔 오늘의 시간이 너무 짧다. 아마 이 부분만은 래일로 미루고 그 공간에 의탁할가 보다. 한국 김대중 전 대통령은 ‘력사는 우리에게 진실만을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력사는 시간 앞에 무릎을 꿇는다. 시간이 지나면 력사의 진실을 알게 될 것이다’는 고담준론을 남겼다. 잠언록 같은 의미를 던져주며 의외의 별건수사에도 적용할 잠재력이 다분하다. 오늘을 살아가고 현실을 영위하는 속물의 진실을 규명하고 처리하라는 충고인줄 알겠다. 내안의 조약을 지키고 그 것으로 꿈의 내용을 알차게 채워야겠다. 조금 경망하지 않나 미심쩍다. 탄로 나면 불법류출된 음원에 대한 류포자검거에 들어갈가부다. 하하! 장본인도 고발자도 스스로임을 고백한다.   오늘을 정리해 수록곡을 묶었다. 처음엔 갈피가 잡히지 않아 번복이 심했다. 인젠 두서가 잡힌다. 서로 상충되면서 엇박자도 많이 빈발했다. 고맙게도 언밸런스를 조률하는 보완으로 오늘이 알뜰한 서빙제공에 나설 줄이야··· 조종사 실수를 비롯해 기체부실 등 제반 가능성을 밀착하면서 추락사고 원인을 조사하는 나의 비행점검은 늘 이런 연극으로 개봉작이다. 노래치고는 하늘을 날아예는 메아리만큼 아름다운 주제가가 또 있을가?! 창공을 벗겨내려 청계수에 미역 감고 사막에서 다시 비상해 은하계의 옥정수를 길어다 오아시스를 보충하니 말이다.   타자를 하는 사이 모니터 하단 우측에 표시된 시간현시가 또 초로부터 분으로 바뀐다. 나중에 시침수자가 바뀐다. 오늘은 부지런하다. 어김없다. 만날 간다. 서지 않고 자꾸 나를 부른다. 듣지 않으면 억지로 끌고 가겠다고 눈을 부라린다. 오늘이 작동하는 메터기를 들여다보며 늘 번망하고 착잡하고 바듯한 스케일을 보듬는다. 진행형이 움직여주는 치다꺼리의 심장인줄 안 탓이다.   나는 아직도 본부석에서 자신을 열심히 지휘한다. 오늘을 옆에 거느린 채 골몰히 잔디밭을 주시하는 감독의 초조감이다. 현재의 존재를 실증하는 승부전이다. 부전자승(不战自胜)이 없는 경쟁도전마당에서 이런 자세는 영형상수(影形相随)처럼 밀착력을 보이지 않는가!···   한모금 농축액을 마시고 웬 비방의 화살도 펀칭으로 선방할 자세는 늘 필수적이다. 현재의 존재는 성공으로 복수할 능력자만이 강자라고 믿기 때문이다. 연변일보 2017.7.13  
18    정호원작가 프로필 댓글:  조회:2556  추천:0  2015-08-31
  중국 정호원(郑虎元)작가 프로필 E-mail: za723@naver.com               za723@qq.com       H.P: 13904439591 향관: 중국 연길현 하오동 경주정씨 문헌공후 고산공파 68대 종손 학력: 연변대학조선언어문학전업졸업, 연변대학조선어본과통신학부졸업 농민, 소학교교원, 중학교교원, 문화국창작원, 신문사 특약기자, 방송국기자 등 직종에 근무. 장편실화, 중편소설, 단편소설, 수필, 시, 평론, 산문, 민담, 희곡, 논픽션, 동요, 동시, 동화, 잡문, 가사 등 쟝르의 작품 1300여편(수) 발표. 한얼패상, 연변일보문화상, 향토수필상, 화신문화상, 정음상, 라지오문학상, 송원컵대상, 국제언론1등상, 해외동포문학평론우수상, 한국농촌문학상, 2008한국KBS서울프라이즈우수상, 전국드라마최우수상, 백두아동문학상, 제6회 연변주정부 진달래문예상,  한국전파진흥원방송우수상, 해외한국어방송대상 등 97차 문학상 수상. 중국작가협회회원 연변방송고급편집   저작:    (공저) 1994년 연변인민출판사    (동화집) 1998년 료녕민족출판사        (가사집) 2005년 한국학술정보(주)         (동요집) 2005년 한국학술정보(주)         (동화집) 2006년 한국학술정보(주)         (시조집) 2006년 한국학술정보(주)         (시조집) 2006년 한국학술정보(주)         (반도인물전) 2009년 한국학술정보(주)     (반도설화집) 2009년 한국학술정보(주)         (반도민속편) 2009년 한국학술정보(주)    (중국전설집) 2009년 한국학술정보(주)    (간도 가이드)2009년 한국학술정보(주)    (세상 나들이)2009년 한국학술정보(주)    (연변 기행문)2009년 한국학술정보(주)    (방송드라마집)2010년 연변인민출판사    (수필집,주필) 2012년 연변인민출판사     (동요곡집) 2018년 8월 한국학술정보(주)      (장편실화집) 2018년 9월 연변대학출판사    (르포르타주) 2022년 4월 한국학술정보(주)
17    그는 이런 작가였다 -고 류연산 작가를 기리며 댓글:  조회:1062  추천:0  2015-01-14
류연산 선생은 1957년 8월 12일 당시 화룡현 서성진 북대촌에서 출생했다. 1982년 7월 연변대학교 조문학과를 졸업했고 1988년 광주 중산대학교에서 1년간 연수를 받았다. 1982년 8월부터 연변인민출판사 문예편집부 편집, 주임, 종합편집부 부장, 총편조리 등 직을 력임했고 2007년 연변대학교에 교수로 전근해 글짓기기초, 문학개론, 문예창작심리학, 소설창작론 등 학과목을 강의했다. 마음이 뜨거운 작가 2012년 1월 17일 연변방송국에 근무하는 필자는 고 류연산타계1주기추모특집을 방송한 적이 있다. 이때 우리 문단의 유명한 작가인 리혜선 선생과 우광훈 선생을 특별초대석에 모시고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는데 류연산 작가에 대한 그분들의 인상이라면 독서가, 장서가였고 수집광이라는것이다. 류연산 선생은 소설가로서 문학작품을 많이 읽었다. 세계명작은 그의 표현으로 말한다면 닥치는대로 읽은것이다. 특히 중국의 고전들은 더 많이 읽었었는데 “수호전”이나 “삼국연의”같은 작품과 중국고대의 경전들인 문심조룡이나 손자병법같은 작품도 읽었다. 수호전은 거의 암기를 할 정도로 읽었다. 그래서 중학교를 다닐 때에는 마을에서 책을 제일 많이 읽은 사람으로 통했고 책을 본 이야기를 듣겠다고 마을 또래들이 줄레줄레 찾아오기까지 하였다. 지금의 표현이라면 마을 또래들 중에서는 인기짱이였다. 그런데 아마 그때부터 력사하고는 무슨 인연이 있었나 본다. 력사소설이 더 많았고 그 후 소설창작에서도 력사제재를 많이 다루었다. 그의 소설의 대표작인 “흑치상지”, “수리재의 망부석”이 그렇고 작품집에 나오는 소설작품도 대부분이 력사제재이다. 이건 그의 독서 분야와 련관이 있다. 장서로 보면 문학작품과 력사서적이 반반이라고 보아야 할것이다. 후에 력사연구와 력사기행, 인물전기쪽으로 매료되면서 력사서적은 필요한 공구서적 그 자체였었다. 1992년에 우광훈 작가와 류연산 선생이 한국에 함께 간 적이 있다. 그때 한국의 서점에서 책을 구입한다는것은 월급쟁이 수준으로서는 언감생심 엄두를 못낼 때였다. 그래서 찾아다닌 곳이 낡은 책을 파는 고서점을 전전하는것이였다. 그곳에 가면 욕심나는 책들을 값싸게 구입할수 있었으니깐. 그런데 귀국할 때 책보따리가 너무 무거워서 우정국에 가서 부쳐야 했는데 우편료가 한화로 40만원이 들었다. 그때 백여원의 월급에 한화 40만원이면 인민페로 4천원이 넘는 어마어마한 거금이였다. 그때 그가 구입한 책들은 대부분 문학작품으로 그중에 세계명작이 많았다. 류연산 선생의 후기 창작이 력사와 인물전기에 치중해 있다 보니 취재가 필수의 전제조건이였다. 1995년 첫 력사인물을 한국의 한국일보에 련재를 시작하면서 그는 취재에 필요한 록음기, 사진기, 비디오촬영기를 구매했다. 그러다보니 사진기는 세개나 바꾸고 렌즈도 몇개를 구입하였다. 지금 그의 유물중에는 취재중의 록음테프가 백여개, 취재수첩이 십여권, 사진이 수천장이 되고 비디오테이프도 수백시간이 된다. 류연산 선생은 수십년간 발로 뛰는 조사와 연구, 불면불휴의 집필을 통해 동년배들의 추종을 불허하는 많은 우수한 작품을 남겼다. 늘 미래지향적인 열린 의식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사물을 관찰하면서 인생공간을 부단히 확대했다. 류연산 선생은 소설, 칼럼, 수필, 문화기행, 전기 등 다양한 쟝르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출중한 재능을 보여주면서 수십년간 근 천만자에 달하는 작품을 남겼다. 특히 장편문화기행 “혈연의 강들”, “심여추평전”, “류자명평전”, “최채평전”은 우리 민족의 빛나는 발자취와 우리 민족 영령들의 파란만장한 일대기를 다룬 문화기행과 전기문학작품으로서 선후로 중국 장백산문학상, 한국 기록문화상 등을 수상했는데 이러한 작품들은 우리 문단 보고문학 수준을 한단계 높이고 력사다큐멘터리붐을 일으켰다고 할수 있다. 류연산선생은 뛰여난 사회활동가로서 일찍 연변작가협회 소설창작위원회 주임, 흑룡강신문사 론설위원으로 활약했을 뿐만 아니라 제11기, 제12기 연변조선족자치주 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위원, 교육과학문화위생위원회 위원, 대표자격심사위원회 위원 등 사회직무를 맡고 활동했다. 상품경제의 충격으로 조선문잡지, 출판계통이 충격을 받고 있을 때 그는 사회조사에 적극 나서서 여러측의 의견을 청취한 뒤 정부의 정책적인 지원을 이끌어냄으로써 민족문화건설에 큰 기여를 했다. 뿐만 아니라 류연산 선생은 남한테 도움이 되는 인생을 살자, 챙기기만 하고 베풀 줄 모르는 삶처럼 가증스러운것은 없다는 좌우명을 갖고 늘 사재를 털어 가난한 이웃들을 껴안고 보듬어주었다. 연변대학에 자리를 옮긴 후에도 류연산은 막강한 실력을 보여줬다. 류연산 선생이 교직에 몸담은 기간은 짧지만 언제나 열정적이고 겸허한 자세로 스승을 존중하고 제자들을 사랑하면서 맡은바 교수와 연구사업을 깔끔하게 완수하였다. 특히 연변대학교 개교 60주년에 즈음하여 모교에 대한 불같은 사랑을 안고 수많은 관련 인사들을 취재하고 밤낮없이 붓을 달려 연변대학교의 력사와 인물, 일화를 다룬 “연변대학산책”을 펴냄으로써 모교의 축제에 소중한 선물을 하였다. 류연산 선생의 유언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세상은 참 아름다운 곳이다. 단 며칠을 살더라도 한번 왔다 갈만한 곳이다. 만약 천국이 있다면 나는 천국에 가서 우주공간에서 가장 좋은 관광코스는 지구의 인간세상이라고 홍보를 하고 다닐것이다.” 작가는 인간의 홍보대사이다. 이처럼 그는 생활과 자기의 직책에 충실했다. 류연산 선생이 암투병을 한다는 소문이 나자 먼 통화에서 제자들이 문병을 왔다. 제자들에 대한 사랑이 지극했기에 제자들이 불원천리하고 찾아올수 있었던것이다. 발로 뛰는 정열의 작가 우광훈 작가는 류연산 작가의 성공비결을 그의 꾸준함과 민족에 대한 사랑과 력사에 대한 깊은 리해력이라는 일가견을 내놓았다. 우리 민족의 민족사는 아직 정리가 잘 되지 못했다. 특히 류연산 선생이 력사연구를 시작하고 취재를 시작하던 때는 더욱 그러했다. 아마 이런 현실이 더더욱 류연산 선생을 민족력사연구에 치우치게 했을지도 모른다. 우선 류연산 선생은 노력가였다. 언제나 쉴새없이 연구하고 답사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부지런히 창작해왔다. 둘째는 행동성이였다. 사실 류연산 선생의 작품 대부분은 취재가 없이는 도저히 쓸수 없는 르포쟝르였다. 연변인민출판사에서 편집으로 근무했고 후에 연변대학에서 교수로 후학들을 가르치면서 취재를 떠나기에는 상당한 애로가 있었을것이다. 더구나 취재가 이곳 연변에 국한된것이 아니고 전국 어디나 널려있는 상황이였다. 그러나 그는 작품을 위해 필요한 순간이면 출발했다. 명절의 휴가, 휴식일, 출장의 기회를 모두 할애해버렸다. 바로 이런 행동성 즉 결심을 하는 순간 실천을 하는 행동성이 성공의 비결의 하나라 할수 있겠다. 마지막으로 민족에 대한 깊은 사랑이다.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이 모태가 되지 않는다면 그 어려운 탐방과 취재, 그리고 창작의 외로움을 이길수 없었을것이다. 류연산 선생은 방방곡곡에 답사 흔적을 남겼다. 그런 바탕이 작품의 환경과 인물과 주제로 살아 숨쉬게 됐다. 두만강, 압록강, 송화강, 흑룡강 이 4개 강 류역에 우리 중국 조선족의 뿌리가 있다. 우리는 조선반도로부터 이곳에 이민을 와 이 땅을 개척했고 또 이곳에서 이 땅을 지켜 일제와 피 흘리며 싸웠으며 감격의 해방도 이 땅에서 맞았고 지난 반세기 남짓한 기간 이 땅을 건설해 왔다. 그리고 이 땅에서 우리는 중국 조선족으로 자리매김을 했고 력대의 정치운동과 파란만장한 세월을 겪어오면서도 우리는 이 땅에서 변함없이 우리 민족의 문화와 전통을 지켜왔으며 그러면서 개혁개방을 맞았다. 그런 의미에서 류연산씨는 이 4개 강을 통털어 혈연의 강이라고 불렀다. 류연산 선생은 생전에 도합 11년의 시간을 들여 4대강을 답사했다. 11년간 두만강, 압록강, 송화강, 흑룡강 이 4대강 류역 1만 5천리를 걸어서 답사, 이 강들에 깃든 우리 민족의 이민사, 개척사, 투쟁사를 발로 써왔다. 특히 “혈연의 강들”을 보면 그의 발자취가 잘 보인다. 흑룡강을 취재할 때의 정경은 마치 드라마를 보는듯이 드라마틱하기도 했다. 령하 40, 50도가 넘은 혹한속에서 사진기가 얼어서 샤타가 눌러지지 않을 정도였다. 그리고 혈혈단신으로 낯설고 땅선 수림속을 헤쳐 가는 길에 수백리를 가도 차 한대 볼수 없는 무인지대를 거쳐 가기도 했다. 흑룡강을 취재하고 돌아와서 그렇게 혹한인 세상을 그렇게 인적이 드문 수림속의 길은 처음이라고 혀를 내둘렀다. 그러면서 이곳에서 차가 고장이라도 생기면 얼어 죽을것이라는 생각이 들더라고 하면서 웃었다. 사실 사고를 겪지 않은것도 아니였다. 압록강을 답사하면서 집안으로 가는데 이도백하에서 집안 가는 사이에 길에서 택시가 고장이 나서 중간에 가지도 오지도 못하게 되였다. 눈길에 차를 밀수도 없고 저녁 어둠은 짙어 가는데 오가는 차도 없고 완전 끝장이라는 생각이 들더란다. 그래서 걸어서 마을을 찾아 떠나 경운기라도 빌려 차를 끌어오려니까 눈길에 떠날수 없다고 가려는 사람이 없더란다. 그래 사람이 죽게 된다고 사정사정해서 겨우 경운기를 빌려서 차를 끌어왔는데 천신만고해서 집안성에 들어서니 새날이 밝더란다. 그리고 차가 물에 빠져 온밤 젖은 몸으로 떨던 일들도 있었다. 확실히 그의 취재는 바로 이런 신고속에서 이루어진것이였다. 바로 이런 책임감 있고 력사의 현장과 흔적을 하나라도 놓치면 안된다는 진실에 대한 추구가 있었기에 그의 작품은 베스트셀러가 될수 있었고 중국에 오는 력사학자들이나 민족의 력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의 필독서로 될수 있었다. 류연산 선생은 다산작가이고 다재이다. 초기에 소설창작이 위주였지만 후에는 력사, 수필, 칼럼 등 많은 쟝르를 섭렵하고 작품을 창작했다. 특히 후기에 섭렵한 칼럼과 수필들은 력사감 뿐만이 아니라 정론성, 인간성적인 면이 많이 부각되였다. 류연산 작가는 우선 소설로부터 실화문학에로의 변신을 성공한 문학가이다. 류연산 하면 우리 사람들은 흔히 그를 소설가로 아는 선입견이 있다. 대학교 때부터 소설을 써오던 류연산은 담임교원 박정양 선생님으로부터 자신이 수집해오던 컨텐츠를 제공 받는다. 백제의 장군으로 백제가 망한 후 당나라 장수로 빛나게 살았던 흑치상지와 고구려후손인 왕모중에 관한 자료를 넘겨받게 된다. 박교수님과 합작으로 두 분의 자료에 기초해 중편력사소설을 쓰면서 류연산 선생은 우리 민족의 고대사를 접하게 됐다. 그 기초에서 1982년 연변대학을 졸업하고 연변인민출판사 문예부에 배치받은 그는 항일렬사들의 이야기집 장백의 투사들의 책임편집을 맡으면서 우리 민족의 현대사도 접하게 됐고 이 과정에서 민족사의 연구가 충분하지 못함을 발견하게 되였다. 특히 그의 가족사적인 영향도 간과할수 없는데 증조할아버지와 할아버지는 독립운동에 참여한 분이기도 하다. 독립운동의 의병장이시고 민족의 독립운동사에서 중요한 분이신 증조부벌이 되는 류린석 장군과도 인척관계가 있다. 증조할아버지는 유학을 공부하셨는데 류린석 장군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이런 가족사적인 뉴대가 그를 민족력사에 심취하게 된 원인중 하나이고 그때로부터 민족사에 사랑과 흥취를 갖고 연구하게 됐다. 류연산 선생은 우리 문단에서 한국에 가장 일찍 간 사람의 하나이며 고국과의 교류에서 가장 일찍 력사의식이 튼 문인이기도 하다. 어느날 그는 친구 다섯명을 불러서 조선족이주실록을 만들자고 제의했으며 자신의 원고료 800원을 선뜻이 내놓았다. 류연산 선생은 이에 머무르지 않고 1991년과 1992년 해마다 3개월씩 한국에 체류해 있으면서 한국에 가있는 조선족들을 찾아 취재, 그들의 애환에 절은 삶을 료해하고 그것을 집필해 1993년부터 실화 “서울바람”을 《청년생활》잡지에 1년간 련재, 사회적으로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류연산 선생의 창작에서 가장 잘 알려진 글로는 “혈연의 강들”을 들수 있다. 그는 허구로 만들어진 소설이 날따라 독자들의 관심에서 멀어지고 있는 현실에서 우리 민족의 력사사실 그대로를 문학의 방식으로 쓴다면 사람들에게 력사도 알려주고 감명도 줄것이라고 인정했었다. 그때가 바로 1994년 11월이다. 그는 이때로부터 자기의 로임으로 우리 민족의 력사가 스며있는 두만강변에 대한 답사를 시작했다. 그는 도보로 다녔기 때문에 경비는 얼마 들지 않았다고 겸손하게 말한적 있다. 사실 당시 두만강변에는 차도 없었다. 류연산은 그 엄동설한에 화룡 숭선으로부터 룡정 삼합에 이르기까지 도보로 10일간 답사를 했다. 공사소재지에 가면 려관에 들고 촌에 가면 촌에서 가장 년로한 분을 찾아 그분들 집에서 류숙하면서 흘러간 옛 이야기들을 들었다. 이듬해인 1995년 2월부터 류연산 선생은 기행문학 답사기를 쓰는대로 한국 서울신문에 련재하기 시작했다. 그 원고료를 받아 3월부터 두달에 걸쳐 또다시 룡정 삼합, 개산툰, 선구로부터 도문의 량수, 훈춘의 경신 방천 즉 두만강 상류로부터 하류에 이르는 두만강 답사를 했다. 하지만 두만강 답사로 로정이 끝난것이 아니였다. 류연산 선생은 계속하여 1995년 5월부터 7월까지 압록강을, 1996년 10월부터 송화강을, 1997년에는 흑룡강을 답사했다. 1997년 6월, 북극과 가까운 흑룡강의 발원지 막하에 찾아갔는데 밤 10시에 해가 지고 새벽 2시에 해가 뜨더란다. 그해 12월에 또 막하에 갔는데 아침 10시에 해가 뜨고 오후 2시에 해가 지더란다. 12월의 기온은 령하 54-55도였다. 류연산 선생의 가족은 물론 친구들도 그 곳에 가지 말라고 권고했었다. 그런데 그렇듯 렬악한 환경에서도 막하 2만명 인구에 우리 조선족이 216명이 사는것을 발견했다. 처음 혼자 그 곳에 찾아갔을 때 정처없이 거리를 걷는데 길옆에 “아리랑개장집”이라는 간판이 보였더란다. 문을 밀고 들어가니 조선족이라고 그렇게 반가와할수가 없더란다. 그의 출현은 현지인들속에서 큰 반응을 일으켰다. 연변에서 작가선생님이 왔다며 조선족들이 하나둘 모이기 시작, 남녀로소마다 반갑다고 손을 잡아주었고 그곳에서 먹여주고 재워주며 우리 민족의 막하에로의 이주로부터 지금의 삶에 이르기까지 밤 새는줄 모르고 이야기해 주었다. 물론 술도 억수로 마시게 되였다. 조선족작가가 그 먼 곳에서 왔다니 아리랑, 도라지를 부르고 춤을 추는데 그때 민족의 정이라는것이 얼마나 귀중한것인가를 새삼스레 느꼈고 민족의 혼을 잊지 않고 살아가는 그들의 모습에서 더욱 큰 책임감을 느꼈다고 했다. 이렇게 씌여진 류연산 선생의 글은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답사기 두만강 1000리 , 압록강 2000리 , 송화강 5000리 , 흑룡강 7000리는 한국 서울신문에 1995년 2월부터 1998년 7월까지 매주 1회로 3년반 동안 련재되였다. 련재가 끝나자 그것을 “혈연의 강”들로 묶어 책으로 출판했다. 이 책 초판 서문에서 김병민 교수는 “혈연의 강”들을 읽으면서 문학작품을 읽는다는 쾌감보다는 민족의 력사와 삶의 현장속에 서있다는 숭엄한 느낌을 진하게 받았다고 평가했고 정판룡 교수는 이 책의 재판본 서문에서 이 장편기행문은 중국에 사는 우리 민족의 력사와 현황을 백과전서처럼 집대성한 책이라고 할수 있다고 평가했다. 왜냐하면 “혈연의 강”들은 우리 민족의 삶의 현장 뿐만 아니라 우리 민족의 고대사, 민족의 삶의 애환과 이주의 참담한 과정도 그려냈기때문이다. 류연산 작가의 창작반경은 국내 뿐만 아니라 해내외로 길게 이어졌다. 2005년 류연산 선생은 중편실화 “한 독립운동가의 운명”을 창작하여 한국에서 제41회 신동아 실화문학 우수상을 타기도 했다. 그리고 2003년과 2005년 그가 한국에서 출간한 책 두권은 한국 문화관광부에서 지정한 인문부문과 력사부문의 청소년 추천도서로 선정되기도 했다. 류연산 선생은 소설집, 수필집, 기행문학, 인물전기문학 등 지금까지 모두 22권의 책을 출판했다. 그중 중국에서 출판한것은 12권이고 한국에서 출판한것은 10권이다. 2004년 한해에만도 책 4권을 출간한 기록을 남겼다. 류연산 선생은 생전에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나는 력사학가가 아닌 문학가이다. 문학과 력사의 만남에서 문학의 형식으로 력사를 반영했다. 내가 갖고 있는 자료들은 그 력사시대를 살아온 분들이 직접 겪고 보고 듣고 느낀것들이다. 그것을 나의 력사지식으로 려과하고 찾을수 있는데까지 력사자료들을 찾아 대조하며 문학으로 반영했다. 하지만 력사학의 견지에서 보면 나 스스로도 결함이 보인다. 이 면에서는 내가 공를 더 많이 해야 하고 력사학가 차원에서 나를 제고시켜야 한다. 우리의 력사사실을 더욱 재미있게 풀어나가고 많은 사람들이 우리 민족의 력사를 취미로 읽을수 있도록 필력을 닦겠다.” 지난 세기 90년대 중반부터 류연산 선생이 수집한 자료들은 상당한 분량이고 모두가 소중하다. 그 많은 자료를 책으로 출판하지 못하는것으로 하여 류연산 선생은 생전에 여간만 애간장을 태우지 않았다. 그동안 많은 로인님들이 사망되면서 우리 민족의 산 력사들이 소실되고 더는 복원될수 없는 일들이 많기 때문이다. 류연산 선생은 자신의 답사가 10년 더 앞당겨 진행됐더라면 더 많은 우리 민족의 력사를 발굴했을수 있었을것이라는 후회를 안고 있었다. 이런 조급한 마음으로 그는 력사를 기억하시는 분들이 한분이라도 더 세상을 뜨기 전에 자료들을 수집하느라 악전고투했던것이다. 생활을 무척 사랑했던 류연산 선생께서 55세의 아까운 나이로 3년 전에 우리 곁을 떠났으니 참으로 아쉽고 절통한 일이다. 비록 그의 육신은 이 세상을 떠났지만 그는 우리 모두에게 너무나 소중한 정신적 유산을 남겨주었다. 류연산 선생의 일대기는 우리 민족 문화발전사에서 한페지를 차지할 분량이기도 하다. 한생을 골몰히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순방답사한 그의 숨결은 오늘도 두만강에, 압록강에, 송화강에, 흑룡강에, 해란강에 도도하게 이어질것이고 남긴 저작들은 후세들의 보물고로 충당될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류연산 작가는 비록 떠나갔어도 혼신을 다 바친 그의 문학정신은 살아 숨쉬며 아울러 결사적인 혈투를 보인 작가적인 문학인기품은 우리가 영원히 본받을 귀감이다. "중국민족"잡지 
16    길의 훔친 길 댓글:  조회:803  추천:0  2014-12-19
길의 훔친 길  □ 정호원                미로아처럼 길을 잃었다가 출가 수행자처럼 찾았다. 가취성이 농후하다. 이번엔 길을 훔친다. 내것이 아닌 다른 길을 내 길우에 포개 덧얹어놓는다. 끼살이한다. 길이 길어지고 길이 넓어지고 길이 높아지고 길이 두터워진다. 하여 길의 척도와 광(廣)과 고도와 테두리가 극대화된다. 어떻게 찾은 길인데 함부로 던지랴? 하여 더 층을 덧쌓으려 수축할 따름이다. 누구든 낯선 곳에서 길이 헛갈려 오리무중에 처한 때도 있을것이다. 경험치곤 너무나 잊혀지지 않을 웃음거리다. 그럴 때 지나가는 행인에게 길을 물어보려면 남성보다는 녀성에게 묻는것이 좋다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메히꼬의 메히꼬시티국립자률대학 연구팀은 남녀 그룹에게 야외에서 버섯을 따오도록 한 뒤 과학적장치를 착용해 이들의 동향을 면밀히 관찰했다. 그 결과 남녀 모두 비슷한 량의 버섯을 가져왔지만 남자가 녀자보다 에너지를 70% 더 많이 소모할줄이야··· 남자는 버섯을 찾으려고 이쪽저쪽으로 갑절 더 많이 움직였지만 반면 녀자는 한번 간 길은 다시 반복하지 않았기때문이다. 연구팀은 남성이 지도를 읽는 능력은 녀자보다 월등하지만 녀자는 한번 간 길을 잘 기억하기때문에 일반적인 길눈에는 녀성이 훨씬 밝다고 천명했다. 한편 이런 차이는 선사시대부터 남자는 먼 들판에서 사냥군의 역할을, 녀자는 일정한 구역내에서 채취군의 역할을 담당했기때문이라고 덧붙여 분석했다. 이제 생소한 너덜겅이나 사거리에 나설 경우 길안내를 우선 현합(贤閤)이나 마돈나(madonna), 퍼스트-레이디(first lady)쪽으로 초간택할가보다. 재간택해도 삼간택해도 말이다. 무엇을 누구를 취하는가 하는것이 관건이다. 례하면 혹서를 이기는 방법이나 방식도 마찬가지이다. 여름에 더우니깐 당연히 랭방설비들이 많이 작동한다. 전기소모가 심각하다. 정부차원에서 대형건물에 대해 일정 온도 이하일 경우 제재했다. 어쩌면 좋으랴? 불피한서(不避寒暑)라고 더위 이기는것도 일종 수양이라 생각하고 마음을 비우면 편해지듯이 내심의 번열부터 식혀야 한다. 허겁떨며 무더위 이기려 하지 마시고 더불어 함께 보낸다고 생각하면 한결 편안할것이 아니랴?! 이렇게 더워 헐떡거리는 실내의 공간에서도 폭포수가 흐르는 외길을 걷는 상상련습을 하면 덜 덥다는 판단이렷다. 누군가는 길을 잃어봐야 진짜 려행이라고 단언했다. 기로와 미로를 념두에 둔채 그 어떤 명제를 내세운 호소에 불과하렷다. 기실 미로아거나 실족인 혹은 방황자는 길에서 받은 공포증이 크고 길의 콤플렉스가 많고 길에 대한 반감이 심하다. 심기가 불편하니 그럴수밖에 없다. 나도 헤맨적이 있었다. 길우에서 길안의 길을 보지 못해 허둥거렸다. 길눈이 어두웠다. 한번 가 본 길을 잘 익혀두어 기억하는 눈썰미를 갖춰야겠다. 뜻밖의 만남이 있게 해준 길과의 연분이 아닌가! 어찌 보면 길을 잃으면 또 다른 길이 열렸는지도 모른다. 새 작업이 시작된다. 굴착, 발파, 언제 쌓기로 시공중이다. 오솔길과 큰길을 훔쳐다 하나의 궤도에 통합시킨다. 어디 그뿐이랴?! 방천길, 옆길, 갓길, 진창길, 꼬부랑길, 지름길, 갈림길,자갈길, 고샅길, 초행길··· 나만의 독점물이 절대 아니다. 인류의 공유물이다. 물론 선방에서 좌선하는 자세는 아직 나 혼자만의 포즈지만 말이다. 비록 길을 얻었어도 역시 초보자이다. 그냥 아직도 길의 지망생이다. 이게 행복이고 영광이다. 잠재력이기때문이다. 창문을 열었다. 부채살처럼 해살이 밀물로 엄습한다. 나의 길 갈래도 아마 이렇게 무늬를 직조하는가보다. 다래, 머루, 산자두, 포도, 오미자를 따먹는 길이다. 넝쿨 잎새, 줄기, 뿌리, 초리를 되살릴 부활이다. 창조적이고 생산적이고 효률적인 능동형의 본형이다. 시간의 존재로 립증받고싶다. 구조적인 원리의 확신을 아직은 잠재운다. 대신 길의 디딤돌 주추돌을 깊이 괼뿐이다. 합병된 길들이 대거 불거지고 커지고 실해진채 활개를 친다. 신작로가 되고 아스팔트가 되고 우주선이 된다. 진득찰처럼 한데 끈끈하게 엉켜 붙었다. 시계치륜처럼 맞물려 돌아간다. 시스템치고는 너무나 사개 맞는 배필이렷다. 돌이키니 때론 너무나 결벽증을 보인적도 없진 않다. 완미한것만 추구하고 지엽적인 오류마저 캐다보니 시간랑비, 인생소모가 컸다. 인젠 한눈을 슬쩍 감는편이 바람직하렷다. 길을 버린 업보를 받아도 마땅하렷다. 길에서 고생도 많았고 길과 씨름도 벌였다. 길을 굶었고 길에 피도 흘렸다. 다 괜찮다. 일종 관광으로 여길가 한다. 려행은 길우의 학교다. 탐승객은 도상의 가이드다. 나 역시 그런 련대성으로 다른 길을 하나하나 한갈래한갈래 훔쳐다 내 길의 건널목에 접목시키고있다. 바줄처럼 실하게 꼬아가는 실천의 길깁기이다. 길의 훔친 길이 새 길을 낳고 키우고 손잡고 간다. 나는 길의 달인이자 노예이다. 하여 달갑게 충성한다. 연변일보    
15    문화사업과 문화산업의 변증이중성을 리드하는 노하우 댓글:  조회:1460  추천:0  2014-02-25
사상해방은 대외개방을 확대하는 기본적전제이다. 그만큼 부단히 령역을 확장한다. 사상해방의 정도는 대외개방의 심도, 개척혁신의 강도와 경제발전의 속도를 결정한다. 연변(沿边)개방지구로서 연변은 풍부한 자연자원, 독특한 지역우세, 집중된 우대정책, 량호한 발전토대 그리고 유구한 문화함수를 고유했다. 우리 자체의 우세이자 현재바탕이다.    그 가운데서 문화테마는 줄곧 연변의 포장이자 내용물 및 속성으로 작용한다. 경제건설과 대회개방 그리고 홍보물에는 줄곧 연변특징인 문화이미지가 얼비친다. 우리는 문화현상을 자체의 맥락처럼 간주하고 사상해방의 한개 벼리로 삼아야 한다.    지혜와 창조력을 분발시켜 선전문화단체가 시종 왕성한 생기와 활력을 갖추게 하는것은 지역매체의 시대임무다. 현실로 부여된 엄연한 정치의제이다. 이것을 민족사명의 행정과 업무 그리고 의식사유에 긴밀히 투영해 특색있는 인기리에 급부상해야 한다. 사상해방대토론에서 심각하게 실시해야 할 립각점이다. 말로만 허무한 공담을 퍼부을것이 아니라 새로운 시기 “대선전, 대문화”의 차원에서 선전문화사업의 일대 앙양을 맞아야 할것이다. 그 획기적인 일환을 이끌어내자면 사상해방, 개혁개방을 운운하지 않을수 없다.    현대의 새 단계성 특징을 띤 사회관념의 다원화, 다변성은 우리 문화의 변수를 높이고 한결 업그레이드할것을 촉구한다. 시대의 긴박성과 민족의 당위성으로 그 변증이중성을 감안함이 목전의 과학적발전관이 예시하는 사로이다. 단순한 동기에서 응부적인 일로를 걷기보다 한결 현실적이고도 지향적인 차원에서 돌파구를 찾아야 한다.    문화사업과 문화산업은 각축되면서도 공존하는 한 개의 개념이다. 과거에는 전자가 기존형태로 고착됐다면 현재는 후속적인 련대성으로 새로운 구조격식을 충당했다. 반드시 이 량자의 병진병행으로 문화가 구축될 때라야만 건전하고 완미한 메커니즘으로 이행할수 있다. 그 체계를 여유롭게 고안하고 형세와 민족의 발전수요로 수납할 때 지역경제 역시 괄목할만한 성과물을 구축할것이다.    우리는 문화를 지키고 만드는데만 로심초사했다. 흔히 산업방면은 소외되고 미개척지로 남았다. 하여 따분하고 허무하고 어딘가 애매한 허점을 감추지 못했다. 우리 문화도 산업화로 이행해 외지로, 해외로 진출할 터전을 닦아야 한다. 한것은 민족브랜드는 자체의 전유물이 아니라 지구촌 글로벌이라는 인류공유재부이기때문이다. 문화산업의 필요성은 지극히 합리한 매력으로 멀티미디어시대를 매료한다. 첫째, 고부가가치의 산업이라는 점이다. 둘째, 문화산업은 국가 이미지의 제고에도 기여한다는 점이다. 셋째, 문화산업은 파급효과가 막대하다는것이다.    하다면 우리는 민족문화산업을 어떻게 주도하고 리드할것인가?    반드시 시대의 변화와 동조해 과학적발전관으로 출발해야 한다. 사상해방은 사상관념속박을 타파하고 발전의 내재적 동력을 강화하는 객관적 요구이다. 사상은 행동실천의 선도자이고 사상해방은 쾌속발전을 실현하는 황금열쇠이다. 문화산업은 결코 돈벌이라는 수입집계가 아니다. 그런 내재적인 함수를 거느리는 외 문화사업의 구조확장임을 명기할 절박성이 있다. 목전 개척창의하는 용기가 부족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 타당하지 못하다면 문화산업 역시 공담에 불과하다. 연변지역의 활성화를 추진하는 첩경 하나가 바로 문화산업을 극대화하는것이다.    급변하는 격변기임에도 답보상태가 없지 않다. 사상관념과 사유방식이 시대의 발전과 뒤떨어지고 새로운 형세의 요구에 부합되지 않는다. 크게 호소하고 캠페인이 굉장하지만 막상 업무를 추진하려 착수하면 걸림돌이 생긴다. 민감하지 않을 일을 일부러 공연히 예민하게 의혹하고 주춤거린다. 이런 보수적인 페단을 극복하자면 반드시 연변의 실제에 립각하여 사상을 일층 해방하고 자만심리를 극복하며 해이정서를 타파해야 한다. 소극적인 정서와 불순한 관념이 더는 창업의 장애물로 돼선 안된다. 개혁은 고쳐져야 하고 개방은 열리여야 하는것이 아닌가!    연변 민족지역의 실태와 한계를 력사적으로 립증한바 있다. 우리는 자체의 우세와 장원한 타산을 앞세우고 사상해방을 진일보 추진해야 한다. 정책법규에 위배되지 않는 문화산업을 홍포하는 한편 자체의 특색문화풍경을 더 짙게 장식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문화사업과 문화산업의 번영발전을 기획함에 있어서 실사구시원칙으로 출발하는것이라 하겠다. 그런데 우리는 자체의 우세적인 문화산업망을 도외시하거나 포기한다. 민속박람회축제를 일회용 손님접대로 부려먹곤 막을 내리자마자 페물로 구겨버린다. 비물질문화유산을 등록하였으나 재활용으로 잠재력을 유발하기엔 력부족이다. 도서, 무용, 미술, 건축, 민속 등 분야의 민족특허권을 공상등록, 법률허가로 인정은 쟁취했지만 후속력은 거의 빵점이다. 수도 북경에 가서 공연콩클무대를 들썽했다지만 연길역에 내리는 순간 증발해버린다. 문화의 생명을 의심하게 되고 예술의 산업성을 경악케 된다. 무턱대고 문예상업구호를 주장하는것이 아니라 가능한 전제하에서의 잠재력을 크게 극대화하자는 발설이다. 민족존속의 필수성과 문화내연성이 당위성으로 능히 추진할 명목이 아닌가!    2007년 연변주정부의 명의로 33가지 주급비물질문화유산보호명록을 공포하였다. 그중 24가지 항목이 성급비물질문화유산보호명록에 들어갔다. 2006년 , 가 처음으로 국가급비물질문화유산보호명록에 들어갔고 2008년에는 , 등 8가지 항목이 두번째로 국가급문화유산보호명록에 들어갔다. 연변비물질문화유산보호중심, 연길시민족악기연구소, 연길시북산가두퉁소로인협회 등 문화단체나 협회는 우리 민족 문화산업의 잠재력이다. 한편 비물질문화유산을 보호하는 동시에 민간에 산재한 비물질문화유산에 대한 조사, 감정을 진행하여 민족민간문화의 전승과 발전을 위해 공헌하여야 한다.    우리의 문화령역은 때론 침체와 정지를 면치 못한다. 유명 이벤트를 이끌어내는 적격자이지만 고수하는데 있어서는 패망자거나 투항자이다. 국내외관광객의 유치나 초상인자를 특성화된 콘텐츠로 접목할 때 문화사업의 연장선은 당연히 문화산업의 활무대이다. 지역경제의 균형적인 발전을 돕고 서비스, 생산유발, 부가가치를 돕자면 우선 문화의 굴진성이 돋보여야 한다.    연변은 결코 자체의 지역민족생리를 떠날수 없다. 기본적인 대전제를 홀시하지 않는 원칙을 견지하면서 문화산업의 새로운 페스티벌(festival)모식을 연찬해야 한다. 매체는 그 일환으로 자체의 콘텐츠를 산업화, 상업화, 시장화할수 있다고 본다. 그 과정이 브랜드로 되는 첩경일수 있다. 등소평은 사상을 해방함에 있어서 사상과 실제가 부합되여야 하며 주관과 객관이 부합되여야 하며 실사구시해야 한다고 지적하였다. 문화산업도 사상해방을 크게 승격시키는 한편 실제주관을 동시에 승화해야 한다. 가장 일약적인 일환으로 문화사업이 문화산업으로 병행하는것이라 하겠다.    고답적인 형이상학이 더는 발붙일 여지가 없는 세상이다. 사상해방에는 “타파하고” “창의”하는 함의가 내포될뿐만아니라 “견지하고” “회복”시키는 의미도 지녔다. 이 량자를 병진하는 수단으로 문화사업과 문화산업을 병행하는 노하우의 도출은 실현성이 충분하다. 전통공예, 첨단문화, 민속풍물, 자원중심, 복합클러스터(cluster), 소재단지, 구조조률, 프로그램콘텐츠 등 복구개발에 치중점을 두고 돌파적인 사상해방, 실질적인 개혁개방의 쇄도를 영접해야 한다. 우리의 소명의식 여하가 바로 그 과제를 완수한다.    문화산업의 전략적인 목표는 효과와 속도 및 내실을 필수로 한다. 사상해방은 과학적 발전관을 전면적으로 시달하고 더욱 좋고 빠른 발전을 실현하며 상대적으로 락후한 면모를 개변시키기 위한 필연적 선택이다. 문화산업의 주도권, 경영권, 전매권이 모두 우리에게 있다. 활을 들었다면 명궁수로 백발백중이여야 한다. 더욱 좋고 빠른 발전을 추진하고 선진지구와의 거리를 줄이자면 자치파워를 활용해야 한다. 그러자면 반드시 사상해방을 일층 강화하고 과학적발전관을 관철, 시달함에 있어서 직면한 새로운 정황, 새로운 문제를 적극 연구하고 개혁개방을 부단히 심화하며 과학적발전관을 추진하여 조화사회건설 등 중요령역과 중점사업에서 새로운 돌파를 가져와야 한다. 사상해방은 목전에 직면한 돌출한 모순과 여러가지 현실적 난제를 해결하는 긴박한 수요이다.    연변의 특징은 문화라는 기호로 잘 알려진다. 연변문화는 변연문화, 자치문화, 접속문화이다.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실정은 바로 문화콘텐츠가 산업브랜드로 불티날 때 더욱 잘 가동된 결과이다.    어떻게 매체미디어도 문화산업에 개입할수 있을가?    의식형태령역에서의 주동권과 참여권도 홀시할수 없다. 공신력을 크게 강조하는 한편 아직도 봉페적인 분야를 향해 자극성을 주입해야 한다. 가령 방송드라마나 연변가요가 산업화, 상업성으로 탈바꿈할 때 우리는 멀티미디어전성기를 누린다겠다. 물론 시장제한성이 없는것은 아니다. 그러나 자체의 우세와 풍격 그리고 지역특수성을 잘 살려 특수한 소재, 특이한 기법, 특출한 효과로 제작된다면 콘텐츠는 브랜드로 일약 급장성하는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한류하는 문화현상이 대국을 쇄도한다고 아우성이다. 반대로 우리 문화선행이 이번에는 한국을 강타할수 없을가? 역시 생산자, 제작자, 방송인의 능동성에 달린 노하우문제이다. 아직은 결과보다 의미가 중요한 시점인만큼 소명의식을 해박하게 잡아야 한다. 콘텐츠가 조선(한)반도를 벗어나 탈아입구할 때 위상이나 위망이 올라가는것은 물론 진정 우리 문화산업의 포인트라겠다. 수용자와 상업토대를 진맥하는 기초상에서 시장확대는 필수적인 우리의 생로이며 흥망성쇠의 갈림길이다.    민족문화유산의 계승과 발전, 민족정신의 육성과 함양에서 우리는 좌적영향의 구속을 팽개쳐야 한다. 한자리에서 그것도 수렁이나 사막에서 답보하는 맹꽁이배역이라면 진작 탈피해야 한다. 문화시처위를 재조명하고 미래지향을 크게 선도할 때이다. 연변 여러 민족 인민들이 근대에 벌려온 피어린 항일투쟁의 귀중한 혁명유산들이 여러가지 원인으로 무시당하고 장백산개발이 뜨악하다. 게다가 문화재보호가 허술하며 지역우세가 미적지근하다. 공익성문화가 활성화하는만큼 문화산업도 정비례관계로 일로매진할것이다. 매체가 반드시 사상해방대토론의 동풍을 빌어 근린사회, 민족패밀리를 촉동하고 호소해야 하겠다. 해란강닷컴 2월 25일자  
14    술의 철학관 댓글:  조회:950  추천:1  2013-11-12
술의 철학관  정호원 술 마시는 자는 반드시 주덕(酒德)에 주의해야 한다. 이는 일찍 "상서"와 "시경"에서 출현했다. 강주정도 금물이거니와 곤드레만드레 역시 취할바 아니렸다. 중국 고대에 술은 신성한 물질로 여겨졌으며 술의 사용은 장엄한 일로, 선조의 제례행사나 귀빈접대 외에 마음대로 쓸수 없었다. 이는 중국 원고시대 주사(酒事)의 습속과 풍격을 점차 형성하게 했다. 술 제조업의 보편적인 흥기와 함께 술은 점차 사람들의 일상생활에 널리 가담했고 주사행사도 광범해졌다. 술은 인간생활의 한부분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나는 20대엔 술고래처럼 억수로 마셨다. 아니 웬만한 주정뱅이를 찜쪄 먹는 호주가악습에 물젖어 있었다. 행악질에 드잡이에 이골이 튼 상습건달풍기가 풍기는 "악동"이였다. 내가 소나기술을 마실 때 술을 입에 대지도 못하던 사람들이 인젠 제법 점잖은 량반음주를 선보인다. 초년에 벼락술을 마신 자는 만년에 도태되고 대신 늦은 가마가 천천히 끓는 격으로 그들이 되려 장훈을 치며 점진법을 보인다. 이것이 음주생리이자 주량비결인가싶다. 하여 각국의 음주생태를 무척 궁금해했다. 동양권에서 쉽게 안겨오는것이 한국인들의 음주법이다. 술의 자존심과 오기 그리고 음지에 숨어있는 인간의 리비도까지 발굴한 정체를 굳이 반복하지 않으련다. 폭탄주 하면 우선 한국을 떠올리니 말이다. 일본인들도 한국인처럼 술을 좋아하고 연회를 자주 가지는 편이다. 무사도정신이 음주에도 가끔 비끼나보다. 그들만의 전매권을 행사해오는 더치페이 즉 비용을 각자 부담하는 일이다. 일명 각추렴, 와리깡(わりかん), AA식이라고도 한다... 린색성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타산적이고 실용적인 일본인의 계산법에 비해 중국에서는 술을 식사할 때 반주형식으로 곁들이며 손님 접대의 1호 메뉴로 등장시키는 관례를 보존하고있다. 주로 즐겨 마시는 술은 맥주이며 취할 때까지 마시는 경우는 극히 희소하다. 주선(酒仙)처럼 술의 순위를 따지고 료리를 풍성하게 만드는 음주법이 바로 중국인의 고로한 초대방식이자 자체의 음주연혁사이렸다. 그런가 하면 서양에서의 미국의 음주문화는 함께 어울려 술을 마시더라도 서로 잔을 권하거나 2차를 가는 일은 거의 없으며 비틀거릴 정도로 취하게 마시지도 않는다. 단지 자기가 마시고싶은 수량의 술을 마시고 특정인이 사겠다고 말하지 않는한 술값은 각자 자신의것만큼 지불한다. 영국은 지역별로 선호하는 주종도 다르고 음주량과 음주문제도 많은 차이를 보인다. 1982년 웨일즈에서는 일요일에 술을 팔지 못하게 했으며 1976년 스코틀랜드의 술집들은 잉글랜드와 웨일즈보다 일찍 문을 닫았다. 그런 차단으로 음호(飮豪)들을 통제했다. 스코틀랜드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술은 위스키이며 북아일랜드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술을 덜 마시는 축에 속한다. 독일인은 술을 마실 때 술잔을 돌리는 법도 없으며 타인에게 술을 따라주고 권하는 경우도 거의 드물다. 또한 술 한잔을 안주도 없이 30여분 넘게 홀짝홀짝 마셔 술을 취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주로 분위기를 즐기기 위해서 마시는 경우도 흔하다. 고추장 맛보기처럼 말이다. 우리 집에는 아버지와 동생 나 셋이서 한상에서 술을 마실 때가 두간했다. 내가 먼저 아버지에게 술을 따라 올리면 아버지께서 비운 잔에 술을 부어 나와 동생에게 차례로 돌렸다. 그런 혹독하면서도 진지한 부자간의 음주풍경이 주정뱅이 나를 구출했다. 내가 아버지 면전에서 술을 배우면서 날탕치던 문란을 극복하던 수련같다. 억병의 고질에서 사임하도록 묵계적인 훈도를 주신 부친님이시기에 더 그립다. 그런 음주교육이 동반해야 바른 기풍이 형성될수 있음을 절감했다. 알고보니 고대 음주례의는 4개 절차가 있다. 바로 절, 추도, 맛보기, 마시기 등이다. 그 뜻인즉 절을 올려 경의를 표시한 다음 술을 땅에 뿌려 자신을 낳아기른 대지에 감사의 뜻을 표한다. 따라서 술맛을 천천히 보면서 주인에게 감사의 뜻을 전하고 나중에 잔을 올려 마음껏 마신다. 어른을 섬기고 선배를 존중하던 미덕을 알것 같다. 중국은 56개 민족중 회족이 보통 술을 마시지 않는 외 기타 민족은 모두 음주력사를 갖고있으며 민족마다 자기만의 독특한 음주풍속을 전해온다. 아무리 고상하고 전통적이라고 해서 음주가 무조건 좋다는건 아니다. 그런가 하면 술이 몸에 좋다는 과학성의 또 다른 이중성을 결코 간과할수 없다는 지적이다. 즉 술의 량면성을 고려하지 않을수 없다. 술 자체는 약으로 쓰인다. 건강의 키워드로 활용함을 알겠다. 의학에서 의(醫)라는 말 밑 부분에 있는 유(酉)가 술을 의미한다. 즉 술이 병을 치료하는 주요 수단이라는 말이다. "동의보감"에서 술은 성질이 매우 뜨겁고 모든 경락을 운행시키며 약 기운을 운행시키고 온갖 나쁘고 독한 기운을 없애며 혈맥을 통하게 하고 위장을 두텁게 하며 피부를 윤기있게 하고 우울함을 없애며 흉금을 털어놓고 마음껏 이야기하게 한다고 밝혔다. 이처럼 술은 옛날부터 귀한 약으로 사용돼 왔음을 알수 있다. 그런데 모든것은 과하면 독이 되는 법이다. 바다물이 얼 정도로 추워도 술은 얼지 않을 정도로 그 내한성이 매우 뜨겁고 독 또한 많기때문이다. "동의보감"에서는 술을 취토록 마시면 독기가 심장을 공격하고 위장을 뚫어 옆구리가 썩고 정신이 혼미하고 착란되며 시력이 희미해져 생명의 근본을 잃게 된다고 기술했다. 술을 놓고 철학을 풀었고 그에게 세계관을 주입시켰다. 이제 술도 생명유기체처럼 작동할지 모른다. 살아있는 모든것은 우주의 조화를 면치 못하고 아울러 신비성을 지닌다. 술도 자체의 마력과 함께 인간의 고용을 덧입었다. 차의 덕이 맑고 고요함이라면 술은 독하고 흥하는 멋이 있다. 이 량자의 긴밀한 결합으로 수용자와 호흡을 같이 한다. 아직도 상정(觴政)이 흥행한다. 술자리에서 흥을 돋우기 위하여 정하는 규칙치고는 꽤 얄밉다. 일단 받은 술을 다 마시지 못하고 남길 때 벌주로 한잔 더 마시는 따위의 약속이니 당연히 세속의 질책을 면치 못한다. 첫잔은 사람이 술을 마시고 두번째 잔은 술이 술을 마시고 셋째 잔은 술이 사람을 마신다 하지 않는가! 그러니 유연하면서도 잠재력이 있는 차의 다례에서 본을 받아 기품을 갖춰야 한다. 그런 출발로 술을 물과 독과 약의 4위일체를 습득하고 제창하면서 점차 그런 분위기를 조성해야 한다고 본다. 파티주안상의 신선로가 식기전에 또 한잔 감미로운 축배를 들자. 술의 철학관에 취하면서 말이다.
13    우리는 같이 댓글:  조회:1082  추천:0  2013-08-27
우리는 같이 정호원   같이 살아오며 정이 들어 같이 있을수밖에 같이 늙어가며 보살피니 같이 즐길수밖에 서로에게 감사한 일 자신에겐 흐믓한 일 지구에 담겨 인생을 누리는 우리는 같이 하늘아래 땅우를 내처 뭉쳐 기러기로 날며 세상 멀리 꿈을 심느라고 우리는 같이   어제 동행하고 오늘 만나 같이 걸을수밖에 래일 기다리며 홀로 아닌 같이 그릴수밖에 자연에겐 축복 주며 친구에겐 사랑주며 려행에 나선 련인을 느끼는 우리는 같이
12    봇나무행렬 댓글:  조회:1119  추천:0  2013-06-28
봇나무행렬 정호원 연길-왕청-동광-십리평-황구-복흥-륙도위자 코스를 달렸다. 두시간 좋이 달려 신툰이라는 간판아래에 세웠다. 동구밖 입구에 들어서니 청일색으로 한족동네라는데 놀랐다. 더 특이한것은 지붕에 올린 “널판자기와”였다. 고로하면서도 특색적인 풍물로 와닿는 주택 옥개(屋蓋)다. 말짱 홍송널판자로 만든 목와(木瓦)다. 당지자원을 합리하게 리용한 농가의 지혜산물임을 절감케 한다. 초씨성을 가진 농부와 안씨성을 가진 농부 두집을 선후해 방문했다. 경작지 6무를 다루는데 자식들은 전부 시내와 외지로 돈벌이를 떠났단다. “마소의 새끼는 시골로, 사람의 새끼는 서울로”라는 속담이 떠오른다. 한족들의 기성세대는 시골에서 땅농사를 하면서도 자식들만은 출세시키고 견식을 넓힌다는 의지이다. 남녀로소 덩달아 “남부녀대”하는 붐에 비해 한족들의 이동현상은 엄청난 이질감이 있었다. 늙은 내외들은 집에서 잣송이를 따는 부업과 산열매채집을 주업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한편 치부의 꿈을 키우고있었다. 집안은 별로 볼품이 없는 가장집물이 전부다. 대조적인 기물은 마당에서 포착됐다. 한마지기에 달할 정도로 휘넓은 뜰에 잣마대를 산더미처럼 쌓아놓았다. 노끈으로 포장한 잣마대옆엔 도끼, 낫, 도리깨, 농기구와 서슬 푸른 전기톱이 놓여있었다. “우린 이 고장에서 43년간 살아오우다. 줄곧 터전을 지키고 밭을 다루고 농살 짓지유…” 안씨는 당당하게 어깨를 추스르며 말한다. 차는 다시 달린다. 도로 량옆엔 전통적이면서도 고로한 한족농사(農舍)들이 즐비하게 늘어섰다. 토피집을 둘러싼 벽체와 “복(福)”자 주련을 붙인 대문짝, 돌로 쌓은 담장, 마소들이 들어선 마구간은 바탕이 구전한 살림 그 자체였다. 바람벽이 떨어져나가고 창호지가 너덜너덜하고 지붕이 고삭은 조선족농가들에 비해 원형을 잘 보존한 원초적인 집단부락들이다. 옥수수를 말리는 덕과 농기계, 비둘기장은 그들만의 유표한 징표로 토착민의 포실한 가계내실을 마냥 표방하고있었다. 복흥에 이르니 해가 서너발이나 솟아올랐다. 식당은 말짱 한족업주가 위주였다. 가물에 씨나듯이 요행 찾은 “조선족개장집” 간판을 보는 순간 동질성에 뭉클해났다. 한달음에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맙시사-벽에 붙은 쌍 “희(喜)”자가 이방인의 얼굴처럼 서먹하고 애매하기만 하다. 식당구조 역시 한족구들이다. 칸막이 벽지에도 창을 꼬나든 괴물의 풍속도가 걸렸다. 주련처럼 나붙은 문구가 벽모서리에 또 걸렸다. “한족식당이구나. 참…” 양대가리를 내걸고 개고기를 파는것 같은 둔갑술에 의아쩍어 반문할 때다. 곱상하게 생긴 안주인이 동남 부엌에서 살룩대며 다가와 입을 연다. “아니예요. 우린 조선족이지요. 남편은 복흥병원에서 화험원으로 근무하고 저는 훈춘 쌍신에서 시집온지 몇십년 되는데요. 김치장사를 하다가 개장집을 경영하는데요…” 박씨성을 가진 녀인의 해사한 인사치레에 눈이 휘둥그래졌다. 소개를 듣고보니 복흥엔 조선족이 거퍼 몇명 없고 조선족식당영업은 자기들이 혼자란다. “원래부터 조선족들이 드물었는가요?” “이전엔 조선족들이 꽤 많았지요. 인젠 학교도 빈 집으로 됐고… 조선말하는 사람도 없어지고…” 그녀의 한숨이 실린 한탄은 듣는이로 하여금 역시 갑갑하게만 군다. 동포군체가 둥지를 떠나니 오붓했던 주변환경도 대뜸 수은주가 내려앉아 을씨년스럽다는 결론이렷 다. 다시 출발했다. 장백산어구에 들어선 감이 들었다. 산등성너머로 삐죽삐죽 내민 봉우리들이 가을과 겨울의 환절기에 접어들어 제법 선명하게 두각을 드러냈다. 도로 량켠은 훤칠한 라목들의 대렬이 의장대처럼 씩씩하게 서있다. 차창으로 찬찬히 보니 일초일목마다 서로들 닮아버려 대동소이를 판박이처럼 만들었다는 핍진감이 앞선다. 마술과 술사가 동시에 작동하는 변화다단한 요지경을 내가 손으로 굴리나보다. 나는 경이감에 찬 눈길로 잎이 다 떨어져나간 겨울수림을 눈빗질하고있다. 뭔가 이상야릇한 초점이 끝내 포착됐다. 한것은 십리평을 지나서부터 비탈에 들어선 나무숲이 일매지게 봇나무로 울울창창하다는 발견에 동공을 키워야만 했다. 금창림장에서 잠간 포즈를 취할 때도 미처 예견하지 못한 풍경이다. 무심한 관찰이 아니다. 봇나무수림은 어찌 보면 근거지를 떠나버린 개척자들의 등신상인지도 모른다. 이것이 내 착상이자 새삼스런 발견이다. 그분들이 옹기종기 모여살던 마을 산자락에 원주민들의 대리동상처럼 일떠선 행렬이 바로 봇나무수림이 아닌가! 하얀 치마자락을 날리는가 아니면 두루마기를 휘저으며 아리랑고개를 톺아오르는가! 백의겨레의 이동대오가 잠간 숲에 머물러 다리쉼을 취하는 포즈 같기도 하고 밀림을 빠져나가는 경의비마(輕衣肥馬)가 안개발에 가리운채 서성거리는듯하다. 봄과 여름엔 무성한 록음에 덮여져 형체를 분간치 못했으나 락엽으로 잎새가 내려앉은 지금은 라목들로 확연하게 현신하고있다. 백의동포가 마을을 비우고 산중의 절을 지키는듯 아니면 초혼하는 모습으로 샤쯔자락을 흔들어대는듯하다. 기발한 착상은 아니고 불길한 조짐도 아닌 그 어중간한 중립상태에서 내 사유는 골풀이를 친다. 유복지인들이 줄레줄레 떠나는 프로필을 보는 심정은 서글픔만 아니다. 말못할 자가당착에 휩싸인다. 흰 봇나무가 앙상한 비석처럼 동토에 서있다. 정든 보금자리를 훌훌 떠나 외로운 또는 삭막한 집산지에 우두커니 서 바들바들 떠는 환각의 영상으로밖에 안겨오지 않는다. 끼끗하고 말쑥하던 봇나무의 이미지가 가뭇없이 사라지고 대신 헐벗고 앙상한 몰골이라는 점이 심히 불안스럽다. 또 살길을 찾아 원정의 촉도난에 올라야 하는 가난의 핍박이라면 운명의 추방이라겠다. 갈대밭에 날아든 갈매기라면 다른 시각으로 흡족하게 웃어줄수 있으련만…한족들은 나무기와를 얹은 두실와옥에서 포실한 살림살이를 영위하고 동족들은 광야라는 객지에 할수없이 나앉아야만 하는가?!… 길림성과 흑룡강성의 경계선에 서서 사진을 남겼다. 한창 시공중에 있는 포장도로옆의 높다란 간판을 파노라마로 기념촬영을 했다. 봇나무행렬을 배경으로 시대의 추억이라는 콘텐츠를 만들었다. 한걸음 북으로 더 내디뎠다. 바로 흑룡강성 땅이다. 곧추 가면 로야령, 로흑산, 동녕, 수분하라는 흑룡강성 행정구역이다. 봇나무행렬은 이어지고 자리뜸하면서 전진한다. 하늘이 높이 더 열리고 땅이 더 넓게 뻗어간다. 피난민이 걸어온 리정표이고 위치를 찍어주는 패쪽이다. 아직도 망국노와 주인공의 시처위가 가끔 헛갈릴 때가 있다는 산 증거라겠다.
11    미이라실체 댓글:  조회:1076  추천:0  2013-02-19
[수필] 미이라실체 정호원 아버지는 여느 촌민들과 마찬가지로 토장을 했다가 면례를 했다. 1990년 1월 14일 타계한 아버지를 2001년 음력 9월 9일, 중양절에 면례로 부모님을 합장했다. 하여 미이라로 보존되기는 글렀다. 허나 추모의 허허벌판에서 부친은 늘 생동하면서도 영원한 미이라로 계신다. 고대 애급인들은 시체처리방식에 따라 향유를 바르거나 다른 방법 등으로 오래 보관할수 있도록 처리된 미이라를 만들었다. 시대에 따라 처리과정이 다양했지만 내장을 제거하거나 제거하지 않았지만 썩지 않게 잘도 보존했다. 하지만 그들은 시체에 송진을 발라 마포로 싸는 과정만은 항상 일정했다. 애급외에 카나리아제도의 구안체인(人)과 뉴기니, 오스트랄리아 사이의 토러스해협 연안에 사는 부족, 남아메리카의 잉카인들도 미이라를 만들었다. 1991년 해발 3200메터의 알프스산맥 티롤의 빙하지대인 Otztal 계곡에서 얼음에 싸여 바짝 마른 미이라형태로 돼있는 태고때의 원시인 시체 한구가 발견돼 화제를 모았다. 난 매년 청명과 추석에 환고향하면 선참으로 조상의 산소를 찾는다. 특히 아버지에 대한 추념은 늘 나를 괴롭히고 분발을 힌트하기도 한다. 구천을 우러러 고인을 되뇜이 괴롭고 부성애를 재생할 땐 힘이 생긴다. 어버이들이 누워계시는 선산이 미이라를 보존한 박물관으로 안겨옴이 그래서 당연하다겠다. 알프스산맥에서 발견된 원시인의 미이라가 세계 이슈로 나도는 가운데 나는 문득 내 가문에도 그런 전대미문의 미이라가 보존됐구나 하는 느닷없는 발견에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아버지는 방부제도 어떠한 약물처리도 하지 않은채 아직도 생생한 프로필로 액틀모습처럼 나를 지켜보신다. 2012년 1월 14일은 바로 아버지의 기일제이다. 기제사랬자 곡소리나 분향은 없다. 그저 고요히 시간을 죽이며 어버이의 은혜를 머금을 따름이다. 키보드를 치며 가친님의 숨결이 들려오는 소리에 서재 중앙벽을 앙시한다. 1980년 11월 24일에 찍은 어버이의 흑백유상이 유심히 나를 굽어보신다. 원시인의 미이라가 남긴 유물을 과학자들은 세밀히 파악했다. 아버지의 유품은 그에 비하면 꽤 현대적이고 구전하다겠다. 그런만큼 내 가문의 미이라는 무시로 연구가 가능하고 참배가 신통한셈이다. 아버지의 일기책과 옥편, 회중시계, 족보만 봐도 이를 립증하고도 남는다. 난 평소에 아버지의 지문이 깃든 옥편과 회중시계, 족보를 곧잘 만지작거린다. 색이 바래진 종이장이고 중고품같은 시계지만 가친님의 애용품인 전가지보이기에 소중히 다룬다. 고인의 피부를 다시 느끼는 촉감이 여전하다. 내가 만약 과학자여서 아버지의 유체를 미이라로 해부한다면 맘의 상처부터 밝혀낼것이다. 동란의 금혁지세에 입은 상처는 보이지 않는 허물로 생채기를 남겼다. 앙급자손(殃及子孫)이란 말을 떠올린다. 중중농의 성분딱지는 조부의 강제퇴학명령처럼 가친의 한생을 지지리도 찌물퀐다. 윤동주모교를 2년 선배로 졸업한 향학열이 중학교로 진학할 기회를 포기해야 했는가 하면 빈하중농선전대와 해방군공작대들에게 기시를 당하고 체신에 맞지 않게 알은체해야 했다. 조부가 아버지를 3대 장손이기에 4촌 동생들의 월사금을 벌라며 강박적으로 중퇴시켰고 《로삼편》을 읽던 나날엔 구척장신을 몇뼘은 줄여야 했다. 아버지는 생전에 서인(庶人)으로 살았고 역시 평민으로 하늘나라를 떠나셨다. 하다보니 귀중한 선물이거니 위대한 기념물은 없다. 대신 세대교체적이고 가족적인 련대성 성총에서는 꽤 오롯한 유산을 남겼다. 생전에 베풀어주신 부성애의 할애인상이 제일 소중한 재부이다. 오늘 아버지의 기제사에 특히 알프스산의 원시인 미이라를 떠올리면서 아버지의 실체를 더 절감하게 됨을 어쩔수 없다. 과학자들은 원시인의 유품으로 추정되는 두가지 부시깃을 출혈을 멈추게 하기 위한 의료적인 목적으로 사용하였을것이라고 보았다. 구리로 만들어진 도끼날을 리용한 도끼를 소지한것으로 보아 이 원시인은 부족에서 위치가 상당히 높았던것으로 보인다. 아버지 역시 생전에 부시돌의 불을 솜에 켜던 기억이 잠간 있다. 성냥이 떨어지고 라이타 휘발유가 없을 경우 간혹 부시깃을 사용했던것 같다. 아버지의 기제사에 부시화제를 꺼내니 추모의 불꽃이 명멸하는걸 분명 보고있다. 호미, 낫, 삽, 괭이를 도끼와 함께 잡고 일년사시절 밭을 다루었고 나무하러 오봉산, 노루바위, 만진기, 사시평으로 다니셨다. 당년의 로동연장과 초부도구들이 미이라의 영원한 소지품으로 매김될줄이야...사람은 가도 자취는 남고 열매는 져도 향기는 남는다. 조부는 76세, 조모는 84세, 가친은 78세, 모친은 75세로 각각 향년을 보냈다. 평균수명을 따질 때 가히 나의 생명시간도 집계가 나오지 않나싶다. 그런 시공간을 넘나들며 충성과 추모를 이효상효(以孝傷孝)처럼 덧붙일가 한다. 불가사리 미이라로 영존할 가친님의 장구한 명복을 빈다. 이런 소망으로 경주 정씨의 충효가성(忠孝家聲)의 조형력을 보천솔토(普天率土)에 넘치게 이룰가 한다.
10    [수필] 진달래민족 (정호원) 댓글:  조회:1019  추천:48  2009-12-23
진달래민족정호원내가 오봉산에서 진달래를 찾아보고자 하는 집착일념은 오랑캐령과 오봉산이 나란히 어깨를 겯고 서있기때문이다. 오랑캐령을 손꼽을라치면 당연히 그리고 자연히 망국대부와 망국멸족의 남부녀대 이주민들을 초들게 된다. 그 망국지민 흰옷의 행렬들이 바로 두만강을 건너 오봉산이 먼발치로부터 지척에 거느린 오랑캐령을 지났다는것이다. 륙도하 하류를 따라 대립자, 중영, 명동, 선바위, 승지를 지나 룡드레우물옛터에 정착했고 “후속부대”들은 비암산, 모아산을 넘어 각각 평강벌로, 연길분지로 산재했었다. 주마등마냥 지나가는 장면을 련상하노라니 오봉산의 진달래와 이민행렬이 엇바뀌여 안겨온다. 아, 눈속에서 상기된 볼을 드러내면서 홍조를 띈 연분홍 진달래의 고운 얼굴! 당년의 이민자들은 선연한 불길을 날리는 진달래를 보면서 어떻게 감탄과 위안을 가졌을가? 진달래와 이주민들은 력사의 상봉을 나누면서 서로의 운명을 점치느라 서먹하기도 했고 매혹적이기도 했으리라???   낯설고 눈선 만주라는 북변땅을 처음 디뎌보면서 망국노의 애통과 실향민의 비탄이 겸비된 이중 곤혹가운데 진달래야말로 가장 화사한 문안이였을것이요, 가장 친절한 인사였을것이다. 굶주리고 얼어든 한몸을 겨우 지탱하면서 눈길우를 며칠째 도강작전으로 찾아온 간도! 불청객을 반긴 환영의 화신도 진달래요, 길안내의 좌표도 역시 진달래였을것이리라????뜨거운 화염을 눈무지에 날리면서 연기 없는 불길로 추위에 우둘우둘 떠는 몸을 감싸준 다감한 온기가 바로 오봉산기슭 오랑캐령에서 방출했을것이 아닌가!   산과 들이 온통 백설천지로 포장한 은백세계에서 진달래의 만개는 제일 선명한 온난의 색조였고 수무의 색상이였다. 망국지탄의 역마직성들은 설중송탄같은 진달래난기를 피부로 느끼고 호듯호듯 드리운 아지랑이같은 진달래열기를 페부로 감지하면서 그 선명한 인상을 각인했다. 장졸지분없이 무심히 핀 진달래가 실향자들에게 안겨준 이국정취는 포옹과 관용 그리고 할애의 사열대였다. 식물의 체취치고는 포섭과 동정을 베푸는 숨결이기도 했었다. 그날의 그 자리에 묵은 뿌리를 드리운 진달래는 망국노의 리정표였고 동족의 자화상이 수입된 데이터를 보관한 소장품이였고 수난의 려정을 목격한 장승이다. 어느덧 나는 당년의 장면으로 서서히 돌아가는 시간을 탑재한 몸이 된것이 아닌가싶다.     나는 이런 발상을 수차 가다듬는가운데서 진달래와 중국조선족의 상호련관성에 대하여 무척 관심을 기울였다. 식물의 대박미산의 함수와 민족의 천생려질의 캐릭터는 동질성과 련대성을 이루는 면이 신비하고 흥미롭다.   아, 삼합진과 지신진의 경계인 오랑캐령의 오봉산, 그 산의 진달래! 조선 회령으로부터 두만강을 도강해 게사처라는 지금의 삼합촌에 닿아서 즉각 오랑캐령을 넘는 고행에 올랐던 천입대오였다. 오랑캐령을 허위허위 넘어 대립자, 명동을 지나 룡정까지 가는 로정은 60킬로메터였다. 흰 두루마기에 하얀 치마저고리를 받쳐 입은 백의동포들의 대렬이 지나간 당년의 사열식을 치른 력사의 목격자요 수난의 립회인인 오봉산 진달래! 괴나리보짐, 죽장망혜, 페포파립, 두루마기, 무명전대, 토스레치마, 미투리, 망태기, 쪽박, 달구지, 발구, 망건, 조바위???렐???흰옷의 그림자들을 편입한 편린들이였다. 초라하고 꾀죄죄하고 람루한 행색들이 걸인으로, 류랑민으로, 실향자로 오랑캐령을 넘을 때 진달래는 동정과 련민과 액색의 안타까운 눈물을 뿌리며 몸부림쳤을줄로 안다. 재해, 전쟁, 전염병의 화근을 입어 기아선상으로, 궁여지책으로, 막무가내로 일가권솔이 흐느끼며 넘던 아리랑고개에서 오봉산진달래는 피맺힌 한을 뿌리에 키웠다.  내 조상의 발자취와 숨결 그리고 그림자가 비껴든 오봉산진달래이다. 수난자의 오열을 터뜨린 호흡과 식물의 비애가 제작한 합성이 금시 어느 골짜기 어느 잎사귀에서 다시 재생되는 메아리에 가슴이 뭉클 저려온다. 조상들의 넋이 어린 진달래 동유림이요, 망국노의 애환이 서린 꽃동산이다. 진달래민족이라는 낱말을 새삼스레 떠올린다.   이쯤 풀이를 한단락 아퀴짓노라니 이어지는 교묘한 하모니가 추가된다. 즉 당년의 진달래이미지와 현대의 재중동포들의 숙명인맥을 포착하게 된다. 그 어떤 텔레파시나 공감대를 형성하는 부분인지도 모르겠다. 다 같은 한반도에 위치하였지만 조선의 국화는 목란꽃이고 한국의 국화는 무궁화이다. 한반도에서 파생되고 분류된 중국조선족이지만 유독 꽃을 좋아하는 시각적내지 심미적인 차이는 왕창 판이하다. 일례로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주화는 바로 진달래이다. 왜 이런 부동한 상징물로 부동한 패턴을 창조했겠는가! 주요 원인은 시처위가 달랐으므로 꽃에 대한 파악조차 거처지내지 소경사를 우선시했다는 지적이다. 꽃을 경험하고 애호하는 체감의 본질은 바로 섭력의 여하에 달린 분수령이였다. 하여 동질성의 이질성으로 서로 다른 꽃을 애완지물처럼 따로 선택했지 않았겠는가 하는 미묘한 반신반의를 품게 됨도 당연하다겠다.   경광성이란 빛의 세기가 자극이 되여 식물기관이 오므라지거나 굽거나 펼쳐지는 성질을 이른다. 꽃의 개페, 팽압 운동 따위이다. 진달래가 그렇고 연변인이 그렇다. 한반도가 모국모향이라는 광의적인 혈통설법은 그럴듯하나 동질성에서 불가피면으로 해탈되여 이질성을 보이는 개성은 중국조선족 그 자체의 골수에 배인 문화체질이 잉태한 모체이다. 민질이자 우세이고 제약성이자 우수성이다. 고루한 답습을 체념하는가 하면 또 새로운 모식을 탐구할줄 아는 순발력도 지니였다. 이른 봄에 이파리 먼저 분홍색 꽃잎속살을 드러내놓고 찬란한 영춘화-전령사-로 된 진달래! 꽃샘잎샘 추위속에서도 피여야 하고 눈물보다 미소를 더 지어야 했다. 자치민족의 수난사가 그냥 묻어있는 꽃이 진달래이고 주화의 상징속성을 뻗쳐가는 저력의 대표성이 바로 진달래이다. 주화의 생리대로 문화속성을 고수하면서 역경의 정복자로 탈바꿈하는 강근지족이 아닌던가! 연변조선민족의 상향성은 그런 발로에서 진로를 열고 진통을 감내한다. 개척민으로 중화민족권의 멤버로 부속된 주인공의 릉운지지 자격도 그런 시발점에서 시작된것이다.   이민 3세를 주축으로 2세와 4세는 조상의 선호와 애정이 어린 진달래를 역시 애착과 갈망으로 숭배한다. 습숙견문이요, 숙습난방이라 했다. 진달래축제를 비롯한 이벤트가 빈번하고 진달래가송을 중심으로 한 예술행사 역시 화끈하다. 진달래주제가요가 연변의 문화브랜드라는 설이 나돌 지경인 현시점인데야???래갱쑏떪?진달래요???래권헹?명구는 연변특유의 풍경주소이다. 왈츠, 벨칸토, 가무, 민속제 등 형식은 진달래승화의 주선률이다. 연변의 상징인 진달래가 경제를 이끌고 관광유치를 자극하는 요소로 합류한다. 허다한 작가, 예술가들은 노래와 그림, 촬영, 시, 사생스케치, 무용 등 다양한 예술작품을 창작하여 민족정수를 주입하고 고양한다. 민간차원의 백의동포정신연구테마 역시 연변풍격을 살리는 진달래를 소외할수 없다는 발단은 중국조선민족의 패턴으로 점점 거세게 불거진다.   연변판도의 시장잠재와 미래지향이 접목하는 합수목이 열린다. 오봉산기슭 오랑캐령에서 흰옷의 이민행렬을 영접하던 진달래가 품격을 업그레이드해 인젠 연성환경으로 추대되였다. 그 뿌리가 다시 오봉산에 뻗어가면서 족속들의 생채기를 쓰다듬는다. 진달래는 잎없이 꽃핀다. 배달겨레도 고국모국이라는 이국땅에서 유산재산 없이 적수공권으로 월경이주해 삶을 피웠다.   진달래는 열매를 맺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나 우리야말로 손색없는 진달래족속이다. 사실 기아선상, 페의파립을 겪으며 대국의 주권, 중화의 주인공으로 정착했듯이 진달래도 열매를 맺는다. 4월에 분홍색 꽃이 잎보다 먼저 가지끝에 피고 열매는 삭과로 10월에 익는다. 헐벗었던 이주민들이 드디여 평등권리를 향수하며 56송이 화원에서 진달래라는 화명으로 활짝 웃지 않는가! 당의 소수민족정책아래 자치주민으로 진달래민족으로 영위할 새 주소, 새 좌표는 벅차고 버겁다.   우리의 령토가 줄어들지 않는한 진달래뿌리는 확장바탕을 늘여갈것이다. 진달래민족의 자존을 다시 찾고 그 속성을 후손만대 이어갈 때 개척자후예로 더 부상할것이 아닌가! 추워도 새 움을 틔우며 만개하는 천사를 이쁘게 키우고 그 활력소를 보장하는 원예사가 바로 우리들이다. 자신의 삶이 깃든 반사경으로 진달래를 감상하는 눈길이 십분 필요한 현시점이다. 만물앞에서 빨간 등불로 추위를 태우고 세상속에서 진한 혼취로 매력을 발산해야 할 중국조선족! 어제도 오늘도 래일도 진달래민족으로 자부할 주대도 필요하거니와 그 이미지를 고수하고 계승하고 발전할 전략도 필수적이다. 하여 장백산진달래든 오봉산진달래든 어차피 자치민족의 패턴이고 소수민족의 넋이라고 그루를 박고싶다. 우리의 근본이 흔들리면 웃음도 꽃도 향기도 무색함을 소름 끼치게 절감할 능력과 용기가 있는지?
9    [시]자연의 합작(정호원) 댓글:  조회:849  추천:40  2009-11-16
자연의 합작정호원물은 물로만 살다가어느날 산을 품었다서로 뒤치락거리다가그만에 서로 떨어졌다물이 산을 외면하고 가는데산이 앞을 막고 길세를 요구했다물은 울면서품속의 모래를 꺼내 동족이라고 설명했다산은 한발 뒤로 비켜강기슭에 탑으로 서겠다고수호신으로 지키겠다고 고백하였다오늘도 물은 시름 놓고바다로 닿고잇다
8    다각도 녀자 댓글:  조회:1416  추천:44  2009-03-21
기실 녀자 역시 절대적인 일면적내용이 없다. 어디까지나 사회인이고 직장인이고 생체인만큼 자체의 천부와 후천적인 추가로 부동한 측면을 갖게 된다. 남자가 발전하고 생물이 진화하고 동물이 발달하지 않는가! 굳이 녀자를 두고 이렇게 저렇게 틀을 짜맞추는것은 종발이 없는 시대에 앙가발이를 미화하자는 주장과 같다. 매년 3.8절을 굉장히 쇤다지만 그 유래와 연혁을 속속들이 다 아는 이들이 많지 않다. 또 3.8―하면 딱 녀성명절인줄만 알았지 다른 의미가 더 있는줄은 더구나 다 모를것이다. 중국에서 《3.8》(三八)하면 두가지를 떠올린다. 하나는 국제로동부녀절인  《3.8》부녀절이고 다른 하나는 녀성을 멸시하는 호칭이다. 다 같은  《3.8》(三八)이라지만 범주와 지칭에 따라 부동한 개념이 된다는 해석이다. 후자의 경우 《3.8》(三八)은 욕이 되는데 행실이 경박하고 말이 많거나 방탕스러운 녀성을 의미한다. 일종 다의어에 속하는 낱말이겠다. 중국 대만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녀성을 욕할 때 《三八》이라고 한다. 천한 부름이다. 그것이 중국 내륙으로 전파되여 이런 추명을 가졌다. 그러나 《3.8》(三八)의 진정한 유래는 중국 송나라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후에 《3.8》(三八)은 중원지구인 당산을 거쳐 복건, 광동 등지로 퍼졌으며 나중에 끝내는 바다 건너 대만까지 전해졌다. 송나라의 재상 구준(寇准)은 위야(魏野)에게 시 한수를 지어줄것을 부탁했다. 그러자 위야는 《군위북도생장팔, 아시서주숙위삼, 막괴존전무소어, 반생반숙미상암》(君为北道生张八,我是西州熟魏三,莫怪尊前无笑语,半生半熟未相谙)이라고 읊었다. 여기에서 《생장팔》(生長八)은 송나라 북방의 한 미모의 기녀를 말한다. 그녀는 용모가 아름다운 대신 행동이 아주 거칠었다고 전한다. 사람들은 그녀를 《생장팔》(生長八)이라고 야유로 불렀다. 위야는 형제중 셋째때문에 그녀를 《위삼》(魏三)이라고 불렀는데 후에 사람들이 이 《위삼》(魏三)과 《생장팔》(生長八)에서 각자 한자를 딴 《三八》로 경박하거나 방탕한 녀성을 비유했다. 문구조립치고는 아주 유머이다. 송나라때 중원지구의 백성들은 대량으로 복건, 광동일대로 이주, 이에 따라 중원의 많은 문화와 민속이 복건과 광동지역으로 흘러들었으며 《3.8》(三八)도 자연히 이 지역에 전파되였다가 복건과 가까운 대만까지 전파되였다. 가령 삼팔절에 무턱대고 《3.8》(三八)로 녀성을 칭송했다간 자칫 바가지를 쓸지 모른다. 녀자는 원체 여러 가지 각도를 겸비한 다기능시스템이다. 처관엄(妻管嚴)은 공처가를 말한다. 기관지염의 중국어는 《氣管支炎》인데 발음은 처관엄(妻管嚴)과 성조 하나 틀리고 나머지는 전부 똑 같다. 처관엄(妻管嚴)의 뜻은 남편에 대한 안해의 관리가 엄격하다는 말로서 쉽게 공처가를 지칭한다. 중국어에 원래 처관엄(妻管嚴)은 없었다. 이 단어가 신조어로 류행된 근원지는 상해이다. 그러니 해방후의 일이다. TV가 보급되면서 사람들은 드라마에서 상해의 남편들이 앞치마를 두르고 부엌앞에서 바쁘게 움직이는 모습을 종종 보게 된다. 1986년 한 통계의 자료에 따르면 상해의 90%이상의 가정에서 안해가 경제지배권을 장악했으며 80% 가정에서 남편이 가무를 전담했다. 한 가정에서 남편이 전통적의식의 틀에서 벗어나 가무를 맡거나 경제지배권을 상실한 남편을 두고 흔히들 처관엄(妻管嚴)이라고 부른다. 사실 이런 남편의 소행을 공처가라고 무조건 얕잡아 일컫는건 무리, 가정의 화목과 안해에 대한 남편의 깊은 사랑이 확답이라고 본다. 처관엄이 반사시키는 빛에서 녀성의 매력과 저력을 동시에 만나게 된다. 일종 야릇하면서도 은은한 미소가 찰랑거린다. 남편을 리드하고 화목한 공간을 개발하는 아이디어소유자로서는 녀자가 적격이나보다. 그 우세적인 지배로 세속의 편견을 이기면서 나중엔 사회에너지를 산생한다. 가정의 세포를 무시로 수시로 생성하고 균일과 통합을 이끌어내는 지혜를 가장 이성적특권으로 향유한다. 그런 녀자가 주부, 어머니, 안해일 때 내조는 성공적이다. 성공한 남자의 뒤에는 현숙한 안해가 서있다는 말의 발상도 여기에 비롯된 소치로 알아주면 좋겠다. 하다면 녀자라면 말짱 예쁘고 매혹적인가? 침우기마(寢牛起馬)라는 말이 떠오른다. 이딸리아 20살 모델이 자기의 소중한 처녀성을 960만원에 판매해 론난을 빚었다. 2008년 9월 중순, 이딸리아의 한 녀성모델이 자신의 정조를 공개적으로 판매하겠다고 밝혀 구설수에 올랐다고 현지 통신이 보도했다. 남성잡지 모델로 활동해온 라펠라 피코(20세)는 최근 이딸리아 잡지 《치》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처녀성을 100만유로(약 인민페 960만원)에 팔겠다고 공개했다. 처녀성 매각판매의 리유는 로마에 집을 사고 연기학원에 다닐 비용을 마련하기 위한것이다. 2008년 여름, 인터넷 사이트 등을 통해 소개되면서 네티즌들의 눈길을 끌고있는 인물은 19세기 후반 미국에서 배우 겸 서커스 단원으로 활동했던 애니 존스라는 이름의 녀성이다. 그녀는 수염투성이로 푸짐한 각광을 억수로 받는다. 1865년 7월 미국 버지니아에서 출생한 애니 존스는 뺨과 턱에 수염이 숭숭 난 모습으로 성장해 부모를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어린 시절부터 코수염 및 턱수염이 자라기 시작했다는것이 언론 등 당시 기록들의 설명이다. 무척 다모증으로 소문났었다. 고대 히브리말로 《털복숭이》를 뜻하는 《에사우》쯤으로 불렸던 존스는 독특한 외모 덕분에 어린 시절부터 서커스 단원으로 활동했다. 태여난지 9달만에 수염이 자랐는바 당시로서는 거액인 주급 150딸라를 존스의 부모가 받았다는것이다. 수염이 무성한 모습으로 성장한 존스는 16살에 결혼을 해 가정을 이뤘고 1902년 37살의 나이로 세상을 하직했다. 얼굴 전체에 털이 무성한 외모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극복하고 가정을 이룬것은 물론 연예인으로 인기를 누리며 화려한 삶을 살아 간 《턱수염 녀성》의 인생에 대해 해외 네티즌들은 한결같이 만장일치의 박수를 보낸다. 도고하면서도 해박하고 오만하면서도 슬기로우며 느긋하면서도 탄력이 강한 녀성세계이다. 단순한 일가견으로 귀납추리하기엔 역부족이다. 어디까지나 상태나 실체를 분석하고 적중한 판단을 내림이 바람직하다. 다각도녀자는 그래서 오묘하고 신비하고 역시 미궁의 보스이다. ―춘향은 엄청 주량이 세다. 소주 다섯 병쯤은 마파람에 게눈감추듯 한다. 그런데 지금은 소주 대신 맥주호프를 마신다고 매니저가 전했다. 황달간염이 발작한 때문이란다. ―심청은 축구운동을 무척 좋아하던 끝에 결국 코신바람으로 잔디밭을 누비고있다. ―황진이는 성형수술로 또 쌍겹눈수술을 받았다. 다음 달엔 인공보조개를 추가수술로 집도할 미용의사를 찾는 광고를 방송했다. 상술한 설법은 가능하기도 하고 응당하기도 하다. 년대나 배경의 진위를 밝히기보다는 그 가능성여부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수용자세가 더 요긴하다. 단지 녀성을 일개 특유의 전속물로 치부하는 선입견이 고약하다는 지적이다. 이러쿵저러쿵 비난하거나 부정하거나 또는 찬양을 할 대신 실리적인 투시로 정체를 조명함이 다각도 녀자에 대한 존중과 애대와 사랑이리라. 생존을 위해 헌신으로 희생하고 명예때문에 부나비로 불속에 날아드는가 하면 렵기심의 자극을 불리느라 해괴망측도 꺼리지 않는다. 어떤 녀자가 범죄인이라면 그 연유와 배경을 살펴 조처할수 있는 대응이야말로 진정한 구조의 손길이다. 어느 녀성이 재벌로 떴다면 히트비결을 안다음 내키는 꽃다발을 드려야 한다. 다각도 녀자일진대 항상 낮거나 비뚠 시점에서 나름대로 평가하지 말아야 한다. 다각도자세로 립체미를 우선 갖춘 다음 상대를 파악함이 십분 현명하다.
7    녀자와 남자 댓글:  조회:1253  추천:39  2009-03-09
남녀를 비교할 때 그 배렬순위를 두고 이의가 없도록 상식화되여온터다. 한것은 의례 천편일률적인 통념으로 먼저 남자를 앞에 놓기때문이다.    가령 남녀혼합석을 가진다고 할 때 문제제기가 참 미묘하게 번져져나간다. 어떤 술좌석에 남녀비례가 비슷하게 대칭되면 례외겠으나 만약 성별비례에서 남자가 렬세면 어찌 될가? 그것도 녀자 여럿에 남자 한명꼴로 합석했다면 어찌 될가 하는 질문이다. 두말없이 대번에 이색적인 시각으로 뒤집혀질거다.   ㅡ하 글쎄, 봉황무리속에 수탉 한마리가 끼였구려! 쯔쯔쯔.   ㅡ어쩐지 보기 구차하네. 남자라는게 시시하게 치마들속에 섞이다니...   동석 전체를 비난하는게 아니라 남자 하나를 쓸까스르는 힐책이다. 동좌(谿麟)에 문제가 있는게 아니라 자성군체에 웅성객체가 동반했다는 질투비슷한 빈정일지도 모른다.    간혹 좌석이 마련되면 응당 남자다수 녀자소수로 점찍는 체질화 역시 남자우선 녀자차요로 된 성별외곡이렸다.  M시 영어학부졸업생들은 1년후 동기생파티를 가졌다. 모임이랬자 고작 7명이였다. 대부분이 출국하고 하해하다보니 M시에 남은 동창생들은 일곱뿐이였다. 양창민은 부푸는 심정으로 호텔커피숍에 흘러들었다. 약정된 장소에 나타나자 온통 녀자들로만 일색일줄이야...사연을 알고보니 세명 남자들은 공교롭게도 사스전역으로 북경에서 돌아오지 못했던거다. 그들은 며칠전에 북경으로 상무고찰과 비자신청, 관광을 떠났다가 각기 모두 격리되였다. 활발하고 선의적인 녀우들이 자주 고무격려하자 그도 인차 정서안정을 되찾았다.   그러나 양창민의 의도적노력은 쉽사리 성공을 몰랐다. 객관적긍정을 받기엔 마냥 유감을 보였다. 그가 호텔과 스낵, 다방, 스탠드바를 옮겨 다닐 때마다 아주 괴상하고 민망해하는 눈초리들이 집중사격을 보내왔던거다. 계집애네의 꽁무니를 졸졸 따라다니는 제비족이나 건설방쯤 오인된거다.    나중에 그는 슬그머니 줄행랑을 놓았다. 잠적한 동행자를 찾느라 핸드폰이 울렸다. 양창민은 부아통이 터진채 꽥 소리질렀다.   ㅡ게사니무리에서 오리는 사라진다. 파리가 봉황둥지에서 탈출한거다! 빠이빠이   그 중퇴자가 바로 나의 오촌조카이다. 걔의 진실한 목격담이자 체험담을 통해 나는 사회대학에 금방 발을 들여놓은 햇내기의 고충을 읽었다. 걔의 곤혹을 무마해줄걸 잊은채 나는 세습적인 고전심태에 못내 찜찜해났다. 하다면 어두운 아지트나 러브호텔에서 남자 하나가 뭇녀자와 그룹섹스로 육탄투신에 나선건 떳떳하단말인가!   가령 양창민이 녀자이고 상대들이 남자였더라면 반감은 없을줄로 확신한다. 그러나 조물주는 그런 명복을 선천적으로 하사부여하시지 않은 모양이다. 적어도 남자를 주도적위치에 놓고 녀자를 수식용이나 부속물로 안배한것 같다.   녀자가 타는 자전거뒤에 남자가 올랐다면 어떻게 평가될가?  녀자가 모는 오토바이뒤에 남자가 앉았다면 어떻게 평판할가?   녀자가 운전하는 하이야옆에 남자가 동석했다면 어떻게 지껄일가?   녀자가...남자가...   이번엔 경우를 바꾸어 꽤 아이러니한 퍼즐을 제기하도록 하자.   녀자가 홀로 외길을 걸어가면 남자가 동행을 발싸심해 뒤따른다.   녀자가 홀로 차에 오르면 남자가 얼른 쿠션이나 옆자리를 양도한다.   녀자가 홀로 한숨쉬면 남자가 은근히 걱정으로 눈치를 살피며 궁금해한다.   녀자가 홀로 산다면 남자가 제꺽 자기도 홀애비라고 자아소개를 서비스한다.   알고보니 녀자를 미천하게 기시하면서도 녀자가 중요한게 남자다. 녀자가 좋으면서도 비쌔는게 남자다. 호감을 숨기고 진정을 파묻고 위선존엄을 부리는 성향이 남자다. 남존녀비ㅡ남녀로소ㅡ남녀칠세부동석ㅡ남좌녀우ㅡ남녀로유ㅡ남부녀대ㅡ남녀유별ㅡ남녀평등ㅡ남흔녀열(켕隙큽릠)ㅡ남녀공학ㅡ남창녀수(켕나큽?)ㅡ남녀동권ㅡ...무릇 남녀를건드릴라치면 무조건 녀자를 뒤에 배렬한건 먼 력사착오이다. 또한 가까운 근대현대의 재생내지 습답이다. 그러한 경직속에 녀자는 그냥 남자부속물로 종속관계를 유지해야 하는줄로 알고 자유박탈, 인권유린을 일삼케 되잖는가! 오도된 사회생리와 가정관념이다. 녀자가 간혹 외박외식을 한다면 온 가족이 총동원되여 광고홍보로 수소문하는 민감성이다. 녀자가 만분의 일의 실수로 CO₂를 발산했다면 하느님이 알프스산에서 로케트로 스키를 탄듯, 염라대왕이 태평양에서 낚시로 고래를 잡은듯 기문일화를 만든다.   녀자집중권에서 해탈되려 하면서도 녀자본체를 탐닉하는게 남자직경의 본능이다.   녀자구심력을 배척하려 하면서도 녀자원심력을 구하는게 남자반경의 관능이다.   당연히 녀자는 초롱속의 새로 갇혀서 끈의 조종을 받아야 하게 된다. 녀자를 일일이 클릭하면 그 개개의 감옥은 집과 직장, 회사를 벗어나 옹근 사회가 령역범주를 확장하는 원인이기도 하다.   남자애가 울면 “에익, 시시하게스리 녀자애들처럼 울다니...남자는 피를 흘렸지 눈물은 몰라”하고 으시댄다. 눈물이 녀성의 무기인듯말이다. 남자가 울면 조소를 받고 녀자가 울면 동정을 받는다는 설교에설가! 아니다. 적어도 녀자가 예속적으로 당하기 마련이라는 고루한 견지에서 남자를 선차적으로 우상도금한거다. 그렇다고 녀자를 경원시하라는 악의 권장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인격절대치를 보장하라는거다.   이제부터라도 부디 남녀순위거나 계칭분야를 언급할라치면 의례 녀남이라는 신조어를 사용하자. 녀주석, 녀대통령, 녀추장, 녀서기, 녀청장, 녀총리, 녀황제가 많지 않아도 인문교제에서라도 그렇게 칭하도록 시도하자. 하여 필자도 제목을 굳이 녀자와 남자로 달았음을 부언하는바이다.  
6    [수필]문은 열려라(정호원) 댓글:  조회:1413  추천:48  2008-09-04
문은 열려라정호원동기생 창일의 생일파티로 자택에 초대되였다. 눅눅한 강바람이 불어오는 풍경구에 위치한 160평방메터 호화형살림집은 오피스텔을 방불케 하였다. 리비아, 일본, 한국, 아르헨띠나 등 나라의 로무길로 귀국하더니 금의주행(锦衣昼行)이였다. 거실이 으리으리하여 왕후나 귀족들의 고대광실을 련상시켰다.   그런데 옥의 티랄가 아니면 미중부족이랄가 하는 유감미련에 찜찜할줄이야… 집에 돌아온후 떠들썩한 베란다밖 소음에 문득 얼마전에 본 기사가 떠올랐다. 꽁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상공을 비행하던 구형려객기의 문이 갑자기 열려 승객 160명이 사망한것으로 우려된다고 영국 BBC방송이 보도했다. 사건은 2003년 5월 8일 밤(현지시간), 수도 킨샤사를 리륙해 제2도시인 남동부의 루붐바시를 향해 가던 옛 쏘련제려객기가 리륙한지 45분이 지나 고도 7000피트(약 2200메터)에서 갑자기 기체압력시스템이 고장나면서 일어났다. 플러터(flutter) 같은 고장으로 뒤쪽 램프(lamp)와 문들이 망가졌고 강한 압력차이로 승객들이 기체밖으로 빨려나갔다고 BBC는 전했다. 공화국당국은 인명피해사실을 확인하지 않고있지만 AFP통신 등은 사망자가 160명, 로이터통신과 AP통신 등은 사고기에 탑승했던 129명 승객 대부분이 사망한것 같다고 피로했다.  특별히 문이라는 구조물에 대해 집착으로 사고하게 된다. 문은 이렇게 잘못 열려지니 재화불행을 초래하는거다. 문으로 화복이 들어오기도 나가기도 한다. 메소포타미아와 고대 세계에서 주로 사용했던 초기형태의 문은 가죽이나 직물로 만들었다. 영구재로 된 단단한 문은 기념비적인 건물과 함께 등장했는데 중요한 방의 문은 보통 석재나 청동으로 만들었다. 바닥과 천장을 피벗으로 련결한 석문은 주로 무덤에 리용했다. 아우구스투스황제시대무렵에 있었을것으로 추정되는 패널로 장식된 대리석문은 봄베이에서 발견되였다. 토이기의 랑가자에서 발견된 200년경의 그리스 문이 이스땀불의 박물관에 소장되여있다. 문과 사람은 불가분리의 의존체이다. 상호작용과 호상관제를 주고받는다. 지금 많은 주거환경이 문을 차단하여 정상적래왕이나 우호통상을 저애한다. 일례로 친구 창일네 집 같은 경우의 봉페식관리나 경호써비스가 깃든 주택이였다. 화원식이요 엘레베터요 하면서 그 품위를 자랑하나 분명 괴리되고 감금된것 같은 제약성은 기일수 없다. 자승자박으로서 어디까지나 고독과 적막을 동반하는 무드가 다분한 페쇄적공간이였다.  나들수 있도록 열려져야 할 문이 모조리 닫기니 통행금지이다. 손님이나 이웃, 친척친우들의 방문을 거절한다. 울타리를 만들어 금지구역을 넓힌다. 초롱과 감옥을 이웃에 거느린듯싶다. 류치장이나 집중영은 백색테로의 소산물인데… 범골에서 상경한 사촌누님이 종일 문을 열수 없어 점심식사마저 굶은채 돌아섰다는 사실은 지극히 페단적인 봉페아빠트의 빌미였다. 호위를 맡은 담당보안일군이 신원확인에서 신분증이나 공작증을 휴대하지 않았다는 리유로 그녀의 입장을 불허했던것이다. 물론 주인이 출근후라지만 그래도 농촌 같으면 옆집이나 뒤집에 부탁하여 갖고 온 땅꽈리와 줄당콩은 맡기고 갔을것이였다. 시내라는 도시의 린색함이였다.  문은 보통 한 장소와 다른 장소를 련결시키는 접점에 위치하므로 담, 벽 등의 경계요소와 함께 있는 경우가 많다. 문의 종류는 기능, 위치, 재료, 형태, 양식에 따라 성문, 대문, 현관문, 방문, 창문, 세간문, 목재문, 철재문, 유리문 등 여러가지로 나누며 지역적특성이나 문화적인 성격에 따라서도 그 용도, 성격, 양식 등이 상이하게 분류될수 있다. 집, 마을, 도시 외곽의 경계에 문을 세우는것은 방어수단, 권세과시, 장엄화하기 위한 목적을 지닌다. 특히 사찰이나 궁전의 문은 다른 장소와 구분시키고 성역화하거나 위엄을 부여하려는 전형적인 실례이다.  세계엔 특수한 형태와 공능을 지닌 다양한 양식의 문이 생겨났다. 현재 건축물에서 사용되는 문들은 개페방법에 따라 여닫이문, 미닫이문, 미서기문, 접문, 주름문, 회전문, 샤타문, 행거문 등으로 구분하며 구조 및 재료에 따라 띠장문, 판자문, 양판문, 플래쉬문, 완자문, 유리문 등으로 구분된다.  조상님네는 전통적으로 대문의 위치 및 좌향을 중시했다. 거주자의 수복강녕(寿福康宁)과 부귀다남(富贵多男)에 큰 의미를 부여한다는 주장에서였다. 집주인의 계급에 따라 대문의 양식이 달랐다. 통일신라시대의 가사규제에서 계층별로 제한을 두던것에서도 찾아볼수 있다. 일반적으로 상민이 사는 농가나 초가에는 사립문을 달았다. 기와집에서는 몸채나 행랑채와 같은 지붕밑에 평대문양식으로 판자문을 달았다. 사대부 주택의 솟을대문은 대문이 설치되는 행랑채보다 대문채의 지붕을 더 높이고 초헌(舌轩)이 드나들수 있도록 凹형의 문턱을 설치하거나 혹은 문턱을 아예 설치하지 않았다.  오늘날 목조, 벽돌조, 철근 콩크리트조, 철판조, 금속재로 문을 꾸민다. 문등(门灯), 초인종, 우편물받이통, 기발꽂이, 고비 등을 설치한다. 그것보다도 철근그물이나 쇠창살을 부대적으로 설치하는 층집을 볼 때면 문우에 문이 달렸고 집안에 집이 있다는 구조발견에 당혹스럽다. 정녕 평화스럽고 간극이 없다면 자물쇠나 카텐이라는 시설물이 필요할가 하는 반문에 저으기 사이비를 감지하게 된다. 또한 방도문, 경보기, 밀페감시회로 등 부대물의 조속한 철거도 기대할만한 일이다. 노크해본다. 빌딩이나 마천루가 우후죽순마냥 일떠서는 건설공사장을 보면 착잡해진다. 신분표방의 기호였던 문의 전통문화가 고급스러워짐을 애석해할가부다. 통함을 막던 봉건세습이 악성순환으로 알류(斡流)하는가! 호화형문장식은 탐탁하며 액색하다. 북경 고궁에는 도합 9999개 반의 방이 있다. 하다면 그만큼한 문이 있어야 할게 아닌가! 이렇듯 문은 자가당착의 복잡성과 함께 일반적인 도적방지, 안전보호, 난방효과 등 기능을 약화시킨채 미궁처럼 입을 다물었다. 환경도 인간도 바뀌지 않는다. 하지만 다 바꿀수 있는 방법은 내 생각을 바꾸는것이다.  빗장의 련대성으로 열쇠가 발명되였다. 처깔은 문고리를 도태시켰다. 사람이 문을 만들고 문이 사람을 가둔다. 집안에 갇히고 문안에 얽매인다. 장벽은 허물어라. 창구는 개방하라. 문은 열려라. 나갈 때다. 구름의 입문이다. 구제비도 들어오라. 월계화는 공기를 마시자. 어항금붕어는 산소를 청하자.  “한쪽 문이 닫히면 다른 문이 열리고 다른 방, 다른 곳에서 다른 사건이 일어난다. 우리 삶에는 열리고 닫히는 많은 문들이 있다. 당신이 바꿀수 있는것은 오로지 당신 자신이다.” (헬렌 니어링의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중에서)  문은 집의 귀이다. 닫히면 안식처가 롱자(聋者)이다. 부실구조의 에러(error)를 클릭하여 업데이트할가부다.                                                                2003년 6월 18일 <<연변문학>> 2008년 8월호
5    알피니스트 (정호원) 댓글:  조회:1386  추천:43  2008-06-17
알피니스트정호원알피니스트(alpinist)란 등산을 잘하거나 즐기는 사람을 말한다. 세계적인 등산붐으로 알피니스트는 생소한 외래어나 신조어가 아니다. 어디 가나 등산이 활발하고 등산화제가 일고있다.  등산용품전매업체를 비롯한 슈퍼마케트따위 체인점들이 속출하고 등산지식들이 핫이슈로 떠오른다. 그만큼 우리는 등산스케줄속에서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것이다. 과연 세계적으로 손색없는 등산가―적격자―를 손꼽으면 누구를 지목할가?  텐징 노르가이는 1914년 5월 15일 네팔 솔로쿰부에서 출생하여 1986년 5월 9일 인도 다르질링에서 타계했다. 2006년 5월 9일은 텐징 노르가이의 타계 20주년이다. 그는 네팔의 셰르파족등반가로 세인의 흠모를 한껏 자아냈다.  가난하고 문맹인 텐징에게 있어서 산은 생명과 유기적인 내연을 지닌 성물이였다. 미지와 공포의 세계에 대한 도전으로 시작했던 알피니즘의 모험전기는 텐징과 힐러리의 등반으로 시작되여 화려하면서도 파격적인 히트로 막을 내렸다.  텐징 노르가이는 뉴질랜드의 E. 힐러리와 함께 세계최고봉인 에베레스트산(8,844.43m) 정상을 최초로 정복한 세계급 엘리트 알피니스트이다. 귀족출신과 수도승들이 지배하는 히말라야에서 몹시 미천한 신분인 그가 처녀등정가로 에베레스트를 정복한것은 인간기적의 승리이다.  1953년 5월 29일 오전 11시 30분, 두 파트너들은 알파니스트라는 동반자로 결성되여 살을 에이는듯한 혹한, 포효하는 돌풍과 성긴 산소를 인고하며 등반에 성공했다. 옆구리까지 차오르는 눈길을 용케 헤쳐오르기를 5시간 대가를 치렀다. 텐징은 “어떤 새도 넘을수 없는 산”이라고 어머니가 말했던 해발 8,844.43m의 에베레스트산정을 발바닥도장으로 싸인하는 기적을 창조했다. 텐징도 힐러리도 모두 그 순간 계기때문에 슈퍼스타로, 폭발적인 인기인물로, 속세의 간세지재로 태여났다.  텐징은 등반에 능숙한 티베트인의 분파인 셰르파족출신으로서 소년시절에 에베레스트 남쪽지역의 셰르파거주지역에 있던 집에서 도망나왔다. 셰르파(Sherpa)란 원래 네팔동부 히말라야산속에 살고있는 티베트계의 한 종족이다. 라마교를 신봉하고 농업, 목축업, 상업 따위에 종사하며 히말라야등산대의 짐을 나르고 길을 안내하는 인부로서 유명했다.  최근 히말라야에서 등산안내원으로 일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단순 가이드나 짐군을 일컫는 말로 사용되고있지만 셰르파의 역할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등반을 위한 전반적인 준비는 물론 등정루트선정부터 정상공격시간의 최종설정에 이르기까지 모든것을 조언하는 히말라야산악 등반안내인이다. 산을 손금보듯 장악하고있는 이들은 설붕(雪崩)이 일어날듯한 장소와 그 시간마저 직감적으로 알 정도라고 한다. 그들은 항상 산과 더불어 살아가고있기때문에 산정세에 누구보다 익숙하고 선관(仙官)마냥 신출귀몰로 선견지명을 군림한다.  텐징은 셰르파(히말라야고산지대 티베트계 네팔인)로 알려져있지만 국적이나 출생조차 확실치 않다. 그는 정의감과 자비심이 강한걸로 알려졌다. 그는 기시를 받으면서 길잡이의 통바른 인격을 시종일관 잃지 않았다. 탁월한 심페기능을 갖춘 천부성과 극빈, 인종차별에서 발로된 반발적인 오기가 더 지배적이였다.  인도의 서벵골 다르질링에 자리를 잡은 텐징은 1935년 에릭 십턴 경이 이끄는 에베레스트조사대의 부지군으로 동행했다. 그후 수년동안 다른 등반가보다 에베레스트탐험에 많이 참가했다. 제2차세계대전이 끝난후에는 짐군조직대장신분으로 많은 탐험대에 가담하는 기회를 가졌다.  네팔인과 티베트인에게 있어서 하늘 향해 솟은 산은 회색 안개의 전모를 억천만겁으로 은닉해온 신령의 탑으로 토템 봉작을 받아왔다. 1952년 스위스탐험대는 남부 등반로를 따라 두차례의 에베레스트정복을 시도했는데 텐징은 두번 다 짐군조직대장으로 참가했다. 이 시기가 바로 그의 인생전환점이기도 하다. 목동과 야크가 방울을 달랑달랑 울리며 걷던 산길에서 신화적인 현대전설이 잉태하였다.         그는 1953년 영국의 에베레스트탐험대에 하담인(荷担人) 대장으로 참가하여 힐러리와 함께 제2정상등반조를 이루었다. 동남부 산마루 해발 8,506m 지점에 설치한 텐트를 떠난 두사람은 5월 29일 오전 11시 30분 마침내 에베레스트정상에 올랐다. 그는 그곳에서 15분에 걸쳐 사진을 찍고 박하빵을 먹은후에 독실한 불교도로서 제수를 남겨놓고 하산했다. 텐징은 수많은 네팔인과 인도인들에게는 전설적인 영웅으로 인식되였다. 영국의 조지십자훈장과 네팔의 타라훈장을 비롯해 많은 훈장과 메달을 선후하여 받았다. 자서전으로는 제임스 램지 울먼과 공저한 《에베레스트인 Man of Everest》(1955)이라는 책자가 있다. 《에베레스트정복이후 After Everest》(1978)는 텐징이 에베레스트등반이후에 했던 려행과 다르질링에 있는 히말라야산맥등반훈련원의 지도자로서의 생활을 담고있는데 이 책은 1954년 인도정부에 의해 세상에 공개출판되였다. 텐징은 에베레스트정상 눈구뎅이에 딸이 건넨 색연필을 묻어 “산꼭대기에 등정기념품을 남겨달라”는 딸의 소망을 들어줬다. 그는 “가족이야말로 내 첫째 관심사이자 최고기쁨”이라고도 표했다.  그의 패기는 세인을 감탄시켰다. 결단력과 친화력 그리고 인내성을 비범하게 보여주는데로부터 등정의 성공을 예시했다. 고용인을 위해 폭풍속에 혼자 텐트를 세울 신실(信實)도 구전해 능히 자립할수 있었다. 그의 고백 역시 아주 소박하고 진실하다.  “나는 일곱차례 에베레스트등정을 시도했다. 원쑤를 물리치는 병사의 기력이 아니라 어머니 무릎에 오르는 아이의 사랑을 갖고 매번 산을 찾았다… 허다한것들이 정치와 국적의 명목으로 치러지지만 산에서는 그렇지 않다. 산에서의 생명은 너무 현실적이다. 죽음은 너무나 근거리이다. 인간은 오로지 인간일뿐 다른것이 될수 없기에 어디까지나 그 자체가 전부이다.”  위인을 두고 시야비야 론의도 많았다. 사실 그는 셰르파족이 아니라 티베트인이였다. 1935년부터 셰르파로 일하기 시작한 그는 강인한 체력과 고용인들을 위해 사력을 다하는 불굴의 투지 및 랑만적인 성격으로 뭇국가들의 원정대에 셰르파로 인정받았던것이다. 그는 맹목적으로 돈을 벌기 위해 등반하지 않았고 후에 히말리야등반학교에서 후진들을 양성하는 일에 진력했다.   1953년 5월 29일 뉴질랜드출신의 양봉업자 에드먼드 힐러리(영국 국적)는 셰르파 텐징 노르가이와 함께 세계에서 가장 높은 미지의 땅에 인류의 첫발을 창조적인 자취로 남겼다. 그리고 이 순간을 기리기 위해 힐러리는 정상에서 단 한장의 력사적인 사진을 찍었다. 정상에서 포토에 찍힐수 있는 사람은 단 한명뿐이였다. 사진속에서 맹렬한 바람에 기발이 흩날리는 피켈을 높이 쳐들고 서있는 셰르파 텐징 노르가이의 모습은 후세의 흠앙을 받기에 너무나 족하다. 산소가 담긴 호흡기를 둘러쓰고 강풍에 부서지는 기발을 추켜든채 인간의 극한 의지를 만방에 웅변하는 프로필이다! 등산에서 텐징과 힐러리를 잊지 말아야 한다. 세계적인 범주에서 등산의 획기적인 창시자이자 출중한 척후병이며 또한 정예한 알피니스트인데야…  작은 메나 산봉에 오르고도 으시대면서 야호를 복창하는 아마츄어등산가들이 없지 않다. 거룩한 불굴의 투사들이 비겁쟁이를 조소하면서 질타하는 음성이 구천에서 들려오는듯하다. 아부로 굽실거리는 한치보기들은 비실비실 게걸음치며 후퇴할것이다. 대의를 버리는 시정아치들에게 있어서 알피니스트의 풍도는 얼마나 름름하고 거창한가!     나도 언젠가는 쵸몰랑마봉에 오르련다. 기이어 내 생애의 숙지를 달성하려 한다. 윽벼른지 벌써 몇십년 된다. 중학교때 지리과에서 그 정상을 노리던 일이 아직도 선하다… 나는 중국조선민족이다. 장백산줄기를 타고 뻗어내린 오봉산과 선바위 사이의 네드렁봉기슭 촌락인 하오동에서 태여난 이민 3세이다.   곰을 잡으려면 큰곰을 잡고 매를 맞으려면 큰 매를 맞으라는 말이 있다. 산에 오르려면 쵸몰랑마봉에 오르라고 나는 웨치고싶다. 나는 믿는다. 내가 그런 경험자 내지 경력자로 조만간 현실을 감오할것이라고. 장백산이나 태산에 올랐던 감흥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하나의 미지가 나를 기다린다. 내 오를 주봉의 처녀지에 쏠리는 호기심은 인생의 한부분으로 나를 조련질한다.                                                                                          2006년 5월 25일 <<연변문학>> 2008년 3월호
4    [수필] 카리스마(charisma)는? (정호원) 댓글:  조회:1371  추천:55  2008-03-28
카리스마(charisma)는? 정호원 네덜란드가 낳은 세계적인 화가 빈센트 반 고흐(1853. 3. 30 네덜란드 쥔데르트~1890. 7. 29 프랑스 파리 근처 오베르쉬르우아즈)는 렘브란트 이후 가장 위대한 네덜란드 화가로 폭넓게 인정받았으며 현대미술사의 표현주의사조에 막강한 영향을 미쳤다. 불과 10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제작된 그의 작품들은 강렬한 색채, 거친 붓놀림, 뚜렷한 윤곽을 지닌 형태를 통하여 그를 자살까지 몰고 간 정신병의 고통을 인상 깊게 전달하고 있다. 고흐는 신경과민으로 발작을 자주 일으켰다. 그는 미술품 거래를 싫어한데다가 1874년 런던 태생의 한 아가씨에게 실련을 당하면서 인생관이 암울해졌다. 인간적 애정을 얻고 싶은 욕망이 좌절되자 짙은 고독이 평생 지속되었다.   1888년 크리스마스이브(Christmas Eve) 즉 성탄절의 전날 저녁인 12월 24일 저녁에 반 고흐는 신경과민으로 발작을 일으켜 왼쪽 귀의 일부를 잘랐다. 그는 정신병원에 12개월 동안 갇혀 있으면서 되풀이되는 발작에 시달리고 평온한 기분과 절망적인 기분의 양극을 배회하면서도 이따금 화필을 놓지 않았다. 1889년부터 1890년 사이 그의 작품을 지배한 주된 특징은 현실과 격리될지도 모른다는 공포심과 일종의 비애이다. 오래 동안 정신병원의 독방이나 정원에 갇혀 있었기 때문에 주제를 마음대로 선택할 수 없는데다 자신의 영감이 직접적인 관찰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기억을 되살려 그림을 그려야 하는 현실과 맞서 싸울 수밖에 없었다. 그는 강렬한 색채를 부드럽게 만들고 좀 더 차분한 그림을 그리려고 각고했다. 그러나 흥분을 억제할수록 상상력이 더욱 넘쳐서 구성요소들의 극적인 효과에 몰두하게 될 줄이야!···그는 역동적인 형태와 힘찬 선에 바탕을 둔 표현양식을 개발했다. 후에 그는 고독을 이겨내거나 병이 나을 수 있다는 희망을 포기한 채 스스로 총을 쏘아 자살을 시도했다가 결국 이틀 뒤에 세상을 떠났다. 그가 자살했을 때 반 고흐라는 이름은 세상에 전혀 알려져 있지 않았다. 천재적인 화가 고흐의 사례를 봐도 알 수 있듯이 신경과민증, 정신분렬증, 다중인격장애 등 각종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환자들이 놀라운 예술성을 가진 작품을 그려내는 경우가 종종 있다. 실로 천하기적이다.   정신질환의 화가들이 상상을 초월한 미술작품은 또 다른 일화에서 더 체크할 수 있다.    요세프 하인리이 그레빙의 작품 ‘로마’는 상당히 걸출한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사람을 작게 그리고 대신 건축물을 그려 넣어 로마를 표현했다. 이 환자는 종이쪼각과 화장지를 모아 도화지를 만든 뒤 그 우에 바로 그림을 그렸다. 전문가들은 정신질환자들의 놀라운 예술성에 대해 “이들은 아성적 사고가 일정 정도 마비된 상태이기 때문에 인간 내면의 욕구를 그대로 분출한다”며 “이 같은 욕구 분출이 그림에 반영되면서 작품에 예술적 깊이를 더하는 것 같다”고 분석하고 있다. 하다면 정신질환의 영향력과 창작사유의 민감성은 모순성을 보이기보다 부동한 측면의 공감대가 존재하지 않나 하는 의혹의 대목이기도 하다.     과연 정신이상의 상태에서 미술작품을 완성한다는 사례의 반증은 무엇인가? 인간의 정신영역에는 아직도 미개발지가 많다는 지적이다. 정신질환자의 미술작품을 예술의 한 장르로 발전시켰다는 평가의 목소리가 거세지는 와중에 우리는 미술작품의 형태에 숨어진 과학의 함량을 다소 의심할 수밖에 없다. 긍정과 통하는 비결은 향후 타진할 몫이다.     잠재된 인간관능의 작용은 리비도(libido)를 포함한 인간내적의 발로를 무시로 수시로 발산하지 않나 하는 현념을 던져온다. 예술분야만 아닌 생활이나 사회활동에서 인간은 신령적인 영험을 연출하는 우연의 일치가 있나보다. 미신이나 봉건유독과는 별개의 이질적인 앙케트(enquête)를 가지고 싶다. 정신병환자의 자화상 같은 작품세계가 보여주는 힌트는 무엇일가? 우리는 영검이나 신험(神驗), 신통의 하모니를 신봉하지 않는다. 요술이나 마술은 눈속임이라고 여긴다. 무형의 독존세계는 어느 면에도 치우치지 않고 자체의 궤도를 운행한다. 식물에 소리가 있고 무기물에 언어가 교류되고 공기 속에 화면이 흐른다면 누가 믿을까? 그렇다고 또 그것의 부정면도 입증이 미미하다.     반상 적이라는 정신질환 환자들의 작품들에서 숨은 예술성을 발견해낸 것도 역시 인간이다. 그렇다면 분렬증 환자의 그림에서 예술성을 읽어내는 감상자 역시 예술적 심성을 지닌 심미관인 것은 또 무엇으로 해석하면 원만한지? 우주탐측, 인간비밀은 첨단만 아닌 기초교육에서도 진일보 한결 중시할 바이다. 신비의 유혹은 인간을 촉발하고 자연의 철학은 이지를 숙성시키고 신기루동네는 그래서 오늘도 우리를 부른다.   카리스마(charisma)란 예언이나 기적을 나타낼 수 있는 초능력이나 절대적인 권위이다. 신의 은총을 뜻하는 그리스어 ‘Khárisma’서 유래하였다. 다른 뜻으로는 대중을 심복시켜 따르게 하는 능력이나 자질을 말한다. 독일의 사회학자 베버가 지배의 세 가지 유형으로 합리적 지배, 전통적 지배와 함께 카리스마적 지배를 든 이후로 일반화하였다. 현대는 ‘권위’로 순화되면서 통칭된다. 하다면 구경 누가 카리스마인가? 우리는 자연을 창조하고 우주를 다스리고 이제 나노기술도 개발하였다. 나노(nano)는 1/1,000,000,000(10-9)을 의미하는 접두어이다. 나노라는 말은 난쟁이를 뜻하는 고대 그리스어 ‘나노스’(nanos)에서 유래했는데 지금은 아주 미세한 물리학적 계량 단위로 사용된다. 나노세컨드(ns)는 1/1,000,000,000초, 나노미터(nm)는 1/1,000,000,000m를 가리킨다. 1nm는 머리카락 굵기의 1/100,000 정도의 크기로 보통 원자 3~4개가 들어간다. 나노는 전자현미경을 통해서만 접할 수 있는 아주 미세한 세계인데 이러한 나노 과학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1980년대 초 주사원자현미경이 개발되면서부터이다. 나노기술은 처음에는 반도체 미세 기술을 극복하는 대안으로 연구가 시작되었지만 전자 및 정보통신은 물론 기계, 에너지, 화학 등 대부분의 산업에 응용할 수 있다. 나노기술이 의미를 갖는 것은 물질의 최소 단위까지 인간이 통제할 수 있게 되였다는 엄청난 변화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인류 문명을 획기적으로 바꿀 수 있는 기술로 떠오르고 있다.   그러나 기존의 인류문화지식보다 이제 더 개발할 미지의 탐구시장이 더 무한하다.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라 했다. 지금은 구상유취(口尙乳臭)가 아니래도 어디까지나 발전단계에 머무른 우리 자신들이다. 미숙한들 그래도 궁극적으로 소신해야 할 적임자는 인간이다. 억겁이 흘러도 최후의 카리스마(charisma)는 물론 인간이다. 명약관화한 결과임을 재삼 단정한다. 작금은 다만 시기상조일 따름이다.
3    날개짓 (정호원) 댓글:  조회:1268  추천:41  2007-12-21
날개짓 정호원무형의 귀객들이 줄레줄레 모여들다 유형의 혈육들이 삼삼오오 떠나가다 해살은 오늘도 창가에서 금노을 샘플을 전시하고 당숙은 어제도 흑송동 간이역에 트렁크 운송하고 청산이 아픈건 비릊던 멍으로 독을 쓰는 탓 강물이 넘친건 증발의 위기로 발악한터 이상한 꿈들이 기발 들고 완행차처럼 지나가다 결코 사이비 아닌 종루의 탑이 고개를 주억거리다 향관(鄕關)은 지금 몇시더냐 돌각담 년륜은 지워졌다 장독대 곰팡이가 분침처럼 피여나 다행스럽다 썩어서 향기로운 유허지로 락엽은 발동 걸다 숲속의 숲 빌딩의 집 그 안채로 족보장이 번쩍거리다 <<연변문학>> 2007년 11월호
2    찢어진 채찍(정호원) 댓글:  조회:1119  추천:41  2007-12-21
찢어진 채찍정호원 꽃을 심으며 물을 준다 북도 돋구고 재자국도 밟는다 담장 넘어 하늘에 넘칠 복욱한 향기 들판 지나 진동할 염려한 빛깔 무수한 나비 지천의 꿀벌 웃는 아가 새물새물 찬찬히 보는 할머니 싱글벙글 물초롱 기울일 정원사 팔을 끼고 미소할 신랑신부 주고받을 발렌타인데이의 정표 촬영사의 활동피사체 화가의 모델샘플 꽃을 심으며 물을 준다 구뎅이를 판다 이번에는 나도 심는다         <<연변문학>> 2007년 11월호
1    록색화라지 (정호원) 댓글:  조회:1369  추천:49  2007-11-26
록색화라지 정호원  (E―mail:za723@hanmail.net )  국자가라는 연길시 도심에는 신흥가 명휘거 23조가 있는데 간칭은 신흥가 162―1―10호이다. 내 아파트가 부동산건물수속처에 등록한 번호는 22042이다. 베란다 바로 앞은 병원건물인데 북경 중남해처럼 붉은 칠을 한 2층짜리 집앞에 화제의 포커스(focus) 주인공― 유표한 매너의 버드나무가 서있다. 별로 희귀한 나무도 아니고 상록수는 더구나 아니다. 언제 반했던가싶게 눈길을 끄는 포인트를 소유한 정원수이다. 아마 무비의 포용력이라도 지녔나부다. 매번 버드나무옆을 지날 때마다 떠오르는 생각이 별도로 끈적거린다. 마치 내가 륙주비전(六注比廛)을 소풍하지 않나 하는 착각이 방불하다. 로무시장을 옆에 끼고 정좌정립의 차렷자세를 취한 정가(庭柯)의 포즈가 너무나 안쓰럽고도 위풍이 도도하다. 왜냐 하면 원수(園樹)의 시처우가 상처와 오염으로 얼룩진 까닭에서이다.  바로 록색화라지배경이다. 푸른 색과 희나리의 깡마른 색조를 통합해 하나의 모자이크(mosaic) 라벨(label)을 조립한데는 그 자체의 이중성때문이다. 버드나무가 서있는 공간이야말로 소요의 천국이요, 잡음의 독천장이다. 마치 다모아김밥, 돈까스, 오징어덮밥, 야채볶음밥, 카레볶음밥, 쫄면, 라볶이, 쫄쫄짬짬, 수제비매운볶음, 오뎅국, 참치김치찌개, 오무라이스, 샐러드김밥, 누드김밥, 다모아김밥, 새우볶음 등 메뉴가 다종다양한 식단을 방불케 한다. 음식목록은 구미를 당기게 하나 소음이 번잡한 도심속의 버드나무는 질식과 희박을 감내하지 않을수 없다. 더군다나 병원의 혼탁한 오염대기, 병균악취를 맡으며 허리를 편채 고개를 쳐들었으니 거창하지 않을수 없다. 나는 정원수를 찬미하는데만 그치지 않았다. 한것은 나무의 생존섭정이 특별히 이색적이였기때문이다. 여느 식물들은 대개 상록수처럼 초록을 통일로 름름하나 정원수만은 언제 보나 고갈과 엽록소를 동시에 거느렸다. 일목료연케 하는 부위는 바로 정수리이다. 구부정하면서도 헌칠한 식물 전체에 풀빛이 함치르르하다. 그러나 좀더 시선을 목청(木靑)에 유심히 팔면 바로 우듬지에서 푸른 빛과 메마른 장작개비가 공존하는 장면을 만나게 된다. 희나리같은 불구가지야말로 록빈홍안(綠鬓紅顔)이 아닐가? 가로수와 정원수는 도시풍경과 미화에서 한몫을 담당한다. 세계 여러 나라들에서 신도시개발때 나무와 록지면적의 비례와 분포를 합리하게 전망계획에 결부시킨다. 나무와 록지가 없고 포장도로와 고층건물만 있는 도시는 사막과 같다. 2004년 8월, 연길시에만 해도 병든 가로수가 무더기로 죽어 쓰러졌다. 하루밤새에 병목도수(竝木道樹)들이 지천으로 널브러졌다. 이른바 《천우》라는 병에 걸려 유충분비물인 《톱밥》이 나무밑둥주변에 어지럽게 널려있었다. 물매미만큼 크고 색상이 까만 죽은 천우성충들은 보기에 모골이 송연했다. 주야로 분무기로 약을 뿌리고 점적주사를 놓느라 야단을 떨기도 했다. 물망에 오른 가로수생존이다. 콜레라, 홍역 등 전염병은 인류의 과학수단에 의해 전승됐으며 페결핵과 문둥병과 같은 악질적인 질병도 인류를 위협할수 없다.  최근에 또 《사스》, 《조류독감》 등 새로운 재난과 질병들이 쇄도하지만 역시 퇴치로 종막을 내렸다. 그러나 내 집앞에 서있는 버드나무라는 록색화라지는 인위적인 퇴치를 피해 자체의 면역력으로 생존을 치른다. 얼마나 장한가!  줄기의 초리를 따라 해살이 호듯호듯 날리며 바레무를 추느라 아양을 떤다. 잎새를 흔들면서 명주바람이 나무겨드랑이를 부쩍 간지럽힌다. 밑둥을 에돌아 개미행렬이 분주히 계절을 지게에 담아 퍼나르며 드나든다. 그늘진 록음속에 청초한 평화가 부들부채를 내젓는다… 비록 랑만에 나붓기는 원수의 춤사위이나 머리우에 떠인 상처는 측은하고 불행하다. 그런대로 나무는 하늘을 떠이고 대지를 부감하면서 옹근 몫에 충정을 고인다. 주변이 떠들던 곪아터진 생채기에 피가 흐르건만 짐짓 모르쇠를 대면서 태연자약하다. 피가 마른 상흔의 허물을 감추려는듯 거창하게 쳐든 고개짓은 지고무상의 위상을 지어냈다. 두가닥으로 갈라진채 해달을 떠인 력사를 만방에 토파하나싶다. 간단없이 턱인사를 전송하는 률동이 그래서 더 다감하다.  뉘라서 이런 강자의 형상앞에서 창유(瘡痏)로만 비애를 자아낼것인가! 턱없다. 생존경영기법과 생활성공비결 그리고 연찬고심의 자세를 현시하는 나무의 지향인지도 모른다. 학자적인 학술탐구를 조형미로 나타낸 발견이길래 내 흥심을 한껏 자아낸것이다. 득실을 배당하려 서두르는 뒤채임… 사익의 편린보다 공리의 편향을 아집한 축소판… 말없이 태를 갖추어 속세를 정화하는 푸른 기상… 보이는 상처를 보이지 않게 감추려고 몸짓을 섞어가는 률동… 그래서 아픔보다 희망을 발산하는 에너지가 산소와 함께 천하에 발산되는것이 아닐가! 입향순속(入鄕循俗)이란 다른 지방에 들어가서는 그 지방의 풍속을 따름을 칭하는 뜻이다. 《회남자》의 《제속편(齊俗篇)》과 《장자》의 《외편(外篇)》에 나오는 말이다. 비록 태고연한 원시림이나 무성한 삼림을 떠났지만 천부적인 속성을 떨쳐온 속성은 여전하다. 인간세상이라는 동네복판에서 긴 그림자를 늘어뜨리며 활력을 뽐내는 나무청춘은 마냥 벅차다. 진대나무나 고목의 편린을 떠인 부식투성이나 나무는 물이 오를 때면 자양분을 한껏 흡수하고 열매를 익힐 때면 탁갑성을 고고성처럼 터뜨렸다.  그런데 나무는 왜서 상처를 떠이고 그처럼 도도하게 그토록 점잖게 생존의 기발을 휘날리는것일가? 나는 5층짜리 남향집 아파트 베란다에서 2006년 10월 1일부터 부감을 시작했다. 사색을 굴리였고 의문을 빈발했었다. 출퇴근길에 지나면서 감탄부호를 떠올리기에 습관되였다. 뭇별이 잠든 고요한 밤, 책을 읽다가 피곤하면 곧장 가로등아래 희부연 형체를 현신한채 버드나무의 압축판을 구경한다. 2006년 10월 1일 국경절을 맞으며 새로 이주한 아파트단지를 《서식지》로 정한 이 범상치 않은 정원수와 인생을 교감한다. 입향순속의 순리를 금시 새삼스레 절감하면서 삶의 애환을 새로 터득하고 경업의 희비를 정리한다. 아픔과 재생의 희로애락은 처처에서 둥지를 털며 계절을 륜환한다. 나는 주기적이면서도 돌발적인 생업의 질서를 수긍하고 나를 그 와중에 존속시키는것으로 자아완수를 위안한다.  남몰래 혹은 공개창으로 보이는 포토파일처럼 드러났으나 깊이 인고한 동통은 그만의 체감이 아닐것이다. 자꾸 곁눈질로 여겨보는 나무의 화라지가 내 가슴에 멍을 돋친다. 푸른 청춘의 꽃인지도 모른다. 소중한 할애의 몫으로 피여난 불멸의 혼이였으면 좋겠다. 일훈일유(一薰一莸)란 바로 향초와 냄새 나는 풀을 한데 놓으면 좋은 냄새는 없어지고 악취만 난다는 뜻으로 좋은 일은 잘 잊혀지나 나쁜 일은 오래도록 전하여 내려옴을 이르는 말이다. 때론 착한 사람의 세력은 악한 사람에게 미치지 못한다는것을 이르는 말로 통하기도 한다. 반대로 일훈일유를 풀이하면 록색화라지의 이중풍경은 나에게 일희일비로 반복되는 현대일상을 감내하게 하는 좋은 프로필이다. 내 인생의 살아숨쉬는 리정비요, 추억의 향기로운 상록수이다. 매번 나무와 치르는 상우례(相遇禮)가 그래서 멋지고 즐겁다. 신랑이나 신부가 처가나 시가의 친척과 정식으로 처음 만나 보는 례식―상호례가 이보다 더 좋을수 없을것이다. 애훼골립(哀毁骨立)처럼 앙상했으나 나에게는 적어도 활력의 무궁한 힘을 주는 정신기둥인 까닭에서 풋풋하고 싱싱하고 풍만하다. 잎이 마르고 가지가 죽어버린 나무라면 상우방풍(上雨旁風)을 련상케 한다. 저항하다가 지친 오만상 같기도 하고 수능하면서 감내해온 오망부리의 표정 같기도 하다. 죽은 잎과 마른 잎 그리고 생엽들이 동시에 공존하는 하늘공간에서 나무는 그로서의 무대를 두개 가진 셈이다. 생사오페라의 활극을 가장 선명하게 가장 진실하게 그리고 가장 극대화한 장면을 연출한다.  나무는 부족한 영향으로 계속 자라려고 나무의 안쪽 90%를 죽이고 껍질부분 10%만 살아있다. 하여 나무는 오래 살고 고초기를 용케 버틴다. 자연의 규률을 따라배워 인간도 고통을 죽이고 희망을 새움으로 돋구는것이다. 인식의 변화에 따라 생체를 돋구어 위력을 보여주기에 너무나 충분한 나무의 존재가 그래서 삶의 길동무로 가능하다. 블랙유머는 스릴이 짜릿하다. 강한 설득력의 지배처럼 버드나무의 위치를 생존모식처럼 받들가 한다. 도능독(徒能讀)의 타산지석은 새로 깨여난 출발의 계획이고 조연배우의 데뷔신청은 새 야망의 라스트를 노린 파악에 비롯된다. 확고한 지위를 차지하자면 환경여하, 조건우렬을 론하기 앞서 스스로의 타진이 우선이다. 활력과 탄력을 돋구고 대리만족기능보다는 첨삭의 신축성을 발굴함이 요긴하다. 그러자면 속물근성을 삼가하는 한편 자아편달로 통하는 가교역할의 외교관이 되여야 하지 않을가 기대한다. 버드나무는 개천이나 습지를 버리고 도심에 심어졌다. 좌천(左遷)은 낮은 관직이나 지위로 떨어지거나 외직으로 전근됨을 이르는 말이다. 예전에 중국에서 오른쪽을 숭상하고 왼쪽을 멸시하였던데서 유래한다. 식물의 좌천은 그래서 인류의 창조적인 편승에 힘입었다가 결국 자기실천을 다그치는중이다. 록색화라지라는 정원수의 욕창(褥瘡)은 그 촉매작용으로 시다림을 주고 인고를 받는다. 나무의 껍질이라는 피부가 병상에 닿아 짓물러서 생기는 종기를 하늘에 거풍하고 새로 태여나는 모습으로 살아간다. 허상의 일탈에서 내면에로 귀환한다는 숨결이 씩씩하다.  나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천사로 나무는 섰다! 시련의 닻을 내린 빈 둥지는 바람에 날려가고 이제 새 출항의 돛을 또 꺼내든다. 허울속의 허상이 가려주는 내막, 숭숭 뚫린 구멍, 조금 발가벗기고 허물을 수납한 자세, 떳떳한 독립을 지켜온 인내, 용케 버틴 지레대! 어쩌면 병들고 구새 먹고 좀먹은 불구가지가 활력의 송신기였고 통합의 안테나였다. 어쩌면 옹근 일색으로 무장한 상록수가 아니길래 더 유정하고 더 돋보이는지 모르겠다. 홀로 서있는 원수의 이미지는 무엇일가? 세상을 멀리하고 결국 속세 복판을 독천장으로 정했다. 고소득의 정착금, 불멸의 서식지, 청춘의 상속인 록색의 계승자, 거듭나는 부활… 지참금 일전 없이 로자 한푼 없이 장도에 오른 구척장신이 도회라는 기착지에서 다리쉼 하나부다. 계절마다 곡물상의 수확을 계산하는 궁냥은 진작 세월을 앞당겨왔다.  나는 슬그머니 나무를 에워싸고 원을 그리는 동작을 환상한다. 해살이 무더기로 쏟아져내려 황금테를 둘러주고 담 넘어 애들의 웃음소리가 초리를 얼싸 껴안는다. 년륜에 정적이 기지개를 켜다가 잠들고 잎새마다 저력이 꿈을 묻힌다. 혼잡한 거리를 물러서고 후원별채 자리 잡은 버드나무를 눈동자에 옮겨온다. 화신은 과연 무엇인가? 농익은 천고마비가 녹아 흐르는 계곡의 감참나무도, 너럭바위를 위시해 돌틈에 숨은 로승도, 계를 받은 녀승의 차잔을 윤기 나게 닦는 모습을 기다리는 초피나무도, 유원지의 록화조경을 돕는 정향나무도 아니다. 그렇다고 또 밤나무, 잣나무, 감나무, 대추나무따위의 유실수도 아니고 산타클로스와 상징적으로 련상하는 크리스마스―트리는 더욱 아니다.  그런데 초토화의 피페상내지 활량함과는 대조적이나 매력은 은은하고 여전하다. 안침지고 유축진 뒤안길에 취한 포즈가 또한 눈길을 끌고 발목을 잡는다. 주목이 덧붙여지고 애정이 새록새록 날개를 젓는 내 추억의 모퉁이요, 집착심의 발상지다. 우수를 띠고 서있는 나무 전체가 고동이 금방 울린 부두의 돛을 방불케 한다. 인위적 식수라기보다 지향의 선택과 환경의 적중을 포착한 하모니(harmony)같다. 악어떼가 우글거리는 늪지대의 고목과는 상태적으로 다르나 락엽의 무리를 거느린 풍경신세는 근사하다. 고급레스토랑의 석가산뒤에 껑충하게 솟은 인조 홰나무는 객적다. 조명과 무대와 열창의 굿판이 그 보조배경이다. 그러나 버드나무는 현실로 살아가는 행인들의 활동체로 생명 그 자체를 확보한 공간식솔이다. 대자연의 기능상실인것 같으나 기실 그로부터의 확장발전진화농축정화세련의 거듭나기이다. 자존심을 내걸고 고요히 숨죽인 심연의 산소가 금방 색조를 달리한다. 언젠가 꿈에 버드나무를 두고 엉뚱한 환상을 했다. 완전히 미친 자의 몽유병이였다. 내가 글쎄 정원수를 통째로 뽑아 메고 연룡도를 뛰여다니지 않겠는가! 정원수가 캐치프레이즈(catchphrase)로 둔갑해 나의 슬로건을 표방하는 로천생방송광고였다. 어즈버, 고목생화(枯木生花), 고목발영(枯木發榮)은 내 거주지로부터 재생하는가! 나는 뿌리를 두고 무언가를 잃었고 또 뿌리를 찾아 무언가를 얻었다. 하늘을 도로 심었다. 태양도 함께 묻었다. 땅이 부스스 자리를 털고 일어나 비상한다. 만물이 태동한다.                                  2007년 2월 27일 <<연변문학>> 2007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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