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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피니스트
정호원
알피니스트(alpinist)란 등산을 잘하거나 즐기는 사람을 말한다. 세계적인 등산붐으로 알피니스트는 생소한 외래어나 신조어가 아니다. 어디 가나 등산이 활발하고 등산화제가 일고있다.
등산용품전매업체를 비롯한 슈퍼마케트따위 체인점들이 속출하고 등산지식들이 핫이슈로 떠오른다. 그만큼 우리는 등산스케줄속에서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것이다. 과연 세계적으로 손색없는 등산가―적격자―를 손꼽으면 누구를 지목할가?
텐징 노르가이는 1914년 5월 15일 네팔 솔로쿰부에서 출생하여 1986년 5월 9일 인도 다르질링에서 타계했다. 2006년 5월 9일은 텐징 노르가이의 타계 20주년이다. 그는 네팔의 셰르파족등반가로 세인의 흠모를 한껏 자아냈다.
가난하고 문맹인 텐징에게 있어서 산은 생명과 유기적인 내연을 지닌 성물이였다. 미지와 공포의 세계에 대한 도전으로 시작했던 알피니즘의 모험전기는 텐징과 힐러리의 등반으로 시작되여 화려하면서도 파격적인 히트로 막을 내렸다.
텐징 노르가이는 뉴질랜드의 E. 힐러리와 함께 세계최고봉인 에베레스트산(8,844.43m) 정상을 최초로 정복한 세계급 엘리트 알피니스트이다. 귀족출신과 수도승들이 지배하는 히말라야에서 몹시 미천한 신분인 그가 처녀등정가로 에베레스트를 정복한것은 인간기적의 승리이다.
1953년 5월 29일 오전 11시 30분, 두 파트너들은 알파니스트라는 동반자로 결성되여 살을 에이는듯한 혹한, 포효하는 돌풍과 성긴 산소를 인고하며 등반에 성공했다. 옆구리까지 차오르는 눈길을 용케 헤쳐오르기를 5시간 대가를 치렀다. 텐징은 “어떤 새도 넘을수 없는 산”이라고 어머니가 말했던 해발 8,844.43m의 에베레스트산정을 발바닥도장으로 싸인하는 기적을 창조했다. 텐징도 힐러리도 모두 그 순간 계기때문에 슈퍼스타로, 폭발적인 인기인물로, 속세의 간세지재로 태여났다.
텐징은 등반에 능숙한 티베트인의 분파인 셰르파족출신으로서 소년시절에 에베레스트 남쪽지역의 셰르파거주지역에 있던 집에서 도망나왔다. 셰르파(Sherpa)란 원래 네팔동부 히말라야산속에 살고있는 티베트계의 한 종족이다. 라마교를 신봉하고 농업, 목축업, 상업 따위에 종사하며 히말라야등산대의 짐을 나르고 길을 안내하는 인부로서 유명했다.
최근 히말라야에서 등산안내원으로 일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단순 가이드나 짐군을 일컫는 말로 사용되고있지만 셰르파의 역할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등반을 위한 전반적인 준비는 물론 등정루트선정부터 정상공격시간의 최종설정에 이르기까지 모든것을 조언하는 히말라야산악 등반안내인이다. 산을 손금보듯 장악하고있는 이들은 설붕(雪崩)이 일어날듯한 장소와 그 시간마저 직감적으로 알 정도라고 한다. 그들은 항상 산과 더불어 살아가고있기때문에 산정세에 누구보다 익숙하고 선관(仙官)마냥 신출귀몰로 선견지명을 군림한다.
텐징은 셰르파(히말라야고산지대 티베트계 네팔인)로 알려져있지만 국적이나 출생조차 확실치 않다. 그는 정의감과 자비심이 강한걸로 알려졌다. 그는 기시를 받으면서 길잡이의 통바른 인격을 시종일관 잃지 않았다. 탁월한 심페기능을 갖춘 천부성과 극빈, 인종차별에서 발로된 반발적인 오기가 더 지배적이였다.
인도의 서벵골 다르질링에 자리를 잡은 텐징은 1935년 에릭 십턴 경이 이끄는 에베레스트조사대의 부지군으로 동행했다. 그후 수년동안 다른 등반가보다 에베레스트탐험에 많이 참가했다. 제2차세계대전이 끝난후에는 짐군조직대장신분으로 많은 탐험대에 가담하는 기회를 가졌다.
네팔인과 티베트인에게 있어서 하늘 향해 솟은 산은 회색 안개의 전모를 억천만겁으로 은닉해온 신령의 탑으로 토템 봉작을 받아왔다. 1952년 스위스탐험대는 남부 등반로를 따라 두차례의 에베레스트정복을 시도했는데 텐징은 두번 다 짐군조직대장으로 참가했다. 이 시기가 바로 그의 인생전환점이기도 하다. 목동과 야크가 방울을 달랑달랑 울리며 걷던 산길에서 신화적인 현대전설이 잉태하였다.
그는 1953년 영국의 에베레스트탐험대에 하담인(荷担人) 대장으로 참가하여 힐러리와 함께 제2정상등반조를 이루었다. 동남부 산마루 해발 8,506m 지점에 설치한 텐트를 떠난 두사람은 5월 29일 오전 11시 30분 마침내 에베레스트정상에 올랐다. 그는 그곳에서 15분에 걸쳐 사진을 찍고 박하빵을 먹은후에 독실한 불교도로서 제수를 남겨놓고 하산했다. 텐징은 수많은 네팔인과 인도인들에게는 전설적인 영웅으로 인식되였다. 영국의 조지십자훈장과 네팔의 타라훈장을 비롯해 많은 훈장과 메달을 선후하여 받았다. 자서전으로는 제임스 램지 울먼과 공저한 《에베레스트인 Man of Everest》(1955)이라는 책자가 있다. 《에베레스트정복이후 After Everest》(1978)는 텐징이 에베레스트등반이후에 했던 려행과 다르질링에 있는 히말라야산맥등반훈련원의 지도자로서의 생활을 담고있는데 이 책은 1954년 인도정부에 의해 세상에 공개출판되였다.
텐징은 에베레스트정상 눈구뎅이에 딸이 건넨 색연필을 묻어 “산꼭대기에 등정기념품을 남겨달라”는 딸의 소망을 들어줬다. 그는 “가족이야말로 내 첫째 관심사이자 최고기쁨”이라고도 표했다.
그의 패기는 세인을 감탄시켰다. 결단력과 친화력 그리고 인내성을 비범하게 보여주는데로부터 등정의 성공을 예시했다. 고용인을 위해 폭풍속에 혼자 텐트를 세울 신실(信實)도 구전해 능히 자립할수 있었다. 그의 고백 역시 아주 소박하고 진실하다.
“나는 일곱차례 에베레스트등정을 시도했다. 원쑤를 물리치는 병사의 기력이 아니라 어머니 무릎에 오르는 아이의 사랑을 갖고 매번 산을 찾았다… 허다한것들이 정치와 국적의 명목으로 치러지지만 산에서는 그렇지 않다. 산에서의 생명은 너무 현실적이다. 죽음은 너무나 근거리이다. 인간은 오로지 인간일뿐 다른것이 될수 없기에 어디까지나 그 자체가 전부이다.”
위인을 두고 시야비야 론의도 많았다. 사실 그는 셰르파족이 아니라 티베트인이였다. 1935년부터 셰르파로 일하기 시작한 그는 강인한 체력과 고용인들을 위해 사력을 다하는 불굴의 투지 및 랑만적인 성격으로 뭇국가들의 원정대에 셰르파로 인정받았던것이다. 그는 맹목적으로 돈을 벌기 위해 등반하지 않았고 후에 히말리야등반학교에서 후진들을 양성하는 일에 진력했다.
1953년 5월 29일 뉴질랜드출신의 양봉업자 에드먼드 힐러리(영국 국적)는 셰르파 텐징 노르가이와 함께 세계에서 가장 높은 미지의 땅에 인류의 첫발을 창조적인 자취로 남겼다. 그리고 이 순간을 기리기 위해 힐러리는 정상에서 단 한장의 력사적인 사진을 찍었다. 정상에서 포토에 찍힐수 있는 사람은 단 한명뿐이였다. 사진속에서 맹렬한 바람에 기발이 흩날리는 피켈을 높이 쳐들고 서있는 셰르파 텐징 노르가이의 모습은 후세의 흠앙을 받기에 너무나 족하다. 산소가 담긴 호흡기를 둘러쓰고 강풍에 부서지는 기발을 추켜든채 인간의 극한 의지를 만방에 웅변하는 프로필이다!
등산에서 텐징과 힐러리를 잊지 말아야 한다. 세계적인 범주에서 등산의 획기적인 창시자이자 출중한 척후병이며 또한 정예한 알피니스트인데야…
작은 메나 산봉에 오르고도 으시대면서 야호를 복창하는 아마츄어등산가들이 없지 않다. 거룩한 불굴의 투사들이 비겁쟁이를 조소하면서 질타하는 음성이 구천에서 들려오는듯하다. 아부로 굽실거리는 한치보기들은 비실비실 게걸음치며 후퇴할것이다. 대의를 버리는 시정아치들에게 있어서 알피니스트의 풍도는 얼마나 름름하고 거창한가!
나도 언젠가는 쵸몰랑마봉에 오르련다. 기이어 내 생애의 숙지를 달성하려 한다. 윽벼른지 벌써 몇십년 된다. 중학교때 지리과에서 그 정상을 노리던 일이 아직도 선하다… 나는 중국조선민족이다. 장백산줄기를 타고 뻗어내린 오봉산과 선바위 사이의 네드렁봉기슭 촌락인 하오동에서 태여난 이민 3세이다.
곰을 잡으려면 큰곰을 잡고 매를 맞으려면 큰 매를 맞으라는 말이 있다. 산에 오르려면 쵸몰랑마봉에 오르라고 나는 웨치고싶다.
나는 믿는다. 내가 그런 경험자 내지 경력자로 조만간 현실을 감오할것이라고. 장백산이나 태산에 올랐던 감흥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하나의 미지가 나를 기다린다. 내 오를 주봉의 처녀지에 쏠리는 호기심은 인생의 한부분으로 나를 조련질한다.
2006년 5월 25일
<<연변문학>> 2008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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