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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대 중국의 “영화황제” 김염
2009년 09월 18일 11시 40분  조회:6810  추천:0  작성자: 人和

 

부인 진이와 함께

1932 5 1,  상해 《전성일보》의 제1면 첫머리에는 독자들이 투표로 선출한 중국 10대 영화배우들의 소식이 눈에 띄게 발표되였다. 이번 선거는 10개 항목에 따라 제각각 선거하는 방식을 취했는데 호접이 “영화황후”로 뽑히고 영사막에 오른지 얼마 안되는 22살 젊은 남자배우가 가장 많은 득표로 3개의 “제일”을 쟁취했는데 “관중들이 제일 좋아하는 남자배우”, “제일 멋있는 남자배우”,”관중들이 제일 사귀고싶은 남자배우”로 되였으며 매체와 관중들은 모두 그를 “영화황제”라고 불렀다. 이 “영화황제”가 바로 조선족인 김염(金焰)이였다.

김염의 원명은 김덕린(金德麟)으로서 1910 4 8일 조선 서울의 한 애국자가정에서 태여났다. 아버지 김필순(金弼淳)은 세브란스에서 류학한 조선 최초의 서의이며 병원에서 원장직을 맡는 한편 신민회에 참가한 항일투사였다. 지금도 서울의과대학병원에 가면 그의 동상이 있다고 한다.

1927년에 초중을 졸업한 김염은 상해로 가 일자리를 구하려 하였다. 처음 그는 로신처럼 작가로 되여 소설을 쓰려고 작심하고 글을 써 투고했으나 퇴자를 맞군 했다.

그가 생활난으로 모대기고있을 때 마침 당시 향항에 있던 민신영화회사가 상해로 이주하게 되였는데 이 회사에서 잡일을 할수 있는 사람을 모집하자 그곳에 입사하여 매일 1원씩 받으며 극무, 기록원 등 일을 맡아하였다.

 그러던중 민신영화회사에서 《목란종군》, 《철혈남아》 영화를 찍는 과정에 배우가 모자라자 보잘것없는 보조역을 김염에게 맡겼다. 이때로부터 그는 영화를 사랑하게 되였고 배우가 되려는 꿈을 꾸게 되였다.

 김염이 영화배우로 되려는 아름다운 꿈을 꾸고있을 때 민신영화회사는 경영이 잘 되지 않아 파산을 선고했다. 또다시 생활난에 부대끼고있을 때 민신영화회사의 감독 만뢰천의 소개로 김염은 중국의 저명한 감독이자 배우인 전한을 만나게 되였다. 당시 전한은 상해에 남국사를 꾸렸댔는데 주로 연극을 위주로 하였다. 저명한 배우 전한선생을 만난것은 김염의 예술생애에 전환점이라고 볼수 있었다. 전한은 김염이 연기기질이 있고 마음씨가 고운것을 보고 세심하게 지도하기 시작했다. 김염 역시 전한을 스승으로 모시고 꾸준히 노력하여 연기실력이 크게 늘었으며 전한이 감독을 맡은 연극에서 주요배우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영화의 한 장면

 1927, 김염은 미국 꼴롬비아대학과 뉴욕연구소에서 류학한 실력파감독 손유와 만났다. 손유는 미국에서 귀국하여 영화 《풍류검객》을 찍으려고 주요배우를 물색하던중 김염을 만나게 된것이였다. 영준하면서도 건강하고 활발하면서도 순박한 19살 생기넘치는 김염의 형상은 손유가 바라던 주인공이였다. 이렇게 되여 김염은 주요배역을 맡게 되였다. 무술영화인 《풍류검객》에서 김염은 천부적인 재질과 손유의 지도하에 대성공을 거두었다.

 1930, 김염은 손유의  《련화》에 들어가 손유와 합작하여 《야초한화》의 남주역을 맡았다. 김염과 하층계급 처녀역을 잘 연기한 완영옥은 폭발적인 인기를 얻으며 일약 최고의 배우로 등극하게 되였다. 진보적인 내용에다 배우들의 신선한 연기가 조화를 이루며 관중들을 열광시켰다. 이렇게 김염은 《야초한화》에서 역시 대성공을 거두면서 자신의 황금시대의 전성기를 맞았다.

 그후 김염은 저명한 감독 만뢰천의《련애와 의무》, 《도화읍혈기》 등 련화회사의 조기영화를 찍음으로써 당시 제일 환영받는 남주역으로 되였다. 영화 《련애와 의무》에서 김염은 주인공인 가난한 대학생 리조의의 역을 맡았는데 표현이 어찌나 자연스러운지 감독도 놀랐다고 한다. 감독이 김염을 보고 “령감이 어디에서 왔는가”고 묻자 김염은 “이는 내가 겪은 사실이며 나의 과거생활이였다”고 대답했다.

 1931년부터 상해에 있는 여러 회사의 초청으로 김염은 선후하여 《일전매》, 《은한쌍별》, 《황금시대》, 《모성의 빛》, 《새도화부채》, 《도시의 밤》, 《랑도사》 등 영화에서 주역을 맡았다. 1932년에는 좌익희곡가련맹에 가입했다.

 1932, 김염은 관중평의에서 일약 “영화황제”의 보좌에 오르게 되였다. 김염의 매력적인 외모와 튼튼히 단련된 몸매는 당시 중국젊은이들이 선망하는 대상으로 되였다. 1930년대에는 그야말로 김염의 말, 행동과 그의 모든것이 류행되였다. 그때 얻은 “영화황제”라는 칭호는 그후 그와 비교되는 배우가 없어 지금까지도 유일한 호칭으로 되고있다.

 1934 1 1,  “영화황제” 김염은 영화 《들장미》에서 함께 출연했던 녀주역 왕인미(王人美)와 결혼했다. 이 시기는 김염의 인생과 사업에서 휘황한 시기라 말할수 있다. 이 해에 손유감독이 항일전쟁을 묘사한 《큰길》이라는 극본을 썼는데 김염은 극본을 받아쥐자마자 흥분에 빠져들었다. 자기가 그렇게도 갈망하던 소재로 엮은 작품이였던것이다. 영화 《큰길》에서의 김염의 형상은 일대 큰 전변을 가져왔다.

영사막에서 김염의 형상은 중국로동자의 형상이였는바 그는 영준한 모습과 진실한 연기로 암흑한 사회에서 강의하고도 락관적인 도로건축로동자 김형님의 형상을 관중들에게 보여주었다. 《큰길》에서의 출중한 연기는 나라를 사랑하고 용감하며 강직하고 악세력에 고개를 숙이지 않는 그의 성격에서 온것이였다.

 김염은 영화계에서 활약했을뿐만아니라 항일활동에도 적극 참가했다. 일찍 일제가 상해에서 일으킨 “1, 28사변”때에 그는 포화를 무릅쓰고 전선구호대에 참가하여 일제와 싸웠다. 그는 예술을 무기로 일제와 싸웠다. 그는 자기가 주역을 맡은 영화 《기개가 하늘을 찌른다》에서 격앙된 목소리로 “우리는 일제에 저항해야 합니다”고 웨쳤다.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김염은 1941 12 8일 향항에서 중경으로 들어갔다. 중경에서 그는 중국 최초의 공군생활을 반영한 영화  《만리창공》의 촬영에 참가하였는데 중국공군병사들의 항일전쟁에서의 애국심과 용감성을 충분히 표현했다.

 1944, 성도에서 무대극에 출연하여 《로미오와 쥴리에트》 등 연극을 하였는데 당시 연극을 본 사람들은 로미오의 역을 완벽하게 창조한 김염의 연기력에 감탄을 금치 못했고 지금까지 중국력사에서 로미오역을 가장 잘 연기해냈다고 평가했다.  1944, 그는 생활난과 성격차이로 왕인미와  헤여지게 되였다.

 1945 8 15,  일본이 투항하자 김염은 상해로 돌아와 계속하여 영화사업에 종사했다. 이 기간 그는 《영춘곡》, 《승룡쾌서》, 《잃어버린 사랑》 3부작의 주인공을 맡았다. 영화 《잃어버린 사랑》을 찍는 과정에 김염은 녀주인공역을 맡았던 진이(秦怡)를 알게 되고 그들은 서로 사랑하며 1948년에 행복한 가정을 이루었다. 당시 김염의 나이는 36살이였고 진이의 나이는 24살이였다.

 

멋쟁이 김염

 김염의 부인 진이의 회상에 의하면 김염은 주은래총리와 두터운 감정을 지니고있으며 해방후에 여러번 만났다고 한다. 남개중학시절 김염이 주은래의 후배인 까닭도 있겠지만 김염이 30년대 중국의 “영화황제”였기때문일수도 있다. 김염이 조선사람인것을 안 주은래총리는 우스개로 “당신은 우리의 부마입니다”라고 했다고 한다. 김염이 집에 와 “내가 부마로 되였으니 당신은 공주로 되였구려”라고 우스개소리를 했다고 한다. 그만큼 주은래총리와 김염은 허물없이 지냈고 서로간에 좋은 영향을 주었다는것을 알수 있다.

 1957, 김염은 청해에서 영화 《폭풍우속의 용감한 매》를 찍게 되였다. 이 작품은 마을사람들을 착취하고 압박하는 국민당 악세력에 맞서서 싸우는 혁명가들의 형상을 반영한 영화로서 마을사람들과 홍군이 힘을 합쳐 항쟁에서 승리하는 내용의 사실주의적작품이였다. 영화에서 김염은 성숙되고도 믿음직한 연기를 잘 보여주었다. 그러나 영화를 찍던중 고원의 무서운 추위속에서 장기간 찬음식을 먹은탓으로 위병에 걸리고말았다. 1958, 김염은 독일에 가 영화를 찍고 금방 북경으로 돌아오자 장기간의 피로로 인해 대형위출혈로 병석에 눕게 되였다. 이때로부터 그는 병석생활을 하게 되였다.  1983 12, 진이는 영화 《뢰우》를 찍느라고 분주히 보내던중 김염의 옛병이 도져 위험하다는 소식을 듣고 총망히 병원에 갔을 때 김염은 마지막 숨을 몰아쉬고있었다. 이렇게 아쉽게도 일대 “영화황제” 김염은 세상을 하직했다.

 일생동안 그는 42편의 영화에서 주인공역을 맡았다. 그는 영화를 함부로 찍지 않았다. 그는 영화황제로서, 참다운 예술가로서 자신이 어떻게 행동하고 살아야 하는지 깊이 터득한 사람이였다.

 김염의 부인 진이는 사랑하는 남편 김염을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김염은 평소에 말수가 적고 자기의 견해를 잘 발표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진정으로 따뜻한 마음을 갖고있는분이였다. 나는 마음속으로부터 그의 인품에 탄복했다. 련애하기전 그는 나의 우상이였기에 나는 그의 결함을 자세히 생각해보지 않았으나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는 외모가 영준했을뿐만아니라 마음도 선량했다. 진정 그는 완벽한 남자였다.      

 

절강넷/연변라지오TV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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