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옛날과 지금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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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 14 ]

14    중국력사상 가장 잔인한 10대 살인백정 댓글:  조회:3654  추천:1  2011-11-28
중국고대사에 나타난 10명의 살인미치광이들은 사람을 죽이고도 눈 한번 깜짝하지 않았고 다른 사람의 목숨을 초개같이 여기면서 피빚을 얼마나 졌는지 모른다. “살인백정”이라는 네글자로 그들을 형용하는것이 가장 적절할것이다. 그럼 아래에 력대 10명 살인백정의 하늘에 사무치는 죄행들을 살펴보기로 하자.       철혈살인백정 백기       공손계라고도 불리운 백기(白起)는 전국시기의 진나라 대장군이였다. 싸움판에서 백기가 어찌나 무자비했던지 6국의 군대들은 백기가 군사를 거느리고 온다는 말만 들어도 혼비백산할 지경이였다. 기원전 294년에 백기는 군사를 거느리고 한나라와 위나라의 련합군을 치면서 적군의 수급을 벤것만도 24만개였고 기원전 273년에 군사를 이끌고 조나라와 연나라의 련합군을 공격하면서 그가 벤 수급만도 13만개였다. 후에 또 조나라장군 가언과 일전을 벌리면서 물을 리용해 조나라병사 2만명을 익사시켰고 기원전 264년에 한나라를 공략하며 5만여명의 목을 전부 베였다. 전쟁터에서 적군의 목을 벤것을 살인백정이라고 할수 없다고 해도 백기는 기원전 278년에 군사를 거느리고 초나라를 공략할 때 물을 터뜨려 언성(지금의 하북성 의성 동남쪽)이 잠기게 함으로써 사망자수가 수십만명에 이르게 하였는데 사망자중에는 10여만명에 달하는 백성들도 있었다. 또 기원전 260년에 조나라와의 장평전투에서 백기는 생포한 조나라군사 40만명을 생매장하고 겨우 240명의 소졸을 돌려보내 소식을 전하게 했다.       잔인한 살인백정 조조       3국시기의 저명한 정치가이며 군사가일뿐만아니라 시인인 조조(曹操)는 란세의 영웅일뿐만아니라 잔인하기 그지없는 살인백정이였다. 193년에 도겸을 공략할 때 서주대도살을 감행했는데 기재에 따르면 남녀로소를 가리지 않고 10만여명을 살해했을뿐만아니라 개든 닭이든 짐승조차도 가만놔두지 않고 닥치는대로 죽였다. 당시 시체가 도처에 널린 까닭에 사수하까지 막혀 흐르지 못하는 정도가 되였다. 그밖에 조조는 장막을 치면서 옹성토벌을 감행했고 려포를 치면서 팽성토벌을 감행했으며 원상을 치면서 업성토벌을 감행했다. 또 오환을 치면서 류성토벌을 감행했는데 조조는 토벌을 감행할 때마다 모조리 죽이는 정책을 실시하여 그 수단이 극히 잔인함을 보여주었다.       식인살인백정 황소       당조말년의 농민봉기군 수령 황소는 횡포하고 지독하기로 소문났다. 황소가 장안성을 함락한후 사람을 어찌나 많이 죽였는지 시체가 온 거리에 널려있을 정도였다. 후에 관군이 다시 장안성을 수복한후 백성들은 완전히 관군의 립장에 서서 “황소가 사람을 마구 죽여 피가 온 성안에 질벅했다”고 공소했다. 《구당서》의 기재에 따르면 “황소가 군사를 거느리고 진주를 1년간 포위하고있었는데 량초가 다 떨어지자 수백개의 대형돌절구를 만들어놓고 펀히 살아있는 백성들과 포로들을 남녀로소 구분없이 돌절구에 넣고 찧어서 그 고기를 병사들이 먹게 했다. 진주 4개주의 백성들을 다 잡아먹고나자 황소는 또 하남, 허, 당 등 10개주의 백성들에게도 마수를 뻗쳤다. 황소는 또 광주 대사에서 학살을 감행했는데 아랍 등 무슬린상인들을 20여만명 살해했다. 과연 그 미친듯한 살인행각은 사람들로 하여금 모골이 송연해지게 하였다.       야만살인백정 테무진       테무진 칭키스칸(成吉思汗)은 세계력사상 걸출한 정치가이며 군사가이지만 그가 세운 몽골제국의 패업은 가히 수많은 사람의 백골로 세운것이라고 말할수 있다. 1215년에 테무진은 금나라의 도성 중도(지금의 북경)를 함락했는데 성안의 백성들을 한달동안이나 대도살했다. 당시 100만명을 헤아리는 사람들이 그 재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1221년에 테무진은 한차례의 유럽정벌에서 대도살을 감행했는데 당시 몽골병사 5만명이 매인 평균 24명의 백성을 도살했다. 그 당시 도합 120만명의 백성이 목숨을 잃었다.       최악의 살인백정 구비라이       칭키스칸의 손자 원세조 구비라이(忽必烈)는 원나라를 건립한 영웅이지만 종족멸종의 정책을 시행하여 한족들을 대거 학살했는데 그 사망자는 1800만명이 넘었다. 중국 북방의 90%에 달하는 한족평민들은 대부분이 그 종족멸종참극의 희생양이 되고말았다. 구비라이가 사천에서 대도살을 감행하기전에 300만~2000만명의 인구가 있었는데 도살후 80만명도 남지 않았다. 이 인간성을 상실한 종족멸종행위는 기니스세계기록대전에 수록(1985년)되였다.       랭혈살인백정 주원장       명나라 개국황제 주원장(朱元璋)은 황제가 된후 갑자기 마음이 변하여 공신들을 마구 학살했다. 사서에 기재된데 의하면 호유용, 리선장, 란옥삼 사건에서 도합 10만여명이 목숨을 잃었다. 주원장은 재위 30년간 20만명을 살해했는데 공신들을 기본상 다 죽여버렸다. 주원장은 개국명장 상우춘(常遇春)에게 이쁜 녀인을 주어 첩으로 삼게 했다. 그런데 상우춘의 안해가 질투하여 그 첩의 손목을 잘라버렸다. 이를 알게 된 주원장은 즉시 사람을 보내여 상우춘의 안해를 죽여버리고 그 갈비뼈를 삶아서 상우춘 및 대신들이 식용하게 하였다. 주원장은 또 사람의 가죽을 바르는 형벌을 만들어 잔인한 본색을 세상에 알리였다.       변태살인백정 주체       주원장의 넷째아들인 명성조 주체는 애비 주원장에 비해 손색이 없는 살인백정이였다. 그는 1402년에 친조카 건문제의 황위를 빼앗은후 건문제궁의 녀관, 태감 등 모든 사람들을 모조리 죽여버렸는데 한번에 1만 4000명이나 학살했다. 그는 또 건문제에게 충성하던 옛신하 방효유 등을 전부 살해했는데 “9족”이 아니라 “10족”까지 멸했다. 그리고 방효유의 안해 및 그 가족중의 녀자들은 군영에 가두어놓고 병사들이 마음껏 즐기게 했는데 한명의 녀자가 밤낮이 따로 없이 20여명 사내들의 수욕을 만족시켜야 했다. 그러다가 육신이 지쳐서 죽는 녀자는 시체를 가져다가 개에게 먹이게 했다. 영락말년에 주체는 또 한번 궁녀, 환관들에 대한 대도살을 감행했는데 그번 대참사에서 살해된 궁녀만도 근 3000명에 달했다. 림종을 앞두고도 학살본성을 잊지 않은 주체는 바로 죽는 날에도 30여명의 궁녀들을 교살하여 자기와 함께 묻게 했다. 과연 명실상부한 변태살인백정이였다.       야성살인백정 장헌충       명나라말년의 봉기군 수령이였던 장헌충은 군사를 거느리고 성도를 함락한후 3일동안이나 대학살을 명령했다. 대학살을 그만둔후에도 장헌충은 의연히 날마다 100여명씩 살해했다. 그러다가 청나라군이 몰려오자 곧바로 도망쳤다. 바로 대군이 성도에서 도망치기전에 그는 참혹한 “4광정책”을 실시했는데 그것이 바로 사천인을 모조리 죽이고 일반백성으로부터 군인가족(로약자와 환자, 부상자)에 이르기까지 심지어 자기의 군사들중에 섞여있는 호북병사와 사천병사들 그리고 최초에 자기를 따르며 사선을 넘나들던 친병들까지 모조리 죽여 그 고기를 베여 군량으로 했다. 기재에 따르면 어느날 저녁에 장헌충은 자기가 부르는데 대답하지 않았다는 리유로 명령을 내려 자기의 어린 아들까지 죽여버렸다. 그리고는 이튿날에 후회되여 처첩들을 불러 왜 아들을 구하지 않았느냐고 문책하고나서 처첩들과 자기 아들을 죽인 도부수들을 모조리 죽여버렸다.        흡혈살인백정 누르하치       녀진을 통일하고 후금을 건립한 청태조 누르하치는 군사를 거느리고 료동지구를 점령한후 당지 가난한 사람들이 생활난으로 반란이라도 일으킬가봐 료동지구의 빈민들을 모조리 붙잡아다 죽여버렸다. 후에 또 료동의 부자들이 압박에 못이겨 반항할가봐 두려워 료동지구의 부자들도 대부분 다 죽여버렸다. 누르하치는 료동백성 도합 300여만명을 살해했는데 료동지구의 한족들은 기본상 다 화를 면치 못했다. 이는 피를 보기 좋아하는 누르하치의 본성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지옥살인백정 다탁       무르하치의 열다섯째 아들이며 청나라 예친왕인 다탁은 1645년에 군사를 거느리고 양주를 포위한후 대포를 쏘아 성문을 열고 양주성으로 짓쳐들어갔다. 다탁은 련속 10일간 대도살을 감행해 양주백성 80만명을 살해했다. 이로써 번화하던 양주성은 순식간에 인간지옥으로 변했다. 청나라군이 양주백성들을 보는대로 살해하다보니 시체가 산더미처럼 쌓이게 되였는데 어린애들도 재화를 피하지 못했다. 나중에 련못도 피로 물들어 벌겋게 되였는데 이런 상황을 만들어낸 다탁이야말로 명실상부한 지옥백정임에 틀림없다. 《중국력사이야기》
13    제갈량과 못생긴 안해 황월영 댓글:  조회:4013  추천:0  2010-01-14
랑재녀모, 즉 남자는 재능, 녀자는 용모가 중요하다는 말이다. 하지만 삼국시대 촉한의 정치가이자 전략가인 제갈량은 못생긴 안해를 얻은것으로 력사에 유명하다. 제갈량의 안해 황월영은 면남(沔南)의 이름난 명사 황승언의 딸이였다. 황월영은 어려서부터 령리하고 학문에 능했지만 키가 작고 머리가 노란데다가 얼굴이 검어 생김새가 매우 추했다. 하여 18살이 되였으나 혼사말이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황승언은 일찍부터 제갈량이 마음에 들었지만 외모나 기량이 더없이 출중했던 그에게 차마 말을 꺼내지 못했다. 그러던차 하루는 제갈량을 만나서 그의 의중을 떠보았다. “군이 안해를 고른다면 몸은 루추하고 머리는 노란색이며 얼굴은 검지만 재능이 있는 녀자를 배필로 맞을수 있겠는가?” 제갈량은 좋다 싫다 대답을 하지 않았다. 황승언이 찾아온 사실을 안 제갈량의 형수는 시동생에게 황월영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넌지시 물었다. “생원도 인젠 장가갈 나이가 되였잖아요? 황승언이 자기 딸을 주고싶어하는데 생원은 어떻게 생각해요?” 그러자 제갈량은 형수를 보고 이렇게 대답했다. “모두들 누런 머리에 얼굴은 검어 추하기 이를데 없다고 합디다. 저도 직접 만나보지 못해서 잘 모르겠습니다만 그가 쓴 시들을 본적이 있는데 그 뛰여남에 놀랐습니다.” “그가 쓴 시가 마음에 들면 사람을 한번 직접 만나보는것이 어때요? 시를 잘 쓰면 학문도 있어야 하겠는데 안그래요?” “형수님이 그렇게 생각하면 한번 만나보겠습니다.” 제갈량이 월영의 지혜와 용기에 탄복하다 형수의 권고로 제갈량은 황승언의 집에 한번 다녀오기로 했다. 그 당시 류비, 관우, 장비가 여러번이나 제갈량을 찾아와 힘을 합쳐 천하를 바로잡기를 원했는데 제갈량은 동의할지 말지 고민중이였다. 제갈량은 황승언을 찾아 상의도 할겸 겸사겸사해서 그의 집을 찾아갔다. 황승언의 안내로 집에 들어간 제갈량이 집안을 살펴보니 벽에 화법이 뛰여난 그림 한점이 걸려있었다. 제갈량이 벽화를 감상하고있는데 황승언이 딸이 그린것이라고 소개했다. “딸이 제멋대로 그린것이니 비웃지 말게.”황승언은 또 창밖에 탐스럽게 피여난 꽃들을 가리키며 자랑했다.“저것도 내 딸이 심고 가꾼것일세. 어떤가? 꽃들이 아름다운가?”제갈량은 황월영의 재능에 감탄하고있었다. “따님이 재간이 많은가 봅니다. 그림도 잘 그리고 꽃도 잘 가꾸니 말입니다.”“내 딸의 자랑은 아니지만 그런 재주가 있는가 보오.”이때 황월영이 방에서 나왔다. 제갈량은 그의 추한 외모에 대해서는 별로 놀라지 않았다. 제갈량은 황승언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류비, 관우와 장비가 와룡산으로 여러번 저를 찾아온적이 있습니다. 그들을 따라 세상을 다스리는데 나서야 할지 말아야 할지 결정을 내릴수가 없습니다. 선생님의 생각은 어떠신지요? 저에게 방향을 가리켜주십시오.”황승언은 기뻐하며 되물었다.“류비가 과연 자네를 찾았었군. 사람보는 안목은 있단 말이야. 먼저 자네생각부터 들어보고싶네.”그러자 제갈량은 자기생각을 털어놓았다. “저는 사실은 조용한 시골에서 농사나 짓고 글이나 읽으면서 세상이 돌아가는것을 지켜보고싶습니다. 복잡한 이 세상에서 이름이 알려지기를 바라지도 않고 그냥 목숨이나 부지하면서 평화로운 삶을 살가 합니다.”이때 옆에서 듣고있던 황월영이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지금은 님이 이름을 날리려는것이 아니라 세상이 당신을 필요로 하고있습니다. 이는 완전히 다릅니다. 그리고 복잡한 세상에서 개인목숨이나 유지하려는것은 잘못된 생각이라고 봅니다. 또 쉬운 일도 아닙니다. 공용(孔融)이나 양수( 修)를 막론하고 예로부터 이런 생각을 품었던 문인들을 보면 결국에는 감금되지 않으면 살해당하고 아니면 류배를 떠나고…평화롭고 자유로운 생활을 하신분이 계십니까?” 황월영의 권고로 세상에 나가다 황승언은 딸이 자신의 마음속말을 하는지라 연신 머리를 끄덕였다. 제갈량도 처녀의 대담함과 슬기로움에 또한번 놀라게 되였다. 황월영은 계속 말을 이었다. “그건 마치 보석이 흙속에 파묻힌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을 깊이 감추려 하실 필요가 있습니까?” 듣고있던 제갈량의 얼굴에 미소가 비꼈다. 흥분의 기색이 력력했다. 그는 황월영을 한번 바라보고는 이렇게 말했다. “월영처녀의 말씀을 들으니 느끼는바가 많습니다. 사실은 저도 뜻을 펼쳐 크게 해보려고 했으나 험난한 과정과 실패가 두려웠습니다. 평생 밭과 씨름하자니 그것도 내키지 않았습니다. 처녀의 몸으로 이런 깊은 생각을 하시다니 정말 탄복됩니다. 저도 생각을 고쳐 다음에 류비 등이 다시 찾아오면 얘기를 나누어보고 생각이 같다면 기꺼이 따라서 가리다. 흥망성쇠는 제 개인의 의지로 좌우지되는것이 아니기때문에 신경쓰지 않으렵니다.” 와룡산에 돌아온 제갈량은 황월영을 입에 침이 마르게 칭찬했다. 그들의 혼인은 이렇게 이루어졌다. 결혼후 얼마 안되여 제갈량은 뜻을 이루기 위해 류비를 따라나섰다. 남편이 항상 전쟁터에 나가있었지만 황씨부인은 근면한 생활을 하면서 내조를 잘해 제갈량의 걱정을 덜어주고 훌륭한 원군이 되였다. 제갈량의 친구들과 이웃들의 어려움을 만사를 제쳐놓고 도와주었으며 성품이 따뜻하고 친절해 “공명이 마누라 고르는것을 배우지 말아야 한다. 황승언의 딸과 같은 추녀를 얻을지도 모르니깐”라고 말하며 비웃던 사람들도 후에는 모두가 그녀를 따르고 존경했다고 한다. 제갈량의 사랑을 한몸에 받았던 현모량처 황씨부인은 재주가 비상했다. 후날 사마의와 싸울 때 군량운반장치인 “목우류마가 등장하는데 제갈량의 발명품으로 알려져있지만 사실은 제갈량의 안해가 개발한것이였다고 한다. 제갈량이 싸움터에까지 가지고다니던 부채에는 안해가 가르쳐준 전략이 적혀있었고 병사들의 병을 “치료하기 위한 “제갈행군산”과 “와룡단”도 황씨부인이 만든것이라고 한다. 제갈량과 그의 부인은 금슬이 매우 좋았다. 그들은 슬하에 아들 둘, 딸 하나를 두었는데 모두 머리가 비상하였다고 한다. 그중에서도 46세에 낳은 늦둥이 제갈첨은 후에 나라의 공주와 결혼하였는데 용감무쌍한 장군으로서 전쟁터에서 불행히 목숨을 거두었다. 황씨부인에 대해 일부 야사에서는 절세미인으로도 소개하고있다. 시국이 어지러울 때라 황월영은 얼굴에 진흙을 발라 자기의 미모를 감추었다고 한다. 그리고 제갈량의 앞에서만 경국지색의 미모를 드러냈다고 한다. 어찌됐건 지모가 뛰여난 제갈량과 탁월한 현모량처 황월영은 그야말로 천하에 길이 빛날 천생배필임에는 의심할바가 없다.   《상해경제》    
12    손중산의 일생 댓글:  조회:2656  추천:0  2009-08-26
손중산의 본명은 손문이다.손문( 1866년~1925년)은 중국 근대민주혁명의 선구자이다. 이름은 문(文), 자는 덕명(德明), 호는 일신(日新) 또는 일선(逸仙)이다. 일본에서 혁명활동을 할 때 이름을 중산(中山)으로 바꾸었다. 광서  5년(1879)에 손문은 어머니를 따라 호놀룰루(檀香山:Honolulu 미국의 섬)로 갔다. 당시에 그곳의 화교자본가였던 큰형 손미의 도움으로 손문은 호놀룰루, 광주, 향항 등지를 오가며 서양식근대교육을 체계적으로 받았다. 1883~1885년의 중국-프랑스전쟁은 손문에게 민족의 위기를 구해야 한다는 애국적정열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청나라정부의 부패와 무능함을 목격하면서 반청사상과 자산계급정치방안으로 중국을 개혁하겠다는 사상을 싹틔우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는 자주 반청관련언론을 발표하면서 초기의 개량주의자 하계(何啓), 정관응  등과 자주 만나 교류를 했다. 1892년에 손문은 향항 서의서원을 졸업한후 오문, 광주 등지에서 의사사업을 하다가 뜻있는 사람들과 함께 혁명단체 창설을 준비했다. 1894년에 손문은 리홍장에게 편지를 보내 “사람은 그 재능을 다할수 있어야 하고 토지는 그 리익을 다할수 있어야 하며 물건은 그 쓰임을 다할수 있어야 하고 재화는 그 흐름이 통할수 있어야 한다”는 개혁적인 주장을 하였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894년 11월, 손문은 상해에서 호놀룰루로 가서 흥중회를 조직하고 “만족축출, 중국회복, 련합정부건설”을 강령으로 삼았다. 1895년 2월, 향항흥중회를 창설하였다. 같은 해 10월, 흥중회는 광주에서 봉기를 모의하였으나 사전에 루설되여 실패로 돌아갔으며 손문은 해외로 망명하였다. 1896년 10월, 영국 런던에서 청나라공사관에 체포되였으나 영국인 친구의 도움으로 위기를 모면하였다. 그후 손문은 유럽과 미국 등 각국의 정치, 경제 상황과 많은 류파의 정치학설을 연구하고 많은 나라의 진보적인사들과 접촉을 가지면서 그의 독창적인 민생주의리론을 완성하였다. 여기에서 삼민주의사상의 기초가 형성되였다. 1897년, 손문은 영국에서 카나다를 거쳐 일본으로 가서 정부와 재야 인사들과 교분을 맺었다.무술변법이후 일본의 우호적인 인사들의 활동으로 손문은 강유위, 량계초(梁啓超)를 대표로 하는 개량파와 합작문제를 론의하였지만 개량파가 황제체제를 견지하고 혁명을 반대하였기에 합작은 실현되지 못했다. 1904년에 손문은 일본, 호놀룰루, 윁남, 타이, 미국 등지에서 화교와 류학생들을 대상으로 혁명을 선전하였다. 1905년에는 필리핀, 독일, 프랑스 등지의 류학생들속에서 혁명단체를 조직하고 이 시기에 국내의 혁명단체, 혁명지사들과 관계를 맺었다. 1905년 8월, 손문은 황흥 등과 함께 흥중회, 화흥회 등의 혁명단체를 기반으로 일본 도꾜에서 동맹회를 창건하였다. 여기에서 손문은 총리에 추대되였으며 그가 제기한 “만족축출, 중화회복, 민국창립, 토지소유의 균등”이 동맹회의 강령으로 채택되였다. 동맹회의 기관지 《민보》 발간사에서 손문은 제일 먼저 “민족(民族), 민권, 민생(民生)”의 3대주의를 발표하였다. 동맹회의 성립은 전국혁명운동의 발전을 강력하게 촉진시켰다. 그는 국내외 각지로 사람들을 파견하여 조직을 발전시키고 혁명을 선전하였다. 손문은 중국혁명민주파의 선봉으로 되였다. 그가 주도한 개량파 비판은 신해혁명(辛亥革命)의 강력한 사상적기초가 되였다. 1906~1911년, 동맹회는 화남 각지에서 여러차례 무장봉기를 일으켰다. 손문은 그러한 봉기에 전략방침을 제공해주었을뿐만아니라 해외에서 분주하게 다니면서 봉기를 위한 모금활동을 벌렸다. 비록 이들 봉기는 대중적기반이 부족하고 조직도 치밀하지 못하여 모두 실패로 끝나고말았지만 혁명의 열기가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계기를 마련함으로써 청나라정부에 많은 타격을 입혔다. 1911년 10월 10일, 무창봉기를 기점으로 전국각지에서 이에 호응하는 봉기가 잇달아 일어났다. 손문은 미국에서 이 소식을 접한후 12월하순에 중국으로 돌아와 17개 성의 대표자들에 의해 림시대통령에 추대되였다. 1912년 1월 1일, 남경(南京)에서 림시대통령취임을 선포하고 중화민국 림시정부를 구성하였다. 이로써 중국은 2000여년에 걸친 군주전제제도를 종식시키고 공화국을 건설하였다. 3월 11일, 손문은 《중화민국림시약법》을 반포하였다. 제국주의와 봉건주의의 강대한 압력과 혁명당내부의 갈등으로 인하여 손문은 1912년 2월 13일에 림시대통령자리를 원세개에게 양위하였다. 그후 1여년간 손문은 민생주의를 적극적으로 선전하였지만 정권이 원세개의 수중으로 떨어진 뒤인지라 이러한 손문의 노력은 아무런 성과를 거둘수 없었다. 1912년 8월, 동맹회는 국민당을 개편하여 손문을 리사장으로 추대하였다. 1913년 3월, 원세개가 국민당대리리사장 송교인을 암살하자 손문은 무력으로 원세개를 타도할것을 주장하였다. 7월에 2차혁명을 일으켰으나 실패로 돌아가자 그는 다시 일본으로 도피하였다. 1914년 6월, 손문은 도꾜에서 중화혁명당을 조직하였고 10월 25일에 도꾜에서 송경령과 결혼하였다. 1917년 7월, 단기서(段祺瑞)의 북양군벌이 국회를 해산시키고 《림시약법》을 페기하자 손문은 서남군벌과 련합하여 광주에서 군사정부를 세웠다. 9월에 대원수에 추대되여 《림시약법》을 수호하기 위한 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손문은 군사정부내에서도 군벌과 정치인들의 배척을 받아 1918년 5월에 어쩔수 없이 대원수직을 사임하고 일본을 거쳐 상해로 갔다. 1917년, 로씨야10월혁명이 성공하자 손문은 1918년 여름에 레닌과 쏘베트정부에 축전을 보냈다. 1919년의 5.4운동은 그를 크게 고무시켰다. 1919년 10월, 중화혁명당을 중국국민당으로 개편하였다. 1920년 8월, 손문은 복건성과 광동성 주둔군에 회군을 명령하여 광동에서 계계군벌을 축출하였다. 1921년 5월, 광주에서 비상국회의 추대로 비상대통령에 취임하였다. 계속하여 륙영정의 세력을 소멸시킨 다음 광동과 광서를 근거지로 삼고 북벌을 준비하였다. 광동군의 지휘권을 장악한 진형명이 1922년 6월에 반란을 일으켰다. 손문은 위험에서 벗어난후 해군을 이끌고 반란군에 대한 반격을 개시하였지만 다른 부대의 지원을 받지 못하여 하는수 없이 광주를 떠나 상해로 갔다. 진형명의 반란은 손문을 매우 어려운 상황에 빠뜨렸다. 이에 손문은 코민테른과 중국공산당의 도움을 받기로 결심하고 리대소  등 공산당인사들을 개인자격으로 중국국민당에 가입하도록 하였다.1923년 2월, 손문은 상해에서 광주로 돌아가 다시 륙해군 최고사령부를 창건하고 대원수의 이름으로 전군을 통솔하고 정무를 총괄하였다. 이와 동시에 서서히 중국국민당 개편준비작업에 박차를 가하였다. 8월에 장개석을 중심으로 하는 대표단을 쏘련으로 파견하여 정치와 군사를 시찰하게 하였다. 10월에 쏘련에서 파견된 보로딘을 고문으로 초빙하였다. 1924년 1월, 손문의 주관으로 중국국민당 제1차 전국대표대회가 광주에서 소집되였다. 여기에서 새로운 당의 강령과 헌장을 제정하여 사실상 “로씨야와의 련합, 공산당과의 련합, 로동자 농민에 대한 원조”라는 3대정책을 확립하고 중국공산당원이 참여하는 중앙통치기구를 구성하였다. 이 대회에서 통과된 “중국국민당 제1차 전국대표대회 선언”에서 손문은 삼민주의에 대하여 새로운 해석을 내리고 반제 반봉건적인 내용을 보충하였다. 1924년 5월, 손문은 광주 황포 장주도에서 륙군군관학교를 창설하고 혁명군대의 설립을 위한 기초를 다졌다. 이러한 일련의 혁명투쟁을 거치면서 손문은 제국주의의 타도만이 중국의 독립과 부강을 보장해줄수 있다고 인식하였다. 1924년 10월, 손문은 광주상인단체가 일으킨 무장반란을 진압하였다. 1924년 10월, 봉계군벌의 사령관 장작림과 직계군벌의 장군 풍옥상이 련합하여 조곤이 사령관으로 있는 직계군벌정부를 전복시켰다. 풍옥상, 단기서, 장작림은 손문에게 전보를 보내 국정을 함께 론의할것을 요청하였다. 손문은 이 요청을 받아들여 11월에 광주를 떠나 북으로 갔다. 12월말에 병을 무릅쓰고 북경에 도착하였으나 1925년 3월 12일에 간암으로 북경에서 세상을 떠났다. 손문은 중국의 위대한 민주혁명의 선구자이며 중국을 개혁하기 위하여 일생동안 모든 정력을 다 쏟았다.   손문의 유언 손문은 1925년 3월 12일 세상을 떠나기 전날 밤에 세개의 유서에 서명하였는데 그것은 “국사에 대한 유언”과 “가정에 대한 유언”, “쏘련에 보내는 유서” 였다. 그중 국사에 대한 유언에서 그는 40년에 걸친 혁명경험을 총화하여 “반드시 민중들을 일깨워서 세계에서 우리를 평등하게 대하는 민족과 련합하여 함께 분투합시다”고 결론지었다. 그리고 “혁명은 아직도 성공을 거두지 못했으니 동지들은 계속 더 노력해야 하오”라고 호소함으로써 그의 혁명주장과 혁명주의가 실현될수 있기를 희망했다. 그의 가정유언에서는 서적과 옷, 일상용품, 주택 등을 송경령에게 기념으로 물려준다 하고 자녀들에게는 그의 혁명유지를 계승할것을 요구했다. 쏘련에 보내는 유서에서는 3대 혁명정책을 실행하면서 견지하였던 반제 애국사업에 대한 그의 확고한 신념을 천명하고 세계 피압박민족의 자유쟁취전쟁에서 중쏘량국이 함께 협력하여 승리를 거두자는 소망을 표시하였다. 그리고 또 손문은 안해 송경령에게 자기 대신 쏘련을 방문하여 그가 생전에 이루지 못했던 념원을 실현시켜줄것을 간곡히 부탁했다. 손문의 유언에는 그의 반제 애국과 3대정책 견지라는 혁명정신이 나타나있었다.   제공:  연변라지오TV신문    
11    청백리 어사 포공 댓글:  조회:2761  추천:0  2009-08-24
포청천(999~1062)은 북송시대의 유명한 정치가이다. 자는 희인(希仁), 이름은 증(拯), 안휘성 합비 출신이다. 그는 단주지주(端州知州), 감찰어사( 察御使), 삼사호부판관(三司戶部判官),영주, 양주, 지주(池州),강녕, 개봉부지부  및 삼사사(三司使)를 거쳐 가우6년(1061)에는 관직이 추밀부사에 이르렀다. 1062년에 포증은 향년 64세로 병사했다. 그가 죽은후에는 다시 그를 례부상서에 추증하고 시호를 “효숙”이라 했다. 포증(包拯)은 전기적인 인물로 남송(南宋)과 금대에 이미 그를 주인공으로 삼은 소설과 희곡 등이 출현하였으며 원나라(元代)때에는 포공희, 포공전설, 소설 등에서 포공을 찬양한 작품이 매우 성행하였다. 명나라때에는 각종 전기, 지방극과 수백권에 이르는 소설화본 《포공안(包公案)》으로 더욱 발전하였으며 청나라때에는 다시 《룡도공안》, 《삼협오의》, 《칠협오의》 등의 장편소설로 발전하였다. 지금에 이르러서도 중국의 지방극은 물론 희극과 소설속에서 포증을 주제로 한 작품이 많이 전해지고있다. 1993년부터 그를 주인공으로 한 《포공(包公)》 극집이 계속 쏟아져나오면서 약 500여편의 영화가 제작되였으며 포청천이란 이름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그는 이미 시공을 초월하여 청백리의 전형적인 인물로 그 명성이 자자했다. 북송 진종 함평(咸平) 2년(999), 포증은 전통적인 학자집안에서 태여났다.  그의 부친은 송왕조의 하급관리였다. 북송 인종(仁宗) 천성 5년(1027), 포증은 진사에 급제하여 건창현 지현에 임명되였으나 년세가 많은 부모님을 공양하기 위해서 관직을 사임하였다. 몇년후 량친이 모두 돌아가자 무덤가에 초막을 짓고 3년상을 치렀으며 그후에도 명리를 탐하지 않고 고향에서 정직하고 소박한 생활을 하였다. 북송 인종 경우4년(1037), 그는 천장현의 지현에 임명되였다. 약 40여세가 되여서야 비로소 정계에 발을 들여놓게 되였지만 이때부터 그는 죽기전까지 강직한 성품으로 청렴결백하고 공평무사한 정치를 펼침으로써 위대한 발자취를 중국력사에 길이 남기게 되였다. 그가 천장현 지현으로 있을 때 한번은 그 현에 특이한 소송사건이 발생하였다. 어떤 농부가 밤에 소를 외양간에 매여두었는데 이튿날 아침에 일어나보니 소가 땅바닥에 드러누워 입에서 피를 토하고있었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농부가 소의 입을 벌리고 살펴보니 누군가에 의해 소의 혀가 잘려있었다. 분통이 터져 참을수 없었던 그 농부는 즉시 관청으로 달려가서 고소하고 죄범을 잡아달라는 부탁을 하였다. 미궁에 빠진 사건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가? 포증은 잠시 생각을 하다가 그 농부에게 “우선 이 사실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고 당장 집으로 돌아가서 그 소를 도살하여 팔아버리게”라고 하였다. 당시의 법률에 의하면 소는 개인이 임의로 도살할수 없는것이였다. 그러나 혀가 잘린 소는 얼마 살지도 못할것이고 관청에서 소를 도살하라고 지시했기때문에 그는 집으로 돌아가서 그 소를 도살하였다. 그 이튿날에 어떤 사람이 관청으로 찾아와서 그 농부가 임의로 소를 도살했다고 고발했다. 이에 포증은 자세한 내막을 물어본후 즉시 큰 소리로 호통을 쳤다. “정말 대담한 놈이로구나. 네가 남의  소혀를 잘라놓고 도리여 임의로 소를 도살했다고 그 사람을 고발하다니?!” 그 사람은 갑작스런 포증의 호통에 할말을 잊고 땅에 엎드려 머리를 조아리고 자기의 죄행을 인정하였다. 사실 소의 혀를 자른 사람은 그 농부와 원한이 있었기에 먼저 소의 혀를 자른 다음에 다시 그 농부가 임의로 소를 도살했다고 고발했던것이다. 이 일이 있은 이후 포증의 판결에 대한 명성이 크게 알려지기 시작했다. 포증은 여러곳에서 지방관을 력임하였는데 그는 가는 곳마다 과중하고 잡다한 세금을 없애고 억울한 사건을 깨끗이 해결해주었다. 그후 그는 경성(京城)으로 가서 간관을 력임하면서 인종에게 불법을 저지른 관료들을 막기 위한 많은 시책들을 건의하기도 하였다. 당시 북송은 범중엄의 신정(新政)이 실패로 끝난후 조정의 부패가 날로 극심해졌다. 특히 경성 개봉부에서는 고관대작들과 황제 인척들의 부정부패가 더욱 심하였으며 그들은 국법도 안중에 두지 않았다. 가우원년(1056) 12월, 인종(仁宗)은 개봉의 질서를 정돈할 필요성을 절감하고 포증을 개봉부지부에 임명하였다. 포증은 그 이듬해 3월에 정식으로 부임하여 가우 3년 6월까지 약 1년 4개월간 개봉부를 맡았다. 개봉부는 황실의 내외척과 권문세족들이 모여있는 곳이였다. 전에는 이 직책을 맡은 사람이 권문세족들과 내통하여 뢰물을 받지 않은적이 없었다. 포증은 개봉부지부에 임명된후 이러한 부패를 척결하기로 결심하였다. 송나라의 법규에 의하면 누구든 관청에 고소를 할 때는 먼저 대리인에게 부탁하여 고소장을 쓴 다음 담당관리를 통하여 그것을 지부에게 전달해야 하였다. 이때 간악한 소송대리인들은 사기를 쳐서 무고한 소송인들의 재물을 갈취하군 하였다. 포증은 그러한 법규를 철페하고 억울한 일을 당한 백성이 고소를 할 때는 직접 개봉부앞으로 와서 북을 치도록 하였다. 그리고 북소리가 울리면 개봉부에서는 정문을 열고 백성들이 직접 안으로 들어와서 고소를 하도록 하였던것이다. 이렇게 되자 개봉부의 관리들은 더이상 중간에서 롱간을 부릴수 없게 되였다. 어느해에 개봉에 홍수가 발생하였는데 알고보니 그곳의 수로가 막혀 배수가 되지 않았기때문이였다. 조사에 나선 포증은 어떤 환관과 권문세족이 수로를 점유하고 화원과 루각을 만들었기때문에 수로가 막혔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포증은 즉시 명령을 내려 그들에게 수로우에 세운 모든 건축물을 철거하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한사람이 그것을 철거하려고 하지 않았다.  개봉부에서는 사람을 파견하여 계속 독촉을 하였지만 그는 여전히 억지를 쓰며 땅문서를 꺼내 그 땅이 자기 소유라고 강변하였다. 포증은 다시 조사해보고 그 땅문서가 위조한것임을 밝혀냈다. 이에 화가 난 포증은 그에게 강제철거명령을 내리고 상소를 올려 그 사실을 인종에게 고하였다. 결국 그 사람은 어쩔수 없이 그 화원을 철거하였다. 포증의 법집행이 엄격하다는 사실을 전해들은 개봉부의 권문세족들은 함부로 나쁜짓을 저지르지 못했다. 그리하여 개봉부에서는 남녀로소를 막론하고 포증이 청렴한 관리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되였다. 포증은 친척과 친구들에게도 매우 엄격하였다. 어떤 친척이 그를 후원자로 리용하려고 하였지만 그는 전혀 돌보지 않았다. 세월이 갈수록 친척과 친구들도 그의 강직한 성품을 파악하고는 더이상 개인적인 일로 그를 찾아가지 않았다. 가우6년(1061), 인종은 포증을 매우 신임하고 중시하여 그를 추밀부사로 승진시켰다. 고관이 된후에도 포증의 사생활은 여전히 평민처럼 소박하고 검소하였다. 그 이듬해 5월에 그는 중병을 얻어 죽으면서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자손들이 벼슬을 하여 부정부패를 저지르면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하게 하라. 그리고 그들이 죽은후에도 우리 포씨집안의 선산에 묘를 쓰지 못하도록 하라.” 사람들은 포증이 살았을 때 그를 청백리로 칭송했을뿐만아니라 죽은후에도 그를 청백리의 전형적인 인물로 삼고 그를 추앙하여 “포공(包公)”이라 하였다. 30여년의 재임시절에 포증이 법에 따라 관직을 박탈했거나 강등시킨 고관대작이 무려 30여명이나 되였다. 이것은 력사적으로 보기 드문 경이적인 일이였다. 그리고 그는 한 개인과 하나의 사건을 위해서 어떠한 경우에도 포기하지 않고 집요하게 조사하여 공정한 판결을 내렸다. 포증에 의해 탄핵된 사람들은 모두 막강한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였으며 그들중에는 포증보다 관직이 높은 사람들도 있었다. 그의 공평무사한 판결과 청렴결백한 생활, 예리한 통찰력은 많은 대중들의 존경을 받았으며 이로써 그는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자연스럽게 신적인 인물로 승화되였던것이다. 이러한 숭배는 포공이 선한 사람을 보호해주고 악한 사람을 징벌해주7며 재앙을 없애주고 복을 내려줄것이라는 믿음에서 비롯된것이다.     제공:  연변라지오TV신문    
10    려씨천하를 꿈꾼 려태후 댓글:  조회:2991  추천:0  2009-08-20
려태후( BC241~BC180)는 이름이 려치, 자는 아후이며 한고조  류방의 황후이다.  그녀는 류방이 죽은후에 정권을 장악하여 16년간 한나라제국을 통치했다. 려치는 진(秦)나라때 단부현(지금의 산동성 단현)에서 태여났다.  그녀의 아버지 려공은 원쑤를 피하여 패현으로 이주했으며 류방과 친분을 맺은 뒤 딸을 그에게 시집보냈다.  초한전쟁이 시작된지 얼마 안되여 려치는 류방의 부모와 함께 항우의 진영에 인질로 잡혀갔다. 기원전 203년에 려치와 류방의 부모가 석방되였다.  그 이듬해에 류방은 황제에 오르고 려치는 황후가 되였다. 려치는 일찍 뛰여난 지략으로 류방의 천하통일을 보좌하였을뿐만아니라 한나라초기에는 류방이 류씨이외의 왕(제후)들을 제거하는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고조10년(BC197)에 류방이 양하후 진희의 반란을 평정하러 출정하였을 때 서울 장안을 지키고있던 려치는 회음후 한신의 반란정보를 입수한후 마침내 승상 소화와 모의하여 한신을 궁궐로 불러다가 죽이고 3족을 멸하였다. 얼마후 류방은 진희의 반란을 평정하고 락양으로 돌아온후에 량왕(梁王)  팽월(彭越)이 반란을 도모하려 한다는 보고를 받았다. 류방은 즉시 팽월을 체포하였지만 모반의 증거가 없자 그를 평민으로 강등시켜 파촉(巴蜀)에 류배보내기로 하였다. 도중에 팽월은 려치를 만나 그녀에게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면서 집으로 돌아가 여생을 편히 살수 있도록 류방에게 잘 말해줄것을 청하였다. 락양으로 돌아온 려치는 류방에게 “팽월은 용맹한 장수이니 그를 촉(蜀)에 보낸다면 범을 산에 풀어주는것과 같아서 크나큰 후환이 될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이 말을 들은 류방은 즉시 팽월을 죽여버렸다. 려치의 슬하에는 아들 류영(후의 혜제)과 딸 로원공주가 있었다.   그러나 류방은 류영의 성격이 나약하다는것을 리유로 자신이 총애하던 비빈  척부인(戚夫人)의 아들 조왕  류여의를 태자로 삼으려고 하였다. 척부인의 눈물어린 호소와 류방의 결심으로 류여의는 거의 태자에 오를번했지만 장량을 중심으로 하는 여러 대신들의 간언과 려치의 노력으로 류여의는 태자에 오르지 못하고 류영이 태자의 자리를 계속 유지할수 있었다. 고조 12년(BC195) 4월에 류방이 죽고 려치의 아들 류영이 제위를 계승하여 한나라의 제2대 황제 혜제(惠帝)로 되였다. 이에 황태후가 된 려치는 어린 혜제를 대신하여 정사를 보면서 조정의 실권을 장악하였다. 려태후는 류방의 사랑을 받았던 척부인과 태자의 자리를 넘보았던 조왕 류여의를 그대로 놓아두지 않았다.  먼저 척부인을 영항(永巷: 원래는 궁녀들이 살던 곳이였으나 후에는 죄를 지은 비빈을 감금하는 곳으로 사용되였음)에 감금한 다음 조왕 류여의를 제거할 기회를 노리였다. 혜제 원년(BC195) 12월, 혜제가 새벽에 활쏘러 나간 틈을 리용하여 려태후는 혼자 남아있던 류여의에게 독주를 먹였다.   아침 해뜰 무렵에 혜제가 돌아왔을 때 류여의는 이미 싸늘한 시체로 변해있었다. 그후 려태후는 다시 척부인의 손과 발을 자르고 눈알을 뽑고 귀를 태우고 벙어리가 되는 약을 먹인 다음 “돼지우리”에 가두고 그녀를 “사람돼지”라고 불렀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혜제는 려태후의 야만적인 행위에 충격을 받고 병을 얻게 되였다.  그는 려태후에게 사람을 보내여 다음과 같이 전하였다. “이것은 사람이 할짓이 아닙니다. 저는 태후의 아들로서 더이상 천하를 다스릴수 없게 되였습니다.” 그리고는 매일 주색에 빠져서 정사를 돌보지 않았다. 그후 려태후는 다시 류씨성을 가진 제후들을 하나씩 제거하기 시작하였다. 혜제 7년(BC188) 가을에 혜제가 세상을 떠났다. 혜제가 죽은후 려태후는 2명의 소제(少帝: 1명은 원래 평민의 소생이였는데 려태후가 혜제의 황후 장씨에게 명하여 그를 데려오게 하여 혜제의 아들로 삼은 다음 그의 생모는 죽여버렸다.  다른 1명은 상산왕(常山王) 류의이다)를 차례로 옹립하고 황제의 지위를 대신하였다.  황제의 이름으로 반포되는 모든 명령과 조서는 모두 려태후의 손에서 나왔으며 이때로부터 그녀는 실질적인 황제나 다름없었다. 려태후는 자신의 정치적지위를 강화하기 위하여 자신의 정책을 반대하던 태위(太尉) 주발(周勃)과 우승상 왕릉(王陵)을 파면하고 “류씨외에는 누구도 왕이라 칭해서는 안된다”는 류방과의 약속을 파기하고 려태, 려산, 려록 등 많은 려씨일족들을 왕으로 책봉했다. 려태후는 황제의 지위를 대신한 8년동안 많은 정적들을 무참히 죽이고 려씨정권을 공고히 하기 위해 그 어떤 야만적인 행동도 서슴치 않았지만 국정운영면에서는 그 어느 왕조의 황제에 못지 않은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기도 하였다. 그녀는 먼저 류방이 시행해오던 민생안정정책을 계승하여 농업을 장려하는 한편 삼족을 멸하는 연좌제와 요언령(妖言令) 등의 가혹한 형벌을 페지하였다. 이로써 이 기간에는 백성들의 생활이 비교적 안정되였을뿐만아니라 그동안 혼란했던 사회도 점차 질서를 잡아가고 피페했던 경제도 점점 회복되였다. 그러나 려태후는 “류씨외에는 누구도 왕이라 칭해서는 안된다”는 류방과 여러 대신들의 약속을 파기하고 많은 려씨일족들을 왕으로 삼았기에 대신들의 불만은 더욱 커졌다.  즉 그속에는 그녀가 죽은후에 일어날수밖에 없는 또 다른 정치적불안요소가 잠재되여 있었던것이다. 기원전 180년 3월, 천하를 호령하던 려치도 결국은 세월의 흐름을 이기지 못하고 병을 얻어 자리에 눕게 되였다. 7월에 병세가 위독해지자 그녀는 급히 뒤일을 수습하기 위하여 조카 려산을 상국에 임명하여 북군을 통솔하게 하고 려록을 상장군에 임명하여 남군을 통솔하게 한후 두 사람에게 다음과 같이 부탁했다. “고조가 천하를 평정했을 때 대신들과 ‘류씨외에 왕이 되는 자는 모두 합심하여 토벌하라’는 약속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려씨가 왕에 책봉되여 권력을 장악하고있으니 대신들은 모두 이에 불복하고있습니다.   내가 죽은후에 황제는 나이가 어리므로 대신들이 란을 일으킬것이니 그대들은 반드시 군사를 장악하여 황궁을 수호하도록 하시오. 나의 장례를 치를 때도 그대들은 황궁을 떠나지 말고 반란에 대비해야 할것이요.” 그리고는 다시 려록의 딸을 황후로 삼은 다음 자기가 죽은 후에도 려씨천하를 유지하려는 야망을 끝까지 버리지 않았다. 7월 신사일(辛巳日), 려태후는 장안 미앙궁에서 62세의 나이로 병사하였다.  려태후가 죽은후에 태위 주발과 승상 진평, 주허후 류장 등은 신속하게 려씨일족을 죽이고 문제(文帝) 류항을 황제로 옹립하였다.  이로써 려태후와 그녀의 일족에 의해 다스려지던 한나라는 다시 류씨천하를 회복하게 되였다. 려태후의 묘지는 류방의 장릉 서쪽(지금의 섬서성 함양시 동쪽 17.5킬로메터되는 곳)에 있다. 사마천은 《사기》 《려태후본기》에서 그녀의 치적을 다음과 같이 긍정적으로 평가하였다.“혜제와 려태후 시절에 백성들은 전국시기의 고통에서 벗어날수 있었으며 군신(君臣)들은 모두 ‘무위’의 경지에서 안식(安息)하려고 하였다. 그러므로 혜제는 팔장만 끼고 아무 일도 하지 않았고 려태후가 녀성으로서 황제의 직권을 대행하여 모든 정치가 방안에서 이루어졌지만 천하가 태평하고 안락했다.   형벌을 가하는 일도 드물었으며 죄인도 드물었다.  백성들이 농사에 힘을 쓰니 의식(衣食)은 나날이 풍족해졌다.”     제공:  연변라지오TV신문    
9    곽수경 - 중국 고대의 저명한 천문학자 댓글:  조회:2761  추천:0  2009-08-02
  곽수경(郭守敬,1231-1316)은 자가 약사(若思)이며 중국 원조때 천문학자, 수학가, 수리전문가, 기기제조가이다.   곽수경과 왕순(王恂), 허형(許衡) 등 사람들은 중국 고대 가장 선진적이고 가장 오래 사용한 역법- "수시력((授時歷)"을 만들어냈다. 왕순(王恂)과 곽수경 등 사람들은 한조이후의 40여종 역법을 연구, 분석해 각 역법의 장점을 섭취하여 천문학에서 중요한 성과를 이룩했다.   정밀한 역법을 만들기 위해 곽수경은 전국 각지에 27개 관측점을 설립해 대규모적인 "사해측량(四海測量)"을 진행했으며 본격적인 "측정여정"을 시작했다.   곽수경이 편찬한 천문역법 저작으로는 "추보(推步)", "입성(立成)", "역의의고(歷議擬稿)", "의상법식(儀象法式)" 등 14가지로서 총 105권에 달한다.   곽수경의 업적을 기념하기 위해 사람들은 달 뒷면의 환형산(環形山)을 "곽수경 환형산"으로 명명했으며 소행성2012을 "곽수경 소행성"으로 명명했다.   노년시기 곽수경은 수리공정에 진력했다. 원조 건립 28년~30년사이 그는 대도(大都, 오늘의 베이징)로부터 통주에로의 운하(즉 백부거와 통혜하)공정을 완성했으며 그 이듬해 곽수경은 소문관(昭文館)대학사 겸 지태사원사(知太史院事)로 승진했다. 그는 수리공사를 책임진 기간 일부 정밀한 시간기록계를 만들기도 했다.    
8    티베트 송짠감보와 당나라 문성공주 댓글:  조회:4231  추천:0  2009-07-22
1300년전, 당나라의 문성공주는 당시 번화한 도시였던 장안(오늘날 산서 서안의 북쪽에 위치함)을 떠나 서쪽으로 3000km를 지나서 토번왕 송짠감보와 화친을 했다. 이는 당조와 토번의 우호교류의 새로운 기원을 열어놓은것이다.. 송짠감보와 문성공주의 이야기는 오늘날까지 한(漢)-티베트 두 민족사이에 널리 유전되고 있다.   7세기초, 중원지구에서 수년간 전쟁을 거쳐 이연(李淵, 당고조), 이세민(李世民, 당태종) 부자는618년에 장안성에 중국 역사이래 전례없던 대당제국을 건립했다. 당시 국력이 강성한 당나라는 동부아세아지역의 문명중심지로 전변하여 주변의 민족부락에 강렬한 영향을 끼쳤기에 많은 민족부락은 전후로 당조와 우호관계를 맺었다.   정관8년(634), 송짠감보는 토번(티베트족의 선조)의 짠보(국왕)로 즉위했으며 13살 어린 나이에 론커얼(論科耳), 상낭(尙囊) 등 신하의 보조하에 반란군을 토벌하고 토번을 통일시켰다. 당나라가 중원지구에서 제패하고 있을 때 송짠감보도 고원에서 군림을 하였으며 일부 소국을 겸병하고 로소(지금의 서장자치구 라싸)에 서울을 정하여 통일된 토번왕조를 세움과 동시에 적극적으로 당조와의 밀접한 관계를 도모했다. 기원 634년부터 두차례를 거쳐 말도 잘하고 총명한 사신 록동짠(綠東贊)을 당나라에 파견하여 당태종에게 화친을 요구하였다. 기원641년 당태종은 드디어 송짠감보의 화친요구에 동의했으며 문성공주를 그에게 시집보내기로 승낙했다.   록동짠은 자신의 총명과 재질을 잘 발휘하여 당태종이 낸 여러 난제를 해결해 마침내 송짠감보가 아름답고 선량한 문성공주를 맞이할 수 있게 한 이야기는 티베트족 민간이야기에도 많은 기록이 있다.   당시 당나라에서 한창 불교가 성행되고 있을 때 토번에는 불교가 없었다. 문성공주는 아주 지극한 불교도로서 토번으로 갈 때 불탑, 경전, 불상을 갖고 갔으며 그곳에 불사를 세워 불교를 널리 알릴 것을 결심했다.   문성공주는 한면으로 불교를 널리 알려 백성을 위해 행복을 기원함과 동시에 다른 면으로는 오곡종자 및 유채씨를 가져와 백성들에게 파종방법을 가르쳤다. 옥수수, 감자, 누에콩, 유채는 고원기후에 적합해 잘 자랐고 밀은 끊임없이 변종되어 오늘날 티베트족 인민들이 즐겨먹는 쌀보리로 변종했다. 문성공주는 또 차, 말, 소라, 낙타 그리고 생산기술과 의학서적을 가져와 토번의 사회진보를 추진하였다.   송짠감보는 현숙하고 다재다능한 문성공주를 무척 사랑하여 그녀를 위해 부다라궁을 수건했다. 부다라궁은 모두 1000개의 궁실로 이루어졌으며 외관이 화려하고 웅위하다. 하지만 그후 번개와 우뢰, 전쟁에 의해 파괴되었는데 17세기의 두차례 확대건설을 거쳐서야 현재의 규모를 이룰 수 있게 되었다. 부다라궁 주건물은 13층으로서 높이 117m, 총 면적은 36만㎡에 달해 웅위한 기백을 자랑하고 있다. 부다라궁에는 많은 벽화들이 보존되어 있는데 그 중에는 당태종이 다섯번이나 토번의 사신 록동짠을 시험한 이야기와 문성공주가 토번으로 가는 길에서 겪은 간난신고 및 라싸에 도착한 후 티베트족 인민들의 뜨거운 환영을 받고 있는 장면들이 담겨져 있다.   송짠감보가 문성공주를 아내로 맞아들인 후 중원과 토번의 관계는 더욱 밀접해졌으며 그 후 200여년간 전쟁이 거의 발생하지 않아 평화적 국면을 형성할 수 있게 되었다.   영용하고 지혜로운 송짠감보는 티베트를 통일한 후 토번의 정치, 경제, 문화발전을 추진시켰고 티베트족과 한족간의 우정을 돈독히 함으로서 중국의 통일된 다민족국가의 역사발전을 위해 큰 기여를 했다. 문성공주는 고생을 무릅쓰고 머나먼 토번에 시집간후 당나라와 토번의 경제문화 교류를 크게 추진했고 한족과 티베트족 사이의 우정을 한층 깊이 함으로서 역사적 기여를 했다.   중국국제방송  
7    서주(西周) 개국 임금-주무왕 댓글:  조회:2529  추천:0  2009-05-31
 주무왕 (중국 역사 인물)   서주 왕조의 개국 임금인 주무왕 희발(姬發)은 주문왕의 차남이다. 형 읍고(邑考)가 상조(商朝) 주왕(紂王)에게 참살당한 것으로 인해 주무왕은 왕위에 오르게 됐으며, '무'는 그가 죽은 뒤의 시호(諡號)다.   주무왕의 생몰년은 역사적인 고증이 없는 것으로 그의 정확한 나이를 알 수 없지만, 93세까지 살았다고 구전되고 있다.   주문왕 통치 50년이란 세월동안, 상조를 토벌하기 위해 온갖 준비를 했다. 내정을 개혁하고, 생산을 발전시키며, 온갖 정력을 몰부어 덕으로 나라를 다스리고, 인재를 중시한 것으로 주나라는 날로 번창했다.   희발이 왕위를 계승한 뒤, 계속 강상(姜尙)을 재상(國相)으로 임명하고 형제인 주공단(周公旦)과 소공석(召公奭)을 조수로 두어 상조를 토벌하는 일에 적극 돕도록했다.   당시 상조의 주왕은 날로 잔인하고 흉폭했으며, 극도로 사치하고 탐욕스러웠다. 결국 충신 한 명 한 명을 잃게 되며 백성들의 원한이 하늘을 찔렀다.   바로 이때 주무왕은 기회를 노려, 도읍을 풍읍(豊邑)에서 호경(鎬京)으로 옮기고, 상조에 대해 또 한번의 탐구적인 공격을 진행했다. 이번의 진공은 주나라 군대에게 있어서 한차례 단련일 뿐만아니라 보귀한 실전 경험을 갖게 된다.   2년 뒤, 주무왕은 맹진(孟津)에 총 800명의 제후를 불러 놓고 맹약을 한다. 모든 준비가 되었다고 생각한 희발은 직접 전차(戰車)300대에 근위무사 3000인, 갑병(甲兵)4만5천 명 그리고 소국(小國)의 병력을 연합하여 동쪽으로 진격해 주왕에 대한 토벌을 시작한다.   맹진에서 진행된 궐기대회에서 그들은 주왕의 여러 죄행을 나열했으며, 하늘을 도와 주왕을 벌한다는 뜻을 표한다. 이번 궐기대회의 소집은 주왕을 토벌하는 연맹군들의 투지를 더해줬는가 하면 작전의 의의와 그들의 손에 거머쥔 사명감을 각인시켜줬다.   쌍방은 격렬한 투쟁을 벌렸다. 주왕을 토벌하는 연맹군은 일치단결한 정의의 힘이라면, 상조 군사들은 황급하게 허둥허둥 전쟁에 나선 흩어진 모래알과 같았다.   아주 빠른 시간내에 상조 군대를 격파한 주군은 바로 조가(朝歌)성을 점령했다. 주왕은 더 이상 만회할 수 없는 대세 앞에서 녹대(鹿臺)에 올라 자분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게 된다.   주나라 군대는 번개같은 속도로 상조 도읍을 점령한 것으로 상조(商朝)의 멸망을 선고한다.   주무왕의 상조 토벌은 중국 역사상의 한 차례 대사다. 구체적인 시간에 대해 아직 정확한 고증은 없지만 보통 기원전 1057년으로 얘기하고 있다.   희발이 상조를 멸하고 서주(西周)를 건립했으며 도읍을 호경에 정했다. 이는 중국 역사상의 세번째 노예제왕조다.  자신의 통치를 공고키 위해 희발은 주공의 상조 백성을 위로하여 천하를 안정케 하는 방안을 채용했다. '공/公', '후/侯', '백/伯', '자/子', '남/男' 등 다섯 등급으로 작위를 나뉘어 친족과 공신을 책봉했으며, 그들로 하여금 제후국을 건립하게 했다. 강상은 영구(營丘)에 도읍을 정해 제나라(齊)를 건립했고, 주공은 곡부(曲阜)에 도읍을 정해 노나라(魯)를 건립했다. 한편 주왕(紂王)의 아들 무경(武庚)을 상나라 도읍에 남겨 은후(殷侯)로 책봉하여 상조의 유민들을 안정시켰다.   이와함께 주무왕은 범인을 석방하고, 가난한 백성을 구제하며 생산을 발전시킨 것으로 서주 초기 정치의 안정, 경제의 발전 더 나아가 사회의 발전을 추동했다.   서주 건국 3년 후, 발희는 병으로 타계하자 아들 희송(姬誦)이 그의 왕위를 계승했다. 당시 희송의 나이가 아직 어린것으로 주공단이 대신 국정을 다스렸다.   낡은 왕조를 뒤엎고 새 왕조를 건립한 주무왕은 중국 역사상 이름 날린 군왕 중 하나로, 오늘까지 후인들의 칭송을 받고 있다.   제공:중국국제방송  
6    중국 열병식-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댓글:  조회:3440  추천:0  2009-04-14
열병식, 제천의식에서 시위로 변화   팔기열진도(八旗閱陣圖)의 일부분 올해 10월 1일이면 새중국 탄생 60주년을 맞이하게 된다. 때가 되면 베이징 천안문광장에서는 성대한 열병식이 진행되어 민족정신을 진작시키고 국민들의 민족자호감과 애국열정을 불러일으키며 세인들의 시선을 집중시킬 것이다. 그렇다면 중국 고대 열병식은 어떻게 진행되었을까?   역사 기재에 의하면 중국 최초의 열병식은 약 4천여년 전 하조(夏朝) 건립시기에 발생되었다고 한다. 당시 중국 북방의 화하부락 두령 하우(禹)는 강남으로 발전하기 위해 오늘의 하남성 숭현 경내에서 남방의 각 부락 두령들과 회맹하게 되었다. 성회에서 병사들은 손에 갖가지 병기들을 쥐고 음악속에서 춤추며 노래했는데 이는 일종의 제천의식이었을뿐만 아니라 먼 곳에서 온 손님에 대한 열렬한 환영의 뜻이기도 했다.   춘추시기에 이르러 열병식 행사는 빈번하게 진행되었으며 최초 사냥방식으로 진행되었다. 군대들이 대열을 선 후 최고 통치자 혹은 장관이 대열 맨 앞에 서서 활로 짐승을 쏘면 검열이 시작된다. 당시 사람들은 이와같은 활동을 "수(搜, 봄사냥을 뜻함)"라고 불렀으며 "수"는 점차 정기적인 군대 검열 혹은 작전차량 검열로 발전되었다.   봉건통치자들이 정기적으로 열병식을 가지는 것은 병사들의 무장상황을 검사하는 외 백성들앞에서 위세를 과시하기 위한 것도 있다.   "열병(閱兵)"이란 명칭은 정확하게 중국 한조시기로부터 시작되었다. 한조때 정기적인 열병식 행사는 입추(立秋)날에 진행되는 "짐승제사"활동과 늘 함께 진행되었으며 그중에는 일부 싸우는 내용도 추가되어 있다. 그뒤로 통치기간이 비교적 긴 왕조마다 한조때의 검열식과 비슷한 정기적 혹은 비정기적인 행사가 진행되었다.   청조의 궁중 화가 김곤 등 사람들이 그린 "팔기열진도(八旗閱陣圖)"는 건륭황제의 남원 대열병에 관한 성황을 생동하게 기록하고 있다. 팔기 병사들이 홍, 황, 남, 백 등 본기의 열병 예복을 입고 하늘을 찌를듯한 기세로 대열을 이루고 있는 모습은 세인들에게 건륭 열병도의 어마어마한 장면을 전시했다.   현대에 이르러 열병식 행사는 각 국가에서 성행하고 있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때 아이젠하워, 처칠, 드골 등 동맹군 사령관은 모두 열병식을 중시했다. 소련 지도자 스탈린은 늘 열병식을 병사들의 기세를 북돋아주는 중요한 수단으로 여겼으며 1945년 6월 모스크바에서 진행된 승리의 대검열은 소련의 국제적 지위와 영향력을 크게 제고했다.   고금왕래 국내에서나 해외에서나 사람들의 의식형태와 민족전통문화가 어떤 차이를 갖고 있는지를 막론하고 열병식 의의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은 거의 비슷하다. 바로 열병식은 한 국가의 위력과 종합적 국력을 구현하고 있으며 군심과 민심을 축적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열병식은 국가와 민족이 긍지감과 자호감을 느끼고 가장 신성하고 장엄한 성전이라 할 수 있다.    
5    중국력사상 가장 잔인한 10대 살인백정 댓글:  조회:4801  추천:0  2009-04-08
중국고대사에 나타난 10명의 살인미치광이들은 사람을 죽이고도 눈 한번 깜짝하지 않았고 다른 사람의 목숨을 초개같이 여기면서 피빚을 얼마나 졌는지 모른다. 따라서 “백정”이라는 두글자로 그들을 형용하는것이 가장 적절할것이다. 그럼 아래에 력대 10명 살인백정의 “걸작”들을 살펴보기로 하자. 철혈백정 백기(白起): 공손계라고도 불리운 백기는 전국시기의 진나라 대장군이였다. 싸움판에서 백기가 어찌나 무자비했던지 6국의 군대들은 백기가 군사를 거느리고 온다는 말만 들어도 혼비백산할 지경이였다. 사서에 기재된데 의하면 당시 다른 나라들에서는 모두 진나라와 싸울 엄두를 못냈다. 사서는 뒤에 주해를 달았는데 그 내용은 진나라에 백기가 있었기때문에 모두들 무서워했다고 밝혔다. 기원전 294년, 백기는 군사를 거느리고 한나라와 위(魏)나라를 치면서 이궐(이궐: 지금의 하남성 락양시 룡문지역)에서 한위련합군을 격파했는데 적군의 수급을 벤것만도 24만개에 달했다. 기원전 278년, 군사를 거느리고 초(楚)나라공략에 나선 백기는 물을 터뜨려 언성(언성: 지금의 하북성 의성 동남쪽)이 잠기게 함으로써 군민사망자수가 수십만명에 이르게 하여 시체가 사처로 물우에서 떠다니게 하였다.   기원전 273년, 백기는 군사를 이끌고 조나라와 연나라의 련합군을 공격, 화양(화양: 지금의 하남성 신정북)에서 조연련합군을 대패시켰는데 그가 벤 수급만도 13만개에 달했다. 후에 백기는 또 조나라장군 가언과 일전을 벌렸는데 물을 리용해 조나라병사 2만명을 익사시켰다. 기원전 264년, 백기는 한나라를 공략하며 한나라 생력군 5만여명의 목을 전부 베였다. 기원전 260년, 조나라와의 장평전투에서 백기는 생포한 조나라군사 40만명을 생매장하고 겨우 240명의 소졸을 돌려보내 소식을 전하게 했다. 이로써 추산으로 도합 100만여명을 살해한 백기는 통계가 불완전한 살인장부를 가지고있다. 량계초의 고증에 따르면 옹근 전국시기에 도합 200만명이 목숨을 잃었는데 그중 절반의 생명을 백기가 죽여버렸다.   잔인한 살인백정(辣手屠夫) 조조(曹操): 조조는 란세의 간웅일뿐만아니라 잔인하기 그지없는 살인백정이였다. 기원 193년, 도겸을 공략할 때 서주대도살을 감행, 기재에 따르면 남녀로소 가리지 않고 10만여명을 살해했을뿐만아니라 개든 닭이든 짐승조차도 가만놔두지 않고 닥치는대로 죽여 도처에 시체가 널린 까닭에 사수하까지 막혀 흐르지 못하는 정도가 되였다. 이밖에 조조는 장막을 치면서 옹성(雍城)토벌을 감행했고 려포를 치면서 팽성(彭城)토벌을 감행했으며 원상을 치면서 업성토벌을 감행하고 오환을 치면서 류성(柳城)토벌을 감행했는데 이르는 곳마다에서 모조리 죽이는 정책을 실시하여 그 수단이 극히 잔인함을 보여주었다.   미치광이살인백정 황소: 당조말년의 농민기의군 수령 황소는 횡포하고 지독하기로 소문났다. 황소는 장안성을 함락한후 사람을 어찌나 많이 죽였는지 시체가 온 거리에 널려있을 정도였다. 후에 관군이 다시 장안성을 수복한후 백성들은 완전히 관군의 립장에 서서 “황소가 사람을 마구 죽여 피가 온 성안에 질벅했다”고 공소했다. 《구당서》의 기재에 따르면 “황소가 군사를 거느리고 진주를 1년간 포위하고있었는데 량초가 다 떨어지자 수백개의 대형 돌절구를 만들어놓고 펀히 살아있는 백성들과 포로들을 남녀로소 구분없이 돌절구에 넣고 찧어서 그 고기를 병사들이 먹게 했다. 진주 4개주의 백성들을 다 잡아먹고나자 황소는 또 하남, 허, 당 등 10개주의 백성들에게도 마수를 뻗쳤다. 황소는 또 광주 대사에서 학살을 감행했는데 아랍 등 무슬린상인들을 20여만명 살해했다. 과연 그 미친듯한 살인행각은 사람들로 하여금 모골이 송연해지게 하였다.   야만백정 테무진: 테무진이 세운 몽골제국의 패업은 가히 수많은 사람의 백골로 세운것이라고 말할수 있다. 기원 1215년, 테무진은 금나라의 도성 중도(지금의 북경)를 함락했는데 성안의 백성들을 한달동안이나 대도살했다. 당시 100만명을 헤아리는 사람들이 그 재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기원 1221년, 테무진은 한차례 서방정벌에서 대도살을 감행했는데 당시 몽골병사 5만명이 매인 평균 24명의 백성을 도살함으로써 도합 120만명이 목숨을 잃었다.   최악의 백정(屠夫之最)   구비라이(忽必烈): 이 원나라의 건립자는 종족멸종의 정책을 시행하여 한족들을 대거 학살했는데 그 사망자는 1800만명이 넘었다. 중국 북방의 90%의 한족평민들은 대부분 그 종족멸종의 참극에 희생양이 되고말았다. 구비라이가 사천에서 대도살을 감행하기전에 300만~2000만명의 인구가 있었는데 도살후 80만명도 남지 않았다. 이 인간성을 상실한 종족멸종행위는 기니스세계기록대전에 수록(1985년)되였다.   랭혈백정(冷血屠夫)  주원장(朱元璋): 이 목동은 황제가 된후 갑자기 마음이 변하여 공신, 조신들을 마구 학살했다. 사서에 기재된데 의하면 호유용, 리선장, 란옥삼 사건에서 도합 10만여명이 목숨을 잃었다. 주원장은 재위 30년간 20만명을 살해했는데 공신들은 기본상 다 죽여버렸다. 주원장은 상우춘(常遇春)에게 이쁜 첩을 안겨주었는데 상우춘의 안해가 그 첩의 손목을 잘라버렸다. 이를 알게 된 주원장은 즉시 사람을 보내여 상우춘의 안해를 죽여버리고 그 갈비뼈를 삶아서 상우춘 및 대신들이 식용하게 하였다. 주원장은 또 사람의 가죽을 바르는 형벌을 만들어 잔인한 본색을 세상에 알리였다. 변태백정 주체: 애비 주원장에 비해 주체 역시 살인백정으로 손색이 없었다. 1402년, 그는 친조카 건문제의 황위를 빼앗은후 건문제궁의 녀관, 태감 등 모든 사람들을 다 죽여버렸는데 한번에 1만 4000명이나 학살했다. 그는 또 건문제에게 충성하던 옛신하 방효유 등을 전부 살해했는데 그의 “10족”까지 화를 면치 못했다. 그리고 방효유의 안해 및 그 가족중의 녀자들은 군영에 가두어놓고 병사들이 마음껏 즐기게 했는데 한명의 녀자가 밤낮이 따로 없이 20여명 사내들의 수욕을 만족시켜야 했다. 그러다가 육신이 지쳐서 죽는 녀자는 시체를 가져다 개에게 먹이게 했다. 영락말년, 주체는 또 한번 궁녀, 환관들에 대한 대도살을 감행했는데 이번 대참사에서 살해된 궁녀만도 근 3000명에 달했다. 림종을 앞두고도 학살본성을 잊지 않은 주체는 바로 죽는 날에도 30여명의 궁녀들을 목을 매달아 죽여버림으로써 자기와 함께 묻게 했다. 과연 명실상부한 변태살인백정이였다. 야성백정 장헌충: 명나라말년의 기의군 장령이였던 장헌충은 군사를 거느리고 성도를 함락한후 3일동안의 대학살을 명령했다. 그로서 3일후 대학살을 그만둔후에도 장헌충은 의연히 날마다 100여명씩 살해했다. 그러다가 청나라군이 몰려오자 장헌충은 곧바로 도망쳤다. 바로 대군이 성도에서 도망치기전에 그는 참혹한 “4광정책”을 실시했는데 그것이 바로 사천인을 모조리 죽이고 일반백성으로부터 군인가족(로약자와 환자, 부상자)에 이르기까지 또 자기 군사들중에 있는 호북병사와 사천병사들 그리고 최초에 자기를 따르며 사선을 넘나들던 친병들까지 모조리 죽여 그 고기를 베여 군량으로 했다. 기재에 따르면 어느날 저녁, 장헌충은 자기가 부르는데 대답하지 않았다는 리유로 명령을 내려 자기의 어린 아들을 죽이고는 이튿날 후회마지 않다가 처첩들을 불러 왜 아들을 구하지 않았느냐고 문책했다.   그리고는 처첩들은 물론 자기 아들을 죽인 도부수들까지 모조리 죽여버렸다. 장헌충은 사람을 죽이는 방법을 여러가지로 만들어냈는데 그중에는 백관들앞에서 10마리의 개를 풀어놓아 개가 누구한테 가서 냄새를 맡으면 곧 그를 죽여버렸는데 이것을 가리켜 “천살”이라고 했다. 장헌충은 매번 사람을 죽일 때마다 상세하게 기록해놓았는데 그중에는 사람머리가 몇무지이고 사람의 손이 몇무지이며 사람의 귀가 몇무지라는것까지 다 기록되여있었다. 마성을 함락한후 그는 부녀들의 발을 잘라내여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가장 이뻐하는 첩을 데려다 참관시켰다. 그런데 첩이 웃으면서 “보기는 좋으나 아름다운게 부족해요. 이쁜 발 한쌍이 더 있었으면 좋겠어요.”라고 하자 장헌충은 “너의 발이 제일 예쁘다”며 바로 그 첩의 발을 잘라내여 “발산더미”에 올려놓았다.   흡혈백정(嗜血屠夫)  누르하치: 누르하치는 군사를 거느리고 료동지구를 점령한후 당지 가난한 사람들이 생활이 바빠 반란이라도 일으킬가봐 료동지구의 빈민들을 모조리 붙잡아다 살해했다. 후에 또 료동의 부자들이 압박에 못이겨 반항할가봐 두려워 료동지구의 부자들도 대부분 다 죽여버렸다. 누르하치는 료동백성 도합 300여만명을 살해했는데 료동지구의 한족들은 기본상 다 화를 면치 못했다. 이는 피를 보기 좋아하는 누르하치의 본성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지옥백정 다탁: 청나라 예친왕(豫 王)인 다탁은 1645년에 군사를 거느리고 양주를 포위한후 대포를 쏘아 성문을 열고 양주성에 짓쳐들어갔다. 다탁은 련속 10일간 대도살을 감행해 양주백성 80만명을 살해했다. 이로써 번화하던 양주성은 순식간에 인간지옥으로 변했다. 청나라군이 양주백성들을 보는대로 살해하다보니 시체가 산더미처럼 쌓이게 되였는데 어린애들도 재화를 피하지 못했다. 나중에 련못도 피로 물들어 벌겋게 되였는데 이런 상황을 만들어낸 다탁이야말로 명실상부한 지옥백정임에 틀림없다.    《신랑넷》    
4    중국1천3백년간의 인재선발제도-과거 댓글:  조회:3943  추천:0  2009-04-04
  과거(科擧)는 중국 고대 지식인들이 참가하는 인재선발 고시이며 역대 봉건왕조에서 시험으로 관리를 선발하는 제도이다. 과거제는 수조때부터 시행되어 청조 광서황제시기 최후의 진사고시를 마지막으로, 약 1천3백여년을 거쳤다.   청조시기 과거제도는 초보적 고시와 정식 고시 두개 단계로 나뉘었다. 정식 고시는 또한 향시(鄕試), 회시(會試), 전시(殿試) 등 3가지로 나뉜다. 청조 과거제도 규정에 따르면 시험에 합격한 자는 리부(吏部)에서 등록한 후 일정한 관직을 얻을 수 있는데 당시 현급 관리에 상당했다. 물론 이 직위는 매우 적은 것으로서 해마다 약 40~130명의 명액밖에 되지 않았다고 한다.   명, 청조시기 규정한 과거시험 문장제식은 팔고문(八股文)으로 되어 있는데 출제시 "사서오경"을 벗어나지 못하며 사서오경 해석은 또한 주희(朱熹)가 편집한 "사서오경"을 기준으로 해야 한다. 학생들은 규정된 서경만 읽어야 했고 출제된 제목에 근거해 규정된 문장격식과 수식어로 작문을 지어야 했다. 이와같은 형식에서 우리는 당시 사람들의 사상에 대한 속박이 어느 정도로 심했는가를 가늠할 수 있다.   송조시기에 이르러 과거시험은 출신이나 빈부와 상관없이 모두 참가할 수 있게 되었다. 이로부터 정부에서 인재선발에 대한 요구를 낮추었고 사회 중하층 지식분자들도 과거시험을 통해 사회 상층에서 유동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정책은 전체 사회안정을 유지하는데 적극적 역할을 일으켰으며 한마디로 과거제는 지식인들을 농락, 조종하는 효과적인 방법으로서 봉건통치를 공고히 하는데 도움을 제공했다.     과거제도는 하층 지식분자들에게 벼슬길을 제공했을뿐만 아니라 조정에서 관원을 선택하는 범위를 넓혀 중국 역사상 중요한 의의를 갖고 있다. 1천3백여년간 지속된 과거제도로 인해 수십만명의 진사(進士), 거인(擧人)과 수재는 수백만명에 달한다. 물론 전부 학식이 높은 인사들이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첩첩난관을 극복해 과거시험에 합격한 사람들은 대부분 출중한 인재로서 높은 문화수양을 구비한 정치가, 군사가, 경제학가, 행정관리 전문가들이다. 이 사람들이 없다면 중국의 대당성세, 남북송의 번화, 원명시기의 강성, 청조의 대일통이 없었을 것이다.   팔고문을 시험내용으로 하는 과거제도는 청조시기까지 지속되었는데 그 폐단은 속속 드러나기 시작했다. 청조초기 일부 대신들은 개혁할 것을 건의했으나 통치자들은 문화집권주의를 시행하기 위해 과거시험을 한족 사대부를 농락하는 수단과 지식인들의 사상을 구속하는 도구로 삼아왔다. 경서와 팔고문을 기계적으로 암기만 하면 관리직을 얻을 수 있는 과거제도, 시험에 참가하는 사람들은 해마다 성장세를 보였다. 합격인수를 제한하기 위해 출제자는 늘 시험명제를 아무런 가치가 없는, 문자유희에 가까운 난제와 이상한 문제를 내놓았기에 시험생은 명제에만 파묻혔으며 과거시험제도는 점점 굳어져갔고 정치 혁신, 과학문화 발전의 중대한 장애로 되었다. 청조말기 광서황제시기에 이르러 근대 과학문화의 전파와 국내 민주혁명운동의 고조로 인해 청정부에서는 강박에 못이겨 천여년간 지속된 과거시험제도를 폐지하게 되었다.   단일한 문화시험만으로 관리직을 부여하는 과거제도는 취할바는 못되지만 세습과 추천 등 제도와 비교할때 상대적으로 공평, 공개 및 공정한 방법이라 할 수 있다. 오늘날의 시험제도는 일정한 정도에서 여전히 과거제도의 연속으로 볼 수 있다.   제공:중국국제방송  
3    중국시인중에서 누가 가장 유명한가? 댓글:  조회:3434  추천:0  2009-04-03
  중국은 시국(詩國)이다. 중국에서 가장 유명한 시인 혹은 가장 위대한 시인이 누구냐는 물음에는 아마도 어느 정도의 교육을 받은 중국인이라면 몇명의 대표적인 시인을 말 할수 있다. 하지만 중국 시인들중에서 시를 가장 많이 쓴 시인이 누구냐 하면 대답이 쉽게 나오지 못할 것이다.   사실 매 시대마다 기준이 있고 매개 사회계층에는 논리와 미학기준이 있기 때문에 중국에서 가장 위대한 시인이 누군가 하는 문제에 대해 자고로 논쟁은 그칠새 없었다.   하지만 중국 고대 저명시인 중에서 시를 가장 많이 쓴 사람이 누군가 하는 문제는 쉽게 결론을 내릴 수도 있다. 시 수량이 "굳은 기준"으로 될 수있기 때문이다.   기재에 의하면 이태백이 평생 남긴 시가는 약 990수, 두보는 1,400수, 백거이는 2,800수, 소식(소동파)은 약 4,000수라고 한다. 애국시인 굴원은 비록 시 편폭이 길지만 수량을 놓고 볼때 겨우 25편에 불과하다.   자료에 의하면 륙유는 시를 가장 많이 남긴 시인으로 알려졌다. 그는 평생 2만여수의 시를 썼으며 오늘날 보존된 시만 해도 9,329수에 달한다. 물론 수량도 중요하지만 질을 홀시할 수 없다. 청조황제 건륭은 평생 지은 시가 42,250수에 달하지만 세인들에 널리 전해지지 못했으므로 일류 시인이라고 말 할수 없는 것이다.   륙유는 인구에 회자한 명언과 명구를 민간에 많이 남겼다. 하지만 그가 중화역사에서 사람들의 찬양을 받아온 것은 시짓기뿐만 아니라 그의 위대한 애국주의 정신때문이다.   륙유가 생활한 시대는 중화민족이 역사상 가장 굴욕받은 시대라 할 수 있다. 수백년간의 송왕조는 부패와 쇠락의 길로 나아갔고, 북방의 여진족이 송왕조를 점차 침범했으며 황제는 겁먹은 쥐처럼 비겁하게 현실을 회피할때 륙유 등 소수의 애국주의자들은 용감하게 맞서 싸웠던 것이다. 평생 풍상고초를 겪어온 륙유의 노년시대는 쓸쓸하기 그지없었다. 나라가 망하고 동배들이 흩어져 그의 시도 더이상 독자가 없어 본인한테 쓰는 "외로운 시"가 된 것이다.   륙유의 시는 그야말로 완벽한 작품이라 할 수 있는데 특히 그가 세상뜨기전에 지은 "시아(示兒)"시는 중화 천추 시역사의 위대한 편장으로서 전체 세계문학사에서도 보기드문 명작이다.   륙유가 중국에서 가장 위대한 시인이라는 여부에 대해서는 물론 단도직입적으로 결론을 내릴 수 없지만 그의 빛나는 재능과 위대한 애국심은 우리가 지극히 탄복하는 바이다.    
2    신중국 개국대전의 숨겨진 이야기 댓글:  조회:3025  추천:0  2009-04-02
1949년 10월 1일의 개국대전이 열리기 하루전날 밤에 회인당에서 외국손님을 접대하는 국연이 있었다. 국연에는 모태주, 통화포도주 등 여러가지 중국명주가 올랐으며 어떤것들은 이미 병마개가 열려있어 대청안에 짙은 술향기가 풍기였다.   사업일군들은 비록 매우 바빴지만 한편으로 매우 흥분되여있었다. 하지만 회인당의 입구에 서있는 중앙경위처의 처장인 왕동흥과 부처장인 리복곤의 표정은 남들과 달랐다. 그들은 국가지도자들의 안전이 더욱 걱정되였던것이다.   리복곤은 검사실 주임인 왕학빈을 불러내여 낮은 소리로 지시했다. “학빈동지, 중앙지도동지들이 래일 천안문에 오르셔야 하니 술을 과하게 마시면 절대 안되오. 어떤 일이 있든간에 한사람도 술에 취해서 쓰러지게 해서는 안되오. 방법을 강구해 처리하시오.” 그리하여 외국손님에게는 진짜술을 대접하고 국가지도자들에게는 물로 술을 대신하는 방법을 생각해냈다.   이날 국연에 구쏘련을 비롯한 동구라파 사회주의국가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등 형제나라에서 온 귀빈들도 참석했다.   연회가 시작되였다. 류소기는 담담하면서 아무 맛도 없는 “술”을 맛보았다. 한잔을 마시였지만 여전히 기쁜 얼굴이였고 전혀 신경쓰지 않는 표정이였다. 류소기는 쏘련에서 온 손님들과 자주 건배를 했다. 하지만 주은래의 반응은 달랐다. 주은래는 술잔을 한번 들어마시고는 맛이 다르다는것을 알아차리고 눈섭을 잠간 찌푸리더니 사방을 둘러보다가 시선을 왕학빈 등에게로 향했다. 주은래는 손님들을 제대로 접대하지 못하는것을 걱정했으며 만일 손님들이 이런 술을 마신다면 어떻게 수습할지… 이때 마침 비서인 하겸이 주은래의 귀가에 몇마디 속삭였다. 그러자 대뜸 눈빛이 부드러워진 주은래는 술잔을 들고 외국손님들과 건배를 했다. 모택동은 “매운것”을 즐긴 반면 술에 대해서는 전혀 흥취가 없었다. 그래서인지 모택동은 두잔의 차잎으로 된 “적포도주”를 마시였는데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주덕은 이미 술이 가짜라는 통보을 받았다. 그는 몇번 가짜술을 마신후 성차지 않아서 몰래 진짜모태주를 몇잔 마시였다. 임필시는 당시 고혈압으로 앓다보니 술을 입에 대지 않았다.   하지만 외국손님들의 술잔에 부은것은 진짜 중국의 명주였다. 그들은 중국명주가 맛이 참 좋다면서 흥이 도도해 잔을 들면 밑굽을 쭉쭉 냈다. 어떤 손님들은 취하기도 했지만 흥이 나서 옆에 있는 사람에게 술잔을 권하면서 계속 마시였다.   당시 국가지도자들은 아무맛도 없는 “술”을 많이 마시였지만 전혀 취해 쓰러지지 않고 외국손님들과 자리를 함께 한 국연을 마칠수 있었다.   《해방군보》  
1    신중국 수도의 최초 후보지는 할빈 댓글:  조회:2796  추천:0  2009-04-01
  신중국 수도의 최초 후보지는 북경이 아니라 흑룡강성의 할빈이였다고 한다.   모택동은 중국을 하나의 거대한 새와 같이 보았다. 흑룡강성은 마치 날개를 펼친 백조와 같았는데. 할빈은 바로 이 백조의 목아래에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할빈을 “백조의 목아래에 있는 진주”라고 부르기도 했다.   할빈은 일찍 제국주의의 침략과 략탈을 경험했다. 30여개 국가의 교민들이 모여있었고 16개 국가의 령사관이 설립되여있는 할빈은 로씨야를 위주로 한 국제적인 도시로 성장하였다. 수천개의 공상기업들이 세워지고 형형색색의 유럽풍건축물도 들어섰다. 도꾜, 런던, 빠리, 베를린, 뉴욕 등 세계1류도시들과 무역도 빈번해지면서 중국 동북지방에서 최대의 시장으로 되였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으로 일본제국주의의 14년에 걸친 식민통치는 끝났다. 하지만 국민당의 군대가 대거 동북으로 몰려와 항전의 승리과실을 빼앗으려 했다. 중국공산당이 령도하는 동북민주련군은 피를 흘리면서 일본침략자를 몰아내고 해방시킨 땅을 지켜내기 위해 국만당군대와 치렬한 전투를 벌렸다. 가장 먼저 공산당에 의해 해방된 도시 할빈은 중공중앙 동북국, 동북행정위원회의 소재지였으며 동북해방구의 정치, 경제와 문화의 중심지였다. 뿐만아니라 할빈이 당시 가장 안전한 도시라는 점을 고려하지 않을수 없었다. 그 리유는 쏘련에 가장 가깝고 쏘련의 지원과 도움을 받기 가장 편리한 지역이였기때문에 모택동과 중공중앙에서는 할빈을 특별시로 정하고 할빈에서 신중국을 세울것을 준비하였다.   모택동과 중공중앙에서는 동북쪽으로 마음이 기울어있었지만 할빈은 상당히 먼곳에 있었으므로 한꺼번에 옮겨가는것이 쉽지 않았다. 그래서 중간의 기착지가 필요했고 중간기착지로 선정한 곳은 화북의 피서산장이 있는 승덕(承德)이였다. 승덕을 당중앙의 림시소재지로 하였다. 료심전투의 전날 동북야전군의 최고지휘관 림표와 라영환은 당중앙에 중앙정부를 동북으로 옮기는 일에 대한 답신을 요청하였다. 모택동은 당시의 상황을 고려하여 “당중앙은 반드시 관내에 머물러있어야 하므로 나는 잠시 떠나지 않겠다”고 표했다.   비록 모택동과 당중앙이 동북 할빈으로 옮기는 일은 잠시 중단되였지만 당중앙을 할빈으로 옮기는 예비업무는 차질없이 진행되고있었다. 이를 위해 중공중앙 부주석인 주은래는 중앙경비대대(당중앙경호부대)를 둘로 나누어 일부분은 남겨서 당중앙을 보위하는 책임을 지고 여전히 중앙경비대대로 부르며 일부분은 “중앙선행경비대대”로 개칭하여 오열에게 대대장을 맡기고 리일민을 정치위원으로 하여 모두 400명으로 구성했다. 1945년 10월 2일, 오열과 리일민은 중앙선행경비대대를 이끌고 동북에서 책임을 맡고있던 리부춘에게로 갔다. 그들은 연안에서 출발하여 30여일의 행군을 거쳐 기찰열요해방구 소재지인 승덕으로 가서 할빈으로 떠날 준비를 했다.   그런데 바로 이때 동북의 정세가 급격하게 변했다. 국민당이 미국의 지지하에 동북에 병력을 증원하여 교통요지를 점령했다. 모택동은 동북정세를 분석하고 과감하게 “당중앙은 승덕으로 옮기지 않는다”는 결정을 내렸다. 중앙군사위원회는 명령을 내려 중앙선행경비대대를 현지에서 개편하여 기찰열요군구에 예속시키였다.   1948년 4월 20일, 모택동은 전국에 신정치협상회의를 소집하고 련합정부의 설립을 호소했다. 모택동의 호소문은 전국각계인사들의 열렬한 호응을 받았다. 당시 국민당이 여전히 중국의 절반을 점령하고있는 상황에서 저명한 민주인사들을 대련을 거쳐 할빈으로 보내는 일은 건국의 큰 일이였고 절대 홀시해서는 안될 일이였다. 모택동과 주은래는 친히 여러가지 호송방안을 짜놓고 재검토했다. 몇차례의 곡절을 거쳐 주은래의 세심한 계획대로 심균유, 곽말약, 리제심 등 민주인사들이 세차례에 나누어 안전하게 할빈에 도착했다. 황염배 등 제4차로 떠난 민주인사들은 1949년 3월 14일에 향항에서 출발하였는데 이때 공산당이 령도하는 동북야전군이 료심전역에서 대승리를 거둔 뒤 남하하여 북경과 천진을 해방시켰다. 중공중앙에서는 할빈에서 열려던 신정치협상회의를 북경에서 개최하기로 결정지었다. 모택동과 주은래의 이러한 조치는 매우 현명했다. 1949년에 중국공산당이 북경에서 소집한 신정치협상회의에는 300여명의 민주인사들이 참가했다.   이때 중국공산당이 령도하는 중국인민해방군은 료심전역, 평진전역, 회해전역 이 3대전역에서 대승리를 거두고 국민당군대에 비해 절대적우세를 차지했으며 절반 중국이 이미 해방되였다. 모택동은 전중국이 곧 해방될것이라고 예감하고 더는 신중국 수도를 북방에 둘 필요가 없다며 평화적으로 해방된 북평(지금의 북경)이 더 좋을것이라고 생각했다.   북경에서 열린 신정치협상회의에서 신중국의 수도를 북경으로 정했으며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되였다.  (력사문현)   제공:연변라지오텔레비죤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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