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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명장면】공자, 노자를 만나다<상>
이인우
子曰 無爲而治者 其舜也與 夫何爲哉 恭己正南面而已矣 자왈 무위이치자 기순야여 부하위재 공기정남면이이의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억지로 하지 않으면서 저절로 다스린 이는 순임금이시라! 대저 무엇을 하셨겠는가? 몸을 공손히 하고 바르게 남면하 시어 임금의 자리를 지키셨을 뿐이다! -‘위령공’편 4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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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공자의 스승
공자는 박학다식한 사람이었다. 그는 묵묵히 이해할 뿐(默而識之-술이편 2장), 결코 아는 체 하는 사람이 아니었는데도 그의 지식은 저절로 밖으로 드러났다. 수십년을 함께 한 제자들은 그런 스승을 ‘나면서부터 아는 사람’(生而知之者)이 아닐까 여겼을 정도였다. 그러나 공자는 제자들이 타고난 재능을 믿고 공부를 소홀히 할까 염려하여 자주 이렇게 말했다.
열 집이 사는 작은 마을에도 반드시 나만큼 성실하고 신의있는 사람이 있겠지만, 나만큼 배우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十室之邑 必有忠信如丘者焉 不如丘之好學也①) -‘공야장’편 27장.
나는 결코 나면서부터 아는 사람이 아니다. 옛 것을 좋아하여 부지런히 구하는 자일 뿐이다.(我非生而知之者 好古敏以求之者也) -‘술이’편 19장.
어떤 이들은 공자의 학문적 배경과 교수법의 원천을 궁금해 하기도 했다. 공자는 이런 의문을 가진 제자들에게 진지하게 말하곤 했다.
그대들은 내가 감춰놓고 가르쳐 주지 않는 것이 있다고 생각하시는가? 나는 결코 그런 일이 없네. 나는 그대들과 더불어 함께 하지 않은 것이 없으니, 그것이 바로 나, 구(丘)의 본모습일세.(二三子 以我爲隱乎 吾無隱乎爾 吾無行而不與二三子者 是丘也) -‘술이’편 23장.
공자에게는 따로 계통을 지을만한 스승이 없었다는 사실을 종내 믿으려하지 않는 이들도 있었다. 공자 자신도 이런 질문이 종종 지겨웠던지, “어려서 비천하게 살았기 때문에 이것 저것 줏어들은게 많았지(吾少也賤 故多能鄙事-‘자한’편 6장)”라고 말하며 웃어넘기곤 했다. 누군가 그에게 가르쳐 주는 사람 없이 공부하는 방법에 대해 물었을 때는 이렇게 대답하곤 했다.
세 사람이 길을 가면 그 가운데 반드시 스승을 삼을 만한 사람이 있는 법, 좋은 점을 보면 본받아 배우고 나쁜 점을 보면 반성하면서 배운다.”(三人行 必有我師焉 擇其善者而從之 其不善者而改之②)-‘술이’편 21장.
스승이란 어떤 사람인가라고 물었을 때는 이렇게 말했다.
옛 것을 익히고 그것으로 미루어 새로운 것을 안다면 남의 스승이 될 자격이 있다. (溫故而知新 可以爲師矣③)-‘위정’편 11장.
훗날 제자 자공은 공자가 학문적 문파가 없음을 의아해 하는 어떤 자와 이런 대화를 남겼다.
위나라 대부 공손조가 자공에게 물었다. “공자께서는 어디서 배웠습니까?”(仲尼焉學)
“문왕과 무왕의 가르침이 아직 땅에 떨어지지 않고 사람들 사이에 남아 있습니다. 현명한 사람은 그 가운데 큰 것을 알고 그렇지 못한 사람이라도 작은 것을 배우게 되지요. 위대한 성현의 도가 없는 곳이 없는데, 왜 선생님이 배울 곳이 없겠습니까? 선생님께서는 따로 스승이 없으셨습니다.” (子貢曰 文武之道未墜於地 在人 賢者識其大者 不賢者識其小者 莫不有文武之道焉 夫子焉不學 而亦何常師之有)-‘자장’편 22장.
*영화 <공자-춘추전국시대>중에서
2. 노자는 공자의 스승인가
자공의 분명한 회고에도 불구하고 언제부터인가 공자에게 스승이 있었다는 주장이 생겨났다. 공자에게 예(禮)를 가르쳤다고 전해지는 사람은 노자(老子)라고 존칭되는 어떤 인물이다. 훗날 도가(道家)에 의해 자신들의 비조(鼻祖)로 추앙된 바로 그 철인(哲人)이다. 노자가 공자의 스승이었다는 설은 노자를 높이고 공자를 낮추려던 도가우위 시대의 산물임은 불문가지이다. 그러나 사상투쟁이 낳은 조작이라는 주장에도 불구하고 노자가 ‘공자의 동시대인으로 실존한 인물’이라는 믿음은 매우 오래동안 지속되었다. 어떤 설화가 생겨나 수천년을 전승할 때는 반드시 그럴만한 ‘실체적 진실’이 계기가 되었기 마련이다. 나, 이생도 그 ‘설화의 실체적 기원’이 궁금하여 선생님께서 돌아가신 후, 여러 지방을 여행하며 전설의 진원(震源)과 진위(眞僞)를 추적한 적이 있다.
동양사상의 양대 거봉인 공자와 노자는 정말로 조우한 적이 있는가? 그랬다면 두 사람은 어떤 영향을 주고 받았을까? 노자는 역사와 설화가 공히 전하는 ‘노담(老聃)’이라는 바로 그 인물인가? 이 이야기는 이런 궁금증을 좇아 중원 일대를 떠돈 한 늙은 순례자의 기록이다.
3. 공자가 존경한 노팽
공자가 따로 스승이 없이 대성(大聖)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사실은 공자 생전에도 그렇고, 사후의 사람들에게도 매우 경이롭게 여겨졌던 것 같다. 그래서 사람들은 공자의 어록과 행적을 근거로 공자가 영향을 받았음직한 사람들을 꼽아보기도 했다. 공자가 고대 관제(官制)에 밝은 것은 젊어서 담(炎+방)자에게 배운 탓이고, 음악에 정통한 것은 장홍(장弘)과 사양자(師襄子)의 가르침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해석했다. 또 공자가 존경한 현자로는 주(周)나라의 노자(老子), 위나라의 거백옥(거伯玉), 제나라의 안평중(晏平仲·안영), 초나라의 노래자(老萊子), 정나라의 자산(子産), 노나라의 맹공작(孟公綽) 등(<사기> ‘중니제자열전’)이 꼽혔다. 이 가운데 특별히 주목되는 사람이 ‘노자’이다. ‘노자’는 열거된 ‘현자’ 가운데 유일하게 실존 자체가 의문시되는 사람임에도, 공자에게 직접 ‘예(禮)를 가르치고, 일종의 도덕적 각성까지 촉구한 언술을 남긴 사람’으로 사서(史書)에까지 올라 있다. 게다가 유가와 쌍벽을 이룬 도가(道家)의 비조로 추존되고 있으니, 만약 그가 공자와 동시대를 살면서 사상을 교류하였다면 이는 인류문화사의 일대 사건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문제는 후대 사람들의 ‘기록’에도 불구하고 정작 선생님의 어록에는 노자라는 사람이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논어>에는 이름이 비슷해 후대의 일부 사람들이 이 사람이 바로 노자가 아닐까 추정한 노팽(老彭)이라는 사람이 딱 한번 등장한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서술하되 짓지 않음은 옛 것을 믿고 좋아하기 때문이니, 나는 이를 몰래 우리 노팽과 견주어보노라. (子曰 述而不作 信而好古 竊比於我老彭④)-‘술이’편 1장.
내가 노팽이라는 사람에 대해 고제들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유사(儒士) 출신의 제자들은 대개 이 노팽이라는 ‘고대인’을 알고 있었다. “노팽은 선생님이 개인적으로 존경하는 고대 무축(巫祝;원시 제정일치 사회의 군장이자 제사장. 무당의 원류이다)의 한 사람이다. 그는 유명한 열명의 대무(大巫) 중 네번째 서열을 가진 무팽(巫彭)이란 분이며⑤, 축도문을 낭송하고 이를 전승하는 집단인 사무(史巫)의 원조격이다. 고천의식(告天儀式)을 치를 때 훌륭한 무사(巫史)는 하늘의 뜻을 정확히 전달할 뿐, 사사로히 의미를 더하거나 빼지 않았다. 술이부작(述而不作)의 전통은 여기서 비롯되었으니, 선생님께서는 저 위대한 현자에 당신의 구도(求道) 정신을 견주어 겸손하게 자부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노팽(老彭)의 노는 무팽(巫彭)의 존칭인가요?”
“노(老)란 나이가 많고 경험과 지식이 풍부해 남의 스승이 될만한 사람을 뜻하지. 주 왕실에서도 임금의 스승을 ‘삼로’(三老)라 했다. 여러 제후국에서도 주나라의 예를 따라 종종 ‘나라의 삼로(三老)를 존중한다’며 고을의 현명한 노인들을 우대하였는데, 이때의 ‘삼로’ 역시 ‘나이 많은 현자들’을 가리켰다. 민간에서도 농사 경험이 많은 지혜로운 농부를 `노농'(老農)이라 했는데, 선생님께서도 그런 표현(子曰 吾不如老農 -`자한'편 4장)을 쓰신 적이 있으셨지."
그럼 노팽이 노자가 아니라면 노자는 그러면 누구를 가리키는가?
4. 사실(事實)과 사실(史實)
선생님의 어록에 언급이 없음에도, 노자라는 사람이 존재하여 공자에게 예를 전수했다는 이른바 ‘문례(問禮)설화’가 역사적 사실로 ‘공인’된 데는 역사가 사마천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사마천은 중국사를 통틀어 최고의 역사가로 꼽히는 인물. 그가 자신의 사서에 노자를 실존인물로 다룬 후부터 사마천을 신뢰하는 후학들이 대부분 그 기록을 따랐다. 만약 사마천이 문례설화를 역사적 사건으로 간주하지 않았다면, 공자와 노자의 조우(遭遇)설은 필시 하나의 ‘설’로 그치고 말았을 것이다.
사마천은 <사기> ‘공자세가’에서 이때의 일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노나라의 남궁경숙(南宮敬叔)이 노나라 군주에게 말했다. “공자와 함께 주나라에 가고자 청합니다.” 이 말을 듣고 노나라 군주는 그에게 수레 한 대와 말 두 마리 그리고 어린 시종 한 명을 갖추어 주고 주나라(낙양)에 가서 예를 물어보게 했다. 공자는 이때 노자를 만났다고 한다. -<사기> ‘공자세가’
노자는 초나라 고현 여향 곡인리 사람으로 성은 이(李)씨, 이름은 이(耳), 자는 백양(伯陽), 시호는 담(聃)이다. 그는 주나라의 장서를 관리하는 사관(史官)이었다. 공자가 주나라에 가 머무를 때 노자에게 ‘예’를 물었다(孔子適周 將問禮於老子) -<사기> ‘노자·한비열전’
이를 종합하면, 노자는 주나라 사관(史官)을 지낸 사람으로, 공자가 노나라 군주의 명을 받아 주나라 낙양에 갔을 때 만나게 되어 그로부터 예를 배웠다는 사람을 가리킨다.
공자가 노자를 찾아가 예를 배웠다는 이 ‘문례(問禮) 설화’는 매우 유명하여, 역사가 사마천이 생존했던 시대에도 공자와 노자의 사상을 말하는 사람치고 한두번 화제로 삼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장주(莊周;<장자>의 저자. 서기전 369~289?)를 비롯한 후대 사상가들이 공자와 노자의 대화를 내세워 자신의 논지를 전개하게 되면서 사상사의 측면에서도 노자의 실존이 확고해졌다. 춘추전국 시대 제자백가의 쟁명을 거쳐 진한(秦漢) 시기의 통치이념 수립 과정에서 공자와 노자의 사상은 치열하게 대립하는 관계가 되었고, 공자 사후 3백여년 뒤의 사람인 사마천이 살던 한나라 시대에 이르러서는 이미 양립불가(兩立不可)의 세계로까지 여겨졌다. 사마천은 당시 두 학파간의 대립이 얼마나 심했는 지를 이렇게 기록해 놓고 있다.
“세상에서 노자의 학문을 배우는 이들은 유가 학문을 내치고, 유가 학문을 배우는 이들은 역시 노자의 학문을 내쳤다. ‘길이 다르면 서로 도모하지 않는다’라는 말은 정말 이러한 것을 두고 한 말일 것이다.”(世之學老子則출(물리칠출 絲+出)儒學 儒學亦출老子 道不同不相爲謀 豈謂是邪) -<사기> ‘노자· 한비열전’⑥
그러나 나, 이생이 공문의 일꾼이 되어 여러 문도들과 생활할 때 그 누구로부터도 노자라고 존칭되는 현자에 대해 들은 적이 없었다. 만약 공자보다 나이가 많고 대중적으로 인기가 높은 노자라는 저명한 현자가 있어서 공자에게 특별한 가르침을 전수하였다면, 민간 학숙으로서 학생들을 유치해야 하는 공문(孔門)의 입장에서 이를 적극적으로 선전하지 않을 이유가 없을텐데 말이다.
선생님 생전이든 사후이든 노자라는 인물이 존숭되거나 혹은 폄하된 흔적이 선생님의 어록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는 사실은 무엇을 뜻하는가? 그것은 노자가 후대에 도가 사상의 비조로 떠받들어졌을지라도, 적어도 이 시기에 노자는 대중적으로 유명한 사람이 아니었음을 의미한다. 설령 그런 현인이 있었다 해도 그는 ‘여러 현인 중의 한 사람’이었으며, 그의 사상도 당시에는 공자 사상과 대립되었다기 보다는 오히려 우호적인 통섭의 관계였을 것이다. 현대의 학자들이 논구한대로 공자가 살던 시기는 여러 사상들이 아직 완전히 분화되기 전이었다. 유가와 도가는 후대로 가면서 점차 사상적 분화과정을 밟았지만, 한동안은 자신들도 어쩌지 못할 동출이명(同出異名;이름이 다르지만 연원을 같이 함)의 ‘혈통’을 나눠가지고 있었다.
아무튼 사마천이 <사기>에서 말한 노자는 도가의 원조가 된 노자, 바로 그 사람이지만, 도가의 원조인 노자라는 사람이 공자와 같은 시대를 살며, 공자에게 예를 교수한 바로 그 사람이라고는 사마천 자신도 확신하지 못했다. 사마천은 노자가 공자와 동시대를 산 주나라 사관 노담이라고 해놓고 뒤에 가서는, 어쩌면 초나라 사람 노래자, 혹은 훗날의 주나라 태사 담이 노자일지 모른다는 식(周太史 담…或曰담卽老子 或曰非也-상동)의 여운을 남겼다. 사마천의 시대에 벌써 노자는 그 실존 여부를 규명하기 어려운 인물이었던 것이다. 사마천은 사실을 기록해야 할 사가로서 노자라 불리는 대사상가의 생몰조차 적시할 수 없자, 그를 그냥 은군자(隱君子), 즉 ‘숨어사는 군자’라고 얼버무리고 말았다.(이상 <사기> ‘노자·한비열전’)
나, 이생의 추적 결과, ‘최초의 노자’는 분명 노담이었다. 내가 여러 고제들의 증언을 종합한 결과, 공자가 주나라 수도 낙양에 갔을 때 노담을 만났으며, 그가 훗날 노자라는 인물을 형성하는 최초의 계기가 되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비록 사마천은 시대적 한계로 인해 노자의 실체를 얼버무리고 말았지만, 가장 자연스러운 결론은 ‘노자’가 여러 세대에 걸쳐 창조된 ‘역사화된 인물’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최초에 실존한 노자’는 ‘최후에 완성된 노자’가 아니지만, 노자라는 인물의 기원이 된 것은 역사적 사실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란 것이 나, 이생의 결론이다. 그렇지 않다면 ‘노담=노자’라는 등식이 그렇게 오랜 세월 동안 성립 과정을 거치지 않았을 것이며, 공자 사상에 비판적이었던 경쟁자들이 노담의 존재를 그렇게까지 열심히 활용하지는 않았으리라.
노담이 ‘최초의 노자’일 것이란 ‘물증’도 있다. <노자>(<도덕경(道德經)>이라고도 한다)라는 5천 자의 짧은 책의 존재이다. 이 책 내용을 분석해 보면, 공자보다 훨씬 후대에 여러 사람의 참여로 형성된 위작(僞作)임을 알 수 있는 내용이 많이 포함돼 있다. 그러나 책의 기본 뼈대나 원천 사상의 표현방식은 한 사람의 일관된 관점이나 집필이 아니면 나오기 어려운 측면도 동시에 가지고 있다. 이는 적어도 이 책이 최초에 쓰여질 때는 단일 저자의 작품으로 출발했음을 의미한다. 그 ‘최초의 저자’가 바로 ‘최초의 노자’라면, 그 가장 유력한 ‘용의자’는 현재까지 노담을 제외하고는 달리 상정할 만한 인물이 없다.(김용옥, <노자철학 이것이다>)
그렇다면 노담은 과연 어떤 인물이었으며, 공자를 만났을 때 무슨 대화를 나누었을까? 공자는 그로부터 어떤 영향을 받았던 것일까? 이에 대한 사서의 언급은 지극히 단편적이고, 유가의 경쟁자들이 남긴 진술은 일방적이어서 객관성을 담보하고 있지 못하다. 나는 두 사람이 나눈 육성이 궁금해 한동안 잠을 못이룰 지경이 되었다. 견디다 못해 어느날 부터인가는 자로와 안연 등 당시 낙양에 함께 갔던 고제들의 뒤꽁무니를 쫓아다니며 질문하기 시작했다.
“고제님들, 공자님과 함께 낙양에 갔던 이야기를 해주세요. 저도 낙양에 꼭 한 번 가보고 싶군요.”
“선생님과 함께 주례를 수입하려고 갔던 주나라 낙양에서의 일 말이냐?”
“그렇습니다. 그때가 언제였나요?”
*영화 <공자-춘추전국시대> 중에서
5. 공자, 낙양에 가다
다시, 사마천의 기록에 주목해 보자.
노나라의 남궁경숙이 노나라 군주에게 말했다. “공자와 함께 주나라에 가고자 청합니다.” 이 말을 듣고 노나라 군주는 그에게 수레 한 대와 말 두마리 그리고 어린 시종 한 명을 갖추어 주고 주나라에 가서 예를 물어보게 했다. 공자는 이때 노자를 만났다고 한다. -<사기> ‘공자세가’
공자가 노자를 만났다는 사실을 고증하기 위해서는 이 기록이 제시하는 역사적 장면들을 꼼꼼히 분석해 볼 필요가 있다. 기록에서는 특정되지 않았으나 공자 일행이 낙양에 간 시기가 언제인지도 매우 중요하다. 시점에 따라 공자와 노자의 나이 차이, 학문적 수준 정도 등을 어느 정도 가늠해 볼 수 있기 때문인데, 이는 사상의 전수라는 점에서 무시할 수 없는 분석 조건이다.
“저, 이생이 듣기로 선생님이 주나라 수도 낙양에 가서 노자를 만난게 17~30살 사이거나, 34, 35살 때의 일이라고 하던데, 그것이 사실인가요?”
“그렇지 않다. 선생님이 20대를 전후한 시기에 유(儒)의 일원으로 여러 지방을 다니며 상례(喪禮)를 수집하신 적이 있는데 그때 낙양에도 들렀을 수 있겠지만, 남궁경숙과 함께 낙양을 공식방문한 것은 훨씬 뒤의 일이다. 또 선생님이 34살 때는 맹손씨의 수장인 맹희자의 3년상이 치러지던 때라 그의 아들인 남궁경숙이 먼 여행을 할 수 없었던 때였다.”
나, 이생이 고제들의 여러가지 증언과 당시 시대적 상황, 공자의 행적 등을 종합해 보건대, 선생님이 주례를 배우러 낙양을 방문한 시기는 노정공 4년 즉 서기전 506년 즈음이었다. 이때는 선생님이 제나라 망명에서 돌아와 곡부에 학숙을 다시 연지 4년째 되던 해로, 선생님의 나이 45~46살 때였다.⑦
서기전 507년 노정공이 즉위한 지 3년째 되던 해 노나라는 각종 국가의식을 치르기 위한 예법과 시설물을 다시 상고(尙古)할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고 있었다. 노나라 집권당인 계손, 맹손, 숙손씨 등 삼환(三桓)은 내부 논의 끝에 주나라 왕실이 비전(秘傳)하고 있는 주례(周禮)에 관한 고례전장(古禮典章)을 구해 올 사절단을 낙양에 보내기로 결정했다. 이때의 일을 자로는 이렇게 회고했다.
“당시 조정과 삼환은 심각한 정통성의 위기에 시달리고 있었다. 돌아가신 소공께서 7년을 망명해 있는 동안 조정과 공실의 예법이 많이 망실되거나 흐트러져 있었고, 임금 자리에 세자 대신 소공의 동생인 금상(노정공)이 계씨의 손에 옹립되면서 임금의 정통성도 많이 취약해져 있었다.”
염백우가 수염을 쓸며 말을 이었다.
“정공이 즉위한 이듬해 궁궐 남문의 양관(兩觀)이 불에 탔지.(<좌전> 노정공 2년) 알다시피 궁궐의 남문인 치문 양쪽에 망루가 있지 않은가. 양관은 국법과 조정의 정령(政令)을 게시하는 곳인데 이곳을 방화했다는 것은 명백한 반체제 시위였지. 게다가 임금께서 진(晉)나라에 조공을 갔다가 황하도 건너지 못하고 되돌아오자 삼환도 더 이상 이 상황을 방치해선 안되겠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지.”
삼환 세력은 민심 회복을 위해 무엇보다 취약해진 공실의 정통성을 조속히 안정시킬 필요성에 공감하게 되었고, 그 방책의 하나가 국가 예법의 복구였던 것이다. 주례(周禮)를 다시 전수해 옴으로써 주공(周公)의 아들 노공(魯公;이름이 백금이다)이 봉건된 나라라는 전통을 새롭게 확립하고자 했던 것이다.
주나라로서도 노나라 사절의 방문은 환영할 일이었다. 주나라는 십여년 전 왕실 내란에서 패배한 서왕 세력이 주나라 왕실의 고대 전적들을 가지고 초나라로 망명하는 바람에 예법시행에 중대한 공백을 맞고 있었다. 주왕실은 내란이 수습되고 낙양이 안정되자 동성(同姓)의 제후국들이 소장한 주왕실 관련 전적들을 왕실도서관에 바치도록 했다. 주나라 왕실 입장에서 보면 주공의 봉국으로 유일하게 왕례(王禮)로 제사하고 있는 노나라의 사례는 가장 밀접한 상고 대상이었을 것이며, 삼환의 입장에서도 노나라 역사서인 <노춘추(魯春秋)>와 천문·역법을 담은 <역상(易象)>등 노나라가 개찬한 전적을 바쳐 주나라 왕실의 환심을 살 수 있는 좋은 기회였으리라.
“아, 그렇게 되어 노나라 사절단이 주나라 도읍 낙양에 가게 된 것이군요. 그런데 그 일을 남궁경숙과 공자가 맡은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때 집정대신인 계평자는 낙양사절단의 임무를 삼환의 큰집인 맹손씨에게 일임했다. 맹손씨가 대대로 사공(司空)의 벼슬을 세습하는 집안이었기 때문이지. 사공(오늘날의 건설부장관과 상공부장관 정도를 겸직하는 벼슬이다)은 국가 주요시설들인 궁궐과 성곽, 조정의 묘당과 묘역 등의 건설과 보수를 담당했으므로, 그에 따른 예법을 정비하고 관리하는 업무와도 무관할 수 없었다. 맹손씨가 주례를 수집하는 일을 맡은 것은 이런 연유때문이지.”
“정공 원년(서기전 509년)에 낙양의 성주(成周) 성을 새로 쌓을 때 여러 제후국들이 역부(役夫)와 물자를 바쳤는데, 우리 노나라에서는 사공인 맹의자가 이 일을 맡았던 것도 같은 이유였지.”
“선생님이 이 일에 참여하게 된 것은 어떤 계기가 있었나요?”
“맹의자와 남궁경숙은 쌍동이 형제로 이때 나이가 25~26살이었습니다. 맹의자는 이 중요한 임무를 동생 남궁경숙에게 맡겼는데, 아직 예법 전반에 대해 잘 알 수 있는 나이가 아니었던만큼, 사절단을 자문하고 지도할 예악 전문가가 필요했습니다. 그때 그들의 눈에 띈 분이 스승님 말고 누가 있었겠습니까?”
안연이 조용히 당시의 정황을 설명해 주었다.
맹의자·남궁경숙 형제는 일찌기 아버지 맹희자가 임종하면서 자식 교육을 공자에게 맡길 것을 유언(<좌전> 노소공 7년)한 바로 그 형제이다. 즉 공자는 이들 형제의 스승이었던 것이다. 또 공자의 아버지 숙량흘이 맹손씨가 주도한 전투에서 큰 공을 세운 인연(<좌전> 노양공 10년)으로 두 집안이 친분을 가지게 되었는데, 이런 인연도 공자가 정부 공식사절단의 자문관으로 선발되는데 일정하게 작용했을 것이다.
“맹의자 형제가 사절단의 일원으로 공문의 참가를 정공에게 보고하자, 임금께서 선생님의 참가를 격려하시기 위해 특별히 수레 한 대와 말 두마리 그리고 어린 시종 한 명을 선생님에게 하사하기도 하였지.”
자로가 안연을 바라보며 웃었다.
“그 어린 시종이 바로 저 사람 안연일세. 하하하.”
공자는 낙양 사절단에 공문의 여러 제자들을 데리고 갔다. 이때 공자를 수행한 제자로는 자로를 비롯해 염백우, 안연의 아버지 계로(안로) 등 초기 제자들이 있었고, 안연이 시종 자격으로 이 여행에 참가했다. 안연은 이때 나이가 15,16살로 곡부의 사족(士族) 사이에서는 이미 수재로 소문이 자자했다. 공자는 공문의 미래이자 자신이 아들처럼 사랑한 안연을 데리고 가 낙양의 높은 문물을 직접 보고 배울 기회를 주고 싶었던 것이다.
훗날 안연의 후학들이 유가의 여러 유파 중 가장 ‘철학적’인 학단으로 기억되고 있는 것은 어쩌면 안연이 이 여행에서 노담을 만났던 것과 무관하지 않을 지도 모른다.
6. 공자, 노담을 만나다
노나라의 문례사절단이 낙양에 도착한 것은 서기전 506년 공자 46살때였다. 낙양은 이때 동왕(東王)과 서왕(西王)간의 왕위 다툼이 동왕의 승리로 일단락된 지 10년이 지나고 있었다. 왕실 내부의 갈등이 진화되고 성주성 등 왕도의 주요 시설들이 재정비되는 등 전란의 후유증이 어느 정도 수습되고 있던 시점이었다. 사절단의 선발대로 먼저 낙양의 동정을 살펴본 자로가 보고했다.
“우리의 임무 상으로 볼 때 낙양에서 꼭 만나보아야 할 인물은 장홍이라는 대부가 될 것 같습니다. 그는 태사(太史)로서 천문과 귀신의 일에 능통해 3대에 걸쳐 왕실의 총애를 받고 있는 자입니다.”
남궁경숙이 말했다. “장홍이라면 3년 전 형님이 낙양 성주성 축성에 참가했을 때 축성 책임자였습니다. 그때 우리 집안과 인연을 맺은 사람이니, 그를 잘 활용하면 어렵지 않게 이번 임무를 수행할 수 있을 것 같아 다행입니다.”
장홍은 음악 분야에도 뛰어났는데, 이때 공자는 장홍에게서 주나라의 궁중음악과 주나라가 여러 제후국으로부터 수집한 시(詩)에 대해 많은 견문을 얻을 수 있었다.
“장홍이 현직에 있는 가장 뛰어난 지식인이라면, 재야 인물로는 노담이란 전직 태사가 으뜸이라고 합니다.”
자로가 공자에게 따로 말하였다.
“제가 낙양에 먼저 와보니 일반 사관들이 한결같이 노담을 대석학으로 존경하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편찬한 책들을 주왕실이 소장케 하는데는 노담의 감수가 지름길이라고들 합니다.”
공자도 낙양에 들어와 여러 경로로 노담에 대해 더 알아본 뒤 남궁경숙에게 말했다.
“낙양의 재야에 노담이라는 노사(老師)가 계시다는데,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그가 옛 일을 넓게 알고 지금 일도 모르는 것이 없으며, 예악의 근원에 능통하고 도덕의 귀추에 밝다고 말합니다. 사절단이 가르침을 받을만 한 듯 하니, 노담과 따로 만날 수 있도록 주선해 주시기 바랍니다.” -<공자가어> ‘관주’편
노담은 태사를 지낸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왕실로부터 장로(長老)의 예우를 받은 이래 자신도 그 존칭을 물려받아 ‘노담’이라 불리었다. 노담은 일찌기 정치에 환멸을 느껴 정계와 절연한 뒤 주왕실도서관장으로서 오직 고도(古道)를 지키고 전승하는 일에만 전념하다가 얼마전에 60여세의 나이로 은퇴했다고 한다.
훗날 자로가 회상하기를 “노담을 만나보니 석학이 따로 없었다. 선생님의 박학이야 내가 모르는 바가 아니지만, 노담의 박학 또한 대단했다. 나이많은 철인답게 사물을 초월적 경지에서 인식하는 심미적 직관도 빼어났다. 사관으로 오래 재직하면서 여러 정치적 사건을 경험한 탓인지, 치술治術)에도 남다른 조예가 있는 듯 했다.”(김용옥, <노자철학 이것이다>에서 인용하여 각색)
아직 어린 나이였으나 시종인 관계로 스승과 노담과의 대화를 곁에서 들을 수 있었던 안연도 노담에게 깊은 인상을 받은 듯 했다.
“제가 보기에 노사(老師)께서는 궁정생활을 경험하고 또 동시에 일반 백성들의 비참한 생활을 목격하여 정치의 양면에 대해 깊은 철학적 통찰을 얻은 듯 했습니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우리가 그 분을 뵈었을 때는 이미 깊은 명상생활의 묘리를 체득한 듯 했습니다. 마치 끝모를 해저를 유영하는 바다용처럼, 구만리 장천을 나는 천룡처럼 도의 심연을 노니는 듯 했습니다.”
공자 일행은 노담과의 만남이 주선되자, 노담이 살고 있다는 낙양의 북망산 아래 초옥으로 찾아갔다. 공자와 노담은 이때 나이차가 20살 안팎⑧이었다. 이때 나눈 대화의 내용이 후세의 서책(<사기> ‘공자세가’와 ‘노자한비열전’, <장자> 외편 등)에 실려 전한다. 그러나 어떤 것은 가탁(假託)의 흔적이 농후해 진위 자체가 의심스럽고, 어떤 것은 너무 단편적이어서 전후 맥락을 알기 어려워 후대의 아쉬움을 사고 있다. 나, 이생이 가장 궁금했던 것도 바로 그 공백 속에 숨어 있는 진정한 주제와 내용이었다. 과연 두 사람은 무슨 말을 주고 받았을까?
일행의 수레가 북망산 아래 대나무숲에 이르자, 멀리서 시동이 일행을 맞이하러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낙양의 아침 해가 정오를 향해 가던 어느 날이었다. <하편 계속>
<원문 보기>
*<논어명장면>은 소설 형식을 취하다 보니 글쓴 이의 상상력이 불가피하게 개입되었다. 역사적 상상력을 통해 논어를 새롭게 해석해보자는 글쓴 이의 취지를 살리면서 동시에 독자들의 주체적이고 다양한 해석을 돕기 위해 원문을 글 말미에 소개한다. 소설 이상의 깊이 있는 논어읽기 를 원하시는 분들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2014년 11월호 연재부터 <논어> 원문보기에 인용할 한글 번역본은 <논어정의>(이재호 정해,솔)와 <한글세대가 본 논어>(배병삼 주석 , 문학동네)이다. 표기는 이(논어정의)와 배(한글세대가 본 논어)로 한다. 이밖에 다른 번역본을 인용할 때는 별도로 출처를 밝힐 것이다. 영문 L은 영역본 표시이다. 한문보다 영어가 더 익숙한 분들의 논어 이해를 추가하였다. 영역 논어는 제임스 레게(James Legge. 1815-1897. 중국명 理 雅各)본을 사용하였다. ***<논어>는 편명만 표시하고, 그 외의 문헌은 책명을 밝혔다.
① ‘공야장’편 27장 子曰 十室之邑 必有忠信 如丘者焉 不如丘之好學也(자왈 십실지읍 필유충신여구자언 불여구지호학야) 이-스승께서 말씀하셨다. “10호쯤 되는 조그만 고을에 반드시 성실하고 믿음직스럽기가 나, 구와 같은 사람은 있겠지만, 나처럼 학문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배-선생님 말씀하시다. 열 가구의 작은 고을에도 나만큼 ‘자신에게 충실하고(忠)’ 또 ‘남에게 성실한(信)’ 사람이야 반드시 있을 터이지만, 나만큼 배우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있지 않을게다. L-The Master said, “In a hamlet of ten families, there may be found one honourable and sincere as I am, but not so fond of learning.”
② ‘술이’편 21장 子曰 三人行 必有我師焉 擇其善者而從之 其不善者而改之(자왈 삼인행 필유아사언 택기선자이종지 기불선자이개지) 이-스승께서 말씀하셨다. “세 사람이 행동할 때면 반드시 그 가운데 나의 스승이 있는 법이니, 그 중 착한 사람을 가려 살펴보고는 그 사람을 따르고, 착하지 못한 사람을 가려 살펴보고는 자신의 잘못을 고쳐야 한다.” 배-선생님 말씀하시다. ㅅ 사람이 길을 가도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게 마련. 그 가운데 잘난 것은 골라서 좇고, 잘못된 것은 고칠 일이다. L-The Master said, “When I walk along with two others, they may serve me as my teachers. I will select their good qualities and follow them, their bad qualities and avoid them.”
③ ‘위정’편 11장 子曰 溫故而知新 可以爲師矣(자왈 온고이지신 가이위사의) 이-스승께서 말씀하셨다. “옛날의 듣고 배운 것을 연구하고 새로운 이치를 깨달아 안다면, 남의 스승이 될 수가 있다.” 배-선생님 말씀하시다. 옛것을 익히고 새것을 알면, 스승이 될만하리라. L-The Master said, “If a man keeps cherishing his old knowledge, so as continually to be acquiring new, he may be a teacher of others.”
④ ‘술이’편 1장 子曰 述而不作 信而好古 竊比於我老彭(자왈 술이부작 신이호고 절비어아노팽) 이-스승께서 말씀하셨다. “전술(傳述)하면서 창작(創作)하지 않으며, 선왕(先王)의 도(道)를 믿고서 옛것을 좋아하기를 내 스스로 노팽에게 견주어 본다.” 배-선생님 말씀하시다. 서술하되 짓지 않고, 옛것을 믿고 좋아함이여! 삼가 우리 노팽에게 견주련다. L-The Master said, “A transmitter and not a maker, believing in and loving the ancients, I venture to compare myself with our old P’ang.”
⑤ 일본의 저명한 한문학자인 시라카와 시즈카는 노팽이 고대의 유명한 무축이었다고 주장한다. 시라카와는 노팽이 <산해경> ‘대황서경’에 등장하는 고대의 십무(十巫) 중 네번째 서열인 무팽일 것으로 본다. 무팽은 축도문의 낭송과 전승을 담당하는 사무(史巫)의 원조이다. 참고로 <산해경>에서 십무는 열 개의 태양의 신을 뜻하는데, 무함(巫咸), 무즉(巫卽), 무분(巫분(月+分), 무팽(巫彭), 무고(巫姑), 무진(巫眞), 무례(巫禮), 무저(巫抵), 무사(巫謝), 무라(巫羅)를 말한다.
⑥<사기> ‘공자세가’, ‘노자·한비열전’ (김원중 옮김)
⑦공자가 주나라에 가서 예를 배운 시기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주장이 있다. 사마천의 <사기> 공자세가는 이때를 공자 17~30세 사이의 일로, <궐리지연보>는 34,5세 때로, 역도원의 <수경주>는 17세 때로, 사마정의 <사기색은>은 34세의 일로 주장한다. 허동래의 <공자연보>는 여러가지 정황을 종합하여 이때를 공자 나이 46세의 일이라고 주장한다.(김학주, <공자의 생애와 사상>) 나는 허동래의 설을 지지한다.
⑧ 근대 중국 철학자 호적(胡適·1891~1962)의 주장이다.
⑨ ‘공자, 노자를 만나다’편(상·하 2편)은 <논어> <사기> <예기> 등을 비롯한 전적들과 후대 학자들의 연구서를 기본 토대로 스토리를 구성하되, 이야기 전개상 필요한 부분에서는 지은이의 상상력이 가미되었다. 전거가 있는 것은 괄호 등의 방식으로 그 출처를 모두 표기하였으며, 지은이가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이라고 여기는 부분과 지은이의 독자적인 견해(또는 추정, 해석 등)는 따로 출처를 표시하지 않았음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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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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