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옛날과 지금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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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중국 수도의 최초 후보지는 할빈
2009년 04월 02일 14시 05분  조회:4109  추천:0  작성자: 人和

신중국 수도의 최초 후보지는 북경이 아니라 흑룡강성의 할빈이였다고 한다.

 

모택동은 중국을 하나의 거대한 새와 같이 보았다. 흑룡강성은 마치 날개를 펼친 백조와 같았는데. 할빈은 바로 이 백조의 목아래에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할빈을 “백조의 목아래에 있는 진주”라고 부르기도 했다.

 

할빈은 일찍 제국주의의 침략과 략탈을 경험했다. 30여개 국가의 교민들이 모여있었고 16개 국가의 령사관이 설립되여있는 할빈은 로씨야를 위주로 한 국제적인 도시로 성장하였다. 수천개의 공상기업들이 세워지고 형형색색의 유럽풍건축물도 들어섰다. 도꾜, 런던, 빠리, 베를린, 뉴욕 등 세계1류도시들과 무역도 빈번해지면서 중국 동북지방에서 최대의 시장으로 되였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으로 일본제국주의의 14년에 걸친 식민통치는 끝났다. 하지만 국민당의 군대가 대거 동북으로 몰려와 항전의 승리과실을 빼앗으려 했다. 중국공산당이 령도하는 동북민주련군은 피를 흘리면서 일본침략자를 몰아내고 해방시킨 땅을 지켜내기 위해 국만당군대와 치렬한 전투를 벌렸다. 가장 먼저 공산당에 의해 해방된 도시 할빈은 중공중앙 동북국, 동북행정위원회의 소재지였으며 동북해방구의 정치, 경제와 문화의 중심지였다. 뿐만아니라 할빈이 당시 가장 안전한 도시라는 점을 고려하지 않을수 없었다. 그 리유는 쏘련에 가장 가깝고 쏘련의 지원과 도움을 받기 가장 편리한 지역이였기때문에 모택동과 중공중앙에서는 할빈을 특별시로 정하고 할빈에서 신중국을 세울것을 준비하였다.

 

모택동과 중공중앙에서는 동북쪽으로 마음이 기울어있었지만 할빈은 상당히 먼곳에 있었으므로 한꺼번에 옮겨가는것이 쉽지 않았다. 그래서 중간의 기착지가 필요했고 중간기착지로 선정한 곳은 화북의 피서산장이 있는 승덕(承德)이였다. 승덕을 당중앙의 림시소재지로 하였다. 료심전투의 전날 동북야전군의 최고지휘관 림표와 라영환은 당중앙에 중앙정부를 동북으로 옮기는 일에 대한 답신을 요청하였다. 모택동은 당시의 상황을 고려하여 “당중앙은 반드시 관내에 머물러있어야 하므로 나는 잠시 떠나지 않겠다”고 표했다.

 

비록 모택동과 당중앙이 동북 할빈으로 옮기는 일은 잠시 중단되였지만 당중앙을 할빈으로 옮기는 예비업무는 차질없이 진행되고있었다. 이를 위해 중공중앙 부주석인 주은래는 중앙경비대대(당중앙경호부대)를 둘로 나누어 일부분은 남겨서 당중앙을 보위하는 책임을 지고 여전히 중앙경비대대로 부르며 일부분은 “중앙선행경비대대”로 개칭하여 오열에게 대대장을 맡기고 리일민을 정치위원으로 하여 모두 400명으로 구성했다. 1945년 10월 2일, 오열과 리일민은 중앙선행경비대대를 이끌고 동북에서 책임을 맡고있던 리부춘에게로 갔다. 그들은 연안에서 출발하여 30여일의 행군을 거쳐 기찰열요해방구 소재지인 승덕으로 가서 할빈으로 떠날 준비를 했다.

 

그런데 바로 이때 동북의 정세가 급격하게 변했다. 국민당이 미국의 지지하에 동북에 병력을 증원하여 교통요지를 점령했다. 모택동은 동북정세를 분석하고 과감하게 “당중앙은 승덕으로 옮기지 않는다”는 결정을 내렸다. 중앙군사위원회는 명령을 내려 중앙선행경비대대를 현지에서 개편하여 기찰열요군구에 예속시키였다.

 

1948년 4월 20일, 모택동은 전국에 신정치협상회의를 소집하고 련합정부의 설립을 호소했다. 모택동의 호소문은 전국각계인사들의 열렬한 호응을 받았다. 당시 국민당이 여전히 중국의 절반을 점령하고있는 상황에서 저명한 민주인사들을 대련을 거쳐 할빈으로 보내는 일은 건국의 큰 일이였고 절대 홀시해서는 안될 일이였다. 모택동과 주은래는 친히 여러가지 호송방안을 짜놓고 재검토했다. 몇차례의 곡절을 거쳐 주은래의 세심한 계획대로 심균유, 곽말약, 리제심 등 민주인사들이 세차례에 나누어 안전하게 할빈에 도착했다. 황염배 등 제4차로 떠난 민주인사들은 1949년 3월 14일에 향항에서 출발하였는데 이때 공산당이 령도하는 동북야전군이 료심전역에서 대승리를 거둔 뒤 남하하여 북경과 천진을 해방시켰다. 중공중앙에서는 할빈에서 열려던 신정치협상회의를 북경에서 개최하기로 결정지었다. 모택동과 주은래의 이러한 조치는 매우 현명했다. 1949년에 중국공산당이 북경에서 소집한 신정치협상회의에는 300여명의 민주인사들이 참가했다.

 

이때 중국공산당이 령도하는 중국인민해방군은 료심전역, 평진전역, 회해전역 이 3대전역에서 대승리를 거두고 국민당군대에 비해 절대적우세를 차지했으며 절반 중국이 이미 해방되였다. 모택동은 전중국이 곧 해방될것이라고 예감하고 더는 신중국 수도를 북방에 둘 필요가 없다며 평화적으로 해방된 북평(지금의 북경)이 더 좋을것이라고 생각했다.

 

북경에서 열린 신정치협상회의에서 신중국의 수도를 북경으로 정했으며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되였다.                                 

 

(력사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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